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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25) Hojae Lee '중화신학'을 만들자

(25) Hojae Lee









Hojae Lee
Yesterday at 07:40 ·



중국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중국의 씽크뱅크이며 중국의 인문학을 이끄는 그 곳에서는 화요일에 한 번씩 출근하여 자신의 연구성과를 공유한다.

당시 그 곳 세계 연구소에서 종교 연구자들이 가장 핫한 화제가 기독교였다. 기독교의 교세가 공산당원의 숫자보다 더 많아지는 것을 정권차원에서 우려하니 당연히 그들의 식사자리 단골주제가 기독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좀 더 단독직입적으로 말하면 공산당 통제아래에서 관리가 되는가였다.

그들 중에 '중화신학'을 만들자라는 의견도 있었다. 인도불교를 격의불교(불교용어를 노장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는 중간 경지)를 거쳐 선불교라는 독창적인 중국불교의 역사가 있으니 이런 발상이 그들에게 낯설지가 않다.


글에서 책에서 늘 밝혀왔듯이 미안하지만 한국 신학은 서구신학의 대리전이자 연장이다. 감리교는 웨슬리를 말하고, 장로교는 칼뱅을 말하고, 동시에 예수와 성경의 말씀을 말한다. 생각해보라. 기장과 합동, 통합과 감리교가 성경의 복음을 말하지만 그들의 성경이해는 아주 다르다. '역사비평'을 도입한 기장과 그렇지 않은 교단의 성경의 이해가 같은가? 물어보시라.

또한 '성경적이지 않다'. '믿음이 없네요' 이런 말을 크리스챤은 자주 말하곤 한다. 성경적인 해석을 한 책을 소개해 주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보여달라. 칼뱅의 "기독교 강요"도 성경해석의 한 방편이고 성경은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과 본인만 아는 믿음, 이웃에게 사랑으로 증거해 내지 못하는 믿음을 강요하지 말라.

굳이 우리가 말하자면 성경의 두 마디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예수가 우리에게 준 계명의 완성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만큼, 눈에 보이는 이웃사랑으로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밝히자 라는 것이다. 과연 이 자리에서 그런 입술로만 믿음이 아닌 실천하는 믿음을 가졌는가를 성찰해 보자.

이웃나라, 아직도 공산주의가 정체성인 중국에서 '중화신학'을 한다는데, 중국보다 더 한 종교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정황에서 우리의 믿음과 성경이해를 우리가 이해하자는데 왜 칼 바르트가 나오고 몰트만이 나오고 폴 틸리히가 나오 서구신학을 거들먹 거리는가? 





  • 김경재의 다원적 성경이해, 
  • 안병무, 서남동, 등의 민중신학, 
  • 이명권의 종교간 대화시리즈, 
  • 박재순의 함석헌과 유영모의 씨알사상 조명, 
  • 김흡영의 도의 신학, 
  • 박종천의 상생신학, 
  • 이정배의 유영모 신학사상 조명, 
  • 이은선의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등등등, 그리고 경전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평가받는 
  • 변찬린의 한밝성경해석학 등은 


이미 축적된 주체적 성경이해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믿음은 맹신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개체적 개성에게 준 거룩한 선물이자 편지이다. 그 편지와 선물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실천하자.

서구신학자가 우리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해 주는가? 유불도의 종교전통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복음을 전해받았을때 구원문제를 서구신학이 한 번이라도 우리 입장에서 고민해 보았는가?

이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아직도 살아있는 문서이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알고 믿고 실천해야 하는 문서이다. 성경의 언어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성경은 문자로 만들어진 세상이고, 눈에 보이는 코스모스는 대우주이고 인간은 소우주이다. 역사와 문명과 민중과 한국과 지구마을과 우주촌을 머리에 이고 성경을 읽을 일이다.

깨어난 자는 시대의 위중함을 각 자의 자리에서 인식하고 자신의 신앙의 깊이만큼 이웃과 한반도와 지구촌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PS) 페북 글은 수정없이 본문 내용 그대로 공유하셔도 됩니다.




185Yuik Kim, 박길수 and 18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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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규 너무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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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이찬수: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기 2015

알라딘: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기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기
 
이찬수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15-08-31







320쪽
책소개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불교를 공부한 저자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내면에서 상통하는 종교적 본질을 밝힌 책.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고, 신앙의 거룩함을 일깨운다.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기독교가 절대유의 차원에 서 있다면 불교는 절대무의 차원에 서 있으나, 절대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은 결국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는 것이다.


목차


1부_ 깨달음의 길에 서다
01 인연에 따르다 : 불교의 인간론
02 믿음과 용기, 그리고 깨달음 : 지눌의 신심론과 틸리히의 신앙론

2부_ 불교와 기독교 서로 만나다
03 법신불 일원상과 범재신론 : 원불교의 일원주의와 세계주의
04 모두 절대무 안에 있다 : 니시다의 철학과 기독교
05 창조적 만남과 궁극적 일치 : 길희성과 타나베의 신학과 철학
06 두 종교를 동시에 살아가다 : 불교적 그리스도인 니터의 고백
07 신학을 불교화하다 : 야기의 불교적 신학
08 불교를 수용하며, 신학을 변호하다 : 발덴펠스의 자기 비움의 신학

3부_ 두 세계를 다시 보다
09 종교는 해석이다 : 스힐레벡스의 신학적 해석학: 모든 종교는 해석이다
10 오늘 우리의 구원과 해탈 : 어느 불교적 신학자의 구원관
11 비종교적인 그러나 종교적인 : 비종교인 리영희가 보는 기독교와 불교
12 90점 불교와 70점 기독교 : 두 종교에 대한 애정어린 요청과 희망


