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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30

‘한국信연구소’ 를 세상에 알리다! 이은선.이정배 부부교수!

당당뉴스:




‘한국信연구소’ 를 세상에 알리다! 이은선.이정배 부부교수!
지난 7월13일 오후,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2020년 07월 16일 (목) 13:16:11 이필완 leewaon3@chol.com

얼마 전 은퇴한 세종대 명예교수 이은선 교수가, 몇 년 전 감신대에서 자원은퇴 했던 이정배 교수와 함께, [한국信연구소]의 출발을 널리 알리면서, 동시에 3권의 출판기념회가, 7월13일 오후4시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열렸다.

이은선 교수는 일찍이 신학을 전공했으나, 그동안 세종대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며 여성신학자로 틈틈이 활동하다가 은퇴 후, 본격적인 여성신학자로 자리매김 하는 모임 자리에,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여성신학회, 생명평화마당,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보인회, 해천우회, 3,1종교개혁연대 등 후원단체들 회원들과 지인들 150여명이 모여 축하했다.

이날 개소식은 단해교회 하태혁목사의 사회로 '찬송 393장 오신실하신 주'를 부르고, 한국여신협 실행위원 신선 교수가 기도하고, 보인회 회원들이 “經 앞에 바로서기-믿음(信)에 관한 증언들”을 낭독하였고 함께 묵상했다.

이어 한국信연구소 소장 이은선 교수가 ‘한국信연구소’를 설립하게된 동기와 취지, 과제를 발표하였고(*기사 하단 전문 참조) 전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최만자교수와 YMCA전국연맹 김흥수 이사장이 축사를 했다.




거문고 병창(거문고 박소연, 장구 고성진) “출강”의 축하공연 후, 이 날 같이 출판된 3권의 책 중, 이은선 쓴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은 한국전통문화대 이선경 교수가 서평하고, 이은선 쓴 '동북아 평화와 聖 性 誠의 여성신학'(동연)은 감신대 김정숙교수기 서평했으며, 이정배 쓴 '유영모의 歸一신학'(신앙과지성사 밀알북스)는 한국예종 임종수 교수가 각각 서평했다.

그리고 작은이의벗친구교회 이학산 목사의 인도로 “담쟁이” 노래를 함께 불렀고, 현장아카데미 원장 이정배 교수가 개소식 이후의 이정배.이은선 부부가 함께 하는 '한국信연구소 개소식 그 이후' 미래 계획을 밝히면서 인사한(* 기사 하단 인사말 전문 참조) 후 ‘함께하는 축복기도’로 마쳤다.
‘하늘 부모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한국信연구소가 탄생했습니다. 그 뜻을 잘 받들어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이 곳에 모인 모두가 함께 기도합니다. 같이 할 친구와 동지들을 보내주시고, 이로써 한반도와 온 세계의 삶이 더욱 편안해지고 사랑과 은혜로 넘쳐 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사진은 서산갈산교회 안인철목사가 찍었다. 현재 유튜브 위한 풀동영상을 편집 중!)









2020.7.13. 한국信연구소 개소식 및 출판기념회


<한국信연구소를 열며>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leeus@sejong.ac.kr)



1. 왜 한국信연구소를 시작하려 하는가?






이렇게 어려울 때 함께 오셔서 축하해 주시고 뜻을 모아주시니 우선 송구한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저희 생각을 나눌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함께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많이 망설였습니다. 2년여 전 세종대학교를 떠나면서 “이제 온전히 신학자로 살겠다”라는 선언과 함께 그동안 ‘한국信연구소’라는 이름 아래서 지내왔는데, 오늘 이를 다시 공적으로 공표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늘과 같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때에 무슨 유용이 있으며, 제가 이 이름 아래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에 또다시 읽은 책이 있습니다. 제가 1980년대 유럽에서 유학하면서 만난 독일 인지학자(人智學) 루돌프 슈타이너의 『어떻게 더 높은 세계를 인식하는가?』 가 그것입니다. 이 책의 마무리에는 우리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경계(문지방)를 지키는 두 수호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만나는 첫 번째 수호령과 문지방은 한 커다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거기서의 수호령이란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되는 우리 삶에서 행한 온갖 거짓과 잘못, 죄과가 누적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문지방을 넘고 첫 번째 수호령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끔찍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와 만난다는 것이고, 그 앞에 적나라하게 서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문지방을 넘는 일은 그런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넘어서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오늘 한국信연구소를 공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일이 어쩌면 저에게는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문지방을 넘는 일은 우리가 이후 더 높은 세계를 향한 인식의 길에서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초감각과 초자아의 참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만나는 수호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제 너의 감각적 자아를 구성하던 사고(thinking)와 감정(filling), 의지(willing)의 상호 연결이 분리되면서 초감각과 초자아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그러나 그러한 너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어찌하려는가? 네가 해방을 위해서 얻은 모든 지식과 좋은 것이 바로 그들 덕분인데, 그들을 그냥 두고서 이 문지방을 넘어서려는가? 한국信연구소를 여는 일이 이렇게 초자아의 해방의 길로 가는 것을 놓아두고서라도 다시 나누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인지, 또는 내가 여전히 자아로 남아있으면서도 밝히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인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2. ‘한국적’(Korean)이라는 것



한국信연구소의 이름을 영어로 ‘Institute of Korean Feminist Integral Studies for Faith’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을 구성하는 한 자 한 자가 바로 저의 그러한 소망과 의지가 여전히 가닿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먼저 ‘한국적’(Korean)이라는 것과 관련해서입니다. 이번 세계적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들은 많은 말 중에서도 『공감의 시대』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이 한국이 이번 사태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훌륭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병에 걸리는 것보다 자신으로 인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더 못 견디어서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매우 기뻤고, 바로 이처럼 한국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았고 언술 되지 못한 고유한 자질이 한 외국인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저의 학적 물음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든 ‘한국적’이라는 민족적 물음을 놓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의 가계의 오랜 정신적 선험성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이신 목사님의 기독교 ‘환원 운동’을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우리가 비록 기독교를 서구로부터 늦게 받았지만, 거기서 기독교의 현실은 온갖 교리적 분파와 분열로 얼룩져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본래의 원형적 모습을 한국 사람의 손으로, 한국인들의 의식으로 다시 찾기를 원했습니다. 여러 시각과 시도로 기독교의 ‘근본’을 찾기를 원했고, 그런 가운데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1974년)’을 단행하기도 했으며, 그러한 일을 위해서 길지 않은 생에서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이렇게 한반도 주변에는 새로운 문명과의 만남에서 항상 그 ‘원형’과 ‘근본’과 거기서의 ‘토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라의 원효가 그랬고, 고려에서 ‘단군고기’(檀君古記)를 간직해서 전해주고자 했던 목은 이색의 스승 행촌 이암(杏村 李岩, 1297-1364) 선생이 있었으며, 조선 유교에서도 비록 ‘소중화’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끊임없이 ‘원형’과 ‘근본’, ‘참’에 대한 추구가 있었음을 보면서 오늘 한국信연구소도 그러한 사상의 젖줄에 기대어서 참 한국적인 신앙과 믿음의 본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 21세기 한반도 현실의 삶에서 강하게 야기되는 남북통일과 동북아 평화의 물음도 저희에게는 그러한 맥락에서 성찰되는 일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여성주의적’(feminist)이라는 것



어떤 대상이나 일에서 감각적인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원형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몰두하는 삶의 중앙에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중앙의 기득권과 불화하고, 그로부터 멀리 떠나 변방으로 가기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변방인과 이방인(pariah)들이 있지 않고서는 현실은 개조되지 않고, 개혁되지 않으며, 생명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도 이러한 생명의 예민한 내적 원리를 간파하셨고, 그것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로 의미화하셨으며, 저는 그 원리를 다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페미니스트 여성신학자로서 세계 문명사의 맥락에서 증거 하고 싶습니다. 한국信연구소 영문 이름의 두 번째 형용사가 되는 ‘여성주의적’(feminist)이라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이해합니다. 주지하듯이 오늘 페미니즘의 시대에는 자기희생과 헌신, 자기 비움과 이름 없음이 그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이름 아래서 지금까지 여성들이 어떤 고통과 아픔을 겪어왔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의 두 번째 수호령의 이야기에서도 들어보았고,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종교적 성찰은 한결같이 바로 그러한 길이 궁극의 구원의 길이라고 지시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 진실과 페미니즘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상극인가를 저는 묻습니다. 그러면서 이 둘 다 놓칠 수 없는 진실의 길을 어떻게든 서로 연결시키고,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나를 찾으면서 저의 미약한 삶에서, 논리에서, 믿음의 일에서 고투합니다. 이것을 저는 지금까지 서구 페미니즘을 넘어서 그와 다른 ‘한국적 페미니즘’, ‘한국적 포스트모던 영성’을 가져오는 일이라고도 했고, 그런 맥락에서 이른 시기부터 ‘공감’을 강조하며 ‘사기종인’(捨己從人)의 여성 리더십을 말하고, ‘모성’의 서구 페미니즘적 탈신화화를 넘어서 일종의 재신화화를 통해서 다시 그 본래를 강조하면서 초기 사회이론 중심적 페미니스트들과 갈등하기도 했습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오늘 ‘집사람’을 강조하면서 ‘사유하는 집사람’을 말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생명 창조와 지속하는 문명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토대가 된다고 주창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또한 대한민국의 민낯이 n번방 사태와 손정우 아동포르노 사태, 최숙현 철인 3종 팀 선수 폭행 사건 등으로 끔찍하고도 비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서구 근대 페미니즘 운동 덕분으로 우리 몸이 해방되었고, 성(sex)이 해방되었으며, 감각의 세계가 한껏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태가 보여주듯이 거기서 생명의 또 다른 차원인 몸의 거룩성이 모두 탈각됨으로써 우리 몸과 섹스와 이생의 삶은 그저 무생명의 물질과 쾌락의 도구가 되었고, 무차별한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비참과 불의가 저는 단지 서구 페미니즘적 법적 정의의 회복만으로 치유되거나 해소될 수 없다고 봅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세계관적인 전이가 요청되는데, 여기서 뜻밖에도 동아시아의 오랜 신유교의 性 이해에서 그 한 가능성을 봅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간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조선 신유교에서의 性 이해는 우리 시대에서와는 달리 그 性이라는 언어로 오히려 우리 안의 깊은 내재적 초월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을 지시하면서 우리 몸과 감정, 성적 관계 등의 신체적 차원이 끊임없는 중용과 섬김, 삼감의 禮로 함께 보살펴지는 일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보살핌(禮)의 실행 주체가 주로 남성이었고 당시 계급사회에서의 양반이기는 했지만, 오늘 그러한 역사적인 차별의 장애가 많이 가신 상황에서는 우리 모두 한가지로 우리 몸과 性에 대한 존숭과 禮의 일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의 깊은 병폐인 몸과 性의 철저한 물화에 맞서서 다시 그 내재적 거룩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말하는데, 그것을 오늘 한국의 보수 교회에서처럼 세상 밖의 외재적 구원자에 기대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오래된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性과 몸 이해로 가능해지도록 하는 일을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더욱 더 진정한 주체와 자유의 길이라고 여기고, 이 길을 더욱 밝히는데 애를 씁니다. 이 일은 앞에서 밝힌 대로 ‘한국적’(Korean)이라는 표제어 아래서 먼저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가 독점해온 神과 거룩을 동아시아의 더욱더 보편적인 초월의 이름인 ‘聖’으로 해방시키고, 여기서는 또 다른 동아시아의 이름인 ‘性’을 가져와서 우리 몸과 성(sex), 가족적 삶과 모성 등의 사적 삶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모두 제가 다른 말로 많이 이야기해 온 ‘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 ‘믿음의 통합학’(intergral Studies for Faith)라는 것



일찍이 20세기 서구 기독교 문명이 낳은 전체주의적 타락인 나치즘에 맞선 본회퍼는 “우리는 바라보면서 살지 않고, 믿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역사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삶의 ‘지속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우리 삶과 역사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결코 사실성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 사실성 너머에 있는, 또는 근저에 있는 초월성에 대해 믿음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성과 초월성, 세계와 하나님, 氣와 理, 身과 心(性), 과학과 종교 등의 두 영역과 측면이 어떻게든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 그 함께 어우르고 연결되도록 하는 일, 이것을 한국信연구소는 계속해서 추구하고, 수행하고, 이루려고 합니다. 이를 우리 존재와 삶의 온 영역에서 밝히고 드러나도록 하는 일을 ‘불이성’(不二性)과 ‘지속성’이라는 의미의 한국신연구소의 세 번째 형용사 ‘Integral Studies’(통합학문) 라는 말로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바로 ‘현장’(顯藏) 이라는 말, ‘나타나고 또 감추어진’이라는 표현이 동아시아의 오랜 생명 표현인 ‘道’나 ‘易’의 본래를 지시하는 귀중한 언어라는 것을 알고 얻어와서 그러한 저희 뜻을 표현하는 언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 우주, 만물, 아무리 하찮은 ‘물건’ 하나, 한 가지 ‘일’에서라도 이 두 차원이 없지 않고 함께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에 대한 진심 어린 존숭과 겸손(敬)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21세기 인류 문명의 다원화 시대에서는 이 불이성, 또는 간단히 표현하면 우주와 만물의 초월성을 이제 어떠한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문제는 많이 열려졌고, 심지어는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론적 보수성도 많이 금이 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이름의 다양성이 불러오는 갈등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도 포함해서 도무지 이러한 초월의 차원을 인정하는 일, 존재의 불이성을 드러내는 거룩성의 차원(敬)을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시대의 핵심 관건은 더이상 神 이야기(God-talk)가 아니라 信, 믿음과 신뢰, 용기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실성과 더불어 초월성, 그 둘의 불이성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할까의 문제라는 것이며, 한국신연구소는 그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지, 왜 우리 사이에서 신뢰와 믿음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믿음을 위한 통합학문”(Integral Studies for Faith)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길은 예전 좁은 의미의 종교나 신학의 물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많은 영역의 일이 포괄되는 것을 말하며, 특히 제가 거룩의 ‘聖’ 자(字), 우리 몸의 ‘性’와 더불어 세 번째로 불러오고자 하는 ‘誠’의 언어로 강조하고자 하는 교육의 차원이 중시되면서 ‘한국적 聖·性·誠의 믿음의 통합학’을 말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앞에서 함께 읽은 ‘經 앞에 바로 서기’에서의 믿음에 관한 여러 문장은 주로 지금까지 써온 글에서 모아봤습니다. 이제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겠다는 예수의 선언을 21세기 오늘 한국 땅에서 다시 한번 정직하고 진실되게 사실화해보자는 의지, 그 예수보다 거의 4백여 년 전에 동아시아의 맹자는 먼저 초월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善이며, 그 믿음은 바로 나에게서 나오고 내 몸에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초감각적인 것이 먼저이고, 모든 형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감각의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통과해야 하므로 이 감각의 기반이 참으로 긴요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친밀한 가족이 필요하고, 거기서 누구나 자신의 몸과 감정이 소중하게 대접받는 경험을 요청하고, 누구든지 이 지구라는 집에 태어났으면 모두가 평등한 주인이므로, 이곳의 선한 것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의 ‘기본 소득’을 말하고, 또한 누구든지 살던 집을 떠나갈 때 함께 했던 가까운 사람들의 배웅을 따뜻하게 받을 수 있도록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다시 깊이 껴안는 사회적 孝의 일 등, 이런 모든 것이 한국信연구소, 현장아카데미가 깊게 관심하는 일입니다.



5. 내 소원은 진정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 善人多): 박원순 시장의 죽음의 시대에



박원순 시장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박원순 서울시장의 서거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다시 몸과 정신, 이 세상과 저세상, 사실성과 초월성, 법과 부끄러움, 명성과 내재, 사적 개인과 공적 사회 등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어쩌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어떻게 더 높은 세계를 인식하는가?』 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 거기서의 첫 번째 수호령, 자신의 끔찍한 과거와 이미 자신이 사실로 만든 형상 앞에서 좌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견디고 넘어서 두 번째 수호령도 만나고, 거기서 다시 우리 시대의 불행에 대한 큰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이곳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까지 인내의 일을 지속할 수 없었고, 우리 사회적 삶의 환경도 그것이 좀 더 수월하게 이루어지도록 함께 마련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시대가 여전히 그 현현을 고대하고 바라는 진정한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시장을 참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고, 그의 남겨진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이 그들이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든 모두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지속성(誠), 믿음과 신뢰(信), 그것을 ‘하늘의 도’(天之道) 라고 했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인간의 길’(人之道) 라 했으며, 한국信연구소가 우리 사이에서 누구든 이 길을 가는 일이 그렇게 홀로 외롭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고(恕), 용서하고,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따뜻한 힘의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일이 가능해지도록 우리 인간의 말을 들어서 그런 인간의 이야기에 봉사하며(執言奉辭) 길을 가겠습니다. ‘사실’은 인간적인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고 이루어지는 것(成)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진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현실이 없으면 그 의미를 잃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16세기 퇴계 선생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내 소원은 진정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 善人多). 그러면서 저의 유가에서의 첫사랑 같은 16세기 양명 선생의 언어로 저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저는 제 속의 착한 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어서 이제부터는 더 솔직하고 과감하게 어떤 작은 것도 감추려 들지 않으면서 ‘광자’(狂者)와 같은 심경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더라도 꿋꿋하게 이 일을 지속해 보겠습니다.” 함께 해주실 것을 간청하고,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 7.13일 이은선 드림




한국 연구소 개소식, 그 이후

이정배교수(현장아카데미)






이제 한국 신연구소 개소식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귀한 발걸음 해주신 분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며 특히 최만자, 김흥수 선생님의 축사를 비롯하여 서평(이선경, 김정숙, 임종수 박사), 기도(신선) 그리고 축주(가)로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고개를 숙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김경재 교수님, 정숙자, 박득훈 이면주 목사님을 비롯한 기독교계의 중요 분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중조, 조영훈, 주대범 장로님께도 감사말씀 드립니다. 물론 불교와 유교의 선생님들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동준 교수님, 연세대 명예교수 이광호 교수님, 불교 재가자 대표 서강대 명예교수 박광수 교수님 고맙습니다. 이 분들 모두로부터 말씀을 청해 들어야 옳겠으나 시간이 허락 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지하듯 우리는 유수한 역사를 지닌 신학관련 잡지, 연구공간들이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 하고 있습니다. 진보성을 띨수록 사라지는 속도가 빠른듯하여 그 안타까움이 매우 큽니다. 신학자들의 경우 통합적 사유를 놓친 채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자기 분야에 함목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쇠자 분 아니라 생존이 힘든 목회자들 역시 저신들 삶의 뼈대가 되는 신학을 뒷전에 처박아 둔 채 신학의 무용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파를 막론한 교계는 더욱 보수, 근본 화되어 타자 혐오적 모습(방식)으로 세상에 현존합니다. 코로나 정국 속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은 사라졌고 자기 생존을 위한 이기적 집단으로 세상에 각인되었으니 그 미래가 걱정입니다. 코로나 이후 기독교의 몰락을 예견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음을 믿고 추세를 거스르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독교와 만났던 초기 신앙 선배들을 소환하고 싶습니다. 이들 중에 기독교 신앙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토착화 그룹(최병헌,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민족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에 관대했던 지도자(손정도, 김창준, 전덕기, 장기천)들, 교파적 기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향했던 환원운동가들(이용도, 동석기, 김윤석, 이신)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의식을 엮어 그들 에토스가 목하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계승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들을 기억하여 소생시킬 때 자본화된 종교적(사적) 집단으로 축소, 변질되는 오늘 추세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신연구소는 이런 과제를 떠맡아 종교개혁 500년 이후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분명 코로나 사태는 다른 기독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상 속에서 달리 믿고 다르게 살기를 명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코로나 이후 기독교의 생명(역동) 성을 위해 우리들 믿음, 상상력의 부패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이 소리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저희들의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희부터 많이 달라지고자 애쓸 것입니다. 하늘 주시는 힘으로 동료, 후학들과 힘을 합쳐 연구공간을 재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신학 담론을 힘껏 제시하겠습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배워 알기를 원하는 이들과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 ‘이후’ 교회의 길을 토론하겠습니다.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문명, 통일한국을 생각하는 값진 연구서도 출판해 낼 것입니다. 젊은 신학도들, 새로움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에게 작은 의지 처, 신뢰의 그루터기가 되고 싶습니다. 저희들만의 힘으로는 벅찰 것이며 길게 가지 못할 것입니다. 핮;만 저희가 기꺼이 마중물 이 될 것입니다. 탈진리(Post-Truth) 시대에 이른 지금 6개혁이란 것이 종교개혁 당대보다 훨씬 더 어렵겠으나 가야할 길이라 믿습니다. 이 도상에서 마음과 뜻이 합해지는 은총의 사건이 생길 것을 믿으며 이 여정에 감히 첫발을 내 닫습니다.



