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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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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DTVIGS JAPANSKE KRIGER

日本で戦うグルントヴ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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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デンマークの大人のための学校が、日本にやってきた。



日本の見えないレールから飛び出し単身デンマークへ渡った彼の生き方から私たちが学べることとは?


近年幸福な国としても知られる、人口約580万人の北欧の小さな国、デンマーク。

ここに175年前に設立された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以下フォルケ)という大人の学校が

存在する。いまやその数は全国に70校。そこでは従来学校で学べる教科や専門性よりも

教養が重視され、学生たちは日々の集団生活を通して人として成長していく。

2019年4月、フォルケが日本へ遠征する日がやってきた。フォルケで教員を務める山本

勇輝は、デンマーク人バンドSunday Karmaとジャーナリストを引き連れ、北は東北から南は四国まで全国8箇所で講演、イベントやコンサートを通して新たな教育の価値観を

紹介する。

果たして彼らはフォルケ旋風を巻き起こし、日本人の心に灯火を宿す事ができたのか?

Credits


制作:2019年(日本語字幕)50分

映画撮影、制作 : Flemming Helsted
音楽:Sunday Karma

出演:山本勇輝,Vibeke Bekckett, Rune Borup, Perry Stenbäck, Christine Dueholm, Robert Dueholm

   Stenbäck, Rasmus Skovgaard

N・F・S・グルントヴィ――人と思想 68page

N・F・S・グルントヴィ――人と思想

 SFCN discussion paper(社会文化形成ディスカッションペーパー) No.14-1
 2014年4月8日発行


グルントヴィ小伝
 ――時代と思想

 ポール・ダム
 (小池 直人 訳)

 補禄: N・F・S・グルントヴィ「生のための学校」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ivig, 1783-1872
(from: J.C. Aaberg, Hymns and Hymnwriters of Denmark, 1945)


 名古屋大学社会文化形成研究会 (FSCN)
 (The Association for the Studies in Formation of Society and Culture, Nagoya University)
 連絡先: 名古屋大学大学院情報科学研究科 情報創造論小池研究室
 Tel: 052-789-4840 E-mail: nakoike@is.nagoya-u.ac.jp
 

정치 사상가로서의 그룬트 비 | 새로운 평론

정치 사상가로서의 그룬트 비 | 새로운 평론

정치사상가로서의 그룬트비

현대 덴마크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저자가 교육 개혁자 그룬트비의 '정치 사상가'로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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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덴마크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저자가 교육 개혁자 그룬트비의 '정치 사상가'로서의 측면에 빛을 내는 의욕작.관련 단어
덴마크 | 정치 사상 | 현대 덴마크 사상 |정치사상가로서의 그룬트비제목저자·편자·역자오베 코스고 저 / 시미즈 만역발행 연월일2016년 1월 22일정가2,750엔ISBNISBN978-4-7948-1027-4 C0031판형46판 평제페이지 수276화
저자·편자·역자 소개
저자 - Ove KORSGAARD ​​(오베 코스고)

1942년생. 오르후스 대학 명예 교수. 호이스콜레 교장 등도 맡는다. 저서에 「빛을 요구해 덴마크의 성인 교육 500년의 역사」 (가와사키 카즈히코·타카쿠라 나오코역, 도카이 대학 출판회, 1999년) 등.

내용
현대 덴마크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저자가 교육 개혁자 그룬트비의 '정치 사상가'로서의 측면에 빛을 내는 의욕작.
덴마크의 교육 개혁자·사상가 그룬트비에 대해서는, 전전부터 일본에도 소개는 되어 있었지만, 최근에는 졸저 “신판생을 위한 학교”(신평론, 1997년)나 헐·콕저 “ 그룬트비」(코이케 나오토역, 풍매사, 2007년) 등에 의해 보다 자세하게 그 중요성이 인식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의 아이디어에 의한 포르케 호이스 코레(민중의 고등교육학교)운동을 중심으로 한 교육에의 공헌이 주로 말되었다. 그 이외에는 덴마크 문학사에서 시의 업적이 언급될 정도이다. 이것은 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그룬트비는 무엇보다 시인, 교육 사상가, 역사가, 교회 개혁자라고 하는 위치가 되어 왔다. 현대 덴마크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오베 코스고는 그룬트비의 지금까지 별로 고민받지 못한 면에 빛을 내고 있다. 본서는 즉, 그를 「정치사상가」로서 파악한 것이다. 분명히 말해 보면 당연한 일로, 근대 덴마크의 국민·국가 형성은 그룬트비와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특히 호이스콜레 운동에 참가한 지식인, 민중에 의해 이루어진 사업이다. 그룬트비는 체계적인 독일 관념론 사상에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굳이 체계적인 사상을 구축하지 않았다. 그 의미에서는 포스트 모던한 사상가이다. 이런 그룬트비의 다양한 텍스트를 섭렵하고 곳곳에 흩어져 나타나 있는 그의 정치사상을 정리한 뒤, 명쾌하게 정리하는 그 기량은 코스고만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자의적인 해석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2부에는 그룬트비 자신의 텍스트도 수재하고 있다. 이것을 읽으면 덴마크가 왜 오늘과 같은 민주적인 국가가 된 이유의 일단을 알 것이다.
(시미즈·미쓰루)

호평 기간서

デンマーク近代国家の成立とグルントヴィの教育思想

Microsoft Word - 12 ★p243-262 灰垣春奈.doc
デンマーク近代国家の成立とグルントヴィの教育思想
https://www.soka.ac.jp › files


PDF

by 灰垣春奈 · Cited by 1 — さらに、グルントヴィについて書かれた英語の主要な文献は、その殆どを参照している。 4.用語解説・語句の定義. 国民高等学校(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 ...
19 pages

グルントヴィのホイスコーレ構想が拓いたもの 訳者解説

グルントヴィのホイスコーレ構想   ―― 訳者解説

グルントヴィのホイスコーレ構想が拓いたもの 小池 直人
http://www.is.nagoya-u.ac.jp › doc › koike4


PDF

日本にグルントヴィが農民の思想家として紹介されて以来およそ百. 年になるが、彼の思想が日本の文化に浸透している状況はない。だが近年、ホイスコーレをはじ.
23 pages


Grundtvig グルントヴィ

Grundtvig

    グルントヴィとは?

     ニコライ・F・S・グルントヴィ(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は、有名な童話作家アンデルセンや哲学者キェルケゴールの同時代人で、彼らとは友人関係にありました。国際的にはアンデルセンやキェルケゴールの方が知られていますが、デンマークではグルントヴィが一番尊敬されています。それは彼こそが近代のデンマークのあり方を決め、近代デンマーク精神の父とも呼ぶべき存在だからです。

    デンマークの国民的詩人

     彼はまず牧師として活動しますが、体制化して堕落した既成のキリスト教を批判して、その職を奪われます。その後、詩人として活躍し、始めは北欧神話に題材をとったもの、次にはデンマークの風土、grundtvig自然、農民の生活などを詩にあらわして、それらが賛美歌となり、デンマーク国民に愛され、歌われました。デンマーク人のどの家庭にも彼の歌が数多く含まれた賛美歌集や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歌集がおかれ、今日でもデンマーク人は冠婚葬祭、誕生日や学校の行事、あるいは家族や友人の団らんなどで、必ずグルントヴィの歌を歌うという慣習が根づいています。人々は生まれてから死ぬまで、彼の歌で祝い、悲しみ、喜びをわかちあいます。デンマークほど、歌が人々の生活に息づいている国はありません。

    [Top] 

    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創始者

     詩とならんで、歴史家としても活躍し、「北欧神話」の再評価に貢献しましたが、彼の一番の貢献は、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語義的には「民衆の大学」)を提唱したことです。グルントヴィは既成の学校が無意味な暗記、試験、理念のない実学教育、立身出世をめざす競争を施しているとして、それらを「死の学校」と呼びました。彼は「教育(教え導く)」という言葉を嫌い、教育とは本来「生の自覚」を促すものだと考えました。「生きた言葉」による「対話」で、異なった者同士が互いに啓発しあい、自己の生の使命を自覚していく場所が「学校」であるべきなのです。そうした理由から、彼は「生のための学校(School for Life)」の構想を1838年に発表しました。彼はその序文でこういっています。

    「われわれだけでなく、あらゆる国民は『死の学校』を知っている。というのも、どこの学校でも大なり小なり文字で始まり、本の知識で終わるからである。それが人が『学校』という名で読んできたもののすべてだし、今もそうである。たとえ聖書のように天使の指先や星のペンで書かれたところで、あらゆる文字は死んでいる。あらゆる本の知識も死んでいる。それは読者の生と決して一致することがない。数学や文法だけが心を破壊し死なせるのではない。子ども時代、人が心と体の適正な発達にいたる以前に、学校で頭を使うあらゆることがすでに無益な消耗なのだ」。(『生のための学校』1832年)

     試験も資格も問わず、学びたい者が自由に学ぶこの学校は、当時の農民解放運動に支持されて、デンマーク中に広まりました。無学で、都市のブルジョアからさげすまれた地方農民たちは、この学校で学んで、社会意識に目覚め、卒業生たちは世界最初の農民協同組合をつくり、農民政党を組織して(デンマークの歴史では農民政党は「左翼党」といわれ、左派に属しました)、労働者と協力してついには政権を平和的に奪取しました。デンマークが豊かで、民主主義が浸透し、高度の社会福祉が整い、弱者に優しい国家となったのも、実は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運動があったからこそです。それゆえに、グルントヴィは、近代デンマーク精神の父でもありえるのです。

    [Top]

    その思想は「民衆の自覚(フォルケオプリスニング、Folkeoplysning)」

     グルントヴィの精神は今では当たり前すぎて、普通のデンマーク人はとくに意識していません。それは一般には「フォルケオプリスニング」という名前で知られています。これは義務教育を意味したり、成人教育の意味でもあり、また地域の体育活動、図書館活動や大学の公開講座なども含む多義的な言葉ですが、60年代終わりの学生革命の時代には、グルントヴィがマルクスやゲバラ、毛沢東らと並んでヒーローになったりもしましたので、こうしたオルタナティヴでラディカルな側面も含んでいます。要するに、民衆自身が自覚して何かを勝ち取ることと理解しておけばいいでしょう。
     70年代から80年代にかけては、この民衆運動は原子力発電に反対する風力発電や環境保護の運動となり、とくに風力発電は今ではデンマークの代表的な輸出産業となりました。グルントヴィの精神はデンマークの教育と市民運動の中に今でも生き続けているのです。

비전홍성 2030 기획인터뷰/ 정해진 그룬트비 고려대 사범대 강사 - 홍성신문

비전홍성 2030 기획인터뷰/ 정해진 고려대 사범대 강사 - 홍성신문

비전홍성 2030 기획인터뷰<7·끝>/ 정해진 고려대 사범대 강사
이번영 기자
승인 2019.01.10



아이보다 성인교육이 먼저 필요하다


정해진(40세) 박사는 우리나라 대안학교 원조로 불리는 풀무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여대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한 뒤 고려대 대학원에서 교육철학 박사 학위를 받아 정통 교육학자의 길을 가고있다.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은 ‘그룬트비 교육사상’, 박사학위 논문도 ‘그룬트비 평민사상’으로 덴마크의 세계적인 교육이론가 니콜라이 그룬트비에 대해 손꼽히는 전문가다. 지난해에는 영국 런던에서 20여 개 나라 전문가들이 참가한 그룬트비 컨퍼런스에 한국측 대표로 참석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고려대와 건국대 사범대에서 교육학개론, 교육철학, 교육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성의 젊은 피, 신세대 학자를 만나 우리교육의 진단과 처방을 요청했다.

이론과 실제가 다른 게 문제

-지난해 서울 해누리 초중 혁신학교 지정 문제로 집값이 떨어진다며 반대하는 주민들로부터 교육감이 폭력까지 당했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 교육개혁의 당위성은 모두 공감하는데 그 실천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문제점은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점이다. 교사, 교육정책 수립가, 행정가, 교육학 전공자들이 모두 분리된 채 서로 소통이 안 되고 있다. 교육학 전공자들은 교육현장을 모르고 현장을 안다는 행정가들은 교육적 내용을 모른다. 교육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이론만 파고든다. 자기 외 다른 분야를 너무 모르며 종합적으로 매치가 안 된다. 개혁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교육개혁은 교육 만으로 해결되지 않고 정치, 사회구조와 뗄 수가 없다. 초등학교가 상대적으로 혁신이 되는 건 대학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아이가 행복하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잘 살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 까워질수록 그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학에 가까워 질 수록 개혁은 안 된다. 고등학교쯤 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공고화된 입시제도가 무너지지 않는다.
대학 입시 제도가 바뀌어야하는데 그러려면 사회가 안정돼야 한다. 어떤 직업을 가져도 안정되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한다. 배우고 싶으면 언제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북유럽의 경우 사회가 안정되니 교육을 통해 뭔가 하려는 경쟁이 줄어든다. 우리 사회는 지금 직업을 갖기 힘들고 불안정하다. 대학을 나와 봐야 소용없다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안 나오면 진로가 없으니까 이 불합리한 입시제도를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오직 좋은 대학 가는 것 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 혁신학교는 노는 학교, 좌파교육이라는 생각으로 굳어져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아 해누리시티 주민들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지역의 학생도 대학도 모두 서울로 올라가 지역교육이 몰락하고 있다. 대안 없나?
▲공립학교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교육 때문에 서울과 지방 교육의 차이가 큰데, 지방에서는 마을교육공동체를 활성화해서 지역사회가 서울의 사교육을 대처할만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뾰족한 대안 찾기가 어렵다. 지역균형이 잘 돼 있는 덴마크 같은데 보면 그런 점은 부럽다. 코펜하겐 시청 안에는 교육청이 들어가 있다. 일반 행정책임자가 교육행정까지 책임을 지고 일을 한다. 우리나라는 일반 행정기관과 교육행정기관이 따로 있으며 서로 협력도 잘 안 돼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도 어렵다. 이런 제도적인 문제도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홍성출신으로 외지에서 보니 홍성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홍성만의 문제를 찾기는 어렵고 전국이 같다. 정보와 인프라가 모두 입시만 바라보는 점이 문제다. 우리나라의 근대 공교육은 일제시대부터 국가중심으로 운영하는 교육이었다. 교육방식이 개인을 어떻게 잘 키울것인가, 그들의 삶을 잘 만족시켜줄 것인가가 목표가 아니라 사람을 국가의 하나의 자원으로 보고 국가가 필요한대로 조절해야되는 자원으로 보고 교육해왔다.



