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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9

알라딘: [전자책] 낭송 아함경

알라딘: [전자책] 낭송 아함경



[eBook] 낭송 아함경  | 동청룡 3 epub

최태람 (옮긴이),고미숙 (기획)북드라망2015-10-08



종이책 페이지수 208쪽



책소개



동양고전의 낭송을 통해 양생과 수행을 함께 이루는, 몸과 고전의 만남 '낭송Q시리즈' 동청룡(봄의 기운)편의 세 번째 책. 팔리어 '아가마'(agama, 전승된 가르침)의 음사로서 '전승되어 오는 경전'을 의미하는 <아함경>은 불교가 이론화되고 여러 분파로 갈라지기 이전 붓다와 승가의 삶을 보여 주는 불교의 원형이다.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등 그 종류도 다양한데, 이 책 <낭송 아함경>에서는 <잡아함경>의 글들을 뽑아 엮었다. 짧은 길이의 경전들이 많고 게송과 산문이 엮여 있어 암송하기에 더없이 좋으며, 가장 원초적인 경전의 형태를 띠고 있어 붓다의 가르침뿐 아니라 붓다와 제자들의 모습, 당시의 시대상 등을 생생하게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잡아함경>은 총 50권 1,362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경전이기에 <낭송 아함경>에서는 붓다와 그 제자들, 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연기법, 배움과 수행 등 네 개의 주제를 선별해 그에 맞는 경들을 선택.배치하였다.





목차

『아함경』은 어떤 책인가 :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아



1. 붓다와 제자들

1-1 깨달은 자의 이름, 붓다

1-2 세상 속에서 세상을 벗어난 자

1-3. 번뇌도 기쁨도 없이 깨어 있는 자

1-4. 평등한 가르침으로 악마를 물리치다

1-5. 마음이 세계를 만든다 : 붓다의 제자들

1-6. 존자 바기사, 붓다와 제자들을 칭송하다

1-7. 지혜의 빛으로 서로를 물들이다 : 사리불과 목건련

1-8. 붓다의 마하가섭 사랑

1-9. 총명제일 아난 존자

1-10. 모든 것은 이별하고 마는 법: 사리불과 아난

1-11.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을 들은 수발다라



2. 붓다의 가르침: 고, 무상, 무아

2-1. 모든 것은 무상하다

2-2.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다 : 사성제

2-3. 괴롭고 병든 몸에서 괴롭지도 병들지도 않는 마음을 닦아라

2-4.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

2-5. 고, 무명, 무지

2-6. 부모와 자식을 잃는 두려움

2-7. 생겨난 모든 것에는 다함이 있다

2-8. 세계는 물거품, 아지랑이, 허깨비와 같아라

2-9. 기둥에 묶인 개는 주위를 빙빙 돌 뿐

2-10. 원숭이처럼 부산한 내 마음

2-11. 두번째 독화살을 맞지 않는 법

2-12. 고통의 근본적 치료법을 아는 의사



3. 자비, 함께하는 삶

3-1. 인욕과 자비의 화신 부루나

3-2.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지 않는 자, 유죄

3-3. 탐욕은 탐욕의 세계를 인연하여 생기는 것

3-4. 고통받는 중생에게 보내는 자비의 미소

3-5. 남을 보호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길

3-6. 화내지 않음을 찬탄하는 공부

3-7. 욕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 법

3-8. 용맹스러운 전사의 악업에 대하여

3-9. 원한을 조장하지 말라

3-10. 올바른 보시의 도리



4. 배움과 수행

4-1. 지혜로 일구는 복전(福田)

4-2. 나의 몸이 나의 수행처

4-3. 송곳으로 몸을 찔린 뒤에야 바르게 사유할 것인가

4-4.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하라

4-5. 감각과 생각에 붙들리는 것은 잠에 빠지는 것과 같으니

4-6. 존자 이십억이의 회의와 수행

4-7.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 닦고 익혀라

4-8. 붓다의 꾸짖음

4-9. 먹는 양을 조절할 줄 아는 수행자 난타

4-10. 중생에게 도움이 되는 네 가지 음식

4-11. 깨끗한 모양에 대한 애욕을 제거하라

4-12. 자신의 경계에 의지한 새 라파의 지혜

4-13. 붓다가 말하는 세 가지 공부

4-14. 준마의 여덟 가지 덕과 수행자의 여덟 가지 덕



접기

책속에서

P. 19 부처는 과거 세상을 보고

그와 같이 미래 세상을 보며

또한 이 현재 세상의 나고[生], 멸하는 모든 행行 다 본다네

밝은 지혜로 일체를 환히 알아

닦아야 할 것은 이미 다 닦고

끊어야 할 것은 이미 끊었으니

그러므로 이름을 부처라 하네 수많은 겁(劫) 동안 찾고 가려 보아도

온통 괴로움뿐 즐거움 없고

태어난 것 반드시 소멸하고 말았네

그러므로 때와 티끌 멀리 떠나고

모든 번뇌와 가시의 근본을 뽑아

일체를 바로 깨쳐 부처라 이름하네  접기



P. 54 “근심하거나 괴로워 말라. 앉고 일어나거나 생겨나 는 일들은 무너지고야 마는 법이니 어찌 무너지지 않 을 수 있겠느냐? 아무리 무너지지 않게 하려 한들 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사랑스러운 모든 사물과 마음에 드는 것을 비롯해 일체 의 것은 다 어긋나고 이별하게 되는 법으로, 늘 존재 할 수는 없다. 비유하면 뿌리, 줄기, 가지, 잎, 꽃, 열매 가 무성한 큰 나무에서 먼저 큰 가지가 부러지는 것처럼, 또 큰 보배산에서 큰 바위가 먼저 무너지는 것처럼, 여래의 대중들 중에서 저 큰 수행자가 먼저 반열반한 것이다. 만일 그곳이 사리불이 머물고 있던 곳이면, 그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처럼 그곳에서 나는 공허하지 않았으니, 그건 사리불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내가 이미 그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난아, 내가 말했듯이 사랑스럽고 갖가지 마음에 드 는 것들은 다 이별하기 마련이니, 너무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 또한 오래지 않아 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아 난아, 마땅히 자기를 바다 가운데 섬으로 삼아 자기를 의지하고, 법을 섬으로 삼아 법을 의지하며, 다른 것을 섬으로 삼지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최태람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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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전비평공간 ‘규문’에서 동서양 고전과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나는 공부복, 스승복, 친구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 속에서 늘 받기만 하는 쪽에 있는 것 같아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청소년 고전 독서클럽』, 『고전 톡톡』, 『인물 톡톡』 등을 썼다.

최근작 : <청소년 고전 독서클럽> … 총 3종 (모두보기)

고미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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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투 비 백수. 20대에는 청년 백수, 30대 중반엔 박사학위를 받고도 중년 백수가 되었다. 그래서 아예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만들어버렸다. 혼자는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서 공부공동체를 꾸렸다.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는 ‘감이당(&남산강학원)’이 본거지다. 2080세대가 함께 꾸려가는 대중지성 네트워크라 생각하면 된다. 주요 활동은 ‘읽고, 쓰고, 말하기’. 그것으로 밥벌이도 하고 수많은 벗들을 만나고 계속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 행운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최근작 : <나는 왜 이 고전을>,<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 총 17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수유+너머'를 듣기 위해 고미숙을 만나다! - 2004.04.02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양고전의 낭송을 통해 양생과 수행을 함께 이루는, ‘몸과 고전의 만남’ “낭송Q시리즈” 동청룡(봄의 기운)편의 세 번째 책. 팔리어 ‘아가마’(agama, 전승된 가르침)의 음사로서 ‘전승되어 오는 경전’을 의미하는 『아함경』은 불교가 이론화되고 여러 분파로 갈라지기 이전 붓다와 승가의 삶을 보여 주는 불교의 원형이다.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등 그 종류도 다양한데, 이 책 『낭송 아함경』에서는 『잡아함경』의 글들을 뽑아 엮었다. 짧은 길이의 경전들이 많고 게송과 산문이 엮여 있어 암송하기에 더없이 좋으며, 가장 원초적인 경전의 형태를 띠고 있어 붓다의 가르침뿐 아니라 붓다와 제자들의 모습, 당시의 시대상 등을 생생하게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잡아함경』은 총 50권 1,362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경전이기에 『낭송 아함경』에서는 붓다와 그 제자들, 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연기법, 배움과 수행 등 네 개의 주제를 선별해 그에 맞는 경들을 선택.배치하였다.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불경은 어렵고 딱딱하다고, 지레 손사래 치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불교경전 특유의 반복구가 만들어 내는 오묘한 울림에 낭송의 참맛을 느끼게 되는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 입과 몸을 통해 울려 퍼지는 붓다의 설법에 수천 년 전 붓다의 제자와 중생들이 그랬듯 기쁨에 환호하게 될 테니 말이다.



『낭송 아함경』풀어 읽은이 인터뷰



1. 낭송Q시리즈의 기획자이신 고미숙 선생님은 “모든 고전은 낭송을 염원한다”고 하셨는데요, 낭송이 되기를 염원하는 여러 고전 중 특별히 『아함경』을 고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함경』은 경전에 대한 저의 편견을 깨준 책입니다. 저에게 경전은 불교 신자들만 읽는 것 혹은 딱딱하고 어려워서 절대로 읽고 싶지 않은 것 정도로 여겨져 왔어요. 또 저는 붓다가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인간이었다는 사실도 간과했습니다. 불교에 대한 막연한 표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죠. 그런데 친구들과 함께 불경을 낭송하고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경전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몇 천 년 전에 붓다가 던진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어째서 수많은 번뇌 속에 시달려야 하는가. 이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계속될 질문이지요. 붓다는 고통에 대한 자각을 통해 번뇌의 장이 곧 깨달음의 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우리의 스승입니다.



붓다의 설법은 제자들에 의해 붓다가 열반에 든 직후부터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이설(異說)을 막고 가르침과 계율을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붓다 열반 100년 쯤 뒤에 제2차 교단회의가 열리고, 이 무렵에 현재의 팔리어 경전의 모습이 갖추어졌는데, 팔리어로 ‘아가마’(āgama, 전승된 가르침)라는 텍스트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음사된 것이 바로 ‘아함경’(阿含經)입니다. ‘전승되어 오는 경전’을 의미하는 『아함경』은 불교가 이론화되고 여러 분파로 갈라지기 이전 붓다와 승가의 삶을 보여주는 불교의 원형입니다.



