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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8

Amazon.co.jp:Reviews : 영원의 철학 - 궁극의 리얼리티 (mind books)

Amazon.co.jp:Customer Reviews : 영원의 철학 - 궁극의 리얼리티 (mind books)

From Japan
유미코 ♪
4.0 out of 5 stars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마음의 책
Reviewed in Japan on July 17, 2007
이 책은 '인식의 문」 「멋진 신세계」 「섬」 「연애 대위법」등의 저서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가 동서고금의 신비 사상가들의 말을 다양한 테마로 분류,
소개하고 그 자신의 의견을 붙인 것이다.

각 장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대는 나름대로 / 인격 · 성덕 · 신의 화신 / 인애 / 심리 / 은총과 자유 의지 / 선과 악 / 시간과 영원한
구원 · 해탈 · 깨달음 / 침묵 /기도 / 고통 / 신 / 기적 / 의식 · 상징 ·秘蹟/ 관조 · 행동 · 사회적 효용
등등이다.
인용은 서부 독일의 신비 학자 엣쿠하루토 세인트 어거스틴 십자가의 성 요한
성 프랑수아 드 사르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 레이즈 브룩 다른
동은 장자, 노자,永嘉인도 고대 서사시 "바가봐도 · 기타 '등

'철학 '이라는 주제를 읽기 어려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모두가 안고있는 마음의
불안을 현인들의 말에 따라 분석하고 "그랬 느냐"고 설득 책.

예를 들어 "인애"절을 일부 소개하면,
"영혼은 스스로 생기 어머 차지하고있는 육체 속보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 사이에
살고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에 생명을주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 사이에 사는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

이 책을 구입 한 것은 이미 상당히 옛날이지만, 지금도 반복을 찾고 싶게 된다.
모든 시대를 통해 사람의 눈에서 비늘을 떨어 뜨리는 그런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38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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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나이트
5.0 out of 5 stars 감동했다!
Reviewed in Japan on July 17, 2012

시대적인 상황 때문인지 저자가 약물을 꽤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眉唾もの일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쌓아 읽기"하고있었습니다.
각주에 과거의 일본어 버전 스즈키大拙사가 서문을 쓰고 있던 것으로, 겨우 손이 나왔습니다.
읽어 본 감상입니다 만, 다른 리뷰어의 코멘트도 있습니다 같이 빨려 내용이었습니다. 한되는 것, 마음, 그리고 진리를 탐구 해 나갈 때의 문제들이 폭넓게 검토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특정 위치에서 고정으로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보편적 인 표현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술어에 대한 지식과 논지 전개의 약속도 필요 없기 때문에 불필요한 생각 손실이없이 깔끔하게 중요한 포인트를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저자의 우리 이론에 이끌려라는 자존심은 너무 느껴지지 않고 한 될 것으로 만난 선인이 남긴 말을 장식 한 선집 형식이며, 그 말을 음미하면서 읽어 진행뿐만 깊은 명상 (한되는 것의 관조)에 이끌려갑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간편한 명상법을 영감했습니다. 탄자하고 심신이 안정되면,出息에서 "아 ~ 치 (한)」라고 염원, 입 호흡에서"무 ~ 무」라고念じる는 것입니다. . "한 될 것"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필경하는 곳, 무 같은으로 간주하는 것에 착안하여 한과 무 사이를行きつ戻りつ하여 고정 관념을 분쇄하려는 것입니다 . 효과와 안전은 보장 할 수 없으므로 실행 내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만,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무엇을해야할지 호넨 고승이 말하는 "선택"수했다는 것이이 책의 힘이라는 것을 을 전하고 싶고, 실례로써 나타내 나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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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4

[[알라딘: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알라딘: 영원의 철학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조옥경 (옮긴이),오강남 (해제)
김영사 2014-07-14
원제 : The Perennial Philosophy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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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 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이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인용되었으며, 21세기에도 그 깊이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안목은 27개 주제 속에 배치한 멋진 인용문들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나며, 해설에서 묻어나는 사유와 체험의 깊이는 《멋진 신세계》의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다.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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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제_ ‘영원의 철학’으로 세계 종교의 심층을 보다

들어가며

01 그대가 그것이다
여기에 그분 말고 누가 있겠나

02 근본바탕의 성질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생겼다

03 성격, 거룩함, 신성한 화신
동일시를 통해, 은총을 통해

04 세상 속의 신
그러나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리라

05 최고의 사랑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긴다

06 고행, 비집착, 올바른 생계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용하기

07 진리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두루마리가 진짜 경전이다

08 종교와 기질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09 자기이해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긴다

10 은총과 자유의지
그대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11 선과 악
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의 자아를 보라

12 시간과 영원
어떻게 시간적 상태가 비시간적 상태와 공존할 수 있을까

13 구원, 해방, 깨달음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어야 한다

14 불멸과 존속
어디로도 가지 않고,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 자

15 침묵
갈망과 혐오의 목소리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일

16 기도
제 안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기도하소서

17 고통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18 믿음
믿음은 극락으로 이끌지만, 다르마는 니르바나로 이끈다

19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20 종교로 인해 짓는 죄
가장 근본적인 속박의 원인은 잘못된 믿음과 무지

21 우상숭배
진리와 정의가 새로운 우상이 될 때

22 감정에 호소하기
정서와 느낌의 우상숭배는 대가를 치른다

23 기적
영혼과 신 사이에 드리워진 방해물

24 의식, 상징, 성찬식
영원으로 통하는 문인가, 속박의 도구인가

25 영적 훈련
새로운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는 약의 사용법

26 끈기와 규칙성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27 묵상, 행위, 사회적 유용성
무엇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가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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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3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P. 76 근본바탕에 대한 직접적인 앎은 합일union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으며, 합일은 오직 ‘그것’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하고 있는 장벽인 이기적인 에고를 소멸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P. 136 자아가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파나fana(선禪의 무심無心)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허물이다. 최고의 상태는 소멸도 사라진 것이다. 아트만-브라흐만이라는 내적 정점에는 황홀경이라는 ‘소멸로부터의 소멸’이 있다. 더 포괄적인 소멸로부터의 또 다른 소멸은 내적 정점에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세상을 통해, 신에 대한 충만하면서도 깨어있는 일상의 앎 속에 존재한다. 

P. 140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지금 그대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라.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행하라. 그대의 가슴hearts 이외에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질서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데에 신성함이 있다. - 드 코사드

이것은 《신심명》에서 간택함을 꺼리고 망령된 견해를 쉬며, 꿈이 사라지고 진리가 스스로 명백하도록 눈을 뜨면서, 지극한 도道를 따르는 것과 똑같다.  접기

P. 150 사랑은 확실하다.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 윌리엄 로

P. 244 그대의 영리함을 팔아서 당혹감을 사들여라.
영리함은 의견일 뿐이지만, 당혹감은 통찰이다. - 잘랄루딘 루미

P. 44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선을 인식하고, 우리의 영원한 근본바탕으로 돌아가서 비록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항상 존재했던 곳에 머물러있음으로써, 구원받고 해방되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 - h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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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40년 가까이 애장하며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고 인용하는 책이다. 캐나다에서 대학 상급반 교과서와 주요 참고도서로 활용할 정도다.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종교의 심층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이번에 김영사를 통해서 한국어로 나오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신학적 제국주의를 충격적으로 일깨워준 책. 올더스 헉슬리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 오강남 (종교학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봉우리는 하나뿐이되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으리라. 루미,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등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자가 남긴 침묵의 언어가 한데 모여 있다. 종교에 대해서 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삶과 예술과 진리를 하나의 봉우리로 이끄는 단 하나의 방법, 즉 자기 무지에 대한 인식과 한없는 겸손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불쏘시개로 자아를 불태우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와 인종을 넘어서, 원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그 불씨를 나눠준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 김연수 (소설가) 


“세상에 꼭 필요한 책, 마스터피스!”
- 뉴욕 타임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 그 신비주의 사상가들로부터 헉슬리가 이끌어낸 종교 사상의 핵심적 통합.”
- 워싱턴 포스트 
“이 책은 문화·종교·영성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출발점이 어디이건 진리를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 가디언 

“이 책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위대한 디딤돌이자 개별 탐구를 위한 좋은 출발점을 제시한다. 매우 포괄적인 추천 도서 목록을 포함한다.” - 아마존 리뷰 

“이 책을 사라. 읽고 또 읽으라.
장담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홉 번째 읽고 있지만 여전히 이 책을 사랑한다.” - 아마존 리뷰 
“시간을 초월한 고전.” - 허핑턴 포스트 


 - 조선일보 북스 2014년 8월 2일자 '책 속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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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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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그는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의 밸리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더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1년에는 『크롬 옐로(Crome Yellow)』를 발표해서 당대의 가장 재치 있고 이지적인 작가라는 평을 들으며 위치를 굳혔다.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6년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a)』를 발표했다. 이는 헉슬리의 ‘후기파’ 성향을 지닌 첫 소설로서, 그의 작품 세계에서 분기점 노릇을 한다. 1958년에는 『멋진 신세계』의 예언적 주제들을 심도 있게 검토한 미래 문명사회 비판론인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다. 활동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끌렸으며 이 경향이 작품들에 반영되었다. 그는 미국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3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불멸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 『루덩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 『섬(Island)』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멋진 신세계>,<멋진 신세계>,<소담 고전 명작 시리즈 세트 - 전5권> … 총 86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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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경 (옮긴이)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도 뿌나대학교에서 요가심리학을 수학했다. 인도 아엥가센터와 미국 히말라야연구소에서 요가 수련을 했고,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심신통합치유학과 교수이자 한국요가학회 회장이다. 역서로 《통합심리학》(학지사, 2008) 《마음챙김을 위한 요가》(학지사, 2009, 공역) 《웰니스를 위한 비니요가》(학지사, 2011) 《영원의 철학》(김영사, 2014) 《요가를 통한 심리치료》(학지사, 2015, 공역) 《켄 윌버의 신》(김영사, 2016, 공역) 등이 있다. 의식의 변용과 확장을 위해 요가 수행을 기반으로 한 몸-마음-영성의 통합적 건강 및 성장 패러다임을 연구하고, 지도하며, 임상적으로 적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요가심신테라피>,<불교와 심리>,<바디워크 테라피> … 총 2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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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해제)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종교 너머, 아하!”(공저)가 있으며, 인생과 종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아하! 오강남 교수가 속담에서 건진 작은 깨달음”,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최근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을 펴냈다. 번역서로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예수의 기도”, “마지막 강의”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 총 6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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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멋진 신세계》의 올더스 헉슬리가 이끌어낸
모든 위대한 종교의 공통 핵심!”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 종교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념비적 저서가 부활하다!

봉우리는 하나뿐이되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으리라. 루미,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등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자가 남긴 침묵의 언어가 한데 모여 있다. 종교에 대해서 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삶과 예술과 진리를 하나의 봉우리로 이끄는 단 하나의 방법, 즉 자기 무지에 대한 인식과 한없는 겸손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불쏘시개로 자아를 불태우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와 인종을 넘어서, 원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그 불씨를 나눠준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_김연수 (소설가)

‘영원의 철학’이란 ‘모든 위대한 종교의 본질적이고 공통된 핵심 진리’로서, 세계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인간관·윤리관을 말한다. 고도로 발달된 종교 및 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라는 표현 자체는 16세기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Agostino Steuco가 자신의 저서 《De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라이프니츠가 ‘역사를 초월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했으며, 19세기 초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와서 올더스 헉슬리의 이 책 《영원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에 의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드디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올더스 헉슬리는 엄청난 양의 종교적 가르침들을 낱낱이 검토하고, 문학·역사·철학·심리학·과학·예술 등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유산에서 진리의 조각들을 모아, 그 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된 핵심을 발견하여 빛나는 모자이크를 보여주었다. 바로 그 올더스 헉슬리의 혁명적 영성 고전 《영원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이 국내 최초로 김영사에서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변치 않는 불멸의 가치를 찾는 이들에게 전설처럼 언급되어왔다.
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이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인용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동서양의 종교와 심리학을 독창적으로 통합시킨 유명한 사상가 켄 윌버Ken Wilber가 ‘세계의 위대한 영적 스승·철학자·사색가들이 채택한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이를 즐겨 언급하고 통합사상의 기본 전제로 삼으면서 21세기에도 그 깊이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안목은 27개 주제 속에 배치한 멋진 인용문들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나며, 해설에서 묻어나는 사유와 체험의 깊이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다.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이기도 하다.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기도 하는 귀중한 ‘지혜의 가르침’들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과 통찰을 던져주어, 출간된 지 70년이 다 된 이 책이 왜 여전히 아마존닷컴의 장기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감성적이고 가벼운 힐링 서적이 아니라 진정 변치 않는 무언가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성을 넘어 영성을 추구한 20세기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헉슬리는 1894년 영국에서 태어나 1963년 미국에서 사망한 작가·시인·사상가이다. 그는 과학·의학·예술·문학 분야에서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등재된 유명한 ‘헉슬리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풍성한 지적 자극과 창의적 재능의 격려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다윈의 자연도태설을 옹호하고 종교적 전통에 강하게 반발하며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주장한 저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가 그의 조부였고, 명문 차터하우스학교 부교장이자 전기 작가인 레너드 헉슬리가 그의 아버지였으며,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으로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현대 진화론의 대가 줄리언 헉슬리는 그의 형,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앤드루 헉슬리는 그의 동생이었다. 외가 쪽은 문학 및 종교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 교육개혁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종교인인 토머스 아놀드가 그의 외증조부였고, 어머니는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저명한 명상 시인이자 문예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그의 외삼촌, 사회와 종교문제를 대담한 소설로 그려낸 험프리 워드 부인은 그의 이모였다.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인으로 평가되는 헉슬리는 시·희극·소설·수필·비평 등 문학의 여러 장르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철학자, 신비가, 사회현상에 대한 예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초기 작품들 속에서 그는 날카로운 지성과 비평을 통해 사회비평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만, 후기에는 철학적 신비주의와 초심리학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종교적이고 영적인 주제에 몰입하게 된다. 동서양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1937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더욱 깊어져, 말년에는 주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스와미 프라바바난다 등 쟁쟁한 영성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전쟁·정치·경제·윤리·교육·종교·기술 등의 현실적 문제를 궁극의 실재와 조화시키려 애썼다. 평화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도 궁극적 의식체험을 위해 명상과 요가 외에 스스로 환각제까지 투여했던 탐구의 내용은 《인식의 문》《천국과 지옥》으로 발표되어 화제를 낳는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와 통합적인 삶의 예술, 서양의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방법론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현대문명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역설했다.

동서양 위대한 종교의 공통적인 핵심을 밝힌다!

