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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생명철학적 행복이해: 유교(중용)와 안창호의 행복이해


생명철학적 행복이해: 유교(중용)와 안창호의 행복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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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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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철학적 행복이해: 유교(중용)와 안창호의 행복이해

유교의 행복이해는 고대와 중세 봉건질서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농경문화의 행복이해이며 안창호의 행복이해는 근현대 민주공화시대의 행복이해다.

2020/11/27

유교의 서(恕)를 통한 관계 치유 – 과거의 관계 속에서의 서( )恕 와 현대의 관계 속에서의 서( ) -恕 김민정(서강대학교)

 


[유교분과 1발표]

유교의 서(恕)를 통한 관계 치유

– 과거의 관계 속에서의 서( )恕 와 현대의 관계 속에서의 서( ) -恕

김민정(서강대학교)

서론

종교적 인간은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해나간다 소외감을. 느끼거나 치유가 필 요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과 자신 외의 세계와의 관계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다 코로나라는. 최근의 상황은 인간관계에 대한 정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다 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 글에서는 관계 속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유교의 실천행위인 서(恕)를 통해 어떻게 지금 여기에

그 실천행위를 적용해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1. 인(仁)으로 향하는 길인 서(恕)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두드러지게 양극화된 선(善)과 악(惡)의 대결구도로 짜여지지도 않을뿐더러 한 사 람이 겪는 하루의 시간 속에서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선택과 결단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사 회의 모습이 어렴풋이 큰 조류를 이룬다. 공자는 그 같은 수많은 선택의 목적지로 인간이라면 인(仁)한 사람 이 되어야 한다는 종교적 인간상을 세운다.

인(仁)에 대한 정의와 개념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교의 이상에는 늘 인(仁)이 중심에 자리 한다. 공자는 부정의하고 어지러운 세상이 달라지길 원했지만 체제를 바꾸거나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형태로 고치려하기보다 인간 내면의 근본 변화로 달라지길 원했다. 그리고 공자가 말한 그 근본변화가 목표로 삼아 야 할 정점에는 인(仁)이 자리 한다.

공자는 一以貫之를 하는 방법이 충(忠)과 서(恕)에 있다고 설명한다 주자학적. 설명에 따르면 충(忠)은 자기 의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마음의 진정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서(恕)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라 설명한다 정자. (程子)는 “자신으로써 남에게 미침은 인(仁)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 침은 서(恕)이다...하늘의 명이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충(忠)이요 건도, (乾道)가 변화하여 각기 생 명(性命)을 마루고 있다는 것은 서(恕)이다. <중용 13장 의> 이른바 忠恕違道不遠이란 것은 바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뜻이다.” )라고 했다. 忠과 恕를 마음의 실천규범으로 삼으면 저절로 하늘의 뜻과 통하는 인(仁)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서(恕)는 인(仁)을 이루는 방법이 된다 인간. 내면의 근 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다다라야할 목표가 인(仁)이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서(恕)라 한다면 서 (恕)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켜 사회적 유토피아인 평천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된다. 누구나 소외받지 않 은 사회 하늘의, 도와 맞닿는 위로를 인간관계에서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상을 우리는 서(恕)에서 찾을 수 있 다. 그렇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서(恕)는 무엇인가?

2, 유교의 서(恕) 서(恕)는 ‘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그러면. 온 나라 어디서든 원

망이 없고 지역사회 어디서든 원망이 없을 것이다.’2)로 대표된다.

그러나 서(恕)를 더 세분화하여 살펴보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소극적인 양면 의 서(恕)3)인 은백률(silver rule)에 해당하는 서(恕)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적극적으로 베푸는4) 황 금률(golden rule)의 서(恕)가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서. (恕)에는 반드시 ‘나 와’ ‘내가 아닌 타자(他者)’라는 관계가 전 제된다. 이 관계에서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서(恕)라는 기제가 발동된다. 먼저 적극적이든 소 극적이든 나의 경험과 감정과 익숙한 윤리 안에서 타자를 헤아리게 된다. 나를 준거로 해서, 내가 타자를 헤 아리고 그도 내가 원하는 일을 원할 것이라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추정이 일어난다 그러고. 나서 적극적 으로 행동을 하는 황금률(golden rule)을 행할 수도 있고, 내가 싫어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싫어하는 행동을 내가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타인을 도모 하는 은백률(silver rule)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 라는’ 한 개인의 기준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남이 못하는 것에 대한 몰이해, 그가 원하지 않 는 것을 원한다고 미루어 생각하는 착각 등 수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들은 나의 이해와 상대 의 이해가 맞아들어야 배려로써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지. 않은 서(恕)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거 나 오히려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솝, 우화의 ‘여우와 학 에서’ 자기에게 맞는 그릇을 상 대에게 내놓는 행위는 상대가 받아들이기에 폭력이 된다 상대를. 중심으로 한 배려가 아닌 나를 기준으로 한 불순한 행위의 서(恕)로 오염 되어버린다 맛있는. 음식을 내 방식으로 미루어 상대를 대접하겠다는 선한 의도 가 선한 결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황용은 황금률에는 행동을 하는 사람과 피행동인(彼行同人)의 차이가 분명히 있고 하나의, 공통된 표준이 사용되는 것은 특수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5) 뿐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참는 것 역시 내가 나에게 강요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무조건적인 배려가 자신에게는 폭력으로 돌아오며 이것을 서(恕)로 미덕으로, 여기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말한 충서(忠恕)의 개념을 주자는 천도(天道)와 연결시켜 이야기 한다. 일반적인 감 정과 주관 속의 나를 미루어 생각하는 서(恕)가 아닌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은 서(恕)라고 분명히 말한다.6)

 

也. ... 中庸所謂 『忠恕 違道不遠』 斯乃下學上達之義.

