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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김대호 - 문재인정권의 간판 상품 내지 정통성의 근원은 도덕성과 여론조사 지지율이다. 그 도덕성도 자신의...

김대호 - 문재인정권의 간판 상품 내지 정통성의 근원은 도덕성과 여론조사 지지율이다. 그 도덕성도 자신의...

김대호
13 hrs ·



문재인정권의 간판 상품 내지 정통성의 근원은 도덕성과 여론조사 지지율이다.

그 도덕성도 자신의 선행(빛)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악행(어둠)을 부각시켜 얻어낸 것이다. 검찰의 먼지털기 수사를 통해 상대(이명박근혜와 보수)가 범법자라는 것을 까발리고 증폭해서 얻어낸 것이라는 얘기다.

문정권은 불평등 양극화 일자리 저성장 저출산 저신뢰 등 절체절명의 시대적 과제 대부분을 해결은 커녕 훨씬 악화시킨다.

내 비판의 대부분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막아내는 방패가 바로 "이명박근혜와 보수는 엄청 나쁜 놈이니 이를 척살 궤멸시키는 것이 최고의 개혁이요 진보"라는 논리다. 그러면서 여론조사 지지율을 그 증거로 들이댄다.

그런데 문정부가 휘두르는 두개의 전가의 보도를 일격에 산산조각 내 버리는 것이 바로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이다.

길벗이라는 분의 글인데 문제의 성격과 핵심을 소상히 잘도 짚었다. 나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그나저나 경제공동체라는 개념은 있던데 (정치적)운명공동체 개념은 없나? 후자도 전자만큼 실재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명검사의 논고처럼 느껴지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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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루킹과 김경수의 관계
문재인 지지자들과 소위 진보진영 사람들은 드루킹의 댓글 공작은 개인적 일탈행위이지 김경수와 무관하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항들만 보더라도 드루킹과 김경수는 단순 문재인 지지자와 문재인 최측근과의 관계가 아니다.

문재인은 김경수를 두고 ‘내 영혼까지 다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신임했고, 대통령 취임식장에 갈 때, 김경수와 함께 동승했으며, 취임식장 인도를 김경수가 할 정도로 김경수는 문재인의 최최측근이다. 한마디로 문재인과 김경수는 정치공동운명체이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이 공모한 증거도 없는데도 경제공동체라고 하고, 최순실과 안종범이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관계라고 김세윤 판사는 말해놓고는 박 대통령, 최순실, 안종범이 공모했다고 박 대통령에게 24년형에 180억 벌금을 때렸다. 드루킹과 김경수의 관계는 최순실과 안종범보다 더 직접적이며 밀접하고, 김경수와 문재인의 정치적 관계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경제적 관계보다 수천 배 강력하다.

2. 국정원 댓글 사건과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

민주당 사람들은 국정원 댓글 사건을 들먹이며 이번 사건은 약과인 것처럼 축소, 희석하려 한다. 자한당 인간들마저도 이번 사건을 국정원 댓글 사건과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국정원 댓글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선에 개입한 정도와 결과에 미친 영향이 큰 반민주적 국기문란 사건이다.

드루킹의 여론조작은 19대 대선 뿐아니라 세월호 사고, 박 대통령 탄핵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 국정원 댓글과 비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조직적 여론조작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의 개인적 일탈이고 그것도 여론조작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적 정치적 의견 피력이거나 대북 사이버심리전의 일환이었던 반면, 이번 민주당원들의 여론조작 건은 김경수가 연루되었고 조직적이고 장기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혹자는 국정원 댓글 사건은 공무원이 개입한 것이고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은 민간인이 저지른 것으로 결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회에 미친 영향이나 정치적 결과에 미친 영향을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뿐아니라 국정원 직원이 했던, 민간인이 했던 여론조작질은 불법이며 처벌 대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직적으로 행해진 것과 개인의 일탈인 것도 큰 차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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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oad3.kr/?p=6284&cat=119





드루킹의 여론조작은 반민주적 국기문란 행위
제3의길2018.04.190정치, 헤드라인








¶글쓴이 : 길벗



–김경수는 문재인 후보 수행실장. 문재인 김정숙과 함께 차량에 동승해 취임식장 들어온 최측근

–드루킹, 대외공관장 인사 발표가 있기 전 이미 친문 기자 출신의 오사카 총영사 내정 사실 알아

–정권의 눈치나 보던 선관위 산자부 경찰 언론 등도 과거와 다른 움직임… ‘달의 몰락’ 시작되나










문재인은 김경수를 두고 ‘내 영혼까지 다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지난 주말, 핵폭탄급 정치적 사건이 터졌다. 드루킹의 여론조작에 문재인의 핵심 측근인 김경수 민주당 의원이 연루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조선일보 등 언론들이 보도하는 내용에 따르면 최소한 김경수는 국회의원직을 내놓는 것 뿐아니라 감방에 가야 하고, 문재인도 하야 요구에 시달려야 할 것 같다.



김경수는 문재인이 후보 시절, 수행실장을 맡았고, 문재인 김정숙과 함께 차량에 동승해 취임식장에 들어와 단상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했을 정도로 문재인의 최최측근이다. 이런 자가 드루킹의 여론조작 행위를 지시 혹은 인지(방조)했다면 보통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19대 대선 결과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으로 문재인이 이 문제에 대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입장(거취)을 밝혀야 한다.



드루킹 사건(조직적 여론조작)은 최근 불거진 고은, 이윤택, 정봉주, 김기식 등 자칭 진보(좌파) 인사들의 이중성과 위선의 도덕성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사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건에 김경수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드루킹이라는 자는 30~40개의 단톡방을 개설하여 2천 명을 상대로 여론조작하고 19대 대선 이전부터 문재인 지지 활동을 했다고 한다. 드루킹의 여론조작은 올 1월의 평창올림픽 관련 문재인 비방 댓글이 처음이 아니고 훨씬 이전부터 해왔던 정황과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느릅나무 출판사를 설립하고 파주에 아지트를 차린 것이 8년 전이니 2010년부터 댓글 조작을 통한 여론조작질을 했다고 보여진다. 2012년 12월 대선,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과 지방선거, 2016년 4월 국회의원 선거, 2016년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 2017년 5월 대선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에서 드루킹이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누구와 관련되어 있었는지 철저히 수사할 필요가 있다.



고가의 매크로 프로그램 구입, 월 485만 원의 임대료가 들어가는 파주 출판단지의 느릅나무 사무실 운영, 170대의 대포폰 구입 운영, 4~7명에 이르는 직원의 급여 등 연간 11억원의 운영비가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돈의 출처도 밝혀야 한다. 돈의 흐름을 추적하면 관련자들을 밝히기가 쉬운데 왜 경찰은 드루킹 일당의 자금 추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소위 진보진영 인사들과 친분이 많은 것도 확인되었다. 노회찬은 2014년 드루킹의 초빙으로 경희대에서 강연을 했고, 유시민 심상정도 드루킹이 경공모의 대표로 참여한 행사에 함께 단상 제일 앞줄에 앉았다. 드루킹은 노회찬의 자원봉사자에게 금품을 건넸다고 처벌 받았고, 노회찬에게 2천만인가 5천만 원을 후원한 의혹을 사 검찰의 수사를 받을 정도로 노회찬과는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 김경수와 윤태영은 드루킹을 안희정에게 소개하고, 안희정은 경공모의 초청으로 강연을 했다.



계속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함께 의혹도 커져만 가고 있다.



1. 드루킹과 김경수의 관계



문재인 지지자들과 소위 진보진영 사람들은 드루킹의 댓글 공작은 개인적 일탈행위이지 김경수와 무관하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항들만 보더라도 드루킹과 김경수는 단순 문재인 지지자와 문재인 최측근과의 관계가 아니다.



김경수는 멀리 파주에 있는 드루킹의 느릅나무 출판사를 두 번이나 방문했고, 최소한 5번을 직접 만났다. 텔레그램에서 비밀문자와 일반문자로 메시지를 주고받았으며, 드루킹은 2018년 3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기사 링크 3,190개를 김경수에게 보냈다.



