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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알라딘: [전자책] 베다 이명권

알라딘: [전자책] 베다 이명권

[eBook] 베다 - 인류 최초의 거룩한 가르침 | 인문고전 깊이읽기 13 epub
이명권 (지은이)한길사201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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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464쪽
ISBN : 9788935668441

책소개

<우파니샤드>(한길사), <마하바라따>(새물결), <베다>(동문선) 등의 연구서적이 출간되었을 뿐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 힌두교와 힌두문화에 대해서는 ‘일천’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출간된 결과물이 많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힌두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입문서 역시 많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름 세계의 인문서들을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독서인들조차 <베다>를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한길사의 ‘인문고전 깊이읽기’ <베다>는 이러한 상황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의 저자 이명권은 2011년 같은 시리즈의 <우파니샤드>를 펴낸 바 있다.
4권의 베다 전체를 유기적으로 다루어 우파니샤드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베다시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도, 베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들을 뽑아 원전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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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베다: 인도 정신문명의 뿌리 | 들어가는 말 13

고대 인도인의 삶과 정신세계 | 베다시대 19

1 신을 부르는 노래, 베다 | 네 개의 베다 42

2 우주와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베다의 창조와 진화 72

3 모든 것은 제의의 불을 통해 | 베다의 제사 110

4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 | 죽음과 환생의 노래 144

5 최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위대한 권력자 | 천상(天上)의 신들 178

6 공중의 세력을 관장하는 대기의 힘 | 대기(大氣)의 신들 212

7 생명을 살리는 제의의 불과 음료 | 지상의 가장 위대한 신 250

8 천지자연의 신성을 노래하라 | 천지와 자연의 신 284

9 남성 우월 신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여신 | 베다의 여신들 312

10 민중을 위한 주술에서 베단타 철학으로 | 『아타르바베다』와 「브라흐마나」 344

영원히 열린 계시의 책, 베다 | 맺음말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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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383

베다를 이해하기 위해 더 읽어야 할 책 415

베다를 이해하기 위한 용어 해설 421

베다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힌두교 주요 인물 431

베다에 대해 묻고 답하기 443

베다에 대한 증언록 457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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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명권 (지은이)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미국 「크리스천 헤럴드」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관동대학교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강의 하였고, 그 후 중국 길림사범대학교에서 중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길림대학 중국철학과에서 노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길림사범대학교 교환교수로 재직하였고, 동 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 초빙교수로 교양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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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 하>,<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 상>,<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 상.하 합본> … 총 2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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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경전으로, 총 분량이 『성서』의 여섯 배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복잡하게 나뉜 책의 체제, 수많은 저자와 그에 따른 첨삭으로 인한 판본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다신론에 의거한 수많은 신들의 이름은 시기별로 바뀌어 불리거나, 신들의 부모자식 관계가 뒤바뀌는 등, 매우 까다로운 문헌이다. 때문에 일반인이 원전을 읽어 이해하기는커녕 그 대강의 모습을 파악하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힌두문화 속으로 안내하는 단 하나의 입문서, 인문고전 깊이읽기 『베다』

한국에서 힌두교에 관한 연구는 아직 본격적이지 못했다. 최근에야 『우파니샤드』(한길사), 『마하바라따』(새물결), 『베다』(동문선) 등의 연구서적이 출간되었을 뿐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 힌두교와 힌두문화에 대해서는 ‘일천’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출간된 결과물이 많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힌두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입문서 역시 많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름 세계의 인문서들을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독서인들조차 『베다』를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힌두문명의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비해 우리는 그 문화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한길사의 ‘인문고전 깊이읽기’ 『베다』는 이러한 상황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의 저자 이명권은 2011년 같은 시리즈의 『우파니샤드』를 펴낸 바 있다. 4 권의 베다 전체를 유기적으로 다루어 우파니샤드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베다시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도, 베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들을 뽑아 원전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베다는 일정한 편집 의도를 갖고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찬가들이 뒤섞여 있다.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찬가들을 가려 뽑아 창조와 진화, 제사, 천상의 신, 대기의 신, 지상의 신, 여신 등으로 알기 쉽게 키워드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은 아무나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방대한 작업이다. 신학과 인도철학에 이어 중문학까지 도전하고 있는 저자의 광대한 학문적 영역이 베다를 설명함에 있어서 치우침 없이 힌두문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준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부록으로 수록된 더 읽어야 할 책(415쪽)이나 용어해설(421쪽), 힌두교 주요 인물(431쪽) 등은 베다의 연구자들에게 기초자료로 사용되기에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알차다.

카스트 제도의 기원, 푸루샤 신화

인도 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제도 중 하나가 카스트 제도(四姓制度)다. 즉 신분을 브라만, 크샤트리아(라자냐), 바이샤, 수드라로 나누어 행동에 제약을 두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신분으로 얽어매는 악습이라 하여 폐지되었지만, 인도 곳곳에 아직도 이런 신분제가 잔존하고 있다. 이 사성제도의 기원은 『리그베다』 속의 ‘푸루샤 찬가’(the Puru?a S?kta)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초의 우주 거인 푸루샤(Puru?a)는 세계, 곧 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불멸의 형태로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그 신체의 일부만이 생명체와 무생물의 형태로 피조물의 영역을 이루며, 나머지 4분의 3은 하늘 위의 불멸의 세계에서 존속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푸루샤는 신들을 지배하며 신들을 탄생하게 한다. 그리고 제사에서 자신의 몸을 분할하여 이 세상이 생겨나게 만든다. 『리그베다』의 천지창조 설명 중의 하나 ‘푸루샤 찬가’는 세상의 생겨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들이 푸루샤를 분할했을 때, 몇 부분으로 나누었던가? 그들은 그의 입을, 그의 두 팔을, 넓적다리와 발을 무엇이라고 불렀던가? 그의 입은 브라만(Brahman)이 되고, 그의 팔은 전사(R?janya), 넓적다리는 평민(Vai?ya), 발은 종(??dra)이 되었다. 달은 그의 마음에서 생겨났고, 태양은 그의 눈에서 생겨났다. 인드라와 아그니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바람은 그의 생명의 숨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배꼽에서는 중간 지대의 공간이 생겨났고, 그의 머리로부터는 하늘이 전개되었고, 그의 두 발로부터는 땅이, 그의 귀에서는 하늘의 사방이 펼쳐졌다. 이와 같이 신들은 세계를 질서 있게 창조했다.”(『리그베다』, X.90.6~16)

-본문 제2장 우주와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중에서


푸루샤 찬가는 인체가 땅과 대기, 하늘, 그리고 신들의 영역을 표방하며 만물 속에 다양성과 통일성, 실제 변화와 움직임이 깃들어 있다는 인도인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화장의 의미―모든 것은 제의의 불을 통해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가장 강렬하게 남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갠지스 강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장면을 꼽는다.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화장하는 문화는 어떤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까? 베다 속의 불의 신이자 제의의 신인 아그니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의 신 아그니는 자기 스스로 공물을 받는 신이자, 신들에게 공물을 전달해주는 중재자다. 따라서 모든 공물을 먹는 첫 신으로서 제의를 중재하고 주관한다. 때문에 신들에게 바치는 모든 것은 불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불에 태워지는 것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아그니는 베다 전체에서 이름이 가장 많이 불리는 신이다.

“그대의 눈동자는 태양으로, 그대 영혼의 숨결은 바람으로 떠나시오. 그대의 업(業)에 따라 하늘로 가거나 땅으로 가시오. 아니면 그대의 운명이라면 물로 가시오. 가서, 그대의 손발은 식물의 뿌리가 되어 터를 잡으시오. ……염소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의 열기로 염소제물을 태우소서. 그대의 눈부신 빛과 화염으로 제물을 태우소서. 오,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 그대의 상서로운 친절한 모습으로 선한 행위를 한 이들이 살고 있는 경건한 나라로 이 사자(死者)를 인도하여주소서.

아그니여, 우리가 바치는 제의의 소마즙과 함께 죽은 자가 그대에게 제물로 바쳐질 때 그를 다시 자유롭게 하여 조상들에게 보내소서. 그리하여 그가 새로운 생명의 몸을 입고 그의 자손이 번성케 하소서,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리그베다』, X.16.4~5)

-본문 제4장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 중에서

베다는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죽음 이후에 우주로 환원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전에 지닌 모든 부분은 우주 속으로 귀환하여 자연이 되는 이 생명의 순환운동이 이어지고 또 변형을 거친다. 죽은 인간은 아그니(불)을 통해 조상과 신 앞에 나아가며, 다시 새 생명의 몸으로 후손을 번성하게 한다.


힌두인의 이해를 넘어 인류 정신사의 근원을 찾아

푸루샤에 대한 이해 없이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무조건 지적하기는 어렵다. 단순히 ‘화장을 통해 재를 흩어버리고 죽은 이를 떠나보낸다’고 하기엔 너무나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다. 이런 이해 없이 표면적으로 인도의 화장풍습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아무래도 이해의 깊이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베다는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힌두인의 삶을 지배한다. 나아가 힌두교가 불교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화장 풍습이나 윤회론 등 여타의 사상들이 이곳 한국까지 전파되어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베다는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인류 지성사의 고전인 『베다』, 거기서 한걸음 나아가 『우파니샤드』까지 만난다면 올봄 우리의 지성도 한층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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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3)

인도의 광활한 역사
띠리띠리 2017-05-05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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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신화도 스케일이 장난아니네요~
라파크레키스 2017-05-0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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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문화속으로 떠나는 고전여행! 기대됩니다.
최춘욱 2017-05-08 공감 (0) 댓글 (0)


2020/03/29

2011 모심으로 가는 길 김지하

피플[신동아 창간 80주년 기념 릴레이 강연 |

 ‘한국 지성에게 미래를 묻다’ ① 김지하]

모심으로 가는 길

“남성은 여성에게 큰절을 하면서 수천 년간의 죄업을 씻어라”

입력 2011.06.21 / 622호(p38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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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는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한국 대표 지성들의 릴레이 강연회를 마련했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2012 4월까지 1년간 계속되며 강연 내용은 신동아 지면에 실린다. 첫 회 연사는 김지하 시인이다. 김 시인의 강연회는 523일 오후 7시 반 서울 신문로 문호아트홀에서 열렸다. 강연에서 김 시인은 여성상위의 남녀평등을 강조하며 여성을 모시는 길이 후천개벽 시대에 인류가 사는 길이라고 설파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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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근 시 한 편을 먼저 인용한다.

열기(熱氣)그날 경기도 주최
세계생명문화포럼에서 호주여자
생태학의 발 플럼우드는
다섯 번을 똑같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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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지구의 대혼돈을 넘어서는 길은 단 한 가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하고 일체 존재를 다 같이 우주공동주체로 거룩하게 드높이는 모심의 문화, 모심의 생활양식으로 현대인간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변혁하는 길 그것뿐이다.

나는 그 뒤부터 어쩌면
발 플럼우드의 충실한 똘마니
어떠랴 서양의 한 젊은 여성의 뒤를 따라 동양의 한 늙은 남자가
중국이 세계에서 돈을 제일 잘 번다는 이 시기에 
도리어 철저히 따라감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불교도 동학도 개벽역학도 모두 다 그 뒤다

나는 이제 한 여자의 피끓는 모심의
세계문화대혁명 주장을 따라 가다가 가다가
몇 번이나 죽을 각오가 돼있다
熱情 없이는 삶은 아예 없는 것
.

(
‘흰그늘의 산알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 p.211. 2010 7월 ‘천년의 시작’ 刊)

이 강연은 신동아가 기획한 지식인 대상의 교양강좌로서 강연자 자신의 전공에 토대를 둔 현대적 교양,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혼돈, 대변혁의 시기인 현대의 동아시아·태평양 한반도의 한 개인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 도덕인 ‘모심’으로 가는 길과 그 길에서 조심할 것 몇 가지를 본인의 최근 열흘간의 일정을 통해 간략히 찾아보는 것이다.

현대 인류 최고의 도덕률

‘모심’이 무엇인가?

나는 천도교가 아닌 ‘나홀로 동학당’이다. 동학의 핵심교리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이고 그 실천윤리는 철저한 모심()이다. 그러나 모심은 단지 동학만의 윤리는 아니다. 2000년 전 나사렛 예수의 필사적인 사랑의 형식은 ‘섬김’이라는 이름의 모심이었고, 그보다 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가 펼친 ‘나무(南無)’라는 이름의 회향(回向) 역시 모심이었다.

