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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9

Namgok Lee 예수의 깨달음의 핵심 - 본인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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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5 h  · 
어제 폭염이었지만, 선풍기도 필요없을 정도로 시원한 한낮의 고운동에서 강영구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세균과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인간이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사회적 거리두기와 백신 같은 기능적 방법으로 가능할까?
극복의 길은 결국 사랑ㆍ양보ㆍ겸손의 길이라는 강 신부님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 나는 각자도생의 차가운 거리두기로는 자칫 생태파시즘 앞에 스스로를 노출할 수 있다는 위험을 지적하였다.
우리의 민주주의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의식과 단순소박한 삶  속에서 행복을 찾는 행복관의 변화가 그 내용으로 담겨야 한다는 생각들을 나누었다.

예수의 출가와 광야에서의 40일 간의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하산, 12제자와의 만남과 복음 선포 등을 석가의 그것과 비교하며 그 근본이 회통한다는 강 신부님의 이야기가 신선했다.

특히 예수의 깨달음의 핵심이 본인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을 화제 삼아, 두 길의 선택에 대한 사제로서의 진솔한 고뇌를 말씀하셔서 감동을 받았다.

두 길, '상선벌악(선은 상주고 악은 벌한다)'과 '동체자비'의 길에서 결국 어디에 설 것인가라는 선택 앞에 사람의 아들이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로는 백척간두에 몸을 던지는 결단일 수 있다.

나는 현실적으로 '미움과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인류사의 진보를 향한 질문과 이 두 길 사이의 선택이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미움과 분노 없이'라는 것은 인간의 현실에서 너무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적어도 '휘둘리지 않고' 정도는 목표로 삼아야 지금의 난국과 위기를 넘어 새로운 전환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인자라야 능히 미워할 수 있고, 진실로 인을 구하면 미움이 없다'
라는 내 해석을 말했는데, 보통 해설서들은 '진실로 인을 구하면 악함이 없다'라고 번역을 한다.
미움과 악함이 한자가 같기 때문이지만, 문득 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길도 '상선벌악'의 길이 아닌 '동체자비'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라면 '악이 없다"라는 번역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은 최치원 선생의 피리 대신 강 신부님의 플륫  연주를 들었다.
 영화 미션의 주제가 였다는 넬라판타지아였다.
뜻깊은 피서였다.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고운동의 새벽.

2021/07/25

Namgok Lee 울트라 휴머니즘 - A Hunger for Who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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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더워지기 전에 산책 나왔다.
요즘 '울트라 휴머니즘'을 천천히 음미하듯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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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이전, 빅뱅과 우주의 역사, 인간의 신비를  깊이 느끼며 읽고 있다.

물리학이나 복잡한 철학적 사유가 어렵지만, 크게 방해받지는 않는다.
이 신비 앞에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상상은 이미 도달한 과학의 성과 너머로 작동해야 의미가 있다.
이 책을 보면서, 공자와 석가를 비롯한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의 회통을 많이 느낀다.
읽다가 내 나름으로 주를 다는 경우도 있다.

'과학은 정신의 문을 열고, 정신은 사랑의 길을 닦는다'
이 책 뒷 표지에 나오는 글이다.
이런 인식과 의지의 보편화가 절실하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라는 위대한 정신이 탄생한 이 땅의 지금 정신을 생각할 때, 아득한 안타까움이 느껴질 때도 있다.
대우주의 신비 앞에 어떤 상상, 믿음도 가능하겠지만, 미신과 욕망의 늪에서는 벗어나야 그 신비 앞에 바로 설 수 있지 않을까?

‘울트라휴머니즘’ 126페이지의 글을 일부 발췌 소개한다.
매력이 넘치는 글이다.

  •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우리가 인간과 우주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는 새로운 기초, 즉 새로운 수준의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믿는 것은 ‘우주에 속해 있는 자기’라는 새로운 감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 부활 의식은 우주적인 해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지구를 위해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새로운 자유로 초대 받았다. 
  • 새로운 지구에서 그리스도는 ‘개성화와 신성화’라는 ‘진화의 중심’으로서, 매력적인 사랑의 힘으로서 ‘물질의 중심’을 통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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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수녀이자 신학자인 일리아 델리오가 저자이고, 맹영성이 번역하고, '여해와 함께 대화출판사'가 출판한 '울트라휴머니즘'을 일단 한번 읽었다,

조금 지나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이다.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들의 '회통'을 느끼면서 읽었다.
특히 '홍익인간'을  '홍익만유'로 읽으면, 아마도 '울트라휴머니즘'이라는 말에 가장 근접할 것 같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 물질과 정신, 지기실현(구원)과 세계진화(변혁)를 상즉하는 하나로 보는 면에서는 '재세이화'의 현대적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책의 마지막 구절을 적어본다.
"현대인은 과학과 기술에 모든 돈을 쏟아부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통합과 행복과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의식적이고 사랑스러운 하느님과의 일치는 과학적인 사실이라는 외적 우주가  아니라 의식이라는 내적 우주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오직 이 내적 통합에  의해서만, 급진적인 방식으로 급진적인 행동을 통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 과학은 정신의 문을 열고, 
  • 정신은 사랑의 길을 닦아야 한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과 40년 전에 만났을 때도,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매력이 우주진화의 대여정에서 인간의식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 비전을 뒷받침하는  진행으로 류역사를 대관할 수 있도록 하는데 영감을 받았었다.
외적 우주와 내적 우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가 나아가는 '불일불이'의 세계로 다가온다.

인류 존속의 위기를 맞으면서 '생명'이 가장 큰 화두 되고 있다.
생명의 길은 '사랑'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빼고서 동물과 식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언가 뒤틀려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하나로 이어져야 진실하다.

자연과의 모순이 심각하지 않던 시대의 위대한 선구자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한 것은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이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자연(동물ㆍ식물)에 대한 사랑이다.

우주진화의 과정에서 최고봉인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진화할지에 대한  비전이 전반적인 정치ㆍ경제ㆍ문화 ㆍ사회운동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삶에 밝은 빛으로 와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차례 읽은 독후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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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4tSpounsosSrfehd  · 
‘울트라휴머니즘’ 산책②
아인슈타인의 E=mc2(자승을 표현 못함 ㅎ) 

이 방정식은 물질이 에너지로,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세계는 ‘구체적인’ 물질세계와 직접적이고 견고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뉴턴은 물질 우주가 비활성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우리는 물질 우주가 근본적으로 에너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인슈타인도 에너지의 한 형태로서 물질이 보여주는 신비(神祕)에 당황했다.

양자 물리학에는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면, 둘로 쪼개진 입자는 쪼개진 반 쪽 입자 사이의 광대한 거리를 거의 순간적으로 뛰어 넘어 서로 소통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이것을 ‘얽힘(entanglement)’이라고 불렀다. 어떻게 그렇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은 텅 비어 보이는 광활한 우주 공간이, 사실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여러 층의 에너지 장(場)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은 우주의 탄력적인 본성이 변화를 내포한다는 아주 놀라운 통찰을 이끌어 내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 통찰이 편안하지 않았다.

(註; 나는 물리학을 잘 모르지만, 이 글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물리학적 통찰을 느낀다. 아마도 직관과 과학의 만남은 편하지 않음을 통과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빛이 이중적인 성질을 가지며, 어떤 경우에는 파동처럼 운동하고 다른 경우에는 광자처럼 운동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빛은 파동(광파)인가? 아니면 입자(광자)인가?
답은 관찰자에게 달려 있다.

(註; 조금 비약이 있기는 한 것 같지만, 혜능의 ‘바람인가? 깃발인가?’에 대한 ‘마음이다’라고 한 대답이 연상된다)
양자 물리학은 떼이야르의 통찰력을 심화시켰다. 의식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때까지 모든 것이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면, 의식은 어떤 의미에서 물질의 ‘내면’ 또는 ‘깊이’이다. 하지만 우주에는 또 다른 유형의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는 물질에도 작용하는 끌어당기는 힘, 인력(引力)이다. 이 매력적인 힘을 떼이야르는 ‘사랑 에너지’라고 부른다. 따라서 떼이야르의 ‘내면성’과 ‘외면성’은 물질의 근본적인 구조를 기술하는 반면, 방사 에너지와 접선 에너지는 근본적인 힘을 기술한다.

방사 에너지는 물질의 ‘내면성’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의식 에너지이다. 따라서 물리적인 복잡성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접선 에너지 또는 인력 에너지는 물질의 ‘외적’인 차원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특징지어지는 매력적인 인력의 중심 에너지이다. 따라서 사랑과 의식은 지적인 우주 생명을 자기 성찰과 의식하는 삶으로 향하게 하는 상호 관련된 에너지, 아마도 두 형태로 나타나는 같은 에너지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의식은 높아지고, 의식의 각성이 일어날수록 사랑이라는 인력도 강해진다. 물론 사랑에 빠졌을 때 마음이 변화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알게되고 다른 사람에게 끌리면, 앎과 사랑은 서로 얽힌 두 실체의 공생(共生)하는 에너지가 된다.

(註; 과학적인 가설(假設)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인(仁)은 애인(愛人)이며, 애인(愛人)은 지인(知人)에서 비롯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이 떠오른다. 인(仁)은 생명력이며, 그것은 사랑이다.)
“과학으로 정신의 문을 열고, 정신은 사랑의 길을 닦는다.”
덧붙침;  문명 전환운동은 생명 살림 운동이고, 생명 살림 운동은 사랑 운동이다.
사람끼리(동종) 적대ㆍ증오ㆍ 배척하면서 자연(동식물)을 사랑하자는 것은 본말전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람끼리의 화해ㆍ상생ㆍ사랑과 자연 사랑은 함께 가는 것이 리에 맞다.

10 comments
최영훈
넘 어려운 테마를 그렇게 비약 상고하듯 툭 연결짓고 쓱 결론
짓는 가벼운 행마에 탄복 또 탄
복!!!
 · Reply · 4 h
Namgok Lee
최영훈 엉터리일 가능성이 더 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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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휴머니즘 - 지구 공동체 의식을 갖는 인간으로  | 사이 너머 총서 6  
일리아 델리오 (지은이),맹영선 (옮긴이)여해와함께2021-06-15
원제 : A Hunger for Wholeness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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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의 말
한국의 독자들에게

서론

1장 우주와 공간
중세영혼의 공간
근대성과 신의 죽음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

2장 팽창하는 우주
펼쳐지는 공간
단력 있는 우주
물질과 에너지
양자얽힘

3장 물질에 정신을 돌려줌
물질에 의식이 있는가?
의식이 모든 것의 근거인가?
떼이야르가 제안한 두가지 에너지

4장 영혼과 우주
종교와 진화
생명의 도약
오메가의 플라톤적 뿌리
버진 포인트

5장 예수, 새로운 인간
하느님과 자연
사이보그로서의 예수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양자 부활
진화는 생명으로의 부활

6장 디지털 인간
기술의 향상
기술과 생물학
사이버스페이스의 급증
종교와 트랜스휴머니즘
기술과 초월의 필요
앙리 베르그송과 근본적인 타자

7장 신비, 정신과 물질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뇌의 각성
자아를 넘어
정신과 감취진 질서
내면에 있는 외적 공간

8장 행성화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
내적 우주의 우위
신비주의와 사상
정신권
울트라휴머니즘
호개인적인 미래
세계 종교와 수렴

결론

접기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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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1915년 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빈 대학에서 2년 동안 계속될 '정신분석 입문' 강의를 시작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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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일리아 델리오 (지은이) 

워싱턴 D.C.에 위치한 워싱턴 연합신학원 교회사 교수이며 영성 연구 책임자이다. 
저서로는 『사랑 가득한 마음 아씨시 클라라의 영성』,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랑: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성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 『간추린 보나벤투라: 그의 삶, 사상, 저작 개괄』등이 있다.
최근작 : <울트라 휴머니즘>,<프란치스칸 기도> … 총 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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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영선 (옮긴이) 

식품화학과 환경신학을 공부한 뒤 지구와 우리 자신을 위해 실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속 공부하고 있다.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 《우주 이야기》, 《생태 영성》을 우리말로 옮겼다. 
포럼 지구와 사람의 ‘토마스 베리 강좌’에서 토마스 베리가 던진 우리 시대에 던진 질문에 어떻게 함께 대답할 것인지 함께 공부하고 있다.
최근작 : <지구별 생태사상가>,<암을 예방하는 식물성 식품>,<생태학적 시대의 식품과 건강> … 총 1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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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인 사이보그가 인간의 신체적, 물질적 한계를 넘도록 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생명과 의식의 초월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성신학자인 일리아 델리오 수녀는 이러한 미래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진화론과 그리스도교의 조화를 주장했던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우주론을 중심으로, 전 지구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울트라 휴머니즘(ultrahumanism)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델리오 수녀가 말하는 울트라 휴머니즘은 더 큰 의식의 통합을 통해 더욱 커진 사랑의 인식으로 살아가는, 정신권 수준에 이른 전 지구적 공동체 의식을 가리킨다. 

출처 : 여성신문(http://www.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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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unger for Wholeness: Soul, Space, and Transcendence Paperback – April 3, 2018
by Ilia Delio OSF (Author)
4.4 out of 5 stars    31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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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it scientist Pierre Teilhard de Chardin, a keen observer of nature, posited two types of energy in the universe: tangential energy/energy of attraction and radial energy/energy of transcendence―in other words, love and consciousness, which correspond to the inner and outer dimensions of nature, respectively. Moreover, as theologian Ilia Delio points out, nature is never at rest; indeed, “Nature [is] on a continuous trajectory of transcendence.” “The Big Bang universe is a story of space but it is also a story of consciousness and love.” How are the inner universe and the outer universe related? “Is the inner universe the key to nature’s transcendence?” she asks. “Is science disclosing a new role for consciousness and thus a new role for spiritual transformation?” The author builds not only on the thought of Teilhard and others but also on the findings of quantum physics to deliver a thought-provoking, deeply insightful reflection on the relationship of God, humanity, and nature in an ever-evolving cosmos


Paper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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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Reviews
About the Author
lia Delio, OSF, is a Franciscan Sister of Washington, DC. She holds the Josephine C. Connelly Endowed Chair in Theology at Villanova University, and is the author of seventeen books, several of which have won awards.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Paulist Press (April 3, 2018)
Language ‏ : ‎ English
Paperback ‏ : ‎ 136 pages

Customer reviews
4.4 out of 5 stars

Top reviews
Top reviews from the United States
David E. Schutt
5.0 out of 5 stars Jolts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November 3, 2019
-
When I began reading de Chardin I found myself somewhat uncomfortable. I found that I had to learn how to read him. But he real awakening was when I realized that he was filled with optimism. It became my inner escape from conditioned institutional pessimism of my past life. Not long after that I had what he refers to as a "jolt". He said that, "we have jolts in life and if they don't kill us, we will never be the same again" . Ten years ago my son, his wife, kids and I visited family in Australia that I had never met. During our first few days we met relative after relative. One day. Something inexplicable happened. A 28 year old cousin of my daughter in law's when introduced to me, kissed me. When we looked at each other, I said, " it seems as though we have known each other for a very long time. " we spent the rest of our visit exploring the ramifications of this. I felt "vested or cloaked with Sophia. So powerful her presence came to me in that kiss. We, "breathed the other in". We sat in a group of four one morning having coffee. I ask what their experience of all this was. They told me Love and a very powerful Energy. From that experience I extracted my theme, F < Energy x Love > 1~. Force (Sophia) gives us Energy x Love, giving us unity, equality and non duality exponentially to an infinite power. I have lived this inner presence of Sophia since then. I'm a contemplative, I journal and read spiritually every day as well as meditate using Centering Prayer. As a deacon I became a thorn in the side of clericalism. I am a radical, progressive, and paradoxical Catholic. Last May I was told by our Parish priest that I was not needed. "I understand completely", I told him. He opened the door and I walked out .. We have a small group who meet every Monday for Centering Prayer. If it were not for spiritual books like this one, and others like Richard Rohr, Cynthia Bourgeault, and others, we would have little hope of connection with this new reality, from our corner of the world in Wasilla Alaska, Thank you so much. Finally I want to affirm a quote from an ancient sufi, Hafiz, " I remember well the day that God(dess) ran up and kisssed me!)
D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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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people found this helpful
-
Vicki
5.0 out of 5 stars mind blowing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November 24, 2020
Verified Purchase
I’m still digesting this book. It’s really blowing my mind. Holy Cow! Bits of brain all over the place. What a surprise in such an unassuming looking little book and soothing title.

I feel excited and confused, filled with profound awe and deeply touched in my core at once. Feeling grateful that this one got slipped onto my reading list. The concepts feel both radical and transformative. I mean I never really considered the 2nd law of thermodynamics in relation to global consciousness before, nor the notion that we are One with our technology in the process of evolution and transcendence. Holy cow. I find I have to read and reread each paragraph, section, chapter. And I’m constantly calling my poor husband over with a ‘listen to this!’

In a world in which awe and wonder have been diminished by our ability to dissect and explain everything, this book is a religious experience. (and well the author asserts that the religious impulse is elemental to all evolution/becoming, even at the microscopic level of life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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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a A Ushman
5.0 out of 5 stars Challenges my mind with new ideas or confirmation of them.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March 26, 2019
Verified Purchase
Excellent books. Easy to read and well planned in its presentation.
2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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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Customer
5.0 out of 5 stars Human consciousness is crossing a new threshold.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August 11, 2019
Verified Purchase
A masterpiece of creative integration of science and theology. Absolute must read for anyone seeking a deeper spirituality.
2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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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R Nelson
5.0 out of 5 stars Evolving Conscious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March 5, 2019
Verified Purchase
Well grounded with insight into creations connectivity, our oneness! A very good read with a host of references
2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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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A. Dalgleish
5.0 out of 5 stars Reformers Take Note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September 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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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our politicians and social reformed took the message of this book to heart our world would be headed in a much better dir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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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dener
5.0 out of 5 stars Five Stars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ly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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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ible, pro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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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es Caldwell
5.0 out of 5 stars Interesting and Thought Provoking
Reviewed in Canada on August 16, 2019
Verified Purchase
Very interesting exploration of the human concept of the Creator of the Universe and how it has changed and continues to change. Very nice printing with a secure binding, exceptional in a small book these days. Small enough to carry around in a pocket, to be read and digested in small b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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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thescot
5.0 out of 5 stars God loves us!
Reviewed in Canada on June 16, 2018
Verified Purchase
Anyone seeking meaning to their life will find some answers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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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goodreads.com/book/show/36959931-a-hunger-for-wholeness

Feb 06, 2019Swood rated it really liked it
My friends Chuck Hoffman and Peg Carlson-Hoffman recommended I read this book. They are acquainted with the author, Ilia Delio.

It's a small book, packed with big ideas and she does a fine job of moving though them logically and persuasively. The conclusion she reaches is powerful and a guide for our times, our future -- that we are all connected, not just with each other, but with all things. And that if we come together we can take what it means to be human to the next level -- of consciousness? of transcendence? As explored by Teilhard de Chardin, explained by Bergson and others. She quotes dozens and dozens of thinkers -- again in nicely plotted support of her logic.

“If we want a different world, we must become different people.” .... “We must either unify or annihilate.”

I was nearly derailed early on, as I feel like she skips two crucial definitions; that of the terms “religion” and “love.” (Finally on pg 95, she offers up a definition of love, but I wish she'd done so much much sooner)

And I felt like she was speaking almost entirely from the Christian tradition/framework; although she did eventually invite other faiths into the discussion (Buddhism). As such, my own biases got in the way of the reading .... yet she did finally bring me around convincingly to her POV.

I feel like physicists, such as an Alan Lightman, might not allow her to make the leap from the revelations of “quantum physics” to consciousness -- but she actually does a pretty good job of building a case for that leap. Of course, all that stuff is beyond my grasp ... but its in my own nature to try.

A worthy and thought-provoking read. I will likely have to read it again. What she is arguing for, hoping for will need constant refreshing in this chaotic world in which we live. One might argue however, that we need to experience the level of chaos we're in now in order to see the path forward. (less)
===




alfonso luis alfaro marroquin3 years ago
Wow! What a woman! What a wonderful concept




Wayne McMillan2 years ago (edited)
Ilia is brillant.



caballero3 years ago
The Steven Hawking of theology.

2021/07/24

웨이드 엘리슨 Namgok Lee 공포가 과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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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YoesuateertndanSfcyip onunsatoSrednmum 21rmsm:09 ·



최영대 선생이 선물한 책을 읽고 있다.
원전을 둘러싼 찬반의견이 쌍방의 확증편향 간의 대립과 정치적 쟁점으로 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나라의 어려움과 지구환경의 위기를 넘어서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탈원전 쟁점이 정권의 유지와 교체의 뜨거운 잇슈로 되는 것을 넘어 
정치전환 문명전환의 마중물이 될 수 있는 건설적인 장으로 되기를 바란다.
원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런 책을 평정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를 바라고, 탈원전 반대하는 사람들이 원전에 반대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책들을 차분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대립의 평행선을 인간의 축적된 지성으로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전환'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확증편향과 관성적 생각 비합리적 낙관이나 비관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와 인간의
사랑의 능력을 결합하자.
이 책의 저자, 웨이드 엘리슨의 말을 소개한다.

"시급하고도 진정한 재앙인 기후온난화와 싸우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방사선 허용 한도를 현재 (연간1밀리시버트)보다 1888배로 올려 핵발전소 건설비용을 대폭 낮추고, 무탄소 전원인 핵발전소를 빨리 증설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과학과 지성의 힘으로 쌍방의 확증편향에서 벗어나 무엇이 지금의 기후위기 등 지구적 재앙에서 벗어나 인류 생존과 진보를 향한 길인지 함께 찾아보자는 취지이다.
가장 뜨거운 잇슈들이 대결의 장이 아니라, 연찬의 장이 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전환'의 가능성을 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 한권이나 논문이나 영화 한편으로 생각이나 입장이 결정되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와 문명을 '누가 옳은가를 각각의 확증편향에서서 마주보고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환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같은 방향에서서 찾아보자는 취지로 소개한다.



