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최한기.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최한기. Show all posts

2023/10/10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도올 김용옥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망중한담 2017 1 19 1501
천즉기 기즉천 (天卽氣 氣卽天)
Content Life 만족한 삶 홈 태그 미디어로그 위치로그 방명록
SHOP NOW
SHOP NOW
SHOP NOW
SHOP NOW
Sony Vctam1 Adhesive Mounts
$29.95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2/15
항상 이렇게 강의를 들으려 와주시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격려 덕분에 이 강의를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습
니다.
저는 지난 주 문화일보 기자직을 그만 두었습니다. 2002년 12월 2일에 발령이 난 이후로 2004년 4월 3일까지, 문화일보
의 평기자로서 1년 반 동안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문화일보의 편집국 분위기는 일체의 외부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편집국은 그들의 상식 위에서 신문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신문사 측에서 저의 기고문인 ‘도올고성’의 주관적 해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제가 그만두게 되었습
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3/15
'도올 고성'이라는 칼럼에 실린 제 글이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일보는 치우침 없는 신문을 만들고
자 하기 때문에 '도올 고성'을 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문제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수정이라도 하겠다고 했으
나 그들은 저의 제의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선비는 각필(閣筆)은 할 수 있으나 곡필(曲筆)은 할 수 없다” 하
고 문화일보를 그만 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글에는 해석이 들어가 있고 치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론에서 치우지 않는다는 기사는 있을 수 없습니
다. 치우치는 (치우칠 수 밖에 없는) 기사를 어떻게 공평하게 싣느냐가 안 치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태에 대해서 서로 상충되는 견해의 기사라 할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는 아량이야 말로 치우치지 않는 언론의
자세인 것입니다.
제가 칼럼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 중에서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하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법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 등을 통해서 미국의 재판과정을 볼 때는 법원이 마치 극장 같습니다. 원고 · 검사 · 피고 간에 형사 사건에 대
한 공방을 진행하는데, 이 장면에서 법정은 하나의 드라마 무대와 같습니다. 재판은 12명의 배심원 앞에서 진행됩니다.
배심원은 다수결로 유죄(Guilty), 무죄(Innocent)가 여부를 결정하고 판사는 형량만을 결정합니다. 중요한 사실 인정은 배
심원이 하며, 후속적인 형량결정만 판사가 하는 것입니다.
재판정에 참석한 배심원은 전혀 법률 전문가나 법조인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반 시민이며, 사법부에서 무작위로 뽑
은 사람입니다.
법관이 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에 관한 진위 판단이나 사실인정은 법관이 아닌 그 시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에 맡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 배심원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당사자주의 : 형사소송절차에 있어서 원고인 검사와 피고인이 소송의 당사자가 되어 소송을 진행시키는 주의. 직권주
의에 대칭되는 말.
배심원제도에는 진위 자체의 인위적 결정은 인식론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는 생각, 즉 진위 여부나 시비의 판단
은 그 사태가 속한 사회의 상식적 컨센서스(Consensus=합의)에 맡기자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영미법에서의 법(Law)은 있는 것(Being)이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Becoming)입니다.
법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성론적으로 생각합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4/15
영미법, 특히 시민의 권리에 관한 민법은 법전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에 의해서 법률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불문법(Unwritten Law)이라고 합니다. 영미법은 불문법이며. 관습 및 판례 중심의 법입니다.
불문법(不文法 Unwrittenlaw) : 영미법 : 관습•판례 중심
성문법(成文法 Writtenlaw) : 대륙법 : 법전 중심
그에 반해서 성문법은 법전 중심이며, 독일과 프랑스 계통의 대륙법을 말합니다.
법전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법관이 그것을 해석하고, 인간사회의 질서, 규범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대륙법 중에서는 참심
제도를 두어 국민의 참여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서양에서 법이라는 것은 마그나 카르타 이래로 귀족들이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 자기들이 낸 일종의 성명서 같은 것입니
다. 그런 성명서들이 역사 속에 계속 쌓여서 법이 된 것입니다. 법은 반드시 그 역사의 내재적 맥락과 체험으로부터 우러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법조계는 법관권위주의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헌법학자 뢰빈슈타인은 헌법을 ①규범적 헌법, ②명목적 헌법, ③장식적 헌법으로 분류했습니다.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지만 우리나라 헌법은 역사의 내재적 맥락과 관계가 희박한 명목상
의 헌법입니다.
법이란 옷과 같은 것으로 신체가 바뀌면 옷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어린 아이에게 멋진 어른의 옷을 입혀놓고
어린이가 커서 맞춰지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우리 헌법과 같은 것)을 명목적 헌법이라고 합니다.
성문헌법으로는 미국의 헌법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성문헌법인 미국 헌법은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에 항거하면서, 신대륙에 어떠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미
국의 사상가 비전을 요약해서 제임스 메디슨을 비롯한 55명의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1787년에 성립한 것이 미국 헌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헌법을 달달 외우고 있습니다.
모든 민권헌법은 계속 수정될 수 밖에 없고, 계속 수정되어 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헌법도 Amendment 즉 수정안들이 누
적되어 이루어진 헌법입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5/15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금은 이런 말이 굉장히 설득력이 있지만 전두환 시대에 이런 말을 하면 어땠을까? 당시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독재국
가다. 주권은 독재자에게 있고 권력은 독재자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어야 맞는 헌법이었다는 말입니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1/4
영국의 헌법은 불문율로 되어 있는 불문헌법(Unwritten Constitution)입니다.
세계 역사상 법치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나라가 영국이라고 하지만, 막상 영국에는 헌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1215), 권리청원(1628), 인신보호법(1697), 권리장전(1689), 왕위계승법(1701) 등이 계속 이어져온 것입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6/15
예를 들자면 :
Status of judicial precedent, text books, law books, the writings of historians and political theorists, the biographies a
nd autographies of statesmen, the columns of every serious newspaper, the volumes of Hansard, the minutiae of eve
ry type of government record and publication. This is what is meant by saying the English constitution is unwritten.
교과서, 법률저서, 역사가들과 정치이론가들의 저작, 정치이론가들의 저작, 정치가들의 자서전과 자필문서, 모든 주요 신
문의 사설, 정부의 기록 간행물 등등 모두가 영국 불문법 헌법에 속한다.
영국의 헌법이 불문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정도전에 의해 ‘조선경국전’이라는 이름의 성문헌법이 최초로 만들어지고, 성종 때 <경국대
전:經國大典>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불문법이 있었는데, 공자의 사상에 예(禮)와 법(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子曰(자왈): 道之以政(도지이정), 齊之以刑(제지이형),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 道之以德(도지이덕), 齊之以禮(제지이례),
有恥且格(유치차격)
정치로써 백성을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은 법망(형벌)을 피하기 위해 염치를 버리게(부끄러움을 모르
게) 될 것이다.
백성을 덕으로서 이끌고 예로서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은 염치도 있고 질서도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경국대전>은 왕의 통치수단으로써의 법이기 때문에 골격은 형법(Criminal Law)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
법은 형법이었습니다. 법을 포도청 나졸이 백성들을 때려 잡는 무서운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법
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됐습니다.
민법(民法)은 것은 법을 통해서 백성(국민)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사상을 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법을 통해서 나의 권리를 주장하고, 법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고, 법을 통해서 혁명을 하고, 법을 통해서 진
리를 밝힌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의 법은 형법뿐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오랜 세월 동안 전통적 규범이었던
우리의 예(禮)와 법(法)은 (백성의 권리를 밝히는) 민법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불문법으로도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사상은 불문법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법 체제에서 유리되어 갔습니다.
조선역사 500년 동안 추구한 것은 4단(四端)이었는데, 이것은 서양의 자연법(Natural Law)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
의 본성에 내재하는 도덕적 질서’를 말합니다.
조선의 주리론(主理論) 전통은 자연법의 추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7/15
주리론, 곧 자연법 추구는 노모스(Nomos)를 뛰어넘는 피지스(Physis)였습니다.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법
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 것 같은 이런 난센스(Nonsense)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노모스 Nomos : Latin어로 Melody, 즉 ‘가락’
▶피지스 Physis : Latin어로 ‘자연의 작품’ 또는 ‘물리적인 성질’
우리는 조선 사상사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사상사를 강의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모든 (근원적인) 문제가 현재의 우리 현실과 얽혀있다는 것에 있습니
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지내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산 후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의 변화가 오기 시작할 때 그것을 감지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대표적