공자의 사단(四端)에서 인()은 의()에 앞서고 퇴계·남명의 영남학에서는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성실()보다 인간이 하늘을 향해 바치는 공경()이 훨씬 중요하다.

이슬람은 아니 그런가?

이슬람 여성과 아기들은 지난 50년간의 지하운동을 통해 무하마드의 거룩한 첫 번째 메카시대 부인의 별명인 아크발라이 쇼크니아바(저 어둠 위에 참빛을!)의 한마디와 그에 대한 무하마드의 코란 제63절 하단의 기도 ‘저 어둠에 대해 진정한 존경심을 갖게 해주소서’의 둘째 마디를 끊임없이 외우는 ‘쎄벨리온()’ 운동을 통해 오늘 쎄벨리온과 똑같은 뜻을 갖는 재스민혁명의 놀라운 모심의 실천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과격한 젠더투쟁의 실패로 인해 이미 낡아빠진 남성가부장적 에코파시즘을 복권시킨 유럽 페미니즘은 오늘 도리어 그 고전적 신성성(神聖性)의 생동하는 해석방향에서 공양(供養)과 양육(養育)을 포함하는 ‘새크라리온(Sacralion)’이라는 ‘모심’을 들어올림으로써 유럽을 다시 한번 신선하게 하고 있다.

현대 유럽 최고의 영지주의자요 대안영성학교 발도르프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현대 인류 최고의 도덕률을 단 한마디로 ‘모심’으로 규정한다.

종말 뒤의 새 시대

모심!

종말적 개벽사태인 대혼돈 극복의 유일한 길을 모심으로 단정한 발 플럼우드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바로 그 모심 때문에 독거미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희생을 설명하는 ‘온난화’는 정당한 우주관인가?

지난해의 강추위나 지금의 일교차는 무엇이며 남극이 추워지고 북극이 더워지며 적도와 경도의 일치, 일본의 대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와 원전 방사능 누출과 지면침강, 미국의 토네이도와 사방에 번지는 수질오염과 해파리 등 죽지 않는 생명체의 등장, 이유 모를 심장해체로 갓난아기들이 돌발적으로 떼죽음당한 것과 며칠 전 보도된 바 제주에서 강남 가기 직전의 제비 3만마리가 한 군데 전선줄에 함께 모여 앉은 현상은 또 무엇인가?

개벽(開闢)이란 어휘 이외에 도대체 무엇으로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짐승마저 모심을 지키는 이 현상은 또 어찌 해명해야 되는가?

3
만마리 제비가 모여 앉은 그 앉음새의 철저한 간격을 어찌 봐야 할 것인가? 그것은 모심의 한 형식이 아니던가?





김지하 시인의 강연회는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김지하 시인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2월15일 형집행정지로 그가 석방되자 동료와 가족들이 목말을 태우며 교도소 앞을 돌고 있다.


‘매화산(梅花山).

?

‘준비하는 마음의 뜻으로!

아항!

저 기괴한 한계령과 얼마나 다른가?

공부하고 글 쓰는 시간 이외에는 며칠 동안 이 한계령과 비로봉과 매화산 이야기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역시 모심의 비밀이겠다. 특히 내가 최근에 몰두하고 있는 ‘서기(瑞氣)의 미학’에 대한 미의식의 조건으로서의 ‘모심’과 연계된 것이다. 여기에 괴기(怪奇), 산숭해심(山崇海深)의 숭고와 심오 등이 모두 직결된다. 거기에 여성성과 모성의 현빈(玄牝)과 어린아이의 현람성(玄覽性)이 마땅히 그 기초를 이룬다. 머리에서 떠날 까닭이 없다.

이후 14, 16, 17일 이외에도 모심은 여러 형태로 나를 붙들고 있었다. 이 다음 모심에 관한 본격적인 글을 쓸 때 상세히 밝힐 것이다.

4
14.

나를 치료해온 장병두(張炳斗) 선생이 서울에서 나를 아내와 함께 불렀다. 만나뵙자마자 대뜸 모심 이야기다.

“왜 화를 내는 거요. ?

“예.

“부인한테 왜 고분고분하지 않는 거요?

“때에 따라서 그런 일도….

“절대로 안 돼요. 부인은 큰 어른이고 선생은 아기요. 그것도 계집아이.

“그거….

“그래야 다 잘돼요! 몸도 낳고 일도 잘되고. 선생은 운이 커서 부인에게 화내기 십상인데 한번 화내면 그만큼 망해요 망해. 명심하세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웬일일까?

전 같으면 그 말에 화가 벌컥 났을 터인데 자꾸 웃음만 나고 화가 전혀 나질 않는다. 웬일일까? 생명이 예절을 좌우하는구나! 아하하!

이날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모심’을 익힌 것이다. 좌우간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4
16.

돌아가신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金玉吉) 선생을 생전에 나는 꼭꼭 ‘누님’이라고 불러 모셨다. 그 누님의 동상제막식 소식을 들었다.

문경새재 고사리 별장의 분수동산이었다.

아내와 함께 갔다. 200명 가까운 분이 오셨다. 김동길 교수의 주재로 기념예배가 있었다. 회식도 있었다. 많은 분이 참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주었고 특히 아내에겐 얼마 전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때문인지 참으로 애틋했다.

나는 떠나도록 내내 한 가지만 생각했다.

‘지족(知足)’이라는 말이었다.

누님은 내가 원주에서 출옥한 뒤 남모르는 집안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중에도 아내가 말 못할 괴로움을 한껏 겪고 있을 때 고사리 별장으로 나를 부르셨다.

식사 후 누님은 분수가에 서서 곁에 있는 내게 이리 말씀하셨다.

“김 시인, 내가 저 분수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성경 속의…?

“음, 김 시인, 한자로는 그걸 뭐라고 하지?

“‘지족’입니다.

“그래 지족. 김 시인. 이제 지족할 수 없겠나?

“네에?

“최고의 시인, 최고의 혁명가, 최고의 사상가가 되었어. 이젠 그만 만족하라고.

“무얼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우리 영주(나의 아내) 언제 행복하게 해줄 건가?

“….

“언제 분가(分家)할 거야? 바로 지금 독립 안 하면 영주 죽어! 머리 빠지는 것 봐! 두 번이나 약 먹었잖아! 죽어. 이 사람아! 김 시인. 독립 안 하면 나 누님 안 할 거야!

벽력이었다. 누님은 그런 분이었다.

모심은 지족의 산물

나는 잔뜩 얼어서 늘 나를 위해 비워놓는 아래 뜰의 조그마한 골방 침대에 가서 누웠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꿈결에서다. 문경새재 꼭대기 신선봉에서 도적떼 애꾸눈 부자(父子) 난쟁이가 내려와 하나는 내 머리를 잡고 하나는 내 다리를 붙잡아 기운껏 위아래로 잡아당겼다. 찢어 죽이자는 거였다.

“아아악-.

소리 지르며 깨어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이 금방 들어왔다.

‘떠나라는 것이로구나!

머뭇거릴 틈도 없었다. 누님께 ‘떠난다는 것’ ‘독립한다는 것’ ‘지족한다는 것.’ 세 마디를 작은 쪽지에 써놓고 바로 일어서서 수안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거기서 바로 버스를 타고 전라도 광주로, 광주에서 해남으로 달렸다. 해남 작은 여관에서 원주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아이들만 데리고 내려와버려라. 차일피일하면 못 온다. 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마침 나의 모친은 하와이에 있었다.

이튿날 아내와 아이들이 왔고 해남 후배들을 시켜 낡은 고가(古家)를 얻기로 했다. 그 뒤로 곧 장모님과 함께 누님이 오셨다.

나를 보고 빙긋 웃고는 아무 말씀 없이 떠나셨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족.

그렇다.

한계령은 내 마음속에 아직도 배회하는 꿈들, 야망들, 울분과 노여움들이었고 그 다음날의 비로봉은 바로 지족이었다.

아하 답은 나왔다.

모심은 지족의 산물이다. 내가 옛 꿈들, 야망들, 울분과 노여움을 다 털고 만족해야만 모두를 모시고 아내를 모시고 아기들과 여성들과 쓸쓸한 사람들과 고양이, 강아지, , , 산과 강물, 그리고 기계와 물건들. 끝내는 내 마음마저도 다 모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심은 립 서비스가 아니다! 먼저 남성 가부장제 전체의 역사적 한계에 지족해야 한다. 물론 진리 공부에 지족 따위는 아예 있을 수 없지만!

오일장의 즐거움

4
17.

내가 원주에 내려간 뒤 새벽과 아침의 공부시간 이외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세 가지. 토지문화관이 있는 회촌의 양안치(兩岸峙) 아래 오봉(五峰)에 가끔 가는 일. 원주 주변 산천들을 돌아다니며 공부하는 일, 그러고는 옛날 나 열세 살 때 목포를 떠나온 뒤 대학 때까지 내내 살았던 평원동, 봉천 냇가의 시궁창 판자촌, 그 가난뱅이 동네에 요즘 들어선 오일장에 닷새마다 꼬박꼬박 장보러 가는 일이다.

그 일이 그렇게 신나는 일이다.

나도 전에는 몰랐다.

옛 어른들은 그 오일장을 ‘희비리(喜悲離)’라고 부르셨다. ‘기쁨과 슬픔이 넘나드는 한울타리’의 뜻이다. 마치 내가 떠나온 목포의 밑바닥 뻘마당 하당(?)과 같은 희비리에서 서기 어린 백운산과 탈속한 미륵산 사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와서 살다간 귀래(歸來)와 원주의 대학들, 고등학교들이 밀집해 있는 흥업(興業) 사이의 토지문화관이 있는 양안치까지가 어찌 보면 나의 지난 삶 전체의 파노라마다.

바로 이 희비리 장바닥에 와 이빨 빠진 귀머거리 할머니들에게 들나물이며 고사리며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사들고 절룩절룩 집으로 돌아갈 때 나 스스로 깜짝 놀라곤 한다.

‘아! 이것이 참 모심이로구나!

여성상위의 남녀평등

그 뒤에 생각해보니 그럼 남자가 이제부터 여성 모심 뒤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달과 물과 그늘의 시대에 그 밑에 쭈그리기만 할 것인가?

바람직한 것은 ‘여성상위의 남녀평등’이다. 이 구조에서 남성이 창조해야 할 자기 일거리의 원칙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고 생각한다.

유럽의 저명한 과학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그의 논문 ‘세 개의 태양에 관한 상상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람직한 해의 기능은 앞으로 불의 추진력과 온도 중심의 Energy Bubble이 아니라 투명한 빛과 예감으로 가득 찬 Symtomm Aura로 변해야 한다.

그렇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이것을 태평성대라고 했다. ‘태양지정(太陽之政)’이다. 우리나라 고대의 천부경은 이것을 ‘태양앙명(太陽昻明)’이라 불렀고 이것을 화엄과 같은 뜻인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조건이라 했으며 그러한 개벽의 실행조건을 바로 ‘묘연(妙衍)’ 즉 여성과 아기의 생명, 생활 가치성, 즉 ‘달과 물과 그늘’의 생활창조의 적극성이라고 했다. 남성은 이제부터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훨씬 더 지혜롭고 훌륭해져야 한다. 버블이 아닌 아우라의 차원에서 말이다.

이 모든 나의 모심, 여성 모심이 꼭 어떤 여성 대권(大權) 지망자의 선전전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럴 때 쓰는 한마디 시구절이 있다. 명말 중국의 한 떠돌이 중이 지은 환조판이환서면(還肇判而環瑞面). 허허허허허. 뜻은 ‘그거나 그거나가 아니다.’ 오대산 간통수(干筒水) 같다.

작자 이름은 ‘개미화(改微花)라 하는데 법명(法名) 같지 않다.

에에잇!

또 유식한 척! 헤헤헤헤헤. .제임스 러브럭은 한때 내가 존경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가이아 복수설’은 정당했는가? 북극 대피설은 온난화를 강조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 직후 북극은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원자력 대체에너지론을 편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일본 원전사태에서 그리도 아득한 옛날 일인가?

스티븐 호킹의 ‘외계 도피설’은 또 어떤가? 그는 현대과학의 유럽적 상징이다. 그러나 제주 제비 떼 3만마리보다 더 나은가?