33You, 崔明淑, 박정미 and 30 others

2021/07/14

김경일 本願에 대하여

김경일

本願에 대하여


언제부터인가 제 오랜 화두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람은 왜 태어나나? 우리는 살면서 꼭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있다면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만물이 다 존재 이유가 있듯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어떤 까닭이나 목적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확연하지 않았습니다. 늘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면서 명료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고 지식을 쌓고 명예를 얻고 배우자를 만나 가족을 이루는 등 이런 것 말고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저는 그것이 本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니 本來誓願이란 말의 줄임말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대 보통 우리는 서원이라고 하면 특별한 사람이 내는 특별한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본원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근본적으로 태생적으로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유정물이 다 동일한 불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유정물은 본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것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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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대종경을 읽다가 대종사께서 이동진화 선진을 만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 크고 중한일은 
첫째가 스승을 만나 성불하는 일이고 
두번째가 대도를 얻은 뒤에 창생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 아! 그렇구나! 이것이 우리의 본원이구나" 하는 감각이 들었습니다. 
답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온 몸이 전율이 왔습니다. 큰 고비 하나를 넘은 듯 가슴이 시원하고 머리가 개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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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잠시 뒤 " 왜 그럼 본원을 아는 사람이 드물까?" 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 중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숙업에 가려 본원이 어두워질 뿐이지....본원은 영원불멸합니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현상계의 오욕에 눈멀어 본원은 알지 못하고 재색명리를 구하는 것으로 소원성취를 삼고 살다가 또 세상을 마치고 다시 왔다가 다시 가고....윤회를 거듭하는구나.

우리는 본디 불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불성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성불제중의 본원을 가진 존재입니다.
성불제중은 특별한 사람만이 갖는 서원이 아닙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든 유정물은 다 이 본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업력에 밀리고 무명에 가려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실 성불제중의 서원을 내가 의지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완벽하게 갖추어진 서원을 본래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다만 이를 각성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건은 우리 본원을 수행하는데 어떤 조건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내가 농사를 짓든 교수를 하든, 내가 돈이 많든 적든, 내가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몸이 아프면 아픈 몸경계를 가지고 공부하면 됩니다.

지식이 많든 적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좋든 나쁘든 성불하고 제중하는데 전혀 방해받지 않습니다.
아니 방해가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운명과 조건들은 내게 최적화된 나에게만 주어지는 유일한 비로자나 법신불, 진리부처님의 선물, 퍼펙트한 선물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 최고의 선물을 외면하고 따로 공부하기 좋은 조건이 다시없음을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본원을 각성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대도정법의 신앙과 수행의 여정에 오릅니다. 나는 불성의 존재일 뿐 아니라 본원을 갖춘 존재임을 받아들일 때 불보살과 함께 파수공행합니다.

이 길은 신앙과 수행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공부길입니다. 온전하게 믿고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 공부가 일승의 법이며 최상승의 법입니다.
본원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면 문득 삶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개벽이 시작됩니다.

내가 늘 원수라고만 여겼던 남편이 내 공부의 최고 자원이고 본원의 동업자이며 
짐으로만 여겨졌던 자식들이 다 나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천사들이고 보살들임을 알게 됩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시집식구들이 내게 서원을 이루는 훌륭한 도우미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현상계의 내 삶을 우리가 다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진리와 법으로 본원을 향해서 공부해 갈 수는 있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본원을 자각하는 순간 동서남북상하의 모든 부처님들이 나를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넘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일어나서 가면 됩니다. 세상의 헛 것에 속지 말고 본원을 향해 나아가면 천지 만물 허공법계는 물론 미물 곤충까지라도 다 나를 지지하고 격려할 것입니다.(1051010감각)



124Namgok Lee, 수지행자 and 122 others
21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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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本願
부처가 맨처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때 세운 서원
자신의 깨달음을 기필코 이루겠다는 마음이 우선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남에게 깨달음을 얻게 해주려는 마음도 중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이롭게 하는 내용이 더욱 중시되기도 한다. 부처와 보살의 본원은 대부분 중생을 위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아미타불 신앙을 비롯한 관음신앙·미륵신앙·지장신앙 등 여러 신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부처가 가지고 있는 서원은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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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본원本願
모든 부처님이 지난 세상에 성불(成佛)하려는 뜻을 낸 인위(因位)에서 세운 여러 가지 서원(誓願).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는데, 총원은 부처님네의 공통한 본원이니,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이고, 별원은 부처님마다 제각기 다른 서원이니, 곧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십이대원(十二大願),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사십팔원(四十八願) 등임. [유사어] 본서(本誓). 본서원(本誓願). 본홍서원(本弘誓願). 홍서(弘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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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願 (본원)
1
본래(本來)부터 가지고 있는 큰 소원(所願)

2
부처나 보살(菩薩)이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려고 과거세(過去世)에 발기(發起)한 서원(誓願)

한자사전 결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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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16
내가 본래(本來-먼 과거) 서원(誓願)을 세우길 『일체중생(一切衆生)으로 하여금 나와 같이 동등(同等)하여 차이(差異-어긋나고 다름)가 없게 하리라.』
2-102 ❖모든 부처님의 서원(誓願)이 위의 게송(偈頌)과 같다. 부처님이 서원을 세우신 바에야 중생은 타의(他意-남에 의하여 마음이 일어남)든 자의(自意-스스로 마음이 일어남)든 성불(成佛)을 하게 된다. 불심(佛心...
2014.09.02.

2021/05/18

Namgok Lee 깨달음ㆍ영성 등은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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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깨달음ㆍ영성 등은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문명의 전환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진정한 동력도 깨달음(인간의 관념계에 존재하는 근원적 부자유로부터 해방)의 보편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나 영성도 결국 각각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집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진정한 방향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내용도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것이라는 자각(이것을 나는 무지의 자각이라고 부른다)이 있어야 한다.
그 판단이나 감각이 우수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탁월하게 보이는 아집일수록 더 큰 해악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지의 자각'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영성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통과해야하는 또 다른 리트머스 시험지는
 과학과 현실의 정치적 판단 그리고 생활과의 일치다.

허구와 편가름에 휘말리거나 생활과 유리되는 깨달음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 영향력이 클 수록 해악이 크다.
과학 너머에 광대한 신비가 있다.
과학(이성)에 반하는 신비가 아니다.

나는 무당을 잘 모른다.
그러나 큰 신비의 커튼이나 문고리에 접근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큰 무당은 허구와 아집을 넘어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자기 감정이나 판단에 도취되는 가짜  무당을 구별하는 안목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과도기적 혼돈이 심한 시기일수록 그러하다.
인류의 보편지성의 진화에 대한 신뢰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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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이병철
큰 만신, 하늘의 뜻을 알아 땅위에 그 뜻을 필치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 그를 제사장이자 임금이라 하였지요.
사드비프라, 영성적인 지도자 또한 이와 같은 거라 싶습니다.
 · Reply · 1 d
유상용
그래서 깨달음 등의 정신적 성취에 대한 연찬(집단지성에 의한 과학적 탐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각자의 체험 경지를 가볍게 내어놓고 정말은 어떤지 검토해가는 것.
어떤 이는 물질과학이 지구적으로 검증하는 학계가 이루어지는 데 200년 정도 걸린 것처럼 정신적 방면에서도 최소한 진위를 검증하는 장치가 마련되는데 비슷한 시간이 걸리지않을까 하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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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9

Namgok Lee ⌈공자(孔子)의 변명(辨明)⌋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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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0 h  · 
⌈공자(孔子)의 변명(辨明)⌋ 가운데서


논어 이인(里仁) 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증삼이여,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게 꿰뚫는 것이다.” 하시자 증자께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슨 말씀인가?” 하고 물으니, 증자께서 대답하셨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이 충서(忠恕)의 ‘충(忠)’을 수식어로 보아 ‘진실한 서(恕)’로 해석하여 ‘서(恕)’ 하나로 일관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충(忠)은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서(恕)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로서 이 둘이 보합하여 자타(自他)의 생명력을 최대로 살리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서(恕)에 대해서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는 그 나름의 설명을 했지만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고, 충(忠)에 대해서는 그런 설명이 없다.
이것은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이야기되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어느 것에 대해서도 단정적이거나 고정된 설명을 하지 않는 공자의 태도다.
그는 결코 ‘이름’을 고정되게 정의(定義)하지 않는다.
노자의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과 대비하여 공자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공자의 정명(正名)은 노자의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이것은 중요한 테마라서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충(忠)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현대인들에게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충(忠)의 대상에 대한 시대적 사회적 한계에 불과한 것이다.
충(忠)은 자발적 의지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나는 이 자발성과 전념(또는 盡力)에 더하여 ‘기쁨’을 충(忠)의 가장 결정적 요소로 말하고 싶다.
충(忠)은 결코 도덕 관념 등에 의해서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충(忠)은 나라나 공동체를 위하여 불의를 막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헌신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 왔지만, 이제 자아(自我)를 최고로 실현하는 기쁨으로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인류가 진보한다는 가장 큰 징표로 다가온다.
일터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에 서(恕)의 문화가 자리잡는다면, 각자는 자기를 최고로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게 된다. 또 자기실현의 기쁨을 충분히 발휘(忠)하게 되는 만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더 쉬어진다. 이 둘 즉 서(恕)와 충(忠)이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나 국경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이상(理想)도 이런 속살을 갖추지 못한다면 뿌리 없는 나무를 키우려는 것 밖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Namgok Lee ‘협동사회운동 연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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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tS1m8nm pArpcolrmnitmlS 2sof0eo1rSe9d  · 
요며칠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을 잘 못이루었습니다.
다음은 나도 제안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는 ‘협동사회운동 연찬모임’ 카톡방에 연 이틀 올린 글입니다.
오늘 새벽 1시경 올린 글과 이어지는 것 같아 공유합니다.


특히 협동운동이 거품과 왜곡과 실망과 체념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어느새 세 번째 모임이 다가왔군요.

처음 모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75세의 노인입니다.

제안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모임까지는 참여하고,  다음 모임부터는 참여여부를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
다만 제안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탁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 면에서 대단히 어려운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대안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협동(조합)운동은 대단히 중요한 운동입니다.
경제적•사회적•정신적 진보의 핵심운동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협동운동 주체 간의 협동, 협동운동이 뿌리내리게 하는 방도의 모색, 미래형 협동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들의 준비 및 운영을 위한 협의체로서 이 모임이 발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꺼이 하겠습니다.”

“어제 글을 올렸던 노인(老人)입니다.
늙으면 가능한 한 입은 닫고, 주머니는 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가진 게 별로 없어 주머니는 열어봐야 별 것이 없어, 입만 닫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너무 노인티 낸다고 흉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 노인 자각(自覺) 중입니다. 너무 없었거든요. ㅎㅎ
저는 젊어서 한 때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당시에 협동조합운동은 혁명을 방해하는 개량주의라고 비판 비난했습니다.

계급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顚覆) 폐기(廢棄)한다는 것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협동(조합)운동은 경제적•사회적•정신적 진보의 핵심운동의 하나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종합운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즐거운 자기실현으로 이루어지는 생산성, 동료나 이웃들과의 사이좋음, 개인적 수행(형태와 관계없이 내면의 자유를 위한)이 어울려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차산업혁명을 이런 종합운동의 좋은 배경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중견기업이나 나아가 대기업도 전환할 수 있는 비전과 계획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입을 닫으라니까 글로 대신한다고 흉보셔도 할 수 없습니다.
새벽에 잠 깨는 노인(老人)의 기호(嗜好)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ㅎㅎ“

2021/04/16

박정미 '사마의'라는 드라마 - 소심하게 댓글 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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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사마의'라는 드라마를 봤다.

중국 드라마는 판타지 드라마까지도 권력을 둘러싼 '대량살륙의 광기'를 많이 보여준다.
주연으로 등장하는 사람들도 결국 긴 역사 속에서 먼지같은 존재로 되고 말지만,
이런 권력투쟁에 희생된 수 많은 엑스트라의 운명을 생각한다.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2차대전,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동족상잔의 전쟁.
스스로 엑스트라의 운명에 뛰어드는 어리석음과 광기가 여러 형태의 파시즘이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 광기가 지배하지 못하는 세상을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는 스스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중적 자각이다.
시대도 바뀌고 제도도 바뀌었지만, 집단적 증오와 분노가 사고를 지배할 때, 언제든 살륙의 광기와 그것에 희생되는 엑스트라의 운명에 휘말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속에 불나방처럼 스스로 뛰어드는 어리석음.
부와 권력을 향한 허수아비  놀음은 지금도, 아니 더 광범하고 위험하게 진행되고 있다.
아주 고상한 외관을 걸친 채.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경고하고 있다.
엑스트라의 운명에서 벗어나라고.
드라마 감상치고는 너무 비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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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8etShponosoredfi  · 
소심하게 댓글 다는 법.
이 글을 읽고 나니 '대륙'이 '대량살륙'의 준말이라 해도 통하지 않을까, 얼핏 섬뜩한 말장난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자리,  왕권이 좌지우지 하는 사회에서는 권력투쟁은 집단적 피바람을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다원화 되고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권력투쟁은 순화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마치 집단패싸움에서 시작된 축구가 건전한 스포츠로 자라 잡듯이요.
제가 선생님이 당연하기 때문에 넘어간 전제사실을 새삼스레 늘어놓는 이유는 우리사회의 문제가 돈과 권력을 향해 영혼없이 달려드는 부나방같은 시류 때문이라는 유교적 훈시로 이 글이 오독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오히려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한 싸움이 더러우니 아예 그것을 돌아보지도 말아야한다는 유교적 선비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근대사회 현실정치에서 패한 후 겨우 목숨을 건져 낙향한 선비들이 주로 쓴 시제가 그런 사회적욕망믜 무상함이었죠. 아직도 글 줄 깨나 읽는사람들은 그 한시의 정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선비스러운 언변과 삶을 지향했던 이번 정권 인사들의 내로남불도 그 근원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자기 안에 있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향한 욕망을 주체하지도 못하면서 대중의 욕망에 잣대를 들이대고 가르치고 억압하는 정책수단을 선호했다는 것 말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사회의 진보동력으로 삼으려면 자연스러운 욕망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욕망은 음지로 스며들어 이중기준으로 어둡게 퍼져나가고 한 사회를 위선과 거짓으로 병들게 합니다. 저는 이번 정권인사들이 반면교사로 우리사회에 확실한 경종을 울려준 역사적성과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적 인간의 건강한 속성을 건강한 인간의 생물학적 성욕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게임의 룰을 공정하게 만들고 잘 지키는지 감시하고 어긋나면 게임에서 탈락시키거나 출전기회를 보류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근대화이고 세속정치가 담당해야할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립적 개인이 누구나 떳떳하게 이 욕망을 인정하고 위험부담 없이 이 인생게임에 뛰어드는 것이 건강한 사회의 척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선생님의 아침 글을 읽고 댓글을 달다가 너무 과하게 길고  주제넘을까 싶기도 하고 어제자 제 글과 연관이 되어 소심하게 제 페북에 옮겨 담아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은 지난 일주일간 동네최고 한의원 모란이 피기까지의 모습)
10 comments


Namgok Lee
'사회적 인간의 건강한 속성'
많이 생각하는 테마입니다.
마침 순천 국가 정원에 와서 걷다가, 쉬는 사이에 박 선생의 글을 보았습니다.
나도 아침 글이 오독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걸 잘 짚어주셨네요.
박 선생의 통찰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나는 사실 낭만적인 이상주의자이지만, 현실성을 가지려면 적어도 박 선생의 시험대는 통과해야할 것 같습니다. ㅎㅎ
낭만적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요즘은 내면 깊숙이 비관적인 우울감이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있답니다.
댓글이 길어졌지요.
몽골 정원 앞에서...
 · Reply · 6 h
박정미
이남곡 선생님께서도 다른 글에서는 경계하시며 말씀하신 내용이고 단지 비감한 드라마 여운으로 한마디 하신 걸 제가 꼬투리 잡았는데도 이렇게 너그럽게 수용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길지도 않았고 그렇게 치열하지도 못했지만 지나온 인생길을 자꾸 반추하게 됩니다.
586세대의 일원으로서 선생님세대에서 배운 것과 다음세대에게 남겨야 할 것들을 이번정권의역사적교훈으로 잘 추려 갈무리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세대의 집단적오류를 반성하고 미래를 기약하는 뒤늦은 반성문에 한글자 얹고 싶은 마음이지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언제나 페북을 통해 또 헌책방에서 선생님 옛날 책도 구해와 읽으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 뵙고 그 책에 싸인받아 놓을 기회를 기다립니다.
건강하시고 봄빗길 남도여행 즐겁게 마치시기를 기원합니다.
 · Reply · 6 h
Namgok Lee
박정미 마침 또 쉬다가 (너무 자주 쉬어요 ㅎ) 글을 봅니다.
이렇게 댓글 통해 거리가 사라지는 놀라운 세상을 즐기느라고 바쁩니다.
고마워요.
 · Reply · 6 h
박정미
이남곡 봄비가 이쁘게 옵니다. 오늘 몸이 좀 안좋았는데 선생님 덕분에 힘이 납니다. 저도 밖에 나가봐야겠어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 Reply · 6 h



 · Reply · 6 h
임미옥
모란이 화왕이 된 건 꽃 피울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오직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데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화왕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은 민들레나 제비꽃도 꽃 아니냐? 씀바귀나 고들빼기 꽃은 왜 무시하냐? 꽃의 계급주의다. 모든 꽃은 평등하다. 모란에게 화왕이라는 말 쓰지 말 것을 법으로 정해라. 민주주의에서는 민들레 고들빼기가 왕이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모란이건 민들레건 다 각자 생긴 대로 꽃 피는 겁니다. 다 각자 생태와 쓰임이 다르지요… See more
 · Reply · 5 h
정금희
의성보다는 한두주 빠르네요.
청송 주산지에 들렀더니 괴불주머니가 오르내리는 길을 노랗게 물들였더군요.
May be an image of flower and nature
 · Reply · 2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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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2.1. 출신2.2. 반동탁 연합군 당시 피난민 생활2.3. 성년이 되다2.4. 조조에게 출사하다
2.4.1. 조조의 의심2.4.2. 의심설이 나온 배경 -후원자들의 살해-
2.5. 조조 휘하2.6조비 휘하2.7조예 휘하
2.7.1석정 전투2.7.2제갈량의 3.5차 북벌2.7.3제갈량의 4차 북벌
2.7.3.1. 기록이 갈리는 노성 전투
2.7.4제갈량의 4차 북벌2.7.5. 관중 부흥2.7.6제갈량의 5차 북벌2.7.7조예 휘하2.7.8공손연의 난2.7.9조예 휘하
2.8조방 휘하
2.8.1. 작피의 역2.8.2조방 휘하2.8.3. 2차 조중 정벌2.8.4고평릉 사변2.8.5왕릉의 난
2.9. 사후
3. 연의4. 가족 관계5. 평가
5.1. 참모에서 지휘관으로
5.1.1. 사마의의 전략
5.2제갈량의 라이벌
5.2.1. 유사하면서도 대조되는 행적5.2.2. 군사적인 측면5.2.3. 내정적인 측면5.2.4. 펜팔하는 사이
5.3. 충의5.4장합의 죽음에 대한 책임 논란5.5. 학살자5.6. 인재안목
6. 기타7. 미디어 믹스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조조를 시작으로 조비조예조방까지 4대에 걸쳐 위나라를 섬긴 중신이며 말년에는 신하로써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인 태위까지 올라갔다. 위나라의 신하로써는 비교 대상이 몇 없을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나라의 동량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나치게 권위가 커져 버린 사마의를 친황 세력이 견제하고 들자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조씨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공식적으로 위나라의 사직을 닫고 진나라를 세운 사람은 손자인 사마염이지만 토대를 닦은 사람은 사마의였기에 사후 실질적인 진나라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사후 무향문후, 무향선문후라는 시호를 받다가, 아들 사마소가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부친 사마의를 선왕으로 추존했고[1], 손자 사마염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묘호와 존호를 더해 조부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추존했다.

2. 정사[편집]

2.1. 출신[편집]

하내군 온현 효경리에서 사마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漢)대 명문가들은 대개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여남 원씨[2]나 홍농 양씨[3]에는 조금 밀리지만 당대에 이미 손 꼽히는 대호족 명문가였다.

할아버지 사마준은 학식이 넓고 고대의 유풍을 좋아했으며 신장이 8척 3촌이나 되었고, 허리 둘레는 5척 비만 이나 되었으며 풍격이 비범해 향리와 일족들이 그에게 의존하는 지역 호족의 리더 노릇을 했으며 영천태수를 지냈다.

아버지 사마방은 정직하고 공정한 관리로 정평이 났었는데 한서의 명신 열전을 그 자리에서 줄줄 암송했으며 본인 스스로와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얼마나 엄격했는지 아들들이 모두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앉지 못했으며, 가르켜 질문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고, 부자 사이는 숙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엄격함 덕분이었는지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고[4], 그 가운데 사마의가 으뜸이었다. 사마방의 벼슬에서 알 수 있는 듯이 그는 문관(경조윤)과 무관(기도위)를 모두 거쳤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사마방의 다양한 경험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마의의 특출났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은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서로간의 문답을 통하여 깨우쳐진 것으로 생각된다.

2.2. 반동탁 연합군 당시 피난민 생활[편집]

부사전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호소와 친했는데[5] 주생에게 납치당했고 살해 당할 뻔했다. 그러나 호소가 주생을 설득하여 살아날수 있었다고 한다.

