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AFSC.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AFSC. Show all posts

2020/10/15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이웃종교의 향기 신년기획 1]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
승인 2014.01.07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에 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하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2020/02/04

Floyd Schmoe Quakers in Korea



Floyd Schmoe


Related Articles
Quakers in Korea

Floyd Schmoe

1895 - 2001

A sixth generation Quaker, Floyd Schmoe was born in Kansas but lived most of his life in the Pacific Northwest of the USA. He was both a forest ecologist and a marine biologist. In the course of relief work carried out in six separate wars, he was shot at, but never carried a gun.

In 1917, he was studying forestry at Seattle University when the US entered the First World War. Schmoe applied to the newly formed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 for alternative service in Europe. He briefly joined a Red Cross ambulance unit as a stretcher bearer, then spent fourteen months building pre-fab homes and converting army barracks to house war refugees.

Returning to the US, he completed his studies and was hired as a park ranger at Mount Rainier in Washington State. He wrote a regular newsletter describing the wildlife and flora, and in 1924 became the park’s first full time naturalist.

In 1928, he joined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as an instructor in forest biology, while at the same time pursuing a master’s degree in marine biology.

At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rld War, he organised demonstrations against American involvement in the war and worked with the AFSC to help Jewish refugees fleeing Nazi occupied Europe. After 1942, he became particularly concerned with the plight of Japanese Americans interned following the attack on Pearl Harbor. He gave up his academic career to head a new regional office of the AFSC. 

 One of his first projects was to help Japanese American students to transfer to schools further east where they were allowed to continue their education. He and his staff worked alongside other church leaders inside the internment camps and also acted to protect the property of those interned. His work led to an FBI investigation, which labelled Schmoe a ‘rabid pacifist.’

Schmoe particularly abhorred the dropping of the first atomic bomb on Hiroshima, calling it "an atrocity, even in warfare." Believing that building new houses for those whose homes had been bombed was a more meaningful response than any apology, he tried to persuade the AFSC to sponsor a house-building project. When that failed, he set about organising his own project, Houses for Hiroshima.

Finding it difficult to get permission to work in Japan, he moved initially to Hawaii, where he ran an AFSC programme to provide food and clothing to Japan. In 1948, he visited Japan for the first time, reviewing the devastation in Hiroshima and bringing with him 250 goats to provide milk for hospitals and orphanages.

Having raised several thousand dollars from friends and family, Schmoe and his wife brought building materials, food and medical supplies to Hiroshima in 1948, and with the help of local volunteers and craftsmen, built houses for four homeless families. Over the next four years, Schmoe helped build twenty houses in Hiroshima and a further twelve in Nagasaki, housing almost a hundred families.

In 1953, Schmoe heard about the refugee crisis in Korea resulting from the war there. He sailed from Japan, bringing building materials and building expertise, and set up Houses for Korea. Between 1953 and 1956, Houses for Korea worked with local people to build homes, secure water supplies, repair roads, and build and run a free medical clinic in Kyonggi Province.

In 1956, following the nationalisation of the Suez Canal, 4000 families from Port Said in Egypt were displaced, some of whom were resettled in the Sinai Desert. Schmoe organised Wells for Egypt, raising money for plants and a pump for a well, and helping to plant an orchard.

After 17 years working largely as an unpaid volunteer, Schmoe retired in 1959 to write. In 1987, at the age of 92, he began work with colleagues, clearing land at the University of Seattle to create a Peace Park. The next year, he travelled to Tashkent in Uzbekistan to help build a peace park there, before going on to Japan to receive a Peace Award from the Hiroshima Peace Centre. Schmoe used his award money to fund the completion of Seattle Peace Park, which opened on Hiroshima Day, 6th August 1990.

Schmoe died in 2001, aged 105.
Print this article




Further Reading and Credits
EXTERNAL LINKS

1997 Seattle Times article about Floyd Schmoe, then aged 101
Essay by Kit Oldham, on HistoryLink.org, including audio interview with Floyd Schmoe

Image reproduced by kind permission of the copyright holders Washington State Historical Society. It can be found at http://columbia.washingtonhistory.org/magazine/articles/2009/0209/0209-a4.aspx For non commercial use only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In the aftermath of the Korean War (1950-53), The Friends Service Unit (FSU) – a joint arm of the British Friends Service Council (FSC) and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 – provided humanitarian and medical aid to refugees and others affected by the war.
War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broke out in 1950.  By January 1951, six million people (one third of the Korean population) had become refugees.  Thirty thousand children were in orphanages and as many again were without shelter.  The UN was providing food relief and carrying out mass inoculations against diseases such as smallpox and typhoid.  Nevertheless, tuberculosis was rife.
In October 1952, the UN invited civilian organisations, including the Quakers, to help with relief efforts. Jonathan Rhodes from the AFSC and Lewis Waddilove from FSC visited South Korea, and identified Cholla Pukto, where there were two hundred thousand mainly North Korean refugees, and Kunsan, where there were thirty three thousand, as areas where Friends could be of most use.
In July 1953, a ceasefire was signed, and Frank and Patricia Hunt arrived to set up the Friends Service Unit, setting up base in Kunsan.  In October, an international team of doctors, nurses and a physiotherapist arrived from England, Ireland, Scotland, Sweden, Norway and the USA. They lived in a Korean house and operated out of the provincial hospital.
Kunsan Hospital had been left unfinished after the Japanese withdrawal from Korea and had then been bombed by the Americans.  There was little equipment, no heating, no running water and only intermittent electricity. The AFSC shipped relief supplies of food, medicine and bedding. Social workers from the USA and Norway began to assess welfare needs. Warm clothing and bedding were distributed by local volunteers.  Milk stations were set up serving hot milk and vitamins to children and pregnant women.
Over the winter, the priority lay in dealing with malnutrition.  However, plans were being drawn up for the rehabilitation of refugees.  American Quaker Floyd Schmoe, who had been helping with reconstruction work following the bombing of Hiroshima in Japan, set up Houses For Korea - a building project that provided refugees with the materials and training to construct their own houses.  Schools were started in the camps, with Korean teachers paid for by the FSU.  Adult literacy classes were started for war widows, and games of volleyball and basketball were organised.
Sewing machines were brought, and the war widows opened tailoring shops, a dry cleaners, and a business making soya bean curd.  Goats, bees and seeds for planting allowed the refugees to supply some of their own food.
In cooperation with the UN, Friends ran a training school for Nurse Aides.  They restored the Pathology lab at the hospital and trained lab technicians. David Ward, the physiotherapist, helped to fit prosthetics, made by local craftsmen, to those who had lost limbs in the war. A nurse, Ann Sealey, and a doctor, Jean Sullivan, started an antenatal and midwifery service.
The FSU started an outpatients’ service for sick children and opened a children’s ward in the hospital, where the children were looked after by a House Mother.  In some cases, children had been abandoned by their families and Friends arranged adoption with families in America.
The Korean authorities had little money to pay hospital staff and locals’ salaries were often paid in part by the FSU.  Throughout the time the FSU operated, the AFSC continued to provide vital medical supplies.
The FSU continued to operate until 1957, under the leadership first of Geoff Hemingway (1953-56) and then under Robert Grey.

Quakers in Korea



Quakers in Korea





Related Articles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Floyd Schmoe
Ham Sok-Hon

Quakers in Korea

The Quaker presence in Korea dates from the end of the Korean War (1950-53). In the aftermath of the war, The Friends Service Unit (FSU) – a joint arm of the British Friends Service Council and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 provided humanitarian and medical aid to refugees and others affected by the war.

From their base in Kunsan, the FSU initially tackled problems of severe malnutrition. Later Houses for Korea was set up by AFSC’s Floyd Schmoe, providing refugees with the materials and training to construct their own houses. Schools were started in the camps, with Korean teachers paid for by the FSU. Adult literacy classes were started for war widows, and games of volleyball and basketball were organised.

The FSU was heavily involved with training local Korean doctors and nurses. They set up a physiotherapy unit to help war amputees, and ante-natal and midwifery service and both out-patient and in-patient services for sick children.

When the FSU was wound up, at the end of 1957, local Koreans who had been working with the Quakers wanted to continue their connection with Quakerism. With the help of American Quaker families living in Seoul (in particular, Reginald Price and Arthur Mitchell), a group began to meet regularly for silent, unprogrammed worship, and for study and discussion.

The first Quaker text to be translated into Korean was Rufus Jones' Quaker's Faith in 1960. It watranslated by Yoon Gu Lee and printed for distribution among members.

Seoul meeting was eventually recognized as a monthly meeting in 1964 under the care of the Friends World Committee for Consultation (FWCC), and in 1967 moved into its own Meeting House. As one member of the meeting was blind, the meeting became involved in the welfare of the blind. Some members gathered periodically to transcribe religious articles into Braille and a work camp was organized to repair a road near one of the homes for the blind.
---
One Ko
rean who had first encountered Quakers through their work in Kunsan was the human rights activist, Ham Sok Hon. Ham was impressed by the Quakers’ pacifism, egalitarianism and their active participation in questions of social justice. Ham started to attend Seoul Quaker meeting and became a member of the Society of Friends in 1967, after attending the Friends World Conference in North Carolina.

“You were already a Quaker before you became one,” an American Friend, Arthur Mitchell, told him.

Ham spoke out against dictatorship and injustice in South Korea. He carried out a hunger strike in 1965, was imprisoned in 1976 and 1979, and was placed under house arrest in 1980. South Korea finally achieved full democracy in 1987. The following year, when the Seoul Olympics were held, Ham was selected to be the head of the Peace Olympiad, which drew up a declaration calling for world peace.

Under Ham’s leadership, and with the support of Mary and Lloyd Bailey, who stayed in Korea during 1983/4 under the auspices of the Friend in the Orient Committee of Pacific Yearly Meeting and continued to correspond with the meeting for many years after, Seoul Meeting flourished. Although membership declined after Ham’s death in 1989, it has revived again since 1998.

Conscientious objection has been a key issue for Quakers in South Korea. In a country still technically at war with North Korea, compulsory military service is considered essential and for many years COs had no option but to serve or to go prison. QUNO (Quaker United Nations Office) and FWCC were among those who campaigned for some form of alternative service to be offered, and this was finally implemented in 2007.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has maintained a presence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They currently run an agriculture programme, helping farmers introduce techniques of rice cultivation adapted to the short growing season in DPRK.

