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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8

16 Forgiving Dr. Mengele by Eva Mozes Kor

Forgiving Dr. Mengele by Eva Mozes Kor

Forgiving Dr. Mengele

Eva Mozes Kor
JANUARY 26, 2016

At the age of ten, Eva Mozes Kor and her twin sister Miriam were transported to Auschwitz. There Dr. Josef Mengele used the two girls along with other twins for medical experiments. Mozes Kor, who speaks internationally, went on to found the CANDLES Holocaust Museum in Terre Haute, Ind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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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January 27, 1945, four days before my eleventh birthday, Auschwitz was liberated by the Soviet army. I returned to my village in Romania to find that no one from my family other than Miriam had survived.

Forty years passed before I spoke to Miriam about our experiences in Auschwitz. She died in 1993 from the long-term effects of Mengele’s experiments. That year I was invited to lecture to some doctors in Boston and was asked if I could bring a Nazi doctor with me. I thought it was a mad request until I remembered that I’d once been in a documentary which had also featured a Dr. Hans Münch from Auschwitz, who had known Mengele. I contacted him in Germany and he agreed to meet with me for a videotaped interview. On my way to meet this Nazi doctor, I was so scared, but when I arrived at his home he treated me with the utmost respect. I asked him if he’d seen the gas chambers. He said this was a nightmare he dealt with every day of his life. I was surprised that Nazis had nightmares too and asked him if he would come with me to Auschwitz to sign a document at the ruins of the gas chambers. He agreed.

In my desperate effort to find a meaningful thank-you gift for Dr. Münch, I searched the stores, and my heart, for many months. Then the idea of a forgiveness letter came to my mind. I knew it would be a meaningful gift for Dr. Münch, but even more important, it became a gift to myself. I realized I was not a hopeless, powerless victim. When I asked a friend to check my spelling, she challenged me to forgive Mengele too. At first I was adamant that I could never do that. But with time, I realized that now it was I who had the power: the power to forgive. It was my right to use it. No one could take it away.

On January 27, 1995, at the fiftieth anniversary of the liberation of Auschwitz, I stood by the ruins of the gas chambers with my children, next to Dr. Münch and his children and grandchild. Dr. Münch signed his document about the operation of the gas chambers while I read my document of forgiveness and signed it. As I did that, I felt a burden of pain lifted from me. I was no longer in the grip of hate; I was finally free.

The day I forgave the Nazis, I also privately forgave my parents, whom I had hated all my life for not having saved me from Auschwitz. Children expect their parents to protect them; mine couldn’t. And then I forgave myself for hating my parents.

I believe with every fiber of my being that every human being has the right to live without the pain of the past. For most people there is a big obstacle to forgiveness because society expects revenge. We need to honor and remember our victims, but I always wonder if my dead loved ones would want me to live with pain and anger until the end of my life. Some survivors do not want to let go of the pain. They call me a traitor and accuse me of speaking in their name. I have never done that. Forgiveness is as personal as chemotherapy – I do it for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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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 때 Eva Mozes Kor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 Miriam은 Auschwitz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Josef Mengele 박사는 두 명의 소녀를 다른 쌍둥이와 함께 의료 실험에 사용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발언하는 Mozes Kor는 인디애나 주 테레 호트에 CANDLES 홀로 코스트 박물관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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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생일 4 일 전인 194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는 소련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나는 가족을 찾기위해 루마니아의 마을로 돌아 왔는데,  Miriam 이외는 내 가족 중 아무도 살아남지 않았 음을 발견했다. 

 Miriam과 Auschwitz에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까지 40 년이 지나야 했다. 그녀는 1993 년 Mengele의 실험의 장기적인 영향으로 사망했다. 그 해에 나는 보스턴의 일부 의사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초대되었고, 나치 의사를 데려 올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한때 다큐멘터리에서 Mengele을 알고있는 아우슈비츠 (Auschwitz)의 한스 뮌헨 박사 (Dr. Hans Münch)가 출연 한 것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그 요청이 미친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에서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비디오 녹화 인터뷰를 위해 나와 만나기에 동의했다. 이 나치 의사를 만나러가는 길에 나는 무서웠지만,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를 최대한의  존중을 가지고 대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가스실을 보았는지 물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 다루는 악몽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치도 악몽을 꾼다는 사실에 놀랐고, 가스실의 폐허에서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나와 함께아우슈비츠에 와줄 것인지 물었다. 그는 동의했다. 

