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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한국불교학 그 반성과 전망 / 이혜숙 -동국대학교의 현행 교과를 중심으로 2000년

불교평론



한국불교학 그 반성과 전망 / 이혜숙

-동국대학교의 현행 교과를 중심으로

[5호] 2000년 12월 10일 (일) 이혜숙  동국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불교학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간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다. 그 포괄적인 반성과 답에 접근해 가는 방식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타의 종교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비교하는 입장에서도 가능할 것이고, 불교교리의 해석이 자체적으로 안내하는 것들을 따라가는 방식, 혹은 아주 경험적으로 기존의 불교교육과정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들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접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 전문교육과정의 하나인 대학에서 전공교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는 것들이 불교학의 모든 내용을 포함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중요성 인정도(認定度)의 우선순위를 생각할 때 그것들이 비교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가장 오랜 전통의 불교학 산실인 동국대학교 불교학부와 대학원의 교과들을 검토해보면 이 시점에서 한국불교학이 중요시하는 대강의 내용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필자는 기타의 종교학과 비교를 해보기도 하고, 불교교리에 입각한 검토, 더 나아가서는 소비자주의 불교학이라 할까, 불교인으로서 자유로이 불교를 향하여 묻고 싶은 질문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불교학의 내용과 보완의 과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2. 동국대 불교학의 교과목과 연구경향



우선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불교학 전공과정에 개설되어 있는 교과목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1) 각주 1)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2000학년도 신입생 교과안내 자료.



1학년에 인도불교사,

2학년 기초교육과정에는 초기불교, 중국불교사, 종교학, 불교경전의 이해, 불교원전 강독, 계율학, 아비달마불교, 대승불교, 한국불교사(삼국), 한문불전강독,

3, 4학년 전문교육과정에는 한국불교사(고려, 조선), 중관학, 유식학, 정토학, 화엄학, 한국불교사상, 동아시아불교, 불교윤리학, 중국불교철학, 천태학, 밀교, 불교교리사, 불교사회경제론, 세계종교사, 전법교화론 등이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의 ‘불교사학 전공’ ‘불교교학 전공’ ‘응용불교학 전공’을 망라하여 개설된 교과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2) 각주2) http://www.dogguk.ac.kr/DGUH/에서 인용. 2000년 11월 현재.



석사과정을 위해서는,

근본불교 연구, 신라불교사 연구, 부파불교 연구, 선사상 연구, 반야사상 연구, 중국불교사 연구, 일본불교사 연구, 한국불교사상 연구, 남방불교사 연구, 서장어 불전 연구, 고려불교사 연구, 중관사상 연구, 천태사상 연구, 불전성립사 연구, 밀교사상 연구, 인도불교사 연구, 범어 불전연습, 여래장사상 연구, 대승불교 연구, 불교교단사 연구, 조선불교사 연구, 유식철학 연구, 화엄철학 연구, 대승불교성립사 연구, 정토사상 연구, 계율사상 연구, 팔리어 불전연습, 삼론학 연구, 법화사상 연구, 중국불교사상 연구, 포교학 연구, 불교사회복지학 연구, 불교서지학 연구, 비교종교학 연구, 불교사회학, 불교경제학, 종교교육학 연구, 불교윤리학 연구, 불교의 여성 연구, 불교고고학 연구가 있다.



박사과정을 위해서는,



신라불교사 특강, 근본불교 특강, 정토사상 특강, 불전성립사 특강, 반야사상 특강, 계율사상 특강, 한국불교사상 특강, 서장어 불전 특강, 삼국불교사 특강, 부파불교 특강, 천태사상 특강, 중국불교사 특강, 여래장사상 특강, 범어 불전 특강, 한국근대불교사 특강, 삼론학 특강, 대승불교 특강, 고려불교사 특강, 밀교사상 특강, 화엄철학 특강, 팔리어 불전 특강, 일본불교 특강, 중국불교사상 특강, 유식철학 특강, 조선불교사 특강, 중관사상 특강, 선사상 특강, 법화사상 특강, 불교교류사 특강, 서역불교사 특강, 인도불교사 특강, 비교종교학 특강, 불교사회학 특강, 포교학 특강, 불교사회복지학 특강, 불교서지학 특강, 불교고고학 특강, 불교예술 특강, 사원경제 특강 등 총 79여 개의 교과가 개설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개설되어 있는 교과목들의 상하단계나 상호관련 등 그 내용을 돌아보는 것은 본고의 예정된 범위를 벗어나므로 여기서는 다만 그 이름들을 주의해 보자. 아울러 국내 기독교대학의 예를 들어 비교해볼까 하는데, 학부의 교과들보다는 대학원과정에 개설된 것들이 연구의 중심과제가 되고 그만큼 비중이 있는 것이므로 대학원 교과를 주로 살펴본다.



연세대학교 학부 신학과의 경우3) 특기할 만한 것으로서는 채플, 현대신학사, 신학실천(1)과 (2), 영어 신학원강, 실용영어, 교회와 사회, 사회윤리의 신학적 배경, 최근의 신학, 교육현장론, 목회학 등이 있다. 흔히 예상되는 신약, 구약개론 등의 기독교교과 이외에 필자의 주관적인 기준에서 앞서 소개된 교과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나중에 소개하겠다. 각주3) http://www.yonsei.ac.kr의 대학 및 대학원소개 자료 인용. 2000년 10월 현재.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망라하여 구약학,신약학,조직신학,세계교회사,기독교윤리학,기독교교육학,종교학,실천신학의 세분된 전공 아래 개설된 과목들은 다음과 같다.



구약학 방법론, 이스라엘 역사, 구약원전, 구약학사, 이스라엘 종교, 성서 지리학, 구약과 고대근동세계, 역대기역사, 구약신약 중간사, 신약의 종말론, 신약 원전, 신약 배경사, 마가복음서 세미나, 계시록, 로마서 세미나, 신약본문 비평, 신약기독론, 신약체계론, 현대신학 동향, 신론 연구, 기독론, 초급 라틴어, 고급 라틴어, 교부신학, 중세신학사, 종교개혁사, 현대신학사, 역사방법론, 성령론 연구, 성례론 연구, 창조론 연구, 이데올로기와 기독교, 기독교 윤리학 방법론, 기독교윤리의 성서적 기초, 기독교윤리체계, 기독교 사회윤리의 연구, 기독교 개인윤리, 기독교 윤리사상사, 기독교 교육 교수학습론, 기독교교육학 연구방법론, 종교심리학, 그룹 다이나믹스, 기독교 청소년교육, 성년기 기독교교육,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기독교 교육과정, 기독교 교육철학, 한국종교사, 종교사회학, 종교학방법론, 구약신학, 구약고고학, 오경연구, 예언서 해석, 아람어, 이사야 연구, 예레미야 연구, 에스겔 연구, 요한복음서 세미나, 신약학사, 신약 해석학, 예수의 비유, 갈라디아서 세미나, 고린도 후서, 마태복음서 세미나, 신약고고학, 신학인식론, 인간론, 구속론, 종교철학, 한국기독교회사, 이단분파사, 현대교회사, 퓨리터니즘 연구, 상황 윤리, 신학적 윤리, 기독교와 공산주의, 기독교윤리와 정치, 신약의 윤리, 기독교교육신학, 목회상담 연구, 기독교 교육사, 종교 예술, 교회 음악, 기독교 교육의 사회학적 기초, 기독교교육의 현장론, 기독교교육 행정연구, 한국 샤머니즘, 세계종교사, 한국신흥종교, 유교 연구, 불교연구, 기독교와 타종교, 연구지도 1, 창세기 연구, 지혜문학 해석, 시편 연구, 사해 사본연구, 고대근동의 종교, 포로기와 회복기의 역사, 바울서 신해석, 공관복음서 연구, 원시공동체의 윤리, 폴틸리히 신학연구, 칼바르트 신학연구, 철학과 신학, 현대 역사신학연구, 교회론, 이레니우스와 어거스틴의 구속사 연구, 보나벤투라와 아퀴나스 연구, 단테와 마셀리우스 연구, 루터와 칼빈신학 연구, 웨슬리와 에드워즈신학 연구, 교회와 국가, 사회윤리 방법론, 현대과학기술과 인간의 가치, 세례론, 기독교교육의 이론과 실제, 민간 신앙, 종교적 언어연구, 신화학, 신명기와 신명기역사 연구, 구약 해석학, 포로기 예언자 연구, 구약외경 연구, 묵시문학 연구, 구약성서 본문비평, 신약 신학 세미나, 사도행전 연구, 히브리서 연구, 불트만 연구, 누가복음서 세미나, 계시론 연구, 삼위일체론 연구, 현대종말론 비교연구, 의인론 연구, 실존론적 신학 연구, 변증법적 신학 연구, 해석학적 신학, 최근의 신학1, 최근의 신학2, 선교신학, 현대신학 세미나1, 현대신학 세미나2, 미국 신학사, 한국신학사 연구, 에큐메닉스 세미나, 현대기독교윤리학, 현대사회와 윤리문제 세미나, 에큐메니칼 윤리, 설교학, 예배학, 기독교교육 세미나, 원시종교론, 현대문명과 종교, 신비주의 연구, 이슬람 연구, 도교 연구, 연구지도2 등 총 160 여개의 교과목이 열려 있다.



다소 지루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신학 전공의 교과목을 낱낱이 나열한 것은 그 특정 대학의 편성이 우리에게 학문적으로 모델시될 이유가 있어서는 결코 아니다.



다만 어느 점에서의 차이가 있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필자의 임의로 고딕체로 강조한 교과목들과 함께 다른 기독교대학원의 전공교과들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의 목회지도자 과정과 평신도지도자 과정이 신학,상담,교육,선교 목회,임상목회,목회상담전문,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볼 필요가 있고,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에는 기본적인 성서신학, 교회사, 조직신학, 윤리신학, 선교신학, 목회실천신학의 전공교과들 이외에 환경윤리 세미나, 의료윤리 세미나, 대중문화와 기독교 세미나, 기독교와 사회복지 세미나, 민중신학 세미나, 제3세계 신학 세미나 등을 개설하거나 개설 예정으로 있음을 본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에는 기독교 신학과와 목회상담학과, 기독교사회학과, 기독교문화학과 등이 있는데, 기초공통과목으로서 현대신학의 동향, 목회상담의 이론과 실제, 현대사회와 기독교윤리가 개설되어 있다.4) 각주4) http://www.sgcs.soongsil.ac.kr 자료 인용. 2000년 10월 현재.



전공필수과목으로서는 각각 오늘날의 개혁신학, 성경신학, 영성신학, 기독교사회학, 사회사상사 혹은 현대사회학이론, 한국교회와 사회, 목회상담자의 정신건강, 상담의 이론과 실제, 집단상담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그 밖에 선택과목들로 특기할 것은 신학적 해석학, 생명신학, 교회성장신학, 신학자 연구, 21세기 기독교와 타종교, 과학기술과 기독교신앙, 기독교문화 신학, 영적 각성운동 연구, 가족문제와 목회상담, 청소년문제와 목회상담, 성격이론과 목회상담, 위기상담의 이론과 실제, 이상심리와 치유목회, 정신역동이론과 목회상담, 체계이론과 목회상담, 실존주의상담과 목회, 현대상담기법과 목회상담, 기독교와 생명윤리(평화, 환경, 여성), 현대문화와 종교, 기독교심리학, 사회문제와 사회조사, 한국사회연구(도시, 농촌, 산업), 사회봉사학, 교회와 사회사업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부에서부터 석사,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듣게 되는 과목들은 예를 들면, 학부에서는 인도불교사로, 석사과정에서는 인도불교사 연구로, 박사과정에서는 인도불교사 특강과 같은 식으로 편성되어 있다. 교과의 이름이 비슷해서 내용이 같으리라고 무조건 단정하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학원 강의는 전임교원만 할 수 있다는 규정과, 학부의 전공교과들도 전임교원들이 거의 하게 되기 때문에 같은 전공분야에서 다른 강사들에게 강의를 들어볼 기회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할 수가 없다.



학부에서 박사에 이르는 전체 연구과정에서 비슷한 교과를 한 전임자가 담당함으로써 신선한 학문적 자극이나 비판을 포함한 교육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우선 외견상으로 교과이름이 근대 감각적(?)인 점이나 그 내용은 차치하고, 선택의 폭을 비교하더라도, 연세대의 경우는 석사, 박사를 망라하여 160여 개 교과목이 개설되어 있고 동국대의 경우는 80개 정도라는 것이 주목된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필자로서는, 동국대학교 불교학 연구교과들과 신학대 교과목들 사이에서 중요시되는 몇 가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불교학 교과목들의 경우,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불교’로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반영하는 면에서 미흡한 점이 크게 문제라고 생각된다.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의 교과 가운데서 오늘날을 암시 혹은 명시한 교과목은 거의 찾을 수 없고 한국을 명시한 경우에도 ‘불교사를 수식하는 말일 뿐, 오늘날 한국불교 혹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인식과 대응 나아가오늘날 불교학 등등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삼는 연구나 교과가 소개되지 않고 있다.



둘째로는, 불교학 방법론에 관한 교과가 없다는 점이다. 혹자는, 오늘날의 모든 학부가 교양과정 수준이라고들 말하지만, 적어도 대학원 수준에 이르면 학문적 방법론이 소개되고 검토되는 것은 필수여야 하지 않은가 싶다. 방법론 연구란 학문의 초입에서 장차 그러한 연구과제와 연구도구들을 선택하게 될 이유를 밝혀주고, 중도마다 연구자의 입지를 설명하는 객관적 안내표지라고도 할 것이다.



불교학도들이 지금껏 배우고 가르쳐온 과정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쌓여 있다면 그것이 방법론 연구로 벌써 체계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의 불교학도는 각자 학문적 목적지 말하자면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천태학, 화엄학 등등의 전공분야를 향해 가되, 어떤 경로로 어떤 방법으로 가고 있는지를 묻지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가고 있을 뿐이다.



셋째로, 고금을 막론하고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와 상호작용을 하는 환경적, 반응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이 깊게 고려되지 않는 교육과정들이다. 현재의 불교학 교과들은 주로 불교원론 자체와 그 해석 및 적용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오늘의 전반적인 상황을 포함한 조건아래서 그 해석과 적용을 가르치고 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숫자상으로 불교학 석사, 박사과정에서는 80개 교과목, 연세대 신학과의 석사, 박사과정에는 160여 개의 교과목이 크게 비교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적으로도 기독교신학과정에 불교, 유교, 이슬람, 도교, 민중신앙, 샤머니즘 등 다양한 종교 그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이념들, 문화적 특성, 문제들, 전망과 대안들을 연구케 하는 배경과 이유에 관해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넷째로, 기독교신학 교육과정에서는 윤리와 사회적 실천에 관한 내용들이 불교학과의 경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편이다. 기독교 사회윤리, 기독교 개인윤리, 기독교 윤리체계, 기독교 윤리사상, 윤리방법론, 교회와 국가 등 이외에도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대상인구별로, 대상문제별로 개입하는 목회상담학이 독립되다시피 하여 있다. 설교학, 예배학, 교육현장론, 상담학 등등 다양하게 세분되어, 기독교와 신학이 사회적 실천의 전문화를 지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3. 불교교의에 의한 보완과제



거듭 강조하거니와, 현행 불교학의 교과목들과 전공분야 보완의 필요성은 서구학, 신학과의 비교에만 근거하는 주장이 아니다. 종교는, 특히 불교는 실천을 기본 조건으로 하고 있다.



불교교의의 도처에서 실천행을 강조하고 그같은 취지의 교설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 간단하고도 체계적인 교학용어로서 신(信)-해(解)-행(行)-증(證)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불교학은 말하자면 불교인이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주교재로 하여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대상목표로 삼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고(信), 이해를 참구(參究)하여(解), 배운 바를 실천으로 구현하고(行), 마침내 목표에 적중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證) 전과정이 교학의 일차적인 연구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일차적>이라는 표현은 다름아니라 개개인의 내적인 경험과 그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의 과제를 우선 생각하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어떤 상태인가? 자타간에 신심의 정도는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가? 그것은 지속적인가 어떤가? 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지적인 경험인가? 무엇이 교의의 핵심이며 교리를 어떻게 올바로 이해하였다고 보는가?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상징체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가? 불교적 신앙행위의 선택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믿음이나 이해와 그 행위 사이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검증하는가? 불교적 수용이나 경지의 증득은 어떻게 측정할까? 어떻게 입증할까?



신해행증에 관련하는 이같은 질문들이 학문으로서 불교를 풀어나갈 실마리가 된다고 본다. 예컨대 <중관사상 연구>라는 교과는, 부처님의 중도교의로부터 용수 등에 의한 신해행증의 틀을 거쳐 발달된 사상체계로 소개될 뿐만 아니라, 오늘 학습자 중심의 신해행증에 의해서 다시금 해석 수용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불교수행자의 입장에서와 같이 호교적(護敎的)일 수도 있고 혹은 비교종교학과 같은 객관적 시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경우일지라도 학문으로서는 기여하는 바가 있다.



다음으로 불교연구의 역사적 접근방법이 곧 불교사학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기간의 역사적 발전을 통해서 불교사상과 제도의 기원과 성장을 추적하고 그 기간 동안에 불교가 수행해온 힘과 역할들을 측정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고고학적 문헌학적 연구에 기초하여 과거를 재현하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수집된다.5)



초전법륜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모든 개개인들에 의한 신해행증의 과정이 집단적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시대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불교역사를 이루므로 그로써 불교사학의 연구대상이 성립되는 것이다. 현재 <불교교학 전공><불교사학 전공>,<응용불교학 전공>의 세 분야로 나뉘어 있는 불교학 연구과정을 생각해보면, 위에서처럼 불교의 전모(全貌)인 신해행증을 하나의 분석틀로 삼아서 각기 교학과 사학전공의 과제들을 연구할 수 있다.



거기다가 <응용불교학 전공>은 신해행증의 종교현상학적, 종교사회학적 접근을 내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종교경험은 반드시 표현되고자 하는 것6)으로서, 그 표현의 집단화, 사회화를 종교현상학 혹은 종교사회학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각주 6) 김종서 역 , 앞의 책, p.122.



가장 최근의 명명을 얻은 <응용불교학 전공>에서는, 기독교의 경우 성서해석신학과 역사학 이외의 대사회윤리적 개입과 교회의 경영, 조직화, 목회상담기술, 실천신학, 각종 사회문화적 현안들에 대한 전망이 적극적이고 다양하게 개설되고 있음을 참고해볼 수 있다.



위에 소개된 신학의 교과목들 가운데 필자가 임의로 고딕체를 사용해 강조한 것들을 다시 참고하기 바란다.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이해하고 그대로 실행한다면 그 결과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서 어떤 현상들을 나타내게 될 것인가? 당대 불교인들의 행동양식을 분석하고 있는가? 오늘의 불교문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의 어떤 교의를 믿고 이해하였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가? 신해행증의 총체적인 현상인 소위 불교계는 어떻게 연구되고 측정되며 해석될 수 있는가? 불교계 내부의 특징적 현상과 불교계 외부를 향한 대사회적 반영들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현대불교의 당면한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내용들이 다양하게 연구되고 축적됨으로써 후대를 위한 사료를 구축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행 교과들은 불교의 위와 같은 현상학적, 사회학적 연구를 이끌어갈 만큼 충분히 다양하게 개설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불교계 안팎을 향한 불교인의 현재의 인식과 주장, 행동양태를 담아내고 그것을 연구, 해석해보려는 불교학 분야는 미흡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불교계, 불교학계 상의성에 의한 연구과제



필자는 앞에서 불교교의가 그 어떤 종교보다도 수행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본령으로 삼는다는 이해에 근거해서, 불교학의 많은 분야들이 그러한 실천의 내용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아가서는 불교계와 불교학계의 상호의존적 관계 즉 연기법적(緣起法的)인 상호관련을 규명하고 반영하는 연구가 불교학의 필수분야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모든 현상은 예외 없이 인과(因果)의 규칙에 적용되며 상호연(相互緣)하는 법을 핵심으로 삼는 불교와 그에 관한 불교학이, 인과로서의 불교문화와 상호연하는 법계, 장(場)으로서의 사회현실을 연구대상으로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창조주의 절대의지 아래 종속되는 인간관, 세계관을 가진 여타의 종교보다도 오히려 현실연구와 해석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오늘날 불교학의 경향조차도 하나의 연구과제가 된다.