드루킹이 설립한 출판사 이름 ‘느릅나무’도 심상치 않다. 느릅나무는 봉하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상징적 나무이다. 드루킹은 어떤 의미로 출판사 이름을 느릅나무로 정했을까?



드루킹이 지인(법무법인 광장의 변호사, 서울법대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에서 석사 학위 받음)을 오사카 총영사로 추천하자 김경수가 이를 청와대 인사수석실에 전달했다. 인사수석실에서 부적합하다고 청탁이 불발되자 드루킹이 김경수에게 항의를 했고 김경수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백원우 비서관에게 부탁했으며, 백원우는 이 드루킹 지인을 청와대(연풍관)로 불러 1시간 면담까지 했다. 드루킹은 오사카 총영사 외에 일본 대사와 청와대 행정관 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드루킹은 3월의 대외공관장 인사 발표가 있기 전, 이미 친문 기자 출신이 일본 오사카 총영사에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현정권 내의 정보에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이런 수준의 청탁을 할 수 있는 관계이고 현정권 내부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라면 상식적으로 둘은 보통의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고, 드루킹이 19대 대선이나 다른 정치 이벤트에서 현 정권을 위해 큰 기여를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드루킹과 김경수, 그리고 그 상부까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증거가 있다. 드루킹이 주도한 ‘經人先’(경제도 사람이 먼저다)이다. 이 경인선은 ‘사람이 먼저다’는 문재인의 대선 구호에 맞춰 ‘경제도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 하에 모인 단체로 드루킹이 주도했으며 회원이 1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19대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 광주 경선장에서는 김정숙이 “경인선에 간다. 경인선으로 가야 한다”라며 ‘경인선’ 멤버들이 모인 장소로 다가가 일일이 경인선 멤버들과 악수하고 김경수는 김정숙을 따라다니며 손을 흔들기도 했다. 아래 동영상을 보면 이 장면이 생생하게 나온다.



김정숙, 드루킹 주도의 ‘경인선’ 회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는 모습



김정숙도 알고 있는 ‘경인선’을 김경수가 모를 리 없고, 김정숙이 고마워 하며 일일이 인사할 정도의 단체의 리더를 김경수가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동영상만 보더라도 김경수와 드루킹이 예사 관계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현재 드루킹이 올 1월의 평창올림픽 관련 2건의 댓글공작 외에 19대 대선, 그리고 그 이전에도 여론조작을 조직적으로 대규모로 했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만약 드루킹의 여론조작을 김경수가 지시했거나 인지하고도 방조했다면 이는 불법행위이며 커다란 부정행위로 19대 대선 결과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또 문재인이 이 사실을 보고 받았거나 인지했다면 문재인은 하야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문재인은 김경수를 두고 ‘내 영혼까지 다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신임했고, 대통령 취임식장에 갈 때, 김경수와 함께 동승했으며, 취임식장 인도를 김경수가 할 정도로 김경수는 문재인의 최최측근이다. 한마디로 문재인과 김경수는 정치공동운명체이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이 공모한 증거도 없는데도 경제공동체라고 하고, 최순실과 안종범이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관계라고 김세윤 판사는 말해놓고는 박 대통령, 최순실, 안종범이 공모했다고 박 대통령에게 24년형에 180억 벌금을 때렸다. 드루킹과 김경수의 관계는 최순실과 안종범보다 더 직접적이며 밀접하고, 김경수와 문재인의 정치적 관계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경제적 관계보다 수천 배 강력하다.



김세윤의 판결논리라면 현재까지 드러난 드루킹과 김경수와의 관계와 드루킹이 여론조작질한 내용만 보더라도 문재인은 탄핵은 물론 최소 50년형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오해는 마시라. 필자는 문재인에게 50년형이 적당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김세윤 판사의 논리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2. 국정원 댓글 사건과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



민주당 사람들은 국정원 댓글 사건을 들먹이며 이번 사건은 약과인 것처럼 축소, 희석하려 한다. 자한당 인간들마저도 이번 사건을 국정원 댓글 사건과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국정원 댓글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선에 개입한 정도와 결과에 미친 영향이 큰 반민주적 국기문란 사건이다.



드루킹의 여론조작은 19대 대선 뿐아니라 세월호 사고, 박 대통령 탄핵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 국정원 댓글과 비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조직적 여론조작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의 개인적 일탈이고 그것도 여론조작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적 정치적 의견 피력이거나 대북 사이버심리전의 일환이었던 반면, 이번 민주당원들의 여론조작 건은 김경수가 연루되었고 조직적이고 장기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혹자는 국정원 댓글 사건은 공무원이 개입한 것이고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은 민간인이 저지른 것으로 결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회에 미친 영향이나 정치적 결과에 미친 영향을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뿐아니라 국정원 직원이 했던, 민간인이 했던 여론조작질은 불법이며 처벌 대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직적으로 행해진 것과 개인의 일탈인 것도 큰 차이이고.



3. 누가 소스를 제공했을까



이번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민주당은 경찰과 검찰이 수사중인데도 조사내용이 언론에 유출되었다며 길길이 날뛴다. 수사중인 내용을 중도에 유출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그 범인을 잡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민주당 애들은 참 양심도 없다. 박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검찰이나 특검이 조사한 내용이 검찰관계자나 특검 관계자의 이름으로 수시로 언론에 보도될 때는, 그것도 언론이 자의적 해석을 붙인 것이거나 과장, 왜곡, 거짓 보도가 나올 때는 단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오히려 언론보도를 사실인 것처럼 확대 재생산만 했지, 수사중인 조사내용이 검찰이나 특검으로부터 나온 것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실 수사중인 내용을 중도에 유출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게 불법 유출인지 언론의 취재로 취득한 정보인지는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아 국민들은 그 소스가 어디인지에 대한 관심보다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가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런 상황들은 국민들이 감안하고 언론들의 기사를 접해왔다.



민주당은 드루킹 사건을 경찰이나 검찰 쪽에서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정권 초기에다 여전히 문재인 지지율이 높고, 더구나 촛불좀비들의 인민재판식 몰아세우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경찰이나 검찰은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드루킹 사건을 경찰이나 검찰이 언론에 흘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은 3월 22일, 드루킹을 구속했지만 구속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검찰에 사건을 송치하면서도 김경수가 연루된 자료는 넘기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송치 사실 자체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던 점으로 볼 때, 경찰은 철저하게 이번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주민 경찰청장이 노무현 정권시절인 2003년~2004년 청와대 행정관으로 문재인과 함께 근무한 경력도 경찰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게 한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찰이 수사하는 것만 지켜보고 검찰 스스로 수사하려 하지도 않았고, 경찰이 기소 의견을 낸 올 1월의 평창올림픽 관련 2건의 댓글만을 대상으로 기소하려 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경찰이나 검찰 쪽에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경찰과 검찰 중에 현정권에 비판적인 인사가 언론에 흘렸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필자는 언론에 정보를 제공한 것은 드루킹측이라고 본다. 드루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판을 키워 자신들이 유리한 국면을 만들려는 의도 때문에 세상에 알리려 한 것 같다. 드루킹은 김경수와의 싸움을 예상하고 있었고, 김경수나 현정권측이 경찰과 검찰을 동원해 자신을 매장하려 할 경우 미리 어디에 정보를 제공할지를 계획해 두었다. 그 증거가 드루킹이 경공모에 올린 글에 나온다.



[단독] 드루킹 “문재인 정권은 예수회…조국은 로마” 황당 주장



위 한겨레 기사에서 드루킹이 경공모에 올린 글 모음 세 번째 줄 상단을 보기 바란다.



“그래서 제가 뭘 까더라도 JTBC만 보내는 게 아니라 조선일보도 보내야 하는 거죠.”



손석희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JTBC를 이용하려 하지만 손석희에 대한 믿음이 없어 조선일보도 이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힌다(이 드루킹의 글들에서 재미있는 것은 드루킹도 손석희가 JTBC 태블릿을 입수한 경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손석희의 JTBC가 태블릿을 주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전달받았다고 드루킹도 보고 있다).