문장의 길이가 긴 경전을 모은 『장아함경』, 문장의 길이가 중간 정도인 것을 모은 『중아함경』, 비교적 짧은 길이의 경전을 모아 놓은 『잡아함경』, 사제(四諦)·육도(六度)·팔정도(八正道) 등을 순서대로 분류하여 엮은 『증일아함경』으로 분류되는데, 이 책에 수록된 경전들은 모두 『잡아함경』에서 뽑은 것입니다.

 『잡아함경』은 총 50권 1,362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경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경전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가장 원초적인 경전의 형태를 띱니다. 짧은 길이의 경전들이 많고 게송과 산문이 엮여 있어 암송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경전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핵심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붓다와 제자들의 모습,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2. 낭송Q시리즈의 『낭송 아함경』은 『아함경』과 어떻게 다른가요?



『낭송 아함경』은 네 개의 주제를 선별해 그에 맞는 경들을 선택.배치했습니다.



낭송을 위한 첫번째 주제는 ‘붓다와 제자들’입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 머물되 연꽃처럼 세속의 욕망에 휘둘려 살기를 거부한 인간 붓다의 이야기입니다. 경전 속에서 붓다는 근엄하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예컨대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제자들을 보고 화가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하고, 등이 아프다며 자리를 깔고 눕기도 하며, 혼자 걸식하는 노인을 보고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자신보다 먼저 죽은 제자를 생각하며 슬퍼하기도 하지요. 이 모든 걸 경험하고 느끼는 삶의 장(場)이 곧 깨달음의 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붓다. 아난, 사리불, 가섭, 목건련 등의 제자들은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잘 배워 깨우친 또 다른 ‘붓다들’이었습니다.



두번째 주제는 ‘붓다의 가르침: 고, 무상, 무아’입니다. 붓다의 핵심적 가르침을 담은 장입니다.



석가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족과 신분 등을 다 버리고 출가를 결심한 이유는 바로 생로병사의 고(苦)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지요. 붓다의 깨달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보편적 사실에 대한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사춘기 때 누구나 한 번씩 했었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걸 걸었던 거죠. 초월자나 스승에게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의 명상을 통해 붓다는 마침내 답을 얻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 이 ‘무상(無常)’에 대한 자각은 삶의 조건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답이었습니다. 물질(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마음(識)이 모두 무상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我)’ 혹은 ‘내 것’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는 것. 그러나 고, 무상, 무아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이 삶을 부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삶의 조건을 알고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죠.



세번째 주제는 ‘자비, 함께하는 삶’입니다. 붓다의 연기법(緣起法)을 담은 내용들입니다.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해서 발생하고 소멸한다는 연기법. 연기적 세계에서는 제각기 다양한 생명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형성합니다. 모든 차이나는 존재들이 위계 없이 평등한 세계에서 인간은 특권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복을 위해 무수히 많은 가축들을 희생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나와 내 것을 실체화시켜 거기에 매달리기 때문이죠. 붓다는 이를 강하게 비판해요. 붓다의 시대에나 지금 우리 시대에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어리석음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요? 네번째 주제는 ‘배움과 수행’에 관한 것입니다.



붓다는 자신의 설법을 듣는 이의 수준과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수행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수행의 단계를 나누기도 합니다. 배우는 이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간절하고 부지런하게 공부할 것!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이 깨달았다는 착각 속에 빠지지 말 것!



3. 앞으로 『낭송 아함경』을 낭송하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붓다는 우리가 놓인 조건을 알고, 생과 사를 겪는 모든 생명의 삶을 이해하라는 거예요. 알고 이해하는 것은 누가 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붓다는 누군가를 숭배하고 의지하면서 성구(聖句)만 외는 것은 남의 소를 세는 것과 같다고 가차 없이 비판합니다. 번뇌 속에서 뒹구는 것도 나, 지혜의 눈을 뜨는 것도 나라고 가르치는 붓다. 그는 신도 아니고 신의 중개자도 아니에요. 붓다는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숭배하라고 말하지 않아요. 자기만 믿으면 죽어서 좋은 데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을 남발하지도 않습니다. 설법의 목표는 오직 하나. 설법을 듣는 상대가 스스로 ‘붓다’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죠.



보리수 밑에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은” 붓다는 열반에 들기까지 45년간 설법을 이어갔어요. 붓다의 설법은 어리석은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발로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깨달음으로 모든 이들을 제도(濟度)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제도할 수 있다는 오만함, 우월함을 전제로 하는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붓다의 자비심은 누구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들임을 믿는 마음입니다. 그가 농부, 왕, 바라문, 노예, 여자, 외도(外道)들에게 차별 없이 설법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죠.



그러나 붓다의 시대에도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보지 못하게 덮어 가리는 허깨비나 환상에 더 열광했어요. “너는 언젠가 죽을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잖아요. 대신 ‘영원한 사랑’, ‘행복만 가득한 삶’ 등의 거짓말, ‘모든 게 잘 될 거야’,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는 식의 위로의 말을 하면 좋아하죠. 붓다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탐(貪)·진(瞋)·치(癡)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붓다가 삶에 적대적이거나 냉소적인 게 아니에요. 붓다에게 ‘고’(苦)를 일으키는 인간의 존재 조건은 동시에 깨달음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생이 고(苦)임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깨달음의 길도 열린다고 본거죠. 자기를 속이지 말고, 스스로를 돌보는 길을 가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참으로 정직합니다.



『아함경』은 구전되어 오던 붓다의 설법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비슷하게 반복되는 구절들이 많아요. 반복구가 만들어내는 오묘한 울림 속에 스며들어 있는 낭송의 참맛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붓다의 말하기 방식,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등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어요. 붓다의 설법을 들은 중생들은 모두 기뻐하며 받들어 행했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 경전을 받아든 분들도 붓다가 선물하는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접기

북플 bookple

2020/08/28

希修 |사람을 비난하면 '미움', 죄를 비난하면 '이해'

(20+) 希修 | Facebook



希修  < 사람을 비난하면 '미움', 죄를 비난하면 '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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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이라는 책에서는 사람의 성격적 특징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명상을 추천하는데, 그 성격적 특징에 대한 묘사 중 흥미로운 부분을 우연히 발견했다. Hate와 understand에 대한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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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e seeks out only unreal faults, while understanding seeks out only real faults. And hate occurs in the mode of condemnining living beings, while understanding occurs in the mode of condemnining formations/fabrications.”

-- 『Visuddhimag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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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이러 저러 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라고 어떤 사람의 어떤 생각/말/행동을 최대한 '좋은' 쪽으로 합리화해 주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이게 '공감' 혹은 '사랑'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고. 하지만 초기불교는 대승불교를 포함한 여타 종교들과 다른 독특한 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 즉, 부처님은 'metta' (goodwill)는 목숨걸고 지키라고 강조하셨지만, 'pema' (love)에 대해서는 밥을 먹으면 똥이 남고 사랑을 하면 미움과 괴로움과 흐려진 정신이 남는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 뭔가를 잘못할 때, 애써 모른 척 하거나 그 생각/말/행동에 대해 변명해 주지 말고, 사람 자체를 비난하지도 말며, 문제가 되는 생각/말/행동 하나만을 impersonal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이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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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지혜' (탐진치 없는 분별력/통찰력)를 계발하는 것이다. 탐貪과 진瞋도 치癡의 다른 형태일 뿐이니 결국 '치' (어리석음=unskillfulness)의 제거가 핵심. 따라서, 어리석은 생각/말/행동이 발견될 때 그것이 어리석다는 판단과 인지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 행위자가 나인가 남인가, 아군인가 적군인가, 윗사람인가 아랫사람인가, 혹은 강자인가 약자인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면 안 된다 - 약자에게 좀더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한 관점이지만. 나의 생각/말/행동뿐 아니라 남의 생각/말/행동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나의 지혜 계발을 위한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 누가 더 잘났냐?의 비교/판단이 목적이 아니며, 선정 외에 일상 속에서의 이런 분별도 병행되어야 지혜가 계발된다.) 

