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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3

文字를 넘어 신의 속나를 보라 ③-4 오강남 교수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文字를 넘어 신의 속나를 보라 - 아주경제


文字를 넘어 신의 속나를 보라
황호택 논설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입력 : 2021-01-27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③ 오강남 교수 <上>




아주경제와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이 공동 기획한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의 두 번째 인터뷰이는 비교종교학으로 명망이 높은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오강남 명예교수다. 코로나 19로 오 교수가 한국에 오지 못하고, 나를 비롯한 취재진이 캐나다로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줌(Zoom)을 이용해 인터뷰가 이뤄졌다.

대학을 갓 졸업한 유수민 인턴기자가 카카오톡 통화로 오 교수에게 줌 작동법을 코치하기 시작한 지 몇 분 만에 오 교수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음성 전달에서 캐나다와 서울 사이에 0.5초 정도의 시차가 있었으나 큰 불편은 없었다. 서울의 아주경제 스튜디오와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오 교수의 서재를 연결해 화상 인터뷰를 두 시간 동안 진행하면서 세상이 '코로나 이전(BC·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AC·After Corona)'로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캐나다로 두 사람이 출장 인터뷰를 갔더라면 5박6일 걸릴 일을 두 시간으로 단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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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릴레이 인터뷰'는 다석을 연구한 학자, 다석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 등 10 여명을 연속으로 만날 계획입니다. 인터뷰를 종이신문,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보도하고 나중에 책으로 펴내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4개 매체에 활용하는데요. 여기는 지금 아침 10시인데 캐나다 밴쿠버는 몇 시입니까?

“오후 다섯 시입니다.”

나는 2년 전 캐나다 밴쿠버를 방문해 부차트 가든 등을 주마간산으로 둘러본 적이 있다. 밴쿠버 섬(Vancouver Island)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태평양 연안에 있다. 남한 면적의 3분의 1 정도 되는 큰 섬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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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교수님의 최근 저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세계적인 종교인 57명을 다루었더군요. 한국인으로는 류영모 함석헌 두 분이 들어있던 데요.

“한국에도 원효 지눌 이퇴계 이율곡 최수운 등 사상가들이 많지만 내가 두 분을 선정한 이유는 한국 종교의 가장 큰 특색인 기복(祈福) 종교를 타파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석학회 회장 정양모 신부는 ‘인도가 석가를, 중국이 공자를, 그리스가 소크라테스를, 이탈리아가 단테를,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독일이 괴테를 각각 그 나라의 걸출한 인물로 내세울 수 있다면 한민족이 그에 버금가는 인물로 꼽을 수 있는 분이 바로 다석 류영모’라고 말했습니다. 좀 과한 것 같지만 다석 류영모의 위상을 잘 얘기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한테 직접 배우신 박영호 선생은 ‘다석은 인류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석을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분이 함석헌 선생입니다.”

-오 교수님은 표층(表層)종교와 심층(深層) 종교를 구분하는 말이나 글을 많이 쓰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합을 금지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복신앙으로 번성한 표층종교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늘상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살 정도까지는 산타가 정말로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와서 굴뚝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고, 착한 일을 한 아이들에게 벽난로 옆에 달린 양말에 선물을 넣어주고 간다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린아이의 정신 발달 과정에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한테는 그것이 1년을 기다리는 이유고, 착한 일을 하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 어머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눈치 채면서 산타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 대신 '산타 이야기는 식구들 사이에 서로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구나, 나도 선물을 받지만 말고 부모님이나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단계 올라가는 겁니다.
아이가 철이 들면 '산타 이야기는 가족 사이에 사랑을 베풀 뿐 아니라 온 동네에, 혹은 더 넓은 사회, 좀 더 넓게 세계의 불우한 이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성숙하면 '불우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만 사랑을 베푸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억울한 사람들이 없게 해야 한다, 환경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습니다. 산타 이야기는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화답하는 천지합일(天地合一), 신이 내려오고 인간이 화답하는 신인(神人)합일을 상징하는 이야기라는 깨달음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들의 산타클로스 믿음 수준에 머물러있다면 일종의 '종교적 발달장애'라고 할 수 있지요.
표층종교는 이기적인 나를 잘 되게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헌금이나 보시를 하더라도 나와 내 식구가 현세와 내세에서 잘 되기 위해서, 기도를 할 때도 내가 잘 되도록 비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심층종교는 이기적인 나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내 속에 있는 신성, 불성, 참 나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나 혼자와 가족만 잘 되기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함께 잘되기를 바라는 결의를 다지는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한 자 한 획도 가감 없이 믿어야 한다는 문자(文字)주의가 표층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을 하던데요. 문자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 거죠?

“류영모 선생은 이기적인 나를 '제나'라고 하고 내 속에 있는 참나를 '얼나'라고 했습니다. 제나에서 얼나로 바뀌는 것, 이를 제나에 죽고 얼나로 살아나는 죽음과 부활이라 할 수 있는데, 류영모 선생은 이를 '솟남'이라 하셨습니다. 류영모 선생님의 경우 어느 종교든지 이렇게 제나에서 얼나로 솟나게 해주는 종교는 모두 유익하다고 봅니다.

표층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합니다. 교회나 절에서 한 얘기를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 광신, 미신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무조건적 믿음은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독립적 사고 능력을 박탈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심층종교는 이와 달리 이해와 깨달음을 강조해요. '보고 깨달아라'는 것이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 해방돼 무엇이 바른지를 계속 추구하는 종교, 열린 종교입니다. 무엇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새로운 눈뜸입니다. 부처님도 '무조건 믿지 말고 실험해보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종교만 옳다'는 근본주의는 폭력

표층종교는 신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식으로 신과 인간, 신과 세상을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이른바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신의 초월(超越)만을 강조하지요. 심층종교는 신이 밖에도 있지만 내 안에도 있다고 봅니다. 어느 면에서는 신의 초월보다 신의 내재를 더 강조합니다. 신이 우리 속에 있는데, 우리 속에 있는 신이 바로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결국 '신과 나는 하나'라고 봅니다. 이런 사상을 강조하는 신관을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하는데, 동학(東學)이 이런 신관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한울님이 따로 계시지만 우리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시천주(侍天主)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한울님이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끝내 나와 한울님은 하나다' '인간이 바로 신이다' 하는 것이 인내천(人乃天)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동학에는 '나만 한울님이 아니다. 내 이웃도 한울님이다' 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도 있습니다.

표층종교는 문자주의를 고집합니다. 성경이나 여러 경전에 있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층종교는 이와 대조적으로 '문자 너머를 보라', 류영모 선생님 용어로 '속나를 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신을 경험하는 일은 너무나도 엄청나 도저히 문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종교 경전은 결국 상징이나 은유를 통해 그 경험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징적 은유적인 문자는 그 경험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경험 자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걸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 믿어라' 라는 것은 성경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합니다. 문자에 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한국 기독교의 다수는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나온 것이면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손가락만 보고 있으면 안 되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표층종교는 자기만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합니다. 독선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 프란체스코 교황은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못한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제일 큰 동창회가 교회 졸업동창회라는 말도 있다던데요. 교회 신자가 감소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지요? 교회보다 훨씬 재밌는 것이 많기 때문인가요?

“교회가 문자주의에 매달리면 그 문자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6일 만에 창조되었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태양 보고 '서라' 했더니 태양이 섰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성경의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하면 요즘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심청전을 보면 심청이가 물에 빠져서 용궁에 갔다가 연꽃에 실려 송나라 황후가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심청전의 메시지가 중요한 거지, 용궁이 정말 있느냐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성경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거지 이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들을 그대로 믿으라고 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소위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고 하는데, 가나안은 '안 나가'를 거꾸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인데…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가 쓴 책 제목이 입니다. 지금 기독교인이 죽고 나면 기독교인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회도 졸업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동창회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미국은 그래도 서방국가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은 셈입니다. 북유럽 쪽은 기독교인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북구의 제일 잘 산다는 세 나라에는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라는 겁니다. 기독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나 필요하지 그 외에는 별로 상관없는 사회가 된 거예요.”


다석 류영모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 왼쪽부터 방수원 현동완 류영모 김흥호 함석헌.

-이 인터뷰의 문패가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유영모'지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함석헌과 다석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해주시죠.

“함 선생이 오산학교에 다닐 때 다석이 교장으로 오셨어요. 그 전에 평교사로 가서 한 몇 년 가르치다가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나올 때 다석은 표층적(表層的)인 기독교를 버렸습니다. 두 살 아래인 동생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무리 기도를 해봐야 효험이 없어 기복신앙이 소용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톨스토이가 죽으면서 붐이 일었을 때 다석도 톨스토이에 관심을 갖고 그를 연구했습니다. 그 무렵 노자의 도덕경과 불경을 배웠습니다.

함석헌 학생이 교장으로 온 다석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석도 함 선생을 특별한 제자로 생각했습니다. 다석이 일제의 간섭으로 1년 만에 교장 노릇을 못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함 선생이 배웅하러 나가는데 다석이 '내가 오산에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보네'라고 특별한 관계임을 말했습니다. 그 후에 계속 사제 관계를 유지했는데 나이는 10살 차입니다. 생일이 똑같습니다.”
함석헌은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다석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당대에는 함석헌이 세속적으로 다석보다 유명했다. 그가 입만 열면 "다석이 나의 스승"이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석을 알게 됐다. 오 교수는 캐나다와 한국에서 여러 번 함석헌을 만나 깊게 교류하면서 다석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오 교수는 다석을 만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생각한다고 책에 썼다.

-말년에 두 분 관계에 묘한 갈등과 결별이 생깁니다. 다석 제자인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전기>에 보면 함 선생의 여자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옵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여자 문제는 흠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세계 종교인 57명의 반열에 함 선생님을 올린 뜻이 궁금합니다.

“조금 곤란한 질문인데 나름대로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에 거론된 사람 중에 여자 문제와 관계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겸 종교학자로 꼽히는 폴 틸리히도 여자 문제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실존철학의 대가 마르틴 하이데거, 인도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마하트마 간디도 여자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도 마찬가집니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이름 높아진 다석

함 선생님의 문제를 알지만 그런 문제보다는 함 선생님의 심오한 사상, 실천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과(功過)가 있는데 저는 공을 보고 그 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론토에 사는 목사님이 나 보고 '폴 틸리히가 여자 문제가 있는데 왜 자꾸 인용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폴 틸리히의 깊은 통찰은 내가 종교를 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다석이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바꿔놓고,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서 정작 본인은 나중에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함석헌 선생이 한때 따르던 무교회주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요? 다석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과 탈(脫)종교화 현상은 다른 건가요?

“다석은 미리 깨달은 거죠. 문자주의적 믿음이 현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거죠. 계몽주의 이전 시대에서는 목사나 신부,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거의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몽주의 시대가 지나가고, 현대 과학 생물학이나 심리학 같은 학문이 발달하고, 특히 인터넷 속에서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데, 2천, 3천년 전의 세계관과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교리를 강요하는 종교는 설득력이 있을 수 없죠. 지금 그런 걸 강조한다면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입니다.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죠.
그런데 류영모 선생은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었어요. 함석헌 선생이 처음에는 김교신 등 무교회 사람들과 같이 <성서조선> 운동을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도 무교회주의에 처음에는 호응했지만 나중에는 결별합니다.

일본인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신학은 소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류영모 선생님의 해석은 완전히 달라요. 류영모 선생은 사상을 풀어갈 때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를 가지고 풀이합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에서 세로로 선 것이 사람이고 가로로 누운 것은 땅, 위의 점은 하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이냐, 인간이 땅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하는 표시'라고 풀이합니다. 대속(代贖)신앙이 아니라 자속(自贖)신앙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인데 정통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서 예수가 죽음으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다석은 그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자기의 씨(신성)를 각 사람 속에 심어줬다고 해석합니다. 우리 속에는 전부 신성이 있고, 불교에서는 그걸 불성, 유교에서는 인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참나, 얼나 이런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하늘에서부터 주어진 씨라고 보는 것이죠.”

-미국에는 교회 신자들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며 예배를 드리면 스트레스가 줄고, 가깝게 지내는 교우도 생기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생각하며 나쁜 유혹에 덜 빠지고… 그런 착한 신앙도 기복신앙, 표층 종교라고 비판할 수 있는 겁니까?

가나안 교인과 안나가 교인


“저는 교회의 공동체적 요소를 좋게 생각합니다. 서로 가깝게 지내면서 돕고, 우의를 다짐하는 것은 좋습니다. 제 형님도 미국 LA에 사는데 교우들이 모여서 매일 아침 골프 치러 가고…. 세상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은 교회 말고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형제나 일가친척도 그렇게 자주 만나지 않지요.

그러나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갈등과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목사 편과 장로 편, 오래된 신도와 새 신도 편 등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고 호소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교인들, 거꾸로 '안나가' 교인들이 많아지는 것이지요.

교인들이 오래 산다는 말이 정확한 통계에서 나온 말일까요. 교회에 안 나가는 북유럽 나라들의 평균 수명이 더 길 것 같은데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제가 LA 어느 목사님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목사 사모들의 경우 생명보험비가 더 높다고 하더군요. 스트레스가 아주 높기 때문이죠. 목사 사모라는 특수 위치 때문에 자기의 전공을 살리지도 못한 체 교회에 묶여 있어야 하고, 남편 목사가 여신도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불평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교회가 사교적이고 즐겁기 만한 모임이 아니고, 자기들의 이기적 '제나'를 추구하는 투쟁의 장소가 되기 쉽습니다. 이상적인 '얼나'를 찾는 장소로 적합한지 다시 생각해봐야죠.”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박하늘 인턴기자)

<오강남 교수 약력>
- 1941년 출생
- 1965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학사
- 196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석사
- 197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76년 캐나다 맥마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Ph.D)
- 1980~2006년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비교종교학 교수
- 1986, 2011년 서울대학교 객원교수
- 1990~98년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
- 1991~96년 북미한국인종교학회 회장
- 저서 "도덕경"(1995, 개정판 2010), "장자"(1999년), "예수는 없다"(2001, 개정판 2017년)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2011, 개정판 2019) 등 다수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④ 오강남 교수 <下>






내가 오 교수와 처음 만난 것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하던 2001년경이다. 오 교수는 그때 현암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펴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개안(開眼)을 하는 느낌을 받고 동아닷컴에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을 읽은 오 교수가 서울에 왔을 때 신문사로 찾아와 처음 만나게 됐다. 그 뒤로 나는 종교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그에게 전화나 메일로 자문(諮問)을 했다. <예수는 없다>는 2001년 5월 초판이 나온 이래 개정판까지 42쇄를 찍은 장기 베스트셀러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보면 정통 기독교인 중에는 오 교수의 안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기독교 계통의 어느 목사가 ‘하느님 보호해주심으로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고, 설사 감염되더라도 성령의 불로 깨끗이 낫게 되리라’고 장담했는데 그 사람도 코로나에 걸렸어요. 트럼프처럼요. 오 교수가 최근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교회’라는 글에서 ‘교회에 모여서 코로나를 낫게 해달라고 합심 기도를 하는 그 집회 때문에 코로나가 더 확산된다’고 지적했던데요. 하느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건가요?

“전광훈 목사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기도나 종교 행사와는 관계가 없고, 방역이 중요합니다. 마스크를 쓰느냐, 손을 잘 씻느냐, 혹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막을 수 있는 거지, 기도한다고 안 걸리는 게 아닙니다. 코로나가 ‘저주냐, 축복이냐’ 하는데 저주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저주도 되고 축복도 된다고 봅니다. 코로나를 기도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모이면 점점 퍼지고 이건 저주가 돼요,

예수님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고, 한두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함께 모여 예배를 할 수 없다고 야단인데, 비대면으로 조용히 예배 드리고, 이런 기회에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 속의 얼나를 찾는다면 축복이겠지요. 내 속에서 우러나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 혹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 얼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글에서 코로나 이후 소위 기복(祈福)신앙,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내려온 인과응보 사상이 힘을 잃을 것 같다고 했는데요.