갖가지의 원리와 신념 그리고 그와 관련한 현상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 학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구성되어진 세계에 대한 의도적인 개념(intentional conception)을 전제로 하여, 그 의도적인 세계의 원리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사회문화적 환경이 서로의 정체성에 스며들어 상호의존적이며 상호간 어떤 측면도 다른 쪽에 대한 설명 없이는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인간의 주관성과 정신적 삶은 사회문화적 환경으로부터 도출된 의미와 자원을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과정을 통해 수정되어진다7)는 것이다.각주 7) Richard A. Shweder, 김의철, 박영신 역, 《문화와 사고》(교육과학사, 1997), pp.79&sim;80.



이를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과와 연기법의 구현이면서 객관적으로는 불교학이라고 하는 것이 초점을 두어야 할 과제들의 속성이다. 이에 관련한 사회과학적 연구이론 가운데서는 무엇보다도 체계론(Systems Theory)적 관점이 불교적 세계관에 매우 근접해 보이는데, 가장 기초적인 체계관의 하나로서 아더 케슬러(Arthur Koestler)의 &lsquo;홀론(Holon)&rsquo; 개념을 살펴보자.



그의 용어 &lsquo;홀론&rsquo;은 각 사회적 체계가 크든 작든, 단순하든 복잡하든, 하나의 부분임과 동시에 하나의 전체라는 생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안되었고, 이것이 나아가 인간사 즉 인간행동과 사회현상들의 인과망(causal network)은 일방적, 단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훨씬 복합적이며 다양한 방향성을 가진다8)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각주8) Ralph E. Anderson/Irl Carter, 장인협 외 4인 공역, 《인간행동과 사회환경》(집문당, 1991), pp.26&sim;28.



이러한 관점은 자연과학적, 생태학적 연구에서 지지되어 왔고, 나아가 사회과학 및 인문과학의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으로 소개되어 왔다.



소위 체계론적 연구 패러다임을 여기서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행하는 혹은 앞서가는 서구학의 방법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연기와 화엄, 인드라망 등의 세계 개념들과 밀접하게 상통하는 관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계관이 불교인인 우리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개념이 아니더라도, 오늘의 불교학이 현실의 그 묵은 원칙들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더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교학전공><불교사학전공>등에서도, 말하자면 불교 원리와 현상 사이의 상호체계적 관련성을 토대로 하는 연구와 이해가 구비되었어야 할 것이며, <응용불교학전공>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불교계, 불교학계는 끊임없이 상호간 환류(feedback)를 담보로 발전한다는 것이 깊이 이해되고 반영되어야 한다.



주시하는 초점의 위치에 따라서는 두 체계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전체계가 되는 여러 가지의 체계들, 예를 들면 불교계 현실과 불교학계라는 두 체계 사이에서 상호환류야말로 자기수정행태(self-correcting behavior)의 핵심이 된다. 환류에 의해서 체계들은 환경적 요동이나 내부적 기능저하로 인해서 생기는 궤도의 이탈을 배제할 수 있고, 내부적 상태와 주변상황을 알려주는 지속적 정보에 비추어서 내부적 환경을 규제함으로써 자체규제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9) 각주 9) 이용필, 《사회과학연구와 새로운 패러다임》(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p.19.



<응용불교학>과 같은 영역이 불교학의 주변학이거나 잡학(雜學)이 아니라 그 핵심으로 평가되고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하여, 필자는 연기법이라는 불교 근본교의와 사회체계론이라는 일반학의 관점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자칫하면 학문이라는 것이 실천적 삶보다 이론을 우위에 두고 행동적 삶보다 사변적 삶을 우위에 두는,10) 혹은 이론 구성을 위한 이론으로 변질하게 될 수도 있음을 기본적으로 경계한다. 각주 10) 최종욱, 〈인문과학 위기에 대한 담론분석을 위한 시론〉, 《한국인문사회과학의 현재와 미래》(학술단체협의회 편, 도서출판 푸른 솔, 1998), p.336 참고.



그러므로 기존 학문분야의 이론 틀에 의해서 미리 제한된 가운데 연역적으로만 연구과제를 선정하지 않도록, 불교 원리와 불교문화현상이 수평적으로 대등한 관계로 취급, 연구되도록, 개인적 집단적 불교인의 생활체험들이 불교학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도록, 연구자들 스스로가 개방적인 관점에로의 문제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즉 순수히 경험에 의한 질문과 담론들 가운데서도 불교학의 연구과제를 삼을 수가 있다. 오늘의 한국불교인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고 있을까?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현실을 대하며 불교적 신행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불교인의 문화는 무엇인가? 불교인 개인 혹은 집단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정립하는가? 불교계 문화와 산업현장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 안에서 산출되는 것을 개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어떠한가? 불교시민단체들의 지향점과 역량은 어떠한가? 종단들의 정치적인 행태에 대하여 불교인의 인식은 어떠한가? 불교인으로서 과거의 반성과 미래의 전망은 어떠한가?



이같은 질문과 연구들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묻고 답하여 <오늘의 불교>를 대내외적으로, 국제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로서 충실하게 결집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5. 불교학 보충 교과의 제안



여기서는 필자가 임의로 자유롭게 어떤 교과목들이 더 보충되기를 바라는지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현행의 교과목들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미 논의되고 있을 주제인지도 모르겠으나, 부분적 논의와 독립된 연구과제로 교과목을 삼는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첫째, 불교교의의 이해와 전달에 관련하여 우리의 정황 및 문화환경을 반영하는 교과들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교과들을 더 배움으로써 불교를 수용하기에 혹은 전달하기에 더 수월한 폭넓은 언어와 사고, 상징, 개념적 도구들이 동원될 수 있다. 어떻게 하든지 세계와 인간, 현실 등을 읽는 불교 내적 개념과 불교 외적 개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지금보다는 원활히 해야 한다고 본다.



시대를 초월한 혹은 통시대적인 개념들, 불교계 안에서조차도 통할까 말까 하는 그런 투의 교과서적인 언어와 인용들을 고집함으로써 불교를 유물처럼 만드는 불교학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해석상의 용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 이해의 출발선인 학습자나 연구자의 관점과 시야가 자기모순에 빠지거나 편협하지 않고 탄력적으로 작동되도록 정지작업을 돕는 교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와 서양철학, 불교와 동양철학, 불교와 심리학, 불교와 정신과학, 불교와 생명 및 물리학, 불교와 자본주의, 불교와 사회주의, 불교와 민주주의, 불교와 생태환경, 불교와 과학문명, 불교와 인간행동론, 불교와 사회문제론, 불교와 시장경제론, 불교와 경영 세계화, 불교와 정보이론, 불교와 현대문화, 불교와 대중문화, 불교와 예술, 불교와 문학, 불교와 음악 등이다.



둘째, 불교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 분야의 산학협동이라는 과제를 생각해 보자. 이론의 불교학이나 과거의 경험들을 표본 채집한 보존용 전시용 불교학이 아니라 지금 살아 움직이는, 숨쉬는 불교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학문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의 것을 잘 선정, 종합해서 내일의 학습자들이 새롭게 배우고 가르칠 내용을 남겨 주어야 할 책임이 이 시대의 불교학자에게 있다.



불교계 현장과 연계된 교과들로서는, 사찰의 경영관리 부문을 위한 종단 및 사원경영, 신도 관리와 조직화, 사원경제 생산성 연구, 불교 매스컴, 불교계 문화산업, 불교의례연구, 사찰 종무행정 실습, 사원문화의 이해(복식, 음식, 주거양태 등), 불교문화재의 관리, 사원의 건축과 조경 등이 있겠다.



불교인의 신행실천에 관련해서는 불교인 연구, 수행자론, 사회복지론, 자원봉사론, 지역사회 시민운동론(NGO), 불교 신행단체의 실제, 유식과 인지치료, 선과 정신치료, 승가와 집단지도(group work), 승가의 이해, 의사소통기술, 리더쉽 훈련, 신행단체 및 조직의 인턴쉽 등의 교육과 개발이 필요하겠다. 포교 부문을 위해서는 포교매체론, 법회 기획론, 설법 방법론, 상담의 기법, 대인관계 기술훈련, 사회문제 연구, 청소년문제 연구, 가족문제 연구, 사회조사방법론, 불교교육현장의 이해, 불교계 자원의 이해 등등을 생각해 본다.



이러한 교과명들을 보면 틀림없이 누군가는 <불교 잡탕학>이라거나 혹은 그게 무슨 학문 과제가 될 수 있느냐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지금 어떤 교과들이 개설될 수 있는지, 누가 그것을 담당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쨌든 불교학이 지금의 불교계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불교학이 아니라면, 불교원론의 연구나 남겨진 자료들로 역사적 접근에 치중하는 것이라면, 결국 불교학의 현재도 미래도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교과 보완과 관련한 마지막 제안은, 소비자주의 불교학이라고나 할까, 동국대학교 혹은 기타의 불교학 전공생들이 졸업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면 좋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를 미리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학문이나 교육의 목표 중에 하나는, 분명 실질적으로 그 정보와 지식으로써 장차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기도 하다.



행여라도 급속도로 변화하는 이 세상의 지식 수요와 학습자의 지적 욕구를 무시한 채, 선행 연구자 혹은 교수자로서 겨우 자기만족적으로 자기류의 정보만을 학습자에게 강제하는 일은 늘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학 전공을 마치면 이론 연구자의 길만이 아니라 불교계 현장 실천가, 실무종사자가 될 수도 있고 더욱이 현재로서는 그런 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여론이다.



이미 불교계 언론에서 언급된 바도 있듯이11) 사찰 종무원이든, 불교계 사업장이든 소위 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각주 11) <교계 전문인력난>〈불교신문〉, 제1780호, 1면(2000년 8월 29일자) 참고.



이 사회에서 불교계는 그 크기를 보더라도 방대한 현장이고,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일련의 특수성이 있으므로 그에 맞는 인력이 전문교육을 통해서 길러져야 한다. 불교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그런 이해 위에서 장차의 일과 불교문화, 불교계를 창출하도록 안내하는 것 역시 학교의 역할이 아닐 수 없다. 불교학에 벤처 정신은 없는 것인가.



다시금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겨보자. 학문이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사회변화의 속도와 방향에 관련하여 종래의 불교학은 무엇을 하였는지, 못하였는지 객관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학문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출발하되 나아가 더 나은 삶을 목표로 추진되는 독특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원리와 그 적용 사이에서 시간과 정력을 바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는 모든 구성원들의 생명현상의 반영이 바로 학문이 아닐까? 지금 한국불교학에 불교인의 삶은 살아 있는가? <끝>



이혜숙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미국 Kansas 대학교 사회복지학부 visiting scholar, 이화대학교 사회복지 석사. 현재 동국대 강사, 종교사회복지연구소장. 옮긴 책으로 《불교사회복지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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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2

Kang-nam Oh 등잔 밑이 어둡다 -우리 전통의 재발견

Kang-nam Oh  등잔 밑이 어둡다 -우리 전통의 재발견 


며칠 전에 <남의 밥의 콩이 굵다 = 나의 종교 남의 종교>라는 제목의 글에서 종교적 배타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에서 서양종교를 절대시하는 우리의 일반적 경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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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시성 괴테(Goethe)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말도 모른다고 했다. 현대 종교학의 창시자라 여겨지는 맥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는 이 말이 언어에 해당되는 것보다 종교 문제에 더 적절한 표현이라 보고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선언했다.
 우리 중에는 종교나 철학의 문제라면 서양 사람들만 생각해 본 일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겠지만, 내가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철학개론 시간에 달레스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무슨 말을 했고, 칸트, 데카르트, 누구 누구 하다가 끝났다.
 그 후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의례 서양 철학을 들추는 것, 종교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것도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 종교사를 살피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이야기다.

 영국의 사상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라는 사람은 1940년대 초반에 출판된 그의 책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에서 그 당시 동양 종교에 대한 자료가 충분히 번역되고 소개된 형편인데, 서양 사람들 중 ‘아직도 종교나 형이상학의 문제에 관한 한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그리스도인들 이외에는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오늘 같은 시대에 이런 무식은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고의적이며, 불합리하고 창피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고 했다.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와 같이 신학적 제국주의도 영원한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9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서양 사람들 중에는 동양의 종교 사상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정신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 대표적 예로 20세기 미국 종교사상가로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사람 중 하나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을 들 수 있다. 그는 “서양이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낮게 평가하거나 등한시하기를 계속한다면 인류와 인류의 문명을 위해하는 비극을 자초하게 될지 모른다.”고 선언하고, 기독교 시작에 동방에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지금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동방에서 오는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했다.

 동양인 자신들은 어떤가? 아니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유산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있는가? 슬프지만 선뜻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은 한류 붐에 따라 한국 정신이나 사상에 대해 새롭게 보는 시각이 움트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도 한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마치 ‘빛은 서방에서’라는 것이 현대판 진리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뭣이나 서양 것이라면 좋고 옳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가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의 경우다.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 동양의 종교 사상이나 철학을 배격하고 서양 역사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상에만 충성하는 것쯤으로 믿고 있다.

 이런 이들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동양의 정신적 유산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빛과 어둠이 어찌 합하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손을 잡으며, 진리와 거짓이 어이 어울릴 수 있느냐고 한다. 따라서 동양의 전통적 종교 사상에 대해 무지하면 할수록 더욱 충성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혹시 동양 사상에 대해 듣거나 읽거나 인용하려면 오로지 그것을 반박하고 비웃기 위해서일 뿐이다.

 영국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에 의하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어차피 배타적인 종교들로서 자기들의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고서는 속이 시원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 요즘 서양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절대적 배타주의에서 탈피해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교에만 계시가 있고 다른 모든 종교들은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여 그리스도교 배타주의의 선봉장이던 칼 바르트(Karl Barth)가 죽고 그의 후계자로 들어선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 교수마저도 오래전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에드먼튼 저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에 대해 열린 마음,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은 모든 종교 전통들의 공헌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가 없다”고 공언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교수도 죽기 전, 시카고 대학교 세계 종교사학의 거장 머치아 일리아데(Mircea Eliade)와 세계 종교를 섭렵하고, 자기에게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세계 종교의 빛 아래서 새로운 조직신학 책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정신적 유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보겠다고 하는 판국에 우리는 어느 때까지 강 건너 불 바라보듯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에게 와서 우리의 전통적 종교 사상에 대해 물어오는 그들에게 본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는 진리만을 일깨워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의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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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훌륭한 책으로 J. J. Clarke지음, 장세룡 옮김, <동양이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Oriental Enlightenment) (우물이 있는 집,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동양 사상이 서양에 미친 영향을 세심한 고증을 거쳐 상술한 책이다.
특히 한국 사상가로 최제우와  , 류영모와 함석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0/05/03

Kang-nam Oh <포도원의 품꾼들> - 그 종교적 의미

Kang-nam Oh


<포도원의 품꾼들> - 그 종교적 의미

며칠 전 예수님이 말한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하는 것을 고용문제 중심으로 생각해보는글을 올렸습니다. 지금은 그 비유에서 어떤 종교적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까 알아볼까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요약하면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구해 일당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자기 포도원에 와서 일하게 했습니다. 주인이 그 후 몇 번 다시 장터에 나가 보니 일거리를 구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 포도원에 와서 일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오후 다섯 시까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서성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일을 끝내고 품삯을 주는 데 저녁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더 받을 거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자기들도 1데나리온을 받고 불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 왜 불평을 했을까요? 자기들은 하루 종일 더위를 견디며 일을 했는데 어찌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였습니다.

신앙인들 중에도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들은 한 평생 예수를 믿느라 이런 저런 일로 고생고생하면서 살아왔는데, 세상에 재미있는 일 다 하다가 죽기 직전 예수를 믿은 사람과 똑 같이 하늘나라에 간다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하필 일찍부터 믿게 되어 이 고생을 하는가? 나도 죽기 직전에 믿을 걸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제일 부러운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옆에 함께 달려 있던 강도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할 짓 싫건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종교를 보상과 형벌(reward and punishment) 중심으로, 좀 전문적인 말로 하면,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 정해 준 율법을 잘 지켜서 그 덕택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든가 어떤 보상을 받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종교가 하나의 짐입니다. 일생이 짐을 지고 사는 힘겨운 삶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오로지 노역의 보상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면 일하는 시간이 고달프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생각을 달리해서 자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 하는 불안감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는 특권을 깨닫는다면, 더욱이 자기가 따서 모은 포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훌륭한 포도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면, 일하는 시간이 그렇게 지겹거나 고생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도 보상과 형벌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경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대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고 했을 때 이것은 예수님이 새로운 종교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율법주의적인 종교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종교적 삶이 하늘 가느냐 지옥 가느냐 하는 율법주의적 관심에서 벗어나 하루하루가 우주와 내 주위, 그리고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삶의 새로운 경지를 깨달아 가면서 무릎을 칠 수 있는 변화(transformation)의 체험이 연속되는 삶이라면 그 삶은 고달픈 삶이 아니라 즐거운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삶의 말년에 가서야 겨우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찌감치 즐거운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





Jeong Yul Kim

맨 마지막에 온 자에게도 똑같은 혜택을 주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정신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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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



김명현

나를 거의 마지막에 온 경우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일까 생각합니다. 항상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면 불평 불만은 어느정도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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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m



Michael Choi

천국 비유이죠. 지상에서 일어나는 고용과 임금지급 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즉 천상의 일을 지상을 언어로 설명할 뿐입니다. 율법주의 적 신앙을 경계하는 말도 아닐 겁니다. 한 데나리온은 지상의 화폐단위가 아니고 천상의 커런시로 읽습니다. 그 가치는 무한대 이고. 그 것으로 지상에서 일한 공력을 나누게 되면 모든 공력이 제로가 됩니다. 천상의 화폐가치 앞에서는 일한 자는 논 자나 평등한 지점에 서게 됩니다. 천국 화폐를 소지한 사람은 지상의 모든 가치를 무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메시지 갖습니다. 만일 품군이 억울하게 느낀다면 그는 천상의 화폐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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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m



상일김

한국사회애선 꼴찌는 언제나 꼴찌. 예수님 말씀을 두고 개천에 용난다 해도 될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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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m

2020/04/28

성경은 대도(大道)의 문서이다 빛의 구도자 다석 유영모와 빛의 전도자 한밝 변찬린(3) 이호재



성경은 대도(大道)의 문서이다 - 에큐메니안



성경은 대도(大道)의 문서이다빛의 구도자 다석 유영모와 빛의 전도자 한밝 변찬린(3)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4.28 


변찬린 : 성경은 어느 특정 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닌 대도(大道)의 문서이다. 『성경의 원리』가 새 종교의 새벽을 예고하는 예루살렘의 홰쳐우는 닭소리가 되길 바란다. 빛은 동방으로부터 비칠 것이다.

유영모 : 대개의 종교 이름은 자신이 붙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붙여서 된 이름이 많은데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해 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


독창적인 한국의 종교적 영성이 보편적인 우주적 영성

두 종교인을 그리스도교의 선교신학과 성취론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한국의 독창적인 종교적 영성과 종교(신학)사상이 서구 그리스도교 문화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보기론(補基論)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두 종교인의 사유체계는 그리스도교를 포월(包越)한 새로운 종교사상의 지평을 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종교와 세계 종교의 지평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변찬린은 유영모, 김교신 등 주체적인 성경해석을 한 종교인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토착화 신학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그리스도교 신종교 계통의 종교사상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한다. 더욱 강조되어야 할 핵심은 희랍적 이원화로 형성된 서구 신학을 극복하려는 역사적 자의식으로 한국의 종교적 영성으로 『성경의 원리』 4부작을 저술하여 세계 종교 지평에서 보편화하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성서를 18개로 범주화하여 조직신학적으로 해석한 『성경의 원리』(1979), 구약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중)』(1980), 신약의 주요인물과 사건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하)』, 그리고 사후에 발간된 『요한계시록 신해』(1986)순으로 발간하고, 2019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개정신판으로 전면 재발간되었다. 『성경의 원리』(1979 초판, 1988 재판, 1992 삼판, 2019 개정신판)는 “Principles of the Bible”로 영역(사진 참조)되어 하버드대 등 영미권의 주요 대학과 저명한 신학자에게 배포되었다.