AFSC continues to campaign against North Korean nuclear tests, while warning that isolating or ignoring North Korea is not only unrealistic but dangerous.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불교포커스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불교포커스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이웃종교의 향기 신년기획 1] 퀘이커 서울모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승인 2014.01.1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www.catholicnews.co.kr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승인 2014.01.07 11:17:40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에 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2020/01/09

한국 퀘이커 이행우 -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 오마이뉴스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 오마이뉴스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인터뷰]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 이행우 선생

11.06.18 15:50l

최종 업데이트 11.06.18 16:27l

김성수(wadans)

 시상식에서 인사하는 이행우 선생
▲  시상식에서 인사하는 이행우 선생
ⓒ 곽봉수




번 돈 모두 한반도통일운동에 써



1985년 나는 함석헌 선생님을 쫒아서 서울퀘이커모임에 처음 나갔다. 나가고 얼마 안 되어서 한 중년의 재미동포가 서울퀘이커모임을 미국에서 방문했다. 이 중년의 재미동포가 모임에 나올 때는 건장한 사람들이 모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또 모임 집 전화도 잡음이 심했다. 전화도청을 하는 것 같았다.



서울퀘이커모임에 당시 재야인사 함석헌 선생님이 매주 나오시고 전두환 정권하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이 중년의 재미동포는 한 번 서울퀘이커모임집에서 '북한방문기'를 이야기 해주었다. 달변은 아니었고 말씀은 어눌했지만 그 내용은 놀라웠다. 그 중년의 재미동포가 이행우 선생님이고 그와 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이행우 선생님은 매년 한국을 방문해서 당시 '철없는' 나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행우 선생님이 1968년부터 미국에 사셨으니 그가 미국에 산 지는 43년이 된다. 미국에서 컴퓨터전문가로 직장생활을 하셨고 65세가 정년인 미국 직장에서 2003년인 73세에야 현업에서 은퇴했으니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집 한 채 가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34년간 컴퓨터전문가로 일한 그지만 가진 재산도 없다.



그는 34년간 컴퓨터전문가로 일하면서 모든 휴가와 돈을 한반도평화통일운동에 썼다. 휴가를 내서 단란하게 가족과 여행가는 대신 그는 자비를 털어 한반도문제를 분석한 보고서를 냈고, 한국의 민주화운동가를 도왔으며, 미국정치인들과 관리들을 수시로 방문했다. 또 중국, 북한, 유럽을 방문해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긴장완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문자 그대로 '공생애'를 산 것이다. 그래서 그를 잘 모르는 한 일본인은 이행우 선생이 '전업로비스트' 인 줄로 오해하기도 한다.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사람



이행우 선생님은 달변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석력과 종합력, 거시적 미시적 시각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보통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은 종합력이 떨어지고, 큰 그림을 잘 보는 사람은 세밀한 것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이행우 선생은 이 둘을 다 잘한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진실함'이다. 지난 6월 17일 이행우 선생은 제17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지난 1주일간 이행우 선생님을 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자주, 수시로 만났다. 그를 만나면서 이행우 선생님이 아름다운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목걸이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 여인의 목에 당당하게 걸릴 수 있는 것은 그 진주 하나하나 속을 관통하여 이어주는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 때문이다. 다음은 이행우 선생님과 지난 일주일간 만나며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먼저 수상을 축하드린다. 그동안 한국 민주화운동, 남북한 긴장완화, 한반도 평화통일에 공헌하셨기에 이번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았다. 1974년 한국민주화운동인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결성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구체적으로 어떻게 민주화운동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도왔는가?

그분들을 위해 송금을 해 주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민주화운동인사들이 거의 수입이 없는 실업상태였기 때문에 재미동포들에게 모금활동을 하여 국내에 돈을 보냈다. 그러나 모금과정에 기부자 이름이 드러나면 동포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동포들 중엔 이에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후원금 낸 분들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장부나 재정보고서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시카고의 김00'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 박정희 정권의 견제가 있었을 텐데 송금은 어떻게 했나?

초대회장 김순경 박사가 가톨릭교도인 관계로 미국에 있는 가톨릭 메리놀 선교회를 이용했다. 한국에 그 지부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 메리놀 선교회에 돈을 기탁하면 거기서 한국 메리놀 선교회로 보냈고 한국 선교회에선 그 돈을 지학순 주교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지 주교가 수감자나 가족에게 돈을 전달했다. 그러다 보니 수혜자 중엔 가톨릭교도가 많았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 다음번엔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문익환 목사에게 보냈다. 그러면 이번에는 개신교 수혜자가 많았다.



나중엔 함석헌 선생에게 보냈고 함석헌 선생이 지인을 통해서 대체로 균형 있게 수감자나 가족에게 돈을 전달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분들 중에서도 특히 감옥소 앞에서, 시골에서 면회 온 수감학생 가족들에게 직접 돈을 쥐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수혜자 중엔 동아투위 기자나 해직교수 등도 있었다. 기부자와 수혜자 명단 등 기록을 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 보낸 액수는 얼마나 되나?

당시 한국에서 가구당 한 달 생활비가 약 100불 정도 필요했다. 최대 많이 보낸 것은 1년에 약 8천불정도였다.



- 북한은 반미감정이 팽배한 국가다. 그리고 AFSC는 미국의 NGO 단체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단체다. 어떻게 이러한 예외적인 일이 가능했는지, AFSC는 어떤 단체인가?

AFSC는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의 약자로 미국퀘이커교 봉사단체다.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고 구호봉사 활동을 폈다. 이를 평가 받아 AFSC는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러한 경력이 북한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AFSC가 북한과 교섭하는 데 7-8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일본 동경에 있는 AFSC 지부가 조총련을 통해서 북한과 교섭하는 한편, 동시에 뉴욕에 있는 퀘이커유엔사무소(QUNO)가 북한유엔대표부를 통해서 북한과 교섭을 시도했다. 이러한 과정에 7-8년이 소요됐던 것이다.



- 1986년 한겨레미주홍보원을 설립, 영문 'Korea Report'를 발간하여 대미홍보와 국제연대 활동을 하셨고, 1987년엔 미국의 지인들과 한국지원연대(Korea Support Network)를 결성,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홍보하셨다. 당시 미국사회나 의회의 반응은 어땠나?

우리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엔 한국문제를 분석한 영문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미국 고위관리, 정치인, 학자들이 아주 흥미로워했다. 당연히 우리 보고서는 정말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다. 수신자는 미국의 모든 국회의원, 고위관리, 연구소 연구원들이었다.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엔 계간으로, 다음엔 격월간으로, 월간으로 발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인문사회학을 공부한 한국 분 4-5명이 거의 전적으로 상근하다시피하면서 이 보고서 발간에 온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 공병우 박사, 임창영 박사, 브루스 커밍스 교수, 정경모 선생 등이 고문으로 애써주셨다. 당시 한국 상황에 대한 영문분석 자료가 없는 풍토에서 우리가 발간한 보고서가 미국사회에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북한대표들은 미국 내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다. 1988년에 당시 미국주재 북한유엔대표가 선생님 댁에서 머물렀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북한대표들은 미국 내에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뉴욕 콜럼비아 서클 밖 25마일 이상을 벗어날 경우 미 국무성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동의 제약이 많다. 그러나 아무래도 퀘이커들이 10여년 이상 북한과 미국 양국정부로부터 동시에 신뢰를 쌓아서인지 미국정부에서 허가해 주었다. 북한대표들은 우리 집에서 2박 3일을 지내며 여러 가지 대화도 나누었고 이곳저곳을 방문했다.



1989년 문규헌 신부와 함께 방북



- 1982년 AFSC 대표로 방북하셔서 한반도 통일문제, 조미관계 개선문제, 북조선대표단 초청문제 등을 협의하셨다. 그리고 1989년엔 방북한 임수경 학생이 문규헌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께서도 문 신부와 함께 방북하신 것으로 안다. 그 때 상황을 좀 말씀해 달라.

문규현 신부 방북 이전에 개신교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도 방북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당시 문 신부는 미국에 유학중이었다. 그래서 한국 가톨릭에서는 미국에 있는 문 신부를 북에 보내고자 했다. 그래서 문 신부와 한국말이 유창한 미국인 조셉 베네로스 신부(한국이름 배종섭)가 가기로 했는데 초행길이라 북한에 한번 가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 함께 가자는 요청이 왔다. 그래서 문 신부, 조셉 베네로스 신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함께 방북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가톨릭교인 임수경 학생의 판문점 귀환 일이 발생했고, 이 일로 문 신부가 다시 방북하여 임수경 학생을 데리고 판문점을 넘어 오게 되었다.



- 89년 당시 북한에 대한 인상이 어땠나?

82년 방북 땐 정말로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생각하는 북한 인민이 많았다. 그런데 89년엔 사회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보였다. 북한을 지상낙원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 1990년 1차 범민족대회로 세 번째 방북하셨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것으로 안다. 남한정부는 현재까지도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여긴다. 남한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한 입장은?

87년에 문을 연 평화연구소의 조성우 소장이 세계평화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한 데서 범민련이 시작되었다. 재야 평화세력은 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세계평화대회를 조직, 성균관대에서 개최했다. 이런 흐름에 맞불을 놓으려고 노태우 정권도 올림픽 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재야의 세계평화대회가 "범민족대회"를 제안했고, 89년에 남·북·해외(미주, 유럽, 일본) 등이 각각 추진본부를 결성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90년 6월에 제1차 실무회담이 베를린에서(해외와 북), 7월에 제2차 실무회담이 서울에서(해외와 남), 8월에 제3차 실무회담이 평양에서(해외와 북) 열렸으며, 드디어 8월 15일에 연세대(남)와 판문점(해외와 북)에서 각각 범민족대회를 개최했고, 여기서 "범민련"을 제안하고 합의하여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부가 태도를 바꿔 범민련을 이적단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조치다.



- 노태우 정권이 퇴진하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동포운동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미주동포전국협회"를 결성하여 미 의회 로비, 북과의 교류, 동포사회 홍보 등의 활동을 했는데, 이 협회의 결성목적과 당시 느낀 소회나 애로사항은?