인 사상가로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琦)라는 인물이 꼽힙니다.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호는 혜강(惠岡), 19세기 중엽, 새로운 사상 패러다임을 만든 대 사상가. 원
래 개성 사람으로, 서울로 이주했다.
최한기의 선조는 집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10대를 통해 과거급제자가 없었습니다. (家素裕 : 집은 원래 부자였다).
최한기는 어려서 양자를 갔는데, 무과에 급제한 양(養)증조부인 최지숭(崔之崇)에 이어 양부인 최광현(崔光鉉)도 무과 급
제를 하여 벼슬은 곤양군수와 진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습니다.
19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사상가인 최한기는 서울 남대문 시장 쪽, 지금의 한국은행 본점 자리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
았습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조선상식문답속편>에 의하면,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저술을 많이 한 사람이 최한기이며, 저서는 <명
란주집>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 권을 저술했다고 하므로 아마 300~400권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보통 3~4책이 한
권 임). 그가 저술한 책 중 상당부분이 유실되었으나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최한기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당대의 명망가들과 교류가 없었고 제자가 없었고 문집도 없었습니다. 정약용은 제자가 있었지만 최한기는 제자가 없었
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조 말에 가장 많은 저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동양 전통 고서 외에도 당대에 출간된 서양
의 (인문) 서적은 물론 모든 과학서적까지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8/15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2/4
그리하여 중국 북경 정양문 내의 인화당(人和堂)에서 최한기의 30대 저서인 <신기통>과 <추측론>을 묶어 <기축체의>
라는 이름의 활자 디럭스판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조선의 학계에서는 최한기를 잘 몰랐고 19세기 조선에서는 중인들이 가장 깨어있었으며, 그들은 해외여행도 자주했기
때문에 역관(譯官)이나 중인(中人)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인(中人)이란 조선 시대에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던 신
분 계급을 말합니다.)
실제로 최한기는 당대의 어마어마한 양반임에 틀림없습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9/15
역사적인 대작(大作)들을 저술한 그의 저택 안에는 기화당(氣和堂), 양한당(養閒堂), 장수루(藏修樓), 긍업재(肯業齋) 등의
네 채의 건물과 24명의 종(남 13명, 여 11명)이 있었습니다.
당시(구한말)의 조선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와 민비(閔妃=명성황후), 대원군, 고종황제 간의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혼탁한 사회였습니다.
이처럼 엉망인 정치상황 속에서도 최한기는 정치와 권력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인류 평화를 생각하고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다가 갔습니다.
우리는 조선 후기가 최한기와 같은 사상가가 활동할 수 있었던 문화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
치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최한기는 너무도 멋지게 살다 간 희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최한기를 19세기 조선의 Cosmopolitan(=세계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최한기 사상의 특이점은 오륜(五倫)에 일륜(一倫)을 더한 육륜(六倫)이라 하는 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장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의 오륜(五倫)에
兆民有和(조민유화)를 더했습니다.
兆民有和(조민유화)란 억조창생, 즉 모든 인간은 화합한다는 뜻입니다.
최한기는 55세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세계인문지리서인 지구전요(地球典要)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지구전요(地球典要)
에는 나라이름, 수도, 인구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최한기의 유일한 친구는 대동여지도의 저자인 김정호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분 이상의 위대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국민이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근대정신의 소산입니다.
김정호의 지도는 오늘날의 인공위성이 촬영한 것보다 더 정확합니다. 생김새(지형)도 정확합니다. 걸어 다니면서 어떻게
그렸을까?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미스터리 투성이입니다.
종래의 지도는 김정호의 지도에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김정호의 친구인 최한기도 정확한 세계지도를 그렸습니
다. 모든 나라의 수도, 인구, 정치제도 등을 적었습니다.
文一平(1886~1936)의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에는 최한기와 김정호가 남산 꼭대기에 올라 밤의 별을 쳐다보면서 다음
과 같은 말을 나눈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두 위인은 기(氣)를 토하면서 말했습니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10/15
“조선의 기를 먹고 살고 있으니 무언가 조선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학문으로서 치안
(治安=치민<治民>과 안민<安民>)을 이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조선의 정치가 무엇 하나 돌아가는 것이 있는가? 안동김씨, 풍양조씨들이 전부 사랑방 정치를 하고 있지 않는가? 국정
은 날로 혼미해가고 있다. 정호야! 너는 지리(地理 : 땅의 이치)를 맡아라. 나는 천문(天文=天紋=하늘의 무늬=하늘의 질서
=모든 보편적 법칙)을 맡겠노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지리를 공부한 김정호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남겼고, 천문을 공부한 최한기는 기학(氣學)을 연구했습니다.
천즉기(天卽氣), 기즉천(氣卽天) 하늘은 기로 되어 있고 기는 곧 하늘이다. 즉, 우주는 기다.
“나는 기를 연구하겠다.”한 최한기는 평생을 기(氣) 하나의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과거 우리가 알았던 (성리학) 이기론의 기가 아니라, 이 사람의 기는 100% 과학적인 기였습니다.
‘기학(氣學)’은 최한기가 55세 때 연구한 우주론의 대작입니다. 이 책은 19세기 조선의 가장 개명한 사상가인 최한기의
포괄적 우주론을 담고 있다. 최한기의 ‘기학(氣學)’은 정말로 위대한 책입니다.
‘기학(氣學)’ 서두에,
中古之學(중고지학), 多宗無形之理(다종무형지리), 無形之神(무형지신), 以爲上乘高致(이위상승고치)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학문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무형의 리(理)와 무형의 신(神)을 받들었다. 애매모호한 것을 숭상했
다.
신기(神氣)는 신천(神天=God)에 해당하는 최한기의 기(氣)개념입니다.
혜강 최한기는 하느님도 기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 자체가 형체이며, 신적인 것이므로 모든 것은 유형으로 환원되어
야 한다고 합니다.
혜강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논점은 바로 무무(無無)입니다.
무무(無無)란, 무(無)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유형의 구체적 증거가 있는 것이고 형태가 없는 것은 무(無)라는 말
입니다.
“모든 것은 유체적인 유형의 근거가 있는 것이고 그 유형의 근거도, 형체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도), 우리
가 무형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유형이다. 앞으로 내가 하는 학문은 형체가 없는 것이라고는 없다.”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11/15
이것이 바로 ‘최한기의 근대 과학사상’의 출발이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3/4
정도전에서 이퇴계에 이르는 모든 유학적 패러다임은 최한기에 의해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개명(開明)한, 현실적인, 세계의 학문으로 발전해 가게 됩니다.
개화기의 사상가들(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은 서양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본에 가서 서양을 배
웠습니다. 서양 제국주의 학문인 진화론의 희생양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동도서기(東道西器) 운운하는 유치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東道西器 : 동양의 도에 서양의 그릇, 즉 정신은 동양적인 것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한다는 의미
10/10/23, 3:41 PM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https://hablife.tistory.com/596 12/15
최한기는 조민유화(兆民有和), 즉 지구상의 모든 민족, 종족이 편견 없이 대등하게 교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19세기 당시에도 그는 “흑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같이 대접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서양의 과학은 뛰어나다. 기학에 있어서도 그들은 근거 있는 유형의 기로부터 법
칙화시켰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계량화시키고 잴(계측할)수 있게 해 주었다. 이때까지 우리가 무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서양문명은 우리가 갖고 있는 정신문명을 깊게 배워야 한다”고 질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19세기 중엽이라 하면 민란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외세가 가장 빈번히 침범해 오는 처참한 역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는 이렇게 위대한 사람,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최한기입니다. 그의 저서는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현재의 어떠한 물리학자의 세계관보다 뛰어난 것이며, 거의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책에 상응하는 과학적 우주론이 한국인에 의해 시도된 바는 없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나와서 소리치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는 저보다 몇 백배 훌륭한 사상가들이 꾸준히,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키워 온 역
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바야흐로 이들이 꿈꾸었던 세계를 이룩하려는 역사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의 역사를 바르게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투표장에 가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한 명도 빠지지 말고 투표장에 가서 귀중한 한 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해야 됩니다.
만 20세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기까지 인류 문명은 희랍인들의 데모크라시로부터 시작해서 2,
500년 동안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오늘의 여러분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2.500년 동안 왕정과 투쟁해서 얻은 (민주주의 투쟁의) 결과인 것입니다.
현재의 나의 존재를 우연적 존재로 생각하지 말고 기나긴 인류사의 정신문명의 성취 속에 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
고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023/10/07

알라딘: 근대라는 아포리아 고사카 시로 (지은이),이광래,최재목,야규 마코토 (옮긴이) 2007

알라딘: 근대라는 아포리아


근대라는 아포리아 
고사카 시로 (지은이),이광래,최재목,야규 마코토 (옮긴이)이학사2007-11-20









책소개

1930년대 일본에서 의논된 ‘근대의 극복’론을 소개하면서 어설픈 근대 비판·반근대론이 내포하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근대라는 것이 왜 아포리아(난문)인지 그 까닭을 다시 밝히려 하는 책. 한국·중국·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하면서 세 나라의 ‘근대’에 대한 이해 방식의 차이를 살펴보고 있다.