인간이 제비보다 더 모심의 능력이 없는 것인가? 제비보다 더 진화된 영성적 능력을 가졌다면 인간은 당연히 이 지구를 스스로 지키고 살려야 한다. 어디로 도피하겠다는 건가?

그 살림의 힘은 모심에 있고 모심과 살림만이 진정한 화엄개벽의 깨침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 그래야 종말 뒤의 새 시대를 맞는다.

전 국토의 도시화

나는 지난 46일 아침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버스 편으로 부산에 가는 도중 바로 이 ‘모심으로 가는 길’을 내내 생각했다. 똑같은 길을 그 지난해 2010년 봄 지인들과 함께 승용차로 간 일을 기억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나.

강원도 원주에서 경상도 청량산에 이르기까지 단 한 건의 생태파괴와 환경오염 사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기적인가?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씨가 제 고향이라고 특별히 봐준 것인가? 아니라면 그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서인가? 도대체 그가 한 일에 천하의 욕쟁이 김지하가 이렇게 감격하는 사건이 일어나도 좋은 것인가?

길게 전문적 설명을 늘어놓지는 않겠다.

나는 박정희씨가 시작한 국토개발 이후 그 추종자들의 일관된 개발 방향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당시의 중앙정보부장과 독대했을 때 그 방향에 대한 나의 질문에 단 한마디의 명쾌한 답변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전 국토의 도시화.

물론 십승지(十勝地)가 많은 양백간(兩白間)에 동해안 쪽으로 중앙고속도로가 뚫린 것이 불과 4~5년 전 일이다. 그러니 당시는 개발이니 나발이니 따위가 아직 들어설 때가 아니었던 것도 안다.

그러나 서부 중부 남부 등 그야말로 전 국토의 너덜너덜한, 이른바 ‘도시화’니 ‘개발’이니 ‘혁신’ 따위에 진저리가 난 내 입맛 때문이었을까?

한마디로 ‘서기권풍수(瑞氣圈風水)’였다.

현대생태학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모시듯 취급하는 ‘과밀초류지역(過密超留地域)’ 또는 ‘과소개활지구(過疎開豁地區)’ 요소들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도대체 웬일인가? 나는 좀체 현상에 감동할 줄 모르는 평소와 달리 몇 번이고 차를 세웠고, 몇 차례고 무릎을 쳤다. 금방 현대생태학에서 관행적으로 쓰는 ‘모시듯 취급’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 내 마음 안에 잃어버렸던 내 조국의 산천에 대한 상서로운 모심의 기이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그 모심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일본 여성들의 해방운동

대표적 십승지인 풍기(豊基)의 그 서늘한 소백산 바람과 아파트 따위 걸레조각이 일절 없는 민들레 벌판의 그 애틋함이 함께 노래 부르는 상서로운 감격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주 봉화 뒷산의 낭떠러지 초미(初眉)와 그 앞 벌판의 현불사(現佛寺), 그리고 그 날 그 길은 아니지만 역시 한 현상이라 할 양양 구룡령(九龍嶺) 아래의 미천골, 제천의 박달재를 싸고 있는 ‘천등산(天登山)’과 ‘지등산(地登山)’ ‘인등산(人登山)’의 각기 다른 기반강물들과의 기이한 풍수(風水)!

이들이 모두 다 동서양 생태학과 풍수학자들의 현장보고들을 훌쩍 뛰어넘은, 거의 기적 수준의 서기(瑞氣)였으니 모심의 대상이 아니려야 아닐 수 없었다.

이조 중·후기의 지질서인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에 대강 이런 내용의 기사가 있다.

‘영주·봉화 뒷산의 낭떠러지 초미는 동해안에 첫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바위 속의 광석들이 수많은 빛으로 반짝이며 은은한 음악을 일으키며 숨어 있던 웬 기운을 뿜어내 주변에 가득 찬 독기와 탁기들을 모조리 정화한다.

모심으로 가는 길
충북 제천의 관문인 박달재의 목조각 공원.

지금부터 10여 년 전 대구 매일신문 문화부는 전문인력을 동원해 이 기사의 진위를 엄밀히 검색한 결과 음악 사안인지 한두 가지를 빼놓고는 모두 사실과 일치함을 발견, 크게 기사화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에 의한 저 너스레 많은 환경운동 따위가 아닌, 자연 스스로 자연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새롭고 진정한 생태자기치유운동의 압도적인 가능성이다. 어디 초미가 우리나라에만 있겠는가? 나는 지난해 언젠가 젊은 풍수학자 김두규 교수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출판기념회에서 그 축하연설을 겸해 한·일 간 공동의 초미운동을 제안한 바 있다.

바로 그 초미운동을 통해 특히 일본열도의 지진, 화산과 지면 침강 경향을 원천적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자연 스스로의 자연융기 가능성을 찾으라고 강하게 제안하고, 그것이 바로 이제껏 억압당해온 일본여성들의 창조적 해방운동의 시발점이라고, 왜냐하면 일본의 유명한 여황(女皇)들인 덴무·지토 천왕들의 능혈과 똑같이 초미가 음혈(陰穴)이고 또 그 연속선상에 신라 역사가 선덕여왕을 포함한 삼대(三代)의 여왕 전통을 창조했다고 강조했으나 대답은 코웃음과 지금의 저 수만명 죽음의 난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아니나 다를까! 지금 일본의 그 동해안 마을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의 잘못인가? 그러고는 그 대답이 겨우 ‘독도는 일본땅’인가?

죽음의 바다,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엄밀한 풍수운기설(風水運氣說)에 의하면 독도는 분명 양혈(陽穴)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잘못인가? 양혈이라면 당연히 그 위에 초미운동이 배합되지 않을 때 지금 진행 중인 개벽의 첨예한 시기에 가서 몇 번이고 또 폭발할 수 있다. 독도의 폭발은 일반적인 바람과 물의 관성대로인 이른바 ‘사할린의 평화’를 여지없이 교란하고 일본의 자랑인 ‘근역성수(謹域聖水)’의 신화는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래도 값싼 국토영유권 내셔널리즘밖에 갈 길이 없다고 믿는가?

반대로 초미의 음혈은 지금 ‘죽음의 바다’라고 하는 오호츠크해와 동해안과 일본해 현해탄(玄海灘)을 도리어 여름의 서늘함과 함께 겨울의 온화함을 유지하는 정역(正易)의 이른바 4000년 동안의 ‘유리(琉璃)의 세계’로 바꿀 강력한 조짐이기도 하다. 사철 해수욕은 물론이고 없어진 북어 대신 귀한 민어와 참치의 시절이 올 수도 있다.

서기(瑞氣) 아닌가! 모심은 자연스러운 솟아오름이다. 초미 앞 경건한 ‘우바이’(출가하지 않은 여성 불제자)들의 오랜 성지(聖地)인 현불사 또한 그렇다. 소의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은 화엄경(華嚴經) 이전 최고의 생명의 약속이다. 이 괴질(怪疾)과 죽음의 시절에 땅 밑으로부터 솟는 거룩한 보살들이라 할 신성한 약초의 무성함을 계시받은 명말(明末) 서남부 중국의 ‘시공종(時工宗)’의 의학적 기적을 화엄경과 함께 일으킨 믿음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정글에, 황량한 남아공(南阿共)의 밀림에, 심지어 로키와 안데스에서까지 약초 채취를 시도하는 유럽과 미국의 의료재벌들, 그 슈퍼박테리아의 참담함과 중국의 화학적 재배 복약물의 공포를 생각해보자.

오늘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의 원천지가 왜 하필이면 저 깔끔한 선비의 땅 안동인가? 독과 약의 상관은 신비에 속한다 하니 이 또한 모심의 조건이 아닌가! 그리고 이 또한 ‘우바이’들의 샘물인 법화경의 꽃 ‘종지용출품(從地湧出品)’이 상서롭게 흐르는 현불사의 존재 아닌가!

어떤가?

경상도 아첨이 너무 심한가?

천왕, 지왕, 인왕

그러면 강원도와 충청도 이야기도 한번 해볼까? 양양 구룡령 아래 깊이 감추어진 골짜기 끝의 약수구멍 ‘불바라기’의 미천골은 어떤가? 시뻘건 약수가 불치의 아랫도리 결림과 다리 저는 병 따위를 깨끗이 고친다. 전문 풍수는 이 역시 미천골이 사실은 미친골로서 음혈인 데서 발원한 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어찌 생각하는가?

나는 이미 신문에 공개된 대로 정신병원에 열두 번 드나든 고질 정신질환자였다. 나를 완치시킨 것은 위대한 유럽과 위대한 중국의 술이 아니다. 백두산 천부의학을 배운 전라도 출신의 조선의술이다.

그 의술의 대강은 이렇다.

“생명도 조국도 세상도 천왕(天王)과 지왕(地王)과 인왕(人王)이 하나()로 통일돼야 건강해지고 좋아지고 해방되는데 문제는 삼왕(三王)이 다 있어도 맨 밑바닥에 있는 작대기 하나(), 즉 ‘물’, 수왕(水王)이 단단히 받쳐주지 않으면 삼왕통일(三王統一)은 불가능하다.

, 수왕은 무엇인가?

바닷물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주생명의 비밀로서 이 힘이 물 위로 올라와야만 삼왕이 통일되는데, 마치 자라 입안에 먹이가 들어가서 오랜 세월 숨어 있다가 참으로 신묘한 힘을 가진 진국으로 변해서 밖으로 나와야 그 것이 곧 신약(神藥)이 된다.”박달재 이야기다.

박달재는 제천에서 충주로 가는 길목에 놓인 500m 높이의 고개다. 그런데 이 고개는 세 개의 산에 의지하고 있다. 800m 정도의 천등산과, 750m 정도의 지등산과, 600m 정도의 인등산이 그것인데 세 산은 거의 연속된다. 문제는 천부경처럼 천지인(天地人)의 이름을 가진 세 산이 모두 다 산 밑에 따로따로 세 개의 서로 다른 물길에 의지하고 있는 점이다. 천등산은 남한강, 지등산은 충주호, 인등산은 삼탄강을 끼고 있다. 이른바 천왕, 지왕, 인왕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수왕의 밑바닥을 얻어서 서로 연결하며 500m의 박달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스민 혁명과 ‘촛불’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박달재의 박달나무는 단군의 나무, 바로 그 ‘단()’을 말한다. 고조선 역사에 의하면 바로 박달나무 아래에서 신시(神市)의 제사와 호혜시장 및 풍류, 화백의 모임, 바로 그 ‘모심’을 열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소수이지만 유럽과 미국의 중도혁신 경제학자들과 일본의 경제통 요사노 가오루, 교텐 도요오, 이나모리 가즈오 등은 ‘따뜻한 자본주의’ ‘착한 경제’ 또는 ‘축적순환과 장기 지속’ 그리고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등 카알 플라니나 페르낭 브로델, 그리고 화엄경의 ‘동진부염 이생상도(同塵不染 利生常道)’ 등을 앞세워 ‘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를 추구한 옛 아시아의 신시 시스템의 현대화를 외쳐댔다. 그리고 일본 여성들은 ‘용녀(龍女)’ ‘역녀(歷女)’ 아메 요코와 같은 여성 중심의 경제사회 혁신을 들어올렸으며 미국 힐러리 그룹의 커피 파티나 유럽의 조안나 안젤리카의 ‘신의 우물’, 또는 뤼스 이리가라이의 ‘새크라리온’, 그리고 이슬람의 ‘아크발라이 쇼큐니아바(저 어둠 위에 참빛을!)’라는 이름을 가진 ‘쎄벨리온()’ 지하운동을 기초로 한 여성과 아기들의 ‘재스민 혁명’이 마치 우리나라의 2008년 ‘촛불’집회의 직접 영향을 받은 듯 거의 똑같은 유행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또 하나의 박달재 아닌가!

박달재에는 정도령이라는 이름의 골짜기 사당이 있다. 지금은 말라 있지만 깊은 물못이 있어 옛 신시나 솟대의 산상지유수(山上之有水), 즉 산 위의 물과 똑같다. 그리고 그 못 위에 서방대장군(西方大將軍)과 동방대장군(東方大將軍)의 두 장승 사이에 세 개의 놋잔(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의 삼태극(三太極))을 세운 상석이 있고 사방에 돌덤부락을 쌓아올렸다. 의미심장하다.