2) 『논어』 12:2.

3) 『논어』 15:23. ‘자공이 물었다. 종신토록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씀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恕)이

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4) 『논어』 6:30.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해주는 것이다. 자기 처지로부 터 남의 처지를 유추해내는 것(能近取譬)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5) Yong Huang, 『A Copper Rule Versus the Golden Rule: A Daoist-Confucial Proposal for Global Ethics , (Philosophy East and West. 55(3) 2005), P.397.』

6) 『중용』 15. 忠恕違 道不遠 ,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도(道)에 가까운 서(恕)란 자기 기준과 경험을 순수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전제로 한 다 자기. 자신이 수양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 라는’ 주관적 준거의 서(恕)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폭력이자, 비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양한 서(恕)는 사람마다 내재된 천이 부여한 성스러운 이치를 드러내게 된다. ‘나 를’ 제대로 헤아리고 모든 사람들 안에 담보된 하늘의 이치를 깨닫지 않으면, 서(恕) 는 인(仁)으로 연결되는 객관성을 잃게 된다. 자신 안에 있는 천리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자신을 도(道) 와 합일한 상태를 갖추어야 나를 미루어 타자를 배려하는 이타심이 제대로 발휘해 비로소 인(仁)과 합일(合一)을 이룬다고 볼 수 있겠다.7)

3. 서(恕)와 유교의 인간관계 서(恕)는 자신 하나의 수양에 국한한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혹은, 우주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까지 확장된다 다산. 정약용은 인(仁)을 관계성 안에서 해석했다. “‘인(仁)’이라는 명칭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가까이는 오교(五敎)  (부의(父義), 모자(母慈), 형우(兄友), 제공(弟恭), 자효

(子孝))에게서 멀리는 천하 백성에 이르기 까지 모든 사람과 그 사람이 그 본분을 다하는 것, 이것을 일러 ‘인 (仁)’이라고 한다.” 라고 말했다. 다산에게 있어서 인(仁)이란 효(孝), 자(慈), 충(忠), 신(信) 등 개개인이 상호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상대 존재에 대해 행할 필수적인 역할윤리의 덕목의 총칭임을 알 수 있다.8) 인 (仁)은 혼자서 정의되는 개념이 아닌, 개인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끌어져 나온다. 이보다 훨씬 먼저 장재는 <서명(西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건을 아버지라 하고 곤을, 어머니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 아득하게 작지만 이에, 혼연히 그 가운데 있다. 그 러므로 천지에 가득한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것은 나의 性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이 나 와 함께하는 친구이다 군주는. 내 부모의 적손이고 ,대신은 적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이를 존경할 때 는 내 어른을 섬기는 듯이 하고, 외롭고 약한 사람을 사랑할 때는 내 아이를 돌보는 듯이 한다. 성인은 덕에 합한 자이고 현인은 빼어난 자이다.”9)

<중용 에서> 공자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아비를 섬김이 능하지 못하고,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임금을 섬김이 능하지 못하고,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형을 섬김이 능하지 못하고, 붕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내가 먼저 베풂이 능하지 못하다 .”10)라고 관계에 대한 유교적 프레임을 언급한다.

유교에서 관계에 대한 질서와 분별은 수없이 강조되고 있는데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ㆍ장유 (長幼)ㆍ붕우(朋友) 다섯 관계는 가장 보편적인 유교적 인간관계 프레임이다 가까운. 관계의 질서가 잡히면 확 장된 관계에서도 화합과 편안함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 시점에서 유교의 관계 프레임은 오륜을 기본으로 한 보수적 수직적 위계적인, , 관계이며 자유로운 교류가 배제된 관계로 평가된다 도교. 역시 유교가 내세우는 경계와 구별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경계가 그어지고 개념이 생겨나면 그 개념을 세

 

7) 풍우란, 박성규역, 『중국철학사』. (까치, 1999), P.122. 송명도학의 육왕학파는 인간에게 본디 완전한 良知가 있고,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성인이다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양지를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절대로 그릇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8) 안외순, 『茶山 丁若鏞의 관용(tolerance) 관념 : 서(恕) 개념을 중심으로』. (동방학, 19, 2010), P,248.

9) 『장재』 서명(西銘) 乾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民吾同胞, 物吾與也. 大君者吾父母宗子, 其大臣宗子之家相也. 尊高年所以長其長, 慈孤弱所以幼吾幼, 聖其合德, 賢其秀者也,

10) 『中庸』 13장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以事父未能也. 所求乎臣以事君未能也 所求乎弟以事兄未能也 所求乎朋友先施之未能也

