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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3

Yi Hwang - Wikipedia

Yi Hwang - Wikipedia

Yi Hwang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Yi Hwang
Korean name
Hangul
이황
Hanja
李滉
Revised RomanizationI Hwang
McCune–ReischauerYi Hwang
Art name
Hangul
퇴계
Hanja
退溪
Revised RomanizationToegye
McCune–ReischauerT'oegye
Courtesy name
Hangul
경호
Hanja
景浩
Revised RomanizationGyeongho
McCune–ReischauerKyŏngho
Posthumous name
Hangul
문순
Hanja
文純
Revised RomanizationMunsun
McCune–ReischauerMunsun

Yi Hwang (Korean이황; 1501 – 1570) was a Korean philosopher, writer, and Confucian scholar of the Joseon Dynasty.[1] He is considered the most important philosopher of Korea - he is honored by printing his portrait on the (most often used) 1000 Won banknote, on the reverse of which one can see an image of his school, Dosan Seaowon. He was of the Neo-Confucian literati, established the Yeongnam School and set up the Dosan Seowon, a private Confucian academy.[2]

Yi Hwang is often referred to by his art name Toegye ("Retreating Creek"). His courtesy name was Gyeongho.[3]

His interpretation of Neo-Confucianism was influential not only in Korea, but also in Japan, Taiwan, and Vietnam, and is now being studied even in the mainland China. His main work,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 originally published in classical Chinese language, has been already translated into modern Korean, Japanese, Vietnamese, English, French, German, Russian and Polish.

Some of his writings were looted by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Life[edit]

Yi Hwang was born in Ongye-ri, Andong, North Gyeongsang Province, in 1501. He belonged to the Jinbo Yi clan, and was the youngest son among eight children.[4] A child prodigy, he learned the Analects of Confucius from his uncle at age twelve and admiring the poetry of Tao Yuanming, started writing poetry. His poem Yadang (hangul: 야당, hanja: 野塘, "Pond in the Wild"), written at the age of eighteen, is considered one of his major works.[3][5] Around the age of twenty, he immersed himself in the study of I Ching and Neo-Confucianism.[3][6]

He came to Seoul (then known as Hanseong) when he was 23 years old and entered the national academy Sungkyunkwan in 1523. In 1527 he passed preliminary exams to become a government official, but re-entered Sungkyunkwan at the age of 33 and socialized with the scholar Kim In-hu. He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s with top honors in 1534 and continued his scholarly pursuits whilst working for the government.[3] He returned to his childhood home at the death of his mother at the age of 37 and mourned her for 3 years. He was appointed various positions from the age of 39 and sometimes held multiple positions including secret royal inspector, or Amhaengeosa (hangul: 암행어사, hanja: 暗行御史), in 1542. His integrity made him relentless as he took part in purges of corrupt government officials. On numerous occasions he was even exiled from the capital for his firm commitment to principle.[2]

2023/06/09

알라딘: 퇴계집 - 사람됨의 학문을 세우다, 이황 (지은이),이광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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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집 - 사람됨의 학문을 세우다  | 한국고전선집
이황 (지은이),이광호 (옮긴이),황상희 (감수)한국고전번역원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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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고전선집. 퇴계 이황이 추구한 학문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인 도가 무엇인지 알고 실천하는 도학이다. 도학은 올바른 삶의 길을 알고 실천하는 가운데 자기 삶의 완성을 지향한다. 자기완성을 위한 학문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성인을 지향하기에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 즉 성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퇴계가 만년에 지어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는 그러한 의미에서 퇴계 학문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차


한국고전선집을 펴내며
이황은 누구인가

제1장 학문의 길에 들어서다
가재
들판의 연못
마음을 읊다
지산의 달팽이 집
가야산을 바라보며
김일손을 그리워하며 소나무

제2장 벼슬에 나아가다
봄날 고향을 그리며
연말에 고향에서 온 편지
청평산을 지나며
독서당의 매화
고향 가는 김인후를 보내며
일본 사신을 끊지 마소서
새벽녘 계장에 도착하여
진리를 기르는 암자
비가 갠 뒤에 느낌을 적다
한가하게 『무이지』를 읽고서
단양 군수로 나가는 길에
단양 산수에 대한 기록을 남기다
백운동서원 제생들을 위하여
백운동서원을 사액 서원으로 정해 주소서
소백산 유람기
주세붕이 보내 준 시에 답하다

제3장 산수를 벗하며 강학하다
한서암을 짓고
하루를 돌아보며
기꺼운 시골살이
도를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조용한 곳에서 수양해야지
우리나라 유학자의 계통
맑게 갠 아침에
계상서당서 강학을 시작하며
계당에서 흥이 일어
입춘을 맞아
함경도 순변사 이준경에게 내린 교서
조식에게 벼슬을 권하다
학교란 무엇인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는
도산서당 지을 터를 얻고서
이이에게 주는 시
이이를 격려하며 경계의 말도 함께하다
의(義)란 일의 마땅함입니다
이산서원 규정
이산서원 기문

제4장 교육과 저술에 힘쓰다
도산기
도산서당
완락재
시습재
뜰의 풀
사단칠정이란 무엇인가
왜 시를 짓는가
이담에게 주는 경계
아홉 서원을 총론하다
「도산십이곡」 발문
그대와 도리를 토론하니
유학의 도통을 노래하다
도산에서 매화에게 묻다
매화를 대신하여 답하다
기대승에게 처세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다
여섯 조목을 아룁니다
사심을 없애야 합니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한다
달밤에 깨어나 매화를 읊다
손자 안도에게
한평생을 읊다

제5장 사람됨의 학문을 세우다
「천명도」로 사람됨의 학문을 열다
주자의 편지는 사람됨에 절실하다
『주역』으로 밝힌 자연의 이법
자신을 성찰하다
선현들의 마음 공부
사람됨의 학문을 총정리하다
『심경』을 신명처럼
『성학십도』를 올리며


제6장 평가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졸기
이이가 지은 「퇴계 선생 유사」
제자들의 기록
오현을 문묘에 종사하라
이식의 추록
이익의 「백두정간」에 실린 글
안정복의 『이자수어』 서문
정약용의 『도산사숙록』
일본의 요코이 쇼난이 남긴 말
중국의 장리원이 본 퇴계 철학
미국의 마이클 칼턴이 본 『성학십도』

연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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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문 2017년 1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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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황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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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李滉)은 1501년 11월 25일 안동 예안현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李埴)과 박씨 부인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세에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등을 배웠고 12세에는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15세에 게[蟹]를 보고 <부석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지었고 20세에는 ≪주역(周易)≫을 탐독했다.