옛 단군 무속 위에 동서양 융합과 삼태극이 결합되고 그 주장을 오두막에 사는 젊은 여성이 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박달재의 금봉이

예부터 박달재는 여성들의 통로였다. 여성들의 장터나 토속신앙의 통로를 천지인과 수왕이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이 젊은 여성이다. 휴게소에는 여성장승들이 가득하다. 노래까지도 그러하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박달재의 금봉이야….

출세하려는 과거꾼이 그 고개에서 금봉이라는 한 여인에게 붙들려 출세를 포기한다는 노랫말의 뽕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정도령의 산시(山市·신림 쪽의 여성무속인들이 찾는 안덕사 굿당 등 치악산 산계열 등)와 반대편 남한강가 목계 선창마을의 유명한 파시(波市), 즉 산과 물 사이의 신시(神市) 여관이다. 이것은 현재 원주를 비롯해 전국 여기저기에서 다시 활발해지는 재래시장 5일장의 유행과 함께 앞으로 동아시아 태평양 신문명의 호혜시장(互惠市場)과 그 여성 주도의 시장소비판단력이 생산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창조적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곳은 강원, 충청, 경기 세 지역의 물, , 길의 초점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 예맥, 백제, 고구려, 발해 및 궁예의 태봉과 고려의 왕건이 서로 차지하고자 오래도록 갈등하고 또 융합했던 바로 그 땅이다.

그러나 막상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금봉이다. 과거 정치를 뛰어넘는 금봉이의 정치력은 무엇인가?

하도 커서 모심이니 서기(瑞氣)니 하는 말은 줄인다. 나는 치악산 구룡사는 물론이고 궁예의 둔거지였던 영원산성,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귀래 미륵산 아래와, 문막후용의 견훤길과 삼거리의 중용 고구려탑, 황사영이 잡혀가 죽은 배론, 동학 지도자 해월 최시형 선생의 피체지 호저 고산리와 임윤지당의 자리, 무장의 신평못과 박달재를 나의 학교로 생각하고 산다.역시 금봉의 정치력 공부가 핵심이다. 왜 박달재의 이쪽저쪽, 박달재의 산시와 목계의 파시 사이에 그리도 환하고 유려한 유교 예절의 ‘모심’이 빛나는 성취들과 모심의 증좌들이 농후한가? 목계 입구의 수많은 마을 이름이 왜 서계(書契)며 율리(律里)며 엄정(嚴正)이며 원월(圓月)인가? 왜 박달재의 제천 쪽 한말 선비 의병들의 본거지로 유인석(柳麟錫)과 유중교(柳重敎)의 고장인 공전리에 자양영당(紫陽影堂)이 그리도 거룩한가! ? 신시, 호혜시장, 비단 깔린 장바닥은 그런 곳이다. 그래서 돈 가는 데에 마음 간다고 했다. 그런 유형들은 중조선 일대에 많고도 많다. 나는 그곳, ‘모심’의 자리들을 찾아다닌다.

여성은 소비와 생산의 주역

무슨 공부를 하나?

표현은 그저 ‘모심으로 가는 길’이지만 자세한 것은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차차 ‘모심으로 가는 길’ 시리즈로 발표할 것이다. 다만 박달재와 세 산과 세 물과 목계 선창마을을 다니며 항상 기억하는 경제학의 한 부분이 있음을, 그것이 금봉이와 연결돼 있음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폴 크루그먼의 ‘새로운 경제학 이야기’다. 여성은 현대경제학에서 소외돼 있다는 말은 전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현대 경제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영역이 소비이고 소비판단이며 그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여성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역할의 창조적 확장과 유기적 연관의 확보과정에서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생산적 기능은 또한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거의 원시적 상태에 가까운 경제학 가부장제 아래 묶여 있는 셈이다.

또 기억난다. 나의 전공 이야기다.

유럽 미학의 새 바람이다.

유타 베름케의 ‘미학과 경제’다. 그의 말이다. 오늘날 미학의 최전선을 이루는 것은 문화자본주의다. 문화자본주의는 문화를 원료로 하는 돈벌이나 문화적 의장이나 홍보수단 또는 브랜드를 일컫는 게 아니다. 그것은 칸트 미학의 이른바 판단력 비판의 영역인 것이다.

판단력 비판이 카를 폴라니가 신시의 현대화, 호혜시장 실현에서 제일 어려워한 획기적 재분배라는 정치적 중심성, 남녀 이원집정제 해결의 열쇠였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본다면 칸트로서는 족탈불급의 차원이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나라 원효(元曉)의 판비양론(判比量論)이다. 나는 박달재의 바로 그 서방대장군이 다름 아닌 칸트이고 동방대장군이 곧 원효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농담 아니다.

그만큼 앞으로의 경제에서 핵심 미스터리는 획기적 재분배이고 그에 의한 호혜와 교환을 객관적 시장 패턴 속에서 현실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화엄사상

지금도 세계 시장의 숨은, 그러나 곧 드러날 차원이 다름 아닌 섬세한 미학적 취미 판단 차원으로까지 발전한 여성 소비판단력이고 그에 토대를 둔 근원적인 재분배의 날카로운 획기성, 세목성, 혼돈성과 개체성, 그리고 심지어는 우연성이기 때문이다. 판단력과 비판력의 융합이 문화자본주의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나의 경제미학적 박달재는 농담은커녕 바로 서기, 그 자체요 당연한 모심의 차원인 것이다.

평등, 균등, 대동(大同) 위에 각자의 경제적 삶에 요구되는 천차만별이 이제는 하나로 이루어져 호혜와 교환의 이불이(移不移), ‘개체화하되 개체화 못함’의 이른바 월인천강(月印千江·달이 천 개의 강물에 다 따로따로 비침)과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한 톨의 작은 먼지 속에 우주가 살아 있음)의 경제적 화엄사상이 반드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나의 전공은 미학이다.

간다.

부산으로 간다.

부산 경암(耕岩)교육문화재단 특강이다.47.

특강 내용의 몇 줄기를 요약한다.

“신령한 거북이 먼 바다를 바라본다(靈龜望海). 경암학술상 시상식이 열린 부산진 앞바다 동백섬의 풍수학적 비의(秘義). 조선조 정조 때 동래사람 정조신(鄭朝臣)의 ‘순수역수기(巡修歷水記)’ 중 ‘가변도서록(嘉邊島嶼錄)’에 다음 구절이 보인다.

신령한 거북이 먼 바다를 바라본다는 문구는 신령한 거북은 아득한 깊은 바다의 나이 많은 거북으로서 문득 햇빛 아래 떠올라 제 속에 가득 찬 것을 토해서 그윽한 먼 바다로, 바다 바깥의 푸른 새 하늘에까지 널리널리 그것을 퍼뜨린다는 뜻이다.

거북은 여성이고 그 속에 든 것은 오랜 고통이 약이 된 것을 뜻하며 먼 바다는 태평양이고 바다 바깥은 미래요 우주다.

아기들의 떼죽음

“나는 지난 시상식에서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 중 넷째인 용옥이 가덕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빠져죽고 그 뒤 시체가 인양되었을 때 가슴에 끌어안은 아기와 함께 그 품속 깊은 곳에서 십자가가 뚝 떨어지는 장면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의 예언성을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의 ‘거북신령의 기운(龜靈跡)’으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미학원리를 ‘초ㅐ탁성(口卒啄性)’으로 설명했다.

“나는 또 대천재 김범부(金凡夫) 선생이 동래 국회의원 시절 하신 기이한 말씀 한 가지를 붙였다.

“정조신이 동백섬을 두고 먼 바다를 개척하는 거북이라 말한 것은 먼 바다가 독물로 들끓는 훗날 한울의 신약(神藥)을 거기 풀어 온 세상을 구할 여자와 아기들이 나온다는 뜻이었다.

“그 자리엔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와 시인 서정주(徐廷柱)가 함께했다고 한다.

“한울의 신약이 무엇일까? 바다는 지금 독물로 들끓고 있다. 일본의 대지진, 화산 폭발, 지면침강, 쓰나미에 원전방사능 누출까지 덮쳐 새떼와 물고기떼, 고래들이 무더기로 죽어간다. 사람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인도는 서양에서 달려온 이른바 ‘현자(賢者)’들로 만원이라 한다. 그들의 소망은 딱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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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달력이 끝나는 내년 2012년 겨울 갑자기 전세계를 가득 덮을 거라는 무수한 아기들의 떼죽음에 어떻게 대응하며 또 그와 함께 시작될 인류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현대세계의 문명 중심 허브는 분명 동아시아·태평양이다. 금융위기 직후 미국의 국가정보위원회는 전 세계 신문과의 공식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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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 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쪽(대서양)에서 동쪽(태평양)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둘은 그럼에도 각 지역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는 다극체제가 형성돼가고 있다는 것.

모심의 주체는 여성과 아기들

똑같은 내용이 7년 전 미국, 일본, 중국, 북한, 남한의 동아시아 경제통 다섯 사람이 다섯 번에 걸친 장시간 비밀 경제회의에서 다음의 결론을 얻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EAST Rotterdam -the integrated network

‘동()로테르담’이란 네덜란드의 대서양 경제 문명의 허브인 로테르담이 동아시아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동로테르담’이 어디인가? 한반도의 동남해안, 서남해안, 동지나해, 그리고 현해탄이다. 그 동남해안이 어디인가? 바로 이곳 부산이다. 그 밑의 설명구인 ‘the integrated network’는 무슨 뜻인가?

‘중심성이 있는 탈중심’이다

미국 쪽 공식 견해와 하나도 다름없다.

나는 7년 전 그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화엄경과 후천개벽의 정역(正易)과 그것을 실천하는 동학과 예수의 ‘모심’과 그 ‘화엄개벽모심’을 제대로 해석하고 정확히 전망하는 방법으로서 통치와 처신 중심의 주역 ‘추연법(推衍法)’ 대신 ‘여성과 아기들의 생명 및 생활 중심성의 법칙’인 천부경 81자의 ‘묘연법(妙衍法)’으로 상호 결합하는 공부를 해왔다. 이것이 곧 ‘모심 공부’다.

부산 특강의 요약을 끝낸다.

화엄경의 핵심은 ‘이불이(移不移)’의 ‘탈중심이로되 중심성의 법칙’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달은 하나인데 천 개의 강물에 다 따로따로 비침’이다.그야말로 ‘획기적 재분배’의 신시는 호혜시장의 경제원리이며 ‘호혜와 교환’이 함께 움직이는 한 사회경제 아닌가! 이것이 ‘동로테르담’에 주어진 새로운 세계의 사회경제적 요구 아닌가!

이러한 화엄이 지금 다가오고 있는 개벽을 타고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의 실재라면 이것을 실천하는 길은 어디에 있으며 이 길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핵심 문제다.

모심! ‘모심’ 아닌가! 또 그 주체는 ‘여성과 아기들’ 아닌가. 그리고 다중(多衆)과 중생 아닌가!

4
8.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

나의 아내인 토지문화관 김영주 관장으로부터 바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과 강연에 대한 잡지 ‘신동아’의 요청을 전달받았다. 나는 즉각 거절했다. 왜냐하면 아내의 요구는 주역이니 정역이니 또는 ‘산알’ 같은 경락학 따위, 그리고 ‘복승론(復勝論)’ 같은 동양생명철학 얘기는 빼고 하되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나 지식인 상황으로 보아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니 꼭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뒷이야기는 좋은데 그것에 맞추려면 앞 이야기는 도리어 그 반대가 옳다는 내 속 의견이 있지만 평소 아내가 늘 하는 다음과 같은 말,

‘만날 민중, 민중 하면서 여성이나 아기들, 또 쓸쓸한 사람들 그 누구더러 들으라고 주역이니, 정역이니 산알이니 그 어려운 얘기를 혼자서 즐기느냐?

또 그 말이었기 때문에 우선 벌컥 화부터 냈다.

이것이 사단이었다.

‘모심으로 가는 길’의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화엄경도 후천개벽도 동학도 정역도 예수의 섬김도 천부경 81자도 사실은 모두 다 노자나 장자처럼 ‘여성 모심’을 전제로 하고 있고, ‘여성적 생명과 생활가치’를 그 해석과 전망 방향으로 이미 못 박고 있으며 동로테르담 허브의 ‘탈중심적 중심성’으로 마치 달과 물의 시대인 현대의, 태양력 중심의 윤달 체제, 365 4분의 1의 슈퍼버블시대가 아닌 정력(正曆), 달력 중심의 360일 무윤력 시대이고, 그러나 ‘달그늘’ ‘물개현상’ 그리고 ‘소산지기(疎散之氣)’의 용납 아래에서 파악되는 ‘흰그늘’의 시대이니 다름 아닌 ‘혼돈의 질서’요 왈, 동학의 ‘강태극(弓弓太極)’의 시절이라!

