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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5

“일본불교 별 니시다와 스즈키, 제국주의 미화했다”

“일본불교 별 니시다와 스즈키, 제국주의 미화했다”

“일본불교 별 니시다와 스즈키, 제국주의 미화했다”
입력2021.08.04. 
조현 기자

‘불교평론’ 일본불교 실상 고발
니시다 기타로·스즈키 다이세쓰
20세기 세계적 불교학자 흔적 추적
원본보기2020 도쿄올림픽을 닷새 앞둔 7월18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선수촌 인근 도로에서 극우단체가 차량을 이용해 확성기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0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성화봉송로 지도에 독도를 일본 땅처럼 표기해 ‘평화의 제전’ 올림픽에서마저 제국주의적 마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 대표적인 계간지 <불교평론>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일본의 세계적인 불교학자들이 제국주의 이론 정립에 앞장섰다고 고발했다.

<불교평론>은 최근 펴낸 여름호 커버스토리 특집 ‘일본 불교의 특성과 실상’에서 니시다 기타로(1870~1945)와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의 친제국주의적 사상과 행보를 파헤치는 글을 게재했다. 이 특집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주류 종교인 불교가 어떻게 제국주의 전쟁을 돕고 참여했는지 구체적인 자료들을 적시했다.


원본보기니시다 기타로. <한겨레> 자료사진

일제의 총동원령에 따라 우리나라 불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 등도 강압적 혹은 자발적으로 전쟁물자를 지원했으니, 일본 내 종교들이 애국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된 것은 별 신기할 게 없다. 그러나 니시다 기타로와 스즈키 다이세쓰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인가받고 이를 이론화해 서양에 전한 동갑내기 둘은 서양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불교인을 꼽을 때 1·2위를 다툴 만한 인물들이다.

니시다 기타로는 일본의 독자적인 철학을 형성한 대표적 사상가로, 교토학파의 개조(한 종파의 원조가 되는 이)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에 건너가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전한 서양 불교의 태두다. 그는 인류문명이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을 서양의 합리주의에 두고, 동양적인 직관, 곧 선 사상의 중요성을 알려 서구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인들이 선(禪)이 아니라 일본어인 젠(zen)으로 표기한 것도 그로 인해서다.


원본보기교토학파의 아버지인 니시다 기타로가 고뇌하며 걷던 ‘철학의 길’이 시작되는 일본 교토의 은각사 전경. 조현 기자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가 약소국들을 침략하는 데 있어 전위대 구실을 한 데 반해, 불교는 ‘비폭력 평화의 종교’로 자리해왔음을 불교계는 자부해왔다. 하지만 이번 특집을 통해 불자도 언제든 제국주의와 폭력에 동원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나선 셈이다.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는 “니시다 기타로는 1944년 ‘일본의 국체가 바로 대승불교 참정신의 재현’이라고 주장했다”며 “니시다가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대하고, 동양공영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왕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썼을 때, 그는 유사제국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니시다 기타로.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에서 발행된 니시다 기타로 기념우표.

최용운 서강대 연구교수는 “니시다는 1943년 5월 일본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지침에 대한 글을 요구받고 <세계 신질서의 원리>를 집필했다”며 “당시 도조 내각이 이를 수용해 중국, 만주, 필리핀, 타이, 미얀마 등의 대표가 참가한 ‘대동아의회’에서 채택한 ‘대동아공동선언’에 상당 부분 반영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론 자체가 니시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근대 세계 역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비판했던 그가 피지배국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치 않은 채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편승했던 행적은 그의 학문적 위업의 빛을 감쇄케 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니시다와 함께 교토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다나베 하지메(1885~1962)가 니시다와 달리 참회의 양심선언을 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다나베는 1946년 저서 <참회도로서의 철학>을 통해 전쟁 기간에 국가의 실책에 대해 어떤 반대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를 뉘우치며 철학자로서의 무력함으로 고뇌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참회를 통한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스즈키 다이세쓰. <한겨레> 자료사진

종교학자인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은 선을 ‘전투 정신’으로 결부시킨 스즈키 다이세쓰를 비판했다. 스즈키는 저서에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극기적인 선 수업의 계율적인 경향은 전투 정신과 일치한다. 전투하는 이는 언제나 싸움의 대상에 마음을 오롯이 쏟으며, 곁눈질해서는 안 되고 적을 부수기 위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썼다. 이 원장은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인 1938년 일본의 대륙 침략이 한창이던 때 스즈키가 이 글을 썼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또 “태평양전쟁 패전 후 스즈키는 일본이 사태를 잘못 파악해 큰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문제의식을 갖기는 했고, 쇼와 일왕 부부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치며 ‘다른 사물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며 “그러나 그 상처 속에 조선인의 상처와 무고한 죽음들이 포함돼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원본보기1946년 도쿄 전범재판석에 앉은 도조 히데키(맨 왼쪽) 등 일본군 전범들. 수많은 부하들과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 중 다수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다시 출셋길을 걸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는 “니시다와 스즈키는 깨닫지 못한 이들에 의한 역사적 현실을 깨달음의 논리로 너무 쉽게 긍정했다”며 “그러다 보니 전쟁의 희생자, 아수라장, 거짓과 폭력 같은 구조적 폭력과 민중의 고통을 마치 가상세계 대하듯 간과해 마침내 침략도, 전쟁도, 죽임도 무화시킨 채 결국 천황제와 군국주의도 긍정했다”고 비판했다.




조현(cho@hani.co.kr)

2021/07/31

알라딘: [eBook] 중심 - 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 법인

알라딘: [전자책] 중심

[eBook] 중심 - 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 
법인 (지은이)김영사2021-03-29 


책소개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키워드, 중심. 주식 시장은 연일 급등과 폭락을 반복하며 출렁이고, 국민의 보루가 되어야 할 정치는 대립과 분열로 휘청인다. 코로나19가 방호복 속까지 침투해 일상을 마비시켜버린 시대. 법인 스님은 고집불통 같은 중심이 아닌, 사유하고 받아들이며 단단해지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움켜쥔 손을 다시 털어버리”고 힘든 이들과 나누며 살 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만날 수 있다고 전한다. 농사를 짓는 농민, 귀촌한 가족, 위안부 할머니, 청년, 석학, 시인, 기업인 등 수많은 사람의 절절한 사연을 듣고 보고 느낀 바를 글로 남겨야 한다고 느낄 때마다 펜대를 움켜쥐었다.