풀무 인간교육 의미 크지만 한국주류사회 안 받아들여

-대안학교의 원조로 불리는 풀무학교 교육을 받고 교육학자가 됐는데 교육계에서는 풀무교육을 어떻게 보나?
▲풀무학교는 우리나라 교육의 고전, 혁신학교, 대안학교 모델로 여기며 많은 교사들이 한 번은 가봐야되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유럽에서 발도르프 학교, 교육개혁, 신교육이 등장해 우리나라 김정환 고대 교수, 송순재 감신대 교수가 교육개혁을 위해 들여왔다. 그런데 똑같은 학교가 한국 홍동에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알고보니 그보다 훨신 전 안창호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이승훈이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그 후손 이찬갑이 남한에 내려와 홍동에 풀무학교를 세운 것을 알게됐다. 안창호는 페스탈로치와 그룬트비 영향을 받아 인재를 길러 나라를 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고 이승훈은 그 안창호 연설을 듣고 오산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더불어사는 공동체교육, 노작교육 등 유럽에서 들여온 교육개혁 내용들과 똑같은 내용의 교육이 더 일찍 한국에서 선각자들에 의해 시작됐던 것이다. 국가중심의 제도교육에 매몰되어 개별적이고 자율적인 교육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풀무학교가 정체성을 지키며 독자적인 교육활동을 지금까지 유지해왔다는 점은 우리나라 교육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95년경 대안학교들이 생겨 이런 교육을 이어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흐름에 대해 아직 한국의 주류사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국 교육의 주류사회에서 풀무교육을 왜 안 받아들이나?
▲우리나라 교육자들은 거대담론에 매몰돼 있다. 서구 사상가들만 찾고 큰 그림만 그린다. 한국의 시골 작은 학교 같은 건 생각을 안 한다. 내가 풀무학교의 가치를 이야기하면 네가 나온 학교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치부하고 풀무학교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실체를 모른다.

-교육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풀무교육 영향을 받았나?
풀무학교에서 홍순명 선생님이 김교신, 페스탈로치, 그룬트비 이야기를 많이 하셔서 그분들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다. 내가 경험한 교육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지금 대학에서 교사가 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처음 생각한 일을 하는 셈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유명 대학 학생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이 그동안 받은 교육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학 중요치 않은 시대 왔다

-2030년 우리나라 교육은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하나?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 인프라와 기술은 변하겠지만 10년 정도로 내용은 변하지 않을것 같다. 책 대신 컴퓨터를 사용하고 칠판 대신 동영상을 사용하는 등 기술과 인프라는 발전하겠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컨텐츠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국가가 어느정도 자율화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이제서 검정으로 바꾼다지 않나. 선진국에서 오래전부터다 하는 제도를. 교사 문제가 중요하다. 지금 사범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나가 중요한데 변화가 없다. 그렇게 배운 사람들이 나와서 전과 같은 교육을 하게 돼 변화의 기대가 어려운 것이다. 이제부터 배출되는 교사들은 자기가 배운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같은 지식이 더 이상 필요없는 세상이 오는데 그걸 어떤 방식으로 따라가는가가 관건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나?
▲각자 교사들에 부여되는 교육의 내용, 방식, 평가에 자율성을 부여해 신뢰받는 교육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은 현재의 입시제도에서 벗어나야 가능할 것이다.

-홍성교육을 특화시키는 방안이 없을까? 풀무학교 교육을 홍성교육으로 특화시키면 안 될까?
▲그건 안 될 것이다. 중요한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이 교육을 뭐라고 생각하는가다. 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가장 우선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교육의 목적을 대학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평민교육이 중요하다. 덴마크 그룬트비는 아이들 교육을 한 게 아니라 평민대학을 만들어 성인교육부터 했다. 그룬트비한데 배워 생각이 바뀐 성인들이 교육, 정치, 경제, 사회를 바꾸며 협동조합도 하고 나라를 바꿨다. 직업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교육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해누리시티의 혁신학교 반대 폭력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끝으로 가장 바라는 점 하나만 강조한다면?
▲사람들이 진실을, 미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교육은 왜 하나, 왜 필요한가를 제대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좋은 대학이 의미가 없어지는데, 좋은 대학에가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는데, 아이들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등 새로운 시대가 오고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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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 정해진 학위논문

RISS 검색 - 학위논문 상세보기



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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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iss.kr/link?id=T13835365
저자


정해진
발행사항


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5
학위논문사항


學位論文(博士)-- 高麗大學校 大學院 : 敎育學科 2015. 8
발행연도


2015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그룬트비 ; 평민교육 ; 삶을 위한 교육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ii, 108 p.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姜善甫
참고문헌: p. 96-108
소장기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세종학술정보원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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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collection.korea.ac.kr/public_resource/pdf/000000060729_20220524002301.pdf

국문 초록 (Abstract)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 연구는 18세기~19세기에 형성된 국가차원의 근대적, 계몽주의적 공교육을 비판하고, 평민의 삶 자체를 교육의 기초로 삼을 것을 주장한 덴마크 사상가 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을 소개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중심이 되는 “평민” 개념을 다각도로 조망하여 그 의미를 도출하고, “평민적 가치”와 교육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평민교육사상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도출하였다.
    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개념인 “평민”, 그리고 “평민적 가치”와 관련된 개념들은 그룬트비가 추구하는 “삶을 위한 교육”의 중심을 이룬다. 평민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인간정신의 대표적 표현인 모국어와 민족적 삶의 양식을 유지하며, 나아가 그것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평민교육의 목적은 평민적 삶을 교육의 바탕으로 삼아, 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있는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삶과 더불어 타인의 삶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로운 가운데 공공선을 추구하고. 더 이상적인 공동체적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룬트비는 더 나은 사회는 삶을 통해 계몽된 사회구성원 개개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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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Ⅰ. 서론 1
    1. 연구의 목적과 필요성 1
    2. 연구의 내용과 방법 7

    Ⅱ. 평민개념의 이해 12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평민의 계층적 의미 13
    2. 이념적 맥락에서 본 평민의 존재적 의미 17

    Ⅲ. 평민교육사상의 등장배경 22
    1. 계몽주의 22
    2. 신인문주의 27
    3. 근대화와 평민교육의 요청 34
    1) 정치적 혁명과 평민 34
    2) 경제적 혁명과 평민 41

    Ⅳ. 평민교육사상 48
    1. 계몽주의적?근대적 교육에 대한 비판 48
    2. 평민교육의 이념 52
    1) 평민교육의 목적 52
    2) 평민교육의 인간상 57
    (1) 정신적 계몽을 통한 도덕적 자유인 57
    (2) 일상의 노동을 통한 독립적 생활인 60
    (3) 공동체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더불어 사는 인간 63
    3. 평민교육의 원리 66
    1) 평민적 가치와 문화에 기초한 교육 66
    2) 살아있는 말을 통한 교육 70
    3) 삶의 계몽을 위한 실제적 교육 77
    4) 살아있는 상호작용을 통한 교육 81
    5) 평민계몽을 위한 공동체 교육 84

    Ⅴ. 요약과 결론 90
    1. 요약 90
    2. 결론 92
    참고문헌 96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논문관계도

    1 유재천, "민중",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4

    2 박현채, "민족경제론", 서울: 한길사, 1978

    3 허경진, "조선평민열전", 서울: 알마, 2014

    4 이동수, "시민은 누구인가", 인간사랑, 고양: 인간사랑, 2013

    5 김성오, "“그룬트비 읽기”", 「처음처럼」. 36. 66-83, 2003

    6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서울: 궁리, 2002

    7 신창호, "톨스토이 서민교육론", 서울: 도서출판 써네스트, 2011

    8 김정훈, 유팔무, "시민사회와 시민운동2", 서울: 한울, 2002

    9 정창렬, "“백성ㆍ평민ㆍ민중”", 「역사비평」. 74. 277-27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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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 정해진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 네이버 블로그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이웃추가 최근 몇 년 사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학교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관심은 이 제 단순한 생각과 관찰을 넘어, 현장에서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시도에 영향을 준 모델 중 하나로 덴마크의 에프터스콜레(efterskole)와 평민대학(Folkehøjskole)을 들 수 있다. 이 학교들은 한국 사회가 그동안 유지해온 기존의 교육제도, 즉 6-3-3-4제 라는 틀을 과감히 깨고 학생 개개인의 삶과 시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덴마크의 교육제도는 얼마 전까지도 한국에 대중적으로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OECD 가입국 중 덴마크의 행복지수 가 가장 높다는 발표를 통해 사람들은 덴마크 사회에 대중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중요한 행복 요인의 하나로 “교육”을 꼽았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눈에 띄는 교육제도가 에프터스콜레(efterskole) 와 평민대학(Folkehøjskole)이라고 할 수 있다. 12 2 함께여는교육연구소 22. 5. 24. 오전 12:47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eri0120&logNo=221044370440 2/9 덴마크의 많은 학생들은 17살 무렵, 스스로 선택한 배움에 온전히 집중하고, 자신을 탐색하기 위해 에프터스콜레(efterskole)라는 학교에 간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에 해당하는 기초교육을 마치고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기 전, 자신을 돌아보고 진로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받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 물론 이 제도는 모든 학생들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진 다양한 선 택지 중 하나다. 성인이 되어서도 덴마크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평민대학(Folkehøjskole)을 비롯해 다양하게 열려있는 교육기회들을 선택하여 쉼과 성장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덴마크12사람들은2이처럼 다양하고 유동적인 교육제도를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형성해 나 함께여는교육연구소 22. 5. 24. 오전 12:47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eri0120&logNo=221044370440 3/9 간다. 그렇다면 덴마크는 어떻게 이러한 방식의 유연하고 자유로운 교육제도를 만들어냈을까? 그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덴마크의 근대사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 바탕에는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덴마크의 근대 사회제도와 교육제도는 그룬트비 (Nikolay Frederic Sevrin Grundtvig, 1783-1872)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룬트비의 영향 을 많이 받았다. 젊은 시절의 그룬트비. 1783년 태어난 그룬트비는 신학자, 목사, 시인, 역사가,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 및 철학자, 정치가, 그리고 교육사상가로 활동하며, 덴마크가 새로운 근대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룬트비가 늘 핵심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덴마크 국민의 대다수 를 이루는 “평민(folk-덴마크어)의 삶과 교육”에 관한 문제였다. 그룬트비의 교육에 관한 생각 또한 여기서 출발하며, 이것이 오늘날 덴마크 사회가 비교적 이상적인 시민사회로 성장하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덴마크는 1814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의무교육을 법제화한 나라로 국가가 국민의 교육을 책임지고 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가난한 농부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으로 돌 아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또한 열악한 조건에서 한꺼번에 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 12 2 함께여는교육연구소 22. 5. 24. 오전 12:47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eri0120&logNo=221044370440 4/9 었던 초기의 의무교육은 학생들에게 획일적인 지식의 암기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룬 트비는 이러한 당시의 학교를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죽음의 학교”라고 묘사하며 크게 비 판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의미로 “삶을 위한 학교”라는 의미를 담은 평민대학을 구상하여, 그 러한 학교를 세울 것을 왕에게 직접 건의한다. 그룬트비는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평민대학의 교육을 통해 덴마크 사회를 바꾸어낼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덴마크 사회를 변화시키고 진정한 민주 주의를 정착시키는 첫걸음이라 생각했다. 덴마크는 왕이 자신의 권력을 국민에게 평화롭게 이양하는 방식으로 정치개혁이 이루어진 나라다. 이후 부르주아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루었지만 그룬트비는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룬트비의 생각은 거리에서, 강 연장에서 여러 사람들이게 전달되었고, 그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들과 평민대학에서 온전한 시민으 로 성장한 사람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주체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입헌군주제가 실시되면서 1849년 제정된 덴마크의 헌법 조항에는 “폴케스콜레(Folkeskole-초중등 단계의 공립학교)에서 요구되는 정도의 교육을 자기 아이들에게 스스로 제공하고자 하는 부모들과 안내자들은 아이들을 폴케스콜레에 의무적으로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조항은 현 재까지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즉, 덴마크의 교육제도는 “의무취학(compulsory schooling)이 아닌 의무교육(compulsory education)”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법과 전통에 따라 덴마크의 부모들 은 지역공립학교 또는 다양한 형태의 자유학교들이나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사립학교들 중 하 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만일 부모들이 용기와 의지가 있다면, 자신들이 동의하는 원칙을 기 반으로 한 새로운 자유학교(Friskole)를 설립할 수도 있다. 이러한 덴마크의 교육법은 덴마크 사회에 자연스럽게 국가가 운영하는 공교육제도와 나란히 병행하는 일종의 대안교육체제인 자유학교 제도 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가치들이 덴마크 사회 전반에 자리 잡기까지는 그룬트비가 설계했던 평민대학이 중요한 역 할을 했다. 그룬트비가 초기에 의도했던 큰 규모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 는 작은 학교들이 덴마크 각 지역에 생겨나면서, 평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적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그룬트비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성하다고 보았다. 실제 로 앞에서 언급한 자녀들의 교육을 스스로 결정하고, 보다 자유로운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새로운 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학부모들의 대부분은 그룬트비가 설계했던 평민대학에서 온전한 사회의 구 성원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그룬트비의 교육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까? 그 바탕의 생각들은 다양한 방 식으로 정리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네 가지의 중심개념을 들어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삶”이다. 그룬트비는 “삶을 위한 교육” 또는 “삶의 계몽”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었다. 그는 아무리 12 권위2있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함께여는교육연구소 22. 5. 24. 오전 12:47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eri0120&logNo=221044370440 5/9 교육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학교에서의 배움은 개인이 삶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것을 일깨워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교육의 내용 역시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 그룬트비가 제시한 것이 삶의 이야기와 생 각이 담긴 평민의 역사와 이야기(신화), 그리고 대화 등이다. 둘째, “자유”다. 그룬트비가 주장하는 자유의 개념은 오늘날의 덴마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자유란,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 동체에서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담보할 때 주어지는 자유이다. 이를 통해 그룬트비는 자유 로운 개인과 공동체 속의 개인이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그룬트비는 평민 대학에서의 공동체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이러한 자유, 즉 타인을 전제로 한 자유를 누리는 법을 그 곳에서의 삶을 통해 충분히 연습할 것을 제안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덴마크 사회의 행복지수는 자신 의 자유와 더불어 타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문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셋째, “공동체”다. 그룬트비가 이야기하는 공동체는 근대적 제도 등에 의해 의미 없이 구성된 인위 적 공동체가 아니다. 그룬트비는 민족의 역사와 말(모국어)을 매우 중요한 교육의 도구로 보고 있는 데, 그 이유는 이러한 요소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중요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사 실상 개인은 공동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데, 개인이 속한 가장 근본적인 공동체는 가족과 그 것을 넘어서는 민족공동체다. 그러한 공동체에서 오랜 시간 공유되어온 삶의 역사와 이야기, 모국어 는 한 개인의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자아를 더 잘 드러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온전히 성장한 개인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 도록 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룬트비는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매우 중요시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평민대학에 해당하는 에프터스콜레도 평민대학과 똑같이 모든 학생들이 생활관에서 1년간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이 구현된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은 학생들이 성장하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와 개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인식하고, 더불어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공의 이익을 자연스럽게 추구할 수 있는 성인 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개념 또한 우리가 바라보는 행복한 복지국가 덴마크가 가능한 중요한 이 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넷째, “살아있는 상호작용”이다. 그룬트비는 교육은 기본적으로 상대방과 나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룬트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생과 학생의 관계, 그리고 수업 및 학교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룬트비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강의식 수업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사 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닌, 함께 배우는 입장에 설 것을 주장했다. 수업 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과 공동 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상호작용은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룬트비가 제안한 평민 대학은 단순히 수업을 통한 학습만이 이루어지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학교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학교를 운영해 나가는 열린 삶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의 상호작용은 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있다. 12 2 함께여는교육연구소 22. 5. 24. 오전 12:47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교육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eri0120&logNo=221044370440 6/9 그룬트비는 어떤 면에서는 실천가라기보다 이론가였다. 실제로 그가 학교를 세우거나 교육활동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철학과 생각은 평민대학에서의 삶을 위한 교육을 통해 덴마 크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사회를 구성하는 건강한 평민을 만들어냈다. 실천은 이러한 덴마크의 “작은 그룬트비”들, 즉 수많은 평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덴마크 교육과 그룬트비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다 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제안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평민교육”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청소년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의 변화를 위한 시도는 현장에서 끊임없이 이어 지고 있다. 문제는 교육적 변화와 시도를 기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어른들이 교육의 변화를 온전 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를 구성하 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회와 교육에 대한 생각과 개념을 일깨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 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은 함께여는교육연구소에서 진행했던 "삶을 배우는 교육,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을 강의해주신 정해진선생님께서 쓰신 원고입니다

위대한평민을기르는덴마크자유교육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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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평민을기르는덴마크자유교육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 개정판 ]송순재, 고병헌, 카를 K 에기디우스 편저 | 민들레 | 2011년 03월 10일

정가 14,000원

출간일 2011년 03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55쪽
책소개
무한 경쟁의 시대,
자유 교육은 과연 현실적인 방안인가

최근 북유럽 여러 나라 특히 스웨덴, 핀란드 등지의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성이나 인간존중 혹은 한 나라의 풍토에 고유하게 뿌리박아 성장한 자유교육이나 민주적 시민교육이라는 점에서, 또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독창적이며 근세사에서 북유럽 인접 국가들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덴마크 교육은 남다르다. 저자는 이러한 덴마크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자유교육과 시민대학의 사상적 원천이 되었던 그룬트비와 자유학교와 시민대학의 실제적 구현자인 콜을 만나 덴마크의 교육 내용을 책으로 담아냈다.