나는 Münch 박사에게 의미있는 감사의 선물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몇 달 동안 상점과 마음을 조사했다. 그런 다음 <용서 편지>에 대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나는 그것이 뮌헨 박사에게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 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선물이되었다. 나는 내가 희망이 없고 힘없는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에게 내 철자를 확인하도록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Mengele도 용서 해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단호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 나는 권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나의 권리였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199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 해방 50 주년에, 나는 뮌헨과 Dr. Münch와 그의 아이들과 손자 옆에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 폐허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용서 문서를 읽고 서명하는 동안 Münch 박사는 가스실 작동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렇게하면서 나는 고통의 짐을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증오에 빠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자유롭게 되었다. 

내가 나치를 용서 한 날, 나는 또한 부모님을 개인적으로 용서했다. 나는 아이들을 아슈비츠에서 구하지 못한 부모님을 평생 미워 했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그들을 보호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부모님은 아이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미워한 것을 용서했다. 

나는 모든 인간이 과거의 고통없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사회는 복수를 기대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용서에 큰 장애물이 있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존중하고 기억해야하지만,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고통과 분노로 살기를 원하는지 항상 궁금하다다. 일부 생존자들은 고통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 용서는 화학 요법만큼이나 개인적이다 – 나는 나를 위해서 했다.






































2020/02/07

Five years since the COI, what progress on North Korean human rights? | NK News

15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Interview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7-21 15:21:00



2015년 0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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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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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믿는 것보다 안 믿는 게 낫다
● 경탄하고 감격하라, awesome!
● ‘참나’ 찾아 ‘자유’ 얻는 게 심층종교
● 행복의 원천은 성찰이 주는 ‘아하!’의 삶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권위가 전만 못하다. 존경할 만한 종교 지도자도 찾기 어렵다. 오강남(74)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된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비교종교학자다. 그는 1971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줄곧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동아일보’ 2001년 10월 11일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오강남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교회 문턱을 넘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미션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종교학과에 진학해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의 믿음은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슬람이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게 사실인 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유학을 한 후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한문을 다시 공부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그는 자기 안에서 ‘기독교와 타 종교가 대화하는’ 핵융합의 과정을 겪게 된다. 예수님의 성령체험이 ‘성불(成佛)’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노장에서 말하는 ‘붕새처럼 변화와 초월의 체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아니겠냐는 인식이었다.”

오 교수가 2001년 한국에서 출간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은 파문을 일으켰다. 요지는 “역사적 예수는 있었으되 오늘날의 교회가 가르치는 그런 예수님은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저술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1947~2010)다. 가수 조영남(70)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억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강남 교수는 글로 먼저 만났다. 목사가 되겠다며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미주지역 순회공연을 하던 1980년으로 기억한다. 공연을 마치고 우연히 누군가가 소일거리로 읽으라며 던져준 교포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읽고는 섬뜩해졌다. 당장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나섰다. 그는 내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한국인의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특별한 사람이다.”

오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캐나다 맥매스터대 대학원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 변화를 경험했다. 서울대 규장각과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섰고,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14년 전보다 지금 한국 종교의 위상은 더 후퇴한 듯 보인다. 기독교 신자가 감소한다. 기독교와 불교 공히 사회적 소통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출간한 저서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는 때로 집단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국가 간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번영만을 위한 종교, 권력에 기생하거나 스스로 권력화한 종교, 양적 대형화에만 골몰하는 종교. 과연 종교란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7월 2일, 그에게 물었다.

▼ 종교란 무엇입니까.

“수없이 많은 답이 있겠으나, 간단히 대답하라고 한다면 ‘우리가 통속적 안목으로 볼 수 없는 실체의 더 깊은 차원을 발견해 더 큰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는 수단’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불교로 말하면 부처님이 4가지 진리(四聖諦)를 깨침으로써 고통에서 자유스러워지라고 한 것, 그리스도교로 말하면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욕심과 미망으로 가려진 눈을 떠 사물을 더욱 명확히 보면서 그만큼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종교기업’

▼ 한국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압도적 크기의 교회 간판이 보입니다. 어둠이 깔리면 십자가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교회도 이 시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흐름에 영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십자가 물결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고 봐요. ‘종교기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좀 다행인 것은 요즘에는 붉은 십자가 대신 흰색, 노란색 십자가가 이따금 눈에 띈다는 거.(웃음) 십자가를 보면 그것이 예수가 달려 죽은 로마의 형틀이라는 생각 대신, 다석 류영모(1890~1981·교육자 겸 종교인) 선생이 말씀한 것처럼 ‘인간이 대지를 뚫고 하늘과 하나 되고자 위로 솟남을 뜻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의미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요.”