치를 묵인, 부인, 은폐, 두둔해서는 치의 제거가 아예 불가능해지기에, 치는 치라고 보는 것만이, 치에 대해 진을 불태우는 치
(i), 치를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치
(ii), 치를 방치/합리화하는 치
(iii)들 사이에서 中道를 지키면서 치를 제거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中道라는 게 무조건 중간값을 취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극단을 모두 파악한 후 상위 목적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방법을 택하라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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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뉴질랜드 외교관의 성추행에 대해 강경화 장관이 사과를 거부한 것은, 한국의 국격과 한국의 도덕 수준 둘 다를 낮추는 한국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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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마음을 이해할만 하면 행동까지 이해해주곤 한다. 특히 자기와 관련한 일이 아닐 때면 쉽게 너그러워진다. 상대에게 공감할 요소가 있거나 나와 닮은 점이 있다면 너그러움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여야 한다. 마음은 이해해주지만, 그리고 용서도 할 수 있지만, 잘못된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다. ... ... 그렇게 행동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행동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법적인 책임을 지울 일이라면 책임을 지워야 한다. 마음의 이해와 행동에 대한 대응. 쉽지 않지만 꼭 나눠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세상 문제에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https://www.facebook.com/drsuh/posts/1372911782729839
서천석의 행복한아이연구소 updated their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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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그럴만 하죠. 이해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이 그의 행동까지 용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행동에 이른 과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감정도, 생각도, 마음의 흐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럴만했겠다며 끄덕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행동을 용납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봐주고 넘어가야 할 것도 아니다.
이해를 하자고 치면 누구의 마음인들 이해를 못하겠는가? 하는 일이 정신과 의사다 보니 어지간한 마음은 다 이해가 간다. 내 앞에 앉아 일대 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에 늘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그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그럴만 하다고 두둔하지는 않는다. 마음은 상대가 없지만 행위는 상대가 있다. 당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그의 마음만 보고 그의 행동까지 이해할 수는 없다. 그의 행동을 이해해줄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의 행동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고, 누구도 피해 입은 당사자에게 이해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게다가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그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조건과 상황은 같아도 반응과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살아봐서 누구나 느끼지만 인생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여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 선택에 이른 과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잘못된 선택이라면 선택에 대해 동의할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이해할만 하면 행동까지 이해해주곤 한다. 특히 자기와 관련한 일이 아닐 때면 쉽게 너그러워진다. 상대에게 공감할 요소가 있거나 나와 닮은 점이 있다면 너그러움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여야 한다. 마음은 이해해주지만, 그리고 용서도 할 수 있지만, 잘못된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다. 용서는 당사자가 하기 전에 남이 먼저 할 일은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고 책임질 일은 책임지게 해야 한다. 그가 책임을 지면 그때는 위로하고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을 면제해선 곤란하다.  
부모교육을 할 때도 부모들이 종종 혼란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아이 마음은 받아주지만, 행동은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속상해하고 떼를 쓴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얼마나 갖고 싶고, 놀고 싶고, 먹고 싶을까? 나도 그때라면 이렇게 떼를 쓰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속상한 마음이 충분히 공감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공감된다고 아이의 떼를 받아서 요구를 들어주면 곤란하다. 그러면 아이의 떼는 점점 심해진다. 모든 문제를 떼쓰기로 풀려고 한다. 아이를 안타까운 표정을 보면서도 요구만은 들어주지 않는 것. 속상해하면 인정해주고 토닥여도 주지만 부탁은 들어주지 않는 것. 떼쓰는 아이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부모의 자세다.
마찬가지다. 마음과 행동은 다르다. 마음은 이해해주자. 오죽하면 그렇게 했겠냐고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해선 안 되는 행동은 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행동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법적인 책임을 지울 일이라면 책임을 지워야 한다. 마음의 이해와 행동에 대한 대응. 쉽지 않지만 꼭 나눠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세상 문제에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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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론과 사무량심: 사회적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의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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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hanti / forgiving / 용서: '정의 실현'은 karma가 할 것이므로 내 손으로 복수/처벌하고 싶은 마음은 깨끗이 버림. 재발 방지를 통해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의 법적 처리가 필요하다면 하되, 미움이나 恨같은 personal한 감정은 갖지 말라는 뜻. 관계 회복/화해와 전혀 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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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metta / goodwill / 慈: 상대방이 지혜를 통해( =업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고 탐진치를 줄여 나감으로써) 스스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것.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기분을 맞춰 주거나, 편한/친밀한/즐거운 관계를 유지하는 등의 일은 metta의 본질과는 무관. 서로를 옭아매는 온갖 기대, 원망, 집착, 소유욕 등으로 귀결되기가 너무나 쉽고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pema / love / 사랑을 부처님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으셨음. 그래서 밥을 먹으면 똥이 남고 사랑을 하면 미움과 고통과 흐려진 정신이 남는다고 말씀하신 것. (뉴에이지에서는 heart가 head보다 우월하다 말하지만, 부처님은 냉철한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중시하셨음. 탐과 진도 실은 치/무지/망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니 당연한 결과. 물론, 팔정도를 완성!한 후에는 모든 관념/이성마저 초월.) 하지만 동시에, 강도가 자신의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내고 있는 와중에도 상대에 대해 유지해야 하는 태도가 metta임. 즉, metta는 감정 앞에서 약해지는 유교적 仁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 의지에 가까움.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72471653124917&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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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karuna / compassion / 悲: 상대방이 지혜를 통해 스스로! 고통/불운을 종식시키기를 바라는 마음 or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돕고자 하는 의지. 아기가 죽어 울고 있는 여인 Kisa Gotami에게 부처님은 따뜻한 위로 대신 "마을에 내려가 일가 친척 누구 하나 죽은 적 없는 가문을 찾아 내어 그 집에서 겨자씨를 빌려 가져오라"는 말씀을 하셨음. 그동안 윤회해 온 억겁의 세월에 비하면 이승에서의 100년은 찰나에 불과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교하는 자체도 무의미하니, 이런 괴로움이 싫다면 더이상 헤매지 말고 어서 해탈하라는 뜻. 불교의 'karuna'는 상식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공감'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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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mudita / empathetic joy / 喜: 상대방이 지혜를 통해 스스로! 복을 짓기를 기원하는 마음 or 그런 과정을 통해 얻은 상대방의 행복에 대해 함께 기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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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upekkha / equanimity / 捨: 현재의 노력만으로 당장 달라질 수 없는 부분 (예: 현재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더이상 희석되지 않는 과거 업의 결과, 타인의 선택 등)에 대한 인내심, 어리석음을 고집하는 이에 대한 평정심. (도박 끊을 생각조차 아예 없는 사람 때문에 속 끓이지 말고 도박을 끊으려는 노력을 하기는 하는데 아직 못 끊고 있는 사람이나 도와 주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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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31 윤회계의 모든 존재들에 대해 무한정으로 베풀어야 하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자비희사의 넷을 四無量心이라고 부르는데, 이 넷과 용서는, 업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이해만 하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귀결되는 태도임. '착함', '상대가 바라는 대로 해 주기' 등과 무관하고, 감정적/'인간적' 차원 아닌 업으로 관통해야 바른 해석이라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가르침. 당신의 업/해탈에 대한 문제는 당신 자신의 수행에 달렸을 뿐 그 누구도, 심지어 부처님조차 어떻게 도와 줄 방도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전제. 궁극적인 의미에선 부처님도 나를 도와 줄 수 없으니,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도움'이라는 것은 '근본적' 아닌 '부수적'/'일시적'일 뿐이라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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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karuna / compassion을 '상대의 감정을 무조건 옹호해 줌' or '함께 슬퍼함'으로 해석하는 것은 '悲'라는 번역에서 기인하는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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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 'Compassion' usually means that you suffer together, but 'karuṇā' does not. A physician needs to understand his patients, but, if he suffers with his patients, he won't be able to help them. ... ... A bodhisattva should be able to have the kind of love (such) that (she) can (be) happy for her and understand the suffering of other people, in order to be able to help them out ... ... If you are a psychotherapist and if you have enough joy, love, patience and understanding in you, ... you won't be overwhelmed by the suffering of those who come to you. 

-- Thich Nhat Hanh

https://www.youtube.com/watch?v=C-wa1cvoJI0

.

(G-ii) A true compassion is not about commiserating. Avoid commiserating with other people’s problems, so that you don’t get caught in their mental construct. 

-- Eckhart Tolle

https://www.eckharttollenow.com/new-home-video/default.aspx?shortcode=y1f1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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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7tn SApoaprnsurotifolodred ·



#78. [Source] "Metta Means Goodwill" (Not Lovingkindness) https://www.dhammatalks.org/books/BeyondAllDirections/Section0007.html?fbclid=IwAR3fWTy5Yd1Wz_SGCgB3R2FAbgbeiNRERBDrr2tk7_glbUfghUWlzY2e6Uc

[Extract] ... ... Metta is a wish for happiness—true happiness. ... ... Many people define it as “lovingkindness,” implying a desire to be there for other people: to cherish them, to provide them with intimacy, nurture, and protection. ... ... But ... there are a lot of them who—like the snake—would react to your lovingkindness with suspicion and fear. Rather than wanting your love, they would rather be left alone. Others might try to take unfair advantage of your lovingkindness, reading it as a sign either of your weakness or of your endorsement of whatever they want to do. In none of these cases would your lovingkindness lead to anyone’s true happiness.

... metta is not necessarily an attitude of lovingkindness. It’s more an attitude of goodwill—wishing the other person well, but realizing that true happiness is something that each of us ultimately will have to find for him or herself, and sometimes most easily when we go our separate ways.

... ... The Buddha never recommends developing universal pema—for, as he notes, love can easily lead to hatred when the people you love are ill-treated by others—but he does recommend developing universal metta: friendliness for all. The fact that this friendliness equates with goodwill is shown in the four passages in the Canon where the Buddha recommends phrases to hold in mind when developing thoughts of metta.

(1) "May these beings—free from animosity, free from oppression, and free from trouble—look after themselves with ease." — AN 10:176

... ... You’re not saying that you’re going to be there for all beings all the time. ... ... “May all beings be happy. May they be able to look after themselves with ease.” That way they can have the happiness of independence and self-reliance.

(2) "Let no one deceive another
or despise anyone anywhere,
or through anger or resistance
wish for another to suffer." — Karaṇīya Metta Sutta


... you wish not only that beings be happy, but also that they avoid the actions that would lead to bad karma, to their own unhappiness. ... For people to find true happiness, they have to understand the causes for happiness and act on them. They also have to understand that true happiness is harmless. If it depends on something that harms others, it’s not going to last.

So again, when you express goodwill, you’re not saying that you’re going to be there for them all the time. You’re hoping that all beings will wise up about how to find happiness and be there for themselves.

(3) "As a mother would risk her life
to protect her child, her only child,
even so should one cultivate a limitless heart
with regard to all beings." — Karaṇīya Metta Sutta


... ... instead of drawing a parallel between protecting your only child and protecting other beings, he draws the parallel between protecting the child and protecting your goodwill. This fits in with his other teachings in the Canon. Nowhere does he tell people to throw down their lives to prevent every cruelty and injustice in the world, but he does praise his followers for being willing to throw down their lives for their precepts. ... ... This is why the Buddha explicitly recommends developing thoughts of metta in two situations where it’s especially important—and especially difficult—to maintain skillful motivation: when others are hurting you, and when you realize that you’ve hurt others. ... ...

(4) "I have made this safeguard,
I have made this protection.
May the beings depart." — AN 4:67


... the truth that living together is often difficult ... and the happiest policy for all concerned is often to live harmlessly apart.

... ... Metta is better thought of as goodwill, and for two reasons. 
The first is that goodwill is an attitude you can express for everyone without fear of being hypocritical or unrealistic. It recognizes that people will become truly happy not as a result of your caring for them but as a result of their own skillful actions, and that the happiness of self-reliance is greater than any happiness that comes from dependency. 
The second reason is that goodwill is a more skillful feeling to have toward those who would react unskillfully to your lovingkindness. ... ... people you’ve harmed in the past ... ... people who, when they see that you want to express lovingkindness, would be quick to take advantage of it. ... ...

... ... If you truly feel metta for yourself and others, you can’t let your desire for warm feelings of love and intimacy render you insensitive to what would actually be the most skillful way to promote true happiness for all.

[cf.] Mettā (Goodwill)

(i) #78.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72471653124917&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ii) #169.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3916179980464&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iii) #170.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3917406647008&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iv) #171.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3917983313617&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v) #180.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3963433309072&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vi) #181.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4038103301605&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vii) #182.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4735436565205&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cf.] Whom, when, how and how much to help:

(viii) #111.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81575188881230&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ix) #149.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
1094889330883149&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x) #44~#51.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68501266855289&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xi) #172.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3918676646881&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

[希修] You don't even have to try hard to like, please, pamper, think positively of, take care of or maintain a 'happy' personal relationship with someone. As long as you wish the person to reach true happiness on her own! by thinking, speaking and acting 'skillfully' (with no or less greed, anger and delusion/ignorance), it is goodwill (metta). As long as you drop your desire to revenge, it is forgiving. The essence of all these five (forgiving and the four sublime states) is in fact the accurate understanding of karma; they are not about being gullible or self-sacrificing but about cause and effect.

Why does anyone help other beings? 
(a) Because goodness or virtue helps to mitigate the consequences of one's own past bad karmas; 
(b) Because suffering tends to spill over and spreads to everyone around; 
(c) Because even those who made some bad karmas in the past deserve compassion. 