저자는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교육의 진정한 국면이 국제학생학업성취도 평가인 PISA에 국한되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어떤 시험이나 제도에 갇힌 좁고 편협한 과정에 목표를 내줄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류의 미래가 있을 자유교육 즉 인성교육과 경쟁 없는 관계에서 창출되는 행복에 대해 교육의 미래를 내걸고자 했다. 그래서 덴마크의 교육제도 전반과 자유교육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였고 또 다양한 현장을 둘러본 탐방기와 보고서들로 책을 구성했다. 『덴마크 자유교육』의 내용이 교육의 절대적인 모범 답안이라고 할 수 없지만 아직 이론 밖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다른 형식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덴마크 자유교육을 만나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드리는 인사말

1부_덴마크 자유교육의 역사와 현황

덴마크의 자유교육
1. 간추려 본 자유학교의 역사와 유형
2. 자유교육운동에서 그룬트비와 콜의 역할 23
1) 니콜라이 그룬트비 2) 크리스튼 콜 3) 그룬트비와 콜의 관계
4) 덴마크 지유교육운동의 사상적 배경
3. 자유학교의 전개 양상과 주요 특징
1) 자유학교의 설립과 이후 자유교육의 전개 양상 2) 초창기 자유학교의 특징_
역사적, 교육학적 견지에서 3) 자유학교의 전개 양상, 교육 단계와 유형별 특징

자유학교의 운영 원리와 실제
1. 간추려 본 덴마크의 학부모운동
1) 자유학교의 원리
2. 부모의 권리
3. 소수자의 권리
4. 자유학교에서의 자유
1) 이념적 자유 2) 교육적 자유 3) 재정적 자유
4) 교사 임용의 자유 5) 학생 선발의 자유
5. 그룬트비와 콜의 이념에 따른 자유학교들
1) 학부모가 운영한다 2) 노래와 이야기를 강조한다 3) 종교적 전통이 살아 있다
6. 다른 종류의 사립학교
7. 네 학교 이야기
1) 구덴오댈렌스 자유학교 2) 오덴세 자유학교 3) 쇠어비움 자유학교
4) 스테운스 자유학교

덴마크 공교육과 자유교육의 법제화 과정과 쟁점
1. 1950년대 이전
2. 1950~2000년 사이 덴마크 사회의 발전 양상
3. 공립기초학교, 폴케스콜레 제도의 발전사 및 현황
1) 1937년 학교법 2) 1958년 학교법 3) 블루 가이드 4) 1975년 학교법
5) 새로운 문제와 논쟁 6) 1993년 학교법 7) 2002년 11월 협약
4. 자유학교가 덴마크 교육제도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
1) 운동의 전개 양상 2) 일반 학교 유형에서 자유학교가 갖는 의미와 위치
5. 덴마크의 김나지움 ? 공립중등교육 II 단계

덴마크의 공식 교육과 비공식 교육
1. 초등교육과 중등교육Ⅰ단계
1) 공립기초학교, 폴케스콜레 2) 사립학교와 자유학교 3) 자유중등학교
2. 중등교육 II 단계_청소년교육
1) 중등교육 II 단계의 네 가지 교육과정 2) 중등교육 II 단계의 내용과 조직
3. 고등교육_대학
1) 고등교육기관의 유형 2) 덴마크 대학입학제도
3) 성인들의 여가를 위한 교육과 개방교육제도
4. 공식 교육과 비공식 교육의 경계

2부_덴마크 교육 현장을 둘러보다

시민사회에 뿌리내린 자유교육
1. 덴마크 교육제도와 그 배경
1) 민중운동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교육 2) 헌법이 보장하는 부모의 권리
3) 삶을 위한 학교
2. 자유교육의 다양성을 키우는 다원적 네트워크
1) 다양한 자유학교들 2) 자유학교를 연결하는 네트워크
3) 부모 참여와 자유로운 학교 만들기
3. 자유를 살리는 제도
1) 보조금 2) 자유학교의 교육평가 및 경영에 대한 감사 3) 이사회와 교장
4) 교육부와 자유학교의 관계 5) 유연한 조직운동체
4. 앞으로의 과제
1)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될까 2) 최근의 사회변화
5. 끝내면서 : 소수파라는 것의 의미

삶을 위한 교육
1. 북(北) 륀델세 자유학교
2. 퓐 학습자료지원센터
3. 베스터댈 자유중등학교
4. 자유교원대학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덴마크 교육 기행
1. 덴마크 공립학교의 현황
1) 칼 닐슨 스콜렌 2) 베스퓐스 김나지움
2. 자유학교의 이모저모
1) 륀델세 자유학교 2) 그람스비어 프리 오 에프터스콜레 3) 올러룹 음악학교
4) 뤼스링에 시민대학 5) 자유교원대학 6) 체육시민대학

시민대학과 교사공동체
1. 영국의 대안대학
2. 덴마크의 시민대학
3. 대안을 꿈꾸는 세계 교사들의 연대, 교사공동체
1) 여행시민대학과 대안사범대학 2) 교사공동체에서 본 교사라는 존재

학교 같지 않은 학교, 니 릴레스콜레
1. 학교 같지 않은 학교
2. 학교 풍경 252
3.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하나
4. 이 학교가 잘되는 이유

부록
1. 덴마크 자유학교의 기본 교육철학 아홉 가지
2. 덴마크 자유학교 관련 법
3. 핀란드, 덴마크 교육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5. 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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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 : 송순재
작가 파일
독일 튀빙겐 대학교(Eberhard Karls Universitat Tubingen) 대학원 사회과학 박사(교육철학 전공).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저, 역서로 『상상력으로 교육에 말걸기』(저서), 『사유하는 교사』(역서), 「근대 기독교 민족운동에서 기독교와 민족 간의 관계 해명: 함석헌과 그룬트비(N.F.S. Grundtvig)의 관점에 비추어」(논문) 외 다수가 있다.
저자 : 고병헌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교육철학, 평화교육, 대안교육, 시민교육, 평생학습 영역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특히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저서와 역서로는 『평화교육사상』, 『간디, 나의 교육철학』(역서), 『희망의 인문학』(공역), 『교사, 대안의 길을 묻다』(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카를 크리스티안 에기디우스 Karl Kristian Aegidius
1935년 덴마크의 교직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54년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 독일, 스페인, 핀란드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활동하느라 학업을 때때로 중단하기도 함. 3년간 작은 농가에서 소작인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스페인에서는 영어교사로 일하기도 함. 군복무를 마친 후 1961년부터 자유학교 교사로 일했다. 몇몇 가정과 함께 자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으며(1962-69), 오덴세 대학에서 역사와 스칸디나비어와 문학을 공부했다(1969-76). 륀델세 자유학교(Nr. Lyndelse Friskole, 1969-71)와 오덴세 김나지움(Odense Katedralskole, 1971-75)에서 역사 교사로 재직. 1976년부터 자유교원대학(Den Frie Laererskole)에서 역사와 사회과학을 가르치다 1997년 은퇴 후 현재까지 ‘덴마크 자유학교협회 국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접어보기

책 속으로
덴마크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공립학교나 국가 보조로 운영되는 다양한 형태의 사립학교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보낼 수 있다. 용기와 끈기가 있다면 새로운 학교를 설립할 수도 있다. 덴마크에는 이런 형태의 다양한 사립학교들이 있다. 학교의 색깔은 종교적, 정치적, 교육학적 스펙트럼에 따라 모두 다르다. 진보적 성향의 학교도 있고, 보수적 성향의 엘리트 양성 학교도 있다.
……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덴마크 민중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자기 책임으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육과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문제도 그들 스스로 해결해 보려 했다. 덴마크 사람들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관리들이 일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정부나 관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곧바로 주도권을 행사했다. 비록 때마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따르고, 해결 방법도 잘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학교도 만들기 시작했다.
---「자유학교의 운영 원리와 실제」중에서

출판사 리뷰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학교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삶이 필요하다!
모두가 자기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교육, 덴마크 자유교육에서 배운다!

“어른들은 빚쟁이처럼 아이들에게 과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과제를 해내야 할 빚진 자가 아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집에서 쉴 권리가 있다. 통제가 필요하고, 숙제가 필요하고, 시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른들의 발상이지 아이들에겐 그렇지 않다.”

1부는 덴마크의 교육제도 전반과 자유교육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이론으로, 덴마크 자유교육에 관한 편저자의 글과 덴마크자유학교협회에서 발간한 소책자 및 칼 크리스티안 에기디우스(Karl Kristian Ægidius) 교수의 글 두 편을 실었다. 2부는 다양한 현장을 둘러 본 탐방기와 보고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내외 여러 저자들의 글 다섯 편을 실었다.

주제에 좀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 생동감이 있는 2부 탐방기를 먼저 읽고 1부를 읽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이 책과 함께 그룬트비의 글 몇 편을 묶어 해설을 단 우리말 단행본이 곧 출간될 예정이며, 콜이 남긴 단 하나의 저작 『Thoughts on the Primary School』과 그의 사상과 실천을 해석한 몇 편의 글을 함께 엮은 책이 우리말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대안교육연대 주최로 지난 11월 12~15일에 서울과 부산에서 열린 '덴마크 자유교육 국제심포지엄(공교육 안팎을 어우르는 배움의 권리 보장. 덴마크 자유의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을 계기로 시리즈로 펴내게 되었다.

덴마크 자유학교에서의 "자유"란?

이념적 자유 : 부모는 아이의 교육에 전적인 책임과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아이들에게 학교를 다닐 것을 요구할 수 없다. 학부모는 아이들을 집에서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자신들만의 학교를 세울 수 있다. 교육과정은 부모들의 생각과 이념에 따라 이루어진다.

교육적 자유 : 수업은 프로젝트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한 학기 내내 똑같은 시간표도 없다. 국가는 수업이 법적 규정에 따라 잘 이루어지는지만 감독한다. 이 일은 감독관이 맡는데, 이조차 학부모가 선택하고 국가는 인준하는 정도이다.

재정적 자유 : 부모가 아이를 자유학교에 보내는데 재정 문제가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학부모의 재정 부담 수준을 아주 낮게 책정한다. 특별한 경우, 학비를 내지 않고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 그럴 경우 학비는 국가가 지급하는 특수 장학금으로 충당한다.

교사 임용의 자유 : 국가권력은 교사교육에 관해서도 간섭할 수 없다. 자유학교 교사들은 교육학 수업을 전혀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아울러 자유학교에 임용된 교사가 면직될 경우 공립학교 교사와 같이 재정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학생 선발의 자유 : 자유학교는 학생 선발과 퇴학을 자치적으로 결정한다. 대부분의 자유학교는 학생들이 학교에 지원하는 순서에 따라 선발한다. 학부모들이 아이를 보내는 학교의 이념에 동의하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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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교육연구소 - 정해진씨 논문(2)

생태교육연구소 - 정해진씨 논문(2):

 정해진씨 논문(2)
백수
조회 수 : 14412005.01.03 (11:25:25)
2. 상호작용에 의한 교육

그룬트비는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교육의 여러 가지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버그(K.E. Bugge)는 Grundtvig's Educational Ideas (그룬트비의 교육사상) K.E. Bugge, "Grundtvig's Educational Ideas," N.F.S. Grundtvig : Tradition and Renewal, Christian Thodberg․Anders Pontoppidan Thyssen ed., (Copenhagen: Det Danske Selskab, 1983).
에서 교육을 주제로 한 그룬트비의 글을 검토해본 결과,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이 가르침과 교육에 관한 그의 사상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룬트비는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관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그룬트비가 이야기하는 상호작용은 좁게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보다 넓은 범위에서는 역사와 신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과거와 현재의 삶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교육의 내용과 보다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좁은 의미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그룬트비가 생각하는 교육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으로, 이를 통해 그룬트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생과 학생의 관계, 그리고 수업 및 학교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Within Living Memory(1837)(살아있는 기억 속에서)”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그룬트비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강의식 수업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사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닌, 함께 배우는 입장에 설 것을 주장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가 로마-이탈리아의 문화 당시 덴마크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로마-이탈리아 학문, 그리고 라틴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반면, 서민들의 삶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덴마크의 언어와 문화 등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당시의 학문과 교육은 주로 책이나 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라틴어 문법을 암기하는 등의 삶과 동떨어진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이러한 로마-이탈리아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자유로운 상호작용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다.
와 전통적인 기독교관 당시의 전통적 기독교관에 따르면, 현재의 삶은 이후 내세의 삶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현재의 세속적인 삶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이러한 기독교관에 반대했으며, 교육은 “인간 삶의 명료화”, 즉 삶의 의미와 목표를 명확히 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기독교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현재의 삶에 중심을 둔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 그리고 시험을 치러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했다. 특히 학생들이 시험을 치러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수업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보다 생기 있고,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험을 치르지 않는 것은 이후 그룬트비의 사상을 기초로 하는 평민대학의 매우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학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수업의 이상적인 모습은 삶의 많은 것을 경험한 교사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들 사이의 토론과 대화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는 교사로부터 학생에게 전해지는 일방적인 수업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수업이다. 학생들이 평민대학에 가져온 다양한 삶의 경험들은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서로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가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업 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과 공동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상호작용은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룬트비가 제안한 학교는 단순히 수업을 통한 학습만이 이루어지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학교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학교를 운영해 나가는 열린 삶의 공간이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기숙학교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의 상호작용은 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상호작용은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게 됨으로써 그 의미와 효과가 더욱 증대된다. 그룬트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발달 단계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질 것을 주장하였으며, 각 단계의 학생들이 가지는 특징에 주목했다. 교육에 있어서 그가 특히 중요시 생각한 단계는 감정(emotion)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청년기(youth)로, 교육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청년들은 보다 활발하고 생기 있는 상호작용을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이 시기의 청년들은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의 구조 속에서 삶의 경험과 그에 대한 성찰을 특징으로 하는 보다 성숙한 세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며 상호작용 하는 것 역시 중요한 내용으로, 특히 공무원과 같은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평민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그룬트비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룬트비는 국가의 일을 맡아보는 높은 계급의 공무원들이 평민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국가의 일을 올바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계층 간의 소통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룬트비는 ‘삶을 배우는 학교(School for Life)’라는 글에서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덴마크의 공직자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덴마크어로 말하고 생각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 조국과 그 조국의 전반적인 구성 체계를 사랑하고 잘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평민대학에서 비록 라틴어는 모르고 기껏해야 덴마크어를 알고 있을 뿐이지만, 경험을 통해서 라틴주의자들이 쓴 그 어떤 책에 들어 있는 것보다도 이 나라의 민족적․사회적 삶, 그리고 여러 군소 지역들의 사정을 훨씬 잘 알고 있는 그들의 동시대인들과 함께 살면서 서로 접촉하고 영향력을 주고받는 활동이 없다면, 이 일은 할 수 없다.” N.F.S. Grundtvig, “삶을 배우는 학교,” 김성오 역, 『처음처럼』, 통권 제36호(2003 3-4), p. 105.


