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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8

알라딘: [전자책]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알라딘: [전자책]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epub 
법정,최인호 (지은이)여백(여백미디어)2015-04-15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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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제공 파일 : ePub(37.02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192쪽, 약 6만자, 약 1.6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샤인
ISBN : 9788958663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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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2003년 4월, 길상사 요사채에서 가진 법정과 최인호의 네 시간에 걸친 대담을 책으로 엮었다. 이 대담에서 두 사람은 행복과 사랑, 삶과 죽음, 시대정신과 고독 등 11가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깊이 있는 사색과 시적 은유로 가득한 언어를 주고받았다.

이 책은 원래 최인호가 생전에 법정의 기일에 맞추어 펴내려고 했다. 법정이 입적한 이듬해인 2011년, 암 투병 중에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내기도 했던 최인호는 이후 병이 깊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2013년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최인호는 병이 깊은 중에도 반드시 법정 스님의 입적 시기를 전후해 책을 펴내라는 유지를 남겼고, 그의 뜻은 법정의 5주기를 즈음하여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최인호는 생의 말년에 왜 이 책을 마음에 크게 두었을까? 그 이유는 이 책의 '들어가는 글'과 '나오는 글'에 잘 드러난다. 샘터라는 잡지에 각기 다른 소재로 인기 연재물을 쓰면서 시작된 첫 만남 이후 30년 동안 두 사람은 열 번 남짓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수필가로서, 소설가로서 당대를 대표한 법정과 최인호는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고 독려하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최인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소설 <길 없는 길>이 법정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사연이라든가, 빗속에서 헤어지며 친형제와도 같은 깊은 애정을 느끼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최인호는 생전의 그 인연을 이 책을 통해 이어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권의 책 속에서 법정과 동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은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다.
목차
들어가는 글

1부 _ 언젠가는 나로 돌아가리라
밤이 내려야 별이 빛나듯 _행복이 시작되는 지점
그 사람을 통하여 우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 _사랑의 원형
사랑이라는 종교의 아름다운 성소 _억겁의 인연, 가족
주인공아, 속지 마라 _진정한 나에게 이르는 길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드러낸다 _말, 글, 그리고 진리

2부 _ 백년의 명상, 한 마디의 말
남은 생을, 그리고 다음 생을 위하여 _삶을 대하는 마음가짐
어지러울수록 깨어 있으라 _시대정신에 대하여
냉철한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_참 지식과 죽은 지식
고독을 즐기고 외로움을 받아들이라 _고독에 대하여
최고의 용기는 용서를 구하는 것 _베풂과 용서, 종교
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 _죽음이라는 여행

나오는 글

책속에서
주님 저에게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 일 수 있는 평온을 주소서.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p169 - 폴그로델의 기도 - 해피북
신념 덕담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저보고 그러시더라구요 ˝ 최선생 이 세상에서 제일 먼 여행이 뭔지 아시오?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여행이랍니다˝p157 - 해피북
참된 지식이란 사랑을 동반한 지혜겠지요. 반면 죽은 지식이란 메마른 이론이며 공허한 사변이고요p135 - 해피북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에서 습관이 나오고, 습관이 성격이 되고, 성격이 운명을 이룬다p88 - 해피북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언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원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러 온 것입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p22 - 해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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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법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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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한 후 인간의 선의지를 고뇌하다가 대학 3학년 1학기 때 중퇴하고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당대 고승인 효봉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7월 사미계를 받은 뒤, 1959년 3월 통도사에서 승려 자운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어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승려 명봉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그 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1975년 10월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다. 1994년부터는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는 한편, 1995년에는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다가, 2003년 12월 회주직에서 물러났다. 강원도 산골의 화전민이 살던 주인 없는 오두막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으며, 2010년 3월 11일(음력 1월 26일) 입적했다.
수필 창작에도 힘써 수십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는데, 담담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정갈하고 맑은 글쓰기로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 작가로도 문명이 높다.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 소리》, 《산방한담》, 《텅 빈 충만》, 《스승을 찾아서》, 《서 있는 사람들》, 《인도기행》, 《홀로 사는 즐거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등이 있다. 그 밖에 《깨달음의 거울》, 《숫타니파타》, 《불타 석가모니》, 《진리의 말씀》, 《인연 이야기》, 《신역 화엄경》 등의 역서를 출간했다. 접기
최근작 : <느낌 그게 뭔데, 문장>,<법정스님이 세상에 남긴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좋은 말씀> … 총 104종 (모두보기)
최인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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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3년에 단편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했고,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는 1970~80년대 한국문학의 축복과도 같은 존재였다. 농업과 공업, 근대와 현대가 미묘하게 교차하는 시기의 왜곡된 삶을 조명한 그의 작품들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며 청년 문학의 아이콘으로서 한 시대를 담당했다.
소설집으로 『타인의 방』, 『술꾼』, 『개미의 탑』, 『견습환자』 등이 있으며, 『길 없는 길』, 『도시의 사냥꾼』, 『잃어버린 왕국』, 『상도』, 『내 마음의 풍차』, 『불새』, 『제4의 제국』,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등의 장편 소설을 발표했다. 수필집으로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천국에서 온 편지』, 『최인호의 인생』 등이 있다. 작고 이후 유고집 『눈물』, 1주기 추모집 『나의 딸의 딸』, 법정스님과의 대담집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문학적 자서전이자 최인호 문학의 풋풋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작품집 『나는 나를 기억한다 1, 2』, 세 번째 유고집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네 번째의 유고집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와 5주기 추모작 『고래사냥』이 재간행되었다.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불교출판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3년 ‘아름다운 예술인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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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2011년 동리문학상, 2003년 현대불교문학상, 1999년 가톨릭문학상, 1982년 이상문학상, 1972년 현대문학상
최근작 : <느낌 그게 뭔데, 문장>,<상도 3>,<상도 2> … 총 20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최인호가 물었다.
“스님,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법정이 답했다.
“몸이란 그저 내가 잠시 걸친
옷일 뿐인 걸요.”

둘은 웃었다.

무소유의 수행자 법정, 불세출의 작가 최인호
행복과 사랑, 시대와 죽음에 대해 남긴 마지막 이야기

법정, 최인호…
더 이상 늙지 않을 영원의 시간으로 돌아가
깊고 맑은 말, 글, 향기로 남다

“세상을 떠난 두 거인, 한 권의 책 속에서 동행하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는 2003년 4월, 길상사 요사채에서 가진 법정과 최인호의 네 시간에 걸친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대담에서 두 사람은 행복과 사랑, 삶과 죽음, 시대정신과 고독 등 11가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깊이 있는 사색과 시적 은유로 가득한 언어를 주고받았다.
이 책은 원래 최인호가 생전에 법정의 기일에 맞추어 펴내려고 했다. 법정이 입적한 이듬해인 2011년, 암 투병 중에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내기도 했던 최인호는 이후 병이 깊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2013년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최인호는 병이 깊은 중에도 반드시 법정 스님의 입적 시기를 전후해 책을 펴내라는 유지를 남겼고, 그의 뜻은 법정의 5주기를 즈음하여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최인호는 생의 말년에 왜 이 책을 마음에 크게 두었을까? 그 이유는 이 책의 <들어가는 글>과 <나오는 글>에 잘 드러난다. 샘터라는 잡지에 각기 다른 소재로 인기 연재물을 쓰면서 시작된 첫 만남 이후 30년 동안 두 사람은 열 번 남짓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수필가로서, 소설가로서 당대를 대표한 법정과 최인호는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고 독려하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최인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소설 《길 없는 길》이 법정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사연이라든가, 빗속에서 헤어지며 친형제와도 같은 깊은 애정을 느끼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최인호는 생전의 그 인연을 이 책을 통해 이어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권의 책 속에서 법정과 동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은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다.

“법정의 입적,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이야기”

이 책은 액자 구성을 취하고 있다. 2010년 3월 11일 법정이 입적한 뒤 최인호는 마치 적군의 기지를 염탐하듯 법정의 빈소가 마련된 길상사로 숨어든다. 최인호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해 1월에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펴낸 이후 암 투병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그 역시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마친 최인호는 길상사 경내를 걷다가 낯이 익은 요사채의 출입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기억을 더듬던 최인호는 그곳이 7년 전 법정과 함께 네 시간에 걸쳐 대담을 나누었던 장소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2003년 4월의 그날, 월간 《샘터》가 지령 400호를 기념하여 마련한 대담을 통해 법정과 최인호는 길상사 요사채에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행복이 될 수도 있고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법정의 말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사랑, 가족, 자아, 진리, 삶의 자세, 시대정신, 참 지식, 고독, 베풂, 죽음으로 이어진다. 대화 형식을 취하기에 미사여구가 생략된 그들의 언어는 주제의 본질을 날카롭게 관통하면서도 품 넓은 여운을 남긴다. 불가의 수행자로, 가톨릭 신자로 각자의 종교관에 바탕을 두고 대화를 풀어나가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두 갈래가 아니다. 문학이라는 ‘종교’의 도반으로서 한 시대를 같이 느끼고 살아온 그들이기에 두 사람의 언어는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깊고 넓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대화의 끝에 이르러 최인호가 묻는다. “스님,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법정이 답한다. “몸이란 그저 내가 잠시 걸친 옷일 뿐인 걸요.” 지금은 고인이 된 두 사람의 맑고 깊은 서(書).언(言).행(行)은 여전히 고운 향기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법정과 최인호의 생생한 육성”

법정은 입적하기 전에 자신이 지은 책을 모두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독자들은 법정이 지은 주옥같은 글들을 당분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법정의 주기가 되면 ‘법정’이라는 키워드를 단 책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모두 법정이 남긴 말과 글이거나 법정을 근거리에서 바라본 이들의 소회를 담은 것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를 통해 법정과 더불어 소설가 최인호의 육성을 접한다는 것은, 또 삶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했던 치열한 ‘수행자’들의 글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삶의 화두를 되새기게 되기를 바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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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불교인과 천주교인들을 보면 참 차분하다. 그런데 왜 개신교인들 가운데 이런 성숙한 모습을 지닌 사람을 찾을 수 없을까?  구매
aratumdei 2017-08-12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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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 것이 없는 인생론.. 그래도 법정스님의 말씀은 여전히 좋다.  구매
스트릭랜드 2015-03-31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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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되는 책입니다.  구매
nanana 2015-12-1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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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교훈과 나와의 대화를 심오하게 할 수 있는 책입니다.  구매
rin0502 2015-05-0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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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히 읽기 좋아요......^^  구매
phyevy 2015-12-2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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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성인의 가르침. 새창으로 보기 구매


 

 아스라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제목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는 법정스님의 추모 주기에 맞춰 출간하려던 최인호 작가님의 그리운 마음이 담긴 책이다. 오랫동안 <샘터>에서 연재했던 두 분의 인연으로 <샘터>400회를 맞아 최인호 작가님이 묻고 법정스님이 답하신 대담집을 묶어 펴내게 되었는데 출간 준비중 지병이 악화되어 작고하신 최인호 작가님의 사연과 절묘하게 어울어져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서문에서 최인호 작가님은 자신은 묻고 법정 스님의 대답을 기록 했기에 대담집이라 했지만, 서로 허물없이 나누는 대화속엔 인생의 풍화를 견디며 삶속에서 길어 올린 통찰들이 깊고도 진한 사향처럼 전해진다.

 

 

행복과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족과 인연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나에게 이르는 길은 무엇이며, 참 지식과 죽은 지식은 무엇인가, 고독, 베품과 용서 와 용기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총 11개의 화두로 구성되었다.

 

 

모두다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이였지만 특히나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앤디 앤드류는 '미움이란 자기 자신이 독약을 먹고 상대방이 죽기를 기다리는 일이다『용서에 관한 짧은 필름』'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 생각을 빌려 행복이란 자신에게 보약을 먹이고 건강한 삶을 기대하는 일이 될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보약이될 행복은 쉬이 오지 않으며 쉬이 찾을 수 없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테니. 그런데 법정 스님은 행복이란 '자기 자신'에게 있다며 자신의 일화를 들려주신다.

