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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자연에네르기를 적극 개발리용하는것은 경제강국건설의 중요한 요구



룡남산




자연에네르기를 적극 개발리용하는것은 경제강국건설의 중요한 요구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학생 임형경 2018.7.14.


당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우리 나라가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의 지위에 확고히 올라선 지금 우리 앞에 나서고있는 가장 중요한 과업은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여 경제강국을 건설하는것이다.

우리가 건설하는 경제강국은 자립경제강국, 지식경제강국이다. 자립경제강국건설에서 중핵적인 문제의 하나는 경제발전에서 전략적의의를 가지는 원료와 연료, 에네르기를 국내자원으로 생산보장하는것이며 지식경제강국건설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록색생산방식을 비롯한 앞선 생산방법을 받아들이고 중요한 경제기술지표들을 세계선진수준에 올려세우고 부단히 개선해나가는것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력을 위주로 하면서 화력에 의한 전력생산을 합리적으로 배합하고 원자력발전의 비중을 높이며 다양한 자연에네르기원천을 적극 리용하여 국가적인 에네르기수요를 자체로 충족시켜야 합니다. 최신과학기술에 기초하여 에네르기생산방식을 개선하며 나라의 경제를 에네르기절약형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자연에네르기를 적극 개발리용하는것이 경제강국건설의 중요한 요구로 나서는것은 우선 그것이 에네르기문제를 전망적으로 해결하여 인민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더욱 강화해나갈수 있게 하는것과 관련된다.

에네르기, 동력문제와 식량문제를 해결하는것은 인민경제의 자립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하는데서 관건적의의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에네르기는 물체 또는 물체계가 일할수 있는 능력으로서 생산활동과 생활에서 쓰이는 모든 에네르기의 원천을 에네르기자원이라고 한다.

에네르기자원은 크게 재생할수 있는 자원과 재생하지 못하는 자원으로 나눌수 있다. 원유와 석탄, 천연가스 등은 재생하지 못하는 에네르기자원 또는 화석에네르기자원이라고 하며 수력, 풍력, 지열, 생물질, 태양열과 빛, 바다에네르기 등은 재생에네르기자원 또는 자연에네르기자원이라고 한다.

자연에네르기는 끊임없이 재생되며 원천이 무한하다. 태양열, 수력, 풍력, 지열, 조수력, 생물연료와 같은 자연에네르기는 말그대로 재생가능에네르기로서 자연속에서 매일, 매시각 자연의 활동결과로 생겨나고있다. 즉 인간이 사용하는것과 동시에 재생되고있다. 실례로 지구가 받는 태양에네르기는 태양표면에서 내보내는 총에네르기의 20억분의 1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것은 지구가 필요로 하는 총에네르기의 3만~4만배로서 그 원천이 무진장하다.

원천이 무진장한 에네르기자원을 적극 개발리용하게 되면 경제의 지속적발전을 위한 에네르기를 원만히 보장하여 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더욱 강화할수 있게 된다.

이로부터 자연에네르기를 적극 개발리용하는것은 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더욱 강화하여 자립경제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요구로 제기된다.

자연에네르기를 적극 개발리용하는것이 경제강국건설의 중요한 요구로 나서는것은 또한 그것이 나라의 록색산업을 발전시키고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보호할수 있는것과 관련된다.

우리가 건설하는 경제강국, 지식경제강국은 지식을 기본생산자원으로 하여 발전하는 지식집약형경제이며 이러한 지식경제의 중요한 특징은 록색경제라는데 있다.

현재 인류가 기본에네르기자원으로 리용하고있는 화석연료는 그 자원이 제한되여있고 고갈되고있는 자원으로써 전망이 없는 자원이다. 뿐만아니라 화석연료의 대량적인 사용은 지구의 생태환경을 급격히 파괴시키면서 인류의 생존자체를 위협하고있다는데 그 치명적인 제한성이 있다.

수력, 풍력, 지열, 태양열과 같은 자연에네르기는 그 자원이 무진장하며 환경적으로 깨끗하고 안전할뿐아니라 늘어나는 에네르기수요를 원만히 충족시킬수 있는 우점을 가지고있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자연에네르기를 효과적으로 리용하는것을 긴장한 에네르기문제를 푸는것과 함께 날로 심각하게 제기되고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방도의 하나로 보고있다.

우리 나라에도 개발리용할수 있는 자연에네르기원천은 무진장하다.

에네르기개발리용에서는 환경오염이 없고 생태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에네르기자원인 풍력, 태양에네르기, 지열, 조수력, 수소에네르기, 생물에네르기와 같은 새 에네르기자원을 적극 개발하기 위한 합리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풍력에네르기로 전기를 생산하는것은 오늘 세계적인 추세로 되고있다. 풍력발전은 건설부지에 대한 요구가 낮고 건설기간이 짧으며 환경오염이 전혀 없으며 운영비도 다른 발전방식에 비하여 매우 눅다.

풍력에네르기개발에서는 년평균 바람의 초당 속도와 바람방향과 기후변화, 지형과 기상학적상태, 교통조건, 전력수요, 자연풍경 등을 조사한 기초우에서 풍력발전소를 배치함으로써 동력자원뿐아니라 토지도 충분히 리용하도록 하여야 한다.

태양에네르기는 전망성있는 자원의 하나이다. 태양에네르기는 자연적, 인공적인 방법으로 열에네르기, 전기에네르기, 화학에네르기로 전환시킬수 있다.

우리 나라는 태양복사량이 많고 해비침시간, 해비침률이 높다.

우리 나라 서해안지역은 지형상특성으로 하여 풍부한 조수력자원을 가지고있다. 우리 나라에서 조수력자원개발의 기본방식은 간석지건설과 조수력발전소건설을 결합시켜 진행하는것으로서 건설원가가 적은 실리있는 개발방식이다.

자연에네르기는 재생가능하고 무진장할뿐아니라 생태환경을 파괴시키지 않는 록색에네르기이다. 이로부터 자연에네르기를 적극 개발리용하는것은 에네르기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나라의 생태환경도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록색경제, 지식경제건설을 다그쳐나가기 위한 중요한 요구로 나선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당의 현명한 령도밑에 록색에네르기산업을 비롯한 록색산업들이 대대적으로 창설되여 인민경제의 자립성을 강화하고 나라의 환경보호사업에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과학기술은 경제강국건설의 기관차



룡남산




과학기술은 경제강국건설의 기관차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김성일 2018.9.28.


오늘 온 나라 전체 군대와 인민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력사적인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전원회에서 제시하신 새로운 전략적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고있다.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할데 대한 우리 당의 새로운 전략적로선을 철저히 관철하며 우리 혁명의 전진을 더욱 가속화해나가자면 인민경제 모든 부문, 모든 단위들에서 과학기술을 확고히 틀어쥐고 모든 사업에 앞세워나가야 한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과학기술이 경제강국건설에서 기관차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건설하는 경제강국은 자립성과 주체성이 강하고 과학기술을 기본생산력으로 하여 발전하는 나라이다.

국방건설과 경제건설, 인민생활에 필요한 물질적수단들을 자체로 생산보장하며 과학기술과 생산의 일체화를 실현하고 첨단기술산업이 경제장성에서 주도적역할을 수행하는 경제강국을 건설하자면 과학기술이 기관차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

과학기술이 경제강국건설의 기관차로 되는것은 무엇보다먼저 그것이 자립성과 주체성이 강한 경제강국건설을 힘있게 추동할수 있는 위력한 원동력이기때문이다.

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은 경제강국을 특징짓는 근본징표이다.

자립성과 주체성이 강한 경제를 가진 나라는 경제를 자기 나라의 자원과 기술에 의거하여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게 건설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나라이다. 다시말하여 자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자기 힘에 의거하여 자기 식으로 건설된 경제, 남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제발로 걸어나가는 경제를 가진 나라이다.

제발로 걸어나가지 못하는 경제, 남에게 의존하는 경제는 겉으로는 번영하는것처럼 보일수 있지만 쇠퇴몰락하는 전도가 없는 경제이다. 경제의 명줄이 남에게 쥐여져있으면 자기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경제를 운영할수 없으며 세계적인 경제파동과 같은 자그마한 외적환경에도 쉽게 흔들릴수 있다. 경제규모가 아무리 크고 생산력이 발전되였다고 하여도 자립성, 주체성이 보장되지 못한 나라는 경제강국이라고 말할수 없다.

경제를 발전시키자면 다른 나라들과의 경제관계도 가져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의 기술, 자기 나라의 자원에 의거하는것을 기본으로 하여야 다른 나라들과의 경제기술적교류와 협조도 평등의 원칙에서 더 잘해나갈수 있다. 더우기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정상적인 무역거래까지 차단되고있는 오늘 경제의 자립성, 주체성을 끊임없이 강화하는것은 사활적인 요구로 나서고있다.

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은 과학기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높여나갈 때만이 더욱 강화될수 있다.