▲ 변찬리, Principles of the Bible, 1995. ⓒ이호재 원장 제공


김상일 교수에 의하면 성서의 부활과 변화의 도맥에 대해 변찬린 만큼 시종일관 깊이 있게 해석한 것은 세계 신학계에서 최초라고 평가한 것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또 한국종교문화 연구의 메카라 할 수 있는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연구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 이사인 윤승용은 변찬린의 한밝 성경해석학을 ‘한국기독교’의 해석 틀을 정초한 해석체계라고 평가하며 윤성범, 변선환 등 문화신학 그룹, 유영모 등과 같은 주체적인 성경해석 그룹, 영통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교계 신종교 그룹 등의 종합된 신학 사상이라고 소개하며 “우리의 삶의 현장을 고려한 주체적 신학담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래 인류의 생명과 문명을 고려한 생명신학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 신학이고, 새로운 축의 시대를 대비하는 인류 미래신학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한다.(1)

한편 유영모에 대해서는 이정배 교수가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2009), 『빈탕한데 맞혀놀이』(2011)라는 저서를 통해 유영모 신학을 재구성하여 세간에 선보였다. 김흡영 교수는 세계 신학계에 한국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해 『가온찍기』(2013)로 다석신학을 조명하며 ‘도의 신학’의 한 사례로서 다석신학을 영미권에 소개하고 있다. 또한 2008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 철학자대회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이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종교인은 성서 및 동서양의 경전에 대한 독창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변찬린은 “성경은 특정 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닌 대도(大道)의 문서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런 바탕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다종교적 경전과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론을 성서해석에 적용한다. 또한 유영모는 “내 말은 이 세상에 쓸모가 없다”, “예수만이 말씀으로 된게 아니다. 개똥조차도 말씀으로 되었다. (중략) 나는 말씀밖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다. 기독교만 말씀이 아니다. 불교도 마찬가지 말씀이다”라고 하며 말씀 중심의 깨달음을 『다석일지』와 강의록으로 남기고 있다. 두 종교인은 한국의 경전읽기 독창성을 바탕으로 우주적 몸으로 경전을 회통하여 보편성을 가진 언어로 재창조해 낸다.

유영모의 『다석일지』와 강의는 김흡영 교수가 말하듯이 “다석의 독창적인 신학 사상을 현대 조직신학의 범주와 잣대에서 체계화systematize 하는 작업 자체가 범주착오적 오류일 수 있다”는 선교신학적 오류를 잘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영모와 변찬린의 경전읽기는 성서해석이라는 관점에 국한해서만 이해하더라도 이미 서구신학을 극복하고 한국의 독창적 영성으로 새로운 경전읽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김흡영 교수는 세계신학계를 향해 핫지슨(Peter C. Hodgson)의 구성신학적 방법(2)을 이용해 조직신학적으로 다석신학을 재구성해 냈지만(3) 변찬린은 성서텍스트를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과 다학문적 방법을 이용하여 당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선교신학의 한계를 극복하였다.

그럼에도 다석의 제자이자 개신교 목사의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김흥호의 『다석일지』 해설서인 『다석일지공부』는 김흥호의 직관적인 깨달음의 해설과 그리스도교의 환원적인 사유적 해석의 입장에서 다석을 해설하고 있다. 김흥호는 『다석일지』를 이렇게 평가한다.
우리는 지금 『다석일지』에 적힌 삼천 수나 되는 시나 시조를 읽으면서 (중략) 이 시조들이 성경 어느 말씀과 연관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한이 된다. 성경 말씀을 읽고 한 말들이니 다시 이 말을 생각하여 성경 말씀까지 찾아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성경』 말씀의 변형이 선생의 시와 시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의 한국화(韓國化)가 『다석일지』이다.(4)


유영모는 성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경전을 읽었으며, 그 깨달음을 한시와 독창적인 한글 언어 등으로 『다석일지』에 기록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신교 목사로서 호교론적인 사유가 『다석일지』의 해설서인 『다석일지공부』에 선 반영되어 있음을 후학은 경계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또 다른 제자 박영호와 대척점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박영호는 “김흥호가 목사가 되고자 신학을 공부하러 가다니, 어미 닭이 오리 새끼를 깬 것과 같이 어이가 없었다”라고 평한다. 스승 유영모와 제자 김흥호와 박영호의 사유체계의 차별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정배 교수의 제안대로 불교에 중점을 둔 교토학파를 염두에 두고 유영모를 중심으로 함석헌, 김흥호와 박영호, 이기상 교수 등 다석연구자로 ‘다석학파’를 형성하려 한다면 선교신학의 입장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유영모와 함석헌을 균형 있게 연구한 결과는 박재순 교수가 있을 뿐이다. 아직도 유영모의 직계 제자인 박영호가 정확한 기억력으로 유영모를 증언하고 있다. 제자가 생존해 있을 때 이런 종교신학프로젝트가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가 참가하여 성공리에 진행되기를 바란다.

유영모와 변찬린은 그리스도교의 사유체계를 포월(包越)하여 한국적 지평에서 인류 정신문명사에서 보편화할 수 있는 ‘포월적 상생’의 사유점을 발견하였다. ‘이 포월적 상생’의 준거점이 변찬린의 언어로는 한민족의 종교적 원형인 ‘선맥과 풍류’의 발견이고, 유영모의 언어로는 ‘가온찍기’를 하고 ‘빈탕한데 맞혀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포월적 중심은 ‘선맥의 가온찍기’이고, 상생의 큰 원은 ‘풍류로서 빈탕한데 맞혀놀이’을 하는 우주적 궤적이다. 이 지점을 놓치면 한국신학의 세계화 작업은 중심없이 원을 그리며 서구신학의 대리전을 치르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유영모의 바른소리치김(正音敎)

‘바른 소리’와 ‘정음(正音)’에 대해서는 유영모 연구자가 상당히 주목하고 있지만 “바른소리치김(正音敎)”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유영모는 자신의 가르침을 ‘정음교(正音敎)’로 불러주기를 바란 적이 있으며, 함석헌도 ‘새 시대에는 새 종교’가 나와야 한다는 탈 그리스도교적 사유를 하고 있다. 유영모의 직계제자인 박영호는 유영모가 이미 특정 종교에 얽매인 사유를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자,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조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말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대개의 종교 이름은 자신이 붙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붙여서 된 이름이 많은데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해 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5)


필자는 2015년 변찬린과 유영모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박영호 선생을 종로 5가에서 처음 만난 후 수년 간 여러 차례에 걸쳐 ‘정음교(正音敎)’의 실체가 학술정보로서 가치가 있는지 다각적으로 조사한 바 있다. 박영호 선생은 의식하였는지 모르지만 필자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유사한 질문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한 결과를 처음으로 에큐메니안에 공개한다.

▲ 2019. 12. 5, 필자와 대담 중 ⓒ이호재 원장 제공


박영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1년경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역임한 전덕용은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가 1, 2호 발간되고 폐간된 후 (함석헌은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 전덕용의 초청으로 구기동에 사시는 유영모 선생을 모시고 광화문 근처에서 20여 명의 청중에게 『정음설교(正音說敎)』를 주제로 한 강연을 하였다. 다음은 그동안 인터뷰한 내용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6)
필자 : 선생님, 유영모 선생께서 생전에 자신의 종교를 ‘바른소리치김’이라고 한 사실은 있는지요?
박영호 : 아 그럼요. 문화일보에 썼듯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해 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했지요
필자 : 일전에 선생님이 무슨 종교를 만든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지만 하나의 제도종교의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있는 거네요.
박영호 : 1971년경에 「정음설교」라는 글이 『다석일지』에도 보이고 심지어 ‘정음교의 신자’라고 하기도 한 적이 있지요!
필자 : 네 선생님, 수차례 문의드렸지만 이 부분은 유영모 선생의 종교적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다시 한번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문의드리는 겁니다.
박영호 :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유영모 선생은 이미 특정 제도의 틀을 벗어나신 분인데 김흥호 선생의 글만 보고 신학자들이 유영모 선생을 크리스챤이라고 하는데 정양모 신부는 기독교의 교리를 훨씬 벗어나신 분이라고 다석학회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필자 : 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종교학자 강돈구 교수는 유영모가 “자신의 사상을 ‘正音敎’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 대문에 “참을 찾고자 하거든 문을 두드리시오”라고 할 정도로 종교사상가이면서 한편으로는 종교가로서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중략) 종교의식과 종교조직, 그리고 경전을 만들려고 하지 않은 유영모의 종교는 소위 ‘구도자求道者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7)

유영모는 종교간(내)의 대화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기존의 제도종교의 경전을 회통해 내고 있다. 이런 지점이 종교학과 신학이 서로 대화를 하여야 하는 다학제적 이해지평이다. 또한 이 지점이 바로 서구 그리스도교의 단속(斷續)과 한국 종교적 영성을 디딤돌로 비약(飛躍)하여 세계 종교 지평에서 ‘포월적 상생’을 하는 풍류의 심성이다.

미주
(미주 1) 윤승용, 「한밝 변찬린, 새 축 (軸) 의 시대 ‘한국적 기독교’ 해석 틀을 만들다」, 『뉴스레터』 (504), 2018.1.10.
(미주 2) 영미권에서는 1994년에 “Winds of the Spirit”로 출간되어 2000년에 『기독교 구성신학』이라고 국내에 소개되었다. 구성신학은 폴 틸리히의 상관관계 방법론을 기초로 하여, 성경과 전통, 문화사와 신학, 종교적 전통, 문화적 콘텍스트(상황, 자리),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구성 자원으로 사용할 것을 핫지슨(Peter C. Hodgson)이 제안한 바 있다.
(미주 3) 김흡영, 『가온찍기』(서울: 동연출판사, 2013), 6-29.
(미주 4) 김흥호, 「나의 스승 유영모」, 『다석강의』(서울:현암사, 2006), 967.
(미주 5) 박영호, 『多夕 柳永模의 생각과 믿음』(서울: 현대문화신문, 1995), 52.
(미주 6) 박영호는 필자와의 교류에서 ‘바른소리치김(正音敎)’를 말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직접 확인해 주었다. 2020년 3월 23일 전화통화에서 인터뷰 내용이 사실과 다르지 않음을 최종 확인하고 사진과 함께 공개하는 것을 동의하였음을 밝힌다.
(미주 7) 강돈구, 「유영모 종교사상의 계보」, 『종교이론과 한국종교』(서울: 박문사, 2011), 484.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2020/03/29

14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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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해암신학연구소, <교회와 신학>2호, 201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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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암신학연구소20140930]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목차-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2. 한국 진보신학의 특징
3.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의 현황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주어진 논제는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이다. '진보신학' 이라는 표현대신에 '진보주의 신학' 혹은 '자유주의신학' 이라는 표현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진보신학'이라는 짧은 표현을 쓰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호칭은 한국 기독교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학의 경향성인 통칭 '보수신학'과 비교하는 일반적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불과하지만, 호칭이란 어휘의 개념이 지닌 상징성과 그 어휘가 사용되는 언어공동체 안에서의 '전이해'(前理解) 때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가령 한국 기독교계에서 보수주의 계열은 '보수신학'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만 '진보신학'과 차별화 하면서 기독교 정통신학을 지키는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어휘와 '보수신학'을 동일시하려 든다. 그리고, '진보신학'은 통칭 '자유주의신학' 혹은 심할 땐 '인본주의신학' 이라는 선입관을 갖기 쉽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신학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또렷이 하려는 의도로서 '복음주의신학'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경우에,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을 하는 신학운동과 신학자들은 '비복음주의적'이라는 신학적 가치판단을 암묵적으로 주입시키는 독선적 입장이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한 분파로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순복음교회'라고 교회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서,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등 여타의 다른 교단소속 교회들은 '순복음'을 신앙하는 교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어휘의 선택과 그 오남용은 보다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임이 한국기독교사에서 드러난 것이다.

일부 보수주의 교단의 목회자들이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을 '자유주의신학, 신신학, 인본주의신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세계 신학의 역사 혹은 기독교 사상사의 흐름에 입각한 공정한 사고가 아니다. "계시된 경전의 권위와 정통교의를 무시하고 신학을 신학적 규범에 제약을 받지않고 멋대로 자유롭게 하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 아닌가?"라는 판단은 소박한 생각이다. 세계 각국의 신학계에서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엄정한 역사적 기간동안 형성되었던 유럽에서의 신학운동에 대한 전문적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신학'이란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이 사상계 전반을 강타한 이후, 19세기의 유럽 종합대학교 신학부의 신학자들의 반응으로서 슈라이에르맛허, 리츌, 하르낙 등으로 대표하는 신학사상 흐름을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은 세계신학사에서 말하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이 비판하는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니버로 대표되는 20세기 초반의 신학운동은 18세기 '신교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신학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혼동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어떤 신학적 입장, 혹은 신학함의 경향성과 특징들을 공유하는 신학인가를 먼저 개념정리 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의 '진보신학'이라고 할 때 다음같은 5가지 특징, 입장, 혹은 경향성을 지닌 신학운동을 의미한다.

2. 한국 진보신학 흐름의 특징

첫째, 한국 개신교권 안에 앞으로 소개할 다양한 진보신학운동의 흐름이 있지만, 그들의 공통적 특징으로 '성경연구에서 비판적 연구방법 수용'이라는 특징을 제일 먼저 들수 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보수신학 진영'과 '진보신학 진영'의 장점을 아우르려는 소위 통전신학 , 중도신학, 중제신학에 해당하는 신학자들을 '보수신학 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인지 진보신학 진영에 속한 다고 분류할 것인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장로교신학대학 총작직을 수행했던 이종성교수나 현재 총작직을 수행하는 김명룡교수를 보수와 진보 어느진영 신학자라고 분류할 것인가 질문을 받는다면, 이 글에서 필자는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이다. 왜나하면 신학계나 정치계에서 흔히 '진영논리'에 입각한 패가름을 필자도 아주 싫어하지만, 그 두분의 조직신학은 현대20세기 성서학계의 '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을 열린 맘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느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무리 사회참여와 현실비판적 역사참여 활동을 펼치더라도, 그 분의 성서관이 20세기 성서학계가 이룬 '비평적 성서연구방법'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보수신학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 연구수용'이라 함은, 소위 학계에서 고등비평이라고 총칭하는 비판적 연구방법들 예들면, 문헌비판 〮역사비판 〮편집비판 〮 전승비판 〮수사비평 연구등 모든 비평적 성경연구태도를 "신구약 상경이 전하려는 복음의 참 본질을 밝혀내기 위하여" 연구방법으로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계의 소위 '보수신학' 일명 '복음주의신학'이란 성경무오설 교리를 가장 중요한 근본교리로 삼는 토대주의 신학인 것이다. '보수신학' 계열안에도 다양할 편차가 있겠지만 공통적 특징은 앞서 언급한 현대 20세기 세계신학계가 연구하는 '비평적 성경연구방법'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성경무오설' 이라는 근본교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진화론을 거부하고,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현대사회윤리의 상황적 응답을 반복음적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글에서 한국신학계의 진보주의 신학 특징으로서 현대문명의 위기적 ‘삶의 상황’에 복음적 입장에서 대답하고 복음을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변증법적 신학’ 입장을 취한다.

20세기 초, 소위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로서 촉발된 일명 ‘신정통주의 신학 운동’과 보다 더 자유로운 신학운동은 모두 강렬한 ‘변증적 신학과제’를 인정하고 그 책임을 수행하려는 학문적 운동이었다. 구미 신학자들을 예들면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루돌프 불트만, 에밀 부룬너, 본 훼퍼등 20세기 전반기에 크게 활동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 ‘변증접적 신학’ 을 수행했다.

‘변증법적 신학 방법’이란 두가지를 함의한다. 그 한가지는 계시적 성경진리를 인간 삶의 정황을 무시하고 변함없이 ‘계시적 진리’로서 선포만하지 않고, ‘상황’과의 상호대화 속에서 기독교진리를 새로운 인간상황 안에 증언한다는 점이다. 또다른 한가지는 변증법적(dialogical) 신학방법을 수행하면서 복음의 구원과 진리를 옹호하는 적극적 과제 즉 복음진리의 변증(apologetic)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신학 교육기관에서 혹은 신학자가 현대신학의 방법적 특징으로 ‘변증법적 신학’을 수행했던, 앞서말한 20세기 초 신학거성들을 비롯하여 진화론적 신학, 종교다원론적 신학, 생태여성신학, 아시아의 빈곤신학등 세계신학계 운동에 긍정적으로 경청한다. 예들면, 신학자 떼이야르 샤르뎅, 죤 캅과 죤 힉, 인도의 사마르타와 대만의 송천성, 영미 여성신학자들 로스마리 류터나 맥 페이그를 강의실에서 자유롭게 논의 할수 있는 신학이 아니라면 진보신학 기관이거나 진보신학자라고 할 수 없다.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이란 포스트모던니즘과 대화하고 포스트모던니즘 안에서 복음을 변증하려는 적극적 신학을 의미한다.

셋째, 오늘의 한국 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오늘의 구원’을 강조하는 선교신학 정신에 긍정적으로 참여하는 속칭 ‘에큐메니칼 신학’을 의미한다.

오늘의 한국신학계에서 그 신학교육기관 혹은 신학자가 ‘진보신학’인가 여부를 가늠하는 쉬운 기준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강조하는 교회의 일치연합 운동, 교회들의 사회적 책임강조, 타계적-미래적 구원만이 아니라 ‘오늘-여기’에서 구원을 강조하는 상황적 신학운동을 지지하는가의 입장으로서 구별된다.

넷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신학을 하나님 백성들의 순례자적 신앙고백으로 이해하여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에 긍정적으로 복무하는 공통특징을 지닌다.

보수신학의 대부였던 박형룡박사가 보수신학은 “선교사가 전해준 복음적 정통신학을 그대로 보수하는 것”을 신학자의 기본 입장으로 삼았다면, 진보신학은 ‘순례자의 신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해명하고 변증하는 ‘신학들’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상대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신학체계를 절대불변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학문적 시도로서의 ‘신학 ’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반복음적 피혜를 초래한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진보신학’은 우리들에게 많은 좋은 점들을 가져다준 구미신학들, 예들면 라틴적 스콜라신학,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영미신학, 독일신학,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등이 필요하고 귀중하듯이 동아시아의 신학과 한국신학이 필요하고 당연하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동아시아-한국적 삶의 자리와 토양 속에서 주체적으로 ‘한국신학’을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섯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21세기 지구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기존의 ‘십자군의 영성신학’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영성신학’의 재정립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신학의 ‘패러다임전환’을 공통적으로 지향한다.

‘십자군의 영성신학’이라 함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일환으로서 진행하는 신학함의 태도에 있어서, 타문화및 세상 정복적 태도와 교회의 무한성장 번영을 복음적 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말한다. ‘십자가의 영성신학’이란 정복이 아닌 섬김, 성장번영이 아닌 낮춤과 비움, 금관의 예수가 아니라 가시관의 예수를 더 주목하는 신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대로, 이 글에서 말하는 한국 신학운동 흐름에서 ‘진보적 신학들’이라고 분류하는 기준을 5가지로 삼았다. 다시 정리하면 ① 비판적 성경연구 방법수용 ②변증법적-변증적 신학입장 ③ 에큐메니칼 신학정신 ④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 ⑤ 십자가의 영성 강조, 이상 5가지 이다.

위에서 말한 진보신학 특징들을 감안하여 필자는 다음장에서 아래의 다섯그룹을 한국의 진보신학계 현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등이다.

이상의 5가지 그룹의 한국 신학계 ‘진보신학 운동들’의 현황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언급하는 신학자 이름들은 그 분야의 특징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선택한 신학자 이름들 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한국 신학계는 이 글에서 지면관계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수많은 귀중한 신학자 지성집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구약 성서신학자들의 활동은 『신학과 교회』창간호와 이번호 특집에서 각각 자세하게 다루는 전문적 연구논문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학자 명단 언급은 하지 않는다.

3.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현황

(1)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의 첫 번째 흐름의 특징을 명시하기 위하여 필자는 ‘통전적 조정신학’(integrating modulation Theology)이라는 어휘를 일부러 만들어 쓰려한다. 이 어색한 신조어 명칭에서는 ‘통전’(integration, 統全)이라는 단어와 ‘조정’(modulation,調整)이라는 두 개의 어휘가 이 진보적 신학지성 집단의 특징을 지시한다. 통전(統全)은 본래 교육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단어로서 한인격체가 원만한 성숙성을 가지고 정서적, 도덕적, 철학적 측면에서도 균형과 통합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조정(調整)은 본래 음율, 음색, 음조등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들리도록 조절하는 일과 많이 관련되는 단어이다.

