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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4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2013 ] 실상사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_ 국제컨퍼런스 강연소식과 강연문전문
작성자 실상사 13-04-25


도법스님,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美유니온신학대학원 강연서 세계 종교인들에 역설

2013년 04월 22일 (월) 박봉영 기자 budgate@hanmail.net

▲ 도법스님의 강연모습.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스님은 19일 세계적 참여불교인과 해방신학자들 앞에서 화엄경의 본래부처론과 동체대비행에 바탕을 둔 생명평화 사상을 역설했다.
강연은 미국 유니온신학대학원 국제 컨퍼런스에서 이뤄졌다. 도법스님은 '나의 불교수행, 화엄세계관과 생명평화운동-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붓다로 행동하자'는 제목으로 강연에 나섰다. 결사추진본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날 강연 소식을 전했다.
도법스님은 "붓다란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저 멀리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어떤 목적지나 경지가 아니다. 지금 당장 그대와 내가 본래 거룩한 붓다임을 알고 서로를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시고 섬기면 그 자체가 붓다로 살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생명평화무늬를 소개하는 것으로 강연은 시작됐다.
도법스님은 "온 우주의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살도록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가 인류 역사의 많은 지성들에 의해 파악되고 제시된 보편적 세계관의 총화”라며 “모든 존재들이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하고 신비한 모체이므로 당연히 지극 정성을 다하여 서로 잘 모시고 섬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도법스님은 자신의 삶과 수행의 역정 속에서 어떻게 생명평화사상에 도달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벌여왔는가에 대해서도 말했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대안적 운동, 생명평화결사, 생명평화탁발순례, 천성산, 새만금, 봉은사,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갈등해결 노력, 종교평화선언 발표와 자성과쇄신결사운동등을 세계의 참여 종교인들에게 소개했다.


▲ 강연에 앞서 열린 세계 참여불교인들과의 대화 모습.

도법스님은 결론적으로 모든 종교가 갈 길은 생명평화의 길이라고 역설하며 지구촌생명평화공동체를 만드는데 모든 종교인들이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인류문명사를 성찰적으로 살펴볼 때 존재법칙에 어긋나고 생명가치를 망각한 채 상대에 대한 불신과 분노, 증오와 공포의 마음으로 온갖 그럴듯한 명분으로 편 가르고 싸우고 이기고 지배하는 방식의 그 어떤 길도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인내와 관용과 비폭력 평화의 마음으로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한 몸 한 생명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의 길입니다. 생명평화의 삶, 생명평화의 세상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염원이며 21세기 시대정신입니다. 우리 종교가 나서서 실현해야 할 21세기 절체절명의 화두는 바로 ‘지구촌 생명평화 공동체’입니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 비로소 종교가 종교다워집니다."
한편, 도법스님은 17일, 18일 진행된 각종 토론회에 참여했으며 19일에도 참여불교 동서양의 대화에 법륜스님(정토회 지도법사), 슐락시바락사 등 세계적인 참여불교인들과 함께 토론 패널로 참여했다. 울리히 두흐로브(독일 하이델베르그대 교수), 폴 니터(미국 유니온신학대학원 교수) 등의 종교인들과도 단독 대담을 가지기도 했다.
도법스님은 21일에는 뉴저지 소재 원각사(주지 지광스님)에서 현지 불자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진행했으며, 22일부터 24일까지 미국 동부의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종교간 대화를 나누고 종교간에 사회적 실천을 공동으로 벌여나가는 방안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 도법스님과 법륜스님.

다음은 강연문 전문이다.

[법문] 비폭력과 종교평화...해강스님 법회와 설법 | 실상사

[법문] 비폭력과 종교평화...해강스님(10월첫주 서원법회) > 법회와 설법 | 실상사

[법문] 비폭력과 종교평화...해강스님(10월첫주 서원법회)
작성자 실상사 11-11-15
 
10월 첫째주 서원법회


비폭력과 종교평화선언
해강스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정토사에서 사찰 순례 겸 우리 법회에 함께 하셨습니다. 정토사에서 오신 분들께 환영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반갑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만, 늘 법회 할 적마다 법당이 좁아 이렇게 밖에 앉으시게 해서 주지 소임자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법당이 좁아서 한데 나 앉은 신도님들에게 제가 미안해하고 면목 없어 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절 불사는 즉 도량을 만들고 법당을 짓는 역할은 원래 스님들의 일이 아닙니다. 재가자들의 역할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언제부터 그랬는지 절을 짓고 가꾸고 하는 일이 스님들의 역할이 되고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절 짓고 관리하는데 동참이나 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고 우리는 대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에 맞게 엄밀히 따져 보지요. 불교에서 최초의 사찰이 무슨 절인 줄 아세요? 그렇습니다. 죽림정사입니다.
그런데 죽림정사 지을 때 부처님이 불사 기획하고 화주 다녔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못 들어봤지요? ^^*
죽림정사 지을 때 부처님이 벽돌 나르고 신도들에게 “우리 절 지으려니까 시주하시오, 뭐 하시오” 그런 적 있어요? 그런 적 없어요.

절이란 본래 재가자들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만들어주셨던 것이고, 그래서 스님들은 그런 수행처를 주시면 거기 살고 없으면 말고 그런 겁니다. 죽림정사도 그렇고 기원정사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로 말하자면은 지금 우리 실상사는 법당이 좁아서 의식을 할 때는 밖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들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그럴만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주지인 저 같은 출가자들의 역할이 아니고 재가자의 역할입니다. 또 재가자들이 판단해서 ‘뭐, 난 한 데 앉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은 주지인 제가 법회 때마다 기도 때마다 신도님들이 밖에 앉으신 것에 대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렇죠? (...) 동의를 안 하시나봐요? 대답 소리가 별로네요.

실상사는 지금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천일기도도 두 번째 하고 있습니다.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기획을 하고 불사세미나를 하고 한지가 벌써 4~5년 쯤 됩니다. 그런데 불사한다고 4~5년 쯤 이러고 있는데 뭐 하나 지어 놓은 것이 없어요. ^^

그렇지만 실상사 불사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인 건물 불사 이전에 이미 불사를 발원하고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불사를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런 정신의 불사를 바탕으로 그런 정신을 담고 키울 수 있는 건물은 금방 이루어지리라 생각을 합니다.

******

올해 서원법회에서는 불자들의 가장 중요한 수행 덕목인 불살생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불살생이란 단지 산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불살생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런데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살생의 계를 지키는 것이고 또 불제자로서의 부처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행덕목이다’ 라고 알고만 있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기 위해서 서원법회 때 함께 하시는 분들과 공동의 서원을 세웠었습니다.
‘불살생을 실천하는 하나의 구체적 수행방법으로써 육식을 줄이고 채식하기, 채식을 늘려가기,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지막에는 육식하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기’ 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모피라든지 가죽 제품 등을 사용하지 않겠다’라는 서원을 함께 세웠었습니다. 서 너 차례에 걸쳐서 육식의 문제와 그리고 모피라든지 가죽제품의 사용 문제 등등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우리 함께 서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부처님 전에 절을 세 번 하면서 서원을 세우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어때요? 벌써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그 약속, 그 서원 잘 이행하고 계신가요? (대중: 네..) 정말이요? (대중: 부족해요.) 부족해요? 그런 겁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본래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하고 그런 게 수행이에요. 마치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다시 넘어지고 또 일어섰다 다시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넘어질지라도 반드시 일어서겠다는 그 마음만 잊지 않고서 계속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넘어져서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점점 잘 일어서게 되고 잘 걷게 됩니다. 이게 수행이에요. 수행은 다른 것 없습니다. 잘 안 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 그 가치를 잊지 말고 계속 시도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것,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주스님 역시 법회 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또 하고, 또 하고 어떻게 ? 밥 먹듯이, 죽어라고 ”
그러다보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정말로 내 삶이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지고 향기로워져 갑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길가다 어느 날 갑자기 번갯불 펑 터지듯이 그렇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네요.

제가 그동안 여러분께 불살생의 정신으로 수행하는 것, 그것도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들로써 채식하기와 모피나 가죽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등등을 말씀을 해 왔는데, 오늘 역시 그러한 일환으로 다른 관점에서 불살생의 문제, 비폭력의 문제를 다뤄봤으면 합니다.

인류가 생겨나면서, 종교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겨났지요. 종교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생겨난 가장 큰 이유가 뭘까요? 불안해서? 그런 분들도 있지요. 불안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맞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종교든지 간에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평온하게 보다 더 행복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요.

“내 종교 믿으면 삶이 고달파진다. 내 사상, 내 가르침을 따르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이렇게 가르치는 종교 보셨나요? 없지요. “내 종교를 믿으면, 내 가르침을 따르면 삶이 진정 행복해 질 것이다” 모두 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거짓은 아니지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그러한 것이니까요. 모두 ‘인간 삶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펼쳐 진 가르침의 종교들이 안으로는 서로 싸우고 밖으로 다른 종교와 부딪히고 싸움으로 인해서 인류 사회의 불행을 만들어 내는 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지요.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나라인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사상의 대립으로 인해서 크게, 민족의 운명이 걸릴 정도로 크게 또는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가고 하는 그러한 분쟁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종교가 자리 잡는데 있어서 정치적 문제나 탄압을 받은 적은 있어도 종교 간의 대립을 통해서 사람이 죽어가거나 피의 대립과 파탄의 갈등은 아직은 없었습니다만, 현재 소소하게 일어나는 종교간의 문제를 보며 많은 이들이 염려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간과하고 그대로 놔뒀다가는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 보듯이 피의 전쟁과 대립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도 이제 종교 간의 화합과 화해 또 서로 공존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당면해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조금 정치적 색깔을 띨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서 조금 언급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문제들이 계속 수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현 정부 들어와서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고 근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또는 각 종교 안에서도 건전하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바라는 것은 종교 간의 화합과 화쟁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한불교조계종단의 화쟁위원회에서 조계종 종단의 이름으로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종교 간의 평화를 이루어 내는 것은 오늘날 우리 현실 삶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에는 간과되어 있다가 다행이도 늦게나마 조계종단 화쟁위원회에서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종교평화선언’이 발표되어지자 세간에서 아주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마 신문이나 뉴스 매체를 꼼꼼하게 잘 보시는 분들을 접하셨을 텐데 여러 신문과 텔레비전 매체에서 조계종단의 ‘종교평화선언’을 매우 크게 다뤘습니다. 중앙일보의 경우 전면에 다루고, 주요 일간지에서는 사설에서도 다루고 텔레비전에서는 9시, 8시 뉴스가 메인 뉴스라던데, 거기서도 다루고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스님들 차담시간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고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얘기인데, 일제 해방 이후에 한국 불교계가 새롭게 정비를 하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역사가 5~60년 되지요. 5~60년 역사에서 불교계가 사회 문제를 가지고 즉,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이해득실과 관련되지 아니한 사회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불교계의 목소리를 내어서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또 좋은 평가를 얻고 또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이 없었습니다.
엄밀히 보면 이 ‘종교평화선언’이 최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조계종에서 내 놓은 ‘종교평화선언’은 사회에서 큰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불교계 내에서는 몰라요. 관심도 없어요. 겨우 몇몇 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말할 뿐이고 또 몇몇 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뿐입니다. 정작 불교계 내에서는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더라’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그동안에 비폭력 문제를 다뤄왔었는데 비폭력 문제를 다루는 일환으로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에 대해서 함께 공유를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말씀드렸듯이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을 준비한 단체가 화쟁위원회입니다. 화쟁위원회를 이끌고 계신 분이 우리 절에 회주로 계시는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사는 도법스님이십니다. 일단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사는 스님이 리더가 되어서 만들어낸 작품이 ‘종교평화선언’이고요. 그리고 그것이 조계종의 역사,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사회에서 최초로 ‘아! 정말 불교가 멋있다! 정말 잘 한다!’ 요즘의 속된 말로 ‘한방 쐈다!’ 이렇게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분을 모시고 사는 우리 절의 신도님들이나 우리 안의 식구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그것이 무엇인지, 별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바로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한번쯤 내용을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용이 엄청 깁니다. 밥 먹기 전까지 법회를 마쳐야 되는데 어렵겠습니다. 누가 그러대요. 서원법회 때 주지스님 법문이 회주스님 법문보다 훨씬 좋대요.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고 짧게 해서. 하하하!.....

짧게 해서 좋다고 그러는데, 배고프지 않게 밥 시간에 맞춰 마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전문을 축약해 놓은 줄임본을 살펴보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싫으시다면 딴 이야기 하고요.
서문을 잠깐 읽어 드릴게요.

<지금 우리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민족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과 진리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상호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평화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연기적 세계관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불교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원적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며, 이웃종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바탕입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과 열린 정신은 기원전 3세기 중엽 인도의 아쇼카왕이 남긴 새김글에도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선언문의 부제가 ‘21세기의 아쇼카 선언’입니다.


잠시 아쇼카란 인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넘어가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아쇼카란 인물은 인도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600년이 지난 다음에 태어난 사람인데요. 인도는 땅덩어리가 큽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나라 남북한 합한 것의 열배도 넘을 거예요. 인도 땅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동에서 서로 기차를 타고 가도 30시간 이상 넘어 가야니까요. 부럽지요? 인도가면 제일 부러운 것이 땅덩이 큰 것입니다. 그렇게 큰 땅덩어리니까 당시 인도는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도를 최초로 거대한 통일 국가로 만든 것이 바로 아쇼카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데, “통일 시키자” 하니까, “그러자” 하며 합해졌을까요? 아니지요. 다양한 여러 국가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요? 엄청난 피의 살육 전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요.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시키겠다는 이름으로 전쟁을 벌여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이 바로 아쇼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욕망에 의해서 뭔가 기대하고 뭔가 이뤄놓고 보면, 막상 이뤄놓고 보면 어때요? 허무하지요. 별거 없습니다. 해 놓고 보면, 허망하고 허무합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이 했던 행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쇼카 역시 그러했지요. 통일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수많은 나라들을 전쟁을 통해 복속 시켜서 대통일 국가를 만들었는데 막상 만들고 보니까 허무하고 그래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니 너무도 많은 피의 살육을 벌였던 거예요.

그래서 아쇼카대왕은 참회하는 마음에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고서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됩니다.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 다음에 아쇼카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뭐가 있냐면... 인류 역사에 보면 동서고금에 많은 통치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실제로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매우 강력하게 실천해 옮긴 인물은 없습니다. 아쇼카왕 이전에 전무하고 아직까지도 후무합니다.

실제로 아쇼카왕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다 보니까 불교가 정말 불교답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그래서 아쇼카왕은 국법으로 모든 종교를 자신의 종교인 불교와 평등하게 대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직접 실천했고 그 법령을 돌기둥에 세워서 곳곳에다 모셔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의 성지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쇼카왕 덕분이에요.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고 부처님 성지 마다 큰 돌기둥을 세워서 ‘이곳이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초전 법륜을 굴리신 곳이다.’ 이렇게 돌기둥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발견 되어서 ‘아!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이고, 이곳이 열반지이구나!’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이 여러 종교의 존중 원칙에 관한 법령을 아쇼카왕이 돌 기둥에다 새겨 세워놨지요.