우려 했던 원의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소외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부부사이의 별(別)에 대한 해석이 그러하다 이덕홍은. 부부유별(夫婦有別)의 별(別)에 서 두 가지 의미를 파악하였다 하나는. 남편과 아내가 공동의 영역을 가지며 이는 타인으로부터 배타적인 영 역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부부가 공동의 영역을 공유하나 일상생활은 남자는 밖에서 여자는 안에서 생활하 면서 안과 밖이 구분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 별(別)에는 ‘내외지간(內外之間)에 서로 함부로 하지 않는 다’(內外有別)와 ‘정해진 짝이 있어 서로 어지럽히지 않는다’(不相亂偶)라는 뜻이 함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덕홍은 전자의 방향으로 기울고 후자의 견해는 무시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문제점에 대해 애통해한다. 정호 는, 불상난우(不相亂偶)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지만 내외유별(內外有別)은 도(道)를 닦는 군자에게나 다그칠 수 있는 것이지 보통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 그만큼 부부사이 의 별(別)이 내포하고 있는 도리에는 상대를 미루어 이해하고 서로 공경하는 태도라는 진정성이 담긴 마음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관계 속에서의 인(仁)은 개인이 각각의 역할 속의 상대를 향한 쌍무호혜적(雙務互惠的)인 사랑이다. 정약용 은 인(仁)인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라고.’ 하며 쌍무호혜적(雙務互惠的) 사랑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존재,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숙명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귀결은 제가와 치국은 물론 평천하(平天下)와 협만방(協萬邦)의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공자는 “군자의 도(道)는 비유하면 먼 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하며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 로부터 함과 같다.” )라 하여 유교의 성인은 가까운 관계를 미루어 생각하여 먼 관계까지 인간이 가져야할 도(道)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루어. 생각하는 서에는 결국 관계성이 설정되어 있고 서는 단순히 나의 경험과 주관을 미루는 차원이 아닌 하늘의 도(道)와 맞닿는 인간의 마음 안의 성(性)이 인(仁)에 방향 지워져 있어야 한다.

4. 현대 사회에서 ‘관계 변화와’ 그 안에서의 서(恕) 언어학자이면서 구조주의자인 소쉬르는 체계성의 테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단순한 차이들을 임의로 한정함으로써 단번에 체계적인 차이와 대립들로 변환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녹색 신호등이 자신의 고유한 속성에 의해 어떤 가치를 부여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것과의 차 이 즉, 빨강 신호등과의 부정적 차별적 대립적, , 관계에 의해 특정한 가치인 ‘가다 라는’ 의미를 획득한다는 말 이다. ) 마찬가지로 유교의 관계도 많은 가능성들과 차이를 단순하게 오륜으로 한정해서 고유한 속성이 아 닌 대립적 관계 안에서 특정 가치를 부여했다.

현대 사회에서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 의 관계로 인간관계를 상정하 는 일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저항도 강하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사회적 관계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중 층적인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각 개인의 관계맺음과 거기서 파생되는 역할도 너무나 다양하다. 지금 우리 가 이루는 사회적 생태계는 공자의 시대에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가상 공간에서 수많은 관심과 취미로 모이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소셜 네트워크, 가정을 이루고 후손을 남기는 것에 대한 인식의 변화, 상하 위계적이었던 조직관계는 이익을 창출하는데 서로 도모하거나, 서로 상생하는 관계로 변화 되었다 또한. 가정 내에서도 여성이 경제력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남녀의 내외 차별이 아니라 서로 하는 일이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공감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더 이상 개인은 가족 안에서, 사회 안에서 제한되거나 자의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신과 만 나 어떠한 관계를 이루는가의 ‘상호작용(相互作用, interaction)’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정의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과 세계마다 개인을 다른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면으로만 자신을 이해받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전인적인 모습의 ‘나 로’ 이해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개인들은 자신을 온전히 이 해받을 수 있는 ‘관계의 부재(不在)’와 근본적 외로움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관계 내에서의 서(恕)는 본인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나를 미룬다고 하는 상황이 다른 타자를 온전하 게 이해하는 완전함을 갖지 못한다. 또한 자신과 타자와의 ‘상호작용(相互作用’으로 정의하는 관계에서 심리 적, 사회적, 인지적, 철학적인 원리로는 ‘온전함 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만나는 접점의 이해관계마다 자신을 해석하고 정의내리는 부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전인적으로 봐 줄 수 있고 알아주는, 존재는 초월적인 신이나 전지(全知)한 존재로 소급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초월을 관 계 내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이고 수양적인 면을 내포한 서(恕)가 있어야 한다. 단순한 타인에 대한 이 해가 아니라 사람 내에 있는 천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적용하는 “천리(天理)를 담보한 서(恕)”, 즉 유 교의 이상적인 서(恕)는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성스러운 본질을 갖는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관계 안에서 가능하면 모두가 행복한 좋은 사회를 꿈꾼다 이것은. 공자의 노력 처럼 체제나 지도자를 바꾸는 것이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야 가능하다 물론. 너무 이상적이고, 오래 걸리 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그러한 무리수에 투자를 한다. 그것만이 온전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도 이미 종교생활에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상적이고. 교리적인 차원의 윤리 와 삶 현대, 세속사회와 맞지 않는 발걸음으로 걷는 기존 종교적 보수성 안에서 많은 신앙인들은 갈등과 긴장 을 겪었다. 그리고 종교생활이 종교시설이나 회당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며 명상과 신비, 같은 관심사 등의 무리로 기존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코로나라는 팬데믹이 우리를 성스러운 공간과 공식적 으로 결별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종교적 성인의 몫이 특정 종교적 색채 안에서 혹은 수도원이나 사당, 승가 에서 기대되지 않는다 성스러움의. 모순과 세속과의 긴장과 갈등이 복잡하게 공존하는 세계 안에서 개개인이 무가치한 가치들에서 가치 있는 것을 명확하게 그려내려는 시도들이 종교적 삶으로 자리 잡고 있다.16) 유교는 기존 종교가 갖는 보수성, 비타협성, 정형화된 인간관계 틀 등, 현대와 갈등을 갖는 모든 요소들을 가장 짙게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인들에게 유교는 화석화 된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다는 편견이 강하다. 그러나 유교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특정 장소 특정,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 다는 점에서 생활 속의 종교라 볼 수 있다. 유교는 현실과 자신이 마주하는 관계 속에서 이상적인 삶을 실현 시키고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천리를, 매 순간 실천하는 구체적인 예(禮)를 늘 작동 시킨다.