다석이 설파한 ‘솟남’은 기독교의 부활, 불교의 해탈에 비견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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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기독교도입니까. 한국의 일부 개신교도는 교수님을 배교자(背敎者)로 여기기도 합니다. 박사학위 논문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는 불교 및 노장사상을 넘나들었고요.


“어머니가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에 다니셨는데, 덕분에 저도 그 교회에 다녔습니다.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할 때도 기독교 극보수주의 교수님의 강의를 많이 들었고요. 머리가 커지면서 어머니가 다닌 교회에서 가르친 것, 그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사상에 몰두했으니 캐나다에서는 동양 종교를 전공으로 택하기로 하고 불교, 힌두교, 노장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했어요. 그러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졌습니다. 불교를 전공 분야로 삼았고, 말씀한 대로 화엄의 법계연기를 학위논문 주제로 택했지요.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다닌 교회의 가르침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글로도 써야 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갖고 있던 교적(敎籍)을 철회해달라고 교회에 요청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배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특정 종교나 교파를 헐뜯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교적이 없어 어느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하지 않은 셈입니다.


현재는 캐나다 연합교회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합니다. 한국에 머무를 때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에서 주관하는 ‘일요 경 모임’에서 종교 경전을 읽습니다. 이곳저곳의 교회나 교역자 수양회, 사찰에서 초대받으면 가서 강연합니다. 개인적 이력을 물은 것 같아 사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겸연쩍습니다.”


▼ 한국 불교의 상황도 신자 수가 줄어드는 기독교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복(祈福)적 성향도 강하고요. 사업 잘되게 해달라,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며 시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찰(大刹)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요.








“그렇지요. 뜻있는 스님들이 직접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불교계가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지 않는 건 알지만, 정법대로 해서는 사찰을 운영하지 못 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속의 佛性, 神性


▼ 나와 내 가족의 복을 바라는 신앙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가족의 평안을 간구(懇求)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 종교는 나와 내 가족이 잘살고 싶다는 소망을 심리적으로 충족시켜줘야 하고요.


“물론 종교에 그런 면이 있어요. 종교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수단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진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종교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한국 교회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웃에 배타적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같은 어구(語句) 탓에 비(非)종교인이 기독교를 삐딱하게 바라봅니다.


“영적 눈을 떠서 사물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중 하나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속에 신성이나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의 근본은 우리가 이런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이라고 하겠지요. 불교에서는 우리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 속에 신성, 혹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고, 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고 해서 우리가 ‘한울님’을 모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내가 하늘과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나아가 천도교에서 말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처럼 남을 하늘 섬기듯 대하게 됩니다.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이런 기본 가르침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 진리를 가졌다, 자기들만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는 등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곤란합니다. 봉은사역 역명 논란, 탱화에 낙서하기, 땅 밟기 기도 등 일부 기독교도의 행동은 기독교와 기타 종교들의 기본 진리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땅 밟기 기도는 일부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의 성소에서 예배를 올리는 의식이다. 또한 기독교 목사가 대구 동화사 탱화에 낙서해 논란이 인 적이 있으며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명명을 두고 불교계와 기독교계가 갈등을 빚었다.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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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여하는 神’ 관념 수정돼야”

▼ 지난해 6월 문창극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 등으로 인해 낙마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할 만한 발언이라고 여겨지지만, 비(非)기독교인은 이러한 견해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비(非)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담스러운 발언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나 미국·소련의 분단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6·25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내지 미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다면 독립을 위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싸운 운동가나 남북분단 상태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이가 되는 셈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관은 함석헌 선생이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본 것과 판이합니다. 함 선생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함께해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니 이제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하면서 이 고난의 역사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역설한 반면, 문 후보자는 우리 민족은 나태하고 무기력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나 미국의 개입 등 외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도움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항과 자존의 역사냐, 숙명적 외세 의존의 역사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뭔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와 바울이 말씀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를 꼽고 싶습니다. 종교에서 중요한 대목은 할례나 기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변화(transformation)를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장자’ 첫머리에 물고기가 변해 붕(鵬)이라는 큰 새가 되어 구만장천을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가 줄 수 있는 초월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 ‘닫힌 종교’가 아닌 ‘열린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느 특정 시대, 어느 특정 사회를 배경으로 생겨난 종교관을 비롯해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등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롭게 이해돼야 합니다. 하나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특수 교리는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특별한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 혹은 절대자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해요.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해 신이 인간사 하나하나에 직접 관여한다는 ‘관여하는 신(Interventionist God)’ 같은 신관(神觀)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열어놓음’이 중요합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 종교에는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 병존하게 마련입니다.

