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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손가락질하며 떠난 이들 원망 대신 자기성찰 했다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손가락질하며 떠난 이들 원망 대신 자기성찰 했다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손가락질하며 떠난 이들 원망 대신 자기성찰 했다

등록 2017-05-31 10:32수정 2017-05-31 10:46
조현 기자 사진
조현 기자

[대안공동체 탐방] 조현의 공동체마을 체험기
⑪ 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곳


가스가야마 낙농부.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의 본부 격인 도요사토는 애즈원에서 차로 불과 20~30분 거리에 있었다. 애즈원에서 방문자들을 담당하는 이치가와 겐이치가 차로 도요사토까지 바래다주었다. 이치가와는 도요사토에서 나온 지 7년 만에 도요사토에 처음 들어온다고 했다. 야마기시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조차 중년을 넘겨 광야로 나갈 수밖에 없을 만큼 야마기시는 숨쉬기 어려운 공동체가 된 것일까.


도요사토는 한때 3천명이 사는 세계 최대 공동체의 명성에 걸맞은 위용을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다. 대학 캠퍼스나 아파트 단지 못지않게 잘 지어진 건물들과 아름다운 정원, 거대한 소 사육장과 야외 경기장, 대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야마기시에서 떨어져 나와 인근 스즈카에 만들어진 애즈원커뮤니티가 이제 막 출발한 신생 중소기업이라면, 도요사토는 굴지의 기업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도요사토에 사는 이는 이제 500명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한때 세계 전자업계 선두였던 소니의 몰락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소니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과연 야마기시는 어떨까.

야마기시 공동체는 야마기시 미요조(1901~61)가 양계장에서 발견한 상생의 원리를 깨닫는 ‘야마기시즘 특별강습 연찬회’로 출발했다. 이후 이런 깨달음을 삶에서 실현해보자는 ‘실현지’가 1961년 가스가야마에 탄생했다. 야마기시 미요조는 1961년 사망했지만, 실현지는 전세계로 퍼져나가 일본, 스위스, 브라질, 타이,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50여곳에 만들어졌다.

이상사회 실험의 모델로 여겨지던 야마기시는 밀레니엄인 2000년 전후 큰 위기를 맞는다. 위기는 엉뚱한 곳에서부터 찾아왔다. 1995년 아사하라 쇼코 교주의 옴진리교가 일본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13명의 사망자와 5000명의 중경상자를 낳은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일본에선 공동체생활을 하는 유사종교집단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야마기시는 어떤 종교 교리나 신념 또는 아집이 없는 ‘고정되지 않는 전진’을 주창했지만, 일반인들에겐 유사종교단체와 달라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때 세계 최대 공동체 야마기시
개인 욕구 수용 못하고 소통 안돼
3천명 공동체 5백명으로 줄어
갈곳 없는 노인들이 주로 남아



속마음 털어놓는 연찬 되살려
권력화했다던 조정위원들도 민의수렴
얼마남지않은 젊은층들 즐겁게



야마기시 떠난 동료들도 돕는 배려
외부의 차가운 시선도 달라져
거센 우환 지나 여유 평화 넘쳐



지난 2009년 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3부작엔 신흥종교집단 ‘선두’와 후카다 교주가 나온다. 후카다 교주는 암살기술자 아오마메에 의해 호텔방에서 미세한 침에 찔려 살해된다. 후카다는 암살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죽음을 맞을 만큼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1Q84>가 나온 뒤 신흥종교집단 ‘선두’의 모델이 야마기시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키의 와세다대 스승으로 알려진, 니지마 아쓰요시 교수가 도요사토 공동체에 입회한 것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니지마 교수가 사망한 후에도 부인은 지금까지 도요사토에 살고 있다.

사린가스 사건 이후 공동체에 대한 매스컴의 비판 기사가 늘었다. 야마기시는 아기 때부터 아이들을 모아 함께 양육했다. 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공복을 유지하는 게 좋다는 ‘니시요법’에 따라 초등학생들한테도 아침을 먹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아이들을 억지로 굶기는 아동학대라며 집중 부각되고, 야마기시를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그러자 그 전까지 야마기시의 유기농 제품을 공급받으려 읍소했던 유명 백화점들이 태도를 바꿔 야마기시 제품 판매 코너를 일제히 폐쇄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거품경제가 무너져 세수 확보가 절실했던 세무당국은 야마기시 참여자들의 기부나 무보수 노동을 탈세로 간주해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야마기시 이후 공동체를 이끌던 스기모토 도시하루가 1999년 도요사토의 포도밭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야마기시 공동체가 무려 수백억엔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이 알려졌다. 스기모토가 공동체를 성장시킨 주역이긴 했지만, 공동체원들의 자유를 제약하며 지나친 내핍생활로 이끈 것이 아니냐는 내부 비판도 제기됐다.

가장 비판적인 이들은 야마기시 안에서도 엘리트로 꼽히는 이들이었다. 야마기시즘 특강회를 이끌거나 사상과 교육, 방향을 결정하던 이들이 2000년 ‘야마기시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이탈해 시작한 게 스즈카의 애즈원이다. 이후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졌다. 더구나 처음 공동체에 들어올 때 전재산을 냈던 이들이 그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까지 간 소송에서 처음 낸 재산의 3분의 1 정도를 돌려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를 두고 야마기시 사람들은 공동체의 방향과 정책을 결정하던 주역들이 자성은커녕 공동체를 비난하고 나갔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도요사토 공동체 정원.그런 태풍이 휩쓸고 간 도요사토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노인 세대가 많이 남았지만, 자포자기나 남은 자의 비감은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이 보이는 드넓은 도요사토 공동식당의 분위기와 음식도 어느 고급 호텔 레스토랑 못지않았다. 다만 자신이 먹을 만큼 가져다 먹고, 설거지를 스스로 하는 게 다를 뿐이었다. 외부의 비판 이후 아이들에게도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고 먹이는 등 공동체 내 변화는 뚜렷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축사의 현대화였다. 도요사토에선 ‘와규’로 유명한 흑소 3천마리를 기르고 있는데, 사람 손이 가지 않아도 되도록 모든 사육과정을 자동화했다. 고령사회 일본에서도 더욱 고령사회가 돼 젊은 노동력이 부족한 공동체에서 앞으로도 생산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자동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오늘날의 야마기시 공동체에는 ‘잘나가던’ 과거와 달리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 도요사토엔 노동력의 주축인 20~50살이 51명이다. 따라서 이들의 일 부담이 적지 않다. 이들이 우리 돈 10만원에 불과한 1만엔의 용돈을 받으며, 개인적 자유를 구가하기는 쉽지 않은 게 이곳의 삶이다. 그러나 윗세대를 무조건 따르라는 게 예전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귀한 몸’이 된 젊은이들에 대한 배려가 크게 달라졌다.



도요사토 공동체 직판장을 책임지고 있는 윤성준씨.경기도 화성 야마기시 마을에서 자라 2009년부터 도요사토에 살고 있는 윤성준(43)씨는 “젊은이들이 너무 외롭지 않게 함께 모여 일하게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스위스계 일본인 공동체원 가지야마 하이디(25)와 결혼한 윤씨는 도요사토 정문 앞에 지역민들을 위해 2014년 문을 연 직판장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 윤씨는 “고가의 유기농보다는 지역 먹거리 정도로 만족하는 게 요즘 일본의 분위기여서 공동체에서도 유기농이 아닌 일반 농축산물을 생산하지만 유통마진 없이 저가에 판매해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야마기시에 대한 외부의 편견도 다시 누그러지고 있는 셈이다. 직판장은 시내와는 떨어져 있는데도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로 붐볐다.

도요사토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최초의 야마기시 공동체 가스가야마의 사육장에서 일하는 야마사키 아키히사(32)도 “같은 또래 4명이 밤이면 자주 모여 술도 마시면서 스포츠와 영화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매사 속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는 ‘연찬’을 통한 ‘무고정 전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탈자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제기한 것이 이 연찬이다. 형식만 남고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의사 결정을 하는 ‘조정위원’이 권력을 쥐고서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등의 개인적 욕구를 수용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스가야마 식생활부에서 연찬하는 공동체원들.그런데 가스가야마 공동식당에서 일하는 10명이 모여 진행하는 식생활 연찬을 보니, 활기가 넘쳤다. 그들은 점심 200명분, 저녁 240명분의 메뉴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유쾌하게 논의했다. 다음날 인근 학교 운동회에 군고구마를 가져다주자는 제안과 단풍축제의 이동판매소에 ‘나도 가보고 싶다’는 바람도 나왔다. 집을 옮기고 싶다고 신청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다거나, 남자들이 숙소 1층에서 담배를 피워 연기가 올라와 싫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한 여성은 “몸이 좋지 않아 4일간 일을 쉬었는데 내일부터는 나오겠다”고 말하며, “예전엔 쉬고 싶거나 뭔가 하고 싶어도 분위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거의 마음을 꺼내고 있다”고 했다.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야마기시에 합류해 일본인 남성과 결혼해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오상순(57)씨도 도요사토의 조정위원이다. 조정위원은 도요사토에서 6개월마다 10명이 뽑힌다. 오씨는 “공동체 인터넷을 통해 하루 수십통의 크고 작은 제안이 들어온다”며 “자신의 제안이 거부당해도 다시 제안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고 했다. 공동체가 개인적 욕망 실현의 장이 아니라 함께 행복한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곳인 만큼 모든 욕구를 다 수용할 수는 없지만, 좀더 개인과 사회의 욕구의 조화를 위해 더 애쓰게 된 것이다.



가스가야마 공동체 식당.

가스가야마의 기타오지 요리노부.

가스가야마에서 만난 기타오지 요리노부(65)는 고교 시절 학생운동의 리더였다. 당시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갇힌 그는 “오히려 밖에서 느끼지 못하는 자유를 감옥에서 느꼈다”며 18살에 야마기시에 합류했던 계기를 전했다. 야마기시는 외형상 지도자를 내세우지 않지만 기타오지는 스기모토 이후 주요 지도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는 “도쿄대 출신들을 비롯한 야마기시의 우수한 인재들이 스즈카로 빠져나갔는데, 그들이 내게도 함께 갈 것을 권유한 걸 보면, 나도 우수한 인재인 모양이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우수한 분들이 빠져나간 이곳엔 갈 곳 없는 노인과 장애인들이 많고, 화가 나면 자기 분뇨를 벽에 칠하는 분도 있다. 나는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다”

애즈원은 구태에 빠진 야마기시를 비난하며 나갔지만, 오히려 야마기시에선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이들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애즈원 같은 곳이 곳곳에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이들은 초기 경제적 자립에 고심하는 애즈원이 만든 비료공장의 비료를 사주며 자립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거센 태풍이 야마기시를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신생 커뮤니티 애즈원이 신선한 생기로 반짝인다면, 야마기시 공동체엔 성숙한 여유와 평화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끝>

도요사토·가스가야마(일본)/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연재조현의 공동체마을 체험기

2023/05/26

귀일사상으로 보는 금강경 공부 - 예수영성 수련회 - 기독교 수도회 동광원

귀일사상으로 보는 금강경 공부 - 예수영성 수련회 - 기독교 수도회 동광원

예수영성 수련회

귀일사상으로 보는 금강경 
공부작성자joong|
작성시간22.07.22|
조회수33



독일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 간의 평화가 없이는 세계평화도 없다.”고 주장하여 많은 공감을 얻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양대 종교로 기독교와 불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두 종교 간의 불화나 갈등이 거의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문화의 자랑이다. 물론 일부 광적인 신도가 불상이나 사찰을 훼손하는 불미스런 행동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여론의 뭇매로 수그러드는 것을 볼 때 종교 지도자들과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역사를 통해 볼 때 문화의 성숙도가 계속 올라가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 풍조가 정의의 가치를 높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참 신앙인들이 많아질 때는 시민의식도 높아지겠지만 모두가 세속적 욕망으로 떨어지면 시민의식은 퇴락하고 사회는 여러 갈등과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참 진리를 추구하는 영성의 신앙을 심층종교라 하고 형식적 종교생활을 하면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복신앙의 종교는 표층종교라 하였다. 우리 신앙이 외형적으로 종교인의 열성을 보인다고 해도 세속적 가치에 매몰된 표층종교로 떨어지면 사회적 역기능을 초래하여 갈등을 해결하여 통합하고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갈등의 요인이 되어 다툼과 분열을 심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층종교로 올라가 영성이 높아져야 하고 영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서로 이해와 소통의 폭이 그만큼 깊어지고 넓어져서 화평의 세계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현대를 탈종교시대 또는 무종교의 시대라고 한다. 지난해인 2021년 어떤 통계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60%는 무종교라 한다. 불교가 16%, 개신교가 17%, 천주교가 6% 기타 1~2%라고 한다. 30년 전에만 해도 종교인이 절반이 넘었는데 이제는 40%로 줄어든 것이다.