인민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보장하는데서 중핵적인 문제인 원료와 연료, 설비의 주체화를 실현할수 있는 근본방도는 과학기술의 역할을 어떻게 높이는가 하는데 달려있다. 원료와 연료는 생산과 건설에서 없어서는 안될 기본재료, 기본동력이다. 경제건설에 필요한 원료와 연료를 국내자원으로 보장하여 생산을 정상화하며 경제건설의 높은 장성속도를 보장하는 문제는 과학기술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다. 세계적인 자원고갈과 원료난, 연료난에도 구애됨이 없이 나라의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수 있도록 경제발전에서 전략적의의를 가지는 원료와 연료를 국내자원으로 보장하는 우리 식의 생산기술공정들을 확립하고 첨단설비를 비롯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기술수단들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자체로 생산보장하자고 하여도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나라의 자원을 종합적으로 리용하며 원유를 비롯한 중요자원들을 적극 개발하는데서도 현대과학기술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그 효률과 경제적효과성을 높여나갈수 없다.

국가적인 에네르기수요를 자체로 충족시킬수 있는 다양한 자연에네르기원천을 적극 리용하며 원자력발전의 비중을 높이자고 하여도 첨단과학기술이 안받침되여야 하고 나라의 경제를 에네르기절약형경제로, 에네르기생산방식을 개선하는데서도 최신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수준에 따라, 어떤 기술에 의거하고있는가에 따라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데 드는 원료와 연료, 동력소비기준이 달라지게 되며 쓸모없는 재료도 유용한 원료자원으로 전환될수 있다.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주체철, 주체비료, 주체섬유와 같은 우리의 기술, 자원으로 만들어낸 창조물들이 련이어 탄생하고 마그네샤크링카생산공정을 비롯한 우리 식의 주체적인 생산공정들이 확립되여 생산정상화의 동음이 높이 울려퍼지고있는것은 과학기술을 중시하고 발전시켜온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로선의 빛나는 결실이다.

인민경제 모든 부문, 모든 단위들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을 보다 높여나갈 때 당의 의도대로 원료, 연료, 설비의 주체화를 실현하고 생산정상화를 믿음직하게 담보함으로써 인민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더욱 강화해나갈수 있다.

과학기술이 경제강국건설의 기관차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우리가 건설하는 경제강국이 과학기술을 기본생산력으로 하여 발전하는 지식경제강국이기때문이다.

지난 시기 로동집약형경제나 자원집약형경제에서는 로동력의 대량적인 투하, 대량적인 자원소비에 의해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그것이 생산력을 대표하였다. 생산의 기술적구성이 매우 낮은 최초의 로동집약형경제에서는 물질적생산을 위하여 로동력과 함께 생산도구, 원료, 자재, 자원 등이 투하되였고 생산비에도 로력비, 생산도구소모비, 원자재소모비 등이 포함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로력비가 기본을 이루었다. 다시말하여 생산자원구성에서 생산수단의 몫이 적고 로동력의 몫이 컸다. 그러므로 생산장성의 기본요인은 생산에 얼마나 많은 로동력이 투하되는가 하는데 따라 결정되였다. 그러나 제한된 로력원천, 로동력의 낮은 생산성은 생산의 지속적인 빠른 발전을 이룩할수 없게 하였으며 로동력은 경제발전을 추동하는 생산력의 기본구성부분으로서의 자기의 지위를 고수하지 못하게 되였다.

생산에 기계기술이 도입되여 생산발전이 추동되고 물질자원, 원료, 자재의 대량적인 소비가 진행되면서 보다 많은 자원소비에 의해 생산장성이 이루어지는 자원집약형경제가 출현하였다. 자원집약형경제는 로동집약형경제에 비할바없이 생산의 기술적구성이 높아졌지만 그의 지속적인 발전은 많은 지하자원과 지상자원의 대량적인 소비를 산생시키면서 자연자원의 고갈과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위험을 주는 지구환경의 파괴를 가져오는 후과를 초래하였다. 이처럼 경제발전을 추동하는 기본생산자원이 무엇인가에 따라 경제발전의 류형이 규정되고 생산장성의 속도와 규모, 지속적발전을 이룩하는데서 차이가 있게 된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인 오늘날 과학기술을 핵심으로 하는 지식은 생산력을 대표하고있으며 경제장성을 추동하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되고있다.

우리가 건설하는 경제강국은 과학기술과 생산이 일체화되고 첨단기술산업이 경제장성에서 주도적역할을 하는 지식경제강국이다. 첨단과학기술을 기술적기초로 하고 정보하부구조를 기반으로 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지식경제는 로동경제, 자원경제와는 달리 과학기술을 기본생산력으로 한다.

지식경제의 하부구조를 구축하고 과학과 기술, 지식이 생산을 주도하는 경영관리체계를 확립하며 과학기술과 생산의 일체화를 실현하기 위한 사업은 과학기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높여나갈 때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떠나서는 나라의 경제를 지식경제로 전환시킬수도, 성과적으로 관리운영할수도 없으며 특히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을 떠나서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정보산업, 나노산업, 생물산업과 같은 첨단기술산업의 중추적역할을 높여나갈수 없다.

인민경제전반을 현대적기술로 개건하고 공장, 기업소들의 모든 생산공정을 자동화, 지능화, 무인화된 첨단수준에 올려세우자고 하여도 과학기술을 앞세워나가야 한다. 인민경제의 현대화, 정보화를 힘있게 다그치는것은 경제강국의 물질기술적토대를 강화하고 나라의 생산력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끌어올리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인민경제의 현대화, 정보화는 곧 기술수단의 현대화, 정보화이다. 남의 기술을 그대로 도입하거나 다른 나라의 설비를 그대로 가져다놓는 식의 현대화, 정보화로써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경제를 발전시킬수 없으며 우리 인민의 기호에 맞는 제품을 생산할수 없다. 자기의 힘과 기술에 의거하여 현대화, 정보화를 다그쳐야 경제기술적자립성을 강화하고 인민경제전반을 현대적기술로 장비할수 있다.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기술갱신, 설비갱신주기가 더욱더 짧아지는 현실적조건에서 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설비갱신을 주동적으로 해나가자고 하여도 과학기술발전에 언제나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고 선진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현대화, 정보화사업을 중단없이 밀고나가야 한다. 인민경제의 현대화는 첨단설비와 자재, 자금이 많이 요구되는 방대한 사업인것만큼 과학기술에 의거할 때만이 현대화사업을 성과적으로 진행해나갈수 있다. 인민경제의 현대화를 진행하는데서 과학기술에 의거하여야 자재, 설비수입에 필요한 많은 외화를 절약하면서도 자체의 과학기술적잠재력과 자립적공업에 토대하여 필요한 기술수단들을 높은 수준에서 자체로 생산보장하고 최대한의 경제적효과를 얻을수 있다.

오늘 우리 당의 현명한 령도밑에 지식경제시대의 본보기, 표준으로 일떠선 공장, 기업소들은 과학기술력에 철저히 의거하여야 통합생산체계와 무인조종체계를 확립하며 록색생산방식을 비롯한 앞선 생산방법을 받아들이고 과학기술과 생산의 일체화를 실현할수 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20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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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타로 (지은이), 김석기 (옮긴이) | 들녘 | 201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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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문명을움직인다 귀농총서' 30번째 신작. 고대 농업 기술과 선주민들의 지혜를 돌아보고, 장단점을 찾아 비판하고 또 수용하면서 그것들이 지금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살핀다. 또 지속가능한 인류사회를 위한 지속가능한 농경법을 다룬다.

저자 요시다 타로는 국내에 이미 소개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의 저자이다. 그는 2010년 9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농수산대학과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쿠바의 전통농법, 멕시코의 밀파 농법, 아스테카의 치남파스 농법을 소개했다
그때 들녘출판사와 (사)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는 “전통농업에 대한 책을 내고 싶다.”며 집필을 의뢰했다.

 한·일 양국의 전통농업에 대한 관심이 빚어낸 역작이라 하겠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프롤로그_변경 농업의 탐색을 권유
현대농업은 석유로 움직이는 공업이다 | 2012년을 경계로 문명은 전환한다 | 문명 전환의 열쇠는 변경과 고대에 잠들어 있다

Ⅰ. Back to the Future
1. 왜 생태농업과 전통농업인가
유기농업이 번성하기에 생태농업으로 전환 | 농업생태계의 구조를 활용한 생태농업
라틴아메리카에는 500가지 농법이 있다
2. 세계 농업유산
위기에 처한 전통 유산 | 인류에게 진정 가치 있는 것은
3. 생태농업과 전통농업을 평가하는 국제평가
녹색혁명에도 유전자조작에도 미래는 없다 | 생태농업을 평가하는 유엔 식량 고문 | 구미의 농업사관을 넘어서
전통농법 칼럼1 왜 가을이 되면 산이 물들까 ―질소와 에너지

Ⅱ. 미래의 유산 ―마야, 아즈텍, 아마존, 잉카
1. 고대 농법의 부활로 마을을 되살림
농업의 근대화로 마을을 버리고 떠난 농민들 | 세계에서 가장 앞선 농법 밀파·솔라
2만 종의 옥수수를 보전 | 풀투성이 옥수수밭 |고대 수로의 부활로 토양침식을 막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사람들을 설득하다
2. 거대 도시를 부양한 물위의 채소밭
호수 위에 떠 있는 거대 도시 | 운하와 하나가 된 순환농법 | 도시 문제의 해결책은 과거에 있다
3. 숲속에서 작물을 기르다
허리케인 피해를 입지 않은 고대 농법 | 생명이 되살아난 온두라스의 언덕 | 개혁은 공동체의 내부로부터
4. 홍수를 극복한 전통농법
되살아난 3,000년 전의 고대 농법 | 물과 양분의 순환으로 다수확을 유지
5. 아마존의 밀림에 잠들어 있는 고대 농법
아마존은 지구 최대의 인공림? | 환상의 엘도라도 | 기적의 흙 테라 프레타 |활동하기 시작한 테라 프레타 재생 계획
6. 제국의 농법
빈곤, 게릴라, 알코올중독의 악순환 | 돌려짓기와 혼농임업으로 제국의 인민을 먹여 살리다
고대 계단밭의 부흥 계획 | 공동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전통농법 칼럼2 레이첼 카슨은 대량 살육자? ―스리랑카의 말라리아