이 책은 헉슬리 스스로도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영원의 철학 선집(대표적 작품을 뽑아 엮은 책)’이다.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스스로 거듭나고 깨달음으로써 ‘궁극의 실재Reality’를 직접 통찰하여 자질을 갖춘, 진실로 ‘성인 같은 남녀들’이 여러 시대와 장소에 걸쳐 토로한 구절들에 헉슬리의 해설을 덧붙인 지혜의 모음집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인 신성한 실재는, 사고와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한 ‘직접적인 영적 앎’의 영역이다. 

헉슬리는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불교·힌두교·도교와 그리스도교·이슬람교 신비주의 등의 여러 경전을 면밀하게 탐구한 후,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들을 비교·분석하면서 본질적인 공통점을 찾아 종합했다. 인용문으로 가려 뽑은 글들만 42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가톨릭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윌리엄 로의 글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성 요한, 잘랄루딘 루미, 성 프랑수와 드 살도 자주 인용하였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뎅크와 프랑크, 퀘이커교를 창시한 조지 폭스의 글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톨스토이·워즈워스 같은 문학 대가들의 글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동양의 현자 중에서는 장자와 노자의 글을 자주 인용하였고, 인도의 유명한 경전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도 인용 횟수가 적지 않다. 다양한 불교 경전도 인용하고 있는데, 달마가 혜가에게 전했다는 《능가경》이 가장 많고, 그밖에 《육조단경》《전심법요》《신심명》 등 선禪의 정수를 보여주는 내용들과 함께 《대승기신론》《청정도론》《능엄경》《법구경》《금강경》 등 웬만큼 불교를 안다고 하는 동양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승과 소승, 교종과 선종의 핵심을 골고루 아우르고 있다.

이런 인용문들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희귀한 자료도 많을 뿐 아니라 그 폭과 깊이, 자료 선정의 안목, 해당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복합적 구성 등을 통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지적·영적으로 의외의 놀라움을 계속 안겨준다. 이처럼 동서양 영적 천재들의 다종다양한 목소리를 총결집시킨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사유의 지평, 그리고 해설에서 묻어나오는 체험의 깊이는 그의 천재성이 주는 경이감과 함께 의식이 고양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떻게 그 길을 찾을 수 있을까?
: 서로 다른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의 짜릿한 전율!

신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초월적인 바깥에서 구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마음속을 살피며, 어떤 이는 곧장 자신이 바로 절대자이고 진리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오랜 탐구와 모험 끝에 내미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결론을 헉슬리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곧장 제시하며 시작한다.

“그대가 그것이다” “모든 것에서 하나만을 보라” 신은 우리 안에도 저 밖에도 계신다. 영혼 속에도, 영혼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재Reality로 가는 길이 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상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이들 중 어느 한 길을 따름으로써만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p.111)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방법은 쉽지 않다. 아니, 대관절 이게 타당하기나 한 사실일까? 그 까닭과 논리, 전후과정과 방법론들이 이 책의 다른 페이지들을 다채롭게 채우고 있다. 사랑과 진리의 관계,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 자유의지와 은총, 자아, 선과 악, 시간과 영원, 구원과 해방, 믿음과 지식, 침묵과 기도, 우상숭배, 영적 훈련과 기적의 가치 등 묵직한 주제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내용들이 현대의 심리학이나 과학?정치적 현실과 만나는 지점 등 세부 주제를 통해 ‘신성한 실재’의 특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들여다본다. 
수많은 인용문과 함께 제시되는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대한 체계를 모자이크처럼 아름답게 구성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이런 탐구와 인용들이 단순히 ‘좋은 말’에 그치거나 일반 명상서적들이 전하는 피상적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장의 제목이자 그리스도교?불교?힌두교의 성인들이 모두 언급한 “그대가 그것이다”라는 유명한 표현 하나만 보더라도, 헉슬리는 그러한 통찰이나 진리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우상’이 될 때 빚어지는 위험성과 그 다음 단계, 그것의 사회적 파급효과까지 언제나 몇 발짝 더 들어감으로써 우리 인식의 지평을 다각도로 넓혀준다.

니르바나(열반)와 삼사라(윤회)가 하나라는 것은 우주의 본성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성이 매우 진보한 영혼만이 이 사실을 충분히 깨닫거나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평범하고 친절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진리를 풍문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반율법주의의 온갖 어두운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모든 것은 신이고 신은 모든 것이라는, 순전히 지적이면서 깨달음이 없는 이론을 실제로 적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p.131~132)

사람에 따라 저마다 그 길이 다른 까닭은?
: 행위의 길, 앎의 길, 헌신의 길을 통해 이르는 곳

본성이 본성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는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길을 잃고 있는 셈이다. (p.267)

왜 어떤 이는 믿음을 우선시하고, 어떤 이는 분석적인 설명을 좋아하며, 다른 이는 윤리적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일까?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여기며 서로를 설득하고 강요하려 애쓴다. 다시 불거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뿐만 아니라 대규모 인종 학살, 여성 학대, 전쟁과 살인, 폭력의 배후에는 서로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고 또 그 속의 ‘같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적 연구와 종교적 지혜라는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공통된 이유를 흥미롭게 짚어낸다. 내배엽-중배엽-외배엽이라는 각자의 생리적 기질(체질)이 어떻게 다르며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이것이 고대 종교가 발견한 헌신의 길, 행위의 길, 앎의 길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는 불완전한 종교들 중 어느 것인가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을 그 자체로 훌륭하고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오류는 때로 끔찍한 영향을 끼쳤다. (중략) 쉘던이 지적했듯이 격렬한 개종은 대개 중배엽의 정도가 높은 성격의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현상이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외향적이어서 마음의 낮은 수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이 자신의 주의를 내면으로 돌리면, 그 결과로 생기는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생소함과 낯섦으로 인해 계시의 힘과 질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회개metanoia, 혹은 마음의 변화는 갑작스러우면서도 감동으로 넘친다. (중략) 이런 종류의 정서적 격변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사람에게 구원을 개종에 의존하게 만드는 교리는 만족감을 주지만, 영적 성장에는 매우 치명적이다. (p.266~267)

종교적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이는 결국 자기 수행과 진리탐구의 방법론으로 이어지며,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까지 종합하여 짚어내는 설명은 체질론의 옮고 그름을 떠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고통과 욕망으로 넘치는 이 세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삶은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하게 된다. 위대한 성인들은 저 멀리 천국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신이 계시고, 세상 자체가 바로 신이라고까지 하건만,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일까?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원죄’와 ‘타락’을 이야기했는데, 헉슬리가 ‘영원의 철학’을 통해 밝히는 그 본질은 ‘개체화된 존재에 대한 열망’이다.

신성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함과 통합unity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창조의 목적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는 현혹적인 분리에로의 충동과 분리감에서 벗어나, 결합하는 앎unitive knowledge을 통해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p.383)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그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p.23)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무언가를 다시 믿어야 하나? 금욕? 기도? 봉사? 무심? 열정? 아니면 또 다른 배움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삶이 그러하듯 이 책 속에서도 늘 의외의 인물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제시된다. 동서양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시/소설/희곡/아포리즘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노래하고 있다.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지금 그대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라.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행하라. 그대의 가슴hearts 이외에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질서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데에 신성함이 있다. _드 코사드 (p.122)

"자아가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파나fana(선禪의 무심無心)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허물이다. 최고의 상태는 소멸도 사라진 것이다." 아트만-브라흐만이라는 내적 정점에는 황홀경이라는 ‘소멸로부터의 소멸’이 있다. 더 포괄적인 소멸로부터의 또 다른 소멸은 내적 정점에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세상을 통해, 신에 대한 충만하면서도 깨어있는 일상의 앎 속에 존재한다. (p.136~137)

종교란 본래 당대 최고의 지적 성찰과 고민을 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일러 '으뜸가는 가르침宗敎'이라고 했던가. 이 책은 그러한 종교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공통 원리를 언급하면서도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과 ‘여기’의 내 삶으로 행복하게 돌아오는 방법, 그 가장 오래된 지혜를 깊이 있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깨달음과 영적 통합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줄 책!

1945년에 영어로 출판된 책이 약 70년 만에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데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아, 이성과 합리성이 시대정신을 주도하던 근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을 억압하는 형식적 합리성의 지배를 피하려는 탈근대적 시도를 넘어 새로운 통합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객관적·이성적 사유를 기반으로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산업의 발전을 향유하고 있는 밝은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삶의 상품화, 질적 차이의 평준화, 생명세계의 파편화, 천박한 유물론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경험한 인류는 지성을 넘어 영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향한 갈망이 점차 커져가고 있다. 그동안 종교의 영역으로 치부해왔던 ‘영성’이라는 주제는 2000년대에 들어와 의료계를 통해 정신건강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꾸준히 보고되면서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최근 대중들 사이에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도덕적·윤리적 욕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곧 우리 모두가 근본에서 하나임을 보여주는 ‘영성’이라는 궁극의 도덕과 직접 관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할 때, 동서양 영적 천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종합하여 고대부터 내려오는 인류 보편의 진리가 존재함을 보여준 《영원의 철학》은 오히려 21세기에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는 기본서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지구촌’으로서의 세계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동서양의 통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동서고금의 수준 높은 지혜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보다 높은 의식의 지평을 여는 단초가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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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분포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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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철학의 중요한 요점들을 잘 정리했다.  구매
도사림 2014-12-16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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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깊은 영성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구매
장미꽃이슬 2014-12-0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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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책!!!
머리속의 지식이 아닌 영혼을 살찌게하는 책!!!
아무나 읽을 수 없는.....  구매
불가사리 2014-12-0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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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  구매
다비치 2014-08-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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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드디어 만나보는 올더스 헉슬리의 후기 대표작...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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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로이 2014-08-07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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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

모든 종교는 비슷한 진리를 품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종교들을 하나의 고리로 엮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 평생을 종교 하나만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동서양의 종교를 망라하는 작업은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그런데 이미 몇십년 전에 이 일을 해낸 사람이 있다. '멋진 신세계'로 잘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가 바로 그 인물이다. 모든 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뽑아낸 뒤에 각 종교마다 해당 이념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종합해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비교적 쉽게 쓰여있다고는 하나,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원래 개념도 어려울뿐더러 원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쓰여있는 단어들도 상당히 까다롭다. 종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에게는 조금 벅찬 책이다.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읽다보면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해서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지지할 것이 없다고 여겨질 때 종교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힌다. 그런데 평화를 위한 종교가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에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분명 각 종교의 지도자는 사랑과 이해를 가르쳤을텐데,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킨다. 이 사람들에게 서로가 다르다고 등돌리기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이념이 다른 것이 아니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약간 그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여러 종교를 통합적으로 보면 각 종교가 가진 한계도 보이고 장점도 보인다. 그럼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다.

종교를 깊이 탐구할수록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된다. 외부 환경을 보고 이런저런 말을 하기는 쉽지만, 정작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비교적 쉽게 번역을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 대해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찾기보다 결국은 나를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 하나의 종교에만 치우치지 말고 좀 더 다양하게 믿음의 폭을 넓혀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종교적 갈등을 보며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신의 왜곡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일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나면 종교에 대한 편협된 생각이 없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종교의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 적극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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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2014-08-03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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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의 보편적 진리 새창으로 보기
冊 이야기 2014-164

『영원의 철학』 올더스 헉슬리 / 김영사

1. "아. 이 멋진 인간들이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들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를 생각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 《멋진 신세계》이다. 흔히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함께 거론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2. 많은 이야기 중 책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웰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공포와 기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헉슬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욕망과 말초적인 자극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오웰이 책을 금지할 자들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3. 책에 대한 관점만 보면 올더스 헉슬리가 이겼다. 최근 인터넷에 오른 글들 중에 머니투데이의 [新대한민국 리포트] '책 안 읽는 사회'를 보면 올더스 헉슬리가 백번 옳다. "문학소녀? 찌질하잖아요. 쌤도 문제 하나 더 풀라던데요". "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무식한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간 중간 눈에 띄는 이러한 문구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아이들이 이 나라를 과연 어떻게 운전해갈지 큰 걱정이다.

4. 책의 제목인 ‘영원의 철학’에 무게감이 실려 있다. 영원히 풀어가야 할 철학이냐? 영원을 향한 철학이냐?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 근대 독일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자 뉴턴과 별개로 무한소 미적분을 창시한 독일 근세 철학의 원조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5. 그러나 옮긴이 조옥경 교수는 ‘영원의 철학’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가 자신의 저서 《De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라이프니츠가 이 용어를 ‘역사를 초월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6.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기독교 · 불교 · 유교 · 도교 · 이슬람교 · 유대교 · 힌두교 등 세계의 종교는 영원의 철학이 제안하는 보편적인 진리가 각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된 결과로 나타난 모습니다. 이 보편적인 진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7. 첫째, 물질 · 생명 · 정신권의 근본바탕에는 신성한 실재가 존재하며, 모든 현상은 그러한 실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신성한 실재는 분석적 사고를 통해서는 포착할 수 없으며, 더 높은 차원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셋째, 인간은 현상적 자아와 영원한 참자아라는 이중성을 지니며, 참자아는 신성한 실재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넷째,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실재와 경험적으로 합일하는 데 있다.

8. 헉슬리는 ‘그대가 그것이다’, ‘세상 속의 신’, ‘최고의 사랑’, ‘진리’, ‘종교와 기질’, ‘선과 악’, ‘시간과 영원’, ‘침묵’, ‘기도’, ‘믿음’, ‘우상숭배’, ‘기적’, ‘영적 훈련’ 등을 포함한 27개의 화두를 갖고 생각을 풀어나가고 있다. 400여 인용문엔 각 종교의 경전 외에 노자,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카뮈, 사르트르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9. 다소 종교적인 면에 치중된 감이 크지만, 요즈음처럼 신앙인은 없고 종교인만 있는 현실을 직시해볼 때 종교를 갖고 있건 아니건 읽어볼 만한 책이다. 간혹 종교에 대한 불신감만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안 믿고, 부처님도 안 믿고 ‘나는 나를 믿는다’고 한다. 그럼 그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종교는 우선 믿고 알아가는 방법도 있다. 그 후에 맛을 보는 경우도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단지 그 맛에만 길들여져서 다른 맛은 모두 배척하는 지나침은 자제해야 할 일이다. 아울러 ‘나’를 제대로 알고 ‘나’를 믿는 계기도 되리라 믿는다. 그 ‘나’를 제대로 알고 나면 ‘나’를 믿게 될지 어떨지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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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4-08-0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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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 읽어보고 싶다 와 읽을 수 있다는 다르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지적 허영이라고 해야 할까? 김영사 서포터즈 선택 도서 중 하나였던 영원의 철학. 책에 대한 소개를 읽고 덜컥 신청하였다. 쉽지 않아 보였으나 그래도 읽을만 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사실 ‘철학’ 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괜히 읽어보고 마음이 생기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 기대와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이 책은 내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아직 내가 이 책을 읽을 정도의 넓이와 깊이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겠지. 따라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서평’이라 말하기에는 매우 부끄럽고 단순한 ‘후감’ 아라 할 수 있겠다.