Although Buddhism says that everyone deserves compassion (the kind of mind a medical doctor would have toward a patient), Buddhism does not say everyone deserves love automatically.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89258058112943&set=a.1042727616099321&type=3&theater

* metta, goodwill, not lovingkindness, true happiness, action, skillful, harmless, independence, self-reliance.


4You, 崔明淑 and 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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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알라딘: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

알라딘: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 - 생명현상과 연기 그리고 공 

유선경,홍창성 (지은이)운주사2020-02-10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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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쪽148*210mm (A5)437gISBN : 9788957465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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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자성自性의 존재를 주장하는 본질주의를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연구해 온 서구의 생명과학은 이미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진화론이나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과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서구의 본질주의라는 철학적 토대에서 기인한다. 이에 대해 필자들은 불교의 연기법과 공의 관점으로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재해석함으로서 이런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본질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방법론을 선보인다.

목차

들어가면서 5



I. 불교로 이해하는 생명과학

1. 생명현상과 붓다의 가르침 23

진화의 산물인 생명체 23 | 상호의존적 생명체 24 | 무상한 생명체 25 | 본질 없이 공空한 생명체 27 | 공空한 생명체의 의미 29

2. 불교로 이해하는 생명과학 34

연기 34 | 무상 38 | 공 40 | 공한 생명체 43

3. 깨달음과 자비, 그리고 생명현상 45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45 | 불자들의 행위의 기준 49 | 생명현상과 자비행 52



II. 생명과학과 깨달음

4. 깨달음, 세계관의 혁명적 변화 61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62 | 현응스님의 돈오 66 | 생명과학혁명 69

5. 깨달음과 생명과학 방법론: 환원론에 대한 오해 1 73

환원이란 무엇인가 74 | 환원론에 대한 오해 76 | 미시구조적 환원 81

6. 깨달음과 생명과학 방법론: 환원론에 대한 오해 2 85

환원론에 대한 또 다른 오해 85



III. 개체

7. 발생의 불교적 이해 1 99

발생과 연기 99 | 발생과 생명 105

8. 발생의 불교적 이해 2 113

본질 없이 공空한 배아줄기세포 113

9. 노화의 불교적 이해 123

노화에 대한 오해 123 | 노화는 없다 125 | 노화도 공空 133

10. 병듦의 불교적 이해 136

병이란 무엇인가 137 | 병의 불교적 해석과 극복 142

11. 죽음의 불교적 이해 1 149

죽음이란 무엇인가 149 | 논리적 개념으로서의 ‘죽음’ 151 | 세포의 죽음(cell-death or apoptosis) 154 | 죽음과 윤회 161

12. 죽음의 불교적 이해 2 162

죽음과 나 162 | 생명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163 | 태어나지 않았으니 죽지도 않는다 167 | 죽음에 대한 불교적 낙관주의 169



IV. 종種(Species)

13. 종種의 불교적 이해 1 177

종과 본질주의 178 | 다윈의 종과 미완의 반反본질주의 180 | 종 개념의 문제 183

14. 종種의 불교적 이해 2 188

동일성을 찾으려는 인간의 집착 188 | 본질에 대한 집착의 연장 194



V. 유전자

15. 유전자 개념과 그 변천의 역사 201

고정불변한 유전자 203

16. 유전학에 대한 이분법과 불교적 반론 211

도그마의 붕괴 212 | 유전자의 상실 217 | 이분법적 유전학의 한계 218

17. 유전자의 불교적 이해 1 223

본질 없이 공空한 유전자 224 | 연기하는 유전자 226 | 기능적 속성으로서의 유전자 228 | 실체가 없이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유전자 231 | 개별자로서의 유전자 233

18. 유전자의 불교적 이해 2 234

활발발活潑潑한 유전자의 기능과 분자망(molecular net) 235 | 유전자 개별자와 분자 네트워크 239



VI. 진화

19. 진화란 향상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 249

18세기까지 ‘진화’의 개념 250 | 다윈의 진화 255

20. 결정론도 아니고 비결정론도 아닌 연기의 과정 260

굴드의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 261 | 결정론 264 | 제약들(constraints) 267 | 철학적 고찰 269

21. 우연과 필연의 재해석 272

모노의 우연과 필연 273 | 모노의 문제 274 | 우연과 필연을 넘어 연기로 280

22. 다윈이 남긴 과제 283

다윈이 남긴 과제 하나 283 | 다윈이 남긴 과제 둘 289

23. 불교의 진화 1 296

연기 297 | 사성제와 팔정도로 진화한 연기 300 | 연기로부터 진화한 무상, 무아, 고苦의 삼법인 302 | 방편方便과 진화 307

24. 불교의 진화 2 310

남전불교와 북전불교 310 | 연기와 공 312 | 윤회가 열반이다 314 | 선禪 316 | 현대의 불교 318 | 다시 연기로 322



미주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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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신문 2020년 2월 14일자 '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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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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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분자생물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미국 브라운대학교 세포분자생물학 박사과정 및 텁스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을 수학하였으며, 미국 듀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Minnesota State University, Mankato)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생명과학철학과 과학철학 및 인지과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와 한글로 발표해 오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과학의 철학』이 있고, 홍창성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했다.

최근작 :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생명과학의 철학> … 총 2종 (모두보기)

홍창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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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브라운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지난 20여 년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Minnesota State University Moorhead)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불교철학 분야의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다.

저자는 지난 2015년에 시작되어 국내 불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깨달음 논쟁’ 당시 누구보다 많은 분량(8편)의 글을 기고하며 논쟁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이후 월간 『불광』, 『불교문화』를 비롯한 매체에 불교철학 관련 글을 연... 더보기

최근작 :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 총 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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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분야 : 불교 7위 (브랜드 지수 87,539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1.

존재하는 어느 것도 아무 원인과 조건 없이 무無로부터 나온 것은 없다. 사물은 조건이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 즉 사물은 조건에 의존해서(緣) 생겨난다(起).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이다.

이 책은 생명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불교에서의 연기와 공空의 관점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필자들은, 연기와 공의 관점이 단순히 기존 방법론과 양립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예측해야만 제대로 된 생명과학 연구가 가능하고, 따라서 생명현상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을 창시한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천 년 동안 서구에서는 고정불변한 자성自性의 존재를 주장하는 본질주의를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연구해 왔다. 하지만,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여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생명 세계를, 불변하는 본질(自性)의 존재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생명과학은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20세기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난관에 직면해 왔다. 이에 이 책은 존재 세계를 꿰뚫는 연기법과 그것의 대승불교적 해석인 공의 관점으로 서구적 본질주의와 실재론이 직면한 난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생명과학과 불교의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2.

이 책의 논의는 크게 여섯 주제로 나누어져 있다.

첫 주제인 ‘I. 불교로 이해하는 생명과학’에서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연기, 무상, 공, 깨달음, 그리고 자비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이 가르침들이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논의하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연기법과 그로부터 도출된 불교의 가르침이 존재 세계를 관통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부인 생명현상도 꿰뚫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둘째 주제인 ‘II. 생명과학과 깨달음’에서는 과학이론의 교체가 마치 정치체제의 근본적 교체와 같이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생명과학의 혁명적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의 서구적인 본질주의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벗어나 연기와 공의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셋째 주제인 ‘III. 개체’에서는 생로병사의 실존적 문제를 생명과학 안에서 구체적인 예를 통해 논의한다. 생로병사라는 현상을 생명과학적으로 고찰하다 보면 결국 연기와 공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관조해 보면, 생로병사가 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계의 변화 과정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불교적 생명과학이 주는 통찰로도 우리가 생사生死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넷째 주제는 ‘IV. 종種’이다. 여기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소개하면서 생명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어져 온 고유한 본질을 가졌다는 종의 존재에 대해 비판적 논의를 전개한다. 다윈 스스로도 종에 대한 본질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명과학자들이 보고해 온 종 본질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종과 관련한 생명현상도 연기와 공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이해해야만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섯째 주제인 ‘V. 유전자’에서는 유전자 개념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진행한다. 먼저 유전자의 개념이 역사상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살펴보고, 분자생명과학이 전제하는 DNA 분자로서의 유전자 개념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논의한다. DNA 분자들이 생명현상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유전자 중심 결정론은 연기와 공의 관점에서 수정 보완되거나 새로운 이론으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섯째 주제는 ‘VI. 진화’로서, 먼저 진화란 향상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이라는 다윈의 주장을 설명하면서 진화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불식시킨다. 그리고 진화와 관련된 섬세하고 진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다윈이 해결하지 않고 과제로 남겨 놓은 두 가지의 문제를 논의한다. 그리고 불교가 지난 2,500년 동안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를 보여주면서 논의를 마무리한다.



3.

이처럼 이 책은 본질주의라는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자성을 가진 인과법칙의 존재를 전제한 채 발전해 오면서 난관에 부딪힌 서구의 과학, 특히 생명과학의 문제에 대해, 불교의 연기와 공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 전혀 다른 형이상학으로 이런 문제들을 조명하고 새로운 해결점을 모색하고 있다.