21세에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 유학한다. 27세에 경상도 향시에 2위로 합... 더보기

최근작 : <사단칠정을 논하다>,<김정희 외 4인의 한시 24수>,<[큰글씨책] 퇴계선집> … 총 63종 (모두보기)

이광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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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서철학을 배우고, 민족문화추진회 한학연수과정과 한국고등교육재단 태동고전연구소 한학연수과정을 수료했다. 《주자의 격물치지설에 관한 고찰》로 석사학위를, 《이퇴계 학문론의 체용적 구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퇴직했다. 서암학술(SBS) 재단 해외파견교수로 선발되어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방문교수가 되었고, 절강대학교 한국연구소 초빙교수를 지냈다. 태동고전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부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한국동양철학회 회장, 국제퇴계... 더보기

최근작 :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다산학 공부>,<고전 강연 3> … 총 32종 (모두보기)

황상희 (감수)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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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에서 ‘퇴계의 종교성’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 공저로 『21세기 보편영성으로서의 성과 효』, 『효경과 인성』이 있고, 논문으로 「퇴계의 천관」, 「퇴계의 태극관」, 「퇴계의 종교성」, 「퇴계의 상제관과 리도설」, 감수로는 『퇴계집』이 있다.


최근작 :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3.1운동 백주년과 한국 종교개혁>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퇴계 이황이 추구한 학문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인 도(道)가 무엇인지 알고 실천하는 도학(道學)이다. 도학은 올바른 삶의 길을 알고 실천하는 가운데 자기 삶의 완성을 지향한다. 자기완성을 위한 학문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성인(聖人)을 지향하기에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 즉 성학(聖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퇴계가 만년에 지어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聖學十圖)』는 그러한 의미에서 퇴계 학문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의 글 중에서 그의 학문과 사상의 정수가 담긴 작품을 선별하였다. 퇴계의 생애를 네 시기로 나누어 그의 삶을 조망하고, 사람됨의 학문을 추구한 이황의 학문 세계를 소개하였다.

제1장 학문의 길에 들어서다

이슬 맺힌 아리따운 풀 물가를 두르고 露草夭夭繞水涯
맑게 흐르는 작은 연못 티끌도 없어라 小塘淸活淨無沙
구름 날고 새 지나는 것이야 으레 그렇지만 雲飛鳥過元相管
때때로 지나는 제비 물결 일으킬까 두렵네 只怕時時燕蹴波
-「들판의 연못[野池]」중에서

⇨ 18세이던 1518년에 지은 시이다. 동양의 학문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인 이해보다도 주체인 마음에 대한 이해와 수양을 중시하였다. 조선조 유학의 특성이 마음을 중시한 것이라면 이러한 성격은 퇴계의 영향이 크다. 퇴계는 이 시에서 맑은 물을 보면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맑기를 바라지만 외물에 흔들리기 쉬운 것이 마음이어서 날아가는 제비를 보고도 혹 물결을 일으킬까 두렵다고 읊었다.

제2장 벼슬에 나아가다

내가 이자현이 조정의 부름에 나아가기를 사양한 글을 보니, 그 글에 장자(莊子)의 말을 인용하여, “새로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을 면하게 하여 주고,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로 인정해서 강해(江海)의 즐거움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아, 이자현의 이런 흉금을 세속의 헐뜯는 자들이 어찌 그 만 분의 일이나마 엿볼 수 있었겠는가.
-「청평산을 지나며[過淸平山 有感]」중에서

⇨ 42세이던 1542년 8월 퇴계가 강원도 재상어사(災傷御使)로 나가는 길에 청평산을 지나며 지은 시와 시의 서문으로, 청평사에 은거하였던 이자현의 삶을 새롭게 평가한 글이다.
우리나라에도 은둔하여 훌륭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 다수 있지만 세속의 좁은 안목으로 잘못 평가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자현의 삶과 행적을 보고 퇴계는 그의 고결한 마음을 느끼고 이해하는데 머물지 않고 잘못된 역사 기록을 비판하고 바로잡는다. 올바른 안목과 과단성 있는 용기를 가슴에 지닌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제3장 산수를 벗하며 강학하다

몸이 물러나 어리석은 내 분수에 편안하나 身退安愚分
학문이 퇴보할까 늘그막이 걱정일세 學退憂暮境
비로소 시냇가에 거처를 정하여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 굽어보며 날마다 성찰하네 臨流日有省
-「하루를 돌아보며[退溪]」중에서

⇨ 벼슬에서 물러나 편안한 마음으로 물가에 살며 성찰하는 모습을 상상하여 보라. 과연 유학을 통하여 성취하려는 학문과 삶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주객을 나눈 다음 객관적인 사물 세계를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마음대로 지배하고 응용하고자 하는 현대의 학문과는 그 방법과 목적이 매우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4장 교육과 저술에 힘쓰다

새끼 새 날갯짓 익히듯 날마다 명과 성에 힘써서 日事明誠類數飛
시시때때로 거듭 생각하고 실천해야지 重思複踐趁時時
깊은 희열 얻는 건 익히 공부하는 데 달렸으니 得深正在工夫熟
어찌 맛난 요리가 입에 즐거운 정도일까 何啻珍烹悅口頤
-「시습재[時習齋]」중에서