원주 주변 내 공부하는 산천 중 무장리(茂長里) 신명못가에 묻힌 여성 기철학자 임윤지당(任允持堂)은 가라사대.

‘여성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도 칠정(七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폭탄발언을 한 정조 때 사람, 저 유명한 기철학의 호랑이 임성주(任聖周)의 누이동생이다.

아내와 장모님이 모두 좋아하던 여성 사상가다.

나홀로 동학당

원주에 돌아와서다.

오래도록 나 혼자 끙끙대며 애써온 ‘화엄개벽을 위한 여성 모심의 길’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난 것이다.

4
8일 오후.

집에서 정신없이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앵산(鶯山)으로 달린다. 앵산이 어디이며 무엇 하는 곳인가? 나는 애초 ‘나홀로 동학당’이라고 했다.

1894
년 겨울 갑오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동학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남도권을 떠나 경기도 이천군 설성면 수산1리 앵산동에 숨는다.

?

단순한 피신이 아니었다.그 이전 제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 ‘남진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남쪽 별이 원만을 얻으면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은하수 이야기는 후천개벽의 완성이고 별은 개벽행동의 첫 시작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 시작과 끝에 남과 북이 있으면 가운데는 자연히 중()이 된다. 그러니 중조선의 원만한 조건을 말한다. 해월의 피신지가 그 뒤 이천, 여주, 양평, 남양주와 원주인 것은 결코 우연이나 단순한 피신 사정이 아니다. 바로 원만이다. 지형적 조건, 역사, 사람, 종교, 문화 등이 모두 연결된다. 정말 그런가?

날더러 과장이 심하다고 흉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내 직업이 시인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사람의 주책이지만,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이것은 사실이다. 나는 최근 사람을 안 만난다. 그 대신 내가 만나는 것은 바로 소나무, , 강물과 벌판과 산이다. 이것도 거짓말 같은가? 외로운 삶의 형태에도 과장이 통하는가?

해월이 원주에서 체포당한 것, 탄허의 월정사 입정, 궁예의 영원산성 입산, 남조선 뱃노래의 주인공 강증산의 제자들 모임인 대순진리회 본부가 여주와 원주 사이에 자리 잡음. 모두 그렇다. 모두가 후천개벽과 화엄 연관행위다.

여성 월경과 ‘엄마를 부탁해’

‘원만’에서 가장 민감한 인간적 조건은 무엇일까? ‘여성 모심’이다. 해월의 중요한 가르침 중 두 가지가 이것이다

여성의 뾰족한 성질은 수천 년간 억압의 산물이니 이때마다 큰절을 하라. 절하면서 그 긴 세월 동안 쌓인 남자들의 죄업을 씻으라.

여성과 아기들은 후천개벽의 타고난 도인(道人)들이니 깊이 모셔라. 후천개벽은 북극의 태음(대빙산) 물의 변동(해빙)이고 그 물을 변동시키는 것은 여자들 몸속의 월경의 변동이다. 이를 모셔라.

마음에 안 들 것이다. 그러나 듣거나 말거나 개벽은 개벽이다.

어째서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 여자주인공들 가운데 악녀와 마녀가 그리도 많은가? 왜 소와 돼지, 닭과 오리, 물고기, 새떼가 그리도 많이 한꺼번에 죽는가? 이 두 가지는 무슨 관계인가? 왜 건강유지에 물이 가장 중요해지는가? 달에 6t의 얼음이 있고 혹성과 혹성 사이에 그린 포플러, 옐로 보넛 따위 수성(水性) 안개띠 같은 화이트홀이 압도하는가? 왜 태양흑점은 140일 이상 다운되는가? 유럽 통합천문대는 작년, 왜 지난 12년간 태양열이 최저로 내려갔다고 발표했는가? 왜 현대를 물의 시대라 하는가? 작년 늦가을 신문 보도에 따르면 ‘비경제권 여성 리더십이 전 인구 중 1270만명의 여성’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기록되는가? 반장, 이장, 동장 등을 여성이 맡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째서 신세대 사이에 ‘엄마’가 아이콘이 돼가고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저리도 인기인가?

나는 그날 앵산동의 앞 논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봉우리 ‘앵봉(鶯峰)’에 섰다. 해월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자의 못난 점, 그 뾰쪽한 편성(偏性)은 ‘그늘’이고 여자의 잘난 점, 부드러운 엄마와 시장판에서의 날카로움은 ‘흰빛’이다. 네 미학사상은 바로 ‘흰 그늘’이고 ‘흰 그늘에 대한 모심’은 바로 너의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의 ‘비결’이자 세계 문화대혁명의 ‘모토’다. 왜 안 지키느냐?

“권세를 여자에게 넘겨라”

아하!

나는 그길로 양평장터와 그 근처의 남한강 ‘두물머리’로 갔다. 장터는 해월 선생을 수발하던 28세의 동학당 여성 ‘이(蝨·본명 李水仁)’가 붙잡혀 반항하다가 찢겨 죽은 장소이고 두물머리는 그때 거기 숨어 있던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 강 위에 뜬 희미한 초생달을 보면서 ‘이가이다(蝨爲李)’라고 울부짖었던 곳이다.

‘이가이다’란 말은 ‘밑바닥이 임금자리에 되돌아온다(已位親政)’라는 소리다. 먼저 ‘이’는 그 여성이 스스로를 낮춰 부른 별명이고, 나중 ‘이’는 그 여성의 본래 성()이 왕족(王族)이었던, 쫓겨난 전주이씨(全州李氏)란 뜻이다.

!

내가 두물머리 나루터에 서서 가슴에 칼이 꽂히는 아픔으로 기억한 말이 이것이었다.

기위친정.2008년 시청 앞 ‘촛불’에서, 튀니지와 예멘 등의 재스민혁명 기사에서 그 재스민이 곧 쎄벨리온()과 같은 뜻의 꽃이름임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이 모두 이것이다.

2005
년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 강증산이 여러 남성 제자가 둘러앉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그의 아내 고수부(高首婦)에게 식칼을 들고 누운 자기 배 위에 올라타고 ‘지금 당장 하늘, , 사람의 큰 권세를 나에게 모두 넘기시오!’라고 부르짖게 하고 자기는 밑에서 두 손을 싹싹 빌며 ‘네에, 잘못했습니다. 지금 당장 다 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한 뒤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이제부터 꼭 이렇게 하라!

이리 가르친 것이 모두 이것이다.

모심이다.

두물머리 곁이 저 유명한 다산 정약용의 ‘마재’다. 그가 평생 집착한 ‘정전법(正田法)’이 무엇인가? 마재에서 남한강을 끼고 원주로 원주로 한없이 오다 들른 강천면 부평리의 쓸쓸한 한 묘지, 선조 때 사람 한백겸(韓百謙)의 묘지임을 기록한 두 개의 돌비석 앞에 선다. 둘 다 무덤 아래의 돌거북이 기이하게도 머리를 획 꼬아 비틀고 있는 모양새다. 이상하다. 그가 반역자 정여립의 시체를 거두었기 때문인가?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그의 이름 ‘백겸(百謙)’이 곧 ‘지극한 모심’이리는 생각에 부딪힌다. 나의 한때 아호가 ‘노겸(勞謙)’임도 뒤따른 생각이다.

시루봉에서 비로봉으로

마재 정약용의 정전제(正田制)와 부평 한백겸의 기전제(箕田制)는 이제부터 나도 여러 지식인도 필히 비교 연구해야 할 ‘공()’과 ‘사()’ 사이의 올바른 ‘중도적(中道的) 경제구조’의 원형이다. 거기에 아마도 참다운 삶의 살아 있는 ‘모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내게는 그 이름 속의 ‘모심’이 아프게 새겨져온다.

4
9.

박달재다. 느끼고 생각한 것은 역시 대장군 상석 위의 세 개의 놋잔. 이른바 ‘삼태극’이요, 삼태극의 주인이며 밑받침인 물, 수왕, 이른바 과거꾼을 붙든 금봉이에의 모심이다.

4
10.

횡성을 지나 서석(瑞石)의 태기산을 지나 양양 구룡령 밑 미천골로 향했다. 모심을 새기기 위해서다. 그러나 ‘불바라기’는 공사 중이라 한다.

그곳에 공사라니 우습기 짝이 없었으나 돌아오는 길에 인제 쪽 한계령으로 들었다.

한계령.

기괴하고 무서운 산괴(山槐). 돌아오면서 내내 산이 내 넋에게 불편했다. 도저히, 산을 그리도 좋아하는 나지만 빈 마음으로 ‘모실 수가 없다.

두려움은 모심이 아니다. 조심과 무심이 모심임을 상식으로도 알지만 이 두려움만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생각해보자. 큰 문제가 아닐까.

4
11.

숙제는 나를 항상 분주하게 한다. 그러나 새벽 글쓰기와 아침나절 세 시간의 공부는 단 하루도 빠진 적이 없다. 오후 치악산 구룡사로 들어간다. 구룡사 뒤편의 치악산 왕초 비로봉(毘盧峰)은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산이다. 마치 화엄경처럼. 그 근처의 학곡리 출신 사람에게 비로봉에 대해 듣는다.

‘왜 비로봉인가?

일반적으로 시루봉인데… 왜?

“왜 부인한테 화를 내는 거요?

이야기는 이렇다.

‘본디는 아홉 용이 절자리와 봉우리 근처에서 들끓었다. 물이 흥건해 시루봉이라 불렀는데 창건자 의상(義湘)스님이 큰 기도를 해서 흥건한 물이 빼어난 봉우리로 변했다. 그 뒤로 화엄경 주불(主佛) 비로자나 사상을 말없이 가르치는 비로봉으로 바뀌어 우아한 산이 되었다.

이 비로봉으로 오르기 위해 산길까지 이름이 바뀌었다. 어떻게?

2020/03/26

알라딘: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알라딘: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History of philosophy
Julián Marías

Thorough and lucid survey of Western philosophy from pre-Socratics to mid 20th century: major figures, currents, trends, literature, significance, and more. Valuable section on contemporary philosophy — Brentano, Ortega, Heidegger, others. One of the best elementary history of philosophy available. "Brevity and clarity of exposition..." — Ethics.
$6.49 (USD)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 존재에 관한 인간 사유의 역사
훌리안 마리아스 (지은이),강유원,박수민 (옮긴이)
유유2016-08-24
원제 : Historia de la filosofia (1941년)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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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00자평(9)리뷰(1)
이 책 어때요?
802쪽
152*223mm (A5신)
1444g
ISBN : 9791185152523

책소개
에스파냐의 철학사학자 훌리안 마리아스 학문의 집대성.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부터 오르테가 이 가세트까지 서양 철학의 도저한 역사와 그 핵심 내용을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일이관지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과 철학사 사이에는 불가분의 연관성이 있다. 철학은 역사적이며, 철학사는 철학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철학사는 철학자들의 견해들에 관한 박식한 서술일 뿐 아니라 철학의 실재 내용을 제대로 상술하므로 틀림없이 철학이다. 철학은 어느 하나의 철학 체계 안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은 모든 철학 체계들의 참된 역사로 이루어진다. 이 책은 그 증거다.