그룬트비는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각성)을 얻게 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했다.

3. 살아있는 말에 의한 교육

그룬트비의 ‘살아있는 말(the living word)’이라는 표현은 어떤 주제든 교사와 학생 간에 이루어지는 동등한 입장에서의 대화라는 뜻과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들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 70.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말은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하며, 글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용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삶을 위한 교육에서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그룬트비는 Norse Mythology(북구 신화)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틴어가 숨기려 하지만 우리가 입을 열 때마다 들춰내는 비밀, 즉 언어가 펜이 아니라 입의 것이라는 점과 생각과 감정, 신념과 세계관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통해서 간단하고 정확하게, 명확하고 활기차게, 뚜렷하고 알차게 전달되고 퍼져나가며 표출된다고 하는 비밀을 운 좋게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는 굳이 내가 언질을 주지 않아도 얼마나 경이로운 광채가 우리들 인간의 삶에 쏟아지고 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독자가 아직도 무덤 속에 있다면 내 책,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책을 가지고도 그를 일깨워 생명의 진가를 알게 할 수는 없다. 내가 감히 바라는 것 전부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말을 하고 들음으로써 그 말의 혜택을 누렸으면 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혀와 귀를 갖고 태어나지, 옆구리에는 책을 끼고 손에는 펜을 쥐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미처 말을 알기 전에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N.F.S.  Grundtvig, “Introduction to Norse Mythology 1832,” 김성오 역, N.F.S. Grundtvig: Selected Writings, Johannes Knudsen․Enok Mortensen․Ernest D. Nielsen trans., Johannes Knudsen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p. 28-29.


그룬트비는 모국어를 ‘생명의 언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모국어가 다른 어떤 형태의 언어나 개념적 장치보다 삶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 즉 모국어에는 그들의 문화와 삶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각 민족의 고유한 생각과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다. 평민의 언어는 삶에서 성장한 것이고, 그것은 역사와 그 나라의 자연과 평민 속에 동화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국어는 삶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룬트비가 주장하는 살아있는 말은 나라와 그 나라의 역사 그리고 인문․자연 환경을 오늘의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되살리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김성오, “그룬트비 읽기,” 『처음처럼』, 통권 제36호(2003 3-4), p. 72.

그룬트비는 이러한 살아있는 말에 가장 가까운 것이 ‘시’와 ‘신화’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즐겁고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시인이 될 것을 주장한다.
언어에 대한 그룬트비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가 제안한 평민대학의 교육에 잘 반영되었다. 특히 그 수업방식에서 잘 나타나는데, 모국어로 이루어진 토론식 수업과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룬트비가 제안한 평민대학에서 사람들은 모국어를 배움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가슴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표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Kaj Thaning, 앞의 책, p. 153.
  

4. folkelighed(폴켈리드)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

시대적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발달한 시기는 그동안 무시되었던 평민들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참여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룬트비는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평민들을 교육을 통해 일깨우고, 그들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민교육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그러나 고귀하고 자유로우며 대중적인 덴마크 평민대학이 공직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공직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도 않고 될 수도 없지만 스스로를 돌보고 또 공직자들을 지원해주어야 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그 필요성이 덜할 수 있겠는가? 한 국가의 근간인, 크고 작은 군소 자치인들 및 자작농들, 모든 종류의 기능인들, 선원들과 장사들이 쟁기 뒤에서, 일터에서 돛대 옆, 채소 가게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말고 다른 교육과 가르침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전제군주들이나 야만인들이 믿는 것이라면 모를까, 북구의 여러 나라들과 국왕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사고방식은 아니었으며, 결코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핏줄’이며, 그래서 오두막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저택에 사는 부자들이나 똑같은 수학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우리나라 말고 더 잘 들어맞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외부 세력들도 무력으로 침공해서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았던 북구의 국가들에서만 볼 수 있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같은 자연적인 평등을 우리는 충분히 길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능한 그 어떤 방법보다도 우리의 조국애에는 깊이를, 국민 교육에는 더 큰 진실성을 부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N.F.S. Grundtvig, “삶을 배우는 학교,” 김성오 역, 『처음처럼』, 통권 제36호(2003 3-4), p. 107.


이처럼 그룬트비는 지위, 생각, 신분, 연령 등의 차이에 관계없이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동등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성오, 앞의 글, p. 71.
이러한 그룬트비의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folkelighed(폴켈리드)라는 개념이다.
그룬트비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 중 하나인 folkelighed(폴켈리드)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 특히 평민교육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말로 그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까다로운데, 덴마크어로 국민, 국가, 민주적 특질 또는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룬트비는 folkelighed(폴켈리드)와 대등한 개념으로 ‘국민의 자유’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개인이 특정한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처럼 어떤 특정한 문화집단이나 학교와 같은 공동체를 선택해서, 책임과 헌신 뿐 아니라 희망과 기대를 품고 그 공동체의 필수 불가결한 일원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 71.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둔 평민교육은 자신과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매니히(Peter Manniche) 20세기에 그룬트비의 사상을 따른 사람들 중 하나로 1921년 Elsinore 지역에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를 세운 덴마크 사람이다.
는 folkelighed(폴켈리드)를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매니히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folkelighed(폴켈리드)라는 개념에서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나라의 정체성(identity), 즉 그 나라의 문학과 시 그리고 삶의 방식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그룬트비는 국가가 정체성에 대한 강한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단계에서 멈추게 되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주변의 약소국을 침략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룬트비가 이야기하는 folkelighed(폴켈리드)는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버그 교수의 설명처럼,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들이 다른 강력한 나라들에 의해 문화적으로 손상을 입는 것을 막으려는 하나의 방법을 장려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Max Lawson, op. cit., pp. 14-15.
즉,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문화의 정체성에 깊이 뿌리박고 공동체 의식을 자각하면 할수록 좀 더 쉽게 편견 없이 다른 공동체와 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함께 협력하고 배우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p. 71-72.


5.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

그룬트비는 교육은 반드시 역사적이며 시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교육은 시와 신화, 그리고 민족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도움을 받아 젊은이들을 안내해야 하며, 이를 통해 젊은이들은 삶의 근본적인 조건들을 드러내는 과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라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전의 생기 있는 국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전성기를 이루었던 과거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학생들이 덴마크의 역사와 북구 신화 그리고 영웅담 등을 통해 조상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정신적인 교류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룬트비는 이러한 교류를 통해 사람들은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희망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것으로 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제시했다.
역사교육에 대한 그룬트비의 생각은 그의 역사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역사는 단순한 사건들의 축적이 아니라 깊은 수준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간 인식의 점진적인 명료화, 또는 인간의 발달에 대한 설명이었다. 역사는 현재에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세계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인간의 생활과 인간의 사상들과 인간 조직의 모든 형태들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한 민족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경험들은 개인의 삶에 유용한 예를 제시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는 개인의 삶의 과정에 대한 깨달음, 즉 삶의 계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역사는 인류의 기억이며, 이 같은 인류의 살아있는 기록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Kaj Thaning, 앞의 책, p. 141.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인간은 추상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이해될 수 없으며, 단지 총화를 이루는 역사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는 바로 그가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던 사람들의 세속적인 일상, 즉 삶에 대한 강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과거 그곳에 살았던 조상들의 실제 삶의 경험이 역사 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의 공통적인 모습 뿐 아니라, 각각의 국가와 민족이 가지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러한 민족의 역사를 통해 덴마크인들은 덴마크인다운 점을 찾아내고 나아가 앞으로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제공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룬트비는 역사관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결정된 것으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헤르더의 역사관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룬트비는 북구 신화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신화의 의미와 기능에 대하여 설명한다.

“모든 민족의 신화는 그 민족의 유쾌한 표현이며 또 그 민족의 정신의 신전을 구성한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신화는 필연적으로 예언적이다. 그것은 한 민족의 운명을 미리 암시해준다. 이런 일은 모든 사람들의 젊은 시절, 특히 시인들의 청춘이 예언적이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일어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젊은 시절에 꾸던 꿈과 그 때 가지고 있었던 욕망에 간직되어 있는 정신적인 약속들 이상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인들과 북구인들의 젊은 꿈이, 그것들을 일상생활의 표현으로 만들어버리는 신화학자들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N.F.S.  Grundtvig, “Introduction to Norse Mythology 1832,” 김성오 역, N.F.S. Grundtvig: Selected Writings, Johannes Knudsen․Enok Mortensen․Ernest D. Nielsen trans., Johannes Knudsen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 33.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신화는 한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성향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그 민족의 시원적 정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시대를 넘어선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예언적인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한 민족의 역사는 그들의 신화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그들의 신화에 비추어볼 수 있었다.  

6.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

그룬트비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룬트비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북구가 깨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시적이든, 역사적이든, 자연적으로 생겨났든 초자연적으로 생겨났든, 율법적․기독교적 세계관이 유일무이한 그리고 진정한 인간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라는 생각에 귀 기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이교도의 신들이 소멸하고, 모든 정령들이 사라졌으며, 영원이라는 것도 공허한 말이 되었을 때에도 이 세계관만은 뚜렷이 빛을 발했다. 이 세계관은 18세기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을 받아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 뿐 아니라 그 자체의 신성한 기원까지도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계관은 실용적인 삶고 학문에서도 우리의 길잡이별이 되어야 한다.” Ibid., p. 23.


그룬트비는 기독교를 ‘하나님의 복음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만 평화를 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로 보았으며, 기독교의 율법과 복음이 사람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매우 중요한 문제로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독교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강요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며, 학문 또는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자로 되어 있는 성경 중심의 신앙 활동을 더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당시 기독교의 모습에 반대했던 그룬트비는 모든 기독교도들, 특히 덴마크의 기독교도들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정신적인 강요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과 기독교인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기독교도들이 자연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과 잘 화합할 때 모든 곳에서, 특히 덴마크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와 국민의 삶이 본래의 자유롭고 올바른, 그리고 자연스러운 신앙관계를 회복할 것이라고 N.F.S.  Grundtvig, “Folk-Life and Christianity 1847,” 김성오 역, N.F.S. Grundtvig: Selected Writings, Johannes Knudsen․Enok Mortensen․Ernest D. Nielsen trans., Johannes Knudsen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40.
생각했다.
그룬트비는 진정한 기독교 정신은 정신의 자유와 국민의 삶을 전제로 하고, 혹 그것이 없는 경우에는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국민의 삶에 봉사하는 정신의 자유라는 대의를 진전시킬 수 있을 때,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가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면 그것은 정신의 자유와 국민의 삶을 전제하거나, 그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룬트비의 생각이었다.
그룬트비에게 기독교 신앙은 ‘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이 삶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가 살아있는 인간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상황과 공동생활의 본질과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인간의 빈약한 신학과 신앙생활에서 기독교인이 처량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진실한 생명에 대한 참여의 빈약과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인 인간의 삶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Kaj Thaning, 앞의 책, pp. 205-206.

그룬트비가 자신의 교육 사상에서 살아있는 상호작용 또는 공동체 내에서의 나눔(fellowship)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는 단지 성서를 읽는 모임이 아니라 신앙인들 사이의 나눔이 핵심이었다는 그의 신학적 믿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룬트비는 종교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평민대학에서 할 일이 아니며, 어떤 단계의 교육에서도 그러한 종교교육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그는 종교교육은 학교가 아닌 교회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생각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그의 생각은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인 종교교육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성서나 기독교인을 노래하거나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인 교육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종교적 각성을 일으키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도인 부모들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덴마크 프리스콜레협회, “그룬트비와 콜의 교육사상과 덴마크의 프리스콜레”, 『처음처럼』, 통권 제23호(2001 1-2), p. 110.

성직자였던 그룬트비가 학교에서의 종교적인 가르침을 거절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이는 그룬트비의 복잡한 개념 중 하나인 ‘첫째는 인간, 그 다음으로는 신앙인(First, the Human, Then the Christian)’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룬트비는 이 말을 통해 사람은 먼저 진정한 인간이 되지 않고는 진정한 신앙인(Christian)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Max Lawson, op. cit., p. 12.
또한 이 문장을 통해 그룬트비는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던 당시의 기독교의 형식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고 있는 그룬트비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실천적 원용

1. 평민대학

1) 평민대학 Larson은 1970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folk highschool이라는 용어는 덴마크 원어인 folkehojskole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Schueler는, “학교의 이름을 ”high school"이라고 짓는데 있어서, 그것은 그러한 학교들이 일반 대중들이 “높은(high)” 생각과 만날 수 있도록 하고, 국민의 성격과 공동체성에 대한 최고의 이상에 대한 큰 뜻을 품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Herbert Schueler, ”Education in Scandinavia“, Comparative Education, 346, in Dean Gordon Larson, "A Comparison of the Spread of the Folk High School Idea in Denmark, Finland, Norway, Sweden and the United States," (Ed.D. diss. Indiana University, 1970), p. 2; Katherine Brown, ”Analysis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Grundtvigian Folk Highschool Ideal within Three Provincial Grundtvigian Finlandssvensk Folk Highschools in Pre-independence Finland,“ (Ph. D. diss. Loyola University, 2001), p.ⅺⅴ에서 재인용.
의 교육목적

그룬트비를 추종하던 사람들과 의식 있는 농민들에 의해 생겨나기 시작한 덴마크의 평민대학(Folk High School)은 과학적인 교육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평민대학의 교육목적과 방법은 모든 점에서 일반 국민들의 생활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으며 국민으로부터 시작된 학교이다. 홀거 베그트룹․한스 룬트․페터 매니히 공저, 앞의 책, p. 18.