--------------------------
책속에서



P.37
지눌 선사상에서 믿음과 앎은 깨달음, 즉 돈오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지눌이 믿음과 앎의 해석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였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눌은 『신화엄경론』과 만나는 체험 후에 원돈신해문, 즉 원돈교에서의 믿음과 앎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세히 밝혔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선에서 강조하던 돈오를 믿음과 앎이라는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화엄의 선화(... 더보기
P.69
법신불은 구체적 “상징” 또는 “나타낸 바”의 차원과 단순히 동일시할 수 없다. 법신불은, 경험적으로는 불타에게서 알려졌으되, 논리적으로는 그 불타 및 다양한 불보살들의 존재론적 근거로, 또는 다양한 불들을 정말 불이게 해 주는 원천으로 상상된 개념이다. 상상되었다고 해서 그저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려면 먼저 그 깨... 더보기
P.151
한국인은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다양한 종교 사상들을 녹여 내고 있는 한국 안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종교 사상들을 매개로 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안에 녹아들어 가 있는 한국의 종교가 한국의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해 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국 종교가 이미 온전히 담... 더보기
P.186
(일본의 신학자) 야기는 이러한 불교와의 만남에서 인간은 성서와 십자가의 직접적 도움 없이도 본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죄 없는 사람(=예수)이라 해도 한 인간이 타인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십자가는 본래적 실존으로 이끄는 매개이고 성서는 실존의 근저의 표현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교의 말씀 안에서만 그리스도와... 더보기
P.254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불교와 기독교의 개개 ‘형식’ 내지 ‘제도’를 벗기고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불교와 기독교란 따로 없다. ‘너’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천적 삶에는 종파가 따로 없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는 원천적 사실에 종파 간, 성별 간, 지역 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미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있는 인...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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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칼 라너(Karl Rahner)와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를 비교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종교철학에 기반한 평화인문학의 심화와 확장을 연구 과제로 삼고 있다. 

저서로 
『평화와 평화들: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 사형폐지론과 회복적 정의』(공역),
 『아시아평화공동체』가 있고, 

논문으로는 
“베트남공화국의 몰락: 지엠 정권의 식민지적 민족주의, 서구적 종교편향, 하향적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平和はどのように構\築されるか: 減暴\力と平和構\築”, 
“Disaster: The Otherization of Nature, the Reification of Human Beings, and the Sinking of MV of Sewol”, 
“祭祀の政治學 II:明治時代の國家神道と公私觀”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한국인의 평화사상 2>,<한국인의 평화사상 1>,<인간은 신의 암호> … 총 4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禪)불교를 공부한 저자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내면에서 상통하는 종교적 본질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은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고,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을 일깨운다.

■ 출판사 서평

깨달음에서 서로를 경유하여 다시 자신에게로
이 책은 ‘세계적 차원의 종교들이 균질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도 대립과 조화 사이를 오가는 기이한 종교 왕국’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 신학자의 자기 고백과 그에 관한 부연이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인도의 신학자 파니카의 말을 빌려 표현한 대로 불교와 기독교가 궁극적 차원에서는 만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저자는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소통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과정에서 고립되고 배척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으나 그의 신학 역정과 신앙 모색은 멈추질 않았다.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심층

이 책은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 가령 공(空)과 하느님, 열반과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와 보살, 기도와 염불 등은 결국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는 것이다. ‘다르지만 조화한다’라는 말은 “군자는 상대와 조화하면서 차이도 인정한다(君子和而不同)”는 공자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으로, 언어와 관념을 넘어서는 근원의 세계, 궁극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절대유의 차원에 서 있다면, 불교는 절대무의 차원에 서 있으나, 절대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다.

불교적 그리스도인, 폴 니터의 불교
저자는 두 종교 사이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신학자로 미국의 신학자 폴 니터(Paul F. Knitter, 1939- )를 예로 든다. 니터 또한 불교를 창조적으로 소화해낸 대표적 신학자이다. 니터는 신학자로서 불교 언어를 치열하게 소화해, 신학적 양심에 솔직하게 녹여내어 고백하는 데에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저자는 태생이 기독교인이고 일급 신학자이지만, 두 종교를 단순 병렬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로 녹여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웅변적이고 체험적으로 보여준 니터를 종교다원주의 신학자이자 불교학자라고 명명한다. 그 밖에도 원불교 사상과 기독교, 쿄토학파와 기독교, 한국의 길희성과 타나베 비교 등을 통해서도 이점을 구명한다.

90점의 불교와 70점의 기독교
저자는 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수치화해서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70%쯤 완성된 종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속적 수치를 넘어서서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이는 태도를 좀더 확연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밖을 받아들이려면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모자라는 30%를 채우려는 기독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공부를 심화하여 부족한 10%를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면, 종국에는 딱히 ‘성인이랄 것도 따로 없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의 진리’를 공


2019/01/02

도마복음 소개 - 오강남의 도마복음 풀이 : 네이버 카페



도마복음 소개 - 오강남의 도마복음 풀이 : 네이버 카페

도마복음 소개 - 오강남의 도마복음 풀이 | 자유게시판

2019.01.02. 16:14

https://cafe.naver.com/yooyoonjn/1610



<도마복음>은 어떤 복음서인가

제가 페북에 올리는 <도마복음> 풀이를 어느 일간 전자매체에서 옮겨 싣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도마복음 중에서 특히 의미있다고 하는 부분을 올려보겠습니다. 그러기 전에 도마복음이 어떤 책인가 아는 것이 중요하여 간략하게 도마복음서를 소개합니다.


<도마복음>의 중요성

󰡔도마복음󰡕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보통 책이 아닙니다. 󰡔도마복음󰡕에서 ‘또 다른 예수’를 만나게 되고, 그가 여기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앤드류 하비(Andrew Harvey) 같은 이는 1945년에 발견된 이 󰡔도마복음󰡕이 같은 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고까지 하면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미국 신약 전문 학자들로 구성된 Jesus Seminar에서는 도마복음서를 제5 복음서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도마복음󰡕의 발굴

1945년 12월 어느 날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 농부가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나일 강 상류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 부근 산기슭에서 밭에다 뿌릴 퇴비를 채취하려고 땅을 파다가 땅 속에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모두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문서들이 땅에 묻혀 있었을까요? 4세기 초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하며 325년 약 300명의 지도자들을 모아 니케아 공의회를 열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예수의 인성만을 주장한 아리우스파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 여세를 몰아, 그 당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계속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 기준에 따라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나중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 속에 숨겨놓은 책들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문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도마복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그리고 그가 전하는 ‘비밀’의 메시지가 그지없이 놀라왔기 때문입니다.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하여 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도마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10년 내지 20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도마복음의󰡕 특성

󰡔도마복음󰡕의 특징은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만 적은 114가지 ‘어록’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들 중에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을 아는 분들에게는 귀에 익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실제적으로 약 50% 정도가 공관복음에 나오는 말씀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기적, 예언의 성취, 재림, 종말, 부활, 최후 심판, 심지어 출생, 고난과 십자가, 대속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 대신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가 새사람이 되고 자유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대속 신앙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폴 틸리히나 최근 존 쉘비 스퐁 같은 신학들은 이런 대속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심히 왜곡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도마복음󰡕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쓰이어졌으리라 생각되는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둘 다 우리 내면의 ‘빛’(요1:4)을, 그리고 미래에 있을 종말보다는 ‘태초(요1:1)나 ‘지금’(요5:25)을 강조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점은 󰡔요한복음󰡕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 등 ‘믿음(pistis)’을 강조한데 반해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할 때, 저는 󰡔도마복음󰡕서를 구태여 영지주의라고 하는 한 가지 특수한 사상체계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생긴 결과라고 할 것 없이, 세계 종교 전통 어디서나 심층 깊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신비주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던 복음서로 보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풀이에서 하려는 것