영원의 철학.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지는 70년이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완역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 김영사 같은 국내의 큰 출판사였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영원의 철학이 당장 불타나게 팔릴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제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영원의 철학의 번역본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출판사에서 낸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 그런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매년 꾸준한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대학수업의 부교재로 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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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은 세계 종교의 ‘공통적 요소’ 27가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없다. 내가 그 수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과 저자의 주장이 있으니 적어보고자 한다. 가장 마음에 와 닿고 배움에도 아래와 같은 자세가 매우 필요하다. 특히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더 아래의 가르침을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자기 종파의 영광을 높일 목적으로 자신의 종파에 전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종파만을 공경하고 다른 종파를 비방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런 행위로 인해 자신의 종파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경건함의 법칙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훌륭하다. - 아소카의 칙령

신의 아이들은 매우 사랑스럽고 매우 별나고, 매우 친절하지만 매우 편협하다. - 사두 선다 싱

백 년 전에는 산스크리티어‧팔리어‧중국어가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유럽 학자들의 무지가 그들의 편협주의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 정도 적절한 번역이 풍성해진 오늘날에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며 변명의 여지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굴하구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 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교와 기질 :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이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도 사람들의 차이에 따라 각자 맞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며 종교에서도 가르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한 가지 길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에게도 한 방법만을 강요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한 길을 인정하는 것은 이미 예로부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철학’은 옛 방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 머리에 꽉 차 들어가게끔 말이다. 그래야 여기의 글들이 마음을 통해 울려지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사람보다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줄 수 있을 책이라 생각된다.

쉽게 읽고 끝낼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곰곰이 씹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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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gperson 2014-08-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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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 새창으로 보기
[북리뷰] 영원의 철학

한마디로 미추어버릴 것 같은 책. 올더스 헉슬리의 이름을 여러 번 되내이면서 정말 헉소리가 나는 책이었다. 페북스터디로 <개념 뿌리들>을 하고 있는데 그 책만큼이나 어려운 책이었다. 그래서 난 서평을 못하겠다!!! 헉슬리의 생각을 간파할 수도 없고, 헉슬리의 이야기를 요약하기도 어렵다. 그저 난 이제 한 번 이 책을 읽었을 뿐이다. 감히 어찌 이 책을 논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하자면, 몇 몇 chapter를 소개하는 정도이지 싶다.

헉슬리는 최고의 사랑이란 chpater에서 사랑을 love가 아닌 charity라고 했다. Charity는 자비나 관용, 자애, 너그러움 등을 의미한다. 즉, charity는 더 이상 최고이자 가장 신성한 형태의 사랑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왜 love와 charity를 굳이 구분하나 싶기도 할 것 같다. 영적 삶을 사는 스승들은 낮은 형태의 사랑일 때 love를 사용했으며, 최고의 사랑일 때 charity를 사용했다고 한다. 용어에 정확히 구분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볼펜 가져와 했는데 붓 가져가면 쓰겠나?

최고의 사랑은 사심이 없고,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그 선함에 대해 어떤 악을 돌려받아도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최고의 사랑이 있을까 싶지만) 또한 낮은 형태의 사랑과는 달리 정서(emotion)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지의 행위로 시작해서 순수하게 영적인 자각, 그 대상의 본질과 결합하는 사랑-앎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아마 낮은 형태의 사랑은 이끌림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남녀간의 사랑은 앎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까)

결론적으로 최고의 사랑은 사심 없음, 고요함 그리고 겸손이다. 그러면서 현대는 냉혹함(lovenessless)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대자연에 대한 자비가 부족하여 자연을 파괴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보면 lovenessless라고 했다. 낮은 단계의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사랑은 높은 단계의 사랑 charity로 가는 과정인데 현대 사회는 love가 없다는 것이 헉슬리의 생각이라고 추론했다.

헉슬리는 사유에 대해서 그리 찬성하는 편은 아니라는 생각을 받았다. 사유하면 집착이 되기에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또 해본다.

여기까지가 최고의 사랑 charity라는 한 chapter의 내용을 나만의 방식으로 요약해 본 것이다. 27개의 chapter 중 겨우 하나의 chapter를 요약하는데 이 정도 걸렸으니 아마도 이 책은 올해까지 읽으면 다행이다 싶을 것 같다.

종교의 이야기를 떠나 헉슬리의 책은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분석하지 않고 나만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나를 한 단계 올려줄 “입맛 까칠한” 책임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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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2014-08-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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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420개 나침반

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420개 나침반
서정보기자  2014-08-02 

◇영원의 철학/올더스 헉슬리 지음·조옥경 옮김 /528쪽/김영사 (2014)

올더스 헉슬리(1894∼1963·사진)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 ‘멋진 신세계’의 작가로만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뜻밖으로 여겨진다. 1944년 출간된 책이 70년이 지나서야 한국어로 완역돼 선보인다는 것 역시 뜻밖이다.

이 책은 사회비평가였던 그가 1937년 미국에 건너온 뒤 크리슈나무르티, 프라바바난다 등 유명한 영성가들과 교류를 나누며 궁극의 실재와 영성을 탐구한 결과다.

영원의 철학은 ‘모든 종교의 본질적이고 공통된 핵심 진리’를 뜻한다. 헉슬리는 이를 신과 결합하는 삶이고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지칭한다. 알쏭달쏭한 이 결론에 대해 독자가 동의하는지는 별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영성과 관련한 27개의 주제를 정하고 기독교는 물론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수많은 종교의 주요 저작에서 420개의 인용문을 뽑은 점이다. 적어도 ‘영성’과 관련해 인류 역사 속에서 축적돼온 방대한 가르침의 진수를 한 권에 축약 정리한 것만 해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 다루는 궁극의 실재, 신, 영혼(soul) 영(spirit) 자아(self) 등의 개념에 대해 한마디로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고 정의를 내리긴 쉽지 않다.

그러나 헉슬리는 난조를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을 명확히했다. 신이 준 것에 대한 한없는 겸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 탐구의 길은 오직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한 "영원한 철학 '과는 반대로, 시간 속에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는'시간의 철학 '은 종교와 이념의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과 배척의 원인이라는 점도 분명히했다. 

책을 추리 소설을 읽는 것 처럼 단번에 읽지 않는다는 것을 희망한다. 조금씩 음미 다시 씹어 습기 찬다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성을 기르도록 읽고 진행 좋겠다. 27의 주제를 1 일 1 개씩 읽으면 딱 속도이다. 그리고 영혼이 갈증을 기억할 때마다 꺼내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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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jp/article/all/20140802/425610/1/%E7%9C%9F%E3%81%AE%E6%82%9F%E3%82%8A%E3%81%AE%E3%81%9F%E3%82%81%E3%81%AE%EF%BC%94%EF%BC%92%EF%BC%90%E3%81%AE%E7%BE%85%E9%87%9D%E7%9B%A4

2021/08/30

이병철 2108 -문명전환의 주체에 대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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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2108 
-문명전환의 주체에 대한 소회/
문명은 인간이 구축하지만, 전환은 스스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문명전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인간이 지금의 문명을 만들었지만 만들어진 이 문명은 이제 그 자체로 자기 운명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은 붕괴한다. 인간이 그 한계의 조건을 만들어내면 스스로 붕괴된다. 그러므로 이 붕괴는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성주괴공은 우주 존재계의 필연적 법칙인 까닭이다. 
지금 이 문명은 스스로 그 끝점을 향해 무너지고 있다. 문명의 겨울, 혹한과 침묵의 긴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이 이 문명의 겨울이 지난 뒤에, 그 동토의 긴 터널을 지난 뒤에 얼어붙고 무너진 그 자리에서 비로소 다시 새로운 문명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과 봄이 잇대어 있지만 봄이 겨울에 앞서 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붕괴와 탄생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붕괴를 조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것이 세워지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모든 선천 문명은 그 자체로 후천 문명을 품고(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는 입춘의 절기처럼 이 문명의 가장자리 또는 그 한복판에서 이미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고 있음을 본다. 
이 문명, 무너져내리는 이 문명을 잘 떠나보내는 것은 새로운 문명을 잘 태어나게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호스피스의 역할은 새로운 출산을 돕는 산파의 역할처럼 필요한 일이다. 
문명의 대전환기, 나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이 문명의 종말을 예감하면서 오랫동안을 이 문명 다음에 도래할 새 문명의 탄생을 돕는 산파의 역할을 꿈꾸어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면한 문명전환의 과정에서 새로운 문명의 출산을 돕는 산파가 아니라 무너져내리는, 이미 임종 상태로 치닫고 있는 이 문명을 잘 마무리하게 돕는 호스피스의 역할이 나의 역할임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나 자신이 이미 낡은 문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스피스 역할은 나를, 나의 임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자각한다. 
나는 이 문명과 나 자신의 마무리를 함께 돌봐야 하는 호스피스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산파의 역할을 꿈꾸고 애쓴 것은 무망한 것이었음을 좀 더 일찍 자각했어야 했다. 
임종의 마무리 과정이나 새로운 출산의 과정에는 모두 두려움과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낡은 것의 임종과 새로운 것의 출산 그 전환과정에 따르는 혼돈은 필연적이다. 이 혼돈의 시기, 그 과정은 기존의 지식이나 문법이 작동되지 않는다. 가보지 않았던, 경험하지 못했던 어둠 속 혼돈의 길인 까닭이다. 
이 전환의 과정을 애벌레가 나비로 되기 위해 번데기로 되는 변태의 과정으로 이해하든, 또는 임종과 출산의 과정으로 이해하든 전환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빅카오스적인 혼돈이나 블랙홀 같은 어둠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빛이 사라진 캄캄한 어둠 속의 갈피 잡을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인간을, 우리를, 나를 파멸시키게 될 것이란 그 두려움, 이것은 나에겐 죽음보다 더 깊은 공포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될 아노미 상황에서의 불신과 살육과 전쟁과 파시즘을 피해갈 수 없으리라는 불안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우리가 휩쓸리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면, 그 카오스적 혼란과 블랙홀의 어둠 속에서도 고요한 중심과 빛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가슴 속에 열린 하늘을 품고 있는 이들은 전환의 혼돈, 그 깊은 어둠에서도 빛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전환의 시기에 사랑과 수행이 더욱 절실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서로를 품어 안으며 미리 죽는 연습을 통해 죽음 너머를 지켜보는 것이다. 

나의 만트라이기도 한 시 한 편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 이 문명을 예감하며 오래전에 이 시를 썼다. 

-지켜보기(觀)/ 

하나의 끝점이/새로운 시작의 그 처음이다// 
끝과 시작이/ 하나로 휘도는 거센 소용돌이/ 그 출렁임 속에서/ 당신을 본다/ 당신을 보는 나를 보고// 
안팎 동시(同視)/ 지켜보는 이를 지켜보는 자리/여여하다// 
고요한 중심/ 환한 미소// 

하나의 문을 닫는 것은 하나의 문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임종과 출산은 이어져 있고 애벌레와 나비도 고치 속의 번데기로 이어져 있다. 따로인 것은 어느 것도 없다. 임종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다른 편으론 잘 태어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생을 안심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잘 죽는 것, 잘 죽어주는 것이 새롭게 태어날 생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 없이 임종을 잘 맞이하게 하는 것. 감사하며 기쁨으로 임종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전환의 문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그 전부라 믿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감사할 때 기뻐할 수 있다. 이 문명의 종언이 새로운 문명의 출산을 위한 통과의 과정임을 안다면 어찌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오직 하나의 아픔이란 전환기, 카오스적 혼란과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아픔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 그 생명들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이다. 

새롭게 다가오는 그 문명이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과정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환한 미소 그 밝음을 잃지 않고 우리 모두, 모든 생명과 존재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랑과 연민 속에서 마침내 나비의 꿈에 이를 것임을 믿는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문명은 생명이 둘로 나누어졌던 문명에서 다시 하나인 문명으로, 나와 세상이 분리되어 있던 세계에서 그 둘이 하나인 세계로의 이행일 것이라 싶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인간의 자기 정체성으로 여겨왔던 ‘신령한 짐승’의 회복과 다르지 않으리라 여긴다. 흔히 말하듯 도래할 문명을 생태문명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란 종(호모 사피엔스)이 다시 땅과 하늘을 이어 소통하는 신령한 짐승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구의식의 회복이란 내겐 그렇게 다가온다. 

우형(又形), 태극의 또 다른 무늬로서의 궁궁(弓弓)을 생각한다. 이미 문명의 겨울이 깊어졌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던 배는 침몰하고 있고 편안하게 살았던 집은 무너지고 불타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새로운 문명이 또한 태동하고 있음을 안다. 혹한의 겨울 가운데서 봄의 기운이 태동하고 있는 것처럼 무너지는 이 문명의 뒷자락 속에 이미 새로운 문명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생생한 느낌으로 전해져 온다. 

새로운 문명, 온생명이 하나인 그 문명의 탄생은 이미 그런 삶을 삶고 있는 이들에 의해 피어나고 있다. 도처에서, 문명의 겨울 속에서 봄을 준비하는 이들을 본다, 새롭게 구명정을 마련하고 새로운 거처와 새 땅에 뿌릴 씨앗을 준비하고 있는 산파의 역할은 그들의 몫이다. 
잊었던 만트라를 다시 챙긴다. '고요한 중심 환한 미소'. 

내가 그렇게 지켜볼 수 있다면 호스피스에 충실하면서도 문명의 새봄이 옴을 설레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그 봄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도 고마움과 격려를 보내리라. 
내 마지막 역할이 호스피스로서 새 문명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 고마움을 연결하는 것일 수 있기를 마음 모은다. 남은 걸음, 더 열린 가슴의 환한 미소로 죽어가는 이 문명과 눈 맞추며 밝고 가볍게 호스피스의 그 길을 걸어가리라. 

