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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최현민 연구실 > 기타 >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를 읽고…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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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를 읽고…2009년
201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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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를 읽고…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개최 심포지움, 양은용 원광대교수논문의 논평문--

최현민 (서강대
)


1.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양교수님은 논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을 같은 맥락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신종교는 물리적 시설과 신자공동체, 교계제도, 집단적인 예배의식 등을 고루 갖춘 ‘보이는 종교’인데 반해 신영성운동은 그런 것을 갖추지 않은 ‘보이지 않는 종교’ 형태로 되어 있다. 기공, 단전, 초월명상 등은 건강운동을 표방하지만 분명 종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기에 신영성운동이라 불리운다. 서구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뉴에이지운동이나 일본의 정신세계도 여기에 속한다.
 
21세기는 영성 시대라고 할 만큼 ‘영성’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대영성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정신수련을 통해 피폐해진 영육을 치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명상이나 정신수련 뒤에 개인주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영성운동은 초자연적 힘이나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는 대신, 자율적 개인의 각성에 의한 영성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종교가 인간 본래의 영성을 억압해 왔다고 보고,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영성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현대인들이 신영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신영성운동이 개인에 중점을 두어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뉴에이지에서는 환생(還生)을 강조한다. 인간이 환생을 거듭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환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의식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영성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신중심에서 우주적 인본주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의 본령은 자기의 본래성-그리스도교에선 하느님의 모상, 불교에선 불성(佛性), 유교에선 천성(天性)이라 함-을 회복함에 있다. 이러한 자기 본래성의 궁극적인 완성은 이웃과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개인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신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삼라만상과 깊은 존재적 연대감을 지닌 ‘관계적 존재’ 곧 ‘공동체적 존재’임을 자각함에 있다.
이 논문에서 신영성운동과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정신적 치유’라는 측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원불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마음공부’가 신영성운동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2.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마음공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원불교를 포함한 신종교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자 한다. 사회학자인 노길명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신종교는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체제 모순과 부조리에 대응하고 그러한 모순과 부조리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성종교의 기능적 한계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따라서 신종교는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기성종교는 자신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신종교에 대해 유사종교, 사이비종교, 사교 이단이라고 하여 그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이다.”1)
이러한 대립과 비판에 바탕한 상호인식은 다종교문화를 지닌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최준식 교수는 “종교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척도,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영혼 곧 성숙을 목표로 하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2) 신종교를 접할 때 이런 척도가 필요하며, 모험적일지라도 서로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본다.
원불교는 1916년 창립된 신종교이면서도 한국 내 350여개의 신종교 교단 중 현재 3대 기성종교인 불교 개신교 가톨릭 다음으로 많은 신도수를 지닌 종단으로 성장해 왔다.3) 그 이유 중 하나로 원불교가 지닌 건전한 종교성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공부는 원불교 교리와 수행의 핵심을 담고 있기에 원불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공부에 관해 몇 가지 여쭤보고자 한다.

1) 본 논문에서는 마음공부를 원불교의 교리도에 배치된 ‘신앙문과 수행문’ 양쪽을 아우르는 마음수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앙문은 사은(四恩)과 사요(四要)를 통해, 수행문은 삼학(三學)과 팔조(八條)를 통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신앙문과 수행문을 통한 실천은 궁극적으로 ‘恩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恩사상이 원불교의 중심이 된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2) 본 논문의 결어에서 양교수님은 마음공부는 신앙문, 수행문 양쪽을 함께 병행해서 닦는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신앙문이 타력문이라면, 수행문은 자력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수행실천에서는 신앙문보다는 수행문이 더 강화된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마음공부가 정신개벽을 지향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기에 자력수행이 더 강조된 것인가? 아니면 신앙문을 강조하다보면 타력신앙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인가?
3) 양문(兩門)의 수행방법이 지닌 치유적 성격으로 ‘염불과 좌선’을 드셨는데 이는 불교에서 행해지는 수행과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또한 마음공부에 대한 이웃종교인들의 호응도나 참여도는 어느 정도인가?