“표층종교가 지금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힘쓰는 자기중심적 종교라면, 심층종교는 나의 ‘참나’를 찾아 지금의 나로부터 자유를 얻고 나아가 이웃을 위해 힘쓰는 타인 중심적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표층종교가 신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고 나와 나의 집단이 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것과 대조적으로 심층종교는 신과 나,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를 중요시합니다. 표층종교가 경전의 문자에 매달려 나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심층종교는 문자 너머의 속내를 발견하려 노력하고 나와 다른 해석에 열린 태도를 가집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표층종교로서 종교생활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거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표층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심화 과정을 거쳐 종교가 줄 수 있는 시원함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종교에나 존재하는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표층종교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종교적 근본주의는 폭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근본주의 그룹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조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라는 게 교황의 설명인데요. 한국 가톨릭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가톨릭 지도자들이 가진 의식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신학자 한스 큉처럼 근본주의에서 벗어난 진보적 가톨릭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처럼 비교적 보수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압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진보적인 신부들이 있지요.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는 보수 경향이 강한 분들이 이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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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성장률 1600%의 배경


▼ 한국 기독교는 교수님이 비판하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가르치곤 합니다. 기독교는 20세기 초 한국이 개명(開明)에 나섰을 때 도움을 줬습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웠고, 독립운동과 기독교가 연결됐습니다. 1970~80년대에는 그리스도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70년대 10년 동안 교인 성장률이 1600%가 넘은 교회도 있습니다. 근본주의 신앙 덕분에 공격적 선교가 가능한 측면도 있었던 듯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러 면으로 공헌한 바가 컸습니다. 교육, 의료, 독립운동, 계몽…. 그러다 1970~8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하면서 전통적으로 친숙하던 농촌 공동체 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한 도시생활에서 소속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에서 새롭게 소속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어요. 더욱이 사람들 사이에 자본주의 가치관이 팽배하면서 부유해지려는 마음이 더 뜨거워졌는데, 교회에서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물질적 축복이 보장된다는 식으로 부채질을 한 셈이지요. 이것이 교회가 기복적으로 경도된 주원인이면서 교인 수 증가의 동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나 사회적, 심리적, 건강상의 소망을 교회가 아니더라도 채워줄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그런 필요에 의해 교회에 다니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자주의에 입각한 공격적 선교에도 한계가 오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 성경의 문자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보는 대로’가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전을 읽는 것은 그것을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가 아니라 ‘나는 성경을 이렇게 읽었다’고 해야 합니다. 경전이란 문자적으로 객관적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내 눈높이에서 읽고 이해하도록 구성됐어요. 이해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해야 하고요. 한국 교회의 큰 문제점이 성경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나요.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책 ‘신 없는 사회’를 보면 라디오, 텔레비전에 나온 목사들이 죄악에 물든 이교도를 저주합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하고요. 경찰서장이 범죄율 증가가 사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느 주지사는 자연재해에 기도로 대처하라고 호소하더군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시작을 알리면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신께서 미국을 변함없이 축복하시길”이라는 말로 연설을 마친 것도 떠오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회입니다. 유럽에서 근본주의가 거의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에는 아직도 기독교 근본주의가 살아 있지요. 주커먼 교수가 지적했듯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는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북유럽 사회가 범죄율, 문맹률, 행복지수, 복지수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을 앞섭니다. 교회 출석률이 높은 미국 남부 ‘바이블 벨트’ 지역 주들의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근본주의에서 말하는 신들을 앞세우면 결국 ‘신들의 전쟁’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사회제도를 개선하거나 복지제도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들만의 신’ ‘만들어진 신’

주커먼에 따르면, 북유럽에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거나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후 부활했다든지 하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게 그들이 말하는 종교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품위 있는 도덕과 가치관이 담긴 책이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는 소수의 북유럽 사람들도 대체로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은 생전에 “모든 이교(異敎)의 군대가 무함마드의 땅을 떠나기 전까지는 미국이 결코 평화로울 수 없을 것을 신께 맹세한다”고 다짐하면서 “신은 위대하다. 영광이 이슬람에 있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리아·이라크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슬람국가(IS)는 형제 격인 시아파마저 ‘불순한 이교도’라고 여깁니다. 불교나 힌두교와 다르게 유일신교인 크리스천과 무슬림은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내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여기는 건데요. 그렇다면 ‘오직 한 분’인 하나님, 다시 말해 ‘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요.