미주동포전국협회는 미국 입법부와 행정부를 설득해 한반도 긴장완화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과거 중국의 '죽(대나무)의 장막'을 개방, 포용할 때라든가 월남전 종식 때라든가 미국 퀘이커들이 중재자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 힌트를 얻어 남북문제에도 미국 퀘이커들이 중재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남북 정책결정자들을 만났는데 양쪽의 의견이 같았다. 그 의견의 요점은 재미동포는 미국정부를 설득하는 활동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 측에서도 미국정부를 설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양쪽의 의견이 이렇게 같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주동포전국협회였다. 협회 결성 시 네 가지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다. 표면적인 순서로 보면 먼저 재미동포의 인권과 권리 신장, 미국 내 우리 문화의 보급, 미국 내 소수민족과의 연대와 평화 활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북통일 기여 등이었다. 미국정치인들에게 내용적으로는 로비를 했으나, 로비스트로 등록을 하면 비용이 많이 들어서 등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교육과 홍보를 위해서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만났는데, 의외로 미국 정치인들이 잘 호응해 주었다.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이행우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 이행우

관련사진보기





- 1995년 미주평화통일연구소를 설립했고, 1998년에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을 설립했는데, 이 기구들의 설립이유, 주요역할, 성과가 무엇이었나?

미국운동의 중심과제가 통일문제로 옮아가자 이론의 개발이 절실했다. 이에 따라 1995년에 미주평화통일연구소(98년 통일학연구소<한호석 소장>로 개편)를 설립했다. 또 북미주조국통일동포회의(1998년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으로 확대)를 결성했다. 말한 대로,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북 및 해외 동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다.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은 주로 남북의 통일운동단체들과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 AFSC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고, 그래서 한국인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천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니다. 추천하지 않았다. 퀘이커들은 정치인을 노벨평화상후보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79년과 85년엔 함석헌 선생을, 1992년엔 문익환 목사를 추천한 바 있다.



- AFSC 아시아지역위원회, 국제실행위원회, 예산위원회 위원으로 24년간 활동 하였고, 또한 앞에서 말한 단체 등을 통해 미국 사회의 행정부, 입법부에 대화통로를 마련하신 바 있다. 한반도 통일문제, 북한문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꾸준히 일해 오면서 대북관계에 대해 미국정치인들과 고위관료들의 대응방안이나 태도를 보셨는데 어떻게 평가하는가?

공화당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민주당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 이들은 다 한반도 문제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다. 공부를 많이 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남북의 평화통일을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냉철한 국익 우선주의자들이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이들 손에 놀아날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한국이 잘되는 길이 미국이 잘되는 길이고 미국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다.



"미 한반도전문가들 자국이익 우선...정신 차려야"



- 선생님의 노력과 주도로 2004년 미 의회에서 1차 남북미 3개국 의원포럼을 개최했고, 그 후 2009년과 2010년에도 2, 3차 남북미 3개국 의원포럼을 개최했는데 그 주요내용은 무엇이고 포럼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미 의회의 협조 또는 상원 외교위원장 초청 형식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포럼을 여러 차례 조직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2004년 7월 20일 미 의회에서 처음 열린 3개국 의원포럼에는 남측에서 이창복, 장영달, 강혜숙, 김재윤, 서병열 의원, 북측에서는 박길연 대사, 한성렬 부대표, 미국 측에서는 Joe Biden(현 부통령), Curt Weldon 의원, 민간전문가로서는 Donald Gregg(전 주한 미대사), Don Oberdorfer, Marcus Nolans, Jack Prichard, Richard Solomon, Jon Wolfsthal, 박한식 등이 참여했다.



2009년 9월 14일과 2010년 7월 27일의 포럼에는 한국 측에서 백낙청, 오재식, 박원순, 이문숙, 김상근, 정현백, 김연철 등이, 미국 측에서는 Eni Faleomavaega, Joel Wit, John Feffer, Frank Jannuzi, Keith Luse, Scott Snyder, Karin Lee, J.J. Ong, John Park, Dennis Halpin, 오인동 등이 참여했다.



행사를 일부러 의회에서 하고 정치인들을 초대했는데 우리 의도는 한반도 문제가 언론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우리 계산은 적중했다.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참여하는 포럼이라 미국, 한국, 중국, 일본의 언론인 40명 정도가 와서 취재경쟁을 했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언론에서 우리 포럼을 크게 다루었다.



또 다른 우리의 목적은 미국 입법부를 통해 대북강경 정책을 취하고 있던 행정부를 견제하고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그 덕인지 당시 경색되어 있던 북미관계가 완화되고 북미 간 대화창구 개통에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미 의회와 정책담당자에게 로비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과 또 보람은 무엇이었나?

미국 관리와 정치인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정치인들은 '돈'이나 '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이 둘 다 없기 때문이다. 내가 취한 방법은 그들을 수시로 방문하는 것이었다. 1년에 20회 이상 의회를 방문한 적도 있다. 그러다보면 그들과도 친해진다. 휴대폰 번호, 나중엔 집전화번호도 준다. 그것은 언제든지 심지어 주말에 연락해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몇 년 걸린다. 아마 내 나이가 자기 아버지 나이라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그런 것 같다. 하여간 나중에 친해지고 맘도 통해서 남북문제 이야기를 하면 진지하게 경청한다. 보람은 바로 그들에게 남북문제를 이해시키는 것이고 그들이 내 말에 동의할 때다.



- 선생님 좌우명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주고 싶은 조언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절대로 미국이나 주변 나라들이 남북을 위해 나서지도 않고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를 규정해온 어설픈 국제관계론이나 한미혈맹론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외세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나서서 우리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반드시 풀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에 우리의 힘과 능력을 확인했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 우리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 위대한 힘과 의지를 다시 찾아 발휘해야 한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중요한 까닭이다. 보수특권정당의 집권은 그들의 본색을 확연히 드러냈다. 평화와 통일지향적인 세력이 다시 집권하여 10년 동안 발전시켜온 역량과 성과를 되찾아 확실하게 구조적으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나의 좌우명은 역행(力行)이다. 힘써 행하라! '지금 여기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당장 여기서 필요한 일을 성심성의껏 부족한 대로라도 온힘을 다 해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행우 선생의 미주민족운동의 오랜 동지이며 시사평론가인 은호기 선생의 말로서 이 기사를 맺는다.



"이행우는 검소하고 성실하며, 옳은 일에 대한 주장을 확실히 하면서도 타협점을 찾는데 인색하지 않다.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일하는 편이며, 일의 성과를 나타내는 데에는 매우 절제적이다. 그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퀘이커 교인의 정신이기도 하다."



** 이행우 선생: 1931년 1월 3일 전북익산 생. 1955년 서울대 물리과대학 수학과 졸업, 그 해에 해군장교에 임관,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 교수. 1957년 군복무를 마치고 이리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 한양대학교 출강. 종교는 퀘이커교. 1968년 미국퀘이커교단 초청으로 유학, 퀘이커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에서 일 년간 퀘이커교에 대하여 공부.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 American Bank(1969-1979), Burroughs Corp.(1979-1980), Polymer Corp.(1980-1986), Delaware Investments(1986-2003) 등에서 Systems Analyst로 근무.


16 한국퀘이커 -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고기교회 -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하늘기차 | 2016.11.29 18:48 | 조회 1068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하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평화교회 퀘이커로부터 평화목회에 대한 단상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필자가 퀘이커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중반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이행우 선생님(현재 자주평화통일미주연합 고문)을 통해서이다. 자주연합단체의 활동을 하면서 이 선생님을 통해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활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해외봉사사무실인 미친우봉사회(AFSC)에도 들려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관심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이들을 퀘이커 학교(Friends School)에 보내면서 거기서 폭력에 대응하는 철저한 교육, 아이들 인격존중과 평등에 대한 관점이 교사나 프로그램 속에 배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위가 끝나가는 마지막 해 2001년 나 자신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선생님을 통해 필라델피아 남쪽, Wallingford에 소재한 퀘이커 교육기관이자 수련공동체인 펜들힐(Pendlehill;www.pendlehill.org)에서 가을학기를 보내게 되면서 평화교육에 관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생활하면서 내게 남겨진 인상적인 몇 가지 체험과 신학적 관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본인이 펜들힐에 들어가고 나서 두 주 만에 9.11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 날은 논문 최종 본을 내는 날이어서 아침에 템플대 캠퍼스에 갔다가 학생들이 경악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TV를 지켜보고 계속 전화를 사방으로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각각 1시간에서 2시간 거리쯤의 위치에서 북으로는 뉴욕에, 서부 펜실베니아에 그리고 남쪽 워싱톤에 비행기가 각각 떨어지면서 가운데 위치한 필라델피아의 학생들에게도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펜들힐에서는 지역사회에 매우 유명하면서도 영향력이 강한 일련의 공개강연회를 매 학기마다 해 오고 있었다. 이미 2년 전에 기획되고 1년 전에 주제와 강사가 섭외되는 이 공개강연회의 당시 주제는 “퀘이커와 돈”이었었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맘모니즘에 대항한 대안적 삶에 대한 것이어서 꽤나 기대가 큰 주제였다.