생명현상에 대한 불교철학적 연구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고, 또 아직까지 충분히 진지한 논의가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생명과학과 불교철학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시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불교철학을 폭넓게 사고하고자 하는 독자들이나 과학 혹은 생명과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 모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독자들은 불교를 통해 생명현상(과학)을 이해하고, 생명현상을 통해 불교를 이해하는 색다른 지적 경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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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라는 합리적이고 심오한 도구로 현대 첨단과학의 하나인 생명과학의 세계를 진단하고 그 문제점과 불교적인 안목에서의 보완점을 제시한 흥미로운 책

바우 2020-05-0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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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전정가위로 생물학의 나무를 마구 잘라대 잎사귀 떨군 나무는 앙상해지고 가위에는 피가 묻은 모습...  구매

LJK 2020-03-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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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 새창으로 보기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며 저것도 소멸한다. (-34-)





온전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진리 자체에 대한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진리를 완전히 내면화해서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철저히 바꾸어야만 붓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7-)





환원이란 물체나 속성이 부분과 그들 각각이 이루고 있는 관계로 남김없이 분석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분해되어 없어진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그런데 분석을 통해 논리적으로 잘게 잘라진 부분을 계속 환원해 나가다 보면 결국 모든 물체는 소립자들과 그것들의 관계들로 환원될 것이다. (-83-)





우리가 세계를 색깔로 인식한다고 해서 세계에 색깔이 새로 생겨나 실재한다고 착각한다면 이느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인데, 이덕은 불교의 연기관에 어긋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우리의 인식체계가 만드는 색깔이라는 틀을 통해 경험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색깔이 창발되어 실재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불교적이지 않고 또 철학적 논증으로도 견지될 수 없는 견해다. (-111-)





질병과 장애를 구분하고 지칭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체 내의 구조적 기능적 변화를 질병이라고 정의하고, 이런 질병으로 인해 나타나는 표현형인 신체적 구조나 기능의 변화를 기형이나 장애라고 이해한다.그러나 실제로는 질병과 장애를 뚜렷이 구분하기 어렵다. (-139-)





이렇게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현재의 자연현상을 과거에 반복해서 일어났던 동일하거나 비슷한 자연현상을 예상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그런데 만약 자연에 법칙이 있다는 전제가 틀리거나 문제가 있다면, 생명현상이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발현된다는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그리고 각각의 동일한 무엇이 개개의 생명체 안에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발현된다는 근거도 없어지고 만다.그리하여 각각의 생명체 집단인 종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무색해지게 된다. (-191-)





다윈은 굵은 줄기에서 여러 가지가 뻗어 나가듯이 생명체의 조상인 종에서 새로운 종이 생겨난다고 생각했다.장미나무를 상상해 보자. 장미나무 가지들은 모두 밑동에서부터 뻗어난다.어느 가지는 다른 가지들보다 굵고 어느 가지는 다른 가지들보다 높이 뻗어나 자란다. 이런 가지 가운데 어느 가지가 다른 가지보다 고등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어진 가지가 밑동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고, 이 가지가 다른 가지들과 함께 어떤 특정한 가지에서 분리되었는가 하는 사실 뿐이다. (-256-)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삶과 죽음 즉 태어남과 소명되어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에서 유로 바뀐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학에 대해서 새로운 이론과 가치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여기서 저자는 서구의 기준으로 생명과학을 보지 않고, 동양의 불교에서 강조하는 연기와 공의 개념으로 생명과학을 분석하고 있었다.즉 우리가 마주하는 서구관에 입각한 생명과학은 그 본질에서 벗어나 있으며, 다윈의 진화론조차 진화가 아닌 변이의 개념으로 살펴 보고 있었다. 즉 생명은 태생과 소멸을 반복해 나가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들을 얻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생명과학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변화 속에서 우연적인 사건과 필연적인 계획에 의해 ,어떤 조건과 부합하게 되면, 형질은 변화하게 되는 이유였다.즉 이 책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개념들은 왜 생겨났으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 이해,우리 실생활에서 과학이란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있다'.





즉 인간은 수많은 개념들은 습관적으로, 때로는 집착과 인간이 만든 기준에 따라 분류해 나가고 있었다.그런데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상식처럼 보이지만, 자연의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비상식적이며, 깨달음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생명과학, 지구에 생명이 탄생될 수 있었던 이유를 불교의 연기론에 입각해 본다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즉 수많은 조건과 인과관계의 의해 지구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생명체는 나타나게 되었고,그 생명체가 서로 생성과 발생,노화와 소멸과정을 거듭하면서, 생명체는 다양해졌다.또한 인간의 노화는 불교의 연기론에 입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지구의 생명체가 평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또한 세포가 생성과 소멸을 할 수 있었기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하나의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각각의 기관이 분리되어 새로운 형태의 온전한 존재가 만들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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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20-03-16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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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6

希修 | '영성'? '깨달음'? '道'?

希修 | Facebook





希修  < '영성'? '깨달음'? '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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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깨달음', '道' 같은 단어들은 그야말로 텅 빈 기표가 된 것 같다. 말하는 이마다 뜻하는 바가 각기 다르고, 때로는 그저 신비주의만 풍길 뿐 자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본인조차 설명을 못 하기 때문. 그런 것들이 상식이나 논리의 차원을 초월하기에 언어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해도 설명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멋진 옷' 같은 詐欺나 환상/망상과 어떻게 구분하겠는지.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현재 이해 수준에서의 초기불교 관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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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심리가 어떤 상태인지, 기가 몸안 어디서 어떻게 막혀 있는지, 어느 하늘나라에 어떤 용이 있는지 등을 보는 것을 '得道'라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한 번 재배하고 나면 땅의 힘을 소진시켜 몇 년간 땅을 쉬게 해야 한다는 인삼을 아침 저녁으로 챙겨 먹어 가며 건강/젊음에 집착하는, 마치 보톡스 중독자의 젊음 집착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그 이기적 욕심은 보지 못 한다. 신통력은 '선정' (정신의 집중으로 인한 고요함)에 수반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side effect일 뿐이고 '지혜'와는 무관하다고 초기불교는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건만, 예외적인 감각이나 질병 치유 능력을 이들은 '영성'/'지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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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들은 자기 내부의 '참 나'를 찾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얘기하는데, 결국 인도 베다전통에서 말하는 브라만-아트만이 그 뿌리.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성'이라고 단어만 바꿨고. 각 개인이 神의 '일부' (일부라고는 하지만 프랙탈 개념)인데 자신이 神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에 그 망각만 일깨우면 된다는 얘기. 그렇기에 Advaita 혹은 Nondualism이라고도 불리는 전통에서의 '수행'이라는 것은 '이승에 국한된 자아인 ego'가 하는 모든 생각을 비우고 'I am'을 되뇌임으로써 잠자고 있는 神性을 깨우는 것. 그리고 이런 철학을 이어 받은 뉴에이지는 미국에서 자기계발과 결합하여 "너는 신이기 때문에 너 자신의 감정을 신뢰해야 하고, 너는 신이기 때문에 니가 스스로를 믿기만 하면 며칠 안에 백만장자도 될 수 있다!"는 '복음'을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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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팔정도' (초기불교에서 '道'는 팔정도를 가리킬 뿐 '대자연의 신비/섭리'가 아님)의 전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은 이렇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어디 한 번 보자'의 단계를 지나 '아~ 이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구나! 그게 바로 이 얘기였구나! 이제 보니 진짜네!'하고 direct knowledge를 얻는 것을 말한다. 45년간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사성제'라는 단어로 대표하기도 하고, 그러나 가장 핵심 교리는 '12연기'이기에, "사성제를 깨닫는다", "12연기를 깨닫는다"고 해도 틀린 얘기는 아닌데, 암튼 중요한 것은 현상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재발견' 혹은 '확인'하는 것 - 단순히 '논리적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말해, 신비적인 게 전혀 아니라는 얘기다. (당신의 가르침은 "쥔 주먹"이 아니라 "편 손바닥" 같은 것이어서, 비밀스러운 것도 신비적인 것도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Direct knowledge까지 얻고 난 후! 모든 관념과 노력마저도 놓는 것은 '강의 건너편인 해탈에 다다랐으니 이제 뗏목에서 내림'인 것이고. (무조건 생각/이성을 놓으라고 말하는 다른 전통들과 달리, 아직 강의 이쪽편에 있으면서 무작정 생각부터 놓으면 축생으로 윤회할 뿐이라고 아비담마는 가르친다.) 요약하여, 선정의 도움을 받아 '지혜를 계발'( =탐진치 감소)해 나가다 보면 direct knowledge를 거쳐 해탈하는 것이고, 신통력은 지혜나 해탈과는 별개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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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in Kang

명쾌합니다! 아직도 불교 공부하려면 한자를 잘하고 불교한자를 제대로 익혀야한다고 믿는 분들이 태반이니... 한국어로 초기불교 소개하시는 분들도 결국 한자어에 의존 안 할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2020/08/23

03 불교평론 초기불교의 사상·윤리성에 비추어 본 한국불교 / 김종명



불교평론
초기불교의 사상·윤리성에 비추어 본 한국불교 / 김종명
특집-현대 한국불교의 비판적 성찰


[17호] 2003년 12월 10일 (수) 김종명 jmk@ysu.ac.kr




1. 머리말

“머리 깎은 스님이나 부처를 믿는 신도나 부처님 말씀을 모르고 있다.”

1967년 해인사 초대방장으로 취임한 성철(1912∼1993) 스님의 사자후다.1)1) 〈성철 스님 《백일법문》으로 겨울나기〉, 〈중앙일보〉 2003년 11월 22일(27면).

나2)도 이 견해에 동의하며, 이 점은 여전히 한국불교계의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불교는 부처가 경험한 다양한 형태의 삶의 산물로서 인간 삶의 진단, 고통의 원인 및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 인생교육시스템이었다. 2) ‘필자’보다 책임성이 강조된 개념이며, 국내의 일부 학계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 역사상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전통’3)은 그 수입 초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내려 왔으나, 인생교육시스템으로서의 ‘초기불교’4)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현실적 삶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불교의 기본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3) 이 전통은 최근 ‘기복불교’란 개념으로 칭해지고 있다. 기복불교의 비판론에 대해서는 《불교평론》 7호(2001년 여름호), 9호(2001년 겨울호), 14호(2003년 봄호) 관련 부분 및 홍사성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와 문화》 1·2호(2002) 참조. 기복불교를 옹호한 데 대해서는 〈법보신문〉 2002. 3. 13 등 참조. 이 글에서의 기복불교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이 자료들에 의하였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한국불교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사유체계와 삶의 양식으로서의 초기불교의 성격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와 그 실천화가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현대의 한국불교계를 진단하고, 국내외의 불교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분석한 후, 이를 바탕으로 사상과 윤리로서의 불교와 그 현대적 중요성을 검토하기로 한다.