오랜 시간 우리는 이런 스님, 이런 어른의 책을 기다려왔다. 법인 스님은 산중 수행자로서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낮고 연약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법석이는 현장에서 중심을 지켰다. 《중심》은 46년간 뚜벅뚜벅 수행길을 걸어온 법인 스님이 산문山門을 열고 온몸으로 세상과 호흡하며 얻은 배움의 기록이다. 세월호 참사, 촛불시민혁명, 전 대통령 탄핵,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격랑의 현대사를 오롯이 살피며 참혹한 어둠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넌지시 일러준다. 부당한 세계에 맞서는 가운데 “나를 올곧게 지켜내라”고 조언하며, 내뱉은 말이 활이 되고 내면에 도사린 화가 독이 될 때 잠시 “멈추고 살피고 결단”하면 평온이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균형이 무너진 사회와 일상을 일으켜 세워줄 해법을 제시하는 명징한 책, 《중심》이 드디어 독자를 만난다.

목차
추천의 글 가운데 있는 마음
책을 펴내며

1부. 사는 일
움켜쥔 손 털어버리는 일
무어 그리 어려울까
인생을 망치지 않는 법
주마간화
보람이네가 행복한 이유
재미의 판
밥 이야기
낯선 규칙이 나를 바꾼다
솔바람과 풀꽃 시계의 값
실사구시의 배움터
‘본다’에서 ‘보인다’로
사는 즐거움, 죽는 즐거움
다른 길, 여러 길, 나만의 길
시간의 회복, 소소한 행복
참회하는 용기, 용서하는 용기
물도 부처, 나무도 부처
똑같은 길, 많이 같은 길
나에게 이런 사람 있는가
그 많은 고무신을 누가 빛나게 닦았을까
노래 못해도 충분히 멋진 사람
땅끝마을 명랑 남매
술맛과 차 맛의 차이
스님이 이렇게 웃길 수가
아이들도 은근 내공이 있다
내가 참 중요하다
짝을 짓는 즐거움

2부. 세상일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으면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회장님, 반성문 다시 쓰세요
존귀한 존재
혼자서 행복하다면 부끄러울 수 있다
참다운 나눔이란 무엇인가
열린 귀는 들으리라
상식의 교집합
두 노인과 코로나19
견딜 수 없어야 한다
공점엽 할머니
꽃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두 번째 화살
21세기 〈애절양〉
똑똑하고 잘난 자식
지리산, 큰 상징성이 두렵다
집은 집集이지, 집執이 아니다
내 몸이 사회를 말해준다
21세기형 아큐와 리플리 씨
촛불의 또 다른 화두
헌 부대에 새 술을 담아보니
단군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일
슬픔에 유효기간이 있을까
저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3부. 닦는 일
그릇에 더러움이 가득하면
맑은 물을 담을 수 없는 법
목탁이 귀중할까, 걸레가 귀중할까
상상, 질문, 대화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가
잠시 멈추면 내 안의 어둠은 사라진다
붙잡거나 붙들리거나
정녕 그것이 괴로움일까
도망가도 따라온다면
붙잡으면 휘둘린다
사랑이 덫이었네
말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다
명사가 위험하다
사소한 말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언어
옳은 것은 좋은 것일까
자기 말을 하는 사람
낭독의 기쁨
거짓말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3천 권 읽고 음미하기
실시간 행복의 실종
고사성어와 도토리묵
생각에 힘을 빼야 하는 이유
불리한가? 부끄러운가!
적명 스님과 배움
시민이 수행해야 하는 이유
장가도 안 간 스님이 어떻게 알아요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패가망신이라는 말이 있다.
P. 21~22 ‘적정 기술’이 있듯이 ‘적정 속도’가 필요하다. 삶이 헐떡거리지 않는 그런 속도 말이다. 적정한 속도를 유지하려면 성장과 독점이라는 미혹의 문명에 대한 큰 전환이 있어야 하겠다. 멈춰 서서 오래 골똘히 보아야 사랑스러워 보인다. 빨리 달리는 말 위에서 어찌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을 보고 느낄 수 있겠는가.
P. 24~25 보람이 부모는 왜 분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분수를 지킬 때 곧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분수라는 말은 신분 사회에서 계급 상승의 욕구를 억누르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본래 사람으로서 일정하게 이를 수 있는 자신만의 몫을 의미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기질과 취향,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남이 좋다고 하고 내 눈에도 좋아 보여서, 다른 이의 삶을 훔쳐보고 넘보는 일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를 매우 잘 알고 있는 보람이 부모는 가끔 농담조로 말하곤 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오르지 않는다.” 분수 밖의 삶에 의미를 두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지혜와 용기가 엿보인다.  접기
P. 59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공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개인과 가족의 삶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은 웃음과 대화가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 아니라 각자 피곤한 몸을 누이고 출근하는 숙소로 바뀐다. 재화의 총량을 늘리는 일을 멈출 줄 모르는 사회 구조가 개인 시간의 절대 빈곤을 만들어낸다. 생각해보자. 개개인이 쓸 수 있고 써야만 하는 저녁과 주말의 시간은 소중한 사유재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재산을 허락 없이 무단으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빼앗는 행위는 탈법을 저지르는 일이며 반칙이다.  접기
P. 64 올여름은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누렸다. (…)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무엇 덕분에 기분이 좋고 행복할까?” 한 아이가 답했다. “나무와 꽃과 시원한 바람이 있어서 행복해요.” 이어 내가 물었다. “이것들이 곁에 없거나 아프면 어떻게 될까?” 그러자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인 듯했다. 낱낱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은 만물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만 살려고 다른 것들을 따돌리고 함부로 대하면 사람도 결코 건강하게 살 수 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접기
P. 138~139 가장 쉬운 일이 가장 어렵고,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가장 쉽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만, 진실과 용기만 있으면 즉시 할 수 있다. 화해와 상생의 미래는 견딜 수 없는 가슴을 열어 보일 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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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지은이) 