Ⅲ. 만다라라는 우주론 ―인도·스리랑카
1. 토종의 부활로 마을을 되살림
종자의 근대화로 자살하고 있는 농민들 | 가뭄에도 침수에도 적응한 토종 | 100종 이상의 벼, 60종 이상의 토종 채소를 부활 | 공동체가 토종을 되살려 자살자를 구하다
2. 고대 인도의 식물과학
브르크쉬 아유르베다 | 녹색혁명에 대한 우려로 연구에 착수 | 실험을 통하여 고대의 기술을 부활 | 농업을 되살린 이미 하나의 과학 체계
3. 사막을 비옥하게 되살린 고대의 댐
장맛비를 모으는 특수한 댐 | 고대 기술로 되살린 하천과 마을 | 자연을 지키고, 호랑이·물고기와 공생하는 마을 사람들 | 마을에 들어와 잠들어 있는 공동체의 힘을 불러일으키다
4.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는 전통농업
2000년 전부터 있던 공동체의 물 관리 | 활용하면서 생물다양성도 보전하는 지혜 | 생태적 삶을 문화로 엮어 넣은 전통 사회
5. 스리랑카의 고대 관개
농업 근대화로 자살하고 있는 농민들 | 내전에 연관된 경제자유화와 빈곤 확대 | 밀림 깊숙이 잠들어 있는 고대 공학기술의 결정 | 공해도 참고한 국토를 꽉 채운 관개망 | 공동체의 붕괴로 황폐해진 관개 체계
6. 자연과 조화한 농경에 기초한 평등사회
자연과 조화하고 풍부한 식량을 제공하던 저수지 망 | 질소고정 나무와 왕박쥐의 똥을 거름으로 | 새들을 위한 벼를 재배하여 해충을 막다 | 토지와 기후, 용도에 따라서 다양한 곡물을 재배 | 숲과 공생하는 화전 농업 | 종교와 일체가 된 평등사회
7. 관개농업의 한계를 돌파한 고대 벼농사
가문 해에도 다수확을 할 수 있는 전통 벼농사 | 전통적인 태음력에 따라 재배 |갈지 않고 덮는 재배로 벼를 기르다 | ‘풀’이 해충을 막고, 제초제를 줄이다 |자연은 경쟁 상대가 아니다
전통농법 칼럼3 생태계의 안정성과 핵심 종

Ⅳ. 태고에서 온 혁신자 ―지금 되살아난 고대의 지혜
1. 뉴기니 고지대의 흙무더기 농법
1만 년 전부터 독자적으로 시작한 농업 | 두둑에서 이어짓기하는 고구마 | 역전층으로 서리 피해를 막는 흙무더기 두엄 농법 | 열대 덩이뿌리 사회의 혁신자
2. 벼와 물고기를 동시에 기르는 벼논양어
미식가 조조가 주목한 벼논양어 | 제갈공명의 모델, 유기劉基와 벼논양어 전설 | 풀을 먹고 자란 물고기 | 해충을 먹어 말라리아도 막는 물고기 | 근대화 속으로 사라진 전통
3. 발리의 여신
농업 근대화로 혼란스런 전통 벼농사 | 해충 피해를 막는 호수의 여신이 지닌 신비로운 힘
| 상·하류가 협력하여 논을 묵혀서 해충 피해를 줄이다 | 컴퓨터가 해명한 고대의 지혜
전통농법 칼럼4 자만은 오래가지 못한다 ―극상림은 승자일까

에필로그 흘러가는 강물은 끊이지 않고
자연생태계를 모방한 소규모 농장 | 생산성보다 위험 삭감과 지속성을 중시
공동체 수준에서 자기조직화하는 공익 | 꽃가루가 말하는 안데스의 환경 파괴와 문명 붕괴
중세 온난기가 뒷받침한 잉카의 융성 | 과거에서 배워야 할 교훈
후기를 대신하여 · 논의 벌레 5만 세대와 함께 공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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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2011년 10월 01일 새로나온 책





지은이 : 요시다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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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교육천국, 쿠바를 가다>,<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농업이 문명을 움직인다> … 총 19종 (모두보기)
소개 :
1961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쓰쿠바대학 자연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지구과학연구과를 중퇴했다. 도쿄 산업노동국 농림수산부를 거쳐 지금은 나가노 현 농업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생태·쿠바 전문 저술가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 출간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200만 도시가 유기채소로 자급 가능한 이유―도시농업 대국 쿠바 리포트》 
《1,000만 명이 반(反)글로벌리즘으로 자급·자립이 가능한 이유―슬로라이프 대국 쿠바 리포트》 
《세계가 쿠바의 고학력에 주목하는 이유》 
《유기농업이 나라를 바꾸었다》
 《농업이 문명을 움직인다》(2011, 들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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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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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토종 씨앗의 역습>,<토종 곡식> … 총 9종 (모두보기)
소개 : 텃밭 농사의 재미에 푹 빠져 지내다 아이를 키우느라 잠시 밭을 떠났다. 이제 다시 돌아가려 하나 몸이 말을 안 들어 고생하고 있다. 『토종씨앗의 역습』을 썼고 『농업이 문명을 움직인다』,『 세상을 바꾸는 기적의 논』을 번역했다.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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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헌법수업>,<청년 흙밥 보고서>,<어쨌거나 내 인생>등 총 425종
대표분야 : 학습법 6위 (브랜드 지수 37,765점), 집/인테리어 7위 (브랜드 지수 11,812점), 환경/생태문제 12위 (브랜드 지수 6,430점)







전통농업은 아직까지도 변경농업, 혹은 문명의 한계지에서나 가능한 농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탈석유화를 달성함으로써 생태농업을 정착시킨 쿠바, 재래품종을 적절히 섞어지음으로써 식량과 환경은 물론 홍수문제까지 극복한 아즈텍의 전통농업, 토종종자의 부활로 마을을 되살린 인도의 전통농업 등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유일하게 지속가능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농법에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줄이고, 토양침식을 막으며, 병해충을 방제하고,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서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많은 슬기가 깃들어 있다.
이 책은 ‘고대 농업 기술’과 선주민들의 ‘지혜’를 돌아보고, 장단점을 찾아 비판하고 또 수용하면서 그것들이 지금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살핀다. 또 지속가능한 인류사회를 위한 지속가능한 농경법을 다룬다. 저자 요시다 타로는 국내에 이미 소개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의 저자이다. 그는 2010년 9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농수산대학과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쿠바의 전통농법, 멕시코의 밀파 농법, 아스테카의 치남파스 농법을 소개했다. 그때 들녘출판사와 (사)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는 “전통농업에 대한 책을 내고 싶다.”며 집필을 의뢰했다. 한·일 양국의 전통농업에 대한 관심이 빚어낸 역작이라 하겠다.

전통 농업이 희망이다
석탄도 원자력도 석유를 대신해서 공업사회와 현대농업을 유지할 만한 힘이 없다. 안타깝게도 석유 생산은 2012년을 기점으로 생산량이 정점에 달했다가 급하락할 전망이다. 따라서 종자 생산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농사의 전 과정을 석유에 의존하는 현재의 농경법으로는 인류의 식량을 담보할 수 없다. 하지만 식량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미래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 요시다 타로는 “옛날로 돌아가면 좋은 것이 있을까, 전통 농업으로 모든 세상사가 쉽게 해결될까?”라고 물음을 던지면서 쿠바, 마야, 인도, 스리랑카, 뉴기니, 발리 등 각 나라의 전통 농업을 소개한다.
전통농업이란 몇 천 년에 걸쳐 시행착오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복잡한 농업생태계 안에서 축적하여 온,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기술이다. 불행히도 과거의 이러한 뛰어난 지혜의 대부분이 선진국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는 아직 수많은 노하우가 남아 있다. 그는 또 전통 농업으로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사례들을 충분히 소개하면서 현대 사회는 이제 ‘전체론’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즉 농업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삶 자체가 ‘전통으로 회귀하든지 근대 과학을 추진하든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벗어나 과학이든 사회든 경제든 ‘통합’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위험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전통농법의 본래 목적인 바 세계 각지의 전통농법도 ‘생산성’보다는 안정성과 지속성을 중시했음을 밝히고 있다.