⇨ 도산서당을 지으며 읊은 「도산잡영」의 칠언 절구 18수 가운데 제9수이다. 시습재(時習齋)는 『논어』「학이」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따와 붙인 이름이다.
생명은 왜 태어나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삶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일까? 퇴계에게 물으면 답은 명백하다. 천명을 부여받아 완수함으로써 우주 자연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역시 타고난 천명인 본성을 온전히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제5장 사람됨의 학문을 세우다

옛 거울이 오랫동안 묻혀 있었기에 古鏡久埋沒
거듭 닦아도 빛이 잘 안 나지만 重磨未易光
밝은 바탕이야 그래도 흐려지지 않는 법이니 本明尙不昧
옛 선현이 밝히는 방법을 남겼다오 往哲有遺方
사람으로 태어나면 노소를 가릴 것 없이 人生無老少
이 일에 힘쓰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네 此事貴自彊
위나라 무공은 아흔다섯 살에 衞公九十五
아름다운 경계의 글을 규장에 새겨 간직했다네 懿戒存圭璋
-「선현들의 마음 공부」중에서

⇨ 사람됨을 위한 학문의 목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유학에서는 학문을 통하여 사람이 선비로부터 현인으로, 현인에서 성인과 신인(神人)으로까지 변화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외물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만 중시하고, 주체가 되는 인간의 마음이 무엇이며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고경중마방』을 읽으며 마음을 닦아 나가다 보면 우주가 무한하듯 인간의 내면세계도 무한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6장 평가

인류가 21세기를 눈앞에 두면서 세계 정치가 다원화되고, 경제가 망락(網絡)·일체화되자 도구이성은 팽창하고 가치이성은 위축되어 인류는 엄청난 생태 위기·사회 위기·도덕 위기·정신 위기와 가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인류가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이루던 정신적인 가정이 파괴되었으므로 우리는 이를 다시 세워야 한다. 퇴계 심성론의 현대적 출로를 탐구하고 그 현대적 가치를 찾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익한 계발(啓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장리원이 본 퇴계 철학」중에서

⇨ 이 글은 『퇴계학보』 제106호에 실린 장리원[張立文] 교수의 『퇴계 심성관의 현대적 가치』의 일부분이다. 장 교수는 퇴계의 학문이 중국 대륙에 광범위하게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학자로서 이 글에서도 퇴계 심성 철학의 도덕적 주체 확립 문제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조명하며 그 장점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고전선집
한국고전번역원이 우리 고전의 홍보·보급을 위하여 2013년부터 간행한 총서로서, 우리 문집 가운데 역사적, 현대적으로 의의가 있는 작품을 골라 그 인물의 삶과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거나 주제별로 엮고, 작품마다 설명과 감상을 곁들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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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약력을 보면,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평생 주자학을 연구한 최고의 전문가이자 퇴계 관련 저술과 번역을 여러 권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분야 전문가가 번역한 책에 왜 감수가 붙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프로필만 보면, 감수자보다 번역자가 훨씬 내공이 깊어 보이는데..
끄덕끄덕 2018-01-0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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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 : 리(理)와 기(氣)의 형이상학







사단(四端)은 <맹자 孟子>에 나오는 말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한다... '단'이란 실마리(緖)란 뜻과 시작(始)이란 뜻,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는 실마리로 해석한다.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실패를 찾듯이 사단을 궁구하다 보면 네 가지를 미루어서 타고난 본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p42)... 칠정(七情)은 <예기 禮記>에 나오는 것으로, 기쁨(喜), 분노(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憎), 욕망(慾) 등을 말한다. 사단이 도덕적인 감정이라면 칠정은 일반적인 감정을 뜻한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43




리(理)는 선진시대에는 옥에 난 무늬, 결 등을 의미하다가 점차로 발전해 개별적 법칙을 의미하고, 나아가서는 법칙을 포괄하는 원리로 확정되었다. 그것이 송대에 들어와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는데, 주로 도덕적인 원리나 법칙을 뜻하게 되었다. 기(氣)는 매우 포괄적인 것으로 처음에는 숨(호흡)을 뜻하다가 점차로 생명으로 발전했다. 생명은 숨과 관련을 맺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송 대 이전에는 기가 중심이고 리는 그에 부속되었는데, 송대 이후에는 리와 기가 함께 논의되고, 리가 중심적인 역할로 바뀌었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45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 ~ 1571)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7 ~ 1584)로 대표되는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입문서다. 조선 성리학의 두 거목들의 사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에서 퇴계 이황의 심성론(心性論)은 '리기호발(理氣互發)'로 요약되는데, 사단을 리(理)의 발현으로, 칠정을 기(氣)의 발현으로 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병행(혹은 대립)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사단은 리가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사단은 리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난 것이라는 의미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나누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사단은 순수하고 칠정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에 기인한다. 사단은 도덕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순선무악한 것이고, 칠정은 감정 일반을 가리키기 때문에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다. 사단은 완전한 것이고, 칠정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이황은 리와 기에 분속시켰던 것이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48






반면,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 ~ 1572)과 율곡 이이는 리와 기를 구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퇴계의 사상과 대립한다. 특히 율곡은 기발이승일도(氣發理昇一道)를 통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며, 고봉보다 더 큰 대립각을 세운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서로 무관한 병행관계로 놓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단과 칠정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사단이 칠정의 일부분인 포함관계라는 것이다. 사단이 칠정의 일부분이지만 둘이 서로 평등한 감정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리와 기는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상 사물에는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것이지, 리 따로 기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50




이이는 이황을 비판하면서 기대승을 옹호한다. 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포함관계라는 것이다. 칠정 가운데 리가 발동한 것이 사단이라고 한다. 이는 절도에 맞는 것이 사단이라는 것이지, 칠정 이외에 달리 사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이는 기대승의 원칙을 고수했다. 사단이나 칠정 모두 기가 발동한 것이라고 하는 원칙을 주장한다. 그렇게 된다면 이황의 사단은 리를 주로 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한 것이라는 주장도 폐기된다. 사단이나 칠정 모두 기가 발동해 리가 탄 것이 되기 때문이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55




