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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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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09 조회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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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3성분별
 
 
 
 
13장에서 몸과 아트만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먼저는 베단타의 입장 에서 했고, 다음은 다시 삼캬론의 입장에서 했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 데 모든 작용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고, 푸루샤, 즉 크쉐트라즈나(밭알이)는 아무런 감동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프라크리티의 작용이 어떤 방법으로 계속되어간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주는 이 장에서 같은 한 프라크리티에서 어떻게 각종 창조물, 특히 산 피조물들이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창조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쉐트라, 즉 몸에 관한 문제이므로, 그것은 자연 몸과 아트만에 대한 문제 속에 포함되어버린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세계도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프라크리티의 한 발전이기 때문에 프라크리티의 구성요소들간의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설명은 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하신 주는, 몸과 아트만에 대한 설명이라는 국한된 논술을 버리고, 아르쥬나에게, 나아가서 즈나나(영적 지식)와 비즈나나(경험적 지식)에 대한 설명을 해 주겠다는 말로 이 장을 시작한다. 즈나나 비즈나나의 문제는 그가 이미 제7장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 프라크리티의 세 요소의 전개에 대한 설명은「아누기타」(anugita)와「마누 스므리티」(Manu-smriti) 제 12장에도 나와 있다. —틸라크
이 14장과 자연의 성격에 대한 세 가지 등분의 설명을 보면 30년 전에 내가 읽었던 헨리 드럼먼드(Heny Drummond)의 저작물(The Natural Law in the Spiritual World) 생각이 난다. 원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세 제목으로 갈라놓았다. 14 장은 인간이 속해 있는 원리를 설명해주는 것이고 15장은 푸루쇼타마(purushottama) 즉 완전한 인간에 대한 설명이다.
인간의 향상이란 것이 이 장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제목이다. 이 사트바(善性), 라쟈스(動性), 타마스(暗性)의 세 성 중에 어떤 사람도 그중 하나만이 독점적으로 주장함을 받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구나 다 힘써서 주로 선성의 원리가 주장하고 있는 지경에 올라가도록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셋을 초월하여 완전한 인간에 이르러야 한다. 물질계에서 한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가령 말한다면, 물이다. 물이 고체로 있을 때에는 땅 위에서 공중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증기가 되어 희박해지면 올라간다. 마침내 공중에 올라가면 구름으로 변하고 비로 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러면 열매를 맺게 하여 땅에 복을 준다. 사람은 모두 물과 같다. 우리는 다 노력하여 우리 자신을 증발시킴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사사로운 나를 없애버리고 무한에 들어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선(善)이 되어야 한다. —간디(「청년 인도」12~1,1928)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내가 다시 지식 중의 지식인 최고 지상의 지식을 말하리라. 그것을 앎으로써 모든 성인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최고의 완전에 이르렀느니라.
 
2. 이 지식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나와 같은 성격에 이르러, 창조 때에도 다시 나는 일이 없고 풀어져 꺼지는 때에도 흔들림이 없느니라.
의지 우파슈리챠(upashritya), 의지(依止), 은신함(take shelter)
힌두교의 신앙에서는 우주 만물이 제 때가 오면 창조되었다가 또 제때가 오면 풀어져 없어져서,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인생에 고뇌가 있는 것은 전생의 업(業) 때문이므로 이 생에서 해탈을 얻어 다시 이 고뇌의 생사유전의 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이상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속에 녹아버리는 일이 아니라, 경험적인 활동을 초월한 정신의 보편성과 자유에 도달하는 일이다. 그 자격은 창조와 소멸의 윤희과정의 영향을 조금도 받는 일이 없다. 모든 형상의 지경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영혼은 점점 자라 거룩하신 이를 닮아 영원불변의 성격을 갖게 되고, 가지가지의 우주적 형태를 스스로 취하는 최고의 주재자에 대한 영원한 의식을 가진다. 그것은 수바루파타(svarupata) 즉 동일성이 아니고 사마나쟈르마타(samanadharmata) 즉 평등의 상사성(相似性)이다. 그는 자기가 찾는 이와 같은 성격이 되어 사드리샤묵티(sadrisyamukti)에 이른다. 그는 자기의 외적 의식과 생활에 신성(神性)을 실현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복음」4: 48)를 보라. 샴카라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다. 그는 사쟈르먀(sadharmya)는 성격의 동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속성의 동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은 하나의 서론이다. 이제 크리슈나는 우선 첫째로 프라크리티는 자기의 여러 가지 형상 중의 오직 한 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삼캬론의 이원론을 제쳐 버리고, 그리고는(베단타와 충돌됨이 없이) 이 세계의 모든 인식할 수 있는 물체가 이 프라크리티의 요소로 인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틸라크
 
3. 바라타의 왕자야, 저 큰 브라마는 나를 위한 탯집이다. 내가 그 속에 종자를 넣어주면 그로부터 모든 산 것들이 나오느니라.
브라마(brahma) 프라크리티.
우리가 만일 단순한 자연의 산물만이라면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절은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란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는 우주의 씨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그는 히라냐가르바(hiranyagarbha) 곧 우주의 혼이다. 샹카라는 말하기를 “내가 밭(크쉐트라)과 밭알이(크쉐트라즈나)를 결합시켜 히라냐가르바를 낳게 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나온다. 주께서 ‘아버지’시고, 그가 자아 아닌 탯집 속에 생명의 짬인 종자를 넣어서, 모든 개체의 출생을 일으키신다. 이 세계는 무한이 유한 위에 노시는 놀음이다. (11장 12절에 대한 주석 참조) 저자는 여기서 창조를 안 있음, 곧 혼돈, 혹은 밤으로부터 형상이 전개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는 설명을 채용하고 있다. 캄캄한 깊음 속에서 일어나 나오는 만물의 형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뽑아낸 것이다. 그것들은 ‘그’가 안 있음 속에 던진 종자들이다. —라다크리슈난
맨첨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는데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지어졌고. 지어진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1:1)
그러므로 도(道)가 내고, 치고, 키우고, 기르고, 튼튼케 하고, 여물게 하고, 먹이고, 덮어준다. 내고도 가지지 않고, 하고도 믿지 않고, 어른 되고도 쥐고 놀려 않으니, 이를 일러 까만 속이라 한다. (道生之畜之長 之育之 亭之毒之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노자
 