호스피스 역할로서 내가 마음 모아야 할 일들/ 

-감사하기/ 감사를 잊지 않기, 깊게 감사하기, 감사로 온몸, 온 존재를 흠뻑 적시기. 이번 생에, 인연에, 천지만물의 은혜에 깊게 감사하기. 
-기뻐하기/ 미소로 온몸, 온 존재를 가득 채우기, 밝음으로 채우기, 내가 먼저 밝음 되찾기 
-기도하기/먼저 가슴 열기, 불안과 두려움 속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의 평화와 안식을 위해. 환한 아픔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하기/빛과 사랑을 보내기, 미소와 꽃을 건네기, 내가 먼저 꽃으로 피어 있기 
(이 소회는 엊그제 여름 지리산연찬에서 이튿날 새벽에 다가왔던 생각과 느낌을 다시 정리해 본 것이다)

2021/08/27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 네이버 블로그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 네이버 블로그

[공지]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시원 김흡영 교수
도의 신학 서설
・ 2021. 7. 17. 16:59


도-그리스도론에 대한 한국적 전거들
그렇다면 도란 근본 은유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사실 도의 해석학
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시작부터 도의 관점을 통해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리스도를 이해한 것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로고스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한 것처럼 지극히 타당하고, 그와
할 수 있다. 한국 신학 사상사에서 도를 근본 은유로 적용한 대표적 사례로서 이벽, 유영모 그리고 이정용의 그
다.<1>
1) 이벽(李檗, 1754-1786):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교차점으로서 그리스도
노자는 궁극적인 도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넘어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언어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
삶의 방법(德)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도는 단지 형언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혁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인 방식들까지도 제시하는 자기발견적인 은유인 것이다. 동아시아
반적으로 도교와 유교라는 상호보완적인 대립쌍(complementary opposites)에 의해 인식되었다. 도가전통
(apophatic) 차원, 곧 하늘의 길(天道)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유가전통은 인간 삶의 언어적(kataphatic) 측
욱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당대에 탁월한 유학자이면서 한국 최초의 신학자라 할 수 있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영적 교부라는 광암 이벽(1
인도의 일치와 합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도와
인성이 합일한 최상의 현자로 보았다.
2)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없이 계신 님”으로서 그리스도
동아시아의 해석학적 지평의 깊은 심장부에서부터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단초를 제시한 이는 다석(多夕) 유영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유교와 불교에 통달했고 선도의 수행자였다.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太極
而太極)’, 즉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절대무(空虛)와 우주생성적 근원이라는 상호보
적 대립쌍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도를 최상의 우주생성적 역설이라고 보는 신유교적 관점에서, 다석은 아주
스도론을 구상했다. “십자가를 무극이 태극이라고 본다. 동양의 우주관이다. 동양의 우주관을 몸소 보여 주신
성인(殺身成仁)이었다. 자기를 제물로 바쳐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가 “내
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넘치는(父子有親
( )로서 드러난다. 다석은 십자가를 “꽃피”라고 했다. ‘꽃피’인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을 드러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라는 꽃이 피를 흘리며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주의 영광스런 만개를



이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가 “내
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넘치는(父子有親
( )로서 드러난다. 다석은 십자가를 “꽃피”라고 했다. ‘꽃피’인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을 드러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라는 꽃이 피를 흘리며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주의 영광스런 만개를
있어서는 “우주 궤도의 돌진이 십자가요 우주 궤도를 도는 것이 부활이요 세상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우편에
이러한 없음(無)과 있음(有), 비존재와 존재라는 최고의 역설적 시각에서 다석은 특유한 한국적 영성으로서 기
apophatic) 도 그리스도론을 구상했다. 그는 예수를 원초적 호흡, 즉 “숨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예수는 “계시
는” 분이다. 다석은 “없이 계신 님”이라고 하는 비존재(無極)적 존재(太極)이라는 특이한 동양적 그리스도론을
어도 (실제적 가치가) 없는 존재’, 즉 ‘존재적 비존재’라면, 예수는 ‘없어도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 곧 ‘비존
하면, 우리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면, 그리스도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3) 이정용(Jung Young Lee, 1935-1995): 역(易)의 완성으로서 그리스도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정용은 주역(周易)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동아시아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키고자 했
신학을 위한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실효성을 상실한 실체론적(substance
충분한 과정신학적(process) 패러다임(becoming)을 넘어서서 역(change)의 방식(being and becomin
임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 보여주었
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유클리드 기하학, 뉴턴 물리학 같은 희랍적 형이상학에서의 있음(substance)이
(Whitehead)의 과정 형이상학에서의 되어감(process)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변화 안에 있는 있음(bein
은 음과 양의 상호보완적 대립쌍 안에 있는 태극에 근접한다. “그러므로 역은 있었고, 있고, 있을 모든 것들의
있음과 되어감의 근원이다. 따라서 역의 신학은 있음이면서 또한 되어감인 궁극적인 것의 특징을 설명한다.”
서구적 사고방식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하는 양자택일적인 논리가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러
까지도,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모든 궁극적 문제들에 있어,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상극적인
모두를 아우르는 상생적인 양자긍정(both-and)에 있다. 이정용은 양자택일의 방식은 그릇된 것이고, 역의 “
의 올바른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했다(God as Change). “역경(易經) 속에 나타난 역은 분명히 범주화할 수 없
에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동시에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이러한 완전긍정(bo
(neither-nor)과 상호보완적이다. 최상의 역설로서, 태극은 완전한 긍정을, 무극은 완전한 부정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면서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그러나 동
않으면서도 비인격적이지 않고, 남성이 아니면서 여성도 아니며, 내재적이지 않으면서 또한 초월적이지 않다
스도는 역의 완벽한 실현으로서 파악된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속에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인성을 배제하는
음(陰)의 존재를 전제하듯이 그렇게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완전한 인성은 완전한 신성을 전제하고 있
변화와 변화함의 완전한 상호보완성 속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변화와 변화
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와 변혁의 궁극적인 현실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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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속에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인성을 배제하는
음(陰)의 존재를 전제하듯이 그렇게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완전한 인성은 완전한 신성을 전제하고 있
변화와 변화함의 완전한 상호보완성 속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변화와 변화
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와 변혁의 궁극적인 현실이다."<4>
이정용의 제안은 사실 신학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합당한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의 반서양적 수
과도했고,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지나치게 실증적인 형이상학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역이 새로운 대안
이상학이라고 주장하며 내세운 그의 ‘복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retrieval)’은 여러모로 탁월성을 가지
학의 구성을 위해 더불어 중요한 전통의 역사에 대한 진솔한 비판을 하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
서 역의 신학은 토착전통에 대해 순박하고 낭만적인 해석학을 사용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스 신학(종교신학)을 위해서는 좋은 모형이지만, 아시아 신학의 또 다른 축인 프락시스 신학(해방신학)을 위해
지 못한다. 서구 형이상학의 모순에 반대하는 열정적인 논쟁 속에서 이정용은 그의 본래의도와는 반대로 도가
있다고 하는 형이상학적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도덕경이 정의한대로, 도는 결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발견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콘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
다. 따라서 역동적인 도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맥락과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도의 해석학이란 해석자 또는
과 맞물리면서, 도의 궤적을 각성하고 창조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
진 어느 때에 어떻게 우주적인 운동 속에 적절히 참여할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요구한다는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 완전긍정과 완전부정의 그리스도
신학적 근본 은유로서 도의 탁월성은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초언어적인 도를 표현해내
적 실재를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도는 그리스
결하고 그리스도를 통전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실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탁월성도 희랍
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우주생성적인 본성을 표현해낸 것에 있다. 그것을 통해 4-5세기 교부들 은 기독교 신앙
고를 초월할 수 있게 하였 다. 우선 니케아 신조(325)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인 동시에 ‘참 인간
기 위해 양자긍정(both-and) 또는 완전긍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칼케돈 신조(451)는 그리스도의 두 본
하지도,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자부정(neither-nor) 또는 완전부정의 방식
어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인성과 신성 양자 모두에 대한 전적 긍정으로서 태극(太
부정으로서 무극(無極) 사이의 최고의 역설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인 신비를 통찰하고 표현했던
인간이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우주의 참 주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의 신학은 신-인간
---
도덕경이 정의한대로, 도는 결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발견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콘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
다. 따라서 역동적인 도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맥락과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도의 해석학이란 해석자 또는
과 맞물리면서, 도의 궤적을 각성하고 창조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
진 어느 때에 어떻게 우주적인 운동 속에 적절히 참여할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요구한다는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 완전긍정과 완전부정의 그리스도
신학적 근본 은유로서 도의 탁월성은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초언어적인 도를 표현해내
적 실재를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도는 그리스
결하고 그리스도를 통전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실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탁월성도 희랍
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우주생성적인 본성을 표현해낸 것에 있다. 그것을 통해 4-5세기 교부들 은 기독교 신앙
고를 초월할 수 있게 하였 다. 우선 니케아 신조(325)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인 동시에 ‘참 인간
기 위해 양자긍정(both-and) 또는 완전긍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칼케돈 신조(451)는 그리스도의 두 본
하지도,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자부정(neither-nor) 또는 완전부정의 방식
어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인성과 신성 양자 모두에 대한 전적 긍정으로서 태극(太
부정으로서 무극(無極) 사이의 최고의 역설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인 신비를 통찰하고 표현했던
인간이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우주의 참 주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의 신학은 신-인간다.
사실 이러한 역설적인 사유 방식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 복음서들, 그레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reopagite)와 같은 초기의 창의적인 신학자들,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와
Eckhart)와 줄리안(Julian of Norwich)과 같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콜라스(Nic
상극적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원리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바울은 성경에서 이
여 그리스도교를 설명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새번역)
새로운 태극(太極): 우주생성적 그리스도
앞에 열거한 선진들의 통찰을 기반으로 도의 신학은 도-그리스도론을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예수는 곧 도이시다. 그는 태극과 무극이 일치를 이루는 지고한 역설의 완성이며, 원초적 숨님이며, 비존재적
---
새로운 태극(太極): 우주생성적 그리스도
앞에 열거한 선진들의 통찰을 기반으로 도의 신학은 도-그리스도론을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예수는 곧 도이시다. 그는 태극과 무극이 일치를 이루는 지고한 역설의 완성이며, 원초적 숨님이며, 비존재적
이며,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완전한 비움(kenosis 혹은 sunyata)이다. 십자가는 우주변화의 길(道)로의 돌진
간-우주적 궤적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변혁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우주의 길을 변화시키는 우주생
것은 도의 옛 형이상학적 세계, 즉 태극과 이(理)에 존재하던 역사적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열어젖히는 사건을
벽(開闢)을 언표한다. 옛 태극의 우주생성은 무극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새로운 태극으로서, 다시 말해 지
적 운동으로서 부활했다. 그것은 그저 교리적인 혁명(logos)만도 아니요, 단순히 메시아적 영감을 받은 사회
은 우주생성적 혁명이다. 도로서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태극은 그리스도의 우주 생성적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태극의 옛 인간-우주적인 고리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그것을 상서(祥瑞)
간-우주적 궤적으로 변화시키고, 태극의 새로운 시대(aeon)를 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주생명
하고 성취했다.<5>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반전과 복귀의 그리스도
이 뜻밖의 상서로운 신-인간-우주적이고 우주생성적 궤적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아직도 감추어져 있다. 그 궤적
지 않고 있으며, 종말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기(氣, )의 개념은 중요한 해석학적 열쇠를 제
통해 그리스도론적 영이신 신-인간-우주적 비전이 새롭게 창안될 수 있다.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기
동시에 그러한 힘의 물질적 현현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원초적 기운의 근원(source)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말하기도 한다. 기의 소통은 인간과 다른 생물들의 관계를 보다 통전적으로 그리고 보다 심오하게 발전시킨다
을 통해 신-인간-우주적 생명의 그물망(life network)이 서로 공생(symbiosis)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민중의 사회-전기(socio-biography)와 순진한 인간-우주적 비전 사이의 변증
서서,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를 주제화 할 수 있게 해 준다. 도로서의 하나님은 기의 영적 소통을
생명들의 사회-우주적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초적 기운인 원기(元氣)로서 그리스도는
에 가져온다. 더욱이 영이면서 동시에 물질로서의 기는 성육신(Incarnation)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탄생 이야기는 영-인간-우주적 비전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착취당하는 생명의
월하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초적 기, 즉 원기
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그리스도론은 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학과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 모두를 그 구성요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곧 도를 그리스도로 언표하는 도-그리스도론은 영적이고 해방적이다. 결국, 도
태극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시아 영성의 구원론적 핵심 안에 구현되어 있는 해방적 그리스도론의 한 전형이라
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와 기-사회-우주적 도로서의 그리스도를 구상하는 도-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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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들의 사회-우주적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초적 기운인 원기(元氣)로서 그리스도는
에 가져온다. 더욱이 영이면서 동시에 물질로서의 기는 성육신(Incarnation)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탄생 이야기는 영-인간-우주적 비전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착취당하는 생명의
월하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초적 기, 즉 원기
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그리스도론은 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학과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 모두를 그 구성요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곧 도를 그리스도로 언표하는 도-그리스도론은 영적이고 해방적이다. 결국, 도
태극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시아 영성의 구원론적 핵심 안에 구현되어 있는 해방적 그리스도론의 한 전형이라
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와 기-사회-우주적 도로서의 그리스도를 구상하는 도-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
본문제인 근대적 역사중심주의와 희랍적 이원론을 극복한다.
결론적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론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라 삶을 바른 길(正道, orthodao)로 변화 시켜나가며,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생명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적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새로운 태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주생성적
신-인간-우주적 도로서 그리스도는 수난받는 온생명들에게 이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으로 복귀할 수
지-영이며, 더욱 우리식으로 말하면 원초적 기(元氣)를 불어넣어 주신다. 이 대목에서 『장자』에 다음과 같은 구
"너는 뜻을 한가지로 가져라. 그래서 귀로 들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듣
은 부합(符合)하는데서 그친다, 허나 기는 허해서 온갖 걸 다 포용한다. 오직 도는 허(虛)한 데서 모이니 허한
다."<6>
참된 도로서의 그리스도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려 솟구치는 연어와 같이 생명들로 하여금 도로 복귀하게 만
를 완성하는 능력인 그리스도의 원초적 기, 곧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공허 곧 자기비움( )과 심재
한 마음 닦음( )이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반전(산상수훈)의 능력에
가려는 물고기처럼 도약하며 도로 복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물고기로 상징되는 깊은 의미를
태극기에 나오는 태극문양 또한 물고기 두 마리가 맞물려 도약하는 상징으로도 표현되니, 그리스도와 우리나
또한 예수께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하신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1:17)
주:
1 이 글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표한 글을 보완·축약한 것이다. 학술적인 논의와 자 료를 위해서는 김흡영, 『도의
175-195; Heup Young Kim, A Theology of Dao (Orbis, 2017), 34-56을 참조하라.