현재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보여질 수도 있지만, 당대에는 리와 기의 문제가 유교의 조선(朝鮮)이 불교의 고려(高麗)를 대신해야하는 명분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를 간단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바라봐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이황의 '사단 - 리', '칠정 - 기' 라고 하는 도식은 사단과 칠정, 리와 기의 관계 설정에서 나온 것이다.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지 않으면 리와 기를 하나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기에 대한 리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고려 시기의 불교적인 사고는 기를 중심으로 삼는 마음(心)에 기초한 사고이고, 그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는 것이 성리학의 관점이다. 따라서 리를 우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53

























성리학의 국가이념에 대해서 섣부르게 정리하기는 조심스럽기에 이 정도만 옮기도록 하자. 그렇지만, 유교에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개념을 도입한 성리학의 틀 속에서 우리는 보다 폭넓게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에서는 이와 같은 퇴계와 율곡의 사상 차이를 사단과 일반감정과의 관계로 정리한다. 사단이 본성에서 발현된다는 퇴계의 사상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발현되다는 율곡의 사상 속에서 본유 관념( 本有觀念, innate idea)라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와 이에 반대하는 경험주의자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의 사상을 떠올린다면 무리한 연상일까.





이황이 사단과 칠정의 분리를 주장한다면 이이는 사단을 칠정이 절도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황과 이이 모두 칠정이 아니라 사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사단이라고 하는 도덕적인 감정이 일반적인 감정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논지가 결정된다... 이황은 사단이 나의 본성에서 발현한다고 주장하고, 이이는 외적인 대상에 대해 나의 마음이 발현한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내적인 발동을, 후자는 외적인 발동을 주장한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61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에서는 리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사상을 비교한다. 퇴계 사상에서는 리를 천(天, 하늘)의 위치까지 높이는데, 이는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실천이성비판>과 도덕이 필연적으로 종교에 이른다는 <이성의 한계안에서의 종교>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율곡의 리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와 비교한다면 어떨까.





이황은 리의 자발성이 있다고 하고, 이이는 리의 자발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리의 운동성 여부가 두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p63)... 리의 발동이 창조적인 힘이고 그것은 인간의 자율적인 도덕 실천과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의 창조적 성격을 강조하다 보면 리의 종교적 성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황의 리동설은 때로는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황은 리를 천의 지위에까지 높이고 있다. 리는 절대적 존재로서 사물에 명령하는 주체이고, 사물의 명령을 받지 않는 주재적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리의 자발적인 운동은 인간 개체의 적극적인 자기 수양을 통한 리의 실현에 논점이 있지, 리가 신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_ 조남호,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p66




개인의 수신원리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의 통치이념에 이르는 방대한 철학체계를 구축한 조선 성리학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에서 언급된 내용을 바탕으로 큰 줄기를 잡고 간다면 어느 정도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물론, 페이퍼에서 소개한 서양철학자들의 사상이 완벽하게 퇴계와 율곡의 사상과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비교해서 본다면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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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이광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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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이광호 (지은이)홍익201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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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100자평(0)리뷰(9)

324쪽

책소개
40여 년간 유학의 진리를 연구하고 이를 현대 인문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온 저자 이광호 교수가 퇴계와 율곡 두 학자가 서로 존중하되 자신의 신념을 날카롭게 내비치는 왕래편지와 시문을 최초로 한데 모아 편집하고, 현대인이 읽기 쉽게 풀어썼다. 이들의 사상과 교류를 통해 학문적 즐거움은 물론 삶의 지혜와 시대정신을 배울 수 있다.

퇴계와 율곡은 서로 화목하게 지냈으나 애써 같아지려 하지는 않았다. 퇴계는 은거하여 내면을 완성하려 했고, 율곡은 관료로서 나라에 헌신하려 했다. 따라서 퇴계에게 율곡은 도덕의 본원에 충실하지 않은 젊은 천재로 보였을 것이며, 율곡에게 퇴계는 당대 제일의 학자로서 세상에 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한 발짝 물러나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율곡이 서른다섯이고 퇴계가 일흔이었던 1570년에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특히 퇴계의 율곡에 대한 실망은 너무나 커서 강한 어조로 율곡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고 경계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자연히 율곡의 마음도 퇴계에게서 멀어졌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결국 둘의 목표는 같았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에서 비롯되는 원칙과 태도로 도(道)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명에 따른 각자의 소신을 어떻게 아울러 협력하고 성과를 내게 할 것인가? 퇴계와 율곡이 서로에게 던지는 질문 속에서 우리 시대의 가치를 어떻게 이끌어내고 스스로 답할 것인가? 이 책이 던지는 고민과 궁리는 다시 돌아올 역사 앞에 놓인 독자들 자신의 몫이다.


목차


머리말
해제

1장. 율곡과 퇴계가 주고받은 시
1. 율곡이 도산의 퇴계를 방문하여 주고받은 시
2. 퇴계와 율곡이 편지로 화답한 시
3. 퇴계가 율곡을 위하여 지은 시
4. 이숙헌에게 드리는 시

