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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4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기자명 오강남
입력 2009.09.22

들어가면서

《불교평론》에서 요청한 원고의 제목은 ‘도마복음 등 외경과 불교와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최근에 펴낸 《도마복음》 풀이 책1)을 중심으로 해서 《도마복음》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앞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도마가 인도로 갔던가, 도마와 인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역사적 진위를 밝히는 작업 등은 이 글의 범위 밖의 것으로서 논의에서 제외됨을 처음부터 밝히는 바이다.

심층에서 만나다

세계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각 전통에는 두 가지 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쉬운 표현으로 하면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라 할 수 있다. 서양 말로는 엑소테릭(exoteric)과 에소테릭(esoteric)이라 하는데, 불교적 용어로 현교적(顯敎的) 차원과 밀교적(密敎的) 차원이라 할 수 있을까.

표층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경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종교를 자기중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경전의 문자적인 뜻 너머에 있는 더 깊은 뜻을 깨쳐 나가려고 노력하고,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불교에도 표층 불교, 심층 불교가 있고, 그리스도교에도 표층 그리스도교, 심층 그리스도교가 있다. 물론 각 종교마다 표층과 심층 중 어느 것이 얼마나 더 두꺼우냐 하는 비율상의 차이점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그 명칭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성불, 곧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심층을 강조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자들 모두가 다 성불을 궁극 관심사로 여기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많은 불자들이 기복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라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표층적인 관심에서 시작하여 심층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한국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이 표층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이라는 심층의 차원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 뿐 아니라 심층을 이야기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이단이라든가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다른 점 한 가지는 불교인들의 경우 자기는 아직 표층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깨달음 같은 심층을 목표로 삼고 있거나 심층적인 불교를 받들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리스도교의 심층적 차원을 이상으로 여기거나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이들을 배척하고 정죄한다는 사실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유영모, 함석헌 선생님을 백안시하거나 배척한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이 한국 그리스도교에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한국 그리스도인들만의 책임이나 잘못은 아니다. 왜 그런가?

《도마복음》의 배경

1세기 그리스도교가 발생하고 2, 3세기에 걸쳐 발전하면서 그리스도교 안에도 몇 갈래의 신앙 형태가 생겨났다. 지금 우리의 분류를 적용하면 초대교회에 크게 표층적인 그리스도교와 심층적인 그리스도교가 병존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믿는 믿음의 단계에 만족하는 표층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이런 단순한 믿음의 단계를 지나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깨달음의 단계를 추구하는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들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물’로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로지 ‘첫 단계’에 불과하므로 이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 스스로도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마3:11, 눅3:16) 세례를 주리라고 예언했는데, 바로 이런 세례를 받아 영적으로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층적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물로 세례를 받았을 때는 하느님을 창조주나 심판자로 믿고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살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제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되고 자기들을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질투하고 진노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새로운 하느님, 우주의 질서로서의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받는 제2의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라 불렀는데, 이는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은 ‘놓임’이나 ‘해방’, ‘해탈’을 뜻하는 말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표층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는 ‘믿음’을 강조한 데 반하여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을 그들은 ‘그노시스(gn굅sis)’라 불렀다. 한문으로 이를 보통 ‘영지(靈知)’라고 번역하고, 영어로는 ‘knowledge’라 옮기는데, 우리말로 ‘깨침’ 혹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원의에 가깝다. 그노시스는 불교의 ‘반야(般若, praj괴켥)’ 곧 혜(慧), 명(明), 지혜(智慧), 현대어로 통찰, 꿰뚫어 봄, 직관 등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속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 내에 있는 이런 소수의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다. 이런 소수의 과격한 주장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표층 신도들과의 차별화를 불러오기 때문에 교회 내에 불필요한 분열을 조장한다고 보았다. 특히 이들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 내의 계급제도라든가 조직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성향을 보이므로 교회의 권위와 일치를 저해하는 세력으로 여겨졌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불행하게도 심층 그리스도교가 억압받고 박해받는 소수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4세기 이런 심층 그리스도교는 지하로 내려가거나 쇠퇴하고 만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등장 때문이었다. 4세기 초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예수를 하느님과 ‘동질’이라 주장하던 아타나시우스가 예수의 인성을 주장하던 아리우스(Arius)파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타나시우스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다양한 신앙 형태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을 드러내고 있던 그리스도교 문서들을 일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쪽복음처럼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이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신약(新約)이라 부르는 그리스도교 경전이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 기준에 따라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던 깨달음 중심의 문서들은 물론 이런 파기 처분의 대상 1호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이런 문헌들을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나중에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속에 숨겨놓았다.

이렇게 숨겨진 문서가 1,600년이 지난 1945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0Km 떨어진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열세 뭉치로 묶여 있는 이 파피루스 서류 뭉치들 속에는 모두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가지고 있는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이 있었다.

이런 문서 중 가장 크게 주목 받은 것이 《도마복음》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도마복음》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22세에 옥스퍼드대학교 교수가 되고, 그 후 신비주의에 관해 방대한 저술을 낸 앤드루 하비(Andrew Harvey) 같은 이는 1945년에 발견된 이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고까지 하면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마복음》을 읽을 경우 그리스도교에는 표층적인 신앙 형태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심층적인 차원이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던 종래까지의 일반적 오해를 불식(拂拭)시키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침’을 강조하고 있고, 거기 나오는 예수는 스스로 깨친 이로서 제자들에게 ‘깨침’을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의 특징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은 사본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해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라 여겨지는데, 그렇게 본다면 《도마복음》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적어도 10년 내지 20년 정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된다.

《도마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114절의 간단간단한 예수님의 말씀만 적어 놓은 ‘어록’이라는 점이다. 이 말씀들 중 약 50% 정도가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서들의 말씀과 평행을 이룬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예수님의 기적, 예언의 성취, 재림, 종말, 부활, 최후 심판, 대속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 대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굅sis)’을 통해 내가 새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는 점이다.

특히 《요한복음》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요한복음》에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 《도마복음》에는 ‘믿음’이라는 낱말이 딱 한 번, 그것도 제자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깨침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불교나 기타 세계 신비주의 종교 전통과 궤를 같이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도마복음》과 불교는 다 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필자는 그동안 논문이나 책을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울 것은 배우고 가르칠 것은 가르쳐 주는 협력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화를 한다면 무엇보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의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이곳저곳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2)

이제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도마복음》 중에서 불교의 기본 가르침과 맥를 같이하는 것 몇 구절을 인용하여 불교와 연관해서 살펴보면서, 이런 작업을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어떻게 더욱 활기 있게 진행될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계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하고 기원해본다.

《도마복음》 제22절: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하고,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하고, 높은 것을 낮은 것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손을 가지고, 새로운 발을 가지고, 새로운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도마복음》의 핵심과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도마복음》 제4절에서 늙은이라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젖먹이 갓난아기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 복음서에도 같은 말이 있는데, 거기는 어린아이가 갓난아기라는 말이 없다. 또 천국에 들어가는 요건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마18:4) 것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서는 자기를 낮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말이 없다. 그와는 달리 《도마복음》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서 ‘젖먹이 갓난아기같이 됨’이라고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며, 이 젖먹이 갓난아기들이야말로 ‘둘을 하나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생각은 제4, 22절에 나왔고, 23, 48, 106절에도 계속 나온다. 무슨 뜻인가?

첫째, 물리적으로 갓난아기는 남성의 아버지와 여성의 어머니 ‘둘이 하나가’ 되어 생긴 결과다. 그 아이도 나중에는 대부분 남성이나 여성이 되겠지만, 아직 할례를 받기 전의 갓난아기는 남녀로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 합일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반대같이 보이는 것을 한 몸에 합치고 있는 종합이다.

둘째,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으로 아이는 아직 나와 대상을 분간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는 상태다. 즉, 주객(主客)이 분화되지 않았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는 ‘내외(內外), 상하(上下), 고저(高低), 자웅(雌雄)’ 등 일견 반대되고 대립되는 것 같은 것을 반대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조화와 상보의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특성으로서, 이런 특성을 가져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태극기 가운데 붉은색(양)과 파란색(음)으로 된 태극의 음양(陰陽)에서 음과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음이냐 양이냐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이나 이항대립(二項對立)식 ‘냐냐주의(either/or)’의 시각으로는 실재의 진면목을 볼 수 없고, 음이기도 하고 양이기도 하며 동시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도도주의(both/and, neither/nor)’적 태도를 가질 때 사물의 전체를 본다고 한다. 음과 양을 독립된 두 개의 개별적 실체로 보지 않고 한 가지 사물의 양면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요즘 말로 고치면 ‘초이분법적 의식(trans-dualistic consciousness)’을 갖는다는 것이고, 좀 더 고전적인 말로 하면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가 말하는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발견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실 세계의 여러 종교에서 ‘양극의 조화’처럼 중요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태극 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위로 향한 삼각형과 아래로 향한 삼각형을 포개놓은 유대교의 ‘다윗의 별’이라든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교차시킨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나, 두 원을 아래위로 반반씩 겹쳐놓고 그중 겹쳐진 부분을 잘라 만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 상징, 불교 사찰에서 보는 만(卍) 자 등이 모두 이런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제23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여기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 명 중 한 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보다 더 어려운 셈이 아닌가.

힌두교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즉, 깨달음의 길(j괴켥na marga), 신애(信愛)의 길(bhakti marga), 행함의 길(karma marga)이다. 깨달음의 길이란 우주의 실재를 꿰뚫어 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를 통해 해방과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고, 신애의 길은 어느 특정한 신이나 신의 현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받드는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행함의 길이란 도덕규범이나 규율을 잘 지키거나 남을 위해 희생적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 가지 구원의 길 모두 자기중심적 자아를 극복함으로써 새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실행하기에 상대적으로 어려운 길과 쉬운 길로 나누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은 가장 가파르고 어려운 길이라 상근기(上根器)에 속하는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길은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애의 길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성불하겠다는 선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나무아미타불” 하며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종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물론 참선하겠다는 사람보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깨달음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결국 《도마복음》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얻으라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더 많았다.

그러기에《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반면 《도마복음》은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식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의 심층 차원을 알아볼 기회가 없던 일반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인기 품목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문맹률이 97퍼센트 이상이던 고대 사회와 달리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나 필자도 한 세대 전에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욜2:28)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가물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튀듯’이 등장하리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심층적 종교의 태도를 의미한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도 근래에 펴낸 그의 책 《The Silent Cry》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장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 참선이나 명상이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현상이 이런 흐름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8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설 곳을 세상으로 정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영혼은 이런 사람의 아들들로 인해 아파합니다. 이는 이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스스로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온 목적을 천명한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니다.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한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만을 실재인 줄로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간들에게 현상계 너머에 있는, 혹은 그 바탕이 되는 실재(實在), 진여(眞如), 여실(如實), 자신의 참모습을 보도록 깨우쳐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마음의 눈이 멀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지혜와 깨달음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데, 그것을 잡지 못하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만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취해 있지만 우리의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를 깨우기 위해 일부러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면, 그리하여 심안(心眼)의 개안(開眼)이 있기만 하면, 완전한 ‘의식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고 했다.

마지막 구절은 종교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발언이다. 여기에서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이라고 할 때 ‘의식을 바꿀 것이다’라고 번역한 이 말의 원문은 콥트어 판에서도 그리스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메타노이아(metanoia)’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을 때 그 ‘회개’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메타노이아’는 어원적으로 ‘의식(noia)의 변화(meta)’를 의미한다.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는 식의 회개라는 뜻 그 이상이다.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켜 초이분법적(trans-dualistic)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하는 뜻이다. 말하자면 성경 복음서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란 결국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주권이 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 풀이해도 무리가 없다. ‘의식의 변화’ 혹은 변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기를 바라던 최대의 소원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 주위에 있는 불교나 유교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불교에서 ‘붓다’ ‘부처’ ‘불(佛)’이란 ‘깨침을 얻은 이(the Awakened, the Enlightened)’라는 뜻이고, ‘불교’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성불하라.”는 말은 “깨침을 얻으라.”는 뜻이다. 유교에서도 신유학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성학(聖學)’이라고 했는데, ‘성인들의 가르침’이라는 뜻보다는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Learning for Sagehood)’이라는 뜻이 더 강하고, 성인이란 한문의 ‘성

제77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정도를 검토할 수 있다. 우선 생각해볼 것은 “나는 빛”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도마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나’는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님 한 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요8:58) 있었던 그 ‘우주적 나(Cosmic I)’, 곧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신성, 하느님, 참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제사를 지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제사임을 강조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한울님을 모신 내가 곧 한울님이니, 제사를 지내도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제사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이 어머니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하늘 위와 아래에 나밖에 존귀한 것이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의 ‘나[我]’도 한 개인으로서의 아기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초개인적 자아(transpersonal self)’, ‘참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이런 초아적 요소를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이것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하기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빛’이라는 것이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종교 전통들은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다.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신성, 참나, 참생명은 바로 ‘빛’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인습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변화되고 고양된 순수 의식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그 ‘빛’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보면 우리 속에 있는 브라만[梵] 혹은 참나[我]를 두고, “그대 홀로―그대만이 영원하고 찬연한 빛이시나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인들이 염불을 통해 체현하려고 염원하는 ‘아미타’불도 ‘무한한 빛’, ‘무량광(無量光)’의 부처님이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13세기 문헌 《조하르(Zohar)》도 문자적으로 빛을 의미하고, 그 문헌에서 언급되는 절대자 아인소프(En-Sof)도 분화 이전의 무극(無極) 상태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빛’이라 했다.

그리스도교 동방정교 전통에서도 ‘신의 영광’이란 빛이신 신의 특성을 이야기한다고 보고, 이런 빛을 보는 사람이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퀘이커 교도들도 침묵의 예배를 통해 ‘내적 빛’을 체험하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빛’은 때 묻지 않은 순수 의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 세계의 찬연함을 말해주는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할 것은 이 절이 말하고 있는 ‘범재신론적 신관’이다. 본문에 ‘나’ 혹은 ‘신성(神性)’이 ‘통나무’에서도, ‘돌’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다. 도가 문헌 《장자》에 보면 누가 장자에게 “이른바 도(道)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장자가 “없는 데가 없다.”라고 하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한다. 결국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기장이나 피에도, 기와나 벽돌에도, 심지어 대변이나 소변에도 있다고 하며 이른바 도의 ‘주편함(周遍咸)’적 특성, 도의 편재성(遍在性)을 강조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이사무애나 사사무애의 경지다.

나가면서

지금껏 《도마복음》 중 단지 몇 절을 뽑아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필자는 앞에서 말한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라는 책 서문에서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염원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도 같은 염원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이 짧은 글에서 독자들이 《도마복음》이나 불교의 깊은 가르침이 다 같이 우리에게 ‘심층’ 차원의 종교를 지향하도록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이웃 종교’임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손을 잡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협력하는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이로 인해 세상이 그만큼 더 밝아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이다. ■




오강남 /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 《도덕경》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장자》 《예수는 없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세계종교 둘러보기》 《또 다른 예수》,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등이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교수

2023/06/21

Kang-nam Oh - 하나 됨,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

Kang-nam Oh - 하나 됨,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 심층종교, 이른바 ‘신비주의’의 가장... | Facebook:

Kang-nam Oh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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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됨,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

심층종교, 이른바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만물이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감지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6월14일 성균관대학 성균인문동양학 아카데미에서 강연하였는데, 강연준비를 하느라 신유학을 다시 훑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유학의 정호(程顥, 1032~1085)가 기가막힌 말을 했음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아인슈타인도 비슷한 말을 했기에 공유하고자 합니다.