유교가 우리 시대에 맞는 관계를 다시 상정하여 개인 대 개인 개인과, 사회 인간과, 만물에 대한 관계의 프 레임을 ‘상호작용(相互作用)’에 설정하여 각기 만물이 가진 존엄성을 개체의 특성대로 이해한다면 천리를 담

 

16) McGuire, Meredith B, 『Lived Religion : faith and practice in everyday life』. (Oxford University, 2008), P.6.

보한 서(恕)를 중도(中道)에 맞게 내세울 수 있다 그렇게만. 하더라도 아직 잔재한 유교적 관계의 부작용, 서로 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유교는 현실적 관계 안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성인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려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 안에서는 세속 안에서 어떻게 성스러운 관계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여 공명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 유교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恕를 주관적 준거가 아닌 타자를 위한 진정한 배려와 이해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 간의 의사소통과 통섭을 통한 오픈된 환경이 필 요하다. 과거의 유교 공동체가 맺은 관계 안에서 천리(天理)가 내재된 서(恕)를 현대화된 관계에 적용시킨다 면 유교적 관계가 가진 경직된 위계와 서열의 부정적인 모습을 거두고 인간의 상호호혜적(相互互惠的) 관계 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論語集註]

[論語古今註]

[中庸]

1. 풍우란, 박성규옮김 (1999) 『중국철학사』, 까치.

2. 양국영 (2006) 『유교적 사유의 역사』, 황종원외 옮김, 유교문화연구소.

3. Mc Guire, Meredith B (2008) 『Lived Religion : faith and practice in everyday life』. Oxford University.

4. 정정기, 옥선화 (2011) 『조선시대 가족생활교육에서 부부유별의 의미 간재 이덕홍의 ‘부부유별도 를’ 중심으로』, 가정과 삶의 질 연구.

5. 안외순 (2010) 『茶山 丁若鏞의 관용(tolerance) 관념 : 서(恕) 개념을 중심으로』, 동방학, 19.

6. 박지혜, (2015) 『유교사상에 나타난 사회성 교육 고찰』, 열린교육연구.

7. 최용호, (2012) 『구조주의 언어학과 차이의 언어학』, 프랑스학연구 59.

8. Yong Huang (2005) 『A Copper Rule Versus the Golden Rule: A Daoist-Confucial

Proposal for Global Ethics , Philosophy East and West. 55(3).』


종교와 영성, 그 사회적 치유 김경재

 

종교와 영성, 그 사회적 치유



김경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1. 들어가는 말

한국 종교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학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오늘 모임의 주제가종교와 영성, 그 사회적 치유 라고했다. 제안을 받아든 필자는 맘이 참 착찹했다. 착찹한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유는 셋으로 압축되었다.

첫째 건강한, 상태의 살아있는 종교라면 마땅히 그 모습이영성적 이라야할 터인데 오늘의 한국 종교가 영 성적임을 잃어버렸다는 자괴감이다 함석헌이. 비유로서 정곡을 찔러 말했듯이종교는 구슬이 아니요 씨다.”1) 그런데 한국의, 종교인들은 자기가 귀의한 종단은 만고불변한 진리의 금은보화 상자를 간직 보관한진리의 궁 궐 이요인류를 먹여 살리는영적 양식 창고 라고자임한다 자라나는. 나무로서 끊임없이 새싹과 새 꽃을 피어 낸 후엔 아름다운 꽃마저 떨구어 버리고 뭇 생명이 먹도록 열매를 맺는 나무이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치유는, 건강한 의사가 병들고 신체부위가 고장난 환자를 고치는 일인데 이, 시대 한국 종교가 과연 감 히사회적 치유 기능 감당 이라는생각을 할 자격이 있는가의 부끄럼이다 일반사회. 중평이 오히려 병든 한국 종교를 염려하고 한국종교계가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이르시기를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루가복음서11:35)고 하셨는데 종교계,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분렬시 키고 미움과 증오심을 가중시킨다 심지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선가(禪家)의 가 르침이 무색할 정도로 손가락에, 금반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내 손가락만 보라!”고 우중을 기만한다. 알 고 보면 사찰 성당 교회당 경전 수도원 교의 성직자 등등, , , , , , , 그 모두가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 한 것 아닌가?

셋째, 문명사적으로 볼 때, 21세기 시대사조는 엄정하게 말하면 종교시대가 아니고 과학시대요, 인간의 모 든 경험과 가치판단을 경험과학적이고 물질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설명하려 든다 인간의. ‘마음’, 정신, 신비체 험, 영성등도 두뇌기능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 인류역사에서 종교의 빛과 그림자를 철저 하게 폭로하고, 역사학과 진화생물학을 융합시켜 베스트셀러 책 『사피엔스 와』 『호모데우스 를』 저술한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 Harari)의식은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이며 신비로운 것이다2)고 고백하 고 있다.

인간의 마음 의식이, 수수께끼이며 신비한 것이라면 그것의 드러나는 현상인영성 도신비한 인간생명 현상 이다 세속화. 물결에 휩쓸려가면서 생물학적이고 기계론적 실재관에 점점 쇠뇌당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영 성이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의 학회모임 주제가 난감

1)   『함석헌 전집』(한길사, 1983), 3, 197.

2)   유발 노아 하라리 지음, 전병금 옮김, 21    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 2018), 477

한 세 번째 이유다. 이상에서 언급한 우리들의 주제가 던지는 난감함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국 종교계가 본래 갖추어야 할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분열되고, 적대적 갈등 속에 시달리는 한민족 과 한국사회의자해적 자살경련 을치유하기 위하여, ‘종교화 된 과학의 탈선 과’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감시와 통제 에서자유하기 위해서다.