아시는 대로 이은선 교수와 저는 2016년 이후 시차를 두고 명예퇴직을 했으며 현장아카데미를 일궈 왔습니다. 사실 이 일은 횡성에 거처를 마련한 2000년 가을부터 꿈꿔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살아보자’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연구(독서)와 영성(예배) 그리고 노동(생산)이 아우러지는 공간이 되길 꿈꿨던 것이지요. 오늘 공식화된 ‘한국 신연구소’가 첫 영역, 연구 분야를 책임지고 이끌어 갈 것입니다. 여성적인 적인 것이 세상을 구할 것이란 말을 믿으며 한국 신연구소의 앞날을 진인사재천명의 심정으로 하늘에 맡겨드립니다. 기념해야 할 뭇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는 2020년, 그 후반기를 시작하는 7월에 한국 신연구소를 공식화하게 된 것이 참으로 뜻깊습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것을 기쁨과 영광이라 여기며 저희들 말()이 이뤄지는() 세상을 선배, 동료, 제자 및 뭇 지인과 함께 믿고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모임을 위해 애써 주신 여러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환희당 모임의 벗, 실상사 법인 스님이 한국 신연구소를 위해 보낸 <대승기신론>의 짧은 글 한 편을 가슴에 새기며 말씀을 갈음하겠습니다. 믿음도 타락할 수 있음을 늘 상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을 성취하는 일은 수행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과제인바, 믿음이 성숙치 못하면 연()을 만나는 순간 곧 퇴진하고 말 것입니다” (필자 변형)

  
   
  
 

2021/07/22

자료실 -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자료실 -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한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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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야 참 신이다 /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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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0.10.10 16:58
감리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쫒아내야 한다는데 그러면 그 사람 자기가 나가야한다. 감리교 교리적 선언 자체가 1930년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이다. 족보도 없는 사람들이 설치는데 나는 감리교인이 아니니까 다행이다.

감리교가 1930년 교리적 선언을 하면서 예수와 우리의 관계를 ‘대속자가 되시며 스승이 되시는’ 이라는 두 가지를 정리를 했다. 전통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큰 두 개의 흐름은 진보적인 성향, 실천가들의 성향에서는 선생님이고 가르침을 받아서 내가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 용어가 더 쉽다고 생각된다. 불교는 자력구원이라고 한다. 대속론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타력구원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특공대이고 우리는 인질이다. 인질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바깥에서 구조대가 와야 한다.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돼서 돌아가셨다. 우리를 대신해서 이것이 대속론인데, 먼저 말할 것은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구원이 무엇인지 토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행히도 그래서 우리가 아무 이야기라도 해도 된다. 반센 노블스라는 체인점 책방이 책은 매상의 30%이고 다른 것을 판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묶으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이해를 한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냐 메시아냐는 전통적으로는 대속자가 된다는 타력구원 쪽이 있고 선생이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가야 된다는 자력구원 쪽이 있다. 한국 감리교는 두 가지를 다 표방했지만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로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대속의 교리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대속의 교리가 왜 문제냐, 인간을 무책임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살인자고 아들을 죽이는, 목적이 있다면 자신의 외아들도 죽이는 입장에서 본다면 대속의 교리는 말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속의 교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준다. 저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장애인을 만나면 대속론을 이야기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다. 죽을 사람에게 네 인생 책임져 라고 한다면 너무 잔인하다. 청년들에게는 네 인생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스승의 입장, 예수를 추종해야 되는 모델로 보는 것이 마땅히 우리가 가르쳐야 될 일이지만 힘들고 지치면 대속론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줄 것이다. 기도 좀 하면 하나님께서 갑절로 갚아주실 것이다.

내가 클레어몬트 옆에 사는데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흘려듣는다. 나는 조직신학이 전공이기에 성서는 몰라도 불편은 없는데 최근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너무 잘못 알았다는 부분이 바울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서학자들이 해놓은 것이 내가 평소에 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별문제가 없다. 바울 이야기는 지금 한창 진행 중인데 옆에서 들어보면 바울 이야기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엄청나게 다르더라. 많은 사람들의 대속론 입장이 바울에게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런 말을 쓰지만 문맥으로 보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그래서 바울은 만약에 우리가 따진다면 자력구원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졌고 그래서 나도 지고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세상과 더불어 싸우는데서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을 쓴다. 거기서부터 대속이란 말이 나왔는데 우리를 위하여, 사랑의 수양관 이거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는가. 우리가 푼돈 좀 내고 우리가 쓰니까 이거 우리를 위해서 지어주었다.

교회에서는 교리문제를 아무도 질문하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LA를 관통하고 있는 고속도로 누가 만들었나? 내가 잘 엔조이하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쓴다. 얼마나 좋으냐. 대속의 교리의 바탕에 있는 종교적인 체험은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내가 누리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선물이다. 이것이 있으면 대속의 교리는 늘 유효한 거라 본다. 그러나 아까 말한 노인네들, 한계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체험이 바탕이 되는 대속론이 아니라 종교적인, 언어적인 트릭을 쓰는 것이다. 희망을 가져라. 그래서 대속의 교리는 종교적인 체험으로 본다면 그 바탕에 내 삶이 내가 수고하지 않은 그 누군가로부터 오는 은총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기독교인이 이 경험이 없이는 기독교인일 수가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노인네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너 자신을 구원하려 애쓰지 마라’왜냐면 너무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진다.’ 어거스틴 말로 믿음은 뭐냐? 은총을 받아들이는 거다. 하나님이 너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이는 거다. 폴 틸리히가 설명했다.

대속의 교리는 바울의 언어에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속’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것도 비유적으로 나온다. 마가복음의 11장인가 12장인가에 나오는데, 문맥으로 보면 섬김을 위한 일반적인 것이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 직접적으로 대속의 교리를 찾으려면 히브리서에 있는 정도다. 교리사적으로는 언제부터 자리 잡았느냐면 어거스틴에게 책임을 돌려야 되는데 그의 잘못은 아니다. 기원후 400년 전후에서 살았는데 예수 믿은 지 6년 만에 비숍이 되었다. 갑자기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고 그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쓴 도구가 바로 ‘원죄’라는 것인데, 그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가 왜 아이들까지 세례를 주냐, 어른은 죄가 많으니까 세례를 받아야 천당 간다는 것은 말이 되는데 100일도 안되어 죽은 아이가 왜 지옥을 가야하냐, 거기에서 나온 것이 ‘원죄’이다. 물론 13살밖에 안된 자신의 사생아가 죽은 것도 관련이 된다. 그래서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 ‘명부’를 만든다.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옥에 간 건 아니다.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연옥에 가서 잠시만 기다리면 천국에 간다. 우리가 죽어 뜨거우면 천당일 가능성이 많다. 연옥은 불로 연단하는 곳이니까. 그런데 희미하면 지옥에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거스틴이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원죄’라는 가상적인 논리이고, 유대인들은 원죄를 믿지 않는다. 인간의 타락도 믿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렇게 넘어갔다. 중세가 되면서 안셀름이 왜 예수가 세상에 왔느냐, 라틴교부들이 법적인 면을 생각하면서 점차적으로 대속의 교리가 고정되었다.

성서는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 다 라는 것을 매우 다양하게 설명한다. 어느 것 하나에 메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유형으로 보면 불교용어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두 개의 유형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체험을 설명하는 두 가지 언어, 그렇게 보고 목회를 한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주워졌으며 선물이니까, 그러나 은총이, 장로교에서는 ‘시너지’를 최악의 죄악이라고 가르치는데 장로교인들 중에 운동권이 많다. 운동권은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기에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을 공동으로 이루어나가는 시너지즘이지, 소위 단독, 하나님이 혼자서 역사한다 그런 것은 이미 아니다. 감리교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장로교에서도 옳다고 본다. 은총은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은총 때문에 인간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이거냐 저거냐 일수가 없는데, 장로교 같은 경우, 도르트문트 회의에서 high Calvinism이 선택되고 그것이 교리화 되면서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겁을 냈다. 그래서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갔다.

어거스틴이 비즈니스를 위해서 원죄교리를 만들었고 장로교가 알비니아니즘과 싸우다보니까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나갔고, 이건 모두가 교회의 장사꾼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만든 것이다. 교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대속의 교리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타력적인 구원이 내 삶을 은총으로 경험하는 것이 밑바탕에 있는거다 라고, 그 점을 안다면 대속의 교리 때문에 불편함이 없을 거다.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지 면제해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가 할 만큼 책임을 져야 자존심이 산다. 볼테르가 천당가기 싫은 이유는 내가 내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기에 죽은 다음에 예수만나면 내가 기죽어서 못살텐데, 그곳은 천당이 아니다. 나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다. 인간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너뜨리면 그건 구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을 갈등관계로 본 것은 교회가 교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가톨릭의 역사를 보아도 자력구원 쪽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한다. 불교의 자력구원은 아니다. 한스 큉이 칼 바르트 밑에서 쓴 논문이 장로교 칼 바르트가 말하는 ‘이신득의’와 가톨릭의 교리는 같은 거다 고 하여 절반의 파문을 받았다. 너는 신부이기는 하지만 가짜 교수다. 그래서 한스 큉 밑에서 배운 학자는 가톨릭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일리가 있다. 가톨릭에서는 은총을 말하고 그 은총이 우리를 성화시키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게 해준다. 가톨릭에서는 ‘칭의’라고 하지 않고 ‘의화’라고 번역을 한다. justify가 justification, 실제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은 옳다고 본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면 내가 의로운 사람이 돼야지 하나님이 나를 봐줘서 의로운 사람이 아닌데도 의로운 사람으로 봐준다. 이것이 내가 배운 감리교나 장로교 개신교 전통에서 배운 ‘칭의’인데, 거기서부터 기독교들이 봐주는 것 사기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에 들어와 있다고 본다. 가톨릭 쪽의 글을 보고서야 개신교가 가톨릭과 차별화하려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 너무 극단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언어와 언어를 담고 있는 밑바닥의 종교체험 그것이 뭘까를 생각해 보면 교리에 대해서 자유할 수 있다. 예수님 덕분에 내가 사는 것이 내 노력이 아니고 이 삶이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경험했으면 이것이 대속의 교리이다. 앞서 가신 예수님이 나의 삶, 영생인지 뭐든지 간에 삶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건 내가 닦은 것이 아니다. 선물이다. 그러니까 대속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말하는 ‘내 죄를 졌다’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건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나오는 잘못된 것이다. 아담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에만 다녀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실제 인물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놓은 죄 때문에 우리가 죽고 그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대속의 교리의 핵심인데 그런 이야기 자꾸만 하면 사람들 교회 안다닌다. 그렇지만 대속이 가르치려고 했던 ‘경험’ 그것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가 간직하고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력구원’ ‘타력구원’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 홍정수 박사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며 한국교회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 안명준 겨자씨와누룩


2009-02-16 오전 00:27:28 © seednyea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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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2013.12.27 22:18


나의 예수 목회세미나



홍정수목사> 2013.02.18.



저는 질문이 있으면 잘 떠드는데 질문이 없으면 할 말이 없어요.



복음서나 신학에 대해서 혹시 질문 있으세요? (강의를 듣고 질문하십시다.)



성경 요한복음 3장16절 뭔지 다 아시죠? 그거 하고 마가복음 1장을 지금 읽어보세요. 저는 구약성서도 신약성경도 다 안 필요하고 마가복음 1장만 있으면 제가 목회하고 제 영혼이 구원받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장을 한번 읽어보세요. 거기에 예수님이 뭘 하셨나? activity의 종류를 한번 적당히 적어보세요.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할 숙제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 그건 잊어버리세요. 십자가? 그건 없으면 좋은 거니까 잊어버리고. 여러분 죽지 않을 거잖아요. 우리끼리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요.



십자가는 없으면 좋은 거니까 때려 치우고.



부활?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그거 징그럽지요. 산 사람들은 재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우리에게 덕이 안 되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금 여기서 서울에서 아산에서 혹은 포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기독교의 핵심을 풀자구요. 넌센스 퀴즈 그만하고.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유인물을 보면 예수! 하나님도 돈도 권력도 없이 어떻게 나에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이게 숙제입니다.





저는 예수 믿어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어요.



제가 반지하에 개척교회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 아버님이 중풍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마가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되지요.



성경에는 계속 기적이 일어나지만 저에게는 기적이 안 일어나지요. 그래서 성경을 깨닫게 되지요. 여러분이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여러분이 비극을 당할 때 예수님이 많은 환자에게 기적을 행하였듯이 나에게 기적을 베풀 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복음서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나의 신앙 나의 하나님 나의 예수. 불만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조직신학을 했으므로 성서신학은 잘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신앙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본 훼퍼가 히틀러를 죽이려고 하는 일에 가담을 했고 감옥에 2년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처음 1년 동안에도 본 훼퍼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조직들이 계속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베르넨교수가 독일에서 공부했는데 독일에서 공부한 그 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를 들면 6월21일날 장교회의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계획대로 본 훼퍼 일당이 한 계획한 대로 장교가 가지고 간 수류탄은 터졌습니다. 그랬데요. 본 훼퍼는 그것이 성공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감옥에 있는 동안 쓴 초기 자료들은 희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그 시각이 되어서 폭탄은 터졌는데, 연합군이 쳐들어오고 독일군은 교착 상태에 빠져서 아무리 참모회의를 해도 희망이 없어서 히틀러는 창밖을 내다보고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은행나무로 된 원탁 테이블이 터진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때부터 본 훼퍼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지요. 본 훼퍼는 몸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지요. 여러분은 목회현장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나요? 저는 하나님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를 하는 데는 하나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그거는 필요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본 훼퍼가 몸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란 용어를 쓰는 거를 반대를 안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쓰는 게 커뮤니케이션이 빨리 됩니다. 우리의 인연은 전생의 인연입니다. 우리는 전생에 형제였습니다 그러면 빨리 알아듣잖아요. 뭐 족보 따져보자 그럴 필요는 없어요. 부부는 전생에 악연이다.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다 그거 무슨 말인지 빨리 알아듣는다. 말은 통하면 됐지 이 말이 사실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서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이야기를 하는 데는 신은 전혀 해당이 없고 써도 좋지만 그거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거 본 훼퍼가 몸으로 경험해서 알고 이야기했는데 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서 빨리 잊어버린 거지요. 저는 늘 마음속에 본 훼퍼를 생각하고 본 훼퍼의 숙제, 본 훼퍼는 뭔 말인지도 모르고 떠들었지요.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그것은 신없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겠느냐? 저는 그렇게 풉니다. 물론 본 훼퍼가 그렇게 해석했다는 건 아니에요. 본 훼퍼는 감옥에서 낙서만 몇 장하고 죽었지요.





그 다음, 조용기는 예수 믿으면 돈 번다고 자꾸 그러는데...



하버드 mba(경영학) 74학번 졸업생들 조사해보니까 MBA니까 아침마다 돈벌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경영학, 하버드생이니까 세계에 겁나는 게 없지요. 하버드 74 학번 입학생들 미국에서는 졸업으로 치겠지요. 졸업생들을 조사를 했어요. 아침마다 구체적으로 목표를 생각하고 교회로 말하면 새벽기도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돈 벌어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나가는 사람보다 능률이 8배나 낫다는 사회학적인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돈돈돈 하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확실하지요.



장로교에서는 돈 많이 버는 것이 구원의 확실한 징표라고 그러니까 장로교 장로가 돈 더 많이 벌고 제대로 된 감리교에서는 돈은 써야 된다고 가르치고 배우니까 감리교 장로들이 가난하지요. 돈독이 든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당연해요.



그건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봐도 욕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요. 좋든 싫든.



따라서 기도해서 돈이 생긴다? 조용기목사와 맥을 같이 하는 로버트 슐러가 무너졌으므로 이젠 기도하면 된다는 그런 개소리는 미국에서는 못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 박정희 복음하고 예수 복음하고는 같았는데 이젠 하면 된다는 말을 하면 안 되니까 이젠 뭐 하지? LA 에서는 젊은이들이 고민을 한다. 뭐 하지?



예수 이야기하면 되지. 그런데 예수 이야기는 끝이 십자가잖아요?



그거는 기독교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거지요. 예수의 십자가는 비극이다는 말은 완전히 넌센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십자가는 상징이라는 겁니다. 날마다 어떻게 죽어요? 한번 지고 부활한다면 질 만한데 날마다 진다면 재미있겠네? 예수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런 이야기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만 읽고 나머지는 사고로 불타서 없어졌거나 물어 떠내려갔다고 생각하고 2박3일동안 여러분이 뭐하는지를 생각하라.



돈 번 사람도 여기 안 왔을 것이고 기도 응답받은 사람도 여기 안 왔을 것이고.



예수 이야기를 하는데 신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되고 하나님이란 단어가 불필요하지만 교회가서 써도 좋지만 여기서는 불필요하고. 이거해서 돈 번다? 이거 해서 출세한다? 성공한다? 그런 말도 쓰지 마시고 그런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려는 그 당시도 쌈박질하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이름을 초대교회라고 그러는데 정말로 무식한 거지요. 초대교회가 지금과 똑같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권력투쟁하고 서로 분쟁하고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고.... 지금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초대교회라고 특별히 사랑하고 지금은 안 사랑했다?



무식한 요한 웨슬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넌센스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부흥사지 신학자는 아니니깐요.





따라서 예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이거 해 가지고 돈도 못 벌고 출세도 못한다. 이게 백날 해 봐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처럼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대전제로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예수가 저의 영혼을 살렸고 저에게 복음이 되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고 봐요. 저는 속된 말로 구원받은 사람은 죽어도 좋다 그렇게 된다고 봐요.



여러분 자녀들이 컴퓨터에 빠져 있으면 엄마 아빠 말이 하나도 안 들려요. 너 내일 학교 못간다. 집에 가서 텔레비전 못 본다. 상관없어요. 그게 딱 예수라고요. 부모가 뭐라 그래, 하나님이 뭐라 그래, 제자들이 뭐라 그래, 저기가면 죽는다. 못 말려요. 못 말려. 오늘도 그런 일은 주변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부터도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도처에서 우리는 예수 현상을 볼 수 있는 거라고요. 이 예수 이야기를 통하여 어린이가 컴퓨터 중독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빠질 수 있는데 컴퓨터에 빠져서는 패가망신이고 인생을 낭비하지만 예수에 빠져 중독돼서 재미를 보면 그게 거창한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가 오는 거고 작게 말하면 주변에 물든 사람들이 함께 재미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게 마가복음 1장의 언어로 보면 복음이고 복음이란 단어는 바울이 퍼뜨린 단어일텐데 왜냐하면 이게 로마지배권 문화권에서만 선포되는 건데 황제만 선포하는 거니까.



요한복음에는 복음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희랍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에도 복음이란 단어는 안 나오는데 요한복음이 왜 복음인지 모르겠어요.



신약성서의 대부분의 말은 바울이 만들어 냈을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라성같은 예루살렘의 기둥들이 유대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가 복음 전달자라는 것은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건데 예수를 황제와 같은 위치에 놓고 복음전달자라는 이상한 착상은, 율법교사라는 말이라면 모를까 그건 바울에서나 나올만한 말이지 예수의 동생 야고보나 예수의 직계제자 베드로에게서는 나와야할 이유가 없는 말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중요한 개념은 바울의 사전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지금은 논쟁이 많이 있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래요. 바울의 문서가 복음서의 문서보다 15년 20년 30년 앞섰기 때문에 바울을 몰랐을 리 없다고요. 사도행전만 봐도 바울을 알고 있었고 바울을 욕하고 변질시키잖아요.





베드로 전서인가 후서에 베드로가 쓴 거는 아니지만 바울이 너무 어렵고 바울을 따라가다가 패가망신한 사람이 영적으로 많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바울이 문제의 인물이였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두 개의 노선, 예루살렘 기독교와 바울의 기독교는 노선이 개념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선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족보상으로는 아니지만 예루살렘 기독교이다. 이건 제도적인 기독교이고 순 엉터리 기독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경상도도 아니고 전라도도 아닌 강원도 촌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은 지배권자이기 때문에 이 지배세력 속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이명박처럼 축복받은 거에요. 저의 어머니는 강원도 계시지만 사상적으로는 소망교회 교인이지요. 엄마가 기도를 열심히 잘 해서 대통령이 됐다는데 나는 기도를 못해서 내 아들은 쫓겨다니고 그래서 내 어머니는 더 많이 기도하려고 노력하지요, 사고방식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잘못됐다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이 없고 출세만 하려고 하는 것이 경상도 신학이지요. 가치관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배 아프다 뒤집어엎자는 것이 전라도신학이고 민중신학입니다. 이게 해방신학이다. 저기 강원도 사람이 볼 때는 잘 해 봐라. 그게 그거지요. 요한계시록은 뒤집어엎자는 것이잖아요. 자기네들이 한번 다스려 보자. 그렇지만 어디도 못 끼는 강원도 사람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아이 우리는 관심없어.