2장. 율곡과 퇴계가 주고받은 편지

1. 율곡의 첫 번째 편지-별지, 퇴계의 답서를 부록함
(《栗谷全書》1, 권9 〈上退溪先生別紙附答書〉戊午[1558년])
2. 퇴계의 첫 번째 답서
(《退溪全書》1, 권14 〈答李叔獻珥○〉戊午[1558년])
3. 퇴계의 두 번째 답서-별지
(《退溪全書》1, 권14 〈答李叔獻珥○別紙〉戊午[1558년])
4. 퇴계의 세 번째 답서-별지
(《退溪全書》3, 속집 권3 〈答李叔獻別紙〉[1558년])
5. 퇴계의 네 번째 답서
(《退溪全書》1, 권14 〈答李叔獻〉戊午[1558년])
6. 퇴계의 다섯 번째 답서
(《退溪全書》3, 속집 권3 〈答李叔獻〉甲子[1564년])
7. 퇴계의 여섯 번째 답서
(《退溪全書》3, 속집 권3 〈答李叔獻〉[연도 미상])
8. 율곡의 두 번째 편지
(《栗谷全書》1, 권9 〈上退溪先生〉丁卯[1567년])
9. 율곡의 세 번째 편지
(《栗谷全書》1, 권9 〈上退溪先生〉戊辰[1568년])
10. 율곡의 네 번째 편지
(《栗谷全書》1, 권9 〈上退溪先生〉庚午[1570년])
11. 퇴계의 일곱 번째 답서
(《退溪全書》1, 권14 〈答李叔獻〉庚午[1570년])
12. 퇴계의 여덟 번째 답서-문목에 답함
(《退溪全書》1, 권14 〈答李叔獻問目〉[경오년])
13. 율곡의 다섯 번째 편지-문목
(《栗谷全書》1, 권9 〈上退溪先生問目〉[1570])
14. 퇴계의 아홉 번째 답서-물음에 답함
(《退溪全書》1, 권14 〈答李叔獻〉[1570])

3장. 퇴계가 사망한 뒤 율곡이 퇴계를 위하여 지은 글
1. 만사
(《退溪全書》4, 陶山輓祭錄, 輓詞)
2. 제문
(《退溪全書》4, 陶山輓祭錄, 祭文, 文人 李珥)
3. 퇴계 이(李) 선생에게 제사 드리는 글
(《栗谷全書》1, 권14, 祭退溪李先生文 壬申)
4. 퇴계 이(李) 선생에게 제사 드리는 글(성호원을 대신하여 지음)
(《栗谷全書》1, 권14, 又 代成浩原作)
5. 유사
(《退溪全書》4, 言行錄 권6, 遺事)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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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우리나라의 유학을 현대적인 사상으로 재창조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일차적 과제는 퇴계와 율곡의 사상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와 새로운 이해이다. 두 분의 사상이 크게 달랐다는 것은 결코 약점이 아니다. 크게 다르면 큰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퇴계의 삶의 방향은 항상 궁극적 진리 곧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인 하늘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서 빛나게 활동하고 있다. 하늘 진리에 대한 앎과 실천을 통하여 사람의 삶과 하늘을 하나로 연결 짓는 것이 퇴계의 철학적 과제였다. … 율곡의 관심은 이와 달랐다. 율곡의 삶의 방향은 크게는 넒은 우주를 향하고,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천지를 넓게 바라보며 넓은 세상을 바로잡아 사람이 살만한 올바른 세상으로 만드는 데에 있었다. 율곡에게는, 현실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는 마음과 인간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듯한 퇴계의 삶과 학문이 바람직한 삶으로 보이지 않았다. 접기

율곡이 퇴계를 존경하고 퇴계가 율곡을 아꼈지만 서로 마음으로부터 존중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퇴계 입장에서 율곡을 보면 도덕의 본원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율곡의 입장에서 퇴계를 보면 세상에 해야 할 일이 많고 많은데 물러나기만 좋아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두 분에게는 각각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 있었다. 접기
퇴계와 율곡의 서로 다름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하여 확인된다. 그러면 그들의 후학들은 서로 다른 만남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가? 필자가 느끼기에 서로 다름은 확인되지만 조화를 이룬 흔적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서로 다른 만남, 어긋난 만남은 항상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변증적으로 넘어서며 큰 조화를 이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니 모든 다른 것들이 한꺼번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다름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만남을 조화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 '해제' 중에서 접기
나는 이틀을 머물고 헤어졌다. 임영에 있을 때 퇴계선생이 편지와 시(詩)를 부치셨다. 그 편지에서 말씀하셨다.
“세상에 영재의 수가 어떻게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기꺼이 옛 학문에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아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중에 스스로 세상에 만연한 풍속을 초탈한 사람이 있더라도 어떤 경우는 재주가 못 미치거나 어떤 경우는 나이가 이미 늙었습니다. 그대 같은 경우는 재주가 뛰어나고 좋은 나이이니, 올바른 길로 출발한다면, 훗날 성취할 바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부디 더욱 원대함을 자신에게 기약하고, 작은 얻음으로 자족하지 마십시오.”

그 시(詩)는 다음과 같다.

예부터 이 학문에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의심하니 ,
이익을 얻으려고 경전을 궁구하면 도와는 더욱 멀어진다네.
고맙게도, 그대 홀로 쇠미한 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니,
사람들 당신 말 듣고 새로운 앎 생겨나게 하시오.
또 시(詩)에서 말씀하셨다.
돌아와 오래 방향을 잃었던 자신을 한탄하고,
고요히 머무름에 겨우 틈새의 빛을 엿보았네.
권하노니, 그대는 제때에 바른 길을 추구하고,
궁향(불교)에 발을 들인 것을 탄식하지 마시오.
나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여 보냈다.
도(道)를 배움에 어느 누가 의심 없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병의 근원을 아아! 내가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구나.
접대에 응하여 차가운 토계(兎溪)의 물 마신 것 생각하니,
마음과 간(肝)이 시원하게 되는 것을 스스로 알 뿐이네.
이른 나이 생계 마련에 사방을 분주히 다니다가,
말은 주리고 사람은 수척해진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반추하였네.