2. 종교현상학 입장에서 인간의 영성 을 이해하는 의미

종교와 영성 그, 사회적 치유 라는오늘 우리모임의 주제자체에서 보면 종교와 영성이라는 두 단어가 어떤 관계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영성(靈性) 어휘가 한자어로서 있어 왔고 한국인들 언어생활에서도 사용되어 왔 지만 그 어휘의 개념파악은 단순하지 않다.

영성(靈性)이라는 한자어에서 영() 이라는 글자는 [1]층 구조로 구성되어있는데비가 내리니 무당이 춤을 추는 형국 으로표현되었다. 은유적으로 말해서, 신기 신령( , 至氣, 계시, 은혜 가) 사람 마음에 접해오니, 대극 적인 두 가지 실재 곧 하늘과 땅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영원과, 시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정신 과 물질 등등 온갖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있던 것이 하나로 통전되고, 그 전일성 체험에서 무당(종교인, 사 람 은) 엑스타시 가운데서 신명나서 춤추는 형국이다.

영성(靈性)을 이해할 때, 인간 품성의 3가지 현상으로서 요약하는 지성(知性), 감성(感性), 덕성(德性)에 한 가지 특성을 더하여 주로 종교적 영역과 관련된인간 마음 정신 의( ) 특수기능”(a special funtion of human mind)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영성은. 종교인들만 발달된 인간정신의 특성이 아니라 모든인간 생명의 본래적 존재양태’(authentic mode of human life)로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영성을, 이해하되 방법 론적으로 말하자면 종교현상학적 방법(method of religious phenomenology) 입장에서 이해하고 설명하 려한다 게라르두스. 반 댈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는 그의 명저 『종교현상학 입문 에서』 다음같이 말했다.

종교는 두 가지 양성으로 나타난다. , 종교는 삶을 확장시키고 고양시키고 심화 시켜서 그 극한에까지 혹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가 하면, 그것은 종교는( ) 또한 삶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어떤 다른 것이 삶 속으로 침 입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전자가,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후자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수평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수직적인 선이 있다. 곧 종교성이 있 고 계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동반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를 우리는 구원이란 이름으로 종합한다. 인간은 이 구원을 자신의 종교 (종교성 에서) 찾으나 그 구원은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3)

위 인용문에서 우리는영성 도종교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즉 곧 본래적 인간본성의 구원상태요 건 강한 인간적 삶의 존재양식이라고 보고자 한다. 영성은 인간 마음속에 내재한 본연의 가능태가 현실태로 실 현되면서 고양되고 심화, 확장되고 자기초월을, 하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성은 인간이소유형태 로간직하 고 활용하는 정신기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초월로 부터 그 밝음, 맑음, 하나임, 어짐(), 새로워짐, 미 래개방성을 선물로서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다.

현상학적 방법이 존재론적 형이상학이나 논리실증주의 방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인간적 삶이란 그 무 엇을 체험하는 것과 체험된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하여 낸다는 것이다. 종교현상학적 방법은지극히 근본적인 경험론’(Max Scheler)이다.4) 그러므로 필자는 본론으로 들어가서종교적 영성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종교학적 명제나 교의적 공식보다는참된 영성적 사람은 이렇게 삶을 살아가더라라는 삶의 존 재양태를 주목할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참된 영성적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Life style)을 서술할 것 이다.

3. 영성은 본래적 인간의 존재양태요 존재방식: 참된 영성적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

첫째특징: 영성적 사람은 주체적 자아의식을 확실히 갖되 그것이연기적 실재임을 안다.

영성을 인간 본성의 심성이 갖추고 있는 존재론적 특성이라고 보든지 혹은 초월적인거룩한 것’(Das Heilige)이 인간의 심성 혼() 속에 접촉함으로서 발생하는 계시 응답적 특성이라고 보든지 관점 견해에 두 가지 입장이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결실로서 영성이 밝아진 사람은 또렷한 주체의식을 갖되, 개인의 주체성이 소라껍질 속에 속살을 감춘 어폐류 같은 실재가 아니고 관계적 참여 속에서 생기(生起)한 실재라는 것을 동시에 자각한다.

불교적 표현으로 하면 깨달음의 근본적 본질인因緣生起論이 말하려는 진실의 가르침을 깨닫고, 세상 살아 가면서 피할 수 없는 ‘’주체 객체- 이분법 ‘(主體 客體- 二分法)을 끊임없이 초극하려는 삶을 산다. 주객이분법의 초극은 말같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원론상 인정하면서도 구체적 생활 속에서는 참 어려운 것이다. 현대 적 용어로 말하면 실존적 자기의식을 가지면서도 그 실존은 이미 사회성을 전제하고 사회성 안에서만 형성되 는 실존임을 자각한다는 말이다. 영성적 사람은 고고한 유아독존적 자유인이 아니다. 동시에 영성적 사람은 전체에 몰입되거나 집단사회를 구성하는 몰인격적 원자단위가 아니라 주체적 자아의식을 또렷이 갖는다.

둘째특징: 영성적 사람은 각각 개성이 다른 구체적 마음들을 갖고 살지만, 마음은 본시하나임을 깨닫 고 한마음을 성취하려는 삶을 지향한다.