가장 먼저 세워진 평민대학은 1844년 플로어(Christian Flor) 교수가 슬레스비 공작의 영지에 살던 농민들과 함께 북 슬레스비(North Slesvig)에 세운 뢰딩(Rødding) 평민대학이었다. 이 학교는 무엇보다도 덴마크의 청년들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것,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점차 거세어지는 독일어와 독일문화의 영향력에 대항하여 덴마크어와 덴마크의 문화를 지키도록 교육하는 것, 농업과 상업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Karl Kristian Aegidius, 같은 글, 2001, p. 71

다음으로 세워진 평민대학은 크리스텐 콜(Christen Kold)에 의해 세워진 학교였다. 콜은 교육에 있어 그룬트비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었으나, 그룬트비의 사상을 교육 현장에서 가장 잘 실현한 인물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실천으로 운영된 평민대학은 이후 새롭게 생겨난 많은 평민대학들의 모델이 되었다.
한때 링그비(Lyngby)에 있는 평민대학의 교장이었던, 보룹(Ernst Borup)은 “평민대학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삶의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그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고, 진실한 가치와 거짓된 가치를 구분할 수 있도록 가르치며, 비록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를 길러줌으로써 학생들을 교육하고, 삶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심어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Peter Manniche, Denmark; A Social Laboratory, (Copenhagen: Duplex-Trykkeriet, 1969), p. 110.

이러한 평민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성장을 매우 중요시 생각한다. 특히, 학생들의 사회적 성장은 평민대학의 교육과정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학생들의 사회적인 발달을 돕고자 하며,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도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학교 안에서 올바른 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경험하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습득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민대학의 중요한 교육 목적들 중 하나는 학생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다시 지역사회로 돌아갔을 때, 그곳 환경을 더욱 풍부하고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기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민대학은 결코 학생들을 그들의 삶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학생 개개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David C. L. Davis, Model for a Humanisitc Education: The Danish Folk Highschool, (Ohio: Charles E. Merrill Publishing Company, 1971), p. 8.

또한 평민대학의 교육은 반드시 삶에 유용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 속에서 학생들이 직접적으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평민대학에서는 교육내용을 마련할 때,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즉, 개인의 존재가 무시되기 쉬운, 모든 학생들에게 획일적으로 주어지는 교육내용이나 교육방법은 거부하며 학생들의 이해력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전의 지식을 고려하여 수업을 진행한다. 따라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를 사용하고, 외국어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강의로 수업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강조된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강의는 똑같은 생각을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글이나 잡지 등을 읽는 것보다 이전에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또한 평민대학에서의 강의는 가능한 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그 과목이 자신들과 실제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Thomas Rørdam, The Danish Folk High Schools, (Denmark: Det Danske Selskab, 1965), pp. 20-21.
학습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즐거움으로 평민대학에서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평민대학의 대표적인 실천가로 알려진 콜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즐거움 속에서 해나갈 때, 진정한 계몽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으로 평민대학에서의 교육은 학생들의 일시적인 흥미나 일상에서의 요구에 한정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주고자 한다. 보다 넓은 외부의 세계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삶의 문제들에 새롭게 눈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평민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러한 교육은 학생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학생들에게 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또한 평민대학의 중요한 교육목적이다. 형식적이지 않으며 자유로운 강의는 이를 전달하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이러한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회의 상황들과 종교, 문학과 일반적인 문화를 다루게 된다. 수업의 다음 단계에서는 다른 나라들과의 비교, 그리고 자신들의 것과 다른 문화적 형태, 사회 체제 그리고 삶에의 철학 등을 설명해보고, 그것을 평가하는 활동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평민대학의 교육은 모두 인간 개개인의 삶과 삶이 안고 있는 가장 깊은 문제들에 빛을 비춰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민대학에서 생활하는 동안 학생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얻게 된다. 학생들이 가지게 된 이러한 질문들은 거의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고 교사 또는 동료학생들과 함께 토론해보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는 매우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삶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과 세상의 어느 부분에 자신이 알맞은가를 발견하는 과정들 속에서의 성장이 학생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평민대학이 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다. David C. L. Davis, op. cit, p. 4.

2) 평민대학 교육의 실제

평민대학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일반적인 학교의 개념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이 학교는 교과목, 수업 방식, 그리고 교실형태 등을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특징이 있으며, 평민대학 간에도, 그 설립 철학과 이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각 학교마다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수업 기간을 채택하기도 하며, 이론과 실제를 연결시킨 과목들, 전통적으로 가르쳐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과목들, 범교과적 주제들, 혁신적인 교육방법의 도입, 소규모 학습동아리, 강의, 워크숍, 학생주도 수업 등 각 학교의 철학과 이념, 상황에 맞는 교육운영을 하고 있다. Helge Bekke-Hansen, "평민대학에 대하여,“ 2002 경기도 평생학습축제-국제학술심포지엄, 2002년 10월 19일(광명시평생학습원, 2002), p. 70.

평민대학은 기본적으로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을 따르고 있으나, 교육기간, 중점을 두는 활동, 교육 대상 등에 있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최근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민대학은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교육체계나 프로그램 대신 삶의 경험과 변화하는 상황에 맞는 유연한 교육과정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교육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평민대학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평민대학은 학생과 교장, 교사, 그리고 학교가 고용한 사람은 누구든지 함께 생활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가장 알맞은 환경인, 기숙학교의 형태를 지닌다. Thomas Rørdam,  op. cit., p. 16.
이러한 환경 속에서 평민대학은 학생들에게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과 비슷한 친근한 분위기를 제공하며, 교사와 학생들은 수업이외의 시간에도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또한 학교 곳곳에서 수시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대화와 토론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진정으로 살아있는 깨달음과 배움을 제공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교장과 교사, 학생들 그리고 교사의 가족들까지도 모두 모여서 식사를 하며, 동등한 환경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함께 한다. 이는 매우 민주적인 생활방식으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활방식을 체득하게 된다.
둘째, 평민대학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인 사회․문화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있다. 평민대학 초기에 교육과정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두 가지 과목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학 모국어로 된 시와 문학작품, 그리고 신화와 전설 등을 중요한 교재로 생각하였다.
이었다. 최근에는 학생들의 필요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과목들이 더해지거나 제외되기도 한다. 평민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대부분 모국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책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교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학생들 사이의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진행된다. 또한 노래와 체육 등을 중요시하여 학교생활에서의 즐거움과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감 등을 매우 중요시 한다.
셋째, 평민대학은 모든 사회계층과 교육적 배경을 막론하고 그 학교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입학할 수 있도록 아무런 입학조건도 내걸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 학교에서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각자의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서로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뜰 수 있게 된다. 평민대학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당시 사회에서 온전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농민들에게도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따라서 학교가 세워지던 초창기에는 대부분 농민을 비롯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점차 도시 출신의 학생들, 또는 사회의 상류계층에 속하는 자녀들도 학교의 구성원이 되었다.
넷째, 평민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는다. 입학시험을 비롯하여,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치르게 되는 여러 가지 시험들, 그리고 졸업시험이 없다. 이러한 특징은 평민대학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교사와 학생 사이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관계와 신뢰의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고 학생들을 점수로 평가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에게 그 과목을 공부하도록 강요하게 되며, 교사 역시 수업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시험에 대한 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학생들의 흥미와는 무관하게 교사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학생들이 그 과목을 공부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평민대학에서는 무엇보다 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이 우선적으로 존중될 수 있었고, 시대적 변화와 흐름에 맞춘 개혁적인 교육과정의 자유로운 변형이 가능하였다. 물론 시험이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민대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 속에서 시험이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평민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자아와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과 경험이었으며, 이는 시험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처럼 평민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은 그들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험이라는 강제적인 요소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섯째, 평민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기간은 적어도 5개월 과정이거나, 해매다 두 번에 나누어서 3개월씩 이루어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즉, 평민대학의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그동안의 가정생활과는 다른, 학교생활에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평민대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콜(Christien Kold)에 의해 마련되었다.

3) 평민대학의 교사 David C. L. Davis, Model for a Humanisitc Education: The Danish Folk Highschool, (Denmark: Det Danske Selskab, 1965)을 주로 참고하였음.  


평민대학의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학생들로부터 한 인간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룬트비는 생각했다. 즉, 그룬트비는 교사이기 이전에 올바른 인간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교사의 조건으로 생각했다. 평민대학의 교사는 단순히 배워야 할 교과목을 학생들의 눈앞에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 자신이 공부했던 교과목을 포함한 삶의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에게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평민대학에서 요구하는 교사의 중요한 과업이다.
평민대학에서 교사를 선발하는 기준에 있어서 주목해 볼 사항은 교사자격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학교의 교사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평민대학의 교사가 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몇 분야 덴마크어, 외국어, 체육, 수학, 과학 등의 과목영역.
에서의 교사의 능력이나 경험, 그리고 이러한 능력과 경험을 젊은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의욕이다. 평민대학의 교사는 단순히 정해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많은 역할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다. 이는 평민대학, 그리고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다.
평민대학의 교사는 수업시간 뿐 아니라 학생들의 자유 활동 시간에도 함께하면서, 그 시간이 학생들에게 온전히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실상 평민대학에서의 교사는 정규 수업시간과 자유 활동 시간을 구분하여 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활동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또한 현실적으로 평민대학에서 일하는 교사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닌 반면, 일의 양은 훨씬 많다. 특히 기숙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교사들은 생활 속에서 늘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재정적인 부분은 나아졌으나, 여전히 교사의 역할과 업무는 많은 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생들과 진정으로 살아있는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교사가 학생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룬트비는 평민대학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종류의 교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첫째,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국민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활기와 다양성 속에서 이야기된 것으로서의 모국어에 특별히 재능이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둘째, 조국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매우 재미있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이 조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사 학습에서는 학생들이 인물이나 지역의 이름, 또는 날짜 등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조국에서 일어난 훌륭한 사건들과 역사 속에서 국가가 위험에 처했던 시기 등에 대한 공부를 통해 나라의 장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이전부터 불러왔던 노래(민요)들과 새롭게 만들어진 국민의 노래(the song of the people)들을 잘 알고 그것을 매우 사랑하며, 학생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도울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덴마크 국민의 노래는 평민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중요한 교육활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 사이의 영혼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넷째, 조국의 곳곳을 여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국가의 여러 도시들과 마을, 들판과 숲,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 그리고 각 사람들의 사고방식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교사도 필요하다. 젊은 학생들에게 단순한 지리적인 정보나 통계적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수업은 없다. 따라서 교사는 나라의 각 지방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 그들의 생각, 그리고 그들의 장점 등에 바탕을 둔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법률책과 갖가지 규칙들에 갇혀 있는 교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평민대학에 필요한 교사는 젊은 학생들에게 정부가 제정한 법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학생들이 찾아낼 수 있는 일반적인 법적 조건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2. 평민대학의 영향

1) 덴마크에 미친 영향

평민대학은 덴마크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덴마크의 평민대학에 관해 연구한 외국인 학자들은 대부분 평민대학의 중요한 영향으로 협동조합 운동, 높은 수준의 문학, 세계 시장의 경쟁에서 이룬 덴마크 농민의 성공, 그리고 진보적인 법제도 등을 들고 있다. 또한 덴마크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대학이 덴마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지만, 그 학교가 덴마크 사회와 덴마크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매니히는 덴마크의 평민대학이 오랜 기간 동안 덴마크의 농민들이 농촌으로 되돌아와 자신들의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Max Lawson, op. cit., p. 15.
이 역시 평민대학이 덴마크에 미친 중요한 영향이다. 1864년 이후로 매년 점차 더 많은 농촌 청년들이 4개월에서 6개월쯤 평민대학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수가 1870년에는 농촌 청년의 15%, 1900년에는 30%에 이르렀다. 교육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갈 때, 청년들은 자신들과 마을 사람들을 물질적․정신적 빈곤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청년들은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통해서 농촌지역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또한 거의 모든 덴마크의 농촌 마을에 마을회관을 건립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마을회관에서는 자유롭고 자주적인 모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모임을 통해 평민대학의 교육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과 계몽활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 74.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은 덴마크의 사립학교 전통을 세우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사립학교란 국가의 소유, 또는 지방자치단체나 어떤 다른 공적 기관에 속하지는 않지만 공적 영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학교를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의 사립학교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 바로 평민대학이었다. 현재 덴마크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사립학교와 공립학교가 공존하고 있다. 대안적 어린이학교, 이를테면 프리스콜레에서부터 사립 김나지움과 평민대학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직업학교들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학교들은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지만, 매우 자유롭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국가권력에 따른, 학교와 수업이 다수에 종속되는 자유가 아닌, 학교와 교육이 가지는 그들만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운영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덴마크 프리스콜레협회, 앞의 글, pp. 87-88.

덴마크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협동조합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협동조합 운동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평민대학의 정신과 그곳에서 생활한 학생들이 경험하게 되는 공동체 생활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매니히는 가장 근본적인 덴마크의 협동조합 운동은 공동 책임(joint responsibility)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 책임이란 조합의 구성원 모두가 같은 조합에 속해있는 조합원이 진 빚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가진다는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한 조합 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이는 평민대학의 공동체 생활에서 중요시되었던 부분이다. 이러한 덴마크의 협동조합, 특히 농업 협동조합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농민들의 필요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협동조합 운동을 주도하고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대학 출신의 농민들이었다.
협동조합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덴마크의 협동사회는 구성원들의 성공과 실패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은 바로 평민대학에서 강조했던 동료애(spirit of fellowship)였으며, 이는 평민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로 뛰어들어 활동함으로써 사회 곳곳에서 발현될 수 있었다.  

2)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미친 영향 이 부분은 Thomas Rørdam, "The High Schools in Other Parts of Scandinavia," The Danish Folk High Schools, (Denmark: Det Danske Selskab, 1965)과 류달영,『새 역사를 위하여: 덴마크의 어제와 오늘』(서울: 동호서관, 1982)을 주로 참고하였다.