한국불교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가진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그것이 부처의 말씀과 어떻게 어긋나는지 근거를 제시한 후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으며,5) 사상·윤리6)로서의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 몇 차례에 걸쳐 견해들을 발표해 왔다. 따라서 이 글은 나의 기존 견해들에 대한 종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여기서의 ‘초기불교’는 부처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뜻한다. 초기불교의 가르침, 생활, 수행법 등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 본다〉, 《불교평론》 14호(2003년 봄호) 참조.
5) 박영록, 〈‘기복불교를 말한다’를 말한다〉, 《불교평론》 9호(2001년 겨울호). 6) 여기서의 ‘사상’은 ‘사회 및 인생에 대한 일정한 견해’를, ‘윤리’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의미한다. 이들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숭녕 감수, 《새국어대사전》 (서울: 한국도서출판중앙회, 1997), p. 586

2. 한국불교계 진단

1) 한국불교의 현재
한국 역사상 전개된 불교의 중요성은 역사적·문화적·교육학적·철학적 측면 및 한국학의 세계화 등의 다방면에서 찾을 수 있다.7) 7) 김종명, 〈21세기와 한국불교〉, 《불교연구》 제7집(서울: 한국불교연구원, 2000), pp.259∼30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불교학의 연구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며,8)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상대적 위상 및 현대 한국의 여론 주도층 중 불교 관련 인사가 차지하는 비율도 상당히 낮다.9) 한국인들은 복을 받고 태어나서, 복을 빌며 살다가, 복을 비는 마음으로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것에 대해 운명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에는 인과응보의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를 불교사상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10) 8) 김종명, 〈한국불교학계의 연구활동: 분석과 평가〉, 《종교연구》 제27집(2002년 여름), pp.87∼118. 9) 김종명, 〈국제대학원과 한국학의 세계화〉, 《국제한국학회지》 제2권(1997), pp.179∼182. 10) 황인규, 〈기복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불교평론》 7호(2000년 여름호).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반 학계, 승단 및 세속 세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의 한국불교계는 제사 만능주의를 표방하여 부처의 비판을 받은 그 당시의 브라만교를 방불케 하고 있는 것이다.11)11) 유동호, 〈기복주의를 넘어 공덕주의로〉, 《불교평론》 7호(2001년 여름

결과적으로, 불교는 기복 위주의 ‘종교’로만 간주된 채 인문교양교육에서도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학도 국내학계의 주변학문으로 밀려나 있다. 이는 현재 세계불교학계를 리드하고 있는 국가의 하나인 미국의 경우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의 불교학 연구가 특히 1980년대 이후 ‘폭발적 성장’세를 보여 온 현상12)과는 아주 다르다. 12) 김종명, 〈국내 불교학 연구의 방향〉, 《철학사상》(2000. 11) 111호, p.70.

더욱이 불교 개념들인 ‘홍익인간’과 ‘원융무애’를 교육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는 나의 재직 대학교의 인문학 전공 교수들도 불교는 종교이며, 이 대학교 교양교과목 편성의 한 원칙인 종교성 배제의 원칙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불교 관련 교과목은 교양교과목이 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불교종단의 고위 행정직을 역임하고 있는 승려들과 사찰의 승려들도 기복신앙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부채질까지 하고 있으며, 현대 한국 불자들의 대부분도 복을 빌기 위해 절에 나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13) 13) 홍사성, 2002.

따라서 비불자들 중 상당수도 불교를 개인 차원의 기복종교로 생각하는 경향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는 무속과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14) 불교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시각의 원인은 무엇인가? 14) 한명우, 〈기복불교의 실태와 문제점〉, 《불교평론》 7호 (2001년 여름호).



2) 원인 분석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다양하다. 초기불교의 자연관, 인생관, 세계관은 각각 사대설, 업보설, 십이처설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사상적으로 이러한 초기불교를 이은 것이 아니다. 한국불교는 초기부터 중국 고유의 자연관, 인생관, 세계관인 풍수지리설·조상숭배설·천견재이설(天譴災異說)에 사상적 토대를 둔 채15) ‘기복불교’로 자리매김 되어 왔으며, 대내외적으로도 왜곡 이해된 역사를 가졌다. 15) 김종명, 《한국중세의 불교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서울: 문학과지성사, 2001), pp. 206∼272. 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문제와도 직결된 이 주장에 대한 학계의 반응을 기대해 왔으나, 아직 별 반응이 없다.

대내적으로는 현실과 타협한 승단의 정치적 예속, 과거 중국불교 전통의 묵수적 수용,16) 근대 일본 불교학계의 연구 성과에 대한 무비판적 계승,17) 현대 한국승가 교육과정의 문제,18) ‘불립문자’에 대한 오해, 교리에 대한 무지19) 등에서, 대외적으로는 왕실에 의한 기복종교화, 유학자들에 의한 허무의 종교 및 비도덕적 종교로의 잘못된 이해,20) 근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한 미신으로의 곡해, 근대 교육과정 수립시 구시대의 유산으로 치부된 점 등이 그 이유들로 나타난다. 

16) 카마다 시게오(鎌田武雄) 지음, 장휘옥 역, 《중국불교사》(서울: 장승, 1993), p. 21. 이러한 경향은 국내의 중국사 연구 및 의학계의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는 각각 김태승, 〈중국근대사 인식의 계보와 유산〉, 한국사연구회 엮음, 《20세기 역사학, 21세기 역사학》(역사비평사, 2000), 82쪽 및 이종찬, 〈동서 의학의 문명사적 비교〉, 영산대학교 제6차 한의학 학술대회(2003. 11. 7) 발표논문, pp.15∼16 참조. 따라서 비판문화의 부재는 국내 동양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7) 국내 불교학계에서는 화엄사상과 정치권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해 왔으나, 이것은 근대 일본 불교학계의 연구성과를 답습한 결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최연식, 〈화엄철학은 어떻게 일본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 《불교평론》 6호 (2001년 봄호) 참조. 18) 김종명, 〈현대사회와 승가교육〉, 《한국불교학》 제28집(2001), pp.485∼518. 19) 조준호, 〈기복불교는 불교인가〉, 《불교평론》 7호(2000년 여름호). 20) 김종명, 〈퇴계의 불교관: 평가와 의의〉, 《한국인의 원류를 찾아서》, 퇴계 탄신 500주년 기념 계명 한국학 국제학술대회 논문집(2001. 9. 16∼20), pp.59∼78. 김종명, 〈불교쟁론 23: 주자의 불교 비판〉 상·하, 〈법보신문〉 1999년 10월 13일∼20일 (12면).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원인들도 내부적 원인의 산물로 간주되므로 현대 한국사회에서 한국불교가 가진 낮은 위상의 궁극적 원인은 불교계 내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바람직한 인생교육을 위한 사유체계로서 출발한 불교의 진면목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결과로 생각된다.

특히, 기복불교는 역사상의 한국불교를 사실상 특징지워 온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다. 이는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난 현상인 동시에 한국불교를 낙후시킨 대표적 병폐기도 하며,21)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되어 온 지도 오래다. ‘통불교’ 개념22) 및 ‘법통설’23)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특징적 개념으로 간주되어 온 ‘호국불교’24) 개념도 기복불교 개념의 외연적 확장에 다름 아니다. 21) 〈불교포럼: 기복불교의 대안〉, 〈현대불교〉 불기 2545[2001]. 9. 19. 22) 이 개념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서는 심재룡,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 《불교평론》 3호(200년 여름호) 및 Jaeryong Shim, “On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Korean Buddhism-Is Korean Buddhism Syncretic?” in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2 (1989), pp.147∼157 참조. 이 개념에 대한 긍정적 시각에 대해서는 이봉춘, 〈회통불교론은 허구의 맹종인가〉, 《불교평론》 5호(2000년 겨울호) 참조.
23)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박해당,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철학사상》 제11호 (2000. 12), pp.43∼62. 길희성, 〈한국불교 정체성의 탐구: 조계종의 역사와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종교연구》 제2집(2000), pp.159∼193 참조. 24) ‘호국불교’ 개념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김종명, 2001, pp.277∼286. 김종명, 〈‘호국불교’ 개념의 재검토-고려 인왕회의 경우〉, 《종교연구》 제21집(2000년 가을), pp.93∼120. Benard Senecal, “On Writing a History of Korean Buddhism: A Review of Books,” in Korea Journal(Spring 1997), pp.154∼177. Jong Myung Kim, “Chajang (fl. 636∼650) and ‘Buddhism as National Protector’ in Korea: A Reconsideration,” in Religions in Traditional Korea, ed. Henrik H. Sorensen, SBS



따라서 유교의 경우 종교로의 자리매김이 현대 한국에서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25)되고는 있으나, 나는 불교가 종교로만 간주되고 있는 점이 인문학으로서의 불교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기본법상의 제약 때문이다. 교육기본법(敎育基本法, 제정 97. 12. 13 法律 第5437號) 제1장 總則에서는 종교교육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한정시키고 있다. 제4조 (교육의 기회균등)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신념,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 또는 신체적 조건 등을 이유로 교육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6조 (교육의 중립성)
2항: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학교에서는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된다(시행일 98. 3. 1).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각자가 믿는 종교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나, 국공립학교에서의 특정 종교교육은 금지되고 있다. 나름대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교육업무를 추진하고 있는 선진 외국의 교육기관들과는 달리, 국내의 국공립학교에서 시행되는 교과과정들은 사립학교에서도 답습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법에 따라 국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가 교수되지 않는다는 것은 종립학교 이외의 사립학교에서도 종교는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국내의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일반 교육 현장에서 특정 종교를 교수할 수 없는 국내의 교육 현실 속에서 불교가 종교로 정의되고 있는 점은 인문학으로서의 불교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못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26) 26) 김종명, 〈21세기와 한국불교〉(2000), pp.266∼267.

따라서 나는 무엇보다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인생교육체계로서의 불교의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된 후, 그것의 한국에서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검토가 이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의 성격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 대한 오해는 곧 불교의 성격에 대한 오해의 산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3. 불교의 성격 검토

불교의 성격은 무엇인가? 철학인가? 종교인가? 양쪽 모두의 성격을 가진 것인가?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위의 물음들은 일견 진부해 보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현대 한국이란 지역에 한정시킬 경우 아주 중요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한국에 소개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기복종교로 간주되어 왔을 뿐, 부처의 가르침은 한국 역사상 대중화되지 못한 가운데 불교의 성격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우리의 학계에서나 승단에서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성격에 대한 해석과 관련, 국내외의 견해들을 살펴보고, 이 견해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해 보자.

1) 국내의 경우
국내에서 불교는 크게 승단과 학계를 통해 수행 및 연구되고 있으며, 불교학계는 다시 종립대학교와 비종립대학교로 구분된다. 이들 집단 간의 불교의 성격에 대한 시각은 다르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 승단에서 불교는 기복종교로 간주되는 경향이 절대적이며, 동국대학교를 비롯한 종립대학교의 경우도 불교는 신앙 우선, 학문 그 다음이란 차원에서 취급되고 있다.

반면 비종립대학교에서는 학문, 특히 철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고 있으며,27) 불교에 관심을 가진 국내의 일부 서양철학자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또한 비불교 전공자에 의한 불교 교육도 상당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성격과 관련,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승단과 종립대학교의 역할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불교를 기복종교로서만 인식하게 하는 한 근본 요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27)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학문계로부터 역풍이 분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Robert E. Buswell, Jr., The Zen Monastic Experience: Buddhist Practice in Contemporary Korea(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p.71 및 로버트 버스웰 지음, 김종명 옮김, 《파란 눈 스님의 한국선 수행기》(서울: 예문서원, 2000), p.99 참조.


2) 서양의 경우
과거 서양에서도 불교는 종교란 편견과 철학이란 편견이 동시에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양에서 불교를 종교의 틀로만 보려는 견해는 중세 이후 기독교를 철학 및 과학과 적대시하여 종교로만 국한시켜 온 버릇에 기인한다.