“하느님이 착한 사람에게 상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 준다면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죄를 지어 그렇게 됐고, 걸리지 않은 사람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게 되죠. 코로나 걸린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것입니다. 세월호에서 죽은 순수한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인간이 겪는 행복과 불운을 신의 상벌(賞罰)로 가르는 것은 오늘날 먹히지 않는 사상입니다. 그걸로 사람을 협박하면 안됩니다. 달라이 라마가 <종교를 넘어>라는 책에서 “인간이 잘해서 나중에 극락 간다, 못해서 지옥에 떨어진다, 이런 식의 협박이나 회유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면 속에서 좋은 일을 하면 즐겁고 나쁜 일을 하면 스스로 고통이 되는 것을 감지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성지 포탈라궁 앞에서. [사진=오강남 제공]

-오 교수가 한국에서 신흥종교가 번성한 데는 정감록 비결의 영향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데요. 이제는 국립공원이 된 계룡산에 옛날엔 불교, 기독교 계통 신흥종교가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도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풍수설이 전해지고 비결서에 새 왕조의 터전으로 지목되면서 신흥종교들이 모여들었다는 거지요. 왜 기독교계 신흥종교들까지 십승지지를 찾아갔을까요.

“한국의 신흥종교는 대체적으로 혼합종교적(syncretic) 특색을 가집니다. 이것저것 필요하다면 다 받아들이지요. 예를 들어 절에 삼신각이 들어와 있다든가, 기독교에서 새벽 예배를 드린다든가 하는 것은 한국 샤머니즘적 요소가 들어온 것이라 봅니다. 정화수 떠놓고 장독대 앞에서 빌던 치성의 연장이죠.”

-한국 교회가 일제시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급성장했고, 서울에는 궁전같이 크고 화려한 교회들도 많은데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한국 교회는 복 받고 부자 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머리 둘 곳이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으리으리한 건물을 짓고 거기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모순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한국 기독교 상당수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황금을 섬기는 맘모니즘(mammonism)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 하면 대형교회를 떠올리기가 쉬운데, 내가 아는 몇몇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은 참 존경스러워요. 교회를 나오는 사람이든 안 나오는 사람이든 아이들을 통학시켜주고, 어려움을 도와주지요. 상당수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제왕과 같죠. 천국에 가도 그보다 좋은 대접을 받긴 힘들 겁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대체로 배타적이죠. 왕왕 불상 훼손 행위를 저질러 사회적 물의를 빚는데요. 다석 사상은 기독교 유교 불교에다 노장 사상까지 들어가 있으니 정통 기독교 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통 기독교인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사실이죠. 종교학을 창시했던 독일인 막스 뮐러가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한 말을 들려주고 싶군요. 여러 종교를 뒤섞고 혼합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내 종교라도 어떤 위치에 있는 건지, 어떤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지, 서로 비교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스 큉은 '종교 간 대화가 없으면 종교 간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 평화가 없으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대화를 해서 네 종교가 어떤 것인가, 내 종교가 어떤 것인가 알아야 합니다. 요즘은 타종교라는 말도 안 쓰고 이웃 종교라고 합니다. 이웃 종교가 서로 상생하고 도와주는 길벗으로서 살아가면 서로 좋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힘쓰게 됩니다.”

동서양 종합한 독창적 종교 사상

‘종교 없는 삶’의 저자 필립 주커먼(Phil Zuckerman)은 '오이즘(Aweism·경외주의)'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종교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는 삶의 태도다. 캐나다와 미국의 알래스카 주에서는 태평양에서 자란 연어들이 자신이 태어난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어 사냥꾼인 물개나 곰이 목을 지키는 위험한 여로다. 밴쿠버에 있는 오 교수의 집 옆으로도 태평양으로 통하는 개울이 있는데 10월이면 알을 낳기 위해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을 만날 수 있다.

암컷들은 목숨을 걸고 수천km 떨어진 고향을 찾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 그러면 수컷들이 알을 부화시키고 따라 죽는다. 오 교수는 이것을 아하이즘(Ahaism)이라고 바꾸어 부른다. 봄에 파란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온다든가, 겨울에 앙상한 가지에서 꽃이 핀다든가 그런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대우주의 움직임이나 신비스러움을 발견할 때 ‘아하’하고 감탄하는 것을 ‘아하이즘’이라고 한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아하’ 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아우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기적인 것은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어느 쪽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오 교수는 종교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산 밑에서는 약간의 나무와 꽃들이 보이지만 올라갈수록 멀리 호수와 넓은 들판이 보인다. 그 때 ‘아하!’ 하게 된다. 새로운 발견이다. 종교는 어느 면에서 ‘아하! 경험의 연속’이다.
“옛날에는 깨달음을 얻었다든가 심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 했어요. 왜냐면 그때는 98% 이상이 문맹이었어요. 심층종교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앉아서도 미국, 유럽 유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하이즘’ 혹은 심층에 접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 겁니다. 그러니까 ‘심층종교의 민주화’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항아리에 담겨 있다 1600년만에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이집트의 고대어인 콥트어로 기록돼 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농부가 밭에서 발견한 항아리 속에서 도마복음이 출현했습니다. 오 교수님은 도마복음 해설서도 썼는데요. ‘오강남 복음’이라고 혹평하는 목사들도 있더라고요. 도마복음은 기독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4세기경 니케아 공의회에서 승자가 된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승리의 여세를 몰아 4복음서 외에는 모두 폐기처분 하라고 명령했는데, 나그함마디에 있던 사원에서는 나중에 다시 찾아보려고 그랬는지 항아리에 넣어서 땅에 묻었어요. 그러다가 1600여년이 지나 1945년에 발견되었는데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어록 114개만 기록되어 있어요. 행적에 관한 것은 없어요. 예수의 수난이라든가,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에 관해서도 없습니다.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치라’고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은 ‘믿으라 믿으라 믿으라’ 그러잖아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도마는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대비되는 도마복음은 믿음(pistis)이 아니라 깨달음(gnosis)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깨달아야만 거기에서 종교가 줄 수 있는 참된 청복((淸福)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도마복음의 특징입니다.

나의 ‘도마복음’ 풀이에 다석을 몇 번 인용했습니다. 도마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땅 주인이 와서 땅을 되돌려 달라고 하니 그 아이들은 땅 주인이 보는 데서 자기들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다석도 삶을 ‘놀이’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묶고 묶이는 큰 짐을 크고 넓은 ‘한데’에다 다 싣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 버려야 한다. 다 벗어 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 한데로 날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도마복음은 ‘홀로’를 강조하는데, 다석도 해혼하고 홀로 되심을 실행했다고 봅니다.

도마복음과 4복음서는 상당 부분 겹치지만 겹치는 부분도 의미를 달리합니다. 예를 들어 4복음서에서 양이 우리를 빠져나와 길 잃은 양이 되지 않습니까? 불쌍한 양이 되어서 예수님이 양을 안고 다시 우리로 들어온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도마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길 잃은 양이 아니라, 99마리의 양들과 달리 너무 특출하기 때문에 거기에 그대로 섞일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스스로 그 무리를 탈출해서 자기 나름의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용감한 양입니다. 그래서 양을 찾았을 때 예수님이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더 귀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은 용기를 가지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를 강조합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엘레인 페이젤스(Elaine Pagels) 교수는 도마복음 전문가인데, ‘도마복음이 만약 폐기 처분되지 않고 기독교 전통의 일부로 남아있었다면 지금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훨씬 쉬워졌을 것’이라는 얘기까지 합니다.
도마복음에서 하는 예수님 말씀이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제 책 제목을 ‘또 다른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문 마지막에 ‘도마복음이 기독교와 불교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99마리 이탈한 한 마리 양은 자유로운 영혼

-오 교수가 ‘교회를 지배하는 신학은 암흑시대라고도 하는 중세와 근대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면서 ‘교회를 개혁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신학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아까 말한 대로 무엇보다 신관(神觀)이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하늘 위에 계셔서 낮고 천한 인간을 보시면서 잘한 사람은 칭찬하고 못한 사람은 벌주고 나중에 죽어서 잘한 사람은 천당 보내고, 못한 사람은 지옥 보내고, 이런 식의 신관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걸 가지고 교회를 유지하는 방식은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유럽 같은 데서는 안 되잖아요.
지금 젊은이들은 ‘나는 종교적이 아니다. 나는 영성적이다’하는 말을 씁니다. ‘전통적인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내 속 깊이의 영적인 영성에 주목하고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고 나를 찾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신관과 성경관 역사관이 통째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맞는 패러다임에 입각한 그런 기독교가 탄생해야지요. 그것이 제가 말한 심층종교적 요소를 받아들인 기독교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이 류영모 함석헌 선생이 지향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종교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

-다석 류영모의 기독교관을 보면 톨스토이가 상당히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요.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다석은 독창적이라서 어느 한 사람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명상해서 발견한 것을 독창적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 괴테, 이런 사람들보다 어느 면에서 더 위대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사람들은 서양에서 태어나 서양 사상만 가지고 생각했어요. 공자나 노자는 동양 사상만 가지고 생각했고요. 다석은 동양 서양 한국까지 다 알아서 종합적인 사유를 했고, 특별히 한국말을 가지고 자신의 독특한 신학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빈탕 한데’라든가, ‘가온 찍기’라든가.
특히 하느님을 말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하느님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해요.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신이 절대적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없어요. 그렇다고 없다고 말하려니 그것도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노자의 경우는 ‘무’라고 하지만 류영모 선생은 둘을 합해서 ‘없이 계신 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는 불교의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과 비슷한데요. 한문보다는 얼마나 우리한테 착 들어맞는 말입니까.”

-다석 류영모의 종교 철학과 사상이 표층종교적인 신학을 개혁하는 데 빛이 될 수 있다고 보는지요?

“그럼요. 류영모 사상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자극 받아서 새로운 설명 방법이 나와야죠. 새로운 세대에 의미 있는 방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해주는 겁니다. 함석헌 선생은 ‘껍데기를 붙들고 있는 정통 기독교는 역사의 골목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한국에서 지금은 근본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얼마 안 가서 근본주의는 지탱할 수 없을 겁니다. 2015년 통계에 의하면 그 전 10년 사이에 종교인구가 300만명이 줄어들었어요. 어느 목사가 한국에서 코로나 사태 이후 교회 1만개 정도는 없어질 거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넷 예배를 본다지만 교회에서 떨어져 있으면 헌금을 덜 하게 되니 종교는 앞으로 더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는데 어쩌다 세계 각국의 종교를 비교연구하면서 때로는 개신교를 비판하는 길로 나가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0리를 걸어서 경북 안동읍 교회에 갔습니다. 바로 위의 형님이 서울에 있는 교회학교를 다니다 방학 때 내려와 종교와 성경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관심이 커졌어요. 그래서 중학교를 교회학교로 갔습니다. 중학교 1학년, 2학년까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흥미로웠는데 3학년 때 터는 의문 투성이였습니다. 종교에 대해서 뭔가 새롭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와중에 고등학교 때 루돌프 볼트만의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조그마한 책을 읽었습니다. 유동식 교수가 번역한 그 책을 읽으면서 종교를 좀 더 객관적으로 알아보겠다는 마음에서 종교학과를 택했습니다. 그 당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분위기는 주로 서양 종교사상이나 종교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거기서 대학원을 마치고 캐나다 유학을 가서 보니 그 학교는 서양종교와 동양종교를 반반씩 가르치고,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서양종교를 부전공으로, 서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동양종교를 부전공으로 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으로 나갈 때 세계종교를 가르칠 수 있는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그때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150년경~250연경)의 중관론(中觀論)을 연구한 세계적인 학자 T. R. V. Murti 교수의 강의를 1년 들으면서 종교 이해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노장사상과 선불교를 공부하고 화엄 철학에 관한 학위논문을 쓰게 됐습니다. 기독교 교적을 자진해서 정리하고 나니 종교에 대해 홀가분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독자가 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죠.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새로운 시각을 발견했다는 사람들도 생기죠.”

종교 높이 오를수록 멀리 보인다

밴쿠버는 여름에는 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 않은 동네다. 겨울이 되면 낮에는 7도, 여름에는 낮에 더울 때가 25도고 30도를 넘어가는 일이 없다.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온다.
“화상 인터뷰를 하는 지금도 밖에 비가 오고 있습니다. 그 대신 4월부터 10월 초까지는 한국의 초가을 같은 청명한 날씨입니다. 단점을 찾자면 여기는 일자리가 별로 없고 집값이 비싸지요. 그런데 밴쿠버 교민들 중에 여기가 999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천(1000)당에서 한 끗 모자란다고….”
오 교수는 서재의 블라인드를 걷으며 마운드 베이커의 산자락을 보여주었지만 서재 밖의 원경(遠景)은 줌 화면에 잡히지 않아서 아쉬웠다. 아들 셋에 손자는 네 명. 자손에 모두 ♂만 있다. 며느리 둘이 모두 한국계인데 북미에서 태어나 오래 살다 보니 평소에도 영어 이름으로 부른다. 셋째 아들은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여자 친구가 중국계 싱가포르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외할아버지가 한국계다. 두 남녀가 아마 한국계 DNA에 끌려서 가까워졌을 수도 있다.

내가 “50대 중반 무렵의 오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 같은데 지금 팔순에 접어들었죠”라고 묻자 “내년이면 80”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생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말해주시죠. 이 답변을 끝으로 국제 화상 인터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쓴 책의 대부분은 제가 먼저 쓰겠다고 한 것은 거의 없어요. 어디서 부탁을 해서 쓰거나 연재를 한 것을 모아서 쓰거나 한 거죠. 지금도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요청이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책 쓰는데 바쳐야 할까요. 제가 쓴 책 중에 영어로 번역하고 싶은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여력이 있으면 그걸 번역하려고 생각 중이죠. 여기저기 강연 요청이 있는데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못 갔습니다. 올 10월에는 한국 종교 발전 포럼이라고 하는 모임에서 강연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때까지는 상황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골프도 열심히 치려고 합니다. 코로나 끝나면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물 흐르듯이 사는 게 제 라이프 스타일입니다.”(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박하늘 인턴기자)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9-⑩ 심중식 소장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 아주경제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24 


다석은 통일 대신 귀일(歸一)하자고 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17 17:09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⑨ 심중식 소장<上>

광주 동광원과 벽제 동광원은 육신의 즐거움을 끊고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산 무명(無名)의 성자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 류영모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석은 1948년 광주 동광원 수양회에서 첫 강의를 했고 1971년 여름 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광주에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다석이 81세이던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강의는 학력이 낮은 동광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석의 신앙과 생각을 풀어내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이 오래 돼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테이프를 원음에 충실하게 풀어 <한나신 아들 예수>라는 책으로 펴냈다.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1877~1942)은 집안이 가난해 어린 시절부터 머슴으로 살았지만 근검절약해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무학의 이세종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며 차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도 잘 수 없다”며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태워버렸다. 창고 문을 열어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길 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대접해 보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수도자의 삶을 살던 이세종은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생활을 끊고 해혼(解婚)을 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육식도 금했다. 그가 부엌 구정물 통에 빠져 버둥거리는 쥐를 구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주식은 쑥범벅이었다. 그는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가 기도터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193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은 전남 화순에 살던 기독교인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신학잡지 <새사람>에 “도암의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로 소개했다. 정경옥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세종은 세속적 명리와 욕심을 끊겠다며 원래 이름을 버리고 ‘빌 공(空)’자를 써서 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마하트마 간디와 이공이 실천한 일일일식(一日一食)과 해혼을 다석도 따라 했다. 이공의 수제자가 바로 이현필이다.