4. 쿤티의 아들아, 어떤 탯집에서 어떤 형상이 되어나왔든간, 그 ‘큰 브라마’가 그것들의 탯집이요, 내가 그 씨를 넣어 주는 ‘아버지’이니라.
모든 산 것들의 어머니는 프라크리티요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또 프라크리티는 하나님의 본성이므로, 하나님은 우주의 아버지요 또 어머니다. ‘그’는 우주의 씨요 또 탯집이다. 이런 관념이 어떤 예배형식에 이용 되는 일이 있으므로 근대의 어떤 청교도들은 그것을 음탕한 생식기 숭배라고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생명에 수정(受精)을 시켜서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게 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 는 세계의 ‘생식적인 이유’ (seminal reason)이시다. 모든 존재는 물질이 말씀의 정자(logoi spermatikoi) 즉, 생명 주시는 영으로 수정됨에 의하여 임신된 결과로 인하여 나온다.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계에서 자기의 일을 이룬다. 이 말씀의 씨는 거친 물질세계를 형성시키는 이상적인 형상이다. 이 이상, 즉 장차 있게 될 것들의 모형은 다 하나님 안에 있다. 온갖 나타남의 가능성은 그 근거를 거기 대응하는 안 나타남의 가능성 속에 둔다. 그 안에서 그것은 자체의 영원한 원인으로 존재해 있고, 거기 대하여서 나타남은 하나의 탄력성 있는 확증이 된다. 하나님은 창조의 세세한 것까지를 포함한 영원한 전망을 가지신다. 그런데 대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서는 이상과 물질은 이원론적으로 생각되고 있어서 오묘한 이상의 세계와 조잡한 물질세계와의 두 관계에 대한 이해가 곤란한 반면,「기타」에서는 그 둘이 다 같이 ‘거룩하신 이’ 밑에 속해 있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 이상의 정자를 이 거친 세계 속에 화신(化身)으로 나타내신다. 이 하나님께로 조차 나오는 이상의 정자들은 모든 것의 근원되는 ‘말씀’ (logos)에 속하는 것들인데,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설명이 된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성에 대하여 초월적이나, 또 다른 한편 영혼 속에서는 거룩하신 이의 직접적인 표현이 된다. 우주의 흘러감은 기원인 알파와 종국의 완성인 오메가가 일치하게 되는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건의 길이 사내 되고 곤의 길이 계집 되니 건이 큰 비롯을 알고 곤이 몬을 지어 이루느니라(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주역」
건을 아비라 일컫고 곤을 어미라 일컫는다. 내 이에 아득한 것으로 왼통 섞이어 그 가운데 있으니, 그러므로 하늘 땅에 찬 것이 내 그 몸이요, 하늘 땅의 머리 된 것이 내 그 바탈이라, 씨은 내 한배요, 몬은 내 더불어다. 임금은 내 부모의 맏아들이요, 그 대신은 맏아들의 가상(家相)이다. 나 많은 이를 높임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하는 바요, 어린이를 헤가림(慈)은 내 어린이를 어린이로 함이다. 거룩한 이는 그 덕을 합한 이요 어진 이는 그 빼어난 이며, 무릇 천하의 지치고 병들고 불구 되고 시름에 빠지고 의롭고 홀아비 되고 과부 된 것들은 다 내 형제의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며 어디 말할 데도 없는 것들이다.(乾稱父 坤稱母 予兹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吾其體 天地之帥吾其性 民吾同胞物吾與也 大君者吾父母宗子 其大臣宗子之家相也 尊高年所以長其長 慈孤弱所以幼吾幼 聖其合德 賢其秀也 凡天下疫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顚連而無告也) ᅳ장재 (西銘)
 
5. 억센 팔을 가진 자야,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는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특성으로서, 그것이 그 불멸의 거주자를 이 몸 속에 묶어두느니라.
불멸의 거주자 아바야(avyaya), 우리의 자아. 아트만이 몸을 집으로 삼고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
불멸의 영혼을 이끌어 생사의 돌아가는 바퀴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구나(gunas), 혹은 무드(mood)의 힘이다. 그것은 “자연의 원초적인 구성 요소요, 모든 물질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질 속에 내재하는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아난다기리의 말). 그것을 구나라 부르는 것은 그 나타나는 것이 언제나 삼캬론의 푸루샤 혹은「기타」의 크쉐트라즈나(밭알이) 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구나는 프라크리티의 세 경향 혹은 성질의 꾀어 있는 삼겹노끈의 세 가다리다. 사트바(sattva)는 의식의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비쳐줌을 받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방사(prakasa)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라쟈스(rajas)는 밖으로 향한 운동(pravrtti)을 가지고 있고, 타마스(tamas)는 타성(inertiaapravrtti)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부주의, 무관심(pramada)하다.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를 영어로 꼭 맞게 옮기기는 어렵다. 사트바는 완전한 정결(淨潔)과 광휘 (光輝)요, 라쟈스는 불순(impurity)이므로 활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타마스는 어둠이요 게으름이다.「기타」에서는 구나들을 주로 도덕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사트바를 선성(善性)이라 하고, 라쟈스를 열성(熱性)이라 하고, 타마스를 둔성(鈍性) 이라 한다.
우주의 삼위일체는 이 세 성의 어느 하나가 주장이 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보존자인 비슈누에는 선성이, 창조자인 브라마에는 열성(혹은 동성)이, 파괴자인 시바에는 둔성(혹은 암성)이 주장이 된다. 선성은 우주의 안고(安固)를 차지하고 동성은 그 창조적 운동을 돕고, 타마스는 모든 것의 무너지고 죽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것들은 각각 이 세계의 계속과 기원과 분해의 이유가 된다. 구나들을 인격적인 하나님의 세 면에 적용해 본다면 그 세면은 객관적 혹은 현상의 세계에 속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속에서 분투하시고 있고, 하나님 닮은 영혼들은 이 구속사업에 ‘그’ 와 협력하고 있다.
영혼이 자신을 자연의 성격과 한가지인 것으로 알 때 그 자신의 영원성을 잊고 마음과 생명과 몸을 다 이기적인 자기만족을 위해 써버리고 만다. 그 얽매임을 벗어버리려면, 자연의 성격을 초월하여 트리구나티타(trigunatita, 三性초월)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유롭고 썩지 않는 영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사트바는 승화되어 의식의 빛, 즉 죠티(jyotih,直觀)에 들어가게 되고, 라쟈스는 고행, 즉 타파스(tapas)에, 그리고 타마스는 평정 혹은 안식, 즉 샨티(shanti)에 들어가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6. 그중에 선성은 청정함으로 하여 광명을 주고 건강을 준다. 오, 흠없는 자야, 이것은 즐거움의 집착과 지식의 집착으로 얽어매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낮은 지적인 지식이다.
선성이 사람의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제거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비록 고상한 것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욕망을 일으켜준다. 모든 것에 대해 애착이 없는 자아도 여기서는 즐거움과 지식에 애착한다.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의지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우리는 해탈된 것이 아니다. 즈나나 혹은 지식은 부디에 관계되어 있는데 그 부디는 프라크리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트만의 본질인 순수의식과는 구별 되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사람을 아는 이는 슬기롭고, 스스로를 아는 이는 밝으니라(知人者智 自知自明). —노자
 
7. 동성은, 너 알라, 달라붙는 성질이니라. 애욕과 애착에서 나오느니라. 쿤티의 아들아, 이것은 활동의 집착으로 몸에 머무는 이를 얽어매느니라.
몸에 머무는 이 데히나(dehina), 주신자(住身者),몸의 거주자(body's tenant), 자아, 아트만.
아난다기리는, “자아가 그 대행자는 아니지만, 라쟈스는 ‘내가 그 하는 이다’ 하는 생각으로 그를 움직여 활동하게 한다”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8. 그러나 암성은, 너 알라, 무지에서 나와, 몸에 머문 모든 이를 매혹시키느니라. 바라타족의 아들아, 이것은 멍청함과 게으름과, 잠으로 얽어매느니라.
멍청 프라마다(pramada), 태만.
게으름 알라샤(alasya), 유타(遊惰)
 
9. 선성은 행복에 집착하고, 동성은 활동에 집착한다. 그러나 바라타족의 아들아, 암성은 지식을 가려 멍청에 매이게 하느니라.
 