강원도에서는 서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미국에 갔을 때는 충격을 안 받았어요. 왜냐하면 공부를 하고 갔기 때문에. 그런데 시골에서 서울 왔을 때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서울 한 복판을 다닐 수 있어?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요? 머리 속에서 없었던 나라에요, 강원도에서는 불필요한 나라엿어요, 중학교때 처음으로 서울놈을 만났는데 얼굴이 하애요. 수돗물 먹어서 하얀가 보다. 처음 서울 오자마자 깜짝 놀랐는데 저처럼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지고. 서울놈을 한 놈 봤는데 얼굴이 하얘. 너 왜 그러냐? 수돗물 먹어서 그렇대. 그래서 수돗물 먹으면 다 하얘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서울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강원도에서는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권력을 차지할 생각이나 뒤집어엎을 생각도 안 해요.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거에요.



몰트만이 탈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그건 다 가진 자들의 장난이에요.



저는 저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저의 간증만.



오늘 저녁에도 자신의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너 틀렸다가 없다. 정죄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나는 예수 때문에 이렇게 재미있다는 말을 하면 됩니다.





마가복음1장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이 다 들어있습니다. 동어반복입니다. 같은 비디오 또 보는 거예요. 그건 아무 필요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전부다 예수의 핵심이 십자가라고 그러고 부활은 나중에 붙여진 거라고 그러는데 신학자들은 돈주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거지요.



저는 그렇게 안 봐요. 신학자로 온 게 아니고 20년간 목회한 목회자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성공할 수도 없고 서울 가서 한판 할 수도 없고 미국 유배지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치신학은 저에게 의미가 없는 거에요. 처음에는 저도 민중신학 해방신학의 분위기였기에 LA에 가 가지고 지역사회를 민주화하자. 지역사회를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많이 해 봤는데 저보다 이민 연령이 높으신 분들은 저의 잠꼬대를 귀엽게 봐 줬지요. 관심이 전혀 없는 거예요. LA에서 한국사람 데리고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그러면 미국을 개혁하는 건데 미국 사람들이 우리를 뭘로 보겠어요. 저거 미친 놈 아냐? 여기서 월남사람이나 태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하나님 나라 만들자고 그러면 뭐라고 그러겠는가? 연극 무대에 올려 연출을 할 수 있으려는지는 모르지만 게네들이 귀담아 듣겠어요? 전혀 아니예요. 똑같은 거에요.





어?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겁니다. 아는 거는 예수 이야기밖에 없고 돈 벌어 보려고 저도 경영학책을 좀 봤어요. 피터 트루커의 책을 좀 봤는데 1번 아는 걸로 돈 벌어라. 다른 일을 알고 싶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하라. 전문가를 고용할 길은 없고 아는 이야기는 예수밖에 없고... 예수 이야기로 어떻게 먹고 사느냐? 예수 이야기가 아무 생각없이 써버이벌, 신분 해결, 취업, 애들 대학 보내는 거, 노후대책, 이런 짐승같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이 사람에게 예수이야기를 어떻게 하냐? 이건 정말로 어려운 숙제예요. 이건 책에도 없는거에요. 고민을 좀 했지요. 내가 이 사람들에게 뭘 해 줄까? 그 사람들은 내가 서울에서 쫓겨왔다는 거는 다 알아서 불쌍히 여겨 밥은 먹여 주는데 밥값을 해야지. 곰이 거저 얻어먹으려면 재주를 부려야 할 것 아닌가. 사실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사람들에게 어떤 예수를 어떻게 전할까?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앓고 있는 문제가 뭔가를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이 앓고 있는 문제가 뭐냐? 여자들은 잘 모르겠고 흑인신학의 언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민사회에 있는 남자들은 nobody. 정체성이 없는 거예요, 막말로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마가복음 1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개같은 놈들에게 너도 사람이다. 사람 취급을 느낌으로 줬다고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가 신학교 다니지요. 선생님 만나서 공부해서 졸업장 받고 대학원까지 가지요. 광야생활 40년 40일. 다 같은 거지요. 성령께서 스카웃해서 사단이라는 특수훈련을 통해서 짐승들도 같이 있었고 천사들도 도왔다고 그러는데 예수님이 신학교 안 나왔다는 건 거짓말이예요. 예수님은 두 개나 학교를 나왔지요. 세례요한에게서 배웠고 광야 대학을 나왔고. 거기서 합격해서 목회를 했지요.



예수님은 저보다 똑똑해서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처음부터 자기가 죽을 줄 알고 계승자 후계자를 세웠어요. 저는 그걸 배운 적이 없어요, 신학교에서. 왜 예수가 제자들을 키웠는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요. 20년 목회하다가 문 닫으려고 보니 재미보다가 사생아를 낳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제 어떻게 하나? 어디 가서 입양을 시켜야 하는데 입양할 교단이 없는 거예요. 교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없는 교단은 교회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뒷감당이 대책이 없는 거예요. 아직도 고민 중에 있어요. 목사 없는 교회를 해야 하나? 맨날 고민하고 있고, 몰몬교도 알아보려고 했고 일본의 무교회주의도 알아보려고 그러는데 아직은 대안이 없어요.



목회를 직업적으로 생각하고 목회로 돈 벌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순수한 신앙공동체이면서 성경해석에 대해서 유지되는 저질교회가 아닌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까? 노하우가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저는 고민 중에 있어요. 그 사람들이 nobody에서 나도 잘 했다! 로. 그걸 열심히 잘 했고 그래서 교인들이 나를 짓밟고 넘어가더라. 가슴은 아프지만 잘 됐어요. 자식이 크면 아버지를 밟고 시집 가고 장가가지요. 그런 것처럼 그들은 저를 잔인하게 짓밟고 갔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수준에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식이 성공하면 떠나야 되고 독자적인 노선을 가야됩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고마운 거는 나가서 한기연 책을 보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습니다. 망하려고 작정한 사람 아니고는 한기연 책을 자주 안 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저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니 잘났다는 소리를 계속 했고, 기죽어 지내던 그 사람들이 어 우리도 해야지. 그런데 유감스러운 거는 저랑 같이 끝까지 목회를 했으면 좋은데 제가 교회를 하다가 사임을 하고 거기 목사들이 많았어요. 평신도보다 목사 가족이 더 많았는데 왜냐하면 신학공부를 자꾸 하니깐. 너희들끼리 하라고 하니까 니가 있으면 우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니가 나갈래 우리가 나갈까? 그 당시는 정치적인 감각이 없어서 몰랐어요. 그 사람들이 나가고 저만 남아서 뒷감당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한 이야기는 너 잘났다는 것 그래서 저는 설교준비 하나도 안 합니다. 그거 외에는 그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없어요.





바울은 예수를 그렇게 봤잖아요.



예수를 믿으면 마가복음 1장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원래는 거기 없었던 거라고 그래요. 예수는 메시야다. 희랍 컨셉. 단어는 희랍 컨셉이지만 그리스 히브리 컨셉. 예수는 메시야다. 못 알아들으니까 나중에 마가는 첨가를 했어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바울에 보면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딸이다. 강원도 사람들에게는 그런 정치적인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나라는 세금만 거둬가는 나쁜 단어다. 세금은 안 거둬가는 게 좋아요. 하나님나라라도 나라라는 개념은 저에게는 아니예요. 여러분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에게는 이게 강원도 사람들의 특징이예요. 나라? 그건 서울 사람이나 하는 거지요. 저 태백산맥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거고 필요한 거지 강원도 사는 사람은 바다와 하늘만 있으면 됐지 그거 뭐하는 거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나라는. 하나님 나라든지 임금님 나라든지 저는 안 좋아해요.





예수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개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야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고, 요한복음은 아니예요. 예수가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전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라는 것은 해석입니다. 저는 바울에게서 왔다고 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이나 흑인신학이나 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다. 그거는 우리가 학자들에 의해 속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아니에요. 예수님의 진리를 가르친 거예요. 물론 하나님 나라이야기도 물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은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에이 이건 3대1이잖아 뭐 그럴텐데 3복음서는 예수님이 목회 1년 했어요. 유대인 학자 말에 의하면 6개월밖에 안 했다고 그래요. 가서 금방 죽은 거예요. 3년 못 끌어요. 그렇게 지독하게 살려면. 그런데 요한복음에만 예루살렘에 서너 번 갔다고요. 그럴 때는 3대1인데도 지가 유리한대로 예수님이 3년 목회했다고 믿어요.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목사님들이 전문가인데도 근거없는 짓을 막 한다고요. 근거 따지지 않고 나한테 좋으면 좋은 거에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이. 강원도 사람들에게는 안 통해요. 강원도 사람들더러 서울에 쳐들어가서 한양 수도권을 장악하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저는 예수님이 그런 말은 안 했다고 봐요. 아마 했더라도 다른 말을 했을 거라고 봐요. 그건 중요하지 않고.



바울의 단어가 매우 정치적인데 하나님나라라는 말도 그렇고 복음이란 단어도 그렇고. 그것이 강원도나 한인 촌놈들이 백악관에 쳐들어가서 놓은 사람 될 생각은 안 해요. 그런 변두리에 있는, 구조적으로 변두리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도 예수가 복음이 되려면 바울의 이야기, 복음이라는 단어,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이란 단어를 바꾸면 뭐가 되겠느냐? 너 잘났다 이거지요. 그런데 감정적으로 너 잘났다는 하루 이틀이면 되는데 근거가 없으면 무너져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 하는 말이 너무 맘에 안 드는데 교수들 붙잡고 물어보면 답이 없어요. 그래서 교수들 실력이 없는 줄 알았지요. 그 사람들 괴롭힐 수는 없고 수요일 저녁에 조용기목사 교회가서 위로 받고 온 적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서 코드가 조금 맞았어요. 그러나 신학교에서 배우고 나니까 이건 순 장난하는 거였어요. 갈 데가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면 명동에 나가서 별 볼 일없는 처녀 총각들이 희희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에이! 저 놈들도 잘 낫는데 나도 잘났다고 그러고 오곤 했는데 정말로 나도 잘났다고 말하고 싶은데 근거가 없으면 쉽게 무너지더라고요. 친구가 있어 서로 자화자찬을 하면 괜찮은데 시골에서 온 놈이. 친구가 없어 굉장히 힘들더라. 사람들이 못 말리도록 나는 잘났다 너는 잘났다 그럴 수 있으면 구원받은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할 게 없어요.



구약성서에는 충분히 나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70이었어요. 세계나라가 70이었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가 야훼 하나님이지요. 야훼 하나님 나라. 야훼 하나님은 아직 나라를 형성하지 않아서 밑에 부하가 없었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야 나도 하나님 노릇 좀 해 봐야 하는데 백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브라함은 그 주변 나라의 신을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신 같은 거는 내가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삭의 부인이 신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가지고 와요. 거기 보면 똑같은 단어지요. 드라빔이라는데 원어로 보면 하나님이다. 하나님 그런 거다 별 거 아니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내가 집안에서 만들 수도 있는데 니가 뭐야?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다는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아브라함이 그래요. 너 뭐 줄 거야? 딜합니다. 이 하나님이 신 노릇 처음 해 보니까 뭘 모르는 거다. 뭐뭐뭐뭐 준다. 엑스. 또 하나님이 공부 좀 해 가지고 와서 또 나타나서 뭐뭐뭐뭐 준다 또 엑스. 세 번째로 와서 요즘 말로 고종명, 잘 죽게 해 줄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내일이 불안했고 죽는 거는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빵도 자식도 당연한 거고 그건 신 도움 없이도 되는 거예요. 이제 나이가 들어보니까 잘 죽는 거가 최고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잘 죽게 해 줄게. 그러니까 당첨! 그런데 뭐 아브라함이 한 두 살 먹은 앤가요? 하나님 말 안 듣지요. 하나님이 뭐 준다 줘 준다 했어도 기근이 들고 어려우니까 애굽으로 내려가고 아내도 팔아버리고 이삭도 똑같은 짓 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자기를 안 믿는다는 걸 안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니면 백성이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끝까지 쫓아가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딜하지요. 그게 시험입니다. 성경에 그대로 되어 있어요.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번에는 시험해 봅니다. 그 전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요. 그렇게 해야 할 거 아닌가요? 딜하려면 검증을 해 봐야 할 거 아니예요.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은 당첨이 됐고 이제 아브라함하고 딜해야겠다고 동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못 믿는 거에요. 그래서 니 아들 바쳐라. 여러분, 자녀가 있으면 이 성경으로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요. 믿음이 좋다구요? 자식한테 맞아 죽지요.



거기서는 완전히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딜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오케이. 그래, 니 마음만 읽었으면 됐다. 이렇게 해서 일이 시작되는 거거든요.



거기에 하나님이 등장하지만 이건 완전히 세속적인 거라구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뭔가를 해 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준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성경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이 달라요. 신학자들이 신학을 많이 만들어낸 거지요. 거짓말로. 저는 어떤 신학책보다는 성경이 훨씬 보다 정직하고 우리들에게 주는 영감이 많다고 봐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로 대등해지는 거지요. 성경은 참 멋있는 이야기라고 봐요.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뭘 했는가?



신학교 대학원까지 나오고 자기가 언제가는 끝났 줄 알고 제자들을 빨리 양성했고요 제자들하고 귀신 쫓아내고 베드로 장모 병 고치고 문둥병 고치고 그게 다예요. 완전히 무당하는 거 다 한 거지요.



그래서 질문한 거는 예수 목회한다는 것은 이거 하는 거예요. 자기 준비 잘하고 자기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고 후임 잘 결정하고 역사를 잘 이어갈 수 있게 준비하고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어느 정도로 하느냐? 법의 한계를 잔인하게 넘어서. 이건데 아브라함이야기를 왜 했냐면 유대인들의 시각은 뭔가? 한인타운과 유대인 타운이 붙어있어서 유대인들을 자주 보는데 저 사람들은 뭐야? 이런 생각 자주 듭니다. 그래서 미워하지만 그 사람들 책을 보고 엄청나게 많은 거를 깨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안 믿어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으면 히틀러에게 진 하나님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히틀러에게 떼죽음을 당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전지전능하다고 믿겠어요? 전지전능했기에 여러분의 자녀를 천국으로 데려갔다면 여러분 자살해야지요. 교인들이 멍청해서 질문 안 하니까 다행이지만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뼈아픈 아픔이기에 질문 안 할 수 없지요.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유대인들 불러다 물어봤어요. 미워하지만 배우려고 진짜로 물어봤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문신이 있는 유대인 부부 데려다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너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어요. 아픈 거 건드리면 안 되는데 물어봤어요. 그 사람이 저를 한참을 쳐다보더라고요. 어이가 없는가 봐요.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이 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 어이가 없나 봐요. 성경이 책상에 놓여 있었는데.... 이게 하나님 이래. 율법주의. 율법은 토라라는 건데. 이게 하나님이래. 그래서 또 가만 있었지요. 이거대로 살면 되는 거래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게 아니래요. 이거대로 살면 된다고. 싫으면 관두는 거래요. 그런데 새로운 하나님 만나려고 뜻을 알려고 기도하는 사람 많지요. 이런 도둑놈들 어디 있어요? 재림예수 왜 기다려요? 예수님 여기다 할 말은 다 했는데! 그거 보면 수상한 거예요. 성경 안 믿는 사람들이예요. 보수주의자들 기도 더 많이 하지요? 기도는 왜 해? 여기 다 있는데? action 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왜 방황해요? 여기 다 있는데! 유대인들 만나서 저는 충격받았어요. 그러면서 유대인들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냐? 그들은 자기네들의 하나님이 절대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해요. 그러면 히틀러에게 진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에요. 어떻게 설명해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세상의 하나님은 둘이다. 강한 하나님과 연약한 하나님, 강한 하나님은 나쁜 새끼야. 인간을 잔인하게 짓밟아. 꼭 누구 누구 같애. 죄를 더 많이 짓고도 시람을 더 많이 죽이고도 노벨 평화상을 받는 누구같애!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은 안 믿어. 없어서도 아니야. 약해서도 아니야. 그거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성이 없기 때문에 그 신은 안 믿어. 그러면 우리 하나님? 비실비실하고 약하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는 그 신을 오늘도 예배하기로 결심한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글을 쓰는 거예요. 저는 설교할 거리가 없으면 유대인들의 설교집을 봅니다. 기독교인들의 설교집은 하면 된다는 거예요. 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너무 가벼운 거예요. 유대인들의 설교를 보면서 아 정말 이렇게 하는 거구나. 고난이 인간의 영혼의 깊이에 들어가는구나. 감동받고 유대인들의 책을 꽤 많이 봤어요.





여기 혹시 목회하는 사람들 교회에서 기도 가르치나요? 저는 교회에서 기도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래도 기도하고 싶으면 유대인들처럼 하라고 하지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기 전에는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고 그래요. 성경을 읽고 그 성경과 가까이 가려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는 안 하면 좋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으면 고거만큼, 우리 아들 공부 좀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기도가 응답이 되느냐 안 되느냐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신학책에 많이 나오는데 이건 신학자들이 기도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뭐 기도를 심심해서 해요? 아프니깐, 다른 길이 없으니까 하는 거지. 기도가 응답이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어요? 지금 내 아들이 울고 있는데 죽어가고 있는데... 기도 응답? 그건 날라리 신학이다. 혼동하지 마세요.



유대인들은 내가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으면 그만큼 나와 같은 아픔을 세상에서 누군가가 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이즈는 작을지 몰라요. 나한테는 만원이 필요한데 내 옆에는 100원이 없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창조과정 속에 있는 아직도 혼돈과 흑암속에 있는 세상이라고 봐요. 이직도 메시야가 안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고통이 해석되고 그게 나의 기도거리가 되고 나에게도 하나님의 고통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했으면 나도 하나님을 돕는 거예요. 이 세상에 고통받고 있는 생명을 치료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뭐 히브리 단어가 있어요. REPAIR THE WORLD, HEALING THE WORLD 같은 단어예요. 이 세상을 치료하는데 하나님하고 동업자가 되어 참여하는 거예요. 이게 삼박자 영성이예요. 성경 읽고 기도하고 기도한 만큼 액션하고. 다시 성경읽고. 이게 삼박자의 영성생활이예요.



야, 이렇게 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기도를 좋아하는데 이런 기도라면 괜찮겠다 싶어요.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글을 써요. 참 무서운 사람들이예요.



그들은 타락 안 믿고 천당도 안 믿어요. 사람들이 너무 천당을 좋아하니까 랍비가 믿고 싶으면 믿어라 그렇지만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냥 요 정도 이거든요. 유대인들 이야기를 왜 하냐면 유대인들은 오늘 마가복음 1장의 이야기를 알고 뭐라 그러냐 면 예수가 병을 고쳤어? 병을 안 고치면 오늘 죽을 건데 고쳤기 때문에 10년 후에 죽어. 그럼 말짱 도로묵이야? 기독교인들 너희들 그런 거야? 예수라는 선생이 메시야라는 예수가 고작 그런 거 하는 거야? 그런 거지요.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그럴 거예요? 병 낫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멍청한 거라고 해요. 언젠가는 하나님한테 배신을 당한다는 거지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써요. 여기 신유의 은사받은 목사님들 설명해 보세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뭘 기도하냐? DIVAIN PRESENCE. 내가 병에 걸렸어. 영적인 문제는 뭐냐? 아픔이 문제가 아니고 죽음이 문제가 아니예요. 사람은 죽게 되어 있고 아플 수도 있는 거라고요. 문제는 내 영혼이 아픈데 하나님이 나를 버린 건지 안 버린 건지 세상에 히틀러가 있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거다. 피할 수 없다. 고통은 OK 그런데 하나님이 날 버렸느냐? 안 버렸느냐? 유대인들은 그거다. 하나님이 날 버렸는가? 마사다 항쟁때도 70년에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도, 드라마에도 나오는데 마사다항쟁때 마지막 순간에 투사들이 마지막 드리고 기도하는 말이 우리 후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해 달라.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아직도 크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고 가는 것이고 우리가 패한 것이 아니다.



열왕기 상하도 정신맥락에서 보면 똑같은 거다. 아들 6명이 즉시 처형되지요. 어머니가 똑같은 기도를 하는 거예요. 다 같은 겁니다.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예요. 그 깊은 곳에서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내 심정으로부터 이 고난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만 선다면 그 다음에는 죽어도 좋다는 거지요. 죽어도 좋다.