이런 통계가 보여주는 의미를 여러 각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우선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는 외형적인 건물과 조직 교리 등 제도적 종교인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대표적 종교로서 여전히 개신교와 불교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종교인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자체가 중요할까 싶겠지만, 고등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표징이란 점에서 염려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고등종교가 쇠락하면 유사종교나 기복신앙의 표층종교가 기승을 부리게 되고 그렇게 종교가 타락하면 문화적 수준도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성숙과 평화를 위해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기복적 표층종교에서 벗어나 심층종교로 올라가야 하는데 자꾸 표층종교로 떨어지기 때문에 제도권의 숫자도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우리 사회의 장래에 대하여 우려하는 것이다.

장차 우리나라의 사회적 화합과 평화를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 무엇보다 우리 시대 종교인이나 신앙인들이 더욱 분발하여 참을 찾고 진리를 추구하여 높은 영성과 정신의 빛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종교의 경전들에 나타난 성인들의 참뜻을 밝혀서 기복신앙이 아닌 참 신앙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참 길을 닦아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와 문화는 그만큼 성숙되고 밝아질 것이다. 불교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로서 이 땅과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고 사회를 화평케 하고 문화를 높이며 모든 생명을 아끼자는데 뜻이 같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불교인은 참 불자가 되고 기독교인들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 서로가 일상의 삶에서 소통하고 화합하는 일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인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는 또 각 종교의 고유한 특징과 역할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필요할 것이다. 화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은 구심력이 되고 각자 고유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힘은 원심력이 되는데 상생의 문화를 고양하기 위해서는 이 두 힘이 다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다양성의 원심력과 하나됨의 구심력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중용 또는 중도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서로를 돌보며 제 역할을 바르게 수행할 때,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개성을 존중하는 화합의 정신으로 하나가 될 것이고 상생의 문화가 발전할 것이다.

공자는 말하길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이면 남도 당하지 않게 하라.”고 했고 예수도 “남이 그대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그대도 남을 그렇게 대접하라.”고 했는데 의미는 같은 것이다. 이런 황금률을 가지고 서로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태도로써 깊이 공감하면 자기의 입장을 존중하는 만큼 타인의 입장과 인격을 존중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때라야 서로 화합할 수 있고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대동의 정신을 다석은 한 마디로 귀일歸一이라 하였다. 서로 하나가 되는 방법에는 통일이 있고 귀일이 있는데 통일은 인간의 욕심으로 하는 일이지만 귀일은 인간의 양심과 도심道心을 통해서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귀일이지 통일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귀일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활동 가운데 하나가 경전을 읽고 나누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강경을 읽어보았다. 우리가 타 종교의 경전을 읽고 서로 나누게 되면 종교인 사이의 소통과 화합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경전을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불교의 경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속을 보여줌으로써 심층적 소통을 하고자 했다. 표층인 겉모습이나 표현에서는 서로 다를지라도 속뜻은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고 인간의 참된 모습과 참삶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신앙일진대 같은 인간으로서 그 뜻이 어찌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소통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 사람과 만물 사이에도 서로 통하자는 것이 종교 아닌가.

다석은 종교의 핵심을 마루뜻이라 했다. 마루는 산마루, 지붕마루처럼 가장 꼭대기를 나타내는 말이요 모든 일의 근원과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마루 종宗, 그래서 가장 꼭대기의 높은 뜻을 알려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가장 높은 뜻은 형이상의 궁극적 실재를 만나서 얻게 되는 한 말씀인데 그것이 결국 하늘과 땅, 사람과 만물의 평화와 화합, 그리고 자유와 생명을 아끼자는 것이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는 평천하平天下를 말하고 석가모니는 정토淨土를 말하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 마루뜻을 위해서 더욱 불자답게 되려고 힘쓰는 사람이 불교인이고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모두가 불교인이 되라거나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주에 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각자 고유한 스펙트럼으로 빛나는 것처럼 각자 고유의 자리에서 고유의 빛을 발하면 된다. 이처럼 세상의 종교인들이 각자 순수한 고유의 빛을 발할 때 세상은 그만큼 더 아름답고 밝아지게 될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하여 불교인들은 기독교를 좀 더 이해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은 불교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남의 언행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듯이 타종교의 경전이나 말씀은 내 신앙의 거울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각자의 영성이 더욱 깊어지고 모두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 그런 작은 계기라도 될 수 있다면 더없는 보람과 기쁨이 될 것이다.

2022. 6. 25.

평산 심중식

 

2023/05/04

알라딘: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

알라딘: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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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학과 그 이후의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근대한국 개벽종교가 한국사회의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사상, 종교, 정치사회, 문화, 교육의 전 부문에서 개벽운동을 추동해 간 역사적 과정을 ‘공공하다’라는 측면에서 재조명하기 위하여 공공성의 의미, 종교와 공공성의 관계, 그리고 한국 신종교-개벽종교의 공공성의 특징을 논구하는 책이다.


목차


제1부 한국 사회와 종교적 공공성

종교적 ‘공공성(公共性)’의 개념과 의미 / 염승준
한국적 공공성 탐구 / 야규 마코토
한국 사회 공공성의 붕괴와 종교적 공공성의 가능성 / 하승우
1920·1930년대 한국 ‘신종교’의 기본지형과 동향 및 특징 / 김민영
근대 한국 종교에서의 ‘민족’과 ‘민중’ / 김석근

제2부 한국 신종교의 공공성

동학이 그린 공공세계 / 조성환
증산사상과 공공성 / 허남진
원불교의 종교성과 공공성 / 원영상
대종교의 종교성과 공공성 / 김봉곤
동학의 공공성 실천과 그 현대적 모색 / 박맹수



책속에서


P. 35서양의 종교가 전통적 이원론의 입장에서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뒤늦게 17, 18세기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과 달리, 동양의 종교는 그보다 훨씬 앞서 인간 마음 안에서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을 자각하였다.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해 온 서양 종교와 달리 신과 인간의 동일... 더보기
P. 55한국 신종교를 특징짓는 것은 후천개벽사상이다. 이것은 종말사상이나 서양 근대적 혁명사상과 달리 사회의 변혁·혁신과 개개인의 새로운 인간관의 각성·수행이 수반된다. 개벽사상의 논리는 각 종교마다 각양각색이지만 인간 존중 사상, 생태·환경 사상, 공동체론, 그리고 타종교에 대해 개방적이고 종교 간 대화·소통·상호 이해를 도모하는 사상은 현대사회에서 공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접기
P. 78특히 지금 시대의 문제는 각기 개별적인 존재로 분리되어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개체들을 주체로 묶을 방법이다. 즉 공(公)의 반대말이 사(私, private)라면, 공(共)의 반대말은 개(個, individual)이다. 그런 전환에서 종교의 역할이 있다. 인격적인 결합체인 공(共)과 비인격적 결합체인 공(公)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도록 개인이 서로 연대하고 사유화된 것을 공유로 다시 점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고 그런 노력의 결과가 구조를 바꿔야 한다. 종교는 그런 ‘묶음’의 역할을 맡을 수 있고, 근대 한국종교의 묶음은 ‘평등’과 ‘자치’라는 한국 사회 공공성에서 실종된 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접기
P. 104(조선 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1930년대의 한국 신종교 현황을 조사한) 무라야마는 ‘유사종교’를 새로운 종교사상운동의 하나로 보았다. 즉 그는 한국 신종교의 ‘후천개벽사상, 지상천국사상, 기적과 구세주사상, 사회운동’이라는 측면과 함께 ‘동학운동(실제로는 동학당 표기), 일진회, 3.1독립운동(실제로는 3.1소요운동 표기), 성도(聖都)운동, 기타 혹세(惑世)운동’ 등과 연계시켜 파악하였다. 접기
P. 137~138[근대화 시기에 우리 민족의] ‘우리’ 인식과 독자적인 정치체제성은 강력한 서구 문명의 도래와 더불어 도전과 위험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서구)의 문명이 ‘표준’으로 여겨졌고, 식민지, 반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같은 표준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근대 국민국가로 업그레이드해서 근대 국제 시스템 내에서 다른 국가들에 의해서, 특히 서구 국가들에 의해서 독자적인 행위자로 인정받는 것이야말로 비서구사회 내셔널리즘의 공통된 과제였다. 한국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으며, 어쩌면 그 같은 과정을 가장 혹독하게 겪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는 했지만 밀려오는 서구 문명 앞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으며, 그런 시도는 특히 ‘종교’ 영역에서 다채롭게 그려졌다. 우리가 주목했던 종교들(동학,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하겠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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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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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사상을 바르고 넓고 깊게 연구함으로써 원불교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74년 7월 4일 설립되었다. 또한 단순히 사상에 대한 연구보다 좀 더 심층적이며 구체적인 원불교학 수립과 사관 수립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작 : <근현대 한국종교의 생태공공성과 지구학적 해석>,<근대 한국종교, 세계와 만나다>,<근대한국 개벽운동을 다시읽다> … 총 1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근대한국 개벽종교, 서구에 대한 ‘대항’이나 ‘대안’ 아닌
서구의 근대를 안고, 치유하며 넘어서는, ‘근대 이후’이다

1. 대전환의 시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상황을 두고, “세계가 성공하지 못했던 대전환의 길”이 전개되고 있으며, “우리가 성공해 낸다면 세계사적인 변화가 우리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한반도의 비핵화를 넘어, 종전선언과 항구적인 평화체제의 구축은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학구도, 그리고 미일중러로 대표되는 세계 모든 나라의 정치적 역학관계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만의 역량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일중러 모두 자국 내의 정치상황과 국제적인 역학관계로 인하여 남북이 주도하며 전개되는 한반도 상황에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도 중요한 변수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 세계의 운명이 ‘대전환’을 시작하여, 새로운 문명의 단계로 진전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것은 150여 년 전 창도(創道)된 동학과 그 이후의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한국근대 개벽종교’들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2. 대전환과 개벽운동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 보국안민(輔國安民), 유무상자(有無相資) 등의 사상과 실천으로 대전환에 직면한 민중들을 각성시켰고,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에 의한 3.1운동 등을 통해 개벽세상에의 전망이 빛을 잃지 않도록 계승하여 왔다.
강증산의 증산교는 동학농민혁명을 겪으며 선천시대 내내 쌓이고 쌓인 원한을 풀어내지 않고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전망 아래 ‘천지공사’를 통해, 그리고 민중을 옭아매는 기제로 작동하는 ‘시스템’과의 결별을 통해 민중 세상으로의 길을 열어나갔다.
대종교는 국권 상실로 절망에 처한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의 역사적 연원을 가진 천손민족(天孫民族)임을 주지시키는 한편 수전병행(修戰竝行)의 가르침으로서 희망의 끈을 잃지 않도록 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사상과 동력을 제공하였다.
원불교는 이러한 모든 개벽적 전망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로 귀납하여, 식민지로부터의 이탈은 물론 물질 중심 문명의 극한점에서 정신 중심 문명으로의 도약을 통한 참 문명 건설에 매진하는 개벽운동의 새 전범을 구축하였다.