2021/08/25

태초에 신과 신, 나와 나의 싸움이 있었다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태초에 신과 신, 나와 나의 싸움이 있었다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태초에 신과 신, 나와 나의 싸움이 있었다

등록 :2021-08-25 

세상 차지 경쟁 신화의 존재론적 의미



테초 세계의 대극. 영원한 싸움을 낳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 세상은 어떻게 존재했던가. 우리는 이미 그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형체도 없는 원생명을 품은 거대한 알, 하늘과 땅 그리고 빛은 안에 품은 채 물결치는 아득한 어둠의 바다. 나는 이를 일컬어 인간의 존재적 뿌리이고 바탕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거기 대극(對極)이 있었다. 독액의 강과 춥고 탁한 안개의 땅 니플헤임과 용암의 열기로 바위가 녹아내리는 불의 땅 무스펠하임으로 표상되는. 또는 음(陰)과 양(陽)으로, 천(天)과 지(地)로 표상되는. 이 세상은 그 상반된 힘의 부딪침과 어울림 속에서 존재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도. 내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땅이 있어서 그 대극의 힘 속에 나는 존재한다. 내 안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다. 나는 하늘인 동시에 땅이며, 하늘도 땅도 아닌 그 무엇이다.



그 서로 다른 힘은 어떻게 작용할까? 평화로운 어울림이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들은 본래 성질이 전혀 다르다. 그들은 끊임없이 엇갈리고 부딪치며 소용돌이를 낳고 폭풍우와 천둥번개를 일으킨다. 이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어느 한 순간도 그 부딪침의 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평화와 조화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일 따름이다. 당장 오늘도 눈을 뜨는 순간, 삶의 전쟁터로 나아가야 하지 않는가.



전 세계와 인류가 감당해야 하는 가없는 싸움의 시초에, 내가 일시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적 투쟁의 뿌리에 태초의 싸움이 있었다. 신과 신 사이의. 세상의 명운(命運), 또는 역사(歷史)를 좌우하게 된.



브라흐마와 비슈누, 시바. 그리고 세 개의 나.

태초의 대극은 갈라졌고, 부딪쳤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났고, 역동했다. 신화는 그 갈라진 기운을, 그리고 그들이 펼쳐내는 역동을 신(神)으로 표현한다. 서로 다른 신들로. 만들어내는 신이 있는가 하면 파괴하는 신이 있다. 지키는 신이 있는가 하면, 흔들어 뒤집는 신이 있다. 파괴하고 뒤집는 신은 흔히 악마(惡魔)나 악귀(惡鬼)로 불린다. 또는 마귀(魔鬼)로도.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존재하던 본래적인 힘이다. 영원에서 시작됐고 영원으로 이어질. 그 또한 신(神)이다.



그 신적 역학관계를 인도신화에서 원형적으로 볼 수 있다. 힌두신화에서 세상의 본바탕을 상징하는 삼주신(三主神)은 브라흐마(Brahma)와 비슈누(Vishnu)와 시바(Shiva)다. 각각 창조의 신과 유지의 신, 파괴의 신으로 설명되는 신들이다. 이 중 시원적 바탕이 되는 존재는 비슈누다. 비슈누의 배꼽에서 브라흐마가 나오고, 이마에서 시바가 탄생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다른 대극의 작용을 한다. 브라흐마가 만들어낸 만유를 시바가 나서서 파괴한다. 네 개의 얼굴과 여덟 개의 팔로써. 시바는 파괴의 신인 동시에, 물질의 신이고 욕망의 신이다. 그는 모든 것에 위력을 미치면서 그것을 뒤흔들고 깨뜨린다. 그렇게 세상은 끝없이, 변화한다.







창조는 어렵지만 파괴는 쉽다. 시바의 강력한 위력에 브라흐마는 빛을 잃는다. 숨듯이 뒤로 물러난다. 파괴로부터 세상을 지키고 재생하는 것은 비슈누의 역할이다. 시바를 포함해 모든 것의 바탕이었던 큰 힘. 하지만 그가 시바의 위력을 제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는 시바와 같이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팔은 네 개뿐이다. 전방위로 진행되는 파괴 속에서 본래의 생명적 질서를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 지금도 분주할 비슈누의 네 팔……. 그것이 오롯이 힘을 내기를 바랄 따름이다. 브라흐마가 함께 제 몫을 해서. 그를 통해 시바의 파괴가 파멸이 아닌 발전적 창조로 이어지기를! 변증법적인.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 모든 곳에 있다. 그들이 곧 세계다. 그리고 그들은 내 안에 있다. 내가 곧 브라흐마이고 시바이며 비슈누다. 끝없이 이어지는 창조과 파괴와 재생의 역동. 오늘도 내 안에서는 원초적인 생명적 빅뱅이 속속 펼쳐진다.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눈을 감고 돌아본다. 지금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나를 조종하며 지배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비슈누인가 브라흐마인가 시바인가. 답은 나와 있다. 그것은 시바(Shiva)다. 일컬어, 물신(物神)의 세상. 가없는 욕망의 물결 속에서 오늘도 시바는 검푸른 얼굴에 혀를 내민 채로 여덟 개의 팔을 흔들며 폭주한다. 과연 내 안의 비슈누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을까? 내 안의 브라흐마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을까? 삼위일체의 생명적 조화를, 나는 마침내 이루어낼 수 있을까?



오시리스에서 세트로, 티탄족에서 올림푸스 신으로. 그리고

대극에서 출발한 신과 신. 그들의 상관관계를 서양 신화는 서로 죽고 죽이는 투쟁으로 표현하곤 한다. 수메르신화가 그러하며, 이집트나 그리스 신화도 그렇다. 히브리와 북유럽 신화도. 끝없는 투쟁의 역사. 그렇게 움직여온 것이, 앞으로도 그리 움직여 나갈 것이 이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초의 세계는 고요한 평화였다. 어둡고 쓸쓸한 태초의 바다. 그 속에 깃들어 있던 큰 신 눈(Nun)으로부터 태양신 레(라; Ra)가 눈을 뜨고 그 자손인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가 짝을 지으면서 세상에는 생명이 약동한다. 그 생명적 주재자는 슬기롭고 선한 신 오시리스였다. 오시리스가 주재하는 세상은 평화로웠고, 문명은 순조롭게 발전해갔다. 하지만 그 질서는 세트의 등장으로 뒤흔들린다. 욕망과 질투, 그리고 전쟁의 신. 그의 교활한 계략으로 오시리스는 관 속에 갇히고, 잠시 나무에 깃들었다가 열네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긴다. 그렇게 이어진 세트의 세상. 신화는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가 세트를 똑같이 찢어서 죽였다고 하지만, 그를 통해 본래의 평화는 돌아왔을까? 그럴 리 없다. 호루스가 행한 일은 세트와 꼭 닮은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그리고 세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독사가 되어 홍수를 일으킨다. 그에 대한 호루스의 재반격…… 그렇게 역사는 투쟁으로 점철된다. 그게 세상이다. 거대한 위력으로 되살아난 21세기 세트의 세상에서 우리의 호루스는, 아니 오시리스는 안녕하신지.






그리스 신화가 그려내는 신들의 투쟁사는, 또는 세계의 문명사는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가차 없다. 태초의 거대한 신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낳았다는 티탄족 열두 남매와 외눈박이 거인과 백수(百手) 거인들, 그들은 어찌 움직였던가. 싸움과 분란의 연속이었다. 그 혼란을 제어하고자 나선 막내 티탄 크로노스가 한 일은,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른 일이었다. 그렇게 생명의 흐름을 끊고 세상의 지배자가 된 크로노스. 하지만 그가 맞이한 것은 자기가 낳은 아들에 의한 가차없는 공격이었고 하늘 끝으로의 유폐였다. 저 유명한 신 ‘제우스’에 의한. 그렇게 펼쳐진 티탄족과 올림푸스 신들 간의 일대 전쟁의 결과는, 젊은 신들의 승리였다. 그렇게 이 세계의 질서는 뒤바뀐다.



그리스 신화에서 티탄족과 거인의 세상은 극복됐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곤 한다. 상징으로 읽으면 티탄족은 원시의 거대한 자연성이고 야만성이다. 크로노스가 제 자식들을 차례로 삼키는 일은 야만적 폭력성의 표상이다. 야생의 자연이란, 이렇게 가차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제어하면서 펼쳐진 새로운 질서는, 올림푸스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평화로운 낙원이었을까? 그럴 리 없다.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아도, 다들 잘 알 것이다. 제우스가 어떤 욕망으로 어떻게 권능을 휘두르는지를. 신들이 서로 어떻게 갈등하고 싸우며 갖가지 재앙을 빚어내는지를. 신화는 제우스가 빚어낸 인간이 ‘철의 족속’이었다고 말한다. 노동하고 슬퍼하고 피곤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범죄와 배반, 약탈과 탐욕에 휘둘리고 쓰러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얘기다.



비슈누와 브라흐마와 시바가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티탄족과 외눈박이 거인 백수(百手) 거인과 제우스가 우리 안에 있다. 포세이돈과 헤파이스토스와 하데스, 에로스와 타나토스와 나르시소스, 그리고 아테나와 아프로디테와 프쉬케도. 우리는 그 중 올림푸스 신들에게 지워진 존재인 티탄족을 잊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더 본원적인 생명이고 질서일 수 있다. 최초로 인간을 빚어낸 것이 티탄족의 프로메테우스라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면,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있고 태초의 카오스가 있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본다. 올림푸스를 넘어서 티탄으로. 크나큰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그리고 그 이전 아득한 태초로.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



미륵과 석가, 또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길

세상을 놓고 벌이는 신과 신의 싸움은 동아시아 신화에서도 여러 형태로 펼쳐진다. 황제와 치우의 대결이 유명하지만, 그에 앞선 시원적인 싸움이 있으니 태초의 창조신들 간의 다툼이 그것이다. 알타이 신화에서는 윌겐과 에를릭이 부딪치며, 몽골 신화에서는 마이다르 보르항(미륵불)과 샥지투브 보르항(석가불)이 승부를 겨룬다. 창조의 주재자였던 윌겐이나 마이다르 보르항에 보조자나 후발주자였던 에를릭과 샥지투브 보르항이 도전한 형태의 싸움이었다. 그중 진정한 생명력 능력자는 윌겐과 마이다르 보르항이었지만, 그들은 속절없이 패배한다. 그리고 세상은 바뀐다. 모순과 부조리가 만연한 곳으로.






그 싸움은 한국 구전신화에서 미륵과 석가, 또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대결로 말해진다. 미륵이 누구던가. 전에 이야기했듯이 태초의 크나큰 창조신이다. 하늘과 땅을 갈라서 이 세상을 만든. 그리고 하늘로부터 인간을 받아 내린. 신화는 그가 다스리던 시절이 태평성대였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 사물 사이에 서로 말이 통하던, 함께 나란히 움직이며 어울리던 자연적 생명성의 시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대는, 말하자면 원시적 공동체사회는, 영원할 수 없었다. 새로운 지배권력이 등장해서 세상을 흔든다. 그가 곧 석가다.



석가는 미륵 앞에 나타나서 “네 세월은 다 갔으니 이제 내 세월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미륵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저항한다. 그리하여 펼쳐지는 세 번의 시합. 금줄 은줄 유지하기와 강물 얼리기, 무릎에 꽃피우기까지 모든 싸움의 승자는 미륵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차지한 것은 그가 아닌 석가였다. 미륵이 피운 꽃을 꺾어다가 제 무릎에 꽂은 뒤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미륵이 남긴 것은,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었다. 꽃이 피어 열흘을 못 가고 심어서 십년을 못 가리라는. 집집마다 기생 과부와 무당 역적이 나고 갖가지 불구자가 나서 말세가 되리라는. 그리고 그 예언은, 실현된다. 바로 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중이다. 갖은 차별과 모욕과 갈등과 다툼이 난무하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질병과 노쇠의 고통을 면할 수 없는……. (여기서 석가는 불교의 석가모니불과는 다른 존재다. 태초의 창조신에 대한 현세의 문명신을 표상하는 존재다. 석가가 현세불이기에 신화에서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제주도 신화 속 대별왕과 소별왕의 다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늘과 땅의 힘이 만나서 탄생한 그들 쌍둥이 형제 중 진정한 능력자는 대별왕이었다. 그만이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차지한 것은 꽃을 훔친 소별왕이었다. 그는 선악을 분별하고 세상의 체계를 세우지만, 위계의 질서이고 욕망과 배제, 폭력의 체계였다. 그에 의해 도륙되고 빻아진 수명장자는 재앙이 되어 온 세상으로 퍼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신화는 그것을 모기, 파리와 빈대, 각다귀 따위로 말하지만 어찌 그뿐이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며 부대끼게금 하는 것이 세상 한가득이다.



미륵과 석가는, 대별왕과 소별왕은, 그 또한 우리 안에 있다. 지금 우리는 미륵의 길을 가는가 석가의 길을 가는가. 이 시간 나는, 대별왕인가 아니면 소별왕인가. 또는 모기 파리 빈대 각다귀인가. 엄중한 질문 앞에, 아득해진다.




세상을 다시 세우고 나를 살리는 힘

신화의 신들은 시간을 넘어서 공존한다. 시바가 여덟 개의 팔을 휘두르며 세상을 마구 파괴하고 있는 한켠에 브라흐마가 비슈누가 있듯이, 세트에게 갈가리 찢긴 오시리스도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화는 그가 저승으로 들어가 왕이 되었다고 말한다. 제우스에게 유폐된 크로노스와 대전쟁에서 진 티탄족도, 그리고 그들의 부모인 우라노스와 가이아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지금 이렇게 대지를 밟고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지 않은가.



미륵과 대별왕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잠시 물러났을 따름이다. 소별왕에게 이승을 넘기는 대신 대별왕이 차지한 것은 저승이었다. 대별왕은 저승에 ‘맑고 청량한 법’을 세운다. 이승에서 훼손되고 뒤집힌 모든 것은 저승에서 빠짐없이 바로잡힌다. 욕망과 권세를 탐닉했던 무리는 지옥에 들어 만년의 고통을 겪고, 부조리와 고통을 감내하며 정도(正道)를 걸어간 이들은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그것은, 단지 죽음 뒤의 일이 아니다. 신화에서 대별왕은 소별왕에게 세상을 넘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잘못하면 재미없으리라”라고.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 돌아와 세계 질서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미륵의 일이기도 하다. 부조리와 차별, 고통이 만연한 이 세상은 그렇게 영속할 리 없다. 미륵불이 재림해서 본래의 생명적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일컬어 후천개벽(後天開闢)! 사람들은 그 믿음과 의지를 가슴 깊이 품고서 꿋꿋이 버텼고, 장렬하게 싸웠다. 스스로 들불이 되어서. 그 순간 그들은, 미륵이었다.