기독교인들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도 김영주! 김동환이 똘만이처럼 열심히 따라다니다가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돈 주니까 이상한 짓하고 wcc가 뭔지 알게 뭐에요? 그가 공부 안 했는데 뭘 하는지 모르지요. 개인을 욕할 게 아니예요.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 했으니 wcc가 뭔지 모르는 거다. 거기 가 있어도 뭐가 뭔지 모른다. 저는 개인을 비방하는 게 아니예요. 큰 교회가 무너진다. 김영주가 무너진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로 생각하면 안 되요. 목사들이 공부를 안 해서 문제라고요. 개인의 문제는 그의 임기가 끝나면 끝나는 거예요. 이건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요. 기독교 역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돈 주고 이거 도장 찍자 그러면 그냥 찍는 거에요. 10년도 더 됐지요? 조용기 목사 그룹을 ncc로 받아들였을 때 이미 다 죄를 진 거고 김영주는 죄가 없는 거예요. 이미 오래 전에 선배들이 했는데 왜 김영주가 욕을 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때 여러분은 가만있다가 이제 싹이 자라 열매를 맺으니까 으으! 깜짝 놀라가지고 지금 그러는데. ncc 계통의 진보세력들은 난리가 났는데 그거는 잘못이지요. 지금 와 가지고. 그래서 지도자들은 공부를 해야 되는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정체성 예수의 복음의 핵심을 충분히 모르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계급적으로 보면 배부르고 한가한 사람들이예요. 여기 두 사람이 신학자라고 그래요. 신학자들은 한 박사가 뭐라 그랬냐? 김박사가 뭐라 그랬냐?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Real 피플들이 리얼 스토리 리얼 아픔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문제를 알아도 풀 수가 없어요.





78년 미국에 처음 가서 교수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때는 인권운둥이 아직도 있었던 때고 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때거든요. 혁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데 혁명의 반대세력인 tv 에반젤리스트들이 TV 에 나와서 종말이 온다고 엄청나게 있었어요. 그래서 교수들 만나 물어봤어요. 나는 한국 같은 촌동네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문명국가 미국에서 인권운동의 본산지같은 미국에서 저녁마다 tv에 나와서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서 설치는데 신학자인 너희들 뭐하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교수들의 답변이 뭔 줄 아느냐? 우리들은 진흙탕에 들어갈 장화가 없어. 그거 안 들어가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 여러분, 신학자 무시하진 마세요. 그러나 존중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예요. 신학자들에게 신학을 배우는 시대는 지나갔어요 그건 아니예요.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이 풀어야 해요. 대학원까지 나오셨잖아요. 여러분이 문제를 내놓고 공동으로 풀어가면 풀린다고요. 신학은 지네들끼리 하는 거예요. 다른 신학자가 뭐라고 그랬느냐 그거예요. 지금 최첨단의 신학성서학이 뭔지 아세요? 클레아몬트나 하버드에서 마가복음은 호우머와 일리야드와 플라톤을 베꼈다. 사실이라고 쳐요.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신학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여기 희랍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쳐요. 기독교로 개종하려고 마음먹고 여기 왔다고 쳐요. 클레아몬트와 하버드에서 이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희랍의 원조 상 호우머와 플라톤을 베낀 겁니다라고 하면 기독교로 개종하겠어요? 우리는 지금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최첨단의 신약학자들이 이거한단 말이예요. 이게 틀렸다는 게 아니예요. 그것만 해서는, 거기서 졸업해서는 목회자가 죽었다 깨나도 못 하는 거고 그래서 클레아몬트신학교가 이슬람대학으로 넘어간 거예요. 이건 장난이 아닌 거예요. 기독교는 몰락해 가고 있고 이 몰락은 피할 수 없는 거라고요.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풀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마가복음 1장에 있는 이 일이 요한복음 3장16절로 말하면 수혜자 입장에서 이게 영생이다.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냐는 거에요.



영생은 시간적인 영생이 아니지요. full life 영생이다. fulling fumain fuman life 내가 정말로 인간대접을 받는구나. 정말로 내가 사람 취급을 받는구나. 그러면 죽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뭘 더 바랄 게 있나요?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은 아닙니다. 대중들에게 예수는 희망이 아니었어요. 안병무선생님은 다 좋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친하고 존경해요. 군중이 민중이다. no way. 군중은 이거예요. 쓰레기들이예요. 단물만 빼먹고 다 도망갔습니다. 제가 읽은 성경은 그래요. 또 다른 성경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대중은 역사창조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 대중이 아니고.





수혜자들 중에 예수의 일을 계승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이 수혜자 입장에서 보면 예수 이야기가 복음이고 정치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그 수혜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거는 황제처럼 되는 거고 그거는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의 회복이지요. 나도 인간이구나! 그걸 회복하는 것이고 속된 말로 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못 말리는 거지요. 그런 경험을 한 거라고 봐요. 예수가 병을 고쳤느냐? 그거는 하나의 툴이라고요. 조용기 목사의 수요 집회를 가면 광고를 해요. 내일은 앉은뱅이 그 다음 주는 호흡기 질환..... 그 사람들이 딱 오면 방언으로 막 기도하지요, 저도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방언으로 기도해서 병도 낫고 귀신도 좇아낸 경험도 있어요. 그거 없었으면 아직도 제가 감신대 있었을 거예요. 곽전태 똘만이가 와서 신앙고백서를 쓰면 살려준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선생들이 그거 많이 했는데 고생 많이 했지만 나는 그거 못한다. 내가 신학적인 글을 쓰는 거는 신앙 고백의 행위다. 너희들이 한강을 넘을 수 있냐? 나도 한다. 니네들이 죽은 자를 살리냐? 나도 한다 나도 경험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치사하게는 못 살아남는다. 그런 거는 못한다. 그러니까 곧바로 가서 일러서 곽전태가 일을 저지른 거지요. 무식한 놈에게 성경을 읽어줬더니 감독실에서 성경이 틀렸느냐고 그러더라고요. 어느 대목이냐 하면 부활, 여러분 부활을 믿어요? 아니 믿어져요 머리로? 죽은 파리가 살아나면 그게 부활이예요? 하나님의 행위가 읽혀지는 사건이 부활입니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게 부활이 아니예요. 부활은 바울이 만든 거예요. 바울은 졸업장이 없거든요. 졸업장을 받아야 사도인데 졸업장을 못 받았어요. 그런데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봤다는 거예요. 언제 봤냐? 부활한 예수 봤다. 그래서 부활 부활 그러는 거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이 쫙 줄 세우지요. 베드로 인정해 주고 야고보도 인정해주고 그 똑같은 경험을 자기도 했다는 거예요. 질적으로 똑같은 거고 시간 차이는 최소한 3년이 되요 길게는 5년. 며칠이라도 상관없어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는 40일 후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40일 지나면 예수를 경험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40일이 지났는데 바울이 예수를 만난 거예요. 영적인 예수지요. 뭐라든 예수를 만났는데 바울의 고집은 베드로가 본 부활한 예수나 자기가 본 부활한 예수나 동질이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의 핵심이예요. 읽어줬더니 성경이 틀렸다고 해요. 박준태 지가 성경 위에 있는 거예요. 지가 틀렸지 성경이 틀렸나? 무식한 것들이 감리교 감독한다고!





예수의 이야기는 수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병고침 받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비난하듯이 병을 고친 게 아니예요. 조금 있으면 병에 또 걸리고 그러다 죽어요. 그게 아니라고요. 예수님이 고친 사람들은 다 천벌을 받은 사람들이예요.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회복된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의 임재를 그 사람들이 자타가 공인하도록 체험한 거예요. 그런데 조용기목사는 신학교 안 나왔으니까 할 말이 없어요. 어느 신학교 나왔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무면허 의료 행위를 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환자는 세브란스로 오라고 하면 되지.... 조용기 목사는 집단으로 고친다. 이걸 보고선 이건 아니다. 예수님은 집단으로 고친 적이 없는 거예요. 한 사람씩 고쳤는데...문둥이는 10명 고쳤지만 그 중에서 한 사람만 고쳤다. 문둥이 10명 고친 것이 집단으로 고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지 모른다. 제일 약오르는 것은 베데스타 연못가에 사람들이 쫙 있는데 온천이 부글부글 끓을 때 들어가야 하는데 기회를 놓쳐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쭉 있는데 일요일날 무슨 예수님이 뭐 할 일이 있겠어요? 거기 와 가지고 몇 사람 고쳤어요? 성경 잘 아시는 분 말해 보세요. 한 사람 고치고 가셨어요. 여러분은 거기서 고침 받은 사람이라고 자꾸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선천적으로 비관적이에요. 저는 거기서 고침을 못 받았지만 거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거에요. 예수 개새끼다. 그렇잖아요. 만일 이게 의료행위였다면, 예수님이 설교하는 거였다면 그 설교를 다 들었을 거 아닌가요? 병이 낫고 안 낫고가 핵심이 아니지요. 이게. 이 병을 고쳤느냐 안 고쳤느냐 이렇게 묻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신 나간 놈들이지요. 지네들이 목회 안 해 봐서 모르는 거라고요. 성경을 진지하게 안 읽어봐서 모르는 거에요. 목회를 진지하게 안 해 봐서 모르는 거다. 왜 거기에 그런 질문이 들어가요? 그게 아니고 버림받은 사람, 천벌을 받은 사람에게 나아가서 상징적인 설교를 하는 거잖아요. 너도 사람이야.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박수갈채를 쳤을 거라고 봐요. 아니면 조용기처럼 의료행위를 한 거라면 예수님이 몰매 맞아 죽지요. 안식일날 뭐 할 일이 있다고? 그건 넌센스에요. 안식일날. 많은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충분히 진지하게 안 봐요. 왜냐하면 이건 서양 사람들이 하는 신학이기 때문에.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간 거는 처음부터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고 갔어요. 처음부터. 신학 공부하러 간 게 아니에요. 내 문제를 풀기 위해 유학을 간 거에요. 슈버트 오그덴하고 대형 교실에서는 못 싸우고 페이퍼로 싸웠어요. 내가 중학생때까지 잘 살다가 어느날 예수한테 꼬여가지고 예수 믿으려고 왔고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몰라서 예수 찾으러 왔는데 슈버트 오그덴이 불트만 제자라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자료가 많아서 아리까리하고. 이미 지네들은 신앙이 있잖아요. 지네들은. 서양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앙이 있는 거다 조상 대대로. 루터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만 있으면 됐지 알 필요가 없다. 이런 거거든요.



지난 주에도 갈릴리 박사원 과정의 학생들하고도 사용했던 거지만 이정배교수도 번역한 밀리오레의 책에 보면 딱 그런 거에요. 예수는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미친 새끼들이에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어.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의 일생을 투자하라는 얘긴데 제가 슈버트 오그덴에게 우리는 그럴 수는 없다. 너나 잘 해라. 고딕체로 JESUS QUESTION. 니가 해라.



하버드 대학 카프만하고도 제가 똑같은 질문을 했지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으려고 그러는데 너는 예수의 독특한 메시지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잘 모르겠다고 해서 열받아 다시 질문, 너 왜 기독교인이 됐냐? 아니? 그냥 됐어. 말하자면 미국 사람에게 너 왜 미국인이냐? 묻는 거나 똑같은 거지. 그냥 태어난거지. 뻔한 거다. It just happen to me? 어 이게 아니네? 하버드대학 교수한테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라서 그 사람에게서 내가 뭘 배운다? no way. 꿈 깨어야 되요. 지금. 세계가 우리에게서 배워야 된다구요.



제가 감신에 있을 때 제가 박사학위를 못 주니까 디민 프로그램한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오스틴장로교신학교에서 우리하고 디민하자고 하니까 그쪽 선생들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우리가 너희들에게 한수 배우러 가야지. 당신들이 왜 우리한테서 배우냐? 서양의 기독교는 몰락해 가고 있고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번창하고 있는데 왜 너희가 우리한테 배우냐? 우리가 너희한테 배우러 가야지. 어 우리는 문교부에서 학위를 못 준다고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그러는 거에요. 세계는 달라지고 있어요. 급변하는 한국에 열정도 있고 재정도 있고 머리도 있어요. 정신차려야 되는 거예요. 서양 신학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건 어림도 없어요.



이제 25일에 서대문에서 갈릴리 학교 박사원 입학식을 기념해서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WCC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려고 그럽니다. 저의 스승인 변선환선생님이 계속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했고 그것 때문에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제가 학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나 변선환선생님을 비판을 하면 한국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비난하는 풍토가 되기 때문에 제가 이제까지는 침묵을 했는데 이제는 끝났기 때문에 변선환 선생이 소개하는 서양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 거 배우면 안 되요. 저는 오직 예수라구요. 그래야 비즈니스가 되지요. 안 그래요? 다른 걸로도 구원받으면 거기로 갔지 미쳤다고 여기와 있어요? 기독교에서 제가 한 푼도 얻는 게 없는데?



그거와, 내가 남들에게서 끊임없이 배운다는 것은 그게 예수 정신이예요.





지금까지 종교다원주의는 남들 하고도 문제없이 우리가 잘 사는데 얘네들이 옆집에 왔어. 야금야금 왔어. 얘네들 봐줄까 말까? 어떻게 할까? 그건 개떡같은 신학이예요.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태어났고 다른 종교인이 우리의 가족이예요. 우리가 대답을 해야지 게네들이 뭘 알아요? 게네들이 서양 사람들이 다 똑똑한 줄 아세요? 미국에서 대학원 나오면 미니멈 6만불 받아요. 그런데 신학교 나오면 3만불도 못 받아요. 그래도 오겠다는 사람들은 쓰레기라고요.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 1980년이후 전세계적으로 조직신학자 글이 한 편도 안 나와요. 똑똑한 사람들은 신학 공부 안 해요. 조직신학이 죽으면 성서신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성서를 해석할 툴이 없는 거에요. 개념이. 따라서 조직신학이 죽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끝났다는 걸 의미해요. 그래서 미주오리가 아직도 프린스턴의 신학교의 교수인데 그 친구의 글을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요. 예수는 몰라도 좋다? 지네들끼리는 그래도 되요. 그렇지만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느냐? 다른 방법으로 살지?





예수가 뭘 했냐? 문자 그대로 보면 병을 고친 사람이예요. 귀신을 좇아낸 사람이예요. 그거밖에 한 게 없어요. 그러나 이게 뭘 의미하느냐? 우리가 조용기처럼 병을 고칠 거냐? 문자적으로 보면 조용기신학에 비하면 민중신학이 뒤떨어진다. 문자적으로 보면 민중신학은 할 말이 별로 없어요. 가난한 자에게 뭘 줬다고 그러는데 예수님은 그런 거 한 적이 없거든요. 가난한 자는 언제나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 화병을 깬, 보물을 깬 이 여인이 잘한 거라는 이 따위 소리나 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예언서는 읽었지만 실제로 한 게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장만 넘기면 병 고치고 병 고치고....신학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조용기가 훨씬 난 거예요. 제가 민중신학 하는 사람들 보고 이건 정말 유치하다. 조용기가 들었으면 내가 훨씬 더 성서적이다 이렇게 말할 것 같더라고요. 신학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예요.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병을 고친 거지만 병을 고친 거는 아니라고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또 죽을 건데...또 병 날 건데 병 고친 게 그게 뭐 메시야거리가 되냐?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대로 그게 뭐 영생씩이나 되냐? 바울의 말대로 그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적들의 비판, 예수를 죽인 당국자들과 유대인들의 비판, 예수에게 흥미를 안 가졌던 대중들의 비판은 중요한 거라고요. 왜냐하면 우리의 가족들, 예수 바깥의 사람들은 예수는 흥미없다고 보고 예수의 일이 겨우 고작 그거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 있고 분명히 성경에도 써 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수혜자이고 예수에게서 영생, 충분히 인간대접 받는 삶,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삶을 체험했으니까 지금도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겠느냐? 저는 그런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해 보면 먹혀들어가요. 그 사람들이 제한테 돈은 내지는 않지만 저는 LA에서 20년동안 그 이야기한 거다. 그래서 저는 설교준비 하나도 안 하고 맨날 똑같은 설교한다.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로버트 슐러도 어느 날 고백을 하더라고요. 18년동안 설교 한 편 밖에 안 했다고. 여러분, 설교 이것저것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렉셔너리보고 한다는데 학자들이 쓴 거 따라가지 마세요. 교인들이 아픈 거 여러분이 알지 렉셔너리가 뭘 아느냐? 학자들은 돈 받고 3년치 뺑뺑이 돌리는 거 하는 거에요. 한 가지 설교를 하세요. 그 교회에서는. 교회가 달라지만 아픔이 달라져요. 그 아픔이 치료되면 다른 거 해도 되지만 교인들의 아픔의 focus에 맞는 그 이야기만 하세요. 로버트 술려도 그렇게 하더라. 저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것저것 하면 헷갈릴 수 있어요. 조용기는 삼박자 축복 그것만 한다. 조용기는 신학이 있는데 여러분은 건강한 목회 한다고 이것저것 찝쩍거리면 여러분의 아이덴티티가 없어지는 거예요. 한 가지만 열심히 이야기 하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을 거라고 봐요. 질문있으면 하세요.





하나님 없이 돈없이 성공없이 예수는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다. I am somebody. 저는 예수 때문에 정말 그렇게 살았어요. 미안하지만 유교문화에서는 선생에게 도전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저는 선생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제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도전을 했던 것이고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제 제자들이 제가 삐딱하니까 역적모의하러 와요. 물으러 오면 저는 언제나 그럽니다. 너 혼자 결단해라. 학원사태던지 크리스천 투쟁이던지 대장부 투쟁이던지 너 혼자 결단해라. 크리스천 양심으로, 개강 예배때 목사님이 좋은 말씀 하셨어요. 너 혼자서도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당연히 해라.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학우들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서 하냐? 그것 때문에 하냐? 그건 크리스천이 아니다. 내가 크리스천으로서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는 크리스천 양심으로서 데모를 어떻게 할 거냐는 것 밖에 충고해 줄 게 없다. 저는 선생님들에게 대든 게 아니예요. 그거는 유교질서에 어긋나는 거지요. 그런데 학자로서 후학들을 기르는 양심으로서 어느 게 옳으냐 그르냐? 그거에 대해서는 제가 타협하고 어물쩡거린다면 내가 내가 아니잖아요? 사람이....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예수를 믿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돈 받으면 좋지요. 돈 얼마나 좋아요? 그거 싫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에요? 종교적인 언어로 말하면 그게 영혼이에요. 영혼이 뭔가? 보수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세속적인 철학으로 말하면 내 삶의 패턴이다. 목회는 삶의 무늬, 패턴, 혹은 심리적인 언어로 성격이 반복되는 거다. 반복되는 내 행위의 동기와 목표, 목적, 그게 늘 무늬처럼 패턴이 되어 크리스천이 되는 거고 그것이 황제가 하듯이 당당하게 세상 죽는 거 겁 안 나고. 저는 그거를 예수님한테서 배웠어요. 그게 군대가서도 도움이 됐고 해외 유학가서도 도움이 됐고 사실은 저한테는 도움이 됐는데 학교에는 혼란만 주어서 사실은 미안해요. 감신을 제대로 갔는데 얼마 후에 후퇴해 가지고 한쪽은 비판 정신이 있고 한쪽은 교회가 엉뚱하게 물량주의로 가는 거는 신학교가 무너졌기 때문에 양쪽이 동시에 무너지는 건데 이건 변선환선생님과 저하고 죽어서라도 굿을 해서라도 갚아야 될 문제입니다. 언젠가는 회복되어야 될 문제에요. 이건 잘못입니다. 그러나 아까도 박종천 총장한테도 이야기했는데 그 당시에 사건을 저지른 한 사람으로서 참회의 글을 쓴다면 물론 소망은 비판적인 정신이 살아나는 건 좋지만 교회에 대한 애정은 엄청나게 부족했다. 그건 제가 20년동안 목회자의 자리에 서 봐서 알아요.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이 목회현장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요.