그러나 9.11사태가 터지자마자 펜들힐은 이 주제를 즉각적으로 취소하고 이슬람에 대한 주제로 바꾸면서 미국내 및 해외의 이슬람 학자와 활동가, 이슬람권과 관계된 평화운동가 등으로 전면 교체하였고 이슬람과 관련된 주제가 다음 학기까지 지속되었다. 대게 참석자들은 처음엔 퀘이커들이 많았으나 보통 100-200명이 모이던 숫자가 여러 지역사회의 관심 있는 사람들로 인해 넘치면서 그 장소를 옮겨 대대적인 모임과 더불어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인 이슬람권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더불어 미국의 헤게모니 정책에 대한 각종 반대운동의 결성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것이 대단한 충격인 이유는 당시 9.11충격으로 집집마다 성조기가 날리고, '적'에 대한 날카로운 국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성조기없는 집은 이웃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분위기였던 상황속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이념, 종교, 인종에 관계없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 것이다. 월남전중에 상선을 구입해서 구호물자를 베트남에 보내다가 미국함대가 이를 막고자 했던 사건이며, 20여 년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활동을 가장 먼저 종교기관으로서는 북과 접촉을 가진 곳도 퀘이커 단체였다. 17세기 중엽, 이미 미국의 퀘이커들은 흑인노예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위원회를 두어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노예를 풀어줄 것을 권고하고 이것이 시행이 안 되자 연회에서 강제로 흑인노예주들에 대한 멤버쉽을 박탈시켜 퀘이커 숫자가 반으로 주는 일까지 감수하였다. 비록 전 세계에 현재 30만 밖에 안 되는 숫자이면서도 갈등해결과 지역빈민구제활동, 비폭력저항운동, 인권을 위한 정책로비활동, 국제구호와 국제연대, 평화활동, 그린피스운동의 경우처럼 녹색활동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와 공헌을 하고 있는 데에는 이들이 가진 독특한 신앙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가 1656년 론세스톤(Launceston)의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의 몇 단어를 차용하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그것에 응답하기(Answering that of God in everyone)"- 퀘이커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진동을 하는 자란 뜻이다. 퀘이커는 모든 인간은-남/여, 노/소, 정상인/장애우, 백인/흑인/황인, 신앙인/비신앙인을 막론하고 - 누구나 “하느님의 그것”이라 부르는 “신적인 빛,” “그리스도의 빛” “내적인 빛”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존중되어야 하며, 특별한 엘리트나 권위자에 대한 경칭을 갖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직자가 없으며 모두가 친우(friends)로 불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타 종교에 대한 존중과 관심에 의한 종교 간의 대화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펜들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학습자와 강사(instructor)간에 구별이 없으며, 강사의 경력이나 질로 보면 수십 년간을 그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독보적인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함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사로움과 인격적인 친밀성이 두드러진 특성임을 느끼게 된다. 무슨 결정을 할 때도 소수자의 신적인 빛을 이해하여 다수결로 정하지 않고 동의과정이라는 독특한 방식에 의해 전원합의의 전통이 수백 년간 지속되고 있다. 결정을 전원동의를 통해 한다는 사실은 외부인에게는 매우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내부로 들어와 그 과정을 보면 전원동의가 얼마나 강력한 신뢰의 서클을 형성하고 또한 행동에 단호한 힘을 발휘하는지 놀라게 된다. 퀘이커학교(Friends School)의 교실에서는 아이가 장애우이어도 교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떠한 강제도 없으며, 어울림이 매우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어떤 갈등에 대해서도 아주 조심스럽고도 끈질기게 그러나 '나쁜 행동한 자'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집중하며 학부모와 학생들이 공동으로 대처하는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충격을 받곤 하였다.

우리의 예배처[교회]이자 모임장소로서 '모임집(Meeting House)'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평등의 원칙을 고려하여 가운데 빈 공간을 중심으로 한 팔각형내지 사각형의 의자 배치와 어떠한 성물-십자가, 촛대, 설교단, 성가대-도 없다. 이들 형식적인 것 모두가 신적인 빛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는 조용히 모여 침묵기도를 드리며 어느 누군가가 성령의 감흥을 받고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끼면 전체를 향해 말하게 된다.

펜들힐의 공동생활에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은 말, 기도 혹은 노래 어떤 형식이든 가슴에서 울려 터져 나오는 그 메시지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며 함께 모두의 가슴이 울리는 듯한 반향을 일으켜 매우 감동적이곤 한다. 혹은 감흥이 없을 때는 기다리다가 침묵으로 마치게 된다. 이런 형태를 통해 각자는 개인의 내적 수행(individual practice)을 통해 신께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의 내적 감흥에 자신도 울림을 받으면서 공동체적 수련 (communal practice)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선과 같으면서도 다른 것은 침묵이 있지만 깨달음/구원/계시의 통로는 관계적이고 공동적이라는 사실이 다르다.

침묵명상기도는 성령, 신적인 빛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역사를 위해 나의 활동, 나의 에고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침묵의 시간을 갖을 때 이는 또한 ‘나의 말함’을 멈추고 미세할지라도 ‘타자의 음성 voices of Others'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신적인 빛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빈 공간을 허락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퀘이커에게 있어서 영성은 말하기 보다는 들음이 영성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들음의 영성으로 인해 이들의 영혼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여리고 예민한지 느끼게 된다. 침묵이 단순히 내면의 고요만이 아니라 그동안 듣지 못한 타자의 음성이 나에게 말 걸게 오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적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역동적 개입(engagement)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진리를 위해 용감해지기(Be valiant for the Truth)" - 진리는 단순히 추상이나 이해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는 확신(convincement)과 관계된 것으로, 그렇게 도달하고 견고히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이다. 위의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것에 응답함”이 신적 빛의 경험(experience)과 존재에 관련된 것이라면 “진리를 위해 용감해짐”이란 "공개적으로 그 빛에 의해 걸어감(walking in the Light publicly)"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국가나 지배자에 대한 어떤 맹세니 징집문제에도 거부하고, 세상에 어떤 타협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퀘이커 신앙에는 신적 빛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social witness)이 분리되지 않는다. 펜들힐에는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치유기도, 성서연구, 신학...)등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을 위한 프로그램 (폭력과 갈등대응, 지역빈민구호, 파트너쉽과 능력부여...)이 동시에 존재한다. 평화의 증언은 퀘이커 역사에 오래된 것이다. 장소, 혀, 펜 그 무엇이든 주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옥이나 자기희생이 따를 지라도 진리일 경우에는 목숨을 거는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상업에 있어서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퀘이커라 할 때 그의 정직과 신용은 의심하지 않게 된다. 정찰제를 역사상 가장 먼저 도입한 무리가 퀘이커이며 퀘이커 상점에 대한 주변이웃의 신용은 확고하다.

* “모범이 되기(Be patterns, be examples)" - 진리에 대한 경험은 모범을 만드는 실험(experimental)을 강화한다. 이들은 선교(mission)이란 말을 안 쓰고 봉사(service)란 말을 선호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을 높이고 하느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누룩처럼 전위적인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 예가 감옥에서의 각종 자원 활동, 정신병동의 개선, 중재, 아동치유학교, 대안교육공동체운동, 평화활동이 그것이다. 모범이 되는 것에는 남들이 안한 가장 그늘진 곳을 먼저 찾아가서 삶의 예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일단 정신병동이든 인권활동이든 먼저 모범을 보이고 다른 단체, 다른 기관들이 그 중요성을 깨닫고 동참하여 그 분야에 운동이 일어나면 과감하게 다른 그늘진 곳을 찾아 간다. 지금까지 수년간 쌓아놓은 기득권, 먼저 차지했으니 우리를 존중해달라는 그 어떤 표시도 없이 자신들의 공로를 남기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들이 퀘이커라는 신분도 이야기 하지 않고 오직 인류와의 연대, 공공의 선에 기여한 것으로 만족한다. 북한에 외부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들어간 퀘이커의 봉사활동은 아직도 북의 파트너는 해외구호단체가 와서 봉사를 하는 것으로 알지 퀘이커(그들의 신앙, 종교)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이렇게 퀘이커는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없이 타자를 일에 함께 관여시키는 방식을 통해 소유권이나 멤버쉽의 배타성을 주장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펜들힐의 교육이 종교적 타자인 누구에게나 열어 놓고 있는 것이 그 예이며, 수많은 퀘이커관련 봉사기관에 타 신앙인이 직원으로 와 있고 네트워크 활동에 과감히 이들 타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봉사는 어느 특정한 공동체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지향한다. 즉 봉사는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인류를 생명으로 모으는 (“spreading the truth abroad...gathering up into the life") 것이며, 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함과 더불어 신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개신교들이 선교라고 부른 것에 대응하는 퀘이커의 봉사의 활동의 근본태도인 것이다.

모임집(우리의 교회에 해당)에서 상징화된 한 가지 생활방식은 또한 단순성(simplicity)에 대한 신앙실천-절제와 소박한 삶-에 대한 것이다. 과잉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옷, 소유물, 먹거리에서만 아니다. 퀘이커는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필자가 평화운동하면서 몇 가지 프로그램할 때 재정이 없어 쩔쩔매다가도-국가폭력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퀘이커는 정부돈을 받지 않는다- 어느 때 펀드가 들어왔다고 해서 그 출처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누군가 죽고서 기부가 들어왔다가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일처럼 말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수백년의 박해기간동안 국가로부터 재산박탈을 통한 생존과 그 박해받아 감옥에 들어가거나 남겨진 가족들 혹은 다른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같이 나눠야 했던 생활습관을 통해 이러한 소박한 삶과 자발성은 철저히 몸에 배여 있다. 그 예중의 하나는 평화 프로그램에 자원봉사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고, 퀘이커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어느 나라 어느 집에 몇 명이 어느 기간동안 무료로 숙박을 할 수 있는지-보통은 여행자가 최소한의 실비를 자진해서 사례하는 경우가 많다-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중독으로부터 단순성의 실천은 대안적인 삶과 서로 돌보는 삶을 목표로 한다.

10년 동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퀘이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마무리 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동안 따라온 허무주의와 내적인 고통이 정리되고 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됨으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실존적 교리로서 성육신 -let your life speak-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내 생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진리를 자기 삶으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은 평화교육운동을 하는 내게 있어서 근본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김성수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jboard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입니다.