1. 중국 신유학자 중 하나인 정호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우주 만물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는데(萬有一體),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 됨을 잃어버리고 분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맹자가 말한 남의 고통을 보고 참지 못하는 불인(不忍)의 마음이나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도 기본적으로 만물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마음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다시 성(誠, sincerity)과 경(敬, attentiveness)이라는 수양을 통해 나와 만물이 하나라는 혼연동체(渾然同體)의 진리를 깨닫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라고 했습니다.(오강남,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372쪽)

2. 아인슈타인이 마커스라는 랍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지만,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그리고 자기의 생각과 감정도 우주의 다른 것들과 분리된 무엇이라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의식에서 일어난 일종의 착시적 망상(optical delusion)에 불과합니다.  이런 망상에서 자유스러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참된 종교가 추구해야 할 화두입니다.  그런 망상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려는 노력만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평화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글을 소개한 나오미 레비는 “아인슈타인이 이런 글을 썼다고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우주 속에 자리 잡은 인간의 위치에 대한 그의 설명은 선불교 선사나 고대 신비주의자들이 남긴 글에서나 듣던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불자나 신비주의자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하나로 통합되며, 물질, 시간, 공간조차도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던 물리학자였다.”고 썼습니다. (나오미 레비 지음, 최순님 옮김, <아인슈타인과 랍비> 29~30쪽 참조)
참조: 

  •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8)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요17:21)

 at-one-ment, reunion, reconciliation

     同體大悲
     相卽相入, 理事無礙, 事事無碍
     侍天主, 人乃天


=====
渾然 혼연 
1. 딴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고른 모양(模樣).
2. 구별(區別)이나 차별(差別) 또는 결점(缺點) 등(等)이 없이 원만(圓滿)한 모양(模樣).

2023/06/11

알라딘: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 - 50 Spiritual Classics by Tom Butler Bowdon

알라딘: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 - 마음의 평화에서 진리의 깨침까지 동서양 영혼의 탐색 
톰 버틀러 보던 (지은이),오강남 (옮긴이)흐름출판2009-03-30

원제 : 50 Spiritual Classics by Tom Butler Bowdon





Sales Point : 646 

 10.0 100자평(1)리뷰(2)




- 절판 확인일 : 2022-12-21


546쪽
책소개

영혼의 세계에 눈을 뜨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게 해주는 명저 50권을 담은 책으로, 영국의 인성계발 전문가 톰 버틀러 보던의 자기계발 3부작의 완성편으로 '내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내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에 이어 완간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자아완성에 이르는 길을 밝히기 위해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사상,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종교 철학은 물론 심리학 물리학 문학 등 2000년의 시공간을종횡무진 누비며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삶의 목적을 깨우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목차


이 책의 구성 ── 4
들어가는 글 ── 8

│1부│인식의 문을 열다 :그대 자신이 되라
chapter 1 리처드 바크, 『갈매기의 꿈』 ── 31
chapter 2 프리초프 카프라, 『물리학의 도』 ── 39
chapter 3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익스틀란 기행』 ── 49
chapter 4 장자, 『장자』 ── 57
chapter 5 G. I. 구르디예프, 『놀라운 사람들과의 만남』 ── 67
chapter 6 올더스 헉슬리, 『인식의 문』 ── 77
chapter 7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이런 일을 생각하라』 ── 87
chapter 8 로버트 M. 퍼시그, 『선과 오토바이 정비술』 ── 97

│2부│행동하는 영성(靈性): 지금 이 순간, 나를 살아라
chapter 9 페마 초드론, 『그대에게 두려움을 주는 곳들』 ── 109
chapter 10 모한다스 간디, 『자서전』 ── 119
chapter 11 칼릴 지브란, 『예언자』 ── 129
chapter 12 댄 밀먼, 『평화로운 전사의 길』 ── 139
chapter 13 틱낫한, 『마음 다함의 기적』 ── 149
chapter 14 돈 미겔 루이스, 『네 가지 약속』 ── 159
chapter 15 스즈키 순류, 『선심 초심』 ── 167
chapter 16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 177
chapter 17 쵸감 트룽빠, 『영적 물질주의를 해부하다』 ── 187

│3부│경험의 다양성 : 그들이 만난 신들

chapter 18 존 니이하르트, 『블랙 엘크 말하다』 ── 201
chapter 19 에픽테투스, 『엔키리디온』 ── 209
chapter 20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안식일』 ── 219
chapter 21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227
chapter 22 카를 구스타프 융, 『기억, 꿈, 성찰』 ── 237
chapter 23 C. 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247
chapter 24 존 오도나휴, 『아남 카라』 ── 255
chapter 25 헬렌 슈크먼·윌리엄 테트포드, 『기적 수업』 ── 265
chapter 26 이드리에스 샤, 『수피의 길』 ── 275
chapter 27 스타호크, 『나선무(舞)』 ── 283
chapter 28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어느 요기의 자서전』 ── 293

│4부│위대한 영적 삶 :그들은 어떻게 깨달았나
chapter 29 무함마드 아사드, 『메카로 가는 길』 ── 305
chapter 30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 315
chapter 31 G. K. 체스터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 325
chapter 32 람 다스, 『지금 여기 있으라』 ── 335
chapter 33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 345
chapter 34 마저리 켐프, 『마저리 켐프의 서(書)』 ── 355
chapter 35 말콤 엑스, 『말콤 엑스의 자서전』 ── 365
chapter 36 W. 서머싯 몸, 『면도날』 ── 377

│5부│신과의 관계 및 삶의 목적 : 신에게 이르는 길
chapter 37 가잘리, 『행복의 연금술』 ── 389
chapter 38 다그 함마슐드, 『이정표』 ── 399
chapter 39 다니엘 C. 매트, 『에센스 카발라』 ── 407
chapter 40 마이클 뉴턴, 『영혼들의 여행』 ── 417
chapter 41 아빌라의 테레사, 『내면의 성(城)』 ── 427
chapter 42 마더 테레사, 『단순한 길』 ── 437
chapter 43 닐 도널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 447
chapter 44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 457
chapter 45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 ── 467
chapter 46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천국과 지옥』 ── 477

│6부│인류의 영적 진화: 우주 속의 한 영혼
chapter 47 리처드 모리스 벅, 『우주 의식』 ── 489
chapter 48 제임스 레드필드, 『천상의 예언』 ── 499
chapter 49 켄 윌버, 『모든 것의 이론』 ── 507
chapter 50 개리 주커브, 『영혼의 자리』 ── 517

연도별로 살펴본 탐나는 영혼서 50 ── 527
옮긴이 에필로그 ── 529
옮긴이가 추천하는 ‘영혼을 일깨우는 고전 50선’ ──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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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연민의 무게를 줄이세요
- 이미령 (번역가, 책 칼럼니스트) 




저자 및 역자소개
톰 버틀러 보던 (Tom Butler Bowdo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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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권의 고전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자 큐레이션.
1967년 호주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영국 옥스퍼드에서 거주하고 있다. 시드니대학교와 런던정치경제대학교를 졸업했다.
현대인의 삶에 가치와 깊이를 더하는 지식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는 톰 버틀러 보던은 철학, 경제학, 영성을 망라한 다양한 분야에서 명저들을 가려 뽑은 ‘50권의 고전 시리즈’로 유명하다. 《USA 투데이》는 이런 그를 두고 “이런 종류의 문헌에 대한 진정한 학자”라고 평했다. 현재 이 시리즈는 전 세계 23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5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다.
이 책 《세계 경제학 필독서 50》은 2018년 북미 최고의 출판 시상식인 엑시엄 비즈니스 북어워드에
서 비즈니스 레퍼런스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 책의 첫 번째 시리즈인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은 2004년 미국 벤저민 프랭클린상을 수상하며 미국 주간지 《포워드》 선정 ‘올해의
책’이 되었다. 접기

최근작 : <세계 경제학 필독서 50>,<세계 철학 필독서 50>,<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 … 총 72종 (모두보기)

오강남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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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종교학과 명예 교수. 우리 시대 대표적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 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으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있다.
저서로 문자주의에 빠진 한국 기독교... 더보기

최근작 : <오강남의 생각>,<살아 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 … 총 70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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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진화사고>,<어린이의 문장>,<라이팅 유니버스>등 총 243종
대표분야 : 마케팅/브랜드 6위 (브랜드 지수 60,764점), 리더십 9위 (브랜드 지수 40,830점), 에세이 14위 (브랜드 지수 411,07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마음의 평화에서 진리의 깨침까지 동서양 영혼의 탐색
영혼의 세계에 눈을 뜨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게 해주는 불후의 명저 50권을 담은 책, 영국의 인성계발 전문가 톰 버틀러 보던의 자기계발 3부작의 완성편으로 '내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내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에 이어 완간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자아완성에 이르는 길을 밝히기 위해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사상,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종교 철학은 물론 심리학 물리학 문학 등 2000년의 시공간을 종횡무진 누비며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삶의 목적을 깨우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지만 원하는 것을 얻어도 고통을 겪는다.”
- 댄 밀먼 -

자아완성에 이르는 마지막 길, 영혼에 눈뜨기
영혼의 세계에 눈을 뜨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게 해주는 불후의 명저 50권을 담은 책,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이 출간되었다. 영국의 인성계발 전문가 톰 버틀러 보던의 자기계발 3부작의 완성편으로 『내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내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에 이어 완간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자아완성에 이르는 길을 밝히기 위해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사상,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종교 철학은 물론 심리학 물리학 문학 등 2000년의 시공간을 종횡무진 누비며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삶의 목적을 깨우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야망이나 목표를 성취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잘나가는 젊은 심리학과 교수로 명예와 직위 돈까지 쥐었던 리처드 앨퍼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삶에 뭔가 빠져있다는, 삶의 껍데기만 긁어대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다른 이들은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지만 그는 내면의 길을 따라 하버드 교수에서 람 다스란 이름을 가진 정신적 지도자, 영혼의 구루로 다시 태어났다'지금 여기 있으라'. 성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그러했다. “학문이나 지성이란 질문하고 의심받게 하는 법만 가르칠 뿐 진리를 알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은커녕 더 불행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백록'
이처럼 인류는 계속 진화해 왔고 발달하고 있지만 1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지점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책은 물질의 안정도 방대한 지식도 우리 삶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 우리는 더 크고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진정한 삶의 호흡, 영혼으로의 숨쉬기

스스로 분투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다 어느 정점에 이르면 반드시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영혼의 길을 따라갔던 이들은 이러한 질문이 영혼의 창을 여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창조하려 하는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성공은 더욱 진실하고 오래갈 수 있게 된다”<신과의 대화 451p>는 사실을 말해준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호흡을 해야 한다. 지금껏 우리는 생물학적인 숨쉬기만을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영혼으로의 숨쉬기(Spiriual), 즉 영성의 회복이 우리의 본질을 회복하여 살아나게 할 뿐 아니라 정말로 인간답게 하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자신의 삶에 숭고하고 신비한 그 무엇이 빠져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살아가는 것이 일정한 틀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배회하게 하는 습성을 지녔다고 느끼고 있다면 이 책에서 모두가 목말라 하는 더 큰 풍요로움에 이르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인식의 문에서 인류의 영적 진화까지
책은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하여 2부에서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틱낫한과 돈 미겔 루이스의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법과 올바른 원칙에 충실하는 매일의 노력을 소개한다. 이어 3부에서는 요가난다의 요기, 인디언 블랙엘크의 경험, 에틱테투스의 스토아, 이드리에스 샤의 수피 등이 만난 신을 통해 영적경험의 다양성을, 4부에서는 영적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람 다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등을 통해 살펴본다. 5부에서는 <영혼들의 여행>과 <신과 나눈 이야기>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신과의 관계 및 삶의 목적을 탐색해보고 끝으로 6부에서는 ‘우리가 인간의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들’이라는 <영혼의 자리>, 의식이 열리면서 직접적인 신의 계시를 받는 이가 늘어갈 것이라는 <우주의식> 등을 통해 인류의 영적 진화를 얘기해준다. 우리는 이를 통해 만물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우주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 오만과 무지의 틀을 벗어날 때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색적인 영적 지도자들
책을 보면 이러한 영적 체험을 하는 이들이 종교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나 상담심리학 출신들 (영혼들의 여행의 마이클 뉴턴, 기적수업의 헬렌 슈크먼, 지금 여기 있으라의 람 다스, 우주의식의 리처드 모리스 벅) 물리학(프리초프 카프라 )이나 화학(캔 윌버), 인류학(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법학자(행복의 연금술의 가잘리)들에게도 찾아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혼들의 여행>은 정신과 의사로서 뉴턴이 내담자와의 상담을 기초로 전생과 환생 사이를 주제로 우리가 여러 생을 거듭해서 태어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우리가 이 삶을 시작할 때 이미 과제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선과 오토바이 정비술'의 저자는 생화학 중퇴였다. 그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기계와 쓸모없는 잡동사니의 차이는 모두 질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우리는 세계를 실제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사랑과 질 같은 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옵션처럼 취급한다는 것을 호소력있게 말한다. 의식을 포함한 우주의 설명체계를 모색한 '모든 것의 이론'의 저자 캔 윌버 역시 의과대 생화학 출신이다.