이 목회자의 심정을 단적으로 설명해 줄께요.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신학공부만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까 저 놈이 밥벌이할 출처가 없으니까 역적모의를 해 가지고 헌금이 오고가는 모양새가 제일 좋은 게 예배예요. 그거 모르셨죠? 알고 있었나요? 성경공부는 백날 해 봐야 돈이 안 생겨요. 예배를 드려서 돈이 오가면 근사해져요. 사랑도 돈이 오가면, 여성신학자 또 난리나겠다 구식 언어니까 양해해요. 똑같은 성경공부라도 돈이 창녀처럼 되요. 성경공부도 돈이 오가면 예배가 돼서 고상해진다. 똑같은 건데도 돈이 오가면. 그래서 성경공부하던 사람들이 역적모의해 가지고 교회를 차린 거예요. 저는 목회에 흥미가 없어 도망가려는데 나뭇꾼과 선녀처럼 어떻게 잡혔지요. 목회를 시작하고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게 예배인데 예배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없어요. 우리 실천신학이 바닥이었기 때문에. 마침 GTU에서 세계적인 대가가 예배에 대해서 3일동안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배웠어요. 역사적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성찬식은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하고 쫙 배웠어요. 다 끝났어요. 목회자에게 예배는 돈 걷는 거예요. 그런 생각은 죽어도 안 해 봤지요? 엉터리 신학자는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목회자에게 예배는 돈 걷는 시간이예요. 목사님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돈 내는 즐거움을 가르쳐주는 거라고 그러면 되는가요? 내가 안 걷으면 딴 놈이 가져가요. 애쓰고 번 돈 내가 안 거둬가면 딴 놈이 다 거둬가요. 중독에 쓰고 도박하고 다른 데 다 써요. 거룩한 사람들도. 돈 때문에 살인사건이 나고요. 그래서 돈은 소중한 거예요. 목숨처럼. 돈을 잘 쓰도록 가르치고 옳은 명분에다가 쓰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사예요. 그런데 제가 그 돈을 받는 동안에는 못 가르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예배학의 도사들은 어떻게 하는가 가서 배웠는데 화려한 예배의식과 세계적인 성찬의식 다 배웠는데 오고가는 헌금 속에 싹트는 신앙이라고 돈 이야기는 싹 빠진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평신도이지요. 예배가 뭔지 모르는 거에요. 예배가 뭔지... 예배는 구약식으로 말하면 눈에 보여야지요.

no charge는 없지요. 가난하면 비둘기라도 들고와야지요. 그게 예배 아니예요? 제가 틀렸나요? 그래서 한 수 더 떴죠. 이 사람 평신도냐고 물었지요. 그렇대요. 그 사람 교회 가냐? 안 간대. 지금 미국에서 신학자들이 교회에 안 가요. 신학하기 때문에. 이게 미국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냐구요? 예배는 돈이예요. 돈을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 돈을 어떻게 아름답게 쓰느냐? 돈을 내면서도 어떻게 즐거워하느냐? 그거 관리 잘 하는 게 목사가 예배 보는 시간이예요. 다음 주부터 헌금이 더 나올라나? 아니면 쫓겨날라나? 구약시대부터 예배는 다 no charge가 없는 거잖아요? 제가 목사가 되어보니까 예배가 뭔지 비로서 알겠더라구요. 저도 옛날에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이따위 신학책에 있는 헛소리도 하고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라고도 하고 이런 거 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예배는 돈이에요. 너무 솔직했나요?





여러분의 신학이 서구 학자들에 의해서 배부른 학자들에 의해서 경멸된 거예요. 신학은 재건되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안 하면 세계 기독교는 망해요. 아니면 빨리 몰락합니다. 개신교 중에서 가장 래디컬한 그룹이 성공회입니다. 거기에 미국과 영국에서는 성공회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아프리카에서만 성공회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성공회측에서 나온 글에 보면 아프리카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너무 낮은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목회를 한다는데 조용기목사처럼 신유 팬타코스타 이쪽으로 가고 있는 건데 이건 아니에요. 조용기목사 교회라면 몰라도 영국 성공회 의 후손으로서는 역사를 이어가는데는 문제가 되는 거에요. 전세계의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몰락하고 있다고요. 저는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가 몰락하는 거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처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고 기독교처럼 내부의 비판이 왕성한 집단은 없어요. 개신교의 전통이지요. 내부의 비판. 그래서 이 내부의 비판이 없으면 리더십이 망하잖아요. 이런 내부의 비판정신과, 저는 예수님을 비판가라고 보는 거거든요. 이런 비판정신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거는 기독교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지구촌에서 기독교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거에요. 저는 기독교와 이해관계는 하나도 없어요. 저는 어떨 때 기도는 안 하지만 기도할 때 저는 지쳤습니다. 기독교 당신 몫입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투정을 많이 부립니다. 그러나 여기 감신대 총장님도 계시니 다행인데 여기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 장로교인들도 많으니 미안한데 샌프란시스코에서 10여년간 가르쳤어요. 거기 장로교인이지만 문희석박사가 에모리대학 나왔고 여기 박종천총장도 에모리대학 나왔는데 그런 인연으로 제가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여러 해 가르쳤어요. 장로교 목사님들이 뭐라는 줄 아세요? 왜 장로교에는 저런 학자가 없어요? 감리교 신학자가 똑똑하다는 게 아니예요.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통하여 학생들의 신앙의 성숙에 이르려고 하는 교육의 기본적인 자세는 변선환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장로교에는 그런 미친 학자가 없었던 것 같아요. 믿으면 된다는 거는 잘 배워서 교회는 성장하는데 그래도 목회자도 자기 영혼은 구원해야 할 거 아니예요? 목사가 되려는 신학생들에게 묻지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가 다르냐?





네 생활속에서 검증될 수 있는 기독교인 특징 세 가지만 대보라고 그러면 장로교 목사님들은 대체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그래요. 저는 비기독교인인데 저는 만나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고요. 장로교가 위험합니다. 언어가 안 통하는 거예요. 장로교인의 언어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안 통한다고요. 미국에서도 미국 목회자들 절반이 그들의 자녀들이 교회에 안 나간다고 그러는데 한국에도 곧 그런 일이 일어날는지 몰라요. 생각하지 않는 설득력이 없는 신앙은 자녀들에게 계승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우리들의 신앙이 내부의 비판이 가능하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 열정이 있는 이 정신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나 신화적이고 거짓에 가득 찬 그런 이야기에 포장되어있는 예수 이야기는 전달이 안 될 거라고 봅니다. 우리 자녀들은 굉장히 똑똑합니다. 영주권 때문에 중학생이 우리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성경공부시간에 그 학생이 제일 똑똑한 거에요. 뒤에 얘기 들어보면 홍해 이야기 사사기 이야기 들으면서 하나님 나쁘다는 거예요. 너무 나쁘다는 거예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게는 영주권 때문에 와 있는 거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빨리 영주권받고 가라고 그랬지요. 선수들끼리는 서로 속이면 안 되잖아요. 영주권 해 주는 거는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 고치는 거와 똑같다고 봐요. 살기 위해서는 법을 조금 어겨도 된다고 보고 미국 이민국에서는 우리가 법을 어기는 줄 다 알아요.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영주권을 받자마자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그랬는데 그 학생이 있는 동안 우리는 배운 거에요. 우리의 언어가 그 중학생에게 이렇게 보이는구나.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한다고 해서 이집트 사람들을 그렇게 떼죽음을 시켜도 되는 거냐? 어떻게 하나님이 줬다고 해서 남의 땅을 쳐들어가면서 아이들까지 싸그리 죽여도 되는 거냐? 이게 찬양거리냐? 아이가 너무 끔찍하게 질문을 ㄹ하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냐? 선생들도 당황하는 거예요. 이런 기독교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똑똑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계승될 거라고요? 어림도 없어요. 이건 기독교가 아니에요. 예수가 중요한 거는 이런 기독교가 아닌, 전혀 다른, 비폭력적이고 생명을 품는 비판적인 그런 기독교잖아요? 저는 예수님 그러면 마가복음 7장 13절 14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전통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거, 뒤집어엎고 그것에 도전하고 인간을 편든 예수, 저는 비판적인 예수로서의 예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나 그건 마가복음 7장으로 가기 전에 마가복음 1장만 읽어도 다 나오는 거잖아요. 저는 마가복음을 너무너무 좋아해요. 너무나 인간적이고. 그 뒤에 읽어보면 이 예수는, 우리가 목회자이니까 본인이야기하지요. 성경에는 없는 거예요.



예수 본인. 성경에는 없지만 이게 되게 재미있었을 거라고 봐요. 저는 역적모의할 때가 제일 재미있거든요. 진짜! 성공하면 더 재미있지만 도적질도 그렇다고 그래요. 모의할 때 재미있고 담 넘을 때 재미있고 전리품 나눌 때 재미있고...제일 위험한 거는 전리품 나눌 때지만. 목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만났을 때 흥분하고 혼자서는 힘든데 이렇게 역적모의할 때 가슴이 떨리고 실패할지라도 예수님도 실패했는데, 바울도 실패했는데, 바울도 마이너리티 콤플렉스 때문에 욕욕하면서 바울이 소수그룹의 대표자거든요. 바울이. 지금은 바울이 문헌을 많이 남겨서 지금은 주류가 되지만 바울은 콤플렉스가 많았어요. 갈라디아서 보세요. 저 기라성같은 저놈들 저주 받아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저 놈들 저주 받아라. 그 사람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사랑하는데 착각하지 마세요. 두 얼굴의 사나이입니다. 저는 그런 예수와 그런 바울을 보면서 너무나 저와 닮았어요. 미안하지만 지랄스러워요. 성격 나쁘다고 그러는데 예수가 무슨 성격이 좋아요? 바울이 뭐 성격이 좋아요? 좋다 나쁘다는 가진 사람들이 권위주의자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도전자들에게 할 때 쓰는 거예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거는 그걸 이야기해야 하는데 성격 나쁘다고 그러면 도매금로 다 넘어가는 거예요. 박정희때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 박근혜가 다시 쓸 지 모른다. 늘 단골메뉴다.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 일부 소수의 깨어난 용기있는 사람들이지 어떻게 일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이예요?



예수 이야기에서 본인은 뭘 했겠느냐? 하나님? no way. 예수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을 했다면 저는 예수 안 믿어요. 저는 하나님 안 믿어요. 예수는 이 일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긍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희열을 맛봤을 거라고 봐요. 생명을 볼보는 거. 단 큐핏이라는 신학자를 제일 존경하는데 80점쯤만. 그 사람이 환갑 이전에는 철이 덜나서 자기 손자손녀들을 보면서 그렇게 즐거웠다고 해요. 생명의 신비를. 그런데 말년에 철이 들어 가지고는 지금 80다 되어 가는데 철이 들어서 이제 사람이 된 거에요. 온 세상 생명들이 다 자기를 향하여 웃어주고 거기서 미래를 본다는 거예요. 철이 안 났을 때는 지 새끼들만 좋은 거예요. 지 새끼들 하고만 즐거운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새끼는 없었지만 짓밟힌 생명들을 보고 거기서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죽어도 좋아 그 말을 했을 거라고 봐요. 가까이 가서 안 봤으니까 그렇지. 늙은이들이 sex를 하면서 죽어도 좋다고 그러는데 sex는 즐거움이 모르긴 몰라도 3초밖에 안 갈 거에요. 짓밟힌 한 생명이 웃음으로 꽃피어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무한히 기뻤을 거라고 봐요 저는. 안 그랬으면 어떻게 예수가 그런 일을 계속 했었을까? 안 그랬으면 바울이 감옥에 갇혔어도 밖에 있는 사람들더러 기뻐하라고 그랬을까? 바울이 정신병자가 아니라고요. 바울의 글에 보면 나는 죽을 뻔 했다고 그래요. 이 사람은 죽고싶은 사람이 아니예요. 죽을 뻔 했다. 매맞아 죽을 뻔 했다. 고생이 심했다.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라는 자각, 확신이 있었어요. 그걸 유교적으로 말하면 천명을 알고 그게 자기와 인카네이션해서 일치한 거지요. 공자가 뭐 50에 천명을 알았다고 그러는데 바울은 그 경지를 산 거지요. 외부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가 그 일을 살면서 안으로 넘치는 희열을 맛 본 거에요. 저는 찌그러진 생명이 피 흘리던 생명이 박수를 치고 웃는 걸 보면 모든 사람들이 웃을 거라고 봐요. 아주 유치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 저는 성악설은 안 믿어요. 사람이 독하다는 거는 믿지만. 아주 아주 옛날에는 영화를 보러 가서 보면 쫓기던 사람이 가까스로 철장문을 넘어서 자유를 얻게 되면 영화 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아멘 안 하시네요. 비행기를 처음 타던 사람이 무사히 착륙하면 옛날에는 박수를 쳤답니다. 비행기를 처음 타 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박수칠 때에 가서는 다 같이 박수를 쳤어요 옛날에는. 그러면 저는 그러지요. 분명히 저기 나쁜 놈들 강패들도 있을 텐데 깡패들이 망가지고 간신히 쫓기는 그 사람이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떻게 똑같은 장면에서 어떻게 똑같이 박수를 칠까? 너무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여러분들이 예수하고 친해져서 예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체험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안 부러워요. 이기철이라고 김홍도를 멸망시킨 사람이 이메일로 컨텍트되어 또 한 번 뒤엎자고 자기가 옛날 자료 다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저는 살만큼 살았는데 그거 다 우스운 일이야 너나 잘 살아라.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공자님처럼 이야기하면 웃길 것 같고, 공자님도 그런 억울한 일 당했는데 나중에 높은 사람 되어 가지고 뭐 좀 하자고 그랬는데 야 그건 사람이 한 일이 아니야. 하늘이 한 일이야 그러고 넘어 가더라고요. 저도 나이가 드니 조금은 그래 져요. 옛날에는 그게 힘들더라고요. 욥기처럼 나는 왜 이래? 별 볼 일없는 애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래?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거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 아픔을 통해서 유배생활을 통해서 제가 발견한 거는 처참하게 신분없이 짓밟히는 한국 사람들과 그들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줄 수 있는 예수의 복음, 예수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발견했기 때문에 신학교에 있을 때에는 관념적으로만 알았는데 여기서 피부로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저는 저 나름대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2021/07/15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 종교는 성경(의 영성)을 구심점으로 역사를 추동한다 이호재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 - 에큐메니안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종교는 성경(의 영성)을 구심점으로 역사를 추동한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12.22 16:50

종교는 권위를 잃었다: 성경은 신학과 교학을 통해 형성된 제도종교와는 다르다

<표 1, 새 축 시대의 구도자의 강령>
명제 1 : 바르게 알았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앎이다.
명제 2 : 바르게 믿었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
명제 3 : 바르게 깨달았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다.


구도자는 성경의 황금률을 귀감삼아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며 제도종교의 원천적 영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직업종교인은 위계적 조직화, 교리와 교학체계 정비, 구제(원)신앙을 종교적 기제로 종교조직을 유지하고 확산시킨다. 이 양자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무너지는 큰 원인은 제도종교의 성장의 핵심이었던 ‘교리와 신학, 교학, 유학과 도학’의 해석학적 전통과 의례체계가 영성의 원천인 성경의 생명을 ‘동맥경화’시키는데서 기인한다. 제도종교는 세속화의 원심력에 의해 형식화, 형해화되면서 종교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현대는 축 시대의 종교적 언어가 가진 종교적 영성이 역사의 추동력을 상실하고 있는 시대이다. 성경의 영성과 제도종교의 문화의 ‘영성적 거리’가 회복불능의 단계까지 벌어진 ‘말기암’증상을 보이고 있다. 제도종교가 낡은 문명의 차별적인 사유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건물성소를 맹신하고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에 함몰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1) 동시에 과학적 유토피아가 선전하는 초과학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포스트 휴먼시대라는 신조어에 주눅이 들어 권위의 원천이었던 종교는 새 축 시대의 한 차원 높은 문명사적 지향점을 설정하지 못한채 과거의 영광을 찬미하는 복고풍의 소리만이 들린다.

종교혁신은 구도자적인 정신을 가진 종교인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순교적인 수난과 성경해석전통의 대전환을 통해 성경의 종교영성을 되살린다. 건물성소 중심의 종교문화의 극복과 종교 간의 융합과 회통, (초)과학의 지도적 영성의 확보는 새 축 시대의 종교가 지향해야 할 삼대과제이다. 새 축 시대는 종교 간의 분별과 차별의 시대가 아닌 다양성을 바탕으로 융합과 회통의 시대이자, 초과학을 포용한 초종교의 시대이다.

새 축 시대는 천문학의 발달에 따른 거시세계의 확장과 이론물리학이 가져다준 미시세계의 발견에 따른 공간확대의 혁명, 통신과 교통의 혁명으로 인한 우주가 축소되는 시간혁명,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결합 등으로 새로운 인간유형의 혁명을 예고한다. 축 시대에 형성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개념자체가 획기적으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필자는 ‘새 축 시대’라고 제안한 바 있다.(2) 바야흐로 종교성과 영성을 다시 회복해야 할 새 축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새 축 시대에 종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포용해야 할 대상은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다. (초)과학은 이미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생명창조와 같은 창조주의 창조성을 모방하려는 차원까지 다가왔다. 과학도 분명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마치 인간 이성이 제시하는 합리성과 논리성의 가치척도라는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수학에서는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말하고,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고 아인쉬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말하고 있다. 수학세계와 관찰세계는 상대적이며,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인간 이성의 결론이다.

종교적 인간은 인간이성의 한계, 과학기술의 한계, 자본의 한계를 가진 과학적 유토피아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인은 종교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과학을 배타적으로 배척하지만, 우주의 공간이 확대되고 우주시간의 거리는 오히려 축소되며, 생명에 대한 제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직업종교인과 종교영역에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눈앞의 도전이다.

변찬린은 1985년 초에 그리스도교가 제도종교로서 형해화되어가는 시점에 과학적 유토피아가 선전하는 내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37년 전의 기록이지만 문명패러다임 전환점에 대한 적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 변찬린, 『요한계시록 信解』, 1985년 2월 22일 탈고 [원고 복사본] , 1986년 5월 25일 초판, 1992년 12월 25일 개판, 2019년 5월 18일 개정신판.


축 시대의 관성에 빠진 제도종교는 과학의 공세와 종교적 영성의 고갈로 무기력에 빠져 있다. 양식 있는 종교인은 현대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말법시대’이고 ‘종말론적인 운세’임을 직감하며 끊임없이 경고음을 내고 있다. 종교인이야말로 과학을 배우고 과학적 유토피아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나가야 할 시대적 책임이 있다. 새 축 시대의 종교인에게 과학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지도(指導)의 대상이다.

위대한 종교인은 새로운 차원의 ‘종교(으뜸가는 가르침)’를 지향하며 종교관리자가 아닌 영원한 구도자의 길을 가면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낡은 문명의 사유체계를 넘어 새로운 문명의 차원을 제시하여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종교는 ‘宗敎’(=‘으뜸가는 가르침’)(3), 즉 시대의 화두, 역사의 공안, 혼돈의 문명에 대한 나침반과 등대불의 역할을 하는 시대적 언어이다. 종교적 영성을 체득한 구도자는 축적된 종교정보와 혼돈의 현실정보를 융합하고 회통하여 미래의 갈 길을 밝히는 목소리를 낸다. 혹자는 호교론적인 신앙의 울타리에서 안주할 줄 모르지만 구도자는 ‘불확실성의 시대’와 포스트 휴먼시대 등의 시대적 개념의 출현, 호모 데우스, 호모 이후의 호모 등 인간 자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동 시대에 출현한 것 자체가 새 문명의 전조를 알리는 상징적 표식임을 직감하고 있다.

그럼 한국 그리스도교는 새 축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한국 종교가 새 축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종교조직은 사회적 기능조직 가운데 가장 생기를 잃은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역사 속에 작동하는 종교는 위대한 종교인과 각성된 민중들에 의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에 불과하였던 유대교는 예수와 바울에 의해 세계 종교인 그리스도교로서 재탄생되고, 중세 가톨릭은 존 위글리프, 얀 후스, 마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이 주도한 가톨릭 혁신운동으로 탈바꿈되었다. 개신교의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형성된 것도 결국은 성서텍스트의 정신을 당대에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의 일환이다. 이는 신유학, 양명학, 선불교의 전통 등 역사 속의 다른 종교도 위대한 종교인의 혁신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는 시점에 유대교는 유대인의 민족종교로서 이스라엘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는 가톨릭(로마 가톨릭, 동방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나뉘어져 있다. 문명전환기에 과연 그리스도교가 창교목적에 합당한 본질적 정신을 역사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예를 들면 개혁교회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개혁을 시대의 언어로 삼아 대중에게 호소하여 성장한 교회이다. 만약 개혁교회가 개혁을 중단하면 개혁교회의 역사적 실험은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교회사가들이 후세에 기록할 것이다.

그럼 서학으로서의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한국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을까? 한마디로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는 서구 신학의 연장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리전이다. 마치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정통으로 삼아 선맥(僊脈)과 무맥(巫脈) 등 한국의 종교문화를 ‘이도(異道)’ 취급을 하던 역사적 데자뷰이다.