본래 아버지를 따라 낙양에 있었으나 반동탁연합 결성 이후 동탁이 장안 천도할때 아버지의 명으로 형 사마랑의 지도아래 친족들과 함께 고향 하내군 온현으로 낙향했다. 그 후 하내군의 혼란을 예상한 사마랑과 함께 다시 여양으로 피난갔다고 한다.[6] 그 후 온현으로 돌아왔으며[7] 대기근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말세에도 형과 함께 학업을 닦았다.(사마랑전)

반동탁 연합군 당시 하내 지역에서는 여러 열전에서 학탈, 약탈이 묘사된다. 그런 혼란을 피해서 여러 호족들은 중원으로 도피한것 같다. 양준은 병란이 일어나자 하내군이 위험하다는걸 예상해 경현, 밀현으로 피난갔으며 그곳에서 사마랑, 사마지, 사마의를 만났음을 알 수 있다. 위서 사마지전에 따르면 사마랑과 사마의와 함께 행동하던 사마지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형주까지 더 피난 갔던 것으로 보인다.

2.3. 성년이 되다[편집]

사마의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절조를 갖추고 총명하며 많은 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교를 가슴에 간직한 청년이 되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피난민 생활을 해서인지 항상 개탄하여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같은 군(郡) 사람인 남양태수 양준이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했는데 16세, 17세의 사마의를 만나보고는 비상한 그릇이라 말했다. [8] 이때 최염은 친했던 사마랑에게 “그대의 동생은 총명하고 성실하며 강단이 있고 영특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하오.”라고 했다.

이후 201년, 군(郡)에서 상계연으로 천거했다. 당시 조조는 사공이었는데 그에 관해 듣고는 사마의를 벽소하려 했다. 사마의는 한나라의 명운이 바야흐로 쇠미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씨에게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하니 관절통 때문에 기거할 수 없다며 이를 사양했다. 조조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사마의를 엿보게 했는데 사마의는 꼿꼿이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했다는 대목을 보고 원소와의 대결을 앞둔 조조세력에게 사마의가 청류파 가문으로서 탁류인 조조세력을 거절했다는 해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이 조조군에 임관해 있었다. 만약 사마의가 조조군을 꺼려했다면 본인이 조조군에 임관함으로써 원소에게 사마씨가 조조측으로 올인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하여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 아무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조조보다는 원소의 세력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마의의 고향인 하내군이 왕광과 원소가 주둔하면서 약탈을 자행해 하내군 백성의 절반이 죽고 사마씨들은 피난간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면 사마의가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사마의의 행동은 일종의 간을 본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선목장황후열전에 따르면 사마의가 처음에 조조의 조명을 거절했을 때 중풍이 있다고 핑계 댔는데 일찍이 책을 말리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서 자기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손수 거둬들인 적이 있었다. 집안의 여종 한명이 이 광경을 목격했는데 아내(장춘화)는 이 일이 누설되어 화를 불러들일까봐 마침내 그 여종을 죽여서 입을 막은 다음 친히 집안일을 돌봤다. 사마의는 이로 인하여 아내를 무겁게 여겼다.

하지만 사마의는 수십년 후 아내를 늙었다고 괄시했고 아내와 아들들까지 단식하자 그런 늙다리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내아들 때문에 내가 사과했다고 떠들었을 정도로 매우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아내를 죽인 조비 등과 비교하면 정신승리 정도로 보이기 때문인지, 사마의를 공처가로 표현하는 창작물들이 있다. 그러나 행간을 살펴보면 조조가 살아있던 시절은 몰라도, 늙고 나서 보이는 모습은 절대 아내에게 살살기는 공처가적인 태도가 아니다. 사마의의 말에선 엄연한 정실부인에 대한 멸시와 자신의 뒤를 이를 아들들을 아내보다 더 중시하는 가부장의 면모가 명백히 나타난다. 오히려 이 발언은 만약 장춘화 소생 중에서 가독을 계승할 맏아들을 비롯한 장성한 아들들이 없고 딸만 있었다면 장춘화가 단식하다 죽었어도 사마의가 눈 하나 깜박하긴 했을까 의문이 들게 만드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2.4. 조조에게 출사하다[편집]

208년 6월, 조조가 승상이 되자 다시 벽소해 문학연으로 삼고는 명을 받들어 떠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만약 다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곧바로 잡아 가두도록 하라.

사마의가 두려워하며 그 직에 취임했다.

사마의가 조조가 벽소하여 출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일단 순욱별전에는 순욱이 사마의를 추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북당서초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사마의는 학문을 좋아했는데 조홍에게 교제를 요구받자 굽히고자 찾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해, 병이 있다고 지팡이를 잡았다. 한을 품은 조홍은 조조에게 말했다. 이에 조조가 사마의를 벽소(辟召, 등용)했고 그러자 사마의가 바로 지팡이를 던지고 명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9]
어감을 보자면 순욱이 조조에게 사마의를 추천한 후에 조홍의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순욱의 천거는 조조진영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의 천거를 이유로 한 조조세력의 등용 시도가 사마의에게 거절당하고 나중에 조홍의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건 없다. 또 조조는 순욱에게 특정 임무를 수행할 인재들을 추천받기도 하였고 그 대상은 이미 본인 세력에 속한 자들이기도 하였으므로, 사마의가 등용된 후에 순욱이 사마의의 재능에 대해 평하며 그가 맡을 만한 역할을 조조에게 추천하였던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정리하면 사마의는 몇차례 공식적인 등용 제안을 거절하고, 나중에 조홍이 그에 대해 알게되어 접근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조조가 강경하게 나오자 그제서야 관직에 임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작게는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했으며 크게는 큰 모략이 있었다. 위에서 최염이 사마랑에게 한 말을 조조가 듣고는 그를 벽소하고자 했는데 사마의는 풍비[10]가 있다고 핑계를 댔다. 조조는 노하여 (그를) 거두고자 하였고, 사마의는 두려워하다가 문학연 직책을 받아들였다고 나온다.[11]

2.4.1. 조조의 의심[편집]

사마의는 내심 꺼리는 바가 있어도 겉으로는 너그러웠고, 시기심이 있고 임기응변이 많았다. 조조는 사마의에게 웅대하고 호방한 뜻이 있음을 알아챘고, 그에게 낭고상(狼顧相)이 있음을 듣고는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12] 이에 그를 불러 오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게 하니 얼굴은 곧바로 뒤를 향하는데 몸은 움직임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세 마리 말이 한 구유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고는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13] 그래서 태자 조비에게 말했다.
사마의는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필시 너희 집안일에 관여할 것이다.

사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가들은 회의적이다. 조비가 217년 세자 책봉이 되었는데 사마의를 겨냥해 언급했다 보기 힘들다. 이는 후세에 세 마리의 말, 후일 조씨의 황위를 찬탈하는 세 명의 사마씨인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염두에 둔, 흥미성 과장이 많이 들어 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설령 조조가 사마의를 경계해 이 말을 했다고 한들 당장 사마의 외에도 사마의의 친척인 사마지, 친형 사마랑, 동생 사마부가 모두 출사해 있었다.

정말로 조조가 사마씨를 경계했다면 208년생 사마사, 211년생 사마소를 의식하는게 아니라 사마랑 3형제를 거론한 것이라고 보는게 맞다. 이때 쯤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도 원래 조식 휘하의 문학연이다가 조비가 태자가 되자 태자중서자로 자리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조비 휘하에 사마씨들이 유력한 측근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던 만큼 조조 입장에서 청류파 명문출신인 사마의와 그 형제들을 미래권력 조비에게 붙여줘도 될지 충성도 테스트를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태자가 평소 사마의와 친하여 늘 서로 비호했는데 이 일로 인해 총애를 잃게 되었다. 이에 사마의는 관리의 직무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까지 모두 직접 챙기니[14], 이로 말미암아 조조가 마침내 그에 관해 안심하게 되었다.

2.4.2. 의심설이 나온 배경 -후원자들의 살해-[편집]

만약 의심설이 사실이라면 이는 최염이 조조에게 살해 당했던 시기가 가장 가능성 높다. 최염은 사마의를 여러번 높게 평가했으며 당시 호족-천거제에서 이는 정치적 후원자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조조는 최염을 살해했다. 비슷하게 조비 역시 사마의에게 좋은 품평을 해준 양준을 살해했다. 이때 사마의는 양준을 살리고자 했으나 조비는 들어주지 않는다.

이렇게 사마의를 추천했던 두 인물들이 조조, 조비에게 시덥잖은 이유로 살해된것은 사마의의 정치적 배경에 악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고대 역사서 특유의 예언론적인 면모가 가미되면서 조조가 의심했다고 기록된것이다. 단 조조는 탁류 출신이었던 만큼 청류파 세력과는 언제나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청류파 인사인데다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기용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인 사마의에 대해 찝찝한 느낌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2.5. 조조 휘하[편집]

그리하여 사마의로 하여금 늘 태자(조비)와 함께 교제하게 하였고, 황문시랑으로 올렸다가 의랑, 승상 동조속으로 전임시키고 뒤이어 주부(主簿)로 전임시켰다. 이러한 그가 출사를 거부한 일화들은 까려면 얼마든지 위선자라고 깔수 있기에 청류파의 위선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늦게서야 조정에 출사한 인물 치고는 황문시랑, 의랑, 승상 동조속, 주부 등 잘나가는 관직을 역임하며 꽤나 출세했다. 조조가 사마의를 꺼렸기 때문에 명문가 자제 신분에 가축 돌보는 일까지 해야했던 기록 자체는 진서 선제기 후반부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마의의 관직 생활이 지장을 받았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 진서 선제기의 해당 기록에도 스스로 가축을 돌보기까지 하는 사마의의 태도를 보고 조조가 의심을 풀었다고 적고 있고, 조비와 별 차이 안나는 사마의의 연령대와 늦은 출사시기를 고려하면 무난한 속도로 승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굴복시켰을 때 사마의는 유엽과 함께 유비가 점령한지 얼마 안 된 익주를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조는 사람은 만족을 알아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5]

이후 진서 선제기에는 유수구 전투때의 일화가 나오는데 그 유명한 손권의 칭제 권유와 조조의 '이 아이(손권)가 나를 화롯불 위에 올리려 하는구나!' 드립이 나온다. 그런데 원래는 이 일화가 관우를 잡을때(219년)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걸 유수구 전투 때로 앞당겼을 뿐만 아니라 칭제를 조조에게 권하는 사람들도 진군환계하후돈 등이 아니라 사마의 혼자 한걸로 나온다. 당연히 진서의 편집 오류로 자치통감에서는 사마의가 혼자 간언했다는 이 기록을 배제한다.

사마의는 조조에게 호수와 부방은 성품이 좋지 않아 변경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조조가 듣지 않았다. 나중에 관우가 번성에서 승승장구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위국이 세워진 뒤 태자 중서자로 승진했다. 늘 중대한 모의에 참여하여 매번 기책을 내어놓아 태자(조비)에게 중한 신임을 얻으니, 진군오질주삭과 함께 4우라 불리었다. 승진하여 군사마가 되자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에 농사짓지 않는 자가 대략 20만여 명에 이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방책이 아닙니다. 비록 전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의당 스스로 농사지으며 둔수해야 합니다.

조조가 이를 받아들이니, 이로써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비축해 나라의 소용이 넉넉해졌다.[16]

형주에서 관우에게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지자 조조는 허도가 적과 가깝다 하여 하북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말하길[17]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니 인근의 백성들이 크게 불안해 할 것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겉으론 친밀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손권을 달래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면 번성의 포위는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라 건의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

조조는 형주의 남은 백성과 한천에서 둔전하던 자들이 남쪽 도적(오나라)에 매우 가까이 닥쳤다 하여 이들을 모두 옮기려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형초 사람들은 경박하여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관우가 이제 막 격파되어 악행을 저지른 많은 이들은 몸을 숨기고 관망하고 있는데, 이제 착한 이들을 옮긴다면 그들의 뜻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차 떠난 자들이 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따랐다. 그 후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와 생업에 종사했다.

2.6. 조비 휘하[편집]

조조가 낙양에서 죽자 조비가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사마의가 장례 치르는 일을 다스리자 안팎이 숙연해졌다. [18] 그리하여 임금의 관을 받들고 업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황제로 즉위한 당시 조비의 측근인 사마의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한나라의 자사와 태수는 상하관계가 명확치 않았다. 그 때문에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해서 지방군만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때, 중앙정부에서 독군어사(督軍御史)[19]를 파견했다. 위나라에 들어서면 한나라 시절 장군직을 남발하지 않고 독군(督軍) 권한을 가진 중앙관료들로 위기상황을 극복하던 시절은 끝났고, 일반적으로 장군직을 가진 무관들이 행도독독군(行都督督軍)을 겸하는 기묘한 형태로 발전 혹은 변화하게 된다.

송서 백관지에 따르면 후한의 광무제가 독군제사(督軍諸使)라는 형태로 체제를 구축한 관직(독군어사/감군사자)를, 조조가 '황제가 임명한 제반 관리'라는 의미의 제사를 떼고, 임시로 군을 독(督)한다는 독군을 붙여 행도독독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물론 조조가 무언가를 새로 만든 건 딱히 아니다. 광무제를 비롯한 한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이 틀을 닦아놓은 관제를 자신의 입맛 혹은 필요에 따라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도독 제도와 조조가 기틀을 닦은 위나라 도독은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한다.

조비는 황초 원년(220년) 사마의를 독군어사중승에 임명한다. 독군어사중승에서 독군의 성격은 독군어사에서 보이는 감찰의 기능과 더불어 임시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사중승은 홍이손의 삼국직관표에 따르면, 4품이지만 어사대의 우두머리이자 독좌(獨座)로서 황제 혹은 승상 직할이었다. 조조가 헌제 시절 승상에 취임해 어사대부(220년 사공으로 개칭)의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면서, 위나라의 핵심 관직이 된 걸로 보인다.

사마의가 초대 어사중승은 아니지만 서선을 어사중승으로 임명 직후 바로 다른 관직으로 보냈기에 조비 시대에 제대로 감찰 임무를 한 건 사마의가 최초라고 봐야한다. 또한, 독군과 어사중승은 유사한 기능, 즉 감찰기능을 지닌 관직으로 이해되며, 독군의 경우 그 임시성을 고려해볼 때, 과거 비상설직이었다가 상설화된 장군과 같다고 보인다. 즉 사마의가 받은 독군어사중승은 과거 대사마대장군처럼 장군의 관이 더해진 형태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장군이 출정이 끝나면 파해졌듯이, 독군 역시 감찰이 끝나면 파해지는 형태로 보인다. 또한 독군어사중승, 독군량집법, 독군량어사, 위나라의 독군어사 등이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던 시기에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독군직이 붙은 관직들은 선양에 의한 즉위에 따른 혼란함을 감독하기 위해 기능한 관직들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독군어사중승을 어사중승에서 독군의 관이 더해진 형태로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그 독군이 가질 수 있는 군령권 가능성 자체를 아예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시기에는 지절을 지닌 도독들이 도독제군사, 도독중외 등으로 등장하던 시기였고, 도독이라는 형태로 이미 행도독독군 등이 거론되는 시기이므로 ‘독군’에서 보이는 감찰의 역할을 넘어선 군령의 권한이 온전히 있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여간 선양 이후 혼란한 체제에 맞추어 사마의가 임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만은 사실로 볼 수 있다.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하진정후에 봉해지고 승상 장사로 전임되었다. 221년 조비는 독군을 파하고 시중 상서우복야(3품)로 사마의를 승진시킨다.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 양양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 양양)을 불태운 후 완으로 후퇴하는데 손권이 진소를 보내 양양을 점거해 버린다. 결국 조인이 서황과 함께 진소를 공파하고 한수 남쪽의 부화민을 북쪽으로 이주 시킨다.

당시 위나라의 양양-번성 라인에서 오나라로 귀순하는 백성들이 여럿 등장하면서 방어선이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비는 후퇴론을 주장했고 사마의는 방어론을 주장했는데 결국 조인은 양양성을 불태우고 완성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손권은 주력군대를 보내지 않고 진소라고 하는 행적이 불분명한 장수를 보낸다. 결국 조인은 서황과 함께 양양을 다시 탈환한다. 이것이 과장되어 진서 선제기는 손권이 아예 양양을 쳐들어오지 않았다고 왜곡하여 서술하였다.

당초 촉장 맹달이 항복하자 위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매우 후대했었다. 사마의는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누차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맹달을 영(領) 신성 태수로 삼고 후(侯)에 봉하고 가절(假節)했다. 위가 한나라의 선양을 받자 사마의는 상서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독군, 어사중승으로 전임되고 안국향후에 봉해졌다. 221년, 독군의 관직을 파하고 시중, 상서우복야로 올렸다.

222년 조비가 남쪽으로 순행할 때 완에 도착하기전에 백관들에게 군현의 일을 간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완의 현령이 잘못 이해해서 시장을 폐쇄하였고, 조비는 '내가 도둑놈이란 말인가?'라고 라며 양준을 투옥했다. 사마의와 왕상, 순위가 양준을 구해주도록 청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피를 흘렸으나 조비는 허락하지않았고, 양준은 결국 자살하였다고 한다. [20]

224년, 조비가 남쪽을 순행해 오와의 국경 지방에서 군대의 위세를 보였다. 사마의는 허창에 남아 진수했는데, 상향후로 고쳐 봉해지고 무군, 가절로 전임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급사중, 녹상서사의 직이 더해졌다. 사마의가 굳게 사양하자 천자(조비)가 말했다.
내가 제반 정무를 보며 밤낮으로 이어 잠시라도 편히 쉴 틈이 없소. 이는 그대에게 영예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거리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오.

225년, 조비가 다시 수군을 크게 일으켜 오를 정벌했는데, 다시 사마의에게 명하길 머물며 지키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진무하고 밖으로는 군수 물자를 공급하도록 했다 조비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는데, 사마의에게 이르길, "짐이 동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동쪽을 맡으시오"라고 했다. 조비가 죽을 때 사마의, 조진진군을 불렀고 황태자 조예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이 세 명의 신하와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2.7. 조예 휘하[편집]

조예가 즉위하자 무양후로 고쳐 봉해졌다.

손권이 강하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장패(張覇)[21]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사마의가 제군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무군대장군에서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했다.

227년 6월, 천자가 조령을 내려 사마의를 완에 주둔케 하고 독형예이주제군사의 직을 더했다.

그리하여 맹달은 오와 연결하고 촉과 관계를 공고히 해 은밀히 중국(위나라)을 도모하려 했다.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은 그가 언행을 이리저리 고치는 것을 증오하고 또한 그가 화를 일으킬까 염려했다. 맹달은 위흥 태수 신의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제갈량은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자 하여 곽모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니 신의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누설시켰다. 신의는 곧바로 맹달이 몰래 촉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로 올렸으나 황제 조예는 믿지 않았다.

전략에 따르면 227년,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한중에 도착하자 맹달이 또한 제갈량에 호응하고자 하여 제갈량에게 옥결(玉玦), 직성장즙(織成鄣汁), 소합향(蘇合香)을 선물로 보냈다. 제갈량은 곽모에게 거짓 항복하여 위나라로 가게 했다. 위흥 태수 신의는 맹달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곽모가 신의에게 말했다.
옥결은 모책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이고, 직성은 모책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소합향은 일이 이미 합해졌다는 말입니다.

맹달은 그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거병하려 했다. 사마의는 맹달이 신속하게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보내 그를 효유했다. 이는 당시 사마의가 맹달이 신속히 거병하면 이를 막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뜻한다. 마침 조예는 맹달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믿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편지를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장군이 지난 날 유비를 버리고 국가에 몸을 의탁하자 국가에서는 장군에게 변경의 중임을 맡겨 촉을 도모하도록 했으니 촉인들은 장군을 이를 갈며 증오하지 않는 자가 없소. 제갈량은 우리를 서로 싸우게 하고 싶었으나 오직 방법이 없어 고심할 뿐이었소. 곽모가 한 말이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누설되게 했겠소.
맹달은 서신을 받고 크게 기뻐하고, 거병을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이 사이에 사마의의 태도가 바뀐다. 사마의는 참군 양기(梁幾)를 파견해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맹달에게 입조를 권하였다. 사마의의 편지로 인해 거병을 망설이던 맹달은 놀라서 비로소 난을 일으켰다.

명제기에 보면 227년 12월, 마침내 조예는 표기장군 사마의에게 맹달의 난을 토벌하게 했다. 처음 신의가 표를 올렸을때는 맹달의 반란을 믿지 않던 조예가 이렇게 태도를 바꾼것은 그 사이 누군가가 조예의 판단 과정에 개입을 했다는 증거이고 이는 즉, 사마의가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맹달이 준비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아군이 준비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사이 군주 조예가 뜻이 바뀐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사마의는 우선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안심시킨 후 낙양에 표를 보내 조예를 납득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마의가 은밀히 군을 일으켜 공격했다. 제장들은 맹달이 두 적(촉한과 손오)과 결탁되어 있으므로 의당 관망한 뒤에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맹달은 믿음과 의리가 없고 지금은 그들이 서로 의심하는 때이니, 응당 결단하지 못하는 때를 틈타 속히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는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8일 만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오와 촉이 각기 그들의 장수를 보내 서성 안교와 목란새로 향하게 하여 맹달을 구원하자 사마의는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이를 막았다.

당초 맹달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완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내가 있는 곳과는 1,200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거사했다는 말을 들으면 응당 천자에게 표를 올리며 서로 왕복해야 하니 한 달은 걸릴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있는 곳은 깊고 험한 곳이라 사마의가 필시 직접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하자 맹달이 또 제갈량에게 고했다.
내가 거사한 지 8일 만에 군대가 성 아래에 도착하니 어찌 그토록 신속할 수 있습니까!
상용성의 3면은 물에 의지했는데 맹달은 성 바깥에 목책을 세워 스스로 굳게 방비했다.