과학자와 영적 에너지의 만남
현대과학의 극단으로 가면 영적이고 신비한 개념과 만나게 되며 또한 현대과학이 이를 해석해주는 방편이 되고 있다. 먼저 물리학의 도를 보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입자물리학 연구를 하다가 물리학과 동양 종교에서 제시하는 물질과 실재의 유사성에 충격을 받아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미 2400년 전의 노장사상이 첨단 물리학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오래전부터 신화와 시의 방식을 빌어 창조세계의 구조를 묘사했음을 알게 되었다. 양자물리학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에너지로서, 세계의 본성이 고정성이 아니라 영원한 움직임을 밝힌다. 그리고 원자핵과 원자 크기의 질량을 통해 물질 허공 사이의 장을 의식하게 되고 허공은 살아있는 것이 되고 물질이란 허공의 일시적 발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원자가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대 정신세계에서 밝히는 에너지, 기氣의 이론적 근거를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영적인 길에서 마주치는 이정표들
보이지 않는 질서를 인정한다 : ‘보이지 않는 질서’와 조화를 이룰 때 삶이 더 좋아지고 의미있게 된다
삶의 목적을 인지한다. : 사실은 우리가 신의 창조를 돕는 동역자라는 것, 신의 도구가 됨으로써 오히려 잠자던 잠재력을 극대화 할수 있다는 것, 자신을 아는 지식이란 신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지 발견하는 것
작은 나를 버린다. : 이기적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만이 가장 큰 힘을 얻는 길이라는 것
현재에 살아있으라 : 삶의 단순한 기쁨을 되찾는 것,
이분법 너머를 본다 : 선과 악, 행 불행의 이분법을 넘어 ‘하나됨’을 인식할 때 세계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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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찾는 영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던 사람들에게,이 책은 우리보다 앞선 자들이 만난 가르침 혹은 지혜의 말씀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어 무지로 인해 에둘러 돌아가는 고생을 피할 수 있게 할 것 같다.  
매화향기 2016-12-1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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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50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니 젊은 사람도 자기계발을 위해서 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서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위사람을 찾아가 이야기를 해본다. “제가 지금 이런 상황인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죠?”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훈계조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개인적인 수다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서점을 찾아가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수많은 책들이 모두 자기를 사가라고 어우성치는 상황에서 어떤 책이 좋은 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책 소개나 서문을 읽어보면 이건 정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하고도 귀한 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책을 사서 몇 장을 읽다보면......쩝. 그러다보니 책을 사기가 부담스럽고 서점을 간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요인이 된다. 내 돈 내고 책 사면서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 짜증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자기계발도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책은 실제 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람도 있다. 말도 안 되는, 다시 말하면 내용은 그럴듯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며, 책을 팔기 위해 쓰잘 데 없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적어놓은 책이란 선입감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신문광고나 베스트셀러라고 하기에 책을 샀다가 재미 못한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실천하려고 했지만 도중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뭔가 하겠다고 했다가 실패한 경우에 그 책임을 어딘가에 넘겨야 하는데 많은 경우 자신의 의지보다 책 내용이 허망하다고 그 원인을 책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책을 권할 경우, 대부분 자기계발서를 추천한다. 이런 종류의 책에는 기존에 나온 내용을 저자가 한번 되씹어 현실에 적응 가능하도록 해석한 것들이 많고, 그렇기에 독자가 책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말 같지 않은 내용으로 범벅이 된 책도 있긴 하지만, 다른 종류의 책은 안 그런가. 어차피 어떤 종류의 책이든지 간에 모든 책이 다 자신에게 맞는 경우는 없다.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50> 이 책에는 기존에 나온 자기계발서 중에 독자가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책이 많다. 아니 많다는 것 조금 잘못된 표현인 것 같고, 책에 소개된 책 중에서 내가 읽어 본 책들은 모두 다 그렇다. 책 내용들이 자기계발분야에서 거의 고전처럼 대우받는 책들이고, 내용도 무척 알찬 것들이다. 이런 책들은 저자가 한두 가지의 요령을 정리한 게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연구하고, 조사한 방대한 자료와 경험들을 책 한권에 압축해 놓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책을 사서 아까운 경우는 책 내용의 깊이가 없거나, 자신이 원하는 주제와는 다른 저자의 신변잡기 같은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을 때다. 그러나 책 한권을 읽고 가슴 뿌듯한 경우는, 비록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내용일지라도, 책 내용에 깊이가 있고,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많은 경우다. 이 책에 소개된 책들 대부분이 바로 그런 책들이다.

왜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냐고? 다행히도 한국말로 번역된 책들이 많아 대부분 다 읽어본 책들이고, 누군가 나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반드시 자신 있게 추천하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뭔가 좋은 책을 찾고 싶으면 큰 서점에 가서 발 아프게 돌아다니지 말고(물론 그것도 운동에는 좋기에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아마 여기에 나와 있는 책 제목들과 요약내용만 알아도 어디 가서 책 안 읽는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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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열 2009-04-0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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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심리학 -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파릇한 꿈으로 가득했던 내 청춘의 시기에 어디에서 적절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책에 푹 빠져 지낸 시절이 있었다. 나고 자랐던 고향을 떠나 처음 시작하는 타향살이에서 오는 공허함도 한몫했겠지만 광주 518이라는 시대적 상황도 무시하지 못할 내 인생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로 그 시기 한 계절을 도서관 구석에서 책에 빠진 것이다. 인간, 심리, 철학 등 그때 읽었던 책들이 그 후 내 삶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대학 진학을 생각하며 전공을 선택할 때 고민의 범주에 있었던 분야가 철학, 역사, 심리학이었다. 모두 사람과 관련된 분야라 그리 오랜 시간 고민하지 않고 심리학을 선택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당시 가장 큰 관심사였기에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내가 접한 심리학은 고등학교 생물시간의 연장으로 뇌구조, 신경발달과정, 파플로프의 조건반사와 같은 하등의 관계도 없어 보이는 수업시간이 지루하지만 했다. 정작 관심이 있었던 사람의 마음과 정신활동에 대해 이해를 하기에는 너무나 내 준비가 부족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의 영향인지 아직도 심리학이라고 하면 다가서기 벅찬 무엇인가가 버티고 있는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관심사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활동의 결과 그리고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에 멈추어 있는 지금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일지 모른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은 바로 멈추어 있던 관심사를 다시 한발 내딛게 하는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은 출발한지 100년이 되는 심리학에 대해 전반적 이해를 돕도록 그동안 심리학에 관련된 저서들을 모우고 선택해서 우리에게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본성과 동기에 감춰진 열쇠를 찾는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행복과 정신 건강의 함수관계 기분을 바꾸면 행복이 보인다, 자아와 성격이란 무엇인가의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무의식을 깨워라, 인간관계에 대한 나는 왜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뇌와 관련된 뇌가 마음을 결정한다, 21세기 창의성과 의사소통 능력에 대한 대화와 설득의 시대 이렇게 일곱 가지로 50권에 이르는 책을 분류하고 있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은 한눈에 심리학의 관심사가 어떻게 변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룩한 심리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심리학 전공자들을 위한 책이 아닌 심리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거나 심리학의 흐름에 관심이 있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대중적인 심리학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 인간의 성생활과 관련된 알프레드 킨제이의 연구나 새롭게 심리학의 주요 관심사로 중심으로 등장한 가드너, 길버트, 골먼, 셀리그먼 등의 연구 성과를 이 책 한권으로 볼 수 있다.

[100년 동안 이어져온 심리학의 계보를 한눈에 꿰뚫고 인간 이해의 혜안을 주는 탁월한 책이다. 특히 인간을 탐험했던 다양한 연구자들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즐거움은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다. 심리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거나 현대 심리학의 연구 흐름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라고 이 책을 추천한 황상민(연세대학교 심리학과)교수의 말에 나 역시 적극 공감 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이러한 심리학 관련 저서를 소개하며 그 저서들의 핵심을 담고 있는 문장을 통해 저서를 집필한 인물, 중심주제, 심리학 발전에 미친 영향 등을 전해주고 간추린 평을 통해 저자가 그 책을 보는 종합적인 분석을 내 놓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권의 책으로 심리학자의 다양한 관심사와 그의 업적을 한꺼번에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인다. 심리학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안내서라 생각된다.

역사 이래 수천 년을 이어온 관심사인 사람의 마음, 정신활동, 행동의 결정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심리학자나 현대 심리학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여전히 한 개인으로서는 자기 인식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이러한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과 범위가 늘어났다는 점은 대단한 성과라 생각한다.

이 책은 사람이나 인간관계, 심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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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계발 분야에서 주목받는 전문 집필가. 그의 첫 번째 책인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은 “가능성의 학문에 결정적인 길잡이가 됐다”는 호평과 함께 벤야민 프랭클린 상을 수상했으며 ‘Forward’지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 뽑혔다. 자기계발과 성공철학, 심리학, 영혼을 울리는 고전 등 인간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 분야의 명저들을 가려 뽑고 그 안내서를 만들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읽고 분석하는 데만 10여 년을 보냈다. 이후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큰 반향과 함께 전세계 17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런던경영대학과 시드니대학을 졸업했으며 영국과 호주를 오가며 꾸준히 집필과 세미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자기계발 및 성공철학에 대한 웹사이트(www.butler-bowdon.com)를 운영하고 있다.

○ 책 속으로

일반적으로 개인의 발달을 자기계발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기적 자아를 만족시키는 수준에서 끝나는 수가 많다. 참된 개인의 진화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화상, 정신적 습관, 틀 같은 것을 없애나가는 것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것이 주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평화로운 전사의 길

뭔가를 움켜잡으려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추상적인 미래를 위해 살아가지만, 영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은 지금의 소중함을 안다. – 서문

자신을 바라보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다른 가능성들이 있음을 알아볼 수 없다. 조나단은 깨닫는다. 멋지게 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신의 섬광 같은 갈매기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발걸음이라는 것을 – 갈매기의 꿈

돈 후안이 전하는 지혜의 핵심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며 살면 명예나 체면이 상실되는 시기에 쉽게 감정을 상하고 나약해진다는 것이며 이 한계를 벗어나면 인생을 가볍게 변화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신을 중요하게 느끼는 자는 무겁고 서투르며 헛되기 때문에 전사가 되려면 가볍고 유연해야 한다. – 익스틀란 기행

(올더스 헉슬리에 의하면 ) 상상력이나 창조성은 개인의 인격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베일을 걷어 올려 자아 너머를 볼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결과였다. – 인식의 문

우리 마음은 여러 세기 동안 쌓인 먼지, 말하자면 지식과 경험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다. 만약 마음을 매일 씻어 어제의 기억에서 자유롭게 해준다면 우리는 모두 싱그러운 마음, 삶의 문제를 헤쳐나갈 능력이 있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 이런 일을 생각하라

우리는 저항정신을 가져야 한다. 사회제도 내에서 무엇을 뜯어고치라는 뜻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는 기존의 방식에 저항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혁명가는 감옥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맥락으로 보기 위해 감옥의 창살을 뚫고 밖을 바라본다. … 우리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마음이 질투와 증오와 야망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런 것들과 구별되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하는 마음 바깥에 놓여있는 창조의 샘터에서 물을 길을 수 있는 자유인의 첫걸음이다. – 이런 일을 생각하라

우리는 늘 우리에게 알맞은 삶의 허구를 만들고 있다. 도도한 삶의 강줄기에 파놓은 작은 수영장(가족, 일, 야망, 종교 등)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크면 클수록 삶의 진정한 본성, 그 끊임없는 변화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그 집착 때문에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된다. … 만약 적극적으로 사물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빠르게 죽어갈 수밖에 없다. – 이런 일을 생각하라

이성적인 마음으로만 해답을 얻으려고 하면 삶의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과학이나 철학은 모두 진리에 이르는 지도에 불과하다는 것, 진리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자연을 경험하는 데서, 신과 가까움을 느끼는 데서 가능하다 – 선과 오토바이 정비술

우리는 감정적으로 안전과 영원에 집착하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불확실하다. 두렵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그 느낌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영적인 성장의 열쇠다. ‘인정받지 못하거나 배신당할 때 느끼는 아픔’ 혹은 다른 고통스러운 느낌이 들 때 … 어떤 감정의 무게와 강도를 정말로 느끼게 되면 그것이 엄청나게 무서울 것 같지만, 사실 해방감으로 주는 것으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동이다.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겠다고 억제하면 결국 이기적 자아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기적 자아는 자기만의 고유영역이라는 환상을 보호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과감히 도전하여 오히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 그대에게 두려움을 주는 곳들

고통과 무지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다른 사람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생긴다. – 그대에게 두려움을 주는 곳들

보통의 갈등은 감정싸움인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이끈) 사타그라하의 행동은 아힘사 원칙의 특질인 자비에서 힘을 얻은 결과 유지할 수 있는 객관적 완강함에서 나온다. – 간디의 자서전

예언자는 말한다. 슬픔은 우리의 존재를 칼로 도려내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주는 공간은 삶의 다른 계절에 이르렀을 때 기쁨을 더 크게 만들어준다. … 당신의 아픔은 깨달음을 가두고 있는 조개껍질 깨기입니다.

우리는 실패가 불운이고 성공을 행운이라고 여기지만 이 둘은 모두 그대로 현실일 뿐이다. 불행에 의연해야 한다는 것은 다만 현실을 애정을 가지고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 평화로운 전사의 길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켜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바보의 행복이다. 전사는 이유없이 행복하다. 댄은 자신의 야망에 발목잡혀 삶 그 자체를 즐기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은 ‘이유없는 행복의 철학을 지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 평화로운 전사의 길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같이 일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이며,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 마음다함의 기적

말로써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의 먹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 사람들이 하는 말은 우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상태나 상황과 관계가 있다.

무엇이나 나와 관련된 것이라 여기지 말라는 두 번째 약속은 다른 사람의 비판이 나에 대한 것이 분명하더라도 나의 진실과 직접 연결짓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 네 가지 약속

참된 영성은 좋은 것 나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을 전체의 부분으로 여기고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모두 경험하기를 원해야 한다. – 영적 물질주의를 해부하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스스로 뭔가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그저 흥미로운 문화적 체험들을 주어 모으는 사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영적인 것에 오히려 ‘엄격한 지성’으로 접근하고 지나치게 경건하거나 카리스마 넘치는 구루를 경계해야 한다.