회복력을 갖춘 전통사회
자연재해나 재해의 충격이 있을 때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고 유연히 대응하거나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능력을 회복력이라 한다. 자연과 사회, 개인에게도 회복력이 있지만 어느 한계를 넘으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한계’도 있다. 특히 기후변화·생물다양성의 감소·질소순환의 변화는 이미 한계를 뛰어넘었고,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농지개발도 한계에 이르렀다. 질소순환 및 농지개발의 한계는 인간의 에너지원인 식량생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세계 각국의 전통농업은 우리 인류가 오래 전에 잊어버린 공동체와 전통사회의 미덕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가장 생태적이고 자연친화적인 농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멕시코의 밀파 농법, 아스테카의 치남파스 농법, 토종종자 부활로 마을을 살린 인도농업, 생산성과 생물다양성 보존에 성공을 거둔 스리랑카, 두둑을 이용한 이어짓기로 수확량을 보장한 뉴기니의 흙무더기 농법 등 고대 전통사회에서는 자연의 특성, 지역과 기후의 특수성을 십분 수용한 전통농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들 공동체의 일원은 자연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고, 다 같이 사는 사회문화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생산성에 목을 매지 않아도 공동체가 충분히 먹고 살만큼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명실공히 자연과 조화한 농경에 기초한 평등사회를 구현했다. 그야말로 자생력과 회복력을 갖춘 사회체계였고, 진정한 의미의 문명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변경 농업의 탐색을 권유하다
저자는"문명의 기초는 사람을 부양하는 먹을거리이다. 먹을거리를 낳는 것은 농법이다. 따라서 농법이야말로 문명의 요람이라 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메소포타미아가 염해鹽害로, 고대 그리스가 토양침식으로 멸망했듯이 문명의 중심지는 농법에 따라 변동한다. 20세기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어, 평원을 지배한 석유농법도 석유생산정점(peak oil)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이다."고 주장한다. 또 유전자조작과 녹색혁명에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이제 전통농업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 영화의 땅에 매장된 전통농업에서 미래 문명을 뒷받침할 농법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전통에 묻힌 슬기를 되찾아오는 것, 고대인의 지혜를 재발견하는 것은 후퇴하는 것도 아니고 시대착오적인 노스탤지어도 아니다. 환경 파괴, 인구 증가, 빈부 격차, 빈곤의 증대 등 목전에 다가온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석유생산정점과 함께 도래할 총체적인 전 지구적인 위기를 탈석유 시대 농법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보면 어떨까?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문명의 돌파구는 정녕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닐까?




2018/11/06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 나무위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 나무위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최근 수정 시각: 2018-11-01 00:58:54


분류
1983년 테러
제5공화국/사건사고
김일성 시대
미얀마의 역사
북한의 대남 도발사




관련 문서: 북한의 대남 도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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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두환미얀마 방문3. 테러4. 사망자 명단5.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6. 수습 및 후속 조치7. 후폭풍
7.1. 대한민국7.2. 북한7.3. 미얀마7.4. 국제 사회8. 만약 테러가 성공했다면?9. 그 밖의 이야기들10. 관련 자료
10.1. 중앙일보 청와대비서실 (1993.8.13 ~ 8.20일자 연재)



1. 개요[편집]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국명은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일행의 암살을 시도한 북한폭탄 테러. 간혹 아웅 테러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초기에는 '아웅산 폭파 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부르면 아웅 산이 폭파 테러를 일으키거나 아웅山이 폭발한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오해가 없는 명칭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버마 아웅산 암살폭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Rangoon Bombing', 즉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라 부른다.

2. 전두환미얀마 방문[편집]




1970~1980년대는 남북한의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절하고 자기들과 수교하라고 조르는 한편, 있는 돈 없는 돈 만들어가며 온갖 선물을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양측의 소리 없는 공방전이었다.

특히 70년대를 기점으로 남북한의 국력 격차가 서서히 남한의 우위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남한의 외교전은 전보다 더 거세어졌다. 미얀마는 제3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북한과 우호적인 외교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 전두환은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대양주 순방에 미얀마를 추가하며 첫 번째 순방국으로 결정했다.

사실 가을 해외 순방국에 미얀마가 추가로 결정되기까지 정부 핵심 관료들 사이에서 반대가 상당했다고 한다. 협소한 국가 규모 및 군사독재 국가의 특성상 거의 외톨이 같은 국제적 위상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친북 성향의 국가임을 감안할 때, 우리와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반대 의견의 주요 근거였다.

또한, 북한에 의한 암살/테러 위협이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범석 등 세계 정세에 정통한 외교 관료 출신 핵심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피력되었다. 하지만 전두환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심[1]으로 반대 의견을 뒤로 한 채 미얀마 순방을 추진하였다.

1983년 10월 8일, 전두환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김포국제공항을 떠나 미얀마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미얀마 양곤공항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미얀마 순방 결정까지 참모진의 반대의견이 좀 많았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해외 순방이 워낙 많았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기에, 미얀마 순방 또한 평범한 해외순방으로 잘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다.

3. 테러[편집]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 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다 하는 의례행사였다.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정상들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전두환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있었다. 현지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이 대사가 탑승한 차량이 맨 앞에서 선도했다.

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 차량을 선도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하자,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아졌다. 창문이 선팅되어 있어 차량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이었다. 수행원들끼리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고 곧 오실 테니 모두 자리에 정렬하자는 이 대사의 말에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한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하는 등 부산했다.



위의 사진은 이렇게 부산한 가운데 촬영된 한국 정부 수행원들이 참배를 위해 도열한 모습을 담은 것으로, 테러가 발생하기 불과 몇 초 전에 촬영된 사진이다. 즉 이것이 희생된 수행원들의 마지막 모습. 얼핏 보면 사고현장에서 건져진 사진답지 않게 매우 깨끗하고 선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당시 매우 훼손이 심각했으며 위에 있는 사진은 복원한 것이다.

이날 예정되었던 참배 대형은 사진과 같은 방향에서 보았을 때 아래와 같으며, 참배 대형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 있는 인물들 중 전두환을 비롯한 굵은 글씨로 표기된 이들만 생존했다.



최재욱
공보 비서관

하동선
해외단장

황선필
대변인
(미도착)

김재익
경제수석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김용한
과기처 차관

강인희
농산부 차관

이기욱
재무부 차관


이기백
합참의장

심상우
국회의원[2]

함병춘
비서실장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경제 부총리


전두환
대통령
(미도착)


그러니까 미도착한 사람 빼고 15명 중에서 가장 구석에 있던 2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다 죽음을 당한 것이다.

수행원들이 도열을 마치고 난 직후 나팔수들이 진혼곡을 1~2소절 연주하다가 아직 주빈인 전두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자 아직 참배가 시작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진혼곡을 멈춘다. 참배인원들 사이에서 나팔수의 실수를 두고 '인제 와서 새삼스레 예행 연습을 하는 건가?', '아직 전두환이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왜 진혼곡이 울리는 거야?' 등 설왕설래가 오가는 순간...


MBC 정치부 문진영 기자[3]가 촬영한 테러 당시 영상. 18초 부분에서 폭탄이 터진다. 사고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시청에 주의를 요한다.[4]
4. 사망자 명단[편집]


한국(17명)[5] : 서석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6], 이범석(외무부장관), 김동휘(상공부장관), 서상철(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주 미얀마 한국 대사), 김재익(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재무부차관)[7], 강인희 (농림수산부차관), 김용한(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국회의원)[8], 민병석(대통령 주치의), 이재관(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 이중현(동아일보 사진기자)[9], 정태진, 한경희(대통령경호실 경호관)

미얀마(7명) : 4명(+3명, 테러리스트 검거작전 중 순직자)

북한(1명) : 공작원은 총 3명이었는데 신기철 상위는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고 2명은 체포되었다. 자국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할 경우 사형에 처해지는 미얀마의 형법에 의거해 김진수 소좌는 1984년 사형당했고, 강민철 상위는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간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 5월 18일에 중증 간질환으로 옥사했다.[10]

1989년부터 강씨와 같이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에 출옥한 미얀마 야당 정치인이자 언론인의 증언에 의하면, 강씨는 생전에 한국으로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2007년 말 북한-미얀마 간의 외교가 수복되자 기대를 가졌지만, 북한은 강씨가 자국민이 아니라며 송환을 거부했고, 남한은 극악한 테러범이라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해서, 결국 미얀마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한의 공식 입장은 당시나 지금이나 "독재자 전두환을 제거하려던 남조선 인민 스스로의 의거이지 북한이 개입한 게 아니다" 이고 따라서 "강민철은 북한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5.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편집]


여러 모로 명백히 전두환을 노린 폭탄 테러였으나 정말 우연히도 현장에 없어서 살았는데 이유는 여러가지다. 종합적으로 보면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이유가 겹쳐져 살아남았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전두환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무장관이 탑승한 승용차가 운행 도중에 길바닥에서 고장이 나 버렸다.

문제는 당시 미얀마사회주의 국가인데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 수준의 교통 인프라를 가진 나라여서 길바닥에 지나가는 택시가 드물었다는 것. 운전기사는 주변을 사방팔방 뛰어다녀 간신히 대체차량으로 택시 1대를 끌고 와 다시 출발하게 된다. 이때가 이미 도착 예정 시각이었던 10시 15분이고 당연히 지각은 불가피했다.

같은 시각 10시 15분, 영빈관에 있던 전두환은 도착해 있을 외무장관과 함께 차량을 타고 묘소로 출발하려 1층 로비에 내려갔으나 외무장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는다. 국빈인 국가 원수가 로비에서 외무장관을 기다리는 격이 되어서는 모양새가 이상할 것도 같고 또 그럴 경우 외무장관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 전두환은 그냥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와서 "이왕 기다리는 김에 영빈관의 영접 요원들에게 격려라도 하자"며 영접 요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4분 뒤인 10시 19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두환은 격려인사를 중간에 멈추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격려인사를 끝까지 했고 미얀마 외무장관과 함께 묘소로 출발한 시각은 예정 시각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오전 일정이 우리나라 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 참배다 보니 스케줄이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닌지라 굳이 서두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스케줄 지연이 전두환을 살린 것이다.