여담입니다만, 아쇼카왕의 석주의 꼭대기에는 사자가 있습니다. 사자머리가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도의 나라를 상징하는 상징입니다. 인도의 국기, 인도의 돈, 인도의 문양, 이런 모든 것에 다 들어갑니다. 어쨌든 그만큼 인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그분이 석조에다 뭐라고 적어 놨느냐면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스님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도 나는 불교 신자이지만 다 존경하겠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종교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법으로 보장해서 대우를 했습니다. 인류사에서 동서양을 통틀어 종교에 관한 다른 왕들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사건이고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아쇼카왕의 석조의 문언을 인용해서 서문의 내용이 계속되는데, 조금만 더 읽어보고 내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실천해야 할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불교인은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종교평화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서 다섯 가지의 자기 약속을 내 놓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연기’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제가 누차 우리 신도님들에게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흔히 내 아버지 어머니만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하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에. 세상에 어머니 아버지만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가깝게는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는 크던 작던 간에 수많은 존재들이,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에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들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나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는데 모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힘을 보탰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바로 나를 낳은 어머니이고 나를 기르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봐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연기’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불제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모든 존재, 우리 절의 꽃님이 까지도 나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이고 아버지인데, 종교가 다른 사람은 어떨까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나와 정말 무관하고 종교가 다르니까 저 놈은 확 쥐어박아야 하는 놈일까요?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다른 이와 어떤 차이가 있던지, 어떤 다름이 있던지 간에 그 차이와 다름은 결국 나에게 보탬이 되는 나를 낳고 나를 성립시키고 살아가게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생겼다고 보세요. 그러면 세상에 남자는 남자만 있고 여자는 여자만 있을 것 아닙니까? 세상이 되겠어요? 안됩니다. 달라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달라야 되요.

그렇듯이 너와 나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른 점이,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헤어지고 대립해야 되는 것이 아니요,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만나야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으면 만날 수도 없어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처님의 진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재한다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평화를 위한 종교인의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에서

첫 번째로 선언한 것은 ‘열린 진리관’입니다.

대체로 많은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사상만이 진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대부분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그러한 성향이 강합니다. 그러면 불교는 안 그럴까요? 천만에, 많은 불교인들도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 불교가 최고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발' 들어보세요? ^^ 아무도 발 안 드네.(웃음) 보세요. 여러분도 다 불교를 최고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불교가 최고일까요? 천만에요. 불교는 최고 아닙니다. 왜? 불교는 최고가 아님으로써 비로소 최고가 됩니다.
최고라는 것이 뭘까요? 다른 것과 다른 것입니다. 너보다 내가 잘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이 ‘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보다 더 잘난 놈이 있다.’ 이렇게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란 것이지요. 불교는 절대 그렇게 세상을 보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최고는 없습니다. 최고가 없으니까 가장 못난 놈도 없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잘나고 못난, 최고 최저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입니다. 다름이 있을 뿐이고 우린 그 다름으로서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종교도 다른 종교대로 그들의 진리를 믿기에 그렇게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열린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고 불교만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이웃종교 나름의 진리가 있다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가 불교의 진리를 인정하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불제자는 불제자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다른 종교나 다른 사람의 존재와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진정 불제자다운 태도요, 마음 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종교 다양성을 존중하겠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큰 종교, 작은 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만약에 세력이 큰 종교만을 종교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옳은 태도일까요? 세상을 그렇게 한번 봅시다. 힘 센 놈만 사람인가요? 힘 센 놈만 한국 사회에 권리가 있나요? 힘 센 놈만 대접 받아야 됩니까? 마찬가지잖아요. 힘없는 종교는 종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세상살이에서도 힘 있는 사람만 존중하고 힘없는 사람은 핍박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뭐가 다릅니까? 똑같은 거지요.

종교는 큰 종교든 작은 종교든 어떤 식의 종교이든 간에 그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불교는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 또한 소중하게 대해주고 여겨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니까, 현재 상황이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 아까도 말했듯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도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비로소 자신이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어요. 이렇게 가르치셨는데 ‘불교만이 최고다. 다른 종교는 우스워, 안 소중해! 다른 데는 별 볼일 없어! 종교로 인정할 수 없어! 진리를 인정할 수 없어!’ 이런 태도는 불교로 살아가는 태도가 아닙니다. 불제자의 태도가 아니고 불교를 모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세 번째, ‘전법과 전교의 원칙’입니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지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이 즉 ‘포교’입니다. 전도와 전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전도와 전법이라는 것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야! 그 종교 별 볼일 없어!, 그것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절 좀 봐봐. 훨씬 더 좋아! 이리로 와!’라고 개종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아쇼카 선언, ‘종교평화선언’이 나오고 난 뒤에 불교계 안에서 일부 불자들이 가장 문제 삼는 이슈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이 점입니다. 그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는 것이 개종으로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교를 또는 포교를 포기하는 일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생각을 달리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그 종교를 버리고 이 종교로 오라고 꼬드겨 내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 어떤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본인의 판단에 의해서입니다. 단, 불제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목적은 뭔가 하면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다섯 명의 비구에게 가르침을 처음 굴리시고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깨닫고 난 뒤에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라. 다섯 명이 함께 몰려다니지 말고 (몰려다니면 아마 일 저지를까봐 그랬나 봐요.(웃음)) 각각 다섯 군데로 흩어져서 가라. (그래야 여러 군데를 갈 것 아닙니까? 뭐 하러 가?) 가서 나의 가르침을 전하라. (무엇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안락을 위해서 가르침을 전하라" 하셨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종교는 몹쓸 종교니까 따르지 말고 내 불교로 끌어와라", "개종시켜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좋은 것을 가졌으면 다만 내 좋은 것을 드러내면 됩니다. 드러내면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고 아 좋으면 다른 사람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를 포교하는 전법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불제자가 불제자답게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모범적으로 마음 쓰고 모범적으로 말하고 불제자답게 행동하면, 누가 봐도 그 모습이 좋으면,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아름답게 생활하고 아름답게 마음 쓸 수 있는 근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다고 알게되면,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자는 당연히 따라 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나가다가 개똥을 보면 어때요? 찡그리지요. 그렇지요? 개똥을 보고서 코를 들이미는 사람 봤습니까? 우리 꽃님이가 막 싸 놓은 따끈따끈한 개똥에 코를 들이미시는 분, 두 종류이지요. 변태거나 또는 그것을 특별하게 연구하시는 분 아니면 안 할 겁니다.

그런데 요즘 가을에 저 뒤로 가면 소국이 많이 핍니다. 지나는 길에 노란 국화가 피어있으면 어때요? 예쁘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눈이 뻥 뜨이고 코를 갖다댈 수밖에 없습니다. 기분이 좋지요. 그렇잖아요. 이런 겁니다.

이런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데 그 거름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름삼아서 세상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서 향기를 풍기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나비가 날아들고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와요.

여러분,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 옷매무새도 가다듬고 화장도 하고 그러죠. 왜 하셨어요? 스스로의 만족도 있지만,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에 전법이라는 것이 다른 종교인들의 개종을 목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투쟁입니다. 이것은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질을 하자는 것입니다. 일부 종교에서 오랜 종교적 전통을 가진 나라로 전도를 하러 가고 포교를 하러 갑니다. 그게 잘 될까요? 잘 안되지요, 그게 바른 태도일까요? 세상으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 봐도 그렇고 부처님 가르침의 전도와 전법과 포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개종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더 확고히 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일 뿐이고 다른 종교를 가졌던 사람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거시적인 것입니다.


네 번째,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 활동’입니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지요. 정교분리는 늘 이야기 하지만 인류역사에서는 정교분리가 제대로 된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지요. 엄밀하게 말해서 종교와 정치는 한 뿌리입니다. 태어난 것이 옛날에 한 뿌리였어요. 그러다보니까 나눠 가지고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종교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나눠져야 한다는 판단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공적영역, 다시 말해서 사회의 정치인이나 관리라든지 아니면 어떤 집단에 공공의 책무를 맡은 사람이 자기의 직책과 자기의 이해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자기 종교를 펼치고 다른 종교를 탄압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불교는 한국사회에서 그런 부분에 취약하기 때문에 두 말할 필요도 없겠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우리가 가장 좁은 단위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버지가 절에 다닌다고 자식들에게 절에 다닐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강요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전법에서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부모님이 정말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자식들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아버지라는 권리와 권력을 내세워서는 자신의 신념을 가족들에게 강요하는 것,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자기 위치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소단위일 수도 있고 때로는 더 큰 집단에서 높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을 이용해서 종교나 포교활동을 하는 것, 다른 이의 믿음을 강요하는 그리고 술수를 부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는 이야기이지요. 결국은 그것 때문에 종교가 대립하게 되고 결국은 비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종교평화선언’에서는 ‘우리 불교인들은 공적영역에서 그런 식으로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 라는 그런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평화를 통한 실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사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종교가 생겨난 이유도 세상사를 평안하기 위한 목적을 걸고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살이는, 현실의 삶은 종교 이상을 실현해내는 좋은 자리이고 종교 이상을 판단해내는 좋은 잣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을 어디다 둘 것인가?
대부분의 불교 신도들은 스님을 따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생겨난 불교집단에 와서는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스님을 따라요. 우습지 않아요? 우습잖아요. 그래서 ‘어느 스님 유명하다더라.’ 우~ 몰리고 ‘어느 스님 기도 발이 잘 받는다더라.’ 우~ 몰리고 그러지요. ‘어느 스님은 텔레비전 나왔었다더라.’ 또 그리로 모이고 무슨 신앙도 유명세를 따라 무슨 연예인들 팬클럽 같이 쫓아다닌다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실망할 일도 많이 생깁니다. 지난 번에 뉴스 보니 어느 연예인이 탈세로 뉴스에 났던데, 겁나게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연예인이라면서요? 그런데 탈세했다고 하루아침에 야단 났데요. 그런 거예요. 사람을 믿으면 늘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를 해봐서 알잖아요. 아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 실망을 주잖습니까? 아닌가봐? 이분들은 사랑을 아직까지 만족스럽게 하시는 분들인가 봐. 저는 그렇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럼, 뭘 믿어야 될까요? 그렇지요. 법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다 법을 클로즈업 시켜서 사람을 봐야하는 것이지 법에다 사람을 갖다 붙여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러셨지요. 나를 믿지 말고 법을 믿어라 그러셨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을 따르게 했는데 아무리 후대 스님이 잘 나고 훌륭하더라도 부처님만 하겠어요? 그렇잖아요. 법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본다면 세상의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 믿는 사람은 싹 죽여 버려라! 이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대요. 이슬람교가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들고 믿을래? 죽을래? 그랬다고 하는데,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이슬람교 사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불교보다도 훨씬 더 평화주의입니다. 뭐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들고 안 믿으면 죽인다? 이것 전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다. 코란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 없습니다. 코란의 가르침을 보면 ‘아하! 진정한 보살행의 구체적인 묘사가 바로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종교든지 다 세상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을 애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종교를 신앙하는 집단에서 보여주는 행위는 좀 다릅니다. 내가 다른 종교는 언급하지 않겠는데요. 우리 종교만 놓고 보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면, 주지 자리 놓고 싸움하는 것이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그렇지요? 신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서 다른 절과 경쟁하라는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없어요. 자꾸 이런 이야기 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니까. 대충 눈치 빠른 분들은 이해하시지요? 그런 이야기 없습니다. 그런데 집단에서는 더러 그렇게 행합니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행합니다. 불교라는 포장지를 씌워서 합니다.


그러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 사람이 아니고 따라야 할 것이 사람이 아니고 법입니다. 바로 평화를 통한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법에 의해서 생각하고 법에 의해서 행동한다고 한다면 종교 간의 갈등 상황도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고 아예 생겨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도 법에 의해서 진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루어진 집단, 즉 사람의 문제입니다. 진리와 법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즉, 평화적인 가르침에 의해서 다른 종교와 함께 하겠다는 태도를 선언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셨지요? 미움은 미움으로써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그러셨지요? 미움을 해소하는 방법, 법구경에 나오지요? 미움은 오직 사랑으로써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양한 신념을 가진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불교가 아무리 포교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훌륭한 스님이 많이 나오신다고 해도 이 세상사람 모두가 불교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대립하지 않고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평화로써 대해야 합니다.

설령 문제가 생겼더라도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고 평화로써,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써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 아닌 자비로 대할 때만이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불교요, 그것이 바로 불제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선언을 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선언을 하고, 마지막으로 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을 세웠는데요.
잠깐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락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이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입니다. 제목은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이라고 했지만 안으로 들여다보면 내 삶의 평화를 위한 나의 서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비춰보고 나의 삶을 다듬어보고 다른 이, 다른 종교, 나와 다른 존재들을 대한다면 바로 내 안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 주변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제가 대충대충 징검다리 건너 뛰 듯이 말씀드렸지만 이 선언문의 전문은 조계종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또 실상사 홈페이지에도 올려놓겠습니다. 인터넷 하시는 분들은 들어가 보시고요. 혹여 필요하신 분들은 다음에 오시면 자료를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초안입니다. 완성본이 아니라는 겁니다.

초안을 발표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불교는 어떠한 것을 만들어 갈 때 대중이 함께 논의해서 만들어가는 전통이 있습니다. 초안을 내어놓고 대중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종교평화선언도 앞으로 대중들의 다양한 의견을 통해서 다듬어진 완성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도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시고 좋은 의견도 내 놓으시고 그랬으면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로 ‘종교평화선언’은 다른 종교와의 평화를 위함일 뿐만 아니라 ‘ 내 안의 내 삶의 평화를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것이 나온 다음 불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느냐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도,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포교를 포기하는 것이냐?’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또 하나는, 실상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요. 기독교 같은 경우 불교에 대해 아주 공격적인데 불교는 그것에 대해 ‘때려라!’ 하고 열린 자세로 나가면 얻어맞기만 하고 결국은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 이런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더 나아가 ‘이렇게 한 들, 저쪽에서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쪽에서 막 때리면 맞고만 있을 것인가? 결국은 그러다 다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료집에 바로 그런 염려들에 대한 답으로 써 놓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제가 그것을 인용해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해인사에 머무셨던 성철스님 법문을 인용해서 말씀을 해 놓았어요. 성철스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어 섬겨라. 우리 부처님을 우리 불교를 제일 욕하고 스님들을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들이 극락세계에 가도록 제일 먼저 기도하고 축원하고 절 합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불교를 비방하고 공격 할수록 자꾸 절하고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과 태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를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보십시오. 그러면 불교는 바닷물이 밀려들듯이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 되면 모든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감동하고 감복해서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해서 불교를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누가 성철스님한테 물어 봤었나 봐요. 여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지르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그 불은 결국 꺼지게 될 것입니다. 저쪽에서 큰 불을 지른다고 나도 같이 불을 지른다면 너와 나를 함께 태우게 되는 것이니까 그쪽에서 아무리 불을 지른다고 해도 우리 쪽에서는 자꾸 물을 붓는다면 결국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과 싸우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방법인 것이고, 또 불교적으로 생각해봐도 불제자가 능히 취해야 할 태도와 마음 씀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께서 좀 더 마음과 관심을 내셔서 ‘종교평화선언’을 한번쯤 접해보시고 읽어보시고 새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것이 곧 내 안의 평화를 이뤄내는 것이고 다른 존재를 비폭력으로 대하고 비폭력으로 대함으로써 다른 존재와 더불어서 함께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불제자의 수행이요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 법문은 ‘종교평화선언’을 공유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2023/06/30

Philo Kalia 생태인문학 학회 - 기독교 원불교 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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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1 h

  · 
이 학술대회에 매력을 느껴 남의 집 잔치이지만 30km를 달려 단대 죽전캠퍼스에 갔다.
정문 오른쪽에 위치한 글로컬산학협력관을 단대 캠퍼스 한 바퀴 빙 돌고서야 겨우 찾았다. 
방향치, 길치, 공간 감각능력 부족.
발표가 6개였지만 1, 2분과로 나눠서 발표하는 바람에 3개 밖에 듣지 못했다.