“그들이 말하는 신들이란 대부분 ‘만들어진 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 격으로 받드는 신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각자의 견해일 뿐이지요. 그들만의 신관(神觀)입니다. 궁극실재로서의 신,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고를 초월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밝힙니다. 말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신관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만진 것만을 절대화하는 대신 서로 둘러앉아 각자 만진 것을 이야기하면서 실물 코끼리에 근접한 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종교 간의 화해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세계 평화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4/6
‘awesome!’을 외치는 삶

▼ ‘그들만의 신관’은 ‘부족신관(部族神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성경의 구약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전투지휘관이 돼 다른 민족을 정벌합니다만….

“그렇지요.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 자기 집단만을 위한 신을 받드는 게 부족신관입니다. 지금도 가령 운동경기를 하면서 자기 팀이 이기기를 신께 비는 것, 자기 종교만을 사랑하는 신을 받드는 것은 부족신관의 잔재라고 할 수 있지요. ‘도덕경’에서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예수님도 하느님은 의인의 밭이나 악인의 밭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이 무조건 내 편,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은 망상인 셈이지요.”

▼ ‘신 없는 사회’가 오히려 평화롭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표층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봐요. 잘못 믿는 것은 안 믿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주커먼 교수가 지난해 ‘Living the Secular Life(종교 없는 삶을 살다)’를 썼습니다. 이 책은 경탄하고 감격하는 삶, ‘awesome(기막히게 좋은)!’을 외칠 수 있는 삶이 권위에 의존적인 종교적 삶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바꾸면 성찰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아하!’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2012년 출간한 ‘종교를 넘어’에서 종교적 계율에 따라 강제되는 삶보다 선한 일을 할 때 더 행복하다는 기본 원리에 입각한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한물간 패러다임에 입각한 옛 신관이나 세계관, 가치관에서 벗어나 생명, 평화를 기본으로 여기고 삶을 사는 세계시민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 앞서 ‘장자’의 붕(鵬)과 ‘도덕경’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언급했는데, 노장사상이 21세기 한국과 세계에 도움을 줄 것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노장뿐 아니라 여러 종교의 심층이 활성화해야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지만, 노장이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에 기여할 대목을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첫째, 도(道)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노장의 실재관은 오늘날의 세계관과 부합하는 점이 많습니다. 둘째, 도를 어머니나 여성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는 등 여성성을 강조합니다. 셋째, 자연은 신비스러운 기물이므로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하는 환경보호 내지 생태적 관심을 가졌습니다. 넷째,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면서 폭력, 전쟁을 반대합니다. 다섯째, 꾸미지 않은 통나무처럼 욕심을 줄이고 순리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여섯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면서 진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종교 같은, 종교 아닌 종교

▼ 한국 사회는 이념, 정치 성향에 따라 편갈림이 심합니다.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쟁은 요즘 말로 고치면 다원주의(pluralism) 혹은 시각주의(perspec tivalism)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동일한 사물이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자는 뜻이에요. 똑같은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모양이 다릅니다. 둘 중 하나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지만,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싸움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화쟁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사상이다. 대립과 모순·쟁론을 조화·극복해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 원효는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화쟁 이론을 전개했다.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도 한다.

▼ 스님이 중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중생이 중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 파문 탓에 시끄러웠습니다. 기독교 교단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는 금품 살포, 상호 비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종교가 ‘소금’ 구실, ‘목탁’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세태를 어떻게 봅니까.

“어느 스님이 그러시더군요. 지금 한국 종교는 기업만도 못하다고. 기업은 돈을 번다는 것을 떳떳이 밝히고 돈을 버는데, 종교는 거룩함이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오히려 기업보다 돈 벌기에 더 혈안이 된 상태라고. 종교가 물질만능주의로 변질되거나 권력화해 생기는 부작용이겠지요. ‘종교 같은 종교가 아닌 종교’를 보고 있다고나 할까요”.

▼ 우리는 종교를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통해 더 큰 자유를 누리는 특권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적,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상 너머에 있는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과 불의의 원인을 꿰뚫어 살펴보고 이런 현상을 타파하는 것도 종교가 할 일이라 봅니다.

인간의 근본적 사명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종교라면 존재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선불교에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침으로 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조상도 죽이라는 뜻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잘라버리라는 말이지요.”

▼ ‘종교는 궁극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변화하는 체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쉬운 말로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변화된 개구리,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개구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 항해하지 못하다가 바다의 실재, 곧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멀리까지 항해할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생각하는 백성’

▼ 한국 종교가 어떻게 나아가기를 바랍니까.