또한 세계 불교학 연구의 초기에 해당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불교학 연구는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중하였으며,28) 이를 수입한 일본 불교철학계도 이 전통 위에 서 있었다. 한국불교계는 일제시대를 통하여 이러한 일본의 학풍을 다시 수입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한국 불교철학계의 전통이 되었다. 28)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우친 점은 한국의 동서양철학계의 공통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김종명, 〈한국 역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논쟁 학설들의 철학적 분석〉, 《한민족과 2000년대의 철학》①, 한민족철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의 3요소인 신, 경전, 신자에 바탕을 둔 이러한 주장은 서구의 기독교에 기준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불교를 비롯한 아시아 종교와 많은 원시종교를 배제한 결과를 가져왔다. 불교가 기존의 종교란 틀 속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의 경우 불교는 일차적으로 기복종교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상도 시대적 산물이란 대전제에 비추어 볼 때, 과거의 기복불교 전통이 현대에도 그대로 수용되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기복이라는 종교행위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연기설과 그것에 바탕을 둔 업설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복을 빌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교에는 복을 빌 대상이 없다. 또한 불교의 중심교리에는 주술이나 기도로써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르침도 없다. 학자들이 이 시기의 불교야말로 인류 종교사에서 가장 비판적, 지성적, 이지적, 합리적, 계몽적 종교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29)29) 조준호, 2000.


소수의 지식층들이 활동하던 과거에는 대부분의 비지식층 대중을 위한 방편설로서의 기복 강조도 나름대로는 시대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경향은 지구촌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처럼 사회적·경제적 박탈감이 강한 국가일수록 그에 대한 심리적 보상 차원에서 종교에 기대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문맹률 측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지식수준이 높아진 현대에서까지 기복신앙이 불교신행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 따라서 유럽 및 북아메리카 등 서구 선진국일수록 기독교 신자가 감소하고 있는 점30)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30) 박정호, 〈부자 나라 기독교 쇠퇴 뚜렷〉, 〈중앙일보〉 2003년 11월 5일 31) 반면, 미국의 불교인들 중 대부분은 유럽계 백인, 고학력 중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별 차이도 크지 않다. 〈불교신문〉 불기 2547(2003)년 11월 26일 참조. 32) 김종만,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 《불교평론》 14호(2003년 봄호).

현대 한국사회의 불자들은 40대 이상, 여성, 비전문인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31)

길어야 20∼30년 후, 이들을 이을 다음 세대를 위한 한국불교계의 대안은 무엇인가? 중등교육이 이미 의무화되었으며, 고교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현대의 한국에서 여전히 기복불교 선양에만 열을 올릴 것인가? 이는 한국불교계의 생존 전략으로서도 부적절하다. 오히려 포교 차원에서도 초기불교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종교다원주의 시대인 현대에서 근본주의적 관점에 서서 초기불교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의 한국불교가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32)

불교를 철학으로 이해하면서,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중해온 서구의 불교학 연구 전통은 불교의 수행면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불교의 중요 교학들은 철학적·논리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참선 경험의 산물이다. 이 점은 불교가 합리적·관념적 분석을 중시하는 서양의 철학적 사유구조와 다른 이유다. 불교 텍스트의 내용들이 수행의 목표를 위한 방편설이란 점을 간과한 것이다.33) 33) Sungtaek Cho, “Rethinking Current Buddhist Studies in Korea,” in Collection of Papers of the 9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더욱이 대부분의 불교이론들도 그렇게 오래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론들 자체에 대한 연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또한 불교와 서양철학은 각각의 독특한 문화적,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전개된 사유체계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사유적 전통에 의해 다른 사유 전통을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단순히 철학의 영역이나 종교의 영역에만 속한다고는 할 수 없다. 불교는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서양철학과는 달리 삶의 양식과 신념 체계를 동시에 의미하는 사상체계34)이며, 불교에서의 이 두 영역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초기불교의 성격과 관련하여 현대의 세계불교학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도 불교는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5)34) 서구에서는 최근 이러한 사유체계를 ‘ethnophilosophy’란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35) Frank E. Raynolds and Charles Hellisey, “Buddhist Religion, Culture, and Civilization,” in Buddhism and Asian History, Joseph M. Kitagawa and Mark D. Cummings, ed. (New York: Macmillan


4. 사상·윤리로서의 불교

초기불교의 핵심 사상들은 사성제·연기설·사대설·오온설·십이처설·삼법인설·팔정도 등이며, 이 이론들은 철학의 일반적 관심사인 존재론·인식론·윤리론뿐 아니라, 서양철학에서는 결하고 있는 수증론(修證論)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철학이며, 해탈의 종교로서 철학적으로는 실재론과 운명론을 극복하면서 구체적 현실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를 통해 합리적으로 사는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도덕적 덕목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윤리적 교육체계로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극복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1) 사상으로서의 불교
사성제의 일부, 연기설·사대설·오온설·십이처설·삼법인설은 사상으로서의 불교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론들이다.

사성제는 인생 진단(苦), 인생 현실의 원인(集), 인생의 목표(滅), 바람직한 삶의 방법(道)에 대한 이론으로서 불교의 총체적 가르침이다. 이는 곧 인생교육시스템이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른 생각과 바른 행위다. 특히 ‘고’와 ‘집’은 철학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는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인생에 대한 부처의 진단 결과를 지칭하는 용어다. 인생을 통하여 누구나 상대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쁨의 순간도 경험하게 되는데, 인간 삶 전체를 고통으로 보는 시각은 자칫 허무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오해의 산물일 뿐이다. 불교가 제시하는 고통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불만족’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통하여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지만, ‘불만족’을 고통의 내용으로 포함시킨 것은 불교만의 특징이다. 인생살이를 통한 기쁜 경험도 일시적이며, 그것이 달성된 후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을 지속적으로 바라는 것이 일반적 인생사란 점에서 기쁨의 경험도 고통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을 초래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집’의 개념으로 나타나며, 그 내용은 무분별한 욕망이다. 불교에서의 욕망은 존재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무지, 즉 무명의 산물로 간주되어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욕망이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부정의 대상은 잘못된 인식의 결과로 인한 무분별한 욕망이며, 올바르고 정당한 욕망은 오히려 긍정된다. 불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무명 상태의 인간은 잘못된 언설적 개념화에 의해 탐·진·치의 삼독으로 대표되는 잘못된 욕망을 일으키고, 이러한 욕망에 의해 이기적 행위를 포함한 잘못된 행위를 하게 되며, 그 결과 고통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표는 이러한 무명의 타파와 욕망의 극복을 통해 존재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를 얻어 마음 속의 번뇌가 없어지게 된 상태에 이르는 데 있는데, 이러한 마음의 자유 상태를 열반 또는 해탈이라 한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며, 그 뜻은 모든 현상은 수많은 1차 원인(因)과 2차 원인(緣)의 결합에 의해 생긴다는 것, 즉 모든 존재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성 속의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들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한 이론인 연기설은 사성제와 함께 불교의 핵심 사상을 이루고 있으며, 부처도 ‘법(현상, 세계)을 보는 것은 연기를 보는 것이며, 연기를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연기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 이 이론은 현대 물리학계로부터도 상당한 설득력을 인정받고 있다.

사대설은 존재의 물질적 구성 요소에 대한 이론이며, 모든 존재는 흙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공기(혹은 바람)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피부·살·머리카락·발톱 등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혈액과 체액 등은 물로 환원되므로 각각 흙의 요소, 물의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본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대사열 및 체온 등은 불의 요소, 날숨과 들숨 등은 공기의 요소로 간주된 것이다. 이 설은 불교 이전 인도의 존재 구성 요소설에 입각한 것으로서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보면 초보적인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온설은 불교의 인간관이며, 인간은 오관(눈·귀·코·혀·몸)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요소(色)와 일련의 정신작용, 감수작용(受)·인식작용(想)·의지작용(行)·판단작용(識)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감각기관과 대상 사이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감수작용 단계에서는 대상에 대한 좋음, 좋지 않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의 세 가지 중 한 가지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대상에 대해 호감을 가질 경우, 정신작용은 그 다음 단계인 인식작용으로 진행되게 된다. 여기서는 대상의 특징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게 되며, 그 결과가 긍정적일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는 의지작용 단계를 거쳐, 소유 결정에 이르는 판단작용에 이르게 되며, 이는 곧 행동으로 나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사대로 구성된 오관을 통해 사물을 받아들이고,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일련의 정신작용을 거쳐 행동을 하는 존재란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작용은 항상성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갖가지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이론을 통해 인간에 대한 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란 말은 우주, 자연, 대상, 객관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인간 인식의 모든 대상이 되는 존재로서 법(法, dharma)이라고 표현된다.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이 객관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며, 이는 십이처설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사유체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사유의 산물이다.36) 36) 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김종명, 〈불교의 세계관〉, 《求道》 (1997. 5), pp.7∼12 참조.


십이처설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意) 등 6근과 인간의 감각기관인 오관의 대상과 마음의 대상인 세계(法)인 6경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며, 그 핵심은 ‘인식 없이 세계 없다’는 것이다. 객관 대상인 세계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관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일 뿐이란 것이다. 그러나 오관 스스로가 각각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란 점은 아주 중요하다. 일례로, 특정 대상을 주시하고 있더라도, 의식 없이 그것을 봤을 경우에는 무엇을 봤는지를 기억할 수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오관을 기능케 하는 ‘그 무엇’을 일컬어 억지로 마음, 의, 의식 등등으로 지칭하였으며,37) 마음은 인간 존재와 세계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인간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즉 세계는 나의 마음의 산물(一切唯心造)이란 시각이며, 마음을 통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은 서양의 신(神) 중심적 세계관 및 유교의 형이상학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현대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론이다. 37) 교학불교와 선불교를 포함함 불교역사상 마음에 대한 다른 명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삼법인설은 존재에 대한 속성론으로서 불교만이 가진 독창설이다.

