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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2

한국 기독교 교파, 교단, 교리의 차이



질문 1) 기독교 교파간 교리의 차이 -1





기독교의 교파

기독교는 세계 2만여 개의 분파가 있으며, 대한민국에는 약 200~250개의 분파가 있다.

주요 교단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뉜다.

정교회 : 정통보편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로 이루어진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 : (로마에 있는) 보편교회(Catholic Church)라는 뜻으로 로마 주교, 즉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지역 교회들로 이루어진 교회. 천주교라고도 한다.




개신교 : 1517년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된 여러 교파를 총칭한다.




루터교 :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신학을 추종하는 개신교의 한 교파. 영어로는 “Lutheran Church”이다.




장로교(개혁교회) :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개신교 교파이다. 종교개혁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에,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도 한다.




침례교 : 1609년 존 스마이스에 의하여 시작된 개신교의 한 교파. 물에 잠기는 침례를 신약성서에 명시된 세례예식이라고 가르치며,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침례만이 옳은 세례라고 가르치고 시행하는 교파이다.




감리교 : 1729년 영국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 신부에 의하여 출발한 개신교 교파이다.




오순절 교회 : 20세기 초반 성령 운동을 통해 생긴 기독교 교파이며,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에서 성장하고 있다.




기타 :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퀘이커, 하나님의 성회, 여호와의 증인 등 각 교파들은 크고 작은 교리상의 차이점들을 보이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기 이전의 신앙고백들인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케돈 신경 등의 내용과 차이가 있는 내용을 교리에 담고 있다면, 그 교파는 기독교내의 기존 교단에서 이단으로 간주된다. 각 교파 사이의 신자들의 실질적인 영성 및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성찬례에 대한 견해의 차이 즉, 영성체 신학의 차이에서 초래되는 것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 위키사전 편집한 내용]




http://cafe.daum.net/ccm2/MCH1/6?q=%B0%B3%BD%C5%B1%B3%20%B1%B3%C6%C4%B0%A3%20%B1%B3%B8%AE%C2%F7%C0%CC&re=1 참고



















기독교 교파와 교단에 관한 이해-2




기독교에 많은 교파가 있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기독교로서의 공통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간이 되는 교리는 삼위일체론, 처녀잉태, 구속, 부활, 재림 등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예배의 형식이나, 성만찬에 대한 견해, 교권체제, 신조, 신학적 바탕 등에서 조금씩 다릅니다.




a) 장로교 (長老敎 Presbyterian)




칼뱅의 신학(神學)과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성립한 그리스도교의 개신교 교파.




장로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감독(bishop)·장로(elder) 등과 같은 의미로, 장로교는 이러한 장로들에 의해 치리(治理)되는 교회를 말한다.

창시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뱅(Jean Calvin)으로, 그는 16세기 중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559년에는 프랑스에서만 2,000여 교회가 장로제도를 채택하였고, 이어 네덜란드·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장로교회가 생겨났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1560년 이후 장로교회를 국교회로 지정해 이후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660년 청교도혁명이 끝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뒤 잉글랜드에서는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세계 장로교의 규범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헌법·예배지침 등을 청교도혁명 기간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장로교 역사상 중요한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노회가 조직되고, 1789년에는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노예문제·신학·전도방법 등의 이견으로 여러 교단이 출현하였는데, 신학·교리 등에는 차이가 없었다.

18세기 이후 미국 장로교회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해외선교에 앞장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써 장로교의 세계화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1882년(고종 19) 《누가복음》《요한복음》이 번역 출간되고, 190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1912년에 총회가 창설되었다.

세계적인 장로교 연합단체로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이 있고, 세계 장로교 총 교인수는 약 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b) 감리회 (監理會 Methodist Church)




1729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하여 시작된 그리스도교 교파.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G.휘필드등의 대학생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데 규칙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메서디스트(Methodist:格式主義者)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들은 성경 및 신학 연구 등에 힘쓰고, 빈민과 병자, 감옥의 죄수들의 전도에 힘썼다.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모인 올더스케이트 거리의 집회소에 참석하여 오후 8시 45분경 인도자가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의 로마서(書) 서문을 읽을 때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한다. 이 회심의 사건은 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고, 감리회의 구원·신앙·성결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원래 존 웨슬리는 고교회파(高敎會派)로서 영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였는데, 영국교회에서는 그의 교회 내 설교를 금하였으므로 야외설교의 방법을 택하여 그 운동은 점차 확대되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서디스트파 신자들을 런던에 모아놓고 전도사업 방침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것이 곧 감리회의 최초의 연회(年會)이다. 이때까지도 존 웨슬리는 영국교회와 분리하려는 뜻은 없었고 교회에 속한 채 전도하려 했지만, 1784년 런던 감독에게 미국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안수하여 주도록 청하자 감독이 거절하므로 그 자신이 안수를 베풀어 T.코크 박사를 미국의 총감독으로 삼고

그 밖에도 몇 사람에게 안수를 주어 목사로 세우니 이때부터 감리교회는 실제적인 한 교파를 이루게 되었다.




감리회의 발전은 교구제도와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었다.

존 웨슬리의 인격 ·조직력 ·지도력, 그리고 야외설교 ·평신도설교 등 꾸준한 복음활동 및 엄격하고 규율적인 생활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1791년 존 웨슬리가 서거하였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에 확장, 잉글랜드를 본거지로 하였던 감리회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이르렀고 미국에서는 휘필드의 주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이며, 그것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로 조직된다.

구역들은 지역적으로 지방회를 조직, 감리사가 피차 협동하여 교회조직과 사업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지방회는 다시 더 큰 집단을 형성하여 연회를 조직하며, 연회는 감독이 관할한다. 그리고 최고기관인 총회가 있다.




감리회 교리는 사도신경 속에 제시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다.

감리회의 특색은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라 하겠다.

사랑에 의하여 구현되는 신앙과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감리회에는 모든 신도가 각기 행하지 않으면 안될 규율, 곧 규범이 있고, 25개조의 종교강령이 있으며, 이것은 감리회의 헌법정신이기도 하다.

감리회 전도방법의 특색은 부흥설교를 통한 전도와 평신도를 통한 개인전도 및 심방전도이다.

감리회의 신앙과 교리는 존 웨슬리가 발표한 25개조의 종교강령과 그의 53개의 ‘표준설교’, 그리고 그가 지은 신약성서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c) 침례교 (浸禮敎 Baptists)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시행하는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특히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서원리(聖書原理) ·침례 ·만인사제(萬人司祭),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한다.

영국의 청교도(퓨리턴)의 여러 파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으며, 창시자는 J.스미스(1554?∼1612)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직자로 1608년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여 동지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는데, 그 중 T.헬위스와 몇몇 동지들이

영국으로 돌아가 1612년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아르미니우스파(派)의 입장을 취한 일반침례파와 칼뱅적 입장에 선 특수침례파의 구별이 있다.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크게 퍼져서, 현재 미국 최대의 교파를 이루고, 대소 27개의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침례교는 미국에서 카톨릭 다음으로 큰 교단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 안수집사,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는 독립적, 자율적인 면을 중요시 하여 총회나, 연회 등을 두지 않고 '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d) 성결교 (聖潔敎 Holiness Church)




1901년(광무 5) 2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 소속 선교사인 C.E.카우만과

E.A.킬보른(한국명 吉寶倫)에 의해 세워진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장로교·감리교와 함께 한국에서는 3대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하나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들 선교사는 일본의 도쿄[東京] 간다구[神田區]에 동양선교회 전도관을 세우고 일본인 목사

나카다[中田]의 후원 아래 동양일원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육에 힘쓰라는 선교회 본부의 지시도 있었으므로 전도관 1층에 성서학원을 개설, 성경 ·신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인 유학생 김상준(金相濬) ·정빈(鄭斌) 등이 이 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자 1907년 염곡(鹽谷:현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한 것이 한국성결교의 효시이다.

1911년 이명직(李明稙)·이명헌(李明憲) 등 5명이 동경성서학원을 마치고 귀국, 안수를 받고 장로사(長老師:순회목사)

가 되어 선교사들의 후원 아래 아현동 고개 위에 새로이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을 열면서 본격적인 목회자 양성과 노

방전도(路傍傳道) 등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21년 9월 중생(重生)·성결(聖潔)·신유(神愈)·재림(再臨)의 사중교리를 내세운 ‘기독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탄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수백 명의 성직자 ·신도들이 수난을 겪고, 교단이 강제 해체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한국 교계를 휩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 현재는

두개 교파로 나뉘어져 있다.




* 교권체제: 총회-지역총회-지방회-개 교회




e) 루터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창립된 가장 오래된 기독 교회




16세기 카톨릭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의 대소교리 문담(1529),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슈말칼트 신앙개조(1580), 콘코드의 신조(1580)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루터교는 이들 신조들 외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안 신조를 고백합니다.




교리적 특징은

1) 이신득의 강조

2) 성찬은 은혜의 방도가 된다.

3) 세례에 의한 중생

4)유아세례는 정당하며 합당하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 부여된 것

6)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있지만 구원은 만민에게 보편적




한국에서 루터 교회는 문서선교를 통해 확산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들어온 지원상 목사를 중심으로 컨콜디아사를 통해 문서선교를 하고 방송(루터란 아워)을 통해 선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회는 그리 큰 교단은 아니지만 베델성서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기독교 한국 루터회(http://www.lck.or.kr/)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회중주의이며, 행정과 결의에 있어서는 대의정치를 추구합니다.







f) 성공회 (聖公會 The Anglican Domain)




영국의 국교회.




영국에서 출발한 성공회는 앵글리칸 처치, 성공회, 에피스코팔처치, 등으로도 불리웁니다.

1536년 로마감독의 교권을 폐지하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가 영국왕 엘리자벳을 파문함으로써 로마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신앙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발생하였고 교회의 신학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교회 및 예배의식은 카톨릭에 가깝습니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교회의 정점이고 국회가 교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교구, 요크 대교구, 웨일스 대교구 로 나눠져 있으며 한국 성공회는 켄터베리 대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교리의 표준은 39신앙개조와 기도문입니다.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 된 것은 1890년 코프감독에 의해서였습니다.




조직은 주교, 신부, 부제라고 일컷는 종신직 신품이 있습니다.

g) 구세군 (救世軍 Salvation Army)




그리스도교 교파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창설한 교파 구세군은 1858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명칭은 1878.5에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1880년 처음 사관학교를 세웠습니다.

구세군의 특징은 사회봉사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인정하에 군대 조직을 차용합니다.