드루킹은 당초 진보진영 혹은 현 정권측 언론으로 JTBC를, 보수진영 쪽 언론으로 조선일보를 이용하려 계획했지만, 실제는 한겨레를 먼저 선택하고 간을 본 다음에 본격적인 자료는 조선일보에 건넸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번 드루킹 사건을 첫 보도한 언론은 한겨레였지만, 그 보도 내용의 뉘앙스가 좀 이상했다.



[단독] ‘정부 비방 댓글 조작’ 누리꾼 잡고 보니 민주당원



보수진영의 사람이 세작으로 민주당에 침투해 댓글 조작하고 진보진영이 여론조작한 것으로 위장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할 수 있게 보도했고, 한겨레는 김경수를 거론조차 하지 않아 사건 자체의 파급력도 별로였다.



드루킹측이 당초 JTBC를 선택하기로 했다가 왜 한겨레로 방향을 바꾸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JTBC의 현재 돌아가는 모양새나 손석희에 대한 믿음에 대한 회의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보도하기 전 먼저 한겨레가 보도하게 함으로써 후속하는 조선일보 보도가 신빙성 있게 보이게 하는 밑밥으로 한겨레를 이용하는 전략을 쓴 것 같기도 하다.



한겨레의 보도가 드루킹측에서 볼 때 미흡했거나 도리어 자신들을 곤궁에 처하게 한다고 판단한 드루킹측은 조선일보에 더 구체적인 정보들을 흘려 판을 키우고, 김경수와 현정권과 이판사판의 이전투구를 전개시켜 김경수와 현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하고 자신은 현정권의 탄압을 받거나 토사구팽의 신세임을 보이려 한 것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드루킹측이 자료를 언론에 흘린 이상, 더 충격적인 내용들이 나올 수 있다고 보고, 이미 TV조선이 핵심적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현정권에 치명적인 자료는 드루킹측이 아직 쥐고 있으면서 이를 이용해 현정권과 딜을 하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 이번 사건은 반드시 특검을 해야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경찰이나 검찰은 정권의 눈치를 보고 이 사건의 실체를 캐는 데 매우 소극적이고, 심지어 경찰청장은 김경수의 말에 맞춰 언론 브리핑을 하는 지경이다. 드루킹 역시 자신의 마지막 패를 최후의 딜을 위해 아끼려 할 수 있기 때문에 특검이 직접 피의자들과 피의자 주변, 그리고 피의자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한 짓들을 조사해 사건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



이번 사건은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며, 그 후과 역시 우리 정치판을 어떻게 바꿀지 모를 정도로 사안이 심각하고 중대하다. 이주민 경찰청장은 노무현 정권 시절 행정관으로 문재인과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한 경력이 있다.

언론의 첫 보도가 나간 다음날 새벽에 파주의 느릅나무 사무실은 누군가에 의해 짐이 빠져 나가 정리되고 CCTV도 꺼져 버리고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드루킹의 블로그 ‘드루킹의 자료 창고’와 드루킹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경공모’, ‘경인선’의 사이트도 폐쇄되어 버렸다. 이렇게 증거인멸이 진행되는데도 경찰과 검찰은 방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 관련 해당 회사로 수사에 절대적으로 협조해야 할 네이버의 부사장을 지낸 윤영찬이 청와대에 앉아 있다. 이번 사건은 정권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경찰이나 검찰에게 사건을 맡겨서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대할 수 없다. 특검이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다.



5. 드루킹이 추천한 인사와 청와대가 임명한 오사카 총영사



드루킹은 자신이 추천한 인사가 청와대 인사수석실로부터 퇴짜를 맞고, 김경수로부터 외교경험 등의 부족으로 오사카 총영사에 부적합하다는 답을 들었다. 또 청와대 민정수석실 백원우 비서관과의 1시간 면담에도 별 소득이 없자, 김경수가 말한 부적합 이유가 사실인지, 그리고 오사카 총영사로 누가 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이 때 이미 드루킹은 오사카 총영사로 친문 기자가 내정된 사실을 알고 그게 그대로 실행될 경우 김경수를 협박(압박)하려 작정한다.

그런데 3월 26일, 청와대는 오사카 총영사로 한겨레 기자 출신인 오태규를 임명한다. 이에 드루킹은 빡 치고 본격적으로 김경수 압박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필자는 드루킹이 빡 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드루킹이 추천한 인사와 오태규와 비교하면 오사카 총영사로는 오히려 드루킹이 추천한 인사가 능력, 자질면이나 일본과 외교교섭력에서 훨씬 나아 보인다. 드루킹이 추천한 인사는 서울법대를 나와 일본의 유명 대학 와세다 대학 석사를 마치고 우리나라 유명 로펌인 ‘광장’ 소속의 변호사인 반면, 오태규는 한겨레신문 기자와 논설이 고작이다.



오태규는 문재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2017년 5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단기간 스펙 쌓기를 급조했다. 문재인 정권 사람들이 논공행상 차원에서 한겨레신문에 자리를 주기 위해 작업했다는 느낌이 팍팍 난다. 그의 급조 스펙 쌓기는 네이버의 인물 검색으로 금방 드러난다.



2017.12 ~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2017.10 ~ 공공외교위원회 민간위원

2017.09 ~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

2017.09 동서대학교 일본연구센터 초청연구위원

2017.07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 위원장

2017.05 ~ 2017.07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사회분과 자문위원



객관적으로 오태규와 드루킹이 추천한 인사 중에 누가 오사카 총영사로 적합해 보이는가? 드루킹이 추천한 인사는 적합하지 않은데 오태규는 적합하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일까? 드루킹이 여론조작한 것은 명백한 국기문란으로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자신이 추천한 인사가 오사카 총영사에서 탈락한 것에 대해 김경수나 현정권에게 빡칠만 하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6. 달의 몰락



이번 드루킹 사건은 정치권에 일파만파로 번져 그 끝이 무엇이 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당장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특검을 요구하고, 여차하면 평화당도 특검에 동의할 태세여서 특검 발의와 의결이 될 공산이 커진데다, 민주당도 특검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특검이 수용되지 않으면 자한당은 국회 일정을 보이콧 할 것이고,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면 4월 27일의 남북정상회담도 드루킹 사건에 묻혀 버릴 것 같다.



특검이 구성되든 되지 않든 상관없이 드루킹 사건은 6.13 지방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드루킹 사건은 정권의 눈치를 보던 집단이나 조직들에게 영향을 줘 검찰, 경찰, 공무원, 사법부에서도 예전과 다른 움직임이 나타날 것으로 본다.



이번 선관위의 김기식에 대한 위법 여부 판단도 드루킹 사건에 영향 받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조국이 적법하다고 말했고, 청와대가 선관위에 해석을 위임한 것을 선관위가 위법이라고 선언한 것은 문재인 집권 후에는 볼 수 없었던 이례적 현상이다. 김기식 본인도 선관위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민주당도 선관위를 비난할 정도로 이번 선관위의 결정은 현정권에게는 충격을 준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고용노동부와 달리 삼성의 영업비밀 공개는 불가하다고 발표한 것도 드루킹 사건의 영향이라고 본다. 산자부가 장기간 판단을 유보하던 종전의 태도에서 벗어나 오늘 그런 결정을 전격 발표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경찰도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이 감지된다. 드루킹의 자금 출처를 조사하겠다고 나섰고, 검찰에 그냥 보내버렸던 133대의 휴대폰을 검찰로부터 다시 받아 포렌식 검증을 하겠다고 한다. 1월의 두 건의 댓글 조작 건 말고도 과거의 여론조작 건도 조사하겠다고 한다. 종전에 1월 2건의 댓글 조작만이 수사의 대상이라고 한 것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경찰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은 야당의 특검 요구가 수용될 가능성이 높은 데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경찰의 실무 수사팀 내부에서 경찰 수뇌부의 지시만 따르다가 나중에 자신들도 감방 갈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언론들도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진보, 보수 언론을 떠나 모든 언론들은 문재인 집권 후 지금까지 친정부적 기사들을 주로 내보냈고, 문재인 정부에 대해 정면으로 대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루킹 사건 보도는 다르다. 아직 오마이뉴스, 경향 등은 김경수를 감싸돌고 있지만, 한겨레마저도 김경수를 까기 시작한다. SBS는 노사가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와 김용민이 맡은 프로그램을 폐지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드루킹 사건은 아직 현정권을 뿌리째 흔들지는 못했지만, 현정권의 기세에 눌려 눈치만 보던 공공기관들이나 언론들이 서서히 자기 목소리를 낼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달의 몰락은 시작된 것 같다.