이찬수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은 어쩌면 한국에서 한국 천주교와 한국 개신교를 동시에 균형 있게 비평한 거의 ‘유일한’ 책이랄 수 있다. 그는 한국에는 아직도 한국 천주교사와 한국 개신교사가 통사적 관점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관계자가 잘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토착화 신학’을 말하기에 앞서 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교회 분열사가 한국 교회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종교현상에 대해 깊은 반성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답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이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특수성을 가지면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이찬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어찌 되었든 그리스도교적이면 충분하지 굳이 한국적일 필요가 있느냐고 …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정답의 절반만 들어있다. ‘한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논의는 두고두고 진행되겠지만 그리스도교가 한국적이라는 말속에는 그리스도교가 더 그리스도교적다워야 한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적이면 충분하다는 말 역시 지역적 특수성 – 이 글의 맥락에서는 한국 문화-이 반영되고 있을때에만 그리스도교도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특수성을 통해서만 성립된다.(4)


한편 한국의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서구에서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토착화를 추진하였을까? 김경재는 『해석학과 종교신학』에서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문화에 적응하는 개신교의 모델을 범주화하여 비평한다. 즉 보수주의 신학의 파종모델, 진보주의 신학의 발효모델, 자유주의 신학의 접목모델, 민중주의 신학의 합류모델이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어떠한 모델에 해당할까? 이정배는 정약용, 유영모, 함석헌을 사례로 하여 『토착화와 세계화 – 한국적 신학의 두 과제』 등에서 “탈민족, 탈기독교적 기독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한국문화신학회에서는 최병헌, 유동식, 유영모, 최태용, 함석헌, 김교신, 윤성범, 서남동, 안병무, 이정용 등을 『한국신학, 이것이다』라는 주인공으로 내세워 조명한다. 그렇다면 천주교인 가운데서는 어떤 종교인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한국 천주교에서는 “한국 신학은 이렇다”라는 주제의 글은 거의 보이지 않고 다른 종교와 대화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천주교의 이런 입장은 보편교회를 표방한 제국종교의 관성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의 위계질서속에 정양모, 심상태, 김승혜, 박일영 등의 학문적 성과는 기억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드문 의문은 장 칼뱅, 존 웨슬리 등 교파교회를 계승한 한국 개신교는 교파교회가 만들어진 역사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다원적 종교적 문화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 교회’는 발생할 수 없는지 궁금하다. 서구의 교파교회만이 왜 한국 개신교 전통이 되어야만 하는가? 한국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그리스도교’가 새롭게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문제제기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자, 천도교학자, 원불교학자 등이 모여 원불교, 천도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의 한국종교를 “종교답게 하기 위한 애정 어린 비판들”이 『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 책은 결국 성경에 근거한 종교적 신앙과 이를 상실한 종교문화의 괴리로 인해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게 만드는 종교현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5)

변선환은 “아시아 종교들이 텍스트가 되어야 하고 서구 신학적 내용들이 각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촉구하고 나선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아시아 종교들이 텍스트가 되고 서구 신학적 내용이 각주가 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어디에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교 문화의 근저인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관점에서 ‘도의 신학자’인 김흡영은 한국 개신교에서 벌어지는 서구 신학의 대리담론에 각성을 촉구한다. 즉 한국 개신교는 서구신학의 구원론, 원죄론, ‘말씀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논쟁’, ‘번역신학의 경향’, 로고스신학과 프락시스 신학의 이원화‘, 교회론적, 인식론적 수준의 신학“은 재고되어 한국의 주체적인 신학하기를 주장한다.(6) 이를 위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할 작업은 무엇일까?

필자는 새 축 시대를 준비하는 한국 그리스도교는 

1) 성서를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의 맥락에서 형성된 ’교리와 신학‘에서 탈피하여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에서 새롭게 읽기, 
2) 성서를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으로 회통적인 성서해석을 하기 
3) 성서와 제도그리스도교의 괴리된 ’영성적 거리‘를 축소시키기 위한 종교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금도 일부 직업종교인은 한국 종교계의 혁신을 위한 종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을 위한 운동‘인 종교이벤트행사가 아니라 핵심담론을 포함한 지속성이 담보되는 종교운동이어야 한다. 핵심담론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사참배의 역사적 참회, 그리고 성전매매와 성전세습의 근절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두 과제는 실추된 제도종교의 종교적 권위를 일거에 회복할 수 있는 종교적 행위이다.

새 축 시대는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데서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의 성경읽기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변찬린은 ‘교리와 신학’에 의해 왜곡된 그리스도교 문화의 본질적 훼손을 ‘성서’를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서구신학의 바탕이 된 성서해석을 텍스트로 삼고, 이로 형성된 서구 ‘신학과 교리’가 각주로 된 그리스도교 문화가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소화도 되지 않은 채 이식되었다고 한다. 변찬린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의 근간을 이룬 성서해석 자체에 대한 해석학적 전환을 시도한다. 즉 성서를 새롭게 읽어 교리화된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해 보자는 것이다. 성서를 텍스트로 삼아 다종교적 언어의 전통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성서’를 새롭게 읽어 새 문명의 사유체계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종교혁명의 대선언이다. 그 종교적 주장이 “성경과 교리화된 기독교를 혼동”하는 데서 탈피하자는 선지자적 목소리이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과 ‘교리와 신학’에 의해 형성된 제도종교 문화와의 영성적 거리를 좁히는 첫 걸음이다.


우리는 이날까지 성경해석을 서구 신학자들의 방법을 무조건 답습(踏襲)했고 모방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신학과 교리를 소화도 하지 못한 채 포식(飽食)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서양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교리만이 진리의 전부요 성경 해석의 방법이지 그 밖의 것은 이단으로 정죄하고 타매(唾罵)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서구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입한 교리와 교파의 잘못된 선입관념을 버리고 빈 마음자리에서 성경을 다시 읽자. 우리는 성경과 교리화된 기독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 = 기독교라는 등식에서 빨리 해방되는 길만이 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성신과 해후할 수 있는 첩경임을 대각(7)해야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486.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 속에서 쓴 〈성경의 원리〉 상·중·하 세 권은 두 사이비 종교 (기독교와 맑스교)의 괴뢰로 전락된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제출한 나의 피 묻은 각서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한국신학연구소, 2019, 10.


위의 발언에 대해 ‘성서’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이해관계자는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교학, 신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은 학문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의 비평과 텍스트로 인해 형성된 텍스트문화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터 위에 지식의 고고학을 형성한다. 비평이 없거나 비평을 허용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다. 동시에 성경의 정신과 상당한 영성적 거리를 가진 종교문화를 비평하는 것은 해당 종교의 건전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교 종교문화는 건전한 비평과 진실된 종교선전이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호교론적이고 선교론적인 글이 넘쳐난다.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화될 수 있는 우월성이 가려져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의 본질과 정신이 서구 신학에서 ‘교파와 교단과 교리’를 통해 고착되어가는 그리스도교 문화와의 괴리현상에 대한 비평은 한국 그리스도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8) 특히,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의 역사적 과오와 교회매매와 교회세습은 이 시대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신앙의 근저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성모독을 한 한국교회가 진정한 참회없이 어떤 종교적 권위로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또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에 경도된 그리스도교의 종교문화는 성서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현상임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혁신의 목소리가 한국교회에 작동하고 있는지 여부는 교계 내부에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순교의 정신과 고난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로 성장할 때 종교적 영성의 상징이었다.

주류 직업종교인은 ‘교리와 교학’을 통한 정교한 의례체계로 제도종교의 유지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창교자의 언행이 종교문화에 생동하고 있지 못한 현실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그럼 어떻게 새 축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새롭게 읽어야 할 때이다. 변찬린은 성서와 그리스도교 문화에 국한하여 이렇게 진단한다.
무출구(無出口)의 현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 시대를 뚫어보는 깬 자라면 마땅히 산으로 퇴수해야 한다. 현대의 산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올라야 할 산은 히말라야산도 시내산도 계룡산도 아니다. 성경은 상징의 아아(峨峨)한 영산(靈山)이다. 이 산에 입산하여 서양의 지혜에 의해 잘못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풀어야 한다.
(중략)
예수가 승천하고 사도들이 순교한 후 진리의 정맥은 지하깊이 스며들고 역사의 지표에는 연원을 잃은 온갖 교파들이 백강(百江)의 흐름처럼 아집과 독선의 탁류(濁流)를 일으키면서 도도(滔滔)히 흘러갔다.
생명수의 뿌리를 잃고 온갖 교리로 절단된 삽목(揷木)들이 나라와 민족과 풍토와 습관에 따라 심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의 진리가 로마에 이식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곡해되고 헬레니즘과 혼음한 후 기독교(가톨릭) 라는 옷을 입고 서양화된다. 모든 고등종교는 동양에서 발아(發芽)되어 정과(正果)를 맺었다. 성경도 동양의 심성 속에 계시된 평화의 문서인데 피묻은 서양의 가위로 오리가리 재단(裁斷)되어 사과(邪果)를 맺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길 원했으나 쓸개 포도가 된 것처럼….
그리하여 성경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착각이 2천 년 동안 지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이 엄청난 미망과 허위와 독단을 타파해야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9-10.


새 축 시대의 성경읽기는 글의 맨 앞에 제시된 [표 1, 새 축 시대의 구도자의 강령]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성경은 구도자의 입장에서 본향을 찾아가는 문서로서 읽혀져야 하며, 제도종교는 성경의 정신을 공동체성으로 구현하는 지향점을 가질 때에만 존재근거가 있다. 만일 그 심각한 부조화의 간격을 극복하지 못하는 제도종교는 역사의 유적으로 남을 뿐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의 정신과 제도종교문화의 영성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건강한 종교적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코로나 판데믹 시대의 제도종교가 관습과 관례의 굴레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는 역사적 고아로서 후세는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의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운동의 기수로서 기록될 것인지는 이해관계자의 실존적 결단에 달려있다.

새 축 시대의 종교인은 혼합과 융합, 혼잡과 회통을 혼돈하는 지점에 배타적인 종교담론을 형성하지 말고 ‘포월적 상생’할 수 있는 포용의 준거점을 설정하는데서 새 축 시대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이다.

미주
(미주 1) 이 글의 논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길희성은 탈종교시대가 지향해야할 바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길희성, 『종교에서 영성으로』, 북스코프, 2018.
(미주 2)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문사철, 2017. 이 책의 제1편에서 개념을 도입하여 이런 맥락하에서 본문을 전개하고 있다.
(미주 3) 서양 종교문화에서 종교를 지칭하는 religio’는 신과 인간사이에 단절된 관계를 연결시켜 준다는 그리스도교적 환경에서 만들어 졌으나, 이 ‘religio’가 1869년 독일과 일본의 두 나라가 통상협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종교라고 번역되었다. 종교는 벽암록에서 첫 출전을 보이며 ‘중요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학자들은 종교를 능가경의 싯단타(siddhanta), 즉 ‘성취하여 완성하다’는 싯다(siddha)와 ‘끝내다’라는 안타(anta)의 뜻을 차용하여 번역하였다. 
최종석,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 민족사, 2017, 5-8.
(미주 4)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11.
(미주 5) 사실 한국종교가 가진 다양한 문제점에 대한 글은 호교론적인 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건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 글들은 건강한 종교문화가 형성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을 참고할 것: 
  • 김근수 외, 『지금, 한국의 종교』, 매디치미디어, 2016; 
  • 김광식, 『새 불교운동의 전개』, 도피안사, 2002; 
  • 이정배, 『두 번째 종교개혁과 작은교회운동 : 종교개혁 500년 이후, 기독교의 한국적 재주체화를 위하여』, 동연, 2017; 
  • 이오갑, 『한국 기독교 개혁의 태마 20』, 한들출판사, 2002; 
  • 김영철, 『목회자가 사는 길: 하나님 앞에 선 노목사가 후배 목회자들에게 전하는 애끓는 당부』, 아바서원, 2013.
(미주 6) 김흡영, 『도의 신학 Ⅱ』, 동연, 2012, 27-41.
(미주 7) 인용글의 고딕체는 필자가 강조를 위하여 표시함.
(미주 8) 이호재, 〈한국교회에는 올바른 교회론이 있는가-건물 교회에서 인격 교회, 인격 공동체로〉, 《뉴스앤조이》, 2019, 11.5; 같은 필자, 〈한국교회, 새로 시작해야 한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 문명을 선도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하여〉, 《뉴스앤조이》, 2020, 11.2.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2021/06/23

알라딘: 빈탕한데 맞혀놀이

알라딘: 빈탕한데 맞혀놀이

빈탕한데 맞혀놀이 - 다석으로 세상을 읽다   
이정배 (지은이)동연출판사2011-11-02


책소개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다석학회 회원으로 다년간 다석사상을 연구해온 이정배 교수가 다석과 관련하여 연구한 두 번째 책이다. ‘빈탕한데’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허공’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석 선생은 평생의 소원을 그 ‘빈탕한데’ 맞혀(맞춰) 노는 것이라고 했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실체는 ‘빈탕’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토착화’는 WCC의 JPIC(정의·평화·창조의 보존) 한국 대회에서 기독교의 10대 과제로 뽑힐 만큼 중요한 과제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이듯이 신토불이(神土不二)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옷을 입혀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착화 신학의 과제이고 저자는 토착화 신학의 원류, 토착화 신학의 절정을 다석에게서 찾는다. 토착화된 신학이기에 세계적인 신학일 수 있다. 다석을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서슴없이 올릴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서론_ 미정고(未定稿)로서의 예수 - 多夕 유영모를 만나기까지
1. 신학적 영향사(影響史)의 개관
2. 오늘의 시각에서 본 가족사와 학창시절
3. 一雅 변선환 선생
4. 프릿츠 부리와의 만남
5. 스승 없이 스승되어 살기
6. 초현실주의 신학자 이신(李信)의 재발견
7. 토착화 신학의 절정으로서 多夕학파의 기독교 이해
8. 신학함의 동반자가 있어 행복했던 25년

제1부 한국 신학의 두 과제, 토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른 多夕의 기독론

1장. 多夕신학에서 본 ‘역사적 예수’의 기독론
들어가는 글
1.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기독론 비판의 근거 - 부활 이전/이후 예수상(像)의 구별
2. 초자연적 유신론 및 인습화된 ‘케리그마’ - 바울 신학과의 연계를 중심하여
3. 역사적(부활 이전) 예수의 신성(神性)과 영(靈)기독론 - ‘참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 이해
4. 역사적 예수의 한국적 재(再)케리그마화 - 영(靈)기독론에서 多夕의 ‘얼’기독론으로

2장. 多夕신학 속의 자속(自贖)과 대속(代贖), 그 상생(相生)적 의미
들어가는 글
1. 기독교 케리그마(Kerygma)는 불변의 상수(常數)인가?
2. 역사적 예수 삶의 탈(脫)현대적 조명
3. 多夕의 예수 이해, 상생적 구속론의 사상적 토대로서 <天符經>과 三才사상
4. 역사적 예수 삶의 재(再)케리그마화로서 多夕의 스승기독론 - 대속(代贖)과 자속(自贖)의 상생(相生)적 차원
나가는 글

3장. 민족과 탈(脫)민족 논쟁의 시각에서 본 多夕신학 - A.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의 비판적 독해
들어가는 글
1. 토착화 신학의 토대로서 ‘한국적 주(정)체성’, 그 실체는 있는가?
2. A. 네그리의 민족주의 비판의 새 차원 - ‘제국’의 도래와 세계적 가난의 실상
3. 다중(多衆)의 삶정치(Biopolitics)와 ‘유러피언 드림, 그 공감의 정치학’
4. 한국적 ‘통섭론’에서 본 새문명론과 多夕의 ‘다중(多衆)’기독론 - 3세대 토착화론에 대한 소견
나가는 글

제2부 두 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 -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

1장. 귀일(歸一)사상에 근거한 多夕의 유교 이해
들어가는 글
1. 多夕의 시각에서 본 유교와 기독교 만남의 역사 및 평가
2. 역사적 유교의 한계와 歸一사상에 근거한 유교 본래성 이해
3. 유교경전에 대한 多夕의 신학적 해석학
4. 성서 풀이 속에 나타난 후천(後天)시대의 多夕의 기독교상(像) - 귀일(歸一)사상에 근거하여
나가는 글

2장. 多夕신학 속의 불교
들어가는 글
1. 삼재론(三才論)의 틀에서 이해된 多夕의 신학적 회통 원리
2. 불교와 기독교 간의 소통 원리로서의 여래장(如來藏)사상 - 삼재론(三才論)에 대한 불교적 이해
3. ‘自他不二’적 구원(해탈)론으로서 십자가 사건 - 돈오돈수(頓悟頓修)적 점수(漸修)론과의 대화
4. ‘얼나’와 불교적 ‘無我’(成佛) - ‘덜 없는 인간’을 넘어서

3장. 기독교의 동양적, 생명적 이해 - ‘빈탕한데 맞혀 놀이’와 진물성(盡物性)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글
1. 없이 계신 하느님과 귀일(歸一)사상
2. 십자가와 참(얼)나
3. 바탈[本然之性]로서의 성령
4. 빈탕과 하나되는 삶 - 자속과 대속의 불이(不二)적 관계
나가는 글

제3부 多夕으로 오늘의 세상 읽기 - 多夕신학과 현대 사조와의 만남

1장. 생명담론의 한국적 실상 - 생명담론으로서 多夕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하여
들어가는 글
1. 생명의 형이상학적 이해, 그 새로운 시도들
2. 신과학의 전일적 생명론과 그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
3. 진화생물학의 생명담론 실상과 전개 및 비판 - ‘通涉’ 개념을 중심으로
4. 한국에서 전개된 자생적 생명철학 - 동학, 多夕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의 한국적 수용
나가는 글 - 현대적 생명담론과 多夕사상의 치열한 만남을 꿈꾸며

2장. 한국적 통섭론(通涉論)으로서의 多夕신학 - E. 윌슨의 ‘생명의 편지’에 대한 한 답신
들어가는 글
1.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편지』 풀어 읽기 - 생명을 위한 연대의 제안
2. 『생명의 편지』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 - 토마스 베리의 우주 진화적 신학과 샐리 맥페이그의 성육신적 생태신학을 중심하여
3. 기후 붕괴 및 종의 멸종 시대와 多夕의 생명사상 - ‘統攝’을 넘어 ‘通涉’으로
4. 한국적 통섭론(通涉論)의 시각에서 본 『에코지능』과 『생체모방』 - 多夕 생명사상의 구체적 실상
나가는 글

3장. 種의 기원과 種의 멸종 사이에서 본 多夕의 ‘없이 계신 하느님’
들어가는 글
1. 다윈 진화론의 핵심 내용과 기독교와의 갈등 배경
2. 진화론에 대한 현대적 논의들 - 유물론적 진화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3.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한 신학적 논의들 - 설계, 성사(聖事)를 넘어 ‘약속’으로?
4. 창조와 성육의 통합으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와 多夕의 ‘없이 계신 하느님’ - 약속을 넘어 ‘책임’으로!
나가는 글