세계의 모든 구세군은 한 대장 아래 통솔을 받습니다. 구세군에서는 목사는 사관 평신도는 병사라고 지칭합니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8 명동에서 영국인 호가드 정령에 의해 옥외집회를 한데서 출발합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남녀평등을 중요시 여겨 사관학교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입교토록 하고 있습니다.




h)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기하성), 순복음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보통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라고도 한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三位一體)인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重生)·성령충만·신유(神癒)· 재림(再臨)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Pure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계열의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오순절파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학적 바탕은 뚜렷하게 어느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략 웨슬레안에 가깝습니니다.










질문 2) 개신교 교파간 교리차이







《 개신교 주요 교파의 차이점과 특징 》





현재 우리 나라에는 크게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등 여러 교파가 있지만 그 교파 내에서도 다양한 교단으로 쪼개져 있습니다.




예컨대 장로교 내에서도 '기독교 장로회'(기장)와 '예수교 장로회'(예장)가 있고, 예수교 장로회 내에서도 통합, 합동, 개혁, 고신, 대신 등등 수많은 교단이 있습니다.




개신교에는 많은 교파가 있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교파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교파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습니다.




1. 장로교

장로교는 국내 개신교 중에서 가장 많은 성도와 가장 많은 교단을 가지고 있는 교파입니다.

장로교는 장로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로란 명칭상의 교회 장로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장로교는 신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감독, 목사, 장로를 같은 직책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장로를 가르치고(설교) 치리하는 장로와 치리만 하는 장로로 나누는데 전자는 목사이고, 후자가 교회 직제명인 장로입니다.

장로교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 등의 교회 중직을 임명에 의해 세우지 않고 공동의회에서 세례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합니다.




심지어 장로교는 담임목사를 위임할 때도 먼저 공동의회에서 세례교인들의 위임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다른 장로교단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제가 속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 교단에는 공동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가 나와야 담임목사를 위임목사로 임직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목사를 청빙할 때도 먼저 제직회의 동의를 거쳐야 합니다. 그만큼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중시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장로교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교회정치를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로교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도를 가지게 된 하나의 원인은 어쩌면 이러한 민주적 교회정치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2. 감리교

감리교는 영국의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존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교파로서 장로교와 동시에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습니다.




감리교의 신학적, 교리적 특징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보편적 구원, ② 완전한 성화(聖化), ③ 교회 공동체를 통한 성도의 교제, ④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달리 칼빈의 예정론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구원 받을 사람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는 교리를 말합니다. 이처럼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합니다.

그리고 감리교는 사회봉사를 중시하기 때문에 장로교보다 사회 현실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보다 자유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감리교는 감독제의 교회 직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감독제는 감독이 다스리는 제도로서 그 체계가 계급적입니다. 교회사적인 의미로 감독제는 주교, 사제, 부제로 구성된 교회의 통치 체제를 의미합니다. 로마 가톨릭교와 성공회가 바로 이런 체제로 되어 있지요.




개신교에서는 일부 몇몇 교파만 감독제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감리교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감리교는 다른 개신교와는 달리 목회자 그룹이 계급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목사를 감독이라고 하며, 총회장을 감독회장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3. 침례교

침례교는 세례를 행할 때 물을 뿌리거나 부어서 하지 않고 전신을 물 속에 잠기게 해서 베풀기 때문에 침례교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침례교는 교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다른 개신교와 같지만 교회 조직이나 치리 형태에 있어서는 개체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회중주의 성격이 강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로마 가톨릭교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개교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지방분권제'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것은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들은 이야기인데 침례교는 특징적인 신학노선이 없다고 할만큼 신학적인 바탕이 약하다고 합니다. 즉 일반적인 기독교 교리를 따르는 추세이고 침례교만의 신학적 토대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4. 성결교

성결교는 다른 교파에 비해 역사가 짧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장로교나 감리교는 미국에서 전래되었지만 성결교는 순수하게 한국인의 선교 활동으로 조직되었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사에 의하면 한국 성결교는 1907년에 도쿄 성서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상문·정빈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결교는 선교단체에서 출발하여 한국인에 의한 포교를 통해 조직되었기 때문에 '국내 자생 교단'이라고도 합니다. 성결교는 그 명칭이 주는 의미처럼 개인의 성결과 성화사상을 중시합니다.




5. 순복음교회(오순절 교단)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대표로 하는 순복음교회의 정식 교단 명칭은 "기독교 대한하나님의 성회"입니다. 기독교 대한하나님의 성회는 19세기에 미국에서 형성된 근본주의적 개신교파인 "오순절교회"에 속한 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교회의 특성은 성령세례와 방언, 신유 등의 성령의 은사를 무척 강조합니다. 순복음교회도 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령 체험을 무척 중시합니다.




장로교나 감리교의 기독교 조직신학에서는 성령론을 그다지 비중 있게 취급하지 않지만 오순절교회는 성령론을 무척 비중 있게 다룹니다. 그래서 오순절 계열 신학교에서는 성령론에 대한 강의가 많다고 합니다.




6. 성공회

성공회는 "영국 국교회"라고 불려집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교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교파의 형성을 위해 창설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도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산물로 생겨난 교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특징은 직제는 로마 가톨릭교를, 교리는 개신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교처럼 7대 성사를 인정하고 주교, 사제, 부제라는 성직을 두고 있으나 가톨릭교와는 달리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그냥 이해하기 쉽게 가톨리교와 개신교의 중간 쯤에 있는 교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공회도 종교개혁의 산물로 생겨났기 때문에 굳이 분류를 한다면 구교(가톨릭교)보다는 신교에 두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외에도 개신교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구세군 등등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이처럼 기독교가 여러 교파로 나뉘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파 통합을 이루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강행한다고 해도 많은 부작용과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교파 통합보다는 교파 간의 협력과 화합을 도모하는 교파 연합이 가장 현실적인 교회일치운동의 방법입니다.

기독교 내에 여러 교파가 있는 것은 뿌리는 하나이나 그 위에 수많은 가지가 있는 나무처럼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위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교파가 생긴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현재 우리 나라 개신교의 교단수는 100개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단 분열은 신학적·교리적 노선차, 지역 갈등, 교권 다툼 등이 주요 원인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처럼 교단이 나뉘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28에서 증거한 것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교단 분열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들의 신앙관과 신학적 관점이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한 교단 내에서 서로 갈등하며 지내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에 맞는 교단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는 교단 분열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교단이 분열될수록 성도가 더 많이 늘어났다는 거죠. 그래서 혹자는 만일 한국 개신교가 하나의 교단으로 이루어졌다면 복음의 확장과 교회 성장이 이만큼 크게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http://cafe.daum.net/sachangchurch/YBVm/6?q=%B0%B3%BD%C5%B1%B3%20%B1%B3%C6%C4%B0%A3%20%B1%B3%B8%AE%C2%F7%C0%CC&re=1 계신교 교파 참고










3. 침례교 교파간 교리의 차이







침례교회의 특징 (장점과 단점)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기독교는 최초의 성립 이래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이전에 이미 서유럽에는 천주교가, 그리고 동유럽에는 동방정교회가 있어서 기독교 세력은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루터의 교회개혁 후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로 나뉘어 졌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 비해서 다양한데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를 비롯해서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 구세군, 그리고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등 이단을 포함한 개신교의 교파는 상당히 많다. 게다가 각 교파는 여러 교단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 밖에도 여러 교파운동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무수히 존재했었고, 또한 현재에도 존재한다.




본 글에서는 침례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교단 조직이 타 교단에 비해 개 교회 중심적이면서도 교회의 운영이 민주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신교 교파들 가운데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 침례교의 특징

침례교는 루터의 교회개혁 이후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이 출현한 교파이다. 많은 사람들은 침례교의 성향을 좌향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신약의 본질적인 원리를 지키는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원형적인 교회(Primitive Church)로서의 신약교회(New Testament Church)의 신앙을 전승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침례교는 당시 교회개혁이 지향하였던 여러 가지 목표들을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밀고 나갔던 교파이기도 하다. 침례교는 루터가 유아세례와 성찬식을 가톨릭의 방식대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이 불충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침례나 주의 만찬과 같은 교회 내 예식이나 조직 면에서 성경에 가장 근접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침례교가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본 연구의 진행은 의식, 교리, 조직, 대사회적 면으로 나누어 타 교단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1) 교회 의식: 침례

침례교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침례를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침례교의 첫 번째 특징은 침례의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교파들은 주로 물을 뿌리는 방법에 의해 세례를 주고 있는 것1)에 비해 침례교는 아예 물속에 담그는 방법을 통해 세례를 주고 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이와 같이 세례를 주는 방법을 달리하고 그 방법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세례라는 말 대신에 ‘뱁티스마(baptism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캐나다인으로 우리나라에 온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주한 외국선교사들로 구성된 성경번역위원회의 부회장으로 있던 말콤 C. 펜윅(Malcom C. Fenwick, 1863-1935)은 ‘baptism’을 세례 대신 ‘뱁티스마’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부회장직을 사퇴하고 성경을 혼자 번역할 정도였다. 그러나 침례교는 ‘뱁티스마’라는 용어가 일반에 생소할 것을 우려하여 ‘뱁티스마’라는 용어는 포기하되, 세례라는 용어 대신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2)




이와 같이 침례교는 침수침례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믿는 자들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신자의 침례’라고 부른다. 침례교에 의하면 신약교회는 믿는 자들만이 침례를 받았으며,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았다. 침례 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장사 지냄을,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믿지 않는 사람이 침례로 인해 몸이 물에 잠겼다면, 그것은 물에 젖지 않은 죄인이 물에 젖은 죄인으로 바뀐 사실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침례교는 모태교인을 인정하지 않으며,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자기의 믿음을 보여 줄 수 없음으로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침례교는 침례가 곧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인에게 침례는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 결코 아니다. 침례는 죄를 씻지 못한다. 따라서 죄를 씻기 위해 침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침례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침례를 못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침례를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침례교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례교는 확실히 믿지 않고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침례를 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인위적인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라 확실히 믿고 있다는 증거만 있으면 침례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3)




2) 교회 의식: 주의 만찬

타 교단과 가톨릭이 말하는 성찬식에 대해 침례교는 ‘주의만찬‘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기독교 각 교파의 입장은 크게 화체설(transubstantiation),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상징설(symbolism)로 구분할 수 있다. 화체설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으로 성찬식 때 사제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기 때문에 성찬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간에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어진다. 공재설은 루터와 칼빈의 입장으로 다시 구분된다. 루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법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가운데’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 의하면 역시 성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도 성찬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 이에 비해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믿고 성찬은 오직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만 작용한다고 믿었다. 화체설과 공재설은 비록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는 점에서는 견해를 같이 한다. 상징설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라는 견해이다. 침례교는 츠빙글리에서 비롯된 이 상징설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다른 교파들과 대비된다. 침례교는 침례가 교인권의 시작이라면, 성찬식은 교인권의 점검이라고 생각한다. 침례교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떡은 떡 그대로, 포도주는 포도주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성찬을 이와 같이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성경에 가장 가까운 견해라고 생각한다.