 

 

불일암이란 암자에서 홀로 기거하시는 스님은 새벽마다 찾아온 기침 때문에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는 고충이 있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새벽마다 찾아오는 기침에 화가났지만, 기침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차를 한 잔 마시며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음을 행복하다 이야기 하셨다. 그러니 모든 행복은 밖에 있는게 아니라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면 행복이되고 불행으로 받아들이면 불행이 된다 이야기 하신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것을 갖고도 만족을 알면 행복을 보는 눈이 생긴다는 이야기처럼 작은것에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낄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중국 선사 중 한 명인 바보 스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 이름을 부르며 "주인공아 주인공아 속지 마라, 속지 마라"라고 외친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인데 대부분 세속적인 것들에 이끌려 조연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떤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곰곰히 되돌아 보게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탐욕, 편견, 위선,들이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진실로 소중히 지켜야 하는 진아(眞我), 나의 진면목을 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함께 있어도 외롭다'는 슬러건으로 가족들을 시시때때로 괴롭혀온 나이기에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는 깊은 성찰을 갖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과 고독을 즐길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삶이 무뎌진 사람이기에 인생을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외로움은 스쳐가는 마른 바람과 같은거라서 머리를 맑게 해준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여러 쾌락적인 환경에 숨어 인생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외로움과 고독을 회피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안이자 고통이 될 테니.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순간 한뼘 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상처가 깊던 마음에 연고가 되어 위로를 전해준다.

 

 

 

 현 시대를 진단한 대표적인 이야기로 간디의 '우리를 파괴하는 일곱가지 증상'이 인상적이다. 일하지 않고 얻은 재산, 양심이 결여된 쾌락, 성품이 결여된 지식, 도덕이 결여된 사업,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원칙이 없는 정치, 희생이 없는 종교는 우리 사회에서 빈번히 터져나오는 끔찍한 사건사고들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이야기들이다. 돈이면 무엇이든 된다는 생각들로 가족간에, 친구간에 타인간에 벌어지는 끔찍한 이야기들,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생산해내는 기업들로 사회는 더욱 침체되어가고 불합리하며 불안정한 시대 속에 놓여졌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야 할때 불변하는 본연의 자세를 잃지 말고 스스로 깨어서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지성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다독인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다는 말처럼. 스스로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퍼 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는 지성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길 마음속에 담아 보았다.

 

 

.모든것을 달관하신 법륜스님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소홀히 살았다는 이야기라며 누구나 겸허히 받아들여야할 생명의 현상이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그 말씀처럼 스님은 평안하게 열반하셨을까. 법정 스님을 그리워하셨던 최인호 작가님은 지금쯤 스님을 만나셨을까. 만나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실까. 성찰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못내 더 들려주실 이야기들이 궁금하고 아쉽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나지 못한 시간들도 아쉽다. 지금이라도 한 권씩 찾아 뵈며 방황했던 시간들을 다잡아야 겠다.

 


주님 저에게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 일 수 있는 평온을 주소서.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p169 - 폴그로델의 기도

신념 덕담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저보고 그러시더라구요 " 최선생 이 세상에서 제일 먼 여행이 뭔지 아시오?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여행이랍니다"p157

참된 지식이란 사랑을 동반한 지혜겠지요. 반면 죽은 지식이란 메마른 이론이며 공허한 사변이고요p135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에서 습관이 나오고, 습관이 성격이 되고, 성격이 운명을 이룬다p88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언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원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러 온 것입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p22

밤이 되어야 별이 빛나듯이 물질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 모두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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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07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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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법정과 산방 대담을 하다... 새창으로 보기
병이 든 최인호가 법정 스님과의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조용조용하니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책을 읽고 있는 방에서 은은한 차향기가 퍼지는 듯 싶다.

서권기 문자향...

책에서 기운이 서려있고 문자에서 향이 퍼진다.

 

박물관의 도자기나 그림...

그것들이 내 소유였다면 잘 보관하고 도둑맞지 않게 간수하느라 바라볼 여유가 없을 거예요.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에

나는 필요할 때 눈만 가지고 가서 보고 즐기면 되는 것.(49)

 

스님의 무소유는 참으로 울림이 크다.

 

우리는 몇 생 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금생에 잘해야 내생에 또 좋은 낯으로 만나지~(66)

 

이러면 싸울 일이 없겠다. ㅎㅎ

 

주님 제가 늙어가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제발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는 않게 해 주십시오.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91)

 

천주교 신자인 최인호가 수녀님의 기도를 옮긴 부분이다.

나이들면서 추해지는 것은 고집부리는 것이고, 말 많은 것이다.

 

모든 글이 그렇지만

소설의 경우도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소설은 좋은 소설이 아니다.(95)

 

세상이 바빠서 소설을 두 번 읽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법정 스님이 좋아하던 어린 왕자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운 소설이 흔치 않다.

 

저는 정면승부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지금 이생에서도 끝까지 창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고요.

문학상의 심사위원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강의하는 사람도 아닌,

글 쓰는 사람으로 사는 일, 저는 창작이 제 남은 삶을 채우길 바랍니다.(109)

 

심사위원~ 그 참 편한 자리인가 보다.

 

우리 민족의 좋은 화두가 있습니다.

심봉사가 공양미 3백석을 바치고도 눈을 못뜨다가,

왕비가 된 심청이가 벌인 맹인 잔치에 가서 눈을 번쩍 뜨지 않습니까?

사람은 모두 공양미가 있어야만 눈을 뜬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바보의 벽이겠지요.

공양미 없어도 뜰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이 삶은 기적의 연속이지요.(133)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을 켜면,

한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변하듯,

공양미 따위, 어떤 조건 따위 필요없다는 말이다.

 

참된 지식이란 사랑을 동반한 지혜겠지요.

반면 죽은 지식이란 메마른 이론이며 공허한 사변이고요.(135)

 

스님도 외롭냐는 질문에...

 

그럼요.

사람은 때로 외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모르면 삶이 무디어져요.

하지만 외로움에 갇혀 있으면 침체되지요.

외로움은 옆구리로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같은 것.

그런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집니다.(142)

 

참 맑은 말이고, 생각이다.

요즘 <느리게 살기>가 관심을 받는다.

 

빠삐용에 그런 말이 나오거든요. <너는 시간을 허비한 놈이다>라는 꿈을 꾸는...

느림이란 <여유있게, 침착하게>이되 시간은 허비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때눈 분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꿀벌처럼, 분주하면서도

사고와 의식은 모든 것을 관찰하는 느리게..

그러니까 <느리게>란 <충분하게>란 뜻이겠지요.(148)

 

우리의 근대에서 얻은 <빨리빨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걷어찬다.

느림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분주한 삶 속에서도 여유있고 충분히 침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통찰.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대신 내가 지금 이 순간순간을 얼마나 나답게 살고 있는지가 과제지요.(177)

 

얇은데 12,000원이나 한다.

비싸보이지만,

맑은 바람 쏘이는 데 그 값이면,

결코 비싸지 않다.

 

책값 역시 그렇게 상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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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5-07-30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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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대담 새창으로 보기
  법정 스님의 글을 즐겨 읽을 때가 있었다. '무소유', '봄여름가을겨울', '맑고 향기롭게', '버리고 떠나기' 등등... 제목에서 묻어나는 것처럼 아무런 수식과 장식없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마음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이름들에 생각들이 자연히 쉬었다. 책 속 내용은 소박하고 부드러우면서 자연스럽고 단촐한 일상의 산사 생활들이었지만 마음 속의 어떤 감성을 일깨우고 무엇보다 글을 이렇듯 가벼우면서도 전달하는 깊은 떨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느덧 그런 스님이 떠나고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최인호 작가도 떠났다. 두 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샘터에 글을 연재하면서부터이다. 주위 지인들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법정 스님을 통해 우리 사회에 '어린왕자'가 다시 읽히고 조명받게 되었으며 '월든 호수'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 사람을 통해야만 건너 갈 수 있는 작은 개천이든지 강이든지 그런 것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통하여 새로운 정신적 자양분을 얻게 되는 인연들이 있다. 법정 스님은 내게 편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상태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는 주옥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무소유'란 삶의 아이콘으로 우리 사회에서 큰 시선을 모았던 스님은 자신의 무소유적인 삶을 많이 방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승려로서의 삶을 살다가 가셨다. 효봉스님의 제자로서 속명'박재철'이란 이름을 쓰셨으며 상좌나 자신의 삶을 보조해주는 어떤 혹도 없이 홀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셨다. 그런 스님의 영향이 내게도 적지 않은 삶의 파장을 가져왔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몇 일만 홀로 방안에 있어도 그 외로움을 떨쳐내는 데에는 많은 마음의 내공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산 속에서의 수십년 간의 홀로된 삶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의 직접적인 맞닥뜨림 없이 어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인가? 비록 큰 스님으로서 큰 깨달음으로 속세의 인연들을 깊은 공부로 이끌지는 않았으나 수행자의 본분의 모습을 생각하기에는 법정 스님같은 삶도 참 의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의 대담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지혜와 교훈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 줄로 믿는다. 그러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법정스님이 말씀보다는 최인호 작가의 말이 많아지고 대화의 논점이 조금은 흐려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법정스님의 사진을 더 많이 실어서 주제와 상관없는 사진으로 주제를 흐리는 면이 적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족과 죽음과 외로움과 삶에 대한 가볍지 않은 명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있는 시간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그 사람을 통해 우주를 보게 하는 것이라는 마음의 상태,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의 말 속 그 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마음 속의 물음표 하나를 찍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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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15-05-2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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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향하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할 당위성을 발견하다. 새창으로 보기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法頂)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1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세. 세수 78세’

   매화가 앞 다투어 피어나는 계절 생명의 불은 붙기 시작하여 부풀어 오른 꽃망울은 터지기 시작하여 온 세상을 화사하게 물들이며 춘심을 흔든다. 생명을 발산하는 계절에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법정스님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열반에 드셨다. 처음 비보를 들었을 때는 정신적 기둥이 뽑혀 휘청거리며 오열하는 불제자로 마음을 다잡기 힘들었다. 엄격하면서도 냉혹한 계율로 자신을 단련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자비를 행하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회의하는 시간이 많았던 스님은 자기 관리에 지독한 선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절제된 생활을 이으며 부처님의 계율을 지켰다. 출가에서부터 열반에 들기까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법음은 편법이 난무하고 부조리가 횡행하는 시대일수록 부정한 세상을 바로 잡아주는 지침으로 작용할 가르침이다.

   문학을 매개로 소통하며 교유하였던 법정 스님과 최인호 작가는 산방에서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문답식으로 한담을 나눈 내용을 새롭게 묶어 출간하였다. 두 사람은 육신을 갉아먹는 암 투병으로 생존하였을 때에도 죽음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어 두려웠을 텐데도 현재적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차안에서의 삶을 관조하였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인생에서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며 생명에 집착하며 지내는 경우가 허다한데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여기며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스님은 말씀하셨다. 스님이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는 항암 중에도 길상사를 찾아 짧은 문상을 끝내고 샘터 출판사에서 수필을 연재하던 인연으로 시작된 대화는 삶을 어떻게 귀결지어야할지 사유케 한다.

 

   산수유가 피어나는 춘삼월 호시절에 고향 친구들과 함께 구레 산수유 마을로 놀이를 떠난 날 차에서 내리고 오를 때만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라는 소리가 습관처럼 터져 나와 마음만큼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나이라는 신호를 받은 셈이다. 나이 듦은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정체되어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채 무사안일로 흐를 수 있음을 경계하여 스스로 성장하기 위한 물음에 답하며 지낼 수 있어야 맑은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노화와 더불어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돌아보며 허투루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한다.