석양은 본래 서산 위에 있으니,
나그네가 어찌 고향 먼 것을 근심하리오.
- '1장. 2. 퇴계와 율곡이 편지로 화답한 시'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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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광호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서철학을 배우고, 민족문화추진회 한학연수과정과 한국고등교육재단 태동고전연구소 한학연수과정을 수료했다. 《주자의 격물치지설에 관한 고찰》로 석사학위를, 《이퇴계 학문론의 체용적 구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퇴직했다. 서암학술(SBS) 재단 해외파견교수로 선발되어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방문교수가 되었고, 절강대학교 한국연구소 초빙교수를 지냈다. 태동고전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부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한국동양철학회 회장, 국제퇴계... 더보기

최근작 :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다산학 공부>,<고전 강연 3> … 총 3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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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천재 율곡과 35세 연상의 석학 퇴계가 나눈
왕래 편지와 시문을 모아 최초로 소개하는 책!

사람의 도리에 대한 아주 다른 통찰, 그리고 시대를 가르는 문답

조선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 퇴계와 율곡. 친근할 정도로 익숙한 이름이지만 정작 그들 사상의 핵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수양을 통한 자기완성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던 퇴계 이황과 사회와 자연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배우고 이해하고 바로잡고자 했던 율곡 이이는 35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지만 기질과 생각과 지향점이 아주 달랐다.

퇴계는 이상을, 율곡은 현실을 지향한다. 퇴계가 인간의 내면성을 중시한다면 율곡은 외적인 성취를 중시한다. 이것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인간의 삶에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40여 년간 유학의 진리를 연구하고 이를 현대 인문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온 저자 이광호 교수는 두 학자가 서로 존중하되 자신의 신념을 날카롭게 내비치는 왕래편지와 시문을 최초로 한데 모아 편집하고, 현대인이 읽기 쉽게 풀어썼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이들의 사상과 교류를 통해 학문적 즐거움은 물론 삶의 지혜와 시대정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커다란 생각은 어긋난 곳으로부터 흘러 흘러 큰 지점에서 다시 만난다!’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 사상가들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삶의 근본과 세상의 물리를 깨닫게 되는 책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퇴계와 율곡이 주고받은 글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살피는 것이 왜 어지러운 현 시대에 큰 의미를 가질까? 퇴계와 율곡은 서로 화목하게 지냈으나 애써 같아지려 하지는 않았다. 퇴계는 은거하여 내면을 완성하려 했고, 율곡은 관료로서 나라에 헌신하려 했다. 따라서 퇴계에게 율곡은 도덕의 본원에 충실하지 않은 젊은 천재로 보였을 것이며, 율곡에게 퇴계는 당대 제일의 학자로서 세상에 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한 발짝 물러나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율곡이 서른다섯이고 퇴계가 일흔이었던 1570년에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특히 퇴계의 율곡에 대한 실망은 너무나 커서 강한 어조로 율곡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고 경계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자연히 율곡의 마음도 퇴계에게서 멀어졌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결국 둘의 목표는 같았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에서 비롯되는 원칙과 태도로 도(道)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명에 따른 각자의 소신을 어떻게 아울러 협력하고 성과를 내게 할 것인가? 퇴계와 율곡이 서로에게 던지는 질문 속에서 우리 시대의 가치를 어떻게 이끌어내고 스스로 답할 것인가? 이 책이 던지는 고민과 궁리는 다시 돌아올 역사 앞에 놓인 독자들 자신의 몫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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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최고의 학자들의 만남



조선 중기 35년의 차이를 두고 두 학자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만난다. 조선 중기 유학사에서 활짝 꽃이피는 순간이다.



우리나라 지폐에도 나와 있는 두 인물은 유학사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는데, 율곡이 퇴계를 찾아가면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나눈 시와 편지가 남아 있어 우리들에게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 알려주게 된다.



35세 연상인 퇴계는 율곡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인데, 율곡은 편지를 통해 퇴계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퇴계가 하는데, 이들의 논의가 지금 내 수준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번역의 문제도 아니고, 이는 유학 개념에 대한 지식의 부족 때문일 수가 있다. 이들은 중용의 몇 구절, 또는 중국 학자의 학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에 이들의 논의를 따라가기엔 너무도 벅차다.

다만, 이들이 이런 편지들을 통하여 어떻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가고 있는지, 과연 접점은 없었는지를 살펴볼 뿐이다.

뒤로 갈수록 이 책의 해설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퇴계와 율곡은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율곡이 묻은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가만 보면 자신의 의견을 고쳤다고 보기는 힘들고, 퇴계 또한 몇몇 부분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범속하게 분류를 하면 퇴계는 주리론(主理論)에, 율곡은 주기론(主氣論)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퇴계는 영남학파, 율곡은 기호학파라고 할 수 있을텐데...

주리론이 서양의 관념론에 가깝다고 한다면, 주기론은 서양의 경험론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이들은 서양의 역사에서도 늘 평행선을 그리며, 때로는 만났다가도 또 평행선을 그었던 철학 사조 아니었던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주기론에서 이야기하는 기(氣)역시 서양에서는 관념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다만 실천적인 활동을 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기가 허약해졌다고 말할 때 기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활동을 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해 리(理)는 이런 기보다도 더 추상적인 무엇이니, 그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태극과도 통하는 것인지...우리 삶의 원리라고 해야 하는지.

해설을 보면 퇴계는 유학의 진리에서 철학을 하고 있고, 율곡은 실천의 차원에서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실정치에서는 율곡이 더 힘을 발휘했으리라는 것은 이들이 이와 기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퇴계가 죽을 때까지 편지를 주고 받는다. 비록 그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율곡은 퇴계를 학문에서는 자신보다 앞선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퇴계 역시 능력있는 젊은이인 율곡에게 학문의 진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으리라. 이런 만남. 이런 관계. 그것이 우리나라 유학을 꽃피우게 만든 동력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퇴계는 기고봉과도 편지를 통해서 논쟁을 하게 되니... 다양한 논쟁을 통해서 문화는 더욱 융성해지고, 생각은 더욱 정교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말을 막아서는 안되고, 생각을 막아서는 안된다. 말과 생각은 터뜨릴 수 있게 해줘야 하고, 이런 말들과 말들이, 생각과 생각이 서로 부딪치면서 좀더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에 시사하는 바가 아닐까.