한편 영빈관에서 선발대로 출발했던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 대사를 비롯한 일부 수행원들은 10시 26분에 묘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이계철 대사가 머리 스타일이 전두환과 매우 흡사한 대머리에 안경까지 착용한 상태였고 또한 태극기를 펄럭이는 의전 차량에서 내려 나머지 선발대 일행들과 함께 묘소로 진입하면서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 앞 열 가운데 자리에 도열했다. 멀리서 보면 이 대사가 마치 전두환인 것처럼 오인될 수도 있었다.

좀 다른 버전도 있는데 통상적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은 전두환과 함께 한다. 그런데 그날은 참배할 묘지의 행사장이 좁다는 이유로 장세동 경호실장의 요청에 의해 함병춘 비서실장이 먼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함병춘 실장도 대머리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이계철 미얀마 대사 또는 함병춘 실장을 전두환으로 잘못 봤든지 아니면 관례처럼 비서실장이 도착하니 전두환도 당연히 도착했다고 생각되어 폭탄테러를 감행했다고 한다.[11]

어찌 됐건 이를 본 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전두환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고 연주를 시작해 버린 것이다. 이 대사가 대통령이 아닌 것임을 알고 이내 진혼곡 연주를 중단했으나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고 곧바로 폭탄이 작동했다. 스케줄 지연과 함께 전두환이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 나팔수가 착각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하여 저술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이라는 책에서는 테러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팔수의 오인보다는 당시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씨가 시간적 여유가 있자, 나팔수들에게 미리 불어보라는 손짓을 하였고, 나팔수가 나팔을 불자 폭탄을 터트린 것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전두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2가지는
1.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탑승한 차량의 타이어 펑크 + 후진국 미얀마 특성상 택시가 주변에 없어 택시를 타는 게 늦어짐 +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아 전두환이 영접 요원들과 인사 = 스케줄이 늦어지게 됨
2. 그곳에 있던 주 미얀마 한국 대사가 전두환과 비슷한 용모 / 비서실장이 전두환보다 미리 도착, 나팔수들이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오인해 진혼곡 연주, 나팔소리에 맞춰 폭탄을 터트린 테러범들이 전두환이 도착하기 전에 터트려버림
이 기막힌 우연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이 외에도 노신영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이 미군과의 연계를 통하여 항로를 변경하는 예리한 판단[12]으로 전두환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는 단순히 미군과의 연계를 위해 항로를 변경한 것이지 이걸 가지고 직접적으로 해당 사건으로부터 전두환을 구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항로 변경으로 미루어진 스케줄로도 전두환은 죽을 뻔했다.

테러의 배후였던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을 부정하기 위해 이 항로수정안을 가지고서 노신영장세동이 계획한 전두환 암살 작전의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경호실장 장세동은 전두환과 늘 같이 다니기 때문에 묘소 방문 일정이 그대로 굴러갔으면 바로 죽은 목숨이었다. 게다가 장세동은 육군사관학교, 노신영은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에 접점이 없다. 그래서 둘이 힘을 모아서 일을 꾸밀 확률은 매우 낮았고 전두환 정권 후반기에서는 권력 때문에 다투었다. 이에 대해서 국가안전기획부 항목 참조.

6. 수습 및 후속 조치[편집]




미얀마 랑군(양곤)에는 2개의 육군병원이 있었는데 테러로 사망한 순국자들은 제2병원으로, 부상자들은 제1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2명 뿐인 당직 의사가 수십 명의 사상자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약품과 의료기재의 부족이었다. 소독약품이 없어서 물로만 상처를 씻어야 했고, 가위가 없어서 면도칼을 사용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치료는 사건 발생 3시간이 지나서야 랭군 시내의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들이 동원되면서 시작되었다. 대사관 직원들과 상사원 가족들은 가정에 비치하고 있던 구급약들을 아낌없이 병원에 제공하였고 환자들을 가족 이상으로 밤새워 간호함으로써 부상자 치료에 큰 힘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순방 일정을 전면 중단 및 취소하고 바로 서울로 귀국했고 이후 인도, 스리랑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브루나이 등 미얀마와 같이 순정 일정이 잡혔던 나라들의 방문도 연기되었다.

한편 테러를 저지른 북한 공작원들은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며 양곤강으로 향했다. 여기서 대기 중인 쾌속정을 타고 북한 화물선에 숨어 북한으로 귀환한다는 게 탈출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곤강에 도착해보니 대기하고 있어야 할 고속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들은 다시 산개해 북한 화물선까지 갔으나 그마저도 없었다. 결국 북한은 처음부터 그들을 탈출시킬 생각 따윈 없었던 것.

결국 공작원 3인 중 신기철은 총격전 중 사살되었고, 강민철과 김진수는 수류탄을 던지려다 안전핀을 뽑는 순간 터져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이 던지려던 수류탄 2개가 동시에 이런 오작동을 일으킨 이유는, 북한이 애초에 안전핀이 뽑힌 순간 수류탄이 터지도록 몰래 조작해 놨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북한이 수류탄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 정도의 공업 수준을 가진건 아니기 때문.

폭발로 팔 하나와 눈 한쪽을 잃은 김진수는 계속 진술을 거부하다 처형되었으나[13], 역시 한 팔을 잃은 강민철은 북한의 테러를 시인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 강민철은 가톨릭에 귀의해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고, 북한의 암살 위협에 괴로워하다 2008년 5월 18일 간암으로 옥중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당시 테러범 검거를 담당했던 미얀마 경찰이 33년 만인 2016년에 미얀마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김진수는 아웅산 테러범인지도 모른 채 우연히 검거했다"고 밝혔다.[14]

7. 후폭풍[편집]

7.1. 대한민국[편집]









사실상 한판 붙어보자는 선전포고[15]였다. 상대가 한국이 아니라 다른 국가였다면, 그리고 미국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16] 진작에 군사적 작전이 시행되고 양측은 피를 봤을 것이다.

이 사건은 행정부를 노렸다는 점에서 북한의 목적이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의 무력화와 국가적 분열에 있었다. 물론 명목상이긴 하지만 박정희 때부터 마련된 7.4 남북 공동 성명 등 여러 남북 평화 통일 방안들이 있었고, 북한은 자기들의 범행이 아니라고 발뺌했으므로 혼란을 틈타 군사적 공격을 가하는 것은 이전의 국제적 선언을 자기들 발로 차버릴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런 배경과 조건 및 외교사적 전례를 제쳐놓고도 이건 대놓고 남조선 니들 엿 먹어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북한이 이미 1.21사태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등으로 이미 암살을 시도한 전례가 있지만, 적어도 그 두 사건은 오직 국가원수만을 노린 것이었고 한국 내부에서 저지른 사건이었다. 각각 비밀특수부대와 조총련 소속 재일교포 문세광을 활용한 일이라 전자는 "좌경맹동주의자들이 헛짓한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일"라고 발뺌이 가능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 핵심 인물을 모두 없애고,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제3국에서 저지른 테러다.

사망자 명단만 봐도 부총리, 장·차관에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대한민국 최고위층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부상자까지 확대해보면 장·차관이 몇 명 더 있고, 합동참모의장을 비롯한 장성까지 들어갔다. 제대로 터졌다면 국가 행정부, 군 지휘부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설치했던 폭탄 중에서 하나만 터지고, 다른 하나는 불발이었다. 그나마 소이탄이 불발되어서 망정이지, 이것마저 터졌으면 섭씨 4,000도가 넘어가는 열기 때문에 사망자가 더 나왔다.

그리고 전두환이 살아남았다는 게 오히려 한국 국민들에겐 다행이었다. 전두환이 독재자였다고 해도, 당시에 전두환까지 죽었으면 대한민국은 국가적인 혼란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17] 실제로 이 사건으로 군부에서 "북한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경론이 득세하자 로버트 세네월드 UN군 사령관이 경악했다. 이에 전두환은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일갈하는 한편 전방을 돌고 군 지휘관들을 일일이 만나 강경한 태도를 보인 덕분에, 겨우 전방 장교들이 진정해서 사건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즉, 전두환이 이 사건으로 암살당했다면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명령의 공백 속에서 전두환의 친위세력인 하나회 소속 장성이나 다른 장성들이 '복수'를 이유로 북한에 국지전이든 특수작전이든 보복 공격을 감행하려 시도했을 수도 있었다. 전면전까지는 미국과 중국 및 소련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18]

이 사건으로 미국은 당시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까지 테러 발생 1달 뒤에 전격 방한하여, 이례적으로 최전방까지 시찰하는 등 한·미 동맹 결의를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국군에서 북한을 때려잡자는 강경 분위기에 대해서 주한 미국 대사 리처드 워커는 테러행위가 북한이란 것을 확신하지만 보복공격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에 전두환은 "우리 정부와 군은 본인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국의 대통령에게 확실히 해두고 싶다. 우리는 귀국 정부와 충분하게 의견을 조율하기 전에 섣부른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19]

한편 미국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개발을 중단했던 지대지 백곰 미사일의 개발을 대북 위협용으로 재개했는데 그 결과물이 현무 미사일. 그런데 관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켰던 것도 전두환 본인이다.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킨 뒤에 정권을 차지한 신분이라서, 동맹국가인 미국일본에서 자꾸만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도 전두환은 미국과 일본을 진정시키려고 엄청 애썼다.
7.2. 북한[편집]


테러의 당사자인 북한(지휘는 장성우(장성택의 친형)가 주도)은 이중적 태도를 취했는데, 북한은 당해 10월 8일 남-북-미 3자 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남한을 대화 상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종전의 대외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기했다고는 평가받았으나, 이를 도모한 이유는 베일에 싸여져 있다.[20]
7.3. 미얀마[편집]


말 그대로 나라가 뒤집어졌다.