10. 바라타족의 아들아, 선성이, 동성과 암성을 압도하면, 그것이 우세해지고 동성이, 선성 암성을 압도하면, 그것이 우세해지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암성이 선성 동성을 압도하고 우세해지기도 한다.
3성은 어떤 사람 속에도 다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서로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도 그것이 전연 없을 수는 없고, 사람마다 다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그 어느 하나가 우세하다. 그 우세하는 성에 따라, 선성적인 사람, 동성적인 사람, 암성적인 사람이 된다. 생리학에서 체액설(體液說)이 한창 지배적이었을 때, 사람을 다혈질, 담즙질, 지둔질(遲鈍質), 신경질로 나누었다. 체액 중 어느 것이 우세하냐 하는 것에 따라서 한 구분이었다. 힌두교의 배열은 정신적 특징을 보아서 한 것이다. 선성적인 성격은 빛과 지식을 목적하고, 동성적인 성격은 불안정적이어서 외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선성적 성격자의 활동은 자유롭고 고요하고 무사(無私)한데 반해 동성적인 성격자는 줄곧 활동하며 가만 앉아 있지 못하며, 그 활동은 이기적 욕망에 물이 들어 있다. 암성적 성격은 우둔하고 게으르다. 그 마음은 어둡고 어지러우며 그 생애 전체가 환경에 대한 하나의 계속적인 굴복이다. —라다크리슈난
 
11. 광명이 (지식이) 이 몸의 모든 문으로부터 발사되어나올 때는 선성이 더해진 줄로 알 것이니라.
지식의 빛은 완전히 생리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의식의 참은 물질적 표현에 반대되는 것 아니다. 신성(神性)은 육체적인 분야에서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을 성화(聖化)하는 것, 빛을 신체 속에 끌어들이는 것, 우리의 생활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요가의 목적이다. 우리 마음이 빛을 발하고 감각이 민첩해지면, 그때는 선성이 우세한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꼴과 빛은 하늘 바탈이다. 성인인 다음에야 제 꼴을 밟을 수 있느니라. (形色天性也 聖人然後可以踐形) —맹자
 
12. 바라타족 중의 으뜸가는 자야, 탐욕과 활동과 사업의 계획과 불안정과 애욕, 이것은 다 동성이 늘어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생활과 그 쾌락을 열심으로 추구하는 것은 동성이 왕성한 데서 오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예수
그 즐기는 욕심이 깊은 사람은 하늘이 준 영적 힘이 옅으니라(其嗜欲深者 其天機淺). —장자
 
13. 쿠루족의 아들아, 밝지 못하고, 활동도 없고, 게으르고, 헤매이고, 이것은 암성이 늘어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14. 몸에 머무는 이가 선성이 왕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그는 ‘가장 높은 것’을 아는 성자들이 도달하는 세계에 갈 것이니라.
환멸(還滅) 프랄라야(pralaya), 죽는 순간.
그들은 해탈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브라마로카(brahmaloka)에 태어난 것이다. 해탈되는 조건은 니슈트라이구냐(nishtraigunya) 즉 3 성의 초월이다. —라다크리슈난
“ ‘가장 높은 것’ 을 아는 사람들이 도달하는 정결한 세계.” 이 뜻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지극히 높은 것을 아는 사람은 자아를 깨달은 사람 혹은 즈나니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극히 높은 것은 마하트(mahat)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틸라크는 ‘신들의 세계’ 라 했고, 비데 샤스트리(Bhide Shastri)는 “사차로카(), 박쿤다(), 카일라사()......”라 했고 비노바()는 전혀 새로운 말을 끄집어냈는데 그것이 본문에 들어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무후(無垢)한 세계에 나서 즈나니(jnani)들과 같이 있다” 한다. 이에 대한 해설은 아마도 다음 절에 있는 카르마상기슈(karmasangishu)라는 단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동성의 사람들이 카르마에 집착하는 사람들 속에 난다면, 선성의 사람들은 즈나나에 집착하는 사람 즉 지식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 날것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러한 논법이 비노바로 하여금 그 절을 그렇게 번역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므로 그의 번역을 취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15. 동성이 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그는 활동에 집착하는 자들 속에 날 것이고, 마찬가지로 암성이 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미혹의 태속에 날 것이니라.
 
16. 선행의 열매는 선성적이어서 정결하나, 동성의 열매는 괴롬이요, 암성의 열매는 무지니라.
 
17. 선성에서는 지식이 나오고, 동성에서는 욕심이 나오고, 암성에서는 게으름, 헤매임이 나오고 또한 무지가 나오느니라.
 
18. 선성에 머무는 이는 위로 올라가고, 동성적인 이는 중간에 머물고, 암성적인 이는 가장 낮은 특성의 영향을 입어 아래 로 내려가느니라.
최고의 이상은 도덕의 지경을 초월해 영계에 올라가는 일이다. 선한사람(satvika)은 반드시 성자(trigunatita)에 이르러야 한다. 이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우리는 아직도 되어가는 도중이다. 우리의 진화는 아직 미완성이다. —라다크리슈난
높은 선비는 도를 듣고 부지런히 행하고, 가운데 선비는 도를 듣고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낮은 선비는 도를 듣고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족히 도로 삼을 수 없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노자
 
19. 보는 이가 구나(性)밖에 다른 작용자가 없음을 알고, 또 구나를 초월하는 자를 알면, 그는 나의 바탈에 이르느니라.
보는 이 식자(識者, seer).
사람이 자기는 하는 자(doer)가 아니고 구나가 있어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자아는 없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 하는 모든 행동을 자발적으로 통과하여, 단순히 제 몸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몸은 가장 고귀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은 떠나 있어 애착이 없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한 보는 자는 구나를 초월하는 ‘그이’ 의 모습에 능히 눈을 떠 그를 믿게 된다. —간디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비임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비임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 장자
그럴 때 자기와 브라만이 하나인 것이 환해진다. —아난다가리
 
20. 몸에 머무는 이가 몸이 거기서부터 일어나는 그 세 구나를 초월할 때, 그는 남, 늙음,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느니라.
간디는 데하사무드바반(dehasamudbhavan)을 “그것은 몸과의 접촉에서 나온 것”이라고 번역했다. 힐도 이 합성된 낱말을 같은 식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은 자아와 관련하여서 존재한다. 몸 속에 태어나 있기 때문이다” 했다. 여러 주석가들이 샹카라를 따르고 있는데 그는 “그것은 몸이 거기로 쫓아 나오는 씨다” 했다. 나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자아를 몸과 하나로 보게 되는 근본이다.—마하데브 데자이
데하사무드바반은 구나는 몸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샹카라는 “그것은 몸이 거기로 쫓아 나오게 되는 씨다”라고 했다. 선성의 사람의 선성조차도 불완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선성은 반대자와 싸우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이 끝나고 절대의 선성이 될 때 그것은 선성이기를 그치고 모든 윤리적 강요를 초월한다. 선성을 발달시킴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것을 초월해 초월적 지혜에 도달한다. 마치 가시로 가시를 뽑는 모양으로, 우리는 세속을 내버림에 의하여 내버림을 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트바에 의하여서 우리는 라쟈스와 타마스를 이기고, 그다음 사트바까지도 초월한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 말하기를
 
21. 오, 주여, 3성을 초월하는 이는 어떤 모양을 함으로 인하여 되는 것이옵니까?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하며 또 어떻게 이 3성을 초월하옵니까?
지반묵타(살아 있는 現身으로 해탈을 얻은 사람)의 특별한 상(相)은 무엇 인가? 그 특징은 2장 55절 이하에 있는 스티다프라즈나(지혜가 부동의 자리에 간 사람). 12장 13절 이하에 있는 박티마(정성으로 믿는 마음이 완전한 사람)와 비슷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분명한 것은 어떤 길로 도달했든간 완전에 이른 사람의 모습은 같다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2. 오, 판두의 아들아, 그는 광명과 활동과 미혹을 그것이 일어날 때에 싫어하지 않으며, 그것이 일어나기를 그쳤을 때 원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23. 그는 가만 앉아, 구나에 관심도 아니하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홀로 서서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니, 그건 그가 작용하는 것은 오직 구나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24. 그는 고락을 평등으로 보고, 자기의 자아 속에 거하며, 흙과 돌과 금을 한가지로 알고, 쾌불쾌를 같이 보며, 마음이 견고하여 비난과 칭찬을 한가지로 여기느니라.
 