신학의 특징을 ‘통전적 조정신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극단적인 진보나 보수적 사고를 통전하고 조정하려는 신학이며,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부분적 진리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적 견해들을 종합(synthesis)하여 보다 ‘건전하고 온전한 형태의 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을 말한다. 이러한 ‘통전적 조정신학’ 작업에 특별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한국 신학자로서 장로회신학대학장을 오랫동안 맡아 수고하셨던 이종성 박사의 신학작업을 예로들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신학 저작물들은 ‘독창적 새로움의 신학’ 이 아니지만, 길게는 그리스도교 신학사 전체를 섭렵하고 짧게는 20세기 세계신학운동의 다양한 흐름들을 이해 한후에, 그 나름대로 ‘통전적 조정신학 체계’를 저술물 속에서 서술하였다.

짧은 한국 개신교 역사 안에서 불행하게도 보수와 진보라는 두 신학진영이 갈라지고 서로 각각의 ‘진영논리’에 갇혀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향성을 노정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통적적-조정신학 운동’은 건전한 신학지식을 목회자들과 신도들에게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일부 급진적 진보신학자들 중에서는 이종성박사로 상징되는 중도적 신학을 통전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만,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2장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진보신학의 범주’에 어떤 신학운동을 포함할 것인가에 대항 5가지 조건중에서 적어도 4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성서비평학 수용, 변증법적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과학신학에도 긍정적 입장을 가지므로, 이종성교수의 신학을 ‘보수신학’이라고 부른다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지금 생존하신 한국 신학계 원로 신학자들 중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 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신학자로서 예들면 해암 이장식 박사를 비롯하여 조종남, 김성수, 민경배, 강근환, 박근원, 선한용, 황승룡, 이형기, 정장복, 서정운, 이원규, 송순재, 윤응진, 박종천, 최인식교수들을 예로 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신학계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의 대표적 신학자는 조직신학 영역에서 김균진교수, 김명룡교수, 오영석교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균진 교수는 『기독교조직신학』(1권-5권)을 완성함으로서 20세기 전세계 진보적 신학흐름을 총정리했으며, 특히 말년에 집필한 『죽음의 신학』이라는 명저를 집필했는데, 긍정적 의미에서의 ‘통전적-조정신학’의 면모를 유감없이 나타내고 신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김명룡교수는 선배 이종성박사의 뒤를 이어 학문적으로나 신학교육 행정면에서 한국 신학계의 ‘통전적-조정신학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그와 김균진 교수와의 공동 노력에 의하여, 20세기 후반기 유럽 조직신학계의 대표적 학자 율겐 몰트만의 중요한 저작들이 10여권 번역되어 신학계와 일선 목회자들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오영석교수도 그의 저술물을 통해서 바르트-몰트만 신학계보의 개혁파신학의 흐름을 건전하게 전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한국 진보신학 흐름중 첫 번째 운동으로서 ‘통전적-조정신학’은 칼빈의 개혁신학 전통, 루터의 종교개혁전통, 웨슬레 신학 전통의 본래성과 그 오늘의 의미를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신학운동이다. 성서비평학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사회의 도전들에 열린맘으로 응전하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적 신학’이 전승해주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굳게 지키려는 심정을 공유한다. ‘복음과 상황’이 만날 때 대등한 관계의 해석학이 아니라 복음 우선적이며, ‘기독교와 이웃종교’가 대화할 때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유일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통전적-조정신학’은 충분히 그리고 철저히 변증법적 해석학 공리를 준수하지 않으면 ‘정통보수적 신학’의 연장이 아닌가라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2)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필자는 한국 진보신학운동의 둘째번 흐름으로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을 언급하고자 한다. 복음운동은 주기도문의 핵심화두 처럼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는 신앙고백이요 삶이요 운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언은 래세적이고 역사초월적 측면 못지않게 현세적이고 역사 내재적 측면을 지닌다. 엄밀하게 말해서 “종말론적이 아닌 신학은 기독교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회정치적 증언을 소홀히하는 신학은 충분히 기독교적 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은 한국적 삶의 총체적 자리안에 하나님의 정의, 자유, 평등, 평화가 온누리에 실현되어 실질적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요10:10) 일에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힘쓰는 신학이다.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이 모두 민중신학회 회원도 아니고 민중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리 복음이 민중지향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먼저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힘을 쏟는 신학운동의 현황을 살피고 그 다음에 민중신학운동을 살피려고 한다. 두 그룹은 대체로 중복되지만 구별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의 래디칼한(radical) 한 신학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정치신학의 본격적 태동은 1961년 박정희 군사혁명 이후, 군부세력의 집권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군사정부가 추진하는 반민주주의적, 반인권주의적, 경제성장 제일주의적 정책의 강행이 성서가 증언하는 복음의 자유, 인간 존엄성, 정의로운 평화,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회의 비젼에 심각하게 위배되고 충돌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동참했던 선구자들은,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12:1)이 있다. 고인이 되신 분들로는 김재준, 김정준, 박대선, 서남동, 문익환, 안병무, 김관석, 현영학, 김찬국교수 얼굴이 떠오른다.

민중신학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도 뚜렷한 한국의 ‘진보신학’ 계열로서 한국적 사회정치신학(Korean socio-political Theology)운동에 힘쓴 신학자들로서 현존하는 인물을 예로 든다면 박순경, 손규태, 노정선, 김창락, 박명철, 황성규, 임태수, 김성재, 유석성, 채수일장윤재, 정재현등을 예로 들수 있다. 현존하는 민중신학자로서는 원로신학자로서 서광선, 김용복교수를 비롯하여 임태수, 권진관, 김은규, 강원돈, 김진호, 류장현, 최형묵, 김영철, 방인성, 김희헌등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눈에 뜬다. 한국 진보신학계열에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려는 신학적 관심을 아래에서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독교복음의 본질파악을 위해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리얼(Real)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서연구에서 정치사회적 조명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본다. 복음이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한 인간구원과 해방’이 정치사회적 차원에 머문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한 해석은 관념적이고 반복음적이 된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순복음교회가 강조해왔던 소위 ‘삼박자 축복의 구원론’과 ‘성장과 풍요의 교회론’을 복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두가지 속성은 ‘공의로우심’(정의)과 ‘긍휼하심’(사랑)인데, 특히 예언자적 성서전통에 의하면 “가난한 자와 눌린자와 포로된자들”(루가 4:18)에게 자유, 해방, 평등, 평화를 선물하는 ‘민중에 대한 우선적 배려’가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특히 민중신학의 강조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장소가 성경, 예배당, 수도원, 크리스챤 형제공동체 못지않게 ‘고난당하는 민중현실’에서 만나라고 강조한다. ‘오클로스 민중론’을 예수와 특별관계로서 세계에 제시함으로써 민중신학은 국내보다도 세계에서 훨씬 높은 관심과 평가를 받았다.

셋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죄성이 개인적인 것만 아니라 집단적 사회구조적 죄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구조적 정치경제 악의 실체에 맞서서 ‘선한 싸움’을 하자는 것이다. 현재 전체 지구촌을 덮고 있는 소위 ‘신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당연한 것이거나 피 할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프란체스코교황이 강조하듯이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고 한국사회 전반에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고 힘써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넷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오늘의 신학적 아젠다’로서 제시하는 것들은, 철저한 민주주의 실현, 남북의 무기경쟁중단과 외세의존 탈피, 남북 민족의 주체적 화해와 평화통일, 소외된 사회계층에 대한 배려,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 회복 강조등이다.

(3)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

한국 진보신학의 세 번째 그룹은 ‘한국적 종교문화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자 그룹이다. 흔히 줄여서 ‘한국문화신학’라고 부르는데 이 신학캠프는 ‘한국민중신학회’와 쌍벽을 이루면서,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한국의 진보신학을 견인해가는 신학운동이다.

일찍이 폴 틸리히는 1920년대초 그가 독일 학계에 데뷔하는 베르린학회에서 「문화신학의 이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 논문발표에서 그는 문화종교신학의 본질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다음같이 피력한바 있다: “종교는 문화의 알짬(substance)이요 문화는 종교의 표현형식(form) 이다”. 다시말해서 문화의 다양한 장르들 법률, 예술, 문학, 이념, 건축, 그리고 심지어 과학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인간의 의미있는 활동의 “깊이 차원”에 종교가 있기 때문에, 사람생명체에 비교한다면 ‘종교’는 정신과 영혼이며 ‘문화’는 신체와 활동이다.

한국 신학계에서 종교문화신학의 발아지역은 장로교보다 감리교 였다. 일찍이 탁사 최병헌목사가 기독교에 접한 이후 한국 전통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성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주체적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부터, 소위 ‘복음의 토착화론’에 선구적 역할을 감리교신학교수단 에서 했고,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교수등 용기있는 개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대체로 한국의 장로교회 교단은 칼빈주의의 강력한 영향으로 ‘복음의 토착화론’에 소극적이거나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3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복음의 빛에 비추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들을 조명하면서 ‘복음’과 ‘한국전통문화’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려는 과제를 갖는다.특히 이웃종교들과의 바른 관계정립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둘째, 한국인 크리스챤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의 문화, 예술, 삶의 표현형식으로 조형(造型)하고 증언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의미한다. 예배 전례상의 상징적 표현들, 건축과 미술과 음악의 한국토착적 표현들, 기독교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소설, 연극, 시 작품창작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셋째, 2,000년 그리스도교신학과 동아시아 영성전통과 만남으로서 제3천년 시기의 ‘제3의 눈’의 신학 형성을 지향한다. 헬라적 교부신학, 라틴신학, 게르만 독일신학, 영미신학이 있었듯이,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정신토양 속에서 형성된 ‘제3의 눈’의 신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종교문화라는 폭넓은 관심영역 때문에, 문화신학학회 정회원만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전문 분과 학자들이 참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서신학자, 여성신학자, 기독교 사회윤리학자, 정치신학자들이 고루 고루 참여하고 있다. 한국 종교문화신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술물도 남긴 학자들중 그 일부만 열거하면 유동식, 유재신, 심일섭, 이계준, 김광식, 김경재, 박재순, 이정배, 김영일, 서창원, 김흡영, 이정구, 송성진, 허호익, 이찬수, 손호현, 박일준 교수와 여성신학자로서 특히 차옥숭교수의 무교연구와 이은선교수의 유학연구, 오정숙박사의 다석연구가 돋보인다. 여성신학자들 활동은 ‘여성신학’운동의 항목에서 별도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문화종교신학계를 지난 30년간 이끌어온 대표적 학자는 유동식 교수이다. 그의 학술적 공헌은 매우 독창적인데 대표적 저술물로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풍류신학』, 『신학과 예술의 만남』이 대표적인 저작물이다. 유동식교수가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끼친 독보적 공헌의 의미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민족의 종교심성 바탕에 깔려있는 무교 혹은 무속연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종교사에서의 ‘무교’를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바알신앙’과 동일시해왔던 오해와 갈등을 상당부분 해소 시켰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민의 종교심성의 영성적 원형바탕을 ‘풍류도’로서 밝힘으로서 기독교신앙의 한민족에 수용과정에서 선교과제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셋째, 특히 말년엔 ‘예술신학’을 제창하면서 신학의 최고경지가 예술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묵상에서 꽃핀다는 것을 밝혀준다.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사에서 변선환목사에 대한 감리교단의 ‘파문’은 감리교단의 역사내 부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신학사에서 큰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변교수가 “이웃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발언한 것이 파문죄목의 중요한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변교수가 의미하는 내용과 교단의 보수적 정통 교권주의자들의 의미하는 내용사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본다. 변선환 교수에게서 ‘구원’은 구체적으로 구원받은 종교인들의 생명현상학에서 세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자기중심적이던 이기적 실존이 실재(Reality)중심의 해방된 존재로 자유인이 된다. 둘째, 자유인이 된 종교인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함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다. 셋째,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내용에 다양성이 있으나, 공통점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고 죽음을 넘어선 승리적 삶을 산다.

유동식, 변선환교수의 선도적 문화신학의 과업을 이어받아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을 젊은 세대들과 호흡을 맞추며 크게 활동한 학자는 이정배교수와 감신대를 중심으로한 그 선후배 동료신학자들이다. 『문화와 신학』 정기 학술지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으며 『한국신학, 이것이다.』(한들출판사, 2006)와 『한류로 신학하기』(동연,2013)를 간행하여 한국문화종교신학회의 과거정리와 미래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는 시범을 보였다. 이정배, 김흡영, 박재순 박사를 비롯한 문화신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종교유산의 토양에 뿌리 박은 한국신학을 정립하려는 역저를 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특히 불교와의 대화가 학자들간에는 열매를 조금씩 거두어간다. 우선 한국교수불자연합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공동주관으로서 붓다와 예수를 상대편 종교인으로서 어떻게 보는가를 시민공개강좌로서 갖고 『인류의 스승으로서 붓다와 예수』(동연, 2006)라는 표제의 단행본으로서 출판된 것은 특기 할만한 일이다. 기독교 학자로서 불교와 기독교 상호관계연구 결실로서 종교학자이면서도 제1급의 신학자인 길희성교수의 연구서는 신학계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 불교계의 전문 학술지 『불교평론』에서 기독교신학자들의 글을 싣는등 학문적 대화는 종요히 계속되어 가고 있다.

천도교, 원불교, 유교, 전통민족종교들과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기독교와 불교와의 관계는 그동안 타종교의 가치와 존재를 부정하는 보수적 교회들의 배타적 태도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선교전선의 약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진보적 기독교 목회자들이 ‘종교간 대화모임’에 열린자세로 임하며, 특히 생태환경운동이나 사회정의 구현에서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성탄절과 석탄봉축일에 서로 경축하는 따뜻한 마음은 조금씩 증가되어가는 추세여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우주적 보편종교이다. 양대 종교사이의 대화와 협력은 상대방을 정복하려는 것도 아니고 흡수통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양대종교의 특징과 진리증언의 길에 서로 경청하면서 보다 성숙해지려는 것이다. 개신교의 종교신학은 결코 종교혼합론이 아니며 도리혀 종교혼합론은 이웃종교 종교배타론 만큼 위험하고 성숙하지 못한 독선과 독단론이라고 본다.

(4) 여성신학 운동

한국신학계의 진보적 신학 운동의 현황소개에서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 만큼 눈부신 활동과 엄청난 학문적 기여및 사회실천적 공헌을 한 지성집단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보다 자세한 여성신학의 역사와 현황소개는 여성신학협의회에서 간행한 훌륭한 단행본 및 논문들이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들은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교계와 신학계를 막론하고 소위 ‘보수, 진보’를 구별하는 확실한 판단도 그 교회,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에서 일어난 ‘여성신학 운동’과 1980년대 초기에 그 반응으로 태동한 ‘한국 여성신학’의 소리들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받아드리는가의 태도로서 여부로서 구별이 가능하다. 그만큼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은 전통적 한국보수교회 안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전통 비판적 주장과 래디칼한 문명비판적 주장들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한국신학계에서 여신학자 협의회가 정식 결성된 해는 1984년이어서 어느듯 30년이 되었지만, 한국 여성신학자들의 활동현황을 살펴보기 전에 ‘여성신학’ 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징을 아래의 몇가지로서 먼저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여성신학은 기독교문명사회와 교회공동체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억압이 가부장적 성서해석에 있음을 주장하고 새로운 성서해석을 시도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 주제는 인간으로서 존엄한 여성의 ‘해방’이다.

경전으로서 성경의 문자무오설과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보수적 신학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겠지만, 여성신학자들은 경전으로서의 성경자체의 형성과 편집과 전승이 ‘가부장적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성서를 ‘억압과 차별’의 경전으로서가 아니라‘해방과 평등과 자유’의 원천으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신구약 성경의 완성자이신‘예수의 마음자리’에서 성서를 읽고, 성서문자에 메이지 말고 성서가 말하려는‘살리는 영’으로 읽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가 엮은 『새롭게 읽는 성서의 여성들』(1994), 구약신학자 이경숙의 『구약성서의 여성들』(1994), 신약학자 최영실의 『신약성서의 여성들』(1995) , 그리고 최만자의 『성서와 여성신학』(1995)등이 여성신학자들의 새로운 성서해석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둘째, 여성신학은 교회안에서와 사회에 편만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부당한 억압구조와 사회와 문명의 성차별적 가부장적 문화구조 해체를 통한 양성평등의 새로운 인간공동체 구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주제는 여성의 평등권을 담보하는 ‘정의’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제반 활동영역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무능한 존재, 지배받고 남성에 의해 계도(啓導) 받아야할 존재로 생각하는 일체의 허위의식 지배이데올로기를 철폐하고, 양성 평등 문명사회를 요청하고 투쟁한다. 한국의 여성신학계는 서구사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국사회에서의 여성폄하적인 노동의 임금차별, 직장의 진급제약, 여성에게 가하는 성의 상품화, 가사노동의 집중과부하등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비인간화 현실을 극복하려는 ‘실천적 여성신학 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여성의 ‘해방과 평등’의 아젠다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여성신학은 민중신학과 파트너쉽을 가지고 발전해가고 있다.

셋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생태계의 위기상황에 주목하고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과제를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중심 주제는 ‘생명의 평화’ 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해방’모티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계, 여성의 ‘평등’ 주장을 하는 정치사회 인간문명의 맥락을 넘어서, 기독교 여성신학은 오늘날 인류문명이 직면한 자연파괴,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기가 성경을 포함한 가부장적 인류종교경전의 잘못해석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 지성계는 인류문명이 당면한 자연환경 오염,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험문제가, 다른 어떠한 주제들 예들면 경제발전이나 우주과학실험이나, 신무기 개발경쟁보다도 우선순위에 놓여야한다는 점에 한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여성의 비하와 억압은 자연(대지)에 대한 무한 공격적 개발과 관련되고, 생태계의 조화와 순환원리를 무시하는 남성적 문화의 ‘바벨탑 건설 본능’과 관련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여선신학계의 원로이셨던 고 이우정선생의 고희기념논문집 책이름이 『여성,평화,생명』(경세원,1993)이었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여성신학의 지향성을 잘 나타낸다.

넷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외국의 여성신학과 다른 독특한 한민족의 분단상황, 동족간 상잔, 전쟁위협과 무기경쟁을 극복하고 모성의 심정으로 민족의 화해, 협력, 평화통일의 과제를 신학적 의제로 진지하게 삼는다. 중심주제는 ‘한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이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모성’이다.

특히 여성신학의 제1세대들 박순경, 이우정은 여성신학운동의 본질적 과제가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임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자들이 여선신학의 긴급한 주제로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의제로 삼는것은 단순히 한국의 일반학계 정치학, 외교학, 군사학등에서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여신학자 선언」(1988)에서 천명한바와 같이, 한민족의 분단을 강요하고, 지속하고,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모든 어리석은 국제정치적 행위자체가 따지고 들어가면 인류문명의 가부장적 죄악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8-19세기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쟁탈, 1,2차 세계대전의 국가주의 발호, 2차대전 후의 세계 냉전체제, 근래 한반도를 둘러싼 6자회담의 정체가 모두 가부장주의 정치문화의 열매이다. 힘의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패권주의, 국가주의 경쟁과 보복의 악순환, 군사문화의 창궐,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구입등등은 그 어리석음을 뿌리에서 비판하여 극복하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에 여성신학의 중요 아젠다가 된다.