사건 자체는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고통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 비참해진다. – 엔키리디온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어떤 실제적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보고 내리는 우리의 해석이다. 다리를 저는 것은 다리에 장애가 있는 것일 뿐 우리의 의지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융은 참된 연금술이란 알려진 것처럼 값싼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을 변화시키는 것, 깨우침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 기억 꿈 성찰

수피의 길은 한 가지 종교나 철학만이 진리라고 믿는 착각에서 벗어나 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열린 자세를 키워나가는 것을 뜻한다. – 수피의 길

요가난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우주를 순수 에너지나 빛으로 줄였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물질이란 결국 에너지가 집약된 것, 사물의 고체성은 어느 정도 허상이라고 했다. … 요기나 성자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세포구조를 물질에서 광 에너지로 바꾸고 이렇게 하여 두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능력을 얻게 된다. 우주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인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대상을 물질화할 수도 있고 비물질화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어느 요기의 자서전

영혼들은 자연 세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는 경험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화할 수 있다. “여러 육체를 겪어보고 여러 가지 환경에 처해보는 일이 우리가 가진 참된 자아의 본성을 확대시켜 준다” – 영혼들의 여행, 우리가 거듭 태어나는 이유

고통은 고통 자체를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현재상태를 딛고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가도록 고무하기 위해 존재한다. 삶은 쉽게 통과되도록 디자인되지 않았다. 도전은 우리가 거기에 잘 응전만 하면 영혼이 자라도록 해준다. – 영혼들의 여행, 왜 신은 고통을 허락하는가

언제나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잊으면 안된다. 우리는 왜 여전히 삶에 만족하지 못할까. 이 세상은 결코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우리의 참된 고향은 영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 목적이 이끄는 삶

갈등과 악의는 우주의 에너지 흐름을 막는 마찰을 만들어내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에너지와 함께 움직이며 은총과 능력을 받는다. 사랑하는 상태에 있으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더 높은 지적 영적 진동속에 존재하게 된다. – 천상의 예언

과학의 끝에는 영성이 궁극적으로 과학과 종교는 둘다 완전히 통합된 우주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진리의 표현들이다. – 모든 것의 이론

○ 출판사 서평

– 자아완성에 이르는 마지막 길, 영혼에 눈뜨기

영혼의 세계에 눈을 뜨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게 해주는 불후의 명저 50권을 담은 책,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이 출간되었다. 영국의 인성계발 전문가 톰 버틀러 보던의 자기계발 3부작의 완성편으로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에 이어 완간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자아완성에 이르는 길을 밝히기 위해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사상, 종교 철학은 물론 심리학 물리학 문학 등 2000년의 시공간을 종횡무진 누비며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삶의 목적을 깨우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야망이나 목표를 성취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잘나가는 젊은 심리학과 교수로 명예와 직위 돈까지 쥐었던 리처드 앨퍼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삶에 뭔가 빠져있다는, 삶의 껍데기만 긁어대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다른 이들은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지만 그는 내면의 길을 따라 하버드 교수에서 람 다스란 이름을 가진 정신적 지도자, 영혼의 구루로 다시 태어났다(지금 여기 있으라).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그러했다. “학문이나 지성이란 질문하고 의심받게 하는 법만 가르칠 뿐 진리를 알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은 커녕 더 불행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백록)

이처럼 인류는 계속 진화해 왔고 발달하고 있지만 1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지점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책은 물질의 안정도 방대한 지식도 우리 삶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 우리는 더 크고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 진정한 삶의 호흡, 영혼으로의 숨쉬기

스스로 분투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다 어느 정점에 이르면 반드시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영혼의 길을 따라갔던 이들은 이러한 질문이 영혼의 창을 여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창조하려 하는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성공은 더욱 진실하고 오래갈 수 있게 된다”(신과의 대화 p.451)는 사실을 말해준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호흡을 해야 한다. 지금껏 우리는 생물학적인 숨쉬기만을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영혼으로의 숨쉬기(Spiriual), 즉 영성의 회복이 우리의 본질을 회복하여 살아나게 할 뿐 아니라 정말로 인간답게 하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자신의 삶에 숭고하고 신비한 그 무엇이 빠져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살아가는 것이 일정한 틀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배회하게 하는 습성을 지녔다고 느끼고 있다면 이 책에서 모두가 목말라 하는 더 큰 풍요로움에 이르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인식의 문에서 인류의 영적 진화까지

책은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하여 2부에서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틱낫한과 돈 미겔 루이스의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법과 올바른 원칙에 충실하는 매일의 노력을 소개한다. 이어 3부에서는 요가난다의 요기, 인디언 블랙엘크의 경험, 에틱테투스의 스토아, 이드리에스 샤의 수피 등이 만난 신을 통해 영적경험의 다양성을, 4부에서는 영적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람 다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등을 통해 살펴본다. 5부에서는 ‘영혼들의 여행’과 ‘신과 나눈 이야기’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신과의 관계 및 삶의 목적을 탐색해보고 끝으로 6부에서는 “우리가 인간의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들”이라는 ‘영혼의 자리’, 의식이 열리면서 직접적인 신의 계시를 받는 이가 늘어갈 것이라는 ‘우주의식’ 등을 통해 인류의 영적 진화를 얘기해준다. 우리는 이를 통해 만물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우주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 오만과 무지의 틀을 벗어날 때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색적인 영적 지도자들

책을 보면 이러한 영적 체험을 하는 이들이 종교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나 상담심리학 출신들 (영혼들의 여행의 마이클 뉴턴, 기적수업의 헬렌 슈크먼, 지금 여기 있으라의 람 다스, 우주의식의 리처드 모리스 벅) 물리학(프리초프 카프라)이나 화학(캔 윌버), 인류학(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법학자(행복의 연금술의 가잘리)들에게도 찾아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혼들의 여행’은 정신과 의사로서 뉴턴이 내담자와의 상담을 기초로 전생과 환생 사이를 주제로 우리가 여러 생을 거듭해서 태어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리가 이 삶을 시작할 때 이미 과제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선과 오토바이 정비술’의 저자는 생화학과 중퇴였다. 그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기계와 쓸모없는 잡동사니의 차이는 모두 질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우리는 세계를 실제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사랑과 질 같은 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옵션처럼 취급한다는 것을 호소력있게 말한다. 의식을 포함한 우주의 설명체계를 모색한 ‘모든 것의 이론’의 저자 캔 윌버 역시 의과대 생화학 출신이다.

– 과학자와 영적 에너지의 만남

현대과학의 극단으로 가면 영적이고 신비한 개념과 만나게 되며 또한 현대과학이 이를 해석해주는 방편이 되고 있다. 먼저 ‘물리학의 도’를 보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입자물리학 연구를 하다가 물리학과 동양 종교에서 제시하는 물질과 실재의 유사성에 충격을 받아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미 2400년 전의 노장사상이 첨단 물리학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오래전부터 신화와 시의 방식을 빌어 창조세계의 구조를 묘사했음을 알게 되었다. 양자물리학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에너지로서, 세계의 본성이 고정성이 아니라 영원한 움직임을 밝힌다. 그리고 원자핵과 원자 크기의 질량을 통해 물질 허공 사이의 장을 의식하게 되고, 허공은 살아있는 것이 되며 물질이란 허공의 일시적 발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원자가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대 정신세계에서 밝히는 에너지, 기氣의 이론적 근거를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영적인 길에서 마주치는 이정표들

.보이지 않는 질서를 인정한다 : ‘보이지 않는 질서’와 조화를 이룰 때 삶이 더 좋아지고 의미있게 된다.

.삶의 목적을 인지한다 : 사실은 우리가 신의 창조를 돕는 동역자라는 것, 신의 도구가 됨으로써 오히려 잠자던 잠재력을 극대화 할수 있다는 것, 자신을 아는 지식이란 신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지 발견하는 것.

.작은 나를 버린다 : 이기적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만이 가장 큰 힘을 얻는 길이라는 것

.현재에 살아있으라 : 삶의 단순한 기쁨을 되찾는 것.

.이분법 너머를 본다 : 선과 악, 행 불행의 이분법을 넘어 ‘하나됨’을 인식할 때 세계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2023/06/10

동양철학 전공자가 추천하는 동양철학 책 목록.list - 도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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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전공자가 추천하는 동양철학 책 목록.list
성리학자(121.159) 

2015.07.21 
조회 29337 추천 52 댓글 51




원전 번역서



1. 공자



논어 : 김형찬 (베스트셀러에 항상 올라있는 유명한 번역자 책, 주석이 별로 없음)

논어 : 김학주 (비전공자들이 교양으로 보기에도 좋은 책)

논어집주 : 성백효 (전공자들이 보는 책, 한자 글자에 대한 주석이 달림)



2. 맹자



맹자집주 : 성백효 (전공자들이 보는 책, 한자 글자에 대한 주석이 달림)

맹자 : 박경환 (교양서로 많이 읽힘, 주석이 별로 없음)
맹자 : 김학주 (이것도 유명! 김학주 센세는 대체적으로 유명!)


3. 순자



순자 : 김학주 (비전공자도 읽기 괜찮은 글)



4. 주희



대학, 중용 : 김미영 (공,맹과 마찬가지로 홍익출판사의 출판, 무난함)

대학 중용 강설 : 이기동 (성대출신 유학전공 교수님, 강설이라서 이해안가는 부분 설명있음)

근사록집해1~3 : 성백효 (이건 전공자들을 위한 책)



5. 왕양명



전습록1,2 : 한정길, 정인재 (이것도 전공자를 위한 책)

전습록 : 김학주 (이건 널럴하게 보기 수월)



6. 노자 



도덕경 : 오강남 (말해 뭐하나 제일 유명한 번역가)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 홍익출판사 (중국 천재 왕필이 주석단 책)





7. 장자



장자 : 안동림 (전공자 사이에서 제일 핫함)

장자 : 현암사 (이것도 유명함)



8. 이황



성학십도 : 이광호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전공자들이 보기 좋은 책 주석, 원문 다양)



9. 이이



격몽요결 : 김학주



10. 정약용



그닥 추천할게 없음. 체계적인 책 없음.



11. 기타



주역 강설 : 이기동 (주역 쉽게 풀이한 책)





입문서



<총론>

중국철학사1,2 : 박성규 - 굉장한 책. 동양철학 전공자들의 바이블. 펑유란 원저. 박근혜 대통령이 젊은 시절 등대로 삼았다는 그 책!

간명한 중국철학사 : 정인재 - 중철 1,2 보다 얇음. 이것도 괜찮음

동양윤리의 담론 : 조헌규 - 다양한 학자들이 있는 입문서

동양사상의 이해 : 장승구 - 다양한 학자들이 있는 입문서

중국철학 강의 : 김병채외 3인 - 신유학의 대가 중국 모종삼 교수가 쓴 책을 번역한 책



<중국철학>

제자백가 대양한 철학 흐름 : 신정근 -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방대하게 담음 책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최진석 - 노자 전공자의 대중적인 책, 시중에 나온 개낚시 책과 차원이 다름

송명성리학 : 안재호 - 성리학 베이스 닦기 좋은 책, 당시 주류 성리학자들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

장자 : 앵거스 그레이엄 - 외국인 장자 전공자가 장자에 대해 해석한 책

논쟁으로 보는 중국 철학 - 철학vs철학 처럼 중국에서 논쟁했던 이슈를 정리한 책

인생 교과서 : 공자 : 신정근 외 - 키워드 중심으로 공자 해석한 책



<한국철학>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 사상 - 한국의 고대부터 조선까지 모든 철학에 대해 설명된 책

조선 성리학의 역사상 : 김태영 - 조선 성리학의 역사에 대한 서술

논쟁으로 보는 한국 철학 - 철학vs철학 처럼 조선시대에 논쟁했던 이슈를 정리한 책

율곡이이 : 황의동 - 율곡의 사상, 생애를 다뤄준 책

퇴계이황 : 윤사돈 - 퇴계의 사상, 생애를 다뤄준 책

다산 정약용 : 예문서원 - 정약용의 사상, 생애를 다뤄준 책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 이광호 - 율곡이랑 퇴계의 논쟁점을 비교



<불교>

인도 철학과 불교 : 권오민 - 근본불교부터 한국 불교까지 자세히 설명

불교 철학의 전개 : 한자경 - 근본불교부터 한국 불교까지 간략히 설명 

논쟁으로 보는 불교 철학 - 철학vs철학 처럼 불교의 주요 논쟁 이슈를 정리한 책







학문외 기타 동양학 교양서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 조용헌 - 사주명리학 한국 1인자의 책

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 조용헌 - 동양학에 대한 칼럼을 엮은 책 (조선일보 기명칼럼리스트 조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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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성리학 전공 대학원생임. 상기의 리스트들은 대부분 내가 다 읽어본 책이거나 전공자들사이에서 회자되는 책이다.

여기 보니까 서양철학만 빠는 애들이 많길래.



리스트를 남겨 본다. 

동양철학 마니마니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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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여시 갤로그로 이동합니다.크 거맙습니다 집가서 제대루볼게여2015.07.21 23:30:58삭제
  • 대머(223.62)동양철학은 한자 알아야하지 않나2015.07.21 23:32:15삭제
  • ㅇㅇ(121.159)한자 몰라도 된다.2015.07.21 23:35:46삭제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야 성리학 전공이라니까 나 뭐좀 물어보자. 난 동양철학쪽이 좀더 끌리는데, 철알못이라 공부좀 시작해보려고. 근데 여기저기서 동양철학은 그 한계점이 이미 드러났고 몇백년동안 발전이 없었다는 글도 있고, 처세 이외의 효용이 없다거나 합리성이 부족하다는 얘기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러하냐?2015.07.21 23:41:45삭제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개인적으로 동양철학에 끌려서 이쪽 공부 해보고 싶은데 요즘 철학전공자들도 절대다수가 서양쪽만 파는거같고... 한계가 드러나서 그런거냐 아니면 계속 발전하고 연구중에 있는거냐???2015.07.21 23:42:28삭제
  • 댓글돌이

  • 치킨 배달 리뷰에 '하의 실종' 사진…점주 "성희롱, 경찰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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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글고 전국책이랑 회남자를 보고싶은데 이책들은 추천 판본이 안나와있네...ㅠㅠ2015.07.21 23:42:44삭제
  • ㅇㅇ(121.159)한계점이 드러났다는 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는데. 동양철학은 인식론이 아니라 수양론과 심성론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느낌이 있긴 함.2015.07.21 23:43:27삭제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쇼펜하우어가 유가 사상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형이상학이 없다고 했는데... 흠 철학의 영역중에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이런 쪽은 동양은 거의 없거나 부실한거?? 윤리학 위주인가?;2015.07.21 23:45:02삭제
  • ㅇㅇ(121.159)절대 다수가 서양철학을 파는게 사실이긴 하지 교수들 봐도 서양에 극단적으로 치우쳐있는게 현실. 그렇다고 한계가 드러나서 발전이 더디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함. 서양 교수중에 고대전공 교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오래됐다고 발전이 없다고 학문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님. 왜 플라톤, 소크라테스 원전 번역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칸트는 백종현 선생님 혼자만 있을까? 외국의 경우에도 고대 전공교수가 압도적임.2015.07.21 23:45:21삭제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송명성리학은 안재호 말고 진래가 지은 책을 많이들 권하던데 독특하네.2015.07.21 23:45:49삭제
  • ㅇㅇ(121.159)맞아. 동양에 형이상학이 부족했고 그것을 추구하다 성리학이 나왔지.2015.07.21 23:45:52삭제
  • ㅇㅇ(121.159)진래가 지었고 안재호가 번역한것임. 저자 이름 다 번역한 사람으로 맞춤2015.07.21 23:46:27삭제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간만에 전문가 만나니 뇌가 춤추는 느낌이다. 머리가 맑아지네. 춘추좌전은 권장 도서 목록에 없네?? 별로인가? 올재꺼 삿긴 했는데 이 판본이 적절한지도 모르겠고 ㅋ2015.07.21 23:47:02삭제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열자 춘추좌전 전국책 회남자 상서 같은 책들이 빠진건 글쓴이가 별로 추천하지 않아서야 아니면 적절한 판본이 없거나 언급할 책이 많아서 누락된거?2015.07.21 23:47:42삭제
  • ㅁㅈㄷ(121.159)내 전공이 아닌 분야는 읽지를 않아서 추천 안한거2015.07.21 23:49:33삭제
  • 댓글돌이