일본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동양과 서양’이라는 도식을 거론할 때 대부분 ‘동양’ 내부의 차이를 무시한 채 마치 자기 나라가 동양 전체를 대표하는 양 말해왔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중국·일본이라는 동아시아의 세 나라만 보아도 각국이 근대화한 과정과 그 뒤의 운명은 서로 달랐고, 또 과연 무엇을 ‘동양’의 것으로 이해하고 무엇을 ‘서양’의 것으로 이해하는지에 대해서도 서로 차이가 있었다.

그는 세 나라의 근대 이해 방식의 차이를 살펴봄과 더불어 같은 유교 문화권에 속했던 한국·중국·일본의 민족주의(내셔널리즘)의 내용적 차이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근대화'를 어떻게 이해했고 또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난제에 대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는 책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동양과 서양"이라는 도식의 함정

1부 근대라는 걸림돌

제1장 화혼양재
1. 서구 근대의 보편성
2. 흑선 오다
3. 양혼양재
4. 근대화의 패턴
5. 실학의 합리 사상
6. 인 없는 이치

제2장 동도서기
1. 실학으로부터 개화로의 전환
2. 위정척사론
3. 천주교의 포교와 조선의 개국 문제
4. 화혼양재와 동도서기의 차이점

제3장 중체서용
1. 리버티Liberty의 번역을 둘러싸고
2. 양무운동·변법자강·중체서용
3. 태평천국의 난
4. 반자유주의
5. 자유란 무엇인가

2부 "근대"라는 역사의 흐름

제4장 서양으로부터의 충격
1. 탈아입구
2. 이와쿠라 견구사절단
3. 화폐경제와 산업구조의 변화
4.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한다
5. "법" 개념의 차이
6. 주자학에서 근대법으로의 전환

제5장 이理와 ratio
1. 푸코의 '광기'
2. 고토와리
3. 불교의 사리와 주자의 이기
4. 학문과 기술의 연계성
5. 계몽주의적 이성
6.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7. 문화의 다양성과 역사적 이성비판

제6장 "근대"의 개념
1. "근대"란 무엇인가?
2. 근대정신의 좌절
3. "근대"라는 역사관에 대한 비판
4. 포스트모던의 시대 의식
5. "근대의 극복"의 논의로부터

3부 근대화와 맞서

제7장 도道
1. 모토오리 노리나기의 "사물을 따라가는 도"
2. 이토 진사이의 "도"
3. 광기
4. 신도
5. 말과 Sprache

제8장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1. 민족의 의식
2. 존황양이론
3. 조선의 위정척사 사상
4. 배만흥한과 반제국주의

제9장 대동아공영권
1. 국제 공헌과 침략
2. 아시아주의
3. 나치즘과 유태 국제주의
4. 민족국가의 보편성

4부 "근대"의 종언

제10장 "동양과 서양"의 통합적 개념
1. "변증법"의 개념
2. 변증법의 도입
2. 정·반·합과 인·연·과
4. 법철학의 입장
5. 1931년-헤겔 서거 100주년
6. 강단철학자들
7. 헤겔주의의 종언

제11장 "동양과 서양"이라는 도식
1. 대립의 구조, 절대자·자연·역사·문화
2. 중국인의 관점에서 본 "서양"
3. 유럽인의 관점에서 본 "동양"
4. 문화의 주체적 과제

후기를 대신하여: 구야마 야스시 선생의 추억

참고 문헌

옮기고 나서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화혼양재'와 같은 발상은 일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밀어닥치는 서양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더구나 기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경우 자국의 전통적 정신을 핵으로 삼고 그러한 정신에 맞추어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자는 생각은 중국에서도 조선에서도 필연적으로 나타난 사상이었다. 중국에서는 '중체서용'이라 했고 조선...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고사카 시로 (高坂史朗)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49년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나 간사이가쿠인대학(關西學院大學)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긴키대학(近畿大學) 교수를 지냈으며, 2007년 현재 오사카 시립대학 대학원 교수로 있다.

니시다 기타로 철학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동양"과 "서양"의 대립 도식과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 외의 아시아의 시점을 망각한 자세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지은책으로 <실천철학의 기초>(1983), <악의 문제>(편저, 1990), Postmodern... 더보기

최근작 : <근대라는 아포리아> … 총 3종 (모두보기)

이광래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강원대 철학과 명예교수 및 중국 랴오닝 대학, 러시아 하바롭스크 경법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민대, 충남대 미술학부 대학원에서 다년간 미술철학을 강의했다. 주요 저서로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 《프랑스 철학사》, 《이탈리아 철학》(공저), 《해체주의와 그 이후》, 《방법을 철학한다》, 《韓國の西洋思想受容史》, 《思想間の對話》(공저), 《일본사상사연구》, 《東亞近代知形論》, 《미술을 철학한다》, 《... 더보기

최근작 : <초연결시대 관계의 상전이 연구>,<건축을 철학한다>,<고갱을 보라> … 총 33종 (모두보기)

최재목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61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기를 보냈다.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현재까지 시를 꾸준히 써 오고 있다.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도중 일본으로 건너가 츠쿠바 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방문학자·객원 연구원으로서 하버드 대학, 도쿄 대학, 레이던 대학, 베이징 대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영남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대충 제멋대로 별 재미없이 살아가고 있다. 닉네임은 돌구乭九, 돌... 더보기

최근작 : <해방후 울릉도·독도 조사 및 사건관련 자료해제 Ⅱ>,<울릉도·독도로 건너간 거문도·초도 사람들>,<스무 살, 나답게 산다는 것> … 총 63종 (모두보기)

야규 마코토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일본 오사카(大阪) 출생. 강원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일본 KYOTO FORUM 특임연구원, 중국 西安外國語大學 및 延安大學 일어전가(日語專家)를 역임했다.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저서로 <崔漢綺氣學硏究>(경인문화사, 2008), <東アジアの共通善─和・通・仁の現代的再創造をめざして─>(岡山大学出版會, 2017, 공저), <지구인문학의 시선>(모시는사람들, 2022, 공저), 역서로 <일본의 대학 이야기>... 더보기

최근작 : <한국과 일본, 철학으로 잇다>,<공공철학 이야기>,<최한기 기학 연구> … 총 6종 (모두보기)
고사카 시로(지은이)의 말
서양과 동양이라는 도식은 일본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보아야 했던 필연성을 갖고 있으며, 그 당시의 문제의식의 주조를 이룬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일본의 지식인이 이 도식을 생각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한국,조선, 중국 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시야에 넣어서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다른 아시아 국가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분명하게 할 것이다.

====



2023/09/15

Taechang Kim 柳生真による 최한기의 [은>과 [효>에 관한 발제

Facebook

Taechang Kim

  · 
昨夜(2023.6.20.火曜日、19:00-21:30)の公共する美学を共にデザインするワークショップでの
柳生真(韓国円光大学)教授による "チェハンギの <恩> と <孝>に関する発題講演を傾聴し、聴講者たちと交わした対話を終えた感想:

1.チェハンギは勿論、日韓中の気学研究史上気と恩あるいは孝との関連で論及したのは前例のない画期的な試み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先ず評価する.

2. しかし恩は恵と、そして孝は慈と、共に一体として相恩互恵し、親慈子孝するという相互性という多次元的動態として体感 体験体認することが大事である.

3. チェハンギの美学とは、生命開新美学の観点と立場から見れば <報謝の美>ではないか、という気がする.