25. 그는 명예와 불명예를 상관 않으며 벗과 대적에 대해 같이하고, 모든 활동의 경영을 내버린 사람이니, 그를 가리켜 구나티타라 하느니라.
구나티타(gunatita) 구나를 초월한 사람.
22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로 읽고 생각하여야한다. 광명, 활동, 미혹은 앞절에서 본 것같이,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가 낳은 산물이다. 이 절들의 속뜻은, 구나를 초월한 사람은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돌은 빛을 바라지도 않고, 활동, 게으름을 싫어할 리도 없다. 그것은 잠잠해, 그런 의지도 없다. 누가 흔들어도 까딱없고, 다시 흔들면 그대로 누워 게으름이나 미혹이 저를 붙잡았다는 감각도 없다. 돌과 구나티타가 서로 다른 것은 구나티타는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죽을 인간을 얽매는 얽맴을 떨어버렸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의 결과로 돌의 안식을 성취하고 있다. 돌과 한가지로 증거하지만, 그것 구나나 프라크리티의 작용을 행하는 자는 아니다. 즈나니(아는 이)는 정좌하여 작용하는 것은 구나임을 알면서도 흔들림이 없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그 행하는 자인 듯이 행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다만 그 지경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도저히 그것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수레를 그 별에다 붙들어 맬 수는 있고, 그리하여 모든 활동에서 자신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점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구나티타는 자신으로서의 지경의 체험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지경을 떠난 것이다. 그러려고 하는 순간, ‘자기’가 벌써 참견을 한다. 우리 평상시의 살림에서 하는 평화, 광명, 소란, 게으름의 체험은 환상이다.「기타」는 여러 가지 말로써 신성의 지경은 구나티타에서 가장 가깝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나도 어떤 때에 가서는 구나티타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힘써서 자신 속에 더욱 선성을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간디
 
26. 흔들림 없는 박티 요가로써 나를 섬기는 사람은 이 3성을 초월함으로써 브라만이 되기에 합당하니라.
 
27. 나는 불사 불멸의 브라만의 기초로, 영원한 법, 절대 복락의 기초이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인격적인 크리슈나가 자기는 절대의 브라만의 기초라고 한다. 샹카라는 설명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주는 그가 브라만의 나타남이라는 의미에서 브라만이라고 한다. 브라만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이슈바라삭티(Isvarasakti)를 통해서 은총을 보여주는데, 그는 그 능력의 나타남이므로, 브라만 자신이다. 샹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설명을 한다. 브라만은 인격 적인 주다. 그러므로 이 절의의미는 “나, 무한정, 불가형언의 내가 한정 속에 있어서 불멸괴(不滅壞)하는 브라만의 기초다” 하는 뜻이다. 닐라칸다(Nilakantha)는 브라마를「베다」가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라마누쟈는 이것을 해탈된 영혼으로 해석하고 마드바(Medhva)는 마야(maya)로 본다. 마두수다나는 이것을 인격적인 주로 본다. 크리슈나는 자신을 절대 무제한의 브라만이라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구나티타는 모든 구나를 뛰어넘었다. 사트바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모든 정진자가 그렇게 하려고 하겠지만) 그보다도 순결 무염(無染)한 사트바여서 라쟈스나 타마스의 한 부스러기도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완전은 사트치트아난다(sat-chit-ananda)인 ‘그이’다. 브라만의 모습 그대로다. 그는 사트(sat), 곧 참, 혹은 실재며, 자신 속에 영원한 법(dharma) 즉 우주 진화의 영원한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치트(chit)다. 그는 완전한 복이 있는 곳이므로 아난다(ananda)다. —마하데브 데자이
이 절의 뜻은 삼캬론의 이원론을 버리고 나기만 하면 남는 것은 오직 하나 파라메슈바라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트리구나티타(trigunatita)의 경지는 파라메슈바라를 믿어서만 된다. 그러나 오직 한분 최고 주재자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기타」는 ‘그이’ 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독단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기타」가 신앙이 가장 쉬운 길이라 하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받아들일 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서도 다른 길은 따르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기타」는 오직 신앙의 길만을 지지한다. 혹은 지식의 길만을 혹은 요가의 길만을 지지한다 하는 것은 각각 그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붙인 의견일 뿐이다. —틸라크
 
이것은「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14장 3성분별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쳐주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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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작성자 바보새 16-01-29 01:37 조회1,1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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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일체상(一切相)
 
 
 
 
앞장에서 거룩하신 주께서 자기의 나타나 뵘을 말씀하시자, 아르쥬나는 그 일체상(一切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장에는 아르쥬나의 요구에 따라 크리슈나가 자기의 우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황홀한 지경이어서 이것을「기타」의 절정이라고 하고, 다른「기타」를 쓴 사람들이 다 이것을 베껴 썼다. ―틸라크
일체상 비슈바루파(vishvarupa), 비슈바(vishva)는 모든 방향으로, 루파(rupa)는 모습, 상(相).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저에 대한 특별하신 은총으로 가장 높은 신비의 영적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미혹은 벗겨졌습니다.
미혹 모호(moho).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저 스스로 존재한다는 생각,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고 움직인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라다크리슈난
 
2. 연꽃 같은 눈을 가지신이여, 모든 것의 나고 사라짐을 당신께로부터 자세히 풀었습니다. 또한 당신의 다함이 없으신 대아(大我)의 영광도 들었습니다.
 