3) 교리

침례교는 교파신학이나 헌법 혹은 특별한 신조를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침례교는 교리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침례교 역시 하나의 교파로 존재하는 한 교리적인 측면의 특징이 없을 수 없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며 성경무오설을 지지한다. 침례교에 의하면 권위는 오직 살아있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신약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펜윅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한글 번역에 힘을 썼으며, 성경 읽기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대한 교단의 권위 있는 해석보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해석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펜윅은 신도들이 바이블의 어려운 구절에 부닥쳤을 때 남의 도움을 빌어 해석하기보다는 수차 그 구절을 읽으면 성령이 필요에 따라 알게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도 개개인이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바이블을 해석할 수 있으며, 과학과 교육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때에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아마도 이러한 입장은 침례교가 영적 개인주의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영혼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다른 어느 교파보다도 강조하여 모든 신자가 똑같이 제사장의 지위를 지닌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침례교에도 교파 나름의 신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침례교는 대체로 웨스트민스터문답서와 필라델피아신앙고백서를 지지하다가 1925년에 가서야 일반적으로 ‘뉴 햄프셔 신앙고백(New Hampshire Confession)’으로 알려져 있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침례교는 1962년에 이르러 이 ‘뉴 햄프셔 신앙고백’을 수정, 보완하여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라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침례교는 이 신앙고백서가 최종적이라고 보지 않으며 오류가 전혀 없는 완벽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만약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다면 적절한 시기에 이 신앙고백서를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가 미국 남침례회라는 침례교의 대표적인 교단에서 채택된 신앙고백서라고 해서 이 신앙고백서를 모든 침례교 교단이 승인할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침례교의 다른 교단은 물론이고 미국 남침례회에 소속된 침례교 교회라고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서를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서는 어디까지나 바이블 해석에 도움이 되는 지침일 뿐 이것이 모든 침례교인의 신앙을 좌지우지할 권위를 지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는 개신교의 다른 교파와 달리 신조가 신도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침례교는 신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소통과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신과 올바른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침례교 내부에는 다양한 신앙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4) 조직

침례교는 원칙적으로 철저한 개교회주의를 지향한다. 비록 개교회가 모인 지방연합회, 그리고 지방연합회가 모인 총회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3자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동의 관계이다. 따라서 침례교의 교단 조직은 한마디로 개교회주의에 입각한 협동적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침례교의 이러한 교단 조직은 로마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의 다른 교파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침례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치권과 자결권을 가지는 침례교의 개교회는 감독제도나 장로제도와 대비되는 회중제도라는 조직 형태를 취한다. 감독제도는 감독이나 주교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 형태로 로마 가톨릭, 영국 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 연합 감리교회, 루터교의 일부가 채택하고 있다. 장로제도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가 교회를 치리하는 교회 형태를 말하는데 장로교가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파이다. 감독제도와 장로제도가 모두 중앙집권적인 조직 형태라면 회중제도는 보다 민주적인 조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회중제도 아래에서는 교회의 모든 문제가 회중 자신에 의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회중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파는 회중교회,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침례교를 열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침례교는 중앙집권적 조직 형태가 아니라 회중제도라는 민주적인 조직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비록 개교회 내에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직분은 계급의 직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의 직분으로 이해된다. 이런 조직 형태 내에서 신도 개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보다 민주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보다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침례교의 조직적인 측면에서의 특징은 한마디로 개교회의 자치와 회중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사회와의 관계

침례교는 대사회적 측면에서도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침례교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은 물론 여타 개신교 교파들과 대비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침례교는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나 침례교는 회중교회가 국가의 통제 아래 있으려는 것과 달리 국가가 교회에 대해 그 어떤 통제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교단유형론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형이라기보다는 섹트형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침례교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비교적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영국, 유럽, 미국 등지에서 주로 서민들이나 노동자 계급에 더 많은 호소력을 지니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개신교 교파 가운데 최초로 해외 선교를 시도한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는 1793년부터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일찍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침례교가 섹트형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세례의 방법으로 침례를 행하며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는 점, 신도 개개인이 바이블을 해석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신조가 다른 교파들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 아울러 우리는 침례교가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며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었다.




3. 침례교회의 신앙

1) 성서의 권위

침례교인들은 또한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믿음과 행습의 유일한 권위로 믿었다. 에릭 올만(Eric Ohlmann)은 이러한 침례교인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종교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어떠한 안내를 받기 위한 자료들을 성경뿐만 아니라 전통이나 이성,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가져오려는 다른 기독교 단체들과는 달리, 침례교인들은 철저하고 단호하게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신앙과 행습의 유일한 권위로 삼았다.” 즉 장로교회는 존 칼빈의 성경에 대한 해석을 따르고, 감리교인들은 존 웨슬리의 성경이해를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신앙의 지표로 삼았다고 볼 수 있지만, 침례교회는 이러한 어떤 신학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고자 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2) 교회론

가. 신약 성경을 모델로 하는 순수한 교회 추구

침례교인들은 신약교회를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인 교회로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의 체계와 직분을 성경에 있는 모범을 따라 조직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교회를 순수한 교회로 보고, 교회의 체계와 직분을 성경에 가르침에 근거하여 만들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침례교회의 입장이다. 침례교인들은 신약성경에서 교회 구조의 모범을 발견하였고, 사도적인 교회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침례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체제에도 적용하였던 것이다.




나. 믿는 자 침례와 중생자 교회회원

침례교인들은 유아세례는 성서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여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신앙을 고백한 자에게만 침례를 베풀었던 것을 근거로 믿음을 고백한 신자에게만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신자의 침례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침례교인들은 침례를 중생 받음에 대한 외부적 표식으로 보았으며, 교회란 신자의 모임이므로 교회 회원은 오직 침례를 받은 중생자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침례교회는 교회의 구성원은 회원(member)뿐만 아니라 참여자(participants)도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다만 정식회원은 중생을 얻은 자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3) 가시적 교회와 교회 치리 강조

침례교회는 불가시적이고 우주적인 교회의 개념을 인정하지만, 주로 가시적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1644년의 “제 1차 런던 신앙고백서”는 “교회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시적인 것으로서, 부름 받아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복음에 대하여 가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침례 받고 주님과 하나 된 성도들의 모임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가시적 교회에 대한 강조는 또한 유아세례 반대에 대한 이론적 근거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4) 정교분리

침례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였고, 그것을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재침례교인들과는 달리 침례교인들은 맹세하는 것, 성도가 관료 되는 것, 무력을 사용하는 것 등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을 강조하였고, 극단적인 평화주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즉 침례교회의 정교분리는 물리적인 분리가 아니라 영적인 분리였던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침례교인들은 모든 성도가 어떠한 인간적인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었음을 보여준다.




5) 회중주의: 만인제사장 교리에 근거

침례교회는 만인제사장의 교리에 근거하여, 교회정치의 형태로 회중주의를 채택하였다. 침례교도들은 성직자를 계급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기능적인 사역으로 여겼다. 즉 목사와 집사, 그리고 평신도는 계급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일의 차이로 생각하였다.




6) 민주적인 체제와 개교회주의

침례교회는 회중주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교회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이고 평등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침례교회는 또한 개교회주의 즉, 지역 교회의 자치를 믿었다. 개 교회 자치의 전통은 민주주의 체제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7) 선교에 대한 강조

사실상 침례교회는 개신교회들 중에서 가장 선교를 강조한 교단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선교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캐리는 침례교 선교사였다). 침례교회는 선교에 열심 하는 교단으로 유명한데, 침례교회가 선교를 강조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는 침례교 자원주의 교회론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었다.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개신교의 한 교파인 침례교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침례교의 여러 특징과 신앙을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본 글이 침례교의 특징과 역사를 침례교 내부에서 완벽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 전통적으로 개혁주의를 따르는 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한다. 이는 구약의 교회에서 시행 되던 예식인 할례와 유월절 만찬이 신약의 교회에서 세례와 성찬으로 대치되었다고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특히 할례나 세례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있는 공동체에 들어온다는 상징이 있다고 해석하며, 이미 공동체에 있던 가정에서 자녀가 출생하면 할례를 베푼다는 구약의 원리를 따라 신약의 교회에서도 언약 공동체 안에 있는 가정에 자녀가 출생하면 공동체 안에 있다는 의미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신교 특징상 구원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2) 침례교의 경우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는데 이는 성경에서 침례요한이 회개 후 침례를 주장하였고, 예수도 제자를 삼은 뒤에 침례를 주라고 분부했다는 것에 기인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zvbx&logNo=50000724467 참고

http://blog.daum.net/kiki2042/1702 참고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26021 참고



2021/06/04

교회와신앙 계시는 계속되고 가시적 재림은 없다 한국 퀘이커교를 진단한다 ②/ 교리와 현황

교회와신앙
계시는 계속되고 가시적 재림은 없다
한국 퀘이커교를 진단한다 ②/ 교리와 현황
2006년 05월 08일 (월) 00:00:00 전정희 기자  gasuri48@hanmail.net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 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그저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한국의 대표적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의 ‘퀘이커 예찬’이다. 퀘이커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이들은 일정한 교회 제도를 택하지 않았기에 큰 조직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면 그들은 개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 현재까지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모임을 가지며 교세를 확산시키고 있다. 동시에 한국교회 종교다원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이에 퀘이커교의 발생배경과 근본사상 그리고 한국전래와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 배경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영국 교회가 로마 천주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개혁운동을 일으켜 17세기에는 영국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그들을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장로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후에 주로 미국을 발판으로 큰 교파로 발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리주의자들 중에 특이한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이 1647년 영국인 죠지 폭스가 창시한 ‘친우회(Friends)’ 또는 ‘퀘이커단(Quakers)’이다.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 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나님을 직접 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며, 특히 사회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크롬웰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엷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있었던 빚 대신 그에게 웨스트뉴저지 개발권을 주었고,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는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안식처가 되었다.