접기
책속에서

서론 중에서

필자의 多夕연구는 크게 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多夕의 동양적 기독교를 서구 종교다원주의 틀에서 다루되 그와의 변별력을 강조했다. 소위 그의 ‘얼기독론’을 서구 다원주의 시각의 급진적 내재화로 본 것이다. 최근에는 그의 ‘얼기독론’을 ‘다중多衆기독론’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두 개의 ‘탈脫’ 탈현대와 탈식민성을 의식했던 까닭이다. 둘째는 多夕사상을 일본 교토학파와 견줄 만한 사상체계로 이해하는 일이었다. 해서 필자에겐 多夕한 사람만이 중요하지 않았고 함석헌 · 김흥호를 비롯하여 박영호 등 多夕을 스승으로 모신 이들의 사상과 多夕과의 관계를 묻는 일이 소중했다. 多夕학파란 이름하에 이들을 함께 묶을 수 있는 틀거지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에 초점을 맞춘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다른 점도 확연히 드러났다. 무게 중심이 기독교에 있었던 까닭에 이들에게 예수는 이론적 전거만이 아니라 고백적 토대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多夕의 기독교 사상을 민족문화 속에 스며든 <천부경>, 그 영향사의 정점으로 보았고 유불선(儒佛仙)은 물론 동학(東學)과도 회통할 수 있는 대승적 틀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십자가를 수행적, 자/타불이(自/他不二)적 대속론(代贖論)의 차원에서 설명한 것이 바로 그 핵심 증거이다. 성직만 있고 수도(修道)의 개념이 간과된 한국 기독교에게 그의 수행적 기독론은 상당히 유의미하다. 향후 필자는 多夕이 남긴 난해한 원전을 더욱 깊이 읽어갈 생각이다. 그러나 多夕을 과거적 시각에서가 아닌 현대 신학적 주제들과 맞부닥트릴 계획이다. 이미 다중(多衆), 생태신학, 진화신학, 역사적 예수 연구의 차원에서 多夕을 조명한 글들을 준비해놓았다. 물론 이런 글쓰기는 多夕한 개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多夕학파의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多夕연구는 순수 종교적 · 이론적 차원에서만 비롯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식치 못했으나 동양적으로 이해된 십자가 개념 속에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케리그마(kerygma)가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多夕에게는 십자가를 지신 스승 예수가 중요했고 그의 십자가를 ‘일좌식 일언인(一座食一言仁)’이란 말로서 동양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것은 그것을 믿는 차원을 넘어 그렇게 사는 길밖에 없을 터, ‘일좌식 일언인’이란 말 속엔 자본주의와 맞설 수 있는 삶의 에토스가 가득 차 있다. 소승적으로 자신 한 몸 수신(修身)하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 가득 찬 죽음의 세력(자본주의)과 맞서는 길이란 것이다.
필자 역시도 처음에는 多夕사상 속에서 개인적 차원만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전 재산이 오늘의 동광원의 기초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제 뜻 버려 하늘(아버지) 뜻’이룬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날 반(反)생태적 천민자본주의와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치열하게 공적(公的)인 삶으로 부르는 것, 사(私)와의 사투(死鬪)를 벌리는 일이 多夕에게 ‘일좌식 일언인’으로서의 십자가였던 것이다. 필자가 多夕사상 속에서 한국적 생명신학의 정수를 재인식하고 이에 몰두하게 된 것도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다. 多夕사상 속에 신학적 화두인 ‘생명’을 발견한 것은 필자에겐 은총 그 자체였다. 향후 한국적 생명신학의 차원에서, 아니 내 자신의 삶 속에서 多夕사상을 깨치고 체화시키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뿐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벨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했고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 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백 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상임 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정배의 생명과 종교 이야기』, 『이웃 종교인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 『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켄 윌버와 신학』,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토착화와 생명 문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종교개혁 500년 以 後신학』과 『3.1정신과 以後신학』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접기
최근작 : <유영모의 귀일신학>,<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 … 총 4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 다석일지 중

현대 담론을 다석 유영모의 사상으로 읽어내다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다석학회 회원으로 다년간 다석사상을 연구해온 이정배 교수가 다석과 관련하여 연구한 두 번째 책 『빈탕한데 맞혀 놀이 - 多夕으로 세상을 읽다』를 펴냈다. 첫 번째 책,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을 내며 다석 사상을 깊이 있게 내재화시킨 저자는 이 책에서 다석사상으로 현대의 신학 담론들, 현대 사조들과 만남을 시도한다.
‘빈탕한데’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허공’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석 선생은 평생의 소원을 그 ‘빈탕한데’ 맞혀(맞춰) 노는 것이라고 했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실체는 ‘빈탕’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토착화’는 WCC의 JPIC(정의·평화·창조의 보존) 한국 대회에서 기독교의 10대 과제로 뽑힐 만큼 중요한 과제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이듯이 신토불이(神土不二)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옷을 입혀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착화 신학의 과제이고 저자는 토착화 신학의 원류, 토착화 신학의 절정을 다석에게서 찾는다.(물론 다석 스스로는 토착화라는 단어를 쓴 적은 없다.) 토착화된 신학이기에 세계적인 신학일 수 있다. 다석을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서슴없이 올릴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론 “미정고(未定稿)로서의 예서 - 多夕을 만나기까지”에서는 저자 자신의 신학적 실존,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난 多夕의 의미를 정리한다. 숫한 신학 여정에서 씨름하며 만난 뭇 이론들과 만나 씨름했던 저자가 온전히 무릎 꿇을 사건을 多夕사상을 만난 것이라고 하는 저자의 삶으로 다석을 반추한다.

1부 “한국 신학의 두 과제, 토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른 多夕의 기독론”에 속한 세 논문은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들과 탈(脫)민족주의 이론들과의 대면을 통해 多夕이 이들 담론들 속에 내재된 서구적 갈등, 곧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민족과 탈민족주의 간의 대립을 동양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적시한다. 1부에서 제시한 자속과 대속의 불이(不二)적 성격 나아가 多夕의 ‘얼기독론’의 재해석으로서 다중(多衆)기독론을 통해 이들 서구 담론에 대한 동양적 응답을 접할 수 있다.

2부 “두 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 -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에서는 역으로 한국 고유한 종교들, 즉 유교와 불교와 만날 수 있는 신학의 적실한 가능성으로서 多夕사상을 언급한다. 축(軸)의 시대 종교들의 영향력이 실재하는 한국 땅에서 서구식의 어떤 종교다원주의 유형도 이런 실상을 온전히 밝힐 수 없다는 판단에서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多夕이 한국 고유한 <천부경(天符經)>의 귀일(歸一)사상의 빛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유교와 불교를 풀었기에 두 번째 차축(後天)시대(후천시대)에 합당한 회통적 기독교를 말했다고 확신하며 글을 풀어나간다.
마지막 3부 “多夕으로 오늘의 세상 읽기 - 多夕신학과 현대 사조와의 만남”에서는 우리 시대의 화두인 생명담론과 多夕사상의 상관성을 논한다. 진화생물학자로서 생태학에 관심 깊은 E. 윌슨의 통섭(統攝)적 생명론을 多夕의 눈으로 비판했고 다윈 진화론에 대한 서구적 논의구조 속에 뛰어들되 종(種)의 멸종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多夕신학의 얼과 구조가 얼마나 더 현실적 대안일 수 있는가를 역설한다. 동서양에서 논의되는 생명담론들의 빛에서 多夕의 생명사상을 자리매김한 것도 저자가 주안점을 둔 곳이다. 접기

유영모·함석헌 사상 연구 발표집 Ⅰ 제22차 세계 철학대회 2008

cs.libp.net/ofmkorea/CS4_2120.asp?F1=19874&F2=1&B1=&B2=&B3=&B4=&SAIR2=&MASTER=&R1=151&R2=&R3=

유영모·함석헌 사상 연구 발표집 Ⅰ / 제22차 세계 철학대회
저자사항 씨알[편]
발행사항 서울 / 재단법인 씨알 / 2008
형태사항 237p. / 초상화(인물사진) / 30cm
주기사항 제22차 세계 철학대회/때: 2008.8.2(토)-3(일)/곳: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 목암홀 ---

  
 목차정보

3분과 : 유영모의 철학 : 생명과 종교 
11:10-11:10 개회 인사 / 박재순 소장 

11:10-12:30 주제 발표 

  • 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 多夕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 이기상 교수 = 1 
  • 天符經을 통해서 본 東學과 多夕의 기독교이해 / 이정배 교수 = 25 
  • 道가철학과 多夕사상 / 강지연 교수 = 47 
  • 없이 계시는 하느님 多夕 유영모의 절대자 이해 / 윤정현 교수 = 57 
  • 12:30-12:50 질의 토론 

4분과 : 함석헌의 철학 : 정치와 평화 
14:00-14:10 개회 인사 / 이정배 교수 
14:10-15:30 주제 발표 
  • 내면의 정치학 - 함석헌 정치사상 / 이규성 교수 = 83 
  • 함석헌의 인간관 - 호모 레지스턴스 / 김상봉 교수 = 95 
  • 함석헌의 평화사상 - 예수ㆍ간디ㆍ함석헌의 비폭력 저항 / 유석성 교수 = 119 
  • 함석헌의 민중 평화론의 탈근대론적 해석 / 정지석 교수 = 145 
  • 15:30-15:50 질의 토론 

5분과 : 함석헌의 철학 : 역사와 현실 
16:00-16:10 개회 인사 / 정지석 교수 
16:10-17:30 주제 발표 
  •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나선형적 역사관의 형성요소에 관하여 / 김경재 교수 = 149 
  •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유 - '저절로 그러함'을 중심으로 / 김명수 교수 = 171 
  • 모성성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씨알, 생명사상 / 차옥숭 교수 = 193 
  • 핵심역량 개발과 마음의 계발 다석의 中庸에 대한 관점 / 이종재 교수 ; 송경오 교수 = 217 
  • 17:30-17:50 질의 토론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⑤-6 이정배 교수 인터뷰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 아주경제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황호택 논설고문입력 : 2021-02-17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⑤ 이정배 교수 <上>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서울에서 인사동 삼청동 부암동 같은 곳은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다.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가고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이 자리 잡고 있다. 부암동에는 김환기 미술관, 윤동주 문학관, 석파정 서울미술관, 젓가락 갤러리 ‘저집’ 등 문화 명소가 많다. 고풍스런 동네에 눈발이 날리니 분위기가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윤동주 문학관 옆에 차를 세우는데 이정배 교수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교수의 집은 문학관에서 멀지 않았다. 대문에서 안채로 이르는 가파른 돌계단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교수 집 2층 창밖으로 부암동의 푸근한 설경(雪景)이 액자 그림 처럼 내다보였다. 이 모습을 놓치기 아까운 듯 인턴기자가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교수가 고창의 윤정현 신부가 보낸 것이라며 곶감을 내놓았다. 고영재 부근 야산의 감을 따서 깎고 말려 보낸 정성이 대단하다. 릴레이 인터뷰 1호가 3호에게 보낸 곶감이다.
다석은 수를 좋아하고 셈을 즐겼다. ‘호암(문일평)이 52세(1만8545일)로 가시니 나보다 627일 먼저 나시었다.’(다석이 쓴 추도문) 다석은 이런 식으로 숫자 기록을 많이 남겼다.

-윤정현 신부, 이 교수 그리고 인터뷰어가 공교롭게도 모두 1955년생 양띠입니다. 다석이 지금 살아있으면 132세였을 텐데요. 55년생인 우리 나이의 딱 두 배가 132네요. 다석도 숫자 계산을 하다가 기묘한 우연을 발견하면 즐거워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우리가 지금 다석 나이의 절반, 그러니까 다석의 허리춤 정도에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석은 ‘나만 따르라’ ‘추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길 삼아, 다리 삼아 한 번 건너라’고 했습니다. ‘나의 허리춤을 잡고 씨름하라’는 의미로 새기고 싶습니다.

-2020년, 작년이 정년이었군요. 정년 4년 반을 앞두고 학교를 떠났더군요.

“31살에 교수로 부임해 30년을 재직했기에 남들 할 만큼 충분히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학내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학생들 편에서 학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요. 교수직 사퇴를 배수진으로 치고 학교 당국과 씨름하고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세월호가 주는 충격이 컸습니다. 강단 신학자로만 학교에 머무는 것이 제 양심에 허락지 않았죠. 국가와 교회 공동체의 문제에 우리가 뛰어들어서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겸사겸사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일찍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석의 묘소는 둘째 아들 자상이 꾸리던 강원도 평창의 농장 인근에 있다. 다석은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들들이 듣지 않고 묘소에 모셨다. 다석 부부 합장묘를 참배한 이정배 이은선 교수 부부. [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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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 <빈탕한데 맞혀놀이>의 도입부에 자전적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서울에서 사업을 일구었다가 실패한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기 싫어 처가가 있는 충북 보은으로 이사 갔다. 그렇지만 자식들은 서울로 보냈다. 누나는 이화여대에 다녔다. 그는 영락교회 재단인 대광 중고교에 다니다 기독교를 접했고, 누나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저희 집안은 전통적 유교 집안입니다. 아버님은 제사를 지내면서 울기까지 할 정도로 조상들에게 죄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던 분이었지요. 나는 그런 배경에서 대광중고교를 다니면서 기독교를 알게 돼 감리교 신학대학에 갔어요. 김리교 신학대학 학생들 중에 목사 장로의 아들 딸이 많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자녀는 나를 포함해 몇 사람 없었던 것 같았어요. 생각만큼 학교 공부가 재미없었습니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던 차에 대학 3학년 무렵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변선환 교수를 만났죠.

그 당시 나는 기독교 교리에 깊이 빠져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데, 그럼 우리 부모님은 어떡하나…”라는 고민이 컸습니다. 그런데 변 교수가 새로운 신학 사조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유교적, 무속적, 불교적 바탕이 매우 소중하고, 서양 사람들이 갖지 못한 정신적 자산을 잘 활용하면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를 학문의 길로 이끌어 준 것이지요.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신앙 양식에 눈 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마복음 "우리를 나간 한 마리 양이 되라"

변 선생의 뒤를 이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더니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한 김흥호 교수(1919~2012)가 명예교수로 와 있었습니다. 바로 옆방에 있던 그분의 가르침을 받게 됐지요. 김 교수는 자신도 다석한테 그렇게 배웠다면서, 나를 한 시간씩 일찍 학교 나오게 해서 다석 사상을 가르쳐 줬어요. 그렇게 2년 이상에 걸쳐 다석에 입문했지요.”

방에 김흥호 선생이 1993년 이 교수에게 써준 글씨가 걸려 있었다.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가 쓴 시구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이었다. ‘시가 떠올라 취중에 붓을 휘갈기다’라는 뜻이다. 이 교수는 하느님의 영에 취해서 학문에 몰두하라는 김흥호 선생의 분부 같다고 해석했다.

-초기 예수 공동체의 도마복음에는 동정녀, 예수님의 부활, 재림, 대속(代贖) 신앙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과정에서 예수가 신격화했다고 하던 데요.

“예수 사후(死後),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국교화하는 AD 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누가 옳고 그르고, 누구는 정통이고, 누구는 이단 같은 구분이 없었습니다. 도마복음서가 있었던 것은 도마를 추종하는 예수 공동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최초의 복음서라고 하는 마가복음서도 예수의 죽음으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한 세기 지난 이후에 부활 이야기를 첨가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따르던 공동체들이 많았습니다. 도마복음서의 공동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양 99마리가 있는 우리를 떠나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죄인이라 하고, 그 양을 다수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도마복음서는 차라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되라고 합니다. 기존 교회가 제도(교리)화 하고 성직자 중심으로 변질돼 가는 정황에서 오히려 도마복음서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을 진정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본 것이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는 과정에서 도마복음서는 제도를 부정하는 거추장스러웠던 책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경에서 제외된 측면이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는 성경에 다르게 묘사돼 있는가요.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30세 될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모습부터 시작합니다. 
그것보다 조금 늦게 쓰인 마태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30년 소급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예수의 삶이 조금씩 도그마화하고 교리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쓰인 누가복음서에는 예수의 재림, 승천, 심판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리고 가장 늦게 쓰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를 로고스인 하나님과 동격이라 묘사합니다.

 나중에 쓰인 복음서일수록 예수님에 대한 신성화, 예수님에 대한 교리화, 도그마화 하는 과정이 두드러집니다. 이에 반해 예수 어록을 담고 있는 도마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김흥호 교수가 제자 이정배 교수에게 써준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 글씨 [사진=황호택]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속죄(贖罪)를 대신(代身)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영생한다는 대속(代贖) 신앙은 정통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데요. 그러나 다석은 대속 신앙에 대해 “나와 관계 없다”고 했는데요?

“톨스토이가 스스로를 비정통이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다석도 스스로 비정통이라고 했습니다. 다석이 본래는 주일 아침만 되면 연동교회 승동교회 새문안교회 등 여러 교회를 다녔고,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을 기독교로 인도할 만큼 정통 신앙에 빠져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유학 시절에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습니다. 그의 일본식 기독교에 접하면서 다석의 마음속에는 한국식 기독교라는 형상이 잡혀갔겠죠.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적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루터의 대속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일본적 기독교는 물론 대속 사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일본에 갔던 함석헌도 이 점에서 동일합니다. 대속 사상은 동물을 잡아 피를 바쳐야 했던 유대 민족의 제사 풍습의 연장선에서 나온 예수에 대한 이해지, 오늘날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낯설다고 본 것이지요.
서양의 기독교가 예수를 통해 구원 받는 대속 신앙을 가르쳤다면 동양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가는 자속(自贖) 신앙이라고들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속과 자속의 의미를 철저히 구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삶이 있었고, 그 삶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 이상 이 길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란 차원에서 대속의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따라 살다가 우리도 그처럼 길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을 자속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가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대속이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우리도 그 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 자속입니다.
그렇기에 대속 신앙이라는 말을 폐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석은 우리들 일상의 삶 자체가 대속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지요. 물론 나 역시 인습적으로 사용되는 교리적 대속 신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기독교가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대속은 틀렸고 자속은 맞다는 양자택일(兩者擇一)적 이해는 오히려 다석의 생각을 그릇되게 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인식이 강한 아버지께 혼날까 봐 신학대학 진학을 상당 기간 숨겼다고 했던 데요.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의 양반들은 왜 기독교를 반대했습니까.

“‘예수 믿고 자기 조상도 못 알아볼 놈’ ‘부모가 죽어도 제삿밥도 안 챙겨줄 자식’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거죠. 아주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조상을 안 챙기는 기독교 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유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느님만 알고, 집안도, 제사도 모르는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걱정을 한 거죠. 저를 손사래 하며 서울로 보낸 데는 가문의 영광을 회복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 신학대학을 나와 누추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전도사가 있었는데 자식의 앞날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 나는 교회에서 배운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에 아버지의 유교적 삶이 못마땅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에 맞서다 생전 안 맞아보던 뺨도 몇 차례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요. 이래저래 큰 불효를 했습니다.”
가톨릭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엄청난 희생자를 낸 것은 장례와 제사 문제 때문이다. 전라도 금산(지금은 충남)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천주교를 믿으면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어머니의 장례를 가톨릭 예식으로 치렀다. 그는 1791년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신해박해다.

-가톨릭이 가혹한 박해를 받은 이후에도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조상숭배는 미신이라고 근본주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기독교와 전통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는 시각이 있는데요.

“맞는 말씀이죠. 당시 한국에 왔던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대부분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구 우월의식, 제국주의 의식을 지니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 것은 미개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것을 기억, 답습하여 한국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우리가 경험했던 그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를 함부로 재단하는 행태가 많습니다.
다수의 유교인들은 기독교인을 조상을 홀대하는 못된 사람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오히려 유교의 병폐가 조상밖에 모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둘 다 문제라는 것이죠. 조상의 끝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상을 유(有)라고 하면 하늘은 무(無)다, 없음까지 올라가야만 진짜 유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도 조상의 의미를 소중히 여길 때 진정한 기독교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이 인터뷰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번역한 성경 2판(1999년)을 인용했다. 공동번역 성경은 요즘 우리가 쓰는 말로 돼 있어서 읽기가 부드럽다. 그렇지만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관주 성경의 옛글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 성경에 애착을 갖는다. 결례되는 비유일지 모르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지금도 빨간 뚜껑의 진로 소주만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로다.’(공동번역 성경)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관주성경)


다석은 광주 동광원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해 강의하면서 하느님의 ‘외아들’(공동번역) 보다는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관주성경)에 애착을 보인다. 다석은 독생자를 다시 ‘한(獨) 나신(生) 분(者)’이라고 순우리말로 바꾸어 풀이한다. 그러나 다석은 로마서 8장 4절을 소개하면서 공동번역이 알기 쉽게 되어있다고 말한다. 60년 동안을 보던 그 관주성경보다는 공동번역 성경을 보고 참뜻을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다석은 한글 사랑이 각별해서 순 우리말로 된 종교 용어를 많이 만들어냈는데요. 그런데 거의 안 쓰이던 순우리말로 조어(造語)를 하다 보니 더 어려워진 것이 많아요.

다석의 한글사랑과 십자가 신학


“흔히 중국의 글자는 뜻글자고 한글은 소리글자라고 구분하잖아요? 우리는 보통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고 해서 혀가 구강의 어느 부분에 닿느냐에 따라 소리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다석은 한글 또한 뜻글자로 보았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끄는 천문(天文)이라고 했죠. 세종대왕은 훈민(訓民)의 차원을 넘어 천문(天文)으로 격상시켰습니다. 
무엇보다 다석은 모음의 원리가 천지인(天地人) 3재(三才) 사상을 기초로 했다고 봤습니다. 농경 중심의 중국 문명은 음양론에 토대를 두었고, 시베리아 수렵문명권인 한국의 문화는 천지인 3재 사상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석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풀었지요.
 땅(ㅡ)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고된 인간의 삶(ㅣ)이 3재론 속에 담겼다고 봤습니다. 다석은 이 3재를 합해서 십자가로 풀었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 현실의 세계인데, 이 땅을 뚫고 올라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이라 한 것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십자가고, 불교로 말하면 성불(成佛)이겠습니다.