   외로움에 지쳐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는 친구 중에는 외로움에 갇혀 헤어나지 못한 채 칩거하며 지낸다. 자기 침체를 벗어나려는 생각보다는 자신만의 벽을 둘러놓고 그 벽을 넘어서지 않으려 해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벽을 허물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다. 스쳐가는 바람처럼 외로움 역시 일상의 소소함을 일깨워주는 명징한 유형물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불행한 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당뇨를 앓던 최 작가 역시 산을 오르며 혈당을 관리한 덕분에 근력이 붙어 활기 있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니 불가피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해 보인다. 산술적인 잣대를 대고 손해 보지 않는 거래를 성사하는 일로 결혼을 생각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맹점을 비판하며 애착 없이 서로에게 아낌없이 잘해주는 사랑의 숭고한 가치를 넌지시 알려준다. 생김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유기체가 타인이 정해놓은 규범을 따르며 동일한 스펙을 쌓으며 개성을 잃어가는 시대에 나만의 능력과 빛깔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절실하다.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맥을 추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문명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여 인간적인 면모를 잃어가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을진대 필요 이상의 것을 취하며 더 갖지 못해 안달하는 자본주의의 우울한 폐해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주인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실수하게 되더라도 흔들림이 많은 시대에 중심을 바로 세우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속력을 내며 달리느라 챙기지 못하였던 마음을 헤아리며 거짓 없는 태도로 조금은 더디 가더라도 여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남을 바꾸려 들기보다는 스스로 변화의 물꼬를 틔워갈 때 질적인 성장을 담보로 하는 내적인 성숙은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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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15-06-10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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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에서 나온 대화라는 책 일부분입니다.똑같은 내용이고 앞뒤 머리말 부분 맺음말 부분만 내용이 추가 된거 같네요.오히려 대화 책이 피천득 김재순 님의 부분이 더 나와있어요.중복되서 사시는 분 있을까봐 남깁니다..

2021/03/22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기자명 현응스님   
입력 2010.02.21

2010년 2월 18일 17회 열린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출현 배경과 그 사상적 특징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이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가 덧없고 허망한 것을 일깨워주어 존재의 실재성으로부터 해탈하게 해주는 효과를 이끌어내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부파불교,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면서 교리적 발전과 정립을 거쳐 더욱 정치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삶과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변화시켜 가야 하는지를 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깨워 주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야 하는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즉 초기불교의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은 개인의 삶과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목적, 방법, 이유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가족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많은 불교도들은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딜레마는 불교 내부에서 교리적으로 모색하여 해결해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지만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이외의 종교나 사상들과 많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부각된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브라마니즘을 위시한 당시의 종교와 사상은 대다수 실재론적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무상, 무아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일과 그런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설명하는 일은 대단히 주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소품, 대품 등)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실재성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매우 희유한 일일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대다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종류나 형태의 실재성 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실재성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실재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의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 무아, 공을 내세우는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반야경 등의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어려움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 어떤 실재(예컨대 신, 브 라만, 선, 이성, 명예, 부, 쾌락 등)가 전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실재로부터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있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는 과연 삶과 역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연기적 세계관을 가지고도 세상을 적극적이고도 뜨겁게 살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그 해답을 내 놓은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은 다음과 같은 첫 질문으로 시작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사람은 일상에서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다스려야 합니까?”
즉 무상, 무아, 공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머묾 없이 마음을 내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아, 인, 중생, 수자라는 각종 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집착하거나 머무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는 결국 머물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유명한 ‘응무소주이생기심’의 구절은 ‘응무소주’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기심’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읽어야 대승의 취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어 행하는 일,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청정심이며, 미묘한 행인 것이다.

중국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는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일러 ‘묘행무주(머물지 않는 미묘한 행위)’라 해석하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머물지 않음)’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을 밝힘’이라 하지만 사실 대승의 가르침은 ‘머물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하는가’에 있다.

불교는 보통 극단적인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승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입장에다가 의도적, 잠정적, 가상적인 실재론적인 입장을 접목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의 불교가 연기론을 공관사상으로 발전시켜 세상을 보는 관점을 공, 가, 중이라는 독특한 존재론으로 형성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전된 연기적 존재관에 의도적인 원과 방편이라는 역사적 실천을 접목하는 일,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회심의 역사관인 것이다.


대승경전과 소승(초기)경전의 내용적 차이는 무엇일까?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표현하면 소승경전이라고 부르며, 공, 공관, 유식, 여래장, 법계, 법신, 진여 등의 용어로 표현하면 대승경전이라고 부르는가? 물론 아니다.

법성, 공성, 연기성, 불성은 다 동의어이며, 나아가 유식성, 법계, 진여, 여래장 또한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공, 여래장, 진여 등의 용어로 세계를 설명하면 대승이라고 보고,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설명하면 소승이라고 보는 태도는 소승과 대승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조삼모사에 속는 원숭이와 비슷한 꼴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대승경전의 진면목은 무상, 무아 또는 공이나 진여라는 연기적 세계에 살면서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바라밀을 행하도록 강조하는 부분이다.

초기대승경전인 십지경(화엄)에서 나타나는 10바라밀은 이러한 대승의 역사적 실천론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인다. 6바라밀에 이은 방편, 원, 력, 지, 이 네 가지 바라밀은 대승불교 회심의 역사적 상상력으로서 연기적 깨달음이 어떻게 역사화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태도는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결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절대주의란 잠정, 가설, 의도성의 색깔을 띤 독특한 절대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승경전을 보면 반야경은 공(연기)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입장에 서면서도(무주) 여러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 정토장엄을 설하는 것이 된다. 공과 연기를 설하는 것은 초기불교 이래로 줄곧 해 왔던 일이다. 대승의 시대에 오면 공과 연기라는 평면적 세계에 불교 특유의 실천론을 덧붙이는 노력을 하게 되며, 그러한 내용들이 모든 대승경전에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은 법계연기나 화엄교관이라는 수행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적 세계관에 서서 다양한 바라밀을 행해 법계를 장엄하는 것에 대해 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경전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 역사적 실천론인 것이다.

정토, 열반, 법화 등의 대승경전도 같은 취지이다. 즉 대승경전은 마음을 밝히거나 세상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도의 사회적 실천의 자세, 목표로 삼는 이상사회(정토), 그리고 그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론에 대한 설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입장은 보살(보디사트바)을 실천적 삶의 주체로 내세우는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보디는 연기적 깨달음을 뜻하며, 사트바는 중생계의 삶과 역사를 뜻한다. 즉 보디와 사트바가 결합된다는 것은 깨달음과 역사가 결합되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지만,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로 읽어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대승의 취지는 보살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구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연기, 공, 반야”만 강조하는 불교, “개인적인 몸과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만 강조하는 현대사회의 불교

불교는 초기불교 이후로 각 부파의 아비달마 시대를 거쳐 기원 전후에 이미 연기론과 역사적 실천을 접목시킨 대승불교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불교가 오히려 초기불교의 문제의식 수준으로 회귀하여 대다수 불교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과정에서 연기, 공, 반야를 설하는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대단히 아쉽다.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한다.

또한 현대불교가 대승불교의 역사적인 실천론을 상실하고 연기론의 범주로 물러나 있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그 연기론의 적용 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에 한정지어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도 정작 연기와 공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일체의 존재현상이 상호 연기적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 개인의 몸과 마음이 다른 영역과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사념처라 하여 존재 현상을 살피는 위빠사나 수행 또한 크게 보면 모든 존재들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잘 살피자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근자의 불교포교의 방향과 그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불교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중국 등의 소위 북방불교는 물론이고 미얌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나 티벳불교까지 모두 다 연기론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으며, 그 연기론의 적용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 문제에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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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7:03 IP삭제
최근에 한국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사념처 수행의 대상이 사회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등은 고결한 안목으로 보인다.
스님의 지적대로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이라" 설명하고 가르쳐왔다. 아마 지금도 대다수의 강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대승경전을 새롭게 읽어내는 스님의 안목은 존경스럽다. 이 글에 대한 찬탄의 소리가 잇달아 나올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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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4:52 IP삭제
불교평론에 올라온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었다.

그 동안 어느 강사나 강주나 학자가 쓴 글 보다도 감명 깊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역사를 꽤뚫은 자만이 투시 가능한 서로의 장단점을 그는 읽고 있었으며 그러한 안목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 내고 있었다.
금강경을 마음을 일으키라는 '생기심'의 메세지로 읽는 것이라든지 화엄경을 '사회적 실천론'으로 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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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실상사 도법, 정토회 법륜 스님의 경우 / 정웅기 불교평론 2008

실상사 도법, 정토회 법륜 스님의 경우 / 정웅기 < 인터뷰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실상사 도법, 정토회 법륜 스님의 경우 / 정웅기

기자명 정웅기
입력 200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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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승가를 기다리는 세상 속을 걷다

1. 글을 시작하며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오랜 세월 ‘은둔의 종교’로 여겨져 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0여 년 전만 해도 그랬다.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기독교계가 활발한 사회구제사업을 펼치던 것에 비해 불교의 사회참여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이런 평가는 당연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이 지난 지금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큰 폭으로 약진했다. 물론 양적으로 아직 기독교계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사회복지나 환경운동 같은 시민사회 영역에 있어 불교계의 참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고도성장은 또 하나의 고민을 불교계에 던지고 있다. 닫힌 빗장을 열고 사회로 나서자마자 예전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내재한 많은 모순들이 숨김 없이 세간에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 운영에 있어 전근대적 기제들, 이를테면 사회일반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비공개적이고 은밀한 운영방식, 비구니에 대한 성차별과 비구 중심의 독단적 교단운영, 문중을 가장한 패거리주의와 같은 전근대적 요소들은 최근에만도 여러 사건으로 외화됐다.

여기에 소비, 경쟁, 개발과 같은 세속적 요소들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무소유와 공동생활이라는 불교 전통 역시 상실 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참여의 손길을 거두고 세상을 향해 다시 빗장을 잠그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아직도 열악한 사회참여를 더 확대하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또 시민사회 일반의 상식에 준거한 교단운영의 체계와 전통을 세워, 전근대성과 세속화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두 가지 과제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교단의 처지에서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삶으로 국민대중의 지지를 얻고, 이러한 실천을 통해 교단이 나아갈 바를 몸으로 개척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도법(道法), 그리고 법륜(法輪) 스님은 21세기가 시작된 불교계에서 이런 삶을 사는 대표적인 인사들로 꼽을 만한 이들이다. 이들은 세간이 개발과 소비의 물신숭배에 흠뻑 젖고, 교단마저 그 뒤를 좇아가고 있는 현실을 불교적 가치와 사유로 해석하고, 개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 사회참여론자들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들을 비평하는 글을 쓰기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두 사람의 세계를 보는 탄탄한 안목도 그렇거니와 10년이 넘게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왔고, 현재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이제 갓 활동 초년병인 필자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도법과 법륜이라는 두 인물의 삶과 실천이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불교사회참여의 오늘과 내일을 조망하기에 충분한 재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단과의 관계에서 이들의 운동 궤적을 살펴보는 데는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존재한다. 교단 안팎에서 이미 공인하고 있듯이 두 사람의 왕성한 활동은 불교사회참여의 사상과 방법의 개발에 있어 그 해법을 풍부히 제공해 왔다. 이를 둘러봄은 한국불교 사회참여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 하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회참여를 둘러싼 당대 교단의 현주소를 이들의 삶을 통해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교단은 오히려 이들의 활동에 질곡이 되고 멍에가 된 적이 많았고, 이들의 삶에 대한 교단 밖의 절대적 호의와 달리 교단 내 질시와 비난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 역시 짚어져야 할 것이다. 이들의 삶을 통해 교단의 현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가고자 하는 지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2. 붓다의 삶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여기는 사람들

우연이었을까. 두 사람의 행적을 좇다 보니 제일 먼저 오버랩되는 것이 법명(法名)이었다. 이름 뜻대로만 본다면 도법(道法)은 ‘이 시대 부처님의 정법이 나아갈 길’이며, 법륜(法輪)은 ‘정법을 위해 굴려가야 할 법의 수레바퀴’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지어진 이름대로 살고, 또 이름대로 살면 잘 살았다고 하는데, 이런 격언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두 사람에게도 꼭 들어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법 스님은 주로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적 해법, 즉 길을 제시하는 데 골몰해 온 이다.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나 귀농운동처럼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적 시각과 대안 제시 같은 사상적인 영역이 두드러진다. 이에 비해 법륜 스님은 북한난민돕기, 환경운동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분야에 매진해 왔다. 그가 굴리는 법륜은 아주 견고하고 충실하여, 치밀하게 세상을 훑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이들은 수행자로서 삶뿐만 아니라 사회참여의 동기 역시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으로부터 찾는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사회를 해석하며,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의 안락 위에 가능하다는 대승불교의 전통에 누구보다 충실하고자 한다. 또 부처님 당시의 교단이 결사공동체에서 출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과 회향을 함께하는 공동체 운동, 결사운동에서 출발하여 그 공과를 회향하고자 해왔다.