“2017년 대선 댓글부대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 언젠가 깨끗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 했던 넘들(놈들)이 뉴스 메인 장식하는 날이 올 것이다.”



드루킹이 한 이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 달의 몰락은 완성될 것이다.



* 관련 자료

1) 드루킹은 친노친문으로 진보진영에 유리한 글을 써왔고, 이 진영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높고 민주당이나 정의당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내 왔다. 2014년 6월, 드루킹은 ‘경제적 공진화 모임’의 리더로 노회찬 당시 정의당 원내대표를 초빙해 경희대 크라운관에서 강연회를 열었고, 2016년 10월에는 ‘10.4 남북정상선언 9주년 행사’에 참여한 단체(경공모)의 대표로 유시민, 윤후덕 민주당 의원, 심상정 등과 나란히 단상에 앉기도 했다. 2018년 1월에는 안희정을 초청해 강연회를 여는 등 자칭 진보진영 인사와 친분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단독] 드루킹, 10·4선언 기념식도 주최…심상정·유시민과 맨앞줄에 앉아



2016년 11월에는 김경수에게 정치후원금 500만원을 후원한 정황이 있어 경찰이 수사중이라고도 한다(김경수는 10만원만 받았다고 주장).



2) 올 1월 민주당대표 추미애가 보수진영에서 댓글로 여론조작을 한다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김어준도 보수진영이 여론조작을 한다고 호들갑을 떨자, 경찰은 수사에 나섰고, 드루킹은 올 1월에 평창올림픽 관련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2건의 글에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문재인 정부를 곤란하게 하는 여론조작을 시도한 혐의로 경찰에 3월 22일 구속되었다.



민주당과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경찰은 보수진영의 댓글 공작으로 보이는 평창 올림픽 관련 정부 비난 댓글을 조사했으나, 예상과 달리 조작한 사람이 민주당 당원 3인이었고, 19대 대선에서도 여론조작을 조직적으로 했을 뿐 아니라 김경수도 연루된 사실을 확인한다.



3) 정권 실세에 문재인의 최측근이 사건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자, 경찰은 검찰에 이첩하기 전에 사건을 언론에 브리핑하는 것이 통상적 관례임에도 소리 소문 없이 검찰로 사건을 넘겨 버린다. 경찰은 검찰에 사건을 넘기면서 김경수와 관련된 사항은 넘기지 않았다. 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도 이런 사실을 언론에 밝히지 않았다.



4) 드루킹이 구속된 지 20여일이 지난 4월 13일, 한겨례가 이 사건을 첫 보도하고, 다음 날 TV조선이 이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이 사건은 태풍급으로 바뀐다.



5) 사건이 보도되고 잠시 잠적해 있던 김경수가 4월 14일 밤 9시 30분,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하며, 드루킹이 무리한 인사 청탁을 해 들어주지 않아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밝힌다. 기자들이 어떤 구체적인 청탁인지 물어보았지만, 구체적 청탁 내용은 밝히지 않았으며, 드루킹이 일방적으로 문자를 보내왔을 뿐이고, 자신은 ‘감사하다’는 정도의 멘트를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텔레그램의 문자 메시지를 보여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현재 모두 지워져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기자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느냐고 질문하자, 묵묵부답하다가, 재차 기자들이 질문을 하니까 “그런 가정을 전제로 한 질문은 적절치 않다”며 답변을 회피한다.



6) TV조선은 후속보도를 통해 드루킹과 김경수가 텔레그램으로 주고 받은 문자가 A4용지 30장 분량이며, 드루킹이 30~40개, 2천명이 참여하는 단톡방을 운영하며 여론조작을 지시하고 관리했고, 파주 출판단지에 3개 층을 빌려 ‘느릅나무’라는 위장 출판사를 차리고 8년간 조직적 여론조작 작업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3개 층 임대료가 한번도 밀린 적이 없다고 함)



7) 4월 15일 새벽, 누군가에 의해 파주 ‘느릅나무’의 집기, 자료들이 반출되고 CCTV도 끄고 잠금 장치까지 되는 등 증거 인멸 행위가 일어났으며, 동시에 드루킹의 블로그 ‘드루킹의 자료창고’, ‘경인선’, ‘세이맘’, ‘경공모’ 등 드루킹이 활동한 사이트의 글이 삭제되거나 폐쇄되는 등 온라인 상의 드루킹의 흔적이 지워지기 시작한다.



8) 민주당 사람들에 의해 드루킹이 김경수에게 요구한 자리는 오사카 총영사라는 것이 알려졌고, 나중에 청와대 행정관 자리와 일본 대사관 자리도 요구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9) 드루킹은 올해 초 자신이 주도해 결성한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카페 회원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올린 글에서 “우리가 1년 4개월간 문재인 정부를 도우면서 김경수 의원과 관계를 맺은 건 다들 알고 계실 것”이라며 “두어 번 부탁을 한 게 우리 회원 분들을 일본대사(로 보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드루킹은 “(김 의원은) 분명히 외교경력이 풍부한 사람이 해야 돼서 못 준다고 했다”며 “외교경력 없는 ‘친문(재인)’ 기자 나부랭이가 오사카 총영사로 발령받으면 그때는 도망갈 데가 없겠죠”라고 적었다.

이로 보아 올 1월초 이전에 드루킹과 김경수의 딜이 이미 진행되었지만, 이때는 상호 의견 차이로 딜이 난항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0) 3월 26일, 정부는 대외공관장 인사 발표에서 한겨레신문 기자 출신인 오태규를 오사카 총영사에 임명했다. (드루킹이 어떻게 정부의 대외공관장 인사 내용을 미리 알았는지 의문이다)



11) 드루킹은 3월 14일(구속되기 전) 자신의 페이스 북을 통해 “깨끗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이라는 표현으로 댓글부대의 배후를 폭로하겠다는 암시를 하기도 했다. 이는 김경수와의 딜이 무산되자, 더 강한 협박을 김경수에게 하고자 함으로 보인다.



12) 4월 16일 오전이 되자, TV조선 뿐아니라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국민일보, 세계일보 등 대부분 언론들이 김경수 관련 의혹들을 쏟아내기 시작하고 자한당과 바른 미래당이 공세를 취하며 특검을 요구하기에 이르면서 이 사건은 핵폭탄급이 되었다.



드루킹의 여론조작 사건이 1년 전 2017년 3월에 선관위에 고발되어 검찰이 내사를 했으면서도 검찰이 조사를 하지 않았거나 수사를 하고도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기사도 나오고, 민주당 최고위층도 보고를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경찰과 검찰의 축소, 은폐 의혹도 불거져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일로이다.



[단독]’드루킹 사건’ 1년 전 검찰 내사 했었다



[단독] 민주당 최고위층도 댓글활동 보고받았다



<민주당원 댓글조작 파문>‘2017대선 댓글 부분’ 빼고 檢에 송치… 警, 축소수사 논란





13) 경찰, 여론조작에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 드루킹 팀의 휴대폰 150개 압수



댓글팀서 ‘조작도구’ 사용 추정… ‘공감’ 늘릴 때 아이디 인증 필요



14) 사정당국 관계자는 “압수물 분석을 통해 김 씨가 활동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만 한 것이 아니라 김 의원이 먼저 지시를 내렸다고 볼 만한 일부 정황을 확보하고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전했다.



“드루킹, 체포직전까지 김경수에 보고했다”



15) 느릅나무출판사는 건물 1, 2층 전부와 3층 일부를 사용하면서 매달 485만 원 이상을 임차료로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댓글 조작을 위해 휴대전화 150대를 위조해 사용하는 데에도 상당한 자금이 소요됐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4∼5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직원과 주말마다 출판사를 찾았던 20∼30명의 인원을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자금 확보’를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한 수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연간 11억원의 운영자금이 소요된 것으로 전해짐.



책 한 권 안냈는데… 日計表엔 입·출금 내역 빼곡



16) 김경수, 4월 16일 오후 5시 30분, 2차 기자회견, 1차 회견 때와 다르게 이야기한다.