1976년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출가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인간과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20대 초반 계룡산 신원사에서 경전보다 문학에 심취하여 지내던 중 “스님은 왜 공부하지 않으세요. 공부해서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을 제도할 스님이 왜 이리 한가하게 사나요?”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반도를 떠돌며 방황했다. 1985년 어느 문예지에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미련 없이 문학을 접고, 경전 공부와 수행에 몰입했다. 1994년 조계종 개혁 불사에 참여한 이후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을 지냈다. 2000년 해남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열어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고, 2009년부터 4년간 조계종 교육부장을 맡아 ‘100년 만의 변화’라는 승가교육개혁을 이끌었다. 2014년 일지암 청년암자학교에서 청년들의 고민에 날카로운 진단과 따스한 처방을 내려 ‘병 주고 약 주는 스님’으로 불렸다. 2015년부터 4년간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 우리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지리산 실상사에서 대안학교인 작은학교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면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월간 〈참여사회〉 편집위원장으로 일상에서 깨달음이 빛나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중심>,<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이런 스님, 이런 어른을 기다렸다!
지식인이 사랑하는 문장가 법인 스님,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을 되돌아본다

역병 재난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온갖 폭력이 도사린 사회를 밝게 만들 해결책은 없을까. 왜 괴롭고 외롭고 화가 나는 것일까. 주어진 길을 따라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물음에 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 중심.
《중심》의 저자 법인 스님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76년 출가하여 46년간 수행길을 걸으며 농사를 짓는 농민, 귀촌한 가족, 위안부 할머니 등 여러 사람을 두루 만나며 “세상사에 무관심”(294쪽)하지 않고, 승속을 넘어선 혜안을 키웠다. 산중 수행자로서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낮고 연약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법석이는 현장에서 중심을 지켰다. 그래서 황지우 시인은 “이 책의 제목 《중심》은 어쩌면 당신의 위치이기도 하다”(5쪽)라고 말했다.
법인 스님은 말한다. 꿈쩍 않는 고집불통 같은 중심이 아닌, 사유하고 받아들이며 단단해지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움켜쥔 손 다시 털어버리”(52쪽)고 힘든 이들과 나누며 살 때 세상의 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스님이 맑은 글들을 죽 따라 읽다보면 망망대해 같은 인생길의 방향이 잡히고, 어느새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에 당도한다.
감은 눈을 뜨게 하는 글이 절실할 때마다 여러 매체에서 법인 스님을 찾았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소위 ‘글 잘 쓰는 스님’으로 불리는 문장가 법인 스님. 때로는 흐트러진 일상을 바로 잡는 죽비 같은 글, 때로는 가슴 먹먹하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써온 스님이 오랜 수행과 만남에서 길어올린 사유를 만나보자.

구심점을 잃은 환난의 시대에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는 일, 세상일, 닦는 일

이 책 《중심》은 2015년 5월부터 2021년 1월까지 법인 스님이 일간지와 월간지에 연재한 칼럼 그리고 미발표 원고를 모아 엮은 산문집이다. 지난 6년여간 수행자의 소임을 다하면서 혼란의 연속인 우리 사회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1부 ‘사는 일’은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해 법인 스님이 사유한 글들을 모았다. 산중 템플스테이에서 나눈 대화부터 산문山門을 열고 세상 사람들과 호흡하며 나눈 이야기까지 가득하다. 고 정주영 회장에게 들은 절밥에 얽힌 이야기가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청년이 남긴 갈색 가방 속 컵라면에 대한 단상으로 이어지며, 밥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를 되새겨본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아빠가 아들과 딸의 손목에 풀꽃 시계를 만들어준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참 많다”(39쪽)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특히 스님은 벗들과 차담을 나누기를 좋아하는데, 차를 앞에 두고 지인들과 나눈 담소는 옹글어 인생의 시선을 넓혀준다.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고 호화로운 집을 소유하고 명품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으로 느끼는 행복이 진짜다. _58쪽

2부 ‘세상일’은 요동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자 고군분투했던 참여적 주제의 글들을 모았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뼈아픈 슬픔을 직시하고 어루만지며, 세월호 참사, 촛불시민혁명 등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한 사회 풍경을 조명하고 공생의 길에 주목한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 속 상황을 비추어 팬데믹 시대에 잠복한 부조리를 성찰한다. 또 고용 불안, 청년 실업 등 입에 풀칠도 못 하고 사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도 잊지 않는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슬픔에 가까이 다가가는 법인 스님의 성정은, 청년 시절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인간과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고, 이순에 가까워지기까지 시를 비롯한 문학을 사랑한 데에서 비롯한 것일 터이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사유를 드러내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스님의 글은 품격 있다. 갑질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대기업 회장님에게 보내는 편지는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성폭력 등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람들뿐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뒤 회피하기에 바쁜 이들에게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되짚게 한다.

회장님! (…) 불가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참理懺’과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정직한 고백을 하고 보상을 해주는 ‘사참事懺’이라는 참회의 방식이 있습니다. 사참이 없는 참회는 이참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왜 지금 진정한 사참을 하지 않습니까? _108~109쪽

3부 ‘닦는 일’은 ‘괴로움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고통을 다스려야 하는가’ ‘말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말그릇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가’ ‘공부란 무엇이며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가’ 등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법인 스님은 “책을 읽고 틈틈이 농사일을 돕고”(116쪽), 노스님과 밤샘 토론을 하는 등 온몸으로 수행하면서, “세간에 살아가는 시민의 수행은 특별한 명상과 기도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각과 언행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도 수행”(293쪽)이라고 전한다.