다석은 한글이 단순히 소리글자가 아니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끌려는 뜻을 담은 글자라 믿었습니다. 자음 역시 삼수(三數) 변화를 퉁해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뜻을 담았다 했지요. ‘ㅅ(시옷)’ ‘ㅈ(지읒)’ ‘ㅊ(치읓)’의 변화를 보십시오. 이걸 선생님은 ‘삶-잠-참’으로 설명하세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잠을 자야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잠이란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한 번 죽어야만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한글에 뜻이 있고, 그 뜻이 우리 인간을 하늘로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교수가 책 제목으로 빌려 쓴 ‘빈탕한데 맞혀놀이’도 어렵죠. 좀 쉽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빈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 무, 없음이라는 말인데 결국 그 없음에 맞춰 살아가는 게 인간이 이 땅에서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인간 속에 바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빈탕은 곧 어둠이기도 합니다. 빛으로 드러난 세상에서 견물생심(見物生心)하지 말라는 뜻도 담겼습니다. 어둠 속에서 더 큰 것과 하나 되는 삶을 살자는 초대이자 부름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꽃이 있으면 꽃만 보고 ‘이쁘다, 좋다, 꺾고 싶다’라는 욕망을 갖지만 꽃을 꽃 되게 하려면 그것을 있게 한 허공, 빈탕한데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알아야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인간도 없이 살 수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늘상 덜 없는 존재, 그래서 더러운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덜 없다는 것은 늘 욕망적인 존재로, 탐진치(貪嗔癡)의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덜 없다’는 것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럽다’가 되는 거예요. ‘덜 없는’ 존재가 ‘더러운’ 존재가 되는 거죠.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자신의 바탈로 모신 인간이 할 일을 자신 속 탐진치를 벗는 길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이 땅에 온 이유고 살아야 할 목적입니다. 빈탕한데 맞혀놀이가 다석의 구원관입니다.”


부암동 집 대문 앞에서 이 교수(왼쪽)와 황호택 논설고문.[사진=이주영 인턴기자]

-다석이 십자가를 동양적으로 재해석해서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일좌식은 한 끼 식사와 명상이지요. 그런데 일언인은 제자나 연구자들의 해석을 들여다봐도 조금씩 다르고 잘 이해가 안 가요.

“김흥호 선생은 다석의 기독교를 한마다로 동양적 기독교라 풀었고 그 핵심이 일좌식 일언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일좌식 일언인은 김흥호가 이해한 다석 사상의 본질입니다.

 ‘일좌’는 말 그대로 앉아있는 것, 명상을 의미하고, ‘일식’은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이죠.

일언은 남녀관계를 풀어 끊는 것입니다. 다석은 뜻과 맛이라고 하는 개념을 대비시켜 이해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맛을 찾아 살지만, 선생님은 뜻을 찾아 사는 것이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아마도 맛중의 맛이라고 하는 것이 남녀의 관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일언’이라고 말로 인간이 색에 사로잡혀 사는 것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맛을 버리고 뜻을 찾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흥호 선생은 마지막 일인(一仁)을 명(名)과 관계시켜 이해했습니다. 한마디로 헛된 명예욕을 벗자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있는 몸을 갖고서 ‘몸성히’를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몸성히’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지면(마음 놓이)로 자신의 바탈을 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수는 다석의 ‘일좌식 일언인’에서 인에 대한 해석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저서 ‘유영모의 귀일신학’에서 ‘일인은 늘상 걷는 일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어질 인이 걷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다석이 여기서 인을 사용했는지 잘 알지 못하겠으나 가늠할 여지는 있다”고 했다. 두 발로 어디든 다니고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해 몸을 건강하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몸성히를 삶의 근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해설했다.

다석의 一日一食과 늘상 걷기

그러나 다석은 1971년 광주 동광원 강의에서 인(仁)에 대해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이라고 하면서 ‘어질 인’이 아니라 ‘성언 인’이라는 순우리말로 푼다. 성은 ‘(몸이) 성하다’에서, 언은 ‘언니’에서 따왔다. 그래서 성언을 찾아서 그 성언을 완전히 이루는 것, 그래서 참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인이라고 다석은 말한다.

-다석은 40년 동안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고 체조와 늘상 걷기 등으로 건강을 다져서 그 시대로서는 드물게 91세 장수를 했는데요. 다석을 따르는 분들 중에 그런 수행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윤정현 신부는 한 때 일일일식을 하다가 포기하고 배꼽시계에 맞춰 먹는다던데요. 

“다석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일일일식을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김흥호 선생은 38살 무렵부터 일일일식과 해혼(解婚)을 실천했고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그걸 실천하려고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지요. 나 역시도 시도했으나 거듭 실패를 했습니다. 저는 일일일식을 문자적으로, 소승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자 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문명비판적인 차원에서 단순성(Simplicity)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다석은 하루 한 끼를 드셨으나 잡수신 양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 한 끼에 집착하는 문자적 의미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단순성, 즉 최소한의 물질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물질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기후(생태)붕괴 시대의 일식의 의미라 믿습니다. 이 때 물질, 곧 최소한의 물질은 정신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석 자신도 하루 한끼 식사를 자기 생명을 바치는 정신적 행위라 여겼습니다. 내 몸이 얼마나 가난한가, 최소한의 물질로, 정신으로 살아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합니다.”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이정배 교수 약력>

-1955년 출생
-1974년 대광고 졸업
-1974~1981년 감리교 신학대학 및 대학원
-1981~1986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전공
-1986~2017년 감신대 교수
-2010~2011년 한국조직 신학회 회장
-2012~2013년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2011~2012년 한국 기독자 교수협의회 회장-1992년 서울에서 열린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대회를 계기로 토착화 신학과 생태신학을 연결하고자 애쓰다-강원도 횡성에 독서와 기도, 노동이 어우러지는 현장(顯藏)아카데미 조성 중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2010) <한국 개신교 전위토착신학연구>(2003)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2008) <빈탕 한데 맞혀 놀이>(2011) <유영모의 귀일신학>(2020) 등 저서 다수




21세기 생태문명의 맹아를 담은 다석 사상
황호택 논설고문입력 : 2021-02-24 16:06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⑥ 이정배 교수<하>

이정배 교수의 스승인 변선환 전 감신대 학장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폭탄 선언과 함께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간 대화를 중심으로 종교간 대화를 활성화하는 운동도 벌였다. 그러다 결국 보수적인 기독교계 목사들의 표적이 되다시피 해 소속된 감리교단으로부터 출교(黜敎)당했다. 변선환 신학을 계승한 대표적인 제자가 이정배 교수다.

-변선환 학장이 1992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주도하는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부터 출교 조처를 당했더군요. 김홍도 목사는 지난해 광화문에서 광복절 태극기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를 대형교회 부흥 목사로 데뷔시켜준 사람인데요.

"그 당시 변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었죠. 70,80년대부터 부흥목사들이 교회들을 크게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로 교회가 엄청난 권력기관이 됐고, 부흥목사들이 교단 정치를 하면서 신학대를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대학을 학문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변선환 박사가 눈엣가시였던 것이지요. 변 학장은 신학대학을 금권과 교권으로부터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흥목사들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 학장의 신학적 소신을 이단(異端)이라고 몰아 출교를 시켰죠. 나도 그 때 교수였는데, 변 학장이 출교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습니다, 학생들 수백 명이 출교를 막으려고 금란교회에 몰려갔다가 교회가 동원한 어깨들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개신교가 유달리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가진 것 같아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가 주로 성경 구절로부터 도출되었다고 말했는데, 주로 어떤 구절을 인용합니까?

“보통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 3절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가 대표적입니다. 이 두 구절을 이웃 종교를 부정하는 원리로 쓰죠. 

하지만 구약성서의 경우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백적으로 했던 말입니다. 자신들 하느님이 최고, 절대라 고백함으로써 종살이하던 이국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다수의 종교가 되고, 제국주의라고 비판 받는 마당에 고백적으로 이야기했던 언어를 교리적인 차원으로 바꿔놓으면 이런 기독교의 정체성은 사람 잡는 정체성이 되어버리죠. 이런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다석은 신약성서 언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란 말씀도 달리 이해했지요. 예수가 말한 ‘나’는 육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 속의 바탈, 없이 계신 하느님, 곧 ‘얼나’를 일컫습니다. 다석은 우리 역시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다석은 배타적인 성서 언어를 보편적으로 달리 사용하였습니다.”



이정배 교수의 뒤편 창 밖으로 부암동의 포근한 설경이 보인다. [사진=황호택]

-이 교수가 쓴 논문 중에 ‘천부경을 통해서 본 동학과 다석의 이해’도 있더라고요.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한다는 다석의 귀일사상(歸一思想)이 천부경에서 비롯됐나요?

“예.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유불선에 능통한 다석이 정작 동학을 언급하지 않았고, 언급하더라도 부정적인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여기서 다석과 동학을 연결 지어 생각해봐야겠다는 학문적인 관심이 생겨났지요. 그 연결 고리가 바로 천부경이었습니다. 천부경에 근거해서 동학을 보았고 바로 그 동학의 빛에서 다석 사상을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동학을 단지 부적을 신뢰하는 비합리적 종교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천부경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틀로 구성되었습니다. 천부경의 상경은 하늘, 중경은 땅, 하경은 인간을 주제 삼았습니다. 그 중 하경의 핵심은 ‘인중천지인(人中天地一)’이란 말 속에 담겼는데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중심이란 사상입니다. 한 유교 학자는 여기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넣은 ‘천인무간(天人無間)’을 보기도 했지요. 저는 이 말을 갖고서 동학과 다석을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 이론과도 변별된다고 여겼지요, 종교다원주의는 큰 틀에서 기독교를 유일 절대의 종교로 보지 않고 제 종교가 저마다 자기 식대로 구원의 길을 간다는 가치 다원주의를 적시합니다. 예수와 붓다 공자 같은 위대한 성인들이 궁극적 실재의 다른 표현이란 것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골자입니다.

하지만 다석은 그 차원을 넘어서지요. 예수 석가 뿐 아니라 우리 인간도 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인중천지일, 모든 인간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없이 계신 이가 인간 속에 ‘바탈’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서구는 붓다 공자 같이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서 다원주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없이 계신 하나님’을 인간 개개인의 마음(바탈)속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덜 없는 상태에서 뛰쳐나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존재라 본 것입니다. 그런 힘이 예수 뿐 아니라 우리 인간 속에 있다고 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인간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귀일사상의 핵심입니다.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도 예수처럼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되고 성불(成佛)하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과정에서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엿새 만에 우주를 창조하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 쉬었다고 하는데요. 다윈의 진화론으로 보면 허황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지 않고 창조적인 진화, 진화적인 창조로 봐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에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과학의 논리는 사이비 과학이고 사이비 신학이죠. 지적 설계론은 창조과학의 발전된 형태이긴 하나 근본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 속의 천지창조 기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BC 580년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서 바빌론의 문명을 경험하며 고백한 하나의 문서입니다. 그 자체로 과학적 진술이나 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화의 한 방향을 이끄는 신적인 원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진화와 창조는 함께 가야 옳습니다. 진화론만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습니다. 다석이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도 과학적 사고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변선환 아키브에서 제자들이 펴낸 책들[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다석을 연구하는 이 교수의 학문적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서구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적 토양에서 기독교를 이해했던 감리교의 토착화 신학 전통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은 지금까지 그 어떤 토착화 신학보다 도발적이고 창발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로써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능가하는 한국적 신학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지하듯 일본 선불교를 배경으로 한 교토학파는 공(空·Śūnyatā) 개념을 갖고서 신의 죽음 이후의 신학을 재정립했습니다. 서구신학이 로고스 개념을 가지고 신학을 만들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공 사상의 개념으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적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주목받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교만 아니라 민족 고유한 천부경에 터해 유불선을 통섭한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훨씬 탈(脫)서구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라 여겼습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다석만 연구한다든지, 함석헌 박영호 김흥호 등 어느 한 인물에 치중한 개별 연구를 넘어서야 하다고 생각 합니다. 다석과 함석헌 간의 차이가 있고, 함석헌과 김흥호가 다르고 박영호와 김흥호 간의 변별력 그 자체가 다석 학파의 기독교를 성립시키는 주요한 근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석 연구자들 간에도 무수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의 논쟁을 벌이기보다 어떻게 다석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는가를 봐야 옳습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모든 분들을 연구하고픈 학문적 욕심이 있습니다. 일본의 교토학파의 기독교처럼 한국에는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있음을 서구에 알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대속적인 기독교 대신 수행적인 기독교를, 배타적인 기독교가 있었다면 불이(不二)적이고 귀일적(동양적) 기독교를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석 학파의 계보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을 통해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다석을 알게 됐는지에 따라 시각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 다석에 입문한 신학자입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다석 사상을 수용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다석 사상은 아직 이단처럼 취급받습니다. 그럴수록 김흥호 선생은 다석을 교회 밖의 다원주의자 사상가로만 자리매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 안에서 다석을 정착시키고자 애쓰셨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서 모순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감신대라는 기독교 학교 안에 있었기에 다석을 기독교 틀 안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석을 교회의 교사로서 만들고자 하신 것이지요. 다석 사상을 교회 안에 들여놓겠다는 생각을 나는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물론 다석 사상을 기독교 밖에서 더 넓게 이해하는 것에 찬성하지만요.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을 배웠기에 대속을 버리고 자속만 취하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석에게 예수가 유일한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물론 인습적인 구세주로서 예수의 이해는 버렸지만요.”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 연구자 많이 나와야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에 대해 연구하는 분이 있나요?

“더러 있기는 하지만 주로 기독교 신학자들이 다석을 연구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웃 종교들에서 다석 연구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유교에서는 고인이 된 도원 류승국 교수가 대표적으로 다석을 좋아했고 연구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 혹은 기독교를 바탕한 종교학자들의 연구만으로 향후 다석 사상이 충분히 발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병무 선생이 다석 사상을 민중신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큰 공헌입니다. 다석 사상을 세상에 알린 박영호 선생의 공로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다석 사전을 만들고 있는 가톨릭 정양모 신부의 역할도 대단합니다. 다석을 한국의 하이데거로 여기며 그의 말 속에 담긴 철학적 뜻을 살핀 철학자 이기상 교수의 역할도 높이 평가합니다.

-시인 고은이, 다석에 대해 ‘총기가 넘치나 부질없는 생각을 한 늙은이’라고 코멘트를 한 게 있던데요.

“<만인보>에 적힌 이 표현에 대해 정양모 신부가 제일 분노했지요. 고은 시인으로서는 다석이 한글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과 소통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으로서는 다석의 언어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은 시인은 다석이 왜 한글을 그렇게 풀어내려고 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석의 종교관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다석의 삶 중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중학교까지만 가르치고, 자신도 일본 유학을 갔다가 그만두고 돌아오고….

“다석의 행동 중에 기행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결혼한 날 신부를 놔두고 일주일 동안 목포 처가에 혼자 갔다 온 일도 있고, 그리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사경을 헤맨 일을 두고도 말이 많습니다. 오산학교 교장을 했고 교육자로 살았음에도 아마 다석 입장에서는 자녀들을 자기 방식대로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배우도록 하려던 것이 아니었겠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스스로 하는 공부, 기계적인 학습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일종의 홈스쿨링(homeschooling)이나 가정교육(home education)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러운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데요. 이 교수는 글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던 데요.

“오늘날 동성애는 과거 천동설 지동설 논쟁처럼 이제 과학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 식물 세계도 동성애의 비율이 대략 10% 남짓 정도 된다고 하죠. 단지 지금까지는 과학적으로 증명을 못했을 뿐입니다.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를 여러 권 펴낸 유발 하라리도 최근 커밍아웃했죠. 기독교는 동성애의 성적 문란함에 초점을 맞추지만, 역사적으로 성소수자(性少數者·sexual minority)들이 창조적인 일을 엄청나게 해냈습니다. 동성애를 병이나 죄로 다루기보다는 그들 성정체성(성지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고 복음이라 생각합니다.”

동성애를 범죄로 보지 말고 성 정체성 인정해줘야

-성경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구절이 더러 있지요?

“구약 롯기에 남색(男色) 이야기가 있고, 로마서에 보면 어린 소년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사실 동성애의 문제로 보기보다 권력의 문제로 봐야 옳은 거지요. 설령 성서 어느 부분에 그런 기록이 있다 할지라도,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XY 염색체만 알았는데 XXY 염색체도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성지향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들을 자꾸 억압하고 몰아치면 음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나쁜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을 불행한 존재로 만든 데는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책임이 큽니다.”

-세월호 아픔에 참여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 모임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데, 한국에서 세월호를 바라보는 시각도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팩트는 분명히 있는데 서로 다른 오피니언을 만들며 싸우잖나요. 세월호를 가지고 정치가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을 조장했어요. 팩트를 명확히 밝히면 오피니언 간의 갈등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시민 사회와 함께 정치인을 움직여 진실 규명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합니다. 지금도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어머님들 추위에 노숙하고 있어요.”

이정배 교수의 부인은 여성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은선 세종대 명예교수다. 성균관대 동양철학 대학원에서 ‘조선 유교의 종교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편과 함께 스위스 바젤에서 신학대학 박사 논문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공부를 더해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갖게 됐다.

“저희 집사람에 대해 물어줘서 고맙습니다. 부부관계를 너머서 학문적 동지로 살고 있습니다. 바젤 대학에서 변선환 선생 내외분과 같은 교수 지도 하에 논문을 썼습니다. 지도 교수는 알버트 슈바이처와 칼 야스퍼스를 배경으로 독창적인 신학 활동을 하던 분이었지요. 그의 지도하에 변 선생 내외는 기독교와 불교, 우리 부부는 유교를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주자학 쪽으로, 저희 집사람은 양명학을 주제로 기독교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은선 교수는 부족한 한문 공부를 더하면서 8년에 걸쳐 한국 철학 분야에서 유교의 여성 종교성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향후 미래가 중국 문명과 미국 문명의 갈등으로 본다면, 종교로는 유교와 기독교가 될 텐데, 지금과는 다른 유교가 필요하고, 지금과는 다른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비판적인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설립한 한국 신(信) 연구소를 통해 기독교를 유교적으로, 여성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화전민의 집을 사서 가꾼 횡성 현장아카데미는 노동과 기도의 공동수행체로 꾸리고 있다. [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부암동 아카데미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요?

“여기서는 주로 학문적 토론의 장이 열리며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70년과 기독교’라고 하는 책은 2년간 작업해서 이번에 출판합니다. ‘종교개혁 500년과 이후 신학’ ‘3·1 선언 100주년과 이후 기독교’ 등의 책도 앞서 펴냈지요. 이은선 교수의 선친인 고 이신 박사의 연구서 ‘환상과 저항의 신학’, 그리고 해천 윤성범 교수 탄생 100주년을 추모한 ‘우주 보편적 영성으로서의 성과 효’란 책도 발간했습니다.”

부암동 집 대문에 현장(顯藏)아카데미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유승국 선생의 작명이다. 인(仁)의 주역적 표현이 현장이라고 한다.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진다고 해서. 횡성에서는 화전민의 집을 사서 20년째 가꾸며 예배드리고 농사를 짓고 수확도 함께 한다. 횡성은 노동과 기도의 수행 공동체이고, 부암동은 학문 공동체다.

-생태신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쓰던데요. 다석의 가르침과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다석을 생태 신학적으로 연구해서 외국어 논문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더라고요. 우선 앞서 말씀드린 
  • 일식(一食)의 개념을 simplicity(단순함)로 본 것이 생태적인 사유(思惟)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 다석의 말씀 중 중요한 것으로 견물생심(見物生心)과 견물불가생(見物不可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 견문불가생, 즉 물건을 보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다석의 가르침이에요. 
  • 서구의 신학과 철학에서 존재는 언제나 ‘있음(유·有)’ ‘Sein'의 차원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있음’을 우선하는 세계관에서 견물생심의 유혹은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입니다. 
  • 견물불가생이 가능하려면 있음보다 ‘없음’을 더 중요시하고, 빛보다 ‘어둠’에 무게중심을 두는 새로운 철학이 요구됩니다.

알다시피 유영모 선생의 아호인 ‘다석(多夕)’엔 저녁 석(夕)이 3개 들어있지요, 이기상 교수가 ‘태양을 꺼라’라고 멋지게 풀어서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의식의 세계죠. 그런데 다석은 ‘빛(의식)을 꺼라’ ‘태양을 꺼라’고 말합니다. 빛이 꺼질 때 광대한 우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다석은 생각의 빛을 끄고 보이는 세계를 단절하는 의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있음을 근거로 하는 서구적 인식으로는 우리의 자본주의 문명을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을 있게 하는 테두리를 먼저 보는 것, 그렇게 하면 견물불가생, 물건을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놔둘 수 있지 않은가요?”

부암동은 다석이 과수원을 가꾸고 축산을 하고 수행을 하며 살던 구기(舊基)동에서 버스 두세 정거장 거리다. 원래 인터뷰를 횡성 현장아카데미에서 하려고 했으나 눈이 많이 오고 찻길이 험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이 교수와 우리 일행은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부암동의 한 식당에서 치킨과 볶음밥을 먹고 눈길을 걸어가다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