4. チェハンギと柳宗悦との恩関連繋がりの話があったけれど、ラフカデイオ-
ハーンが日本の美を世界が十分理解していないなかで、日本人以上に高く評価し
世界に知らせようとしてもらったことに感謝し、それをまだ世界が十分知らない

韓国民衆の日常生活から生み出された民衆的生活用品にそれまで認識されなかった独特の美をはっけんし、そこから貴族的芸術美学とはちがう民衆的工芸美学を整理提示することによって世界に知らせることを通じて報恩の実践に献身したという深い結縁を感じるのである. 

天地人三次元相関連動としての地球生態学的認識像は、歴史的状況的条件変化によって刷新を繰り返してきたけれど、恩恵生態学という新たな認識-実践像の整理と提示には大きな思考発展的意義と展望開新的可能性があ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生態学と言うけれど、自然生態学が昨今の議論の主流になっているけれど、文化生態学や社会生態学、そして政治生態学や経済生態学等々いろんな専門分野が多元化しているなかで、韓国の一部では地球(生態)政治神学の吸収と波及こそが時代と現状の桎梏から解放される道筋であるかのように談論が続く. 果たしてそれでよいのか?
===
어젯밤(2023.6.20.화요일, 19:00-21:30)의 공공 미학을 함께 디자인하는 워크숍에서
야나이 마코토 교수에 의한 "최한기의 <은>과 <효>에 관한 발제 강연을 듣고, 청강자들과 교제한 대화를 마친 감상:

1. 최한기는 물론, 한일중의 기학연구 사상기와 은 혹은 효와의 관련으로 논의한 것은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시도였다는 것으로, 우선 평가한다.

2. 그러나 은혜는 혜택이고 효는 자와 함께 일체로 상은 호혜하고 친자자 효하는 상호성이라는 다차원적 동태로서 체감체험체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최한기의 미학이란 생명개신미학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면 <보사의 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4. 최한기와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은관련 연결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라프카데이오-
한이 일본의 아름다움을 세계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일본인보다 높은 평가를 했지만.
세상에 알리려고 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세계는 아직 그것을 충분히 알지못한다.

한국 민중의 일상생활에서 만들어진 민중적 생활용품에 그동안 인식되지 않았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벗어나 거기에서 귀족적 예술미학과는 다른 민중적 공예미학을 정리 제시함으로써 세계에 알리는 것 이를 통해 보은 실천에 헌신했다는 깊은 결연을 느끼는 것이다.

천지인 3차원상 관련 동으로서의 지구 생태학적 인식상은 역사적 상황적 조건 변화에 의해 쇄신을 반복해 왔지만, 혜택 생태학이라는 새로운 인식-실천상의 정리와 제시에는 큰 사고 발전적 의의와 전망 개신적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태학이라고 말하지만, 자연 생태학이 최근의 논의의 주류가 되고 있지만, 문화 생태학이나 사회 생태학, 그리고 정치 생태학이나 경제 생태학 등 다양한 전문 분야가 다원화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의 일부에서는 지구(생태) 정치신학의 흡수와 파급이야말로 시대와 현재의 桎梏에서 해방되는 길인 것처럼 담론이 이어진다. 과연 그것이 좋을까?



2023/09/14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 일본의 카이바라 에키켄 <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8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 일본의 카이바라 에키켄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 일본의 카이바라 에키켄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05.13 
동양포럼(68)-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카이바라 에키켄 초상
야규 마코토(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카이바라 에키켄은 누구인가?

카이바라 에키켄은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의 유학자·박물학자이다(전문의 의사가 아니었다). 이름은 아츠노부(篤信), 자는 시세이(子誠), 호는 쥬사이(柔齋)·손켄(損軒) 등이 있으나, 만년에 쓴 에키켄(益軒)이 가장 유명하다.

에키켄은 큐슈(九州) 후쿠오카번(福岡藩, 일명 쿠로다번黑田藩)의 서기였던 카이바라 칸사이(貝原寬齋)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의학에도 밝았던 아버지로부터 의학을 배우고 둘째 형부터 글을 배웠다. 18세 때부터 후쿠오카번에 출사했으나, 어느 날 번주(藩主)인 쿠로다 타다유키(黑田忠之)의 노여움을 사서 면직되고, 7년 동안 낭인 생활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에 나가사키(長崎)·에도(江戶) 등지에 가서 의학과 주자학을 공부했다. 1656년에 새로운 번주 미츠유키(黑田光之)에게 사면을 받고, 다시 출사하게 됐다. 그는 의사·주자학자로 교토(京都)에서 35세 때까지 7년 동안 유학하면서,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한 후에 후쿠오카로 돌아와 주자학 강의, 조선통신사의 응접, 이웃 번과의 분쟁 해결, 쿠로다 가문의 계보인 ‘쿠로다 가보(黑田家譜)’ 편찬 등 교육, 외교, 역사편찬 등 다방면으로 확약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후쿠오카에서 오랫동안 문교전책에 관여한 관계도 있어서, 그의 장서에는 퇴계·율곡 등 조선유학의 책도 많이 들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1700년, 70세가 된 에키켄은 공직을 물러가고, 에도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박물학서인 ‘대화본초(大和本草)’, 교육론인 ‘화속동자훈(和俗童子訓)’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1713년에 아내 도켄(東軒)이 돌아가자 대표작인 ‘양훈생(養生訓)’을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 1714년 8월 27일에 8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보시다시피 에키켄은 전문 의사가 아니라,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자기 눈으로 확인한 사실만을 인정하는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대도와 백성들의 삶에 이바지하는 것을 중히 여기고, 저작의 대부분을 한문이 아니라 대중들이 알기 쉬운 카나(かな)문자로 쓴 만큼,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대도를 견지한 실학자였다.



●왜, 지금 양생인가?

일흔 살을 가리켜 고희(古稀)라고 한다.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항상 있지마는 사람이 70 살기가 옛날부터 드물구나.”(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杜甫)의 ‘곡강(曲江)’ 한 구절에 유래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술빚 걱정은 몰라도 일흔 넘게 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됐다. 하지만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느냐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의료복지 제도의 확충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생(養生)’이라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양생’은 ‘장자(莊子)’에도 양생주(養生主)편이 있는 만큼, 도가와 인연이 깊은 개념이었다. 그 양생주편에는 포정(庖丁; 요리사)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아주었는데, 포정이 칼질하는 솜씨에 감탄한 문혜군이 그 비결을 묻는 대목이 있다.

그 포정과 문혜군의 대화 속에 양생사상의 기본이념이 들어 있다. 즉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결코 무리하지 않는다는 점,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평소부터 도를 닦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잘 지키면 생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생사상의 이론과 실천방법은 전국시대부터 한(漢)나라 때에 걸쳐 크게 발달하고 체계화됐다. 그것은 동양의학과 도가적 수양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일찍이 몸이 허약했던 퇴계 이황(退溪李滉)이 ‘활인신방(活人神方)’의 수련법을 써서 건강을 유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생의 사상과 실천은 한중일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양생사상은 동양의학과 도가사상 속에 매몰되고, 의료 전문가나 상당한 지식인 혹은 도인이 아니면 접근하기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17~18세기 초 일본의 유학자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1630~1714)은 ‘황제내경(黃帝內經)’과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그 외에 ‘난경(難經)’(周나라의 의사 편작扁鵲의 저술로 전해짐), ‘금궤요략(金櫃要略)’(후한 장중경張仲景 저), ‘갑을경(甲乙經)’(晉나라 황보밀皇甫謐 저), ‘천금방(千金方)’(唐나라 손사막孫思邈 저) 등 수많은 의학서·의술을 섭렵하고 스스로 시험·증험해보면서 유학과 어울려서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소개한 것이다.

양생·장생은 전문 의사 이외에 도가에 의해 많이 연구돼 왔다. 그래서 전문적인 의사도 아닌 유학자인 에키켄이 양생을 문제로 삼은 배경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사회적 요인으로는 그가 살았을 때가 바로 에도시대의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서,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아주 번성한 시기였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는 자꾸 폭음폭식하고 미인을 쫓아다니면서 재미있게 살다가, 만년에 건강을 해치고 고생하거나 병들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들과 꽤 비슷하다.

그래서 에키켄은 스스로 쌓아놓은 연구와 실천을 토대로 사람들에게 양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만사에 한때 마음에 즐거운 것은 반드시 뒤에 탈이 된다. 술과 음식을 마음대로 먹으면 즐겁겠지만, 언젠가 병이 나는 것과 같은 부류이다. 앞에 참으면 반드시 뒤의 즐겁게 된다. 뜸뜨고 뜨거움을 참으면 나중에 병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왜 양생하는가?