2. 퀘이커교의 교리

첫째, 퀘이커교는 그들 특유의 예배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무언(無言)을 지킨다. 침묵(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성령의 내림을 기다린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성령의 내림과 사역이 있으면 받은 영감을 말한다. 17세기에 이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영감을 받을 때 전신이 떨었다 해서 ‘진동자(Qua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약 영감을 받은 사람이 없으면 무언으로 그 모임은 끝난다. 그들은 직접적 영감을 중시하여 언제든지 새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함석헌은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다. 퀘이커들은 단체로 명상할 때 하나님이 임재한다고 믿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예배형태에 대해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조직신학)는 “과연 퀘이커 모임 가운데 있는 것이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며 “그들은 때때로 성경과 예배 중에 성령의 영감을 구분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퀘이커 사람들은 계속적인 계시(continuing revelation)를 말하는 결과를 내고 만다”고 지적한다. 즉, 퀘이커교도들은 요한복음 1장 9절~18절에 근거해 ‘보편적인 내면의 빛(the universal Inward Light)’을 중요시하면서 이것으로 계속적으로 진리를 계시해 준다고 주장하지만 이 본문이 그런 뜻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모든 신비주의를 허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퀘이커교는 성서가 모든 종교체험에 관한 가장 우수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불변의 진리가 있거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퀘이커에 따르면 “성서는 원천에 관한 방향 제시는 되나 원천 자체는 아니다. 그 원천은 오히려 성령 또는 각자의 내부에 있는 ‘영적 빛’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내적으로, 직접적으로 자기 안에 내주하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성서대학교대학원장 김호식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성경보다 자기들이 직접 받은 계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문제다”며 “이에 반해 개신교는 66권 성경이 모든 신앙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아래 박스 기사 참고).

셋째, 퀘이커교는 내적 계시를 중시하고 성서를 격하시키기 때문에 어떤 교리나 신앙고백서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신학적 사변의 무거운 짐을 바닷가에 다 버렸다고 자랑한다. 퀘이커호주연회에서 펴낸 <청소년을 위한 퀘이커 신앙 안내서>의 교리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싸움을 무조건 반대한다. 따라서 군대에 들어간다거나 전쟁준비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양심적 병역거부).”
“우리는 노예제도,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은 외적인 성례전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례전을 갖지 않는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분이 있다. 그것은 ‘씨’, ‘속의 빛’, ‘사람의 영’ 등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인종이나 종교에도 상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 속에 있는 영을 계발하고 진리를 더 열렬하게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매우 가까이 나아갔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인 악나톤, 인도 왕자 석가모니, 중국 신비주의자 노자, 유대인 이사야 등이 있다.”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힌두교나 유교 또는 그밖의 다른 종교나 철학이 하나님께 향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과 실천을 존중한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교리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퀘이커교도들은 대개 삼위일체 교리, 전전 타락 교리, 죄의 전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 등을 거부하고, 성례가 불필요하다고 본다. 초기 퀘이커 교리는 Robert Barclay(1648~1690)가 쓴 「Apology for the True Christian Divinity」(Amsterdam, 1676)에 요약되어 있고, 19세기 초에 와서는 그들 안에 있던 청교도적이고 재세례파적인 요소들을 모두 버려 버리고 19세기의 지적 정황에 맞게 자신들의 사상을 다시 표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퀘이커는 두 종류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복음주의적 퀘이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이다.

주로 Joseph John Gurney(1788~1847)의 영향 하에서 나타난 복음주의적 퀘이커는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며, 그것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계속적인 계시와 철저한 평화주의(doctrinal pacifism), 그리고 내면의 빛을 통한 구속과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퀘이커들은 목사를 임직시키지는 않지만, 목사를 청빙하기는 한다. 또한 순서를 따라 드리는 예배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복음주의적 퀘이커의 표준적 진술은 ‘리치몬드 선언’(1887)이다.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주의는 부분적으로는 18세기 정적주의적 퀘이커 사상(quietist Quakerism)에서 연원한 것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결합시킨 사상이다. 보편적 내면의 빛 교리를 확장시켜 모든 종교에 그 빛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며 모든 종교들은 다 조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류는 다 하나라고 믿기에 이런 분파의 퀘이커는 평화 운동과 사회봉사 활동에서 매우 활동적이다.”

넷째,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종자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죄의 종자와 신적 종자다. 죄의 종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싹이 트나, 신적 종자는 신으로부터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님의 심방’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방의 하루 또는 한 때를 주어 그가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에 동참하게 한다. 이 하나님의 심방의 때를 가지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마음속에 비치는 빛에 항거하는 사람은 멸망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다.

또, 퀘이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아담의 죄값이 전가되어 있지 않다. 사람이 다 같은 불복종의 죄를 범하고부터 비로소 죄책이 생기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까지 원죄의 책임을 지우는 교리는 잔인하고 자연과 하나님의 자비와 의에 어긋나는 견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아담의 죄의 전가를 거부하는 퀘이커교는 결국 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고, 그 구원의 방도는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가의 여부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섯째, 퀘이커교의 교회는 ‘거룩한 빛,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순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한다. 그 안에는 이미 죽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교도(異敎徒)와 터키 사람과 유대 사람도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눈을 뜨고 은혜의 선물의 정도에 따라 서로 가르치고 교육하고 배려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런데 외적 신앙고백과 외적 의식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다면(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목) 그들은 악마의 꼬임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주장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초기 퀘이커 사상가인 죠지 폭스는 가시적 교회의 배교가 신약 성경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며 배교한 교회에 천주교회와 개신교 모두를 넣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이제 ‘참 교회’를 모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했다. 그 함의는 이제 내면의 빛을 추구하는 이들이 참 교회라는 것이고, 자신들과 이교도 가운데서 이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 이들은 모두 참 교회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후에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에서는 이런 생각이 더 확대되어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섯째, 퀘이커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주의자이다. 따라서 퀘이커교가 병역과 선서를 거절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봉사적 사랑으로써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 점이 다른 기독교신비주의자들과 다른 점이다.

3. 퀘이커교의 한국 전래와 현황

처음 퀘이커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6.25전쟁 직후다. 1953년 전북 군산의 도립병원에서 구제활동을 폈던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의사들을 통해 처음 퀘이커를 접한 군산 사람들이 그들의 침묵예배에 참석하면서 한국 퀘이커가 탄생했다. 퀘이커 봉사자들이 떠난 이후에도 한국인들끼리 자체 모임을 계속해 한국 퀘이커 1세대가 출현했으며 최초의 한국인 퀘이커는 이윤구였다.

1960년대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 데 공감한 함석헌의 가담으로 퀘이커는 한때 크게 부흥했다. 함석헌은 본래 장로교 신자였으나 일본에 건너가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소극적 신앙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퀘이커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퀘이커 지도자였던 브린튼의 영향을 직접 받아 그것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한국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교는 1989년 함석헌 타계 후 내부 혼란과 갈등을 빚으며 10년이 넘도록 예배모임조차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미국 펜들힐에서 정식 퀘이커교도가 되어 귀국한 이후 한국퀘이커에도 활기가 생겼다. 옛 퀘이커 멤버들을 중심으로 원상 복귀를 위해 노력해 다시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서울 신촌의 모임에는 약 50여명의 교도들이 있고, 곧 대전에 모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박성준 교수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는 글을 통해 퀘이커교와 민중신학의 연합을 시도한다. 그는 죠지 폭스는 ‘예수가 이미 재림한 사실을 알리려 했던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죠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음으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계속해서 “죠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며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사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고 해석한다.

이승구 교수는 박성준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결국 그리스도의 가시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고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강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갈 2:20), 바울을 따라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에도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과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했으며, 우리는 그 점을 매우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우리들의 성령님의 은혜 아래서의 삶과 사역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결국 그리스도 사역의 독특성을 파괴하게 된다”며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反)하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문자적, 신체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또 “함석헌은 1970년대 초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그의 씨알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흡사하다”며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알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 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석헌 선생님은 무교회주의사상과도 오랫동안 관련을 갖고 계셨고, 1970년대에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종교적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퀘이커 사상을 항상 변해 가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그를 충실한 퀘이커라고 하기는 어렵다. ‘씨알’ 사상은 퀘이커 사상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영글어진 것이 분명하며, 퀘이커 사상과 민중 신학을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나(따라서 학자들이 그런 논구를 할 수는 있으나)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  참고도서 -----
김나미, <이름이 다른 그들의 신을 말하다>, 2005
김남식,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 운동 연구>, 새순출판사, 1987
김성봉, <빈야드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와신앙, 1996
김영태, <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 인간사랑, 2002
이종성, <교회론(1)>, 대한기독교출판사, 1989
함석헌, <현대의 禪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 1985
박성준,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 <신학사상>109집, 2000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 2002  

직접 계시 중시, 교회 조직 거부 "이단성"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보는 퀘이커교

퀘이커교의 이 같은 예배 형태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개신교 신학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노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성서대학교의 이호우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주관적인 성령의 계시, 임재, 조명을 부르짖다가 교회조직과 성경해석, 성경연구, 심지어 일반적 예배조차 거부한다”며 “이것은 최근 범종교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영성수련과 일맥상통한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성령의 빛 또는 내적 조명을 강조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영성을 계발하고 신(하나님)과의 체험을 이룬다는 측면은 최근 동양철학적인 명상이나 마음 수련 즉, 뉴에이지 운동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개인적인 성령의 조명하심도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나 교회 공동체에게 임하는 해석적인 측면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신대대학원 최덕성 교수(역사신학)는 “퀘이커교도들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것은 신앙의 외형성(externality)에 대한 부정과 내면성(internality)에 대한 집착”이라며 “서양인의 사고양식인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서 영국교회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이 외형적인 요소들, 교회라고 하는 조직(헌법, 규례 등), 성찬이라고 하는 물질요소들, 교리나 신학이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규범들을 거부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규정지었다.

특히 최 교수는 “부패한 지상교회의 조직이 가진 모순과 횡포를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이 이해는 된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우리가 연약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에서 외형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성경이 외형적 요소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최 교수는 “로마가톨릭처럼 외적 요소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퀘이커교도들의 주장은 합리적인 면에서나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그리고 ‘역사적 교회’라는 것을 검토해 볼 때도 호소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성서대대학원장 김호식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경험주의적인 신앙노선에서 성경보다 자기들이 직접 받은 계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이단이라고 취급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개신교는 66권 성경이 모든 신앙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는다”면서 “퀘이커는 계시의 현장성을 믿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성경과 대등한 종류의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경의 정경성을 부인하는 면에서 이단이라고 분류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퀘이커는 성령을 받으면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신체 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 빈야드와 오순절 운동과 같은 계열의 ‘성령운동자들’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인본주의 신학 즉, 자신들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경험을 기준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미국이나 남미의 ‘해방신학’이 한국에서 ‘민중신학’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며 “퀘이커교 운동이 현대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퀘이커는 평화주의자’라는 인식에 대해 “평화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적국이 침략해 올 때 방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평화주의는 문제 있다”고 비판했다. 
 

함석헌 평전을 읽고

The Ch5 Studio


함석헌 평전을 읽고 작성일 2005-11-04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이 4권 있다.

첫번째 책은 솔로몬의 저서로 알려진 서양 성경책에 수록된 "전도서".
나의 10대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영향 탓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그 첫 구절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음악을 가까이 접하기 시작하면서 접하기 시작한
서양의 미학과 관련된 책들... 그 중에서 거의 필이 딱 꽂힌 책이
바로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유명한 저작은 아니지만
당시에 이 책이 주었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한마디로 예술한답시고 개폼 똥폼 잡는 게 오히려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고,
나아가 참된 예술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 안에 있다는 얘기.
논리 정연한 듯 보이기는 하되 정작 내용이 공허한 여타 미학책들과는
그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고, 논리를 넘어선 어떤 아우라(aura)를 느끼게 된다.