“지금까지 이렇게저렇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요약하면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돼야 하겠지요.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 같은 이는 그리스도교가 심층적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 남양주시의 어느 큰 스님도 기복 일변도 종교로서의 불교는 역할이 끝났다고 말씀하더군요. 생각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종교의 심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 개인은 종교와 관련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영성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과정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캅 교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물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동방정교에서 행하던 예수기도(Jesus prayer),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선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지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過程神學)은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사조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신도 변화해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헌금은 ‘욕심 줄이기’ 연습

▼ 헌금은 왜 하는 겁니까. 십일조는….

“히브리 성서(구약) 마지막 책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생각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1000만 원이 필요하면 미리 100만 원을 바치고 1000만 원이 들어올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헌금은 이처럼 내가 얼마를 내고 신의 축복으로 그 몇 배로 튀겨서 받는 투자나 투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욕심을 줄이는 연습이고,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겠다는 인류 공동체 의식의 함양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종교기관에 바치는 것이 그것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로 나뉘어 있을 때 각 지파가 수입의 10분의 1을 제사장 족인 레위지파에 바치는 제도에서 비롯했습니다. 레위족은 그것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습니다. 당대에는 일종의 세금이었던 셈이지요. 오늘날 십일조를 강제로 바치게 한다면 이중과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만, 수입 일부를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사용하도록 적절한 곳에 바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2001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CP CURRENT PAGE:WORLD | WEDNESDAY, JANUARY 29, 2020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Persecuted even after death': China bans Christians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By Leah MarieAnn Klett, Christian Post Reporter| Wednesday, January 29, 2020

Chinese Catholic worshippers kneel and pray during Palm Sunday Mass during the Easter Holy Week at an "underground" or "unofficial" church on April 9, 2017 near Shijiazhuang, Hebei Province, China. | Getty Images/Kevin F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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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s across China are prohibited from holding religious funerals for their deceased loved ones as the Communist Party continues to tighten its grip on the regulation of religion and religious activity.

Bitter Winter, a magazine documenting human rights and religious freedom abuses in China, reported that authorities throughout the country are enforcing policies that prohibit religious customs and rituals to be used during funerals.


In December, the government of Wenzhou city’s Pingyang county in the eastern province of Zhejiang adopted the Regulations on Centralized Funeral Arrangement.

Under the new rules, “clerical personnel are not allowed to participate in funerals,” and “no more than ten family members of the deceased are allowed to read scriptures or sing hymns in a low voice.”

The new rules aim to “get rid of bad funeral customs and establish a scientific, civilized, and economical way of funerals.”

Similarly, a village official from the central province of Henan told Bitter Winter that the local government convened a meeting for religious work assistants in April, informing them that all religious funerals are restricted.

Soon after, officials issued a document stipulating that clerical personnel should be “timely stopped from using religion to intervene in citizens’ weddings and funerals or other activities in their lives.”

In Wuhan, police stormed the funeral of a Christian member of a government-regulated Three-Self Church and arrested her daughter, who was praying for her mother at the time. The daughter was only released after the deceased was buried without Christian rituals two days later.

Last April, officials broke up an 11-person Christian funeral in the province of Henan that was honoring a deceased member of the congregation. Officials accused attendees of “hiding” their actions in the countryside and threatened them with jail time. The police registered the personal contact information of the attendees and told them that they could be investigated at any time.

“When my father died, village officials threatened to arrest us if we didn’t conduct a secular funeral. We did not dare to go against them,” a villager from Gucheng town in Henan’s county-level city of Yuzhou told Bitter Winter.

“My father had been a believer for several decades. He is persecuted even after death.”

The crackdowns on religious funerals are part of the government’s campaign to “sinicize” religion, or bring it into unity with Communist Chinese culture.
In recent years, China has destroyed churches, burned down crosses, restricted religious expression online, and have attempted to rewrite the Bible and hymns so that the message reflects the Communist Party's ideology.

Beginning in February, the government plans to implement harsh new measures requiring all religious personnel to support and implement total submission to the CCP.

The “Administrative Measures for Religious Groups,” which consists of six sections and 41 articles, will control every aspect of religious activity within China and will complete the "Regulations on religious affairs" revised two years ago and implemented on Feb. 1, 2018.

“Religious organizations must adhere to the leadership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observe the constitution, laws, regulations, ordinances and policies, adhere to the principle of independence and self-government, adhere to the directives on religions in China, implementing the values of socialism,” says Article 5 of the new policies.

Persecution watchdog group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warns that the latest measures will be used by the Communist regime as a ”legal tool to further tighten space for religious groups.”