벽제 동광원 뒷산에서 심중식 소장.[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은 1946년 서울YMCA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를 듣고 이세종의 자취를 찾아 화순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공이 작고한 지 몇 년 뒤였다. 현 총무는 세계의 성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다석과 현 총무를 광주역으로 이현필(1913~1964)이 마중 나갔다.
이현필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발생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6·25 전쟁 중에는 600여 고아들을 보살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폐결핵 환자들을 거두어 주었다.
이현필과 마더 테레사(1910~1997)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생 동안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낮은 자세로 섬기며 살았다. 이현필은 가톨릭 같은 교회나 조직의 지원도 없었다.
이현필은 스승 이공의 가르침에 따라 이나 벼룩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 길을 다니다 벌레를 밟아 죽일까 염려해 맨발로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의 불(不)살생 교리 형성에 영향을 준 인도 자이나교의 수행자들과 비슷한 삶의 자세였다.
다석은 당대에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릴 만큼 지식인 사회에서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이현필은 변변한 학력이 없는 초라한 시골 청년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진리를 구하는 정직한 구도자로서 식색(食色)을 초월하여 절대이신 하나님만을 모시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광주를 빛고을이라는 우리말로 처음 고쳐 부른 사람도 다석이다.

食色을 초월하는 하루 한끼와 해혼(解婚)

벽제 계명산 앵무봉 골짜기에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움막이 있었다. 1956년 현 총무를 따라왔던 정한나 수녀가 이듬해 이희옥 박공순 수녀와 함께 수도처를 개척했다. 수녀 세 사람이 농사를 짓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수녀골이라고 불렀다. 이현필은 1964년 52살 때 광주에서 이곳을 찾아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벽제 동광원은 다석이 살던 구기동에서 두 시간 정도면 걸어서 올 수 있는 곳이다. 다석은 웬만한 거리는 모두 걸어 다녔다. 다석은 가끔 이곳에 와서 동광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도 하고, 예배도 보았다.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도 벽제리 웃골에 살았다. 다석은 벽제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정재용의 집을 찾았다.
동광원, 귀일원, 귀일사상연구소 등은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자매 기관이다. 현재(鉉齋) 김흥호 목사가 다석의 뒤를 이어 동광원 수양회 강사를 하다 2002년 경부터 나이가 들어 그만두면서 심중식 귀일사상연구소장이 강사를 맡았다. 현재는 다석이 아끼는 제자인 김 목사에게 내려준 호다.

-이현필 성인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나중에 부부관계를 끊는 해혼을 했습니다. 금욕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현필 선생이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사랑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자기를 극복하려는 고신극기의 삶을 사셨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시 거의 모든 국민이 하루 한끼도 제대로 못 먹고 굶주리던 시절이었죠. 전쟁 통에는 하루에 고구마 몇 개로 연명했습니다. 내가 안 먹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먹지 않겠는가, 그런 자비와 사랑에서 우러난 행위였지 자기학대는 아니었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 사람들은 귀일(歸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다석이 1955년 6월 2일에 쓴 일지를 보면 귀일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統一爲言 人間譌 (통일위언 인간와)
歸一成言 天道誠 (귀일성언 천도성)

한시를 풀이하면 이런 뜻이죠. ‘통일(統一)을 이루겠다 떠드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거짓이다. 귀일(歸一)하여 말씀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요, 진실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일하겠다고 야단을 쳤습니까.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이념 때문에 남북으로 갈려서 서로 싸우면서 계속 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6·25 전쟁 3년 동안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분단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다석은 정치지도자들이 떠드는 통일이란 말을 싫어했습니다. 다 제 욕심에서 나온 통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극복하여 무아(無我)가 되어 진리이신 한 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길에 순종하는 통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이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 너도 없고 나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자는 운동입니다. 귀일의 의미가 다석과 이현필에 의해서 기독교식으로 해석되고 공동체적 사회원리로 확장되었지만 이 말은 원래 선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우주 만물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라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법화경에 일승(一乘)을 설명하면서 ‘회삼귀일(會三歸一 · 셋이 모여서 하나로 돌아간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비해 통일은 해방 후 분단된 조국 현실을 놓고 나온 정치적 의미의 새로운 용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은 통일을 말하지 말고 귀일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각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진실이 되면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 전쟁이 부른 참화

이현필은 말년에 정인세 원장에게 ‘귀일원을 하시오’라고 권했습니다. 귀일원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거나 버림받는 영혼이 없는 그런 민주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귀일원은 현재 약 150여명의 장애인들과 50여명의 직원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 직원들 가운데 동광원 출신은 거의 은퇴하고 수녀님들 몇 분이 함께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다. 심 소장은 귀일원의 천사 복은남 수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복 수녀는 이현필의 초기 제자로 여러 언님(다석이 만든 말로 동광원에서는 수사 수녀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따랐다.
“복 수녀는 귀일원에서 어려운 환우들을 돌보며 생활했는데 언제나 그 얼굴이 화평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맡은 환우 중에 사고를 당하여 꼼짝도 못 하고 24시간 누워 지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우의 얼굴이 항상 밝아 차츰 사람들에게 천사의 얼굴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환우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한 천사의 얼굴을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복은남 수녀였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날마다 그 환우의 침대 밑에서 생활하며 조금이라도 환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일어나서 수발했습니다.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과 목욕, 자세를 돌려주고 옷 갈아입히고 세수를 시켜주고 온종일 쉴 새 없이 돌봤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을 한결같이 지극 정성을 다하자 환우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복 수녀에게 ‘얼마나 힘드시냐’고 물으면 “힘들다니요? 제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번화한 도시에 있는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이지만 지금까지 쇠창살 자물쇠 등의 격리시설이나 통제 없이 한 가족이 되어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저절로 동화되고 치유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헌신성과 영적 감화의 능력이 대대로 축적되어 흐르는 곳이 귀일원이라 하겠습니다.”



이현필 묘소 앞에서 대담하는 심중식소장(왼쪽)과 인터뷰어.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 신앙공동체가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아와 불치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동광원은 1965년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귀일원에서 정신장애 및 지체장애인들을 보살피던 언님들이 정년 퇴임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남원시 대산면에 새로 터를 닦아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그것이 현재의 남원 동광원이다. 동광원과 귀일원은 이현필의 제자들이 세운 신앙공동체이자 사회복지 봉사 기관이다. 2010년부터 귀일원에서 귀일사상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 귀일사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시절 함석헌 선생과 <씨알의 소리>에 접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지요. 그러다 방향을 전환해 1981년부터 현재를 찾아가 다석을 공부하고 실존적 신앙을 배우게 됐다면서요?

“시골 출신이라 서울에 대한 동경이 무척 컸습니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에 들어와 보니 고등학교 시절과 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제 남과 경쟁하는 일은 그만두고 내가 갈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막했습니다.
몇몇 동아리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에리히 프롬의 책을 시작으로 역사학 및 사회과학 서적을 보면서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학교에서 몇 번 데모를 하고 친구들을 따라 함 선생 집회에 참석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독재 타도! 민주평화통일 만세!’ 라고 외치지만 저에게는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목숨이 아까웠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처음으로 실존적 물음을 해보면서 내 자신이 백지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와 성경 그리고 기독교를 알고 싶어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함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구독하고 동양 경전들을 읽어보고 김태길 교수님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18을 겪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만난 분이 현재였습니다. 현재가 이끄는 이화여대 연경반(硏經班)에 처음 참석했을 때 선생은 시국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종교철학적인 이야기만 하니까 너무 현학적이지 않은가 하고 거부 반응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하루 한끼를 먹으며 세속을 초탈한 도인같은 느낌이 들고 동양경전과 성경을 새롭게 그리고 쉽게, 깊은 내용으로 풀어주는 것을 보고 차츰 말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시고 일식(一食)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참 스승을 모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독특한 해석이 제게 천둥 같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바울 사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요한 사상으로 기독교를 다시 살려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은 로마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지만 요한복음이야말로 동양인을 위한 복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어떻게 동광원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연경반에서 현재는 다석뿐 아니라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에 대해 가끔 말했습니다. 1985년 박영호 선생의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전기를 읽었습니다. 엄두섭 목사가 1977년 쓴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도 봤습니다. 현재는 다석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이현필 선생을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옷 속에 있던 이가 소매로 기어 나오니까 그것을 잡아서 너도 함께 살아야지 하면서 다시 자기 품속으로 집어넣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YMCA 화장실이 아주 더러운 공중화장실이었는데 이 선생이 제일 깨끗한 화장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선생께서 직접 또는 제자를 시켜 계속 청소하고 관리를 하니까 가장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더러운 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가장 척박한 땅을 가장 비옥한 옥토로 만드는 사람들이 이현필의 동광원 사람들이라고 김흥호 선생은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벽제 동광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동광원 간판이 없었습니다. 허름한 토담집들이 두어 채 있는데 거기가 동광원이었습니다.
그 당시 현재가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강사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현재가 동광원 수양회에서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는 찾아오기 힘들다고 하자 동광원 사람들이 제자라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내가 처음으로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석, 현재,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3대(代) 강사라 할까요. ”

-현재의 강의를 녹취 편집해 주역, 원각경, 양명학, 법화경, 화엄경 강해를 펴냈는데요.

“1981년 현재의 이화여대 연경반에 출석하면서 종교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관심은 진리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석이 52세에 중생(重生) 체험을 했다는데 그게 어떤 것일까. 현재는 35세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체험일까.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나 모두 거듭남의 체험을 가졌는데 나는 언제 어떻게 하면 그런 체험을 가질 수 있을까?
현재는 늘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듣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자 선생의 말씀이 점점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깊이 심취해서 듣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거의 다 알아듣는가 싶었지만 그게 곧바로 제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의 말씀이 어떻게 하면 나의 이야기로 될 수 있을까?
그걸 놓고 고민하다가 현재와 좀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붓글씨를 배웠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댁으로 찾아가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배우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다시 댁으로 모셔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1992년 5월 5일 새벽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적 차원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동광원 옆에 있는 현동완 YMCA 총무의 기도터. [사진=황호택]
그후 나도 일식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강의를 녹취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석의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人)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식과 해혼(解婚)은 일언이고, 일좌는 현재의 강의를 듣는 것이고, 일인(一仁)은 녹취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다석이나 현재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입니다. 일식은 주야통(晝夜通)이요, 일언은 생사통(生死通)이요, 일좌는 천지통(天地通)이요, 일인은 유무통(有無通)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역강해>로부터 시작하여 <법화경 강해> <화엄경 강해>까지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땅 파고 김 매며 농사짓고 예배드리는 일이 동광원의 일상인데요. 이런 수도자적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수도자로 사는 삶, 그것이 가장 자연스런 삶이요,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삶이요,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일상적 수도자의 삶이 되면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고단하면 자는 생활, 그처럼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까, 자유요, 평화와 기쁨의 삶이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길은 좁고 험난합니다. 선불교에서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1단계에서 얻는 평상심은 도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2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에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라 하는 3단계에 이르러 고요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런 평상심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마지막 수도자의 삶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3단계를 심우도(尋牛圖)에서는 10단계로 표시하는데 일체 공(空)이 되었다가 마지막에 시정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서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공자로 말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입니다.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평상심이 되니까 이제 마음대로 해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그런 자유의 경지입니다. 동광원에서는 일생 험난한 온갖 역경을 겪고 난 뒤에 일체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언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심중식 소장 약력>

-1957년 출생
-1977~81년 서울대학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대학시절 5.18을 겪고 좌절을 겼다 이화여대 김흥호 교수를 만나 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와 주체적 신앙을 알게 됨
-1981~83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
-1981~2011년 30여년 동안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에게 동양경전과 성경을 배움.
-1992년부터 일일일식하며 스승의 강의를 녹취 편집하여 주역강해, 원각경강해, 양명학공부, 법화경강해, 화엄경강해 등을 출간.
-2003년부터 다석과 김흥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자생적 기독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 귀일원에서 수양회 강사로 참여
-2010년 귀일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며 귀일영성학교 운영중
-2018년 <맨발의 사랑 이현필의 삶과 신앙> 편저
-2020년 다석이 1971년 8월 광주 동광원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한나신 아들 예수>를 편찬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⑩ 심중식 소장<下>

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한나신 아들 예수>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를 들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기성교회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석이 강의할 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듣는 이는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금남 등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한 사람, 아니 반 사람만 있어도 그 영혼을 위해 말씀을 다했을 분입니다. 그리고 다석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마디라도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사는 동광원 언님들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옥남 언님은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룬 일을 이루어라”는 구절을 늘 외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언님은 “있다시 온 옛다시 간 없이 있을 나”라는 구절을 외며 살았습니다. 수녀 수사로서 순결과 초월의 믿음으로 사는 그 수도의 길에 다석이 동행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요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벽제 동광원을 자주 찾았던 다석

-심 소장이 책으로 출간한 다석의 마지막 강의는 다석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석은 책을 저술하지 않고 20여 년 간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일기를 모아서 나온 책이 <다석 일지> 4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로 시(詩)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석 직제자들의 풀이를 읽어봐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가 간단히 해설을 붙인 <다석일지 공부> 7권을 솔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속기사를 시켜 1년 동안 다석의 YMCA 강의를 속기한 자료가 책으로 나온 것이 <제소리>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이를 보강하고 해설을 붙인 책이 <다석강의>입니다. 그리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연경반 강의를 주규식이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박영호 선생이 펴낸 책이 <다석 씨알강의>입니다. 그리고 다석이 1971년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1주일 간 한 강의를 녹취해 나온 책이 <다석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같이 여러 책이 나왔지만 다석의 육성과 대조할 수 있는 책은 <다석 마지막 강의>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새로 <한나신 아들 예수>를 다시 편집한 경위는 머리말에 적어 놓았습니다. 다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육성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믿음과 영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다석 일지>도 다석이 직접 기록한 1차 자료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석에서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동광원 강의는 쉽게 풀어서 말한 내용이라 훨씬 이해하기 용이하고 해석상 논란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다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광원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만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것을 듣기 쉽게 책으로 나온 것이 <한나신 아들 예수>라 하겠습니다. <한나신 아들 예수>도 녹취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 자꾸 보완해 나감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책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동광원을 만들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산 성자 이현필의 초상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있는데요. 풍요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현필 선생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현필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처럼 살라고 가르치거나 본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0년대 1950년대에 거의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다 굶고 있는데 어찌 나만 배를 불릴 수 있느냐?
하늘나라에서는 맨 꽁무니가 꼭대기라 했습니다. 이현필은 버스나 기차를 타도 맨 마지막에 타고 밥을 먹어도 맨 마지막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그때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특히 강하게 의식하며 살았던 분이 무아(無我)를 추구했던 이공 이현필 선생이라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자기를 이기고 도를 실천하는 길은 식색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은 이런 길을 성령 충만의 가난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배우는 명심보감에 포난사음욕(飽暖思淫慾)이요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 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음욕이 일어나고 춥고 배고플 때 구도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을 벗어나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6.25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모시고 화학산에 들어가자 공산 빨치산들이 그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화순 도암에서 세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죄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누구보다 큰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회개와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후두 결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써서 다 치료해주고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게 되면 그때 약을 먹고 치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이 아주 귀한 시절이기 때문에 그런 비싸고 귀한 약을 어떻게 차마 자기가 먼저 먹을 수 있느냐는 심정이었습니다.
쥐나 이도 죽이지 않은 것은 전통적인 불교의 불(不)살생 신앙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에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현필이 말하길 천지는 나와 한 몸이요, 만물은 나와 한 지체라 했는데 이런 만물일체지인(萬物一體之仁)의 사랑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한 것이라 봅니다. 요새 언어로 말하면 우주적 생명의식과 생태학적 영성이 강했던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의 육성이 남아 있는 동광원 강의

-다석은 이 세상에 나온 어떤 사상이나 주의도 미정고(未定稿)라 했는데요?