대개 학회에서는 동종 전공자들의 동종교배만이 이뤄지는데
이번에는 과학, 동양철학, 서양철학, 종교사상과 교육까지 다양한 전공자들이 참여했다. 
학문간 대화와 융합이 생태문제, 지구위기, 기후위기를 놓고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기후위기 문제를 어찌 한 분야에서 다 말할 수 있다거나 해법을 발견할 수 있으랴.

서성열 선생(농사상연구소)의 “기독교 생태 신학과 농(農)의 신학”이 
무척 신선하고 도전적이었다. “하나님은 농부이시다”는 선언을 신학적으로 사색하고 전개할 수 있는 발표였다.

고은아 선생(대전광역시환경교육센터)의 “생태전환교육의 필요성과 방향”에서는 
3년 전부터 초등과 중등교육과정이 생태전환교육으로 교과전체가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늘 기성세대와 정치와 (대)기업에 있다.

*학회의 고질적인 문제:
발표시간과 토론시간이 늘 부족하다.
발표문의 밀도 있는 문제의식과 전개 및 해법 제시, 토론자의 그것에 대한 정성어린 비판이 부족하다.
토론문에 발표자의 논문 요약은 안 했으면 좋겠다. 
질의와 비판을 하면서 그 안에서 충분히 발표 내용을 언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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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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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도
5 results in book
작가

Page 4

⦁ 성덕도 유지재단에서 교직자 역임(1962~1969)
그 이름이 떠오르면

Page 15

 어머니는 多 종교인이셨죠. 원불교, 성덕도, 기독교 등. 유난히 향학열이 강했던 나였지만 7…
그 이름이 떠오르면

Page 16

 학교 기숙사가 아니고 성덕도 수련도장이었다. 인생철학을 공부하는 최고의 대학이라는 어머니 말씀. 성숙치 못한 나에겐 …
그 이름이 떠오르면

Page 16

…심도덕경>공부만 했다. 여섯 달 동안 읽고 쓰고 공부하다보니 차츰 동화되어 칠십 여 평생 성덕도인이 되었다. 그렇게 강제로 성덕도 입문을 종용하던 어머니는 세월 따라 기독교로 또 다시 개종하셨습니다.

Kang-nam Oh - 세 종교 – 천도교, 원불교, 성덕도

Kang-nam Oh - 세 종교 – 천도교, 원불교, 성덕도 얼마전 어디에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 끝나고 질의 시간... | Facebook


Kang-nam Oh
25 m  · 
세 종교 – 천도교, 원불교, 성덕도

얼마전 어디에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 끝나고 질의 시간 어느 분이 저에게 여러 종교를 섭렵한 분으로 어느 종교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느 종교가 가장 훌륭하다고 꼭 집어서 말하기는 곤란하고 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노장사상과 선불교라고 얼버무렸습니다. 
비교종교학은 종교들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주 연구과제로 삼을 뿐 어느 종교가 더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비교종교는 Comparative Religion이지 우열을 따져 경쟁시키는 Competitive Reigion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아는 여러 종교 중 특히 세계인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종교 셋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천도교(동학), 원불교, 성덕도를 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 종교 모두 한국에서 자생한 민족 종교들입니다. 저는 K-pop, K-drama, K-movie, K-food, K-music, K-classic 등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데, 아직 K-religion 혹은 K-thought는 세계화에 미흡한 형편이라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데 이 세 종교가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져 그들의 영적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 종교의 공통점은 첫째, 유불선과 기독교까지를 섭렵한 후에 독립적으로 생겨난 한국의 자생종교라는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나 불교 등 재래 종교에서 발견되는 미신적 요소랄까 독소조항이랄까 하는 것이 걸러졌습니다.  셋째, 세계 여러 종교 심층에서 발견되는 긍정적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습니다. 넷째, 구시대의 패러다임에 입각한 초자연적 존재 찾거나 거기에 의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로 이 세 종교들의 핵심적 가르침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도교(天道敎):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내 안에 하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시천주(侍天主), 내 안의 그 하늘이 바로 나라로 하는 인내천(人乃天),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이웃도 마찬가지이므로 이웃 섬기기를 하늘을 섬기듯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은 심층 종교의 진수를 요약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같이 환경파괴와 기후위기의 시대에 경천, 경인, 경물의 삼경(三敬)이라 하여 하늘과 사람뿐 아니라 물질세계도 공경해야 한다는 거시안적 통찰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 사상은 어느 면에서 ‘생명경외’를 강조한 슈바이쳐 박사의 생각보다 한 발 더 나간 사상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불교(圓佛敎):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라는 깨달음을 근본으로 시작된 원불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하여 새 시대에 새로운 정신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깨달음을 강조하는데, “다른 종교들과 달리 원불교는 교주의 탄생일이 아닌 깨달은 날을 경축한다. 인간은 그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많이 배웠거나 덜 배웠거나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깨달을 수 있다.” (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
곳곳이 부처님이시니 일마다 불공하세. 언제나 마음공부 어디나 선방(處處佛像 事事佛供 無時禪 無處禪)이라는 가르침이나 하느님이나 불보살의 은혜가 아니라,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은(四恩)의 가르침, 수양과 연구와 취사의 삼학(三學)을 강조하는 것 등은 생활 종교의 전형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덕도(聖德道): 

1952년에 생긴 성덕도의 경전인 <자성반성 성덕명심도덕경>에 보면 놀라운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신이 아니라 사람이 천지지간 만물의 영장이니 사람이 우주만상물을 지배하고 조정할 수 있으니 초월적인 존재에 명복과 소원성취를 비는 것은 사리사욕에 이끌리는 것으로 미신이니 그런 미신은 타파해야 한다고 합니다.  천당 극락 지옥은 어디 있는가. 각자 마음 속에 있기에 심전(心田)을 청정정심하면 그것이 곧 천당 극락이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 하지만 천은(天恩)과 지혜(地惠)가 일반이니 남녀는 평등하다고 합니다. 성덕도는 유불선 삼교 교합법이라 이웃 종교의 가르침 중 중요한 요소를 취합했다고 합니다.  기복사상 배격, 천당 극락 지옥은 내 마음속에 있으니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 남녀평등 강조 등 대형 종교의 독소조항이 말끔이 가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다석 류영모나 함석헌 사상도 K-thougt로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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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동학)에 대해서는 저의 책 <세계종교 둘러보기>(2013) 329~338쪽에 언급되고, 원불교와 성덕도에 대해서는 <오강남의 생각>(2022) 173~186쪽에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부기: 이 글은 제가 스페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쓴 것인데, 올리지 못하고 떠났었습니다. 혹시 다른 종교인들에게 오해 살 소지가 있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을 주무대로 쓴 Dan Brown의 소설 <오리진>을 다시 읽고,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Sagrada Familia)성당을 방문하면서 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돌아오자마자 용기를 가지고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리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올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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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김경란
저는 거의 모태신앙으로서 성덕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고자 하는 성남 성덕도 도생인데요. 두 종교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어쩌면 오히려 젊은 사람들, 성덕도 도생 2세들의 외면이나 무심함으로 점점 축소되는 듯한 현실이 안타까운데 교수님 덕분에 널리 성덕도를 알리는 계기가 되니 너무 감사합니다. 최소한 교수님의 글을 읽는 분들은 성덕도가 사이비종교인가? 하는 오해는 안 하실 것 같아서요. 매번 좋은 글 잘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06/20

AGENDA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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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중심의 근대문명은 지구촌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근대문명의 전 지구적 확산은 자본의 독점, 제국주의의 확산, 세계적인 전쟁의 발발, 그리고 마침내는 인간의 소외 및 생명 경시 풍조를 양산하였으며, 21세기가 되었음에도 그 모순은 심화되고 있다. 즉, 근대문명은 우리에게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로움과 기본적 인권의 이념, 개인의 존엄에 입각한 자유와 평등 시민사회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그 문명의 확산 과정에서 자본의 독점과 제국주의, 세계적인 빈부격차의 확대, 세계적인 전쟁, 인간 소외 등의 부작용도 초래하였다. 동학(1860년)을 비롯한 근대 한국종교는 이상의 근대문명의 긍정적인 면을 적극 수용하는 한편,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후천개벽’, ‘정신개벽’ 등의 이념을 통해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했다.

‘개벽’의 이념은 교리적인 측면과 사회적 실천의 양면에서 근대 문명에 대한 수용과 응전의 형태를 취했다. 예를 들면 동학?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인시천(人是天)’,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사상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가치성과 한국적 평등사상을 심화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말기의 신분차별과 빈부격차를 타파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맞서 싸우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렸다.

동학이후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도 근대문명 수용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근대문명의 부정적 요소를 극복할 수 있는 교리를 구축하고 독립운동과 자립운동, 조합운동, 신문화운동 등 다양한 차원에서 대응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에도 민주화운동, 경제공동체운동, 생명평화운동 등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근대 한국종교는 단지 내적 수양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ㆍ사회ㆍ경제ㆍ문화 등의 영역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인류문명에 대해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본 아젠다는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이라는 이름으로 설계하였다. 본 아젠다를 설계하게 된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근대문명 수용 시기에 성립된 한국종교에 대한 연구가 유ㆍ불ㆍ도로 대표되는 전통종교나 천주교, 개신교와 같은 서구 외래종교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 또는 의도적으로 무시되어온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근대 한국종교연구는 운동사 중심 혹은 교학적인 연구이거나 공통적인 사상을 살펴보는 연구가 지배적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전통종교에 대한 ‘혁신’과 근대문명 수용과 함께 유입된 외래종교의 ‘도전’이라는 이중적 과제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하게 된 근대 한국종교에 내재된 문제의식에 대한 학문적 성찰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본 아젠다는 근대문명의 수용 과정에서 당시 한국의 근대종교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교리와 사상 및 활동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근대 한국종교의 공공성을 규명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공공성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근대 문명에 대한 인식이나 대응방식, 그리고 일반 대중들의 교리 수용과 실천, 또 그러한 교리체계의 의의와 한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문명 전환기에 있어서 종교의 대안적 공공의 가치를 규명하고자 한다.

1단계 3년 동안의 연구목표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통해 표출된 종교운동을 통해 오늘날 필요한 시민적 공공성의 구체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다. 즉 근대 한국종교의 근대문명에 대한 수용과 응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시민적 공공성을 재구축하여 그 현재적 의미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근대 한국종교는 근대문명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통해 사상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운동) 측면에서 공공성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종교의 공공성에 대한 탐구를 위해 본 연구팀은 근대문명의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근대 한국종교는 이미 탈근대적 면모를 내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을 토대로 현대의 탈근대적 상황 속에서 종교의 시민적 공공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본 연구팀은 근대문명의 수용 과정에서 당시 한국의 종교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교리와 사상에 한정하지 않고 실천(운동)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종교의 공공성을 규명하고, 더 나아가 탈근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떤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고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종교의 시민적 공공성을 재구축시키고자 한다.

1단계 3년 동안의 연구에서는 근대 한국종교운동에 나타난 공공성의 이해 및 특징 도출, 그 운동의 공공적 가치와 실천운동 분석, 그리고 이상의 내용을 통한 공공성 재구축을 정립하고자 한다.

2단계에서는 한국종교의 시민적 공공성 세계적 확산이라는 주제로 세계 시민적 공공성과의 만남, 탈근대의 생명, 환경, 평화의 윤리, 글로컬(Glocal)적 세계 시민적 보편 윤리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1단계 연구의 기반으로, 1년차는 아시아 및 세계의 시민적 공공성과의 만남, 2년차에 탈근대의 생명, 환경, 평화의 원리, 3년차에 탈경계시대의 회통과 조화의 세계시민적 보편윤리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세계로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종교의 다양한 사건 및 운동과 연계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2023/05/30

학술논문 전문 검색 원영상 - 일본불교 - 원불교

지식을 담다. 지식을 나누다. 학술논문 전문 검색


저자명 = "원영상"
검색결과
34 건
본문포함

전체선택

1
KCI 등재
화엄의 사상과 실천2 : 근대 일본의 화엄사상과 국가
원영상 ( Yong Sang Won ) 2016
한국불교학 한국불교학회 77 317~351 (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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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조왕손 일연상인(日延上人)에 대한 연구
원영상 ( Yong Sang Won ) 2015
한국불교사연구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 6 72~100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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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00
3
KCI 등재
소태산 박중빈의 불교개혁사상에 나타난 구조 고찰
원영상 ( Yong Sang Won ) 2014
신종교연구 한국신종교학회 30 121~154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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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00
4
KCI 등재
한국학계의 일본불교연구 동향
원영상 ( Yong Sang Won ) 2013
한국불교학 한국불교학회 68 563~629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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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KCI 등재
광복 후 분단체제에 대한 원불교의 대응과정 연구
원영상 ( Yong Sang Won ) 2013
신종교연구 한국신종교학회 28 223~258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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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00
6
KCI 등재
근대 일본불교의 서양사상의 수용과 전개 -정상엔료(井上円了)를 중심으로-
원영상 ( Yong Sang Won ) 2011
동양철학연구 동양철학연구회 67 341~371 (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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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00
7
KCI 등재
일본철학 : 근대 일본불교와 민족주의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를 중심으로-
원영상 ( Yong Sang Won ) 2010
동양철학연구 동양철학연구회 64 415~449 (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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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00
8
KCI 등재
[탈근대성에 대한 동양철학의 담론2] 잘삶(well-being) : 잘 삶의 의미 -왕생정토 사상을 중심으로-
원영상 ( Yong Sang Won ) 2008
동양철학연구 동양철학연구회 53 41~72 (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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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00
9
KCI 후보
소태산 박중빈의 재가주의 불교운동과 민족주의
원영상 ( Yong Sang Won ) 2007
한민족문화연구 한민족문화학회 23 63~96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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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00
10
KCI 등재
사이초(最澄)의 법화사상-그가 평생 추구하고자 한 것-
원영상 ( Won¸ Yong-sang ) 2021
한국사상사학 한국사상사학회 68 105~127 (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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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00
11
KCI 등재
원불교 무시선법(無時禪法)에 대한 고찰
원영상 2020
禪學(선학) 한국선학회 (57) 71~99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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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KCI 등재
근대 일본선종과 군국주의 -전쟁선(戰爭禪) 사상을 중심으로-
원영상 2020
禪學(선학) 한국선학회 (55) 5~31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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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KCI 등재
근대 일본불교의 군국주의 -니치렌주의(日蓮主義)를 중심으로-1)
원영상 2020
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 사단법인한국교수불자연합회 26(1) 105~126 (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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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KCI 등재
근대 일본불교의 군국주의 -니치렌주의(日蓮主義)를 중심으로-
원영상 ( Won Yong-sang ) 2020
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 사단법인 한국교수불자연합회 26(1) 105~125 (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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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0
15
KCI 등재
일본중세 신불교 조사들의 신행관 - 도겐(道元)·신란(親鸞)·니치렌(日蓮)을 중심으로 -
원영상 ( Won Yong-sang ) 2018
동아시아불교문화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34 243~267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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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00
16
KCI 등재
근대 개혁불교의 사회적 공공성 - 불법연구회의 귀환전재동포구호사업을 중심으로 -
원영상 ( Won Yong - Sang ) 2018
선문화연구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4 307~344 (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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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00
17
KCI 등재
근대 일본불교의 한반도 유입의 초기 전개 양상 - 통감부통치 시기를 중심으로 -
원영상 ( Won Yong-sang ) 2018
한국불교학 한국불교학회 87 347~371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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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KCI 등재
유마경과 정토, 그리고 현대불교
원영상 ( Won Yong-sang ) 2017
한국불교학 한국불교학회 81 187~214 (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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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KCI 등재
소태산의 평화사상
원영상 ( Won Yong-sang ) 2016
통일과 평화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8(2) 5~44 (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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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00
20
KCI 등재
원불교의 탈불교화 과정에 대한 연구
원영상 ( Yong-sang Won ) 2016
신종교연구 한국신종교학회 35 83~110 (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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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00
21