교단 내에서 점하는 위치와 처지는 다르지만 작금의 교단을 보는 시각 역시 비슷했다. 소비주의와 물량주의와 같은 교단의 병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물론, 오랫동안 한국불교의 전통인 양 행세해 온 호국불교, 중생의 삶에서 멀어진 채 유유자적하는 선(禪)전통에 대해서까지 이들은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물론 역으로 두 사람에 대한 교단 내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도법 스님은 그가 주도적으로 수습한 98년 종단사태를 두고, 감정적 비판을 서슴지 않는 그룹이 존재하며, 법륜 스님 역시 비구계 수지 문제 등을 들어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결과적으로 교단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보다는 질곡으로 다가서는 경우가 많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수록 질시와 비난의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의 일차적 원인이 교단 내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 역시 철저히 본인들의 몫일 뿐이다. 주관적 판단의 개입이 불가피하지만, 이 문제도 짚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3. 도법―소비주의문명에 정법의 칼을 들어라!

몇 년 전부터 도법 스님이 사는 남원 실상사는 한국사회 대안운동의 근원지로 주목을 받아 왔다. 최근에만도 지리산 살리기 시민연대가 주관해 온 지리산 댐 백지화 반대운동,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좌·우익 영령을 위한 지리산위령제가 열려 뉴스의 초점이 됐고, 또한 IMF 경제위기를 전후하여 개설한 귀농학교, 올 봄 개설한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까지 큰 사회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올해에만도 주요 일간지·월간지들이 모두 도법 스님과의 인터뷰기사를 크게 할애해 게재할 정도로 불교를 향한 세간의 이목은 실상사와 주지 도법 스님에게 향해 있다.

도법 스님은 1949년 제주생이고, 열여덟 살 때 김제 금산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월주 스님이다. 69년 해인사 강원을 나와 87년 금산사 주지를 맡을 때까지 15년간 주로 선원에서 정진했다. 초발심 시절, 그에게 화두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도 산문을 나서지 않고 내친 뒤 이에 대한 도반의 비판을 들으며 생겨난 좌절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고 한다.1) 그 뒤 그는 ‘인연의 철학’ 연기(緣起)에 깊이 매달렸다.

그처럼 연기를 강조하는 사람은 절집 안에서도 찾기 드물다. 그는 우주를 하나의 큰 그물로 보는 인드라망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돕는 생명의 길을 걷자고 주창한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화엄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화엄경》에 대한 그의 애정과 천착은 각별하다.2) 그는 《화엄경》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화엄학림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을 금산사에서 시작한 이래 근 20여 년 동안 이를 위해 노력해 왔다.

금산사에서 시도한 화엄학림은 별 무위로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95년 실상사에 세운 화엄학림은 지금까지도 화엄학을 연찬하는 학승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그의 화두는 늘 화엄의 철학을 교단과 사회에 투영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화엄 근본주의자’ ‘화엄 지상주의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출가사문을 인드라망 그물코의 중심으로, 또 이 시대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가 펼친 90년대 활동은 궁극적으로 출가승단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비구결사체 선우도량 만들고 이끌어

도법 스님의 활동이 교단 안팎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승가개혁운동 결사체인 선우도량(善友道場)이 창립되면서부터다. 교단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행풍토의 회복을 제1과제로 내걸었던 선우도량은 91년 창립부터 98년까지 매년 두 차례씩 총 14차례의 ‘수련결사’를 열어 승풍진작을 통한 교단개혁의 이론과 방법을 모색했다.3) 그는 승가대중의 결사체가 근본적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결사를 통해서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불교의 혜명을 계승하며 교단의 승풍을 진작시키고 사회역사 미래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면 그 방향은 분명해지리라. ……그러므로 지금의 결사 방향은 개인의 출가정신을 확고히 하고, 교단의 승풍을 신선하게 하며, 사회 역사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는 사상체계를 확립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91년 8월 〈선우도량 창립선언문〉 중에서)

도법 스님의 지론은 94년 종단개혁을 통해 실험 계기를 맞게 된다. 94년 당시 그는 개혁회의 상임부위원장직을 맡아 개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와 선우도량은 이 과정에서 종헌·종법 개정, 교육원 별원, 교육개혁안 성안 등 주로 승가개혁 쪽에 힘을 쏟았다. 이에 따라 ‘승가교육개혁안’이 통과되고 교육원이 별원이 됐고, 기본교육 재교육 등 승려교육에 필요한 여러 제도들이 그가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마련됐다.

94년 개혁회의의 활동은 ‘종단 현대화 민주화의 전환점’이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권력상층부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여전히 엇갈린다. 그에게는 개혁작업의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종단의 관리나 운영 부문을 위한 제도의 틀을 좀더 낫게 만들었지만, 종교의 바탕인 사상과 정신의 차원에서 한치도 진전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4) 95년 선우도량 수련결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94년 종단개혁활동은 개혁주체의 불교사상과 정신의 신념, 불교적인 개혁내용, 현실적인 방법 등에 대하여 조직적이고 체계 있게 챙기고 준비하지 못했음을 느꼈다. 종단개혁운동의 미흡 원인으로는 △제한된 시간 △개혁주체 역량의 미흡 △불교대중의 자주화 의식과 역량 부족 △종단역학 관계에서 힘의 부족 △개혁추제 역량의 한계 △타성에 젖은 종단풍토 등이었다. (〈종단개혁의 반성적 점검과 한국불교의 창조적인 미래〉《선우도량》 95년 7호)

그는 개혁회의가 해산한 직후 자신의 은사인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을 뒤로 하고, 실상사로 내려갔다. 그리고 4년 만인 98년 폭력으로 점철된 종단사태가 발생했다. 종단사태는 그의 종단 내 위치와 역할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또 한편으로 수행자 도법에게는 큰 아픔을 준 사건이었다. 그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3선공방과 총무원 청사 점거 등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 때, 분란의 와중에서 98년 조계종 총무원장 권한대행에 임명됐고,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에 선출되어 종권을 인계할 때까지 사태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했다. 후일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종단사태의 한복판에 서서 일을 수습하려고 했을 때,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 수행자의 이상과 신념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싸움에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하는 한낱 싸움꾼의 모습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행을 잘못한 것인지, 수행력이 부족한 탓인지,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인지, 사태의 한복판에 서서 우왕좌왕하며 떠밀려 가고 있는 남루하고 초라한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 피눈물이 났지만 현장의 큰 흐름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마음의 정리를 하였다.5)

월주 스님의 임기 마지막 날 전격적으로 권한대행에 임명된 그는 결국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종단을 정상화시킨 주역이 되어야 했다. ‘폭력을 잠재우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사용했다’는 비법적 현실은 공권력을 투입하여 종단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과 함께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6) 최근 해인사 대불을 둘러싼 사건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도법 스님이 갖는 교단 안팎의 높은 신망에 반하여 반대자들의 음해성 공격 역시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도 사실은 여기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가 일부 반대자들의 악성비난처럼 적어도 시류와 상황에 따라 처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오래 전부터 교단활동에 있어 지극히 원칙적 입장을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90년 월간 《해인》에 발표한 글에서 “교단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있어 원칙도 없이 법·비법을 가리지 않는 적당한 타협주의가 교단의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 바 있고, 94년 종단개혁 당시부터 종헌·종법이 오늘날의 청규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종헌 종법에 의한 교단운영을 중시했다.7)

실상사 근거지로 대안운동 이끌어

98년 종단사태 이후 도법 스님은 실상사를 근거지로 한 대안운동과, 공동체 운동의 전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실상사에는 귀농자들에 대한 전문 교육을 실시하는 귀농전문학교를 비롯하여 농장공동체, 작은학교 등 대안운동의 실험적 영역들이 하나둘 개척하고 있으며, 99년 9월에는 불교대안운동 단체인 ‘인드라망 생명공동체’가 창립되어 활동중이다. 98년 개설된 불교귀농학교에 이어 실상사에 개설된 국내유일의 ‘귀농전문학교’는 99년 3월 실상사가 소유 농지 3만 평을 공동체 토지로 기증한 후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현재 6기까지 13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는 졸업생 가운데 7명이 실상사에 남아 공동경작하고 있다.

실상사 농장공동체는 사찰토지와 농사공동체의 첫 시도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 봄에 만들어진 ‘작은학교’도 관심거리다. 현재 1학년생 15명이 8명의 교사와 함께 임시 콘테이너 박스에서 거주하며 다양한 체험과 살아 있는 교육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분야별 활동들은 모두 도법 스님이 상임대표로 있는 인드라망 공동체의 사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실상사 공동체 운동은 지역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경제 활성화 사업과 생활협동조합을 매개로 한 도농공동체 운동, 나아가 지리산 권역 전체를 대상으로 넓혀가고 있다.8) 올 여름 지리산에서 산화한 좌우익 영령들을 위한 위령제를 연 것도 이의 일환에서였다고 한다. 실상사를 통해 그는 사찰이 소비주의문명에 찌든 사회를 바꾸는 생명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하고 있다. 화엄과 연기의 불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바꾸는 최첨병에 서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일을 하면서 기존의 비구 중심에서 사부대중에 의한 공동체 운동으로의 전환을 실험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98년 이후 그가 사부대중 공동체 운동을 주창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실상사에서 이를 실험하면서 구체화하고 있다. 실상사에는 지난해부터 사부대중 공동체 기획위원회가 설치되어 출·재가 대중이 모두 참여하는 산중좌담회와 산중법회를 운영중이다. 물론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어쨌든 선우도량을 중심으로 비구 중심9)의 종단개혁운동을 펼쳐 왔던 그가 사부대중에 의한 사찰운영을 적극 실험하고 있는 것은 큰 변화의 하나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98년 종단사태 이후 그의 종단 내 소임은 실상사 주지 외엔 따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단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거둔 것은 아니다.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문제제기와 우담바라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이 최근의 대표적 사례다. 얼마 전 불교신문이 주최한 간화선 토론회에서 그는 “깨달음이 현실과는 다른 영역에서 신비의 존재처럼 인식되어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깨달음의 문제를 현재의 삶과 통일될 수 있도록 정립해 내지 않는 한 불교수행 집단의 모순과 혼란과 무능력과 방황은 해결되지 않는다.”고 꼬집으면서 실천 없는 수행풍토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최근 불교계의 이슈가 된 바 있는 ‘우담바라’에 대해서도 불법의 대의에서 벗어난 혹세무민에 불과하다고 공개비판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얼마 전 한 교계신문의 조사 결과 가장 존경받는 스님으로 꼽힐 정도로 교단 안팎에서 지대한 역할을 점하고 있다.

4. 법륜 스님― “좌든 우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질”

울산 출신으로 경주에서 자란 법륜 스님은 일찍부터 포교활동에 원을 세워 불교에 투신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절에 들어간 후 불교학생회 일에 뛰어들 때까지만 해도 불교에 심취한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겠지만, 교육과 포교에 대한 열정은 그때부터 남달랐던 것 같다.

77년 경주에 영남불교 교육원을 설립하였고, 82년 조계종 포교사가 된 이래 포교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뉴욕, L.A. 등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그는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후 82년부터 불국사에서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불국사 포교당에서 인권문제 같은 것을 이야기하다 사찰로 모종의 압력이 들어와 못하게 됐고, 경주시내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던 때였다고 한다. “어느 날 사시예불을 모시고 있는데 불우한 상이군인 한 사람이 법당으로 들어왔다. 절에 중이 되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한 자여!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하신 좋은 안식처가 있으니 여기로 오십시오.”라고 써놓았던 홍보전단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보낼 수 있을까, 다른 절을 소개해 줄까 궁리만 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나는 헌신적으로 일하는 법사다’라는 아상이 깨어짐을 느꼈다고 한다.10)

그 일이 있은 후 83년부터 대불련 상임법사로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는 출가 전이었고, 최석호 법사로 알려져 있던 때다. 그 해 10.27 법난 명예회복운동을 벌이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84년 봉천동 소림선원에서 5명의 도반과 함께 결사정진을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초심자들이 읽는 《실천적 불교사상》이 이 해에 발간되었고, 보다 체계적인 불교교육을 위하여 중앙불교교육원(85년)을 설립한 이후 88년 홍제동에 정토포교원 개원을 시작으로 한국불교사회교육원(불교환경교육원의 전신), 민족불교학당, 한국불교사회연구소 등을 잇따라 설립했다.