3. 한국근대 개벽종교와 공공성 구축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근대화’라는 역사 발전 단계를 거치는 동안 전개된 한국근대 개벽종교들의 이러한 운동은 단지 ‘좁은 의미의 보국안민(輔國安民)’이 지향하는 바, 한국사회나 한(韓)민족만의 해방과 개벽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 시기에 한민족의 종교적인 천재(天才), 사상적인 선구자들은 전 지구촌 차원으로 확장된 서구근대문명에 도사린 한계를 직관적으로 체득하고, 문명사적으로 도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혹은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달았고, 이를 선포했다.
지난 150년 동안의 한국사회의 끊임없는 민족운동의 저변에는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서부터 비롯된, 포기하거나 절망할 수 없는 정의롭고 선한나라, 아름답고 행복한 나라로의 전진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2017년 버전이 바로 ‘촛불혁명’이었다.
촛불혁명은 그 자체가 완성이나 종국이 아니라, 바로 그로부터 탄생된 문재인 정부를 매개로 하여, 바로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협정 그리고 전 세계적 차원의 신시대로의 도약으로 귀결되고 있다.

4. 지체된 근대/산업/민주/선진화와 대전환

한국사회의 최근 움직임들을 ‘대전환’이나 ‘개벽’이라는 패러다임(창)으로 진단하고 전망하는 것은 아전인수인가?
나아가 이것이 ‘교단종교’로서의 동학(천도교)이나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차원의 공공하기의 결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종교편향적’인가?
통일민족국가의 건설 내지 주변강대국으로부터 자주적인 민족국가의 건설운동 즉 한반도 운전자론이나, 최근의 ‘미투운동’이라는 사회적 인권의식의 ‘정상화’ 운동은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달성한 기초적인 것을 추구하는 철지난 숙제하기에 불과한가?
한국/한반도 차원에서 지체(遲滯)된 근대/산업/민주/선진화를 달성하는 것이 한국/한반도 지평을 넘어 세계사적인 의의/성과로 확장/확산된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전망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한국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근대한국의 개벽종교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지금 여기를 넘어 ‘내일’ 그리고 ‘그곳(세계 각국 각 곳)’에서도 유효하고 유의미한 답이 될 수 있는가? [최근 일본의 아베 퇴진 시민운동의 일각에서 ‘촛불혁명’을 배우자는 담론이 일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전망이다. 일찍이 한반도의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을 거쳐 인도의 독립운동에까지 그 영향을 끼친 바 있다.]

5. 촛불혁명 이후의 개벽운동 - 공공하기

2016-2017의 촛불혁명이 동학 이래의 개벽운동의 결실이라면, 촛불혁명 이후의 개벽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가? 이 책은 ‘공공하기’가 그 해답이라는 암시를 준다.
‘개벽종교’라는 집합명사 속에 담기는 종교들의 교리와 역사, 철학과 제도, 사상과 운동을 ‘공공하기’라는 패러다임으로 재조명하고, 우리나라는 물론 그리고 인류사회가 직면한 과제에 대한 해답을 그 속에서 찾아보려는 작업은 앞으로 6년 동안 “종교와 공공성 총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 저자 소개
염승준 / 원광대학교 조교수
야규 마코토(柳生 眞)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조성환 / 원광대학교 책임연구원
김석근 /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김민영 / 군산대학교 교수
하승우 /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박맹수 / 원광대학교 교수
원영상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김봉곤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허남진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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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9

2021 조성환 - 하늘과 땅의 살림영성 – 다시개벽

하늘과 땅의 살림영성 – 다시개벽

하늘과 땅의 살림영성

-안도 쇼에키와 동학을 중심으로

글: 조성환, 2021.05.01

이 글은 개벽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쥴리앙이라는 프랑스의 비교철학자는 “한국은 중국철학의 보관소”라고 했다고 한다(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전략』 교유서가, 2015, 『해제』). 중국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귀중한 사상들을 한국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인들은 한국이라고 하면 ‘한(恨)’을 떠올린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의 혐한론의 분위기를 타고 더욱 가열되고 있는데, 가령 일본에서 활동하는 황문웅이라는 대만출신 저널리스트의 신간 『恨韓論』(宝鳥社, 2014)이 대표적이다(설령 한국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자 하는 논의의 경우에도 ‘한’은 단골 주제로 등장한다. 가령, 오구라 키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講談社, 1998)).
이런 외국인들의 평가에서 공통되는 것은 한국사상의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과 일본의 생명사상에 접근한 것이다.

1. 안도 쇼에키의 활진사상(活眞思想)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는 에도 중기에 해당하는 18세기 일본의 사상가로 중국의 유교, 불교, 도교의 이른바 삼교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독특한 사상가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의사였으면서도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였고 특히 생명사상을 주창한 사상가로 유명하다. 유불도 삼교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니노미아 손토크(二宮尊徳. 1787~1856)와 유사하고, 생명을 철학적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는 ‘직경, ‘활진’, ‘자연세’ 등을 들 수 있다.

(1) 직경(直耕=직접 밭을 간다)
안도 쇼에키는 우주의 본질을 ‘경(耕)’, 즉 ‘노동’으로 파악한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다 각자 맡은 일을 함으로써 먹고 산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숭상받아 온 성인들(요순, 석가, 노장 등)을 모두 “불경탐식(不耕貪食)”, 즉 “농사일을 하지 않고 농민들을 착취한 도둑”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인의나 무위의 실천자로서의 성인이 아닌 ‘일하는 사람’(耕者之謂聖)으로서의 성인관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2) 자연의 원리를 훔친 성인
쇼에키는 우주의 원리는 직경인데, 성인만이(더 나아가서 지배층) 이 원리를 위배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노장사상에서 모든 존재는 무위의 존재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오직 인간만이 여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비판과 유사하다. 다만 그 내용상에 있어서 쇼에키는 무위(=자발)가 아닌 직경(=노동)을 주장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쇼에키의 말을 들어보자: “대개 조, 수, 충, 어에게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고 동류끼리 서로 먹거나 먹히는 일이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네 종류를 잡아먹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잡아먹는 관습이 시작된 것은 바로 성인들이 범한 죄로 천도를 훔쳤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성인들은 일찍이 천도를 위배한 것입니다.”(박문현·강영자 번역, 『법세이야기』, 5쪽)

(3) 전도(轉道)와 정도(定道)
쇼에키는 기존의 중국철학의 핵심 개념을 모두 자기 식대로 바꾸고 있다. 가령 ‘성인’대신에 ‘정인(正人)’이라는 말을 쓰거나 ‘천(天)’대신에 ‘전(轉)’을, ‘지(地)’대신에 ‘정(定)’을 각각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천지(天地)에는 상하의 계층적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 대신에 전정(轉定=회전과 고정)이라는 가치중립적 용어를 쓴다. 그리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천도(天道) 대신에 전도(轉道)를, 지도(地道) 대신에 정도(定道)라는 말을 쓴다.(참고로 『법세이야기』에서는 편의상 ‘天’을 ‘轉’으로 수정해 놓았다: “본문에는 ‘轉眞’으로 되어 있으나 ‘天眞’으로 일괄해 이해하기 쉽게 했다. ‘轉道’ 또한 ‘天道’로 통일하였다.” 박문현·강용자 『법세이야기』 5쪽, 각주 5)

(4) 활진(活眞) 또는 토활진(土活眞)
‘활진’은 쇼에키에게 있어서 우주의 궁극적 실재와 같은 개념이다. 그가 고안해낸 이 말에는 ‘생명’(活)이야말로 ‘참’(眞)이고, 그것의 근원지가 바로 땅임을 의미한다(土活眞). 아울러 ‘곡령(穀靈)’은 땅에서 나오는 곡물 속에 생명의 엣센스가 들어 있고, 그것을 영성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공공철학자 김태창은 쇼에키의 ‘활진’을 일본의 고신도(古神道)의 ‘산령産靈’(무스히=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신령)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마찬가지로 신도학자인 카마다 토지(鎌田東二) 교수는 “자연신도에서는 무스히를 포함해서 자연생성력이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미래공창신문> 제24호). 이것은 쇼에키의 사상이 고대 일본의 생명사상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5) 자연진영도(自然眞營道)
쇼에키에게는 『자연진영도』라는 대표적인 저작이 있는데, 여기에서 ‘진영’이란 우리말로 옮기면 ‘참행위’와 같은 말로,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자연의 생명력을 기르는 직경이야말로 참다운 행위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이야말로 참된 ‘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말하는 ‘노심자(勞心者)’와 ‘노력자(努力者)’의 위치를 정확하게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天下之通義也. 『등문공(상)』).

(6) 법세에서 자연세로
쇼에키는 성인이 노동하지 않으면서 노동하는 자들을 착취하는 세상을 ‘법세’라고 한다. 법세는 성인들이 사적인 법(=제도)를 만들어 자연의 원리(=직경) 반하는 착취를 일삼는 세상이다. 반면에 모두가 직경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세상을 자연세라고 한다. 자연세는 몸소 경작을 함으로써 대지의 생명력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타인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치며 사는 이상세계이다.

(7) 일본적 영성
카마다 토지 교수는 일본적 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적 영성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으로 ‘장소적 논리’가 있고, 이것을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말로 하면 대지성(大地性)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이 지닌 커다란 역동으로, 거기에는 생태지(生態智)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생성력으로서 무수히의 힘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낳고 만들어 나가는 스스로성과 저절로성이다. 이러한 무스히의 힘이나 자연생성력이 일본적 영성의 근간에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미래공창신문> 제24호)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안도 쇼에키의 활진, 곡령, 직경사상 등은 이러한 일본적 영성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2. 동학의 하늘사상
일본적 영성의 근원에 ‘대지’가 있다고 한다면, 한국적 영성의 바탕에는 ‘하늘’이 있다. 한반도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인 기록은 제천행사를 특징적으로 전하고 있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탄생한 이른바 민족종교들은 하나같이 제천행사를 부활시키고 있다(동학, 대종교, 증산교).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박재순은 하늘을 ‘한국종교의 원형’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또한 김태창은 최치원이 말한 풍류는 하늘의 노마드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대지와 하늘의 차이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심성의 차이를 대변한다고 하였다. 동학은 이러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 사상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다.