하나님의 모성적 심성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인간살상과 긴장갈등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신학의 중요한 신학적 의제로서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민족평화 통일 신학’은 마침네 신학의 아킬레스건이랄 수 있는 전통적 신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주장한다. 그동안 서구신학이 설명한 ‘하나님론’이 다분히 가부장적, 남성적, 지배적 힘숭배의 관념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반성이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운동은 성서가 증언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온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들’ 예들면 ‘산고의 진통’, ‘기다림과 설득’, ‘차마못하는 마음’, ‘내어줌으로서 만족’, ‘비움으로서 충만’ 등의 속성을 기독교 신관이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 신관은 율법제정자, 질서의 보존자, 인과응보적 심판주, 선악의 재판관, 세계정상의 지배자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관의 혁명은 역동적인 기독교 ‘영성운동’에 창조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인 여성신학자들의 ‘지성집단’의 힘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더욱 놀라운 결실을 맺을 것이다. 필자의 이글은 여성 신학자들의 활동과 논저를 소개할 목적에 있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다만 ‘구름같이 많은 한국의 에스더들’의 면모를 독자들이 감지하도록 하기 위해 필자의 서재에서 발견되는 여성신학자들의 면모를 소개하는데 그친다. 물론 미처 소개못하는 인재들이 더 많다. 이우정, 박순경, 손승희, 안상님, 정숙자, 최만자, 선순화, 장상, 김윤옥, 최영실, 이경숙, 박경미, 김애영, 임희숙, 정미현, 이영미, 강남순, 유춘자, 이현숙, 이문숙, 윤수경,한국염, 김순영, 이숙진, 김정수, 권미경, 명노선(무순) 제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5)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다섯번째 캠프는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이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를 본질로 하지만, 일반적인 현대 물리학이나 천문학등 과학일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신학적 응답보다는 그 핵심이 지구촌이 당면한 ‘생태학적 위기’(ecological crisis)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자연신학적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한 갈래로서 ‘신자연신학’( new theology of nature)은 다음같은 차이가 있다. 전통적 ‘자연신학’은 계시론과 신 인식론에 관련된 개념으로서, 자연질서와 리성을 포함한 일반자연을 매개로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이론이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한 초자연적 ‘말씀계시’(성서) 만이 아니라, 자연도 하나님의 또다른 말씀이라는 긍정적 생각이 그 단초를 이룬다. 특히 중세 스콜라신학 체계에서 ‘우주론적 신존재증명’(cosmological arguments)은 전형적인 전통적 ‘자연신학’의 한 사례이다.

20세기 초,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자연신학 논쟁’도 인간성의 ‘전적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응답능력이 인간성안에 존재하느냐 않느냐의 논쟁이므로 전통적 ‘자연신학’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신자연신학’은 계시론이나 신인식론의 가능성 여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뉴톤-데카르트적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 진화적 자연, 새로움을 생성하고 창발시키는 자연, 자기조직능력과 자기조절능력을 자신 안에 갖춘 유기체적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지와 씨름하는 신학적 통찰이 관련되어 있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한 갈래로서 ‘생태학적 신자연신학’의 의제와 특성들을 3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적 ‘신자연신학’ 운동은 종교(신학)와 자연과학과의 관계정립에서 상호 배타적 관계모델이나 평행적 독립모델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대화모델과 상호 통합모델까지를 추구한다.

이언 바버(Ian Barbour)는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책안에서 인류문명사속에서 자연과학과 종교간의 만남의 관계유형을 4가지로 이론으로서 대별하여 설명하였다: 갈등이론, 독립이론, 대화이론, 통합이론이 그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성서무오설에 입각하여 진화론을 부정하고 생명 종들의 독립적 창조론을 주장할 때,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는 갈등모델에 해당한다.

창세기 창조설화를 자연과학 지식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창조의 목적과 근원과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설화로서 이해하고, 객관적 사실세계(fact) 탐구를 주업무로 하는 자연과학과 창조의 궁극적 의미와 뜻을 탐구하는 주관적 가치세계(meaning)를 탐구하는 정신과학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독립이론에 해당한다. 칸트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의 거성들(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부룬너, 라인홀드 니버)은 사싱 독립모델의 캠프에 속한 신학자들이다.

그러나 세계 자연과학계와 신학계는 1960년 이후, 이전의 독립이론에 안주 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과 종교(신학)의 관계성 정립에서 대화이론과 통합이론이 활발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 지성계의 흐름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신진 신학자들은 테드 피터스(Ted Peters)가 엮은 책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을 우리말로 공동번역한 5명의 신학자들이다. 김흡영, 배국원, 윤원철,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수고했는데, 특히 이분야에서 김흡영교수의 선도적 노력이 컸다. 문화신학자 이정배교수는『기독교 자연신학』을 저술하고 죤 폴킹혼(John Polkinghorne)의 『과학시대의 신론』을 번역하였으며,김흡영교수는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를 저슬했다. 강성열교수는 『기독교 신앙과 카오스 이론』을 저술했고, 심광섭교수는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 이라는 책을 통해서 현대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대화 곧 신자연시학을 연구발표 하였다.

둘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중 ‘신자연신학’ 운동의 뚜렷한 목표는 기독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어떤 형태이든 진화론을 부정하는 기독교계의 ‘창조론’을 극복해야할 21세기 신학적 과제라고 본다.

위 주제를 가지고 특별히 노력을 경주한 진보신학자 신재식 교수는 최근 『예수와 다원의 동행』을 출판하여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기독교신앙이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될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신재식은 이 책에서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쟁점들과 이론들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신자연신학을 이끌어가는 한국 진보신학계 중진 신학자로서 면모를 보인다.

신자연신학의 주제중 특히 진화론과 전통적 창조신앙과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돕는 존 F. 호트(John F. Haught)교수의 명저 『다윈 이후의 하느님: 진화의 신학』을 박만교수가 번역하였는데, 그 주제에 관하여 신선한 통찰을 우리들에게 선물한다. 이 책에 관하여 서평자 그리핀이 말하는대로 “ 이 책을 통하여, 우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며, 창조주는 진화로 인해 제약을 받는 전능하신 설계자가 아니라 가능성과 가치, 새로움, 정보,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우주적 원천으로 이해된다”.

셋째, 신자연신학 운동은 실천적 시급한 지구촌 문제의식과 더불어 생태학적 영성과 신학의 새로운 재구성을 힘주어 주장한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구가 환경파괴문제및 기후붕괴, 그리고 생태계 교란 등으로 위기상태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에서는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응책에 관혀 진보신학이 보수신학과 다른점은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 극복은 단순히 ‘개인적 경건윤리 의식’을 고취함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데 있다. 다시말하면, 정통적 신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특히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통적 기독교 패러다임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개인윤리적 생활에서, 근검절약, 자원의 재활용, 자연환경보호운동등의 실천으로서만은 않된다는 인식을 갖는다.

생태학적 윤리, 혹은 생태학적 영성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무엇이 선하고 옳은 일인가의 윤리적 판단기준은 인간과 하나님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정의, 진실, 정직, 평등, 사랑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및 생태계와의 관계가 고려되지 않는 바른 도덕적 삶, 영적 삶이란 지극히 부분적이거나 심지어 반윤리적, 비영성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생태신학에 대한 비상한 관심은 한국교회환경연구소가엮은 책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에서 15명의 신학자들이 세계 생테신학의 동향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책안에서 세계적 생태신학자들 예들면 제이 맥다니엘, 디터 헷셀, 다글라스 할, 샐리 매페이그, 버나드 앤더슨, 로즈마리 류터, 매튜 폭스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생태학적 신학에 관한 한국 기독교계의 각성과 응답을 촉구하면서 여러신학자와 출판사가 노력하지만,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박사의 열정에 힘입어 이 분야의 좋은 논저가 한국 교계에 소개되었는데 그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진보신학의 여성신학운동과 생태신학 운동의 배경에는 현대 기독교 신관에 대한 새로운 재성찰이 요청되는데, 과정신학의 신관은 다양한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과정신학을 한국 진보신학계에 소개한 학자들로서 류기종, 김상일, 장왕식,김희헌, 전철, 정강길 등의 공헌이 있었다.

생태학적 신학운동캠프에 속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한국사회에서 이끌어가는 평신도 크리스챤 과학자인 장회익 교수의 명저 『삶과 온생명』은 특기할만한 저술물로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안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 윤리학을 극복하고 동시에 동양사상이 흔히 빠지는 범신론적 만물동체주의(萬物同體主義)에도 빠지 아니하고, 전체지구를 '유기체적 한 몸'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자리매김은 '중추신경계'에 해당한다는 은유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진보신학의 운동현황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진보신학 캠프안에 흐르는 5가지 색깔을 그 신학적 지향성과 특징들이 무엇인지 대략살펴 보았다.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라는 것은 앞으로 10년 혹은 30년 을 내어다 보면서 미래의 과제를 살피자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언제나 현제 속에 이미 다가오고 있는 것이며, 내일의 과제는 곧 오늘의 과제이다. 특히 힘써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미쳐 수행하지 못한 신학적 책임을 각성하자는 의미에서 내일의 과제라고 말한 것 뿐이다. 진보신학의 개념규정과 그 현황 흐름을 각각 5가지 언급했으므로, 내일의 전망과 과제도 5가지를 간추려 살피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첫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은 아직 교회론을 충분하게 담론화 하지 못했으며, 21세기 세속화 물결과 포스트모던사회 속에서 새로운 교회론의 치열한 담론화가 요청된다.

기독교 신학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믿는 바를 서술하고 세상에 증언하며 새로운 세상 상황 속에서 변증하는 과제를 지닌다. 줄여말하면, 신학이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봉사하는 책임을 갖는다.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교회공동체의 공동작업인 것이지 개인 신학자의 기독교에 관한 소견이거나 특정 지식인 집단의 기독교철학 작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들은 1960년대 이후, 급진적으로 변화된 시대상황과 한국적 ‘삶의 자리’에서 보다 복음적이고 책임적 신앙고백과 실천적 참여를 하는 과제앞에서 일차적으로 기존 전통신학의 굳어지고 시대착오적 신학틀과 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과제에 복무하지 않으면 않되게 되었다. 그리고. 진보적 신학운동을 펼처갔던 신학자들은 ‘굳건한 정통신학’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충분하게 설득하지 못하고, 기존교회 울타리 밖에서 그리고 진보적 신학집단들 학회활동 안에서 주로 신학운동을 펼쳐간 것이다.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교회’, ‘선교의 아방가르로서 교회’, ‘민중운동으로서의 교회’, ‘전위적 제자직을 수행하는 교회’, ‘평신도중심의 만인 사제직 교회’, ‘자연과 세속사회를 제단으로 삼는 범성례전적 교회’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제도적 전통교회의 형태변화를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감성과 윤리성과 지성이 아울러 충만한 <21세기에 걸맞는 영성적 제3교회> 시대를 아직 열지 못했다. 이것이 제일 첫 번째 과제이다.

둘째, 진보신학의 다음과제는 신학을 진보적 신학자들 집단의 전유물로서 생각하거나 전문적 신학써클 안에서만 논하는 학문적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진보신학 운동의 대중화, 소통강화’라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대중화는 학문성의 하향조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교회의 적지않는 지성인 신도들은 기존교회의 설교와 신학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진보적 신학서적 독서를 통하여 신학적-영적 갈증을 메꾸어오고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열린강좌’가 시대의 흐름이듯이 ‘감성과 지성이 함께 숨쉬는 열린 신학강좌’를 기획하여 귀중한 한국진보신학 써클이 지닌 집단지성을 ‘생명의 떡과 포도주의 잔치’로 펼쳐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통은 세상의 다른 학문들과 학제간 소통, 기독교 안에서 보수신학과 진보신학과의 소통을 과제로 갖는다. 평화통일 신학은 남북한의 역사적 경험이 융합된 소통의 신학을 요청한다.

셋째, 한국의 진보신학만이 아니라 세계신학의 최대화두는 계몽주의 시대 인간 역사의 경험, 아우슈비치 홀로코스트, 그리고 지구촌의 생태계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 이해’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신학은 학문이름 그대로 결국은 ‘신론’이 중심을 이룬다. 기독교의 위기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위기이거나 ‘예언자와 사도들이 증언한 성서적 진리’의 위기가 아니라, 그 해석과 이해의 틀을 새롭게 재해석하지 못하고 기존교리에 안주하는데서 오는 위기이다. 적어도 “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안에 계시는 한 하나님”(엡4:6) 고백에 걸맞는 새로워진 하나님론을 말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다시말하면,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 신관은 만유를 초월하시는 주 하나님, 들꽃과 고난당하는 피조물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내재적 하나님, 그러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창발하면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과정적 하나님 체험이 동시에 살아나는 신관을 요청한다.

넷째, 한국의 진보신학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종교개혁신학 원리의 총체적 메타크리틱’ 과제를 숙제로 갖는다.

흔히 종교개혁의 3대모토로서 ‘오직 믿음만, 오직 성서만, 오직 은총만’의 신학원리를 강조한다. 본래적인 의미에서라면 언급한 종교개혁 정신의 3대원리는 항구적 진리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나, 지난 500년을 지나오는 동안, 종교개혁이 3대원리는 많은 신학적 문제를 제기해왔다는 것을 개신교 교회사에서 증명한다. 특히 개신교 교회안에 영성수행의 약화, 성례전 신학의 약화, 성서해석상의 분파주의,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공공성의 약화를 초래했다.

다섯째, 세계신학사 지평에서 볼 때, 한국 진보신학은 동아시아 정신적 영성토양에 뿌리내린 ‘동아시신학’(East-Asian Theology)을 형성하여 세계 그리스독교 신학사에 공헌한 과제와 사명을 갖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역사는 짧고 각각의 관심영역으로 분화되어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구미신학의 역사가 각각 위대한 복음진리를 그들 시대와 문화역사적 토양 속에 육화시켜 독특한 신학전통을 창출해 냈다면, 동아시아 문화역사 토양에서 그 가능성은 훨씬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문화권 안에는 불교, 유교, 노장철학, 한국의 종교등과 더불어 아시안인들의 고난경험과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등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실패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진보신학은 그 과제를 피할수 없는 세계신학사적 과제로서 인식하고 있다. (탈고 2014.9.23)


[논문 한글 요약]

이 논문은 한국의 진보신학의 동향과 그 과제를 개론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진보신학’이라는 명칭은 한국의 교계나 신학계에서 ‘보수신학’이라는 표현에 대비하여 사용하는 호칭을 일컫는데 다음같은 신학함의 경향성을 공통으로 한다: (i)세계 신학계의 비평적 성경연구 방법의 수용 (ii) 복음과 상황과의 변증법적 관계 (iii)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신학운동 참여 (iv) 토착적 한국신학 형성추구 (v) 십자군의 영성을 지양한 십자가의 영성을 추구함이 공유하는 정신이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운동으로서는 다음같은 다섯가지 신학써클을 통하여 진보신학의 현황과 미래과제를 살펴보았다: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자연신학 운동이 그것이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이 안고 있는 내일의 과제들은 진보신학에 걸맞는 교회론의 강화, 진보신학운동의 대중화, 21세기 지식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론의 새로운 정립, 그리고 종교개혁 정신의 근본적 재성찰, 그리고 세계신학계에 공헌해야 할 동아시아 영성신학 정립으로 보았다.
(중요 어휘) : 성서비평학, 오늘의 구원, 생태학적 여성학, 우주신인론적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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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영문요약]

This essay is a bird's eye view of Korean Progressive Theology, which is a common title in contrast to Korean Conservative Theology. In a broad sense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shows some marked trends toward doing theoloy : acceptance of biblical criticism , dialectical method between gospel and situation, commitment to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through investigation into indigenous theology, and pursuit for spirituality of crucifixion.
For making a general survey of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this essay classifies Progressive Theology of Korea into five large groups: (i) theology of modulation (ii) minjung oriented socio-political theology (iii) indigeneous religio-cultural theology (iv) feminist theoloy (v) eco-theology of nature. And some specific chracters and tendencies of each theological movements are described comprehensively.
At the end of this treaties, the urgent tasks of Progressive Theology for today as well as future are suggested to theologians of five groups above mentioned: formation for update ecclesiology corresponding to post-modern world, driving of progressive theology to win a public support, proposal of new doctrine of God overcoming a supernatural God of orthodoxy protestants, and shaping of new christian spirituality deep rooted in east-Asian fertile soil.

(key words) Biblical criticism, liberation, salvation of Today, eco-feminism, cosmotheandric spirituality.



2020/03/27

알라딘: 김재준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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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평전 - 개정판,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김경재 (지은이)삼인201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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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424쪽135*195mm520gISBN : 978896436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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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김재준 평전 개정판. 김재준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나 한국 개신교사에서 가장 큰 시련 중의 하나였던 근본주의적 보수 신학과의 갈등과 그로 인한 교단 분열에 대해서도 ‘대승 기독교’로의 발전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분열의 이면에 “교권주의자들의 추잡한 탐욕과 명예욕, 타락한 직업 종교인들의 밥그릇 싸움, 사랑과 이해보다도 미움과 분쟁으로 치닫는 인간의 죄성, 제3세계의 어린 교회를 영구 지배하려는 제1세계 선교사 집단들의 시대착오적인 우월 의식과 분파주의 책동 등등”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김재준은 “결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전제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분열사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의 약함의 결과이다.



그러나 분열사가 꼭 부정적인 측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타성과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자유로이 쉬지 못할 때 영적 체험과 진리 파지를 목적으로 한 새로운 물결 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 운동을 종교 전통의 기득권자들이 폭력으로 내리누르고 이들을 정통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 버릴 때 그 결과로서 새로운 종교 교파가 생겨나게 마련이다.”라고 쓰고 있다.

목차

개정판에 부쳐



머리말



경흥 산골 마을에서 자란 늦깎이 청년

자연 환경, 가족 혈통, 시대 상황

유가 가풍, 서당 교육, 선비 기질

3.1 만세 사건 이후, 탈향



성 프랜시스와 예수의 심장에 귀기울이고

기독교로의 개종과 서울 고학 3년

성 프랜시스의 청빈과 예수의 심장에 접하고

아오야마, 프린스턴, 웨스턴 신학부 유학



섭리 손에 붙잡힌 상수리나무 그루터기 하나

1930년대 조선 사회와 조선 기독교의 상황

숭인상업과 은진중학 교사 시절

조선신학교 설립 과정에 부름 받고



조선 교회의 주체성 자각과 선교사 시대의 종언

조선신학교의 건교 정신과 하늘의 소명

해방 공간, 그 혼돈과 어둠으로부터 질서와 빛을

경동교회, 선린형제단, "기독교의 건국 이념"



복음의 자유혼과 프로테스탄트 개혁 정신

6.25 전쟁과 한국 장로교의 분열

한국신학대학과 기독교장로회

복음의 자유혼은 우상 숭배를 거절한다



성육신 신앙은 역사의 소금과 누룩

4.19와 5.16의 충격 속에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해야 할 때

성육신 신앙은 현실 변혁을 지향한다



북미주 대자연 속에서 풍류객의 진리 증언

'제3일'과 말씀의 인간화

교회는 하늘 기관, 그러나 교회주의를 경계하라

목사는 시인의 마음을 지녀야

통일 한국을 위한 화해와 평화 신학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며 고토를 걷다

인간의 신비와 하나님의 형상

성속의 변증법과 기이한 꿈 이야기들

동양 종교와 기독교의 만남의 문제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와 대승 기독교론



에필로그: 김재준 목사의 초상화들



부록



장공과 신천옹의 삶과 사상의 상호조명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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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경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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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를 졸업한 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과 고려대 대학원에서 현대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미국 듀북 대학 신학원과 클레아몬트 대학원 종교학과를 거쳐,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에서 문화신학·종교 신학 교수로 일하다가 정년 퇴임했다.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 한신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폴 틸리히 신학 연구』, 『해석학과 종교신학』, 『이름 없는 하느님』, 『김재준 평전』,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 등이 있다.

최근작 : <틸리히 신학 되새김>,<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생> … 총 28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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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어록으로 본 이낙연>,<아담의 첫 번째 아내>,<시베리아를 건너는 밤>등 총 248종

대표분야 : 한국시 26위 (브랜드 지수 19,27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성육신 신앙은 현실 변혁을 지향한다.”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진보적 흐름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창립의 중심 인물로, 한국의 개신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수많은 신학 논쟁은 물론이려니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독교단의 현실 참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종교 지도자이다.

그는 1945년 경동교회를 설립하여 초석을 다진 목회자였으며, 한국신학대학을 통해 수많은 성직자와 종교 지도자를 양성한 교육자였으며, 교회 갱신 운동에 헌신하면서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포용적 입장에서 교회간/종교간/문화간/민족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위해 앞장선 선구적 신학자였다. 또한 1965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운동’을 주도한 이래,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장,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북미주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의장, 북미주 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 등을 지내며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전개한 사회 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저자 김경재 교수(한신대)는 “신라에 불교가 공식 전래된 지 200여 년이 지나 원효와 의상을 낳았고, 조선 왕조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지 200년쯤 되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낳았”던 것에 비유하여,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여 년 만에 장공 김재준과 신천 함석헌이라는 두 거목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이러한 평가의 근거로, 그 이전까지의 소승적인 전통 기독교에 대하여 한국의 ‘대승적 기독교’를 창시했다는 점을 내세운다.