사마의는 물을 건너 그 목책을 깨뜨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여덟 갈래 길로 성을 공격하여 16일 만에 맹달의 생질인 등현과 장수 이보 등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맹달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군대를 거두어 개선하여 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금하니 남쪽 사람들이 기뻐하며 귀부했다.

당초 신의는 오랫동안 위흥에 있으면서 변경 지역에서 전횡하며 번번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하여 인장을 새겨 많이 황제 명의로써 대신해 수여하였었다. 맹달이 주살되자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무렵 여러 군수들이 사마의가 새로 승리했다 하여 예물을 바치며 축하하자 이를 모두 받았다. 사마의는 사람을 시켜 신의에게 하례하러 직접 오도록 권유하고, 신의가 도착하자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한 정황을 심문하고는 그를 체포해 수도로 송환했다. 또한 맹달의 남은 무리 7천여 가를 유주로 옮겼다.
여기서 선제기에는 촉장이라는 요정, 정타가 7천기를 데리고 항복했다는 기록을 있는데 타 기록에는 교차검정되지않는다. 만약 사실이라도 상용 근방의 거주하던 반독립적 세력에 가까울것이다.

2.7.1. 석정 전투[편집]

이 무렵 변군이 새로 귀부하여 호적에서 누락된 호구가 많으니 위 조정에서 실태 조사를 하려 했다. 사마의를 수도로 오도록 하여 천자가 이 일에 관해 사마의에게 자문을 구하자 사마의가 대답했다.
적이 엄격한 법률로 아랫 사람들을 속박하니 이 때문에 아랫 사람들이 그를 저버린 것입니다. 의당 너그러이 다스리면 자연히 안거하며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것입니다.
또한 두 적을 의당 토벌해야 하는데 누구를 우선해야 하는지 물으니 사마의가 대답했다.
오는 중국(위나라)이 수전에 익숙지 못하다 여겨 감히 유수구 일대 관문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구, 동관이 바로 적의 심장과 목구멍입니다. 만약 육군을 환성으로 향하게 해 손권을 동쪽으로 유인한 뒤 수전군을 하구로 향하게 해 그들의 허점을 틈타 공격한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천자가 이를 모두 옳게 여겼고, 다시 사마의에게 명해 완에 머물도록 했다.

2.7.2. 제갈량의 3.5차 북벌[편집]

230년,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대도독, 가황월이 더해지고 조진과 함께 촉을 정벌했다.[22] 사마의는 서성에서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내 길을 열고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해 한수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큰 비를 만나 회군했다.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라고 쓰고 있는데 문제는 저 구인이라는 곳이 한중이 아니라 파동군 구인현이고 신풍현은 경조의 신풍현밖에 없다. 지명이 틀린게 커서 그냥 차라리 자치통감 말대로 서성에서 거슬러 올라갔다라고 쓴 거 만도 못하게 되었다.(...)

보통 비가 내려 제대로 된 전투를 지속하지 못하고 위군이 후퇴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전투가 있었던 모양으로 하후연전 하후패전에 따르면 (조진이 군사를 일으켜 자오도를 통해 촉을 침공했을 때) 하후패도 같이 참전했다. 선봉을 맡아 자오도를 통해 촉을 침공했던 하후패는 흥세를 포위하고 전곡에 진채를 내렸고 지원군이 올때까지 몸소 싸웠다고 한다.

또 왕기전 주석에서 왕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고 하며 위나라가 본 손해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고갈된 상황에서 싸움을 통한 위나라군의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후일 강유의 북벌에서 강유가 입은 피해와 제갈탄의 난에서 문흠과 당자가 죽은 것과 비슷한 사례로 언급하는것을 보면 위군이 전투와 홍수로 인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7.3. 제갈량의 4차 북벌[편집]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선비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 석성에 이르러 제갈량에 호응했다. 이때 위 대사마 조진이 병이 들어, 사마의가 형주에서 와서 입조했다. 조예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 비요대릉곽회 등을 이끌게 했다.

사마의는 비요,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천수군 상규현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 미에 주둔시키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전방의 군대가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의 3군이 경포[23](영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그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남겨두어 기산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상규에서 사마의를 역격하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사마의와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에 도착했다.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사마의가 이에 따르지 않고 제갈량을 뒤쫓았다.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위평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사마의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 무당감 하평(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2.7.3.1. 기록이 갈리는 노성 전투[편집]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은 위연고상오반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옷 입은 군사 3천 급, 철갑옷 5천 벌, 각노 3,100 장을 노획했다.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왕평전에 따르면 231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반대로 사마의가 포위를 무너 뜨리니 제갈량은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뒤쫓아 이를 깨트리니 사로잡히거나 참수한것이 만을 헤아렸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자치통감은 한진춘추의 기록을 손들었으며 왕명성 역시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뢰했다.반대로 하버드 교수이며 자치통감을 영역한 아킬레우스 팡은 진서 선제기의 손을 들었다. 사마의 항목이기 때문에 진서 측의 지지근거만 서술하자면 아킬레우스 팡은 습착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한진춘추의 승전기록이 숫자 자체가 모순이며 전혀 믿을수 없다고 평가했다. 자치통감은 한진춘추를 그대로 옮겼기때문에 사료의 교차검증이라고 할수는 없기때문이다. 또한 한진춘추에 따르면 위군은 계속 패배만 하였는데 선제기, 명제기에서 교차 검증되는 공훈의 차등 포상할 사건이 전혀 보이지않으며 이런 포상이 벌어진 위나라에 비해 4차북벌 이후 촉나라는 이엄,유염이라는 최고위 장군이 처벌받거나 참수되는데 겨우 음평,무도와 왕쌍을 잡고도 승상으로 복직되었던 3차 북벌에 비하면 대승한 4차북벌 후의 기록이 믿을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이엄은 제갈량에게 장마비로 후퇴를 건의했고 제갈량도 동의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엄은 제갈량을 두려워하고 있고 제갈량이 진군하지 못한 잘못을 보이려했다하고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나 한진춘추는 이엄이 제갈량을 두려워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유염은 최고위 장성인 거기장군임에도 아내의 얼굴을 때렸다는 이해할수 없는 이유로 처형당한다. 이렇게 최고위 수뇌부 두명이 숙청되는 촉한의 분위기로 볼 때 제갈량은 퇴각하면서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다.

2.7.4. 제갈량의 4차 북벌[편집]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가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고 장합은 전사한다. 한표전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은 처음부터 사마의가 장합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목문도라는 곳의 나무에 장합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24] 신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이렇게 장합이 죽자 황제가 탄식하고 진군이 맞장구치는 등 위나라 조야가 한탄했다고 위서는 기록하고 있다. 어쨌거나 제갈량의 북벌을 막은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더함에 각기 차등을 두었으며 사마의의 봉읍을 늘려 주었다.

제갈량전 주석으로 달린 사마진 시기 왕은이 지은 촉기에는
곽충 4사로 사마의가 장합과 함께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검각을 노렸으나 제갈량이 8만의 신의를 지켜 병사들의 교대 시간을 지켰고 이에 감격한 촉나라의 병사들이 일당십으로 싸워 장합을 죽이고 사마의를 격파했다고 나온다.

일각에서는 장합이 목문도에서 촉군을 추격하다 전사했다는 것은 사마의가 노성 전투에서 패하고 상규로 도망갔다는 증거로 본다. 목문도 위치는 노성의 북쪽이자 상규 남쪽인데 촉군이 목문도에서 퇴각했다는 이야기는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규까지 추격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합을 무리하게 추격시킨 이유도 하마터면 목에 칼이 들이밀어질 수도 있던 위기를 맞자 과잉대응을 한 개념이라는 주장도 덧붙여진다.

2.7.5. 관중 부흥[편집]

청룡 연간[25]이 되자 사마의는 장안에 주둔해 군영에 시장을 설치했는데[26] , 부대의 관리나 병사들은 현민을 깔보며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비는 이 사실을 즉각 사마의에게 알리니 사마의는 이에 노해 군의 시후[27]를 불러들여 즉각 안비 앞에서 백대의 매질을 하고 그 자리에서 관리, 병사들에 대해서 엄숙함을 유지하도록 명한다. 그 이후로 군현과 군영이 맡은 바를 지키는게 가능해졌다고 한다. 자세한것은 안비 참고.

이 무렵 군사 두습, 독군 설제가 모두 말하길, 내년(232년)에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제갈량은 기산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에서일 것이고 농서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이에 표를 올려 기주의 농부(農夫)를 옮겨 상규(上邽)를 경작하게 하고 경조(京兆), 천수(天水), 남안(南安)의 감야(監冶, 대장장이 감독)를 흥성하게 했다.

그런데 진서 식화지에 따르면 사마의가 가평(嘉平) 4년, 관중에 기근이 들자 사마의가 표를 올려 기주농민 5천명을 상규에 이주시켜 밭을 갈게 하고 경조, 천수, 남안의 염지(소금호수)를 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제는 가평 4년은 252년으로 이미 사마의가 죽은 다음해라는 것(...) 게다가 상규로 기주의 농민을 이주시키는 계획은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사마의가 아니라 그의 동생 사마부의 계책이었다. 그리고 선제기는 사마의가 시킨게 감야(監冶)라고 나오는데 식화지는 염지(鹽池)를 흥하게 했다고 나온다. 일단 식화지는 사마의가 죽은 다음에 사마의가 표를 올렸다고 말이 안 되게 기록했으므로 이 부분은 선제기가 맞는듯 하다.그리고 아무리 글자가 비슷해도 그렇지 염지와 감야의 차이도 교정을 안 하다니 참... 어쨌거나 선제기, 식화지, 안평헌왕부열전이 서로 충돌하는 기록이라 진서의 신뢰성을 더욱 의심하게 하는 기록으로 믿을 수가 없다.

또 선제기에서는 기주의 농부를 상규로 옮긴게 사마의로 나오고 안평헌왕부열전에서는 사마부로 나오는데 선제기는 사마의가 '제갈량은 농서로는 안 올 것'이라고 말해놓고 정작 농서인 상규에 농부들을 배치하고 대비케 하는 모순(...)을 저질렀으니 사마부 열전 쪽이 더 맞는듯 하다. 상규의 농민 이주는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매번 제갈량이 관중을 침입했는데 변방의 병력들은 제갈량을 능히 당해내지 못했고 관중에 적과 우연히 마주치자 곡식과 비단이 부족해서 제시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막으려는 시도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233년, 성국거(成國渠)를 뚫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수천 경의 농지에 물을 대니 나라가 충실해졌다. 진서 식화지에 따르면 임진피는 주변 황무지 3천경의 물을 댈 수 있었다고 한다. 성국거는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오장원과 무공, 위수에 가까운 미현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개수로였다. 이런 성국거를 진창에서 견수까지 확장시켰다는 기록이 진서에 있는데, 이것은 사마부가 제안한 관중 부흥책과 연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서 제갈량의 북벌에 대비하려 했던 것 같다.

이 모든건 자치통감에는 없는 기록이지만 하여간 사마형제가 놀고 있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흉노 호박거자직이 반란을 일으키자 호준을 파견해 추격하고 격파해 항복시켰다. 호준이 열전이 없어 상세한 활약은 알기 힘들다

2.7.6. 제갈량의 5차 북벌[편집]

234년, 제갈량이 다시 군사 10여 만을 이끌고 야곡을 나와 미 땅의 위수 남쪽 평원에 영루를 세웠다. 천자가 이를 우려하여 정촉호군 진랑을 보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사마의의 지휘를 받게 했다.

어림에 따르면 제갈무후(제갈량)가 사마선왕(사마의)과 위수 가에서 장차 싸웠는데, 선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일에 임하며, 사람을 보내 무후(제갈량)를 살피게 하였다. 과연 무후는 흰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며,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중군(眾軍)이 모두 그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고 하였다. 선왕(사마의)이 듣고 감탄하여 말했다.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도다!

제장들이 위수 북쪽에 주둔하며 적에 맞서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백성들이 모두 위수 남쪽에 모여 거주하니 이곳이 필히 다투어야 할 땅이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물을 뒤로 한 채 영루를 세웠다. 그리고는 제장들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에 오른다면 제군이 무사할 것이오.

한편 제갈량은 호보감(虎步監) 맹염을 보내 무공수(武功水) 동쪽을 점거하게 했는데, 사마의가 위수(渭水)가 불어난 것을 틈타 20일에 (또는 20일만에?) 기병 1만을 출병하여 와서 맹염의 영을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죽교를 만들며 강 너머로 활을 쏘았고 다리가 완성되자 달려가 구원하고 사마의는 후퇴하였다.

이후 제갈량이 사곡에서 공격하여 나왔고, 아울러 난항(오장원)에서 둔전을 하였다. 당시 사마의는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이 반드시 북원을 다툴 것이므로 응당 먼저 그곳을 점거해야 된다고 계획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곽회가 말했다.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의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참호와 보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촉나라 병사가 대대적으로 이르렀으므로, 곽회는 맞아서 그들을 공격했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장수들은 모두 서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관병으로 하여금 중병을 서쪽에서 대응하게 하려는 것으로, 실제로는 틀림없이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과연 양수를 공격하였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성을 공략할 수는 없었다.[28]

당시 조정에서는 제갈량이 군을 외지에 거주하게 하며 멀리 침범했으니 제갈량의 입장에선 급히 싸우는 것이 이롭다고 보아, 사마의에게 늘 명하길 몸가짐을 정중히 하며 그들의 변화를 살피라고 했다.

제갈량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의가 출전하지 않으니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부녀자들이 쓰던 두건과 머리 장식과 부인들이 쓰는 장신구를 보냈다. 사마의가 노하여 표를 올려 결전할 것을 청하자 천자가 불허하고는 강직한 신하 위위 신비를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서 군사가 되어 이를 제지하게 했다. 그 뒤 제갈량이 다시 와서 싸움을 걸자 사마의가 장차 출전하여 이에 응하려 했는데,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에 서서 막으니 사마의가 이에 그만두었다.

당초 촉장 강유는 신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말했다.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당도했으니 적이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말했다.
그는 본래 싸우려는 마음이 없는데 천자에게 결전을 굳게 청한 이유는 그의 군사들에게 무(武)를 과시하자는 것이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만약 저들이 우리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길을 가서 굳이 결전을 청하겠소!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가 서신을 보내 군사에 관해 물었다. 사마의가 답장을 보내 말했다.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통전 150권에 따르면 사마의는 2000여 명에게 영내 동남쪽 모퉁이에서 만세를 부르게 시켰다. 제갈량의 사자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사마의가 말하길 손오의 사자가 와서 항복을 청했다고 했다, 제갈량은 이를 알고 "손오가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마의는 곧 60세가 되는 영감인데, 구태여 이런 속임수를 쓸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했다.[29]

그 이전에 제갈량의 사자가 도착했을 때 사마의가 물었다.
제갈량의 일상 생활이 어떠하고 음식은 얼마나 드시오?
사자가 대답했다.
3~4 되를 드십니다.
이어 정사에 관해 물으니 대답했다.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그 뒤 사마의가 다른 이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
[30]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그와 더불어 대치한지 백여 일 만에 때마침 제갈량이 병으로 죽고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가 그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양의(楊儀)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선왕(宣王)에게 급히 고했고 사마의가 이를 추격했다. 강유가 양의에게 정기를 돌리고 북을 울리면서 마치 곧 사마의를 향해 나아갈 것처럼 하게하니, 선왕은 이내 물러나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31]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야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發喪)했다. 사마의가 퇴각하니 백성들은 속어(諺)를 지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를 사마의에게 고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헤아려 대적할 수는 없다"

다음 날, 제갈량의 군영의 보루로 가서 그의 남은 흔적을 살펴보고 그의 도서와 양곡을 매우 많이 노획했다. 신비는 제갈량이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사마의가 말했다.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대의 문서, 비밀한 꾀, 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중요한 것을 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관중에 남가새가 많다는 말을 듣고 사마의는 군사 2천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기병과 보병이 함께 진격했다. 추격하여 적안에 도착했으나 더 이상 미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2.7.7. 조예 휘하[편집]

235년, 태위로 올리고 봉읍을 더욱 늘려주었다. 촉장 마대가 침범하니, 사마의가 장군 우금(牛金)을 보내 이를 공격해 패주시키고 천여 급을 참수했다. 자치통감에서는 정사 삼국지 명제기의 기록에 따라 태위로 올린 것만 기록했으며, 마대를 격파한 것을 제외했다. 아마도 정사 삼국지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일듯 하다.

이때쯤이면 조진, 조휴등 동료(경쟁자)들의 죽음 덕분에 사마의는 앉아서 위나라의 군권을 틀어 쥔 사나이가 되었다. 235년 정월의 태위 직 제수는 이미 그가 쥔 권력과 권위를 생각하면 차라리 숙적 제갈량을 막아낸 것에 대한 기념선물에 가까웠을듯. 허나 중요한 것은 위나라 건국이래 진짜 군권은 조씨 인척들끼리 해먹는 대사마(조인조휴조진)로 분리되는 한편 나이든 문관들이 차례로 앉으며 사실상의 명예직이 되었던 태위 자리에, 실질적인 군권과 실력을 지닌 인물이 앉게 되었다는 것. 덕분에 조위의 역대 태위 중에서도 사마의는 전무후무한 존재감을 발휘하게 된다.

무도 저족의 왕 부쌍, 강단이 그들의 부속 6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정사 삼국지 촉서 장억전에는 '236년 저족의 왕 부건의 동생은 정말 400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로 갔고 부건만이 투항하러 온다고 했다.' 라는 기록이 있고 이에 따라서 자치통감은 기록했다. 즉, 진서의 과장으로 부쌍은 왕도 아니었다.

관동에 기근(飢, '흉년'으로도 해석된다)이 들어 사마의는 장안의 곡식 5백만 곡을 수도로 보냈다.[32]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3월, 자치통감에 따르면 4월 조예는 이때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昭陽殿)과 태극전(太極殿)을 만들었으며, 총장관(總章觀)을 지었다. 총장관은 높이가 10여장이나 되었는데 백성들은 농업과 잠업(누에치기)을 실업해 적기를 빼앗겼으며, 강직한 신하 양부(楊阜)와 고당륭(高堂隆) 등이 각각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하게 진언했는데 조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략에 따르면 조정에서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에는 '장병(將士)의 부모와 처자들의 굶주린 자를 후하게 하사하고, 백성의 병환을 물어서 그 악함을 없애고, 곳간을 채우고, 갑옷과 병기를 보수하고, 공경함으로서 천하에 임해주십시오'라는 말이 있어 곳간은 비고 장병의 부모, 처자들이 굶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같은 해 7월에는 낙양의 숭양전이 불에 타 버렸는데 자치통감과 위서 고당륭전에 조예가 말하길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조예: (숭양전이 불탄) 이것은 어떤 허물이오? 예법에는 어찌 기도하여 재앙을 없애는 방법이 있소?
고당륭:《역전(易傳)》에서 말하기를, '위가 절검하지 않고 아래가 절검하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불이 나서 그들의 집을 태운다'고 했고, 또 '군왕이 누대를 높이면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 힘써서 궁실을 장식하면서 백성들이 텅 비게되고 고갈되어 있는걸 알지 못한 것이니 하늘이 그것에 대응하여 가뭄(旱)를 주고, 우뚝 솟은 궁전에 화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하늘이 감계를 내리는 것은 폐하를 꾸짖고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인도(人道)를 더하고 숭상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만 합니다.

즉, 3~4월에는 백성들은 부역에 동원되느라 농사시기를 놓쳤고 장병들의 처자들에게 줄 식량이 없었으며 7월에는 백성들이 텅 비고 고갈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들어 가뭄이 들게했다는 것으로 당시 가뭄으로 인한 재해[33]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농사 시기를 놓친데다가 가뭄의 재앙까지 들었으니 기근이 들고 흉년이 되는건 당연지사, 따라서 사마의가 양곡 5백만 곡을 수도로 보낸건 235년 7월 후 흉년이 든 추수철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236년, 흰 사슴을 잡아 헌상했다. 천자가 말했다.
옛날 주공단이 성왕를 보좌할 때 흰 꿩을 바친 일이 있다. 이제 그대가 섬서에서 대임을 맡아 흰 사슴을 헌상하니, 충성이 서로 부합하여 천년이 한 마음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으로 어찌 길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2.7.8. 공손연의 난[편집]

당초 문의(공손연)는 숙부인 공손공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가범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간절히 간언하니 문의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요동태수 공손문의(공손연)[34]가 모반하자 사마의를 수도로 불렀다. 천자가 말했다.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요수에 의지해 대군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만약 앉아서 양평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말했다.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현명한 자만이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말했다.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당시 궁실을 크게 수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전쟁이 더해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피폐해졌다. 사마의는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하수 이북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안팎으로 노역이 많아 사세상 이들을 함께 병행할 수는 없으니, 의당 안의 일은 잠시 그만두어 한 때의 위급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238년, 우금호준 등과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수도를 출발했다.[35] 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 아들 사마사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을 하사하고 군수, 전농 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36]

고향인 온현에서 노인과 옛 친구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사마의는 탄식하고 몹시 서운하고 섭섭해하다 감흥이 일자 노래를 읊었다.
천지가 개벽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 리를 깨끗이 하고 온 세상을 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관직을 사양하고 노인으로 여생을 보내 무양에서 죄인이 처벌을 기다리겠노라.[37]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

당초 사마의가 양평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말했다.
내 얼굴을 보시오.
고개를 숙여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어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문의(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하고 문의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의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심히 동생(공손연)이 염려되오.