“다석은 주의(主義·이즘)를 반대하였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의가 없어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민주도 주의가 되면 또 다른 전제정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정고에 불과한 그런 주의나 사상에 붙잡히면 참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 힉이라는 분이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도 진실이 있겠지만 그것도 미정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간 대화로써 평화를 이루자는 취지엔 찬동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라 하여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다석의 뜻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석은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聖賢)들이 수천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았는데 그걸 씹어 먹고 산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일이 아니고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일하자는 것이 귀일입니다.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하는 사람이고 대인은 각각 다른 입장에서 화합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아져야 한다면서도 서로 다투며 화합이 되지 않습니다. 대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각기 특성을 살려 나가야지 모두가 같다고 해서 각자의 특성을 없애려 든다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생명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심 소장은 현재(김흥호)의 제자인데요. 현재의 제자들과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이 다석을 보는 입장이 좀 다른 것 같던데요. 다석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참 크리스천이라고 보는 데 비해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탈(脫)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초극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이 얼나를 깨치고 솟나신 분이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서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하고 종교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본 거지요. 특히 박 선생이 불교의 니르바나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하면서 불교나 기독교나 궁극적 진리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시는 분들도 많은 듯합니다.



광주 동광원(지금의 귀일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여성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운데가 다석. [사진=동광원 제공]
다석은 20대부터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을 받아서 다석은 그동안 진리로 믿었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함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을 보며 자득(自得)한 것을 YMCA 연경반에 나가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52세에 성령을 체험하고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을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에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다석은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할 때 노자의 몸도 아니고 석가의 맘도 아니고 공자의 집도 아니고 예수의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석이 말하는 새로운 믿음에 들어감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52세 때인 이 당시의 믿음은 기독교 믿음이지 유교나 불교의 믿음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또 다석이 정통 기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다석이 82세에 동광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는데 그 말씀을 들어보면 다석은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참 크리스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의 동광원 마지막 강의가 다석을 연구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자로 알려진 일본의 우치무라와 한국의 김교신 선생은 제도적인 교회를 거부하고 본래의 교회를 회복하자는 분들이지요. 다석은 김교신 선생과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 기조는 조금 달랐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김교신은 바울 사상에 기초한 정통교리를 받아들인 분이고 다석은 바울 사상을 벗어난 분이었습니다. 나는 다석을 새로운 기독교 영성을 보여 주신 종교 개혁자, 또는 종교 혁명가로 봅니다. 기독교 탈출자나 초극자(超克者)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보낸 질문에 대한 서면 답변인데 상당히 길어서 분량을 줄여 싣는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다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석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로서는 다석이 기독교라는 한 종파의 교리를 넘어섰다고 하는 관점도 양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가 이화여대에서 다석 연경반을 꾸릴 때는 150~200명씩 모였다고 들었다는데요. 현재가 돌아가시고 이명섭 전 성균관대 교수가 3년 정도 끌고가다가 해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왜 오래 지속하지 못했습니까?

“이명섭 선생이 용인에서 오기 때문에 매주 참석하시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모님이 운전을 하고 모셔왔는데 사모님이 아프면서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화대학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 중심으로 연경반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했겠지요. 현동완 총무가 세상을 떠나자 다석이 하던 YMCA 연경반도 그만두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총무가 다석의 연경반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나 교단에서 신학을 한 목사들이 다석이나 현재의 사상과 신앙을 용납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거지요.”

뜻 모르고 주르륵 외는 것은 기복신앙

-다석은 사도신경에 대해 “더덕더덕 다 주워 모은 것이지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 요긴한 게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요.

“이 부분은 <한나신 아들 예수> 동광원 마지막 강의에 비교적 잘 나와 있습니다. 더덕더덕 주워 모은 것으로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생명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글을 무슨 신조라고 조르르 욀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신자들이 염불한다고 뜻도 모르고 그저 경을 읽거나 외기만 하면 부처님이 병도 물리치고 여러 액운을 벗겨주신다고 믿는 것은 기복신앙이 될 수 있지요. 사도신경도 그렇게 생명 없이 조르르 욀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지 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외워봐도 생명이 통하지 않는데 왜 이런 것을 형식적으로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도신경이 12 사도가 한마디씩 한 것을 모아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주섬주섬 모아놓은 것이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심 소장은 주역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은 모든 동양 고전에 밝았지만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주역 하면 점치는 책으로 인식하는데요.

“유교 삼경에 서경 시경 역경이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서경은 역사, 시경은 문학, 주역은 철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주역에는 우주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주역은 이진법 수리철학이라 하겠습니다. 두 기호를 사용하여 이진법을 쓰게 되면 3자리 수는 8, 6자리 수는 64가 됩니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요소를 8가지로 구분하고 인생과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64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8가지 요소들이 서로 부딪혀 일어나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그 자리는 또한 6개로 구분되어 있으니까 64 곱하기 6 하면 384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인생과 역사 사회의 모든 문제를 64개의 상황과 384가지 처지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하늘의 빛과 땅의 힘과 사람의 숨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주역의 길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합쳐져 6차원의 세계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주역에 관하여 유명한 말이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입니다. 그러니까 무극( ○ ) 태극 ( · ) 음양(∽), 이 셋이 핵심 개념인데 음양은 4상 8괘 64괘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도(太極圖)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도道(∽)를 그린 것입니다. 주역은 복희伏羲)의 체험과 문왕(文王)의 표현과 공자(孔子)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자의 해석을 깊이 생각하고 문왕의 표현을 삶으로 실천해가다가 종당에 복희의 근본체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힘과 숨을 통하여 일체지인(一体之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易經)을 통해서 지천명(知天命)하고, 이순(耳順)하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함으로 나 자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역경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우주의 원리와 인생의 윤리를 알려주는 책이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역경은 한마디로 궁신지화(窮神知化) 성덕야(盛德也), 절대자에 부딪쳐서 나 자신이 변화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벅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1964년 이현필 선생은 광주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벽제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는 계명산 골짜기의 모임에 다석은 자주 참석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석은 무릎을 탁 치시며 “아, 시원히 잘 가셨소!” 했다고 한다. 다석은 계명산을 찾아올 때마다 “이 선생~ ! 이 선생 ~”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심 소장은 전했다.
이현필은 죽기 직전에 “나는 죄인이니까 거적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 묻어라.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平土葬)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인 이세종도 산골에서 숨을 거두며 관, 수의, 비, 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제자인 이현필 선생도 세상을 떠나며 수의나 관을 쓰지 말고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관을 구해서 가까운 산 언덕에 무덤을 썼다. 1990년대 말에 동광원 출신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갔던 박찬섭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무덤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맸다. 스승의 무덤을 어렵게 찾아낸 박 목사는 ‘성인의 무덤을 이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고 주위를 설득해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글은 엄두섭 목사가 짓고, 묘비엔 현재의 붓글씨를 새겼다.
벽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광원에서 이현필과 다석의 가르침을 받은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짓자고 발의해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근사한 집을 갖게 됐다.

-수도권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서 수녀들이 밭농사 짓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이 찾아와 다석과 이현필의 정신을 잇는 영성공동체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동광원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할 때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며 신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다석과 이공의 귀일신앙으로 평신도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하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고 갱신된 교회라야 사회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양극화와 생태계 및 환경파괴, 그리고 가치관 혼돈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사상과 영성이 다석과 동광원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벽제 동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언님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계명산의 쑥과 찹쌀로 빚은 쑥개떡이 별미였다. 김치와 깍두기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채소에 젓갈을 쓰지 않아 맛이 담백했다. 점심 후에는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와 이현필 선생의 묘소, 기념관을 둘러보고 계명산을 떠났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2021/06/05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epub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홍지수 (옮긴이),오강남 (해제)김영사2017-04-10 원제 :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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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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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424쪽, 약 34.1만자, 약 7.6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샤인
ISBN : 978893497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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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의 명저다.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목차
1장 종교의 진화 | 2장 초자연적 감시자 | 3장 위로부터의 압력 | 4장 우리는 거대한 신을 믿는다 | 5장 자유사상가는 무임승차자 | 6장 진정한 신도 | 7장 거대 집단에 필요한 거대한 신 | 8장 협력과 경쟁을 부추기는 신들 | 9장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 10장 신 없는 협력 | 해제_거대한 신, 그리고 그 너머 | 주석 | 참고문헌 | 색인

책속에서
P. 53 인간과 유사한 초자연적 존재들이 인간을 감시하고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고 인간의 행동을 보상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 훨씬 설득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이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청탁도 들어주는, 자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인격화된’ 신을 원한다. 추상적이고 인간사에 무심한 신보다 인격화된 신에게 훨씬 열렬한 추종자들이 몰리는 현상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접기
P. 137 친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세속적 경로가 또 하나 있다. 협력과 높은 수준의 신뢰를 촉진하는 효과적인 제도와 기관들이다. 이런 제도와 기관이 갖추어진 세속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이라면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종교에 의해 직접적으로 동기 유발되지 않는 무신론자도 친사회성을 보일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공적 영역을 관장하는 강력한 제도가 존재하면, 즉, 계약이 이행되고 경쟁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부정행위자는 처벌받는다는 믿음이 있으면,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공히 높은 수준의 신뢰와 협력의 태도를 보인다.  접기
P. 182~183 이런 터무니없이 과도한 행위들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주로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고, 이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예를 들어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남성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거세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로마제국 초기에는 키벨레 종교가 부활해 문화적으로 확산되었다. 신심을 공개적인 행동으로 과시해 보이면 키벨레를 숭배하는 다른 신도들에게 믿을 만하다는 신호를 보낼 뿐만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포교하는 수단도 된다는 뜻이다. 즉, 문화적으로 키벨레 종교를 비신도들에게 전파하는 수단이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행태가 나타났다. 그들은 기꺼이 순교를 택하여 문화적인 귀감이 되었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믿음이 문화적으로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접기
P. 296 종교적 관행과 의식을 통해 공고해지고 사회적 결속력은 공동체를 응집시키지만 동시에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부인인지 구분하게 만든다. 흔히 강한 사회적 결속력이 본질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결속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친사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도 많다. 하지만 강력한 사회적 결속력 이면에 존재하는 추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배타심이 생기고,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폭력적 반감을 표출한다. 이런 현상을 ‘집단 간 폭력에 대한 사회적 결속력 가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접기
P. 309 죽음을 상기시키면 사람들은 자기가 지닌 문화적 신념에 방어적으로 매달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비롯해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편협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실존적 위협이 팽배한 경우더라도 호전주의가 평화주의로 전환될 가능성은 있다. 이란의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죽음을 상기시키자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한다는 사례가 증가했다. 하지만 자비심을 강조하는 이슬람 가치들(“알라는 선행하는 자를 사랑하시니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라”)을 상기시키자, 죽음을 떠올려도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하는 수가 줄어들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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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아라 노렌자얀 (Ara Norenzay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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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성에 대해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연구에 CNN, BBC 등의 방송과 <뉴욕타임스 매거진> <이코노미스트> <슈피겔> <내셔널포스트> <뉴사이언티스트> 등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였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자랐으며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총 5종 (모두보기)
홍지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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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하버드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KBS 앵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정부의 정보통신부 차장, 리인터내셔널 무역투자연구원 이사로 일했다. 옮긴책으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미국의 봉쇄전략》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트럼프 위치 헌트》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가 있다.
최근작 :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 총 65종 (모두보기)
오강남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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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더보기
최근작 : <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 총 6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 뇌과학자 김대식, 종교학자 오강남,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 긍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추천! ★

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 명저.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흥미진진한 지적 탐구.

출판사 리뷰

인간과 사회 그리고 신의 관계에 대한
심오하고 독창적인 지적 탐구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생활을 하던 인류는 어떻게 거대한 집단을 만들고 오랜 기간 집단을 확장하거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친족이라는 친밀함의 경계를 넘어 낯모르는 사람들까지 거대 집단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어둘 수 있었던 구심점은 무엇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결속 아래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사회화의 기원을 묻는 이런 물음은 역사가 시작한 시점부터 있어왔고, 무수히 많은 종교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이 그 답을 찾아 수많은 시간을 바쳤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Big Gods》의 저자 아라 노렌자얀도 그중 한 사람이다. 레바논 출신으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그는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을 결속하는 힘이 무엇이며, 그 힘은 우리를 어떻게 협력하게 만들었는지 연구했고, 종교의 관점에서 그 답을 제시한다. 신앙의 대상이기만 했던 종교가 인간의 사회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거대한 집단에 거대한 종교가 필요했고, 거대 종교의 성장을 위해 거대한 사회가 필요했던 공생 관계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본다. 더불어 저자는 종교가 거대 사회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여덟 가지 믿음을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여덟 가지 믿음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급진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정연한 주장과 실험을 통한 탄탄한 연구가 뒷받침되었고, 영장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프란스 드 발도 “아라 노렌자얀은 방대한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절실하게 필요했던 논리정연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추천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과 종교의 미래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신에게 물을 것인가, 우리에게 물을 것인가”

젊은 석학 아라 노렌자얀의 학문이 집대성된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종교를 넘어 심리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종교의 탄생과 발달, 사회의 기원에 대해 밀도 있게 보여준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성격과 역할,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제도와 문화가 공정하고 선진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하는 한편, 21세기 미래의 종교 현실과 역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묻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사회제도의 발달과 공정한 세속적 권위의 강화로 변모하는 종교의 역할이다. 저자는 10장에서 2007년 코펜하겐에서 겪은 자전거 서비스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그리스도교가 전통을 이어온 서구 사회에서 점차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심지어 “정부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이 서로 상쇄하는 관계로 보인다는 점에서”(321쪽) 유럽의 무신론 확산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이런 세속적 제도는 종교를 대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제도가 잘 갖추어진 것에 비해 종교적 파급력이 강한 나라, 국민 대다수가 종교가 있다고 말하는 나라, 저자가 사회적인 긴장도(여러 가지 상황에 적용되는 엄격한 사회적 규범들을 갖추고 있는가?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은 어느 정도나 허용되고, 이런 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는가의 여부)가 상당히 높다고(259쪽) 연구를 통해 밝힌 한국의 독자들이 특히 눈여겨보며 우리 사회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거대한 신들,
그들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이 책을 관통하는 초자연적 감시에 대한 여덟 가지 믿음이 있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 여덟 가지 믿음은 종교가 거대한 사회를 만드는 데 되었다. 이제, 이 여덟 가지 주장을 찬찬히 짚어보자.