그 다음으로는 "도덕경"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도덕경은 서양 철학책처럼 말 자체가 어려운 책은 전혀 아니다.
도덕경은 간결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와 덕을 말하는 데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톨스토이란 분이 원래 도덕경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니
내가 도덕경을 전혀 몰랐던 상태에서도 톨스토이의 글을 읽고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 또한 이러 저러한 사정을 알게 되니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해 정신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껴
몸 수련으로서 무술을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껸에 이어 태극권을 하게 된 이유 또한 도덕경의 영향을 배재할 수 없다.

도덕경을 몸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말할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포기하지 않는 곳에
'길'이 있으리라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책은 "금강경"이다.
이 책의 내용은 내가 거의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어떤 어렴풋한 이미지로 상상만 해 볼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강을 건넜거든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사용했던 뗏목을 버려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늘 염두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연 내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그 무언가를 뗏목을 버리듯 과감하고
미련없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을지 나의 미래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김성수 지음의 "함석헌 평전"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냥 기독교 교회의 목사님 같은 분인줄로만 알았는데
기독교로부터의 지대한 영향, 톨스토이의 사상, 유교 경전 및 도덕경 그리고 불경...
우연하게도 내가 영향을 받는 사상의 궤적과 거의 일치된 삶을 살다 가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기가 통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최소한 잘못된 길은 아닌가 보다는
안도감도 생긴다.

그의 평전으로 인해 기독교 중 퀘이커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왜 한국의 교회가 그토록 지나친 친미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여러가지 복잡한 시대적 상황이 얽혀 있으므로 짧은 글로는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지만 어쨌든 일제 시대의 기독교는 전통적 유교 관습을 탈피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던 것 같고, 게다가 미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당히 드문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를 거쳐 한국의 여러 독재 정치를 거치는 동안
그가 보여준 행보 또한 깊이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런 인물을 여지껏 내가 이름만 간신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
함석헌이야말로 내가 생각해 왔던 바로 그런 기독교인인 것 같다.
기복신앙적 요소와 재정적 부패, 유일신 사상을 기본으로 한 원리주의에 의해
독단으로 치달아 버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잣대로는 그를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현 평전에 두어번 반복해서 나온 듯 하여 기억에 남은 구절로
"평화는 할 수 없다고 안하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어도 해야 하고 할 수 없어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개인의 입장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 될 수 있을텐데
나는 이 말을 자신이 가려는 길의 최종 목표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길을 가고 있는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늘 깨어 있는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것이 정신을 자주 잃고 본질이 아닌 곳에 정신을 쉽게 빼앗기곤 하는
나에게 당장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1/05/23

내가 본 함석헌





내가 본 함석헌 책읽기

2006. 5. 13. 21:14



https://blog.naver.com/stupa84/100024304420
번역하기




『내가 본 함석헌』

조우석 |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또 한 권의 믿음직한 함석헌 평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읽을거리 『내가 본 함석헌』을 이번 호를 포함해 두 차례로 나눠 리뷰한다. 실은 "한 10여 회라도 썼으면…" 싶은 마음이다. 『내가 본 함석헌』은 험했던 우리 시대에 흔치않은 두 인격인 함석헌과 김용준의 만남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평전 이상의 평전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중 세월이 좋아지면 수십 권의 함석헌 평전이 나오겠지만, 그 어느 책도 이 텍스트를 비껴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든다.

그만큼 소중한 증언자인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말 내게 각별한 분으로 남아 있다. 게으른 탓에 그 어른을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여러 계기로 내게 다가왔다. 이를테면 그가 관여했던 1980년대 신과학운동 관련서를 보며"중진 화학자의 이런 탄력적인 과학관이라니…" 하며 그를 단단히 입력했다. 당시 학계 지원사업이 활발했던 핵심 공간이 대우빌딩 뒤 대우재단빌딩. 그때 그곳은 문화부 기자의 주요 출입처 가운데 하나였다.

그곳에 간혹 들릴라치면 그곳의 간판스타인 국제정치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동주 이용희 선생과 함께 김용준, 그분의 손길이 느껴졌다. 젊은 내가 지적 자극을 일정하게 받았음은 물론이다. 당시 막 뜨던 도올 김용옥의 맏형이 그 어른이고, 거의 깝친다는 수준이었던 도올의 스타 기질이란 알고 보면 '장형 콤플렉스'라는 점, 어렸을 때 엄한 장형으로부터 숱하게 종아리를 맞았다는 일화도 재단 후배로부터 전해 듣고 웃었던 기억이 선하다.

김용준과 김용옥이 동향인 천안 출신이라서 친근감을 가졌으나, 김용준의 사람됨에 관한 일화 역시 우연치 않게도 천안 분으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신문기자 대선배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의 이계익 전 문화일보 부사장. 연세와 상관없이 가장 유연하고 탄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분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장관을 역임했지만, 내가 알기에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그중 리얼하고 잘 쓰인 논픽션의 저자다.

거의 30년 전인 1978년에 선보인 『소양강 뱃사공』(정우사)이라는 매력적인 책. 그 많은 편집국 후배들 중 당신께서는 내게 그 책을 서명해주는 친절을 베푸셨다. 예의 삼아 읽어야 했던 그 책은 험한 현대사의 복판을 걸어야 했던 바로 앞 세대의 삶에 관한 너무도 많은 정보가 담긴 보물단지로 다가왔다. 지금의 나는 그 책을 한국전쟁 시기의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꼽는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거의 백미에 속하는 당시 전쟁상황의 일상사를 다룬 표현이다.

명문 배재중 1년생인 소년 이계익은 창졸지간에 잃은 아버지 유해를 천안여중 옆의 둑방에 가매장을 한 뒤 인근 시골 광덕에 내려간다. 그게 개전 바로 한 달 전후. "새우젓독 같은 시커먼 폭탄을 주르르 쏟"(19쪽)는 B29폭격기의 공습을 일상으로 여기며 마을 우물가에서 잡아들인 갯붕어의 배를 따던 그는 2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 인민의용군을 마주친다. 놀라와라. 장총 한 자루씩을 등에 맨 채 "괴뢰와 더불어 싸워 죽은/ 우리들의 죽음을…" 하는 군가를 부르고 남진을 하던 그들은 배재의 이웃 이화여중 출신 패거리였다.

"'너, 나 모르겠니? 기억 없어?' 이웃한 여중의 5학년 간부였다면서 반갑다는 기색이었지만,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모두 자원한 의용군이라고 했다. 쑥물을 들인 후줄근한 무명군복이 땀과 먼지에 찌들어 궁상스러웠다. 가슴, 어깨, 등에 얽힌 위장망에는 시든 풀잎이 몇 개씩 늘어져있었다. 장총을 짚고 선 계집애, 따발총을 거꾸로 둘러맨 계집애, 그것도 없는 애는 약통을 걸쳐메고 있었다."(23쪽)

전쟁의 일상에 관한 디테일로 이만한 글을 나는 본 일이 드물다. 중요한 것은 저자다. 개전 초기에 아버지를 잃었고, 막내 동생마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 봐야 했던 그는 10대 시절 '전쟁 마당의 들개'로 추락한다. 마을 공회당 구호양곡을 팔아먹는 것 따위야 여반장이었다. 급기야 천안 한 교회의 책을 훔치다가 붙잡히고 만다. 그때 운명처럼 만나게 된 '이계익의 밀리에르 신부'가 다름 아닌 청년 김용준이었으니!

"'이 세상에 악인은 따로 없습니다.…' … 딱히 무슨 뜻인지 짚이지 않는 대목도 많았으나 계속되는 그 이야기는 서서히 뜨거운 강물이 되어 나의 발끝에서부터 차 올라오는 것이었다. 드디어 가슴 어깨 그리고 머리까지 물 속에 잠기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젊은 분은 나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뜨거운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내일 천안중학교로 와서 나를 찾으세요. 화학을 가르치는 김용준입니다.' '…' '아니면 저녁시간에 교회로 오세요. 영어 공부들을 하고 있으니까…'"(84-85쪽)

김용준이라는 인격을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까. 또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이 이토록 우연이면서도 절묘할 수 있을까. 전쟁 직후의 그런 사정은 『내가 본 함석헌』에도 내비치고 있다. 즉 1951년부터 3년간 김용준은 천안에서 화학, 독일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때 김용준은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23쪽)을 만난다. 함석헌이 강연차 그 학교에 내려왔던 것이다. 당시 함석헌을 처음 뵐 때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33쪽)고 털어놓았던 김용준은 지금 천안중앙장로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김용준이 무교회주의자 함석헌 추종자라는 이유로 이단으로 찍혀 교회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그게 1950년대 시절의 얘기다. 이러저런 이유로 『내가 본 함석헌』은 앞의 내 판단대로 인격과 인격이 만난 '두 겹의 평전'이다. 다음 호에는 그렇게 교직되는 인연 속에서 바라본 함석헌의 모습을 리뷰하겠지만, 다소 인용이 길었던 이번 호의 잠정적인 주제는 간단하다. 우선, 만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다는 점이다. 사람살이란 때론 그토록 오묘하다.

또 교육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평균적이고 산술적인 실력 끌어올리기가 아니다. 상대의 그릇을 발견하는 행위일 뿐이다. 또 그걸 재확인해주는 보증작업이다. 이계익을 김용준이 발견하고, 그 김용준을 함석헌이 재확인해주고…. 그러면 함석헌은 누구인가.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20세기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를 꼽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내가 본 함석헌』은 그 모습이 그런대로 입체적으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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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조우석 |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halfguy@hanmail.net





『소양강 뱃사공』의 저자인 10대 이계익이 운명처럼 '이계익의 밀리에르 신부'에 다름 아닌 20대 청년 김용준을 마주치고, 그 김용준은 함석헌이라는 문제적 인물과 조우를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다고 나는 지난 주 이 지면에서 말했다. 그 점에서 『내가 본 함석헌』은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이 만난 '두 겹의 평전'이었다. 교육이라는 것도 상대의 그릇을 발견하는 마주침의 행위일 뿐이라는 비약 아닌 비약까지 내친 김에 해봤다.