문의(공손연)는 비연,양조에게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보내 요수에 의지해 벽을 튼튼히 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사마의에게 맞섰다. 정사삼국지 공손연전에 따르면 주위 20리 이상의 참호를 팠고 사마의군이 도착하자 비연이 응전하나 사마의가 호준을 보내 격파했다.

사마의가 대군을 결집해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이 정예병을 다하여 이를 향해 나아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 적을 내버려두고 양평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적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은 사마의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사마의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정사 삼국지 공손연전에는 사마의가 동남으로 이동하는척 속이다 급하게 동북쪽으로 돌려 비연 등이 양평에 방비가 없는 것을 두려워해 밤 중에 달아났다. 다시 수산(首山)에서 공손연이 비연을 보내 죽음을 각오하게 싸우게 했는데 사마의가 대파하여 진군해 양평성 아래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고 서술하였다.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 홍수가 나[38] 물이 평지에서도 수 척에 이르자 전체의 군대가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사마의가 군중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적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을 공격할 때는 8부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39]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적이 그들의 군사 수 많음과 비오는 것을 믿고 굶주리고 곤궁해도 항복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조예가 반대했다
사마의는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외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방패, 전차, 사다리, 충차를 쓰며 화살과 돌을 비 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요수가 불어난 것을 이용하여 수송성을 요구(遼口)에서 성아래 까지 이르게 했다고 한다. 비가 그치자 토산을 쌓고 노(櫓,망루)를 세우고 발석(發石,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군급(窘急,궁지에 몰려 매우 급박함)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라고 쓰고 있다.

처음엔 양평은 비어있다고 말하고, 공손연군이 양평에 방비가 없는 것을 두려워했다면서 갑자기 포위하고 나서는 양평에 군사가 많아 식량이 부족하다고 선제기, 정사삼국지 공손연전 둘 다 증언하고 있는데 아마 공손연군은 요수에 방어라인을 쌓고 그곳에 물자를 모두 비축했다가 사마의의 우회기동에 곧바로 깨지고 양평으로 돌아온 공손연군과 양평에 살고 있던 일반 백성들 때문에 양평의 식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무렵 색이 희고 빛나는 갈기털이 있는 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공손연)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 왕건, 어사대부 유보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라 청했다. 사마의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에게 고했다.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가 다시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사마의가 위연에게 말했다.
군사의 대체의 요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 것 뿐이다. 너희는 항복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내 무얼 어찌하겠단 말인가?
"軍事大要有五,能戰當戰,不能戰當守,不能守當走,餘二事惟有降與死耳。汝不肯面縛,此為決就死也,不須送任。"
("전쟁에서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다. 너희들은 항복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죽기로 작정한 것일 터, 인질을 보낼 필요는 없다.")

문의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 갑자기 쑥 나오자 사마의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 가의 장성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새 것과 헌 것을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인골을 쌓은 전승 기념비를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 30여 만 구를 거두었다.[40][41]

이에 사마의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 등의 묘를 흙더미를 쌓아 북돋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42]영을 내려 말했다.
옛날 나라를 정벌할 때는 그 흉포한 악인를 주살할 뿐이었다. 문의에게 연루되어 그르쳐진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용서한다. 중국인이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를 청했으나 사마의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했다.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청의 소유인 물품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여 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유주 광양군 계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예주 영천군 곤양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여담으로 공손연의 난은 사마의가 고구려와 직접 대면한 사건이 되었다. 물론 아군으로.

2.7.9. 조예 휘하[편집]

사마의가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부역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아름답게 꾸며 감상용으로 만든 물건이 천 개에 달했다.

이 때 조예가 사망하기 직전에 조우 등과 손자유방 때문에 위나라 궁궐에서는 여러 혼란이 있었는데, 처음엔 조우가 사마의를 관중으로 보내는 조서를 보낸다. 그러나 백옥에 이르렀을 때 사마의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장안으로 가라는 조서, 낙양으로 오라는 조서 두가지 다른 조서가 내려지니 사마의가 크게 두려워하고 낙양으로 출발한다. 이에 빠른 거마를 타고 밤낮으로 쉴 시간이나 쉬지 않을 시간이나 가리지 않고 계속 일하여 백옥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 침실 안으로 인도되어 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사마의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가 사마의의 손을 잡고 제왕(조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과 함께 임금의 유언을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

2.8. 조방 휘하[편집]

제왕(조방)이 황제로 즉위하자 시중, 지절, 도독중외제군, 녹상서사로 올라 조상과 함께 각기 군사 3천 명을 통수하며 함께 조정을 관장하고 대궐 안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수레를 탄 채 대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상은 상서가 일을 아뢸 때 먼저 자신을 통하도록 하기 위해 천자에게 말해 사마의를 대사마로 전임하도록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 앞뒤로 대사마가 누차 재위 중에 죽었다 하여 이에 사마의를 대사마로 임명하지 않고 태부로 삼았다.

위서 조상전에 따르면 정밀(丁謐)이 계책을 내어놓았는데, 조상으로 하여금 천자에 고해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임명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겉으로는 명목상 사마의를 존중하는 것이나, 내심으로는 상서(尙書)의 주사(奏事, 국사의 결재를 주청하는 업무)가 먼저 자신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그 일의 경중(輕重)을 제어하고자 함이었다. 조상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 대사마로 삼아달라고 했는데 조방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생각건대 선제(先帝)께서는 본래 군자로서 낙천지명(樂天知命, 하늘의 뜻에 순응함)하셨으니 티끌만한 의심으로 꺼린 것은 아니나, 마땅히 백인(柏人)과 팽망(彭亡)의 일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저회(低徊, 생각에 잠겨 고심함)하셨으니 그 뜻이 있었도다! 이는 또한 선제(先帝)가 대신들을 경애하고 중히 여겨 은애(恩愛)로 지극히 후대한 것이다. 옛날 성왕(成王)이 보부(保傅, 태부, 태보)의 관직을 만들고 근래에 한(漢) 현종(顯宗, 후한 명제)이 등우(鄧禹)를 태부로 삼았으니 이는 모두 준걸들을 존숭한 때문이다. 이에 태위를 태부로 임명한다.”[43]

어쨌거나 이런 개드립 치고 넘어가긴 했지만 대사마는 누락되고 태부가 된 것. 누락된 이유는 이전 대사마들(조진/조휴)가 일찍들 죽어나가서 불길하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름에 관한 금기가 많았던 고대 중국 사회에서 '대사마 사마의'는 웃기는 문제를 넘어서 당사자도 주변 사람들도 이건 좀 아니다라고 생각했을듯. 대사마는 생겼다가 없어졌다 태위로 이름이 변경됐다 태위와는 또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대사마 관직이지만,최소한 위나라에서는 이자리를 일종의 '대장군+@(명예)' 적인 무언가로 취급한 느낌이 있다.

위나라 초대 대사마는 조인인데, 하후돈/하후연은 먼저 죽었고 표기장군 조홍은 뭔가 올리기 애매하니 원톱 포지션이던 조인은 이미 대장군이었지만,그걸 대사마로 영전. 사실상 실권은 변화 없었겠다만 어쨌든 태생적으로 '대장군을 한 칸 더 올려준' 느낌으로 신설한게 대사마였다는 것. 그 조인이 죽고난 후, 조비의 남은 제위기간 3년 동안은 어째서인가 대사마/대장군이 공석으로 남는다. (나중에 결국 이 자리를 차지할) 당시의 군부 톱 - 조휴와 조진은 이 시기 동안 중군대장군/정동대장군이라는 한급 아래의 자리에 머물렀음. 이는 무군대장군 사마의도 마찬가지.

어쩌면 친정을 중시하던 조비로서는 굳이 대장군(/대사마)라는 군부 1인자를 한 명 뽑아 세워두기 보다는 다들 그 아랫급에 동렬로 남겨두고 자기가 직접 컨트롤하는 게 낫다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다. 어쨌든 그 조비가 죽고난 후, 조예 대에 이르러 비로소 조휴가 대사마/조진이 대장군에 임명된다. 사실 이전에는 동렬이라해도 조진의 이름이 한 칸 앞에 실리는 입장이었지만, 여기서 역전된 셈. 그러나 어려서부터 함께 친하게 지내온 친척이자 동료인 두 사람이니만큼,이것을 공식적인 '서열변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듯하다. 조비가 좀 독특했던 거지 대장군 클래스에 올라야 하는 게 당연한 입장이었던 두 사람인지라...대장군을 둘로 분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형식상으로만 윗급인 대사마를 두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동렬로 각각 서쪽/동쪽을 관장하라는 게 자타 모두의 인식이었을 듯.

그렇다고는 해도 어쨌든 형식상으로는 대사마가 위인지라,조휴의 사망 이후 대장군이었던 조진이 대사마로, 표기장군이었던 사마의가 대장군으로 한 칸씩 승진. 그리고 그 조진과 조예가 죽고난 후, 조방 체제가 시작되면서 정밀의 계책에 의해 문제의 '대사마 사마의'가 탄생할 뻔한 건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분명 정밀의 계책에 따르면 이 인사는 사마의를 툇방 늙은이로 몰아 넣는 의도를 띠고 있지만, 그런 목적이라면 태부는 몰라도 대사마 겸임은 그 목표에 어긋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어떤 의미로는 대사마/대장군 관계를 태부/태위(전자가 후자보다 명목상 더 높지만 명예직)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종요를 통해 그런 '명예퇴직 용' 자리임이 확인된 태부와는 달리, 대사마는 지금까지 3대에 걸쳐 전성기의 원톱장군들이 앉아있던 자리였다.

더군다나 진서에 따르면 대장군인 조상이 사마의를 대사마로 올리려 한 것은 상서의 일이 자신을 거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한대 기준으로는 오히려 대사마의 역할이 바로 상서 통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위나라에서의 이 역할은 태위로 이어진다.) 혹시 조휴와 조진을 대사마/대장군으로 임명할 때 밸런스를 맞추는 의미에서(조비 시절 조진 쪽이 조금 앞서 있을 땐 조휴에게만 황월을 내렸듯) 대사마 쪽의 권한 일부를 축소하고, 그것이 악용될 소지를 남긴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정밀은 '이름 문제 때문에 대사마 자리는 무산 될 거라고 미리 내다보고', 태부 자리만 추천하면 너무 속보이는 짓이니 명예직인 태부+실권직인 대사마 자리를 추천하는 척 하면서 결과적으로 전자만 남고 후자는 증발해 버리는 시나리오를 쓴 것인지?

특히 본래 조씨 무장이 톱으로서 군권을 장악하는 위나라 통치 시스템 상징이었던 대사마가, 하필 후일 조씨 사직을 뒤엎을 사마의와 관련된 해프닝 때문에 증발해 버린 것은 뭔가 상징적인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어쨌거나 어전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하지 않고(입조불추), 임금을 알현할 때 호명하지 않고(알찬불명), 어전에 오를 때 칼을 차고 신발을 신도록 하니(검리상전) 한나라 때 소하의 전례와 같았다. 혼인과 장례 비용은 관에서 대어주었고, 아들 사마사를 산기상시로 삼고 자제(아들) 세 명을 열후로 삼고 네 명을 기도위로 삼았다. 사마의는 굳게 사양하며 자제의 관직은 받지 않았다.[44]
정시 원년(240년) 봄 정월, 동쪽의 왜국이 중역(重譯, 여러 나라 말을 거쳐 거듭 통역함)하며 공물을 바치고 언기(焉耆), 위수(危須)의 여러 나라들(언기, 위수는 서역방면의 나라)과 약수 이남의 선비 명왕(名王)이 모두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자는 이를 재상의 공으로 돌려 다시 사마의의 봉읍을 늘려주었다.
당초 조예는 궁실 수축을 좋아하고 규격, 양식이 화려해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사마의가 요동(遼東)에서 돌아왔을 때 부역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아름답게 꾸며 감상용으로 만든 물건이 천 개에 달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모두 파하도록 상주하고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니 천하가 기뻐하며 의지했다.

2.8.1. 작피의 역[편집]

제왕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오의 장군 주연 등이 양양군 번성현을 포위하자, 태부 사마의가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제왕기 주석 간보진기에 따르면 오나라 장군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의 5만 병력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보즐이 조중을 침범했다. 전종이 이미 파주(破走)하고, 번성이 에워싸여 급박해졌다. 이에 사마의는 이렇게 청했다.
조중의 백성 10만이 강의 남쪽에 떨어져 갈팡질팡하여 갈 곳을 모르고 있으며 번성은 공격을 당하여 수개월 동안 포위가 풀리지 않으니 긴급한 일입니다. 청컨대 이를 토벌하고자 합니다.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적들은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는데 함락시키지 못하고 견고한 성의 아래에서 (기세가) 꺾였으니 스스로 파멸당할 형국에 있으므로 응당 좋은 계책으로 방어해야한다고 하였다. 사마의가 말하길
병법에 이르길 장군이 유능한데 수비하라고 하는 것은 군대를 속박하는 것이요 장군이 무능한데 맡기는 것은 군대를 복멸시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국경이 소란스럽고 백성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는데 이는 바로 사직의 커다란 걱정입니다.

선제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약탈하자 사마의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의당 장기적인 책략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장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241년, 오나라 장수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여, 성 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에 주둔하였는데, 병력이 적어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하여 주연으로부터 6~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한 달여 만에 태부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간보진기에 따르면 6월에 제군을 통솔하여 남정하였고 거가(車駕, 황제)가 진양성의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사마의는 남방이 무덥고 습하므로 응당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경기병을 시켜 도발하였으나 주연이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제군으로 하여금 휴식하고 목욕하도록 명령 내리고는 정예를 고르고 선봉에 설 병사들을 모아 호령을 펼치고는 반드시 공략할 기세를 보였다. 주연 등이 이를 듣고는 마침내 밤중에 도망갔다. 추격하여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러 크게 살육하고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선제기에 따르면 6월, 그리하여 제군(諸軍)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사마의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를 뽑고 선봉을 모집하며 호령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오군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선박, 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천자가 시중상시를 보내 완(宛)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라는데, 간보진기와 선제기를 빼고 정작 다른 사서들에선 그냥 주연이 한 달동안 포위하다가 사마의가 오자 퇴각, 혹은 달아났다고만 나오고 자치통감에서는 6월, 태부 사마의의 군대가 번성을 구하러 왔고 오나라 군대가 이를 듣고 밤중에 몰래 도주했는데 삼주구까지 추격해 많이 노획하고 돌아왔다(六月,太傅懿督諸軍救樊;吳軍聞之,夜遁。追至三州口,大獲而還)로 적었을 뿐이다. 자치통감에서 이렇게 적은 이유는 고증을 위해 참고로 한 여러 자료 들, 특히 정사 삼국지 본전에서 위나라와 오나라간의 특별한 혈전을 통한 대파, 참수 같은 기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 여름 5월 오(吳)의 장군(將) 주연(朱然) 등이 양양군(襄陽) 번성현(樊城縣)을 포위하자,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6월 29일 군사들을 퇴각시켰다. - 위서 삼소제기 제왕부분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취했다. 5월, 이 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6월, 군대가 돌아왔다. - 오서 오주전

어디에서도 간보진기, 선제기 같은 수많은 살육, 만여급 참수 같은 여파에 대한 얘기는 없이 그냥 서로 군대를 물려서 돌아왔을뿐이다. 오나라측은 피해 부분을 이미 오주전 본전에서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같이 기록했는데도 이 부분에서 인명이 상하는 대패를 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위략에서 간보진기, 선제기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주연이 밤중에 몰래 도주한 정황 자체는 있으므로 주연이 밤중에 몰래 도주했고 삼주구까지 추격해 오나라가 버린 많은 물자를 취했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또 간보진기와 선제기는 양 기록을 볼 수 있듯이 사실상 내용이 같은 기록인데 선제기는 간보의 진기에서 그냥 '많이 죽이고 전리품을 획득했다'는 부분을 확정적으로 '만여 명을 참획하고 군수 물자에, 선박까지 획득했다'고 내용을 부풀렸다. 사실 본전을 살펴도 간보의 진기에서 많은 이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얻었다는 기록 자체가 의문스러운 기록인데, 한술 더 떠서 선제기처럼 주연의 군세가 5만인데 만여 급 참획에 선박, 군수물자까지 빼았겼다면 매우 엄청난 피해이다. 그러나 당연히 삼국지 위서, 오서엔 이런 기록이 없고 위략에서조차 주연이 도망갔으면 갔지 이런식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쓰진 않았으며 자치통감도 만여급 참획은 빼버렸다. 이는 진서 선제기가 얼마나 기존 기록을 과장하고 왜곡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왠지 숫자까지 비슷한 기록을 위에서 읽은 것 같은 이 기분…

2.8.2. 조방 휘하[편집]

가을 7월, 봉읍을 늘려 언, 임영을 내리니 예전과 합쳐 모두 4개 현에 식읍이 1만 호가 되었고, 자제 11명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사마의의 훈덕이 날로 높아졌으나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게 처신했다. 향읍의 덕망 있는 원로인 태상 상림은 그들이 매번 벼슬을 받는 것을 보고는, 늘 자제들을 타이르며 말했다.
가득 찬 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바다. 사시가 변화하는 것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

241년 이전, 조정에서는 당시 밭을 개간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적국을 멸망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고 등애를 진과 항의 동쪽인 수춘 지역까지 파견하여 시찰한 후에 제하론을 내어 허창 부근에 있는 여러 논농사를 줄이고 하천을 모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면서 회하 북쪽에 사는 사람 2만 명과, 회화의 남쪽에 사는 사람 3만 명을 열에 둘씩 쉬게 하고, 늘 4만 명에게는 농사를 지으며 수비를 하게 하며[45] 더욱이 황하의 운하를 개척하며 관개를 늘리고 조운을 통하게 하자는 등애의 의견을 사마의는 훌륭하게 여겼다. 정시 2년(241) 이 해에 비로소 조운할 운하를 넓게 팠는데 동남 지역에 사건이 있어서 크게 군사들을 일으키게 되면 배를 타고 내려가서 장강과 회하에 도달하게 되었고 물자와 먹을것에 여유가 생겼으며 수해를 입지도 않았다. 이것은 등애의 주장을 사마의가 받아들인 것으로 정사 삼국지에 등애의 주청-241년 운하 완공 기록이 있어 자치통감에서도 기록하였다. 참고로 진서 선제기에서는 등애가 주청했다는 이 기록을 빼버렸을 뿐더러 등애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242년 봄, 천자가 돌아간 아버지 경조윤(사마방)을 죽은 뒤에 봉해 무양성후의 시호를 내렸다.

3월, 주청하여 광조거(廣漕渠)를 뚫고 하수의 물을 끌어 변수(汴水, 황하의 지류)로 유입시키고 동남쪽 저수지들에 물을 대니 비로소 회수 이북에서 크게 농사지었다.

당초 오나라가 장수 제갈각을 보내 양주 여강군 환현에 주둔케 하여 변경 지역에 이에 괴로움을 받으니 사마의가 몸소 제갈각을 공격하고자 했다. 의논하는 자들 여럿이 말했다.
적이 견고한 성에 의거해 곡식을 쌓아놓고 위나라 군대를 유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공격해왔으니 그들의 구원군이 필시 당도할 것이라 진퇴가 쉽지 않고 유리한 점을 볼 수 없다.
사마의가 말했다.
적의 장점은 물에서 싸우는 것이니 그들의 성을 공격해야 하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장점(수전)을 쓴다면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승리하게 되는 것이오. 만약 성을 고수한다면 겨울이라 호수가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어 필시 물을 버리고 서로 구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단점(육전)을 쓰는 것이 되어 또한 우리가 유리하오.

243년 가을 9월, 사마의가 제군을 이끌고 제갈각을 공격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을 나와 전송했다. 12월, 군이 여강군 서현에 당도하자 제갈각은 비축해둔 군량을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46] 사마의는 적을 멸하는 요체는 군량을 비축하는 데 있다고 여기니 이에 군영을 지킴을 크게 일으키고 회양, 백척의 두 수로를 널리 열고 또한 영수의 남북에 있는 저수지들을 수리하여 밭에 물을 댐이 만 여 경에 이르렀다. 이 이후로 회북에 쌀 창고가 도처에 많게 되었고 수춘에서 수도에 이르기까지 농관, 둔전병이 서로 잇달았다.