드루킹을 만난 시기도 1차 때는 19대 대선 전이라고 했는데 2차 때는 2016년 중순이라고 함, 1차 때는 드루킹의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고 했는데, 2차 때는 지인을 오사카 총영사로 천거하길래, 청와대 인사수석실에 추천해 주었으나 부적격자라는 회신이 와 힘들다고 했음. 드루킹이 계속 요구하길래 이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보고, 민정 비서관 백원우가 소개하는 지인을 청와대에서 1시간 동안 면담했으나 역시 오사카 총영사로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하고 더 이상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말함. 드루킹의 사무실인 파주 느릅나무를 격려차 2번 갔다 왔다고 말함. 만난 횟수도 4~5차례, 안희정에게 드루킹을 소개하기도 했다고 함. 1차 때는 드루킹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보내왔고 자신은 간혹 감사하다는 회신만 했고 대부분 메시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했으나, 2차 때는 좋은 기사나 글을 드루킹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말을 바꿈.



[전문] “‘드루킹’ 인사요청 청와대에 전달했다” 김경수 의원 2차 기자회견



17) 청와대는 4월 14일에는 드루킹 사건에 대해 관련 없고 전혀 모른다고 했다가 4월 16일에 와서는 인사수석실에서 드루킹의 지인을 김경수로부터 추천받아 검토했으나 적합하지 않다고 했고, 민정비서관 백원우가 해당 드루킹 지인을 1시간 면담했다고 말을 바꿈.



18) 안희정에게 들어온 강연 요청이 김경수 의원과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충남도청 비서실로 들어왔다.



김경수 “안희정에 드루킹 소개”…공문 속 드러난 ‘경공모’ 실체



19) 청와대 백원우 민정 비서관이 드루킹 지인을 만났다는 시기도 계속 바뀜.

2월-> 3월초 -> 3월말로 세 번 바뀌었고, 면담 내용도 지인(변호사)의 말과 다름. 실제 백원우가 이 드루킹 지인을 만난 것은 3월 28일로 드루킹이 구속(3월 22일)된 이후라 백원우(청와대)가 개입한 이유가 의혹을 사기 충분함.





경찰의 헛소리

경찰 “김경수, 드루킹 텔레그램 메시지 대부분 확인 안해”



오마이뉴스의 김경수 감싸기

“경찰 발표와 다른 ‘조선’ 드루킹 보도… 왜곡 사례 5가지”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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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21&aid=0002350131

<뉴스와 시각>‘도덕 정권’의 非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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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18.04.19 오후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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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드루킹 일당이 암약한 댓글조작 의혹 사건은 ‘도덕 정권’을 자처해온 문재인 정부의 비(非)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자신들이 그토록 비난하고 비웃었던 이명박·박근혜 선행 정권의 음습한 습성을 꼭 빼닮았다. 촛불의 명령이라며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여소야대 정국에서도 지지율만 믿고 협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권력이었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어간 걸까.

지난해 박근혜 탄핵 후 조기 대선이 있었다. 문재인은 당내에서는 이재명·안희정 두 라이벌과 싸웠고, 당 밖에서는 안철수와 생사를 건 인정투쟁을 벌였다. 드루킹이 이끌던 ‘경제공진화모임’(경공모)과 ‘경제도사람이먼저다’(경인선) 등 조직이 그때 맹활약했다. 이재명과 안희정은 ‘문빠’ 댓글 부대의 공격으로 당하는 고통을 토로하기도 했다. 둘이 무너지자 다음은 안철수였다. 대선을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4월 중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안철수가 문재인을 바짝 따라붙자 드루킹 일당은 ‘안철수= MB 아바타’를 내걸며 대대적인 네거티브 공작을 벌였다. 안철수의 지지율은 그 후 거짓말처럼 추락했다.

드루킹은 인터넷상의 유명인사다. 누적 방문자 수 1000만 명의 ‘파워 블로거’이며, 회원이 2000명 넘는 인터넷 카페의 운영자다. 문 대통령의 복심인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선을 전후해 최소 5차례 만났고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민주당이 대선 후 국민의당에 9건의 대선 관련 고발 취소를 요구하면서 소속 의원과 당직자 외에는 유일하게 드루킹과 문팬을 포함시켰다.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대선 경선 때 “경인선도 가야지”하며 경선장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도 공개됐다. 이쯤 되면 이들을 ‘대선 사조직’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문 대통령과의 연루 의혹까지 제기되는 이유다.

수사 당국은 세 가지를 밝혀내야 한다. 드루킹 일당이 벌인 불법 활동의 내용, 권력의 인지·개입 여부, 돈의 출처. 드루킹은 휴대전화 170개를 보유한 상주 인력 50여 명과 8년간 함께 지냈다. 한 사람이 한 달에 100만 원씩 썼다면 48억 원, 200만 원씩 썼다면 100억 원의 돈이 들어갔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권력의 뒷받침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향후 수사는 권력이 드루킹 일당의 활동을 알고 있었는지, 그 활동에 개입했는지, 활동 경비는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조달됐는지를 규명하는 데 집중돼야 한다. 드루킹은 경찰에 체포되기 전 페이스북에 “니네들이 댓글 부대 진짜 배후를 알아?…까줄까”라며 배후 존재를 암시했다. ‘봤는데 별거 없더라’는 방식으론 안 된다.

드루킹 팀 외에도 대선 사조직처럼 운영한 조직이 몇 군데 더 있다는 말이 나돈다.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이번 댓글 조작 사건을 ‘게이트’라 부르기 시작했다. 경찰도 검찰도 영 미덥지가 않다면 특검을 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 김대중 정부는 출범 15개월 만에 ‘옷 로비’ 사건을 맞아 비틀거렸다. 이번 사건은 집권 11개월 만에 터졌다. 지금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죄질’이 옷 로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무겁다. 누군가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한다면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주저앉고 민심이 폭발하고 정권이 휘청거릴 것이다. mi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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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8

[백승종의역설] 아르네 네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백승종의역설] 아르네 네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올해 초, 노르웨이 철학자인 그가 세상을 떴다. 세계 주요 언론이 앞다퉈 애도를 표했다. 네스는 심층생태학 이론을 통해 온 세계의 환경운동과 녹색당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1970년대 초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과 대등한 고유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생명 중심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는 노르웨이 남부 높은 산꼭대기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검박하게 살며 생태계의 평형과 조화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해 많은 글을 썼다. 대표작으로는 <아르네 네스 선집>이 있다. 네스는 환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교수를 사직했고,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모태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생태계의 평화를 위해 근대 산업자본주의를 해체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녹색당을 창설하는 데도 앞장섰다. 네스는 현재 진행중인 극심한 환경파괴를 이유로 인류의 미래를 비관하면서도 환경운동이 잘만 지속되면 200년 뒤에는 파라다이스를 되찾을 수도 있을 거라고 전망했다.

그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머물고 있는 독일 보훔시는 본래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탄광도시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학교가 여기 있었고, 불과 사십년 전까지도 시내 곳곳에 석탄 채굴장이 가동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보훔은 푸른 초원과 맑은 강물로 에워싸인 전원도시로 거듭났다. 산과 들을 망친 이도, 되살려낸 이도 시민들이다.

지난달 광양만에서는 유독성 침출수가 바다를 오염시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조류인플루엔자(AI) 매몰지 주변도 심상치 않다. 주민들이 식수로 쓰는 지하수가 적잖이 오염돼 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주류 언론매체는 보도조차 거의 안 한다. 생각해 보니 그네들은 네스가 작고했을 때도 침묵했다. 그들에게 환경은 아직 뒷전이다.

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78708.html#csidx6ed88b6088ec51ba79ac41ea38abcef

2016/11/04

신동아 김용준 교수 인터뷰 (함석헌 선생 회고 포함) | 우리 말과 글이 있다는 것, 언제나 내 마음의 기쁨 !

신동아 김용준 교수 인터뷰 (함석헌 선생 회고 포함) | 우리 말과 글이 있다는 것, 언제나 내 마음의 기쁨 !