주권국가인 미얀마의 영토 안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으니 이는 미얀마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기한 대로 미얀마 사람들도 많이 죽고 다쳤다.

게다가 이 테러로 미얀마에서 성역으로 대접 받는(대한민국에 비유하자면 국립 현충원 이상으로 중요한) 아웅 산 장군의 묘소가 박살이 났다. 미얀마에서 아웅 산은 단순한 건국 공로자의 위치를 넘어서, 신성불가침 수준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미얀마는 국제 사회에서도 체면을 크게 깎이는 굴욕을 당했다. 타국의 국가 원수가 방문할 때는 자국의 국가 원수 수준에 맞춰 보안 조치를 하는 것이 외교적 관례이자 상식인데, 이런 식으로 외국에서 온 귀빈들이 죽고 국가 원수가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것은 그만큼 미얀마의 치안 유지 및 사전 조치가 허술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얀마는 이전부터 북한과 연결이 있었으므로, 잘못 꼬이면 미얀마가 북한과 짜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유인해서 암살하려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테러범이 명확했고, 미얀마 정권이 자기네 민족의 성지를 제 손으로 때려부수는 자살행위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대한민국 측에서도 이해했기 때문에 별 말 안 듣고 끝나긴 했다. 미얀마의 대통령인 우 산유는 물론, 당시 미얀마의 실권자인 우 네윈 사회주의 계획당 의장도 사건 당일 오후에 이례적으로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할 정도였으니 미얀마 측에서 이 사건을 얼마나 심각히 여겼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겠다.

테러 발생일로부터 25일째가 되는 1983년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마침내 테러범이 북한군 특공대원임을 밝히고 "범죄 집단인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며 한국에 위로 및 사과 사절단을 보냈다.[21] 이 사건 이후 미얀마에서는 '국내에서 외국의 국가 원수를 살해해도 자국의 국가 원수를 살해한 죄와 똑같이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보니, 법이 미처 이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해서 발생한 해프닝이다. 오쓰 사건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논쟁이 되었던 일이 있었다.

정부 관계자들이 사망한 일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본다면 2016년 방글라데시 다카 베이커리 테러가 있을 것이다. 당시 IS의 지령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학살이 일어난 홀리 아티산 제과점(레스토랑)에서 내국인 뿐 아니라 여러 외국인 관광객들이 피해를 입고 사망했는데, 이로 인해 방글라데시는 테러에 나라망신까지 콤보로 뒤집어쓰고 한동안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후 방글라데시에선 국가 주도로 추도식을 벌이고 각 관광객들이 속한 나라의 총리들도 와서 대거 참석하는 등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했다.

2017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아웅산 묘소 테러를 관한 판결한 판사의 딸이 일본에서 의문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사건 현장에서 북한제 담배꽁초가 발견돼 북한의 보복성 암살이라는 추측도 제기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7.4. 국제 사회[편집]


이 테러로 인해 미국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고, 미얀마 외에도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친북 성향의 제3세계 국가들이 전격적으로 북한과 단교하였다. 제 나라도 대한민국도 아닌 제3국에서, 그것도 그 나라의 제일 중요한 장소에서 그 나라가 국빈으로 맞아들인 사람들한테 폭탄 테러를 저지른 놈들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색이 우방국인 미얀마에서도 저렇게 깽판을 치고 다니는데 자기들이 안 당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이로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제3세계 남북외교전은 북한의 장렬한 자폭으로 인해 북한의 몰수패로 끝나게 되었다. 2014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한몫 했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 군부에선 "북한에게 보복을 해야 한다"고 분노했지만, 전두환이 이를 막고 외교적으로 수습하여 무력사태로 키우지 않았다.

결국 북한은 스스로 외교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역사학자 한홍구조차 '전두환의 과오에 대한 평가는 계속 진행돼야 하지만, 이것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다.'며 당시 전두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북한은 "테러범들이 북한 사람들도 아니고 북한과 관계 없다"며 범행 사실을 잡아 떼었고, 뒤에서 미얀마와 이면 교섭으로라도 붙잡힌 테러범들을 구출할 생각조차도 전혀 없었다. 미얀마는 친북 성향의 국가이기에, 북한이 보이지 않게 외교적으로 손을 쓸 여지는 있었다. 그럼에도 아웅산 자체가 미얀마의 국부급이다 보니, 미얀마 국민들의 반감은 장난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망명한 황장엽 前 북한노동당 비서의 말에 따르면, 1983년 당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와 관련해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예전의 1.21사태와 같이 "저 밑의 일선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했으나 김정일은 "절대 부인해야 된다"고 강경하게 대립하였다가,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반영되어 오리발 모드로 나간 것이라고 한다.

8. 만약 테러가 성공했다면?[편집]


앞서 설명했듯 국가 원수가 사망했으니 한국은 혼란에 빠졌을테고 이러한 틈을 타 북한이 남침에 준하는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를 노리고 저지른 테러일 수도 있다. 내부를 단단히 결속시키는데 전쟁 분위기보다 더 좋은 건 없다. 그러나 북한이 실질적으로 국지전 이상의 전투를 벌였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크게 혼나봤기 때문에.. 게다가 먼저 벌인 도발, 그것도 상대국의 행정수반을 테러로 모조리 날리고 시작하는 전쟁은 전쟁을 벌이는 정당한 명분 자체가 싹 사라지기 때문에 한국전쟁처럼 거의 전세계를 적으로 돌리기 충분하고 중국과 소련조차도 북한을 다시 지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전쟁 때는 전력이라도 북한군이 확실한 우세였지, 이 때는 국군이 현대화된 전력을 갖추기 시작했는데다가 남한도 북한 못지 않은 병영국가였기 때문에 남북이 1:1로 전면전을 해도 북한군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남침으로 인한 적화통일은 자신들의 망상에 가까웠다.[22] 뭐 구소련과 중국마저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명백한 북쪽 잘못이기 때문에 실드치는 걸 포기했지만...

이 사건도 김정일이 벌인 후계자 승계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테러가 성공적이어서 전두환까지 죽였다고 해도 김일성이 마냥 기뻐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이 이때보다 젊었을 때도 박정희를 죽이려 든 적은 있었지만 후에 표면적 간접적으로나마 사과를 하는 등 신중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후로 스케일이 정도 이상을 넘는 대남 도발의 경우 김정일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파 숙청과 주체 사상 제창 등 북한 체제를 완전히 쥔 김일성 입장에서는 권력의 안정과 말년의 편안함을 원하기 때문에 아들의 무리수를 타이르거나 뒷수습하는 것에 짜증이 났을 가능성도 있다. 바로 위 항목에 서술된 황장엽의 증언만 봐도 김일성이 김정일식의 도발에 대립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전두환까지 죽어 작전이 완전 성공이었어도 혼자 좋아하는 김정일을 뺀 다른 북한 고위층들은 급작스런 전쟁 대비에 비상이 걸리고 한편으로는 남한과 미국에 저자세로 나가며 중국과 소련에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자문 구하느라 더 바빴을 가능성이 높다. 잘못하다가는 휴전선 북쪽이 아예 황무지로 변해버렸을 수도 있었다.

물론 미얀마는 강력히 북한을 싫어하게 돼 남한과 북한 도발에 공조했을 지도 모른다.

9. 그 밖의 이야기들[편집]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애초에 버마가 방문지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고 전두환 본인 또한 사회주의 국가 아니냐면서 영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지만, 허문도 문화공보부 차관이 "네윈 장군의 섭정을 벤치마킹하는 게 좋다."고 건의하고 이에 전두환이 혹해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참고로 이범석 외무부 장관과 노신영 안기부장은 버마가 친북 성향인데다 동남아에서 그다지 영향력이 큰 국가도 아니라는 점을 들며 전두환의 방문을 말렸다고 나온다.

아웅산 묘소와 폭파 사건 이야기. 테러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으니, 관련 자료를 확인할 요량이라면 한 번 보도록 하자.



1984년판 보도사진연감에 실린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희생당한 정부 수행원들의 영결식.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행했다.

수행원 영결식 및 관련 소식들을 정리한 당시의 대한뉴스 영상 링크.