한자경은한국인의 심성과 철학적 지향 이라는주제의 첫 문장에서 다음같이 선언적으로 말한다: “일심(一心)은 한마음이다. 한은 하나()라는 뜻과 크다()는 뜻을 동시에 내포한 단어로서 일과 대를 합해 천()이 되므로 일심은 곧 천심(天心)이다....각각의 개별자 안에서 개별자를 생명체로 유지하는 그 힘이 곧 무한한 일 심인 것이다.... 이 일심을 통해 각각의 개체는 자기경계를 넘어 다른 개체와 하나로 숨쉬고 하나로 느낄 수 있다.”5)

시천주(侍天主) 해설에서 수운, 최제우는하늘님 모심 의의미와 현상을 세가지로 압축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 해설하면모심이란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는다른 개체와 하나로 숨쉬고 하나로 느낄 수 있고’, 뭇 사람들이 하늘님을 한시도 몸에서 옮겨놓을 수 없는 존재자체라는

4)      dnldhk rkxdms cor, 25-28Whr.

5)      한자경, 『한국철학의 맥』, 제 장3              . 한국인의심성과 철학적 지향 (이화여대 출판부, 2008), 58.

것을[2] 즉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증언하기를하느님께서는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 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사도행전 17:24-28). 바울의 증언을 들어보면 서구 기독교가 발전시켜온초월적 유신론 는처음 기독교인의 신앙을 대표하는 사도 바울과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알수 있다.

함석헌은 1970 4월 그의, 개인 월간지 『씨의 소리 를』 간행하면서 우리가 내세우는 것선언문 안에 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하나하나 속에 있습니다.”6)

위에서 살펴본 한자경 최수운 사도바울 함석헌이, , , 말하듯이 참다운, 영성적 인간의 존재방식과 삶의 지향 성은생명이란 개체적이면서도 전체적 하나요 한, 마음 이라는 자각 이뚜렷한 사람을 말한다 그. 사람이 어 떤 종파 어떤, 학파 어떤, 정치정당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고 사는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생명은 본시 하나이며, 분리 독립되어있는 개별자가 아니라 하나다 라는의식, ‘한 마음 의식 이있느냐의 여부로 그 종교 인, 그 정치인, 그 지식인 그, 노동자의 사람됨과 영성적임의 정도가 판가름 난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사회의 정파싸움, 종파간 배타적 우월결쟁의식, 경제적 빈부격차에서 계층간 불통, 남북정치 이념적 갈등을 보면 결 국 한국인은 본시 한국인의 삶의 철학의 본질인하나의 영성 을상실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의 모든 심성속에 있는하나의 마음 이쪼개지고 편린처럼 작아지고 갈등 속에 빠지는 이유중 가장 큰 이유를 다른 논리로서 말하면 인간이란해석학적 동물 이기때문이다. 사물을 이해하고 사회현상을 바라 볼 때 이미 사람마다 플라톤이 비유로서 말하는동굴에 갇힌자의 편견 이나바울이 경험한눈의 비늘 을지 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영혼의 눈을 덮고있는無明의 백태(白苔)’(具常) 때문이다. 태어 난 이후 자라면서 각 사람이 처한 삶의 조건과 경험이 사물을 보고 사건을 이해하는해석학적 지평 을형성한 다 자기의. 제한적이고 상대적인해석학적 지평 을절대적인 것이라고 확신하면 할수록 그는 독단, 독선, 광 신, 이념노예가 되면서 사회갈등의 원인이 된다. 영성적 인간이란 누구나 함몰되기 쉬운 상대적이고 제한적 인 자신의해석학적 지평 을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극복초월하면서 진리의 보편성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셋째특징: 영성적 사람은 신비적 활홀감 속에서 망아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은 더 밝아지고, 덕성은 더 맑아지고, 특히 감성이 더 예민해져서작은자, 낮은자, 눌린자 의희비애락을 예민하게 공감

(compassion)하고 고난의 동반자(suffering companion)[3])되기를 짐스러워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유마거사가 앓는 것은 중생들이 앓기 때문이라 했다.[4]) 중생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 (大悲)에서 온다 는아름답고도 위대한 깨우친 자의 말은 결코, 앞서 깨우친 자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중생들 을 향한 동정, 시혜, 가르침 등등의 우월감이나 자만의식은 털끝만치도 없는 것이다. 대비(大悲)는 글자 그대 로큰 슬픔 이지대자대비(大慈大悲)이 줄임말이 아니다. 자녀가 병들어 고통하고 아프면 부모는 그 자녀의 고통과 아픔보다 더 크게 아프고 고통을 느낀다. 왜 그런가? 부모자식관계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일부 타락하거나 변질된 기독교 영성운동사를 보면 기사이적 능력을 통해 방언과 신유능력을 가진 자를 영 성가라고 오해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런 초능력자도 있을 것이나 그런, 초능력자를 모두 영성가라고 보아서 는 위험하다 초능력의. 유무를 떠나서 타자 특히 한몸 생명공동체를 이루는 생명체들 중에서낮고 천대받고 억압받는 자들 의고통과 인간비애가일심동체 심정으로서곧 나의 아픔으로 느낄 뿐만 아니라 그런, 정신적 육체적 개인과 사회의 질병고통 원인제공과 책임의 일부를 자기도 피할 수 없는 자임을 진지하게 자각하는 데서 온다.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논설문에서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 이 곧 민중이다 그. 민중을 더럽다 하고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아프게 하는자다[5]) 한국의 민중 신학이 말하려는 요지도 그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전래되던 초기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 는 중산층 이상의 종교가 되었고 기득권자과, 더불어 자기를 강화하는 부자들이 모여 제일 큰 교회당을 짓는 종교가 되었고, 인간본성의 본래적 측은지심으로서 우리사회 어려운 겨레들을 위한 보편복지정책을좌파정 치 이데올로기 라고몰아붙였다. 그러한 교회들의 교회강단과 목회자들이 영성을 말하고 영성적임을 강조하 는 것은 넌센스이다.