인간은 초자연적 감시자가 있다고 상정하고, 그 감시자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볼 줄 알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고 의인화한다. 감시자는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감시하고 있다. 이런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생각은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이런 신들을 두려워한 신앙인들은 전지적 능력이 없는 신들이나 인간의 도덕성에 무관심한 신들을 믿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구성원들과 서로 협력하고 신뢰하고 희생을 감수”(22쪽)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정신-육체 이원론’과 ‘목적론적 직관’을 가지고, 이것을 통해 막강하고 거대한 신이 인간을 감시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는 신격체-하늘의 감시자-가 있으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사람들”(48쪽)은 서로 협력하게 된다.
두 번째 믿음은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이다. 저자는 ‘일요일 효과’를 그 예로 든다.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는 자선이나 봉사 등 종교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일요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비신앙인들의 반응과 그리스도교도들의 반응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74쪽)는 것을 일요일 효과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24시간 내내 종교적일 수는 없으며, 종교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친사회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믿음은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이다. 저자는 신의 성정에 관한 평가실험을 통해 “신이 무자비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이 자비롭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부정행위를 할 가능성이 훨씬 낮”(86쪽)다는 것을 입증했다. 초자연적 존재에게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신의 자비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직접적이고 이는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신은 정반대 효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리를 저지르고 부추기는 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87쪽) 이는 천국보다 지옥을 믿는 비율이 높은 나라의 범죄율이 낮다는 아짐 샤리프와 마이크 렘툴라의 실험 결과에서도 입증되었다.
네 번째 믿음은 마 타리니Maa Tarini 여신을 믿는 인도 버스 운전기사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이다. 자신의 귀중품을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길 때 ‘신성한 유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니 무신론자보다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협력을 촉진하는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는 사람이라면 협력의 상대로 신뢰할 수 있”(123쪽)다. 9?11 이후에도 미국인들은 무슬림보다 무신론자에게 더 큰 반감을 가졌으며,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은 불신에서 비롯된 반면,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현오감에서 비롯”(149쪽)되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행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과도한 종교적 행위는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는 믿음으로 설명된다. 독실한 신자들이 이런 자학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거세나 장기간의 금식, 특정 음식 섭취 등 “거짓으로 꾸미기 어려운 행위를 함으로써 종교집단에게 신심을 증명해 보이는 효과가 있”(182쪽)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과도한 행위를 통해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종교적 믿음은 거짓으로 꾸미기 쉽기 때문에,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합리적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비용의 종교적 행위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진화”(188쪽)해온 것이다.
어린이에게 도덕적 심판을 하는 산타클로스는 왜 거대한 신이 될 수 없는가?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열렬한 추종자들이 독실하게 그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회적 증거가 없으면 그 신은 사람들을 개종하게 만들 힘을 발휘하지 못”(205쪽)하고 지리멸렬한다. 그래서 초자연적 감시자로 도덕성에 관심이 많은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의 신화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문화적 진화라는 막강한 힘이 작용하여 문화적 생존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종교집단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저자가 주장하는 초자연적 감시의 일곱 번째 믿음을 보자.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지구상 최후의 수렵채집 집단이라 불리는 ‘하드자Hadza'(탄자니아 북부에 거주)는 거대한 신을 섬기지 않는다. “교회도, 목사도, 지도자도, 종교적 수호자도 없고, 신의 형상이나 이미지, 조직화된 모임, 종교적 도덕성, 내세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도 없다.”(226쪽) 그들은 어느 정도 한계를 초월하는 영령이나 신을 섬겼지만, 오늘날의 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런 수렵채집인들이 거대한 신 없이도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사회는 도덕적 심판을 하는 전지전능한 초자연적 주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역사회의 결속력을 구축할 수 있었”(230쪽)기 때문이다.
마지막 종교적 믿음은 종교 간 경쟁에 관한 것이다. 거대한 집단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게 되었을 때 어떤 집단들이 더 우세하게 될까? “집단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거대한 신과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관행들로 무장한 친사회적 종교집단은 경쟁 집단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된다.”(262~263쪽) 바로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전적 진화의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문화적 진화로만 설명할 수 있다. 친사회적 종교집단의 생존을 위해 개종과 출산율의 증가를 통해 집단의 규모를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종교가 지닌 이점, 즉 출산율을 높인다는 이점은 협력을 촉진한다는 이점과 더불어 문화적 진화의 과정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280쪽)

우리가 잘 아는 이슬람교, 개신교뿐만 아니라 모르몬교나 오순절주의는 그 세력을 빠르게 확장한 반면 어떤 종파는 왜 그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동성애자보다, 왜 무신론자가 신앙인 사회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이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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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이다. 
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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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본문중에서 폐경을 완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자의적으로 만든 말이죠. 번역자의 태도로 옳지 않습니다. 공사구분을 해야죠. 
maitri 2017-09-12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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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용감한 책을 썼을까.. 레바논에서 20년동안 종교전쟁을 목격한 사람의 말이라면 이해가 될까.. 종교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썼다. 
삐약삐약 2019-01-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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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인류는 대부분의 세월을 가까운 혈연관계인 구성원들끼리 비교적 소규모 집단을 형성해 채집과 수렵 활동을 하며 서로 직접 대면하면서 관계를 유지했고, 이따금 낯선 이들과 제한적으로 교류를 했다." 대규모 공동체 생활, 낯선 타인과 협력과 거래를 시작한 시기는 불과 만이천 년 전으로, 농업 혁명이 시작된 시기다. (P.14) 그와 더불어 이른바 '거대한 신들'(big gods)에 대한 숭배가 퍼졌다.





거대한 신들은 '초자연적 감시자'다. 자연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지며, 상과 벌을 내리는 존재다.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믿음이 확산된 원인은 무엇일까. 거대한 신은 인류의 성장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가. 신앙의 토대는 무엇이고, 친사회적 성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가 다루는 질문들이다.





저자 아라 노렌자얀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특히 종교와 관련된 심리, 문화, 인류학적 연구로 CNN, BBC 등 유수의 언론에 연구 성과가 소개되었다. 저자의 주장은 여덟 가지로 요약된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다.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한 집단에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언뜻 당연하고 식상해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위의 주장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어떻게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대규모 집단생활에는 익명성이 따른다.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 다른 집단과 교역하기 위해선 중요한 거래비용이 있다. 바로 상호 신뢰다. 남을 믿을 수 있어야 생활할 수 있다. 신뢰는 중요한 무형의 사회적 자본으로, 경제적 거래 형성에도 필수 기반이 된다. 신뢰가 없는 사회는 탐색 등을 위해 막대한 거래비용이 소요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사회 체제가 고도화되지 못한 만이천 년 전 농업 혁명 당시에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바로 거대한 신들이다.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신앙으로 상대방의 도덕성을 담보했다. 사회 규모가 커질수록 신은 거대하고 전지전능해졌다.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도덕적 상벌을 내린다. 물론 소규모 채집 생활에도 신앙은 있었다. 자연 친화적이고 인간 생활에 덜 간섭했다. 무엇보다 권능을 부리는 범위도 한정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거대화될수록 신도 거대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 터키 동남부 괴베클리 테베는 돌 하나의 무게가 7에서 10톤에 이르는 장대한 종교 건축물이다. 그러나 신전 주변과 건축 당시에 농경 사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과연 수렵 채집인들은 왜 웅장한 신전을 세웠을까. 나아가 농업 혁명과 대규모 공동체 집단의 필요에 의해서 거대한 신들을 믿게 되었을까. 아니면 거대한 신들에 대한 믿음이 대규모 사회를 형성하게 하였을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다.





거대한 신은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하고 사회적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 '친사회적 종교'다. 현재도 다양한 심리 연구 결과, 종교 관련 상징을 제시할 경우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공정한 거래를 한다. 기독교 신자와 무신론자는 일상적으로 행동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기독교 신자는 종교적 상징물을 보거나 주일에 더욱 도덕적이고 관대해졌다.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가고, 종교의 효과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다. 무신론자 거부감이 절반을 넘는데, 이는 이슬람보다 높은 수치다.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불신이었다. 무신론자는 믿을 수 없어서 거부당했다. 순교, 엄격한 금기 준수, 심지어 힌두교의 카바디 등의 종교적 자학행위는 일종의 고비용 신호전달로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신앙은 인류의 대규모 집단화와 함께했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들은 종교적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신뢰가 높다. 이유는 고도화된 사회 체제와 제도 덕분이다. 제도와 법체계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공평한 사회일수록 비종교적이고 무신론자에게 관대하다. 구성원들이 신앙으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필요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대부분이 믿는 종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사회적 제도와 법체계가 고도화될수록 친사회적 종교에 대한 의존이 감소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일만여 개의 종교가 있고, 하루에도 두세 개의 신흥 종교가 발생한다는 추산이 집계된다. 저자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도 미래에 종교가 건재할 수 있는 이유로 높은 출산률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세계 독재 국가들의 사회적 신뢰도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전히 종교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인간의 직관적 사고 방식에는 친종교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종교를 설명한다. 어떻게 거대한 신들에 대한 신앙이 발전하였고, 초자연적 감시자가 사회적 신뢰 관계를 증진시켰던 사례와 연구 결과를 설명한다. 종교가 친사회성을 띄고 세계적으로 전파된 이유다. 반면에,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전쟁과 종교적 분쟁 또한 거대해졌다.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는 행위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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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10-25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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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감 새창으로 보기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 | 홍지수 (옮긴이) | 오강남 (해제) | 김영사

  2016-09-19

_원제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2013년)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1.

‘신’의 존재감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양식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 이백년 동안 지구상에서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이 수없이 반복됐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을 유지해왔고 여전히 독실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 오히려 종교는 빠른 속도로 그 수가 늘어나고 성장하고 변해왔다. 하루 평균 두세 개의 신흥종교가 생겨난다는 추산도 있다.

 

2.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1만 여개의 종교가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지만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는 극소수 몇 개의 종교를 믿는다. 즉 몇몇 종교들이 전 세계 신앙인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문화시장에서 살아남은 극소수 종교운동들을 계승한 문화적 후손들이다.

 

3.

이 책의 저자 아라 노렌자얀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저자의 연구에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고 있다.

 

4.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이다. 신이 감시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다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신뢰의 수준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이다.저자는 신앙인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비신앙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견해를 펼쳐나간다. 아울러 지난 1만 2천 년에 걸쳐 친사회적 종교와 대규모 협력 공동체가 출현하도록 만든 역사적 동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5.

그렇다면 종교가 규정한 도덕 공동체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종교는 성스러운 가치들을 전파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고질적인 갈등을 일으키는가? 어떤 경우에 종교적 친사회성이 집단 간 적개심과 폭력으로 변질되는가? 갈등을 해소하는 데 종교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가?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들이다. 이와 같은 의문들은 종교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저자는 이 부분들에 대해 나름대로 그의 생각을 표출한다.

 

6.

시간을 거슬러 9세기와 13세기 사이 – 지금으로부터 20세대에서 30세대 전 -의 중세 유럽으로 되돌아간다면,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제도나 관행과 수없이 마주치게 된다. 저자는 그 중에서 신성재판(神聖裁判, trial by ordeal)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중세 유럽 당시는 물론 유전자검사 기술도, 전화 통화기록도, 보안카메라도, 심지어 믿을 만한 증인의 증언도 없던 시절이었다. 판사들이 증거를 조사하고 범행 동기나 범행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는지를 밝혀낼 방법들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난해한 사건들을 만나면 판사들은 신성재판을 명령했다. “끓는 물을 담은 솥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기나 돌을 던져 놓고 피고에게 그 솥 안에 팔을 집어넣어 그것을 건져내라고 명령했다. 피고가 화상을 입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했고, 그렇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렸다. 알몸인 피고를 결박하여 수심이 깊은 성수에 던져 넣어 피고의 몸이 가라앉으면 유죄를 선고하고, 몸이 물에 뜨면 무죄 방면하는 방식도 있었다.”

 

7.

저자는 장거리 교역과 종교인들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장거리 교역은 대규모 협력을 연구하기에 안성맞춤인 사례라는 것이다. 교역에 관여하는 상인 공동체들은 익명성, 책임 소재 규명이 어려운 집단적 행동이라는 문제를 극복하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과 서로 다른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빼앗기거나 사기를 당해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값진 물건들을 주고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런 교역망을 유지하고 번성하게 하려면 높은 수준의 사회적 결속력을 담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17세기 초, 아르메니아 비단 상인들이 운영했던 교역조직망을 살펴본다. 이 교역망의 최고 전성기에는 암스테르담과 런던 같은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멀리 인도, 티베트와 필리핀 같은 극동지역까지 뻗어 있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아르메니아 국가에서 정치적 군사적 혜택을 받지 않고도 자신들의 교역활동을 뒷받침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 비결은 뭘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 상인의 친족들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얽힌 정교한 통신망 및 사회적 감시망에 의존했다. 여기에 신뢰심이 추가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도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종교적 공동체들 내에서 상거래 계약이 자율적으로 이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일한 이유는 물론 아니지만)한 가지 강력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지 여부를 모두 알고 있고 늘 인간을 감시하며, 보상과 처벌을 내리는 신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8.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언급되는 (초자연적 감시에 대한) 여덟 가지 믿음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다.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한 집단에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9.

세속적 사회의 문화적 수명과 종교의 문화적 수명을 비교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일부 지역에서 세속화를 추진하는 막강한 힘들이 작용하면서 세속화가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경제적으로 더욱 풍요롭고, 실존적 안정이 확보되고, 세속적으로 막강한 제도들이 구축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과 과학과 분석적 사고에 노출되고 있다. “친사회적 종교는 세속적 제도들에 비해 한 가지 결정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다. 신앙인들의 높은 출산율이라는 횡재이다.” 종교가 지닌 이런 우위는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 약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가장 세속화된 사회들이 출산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친사회적 종교집단들이 세속화 세력에 맞서기에 불리한 여러 약점들을 출산율에서 만회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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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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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어떻게 생겨났고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나?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새창으로 보기

 알고 있는지? 종교에도 수명이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에 따르면 19세기에 종교적, 세속적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 공동체가 무려 200개나 만들어졌는데, 그 평균 수명이 겨우 25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보면 종교의 생명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길고 질길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가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한 번은 해 봤을지도 모를 그 질문에 본격적으로 천착하여 한 권의 책까지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인 아라 노렌자얀이다. 그리고 그 책이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는 종교의 생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종교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종교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해 진화론, 인지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 방법을 통해 종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밝혀낸다.