고요한 시간에 정직하게 자신을 응시해본다면 자기 내면에 도사린 화를 알 수 있다. (…) 화가 나고 불안하고 고립감을 느낄 때는 멈춰야 한다. 왜 멈추는지 묻는다면, 살피기 위해 멈춰야 한다고 답하겠다. 그리고 내면에 깃든 어둠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어두운 여러 모습이 나에게 깃들어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멈추면 보이고 바라보면 사라진다. 어두운 모습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과 기쁨이 찾아온다. 그래서 ‘텅 빈 충만’이라고 하지 않는가. _210~211쪽

화려한 꽃이 소박한 야생화를
깔보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나를 올곧게 지켜내며 참여하고 연대한다

법인 스님의 글은 불교라는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주눅 들지 않는 꽃들이 어우러진 꽃밭“(295쪽), 즉 화엄華嚴을 보여준다. 신부님, 목사님 등 여타 종교인과 경계를 두지 않고 소통하며 청년들, 농민들,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 글의 품이 넉넉한 건 당연한 이치겠다. 소위 “장가도 안 간 스님이 어떻게 세상일을 속속들이 아느냐고”(294쪽) 묻곤 하는데, 이에 대해 법인 스님은 “산과 강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백천 지류의 물들이 바다에 모이듯, 여러 사람과 사연이 모여드는 곳이 절집이다. (…) 여러 사연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절집엔 늘 잡설의 꽃이 핀다. 잡설이 모이면 경전이 된다”라고 답하며, 사람 사는 내음을 품되 강골 있는 언어로 참여와 연대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가 참여하고 연대할 때 소홀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부당한 세상에 맞서면서도 ‘나’를 올곧게 지켜내는 일이다. 왜냐면 저마다의 ‘나’가 확장하여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_100쪽

법인 스님은 잠깐 편해지는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오래 곱씹게 되는 일침을 전한다. 어쩌면 이 책 《중심》은 스님의 반성문이자 소리 없는 분투기에 가깝다. 무균실과 같은 세상은 없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물이 조금만 탁해져도 물고기는 아가미를 여닫을 수 없다. 물이 오염되면 물고기는 숨을 거두게 된다. 물이 세상이라면 물고기는 사람이다. 티끌 하나 없는 물은 있을 수 없지만, 오염물이 넘쳐 흐르는 세상을 정화할 필요는 있다. 이런 세상에서 새삼 다시 《중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내가 서 있어야 할 ‘바탕’에 내가 서 있고/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내가 길을 가면/ 그곳이 바로 ‘중심’이다.// 천길 벼랑 끝의 나뭇가지 붙잡고 있는 그대, 당장 그 손을 놓으시라./ 천길 벼랑 끝에 서 있는 그대, 당장 한 걸음 내딛어라.// 지금 여기, 머뭇거릴 이유 없네. _9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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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답답한 세상인데, 잠시나마 절에 와서 스님과 얘기한 기분이 드른 책 입니다.
점심 먹고 쉴때 한 챕터씩 읽기 좋아요 
gisuis 2021-04-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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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 새창으로 보기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키워드 '중심'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이해인 수녀님 등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러울 때마다 우리를 든든히 붙잡아주시는 어른들이 계셨다.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지금도 세상은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괴롭고, 외로운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여줄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참 오랜만에 스님이 쓰신 책을 만났다.

법인 스님은 산중 수행자로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낮고 연약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법석이는 현장에서 세상과 호흡하며 얻은 배움의 기록이 정리되어 있다.





"머뭇거림 없이 중심을 지키면서 

가고 싶은 길을 가고, 가야 할 길을 가고,

가고 싶지 않은 길도 가기 위해

왜 나는 나와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는가.



나를 힘들게 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왜 나는 정직하게 질문하지 않는가."





"우리가 참여하고 연대할 때 소홀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부당한 세상에 맞서면서도 '나'를 올곧게 지켜내는 일이다. 왜냐면 저마다의 '나'가 확장하여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단단히 중심을 잡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한 문장씩 읽다 보면 스님의 지혜가 전해지고 마음에 쌓여 세상살이에 조금은 유연해진 나를 발견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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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yj0702 2021-04-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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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 존재하기. 새창으로 보기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요즘 책과 친해져서 쉬는 시간마다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읽는 책들마다 한결같이 나에게 전달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라는 것.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 사람은 하루에 3-4만 개의 선택을 한다고 하는데, 수만 가지의 선택지 속에서 '대체 내가 제대로 선택하고 있기는 한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온전한 나의 선택으로 가꾸어지는 나의 삶 역시 잘 가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도 물론 있다. 그런 나에게 의심을 거두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있어서 내심 감사한 밤이다. 



오늘 읽은 책, <중심: 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는 휘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나만의 중심을 세우는 것의 특별함을 선사한다. 얼핏 보면 중심 잡는 게 꽤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는 것. 그래서 중심이 흔들릴 땐 꼭 이 책 앞으로 가야 한다.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고, 그 어느 것보다 영혼의 일이 먼저 질서가 잡혀야 마음이 편하다." (P.134) 

-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말이 마음속에 콕 박힌다. 살면서 나의 '영혼'을 생각하는 나날들이 얼마나 있을까. 나의 몸과 마음은 생각하지만, 정작 영혼을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아 <영혼>이라는 단어가 내심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유한다. 영혼의 일이 따라야 하는 질서가 무엇일까. 모든 일을 잠깐 멈추고 내 몸과 마음을 되돌이켜 봄으로써 답을 찾길 고대한다. 그렇다. 명상이 답이다. 



"노래를 못해도 감흥에 젖어 흥겨울 수 있고, 글을 못 써도 책을 읽고 내용과 의미에 공감할 수 있다. 누구든지 마음을 다해 눈을 뜨고 귀를 열면 온갖 아름다움과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감수성이라는 특별한 재능이 보일 것이다. 감성 지수를 높이는 일이 최고의 재능이고 복락이겠다. '창에 스미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는 공부를 잠시 쉬어도 좋겠다.' (P.80)

-<감수성이라는 특별한 재능> 이란 말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느릴 수 있는 특권인데, 나에게는 그런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싶다. 길을 가다 잠시 멈춰 서서 아름 다운 것들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삶 속 작은 여유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 즐길 줄 아는 사람. 감수성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똑 부러지게 잘 쓰는 사람이 돼야지.