저자는, 김재준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나 한국 개신교사에서 가장 큰 시련 중의 하나였던 근본주의적 보수 신학과의 갈등과 그로 인한 교단 분열에 대해서도 ‘대승 기독교’로의 발전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분열의 이면에 “교권주의자들의 추잡한 탐욕과 명예욕, 타락한 직업 종교인들의 밥그릇 싸움, 사랑과 이해보다도 미움과 분쟁으로 치닫는 인간의 죄성, 제3세계의 어린 교회를 영구 지배하려는 제1세계 선교사 집단들의 시대착오적인 우월 의식과 분파주의 책동 등등”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김재준은 “결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전제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분열사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의 약함의 결과이다. 그러나 분열사가 꼭 부정적인 측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타성과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자유로이 쉬지 못할 때 영적 체험과 진리 파지를 목적으로 한 새로운 물결 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 운동을 종교 전통의 기득권자들이 폭력으로 내리누르고 이들을 정통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 버릴 때 그 결과로서 새로운 종교 교파가 생겨나게 마련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1930년대부터의 해묵은 주제인 ‘성서 무오설 논쟁’을 비롯한 기독교의 보수-진보간 신학 논쟁의 지평에 ‘소승-대승’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논점을 마련하면서 논쟁의 불씨를 던지고 있다.

저자는 김재준 신학의 핵심으로 ‘성육신(成肉身) 신앙’을 제시하면서, 이 역시도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의 ‘타계(他界)주의적 경향’을 겨냥한 비판으로 읽어 낸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이유는, ‘시한부 종말론’자나 ‘타계주의자’처럼 이 세상을 포기하거나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평등, 정의, 사랑이 숨쉬는 ‘생명 공동체’가 되도록 변혁시켜 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김재준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을 통해 현실 변혁적 운동체 속으로 깊이 관여한 것은 본래적 신앙인의 삶에서부터의 ‘이탈 행동’이 아니라 그 성실한 ‘실천 행동’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성육신 신앙’이야말로 김재준의 생애를 ‘실천 신앙’, ‘생활 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신학적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이 같은 시각은 “김재준이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계가 그를 비방하는 대로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아니라 철저히 바울/어거스틴/루터와 캘빈/칼 바르트로 이어오는 정통적인 신학적 인간학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저자는 김재준을 통해 ‘보수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진정한 보수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시각은 극단적인 ‘교리주의적 기독교’야말로 ‘교리’라는 상대적 가치를 절대화하는 ‘우상 숭배’라는 비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김재준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좇아가면서 당시의 시대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김재준 신학의 핵심을 이끌어 내어 보여 주는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기독교 사상이나 신학적 개념에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알기 쉽게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김재준은 기독교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종교 지도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실천 신앙’이 상징하듯 우리 사회의 현대사 전체를 보아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비중을 지니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이다.



2001년. 장공 김재준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 장공 김재준을 다룬 본격적인 인물 평전으로는 최초로 <김재준 평전>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2014년에 새로 내는 개정판이다.

개정판에는 부록으로서 ‘장공과 신천의 비교연구’ 논문과 역사적 ‘편지’, 그리고 중요한 사진 자료를 추가하였다. 접기



2019/10/07

류기종 목사.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7) - Rudolf Otto, Whitehead, 틸리히, Suzuki, 머턴, 류영모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7) - 류영모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토마스 머턴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 D. T, Suzuki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4) -폴 틸리히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 - 
기독교와 불교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기독교와 불교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4월 28일 (수) 17:59:29
최종편집 : 2010년 05월 04일 (화) 13:42:15 [조회수 : 6492]


* 류기종 목사가 발표한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편을 소개한다. 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을 지난 이천년에 걸쳐서 가장 깊이 사색하고 묵상(체험)한 영적 큰 스승들의 통찰과 이해에 의거해서 살핀 글이다. Rudolf Otto, A. N. Whitehead, Paul Tillich, D. T, Suzuki , Thomas Merton, 다석 류영모를 조명한다.


<기독교와 불교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1. 한국 사회의 종교적 상황과 특수성
한국 사회는 종교사적으로 볼 때,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찍부터 동양의 삼대 종교 즉 불교 도교 유교가 들어와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했을뿐 아니라, 한국의 고유문화를 창조했으며, 특히 불교와 유교는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교와 불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가까운 이웃 나라인 중국을 통해서 유입되기 시작했으나, 특별히 불교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삼국시대부터 였으며, 통일 실라 시대를 거처 고려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세기에 이르러 고려조의 붕괴와 함께 이씨 왕조의 등장으로 한국 사회는 불교의 영향이 뒤로 밀려나고 유교가 전 사회의 지배적 종교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한국의 근대사회는 유교중심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 서구문화가 동양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가 중국을 경유하여 한국 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8세기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리고 19세기에는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와, 불과 1, 2백년 동안에, 기독교가 한국의 주요 종교 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불교와 함께 한국사회의 2대 종교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인구통계에 따르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의 한국인의 종교인 분포 중 가장 특이한 점은 지구상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종교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동서양에 걸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쳐온 두 종교 즉 불교와 기독교가 대등한 분포의 종교로 자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불교인 수와 기독교인(신 구교 합한)의 수가 각각 일천만 명에서 천오백만 명 선에 달하고 있다. 이 둘을 합하면 2천5백만 에서 3천만 명으로 한국인 전체인구의 과반 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기독교인과 불교도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또한 두 종교인의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서 대등한 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외에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종교사적으로나 인류 문화사적으로 매주 주요한 사실로 보여진다. 이 사실은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인의 두 사람 중 하나는 기독교인이거나 불교도란 사실을 의미하며, 따라서 한국인들은 길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즉 사회 전 분야에서 두 종교인들 즉 불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은 수시로 만나고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불교들은 이렇게 매일 만나고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그들 사이에는 종교라는 벽이 가로 놓여있어서 그들 사이에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오늘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임과 동시에 이것이 오늘의 한국의 사회적 갈등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들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요인들을 간추리면 (1)빈부의 갈등 즉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갈등, (2)출신 지역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그리고 (3)정치 이념적 갈등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사회적 갈등의 가장 저변에 깔려 있는 요인은 바로 다름 아닌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즉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적 신념이 우리 인간 생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예로, 불교인 시어머니와 기독교인 며느리, 기독교인 직장 상사와 불교인 하급 직원, 불교인 선생과 기독교인 학생, 그리고 한 직장 안에서 종교가 다른 개인 혹은 구릅 간의 불편한 관계 등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한 사회 안에서의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사람들 간의 이러한 간격과 갈등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가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회적 갈등의 중요 원인이 되는 종교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대화의 채널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있으며, 특히 한국 사회 전체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는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화의 채널이나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들 두 종교는 그들 두 종교 구성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하여, 매우 배타적 성향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밖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마저 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들을 다른 문화권에서도 흔이 보게 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충돌로 인해서 집단적 분쟁 즉 전쟁이나 종족 살육과 같은 극단적 행위들까지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행위들은 특히 종교적 신념의 대립이 종족이나 민족적 대립과 결부되었을 때 더욱 격열해 지며 때로는 참혹한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한국은 고래로 세계의 큰 종교들 즉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 기독교 그리고 또한 한국의 고유 종교들인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이 함께 어울려 있으면서도, 종교적 신념들로 인한 극열한 대립이나 집단적 투쟁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특히 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가량을 점유하는 기독교인들과 불교인들 간의 내면적 갈등과 정신적 관계의 단절의 심각성이다. 즉 한 사회 안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 간에 종교적 신념의 차이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깊은 골 즉 간격이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 한국 사회 안에 잠재해 있는 보이지 않는 불행한 요소이며 또한 정신적 고통의 요인인 것이다. 특히 불교와 기독교의 경우 한 가족 공동체 안에서 종교가 다름으로 인해서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해야 할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그로 인해서 가족 구성원들이 정신적 고통과 불행을 겪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종교인들 간의 갈등 특히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의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대화의 통로가 닫혀 있으며, 그로 인해서 두 종교 간에 상호 이해의 길이 막혀있으므로 해서 상대방의 종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에 의한 지극히 피상적 이해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무조건 적대적 종교로 이해하고 있는데 기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은 불교를 전적으로 무신론 종교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불교는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종교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불교는 기독교를 인간의 감정을 지닌 신을 믿는 유치한 유신론 신관의 종교로 아니면 기복적 신앙의 종교로 곡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현상들은 두 종교 간에 상호이해의 기회나 대화의 통로가 전적으로 막혀 있는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기독교와 불교 간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 동기는 필자가 1970년대 중반에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두루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철학 과목을 공부하는 중에 대승불교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이론 체계 수립자인 1세기 말의 인도의 대 사상가(철학자)인 나가주나(Nagarjuna, 한국명, 용수)의 “무”(無, Emptiness) 사상을 접하고서 이다. 담당 교수로가 필자에게 한 책을 주면서 그 책의 내용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 때 필자가 받은 책은 미국의 저명한 종교철학자 프레드릭 스트랭(Frederick Streng)이 풀이한 나가주나의 주저 <중도론/中道論>의 해설서였는데, 그 책의 내용은 주로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인 공(무)사상과 연기론(緣起論) 그리고 그것의 종교적 역할과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나가주나는 그의 공(空) 사상을 설명함에 있어 불타가 설한 공사상의 핵심인 연기론에 기초해서 그것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 준 까닭으로 해서 제 2의 불타로 불려지기도 한다.

필자는 그 책을 접하고 큰 충격과 감동을 느꼈다. 왜냐하면 필자는 그 때 까지 불교의 중심사상에 대해서 체계적인 지식을 갖지 못하였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와 대화할만한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통해서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따리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무) 사상이 무신론이나 부정주의 철학 원리가 아니라 서양철학 혹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앞으로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은 그후 현대의 많은 대승불교 학자들의 나가주나 연구서들을 접하면서 한 층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 글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기독교와 대비되는 불교의 사상은 불교의 경전들에 의존하기 보다는 바로 이 대승불교의 중심사상(Central Philosophy)에 해당하는 나가주나(Nagarjuna)의 중도론에 나타나 있는 공사상과 연기론에 주로 의존하고 있음을 미리 말해 두고자 한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4) -폴 틸리히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한국신학 소고(溯考): 한국신학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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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10일 (월) 16:00:35
최종편집 : 2010년 05월 11일 (화) 20:11:05 [조회수 : 2804]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선각자들

20세기에 들어와서 우리 지구촌 인류가 경험한 중대한 사건들은 먼저 1,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었으며, 그 후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이념적 대립에 의한 세계질서의 극한적 대립과 거기에서 파생한 긴장과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서 전 인류는 큰 고통을 경험했으며, 그 직접적 피해는 이 지구상 어느 민족이나 국가들 보다 더 우리 한국국민들이 가장 심각하게 경험한 바이였으며, 아직도 그 상처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20세기의 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의외로 20세기에 지구상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시작의 사건을 지목했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서서 싹트기 시작한 기독교와 불교와의 접촉과 대화의 시작을 이 지구상(역사상)에 발생한 어느 사건들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 이유는 전 세계 인구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기하고 있는 두 종교 즉 동서양을 대표하며 또한 동서 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교 그리고 가장 심오한 인간의 도덕적 가치체계와 구원의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는 두 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서로 담을 높이 쌓고 문을 굳게 잠근 채 남남으 로 지내대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굳게 닫친 문을 열고 서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인류 역사의 정신적(내면적) 의미의 중대성을 간파한 토인비 박사의 예리한 판단과 통찰력에서 나온 결과로 사료된다. 뿐만 아니라 토인비 박사는 그의 <세계 종교 속의 기독교>란 소책자에서 인류의 평화 증진을 위해서는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긴밀한 대화의 필요성과 함께 기독교의 오만(교만)의 포기와 겸손의 필요성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토인비 박사의 지적대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와 불교는 비록 소수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대화가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동서양의 종교 사상가들의 주 관심사가 되다 시피 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주류 신학자들의 주 관심사의 하나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으며, 특히 우리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심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꽉 막혀있던 우리 한국 사회의 두 주류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상호이해와 소통의 길이 열리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으로 지난 20세기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의 간의 대화의 물꼬를 터준 선각자들은 누구인가 살펴보기로 한다.


(1) 루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

▲ 루돌프 오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암시한 최초의 인물은 아마도 1917년에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 란 책을 저술한 독일의 신학자며 종교철학자인 루돌프 옷토 일 것이다. 이 책은 현재 종교학이나 종교철학 분야에서 하나의 고전이 되다 시피 하였다. 옷토가 기독교 사상을 넘어서 다른 종교 특히 동양의 종교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1910년에서 1911년까지의 2년에 걸친 긴 여행을 통해서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북아푸리카와 이집트, 팔레스타인을 거쳐서 인도와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5년 후인 1925년과 1927-1928년 사이에 다시 중동과 인도를 방문하여 동양의 종교전통에 대한 그의 지식을 한층 심화시켰다.

거룩함의 경험: 옷토는 기독교의 성서가 말하는 종교적 진리의 핵심은 우주의 근원적 실재인 하나님 곧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중심한 것인데, 이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간의 이성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적 차원의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그는 “거룩함에 대한 경험”, 혹은 "초월적 실재"(numen/the numinous)에 대한 경험으로 보았다. 그 한 예로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할 때,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는 음성을 들은 것은 초월적 실재인 하나님의 임재경험을 들어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 때 모세에게 준 신의 명칭 즉 “스스로 존재하는 자”란 뜻을 지닌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신의 명칭은 이 세상 만물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신비 지극한 초월적 실재라는 뜻을 암시한다고 옷토는 이해하고 있다. 이 신비 지극한 존재로서의 신을 기독교 신비가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세상 만물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라고 해서 “전적 타자”(the Wholly Other)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신비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루돌푸 옷토가 현대의 기독교계와 종교계에 공헌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비주의"(Mysticism)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제공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옷토는 유한자인 우리 인간이 초월자/무한자인 신의 임재를 경험할 때,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1)극치의 신비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tremendum majestorum)과 (2)감당하기 어려울 만한 “매혹적인 황홀한 마음”(tremendum fasinosum)이다. 이러한 경험이나 느낌과 깨달음은 신비주의의 특색을 잘 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옷토는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신비주의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따라서 신비주의는 기독교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임을 잘 표현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신비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저 넘어"(beyond) 라는 것도 역시 모든 종교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합리적 요소가 극도의 긴장상태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신비주의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의 누멘적 대상을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되, 단순히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과의 대립으로 만족하지 않고 급기야는 “존재 자체(Being itself)”와 모든 “존재하는” 것 과 대립시킨다. 결국 신비주의는 그것을 무(無)라고 부른다. 여기서 무라는 것은 단지 어떤 것으로도 말할 수 없다는 뜻할 뿐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혹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과 단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며 반대적이라는 뜻이다.....우리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독특한 “무”(nihil)에 대한 고찰은 불교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공”(空)한 것 혹은 “공”(Sunyata)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타당하다.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신비적 언어나 지시어(ideogram, 상징적 표현)에 대하여 아무런 내적 감정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교적 신비주의자의 "공"과
"공화"에 대한 추구는 일종의 어리석음으로 보일 것이다....그러나 사실은 동양의 “공”(무)은 서양의 "없음"(nothing)과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것”(the wholly other)에 대한 누멘적 지시어인 것이다. 공이란 “기이한 것”(mirum) 그 자체,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언급하게 될 "역설"(paradox)과 “이율 배반적인 것으로 까지 고조되는 것이다.(거룩함의 의미, 길희성 역, 분도, 1987, pp.71-72).

위의 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옷토가 불교의 “무“ 혹은 “공”의 개념을 서양이나 혹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파악한 “전적 타자” 혹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신비적 방법에 의한 인식, 다시 말하면 궁극적 실재인 신에 대한 신비적 경험의 내용과 동일하게 보았다는 사실이다. 옷토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서구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도 이질적으로만 느껴지고 심지어는 일종의 허무주의 내지는 부정주의 종교철학 원리로만 인식되던 불교의 “공”사상을 새롭게 보았을 뿌 아니라, 기독교 신비가들이 경험하고 체득한 신(하나님) 체험의 내용과 동일한 차원의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옷토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첫 물고를 터 준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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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16일 (일)  [조회수 : 2721]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계속 -

▲ A. N. Whitehead


(2)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33-1947)

20세기 들어와서 기독교와 불교의 긴밀한 관계성과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이다. 그는 런던 대학에서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온 해인 1924년 2년 후인 1926년에 발표한 그의 종교론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란 책에서, 불교와 기독교 두 종교의 특색과 함께 두 종교의 대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1) 최고의 합리적 종교로서의 불교와 기독교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주된 합리적 종교가 있는데, 이들은 곧 기독교와 불교이다. 즉 기독교와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된 우주관에 적합한 합리화의 과정에 진입한 종교들이다. 이 들 두 종교의 주변에는 경쟁적 종교들이 있었지만, 이 두 종교는 이념의 명료성, 시유의 일반성, 도덕적 품위, 존속의 능력, 그리고 세계로의 확대의 폭 등을 고려할 때, 이런 성질들을 골고루 구비한 점으로 해서 그들의 경쟁자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들 두 종교를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판단한다면 현재 쇠퇘(퇴보)의 국면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두 종교는 현재 세계에 미치는 과거의 위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두 종교의 특색:
(1)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는 두 위대한 이물인 불타와 그리스도의 영적 체험에 기초한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구원의 도리를 인간과 우주 만물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적 이해를 통해서 도달하려는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 활동하는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불타는 인류에게 위대한 교리를 준 반면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주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표현이 불교와 기독교의 특색을 가장 잘 들어내는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불교는 다분히 혹은 본래적으로 철학적/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불교를 응용된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례라고 말하며, 따라서 불교가 종교를 탄생시키는 형이상학 즉 종교적 기능을 하는 형이상학/철학 원리인 반면 기독교는 항상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종교 즉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정항에서 시작해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의 특색을 지녔다고 말한다.

(2)화이트헤드가 이해한 기독교와 불교의 또 하나의 특색(유사점과 차이점)은 악의 문제에 관해서이다. 기독교와 불교 둘 다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위대한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는 이 중대한 악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즉 악의 극복의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불교는 물질적 또는 감정적 경험의 세계의 본성 자체 안에 악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것을 깨닫게 하는 지혜는 그러한 경험의 방편이 되는 개체적 성격들로부터 “놓임”을 받도록 깨닫게 하며 또한 그렇게 삶을 살도록 유도한다.

기독교도 역시 악 혹은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놓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악의 문제에 있어서 불교보다 형이상학적인 관점으로는 덜 분명하지만, 반면에 더 구체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다. 즉 기독교는 처음에는 악이 세계 전반에 내재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악은 개개인의 삶/사실 그 자체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숭고한 이상의 실현과 선을 지향하는 삶을 통해서 즉 선으로서 악을 극복하려 한다고 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악의 문제이 있어서 즉 악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극복의 방법에 있어서 두 종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3. 두 종교의 퇴보의 원인과 대화의 필요:
화이트헤드는 기독교와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진보된/발전된 위대한 종교들이지만 현재의 상태는 그들의 발생 초기에 비해서 쇠퇴의 과정에 들어서 있다고 보고 있다. 두 종교의 쇠태/퇴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두 종교의 폐쇠성 즉 두 종교가 각각 배타주의와 우월주의에 빠져서 상대방에게서 더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에 빠져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두 종교가 초기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두 종교가 문을 열고 대화하며 상대방에게서 배우려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 사상에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끼친 기독교와 불교의 퇴보는 부분적으로는 이들 각 종교가 지나치게 상대방으로부터 피해 숨어버린 상태에 기인한다. 배움에 대한 자기 충족의 폐쇄성과 무지한 열광주의자들의 확신이 결합하여 각 종교를 자기 자신의 사유의 형식 속에 갇혀 있게 만들었다. 더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한 상호간의 탐구와 고찰 대신에 그들은 자기만족과 메마른 상태로 머물러 온 것이다.(Whitehead, 종교론, 류기종 역, 제4장, 진리와 비판, p.111).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불교가 각각 자기 종교의 쇠퇴(퇴보)적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보다 높은 단계로의 성숙을 위해서 자기 종교의 문을 열고 상대방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두 종교 간의 긴밀한 상호 교류와 대화가 요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두 종교 간의 관계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 즉 서로에게서 배워야 하는 상보의 관계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상호교류는 양 종교를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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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4) -폴 틸리히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23일  [조회수 : 3899]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 폴 틸리히

20세기에 들어서서 기독교 신학자로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낸 이는 아마도 폴 틸리히일 것이다. 틸리히의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가 1960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수개월 간(5월에서 7월까지 약 8주간을) 도꾜와 교도에 머물면서 일본의 저명한 불교 학자들과의 깊은 교제와 대화를 나눈 점을 보와도 알 수 있다. 그의 일본 방문은 야사카 다까기(Yasaka Takagi) 교수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때 그가 만난 사람들은 선불교의 대가인 스즈키(D. Suzuki) 박사를 비롯하여 교도학파(the Kyoto School)의 철학자 및 불교 학자들과 또한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토(Shinto)의 스님들과 선승들(Zen Masters)도 포함되어 있었다. 틸리히는 그들과의 대담과 토론을 통하여 동양 사상 특히 선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증거로서 틸리히는 그의 일본 방문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이란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 책에서 그는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의 문제를 직접 취급하였다.