그러나 자치통감에서는 진서 선제기에서 기록한 242년에 있었던 광조거 수로 개척과 243년에 있었던 회양거, 백척거 수로 개척을 언급하지 않는다. 자치통감은 황하에서 수춘까지 운하의 개척이 정사 삼국지 등애전의 기록에 따라 241년에 있었다고 본 듯 하다. 사실 회양거, 백척거의 경우 사마의가 243년 12월에 서현에 도착했고 다음해 정월에 수도에 도착했으므로 선제기 말 처럼 그 사이에 수로를 개척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광조거도 사실 등애의 말대로 한다면 241년 운하가 완성되었을때 '하천의 물을 모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면서 회수 이북에서 수만명이 크게 농사짓고 있던 만큼' 광조거를 뚫었다고 '비로소'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

진서 식화지는 '정시 4년, 그러니까 243년에 사마의가 제갈각을 물리치고 등애를 수춘으로 파견했는데 등애가 땅은 좋은데 수원이 없는 것에 착안해 제하론을 짓자 듣고 좋다고 했고 회양, 백척의 수로를 열고(중략) 밭에 물 대고 크게 군사들을 일으키게 되면 배를 타고 내려가서 장강과 회하에 도달하게 되었고 물자와 먹을것에 여유가 생겼으며 수해를 입지도 않았다.'라고 회양, 백척거와 등애의 대운하 기록을 합쳤는데 회양, 백척거가 선제기에서는 1만경에 물을 댔다고 한데 비해 무려 2만경이나 물을 대었다고 뻥튀기 한데다가 회양, 백척거의 효용성에 대해 등애의 대운하 기록을 그대로 차용해왔다. 회양, 백척거가 실은 등애의 운하라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걸 수도 있겠고 등애의 공적을 빼앗아 사마의의 공적으로 넣으려는 시도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식화지건 선제기건 간에 정사 삼국지 등애전에 수춘에 파견 나갔다가 돌아와 제하론을 등애가 제시한 시간대인 정시 2년(241년) 이전에도 안 맞고 자치통감도 운하에 대해선 등애전의 효용성에 대한 기록과 개통 시간대를 따른다. 따라서 광조, 회양, 백척 등의 수로는 241년 대운하를 팠을 때 건설했거나 대운하의 일부였다 보는게 타당하다. 이 세 수로를 팠을때 나타난 효과도 등애 대운하의 효과로 보면 되겠고. 어쨌거나 등애가 현장 간부라면 사마의는 이를 결제하는 높으신 분 포지션이라 사마의도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44년 정월, 사마의가 회남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사자에게 절(節)을 들여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상서 등양이승 등은 조상이 공적과 명예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촉을 정벌하도록 권했다. 사마의가 이를 반대했으나 막을 수 없었는데 조상은 과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245년 가을 8월, 조상이 중루중견영을 없애고 그 군사들을 자신의 동생인 중령군 조희에게 속하게 했다. 사마의는 전대 황제 때부터의 오랜 제도라 하여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겨울 12월, 천자가 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려 조회할 때 수레를 타고 어전에 오르도록 했다.

2.8.3. 2차 조중 정벌[편집]

246년 봄 정월, 오나라가 조중을 침범하자 이민족과 중국인 만여 가가 침범을 피해 북쪽으로 면수를 건넜다. 사마의는 면수 이남이 적과 가까우므로 만약 백성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필시 침범받을 것이므로 의당 임시로 백성을 면수 이북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했다. 조상이 말했다.
지금 면수 이남을 잘 닦아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머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사마의가 말했다.
만약 적이 2만 군사로 면수를 끊고서 3만 군사로 면수 이남의 제군과 서로 대치한 채 1만 군사로 조중에서 마음대로 날뛴다면 장차 어찌 구할 수 있겠소?
조상이 이에 따르지 않고 끝내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과연 적이 조중을 습격해 격파하니 희생당한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이 해에 오나라 장수 주연이 조중에 들어와 수 천명을 참하고 노획하므로 조중의 백성과 관리들 만 여가가 면수를 건넜다. 사마선왕이 조상에게 말하길 "만약 곧바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반드시 다시 도적들을 불러올 것이니 응당 당분간 머무르도록 해야 하오."조상이 말하길 "지금 면수의 남쪽을 지키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면수의 북쪽에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선왕이 말하길 "그렇지 않소. 무릇 사물은 안전한 곳에 두면 안전한 것이고 위태로운 곳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러므로 병서에서 이르길 '성패는 형(形)에 있고 안위는 세(勢)에 있으니 형세는 무리를 이끄는 요체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소. 만약 적 2만명이 면수를 끊고 3만명이 면수 이남의 군대와 대치하며 만명이 육로로 조중을 습격한다면 그대께서는 장차 어찌 구하려고 하시오?"하였으나 조상은 듣지 않고 끝내 (면수 이북으로 간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주연이 이후에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한진춘추

...한진춘추와 진서 선제기의 내용은 대화까지나 조상이 격파당했다는 내용까지는 대략 비슷하나[47], 여기서 또 조상이 보낸 백성들이 격파당해서 희생된자가 만여명을 헤아렸다고 언급하는데 당연히 정사 삼국지와 그 주석인 한진춘추와는 전혀 검증이 안된다. 오주전에서는 천여명을 참획했다고 나올 뿐이고 한진춘추에서도 단순히 격파했다고 보고 있다, 재차 습격했을 땐 주연이 직접 참획했다기보단 그냥 그곳에 있던 인구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오나라엔 별로 획도 안 돼서 전공으로 쓰기가 모호했다거나 선제기가 조상을 깎아 내리기 위해 과장한 서술로 보인다.

2.8.4. 고평릉 사변[편집]

247년 4월, 부인 장씨(장춘화)가 죽었다.

조상이 하안등양정밀의 모책을 써서 태후(명원황후)를 영녕궁으로 옮기고 조정을 전횡하니 형제가 함께 금병(친위군)을 관장하고 가까운 무리를 많이 심어놓고 제도를 여러 차례 고쳤다. 사마의가 이를 제지할 수 없었고 이에 조상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었다.

5월, 사마의는 병들었다 칭하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에 관해 노래했다.
하(하안), 등(등양), 정(정밀)이 도읍의 성을 어지럽히는구나.
248년 봄 3월, 황문 장당이 사사로이 비빈과 궁녀들의 거처의 재인(才人) 석영(石英) 등 11명을 뽑아 조상에게 바쳐 가녀로 삼게 했다. 조상과 하안은 사마의의 병이 위중하다 여겨 마침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으니 장당과 더불어 은밀히 공모해 사직에 해를 끼치려 도모하여 그 기일이 멀지 않았다. 사마의 또한 이를 은밀히 방비하니 조상의 무리들도 사마의를 자못 의심하게 되었다.

9년(248) 겨울, 이승이 서울을 떠나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길에 사마의를 방문해 동태를 살폈다. 사마의가 병이 깊은 것처럼 속이니 2명의 계집종에게 시중들게 하고 옷을 잡고 있었으나 옷자락이 땅에 끌렸다. 입을 가리키며 목이 마르다고 하니 계집종이 죽을 올렸는데 사마의는 죽그릇을 잡지 못했고 죽이 모두 흘러 가슴자락을 적셨다.
이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주상이 아직 어리셔서 천하가 명공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명공의 옛 풍질(중풍)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가 이 지경일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사마의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코앞에 닥쳤소. 그대가 병주에 가게 되었구려. 병주는 흉노와 가까우니 잘 방비하도록 하시오.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아들 사마사, 사마소 형제를 부탁하오.
이승이 말했다.
송구하게도 본주(형주)로 돌아가게 된 것이지 병주가 아닙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이를 혼동하며 말했다.
군이 병주에 도착하거든 노력해서 자신의 몸을 잘 지키시오.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하게도 형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이 사마의가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구려. 이제 본주 자사로 돌아가면 성덕장렬(盛德壯烈)히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제 군과 헤어지면 내 기력이 쇠해 뒤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니, 내 힘으로는 주인의 예도 다하지 못하니 죽을 날이 가까웠구려.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구구한 바램이오.
이승 또한 크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황제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이승이 작별인사하고 나와 조상과 만났다. 이승이 말했다.
태부의 말씀이 혼란스럽고 입으로는 그릇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쪽을 가리키면 북쪽을 보는 식입니다. 또 내가 병주로 간다고 말하기에 내가 형주로 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 그제야 제가 형주로 간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주인의 예도 행하지 못해 전송할 때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조상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부의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조상 등은 다시 사마의를 방비하지 않았다.

249년 봄 정월 6일, 천자가 고평릉을 참배하자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갔다. 당시 조상의 형제가 예전에 여러 차례 함께 성 밖을 나가자 환범이 말했다, "만기(萬機, 천하의 정치,정무)를 총괄하는 사람과 금병(禁兵)을 통솔하는 사람이 함께 나가서는 안됩니다. 만약 성문을 폐쇄해버리는 이가 있다면 어느 누가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조상이 말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다시는 함께 나가지 않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함께 성밖을 나갔다. 이날 금성이 달을 범했다. 사마의는 그동안 몰래 사마사가 기르고 있던 병마를 이끌고 먼저 무기고를 점거하고 도성을 나와 낙수(洛水) 부교(浮橋)에 주둔했다. 이에 사마의는 영녕궁의 태후(명원황후)에게 상주해 조상 형제를 파면하도록 했다.
신이 예전에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선제(先帝, 위 명제 조예)께서 폐하와 진왕(秦王, 조순曹詢), 그리고 신을 어상(禦床)으로 오르게 해 제 팔을 잡고 말씀하시길 깊이 뒷일을 염려한다 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2조(조조와 조비)께서 또한 신에게 뒷일을 맡긴 것은 폐하께서도 보신 바이니 근심하실 일이 아닙니다. 만의 하나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신은 마땅히 죽음으로 명을 받들겠습니다.'[48]고 말씀드렸었고, 이는 황문령 동기(董箕) 등과 병을 간호하던 재인(才人)들도 모두 들어 알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 대장군 조상이 그 고명(顧命)을 저버리고 국법을 어지럽히니, 안으로는 참람되게도 군주의 의례를 모방하고 밖으로는 권력을 농단하고 있습니다. 여러 영(營)을 파괴하고 금병(禁兵, 친위병)들을 모두 장악하고, 백관의 요직에 모두 자기와 친한 자들만 앉혔습니다. 숙위하던 오래된 자들은 모두 쫓아내고 새로운 인물로 채워 사사로운 계책을 꾸미니, 그들 일당의 뿌리가 더욱 깊어져 그 방자함이 날로 더해갑니다. 또한 황문 장당(張當)을 도감(都監)으로 임명하여 서로 교류하며 지존(至尊)의 동태를 살피고 신기(神器, 정권, 제위)를 엿보며 2궁(황궁과 태후궁)을 이간시켜 골육의 정을 다치게 했습니다.

천하가 흉흉하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지금 폐하가 남에 기대어 보위에 앉아서 어찌 오래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선제께서 폐하와 신을 어상에 함께 오르도록 한 본의와 어긋나는 일입니다. 비록 신이 늙어서 쓸모없으나 어찌 감히 지난날의 맹세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조고(趙高)가 득세하자 이 때문에 진(秦)나라가 망했고 여씨와 곽씨(呂霍)를 일찍 처단했기에 한나라는 오래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니 지금이 (이전 맹세에 따라)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태위 장제, 상서령 사마부 등 신하들 모두, 조상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고 있어 그 형제들이 친위군을 지휘해 숙위(宿衛)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황태후께 상주했습니다. 이에 태후께서 명하시길 상주한대로 시행하라 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담당관원과 황문령(黃門令)에 명하여 조상, 조희, 조훈의 관직과 병권을 파하고 각자 본래 관직인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가라 명하고, 만일 거가(車駕)를 억류하면 군법으로 처리하라 했습니다. 신이 병에 걸린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낙수 부교로 나아간 것은 비상사태를 살펴 대비코자 함입니다.

당시 사마사는 중호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사마문에 주둔했다. 사마의는 궐 아래에서 포진하고 조상의 문을 지나려 했다. 조상의 장하독 엄세가 문루에 올라 노를 당겨 사마의를 쏘려 하니 손겸이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사태가 어떠한지 아직 알 수 없소.
화살을 시위에 세 번 얹었으나 세 번을 말리며 매번 그의 팔꿈치를 당기니 발사하지 못했다.

대사농 환범이 성문을 나가 조상에게로 나아가자 사마의가 말했다.
꾀주머니가 갔구나!
장제가 말했다.
조상은 환범과 더불어 안으로 소원하고 지혜가 미치지 못하며 굼뜬 말은 작은 콩에 연연하는 법이니 필시 그를 제대로 쓰진 못할 것입니다.[49]
그리고는 사도 고유에게 부절을 내려 대장군의 사무를 대행하여 조상의 진영을 거느리게 하며 말했다.
그대가 바로 주발이오.
태복 왕관에게 명해 중령군의 직을 대행하며 조희의 진영을 관장하도록 했다.

조상은 거가를 이수(伊水)의 남쪽에 머물게 했는데, 나무를 베어 녹각을 세우고 둔갑병(屯甲兵) 수 천명을 뽑아 호위하게 했다. 사마의가 동생인 사마부에게 말하길, 폐하가 밖에서 노숙할 수 없다며 장막과 태관(太官, 음식을 담당하는 관직), 식기를 재촉해 보내 행재소(行在所, 궁성밖에 임금이 임시는 머무는 곳)로 가게 했다.

환범이 조상을 설득하기를, 거가를 모시고 허창으로 가서 외병(外兵)을 부르자고 했다. 조상의 형제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환범이 다시 조상의 동생인 조희에게 말했다,
지금에 이르러 경의 가문이 다시 빈천한 자로 돌아가려 한들 그럴 수 있겠소? 게다가 필부조차 인질 한 명을 잡아 살아나고자 하는 법인데, 지금 경은 천자를 끼고 있으니 천하에 영을 내리면 누가 감히 응하지 않겠소?
그러나 조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의는 시중 고양허윤과 상서 진태를 보냈고 이들은 조상 스스로 한시바삐 돌아가 죄를 받으라고 설득했다.[50] 또한 조상이 신임하는 전중교위 윤대목을 보내 조상에게 말하길, 단지 관직에서 파면할 뿐이라 하고 이를 낙수(洛水)에 맹세했다. 조상이 이를 믿고 군사를 해산했다. 이에 조상은 허윤과 진태를 사마의에게 보내 돌아가 죄를 받고 죽음을 청하도록 하고 사마의의 상주문을 천자에게 알렸다.
군사를 해산하고 조상이 말했다.
나는 별로 잃는 거 없이 부가옹(富家翁, 돈 많은 늙은이)으로 살 수 있다.
환범이 소리내어 울며 말했다
조자단(조진)은 빼어난 인물이나 당신들 같은 형제를 낳았으니 송아지를 키웠을 뿐이오! 어쩌다가 오늘 당신들에게 연루되어 내 일문이 멸족당하게 되었소이다!”
마침내 조상 형제는 파면당해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갔다.

조상의 형제가 집으로 돌아가자, 낙양현에 조칙을 내려 백성 8백인을 뽑고 위부(尉部)에 명해 조상의 자택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각 모서리에는 높은 망루를 세우고 그 위에서 조상 형제의 거동을 감시했다. 조상이 궁지에 몰려 고민하다 활을 지니고 후원으로 가자, 망루 위의 사람이 '전 대장군이 동남쪽으로 간다!'고 소리쳤다. 조상이 청사로 돌아와 형제와 함께 의논했는데 사마의의 의중을 어떤지 알지 못하여 사마의에게 서신을 보냈다.
비천한 저 조상은 두렵고 두렵습니다. 무상히 화를 초래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목숨입니다. 이전에 집안사람, 하인을 보내 양식을 가져오게 했으나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아 여러 날을 굶어 마른 곡식으로 아침저녁 끼니를 잇고 있습니다.
사마의가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놀라며 즉시 답장을 보냈다.
양식이 부족하단 걸 미처 알지 못했소. 지금 쌀 1백 곡과 육포, 소금, 메주, 대두를 보내오.
그리고 이 물건들을 보냈다. 조상 형제는 즉시 기뻐하며 죽임을 당하지는 않으리라 여겼다.[51]
당초 황문 장당이 사사로이 재인(才人) 장(張)씨, 하(何)씨 등을 뽑아 조상에게 바쳤었는데 (조정에서는) 부정한 일이 있다 의심하여 장당을 구금하여 치죄했다. 장당이 진술하기를, 조상이 하안 등과 함께 은밀히 반역을 꾸며 이전에 훈련시켜 놓은 군사로 오는 3월 중에 거사할 것이라 했다. 이에 하안 등을 잡아들여 하옥했다. 그런데 위서 제왕기에는 1월 10일, 담당관리가 상주하여 황문(黃門)의 장당(張當)을 체포하여 정위에게 넘겨주고, 그의 진술에 따라 조사해 보니 조상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한 흔적이 없었다고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 일파가 조상을 통해 음모했다고 한 것이다. 즉, 사마의는 애당초 이 반란을 기획하여 실행할 때부터 조상을 살려 둘 마음이 없었다. 불과 사나흘 전에 낙수에 걸고 파면으로만 그치겠다고 맹세한 것도 장제와 조상에게 한 거짓말이었다.
공경(公卿) 조신(朝臣)들이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춘추의 뜻으로 볼 때, 임금의 친척은 장수가 되어선 안되고 장수가 되려고 하면 반드시 죽인다고 했다. 조상은 살붙이로서 대대로 특별한 총애를 입었고 선제(先帝)께서는 조상의 손의 잡고 유조를 남기며 천하의 일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더러운 마음을 품어 고명을 저버리고 하안, 정밀, 장당 등과 함께 신기(神器)를 도모했도다. 환범의 일당도 같은 죄인으로 모두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자들이다.
이에 조상, 조희조훈하안등양정밀필궤이승환범, 장당 등을 잡아들여 모두 주살하고 3족을 멸했다.

장제가 말했다.
조상의 부친인 조진의 공훈을 볼 때 제사를 잇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들어주지 않았다.

장제는 조진의 훈공으로 볼 때 그 제사가 끊어지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며 조진의 족손(族孫) 조희(曹熙)를 후사로 삼게 했다. 또한 장제는 자신의 말이 신의를 잃은 것을 스스로 질책하다 병이 들어 죽었다. 이는 조상에게 서신을 보내 파면하는데 그친다고 낙수에 맹세했으나(또는 사마의의 맹세를 전했으나) 이를 어긴 일을 가리킨다.

당초 조상의 사마 노지, 주부 양종이 궐문의 군사를 베고 조상에게로 달아났었다. 조상이 장차 죄를 받으려 하자 노지, 양종이 울며 간언했다.
공이 대임을 맡아 천자를 끼고 천위에 의지하는데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버리고 처형장으로 나아가려 하시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담당 관원이 주청하여 노지, 양종을 체포해 죄를 결정하라 하자 사마의가 이들을 용서하며 말했다.
이는 주인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권하기 위함이오.
1월, 천자가 사마의를 승상으로 삼고 영천군의 번창, 언릉, 신급, 부성을 봉읍으로 더해 예전과 합쳐 모두 8개 현에 2만 호가 되었고, 상주할 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게 했다. 승상 직은 굳게 사양했다. 또 구석의 예를 더하고 조회할 때 절하지 않게 했다. 구석 역시 굳게 사양했다.[52]

공연의 한위춘추에 따르면 조서를 내려 태상 왕숙(王肅)으로 하여금 사마의를 승상으로 책봉하게 하고 봉호를 1만호 늘리며 군신들이 주의를 올릴 때 이름을 쓰지 못하며 한나라 곽광의 고사대로 하도록 하였다. 사마의가 상서하여 사양하며 이르길
신이 친히 고명을 받으며 걱정이 깊고 책임이 막중하였으나 천위에 기대어 간사한 무리들을 없애고 속죄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니 공로는 족히 논할 것이 못됩니다. 또한 3공의 관직은 성왕의 제도이며 전례에 적혀있는 것입니다. 승상에 이르러서는 진시황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한나라가 그대로 이어받아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3공의 관제가 모두 완비됐는데 이유 없이 다시금 총신으로 (승상을 삼는다면) 앞선 제도를 어긴 것이고 성명한 경전을 바꿔 진한의 길을 답습하는 것인데 비록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이 응당 바로잡아야 하거늘 하물며 신 자신이 이에 당하여 굳게 다투지 않는다면 사방의 의논하는 자들이 장차 신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상서하길 10여 번이 되자 조서를 내려 마침내 허락하고 다시 구석의 예를 가하였다. 사마의는 다시 말하길
태조께서 대공대덕이 있으시어 한씨가 높고 무겁게 여긴 연고로 구석을 내린 것입니다. 이는 곧 조대가 바뀔 때의 비정상적인 일이니 후대의 군신이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는 또한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250년 봄 정월, 천자가 사마의에게 명해 낙양에 종묘를 세우도록 하고, 좌우 장사를 두고, 관속을 늘리고, 귀족의 측근이나 시종은 10명을 채우고, 매년 관청 등에서 업무를 돕는 하급 관리 중에서 천거해 어사, 수재 각기 1명씩을 임명하고, 관기 1백 명과 고취악대 14명을 늘리고, 사마의의 아들 사마융을 평락정후에, 사마륜을 안락정후에 봉했다.

사마의가 오랜 병으로 황제를 배알하지 못하자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자가 친히 사마의의 사저로 행차해 자문을 구했다.

위 내용을 정리하자면, 조상 일가의 경계를 파악하여 일부러 아픈 척을 해서 조상 일가를 방심하게 한 뒤 황제가 고평릉을 참배하러 가자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가버려 성이 비워진 사이 꾀병을 부려 그들을 속였던 사마의가 도성을 점거하여 명원황후를 압박해 조씨 일가를 모두 몰살시켜버리고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조상 일파는 사마의를 견제하면서 사마의의 아들들(이 중 사마사는 쿠데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따라서 조상에게는 목숨을 걸고 정쟁을 벌인다는 인식이 부족했다.

사실 부족했다기보다 그런 생각 자체를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조상 일파는 사마의를 견제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사마의 개인에게서 실권을 거두어가는 정도의 행동만을 했을 뿐, 형식상으로는 오히려 태부로 승진시키는 등 딱히 사마의를 핍박하거나 사마의 가족들을 정계에서 몰아내려는 식의 시도는 하지 않았다.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켰을 때도 조상이 순순히 권력을 넘긴 것은 사마의와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대립 관계는 아니므로 사마의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핍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8.5. 왕릉의 난[편집]

연주 자사 영호우, 태위 왕릉이 사마의를 배반하고 초왕 조표를 옹립할 계책을 꾸몄다.
251년 4월, 오나라 병사들이 도수(涂水)를 막았다. 이 때문에 왕릉은 사건을 일으키려고 각 군대에게 비상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적군 토벌을 구하는 상주문을 올렸는데, 조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장이었다. 왕릉의 음모는 더욱 깊이 진행되었다. 그는 장군 양홍을 파견하여 폐립하는 일을 연주자사 황화에게 알리도록 했다. 황화와 장홍은 연명하여 일을 사마의에게 보고했다. 사마의는 중군을 이끌고 수로를 이용하여 왕릉을 토벌하면서, 우선 왕릉의 죄를 사면해준다는 명령을 내렸으며, 또 상서 왕광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서 그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왕릉을 깨우치게 하였다.