3. 오, 지극히 높으신 주여, 당신은 스스로 그렇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이십니다. (그러나) 오, 지극히 존귀하신 이여, 저는 당신의 거룩하신 그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4. 오, 주시여, 만일 저로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거든, 오, 요게슈바라시여, 당신의 불멸의 몸을 제게 보여주시옵소서.
요게슈바라(Yogeshvara) 요가의 주.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한복음」
삶 있음은 삶 없음에서, 달라짐 있음은 달라짐 없음에서, 나지 않는 것이 나게 할 수 있고, 달라지지 않는 것이 달라짐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나는 것은 나지 않을 수 없고 달라지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늘 나고 늘 달라진다. 늘 나고 늘 달라지는 것은 나지 않는 때가 없고 달라지지 않는 때 없다.(有生不生 有化不化 不生者能生生 不化者能化化生 者不能不生 化者不能不化 故常生常化 常生常化者 無時不生 無時不化) ―열자
이름 없어 하늘 땅의 비롯, 이름 있어 모든 것의 어미, 그러므로 늘 하고자 함 없어서 그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늘 하고자 함 있어서 그 끄트머리를 본다. 이 둘은 한가지로 나와서 이름이 다르니, 한가지로 일러 깜, 깜 중 또 깜이 모든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의 문이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맨첨에 없음이 있어, 있음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하나가 일어나는 데여서, 하나가 있을 뿐, 꼴이 없다. 모든 것이 그것을 얻어 사니 일러서 큼이라 한다. (泰初有無 無有無名 一之所起 有一而未形 物得而生 謂之德) ―장자
‘연꽃잎 같은 눈을 가진 이’ (kamala-patraksha) 연꽃 이파리 같은 까맣고, 보드랍고, 큰 눈을 가진 크리슈나를 가리킨다. ᅳ마하데브 데자이
모든 것 속에 영원의 영이 들어 계시는 줄을 아는 것과 그 모습을 보는 것과는 같은 일이 아니다. 아르쥬나는 그 뵈지 않는 영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꼴, 그 일체상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이는 모든 산 것의 근본이요 또 무너짐이다. 추상적인 형이상의 진리가 볼 수 있는 실체로 되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는 1절에서 영적 지식(ashyatma)이라는 말로 나타나는 최고 주재자(Parameshvara)의 불멸, 불가사의한 모습을 알게 됐다. 그것은 크리슈나가 7장, 8장에서 말한 것이다. 또 그외에 7장에서 즈나나, 비즈나나를 말한 다음 9장, 10장에서 말한 가지가지의 인식할 수 있는 모습에 관해서도 알게 됐다. 2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근원과 종말”이라는 말은 인식할 수 있는 허다한 것들이 어떻게 홀로 하나인, 인식할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주석자들은 3절의 아래 위 두 부분을 서로 딴 문장으로 보고 아래와 같이 읽는다. “오, 지극히 높으신 주시여, 당신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오, 지극히 존귀하신 이시여, 저는 당신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두 부분은 한 문장으로 합해 보는 것이 옳다.「파라마르 다프라파」(Paramarthaprapa) 주석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4절에 나오는 ‘요게슈바라’란 말은 요가의 주라는 말이지, 요기(요가 닦는 사람)의 주란 말이 아니다. ‘요가’라는 말을 인식할 수 없는 것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해내는 힘 혹은 방법의 뜻으로 해석하는 예는 전에도 있었다(7:25, 9:5). 크리슈나는 지금 자기의 우주적인 모습을 그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보여주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요게슈바라’라는 명칭은 고의로 사용한 것이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프리다의 아들아, 볼지어다. 내 모습은 백 가지 천 가지 종류요 거룩하고, 여러 빛깔이요 모양이니라.
하나님의 경악케 하는 자기 나타냄의 능력이 우주의 변화와 궁극의 참 의미를 이해한 아르쥬나의 앞에 나타났다.「마하바라타」6장 131에는 크리슈나가 두료다나에게 다가갔을 때 두료다나가 그를 포로로 잡으려 하자 크리슈나는 자기의 세계적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 환상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고 영적 체험이다. 종교적 체험의 기록 안에는 그러한 환상이 수두룩하다. 예수의 변모, 사울의 다마스커스 도상의 환상, 콘스탄틴의 “이 표적을 가지고 정복하라”는 표어가 붙은 십자가, 잔다르크의 환상 같은 것은 다 아르쥬나의 것과 비슷한 것들이다.
성 힐데가드(Saint Hildegard)는 환상 속에 뚜렷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가 자기를 누구라고 했다는 것이 흡사히「기타」에 있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다. “나는 모든 생명의 불꽃을 불어 보내는 그 지극히 높고도 두려운 힘이다. 죽음은 내 안에 그림자도 없지만, 나는 그것을 여기 저기 보낸다. 그러므로 나는 지혜를 날개처럼 몸에 두르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들 속에 빛나는 그 거룩한 본체의 살아 있는 무서운 본질이다. 나는 물 속에서 반짝이고, 해와 달과 별 속에서 불탄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의 신비로운 힘도 내 것이다. 나는 모든 산것들의 숨을 붙들어주며, 숲 속에도 불고 꽃 속에도 불며, 물들이 산것처럼 흘러갈 때 그것도 나다. 온 땅을 버티는 기둥을 내가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사는 것은 나 때문이요, 나는 그 속에 있고 그 생명이다. 나는 지혜요, 우뢰같이 몰아치는 말씀의 바람으로 내가 만물을 지었다. 나는 모든 것을 꿰뚫어 그들을 죽지 않게 한다. 나는 생명이다.” ―라다크리슈난
 
6. 볼지어다, 바라타족의 아들아, 아디차들을, 바수들을, 루드라들을, 저 두 아슈빈들을, 그리고 마루트들을, 일찍이 보지 못한 여러 기이한 것들을.
아디챠들(Adityas) 열 두 태양신들.
바수들(Vasus) 여덟 세천(世天)들.
루드라들(Rudras) 열 한 황신(荒神)들.
아슈빈들(Ashvins) 두 구생신(俱生神).
마루트들(Maruts) 마흔 여넓의 풍신(風神)들.
 
7. 볼지어다, 구다케샤야, 오늘 이 내 몸 안에 움직이는 또 움직이지 않는 온 우주가 온전히 하나 되어 있느니라. 또 네가 보기 원하는 그 밖의 어떤 것도.
 
8. 그러나 너는 네 그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느니라. 내 네게 하늘눈을 주리니 그것으로 내 신비의 능력을 보라.
어떤 육신의 눈도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인간의 눈은 그런 빛을 뛰어넘은 것을 보게는 되어 있지 않다. 디뱌차크수스(divya-caksus)는 하늘눈(天眼)이고 맘사차크수스(mamsa-caksus)는 육안이다.
인간의 눈은 외양을 볼 뿐이고, 속의 혼은 영적 눈에 의하여서만 알 수 있다. 지식에는 우리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즉 감각의 전달과 지능의 활동에 의하여 되는 지식과, 우리가 은총의 영향을 받아서 되는, 즉 영적 실재의 한 직접적인 지식이 있다. 신의 환상은 신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전체가 하나님의 신성 속에 있는 우주적인 다양성의 통일을 말하기 위해서 하는 시적인 이야기로 된다.
환상이란 하나의 정신적 구성이 아니라 유일한 마음의 저쪽에서 하는 진리의 열어 밝힘이다. 체험의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것이 여기서 드러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산자야 말하기를
 
9. 임금이시여, 이렇듯 말씀하시면서 위대하신 요가의 주, 하리께서는 프리다의 아들에게 지극히 높으신 이슈바라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산자야 1장에 나오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에게 전장의 모양을 설명하는 마부.
하리(Hari) 지극히 높으신 신, 크리슈나를 가리키는 칭호.
이슈바라 자재주(自在主).
 
10. 가지가지의 입과 눈을 가지고, 가지가지의 놀라운 다르샨을 가지고, 여러 가지 거룩한 장식을 하고, 여러 가지 거룩한 무기를 높이 들고,
다르샨(darshan) 바라봄, 목격(sight).
 
11.하늘 꽃줄 하늘 옷을 늘이시고, 하늘 향을 바르시며, 모든 기묘한 것을 갖추시고 눈이 부시며, 한이 없으시고, 모든 방향으로 보시는 낯을 가지신 하늘 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2. 만일 천 개의 해가 하늘에 나타나 그 빛을 단번에 쏟는다면, 혹 그 높으신 이의 광채에 비슷하올까.
 
13. 판두족의 왕자는 거기서 가지가지로 갈라져 있는 온 세계가 신 중의 신이신 그 한 몸 속에 하나인 것을 보았습니다.
 
14. 그때에 그 가멸음의 정복자는 놀람에 맞아 머리터럭이 곤두서고 머리를 조아려 주 앞에 절하며 합장하고 사퇴기를,
 
아르쥬나 말하기를
 
15. 오, 주시여, 저는 당신의 몸 안에 모든 천신들과 또 여러 이상한 생물의 무리와, 연꽃 위에 앉으신 모든 신들의 주이신 브라마와, 모든 성인들과 또 모든 하늘 용들을 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환상을 보면 시야가 넓어져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기 쉬운 시끄러운 근심 걱정의 속세의 저쪽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 조그만 지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우주의 하잘것없는 한 부분일 뿐이다. 아르쥬나는 이제 우주에 가득 차는 무한 무수의 영의 무리를 본다. ―라다크리슈난
 
16. 저는 허다한 팔과 배와, 허다한 입과 허다한 눈을 가지시고 사방에 무한한 모습을 나타내시는 당신을 봅니다. 그러나 당신의 끝과 중간과 맨첨을 저는 보지 못합니다. 오, 일체의 주시요 일체의 모습이신 주시여!
 
17. 제가 보니 당신은 왕관을 쓰시고, 권세의 지팡이를 드시고, 윤보(輪寶)를 가지시고 사방으로 광채를 발하시는 빛의 덩어리시요, 타오르는 불꽃같이 태양같이 헤아릴 수 없어 눈부시어 볼 수 없습니다.
 