『내가 본 함석헌』 역시 그런 만남으로 가득 차 있다. 함석헌이 함석헌인 이유는 세상이 다 알듯 다석 유영모와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했던 오산학교에 함석헌은 3학년으로 편입했고, 그때 두루마기에 고무신 차림의 교장인 다석을 마주친 것이다. "전 생애를 통해서 크게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게 함석헌의 회고인데, 그 말의 무게를 거듭 음미해볼 만하다. 그건 쌍방향이다. 다음 다석의 말도 기억해두자.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 만나기 위해서였던 가 봐." 함 선생님은 류 선생님의 이 한 마디 말씀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왔다고 류영모 선생님의 1주기를 기념하여 모인 자리에서 고백하였다."(92쪽)

우리의 20세기 지성사에서 다석과 함석헌이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한다. 다소 거칠게 말하면 20세기란 서구 근대학문의 이식사에 다름 아니고, 그것은 대학이라는 제도를 통해 지식권력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피할 수 없었던 과정이었지만, 그것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식민성이야말로 우리를 괴롭히는 핵심 요소다. 다석과 함석헌은 우리의 부끄러움 내지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씻어주는 위안이다.

그 점에서 구한말 민족종교 이후 다석-함석헌으로 이어지는 족보야말로 '20세기의 장외場外 사상사'의 줄기로, 장차 거듭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퀘이커교도였던 두 분이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라고 하는 수입 종교와 얽혀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바로 그런 근대성의 측면 때문에 민족종교가 갖고 있는 한국 사상의 원형은 근대적 변용과정을 거칠 수 있었고, 이후 20세기로 이어진다는 게 내 판단이다.

어쨌거나 『내가 본 함석헌』에서 유심히 들여다 본 대목은 함석헌의 인간적 약점에 대한 서술이었다. 다석 역시 함석헌에 대해 실망을 안는 계기가 되었던 한 여성과의 스캔들 말이다. 혹시 그 여자문제를 마치 없던 일처럼 처리했다면, 이 평전은 '우러러보기도 힘든 함석헌'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면서, 국내 평전들이 저지르는 우상화 함정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있었다.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123쪽)는 구체적인 서술을 포함해 3개 절節에 걸친 서술은 인간 함석헌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가 오모 여인이라는 것, 그 여성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함석헌의 취사를 돕던 사람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일 것이다. 정권의 사주를 받은 함석헌의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써서 재야세력의 핵심인 함석헌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는 90년대 말 필자가 근무했던 신문사까지 찾아와서 함석헌이 얼마나 호색한인가를 내게 강조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당혹스러웠고, 근거 없는 호색한의 이미지를 잠시 주입시켰음을 고백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영모) 선생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1960년 9월 30일자)."(127쪽)
그 편지는 함석헌이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신학자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때 함석헌은 환갑 나이였고, 단 한 번 외도로 그런 고통을 겪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에 결혼했던 부인이 일생을 문맹으로 마쳤다는(133쪽) 점도 나는 이 평전에서 처음 알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함석헌을 종교적 성인 반열에 올려놓고, 그의 윤리를 재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옳다. 내 경우 이 평전을 통해 비로소 사람 함석헌이 친근하게 느껴졌음을 고백한다.

그런 함석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저자는 "나는 함석헌을 서슴없이 '정신적 낭만주의자(Spiritual Romantist)'라고 부른다"(39쪽)고 말한다. 포괄적인 규정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 "워즈워스뿐만 아니라 셸리, 바이런, 브라우닝 등 19세기의 낭만주의 시인들을 즐겨 읽었다는 이야기와 또 "나는 낭만주의자이지, 별 수 없어."라는 그 자신의 고백"(34쪽)에 대한 인용도 그걸 뒷받침한다. 흥미롭다. 저자는 그 말을 주로 멘탈리티에 대한 규정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함석헌의 공적 생애가 만개한 1960년대,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역시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에 앞섰던 낭만주의 멘탈리티가 아닐까 싶은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싶다. 그러나 함석헌은 동시에 1인 저널리스트이자, 노장사상과 인도사상에 대한 해석자이기도 했으며, '고난의 역사론'이라는 독자적인 사론을 가졌던 재야 한국사 연구자다. 무엇보다 그는 걸출한 시인이기도 했다.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 우리는 함석헌 연구의 첫 발을 뗀 것뿐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타고르가 못 났다. …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같이 다 곪아버릴 수밖에 없었다."(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넘어』 머리말 재인용, 6쪽)






http://www.kpm21.co.kr


[출처] 내가 본 함석헌|작성자 stupa84

2021/05/19

Ken Geunyoun YI 마흔 뭣이 중헌가? 15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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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뭣이 중헌가? 15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기

마흔 뭣이 중헌가? 시리즈 11번째 글에서 야곱과 천사의 씨름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개인적으로 그 본문이 구약성경에서 가장 난해했던 본문이었다면, (댓글에 링크)
신약에서 해석이 가장 오락가락했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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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굳이 요약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 혹여나 내용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내용을 말씀드리면,
사사건건 당시의 보편적인 율법 해석에 딴지를 걸며 튀는 행동을 일삼던 예수님을 별로 안 좋아하던 ‘율법학자’ 한 사람이 또 다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만한 어려운 질문을 갖고 찾아왔다.
율법학자: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예수님: 성경이 뭐라 하느냐?
율법학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 맞다. 그렇게 살아라.
율법학자: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뺏기고, 죽도록 맞아 죽어가고 있었는데,
유대인 제사장은 보고 그냥 지나쳤고, 레위인(이스라엘 12지파 중 제사장 지파)도 힐끗 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스라엘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의 혼혈로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음)이 지나가다 치료해주고, 상처에 기름을 붓고, 노새에 태워 여관에 옮긴 후,
다음 날 주인에게 간호를 부탁하며 두 데나리온(노동자의 이틀 치 품삯)을 주고 부족하면 돌아와서 더 줄 테니 잘 보살펴 달라고 했다.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율법학자: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해라.