(1) 천도의 부활
최제우는 자신의 학문은 ‘하늘’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천도’라고 불렀고, 이 점에서는 서학과 마찬가지지만 ‘학’의 연원이 한반도(東方)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서학’이 아닌 ‘동학’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쇼에키의 ‘활진’개념이 신도의 ‘무스히’사상에서 나왔다는 견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것은 동학이 우주적 생명력의 근원을 하늘 관념에서 찾고 있다고 한다면, 쇼에키는 그것을 경작이라는 대지 관념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편의상 전자를 천학(天學), 후자를 지학(地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학의 ‘하늘’은 유불도에 나타난 중국의 ‘천(天)’사상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령 『논어』에서의 ‘천(天)’은 무언(無言)의 천(天)인 반면에 최제우의 하늘은 가르침을 내려주는 하늘이다. 이러한 차이는 중국사상이 일찍부터 ‘상제(上帝)’나 ‘천(天)’이 아닌 ‘도(道)’라고 하는 인문적 질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에서 중국사상은 도를 정점에 두는 도학(道學)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동일한 맥락에서 서양사상은 God을 가치의 근원에 두는 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2) 어우러짐으로서의 생명력
동학과 중국사상 또는 서양사상과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천인관계, 즉 하늘과 인간(또는 신과 인간)의 관계일 것이다. 최시형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천인상여”(天人相與=하늘과 인간이 서로 관여한다)라는 동중서의 말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天人相與之機不可須臾離也”- 하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구조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한대의 동중서는 군주가 비도덕적인 정치를 하면 그에 대한 경고로서 하늘이 자연재해를 내린다고 하는 천인감응론 또는 천인상관론의 입장에서 천인상여를 말했다고 한다면, 동학은 하늘과 인간의 상호의존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말을 차용하였다(“하늘은 인간에 의지하고 인간은 하늘에 의지한다.”최시형).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원리를 일방적으로 본받는다고 하는 중국의 도가사상이나 쇼에키의 직경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이다. 즉 동학은 인간도 하늘을 죽일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어린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해치는 것이다.”최시형) 인간의 주체성과 영향력을 훨씬 강조하고 있다. 동학에 이르면 하늘은 인간처럼 인격화되고 인간은 하늘만큼 존귀해진다. 동학의 생명사상은 하늘과 인간의 하나됨(合一)이 아니라 ‘어우러짐’(相與)을 통해 완성된다(이것을 김용우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호혜’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학이 하늘과 인간의 불상리(不相離)를 말하고 있다면, 『중용』에서는 도(규범)와 인간의 ‘불상리’를 주장하고 있다(道也者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또한 『팡세』에서는 신과 함께 하는 행복(Happiness of man with God)과 신과 함께 하지 않는 불행(Misery of man without God)을 대비시키고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대지로의 회귀를 일본적 영성의 특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역시 천학(天學)과 도학(道學) 그리고 신학(神學)과 지학(地學)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언설들이라고 생각한다.

(3) 어우러짐의 한국철학적 배경
조선성리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권근은 『천인심성분석지도(天人心性分釋之道)』에서 성리학의 ‘태극’이 아닌 ‘하늘’을 정점에 위치지우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권근은 ‘天’이라 글자를 ‘大’와 ‘一’로 분해한 뒤, 각각을 다시 리와 기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天爲一大. 一者, 以理言無對, 以行言無息; 大者, 以體言無外, 以化言無窮. 하늘은 ‘一’과 ‘大’를 말한다. ‘一’이란 원리의 측면에서 말하면 짝이 없다는 것이고, 운행의 측면에서 말하면 쉼이 없다는 것이다. ‘大’란 형체의 측면에서 말하면 밖이 없다는 것이고 변화의 측면에서 말하면 끝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 그림 참조).
권근이 성리학적인 태극이나 리가 아닌 ‘천’을 최고의 범주로 설정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가령 리기론적 범주만으로는 실천철학적인 함축, 즉 ‘외천’(畏天)으로서의 경(敬)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반면에 ‘천’을 리와 기를 아우르는 범주로 설정함으로써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를 포괄하는. 이것을 리와 기의 어우러짐으로서의 하늘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하늘을 대신해서 태극이나 리가 최고범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면, 권근의 경우에는 그러한 사유체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하늘이 여전히 최고범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리와 기의 묘합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생각은 이후에 율곡 등으로 이어지는데, 가령 율곡은 리와 기의 관계를 ‘묘합’으로 보았다고 한다(“理氣之妙.”‘묘합’에 대해서는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김동희 박사의 논문 『율곡 이이의 리기지묘 사유에 대한 재고찰』(2015)로부터 계발을 받았다. 김박사는 서양의 이원론적 사유, 중국의 일원론적 사유에 대해서 한국의 묘합적 사유를 특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김동리의 형인 김범부는 한국사유의 특징을 ‘묘합’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월간 『공공철학』에 실린 야규 마코토씨의 글을 참고하였다). 리와 기의 묘합적 존재방식은 마치 양자역학에서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인 것과 유사하다(이 점에 대해서는 한동대학교 기계과의 이재영 교수로부터 계발을 받았다). 빛은 관찰자가 보고 있으면 입자처럼 움직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파동과 같이 행동한다고 한다. 여기서 입자와 파동의 이중적 존재방식은 이원론이나 일원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선후나 본말이 있을 수 없다.(게슈탈트심리학에 대해서는 Brook Ziporyn 교수가 중국철학의 ‘리’를 coherence로 해석하면서 드는 예를 참고하였다)

(4) 종교와 종교의 어우러짐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가설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사유의 특징 으로 ‘어우러짐’을 들 수 있고, 그것이 동학에서는 ‘상여(相與)’의 호혜행위로, 권근이나 율곡 등에서는 ‘묘합(妙合)’의 존재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또한 이런 맥락에서 일제시대 종교사가인 이능화의 “세계의 모든 민족종교는 하늘을 중심에 두고 있다”(悉皆以天爲主, 『백교회통』, 1912)는 말을 이해하면, 모든 종교를 어우러지게 하는, 즉 조화되게 하는 작용으로서 하늘이 설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종교’를 신도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의 세 개로만 한정시키고, 나머지는 ‘유사종교’라는 이름으로 단속과 통제를 가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대조적인 이해이다. 서양에서도 종교다원주의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이 19세기 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능화의 “백교회통론”은 대단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과는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이런 논의가 일찍부터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능화의 심성에는 종교와 종교 간의 장애가 아닌 소통(通敎)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다. 한편 최치원은 이러한 통교적 사유방식을 ‘포함’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다”). 여기서 ‘풍류’는 중국의 유불도 삼교를 어우러지게(包含) 하는 하나의 사유방식을 말하고, 그것이 한국인의 ‘멋’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삼교의 조화나 백교의 조화를 논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어우러지게 하여 하나의 새로운 ‘도’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중국과도 다르고 이능화와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시대에 이러한 종교간의 어우러짐을 표방하고 나타난 종교단체가 원불교이다. 가령 원광대학교의 한복판에 있는 수덕호에는 둥그런 호수 주위에 원불교 창시자의 동상 대신에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석가의 동상이 놓여 있다. 이것은 최치원의 ‘포함’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을 지낸 조옥정은 구한말에 유학자로 시작했다가 동학도로 전향하고 다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원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기독교 성직자들로부터 불교를 신봉한다는 비난에 대해서 “한 눈보다는 두 눈이, 한 손보다는 두 손이 한 발보다는 두 발이 더 유익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5) 한국인의 영성
나는 바로 여기에 한국인의 영성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즉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인정하는 경향이다. 그것을 한글로 표현하면 ‘하늘’이나 ‘한’으로 나타낼 수 있고(‘크다’, ‘많다’는 의미에서), 이미지로 그리면 ‘○’이 되고, 한자로 표현하면 ‘通’이나 ‘風流’가 될 것이다. ‘한’이나 ‘円’은 타자를 수용하는 ‘바탕’이나 ‘마당’또는 ‘터’를 형용한 것이고, ‘풍류’는 그것이 ‘미적’이라는 가치를 표방한다. 살림은 이러한 영성의 발현을 통해서 실현된다. ‘한’은 맺힌 ‘恨’을 풂으로써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을 어우러지게 하는 살림행위를 말한다. ‘한살림’은 ‘큰살림’이라는 뜻이다. 권근은 그것을 ‘天’으로 표현하고, 그 의미를 다시 ‘大’와 ‘一’로 담아냈다. 큰살림을 방해하는 것은 하늘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작고(小) 구분된(二) 인식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전시체제에서 와츠지 테츠로는 ‘공공’을 국가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이것은 ‘공공의 세속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스즈키 다이세츠는 1940년대에 『일본의 영성』(1944), 『일본적 영성의 자각』(1946), 『영성적 일본의 건설』(1946), 『일본의 영성화』(1947)를 발표하여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일본식 근대화를 추구해 온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마 최근에 한국에서도 조금씩 영성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아마도 한살림운동의 근저에는 근대화과정에서 잊혀진 한국적 영성에 대한 성찰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생명학연구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2023/04/24

Sung-Deuk Oak - [천공이 무속인인가?] 무교는 무죄 일반 언론은 물론 기독교 언론과 목사들이 천공 등을... | Facebook

(1) Sung-Deuk Oak - [천공이 무속인인가?] 무교는 무죄 일반 언론은 물론 기독교 언론과 목사들이 천공 등을... | Facebook


[천공이 무속인인가?] 무교는 무죄

일반 언론은 물론 기독교 언론과 목사들이 천공 등을 무속인으로 칭하고, 무속/무교가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한다고 비판한다.
뭐가 무속/무교이며, 뭐가 무속인/무당/무교인인지, 그 범주화에 대해서 다시 공부하면 좋겠다.
천주교는 19세기 유교 정부와 주자학을 받드는 양반들에 의해 혹세무민하는 미신/사술/사교로 여겨졌고, 무부무군의 천주교인은 여러 번의 박해를 통해 10,000명 가까이 처형되었다. 뭐가 이단사술인가?
천주교나 개신교는 포교 초기에 한국의 무교를 종교가 아닌 '미신'으로 낙인 찍었다. 경전, 사원/예배당, 목회자 조직 등 눈에 보이는 체제가 없으면 종교의 범주에 넣지 않았다.
일제는 무속을 한국인의 종교로 못박고, 한국이 1,000년 이상 정체하는 영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여성의 신앙, 전근대적 신앙, 미신적 신앙으로 낙인을 찍었다. (정체성론) 그리고 자연종교에서 더 발전된 남성 사제를 가진 신도로 대체하려고 했다. (근대화론) 그들은 조선 멸망의 한 원인을 민비의 무속화라고 주장했고, 지금도 식자들의 글에 민비와 비선실세 진령군의 관계를 가지고 와서 한국 정치를 비판한다. 일제 식민지사관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포로가 된 꼴이다. 진령군 역시 무당이라기보다는 도교쪽 사이비 예언자였다. 민비는 1887-94년 앨러즈 의사(간호사), 언더우드 부인 등 선교사들과 친하고 복음을 듣고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면도 있다는 뜻이다.
박정희 정권도 동일한 노선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해 미신적 무속을 청산하려고 했다.
이러한 기독교-일제-박정희정권의 남성적, 군사적, 조직 종교의 힘으로 억압하고 미신으로 낙인한 한국 무교는 핍박 속에서도 민중의 종교로 살아 있다. 한국 개신교 목사들이 가진 무교에 대한 지식은 그처럼 매우 천박하다. 혹 공부를 좀 한 목사도 두 세대 전에 나온 유동식 교수의 무교 이해에 머물러 있다. 만일 누군가가 60년대 한국 개신교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현재를 진단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난 10년 동안 출판된 한국 무교에 대한 논문 한 편이라도 읽으면 좋겠다. 한국 무교는 지난 30년 동안 급변했다.
과연 도사 노릇하는 천공 등이 무당/무속인인가? 한국 종교 전통에서 남자 무당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선도/도교 계열에 남자 도사들이 많았다. 물론 유불선이 습합된 한국의 다종교 상황에서 일부 불승은 도교를 실천하고 무속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불승을 보고 무당/무속인이라고는 잘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1) 도교의 경전을 공부하고 단전 호흡 등을 하며 도를 닦았던 도인들을 무당/무속인이라 할 수 없다.
2) 도교의 경을 암송하며 축귀하던 맹인 판수를 우리는 무당/무속인이라 하지 않는다.
3) 유교와 도교 전통의 일부인 풍수하는 풍수가를 무당/무속인이라 하지 않는다.
4) 점을 치는 역술인(점쟁이)도 무당과 다르다.
5) 정치적 도참가도 다른 부류였다.