  • 유희열, 유재석·이효리 소속사 안테나 지분 21% 32억에 샀다…2대 주주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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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흉노왕 갤로그로 이동합니다.바쁠텐데 많이 알려줘서 고맙고 좋은 글 유용하게 볼게. 학문 수양에 많은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2015.07.21 23:51:07삭제
  • ㅇㅇ(220.122)성리학을 전공한 이유가 뭐냐??2015.07.21 23:56:18삭제
  • 분노의포도(218.234)크아 대박ㄱㅅㄱㅅ 근디 저 사주좀 봐주세요 귀격이라던데=_=2015.07.22 00:06:44삭제
  • ㅇㅇ(121.159)재밌어서 전공함2015.07.22 00:07:20삭제
  • 식물(119.196)노자, 장자를 오선생 책으로 추천하셨는데요...올재꺼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훨 나을 겁니다2015.07.22 00:29:00삭제
  • 33(182.225)성학십도 봤는데 ㅋ 이황 기준 성리학 입문서적 같던데 ㅋㅋ 재밌었음 다만 춘추, 사기 같은 중국 역사에 대해서도 기반지식이 있어야 할듯 했네요2015.07.22 00:29:06삭제
  • 33(182.225)오선생꺼 노자 읽었는데 괜찮든데요 종교학에 대해 조예도 깊고 사료분석도 잘하셨고 미국권에서 공부도 하셔서 다양한 관련 자료를 기반으로 풀이해놨는데 그닥 어렵지도 않고 하여튼 현암사-오강남 노자도 볼만했음요 그리고 올재 노자는 구할 수 있어도 올재 장자는 아직 없을꺼 같은데요2015.07.22 00:30:39삭제
  • 식물(119.196)장자는 아직 보급이 안되었네요. 전 올재 장자 본후 다른 장자는 팔아버렸어요2015.07.22 00:35:21삭제
  • 33(182.225)장자도 상황봐서 나올수도 있겠네요 ㅎㅎ;;2015.07.22 00:37:42삭제
  • ㅇㅇ(61.79)오강남 역 도덕경 완전 사랑함.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스타일 아닌데 저건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펼쳐봄. 참 일본 사상사에 관한 건 없음? 꼭 읽어보고 싶고 읽어야 하는데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음. ㅠㅠ2015.07.22 03:11:25삭제
  • 33(222.104)현실은 동양철학을 철학으로 연구하는건 똥양인 밖에 없다는거 ㅋㅋㅋㅋ 중세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똥양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2015.07.22 03:43:16삭제
  • 연영과 갤로그로 이동합니다.쭉 내려서 불교쪽 보니까... 실제 원전 빼고는 그냥 평범한 입문서들이 많네... 펑유란의 책이야 유명하지만...2015.07.22 07:16:07삭제
  • 연영과 갤로그로 이동합니다.전반적으로는 별로네...2015.07.22 07:21:39삭제
  • BertrandRuss.. 갤로그로 이동합니다.으아니ㅋㅋ몰라서 아무거나 사서 후회했었는데 알려줘서 고마워ㅠㅠ 진짜 대박이다2015.07.22 07:34:02삭제
  • ㅇㅇ(58.233)김형찬 논어는 왜 넣은 거냐? 걍 제일 잘 나가니까? 그리고 오강남은 정말로 말해 뭐한 최고의 번역가이더냐? ㅋㅋㅋ2015.07.22 09:23:43삭제
  • 댓글돌이

  • 내년 학교 덮칠 'AI 교과서'…현장선 "내가 교사냐, AS 기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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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영자유저라이프에 등록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2015.07.22 18:38:14
  • 고추털제모함(114.206)동양철학공부하는이유가 뭐냐고?구조적차별에 대해서 심도있게 공부하기위해서다.2015.07.22 20:34:27삭제
  • asf(118.37)동양철학 공부하는 이유가 뭐냐 지옥불반도 만들어준 학문인데2015.07.22 21:13:03삭제
  • 2222(222.112)한비자는 없엉?2015.07.22 23:10:22삭제
  • qwet(58.124)믿고 거르는 '한자제목' 책들이네요2015.07.22 23:25:41삭제
  • qwet(58.124)저런거 보느니 양판소 하나라도 더 보는게 낫죠2015.07.22 23:26:14삭제
  • qwet(58.124)미개한 중국의 좆자1 좆자2 좆자3... 저주받은 조선땅에 살던 좆이 좆황 좆약용... 전혀 알 필요 없는 이름들입니다. 아 좆약용은 물고기그림그려놓은 업적이 있네요2015.07.22 23:29:21삭제
  • ㄱㅁㅅs(14.32)동양 철학에 대해 요즘 관심 좀 있었는데, 감사합니다2015.07.22 23:36:00삭제
  • dd(119.202)한비자는 없엉? (2)2015.07.23 02:31:08삭제
  • ㅇㅇ(119.198)비서구문명엔 논리학자체가 없는 수준이였슴2015.07.23 03:39:30삭제
  • ㄷㄱㄴㄱ(223.62)ㄴ ㅇㄱㄹㅇ 조선반도가 지옥이 아니고 유교가 지옥인것도 아니다.. 너외나 우리 즉 조센징이 사는 곳이기에 지옥이다2015.07.23 07:48:27삭제
  • aa(218.156)동양을 이지경으로 만든 2000년전 유교, 동양철학을 아직도 배우는 미개한 조센징들 ㅉㅉㅉㅉㅉ 한무당들도 요새 서양기계수입한다더만;;; 서양철학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 창조할때 똥양인들은 제사지내는거 말고 뭐했냐?2015.07.23 09:21:44삭제
  • 역갤러(118.36)10. 정약용 (그닥 추천할게 없음. 체계적인 책 없음)의 이유가 일본에 있기 때문. 일본은 1700년도 초반에 이미"동양철학 병신 좆까" 했고, 논어는 공자의 잡담-도덕 교과쇼가 절대로 아님으로 논어를 새롭게 해석함, 맹자는 공자의 논어를 도덕책으로 견강부회 했다고 비판2015.07.23 10:54:42삭제
  • 역갤러(118.36)정약용은 그런 일본의 사상에 깜놀, 오규소라이 논어징을 바탕으로 논어를 재해석 함. 뻑이 간 상태에서 "일본이 유학마저 우리를 앞지름, 일본이 철학적으로도 깨인 나라라서 이웃나라를 침범하는 오랑캐짓을 하지 않을 꺼"라 헛다리2015.07.23 10:56:30삭제
  • 역갤러(118.36)오규소라이는 일본어로 현토된 논어를 읽고 논어를 읽었다고 말하는 건 병신이라 함. 중국인 개인교사 들을 옆에 두고 중국말을 배우면서, 고대 중국어까지 유추하면서 중국 고대 서적을 분석함.2015.07.23 11:00:20삭제
  • Foregone(223.28)논어 황희경 선생님꺼 봐라2015.07.23 14:40:44삭제
  • Last.R 갤로그로 이동합니다.똥송합니다..2015.07.23 16:20:09삭제
  • 꺌꺌(221.151)근사록은 이광호 선생님이 번역하신 '근사록 집해'가 더 좋은 것 같다. 논어는 위의 추천도 좋지만 김용옥의 '논어 한글 역주'도 괜찮다. 중간에 개인적 의견을 많이 첨부해서 그렇지 고주, 신주, 소라이, 정약용 등 각종 주석서를 망라해서 소개해주는 솜씨가 일품이다. 대학도 박완식 선생의 '대학' 번역한 것도 좋다. 대학 원문 뿐 아니라 대학장구, 대학혹문, 대학강어까지 번역하고 설명해줘서 좋다.2015.11.22 22:14:26삭제
  • 꺌꺌(221.151)입문서에는 중국철학사 풍우란도 좋지만 노사광이 쓴 것도 참조하면 좋다. 시대별로 조금 들어가자면 우선 선진시대는 그레이엄의 '도의 논쟁자'와 벤자민 슈월츠의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도 좋은 책이다. 송명시대의 경우에는 쓰치다 겐지로의 '북송도학사'랑 구스모토 마사쓰구의 '송명유학사상사'로 전체적인 철학사를 익히고, 진래의 '주희의 철학' '양명철학'으로 가장 주류학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2015.11.22 22:14:27삭제
  • ㅇㅇ(61.79)조용헌이 사주명리학1위라고? ㅋ2017.09.06 15:38:08삭제
  • 댓글돌이

  • 삼겹살 산처럼 주고 1만원…'바가지 요금' 없앤 무주 축제 비결
  • 1/20 
  • 이제봤는데(14.38)한심한 수준이네. 대학원생이 저런 추천목록을 작성하고 있으면 학부 때 공부 하나도 안 했다는 이야기지.2018.05.19 19:01:50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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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1

Kang-nam Oh | 이집트 여행기 (1-8)

Kang-nam Oh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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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⑧ – 사막의 교부들

‘이집트’하면 종교학이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Desert Fathers)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도 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이들의 지혜와 선불교 선사들의 가르침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D. T, Suzuki에게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 여행에서 이 사막 지방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평소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집트 여행기의 한 부분으로 이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보고자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대략 3세기부터 주로 이집트 나일강 하류 델타의 서북쪽 스케티스(Scetes) 사막에서 은둔생활과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신과 가까워지거나 신과 하나 되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남자들 뿐 아니라 소수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사막의 교모(Desert Mothers)라 하기도 합니다.
처음 이곳에 온 이는 로마 황제 데치우스(Decius) 치하에서 있었던 기독교 박해 기간(249-251)을 피해 들어온 테베의 바울(St. Paul of Thebes, 227-341)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이는 대 안토니우스(St. Anthony the Great, 251-356)로서 기원후 270년 경 이 사막으로 들어와 사막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막의 교부/교모들이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혼자, 혹은 두 세 사람이 모여 동굴이나 오막살이에서 기거하며 수행하였는데, 날이 가면서 함께 모여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나중 조직적인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성격의 조직적 수도원을 남자를 위해 9개, 여자를 위해 2개를 창설한 사람이 그 유명한 성 파코미우스(St. Pachomius, 290-346)였습니다. 
기원후 350년 경에는 수천 명이 이곳 사막으로 모여들어서 아타나시우스가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고 증언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청빈, 봉사, 극기의 삶을 본받아 살기로 서약하고, 예수님이 어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19:21)라고 한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모은 것이 <사막의 교부들의 말씀(Sayings of the Desert Fathers)>이라는 글 모음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막 교부들의 지혜’ 등의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된 책도 많습니다.
이들의 수행 방법은 주로 침묵과 금식과 기도였습니다. 이들의 삶과 수행법은 중세 경건주의 운동이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암송, 베네딕도(분도) 수도원 규칙, 심지어 감리교 부흥 등 기독교 역사 전반에도 계속 영향을 주었지만, 특히 동방정교회 수행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하나가 Hesychasm(헤시카주의) 수행법입니다. 그리스어 ‘hesychia’란 고요함, 침묵 등을 뜻하는 말인데, 이 수행법 중 하나는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예수 기도(Jesus Prayer)”를 외우는 것입니다.
이 수행법을 실천한 어느 러시아 청년의 생생한 경험이 책으로 나왔는데, 제가 번역하고 대한기독교서회에서 2003년에 낸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입니니다. 이 책에 대해 aladin 전자서점에 나온 소개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책 선전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책을 사시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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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책.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보여준다.
   주인공은 어느 날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미 영어로도 여러 번역본이 출간되어, "러시아 영성의 고전" (휴스턴 스미스 교수, 미국의 종교학자),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 등의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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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중에는 <필로칼리아> 같이 그 청년이 감동 받았던 사막 교부들의 책이나 가르침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고: 토마스 머튼은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 생활을 한 것,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한 것, 바울이 사막에 가서 2년 동안 지낸 것 등입니다.  사막은 오로지 하늘만 바라볼 수 밖에 없으니 하느님과 가까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머튼도 사막으로 가야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지리적 사막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사막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켄터키 주 게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 <토마스 머튼이 길어낸 사막의 지혜>(바오로의 딸, 2011) 참조.


Kang-nam Oh
3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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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⑦ - 도굴 원조국

이집트 무덤들은 왕들의 무덤이든 귀족들의 무덤이든 거의 모두 도굴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왕들의 무덤에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함께 매장되었기 때문에 무덤이 완성되는 다음 날이면 심지어 ‘무덤을 만든 이’들에 의해 도굴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도굴은 어디에나 있는 현상이지만 3천년, 4천년 전 그 옛날에도 도굴이 그렇게 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피라미드처럼 무덤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은 그대로 도굴꾼들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굴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가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에 즐비한 왕들의 지하 무덤 조성으로 나타났습니다. Luxor에서 멀지 않은 왕가의 계곡에 가면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게 계곡 양 옆 언덕을 파고 왕들의 무덤을 조성하여 두었습니다.  현재까지 64개인가 66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무덤들은 거의 다가 도굴꾼들의 손을 타 텅 빈 상태입니다. 유일하게 투탕카멘과 그의 이모 겸 양어머니 네페르티티 왕비의 무덤만이 도굴을 면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약 1331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이집트 제18왕조 12대 왕으로 등극하여 18세에 사망했습니다. 1922년에 발견된 그의 무덤은 다른 왕들의 무덤과 비교하여 작은 편에 속하지만 도굴을 면한 덕택에 거기서 발견된 황금 마스크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모든 왕들은 사후 미라로 처리하고 얼굴 위에 생전의 모습과 같은 황금 마스크를 씌우는데, 이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잘 생긴 젊은이의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무덤에는 그 외에 5천 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밖으로 가져 나오는 데만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현재 그 황금 마스크와 유물들은 카이로에 있는 국립 이집트 문명 박물관(National Museum of Egytian Civilization) 2층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으로 최근에 발견된 무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집트의 다신론 신앙을 태양신만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제18조 제10대 왕 아크나톤 왕의 왕비로 그의 종교개혁을 함께 실행한 네페르티티(BCE 1370-1330경) 왕비의 무덤입니다. 그의 석회석 채색 흉상은 1914년 발견되어 현재 베르린 알테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그의 무덤은 최근까지 찾지 못하다가 몇 년 전에 (2021년에?) 찾았답니다.(연도를 정확히 아시는 분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 ‘선택 관광’의 하나로 들어가 보았는데, 가이드 말에 의하면 입장료는 우리가 선택한 선택 관광 중에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 안의 벽화에 묘사된 여인의 의상이 그림마다 달라 패션 전시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Alvin Dunn
Reply3 d


Kang-nam Oh
23 April at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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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⑥ – 금자탑(金字塔)이 이집트에?