이 책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꼭 필요한 <중심>을 제대로 잡아주는 책이다. 따라서, 삶의 <중심> 이 흔들린다고 느끼시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다. 그리고 말씀드리고 싶다. 중심이 흔들려도 괜찮다고. 흔들리니까 사람이고, 그깟 중심, 마음 단단히 먹고 세우면 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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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yeiseul 2021-04-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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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새창으로 보기
#중심 #법인
극단의 세상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
🏷 어떤 세상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바로잡기
모든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혼자만 살고자 하면 혼자도 살 수 없다. 재난은 우리 곁에 늘 숨어 있다. 인간이 마음을 모으면 희망의 빛을 부를 수 있다. (118쪽)
스님이 쓰신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닥 세상을 알지 못한 채로
편한 소리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랄까.
라떼는 말이야같은 느낌일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요지경의 세상 이슈들을 말했다.
스님은 세상의 요지들에 딴지를 걸고 답을 청했다.
뻔한 소리가 아니여서 좋았다.
그러한 세상일수록 우리는 중심을 세우고
오히려 자신을 더 돌아봐야 한다는 것.
🏷 다른 종교인들과 모임도 하시는 스님
주체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내가 반드시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바라보고, 사적 이해득실을 떠나 상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바꾸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80쪽)
신부님, 목사님, 스님들과도
모임을 하신다는 사실이 이색적이었다.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본질적인 뜻을 가지고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
종교가 다른 사람과는 결혼도 못한다고 하는데,
성직자들의 본질은 같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종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중심이 갖춰져야 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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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운 2021-04-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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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충만 새창으로 보기
수행자 법인 스님이 5~6년 전 발표하신 글 부터 아직 발표하지 않은 글 까지 짧은 글을 모아놓은 산문집이다. 출가 수행자가 쓴 글인만큼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불교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기존에 아는 것이 있다면 그 뜻을 더 깊게 알 수 있다. 책을 읽으며 40년 이상을 수행자로 살아오신 분도 일상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깨달음을서 얻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1부 '사는 일'은 주로 저자 본인과 타인의 일상 속 깨달음 이야기다. 찻잎을 따고 감자를 캐는 노동에서도 의미를 찾고 아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존경스럽다. 또 나의 삶, 이야기, 감정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확장하여 사회 곳곳에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안타까운 일에 대한 의견도 제시하신다. 이는 2부 '세상 일'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수행자의 마음으로 진단한다. 최근 이슈 뿐만 아니라 2021년에 점점 잊혀가는 일들을 종교적 성찰의 말씀과 함께 돌아볼 수 있는 챕터다.

 

3부가 가장 '불교스러운' 챕터였는데, 그만큼 읽는 동안 잡념이 조금이나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부처님의 말씀이 가장 많이 수록된 챕터이다.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배우는 사상으로서의 불교만 접할 수 있어 '출가'나 '수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세속과의 거리감이 불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서 불교나 불교 수행자들이 세간 일에 가지는 관심과 진단, 지혜 등이 생각보다 더 깊고 본질을 꿰뚫는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제목 '중심'은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시민 수행자'로서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으며, 그름을 배격하되 끝내 함께 가겠다는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삶(p193)'을 흔들림 없이 지향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싶다. 

 

시험기간에 읽어서 그런진 몰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템플스테이를 꼭 해보겠다고 한 번 더 다짐했다. 차담을 나누며 '보는 풍경'이 아닌 '보이는 풍경'을 발견하는 기쁨을 경험해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보는 풍경'은 그저 똑같은 사진으로 남고, '보이는 풍경'은 저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다다른다. (P49)

슬픔과 아픔은 당사자가 감내하는 무게다. 위로와 사랑은 오직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P191)

 

*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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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dls9955xp 2021-04-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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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새창으로 보기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혼란과 격동의 세월을 겪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들 말도 할 수 없이 불안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환경의 변화에 의해 흔들리고, 남들의 이야기에 갈등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불안정한 사회가 지금의 현실이다.


이 책은 이런 우리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자신을 지켜라고 말씀해 주시는 법인 스님의 산문집이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연재한 칼럼과 원고를 엮은 이 책은 혼돈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가장 쉬운 일이 가장 어렵고,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가장 쉽다.'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가 대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초등생 자녀들에게 풀꽃 시계를 선물로 준 아버지의 진심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고 명품시계를 밝히며 겉치레만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삶의 중심을 내가 아니라 남들에게 옮겨 생각하고 있는 주체 없는 삶이 문제가 아닐까.


'아무리 편하고 빨라도, 내 정신과 감성의 생기와 울림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일 수 없다.'


지금껏 불안해하던 나를 돌아본다. 스님의 말처럼 내 중심을 찾아보고자 한다. 나의 중심은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혹시나 남들보다 뒤쳐질까, 창피한 삶을 살게 될까 주저하며 불안해하며 남의 시선만 좇던 나를 말이다. 스님의 꾸짖음이 나를 때린다. 정신 차리고 살라고. 니 욕심으로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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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dugi 2021-04-2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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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2

성덕대왕신종 - 나무위키

성덕대왕신종 - 나무위키

성덕대왕신종

최근 수정 시각: 

에밀레종에서 넘어옴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鐘
소재지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의식법구 /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1. 개요2. 역사3. 전설
3.1. 내용3.2. 역사학적 검토
4. 특징
4.1. 종 고리가 로스트 테크놀로지라는 주장
5. 당대 다른 종(鐘)과의 비교6. 기타7. 국보 제29호8.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신라시대 771년 12월 14일에 만들어진 이다. 국보 29호로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되었다. 통일신라 때 만들었는데, 전근대에 만들어 국내에 실물이 현존하는 범종 중 가장 커서 높이 3.75 m, 지름 2.27 m, 두께 11∼25 cm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20세기 전까지는 한국 최대의 종이었지만, 2008년에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에 위치한 세계평화의종공원의 '세계평화의 종'[1]에 밀렸다.[2] 하지만 여전히 성덕대왕신종이 한국을 대표하는 범종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2021년 2월 8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을 타종하여 녹음한 종소리를 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하였다. #