이처럼 남성 도인, 판수, 풍수(쟁이), 역술인, 도참가 등은 무당과 다른 부류의 종교인들이었다. 지금은 더 다양하다. 모두 무속인으로 퉁치면 곤란하다.
무교를 유사종교도 아닌 미신으로 분류했던 일제 총독부의 학문적, 행정적 한국 종교 탄압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 받은 해방 후 여러 정권과 기독교는 여전히 한국의 민속 종교를 통으로 싸잡아 미신으로 간주한다. 그러니 기독교를 통으로 싸잡아 서양 귀신을 섬기는 반민족적 집단으로, 조상신(세습해 준 아비 목사)을 섬기는 제사 집단, 거대 예배당을 짓고 복을 비는 우상숭배 집단으로 몰아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타종교를 비판하려면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조선 시대 불교가 지금 불교가 아니고, 조선 시대 유교가 지금 유교가 아니며, 1903년 개신교가 지금 개신교가 아니듯, 100년 전 무교가 지금 무교가 아니다.
교회가 이미 기복신앙 집단, 미신적 집단이 되어 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부터 보기 바란다.
참고) 무속보다 가짜 예언이 문제,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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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 양은용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 네이버 블로그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양은용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차례

Ⅰ. 서언
Ⅱ. 소태산 종교관의 구조
Ⅲ. 원불교 교리상의 마음공부
Ⅳ. 마음공부와 치유
Ⅴ. 결어
===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최현민 수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우교수, 사랑의 씨튼수녀회)

차례

Ⅰ.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Ⅱ. ⾃他⼒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Ⅲ.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Ⅰ. 서언
질병 ․ 빈곤 ․ 전쟁의 3대 사회악이 종교를 낳게 한다는 말이 있다. 종교의 본령이 사회구원에
있으므로, 질병과 빈곤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고통이 심화될 때, 성자의 구세이념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불교의 원점에서 파악된 고(苦)와 이에 대한 자비(慈悲), 그리스도교의 원죄(原罪)와 사랑이
강조된 것은 이러한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구세이념은 새로운 이념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다. 성립사적으로 보면, 기존종교의
가르침이 변화된 사회상황 아래서 기능하지 못할 때 사회에서는 새로운 구세이념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대응하는 것이 새 종교운동이다.
바라문교의 가르침 아래서 불교가 성립하고, 유대교 아래서 그리스도교가 성립한 것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는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포월(包越)하는 가르침을 제시하려 한다. 당시
사회가 그 이념을 받아들일 때 다시 말하면 새 종교운동의 구세이념이 목적을 달성할 때 그것은
사회적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러지 못할 때는 소멸하고 만다.
그렇다면 사회의 존재형태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근현대에 와서 종교이념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근대 인류는 격변하는 사조(思潮)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구세이념을 갈구하게 되었다. 서세동
점(西勢東漸)의 정치사회사조 아래 혼란과 전쟁을 경험하였고 새로운 체제와 이념을 터득해 온
것이다.
물질문명의 이기에 탐닉하면서 정신문화의 축을 다시 세워야하는 과제를 안고, 교통 ․ 통신의
발달과 함께 공동체적 운명을 가꾸어 왔다. 근대 이후 인류가 경험해온 전쟁, 인구증가와 자원고갈,
환경오염, 도덕적 타락 등의 현상은 지구촌사회를 이대로 두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이러한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구세이념에서 볼 때 가장 두드러진
흐름을 신종교(新宗敎)운동과 신영성(新靈性)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먼저 신종교운동은 19세기를 전후로 사회구제를 외치며 일어난 사회운동이다.㉮ 지구촌이라
불릴 만큼 변화된 사회 환경 아래서 새로운 구세이념을 모색함으로써 그것은 민족과 지역을 넘어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성립하였다.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비판하고 또 새롭게 해석하면서 기존종교의 근대적 변모를 자극하였다.
한국 신종교의 사상적 특징을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 ․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 ․ 민족주체(民族主
體)사상 ․ 인간존중(人間尊重)사상 ․ 사회개혁(社會改革)사상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 姜敦求,「新宗敎硏究序說」(서울대 종교학연구회 편,『宗敎學硏究』6, 1987, 191쪽); ⾦洪喆,『韓國新
宗敎思想의 연구』, 집문당, 1989, 25쪽 참조.
㉯ 졸고,「韓國新宗敎運動과 그 사상」(『東洋宗敎學』11, 원광대 동양종교학과, 2001, 9쪽 이하) 참조.
이를 盧吉明,『韓國新興宗敎硏究』(경세원, 1996) 40쪽 이하에서는 ⼈尊사상과 民衆사상․開闢사상
과 地上天國신앙․救世主신앙과 選民사상․調和사상과 統⼀사상․解寃사상과 傳統⽂化繼承사상으로 정
리하고 있다.

2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운동에는 시대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지역이나 민족국가에 따라 문화기반이나 사회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제도이념의 구성 체계 등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문명에 대응한
정신문명, 곧 영성의 혁명을 강조함으로써 인류정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신영성운동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이다. 신종교운동이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형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 신영성운동도
그러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는 미국 등지에서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으로㉰ 일본에서는
신영성운동 외에 정신세계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교나 과학과 같은 과거의
문화현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성을 찾으려고 한다. 영성으로 불리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나감으
로써 절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변용(自己變容)이나 치유(治癒)의 의미가 강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운동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종교사상의 흐름에서 보면 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대응은 전통종교나 신종교운동 모두가 전 세대와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고,㉲ 신영성운동에
서도 그 근저에 종교적 흐름이 깔려 있다.
생명 중시의 기철학(氣哲學)적 세계관이 강조되고 건강문제가 사회적 화두(話頭)로 부각된 가운데
전개되는 이들 운동은 인류의 새로운 정신차원을 모색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회구원의 문제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지구촌 사회가 된 오늘날에 그것은 밖으로 환경과 생태계로 연결되고, 안으로는 영성 내지 정신세계
와 관련되어 있다. 사회가 복잡하고 이념이 다양해진 만큼 극절한 치유를 통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환경회복과 인간회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인간 삶의 새로운 활로를 말해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근현대사회의 변혁사조 아래 소태산(少太山 朴重彬, 1891-1943)에 의해 1916
년 성립한 원불교의 교리체계를 통해 그 구세원리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만유로 벌여
있는 세상을 은(恩)으로 파악하며 이에 따라 감사생활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의 구세이념을
특히 마음공부와 관련하여 치유적 성격을 밝히려는 것이다.
㉰ 존슨 로버트 L,『반문화운동과 종교』, 이장식 역, 현대사상사, 1976; 全明秀,「뉴에이지운동의 전개
와 변모-대체종교에서 대중문화로의 방향전환에 관한 시고」(『圓佛敎思想과 宗敎⽂化』34,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6) 등 참조.
㉱ 島薗進,『精神世界のゆくえー現代世界と新霊性運動ー』, 東京堂出版, 1996; 島薗進,「新靈性⽂化と宗
敎」(원광대학교 편,『미래사회와 종교』, 원광대출판국, 2000) 등 참조.
㉲ 신종교의 개념에 근대의 변화된 사회상황 아래 변용된 종교활동의 대부분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근래 한국사회에서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달라지면서 종교단체와 수련단체의 경계가 모호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 소태산은 우주와 세계, 인간관계를 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은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
명적 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네 가지 범주로 규정한 것이 사은이며, 사은의 실천이념이 감사생활
로 요약된다. 원불교 은사상에 대해서는 李鉉澤,「원불교의 은사상」(원불교사상연구원 편,『원불교신
앙론 연구』, 원불교출판국, 1996, 185쪽 이하); ⾦洛必,「恩思想의 ⽣哲學적 조명」(같은 책, 284
쪽 이하) 참조.