신동아 김용준 교수 인터뷰 (함석헌 선생 회고 포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김용준(金容駿·78) 고려대 명예교수는 독재정권 시절에 두 차례나 해직된 경력이 있다.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유신정권의 눈 밖에 나 1975년 해직돼 4년 동안 백수로 지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와 복직했으나 격동의 세월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신군부 집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에 과학계 대표로 참여해달라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명했다가 다시 4년 동안 강단에 설 수 없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동안 민주화운동에 한 발을 걸쳤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 자리씩 했다. 결코 그들의 용기와 공헌을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민주화운동 인사 중에는 세 정권에서 대통령 총리 국회의원 장관 총재 총장 사장 등으로 보상을 넉넉히 받은 사람이 많다. 김 교수의 우산 밑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정부의 실세가 됐다. 그러나 그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김 교수가 계간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 ‘나도 황국신민선서를 읽었고 창씨개명을 했으며 춘원(春園) 이광수를 욕할 수 없노라’는 글을 실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출범해 친일파의 행적을 단죄하겠다는 마당에 그는 ‘이광수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일본식 이름을 가진 충실한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친일진상 규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를 교과서로 배운 세대다. 그 시절에 태어나 간난(艱難)과 격동의 세월을 산 사람들의 체험 속에는 교과서에선 배울 수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서울 힐튼호텔 옆 대우재단빌딩 18층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지만 대우재단은 살아남았다. 김 교수는 1976년 해직됐을 때 대우재단의 과학부문 자문위원을 지낸 인연으로 대우재단 산하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리에 앉자 팔순을 바라보는 김 교수가 직원을 시키지 않고 손수 차를 내왔다. 속기사는 “공무원은 계장만 돼도 여직원을 시키는데…”라며 황송한 눈빛이었다.

동생 도올과 장남은 동갑내기

-대우그룹이 사라져 학술협의회 꾸려나가기가 어렵지 않은가요.

“대우재단의 주 수익원은 대우재단빌딩(18층)의 임대료입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50억원을 희사해 대우재단을 발족시켰죠. 힐튼호텔과는 지금도 가교(架橋)로 연결돼 있어요. 학술협의회는 대우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동생인 도올(김용옥·57)은 자주 만나십니까.

“요새는 못 만나요. 걔가 어떻든 고려대 철학과를 나와 일본 미국 대만에서 석사, 미국 하버드에서 박사를 했지 않습니까. 동생이 보스턴에 있을 때 만났더니 ‘한국 가면 한의학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되겠나 생각했죠. 그런데 원광대에서 6년 만에 한의사가 됐죠. 내 동생이지만 공부도 할 만큼 했고 머리도 있고 정력이 대단하죠. 신통하게 생각하는데 좀 불안합니다. 그놈이 럭비공 같아서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형만 아니라면 저 럭비공이 이리저리 튀는 모습을 보며 구경을 하겠는데….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니까 이놈이 안 와요.”

4남2녀 중에서 김 교수는 맏형이고 도올은 막내다. 김 교수의 장남과 도올은 동갑내기다. 부모 같은 형이라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자타칭 대가(大家)가 된 도올을 ‘걔’ ‘얘’ ‘이놈’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밌다. 장형은 도올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 걸까.

“너무 그렇게 튀지 말라고 하죠. 학교(고려대)를 그만두는 게 아닌데…. 그만두려고 할 때 주저앉히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죠. 걔 성격이 괴짜 같은 구석이 있어요. 말도 악센트를 줘서 하다보니 때때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도 있어요. 걱정이죠. 그냥 보시는 대로예요. 가라앉아 자기의 길에 천착했으면 좋겠는데. 칭찬하는 사람은 또 칭찬하고… 저도 칭찬합니다. 내 동생이라고 나무랄 생각은 없는데 너무 그러니까 걱정이 돼서.”

-도올이 만든 EBS 다큐멘터리 10부작 ‘한국독립운동사’는 봤습니까.

“좌익 계통의 독립운동사라고 하더군요. 나는 보지 않았어요. 걔 책도 별로 읽은 게 없습니다. 이때까지 가려졌던 부분을 파헤쳤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 안창호보다 더 독립투사라고 했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직접 안 봐서. 걔 거는 일단 안 봐요.”

-도올이 쓴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글에 경기중학교를 나온 형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을 토로한 대목이 있더군요.

“용옥이가 내 큰아이와 6개월 차이죠. 내 아들 셋이 경기를 나왔단 말이에요. 나까지 합하면 넷이 경기를 나왔죠. 경기 나온 셋 중 둘이 서울대를 나오고 한 아이는 외국어대를 나왔죠. 그런데 용옥이는 어떻게 하다 보성에 들어갔거든.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죠. 어려서부터 걸작 같은 면이 있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면 없어져요. 산속에 들어가 거의 거지 중 꼴이 돼서 돌아와요. 걔 태권도가 몇 단인지 아세요? 걔한테 얻어맞으면 죽어요. 그런 얘예요.”

-기인(奇人)이군요.

“네. 동양학을 하버드에서 했지 않습니까. 나는 국학이나 동양학 한 사람들이 메서돌러지(methodology·방법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냥 공자왈 맹자왈 암기식으로 나가고, 학문적 방법론이 부족하죠. 용옥이는 어떻든 양쪽을 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영미의 현대 학문 조류와 동양학이 합류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죠. 자기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러겠죠. 그런데 인기가 너무 올라가니까 거기서 오는 병폐도 있잖아요. 내가 어디 가면 도올의 형으로 소개될 때가 많죠.”

-동생 김숙희 교수는 김영삼 정부 때 어떤 인연으로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습니까.

“걔가 지금도 독신이죠. 집은 앞뒷집이지만 같이 밥 먹고 함께 살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내가 큰오빠니까. 걔가 YWCA에서 일할 때 어느 지방에 가서 ‘이제는 그래도 대학 나온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게 좋겠다’고 몇 번 얘기했더래요. 그 말이 지방 사람들에게 꽤 먹히더래요. YS가 대통령 취임하기 전에 만나자고 해서 입각 교섭을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내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정무장관이나 여성부 장관은 하지 말라고 했죠. 이회창씨가 국무총리 된 후에 YS가 또 만나자고 하더니 교육부 장관 하라고 하더래요. 이회창씨는 어떻게 여자가 교육부 장관을 하냐고 반대했대요. 장관 하면서 월남 파병을 용병(傭兵)이라고 했다가 재향군인회에서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쫓겨났죠.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지요. 월남 파병이 용병이 아니면 뭐예요.”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라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글에서 ‘소학교 다닐 때 자정 무렵 역에 나가 지나(支那·중국)로 가는 출정군인(出征軍人)들을 전송하면서 일장기를 손에 들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었던 추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썼더군요. 중학교 5학년을 마칠 무렵엔 가네미쓰 요슝(金光容俊)으로 창씨개명을 했다지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안 하고 버틸 수는 없었던 겁니까.

“우리 집은 광산(光山) 김가라 가네미쓰(金光)라고 지은 거죠.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분들도 있죠. 그러나 창씨개명 여부로 친일(親日) 반일(反日)을 가릴 수는 없어요. 항일운동가도 창씨개명을 안 했지만 친일파 중에도 창씨개명을 안 한 사람이 있어요. 한상용(韓相龍)씨 같은 친일 거두도 창씨개명을 안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죠. 압박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학교에서도 계속 창씨개명하라고 독촉하고, 사회에서도 불이익이 그대로 쏟아지니까 안 하고 배길 수 있나요. 어떻게 보면 그때 창씨개명을 안 한 것이 애브노멀(abnormal·비정상)이고 창씨개명한 것이 정상적인 거죠. 못 견뎠으니까….”

한상용은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로 중추원칙임참의(中樞院勅任參議)를 15년간 중임하고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됐다. 각종 친일단체에 참가해 1916년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평의장을 지냈다.

-‘친일 문인’ 이광수를 옹호한 대목이 흥미롭더군요.

“경기중학교가 종로구 화동 꼭대기에 있었어요. 학교에서 안국동을 거쳐 종로로 나가면 화신상회(현재 삼성증권 자리) 4층에 서적부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돈이 올라와 서적부를 어슬렁거리다 춘원이 쓴 ‘그의 자서전’이란 소설책을 샀습니다. 친구 부인과 간도(間島)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스토리죠. 간도의 한국사회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의 본거지였죠. 춘원이 나 같은 놈을 생각해 쓴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그 책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한 겁니다.