저의 풀이가 다른 신학자들의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제 자신의 배경을 살려 다른 종교 전통의 문헌들, 특히 󰡔도덕경󰡕과 󰡔장자󰡕, 불교 사상 등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과 비교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특별한 당부의 말씀

한 가지 좀 특별한 소망을 덧붙인다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2018/12/18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네이버 카페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네이버 카페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자유게시판

2018.12.16. 17:59

 soft103a(soft****)
나눔회원
https://cafe.naver.com/yooyoonjn/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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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생명, 평화, 민주, 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한국의 간디’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들어가며

다석 류영모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가 함석헌 선생이었고, 함석헌 선생이 가장 존경하던 스승이 류영모 선생이었다. 함석헌 선생은 다석의 1주기에 다석 선생의 제자들이 다석 선생의 집에 모였을 때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두 분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이었다. 우선 11살의 차이였지만 생몰 일자가 거의 같다. 똑같이 3월 13일에 출생하고 돌아가신 날도 류영모 선생님은 2월 3일 저녁, 함석헌 선생님은 2월 4일 새벽으로 몇 시간 차이일 뿐이다. 그야말로 ‘의미 있는 우연’이라고 할까? 두 분 모두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고, 수염을 기르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분의 근본 사상이 여러 면에서 같았다는 사실이다. 두 분 모두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되었다. 필자로서는 류영모 선생을 뵙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면, 함석헌 선생은 여러 번 뵙고, 1979년 캐나다 에드먼튼에 살 때 필자의 집에 유하시면서 필자가 근무하던 알버타 대학교에서 교민을 대상으로 강연도 하시고 종교학과 교수들과 대담도 하실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은 더 없는 영광이라 생각된다.

대조적인 점은 류영모 선생에 비해 함석헌 선생은 키도 크시고 외모도 출중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류영모 선생이 생의 후반에서 비교적 은둔적이고 금욕적인 면이 강했던 데 비해 함석헌 선생은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한국 민주화에 직접 참여하시는 등 사회 개혁에도 힘을 많이 쓰셨던 점이라고 볼 수 있다.신비주의 전통에서 즐겨 쓰는 용어를 빌리면 함석헌 선생은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마침 함석헌 선생이 “나는 왜 퀘이커교도가 되었는가”하는 제목의 자서전적인 글을 쓰셨는데, 그것을 토대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

그의 삶

신천 함석헌咸錫憲(1901~1989)은 (여기서부터 존칭 생략) 평안북도 황해 바닷가 용천에서 아버지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 사이의 3남2녀 중 누님 아래 둘째로 태어났다. 5세경 누님이 배우는 천자문을 옆에서 듣고 모두 외었다. 여섯 살에 기독교 계통의 사립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고 긴 댕기머리를 잘랐다. 함석헌에 의하면 전통 종교가 창조적인 생명력을 잃은 형식적 전통에 불과할 때 ‘바닷가 상놈’의 고장으로 알려진 자기 마을에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 계통 사립 초등학교에서‘하느님과 민족’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홉 살 때 나라가 일본한테 아주 망하고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린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인해 아주 낙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후일 함석헌은 자기가 “열세 살까지 지금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 소년이었다”고 고백한다. 14세에 양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6세에 졸업한 다음,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은 나중 의사가 될 목적이었다. 공립학교에 다니면서 순진성이 많이 없어지고 과학을 배우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양고보 2학년 17세에 한 살 아래의 황득순과 결혼했다.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수리조합 사무원, 소학교 선생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해 11월 장남 국용이 출생하고 2년 후 장녀 은수가 태어났다. 그는 모두 2남 3녀를 두었다. 그는 이때를 회고하며 “집에서 2년 동안을 있노라니 운동 이후 폭풍처럼 일어나는 자유의 물결과 교육열 속에서 젊은 놈의 가슴이 타올라 날마다 빈둥빈둥 놀면서 썩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21년 21세에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4월이라 입학 시기가 지나 어디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집안 형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나, 그가 써주는 편지를 가지고 정주 오산학교에 가서 3학년에 편입되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류영모가 교장으로 부임하고, 9월 개학식 때 함석헌은 처음으로 류영모를 만나게 되었다. 함석헌에 의하면 그는 류영모의 영향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처음으로 한국이 필요로 하는 뭔가를 찾기 시작하고, 또 류영모로부터 노자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남을 따라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 더 참된 믿음을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교회가 ‘점점 현실에서 먼 신조주의信條主義’, 교리중심주의로 굳어지게 되자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시작했다. 오산학교와 류영모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함석헌은 1923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그해 9월에 난 대지진으로 도쿄시의 3분 2가 타버렸다. 일본 정치가들은 민심수습책으로 한국인들이 폭동을 계획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한국인 약 6천명이 학살되었다.이를 본 함석헌은 “기독교를 가지고 내 민족을 건질 수 있을까?” 번민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렇다고 도덕을 무시하는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할 수도 없었다.오래 동안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 형편으로는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일본 유학을 결심한 그 본래의 의도대로 1924년 지금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다가 동갑내기1년 선배인 김교신金敎臣을 만나고,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치무라는 오산학교에서 류영모 선생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 당시에는 우치무라가 생존인물인지도 몰랐는데, 김교신을 통해 그가 도쿄에 살면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존경하는 스승 류영모가 언급한 인물이라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모임에서는 별도의 예배형식이 없이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며 해석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함석헌은 “성경이란 이렇게 읽어 나갈 것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번민에서 벗어나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8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오산학교로 돌아와 역사 선생으로 일했다. 그러나 역사 선생이 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역사란 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일 뿐 아니라 한국 역사가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이어서,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과 낙심만’ 심어줄 것 같고, 다른 사람들처럼 과장하고 꾸미려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민에 고민, 결국 자기에게는 세 가지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확인했다. 첫째 한민족으로서 민족적 전통을 버릴 수 없고, 둘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버릴 수 없고, 셋째 영국 역사가 H. G. Wells의 The Outline of History를 읽고, 그 영향으로 받아들인 과학과 세계국가주의를 버릴 수 없었다. 이 셋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 셋을 다 살리면서 역사 교육을 할 수는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난의 메시야가 영광의 메시야라면,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느냐?’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용기가 나 역사 교수를 계속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 역사의 keynote를 ‘고난suffering’으로 보는 역사관이 확립되고 이런 역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역사를 재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치무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했던 유학생들 여섯 명이 귀국하여 성서연구모임을 만들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함석헌은 ‘고난’의 견지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명작이 되어 나왔다. 이 책은 나중��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나왔고, 류영모의 맏아들이 번역하여 영문판으로도 나왔다.