(1) 노르웨이의 평민대학

노르웨이는 킬 조약에 의해 덴마크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400여 년 간 덴마크의 영토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덴마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랜 기간 동안 덴마크의 일부였던 만큼 노르웨이는 그룬트비의 사상과 그가 제안했던 평민대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노르웨이에도 이러한 평민대학들이 생겨났다.
그룬트비의 사상을 가장 먼저 노르웨이에 소개한 사람은 레오 핏히였다. 그는 교육가로서,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노르웨이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1850년대 이후 핏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의 언어, 역사, 민족의 전설, 그리고 민요 등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정리하였으며, 국민을 위한 교육에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덴마크와의 역사적 관계와 핏히의 영향으로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국가들 중 가장 먼저 평민대학을 받아들인 곳이었다. 핏히의 영향을 받아 직접 평민대학을 세운 사람은 헤르만 안카(Herman Anker)와 오라운 아르베젠(Olaus arvesen)이었다. 이들은 대학을 마친 후 덴마크로 넘어가 그룬트비의 문하생이 되어 평민대학에 대한 것들을 자세히 연구하였으며, 협동조합 운영에 관한 방법들도 연구하여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1864년 그들은 무제에겐 호숫가(Mjøsens River)에 사가툰(Sagatun) 평민대학을 세운 그들은 80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헤르만 엔커는 이 학교의 설립목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학교의 목적은 농민들의 자녀들에게 보다 진보적이고 보편적인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삶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근원을 제공해주고,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보다 나은 국가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할 것이다.”
이러한 사가툰 평민대학이 세워진 이후, 1867년에는 그리스토퍼 브룬(Christoffer Bruun)이 판하임 평민대학을 세웠는데, 이 곳의 교육 역시 시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에는 비고 울만(Viggo Ullmann)도 평민대학을 설립했다. 이들은 모두 덴마크를 직접 방문하여 평민대학에 대한 것들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이후로도 노르웨이에는 20여 개의 평민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민대학들이 설립되었던 당시에는 정부에서 이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학교들에 지원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교들은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또한 정부에서는 이에 반대하여 더 많은 문법학교들을 설립했는데, 이곳의 학생들은 많은 지원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역시 살아있는 교육보다는 보다 높은 단계의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의 평민대학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한때는 평민대학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으나,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젊은 농부들의 운동(Young Farmers' Movement)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다시 살아나게 된 평민대학은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던 당시의 사회적 움직임과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평민대학과 일반 학교들 사이에는 점차 그 차이가 사라지게 되었으며, 1949년 7월 28일에 시행된 법령에 의해 당시 노르웨이에 존재했던 세 가지 종류의 학교들은 모두 평민대학이 지향하는 형태의 교육에 영향을 받게 되었고, 모두 하나의 법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노르웨이의 모든 학교들은 남녀 공학의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매우 빨리 시행된 것이었다.
  
(2) 스웨덴의 평민대학

스웨덴의 평민대학 역시 덴마크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평민대학은 덴마크의 평민대학과 여러 가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웨덴만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스웨덴은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국가적 또는 민족적 위기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대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나 그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강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스웨덴의 소작농들은 사회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매우 조화로운 발전을 이루어온 나라였다. 이러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던 스웨덴의 경우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거나, 부조리한 구조에 맞서기 위한 투쟁적인 평민대학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평민대학에 추구하는 교육내용 역시 덴마크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다.
스웨덴의 평민대학에서는 사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강의는 영감을 주는 것이거나 영적이기 보다는 정보를 제공해주는데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1868 년에는 Östergötland 평민대학, Önnestad 평민대학, 그리고 피일란(Hvilans) 평민대학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대부분 어거스트 소르만(August Sohlman)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스웨덴의 평민들을 교육하는데 힘쓰지 않고, 대부분의 교육기관들은 상류 계급의 사람들만을 위한 곳이 되어버린 당시 스웨덴의 상황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국민을 평등하게 교육시켜야 하는 학교의 역할에 대하여 역설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 분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혁명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학교의 본보기로 그는 바로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소개했다. 그는 덴마크의 첫 번째 평민대학이었던 뢰딩(Rødding) 평민대학의 교장이었던 플러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Östergötland 평민대학의 교장이었던 Ålund 박사 역시 덴마크에 머물면서 덴마크 평민대학의 교사들로부터 평민대학 운영에 관한 많은 것들을 익히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이후 스웨덴에 돌아와 세웠던 Östergötland 평민대학은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스웨덴 평민대학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덴마크의 평민대학과는 달리 책도 교육의 중요한 자료로 여겼다는 것이다. 교사의 가르침에 의한 교육 뿐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하는 독립적인 학습 역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의회를 갖게 되고, 그 결과로 새로운 지방 정부가 농민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개정법(Reform Act)이 생겨난 1866년 이후, 사람들은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에 대한 강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교육이 사회 계층 사이에 놓여있는 장벽을 허물고자 했다. 평민대학의 과업은 학생들을 공동체와 개인적인 삶의 장소 모두에서, 삶과 조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었다.
1882년 이후 비로소 평민대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스웨덴 정부는 학교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학생들이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내리기도 하였다. 1964년에는 국가 보조금을 받는 평민대학의 수가 110개교에 달했다. 이러한 평민대학은 점차 스웨덴 교육제도의 일부로 통합되었으며, 자유롭게 운영되고 있다. 교육방법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최대한으로 줄었기 때문에, 스웨덴의 평민대학에서 교사들은 매우 자유롭게 교과목을 선택하고 수업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교장이나 교사를 선정하는데 있어서는 정부가 관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덴마크의 평민대학만큼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으며, 국가에 속해있는 기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정치적 발전 등과 함께, 평민대학 역시 스웨덴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교육을 기반으로 스웨덴은 문화, 정치, 경제, 산업의 각 부분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3) 핀란드의 평민대학

핀란드에서는 1880년대 이후부터 젊은 소작농들이 더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핀란드의 학교에는 가난한 농민 출신의 학생들이 점차 늘어났고, 학교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인 농민들의 문화를 온전히 보전할 수 없는 도시적 환경에서 농민 계급의 자녀들이 인간적인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학교의 과제가 되었다.
핀란드는 그룬트비의 사상에 바탕을 둔 평민대학이 뿌리내리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핀란드의 젊은이들 사이에 일어났던 평민대학 운동과 덴마크의 평민대학 운동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모국어에 대한 그룬트비의 생각과 자유에 대한 그룬트비의 날카로운 요구는 루네베르그(Johan Ludvig Runeberg)와 그가 쓴 민족 전설에 큰 희망을 품고 있는 핀란드 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핀란드는 당시 유럽 세계에 일고 있었던 변화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핀란드가 겪었던 변화는 경제․사회적인 것 뿐 아니라 민족적인 것이었다. 19세기에는 민족적․사회적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운동은 르네베르그(Runeberg)와 린토르(Elias Lönnrot)가 수집한 핀란드의 민요집 카베바라(Lays of Kalvevala)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핀란드의 역사와 언어의 중요성은 당시 유명한 웅변가였던 스넬만(Johann Wilhelm Snellman)에 의해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는 핀란드인들이 민족적인 것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새롭게 눈뜰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사회 지배계급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과 일반 민중들 사이에 놓여있는 커다란 간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대중교육은 사회적․민족적 간격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대중교육에 대한 고민 속에서 핀란드 역시 덴마크의 평민대학 모형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이미 들어와 있던 평민대학을 통해 간접적으로 덴마크의 평민대학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핀란드의 평민대학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1860년대 이후로 핀란드에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대중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평민대학을 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889년에 이르러 첫 번째 평민대학이 소피아 하그만(Sofia Hagman)이라는 여성에 의해 캉가살라(Kangasala) 지역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핀란드 어만을 사용하였고, 수공예 과목과 종교, 역사, 음악, 체육 등을 중요시하였다. 이후 16개의 핀란드 평민대학과 5개의 핀란드계 스웨덴(Finno-Swedish) 사람을 위한 평민대학이 세워졌다.
1905년 이후부터 이러한 평민대학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평민대학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대부분의 평민대학에서는 사회학과 인본주의적인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으며, 이들 학교는 일반적인 교육과 사회적이고 직업적인 기술을 제공하는 기숙학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3) 제 3세계 국가들에 미친 영향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중시하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1950년대 들어 제 3세계의 국가들이 직면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대부분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제 3세계 국가의 국민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민족 고유의 문화를 강조하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제 3세계 국가의 사람들은 그룬트비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들의 상황에 알맞은 평민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서 발견한 것은 사람들을 이미 결정된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람들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기술을 이끌어내고, 각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려는 정신이었다.  
이들 국가에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국가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평민대학과 그룬트비 운동을 통해 덴마크의 경제와 사회가 발전한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이들은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을 모델로 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이 자신의 문화와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깨닫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때, 삶 속에서 진정한 진보와 혁신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나라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제 3세계 국가에는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모델로 한 많은 교육기관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 설립되었다. 이 지역에 세워진 평민대학들은 대부분 덴마크에서 평민대학의 교육, 특히 농업교육을 직접 경험한 후 본국으로 돌아온 제 3세계 국가의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또한 몇몇 학교들의 경우는 덴마크 정부의 새로운 보조 프로그램(Danish government's new assistance program)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H. B. Hansen, Heritage and Prophecy: Grundtvig and the English-Speaking World. A.M. Allchin, D. Japer, J.H. Schjørring, K. Stevenson, ed., (Denmark: Aarhus University Press, 1993), p. 310.

제 3세계 국가들에 세워진 평민대학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나와 인도의 평민대학을 들 수 있다. Ibid., p. 310.
가나에는 비교적 일찍 평민대학이 세워졌는데, 중등학교 진학에 실패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그 학교의 목적이었다. 이후 이러한 교육체계는 나라 전역에 걸쳐 실시되는 대학의 부설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인 성인교육기관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는 농촌지역의 성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가장 중심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Ibid., p. 312
이러한 가나의 평민대학은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립학교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학교는 덴마크의 평민대학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1947년 국가가 독립하던 시기에 성인교육을 위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에는 농촌의 청년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평민대학(people's school or folk school)을 짓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Ibid., p. 313
1950년대 초 인도는 국제 협력을 위한 덴마크 협회(Danish Association for International Coorperation)와 관계를 맺게 되어, 덴마크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평민대학이 세워지던 초기 단계에 덴마크는 직접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경험한 덴마크인 교사와 직원들을 보냈다. 이 학교에서도 역시 어린 시절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들과 젊은 여성들의 교육을 주로 담당하였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교육은 사회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러한 효과를 인정한 지역 정부는 이러한 교육기관을 위한 모든 비용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제 3세계 국가들에 소개된 평민대학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평민 신분의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의 발전을 꾀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Ⅴ. 요약 및 결론

1. 요약

그룬트비는 19세기 덴마크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덴마크 사회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당시 나라가 처해있던 어려운 상황에서 민중들을 일깨우고 그들의 삶을 통해, 덴마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19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는 당시 덴마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 정세의 변화와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덴마크는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되었으며, 국가 경제도 파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당시 덴마크에서는 외래의 문화와 언어에 가치를 두는 사대주의적 경향이 널리 퍼져, 학자들 사이에서 덴마크의 말과 역사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러한 외래의 문화를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평민들 대부분의 삶은 전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덴마크 사회는 죽음과 같은 절망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룬트비는 덴마크 사회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덴마크의 전통문화와 생생한 삶이 담겨있는 평민들의 말과 생활에 주목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덴마크가 전성기를 누렸던 과거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희망을 갖고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덴마크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귀족 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겨났으며, 토지개혁을 통해 성장하게 된 농민들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849년에는 지방 정부법에 의해 농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면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성립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운영을 위해서는 농민계급의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당시의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실현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상은 낭만주의 사상이었다. 초기에는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그룬트비는 계몽사상의 이성 중심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에 반대하게 되었다. 그룬트비는 낭만주의 중에서도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주로 받았는데, 민족의 정체성과 자아, 그리고 국가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이나, 모국어를 중요시하는 것, 그리고 민족의 신화와 역사를 중요시하는 것 역시 낭만주의의 영향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로는 헤르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다음의 6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삶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삶의 계몽’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진정 의미 있고 살아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육은 죽은 문자로 이루어진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생한 일상의 삶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룬트비의 생각이었다.
둘째,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중요시한다. 상호작용은 그룬트비의 교육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으로, 그룬트비가 제시한 학교와 수업의 형태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호작용, 특히 살아있는 상호작용은 주로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함께 생활을 나누며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룬트비가 제안하는 학교에서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 또한 중요하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학생들은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깨달을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일상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살아있는 말인 모국어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문자화 되어 있는 글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말은 상호작용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각 민족의 모국어에는 그들의 고유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교육은 모국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넷째, folkelighed(폴켈리드) 정신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공동체적 삶’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지위, 생각, 신분, 연령 등의 차이에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동등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룬트비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평민교육에 대한 생각과 민족교육에 대한 생각의 바탕이 되었다.
다섯째, 그룬트비는 교육은 민족의 역사와 문학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역사는 한 민족의 진보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현재를 올바로 해석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된다. 민족의 신화 또한 한 민족의 젊은 시절의 꿈을 표현하는 것으로 예언적인 기능을 가지며,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성향을 표현해 준다. 특히 신화에서 사용되는 시적이고 구어적인 표현들은 그 민족의 정신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
여섯째,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살아있는 상호작용 또는 공동체 내에서의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신앙인들 사이의 나눔이 그 핵심이라는 기독교에 대한 그의 믿음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학교 교육에서 형식적인 종교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는 기독교 또한 정신의 자유와 국민의 삶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단지 이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평민대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학교를 탄생시켰고, 실제로 그것이 현장에서 실현되었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을 현실의 삶 속에서 실천했던 평민대학은 작은 규모의 사립학교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초기에는 농민들의 교육에 특히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18세 이상의 젊은 청년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평민대학은 평민들의 삶에 의해 교육목적과 교육방법이 결정되며, 교육과정은 각 학생들의 흥미와 요구, 그리고 사회적 변화 등에 맞출 수 있도록 매우 유연하게 운영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형식적인 교육체계나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는다. 또한 교사와 학생이 모두 공동체 생활을 한다. 교사와 학생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함께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회의와 토론을 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은 시험이 없다는 것으로, 입학시험을 비롯한 어떤 시험도 실시하지 않는다. 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관계를 보장해준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교육은 모두 인간 개개인의 삶과 삶이 안고 있는 가장 깊은 문제들에 빛을 던져주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곳의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사자격증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 그리고 학생들의 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분야에서의 능력이다. 그룬트비는 자신의 글에서 평민대학의 교사는 교사이기 이전에 먼저 올바른 인간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평민대학은 1864년 이후로 덴마크 전역에 설립되었으며, 덴마크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농민생활의 발전 협동조합의 운영, 그리고 교육제도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덴마크 사회 내에서 올바른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운영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평민대학에서 추구했던 공동체 속에서의 자유롭고 생기 있는 삶과 서로에 대한 책임감은 덴마크 사회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불 수 있다.
평민대학은 덴마크 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 그리고 제 3세계의 국가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칸디나비아지역의 대표적인 나라들로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를 들 수 있으며, 제 3세계국가로는 가나와 인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나라들 역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평민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는데, 덴마크의 평민대학은 그러한 교육을 위한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각각의 나라들은 이러한 그룬트비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모델로 하여 그들 나름의 특성을 살린 평민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제 3세계 국가들의 경우는 평민대학을 세우는 과정에서 덴마크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2. 결론