학교 가면 황국신민(皇國臣民) 선서를 낭송하고 천황이 계신 곳을 향해 동방요배(東方遙拜)했습니다. 일본말로 쓴 일기장을 제출해야 했죠. 그야말로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랐죠. ‘덴노 헤이까(천황 폐하)’라는 말이 나오면 벌떡 일어서서 차려 자세를 취했습니다. 천황 폐하의 적자(嫡子)로서 생명을 새털같이 버리는 게 남아(男兒)의 영광스러운 일생이라고 교육받았으니까요.

‘그의 자서전’ 이후 춘원의 역사소설을 모조리 읽었어요. 그때는 일본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정식 학교에서 한국 역사를 못 배운 세대거든요. 춘원의 소설을 읽은 후로 우리글로 일기를 썼죠. 광복이 되고 나서 춘원을 친일파다 뭐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춘원이라는 사람을 욕할 수 없죠.”

교수도 광복 직후에는 쏟아져 나오는 좌익서적에 심취해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정심상소학교(지금의 천안초등학교) 다닐 때 박성의(朴成義)라는 친구가 급장을 하고 내가 부급장을 했어요. 그 친구는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했어요. 성의의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로 집안이 무척 빈한했죠. 우리 집은 꽤 잘살았어요. 아버지가 개업 의사였으니까. 성의는 경성사범학교에, 나는 경기중학교에 갔어요. 둘 다 좋은 학교였어요. 경성사범은 수업료가 일절 없어 가난한 수재들이 모여들었죠. 성의는 연수과에 진학했다가 광복 후에는 사범대학생이 됐죠. 사범대학은 좌익의 소굴이었고 성의는 거기서 보스였어요.

성의가 갖다준 야마카와 히도시(山川均)의 ‘자본주의의 계략(資本主義の からくり)’과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또 하나의 가난한 이야기(第二貧乏物話)’라는 책에 사로잡혔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 쓴 책이에요. 성의에게 이끌려 좌경화된 거죠. 마분지 같은 종이에 인쇄된 모택동·스탈린·레닌 선집이 쏟아져 나올 때였죠.

성의가 함께 좌익운동을 하자고 해서 사범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죠. 사범대학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사범대학이 교원 양성소지, 그게 어디 대학이냐’며 할아버지 산소 앞으로 끌고 가서 우시는 거예요. 그래서 경성공업대학(서울 공대의 전신)에 진학했죠. 거기서 국대안(國大案) 반대투쟁을 격렬하게 했어요.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과 약학전문학교·의학전문학교·고등공업학교·고등농업학교 같은 고등교육기관을 합쳐 국립서울대를 만든 거죠. 광복이 되고 고등교육기관이 모자라 야단인데 그걸 다 합해서 하나로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잘못된 정책이죠.

신입생 투쟁위원이 돼서 국대안 반대 삐라를 붙이고 다니다 경찰관에게 붙잡혔어요. 성의는 내가 붙잡히는 걸 보고 달아났어요. 그게 마지막이죠. 그 친구는 전쟁 통에 월북하다 폭격을 맞고 죽었다고 해요.”

-언제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게 됐습니까.

“삐라 붙이다가 붙잡혀 형무소살이를 하고 있는데 천안에서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빼내주셨죠. 만 스무 살이 안 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소년감호원으로 이감됐다가 나온 거죠. 나는 소년감호원에서 사식(私食)을 먹고 살이 뽀얗게 쪘는데 집에 내려가보니 어머니는 자식이 형무소에 있는데 편하게 잘 수 없다고 가마니를 깔고 자며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 무릎에 부황이 나셨더군요.

천안에 있을 때 김구 선생님이 쉰 듯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어요. 국대안 반대투쟁을 거론하며 ‘너희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나라 걱정은 우리한테 맡기고 너희는 공부해라’고 말씀하셨어요. 남로당은 김구 선생을 반동의 괴수요, 백색 테러의 두목이라고 헐뜯었죠. 그러나 김구 선생의 호소는 내 심금을 울렸습니다.

서울대 동맹휴교가 많이 허물어지고, 한쪽에서는 이철승씨가 이끄는 우익 전학련이 침투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투쟁본부로 가서 제네스트(general strike·총파업)를 일단 중단하고 등교했다가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했죠. 남로당의 명령이라서 중단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남로당은 그때 전국노동자평의회의 철도 제네스트와 서울대 국대안 반대 제네스트를 연대한 투쟁을 지시해놓고 있었거든요.

나는 형무소에서 넉 달 동안 위대한 투쟁을 하고 있을 때 국대안 반대 투쟁본부에서 면회 한번 안 오고, 고생하고 나온 뒤에도 위로를 안 해줘 뿔따구가 나 있는 상태였죠. 학생운동은 순수해야 한다며 탈퇴했어요. 적색 테러가 굉장했을 때라 정말 혼났어요. 사범대 교수 두 명이 노상에서 맞아죽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국대안 반대 투쟁위원들이 몰려왔죠. ‘저 악질 반동놈의 새끼, 한민당 놈들 쏘기 전에 너부터 쏘겠다’고 협박했죠. 배신자라는 거죠. 한 달 이상 집 밖으로 못 나갔어요. 어쨌든 그쪽에서 볼 때는 배신자 아닙니까.”

국보법 폐지엔 찬성

-강정구 교수가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지 77%, 자본주의 지지 14% 로 나왔으니까 당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선택했어야 맞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세분하면 공산주의 지지 7%, 사회주의 지지 70%였죠. 과연 그 여론조사가 정확했던 걸까요.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요즘도 통계숫자를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질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6·25전쟁 터지고 나서 피난민이 몰려와서 이북 사람들이 여기에 자리잡은 거 아닙니까. 잘살았으면 여기서 그리로 올라갔지, 젠장.

강 교수는 도대체 정체가 뭔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돼요. 왜 야단스럽게 꼭 그런 발언을 지금 이 단계에서 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소리를 해야 클로즈업되는 건가요.”


-김종빈 검찰총장이 강정구 교수에 대해 구속수사를 하려니까 법무부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하는 바람에 결국 사퇴하는 사태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누가 얼마 전에도 묻길래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할 법’이라고 했어요. 법률지식은 없지만 형법으로 다스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국가보안법은 이북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법이죠. 이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거기까지도 잘못됐다고 생각 안 했습니다. 없애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국가보안법은 애브노멀하고 예외적인 법이죠.

그러나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걸 보고 ‘아, 이 나라는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법률을 없애기 전에는 그 법에 의해 움직이는 게 검사의 본분입니다. 검찰이 제멋대로 법률을 만들어서 집행합니까.”

그는 이 대목에서 질문하지 않았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이 정권을 나무라기 전에 이 정권을 들어서게 만들어준 전(前) 정권을 나무라고 싶어요. 이 정권이 이렇게까지 아마추어인 줄은 몰랐잖아요. 386세대가 휴대전화를 동원해 감성적으로 당선시켜놓았지만 지금 뽑아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후회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대통령이 대학을 안 다녔다고 하지만 고등학교를 나와서 판사 된 것 보면 머리는 꽤 좋은 편이죠. 어떻든 전 정권에서 장관도 했죠. 그런 사람이 이 정도밖에 못하니까 안타까워요. 글쎄, 대통령 아닙니까. 대통령이 보통 자리입니까. 대통령 한 지가 벌써 2년 반이 넘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대통령인 걸 몰라요, 내가 볼 때는 대통령이라는 자각(自覺)이 없어. 대통령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다 끌어안고 가야지요. 미운 놈한테 떡 하나 더 주라는 게 뭐예요. 나라 다스리고 장(長) 노릇 하려면 보기 싫은 놈 궁둥이도 두들겨주고, 승진도 시켜주면서 부려먹어야 해요. 그게 장이지요. 그렇게 제 코드에 맞는 것만 찾고 앉았으면 정치가 됩니까.”