오산학교에 10년간 있었는데, 그때는 스스로 ‘십자가 중심 신앙에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다고 했다. 그러나 본래 교파를 싫어하여 무교회라는 것이 생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무교회도 하나의 교파로 굳어가는 것 같고, 또 우치무라에 대한 개인숭배 태도가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반감을 느끼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을 깊이하면서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강조하는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심정적으로는 무교회주의에서 떠났지만, 그것을 크게 공표하여 부산을 떨 필요를 느끼지 않아 그런대로 몇 년을 지났다.

오산에 있으면서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농촌을 살려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오산에 온 것도 이를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36~1937년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점점 가혹해지자 함석헌은 죽을 지언정 이에 맞서야 한다고 하였지만 오산학교 행정자 측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그는 평생을 바칠 마음으로 왔던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봄 “눈물로 교문을 나왔다.”

교문은 나왔지만 차마 학생들을 떠날 수는 없었다. 오산에 머물면서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만났다. 그렇게 2년을 보내다가, 후배 김두혁이 평양 시외에서 경영하던 덴마크식 송산농사학교를 넘겨주겠다고 하여 1940년 그리로 갔다. 가자마자 설립자가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에 따라 함석헌도 덩달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억울하게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집안이 말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1942년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실린 「조와弔蛙」라는 우화 때문에 잡지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가는 사건이 터져, 다시 감옥에 들어가 1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이 때문에 나중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이장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옥 후 다시 농사를 짓고 있는데, 2년 후 해방이 되었다.

함석헌은 이때까지 감옥을 네 번, 그 후로도 세 번 더 들어갔는데, 감옥에 있을 때 얻은 것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부르고, 감옥 속에서 불교 경전도 보고, 노자, 장자도 더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도 얻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를 수도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에서 깨달은 바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것은 단순히 국경선의 변동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는 세계혁명의 시작이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국가관이 달라져야 한다. 대국가주의시대大國家主義時代가 지나간다. 세계관이 달라지고 종교가 달라질 것이다. 아마 지금과는 딴판인 형태를 취할 것 아닐까? 종교의 근본 진리야 변할 리 없지만 모든 시대는 그 영원한 것의 새로운 표현을 요구한다. 각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 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 누가 받을까? 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風)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 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 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기성 종교는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관련되었기에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치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나 2000년 전 예수 탄생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지금도 ‘동방에서 새로운 정신적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한 토마스 머튼을 읽는 기분이다.

해방 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임시자취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서 평안북도 임시정부 교육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밀정이 되기를 요구하는 소련군정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남한으로 넘어왔다. 1947년의 일이다.

월남하여서는 무교회 친구들의 협력으로 일요 종교 강좌를 열어 1960년까지 계속하면서 말로나 글로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필자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 그 당시 ��사상계思想界��에 실린 그의 글들을 읽었다. 그의 생각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그의 무교회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주된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부정하고, 기도하지 않고, 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고, 기도도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공중기도를 삼갈 뿐이라고 하고, 동양 종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으로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심층 종교로 들어가는 함석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구태여 무교회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무교회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중대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오산 시절부터 간디를 알고 오래 동안 간디를 좋아해 간디 연구회를 만들 정도였는데, 동지들 사이에서 간디의 아슈람 비슷한 것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고 젊은 몇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이때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형세는 돌변했다. 친구들이 모두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 그러면서 관념적으로 믿고 있고 감정적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러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러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 뿐이러라
내가 쟝발장이되어 보자고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미리엘이 아니고 쟈벨 뿐인 듯이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든다.”

이때를 예견한 것인가? 함석헌은 1947년 월남 이후 지은 그의 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심정이 토로하고 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救命袋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不義의 死刑場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 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스승 류영모마저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끝내 그를 내쳤다. 그러나 물론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석일지��에 보면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 이별인가” 하며 탄식하는 등 7~8회에 걸쳐 제자 함석헌을 그리는 글이 나온다. 류영모는 “내게 두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적으로는 그럴지라도 겉으로는 스승으로부터도 버림받아 홀로 된 그에게 퀘이커가 나타났다. 퀘이커에 대해서는 오산 시절부터 들었지만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 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퀘이커들을 만나 처음으로 퀘이커 신도가 된 이윤구를 통해 퀘이커를 접하게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 1961년 겨울이었다. 이렇게 되어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퀘이커 훈련 센터인 펜들힐Pendle Hill에 가서 열 달 동안, 비슷한 성격의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브루크Woodbrooke에 가서 석 달 동안 지내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룻밤 뽕나무 그늘 밑에서 자고 가려는 중의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에서 열렸던 퀘이커 세계 대회에 퀘이커 친우들이 그를 대해 주는 데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서 결국 퀘이커 정회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수평선너머’를 내다봅니다.
내가 황햇가 모래밭에서 집을 지었다 헐면서 놀 때에 내다보던 수평선,
피난 때 낙동강 가에서 잔고기 한 쌍 기르다 죽이고 울면서 내다보던 수평선,
영원의 수평선너머를 나는 지금도 내다봅니다.”

함석헌은 류영모와 달리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961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단에 초빙되어 5·16 군사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잡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씨 사상’을 널리 펼치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8년 만에 복간되었다. 군사 정권에서는 군사 독재에 맞서서1974년 윤보선,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역을 맡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런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9년 췌장암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2월 4일 새벽 5시 28분, 87년 11개월 가까이, 날짜로 33,105일을 사시고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을 따르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박재순 박사에 의하면, 돌아가시기 전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애쓰셨다는데, 그것이 스승 류영모가 돌아가신 날에 맞추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고 한다. 장례식은 조문객 2 명이 오산학교 강당에 모여 오산학교장으로 치르고 경기도 연천읍 간파리 마차산에 묻혔다가, 200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이에 따라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영원한 ‘들사람’에게는 약간 의외의 조치가 아닌가 여겨지는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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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르침



함석헌은 동서고금의 정신적 전통에서 낚아낸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생명, 평화, 민주,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세간에서 말하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누가복음6:40) 했다. ��도마복음��이나 ��장자��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류영모 선생님의 제자이지만, 어느 면에서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했다는 의미에서 ‘청출어남이청어남靑出於藍而靑於藍’의 경우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함석헌의 사상이 어떻게 세계 종교의 심층, 곧 신비주의 전통과 통하는가,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우리가 살펴본 인류의 정신적 스승들의 사상을 통섭하고 있는가, 몇 가지 예를 들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경전을 ‘끊임없이 고쳐 해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없는 역사의 행진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아니다, 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

종교적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적’ 태도는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고 한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자라나는 신앙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 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


“옛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는 낡아 빠진 종교다. 우리들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하는 종교는 낡아 빠진 종교이다. 신학적인 설명을 강요하기 휘해 과학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종교도 역시 낡아 빠진 종교다.”