에키켄은 ‘양생훈(養生訓)’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몸은 부모가 근본이 되고, 천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지부모의 은혜를 입고 태어나 또 길러주신 내 몸이니, 자기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천지가 하사(下賜)하시고 부모가 남겨주신 몸이라면, 삼가고 잘 키워서 해치고 상하지 않도록 해, 천수를 오래 보전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바로 천지부모를 섬기는 효도의 근본이다. 몸을 잃어서는 섬길 수 없다. 자기 몸 가운데 조그마한 피부, 머리털조차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 함부로 해치는 것은 불효인데, 하물며 큰 신명(身命)을 자기의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 삼가지 않고 음식·색욕을 제멋대로 하며 원기(元氣)를 해치고 병을 얻어서, 타고난 수명을 짧게 하고 일찍 신명을 잃게 되는 것은, 천주부모에 대한 엄청난 불효이며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앞에서 보았듯이 자기 생명을 오래 보전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양생’은 유가보다 오히려 도가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런데 에키켄은 양생이 천지부모를 섬기는 ‘효도의 근본’이라고 규정하고,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것은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그가 효도의 근본으로서의 양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있었던 것 같다. 에키켄은 39세 나이로 상당히 늦게 결혼했다. 아내는 나이 17세인 아키즈키번(秋月藩)의 무사 에자키 히로미치(江崎廣道)의 딸 하츠였다. 하츠는 토켄(東軒)이라는 호도 가지는 정도로 서예에 능한 여성문인이었고, 남편의 학문·저술을 많이 도왔다. 에키켄은 딸과 같이 나이 차이가 있는 아내와 함께 자주 여행에 다녔고, 집에서는 함께 악기를 타고 시를 읊으며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둘 다 원래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의학과 건강법을 많이 연구하고 시험해 보기도 했다. 에키켄이 84세 때 토켄이 자기보다 먼저 죽자, 학문적인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아내를 잃은 그는, 오랫동안 둘이서 연구하고 시험해 온 성과를 세상 사람에게 널리 알려서 세상 사람을 이롭게 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양생론’이라는 책이다. 이것은 에키켄 양생론의 집대성이자, 에키켄과 토켄 부부가 상부상조한 성과인 것이다.



●양생의 방법

(1) 하늘이 나에게 준 원기를 잘 보전하라

‘양생훈’에서 에키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생의 방법[術]은 우선 자기 몸을 해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몸을 해치는 것이란, 내욕(內慾)과 외사(外邪)이다.” 내욕이란 음식, 호색, 수면, 말을 함부로 하는 욕심과, 기뻐함·화냄·근심·생각·슬픔·두려움·놀람의 일곱 감정(七情)을 말한다. 외사(外邪)는 하늘의 네 가지 기운(四氣)이니, 바람(風)·추위(寒)·더위(暑)·습기(濕)를 말한다.

“내욕을 참고 줄여서 외사를 경계하고 막음으로써 원기를 해치지 않으면 병이 나지 않고, 천수를 오래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듯이, 욕심과 감정을 절제하고, 순하지 않는 기운을 피하는 것으로, 원기 즉 사람이 타고난 생명의 기운을 지키는 것이 양생의 요체인 것이다. “뭇사람이 타고난 수명은 대부분 길다. 수명이 짧게 타고난 사람은 드물다” “사람의 목숨은 자기에게 있지 하늘에 있지 않다고 노자(老子)는 말했다. 사람의 목숨은 본디 하늘에서 받은 것이지만, 양생을 잘하면 길어지고 양생하지 않으면 짧아진다. 그렇다면 수명을 길게 하는 것도 짧게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몸이 씩씩하고 장수로 타고난 사람도, 양생의 술(術)이 없으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다. 허약해서 수명이 짧다고 보인 사람도 잘 보호하고 기르면 목숨이 길어진다.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는 짓이니 하늘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2) 약·침·뜸은 어쩔 수 없이 쓰는 하책이다

하지만 에키켄은 “무릇 약(藥)·침(鍼)·뜸(灸)은 어쩔 수 없이 쓰는 하책(下策)이다.” “사람의 몸을 보전하려면 양생의 도를 믿어야 하고, 침·뜸과 약의 힘을 믿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절대로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도 잘못 쓰거나 체질에 안 맞으면 도리어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차라리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양생의 도에 맞는다는 것이다. 그가 권장하는 방법은 적당한 운동이다. “신체는 날마다 조금씩 힘써 움직여야 한다. 오래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매일 식사 후 반드시 마당을 수백 걸음 조용히 걸어라. 비가 내리면 실내를 빈번하게 천천히 걸어라. 이와 같이 아침저녁에 운동하면 침·뜸을 쓰지 않아도 음식·기혈(氣血)이 막기지 않고 병도 없다. 침·뜸이 없으면 심한 열병이 나서 몸이 아픈 것을 참아야 될 지경이 이르기보다, 차라리 이렇게 하면 병들지 않고 안락할 것이다.”

(3) ‘내적’과 ‘외적’에는 방비책을 달리하라

에키켄은 “대개 사람의 몸은 약하고 여려서 덧없는 것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이 꺼지기 쉬운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공격하는 적은 크게 두 가자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과식·호색·졸림 등의 욕구, 혹은 화냄, 슬픔, 근심 등의 감정으로 모두 안에서 공격해오는 ‘내적(內敵)’이다. 하나는 바람, 추위, 더워 등 바깥에서 몸을 상하는 외적(外敵)이다. 에키켄은 ‘내적’에 대해서는 마치 적과 접전하듯 단단히 이겨내야 하지만, ‘외적’에 대해서는 방위(防衛)하는 것과 같이 대책을 단단히 세워서 적이 다가오지 않도록 막되, 적과 오래 붙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내적에 대해서는 다기지고 씩씩하게 이겨내라. 외적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빨리 퇴각가라. 다기진 것은 안 좋다.”

에키켄은 ‘내적’과 ‘외적’의 구별을 세워서 서로 대해 다른 대응책을 써야 된다고 지적함으로써, 주로 유가적인 도덕수양의 개념으로 생각되던 지나친 욕심·감정을 극복하는 것과, 의학적인 관점에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강조된 바람·추위·더위 등을 막고 피하는 것을 ‘양생’의 개념으로 결부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는 사무라이사회의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쉬웠을 것이다.

(4) 줄(縮小)인 즐거움을 즐거워하라

에키켄은 “성인(聖人)께서 자주 즐거움을 말씀하셨다. (……) 즐거움은 사람이 타고난 천지의 생리(生理)이다. 즐거워하지 않고 천지의 도리에 어겨서는 안 된다. 항상 도로써 욕심을 억제하고, 즐거움을 잃지 말라. 즐거움을 잃지 않음은 양생의 근본이다.” 라고 강조했다. ‘즐거움’과 욕심을 억제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서로 모순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뜻은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안 좋다는 것이고 억제하다고 해도 완전한 금욕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양생의 요결(要訣)이 하나 있다. 요결이란 간요한 구전이다. 양생에 뜻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알아서 지켜야 된다. 그 요결은 ‘소(少)’의 한 글자이다. ‘소’란 만사에 모두 적게 하고 많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통틀어서 단적으로 말하면 욕(慾)을 줄이는 것이다. 욕이란 이목구체(耳目口體)을 만족시키는 탐욕하는 것을 말한다. 주식(酒食)을 좋아하고 호색을 좋아하는 등의 부류이다. 대개 많은 탐욕이 쌓이게 되면 몸을 상하고 목숨을 잃게 된다. 탐욕을 줄이면 몸을 키우고 목숨을 길게 할 수 있다. (……) 한때에 기를 너무 많이 쓰고 마음을 너무 많이 쓰면 원기가 줄고 병이 나서 목숨이 짧아진다. 사물마다 (신경을) 많이 쓰고 널리 쓰지 말아야 한다. 덜 쓰고 좁게 쓰는 것이 좋다.” “양생의 술은 먼저 심법(心法)을 잘 삼가 지키지 않으면 행하기 어렵다. 마음을 고요하고 요란스럽지 않게 하고 분노를 참고 욕심을 줄이며 늘 즐거워해서 근심하지 말아야 된다. 이것이 양생의 술이자 마음을 지키는 도이다. 심법을 지키지 않으면 양생의 술이 행해지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키우고 몸을 키우는 공부는 둘이 아니다. 한 술이다.” 요컨대 평정한 마음을 지키고 욕심을 줄여서 항상 즐길 줄 아는 마음공부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생의 술인 것이다.