와단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첨부화일1 : 김성수-한국기독교사에서_퀘이커주의와_함.hwp (62464 Bytes)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김 성 수*


1. 머리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
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1. 머리말

함석헌은 한국기독교가 제사적인 면에서 벗어나 한국사회의 윤리와 정의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종교의 세계는 윤리나 사회정의 이상의 세계이지만, 윤리의식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종교는 미신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이러한 도덕과 사회정의 그리고 건전한 상식을 지닌 종교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퀘이커주의는 현실적이고 동시에 이상적인 동반자로서 함께 했다. 우리는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를 바람직한 종교로 생각할 수 없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1624~1691)는 인간 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 약자를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할 때,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국내 학계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1994년 영국 에섹스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함석헌의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이해〉(“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가 최초의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글이다. 이어서 1998년 영국 쉐필드 대학교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유산에 관한 연구 : 20세기 한국 씨알의 소리와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An Examination of Life and Legacy of a Korean Quaker Ham Sok Hon: Voice of the People and Pioneer of Religious Pluralism in Korea”)라는 논문에서 역시 부분적으로 퀘이커 함석헌에 관한 연구를 다뤘다. 이 주제와 관련된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2004년 영국 버밍엄-선더랜드 대학교 정지석의 박사학위 논문〈퀘이커 평화증언,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국통일신학〉(Quaker Peace Testimony, Ham Sok Hon's Ideas of Peace and Korean Reunification Theology)이 있다. 국내에서는 퀘이커주의에 대한 1차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에 관한 연구가 그동안 부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지석의 논문은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면,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은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를 비교 분석 했고, 박사학위 논문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을 총괄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선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사상이 한국기독교사에서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평가함으로써, 위에 언급한 논문들과의 차별성을 두고자 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미 역사에 미친 주요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이 연구는 현재 퀘이커주의에 관한 연구가 국내학계에 극도로 빈약한 형편임을 고려할 때 그 학문적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에 ‘조직기피증’ 성향의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 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할 것이다.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심을 사회적 행동으로 표현하여야 한다.……삶의 일부만이 아닌 전체가 거룩하고, 온통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절대자의 사랑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분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퀘이커주의는 개신교 신앙에 속한다. 서구의 경우에 각 퀘이커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믿는 편이다. 현재 영국 퀘이커회는 세계교회연합회와 영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다. 1997년 영국교회연합회는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유니테리언회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 삼위일체론에 대한 입장 밝히기를 꺼려하는 퀘이커회는 기꺼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1994년을 기준으로 세계에는 약 303,858명의 퀘이커들이 있다. 그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미국 103,379명)에 약 155,000명, 아프리카 대륙(케냐 104,500명)에 약 122,000명, 유럽(영국 17,934명)에 약 20,500명, 아시아 대륙(한국 10여 명)에 약 4,592명, 오세아니아에 약 1,766명 정도가 있다. 숫자 면에서는 퀘이커교가 단연 소수 종파임을 알 수 있다.
평등사상의 강조로 인해 목회자의 지도 없이 혼자서 성경공부나 기타 연구를 해야 하는 현대 퀘이커는 다수를 위한 종교보다는 소수 엘리트 종파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양적 성장과 질적 향상의 문제는 앞으로도 퀘이커들이 계속 고민해야 할 주제 중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한국 퀘이커는 1958년 처음 예배모임을 가진 이래 약 반세기가 다가오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약 10여 명에 불과하고 아직 한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 아니다. 아울러 아직 한국사회와 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함석헌에 대해서도 몇몇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호의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기독교계와 사학계로부터 함석헌은 아직 냉대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퀘이커교는 영국이 청교도혁명(1640~1660)에 휩싸여 있었을 때 서서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지 폭스의 사상은 영국에서 종교친우회(즉 퀘이커회) 창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폭스는 영국에서 직공(weave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청교도적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그의《일지》는 1694년 처음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책이 퀘이커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의《일지》를 통해서 폭스는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교감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생명, 내면의 빛(inner light, inspiration 혹은 holy spirit), 내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씨앗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나님의 영성과 교통할 수 있다.
퀘이커들은《성경》을 존재하게 한 절대자의 성령이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절대자가 몇 세기 전에 보여준《성경》의 기록보다는 ‘지금 여기서’ 절대자가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에서 내면의 빛(성령)이《성경》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집권세력으로부터 퀘이커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외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고, 개신교가 성서의 권위를 중요시한 반면, 퀘이커는 성령의 권위를 역설했다. 이 내면의 빛의 신앙은《신약성경》〈요한복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참 빛은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인간에게 빛을 준다.” “나(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자는 누구나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내면의 빛과 자라나는 종교

퀘이커주의에서 생명과 진리의 원천은 각 사람의 내면의 빛, 즉 마음속 그리스도다. 17세기 영국 퀘이커들은 종교가 설교나 교리, 의식에 의한 제도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있으므로, 폭스는 각 개인이 침묵예배를 통해서 절대자와 교감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느꼈다. 이 내면의 빛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어떠한 형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이 내면의 빛은 각 개인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단체모임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종교에는 영구불변한 종교와 늘 새롭게 변하는 종교가 있고 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는 것이 퀘이커주의다. 퀘이커들은 성경과 그 밖의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존중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열려 있고 책임적일 수 있는 능력이 각 사람 안에 존재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은 성경에 씌어진 문자를 그대로 믿기보다는 그 내용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초창기 퀘이커들이 정규 교육과 성직자 계급을 경시한 결과, 종종 신학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퀘이커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초창기 퀘이커들에게 대학 진학의 길이 제약된 것도 퀘이커들이 대학교에서 ‘퀘이커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보다는 ‘삶 속에서 퀘이커주의를 체현화’시키는 데에 더욱 중점을 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퀘이커신학의 부재 탓이건 혹은 퀘이커주의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꺼려하는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누구도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퀘이커교의 공식대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한 각 퀘이커는 단지 자신이 이해하는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를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2) 성속이 하나

퀘이커들은 인간사의 모든 일에는 성속에 관계없이 절대자의 숨결이 서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퀘이커주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전체성이다. 모든 것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어떤 것도 전체라는 영역에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퀘이커들에겐 성속의 구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그래서 사회문제는 종교문제와 동등하게 중요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시각 때문에 퀘이커들이 기도, 묵상, 혹은 절대자에게 예배할 때, 장황한 말이나 예식보다는 좀더 침묵에 중점을 둔다. 이 점이 퀘이커가, 비록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해 ‘성악설’이나 ‘원죄’론보다는 ‘성선설’이나 ‘낙관론’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기독교의 시각과 다른 면이다.
초창기 조지 폭스를 비롯한 영국 퀘이커들은 한 개인의 영적 통찰도 깊은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퀘이커들의 증언(testimonies)은 타인의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을 그 기초로 한다. 그래서 수감자들을 위한 교도소 시설의 개선, 정신병원시설 개선, 여성참정권, 노예제도반대, 노동자들을 위한 공정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정직한 상거래 확립(정찰제 소개), 교육 및 구호사업, 세계평화운동 등을 위해 퀘이커들은 역사를 통해 부단히 힘써 왔다. 또한 초창기부터 퀘이커들은 남녀평등을 중요시했다. 그것은 예배뿐 아니라 공개연설, 교육, 그리고 사무관계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퀘이커 모임에서 양성 평등의 훈련을 통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도력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사회의 소외된 계급인 여성과 중․하층계급의 주목을 받았다는 면에서 17세기 중반 영국 퀘이커교와 19세기 후반 한국 개신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함석헌이 유교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멸시받던 ‘평안도 상놈’ 출신이고 19세기 후반 상공업자가 많은 평안도에서 태어난 것도, 그가 훗날 퀘이커주의로부터 더욱 사상적 친근감을 갖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짐작된다.