 터키 동남부에는 '괴베클리 테페'라는 유적지가 하나 있다. 원래는 중세의 공동묘지로 알려져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게 밝혀졌다. 무려 11,5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고대 유적지인 스톤헨지보다 두 배는 더 오래된 신전이다.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신전이라는 말은 이 때 종교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전이 있었던 시기는 놀랍게도 신석기 시대였다. 지금까지 종교는 농경 사회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베'의 존재는 먼저 거대한(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 때문에 농경 사회도 출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인류가 무리에서 사회로 전이해 가는데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과연 종교의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책의 전반부는 바로 그 의문을 푸는데 할애된다. 최근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육식 동물에 비해 부족한 체력적인 한계를 무엇보다 상호 협력을 통해 생존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의 언어도, 윤리 감각도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보호도 알고보면 그런 협력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런 협력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협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뢰다. 종교는 바로 그 신뢰를 구축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령 먼 이국의 이방인일지라도 신을 믿고 있다면 신뢰할만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넘어 국가가 만들어지고, 먼 이국의 땅까지 교역이 이뤄져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신뢰는 어떻게 보증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노렌자얀이 거대한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에게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신의 초자연적 감시자로써의 속성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종교의 신에겐 결코 빠지지 않는 공통된 특성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신의 명령과 믿음을 져버리면 형벌을 받는다'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산타클로스조차 1년 동안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 지켜본다는 관념이 남아있을까? 종교의 신은 이렇게 초자연적 감시자와 기독교의 십계명과도 같이 신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형벌을 내리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구축되었다. 왜나하면 바로 이것이 상호 협력을 위한 신뢰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회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무역을 할 때, 언제나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따졌다. 신을 믿으면, 그 역시 초자연적 감시자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며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도덕적으로 행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설령 같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뤄졌다. 실제로 당시엔 서로 다른 신을 많이 믿었지만 이방인 사이에 교역이 이뤄지는 것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을 믿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바로 이슬람교 최대 성지 순례 행사인 '하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로 성지 순례하는 하지는 이슬람교도라면 꼭 지켜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해서 매년 수백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이나라 저나라에서 찾아든다. 한 마디로 이슬람교에서 가장 대규모로 이뤄지는 국제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처럼 온갖 국적과 파들이 모이는 행사에 모이는 교도들이 그렇지 않은 교도들보다 더 타인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여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폭넓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종교적 체험이 도덕의 테두리를 확장시킨'(p. 304)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재밌는 예 하나를 들자면, 9. 11 이후 미국에서 무신론자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졌다는 게 조사로 입증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을 믿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자신의 아기들을 위한 보모를 고르기 위해 유타주에 주로 공고를 낸다고 한다. 거기는 몰몬교들이 많기에, 신을 믿는 그들이라면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신은 인류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호 협력을 위한 증진 방안 중의 하나로써 인위적으로 구축된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신이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신이 있어 인류가 좀 더 사회적이 되고 도덕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입증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빈도가 증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종교로 인한 많은 갈등을 보고 있다. IS는 코란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렌자얀은 그것이 전적으로 종교의 탓으로 볼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는 원래 이타주의적이 되도록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소속감이 필요했다. 그 소속감을 주기 위해선 종교 나름의 성스런 가치의 강조가 필수적이었는데, 현재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 대부분은 바로 이 성스런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여기게 되는 바람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렌자얀은 그런 종교들간의 타협불가능한 성스런 가치들 역시 마땅히 타협 가능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 본연의 의미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리하자면, 내게는 종교 본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 천 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참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필 주커면의 '신 없는 사회'를 읽은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이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가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신 없이도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아라 노렌자얀 역시 이 책에서 그런 나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민이 정부에 대해서 가지는 신뢰가 무척 크기 때문인데, 노렌자얀은 그것이 무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정부에 대한 믿음으로 전이된 것으로 설명한다. 필 주커면도 여기에 대해선 그다지 반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종교가 그냥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문화로 자리잡았기에(다시 말해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아비투스화 되어버렸기에) 가능해진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까. 이 책은 무신론의 유혹이 깊어지는 시대에 종교의 효용이 그렇게 없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종교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책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고 내부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도록 이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종교인으로 넘쳐나는 우리 나라가 이토록 살기가 어렵고 힘든 것은 우리가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지도 않고 서로 자신의 성스런 가치만 고집하고 때로는 그것을 탐욕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국정마저 한 이상한 종교인(과연 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때문에 파국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이제야말로 과연 종교라는 게 무엇인지 그 근본부터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렌자얀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종교의 본질은 상호 신뢰를 증진하여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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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로이 2016-10-2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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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탄생과 성장, 그 실체를 다양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잘 정리한 책 새창으로 보기
신과 종교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종교인들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면

바로 종교인들의 거센 공격이 빗발치기 십상인데 이 주제는 기본적으로 논쟁이 제대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신과 종교가 상당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종교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와

그 전파과정, 인간 사회에 있어 끼치는 영향까지 종교를 논리적으로 제대로 분석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통해서 신과 종교라는 허구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을 이미 경험했지만

이 책은 좀 더 사회학, 심리학적인 면에서 종교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먼저 신을 '인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존재, 존재의 근거 또는 만물의 총체로 신을 보는 일부 신학적인 교리들과는 달리,

신앙인들의 일상적인 생각 속에 존재하는 신은 마음을 지난 인간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사에 개입하는 막강하고 거대한 신이라는 개념이 인간 사회에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유형의 신들이 인간을 감시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믿음을 받아들인 사회들이

협력적인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적 감시는 낯선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어 초자연적 감시자가 출현하는 데 필요한 선행조건이 되었고 친사회적인 종교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도

협력이 가능하게 만들어 더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결국 거대한 신의 존재와 복잡한

사회집단의 형성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선 무신론자들에 대한 신앙인들의

편견에 대한 다양한 조사 결과와 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타 종교인들보다 무신론자에 대해

더 불신을 갖는 이유는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통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다는 말인데

현실에서 종교를 빌미로 이뤄지는 각종 범죄들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편견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한국 사회는 불신의 사회여서 무신론자에 대한 배타적인 편견이 적은 편이지만 종교 국가인

미국 등에선 무신론자가 동성애자보다도 더 불신의 대상이 된다니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해선 친사회적 규범을 창출하는 강력한 세속적 제도에 노출시키거나

그런 암시를 주는 방법, 무신론자가 많다는 사실을 노출시키거나 그런 암시를 주는 방법, 사회에서

종교적 성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아무래도 종교인들처럼 맹목적이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종교인들처럼 세력을 형성하거나 자기 표현을 강력하게 하지 않는 한 종교인들이 만들어내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긴 쉽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친사회적 종교집단은 집단생존율에서도 우위를 보이고 문화적 안정성도 가지고 있으며 종교인들은 출산율마저 높기 때문에 다른 집단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점이 많은데, 이런 종교의 위력은 결국 사회가 종교를 대체할 강력하고 세속적인 대안을

개발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정부와 사법기관 등 세속적 기관들이 충분히 신뢰를 받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면 결국 종교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종교가 어떻게 인류사회에 등장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지와

종교의 미래도 조심스럽게 엿볼 수 있었다. 종교가 분명 인간들의 결속을 이끌어내며 거대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이상적인 국가들로 생각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을

보면 더 이상 종교가 그리 필요한 것 같진 않다. 다만 종교가 무용한 세상이 되기 위해선 세속적인

사회가 충분히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면 종교가 여전히 기세를 떨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씁쓸한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종교가 없는 세상을 노래한 

존 레논의 'Imagine'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데 종교의 실체에 대해 다양한 연구결과를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서 이론적으로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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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6-10-23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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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은 제목만 얼핏 보면 "신의 존재 여부"를 과감히 논하거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유신론 vs 무신론"의 현황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런 추상적이고 어차피 똑떨어진 답이 나오기도 힘든 물음에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처럼 무익한 수고를 벌이는 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때로는 특징적 혹은 무작위로 뽑힌 집단을 두고 벌인 실험을 통해, 중립적이고 과학적 접근으로 "왜 신은 우리 인간의 관념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나"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않고는 차라리 부차적인 이슈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면(아주 어리석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 신은 속타서 죽을(?) 지경이겠지만 여튼 인간의 시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인간은 이런 번거롭고도 부자연스러운 개념을 만들어 내어 자신도 괴롭히고 안 믿겠다는 다른 동족까지 괴롭혔는지, 그 해답이 그런 이유에서라도 필요는 합니다.

일일이 인간사에 끼어들어 악당을 처단하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 냉정하고 초연하며 공감도 안 하면서 전지전능하기만 한 신, 따라서 그 가시적 흔적을 확인도 할 수 없는 저런 신을 왜 인간은 숭배하는지, 지극히 이기적이고 생존 본능에 충실하게 진화해 온 인간치고는 썩이나 안 어울리는 이런 선택("관념론적 신앙")을 왜 거창하게 해 온 건지,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하나 짚어 나갑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그저 과정의 기술에 그친다거나, 최종적인 해답은 독자가 스스로 내 보라며 무책임하게 발을 빼지도 않습니다. 그 나름 대담한 결론까지 낸다는 점에서 독자는 더욱 혹해서 읽어 갑니다. 그리고 제법 알찬 생각거리까지 건지거나, 더 나아가 저자들의 결론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논쟁적인 주제를 담았으면서도 흥미롭고, 논의의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하기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첫째 명제는 유신론/무신론 여부에 관계 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믿음 체계는, 일일이 마을의 원로나 실력자가 개개인의 뒤를 쫓아 다니며 도덕을 준수할 수고를 덜어 줍니다. 사회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1차 집단의 윤리가 다양한 개성과 선택을 규율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만, 일탈 분자의 질서 파괴 행위를 작건 크건 용인하면 공동체 전체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합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이 아니라 확신)시키고, 설령 현장에 감시하는 (사람의)눈길이 없다 해도 저 위에서 전지전능한 이가 지켜 보고 있다고 환기시키면, 그저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가 강력하다는 겁니다.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서는 우스운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역사 시대 초기 전체가 공존할 지혜가 필요한 단계에선 이게 꽤나 효율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효과를 크게 보았을 터입니다. 우리 종이 지금 이 정도로나 생존을 이어 왔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리는 것도 저런 어설픈 믿음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소수의 범죄자(어리석기까지 한)가 공동체 전체를 망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아닐까요?

종교의 효과가 개인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 쉽게 말해 이런 뜻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개인이 종교적(이라기보다 사회적) 의무를 잘 지킨다기보다, 그저그런 껄렁한 신자가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조성되었을 때 이런 의무를 더 확실히 지킨다는 겁니다. 즉 종교는 개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일일이 고쳐 먹게 한다기보다, 불특정 다수가 평균적으로 나쁜 마음을 덜 먹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건, 이런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이라기보다 차라리 친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 경우 다분히 실용적인 효용을 창출하며, 여기서 강조하는 도덕은, 결국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돕는 공리적 메커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시스템 한 구석에 고장이 났을 때 보수 없이도 자발적 봉사에 나서는 건 그게 동기가 종교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결국은 개인의 행동으로 사회가 건전한 질서로 복귀한다는 그 실용적 결과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바른 행동으로 사회의 질서가 잡히는 그 결과에 주목하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내내 구사하는 "친사회적"이란 용어는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천하고 가난하며 사악한 종자들에게 죽어서 지옥 간다는 협박도 못 하면 어떻게 교회가 유지되겠소?"라는 어느 성직자(...)의 말이 나옵니다. 여튼 이런 사후 세계에의 엄혹한, 혹은 한없이 희망적인 기제가 개념상으로 구축되면, 사람들의 행동은 아무 현세적 보상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친사회적(결과적으로는)"으로 재편됩니다. 처벌은 꼭 현세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며, 존재의 필멸성, 유한성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머리 속에 인식된 이들에게 "지옥의 위력"은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혹은, 현세의 처지에 큰 만족을 못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신(사실은 이를 빙자한 권력자의 야욕)의 미션을 수행하면 지복(至福)의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끼로 테러리스트의 길을 부추기는 집단(IS 등)도 있습니다. 샤리프와 렘툴라의 실험 보고서가 이를 직접 표명하지는 않아도, 어쩌면 이 역시 "친사회성 증대"의 범주로 판단하면 (테러리스트= 반인륜 이란 이유에서) 다시 타당성이 확인되는 셈입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경우에도(흑인이나 [미국에서는 소수파인] 가톨릭이나, 여성이나, 심지어는 모르몬, 동성애자보다 더) 나쁜 취급, 불신을 받는 게 흥미롭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어떤 기독교도는 "설사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파로 적대한다 해도, 그가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보다야 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같은 말을 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는 종교 관념이 희박한 동양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주장 같습니다. 한국이라면 오히려 무교라고 밝히는 이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인상도 주고, 기독교라 해도 자파에서 이단이라 점찍은 이들에게는 무교인(잠재적 고객)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 드는 예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코코넛을 운반하는 운전수들"입니다. 힌두의 신전까지 코코넛을 그 원산지로부터 옮겨 가야 하는데, 중간에 가로채거나 의무를 태만히하는 이도 없이, 일단 앞 "주자"로부터 바톤을 넘겨 받은 모든 운전수들이 착실히 이를 (아무 대가 없이) 운반핝다는 겁니다. 인도 사회가 정직하고 이들이 교육을 충분히 받아 명예를 지키는 까닭일까요? 전혀 아니겠죠. 그 비결은 오로지 "마 타리니 신이 무슨 응보를 내릴지 몰라서" 같은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신념은 경제 질서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핵심 팩터이기도 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예전에 사회를 선진 질서와 그렇지 못한 혼란으로 양분하는 원인으로 "트러스트"를 꼽은 적이 있죠. 이런 "신뢰"가 종교적(거의 미신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도, 이성적인 형량 과정을 거쳐 자발적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회 질서의 고도화 단게에 차별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등한 개인들의 예를 들며 "이런 문제도 하나 해결 못하는데 A의 효용이 대체 무엇이냐?"며 유치하고 미숙한 불평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자신의 예를 들며, 나 자신이 효과를 못 봤으니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며 일반화의 폭주 그 끝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가 있어도 이 모양인데 종교가 없으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관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신이 창조하여 완전무결한 인간이 오늘날 이지경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어디냐며 대견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훨씬 건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이 있고 없고, 어느 종교가 그르고 옳고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든 뭐든 어떤 제도와 신념의 도움을 빌려 인간이 얼마나 나은 삶(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을 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공리적 결과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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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6-10-25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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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1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 네이버 블로그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 네이버 블로그

김용옥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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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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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 문명의 세 기둥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 도덕의 근거에 대한 세 문명의 답변

서양 : 초월적 세계관 → 신(초월자)으로부터 상벌

중국 : 역사적 세계관  조상의 결과, 자손에 영향

인도 : 윤회적 세계관  전생의 업(원인), 후생의 업(결과)

명적X, 혁명적 사상. 철저한 개인주의/개인책임





2강 - 싯달타와 세종대왕


그리스도 : 기름부음을 받은 자
붓다 : 깨달은 자 ; 고타마(성) 샤캬(석/가문?) 싯달타(이름)


불교의 개인주의 : 고려문화의 근간

cf) 유교의 집단/가족주의 : 조선문화의 근간


훈민정음 3저작 : 용비어천가/석보상전(붓다의 전기)/월인천강지곡(세종의 찬불가)

세종 때도 (불교)문화는 안바뀜
김수온의 저작? : 세종이 아낀 당대의 문장가/석학


한국 사상사 : 샤머니즘 +→ 불교 + 유교 + 기독교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친화성





3강 - 싯달타의 생애 (624?~544?)


카필라성의 왕자. 아주 작은 부족국가.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추정 됨 (→카스트제도 혁파)


이미지의 반전

예수의 일생 : 신화적. 고난의 삶  인간적 이미지

싯다르타의 일생 : 인간적. 평안한 삶  신적 이미지 


싯달타의 시대적 배경 : 부족국가  제국화 과정 중

cf) 춘추전국진秦 제국, 그리스 폴리스알렉산더 제국 ; 비슷한 시기, 비슷한 변화

혼란기, 상공업 발달 : 브라만의 권위 하락, 크샤트리아/부유한 바이샤(상인)의 힘이 강해짐

슈라마나(사문, 유세객들)들의 전성기 - 그 중 하나가 붓다 

회의주의, 비판의식, 상대주의, 유물론자, 다양한 사상가들
cf) 중국 제자백가, 그리스 소피스트


싯달타의 일생 : 35세에 깨달음. 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함(남들이 이해 할 수 없음)

종교 만들 생각 없었음. 후계자 키우지 않음. 슈라마나-걸식집단 이었을 뿐.
유언 "오로지 진리에 귀의할 것이며, 자기 자신을 귀의처로 삼을 것이며, 나(싯다르타)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
진리. 담마(법)만을 남기고 갔음.





4강 - 싯달타의 출가


어머니 늦게 임신. 출산 후 7일만에 돌아가심. 새엄마(이모)에게 자람

태어나서 본 점괘 : 32세에 전륜성왕(인도의 메시아-민간설화), 출가하면 붓다(깨달은자)가 된다


7세 선농제(축제)에서 지렁이의 죽음을 접함 →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 시작 ; 극한의 감수성

노인, 상여 - 청춘의 즐거움이 가심


노병사 3법의 충격  출가 ; 위대한 진리의 평범성





5강 - 싯달타와 라훌라(장애)





6강 - 팔리어 삼장 
: 불교의 역사와 재발견

인도 문명의 특징 : 구송/암송문화(첸팅). 저자/시간 기록 없음. 역사에 대한 관념 없음. 

ex) 브라만 : 베다를 외우는 걸로 권위가 유지됨


근본불교 : 붓다 살아생전 법(담마)과 율을 가르침


1차 결집(BC6C) : 사후 3개월 왕사성에 500 제자 모임(쌍기띠 : 함께 노래부른다)

다문제일 아난존자 구술 : "如是我聞(여시아문: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聞佛所說(문불소설: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皆大歡喜(개대환희:모두 크게 환희하고 즐거워하며) 信受奉行(신수봉행:이를 받들어 믿고 행하느니라)"

암송으로 최초의 텍스트 형성 : 경장과 율장


2차 결집(BC5C) : 100년 후 바이샬리. 경에 대해서는 이견 없음. 율에 대한 이견 발생.