18. 당신은 불멸이시요, 깨달아 이르는 지극히 높으심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궁극의 근본이시오, 당신은 무너짐 없는 영원한 진리를 지켜주시는 이이십니다. 당신은 으뜸 사람이시라 저는 믿습니다.
 
19.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없으시고 힘이 한이 없으시며, 한없는 팔을 가지시고, 해 달로 눈을 삼으시는 당신이 입에서 나오는 불꽃으로 이 우주를 불사르고 계신 것을 제가 봅니다.
 
20. 이 궁창과 땅 사이의 공간과 또 모든 방향이 오직 당신 하나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오, 마하트마시여, 당신의 이 놀랍고 무서운 모습을 보고 삼계가 부르르 떱니다.
 
21. 저 모든 천신의 무리가 당신께로 들어가고, 더러는 두려워 합장하고 찬송하며, 대성인과 성만위(成滿位)에 이른 성자들의 떼가 “복이 있도다”를 외며 울려퍼지는 찬미로 당신을 노래하옵니다.
 
22. 루드라들, 아디차들, 바수들, 사드야들, 비슈바데바들,. 아슈빈들, 마루트들, 우슈마파들, 간다르바들, 야크샤들, 아수라들, 싯다들의 모든 무리가 놀람으로 당신을 바라보옵니다.
사드야들(Sadhyas) 성취신(成就神).
비슈바데바들(Vishvadevas) 일체신(ᅳ切神).
우슈마파들(Ushmapas) 조신(祖神).
야크샤들(Yakshas) 야차신(夜叉神).
아수라들(Asuras) 수라, 아수라(阿修羅).
 
23. 오, 억센 팔을 가지신이여, 많은 입과 많은 눈과 많은 팔, 다리, 발과 많은 배와 많은 끔찍스런 이빨을 가진 당신의 엄청난 몸을 보고 온 세계도 저도 놀랍니다.
 
24. 당신의 하늘 닿는, 갖가지 빛의 불길이, 입을 쩍 벌리고 이글거리는 눈을 하신 모습을 보고, 오, 비슈누이신 이여, 제 속의 혼은 무서워 떨고, 가만 있을 수도, 맘이 평안할 수도 없습니다.
 
25. 저는 당신 입의 그 무서운 이빨을 볼 때, 타오르는 멸망의 불길을 보는 것 같아, 어디가 어딘지를 잊어버리고 평안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오, 신들의 신이시여, 세계의 피난처시여!
열망의 불길 칼랄라나(kalalana), 겁화(劫火).
 
26. 저기 있는 모든 드리타라슈트라의 왕자들, 모든 나라 왕의 무리들, 비슈마와 드로나와 또 카르나와, 그리고 한가지로 우리 편의 우두머리 되는 용사들,
 
27. 휩쓸려 당신의 무섭게 벌린 입의 이빨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것은 이빨 사이에 끼여 그 대가리가 부서지고 가루가 된 것이 보입니다.
 
28. 마치 많은 시냇물의 사나운 물결이 한데 밀려 바다로 들이닫듯이, 그들 세상의 날쌘 영웅들이 불타는 당신 입 속으로 달려들어 갑니다.
 
29. 마치 부나비들이 타는 불 속으로 몰아쳐 들어가 타 죽듯이, 모든 사람이 죽기 위해 당신 입 속으로 몰아쳐 들어갑니다.
 
30. 오, 비슈누 신이시여, 당신은 사면에 있어서 불타는 당신의 입으로 삼켜 씹어 온 세계를 먹어치우십니다. 당신의 무서운 불빛이 온 세계에 충만하여 그 불꽃으로 그것을 살라버립니다.
 
31. 그렇게 끔찍한 모습을 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씀해 주시옵소서! 당신께로 나갑니다. 모든 신 중에 가장 크신 주시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저는 맨첨이신 당신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하자는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무지로 인하여 눈이 어두운 인생들은 자기 멸망으로 달음질치는데, 거룩하신 주재자는 그것을 그대로 두신다. 그들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원할 때는 그 결과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행동은 우리를 결과에다 붙들어 맨다. 이 원인 결과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의 한 발현이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실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을 통하여서, 이 온 우주가 그 크기와, 아름다움과, 두려움과, 신들, 축복받은 영혼들, 동물들, 식물들, 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속에 가지고 계시므로 자기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런 생각에 잡히고, 어떤 때는 저런 생각에 잡힌다. 우리는 연속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하신다. 거기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2. 나는 시간이다. 세계를 멸망시키는 자다. 다 자랐다. 이제 나는 모든 세계를 삼켜버리려 나타났다. 네가 아니더라도, 저기 마주서 진을 벌이고 있는 모든 무사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라.
시간 칼라(kala)
시간은 우주의 원동자(原動者)다. 하나님을 만일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끝없이 창조하는 이요 끝없이 파괴하는 이다. 시간은 끝없는 유전(流轉)이다.
최고의 주재자는 창조와 파괴를 다 주장한다.「기타」는 누구나 보통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선을 주장하고 사탄은 악을 주장한다는 사상에 찬성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유한한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것, 생명도, 창조도, 고통도, 죽음도 그에 게서 나온다 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시간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시간 밖에 서기 때문이요, 또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시간 위에 올라서게 된다면 그것을 주장할 수 있다. 시간 뒤에 서시는 힘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보다 멀리 내다보시고, 모든 사건을 어떻게 주관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르쥬나에게 일의 원인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작용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막아낼 수 없는 자연적인 결과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대적들의 멸망은 벌써 오래 전에 저지른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정이 되어 있다. 비인격적인 운명이란 것이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섭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하나의 일반적인 우주적 필연이다. 즉 모이라(moira)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 면의 나타남이므로 그의 만유의 주재자로서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사람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거기에 대하여는 제 뜻으로 하는 모든 항의가 다 소용이 없다. —라다크리슈난
 
33.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라. 그리하여 네 영광을 얻을지어다. 네 대적을 정복하고 풍성한 왕국을 누릴지어다. 그들은 이미 나에 의하여 부서졌느니라. 오, 왼손잡이야, 너는 다만 그 잡은 것이 되라.
왼손잡이 사뱌사친(Savyasacin), 좌우 양손을 다 잘 쓰는 사람, 아르쥬나.
다만 그 잡은 것 니미타마트람(nimittamatram, merely the occasion, just the cause, no more than an instrument), 외인(外因)뿐.
 