(3) 종교, 과학, 탈민족, 탈국가

절대계뿐만 아니라 상대계 진리를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은, 역사를 통해 과학 발달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접목에 주요 공헌을 해왔다. 특별히 영국의 경우 뛰어난 퀘이커 과학․기술자들이 영국사회에 준 영향과 공헌을 살펴볼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무쇠 교량을 설계 건축한 건축설계가 아브라함 다비(1678~1717)와 아브라함 다비 3세(1750 ~1789), 천체물리학자 아더 에딩톤(1882~1944), 유전공학자 프란시스 겔톤(1822~1911), 화학자 존 달톤 (1766~1844), 소독약과 방부제를 발명한 조셉 리스터(1827~1912) 등이다.
이렇게 퀘이커 과학자들이 가진 종교적 신앙심은 그들에게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가치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1851년으로부터 1900년 사이에 영국 퀘이커는 왕립과학회의 회원으로 추천되는 확률이 퀘이커가 아닌 다른 학자들보다 50배나 더 많았다. 종교적 신비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결합한 퀘이커들이 과학과 신앙의 갈등으로부터 대체로 자유롭게 되었고, 그 대신 그 점에서 상생의 길을 발견한 것이 퀘이커들이 과학과 종교 사이의 자연스러운 접목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은 타인들의 고난에 외부적 행동으로 참여함으로써 드러났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 퀘이커들은 피난민과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1847년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퀘이커들은 세계 최초로 무료식당운동을 전개했다. 더불어 미국의 청년, 흑인, 인디언, 새 이민자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퀘이커들의 범세계적 활동들이 세계주의자 함석헌에게 공감을 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퀘이커들을 절대평화주의자들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 생활에서 각 퀘이커는 각자의 내면의 빛이나 통찰력에 따라 각자 믿음대로 결정한다. 예를 들면 미국 독립전쟁 당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집총을 거부한 퀘이커들이 있는 반면, 애국심의 가치를 평화주의보다 앞세워 전쟁에 참여한 퀘이커들도 많았다. 또한 남북전쟁 중 많은 퀘이커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무력을 통해서라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론을 택하기도 했다.
사회정의 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퀘이커들은 사회정의, 빈곤 및 문맹퇴치, 반전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미 퀘이커회는 제 1․2차 세계대전에서 난민 및 그 유가족들을 도와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국제적 평화주의의 중요성을 행동으로서 고취시켰던 공헌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제 2차 대전 후에도 퀘이커들은 국제적 원조, 구제, 재건활동을 지원했다. 특별히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영․미 퀘이커 의료봉사단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의료봉사활동을 벌였다. 약 2만여 명의 한국전쟁 난민은 영․미 퀘이커의료봉사단의 도움 아래 군산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다. 1970년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여러모로 도와주었고 1990년대는 영국 대학원에서 ‘함석헌 연구’를 위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필자에게 해 주었다.
퀘이커들은 실천적인 면과 신비적인 면, 상대적 사회현실과 절대적 가치인 하나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속한 구체적 한 시대와 영원의 세계, 일치와 다양성, 그리고 최소한의 형식과 무제한적인 생명 등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영국 퀘이커교도 잉글 라이트는 그러한 상대세계와 절대세계의 밀접한 연관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속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퀘이커들의 침묵 예배는 상호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구한말 대다수 그와 동시대인과는 다르게 여섯 살 때인 1907년 함석헌은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를 가졌다. 초등학교도 전통적인 서당보다는 장로교 계통의 소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대한제국이 쓰러져가는 20세기 여명에 함석헌이 누린 보기 드문 특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유․불․도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적 전통 속에서 함석헌은 어려서부터 이 동서사상과 종교를 접할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그런 함석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퀘이커교도였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접하게 된 과정과 그 퀘이커주의가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퀘이커 함석헌이 한국기독교사에 어떤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함석헌은 대외적으로는 약육강식이 판치던 제국주의 시대에 국내적으로는 자국민을 상대로 국가 폭력이 난무하는 20세기 한반도에 살았다. 찰스 틸리는 국가의 성립 자체를 조직범죄로 평가하고 국가행동양식을 조직범죄에 비교하기도 했다. 함석헌이 국가주의를 탈피하고자 노력하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취했던 것이 이러한 틸리의 역사사회학적 분석과 동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가 자국민의 안녕과 평안을 지켜줄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민을 상대로 착취와 폭력만을 일삼는다면 그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함석헌은 서구기독교가 로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 이념화되고 정치제도권과 결탁함으로써 일반 씨알과 생활을 함께 했던 예수정신의 본래 의미를 상실했다고 믿었다. 그때부터 영과 운동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 세속권력을 위한 편의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고,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한낱 도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함석헌은 국법에 의하여 공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종교를 늙고 침체된 종교로 보았다. 1940년대 이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비판적 입장을 가진 함석헌이 아마도 그래서 국가주의에 물들지 않고 국가종교가 아닌 비국교, 퀘이커교에 한없는 매력을 느꼈다고 평가된다.
함석헌은 박정권하에서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민이라는 단어나, 주체보다는 객체로서의 의미가 강한 백성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했다. 민중이라는 단어 역시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는 한자라 역시 사용을 꺼려했고, 인민이라는 용어는 레드 콤플렉스가 극대화된 남한정권 아래서 ‘빨갱이’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서 역시 사용을 자제했다. 그래서 이런 이념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고자 그는 기꺼이 ‘민’에 해당하는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생각한, ‘씨알’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함석헌이 생각한 씨알은 ‘순수․순박한 사람’, 노자가 이야기한 ‘다듬지 않은 사람’ 혹은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이야기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최초 퀘이커 조지 폭스가 17세기 영국 장인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하고 근엄한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 것처럼, 함석헌도 20세기 상공업이 발달한 평안도 지역에서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그는 3․1운동이라는 정치․사회변혁을 체험하고 경직된 장로교로부터 영적 만족을 못 느끼게 되는 것도 폭스의 영적 행로와 유사성이 있다. 고난의 삶을 살다간 조지 폭스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아들 함석헌도 아무런 세속의 매개 없이 절대자와 직접 대면하려던 사람이었다.
함석헌의 종교적 편력이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17세기 영국교회의 세속적 권위에 대항해서 폭스가 주장한 ‘내면의 빛’ 개념이 20세기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함석헌은 퀘이커주의 내면의 빛을 통해 내적 힘을 기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신을, 한국 민족이 그 의지를 기르고 일으켜 세우는 한 방법으로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도 폭스처럼 기성교회의 무조건적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탈권위적 성향의 퀘이커주의로부터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1) 퀘이커주의와의 첫 만남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후 오산학교에서 면학에 힘쓸 때인 1921년이었다. 그때 그는 토마스 카알라일(1795 ~1881)의《의상철학》을 통해서 퀘이커주의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이때 그는 조지 폭스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폭스의《일지》를 읽게 되었다. 이 때 함석헌은 퀘이커주의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으나 깊은 흥미는 못 느꼈다. 그 후 함석헌이 유학차 일본에 있을 때(1923~1928) 그는 처음으로 우치무라 간조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1862~1933)와 함께 일본 퀘이커 모임에 출석했다. 그러나 이때 그가 일본 퀘이커들로부터 별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함석헌이 니토베로부터 별 감동을 못 받은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니토베는 젊은 시절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 갔을 때 일본의 첫 퀘이커교도가 되었다. 니토베는 훗날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을 방문해 만주침략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강변했다. 아마 니토베의 이런 행동양식이 함석헌에게 별 감동을 못 준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에 대한 관심은 해방 후인 1947년까지 약 20년 동안 중단되었다. 1947년 함석헌은 북한에서 막 월남한 상태에서 YMCA 총무 현동완으로부터 서구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듣게 되었다. 함석헌은 그 당시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을 듣고 놀랐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국가 폭력으로부터 세계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그 중요성을 실감했다. 더구나 북한에서 맞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소련군정하에서 겪은 야만적 폭력과 수감생활은 그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우쳐 주었다. 더구나 그 후 함석헌은 국가폭력의 절정인 6․25전쟁을 체험했다. 전쟁기간 중 여기저기 피난생활을 하며 그는 온 세계와 민족이 이념을 넘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6․25를 겪은 그는 “이제 일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도 아니요, 민족도 아니요, 계급도 아니다. 세계다”라고 탈민족주의, 세계주의를 선언한다.
이런 와중에 함석헌이 그 생애에 처음으로 서양 퀘이커교도들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 전북 군산에서였다. 1953년 6․25 직후 함석헌은 전북 군산병원(현재 원광대병원)에 한국의 피난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단으로 온 영․미 퀘이커교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20~30대의 젊은이들로 전후에 과부와 고아가 되어버린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1953년부터 5년 동안 자원봉사를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함석헌은 서구의 젊은 퀘이커들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6․25 직후……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로 인해 나는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문헌이나 사상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의 ‘직접적 행동’ 때문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조지 폭스가 주장한 ‘네 삶으로 말하라’는 퀘이커주의의 핵심이 그대로 함석헌에게 전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1958년 2월 15일은 한국 퀘이커 역사에서 기록될 날짜이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의 집에서 처음 한국인들을 위한 퀘이커 예배모임이 시작되었다. 이윤구(1929~ )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으며 이어 1958년 7월 이윤구는 한국의 첫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1959년 8월부터는 세계 최초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가 자신의 집을 퀘이커 예배모임 장소로 제공해 주고 참여했다.

(2) ‘죄인’ 함석헌

함석헌은 군산병원에서 서구 퀘이커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를 중시하는 활동에 큰 감동을 받아 나중에 퀘이커 회원이 된다. 물론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적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결국 그 자신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고백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로부터 ‘여성문제’로 여전히 비난받고 있는 상태였고, 보수적 한국교회의 교단으로부터는 격렬하게 배척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함석헌이 고독감에 친구를 절실히 그리워하고 있을 무렵인 1950년대 후반, 그런 그에게 친구가 되고자 서구 퀘이커들이 나타났다. 훗날 함석헌은 무엇이 그를 서구 퀘이커들과 극도로 가깝게 만들었는지 술회했다.

내가 퀘이커주의를 공부한 후 퀘이커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갈 데가 없게 된 나는 퀘이커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다.
그 당시 함석헌은 외로운 ‘죄인’으로서의 어려운 심정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내가 죄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죄인 한 사람이 사회 전체로부터 어떻게 전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를 체험했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용서에 대한 함석헌의 태도를 통해서 그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외로움은 커져 갔고, 그때 그가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얼마나 죄인으로서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나를 볼 수 있다.

친구들도 나 용서 아니 하나 봐요. 그래서 맘을 걷어 잡을 수 없어요. 죽겠어요!……친구, 친구! 없어요. 죄를 사하고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만이 친구인데 없나 봐요. 나는 한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맘을 알아줄, 붙들어줄 한 사람! 1960년 10월 9일.

함석헌의 이러한 고뇌에 찬 체험은 훗날 그에게 개인과 전체와의 관계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 그 중요성을 깨우치게 한다.




(3) 왜 퀘이커가 되었나?

서구 퀘이커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있는 함석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퀘이커 주의와 극도로 가깝게 된 동기는 퀘이커 사상에 어떤 큰 동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퀘이커들이 다정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퀘이커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또한 사상적으로도 퀘이커주의에 많은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이 기존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종교조직,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한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주요 관심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세계평화와 사회정의에 집중된 것에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의 서구 퀘이커에 대한 관심은 그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다. 서구 퀘이커들도 흰 수염,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을 신은 ‘신비한 동양의 현인’ 같은 함석헌의 모습에 깊이 끌려들었다. 그들은 아마도 6․25전쟁 후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나라에서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를 만나며 무더운 사막 한 가운데서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주의가 얼마나 동양적인 종교인가를 재삼 강조한 바도 있다.

서양사람에게서 나온 종교 중에서 동양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사상이 바로 퀘이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워드 브린톤이 [퀘이커주의를]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마도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동양 고전사상 사이에 많은 일치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함석헌과 서구의 퀘이커리들이 왜 그리도 급속한 ‘열애’에 빠졌는지를 이해할 만하다.
1962년, ‘열애’에 불붙은 미국 퀘이커들은 필라델피아 펜들힐 퀘이커연구소로 10개월간 함석헌을 초대했다. 다음해인 1963년 봄, 영국 퀘이커들도 그를 버밍험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소로 초대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990년 봄, 필자는 우드브룩에 3개월간 머물며 함석헌이 그곳에 남긴 발자취를 되밟아보았다. 1963년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함석헌은 영국 퀘이커들에게 한번 한국사에 대한 강의를 영어로 했는데 그는 그의 영어발음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때 한 영국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어강의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감동을 전했다’고 술회했다. 1990년에 우드부룩에서 필자가 만난 나이가 지긋한 한 영국퀘이커는 필자에게 “함석헌의 영어발음이 당신의 영어발음 보다 좋았었던 것 같던데요”라고 일침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펜들힐과 우드브룩에서 함석헌은 퀘이커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구미 퀘이커연구소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그도 퀘이커들의 자율적 원칙에 깊이 매료되고 많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많은 사상적 공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그는 특별하게 퀘이커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1953년「대선언」 이후 함석헌이 어떤 특정종교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직 기피증’은 퀘이커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함석헌은 그 자신을 외딴 들판의 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길을 계속 가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7년 그는 태평양 퀘이커 연회 초청으로 미국 북캐롤라이나의 세계퀘이커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함석헌은 비로소 퀘이커회의의 공식회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럼 무엇이 '종파기피증'에 있었던 함석헌을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퀘이커들의 우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퀘이커주의는 신비파운동에서 일어났지만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의 주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이렇게 불확실하지만, 열린 태도로 함석헌은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었다. 퀘이커주의는 신비주의적 신앙체계를 지니고 있으나 신비주의가 간과하기 쉬운 사회․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므로 퀘이커주의를 ‘윤리적이고 상식적 신비주의’의 양상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퀘이커주의의 이러한 면에 함석헌은 매료되었던 것이다.