아직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행적을 알아 가면서 대단히 경이로웠음을 먼저 고백하고 싶다. 연구소 설립이나 월간지의 창간, 결사의 진행 등은 불교는 물론 당시 일반인들보다 몇 발 앞선 선구적인 일이었다. 개척자적 자세는 91년 그가 도문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고 출가승려의 길로 접어든 이후 더욱 활기를 더했다. 아직까지도 정식 비구계 수지 여부로 그에게 마땅찮은 시각을 보내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에 굴함 없이 승려 법륜으로서 더욱더 많은 일을 해냈다.

일찍이 93년 만일 결사를 시작하면서 공동체 운동을 시작했고, 이즈음 이미 불교환경운동론을 정립하고 단체를 만들어 불교와 환경운동의 접목을 시도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일찍부터 해외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94년부터 인도 둥게스리에 불가촉 천민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 이래, 외국인 노동자 돕기·조선족 돕기, 스리랑카·태국 등 국제참여불교 단체·실천가들과의 교류, 북한 난민 돕기·몽골 빈민 돕기까지 국제활동은 해마다 그 폭이 넓어지고 있다. 많은 국제불교단체, 지도자들과 그는 깊은 연관을 맺고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미국과 독일 등 서구의 대학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 정도로 그의 국제적 명성은 높다.

‘정토회’ 중심으로 활발한 사회활동 펼쳐

법륜 스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토회다. 정토회는 환경교육원, JTS, 좋은 벗들과 같은 사회참여기구를 움직이는 모집단이자 공동체이다. 서울 서초동 정토회관에 가면 1백여 명의 상근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접할 수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속한 기구의 활동업무 외에 정토회관에서 생활과 수행을 함께 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정토회 구성원들은 
△일과 수행의 통일 
△대중 주체의 공동체 실현 
△전인류적, 전지구적 운동의 전개 
△정보의 공유 
△무보수 자원활동 등을 약속하고 공동체 생활의 청규를 지키며, 수행과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정토회는 농촌에 있는 생산공동체는 아니지만 사적 소유를 줄이고 사회적 회향을 중심에 두면서, 그 내적 동기와 룰을 불교신앙과 전통에 의지하고 있는 순수 종교공동체의 특성을 겸비하고 있다. 그 지향은 중생에 대한 헌신을 제일명제로 하는 이상적 인간형 ‘보살’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이란 그의 시에 그의 생각하는 보살의 상이 그려져 있다.

…(전략)
다만 현재에 집중하라
깨어 있으라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사람
보살이라네

잘못한 줄 알아서 뉘우치고
틀린 줄 알아서 고치며
모르면 물어서 알아보는 사람
천하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

날이면 날마다
언제 어디서나
이대로 좋은 사람
바라는 바 없는 사람

배고픈 이에게는 양식이 되고
병든 이에게는 양약이 되고
목마른 이에게는 감로수가 되고
길잃은 이에게는 길잡이가 되리니
괴로운 사람 하나 없는 세상을 만든다네

그 이름도 아름다운 이
깨달은 사람, 보살
그가 사는 세상
정토(淨土)11)

정토회 같은 작은 공동체가 많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인류라는 최대의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법륜 스님의 공동체론이다. 그는 “소비자 협동조합이든, 생산협동조합이든, 몬드라곤 형태의 공동체이든, 아니면 수행공동체이든, 유기농법 공동체든 일단은 공동체가 곳곳에 만들어지고 그 안을 완전한 민주주의로, 그리고 정보가 완전히 열려 있는 사회로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이 모든 작은 공동체는 인류공동체라는 큰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의 공동체처럼 닫혀버리면 절대 근본적인 모순을 풀 수 없다. 공동체 안에서는 자기를 버리는데, 공동체 밖에서는 자기들의 이익을 보려고 하는 생각이 닫힌 생각을 낳는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인류 대안으로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12)

그는 국내에서 불교와 환경운동의 구체적 접목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다. 철저히 연기적 시각에 기초해 주로 교육사업을 펼쳐 온 불교환경교육원은 국내 최고의 환경전문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10년 동안 이미 1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생태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국내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젊은 활동가들 가운데 이곳을 안 거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불교적 환경교육의 산파역을 담당해 왔다.

10년전부터 기아-질병-문명 퇴치 국제운동 펼쳐

국제활동도 활발하다. 91년 설립된 국제민간구호단체 (사)제이티에스는 부처님의 나라 인도를 향해 뛰어들어13) 93년 인도현지에 법인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천대받는 불가촉천민이 모여사는 비하르주 둥게스리 마을에 학교를 설립한 이후, 주변 15개 마을에 무료진료와 지역개발 사업을 계속 진행중이다. 제이티에스는 미국과 중국에도 설립되어 있는데, 97년에 설립한 중국지부의 경우는 나진·선봉 탁아소 및 유치원 어린이 결연사업 등 북한주민과 난민을 위한 구호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연변지방에서 난민구호활동을 벌이던 이 단체 활동가 4인이 중국정부로부터 간첩혐의로 추방을 받는 등의 사건도 있었을 정도로 주목받으며 활동폭을 넓히고 있다. 국제구제사업에 참여하는 그의 논리는 단순명쾌하다. 그는 “사는 게 기적인 사람들, 기아·질병·문맹 상태에 처한 12억의 최극빈층에겐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전생에 죄가 많아서 업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도 그들의 인연이라고 불자들이 지나치는 현실은 연기에 대한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아와 질병, 문맹 상태에 있는 극빈층 20%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

법륜 스님의 경우 교단문제에 대해 일체 개입하지 않는 방침을 오랫동안 고수해 왔다. 98년 종단사태가 터졌을 때처럼 특정 사안에 대해 정토회 소속 일부 단체가 참여하기는 했지만, 특히 교단 내 분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해 왔다. 여기에는 비구계 수지 여부를 둘러싼 조계종단의 배타성이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오히려 이것보다는 법륜 스님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14) 결과적으로 교단문제에 거리를 둠으로써 대사회활동에 보다 충실할 수 있었고, 이것이 결국 정토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5. 두 사람의 공통적인 세계관은 ‘연기의 철저한 적용’

약간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 있지만, 활동 스타일 역시 두 사람의 법명대로 독특하다. 실무자만 100여 명에 달하는 정토회를 이끌고 있는 법륜 스님은 굉장히 꼼꼼하고 치밀한 일처리, 왕성한 활동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도법 스님은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엔 적극성이 덜하고, 또 구체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실무자들에게 맡기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활동영역과 스타일 등 전반적인 평가에 있어 길을 제시하는 역이 도법 스님이었다면, 활동영역을 개척해 온 철두철미한 실천은 법륜 스님 몫이었던 것 같다.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사회참여를 이끌고 있는 두 사람이 한국불교에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두 사람은 모두 

첫째, 연기(緣起)를 강조하여 ‘만 생명은 하나’임을 현실에서 줄기차게 적용하려 한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알고 보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고통과 맞물려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 위에서 자신의 행복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

둘째, 보살행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 전통을 계승하여 보현행으로 보리를 이루려 하는 ‘이보현행오보리(以普賢行悟菩提)’에 철저하다. 이들에 있어 보현행은 깨달음 그 자체이자, 자신의 깨달음을 현실에 드러내는 징표이다.

셋째, 붓다의 정신에서 멀어진 교단을 바로잡으려 한다. 도법 스님은 일찍이 90년 9월 월간 《해인》에 발표한 글을 통해 “언젠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시던 원로 스님이 이 정도는 내가 타고 다녀야 안 되겠나.” 하는 모습을 보며 교단이 붓다의 가르침에서 멀어졌음을 통감했다고 밝힌 바 있고, 나아가 법륜 스님은 오늘의 교단은 불교도의 이상을 담보하는 그릇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요소인 면이 많다고 주장한다.

넷째, 잘못된 교단 전통에 대해서 극복하려 한다. 교단의 세속화와 물량주의에 대한 배격과 신랄한 비판은 물론이고 ‘호국불교’와 ‘선이’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적 상징도 예외 없이 비판의 시각을 거두지 않는다. ‘호국불교’가 한국불교의 생존을 위한 일탈의 마취제였고, 선이 이를 치유하는 신비스런 영약으로서 부정적 측면이 있다 했을 때 두 사람의 활동은 공히 이 두 가지 전통의 부정적 측면에도 결별을 시도해 왔다.


6. 교단 현실 직시하고 개혁운동 포기 말아야

불교 사회참여의 길을 개척해 온 대표적 인사에 대해 경험이 일천한 필자가 언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교단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을 전하는 차원에서라도 언급할 필요성이 있을 듯싶다. 처지의 차이 때문에 법륜 스님보다는 도법 스님에 더 많이 해당하는 주문사항이겠지만 설혹 근거 없고 악의적일지라도 그조차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도법 스님은 

첫째, 교단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우담바라’ 소동이나, 간화선의 현재 풍토에 대한 도법 스님의 비판은 적절한 시점에서 이뤄진 용기 있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잘못은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가이고, 나아가 이러한 문제들이 대중공사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건강한 풍토 속에 풀려갈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특히 근래 들어서 교단 내에서는 무엇이든지 비판을 해도 정치적 배경과 색채로 제단하는 경향이 심각해졌다. 누구는 아무개 상좌, 누구는 어떤 배경으로 이 문제를 활용하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 만연하다. 도법 스님은 이러한 교단의 악폐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겠지만, 역으로 이제는 이러한 왜곡이 가능한 구조를 스스로부터 남김없이 던지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례로 날로 심해 가는 문중이기주의와 같은 구조적 병폐에서 도법 스님 스스로 더 자유로워져야 교단 내 공감은 배가될 것이다.

둘째, 교단개혁의 열망을 놓지 말아야 하며, 개혁에 대한 원론적인 언급을 넘어 이제는 현실적인 개선점을 찾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도법 스님은 ‘부처님다운 승가상’을 확립하는 데 매진하였고, 이러한 사고에 기반하여 승가교육개혁에 집중하였던 것을 대중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승가의 정체성 확보가 쉽지 않았음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교단이 사회와 밀접해지면서 사회의 지배적 가치―소비주의와 무한경쟁 같은 자본주의적 생활양식―는 교단에 더 깊이 투영되고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주장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지언정 많은 이들이 따라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단문제의 핵심을 ‘승가 개혁’이라고 봤다면 이에 걸맞는 현실적 대안들을 내어놓는 데 적극 나서는 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타당한 접근법일 것이다. 승가개혁이 잘되지 않았다면, 여기엔 다음과 같은 근본적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다. 은사와 문중이 보잘 것 없어서 당장의 생계와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스님들이 종단에는 그렇지 않은 스님들보다 많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이왕이면 큰 절의 주지직을 맡기 원하고, 주지로 재임하는 기간에 가급적이면 노후대비까지 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면 불사 위주의 사찰운영에 치우치는 등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개선할 것인가.

어떤 이는 “중노릇만 잘하면 걱정없다. 무능한 이들의 변명이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정도로 풀릴 문제가 아님은 자명하다. 사상과 정신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점차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삶의 문제를 개선하지 못하는 정신과 사상의 강조가 공허해지는 것을, 그래서 결국 많은 대중들이 가치를 포기하고 생존의 문제에 얽매임을 역사와 현실은 이미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단의 현실을 점차적으로 개선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98년 99년 폭력사태에 대해서는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좀더 과감하게 자기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당시의 폭력사태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 것은 불교정보센터와의 최근 인터뷰인데, 이 인터뷰에서 도법 스님은 “98년과 99년 폭력사태는 종헌종법과 종단의 정체성 수호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본질이 다른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98년 공권력을 투입하여 종단을 정상화시킨 것과, 99년 사법부 판결에 대한 저항 역시 다른 차원이라고 말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98년과 99년은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인해 그것이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이다. 최근의 해인사 선방 수좌들의 실상사 폭력에 대해서 21일 동안의 단식참회 기도는 저간의 사정을 지켜본 필자에게도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구조화된 폭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은 비폭력을 견지할 수 있는 정신이다. 특히 상대방이 폭력을 가해 올 때 그때를 제대로 견뎌야만 비폭력의 정신과 기운은 확산된다. 도법 스님 역시 지난해 한 교계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에서 달라이 라마를 예로 들며 이를 언급한 바 있다. 폭력의 순간에 비폭력의 정신을 견지하지 못했다면 이조차 자신의 문제로 여겨 털어놓고 ‘내 탓’임을 주장하는 것이 진정으로 폭력을 이기는 길일 것이다.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을 한층 성숙시켜 혹시 아직도 스님을 원망하고 있는 대중들이 있다면, 이들조차 진심으로 포용하기를 바란다.