자라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 생명이 없는 신앙이다.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바람(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결국에는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도마복음』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의식구조가 변화를 받아 점점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가장 ‘본질적인 나’라는 뜻에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참 나라 할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나의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발견을 일반적으로 일컬어 ‘깨침’이라 한다. 심층 종교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넷째,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놀라운 통찰이다. 


예수는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임을 발견한 분이다.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예수와 같은 그리스도 의식에 동참하여 그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다. 

1945년에 발견된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심층 종교의 기본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랑이 이긴다’는 가르침이다.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 거의 모든 종교 신비주의 심층 전통에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말함과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 다른 사물들과도 결국 일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이다. “어떤 경우가 천박한 이해인가? 나는 답하노라.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 라고. 그리고 어떤 경우가 이런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인가? 나는 말할 수 있노라.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깨닫고 천박한 이해를 넘어섰을 때’라고.”


여섯째는 ‘너와 나는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과 같이 있다. 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 나·남이 떨어져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나’다. 그러므로 남이 없이,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함석헌은 “내 속에 참 나가 있다”, “이 육체와 거기 붙은 모든 감각·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참 나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와 만물이 하나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가히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다.

일곱째는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 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 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느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맹, 노·장도 모두 다 하느님의 예언자다.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말이나 문자로 표현된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궁극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견해見解는 그 타당성이 결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견해가 이럴 진데 나의 견해만 예외적으로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자연히 다원적 사고를 인정하게 된다.거의 모든 심층 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이런 몇 가지 예만으로도 함석헌의 사상이 류영모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세계 신비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아는 데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오늘 한국의 종교들이 거의 표층 종교 일색으로 변해 있는 상태에서 이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된다.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나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가 미래의 종교는 어쩔 수 없이 심층적인 종교, 신비주의적 종교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류영모·함석헌의 사상에서 미래 종교의 광맥을 보는 듯하다 하면 과장일까?*


#함석헌 #오강남 #경계너머아하 #류영모


2018/11/14

Kang-nam Oh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예습 - 존재의 바탕 [the ground of being] - 신성 [Godhead]