종교 간의 대화의 요건: 틸리히는 위의 책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 고찰함에 있어, 불교를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낫 설며, 동시에 가장 경쟁적인(most greatest, strangest, and competitive) 종교라고 칭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는 현재까지는 매우 미미했지만, 앞으로 두 종교의 대화는 가까운 장래에 가장 중심적 문제로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왔는데, 그 이유는 현대 세계에 나날이 확산되어가는 세속주의와 그것의 영향을 받은 유사종교들(quasi-religions)의 발흥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한편 틸리히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대화자가 취해야할 기본자세에 대해서 다음 네 가지로 언급하였다. (1)상대방 종교의 신념의 가치에 대해서 존중하고 인정할 것, (2)대화자는 지신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임할 것, (3)대화가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에 공통분모(common ground)를 찾아낼 것, (4)상대방의 비판에 대해서 열린 자세를 가질 것 등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요소(자세)들을 가지고 대화에 임한다면, 서로에게 지극히 유익하며(extremely fruitful), 또한 그것을 계속한다면, 자신의 일본에서의 경험에 비추어서 볼 때, 두 종교 및 다른 종교 간의 대화는 우리 역사에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인격주의 대 비인격주의: 틸리히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함에 있어 가장 크게 부디치는 문제로서 기독교의 인격주의적인 특성과 불교의 비인격적인 특색을 지적했다. 그 대표적인 개념이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과 불교의 “절대무"(Absolute Nothingness)와 “열반"(Nirvana)의 개념이다. 즉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특성으로 표현/상징화(symbolized)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궁극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현(상징)인 “공"(Void)이나 “절대 무”(Absolute Non-Being)는 비인격적 혹은 초인격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사실 이것은 틸리히가 기독교와 불교의 특징을 비교 고찰함에 있어서 정확한 진단이며 지적이라고 사료된다. 왜냐하면 불교는 인격주의적 표현이나 개념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표현들이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부적합하다고 보는 반면에, 기독교는 오리혀 그것을(인격주의적인 접근이나 표현을) 궁극적 실재 혹은 신의 실재를 표현하는데 있어 더 적극적(긍적적)이고 적합한 표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는 넓은 의미로 표현하자면 “인격주의”(personalism)와 “비인격주의” 혹은 “초인격주의”(trans-personalism)와의 대화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틸리히의 하나님 이해: 틸리히가 기독교와 동양종교 특히 불교와의 대화에 크게 공헌한 점은 그가 기독교의 인격주의 중심의 신관을 초인격주의적인 신관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부르는 것은 “절대자”(혹은 절대 타자)인 하나님을 여러 존재들 중의 하나로 즉 비록 모든 존재들 중 최고의 존재라 하더라도 무한자를 유한자의 범주로 격하시키는 일이 때문에 부적합하다고 보왔다. 그래서 그는 신의 존재를 “하나님”(God)으로 호칭하지 않고, 모든 존재들의 근거가 되는 의미에서 “존재 자체”(Being-Itself) 혹은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으로 불렀다.

뿐만 아니라 틸리히는 기독교의 전 역사를 살펴보면 신과 인간에 관해서 불교의 사상에 매우 유사한 신비주의적 요소를 발견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특히 오리겐, 어거스틴, 에크할트 등이 사용한 고전적 신개념인 “존재 자체”(esse ipsum)란 개념은 불교의 “공”(空) 개념이나 “절대무”(絶對無)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단서를 제공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즉 틸리히에 의하면, 존재 자체로서의 신은 어떤 하나의 위대한 존재나 혹은 모든 존재들의 총체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초월하면서 또한 모든 존재들을 존재 가능케 하는 “존재의 기반” 혹은 “모체”(Matrix)로서, 우리 인간의 언어나 상징이나 어떠한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대계”(the Absolute) 즉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아마도 틸리히의 이러한 신관(하나님 이해)은 불교의 “공”사상과 “절대무”(Absolute Nothingness or Emptiness) 혹은 “열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 이해와 대화에 있어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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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 D. T, Suzuki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30일 (일) [조회수 : 4065]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계속

(4) 다이세츠 스즈키(D. T. Suzuki, 1870-1966)




▲ D. T, Suzuki


일본의 경도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다로(1870-1947)의 친구이자 선불교의 대가인 스즈키 박사는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 특히 일본의 선불교(Zen Buddhism)를 서방 세계에 알린 인물이며, 또한 동-서의 철학과 종교 사상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현대의 한 역사가인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1927년에 영문으로 출판된 스즈키 박사의 “선불교의 논문들”(Essays in Zen Buddhism)이란 책의 출현은 오는 세대에 있어서 마치 13세기의 윌리엄 모어베크(William Moerbecke)에 의한 아리스토틀의 라틴어 번역과 또는 15세기에 피치노(M. Ficino)에 의한 플라톤의 번역에 비견될만한 의미를 지닌 한 위대한 지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만큼 스즈키 박사의 이 책은 기독교 문화권인 서방 세계에 대승 불교의 사상을 알리며 그들에게 큰 관심을 끌게 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즈키 박사의 여러 저서들 중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작품은 기독교와 불교의 긴밀한 관계성을 말한 책으로 1957년에 출판된 <신비주의: 기독교와 불교>(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t)이다. 스즈키는 이 책에서 기독교와 불교 특히 선불교와의 관계를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스즈키는 기독교의 많은 사상가들 중에서 특히 14세기에 독일의 도미니크 수도회 수장으로 활동한 마이스터 에크할트(Meister Eckhart)의 신비주의 사상이 대승불교와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처음 마이스터 에크할트의 설교문들이 수록된 소책자를 읽고서 큰 감 명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과거나 현대에 걸쳐서 어느 기독교 사상가도 이 들 설교문들에 나타나 있는 사상들을 따라 갈만한 그런 기독교 사상가는 기 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설교문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거기 에 나타난 사상들은 확실히 불교적 사상들에 접근하고 있었으며, 너무도 가 깝게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이 거의 확실하게 불교적 사 유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나의 판단으로 는 에크할트는 특이한 ‘그리스도인’인 것 같다>(스즈키, 신비주의, 제1부 제1장, “에크할트와 불교”에서 인용)

절대무(Absolute Nothingness)와 신성(Godhead): 스즈키 박사가 발견한 마이스터 에크할트의 신비주의에서 대승불교와 가장 가까운 개념은 에크할트가 이해한 “신성” 으로서의 하나님관이다. 에크할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활동에 직접 간여하는 신(God)과 모든 창조활동에 전적으로 초월에 있는 “신성"(Godhead)의 두 면이 있다. 이것은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양면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개념은 신구약성서 전반에 들어 있으며, 오리겐을 비롯하여 어거스틴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교부들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칼 발트 등 현대 신학학자들에 이르기 까지 줄기차게 주장되어 온 개념이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에크할트는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차이를 강하게 언급하고 있다. 에크할트는 "신"(하나님)과 "신성"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이룩하신다. 그러나 신성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럴 필 요도 없으시다. 신성은 어떠한 행위도 추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하나님과 신성의 차이는 행위와 행위의 부재로서 구별된다. 나는 전에 말해 본 적이 없는 바, 하나님과 신성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 하고자 한다. 사람의 내면성과 외면성도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 그러 나 신과 신성과의 거리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다>. (Matthew Fox, Breakthrough, pp. 76-77)

에크할트는 “신(창조의 하나님)”은 무엇을 이룩하기 위해 활동하지만 “신성”(신의 본래 모습)은 그럴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신성”은 어떠한 행위도 부재한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에크할트는 신의 참 모습은 그의 초월성인 “신성”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성”으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신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에크할트가 여기서 말하는 신의 초월성을 의미하는 행위의 부재로서의 “신성”은 대승불교에서 의미하는 “공”이나 “절대무”와 매우 유사한 개념임을 나타낸다고 스즈키는 보고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무”는 이것과 저것, 행위와 무행위, 있음과 없음 등의 모든 상대적 개념을 다 초월하며, 따라서 어떠한 상대적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대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로 여겨지는 불교의 "공"(空) 특히 선불교의 “절대무” 개념과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 사이에는 비록 신비주의자들이나 혹은 영성가들의 이해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상호이해와 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지적해 준 이가 바로 20세기에 들어서서 불교와 기독교 및 서구철학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다이세츠 스즈키 박사이다. 그런 점에서 스즈키 박사는 기독교와 불교(특히 선불교)와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자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겠다.

[관련기사]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한국신학 소고(溯考): 한국신학의 과거, 현재, 미래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
예수의 종교(Religion of Jesus)


제이 씨 (184.146.115.16)

2012-04-27 08:08:18



기독교와 불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상호 이해와 대화가 가능한가?
종교란, 수평/竪直적 의미에서 “절대무” 찾기나 “존재자체” 찾기를 말한다면,
사람들에 의하여 아래로부터 위를 향한 상향식↑추구라고 사려되며,
기독교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인격적 하나님” 의 垂直적 계시↓에 의한
특수한 만남 (현현과 응답) 에 대하여, 신뢰↑함으로 “인격적 하나님” 과의
상응관계 곧 위로부터 아래를 향한 하향식↓의미가 전제 되어 상하↕관계
형성이 된다는 인과성의 체험적 의미가 부여 된다는 생각입니다.
“인격적 하나님” 의, 사람 존재 (창조) 이 전의, 그 분의 “인격” 이란,
어떤 분의 말을 빌리면,
“내적 개념내용과 고유한 자 의식,
The inner content and unique self-conteousness,”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인격” 으로의 내적개념내용이란, 하니님의 정체 (영, 스스로 존재
하는 창조자) 를, 그리고 하나님의 고유한 자의식이란, 자기 계시와 타자인식
(사랑) 을 의미한다고 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의 인격을 해석 함은,
내적개념내용인 사람의 정체를 영과 육체 곧 피조자로, 그리고 사람의
고유한 자 의식을, 자아 발견 의식과 타자 인식 으로 이해 됩니다.
그러므로 인격주의? 적인 체험(하나님 만나는 경험) 과 비 인격주의? 적인
궁구한 발상적 초월과의 대화적 공통점을 찾을수 있을까 라는 풀리지
않을것 같은 의문을 제기 합니다.


창공 (121.162.90.34)

2010-05-26 08:32:52




기독교와 불교를 하나님과 절대무, 인격과 비인격으로 표현한 것을 읽으며 실제 종교의 표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면 불교는 부처(인간모습의 불상)이고, 기독교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셔서 만들지 않아 오히려 역으로 보이고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아렇게 뒤바뀌어 보이니 진리를 알아채고 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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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토마스 머턴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6월 06일 (일)  [조회수 : 4120]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 -계속-

(5) 토마스 머턴(Thomas Merton, 1916-1968)


▲ 토머스 머튼


20세기 중반 이후에 기독교와 불교 특히 기독교와 선불교와의 대화에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아마도 20세기의 “사막의 교부”(a Desert Father)라고 불리는 토마스 머턴일 것이다. 머턴은 1941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어렵게 얻은 뉴욕의 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켄터키 주에 있는 겟세마네 수도원에 한 수도사로 들어가 일생동안 명상수행에 전념했으며,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서 “명상” 및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세계 평화의 문제와 빈곤과 폭력과 사회악 등 사회정의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머턴은 오랜 동안의 자신의 명상수행의 과정에서 불교의 명상 의 방법 특히 선수행(Zen Practice)의 방법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머턴은 기독교 신비가들의 영적 체험의 방법과 선불교의 영적 체험의 방법이 본질적으로 깊이 통하는,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심오한 영적 체험과 깨달음을 표현하는 형식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67년에 <신비가와 선의 대가들> (Mystics and Zen Masters>이란 저술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머턴은 6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발전된 선의 역사와 내용 그리고 발전 과정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선(禪/Zen)불교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인도에서 들어온 달마대사(Bodhidharma)에 의해 처음 중국에 소개되었고, 도교와 결합하여 발전된/꽃피운 대승불교의 한 지류이며, 그후 한국과 일본에 널리 소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불교(Zen Buddhism)와 기독교 신비주의(Christian Mysticism): 달마대사에 의해서 소개된 선의 기본정신은 “교외별전 불입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4개의 한자성어로 된 내용이다. 이 시는 선불교(Zen)의 핵심을 집약적으로 들어내는 시이다. 즉 우리 인간이 진리를 깨닫는 득도에 이르는 길은 경전의 문자나 교리나 추상적인 개념들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내면을 직시함으로써, 즉 마음(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세계)의 신비(본질)를 깨달음으로써, 참 진리(실재)의 인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선종(선불교)은 선의 5대조 홍인(弘忍)의 두 제자 혜능(慧能)과 신수(信秀)에 의해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6대조의 선발과정에서 5대조 홍인의 수제자 신수의 시가 혜능의 시에 뒤떨어짐으로서 혜능이 6대조로 선택 되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신수의 시: (신수는 최고령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홍인의 후계자로 보였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깨끗한 거울 같구나,
항상 갈고 닦아서 한 올의 먼지도 묻지 않게 하려네>.

혜능의 시: (혜능은 홍인의 절에서 계도 받지 못한 채 부엌에서 일만하던 시골뜨기 도반중 하나에 불과 했으나 선의 참뜻을 나타내는 탁월한 시를 썼다)
<보리수 나무 원래 없고, 깨끗한 거울 또한 아무데도 없는데,
어느 곳에 때가 끼고 먼지가 일까?>

혜능은 바로 이 시 때문에 신수 대신 홍인을 이어 선의 6대조가 되었다. 머턴은 이러한 선의 방법들이 기독교의 여러 상이한 신비체험들과 어떻게 연관되고 교류될 수 있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머턴(Merton)은 선불교와의 접촉에 있어서 선승이며 동시에 대학자인 다이세츠 스즈키와의 교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두 사람 간의 서신교환은 1959년부터 시작하였는데, 머튼은 고대 사막교부들의 관상적 영성과 선불교의 선승들의 영성의 유사성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서, 이점에 대해 큰 관심을 지녔던 스즈키와 깊은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64년에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 교정에서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이후 깊은 교제를 나눴는데, 스즈키는 머턴을 가리켜서 선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한 서양인(기독교인)이라고 평한바 있다.

스즈키와의 교제 이후, 머턴은 1965년에 <장자의 도>란 책을 출간했으며, 1967년에는 자신의 선불교 연구서로 볼 수 있는 앞에서 언급한 <(기독교)신비가와 선의 대가들>이란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머턴은 장자를 통해서, 언어와 개념을 넘어선 “실재”에 대한 체험적 인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머턴은 기독교의 문제점은 언제나 개념화와 교리화에 집착하는 약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머턴의 동양종교에의 깊은 관심은 1968년 태국 방콕(Bangkok)에 열린 종교회의에의 참석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이 기회를 불교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종교성과의 접촉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마턴은 이를 계기로 인도, 태국, 스리랑카를 방문하려 했고, 다라이 라마와의 만남과 일본의 선승들과도 만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머턴은 회의 도중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 뜻을 다 실현하지 못했다.

머턴과 깊은 교제를 나눴던 틱낫한(Thich Naht Hahn)은 머턴에 대해 평하기를 대부분의 서구 신학자나 영성가들이 이원론적 사고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데 반해서 머턴은 그런 틀에서 벗어서 있다는 사실이라고 평했다. 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D. S. Rast)가 머턴에게 묻기를, 불교와의 접촉 없이 기독교의 가르침들 을 잘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머턴이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 “나는 불교의 빛으로 조명하지 않고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머턴의 이 말은 불교의 진리들은 기독교의 깊은 영적인 진리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머턴은 <신비가와 선의 대가들>의 서문에서 “선은 추상적인 형이상학도 아니며, 신학도 아니며, 이론적인 명제도 아니고, 의식과 앎의 굴레(속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행위로서, “구체적인 살아있는 존재론”이라고 정의 내렸다. 머턴은 이 책에서 기독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교부시대, 초기 수도원제도(사막의 수도자들), 영국의 신비주의, 17세기 신비주의, 러시아 동방정교회 영성 그리고 개신교 수도원 공동체 등도 소개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머턴은 선불교 즉 불교의 선(Zen)의 방법에 매혹된 기독교 명상수도자로서, 영성주의 혹은 신비주의의 측면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깊은 대화의 길을 모색한 사람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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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7) - 류영모 - 당당뉴스

류기종 | rkchg@hanmail.net
2010년 06월 13일 (일) 18:38:37 [조회수 : 3945]


(6) 류영모(柳永模, 1890-1981)



▲ 다석 유영모

다석(多夕) 류영모는 젊은 시절 한 평번함 과학도로 시작하여, 끊임없는 연구(진리탐구)와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통해서 세계(인류) 정신문화의 원천인 유, 불, 선, 기(기독교)의 회통과 창조적 조화를 이룩해 낸 인물로서, 20세기의 탁월한 통섭의 사상가인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비견될만한 특유의 사상가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접한 기독교 신앙을 일생동안 자신의 삶의 근거로 견지 하면서도, 단순한 교리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동양의 전통 종교 사상들과 또한 한국고유의 전통종교 사상들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창조적 만남과 조화 회통을 통해서,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심층적으로 이해한 참으로 희귀하고 독특한 사상가이다.




<류영모와 연경반>: 류영모는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안의 초청으로 일종의 종교 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 강좌를 맞게 되었는데, 1928년에 시작하여 1963년 까지 35년간 지속되었다. 박영호씨의 기록에 의하면, 연경반은 많이 모일 때는 수백명이 참석할 때도 있었지만, 적게는 십여 명씩 모였으며, 평균 20명 정도가 참석하였다고 한다. 류영모는 이 연경반에서 기독교의 성경뿐 아니라, 유불선의 경전들즉 동양의 고전들도 강의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기독교와 유불선의 종교적 가르침들과의 조화 속에서, 즉 기독교를 그 자체에 의해서만 이해하지 않고, 동양의 지혜를 통해서 이해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류영모는 1959년에 영경반에서 <노자>를 강의 했고 같은 해에 불교의 중요 경전인 <반야심경>을 강의하였다. 박재순 교수는 다석의 불교에 대한 친밀성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석은 공(空) 사상에 기초해서 만물을 공으로 보고 하느님의 본성도 공으로 보았다. 그는 23세 때부터 빔(空)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늘 빈탕한테를 말한 것도 불교적이고, 해혼 후 하루 한 끼 먹은 것도 금욕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모든 집착과 욕심을 끊고 자유로운 삶을 살려는 것은 불교의 해탈을 추구한 것이다. 날마다 무릎 꿇고 앉아서 생각과 명상에 잠긴 것은 불교의 선(禪)을 수행한 것이다,...사람 노릇을 하려면 불교를 알아야 한다고 했고 불교를 모르고는 이 세상을 바로 살 수 없다고도 했다. 다석은 자주 예수와 석가를 나란히 언급했다. 다석은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인 불성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보았고, 하느님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기독교와 불교를 연결시켰다. (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pp. 313-314)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단순히 기독교와 불교(특히 선불교)의 대화나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 두 종교를 한 생명인 자신의 삶으로 직접 실천한, 다시 말하면 기독교와 불교 두 종교의 창조적 일치를 실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기독교를 통해서 불교를 보고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리스도와 불타가 따로 있지 않고 둘이 진리의 스승으로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스승인 점에서 그 두 분은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통찰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필자는 류영모의 이러한 통섭의 정신은 바로 우리 한국인의 고유 철학인 “한사상”(韓思想) 즉 일즉다(一卽多)의 궁극적 조화와 일치의 원리인 “한사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참조, 류기종, 기독교와 동양사상, 황소와 소나무, pp. 12-37)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 류염모는 인간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양측의 입장을 함께 종합해서 본 듯하다. 즉 기독교는 인간의 현존재를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에 의한 원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성이 만인에 보편적으로 깃드려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불교는 인간이해의 핵심으로서 탐(貪,탐욕), 진(瞋,분노/시기/질투/미움), 치(痴,무지/어리석음/치정-성적충동) 3독을 보편적 성질로 이해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탐진치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나 생물들의 삶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이다. 우리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탐진치 3독의 내재성으로 보는 불교적 인간 이해는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죄성(롬1:29-3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에 대한 진술과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동물적 요소인 탐진치의 속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참조, 박영호 풀이, 다석 류영모 명상록, 두레, pp. 472 이하).