이집트로 여행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피라미드를 보러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방문객 수가 좀 내려갔을 수도 있겠지만 한 때 일 년에 천5백만 명 이상이 피라미드를 보러 왔다고 합니다.  이집트는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과 함께 조상 덕에 사는 대표적인 국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처음부터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보통 ‘금자탑’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후세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업적을 일컫는 말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피라미드를 가리키는 한자어입니다. 피라미드 모양이 쇠금(金)이라는 글자(字)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金字塔’이라 했다고 합니다.  중국, 한국, 일본 한문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쓰는 말인데,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피라미드’라고 부르는데, 중국은 아직도 피라미드라는 말이 아니라 금자탑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한다 하니 이 말은 중국 발명품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집트에는 현존하는 70기인가 138기의 피라미드 중에서 제일 큰 기자의 大피라미드에 가 보았습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진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쿠푸(Khufu) 왕의 무덤으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27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하니 2500년이라고 해도 4천5백 년 전. 그러니까 지금이 단기로 4356년, 단군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된 건축물인 셈이네요. 
이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6m, 하단 한 면의 길이는 230.33m라고 하는데, 현재 높이는 약간 낮아졌다고 합니다. 230만개의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무게가 6백만 톤이나 된다고 하네요.
피라미드를 처음 보면서 그동안 상상했던 것보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확하게 다듬어진 직사각형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매끈한 건축물인 줄 알았는데, 울퉁불퉁하게 쌓여 있어 멀리서 보면 거의 거대한 흙더미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울퉁불퉁한 돌들 위에 반죽한 석회암을 바르고 꼭대기는 황금으로 장식하여 더없이 아름다웠는데, 후대에 석회암이나 돌들을 다른 건축물을 위해 무단 채취해 갔기에 지금의 겉모양을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단 쿠푸 왕의 아들과 손자의 피라미드가 그 주위에 있는데 손자의 피라미드 거의 윗부분에는 아직도 석회암 마감재가 남아 있어 매끄럽게 보였습니다.
이 대 피라미드를 짓는데 10년인가 20년 정도 걸렸을 것 같다는데, 지금까지 노예들의 피땀으로 지어졌으리라 믿고 있었지만, 1986년에 피라미드 근처 마을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벽화에서 노예가 아니라 농민들이 나일강이 범람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기간 동안 임금을 받으며 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한 일꾼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은 일하러 갈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한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다네요. 이들은 심지어 임금 쟁의까지 했다고 합니다. 한편 피라미드 공사도 농민들이 농한기 동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측면도 있다고 합니다. 
<십계>나 <이집트의 왕자> 같은 영화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전을 짓는데 동원되어 말할 수 없는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전 자체의 건설과는 관계 없고 오로지 흙와 짚을 섞어서 벽돌을 만드는 데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왕의 관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3분의 1 정도 높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광객들은 거기를 보기 위해 전에 도굴단이 만든 통로를 통해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갑니다.  저도 따라서 들어갔는데, 통로가 좁고 가파르고 낮아서 바닥에 나무막대기 같은 것을 박아 놓은 것을 밟고 기다시피 하며 올라가면서 여러 번 머리를 위에 있는 돌에 부딪히기도 하고 내려오는 사람들과 몸을 비빌 정도로 겨우겨우 비켜 가면서 왕의 관이 안치된 방에 도달했습니다.  관은 붉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물론 지금은 빈 관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 되던 날 사람들이 무덤에 갔을 때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생각했다는데, 이집트인들이나 관광객들은 피라미드 안 ‘빈 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집트 역대 왕들의 미라는 미라 박물관에 함께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Kwon Ji-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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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5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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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20 April at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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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⑤ - 이집트의 신(神)들

이집트에는 신들이 많았습니다.  이집트가 지금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국가여서 알라 신 한분만 믿는 유일신 종교를 신봉하고, 이집트에 사는 콥트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로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2천 이상의 많은 신들을 믿는 다신교 국가였습니다.  그 중 유명한 신은 남신 오시리스(Osiris), 여신 이시스(Isis), 그리고 이들의 아들 호루스(Horus)입니다. 
 땅의 신 게브(Geb) 남신과 하늘의 신 누트(Nut) 여신 사이에서 2남2녀의 신들이 탄생했는데, 오시리스(남), 이시스(여), 세트(남), 네프티스(여)였습니다. 오시리스가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 왕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했는데, 그의 동생 세트가 그의 지위를 탐하여 그를 죽이기로 했습니다. 신들도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좀 이상스럽습니다만, 이 이야기에 관계되는 몇 가지 버전 중 하나에 의하면, 어느 파티에서 세트는 훌륭한 관을 가지고 들어와 누구든지 이 관이 맞는 이에게 이 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오시리스가 들어가 보았는데 세트는 관 뚜껑을 닫고 관을 나일강에 던져버렸습니다.  오시리스의 여동생이자 동시에 아내이기도 한 이시스가 관을 찾아냈지만 세트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관이 저절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튼 이를 발견한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14토막으로 내고 이집트 각지의 들판에 흩어버렸습니다. ‘토막 살인’이 아니라 ‘토막 殺神’인 셈이네요.  
이시스는 다시 오시리스의 토막 난 몸의 부분들을 다 모아 붙인 뒤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설에 의하면 세트가 그것을 잘라 강물에 던져버려서 물고기가 먹어치워버렸기 때문이라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흙(혹은 황금)으로 그 부분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몸이었지만, 일단 새로 부활한 오시리스를 통해 이시스는 임신을 하게 되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이 호루스입니다. 호루스는 자라나 세트를 물리치고 이집트 전체를 치리하는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호루스가 세트와 싸우다가 눈 하나를 잃었지만, 지혜의 신 토트가 호루스의 눈을 찾아주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우자트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화와 관계해서 몇 가지 설왕설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시스가 오시리스와의 직접적인 성관계 없이 호루스를 낳은 것과 마리아가 남자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낳은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근거 없는 억측이라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시스가 아기 호루스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해서 이런 논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이집트 ‘아누’라는 곳에서는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오시리스의 다른 이름이 Azar이어서 ‘Azar의 부활’ 축제인 셈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1-45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살다가 죽은 나사로를 3일만에 부활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학자들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Azar라는 이름에 엘리야, 엘리사라고 할 때처럼 신을 의미하는 El을 붙여 Elazar가 되고 여기서 E가 탈락되어 Lazar, 우리말 ‘나사로’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함께 ‘베다니’라고 하는 곳은 이집트 Anu에다가 유대인들이 베델, 베들레헴 할 때처럼 지명에다 붙이는 Beth를 붙여서 ‘Bethanu’, ‘베다니’라는 유대식 이름이 된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결국 베다니의 나사로 부활 이야기는 아누에서 있었던 오시리스의 부활 이야기를 원용했다는 뜻이지요.  믿으시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겠지요. (이 이야기는 제가 작년 부활절에 페북에 소개했고 자세한 것은 <오강남의 생각>(현암사, 2022) 27-30쪽에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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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17 April at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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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④ - 모세 이야기

(이번 글은 좀 길어졌습니다. 2부로 올리려다가 한꺼번에 올립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는대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번 홍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홍해 하면 모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출애굽기> 혹은 <탈출기>에 의하면 아기 모세가 나일강 갈대 밭에서 ‘건짐을 받고’ 장성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방문 첫날 파라오 왕의 딸이 나일강가에 나왔다가 바구니에 담겨 나일강 갈대숲에 떠 있는 모세를 건졌다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는 강이었으나 지금은 아스완 댐에서 물을 막아 아스완 댐 이하 하류는 상당 부분 육지로 변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떠 있었다는 나일강 갈대숲도 지금은 육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곳에 Ben Ezra Synagogue라는 유대교 회당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수 중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모세를 유대교의 창시자라 여깁니다. 유대교는 자기 조상들의 이집트 탈출사건(Exodus)을 자기들 신앙의 중심이며 초석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그들 고유의 신 야훼 신을 알게 되고, 하나의 백성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고, 선민(選民)의식도 갖게 되고, 십계명이라는 기본 법률도 가지게 되고, 자기들 고유의 신과 언약 관계도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를 매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 의식을 확립하게 된 셈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창세기>에서 야곱, 이삭, 아브라함이 언급되고, 더 거슬러 올라가 최종적으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결국은 천지창조의 이야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모세와 이집트 탈출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배경 이야기라 보아야 합니다.
I. 강에서 건짐을 받다
 모세를 나일강에 버리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왜 모세가 이집트에 태어나 어째서 그런 위험에 처했는지 알아야겠지요. 아시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야곱과 열두 아들입니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쌍둥이 형 에서를 속인 죄로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 그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라헬을 사랑하여 그를 얻기 위해 7년간 일했지만 외삼촌의 속임수로 원하지 않던 레아와 먼저 첫날밤을 보내게 되어, 라헬을 위해서는 다시 7년간 일을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이 두 여인과 그들의 여종들을 통해 모두 열 두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가 특별히 사랑하던 라헬에게서 난 요셉과 베냐민에게는 채색 옷을 입히는 등 그들을 몹시 편애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요셉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자기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둘러서서 자기 단에 절하는 꿈도 꾸고, 또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도 꾸었다고 말하여 더욱 큰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요셉에게 형들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이 “꿈꾸는 자가 온다”고 하면서 그를 구덩이에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대상(隊商)들을 보고 요셉을 그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파라오(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 집에 팔려 갔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결국 감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 두 사람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몽해 주었는데,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은 사흘 만에 복직하여 다시 왕을 섬기게 되고, 떡 굽는 관원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고 그 뜻을 몰라 고민할 때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천거하여 왕의 꿈을 해몽하게 하였습니다.  
 왕은 꿈에서 일곱 마리 살진 소가 나타났는데 그 후 일곱 마리 파리하고 흉한 소가 나타나 살진 소를 먹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깼다가 다시 잠들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타나고, 그 후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타나 충실한 일곱 이삭을 먹어 버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일종의 예지몽 같은 것인데, 요셉은 이것이 이집트에 7년간 큰 풍년이 들었다가 7년간 흉년이 들 것이라 해몽하고, 왕에게 건의하여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잔뜩 비축해서 7년 흉년을 대비하라고 했습니다. 이 꿈 해석을 들은 왕은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았습니다.
 정말로 7년 풍년 다음에 7년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이집트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들어서 가나안에 살던 야곱의 식구들도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집트에는 곡식이 많이 비축되어 있어 거기 가면 곡식을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을 그리로 보냅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며 곡식을 팔라고 간청했습니다. 길고 눈물 나는 이야기지만 눈물을 머금고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결론적으로 요셉의 주선으로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모두 나일강 하류의 기름진 땅 고센이라는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야곱도, 요셉과 그의 형제들도, 그들을 도와준 파라오 왕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강해져 갔습니다. 한참 지난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나타나 혹시 전쟁이 날 경우 강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오는 적들과 합세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가정에서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놓고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울음소리가 커지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강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 때 왕의 공주가 나일강으로 목욕하러 왔다가 상자에 든 아기가 우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아이를 구하기로 하고, 모세의 어머니를 유모로 삼아 어느 정도 키운 다음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모세라는 말은 ‘물에서 건져내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계속)
II.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내다
 이집트 궁전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가 어느 날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이 힘들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쳐 죽여 모래 속에 묻었습니다.  다음 날 다시 나가 보니 두 히브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하자,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 하는 것이오”하며 덤볐습니다.  자기가 살인한 것이 탄로 난 것을 알게 되고, 왕도 이 사건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모세는 이집트에서 홍해 건너편 미디안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거기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 아들까지 얻으며 40년을 살았습니다.
 한편 이집트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로 하여 어느 날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아니하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고,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집트로 내려가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할 터인데,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고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보내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려 한다 말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에서 이스라엘 신 ‘야훼’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 파라오 왕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내보내라 했다고 전하자 왕은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길래 이런 요청을 하느냐 하며 일거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일강 물을 비롯 모든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후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가축의 돌림병 재앙, 악성 종기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마지막 열째 재앙으로 이집트의 처음 난 사람이나 짐승을 다 죽이는 재앙을 내리자 왕은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나오는데, 홍해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가게 한 왕 파라오는 이를 곧 후회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오려고 스스로 기마병을 지휘하여 그들의 뒤를 좇았습니다. 모세가 홍해 위로 손을 내밀자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고 나서, 이집트 군대가 뒤따라 바다 가운데로 들어왔을 때 모세가 다시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바다가 합쳐져 파라오와 그의 군대가 다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집트 군대를 지휘하고 간 왕이 람세스 2세로 추정되는데, 람세스 2세는 수장되지 않고 ‘왕가의 계곡 KV7’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이것이 히브리 성서에서 말하는 “모세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시내 반도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결국 모세는 120세에 죽고 여호수아가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지금의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해 들어갑니다.
모세의 출생 배경과 모세의 건져올려짐, 모세를 부르심,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냄 등을 이야기하려다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기초적인 성경 지식이 갖추어지신 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하자는 의미로 올려보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성경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보시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유대교의 정신사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냈을 뿐 아니라 모세 오경(五經)의 저자라고 전해 내려오는 모세 이야기가 중심이고 <창세기> 이야기는 모세와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배경인 셈입니다. 물론 현재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사적 진위를 떠나 그 이야기에 담긴 속내는 알아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요. 
성경 이야기는 하나의 암호(cypher)라 할 수 있습니다.  암호해독(decyphering)이 중요합니다. 흑인 신학에서는 이 이야기에서 큰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한국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야훼 신에게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주십시오.”(출32:32)라고 탄원할 정도로 자기 백성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모세 같은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차춘희
불교에서 수행의 가장 높은 단계는 내가 사라지고 중생을 위해 돕는 것이라 했는데 모세가 그러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군요
성서를 역사적 사건으로 읽으면 모순이 많겠지만 의미사로 읽어야만 그 본뜻을 깊이 이해 할수 있겠지요!!…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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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차춘희 의미사로 읽기-정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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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12 April at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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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③ - 홍해는 붉은 바다인가?

이집트 하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다는 홍해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해(紅海)를 영어로도 Red Sea라고 하는데, 홍해가 정말로 붉은 바다일까요.  
제가 같이 간 분들과 함께 휴양의 도시 후루가와에서 반잠수함 배를 타고 홍해를 항해해 보았습니다.  바다는 이름과 달리 마치 파란 잉크를 풀어놓은 듯 완전 파란색을 띠고 있는 ‘파란 바다’였습니다.  
(참고: ‘푸른 바다’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푸른색은 ‘풀의 색’이기 때문에 초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푸른 바다’라고 하면 영어로 green sea가 되는 셈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에서 푸른색과 파란색을 구별하지 않고 섞어 쓰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색깔에 우리 말이 다 있습니다. 황-노랗다, 흑-검다, 홍-빨갛다, 백-희다, 청-파랗다 등. 그런데 유일하게 록(綠)에 대해서만은 우리 말이 아니라 한자어 ‘초록색’이라 합니다. 색깔 중 산이고 들이고 우리 눈에 가장 많이 보이는 색깔이 초록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풀색, 푸른색이 초록에 해당하는 우리 말입니다. 따라서 ‘푸른 초원’은 맞는 말이지만 ‘푸른 바다(풀색 바다)’, ‘푸른 하늘’(풀색 하늘)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사족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물이 파란데 왜 붉은 바다라고 했을까요?  이번 이집트 여행에서 그 연유와 관계되는 몇 가지 설을 알아냈습니다.  첫째, 후루가와에서 사막을 보여주면서 지프 운전을 하던 현지 기사에 의하면 바다에 산호초가 많아서 홍해라 했다고 합니다.  특히 보름 때, 썰물이 되면 바다 속 산호초들이 가까이 보여 홍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반잠수함 배를 타고 바다 물 밑을 내려가 보았는데, 산호초가 붉지 않고 회색을 띠우고 있었습니다.
둘째 설은 홍해 연안에 붉은 산맥들이 있는데, 그 산들의 붉은 빛이 바다에 비쳐서 붉게 보이기 때문에 홍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듯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셋째 이론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튀르키예(터키)를 중심으로 하는 바다의 명칭이 동양에서 잘 알려진 오방색(五方色) 이론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오방색이란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색깔로 표시한 것입니다.중앙은 황, 북은 흑, 남은 홍, 서는 백, 동은 청. 이렇게 다섯 가지 색깔인데, 튀르키예 사람들이 자기들 사는 곳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바다는 흑해, 남쪽에 있는 바다는 홍해, 서쪽에 있는 바다 지중해는 튀르키예 말로 백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청해는 왜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카스피해가 청해였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오방색? 투르키예인들은 돌궐족(突厥族)의 후예들이라 그들이 동아시아권에 있을 때 오방색 개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튼 홍해는 이름과 달리 붉은 바다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Kang-nam Oh
10 April at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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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② -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서