사마의는 대군을 이끌고 몰래 백척(百尺)까지 나아가 왕릉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왕릉은 스스로 대세가 이미 끝났음을 알았으므로 배를 타고 혼자 나와서 사마선왕을 맞이하고, 하급관원 왕욱을 보내 사죄하고, 인수와 절월을 보냈다. 군대가 구두에 도착하자, 왕릉은 스스로를 결박하고 물가에서 죄값을 받으려고 기다렸다. 사마의는 조서를 받고 주부를 보내 결박을 풀어주었다, 왕릉은 이미 사면을 받았고, 더욱이 옛날에 잘 지냈던 것을 믿고 다시 의심을 품지 않고 작은 배를 타고 지름길로 사마의에게 가려고 하였다. 사마의는 사람들을 시켜서 이를 막고 배를 회하 가운데 머무르게 하였는데, 서로의 거리가 10여 장이었다. 왕릉은 자기를 바깥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멀리있는 사마의에게 말하였다.
경이 곧바로 절간(折簡, 반쪽자리 죽간)을 가지고 나를 부른다고 하여도 내가 마땅히 감히 이르지 않겠는가? 군대까지 끌고 와야 했는가?"
사마의가 말하였다.
경은 편지를 보낸다고 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왕릉이 말하였다.
경은 나에게 빚을 진 것이오.
사마의는 말하였다.
나는 차라리 경에게 빚을 지지 국가에 빚을 지지는 않겠소.

마침내 사람을 시켜 그를 서쪽(낙양)으로 호송하게 했다. 왕릉은 스스로 중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에 시험삼아 관에 박는 못을 요청함으로써 태부의 의중을 떠보았는데 태부가 못을 그에게 주었다. 왕릉은 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렀을 때 밤에 속관들을 불러 그들과 결별하면서
향년 80에 신명이 모두 스러지게 되었으니 천명인가 보다!

말하고는 마침내 짐독을 먹고 죽었다. 그의 남은 일당을 체포해 모두 삼족을 멸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왕릉의 반란이 미수에 그치자 수춘에서 대량으로 사람을 죽였다. 6월, 아울러 조표를 죽였다. 위나라의 여러 왕공들을 모두 붙잡아 업에 두고는, 담당 관리에게 명해 이들을 감찰하여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천자가 시중 위탄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오지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사마의가 감성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또 겸대홍려, 태복 유의를 보내 절을 주면서, 사마의에게 책명을 내려 상국으로 임명하고 안평군공에 봉하고 사마의의 손자와 형의 아들 각기 1명을 열후로 삼았으며, 그 앞뒤로 식읍이 5만 호, 후로 봉해진 자가 19명에 달했다. 상국, 안평군공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8월, 사마의가 병으로 앓아누워 가규[53], 왕릉에게 해를 입는 꿈을 꾸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미리 장례에 관한 유언을 지어 수양산에 흙을 파서 매장하고 분묘를 만들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다. 유언 3편을 지었는데, 평상복으로 염하고 부장품을 두지 말고 뒤에 죽는 자를 자신의 묘에 합장하지 말라고 했다.

가을 8월 5일, 수도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73세였다.

2.9. 사후[편집]

천자가 소복을 입고 조문하고 장사 지내는 일의 예법은 한나라 곽광의 전례에 의거하고 상국, 군공을 추증했다. 동생인 사마부가 표를 올려 고인의 뜻을 진술하며 군공과 상여를 사양했다.

9월 17일, 하음에 매장하고 시호를 내려 무양문후라 하고 뒤에 무양선문후로 고쳤다.[54]

아들 사마소가 진왕에 오르고 나서 그는 아버지 사마의를 선왕으로 추존하였다.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의 황제인 원제에게 선양을 받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묘호와 존호를 올려 할아버지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추존하고 무덤을 고원이라 하였다.

진명제 때 왕도가 모시고 배석했다. 진 명제가 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가 사마의가 창업을 시작한 일을 진술했다.
  • 공손 문의(공손연)를 평정하자 대거 살육을 행했다.
  • 조상을 주살할 때는 그의 일파들 모두 삼족을 멸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고모 등 출가한 여자들까지 모두 죽였다.
  • 그 뒤 위나라의 왕권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 더불어 사마소 말년의 고귀향공(조모)에 관한 일을 진술했다.
진 명제가 얼굴을 평상에 묻으며 말했다,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동진)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

진서 선제기는 '그의 의심많고 잔인한 행적을 보면 대저 낭고(狼顧)라는 말에 부합되는 점이 있는 것 같다.'라고 평가 했다.

3. 연의[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라이벌이자 최종보스 역할로 나온다. 삼국지 전반부가 조조와 유비의 대결이라면 삼국지 후반부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이 주가 된다. 육손과의 대결은 1번 있었는데 졌다(...).

처음 등용됐던 시기[55]를 한참 지나서야 등장하는데 사마의는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고 나서야 처음 등장하여 조조에게 이 기세로 익주까지 정벌하라고 진언하나 조조는 듣지 않는다. 관우가 번성을 수몰시키자 또 등장해서 장제와 함께 조조에게 손권을 끌어 들이라고 건의한다.

일찍이 조조가 세 마리의 말(馬)이 한 구유통에서 구유를 먹는 꿈을 꾸었을 때 조조는 이를 마등 삼부자로 여겼다. 그런데 조조가 죽기 직전 똑같은 꿈을 꾸자 가후에게 해몽을 부탁하자 가후는 이를 록마로 해석하여 길조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사마(司馬)씨의 득세를 뜻했다.

사마의는 조비에게 건의하여 대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촉한을 협공하게 한다. 그러나 재빨리 방도를 강구한 제갈량은 군사들을 각기 파견하고 등지로 하여금 오와 동맹을 다시 맺게 하여 5로 대군을 물리쳤다. 이 5로 대군 이야기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사마의가 제갈량 라이벌로서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조비 사후 조예가 그 뒤를 잇는 과정에서 사마의가 옹주와 양주의 경비를 맡았을 때, 제갈량은 마속과 이야기하다가 그 사실을 듣고 매우 놀라면서 "위나라의 진정한 장수라면 사마의 한 사람 뿐이라고 해도 좋다."라고 말하기까지 하면서 사마의를 띄워준다. 제갈량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가 군을 지휘한다면 북벌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고 마속은 조비가 죽은 틈을 타서 유언비어로 사마의를 실각시키고 제갈량에게 더 큰 신임을 받는다. 정사에서 마속이 이런 책략을 쓰는 장면은 없고 사마의가 실각되지도 않았다.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지휘관 조진이 계속 패하자 조예는 다시 사마의를 기용한다. 사마의는 신속히 제갈량과 내통 중인 맹달을 평정하고 장합을 파견해 가정의 마속을 패배시킨다. 가정에서 마속이 패하자 사마의는 군을 이끌고 곧바로 서성으로 진군한다. 성에 군사가 없었던 제갈량은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에 올라 악기를 연주했다. 사마의는 의심이 많아서 제갈량이 복병을 숨겨놓았을 것이라 의심하고 퇴각한다. 정사에서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활약한 것은 조진, 장합 등이었고 사마의는 당시 완성에 주둔 중이었으니 여기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정사에서도 제갈량이 성을 비우자 복병을 의심한 사마의가 군을 물린 일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배송지는 이 일화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정사에서 제갈량의 북벌은 5차례이지만 연의에서는 위의 진격에 대한 반격인 3.5차 북벌까지 한 차례 북벌로 추가되어 육출기산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제갈량의 4차, 5차 북벌이 5차, 6차 북벌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있으니 혼동에 주의하도록 한다. 위군은 진창에서 궂은 날씨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실패하고 말아서 다시 장안으로 퇴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위나라 조정에서 퇴각하라는 전서를 보냈는데, 전서가 도착한 시점이 궂은 날씨 다 버텨내고 맑아져서 진군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반드시 치고나올 것이라 예견한 반면, 조진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자 사마의가 조진에게 제갈량이 기습을 해오지 않으면 얼굴에 분을 바르고 치마를 두른 채 조진에게 절을 하는 벌칙을 받겠다고 한다. 크로스드레서 이에 조진은 자신이 틀리면 조예께서 내리신 말 한 필을 선물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사마의의 예상이 옳았고 조진은 적의 기습을 제대로 당하나 겨우 사마의에게 구원을 받아 살아남았다.[56] 이에 조진은 상심하고 부끄러워 병이 재발하던 중 제갈량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받고 열받아 죽어버린다.

제갈량의 4차 북벌에서 군량 문제로 제갈량이 퇴각하자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합은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다가 전사한다. 정사에서는 장합이 만류하는데도 사마의가 억지로 장합에게 추격을 명해서 괜히 장합을 죽게 만든 것이다. 연의에서는 그 반대로 사마의를 띄워주기 위하여 사마의가 만류했던 것으로 바뀌었다.

제갈량의 5차 북벌에서 제갈량이 꾀를 쓴다. 위연은 사마의와 일기토 겨루다가 거짓으로 후퇴하여 사마의를 상방곡으로 유인한다. 여기서 문관인 사마의와 촉나라의 무력 본좌 위연이 일기토를 벌이는 창작 장면이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덕분에 사마의는 태사자와 칼싸움을 벌인 왕랑처럼 문관계의 양대 무력 본좌가 되었다(...). 제갈량은 상방곡 안으로 들어온 사마의를 화공을 이용하여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하늘은 사마의의 손을 들어 줘 마침 내린 비 때문에 사마의는 무사히 빠져나왔다.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며 크게 한탄했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다. 사마의가 상방곡에서 화공을 당한 장면은 연의의 창작이며 정사에서는 제갈량의 상을 골짜기로 들어가서 치루었다는 기록 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의 삼국지 매체에서는 위연과 사마의의 일기토 부분을 대부분 삭제한다. 상방곡으로 유인하는 것은 사마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인데, 사마의가 직접 일기토에 응한 상황이면 위연이 그냥 일기토에서 죽이면 목적을 이를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거기서 또 위연이 거짓 후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쉽게 말해서 후반부 촉의 무력 원탑인 위연이 사마의와의 일기토에 밀려서 퇴각하는 상황인데 사마의는 의심 없이 위연을 추격한다. 이게 성립되자면 위연은 사마의를 상대로 일기토에서 낙승을 장담할 수 없으며, 위연이 패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마의의 무력이 강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앞서 사마의가 요화에게 허둥지둥 쫓기는 게 설명이 안된다. 아무리 전술적으로 사마의가 패배해서 도망가는 상황이라지만, 무력 차이가 심하게 나는 적장이 추격할 때 오히려 일기토로 역관광 시키는 일이 연의에 자주 있었으니.

사마의는 상방곡에서 당한 뒤 싸우지 않고 진채를 지켰고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여자 옷과 관을 보내 상례를 치르느라 집에만 처박혀 있는 아녀자에 비유하여 모욕한다. 사마의는 격분하지만 일시적인 개인적 분노를 참고 최후의 승리를 도모했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각색으로 정사에서는 이러한 도발에 넘어가 빡친 사마의가 출진하려고 했으나 신비가 말려서 넘어간 것이다.

제갈량이 보낸 사자로부터 공명이 식사는 적게 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도맡아 한다는 말을 듣고 식소사번이니 제갈량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했다.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관용구는 정사에서도 나오는 대목이지만 연의에서는 이 일화가 각색되었다. 제갈량이 죽자 사마의는 진격하는데 제갈량이 죽기 직전 명령으로 만들어진 목상을 보고 그가 살아있다 착각하여 깜짝 놀라 퇴각을 명령했다. 이후 사마의의 대사 "내 머리가 아직 붙어 있느냐?"가 압권이다. 이후 진짜로 제갈량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마의는 탄식하며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정사에서 이는 제갈량이 죽자 후미를 맡은 강유가 대처를 잘해서 사마의가 물러나자 생긴 속어이다.

사마의는 공손연의 난을 평정하는데 여기서 명대사를 읊는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우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키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고, 달아날 수 없을 때는 항복하고, 항복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한다." 정사에서도 나오는 명대사지만 정사와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변경되었다.

조예가 죽은 뒤, 조상의 음모로 인하여 실권을 빼앗기지만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다시 정권을 탈환한다. 왕릉의 난의 묘사는 없으나, 죽을 때의 장면은 있다. 사마사와 사마소에게 나라에 충성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4. 가족 관계[편집]

춘추전국시대의 은왕 사마앙의 후손들은 주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진나라로 간 사마씨들은 역사가 사마천의 분파가 되었고, 조나라로 간 사마씨들은 사마의의 분파가 되었다. 한나라 시대 명문가들은 대개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사마씨도 온현 일대의 거족으로 청류파의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사마방의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고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다.

천하의 사마의도 두려워 하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장춘화였다. 그러나 말년에 장춘화를 늙었다고 대놓고 괄시 하는 것을 보면 젊었을 때 두려워 했던 것 같다.장춘화보다 열 살이나 많았으면서 낮짝도 두껍다 사마씨 가문은 천재가 가득했고 사마의의 아내 장춘화도 똑똑했는데 어째서 그 후손들 가운데 금치산자가 많았나 아주 의아하다. 특히 사마충이나 사마덕종은 손에 꼽는 바보였다.[57]
  • 장춘화 - 사마의의 정실, 사마사, 사마소, 사마간, 남양공주의 어머니.
  • 복부인 - 사마의의 첩, 사마량, 사마주, 사마경, 사마준의 어머니.
  • 장부인 - 사마의의 첩, 사마융의 어머니.
  • 백부인 - 사마의의 첩, 사마륜의 어머니.
  • 사마사 - 사마의의 장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소 - 사마의의 차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량 - 사마의의 삼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주 - 사마의의 사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경 - 사마의의 오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준 - 사마의의 육남?, 복부인의 아들.
  • 사마간 - 사마의의 칠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융 - 사마의의 팔남, 장부인의 아들.
  • 사마륜 - 사마의의 구남, 백부인의 아들.
  • 남양공주 - 사마의의 장녀, 장춘화의 딸.
  • 고육공주 - 사마의의 차녀, 생모 미상, 두예의 아내.

5. 평가[편집]

5.1. 참모에서 지휘관으로[편집]

사마의는 독특하게 처음엔 참모로 시작해서 지휘관으로 전환한 케이스이다. 기동전으로 명성을 얻은 그답게 다양한 공세 전략을 제시했다. 정작 공세작전을 펼친 곳은 워낙 빠르게 사건이 종결되고 이목이 쏠린 제갈량의 북벌에선 수세전략으로 나왔기 때문에 인기가 없는걸지도. 덕분에 사마의의 이미지가 문관에서 무관 사이의 그 쯤에 있어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선 이미지가 흐릿한 편, 다만 문무 모두 뛰어나다는 이미지 때문에 스텟은 높게 잡히는 편이다.

5.1.1. 사마의의 전략[편집]

  • 익주 침공: 득롱망촉의 일화로도 유명한데 유비와 손권이 익양에서 대치하고 있는 동안, 장로의 항복을 받아 한중을 점령한 조조에게 촉나라까지 점령하자는 건의를 하나 들어지지 않았다. 근거는 아직 촉나라의 내부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것. 첫 출진으로 보이는 지라, 조조의 신임을 얻기 위한 오버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어쩌든 제갈량의 북벌시기엔 지키기만 했던 사람이 익주를 향해 적극적인 공격을 건의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삼국지 위서 유엽전에는 유엽이 혼자 간언한것으로 나오고 진서 선제기에는 사마의 혼자 간언한 것으로 나온다. 자치통감은 사마의가 먼저 건의하고 조조가 반대하자 유엽이 다시 재반박했다고 기록했다.
  • 천도 반대와 촉,오 분열 예언: 우금등이 수몰당한건 전투에서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며, 천도를 하면 다시 생겨나는 혼란을 걱정했으며,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 친하지만 속으로는 소원해 관우가 뜻을 펴는걸 손권이 원하지 않을터이니 그로 하여금 관우의 배후를 치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을 책봉하는 걸 약속하면 번성의 포위는 절로 풀릴 것이라 했다. 놀라운 예측력이라고 볼 수 있다. 위서와 촉서 관우전에는 장제와 사마의가 함께 진언했다고 하는데 진서 선제기에는 장제의 일은 빠져있어 마치 사마의 혼자 진언한 것처럼 서술했다. 자치통감에는 원래대로 장제와 사마의가 함께 진언했다고 서술했다.
  • 오나라 침공: 유사 봉건제 수준인 오나라는 핵심전력만 무력화하면 심장을 찌르듯이 공격할 수 있다는 전략. 상당히 과감한 전략으로 환성으로 향해 손권을 유인한 후 수군을 하구로 보내자는 의견. 조예도 수긍했고 이에 조예는 오를 칠 생각을 하는데 조휴는 주방의 거짓 투항을 믿고 윤허를 얻어 적진 깊숙이 환현까지 들어갔다. 이에 조예는 사마의에게 강릉을 향하게 하고 가규는 동관(유수구의 서남쪽)의 향하게 하여 세 길로 나아가게 하고 추가적으로 만총에게 하구로 가도록 한다. 이는 곧 석정 전투로 이어지나 석정 전투는 대실패해 버렸고 제갈량의 지속적인 북벌 때문에 여력이 안났는지 이후엔 실행되지 않았다.

5.2. 제갈량의 라이벌[편집]

5.2.1. 유사하면서도 대조되는 행적[편집]

  • 제갈량은 서주 출신이나 서주 대학살을 피해 형주로 피난갔으며 사마의는 하내 출신으로 하내에 주둔한 반동탁 연합군의 약탈을 피해 중원으로 피난갔었다.
  •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를 통해 출사했으나 사마의는 조조의 강압적인 명령을 통해 출사했다.
  • 둘다 황제의 탁고대신으로 지정받았다. 제갈량은 유비, 사마의는 조비,조예 두 황제의 탁고대신이었다.
  • 그리고 둘 다 함께 탁고를 받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이엄조상을 물러나게 했다. 제갈량은 이엄을 은퇴시키고 그의 아들을 계속 임용하는 선에서 끝냈지만 사마의는 조상을 살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조상 일파의 3족을 멸했다.
  • 제갈량은 자신과 혈육이 아닌 장완을 후계자로 삼았지만 사마의는 자신의 혈육 사마사를 후계로 삼아 권력을 물려줬다.

5.2.2. 군사적인 측면[편집]

227년,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했지만 제갈량이 꾀를 써서 일부러 성을 비우고 성문을 열어놓자 복병을 의심한 사마의가 군을 물렸다. 그러나 이 기록은 배송지가 당시 사마의는 완성에 있었으니 거짓이라고 반박했으니 신빙성이 낮다. 이 일화를 거짓으로 본다면 실질적으로 사마의와 제갈량이 맞붙은 전투는 다음 나오는 두 차례 뿐이다.

사서에 기록된 사마의와 제갈량의 직접적인 전투는 2번이며 둘 다 사마의가 패했다. 231년 노성 전투는 진서에 따르면 사마의가 압승을 거두었다고 나오나 한진춘추에는 제갈량에게 패했다고 적혀 있다. 사마의가 이겼다고 적은 기록은 진서 하나뿐이고 진서는 그 편찬 과정과 신뢰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서다. 다시 말해 서진의 역사를 다룬 진서가 한 곡필. 자치통감에도 제갈량의 승리로 적었다.[58] 또 234년 오장원 전투에서는 거점을 만드는 촉군이 도하 작전을 개시하자 정예 기병 1만을 보내 선제 공격을 했지만 이 또한 제갈량의 기민한 대응으로 패했다.

사실 사마의가 지구전을 펼친 건 5차 북벌 딱 한 번뿐이다. 4차 북벌때는 위군도 군량이 간당간당해서 지구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고 5차 북벌때에 와서야 비로소 지구전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59] 그러나 제갈량이 여성 의류를 보내 사마의를 도발하자 이 도발에 넘어간 사마의가 자꾸 제갈량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신비가 말려서 넘어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도발에 차분하게 대응한 것은 연의의 창작일 뿐이다.[60] 사마의 역시 처음에는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과 교전하다가 제갈량이 강을 건너자 철퇴한 적이 있고 제갈량 역시 동서로 군사를 움직이며 교전을 유도하였다. 5차 북벌은 이후 제갈량이 오장원에 눌러 앉으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가고 사마의도 조예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싸운것이다.#

사마의 입장에선 오랜 북벌을 통해 단련된 촉군을 야전으로 깨부수기에는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이 한번의 야전을 통해서 드러났고 촉군이 장악한 위빈 지역, 즉 위수 남쪽 무공수 인근에서 교전을 하기엔 꺼림직하게 여겨졌을것이다. 결국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현지 백성들을 회유, 행정력을 넓히고 둔전을 통해 많은 군량을 확보하여[61] 사마의의 지구전에 맞대응하고 이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막는데 사마의는 실패했다. 그가 이길 수 있던것은 제갈량의 병사라는 의외의 변수 때문이었다.

결국 지휘관의 능력을 살펴본다면 사서에 기록된 사마의와 제갈량의 직접적인 전투는 언제나 사마의가 패했다.[62] 게다가 위의 지구전 전략도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했으나 촉군이 둔전을 토대로 오래 버티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전반적인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라이벌이라는 제갈량보다 분명히 아래였다고 볼 수 있다.