목차


역자 서문
서론

제1부 희랍 철학

희랍 철학의 가정들

I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1 밀레토스 학파
2 피타고라스주의자들
3 파르메니데스와 엘레아 학파
4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데모크리토스까지
A) 헤라클레이토스│B) 엠페도클레스│C) 아낙사고라스│D) 데모크리토스

II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1 소피스트들
2 소크라테스

III 플라톤
1 이데아
2 실재의 구조
3 이데아론에 의해 생겨난 문제들
4 시민과 도시 정체
5 철학

IV 아리스토텔레스
1 앎의 층위들
2 형이상학
3 존재의 양상들
4 실체
5 논리학
6 자연학
7 영혼론
8 윤리학
9 정치학

V 지혜로운 인간의 이상
1 소크라테스 전통의 윤리 철학들
A) 퀴니코스 학파│B) 퀴레네 학파
2 스토아주의
3 에피쿠로스주의
4 회의주의와 절충주의
VI 신플라톤주의

제2부 기독교

기독교와 철학

I 교부학
II 성 아우구스티누스
1 생애와 품성
2 철학
3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의

제3부 중세 철학

I 스콜라주의
1 이행의 시기
2 스콜라주의의 특징

II 중세의 중심 주제들
1 천지창조
2 보편자들
3 로고스

III 중세 철학자들
1 스코투스 에리게나
2 성 안셀무스
3 12세기
4 동방의 철학자들
A) 아랍 철학│B) 유대 철학
5 13세기의 정신세계
6 성 보나벤투라
7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학
A) 성 알베르투스 마그누스│B) 성 토마스 아퀴나스
8 로저 베이컨
9 에스파냐에서의 기독교적 철학
10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암 오캄
A) 둔스 스코투스│B) 윌리암 오캄
1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2 중세 철학의 마지막 국면

제4부 근대 철학

르네상스

I 르네상스의 세계
1 정신적 배경들
2 인문주의 사상

II 근대 철학의 시작
1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2 조르다노 브루노
3 근대의 자연학
4 에스파냐의 스콜라주의

17세기 관념론

I 데카르트
1 데카르트 문제
2 인간
3 신
4 세계
5 이성주의와 관념론

II 프랑스에서의 데카르트주의
1 말브랑슈
2 종교 사상가들

III 스피노자
1 형이상학
2 윤리학
3 생존 욕구로서의 존재

IV 라이프니츠
1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상황
2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3 인식론
4 변신론

경험주의

I 영국 철학
1 프란시스 베이컨
2 홉스
3 이신론
4 로크
5 버클리
6 흄
7 스코틀랜드 학파

II 계몽주의
1 프랑스 계몽주의
A) 백과전서│B) 루소
2 독일 계몽주의
3 역사에 관한 비코의 학설
4 에스파냐의 계몽주의 철학자들

III 근대의 형성
1 철학과 역사
2 이성주의 국가
3 종교개혁
4 근대적 사회
A) 지적 생활│B) 사회적 변화
5 신의 상실
-----------
독일 관념론
I 칸트
* 칸트의 학설
1 초월론적 관념론
2 순수 이성 비판
A) 판단들│B) 공간과 시간│C) 범주들│D) 전통 형이상학 비판
3 실천 이성
* 칸트 철학의 문제들
1 칸트 철학에 대한 해석들
2 인식론
3 존재
4 철학

II 피히테
1 피히테의 형이상학
2 피히테의 관념론

III 셸링

IV 헤겔
1 헤겔 철학의 개요
2 정신 현상학
3 논리학
4 자연 철학
5 정신 철학

V 낭만주의 시대의 사상
1 문예 운동들
2 역사학파
3 슐라이어마허와 종교 철학
4 관념론에서 도출된 사상들
5 쇼펜하우어
--------------
19세기 철학

I 감각론에 대한 승리
1 멘 드 비랑
2 유심론

II 콩트의 실증주의
1 역사
2 사회
3 과학
4 실증주의의 의의

III 실증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철학
1 프랑스의 사상가들
2 영국 철학
3 독일에서의 실증주의 시기

IV 생의 발견
1 키르케고르
2 니체

V 전통 형이상학으로의 귀환
1 첫 시도들
2 알퐁스 그라트리

제5부 현대 철학

I 브렌타노
1 철학사에서 브렌타노의 위치
2 심리학
3 윤리학
4 신의 현존

II 생의 이념
1 딜타이
2 지멜
3 베르그손
4 블롱델
5 우나무노

III 영미 철학
1 프래그머티즘
2 인격주의
3 그 밖의 동향들

IV 후설의 현상학
1 이념적 대상들
2 의미들
3 분석적인 것과 종합적인 것
4 의식
5 방법론이자 관념적 논제로서의 현상학
6 현상학적 철학

V 가치론
1 가치의 문제
2 셸러
3 하르트만

VI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
1 존재의 문제
2 현존재 분석
3 ‘실존주의’

VII 오르테가와 생적 이성의 철학
1 오르테가의 품성
2 오르테가 철학의 탄생
A) 관념론 비판│B) 발견의 국면들
3 생적 이성
4 인간의 생
5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생

후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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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0~21 종교, 예술 그리고 철학은 인간에게 실재 전반에 관한 총체적인 확신을 준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점이 없지는 않다. 종교는 인간에 의해 수용되고 신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진, 하나의 확실성이다. 그것은 계시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확실성을 스스로 성취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그것을 쟁취하지 않는다. 그 확실성은 인간이 직접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술 또한 인간 자신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확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인간은 자신의 삶 전부를 해석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러한 신념은 그것 자체로 정당화되지 않으며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기 고유의 증거를 갖지 못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 그러한 확신이라는 귀결에 이르렀는지를 대답할 수 없다. 이와는 다르게 철학은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자율적인 확실성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것은 자신의 타당성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면서 증명한다. 철학만이 입증을 추구하는 것이다. 철학은 항상 자신의 확실성의 근거를 갱신한다. 접기
P. 79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귀납적 추론과 보편적 정의’가 소크라테스의 공헌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한 구절을 들 수 있다. 게다가 이 두 가지는 다름 아닌 앎의 시작과 관련되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덧붙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할 때, 이를테면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는 ‘규정’을 요구한다. 어떤 사물을 규정한다는 것은 그것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시하는 것이다. 즉 그것의 본질을 명시하는 것이다. 규정은 본질로 이어지고, 단순한 안목 또는 분별로 이해되던 앎은 소크라테스의 노력을 통해 사물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게끔 하고 그것들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는, 어 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앎으로 이어진다. 이 지점부터 소크라테스 사유가 가진 풍부함이 펼쳐지고, 진리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며, 소피스트들이 외면했던 존재의 관점에 다시금 집중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진정 사물들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본질을 규정하는 이러한 과정은 이데아에 관한 플라톤의 이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접기
P. 207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근대 철학의 요소가 될 ‘내밀함’을 함축한다. 우리는 그의 철학이 어떻게 내적 인간에 토대를 두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인간에게 자기 영혼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함께, 그리고 신과 함께 자기를 발견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성 안셀무스가 처음으로 배우고 그를 통해 서구의 모든 신비주의가 배우게 될 위대한 가르침이다. 아고라와 포룸의 사람들이었던 고대인을 특징짓는 외재적 세계로의 비상飛上과는 대조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아의 조용한 내면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 이로써 데카르트와는 다른 가정들을 통해 도달하지만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유사한 다음 언명에서, 그는 확실성의 가장 높은 기준은 자아라고 확언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이해한 것이며, 그가 이해한 이것에 대해 확신한다’. 접기
P. 443 이념들은 철학의 영역에서 구상되지만 결국에는 역사적 결과들을 낳아놓는다. 개념들은 일반화되고, 대중들에게 뻗치는 역동적인 힘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이러한 현상은 늘 있어왔지만 지금 우리가 살펴볼 시대에는 전례 없이 대규모로 일어난다. 우리가 계몽주의 시대라고 알고 있는 18세기 전체는 이전 세기들에서 구상된 이념들이 영향력과 현실성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시대는 어느 정도 이념들 위에서 진행되지만, 반드시 이념들이 스스로를 이념들로서, 즉 이론들로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이념들은 자신들을 위장함으로써-예를 들어 전통적 형식들로 위장함으로써-힘을 얻는다. 그렇지만 18세기에는 이념들이 바로 이념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중요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이념들에 따라, 즉 이성(raison)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이념들은 스스로를 위장할 필요가 없었고, 그에 따라 최대의 힘을 얻었다. 접기
P. 466 형이상학의 시작을 대변하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존재는 사물들의 실재적인 특성이며, 하나의 색처럼 사물들 안에 있는 것이지만 모든 다른 가능한 특성들보다 선행하는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파르메니데스에서 사물들은 실재적이지만 관념론 철학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존재는 실재적이지 않고 초월론적이다. 내재적(immanent)이라 함은 안에 머물러 있는(immanet, manet in)을 의미한다. 초월적(transzendent)이라 함은 무엇을 넘어서거나 초월하는 것을 뜻하며, 초월론적(transzendental)이라 함은 초월적인 것도 내재적인 것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탁자는 존재라는 특성을 가지지만, 탁자의 다른 모든 특성들 또한 존재라는 특성을 갖는다. 존재라는 특성은 나머지 모든 것들에 스며들어 그것들을 감싸지만, 그것들 중 어떠한 것과도 섞이지 않는다. 모든 사물들은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에 따라 존재는 사물들 간의 다리를 제공한다. 이것이 초월론적 존재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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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문 2016년 9월 9일자 '학술.지성 단신'



저자 및 역자소개
훌리안 마리아스 (Julian Marias)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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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미국에서 철학사가이자 철학교육자로 잘 알려진 훌리안 마리아스는 마드리드 학파의 창시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다. 마리아스는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나,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프랑코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 구절 때문에 대학에서 거절당했다. 이때 에스파냐에서 가르치는 일조차 금지당했던 그는 194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와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2005년에 사망했다. 그가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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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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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 역사, 문학, 정치학 등에 대한 탐구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써 왔다. 오랫동안 개인 플랫폼에서 ‘책읽기 20분’을 진행했으며, CBS ‘라디오 인문학’과 KBS 제1라디오 ‘책과 세계’ 등 방송에서도 전문 서평가로 활동했다. 《책》 《책과 세계》 《주제》 등의 서평집과 《인문 古典 강의》 《역사 古典 강의》 《철학 古典 강의》 《문학 古典 강의》 《숨은 신을 찾아서》 《에로스를 찾아서》 등을 썼으며, 《경제학 철학 수고》 《철학으로서의 철학...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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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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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으며, 2001년부터 원전강독 모임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헤겔 근대 철학사 강의』(공역, 이제이북스, 2005)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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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정통 철학의 문제의식과 개념들에 따라 철학자들의 이론 체계를 서술한 표준 철학사. 철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공부와 사유의 토대로서 익혀야 하는 ‘종합적 학으로서의 철학’의 역사를 개념과 맥락을 잡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책.

정통 철학의 문제의식과 개념들에 따라
철학자들의 이론 체계를 서술한 표준 철학사
철학사가이자 교육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훌리안 마리아스의 『철학으로서의 철학사』(Historia de la filosofia)는 1941년에 처음 출간된 철학사 책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유럽에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등장한 최고의 기본 철학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에스파냐어본은 30쇄 이상을 거듭하며 읽혔으며, 마리아스의 감수 아래 1967년에 처음 번역된 영어본(『History of Philosophy』)은 영미권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철학사 수업을 위한 텍스트로서, 일반인에게는 다소 어렵지만 제대로 된 입문서로서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이 이렇게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서구 철학사를 온전하고 충실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본적인 철학자들과 흐름들을 다루면서도 철학자 개인의 전기적 자료들까지 조망하고 있으며, 서구 사상사의 연결선상에서 각각의 철학 이론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정통 철학의 문제의식과 개념들을 근간으로 철학 이론들을 서술함으로써, 철학사의 주요 테제들을 연결하는 끈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즉 철학자와 철학자를 잇는 철학적 명제는 무엇인지, 철학의 주요 개념들이 언제 처음 생겨나고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철학의 이념과 시대 상황은 어떻게 연관되는지 예리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철학사를 공부하면, 철학사의 맥락에서 개별 철학자들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사의 주요 문제들을 연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로 번역된 이유도 이러한 장점과 연관이 된다. 문제의식의 연계를 중심으로 철학사를 탐구하다 보면 철학사는 그 자체로 철학적 인식이 되고 철학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인터넷과 다양한 디지털 매체가 발달한 시대에는 철학자나 개념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이 책처럼 철학적 지식을 유기적으로 엮어 주는, 그럼으로써 사유와 공부의 힘을 길러주는 철학사 책은 많지 않다. 서양 철학의 전 역사를 단계별로 추적하면서 그 마지막에는 철학의 의미가 가지는 근원적 통일을 보여 주는 이 책의 출간 의의는 그래서 더욱 두드러진다. 접기