2. 역사[편집]

신라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버지 성덕왕의 공을 기리고자(그래서 성덕대왕) 경덕왕이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즉, 용비어천가와 비슷한 목적. 종에 씐 명문 1037자에는 한림랑(翰林郞) 김필중(金弼重)이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고 시작해서 제작 시기, 제작 동기, 범종의 의미,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 8명의 이름과 관직, 기술자 4명의 직책과 이름을 설명하고, 성덕대왕의 덕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었고 어진 사람을 발탁해 백성들을 편하게 해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성덕대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글씨는 대나마 한단이 쓰고 시명은 김백완이 지었으며 감독관은 대각간 김옹과 각간 김양상이었다고 한다.[3]

하지만 이 종이 완성되기 이전에 경덕왕은 세상을 떠났고 결국 경덕왕의 아들, 즉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재위하던 771년에야 주조를 끝마쳤다. 그리하여 현재의 경주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 봉덕사에 걸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덕대왕신종 표면에 새겨진 명문 덕에 알 수 있다.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될 때는 많은 불교 범종을 녹여서 무기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도 녹여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봉덕사는 이후 조선시대에 북천에 큰 홍수가 나면서 절은 없어지고[4] 종은 조선시대 한동안 빈 들판 풀 속에 덩그러니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460년 영묘사(靈妙寺)[5]에 옮겨서 걸었다가, 이후 1506년에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거기에 걸어서 성문의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현대에는 1915년 옛 경주박물관[6] 자리로 옮긴 후 경주고적보존회를 거쳐 1975년에 새로 지은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당시 이 거대한 종을 옮기는데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 종을 트레일러에 실으니 무게는 50톤이 넘어서 최단거리인 월성로를 통과하면 중간에 있는 작은 다리가 50톤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경주 시내를 관통해서 멀리 있는 다리를 타야 했는데, 그러면 트레일러에 실린 종의 높이가 6미터가 넘어서 경주시내 전깃줄이 모두 걸리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전력공사에서 전공들이 다수 동원되어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갈 때마다 전깃줄을 끊어주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이어주는 식으로 했고, 성덕대왕신종이 경주 시내를 지나가는 동안 10만 시민들이 종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서 천천히 가는 트레일러를 따라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3. 전설[편집]

현존하는 종들 중 가장 유명한 전설은 인신공양 전설이다.

3.1. 내용[편집]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에밀레'하고 울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
혜공왕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을 만들기 위한 돈을 시주받았는데, 시주하러 다니던 스님이 들른 어떤 한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 집에서는 과부 아낙이 아기와 같이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시주하고 싶지만 있는 건 갓난아기뿐이네요'라고 아기라도 시주받아 가겠냐는 투로 말했다.[7]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떠나 열심히 시주를 받아 종 주조에 보탰다.

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질 않아 점을 쳐 보니 '받아올 시주를 받아오지 않았다'라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저 아기를 시주하겠다던 집밖에 안 남기에 그 아이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8] 그래서 스님은 아이를 시주한다던 그 집을 찾아가 여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속에 결국 아이를 빼앗듯이 강제로 데려왔고[9] 울음을 삼키며 아이를 쇳물에 던진 뒤[10] 종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이후 종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소리처럼 에미일레라('어미의 탓이다'라고 원망한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울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말실수로 인해 아이가 시주로 바쳐졌다는 이 이야기가 제일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내용의 전설도 존재한다.
봉덕사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일전(一典)이라는 이름의 종장이 이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엄청 받았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전에게는 과부의 몸으로 그 집에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겨서 고뇌 끝에 자신의 아이를 바쳐서 종의 제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전에게 이를 알린다. 일전은 처음에는 이를 망설였지만 결국 부처의 뜻으로 여겨 그 청을 받아들인다. 결국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지고 종이 완성되었고, 종소리는 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는 '에밀레'로 들린다고 한다. (최상수, <경주의 고적전설>에서 발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던 당시, 계속해서 종이 망가지자 책임자였던 대장장이는 머리를 썩혔다. 여태껏 열심히 만들었는데도 계속해서 실패만 하니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과부 여동생이 어린 아이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오빠의 고민을 눈치채고 자신의 아이를 대신 바치겠다고 얘기했다. 여동생의 대답에 오빠는 깜짝 놀라 절대 하지 말라고 말렸고 사찰로 가서 부처님에게 조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저녁 대장장이의 꿈에 부처가 보살들과 나타나 아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주었다. 바로 목침을 용광로에 넣으란 것이었다. 자신들이 이적을 일으켜서 목침을 아이의 모습으로 보이게 할 것이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대장장이는 꿈에 깨서 서둘러 목침을 용광로에 넣었다. 부처의 이적으로 아이의 모습을 한 목침이었지만 그는 아이가 떨어지는 것 같아 슬피 울었다. 너무 울어서 눈이 멀 정도였지만 그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무사했고 이 아이는 훗날 명승이 되었다고 한다.

3.2. 역사학적 검토[편집]

이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놀랍게도 20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등장했다.

여기서 종을 주조할 당시 아이를 넣었다는 인신 공양 설화는 간장과 막야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이미 있었다. 그렇기에 이 설화가 보신각종에서 성덕대왕신종으로 넘어간 것일 뿐이란 주장도 나온다. 선교사 알렌과 헐버트 등은 1900년을 전후해 에밀레가 보신각 종이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1927년 성덕대왕신종에 대해서도 유아공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글이 동아일보에 실렸음이 밝혀지면서 에밀레종이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또한 조선 중기 평양 연광정 옆의 평양 종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음을 해당 기사에서 전하고 있다.# 고로 더 자세한 고증이 요구된다.

종이 운다는 이야기는 오호십육국시대 전량 때 세워진 중국 간쑤성 무위(武威)시 대운사(大雲寺)에 있는 종이 대표적. 여기는 '낭아娘呀, 낭娘'(여자 혹은 어머니) 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 하고 운다고 한다(황인덕의 연구). 당나라~오대십국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추정되므로 이런 이야기가 번역되어 같은 시기 한반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전설이 혜공왕대의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한다. 어린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전횡을 일삼던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과, 혜공왕의 고종사촌이자 나이 어린 왕을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한[11] 상대등 김양상을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것.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유형의 전설에서든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아버지인 죽은 경덕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게 사실이라면 왜 기록이 없느냐는 의문점이 있다. 물론 기록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면 그 사실은 어떻게 전해졌으며,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사실이라고 믿을 근거가 무엇인지 의뭄을 갖게 된다.