이집트 여행을 하면서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 Km 떨어진 나일강 상류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였습니다.  
 1945년 12월 어느 날,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 농부가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이곳 산기슭에서 밭에 뿌릴 퇴비를 채취하려고 땅을 파다가 땅속에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귀신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나 무서웠지만 금덩어리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항아리를 열어 보았습니다.  귀신도 나오지 않고 금덩어리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가죽으로 묶은 열세 뭉치의 파피루스 문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고문서가 들어있는 항아리가 금으로 가득한 항아리보다 더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던 농부는 혹시 고문서라도 골동품으로 값이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장에 가지고 가서 몇 가지 식료품과 맞바꾸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이 고문서는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을 통치할 통일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그리스도교를 채택하고,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325년 약 300여명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지금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서남쪽에 있던 니케아에 모이게 하여 공의회를 열게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한 아리우스(Arius)파를 물리쳤습니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그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 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正經)화했습니다. 그후 그는 한 걸음 더 나가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에 따라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문헌들은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그 함마디 문서는 이집트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부적절하다고 지목된 도서를 수도원 도서관에서 빼어내어 항아리에 밀봉하고 산기슭에 묻어 두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문서 뭉치들 속에는 52종의 문서가 들어가 있었는데, 이 문서들은 모두 콥트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콥트어 문서란 고대 이집트 말을 그리스 문자에다가 이집트에서 전해오던 글자 중 일곱 글자를 더해서 기록한 문서입니다. 이집트에는 콥트어를 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이집트 콥트 그리스도인들이 인구의 약 10% 정도라고 합니다. 이들 콥트어 문서는 본래 그리스어로 된 문서를 콥트어로 번역한 것들입니다. 이 문서들중 가장 잘 보존되고 가장 획기적인 내용을 포함한 것이 바로 󰡔도마복음서󰡕였습니다.  
 <도마복음>은 지금 성경에 포함된 공관복음서와 50% 정도가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지만, 공관복음서와 달리 기적, 예언의 성취, 부활, 재림 등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어록 114개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 속에 빛으로 계신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ōsis)’를 통해 내가 새사람이 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경주라 할 정도로 유명한 룩소르(Luxor)에서 이집트 최대의 신전 카르낙 신전, 왕가의 계곡, 그 중에서도 새롭게 개방된 이집트 신왕국 제18대 파라오(바로) 아케나톤 왕의 부인 네페르티티의 무덤 등을 돌아보고 다음 날 버스로 5시간 걸려 이집트의 대표 휴양지 후루가다로 가는 길, 룩소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 Km 떨어진 나그 함마디를 지나가면서, 저는 <도마복음> 해설서를 쓴 저자로서, 거기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꿀둑 같았지만, 이번 여행이 단체 여행이라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어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버스에서 마이크를 잠깐 빌려 같이 간 분들에게 나그 함마디와 <도마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섭섭함을 달랬습니다.
안광덕
이집트 사막수도원 순례와 룩소르 가서 도마복음서 예기로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다시 충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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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5 April at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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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 ① - 이집트 피란

지난 2월 중순 이집트에 다녀왔습니다.  이집트에서 보고 느낀 것 중 페친들에게 흥미가 있을 것 같은 제목의 글을 몇 개 올리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피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나시자마자 이집트로 피란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 첫 날 예수님과 그 부모가 피란 가서 살았을 것이라는 동굴과 그 위에 지어진 ‘아기예수 피란교회’라 불리는 콥트 교회도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그의 별을 보고 이스라엘로 찾아와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불러 문의한 결과 그곳이 베들레헴일 것이라 일러주었습니다.  
헤롯 왕은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를 찾거든 돌아와 자기에게 말해주면 자기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했습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향해 나서자 동방에서 본 그 별이 문득 앞에 나타나 그들을 인도하여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가 있는 집에 들어가 (참고: 마태복음에는 아기가 말구유에 누워있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편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해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돌아간 후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개역 성경에는 애굽이라 했습니다)로 피하여 다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기 있으라 했습니다. 요셉은 그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살았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자기에게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대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주위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다 죽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참고: 아기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예수님과 모세를 등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 미드라시 서술기법이라고 합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이집트에서 요셉의 꿈에 나나타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으니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에 정착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왔다고 하는 선물 중 몰약이 뭔가 잘 몰랐는데, 이번 이집트 방문에서 몰약이 미라의 부패를 막는 항균제로 쓰이는 값비싼 물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황금과 유향도 비싼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상가 중 한 분인 토마스 머튼은 이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풀이합니다. 예수님의 식구들이 이집트에 몇 년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거기 살 때 이 선물들을 팔아서 생활비로 충당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기독교 초기에 동방에서부터의 선물이 이처럼 중요하였던 것같이 2천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가 다시 활기를 되찾으려면 동방으로부터의 선물이 필요한데, 그것은 노장 사상이나 선불교 같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예수님 식구들이 살았다는 곳에 가서 다시 떠오르는 생각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참고: 예수님 식구들이 살았다고 하는 곳은 이곳 말고도 여러 곳 있다고 합니다.)

2023/02/04

오강남 - 무아無我를 중심으로 > 월간고경

무아無我를 중심으로 > 월간고경 | 백련불교문화재단

[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무아無我를 중심으로
 
오강남 / 2023 년 2 월 

지난 호에서 모든 종교에는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의 차이점 몇 가지를 예거했습니다. 차이점의 첫째는 표층 종교는 탐진치로 찌든 지금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인 반면 심층적 종교는 지금의 내가 본래적인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려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불교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좀 자세하게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무아사상의 보편성

지금의 이기적인 자기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면 희망이 없다고 하는 가르침은 사실 거의 모든 종교의 심층에 깔려 있는 기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없애는 것, 자기에게서 해방되는 것, 자기를 잊는 것, 자기를 부정하는 것 등으로 표현되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이 종교적 삶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경우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향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뜻입니다. 중세의 많은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종교적 목표가 ‘신화(deification)’ 곧 ‘신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된다고 해서 교만이나 신성 모독의 극치라고 여기기 쉬우나 여기서 신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없어진다는 것, 나의 모든 것은 모두 신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진 1. 노자老子.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도 『도덕경』 제7장에,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고 했습니다. 같은 도가 사상가 장자莊子도 ‘오상아吾喪我’라고 하여 ‘나를 여읨’ 곧 지금의 나와 사별하는 것을 수행의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유교의 경우에도 공자孔子님은 나이 70이 되었을 때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하여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진 상태에서나 가능한 경지입니다.

신유학에서는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를 주장하는데, 개체로서의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만물과 하나된 나를 상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교에서 전반적으로 말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를 취하라고 하는 것도 결국 지금의 나에게서 해방되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 2. 공자孔子.

그러나 지금의 ‘자기’란 정말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꾸며놓은 허구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힘있게, 체계적으로 설파하는 종교는 불교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녹야원으로 가셔서 다섯 수도승에게 처음으로 가르치신 것이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와 무아無我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anātman)

그러면 부처님은 왜 처음의 가르침으로 이런 무아의 가르침을 가르친 것일까요? 부처님 당시 힌두교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我(atman)를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梵, Brahman)과 동일시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표층 종교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나, 이 썩어질 나, 현실적인 나, 이기적인 나(self, ego)를 가장 중시하고 이를 떠받드는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나’, ‘아트만’을 불변의 영원한 실체로 여기는 오해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보고, 이런 자아라는 망상을 타파하기 위해 ‘무아無我’, 내지 ‘비아非我’를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 무아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이론적 근거가 있습니다.


사진 3. 초전법륜상. 법륜에 손을 얹어 첫 설법을 하는 부처님(간다라, 2세기, 미국 트로박물관). 사진: 유근자.

첫째는 윤리적 근거입니다. 이런 피상적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 일상적인 나를 영구불변의 실재로 보고 떠받드는 종교는 집착, 욕심, 증오, 교만, 이기주의 등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보았습니다. ‘나’라는 생각, 나를 떠받들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괴로움으로 이끄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분쟁에서부터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작용은 바로 나에 대한 오해와 집착,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기주의적 사고라고 본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섯 수도승에게 “[지금의 나에 대해] 염증을 느껴야 거기서 물러설 수 있고, 물러서야 참으로 자유스러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무아의 가르침은 윤리적 ‘요청(postulate)’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논리적 근거입니다. 논리적 근거의 첫째는 오온五蘊입니다. 오온이란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요인의 일시적인 가합假合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마차가 실제로는 하나의 독립적 실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판자, 바퀴살, 심보, 밧줄 등으로 이루어진 결합체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그 자체로 독립적 실체일 수 없다는 논리적 근거 둘째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연기緣起’ 사상입니다. 연기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기본 원칙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물은 예외 없이 다른 무엇에 의해 생겨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두가 상호의존, 상호연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뿐 독자적으로 일어나거나 존재하는 실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립적 실체로서의 ‘나’는 성립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아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스러워지고, 세상도 그만큼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연기 사상은 자아가 궁극적으로 허상이라는 것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해준 셈입니다.

불교에서는 개인의 자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도 그 자체로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까지 이야기합니다. 무아를 영어로 ‘noꠓself(자아 없음)’이라고만 번역하지 않고 ‘no-substance(실체 없음)’이라고 번역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궁극적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데, 
  • 이것은 모든 것이 덧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와 함께 
  • 전통적으로 불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하는 삼특상三特相, 곧 모든 사물이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 가지 공통적 모습’이라 봅니다.

무아사상의 난점

무아의 가르침을 논리적 귀결이라 볼 수 있지만, 엄격히 따져 보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업(karma)’의 원리대로라면 내가 지금 한 행동에 대해서 나중 내가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인데,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없다면 내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누구일까? 그뿐 아니라 ‘나’가 없다면 내가 행동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누구일까? 하는 문제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는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를 상정해도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무아 같은 가르침이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화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했다는 독화살을 맞은 젊은이의 비유에서 이런 생각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느 청년이 독화살을 맞았는데, 사람들이 달려와 독화살을 빼려고 하자, 그 청년은 독화살을 빼기 전에 독화살과 그것을 쏜 사람 등에 대한 정보를 먼저 알아야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아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허상을 깨는 것이 급선무이지, 그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가 없는가 따져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은 사변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을 경계했습니다. 어느 제자가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하는 등의 14가지 질문을 했을 때 침묵했습니다. 이른바 무기無記입니다.

나가면서

어찌 보면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는 것, 자기를 잊는 것, 자기와 사별하는 것이 ‘희생의 길’, ‘고난의 길’ 심지어 ‘바보의 길’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길에서 이런 심층에 이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묶고 있는 목줄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의 길이요 창조와 발견, 자각과 성장, 평화와 기쁨의 길,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보람된 길이라 증언합니다. 이제 우리도 불교를 나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비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대신, 이렇게 나를 비움으로 얻을 수 있는 청복을 약속하는 심층 종교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2022/11/27

Kang-nam Oh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 – 그 전개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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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 – 그 전개와 전망


11월16일 토론토 부근에 있는 University of Waterloo 한국문화 강좌 시간 특강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학교는 한국학 과목이 아주 활발하여 1년에 약 500명 가량의 학생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 과목을 수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서 영어로 한 강의 내용을 요약해서 페친들과 나누고 싶어 컴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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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제목은 Korean Christianity: Past, Present and Future 였습니다.  한국 종교 전반에 대한 강의는 강의 담당 교수가 이미 다루었다고 해서 저는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의 배타성을 중심으로 강의했습니다.  영어 인용문은 혹시 참고하실 분들이 계실까 해서 번역과 함께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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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선 시작하기 전에 미국 시카코 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유명한 요아킴 바흐 교수의 글을 인용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비진리를 증오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믿음을 고양하기 위해 다른이의 믿음을 증오하고 비하하여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It is true that to love truth you must hate untruth, but it is not true that in order to exalt your own faith you must hate and denigrate those of another.  - Joachim Wach

개신교

개신교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던 Dr. John Ross(1842-1915)의해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본격적인 선교는 1884년 Dr. Horace N. Allen (1858-1932), Horace G. Underwood (1859-1916), Henry G. Appenzeller (1858-1902) 등의 도착으로 본격화.  그후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등의 선교사들이 내한.
선교사들은 전도 뿐 아니라 교육기관과 병원등을 설립하고, 더러는 한국 독립운동을 돕기도 하여, 초기 선교사들과 개신교 신자들은 일반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개신교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도시화와 경제적 관심의 고조와 함께 비약적으로 확장.
그러나 현 기독교인의 절대다수는 이른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이들의 특징은 성경 문자주의, 기독교만 진리 종교라는 배타주의.
무속에서 받아들인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개신교의 배타성

전통적으로 한국인들 일반은 여러 종교에 대해 관대한 편.  1886년 한국에 온 선교사 Homer B. Hulbert는 이런 한국인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술.
“독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한 적대감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원만한 한국인들은 사회에 나가면 유교인이 되고 철학적 사고를 할 때는 불교인이 되고, 위급한 문제에 봉착하면 정령숭배자(무속인)가 된다.  ….the reader must ever bear in mind...that there is no antagonism between the different cults…As a general thing, we may say that the all-round Korean will be a Confucianist when in society, a Buddhist when he philosophises and a spirit worshipper when he is in trouble. “
이런 관용적이고 심지어 혼합주의적인 태도가 근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와는 반대로 이웃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심한 배타성을 보이고 있다.

몇 가지 예

30년 전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장이었던 변선환 목사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발언했다고 해서 교수직, 목사자격도 박탈당하고 결국은 교단에서부터도 축출되었다.
다른 한 가지 예는 강남대학교 이찬수 교수는 부처님에게 절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한 가지만 더. 어느 기독교 광신자가 김천 개운사에 들어가 불상을 훼손하고 기물을 파괴했는데, 서울기독교대학교 손원영 교수는 불교계에 사과하고 법당 복구비용을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 그 이유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  아직도 법정 투쟁 중.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나 철학사상을 배격해야만 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듯.  마치 영국 시인 키플링(Rudyard Kipling)이 “동은 동, 서는 서, 이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하리“(“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er the twain shall meet.”)라고 한 말을 그대로 신봉하는 듯.
반세기도 전 독일의 종교학자 하일러(Friedrich Heiler, 1892-1967)가 한 말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우리는 이런 배타적인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 벨리알,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은 같이할 수 없다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One can hear such exclusivist theologians say over and over again that there is no communion between Christ and Belial, light and darkness, truth and deceit.)”