난암 유종묵의 수행교화와 일본행적에 대한 시론적 고찰
원영상 2016
한국불교학회 학술발표논문집 한국불교학회 2016 121~136 (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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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KCI 등재
난암 유종묵의 수행교화와 일본행적에 대한 시론적 고찰
원영상 ( Won Yongsang ) 2016
한국불교학 한국불교학회 79 323~345 (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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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부_ 동아시아불교와 화엄사상 : 근대일본의 화엄사상과 국가
원영상 2015
한국불교학회 학술발표논문집 한국불교학회 2015(1) 139~167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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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KCI 등재
『한국신종교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연구-연구방법론의 제기로부터 표제어 추출까지-
김도공 ( Do Gong Kim ) , 윤승용 ( Seung Yong Yun ) , 고시용 ( Shi Yong Ko ) , 김항제 ( Hang Je Kim ) , 원영상 ( Yeong Sang Won ) , 권동우 ( Dong Woo Kwon ) , 허남진 ( Nam Jin Heo ) 2014
신종교연구 한국신종교학회 31 251~284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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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00
25

한국학계의 일본불교연구 동향
원영상 2013
한국불교학회 학술발표논문집 한국불교학회 2013(1) 521~546 (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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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KCI 후보
정토교의 임종론 고찰 -임종행의(臨終行儀)를 중심으로-
원영상 2012
정토학연구(淨土學硏究) 한국정토학회 (18) 265~314 (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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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주제발표: 불교와 한국종교와의 대화 : 「불교와 원불교의 만남」에 대한 논평문
원영상 2011
한국불교학회 학술발표논문집 한국불교학회 2011(1) 185~189 (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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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KCI 등재
근대 일본불교의 현실참여와 아나키즘
원영상 2011
일본근대학연구 한국일본근대학회 33 347~367 (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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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0
29
KCI 등재
일본 근대 군국주의 정책과 불교계의 수용
원영상 2009
禪學(선학) 한국선학회 (24) 455~492 (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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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KCI 등재
불교의 효사상에 대한 고찰
원영상 2009
禪學(선학) 한국선학회 (23) 553~590 (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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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KCI 후보
한중일 삼국 근대불교의 민족의식에 대한 비교연구
원영상 2008
禪學(선학) 한국선학회 (21) 453~496 (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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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KCI 후보
전시체제의 종교탄압과 불교계의 저항
원영상 2007
禪學(선학) 한국선학회 (16) 287~318 (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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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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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2

은(恩)으로 혐오 넘어서기 : 지구인문학으로서 원불교학 - 은혜철학 이주연

은(恩)으로 혐오 넘어서기 : 지구인문학으로서 원불교학



은(恩)으로 혐오 넘어서기 : 지구인문학으로서 원불교학Going beyond Hatred by Fourfold Grace : Won-Buddhist studies as Globalogy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021, vol., no.89, pp. 159-184 (26 pages)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분야 :
인문학 >
종교학 > 한국종교 > 원불교학
이주연 /Lee Ju youn 1


1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초록 


이 연구에서는 혐오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관점이 필요한지를 논 의한다. 혐오는 오염으로 인해 자신이 완전무결하지 못하고 낮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무의식적 불안감에서 유발된다. 요즘은 지구화시대의 가속화로 인해 혐오가 더욱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타자의 존엄성을 고 려하지 않았던 제국주의 시대에 새로운 사유법으로 등장했던 타자철학은 타 자의 절대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지금의 지구화시대에는 바로 지구인문학적 관점이 전 지구적 존재들의 존엄함과 평등성에 주목함으로써 ‘지구적 혐오현 상’의 해법으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지구인문학은 토마스 베리의 주장처럼 지구에 매혹될 것을 권유하는데, 
신유물론자들과 포스트휴머니스트들, 그리고 한국의 종교가와 사상가들이 이 지구인문학적 사유법을 제시해왔다. 
특 히 원불교의 은(恩)사상은 모든 존재들의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를 바탕으로 서 로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권장하고 있어, ‘실천학’으로서의 지구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법신불(法身佛)’과 ‘사은(四恩)’에 대한 균형 감 있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혐오를 포기케 하는 유토피아’로 우릴 안내할 것이다.


This study discusses what viewpoint is required for going beyond hatred. Hatred is caused by unconscious anxiety that men may become people of low ability who are absolutely perfect due to corruption. Hatred has appeared in more multi-layered and complex forms due to the era of accelerated globalization these days.Philosophy for others that appeared as a new thinking method in the era of imperialism which did not consider others' dignity focused on their absoluteness. And the viewpoint of globalogy plays the role as a solution of 'global abhorrence phenomena' by focusing on dignity and equality of global beings in the present era of globalization. Globalogy recommends people to be fascinated by the earth like Thomas Berry's arguments and new materialists, post humanists, and Korean religionists and thinkers have presented thinking methods from the viewpoint of globalagy. Especially, grace thought is globalogy as practical learning as it recomends people to repay each other's kindness based on all beings' close independent relationship. But one concern is that beliefs balanced between ‘Dharmakāya Buddha’ and ‘Fourfold Grace’ are required. These beliefs will lead people to ‘utopia to make them give up hat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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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지구인문학,
원불교,
은사상,
신유물론,
포스트 휴머니즘

Hatred, Globalogy, Won Buddhism, Grace thought, New materialism, Post hum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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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소개] 한국 자생종교인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이 새롭게 선언한 
  • 사은(四恩)사상, 즉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의 네 가지 은혜에 관한 철학은 이 우주만물이 본래 서로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관계로 얽혀 있으며 
  • 그것이 우주 만유의 존재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진리 언어임을 새롭게 발견해 가는 여정을 담아낸 책이다. 

  • 사은은 우주의 존재론, 그 창조성, 그리고 생명성을 보여주는 
  • 핵심 패러다임으로서 생명 근원, 무한 긍정, 평화 공생의 의미를 통해서, 
  • 혐오, 소외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의 위기와 기후위기나 인류세 등으로 대표되는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고
  •  수양과 불공의 겸전을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해 나가는 밑바탕의 원력이 됨을 탐구한다. 
  • 또한 이 은혜철학으로써 타자와 대화하고 생태학과 대화하며 세상을 새롭게 보고, 읽고, 듣고, 말하자고 제안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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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문학의 시선-갈래와 쟁점
(지구인문학총서 03)
출판사 : 모시는사람들
2022.03.31 ㅣ 256p
 
이 책은 전 지구적으로 기후위기나 그에 따르는 기상이변, 팬데믹이 현실화, 일상화하는 인류세 시대에 즈음하여 지금까지 인류가 안주해 온 ‘인간 중심의 시선’을 지구환경 문제로 확장하는 것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그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하여 ‘지구의 시선’으로 인간과 지구를 들여다보는 지구인문학의 최신 쟁점과 관점을 소개한다. ‘지구인문학’은 인문학의 종결자로서, 디스토피아의 징후를 보이며 다가오는 ‘지구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와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현재 ‘형성 도상에 있는 지구인문학’을 구체적인 현장에서부터 귀납하여, 그 의미와 지평을 열어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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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서평

[목 차]

제1장 ‘장소’의 지구철학: 세계철학의 신(新)구상 / 박치완 … 15
1. 우리는 ‘어디’에서 학문을 하는가? … 18
2.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의 구성과 그 방법론 … 24
3. 제3세계 지식인들의 연대와 ‘장소감’의 증진이 필요한 이유 … 45

제2장 ‘사이’와 ‘너머’의 지구정치학 / 김석근 … 53
1. 지구인문학과 새로운 사유 … 55
2. 지구와 인간 그리고 인류세(Anthropocene) … 59
3. 지구정치, 지구정치학, 지구공동체 … 66
4. ‘지구정치학’을 향하여(AD TERRA POLITIKA) … 78

제3장 ‘공생’의 지구정치신학 / 박일준 … 85
1. 정치신학의 주제로서 지구와 공생 … 87
2. 좌절된 미래와 분노의 정치 … 91
3. 미래 이후 시대의 정치신학: 언더커먼스의 정치신학 … 97
4. 비존재적 집단체(the collective)의 정치적 가능성 … 106
5.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로서 정치신학적 투쟁 … 113
6. 지구의 존재 역량을 정치적으로 신학하다 … 122

제4장 ‘은혜’의 지구마음학 / 이주연 … 127
1. 혐오의 시대 … 129
2. 은혜로 혐오 시대 넘어서기 … 136
3. 지구마음학, 그 현장의 소리 … 151

제5장 ‘실학’의 지구기학 / 김봉곤·야규 마코토 … 163
1. ‘세계’에서 ‘지구’로 … 165
2. 최한기의 지구 인식 … 167
3. ??지구전요(地球典要)??와 새로운 지구학 … 176
4. 만물일체(萬物一體)와 ‘천인운화(天人運化)의 효(孝)’ … 184
5. 지구 내 존재 … 194

제6장 ‘미래’의 지구교육학 / 이우진 … 199
1. ‘되기(become)’ 위한 배움 … 201
2. 고귀하지만 결함이 있는 세계시민교육 … 207
3.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생태시민교육 … 217
4. ‘미래 생존을 위한 교육’으로 … 225
에필로그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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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서평
지구인문학의 시선으로 인간, 사물, 세계를 논한다

2020년, 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큰 홍수가 발생했으며, 2019년부터 시작해 이듬해까지 이어진 호주 산불은 막대한 피해를 야기했다. 같은 해 터키에는 지진이 일어났고, 한국에선 54일간 장마가 이어진 데다 태풍도 줄줄이 찾아왔으며, 중국에는 폭우로 인한 홍수가 있었다. 모두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 인류를 찾아온 위험들이었다. 묘하게도 같은 해에 지구인문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지구인문학자들이 함께 저술한 이 책, ??지구인문학의 시선??에서 다루는 논점들은 지구의 관점에서 인간과 만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분야별로 다룬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시선, 서구의 시선으로 살아오며 자본주의를 보편적인 프레임으로 공식화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당면한 팬데믹에 도달하고 말았다. 인류세와 기후위기 현상이 요청하는 것은 기존의 시선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구인문학의 시선??에서는 더 이상 인간의 시선이 아닌 ‘지구인문학의 시선’을 상상하고, 탐색한다.

지구인문학자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소개한다

1장 ‘장소의 지구철학’은 ‘장소의 존재’로서 인간이 지구를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생존의 장소로 구성해낼 수 있는 방법을 타진한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닌 ‘제3세계성, 즉 억압당하고 배제당한 자의 눈으로 지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2장 ‘사이와 너머의 지구정치학’은 명사적 존재로 가득한 인간의 정치와 철학을 넘어, 그 ‘사이’의 존재들에 주목하고, ‘사이 너머’를 사유하는 지구정치학을 구상한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이 국면에서 지구가 보여주는 다양한 양상과 반응이 바로 지구의 정치적 행위임을 재발견한다.
3장 ‘공생의 지구정치신학’은 ‘함께-만들기’ 혹은 ‘공동생산’으로서의 ‘공생’에 주목하여 제도권 정치로부터 정치적 행위 주체성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의 정치적 잠재력에 주목하고 이들의 연대를 꿈꾸는 정치신학을 제안한다.
4장 ‘은혜의 지구마음학’은 ‘은혜’라는 키워드로 카렌 바라드의 ‘모든 존재들의 얽힘’을 재서술하면서 지구상의 모든 존재, 특히 나는 모든 존재로부터 은혜를 입고 있음을 호소한다.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마음 바탕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구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5장 ‘실학의 지구기학’은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의 기학이 “‘세계’로부터 ‘지구’로의 시선의 전환”을 통해 성립된다, 즉 “인간과 만물이 관계를 지구적 차원에서 사유하는 시도가 일찍이 조선사회에 형성되었음”을 주목한다. 최한기는 ‘만물이 일체로 얽혀 있음’에 주목하면서, 천지를 섬기는 ‘천륜적 효’를 제안한다. 이는 인간의 행위주체성을 지구적으로 확장하는 사유라 할 수 있다.
6장 ‘미래의 지구교육학’은 미래교육의 방향성을 ‘지구교육학’의 지평에서 조망한다. 이는 ‘세계시민교육’과 ‘생태시민교육’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생명적 사유’에서 “비생명적 존재들과의 얽힘도 사유할 수 있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인류세 시대 인문학의 방향을 새롭게 정립한다

지구위기 문제들을 한국사상과 비서구적 관점에서 사유하기 위해 기획된 이 책은 인간과 유럽 중심의 근대인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와 만물까지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 인간과 지구가 공생할 수 있는 다양한 논의들을 모색한다. 당면한 기후변화와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사유체계를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은 학문 영역뿐 아니라 문화, 정치, 예술, 교육 등의 영역 전반에 널리 공명하고 있다.

특히 우리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인문학 사조들은 인간의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 인류세 시대가 본격화됨에 따라 압도적으로 현상화된 - 지금의 위기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구인문학은 이러한 과제에 적극 응답하며 ‘지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우리를 향한 지구인문학의 시선’을 닮아야 한다는 점을 깊이 파고든다. 이것을 통해 문명의 전환을 이룸으로써 지구적 전환 속에 인간의 자리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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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4

알라딘: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

알라딘: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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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학과 그 이후의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근대한국 개벽종교가 한국사회의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사상, 종교, 정치사회, 문화, 교육의 전 부문에서 개벽운동을 추동해 간 역사적 과정을 ‘공공하다’라는 측면에서 재조명하기 위하여 공공성의 의미, 종교와 공공성의 관계, 그리고 한국 신종교-개벽종교의 공공성의 특징을 논구하는 책이다.