제갈량 이외의 적들, 즉 맹달, 공손연, 왕릉을 상대로 얻은 사마의의 군공을 살펴본다면 가히 속전속결의 달인임을 알 수 있으며, 장합의 전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감한 공세를 펼치는 것을 과도하게 선호하기도 했던 사마의이다. 이런 사마의가 어쩔 수 없이 지구전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 게다가 국력이 압도적으로 나은 위나라가 그랬다는 것 자체가 제갈량과 사마의의 능력차를 보여주는 일이다.[63] 물론, 조예의 정치적 지원 아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고 성공적으로 북벌을 저지했으며, 반란군 진압이나 거시적 안목에서 보여준 군재를 본다면 제갈량을 제외하면 최고 수준의 인재임은 확실하다. 다만 제갈량의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한수 아래였을 뿐.

그러나 이러한 수비전략 자체를 '사마의가 제갈량을 두려워했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폄하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스포츠에서조차 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는 말이 있는데, 전쟁은 스포츠보다도 승리가 중요하고 전력손실이 기피되는 영역이다. 설령 공격적인 전략으로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수비적인 전략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수비를 선택하는 게 지휘관으로서는 현명한 것이다. 사마의가 자신이 선호하던 전략을 버리고 수비에 임했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실제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전략을 버리고 수비 전략까지 소화했다는 뜻이며, 이는 지피지기라는 이념에도 부합된다.

5.2.3. 내정적인 측면[편집]

촉한의 제갈량은 한 국가 전체를 책임지는 재상이었으며, 그가 촉한에 남긴 업적은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지만 사마의는 국정 전반을 다루는 재상으로는 활약한 적이 없으니 전반적인 내정적인 측면에선 제갈량이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마의 역시 당대의 인재인 만큼 내정에 공을 세웠다. 주로 사마의는 농지개발과 인사권에 특화된 활약을 펼쳤다. 그는 대장장이 육성, 농지개간, 운하 건설등 주로 개발 분야나 토목 공사 등에서 재능을 보였다. 송나라 시기 역사를 다루는 송사의 지 47권에 기록된 송태종 지도(至道) 원년(995년) 정월에 관료들이 황제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등, 허, 진, 영, 채, 숙, 박(鄧, 許, 陳, 穎, 蔡, 宿, 亳)의 땅[64]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당시) 경작하지 않은 땅(閑田)이 351곳에 합치면 토지 22만 경이 된다고 했는데, 백성의 힘으로는 논밭을 다 갈 수 없으며, 모두 한나라, 위나라 이래로 소신신, 두시, 두예임준, 사마의, 등애 등의 인물들이 제도를 세워 개간했다고 설명했다. # 당시는 사마의가 땅을 개간한 시기로부터 700여년이 지났던 시기로 그가 개간한 땅도 세월이 지나면서 버려진 듯 하다. 어쨌거나 이 기록은 사마의가 한나라, 위나라 이래로 농지개발에 적극적인 인물들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송서의 지와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제갈량 사망 이후인 235년에 장안(長安)의 곡식 5백만 곡(斛)을 낙양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사마의는 감찰,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정치적 요직도 두루 거쳤다. 특히 인사권자로서는 등애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사마의의 추천을 받아 활동했다. 사마의는 이렇게 인재를 등용하면서 이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사마씨가 권력을 잡은 후 이들이 사마씨에게 충성하도록 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또한 제갈량의 식소사번 일화와 비슷한 일화가 사마의에게도 있는데 선제기에서는 '야이망침'이라고 해서 젊었을때 사마의가 조조의 의심을 받아 마부로 일하면서 관리의 직무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까지 이르러 이를 모두 직접 챙겼다는 일화가 있다.

내정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사법권을 행사하는 방법이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라는 평가를 받은 제갈량은 엄정한 사법처리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남만 정벌 때도 관대한 통치를 통해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사마의는 숙청, 반란군 토벌시 강경책을 써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평상시에는 나이 많은 하급자에게도 깍듯하게 행동하고 조비의 노여움을 산 신하를 변호하는 등[65] 너그러웠으나 조상 일파 숙청, 요동에서의 학살, 수춘에서의 학살 등으로 '의심많고 잔인하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데도 훨씬 장수하여 제갈량 사후 17년이나 더 살았고, 제갈량은 선제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수습함과 동시에 어린 군주를 성실히 보좌하는 충신의 역이라면 사마의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여차하면 주인도 쳐버릴 수 있는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대비된다. 제갈량은 승상 시절 창업군주 선제 유비의 전폭적인 지원과 탁고대신으로서 여차하면 황제까지 갈아치울 수 있다는 엄청난 권리를 받았기 때문에 아직 어렸던 유선 아래에서 사실상 황제가 해야할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찬탈까지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도 있는 자리에 앉았고 또 실제로 자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탁고대신 이엄으로부터 그러한 제의까지 받았지만 거절하고 끝까지 유선에게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사마의는 조예가 죽고 어린 조방이 황제가 되자 칭병하면서 기회를 노려 조상 일당의 전횡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방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 제위를 찬탈하는 초석을 만들었다.[66]

5.2.4. 펜팔하는 사이[편집]

  •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황공형[67]은 호방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라고 쓴적이 있다.
  •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이 1차북벌 당시 기산에서 사마의에게 답장하였는데 맹건을 통해 두습(사마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5.3. 충의[편집]

사마의의 충성심에 대해서 이래저래 말이 많다. 해석하기에 따라 그 자신은 순수하게 위에 충성했다고 볼 수도 있고 희대의 역적으로 볼 수도 있는 신기한 인물.[68]

그가 조위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영웅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석을 받고 위왕에 올라 한나라 황실의 권위를 흔든 조조와 달리 그는 죽을 때까지 왕은커녕 구석조차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조처럼 승상이 되어 1인 독재를 한것도 아니고 3공의 한 사람인 태위에서 멈췄다. 말년에는 잠깐이나마 태부직을 받아들여 실권을 내놓기도 했다. 조상 파벌 내에서도 말이 나올 정도로 조상 일파의 국정 운영이 혼란스러웠으니 만년에 일으킨 고평릉 사변도 조상 일파의 실정이란 명분이 있었다. 또한 군사적 업적으로 쌓은 엄청난 권위를 내세워 하후현 등 친황 세력을 완전히 숙청하지 않고 남겨뒀다. 즉, 그 사후에 더 큰 권력을 넘본 아들들이야 어찌되었든 그는 위의 충신에 그쳤다고 볼 수도 있다. 조위의 주군들로부터의 신뢰도 최고였다. 비유하자면 조비 때는 군왕이 본진을 믿고 맡기는 2인자인 조조-순욱의 관계와도 같았으며, 조예 때는 선황으로부터 탁고대신으로 임명받았으며 현 황제가 아버지처럼 흠모하고 신뢰하는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유선-제갈량의 관계와도 같았다.[69]

하지만 다르게 보면 아직 위나라가 건재하던 234년에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가 이미 딴 마음을 품고 이를 눈치챈 아내 하후휘를 독살했는데 사마씨 일파는 이미 다른 본심을 품고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고려하면 그의 본심에 대한 의심은 더욱 확고해진다. 아들이 역심을 품고 개국공신 하후가의 여식인 아내를 독살하는 지경까지 갔는데 (가정 교육은 둘째치고) 아버지가 그 상황을 몰랐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본인이 주도했거나 암묵적 동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조예 때 군권과 재정이 사마씨의 수중에 들어왔고, 구품관인법으로 관맥이 형성되었고, 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사마씨에게 조정 대권이 집중되고[70], 종실 왕공들은 왕릉의 난을 계기로 사마의가 싹 유폐시켰다. 왕릉이 사마의와 절친한 사이였는데도 자신이 위의 충신임을 피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걸 고려하면 당대에도 사마의가 역심을 품었다고 널리 받아들여졌다고 해석할수 있다. 어차피 서두를 게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 왕조의 레일은 충실하게 깔아줬다. 더군다나 그는 조씨가 유씨의 황위를 빼앗던 과정을 모두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하며, 젊어서부터 보여준 치밀하고 타산적인 성격을 고려하면 이때의 교훈을 받아들여 더욱 교활하게 진행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한 시각은 위의 틀에 있는 사마의의 초상화에 덧붙인 문구[71]에도 나타나 있다.

만약 사마염이 세운 서진이 통일 제국으로서 제대로 움직였다면 선대들의 행각에 대하여 비판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나라를 멸하고 통일을 완수한 후 서진의 초대 황제인 사마염부터 온갖 실정을 일삼기 시작했고 후한 이래로 축적되었던 사회적인 모순이 폭발해 몰락해가다가 50여년만에 화북을 북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강남 왕조로 전락했으며, 그 다음에 이어진 시대가 5호 16국이라는 난세였다. 한 개인이 감당해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때문에 처음부터 장수할 가능성이 낮았다는 게 가장 긍정적인 평가인 서진의 시조인 3부자에 대한 평은 자연스럽게 더욱 박해졌다. 사마의는 후대에도 망탁조의[72] 중 한명으로 꼽히며 역적으로 간주되었다. 사마씨는 청류파 가문이었기에 그의 행실은 청류파의 위선을 보여준다는 의견도 있다.출처[73]

당태종 이세민은 이런 사마의의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냉담한 평가를 내렸다. 니가 그런 소리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74]
문제 때에는 (임금을) 보좌하며 권세가 컸으니 허창에서 소하와 같은 임무를 맡고 숭화전에서 곽광 때보다 더한 부탁을 받았다. 응당 성심과 절의를 다했다면 이윤이나 부열(傅說)과 그 이름을 나란히 했으리라. 명제가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대들보를 그에게 맡기니, 두 임금의 유조를 받고 3조[75]를 좌명(佐命)했고, 인사지탁[76]을 받들었으나 일찍이 목숨을 다해 보답하지 않았다.

천자가 바깥에 있을 때 안에서 갑병(甲兵)을 일으키고 (후사를 부탁했던 명제) 능(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급거 서로 주륙하니 충정한 신하의 지체로서 어찌 이 같을 수 있는가! 그가 선(善)을 다했다는 것은 이로 인해 의심스럽다.

5.4. 장합의 죽음에 대한 책임 논란[편집]

조조 휘하의 다섯 명의 좋은 장수를 뜻하는 오자양장[77]의 1인으로써 위나라의 명장이였던 장합이 무리한 추격전 끝에 전사한 것에 대해 이를 명령한 사마의에 대해 논란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은 여러가지로 나눠지는데, 첫번째로 사마의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두번째로 주도권 싸움에서 방해가 되는 장합에게 무리한 명령을 내려 죽도록 만든 것이다[78], 세번째로 장합이 전공을 지나치게 탐하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고, 이에 대해 사마의가 억울하게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79]이다는 주장이 있다.

장합이 공을 탐내 무리하다가 죽었다는 연의의 창작을 제외하곤, 사마의에겐 부정적인 주장이 대다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명장을 죽게 만들었다면 그 자체가 큰 실책이고, 음흉하게 주도권 확보를 위해 자기편을 외적에게 죽게 만든 것이라면 아주 악질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실책 VS 최악의 악행

사실 조진 죽고 난 뒤에 대촉전선에 거물이라고 할만한게 곽회랑 장합 정돈데, 곽회는 장합, 사마의보다 짬이 좀 많이 아래였다. 그렇다면 사마의가 대촉전선을 장악하는데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장합인데, 장합은 선대 조조의 전성기때부터 위를 섬긴 숙장이라 황제에게 특진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항장과 달리 장합은 적극적으로 옛 주인을 배신해서 큰 공을 세우고 조위의 공신이 된 인물이기 때문에 다른 항장들처럼 함부로 대할수 없었다. 거기에 대촉전선인 농서에서 장합은 제갈량을 막은 일로 명성이 높았다. 호삼성도 농서에서 제갈량을 막은 장합의 명성을 부담스러워 했을거란 평가를 남겼다. 따라서 사마의가 장합을 거슬려 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제갈량의 4차 북벌 당시 사령관인 사마의와 보좌역인 장합, 이 두 사람의 의견이 많이 충돌하기도 했던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사마의가 하필이면 장합에게 추격토록 종용했고, 오히려 장합은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라고 하며 이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정사 장합전에 존재한다. 기록대로 라면 장합은 위험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거부까지 했음에도 사마의가 이를 그냥 무시해 버린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장합이 전사한 뒤 대촉전선은 사마의 혼자 전권을 차지하게 된다. 사령관 되자마자 자기 권위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 전사했다는 것이 너무나 시기적절하다. 이렇게 봤을때 어차피 툭하면 태클걸어 감정도 안 좋은 같은편 원로 장군을 함부로 죄를 물어 죽일 수는 없으니, 사마의가 간접적으로 전략적 판단 실수인척 장합을 죽도록 유도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기는 하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사마의가 충성스럽고, 청렴결백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야심찬 인물이라...물론 사마의가 전공 욕심에 무리하게 장합의 의견도 거부하고 억지로 추격하라고 했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결론을 쉽게 낼 순 없는 문제다.

게다가 사실 윗논리는 큰 헛점이 있는게 추격전을 하다가 반격을 받는다고 해도 최고 지휘관이 사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것이다. 결과적으로 장합이 죽어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 추격을 한다고 장합이 100%죽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이것을 책략이었다라고 할수 있을까? 만약 장합이 무리한 추적을 하다가 대패하여 병사를 모두 잃고 본인만 살아돌아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일반적인 패전에서 지휘관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는것을 생각할때 이러한 양상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매우 높을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마의와 장합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을것이고 무리한 명령을 내린 사마의의 입지도 안 좋아졌을것이다.

여담으로 중국 사학자 허쯔취안의 역사서 위촉오삼국사에서도 장합 함정설을 주장하고 있다. 근데 근거가 그냥 '사마의는 그러고도 남을놈!'일 뿐이라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논쟁을 바탕으로 최근의 창작물들은 사마의의 어차피 인성면에선 평가가 안 좋았으니 포기하고 전략적인 실책을 지우고 지략을 미화하기 위해서 이런 설정을 취하는 듯 하다.

5.5. 학살자[편집]

사마의는 요동정벌에서 양평성에서 15세 이상의 남성 전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7000명을 학살하고 그 시체로 경관(京觀)이라는 기념물을 만드는 초강경 통치를 보여준다. 현대에 봐도 사마의의 행동은 잔혹한 행보였지만, 당대에 봐도 잔혹했다고 평가받아 사마의를 개국자로 모신 후대의 (동)진의 황제 명제 사마소조차 사마의의 학살과 고평릉 사변 등의 행동을 보고는 이런짓을 벌였으니 진나라의 운명이 길지 못하겠다며 한탄했다고 한다[80]

실제 명제의 말처럼 사마씨는 정권 탈취와 통치 과정에서 잔혹한 일을 많이 저질렀고, 사마씨와 같은 배경을 가진 귀족들과 결탁해 많은 실정을 저질렀으며, 자기들끼리도 잔혹한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또 이후로도 이민족을 노예로 삼는등 이민족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밀고 나갔다, 그 댓가로 통일 직전에 벌어져 삼국통일을 10년은 늦춘 독발수기능의 반란을 겪었으며, 통일 후 겨우 30년만에 영가의 난이 벌어져 이민족의 공격으로 수도를 포함한 나라 대부분을 빼앗긴다.

5.6. 인재안목[편집]

  • 등애는 사마의가 밀어줘 키운 사마의 키드다. 군의 하급관리로 머물던 등애를 처음 태위의 부하로 등용했고[81], 상서랑으로 발탁한 것도,대운하 프로젝트를 추진/승인한 것도 사마의.
  • 사마의 키드의 다른 케이스로 왕창은 원래 중앙 쪽에서 관직을 하고 있었는데 사마의가 눈여겨 봐 서주(자사)+형/예주(제군사)라는,대오 전선의 사령관으로 전임하여 전공도 세웠고,아들인 왕혼은 오나라 정벌의 사령관 중 하나로 활약.

    결국 촉의 멸망과 오의 멸망 모두 직/간접적으로 사마의 그늘 아래 있는 이들이 공을 세웠고 그 외에도 왕기처럼 역시 사마의가 뽑아 대오전선에서 활약한 이도 있으니, 사마의가 인재안목이 있었던듯 하다. 그런것치고는 등애는 진서 선제기에 이름 한자도 올리지 못했으니 안습하지만...그리고 정작 그 아들인 사마소는 등애를 끝내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활용이야 물론 뽕을 뽑고도 남을 정도로 했다만) 그 도량 면에서도 더더욱.
  • 호수 & 부방
    형주 자사 호수(胡脩)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 부방(傅方)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조조는 이를 따르지않았고 관우의 형주공방전에서 호수와 부방은 관우에 항복한다.
  • 맹달
    유엽과 함께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조비가 맹달을 총애했고 조비의 측근인 환계와 하후상과도 맹달이 친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후일 제갈량과 내통한 맹달은 실제 반란을 일으키고 방심하지 않고 있던 사마의는 이를 진압했다.
  • 왕기
    왕릉 수하에 있던 왕기를 빼왔다.
  • 주태
    주태는 형주자사 배잠의 수하로 있었는데, 재능을 확인하고 이후 맹달을 토벌할 때 선봉으로 세웠다.
  • 왕관
    조예는 일시적인 기쁨과 노여움으로 사람들을 다스린 적이 많았았는데, 왕관은 뜻을 굽히지 않고 법에 따라 집행했다고 한다. 사마의는 왕관을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 왕관은 그렇게 출세하게되고 조상 사망 이후 조상파의 군대를 맡게된다.
  • 우송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종사해 격문과 공고문을 작성했다. 그후로도 재능을 인정받아 사마의가 연속해서 벼슬을 내렸다.
이런 일화들은 한편으로는 당시 사마의가 위나라에서 귀족, 관리들이 인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일화들이다. 정사 삼국지에도 노육손례부하포훈순의 등에게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6. 기타[편집]


사마의를 중국어 발음대로 읽으면 쓰마이(Sīmǎ Yì)에 가깝게 발음된다. 삼국지 관련 사극에서 쓰마이 쓰마이 하는 게 묘하게 중독성 있어서인지 삼국지 관련 커뮤니티에서 사마의를 쓰마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꽤 많다.

위나라의 인물 대부분이 축소되거나 언급되지 않는 어린이용 학습만화에서도 사마의 만큼은 비중이 굉장히 높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대부분의 어린이용 학습만화 삼국지의 후반부 주인공격 인물은 제갈량이고 사마의는 그 제갈량의 라이벌로 나오기 때문. 그리고 그 때문에 사마의는 주로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90년대 후반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한결 만화 삼국지가 그 대표적인 사례. 하지만 사마의의 집념만큼은 정말 대단하게 묘사된다. 예를 들어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죽을 각오로 싸워라!"라고 독려하면, 사마의가 "죽어도 다시 일어나 싸워라!"라고 부르짖을 정도.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 대부분이 촉을 주연으로 했으니 사마의가 악역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은 아니나 실제 사마의 역시 빌런 소리를 들어도 싼 악행들이 있어서 일방적인 대립 구도 설정이라고 볼 수 없다.

민간설화에서는 제갈량에 집착(?)하는 이미지도 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제갈량이 죽자 제갈량의 시신을 강탈하려는 사마의가 대노한 강유과 일기토를 뜨는 장면이 있고 아예 사마의가 제갈량 묘를 몰래 팠는데 무덤 아래에 묻힌 자석 때문에 발이 안 떨어지니까 쫄아서 튀거나 관우 장비 귀신이 튀어나와서 쫓아내거나 조자룡 귀신이 쫓아내기도 하는 다양한 설화 버젼이 있다(...).

후손인 사마씨는 후에 송나라를 건국한 유유에게 황위를 찬탈당한 뒤 대거 몰살당했고, 현대에 접어들어서는 10만명에도 미치지 못할만큼 숫자와 위세가 줄어들었다. 잠시나마 삼국통일을 해봤던 것 치고는 너무나도 쉽게 몰락했다. 그래도 동진까지 조위나 촉한보다는 훨씬 오래가고 역사에 족적을 남기긴 했다.

여담으로 사마의의 고향 하내 온현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물리치고 연주하게 했다는 '사마의득승고'라는 타악곡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마의의 유일한 시인 '천지개활 일월중광'시에 곡조를 붙인게 현대까지 전승되어 왔다고. 시에 곡조를 붙었다는건 후대의 윤색이라는 의견도 있다.
天地開闢 日月重光
遭遇際會 畢力選方
將掃穢甫 還過故鄕
肅淸万里 総斉八荒
告成歸老 待罪武陽

천지개벽 일월중광
조우제회 필력선방
장소예표 환과고향
숙청만리 총제팔황
고성귀로 대죄무양

천지가 개벽하고, 일월이 거듭한 즉
좋은 군주를 우연히 만나, 마침내 힘을 떨쳤다.
장수로서 잡초들[82]을 쓸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만리에 걸쳐 숙청을 하고 어지러운 팔방을 평정하였다.
성공을 보고하고 돌아가서 무양(武陽)의 죄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시를 못하는 걸로 유명했다. 현대까지 유일하게 내려오는 바로 위의 시를 보면 운만 맞춘 작전 보고서가 따로 없다. 조조가 건안문학을 일으킨 이후 당대 귀족사회에서 시를 못쓴다는 건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된다는 걸 생각할 때 시에 아주 관심이 없던 걸지도.

사마의는 낭고상으로도 유명하지만, 형인 사마랑 관련 기록인 사마랑전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때(12세) 시험을 보는데 하도 덩치가 커서 나이를 속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고, 게다가 역시 한 덩치하는 동탁이 사마랑에 대해 '내 아들이랑 꼭 닮았다'고 평가했다고. 사마랑 본인 말에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의 집안 유전이라니 동생들인 사마의와 사마부도 꽤 한 덩치 했을것이라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조선시대 충성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평가가 안 좋았다. 그래도 병법에 관해서는 나름 좋게 평가 받았다. 세종대왕도 김종서에게 사마의의 고사를 들어주는 기록이 있다.[83]

상림전에 상림보다 지위가 높으나 고향선배 대접을 해서 항상 인사를 했다고 한다.

7. 미디어 믹스[편집]

8.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