At a press conference earlier this month, David Curry, CEO of persecution watchdog group Open Doors USA, warned that the “greatest threat,” in his opinion, to human rights worldwide is China, which rose in the rankings from No. 27 to No. 23 in the 2020 report.

Curry stressed that the implications lie in China’s development of surveillance to control its people.

“Its implications are not just for Christians within China but for every country and for religious freedom generally,” Curry said. “Let me put it together. It is like a puzzle. The pieces are there but it is not until you put it together that you see it clearly. When you see it clearly, it is frightening.”

“I saw with my own eyes the surveillance on the street but also in the churches, watching their congregation,” he added. “Facial scans when you come in and then tracking you and generating reports [with] assumptions built into their artificial intelligence system that is tracking Christian behavior.”

Curry said that the more often a person is seen going to church, the more often they are to be labeled a “radical.”

“They are shutting down house churches at a massive rate — 5,596 churches shut down, many because they refuse to put surveillance cameras up to watch their congre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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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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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ing Across Divides Toward Reconciliation


“In Christ, 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 and entrusting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to us” 2 Corinthians 5:19

Facing current conflicts and divisions and historical wounds, the annual 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provides a multi-national platform for Christian leaders from diverse stakeholder groups – university, seminary, civil society, church, and younger leaders – to come together to pursue a common mission:

To forward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 by inspiring and educating Christian leadership, fostering community and healing across divides, bearing prophetic witness, and being a catalyst for collaboration and new initiatives.

The Forum is the core program of the Northeast Asia Reconciliation Initiative (NARI). The geographic focus is currently China mainland, Hong Kong, Japan, Korea, Taiwan, and the United States.
Founded in 2012, NARI is grounded in mutually transformative relationships between the following partner organizations: the Duke Divinity School Center for Reconciliation, the Mennonite Central Committee, and institutions and leaders in Northeast Asia.The 88 participants of the 2018 Forum in Kyoto gather at Doshish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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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H ANNUAL FORUM: MAY 27-JUNE 1, JEJU,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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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ory of Rev. Sekita Hiroo  FEBRUARY 6, 2020
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Jeju, 2019FEBRUARY 4, 2020
Christian Forum for Reconciliation in Northeast Asia-Kyoto, 2018FEBRUARY 4, 2020
Duke Divinity Students Attend Japan ForumSEPTEMBER 19, 2018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Kyoto Forum Report 2JUNE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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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4

13 Korean government honours Quaker | The Friend

Korean government honours Quaker | The Friend



Korean government honours Quaker

Posthumous award for John Cornes
Jean Cornes, ambassador Suk-hwan Park and Ruth Homer at the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 Photo: Photo courtesy of the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A Quaker who worked for the Friends Service Unit after the Korean War has been honoured by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Friends Service Unit in Korea: 1952-57

In the aftermath of the Korean War (1950-53), The Friends Service Unit (FSU) – a joint arm of the British Friends Service Council (FSC) and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 – provided humanitarian and medical aid to refugees and others affected by the war.
War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broke out in 1950.  By January 1951, six million people (one third of the Korean population) had become refugees.  Thirty thousand children were in orphanages and as many again were without shelter.  The UN was providing food relief and carrying out mass inoculations against diseases such as smallpox and typhoid.  Nevertheless, tuberculosis was rife.
In October 1952, the UN invited civilian organisations, including the Quakers, to help with relief efforts. Jonathan Rhodes from the AFSC and Lewis Waddilove from FSC visited South Korea, and identified Cholla Pukto, where there were two hundred thousand mainly North Korean refugees, and Kunsan, where there were thirty three thousand, as areas where Friends could be of most use.
In July 1953, a ceasefire was signed, and Frank and Patricia Hunt arrived to set up the Friends Service Unit, setting up base in Kunsan.  In October, an international team of doctors, nurses and a physiotherapist arrived from England, Ireland, Scotland, Sweden, Norway and the USA. They lived in a Korean house and operated out of the provincial hospital.
Kunsan Hospital had been left unfinished after the Japanese withdrawal from Korea and had then been bombed by the Americans.  There was little equipment, no heating, no running water and only intermittent electricity. The AFSC shipped relief supplies of food, medicine and bedding. Social workers from the USA and Norway began to assess welfare needs. Warm clothing and bedding were distributed by local volunteers.  Milk stations were set up serving hot milk and vitamins to children and pregnant women.
Over the winter, the priority lay in dealing with malnutrition.  However, plans were being drawn up for the rehabilitation of refugees.  American Quaker Floyd Schmoe, who had been helping with reconstruction work following the bombing of Hiroshima in Japan, set up Houses For Korea - a building project that provided refugees with the materials and training to construct their own houses.  Schools were started in the camps, with Korean teachers paid for by the FSU.  Adult literacy classes were started for war widows, and games of volleyball and basketball were organised.
Sewing machines were brought, and the war widows opened tailoring shops, a dry cleaners, and a business making soya bean curd.  Goats, bees and seeds for planting allowed the refugees to supply some of their own food.
In cooperation with the UN, Friends ran a training school for Nurse Aides.  They restored the Pathology lab at the hospital and trained lab technicians. David Ward, the physiotherapist, helped to fit prosthetics, made by local craftsmen, to those who had lost limbs in the war. A nurse, Ann Sealey, and a doctor, Jean Sullivan, started an antenatal and midwifery service.
The FSU started an outpatients’ service for sick children and opened a children’s ward in the hospital, where the children were looked after by a House Mother.  In some cases, children had been abandoned by their families and Friends arranged adoption with families in America.
The Korean authorities had little money to pay hospital staff and locals’ salaries were often paid in part by the FSU.  Throughout the time the FSU operated, the AFSC continued to provide vital medical supplies.
The FSU continued to operate until 1957, under the leadership first of Geoff Hemingway (1953-56) and then under Robert Grey.