목차


제1부 한국 사회와 종교적 공공성

종교적 ‘공공성(公共性)’의 개념과 의미 / 염승준
한국적 공공성 탐구 / 야규 마코토
한국 사회 공공성의 붕괴와 종교적 공공성의 가능성 / 하승우
1920·1930년대 한국 ‘신종교’의 기본지형과 동향 및 특징 / 김민영
근대 한국 종교에서의 ‘민족’과 ‘민중’ / 김석근

제2부 한국 신종교의 공공성

동학이 그린 공공세계 / 조성환
증산사상과 공공성 / 허남진
원불교의 종교성과 공공성 / 원영상
대종교의 종교성과 공공성 / 김봉곤
동학의 공공성 실천과 그 현대적 모색 / 박맹수



책속에서


P. 35서양의 종교가 전통적 이원론의 입장에서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뒤늦게 17, 18세기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과 달리, 동양의 종교는 그보다 훨씬 앞서 인간 마음 안에서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을 자각하였다.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해 온 서양 종교와 달리 신과 인간의 동일... 더보기
P. 55한국 신종교를 특징짓는 것은 후천개벽사상이다. 이것은 종말사상이나 서양 근대적 혁명사상과 달리 사회의 변혁·혁신과 개개인의 새로운 인간관의 각성·수행이 수반된다. 개벽사상의 논리는 각 종교마다 각양각색이지만 인간 존중 사상, 생태·환경 사상, 공동체론, 그리고 타종교에 대해 개방적이고 종교 간 대화·소통·상호 이해를 도모하는 사상은 현대사회에서 공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접기
P. 78특히 지금 시대의 문제는 각기 개별적인 존재로 분리되어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개체들을 주체로 묶을 방법이다. 즉 공(公)의 반대말이 사(私, private)라면, 공(共)의 반대말은 개(個, individual)이다. 그런 전환에서 종교의 역할이 있다. 인격적인 결합체인 공(共)과 비인격적 결합체인 공(公)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도록 개인이 서로 연대하고 사유화된 것을 공유로 다시 점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고 그런 노력의 결과가 구조를 바꿔야 한다. 종교는 그런 ‘묶음’의 역할을 맡을 수 있고, 근대 한국종교의 묶음은 ‘평등’과 ‘자치’라는 한국 사회 공공성에서 실종된 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접기
P. 104(조선 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1930년대의 한국 신종교 현황을 조사한) 무라야마는 ‘유사종교’를 새로운 종교사상운동의 하나로 보았다. 즉 그는 한국 신종교의 ‘후천개벽사상, 지상천국사상, 기적과 구세주사상, 사회운동’이라는 측면과 함께 ‘동학운동(실제로는 동학당 표기), 일진회, 3.1독립운동(실제로는 3.1소요운동 표기), 성도(聖都)운동, 기타 혹세(惑世)운동’ 등과 연계시켜 파악하였다. 접기
P. 137~138[근대화 시기에 우리 민족의] ‘우리’ 인식과 독자적인 정치체제성은 강력한 서구 문명의 도래와 더불어 도전과 위험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서구)의 문명이 ‘표준’으로 여겨졌고, 식민지, 반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같은 표준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근대 국민국가로 업그레이드해서 근대 국제 시스템 내에서 다른 국가들에 의해서, 특히 서구 국가들에 의해서 독자적인 행위자로 인정받는 것이야말로 비서구사회 내셔널리즘의 공통된 과제였다. 한국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으며, 어쩌면 그 같은 과정을 가장 혹독하게 겪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는 했지만 밀려오는 서구 문명 앞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으며, 그런 시도는 특히 ‘종교’ 영역에서 다채롭게 그려졌다. 우리가 주목했던 종교들(동학,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하겠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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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원불교 사상을 바르고 넓고 깊게 연구함으로써 원불교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74년 7월 4일 설립되었다. 또한 단순히 사상에 대한 연구보다 좀 더 심층적이며 구체적인 원불교학 수립과 사관 수립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작 : <근현대 한국종교의 생태공공성과 지구학적 해석>,<근대 한국종교, 세계와 만나다>,<근대한국 개벽운동을 다시읽다> … 총 1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근대한국 개벽종교, 서구에 대한 ‘대항’이나 ‘대안’ 아닌
서구의 근대를 안고, 치유하며 넘어서는, ‘근대 이후’이다

1. 대전환의 시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상황을 두고, “세계가 성공하지 못했던 대전환의 길”이 전개되고 있으며, “우리가 성공해 낸다면 세계사적인 변화가 우리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한반도의 비핵화를 넘어, 종전선언과 항구적인 평화체제의 구축은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학구도, 그리고 미일중러로 대표되는 세계 모든 나라의 정치적 역학관계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만의 역량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일중러 모두 자국 내의 정치상황과 국제적인 역학관계로 인하여 남북이 주도하며 전개되는 한반도 상황에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도 중요한 변수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 세계의 운명이 ‘대전환’을 시작하여, 새로운 문명의 단계로 진전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것은 150여 년 전 창도(創道)된 동학과 그 이후의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한국근대 개벽종교’들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2. 대전환과 개벽운동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 보국안민(輔國安民), 유무상자(有無相資) 등의 사상과 실천으로 대전환에 직면한 민중들을 각성시켰고,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에 의한 3.1운동 등을 통해 개벽세상에의 전망이 빛을 잃지 않도록 계승하여 왔다.
강증산의 증산교는 동학농민혁명을 겪으며 선천시대 내내 쌓이고 쌓인 원한을 풀어내지 않고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전망 아래 ‘천지공사’를 통해, 그리고 민중을 옭아매는 기제로 작동하는 ‘시스템’과의 결별을 통해 민중 세상으로의 길을 열어나갔다.
대종교는 국권 상실로 절망에 처한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의 역사적 연원을 가진 천손민족(天孫民族)임을 주지시키는 한편 수전병행(修戰竝行)의 가르침으로서 희망의 끈을 잃지 않도록 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사상과 동력을 제공하였다.
원불교는 이러한 모든 개벽적 전망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로 귀납하여, 식민지로부터의 이탈은 물론 물질 중심 문명의 극한점에서 정신 중심 문명으로의 도약을 통한 참 문명 건설에 매진하는 개벽운동의 새 전범을 구축하였다.

3. 한국근대 개벽종교와 공공성 구축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근대화’라는 역사 발전 단계를 거치는 동안 전개된 한국근대 개벽종교들의 이러한 운동은 단지 ‘좁은 의미의 보국안민(輔國安民)’이 지향하는 바, 한국사회나 한(韓)민족만의 해방과 개벽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 시기에 한민족의 종교적인 천재(天才), 사상적인 선구자들은 전 지구촌 차원으로 확장된 서구근대문명에 도사린 한계를 직관적으로 체득하고, 문명사적으로 도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혹은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달았고, 이를 선포했다.
지난 150년 동안의 한국사회의 끊임없는 민족운동의 저변에는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서부터 비롯된, 포기하거나 절망할 수 없는 정의롭고 선한나라, 아름답고 행복한 나라로의 전진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2017년 버전이 바로 ‘촛불혁명’이었다.
촛불혁명은 그 자체가 완성이나 종국이 아니라, 바로 그로부터 탄생된 문재인 정부를 매개로 하여, 바로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협정 그리고 전 세계적 차원의 신시대로의 도약으로 귀결되고 있다.

4. 지체된 근대/산업/민주/선진화와 대전환

한국사회의 최근 움직임들을 ‘대전환’이나 ‘개벽’이라는 패러다임(창)으로 진단하고 전망하는 것은 아전인수인가?
나아가 이것이 ‘교단종교’로서의 동학(천도교)이나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차원의 공공하기의 결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종교편향적’인가?
통일민족국가의 건설 내지 주변강대국으로부터 자주적인 민족국가의 건설운동 즉 한반도 운전자론이나, 최근의 ‘미투운동’이라는 사회적 인권의식의 ‘정상화’ 운동은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달성한 기초적인 것을 추구하는 철지난 숙제하기에 불과한가?
한국/한반도 차원에서 지체(遲滯)된 근대/산업/민주/선진화를 달성하는 것이 한국/한반도 지평을 넘어 세계사적인 의의/성과로 확장/확산된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전망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한국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근대한국의 개벽종교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지금 여기를 넘어 ‘내일’ 그리고 ‘그곳(세계 각국 각 곳)’에서도 유효하고 유의미한 답이 될 수 있는가? [최근 일본의 아베 퇴진 시민운동의 일각에서 ‘촛불혁명’을 배우자는 담론이 일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전망이다. 일찍이 한반도의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을 거쳐 인도의 독립운동에까지 그 영향을 끼친 바 있다.]

5. 촛불혁명 이후의 개벽운동 - 공공하기

2016-2017의 촛불혁명이 동학 이래의 개벽운동의 결실이라면, 촛불혁명 이후의 개벽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가? 이 책은 ‘공공하기’가 그 해답이라는 암시를 준다.
‘개벽종교’라는 집합명사 속에 담기는 종교들의 교리와 역사, 철학과 제도, 사상과 운동을 ‘공공하기’라는 패러다임으로 재조명하고, 우리나라는 물론 그리고 인류사회가 직면한 과제에 대한 해답을 그 속에서 찾아보려는 작업은 앞으로 6년 동안 “종교와 공공성 총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 저자 소개
염승준 / 원광대학교 조교수
야규 마코토(柳生 眞)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조성환 / 원광대학교 책임연구원
김석근 /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김민영 / 군산대학교 교수
하승우 /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박맹수 / 원광대학교 교수
원영상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김봉곤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허남진 /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접기

2023/04/07

2019 원불교의 마음공부 원익선(원불교 교무)

원불교의 마음공부



원불교의 마음공부
사건과 신학 2019. 8. 28. 15:33





원불교의 마음공부

- 원익선(원불교 교무, 원광대학교 정역원)



원불교의 기원은 1916년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깨달음이다. 1924년에는 익산에 성불제중(成佛濟衆, 부처가 되어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을 향한 교단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48년 원불교로 개명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원불교는 개혁불교이자 현대불교다. 일제의 억압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박중빈은 자수자각(自修自覺, 스스로 수행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음)하여 민족의 앞날을 희망으로 비추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어 인류 문명의 미래를 바르게 인도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 즉 인류를 낙원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길은 다름이 아닌 마음공부다.

박중빈은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대종경(大宗經)』 제11요훈품(要訓品) 제1장)라고 설한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공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삶은 인간의 마음이 운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건물을 짓는다고 하자. 그 건물의 원모습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설계도로 나타나고,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건축된 것이다.

인간관계 또한 인간의 마음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삶에서 경험하는 희비애환은 마음의 다양한 모습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명은 인류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찬란한 예술 문화는 인간의 마음이 아름다운 미적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철학과 종교 또한 진리와 선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증오가 상대방을 절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다. 원효(元曉)대사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일심(一心)으로 표현한다. 마음에서 일체가 생성되고, 일체가 소멸된다. 마음은 마음먹기에 따라 좁쌀보다도 작기도 하지만, 우주를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마음의 묘한 작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러한 마음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자는 마음공부가 유행하고 있다. 다양한 명상체험이 아울러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전횡에 따라 인간의 자아가 왜소해지면서 삶의 중심이 흔들리고, 존재 자체가 물적 조건에 흔들리며, 존재 자체의 기쁨을 빼앗기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일어난 것으로 본다. 마음공부나 명상 모두는 인간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주체적인 삶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종교인 원불교 또한 이 점에서 마음공부를 하나의 종교적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있다.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초기교단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법연구회는 전통적 불교가 위기 때마다 실천한 결사정신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 결사야말로 재가, 출가가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주경야독, 반농반선(半農半禪, 하루의 반은 생산활동에, 반은 수행에 집중하는 것)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 생활에서 마음을 찾고, 마음을 가꾸며, 마음을 활용하는 마음공부를 했던 것이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이 경험을 기반으로 교의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확대되어 정착되었다. 나아가 현대문명의 근본문제를 치유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는 원불교 마음공부가 좀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나(我)와 경계(境界,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부딪히는 모든 상황을 말함)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식에서 촉발되었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경계에 부딪혔을 때, 그 경계를 계기로 나의 본성인 불성(佛性)을 청정하고도 온전한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키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STAR 마음공부’라는 것이 있다. S: Stop (멈추기) 온전한 정신수양, T: Think (생각하기) 생각으로 사리연구, A: Act (실행하기) 옳고 그름을 취사하기, R: Review (반조하기) 주의할 것, 이라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이것은 원불교의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라는 삼학과 함께 그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검토하는 반조공부가 곁들여진 것이다.

이 삼학은 불교의 전통적인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근본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 수행은 견성(見成, 불성을 찾아 회복하는 것), 양성(養性, 부처의 삶이 되도록 불성을 잘 기르는 것), 솔성(率性, 실생활에서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 목표다. 결국 이 불성을 깨달아 부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된다. 불성은 모든 사람이 고유하게 품고 있으며,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는 근본적 요소가 된다. 여기에서 불법의 평등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불성과 성품은 같은 뜻이다. 단 성품은 불성을 품고 있는 마음이다. 마음은 불성을 기반으로 하되 온갖 번뇌로 뒤덮여 자신의 업(karma)을 쌓아가는 불성의 외피다. 이 마음은 진리와 연계된 불성과는 달리 경계를 만나 발현된 파편화되고, 단절된 자기중심주의로 이끄는 원인 제공자이다. 불성은 이러한 마음의 독단에 끌리지 않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세계다. 이 불성의 성격이 현실에서 그대로 작동되면 부처의 삶이 된다.

예를 들어 무시선법(無時禪法)이라는 원불교 수행의 최고 단계에서는 “진공(眞空)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用)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라고 한다. 우리의 불성이 완전히 비어 있음을 알게 되면, 어떤 경계에도 걸림이 없게 된다. 즉 맑은 호수에 기러기가 날아가도 호수에 파도가 일지 않듯이 불성에는 어떤 파도도 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텅 빈 마음으로 대하는 모든 존재는 각각 절대적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즉 인간과 자연 모두는 그 하나하나가 절대적 존재인 것이다. 처처불상(處處佛像, 모든 존재는 부처로 현현해 있다는 뜻)은 이를 말한다. 진공묘유는 불성의 또 다른 성격이다.

무시선법의 핵심은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고 가르치는 『금강경』(대승경전의 하나로 선종에서도 활용되는 경전)의 핵심 내용이다. 즉 우리 성품의 근본 자리에서 경계를 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어떠한 평지풍파도 나의 삶에서는 객관화가 된다. 희로애락에 끌려다니지 않는 청정무위(淸淨無爲, 마음이 청정하여 힘쓰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삶이 영위되는 경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무시선법은 “우리의 몸인 육근이 일이 없을 때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일이 있을 때는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고 한다. 일심은 깨어 있는 마음, 번뇌로부터 해방된 마음, 우주와 하나 된 마음이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핵심은 “일상수행의 요법 9조”에 잘 나타난다. 이 가운데 1, 2, 3조는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2: 어리석음, 3: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2: 어리석음, 3: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2: 혜(慧), 3:(戒))을 세우자”이다. 이는 일상 속에서 삼학수행을 하는 것으로, 앞의 무시선법과 상통한다. 심지라는 것은 마음이 의지해 있는 근본, 즉 거의 같은 의미인 불성, 성품, 자성을 말한다.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불성에는 원래 없다. 이를 자성삼학이라고 한다. 중국 선종의 6조 혜능(惠能)대사의 행장인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일찍이 확립된 선사상이다. 원불교는 이에 더 나아가 마지막 9조“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라고 하여 마음공부의 범위를 사회로 확장하고 있다.

원불교는 오늘날 다양한 현대불교와 같은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즉 인간 개개인의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부조리와 불의를 물리치고 부처들이 사는 불토 낙원으로 변화시키자는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에 속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마음을 통한 개혁 또는 개벽을 주장한다. 즉 마음공부가 근본 동력이다. 그 핵심은 불성의 다른 모습인 공적영지(空寂靈知, 공한 가운데에도 신령하게 아는 것)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삶과 문명은 이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물론 원불교 수행은 ‘평상심이 도’와 같은 선사상과 ‘단전주(丹田住)’와 같은 전통 선법도 계승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원불교야말로 기존의 불교교의를 통합 활용하는 회통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이 진공묘유 또는 공적영지한 성품을 최근 일부에서는 ‘메타마음(Meta-Mind)이라고도 한다. 어떤 형태로 표현하든 그 최종에는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法身佛, Dharma-kāya-buddha, 부처를 부처이게끔 하는 근본 부처이자 우주의 근본 진리)의 진리로 귀결된다. 앞에서 언급한 불성 또는 성품은 곧 법신불의 속성이며, 인간 누구나 이 법신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즉 깨닫게 되면, 무명(無明, 마음이 밝지 못하여 죄업을 짓게 되는 마음)을 벗어나 법신불과 일치가 되는 것이다. 법신불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법신불의 상징은 또한 원불교를 상징하는 일원상(一圓相)이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이 근본 진리와 합일하여 진리적인 삶, 즉 부처의 삶을 살며, 이 지상을 불국정토로 변화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된다.