십사논쟁 → 상좌부(보수,경직) / 대중부 (진보,유연)로 분열 : 근본분열 ; 여기까지 원시불교


부파불교 시대 : 근본분열 후 18~20개로 분열 but 서로 인정 소승불교 여기까지 초기불교

3차 결집(BC3C-아소카왕) : 팔리어 3장 정리 - 경(다르마)/율장(비나야)/논장(아비달마:주석)

이때까지 암송으로 전승. 아쇼카의 주변국 전도 → 스리랑카에서 기원전후에 문자화.


대승불교 운동 : 기원전후. 전도주의. 뛰어난 이론가의 글이 많이 생산

인도에선 7~8세기까지도 소승이 주류, 대승은 하나의 파 → 중국으로 건너가 주류가 됨


중국불교 : AD 3세기 전파. 초기불교의 3장이 아닌 대승불교의 경전이 전해짐. 3만 대장경/일체경


1881년 팔리어 3장(상좌부) 재발견 : 스리랑카에서 영국에 의해 발견. 비로소 세상에 알려짐

2천년동안 잠자고 있었던 오리지널 텍스트 : 대승경전과 다름

→ 1935~41 일본에서 처음 번역. 불교의 새로운 중흥기. 새로운 시작





7강 - 속세 속의 불교





8강 - 아함의 대발견


4차 결집(AD2C) : 쿠샨 왕조. 논장 관련 논의. 토속어 팔리어를 고상한 산스크리트어로 옮김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이 산스크리트어 대승경전. 대장경


중국어 번역의 어려움 : 산문을 운문으로, 표음문자를 표의문자로. 전혀 다른 형태의 언어

1000여 년 간 끊임없이 번역 → 8만 대장경  번역자에 따라 또 달라짐. 같은 경전의 시대에 따른 해석을 알 수 있음. 

이역 ; 구마라집본, 현장본..


대승사상 : 보살사상  반야  공  유식 ; 초기 불교(팔리어 3장)에 없는 내용

금강경(AD150), 화엄경, 법화경..


8만 대장경 순서 : 천태지의 중국식 분류법

부처님 증득 후 화엄경  녹원시;소승경전(아함경)  방등시  반야시  법화경/열반경 


아함경 : 화엄을 쉽게 푼 것이라 알려져 천시됨. 짧아서도 무시됨

팔리어 '아가마(부처님 말씀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의 번역 ; 엄격히는 경아함(경의 아함)

3~5C에 중국어 번역 : 장아함(좀 긺)/중아함(덜 긺)/잡아함(짧음)/증인아함(숫자 인덱스) 4종

팔리어 3장 중 닛까야(경장) 5개 : 장/중/상응/증지부/소부
=> 두 종이 거의 동일 : 아함이 초기 경전이었음이 확인됨 ; 1930년대의 발견 → 불교는 아함부터


숫다니파타 : 소부 15개 중 하나. 가장 오리지널한 근본불교(부처님 직접 말씀) 텍스트
한국에는 법정스님이 최초 소개. 다음으로 담마빠다(법구경)이 중요

아함의 특징 : 쉽고 구체적이며 현실적 설법. 솔직함과 진실함





9강 - 수타니파타 1 : 소개


숫다니파타(Sutta Nipāta) : 최초로 성립된 불교 경전(bc150경?)숫다:경/니파타:모음=경집.


득도후 초기 설법(55세 이전) : 아난(돌아가시기 전 25년 모심)이 안나옴. 혼자 다님

호칭 : 선생님, 고타마씨, 행복한/온전한/눈뜬 사람. 부처님X

불교 용어 없음. 대부분의 불교 이론이 없음.


'화'의 문제 : 보물(다음 생에 도움되는 것)을 뺏어가는 가장 큰 도둑놈.

열반 : 마음의 불(화)을 꺼버림 (티벳은 화가 없는 문화)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연꽃의 줄기를 꺾어버리듯.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사람은,
이언덕과 저언덕을 모두 떠나 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독각 : 홀로 깨닳음. 초기 불교의 이상 ; 가장 중요한 사상. 부처의 가르침. 





10강 - 수타니파타 2 : 싯달타의 행복론


독각적 사상 : 개인이 서야 함. 원시불교의 모습 → 무소유/무집착

만남/사귐/접촉/사랑/그리움/가족/친구/친함/주장/비난 멀리하기

논쟁하지 말라 - 서로를 인정하기. 진리는 하나이나 표현은 수만가지
배운 것이 풍성하며,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를 항상 가까이 하라.

자기 길 가기 - 사귀되 혼자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음 


계급타파 : 비천함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규정. 인간평등론.


행복 : 기술을 익히고/몸으로 삼가기(끊을 줄 알기)/말솜씨가 유려(해야할 말을 정확히)/부모섬김/

아내사랑/자식보호/하는 일에 질서있게/(평시에,항상)배풀기/이치에 맞게/비난 살 만한 행동 하지 않기/악을 끊고 멀리하기/술 삼가하기/덕행을 소홀하지 않기/존경/만족/감사/겸손/알맞는 때에 가르침(,이법) 듣기/인내하기/말을 온화하게/덕행이 높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기/수행/진리를 통찰/마음의 평화를 체득하기..





11강 - 수타니파타 3 : 싯달타의 고행


선정禪定으로 시작

선 : 디아냐(범어:dhyana)의 음역. 마음을 정함(=定)  cf) 선정 like족발,역전앞


→ 고행 → 악마의 유혹(나무치/마라) "살아있어야 (무엇이든) 한다"

소승의 목표 : 열반. 사라짐 "진정한 브라만이 되는 것"  cf) 대승 : 이 땅에서 살아감

인도문화권 모든 신들의 족보는 불의 숭배로 거슬러 올라감 : 문명, 생명(, 율법?)

악마 : 세간의 공덕을 구하는 자

모든 새로운 종교 : 과거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악마의 군대 : 끊임없는 공포/기갈/의혹  위선/고집 

도올 "위선만 없는 종교는 다 받아들인다"

악마를 이기는 힘 : 지혜

신앙자 : 생각이 맑아지는 것


※ 도올의 투표 방법

1. 되고자만 하는 사람을 피할 것

2. 공약의 내용보다 공약에 담긴 사고능력/판단능력(심미안)/생각을 볼 것
3. 무소유하는 자 





12강 - 법구경 특강

경전『화살』 : 인간의 죽음을 다룸. "인간은 죽는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 것이다"

;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기 "마음을 다스려라."


법구경(담마빠다Dhammapada) : 수타니파타보다 조금 늦게 성립된 경전

근본불교 : 암송으로 전해짐. 쉬운 일상언어.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

불교 : 내부로부터 해방. 자각/독각의 사상. 마음을 다스려. 자기를 이김 → 인본주의/인도주의

cf) 기독교 : 외부로부터 해방. 믿음. 신 중심. 절대주의


"행동이 바른 사람을 존경하라"


"악한 일을 하지 말라. 착한 일을 하라. 그대 마음을 늘 순수하게 가져라. 
이것이 모든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다."

"건강은 가장 큰 재산이요, 만족은 가장 값비싼 보석이요, 

신뢰는 가장 위대한 친구요, 니르바나(열반)는 가장 큰 기쁨이다."

 



13강 - 싯달타의 깨달음

신神 개념의 진화 : 느낌의 응축+언어의 주술적 능력 → 신격화  다신론

 신들 사이의 불평등  신들의 싸움 → 만신(제우스, 신들의 대장) 

 일신론 (하나님/브라흐마.. 제국의 통일기에 출현 ) "나만을 믿어라" 

 zero. 공空 : 싯달타의 혁명. 유일신까지 부정

현대과학과 같은 세계관: "우주를 움직이는 인격적 존재는 없다"

空 : 색이란 감관에 의지하므로 그 자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계 속에 존재는 있다. 즉 존재는 관계되어 있다. =>

緣起연기/프라티트야 삼무파다(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 : "의존하여 같이 일어난다 "

신을 부정하고 우주의 법칙을 탐구한 결과 => 12연기(역관부터 순관으로)

노(병)사→생→유→취→애→수→촉→6입→명색→식→행→무명 ; '지독한 과학적 사고'

역관 : 이법이 없어지면 이법이 없어진다 = 환멸연기 ; 제법무아

순관 :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겨난다 = 유전연기


"우주를 보는 나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

" '생하는 법은 어느 것이나 모두 멸하는 법이다.' 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14강 -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우리는 연관되어 있음
→ 환멸연기 : 문제의 원인을 찾아 없애는 것
 4성제(고집멸도) : 연기법에 대해 쉽게 설한 것

"일체의 고는 집착에서 나오며 이것을 멸하는 도가 있다."

 8정도 : 멸하는 도 "정견/정사유(인과)/정어/정업(생활)/정명/정정진/정념(기억)/정정(마음)"

바르게 하기

 3학 "계戒/정/혜" : 세 가지가 함께여야 가능. 인생의 원칙

계戒 | 계율戒律 자연에 따름, 건강한 삶, 규칙적 삶, 몸의 단련/공부, 정어/정업/정명

정定 | 선정禪定 : 삼매(쌈마디:정신통일), 집중(Attention. 좌선은 방편 중 하나), 정념/정정

 | 지혜智慧 : 앎, 정견/정사유 [정진은 계정혜 공통]

원시불교의 핵심적 사상 : 부처의 가르침에 반복적으로 나타남

→ 고려말 지눌 "돈오점수頓悟漸修" : 깨달음이 와야 계속 닦을 수 있다. 끝없는 고양

 성철 "돈오돈수頓悟頓修" : 진정한 깨달음은 한번의 닦음으로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앎)은 더이상의 노력(修)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확실히 알기 때문에. 더 잘못하지 않는다. ex) 뜨거움/차가움,,

"돈수까지 되는 깨달음이라야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올 "싯다르타 가르침의 핵심은 오보다 수에 있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사막의 수련이다."

"끊임 없는 수의 과정 속에 오의 순간들이 온다. 인간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은 무아無我, 깨달은 자의 삶은 무아행(자비행慈悲行)이다."





15강 - 무아란 무엇인가?


이제까지의 원시불교 간단정리

1. 일체계고 : 노병사. 인생은 즐거울 수 없다.

두카(고) ↔ 샨땀 (고요,평화)

2. 고행 : 영육 이원론 (육체의 학대를 통해 정신의 자유를 추구)

3. 연기(쌈 무빠다) : 기나긴 사색의 결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함께 일어난다."

생과 사, 장과 단.. ; 고립된 것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법/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한다" ; 연기에서 도출되는 것


사고의 오류는 언어에서 나옴 : 언어는 세상을 반영하지(비추지) 못함.

주어 속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음

"꽃이 핀다" "가는 놈은 가지 않는다"

"나는 산다/말한다" ; 나와 삶/말은 분리될 수 없음

주어가 없는 우리 말이 더욱 진실됨. '술어 속에/술어 로서' 주어가 존재.

무아 = 아트만(我, 동일성의 체계)은 없음. 강압적/임시적 작동체계가 무너지면 바로 무너짐

ex) 잔디밭 : 끊임 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상태(동일성의 체계,아트만)가 유지됨

"너를 죽이겠다" = '너'가 죽으면 그것을 증오하는 '나'도 죽음 → 대자대비


연기론 =>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가 사라짐. 철저한 반형이상학적 철학. "언어에 속고 있다."

cf) 형이상학 : 언어를 통해 실체화시켜 놓은 것을 탐구.

    안티노미 (이율배반) : 상반되는 명제가 모두 참인 것. "신은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

=> 무기無記 :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 모든 존재의 존립근거가 깨짐


언어를 통해 언어를 부정하기. 언어의 미망 속에 빠지면 안됨. 

언어로 쌓여 있는 나我를 해체시켜야 함.





16강 - 싯달타의 죽음


"자신을 귀의처로 자신에게 귀의할 것이며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진리를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대반열반경 - 소박함/인간적/비신화적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외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다르마)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따라 진리에 바르게 이르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여래를 깊게 경외하는 것이 되느니라."


"아난다여, 나의 죽음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아난다여,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지는것. 그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레께서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었다.


스투파 = 탑 = '부처님의 무덤'의 뜻 ; 대승과 소승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





17강 - 무아無我에서 유식唯識으로


윤회의 주체로서의 아我를 찾기 : 윤회론과 무아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고찰 ; 무엇이 윤회하는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6식

눈(가장 명백하고 저급하며 미망의 가능성이 높은 것)에서 밑바닥(識의 심층)으로

6식 의식 - 5식을 묶은 것. 통각적 요소 ; 일상생활은 6식 까지


7식 말나식 : 의식 아래의 자의식 ; 살아야 한다는 집착 등
8식 아뢰야식(저장식) : 위의 7식이 저장되는 근원적 밑바닥의 의식 ; 훈습. 무의식. 윤회하는 것 

무명식/망식. 부정적인 것. 식을 버려야 지혜를 이룸=해탈


모든 사태는 나의 감관에 비친 것(내가 만들어 낸 것)을 인식하는 것


유식론 : 유식무경唯識無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극단적 유심론/주관론 (대상세계가 없다)

"사태가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내 의식의 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모든 앎/현상은 내 의식의 투영이다." 

"깃발도 바람도 아니라 마음이 움직인다" - 혜능선사
요가행파가 만들어냄
전식득지轉識得智 : 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이룬다 ; 유식의 깨달음이 있어야 함





김용옥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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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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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 문명의 세 기둥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 도덕의 근거에 대한 세 문명의 답변

서양 : 초월적 세계관 → 신(초월자)으로부터 상벌

중국 : 역사적 세계관  조상의 결과, 자손에 영향

인도 : 윤회적 세계관  전생의 업(원인), 후생의 업(결과)

명적X, 혁명적 사상. 철저한 개인주의/개인책임





2강 - 싯달타와 세종대왕


그리스도 : 기름부음을 받은 자
붓다 : 깨달은 자 ; 고타마(성) 샤캬(석/가문?) 싯달타(이름)


불교의 개인주의 : 고려문화의 근간

cf) 유교의 집단/가족주의 : 조선문화의 근간


훈민정음 3저작 : 용비어천가/석보상전(붓다의 전기)/월인천강지곡(세종의 찬불가)

세종 때도 (불교)문화는 안바뀜
김수온의 저작? : 세종이 아낀 당대의 문장가/석학


한국 사상사 : 샤머니즘 +→ 불교 + 유교 + 기독교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친화성





3강 - 싯달타의 생애 (624?~544?)