엉클어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내 안의 미륵과 대별왕을 찾아서, 비슈누와 오시리스와 가이아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자꾸만 아득히 숨어버리는 그들을 마침내 찾아내서, 그와 하나 되어서, 싸워 가리라. 정의와 생명의 세상을 향하여. 진정한 나의 삶을 향하여.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치료학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well_friend/1009008.html?fbclid=IwAR0R87FhGtsor6KyoA7A03UiuS7iKrRRoOTVC35W0GSYfslsSyJhZub5uOI#csidx8d022e6e5e825999a2db91f2d87f085

2021/08/23

이병철 -지리산정치학교 1기 과정을 마치며/ ‘사드비프라’라는 영성적 지도자

(1) Facebook: 이병철


이병철
tS1psSo4nnsoreehd ·



-지리산정치학교 1기 과정을 마치며/

2박 3일 동안의 지리산정치학교 1기 1차과정을 마쳤다. 초대했던 분 가운데 3사람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할 수 없게 17명이 수료했다.
문명전환을 위한 생명의 정치는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지금까지 거의 삼십년 가까이 현실 정치와는 담을 쌓고 대안운동에만 주력해왔던 지리산운동?이 왜 갑짝스레 '정치학교'를 내세우게 되었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절박성과 절실성이 참가자들에게 가닿았는 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강조한다고 전달되거나 공감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대가 어떠했던 간에 하나의 물꼬는 터졌다. 샘이 계속 솟아난다면 언젠가는 바다에 이를 것이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있어 새로운 사건 가운데 하나일 수 있으리라.
뜨거운 열정과 꿈으로 함께 이 과정을 만들어낸 1기 수료생들과 이 과정을 준비한 운영팀과 실무팀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리산과 실상사와 이 과정을 제안하고 함께 한 도법스님과 남곡선생 그리고 실무를 책임진 사발님과 와월당 등 여러 벗들께도.
이제 2기, 3기 앞으로 이 땅에 새로운 문명이 열릴 때까지, 생명정치가 실현될 수 있을 때까지 이 지리산정치학교는 이어져 갈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마음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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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 호혜상생의 새로운 문명이란 결국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교란 그런 사람을 길러내는 도량인 까닭이다.
이번 과정에 인삿말 하는 역할을 맡은 지라 파견의 인삿말도 여기에 나누며 벗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을 요청한다.
 
 
-파견인사/
지리산정치학교 1기과정의 수료를 함께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정식으로 지리산청치학교 1기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학교를 3년 간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학교의 과정은 이 땅에, 이 지구행성에 새로운 문명, 생태문명, 그 호혜상생의 살림과 모심의 문명을 위한 정치가 새롭게 뿌리내릴 때까지 이어지리라 싶습니다. 우리의 힘이 미약하면 누군가가 다른 이들이, 아니 바로 여러분들이 이 과정을 그때까지 이어가리라 믿습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우리가 함께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수료식은 여러분을 전환의 정치, 생명의 정치 현장으로 파견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수료식이자 파견식인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한 사람을 기억하십시오.
전환의 정치를 위한 이 지상의 그 한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한 사람'이란 이름으로 오래 전에 썼던 시 한 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한 세계다/ 
그 한 사람이 있어/ 
그 한 세계가 또한 있다/
세계는 그 한 사람에게 비롯되고/ 
마침내 그 한 사람에게서 끝난다/ 
그러므로 그 한 사람이 평화로우면/ 
그 세계 또한 평화롭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바로/ 
그 한 사람인 까닭이다//

 
문명의 전환을 위한 생태정치, 생명정치는 바로 그 한 사람인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꿈꾸고 만드는 세상만이 진정한 우리의 새상인 까닭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렇게 모두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서로 이어진 그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따로 또같이' 그렇게 우리는 문명전환의 동지로. 도반으로 함께 이어져 있고 
어머니 지리산과 천년의 수행도량 실상사와도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드비프라(Sadvipra)를 기억하십시오. 사드비프라적인 정치지도자가 되십시오.
 
흔히 정묘한 마음을 지닌 자들이라는 의미의 '사드비프라'라는 지성과 영성을 함께 갖춘 깨어있는 영성적인 정치적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사드비프라는 또한 높은 도덕성과 아울러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와 착취에 대항해 싸울 용기를 지닌 지도자입니다. 그는 영원한 혁명가이면서 정치가이며 동시 생태영성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 차원만이 아니라 생태적이고 영적인 시각을 함께 제공하는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문명의 대전환, 그 전환정치의 중심이 생명정치, 생명이 충만하게 꽃피는 생태사회와 직결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전환의 새로운 정치에서 이에 걸맞은 지도자의 자격은 사드프라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립니다.
자신의 깨어남을 위한 수행과 함께 인류세의 대재앙 속애 죽어가고 있는 뭇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번 과정에서 익힌 연찬의 태도와 공동의 약속을 잊지 않는 것은 그 길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 지리산과 함께 가십시오.,
 
모두를 함께 품어온 그 너른 품과 깊은 사랑과 함께 가십시오.
힘들고 지칠 때 그 품에 기대십시오. 여기로 돌아와 다시 기운과 활력을 충전하십시오.
연어가 만리의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모천(母川)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났을 때의 물 맛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지리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품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의 수행도량 실상사도 여러분의 친정이 되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전환정치의 길동무, 도반들과 함께 하십시오. 마지막 당부는 이것입니다. 현실정치에 있어 저마다 소속 정당이나 현장이 서로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서로 다른 현장이 우리의 활동과 그 영향력을 더 크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꿈과 목적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정치학교의 다음 기수를 추천해주십시오. 함께 문명의 전환을 이루어갈 벗들입니다. 이번 정치학교의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생각과 제안들이 이 나라의 전환정치를 앞당기게 하는 밑거름이 되리라 믿습니다.
특히 문명전환과 생명정치를 위한 10년 결사의 다짐, 이의 바탕이 될 배움터 마련과 확산, 그리고 정치세력화를 위한 구체적인 참여 노력 등의 논의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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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을 전환정치의 현장으로 떠나보내면서 저는 민들레 홑씨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가닿은 거기에 새로운 민들레의 영토가 환하개 펼쳐짐을 그려보며 그 기대로 설레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바로 그 새월호임을 생각합니다. 지구적 차원의 대재앙 앞에서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추궁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구명정을 마련하고 스스로 구명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길에 우리도 언제나 함께 하겠습니다.
그 전환정치의 대장정에 갚은 평화와 신명이 늘 함깨 하시기를 마음 모으며 사랑과 감사를 함께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후원계좌 농협 351-1187-4105-23 예금주 : 지리산정치학교(이명희)
https://forms.gle/EM9mNHFgKKWuczpw5




장기표는 틀렸다, 그래서 옳다
기자명 이병철 객원논설위원   
입력 2021.07.10

세상 인심은 흔히 그런 장기표 선생을 일러 현실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거나

아직도 자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거나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현실정치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현실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선배가 장기표 선생이다. 나는 현실의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는 이들과는 애초부터 그 길이 다르다는 생각에 친구나 선후배 등 지인들 가운데 정치권에 참여하는 이가 있으면 그 순간부터 관계를 중단한다. 이 나라의 현실정치, 특히 여기에서 행세하고 있는 인사들의 언행을 볼 때, 나는 도저히 그들을 상종할 만한 용기도, 그 역겨움을 견뎌낼 비위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보라는 탈을 쓰고 편가름을 바탕으로 국민을 대립, 분열시키며 역사를 퇴행시키는 이른바 586세력이 주도하는 이 정권을 보면서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안도하고 있다.

현 집권세력이 저들의 무지와 무능과 무도함을 오히려 정치적 능력과 훈장처럼 내세우고 있는 작금의 정치 현실이 이를 실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치를,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족속들과 어떻게 상종할 수 있는가 싶은 것이다.

그런 내가 정기표선생과는 아직도 교분을 이어오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장선생은 정치판에 들어가 있지만 그를 현실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정치라는 장에서 여전히 정치운동을 하고 있는 영원한 운동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장기표선생은 나에겐 영원한 운동가요, 지금도 함께 하는 그 운동의 선배동지인 것이다. 영원한 민주투사라는 그의 별명처럼 선생은 정치판, 그 오염의 현장 한가운데서도 마치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는 저 처염상정의 연꽃처럼 한 생을 그렇게 오롯하게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기표선생은 현실 정치인이 아니라 운동가요, 지사요, 또는 수행가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인심은 흔히 그런 장기표 선생을 일러 현실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거나 아직도 자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거나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현실정치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한다.

맞다. 이 모두 맞는 말이다. 이 나라 학생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의 신화적 인물로 칭송받던 선생이 정치판에서 실패한 돈키호테로 비아냥의 대상이 된 것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닌 장선생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정치판을 운동의 장으로 삼은 것 자체가 그의 무지거나 만용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것은 무망한 짓이었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한 두 선배가 모두 그랬다. 한 선배는 작고한 제정구선생이고, 또 한 선배가 지금의 장기표 선생인데, 두 선배가 그 점에서 정확하게 서로 닮았다.

나는 고향 선배이자 공범으로 함께 징역살이했던 제정구선생을 추모하는 글에서 ‘정치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먼저 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썼다. 일급수에서나 살 수 있는 물고기는 삼, 사급수의 오염된 물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기표 선생이 국회의원에 7번이나 출마했다가 모두 낙선한 것 또한 이와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선생이 여러 정권으로부터의 국회의원 전국구나 장관 등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기만의 길을 고집한 까닭이다. 정치를 하려면, 그래서 현실 정치인으로 나서서 무엇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국가운영체제를 바꾸어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의회부터 진출하고 자신의 정치세력과 힘을 길러야 했다. 이를 위해선 타협도 하고 과정의 불합리도 수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선생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정치는 바름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원칙, 자신이 걸어온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사나 올곧은 선비라는 칭송은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도 현실정치에는 실패했다. 현실정치의 참여를 통해 자신이 그리는 나라를 이루어가겠다는 장기표 선생의 정치노선은 실패했고 그래서 틀린 것이다. 내가 장기표 선생이 틀렸다고 하는 이유이다.

장기표 선생이 내년 대선의 대통령후보로 출마선언을 했다. 총선에 7번이나 낙선하고 지금 당적을 두고 있는 국민의 힘 안에서도 아무런 기반도, 별다른 지지세력도, 국민적 지명도도 거의 없는 사람이 대통령후보가 되겠다고 출마선언을 한 것이다. 뜨악하게 생각하거나 장기표선생의 또 다른 돈키호테식 언행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싶다.

출마 선언을 하고 며칠 되었지만, 주류언론이나 정치판에서 별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음이 그 증거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장 선생은 우리 나이로 일흔일곱, 지금까지 거명되고 있는 후보 가운데서도 가장 고령으로, 이미 한물간 노인으로 치부되는 나이기도 하다. 지금 정치판의 가장 중요한 정치이슈 가운데 하나가 세대교체인데, 최고령의 노인이 나선 격이다. 그리고 국민들 다수, 특히 젊은이들 거의 대부분은 장기표 선생이 누군지도, 민주화운동의 대부요, 운동권의 신화라는 지난 이야기에도 크게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절실한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표 선생이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것이다. 아마도 장 선생의 마지막 정치적 도전이요. 기회라 할 것이다.

장 선생은 대통령 후보 출마선언문에서 이번 출마의미를 자신이 운동가로서 평생을 꿈꾸어 오던 그 오랜 꿈의 실현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이 땅, 이 나라에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평생의 포부와 다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10가지 청사진을 제시한다. 실패한 정치인이 내세운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정치선언‘이다. 선생이 쓴 ’행복의 정치론‘을 보면 새로운 시대의 국가목표는 국민 모두의 ’자아실현‘에 있다. 모든 국민이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그 목표인 것이다.

가슴이 설렌다. 국가 발전의 목표를 이렇게 설정한 정치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장기표 선생의 이 같은 출마 선언을 공감하고 지지하며 성원한다. 내가 이를 지지하는 것은 선생이 제시하는 내용과 그 실현을 위한 정치적 과제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선생이 현실 정치인으로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핏 역설적이기도 한 이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제도권 정치를 통한 그의 정치혁명의 실패는 새로운 정치를 열어가는 밑거름이자 도약의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정치판에서 실패한 것은 선생이 제시한 ’국민행복시대‘라는 그 꿈의 실현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이 평생을 이 땅의 민주화와 노동자의 인간다운 권익실현을 위해 몸 바쳐 온 것은, 그리고 정치판에 뛰어들어서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탐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철학과 혁명적 목적을 흔들림 없이 견지해온 것은 이 모두 ’국민 모두가 행복한 새로운 시대‘, 국민 모두의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철학과 올바름을 지켜내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대교체가 아니라 시대의 교체이다. 그리고 문명사적 대전환이다.

진보와 보수, 이 구분은 더이상 유용한 잣대가 아니다. 낡은 시대의 한갓 고루한 관념일 뿐이다. 이제 유일한 하나의 기준은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인가, 현 물질 자본주의 체제의 기득권 유지인가의 여부이다. 지구온난화 등 기후비상사태와 대역병 등의 인류생존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문명사적 대위기 앞에서 지금 우리는 새로운 나라를 위한 정치적 변혁과 지구 차원의 공멸적 위기에 대한 대응을 함께 요구받고 있다.

생존을 위한 이 절대적 명제 앞에 세대와 계층과 성별과 인종과 국적 등 지금까지 서로를 구분하며 분리하던 기준들은 이제 그 의미를 상실하였거나 부차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엄중한 시대적 과제 앞에서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을 위해 이제는 모두가 함께 온몸을 던지는 결단이 절실한 때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나라 안팎으로 전환의 혁명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절체절명 상황과 마주하여 이를 헤쳐갈 수 있는 정치지도자의 능력과 자질이 어느 때보다 참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치적 술수나 선동이나 흉내 내는 것 등 정치판의 낡은 이념과 수단으로는 더는 가능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제 이 나라의 명운과 온 국민의 안위가 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폭풍우 몰아치는 캄캄한 거친 밤바다의 뱃길에 바른 항로를 잡아 배를 몰고 가면서 승객들의 안심과 협력을 얻어 갈 수 있는 지도력과 인품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차기 정권의 국가운영 책임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에 따라 이 나라의 명운과 국제질서의 앞날이 가늠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기표 선생은 이른바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새로운 문명의 전환과 이를 통한 국민행복론을 연구하고 실현방안을 제시해왔다. 그는 이를 위해 일찍이 신문명연구소를 설립하고 ’신문명국가비전‘ 등의 여러 저술을 통해 그 방향과 목표, 과제와 실현 방법을 제시해온 것이다. 선생은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향한 연구 모색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과제의 제시를 위해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분야를 넘나들며 2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해왔고 이를 통해 ‘신문명과 국민 행복’을 함께 제시한 유일한 정치가이며 사상가이기도 하다.