조선시대에도 그랬는데, 지금 민주화된 시대에는 이런 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단지 퇴계와 율곡의 사상이 어떻다,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나고, 나는 어느 편에 더 마음이 간다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토론이 우리 사회에서도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게 해야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것이 책을 읽는 의미를 살리는 길이 된다.



우리의 전통 철학에서 많이 멀어져 왔다. 가끔 옛 성현들의 글을 읽기도 하지만,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렵다. 좀더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이렇게 번역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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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13-11-29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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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의 사상의 차이를 엿보다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윤리 시간에 혹은 도덕 시간에 배웠던 퇴계 이황의 주리론과 율곡 이이의 주기론. 네모 칸 메꾸기에 바빴던 당시는 그들의 사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누가 무엇을 주장하고, 또 누구는 무엇을 주장했다까지가 배우고, 익히고, 외우는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주리론이 무엇인지, 주기론이 무엇인지는 시험이 끝나고, 내가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순간 머리 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그렇게 잊어도 굳이 사는데 필요하지도, 불편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철학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하면서 어렵지만 철학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인문학의 관심과 더불어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동서양 철학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아무리 책을 읽는다 하여도 개념조차 정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계보를 따라가면서 왜 그러한 이론이 나오고, 그 주장을 뒤를 이은 학파는 어떻게 이어받았고, 하면서 조금씩 정리해가면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 지라도 그럭저럭 힘겹게 나아갈 수는 있었다.

최근 가장 주목을 받고 있고, 가장 많이 읽은 책이 아마도 <논어>가 아닐까 한다. 기업인들이 많이 읽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현대인의 처세에 부합되게 해석되는 내용도 많다 보니 논어는 자기계발서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여러 가지 버전으로 선을 보이고 있다. 요즘은 더불어 맹자와 노자, 장자의 책도 두루두루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아직 두루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좀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도전을 해보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참이다.

그러다가 이 책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사상가들에 대한 책은 아직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생각까지 미치었다. 물론 유학을 근본으로 나라가 세워진 조선이 사상적으로 중국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 유학사상을 우리만의 관점으로 해석해내고, 풀어낸 위대한 사상가는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고지에 있었던 대표적인 분이 퇴계와 율곡이었을 것이다. 물론 두 분의 견해는 점점 벌어져 차이를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보였으나 이 두 분으로 시작된 조선 유학의 계보는 조선의 후기까지 이어져 정약용 때 정점을 찍으며, 조금씩 학문의 한 부분으로 축소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35년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언쟁을 했던 9번의 편지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퇴계가 내면세계와 내면세계의 근원인 초월적 하늘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율곡은 객관세계와 객관세계의 근원인 초월적 이법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책의 처음에는 이율곡의 학문에 대해 이황은 나이에 비해 영민한 학문의 수준에 대해 칭찬도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지탄을 받을 때도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으니 앞으로 더욱 정진하라고 위로도 해주고 감싸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고, 다시 반론하는 과정의 편지의 내용을 보면 서로 다른 관점의 이견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
정복심의 <심학도>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심한 견해 차이를 보일 때 퇴계는 정복심에 대해 함부로 비판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더 나아가 율곡의 학문하는 태도에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음을 지적하면서 마지막 편지까지 끈내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인설도>가 <심학도>의 앞에 있어야 한다는 율곡의 주장에 퇴계는 그의 견해를 받아 들여 <성학십도>에서 수정을 한 것처럼 율곡의 주장을 수용하기도 하였으나 둘 사이의 주장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주리파, 주기파라는 학파로 나뉘게 되는 논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책은 두 분의 편지와 이를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단 역자의 해설, 그리고 원문 순으로 실려 있다. 물론 두 분의 편지에서 언급된 원전이나 원문에 대한 내용은 주해석으로 달려 있다. 그럼에서 역자의 해설이 외국어같은 편지의 내용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 역자는 두 분의 편지의 대립이 세상에 좀더 빨리 나오지 않은 것을 의아해 하며, 그러한 일을 하게 된 것을 사명처럼 얘기한다.






유학을 고루하게 생각하지 않고, 좀더 옛 성인의 사상적 지표로 여기고, 관심을 갖다 보면 그 분들의 관점으로 당시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너무 어렵고, 힘들지만 조금씩 그 간격을 좁혀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며, 이 책은 그러한 나의 미약한 노력에 힘이 되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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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여는길 2013-09-1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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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퇴계이황과 율곡이이.. 자연스럽게 주리론-영남학파, 주기론-기호학파라는 수식이 떠오른다. 거의 나에게는 맹자- 성선설, 순자-성악설 같이 공식같은 느낌인데.. 문제는 이 공식이 막상 시험때는 헛갈린다는 정도? 조선시대 유학자를 대표하는 두분의 학설이자, 두 학파의 분열과 갈등을 가져온 그 이유를 제대로 배워보거나 알려고 한적이 없었던 거 같다.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왕조는 유학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은 국가였다. 하지만 그 엄청난 문화적 유산은 현대에 이어지지 못하고, 대부분 나와 비슷한 수준의 암기정도로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유학을 현대사상으로 재창조하고자 하는 이광호님은 조선중기 성리학의 거두 퇴계와 율곡이 갖고 있던 견해의 차이를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로 풀어냈다. 풀어냈다고 하기에는 책 내용이 조금 어렵다고 느껴지지만.. 그보다는 나의 부족한 소양이 문제일듯 하다.
유학의 핵심을 거칠게 말하자면 수기안인(修己安人),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할 수 있는데, 퇴계와 율곡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퇴계는 유학을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성인이 되어가는 자기 완성의 학문으로 이해한 반면 율곡은 사회와 자연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배우고 이해하고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처음 두 분이 만났을때.. 퇴계는 35살이나 어린 율곡을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학문을 그가 성취하여 주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자신의 뜻과 다른 길로 나아가는 율곡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를 달리해볼 것을 권유해보기도 하고 율곡의 독서자세를 꾸짖어 보고 경계하고 비판하는 마음을 놓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좋은 소리도 세 번 하면 듣기 싫다고 하는데 이미 길을 달리한 율곡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두분의 견해차이의 극치였다는 <心學圖(심학도)>는 주자 심학의 기본 설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율곡은 그 항목과 배치를 논리적으로 문제삼으며 심지어 비슷한 말의 반복이라고까지 이야기 했다. 그리고 퇴계의 학문을 평하며 주자의 학설을 신봉하고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하여 의양지미(依樣之味, 모방하는 맛)라 하였는데, 이전에 읽었던 퇴계의 글이나 이 책에서 접했던 그의 서찰이나 시등을 볼때 조금은 박한 평가가 아닐까 한다.