왜 배타적이 되었는가?
몇 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첫째, 그리스도교에 전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배타적 경향 때문.  그리스도교에는 오랫동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Thomas Merton도 이를 지적,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를 만날 때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상대적인 사상체계’ 혹은 경쟁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이상한 세계관, 더욱 간단히 ‘거짓 종교’라고 치부했다.(When encountered the other faith, most Christians, “instinctively” reacted to it as “a rival system of thought’ or a ‘competing ideology’ or an ‘alien world view’ or more simply a ‘false religion’.)” 
둘째,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기본적으로 근본주의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는 점.  중국이나 일본에 들어간 선교사들에 비해 한국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열정과 웨스레적인 열성(Puritanic zeal and Wesleyan fervor)’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는 근본주의 기독교가 휩쓸게 되었다. “fundamentalism held sway in the Korean peninsula.”
Homer Hulbert나 George Heber Jones, 그리고 Canada 선교사 James S. Gale(1863-1937, 이분은 성경번역, 사전편찬, 문학번역 등 한국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 같은 예외적인 이들도 있었지만 근본주의를 개선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한국 전통 종교들의 도전에 접해보지 못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종교와 특별히 대화하거나 관계를 맺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 재래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간파하지 못한 채 기독교 우월주의를 고수할 수 있었다.
넷째, 한국 교회의 최고 관심사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은 헌금을 걷는 것. ‘성공한 교회’란 헌금액수가 가장 큰 교회.  따라서 내 종교만 올바른 종교, 다른 종교에 눈돌리지 말라는 태도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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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Religious Pluralism)

종교적 배타주의는 물론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 학자로서 하버드 세계종교 연구소 원장으로 오래 근무한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교수도 지적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종교체계들은 외부인들에게 어리석거나 심지어 그로테스크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적어도 고려짝인 무엇처럼 보이기 마련이다.(“most religious systems seem quaint, if not silly or even grotesque, to outsiders.”)
그러나 한국과는 달리 근래 서양 기독교에서는 이런 배타주의가 오늘처럼 다문화적이고 다종교적인 시대에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유지될 수도 없다(neither plausible nor tenable)는 사실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John Hick: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하는 프톨레미적 시각(the Ptolemaic perspective)처럼 종교가 내 종교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종교적 프톨레미 시각을 버리고 내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모두 진리의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시각”을 채택해야 한다. 
Arnold Toynbee: “배타주의적 심성(exclusive-mindedness)”은 죄된 심성인데 그 죄는 바로 교만의 죄이다. 
Aldous Huxley: “다른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도 영구적 세계 평화에 위협적 존재가 된다(Like any other form of imperialism, theological imperialism is a menace to permanent world peace.)”
Heinrich Ott, 기독교 배타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칼 바르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오트가 캐나다에 왔을 때 한 말: “인간적이란 것이 무엇을 의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전통들의 공헌을 고려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Understanding what it means to be human cannot be done without taking into consideration the contributions of all religious traditions.)” 
Mircea Eliade: 세계적으로가장 유명한 시카고대학 종교학자: “실로 우리는 이미 전지구적 문화에 접근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아무리 국지주의적인 역사가, 철학자, 신학자라 하더라도 다른 대륙, 다른 종교 신도들 출신의 동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의 문제를 생각하고 자기의 신념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Indeed, we are already approaching a planetary culture, and before long even the most provincial historian, philosopher or theologian will be compelled to think through his problem and formulate his beliefs in dialogue with colleagues from other continents and believers in other religions.)  
Paul Knitter: 다른 이름으로는?(“No Other Name?”)
Max Müller: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Hans Küng: “종교 간의 대화가 없으면 종교 간의 평화가 없고, 종교 간의 평화가 없으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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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원주의를 위한 몇 가지 시안(Some Tips for Religious Pluralism)

첫째,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의 전통 종교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더욱 심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시각주의(perspectivalism)에 해당되는 화쟁론(和爭論)의 주창자 원효(元曉, 617-686)나 새로운 의식의 변화를 중심의 성학(聖學)을 강조하는 퇴계나 율곡 같은 분들의 사상체계를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좀 더 광범위한 시각으로 보아, 한국 그리스도인들은(한국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세계 그리스도인들, 나아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15세기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가 주장한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 혹은 ‘양극의 조화’의 뜻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칼 융은 이를 자각하는 것이 정신적 성숙의 극치라고 했다.
반대의 일치란 ‘빛이 파동도 되고 입자도 된다’고 하듯 ‘이것도 저것도’라고 하는 ‘도도주의’(both/and mentality)이다. 
사실 이것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이라 할 수 잇다.

몇 가지 예: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그림이 올라오지 않네요.)


- 음양의 조화
   태극무늬
- 십자가 Cross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 David stern, the Star of David 
   세모를 두개 겹친 것
- Fish - Ixthus, ἰχθύς)
  두개의 원이 겹치는 것을 오려내 물고기처럼 보이는 것
- Swastika, "conducive to well-being" 
   불교의 만자























이 말은 세상에 ‘독불장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상호의존 상호관계 속에 있다는 것.(Interdependence and inter-relatedness).
따라서 독립적으로 혼자만 진리라는 일방적 주장을 성립불가하다는 것. (No one religion is independent. No one is an island!)
셋째,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지금 퇴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실정.  탈종교화(Irreligion).  탈종교화의 대표. 스칸디나비아 3국(“Society without God”)을 비롯한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도. 미국 고등학교 졸업생 중 69%에서 94%가 교회도 졸업한다고.  미국 보수 목사의 책 (Josh McDowell, The Last Christian Generation.)
John Shelby Spong 성공회 주교: 미국에서 제일 큰 졸업동창회는 교회졸업동창회.
많은 젊은이들, 종교는 no, 영성을 o.k. (Spirituality, but no Religion, SBNR)
이런 판국에 인습적이고 표피적 기독교만 진리 종교라고 외치는 것은 의미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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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

사라져 가는 표층종교를 대신할 21세기 대안 종교는. 무엇? 경외심을 강조하는 Aweism, 아하! 경험을 중요시하는 Ahaism.  우주에 편만한 신비에 눈 떠서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놀라워하고 경외하고 아하!하고 외칠 수 있는 심성, 감수성, 공감능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종교,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서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새로운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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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종교학계의 거장 Huston Smith의 말: 우리는 다른이들의 종교에 귀 기울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경우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등은 ‘다른이들’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들의’ 종교, 적어도 우리들의 일부. 얼마나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어야 하겠는가? 서로 다른 종교는 경쟁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임(not competitive but complementary)을 깊이 깨달아야.
위대한 종교 사상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 ”모든 살아있는 종교의 깊이에는 종교 자체가 그 중요성을 잃어버리는 경지가 있다. (In the depth of every living religion there is a point at which the religion itself loses its impor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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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comments
박희승
잘 보았습니다!
(((_)))
Reply6 d
전병렬
상호보완적인 종교. 불교와 천주교입니다. 개신교, 이슬람교 제외. 힌두교 포함한 상호보완적 내외부적 신앙과 수행이 진정한 종교입니다.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좋아요
Reply6 d
Kang-nam Oh
전병렬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Reply18 h


Sehoon Oh
잘 읽고 공유합니다.
Reply6 d
Kang-nam Oh
오세훈 고맙습니다.
Reply18 h


Minjeong Seok
저도 가서 직접 강연을 들을 수 있었음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렇게 포스팅으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Reply6 d
Kang-nam Oh
Minjeong Seok 이 글이 강연의 내용을 거의 옮긴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암튼 감사합니다.
Reply18 h
Minjeong Seok
Kang-nam Oh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
Reply15 h


유인걸
한국인들에게 아직도 일신교가 완전히 소화되지 못하였읍니다.일신교란개념자체가 조선민족애게는 충격이었으니까요.
Reply6 d
이기동
좋은 글 감사합니다. 특히 기독교 자체의 배타성에 대해서 생각중입니다. 혹시 구약이나 신약성서, 또는 교부시대의 배타성에 대한 내용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종교가 집단을 이루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려면 배타성은 종교성 집단의 필연적인 귀결같습니다
Reply6 dEdited
Kang-nam Oh
이기동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가 저에게는 실존적 절대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의 어머니를 폄하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겠지요.
Reply18 h


최택진
복습하게 되는 기회여서 좋았습니다!
Reply5 d
최택진
국민일보 4월 여론조사 결과라네요! 1,000명 샘플. 코로나19로 더 짙어진 것 같아요. 신천지와 오십보 백보 같은 한국 개신교. 일반 국민들 의식 속에서 저런 인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거. 대안은 무엇일지? 음...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종교별 이미지 친근한 불교 포용적인 상생하는 엄숙한 보수적인 이건한 세속적인 공감하는 개신교 배타적인 방적 도덕적인 헌신적인 진정성있는 희생적인 천주교 물질적인 위선적인 진보적인 보적인"
Reply5 d
Kang-nam Oh
최택진 좋은 자료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신교가 문제네요.
Reply18 h


Kihyun Han
위대한 종교 사상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 ”모든 살아있는 종교의 깊이에는 종교 자체가 그 중요성을 잃어버리는 경지가 있다. (In the depth of every living religion there is a point at which the religion itself loses its importance.)
저는 그래서 오염된, 한국교회의 '하나님'이라는 이름 대신 '다오라신'이라고 작명하여 부르고 있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종교가 있든 없든, 무슨 종교를 믿든, 성향이 어떻든)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서 따온 것이지요.
표층종교에서 벗어나 심층종교로 나아가도록 깨달음 주시는 박사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Reply5 d
Kang-nam Oh
Kihyun Han 한 선생님,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다오라신"--재미있는 발상이네요. 배타의 정 반대 개념이네요.^^
Reply18 h


Hachun Sung
선생님, 조리있고 사려깊은 충언의 말씀 잘 읽었습니다. 개신교(기독교)는 문자주의로 대표되는 종교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타종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종교다원주의적 사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취지로 읽혔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한국 개신교인은 기독교를 근본주의로 선택했다면 그것을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면, 기독교를 버릴 지언정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이 주류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최근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는 그의 <조선사상사>에서 한국인은 사상의 순수성을 고수한다고 합니다. 주지하듯이,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의 조선이 되고, 주자학이 들어오면 주자학의 조선이 되고, 기독교가 들어오면 기독교의 한국이 됩니다. 그 반대 방향은 우리 민중이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다음 세대가 기독교를 버리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선택할 지언정 위와 같은 논의는 상당히 이상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Reply5 d
Kang-nam Oh
Hachun Sung 좋은 생각 감사합니다. 기독교를 신봉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다른 종교를 거짓종교라고 규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금은 사실 기성 종교, 표층 종교는 그 어느 것이든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Reply18 h


이경일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한국의 기독교는 충분히 그리고 넉넉하게 그 특유의 배타성에 흠뻑 빠져 해어나오지 못하고 허둥데는 모습데로 살아가야할 운명인가? 심히 부끄럽고 어지럽기까지 합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Reply5 d
Kang-nam Oh
이경일 이 목사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ply18 h


Hum Kim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Reply5 d
Jeongwoo Bae
👍👏
Reply5 d
Hyuk Tae Kwon
교수님 요하킴 바흐 교수님 말을 이름과 함께 외워둡니다.
교수님 좋은 글을 이렇게 공개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자기 주장이 아니라 사람에게 유익한 이런 글을 보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이기주의를 벗어난 극소수의 자부심으로 살아야겟지요.
Reply5 d
Kang-nam Oh
Hyuk Tae Kwon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쪽은 이제 여름이 되어 가겠네요. 좋은 계절 즐기시기 바랍니다.
Reply18 h
Hyuk Tae Kwon
Kang-nam Oh 예 교수님 세계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사람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Reply16 h


Julie Jeong
오교수님,
이렇게 대중들에게 종교를 "논"해야 하는 것 조차도 저에겐 불편할 때가 있어요.
그래도 "머리 (Head, Brain)" 로 살고 있는 삶에서 "가슴 (Heart)으로 사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 있어야 하겠기에 오교수님같은 분이 계신다고 생각해요.
오교수님의 열정에 감사드려요.
Reply5 d
Kang-nam Oh
Julie Jeong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대화가 이어지기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Reply18 h


고영의
잘 읽었습니다. 오늘 신천지가 대구에서 대규모 집회를 대놓고 했다고 해요. 샘 말씀처럼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게 하는 시대네요 ㅜㅜ
Reply5 d
Kang-nam Oh
고영의 잘 읽어주셨다니 고마워요. 코로나는 잘 극복하셨겠지요? ㅎㅎ
Reply18 h


호우선사
오타; '결론' 부분의 '상호보와작임' -> '상호 보완적임'
Reply5 d
Kang-nam Oh
호우선사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고쳐넣었습니다.
Reply18 h


호우선사
영상 사료 및 문헌 사료상, 독일계 천주교 신부단이 이조선말에 많이 이조선에 파송되어 왔었슴. 유투브에도 영상 자료가 적잖이 남아 있슴.
Reply5 d
태영최
꾸벅
새벽에 기도하셨어요.
예수님께서!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새벽기도 한 거지요.
Reply5 d
류제동
근본주의 극복을 위해서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aladin.kr/p/QPlSY
경전이란 무엇인가
ALADIN.CO.KR
경전이란 무엇인가
경전이란 무엇인가
Reply5 dEdited
Kang-nam Oh
류제동 좋은 책 번역하셨네요. 많이 읽히기 바랍니다.
Reply18 h
류제동
Kang-nam Oh 고맙습니다.^^
Reply17 h


Joon Park
잘 배웠습니다. Exclusivity가 결국은 superiority로 발전한다는 것.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이와는 반대로 Christ의 humility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런 기독교는, 말씀해 오신대로, 처음부터 없었던 것지요.
Reply5 d
Kang-nam Oh
Joon Park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Reply18 h


Maria Roering
잘 읽었습니다. 모든 종교가 서로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는 말씀 좋았습니다. 그래야 다름 속에서도 같음을 찿아낼수 있기 때문이란 생각도 곁들여 봅니다. 감사합니다.
Reply4 d
Kang-nam Oh
Maria Roering 감사합니다. 상호보완적--좋은 말이지요.
Reply18 h


Richard C. Choe
Thank you for sharing your lecture notes, Dr. Oh. It was great to hear you in Toronto.
What would be the appropriate English words for 표층종교 and 심층종교?
Reply3 dEdited
Kang-nam Oh
Richard C. Choe 'Surface Religion' and 'Indepth Religion' may be close to 표층종교 심층종교. The proper English word for 심층종교 is mysticism. 
But "신비주의" is a misleading word in Korea, and that is why I call it "심층종교." 

It was nice to know that you heard my lecture in Toronto.
Reply18 h
Richard C. Choe
Kang-nam Oh Thank you, Dr. Oh. It was great to see you after so many years. Thank you for deepening and widening our understanding of who we are in relation to God and with one another. Peace.
Reply12 hEdited


Misael Park
https://cafe.naver.com/yooyoonjn/2406
오강남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 – 그 전개와 전망" Korean Christianity: Past, Present and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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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 – 그 전개와 전망" Korean Christianity: Past, Present and Future
오강남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 – 그 전개와 전망" Korean Christianity: Past, Present and Future
Reply1 d
Kang-nam Oh
미사엘 님, "대립의 조화" "도도주의"의 상징 그림을 찾아서 넣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Reply18 h


Wan Hong Lee
대부분 목회자들이 교회를 이용하여 먹고 사는 일로 여기기에 교인을 세뇌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요?
Reply13 h
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