역사학과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사료가 언제 작성되었가 하는 문제다. 몽골 제국의 침입과 14세기 왜구의 습격으로 구전 전승을 이어나갔을 지역 사회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 작성된 자료만 되어도 이 기록의 신뢰성을 높게 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학계에서 이 에밀레종 설화를 신라 당대의 일로 보는 학자는 없다. 종합 자료집 같은 경우에야 '이런 얘기도 있긴 한데...' 하는 식으로, 하도 유명하니까 언급이야 해 주겠지만 학술 논문에서 이런 소리하면 역사 자료 방법론을 무엇으로 배웠냐면서 게재를 거부당할 것이 뻔하다. 다만 국문학과나 민속학과라면 자료의 신뢰성 문제보다 내러티브의 문제를 중시하고 구전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아주 가끔 이런 논문이 통과된다. 물론 앞서 말한 자료 방법론의 문제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논문으로 취급받는다.

당연히 진짜로 아이가 들어간 게 아니다. 성분 분석에 따르면 인간을 넣었을 경우 당연히 있어야 할 성분(뼈의 칼슘, 인 등)이 없으므로 그냥 전설일 뿐이다. 또한 주조 과정에서 종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신속한 공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신종을 만들 때는 소형 도가니들로부터 동시에 주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아이를 넣으려면 아이를 균등하게 갈아 도가니별로 넣어줘야 하는데 잔혹성은 둘째치고서라도 제대로 된 종이 나올 리가 없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에서 종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인신공양 전설은 워낙 흔하지만..

4. 특징[편집]

현 소재지는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번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

이 종이 내는 음색의 특성으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종의 안쪽을 대칭형 구조 속에 숨어 있는 미세한 비대칭성이 나타나도록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종을 치면 일정하지 않은 두께로 서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는 '맥놀이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의 아래에는 땅을 파놓은 울림통이 있는데, 종 위의 음관과 함께 한국 종의 고유한 특징이다. 울림통은 종이 울릴 때 나오는 간섭파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금 설치된 울림통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종의 진동수와 약 3Hz정도 오차가 있다고 한다. 크기를 키워야 된다는 이야긴데, 연구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울릴 일이 없다 보니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종 위의 음관은 찢는 듯한 고주파음을 재빨리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성덕대왕신종은 종소리를 녹음해서 매시 정각, 20분, 40분에 틀고 있다.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했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했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과 2003년 개천절(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2004년 말에는 보존에 문제를 일으키는 금속 스트레스 누적을 억제하기 위해 더 이상 타종을 금하고 있다. 금지 이후로도 관광객들이 종을 살짝이나마 쳐보는 일이 빈번해 당목도 떼서 바닥에 둔 상태다. 주기적으로 쳐 주는 것과 안 치는 것 어느 쪽이 보존에 유리한지는 전문가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한국의 보존기술은 반쯤 망가진 종을 완전복원해 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정도라는 사실은 알아두자. 아침저녁으로 종치면서도 천년이 넘도록 멀쩡했건만 나름대로 보존을 한답시고 최첨단 기술로 개발된 보존액을 발랐다가 되레 부식해서 이젠 치지도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녹슬지도 않은 쇠에 보존액을 굳이 바를 리가 없으므로 이건 그냥 진짜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데 대한 악담이나 억측이다. 이후 2021년에 종 완성 1250주년을 기념하며 입체음향을 채록하기 위해 수 차례 타종하였다. #

종 표면의 명문(銘文)이나 그림 등을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 코너에 가자,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4.1. 종 고리가 로스트 테크놀로지라는 주장[편집]

예전에 유명했던 이야기로는, 종을 매달고 있는 고리는 현대 문명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힘든 오파츠 수준의 강도를 자랑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신관으로 옮겨 달면서 새로 종고리를 만들었는데, 종고리의 강도를 실험해보기 위해 강괴를 달아놓고 변화를 관찰해보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종의 하중보다 더 가벼운 강괴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든 종고리가 늘어져버렸다고 하며, 이에 신품 제작을 시도했지만 종고리를 넣는 구멍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여기에 들어갈 만한 고리로는 종의 무게를 지탱할 강도를 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직경 15cm면 버텨낼 수 있는데 구멍의 직경이 9cm가 안 되었기 때문에, 와이어로 칭칭 감아버리면 무게가 분산되는 효과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그래서는 종을 달아둔 게 아니게 되므로 포기했다."고 하며, "결국에는 본래 쓰던 고리를 찾아서 다시 끼워넣었다."는 것이 해당 서적의 진술이다. 혹은 모 TV 프로그램에서 시험해 본답시고 원래 고리를 떼고 최첨단 합금으로 만든 고리로 실제 바꿔달자 하루도 채 안 돼서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도로 갈아끼워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에 대한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다.

이 고리 오파츠설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데, 일단 산업현장에서 사용하는 50톤의 중량을 버티는 샤클의 지름이 2인치(5.08 cm)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을 달로 보내는 현대 공학 수준은 절대 만만한 레벨이 아니다. 다음의 반박글도 참고해보자. 고로 유추해 보건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 베스트셀러에 실린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믿어버려서 만들어진 도시전설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당장 고리만 해도 위의 링크에 실린 것처럼 얇은 합금을 대장장이가 말아서 만들 필요조차 없이 그냥 적당한 철을 가져다가 쓰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데다가, 그냥 사진만 확인해봐도 고리보다 더 공학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그 고리를 끼우는 틀 자체가 근대에 복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전문가들의 검증이 필요한 부분일듯.

5. 당대 다른 종(鐘)과의 비교[편집]

동북아시아의 대종들은 대개 맑고 높은 소리보다는 진중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그 기술의 정점에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이다. 앞서 말한 음통(음관)과 울림통도 그렇지만.