 Kang-nam Oh -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에서 다음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는다고 하여 예습삼아...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에서 다음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는다고 하여 예습삼아 읽어보시라고 제가 <종교, 심층을 보다>(2011, 현암사)에 실었던 글 하나 옮깁니다. 신에 대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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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를 꼽으라면 거의 모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를 꼽을 것이다. 그는 그 당시까지의 신비사상을 모두 통합하고 그 이후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독일 남서부의 투린기아 주 호크하임(Hochheim)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5세에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처음 에르프르트에서 훈련을 받고, 곧 쾰른으로 옮겨가 같은 도미니크회 신학자로서 막 세상을 떠난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저작을 공부했다. 파리에서 공부를 끝내고 1302년 42세에 ‘마이스터'가 되고 이때부터 그는 요한네스 에크하르트라는 이름 대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도미니크회 수도원에서의 봉사 기간이 끝나고 1311년 그가 51세 되던 해부터 파리, 스트라스부르그, 쾰른 등지에서 가르치면서 훌륭한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1314년 이후에는 라인강 계곡에서 관상기도에 전념하는 수녀들에게 설교하는 일에 힘썼다.
그러던 중 그가 66세 되던 해 도미니크회에 극히 비우호적이던 프란체스코회 소속 쾰른의 대주교로부터 이단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쾰른에서 재판을 받고, 이어서 그 당시 아비뇽에 있던 교황에게 상소했지만, 최후 판결이 나기 2년 전인 1327년 세상을 떠났다. 최후 판결에서 그의 사상을 요점적으로 정리한 28개 조항 중 17개 조항은 이단적이고, 나머지 11개 조항은 완전히 이단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어투로 보아 역시 개탄스러운 것이라 했다. 
에크하르트는 그의 변론에서 “나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이단일 수 없다. 전자는 지력에 속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가 가르치는 것은 ‘발가벗은 진리’ 뿐이라고 했다.
아무튼 이런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을 공개적으로 회람하거나 토의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세월이 가면서 그의 저작 중 상당수가 훼손되거나 분실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855년 오스트리아의 어느 학자가 그의 독일어 저작을 수집하여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그 때 이후 그의 저술이 다시 활발한 연구 대상이 되고, 또 그의 영향력이 다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0에는 도미니크회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한 모든 검열의 중단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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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에크하르트도 신의 초월성과 동시에 내재성을 강조했다. 여러번 지적한 것처럼 신의 초월만 강조하는 것은 유신론이고, 내재만 강조하는 것은 범신론이지만,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것, 초월이며 동시에 내재이고, 내재이며 동시에 초월임을 강조하는 것은 ‘범재신론(panentheism)으로서, 에크하르트는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용어를 쓰기는 했지만 그의 사상 전체를 볼 때 그의 입장은 결국 이런 범재신론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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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앞에서 말한 위 디오니시우스에게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영혼이 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말은 그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지 못하다....우리가 신에 대해서 말하는 무엇이나 그것은 신과 직접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신은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바의 무엇이다.”
무한의 신은 모든 말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불교적으로 하면 언설을 이(離)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뜻이고, 〈도덕경〉 식으로 말하면 제1장 첫머리에 나오는 것처럼,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 실재 [ultimate reality] 를 에크하르트와 그가 속했던 독일 신비주의 학파에서는 ‘Nichts’ ['Nothing']라고 했다. ‘무(無)’나 ‘공(空)’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에크하르트 자신의 말로 “신은 모든 유한한 존재보다 높다. 최고의 천사가 벌레보다 더 높은 것처럼... 신은 이것이라 할 수도 없고 저것이라 할 수도 없다.” 힌두교 베단타에서 말하는 ‘네티 네티(neti-neti)’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표현과 같은 ‘부정의 신학’ 계통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신을 완전한 비실재로 보기보다는 모든 존재의 바탕 [the ground of being] 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신은 선하지도 않고, 더 선하지도 않고, 최고로 선하지도 않다.” 성경 마태복음 19:17에 보면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곧 신 이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고 했지만,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낼 경우에 한한 것이지 신의 본성 자체에 있어서는 선악 같은 모든 속성이나 분별을 초월하기 때문에 선하다거나 더 선하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고, 오로지 조용함과 침묵 속에서만 가능한 신비적 체험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에크하르트는 신(神)과 신성(神性)을 구별한다. 신을 라틴어로는 Deus, 독일어로는 Gott, 영어로는 God이라 한다면 신성은 각각 Deitas, Gottheit, Godhead라 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신, 창조주로서의 신, 인격이나 선하심 등의 속성을 가진 신, 우리 머리로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신(God)은 어떤 형태로도 나타나지 않는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성(Godhead)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신과 신성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고 했다. 힌두교 베단타 철학에서 말하는 훌륭한 속성을 가진 절대자로서의 싸구나브라흐만(Saguna Brahman)과 속성을 초월하는 무속성으로서의 절대자로서의 니르구나브라흐만(Nirguna Brahman)이라는 생각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표현 불가능한 궁극 실재를 불교식으로 하면 법신(法身)이라 할 수 있을까?
영혼은 신에게서 나와서 신에게로 돌아가고자 한다. 우리가 의지의 영역에 머무르는 한 신의 선하심만 가지고도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직관이나 통찰의 영역으로 옮기면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오로지 신성의 차원까지 꿰뚫고 들어가야 만족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종교적 경험은 신성으로서의 신을 보는 것으로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될 때 참다운 앎,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신 자체이신 빛으로 빨려들어 가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신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경험은 사실 우리 영혼 속에 신의 불꽃, 바로 영혼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바탕인 이 불꽃이 다름 아닌 우리 속에 거하는 신 자신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참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에크하르트는 이처럼 신성 자체와의 합일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한성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신성 자체와의 합일은 두 가지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1] 첫째는 우리의 영혼 속에 ‘신의 탄생’, ‘아들 혹은 로고스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신의 탄생, 혹은 로고스의 탄생은 지금껏 나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일상적인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 신이 내 삶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될 때만 가능하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그 가장 깊은 차원에서 신과 하나가 된다.
‘나’ 뿐 아니라 시간에 속한 모든 것에 집착하는 일을 그만두고, 무아와 자비, 겸손의 길을 걸어야 한다. “모든 사물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넘어지지 않고 풍요로움에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일도 없고, 어느 한 가지에 더 기뻐하는 일도, 어느 한 가지에 더 무서워하거나 슬퍼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이런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신과 하나가 된다. 중세 많은 신비자들이 한결 같이 이야기하는 신화(神化, deification), 우리의 옛 자아가 소멸되고 우리 스스로가 신 자체로 변하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했다.
2] 둘째는 ‘관통(breakthrough)’의 단계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의 신에 집착하는 일마저 거부해야 한다. 신에 대한 상상은 모두 신을 우상화하고 상대화하는 일이다. 모든 관념이나 견해를 떨쳐버리고, 우리의 참된 근원인 영원에 거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같은 교리에 나타난 신을 넘어서 그것이 상징하는 실체 자체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 인간이 감행해야 할 최후 최고의 이별은 그가 신을 위해 신과 이별할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신을 넘어서는 신, 곧 ‘신 너머의 신(God beyond God)’을 체험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과 하나가 되는 일, 혹은 신이 되는 일은 영혼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에크하르트는 그의 설교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혼이 신과 합일하는 일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거의 믿을 수가 없다. 신은 그 자신 너무나도 높으셔서 어떤 형태의 지식이나 욕망도 그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욕망은 깊고, 한 없이 깊다. 그러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욕망이 바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신일 수는 없다. 이해와 욕망이 끝나는 지점, 거기에 어둠이 있고 거기에 신의 찬연함이 시작된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강조한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든가,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 개념, 하이데거가 말하는 ‘놓음(Gelassenheit, letting-go)’ 등도 에크하르트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 서양 신학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신을 ‘존재의 바탕’으로 보았다든가, ‘신 너머의 신’ ‘신의 상징으로서의 신’ 등의 개념을 강조한 것 등 많은 면에서 에크하르트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이 힌두교 베단타의 샹카라 철학과 너무나도 비슷하여 종교학의 대가 루도르프 오토(Rudolf Otto)는 〈Mysticism East and West〉라는 책을 내었고, 또 그것이 선불교 가르침과 너무나 비슷하여 선불교를 서양에 소개한 스즈키(D. T. Suzuki)는 〈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t〉라는 책을 낼 정도였다.

Sejin Pak










2016/05/29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참된 영성이다 - 뉴스앤조이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참된 영성이다 - 뉴스앤조이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참된 영성이다 
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

이원석  | 2015.12.14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는 <뉴스앤조이> '톨레레게' 12월 21일(월) 모임에서 나눌 책입니다. 톨레레게에 참가하길 원하시거나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글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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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거의 다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를 알 것이다. 기독교 교육학자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To Know as We Are Known>(IVP)을 통해 나래를 단다. 이 책은 비교적 얇은 지면 속에 교육의 영성적 차원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아낸 걸작이다(서문에 소개하듯이 여기에는 헨리 나우웬의 영향이 스며 있다). 이로 인해 교육학계의 구루로 거듭난 그의 포지션은 <가르칠 수 있는 용기 Courage To Teach>(한문화)로 귀결된다(아마도 이 제목은 폴 틸리히가 예일대에서 했던 테리 강연을 책으로 묶어 펴낸 저작, <존재에의 용기 Courage to Be>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정치, 영성, 마음




▲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파커 파머 지음 / 김찬호 옮김 / 글항아리 펴냄 / 328쪽 / 1만 5,000원

 
갈수록 확장되는 파커 파머의 영향력은 교육의 장을 넘어 사회 전체를 향하게 된다(또한 이에 따라 그의 접근 방식은 기독교적 언어와 개념을 넘어 개방적이고 포괄적으로 진전하게 된다). 그러한 결실이 바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이다. 민주주의를 열렬하게 추구하는 미국 시민의 한 명으로서 써낸 이 작품 이면에는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퀘이커 교도(202쪽)로서의 영혼이 불타오르고 있다. 따라서 "폭력은 절대로 답이 될 수 없다"(36쪽)는 게 그의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정치를 다루지만, 실제로는 영성을 강조하는 책이다.