언뜻 보면 간단한 비유 같지만, 생각보다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 않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신학자 중의 한 분인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조차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강도 만난 자 = 아담
예루살렘 = 하늘의 도성
여리고 = 세상
강도 = 마귀
강도가 떼려 거반 죽게 만든 것 = 마귀가 아담으로 하여금 죄를 지어 영적으로 반쯤 죽게 만든 것
제사장/레위인 = 구약성경
사마리아인 = 그리스도
여행자의 상처를 싸 매주는 것 = 죄의 회개
기름 = 선한 희망의 위안
노새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심으로써 입은 육체
여관 = 교회
여관집 주인 = 사도 바울
다음날 = 주의 부활
두 데나리온 = 사랑의 두 형태 즉 이생과 내생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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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의 해석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좀 유치하다. (물론 토시하나 놓치지 않고 연결해 내는 끈기와 창의성은 인정.)
한창 전도사로 사역을 하던 시절의 내 해석은 이러했다.
율법학자는 ‘내 이웃’을 한정해서 어떻게든 영생의 길을 좁히려고 했다. 아무나 ‘내 이웃’이라면 영생의 길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쓸데없이 ‘내 이웃’이 누구인지 고민할 시간에 ‘너는 강도당한 자에게 어떤 이웃인지?’ 즉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위선적인 종교인인지? 아니면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진실하고 선한 이웃인지? 나 고민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대상인 ‘내 이웃’에 대한 관심을 끄고,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너 자신’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관심은 ‘너 자신’의 삶이지, ‘너가 누구를 사랑하는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정도 해석도 나름 훌륭하다.
그러나 사우디라는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인종이나 환경 면에서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곳에서 8년의 삶을 살며 머릿속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 온 몸으로 경험한 해석을 새롭게 얻게 되었다.
아내가 사우디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아내로서 담담히 회고한 바 있지만,
당사자인 내게는 그 과정이 마치 강도 당해 거반 죽은 것처럼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좋게 해석하려 많이 애쓰고 있지만, 40대 중반에 여덟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의 실직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불행한 일은 틀림없지 않은가?
그렇게 인생이 날린 강력한 펀치를 맞고 비틀거리고 있는 나를 모른 척 지나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조금만 신경을 써줘도 내게 많은 도움이 될 만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애써 내 상황을 외면하려 했고, 더 곤경에 몰아넣으려 했다.
그러나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임을 입증시켜 준 소중한 이웃들도 있었다.
그렇게 자비를 베푼 이웃들 중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수의 이웃들은 내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는 무슬림들이었다.
이런 실존적인 경험이 내게 예수님의 이 비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과연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꿈꾼 영생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왜 하필 강력한 풍자의 대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종교인들을 꼽고, 이상적인 모델로 당시에는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을 꼽았을까?
이 본문에만 한정해서 조금 위험한 해석까지 나가보자면,
나는 이 비유에서 종교라는 체제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불신과 탄식을 본다.
예수님은 죽어 가는 사람을 모른척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해 조금의 분노도 표현하지 않으시고, 그냥 담담히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묘사하신다.
마치 욕도 아깝다는 듯,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그야말로 무감각, 무관심하시다.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제도화된 종교가 얼마나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지,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해 왔는지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성의 말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묘사하시면서도 담담하시지 않았을까?
과연 예수님께 종교라는 제도 속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한 이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그 지위에 올라가기까지 지나쳐야만 했던 수많은 인간성 말살의 순간을 모두 알고 계시는 그 분께 그들이 쌓아 올린 높은 지위는 오히려 환멸의 대상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 본문에 국한해서만 생각하자면, 예수님은 영생의 길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단 한 단어도 종교의 언어를 쓰지 않으셨다.
강도 만난 자의 상처를 싸매고, 기름을 붓고, 노새에 태워 여관에 데려가 간호해 주고, 자신의 돈을 써서 그를 부탁하는 등, 여기 어디에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찬양과 십일조와 같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말이 나오는가?
종교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평범하지만 진실한 삶의 한 순간을 묘사하며 영생의 길을 말씀하시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께 영생이란 전혀 종교와는 상관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멀쩡히 종교의 탈을 쓰고도 인간성을 상실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종교 과잉의 시대에,
예수님이 꿈꾸는 영생의 삶은 화려한 종교인의 삶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지만, 아니 어쩌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강도만난 자의 딱한 사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그를 도와주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성의 상실만은 참을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아니겠습니까?’
위키사전에 나오는 예문이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입으로는 영생, 구원, 천국 등 종교의 언어가 가득하지만, 실제 불쌍한 이웃 앞에서는 ‘인지상정’을 거두어 버린 비정한 종교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진정한 영생의 길은 꽹과리와 같이 울리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불쌍한 이웃 앞에서 ‘인지상정’을 거두지 않은 평범한 인간의 삶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십대 중년 가장의 실직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통과하며 내가 만난 선한 무슬림들은 나에게 종교와 인종, 문화와 역사라는 틀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며, 실제 고통 속에 있는 이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진정한 영생의 삶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 본문을 묵상하는 짦은 시간동안 만이라도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종교의 틀을 뛰어 넘어, 예수님이 그렇게 자랑하고 싶어하셨던 진정한 인간성 속에서 영생을 살았던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다.
*그림은 나의 최애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선한 사마리아인, 거의 의식이 없는 강도만난 자를 힘겹게 노새에 싣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저 멀리 무심하게 상황을 외면한체 길을 걸어 가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희미한 모습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고흐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비참한 삶을 겪어 보았기에 더욱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릴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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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and 5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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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
    아멘! 다시 말씀 사역 해도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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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김영배 ㅎㅎ말씀 사업이 될까 겁나요. 저는 좋은 사업가가 되는 것에 최선을 다할테니, 말씀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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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
      이근윤 언제 한번 오포에 오시오~ 회포 한번 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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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김영배 네 한번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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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oson Da
    공감 💯합니다 ~
    어떠한 배경 (제사장,레위인,사마리아인)과 상관없이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함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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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Hyoson Da 지금 시대에 말씀하셨다면, 사마리아인 대신 성소수자, 아시아인, 난민 등 소외 계층을 대입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모든 차별 받는 이들의 영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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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un Ju Kim
    실덕 후 함석헌 님이 퀘이커가 된 장면이 떠오르는군.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한 것 아님을 고통을 통해 알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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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Hyun Ju Kim 현실 종교가 가진 장점이 분명히 있겠지만 본질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종교에 데어 본 사람들의 선택지는 퀘이커 정도 밖에 없나 봅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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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un Ju Kim
      이근윤 퀘이커에도 껍데기가 있어요. 계속 벗겨내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으려는 마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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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Hyun Ju Kim 맞아요. 껍데기를 끝없이 벗겨내서 환골탈태 하려는 지속적인 노력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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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un Ju Kim
      이근윤 껍데기가 있어서 알맹이가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니, 벗겨지는 껍데기에게도 감사할 수밖에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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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Hyun Ju Kim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제게 성경과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 껍데기가 없었다면 알맹이를 키울 수가 없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어느 순간 보호막이 아닌 억압이 되어 버린 껍데기는 과감히 벗어버려야 한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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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ng Jun Kim
    사마리아인과 같은 삶이되길. 그리고 새일도 잘 준비하고 ^^. 멀지 않는곳에 있는데 혹시나 기회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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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Young Jun Kim 그래 내가 큰 업적은 못 남기더라도 선한 이웃으로 살아 가는 것만은, 특히 환난당한 자의 이웃이 되기 위해 많이 애써야지.. 가까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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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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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ng Jun Kim
      이근윤 응. 난 원주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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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h
  • Kim JinHyoung
    귀한 깨달음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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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n Geunyoun YI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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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ung Min Shin
    그러게 말입니다. 복음과 진리는 교회의 종교성을 초월하는것을 정정 겪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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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 h
  • Jong Hyun Yoon
    종교시스템의 부품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는 삶..선한 사마리아인은 진정한 언약이 무엇인지..마음에 할례받은 자가 누구인지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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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뭣이 중헌가? 11
사업가 야곱 이야기(자신과의 불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하여, 긴글 주의)
나에게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을 꼽으라면 야곱을 택하고 싶다.
그는 태생부터가 난해하다.
그의 엄마 리브가는 태중에 에서와 야곱, 두 이란성 쌍둥이를 잉태했을 때 '복중에 두 나라가 나뉘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그리고 출산의 날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다. 본능적으로 형과의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었으리라..
복중에서부터 분단된 두 형제 나라의 비극은 아빠 엄마의 취향 차이(아빠는 사냥, 엄마는 요리)에서 비롯된 편애로부터 싹이 트고,
팥죽 한 그릇에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면서 커져 가다가, 엄마의 계략으로 아빠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주려 했던 장자의 축복을 야곱이 가로 채며 절정에 이른다.
결국 야곱을 죽이러 나선 형 에서를 피해 야곱은 정든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길고 긴 피난길을 떠난다.
라반의 집에서 그는 운명적 사랑에 빠지고, 무려 14년의 시간을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장인이 될 라반에게 무료 봉사한다.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 치밀하고 똑똑해 보이는 그가 사랑에 눈이 뒤집혀 인생의 가장 혈기 왕성한 기간을 허송하며 보내는 듯한 장면은 지극히 낭만적이다. 솔직히 현실주의자의 눈으로보면 대단히 멍청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랑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성경에 이보다 더 순정적인 러브 스토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눈먼 사랑에 포로가 되어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던 그는, 순간적으로 찾아온 기회 앞에서 엄청난 순발력과 사업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약간은 속임수로 보이는 수완이었지만, 어쨋든 합법적으로 그가 외삼촌에게 당했던 모든 무료 봉사의 댓가를 넉넉히 돌려 받는다.
물론 이 과정이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이 없이는 불가능했겠지만,
애굽에 피난 가서 아내를 파라오에게 강탈 당할 뻔했다가,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그 쓰린 경험의 댓가로 파라오에게 사과의 선물을 받아 벼락 부자가 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이미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로 태어 나서 평생 큰 평지풍파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 이삭에 비해서(물론 그도 극심한 기근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을 떠나지 않는 뚝심으로 100배의 수확을 얻는 대박을 터뜨린 적이 있긴하다.)
무려 14년을 자원 봉사만 하던 빈털털이 가출 소년에서, 한순간에 자신의 능력으로 거부가 된 자수성가한 수완 좋은 사업가라는 면에서, 나로서는 가장 부러우면서도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사업가로서 야곱의 재능은 부의 축적이라는 면에서도 돋보이지만, 일궈낸 부를 수성하기 위한 리스크 관리 면에서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 준다.
첫번째 위기는, 합법적인 계약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핵심 재산을 고스란히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라반의 아들들에의해 찾아 왔다.
그러나 야곱은 아마도 오랜 도망 생활로 체득되었을 놀랄만한 눈치로 상황을 일찍 파악했고, 미련 없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 같던 사업을 포기하고 야반도주를 한다.
아마도 '조금만 더' 하는 심정으로 알토란 같은 사업 모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미적거렸다면 결국 철수 시점을 놓쳐 한방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겨우 첫 위기를 탈출한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 모든 모험의 시작점이었던, 무서운 형, 에서와의 재회였다.
혈혈단신으로 도망 나와 40년만에 네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 그리고 엄청난 종들과 가축을 거느린 자수성가한 거부가 되었지만,
잊을만하면 불현듯 살아 돌아와 늘 그를 우울 모드에 빠지게 했던 흑역사,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트라우마가, 외나무 다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형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먼저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야곱이었다. 장자권을 끝없이 탐내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가지려했던 야곱에 비해, 형 에서는 어찌 보면 쿨하게 동생을 대했다.(물론 성경은 이것을 망령된 것으로 평가하지만...)
야곱이 에서를 보기 힘들어 했던 것은 단순히 자기로 인해 화난 형을 만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 보아야 했기에 그 순간이 세상 그 무엇보다 두렵고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파수꾼의 보고로 형이 무려 400명의 전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후, 야곱은 평생 자신을 지탱해 온 수완을 총동원하여 이중 삼중의 대비책을 세워 에서의 습격에 대비한다.(다시 한번 놀라운 수준의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 준다.)
모든 가족들을 철저하게 전략적 순서에 따라 배치하여 얍복강을 건너 보낸 후, 이제 자신이 건너 가야 할 차례지만, 야곱은 차마 건너가지 못하고 혼자 망설이고 있다.
밤이 늦도록 나룻터에 서성이던 그는 갑작스런 자객의 습격을 받아 밤새 처절한 육박전을 벌인다. 싸움의 결과로 그는 평생 남을 장애를 갖게 되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단순한 씨름 경기가 아니라 목숨을 건 혈투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야곱을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인물로 꼽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씨름을 하나님과의 투쟁이라 해석하여, 특히 기도할 때 하나님과 싸워서 이겨야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라 믿는다. 일종의 쟁취인 셈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고, 꾸짖지 않으시고 후하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권고한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과 왜 싸워야 하나? 주고 싶어하는 사람과 싸워서 강제로 빼앗는게 가능한가?