9.2







저작이든 번역이든 믿고 읽는 강유원!
오메르타 2016-08-31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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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커버가 쌔끈하다. 새까만 바탕에 은빛 부엉이가 번쩍거리는데, 그렇지 역시 지혜는 밤에 야금야금 먹어치워야 한다. 내용은 솔직히 번역자 믿고 일단 그냥 샀다. 읽다가 힘들면 망치로도 쓰고, 베개로도 쓰고, 둔기로도 쓰고 그래야겠다. 그래도 카프카의 말마따나 도끼로 쓰인다면 가장 좋겠지.
성난똥꼬 2016-11-03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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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리가 잘 되어있고 설명이 명료함.(단점은 너무 많은 사람을 다루면서, 주변의 잡다한 주제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함)
밭고랑 2017-01-1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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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두꺼우나 무게는 가볍다. 내용은 즐겁게 무겁다.
juyesi 2016-12-22 공감 (1) 댓글 (0)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 훌리안 마리아스

"종교는 인간에 의해 수용되고 신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진, 하나의 확실성이다. 그것은 계시된 것이다." 예술 또한 "인간 자신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확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인간은 자신의 삶 전부를 해석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확실성을 스스로 쟁취하거나 직접 만들어내지 않으며, 이 신념 자체를 정당화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 고유의 증거를 갖지 못한다." 반면 철학은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자율적인 확실성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것은 자신의 타당성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면서 증명한다. 철학만이 입증을 추구한다. 철학은 항상 자신의 확실성의 근거를 갱신한다."(20-1)

"최초의 인간은 주변 사물에 대해 궁금해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궁금해했다." 철학은 인간과 동떨어져 단독적으로 있는 듯한 사물에 대해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완전히 새로운 태도이며, 신화적인 태도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관상적 태도라 부를 만하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상 처음으로 희랍에서 등장했으며, 그때부터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생겨났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사물만이 참이나 거짓일 수 있다. 사물들의 진리에 대한 이러한 깨우침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 경이驚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학의 뿌리다."(23-4)

"철학사는 철학자들의 견해들에 관한 박식한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실재 내용을 제대로 상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사는 틀림없이 철학이다." 각각의 철학 사상은 "선행하는 모든 체계들을 필요로 하고 포함"하기 때문에, 철학은 "모든 철학 체계들의 참된 역사로 이루어진다." 다른 관점에서 봐도 "각각의 철학 체계는 최고 실재, 즉 완전한 진리를 오직 자기 자신의 밖에서만, 다시 말해서 그 체계를 계승하려는 철학자들의 사유 속에서만 성취한다. 모든 철학함은 과거의 총합에서 유래하여 미래로 나아가며, 그리하여 철학사를 진척시킨다. 요약하자면 이것이 철학은 역사적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다."(25-6)

희랍인들이 보기에, 세계는 늘 현존해왔고, 따라서 "모든 물음은 이 세계를 상정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출발한다." 자연으로 해석되는 이 세계는 "구체적인 실재가 등장하거나 생겨나는 하나의 근원적인 원리"이자, "변화할 수 있으며 대립자들로 규정되기도 하는 많은 사물"을 담고 있는 양극성의 세계이다. "존재, 이론, 로고스"로 특징지어지는 희랍 사유는 세계를 질서 있고 법칙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코스모스cosmos라는 개념이다. 이성은 그 세계의 이러한 법칙적 질서에 편입되어 통제되고 인도받을 수 있으며, 인간사에서 이러한 법칙적 질서의 구체적인 형식은 폴리스에 사는 인간들의 정치적 공존"으로 나타난다.(32-3)

"퓌시스physis(자연)는 철학의 첫 단계 전반의 주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상가들을 퓌시올로고이physiologoi(자연철학자들)라 불렀다."(35)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무엇이 참된 사물인지, 다시 말해서 사물은 그것들의 수많은 현상들 뒤에서 영원히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궁금해했다." 즉, 사물의 존재 자체에 스며들어 있는 다수성과 모순을 넘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물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근원들을 탐색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철학의 최초 물음이 '이러한 모든 사물은 참으로 무엇인가' 또는 '모든 사물을 출현시키는 원천인 자연[본성]이란 무엇인가'이다. 희랍 철학의 역사는 이 물음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로 이루어져 있다."(37)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철학은 형이상학과 존재론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하게 사물들을 논의하려고 하지 않았고 본질의 측면에서 본 사물들, 즉 '있는 것들'로서의 사물들을 논의하려고 했다. 있음, 에온eon, 온on은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발견이다."(48) 누스Nous(지성)는 '있음'을 대상으로 '있는 것'의 길(진리)와 '있지 않은 것'의 길(막다른 길)을 탐구한다. 감각은 '사물들'을 대상으로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길(의견의 길)을 탐구한다.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유에서 "두 세계의 분리, 즉 진리의 세계와 가상들의 세계의 분리가 시작되었음을 본다. 후자의 세계를 참된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다. 이 분리는 희랍 사상에서 결정적인 것이 된다."(53)

기원전 5세기 초 새롭게 시작된 철학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의 이상형이 "잘생기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품위 있는 사람, 즉 우리가 칼로스 카가토스kalos k'agathos라고 불렀을 만한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완벽한 시민, 즉 폴리테스polites가 이상형이 되었다." 이제 희랍 사유의 중심에 "퓌시스가 아닌 개인의 본질의 전개라는 의미에서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행복)가 들어섰다." 이 새로운 개념의 결과는 모든 사람이 누스를 가지며 누스는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라는 '민주정'의 수립이었으며,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에서 "파이데이아paideia, 즉 정식 교육"을 수행하였다.(74-5)

플라톤은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86) 플라톤이 명명한 이데아는 "사물들의 참된 존재를 포함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자들이다." 이데아들은 "전통적으로 있음에 요구되었던 술어들을 가지며, 감각이 지각하는 사물들은 있음을 가질 수 없다. 이데아들은 단일하고, 변화하지 않으며, 영원하다. 이데아들은 비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90-1) 인간은 이전에 "자신이 관상했던 이데아들에 관한 아남네시스anamnesis(상기)"를 사물들에서 촉발한다. 그러므로 "앎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에로스eros는 "아름다움의 이데아 자체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우리를 이데아의 세계로 이끈다."(92-3)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포이에시스poiesis는 희랍어로 '제작, 생산'을 의미한다. 프락시스praxis는 실행인데, 이 실행의 목표는 실행 자체이지 실행과 무관한 어떤 것이 아니다. 프락시스는 자신 안에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포이에시스보다 우위이며 자기-충족적―아우타르케이아autarchia(자족)―이다."(113) 포이에시스가 본질적으로 자기-충족적이지 않은 것은 "그 목표가 자기 바깥에, 즉 생산물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프락시스는 목표가 생산물, 에르곤ergon이 아니라 활동하는 과정, 활동성 또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이다." 신의 존재 양상인 테오리아theoria(관상)는 프락시스의 한 유형으로서, "사물들의 총체성 속에서 사물들의 존재를 보고 깨닫는 활동이다."(120)

"실체usia는 질료hyle와 형상morphe/eidos이라는 두 요소의 합성물로 해석된다. 질료는 하나의 사물이 무엇으로 구성되느냐에서, 그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며, 형상은 하나의 사물을 그것 자체이게 하는 것이다."(129) 질료와 형상은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를 보여준다. 잠재태는 자신이 품은 가능성 안에서 현실태로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운동이란 '가능한 것인 한에서 가능태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잠재적인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 있지 않고 자신을 실현한다면 거기에는 운동,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성이 있게 된다."(130-1)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세계의 절대적인 계기로서, 운동/생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창조자는 아니다."(133)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는 형이상학 자체에 관한 관심이 사라지고, 윤리학의 물음들에 집중한다. 폴리스의 붕괴와 제국의 도래라는 혼란기를 맞아 고대인들은 "자립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사람, 완전한 평온과 균형 속에서 필수적인 삶을 사는 사람, 철학자의 삶의 방식―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적 삶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 삶―을 구현하는 사람을 규정하는 특징들을 발견"하는 데 힘쓴다.(156) 여기에는 행복을 극단까지 몰고 나아가 거기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퀴니코스 학파, 금욕주의와 덕을 통해 일상의 온건하고 평화로운 쾌락을 추구한 퀴레네 학파, 인간 이성을 우주의 본성에 합치하고자 한 스토아주의, 철학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에피쿠로스주의가 있다.

플로티누스는 범신론과 반反유물론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체계의 존재론적 위계질서의 원리는 일자이며, 이 일자는 존재이기도 하고 좋음이자 신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들은 일자로부터 유출된다. 유출된 것 중 첫째는 정신의 세계이자 이데아들의 세계인 누스다. 누스는 자신에 대한 상기, 즉 반성을 전제하며, 그에 따라 이원성을 전제한다. 둘째는 누스의 반영인 영혼이다. 존재의 가장 낮은 층위는 물질이며, 이 물질은 거의 비존재다."(174-5) 세계 존재는 무無가 아니라 일자로부터 산출되는데, 이는 "공空을 수용하지 않고도 창조를 생각해내려는 시도다. 이것은 유대-기독교 사상에 의해 도입된 창조 이념에 맞닥뜨렸을 때 희랍 정신이 보인 특징적인 반응이었다."(176)

"기독교는 세계와 인간의 현존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전적으로 새로운 이념을 도입한다. 바로 창조라는 이념이다."(183) 성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핵심은 '신과 영혼'이다. 첫째, "그의 사변의 핵심은 신이고, 그의 형이상학적 노고들도 신을 향한다." 둘째, 그의 정신 철학은 "내밀함 속에서 스스로를 고백"한다. 셋째, "지상에 살고 있는 이러한 정신이 신과 맺는 관계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신국의 이념으로 이끌고, 이는 역사 철학으로 이어진다."(199-200) <고백록>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데카르트가 인도한 "근대의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자아와 함께 혼자 남았을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심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207-8)
"9세기가 시작되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성과로서 학교들이 등장하며, 그 학교들에서 일구어낸 특별한 지식으로서 스콜라주의가 함께 등장한다." 중세 대성당들이 막대한 익명의 노동으로 세워진 것처럼, 스콜라주의도 "개별자의 인격이 강조"되지 않고, 중세 말까지 공동의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216-7) 스콜라주의는 철학과 신학의 복합체이며, 그것은 "추구(quaerere)라는 근본적인 통일 안에서 믿음과 이해가 동등하게 강조되어야만 하는, 안셀무스의 명제인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중세 스콜라주의는 이 두 요소 사이에서 움직이며, 이러한 추구 안에서 결합된다."(219-20)

스콜라 학파에 따르면 "천지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며, 더 정확하게는 무無와 주재자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hihilo sui et subjecti)이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는 중세 철학의 원리는 "신의 개입 없이는, 정확하게 말하면 천지창조 없이는 무로부터 아무것도 나올 수 없음을 뜻한다."(221-2) 세계는 신에 의해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신의 활동은 지속적이며, 계속해서 매 순간 세계를 현존하게 해야 한다. 이는 지속적인 창조와 같다." 그러나 유명론자들은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세계에 부여했던 존재만으로 세계가 자체 존립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223)

12세기까지 널리 받아들여진 실재론은 "보편자들이 사물들(res)이라고 주장했다. 실재론의 극단적 형식을 지지한 사람들은, 보편자들이 그것들의 항목 아래 있는 모든 개별자들 안에 현전하며 그 결과 개별자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고 우연적 차이들만 있다고 믿는다." 13세기에 등장한 온건 실재론자들 역시 개별자가 참된 실재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개별자의 실재성은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에 따라 그 종種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다. 성 토마스는 "하나의 개별자는 양으로 규정된 질료(materia signata quantitate)"일 뿐이며, 질료를 수량화하는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질료 안에 있는 보편적 형상이 개별화한다고 보았다.(226-7)

오캄에게 "이성은 인간에게만 관련된 것이다. 이성은 인간의 특성이지 (전능한) 신의 특성이 아니다." 중세 말에 이르면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중대한 이론적 주제가 아니게 되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분리된다." 이제 인간은 이성의 탐구로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영역들에 관여한다. 그것은 "첫째가 인간 자신이고, 둘째가 당시 놀라운 질서가 발견되고 있었던 세계이다."(232)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의 자연학은 "운동과 원인들 자체를 이해하고자 했으나, 근대 자연 과학은 운동과 원인들에 관한 수학적 상징들에 만족한다." '자연의 책은 수학적 기호들로 쓰인다'고 말한 갈릴레오처럼 우리는 "운동 중의 변화량만을 측정할 뿐, 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추구하지 않는다."(229)