지금까지 덴마크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그의 교육사상을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평민대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핵심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일상의 삶’을 통해 교육을 하고 이를 통해 삶을 일깨운다는 점이다. 교육에 있어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룬트비 뿐 아니라 프레네를 비롯한 많은 교육사상가들이 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의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교육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바탕이 되는 생각일 것이다. 그룬크비의 교육사상은 바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덴마크 사회를 훌륭히 바꾸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실천은 우리나라의 교육을 개선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 특히 대안교육 운동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다시 한 번 교육에서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기존의 형식적이고 경직된 교육에 반대하여 새로운 교육을 추구했던 많은 교육사상가들이 교육에서의 삶이라는 요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책을 중심으로 하고 일방적인 교사의 강의가 수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은 현재의 삶보다는 앞으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삶은 교육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비추어 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활동이기 이전에 현재, 바로 이곳에서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꿈꾸고 희망하는 미래도 있는 것이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서는 어떤 것보다 이 점을 중요시하였다.
둘째, 살아있는 상호작용에 대한 그룬트비의 생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방법은 우리나라의 대안학교를 운영하는데 좋은 본보기가 된다. 또한 그러한 형태의 교육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바탕을 둔 평민대학의 특징적인 교육방법은 대화와 토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책이 아닌, ‘말’ 위주의 수업이었다. 또한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하나의 학교 공동체를 이루어 민주적인 생활 방식을 실제적 경험을 통해 익힐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수업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뿐 아니라, 하나의 생활 공동체라는 장 속에서 보다 다양하고 깊은 수준의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실천사례는 그러한 교육이 실현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또한 다양하고 실제적인 실천사례들은 교육의 이론적인 토대 뿐 아니라, 실제로 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셋째, 그룬트비의 교육이 덴마크 사회변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교육을 통한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던 덴마크 사회의 민주주의와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교육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현재 덴마크 사회의 민주주의와 협동조합 운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물론, 덴마크 사회의 변화에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나 평민대학의 교육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 사회 역시 그러한 교육을 통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다.
넷째, 앞으로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과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다. 교육은 한 사회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얻게 되는 ‘가치관’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자리 잡아,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이 지향했던, 일상의 삶을 중요시하고, 모든 사람, 특히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평민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공정하고 민주적인 가치관은 세계적인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는 민주적인 덴마크 사회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덴마크 사회의 변화는 아직까지 엘리트 중심의 교육 또는 경쟁위주의 교육이 사회의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의 가치가 이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그러한 변화에 있어 많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 또한 새로워져야 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서론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덴마크 사회적 운동을 배우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는 덴마크의 선진적인 교육이나 사회 제도들이 뿌리를 내리기에 너무 척박한 토양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씨앗들은 말라죽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뿌려졌던 수많은 씨앗들 중 한 두 개는 살아남아 성장해왔으며, 새롭게 일어난 대안교육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룬트비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덴마크의 교육을 받아들여,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5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 교육의 한편에서는 이제 그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다시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을 주제로 한 본 연구는 그 동안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에 대한 내용을 하나의 선상에서 정리해보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을 주 목적으로 하였다. 이제는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실천에 대한 보다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그를 토대로 한 교육운동, 그리고 실천으로 변화된 덴마크의 교육제도와 사회에 관한 연구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데 누구보다 많은 공헌을 한 교육 실천가 크리스텐 콜에 관한 연구와 소개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교육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있어, 보다 유용하고 풍부한 정보와 자료들, 그리고 실천 사례들을 얻게 될 것이다.

[밀크북][밀크북]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롯데ON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롯데ON


[밀크북]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도서소개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건국된' 나라로 좁히려는 세력의 시도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1919년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국가라는 게 다수의 생각이다.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 3?1 정신과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 이야기에 정면으로 친일 문제가 걸려 있고, 또 한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았을 때 모두가 바라던 국가의 설계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그리고 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고, 그들의 설계는 주로 어디에서 연유했으며, 또 얼마만큼 현실에서 실현되었을까.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 현대사의 근대적 전환기를 이룩한 1960~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헌들과 연구들을 참조해 가면서, 이 시기에 정부 정책을 주도한 이들과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모두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들이 바로 '친일을 하지 않은 우익', 즉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었던 것이다.
출판사 리뷰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가는 지성의 대향연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건국된’ 나라로 좁히려는 세력의 시도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1919년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국가라는 게 다수의 생각이다.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 3?1 정신과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 이야기에 정면으로 친일 문제가 걸려 있고, 또 한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았을 때 모두가 바라던 국가의 설계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그리고 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고, 그들의 설계는 주로 어디에서 연유했으며, 또 얼마만큼 현실에서 실현되었을까.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말하려면, 간과하기 쉽지만, 당연한 전제 조건이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를 자부하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시기에 남북 분단이라는 예기치 못한 불행을 엄연한 현실로 맞닥뜨린 만큼, 하나는 일제에 부역한 사실이 없거나 그 사실을 철저히 참회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도 일정 정도 이상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친일을 하지 않은 우익’이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의 조건이다.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는 남북 대결의 와중에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친일 세력이 우파의 정체성을 실질적으로 독점해 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우파가 이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들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계획하고 실행한 실질적 주체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 현대사의 근대적 전환기를 이룩한 1960~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헌들과 연구들을 참조해 가면서, 이 시기에 정부 정책을 주도한 이들과 민주화 진영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모두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들이 바로 ‘친일을 하지 않은 우익’, 즉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었던 것이다.
대전대학교 김건우 교수는 스무 해 가까운 연구를 통해 친일에 물들지 않았으면서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도 거리가 있는 ‘양심적’ 우익의 실체를 추적하고, 이들이 대한민국의 발전과정에서 했던 일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해 왔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한국 현대 지성사와 문학사에 관련하여 꾸준히 축적해 온 그동안의 연구 업적을 집대성한 저작으로, 이 저작을 통해서 우리는 이른바 ‘학병세대’를 가운데에 놓고 치열하게 전개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줄기가 한국 우익의 진짜 기원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학병세대’는 왜 중요한가. ‘학병세대’는 주로 1920년 전후 다섯 해 정도에 출생한 이들로, 실제로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 이름만 들어봐도 쟁쟁하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백낙준,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조지훈, 김수영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의 사상적 선배로는 이들 ‘진짜 우익’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등이 있고, 그 후배들로는 천관우, 이기백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선배 세대인 이승만, 장면, 박정희 등과 달리 친일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또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주로 이북 출신으로 남쪽을 택한 사람들이기에 반공 문제에서도 의혹이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기도 했다.
해방기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주체를 세울 때, ‘친일’ 여부 문제는 대단히 중요했다. ‘민족에 반역하고 친일을 했던 이들에게는 새 나라의 주체가 될 자격이 없다’는 공감대가 당시에 있었다. 다만,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기에 나라 만들기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학병세대’가 시대의 중심에 등장했다. 일제 말 전쟁에 동원되어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터로 끌려갔던 사람들, 제국 최고의 고등교육을 이수했지만 친일 전력이 없는 이들이 새로운 나라 만들기 과정에서 중심세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들은 제국 일본의 교육을 정점까지 받은 엘리트 집단이어서 정치경제적 근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불변의 상수에 해당하는 미국 정부와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구 지향의 세계주의자였고,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었다. 4?19혁명과 5?16 쿠데타 이후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이들은 때때로 정치 현실에 참여하여 박정희 주도 세력과 뜻을 같이하기도 했지만, 그 친일적 뿌리에 대해서는 생래적 반감과 꾸준한 의혹을 품었다. 아울러 이들은 ‘제헌 헌법’에 구현되어 있는 상해 임시정부의 중도적 이념에 동감을 표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그려 낸 산업화의 밑그림을 박정희 정권에 제공했으며, 한국적 특수성을 내세워 정치사회적 자유를 억압하는 군사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 ‘진보 우익’이야말로 정통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었다. 《사상계》의 장준하와 《동아일보》의 천관우와 《조선일보》의 선우휘가 모두 여기에 속했고, 보수적 지사 조지훈과 자유의 화신 김수영이 이 그룹에서는 하나였다. 연세대학교의 백낙준이 이들을 후원했으며, 탈출한 학병이자 《사상계》의 주필을 역임한 고려대학교의 김준엽은 이들의 화신과 같았다.
학병세대는 극우적 국가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자신들과 입장이 같지 않으면 모두 용공좌파로 내모는 ‘우익의 사칭자들’과는 그 뿌리가 달랐고, 근대 국가에 대한 그림도 달랐다. 이들은 산업만의 근대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총체적 근대화를 꿈꾸었다. 정치적 근대화로서의 민주화, 경제적 근대화로서의 산업화, 문화적 근대화로서의 새 문화 창조가 이들의 구상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도달한 지점을 보면, 이들이 꿈꾸었던 나라를 향해 대한민국이 분명히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차 자료를 뒤지면서 오랜 연구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 설계자를 밝혀낸 이 책의 소중함은 여기에 있다.
아래는 각 장의 내용을 주요 인물별로 요약한 것이다.

장준하(1918년생)와 김준엽(1920년생), 평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 모두 1944년에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일본군으로부터 탈출해 충칭 임시정부로 건너가 광복군으로 편성되었다. 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 중이었던 이들이야말로 광복군의 적통이자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했던 임시정부 우익 민족주의의 적자였다. 이들은 해방 후 자신들이 해야 할 건국 사업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 군사에 걸친 제반 건설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를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1장 학병세대가 서 있던 자리)

해방 전후의 장준하는 전형적 ‘기독교 반공 우익’에 ‘국가주의자’의 면모까지 가지고 있었다. 장준하를 백범의 계보를 잇는 존재로 흔히 평가하지만, 해방과 귀국 당시의 장준하는 이범석계가 분명했다. 1946년, 이범석이 귀국해서 조선 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하자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직을 떠나 즉시 족청에 가담했다. 장준하는 족청의 핵심 기관인 중앙 훈련소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47년 장준하는 족청 내 좌익분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이범석과 의견이 맞지 않아 족청을 떠나게 된다. 이후 장준하와 김준엽 모두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했다. 장준하가 우익 반공주의 이념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였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장준하는 분명한 중도 통일 노선을 표명했다. 한반도 모든 모순의 근원이 분단에 있으며, 따라서 분단 체제의 모든 가치와 논리를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2장 장준하, 우익 반공주의에서 통일 지상주의로)

장준하와 김준엽, 두 사람의 출신 지역과 성장 환경에는 서북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기독교’와 ‘접경 지역’이라는 키워드로 말할 수 있는 이 지역에 대한민국 설계자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있었다. 차별과 착취의 땅인 서북 출신의 안창호는 봉건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삶을 전환한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를 연결고리로 해서 이광수, 김억, 김소월, 주요한 등에 이어 장준하, 김준엽, 함석헌 등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 이들과 이어져 있었다. 안창호는 수양을 통해 개인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족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보는 ‘실력 양성론’의 중심에 있었다. 교육을 받고 실력을 갖춘 사람이 일제의 협력자가 될 위험이 있었으나, 새로운 국가 건설은 이들 엘리트 집단 없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설계’에서 그 영향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안창호의 생각은 해방 이후에도 서북 출신 지식인들에게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3장 서북 지역주의와 도산 안창호)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한반도 남쪽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해방 후 한국 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잡지 《사상계》를 만들게 된다. 《사상계》는 전후 지식인의 집적체였고, 단순한 잡지 차원을 넘어 1950~1960년대 대한민국의 싱크 탱크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사상계》의 전신이 있었다. 당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일을 총괄하던 장준하가 서영훈(1923년생)과 함께 만든 기관지 《사상》이 그것이다.
서영훈은 월남 직후 이범석의 족청에 머무르는 동안 장준하를 만난 인연으로 함께 《사상》을 만들게 되었다. 《사상》이 폐간된 후, 서영훈은 1953년 적십자사에 들어가 이후 거의 평생을 적십자사에서 일했다. 대한적십자사의 중요성은, 남북한 화해와 통일 논의가 있을 때 항상 ‘매개’로 작용했다는 데서 확연히 나타난다. 한국 현대 지성사의 맥락에서 보면, 서영훈 역시 도산 안창호의 후예로 분류할 수 있다. 서영훈은 전두환 정권 시기에 흥사단 이사장이 된 후 동숭동 흥사단 본부 강당을 민주화 운동 단체 집회에 제공했고, 이 시기에 김대중, 문익환, 김근태 등 야권과 재야인사를 알게 되었다. 서영훈은 6.15 남북 공동 선언이 있던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맡기도 했다. 서영훈의 짧은 정치 활동을 여야의 진영 논리로 해석할 수 없다. 이북 출신들에게 통일은 논리 이전에 언제나 마음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무엇이었다. 훗날 함석헌과 류영모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스스로 밝힌 서영훈은 민족주의자라기보다 세계주의자였고 진정한 의미의 평화주의자였다.
장준하의 《사상》과 《사상계》 창간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백낙준(1895년생)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장준하의 중학교 선배였던 백낙준은 1928년 연희 전문 문과 과장이 되어 정인보, 최현배, 백남운 등을 지원하면서 조선학 운동을 전개했다. 일제 시기 1930년대에 전개된 이들의 조선학이 해방 후 국학의 사실상 기원이 되었다는 것은 학계의 상식이다. 백낙준은 연희 전문에도 조선어, 조선사를 교과 과정에 두도록 했고, 해방 후에는 ‘동방학 연구소’(현 연세대 국학 연구원)를 설립하여 국학 연구 전통을 이어가고자 했다. 백낙준은 세계주의를 상징하는 ‘홍익인간’을 대한민국의 교육 이념으로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4장 월남 지식인들, 《사상계》를 만들다)

김성한(1919년생)을 시작으로 《사상계》는 안병욱(1920년생), 김준엽, 양호민(1919년생), 지명관(1924년생)이 차례로 주간을 역임하면서 《사상계》 그룹은 ‘잡지를 만든다’기보다 ‘근대화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상계》의 지향은 한국 사회의 총체적 근대화에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근대화에 해당하는 것이 민주화라면, 경제적 근대화는 경제 발전(산업화)으로, 문화적 근대화는 새 문화 창조로 구체화되었다. 《사상계》 그룹이 목표하는 근대화한 국가상이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은 모델이 서구 사회였음을 뜻한다. 한국 사회에서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적어도, 서구 사회에 대한 열망과 민족주의가 하등 모순되지 않았다. 이들의 생각은 ‘민족을 위해 과거를 버리고 서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5장 《사상계》 그룹, 근대화의 모델을 제시하다)

4.19 혁명 이후 《사상계》 그룹은 제2공화국 장면 정부가 이끄는 경제 우선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대한민국 근대화 건설의 밑그림을 그렸다. 장준하가 주도한 국토건설본부에는 이만갑, 유익형, 신응균, 박경수 등 《사상계》 관련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을 비롯한 한국 지식인들은 1950년대 다른 신생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이미 연구하고 있었으며 한국 사회에 실현할 방법을 고민 중이었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은 그런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장면 정부는 실행을 준비했으며 그 직전 단계까지 갔다. 그러나 장면 정부를 통해 자신의 원대한 꿈 하나를 실현해 보던 장준하의 계획은 5.16쿠데타로 무산되고 말았다. (6장 제2공화국과 국토건설본부의 구상)

《사상계》 그룹은 처음에는 5.16쿠데타를 4.19혁명의 연장으로 보고 환영했다. 군사 정부가 ‘반미적’일까 염려하여 미국과 진지하게 중재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군사 정부의 반대편에 섰다. 군정 세력 입장에서는 당대 최고 브레인 집합이자 오피니언 리더였던 《사상계》가 자신들에게 반대 입장을 취한다면 확실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직후인 1965년, 대학 사회가 ‘연구비’를 빌미로 국가 통제에 순차적으로 편입되면서 대학에 적을 둔 교수는 지식인이 아니라 전문가의 정체성을 강요받았다. 지식인이고자 했던 《사상계》 소속 편집위원들은 대학에서 점차 쫓겨났고, 이는 결국 《사상계》의 와해를 가져왔다. (7장 《사상계》 그룹의 와해와 대학의 변화)