카필라성의 왕자. 아주 작은 부족국가.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추정 됨 (→카스트제도 혁파)


이미지의 반전

예수의 일생 : 신화적. 고난의 삶  인간적 이미지

싯다르타의 일생 : 인간적. 평안한 삶  신적 이미지 


싯달타의 시대적 배경 : 부족국가  제국화 과정 중

cf) 춘추전국진秦 제국, 그리스 폴리스알렉산더 제국 ; 비슷한 시기, 비슷한 변화

혼란기, 상공업 발달 : 브라만의 권위 하락, 크샤트리아/부유한 바이샤(상인)의 힘이 강해짐

슈라마나(사문, 유세객들)들의 전성기 - 그 중 하나가 붓다 

회의주의, 비판의식, 상대주의, 유물론자, 다양한 사상가들
cf) 중국 제자백가, 그리스 소피스트


싯달타의 일생 : 35세에 깨달음. 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함(남들이 이해 할 수 없음)

종교 만들 생각 없었음. 후계자 키우지 않음. 슈라마나-걸식집단 이었을 뿐.
유언 "오로지 진리에 귀의할 것이며, 자기 자신을 귀의처로 삼을 것이며, 나(싯다르타)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
진리. 담마(법)만을 남기고 갔음.





4강 - 싯달타의 출가


어머니 늦게 임신. 출산 후 7일만에 돌아가심. 새엄마(이모)에게 자람

태어나서 본 점괘 : 32세에 전륜성왕(인도의 메시아-민간설화), 출가하면 붓다(깨달은자)가 된다


7세 선농제(축제)에서 지렁이의 죽음을 접함 →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 시작 ; 극한의 감수성

노인, 상여 - 청춘의 즐거움이 가심


노병사 3법의 충격  출가 ; 위대한 진리의 평범성





5강 - 싯달타와 라훌라(장애)





6강 - 팔리어 삼장 
: 불교의 역사와 재발견

인도 문명의 특징 : 구송/암송문화(첸팅). 저자/시간 기록 없음. 역사에 대한 관념 없음. 

ex) 브라만 : 베다를 외우는 걸로 권위가 유지됨


근본불교 : 붓다 살아생전 법(담마)과 율을 가르침


1차 결집(BC6C) : 사후 3개월 왕사성에 500 제자 모임(쌍기띠 : 함께 노래부른다)

다문제일 아난존자 구술 : "如是我聞(여시아문: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聞佛所說(문불소설: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皆大歡喜(개대환희:모두 크게 환희하고 즐거워하며) 信受奉行(신수봉행:이를 받들어 믿고 행하느니라)"

암송으로 최초의 텍스트 형성 : 경장과 율장


2차 결집(BC5C) : 100년 후 바이샬리. 경에 대해서는 이견 없음. 율에 대한 이견 발생.

십사논쟁 → 상좌부(보수,경직) / 대중부 (진보,유연)로 분열 : 근본분열 ; 여기까지 원시불교


부파불교 시대 : 근본분열 후 18~20개로 분열 but 서로 인정 소승불교 여기까지 초기불교

3차 결집(BC3C-아소카왕) : 팔리어 3장 정리 - 경(다르마)/율장(비나야)/논장(아비달마:주석)

이때까지 암송으로 전승. 아쇼카의 주변국 전도 → 스리랑카에서 기원전후에 문자화.


대승불교 운동 : 기원전후. 전도주의. 뛰어난 이론가의 글이 많이 생산

인도에선 7~8세기까지도 소승이 주류, 대승은 하나의 파 → 중국으로 건너가 주류가 됨


중국불교 : AD 3세기 전파. 초기불교의 3장이 아닌 대승불교의 경전이 전해짐. 3만 대장경/일체경


1881년 팔리어 3장(상좌부) 재발견 : 스리랑카에서 영국에 의해 발견. 비로소 세상에 알려짐

2천년동안 잠자고 있었던 오리지널 텍스트 : 대승경전과 다름

→ 1935~41 일본에서 처음 번역. 불교의 새로운 중흥기. 새로운 시작





7강 - 속세 속의 불교





8강 - 아함의 대발견


4차 결집(AD2C) : 쿠샨 왕조. 논장 관련 논의. 토속어 팔리어를 고상한 산스크리트어로 옮김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이 산스크리트어 대승경전. 대장경


중국어 번역의 어려움 : 산문을 운문으로, 표음문자를 표의문자로. 전혀 다른 형태의 언어

1000여 년 간 끊임없이 번역 → 8만 대장경  번역자에 따라 또 달라짐. 같은 경전의 시대에 따른 해석을 알 수 있음. 

이역 ; 구마라집본, 현장본..


대승사상 : 보살사상  반야  공  유식 ; 초기 불교(팔리어 3장)에 없는 내용

금강경(AD150), 화엄경, 법화경..


8만 대장경 순서 : 천태지의 중국식 분류법

부처님 증득 후 화엄경  녹원시;소승경전(아함경)  방등시  반야시  법화경/열반경 


아함경 : 화엄을 쉽게 푼 것이라 알려져 천시됨. 짧아서도 무시됨

팔리어 '아가마(부처님 말씀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의 번역 ; 엄격히는 경아함(경의 아함)

3~5C에 중국어 번역 : 장아함(좀 긺)/중아함(덜 긺)/잡아함(짧음)/증인아함(숫자 인덱스) 4종

팔리어 3장 중 닛까야(경장) 5개 : 장/중/상응/증지부/소부
=> 두 종이 거의 동일 : 아함이 초기 경전이었음이 확인됨 ; 1930년대의 발견 → 불교는 아함부터


숫다니파타 : 소부 15개 중 하나. 가장 오리지널한 근본불교(부처님 직접 말씀) 텍스트
한국에는 법정스님이 최초 소개. 다음으로 담마빠다(법구경)이 중요

아함의 특징 : 쉽고 구체적이며 현실적 설법. 솔직함과 진실함





9강 - 수타니파타 1 : 소개


숫다니파타(Sutta Nipāta) : 최초로 성립된 불교 경전(bc150경?)숫다:경/니파타:모음=경집.


득도후 초기 설법(55세 이전) : 아난(돌아가시기 전 25년 모심)이 안나옴. 혼자 다님

호칭 : 선생님, 고타마씨, 행복한/온전한/눈뜬 사람. 부처님X

불교 용어 없음. 대부분의 불교 이론이 없음.


'화'의 문제 : 보물(다음 생에 도움되는 것)을 뺏어가는 가장 큰 도둑놈.

열반 : 마음의 불(화)을 꺼버림 (티벳은 화가 없는 문화)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연꽃의 줄기를 꺾어버리듯.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사람은,
이언덕과 저언덕을 모두 떠나 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독각 : 홀로 깨닳음. 초기 불교의 이상 ; 가장 중요한 사상. 부처의 가르침. 





10강 - 수타니파타 2 : 싯달타의 행복론


독각적 사상 : 개인이 서야 함. 원시불교의 모습 → 무소유/무집착

만남/사귐/접촉/사랑/그리움/가족/친구/친함/주장/비난 멀리하기

논쟁하지 말라 - 서로를 인정하기. 진리는 하나이나 표현은 수만가지
배운 것이 풍성하며,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를 항상 가까이 하라.

자기 길 가기 - 사귀되 혼자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음 


계급타파 : 비천함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규정. 인간평등론.


행복 : 기술을 익히고/몸으로 삼가기(끊을 줄 알기)/말솜씨가 유려(해야할 말을 정확히)/부모섬김/

아내사랑/자식보호/하는 일에 질서있게/(평시에,항상)배풀기/이치에 맞게/비난 살 만한 행동 하지 않기/악을 끊고 멀리하기/술 삼가하기/덕행을 소홀하지 않기/존경/만족/감사/겸손/알맞는 때에 가르침(,이법) 듣기/인내하기/말을 온화하게/덕행이 높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기/수행/진리를 통찰/마음의 평화를 체득하기..





11강 - 수타니파타 3 : 싯달타의 고행


선정禪定으로 시작

선 : 디아냐(범어:dhyana)의 음역. 마음을 정함(=定)  cf) 선정 like족발,역전앞


→ 고행 → 악마의 유혹(나무치/마라) "살아있어야 (무엇이든) 한다"

소승의 목표 : 열반. 사라짐 "진정한 브라만이 되는 것"  cf) 대승 : 이 땅에서 살아감

인도문화권 모든 신들의 족보는 불의 숭배로 거슬러 올라감 : 문명, 생명(, 율법?)

악마 : 세간의 공덕을 구하는 자

모든 새로운 종교 : 과거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악마의 군대 : 끊임없는 공포/기갈/의혹  위선/고집 

도올 "위선만 없는 종교는 다 받아들인다"

악마를 이기는 힘 : 지혜

신앙자 : 생각이 맑아지는 것


※ 도올의 투표 방법

1. 되고자만 하는 사람을 피할 것

2. 공약의 내용보다 공약에 담긴 사고능력/판단능력(심미안)/생각을 볼 것
3. 무소유하는 자 





12강 - 법구경 특강

경전『화살』 : 인간의 죽음을 다룸. "인간은 죽는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 것이다"

;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기 "마음을 다스려라."


법구경(담마빠다Dhammapada) : 수타니파타보다 조금 늦게 성립된 경전

근본불교 : 암송으로 전해짐. 쉬운 일상언어.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

불교 : 내부로부터 해방. 자각/독각의 사상. 마음을 다스려. 자기를 이김 → 인본주의/인도주의

cf) 기독교 : 외부로부터 해방. 믿음. 신 중심. 절대주의


"행동이 바른 사람을 존경하라"


"악한 일을 하지 말라. 착한 일을 하라. 그대 마음을 늘 순수하게 가져라. 
이것이 모든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다."

"건강은 가장 큰 재산이요, 만족은 가장 값비싼 보석이요, 

신뢰는 가장 위대한 친구요, 니르바나(열반)는 가장 큰 기쁨이다."

 



13강 - 싯달타의 깨달음

신神 개념의 진화 : 느낌의 응축+언어의 주술적 능력 → 신격화  다신론

 신들 사이의 불평등  신들의 싸움 → 만신(제우스, 신들의 대장) 

 일신론 (하나님/브라흐마.. 제국의 통일기에 출현 ) "나만을 믿어라" 

 zero. 공空 : 싯달타의 혁명. 유일신까지 부정

현대과학과 같은 세계관: "우주를 움직이는 인격적 존재는 없다"

空 : 색이란 감관에 의지하므로 그 자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계 속에 존재는 있다. 즉 존재는 관계되어 있다. =>

緣起연기/프라티트야 삼무파다(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 : "의존하여 같이 일어난다 "

신을 부정하고 우주의 법칙을 탐구한 결과 => 12연기(역관부터 순관으로)

노(병)사→생→유→취→애→수→촉→6입→명색→식→행→무명 ; '지독한 과학적 사고'

역관 : 이법이 없어지면 이법이 없어진다 = 환멸연기 ; 제법무아

순관 :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겨난다 = 유전연기


"우주를 보는 나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

" '생하는 법은 어느 것이나 모두 멸하는 법이다.' 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14강 -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우리는 연관되어 있음
→ 환멸연기 : 문제의 원인을 찾아 없애는 것
 4성제(고집멸도) : 연기법에 대해 쉽게 설한 것

"일체의 고는 집착에서 나오며 이것을 멸하는 도가 있다."

 8정도 : 멸하는 도 "정견/정사유(인과)/정어/정업(생활)/정명/정정진/정념(기억)/정정(마음)"

바르게 하기

 3학 "계戒/정/혜" : 세 가지가 함께여야 가능. 인생의 원칙

계戒 | 계율戒律 자연에 따름, 건강한 삶, 규칙적 삶, 몸의 단련/공부, 정어/정업/정명

정定 | 선정禪定 : 삼매(쌈마디:정신통일), 집중(Attention. 좌선은 방편 중 하나), 정념/정정

 | 지혜智慧 : 앎, 정견/정사유 [정진은 계정혜 공통]

원시불교의 핵심적 사상 : 부처의 가르침에 반복적으로 나타남

→ 고려말 지눌 "돈오점수頓悟漸修" : 깨달음이 와야 계속 닦을 수 있다. 끝없는 고양

 성철 "돈오돈수頓悟頓修" : 진정한 깨달음은 한번의 닦음으로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앎)은 더이상의 노력(修)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확실히 알기 때문에. 더 잘못하지 않는다. ex) 뜨거움/차가움,,

"돈수까지 되는 깨달음이라야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올 "싯다르타 가르침의 핵심은 오보다 수에 있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사막의 수련이다."

"끊임 없는 수의 과정 속에 오의 순간들이 온다. 인간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은 무아無我, 깨달은 자의 삶은 무아행(자비행慈悲行)이다."





15강 - 무아란 무엇인가?


이제까지의 원시불교 간단정리

1. 일체계고 : 노병사. 인생은 즐거울 수 없다.

두카(고) ↔ 샨땀 (고요,평화)

2. 고행 : 영육 이원론 (육체의 학대를 통해 정신의 자유를 추구)

3. 연기(쌈 무빠다) : 기나긴 사색의 결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함께 일어난다."

생과 사, 장과 단.. ; 고립된 것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법/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한다" ; 연기에서 도출되는 것


사고의 오류는 언어에서 나옴 : 언어는 세상을 반영하지(비추지) 못함.

주어 속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음

"꽃이 핀다" "가는 놈은 가지 않는다"

"나는 산다/말한다" ; 나와 삶/말은 분리될 수 없음

주어가 없는 우리 말이 더욱 진실됨. '술어 속에/술어 로서' 주어가 존재.

무아 = 아트만(我, 동일성의 체계)은 없음. 강압적/임시적 작동체계가 무너지면 바로 무너짐

ex) 잔디밭 : 끊임 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상태(동일성의 체계,아트만)가 유지됨

"너를 죽이겠다" = '너'가 죽으면 그것을 증오하는 '나'도 죽음 → 대자대비


연기론 =>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가 사라짐. 철저한 반형이상학적 철학. "언어에 속고 있다."

cf) 형이상학 : 언어를 통해 실체화시켜 놓은 것을 탐구.

    안티노미 (이율배반) : 상반되는 명제가 모두 참인 것. "신은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

=> 무기無記 :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 모든 존재의 존립근거가 깨짐


언어를 통해 언어를 부정하기. 언어의 미망 속에 빠지면 안됨. 

언어로 쌓여 있는 나我를 해체시켜야 함.





16강 - 싯달타의 죽음


"자신을 귀의처로 자신에게 귀의할 것이며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진리를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대반열반경 - 소박함/인간적/비신화적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외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다르마)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따라 진리에 바르게 이르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여래를 깊게 경외하는 것이 되느니라."


"아난다여, 나의 죽음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아난다여,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지는것. 그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레께서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었다.


스투파 = 탑 = '부처님의 무덤'의 뜻 ; 대승과 소승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





17강 - 무아無我에서 유식唯識으로


윤회의 주체로서의 아我를 찾기 : 윤회론과 무아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고찰 ; 무엇이 윤회하는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6식

눈(가장 명백하고 저급하며 미망의 가능성이 높은 것)에서 밑바닥(識의 심층)으로

6식 의식 - 5식을 묶은 것. 통각적 요소 ; 일상생활은 6식 까지


7식 말나식 : 의식 아래의 자의식 ; 살아야 한다는 집착 등
8식 아뢰야식(저장식) : 위의 7식이 저장되는 근원적 밑바닥의 의식 ; 훈습. 무의식. 윤회하는 것 

무명식/망식. 부정적인 것. 식을 버려야 지혜를 이룸=해탈


모든 사태는 나의 감관에 비친 것(내가 만들어 낸 것)을 인식하는 것


유식론 : 유식무경唯識無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극단적 유심론/주관론 (대상세계가 없다)

"사태가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내 의식의 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모든 앎/현상은 내 의식의 투영이다." 

"깃발도 바람도 아니라 마음이 움직인다" - 혜능선사
요가행파가 만들어냄
전식득지轉識得智 : 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이룬다 ; 유식의 깨달음이 있어야 함



황순식
황순식

사랑, 평화, 자유 Love, Peace, Freedom - 정의당 경기도당위원장 | 한반도평화특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