정치와 영성이 마음이라는 단어에서 수렴된다. 이와 관련해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원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제('민주주의의 마음을 치유하기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를 구성하는 세 단어(민주주의, 마음, 치유) 모두가 중요하다. 사실 역서의 제목은 서문의 제목(The Politics of the Brokenhearted)을 풀어 옮긴 것이다. 파머는 마음이 상한 자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곧 마음이 상한 자들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은 링컨이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향해 상한 마음을 개방해 나갈 때 실행했던 정치다."(38쪽)

마음의 치유에서 정치적 용기로

마음(heart)은 "자아의 핵심을 가리"(38쪽)키며, 여기에서 지정의가 통합된다. heart의 어원은 라틴어 cor인데, 이는 courage의 어원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아와 세계라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중심부에서 하나가 될 때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38쪽) 마음과 용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치유가 발생한다. 마음이 상한 자들, 곧 비탄한 자들이야말로 우리와 너희, 당위와 현실의 간극을 오롯이 껴안으며 긴장을 감수하는 이들이다. 이때 필요한 덕성이 바로 용기이다. 원서의 부제가 보여 주듯이 우리에게는 '인간 영혼에 조응하는 정치를 창조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한 면으로 미국적 덕성이다. 미국 개척의 역사는 스스로 돌보고(self-help, 자기 계발), 스스로 지키는 태도를 미국적 삶의 기본자세로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 면으로 보면, 용기는 예언자적 덕성이다. 예언자는 강자 앞에서는 강하지만, 약자 앞에서 온유(배려)하다. 약자와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예수님이 양과 염소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소자(약자)를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강자 앞에 당당하게 서고, 약자 곁에 함께 서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용기이다.

나아가 용기의 미덕은 국가를 바르게 세우는 주요한 토대가 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선언은 어디로 갔는가? 폭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적어도 그만큼의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중략) 국가의 위대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강자가 얼마만큼 성공하느냐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약자를 얼마나 잘 지지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33쪽) 약자를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렇게 예언자적으로, 아니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38쪽)가 부재하는 이유는 마음의 통합(치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마음

상한 마음의 치유를 개인적 맥락으로 한정해서는 곤란하다. 원제가 말해 주듯이 민주주의의 마음 또한 치유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폭력이 가해지는 상황은 언제나 치유를 요청한다. "군인들의 마음에 가해진 폭력은 자아와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부숴 버린다. 그리고 폭력은 전쟁터에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중략) 따라서 정치에서 상대방을 악마화하거나,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무시한 채 정치적으로 편리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40쪽)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정치는 게임이거나 투쟁일 것이다. 하지만 참된 정치는 그저 자기 욕망을 따르는 게임도 아니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투쟁도 아니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정치는 절대로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한 오래되고 고귀한 인간적인 노력이다. 거기에서는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도 번영할 수 있고, 사랑과 권력이 협력할 수 있으며, 정의와 너그러움이 함께 실현될 수 있다." (41쪽) 이러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마음이 치유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는 항상 위기에 처해 있다"(43쪽)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파커 파머는 "민주주의는 끝이 없는 실험이고, 그 성과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15쪽)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민주주의가 "시민이 이룩한 최고의 정치적 성취"(18쪽)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두 가지가 요청된다. 한 면으로 대중매체가 시민의 정치적 무력감을 조장하는 방식에 저항해야 하고, 다른 한 면으로 창조적(생산적)으로 긴장(갈등)을 끌어안는 "마음의 습관"(17쪽)을 들여야 한다.

'마음의 습관'이라는 용어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한길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습관, 즉 우리를 통제하는 습속인 아비투스(Habitus)가 민주주의를 형성하고 지탱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형성을 위해 제도적 차원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마음의 차원이다. 파커 파머는 우리 생활을 지탱하는 여러 물리적 인프라가 소홀하게 취급되는 이상으로 무심하게 다루어져 왔던 민주주의 인프라의 두 층위에 주목한다. "인간의 마음이 지닌 보이지 않는 역동 그리고 그 역동이 형성되는 가시적인 삶의 현장들이 그것이다."(43쪽)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부흥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곳은 무엇보다도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민주주의 형성과 지속, 그리고 부흥을 위한 참된 출발점이다. "각자 안에 존재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구성원임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갈등을 끌어안을 수 있다."(43~44쪽) 정상적인 민주주의는 인간 사이와 집단 사이의 갈등을 전제한다. 이러한 갈등은 당연히 인간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파커 파머는 이렇게 마음이 깨어지는 가운데 마음이 열릴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가 시작되어야 한다. 마음이 열릴 때, 다시 말해 마음이 치유될 때에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권력을 사용하여 삶에 질서를 함께 부여하는 행위로서, 심층적으로 하나의 인간적인 기획이다. 마음이 부서져 흩어진 게 아니라 깨져서 열린 사람들이 정치의 주축을 이룬다면,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세계를 위해 차이를 창조적으로 끌어안고 힘을 용기 있게 사용할 수 있다." (57쪽) 민주주의의 교육

정치의 영성적 차원을 다루는 파커 파머의 논의는 넓고 깊다. 각 장마다 풍요로운 통찰이 숨어 있어서 여기에서 자세하게 다루는 것조차도 벅차다. 여기에서는 민주주의 교육 공간에 대한 파머의 논의를 소개하는 것으로 한정 지으려고 한다. 민주주의의 형성과 지속은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는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한 양육 공간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학교와 종교 공동체이다. 교회와 학교는 우리를 내적으로 바로 형성하거나 일그러뜨릴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한 심상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 양육의 장은 동시에 시민 형성의 장이 된다.