영성적 사람의 셋째특징으로서 예민한 감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참종교인은 교리나 법 문의 암송이나 지식에 있지 않다 신앙. 곧 믿음을 반지성과 병행하는 것인 줄 착각하는 반지성적 종교와 바리 새이즘에 병든 경직화된 도덕종교는 미래가 없으며, 종교로서 인간의 비판적 지성과 덕성을 마비시키는대 중의 아편 이될 뿐이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의 내수도문(內修道文) 제 조목에1 다음 같은 말이 나온다. “하인을 내 자식과 같이 여 기며 육축, (六畜) 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꺾지말며 어린자식을 치지말고 울리지 마소서[6]) 말 못 하는 육축이라도 아끼며, 추운 겨울을 이기고 갓 돋아난 새로 벋어나온 나뭇가지와 새순을 농경사회라고 해 서 함부로 꺾거나 낫으로 베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알버트. 슈바이쳐이생명외경 사상보다더 예민한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감성이다 이런. 것을 영성적 감성이라 부른다 다음시대에. 열리는 생태학적 문명의 단초는 이런 예민한 감수성에서 부터 시작될 것이다.

넷째특성: 영성적 인간은 인간 심성에 본유적으로 주어져있는 초월적인 영() 그 자체가 사람의 영성 (靈性)으로서 맑고 밝게 발현되기 위해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修行)을 일상화 하는 사람이다.

『중용 에』 이르기를천이 명한 것이 곧 성이다”(天命之謂性)고 헸다 주희는. 이 구절에 두 가지 의미를 보았 다 첫째는. 도의 본원은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에 바뀔 수 없다는 것 둘째는. 도의 본원실체가 사람 자기 몸에 갖추어져 있어 떠날 수 없다는 뜻이다.[7]) 유교나 불교에서 위대한 현인들은 신성, 천리, 본연지성, 도심, 불 성 진여등,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간에 그것들이 본유적으로 주어져 있을지라도 실현시켜야하는 실재이며, 또 한 사욕과 탐욕으로 덮이고 변질되기 쉬운 것이므로 끊임없는 수양과 명상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영성 또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본연적 심성을 유학자들은                 허령통철’(虛靈洞徹/권근) 하고허 령불매(虛靈不昧/ 정도전)라고 보았고[8]), 불교 고승들은성자신해‘(性者神解 / 원효))하고 공적영지(空寂靈智 / 지눌) 한 것으로 보았다.[9]), 그 모든 언표들은 사람의 마음의 본래적 실재성, 당위성,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지 현실성, 구체성, 사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마음의 본연지성은 본디 신령스러우며 맑고 밝으며 신령하게 자신과 만물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능태로서 갖추어 있지만 가능태는 아직 현실태는 아닐 뿐만 아 니라 끊임없이, 탐진치 삼독(三毒))과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죄업으로 침윤당하고 변질되고 있다,

현대 한국 종교계의 위기 특히 세인의 질타를 받고 있는 한국 기독교 개신교 의( ) 위기는 수행과 명상이 신앙 인의 삶속에 체질화 되어있지 않고 성경문자주의, 교리주의, 성직자가 집례하는 예배를보는예전객관주의 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수행과. 명상은 반드시 특정장소에서 일정기간 집중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한국. 불교계 의 큰 자산은 하안거 동안거 기간 중 용맹정진 엘리트 젊은 불자 3,000여명이 해마다 좌선명상 수행에 정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럴 형편 이나 여건이 않되는 직장인 가정부는 영성수련이 불가능할가? 잠들기 전 짧은 명상 좋은, 종교시나 음악을 들으면서 평소 일에 집중하기, 홀로 있는 시간 갖기 가벼운, 등산길과 동내 재래시장 돌아보기도 좋은 명상과 수행의 방편이 된다. 맘챙기기가 중요하지 여건이나 때와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섯째 특징: 영성적 사람의 특징으로서 꾸밈없는 소탈함, 단순성, 어수룩함, 모나지 않음, 별나지 않음 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영성적 사람의 풍기는 외모는 비범하지 않음에 있다.

스승엔 3종류가 있다는 말 우리는 듣는다 첫째부류. 선생은 자기가 아는 것과 연구한 것을 부지런히 제자들 에게 가르치는 선생이다 둘째부류. 선생은 이론이나 말로서 훈계보다 모범으로 보이고 삶으로써 교화를 끼치 는 스승이다 셋째는. 존재함 그 자체가 풍기는 감화가 있고 함께있는 자들이 예기치 않는 영감을 받는 스승이 다 첫째 둘째 셋째를. , , 교사등급 기준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지만 인생여정에서, 평균 20년 동안 집중으로 배 우는 과정을 뒤돌아보면 세, 번째 선생님들 안에서 영성적 품성이 영글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엔 정말로 완성된 것은 어딘가 모자라는 것 같고(大成若缺), 참으로 가득찬 것은 비어있 는 것처럼 보이고(大盈若沖), 참으로 교묘한 것은 서툰 것 같고(大巧若)), 참 잘하는 웅변은 더듬는 것처럼 들린다(大辯若訥)고 글을 남겨 우리를 충고했을 것이다. 발제자는 , 국내외 기라성 같은 석학들을 논외로 하 고, 직접 인격적 감화를 많이 받은 3분 선생이 계신데 장공 김재준, 신천옹 함석헌, 소금 유동식 선생님이시 다. 그런데, 그 세분이 한결 같이 남기신 글을 보면 놀라운 내용들인데 말씀하시는 것이나 생활하시는 걸 가 까이에서 보면 하나같이 눌변이요, 평범이요, 어리숙함이 공동특징이다. 세상의 전문직종 중에서 비교적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라면 정치인, 교직 종사자(교사, 교 수), 언론인 그리고, 종교인 성직자 일( ) 것이다 그들이. 참으로 영성적 수행과 품성도야에 실패한다면, 가장 세 상을 어지럽게 하고, 분란을 일으키며 참 도()를 왜곡시키며, 그것으로 밥을 먹고사는 불쌍한 지식도매자 들이 될 것이다 국회의사당에. 정치는 없고 정쟁만 소란하며, 상아탑 대학엔 철밥통 지식판매자는 많아도 문 명 살리는 지혜자는 없고 신문, 방송 유튜브엔 편파적 선동뉴스기사는 차고 넘치는데 정론이 드물고, 종단의 설교단과 법문강론 단상엔 만고찬란한 교리강론은 번지르르 한데 민생의 맘은 강팍해지고 황폐해지고 머리 둘 곳이 없다.