3.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궁극적 진리,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본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의 종교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나와 우주의 합일체험’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일체중생의 본성은 그것과 하나이며, 같은 근원으로 비롯된 모든 만물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원불교 신앙강령인 ‘모든 것이 부처아닌 것이 없으니 대할 때마다 불공을 드리라’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양교수님은 이러한 법신불 일원상을 종교의 궁극적 체험으로 보면서, 불교의 佛, 유교의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 도교의 무위자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4) 즉 이러한 절대적 경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차원은 같다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선생님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느님은 있음과 없음을 넘어선 ‘존재 그 자체’, 불교의 공(空)과 만날 수 있는 경지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 실재는 비인격성과 인격성의 이원론적 사유까지도 넘어서야 하기에 이를 다 포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강조하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고, 불교는 비인격적인 면을 강조한다. 공(空), 연기(緣起), 법신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서의 법신불은 어느 면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가?
원불교에서 매일 아침, 저녁 드리는 기도문이나 참회정진 기도문, 그리고 천도의식 기도문에는 “법신불 사은이시여”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故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에서 볼 수 있었던 원불교 천도재에서 의식을 집전하신 교무님께서 “법신불 사은이시여”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기도문에서 부르는 법신불 사은은 인격적인 측면을 보여주나, 마음공부를 통해 깨닫고자 하는 법신불 일원상은 비인격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법신불이 지닌 인격성과 비인격성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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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2쪽.
2) 같은 책, 50쪽.
3) 1998년 원불교 종교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른 것인데 어떤 경우는 교단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을 파악하기 어려워 300에서 400개 정도라고 막연히 보기도 한다.(같은 책, 17쪽 참조)
4)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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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창]  / 최현민 수녀
발행일 : 2015-01-04 [제2926호, 23면]
 

최근 들어 행복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삶의 여유가 더 생기면서 행복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일까?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라 논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개인의 행복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데, 국가별로 행복을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면도 있지만, OECD 주요국의 행복지수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7위라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음이 드러났다.(2013년기준)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지만 행복지수는 그에 못 미친다는 말이다. 왜일까?
한국인의 낮은 행복감은 우리의 욕구 변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정신세계는 혈연중심의 친족주의와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는 현세 기복주의와 배상주의가 상호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면이나 배상주의는 좀 새로운 개념인 듯 싶다. 이는 현대와 같이 과열경쟁 사회에서 자신이 체험한 삶의 고난에 대해 대가를 되돌려 받기를 갈망하는 심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주의나 현세기복주의, 배상주의가 한국인이 지닌 지복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한국인의 지복의식이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명절인사에서의 ‘복’이 의미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염원하는 복은 재산이나 명예, 권력과 같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운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 행복의 가치는 한국사회와 같이 과열된 경쟁사회, 악성 서열주의 문화 속에서는 점점 더 채워지기 어렵다. 그러기에 한국인의 행복감이 낮다고 드러난 게 아닐까?

우리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기 전에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지니는 기복적 행복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행복관이 기복적 차원에만 머무른다면, 자칫 우리는 삶에 드리운 고통이나 어려움의 의미를 놓치기가 쉽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고통을 ‘신비’라 표현한다. 그만큼 고통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리라.사실 불행이나 고통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삶에 드리운 어려움과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그 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지 싶다.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삶을 통해 알고 있다.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음을….이렇듯 행복과 불행이 씨줄 날줄로 엮어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기에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던가. 좋은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 어떤 상황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로 새해를 열고 싶다.

코헬렛이 말하듯 우리에게 다가올 그 모든 다양한 ‘때’를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으로 이 한해를 시작하고 싶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어진 것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고 믿으며, 그 순간들에 충실한,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보며 2015년 을미년을 맞이한다.
최현민 수녀(씨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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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산다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구름들,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어드는 눈부신 햇살. 감나무에 달린 익어가는 감들, 오늘 아침에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그래, 우리는 가끔 자연에서 태초의 그 무엇을 힐끗 보고 느낄 때가 있다.

숲은 가로누워 쉬고 있고 개울물은 급히 흐른다.
바위는 묵묵히 그렇게 서있고 비가 촉촉이 내린다.
들녘의 논밭은 기다리고
샘물이  솟는다.
바람은 잔잔히 불고
축복이 은은하게 가득하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노래한 시다.
보통 서양 철학에서는 기분이나 감정은 세계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방해가 된다고들 말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은 늘 어떤 기분 속에 살아가지 기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위 시에서처럼 읊을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바라보며 느낀 자신의 감정 때문이리라.
성녀 힐데가르트는 자연은 우리에게 녹색생명력을 준다고 했는데 자연속에 머물다보면 이 말이 참임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자연을 통해 비리디타스viriditas 곧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을 받곤 한다.
가끔씩 감성이 예민해지면 우리 주위에 자명하게 존재해온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나?
 이런 경이의 기분이 들 때  종전에 보지 못했던 광채를 느끼기도 하는데 아마 이게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빛’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거기에서 존재의 신비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존재의 신비를 접하는 것은 내가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물게 되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존재의 실상이 지닌 경이로움에 눈뜨게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이런 경이로움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우울이나 허무감에서, 고독감이나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는 이미 허무나 고독, 무력감을 극복할 잠재적 능력이 깃들여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이 잠들어 있을뿐. 그 잠들어 있는 존재의 빛이 드러나도록 내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빛이 나와 너를 비추게 된다.
  하이데거는 지금 여기를 사는 자를 ‘현존재’라 했다. 불가에서는 이를 깨달은 자 곧 각자(覺者)라고 하고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그렇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 눈뜨고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들에서 자유로와져 여기에 마음을 다해 살 때 우리는 존재의 경이로움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자는 사도바울이 말한 “늘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