(4) 퀘이커와 씨알의 소리

그래서 1967년 함석헌은 정식으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65년 이래, 벌써 함석헌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 퀘이커들의 잡지〈프랜드 저널〉에 ‘한국의 간디 퀘이커 함석헌’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퀘이커들은 회원과 참석자들을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1950년대 후반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을 처음 만났을 때 미첼이 함석헌을 놓고 한 증언이 그러한 퀘이커들의 태도를 반영해준다. 미첼은 함석헌을 처음 만난 후 그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당신은 퀘이커교도가 되기 전에 이미 퀘이커였습니다.” 미첼의 함석헌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비형식주의, 반교리주의, 검소함, 평등주의, 세계평화, 사회개혁적인 태도 등에 매료되었지만, 그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가입하기 이전에 함석헌은 벌써 그 안에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자격으로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둘러앉아, 그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나타나 계시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 됐거나 못 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퀘이커에 대한 그의 위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가 퀘이커의 평등주의와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는 태도에 애착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의 평등사상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 퀘이커 모임에서 함석헌과 다른 퀘이커들과의 관계는 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 모임의 평등사상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퀘이커주의는 1960년대 이후 함석헌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서구 퀘이커들은 그의 민주화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박정희의 잇단 긴급조치 발동과 장준하의 의문사와 맞물려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6년 함석헌이 다른 재야인사들과 함께 참여한 ‘3․1민주구국선언’은 긴급조치 아래서 하강기에 빠져 있던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권에 의해 구금당하고 있었을 때, 영국 퀘이커 주간지인〈프랜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함석헌 감금되다 ; -- 함석헌은 ‘3.1 구국선언’에 이어 다른 8명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함석헌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세계퀘이커협의회는 박대통령과 재영 한국대사에게 함석헌을 비롯한 다른 구금자들을 조속히 석방시켜 줄 것을 호소했다. 이 호소문을 통해서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적 원칙에 입각한 비폭력주의와 그의 인도주의를 위한 전적인 헌신을 언급했다. 미국퀘이커협의회 또한 박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냄과 동시에, 포드대통령에게 서면을 보내 남한의 인권이 극악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박대통령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3․1민주구국선언’ 후 함석헌은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빼앗기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은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계속해서〈프렌드〉지는 ‘3․1민주구국선언’ 이후 함석헌이 겪는 재판과정을 보도했다.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은 다른 17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서울에서 열린 공판에 회부되었다.……모든 피고인들은 징역을 선고받았고, 함석헌은 8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이 선언서를 통해서 서명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폐기하고, 국회를 복원시킬 것과, 사법부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이 선언서는 박정권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한국경제구조를 철저히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75살의 함석헌은 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죄로 8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계류상태에서,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서간을 보냈다. 다음 서간은 그의 외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내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1976년 8월 9일 새벽 4시……지난주 기도예배를 드리던 중 나는 오는 8월 11일 법정최후진술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이 열려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를 기소한 검찰 측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을 위로할 생각입니다. 이번 일은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투쟁의 끝이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를 심판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새로오는 세상을 맞이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길고 긴 고난과 시험을 우리 씨알에게 허락하셨다고 느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러 값진 고난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에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건강하시고 진리 안에서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글은 함석헌이 재판을 앞두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에게조차 얼마나 훈훈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아울러 내면의 빛을 강조하는 퀘이커주의를 통해서, 그가 외적 탄압을 넘어서 어떻게 내적 평안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함석헌의 자유를 위한 서구 퀘이커들의 국제적 활동이 서구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여간 이 글을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함석헌은 집행유예로 형 집행정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민주화 운동을 위해 영․미 퀘이커들이 보여준 국제적 차원의 지지와 후원을 동아시아의 도가협회나 불교회로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은 아마도 그래서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데 서구의 실질적 영향력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는 현대세계에 서 서구의 두드러진 영향력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지금 이 세계를 이만큼이라도 유지해가는 게 뭘로 되는지 아십니까? …… 완전히 기독교적은 못되지만, 그래도 현실을 유지해가는 것은 서구적인 지성이에요.……서구적인 지성이란 것은 17세기 18세기 근대에 오면서 발달한 건데, 그것은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결국, 서구 퀘이커들의 지속적인 국제적 지지를 받아가며 함석헌은 더욱 효과적으로 그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과학적․이성적 종교

함석헌이 종교의 신비주의와 상식주의 요소를 모두다 중요시한 만큼 그는 퀘이커들의 ‘이성적 신앙’에 많은 공감을 가졌다. 함석헌은 미래의 종교가 광신적이기보다는 과학적․합리적이어야 하고, 감정적이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지니면서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함석헌에게서 합리적 이성을 결핍한 종교는 맹목적 광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과학과 종교 가운데 하나만 택하는 상황이 오면 차라리 과학을 택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종교의 세계는 과학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상호보완적인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동서 문화의 차이와 역사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퀘이커들의 종교관과 그 자신의 신앙관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함석헌이 1955년 쓴, 기독교인에게서 기도의 의미와 하나님의 씨앗이 각 씨알 속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은 퀘이커들의 신앙관인 성속을 구별하지 않는 ‘온 삶 자체의 신성함’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

기도하란 말은 말로 하란 말이 아니다. 말로 하는 기도는 기도의 가장 끄트머리, 가장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기도는 몸으로 살림으로 하는 기도다.
나는 하나님은 아니요 하나님의 모습을 가진 자라 하나님에게까지 갈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다.

서구 퀘이커들이 고정된 교리보다는 다양하게 변해가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 것처럼, 함석헌 또한 그의 영적 행로를 통해서 경직된 교리나 형식주의보다는 유연하고 초월적 양상이 강한 내적 신앙을 중요시했다. 그가 퀘이커주의를 가까이 알기 전인 1953년,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리에 그저 복종하기보다는 다변적으로 변화해가는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바 있다.

동양의 맘이 본 생명의 근본 모양도 역(易) 아닙니까? 역이란 변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변합니다. 인생이 변하는 것이라면 불변하는 교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는 ‘영원의 미완성’이라 노래했고 그래서 고정된 교리를 갖지 않은 퀘이커주의와 근원적 공명을 느낀 것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화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함석헌은 현대인들의 신에 대한 관념도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변화에 따르는 관념변화의 절박한 필요성을 태아와 그 어머니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어머니 몸에서 오는 것으로 살지만, 생명이 자라서 어느 시기에 오면 거기가 도리어 죽는 곳이요 어서 거기를 탈출하여야 된다는 지혜가 솟게 됩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거기를 빠져나오면 일순간에 새 살림이 시작됩니다.

그의 이런 비유는 과거의 생동하는 종교적 영감일지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적용되지 않고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질식시키는 사슬과 화석화된 교리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준다.

(6) 보편적 역사의식과 평화주의

그의 말년인 1979년과 1985년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퀘이커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추구해 온 비폭력 철학의 근원은 노장의 평화사상과 퀘이커의 평화주의에서 비롯된다. 퀘이커주의는 두 가지 측면 즉,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봉사와 세계평화의 실현을 특별히 강조한다. 함석헌 또한 ‘역사적’인 것에 뜨거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역사의식을 중요시했기에, 그는 퀘이커주의의 ‘내면의 빛’을 ‘속의 소리’ 즉 ‘양심의 소리’로 해석했고, 이 양심의 소리는 함석헌에게 곧 ‘하느님의 소리’이자 ‘역사의 소리’였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을 총체적이자 일체적 존재로 이해했는데 역사적 보편주의 입장에서〈신약성경〉을 예로 들어 자신의 역사관을 이야기 했다.

예수는 자기 말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이가 하는 것이라 했다. 그 보내신 이란 보통 말로 하면 역사요, 종교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 역사의 아들이라 하나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예수를 가지고 마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고, 누가는 아담의 자손이라 하였고, 요한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라 했다.

그는 또〈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맹, 노․장도 모두다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역설했다.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도 표현했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객관적으로도 평가할 수 있는 종교적 열정에 맞먹는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데, 한 종교에 열렬히 외골수로 몰입하면서 그런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절대적 표현과 상대적 표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함석헌의 종교적 신앙고백이 때로는 그가 속해 있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석헌에게 광범위한 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는, 삶의 단면만 보여줄 뿐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퀘이커들의 뚜렷하고 폭넓은 역사의식에 많은 공감대를 느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1959년에 쓴 함석헌의 글을 보면 그가 주장한 종교인의 역사의식과 사회참여론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그는 ‘속알 밝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퀘이커주의의 근본사상인 ‘내면의 빛’과 아주 흡사하다.

모든 종교 도덕은 어쩔 수 없이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다시 말할 것 없다. 모든 것의 터는 낱 사람에 있다. 그러나 내 속알 밝힘이 산골짜기나 골방 속에서 되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속알 밝힘은 반드시 그 어두워진 역사적 사회적 사회 살림 속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아무도 제 인격을 온전히 이루고 혼을 기르는데 역사적 사회를 떠나 외톨이로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퀘이커교도로서 필자는 다른 여러 종교 또한 내 종교를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의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나의 생각의 폭이 조금이라도 넓어져 간다고 느낀다. 인간정신은 획일적인 데서보다는 다양성 속에서 최고 가치를 발휘한다. 절대자는 문자 그대로 어디서나 존재한다. 퀘이커들은 이것을 ‘신적인 어떤 요소는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고 표현한다. 영국 성공회 신부이며 퀘이커교도인 폴 오스트리쳐는 “선한 것이건 사악한 것이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들과 여러 근본정신에 이미 큰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의 세계평화주의에 대한 갈망은 결국 민족주의를 배타적인 감정으로 평가하기에 이른다. 1930년대《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쓸 때의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그 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체험한 함석헌은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자로서 성숙된 세계평화의 길을 왜 인류가 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역설한다.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인간이 아직 어린 시절 한때 우리를 이끄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그 정도를 지나쳐 자랐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것이 죄악이다. 청산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제 민족주의 시대가 지나갔음으로 인류가 유아기 시절의 민족관을 버리고 민족을 넘어서서 세계를 포용하는 세계와 우주 전체관을 가져야 할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전체는 곧 함석헌에게 운명공동체인 인류사회 전체이자 절대자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7) 미래의 종교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새로운 종교는 아니지만 새 종교의 탄생을 위해 태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특별히 퀘이커들의 단체적인 명상을 그는 인류의 새 종교를 위한 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 퀘이커들의 명상과 동양의 명상인 참선이 어떻게 다른가를 지적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이 브린톤의《퀘이커 300년》을 읽었을 때 그는 퀘이커들의 단체 및 공동체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퀘이커 300년》에서 브린톤이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이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단체적인 것임을 강조했던 것을 상기하며,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그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다.