이 테러로 희생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들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의욕적으로 기용한 그야말로 21세기 초까지도 비견할 사람이 없는 S급 정부 핵심 참모+행정가들이었다.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법학, 경제학, 행정학, 사회학 등에서 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

법학계에서는 이 사건에서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순직한 것을 아깝게 여기고 있다.[23] 한국법사회학의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는 평.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국 법철학과 법사상사, 법제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몇십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법학도라면, 특히 연세대학교 법학과 학생의 경우 법철학과 법제사 등의 과목을 수강할 때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확립한 체계를 배우게 된다. 법사회학 쪽에선 민법의 곽윤직 교수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경제계 쪽은 서석준 경제 부총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 당시 한국의 경제를 책임지던 주요 인사들과 경제통들이 한꺼번에 가 버리는 바람에 이후 한국 경제가 기울었다는 관측이 있다. 특히 김재익 경제수석의 경우 전두환 정부의 가장 뛰어난 경제정책통이자 사실상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였다. 다만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경제 발전 방식은 그 시점에서는 이미 한계였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행정학 및 정치학 측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 외교 안보의 핵심인 이범석[24] 외무부 장관을 높이 치는데, 이범석 장관은 소련, 중국 등 공산권과의 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북방정책'의 선구자격 인물이었고, 이는 후임 노태우 정부에서 결실을 이루었다. 그 외 이기욱, 하동선 등 그 막장인 군사정권이 경제만은 제대로 부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인 핵심 행정역량들도 높이 평가된다. 그 이후 그나마 행정 먼치킨이라고 평가할 만한 사람은 고건정도.

여담으로 한국의 저명한 원자력 관련 박사이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 정근모는 김재익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본인의 상하이 출장, 김재익의 미얀마 출장을 앞둔 밤에 미뤄두었던 전도를 하고자 했다. 참고로 김재익은 천주교 신자이고, 그의 누나 김재순과 김재숙은 성심수녀회 소속의 수녀다.[25] 그러나 나랏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김재익의 언사들에 틈을 낚아채지 못해 전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각자의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고 비보를 전해들은 정근모는 그야말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회상을 실었다.

역시 이 사건의 희생자인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은 바로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이다. 사건 발생 직전의 사진을 보면 표정이 굳어 있는데, 심현섭이 훗날 사건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 날 따라 말수도 적고 표정도 어두웠다고. 평소 심상우 의원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비서 등의 아래 사람들에게까지도 항상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대하며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쾌활한 성격이었음을 고려하면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을 했었던 것 같다. 여담으로 심현섭이 2002년 보수계열 정당의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을 지지 선언을 한 이래로 10년 후인 2012년 대선 때까지 줄곧 보수파 계열에서 정치적 지지 행보를 꾸준히 이어가는 근본적인 동기로 분석된다.

아웅산 테러로 사라진 인재들.



당시 합동참모의장이었던 이기백 대장의 경우 군인 신분이었기에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 정복이다보니 이 옷에는 다른 인사들의 일반 정장과는 달리 금속제의 각종 휘장, 약장 등이 붙어 있었고, 이것들이 방탄복 역할을 해주어서 그는 비록 중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이때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구한 사람이 전 육군 장성전인범 중장이다. 당시 합참의장의 전속부관으로 중위 계급이었던 그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폭파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이기백 장군을 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받았다. 동아일보 기사.

폭탄 테러 때에 대한 전인범 중장의 회고에 따르면 "두부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이 사건의 교훈으로 군인의 두발은 되도록 짧은 것이 좋다는 확신을 가졌고, 훗날 27사단장이 된 후 부대원들에게 이기자컷으로 명명된 모히칸 스타일의 두발을 하도록 규정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위의 사진이 바로 이기백 장군이 사건 당시 착용했던 정복으로, 이기백 장군은 귀국하는 즉시 이 정복을 자신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가면 전시되어 있는데, 확인해보고 싶으면 육사를 방문하면 된다.

이 사건으로 순국한 언론인 동아일보 이중현 사진기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취재하러 일본 홋카이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지 1달만에 전두환의 해외순방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는데, 출국 전 국가원수의 순방취재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장 깊이 있는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카메라 렌즈 등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등, 신문 사진 풀기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안타깝게도 버마에서 찍은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카메라가 훼손되는 바람에 영원히 볼 수 없게 됐다.

참고로 이 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사업을 목표로 1983년 12월 발족한 재단이 그 유명한 일해재단이다. 이 재단은 결국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에 이용되었고,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일해재단 기부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전두환은 이와 같은 공격적인 수금을 통해 평생집권을 기도했다.

그러다가 1988년 전두환 퇴임 전날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제정되면서 그의 평생집권 기도 자체가 드러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새세대 육영회, 새마음심장재단,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함께 5공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취급되어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되었다. 1988년부터 '세종연구소'로 바뀌어 평범한 국가정책연구기관으로 잔존중이다.

또한 당시 유족들과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테러 당시 촬영된 장면이 테러 직후에는 방영되지 않다가, 1년 뒤 9시 뉴스에서 방영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당연하지만 잔인한 장면은 최대한 편집해서 방송했다.



유신정권 때부터의 관례로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나서면 체신청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당연히 해외 순방이 지속될 리가 없었으므로 해당 우표를 회수 후 폐기 처분하였다. 덕분에 아직도 액면가 이하(…)로도 거래되는 순방 기념 우표도 많지만 이 우표는 레어템이 되어 가격대가 꽤나 높은 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우표 이야기.

테러 1주기인 1984년 10월 9일, 파주시 임진각 관광단지에 버마 아웅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탑을 건립했다. 높이 17m 탑신, 계단 등 각 17개는 희생된 17명의 위령을 상징하며 중앙 1개 지주에는 대통령이 쓴 탑명이 조각되어 있고, 4개의 청동군상은 외교를 통한 국력신장, 민족화합, 조국번영, 승천영생의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탑 정면에 마련한 "구원의 불꽃" 대는 순국자들의 명복과 영생을 빌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의선 임진강역에서 하차 후에 관광단지 쪽으로 가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위령탑 사진.



2006년 한국인 최초로 UN 사무총장으로 내정되어 화제가 되었던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월 9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방문 및 참배하여 아웅산 테러 순국 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특히 반기문의 참배는 외교관 시절 은인이었던 이범석 외무부 장관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범석 장관이 반기문을 전격 발탁한 일화는, 외교가에서는 상당히 유명하다. 반기문이 주 인도 대사관에서 4급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탁월한 업무처리 능력과 겸손함, 총명함을 눈여겨 보던 이범석 당시 외무 장관이 3급 부이사관급이던 외무장관 보좌관으로 그를 전격 발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반기문은 외교 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테러가 발생하던 1983년 10월 당시에 반기문은 외교부의 지원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아웅산 테러 소식을 전해듣고 그 날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애도 기간[26] 추모의 뜻으로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뉴스만 방영하였다. 천안함 피격사건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앞의 두 사건 때는 예능 프로만 방영이 제한된 반면, 이때는 뉴스를 제외한 전 방송이 스톱되었다. 광고방송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장례식은 생중계되었다.

이러한 방침은 자율적으로 한건 아니고 문공부에서 내린 지시로 그렇게 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KBS3, AFKN도 추모방송을 내보냈다고 한다. 당시 방송사 ID(방송사 고지)의 배경화면도 애도 문구가 삽입되었으며[27] 구슬픈 분위기의 음악이 삽입되었다.

대구MBC에게는 이 사건과 악연이 있었는데, 사건이 터진 다음날인 1983년 10월 10일이 음악FM 개국날이었기 때문이다. 음악FM 개국을 하긴 했는데, 추모 분위기상 당연히 축하한다며 잔칫집처럼 들썩이지 못하고 장송곡만 틀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011년 5월 SBS 수목드라마 시티헌터의 첫 방영분에서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재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웅산 묘소도 아니고 그냥 아웅산이라고 나오는건 덤 제작진이 아웅山이라는 지명이 있는 줄 알았나 보다. 그것보다 각그랜저가 거슬린다[28]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는 이러하다. 윤성(이민호 분)의 아버지 박무열(박상민)은 이진표(김상중)와 함께 정부 수행원 자격으로 버마(현 미얀마)에 갔다가, 북한의 테러를 받는다. 두 사람은 곧장 테러에 대한 복수를 나섰으나 정권의 버림을 받고, 박무열은 작전 도중 숨을 거두고, 겨우 살아남은 이진표는 무열의 아들 윤성을 킬러로 길러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당연히(...) 반공 드라마의 소재로 나왔는데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천하의 개쌍놈 김정일이 광분하면서 꾸민 사건으로 나온다. 다 아는 사실이잖아? 공작원들을 훈련시키고 납치한 최은희에게 자랑하고, 버마로 보내기 전에 여자를 보내서 회포를 풀게 하고 여자를 덮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2012년 5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1983년 테러의 현장이었던 아웅산 묘소를 방문하였다.[29]

사진에서 보는 묘소의 모습이 1983년 당시와는 많이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때 테러로 목조 건물은 파괴된 데다, 유사 테러에 취약한 점을 감안하여 미얀마 측에서 아예 시멘트로 만든 육중한 기념탑으로 새로 바꿨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콘크리트로 복구한 아웅산 묘소는 보안을 문제로 외부인의 출입과 촬영이 통제되었으나, 최근 다시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되었다.