3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Ⅱ. 소태산 종교관의 구조
원불교의 교리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립과정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기존종교의 역할이나 구세이념에 대한 평가가 따르고, 그 영향 등이 드러나기 때문인데 소태산의
종교관과 관련하여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에 대한 수용과 공존의 태도이다. 새로운 종교는 기존종교나 그 구세이념
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기 마련인데 원불교에서는 그 역할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소태산은,
<1> 천하 사람이 다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큰 도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도라 이르나니, 그러므로 우리의 일원종지(一圓宗旨)와 사은사요(四恩: 天地
恩․父母恩․同胞恩․法律恩, 四要: 自力養成․智者本位․他子女敎育․公道者崇拜) 삼학팔조(三
學: 精神修養․事理硏究․作業取捨, 八條: 信․忿․疑․誠․不信․貪慾․懶․愚)는 온 천하 사람이
다 알아야 하고 다 실행할 수 있으므로 천하의 큰 도가 되나니라.㉴
<2> 참다운 도덕은 개인 ․ 가정으로부터 국가 ․ 세계까지 다 잘 살게 하는 큰 법이
니, 세계를 맡긴들 못할 것이 무엇이리요.㉵라 하여,
그 교법을 천하의 큰 도라고 자신한다. 세계를 맡겨도 능히 지도해나갈 수 있는 가르침이라
고 본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법위(法位)를 갖추어감에 있어서 불퇴전(不退轉)에 이르는 출가위
(出家位)의 승급조항에「현재 모든 종교의 교리를 정통하며」㉶라 하고,「모든 종교의 교지도 이
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자는 것이니라.」㉷ 라고 하여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3> 모든 교회의 서로 달라진 내역과, 그 근원은 원래 하나인 내역도 또한 이와 같
으므로, 인지가 훨씬 개명되고 도덕의 빛이 고루 비치는 날에는 모든 교회가 한 집안
을 이루어 서로 융통하고 화합하게 되나니라.㉸
<4>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
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저
교 이 교의 간격을 두어 마음에 변절한 것 같이 생각하고 교회 사이에 서로 적대시하
는 일도 있지마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때와 곳을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이요 다 한
집안으로 알게 되나니, 그대의 가고 오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이 알아서 하라. … 나
의 제자 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 『⼤宗經』교의품 2.(『圓佛敎全書』, 원불교출판사, 1977, 112쪽)
㉵ 같은 책, 실시품 14.(같은 책, 333쪽)
㉶ 『正典』수행편 법위등급.(같은 책, 91쪽)
㉷ 같은 책, 총서편, 교법의 총설.(같은 책, 22쪽)
㉸ 『대종경』전망품 13.(같은 책, 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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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이러한 소태산의 종교관을 구세이념에서 보면 자신이 조직한 교리제도가 너른 세계의 많은
생령(生靈)을 건지는데 가장 적실한 가르침이며 구세 사업에는 모든 종교와 만나고 협력해나가야
한다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법통을 이어 2대 종법사(宗法師)에 오른 정산(鼎山 宋奎, 1900-1962)이 삼동윤리(三同倫理:
同源道理․同氣連契․同拓事業)를㉻ 밝히고 3대 종법사인 대산(大山 金大擧, 1914-1998)이「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 밝힌 것이 이러한
성격을 증명한다.
둘째, 불교에 연원(淵源)하여 만 종교 만 사상을 아우르는 태도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태산은
구도(求道)에서 대각(大覺)에 이르도록 까지 고향에서 생활인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구도과정에
서는 깊은 선(禪)적 경지에 들고「이 일을 장차 어찌 할꼬?」하는㉯ 화두로 일관하기도 하였다.
1916년 4월 28일 대각을 이룬 후, 그는 모든 종교의 경전을 열람하는데 그 가운데 『금강경(金剛經)』
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밝힌다.
<5> 서가모니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道를 얻
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 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 장차 회상(會上)을 열 때
에도 불법(佛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당시 불교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불교관은 불법(佛法)과
불교(佛敎)를 크게 대별하여 전자를 계승 선양할 가르침으로, 후자를 제도적으로 개선할 대상으로
보는 특징이 있다.㉲
<6> 그가 보는 불법은 천하의 큰 도(道)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
㉹ 같은 책, 전망품 14.(같은 책, 388쪽)
㉺ 졸고,「원불교에서 본 종교 간의 대회원리」(『한국종교연구』4, 서강대 종교문제연구소, 2002, 46
쪽) 참조.
㉻ 1961년 4월에 발표한 涅槃 偈頌으로, 그 내용은『⿍⼭宗師法語』 도운편 34-37(같은 책,
988-991쪽)에 밝혀 있다.
㉮ 『⼤⼭宗師法語』 구세편 15.(자문판, 대산종사법어편수위원회, 2006, 584쪽) 1971년 원불교반백
년기념대회 표어이며, 1989년 2월의「민족평화를 위한 종교인 회의」에 메시지로 보내고, 열반에
이르러 게송으로 삼았다.
㉯ 『圓佛敎敎史』제1편 2장, 대종사의 입정.(『원불교전서』1036-1038쪽)
㉰ 『대종경』서품 2.(같은 책, 95쪽)
㉱ 소태산은「불교가 이 나라에서 여러 백년 동안 천대를 받아 온 끝이라 누구를 막론하고 불교의 명
칭을 가진 데에는 존경하는 뜻이 적게 된지라」(같은 책, 서품 15, 같은 책, 102쪽) 하여, 실상을
파악하고 있다. 그가 1920년에 초안, 출판한『조선불교혁신론』(불법연구회, 1935)은 이러한 그의
불교에 관한 관점을 집약한 것이다.
㉲ 한종만,「원불교의 불교관」(수위단사무처 편,『원불교사상시론』I, 원불교출판사, 1982, 74쪽) 참조.
불법과 불교를 혼용한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교법은 계승하고 제도는 개혁한다는 관점이 드러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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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 고 하여,
만 종교에서 뛰어난 가르침으로 평가한다. 물론 미래의 불법은 과거의 불법과는 달라야 하며,
그 달라진 불법은 장차 세계의 주교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것이 소태산이 말하는 불
교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이다.
<7> 그는 과거에는 유․ 불․ 선(儒佛仙) 삼교가 각각 그 분야만의 교화를 주로 하
여 왔지마는 앞으로는 그 일부만 가지고는 널리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므로 우
리는 이 모든 교리를 통합하여 수양 ․ 연구 ․ 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또는 영육쌍
전(靈肉雙全) ․ 이사병행(理事竝行) 등 방법으로 모든 과정을 정하였나니, 누구든지
이대로 잘 공부한다면 다만 삼교의 종지를 일관할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의 교
리며 천하의 모든 법이 다 한 마음에 돌아와서 능히 사통오달의 큰 도를 얻게 되리
라. 고㉵ 본다.
앞으로의 가르침은 불교에서 비롯하여 유․불․도 삼교사상의 종지를 통하고 만 종교 만 사
상과 원융회통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신개벽(精神開闢)으로 본 한국 신종교의 개벽사관의 수용 태도이다. 그것은 1960년 수운(水
雲 崔濟愚, 1824-1864)의 동학(東學) 창도로 비롯된 신종교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선언한 시대변화
사조를 계승하는 성격을 지닌다.
개벽이란 암흑과 혼돈에서 천지가 열린다는 뜻으로, 선천세계가 끝나고 대명천지가 도래한다는
뜻에서 후천개벽이라고도 한다. 후천개벽이란 인간중심의 문화개벽으로 새로운 문명세계를 가져오게
되며 한국 신종교에서는 이를 천운의 회복으로 본다.
수운과 함께 연담(蓮潭 李雲圭, 1804-1861-?)에게 배웠다고 하는 일부(一夫 金恒, 1826-1898)는
1881년 『정역(正易)』을 완성함으로써 선후천 교역(先後天交易)을 맞이했다고 술하고 있다.㉶
수운은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윤회(輪廻)같이 둘린 운수 내가
어찌 받았으며/ 척조창생(億兆蒼生) 많은 사람 내가 어찌 높았으며/ 이 세상 없는 사람 내가 어찌
있었던고…」라㉷ 하여 삼교의 교화력이 쇠멸했음을 분명히 한다. 개벽의 원리에서 보면 삼교는
선천시대의 구세이념이요, 그러한 시대가 지나 운(運)이 다했다는 논리이다.㉸
㉳ 『대종경』서품 3.(『원불교전서』95쪽)
㉴ 같은 책, 서품 15(같은 책, 103쪽) 참조.
㉵ 『대종경』교의품 1.(같은 책, 111-112쪽)
㉶ 李正浩 저,『正易硏究』(국제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76),
200쪽에서는 수운 ․ 일부 ․ 광화(光華 ⾦致寅, 1855-1895)의
3인을 연담의 동학제자로 소개하고 있다. 연담은 기존종교인
유․불․선 삼 교 가운데 수운에게는 선, 일부에게는 유, 광화에
게는 불을 전수했다고 한다.
㉷ 『⿓潭遺詞』敎訓歌.

6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수운은 결국 하느님을 직접 모실 수 있다는 자신을 갖는다. 수운은 교화력을
잃은 유교와 불교에 대하여 당시 세력을 확대하던 서학(西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운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 유 ․ 불 ․ 도 삼교의 문화풍토를 수용하면서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추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선천은 억압과 폭력으로 불평등과 부조리가 가득 차서 어둡고 괴로운 시대이며, 후천은 협력과
조화에 의해 평등과 평화가 가득 차서 밝고 서로 잘 사는 시대이다. 묵은 세상이 가고 새 세상이
오는 것은 민중의 바램이다.
이 후천개벽시대가 오는 과정에 있어서 수운은 괴질(怪疾)이 존재한다고 보고, 증산(甑山 姜一淳,
1871-1909)은 병겁(病劫)을 말하고 있는데, 소태산은 이를 정신개벽으로 주장한다.㉺ 수운에서
비롯되어 한국 신종교운동에 있어서 공유되었던 개벽사관을 소태산은 정신개벽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신개벽은 소태산의 개교, 즉 원불교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대각을 이룬 그의 시대사회를 바라보는 코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8> 대종사(소태산) 당시의 시국을 살펴 보시사 그 지도강령을 표어로 정하시기를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하시니라.㉻
<9>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
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
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이 가운데 정신과 물질을 아울러 나가는 도학과학병진론(道學科學竝進論)이나 신앙과 수행(훈련)
이라는 자타력병진론(自他力竝進論) 등 그의 다양한 관점의 단초를 열고 있다. 정신개벽이란 달라진
시대환경 아래서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므로 개인에게는 물론 사회에 있어서의 치유에까지
전개될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소태산의 도학과학병진론을 치병과 관련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0> 이운외(李雲外)의 병이 위중하매 그의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와 대종사께 방책
을 문의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곧 의사를 청하여 치료하라. 하시고, 얼마 후에 병이

㉸ 李世權편저, 東學思想(경인문화사, 1987) 82쪽 참조.
㉹ 崔東熙, 水雲 (金用天·崔東熙저 天道敎, 1973,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57쪽) 참조.
㉺ 김홍철, 「근세 한국종교사상에 있어서의 病觀 연구」(동저, 圓佛敎思想論考, 원광대학교출
판국, 1980, 307쪽 이하) 참조.
㉻ 『대종경』서품 4.(『원불교전서』 95-96쪽)
㉮ 『정전』총서편, 개교의 동기.(같은 책, 21쪽)

7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평복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전에 운외가 병이 중하매 나에게 먼저 방침을 물은
것은 그 길이 약간 어긋난 일이니라. 나는 원래 도덕을 알아서 그대들의 마음병을 치
료해주는 선생이요, 육신 병의 치료는 각각 거기에 전문하는 의사가 있나니, 이 앞으
로는 마음병 치료는 나에게 문의할지라도, 육신병 치료는 의사에게 문의하라. 그것이
그 길을 옳게 아는 것이니라.㉯
그는 병을 육신병과 마음병으로 구분하고 육신병 담당은 의사이므로 병원을 찾고, 자신은 마음병
치료인이므로 그에 관해 문의하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현대 의학을 인정 수용하는 태도가
분명해진다. 그의 개벽사관은 물질문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용할 인간의 자주력이
필요하며, 그것을 정신개벽이라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태산의 종교관은 개벽사관을 통한 시대인식과 불법에 연원한 교법으로 기존종교의
구세이념과 융통조화하는 원리이다.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이웃종교와 공존하면서 공동선(共同善)을
구축하는 종교협력의 관점이 그의 종교관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원불교 교리상의 마음공부
소태산의 구세이념은『정전(正典)』에 그 대체가 담겨 있다. 초기교서인『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
要論)』(1927)과『육대요령(六大要領)』(1931)을 거쳐 그의 열반을 앞둔 일제말기에『불교정전(佛
敎正典)』(1943)으로 발간했던 것을, 1962년에 현재의 체제로 결집하였다.㉰ 원불교 교리체계는『정
전』의 머리에 수록된 「교리도(敎理圖)」㉱를 통해 그 구성체계가 드러나며, 마음공부 원리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리도」는 중앙 상단의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 〇)을 정점으로 3등분하고 있다. 중앙은
법신불 원리를 설명하고, 오른 쪽은 수행문, 왼쪽은 신앙문을 배치하고 있다. 수행문에는 삼학과
팔조 그리고 아래에 수행의 강령인「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을 배치하고 있는데 「무시선
무처선」은 「언제나 선, 어디서나 선」으로 번역한다.
신앙문에는 사은과 사요 그리고 아래 신앙의 강령인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을
배치하고 있는데,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곳곳이 부처님, 일마다 불공」으로 번역한다. 아울러
이들을 둘러싼 네모서리 밖에 사대강령(四大綱領)인 정각정행(正覺正行) ․ 지은보은(知恩報恩) ․
㉯ 『대종경』실시품 31.(같은 책, 339-340쪽)

때가 급하여 이제 만전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나, 나의 일생 포
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
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 만대에 길이 전하게 하라.」(『대종경』 부촉품

㉰ 『불교정전』을 편수하고 소태산은「

3, 같은 책, 400쪽)고 한 것처럼 당시에 골격이 갖추어졌다. 그 가운데 일제시대의 제약을 털어
내는 등의 작업을 거친 것이『정전』이다.『정전』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時湧,「원불교 교리성립사
연구-『정전』결집을 중심으로」(원광대 박사논문, 2004) 를 참조.
㉱ 『정전』모두 소수.「교리도」는『육대요령』(1931)에 처음 등장하며, 현재의 그것은 1943년 1월에 제
정되었다.(『대종경』부촉품 7장)