월남 학병세대의 중심에 선 인물 선우휘(1922년생)는 교사, 군인, 언론인을 두루 거치면서 해방 후 대한민국이 처한 결정적 국면에서 항상 현장에 있었다. 그는 일관되게 보수 성향이었으나,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그의 고향 서북 출신 사람들을 끝까지 옹호하는 지역주의 이념을 날것 그대로 보여줬다. 선우휘는 인간관계에서 정치 성향보다 인정이 중하다고 믿는 우익이었다.(8장 선우휘,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에서)

5.16 쿠데타 이후 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아 덴마크 모델을 따른 국민운동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던 류달영(1911년생)의 노력은 일정한 성과를 보였지만, 곧바로 군인 출신 국가주의자들과 충돌했다. 평민 교육과 협동조합을 통한 농민의 자율성을 강조했던 그의 뜻과 달리, 재건국민운동은 새마을운동으로 정신과 방법이 변질된 채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농심(農心)’이란 말을 창안해 사용했고 평생 정치 진영과 무관한 자리에서 한국 농촌과 농민만 생각했다. 대한민국 사회에 류달영이 기여한 것은 농촌 사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화된 ‘평생교육’ 개념을 헌법으로 제정케 하는 등 현실적, 정신적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1장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본부와 덴마크 모델)

이러한 류달영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자리 잡게 한 사람이 바로 김교신(1901년생)이다. 평교사로 마흔네 살 짧은 삶을 살았고, 수백 명 구독자가 있던 잡지 《성서조선》을 발간했을 뿐이지만, 류달영, 장기려, 이찬갑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육성함으로써 김교신은 교육자 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김교신이 이끈 《성서조선》 그룹은 “독립운동 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들”이라는 말을 일본인 형사한테 들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인 지점에 섰으며, 이들에게 신앙은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바탕 그 자체였다. 김교신은 우익 민족주의 계열에 속했지만 사고가 굳어 있지 않아 좌익을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복역 후 함경도 흥남 공장 근로자로 취업해 나중에는 ‘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리기까지 했다. (10장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기독교)

남강 이승훈(1864년생)이 설립한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는 일제 시기 민족 지성사의 성소였다. 류영모, 함석헌 등의 영향으로 무교회주의가 이 학교 주변에 뿌리를 내렸다. 이승훈의 집안 후손 이기백(1924년생)과 이기문(1930년생)은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받고 “그 나라의 말과 역사가 아니고서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는 덴마트 그룬트비의 말을 실천에 옮겨 국학계의 태두가 되었다. 이기백과 이기문의 부친 이찬갑은 해방 전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생활 단위로 하는 오산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한 사례가 있었다. 1958년 이찬갑은 충남 홍성 홍동면에서 주옥로와 함께 풀무학교와 풀무 공동체를 시작했다. 풀무학교는 덴마크 국민고등학교의 모델과 무교회주의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집약해 보여 주는 사례로 지역에 기반을 둔 학교였다. 최태사가 이끄는 오산학교 출신 무교회주의자 모임인 ‘일심회’가 뒤를 받쳤으며, 한국 최초 의료조합을 만든 장기려도 후원회를 꾸려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 홍순명(1936년생)의 헌신이 덧붙여지면서 풀무 공동체는 한국 대안 교육의 상징이자 협동조합에 바탕을 둔 마을 공동체의 이상이며 유기농업 혁명의 본산이 되었다. (12장 오산학교의 무교회주의자와 지역공동체)

학병세대 ‘진짜 우익’들의 사상적 선배인 이들을 살펴보자. 평화와 세계를 강조하고 민족 지상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항한 두 사람, 류영모(1890년생)와 함석헌(1901년생)이다. 이 두 사람이 한국 지성사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크다. 오산학교 스승과 제자였던 두 사람은 톨스토이에 뿌리를 둔 무교회주의와 동양적 사유를 융합하여 독특한 사상적 계보를 이루었다. 함석헌이 씨???이라는 말로 표현한 이 사상은 개체의 자립성과 자율성을 가장 높은 가치로 설정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에 가장 격렬한 저항 지점을 형성했다. 이러한 함석헌의 ‘씨???’이라는 말도 실은 스승 류영모로부터 온 것이었다. 류영모는 유교의 충효 논리를 국가 철학의 기반으로 삼아 ‘인륜적 국가관’을 내세운 김범부와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을 극력 비판했다. 모두가 ‘조국 근대화’를 외치던 시기에 ‘물질’보다는 ‘정신’을, 국가 이념보다 보편 윤리를 강조한 류영모와 함석헌은 확실히 이상주의자들이었으나 대한민국 사회를 나락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잡아 주는 소임만으로도 한국 지성사에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13장 국가주의 철학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함석헌과 동갑인 김재준(1901년생)은 해방 후 한국 지성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그룹, ‘한신 계열’을 이끈 선배 세대에 속한다. 캐나다 장로회의 영향에 있던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교사 김재준은 무소유주의 기독교도인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의 영향을 받은 뒤로 해방 공간에서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기독교적 건국이념을 발표하여 ‘한신’을 중심으로 전개될 진보주의 기독교의 씨앗을 뿌렸다.
김재준의 용정 은진중학교 제자인 강원용, 안병무, 문익환은 ‘한신’ 그룹의 중심이 되어 1960~1970년대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엄청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최고의 구약 신학자였던 문익환(1918년생)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당대 제3세계 국가들에서 일어난 탈식민 운동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아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 운동을 주장했다. 안병무(1922년생)는 1973년에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한국적인’ 신학을 창출했다. 그는 전태일 분신 사건을 통해 살아 있는 민중을 보았고, 이 민중 ‘사건’ 안에서 예수의 현신을 보고 세계 신학계에 ‘학문’으로 알려진 민중신학을 개척했다. (14장 한신(韓神)을 만든 김재준과 제자들)

강원용(1917년생)은 스승 김재준의 경동교회를 물려받아 현장 목회자로 활동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 활동을 통해 유신 정권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세계 기독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사랑은 정의를 실현할 사회 구조 자체의 개혁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기독교 사회 운동의 길을 개척했다. 강원용은 독일 교회의 지원을 받아 1962년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사회 각 부문의 중간급 지도자와 운동가를 기르는 ‘중간 집단 교육’ 운동에 나섰다. 김세균, 신인령, 김근태, 천영세, 이우재, 한명숙, 윤후정 등 진보 진영 지도급 인사들이 교육 담당자이거나 교육생 출신이었다. 여성학이 제도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여기에서 생겨나고, 박노해, 법륜 등이 교육을 받아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강원용은 ‘중간 집단’의 기능을 ‘약자엑 힘을 주고 억압자에게 압력을 가하는 집단’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 통합 견지에서 ‘중간 집단 교육’을 구상했으며, 이러한 보수적 성향은 진보 성향 ‘월남’ 기독교인의 기본 성격이기도 했다. 현장 목회자이면서 탁월한 조직가이자 활동가였던 강원용은 ‘한신’ 그룹에서 주목해야 할 첫째 인물로 꼽힌다. (15장 통합의 중재자 강원용)

한국 가톨릭계의 거목 김수환(1922년생)과 지학순(1921년생)도 학병세대에 속한다. 두 사람은 교회 현대화를 선언한 제2차 바티칸 공회가 있은 직후, 교구를 책임지는 주교가 되었다. 두 사람은 바티칸 공회에서 채택된「사목 헌장」을 한국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교회가 사회 참여를 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절대적인 의무”라고 주장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사회 참여를 이끌었다. 유신 선포 다음해 김수환은 “인간의 근본적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때에는 그것은 이미 법으로 부를 수 없다”면서 자연법 사상에 근거해 유신헌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교황청 회칙에 기초한 김수환의 비판은 로마 가톨릭에 철저히 충실한 원칙주의자다운 면모였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확고한 비판 의식을 품었다는 점에서 1950년대 《사상계》 지식인들의 논리와 맥을 같이했다. 강원도 원주를 가톨릭 평신도 운동의 성지로 만든 지학순은 신앙을 생활 운동의 형태로 실현하려 했다. 그는 장일순과 힘을 합쳐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펼쳤으며, 이는 훗날 한살림 운동으로 이어졌다. 지학순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될 때 ‘양심선언’을 남겼으며, 이는 민주 투사들에게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16장 가톨릭의 학병세대, 김수한과 지학순)

천관우(1925년생)는 마흔 살이 못 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을 정도로 언론인으로서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가 한국 언론사에 기여한 가장 큰 점은 ‘언론의 자유’를 언론인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 내는 전통을 수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문 지면에서 경영주의 입김이 커지던 1960년대 말, 《신동아》 필화 사건을 계기로 사주가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강제로 《동아일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당한’ 기질의 천관우는 언론인의 역할이 힘들어지자 민주화 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창립될 때 천관우는 공동 대표 3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1974년에는 유신 체제 아래 최대 재야 기구라 할 수 있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 대표위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학계에 직접적으로 몸담지 않았지만 천관우는 이미 학부 졸업 논문만으로 이름을 날린 역사학계의 기린아였다. 실학을 근대의 맹아로 해석한 그의 입장은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사의식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이후 아주 오랫동안 한국학의 주류로 남았다. (17장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문학계의 학병세대에 속하는 조지훈(1921년생)과 김수영(1921년생)을 저자는 한국 인문 정신의 두 원형으로 꼽는다. 조지훈은 경북 영양의 유림 명가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자랐으며, 일제에 일절 빚진 바 없는 몸이었기에 늘 당당했다. 한국 고유의 전통을 탐구하고 민족 문화를 일으켜 세우려고 한 그는 ‘선비다운 우국경세의 붓’을 들어서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수영은 자유정신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자유주의를 글로 보여 준 인물이었다. 가장 진보적일 때조차도 민족주의란 자유를 제한하는 위험을 품고 있음을 김수영은 꿰뚫어보았고, 자유와 사랑과 혁명이 남북통일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자유와 사랑은 동의어였고, 사랑이 없다면 진보도 없었다. 정통 보수주의자 조지훈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김수영은 현대 한국의 정신사에서 다른 모든 지성을 대표해 보수 대 전위, 전통 대 현대의 원형을 보여 준다. (19장 조지훈 대 김수영, 한국 인문 정신의 두 원형)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꾼 학병세대’로 이 책의 첫 장에 나온 김준엽(1920년생)은 ‘한국 우익의 기원’으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기록한다. 일본군을 최초로 탈출해 평생의 동지 장준하를 이끌어 충칭 임시정부로 인도했고, 해방 직전 광복군 장교가 돼 이범석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국가를 재건하던 1950년대 후반 《사상계》 그룹의 핵심으로 4.19 혁명의 격동기에 《사상계》 주간으로 여론을 주도한 김준엽은 한국의 ‘정통’ 우익을 대표한다. 그는 임시정부 환국 때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아 중국 현대사를 공부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학계에 중국 연구의 기초를 놓았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통해 한중 관계에 뚜렷한 기여를 한 점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힘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권력으로 남아 있는 친일 세력에 결벽증을 보이고, 이후 이어진 군사 정권에 명백한 불의를 드러낸 김준엽은 1987년 개정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장을 명기할 것을 관철시킴으로써 ‘정통 우익’의 감각을 현대사에 새겨 넣었다. (20장 한국 우익의 기원)
작가소개
 
저자 : 김건우
196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전대학교 문학역사학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문학을 한국학이라는 더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면서, 해방 후 지성사와 문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상계와 1950년대 문학』, 『혁명과 웃음』(공저) 등이 있다.

목차
 
서장 해방된 청년들,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는 누구인가│‘세대’의 문제│‘남쪽’을 선택한 사람들

1 학병세대가 서 있던 자리
새 국가 건설의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장준하와 김준엽, 일본군을 탈출하다│광복군의 적통, 우익 민족주의의 적자

2 장준하, 우익 반공주의에서 통일 지상주의로
임시정부 청사 난입 사건│우익 반공 국가주의의 선봉에 서다│반공에서 통일 지상주의로 이동하다

3 서북 지역주의와 도산 안창호
차별과 착취의 땅 서북에서 새로운 국가상이 싹트다│서북파와 기호파의 갈등│개인의 정신 개조를 통한 사회 변혁

4 월남 지식인들, 《사상계》를 만들다
장준하와 서영훈, 《사상》을 만들다│《사상》의 폐간과 백낙준의 후원│서영훈, 장준하를 떠나 적십자사로

5 《사상계》 그룹, 근대화의 모델을 제시하다
《사상계》 그룹, 서북 출신에 편중되다│《사상계》가 꿈꾼 근대화│미국의 지원과 유도

6 제2공화국과 국토건설본부의 구상
《사상계》, 현실로 뛰어들다│경제개발계획과 국토건설본부│5·16 이후의 경제개발계획은 독자적인 것인가

7 《사상계》 그룹의 와해와 대학의 변화
사상계 그룹, 미국과 군정의 중재를 시도하다│《사상계》 그룹의 와해│대학에 뿌리내린 국가의 감독과 통제

8 선우휘,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에서
작가이자 기자이자 군인│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은 지역주의자│“나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다”

9 정권 참여 지식인들과 정치 참여의 논리
“무조건 반대냐, 건설적 협력이냐”│임방현의 근대화 인텔리겐차론│이데올로그가 된 지식인들

10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기독교
일본 기독교의 지성, 우치무라 간조│《성서조선》과 무교회주의 신앙│노동자들의 아버지가 되다

11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본부와 덴마크 모델
최용신 전기 집필과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동양의 덴마크’를 꿈꾸다│재건국민운동본부 해체, 그 이후

12 오산학교의 무교회주의자와 지역공동체
함석헌, 오산학교에 무교회주의 신앙의 씨를 뿌리다│오산의 학병세대, 역사학자 이기백│이찬갑, 주옥로의 ‘위대한 평민’│공동체의 기반, ‘조합주의’

13 국가주의 철학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류영모.함석헌의 독특한 계보│김범부와 박종홍의 국가주의 철학│노장 사상에 입각한 국민 윤리 비판

14 한신(韓神)을 만든 김재준과 제자들
함경도와 북간도에 뿌리 내린 진보적 기독교│김재준, 기독교적 건국이념을 제시하다│용정 은진중학교의 제자들, 강원용, 안병무, 문익환

15 통합의 중재자 강원용
세계교회협의회의 거물이 되다│크리스찬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해방기부터 비롯된 중도 지향의 삶

16 가톨릭의 학병세대, 김수환과 지학순
가톨릭의 혁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추기경 김수환, 한국 가톨릭을 바꾸다│지학순, 원주를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만들다

17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자유 언론의 전통을 세우다│천재적 역사학자의 면모│쓸쓸한 말년의 삶

18 지식인들, 민족주의로 이동하다
국학계의 한국사 시대 구분 논의│‘한국적인 것’을 찾아서│민족주의, 아군과 적의 경계를 흩트리다

19 조지훈 대 김수영, 한국 인문 정신의 두 원형
조선 선비, 전통적 인문주의자 조지훈│보수주의자의 현실 정치 비판│급진적 자유주의자 김수영│한국 인문 정신의 두 원형

20 한국 우익의 기원
한국의 정통 우익, 김준엽│친일로부터 자유로운, 그러나 제국이 키운 세대│새 나라의 설계, 일본에서 미국으로│종교인들, 이념의 숨통을 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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