34. 드로나 장군, 비슈마 장군, 쟈야드라다 장군, 카르나 장군, 그밖의 용사들도 이미 나에 의하여 죽여졌느니라. 너는 그들을 죽여라! 겁내지 말라! 싸워라! 너는 싸움에서 대적을 정복할 것이다.
쟈야드라다(Jayadratha) 위대한 전사.
운명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했으므로 아르쥬나는 그 잡은 것이 되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전능자의 손에 쥐인 한 개의 피리다. 그러면 그는 자기 목적대로 행하여 위대한 진화를 성취하신다. 아르쥬나가 만일 자기의 불완전한 판단에 따라 행하려 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한테 속게 된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특권에 침입할 수는 없다. 무기를 들지 못하겠다 했을 때 아르쥬나는 건방짐을 범했다.
‘다만 그 잡은 것’이 되라고 했을 때 저자는 하나님의 예정설을 지지하고 있고, 개인은 완전히 무력하고 무의미하다는 것, 그의 의지와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정은 이미 되어 있는 것이므로 아르쥬나는 그것을 변경할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 개의 힘없는 잡힌 거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거나 되는 대로 하는 이가 아니다. 이 두 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흔히 있는,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모든 것을 홀로 주장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 속에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지하자는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 하나님은 (완전히 타자)로서 우리와 절대적 대립 속에서 있는 이라는 뜻이 여기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직관이 여기 나와 있다. 그것은 욥기나 바울의 서간에도 나와 있다. “지음을 받은 자가 어찌 지으신 이를 향하여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할 수 있느냐?”
우리가 우주의 과정을 다 예정의 전개로만, 즉 미리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를 열어 보여주는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행동은 미리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의 영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의 어느 순간 속에도 영원이 다 현존해 있다는 뜻을 긍정하려 하고 있다. 시간내에서 되는 진화의 각 순간의 이 극단적인 특이성이 하나님의 영원과 양립 안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은 다 인간의 기구적인 성격을 통해서 된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리는 하나님 손 안에 잡힌 것답게 행한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온전히 내놓아 하나님으로 하여금 온전히 흡수해버리게 하여 자아의 형적을 남겨두지 않게 한다. 우리는, “당신의 뜻 속에 우리 평화는 있습니다”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그의 명령을 받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23:46) 아르쥬나는 ‘당신의 뜻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만이 오직 하시는 것이고 저는 다만 잡힌 것일 뿐입니다’ 하고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의 끔찍한 참상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인간의 표준으로 본다면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막이 올라가고, 그리하여 전능하신 이의 목적이 드러났을 때 그는 거기 가만히 순종할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원하던 것, 그가 이 세상에서 또는 오는 세상에서 이렇게 됐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이제는 다시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뒤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그것을 꿰뚫고 있다. 우리는 그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거기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모든 행동이 다 그것을 뛰어넘는 저 먼 어떤 것의 상징인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아미 나에 의하여 죽여졌다’(maya hatan) 함은 하나님에 의하여 운명이 결장되었음 뜻한다.
하나님은 그들 생애의 가는 방향, 그 종착점을 다 알고 있다. 아무리 미미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아르쥬나는 섭리의 사무를 집행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외적으로는 자연의 주요, 내적으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거기서 초연하고 있을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여호와의 칙령을 들으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시편」(2:7∼9)
 
산자야 말하기를
 
35. 이렇듯 케샤바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관을 쓴 이는 떨며 합장하고 절한 후, 다시금 두려움으로 크리슈나 앞에 업디어 더듬는 말로 했습니다.
케샤바(Keshava) 피발천(被髮天),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보관을 쓴 이 아르쥬나를 가리킴.
 
아르쥬나 말하기를
 
36. 오, 흐리쉬케샤시여, 온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여 즐거워하고 알뜰히 사모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옵니다. 나찰들은 두려워 사방으로 도망갔고, 모든 싯다상가들은 당신 앞에 업디어 절 하옵니다.
흐리쉬케샤(Hrishikesha) 머리터럭 거슬린 이,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나찰(rakshasa) 악한 귀신.
싯다 상가(siddha-sangha) 깨달아서 완전한 지경에 이른 성자들.
아르쥬나는 한편 경탄하고 한편 고뇌하는 영적 황홀 속에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양한다. 그는 시간의 파괴력을 보는 동시에 또 우주를 다스리고 있는 법칙이 임해 계신 것을 보았다. 그 첫번 것은 두려움을 주었고, 그 둘째번 것은 황홀한 기쁨을 주었다. —라다크리슈난
 
37. 오, 마하트마시여, 또 그들이 어찌 당신을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맨첨의 창조주시요, 브라만보다도 더 크시고, 무한의 신이시며 만신의 신이시요, 우주의 피난처이십니다. 당신은 불멸이시요, 있음이요, 안 있음이시며, 또 그것을 뛰어넘으신 이십니다.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 위대하신 이, 대성(大聖).
맨첨의 창조주 아디카르트레(Adikartre).
우주의 피난처 쟈간니바사(jagannevassa), 그 안에 온 우주가 거하는 하나님.
있음, 안 있음(sat-asat) 유와 비유(有, 非有), 원인 결과.
맨 처음의 창조주, 혹은 당신은 브라마의 창조주이시기까지 하옵니다. —라다크리슈난
「기타」(7: 24, 8:20, 15:16)를 보면 사트(sat)와 아사트(asat)란 말은, 여기서는 인식할 수 있는, 인식할 수 없는(vyakta and avyakta)의 뜻으로, 혹은 변하는 또는 안 변하는(kshara and akshara)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사트아사트를 뛰어넘는 원리를「기타」에선 불멸의 브라만(akshara-brahman) 이라고 한다. 13장 12절에 나온 말대로 한다면 “나는 사트도 아니요, 아사트도 아니다.” 아크샤라라는 말을「기타」에서는 프라크리티에 대해 쓰고, 어떤 때는 파라브라만에 대해서 쓴다. —틸라크
 
38. 당신은 맨 처음의 신이시요, 한 옛적의 으뜸 사람이시며 이 온 우주의 궁극의 쉴 곳이십니다. 당신은 아시는 이요, 또 알려질 것이며, 그 모든 것의 돌아갈 곳이십니다. 끝이 없는 형상을 가지신이여, 당신으로 이 우주는 꿰뚫려 있습니다.
 
39. 당신은 바유시요, 야마시오, 아그니시요, 바투나시요, 또 샤샹카시요, 프라쟈파티시요, 프라피타마하십니다. 당신 앞에 절하고 다시 절합니다. 다시금, 다시금, 천번도 더 다시금 당신께 절 드리옵니다.
바유어(Vayu) 바람.
야마(Yama) 죽음의 임금.
아그니(Agni) 불의 신.
바루나(Varuna) 물의 신.
샤샹카(Shashanka) 달.
프라챠파티(Prajapati) 창조주 브라마.
프라피타마하(Prapitamaha) 조상의 조상.
브라마데바(Brahmadeva)의 마음으로 낳은 일곱 아들들이 있다. 그중 첫째 가마리치(Marici)인데 그에게서 카샤파(Kasyapa)가 나왔고, 카샤파에게서 그밖의 모든 자손이 나왔으므로 이 마리치와 그밖의 것들을 합해서 프라쟈파티들(자존들의 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프라쟈파티란 말을 어떤 이는 카샤파란 뜻으로, 또 어떤 이는 프라쟈파티의 뜻으로 해석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프라쟈파티의 단수를 썼으므로, 브라마데바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브라마데바는 마리치와 그밖의 아들들의 아버지기 때문에, 즉 모든 자손의 할아버지기 때문에 아래 있는 조상의 조상(프라피타마하)이라는 말에 맞는다. —틸라크
 
40. 당신 앞에서 절합니다. 당신 뒤에서 절합니다. 일체의 신이시여, 일체의 방향에서 당신께 절합니다. 당신은 능력이 한없으시고, 힘이 한없으십니다. 당신은 일체를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체이십니다.
 
41. 당신을 친구로 알아, “오 크리슈나, 오 야다바, 오 친구여” 하면서 당신의 이 위대를 모르고, 혹은 경솔함으로, 혹은 친애하는 마음에서 당신을 향해 전에 했던 모든 말,
야다바(Yadava) 크리슈나의 다른 호칭.
 
42. 또 농담으로, 쉬는 동안,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밥을 먹는 동안, 혹은 혼자서, 혹은 여럿 앞에서 당신께 버릇없이 한 모든 행동을, 오 변함없으신 이시여, 용서하옵소서. 오, 불가사의하신 이시여, 이제 당신 앞에 비옵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본 사람은 자기가 아무 값어치 없는 물건이라는 것과 자기가 죄인이란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신 것을 보았을 때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의 내 왕을 눈으로 뵙다니?” 했다. —라다크리슈난
 
43. 당신은 이 흔들리는, 또 흔들리지 않는 세계의 아버지이십니다. 당신은 신들의 예배를 받으실 분이요, 존경을 받아야 하는 스승이십니다. 당신 같으신 이는 없습니다. 당신보다 더 큰이가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삼계에서 비할 자가 없는 능력이십니다.
 