●최한기와 에키켄—즐거운 늙음

그런데 필자에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나라도 시대도 다르고 어떤 영향관계도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키켄이 최한기(崔漢綺)는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에키켄은 (당시 동아시아의 학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주자학자였지만, 만년에 쓴 ‘대의록(大疑錄)’이라는 논저에서 정주(程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을 밝혔다. 이기이원론과 결별한 그는 도덕의 근거를 더 이상 초월적인 리(理)에게 구할 수 없었다. 대신 천지의 기운이 만물을 낳고 길러주는 ‘은(恩)’에 보답한다는 ‘효(孝)’를 논리를 윤리적 기반으로 삼았다.

앞에서 보다시피 에키켄은 양생을 천지부모에 대한 효도의 근본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최한기도 마찬가지였다. “무릇 효는 어버이를 섬김을 근본으로 삼고, 오륜(五倫)에 미치고 만사에 달하며, 과불급(過不及)의 한계와 절제는 천인운화(天人運化)에게 기준이 있다. 이것을 받들어 따라서(承順) 효도(孝道)를 베풀면, 가히 천하에 통할 수 있고 유명(幽明)의 틈이 거의 없어진다.” “운화(運化)를 받들어 따름은 (……) 효를 백가지 덕행(百行)의 으뜸으로 삼는다.” (‘기학氣學’) “효의 작고 일반적인 것은 어버이를 봉양함이요, 크고 귀한 것은 신기(神氣)를 섬김이다.”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 그리고 그 천지부모에서 받은 몸과 마음을 중요시한 점, 기존의 권위 있는 텍스트를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실증을 중요시한 점에서도 둘은 서로 상통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젊어서부터 나이가 들면서 경험과 견식이 깊어진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점이다.

에키켄은 “인생 50세에 이르지 않으면, 혈기(血氣)가 안정되지 않고 지혜도 열리지 않으며, 옛것과 지금 것을 잘 모르고 세상의 변화에 익숙하지 않고 행하는 데에도 뉘우치는 것이 많다. 인생의 도리도 즐거움도 아직 모른다. 50이 되지 않고 죽는 것을 요(夭; 젊어서 죽음)이라 한다. 역시 불행단명(不幸短命)이라고 해야 한다. 오래 살면 즐거움도 많고 얻는 것도 많다. 날마다 몰랐던 일을 알게 되고, 달마다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학문이 장족의 진보를 이루는 것과 지식에 밝게 통달하는 것도, 오래 살지 않으면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양생의 술을 행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수명을 유지하고, 50세를 넘어서 되도록 더욱 오래 살아서, 60세 이상의 수역(壽域)에 이르러야 될 것이다. (……) 하지만 기질이 거칠고 욕심을 제멋대로 하고 참치 않고 삼가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최한기도 역시 50~60세 이후에는 견문도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과 실무 경험도 쌓여서 승순(承順)의 도가 점차 넓고 원대해지고, 70세 이후에는 몸이 운화에 승순하면 바야흐로 강장지도(康莊之道)를 열게 된다고 말했다.

한일의 옛날 석학이 둘 다 나이가 많을수록 공부와 경험이 축적돼서 도가 밝아지게 됐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은 무언가 고령화시대를 맞이한 우리에게 희망의 빛으로 비추어주는 것 같다.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한국의 혜강 최한기 < 동양포럼 < 동양일보 2018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한국의 혜강 최한기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한국의 혜강 최한기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05.13 

동양포럼(68)-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최한기 초상
야규 마코토(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최한기는 누구인가?

최한기(崔漢綺·1803~1877)는 19세기 한국의 특이한 유학자·실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개성(開城)에서 태어났으나, 10대 중반 무렵부터 평생 서울에서 살았다. 23살 때 생원시에 합격한 후 출사의 뜻을 버리고, 저술과 독서에 전념하면서 재야 지식인으로 평생을 보냈다. 만년에 맏아들 최병대(崔柄大)가 시종지신(侍從之臣)이 됐기 때문에, 최한기가 이른 살이 됐을 때 시종의 아버지에 대한 은전(恩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및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을 받았다. 또, 수직(壽職)으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을 받았다. 1877년에 향년 75세 나이로 서거했으나, 사후 15년이 지난 1892 년에 조정에서 학업이 평가받아 도헌 겸 좨주(都憲 兼 祭酒)로 추증됐다.

최한기는 평생 동안 천문·지리·수학·의학·농학·수리·정치·사회·경제·교육 등 다양한 분야를 기철학(氣哲學)으로 아우르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오늘날 그는 19세기 조선에서 ‘기학(氣學)’을 제창한 독창적인 사상가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가 사상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독립 이후의 일이었다.

생전에 그의 사상은 동시대 사람들한테 이해되지 않았다.

양명학자이자 저명한 문장가로 당쟁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그 폐해를 비판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술도 있는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조차 최한기의 약전(略傳)인 ‘혜강최공전(惠岡崔公傳)’를 쓰면서 “공(公; 최한기)의 책을 보니 오로지 기(氣)를 미루어 이(理)를 헤아리는 것만 말하고 있어서, 대개 선유(先儒)가 밝히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 최한기의 학문이 기존의 어느 학문의 틀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최한기는 사상가라기보다 애서가 혹은 저술가로 알려져 있었다. 최한기와 친했던 실학자 오주 이규경(五洲 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19 ‘중원신출기서변증설(中原新出奇書辨證說)’에서, 당시 중국에서 새롭게 간행되고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책들을 열거하면서 그 중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 ‘완씨전서(阮氏全書)’, ‘수산각총서(壽山閣叢書)’ 등이 영의정 조인영(趙寅永)과 최한기 집에 있고, ‘영환지략(瀛圜志畧)’ 등의 책은 최한기 집에만 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최한기가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정치를 주도한 권신이자 문인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조인영의 그것을 능가하는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최한기가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지도 제작·간행을 도와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한기는 스스로 귀한 책을 모을 뿐만 아니라 남의 출판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건창에 의하면, 최한기 집안은 원래 부유해서 그가 좋은 책이 있다고 들으면 값이 비싸더라도 아낌없이 사들이고, 오래 읽은 책은 헐값으로 팔았다. 그 때문에 온 나라의 책상인이 앞을 다투어 책을 팔기 위해 찾아오고, 북경]에서 새롭게 출간되고 조선에 들어온 책으로 혜강이 읽지 않는 것이 없는 정도였다고 한다.

“책을 사는 돈이 너무 많지 들지 않소?”라고 어떤 사람이 쓴 소리를 하자, 최한기는 “만약 이 책 속의 사람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천리(千里)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는 반드시 만나러 갈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무런 고생도 안하고 앉은 채 그것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책을 사는 돈이 든다고 해도 식량을 마련해서 먼 길을 떠나는 만큼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 때문에 집안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고 마침내 저택을 남에게 넘겨주고 도성 밖으로 이사하게 됐다. 1866년 최한기 64세 때에 지은 ‘신기천험(身機踐驗)’ 이후, 그는 ‘명남루(明南樓)’의 호를 계속 쓰고 있다. 이 ‘명남루’가 바로 최한기가 가장 만년의 살던 집의 호로, ‘남쪽을 밝히다[明南]’에서 보아 도성 외각 남쪽의 어딘가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건창에 의하면, “향리로 돌아가서 농사라도 지으면 어떤가?”라고 어떤 사람이 최한기에게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나도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 내 견문을 넓히고 내 앎과 생각을 활짝 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데,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서울보다 편한 곳이 없다. 그런데 어찌 굶기가 두려워서 시골에 가서 살아야 되겠는가?”

만약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 통신판매가 있었더라면 최한기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 사람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어느 시골로 이사했을지도 모른다. 해튼 이와 같이 그를 둘러싸는 환경은 변화했지만, 서적에 대한 욕구와 왕성한 지식욕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 몰랐다.