넷째, 일부중이든 이부중이든 승가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을 부탁하고 싶다. 실상사에서 사부대중공의로 사찰운영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또 가장 모범적인 사찰로 일궈가기를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 운동과 더불어 승가운동의 늦춰졌던 고삐도 다시 당기는 게 필요하다. 현 교단의 상황에서 파급력이나 영향력이 당분간 높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는 사부대중운동과 별도로 건강한 스님들이 결사와 공동체의 정신으로 교단을 바꿔가려는 노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참여불교재가연대는 교단자정센터라는 일을 하면서 마치 승려 전체에 대한 감시기구로 비치는 것을 적이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니 왜 우리 출가승려들이 재가자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라며, 새로운 승가운동의 기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교단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은 누가 뭐래도 출가승단이다. 도법 스님은 승가운동결사체인 선우도량을 결성하여 근 10여 년 동안 교단문제에 대해 깊은 연구와 실천력을 보인 바 있지만 98년 이후부터 선우도량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필자는 도법 스님이 ‘이 시대의 부처님’인 출가사문의 공동체와 결사운동을 다시 시작하여 과거 운동의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극복해 가는 새 승가운동을 하루빨리 다시 시작했으면 한다. 건강한 재가운동과 건강한 출가운동은 수레의 양 바뀌와 같아야 하고, 두 바뀌가 제대로 굴러갈 때 교단은 진보한다.


7. 대중의 삶에 한 발 다가서는 공동체 운동을 기대하며

법륜 스님은 도법 스님과 교단 내 처지가 현격히 다르다. 83년 비상종단에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94년 종단개혁운동은 물론이고, 98년 종단사태 등 종단문제에 대해서는 소속단체 일부가 이름을 내건 것을 제외하곤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비구계 미수지 문제이지만, 이면에는 교단의 배타성이 깔려 있다.

얼마 전 법륜 스님을 모 사찰로 초청하여 수련프로그램을 진행하려 했는데, 사중 소임자 일부가 반대하여 장소를 바꾼 적이 있다. 특히 비구승 중심의 배타성이 강한 이들은 지나치게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솔직히 필자는 비구계를 단일계단에서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조계종 승적이 있니 없니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승적을 만들고, 계첩을 나눠준 것이 교단 통제의 일환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활동에 호감을 가졌던 일부 스님들이 94년 개혁회의 출범 이후, 또 96년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던 때,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하여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극단적인 교단 내 비토세력의 존재로 결국 무산됐다.

물론 법륜 스님 본인도 이 문제를 풀려는 적극성이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종단이나 법륜 스님 본인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열쇠를 쥐고 있는 종단의 지도부는 이 문제를 대승적으로 판단하여 오히려 법륜 스님의 활동성과를 종단 내로 수렴코자 나서야 할 것이다.

법륜 스님에게는 정토회라는 공동체를 한 단계 더 열린 문명운동, 문화운동, 대중운동의 공동체로 성숙시켜야 할 과제도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정토회가 대외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위상과 활동력은 구성원들의 높은 헌신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활동 초기 공동체 건설을 위해 천막에서 거주하는 것도 마다 않았고, 지금도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위해 개인 생활을 기꺼이 희생하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그룹이다. 그러나 일정하게 제 위상을 확보한 지금은 역으로 구성원들의 헌신성이 보다 폭 넓은 대중성 확보에 장애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법륜 스님의 소신처럼 하루 24시간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가정과 직장, 여가와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고, 또 ‘보살’의 길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삶 터에서 일상적인 생활불교운동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삶을 서원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한 평범한 소시민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평범한 소시민과 공동체는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풀어냈을 때 정토회의 공동체 운동은 대중의 삶을 바꿔가는 문명 운동으로 승화될 터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많은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공동체에 머무르고 만다.

8. 끝맺으며―이젠 교단이 그들의 삶에 화답해야

두 사람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회참여론자이면서 동시에 교단개혁가들이다. 이들의 활동에 열렬히 반응하는 것은 교단 밖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일등포교사라 해도 손색 없다. 이제 뒤늦게나마 그 반응은 교단 내로, 불자 대중에게로 메아리쳐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하고, 함께 나서는 사람들은 불자이거나 불교적 삶의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교단에서 출발했고, 한 사람은 아예 바깥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차이가 있지만 종착역은 같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고 있다.

이제 10여 년 이상 자신의 영역에서 사회참여의 길을 개척해 온 그들의 삶에서 교단은 중생구제의 이론과 방법을 배워야 하고, 이를 교단 전체로 확산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단은 그들의 삶에 불교적 가치와 교단 내 지위를 부여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사사로운 이해를 갖고, 근거 없이 비방하거나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비판하되 육성하고 장려하는 자세로 그들의 활동의 장점이 교단 내로 온전히 수렴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깨달음과 중생 구제가 둘이 아님을 실천해 온 두 사람의 삶과 실천에 이젠 교단이 화답해야 할 차례다.■

15 도법스님의 ‘붓다로 살자’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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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로 살자’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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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06

‘붓다로 살자’에 대한 비판
                                                  2015년 2월 10일 허정

 

 불교는 진리와 진리를 보는 방법을 설명한다. 붓다의 유언인 법등명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경전의 언어를 잘 이해해야 한다. 모든 경전은 부처님과 제자들의 대화로 채워져 있기에 불교는 ‘대화의 종교’라 일컬어진다. 대화의 종교는 정확한 언어 사용이 매우 중요한데 제가 알기로는 조계종 안에서 정확한 언어 사용을 가장 강조하시는 분이 도법스님이시다. 저는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도법스님과 많은 토론을 통하여 언어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는데 송구스럽게도 지금은 제가 도법스님의 언어사용을 지적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난날 도법스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토론을 하기전에 토론에 사용하는 ‘용어’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도법스님이 사용하는 ‘붓다’의 의미가 속담에서 나타나는 착함, 양심에서부터 이타심, 깨어있음,일념등과 4향4과라고 부르는 성인의 지위까지를 포함하고 또한 계정혜 삼학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광범위한 붓다의 의미는 정리될 필요가 있다. 이제  ‘붓다로 살자’에 대한 문제점을 몇가지 짚어보자.

 

첫째 ‘붓다로 살자’는 ‘일체중생실유불성’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리고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다만 어리석고 미혹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奇裁奇裁 此諸衆生 云何具有如來智慧 愚癡迷惑 不知不見)’라는 대소승 경구(經句)를 기반으로 한다. 이 경구들은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원리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특별한 수행을 통해 다시 붓다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고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고 한다. 나아가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듯 본래 붓다인 우리가 붓다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이미 붓다라면 우리는 저절로 붓다의 말과 행위를 하게 될 것인데 왜 그렇치 못하고 다시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해야 하는가? 또한 구체적으로 무엇이 부처의 생각이며, 어떻게 말하는 것이 부처의 말이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부처의 행위인가?


또 누가 그것들을 규정하는가? 

둘째 도법스님은 자신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로 소중하고 그것이 부처라고 말한다.(2014,8,조계사법문) 상윳따니까야에서 말리까왕비와 빠세나디왕은 무엇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하다 서로가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처님도 이 말씀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마음이 어떠한 곳으로 돌아다니더라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해치지 말라” 부처님은 인간의 이기심과 생존본능을 인정하되 그 욕망을 돌아보아 상대방에게 자비심을 내라고 가르치는 반면 도법스님은 자기 자신이 최고로 소중하므로 자신이 붓다라고 말한다. 불교는 목숨이 아무리 소중하다해도 그것에 집착을 하면 괴로움이라고 가르치고 진리를 모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진리를 알고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고 가르친다. 부처란 생사에 집착이 없는 분이지 목숨을 최고로 여기는 분이 아니다. 목숨이 부처라는 말은 불교가 죽음을 미워하고 삶만을 원하는 욕망의 종교, 세속적인 종교로 오해하게 만드는 비불교적인 발상이다.

 

셋째 도법스님은 내 인생을 내가 주체적으로 살 수 있기에 부처라고 말한다. 이른바 일체유심조, 자업자득의 근거인 ‘자유의지’를 부처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졌기에 착한일도 하지만 나쁜 일도 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부처라면 착한부처와 나쁜부처를 인정하는 것이고 살생하고 도둑질하는 것도 자유의지이므로 살생하는 붓다. 도둑질하는 붓다를 인정하는 꼴이다. 또 생각이란 것은 본인의 의지없이 문득 나기도 하는 것인데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생각들 중에는 붓다의 생각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운 것들이 많다. 그때마다 우리는 번뇌하는 붓다, 우울한 붓다가 될 것이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살 수 있기에 부처라는 발상도 비불교적이다.
 
넷째  불교가 탁월한 점은 어떤 믿음이나 전제조건 없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전혀 없다. 불교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를 문제 삼는 사람들의 것이다. 가르침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면 실천하여 보아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받아들이면 된다. 불교는 인간에게 생겨나는 ‘괴로움이 무엇이고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이고 괴로움의 소멸시키는 길은 무엇인지’를 현실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즉문즉설의 종교이다. 일반인들에게 ‘붓다로 살자’며 ‘붓다’라는 용어를 들이대는 것은 전제 조건없는 가르침을 협소한 종파의 울타리에 가두는 것이며 ‘불성’에 대한 믿음이나 ‘본래부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와서 보라’고 가르친 부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다. 또한 비불자들에게 ‘붓다로 살자’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처럼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전제조건을 달고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거나 그 공포로 거래를 하게 된다.
 


결론 및 요구사항:

1.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교리적으로 모순이 있으니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여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혹은 ‘보살로 살자’라는 운동으로 전환하거나 ‘맑고 향기롭게’ ‘내 탓이오’처럼 불교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운동으로 나아가자

2. 믿음의 불교대신에 전제조건 없는 불교, ‘와서 보라’는 불교, 이해의 불교를 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적합하다.

3. 도법스님의 ‘붓다로 살자’와 무비스님의 ‘인불사상’은 꼭 ‘사람이 부처’이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가장 소중한 것이 목숨이므로 목숨이 부처라고 설명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 또한 ‘사람이 부처’이기에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탁월한 것도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히려 인간 각자가 이기적이고 생존본능이 있기에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4. 본래부처와 불성사상은 싯다르타가 몸소 보여 주신 깨달음(탐진치소멸), 전제 조건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구체적인 가르침(사성제),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8정도)을 제시하는 불교와 다르지 않다.

 

 

2021/03/04

5] Right Action | The Noble Eightfold Path : 13 Meditation Talks

5] Right Action | The Noble Eightfold Path : 13 Meditation Talks

Right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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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8, 2007

Today I was talking to someone who said in passing that sitting and meditating when your mind is a mess all over the place is a waste of time. And of course that’s not true. At the very least, meditating when the mind is messy gives you an opportunity to look at what a messy mind is like. Maybe with enough time, you’ll get tired of it, and want to do something about it.

I’ve often found that one way of jumpstarting your practice is to make up your mind that you’re going to sit for a certain amount of time every day and really stick with it. You may find in the beginning that your meditation is miserable, and you don’t like it. But if you stick with that set amount of time every day, there comes a point where you have to say, “Look, as long as I’m sitting here, I might as well do this right.” Sometimes you have to corner the mind that way before it will begin to shape up.

Another consideration, of course, is that while you’re sitting here with your eyes closed, you’re not causing anyone any harm. You’re not engaging in wrong speech, you’re not engaging in wrong action or wrong livelihood, and that’s not a small thing. So at the very least, even when you’re mind is a mess in the meditation, you’re keeping yourself from causing harm.

The teachings on right action are very rarely mentioned in the talks here, because as we’re sitting here nobody’s killing anybody, nobody’s stealing, nobody’s engaging in illicit sex, unless you’re doing that in your mind. But it’s important every now and then to think about why right action is part of the path.