44. 그러므로 당신께 절하고 업디어 빕니다. 찬양하올 주시여,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하듯, 친구가 그 친구에게 하듯,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에게 하듯, 저를 참아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것은 힌두교에는 흔히 있는 사상이다.「리그베다」에는 “우리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옵소서.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하듯, 스스로 빛을 발하시는 주시여, 우리와 함께 계시어서 복을 주시옵소서” 했고 또「야쥬르베다」에는 “오 주여, 당신은 우리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처럼 우리를 가르쳐주시옵소서” 했다. 구약에도 아버지의 상에 대해 씌어 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불쌍히 여기듯이 주께서는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사상이 그 가르침의 중심이다. —라다크리슈난
어떤 해석자들은 프리야(priyah), 프리야야르하시(priyayarhasi)를 “사랑 하는 자”, (여자들인 경우는) “내 사랑”이라 하지만, 내 해석으로는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프리야야르하시란 말을 문법적으로 볼 때 프리야야(priyayah)와 르하시(rhasi)를 끊어서 볼 수 없고, 비교를 표시하는 말인 이바(iva)가 이 절 안에서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프리야 프리야야르하시(priyah priyayarhasi)를 세째 비교로 보는 것보다는 그것을 그 비교의 주제목으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틸라크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법상의 토론은 약하기로 하고, 틸라크는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를 “부부의 비유로 보려 하지 않고(사실 원문에는 남편이란 말도, 아내란 말도 없다) 그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으로 보고 “그의 사랑”(받는 자)을 아르쥬나 자신으로 보아서,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사해주고, 친구가 친구의 잘못을 사해주듯, 그렇듯 사랑하시는 당신께서 당신의 사랑받는 제 잘못을 사해주옵소서 하는 뜻으로 해석하자는 것이다.”—함석헌
 
45.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저는 기쁨에 찼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두려움으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주시여, 당신의 모습을 제게 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만유의 주시요, 우주의 피난처이신 당신이시여!
초월적인 존재, 우주적인 존재의 무서운 모습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또 무서움에 질린 이 죽을 인생에게 다시 용기를 주는 인격신의 모습, 신성(神性)에 대한 명상의 상징이 되는 모습도 또 있다. 크리슈나의 옹근 모습의, 부숴버리는 광명의 불꽃 밑에서 견디어 설 수 없어하는 아르쥬나는 이제 보다 더 즐거운 모습을 원한다. 세계의 저쪽에 항상 빛나는 그 빛은 또 제 속에 있는 빛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제 속에 있는 스승과 친구다. —라다크리슈난
 
46. 전같이 왕관을 쓰시고 권세의 지팡이를 잡으시고, 윤보를 드신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오, 일천 팔의 하나님, 무한형상의 주님, 바라옵나니, 네 팔의 모습으로 보여주시옵소서!
윤보(輪寶) 우내(宇內)를 통일 지배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보기(寶器).
아르쥬나는 이제 비슈누의 화신으로서의 크리슈나의 모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47. 아르쥬나야, 내가 네게 만족했으므로 내 요가의 힘에 의하여 나의 최고의 모습을 네게 보여주었으니, 이것은 광명으로 이뤄진 것이요, 온 우주요, 무한이요, 맨 처음이니라. 너를 내 놓고는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느니라.
최고의 모습 일천 팔의 하나님, 무한형상의 주님을 가리킴.
환상이 사람이 찾는 것의 구경은 아니다. 그렇다면「기타」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한때 번쩍이고 지나가는 환상이 찾는 자의 늘 있는 체험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황홀 혹은 사마디(三昧)는 신앙생활의 목적도 또 본질적인 요소도 아니다. 눈을 캄캄케 하는 빛, 법열 속에 떠다님이 영구적인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아르쥬나는 그가 본 치떨리는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것을 자기 생활 속에 박아넣지 않으면 안됐다. 환상은 다만 열어줌일 뿐이다. 그것은 튼튼케 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본 것을 다른 감관의 증거로써 시험해보고 확인하고 하듯이 환상으로 얻어진 지식도 생명의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온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라다크리슈난
옹글참됨은 하늘길이요, 옹글 참되게 함은 사람의 길이다. 옹글참되게 한다는 것은 착함을 골라 굳게 잡음이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중용」
 
48. 오, 쿠루족의 가장 뛰어난 용장아, 베다나 희생이나 공부에 의해서도, 자선에 의해서도, 제사의식에 의해서도, 무서운 고행에 의해서도, 나의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너를 내놓고는 아무도 될 수 없느니라.
 
49. 나의 이러한 무서운 모습을 보고 너는 두려워도 말고 어쩔 줄 몰라 하지도 말라. 두려워 말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나의(전의) 모습을 보라.
 
 
산자야 말하기를
 
50. 그렇듯 아르쥬나에게 말씀하시면서 바수데바께서는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시었습니다. 마하트마는 다시금 자기의 인자하신 형상에 돌아가시어서 무서움에 질린 아르쥬나를 위로해주셨습니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51. 오, 쟈나르다나시여, 당신의 이 인자하신 모습을 뵈오니 제 마음이 가라앉고 제 본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2. 나의 이 지극히 보기 어려운 모습을 너는 이제 보았느니라. 모든 신들조차도 이 모습을 보기를 항상 원하느니라.
 
53. 베다에 의해서도, 고행에 의해서도, 자선에 의해서도, 희생에 의해서도, 네가 지금 본 나의 그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54. 아르쥬나야, 그러나 외곬으로 믿는 마음에 의해서만 나는 나대로 알 수 있고,참대로 볼 수 있고, 또 들어갈 수 있느니라. 오, 파란타파야!
 
55. 판두족의 아들아, 나를 위해 일을 하고, 나를 자기 목적으로 알고, 나를 진심으로 믿고, 아무것에도 집착이 없으며, 모든 물건에 대하여 악의를 품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내게로 오느니라.
이것이 박티 신심(信心)의 짬이다. 12장 13절을 보라. 이 절이「기타」전체의 교훈의 주지다. 우리는 우리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어떤 생명체에 대해서도 적대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직업이 무엇이었거나, 우리 성격이 어떠하였거나, 또 우리가 창조적인 사상가였건, 혹은 명상적인 시인이었건, 아무런 천부의 재능도 가진 것 없는 비천한 한 남자 한 여자였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구가 될 수 있고, 그의 사랑과 목적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산 영(靈)들의 넓은 세계가 하나님에게 가락을 맞추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면 인간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다.
「기타」는 그 놀라운 초월적인 환상의 체험이 있은 다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초월적인 아트만의 큰 비밀, 곧 있는 모든 것의 근본인 그 자체는 아직도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고자가 유한한 것의 끝없는 과정의 배경이 되고 있다. 아르쥬나는 이 진리를 보았지만 그 안에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기의 온 천성을 변화시켜야 했다. 한때 반짝 하고 지나가는 환상은 그것이 아무리 생생한 것이고 그 영향이 아무리 영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도달은 아니다. 영존(永存)하는 실재에 대한 탐구, 즉 궁극의 탐구는 감정적인 만족감이나 발작적인 체험으로 끝날 수 없다. —라다크리슈난
그때 갑자기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하였다. 그의 옷은 눈부시게 빛나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보였다…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초막 셋을 지으십시다. 그래서 하나는 선생님이 계시고,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도록 합시다” 했다……바로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했다……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게도 말하지 마시오”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그들이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보니, 큰 군중이 둘러서 있는……예수께서는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을까!” 하셨다. —「마가복음」(9:2∼29)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제 11장 일체상의 끝이니 브라만의 지식의 일부 요가에 대한 학문에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하는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