전환의 신문명,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한다.

나는 장기표 선생을 볼 때마다 ‘사드비프라’라는 영성적 지도자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드비프라(Sadvipra)는 영성적 정치지도자를 일컫는 용어이다. 흔히 정묘한 마음을 지닌 자들이라는 의미의 '사드비프라'라는 지성과 영성을 함께 갖춘 깨어있는 정치적 또는 혁명적 지도자를 의미한다. 사드비프라는 또한 높은 도덕성과 아울러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와 착취에 대항해 싸울 용기를 지녔다. 그는 영원한 혁명가이면서 정치가이며 동시 생태영성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 차원만이 아니라 생태적이고 영적인 시각을 함께 제공하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인류문명의 대전환, 그 전환정치의 중심이 생명정치, 생명이 충만하게 꽃피는 생태사회와 직결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전환의 새로운 정치에서 이에 걸맞은 지도자의 자격은 사드프라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전환의 신문명으로의 이행을 통해 ‘국민행복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혁명가 장기표선생, 십 년의 감옥과 10년의 수배 생활을 겪어오면서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영원한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영성적 수행가이며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신문명으로의 전환을 통해 국민행복론’을 주장하는 장기표 선생은 그런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해 준비해온 유일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선생이 이미 91년에 ‘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이란 8권의 전집을 통해 발표한 저서에서 보듯 그의 정치의 요체는 ‘변혁과 사랑’이다. 그의 혁명은 사랑의 혁명이며 그의 정치는 사랑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지혜와 사랑으로 깨어있는 사드비프라적 지도자로 장기표선생을 능가할 후보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선 후보로 나선 인물 가운데 이러한 성품과 자질과 새로운 나라를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준비해온 이는 그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새로운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여 젊은이들에게 노동의 진정한 가치와 보람과 이를 통해 삶의 기쁨을 보장해줄 수 있는 지도력을 갖춘 사람도 장기표 선생 뿐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불타는 전태일 곁으로 달려간 최초의 대학생이었던 오직 장 선생만이 대기업 중심의 노동귀족들에 맞서 노동의 정의와 형평을 실현할 수 있는 도덕성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장기표 선생, 그는 세상 나이로는 노인이라고 하지만 시대정신과 열정과 기상은 어느 젊은이들보다 더 푸르른 만년의 청춘이다. 선생을 존경하는 후배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선생의 한결같은 삶의 여정을 지켜보며 이번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마한 것을 지지하고 성원한다. 지금까지 정치인 장기표선생의 실패가 지금 새로운 정치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음을 믿는 까닭이고, 오직 그런 선생만이 이 대전환의 시대에 새로운 정치, 새로운 나라를 위한 담대한 변혁을 이끌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내년의 새로운 정권의 출범은 87체제의 극복만이 아니라 이 나라에 새로운 정치, 문명의 전환으로 이행되는 새로운 생명정치의 탄생이 되기를, 그리고 장기표선생이 이번 대선 출마를 통해 그 큰 마중물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기를 간곡히 마음 모은다. 선생의 일관된 지사적 품성과 경륜과 담대한 포부와 전환문명에 대한 식견을 겸비한 지도력과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젊은 층의 열정을 함께 결합한다면 내년 대선을 통한 정권교체기가 이 나라의 새로운 정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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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객원논설위원 hansimdang@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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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민청학련 구속자, 생태귀농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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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속 정치이야기] 분배정의(分配正義)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승인 2015.10.29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계급질서를 유지하면서 공리적 배분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인도의 종교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인 사르카르이다. 그는 역사의 원동력을 경제나 정치권력이 아니라 문화라고 생각했다. 우주는 비드야(Vidya)와 아비드야(Avidya), 즉 내향과 외향, 축소와 확장, 연민과 분노가 맞서서 투쟁하는 거대한 장이다. 음양론과 유사한 그의 인식은 물리적 우주와 사회적 우주에 모두 적용되는 영원한 속성이다. 개인은 우주라는 영적인 존재와 융합돼야 한다. 사르카르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자본주의의 탐욕적 속성을 무시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이상주의자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변화에 주력하는 심령주의자와 달랐다. 휴머니즘은 신으로부터 개인적 권리를 확보했지만, 결국 인간을 우주와 영성으로부터 소외시켰다. 사르카르는 인간이 우주의 모든 생태적 존재와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도의 전통적인 계급제도인 카스트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카스트의 본질은 사회적 역할의 구분이지 지배체제가 아니다. 사르카르에게 계급은 특권이 아니라 의무이다. 상위에 속하는 계급일수록 의무는 더 무겁다.

사르카르는 역사의 발전단계를 가속화시키면 계급적 착취를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가속화는 마르크스의 물질적 변화나 헤겔의 혁명의식이 아니다. 그는 정치적 혁명에 기대하지 않았다. 사회적 변화의 주체는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사드비프라(Sadvipra)’로 묵자의 성왕(聖王)이나 플라톤의 철인(哲人)과 유사하다. 사드비프라의 리더십은 겸허한 봉사, 약자를 보호하는 용기, 무지한 사람들을 교화하는 탁월한 통찰력, 정당하고 혁신적인 부의 사용으로 실현된다. 그는 유연하고 조화롭게 혁명적 변화에 개입한다. 자본가가 기술혁신으로 생산수단을 독점할 때는 노동자혁명을 이끌고, 노동자의 힘이 정치적 무정부상태를 초래할 때는 자본가혁명을 이끈다. 국가의 통치가 지나치게 집중되고 문화가 정체되면 지식인을 자극해 비물질적인 가치생산의 혁명을 이끈다. 사드비프라는 합리성이 아니라 영성을 중심동력으로 삼는다. 그러나 영성혁명이 타락하면 더 심한 물질적, 정신적 착취가 발생한다. 중세의 로마교회나 현대의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의 혁명정부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영성을 바탕으로 자아, 공동체, 환경, 우주의 균형을 갖춘 문화를 창조했을 때는 계급적 갈등으로 인한 혼란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가 규정한 역사의 단계는 진보적인 운동과 퇴보적인 운동이 혼재돼 있다. 인간의 생명은 영적인 순수성에서 유래됐다. 이 순수성은 우주가 빅뱅을 일으키기 전의 상태로 도가의 무극(無極)이나 불교의 공(空)과 같다. 변화는 순수의식에서 물질적인 측면으로 발생한다. 사르카르가 말한 계급적 갈등이 없는 영성의 세계는 종교를 통해 가능하다. 공포로 가득 찬 삶은 평화로 변하고, 탐욕을 초월한 개인과 사회는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다. 개인의 해방은 소승적 해탈이 아니라 대승적 각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불평등과 불의의 구조가 만연된 사회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파괴돼야 한다. 사르카르에게 현대는 각성의 시대가 아니라 다양한 주장을 내세운 기생충과 같은 소수가 많은 사람들의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먹는 탐욕의 시대이다. 사르카르의 역사인식은 묵자의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인식과 유사하다. 묵자도 현실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의 고민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을 어떻게 각성시키느냐에 있었다. 계급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힘을 장악한 계층의 반발을 초래한다. 사르카르가 영성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면 묵자는 인간의 본성에 희망을 걸었다. 사상과 행동이 통일되면 혼란은 해소되고 사회는 질서와 안정을 회복해 발전하게 된다. 굴절된 영성에서 해방된 개인이 소외에서 벗어나려면 순수한 영성을 회복해 공생의 길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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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vipra: Prout's concept of Leadership
Blog by Shrii Shrii Anandamurtij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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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f we understand each of the four basic requirements of a comprehensive socio-economic theory and the topics they cover, we will gain valuable insight into human society. As an illustration, let us briefly discuss leadership.

The types of leadership that can be adopted by a society may be divided into three basic categories: rule by brute force, rule by rationality, and spiritual leadership. Rule by brute force includes various forms of leadership, ranging from brutal martial leaders, such as Genghis Khan, to proletariat dictatorship, a utopian leadership model that never actually existed in practice. Prout does not support rule by brute force. Rule by rationality includes democracy, both general democracy, which is widely practised today, and restricted democracy, which was practised by the Licchavis and the Greeks.
It is only possible to give qualified support to democracy because its value depends entirely on 51% or more of the population having a proper education, a moral and ethical sense, and a well developed socio-economic-political consciousness. These must not be a superficial understanding. Accordingly, general democracy as it is practised today is unlikely to elevate and increase the well-being of most people as it is dependent on party politics and party dictatorships emerging from elections. It also has no sense of economic democracy.Until a better system is developed, restricted democracy can be supported. Today's democratic standards are quite low in any case.
Until the consciousness of people is raised beyond the mundane, it is likely that democracy will continue to support essentially selfish and degraded interests over all-round welfare. In the future, it is quite possible that democracy will be replaced by another form of government based on merit: meritocracy. This means that people will demand that their leaders be both capable and ethical. A genuine meritocracy should be supported. Eventually, as human consciousness evolves a time will come when elevated people will guide society. In due course, spirituality will be widely accepted in society and spiritual leadership is the best form of leadership.

This does not mean religious leadership by religious dogmatists. That era has long since gone since the rise of the Renaissance period. Although it still emerges today when political leaders continually evoke the name of God to assist in their efforts for war and national victory. These blind dogmatic notions and superstitious toadyisms do great harm to elevating the consciousness of people - the degenerate the level of thinking to irrational assertions that some kind of paper gods will solve international conflicts.Spirituality requires morality and a spiritualist fights against immorality. Earning money in a sinful way or accumulating great wealth is against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spirituality. It will be quite impossible for people who are not follow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morality to be spiritualists.

Spiritualists are those who are engaged in the continued endeavour to expand the self. By reciting holy scriptures or by acquiring a few pompous titles, one cannot succeed in spiritual pursuit. Spirituality bears no relationship to religion. Although religion may or may not have some aspects that incline to spirituality.Also, those who believe that they must first attain success in individual life before participating in collective struggle will not succeed. They will never bring expansion in their individual lives if they ignore collective welfare. Individuals will have to concentrate on both intellectual and social development. Otherwise, no matter how lofty they might sound in theory, it will remain as a big hoax in the practical field. One will have to make an earnest endeavour to develop oneself thoroughly; mere rhetoric will not do. People who profess to be spiritual moralists will pick up the neglected humanity and arrange for its revival.

To them no sinner is contemptible, no one is a rogue. All round elevation of mind and self is the hallmark of spirituality, as well as a proper objective understanding and application in the physical world. It has nothing to do with attaining a spot in some mythical heaven or kingdom of God or being a chosen people or any other social and religious dogmas that confine people to narrow thinking about their place and existence in the human society, world or universe. That sort of thinking is the cause of fissiparous tendencies and irrational inclinations for bloodshed.The type of leadership adopted by a society provides an insight into the stage of human evolution of its members and the extent of its advancement. It is vital that members of the human society understand the motives of leaders and see through the veneer of dogmas that are spouted. This is critically important today as more and more political leaders turn to the concept of God to justify their cause. The distinction between religion and spirituality becomes even more critical when that happ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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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MSON DAWN

Ananda Marga News & Resources

Sadvipra Leadership


“The meaning of the word sadvipra is “a person who is a moralist and a spiritualist and who fights against immorality”. Earning money in a sinful way or accumulating great wealth is against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Prout. It will be quite impossible for people who are not follow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Prout to bring about shúdra (labour) revolution.”

“Sadvipras will have no rest, ever. A time will never come in the life of a sadvipra when he or she will relax in an arm chair and say, “Ah, I have nothing to do today. Let me rest awhile.” In this first phase of human history, the sadvipra society has not yet formed itself. In the absence of a sadvipra society the social cycle is moving on its natural round. In every age, the government of the predominant class becomes exploitative, and thereafter comes evolution or revolution. For lack of sadvipras’ assistance, the foundation of human society is lacking firmness. Today I extend my earnest request to all reasonable, virtuous and moral fighters that they form a good, well-disciplined sadvipra society without further delay. These sadvipras will work for the good of all countries, for the all-around emancipation of all humanity. The downtrodden humanity of this disgraced world is looking up to the eastern horizon, awaiting the sadvipras’ advent with earnest zeal and eagerness. Let the cimmerian darkness of the interlunar night disappear. Let the human being of the new day of the new sunrise wake up in the world. With these good wishes I conclude my discourse.”

– Shrii P.R Sarkar
(Human Society II, 132)

A new website has been opened at:

www.sadvipra.crimsondawn.net

It promises to become a hub for university students and youth searching for the right path in life.


“How to make a Bansuri”: A Spiritual Leadership Training experience

Sometimes revolutions happen by chance. But in general it is a culmination of an historical period where society looks for a solution to transitional problems. Today we are living a time of transition and it is most natural for a revolution to occur.

In this peculiar and auspicious time the determination of spiritual leaders and their training is of the utmost importance. Therefore all young people who have the courage to voice their intolerance for injustice and exploitation have to take the responsibility to train themselves and process their passions in a cooperative and well organized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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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네오휴머니즘 신자유주의 넘을 열쇠”

등록 :2008-11-14 

“협동조합+네오휴머니즘 신자유주의 넘을 열쇠”
조합원 공동소유 바탕 노동 기여 따라 성과급
‘영성’으로 이기심 막아 자본·사회주의 넘는 제3의 길
〈건강한 경제모델 프라우트가 온다〉
다다 마헤시와라난다 지음·다다 칫따란잔아난다 옮김
/물병자리·1만원






“1970년에 국제자본의 90%는 무역과 장기투자(대체로 생산부문 투자)에 사용됐으며, 10%가 투기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1990년에는 이 숫자가 뒤바뀌었다.” 프라우트 운동가 다다 마헤시와라난다가 2003년에 낸 <건강한 경제모델 프라우트가 온다>(AFTER CAPITALISM: Prout’s Vision for a New World)에 서문을 쓴 노엄 촘스키는 불과 20년 만에 국제자본의 90%가 투기자본화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현재의 경제제도는 실패작이며, 거의 재난에 가깝다”고 썼다. 2007년 월든 벨로는 하루 약 1조9000억달러의 돈이 투기 도박장에서 거래된다고 했다. 지금 전세계 하루 자본거래액 가운데 실물경제와 관련된 것은 2%에 지나지 않으며 98%가 투기거래다.