"종교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우리는 미리 정해진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내면 탐구를 수행하도록 여러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지침과 자원들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어떤 마음의 습관을 형성해 가고 있을 것이다." (203쪽) 이를 위해서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는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담겨 있는 '큰 이야기'를 학생의 삶에 있는 '작은 이야기'와 분명하게 연결시키(206쪽)"는 것이다. 학교에서 5·18 민주화 투쟁을 가르친다면 [?] , 한 면으로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는 지역 차별 문제(현실 세계)에, 다른 한 면으로 어둠의 힘이 넘실거리는 학생의 내면세계에 이를 연결해야 한다. 또한 이에 더해 "학교 안에서 민주주의를 실행"(211쪽)해야 한다. "교사에게 요구되는 도전은 시민 교육적 가르침의 실천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를 그런 교육을 지지하는 장소로 바꾸는 투쟁에 앞장서는 것이다."(213쪽)

하지만 사실상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교육이 그 권위를 찬탈한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이런 제안들을 실행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홈스쿨링이나 마을 공동체에서의 공동 교육 등 해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대안 교육을 통해서 파머가 제시하는 그림에 근접하는 결실을 얻는 경우도 종종 목격한다. 이는 학교 안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사와 동료 학생들로 이루어진 올바른 교육 공동체가 인간 형성에 선하게 기여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의 증거로 대안 교육을 제시할 수 있다(물론 대안 학교가 또 다른 귀족 교육으로 전락한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 학교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 바로 교회다(지금 여기에서 다른 종교 공동체 현실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개독교'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굳이 다른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안타깝게도 좋은 대안 학교를 찾는 것보다 좋은 지역 교회를 찾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실정이다. 개혁적 성향으로 잘 알려진 교회조차도 많은 경우에 "교회 생활 속에 감춰진 커리큘럼을 바꿔야"(221쪽)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위계적 현실이 강단에서 선포하는 복음적 메시지와 엇갈린다. 많은 설교가 공허한 울림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지도자가 일관성 있게 끌어안게 되면 어떤 배움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겸손함과 뻔뻔스러움의 혼합물을 터득할 수 있게 된다. 그 공동체가 강인해지면서 평신도는 일상생활로 돌아와 신앙과 경험이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 조응하고, 적절한 반응이 일어나는지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26쪽) 

민주주의 동력으로서의 고독과 공동체

미국 교회와 학교도 실은 한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파커 파머는 미국 교육계와 종교계의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교육을 위해 학교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지시한다. 이는 마음의 영역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제도의 민주주의는 마음의 민주주의를 전제한다. 파머는 마음을 변혁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를 해방시키거나 제한하는 관념의 공간은 늘 바깥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안으로부터도 생겨난다. (중략) 관념의 공간이 솟아나는 샘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는 마음을 가리켜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라고 불렀다."(242쪽)

마음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타자를 압도하는 공포의 순간과 타자를 포용하는 은총의 순간에 그 영향력을 드러낸다. 더불어 다른 힘에 의해 영향 받기도 한다. 우리의 정치적인 개념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주로 대중매체이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잘 관리하지 않는다면 미디어가 정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대인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자극적 뉴스에 중독되어 있다. 파커 파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시민이 되고자 한다면 대중매체가 아닌 개인적 경험에 의해 규정되는 개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 공간에서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뉴스를 접할 수 있다."(246쪽)

신화 연구가 조셉 캠벨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온전히 경험하고 말할 수 있는 장소"(247쪽)가 필요하다. 마음속으로 더욱 들어가기 위해 홀로 머무르는 공간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뉴스는-천국 같은 것이든 지옥 같은 것이든 모두-마음속에서 시작된다."(247쪽) 자기 마음에 대해 알게 되는 만큼 세상을 더욱 잘 알게 된다고 파커 파머는 말한다. 따라서 고독한 묵상의 여정에 생을 바친 수도사 토마스 머튼을 주목하는 것이다. "수도사가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절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더욱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247쪽)이다.

또한 고독을 위한 공간에서 더불어 있는 모임으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는 차원으로 가면 고독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은 모임의 안전한 공간도 필요하다."(251쪽) 이는 그런 공간 안에서 "우리가 타인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회복하고, 연습하고 개방할 수 있"고, "그 자리에 모여서 서로에게 더 잘 연결되고, 민주주의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남을 위해 파커 파머는 '신뢰의 서클' 결성에 주력한다. 그는 또한 오바마 대선 캠프가 이러한 나눔을 위한 공간을 제공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영성

이제까지 보여 준 바와 같이 파커 파머는 교사의 교사에서 이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통해 정치의 교사로 우뚝 서 있다. 교육학계의 구루에서 민주주의의 구루로 진화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파머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영성을 보여 준다. 민주주의는 종교개혁이 새롭게 천명한 복음의 능력을 정치적으로 전유한다. 민주주의는 인간적인 동시에 종교적이다. 영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다. 민주주의에 기반한 삶은 곧 낯선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다. 이웃과 공존하고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촉구하는 윤리적 삶이며, 종교적 사명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효율성이라는 척도로 평가할 수 없고, 인격적 충실함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충실함이 우리의 기준이 될 때 결코 완수될 수 없는 과업에 계속 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의를 실현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사랑스러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300쪽)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하나님나라가 궁극적으로 완성될 때에야 온전히 실현된다. 민주주의의 완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성취와 지속의 과업은 구원론적인 것이다. 우리의 최선에 주님의 은총이 임해야 한다. [?] 이것은 파머가 라인홀드 니버의 아래와 같은 인용문으로 책을 마무리하는 이유이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은 어느 것도 역사의 즉각적인 문맥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고결하다 해도 혼자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301쪽) 그러니까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심리학으로 출발하여 신학에서 종결된다. 서문을 우울증의 세 번째 발병(33쪽)과 회복에 대한 회고로부터 시작하는 이 정치적 매뉴얼은 정치의 심리학(치유와 통합)이자 동시에 정치의 신학(구원과 종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둘은 하나다. 종교적 영성이 곧 심리적 치유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척박한 정치 현실에서도 역시 민주주의의 영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정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정치 변혁을 갈망하는 시민들의 내면 변혁을 위한 최고의 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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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톨레레게' 12월 2차 모임 참가 신청
12월의 주제는 '정치'입니다.
2차 모임에서는 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를 읽습니다. 이원석 작가가 모임을 인도합니다. 12월 21일(월) 저녁 7시 30분, <뉴스앤조이> 사무실에서 진행합니다.
톨레레게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래 참가 신청서를 작성해 주세요^^
●일시: 12월 21일(월) 저녁 7시 30분
●장소: <뉴스앤조이> 사무실
*숙대입구역(4호선) 10번 출구에서 5분 거리, 남영역(1호선) 1번 출구에서 10분 거리. 오시는 길(클릭)
●진행: 이원석 작가
●도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
●회비: 5,000원
●문의: 070-7872-2342, newsnjoy@newsnjoy.or.kr
verbs@hanmail.net(이원석 작가)
모임 참가 신청하기(클릭)


이원석 / 작가, 문화연구자, <뉴스앤조이> 편집위원. 한국 교회와 사회의 본질이 교양의 부재에 있다고 보기에 교양 사회의 구축을 사명으로 생각하며 집필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거대한 사기극>·<공부란 무엇인가>·<인문학 페티시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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