성경의 하나님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서 억지로 빼앗아야만 하는 욕심많은 신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도로 찾아 온다면 누구보다 기뻐하실 분이 그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딱뜨려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야곱과 생사를 건 씨름을 하셔야 했을까?
내가 이 씨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예전 글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의 통로라 소개한 '무력감'이라는 단어였다.
압복강을 건너기 전까지 야곱에게 '무력감'은 무척 낯선 단어였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정도로 그는 집념 그 자체였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격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설사 그것이 옳지 않은 속임수를 쓰는 것일지라도) 쟁취하고야 마는 그의 사전에 '무력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평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온 야곱이 이날 밤만은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맞딱뜨렸다.
그 좋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보아도, 이 일생일대의 위기를 벗어날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평생을 그에게는 거침돌이자, 공포 그 자체인 형 에서를 넘어서야만 한다. 그런데 도저히 자신도 없고 복잡한 생각과 정리되지 않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는다.
그 때 갑자기 자객이 덥쳤다. 어쩌면 야곱은 얼씨구나 잘 됐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도 답답하고, 어딘가 분풀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는데, 누군가가 덤벼 주니 잘됐다. 오늘 니가 죽든 내가 죽든 정말 죽어라 한번 싸워보자...
그런데 싸우면 싸울수록 좀 이상했다.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인줄 알았는데, 늘 가까이 있던 사람처럼 익숙하다. 매일같이 상대했던 사람처럼 모든 것이 친숙하기 그지없다.
밤이 맞도록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이 사람은 떠나기 직전 불의의 한 수로 야곱을 벌러덩 나가 떨어지게 만든다. 얼마나 큰 부상을 입었는지, 이 때로부터 야곱은 평생을 절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사람을 붙잡고 뜬금없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며 물고 늘어진다. 결국 이 사람은 야곱을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새 이름을 준다.
아니 분명 부상은 야곱이 입었는데, 왜 이 사람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칭호를 주었을까? 난해해, 난해해...
야곱이 에서를 극복하지 못하고 늘 그를 의식하며, 그의 것을 어떻게든 빼앗으려 했던 것은, 사실 에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에서는 거의 야곱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야곱을 경쟁의 상대로 생각하는 듯한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늘 두 관계에서 안달했던 것은 야곱이었다.
도대체 야곱은 왜 이렇게 형의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했던, 늘 형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래서 병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성공하려 했던 야곱의 거친 자아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성경의 어떤 인물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 앞에 한번도 수동적이었던 적이 없던 인물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요셉 등 주요 인물들이 모두 중매 결혼에 만족할 때, 유독 그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즉 연애 결혼을 하기 위해 14년의 세월을 허송하며 보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달리 철저히 자신의 수완으로 이뤄졌다.
나는 그의 이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이 보기 좋지만 않다. 왠지 애처롭고 외로워 보인다.
내 생각에 그가 그렇게 미친 듯이 연애에 매달리고, 악착같이 부를 축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형을 편애하는 아빠와 자신을 편애하는 엄마 사이에서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자아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삐뚤어진 자아의 시각으로 바라 본 하나님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으며, 그의 축복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장자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자신을 이렇게 밖에 대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인 원망은 아닐지라도 미묘한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자신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분을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대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기로 했다. 심지어 그것이 형과 아버지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속이고 죄를 짓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느니 죄를 짓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가 마치 양과 목자와 같이 깊은 신뢰 속에 막막해도 일단 믿고 따르는 관계였다면,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는 감정이 배제된 비즈니스를 보는 듯하여 좀 불편하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가다가 돌베게를 베고 자다, 하늘 사다리를 타고 천사가 오르내리는 유명한 꿈을 꾼 후 처음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던 장면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매달린 다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든지 이런 개인적이고 친밀감이 담긴 기도를 드리는게 아니라 이 길에서 무사히 돌아 오면 십일조를 하겠다는 일종의 사업적 거래를 제안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기도라기보다는 무슨 사업 제안서 같은 딜을 시도했던 야곱의 바램처럼 40년의 이민 생활을 마감하고 고국으로 돌아 오게 되었다. 수많은 고초도 겪었지만 야곱의 집요함과 뛰어난 수완,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잘 버무려 져 큰 부를 일구고 대가족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마지막 고비에서 이 모든 것을 한방에 날리게 될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딱 뜨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야곱이 맞딱뜨린 가장 큰 위험은 에서와 400명의 전사가 아니었다. 끝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틀어 놓는 내면의 원망과 비뚤어진 자아, 그리고 죄를 짓더라도 충족해야만 했던 강렬한 욕망이 문제였다.
아무리 외부의 위기를 귀신 같이 피해 다니고 적절히 관리해도, 내면의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얍복에서의 그날밤 그는 폭발하고 말았다. 갑작스레 덤벼드는 자객에게 평생의 한을 가득담아 죽일듯이 덤벼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분이, 그가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으면서도, 결국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체 자신의 삶 깊숙히 들어 오는 것은 거부했던, '그 분'이라는 것을....
'그 분'임을 알고 나서도 그는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이름 야곱(당시 씨름에 사용되었던 속임수)답게 온갖 속임수로 그분을 이기려 들었다. 그러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만한 무렵, 상대는 지금껏 숨겨왔던 강력한 수로 야곱에게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혔다.
아곱은 이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평생 자신이 이 사람으로부터 얻지 못해 죽을 것만 같았던, 그것을 얻어야만 이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기대했던 축복대신 이 사람은 평생을 절뚝발이로 살아야만 하는 장애를 안겨주며, '너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자'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만 남기고 가버렸다.
나 같으면, 평생의 분노보다 더 큰 증오로 까무려쳤을 법도 한데, 야곱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이름으로 그 처절한 전투장을 기억하며, 그는 감격스러운 아침을 맞이한다.
이 후 그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에서와의 만남은 너무나 싱겁게 아름다운 화해로 마무리가 된다.
도대체 이렇게 극적인 화해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야곱은 그날 밤,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묵묵히 야곱의 온갖 공격을 다 받아 주셨다. 마치 일부러 야곱에게 져주기 위해 오신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 분 앞에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다 보여 준 후에, 더 이상의 밑바닥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쌓아 두었던 높은 담을 허물 수 있었던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가장 악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낸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도 오래 불화해 온 자신과의 화해가 이뤄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지금껏 하나님과 아버지 그리고 형에게 죄를 지어 가면서까지 쟁취하려 했던 욕망에 대한 회개도 이뤄졌을 것이다.
결국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나님은 이 화해의 확실한 증표로 야곱의 몸에 평생 사라지지 않을 장애를 남겨주셨다. 야곱은 그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이후로 야곱은 인생은 이전과는 달랐다. 여전히 말못할 고초와 어려움이 덥쳤지만, 더 이상 안달복달하며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말년에 애굽에서 죽기 전에 열 두 아들을 축복할 때 그가 보여 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의 깊이는 오래도록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한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심오한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감 브니엘에서 야곱의 속사람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그랬듯, 이삭이 그랬듯, 하나님과 완전한 화해가 이뤄졌고,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그 '무력감'이 야곱의 삶에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준 것이다.
4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오는 형을 만나기 위해 그에게 필요한 무장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무기가 아니었다.
밤새도록 싸우느라 초췌해진 얼굴에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야곱 생애에서 가장 무력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최고의 무장이었다.
무력하기 그지없는 야곱의 모습 앞에서 에서의 미움은 녹아 내렸다. 그도 분명 자신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간 동생이 엄청난 거부가 되어 돌아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한켠에 비켜 두었던 분노가 주체하지 못할만큼 타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들을 데리고 동생을 손보려 했을 것이다. 그가 받았어야할 복을 가로채 거부가 된 동생을 어찌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가 맞이한 동생의 모습은 소위 성공한 이의 기름이 좔좔 흐르는 그것이 아니었다. 초라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절뚝이며 오는 동생을 보며 에서의 분노는 연민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야곱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그의 유능함이 아니라 무능함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돌파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어쭙잖은 내 인생을 야곱에 우겨 넣어 보자면,
나도 한 때 과도하리만치 하나님의 복에 집착한 적이 있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성장 과정을 거쳐 온 나에게 청년의 때에 맛본 하나님의 복은 너무나 달콤했고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바닥에서 통할만한 재주도 적절히 있어서, 제법 그 영역에서 성공을 거뒀고, 나름 괜찮게 사역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 또 하나님에 대해 철저하게 정직하지 못했던 나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위기 앞에서 쉽게 무너져 내렸다.
어설픈 유능함과 몇 몇 신앙적 성공에 의존해 있던 내 자존감은 믿기 힘든 결과 앞에 버티기 힘들었고 약한 수준의 우울증도 경험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멀리 달아 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나마 내 유능함이 아직 먹힐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아 왔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빈손 쥐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홀가분했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좋았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고생의 기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술술 잘 풀렸고, 제법 괜찮은 성취를 이뤘다.
그러다 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전에 내게 많은 성공을 가져다 주었던 비즈니스 모델에 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안이하게 집착하다간 모든 것을 다 날릴 판이다.
급하게 방향을 바꿔 이것 저것 시도하고 있지만, 지금 내 기분은 마치 얍복 나루터에 앉아 400명의 전사를 몰고 오고 있는 형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야곱이 된 기분이다.
낯선 나라에 와서 제법 나쁘지 않은 성취도 이뤘지만, 앞에는 과거의 원수인 형 에서가 뒤에는 현재의 원수인 라반의 아들들이 이를 갈고 있는 진퇴양난에 빠진 야곱과 같이 막막한 느낌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게 무엇일까? 400명의 전사와 싸워 이길 용기와 유능함? 아니면 또 다시 그들을 속여 넘기고 위기를 모면할 지혜와 계책?
아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해임을 느낀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싸우시러 오셨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의 삶과 나의 모습과, 나의 하나님께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내 유능함으로 내 인생을 성취하고 싶은, 무능함과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는 내게 오셔서, 내 자신과의 불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불화를 다루고 싶어 하신다.
만약 이 얍복의 전투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거듭 나지 못한다면, 여전히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위기를 헤쳐 가려 한다면, 내 삐뚤어진 욕망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다면, 브니엘의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며, 400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덥쳐 오는 에서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무력해진 야곱에게 비로소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고 바로 그 이름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름이 된다.
마흔, 내게 주어진 씨름은 스물, 서른 때처럼 더 이상 얼마나 유능하냐의 싸움이 아니다. 에서와의 비교와 경쟁, 라반의 아들들과의 경쟁도 아니다.
얼마나 더 철저하게 무력해 지느냐의 싸움이며,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과 또 나 자신과 불화했던 내가 하나님과 또 나 자신과 화해하느냐의 싸움이다.
사우디 불황의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는 고독한 사업가로서 절로 기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나를 축복하시지 않으면, 당신을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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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un Lee
    야곱의 외로움과 고뇌를 잘 이해하고 성찰한 메시지 ... 공감합니다... 야곱 ... 성경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입니다...제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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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Hyun Lee 해외에 체류하며 계획에 없던 사업을 하게 되고, 또 수많은 속임수 속에서 나 자신을 방어하며 살아야 하다 보니 이전에 피상적이던 야곱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때로 그의 놀라운 수완과 성공이 부러우면서도 그의 고뇌와 갈등을 생각하면 손사례를 치게 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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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ng Yeol You
    이른 아침 너무 와닫는 글에 장문을 잘 읽지 않는 저도 다 읽었네요. 공감 1000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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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Young Yeol You 오랜만이다 영열아... 성경은 나잇살을 먹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이 많은 것 같아. 너무 젊으면 헛다리 짚게 되기 쉬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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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e Kyung Jun
    야곱을 좋아하는 1인요.
    이유는 1)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인물-겉과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
    2) 하나님을 때마다, 끝까지, 의지하는 인물.-그래서 성경의 인물 중 노년(죽기 전까지도)의 영성이 제일 멋진 사람.
    * 마흔, 쉰, 예순, 일흔, 여든, 아흔, 백에도 하나님을 꼭~!!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봅시다. 마흔 인생 화이링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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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전희경 사실 우리가 매칭시키기에 제일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죠. 요셉, 다윗, 다니엘은 거의 사기 캐릭터에 가까워서... 야곱 정도가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데, 나이들어 인생의 부침을 겪어 보니 야곱마저 넘사벽될락..^^
      아직 마흔이 낯선데 벌써 마흔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으니...
      나이 먹을수록 더 아름다운 신앙... 야곱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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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euk Han
    근윤아 행복한 성탄일 보내기 바린다 Merry Christmas^^ 네 글의 애독자가 될 듯^^ 네 말대로 나이가 먹고 인생 경험이 더 해질수록 야곱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지는 부분 동감한다 좋은 글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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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한재욱 긴 글이라 여러 사람 읽어 주길 기대하기보다능 약간은 자기 만족을 위한 용도로 쓴 글인데, 공감해 주어 고맙다. 여기 사우디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크리스마스 분위기 안 나는 곳이라 정말 썰렁한 하루 보내고 있다. 가족들 모두가 감기로 몸져 눕는 바람에 더 우울한 성탄. 암튼 재욱네도 행복한 성탄 복된 새해 되길...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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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yung Hee Joh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길다고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흥미있고 읽고나니 복된 느낌마저 듭니다.
    가족분들의 쾌차를 기원하며 선생님의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
    연말연시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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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en Geunyoun YI
      좋은 독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술로 만나서, 글로 교류하게 되어 더 반갑고 좋습니다. 가족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새해 맞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도 이국 땅에서 따뜻하고, 행복한 연말, 복된 새해 맞으시길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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