현재 원불교 내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STAR 마음공부’만이 아니라, ‘정전 마음공부’, ‘온삶 마음공부’, ‘알아차림 마음공부’ 등 다양한 마음공부의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어떠한 마음공부든 최종적으로는 이 법신불과 하나 되는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다르게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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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기반으로 치유·성장·평화를 이야기 하다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마음공부 기반으로 치유·성장·평화를 이야기 하다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마음공부 기반으로 치유·성장·평화를 이야기 하다
기자명 이여원 기자
입력 2019.11.14
호수 1959


제10회 마음인문학 국제학술대회
마음·삶·사회의 평화를 위한 담론
제10회 마음인문학 국제학술대회는 국내외 석학들이 함께 자리해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음공부 전통과 새로운 마음공부법을 심도 있게 짚었다.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소장 고시용)가 지난 10년간의 성과를 돌아보며 6일~9일 “마음공부 기반 치유· 성장·평화-마음인문학의 성과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원광대 숭산기념관에서 제10회 마음인문학 국제학술대회를 진행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그간 수행됐던 마음인문학의 연구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마음인문학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자리였다. 이를 위해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진과 국내외 석학들이 함께 자리하며 학계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음공부 전통이나 새로운 마음공부법을 심도 있게 짚었다. 총 나흘간 진행된 학술대회는 6일 호주 출신의 존 앨런이 진행하는 ‘마음공부의 원류들을 찾아서’라는 주제의 집중워크숍으로 시작했다.

워크숍에서는 호주 원주민과 불교 및 타 전통에서 유래하는 마음치유의 지혜를 활용하여 오늘날 제기되는 개인적· 환경적 도전을 헤쳐나가는 전략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됐다. 7일에는 ‘마음인문학의 회고와 전망-마음공부 공동체의 토대 구축’ (장진영·마음인문학연구소), ‘유아 정신건강 및 웰니스에 세대간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마음챙김 양육 프로그램들’(니르베이 싱·미국)의 주제발표를 시작으로, 오후에는 두 분과로 나눠 발표가 있었다.

8일에는 각 두 분과로 나뉜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이후 9일까지 원불교 영산성지 현장답사, 영광 국제마음훈련원에서 진행되는 종합토론이 이어지며 건강한 마음의 확장과 공유를 통해 열린 사회의 안녕과 평화의 의제까지 고민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마음인문학연구소 고시용 소장은 “생활 중심의 마음공부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새로운 시대코드를 반영하며 재구성되고 있다”면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지난 10년간 진행된 마음인문학연구소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그동안 심도있게 논의된 마음공부의 사회과학적 담론을 통해 마음공부의 외연을 사회적 차원으로 넓히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2019년 11월15일자]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 양은용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 네이버 블로그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양은용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차례

Ⅰ. 서언
Ⅱ. 소태산 종교관의 구조
Ⅲ. 원불교 교리상의 마음공부
Ⅳ. 마음공부와 치유
Ⅴ. 결어
===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최현민 수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우교수, 사랑의 씨튼수녀회)

차례

Ⅰ.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Ⅱ. ⾃他⼒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Ⅲ.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Ⅰ. 서언
질병 ․ 빈곤 ․ 전쟁의 3대 사회악이 종교를 낳게 한다는 말이 있다. 종교의 본령이 사회구원에
있으므로, 질병과 빈곤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고통이 심화될 때, 성자의 구세이념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불교의 원점에서 파악된 고(苦)와 이에 대한 자비(慈悲), 그리스도교의 원죄(原罪)와 사랑이
강조된 것은 이러한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구세이념은 새로운 이념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다. 성립사적으로 보면, 기존종교의
가르침이 변화된 사회상황 아래서 기능하지 못할 때 사회에서는 새로운 구세이념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대응하는 것이 새 종교운동이다.
바라문교의 가르침 아래서 불교가 성립하고, 유대교 아래서 그리스도교가 성립한 것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는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포월(包越)하는 가르침을 제시하려 한다. 당시
사회가 그 이념을 받아들일 때 다시 말하면 새 종교운동의 구세이념이 목적을 달성할 때 그것은
사회적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러지 못할 때는 소멸하고 만다.
그렇다면 사회의 존재형태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근현대에 와서 종교이념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근대 인류는 격변하는 사조(思潮)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구세이념을 갈구하게 되었다. 서세동
점(西勢東漸)의 정치사회사조 아래 혼란과 전쟁을 경험하였고 새로운 체제와 이념을 터득해 온
것이다.
물질문명의 이기에 탐닉하면서 정신문화의 축을 다시 세워야하는 과제를 안고, 교통 ․ 통신의
발달과 함께 공동체적 운명을 가꾸어 왔다. 근대 이후 인류가 경험해온 전쟁, 인구증가와 자원고갈,
환경오염, 도덕적 타락 등의 현상은 지구촌사회를 이대로 두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이러한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구세이념에서 볼 때 가장 두드러진
흐름을 신종교(新宗敎)운동과 신영성(新靈性)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먼저 신종교운동은 19세기를 전후로 사회구제를 외치며 일어난 사회운동이다.㉮ 지구촌이라
불릴 만큼 변화된 사회 환경 아래서 새로운 구세이념을 모색함으로써 그것은 민족과 지역을 넘어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성립하였다.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비판하고 또 새롭게 해석하면서 기존종교의 근대적 변모를 자극하였다.
한국 신종교의 사상적 특징을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 ․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 ․ 민족주체(民族主
體)사상 ․ 인간존중(人間尊重)사상 ․ 사회개혁(社會改革)사상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 姜敦求,「新宗敎硏究序說」(서울대 종교학연구회 편,『宗敎學硏究』6, 1987, 191쪽); ⾦洪喆,『韓國新
宗敎思想의 연구』, 집문당, 1989, 25쪽 참조.
㉯ 졸고,「韓國新宗敎運動과 그 사상」(『東洋宗敎學』11, 원광대 동양종교학과, 2001, 9쪽 이하) 참조.
이를 盧吉明,『韓國新興宗敎硏究』(경세원, 1996) 40쪽 이하에서는 ⼈尊사상과 民衆사상․開闢사상
과 地上天國신앙․救世主신앙과 選民사상․調和사상과 統⼀사상․解寃사상과 傳統⽂化繼承사상으로 정
리하고 있다.

2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운동에는 시대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지역이나 민족국가에 따라 문화기반이나 사회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제도이념의 구성 체계 등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문명에 대응한
정신문명, 곧 영성의 혁명을 강조함으로써 인류정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신영성운동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이다. 신종교운동이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형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 신영성운동도
그러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는 미국 등지에서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으로㉰ 일본에서는
신영성운동 외에 정신세계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교나 과학과 같은 과거의
문화현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성을 찾으려고 한다. 영성으로 불리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나감으
로써 절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변용(自己變容)이나 치유(治癒)의 의미가 강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운동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종교사상의 흐름에서 보면 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대응은 전통종교나 신종교운동 모두가 전 세대와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고,㉲ 신영성운동에
서도 그 근저에 종교적 흐름이 깔려 있다.
생명 중시의 기철학(氣哲學)적 세계관이 강조되고 건강문제가 사회적 화두(話頭)로 부각된 가운데
전개되는 이들 운동은 인류의 새로운 정신차원을 모색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회구원의 문제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지구촌 사회가 된 오늘날에 그것은 밖으로 환경과 생태계로 연결되고, 안으로는 영성 내지 정신세계
와 관련되어 있다. 사회가 복잡하고 이념이 다양해진 만큼 극절한 치유를 통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환경회복과 인간회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인간 삶의 새로운 활로를 말해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근현대사회의 변혁사조 아래 소태산(少太山 朴重彬, 1891-1943)에 의해 1916
년 성립한 원불교의 교리체계를 통해 그 구세원리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만유로 벌여
있는 세상을 은(恩)으로 파악하며 이에 따라 감사생활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의 구세이념을
특히 마음공부와 관련하여 치유적 성격을 밝히려는 것이다.
㉰ 존슨 로버트 L,『반문화운동과 종교』, 이장식 역, 현대사상사, 1976; 全明秀,「뉴에이지운동의 전개
와 변모-대체종교에서 대중문화로의 방향전환에 관한 시고」(『圓佛敎思想과 宗敎⽂化』34,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6) 등 참조.
㉱ 島薗進,『精神世界のゆくえー現代世界と新霊性運動ー』, 東京堂出版, 1996; 島薗進,「新靈性⽂化と宗
敎」(원광대학교 편,『미래사회와 종교』, 원광대출판국, 2000) 등 참조.
㉲ 신종교의 개념에 근대의 변화된 사회상황 아래 변용된 종교활동의 대부분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근래 한국사회에서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달라지면서 종교단체와 수련단체의 경계가 모호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 소태산은 우주와 세계, 인간관계를 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은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
명적 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네 가지 범주로 규정한 것이 사은이며, 사은의 실천이념이 감사생활
로 요약된다. 원불교 은사상에 대해서는 李鉉澤,「원불교의 은사상」(원불교사상연구원 편,『원불교신
앙론 연구』, 원불교출판국, 1996, 185쪽 이하); ⾦洛必,「恩思想의 ⽣哲學적 조명」(같은 책, 284
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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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Ⅱ. 소태산 종교관의 구조
원불교의 교리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립과정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기존종교의 역할이나 구세이념에 대한 평가가 따르고, 그 영향 등이 드러나기 때문인데 소태산의
종교관과 관련하여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에 대한 수용과 공존의 태도이다. 새로운 종교는 기존종교나 그 구세이념
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기 마련인데 원불교에서는 그 역할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소태산은,
<1> 천하 사람이 다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큰 도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도라 이르나니, 그러므로 우리의 일원종지(一圓宗旨)와 사은사요(四恩: 天地
恩․父母恩․同胞恩․法律恩, 四要: 自力養成․智者本位․他子女敎育․公道者崇拜) 삼학팔조(三
學: 精神修養․事理硏究․作業取捨, 八條: 信․忿․疑․誠․不信․貪慾․懶․愚)는 온 천하 사람이
다 알아야 하고 다 실행할 수 있으므로 천하의 큰 도가 되나니라.㉴
<2> 참다운 도덕은 개인 ․ 가정으로부터 국가 ․ 세계까지 다 잘 살게 하는 큰 법이
니, 세계를 맡긴들 못할 것이 무엇이리요.㉵라 하여,
그 교법을 천하의 큰 도라고 자신한다. 세계를 맡겨도 능히 지도해나갈 수 있는 가르침이라
고 본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법위(法位)를 갖추어감에 있어서 불퇴전(不退轉)에 이르는 출가위
(出家位)의 승급조항에「현재 모든 종교의 교리를 정통하며」㉶라 하고,「모든 종교의 교지도 이
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자는 것이니라.」㉷ 라고 하여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3> 모든 교회의 서로 달라진 내역과, 그 근원은 원래 하나인 내역도 또한 이와 같
으므로, 인지가 훨씬 개명되고 도덕의 빛이 고루 비치는 날에는 모든 교회가 한 집안
을 이루어 서로 융통하고 화합하게 되나니라.㉸
<4>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
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저
교 이 교의 간격을 두어 마음에 변절한 것 같이 생각하고 교회 사이에 서로 적대시하
는 일도 있지마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때와 곳을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이요 다 한
집안으로 알게 되나니, 그대의 가고 오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이 알아서 하라. … 나
의 제자 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 『⼤宗經』교의품 2.(『圓佛敎全書』, 원불교출판사, 1977, 112쪽)
㉵ 같은 책, 실시품 14.(같은 책, 333쪽)
㉶ 『正典』수행편 법위등급.(같은 책, 91쪽)
㉷ 같은 책, 총서편, 교법의 총설.(같은 책, 22쪽)
㉸ 『대종경』전망품 13.(같은 책, 387쪽)

4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이러한 소태산의 종교관을 구세이념에서 보면 자신이 조직한 교리제도가 너른 세계의 많은
생령(生靈)을 건지는데 가장 적실한 가르침이며 구세 사업에는 모든 종교와 만나고 협력해나가야
한다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법통을 이어 2대 종법사(宗法師)에 오른 정산(鼎山 宋奎, 1900-1962)이 삼동윤리(三同倫理:
同源道理․同氣連契․同拓事業)를㉻ 밝히고 3대 종법사인 대산(大山 金大擧, 1914-1998)이「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 밝힌 것이 이러한
성격을 증명한다.
둘째, 불교에 연원(淵源)하여 만 종교 만 사상을 아우르는 태도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태산은
구도(求道)에서 대각(大覺)에 이르도록 까지 고향에서 생활인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구도과정에
서는 깊은 선(禪)적 경지에 들고「이 일을 장차 어찌 할꼬?」하는㉯ 화두로 일관하기도 하였다.
1916년 4월 28일 대각을 이룬 후, 그는 모든 종교의 경전을 열람하는데 그 가운데 『금강경(金剛經)』
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밝힌다.
<5> 서가모니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道를 얻
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 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 장차 회상(會上)을 열 때
에도 불법(佛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당시 불교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불교관은 불법(佛法)과
불교(佛敎)를 크게 대별하여 전자를 계승 선양할 가르침으로, 후자를 제도적으로 개선할 대상으로
보는 특징이 있다.㉲
<6> 그가 보는 불법은 천하의 큰 도(道)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
㉹ 같은 책, 전망품 14.(같은 책, 388쪽)
㉺ 졸고,「원불교에서 본 종교 간의 대회원리」(『한국종교연구』4, 서강대 종교문제연구소, 2002, 46
쪽) 참조.
㉻ 1961년 4월에 발표한 涅槃 偈頌으로, 그 내용은『⿍⼭宗師法語』 도운편 34-37(같은 책,
988-991쪽)에 밝혀 있다.
㉮ 『⼤⼭宗師法語』 구세편 15.(자문판, 대산종사법어편수위원회, 2006, 584쪽) 1971년 원불교반백
년기념대회 표어이며, 1989년 2월의「민족평화를 위한 종교인 회의」에 메시지로 보내고, 열반에
이르러 게송으로 삼았다.
㉯ 『圓佛敎敎史』제1편 2장, 대종사의 입정.(『원불교전서』1036-1038쪽)
㉰ 『대종경』서품 2.(같은 책, 95쪽)
㉱ 소태산은「불교가 이 나라에서 여러 백년 동안 천대를 받아 온 끝이라 누구를 막론하고 불교의 명
칭을 가진 데에는 존경하는 뜻이 적게 된지라」(같은 책, 서품 15, 같은 책, 102쪽) 하여, 실상을
파악하고 있다. 그가 1920년에 초안, 출판한『조선불교혁신론』(불법연구회, 1935)은 이러한 그의
불교에 관한 관점을 집약한 것이다.
㉲ 한종만,「원불교의 불교관」(수위단사무처 편,『원불교사상시론』I, 원불교출판사, 1982, 74쪽) 참조.
불법과 불교를 혼용한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교법은 계승하고 제도는 개혁한다는 관점이 드러난
다.