따라서 류영모는 우리 인간이 득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참 자유인 즉 진리를 깨달아서 참 자유함을 얻은(요8:32) “얼나” 곧 영적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3독을 제거하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류영모의 인간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적 요소와 기독교적 요소가 함께 공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 류영모의 기독교와 불교의 친밀성(공통점) 이해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바로 불교의 공(空/빔/없음)과 기독교의 하나님(하느님/한님/한얼)을 그 근본(본질)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어떤 의미로는 동일한 내용(개념)으로 이해한 점이다. 류영모에 따르면 허공(空)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순수하고/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하공을 알고 허공을 존중하여 맘에 품고 살 때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와 인간의 바탕이 허공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석이 공 혹은 허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물의 근거로 본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류영모는 공(空)을 참된 실재로 보는 불교의 공의 철학 곧 공의 신비와 의미를 깊이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석가는 “빔”(공)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는 내가 아버지(하나님) 안에 아버지(하나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여, 석가의 공 이해와 예수의 하나님(아버지) 이해를 대비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류영모는 이 “빔”(공/허공)을 최고로 높고 밝고 거룩한 것으로 보았다. 즉 류영모는 공 혹은 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신령한 허공을 하느님으로 이해했으며, 허공, 마음(얼) 혹은 영(靈), 절대자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인 허공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즉 그는 허공과 하나로 되어 하늘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물질과 허공을 하나로 보는 공색일여(空色一如)의 자유함을 얻는 다고 하였다. 그러나 류영모는 공(허공)을 참된 실재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라 이해하면서도 불경에 하나님이란 말이 없음을 못내 아쉽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마음의 저변에 기독교의 신관과 함께 한국인의 고유 종교성인 하느님 신앙이 흐르고 있음을 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참조, 박재순, 앞의 책, pp. 316-319)




요컨대, 류영모가 이해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마음의 욕심(3독)을 뽑아내서 “빔”에 이르러 공색일여(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진리를 깨달음에서 오는 참 자유 곧 궁극적인 자유(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다석이 허공을 진리 곧 참 실재로, 만물의 바탕으로 본 것은 불교의 중심 진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공(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것은 불교의 기독교적 이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점에서도 류영모의 기독교와 불교의 조화와 통섭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얼나”의 현시자로서의 불타와 그리스도>: 류영모의 사상에서 또 하나의 독특한 개념은 “얼나”의 개념이다. “얼나”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인 “제나”(selfish ego) 즉 인간의 죄성인 탐진치 3독을 제거하지 못한 인간에서 “빔”(공)의 진리를 깨우쳐서 신의 본성인 "빔"(空性)과 하나가 된 영원한 자아, 즉 시공을 초월하는 공한 마음(空心)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참 자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삶의 목표는 바로 이 동물성(獸性) 곧 죄성으로 인하여 죽어 없어질 존재인 “제나”(육적인 자아 곧 땅의 존재)에서 영원한 생명과 광채를 지닌 “얼나”(하늘의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제나”가 “얼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나”가 완전히 죽어야 하는데, 이 제나의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이다. 류영모에 있어서 완전한 자기부정의 길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타(불교)의 진각(眞覺)에 이르는 4대 진리인 고집멸도(苦執滅道)의 완성/성취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얼나”는 득도 진각을 이룬 초월적 자아 곧 영적인 자아(enlightened/spiritualized self)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에 따르면, 불타와 그리스도는 둘 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인류에게 득도 해탈의 길 곧 구원의 길을 제시해준 위대한 참 스승이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진인(眞人) 곧 “얼나”의 모형이다. 그런 점에서 불타와 그리스도는 이 “얼나”의 현시자요 화신(incarnation)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불타는 공(빔)의 진리와 또한 공과 만물이 그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모든 집착과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해탈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그리스도는 참 빔(참 실재)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길,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죽음까지도 포함된 모든 속박과 억매임으로부터 완전히 놓임 받는 참 자유함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에게는 불타와 그리스도 두 구원자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실은 이 둘은 하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타와 그리스도 두 분이 다 참 "빔"(공/허심/태일太一/하나님/궁극적 실재)과 하나가 됨으로써, 즉 “빔의 신비"(mystery of emptiness) 곧 “없이 있으며 참으로 있음”의 신비를 깨달음으로써, 궁극적 자유함(해탈)인 구원에 이르는 길(진리)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에 있어서 불타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태극의 음양 리기의 관계처럼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의 관계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류영모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와 만남을 넘어서 두 종교의 아름다운 조화와 상보관계를 실현한 독보적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류영모는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또한 기독교를 통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시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에 있어서 두 종교의 관계를 류영모 처럼 깊이 통찰한 사람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맺는말>: 이상에서 지난 20세기 동안에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크게 기여한 즉 두 종교 간의 대화의 개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았는데, 필자는 그들 중에서 우리 한국의 기인(奇人) 다석 류영모의 방법이 가장 탁월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두 종교의 대화를 넘어서서, 양 종교를 친밀한 형제와 친구의 관계로 즉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이 꼭 필요한 (태극의 음양과 리기의 관계처럼) 필수적 동반자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독교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불교를 필요로(알아야)하고, 또한 불교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필요로(알아야) 하는 상보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류영모는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이해와 대화에 있어서 최대의 공헌자로 평가되리하고 사료된다.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요약) [새창] 류기종 2010-06-20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7) - 류영모 [새창] 류기종 2010-06-13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 D. T, Suzuki [새창] 류기종 2010-05-30
[류기종의 영성강좌] 한국신학 소고(溯考): 한국신학의 과거, 현재, 미래 [새창] 류기종 2010-04-28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 [새창] 류기종 201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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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요약)
류기종 | rkchg@hanmail.net
2010년 06월 20일 (일) 16:42:46 [조회수 : 3801]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과정사상과 영성적 관점에 본-

이 글은 지난 20세기 동안에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와 상호이해에 크게 기여한 사상가들의 중심사상을 고찰해 봄으로써 두 종교 간의 사상적 연대성과 협력방안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불교와 기독교를 지구상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된 합리적 지적 체계를 지닌 종교라고 보았는데, 그러나 두 종교가 서로 문을 닫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으므로 해서 현재 쇠퇴의 과정에 들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한편 역사가 Arnold Toynbee는 20세기에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의 닫힌 문을 열고 대화를 시작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오늘에 와서는 동서의 많은 철학자/종교가 및 신학자들이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문제를 중요 이슈로 다루고 있는 실정에 있다.

한국사회의 종교적 사항과 특수성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불선 3대 종교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와 불교 두 종교가 양대 종교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종교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녔으면서도 전혀 대화의 챈널을 찾지 못한 체 기름과 물처럼 높은 담이 그어져 있다.

1. 로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물고를 터준 사람은 독일의 신학자며 종교철학자인 옷토이다. 그는 1910-11년의 2년에 걸쳐서 북아프리카, 이짚트, 팔레스타인을 거처 서 인도와 중국과 일본까지를 방문하여 동양의 종교와 사상들을 접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1917년에 <성스러움/Das Heilige-영역 the Idea of the Holy>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동서양의 신비주의적 경험과 직관의 공통적 요소를 언급하였다.

1). 옷토는 동서양의 신비주의적 방법과 경험(mysticism) 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고했다..
옷토에 따르면, 신비체험은 거룩함/신/전적타자/초월적 실재(numen)에에 대한 체험/인식으로서 (1)심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tremendum majestorum)과
(2)심히 매혹적인 황홀한 경험(tremendum fasinosum) 을 동반한다.
2). 동양 종교(불교)의 공(空/Sunyata) 체험과 서양종교(기독교)의 신神 체험은 공히 절대타자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계 혹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경험(혹은 깨달음)의 표현들이다. 이로써 옷토는 신비주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2.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화이트헤드는 런던대학에서 은퇴하고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로 옮겨온 그 다음해인 1926년에 과정사상의 종교이해의 기초가 되는 책 <종교의 형성/Religion in the Making>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종교란 처음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의식(우주관)의 고양과 함께, 원시종교에서 고도의 지적/합리적인 종교로 발전해 왔는데, 그 과정에는 여리 지역의 문화(종교, 철학, 윤리체계)들의 교합작용(mutual assimilation)을 통해서 발전해왔으며, 지금도 그 작용은 진행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 기독교와 불교는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진화된 최고의 합리적 종교이다.
2) 불교는 종교의 기능/역할을 하는 형이상학 즉 철학적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종교이다(불교는 응용된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례이다)
3) 불타와 그리스도는 둘 다 깊은 영성체험에 기초하고 있으며, 불교는 악의 문제를 형이상 학적 원리로 해결하려 하는데 반해서 기독교는 선한 행위로 악을 극복하려 한다. .
4) 두 종교는 현재 쇠퇴의 과정에 들어있는데, 그 이유는 두 종교가 각기 상대방에게서 더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자만과 자신의 사유의 틀 속에 안주하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이트헤드의 사상 중 불교의 사상과 유사한 개념들은 다음 셋으로 요약된다:
1)신의 존재를 무한한 잠재성(absolute wealth of unlimited potentialities)의 세계로 보아 불교의 공사상과 유비되는 점(그 본질은 언어나 개념으로 설명 불가능하다),
2)모든 현상들이 잠정으로 발생했다 살아지는 계기적 존재들로서, 또한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의 자료와 원인이 되는 점(인과관계)을 들어, 사물의 비실체성(non-substance)을 말함으로써 불교의 연기설과 비자성성(제행무상/제법무아)과 유비되는 점을 들 수 있다.
3)신(제일 본성)과 우주(제이 본성)는 한 실재의 양면의 관계이다(색즉시공/공즉시색)

3. 다이세츠 스즈키(D.T. Suzuki, 1870-1966)

일본의 경도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다로(1870-1947)의 친구이자 선불교의 대가인 스즈키는 대승불교 특히 일본의 선불교를 서방세계에 알린 인물이며, 또한 동서의 철학/종교 사상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1957년에 발표한 <기독교와 불교의 신비주의/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m> 라는 책을 통해서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접근성과 상호교류의 가능성을 피력하였다. 스즈키는 기독교의 많은 영성가/신비가들 중에서 특히 14세기의 독일의 신비가 Meister Eckhart의 사상에서 선불교의 방법과 너무도 일치하는 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에크할트는 神(God)과 神性(Godhead)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신성”은 모든 언어적 표현과 어떠한 상대적인 개념으로도 설명 불가능하며, 또한 거기에는 어떠한 행위(action/motion)도 부재한 절대 태허의 세계를 지칭한다. 따라서 스즈키는 에크할트의 “신성”의 개념은 선불교의 “절대무”의 개념과 너무나 가까운 개념으로서, 그는 에크할트가 기독교인지 선불교인이지 분하기 곤란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신비가들이나 영성가들의 방법이 선불교와의 대화에 중요한 촉매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기독교 신학자로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우린 사람은 폴 틸리히이다. 그는 기독교의 인격주의적 신관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존재론적인 신관으로 바꾸었다. 그에 따르면 신은 모든 존재들 중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존재 가능케 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지칭한다. 그래서 그는 신을 "존재 자체"(Being-itself), "존재의 근거" (Ground of being), “존재의 심연”(Abyss of being) 등으로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존재자체로서의 신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있다 없다” 란 어떠한 상대적인 존재론적 개념이나 언어로도 설명하기 블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최상급의 개념이나 언어로 표현해도 그것은 신의 절대성을 훼손하거나 제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신에 대한 모든 표현들은 상징에 불과하다.(예를 들면, 아버지, 왕, 심판자, 구원자 등등). 틸리히의 신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틸리히는 1960년에 8주간에 걸친 일본 방문을 통하여 스즈키 박사를 비롯하여 불교학자 및 선승들과 신토교의 지도자들과 교제면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60년에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이란 책을 저술했으며, 거기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문제를 심도있게 취급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의 특색 및 큰 차이점은 기독교의 인격주의적 성향과 불교의 비인격주의적 성향을 들수 있는데, 그는 기독교의 신비주의자들에서 초인격주의적 색체를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하고, 동시에 기독교 역사 속에는 불교의 “절대무”를 지칭하거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개념들이 다분히 있음을 언급했다. 이로서 신비주의가 양 종교의 공통성/접촉점임을 알수있다.

5. 토마스 머턴(Thomas Merton, 1916-1968)

20세기 사막의 교부라 불리는 머턴은 1941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어렵게 얻은 뉴욕의 한 대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 켄터키 주에 있는 엄률수도원(Trappist Monastry)에 들어가 일생도안 명상과 수도생활을 하며,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는 한편, 전쟁과 폭력의 근절/평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종교간의 대화 특히 기독교와 선불교와의 대화와 상호교섭의 문제를 숙고했다. 머턴은 스즈키 박사와 틱낫한과의 교제를 두텁게 가지면서, 장자의 도사상과 선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기독교)신비가와 선의 대가들> 그리고 <장자의 도>란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영성수행의 경험을 통하여 기독교 신비가들의 영적 수행의 방법과 선불교의 수행의 방법이 근본에 있어서 다른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선불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선불교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6세기)에 인도의 달마 대사에 의해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후에 중국의 도가 사상과 결합하여 동북아 지역의 토착불교로 발전하여, 중국, 한국,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선불교의 근본정신은 불입문자, 교외별 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로 요약된다. 중국의 선불교는 일대조 달마를 필두로 혜가, 승찬, 도신을 거쳐 5대조 홍인에 이르러, 6대조를 뽑는 과정에서 혜능의 선시가 신수의 것을 능가하여 혜능이 6대조로 피택됨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머턴은 선(Zen)은 추상적인 형이상학도, 신학/철학도, 이론적인 명제도 아니며, 의식과 앎의 굴레(속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행위로서 “구체적인 살아있는 존재론”라고 정의내렸으며, 이러한 방법은 기독교 영성가/신비가들이 추구하던 방법들과 매우 유사 내지 일치함을 발견했다. 머턴은 불교와의 접촉없이 기독교를 잘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불교의 조명 없이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잘 설명하기란 불가능할 것임을 피력하기도 했다. 머턴은 기독교 영성가로서 선불교에 매료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6. 류영모(柳永模, 1890-1981)

다석(多夕) 류영모는 한 평범한 과학도로 시작하여, 동서의 종교 사상들에 대한 부단한 연구와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통하여, 세계(인류)의 정신문화의 원천인 유.불.선.기(기독교)의 상호 회통과 창조적 조화에 의한 웅대한 영성적 고봉을 이룩해 낸 특이한 인물이다.

류영모와 연경반: 류영모는 16세의 소년시절에 기독교를 접한 후 신앙인의 삶을 견지하면서도 그 울타리에 갇혀있지 않고, 한국의 전통종교들과 특히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려는 구도자의 길/삶을 살았다. 그는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안의 초청으로, 일종의 종교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을 맞게 되었으며, 1928년에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지속했다. 거기서는 기독교의 성경만이 아니라, 동서의 고전들도 강의했는데, 1959년에는 <노자>를 강의 했고, 같은 해에 <반야심경>을 강의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은 대부분 한시 형식으로 일기처럼 쓰여졌는데, 그의 제자들 중 하나로 연경반에 참여했던 박영호씨에 의하여 풀이되어 <다석전집>으로 출판되었다.

1) 공(空)과 하느님: 공(빔)과 하느님은 참(영적/궁극적/영원한) 실재를 지칭한다
류영모는 불교의 공(空)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한 내용으로 이해했다.그에 따르면 공(허공/빔/하늘)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공/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지극히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인간이 공/허공을 알고 마음에 품고 살 때 진실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석가는 빔이 내맘 안에, 내맘이 빔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는 하느님(아버지)이 내 안에, 내가 하느님(아버지) 안에 있음과 그 둘은 그 근본/본질에 있어 하나/같음을 깨달았다고 보았다. 이것을 깨달음이 참 깨침이다.

2)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 다석은 인간의 고통/불행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성(동물성)인 탐진치 3독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불행/타락의 원인을 교만과 탐욕/이기심에 근거한 죄성에 의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 인간이해에 대비된다.

3) 제나(selfish Ego)와 얼나(spiritual/enlightened Ego)
제나는 공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탐진치 3독을 버리지 못한 옛 인간, 옛 자아, 이기적 자아를 물적/육적인 자아를 지칭힌다. 반면에 공과 무상/무아의 진리를 깨닫고 탐진치 3독에서 해방된 자아를 얼나, 즉 영적인 자아, 득도 해탈 즉 참 깨침에 이른 자아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종교적 수행의 최종 목표는 제나에서 얼나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은 존재가 되는 일이다.

4) 얼나의 현시자로서의 불타와 그리스도
류영모에 따르면 불타와 그리스도는 진정한/완전한 “얼나”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또한 얼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알려준 지고한 스승/현자들이며, 따라서 참 얼나의 현시자들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들의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통해서 “얼나”로 태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류염모에 있어서는 불타와 그리스도는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5) 요컨대 류영모는 동양종교 특히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또한 기독교를 통해서 동양의 종교들과 특히 불교를 이해한 특이한 모델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현재 활동 중인 인물들: 아베 마사오, 한스 발덴펠스, 틱낫한, J. Hick, Marcus Borg 등.

결론: 불교와 기독교의 깊은 대화를 통한 두 종교의 접근과 제휴 및 융합의 가능성 모색

(1) 기독교와 불교를 친밀한 형제 종교로 만드는 일, 그래서 기독교적 불교도/불교적 기독교도(Christian Buddhist/Buddhist Christian)의 길을 가능케 함(류영모 모델),
(2) 여기에 유교와 도교 및 한국의 고유종교들을 융합하고 또한 유대교의 카발라, 이스람의 수피즘, 힌두교의 아드바이티즘(不二학파)도 포함시켜서 범세계영성종교(Universal Spiritual Religion)를 탄생시키는 일(한국의 고유철학인 한(韓)사상의 일즉다의 원리를 적용해서). 이것은 곧 종교간의 담을 헐고 전인류의 평화실현이란 큰 목표를 위해서 종교들이 긴밀히 협력/교류/ 연대함을 의미한다.

한국이란 나라에 일찍이 유불선이 들어왔고 근대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와 현재 불교와 기독교가 양대 종교로 자리하게 된 것은 이들의 영성을 융합하고 고양시켜서 범우주적인(전인류를 포괄하는) 영성적 종교를 탄생시키라는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사료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류의 평화실현의 가장 중요하고 바람직한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주 전체를 하나의 몸(유기체/생명체)으로 보는 과정사상과 영성주의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곧 만유/만인을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빠 하나님 신앙과 사도 바울의 만유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신앙(롬11:36, 엡4:6)의 귀결이 아닐까 사료된다.







기독교의 사랑(agape)과 불교의 자비(karuna)의 비교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아가페 "사랑"과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한 이 두 개념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공통점이란 자기 사랑이 아닌 철저한 "이타성"과 사랑의 대상에 대한 "무조건성"( unconditionality)과 "무제한성"(unlimitedness), 그리고 그 힘의 "강렬함" (intensity)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마음에 근거하고, 불교의 자비는 불타의 마음과 깨달음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하나님 및 그리스도의 마음과 불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마음은 만인을 구원하시려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만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를 아낌없이 주는 자기 희생적 사랑의 마음이고, 불타의 마음은 색계(현상세계)와 공계(본질세계)의 동일성 즉 불이(non-difference)의 진리인 "연기의 법측"을 간파한 무한한 지혜로부터 나오는 마음으로서, 만인을 무지와 고통으로부터 제도(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사랑"인 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과 불교의 자비인 불타의 마음은 다 같이 "만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란 외연적인 공통점/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