이 만연한 투기의 수혜자들은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포브스>(2007년 5월3일)는 애플컴퓨터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가 받은 연봉은 6억4800만달러로 애플사 초년생 연봉의 3만배나 된다고 전했다. 이 잡지가 발표한 2006년도 ‘억만장자 명단’을 보면 세계 최상위 부자 52명의 재산은 최근 4년간 2배 이상 늘어 1조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전세계 인구의 절반인 30억명의 1년 소득액보다 많은 것이다. 그 결과 지금 66억 세계인구의 3분의 2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중산층’은 양극분해돼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1970년대 미국의 이른바 ‘레이건 혁명’과 영국 ‘대처리즘’ 등장 이후 본격화한 정치적 신보수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몰고온 재난을 한국인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 이미 처절하게 체험했다. 지금 그때보다 더하다는 대재난이 다시 밀려오고 있다. 이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가 아니라 ‘다른 세계는 가능해야 한다’는 외마디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공통적인 이익을 고려할 때, 자본주의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건강한 경제모델 프라우트가 온다〉인도 비하르주 자말푸르 출신으로 1955년에 사회적·영적 조직인 ‘아난다 마르가’(Ananda Marga·지복의 길)를 창설한 프라밧 란잔 사카르(1921~90)는 재난을 몰고 오는 경제적 공황을 “순전히 착취의 결과”라고 했다. 이기심에서 출발한 무자비한 이윤추구가 초래한 극단적인 부의 편중과 넘쳐흐르는 돈의 투기자본화에 따른 화폐유통시스템 마비가 공황을 부르며, 이는 자본주의체제 아래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봤다. 그는 “자본가들은 마치 기생충처럼 공업·농업 노동자들의 피로 번영한다”고도 했다. 해결책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제자들과 함께 창설한 조직이 아난다 마르가였고 1959년에 대안이론으로 제시한 것이 프라우트(Prout)였다. 프라우트는 ‘진보적 활용론’으로 번역되는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라는 영어 머리글자들을 엮어 만든 말이다.

개혁주의자들을 비판하며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한 점에서 사카르는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영성과 종교적인 도그마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종교 전도사들이 과거 세계 곳곳에서 인류를 착취했으며, 오늘날에도 같은 짓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아난다 마르가와 프라우트가 단순한 종교조직이나 신앙 차원의 비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성’을 강조하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일 리도 없다.


그는 혁명을 얘기하지만 무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유혈혁명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영적인 지도자들인 ‘사드비프라’가 지도하는 대중운동 형식의 점진적 무혈혁명을 추구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공산주의 철학을 인간심리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이라 비판하면서 중앙집중식 전체주의도 거부한다.

프라우트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촘스키는 이를 “협동조합 중심의 경제적 민주주의”라고 했고 지은이 마헤시와라난다는 “일종의 통합적 거시경제 모델”, “모든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사회와 경제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를 담은 청사진”이라고 했다. 핵심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는 사업을 통하여, 구성원들의 공통된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 필요성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뭉친 사람들의 자율적인 협회”로 정의되는 협동조합이다. 프라우트 협동조합은 사적 소유를 인정한 바탕 위에 지분을 나눠 가지지만 이 투자 지분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다. 투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누구에게나 기본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기술이나 노동 기여도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되 최고임금에 상한을 설정해 최저임금과의 격차를 일정 한도 내에서 제한하며 조합 생활수준의 전반적 향상에 따라 그 차이는 점점 줄어드는 구조로 돼 있다. 공동소유이니 해고 같은 것도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면, ‘영성’은 사카르가 “정신병”이라고 못박은, ‘이윤을 무한 추구하는 탐욕과 이기심’을 원천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형이상학적 장치다. 사카르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우주심, 지고의 존재와 연결돼 있는 한몸이자 하나의 가족으로서 공명·공감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영성가족’ 개념을 얘기하면서 그것을 확장된 휴머니즘 곧 네오휴머니즘이라 일컫는다. “프라우트의 목적은 경제성장이나 부의 축적이 아니라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시키고 무한한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요한 갈퉁)

프라우트가 과연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세계의 비전’이 될 수 있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옮긴이와 함께 / 다다 칫따란잔아난다



“영성공동체로 자본주의 이후 대비”






다다 칫따란잔아난다“플라톤도 한 사회 상층의 소득이 하층 소득의 5배를 넘으면 위험에 빠진다고 했다. 내 유학시절 미국의 상하층 소득비는 1000 대 1 정도나 됐다. 하지만 지금 미국 대기업 최고책임자의 연봉은 그 회사 초년생 연봉의 3만배다. 그 회사 직원이 아니라 일반 하층민 소득을 그 최고연봉자와 비교하면 무려 9만배 차이가 난다.”

책 번역자 이름이 ‘다다 칫따란잔아난다’(사진)로 돼 있어서 한국말 잘하는 인도 사람이 있나 보다 했는데, 전북 정읍 출신의 한국인이었다. 1947년생이니 61살. 오렌지색의 인도 수행자 특유의 옷차림에 터번을 두르고 수염까지 기른 그는 아닌 게 아니라 인도인처럼 보였다. 서강대 경제학과를 나와 1982년부터 약 7년간 미국 위치타대와 메릴랜드대에서 공부했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와 산업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일했는데 고혈압과 당뇨, 위염 등으로 몸을 심하게 앓아 이곳저곳 찾아 헤맨 끝에 아난다 마르가를 만났다. “거기 들어간 지 1년 만에 먹던 약들을 몽땅 끊었고 지금까지 약을 먹어본 적이 없다. 3년 만에 직장도 그만두고 인도에 갔다 왔다. 몸도 정신도 완전히 바뀌었다. 갖고 있던 미국 책들도 모두 버렸다.” 대학 다닐 때 데모 한 번 한 적 없던 그는 “자본주의는 착취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스승 사카르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스승의 책 200권을 읽었는데 “매우 논리적”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착취사회다. 모두가 모두에게 도둑이라 할 수 있다. 다들 어떻게 하면 남의 몫을 빼앗아 가질까만 생각하고 있는 꼴이다.” 입시를 봐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내 아이 합격만 빌면, 남의 아인 떨어지라는 얘기냐?”

1997년에 낸 <자본주의의 종말>은 “금융공황이 밀어닥치고 있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했다. 거기서 지구 자전축 변화와 환경파괴 등에 관한 얘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본명 ‘고철기’를 버리지 않았다. 결혼하고 가정이 있었지만 2001년 “깨달음과 사회봉사를 위해 여생을 보내려고” 출가수행자가 됐고 그때 이름도 바꿨다. “수행자는 앞만 보고 나가야 하는데, 옛 이름을 들으면 과거에 미련을 갖고 뒤돌아보게 된다.” 아난다 마르가의 출가수행자는 지금 200여개 나라에 1500여명이 있는데, 한국인 출가수행자는 그를 포함해서 모두 세 사람인데 한 사람은 동남아에 또 한 사람은 유럽쪽에 나가있다.

한국 첫 아난다 마르가는 1991년 전북 완주군에 세워졌다. 지금 그 자리에는 ‘고산 산촌유학센터’가 새로 들어섰다. 아난다 마르가는 유학센터일을 돕고 있는데, 지금 유학센터에는 선생 7명에 학생 18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학생들은 다 도시 아이들이다. 한 학기 또는 1년씩 와서 요가하고 명상하며 함께 생활한다. 그 기간에 근처 학교에 다니는데, 그 덕에 학생이 없어 폐교 위기에 처했던 학교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었단다. 경북 청송에 농사짓고 수행하는 일반인 대상의 자급자족 영성공동체를 또 하나 준비하고 있다. 그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아난다 마르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서도 지금의 인간 심성으로는 프라우트를 당장 실현하긴 어렵다고 했다. 결국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가 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사람들이 깨닫게 되고 무혈혁명이 일어나겠지만 준비를 착실히 해서 그 시기를 앞당기고 좀더 무난하게 전환하도록 만들 수는 있단다. “요구르트를 발효시킬 때 보면, 발효 마지막 순간까지 별 변화가 없어 보인다. 발효는 그 마지막 순간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발효 준비시간을 단축시켜야 한다.” 그게 그 자신을 포함한 영적인 혁명 리더들, 곧 사드비프라가 할 일이라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321945.html#csidx7b010e09f5c95e49b135875d70915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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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Capitalism: Prout's Vision for a New World Paperback 
– January 15, 2003
by Dada Maheshvarananda  (Author)
3.7 out of 5 stars    23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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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back
AUD 13.78 

247 pages
After Capitalism: Prout’s Vision for a New World sheds light on the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 or Prout, a socio-economic model based on decentralized economic democracy, cooperative enterprise and the ethics of inclusion. Foreword by Noam Chomsky, with contributions by Frei Betto, Marcos Arruda, Johan Galtung, Leonardo Boff, Sohail Inayatullah, Ravi Batra, Mark Friedman.
The book asserts that capitalism contains the seeds of its own destruction, based as it is on greed, intense competition and the concentration of wealth in the hands of a few. In contrast, Prout provides a model of economic development grounded in universal values. It seeks to balance regional self-reliant economic development with ecological protection, and encourages creativity and innovation.

In his preface to the book, Noam Chomsky stated, "Alternative visions are crucial at this moment in history. Prout’s cooperative model of economic democracy, based on cardinal human values and sharing the resources of the planet for the welfare of everyone, deserves our serious consideration." Historian Howard Zinn, author of the best-selling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wrote: "After Capitalism is refreshingly original. It is spiritual and utopian while remaining grounded in reality. Its analysis is intelligent and its vision inspiring."
Editorial Reviews
About the Author
Dada Maheshvarananda is a highly respected monk, social service worker, social activist and organizer, and a teacher of meditation and yoga. Dada has worked with exceptional commitment in these capacities for over thirty years. He has served and benefited many people and communities throughout the world -- Southeast Asia, South Asia, South America and North America.
Dada Maheshvarananda has studied and continues to study the theory and application of the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 (PROUT). Dada also studied under the guidance of founder of PROUT, the late Mr. Prabhat R. Sarkar. He has dedicated his life to not only conveying what PROUT is, but more so to serving "all living beings" through its application.

Mr. Maheshvarananda is affectionately referred to as Dada, which simply means "brother." His complete name is Acharya Maheshvarananda Avadhuta, a Sanskrit name. Acharya is a title meaning "spiritual teacher" and "one who teaches by example." The name Maheshvarananda signifies "one who experiences the bliss of the Lord." Avadhuta means "dedicated renunciate mo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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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Dada Maheshvarananda is a yoga monk, activist and writer from the United States. As a student, he was active in the protests against the Vietnam War and adopted a radical approach to social change. He was inspired by the words of Che Guevara, to become a "true revolutionary guided by great feelings of love."
In 1978 he traveled to India and Nepal where he became a yogic monk and studied the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 (Prout) under its founder, Prabhat Ranjan Sarkar. He taught meditation and organized for social justice for 14 years in Southeast Asia, three years in Europe and 21 years in Brazil and Venezuela. He has given hundreds of seminars and workshops at conferences, schools, yoga centers, and prisons about social activism, spiritual transformation, and cooperative games.
His first book, "After Captalism: Prout's Vision for a New World" with a preface by Noam Chomsky was published in 2003 and has been translated into 10 languages.
In 2007 he founded the Prout Research Institute of Venezuela in Caracas, where he served for nine years as director. His second book, "After Capitalism: Economic Democracy in Action", was published in 2012.
"Cooperative Games for a Cooperative World" was published in 2017. In 2019 he was the co-author with Mirra Price of "Tools to Change the World."
 
Customer reviews
3.7 out of 5 stars

Top reviews from the United States
P. Schumacher
5.0 out of 5 stars Fine Book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October 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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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book was written before the Crash of 2008, but in some ways anticipates those problems.

It takes the position that the economy should serve people (and the environment), not the other way around.

For this to happen, people must be schooled (de-brainwashed) in the idea that the common good promotes the individual good, and not the reverse. Key to this is the idea that "good" consists of more than just economic "goods"--a lot more, like time, creativity, a culture receptive of individual talent, closer connections with others (rather than the atomization promoted to increase consumerism), and spiritual fulfillment.

The author strongly espouses cooperatives, both for production and distribution--cooperatives that, by definition, are run from within rather than from above.

In other words, he espouses economic democracy--greater say by everyone over his or her work, time, methods and results of production.

He favors many vital reforms: serving the basic needs of all before the luxury needs of the top, a floor and ceiling on incomes, a different incentive system involving not so much money as recognition, freedom, and creativity.

Amazingly, he even applies these principles to agriculture and heavy industry, the two absolute fundamentals of modern society.

He also favors decentralization, both in living and working space, and in population.

I don't always agree with his details. For example, returning to the gold standard is simply foolish. A money standard should be founded on something with universal value and usefulness, like bushels of wheat.

He also seems to hold (sometimes) the Punitive Theory of Work--that everyone should work, even when it is not needed.

But these are minor.

This book will open your eyes to new ways of thinking about economy. Refreshing, accessible, clear, fast-pa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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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eople found this help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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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da Dufwa
5.0 out of 5 stars What the world's economy needs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May 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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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what the world's economy needs, Please read it, we need to make a serious change all around the 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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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0 out of 5 stars One Star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November 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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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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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Lagana
5.0 out of 5 stars A Call to Action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ne 13, 2003
This book sheds light where few people care to look, and inspires us to act. Also recommended, "Chicken Soup for the Volunteer's Soul," "Serving Productive Time," "Chicken Soup for the "Prisoner's Soul," and "Serving Time, Serving Others."

Serving Productive Time: Stories, Poems, and Tips to Inspire Positive Change from Inmates, Prison Staff, and Volunteers

Chicken Soup for the Prisoner's Soul: 101 Stories to Open the Heart and Rekindle the Spirit of Hope, Healing and Forgiveness (Chicken Soup for the Soul)

Serving Time, Serving Others: Acts of Kindness by Inmates, Prison Staff, Victims, and Volunteers

Chicken Soup for the Volunteer's Soul: Stories to Celebrate the Spirit of Courage, Caring and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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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endiz de Brujo
5.0 out of 5 stars A MUST read for XXI century citizens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ly 16, 2008
Capitalism is a system in crisis. We, the middle classes should know that by now. What we don't know is the history of abuse behind capitalism, what we fail to acknowledge is that not only third nations are being pillaged, but also the people of developed nations. Not long ago families with 6 or 7 kids were easily supported with the money one of the parents earned working 40 hours a week. Now both parents need to work to support two kids, what is going on? Is this progress? According to the media, it is.
We must inform ourselves about what is really going on and you won't find that watching TV. After Capitalism is a book for the layman to understand the most important flaws in Capitalism and why it can't be fixed. It also describes an alternative system based on local economies run by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But it's not a book about the future, it's a book about the present. It's about our current alternatives as a society and as individuals. There IS a better way, and it starts today. It starts with every individual reading about reality and about what can be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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