내가《퀘이커 300년》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 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퀘이커들이 제기한 공동체 정신은 계급․인종․종교․국가의 기원에 무관하게 사람들이 팀워크로 상호 협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퀘이커 신비주의는 개인에 머물지 않는 단체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것이다.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퀘이커주의는 함석헌 생애 후반기인 1960년대 이후 그의 종교․사상관 그리고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의 무소속 구도자와 종교적 ‘이단자’로서 함석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서구의 퀘이커들은 그에게 심적․물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결국 그는 퀘이커로서 삶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쩌면 항시 추구하는 ‘영원한 미완성’의 구도자였다고 느껴진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 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

죽는 날까지 민족․국가 그리고 종교의 벽을 극복하고자 했던 함석헌. 그러면서도 결국 자신은 한국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기독교인’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의 사람.
그렇다. 그는 철저한 모순의 사람이었다. 성속, 민족과 세계, 과학과 종교, 한 종교와 여러 종교,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갈망하고 추구한 그는 모순의 사람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불완전한 위선자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완전과 지고의 진선미를 추구하는 철저히 모순된 존재다. 그리고 이 모순에 인간의 비극이 있고 희망이 있다. 완전한 절대자와 합일을 끝없이 갈망하고 추구하는 불완전한 상대자가 인간이고, 그런 면에서 함석헌은 철저한 자기모순의 인간이었다. 어느 종교적 종파나 정당에도 가입하기를 꺼려했음에도 퀘이커교의 회원이 되고, 더러운 정치판에 말로 할 수 없는 환멸과 비애를 느끼면서도 장준하의 선거운동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함석헌! 그런 속 다르고 겉 다른 모순의 삶을 살면서도 그는 진리의 본질은 외양적 종교교리나 정치강령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양심 속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가 살던 20세기 한반도는 국가주의라는 가치가 전지전능한 가치였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한 존재의 생사를 너끈히 위협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 속에서 작은 한 개인과 거대한 국가의 대립이라는 개념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절대적 국가권력에 대해 한 개인이 스스로 세워놓은 이상적 원칙에 따라 저항한다는 것은, 곧 그 개인과 가족의 필연적 희생을 의미했다.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한 함석헌은 그래서 ‘바보새’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 편협성과 정치․사회적 압제가 팽배했던 지극히 제한된 한국역사의 한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이 최소한의 조직을 갖춘 퀘이커교의 교도가 된 것은 그런 열악한 외부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최소한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의 위치와 의미를 필자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퀘이커 함석헌은 ‘내면의 빛’을 추구하며 혼란의 시대 ‘한국의 양심’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난세에 종교인으로서 사회참여를 통해 그는 한국기독교의 영성을 더욱 심화시켰고,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펼쳐보였던 것이다. 둘째, 이제 한국교회도 교회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양적인 규모에 걸맞는 질적인 성숙함을 한국기독교계가 갖추어야만 한다는 본을,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보여주었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셋째,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목회자에 대한 의존도를 지양하면서, 평신도가 스스로 이끄는 신앙생활을 지향하는 데,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하나님이 항상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한 것처럼, 그는 퀘이커로서 역사의 ‘지금 여기에서’ 일할 것을 강조했고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여기가 곧 하늘나라였던 것이다. 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그의 뜨거운 비판은 곧 그의 종교인으로서 신앙고백․양심선언이자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공의의 추구였다. 전체적인 것만이 거룩한 것으로 믿었던 그는 씨알과 더불어 기꺼이 고난의 길을 택했다.
퀘이커주의는 함석헌에게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과 타종교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을 더욱 일깨워 주었다. 아마도 진리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정립뿐만 아니라 인종, 성, 문화, 국가, 이념, 생각, 얼굴, 모든 것이 다른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에 있지 않을까.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는 ‘발과 별,’ 즉 현실과 이상의 조화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이상도 현실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면 빛을 보지 못하고, 원대한 이상이 없는 근시안적인 현실은 인간 정신을 메마르게 할 뿐이다.
한국기독교인의 종교관도 외골수적이거나 편집광적인 획일성에서 벗어나 폭넓은 보편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의 영향 등으로 경제적 단위는 물론이고 문화․정신적으로 더욱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각 국가, 문화간의 긴밀한 접촉은 불가피하다. 세계 공동체의 사회구조 또한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 점점 더 보편적으로 변화 되어간다. 자기민족 중심주의는 이제 인류가 청산해야 할 과제다. 이러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한 민족의 미래는 인종․문화․종교적 다양성과 여러 집단 간의 상호존중에 있다. 내가 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의 다름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곧 독선이고 아집일 뿐이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는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선민의식을 극복하고 다른 종교나 이념에 대해 관용을 갖고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었다.
편식이 몸의 건강에 안 좋듯이 균형을 잃은 편향된 사상이나 종파심은 인류의 건강한 정신발달에 안 좋다. 함석헌이 그랬듯이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내가 가진 이념이나 신앙이 최고 불변의 가치이고 생명보다 소중할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그리고 타인의 그런 관점과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고서는 인류가 영원히 흑백논리와 독선, 그리고 끝없는 죽음의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타인, 타민족, 타국가의 신앙과 이념을 서로가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하나님 나라는 인류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참고자료

김영태,《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 인간사랑, 2002.
조지 폭스․문효미 옮김,《조지폭스의 일기》,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함석헌 편,《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 1985.
함석헌,《전집1 :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3.
함석헌,《전집2 : 人間革命의 哲學》, 한길사, 1983.
함석헌,《전집3 :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한길사, 1989.
함석헌,《전집10 : 달라지는 世界의 한길 위에서》, 한길사, 1983.
함석헌,《전집11 : 두려워 말고 외치라》, 한길사, 1983.
함석헌,《전집12 : 6천만 民族 앞에 부르짖는 말씀》, 한길사, 1983.
함석헌,《전집15 : 말씀/퀘이커300년》, 한길사, 1988.
함석헌,《전집19 :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7.
함석헌, “펜들힐의 명상,”〈서울 퀘이커모임 월보〉, 서울퀘이커모임, 1984.
Brinton Howard, Friends for 300 Years, Pendle Hill, 1994.
Fox George / John L. Nickalls, editor, Journal of George Fox,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1952) 1986.
FWCC, Quakers Around the World: Handbook of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London : FWCC, 1994.
Gorman George H., Introducing Quakers, QHS, 1981.
“Ham Sok Hon Detained,” The Friend, London: March 12, 1976.
Ham Sok Hon, Kicked By God, Baltimore, Md.: AFSC, 1969.
Jung Jiseok, Quaker Peace Testimony, Ham Sok Hon's Ideas of Peace and Korean Reunification Theology, PhD diss., Birmingham, Woodbrooke College et al, 2004.
Kim Sung Soo, Biography of a Korean Quaker, Ham Sok Hon - Voice of the People and Pioneer of Religious Pluralism in Twentieth Century Korea, Samin, 2001.
Kim Sung Soo, “Ham Sok Hon'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 An Anthology of Ham Sok Hon, Samin, 2001.
Lee Yoon-Gu, “Quakers in Korea,” Friends Journal, (Pennsylvania: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February 1, 1984).
Oestreicher Paul, The Double Cross, London: Longman, 1986.
Punshon John, Portrait in Grey, QHS, 1991.
Quaker Home Service, Some Stories About John Woolman, QHS, 1980.
“The Trial in Seoul,” The Friend, London: September 3, 1976.
“The Voice of Ham Sok Hon,” Friends Journal, Philadelphia: AFSC, February 1, 1984.
Wright Mary Ingle, “What is a Quaker Meeting?,” Friends Quarterly, London, 1967 July.


(투고․접수일 : 2005년 7월 25일 / 심사완료일 : 2005년 8월 1일)


국문초록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대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때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월간지〈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게 된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스캔들’ 등으로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의 정치적 관여, 혹은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으며 인간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의 약자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하면서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했다.
이 글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 역사에 미친 주요 공헌과 영향을 분석했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의 ‘조직기피증’ 성향에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했다.

주제어 : 내면의 빛, 기독교, 종교, 성속, 평등, 과학, 민족과 국가, 퀘이커, 역사, 세계평화.


Abstract

The Position of Quakerism and Ham Sok-Ho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Kim Sung-Soo

Ham Sok Hon had a close connection with the Western Quakers from 1960 until he died in 1989. During this period he was actively engaged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vigorously protesting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At the height of the military dictatorship, 1970, Ham also established a monthly magazine, Voice of the People. What turned Ham, the downhearted man of the end of 1950s who was involved in a scandal, into a relentless freedom fighter?
From at least the 1960s onward, Quakerism was always behind Ham whenever he was active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George Fox, early leader of the Quaker movement, also emphasized the equality of men and women, and respect for each individual, not only under the law but also before God. Fox said that religion means looking after the social underdog and standing by him. Ham, always a man of doing rather than a man of being, ended his life as a Quaker. I will therefore examine and evaluate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Ham and Quakerism.
In this paper, firstly I will look into the philosophical aspect of Quakerism as seen through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In particular, I will closely examine the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Quakerism to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Secondly, I will analyze how and why Ham became interested in Quakerism, and how his thinking was influenced by Quakerism. By doing so, I will look into what it meant to be a Quaker to Ham as a Korean. In addition, I will also examine what kind of role Ham fulfilled as a Quaker in relation to Korean Christianity.

Key-words : Inner Light, Christianity, Religion, Secred and Secular, Equality, Science, Nation and State, Quaker, History, and the World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