道常無爲而無不爲[10])는 만고의 진리다. ‘영성 이()는 아니지만, 위리엄 스미스가 신비체험의 현상학적 특징으로서 열거하는 4가지 특성 곧 언표불능성(ineffability), 인식론적 특성(noetic quality), 일시성 (transiency), 수동성(passivity)중에서 영성특징으로서 언표불능성과 수동성은 겹치는 면이 있다고 보인 다.15)

여섯째특징: 영성적 인간은, 특히 21세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우주창공에 떠있는 지구 녹색행성에서 호모사피엔스가 갖는 생태학적 자리매김에 대한 각별한 자각과 함께, 진화과정 속에서 점증해가는 진 선미의 창발현상에 경외감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녹색행성 지구 살리기와 생태문명에로 전환에 힘쓴 다.

찰스 다윈의 진화이론이 발표된 지 150년이 지났다. ‘진화이론 은생명의 출현 생명종의, 다양화, 돌연변이, 자연선택등에 관한 본래적 의미에서 과학적가설 이므로’ “진화이론은 진화한다.” 무릇 모든 과학이론은 좀 더 정밀하고 정확한 이론에 의해 보완되어 가거나 대체되어 간다 진화론을. 받아드리면 필연적으로 무신론자 가 되거나 물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도킨스( ) 과학이론을 종교적 도그마로 변질시키는 일종의 형 이상학이다. “다윈 과학과 유물론이데올로기는 구분되어야 한다.”16)

종교와 영성 이라는주제를 놓고 생각해야 할 점은 21세기 인류는 전통적으로 생각해왔듯이 인간 본연지성 (本然之性)으로서 혹은신의 형상’(image of God)로서 인간성 속에 본유적으로 갖춘 영성함양에 관심 가질 뿐 아니라생태론적 영성’(ecological spirituality) 함양에 맘을 써야한다. '생태론적 영성의식 이란유기체 적지구생명‘(Global Life) 또는온생명 장회익‘( ) 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가 갖는 바른 정위치를 자각하는 영성이다.17)

떼이야르 샤르뎅에 의하면 지구는 45억년동안 크게 지질권형성(Geosphere), 생물권형성(Biosphere), 정 신권형성(Noosphere)을 단계적으로 이뤄가면서 성장해가는(진화해가는) ‘전일적 생명 이라고본다. 장회익 은 생물권과 정신권 개념을 통전하여 유기체적 온생명 혹은 지구생명(global life)라고 부르고, 지구생명을 하나의 유기체적 몸에 비유할 때, 인류는중추신경계 에해당하는 위상이 자기의생태론적 정위치 라고보 았다 사람. 몸에서중추신경계 는몸의 일부이며 신체를, 구성하는 구성소이지만 유일하게, 자기 몸의 현상전 체를몸으로서 자각하는자기 의식적 신체기관이다 중추신경계는. 몸을 환경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예방하 고 신체메카니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건강하게 지탱되도록 봉사해야 한다.

21세기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생태학적 영성 이란바로 그러한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바른 위상과 그 에 걸맞은 책임을 감당하려는 자기의식을 가진 영성이다. 동시에 생명현상 특히 인간생명현상은 유물론적 다윈주의자가 생각하듯이 긴긴 시간의 과정 속에서 우연히, 물질분자들의 합성에 의해 아무 목적도 없이 발 생하고 진화한다는 순수 유물론적 진화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태학적. 영성이란 오늘날 주류적 진화과학자 들이 주장하듯이 지구생명이 진화가이기적 유전자 들의단순한 생존과 번식욕구로서 설명되어지는 것이라 고 보는 단순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21세기 생태학적 영성은 생명계에 나타난 비극, 아픔, 어두운 그림자들을 이겨내면서 녹색지구 온생명은

아름다움의 심화확장을 향한 끊임없는 추동”(universe's incessant impetus toward the intensification and expansion of beauty)"18) 이라고 보는 영성을 말한다 그래서. 길가에 핀 사소한 들꽃을 경외감을 가지 고 사랑하며 삶을 비관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힘쓴다. 진보신학자 김재준은

15) 위리엄제임스 지음, 김성민 정지련 옮김, 『대한기도교서회, 1998 , 414-415』 쪽.

16) 존 F.호트지음, 박만 옮김, 『다윈 이후이ㅡ 하느님: 진화의 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35Whr.

17) Teilhard de Chardin, TheFutureofMan,(Harper and Row,1964), p. 163. ; 장회익, 『삶과 온생명』(솔, 1998), 182-187쪽.

18) 존 F. 호트, 위와 같은 책, 225쪽.

2020/11/10

자아 실현의 달성 Self-realization 곡두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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