비는 늘어진 은죽처럼 시내 기슭 가볍게 두드리고,
눈 구슬 곷 되어 나무 몸 싸매네.
말은 진흙 벌에 빠져 가는 길이 아직 힘들겠지만.
맑은 날을 부르는 새소리에 풍경 비로서 새롭네.
재차 권하는 술잔이 어찌 그리 얕은가.
이제부터 나일랑 잊고 의 맺어 더욱 친하게 지내보세



퇴계가 율곡에게 전한 시에서.. '나일랑 잊고 의맺자' 라는 글귀가 책을 읽는 내내 떠올라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소낙비를 은죽(銀竹)이라 하여 대나무 줄기에 비유하는 것처럼.. 유학자들은 자신의 굳센 의지와 도도한 절개를 대나무로 많이 상징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하늘에서 무심히 떨어지는 빗줄기에도 유학자의 마음가짐을 떠올렸던 퇴계와 거기에 뒤질바 없었던 율곡의 올곧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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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3-09-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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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두 인물 혹은 그 시대의 학자로
대한민국에 살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세히 알고있는 사람도 혹은 이름
만 들어본 사람도있을것이지만 그만큼 많이 알려진 두 인물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책이 이책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숨겨진 이야기인가 하면
이 당대의 두 지성이 동시대에서 비록 나이차이가 났지만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았는것이 숨겨진 이야기였다
나는 이 두인물의 왕래나 서신교환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며
또한 실제로 그러한 왕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때문에
이책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다


당대의 두 학자가 생각을 다투다니 과연 무슨 내용일까?
이책의 초반 도입부에서는 이분야를 연구한 저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퇴계가 하늘을 지양했다면 율곡은 땅을
퇴계가 원칙이라면 율곡은 이상향을 주장했다는것이다

원래 학문이라는 것이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정도가 없다고 한다
이 두 학자가 의견이 달랐던 것도 어쩌면 많이 알기때문에 그런 간극이 생긴것이 아닐
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되었다

물론 내용이 이러한 쪽을 공부하지 못한 나에게는 어려웠지만 분명
교훈이 되는 내용도 있었고 신기한 점도 많았다

두 사람이 비록 생각과 지양점이 달랐으나 서로 존중하는 모습
때로는 서로의 학문을 질책하지만 문답을 그치지 않는 모습
개인적으로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모습
그리고 율곡이 자신의 과오를 퇴계에서 말하자
실수는 성인들도 한다며 위로해주는 모습들
이 기억에 남았다

비록 나에게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지만

이런 색다른 면때문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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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종스님 2013-09-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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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이광호 편역, 홍익출판사



저 유명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이 두 분의 명성은 이미 알고 있으나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 책 제목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는 매우 흥미롭고 도전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어, 율곡은 퇴계의 제자이며 둘 다 위대한 성리학자 아니었나? 두 분이 생각을 다투었다니 무슨 의미일까?’ 이런 질문을 하며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얼마 전에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은 터라,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겼습니다.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道)>와 율곡의 <성학집요(聖學輯要)>에 따르면, 학문은 스스로 성인(聖人)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나이(35세 차이) 뿐 아니라 기질과 생각 그리고 지향점이 달랐습니다. 편역자인 이광호 교수는 ‘해제’(여는 글)에서 두 사람이 “같은 유학자이지만 유학에 대한 이해의 관점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퇴계는 “궁극적 진리 곧 하늘을 향하고”(p. 12) 있었던 반면, 율곡은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향하고 있었다“(p. 13)고 말합니다. 과연 퇴계와 율곡이 주고 받은 시와 편지, 그리고 이 분들과 관련된 문서들을 통해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이 분들이 주고받은 시(詩)에서, 서로 생각이 달라도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경하는 옛 선비의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분 사이에 오간 편지의 내용은 차분히 읽어도 다 이해하기 어렵군요. 내가 유학 특히 성리학에 관해 오리엔테이션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편역자의 해설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유학(儒學)의 도는 지선(至善)이라 하는데, “지선에 대한 인식을 격물치지(格物致知), 곧 사물에 나아가 앎을 얻는 것”(p. 53)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친절하게 밝혀줍니다. 사실, 두 분의 차이는 이기론(理氣論)을 주축으로 하는 성리학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관념론과 경험론, 유심론과 유물론의 대립처럼, 퇴계 이황으로 대표되는 이(理)를 중시하는 이상주의와 율곡 이이로 대표되는 기(氣)를 중시하는 현실주의가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큰 봉우리가 함께 통합되고 어우러진다면, 성리학은 지금도 여전히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 매우 단단하고 마음에 듭니다. 퇴계나 율곡의 시와 편지, 글들을 먼저 차분히 번역하고 자세한 각주와 해설로 이해를 돕습니다. 그리고는 원문(原文)인 한문 전문을 실었습니다. 편역자의 해설과 여러 글들로 이 책의 가치는 커졌습니다. 책표지도 멋집니다. 홍익출판사답습니다.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道)>와 율곡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완독한 뒤, 다시 이 책을 꼼꼼히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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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7joy 2013-09-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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