●신미양요 때 자문을 받다

‘혜강최공전’에 의하면, 영의정 조인영, 좌의정 홍석주(洪奭周) 등이 최한기에게 출사를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사상을 동시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는 재야학자로서 조정의 고관대작들부터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아들 최병대의 잡기(雜記)를 모은 ‘최병대난필수록’ 중에 ‘오월십망일 강화진무사 정기원 여가대인서(五月十望日 江華鎭撫使 鄭岐源與大人家書)’가 실려 있다. 이것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존 로저스(John Rodgers)가 이끄는 미국 아시아함대와 대치(對峙)하던 강화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최한기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정기원은 조속히 적을 격퇴시키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만 아니라, 여름의 습한 날씨 속에서 노영(露營)이 장기화되면서 질병에 걸리는 사졸(士卒)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고초를 들어놓고 있다. 그리고 최한기의 고명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이미 대원군께 아뢰어 허락도 받았으니, 부디 강화도의 군영까지 발걸음해 주어서, 평소 간직하고 있는 경륜지책(經綸之策)을 피력해주면 고맙다는 내용이다.

사실 그 당시 최한기의 나이 69세였고 아무리 나라의 위기라 하더라도, 또 흥선대원군의 허락이 내려졌다 하더라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군영까지 나와서 참모 노릇을 해 달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최한기의 답장인 ‘가대인답정기원서(家大人答鄭岐源書)’도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병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10여 년 동안 바깥에도 안 나가고 집안의 잡다한 일들은 자손들에게 듣고 있는 형편인데다가, 나이도 벌써 69세가 됐다. 그러니까 결코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의리가 싫어서 평소와 같이 집에 앉아 있으려는 것은 아니다. 여쭙고 싶은 기밀이나 의문이 있으면 내가 아는 대로 대답할 것이고, 쓸 만한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성력(誠力)을 다해 상세히 알릴 것이다. 이 뜻을 대원군[雲峴宮]께 잘 전해드리기 바란다. 내가 서울에 있어야 정신 차리고 꾀와 생각을 얻어서 군국대사(軍國大事)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진영 사이를 분주해 봤자 기력과 정신을 쇠진하고 꾀도 안 나오고 공사(公私) 모두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최한기는 집에 있으면서 수시로 정기원의 자문에 응하게 됐다.

‘혜강최공전’은 두 사람 사이에서 논의된 이야기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정기원이 최한기에게 급히 사자를 보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을 논의했다.

“어느 날 오랑캐들이 갑자기 모래를 배에 싣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무슨 작정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최한기가 말했다.

“틀림없어, 그들은 식수가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옹기에 모래를 담고 바닷물을 붓고 짠물을 걸러서 맑은 물을 얻으려 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너무 깊이 들어갔으니 맑은 물을 구할 방도가 없어서 장차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과연 며칠 후 오랑캐는 도망쳐 버렸다.

요컨대 최한기는 미군이 모래를 배에 싣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들이 물 부족에 빠져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 때문에 장차 퇴각할 것이라고까지 예측한 것이다.

사실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출항하고 강화도에 이른 미국해군 아시아함대는 일본에서의 선례에 따라 조선의 개국도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장기전의 준비가 부족했던 데다가 조선군의 결사적인 공격 때문에 육지에서 충분한 땔감과 물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미군은 강화해협에서 고립하다가 조선에 대해 아무런 외교적 성과도 얻지 못한 물러가게 된 것이다.

혹은 그들을 바다 위에서 고립시키고 스스로 퇴각하게 하는 것까지 최한기가 세운 전략일 수도 있다.

원래 실학자로서의 최한기는 열렬한 개국통상논자(開國通商論者)였고,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에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서양 천주교의 형이상학 및 신앙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거듭 반대했지만, 서양학의 유용성은 인정하고 좋은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나 병인양요, 그리고 이번의 신미양요 때에도 서양 열강들은 하나같이 군함과 우세한 무기를 과시하면서 무례하게 다가오고, 개국과 신교 자유를 요구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협하고, 적지 않는 군민(軍民)을 살상했다. 그 때문에 배외(排外) 감정이 조야에 확산됐다.

세계의 바다를 두루 노니는 상려(商旅)가 최근에 밝혀진 바의 끝머리[支流餘緖]를 빌려와서 백성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화포(火砲)를 바다 위에서 마구 쏘기도 하고, 교술(敎術)을 어리석은 백성을 전하기도 한다. 이래서는 교통이 비로소 열렸어도 머지않아 그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민심의 동요가 원근(遠近)에 퍼지고 있는 것이 다섯 번째 불행이다.(「明南樓隨錄」)

최한기가 보기에 서양의 군함이나 화포 같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도 광대한 우주만물의 ‘천지운화(天地運化)’에서 보면, 그 끝머리를 군사에 응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가지고 백성을 위협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서양 각국과의 접속과 교섭이 평화롭고 대등하고 호혜적인 방식이 아니라, 열강의 군사력을 앞세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가슴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언제나 문달을 구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맏아들 최병대는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의 시종지신(侍從之臣)이 됐다. 최한기의 정치사상에 있어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수시로 조언하고 선도(善導)하는 강관(講官)·언관(言官)은 가장 중요시되는 직책이었다. 아들이 바로 그러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병대가 시종이 됐기 때문에, 시종의 아버지에 대한 관례에 따라 최한기가 70세가 된 1872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가 내려졌다. 최병대가 아버지의 묘소를 위해 지은 「여현산소묘지명(礪峴山所墓誌銘)」에 따르면 이때 실직(實職)도 함께 주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최한기 본인은 “조정의 은전(恩典)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관례로는 시종 아버지에 대한 추은(推恩)이 으뜸가는 것이다. 이미 최고의 명예를 받았는데, 어찌 벼슬의 유무 따위를 생각하겠는가? 그런 것은 굳이 원하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래도 결국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이듬해 봄에 다시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또한 숙사(肅謝)하지 않았다(又不肅謝)”고 한다. ‘묘지명’은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언제나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숙사란 새로운 벼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출근할 때, 먼저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숙배(肅拜)하고 사은(謝恩)의 뜻을 표하는 인사이다. 하지만 최한기는 결국 그것을 안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4년 최한기 72세 때에는 다시 수직(壽職)으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이 주어졌다. 수직은 관원이 80세, 평민은 90세가 되면 주어지는 원칙이었으나, 72세의 최한기에게 그것이 주어진 것을 보면 조정의 최한기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신미양요 때 그가 정기원의 자문에 응한 일에 대한 포상의 뜻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최한기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든 포상을 주든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큰 운화(運化)에 승순(承順)하라’

말년의 최한기는 인생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가 1868년 무렵에 쓴 ‘승순사무(承順事務)’라는 초고가 남아 있다.

그는 이 우주 전체가 필경 한 덩어리의 신기(神氣)이며, 그것은 항상 쉬지 않고 운동하고 변화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운화(運化)’라고 말한다. ‘승순(承順)’이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윗사람의 명을 잘 좇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최한기는 거기에 기의 운화(運化)─우주자연과 인간사의 조리· 법칙을 잘 헤아리고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인생에 10세마다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10세 이전에는 한 몸에 지닌 맑은 기운을 승순한다. 하지만 이때는 천지와 사람과 사물의 변화를 잘 모르고 있다. 20세 이전에는 되면 바야흐로 혈기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30세쯤 되면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고 천지만물의 현상과 부회시켜 귀신(鬼神)·방술(方術)·화복(禍福)·길흉(吉凶) 등에 물들게 된다. 40세쯤 되면 인생 경험의 절반을 넘게 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평상시의 승순하기에 따라서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50세 이후에는 견문도 쌓이고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과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일의 경험도 많아진다. 사람이 나를 따르면 기뻐하고, 남이 다른 사람을 잘 따라도 기뻐하고, 나아가서는 사람이 마땅히 따르지 말아야 하는 일에 안 따라도 기뻐한다.

60세 이후, 승순의 도가 점차 넓고 원대해지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정치와 가르침[政敎]은 모두 절의(節義)에 따라 베풀고, 나라의 전쟁을 화해시킨다면 천지와 사람과 사물의 운화와 경험이 어긋나지 않게 되고, 운화의 가르침이 넓어지고 해를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70세 이후는 몸이 운화에 승순하면 바야흐로 후세에 강장지도(康莊之道)─편안하고 왕성한 도─를 열게 된다.

대체적으로 최한기의 ‘승순’사상에서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만큼 그것이 많아지는 고령 세대의 역할과 행실이 중요하게 된다. 유년기에는 아직 세상만사 만물의 이치를 모르고, 소년기에는 혈기가 넘치고, 중년기에는 자칫하면 미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조심해야 된다.