5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 고 하여,
만 종교에서 뛰어난 가르침으로 평가한다. 물론 미래의 불법은 과거의 불법과는 달라야 하며,
그 달라진 불법은 장차 세계의 주교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것이 소태산이 말하는 불
교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이다.
<7> 그는 과거에는 유․ 불․ 선(儒佛仙) 삼교가 각각 그 분야만의 교화를 주로 하
여 왔지마는 앞으로는 그 일부만 가지고는 널리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므로 우
리는 이 모든 교리를 통합하여 수양 ․ 연구 ․ 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또는 영육쌍
전(靈肉雙全) ․ 이사병행(理事竝行) 등 방법으로 모든 과정을 정하였나니, 누구든지
이대로 잘 공부한다면 다만 삼교의 종지를 일관할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의 교
리며 천하의 모든 법이 다 한 마음에 돌아와서 능히 사통오달의 큰 도를 얻게 되리
라. 고㉵ 본다.
앞으로의 가르침은 불교에서 비롯하여 유․불․도 삼교사상의 종지를 통하고 만 종교 만 사
상과 원융회통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신개벽(精神開闢)으로 본 한국 신종교의 개벽사관의 수용 태도이다. 그것은 1960년 수운(水
雲 崔濟愚, 1824-1864)의 동학(東學) 창도로 비롯된 신종교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선언한 시대변화
사조를 계승하는 성격을 지닌다.
개벽이란 암흑과 혼돈에서 천지가 열린다는 뜻으로, 선천세계가 끝나고 대명천지가 도래한다는
뜻에서 후천개벽이라고도 한다. 후천개벽이란 인간중심의 문화개벽으로 새로운 문명세계를 가져오게
되며 한국 신종교에서는 이를 천운의 회복으로 본다.
수운과 함께 연담(蓮潭 李雲圭, 1804-1861-?)에게 배웠다고 하는 일부(一夫 金恒, 1826-1898)는
1881년 『정역(正易)』을 완성함으로써 선후천 교역(先後天交易)을 맞이했다고 술하고 있다.㉶
수운은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윤회(輪廻)같이 둘린 운수 내가
어찌 받았으며/ 척조창생(億兆蒼生) 많은 사람 내가 어찌 높았으며/ 이 세상 없는 사람 내가 어찌
있었던고…」라㉷ 하여 삼교의 교화력이 쇠멸했음을 분명히 한다. 개벽의 원리에서 보면 삼교는
선천시대의 구세이념이요, 그러한 시대가 지나 운(運)이 다했다는 논리이다.㉸
㉳ 『대종경』서품 3.(『원불교전서』95쪽)
㉴ 같은 책, 서품 15(같은 책, 103쪽) 참조.
㉵ 『대종경』교의품 1.(같은 책, 111-112쪽)
㉶ 李正浩 저,『正易硏究』(국제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76),
200쪽에서는 수운 ․ 일부 ․ 광화(光華 ⾦致寅, 1855-1895)의
3인을 연담의 동학제자로 소개하고 있다. 연담은 기존종교인
유․불․선 삼 교 가운데 수운에게는 선, 일부에게는 유, 광화에
게는 불을 전수했다고 한다.
㉷ 『⿓潭遺詞』敎訓歌.

6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수운은 결국 하느님을 직접 모실 수 있다는 자신을 갖는다. 수운은 교화력을
잃은 유교와 불교에 대하여 당시 세력을 확대하던 서학(西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운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 유 ․ 불 ․ 도 삼교의 문화풍토를 수용하면서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추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선천은 억압과 폭력으로 불평등과 부조리가 가득 차서 어둡고 괴로운 시대이며, 후천은 협력과
조화에 의해 평등과 평화가 가득 차서 밝고 서로 잘 사는 시대이다. 묵은 세상이 가고 새 세상이
오는 것은 민중의 바램이다.
이 후천개벽시대가 오는 과정에 있어서 수운은 괴질(怪疾)이 존재한다고 보고, 증산(甑山 姜一淳,
1871-1909)은 병겁(病劫)을 말하고 있는데, 소태산은 이를 정신개벽으로 주장한다.㉺ 수운에서
비롯되어 한국 신종교운동에 있어서 공유되었던 개벽사관을 소태산은 정신개벽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신개벽은 소태산의 개교, 즉 원불교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대각을 이룬 그의 시대사회를 바라보는 코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8> 대종사(소태산) 당시의 시국을 살펴 보시사 그 지도강령을 표어로 정하시기를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하시니라.㉻
<9>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
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
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이 가운데 정신과 물질을 아울러 나가는 도학과학병진론(道學科學竝進論)이나 신앙과 수행(훈련)
이라는 자타력병진론(自他力竝進論) 등 그의 다양한 관점의 단초를 열고 있다. 정신개벽이란 달라진
시대환경 아래서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므로 개인에게는 물론 사회에 있어서의 치유에까지
전개될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소태산의 도학과학병진론을 치병과 관련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0> 이운외(李雲外)의 병이 위중하매 그의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와 대종사께 방책
을 문의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곧 의사를 청하여 치료하라. 하시고, 얼마 후에 병이

㉸ 李世權편저, 東學思想(경인문화사, 1987) 82쪽 참조.
㉹ 崔東熙, 水雲 (金用天·崔東熙저 天道敎, 1973,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57쪽) 참조.
㉺ 김홍철, 「근세 한국종교사상에 있어서의 病觀 연구」(동저, 圓佛敎思想論考, 원광대학교출
판국, 1980, 307쪽 이하) 참조.
㉻ 『대종경』서품 4.(『원불교전서』 95-96쪽)
㉮ 『정전』총서편, 개교의 동기.(같은 책, 21쪽)

7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평복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전에 운외가 병이 중하매 나에게 먼저 방침을 물은
것은 그 길이 약간 어긋난 일이니라. 나는 원래 도덕을 알아서 그대들의 마음병을 치
료해주는 선생이요, 육신 병의 치료는 각각 거기에 전문하는 의사가 있나니, 이 앞으
로는 마음병 치료는 나에게 문의할지라도, 육신병 치료는 의사에게 문의하라. 그것이
그 길을 옳게 아는 것이니라.㉯
그는 병을 육신병과 마음병으로 구분하고 육신병 담당은 의사이므로 병원을 찾고, 자신은 마음병
치료인이므로 그에 관해 문의하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현대 의학을 인정 수용하는 태도가
분명해진다. 그의 개벽사관은 물질문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용할 인간의 자주력이
필요하며, 그것을 정신개벽이라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태산의 종교관은 개벽사관을 통한 시대인식과 불법에 연원한 교법으로 기존종교의
구세이념과 융통조화하는 원리이다.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이웃종교와 공존하면서 공동선(共同善)을
구축하는 종교협력의 관점이 그의 종교관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원불교 교리상의 마음공부
소태산의 구세이념은『정전(正典)』에 그 대체가 담겨 있다. 초기교서인『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
要論)』(1927)과『육대요령(六大要領)』(1931)을 거쳐 그의 열반을 앞둔 일제말기에『불교정전(佛
敎正典)』(1943)으로 발간했던 것을, 1962년에 현재의 체제로 결집하였다.㉰ 원불교 교리체계는『정
전』의 머리에 수록된 「교리도(敎理圖)」㉱를 통해 그 구성체계가 드러나며, 마음공부 원리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리도」는 중앙 상단의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 〇)을 정점으로 3등분하고 있다. 중앙은
법신불 원리를 설명하고, 오른 쪽은 수행문, 왼쪽은 신앙문을 배치하고 있다. 수행문에는 삼학과
팔조 그리고 아래에 수행의 강령인「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을 배치하고 있는데 「무시선
무처선」은 「언제나 선, 어디서나 선」으로 번역한다.
신앙문에는 사은과 사요 그리고 아래 신앙의 강령인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을
배치하고 있는데,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곳곳이 부처님, 일마다 불공」으로 번역한다. 아울러
이들을 둘러싼 네모서리 밖에 사대강령(四大綱領)인 정각정행(正覺正行) ․ 지은보은(知恩報恩) ․
㉯ 『대종경』실시품 31.(같은 책, 339-340쪽)

때가 급하여 이제 만전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나, 나의 일생 포
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
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 만대에 길이 전하게 하라.」(『대종경』 부촉품

㉰ 『불교정전』을 편수하고 소태산은「

3, 같은 책, 400쪽)고 한 것처럼 당시에 골격이 갖추어졌다. 그 가운데 일제시대의 제약을 털어
내는 등의 작업을 거친 것이『정전』이다.『정전』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時湧,「원불교 교리성립사
연구-『정전』결집을 중심으로」(원광대 박사논문, 2004) 를 참조.
㉱ 『정전』모두 소수.「교리도」는『육대요령』(1931)에 처음 등장하며, 현재의 그것은 1943년 1월에 제
정되었다.(『대종경』부촉품 7장)

8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각각 배치하여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교리도」에 나타나는 일원상은 소태산의 대각에 의해 체현된 근원적 진리의 상징으로, 「일원(一
圓)은 법신불이니, 우주만유의 본원(本源)이요,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이다.」㉲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일원이란 일원상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진리당체로, 일원즉사은(一圓卽四恩)이며, 일원을
양성(養性) ․ 견성(見性) ․ 솔성(率性)의 세 가지 속성으로 배대한 것이 삼학이다.㉳ 신앙문인 사은사요를
통해서는 복족(福足), 수행문인 삼학팔조를 통해서는 혜족(慧足)으로, 복혜양족(福慧兩足)하면 부처
가 된다는 원리이다.
이러한 교리의 강령이「일상수행의 요법」9조로, 각 조는 다음과 같다.
<11>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
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
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
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6.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이들 각조를 교리에 배대하면 1-3조는 삼학, 4조는 팔조, 5조는 사은, 6-9조는 사요에 해당한다.
9조의 실천강령 속에 주요 교리를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마음공부의 요체로 간주된다.
마음공부는 오늘날 원불교 신앙․수행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공부에 관련하여 소태산은 말한다.
<12> 지금 세상은 물질문명의 발전을 따라 사․농․공․상에 대한 학식과 기술이 많이
진보되었으며, 생활 기구도 많이 화려하여졌으므로 이 화려한 물질에 눈과 마음이 황
홀하여지고 그 반면에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은 극도로 쇠약하여 주인된 정신이 도리
어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크게 근심될 현상이라.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물질이라도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물질이 도리
어 악용되고 마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재주와 박람박식(博覽博識)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재주와 박람박식이 도리어 공중에 해독을 주게 되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환경이 도리어 죄업을
돕지 아니하는가.
㉲ 같은 책.
㉳ 韓鍾萬,「⼀圓相眞理의 相卽性」(원불교사상연구원 편,『일원상진리의 제연구』상(원광대출판국, 1989,
327쪽 이하) 참조.
㉴ 『정전』수행편, 일상수행의 요법.(『원불교전서』 54쪽)

9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그러므로 천하에 벌여진 모든 바깥 문명이 비록 찬란하다 하나 오직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종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낮게도 하나니,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
면 모든 문명이 다 낙원을 건설하는 데 보조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요, 마음을 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면 모든 문명이 도리어 도둑에게 무기를 주는 것과 같이 되나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은 새로이 각성하여 이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用心法)을 부
지런히 배워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이타(自利利他)로 모든 것을 선용하는 마음의 조
종사가 되며, 따라서 그 조종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양면으로 한 가지
참문명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노력할지어다.㉵
<13>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
그는 구세이념의 본질이 용심법에 있고, 이를 수행과 학습을 아우른 개념으로 마음공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정산 역시 같은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14> 송죽(松竹)의 가치를 상설(霜雪)이 드러내듯이 공부인의 가치는 순역경계가 드
러내나니, 각자에 난관이 있는 때나 교중에 난관이 있는 때에 그 신앙의 가치가 더 드
러나고 그 공부의 가치가 더 드러나나니라. 국가에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은 유사시에
쓰자는 것이요 도인이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경계를 당하여 마음 실력을 활용하자는
것이니라.㉷
<15> 학인이 묻기를 “이 세상에서 어떠한 공부가 제일 근본되는 공부가 되나이까.”
말씀하시기를 “마음공부가 제일 근본되는 공부가 되나니라.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를
총섭하나니, 마음공부가 없으면 모든 공부가 다 바른 활용을 얻지 못하나니라.” 또 묻
기를 “이 세상에서 어떠한 기술이 제일 근본되는 기술이 되나이까.” 말씀하시기를 “인
화하는 기술이 제일 근본되는 기술이 되나니라. 사람 잘 화하는 기술은 모든 기술을
총섭하나니 인화하는 기술이 없으면 모든 기술이 다 활용되지 못하나니라.”㉸
<16> 과수를 기르는 데에도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그 과수가 잘 자라고 훌륭한 결
실을 보게 되는 것 같이, 사람의 뿌리는 마음이라 무엇 보다 먼저 마음공부에 힘써야
훌륭한 인격을 이루나니, 이 마음공부를 여의고 어찌 혜복의 결실을 바라리요.㉹
원불교에서는 이러한 마음공부 개념을 정리하여 1977년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래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들에는 마음공부의 개념 작업에서부터 마음이 무엇이며, 마음공부의
㉵ 『대종경』교의품 30.(같은 책, 130-131쪽)
㉶ 같은 책, 요훈품 1.(같은 책, 315쪽)
㉷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31.(같은 책, 878쪽)
㉸ 같은 책, 무본편 6.(같은 책, 907쪽)
㉹ 같은 책, 무본편 9.(같은 책, 908쪽)