2013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이 실려 있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교학사가 유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이, 2007 개정교육과정 당시 상당수의 교과서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다루었다. 그런데 2009 개정교육과정에 와서 없어진 것은 교육과정 각론에서 내용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30] 각론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역사교과에서 반드시 다뤄야 하는 성취기준과 학습요소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교과서에 해당 내용을 넣는 것은 각 교과서 집필진과 출판사의 재량에 속한다. 당시 2009 개정교육과정의 사회과 - 일반과목 - 한국사 - 영역 및 학습 내용 성취 기준에 따르면 "(마) 북한사회의 변화와 오늘날의 실상을 살펴보고, 남북한 사이에서 전개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파악한다." 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박근혜정부에서 만든 2015 개정교육과정의 사회과 성취기준과 학습요소를 보면 해당 연대의 성취기준 해설에서는(9역09-03) "양자를 서로 갈등 또는 대립 관계로 파악하기보다 함께 진행되어 온 것임을 이해하도록 하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국가 사회적 과제를 파악하도록 한다."로 규정해 놨으며, 학습요소에는 4.19 혁명,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사회 양극화가 제시되어 있다. 즉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논란을 불렀던 박근혜정부에서조차 이 사건은 중요하게 교육내용으로 다룰 생각이 없었다는 소리다.
결론적으로 당시 다른 8종의 한국사교과서들이 2009 개정교육과정과 교육부가 제시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라는 틀에 충실하게 내용을 서술한 것에 반해, 교학사 교과서는 여전히 교육부가 제시한 틀과 다르게 남북관계에 갈등요소를 적지 않게 서술했다는 것으로 교학사 교과서가 혼자서 문제(...)였다는 것이다.

2014년 4월에 임명되었던 강병규 전 안전행정부 장관이 아웅산 테러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대통령 순방에 따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가자마자 죽을 뻔한 것.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 고영환[31]은, 아웅산 사건이 나기 1년 전에 가봉에서 전두환을 암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32] 공작원 2명[33]과 고영환 포함 총 5명[34]과 15일간 동행하였는데, 실행 전날에 작전취소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이 작전을 주도했는데, 실행하기 전날 김일성에게 계획을 보고하니, 김일성이 "25년간 아프리카 외교에 힘써왔는데, 이 일로 아프리카 52개국 전원이 북한에게 등 돌리면 엄청난 손해이니 아프리카에서는 하지 말라!"고 해서 김정일이 취소 명령을 내렸다. 팀장은 "작전 후 가봉 앞바다 수 km 떨어진 곳에 공작선이 있으니 그곳으로 도망가라"고 했는데, 고영환은 수영을 25~50m 밖에 못하고[35] 동행 중 우연히 공작원 장비를 보니까 스쿠버 장비가 2명분밖에 없었다고...[36] 나중에 아웅산 사건 소식을 듣고, 취소명령을 내려준 김일성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걸 아는 인간이 그 짓을 한단 말인가?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불안했던 김정일이 어떻게든 튀어볼려고 사고친거겠지 욕은 김일성이 다 먹고

그리고 34년 후, 그 다음 대의 김정은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근처 또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또 비슷한 짓을 벌여 국제적으로 엄청 욕을 먹고 현재 해당 국가와 단교 위기까지 가고 있다. 니들 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37]
10. 관련 자료[편집]

10.1. 중앙일보 청와대비서실 (1993.8.13 ~ 8.20일자 연재)[편집]



제139회: 1, 2


제140회: 1, 2
[1] 2010년대에 KBS가 제작한 다큐에 출연한 당시 취재기자는 "전두환이 집권 후에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네윈의 통치술을 배우기 위해 버마를 선택한 것이란 의견이 많이 돌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동아 1992년 6월호 기사 <전두환은 '네윈'을 꿈꿨다(이상우 기자)>, 1993년 8월 13일자 중앙일보 <청와대 비서실(박보균 글)> '전씨 「나들이 병」 겹친 과잉 외교'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실제로 1981년 네윈-우산유 대통령직 이양 이후 서열관계는 <88년 정권교체준비연구>란 문건에 나온 권력구도와도 유사했다.[2] 정확히는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참고로 당시 총재는 대통령 본인.[3]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였다가 후에 MBC로 이직했다.[4] 1991년 MBC 창사 30주년 특집 뉴스데스크에서 테러 당시 영상이 자료화면으로 사용되었는데 "MBC 뉴스가 단독으로 촬영한 아웅산 사건은 당시 너무 잔혹하다는 이유로 방송되지 못했습니다."라는 해설이 나왔다.[5] 10월 13일 합동 국민장으로 전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6] 여담으로 서석준 부총리의 외동딸인 서이영 씨는 12년 뒤인 1995년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목숨을 잃었다.[7] 사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부상자들이 후송된 미얀마 제2육군병원의 의료상태가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만 상처를 씻고 가위도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를 정도로 열악한 탓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사고 4일만에 순직하고 말았다.[8] 전 호남전기 및 전남매일신문 사장, 광주일보 명예회장.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9] 이 사건에서 사망한 유일한 언론인. 경향신문에서 동아일보로 이직했으며, 1970~80년대 걸작급 보도사진들을 남긴 거장이기도 하다.[10] 강민철 상위의 이름은, 후일 미국에서 나온 한국전쟁 관련 소설에서 스파이의 이름으로 사용된다.[11] <대통령 비서실장론> 함성득, 151쪽[12] 항로를 변경한 덕분에 스케줄이 미루어졌다.[13] 미얀마는 불교국가라 사형제도가 사실상 무의미하나 당시 김진수의 부상이 너무 심각해 고통을 덜어준다는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사형이 집행되었다.[14] 아웅산묘역 테러수사 경찰관의 고백 "북한 공작원 검거는 우연", 김상훈 방콕 특파원, 연합뉴스, 2016.7.31[15] 국제법에서도 국가 원수에 대한 암살이나 암살 시도는 상대국의 선전포고로 간주한다.[16] 실제 대남도발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의 군사력을 작전권 핑계로 일방적으로 묶어놓고 북한을 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도 아닌 미국이었다.[17] 전두환 역시 군부독재자였고, 이 때 죽었다면 민주 선거를 통해 민주화는 87년보다 더 빠르게 올 수 있었고 전두환으로 인해 죽거나 고통 받을 사람들이 줄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5공 헌법이 존속하고 있었고, 따라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여서 법에 따르자면 제대로 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10. 26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군부가 새로운 독재자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전두환이 이 사건으로 죽었다면 전두환은 북한과 맞서다 죽은 순교자로 영웅화되었을 것이고,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 전두환의 악행들에 대한 재평가 자체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18] 그 심각했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도 결국 양쪽 강대국들은 사과를 통한 사태해결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은 미국의 허락을 얻어야 했는데 미국이 섣불리 군사행동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아래 문단을 더 읽어보자.[19] 원 출처: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26.[20] 원 출처: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27~229.[21] 몇 번의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된 지금에 와서는 다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22] 국방부가 21세기가 된 최근까지도 미군없이는 북한군에 진다고 헛소리를 해대긴 하지만 그건 예산 타내려는 시도라는게 중론이고, 당시 기준으로 봐도 북한의 경제력은 정체기에서 쇠퇴의 징조를 보였지만 남한의 경제력은 한창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다가 남한의 국방 상황은 각종 신무기를 도입해서 북한군에 비해 무기 수준이 높았다.[23] 그의 아들 함재봉은 2005년까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미국 대학으로 옮겼다. 이 때문인지 함병춘 비서실장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이 사건의 순국자들을 언급할 때, 유일하게 생애, 업적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24] 독립운동가 이범석과는 동명이인[25] 김재순 수녀는 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에 이어, 성심여자대학교 화학과 교수 및 총장을 지냈다.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김 수녀님'이 바로 김재순 수녀. (함께 언급되는 '주 수녀님'은 중국인 주매분 수녀로, 초창기 성심여중고 교장.) 김재숙 수녀는 박근혜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이다.[26] 10월 9일~13일.[27] 당시 MBC에서의 자막은 '삼가 명복을 빕니다'를 자막으로 냈다.[28] 해당 차종은 1986년 7월에 출시. 그리고 고증오류가 하나 더 있는데 각그랜저 말고 다른 차가 있는데, 링컨 타운카로 리어라이트의 후진등 위치를 보아 2세대로 추정되며 이건 1990년대에 생산된 차량이다.[29] 1983년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미얀마에 도착한 후에야 이를 대외에 공개했다.[30] 각론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기록해도 무방하지만, 기록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각론에 있는 내용이 서술되지 않을 경우 그 교과서는 검정 승인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출판되지 못한다.[31]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32] 고영환의 임무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프리카 여러나라를 육로로 우회해서 가봉으로 가는데 자신의 외교관 신분과 공작금(뇌물)을 이용해서 나머지 팀원들의 여권에 여권도장을 안 찍히게 하는 것이었다.[33] 아웅산 테러 사건에 투입된 공작원 신기철과 강민철.[34] 팀장, 공작원 2명, 운전기사, 외교관[35] 특수교육을 받아 본적이 없는 순수한 외교관이었고, 갑작스럽게 현지에서 발탁되었다.[36] 아웅산 사건과 같이 당연히 버려질 예정이었다.[37] 차이점이라면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와는 달리 이번에는 남한 고위 정치인을 노린 게 아니라(즉 대'남' 도발이 아니고) 김정은에게 잠재적 위협이 되는 같은 북한 사람인 이복형을 제거했다는 점, 그리고 자국 공작원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베트남,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이용해서 차도살인의 형태로 암살했고 암살도구로 VX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마 아웅 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이나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 때처럼 자국 공작원이 직접 체포되어 모든 게 탄로나 국제적으로 코너에 몰렸던 점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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