하지만 50세 이후에는 옛것을 계승하고 장래세대를 깨우쳐 주는 학문과 사회적 경험도 나름대로 쌓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승순의 도를 넓힌 고령자는 스스로 절의를 지키고 전쟁을 화해시켜 평화를 실현시키고, 나아가서는 후세에 편안하고 왕성한 도를 열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기준과 양생

최한기는 고희(古稀)를 넘어서 75세까지 살게 됐는데, 특별히 ‘양생’에 대한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서 몸 관리를 잘 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 있다.

‘인정(人政)’ 권25 용인문(用人門) 6 ‘유준무준(有準無準)’이 바로 그것이다.

“기준(準)도 없이 사람을 쓰는 자는 혹 쓰지 말아야 될 사람을 쓸 만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고, 혹 쓸 만한 사람을 쓰지 말아야 될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며, 오직 마음과 뜻[心志]이 내키는 대로 일정한 근거가 없으니, 누가 그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 특히 사람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온갖 일에 기준이 없는 자는 호생(好生)을 알면서도 양생(養生)의 도(道)를 모르고,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면서도 죽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음식이 정도를 지나치면 속히 질병이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고 기름진 음식 입에 넣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정(情)을 다해 욕(欲)을 제멋대로 부리다가 죽고, 손해를 보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나는 바를 삼가고 가슴속에 담아둘 줄 모르는 것, 이것은 이른바 안다는 것이 준적(準的)이 없는 앎이고, 이른바 모른다는 것이 준직이 없는 모름인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사람의 준적이 있고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준적에는 크고 작음, 허와 실이 있다. 크고 내실이 있는 것은 천인운화(天人運化)이고, 작고 허망한 것은 헛된 마음의 추측(推測)이다.”

그는 사람을 쓰는 일은 물론, 모든 일에 타당한 기준(준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양생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좋아할 줄 알면서도, 생명을 키우는 도를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몸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달고 기름진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정욕을 제멋대로 하다가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정욕을 가슴속에 담아둘 줄 모르는 사람―예컨대 요즘 세계를 흔들리고 있는 #Me Too 운동에서 고발당한 아무개 같은 사람이라든가―은 모두 기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앎(知)와 행함(行)이 분리된 사람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최한기는 왕양명(王陽明)과 달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외치지 않았다. 그는 ‘천인운화’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어떤 권위자가 정해 놓은 외부적·고정적인 기준도 아니고, 왕양명이 말한 양지(良知)나 심즉리(心卽理)처럼 내부적·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외부와 내부, 고정과 유동 사이에서 주관과 객관을 아우르는 기준이라고나 할까. 최한기는 바로 그러한 기준을 따라 평생을 살았음이 틀림없고, 양생에도 유의했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영광스럽구나!”

일본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운양호사건 후 1876년 1월에 일본의 군함 5척이 다시 찾아와 조선에게 개국을 요구했다. 조선 측이 그것에 응하지 않자, 일본 군함은 서해 앞바다에 계속 정박하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저 시간만이 지나가던 바로 그때, 최병대는 상소를 올렸다. 그것은 인심이 동요하는 바로 지금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정사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고종도 즉시 현직 대신과 당상관을 소집해 대응책을 강구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최병대는 그때 이미 언관(言官)을 사직한 뒤였다. 전직 언관이 상소를 올리는 것은 조정의 법도와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이하응(李昰應)에게 탄핵을 당하고 익산군(益山郡)으로 유배됐다.

그때 최한기는 아들을 배웅하면서 난색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네가 능히 말로써 죄를 얻을 수 있었으니 가히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화복 따위는 근심해야 할 일이 아니다.”(「惠岡崔公傳」)

최한기는 왜 조정의 법도를 어기고 상소를 올린 아들을 칭찬했을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최병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소한 법도에 구애되지 않고, 상소를 올려 말로써 그것을 타파하려 했다. 최한기는 그것을 해낸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다.

최한기 만년의 삶과 생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결과가 좋고 나쁨에 개의치 않고, 늘 바른 길을 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사회에 공헌하면서 살고, 다음 세대도 그렇게 살게끔 깨우쳐주며, 장차 밝은 세상을 열게 이끌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고령세대의 몫이라고 그는 주장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산 것이다.

동양일보TV


박장미 pjm8929@dynews.co.kr

2023/06/23

Taechang Kim - 柳生真 教授による "チェハンギの <恩> と <孝>

(6) Taechang Kim - 昨夜(2023.6.20.火曜日、19:00-21:30)の公共する美学を共にデザインするワークショップ... | Facebook

昨夜(2023.6.20.火曜日、19:00-21:30)の公共する美学を共にデザインするワークショップでの柳生真(韓国円光大学)教授による "チェハンギの <恩> と <孝>関する発題講演を傾聴し、
聴講者たちと交わした対話を終えた感想:

1.チェハンギは勿論、日韓中の気学研究史上気と恩あるいは孝との関連で論及したのは前例のない 画期的な試み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先ず評価する.
2. しかし 恩は恵と、そして孝は慈と、共に一体として相恩互恵し、親慈子孝するという相互性という多次元的動態として体感 体験 体認することが大事である.
3. チェハンギの美学とは、生命開新美学の観点と立場から見れば <報謝の美>ではないか、という気がする.
4. チェハンギと柳宗悦との恩関連繋がりの話があったけれど、ラフカデイオ-
ハーンが日本の美を世界が十分理解していないなかで、日本人以上に高く評価し
世界に知らせようとしてもらったことに感謝し、それをまだ世界が十分知らない
韓国民衆の日常生活から生み出された民衆的生活用品にそれまで認識されなかった独特の美をはっけんし、そこから貴族的芸術美学とはちがう民衆的工芸美学を
整理提示することによって世界に知らせることを通じて報恩の実践に献身したと
いう深い結縁を感じるのである.
See translation

2 comments

  • Taechang Kim
    天地人三次元相関連動としての地球生態学的認識像は、歴史的状況的条件変化によって刷新を繰り返してきたけれど、恩恵生態学という新たな認識-実践像の
    整理と提示には大きな思考発展的意義と展望開新的可能性があ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 Like
    • Reply
    • See translation
    • 2 d
  • Taechang Kim
    生態学と言うけれど、自然生態学が昨今の議論の主流になっているけれど、文化生態学や社会生態学、そして政治生態学や経済生態学等々いろんな専門分野が多元化しているなかで、韓国の一部では地球(生態)政治神学の吸収と波及こそが時代と現状の桎梏から解放される道筋であるかのように談論が続く. 果たしてそれで
    よいのか?

===
·
어젯밤(2023.6.20.화요일,19:00-21:30) 
공공하는 미학을 함께 디자인하는 워크숍에서 유생진(한국원광대학교) 교수의
 "최한기의 <은혜>와 <효>에 관한 발제 강연을 경청하고, 청강자들과 나눈 대화를 마친 소감:

1. 최한기는 물론 한중일 기학연구사상 기와 은혜 혹은 효와의 관련으로 논급한 것은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시도였다는 점에서 먼저 평가한다.
2. 그러나 은혜는 혜와, 그리고 효는 
자와 함께 일체로서 상은호혜하고, 친자자효한다는 상호성이라는 다차원적 동태로서 체감체험체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최한기의 미학이란 생명개신미학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면 <보사의 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최한기와 야나기무네요시의 은혜관련 이야기가 있었는데, 
라프카디오-한이 일본의 미를 세계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인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고 세상에 알리려고 해준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아직 세계가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한국민중의 일상생활에서 창출된 민중적 생활용품에 그동안 인식되지 않았던 독특한 미를 발굴하고, 그로부터 귀족적 예술미학과는 다른 민중적 공예미학을 정리 제시함으로써 세계에 알리는 것을 통해 보은 실천에 헌신했다고 라는 깊은 결연을 느끼는 것이다.
===

천지인 3차원 상관연동으로서의 지구생태학적 인식상은 
역사적 상황적 조건변화에 따라 쇄신을 거듭해 왔으나 
수혜생태학이라는 새로운 인식-실천상의 정리와 제시에는 큰 사고 발전적 의의와 전망 개신적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태학이라고 하지만, 
자연생태학이 오늘날의 논의의 주류가 되고 있지만, 
문화생태학이나 사회생태학, 그리고 정치생태학이나 경제생태학 등 여러 전문분야가 다원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지구(생태)정치신학의 흡수와 파급이야말로 
시대와 현상의 질곡에서 해방되는 길인 것처럼 담론이 계속된다. 
과연 그것으로 좋으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