8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각각 배치하여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교리도」에 나타나는 일원상은 소태산의 대각에 의해 체현된 근원적 진리의 상징으로, 「일원(一
圓)은 법신불이니, 우주만유의 본원(本源)이요,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이다.」㉲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일원이란 일원상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진리당체로, 일원즉사은(一圓卽四恩)이며, 일원을
양성(養性) ․ 견성(見性) ․ 솔성(率性)의 세 가지 속성으로 배대한 것이 삼학이다.㉳ 신앙문인 사은사요를
통해서는 복족(福足), 수행문인 삼학팔조를 통해서는 혜족(慧足)으로, 복혜양족(福慧兩足)하면 부처
가 된다는 원리이다.
이러한 교리의 강령이「일상수행의 요법」9조로, 각 조는 다음과 같다.
<11>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
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
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
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6.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이들 각조를 교리에 배대하면 1-3조는 삼학, 4조는 팔조, 5조는 사은, 6-9조는 사요에 해당한다.
9조의 실천강령 속에 주요 교리를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마음공부의 요체로 간주된다.
마음공부는 오늘날 원불교 신앙․수행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공부에 관련하여 소태산은 말한다.
<12> 지금 세상은 물질문명의 발전을 따라 사․농․공․상에 대한 학식과 기술이 많이
진보되었으며, 생활 기구도 많이 화려하여졌으므로 이 화려한 물질에 눈과 마음이 황
홀하여지고 그 반면에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은 극도로 쇠약하여 주인된 정신이 도리
어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크게 근심될 현상이라.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물질이라도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물질이 도리
어 악용되고 마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재주와 박람박식(博覽博識)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재주와 박람박식이 도리어 공중에 해독을 주게 되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환경이 도리어 죄업을
돕지 아니하는가.
㉲ 같은 책.
㉳ 韓鍾萬,「⼀圓相眞理의 相卽性」(원불교사상연구원 편,『일원상진리의 제연구』상(원광대출판국, 1989,
327쪽 이하) 참조.
㉴ 『정전』수행편, 일상수행의 요법.(『원불교전서』 54쪽)

9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그러므로 천하에 벌여진 모든 바깥 문명이 비록 찬란하다 하나 오직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종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낮게도 하나니,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
면 모든 문명이 다 낙원을 건설하는 데 보조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요, 마음을 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면 모든 문명이 도리어 도둑에게 무기를 주는 것과 같이 되나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은 새로이 각성하여 이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用心法)을 부
지런히 배워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이타(自利利他)로 모든 것을 선용하는 마음의 조
종사가 되며, 따라서 그 조종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양면으로 한 가지
참문명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노력할지어다.㉵
<13>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
그는 구세이념의 본질이 용심법에 있고, 이를 수행과 학습을 아우른 개념으로 마음공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정산 역시 같은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14> 송죽(松竹)의 가치를 상설(霜雪)이 드러내듯이 공부인의 가치는 순역경계가 드
러내나니, 각자에 난관이 있는 때나 교중에 난관이 있는 때에 그 신앙의 가치가 더 드
러나고 그 공부의 가치가 더 드러나나니라. 국가에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은 유사시에
쓰자는 것이요 도인이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경계를 당하여 마음 실력을 활용하자는
것이니라.㉷
<15> 학인이 묻기를 “이 세상에서 어떠한 공부가 제일 근본되는 공부가 되나이까.”
말씀하시기를 “마음공부가 제일 근본되는 공부가 되나니라.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를
총섭하나니, 마음공부가 없으면 모든 공부가 다 바른 활용을 얻지 못하나니라.” 또 묻
기를 “이 세상에서 어떠한 기술이 제일 근본되는 기술이 되나이까.” 말씀하시기를 “인
화하는 기술이 제일 근본되는 기술이 되나니라. 사람 잘 화하는 기술은 모든 기술을
총섭하나니 인화하는 기술이 없으면 모든 기술이 다 활용되지 못하나니라.”㉸
<16> 과수를 기르는 데에도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그 과수가 잘 자라고 훌륭한 결
실을 보게 되는 것 같이, 사람의 뿌리는 마음이라 무엇 보다 먼저 마음공부에 힘써야
훌륭한 인격을 이루나니, 이 마음공부를 여의고 어찌 혜복의 결실을 바라리요.㉹
원불교에서는 이러한 마음공부 개념을 정리하여 1977년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래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들에는 마음공부의 개념 작업에서부터 마음이 무엇이며, 마음공부의
㉵ 『대종경』교의품 30.(같은 책, 130-131쪽)
㉶ 같은 책, 요훈품 1.(같은 책, 315쪽)
㉷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31.(같은 책, 878쪽)
㉸ 같은 책, 무본편 6.(같은 책, 907쪽)
㉹ 같은 책, 무본편 9.(같은 책, 908쪽)

10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대상과 방법, 그리고 공부가 이루어지는 이른바 경계와 마음의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내창은 이러한 선행 연구에 바탕하여 원불교의 마음공부를 「1) 경계에 접하여, 2) 이 경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마음(객체적 자아)을, 3) 또 다른 마음(주체적 자아)이 지켜보면서, 4) 즉각적인
반응을 일단 멈추고(경계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5) 성품(자성)에 비추어, 6) 반응하는 마음이 적절한지
대조해, 7) 경계를 원불교적 가르침에 맞게 활용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Ⅳ. 마음공부와 치유
그런데 마음공부를 모든 공부의 총섭 원리로 본다면 정신개벽과 의미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개벽은 물질문명의 이기에 빠져 주체성을 상실한 현대사회에 대한 병맥진단이라는 점에서
치유를 전제한다.
은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감사생활로, 삼학수행에서 본다면「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정신수양에서부터
「천만 사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이 생기게 하는 사리연구, 그리고「모
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게
하는 작업취사공부이다.㉮
이를 요약하면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는 공부가 된다.
그러면 이러한 수행의 방법이 어떻게 치유적인 성격을 지니는가? 소태산은 정신수양의 방법으로
염불(念佛)과 좌선(坐禪)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7> 염불이라 함은 천만 가지로 흩어진 정신을 일념으로 만들기 위한 공부법이요, 순역(順逆)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법으로서 … 염불하는 사람이 먼저 이 이치를 알아서
생멸이 없는 각자의 마음에 근본하고 거래가 없는 한 생각에 대중하여, 천만 가지로 흩어지는
정신을 오직 미타일념(彌陀一念)에 그치며 순역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무위안락의 지경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곧 참다운 염불의 공부니라.㉰
㉺ 김도공,「마음공부 방법론에 대한 모색-교단 내 마음공부의 현상과 원리 비판을 중심으로-」(『원불
교사상』 24,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0, 365쪽 이하); 유명원,「단계별 마음공부 방법론에
대한 고찰-법위등급 6단계를 중심으로-」(『원불교학』 7, 한국원불교학회, 2001, 244쪽 이하); 백
준흠, 「원불교 마음공부에 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28,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4, 109쪽 이하); 김성장,「원불교 마음공부 개념에 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2005, 117쪽 이하); 고시용,「원불교 설교에 나타난 마음공부-『월간교화』를 중심으로-」(같은 책,
30, 2005, 159쪽 이하); 유정엽,「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 해석의 문제」(『원불교사상연구원 원
보』 58,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9, 203쪽 이하) 등.
㉻ 한내창,「원불교 ‘마음공부’ 정의의 한 시도」(『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176쪽).
㉮ 『정전』교의편, 삼학.(『원불교전서』 46-50쪽)
㉯ 같은 책, 수행편, 상시훈련법.(같은 책, 57쪽)

11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18>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이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
어 화기(火氣)를 내리게 하고 수기(水氣)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의 기운이 상쾌하
리라. … 오래오래 계속하면 필경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원적무별한 진경에 그쳐서 다시없는 심락을 누리게 되리라.㉱
염불은 마음을 무위안락에 돌아오게 하고 좌선은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의 기운이 상쾌해지
는 공부라는 것이다. 물론 수양의 구경은 군인이 전쟁에서 마음을 단련하여 부동심이 되는 기질수양(氣
質修養)과 수도인이 오욕의 경계 중에서 마군을 항복받아 순역경계에 부동심이 되는 심성수양(心性修
養)을 같이 얻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실지의 경계에서 단련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태산은 이처럼 마음공부를 직업생활
속에서 적극적인 실천이념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19> 한 가정의 흥망이 호주의 정신 여하에도 달려 있나니, 한 가정이 흥하기로 하
면 첫째는 호주의 정신이 근실하여야 할 것이요, 둘째는 집안사람들이 서로 화합하여
모든 일에 힘을 모을 것이요, 세째는 무슨 실업이든지 먼저 지견과 경험을 얻은 뒤에
착수할 것이요, 네째는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준칙으로 순서 있게 사업을 키워 나갈
것이요, 다섯째는 폐물 이용의 법을 잘 이용할 것이요, 여섯째는 원업(元業)과 부업(副
業)을 적당하게 하며 생산 부분을 서로 연락 있게 할 것이요, 일곱째는 그 생산이 예
정한 목표에 이르기 전에는 그 자금을 다른 곳에 함부로 유용하지 말 것이요, 여덟째
는 목표에 달한 뒤에라도 무리한 폭리는 꾀하지 말고 매양 근거 있고 믿음 있는 곳에
자본을 심을 것이요, 아홉째는 수지를 항상 살펴서 정당한 지출은 아끼지 말고 무용한
낭비는 단단히 방지하여, 이와 같은 치가에 전력하면 그대들의 살림이 자연 불어나고
그에 따라 마음공부 하는 데에도 또한 서로 도움이 되리라.㉳
<20> 사람이 평생에 비록 많은 전곡을 벌어 놓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하나
도 가져가지 못하나니,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어찌 영원한 내 것이라 하리
요. 영원히 나의 소유를 만들기로 하면, 생전에 어느 방면으로든지 남을 위하여 노
력과 보시를 많이 하되 상(相)에 주함이 없는 보시로써 무루(無漏)의 복덕을 쌓아야
할 것이요, 참으로 영원한 나의 소유는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이니, 서원과 마음공부에 끊임없는 공을 쌓아야 한없는 세상에 혜복의 주인공이
되나니라.㉴
예컨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근실한 가운데 살림을 잘 이루면 마음공부에도 도움이 된다는
㉰ 같은 책, 수행편, 염불법.(같은 책, 60쪽)
㉱ 같은 책, 수행편, 좌선법.(같은 책, 63-66쪽)
㉲ 『대종경』수행품 16.(같은 책, 151쪽) 참조.
㉳ 『대종경』 인도품 41.(같은 책, 206-207쪽)
㉴ 같은 책, 천도품 17.(같은 책, 293-294쪽)