Quaker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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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Quaker presence in Korea dates from the end of the Korean War (1950-53). In the aftermath of the war, The Friends Service Unit (FSU) – a joint arm of the British Friends Service Council and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 provided humanitarian and medical aid to refugees and others affected by the war.

From their base in Kunsan, the FSU initially tackled problems of severe malnutrition. Later Houses for Korea was set up by AFSC’s Floyd Schmoe, providing refugees with the materials and training to construct their own houses. Schools were started in the camps, with Korean teachers paid for by the FSU. Adult literacy classes were started for war widows, and games of volleyball and basketball were organised.

The FSU was heavily involved with training local Korean doctors and nurses. They set up a physiotherapy unit to help war amputees, and ante-natal and midwifery service and both out-patient and in-patient services for sick children.

When the FSU was wound up, at the end of 1957, local Koreans who had been working with the Quakers wanted to continue their connection with Quakerism. With the help of American Quaker families living in Seoul (in particular, Reginald Price and Arthur Mitchell), a group began to meet regularly for silent, unprogrammed worship, and for study and discussion.

The first Quaker text to be translated into Korean was Rufus Jones' Quaker's Faith in 1960. It watranslated by Yoon Gu Lee and printed for distribution among members.

Seoul meeting was eventually recognized as a monthly meeting in 1964 under the care of the Friends World Committee for Consultation (FWCC), and in 1967 moved into its own Meeting House. As one member of the meeting was blind, the meeting became involved in the welfare of the blind. Some members gathered periodically to transcribe religious articles into Braille and a work camp was organized to repair a road near one of the homes for the bl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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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Ko
rean who had first encountered Quakers through their work in Kunsan was the human rights activist, Ham Sok Hon. Ham was impressed by the Quakers’ pacifism, egalitarianism and their active participation in questions of social justice. Ham started to attend Seoul Quaker meeting and became a member of the Society of Friends in 1967, after attending the Friends World Conference in North Carolina.

“You were already a Quaker before you became one,” an American Friend, Arthur Mitchell, told him.

Ham spoke out against dictatorship and injustice in South Korea. He carried out a hunger strike in 1965, was imprisoned in 1976 and 1979, and was placed under house arrest in 1980. South Korea finally achieved full democracy in 1987. The following year, when the Seoul Olympics were held, Ham was selected to be the head of the Peace Olympiad, which drew up a declaration calling for world peace.

Under Ham’s leadership, and with the support of Mary and Lloyd Bailey, who stayed in Korea during 1983/4 under the auspices of the Friend in the Orient Committee of Pacific Yearly Meeting and continued to correspond with the meeting for many years after, Seoul Meeting flourished. Although membership declined after Ham’s death in 1989, it has revived again since 1998.

Conscientious objection has been a key issue for Quakers in South Korea. In a country still technically at war with North Korea, compulsory military service is considered essential and for many years COs had no option but to serve or to go prison. QUNO (Quaker United Nations Office) and FWCC were among those who campaigned for some form of alternative service to be offered, and this was finally implemented in 2007.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has maintained a presence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They currently run an agriculture programme, helping farmers introduce techniques of rice cultivation adapted to the short growing season in DPRK.

AFSC continues to campaign against North Korean nuclear tests, while warning that isolating or ignoring North Korea is not only unrealistic but danger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