아랍 철학(이슬람 스콜라주의)의 "주요 주제는 쿠란에 대한 이성적 해석이며, 서구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철학의 관계들"이다.(254) 아비센나(이븐 시나)가 도입한 지향intentio 개념[영혼 밖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하는 제1지향(intentio prima)과, 영혼 안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하는 제2지향(intentio secunda)]은 "성 토마스의 철학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256) 아베로에스(이븐 루슈드)는 정신을 "입증의 인간, 개연성 있는 추론들에 만족하는 변증법의 인간, 그리고 수사학과 이미지들에 만족하는 설득의 인간" 세 부류로 구별한다. 따라서 쿠란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하나의 사물은 신학적으로 참이면서도 철학적으로는 거짓일 수 있으며, 이는 역으로도 성립한다."(257-8)

성 토마스는 철학과 신학을 분명히 구별한다. "신학은 신적 계시에 토대를 두며, 철학은 인간 이성의 활동에 토대를 둔다." 다만, "신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그의 계시는 의심받을 수 없지만, 올바르게 사용된 이성 또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 성 토마스는 "믿음의 대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태도는 "믿음과 신학을 주제로 하는 논제들에 이성을 적용하는 이른바 자연 신학"으로 이어진다. "철학적 이론과 계시된 교리 간의 부조화는 그 이론이 오류"임을 뜻하고,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계시에 종속되지만, "참된 앎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은 철학적 이성 자체다."(278-9)

"성 토마스와는 반대로 스코투스는 의지주의자다." 그는 "의지는 필연성과 관계가 없다"(voluntas nihil de necessitate vult)고 말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의지가 지성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295) 스코투스의 의지주의는, "신과 이성을 분리하고 인간의 이성적 사변의 영역에서 신을 없애는 태도로 전환된다." 여기서 "신의 죽음이라 불릴 만한 여정이 시작되고, 이러한 여정의 국면들은 근대 역사의 국면들이 된다." 아울러, 학문을 "사물들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기호들 또는 상징들에 관한 학문"으로 보는 태도는, "르네상스 시기의 수학적 사유의 정점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이제 근대 철학은 "진리에 대한 갈망보다는 오류의 두려움에 의해 더욱 고무될 것이다."(296-7)

쿠자누스는 앎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감각senus을 통해 얻는 앎은 이미지들만을 제공한다. 둘째, 독일 관념론자들이 '오성Verstand'이라고 번역한 라티오ratio(이성)는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그것들의 다양성에 따라 이해한다. 셋째, 독일 관념론자들이 '이성Vernunft'이라고 부른, 지성intellectus은 우리를 신의 진리로 이끈다. 그러나 이 진리는 무한자가 불가해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며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참된 철학이며, 최고의 앎은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다." 쿠자누스에게 "신은 대립자들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irum)로서 나타난다."(324-5)

쿠자누스가 볼 때 "안다는 것은 더 이상 사물 자체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유사한 것을 취하는 것이다." 즉, "인간 정신의 진리는 신의 정신의 진리의 모상이며 닮음이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신에 관심을 갖는다." '신의 전개(explicatio Dei)'인 쿠자누스의 세계에서 "무한자의 단일성은 세계의 다수성과 다양성 안에서 해명되고 현현된다." 이 세계가 최상의 세계라는 쿠자누스의 생각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낙관주의에 차용"되고, 세계는 질서이자 이성이라는 원리는 "헤겔에 의해서 공언"된다. 세계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무한하다는 생각은 "거의-무한적인 것을 자연학적, 수학적 감각 세계로 확장"하면서 근대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룬다.(327-8)

데카르트 철학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인 자신의 의심, 즉 깊은 불확실성과 함께 출발한다."(352) 엄밀하게 말하면, "데카르트 증명의 출발점은 신이라는 명석 판명한 개념과 함께 받아들이는 자아의 실재성이다. 나의 유한성 및 불완전함은 나 자신 안에서 내가 발견한 관념인 신의 무한성 및 완전함과 대조된다. 내 안의 긍정적인 것을 무한성으로까지 끌어올리고 모든 한계들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지적으로 나 자신을 신에게까지 끌어올린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신의 모상을 가지며, 이 모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적 앎에 도달하게 한다."(358-9) 데카르트 이후로 관념은 실재와 합치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실재 자체로 간주된다."(360)

스피노자는 "실체 또는 신은 현존하는 모든 것이며, 만물은 신의 작용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은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생겨나고 싹트는 사물들 자체'다. 스피노자도 신의 현존을 필수적으로 정초하지만, 신격의 입지도 자연 자체에 귀속된다. "스피노자에게 존재는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신의 존재다."(382-3) 이 세계는 목적론적 결말을 갖지 않으며, "모든 것은 필연적이고 인과적으로 규정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이 자유롭지 않음을 알게 되지만, 그러한 앎을 가져다주는 '이성은 자유'다. 스피노자에게 "사물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하나의 욕구이자 분투"이며, 인간의 본질은 (지속적인 현존을) "욕구하는 것"이다.(385-6)

영국 철학은 대륙의 사상과 두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는 "엄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들과 덜 관련되고, 인식 이론(물론 형이상학이 항상 전제되는) 및 국가 철학과 더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둘째는 "선험적이고 수학적인 성향의 이성주의와 대조되는 감각론적 경험주의"의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영국 철학은 "앎의 원천으로서 감각 경험을 가장 우선"한다.(407) 이런 관점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손과 정신'이 동등하며 "물질적, 정신적 도구들"이 거기에 참된 효력을 더해준다고 보았다.(409-10) 홉스는 인간이 자유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권리 행사, 권리 포기, 권리 양도"를 꼽았으며, 권리의 상호 양도 개념에서 "정치 공동체의 이념"을 끌어낸다.(413)

"로크에 따르면 관념들은 대륙의 이성주의가 생각했던 것처럼 본유적인 것이 아니다. 영혼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서판tabula rasa이다." 경험은 "감각들을 통해 얻는 외재적 지각 또는 감각과 심적 상태들에 대한 내적 지각 또는 반성"으로 나뉜다. "어느 경우에나 감각에 의해 들어온 자료들에는 반성이 작용한다." 우리의 정신은 단순 관념들을 결합하거나 연합하는데, 여기서 '추상화, 일반화'가 이루어진다. 로크의 경험주의는 "형이상학의 중대한 전통적 주제들과 관련한 앎을 제한"하며, 흄의 회의주의에서 정점을 이룬다. 훗날 칸트는 이러한 인식론적 불신에 대처하고자 "이성적 앎의 타당성과 가능성의 문제라는 난제를 정식화"한다.(419-20)

"이신론, 자유와 대의 정부를 옹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 관용, 경제 이론" 등의 경험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계몽주의는 "역사와 사회 규범들을 재검토함으로써 기독교 신앙부터 절대 군주정에 이르는 모든 전통적 신념들에 대해 비판"한다. 계몽주의는 "모든 학적 지식을 집성하고자 했으며, 폭넓은 대중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신학적인 문제들을 말할 것도 없고, 엄밀하게 철학적인 문제들은 이차적인 것으로 격하된다."(428-30) 볼테르에 이르러, 역사는 더 이상 "사건들에 대한 단순하고 연대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국민들의 습속과 정신"을 다루게 되며, "국민들은 각기 고유한 정신과 습속을 가진 역사 구성단위로 등장한다."(433-4)

루소는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며, 개별자가 사회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국가를 추동하는 힘은 "모든 개별자들의 의지의 총합"인 '전체 의지(volonte de tous)'가 아니라,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의지의 총합인 '일반 의지(volonte generale)'다. 루소의 사유는 "민주주의의 원리이자 보편적인 참정권의 원리"를 천명하지만,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할 권리가 있는 소수자들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자들이 정치 공동체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일반의지를 수용하는 문제"를 남긴다.(436) 루소의 영향을 받은 독일에서는 계몽주의의 차가운 이성에 대한 반동으로서 "중세와 독일 문화에 대한 새로운 존중의 태도가 출현한다."(438)

칸트는 "앎의 세 가지 양상들, 즉 감성(Sinnlichkeit), 반성하는 오성(Verstand), 그리고 이성(Vernuft)을 구별한다." 순수 이성은 '선험적 원리들'에 근거하며, 개별자의 이성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의 이성"이다. '실천 이성'은 '순수 이성'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천 이성 또한 순수하며, 사변적이거나 이론적인 이성과 대립"한다. 따라서 칸트의 의도를 "온전하게 표현하려면 '사변적'(또는 이론적) 순수 이성과 '실천적' 순수 이성이라 할 수 있다."(468) 칸트는 전통적 사변 형이상학이 "어떠한 가능한 경험도 넘어서 있는 대상들―영혼, 세계, 신―에 대한 실재적인 앎을 선험적 사유로 얻으려는 시도"이기에 헛되며, 그러한 앎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476)

그러나 형이상학은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본성적 경향으로서 계속 현존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대상들은 칸트가 이념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러한 이념들은 "직관에 대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규제적인 효용"만을 갖는다. 그러나 이론 이성이 이를 증명할 수 없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영혼이 불멸할 것처럼, 자신이 자유로운 것처럼, 신이 현존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초월적 이념들의 "절대적이고 무제약적인 타당성"은 "실천 이성의 요청들로서 다시 등장한다."(477) 실천 이성이 절대적으로 자명한 요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인간은 "그가 도덕적 인격인 이상 자유로우며, 그의 자유는 실천 이성의 요청"이기 때문이다.(479)

헤겔은 <정신 현상학>에서, "정신이 철학의 시원에 이르는, 정신의 내재적 변증법을 설명한다." 헤겔은 "단순한 서술과, 내가 사물들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는(실재적 앎이 있는 학學의 상황) 개념적 앎을 구별한다. 그러나 절대적 앎은 여전히 요구된다. 절대적 앎은 모든 것을 포섭하는 앎이다. 절대적 앎이 되려면 그것은 어떠한 것도, 오류조차도 자기 외부에 남겨놓을 수 없다. 그것은 오류로서의 오류를 포함한다. 역사는 인간 정신의 모든 요소들, 즉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오류로 등장하는 요소들까지도 포함해야 한다."(517) 변증법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필연적인 이행이 있고, 각 단계는 이전 단계의 진리를 포함한다." 각 단계는 "보존됨과 동시에 극복된다."(518)

절대적 시원인 존재는 "순수한 존재, 절대적 존재다." 헤겔에 따르면 "존재는 무규정적 무매개성(das unbestimmt Unmittelbare)이다." 이 존재는 규정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아닌 것과 자신을 구별"짓지 않는다. "내가 존재를 생각하고자 할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無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에서 무로 이행한다. 물론 이러한 이행은 존재 자체가 하는 것이지 자아가 하는 것은 아니다."(520-1) 존재는 무로 이행하고, 무는 존재로 이행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차원을 넘어 올라선다(아우프헤벤aufheben). "존재와 무가 서로를 배제하는 이런 방식은, 생성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통일로 보존되고 올라서는 존재 양상이다."(523)

"헤겔에서 체계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체계는 진리가 현존하는 방식이다. 체계에는 자립적인 진리들이 없고, 그것 자체로 참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진리는 다른 모든 진리들에 의지하고 근거한다. 이런 구조는 선형적 구조―예를 들어 수학적 구조―라 불릴 만한 것과는 대조적인, 철학의 체계적 구조다."(529) 헤겔에서 "철학은 절대자에 대한 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자기를 아는 한에서 절대자다. 철학의 역사가 철학 자체의 본질적 부분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철학은 모든 이전 철학들의 성과이며, 모든 원리들은 보존된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고투인가 (Tantae moliserat, se ipsam cognoscere mentem)."(531-3)

낭만주의가 생명을 향한 의지를 물리치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난 후, "19세기에 철학은 형식적으로도 부정되는데, 이것은 철학함에 대한 기이한 혐오의 증거이다. 이 혐오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한때 아주 성공적이었던 독일 관념론의 마지막 국면들을 특징짓는, 변증법적 방법의 오용에 의해 생겨났다. 인간은 사물들과 실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고, 실재 자체를 받아들이기 위해 정신적 구축들과 단절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1830년에 유럽의 정신은 철학의 영역으로 들여와야 할 모형을 개별적 학문들에서 발견한다. 물리학, 생물학, 역사학은 앎의 모범적 양상들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실증주의를 불러일으킨다."(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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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7-11-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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