12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것이다. 치유에서 본다면 일탈에 의한 방법이 아니라 건전하고 적극적인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혜복의 주인공이란 신앙과 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인물을 가리킨다.
마음공부에 있어서 직업을 중시하는 것은 정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태산은 사회도 사람처럼 병이 들며, 치유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밝힌 사회병의 진단과 처방은 다음과 같다.
<21> 지금 세상은 밖으로 문명의 도수(度數)가 한층 나아갈수록 안으로 병맥(病脈)
의 근원이 깊어져서 이것을 이대로 놓아두다가는 장차 구하지 못할 위경에 빠지게 될
지라, 세도(世道)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근심을 금하지 못하게 하는 바
이니라. 그러면, 지금 세상은 어떠한 병이 들었는가. 첫째는 돈의 병, 둘째는 원망의
병, 셋째는 의뢰의 병, … 네째는 배울 줄 모르는 병, … 다섯째는 가르칠 줄 모르는
병, … 여섯째는 공익심이 없는 병이니 … 이것이 곧 큰 병이니라.㉶
<22> 그런즉 이 병들을 고치기로 할진대 무엇보다 먼저 도학(道學)을 장려하여 분
수에 편안하는 도와, 근본적으로 은혜를 발견하는 도와, 자력생활 하는 도와, 배우는
도와, 가르치는 도와, 공익 생활하는 도를 가르쳐서 사람 사람으로 하여금 안으로 자
기를 반성하여 각자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게 하는 동시에, 선병자의(先病者醫)라는 말
과 같이 밖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병든 세상을 치료하는 데에 함께 노력하여야 할지니,
지금 세상의 이 큰 병을 치료하는 큰 방문은 곧 우리 인생의 요도인 사은사요와 공부
의 요도인 삼학팔조라, 이 법이 널리 세상에 보급된다면 세상은 자연 결함 없는 세계
가 될 것이요, 사람들은 모두 불보살이 되어 다시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낙원을 수용하게 되리라.㉷
그가 밝힌 사회의 병은 돈의 병, 원망의 병, 의뢰의 병, 배울 줄 모르는 병, 가르칠 줄 모르는
병, 공익심 없는 병의 여섯 가지이다. 사람의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같이 사회의 병도 그대로 두면 사회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치유하는 방법은 도학을 장려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는 분수에 편안하는 도,
은혜를 발견하는 도, 자력 생활하는 도, 배우는 도, 가르치는 도, 공익 생활하는 도를 가르쳐 안으로
병든 마음을 다스리고 밖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치료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려할 도학은 구세이념인 교리강령이라고 그는 본다. 아울러 치유된 세상은「모두 불보살이
되어 다시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낙원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치유된 삶이란
불보살과 천국, 곧 주체와 환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 정산은「신․분․의․성을 마음공부에 들이대면 삼학공부에 성공하고 사․농․공․상에 들이대면 직업
에 성공하나니라.」(같은 책, 권도편 32)
㉶ 『대종경』교의품 34.(같은 책, 134-135쪽)
㉷ 같은 책, 교의품 35.(같은 책, 135-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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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Ⅴ. 결어
이상에서 원불교의 교리구조에 유의하면서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소태산은 물질문명이 범람하던 시기(1916)에 대각을 이루고 원불교를 창립하였다. 교통․통신이
발달하여 지구촌사회를 이룬 가운데 동서의 종교가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전개된 그의
종교관은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에 대해 수용․조화하면서 이를 포월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불교와 만나 불법에 연원을 정하고 유․불․도 삼교를 비롯하여 만 종교 만
사상과의 원융회통을 구하며, 한국 신종교운동에 있어서 기축이 된 개벽사관을 수용하여 정신개벽을
제창하고 있다. 원불교 교리에 나타난 영육쌍전 ․ 이사병행 ․ 도학과학병진 등의 병진이념이 이러한
소태산의 구세이념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원불교 교리는「교리도」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종지인 법신불일원상을 수행문과 신앙문
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수행문에 삼학팔조, 신앙문에
사은사요를 배치하여 전자를 통해 혜(慧), 후자를 통해 복(福)을 원만하게 갖추도록 한다. 따라서
일원상에 바탕한 삼학팔조, 사은사요는 원불교 교리의 기본강령이며, 원불교의 마음공부도 이것이
주체가 되어 있다. 이를 몰록 드러낸 것이「일상수행의 요법」이다.
마음공부는 여러 가지 개념화가 이루어져 있지만『정전』의 용어를 빌린다면「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계에 물들지 않는 조촐한 한 마음을 간직하는 노력은
종교인의 신앙 ․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사를 잘 영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소태산은 보고 있다.
세상사를 잘 하면 마음공부가 잘 되고, 마음공부가 잘 되면 세상사가 잘 영위되도록 하는 원리이다.
그리고 마음공부로 치유된 세상은「불보살과 천국」의 표현처럼, 인간과 환경이 함께 거듭난 이상의
낙원이라는 것이다.
弓山達也는 최근의 뉴에이지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1990년대 이후「치유」가 강조되는 사회경향
에 주목하고, 특히 젊은이 문화를 분석하면서 그것을 사람의 몸과 마음을 둘러싼 환경 ․ 우주를
포함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최근의 종교나 신비 주술에의 불신감․무관심의 결과이며, 정신성이나 마음에의 관심층이
종교 ․ 신비 주술로부터 심리학 등의 다른 섹터로 이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뉴에이지가 베트남
전쟁 ․ 환경파괴 ․ 인간소외라고 하는 현대사회의 병소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부터 일어난 것에
비해 일본은 그러한 강인함이나 사회성은 볼 수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도 신영성운동이 전개된 만큼 탈종교적 경향 등 이와 유사한 사조가 존재할 것이다.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도 이러한 사회사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용어에서부터 원불교라는 종교적 이미지를 벗어나 생활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담없이 만날 수
㉸ ⼸⼭達也,「젊은이 ⽂化에 있어서 治癒」(『한국종교』 28,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2004, 297쪽 이
하) 참조.

14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2008년에 들어 원불교에서는「마음공부연구소」㉹를
발족하였다. 병든 인간, 병든 사회에서 치유주체 보다는 치유자체가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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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공부연구소는 2008년 12월 11일에 개원하였다.「종교색에 거부감을 갖는 불특정 다수를 위
한 교화방안으로 마련한 것」(『원불교신문』 2008. 12. 19)이라 발족 의의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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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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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최현민 수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우교수, 사랑의 씨튼수녀회)

1.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양 교수님은 논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을 같은 맥락 안에서 해석
하고 있다. 신종교는 물리적 시설과 신자공동체, 교계제도, 집단적인 예배의식 등을 고루 갖
춘 ‘보이는 종교’인데 반해 신영성운동은 그런 것을 갖추지 않은 ‘보이지 않는 종교’ 형태로
되어 있다.
기공, 단전, 초월명상 등은 건강운동을 표방하지만 분명 종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기에
신영성운동이라 불리 운다. 서구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뉴에이지운동이나 일본의
정신세계도 여기에 속한다.
21세기는 영성 시대라고 할 만큼 ‘영성’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대영성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정신수련을 통해
피폐해진 영육을 치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명상이
나 정신수련 뒤에 개인주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영성운동은 초자연적 힘이나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는 대신 자율적 개인의 각성에
의한 영성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종교가 인간 본래의 영성을 억압해 왔다고 보
고,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영성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현대인들이 신영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신영
성운동이 개인에 중점을 두어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뉴에이지에서는 환생(還生)을 강조한다. 인간
이 환생을 거듭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환생을 강조하면
서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의식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이
와 같이 신영성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신(神)중심에서 우주
적 인본주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의 본령은 자기의 본래성-그리스도교에선 하느님의 모상, 불교에선 불성(佛性), 유교에
선 천성(天性)이라 함-을 회복함에 있다. 이러한 자기 본래성의 궁극적인 완성은 이웃과 세
상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개인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신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삼라만상과 깊은 존재적 연대감을 지닌 ‘관계적 존재’ 곧 ‘공동체적 존
재’임을 자각함에 있다.

17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이 논문에서 신영성운동과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정신적 치유’라
는 측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원불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마음
공부’가 신영성운동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2.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마음공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원불교를 포함한 신종교를 어떤 시각으
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자 한다. 사회학자인 노길명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
한바 있다.
“신종교는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체제 모순과 부조리에 대응하고 그러한 모순과
부조리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성종교의 기능적 한계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따라서 신종교는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기성
종교는 자신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신종교에 대해 유사종교, 사이비종교, 사교 이
단이라고 하여 그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대립과 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상호인식은 다종교문화를 지닌 한국 땅에서 살아가
는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최준
식 교수는 “종교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척도,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영혼 곧 성숙을
목표로 하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신종교를 접할 때 이런 척도가 필요하며, 모험적일지라도 서로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본다.
원불교는 1916년 창립된 신종교이면서도 한국 내 350여개의 신종교 교단 중 현재 3대 기
성종교인 불교 개신교 가톨릭 다음으로 많은 신도수를 지닌 종단으로 성장해 왔다.㉮ 그 이
유 중 하나로 원불교가 지닌 건전한 종교성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공
부는 원불교 교리와 수행의 핵심을 담고 있기에 원불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공부에 관해 몇 가지 여쭤보고자 한다.
1) 본 논문에서는 마음공부를 원불교의 교리도에 배치된 ‘신앙문과 수행문’ 양쪽을 아우르
는 마음수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앙문은 사은(四恩)과 사요(四要)를 통해, 수행문은 삼학
(三學)과 팔조(八條)를 통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신앙문과 수행문을 통한 실천은 궁극적으
로 ‘恩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恩사상이 원불교의 중심이 된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셨으
면 한다.
2) 본 논문의 결어에서 양 교수님은 마음공부는 신앙문, 수행문 양쪽을 함께 병행해서 닦
㉺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2쪽.
㉻ 같은 책, 50쪽.
㉮ 1998년 원불교 종교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른 것인데 어떤 경우는 교단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
을 파악하기 어려워 300에서 400개 정도라고 막연히 보기도 한다.(같은 책, 1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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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는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신앙문이 타력문이라면, 수행문은
자력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수행실천에서는 신앙문보다는 수행문
이 더 강화된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마음공부가 정신개벽을 지향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기에 자력수행이 더 강조된 것인가? 아니면 신앙문을 강조하다보면 타력신앙에 떨어지
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인가?
3) 양문(兩門)의 수행방법이 지닌 치유적 성격으로 ‘염불과 좌선’을 드셨는데 이는 불교에
서 행해지는 수행과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또한 마음공부에 대
한 이웃종교인들의 호응도나 참여도는 어느 정도인가?

3.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궁극적 진리,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본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의 종교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나와 우주의 합일체험’이라 할 수 있다. 모
든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일체중생의 본성은 그것과 하나이며, 같은 근원으로
비롯된 모든 만물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원불교 신앙강령인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대할 때마다 불공을 드리라’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도 이런 관점에
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양 교수님은 이러한 법신불 일원상을 종교의 궁극적 체험으로 보면서, 불교의 佛, 유교의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 도교의 무위자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이러한 절대적 경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차원은 같다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선생님은 하
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느님은 있음과 없음을 넘어선 ‘존재 그 자
체’, 불교의 공(空)과 만날 수 있는 경지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 실재는 비인격성과 인격성의 이원론적 사유까지도 넘어서야 하기에
이를 다 포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강조하는 측면
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고, 불교는 비인격적인 면을 강조한다.
공(空), 연기(緣起), 법신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서의 법신불은 어느 면에 더 강조
점을 두고 있는가?
원불교에서 매일 아침, 저녁 드리는 기도문이나 참회정진 기도문, 그리고 천도의식 기도문에는
“법신불 사은이시여”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故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에서 볼 수
있었던 원불교 천도재에서 의식을 집전하신 교무님께서 “법신불 사은이시여”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기도문에서 부르는 법신불 사은은 인격적인 측면을 보여주나 마
음공부를 통해 깨닫고자 하는 법신불 일원상은 비인격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법신불이 지닌 인격성과 비인격성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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