그 내용은 (1) 모든 존재란 시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생멸을 반복하기 때문이며, 오온으로 구성된 인간도 예외는 아니란 것이다. (2) 모든 존재는 공간적으로도 실체가 없다는 것(諸法無我)이다. 이 이론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중의 하나로서 존재의 본질과 참모습에 대한 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불교 흥기 당시 인도의 정통종교였던 브라흐만교엔 없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보통 자신, 혹은 영혼 등의 한 부분은 적어도 변치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상정된 영원한 자아에 묶인 삶을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무집착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이론은 자아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 아니라 ‘참 자아’를 찾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3)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존재(一切皆苦)란 것이다. 인생살이를 통해 인간이 겪게 되는 대표적인 고통은 4고(태어남·늙어감·병듦·죽음)로 표현되며, 이것의 확대된 형태는 8고(태어남·늙어감·병듦·죽음·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싫어하는 이와의 만남·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오온에의 집착)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의 의미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있다. 일반적으로 범부들은 존재의 현상에 집착하여 판단을 내리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겪게 되므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어려움을 줄이거나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불교의 주요 사유체계들은 불교의 존재론·인식론 및 세계관을 대표하는 것들이며 인간의 의지, 즉 ‘마음’을 모든 존재의 근본으로 본 데 그 핵심이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기복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복도 잘못된 마음의 산물이며, 그 속성도 영원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른 건강한 삶을 살 때, 복은 부수적으로 따른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일 것이다.

이들 초기불교 교학들은 후대에 전개된 부파불교 전통의 대표적 학파들인 상좌부·대중부·설일체유부, 대승불교 전통의 중관학·유식학, 한국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불교 전통의 화엄종·천태종·선종·정토종 등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역사상의 불교전통에서는 주인공인 불교의 내용보다는 부수적인 ‘방편설’이란 이름의 기복신앙이 주인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이 점은 반성적 시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더 이상 묵수나 추종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복불교란 기치 아래 ‘부처 팔아 밥 빌어먹는’ 일은 이제 불식되어야 한다. 이 점은 한국 역사상 시대별 대표 승려들이었던 원효(元曉, 617∼686), 지눌(知訥, 1158∼1210), 휴정(休淨, 1520∼1604),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질타했던 일이기도 하다.

2) 윤리로서의 불교
불교에서는 인간 행동의 범주를 몸에 의한 행동(身業), 입에 의한 행동(口業), 뜻에 의한 행동(意業)의 3가지로 분류한다. 따라서 불교윤리의 목표도 이 삼업의 청정화에 두고 있으며, 특히 의업은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간주되어 가장 중요시 된다. 불교의 윤리성은 사성제 중의 네 번째 가르침인 팔정도에서 잘 나타난다. 팔정도는 계·정·혜의 삼학으로 구성된 바람직한 삶의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서, 특히 계의 항목들―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바른 정진―은 불교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후대에 전개된 5계·8계·10계 및 이삼백여 가지에 달하는 비구(니)계 등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소승불교 전통에서도 계율은 깨달음만큼 중요시되었으며, 계율은 깨달음의 하위 개념도 아니었다. 특히 대승불교권에서 잘 알려진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는 윤리로서의 불교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도림선사(道林禪師, 741∼824)의 대화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송나라에서 1004년에 편찬된 《경덕전등록》에 전하는 이 게송의 내용은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선을 중시해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맑게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重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란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불교는 곧 윤리적 가르침이었으며, 그 핵심은 마음 수행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처는 자신의 교설의 목적을 행복(열반)을 얻는 데 두고 있었으며, 삼독을 없애는 것도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는 곧 도덕의 완성을 의미하였다. 윤리로서의 불교는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확신이란 철학적 기초 위에서 자리이타를 지향하는 윤리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그 핵심은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칠불통계게의 핵심도 단순히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하라는 윤리적 교훈으로서보다는 청정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있으며, 그것이 바로 불교의 본질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윤리로서의 불교도 바른 마음가짐에 의한 바른 행동을 강조하고 있을 뿐 기복을 중요시하고 있지는 않다.

3) 현대적 중요성
불교의 철학적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시한 합리적 세계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는 사회의 변혁과 인류 공동의 행복이 개개인의 올바른 세계관과 이에 근거한 삶의 양식의 변화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자아변혁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38) 38) 안옥선,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초기불교윤리에의 한 접근》(서울: 불교시대사, 2002), pp.103∼105.


이 점은 기존의 동서양의 세계관과는 아주 다르지만, 합리적인 것이다. 세계란 형이상학적 실재인 신의 창조물이란 시각이 서양의 전통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었다면, 동양 성리학의 세계관은 세계 존재 이유로서의 이치와 다양한 만물이 생기기 이전의 태초의 세계를 ‘있다’고 보는 믿음 위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분석적·합리적·구체적 관점에 서 있다기 보다는 실유론적·형이상학적·사변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다.39) 39) 김종명,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하여: 그 동양철학적 모색〉, 황필홍 외,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서》(서울: 한맥, 1997), pp.115∼147.


그러나 불교의 세계관은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유 없이 존재 없다’는 십이처설의 메시지는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 세계관의 현대적 중요성은 기존의 동서양철학이 가진 존재론적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에서 살필 수 있다. 이는 곧 불교의 윤리학적 특징으로도 이어진다.

현대의 종교는 윤리적 요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더욱 넓게 정의되고 있으며, 이 점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전통도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40) 연기론적 존재론과 상황윤리론을 바탕으로 한 불교윤리의 현대적 중요성은 현대 윤리학이 직면해온 합리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40) Mircea Eliade, ed., Encyclopediea of Religion, vol. 11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93), p. 283.


윤리학의 근본과제는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별하는 보편적 기준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동양의 윤리는 유가 윤리로, 서양윤리는 기독교 윤리로 대표되어 왔다. 그러나 기존의 동서양 윤리론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한계성을 가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양자의 윤리론이 각각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인 천명·신의 뜻·이성을 윤리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성리학은 윤리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켜 도덕적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려 하였다.

성리학의 인간관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도덕적 형이상학도 더 이상 그 가치를 지속시킬 수 없게 되었다. 서구 근대 윤리학은 이성의 입장에서 도덕 판단의 보편적 원리를 확립하고자 노력해 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합리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것은 인간 행위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인 이유와 근거,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으며, 윤리적 상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41)41) 길희성, 〈현대 윤리학의 위기와 상호의존의 윤리〉, 《西江人文論叢》 第11輯(2000. 1), p.53.


그러나 불교의 연기적 상호의존의 윤리는 기존의 전통적 도덕 실재론들과 차별화되며, 또한 존재론적 근거도 갖고 있다. 어떤 행동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대한 불교의 기준은 그 행동이 자신이나 남, 혹은 양쪽 모두에게 해가 되느냐, 아니냐와 열반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으며, 인간 스스로가 자기 행동의 책임자로 간주된다.

이러한 특징은 기존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윤리관이 가진 현실적 딜레마로부터 하나의 탈출구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인도철학사와 종교사에서 불교가 남긴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도 자아와 같은 증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가정하지 않고 윤리론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불교는 감정과 이성을 동시에 중요시하고 있는데, 지계(持戒)를 통한 바른 감정이 없으면, 지혜도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감정에 바탕을 둔 유럽의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나 흄(David Hume, 1711∼1776)의 경험론, 이성에 기초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이성론의 한계도 극복한 것으로 간주된다.42)42) Damien Kewon, The Nature of Buddhist Ethics(New York: St. Martin’s Press, 1992), p.108.


불교윤리는 상황윤리란 점에서도 기존의 윤리론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부처는 당시의 다른 사상가들처럼 특정 행위는 특정 결과를 낳는다고 보지 않았다. 브라흐만교에서는 범신에 대한 제사만을 선업으로 간주하였으며, 부처 당시의 육사외도들은 숙명적 인생관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자이나교는 업의 절대적 법칙성을 강조하였으며,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은 자아가 행위자며, 결과를 받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의 행동은 세 가지 요인인 외부 자극(접촉 등), 의식적 동기(삼독 등), 무의식적 동기(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 등) 중의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행동이라도 환경이 다를 경우 결과도 달라진다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존재들을 과거의 업으로 해석한 결정론자들과는 달리, 부처는 업을 존재 결정의 한 요소로 간주하면서, ‘행위는 윤회의 밭, 의식은 씨, 욕망은 수분’으로 비유하였다.43) 43) David J.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Honolulu: Th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76), pp.44∼51.




즉 행위의 효과는 행위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으며, 행위자의 상태, 행위 환경 등의 다른 요소들도 관계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자의 의식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현대의 실정법 체계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연기적 인간관은 전통사회의 공동체적 인간관계가 지닌 폐쇄성과 배타성뿐 아니라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 서구 사회의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와 폐쇄적 공동체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우주적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44) 44) 길희성, 2000, pp.51∼72.


따라서 불교의 상호존중성과 포용성은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도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45) 인간의 삶과 자연 존재를 동시에 중요시하는 불교의 사유체계는 환경문제가 지구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현대에서 환경생태학46) 측면에서의 기여도도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45) 안옥선, 2002, pp.143∼168. 46) 불교와 생태학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불교문화연구원, 《불교와 생태


5. 맺음말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는 기복불교로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산물일 뿐 인간 스스로와 그들의 삶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 얻기와 그 실천에 중점을 두었던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도 다른 것이다. 불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부처의 가르침 자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산물로서 전개된 한국불교에 대한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도 불교는 기복 위주의 종교로만 간주된 채, 인생교육체계로서의 불교의 존재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철학적·윤리적 가르침들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 동서양의 철학계와 종교계에 새로운 대안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불교는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가르침47)이다. 따라서 불교의 성격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현대 인류의 삶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불교계에 남겨진 과제로 생각된다. 47) 안옥선, 〈‘불교와 불교학의 실용성’에 대한 한 생각〉, 《불교평론》 13호(2002년 겨울호).

인간의 가치는 노력과 수양과 행동에 있는 것으로서 종성(種姓)의 문제는 수도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부처와 그 제자들의 요지였다.48)
48) 기무라 다이켄(木村太賢), 박경준 역, 《原始佛敎思想論》(경서원,

근대 한국의 대표적 선승이었던 만공(滿空, 1876∼1946)도 승려의 기준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앎에 있음을 강조하였다.49)

무엇보다도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의 함양은 가장 시급한 과제다. 불립문자는 문자적 지식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을 경고한 말이지 불교교리 자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승단에는 이를 잘못 해석하여, 문자는 마귀며, 승려로서 교학을 공부하는 자는 지적 알음알이에 묶인 사람이라는 식의 인식이 팽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연히 불식되어야 한다. 앎이 없는 실천은 위험할 뿐 아니라 정혜쌍수를 강조해온 한국불교 전통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들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가진 인류의 관심사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문의 전당이며, 종립대학들도 이 대전제 위에 서 있다. 따라서 그 일차적 관심도 불교신앙이 아닌 불교학에 두어야 할 것이며, 그 학문적 성과는 현대 한국사회에 회향되어야 할 것이다. ■

김종명
UCLA 철학박사(불교학전공), 현재 영산대학교 조교수(문화관광 전공). 논저서로 《한국중세의 불교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의》, Encyclopedia of Buddhism(공저),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파란 눈 스님의 한국선 수행기》(역서), 〈원효와 지눌의 수증론 비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