To begin with, it grows out of right view and right resolve. You realize that your actions are important, in thought, word, and deed. You don’t want to do anything that’s going to be harmful either to yourself or to other people. The three types of wrong action are three of the things that the Buddha singled out as always harmful. And unlike right speech, all three forms of wrong action find a place in the five precepts. In other words, they’re a basic practice for everybody. You don’t kill anybody, any animal that’s big enough for you to see. You don’t steal anything. You don’t engage in illicit sex. Period.

These are vows that you take for yourself. They’re “right” in the sense that they’re skillful. If you don’t cause harm to yourself, if you don’t cause harm to other people, then they benefit, you benefit, and that makes it a lot easier to meditate. It cuts off a lot of unskillful thinking when you realize, “I just can’t do that. I can’t engage in that kind of action, so why even think about it?”

That helps put up a wall. Now often we think of a wall as a restriction, but here the wall is a protection. It protects you from rationalizing. Otherwise, there are lots of easy ways where the mind could justify actions of this sort.

One of the reasons the precepts are so short and clear-cut is that they’re especially important to remember when you start finding reasons for breaking them—when your life is endangered, when the life of your loved ones is in danger—and you have to remind yourself, “No killing.” Because it’s short, it’s easy to remember. Now you do what you can to stop the danger, short of killing. But no killing. And so on down the line.

These forms of wrong action are also related to the hindrances. As the Buddha pointed out, when a hindrance is particularly strong—as when there’s the desire to get engaged in sensual passion, or you’re feeling thoughts of ill will, restlessness, and anxiety—you don’t recognize the fact that those thoughts are unskillful. That’s one of the main problems with the hindrances: They blind you; they get you to see things in their way. But having the precepts reminds you that these mind states really are unskillful no matter what, no matter where. So that fact stops you short. It’s a red flag: No, this kind of behavior is out of the question.

At the same time you can, as with right speech, think of right action as a set of guidelines for your meditation. On one level, as I said, it refers to the hindrances. You think, “Okay, no killing.” That relates directly to the hindrance of ill will. No stealing. No illicit sex. Those, depending on your motivation for stealing, could relate to ill will or to sensual desire. You may steal simply because you really want it, but there are times when you might steal because you’re angry at somebody, you want to deprive them of something: That’s stealing through ill will. The same with illicit sex: That can be motivated either by sensual desire or by ill will.

This focuses you on the two big hindrances, to remind you that you don’t want to go there, because if you’re going to get the mind in a good solid state of concentration, then, as the texts say, you have to be secluded from sensual passion, be secluded from unskillful mental qualities. Sensual desire and ill will are the two big unskillful qualities. They’re forms of wrong resolve.

And even further, Ajaan Lee takes the teachings on right speech and right action and makes them more symbolic of other things that go on in the mind when you’re meditating as well. Killing for instance: You don’t want to kill your goodness. Where does your goodness come from? It comes from being heedful. As the Buddha said, when you’re heedless, it’s as if you’re dead. You’re killing yourself; you’re killing the goodness of the mind. If you say, “Well, there’s nothing much I have to do; everything is perfectly fine as it is; I don’t have to work at putting any effort into the path”: That kills you right there, kills the practice. So you want to make sure you don’t kill your practice. You don’t kill your goodness. You’ve got to be heedful at all times. This means having a strong sense that what you’re doing right now is important, and you don’t know how much time you’re going to have to do skillful things, so you’ve got to develop as many skillful habits as you can—which means you have to do them right now.

The Buddha once talked about having the monks develop mindfulness of death as a useful form of meditation. The different monks talked about how they developed it. One said, “I think every day, ‘May I live at least one more day so I can practice in the Buddha’s teachings; I’ll be able to get a lot out of it.’” Another monk said, “I think every half day, ‘May I live another half-day,’” and so on down the line, until it came to two monks. One said, “I think, ‘May I live to breathe in and out once more.’” Another monk said, “’While I’m eating, may I live the amount of time it takes to eat a mouthful of food, so in that amount of time, I’ll try to do as much skillful practice as I can, and I’ll get good results that way.” And the Buddha said, “Only these last two monks really count as being heedful.” So here you are, meditating. You’ve got the chance at least with this breath, as it comes and goes out, to develop something skillful. And then you do the same with the next breath, and the next. That’s how you avoid killing your meditation, killing your goodness.

As for stealing, as Ajaan Lee says that, on the level of concentration practice, it means stealing the affairs of other people, thinking about how this or that person is no good. He says, “You never really asked their permission to think about their bad habits, so it’s like stealing their stuff.” And what kind of stuff you are stealing? You’re stealing their garbage. If you’re going to steal things from other people, at least steal their valuables. Think about their good points in a way that gives you some energy to emulate those good points yourself. Remember the analogy the Buddha gives, of a person traveling across the desert, tired, trembling with heat, thirsting for water, and finding a little bit of water in a cow’s footprint. He realizes: “Here I am, tired, thirsty, and trembling. I need that water. But if I try to scoop it up with my hand, I’ll get the water all muddy.” So he gets down on all fours and very carefully slurps up the water straight from the cow print.

Your need for the goodness of other people is that extreme. If all you can see is other people’s bad points, you’re going to lose your enthusiasm for treating them skillfully. You’ll say, “Well, everybody else is cheating, I might as well cheat as well.” That’s a very common attitude that you see throughout society. Again that kills your goodness.

So you don’t want to steal other people’s bad traits. Think of their good traits. Think about the great ajaans, and think about Upasika Kee: people who gave their lives to the practice and have done so much for the world as a result. You can do that, too. There’s nothing about them that’s super-human. While you’re thinking about their good habits, maybe you can think about how they might have solved the problems you’re facing right now. That gives you energy. So as Ajaan Lee says, as long as you’re going to steal something, steal their valuables. Don’t steal their garbage.

But ultimately you want to get to the point where you’re more of a self-starter. You can stop stealing because you can maximize your own inner resources. And what are your inner resources? You’ve got the four properties of the body here. You’ve got the breath. You can develop that. You’ve got good mental states. Develop those. Develop your own resources. You’ll find that you’ve got all the inner wealth you need, so you don’t need to steal anything from anybody else, good or bad.

As for the precept against illicit sensuality, this relates to sensual desires. You don’t want to get anywhere near them while you’re sitting here meditating. Remind yourself that every sensual passion, every sensual desire, comes with a price. The Buddha has a long list of analogies for the drawbacks of sensuality. He says, it’s like a dog gnawing at a bone that has no meat: all that effort for no nourishment at all. It’s like a person carrying a torch against the wind: The flame of the torch is going to burn you if you don’t throw down the torch. It’s like using and flaunting borrowed goods: The sensual pleasures you get from other people, they can take away at any time. Another analogy is that sensuality is like a man up in a tree, gathering fruits, and someone else comes along and says, “I want the fruits but I can’t climb the tree, but I’ve got my ax, so I can cut down the tree.” If the first man doesn’t quickly get out of the tree, he’s going to get hurt pretty badly. In other words, someone else may come along and very easily take the sources of your sensual pleasures in a way that can damage you. So you’re putting yourself in a dangerous position when you indulge in sensuality.

Sometimes you hear of the dangers of jhana, that you’re going to get stuck in jhana, and it’s going to be so wonderful and enthralling that you’ll never gain awakening. You can find a few passages in the Canon that make that point, but they’re very, very few. The danger of getting stuck in concentration is very small compared to the dangers that come from being stuck on sensuality. As the Buddha said, this is why we have wars, this is why we have quarrels, this is why people work themselves to death. This is why they steal and cheat, in their desire for sensuality. I don’t know anybody who’s broken the five precepts from being attached to the pleasure of jhana.

So jhana is a safe place; sensuality is a dangerous place to be. Always keep that in mind. In this way, you take the principles of right action and bring them inside so that you have your own inner wealth to build on. There’s no need to steal anything from anyone else, no need to expose yourself to the dangers of trying to find your happiness outside. And by being heedful this way, you keep your goodness alive. That’s the most important possession you can h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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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ing to Henepola Gunaratana, the term "jhana" is closely connected with "samadhi", which is generally rendered as "concentration". The word "samadhi" is almost interchangeable with the word "samatha", serenity.

Dhyāna in Buddhism - Wikipediahttps://en.wikipedia.org › wiki › Dhyāna_in_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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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hanas in Theravada Buddhist Meditationhttps://www.accesstoinsight.org › lib

One, the etymologically correct derivation, is the verb jhayati, meaning to think or meditate; the other is a more playful derivation, intended to illuminate its fun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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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ana: jhana - Access to Insighthttps://www.accesstoinsight.org › ptf

Jhana is a meditative state of profound stillness and concentration in which the mind becomes fully immersed and absorbed in the chosen object of at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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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ring the Jhanas - Lion's Roarhttps://www.lionsroar.com › enterin...

2017. 5. 23. — The jhanas are eight 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 brought on via concentration, each yielding more concentration than the previous. As yo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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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hanas: Perfect States of Concentration - Tricyclehttps://tricycle.org › Magazine

But few strategies are as central to the Buddhist path, and as little known to Westerners, as those called the jhanas. Jhana is the Pali word for mental or meditat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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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계 (五戒)
a. 살생하지 말라.
b. 남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주지 않는 것은 취하지 말라. (도둑질과 사기는 물론이거니와, 종교인이 신도들에게 "요즘 절/교회 운영이 어렵다"고 엄살 부리면서 헌금을 은근히 종용하는 행위도 포함됨.)
c. 성적인 비행을 하지 말라.
d. 거짓말하지 말라. (Wrong speech 4가지 중 거짓말만 오계에 포함시킨 것은, 다른 3가지의 wrong speech에는 예외도 있을 수 있기 때문.)
e. 술이나 마약 등 정신을 흐리게 하는 물질을 섭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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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계 준수의 의의
a.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피해주지 않기.
b. 과오로 마음이 불편하면 명상이 잘 안 됨.
c.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간은 남탓을 하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음. 어리석음의 악화.
d. 타인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실은 나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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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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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채식을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함.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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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스님들은 절대 돈을 받으면 안 되고 옷이건 생필품이건 직접 물건으로 보시를 받아야 하며 음식도 탁발을 하는 것이 원칙. 하루 딱 한 번 발우 (나무로 만든 대접 모양의 그릇)를 들고 마을에 가서 몇 집으로부터 밥 한 숟가락씩 발우에 받아 와서 먹는 것. '난 이건 싫다', '저건 안 먹는다', 그러면 안 됨. 이 집 저 집에서 주는 대로 음식을 조금씩 받다 보면 그야말로 개밥처럼 온통 뒤섞여 맛이 이상해지지만, 맛을 즐기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는다는 목적이기 때문에 맛있네 맛없네 따지면 안 됨. 그러니 고기이건 뭐건 거부하거나 요청함으로써 보시자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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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로 아랫 글 '불교 윤리의 제1 덕목'에서도 언급했듯이, 어차피 채식을 해도 생명 (곤충)은 죽이게 되어 있음. 그러므로 육식 비롯 모든 종류의 소비를 최소로 줄이는 노력이 필요. 그리고 사람에 따라 체질에 따라 육식이 꼭 필요할 수.도. 있음을 무시하지 않음. 다만 '수행에 지장 없을 정도의 건강만을 유지한다'라는 필요 이상 먹거나 맛을 위해 먹지는 말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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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시 아랫 글에서 언급했듯이, 불교 윤리의 제1 덕목은 남에게 '잘 해 주는' 게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내가 채식주의자라 해도,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그 집 주인이 정성껏 준비해서 내온다는 음식이 고기뿐이더라, 그러면 그냥 고기를 조금만 먹는 것이 예의라고 함. 고기 먹는 타인이 채식주의자인 나를 위해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 채식요리를 준비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내가 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 그래서 고기든 카레든 국이든 주는 대로 조금씩 전부 한 그릇에 받아 그냥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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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가 중국으로 와서 채식이 당연하게 된 것은 도교의 영향. 그리고 하루 한 번만 먹어야 한다는, 부처님이 만드신 규율도 사라짐. 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선 스님들이 동네를 다니면서 생쌀을 시주 받으셨었는데, 이젠 그 전통도 없어지고 주로 돈으로 보시를 받음. 오히려 한국 절에선 신도들로부터 받은 돈으로 밥을 해서 신도들에게 대접하는 관습이 생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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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삼국시대의 민속신앙과 불교의 혼합현상이 현대사회에 미친 영향(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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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는 분이 드물어요. (선후 관계를 그리 중하다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닌듯 싶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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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어렸을 때만해도, 탁발하는 스님들을 종종 보고는 했는데, 탁발을 빙자해서 가짜 승려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대형 종단 차원에서 탁발을 없앴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게 먹는 것에 대해서는 도가 또는 선가쪽에서는 '벽곡'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걸 실제로 하는 분을 만나뵌 적이 있는데, 같이 식사까지 했던 분의 말씀에 따르면 자연식+채식만 하셔서 만나면 죽 말고는 같이 드실 수 있는게 없었다고 했죠. 그마저도 아주 조금밖에 안드셨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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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윤리의 제1 덕목: 다른 '좋은' 일 하려 들기 보다 나의 탐진치로 인해 '남' (모든 종류의 생명체 포함)에게 폐 끼치는 일부터 없애기/줄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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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단 하나, 책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 뿐. 자신에게 잘 해 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좋아하는 등의 감정적 측면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똑같다. 엄마가 아이들을 야단칠 때 원망스런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며 궁시렁거리면서 아이들 편을 든다든가, 아이들끼리 좀 과격하게 놀면 싸운다고 생각해서 말리려고 한다든가, 누가 좀 우울한 것 같으면 와서 위로해 준다든가, 이런 정서적인 이해와 교감은 동물도 인간에 손톱만큼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왔다갔다 하면서 윤회한다는 불교의 교리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진다. (아무리 '착하게' '평정심을 갖고' 살아도 분별력이 떨어지면 그 癡-지혜없음-으로 인해 축생으로 윤회한다고 초기불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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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그렇다면 육식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는데, 타니사로 스님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vegan으로 산다 해도 농작물 재배과정에서 이미 무수한 곤충들을 죽이게 되고 또 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의식주 때문에 삶의 터전을 혹은 생명을 잃는다고. 누군가의 즐거움/편리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희생/고통에 기반하게 되는 것이 애초부터 인간계의 불행한 조건(*)이라고. 그러므로 육식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세 식구가 사막을 건너는 과정에서 모두 굶어 죽을 것 같아, 부부가 자기 아이를 죽여 식량으로 취하면서 사막을 건너는 상황이라면, 그 부부는 그야말로 생명유지에만 필요한 최소로 섭취하면서 그러면서도 '식사' 때마다 죄책감과 슬픔에 압도되지 않겠냐고, 어떤 종류의 자원이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취할 때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인간계가 고통의 조건(*)을 벗어날 수 있다고.. (세 식구의 이 얘기는 사실 초기경전 SN 12.63에 나오는 것으로, 모든 소비를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하고 감각적 즐거움도 이런 수준으로 절제해야 한다는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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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서 눈앞에 다가오는 토네이도의 존재를 부인하는 모습으로 살면서, 지구 전체가 오로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양 거만을 떨며, 온갖 파티니 선물이니 장식이니 등의 목적으로 오늘도 열심히 각종 불필요한 소비를 통한 환경파괴에 전력질주를 하고 있음.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단 한 순간의 즐거움/재미를 위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조금이라도 더 빠른 속도로 파괴하지 못 해 아주 안달인 것이 바로 인간들의 모습. (한 달 전의 미 서부 산불도 파티에서 터뜨린 폭죽이 원인이었다나.)