10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대상과 방법, 그리고 공부가 이루어지는 이른바 경계와 마음의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내창은 이러한 선행 연구에 바탕하여 원불교의 마음공부를 「1) 경계에 접하여, 2) 이 경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마음(객체적 자아)을, 3) 또 다른 마음(주체적 자아)이 지켜보면서, 4) 즉각적인
반응을 일단 멈추고(경계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5) 성품(자성)에 비추어, 6) 반응하는 마음이 적절한지
대조해, 7) 경계를 원불교적 가르침에 맞게 활용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Ⅳ. 마음공부와 치유
그런데 마음공부를 모든 공부의 총섭 원리로 본다면 정신개벽과 의미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개벽은 물질문명의 이기에 빠져 주체성을 상실한 현대사회에 대한 병맥진단이라는 점에서
치유를 전제한다.
은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감사생활로, 삼학수행에서 본다면「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정신수양에서부터
「천만 사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이 생기게 하는 사리연구, 그리고「모
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게
하는 작업취사공부이다.㉮
이를 요약하면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는 공부가 된다.
그러면 이러한 수행의 방법이 어떻게 치유적인 성격을 지니는가? 소태산은 정신수양의 방법으로
염불(念佛)과 좌선(坐禪)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7> 염불이라 함은 천만 가지로 흩어진 정신을 일념으로 만들기 위한 공부법이요, 순역(順逆)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법으로서 … 염불하는 사람이 먼저 이 이치를 알아서
생멸이 없는 각자의 마음에 근본하고 거래가 없는 한 생각에 대중하여, 천만 가지로 흩어지는
정신을 오직 미타일념(彌陀一念)에 그치며 순역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무위안락의 지경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곧 참다운 염불의 공부니라.㉰
㉺ 김도공,「마음공부 방법론에 대한 모색-교단 내 마음공부의 현상과 원리 비판을 중심으로-」(『원불
교사상』 24,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0, 365쪽 이하); 유명원,「단계별 마음공부 방법론에
대한 고찰-법위등급 6단계를 중심으로-」(『원불교학』 7, 한국원불교학회, 2001, 244쪽 이하); 백
준흠, 「원불교 마음공부에 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28,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4, 109쪽 이하); 김성장,「원불교 마음공부 개념에 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2005, 117쪽 이하); 고시용,「원불교 설교에 나타난 마음공부-『월간교화』를 중심으로-」(같은 책,
30, 2005, 159쪽 이하); 유정엽,「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 해석의 문제」(『원불교사상연구원 원
보』 58,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9, 203쪽 이하) 등.
㉻ 한내창,「원불교 ‘마음공부’ 정의의 한 시도」(『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176쪽).
㉮ 『정전』교의편, 삼학.(『원불교전서』 46-50쪽)
㉯ 같은 책, 수행편, 상시훈련법.(같은 책,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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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18>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이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
어 화기(火氣)를 내리게 하고 수기(水氣)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의 기운이 상쾌하
리라. … 오래오래 계속하면 필경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원적무별한 진경에 그쳐서 다시없는 심락을 누리게 되리라.㉱
염불은 마음을 무위안락에 돌아오게 하고 좌선은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의 기운이 상쾌해지
는 공부라는 것이다. 물론 수양의 구경은 군인이 전쟁에서 마음을 단련하여 부동심이 되는 기질수양(氣
質修養)과 수도인이 오욕의 경계 중에서 마군을 항복받아 순역경계에 부동심이 되는 심성수양(心性修
養)을 같이 얻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실지의 경계에서 단련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태산은 이처럼 마음공부를 직업생활
속에서 적극적인 실천이념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19> 한 가정의 흥망이 호주의 정신 여하에도 달려 있나니, 한 가정이 흥하기로 하
면 첫째는 호주의 정신이 근실하여야 할 것이요, 둘째는 집안사람들이 서로 화합하여
모든 일에 힘을 모을 것이요, 세째는 무슨 실업이든지 먼저 지견과 경험을 얻은 뒤에
착수할 것이요, 네째는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준칙으로 순서 있게 사업을 키워 나갈
것이요, 다섯째는 폐물 이용의 법을 잘 이용할 것이요, 여섯째는 원업(元業)과 부업(副
業)을 적당하게 하며 생산 부분을 서로 연락 있게 할 것이요, 일곱째는 그 생산이 예
정한 목표에 이르기 전에는 그 자금을 다른 곳에 함부로 유용하지 말 것이요, 여덟째
는 목표에 달한 뒤에라도 무리한 폭리는 꾀하지 말고 매양 근거 있고 믿음 있는 곳에
자본을 심을 것이요, 아홉째는 수지를 항상 살펴서 정당한 지출은 아끼지 말고 무용한
낭비는 단단히 방지하여, 이와 같은 치가에 전력하면 그대들의 살림이 자연 불어나고
그에 따라 마음공부 하는 데에도 또한 서로 도움이 되리라.㉳
<20> 사람이 평생에 비록 많은 전곡을 벌어 놓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하나
도 가져가지 못하나니,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어찌 영원한 내 것이라 하리
요. 영원히 나의 소유를 만들기로 하면, 생전에 어느 방면으로든지 남을 위하여 노
력과 보시를 많이 하되 상(相)에 주함이 없는 보시로써 무루(無漏)의 복덕을 쌓아야
할 것이요, 참으로 영원한 나의 소유는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이니, 서원과 마음공부에 끊임없는 공을 쌓아야 한없는 세상에 혜복의 주인공이
되나니라.㉴
예컨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근실한 가운데 살림을 잘 이루면 마음공부에도 도움이 된다는
㉰ 같은 책, 수행편, 염불법.(같은 책, 60쪽)
㉱ 같은 책, 수행편, 좌선법.(같은 책, 63-66쪽)
㉲ 『대종경』수행품 16.(같은 책, 151쪽) 참조.
㉳ 『대종경』 인도품 41.(같은 책, 206-207쪽)
㉴ 같은 책, 천도품 17.(같은 책, 293-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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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것이다. 치유에서 본다면 일탈에 의한 방법이 아니라 건전하고 적극적인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혜복의 주인공이란 신앙과 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인물을 가리킨다.
마음공부에 있어서 직업을 중시하는 것은 정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태산은 사회도 사람처럼 병이 들며, 치유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밝힌 사회병의 진단과 처방은 다음과 같다.
<21> 지금 세상은 밖으로 문명의 도수(度數)가 한층 나아갈수록 안으로 병맥(病脈)
의 근원이 깊어져서 이것을 이대로 놓아두다가는 장차 구하지 못할 위경에 빠지게 될
지라, 세도(世道)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근심을 금하지 못하게 하는 바
이니라. 그러면, 지금 세상은 어떠한 병이 들었는가. 첫째는 돈의 병, 둘째는 원망의
병, 셋째는 의뢰의 병, … 네째는 배울 줄 모르는 병, … 다섯째는 가르칠 줄 모르는
병, … 여섯째는 공익심이 없는 병이니 … 이것이 곧 큰 병이니라.㉶
<22> 그런즉 이 병들을 고치기로 할진대 무엇보다 먼저 도학(道學)을 장려하여 분
수에 편안하는 도와, 근본적으로 은혜를 발견하는 도와, 자력생활 하는 도와, 배우는
도와, 가르치는 도와, 공익 생활하는 도를 가르쳐서 사람 사람으로 하여금 안으로 자
기를 반성하여 각자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게 하는 동시에, 선병자의(先病者醫)라는 말
과 같이 밖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병든 세상을 치료하는 데에 함께 노력하여야 할지니,
지금 세상의 이 큰 병을 치료하는 큰 방문은 곧 우리 인생의 요도인 사은사요와 공부
의 요도인 삼학팔조라, 이 법이 널리 세상에 보급된다면 세상은 자연 결함 없는 세계
가 될 것이요, 사람들은 모두 불보살이 되어 다시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낙원을 수용하게 되리라.㉷
그가 밝힌 사회의 병은 돈의 병, 원망의 병, 의뢰의 병, 배울 줄 모르는 병, 가르칠 줄 모르는
병, 공익심 없는 병의 여섯 가지이다. 사람의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같이 사회의 병도 그대로 두면 사회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치유하는 방법은 도학을 장려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는 분수에 편안하는 도,
은혜를 발견하는 도, 자력 생활하는 도, 배우는 도, 가르치는 도, 공익 생활하는 도를 가르쳐 안으로
병든 마음을 다스리고 밖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치료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려할 도학은 구세이념인 교리강령이라고 그는 본다. 아울러 치유된 세상은「모두 불보살이
되어 다시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낙원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치유된 삶이란
불보살과 천국, 곧 주체와 환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 정산은「신․분․의․성을 마음공부에 들이대면 삼학공부에 성공하고 사․농․공․상에 들이대면 직업
에 성공하나니라.」(같은 책, 권도편 32)
㉶ 『대종경』교의품 34.(같은 책, 134-135쪽)
㉷ 같은 책, 교의품 35.(같은 책, 135-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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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Ⅴ. 결어
이상에서 원불교의 교리구조에 유의하면서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소태산은 물질문명이 범람하던 시기(1916)에 대각을 이루고 원불교를 창립하였다. 교통․통신이
발달하여 지구촌사회를 이룬 가운데 동서의 종교가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전개된 그의
종교관은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에 대해 수용․조화하면서 이를 포월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불교와 만나 불법에 연원을 정하고 유․불․도 삼교를 비롯하여 만 종교 만
사상과의 원융회통을 구하며, 한국 신종교운동에 있어서 기축이 된 개벽사관을 수용하여 정신개벽을
제창하고 있다. 원불교 교리에 나타난 영육쌍전 ․ 이사병행 ․ 도학과학병진 등의 병진이념이 이러한
소태산의 구세이념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원불교 교리는「교리도」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종지인 법신불일원상을 수행문과 신앙문
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수행문에 삼학팔조, 신앙문에
사은사요를 배치하여 전자를 통해 혜(慧), 후자를 통해 복(福)을 원만하게 갖추도록 한다. 따라서
일원상에 바탕한 삼학팔조, 사은사요는 원불교 교리의 기본강령이며, 원불교의 마음공부도 이것이
주체가 되어 있다. 이를 몰록 드러낸 것이「일상수행의 요법」이다.
마음공부는 여러 가지 개념화가 이루어져 있지만『정전』의 용어를 빌린다면「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계에 물들지 않는 조촐한 한 마음을 간직하는 노력은
종교인의 신앙 ․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사를 잘 영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소태산은 보고 있다.
세상사를 잘 하면 마음공부가 잘 되고, 마음공부가 잘 되면 세상사가 잘 영위되도록 하는 원리이다.
그리고 마음공부로 치유된 세상은「불보살과 천국」의 표현처럼, 인간과 환경이 함께 거듭난 이상의
낙원이라는 것이다.
弓山達也는 최근의 뉴에이지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1990년대 이후「치유」가 강조되는 사회경향
에 주목하고, 특히 젊은이 문화를 분석하면서 그것을 사람의 몸과 마음을 둘러싼 환경 ․ 우주를
포함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최근의 종교나 신비 주술에의 불신감․무관심의 결과이며, 정신성이나 마음에의 관심층이
종교 ․ 신비 주술로부터 심리학 등의 다른 섹터로 이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뉴에이지가 베트남
전쟁 ․ 환경파괴 ․ 인간소외라고 하는 현대사회의 병소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부터 일어난 것에
비해 일본은 그러한 강인함이나 사회성은 볼 수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도 신영성운동이 전개된 만큼 탈종교적 경향 등 이와 유사한 사조가 존재할 것이다.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도 이러한 사회사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용어에서부터 원불교라는 종교적 이미지를 벗어나 생활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담없이 만날 수
㉸ ⼸⼭達也,「젊은이 ⽂化에 있어서 治癒」(『한국종교』 28,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2004, 297쪽 이
하) 참조.

14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2008년에 들어 원불교에서는「마음공부연구소」㉹를
발족하였다. 병든 인간, 병든 사회에서 치유주체 보다는 치유자체가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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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공부연구소는 2008년 12월 11일에 개원하였다.「종교색에 거부감을 갖는 불특정 다수를 위
한 교화방안으로 마련한 것」(『원불교신문』 2008. 12. 19)이라 발족 의의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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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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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최현민 수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우교수, 사랑의 씨튼수녀회)

1.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양 교수님은 논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을 같은 맥락 안에서 해석
하고 있다. 신종교는 물리적 시설과 신자공동체, 교계제도, 집단적인 예배의식 등을 고루 갖
춘 ‘보이는 종교’인데 반해 신영성운동은 그런 것을 갖추지 않은 ‘보이지 않는 종교’ 형태로
되어 있다.
기공, 단전, 초월명상 등은 건강운동을 표방하지만 분명 종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기에
신영성운동이라 불리 운다. 서구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뉴에이지운동이나 일본의
정신세계도 여기에 속한다.
21세기는 영성 시대라고 할 만큼 ‘영성’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대영성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정신수련을 통해
피폐해진 영육을 치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명상이
나 정신수련 뒤에 개인주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영성운동은 초자연적 힘이나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는 대신 자율적 개인의 각성에
의한 영성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종교가 인간 본래의 영성을 억압해 왔다고 보
고,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영성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현대인들이 신영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신영
성운동이 개인에 중점을 두어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뉴에이지에서는 환생(還生)을 강조한다. 인간
이 환생을 거듭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환생을 강조하면
서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의식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이
와 같이 신영성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신(神)중심에서 우주
적 인본주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의 본령은 자기의 본래성-그리스도교에선 하느님의 모상, 불교에선 불성(佛性), 유교에
선 천성(天性)이라 함-을 회복함에 있다. 이러한 자기 본래성의 궁극적인 완성은 이웃과 세
상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개인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신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삼라만상과 깊은 존재적 연대감을 지닌 ‘관계적 존재’ 곧 ‘공동체적 존
재’임을 자각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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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이 논문에서 신영성운동과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정신적 치유’라
는 측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원불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마음
공부’가 신영성운동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2.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마음공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원불교를 포함한 신종교를 어떤 시각으
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자 한다. 사회학자인 노길명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
한바 있다.
“신종교는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체제 모순과 부조리에 대응하고 그러한 모순과
부조리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성종교의 기능적 한계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따라서 신종교는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기성
종교는 자신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신종교에 대해 유사종교, 사이비종교, 사교 이
단이라고 하여 그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대립과 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상호인식은 다종교문화를 지닌 한국 땅에서 살아가
는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최준
식 교수는 “종교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척도,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영혼 곧 성숙을
목표로 하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신종교를 접할 때 이런 척도가 필요하며, 모험적일지라도 서로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본다.
원불교는 1916년 창립된 신종교이면서도 한국 내 350여개의 신종교 교단 중 현재 3대 기
성종교인 불교 개신교 가톨릭 다음으로 많은 신도수를 지닌 종단으로 성장해 왔다.㉮ 그 이
유 중 하나로 원불교가 지닌 건전한 종교성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공
부는 원불교 교리와 수행의 핵심을 담고 있기에 원불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공부에 관해 몇 가지 여쭤보고자 한다.
1) 본 논문에서는 마음공부를 원불교의 교리도에 배치된 ‘신앙문과 수행문’ 양쪽을 아우르
는 마음수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앙문은 사은(四恩)과 사요(四要)를 통해, 수행문은 삼학
(三學)과 팔조(八條)를 통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신앙문과 수행문을 통한 실천은 궁극적으
로 ‘恩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恩사상이 원불교의 중심이 된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셨으
면 한다.
2) 본 논문의 결어에서 양 교수님은 마음공부는 신앙문, 수행문 양쪽을 함께 병행해서 닦
㉺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2쪽.
㉻ 같은 책, 50쪽.
㉮ 1998년 원불교 종교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른 것인데 어떤 경우는 교단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
을 파악하기 어려워 300에서 400개 정도라고 막연히 보기도 한다.(같은 책, 1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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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는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신앙문이 타력문이라면, 수행문은
자력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수행실천에서는 신앙문보다는 수행문
이 더 강화된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마음공부가 정신개벽을 지향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기에 자력수행이 더 강조된 것인가? 아니면 신앙문을 강조하다보면 타력신앙에 떨어지
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인가?
3) 양문(兩門)의 수행방법이 지닌 치유적 성격으로 ‘염불과 좌선’을 드셨는데 이는 불교에
서 행해지는 수행과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또한 마음공부에 대
한 이웃종교인들의 호응도나 참여도는 어느 정도인가?

3.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궁극적 진리,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본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의 종교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나와 우주의 합일체험’이라 할 수 있다. 모
든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일체중생의 본성은 그것과 하나이며, 같은 근원으로
비롯된 모든 만물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원불교 신앙강령인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대할 때마다 불공을 드리라’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도 이런 관점에
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양 교수님은 이러한 법신불 일원상을 종교의 궁극적 체험으로 보면서, 불교의 佛, 유교의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 도교의 무위자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이러한 절대적 경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차원은 같다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선생님은 하
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느님은 있음과 없음을 넘어선 ‘존재 그 자
체’, 불교의 공(空)과 만날 수 있는 경지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 실재는 비인격성과 인격성의 이원론적 사유까지도 넘어서야 하기에
이를 다 포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강조하는 측면
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고, 불교는 비인격적인 면을 강조한다.
공(空), 연기(緣起), 법신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서의 법신불은 어느 면에 더 강조
점을 두고 있는가?
원불교에서 매일 아침, 저녁 드리는 기도문이나 참회정진 기도문, 그리고 천도의식 기도문에는
“법신불 사은이시여”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故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에서 볼 수
있었던 원불교 천도재에서 의식을 집전하신 교무님께서 “법신불 사은이시여”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기도문에서 부르는 법신불 사은은 인격적인 측면을 보여주나 마
음공부를 통해 깨닫고자 하는 법신불 일원상은 비인격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법신불이 지닌 인격성과 비인격성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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