다만 에밀레종도 대단한 물건이나 역사상으로 보면 신라 최대의 종은 아니다. 신라 최대의 종은 경덕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의 황룡사 대종으로, 그 규모가 성덕대왕신종의 무려 4배에 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몽전쟁으로 황룡사가 파괴될 때 소실되었다.

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도 아니다. 에밀레종보다 46년 빨리 만든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725년 주조, 1.7 m)이 가장 오래된 종이다. 이 종은 성덕왕 때 만들었고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이 죽은 뒤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6. 기타[편집]

  • 특유의 인신공양 전설이 가히 충격적이어서, 최근 국내에선 '에밀레'가 사람을 인신공양급으로 부려먹는 행위를 의미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공밀레와 번밀레가 있으며, 애니메이션 작화가 매번 극강이면 작화진을 갈았다면서 작밀레라 하기도 한다.
  • 한편으로는 신라의 쇠락을 잘 나타내는 전설이기도 한 게, 혜공왕 이전까지 강력한 국력을 가졌던 신라가 종을 만드는 데 어린아이를 바치는 일이 있을 정도로 매우 몰락해가던 상태였음을 잘 묘사해 준다.
  •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마련된 종각에 전시되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종 표면을 긁어낸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종의 가루를 달여 마시면 낙태에 도움이 된다는 기이한 미신이 1930~40년대에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2] 물론 실제로는 녹물이나 다름없어 건강에는 아주 해롭다. 현재는 박물관 내에서 전시 중이라 함부로 만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 워낙 오래된 유물이다보니 최근엔 보존을 위해 종을 직접적으로 울리는 일은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그 대신에 녹음한 종소리를 주변 음향기기를 통해 들려주고 있어 감상은 가능하다. 종을 함부로 울리는 막장 관람객이 있을지 몰라 종을 칠 때 쓰는 나무 기둥은 쇠줄로 단단히 고정해 장식용으로 방치해뒀는데, 이게 부식된터라 2021년 현재는 떼어버리고 주변 울타리를 투명 강화유리로 교체한 상태다. 또한 종 하단에 갈색 받침대로 보이는 물체 3개를 괴어놓았다. 실제로 보면 다 썩어서 모양만 겨우 남은 상태여서 정상적인 사용도 불가능하다.
  • 서울의 보신각종이 원래 있던 종이 1985년에 본래의 보신각종이 노후화되어 이 종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기고 보신각에 걸 종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때 성덕대왕신종을 복제했다. 그러나 이 역시 종소리가 진품에 한참 못미쳤다고 하는데, 해마다 12월 31일에 제야의 종이 울리는데 옛날에는 성덕대왕신종도 자정에 쳤고, 그걸 새 보신각종(에밀레종 복제품) 치는 것과 교차해 TV에 생중계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종의 소리가 아무리 소리에 둔한 사람이라도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만큼 수준 차이가 났다고 한다.
  • 전통무용가 이애주가 이 종소리에 맞춘 춤을 만든 적이 있다. 춤 이름은 후천개벽무(後天開闢舞)로 본래는 1986년 개천절에 초연할 예정이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같은 해 10월 9일 한글날에 공연을 했다고 한다. 장선우 감독이 영상 촬영을 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미처 촬영을 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이애주는 성덕대왕신종 타종행사 때 종에 대한 의미를 담은 춤을 추는 공연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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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서 보이듯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인근 샌페드로(San pedro)에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에밀레종을 본따 만든 우정의 종각(Korean Bell of Friendship)이 있다.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와 종각의 모습이 어우러져, 근처에서 이 종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찍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도 잠깐 나온다. 다만 형태는 흉내만 냈지 제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 종처럼 맑은 소리가 아니라 깡통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못 들어줄 수준은 아니다.

7. 국보 제29호[편집]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제1167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운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8. 같이 보기[편집]

[1] 1만 관(37.5톤), 높이 4.67 m, 지름 2.76 m[2] 이전까지는 한국 범종 제작 기술이 실전되어 새로운 전통 대종이 나기 힘들었지만 현대에는 기술이 복원되어 새로운 종이 나온다. 대부분 진천군 덕산읍 성종사에서 제작한다.[3] 아이러니하게도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된다. 종의 주인공인 성덕왕 입장에서는 손자를 죽인 원수의 이름이 자신을 칭송하는 종에 씐 셈이다.[4] 당연히 숭유억불의 조선이라 복구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이후 김시습이 폐허가 된 봉덕사지를 보고 지은 시가 있는걸로 봐선, 이때까지는 봉덕사 폐허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았던 모양이다. 역덕들의 추측으로는 북천 서쪽 성동동 1사지로 추측하지만 일부는 북천의 물길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수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5] 출토된 기와에 적혀있는 명문을 근거로 현재의 흥륜사지로 추측한다. 이 절도 당연히 조선조에 숭유억불 기조로 타격을 받아서 현대에야 절터 옆에 새 절을 만들었다.[6] 경주문화원에 있는 종각[7] 다른 판본에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이야기도 있다.[8] 이 부분은 여러 이본이 있다. 처음부터 아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든가, 어미가 아이 운운하며 시주를 거절함으로써 스님을 모욕했기에 부정 타서 종 완성이 안 되는 거였다든가.[9] 판본에 따라 여인이 결국 어쩔 수 없이 승려에게 아이를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10] 전설에는 스님과 대장장이들이 어린 아이가 안타까워 정말 울면서 던졌다고 한다.[11] 삼국사기에서는 주어 없이 김지정의 난이 일어난 직후 왕이 시해되었다고 전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김양상과 김경신이 왕을 시해했다고 보다 명확하게 나온다. 실제로는 김경신이 반란을 주도하여 혜공왕을 시해하고 명분을 위해 김양상을 강제로 즉위시켰다는 학설이 있기는 하나, 어떤 경우든 당대 사람들에게 김양상은 반란의 주도자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12]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과 중대의 왕실」, 『신라국사의 연구[新羅國史の硏究]』, 요시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 2002, 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