지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 자체이며, 인간의 이성이 아무리 불완전한들 인간을 동물로부터 차별화하는 것도 사유능력뿐. 그러므로 '해결책'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포기하고 동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통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신의 욕망에 이성의 빛을 비추어 반성하고 절제하는 수행을 통한 '자기 개조'뿐이라는 것이 불교의 입장. 한 번 재배하면 땅 힘이 소진되어 땅을 10년이나 쉬게 해야 한다는 인삼까지 매일 먹어 가며 젊음/건강에 누구보다도 집착하는 사람들이 또 입만 열면 '道' 운운하는 아이러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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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崔明淑, Sungsoo Hong and 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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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에는 안 좋겠지만 동경하는 것은 미니멀리스트..조리기구든 뭐든 한가지 용도만 있는 것은 질색이에요. 하나로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산업계에서도 개발에 박차를 가해 주었으면 합니다. 주변의 물건을 최소화하고 싶어요. 이상은 트렁크 하나에 내 짐이 다 들어가게 준비하고 싶음..죽을 때까지는....꿈~! 가능했으면 좋겠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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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明淑
       살다 보면 정말 일년에 몇 번 쓰지도 않으면서 없으면 또 때로 아쉬운 그런 자잘한 물건들이 너무나도 많죠. 여러 가구가 공동으로 거주하는 그러면서도 독립성이 보장되는 어떤 형태가 가능하다면 자잘한 물건들을 공유할 수 있으니 좋을 텐데 말이예요. 핵가족화는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자본주의의 음모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 나름 그럴 듯 하다 생각되었어요. (사실 두 사람 거주하는 집이나 여섯 사람 거주하는 집이나 필요한 물건들의 종류와 양에는 별 차이가 없죠.)
      아~ 저도 정말 차츰 줄여 나가고 싶어요. 미국에서 중산층으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원죄'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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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스님할까요...? ㅋㅋ 저 글에 나오는 스님 결론이랑 제 결론이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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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자고 제 나름대로 결론내놓고 질문한거였는데 스님이 뭐라고 답하셨는지는 기억이 안나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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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삼국시대의 민속신앙과 불교의 혼합현상이 현대사회에 미친 영향(上)
불교 전래와 민간신앙, 그리고 삼국시대 종교 혼합현상
기사입력: 2020/10/28 [08:0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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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wrn.com/sub_read.html?uid=16511&fbclid=IwAR17AVj3JIUpIaaKzq092FmigEIuzmXgOrbvnv198yEgxIL29d3ZZCzGl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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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삼성현학술대회가 23일 오후 1시부터 삼성현문화박물관(관장 양훈근, 경상북도 경산시 소재)에서 “삼국유사와 고대의 예술-설화와 현장”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삼성현 역사공원은 이 지역 출신으로 원효, 설총, 일연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문화공원이다.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삼국유사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이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한정호 교수(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삼국유사와 황룡사의 불교 미술” ▲제2주제 최성은(덕성여대 미술사학과)교수 “삼국유사 의해편 보양이목 조와 운문사의 석조미술”이란 주제로 발표 ▲제3주제 이용현(국립 경주박물관) 학예사의 “삼국유사가 기록한 왕경사찰의 경관”이란 주제 발표 ▲제4주제 장정태 원장(삼국유사연구원)“삼국유사의 민속신앙과 불교의 혼합현상이 현대사회에 미친 영향”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이중 장정태 원장의 “삼국유사의 민속신앙과 불교의 혼합현상이 현대사회에 미친 영향”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불교 전래와 민간신앙, 그리고 삼국시대 종교 혼합현상   

잡다한 신앙이나 종교를 붓다에게 귀의시키는 종교성향

 

우리 사회는 불교 전래 이후 단일한 종교사회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다양한 형태의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였다. 그러면서 잡다한 신앙이나 종교를 붓다에게 귀의시키는 종교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화엄의 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 한국 불교에는 우리의 민속신앙이 많이 혼합 되어있다. 잡다한 신앙이나 종교를 붓다에게 귀의시키는 종교성향을 가지고 있다. 화엄의 ‘一卽多 多卽一’과도 맥이 통한다. 사진은 화엄사상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종 본찰 부석사.
 

현대 한국 불교만 살펴보면 한국 불교는 불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불교 내 우리의 민속신앙이 많이 혼합 되어있기 때문이다. 혼합은 보편적 종교와 기층신앙과 결합의 한 형태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외래의 불교 행사와 불교 용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실은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 민족의 고유신앙이다.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민속신앙과 혼합되면서 많은 변화를 주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둘러보아도 불교적인 요소가 짙은 것을 누구나 알게된다. 이와같은 현상속에서 불교와 민속신앙은 서민불교라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로 발전되면서 민속신앙의 혼합현상이 뚜렷해 졌다.

 

이들 한국화된 불교는 불교 토착화의 한 모습으로 해석하며 토착화에 성공한 사례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형적 모습뿐 아니라 교리해석 내면에서도 상당 부분 붓다의 가르침과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서민들이 바라보는 불교는 자신의 눈으로 본 불교를 통해 불교를 이해한다. 외래의 불교가 한국 사회에 전래하면서 고유신앙과 접촉하여 문화적, 변용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불교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전래한 대부분 종교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불교의 연구는 교단 내 유력인사, 승려 특히 비구 중심의 연구사였다. 본 연구는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개인 우상화, 신이한 설화, 전설 중심의 연구사에서 현장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신앙인(신도)의 관점에서 연구사다.

 

불교와 민속신앙간 습합현상은 불교가 한반도에 전개될 때부터 시작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전래된 불교는 이 땅의 고유신앙과 갈등하고 혼합하면서 토착화하고 대중화 하여왔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그중에도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고구려가 처음 불교를 도입하였다. 삼국이 다 같이 국가불교로 수용되고, 그것이 민간에도 자리 잡았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으로 한국 불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불교는 민간을 기반으로 일찍부터 수용되고 이후 불교가 결국 국가권력으로로 부터 공인된 것이다. 민간 수행자 사이에 행해진 잠재적 서민불교가 결국 표면화되고 국가적 불교가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공인과정이 순조로웠던 데 비해 신라는 귀족층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대해 익숙하였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신라는 중국 등 외래문화에 대한 경험이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결국,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어렵게 공인될 수 있었다. 이후 불교가 한국 사회에 정착이 가능했던 것은 불교의 일반적 특징인 자신들이 포교하고자 하는 지역에 있는 기존의 모든 종교, 사상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는 습합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들의 공간에서 민속종교인들의 신앙 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불교와 민속신앙간 습합현상은 불교가 한반도에 전개될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속」 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유리이사금」조다 늙은 홀아비, 홀어미, 고아, 늙어서 아들이 없는 이, 늙고 병들어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이를 위문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주어 부양하게 하니, 이에 이웃 나라 백성들이 듣고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이해에 <민속>이 즐겁고 편안하여 이것이 가악의 시작이다.

 

민속신앙은 사원·교회 등과 같은 종교조직이 직접 관장하지 않으며, 또한 승려·신부·목사 등과 같이 직업적인 종교가에게 상시로 지도받지 않는, 그저 민중들 사이에 퍼져있는 신앙형태를 총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정한 사회를 조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행동방식이 가장 넓은 의미의 민속이지만, 좀 더 좁은 의미 또는 좀 더 적절한 의미의 민속이란 왕이나 귀족들의 사고방식, 행동방식이 아니라 우리 주변 가까이 즉 민간에 퍼져있는 사고방식, 행동방식이며, 그다지 학문적이지 않은 서민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정한 교조·교리체계·교단조직을 가지지 않고 일반 민중의 생활 속에 전승되고 있는 전 종교적 또는 주술적 신앙형태’ 또는 ‘민족의 종교 체험사 중에서, 특히 전 종교적, 미분화된 분야로서 혼융·복합적인 주술종교영역(Magic-Religions)에 드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민속신앙은 민속종교와 동의어로 성립종교와 대칭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민속신앙은 민간층에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인데, 조직되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 전승되고 있는 사회적 종교 현상을 말하며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간계층의 살아있는 ‘현재의 종교’로서 정신적 지반이 되어 왔다. ‘현재의 종교’라는 말은 민속신앙이 과거에 한때 성행했던 과거의 종교나 먼 이상이나 미래를 전망하는 관념적인 미래 지향의 종교가 아니고, 민간계층의 생활 현장에서 현재 생동하는 그 현장성을 의미한다.

 

민속신앙이라는 말은 종교학이 성립하기 전에는 미신이라는 말로 주로 쓰였다. 그러나 미신이란 말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신앙 외 다른 종교신앙을 멸시하거나 그것은 종교신앙이 아니라는 독단에서 오는 오해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에서 미신이란 말 대신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신앙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민간신앙은 종교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먼 이상이나 미래보다도 현실 쪽에 서서 민간계층의 생활 현장에 뿌리를 내린 현재 살아있는 종교 현상이다.

 

민속신앙 범위에는 가신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가신신앙은 가내 평안을 비는 신앙으로 그 주제자는 각 가정의 여성 가운데 최연장자가 담당한다. 결국 가신신앙까지 포함한 민속신앙을 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