친일 진상규명은 학자의 몫

-광복 60년이 지났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활동한 사람들은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됐죠. 광복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해산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친일파의 아들이나 손자 증손자가 조상의 과오에 대해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지금 국가기구를 만들어 친일을 규명하는 것은 연좌제밖에 안 된다고 보는데요.

“둘째아이(김인중·53)가 숭실대 사학과 교수입니다. 인중이만 해도 책을 읽고 6·25전쟁이 이랬구나 하고 알죠. 인중이한테는 임진왜란이나 6·25전쟁이나 다 옛날 이야기지요.

정확한 역사를 쓰기 위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것에는 절대 찬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의 친일 진상규명은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해서 뭘 하자는 거냐고 이 정부에 물어보고 싶어요. 그건 역사학회 혹은 국사학회에 맡겨서 객관적 관점에서 정리해보라고 해야죠. 그런데 자기편에 서 있는 친일파는 안 넣었다는 얘기도 나오더군요.”

미군 통역 생활

그가 6·25전쟁을 맞아 천안 산골짜기에 숨어 있을 때 미군 부대가 올라와 가까운 곳에 주둔했다. 거기 구경나갔다가 짧은 영어로 미군들과 대화를 나눴다. 매코이라는 미군 대위가 낙동강 전투에서 부대가 박살나는 바람에 통역이 모두 전사했다며 그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한 달 동안 으스대며 대대 부관 통역을 했다. 이 부대가 북으로 진격할 때 미군복을 입고 카빈총을 메고 38선을 넘었다.

철원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인민군 패잔병이 밀려 내려왔다. 미군들은 그에게 인민군과 의용군을 가려내라고 했다. 수많은 패잔병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몇 마디 물어보고 이북 말을 쓰면 ‘코뮤니스트’, 남쪽 말을 쓰는 사람은 ‘볼런티어’로 분류했다. 모두가 그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속에서 인민군 중좌, 정치보위부원 등 3명이 당당하게 신분을 밝혔다. 미군은 이 3명을 특별호송했다. 그가 통역으로 종군한 미군 부대는 내일이면 압록강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할 것이라는 지역까지 갔다가 중공군에 밀려 남하하기 시작했다.

“강정구 교수가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느니,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느니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볼 때는 말도 안 되죠. 내가 돈암동에서 큰길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살고 있었어요. 19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죠.

헌병들이 권총을 양손에 들고 지나가는 차를 모조리 징발해 외출 나온 군인들을 붙잡아 전방으로 보냈어요. 무심코 하룻밤이 지났는데 군인들이 우리 집 대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창덕궁 근처 이모 집으로 피신했죠. 다음날(6월27일) 새벽에 인민군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창경원 앞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죠. 그걸 다 겪은 사람 아닙니까. 나중에 서울을 빠져나가 천안 처가 근처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습니다. 미군이 일단 올라왔다가 후퇴할 때 남겨두고 간 발전기를 고쳐 라디오에 연결했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국의 소리를 들었죠. 9·28 서울 수복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그때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어요.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는 그런 걸 겪은 사람들이니까 강 교수가 암만 그래봐야 코웃음밖에 안 나오죠.”

그는 함석헌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화학 빼놓고는 모든 걸 함 선생한테 배웠다고 술회한다. 그의 집 책상 앞에는 함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여동생(김숙희)은 “우리 오빠는 아버지가 두 분”이라고 말한다.
“함석헌 선생에게 모든 걸 배웠다”

“함 선생님이 일요성서 강좌를 오후 2시에 시작하면 해가 질 때까지 해요. 모든 게 다 나오는 겁니다. 박식하시죠. 내가 쓴 ‘내가 본 함석헌’이란 책이 내년에 나옵니다.”

도올 김용옥이 쓴 ‘나의 큰형 김용준’이란 글에는 ‘아버지가 함 선생에 빠져 있는 큰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아버지는)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를 마땅치 않게 여겼고 퀘이커 운운 하는 것도 시원찮게 여겼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큰형 얘기만 나오면 “쟤는 함석헌 따라다녀서 저 모양 됐어”하고 아주 못마땅하게 쯧쯧 혀를 찼다. 해직당했을 때도, ‘씨의 소리’를 복간한다고 돈을 구하러 다닐 때도, 아버지는 큰형의 함석헌 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중략) 함석헌은 내가 생각하기에 좀 헛폼이 쎈 사람이다.’

김 교수는 ‘함석헌은 헛폼이 쎈 사람’이라는 도올의 글을 읽어주자 “허” 하며 웃었다. 지하의 함 선생이 도올의 글을 읽었더라면 아마 “도올 이 사람아, 자네도 헛폼이 세기는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함 선생님이 이화여대에 초청 강의를 가셨던 모양이에요. 강의를 하면서 이대생들에게 ‘공부 안 하고 멋만 부린다’고 야단치셨대요. 강연 끝내고 나오는데 여학생들이 뒤따라오면서 ‘자기는 멋 안 부리나. 자기도 흰 두루마기 입고 수염 기르고 고무신 신고…. 자기는 저게 멋이지’라고 쑤군거리더래요. 선생님은 그런 말을 들으시면서 속으로 ‘너희들 말이 옳다’고 생각하셨대요. 나는 함 선생님 생각할 때마다 원효대사를 떠올려요. 함 선생님이 아마 신라시대에 사셨으면 원효처럼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화학과 교수가 민주화 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도 함 선생의 영향인가요.

“함 선생이 가끔 하신 말씀이 있죠. 젊은 놈들 교육한다면서 ‘저 놈 때문에 내 아들 버렸다’는 소리 한번 못 들으면 교육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함 선생을 만나 내 일생이 순조롭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화학에서 할 일도 많았는데….”

-거룩한 인물한테도 사사로운 흠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1980년대에 함 선생의 여성 관계를 다룬 ‘거짓 예언자’라는 책이 나왔죠. 국가안전기획부 공작이란 설(說)이 파다했죠. 먼 친척이 썼다고 하는데 그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나 사실인가요.

“글쎄, 나는 그 책을 안 읽었습니다. 읽을 가치가 없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렇습니다. 함 선생님을 따라다니던 여대생이 꽤 있어요. O씨 같은 분도 그 중에 포함되죠.

함 선생님이 천안 씨농장에 혼자 계시는데 O씨가 뒷바라지한다고 가 있었죠. 그 여성은 함 선생님을 몹시 흠모했죠. 선생님으로 보지 않고 남자로 본 거죠. 함 선생님 혼자 주무시는 방에 옷을 벗은 채로 들어간 일도 있다고 해요. 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던 거 같아요. 함 선생님의 여자관계를 조금도 숨길 마음이 없습니다. 함 선생님이 성자(聖者)는 아니죠. 나는 그분을 철저한 인간으로 보니까요.

그 양반만큼 자기의 일에 대해 표리(表裏)가 같으신 분은 정말 없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여자 문제가 좀 있었다고 해서, So what?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그런 상황에서 부득이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안전기획부가 함 선생님의 먼 조카뻘 되는 아이를 꼬여서 ‘거짓 예언자’를 쓰게 하고 5만부를 찍었죠. 항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책방에서 진열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함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 감격했어요. 큰 테두리에서 봤을 때 그 일이 함석헌이란 거목에 그렇게 큰 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내가 돈암동 집에 있을 때 함 선생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시더군요. 거의 정신이 나가신 모습이었어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1890∼1981) 선생이 나무라시더랍니다. 유영모 선생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함 선생님의 그 일에 대해서. 함 선생님은 오산학교 스승인 다석 선생을 아버님처럼 모셨죠. 선생님한테 애걸하면서 ‘제가 잘못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빌어도 돌아가실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셨죠. 주변의 무교회주의자들한테 지탄받고,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용서를 안 해주시니까 무척 괴로워하셨습니다. 칼릴 지브란 번역 전집 서문에 그 심정이 나죠. 서문을 읽어보면 눈물이 나와요. 당신의 후회하는 모습이 들어 있죠. 함 선생님이 그 사건 가지고 그 정도 반성했으면 됐지.”

원효가 요석 몇 번 안은 셈

-한 여자와의 일이었습니까. 그 책에는, 따라다니는 여자는 모두 건드리는 것으로 묘사돼 있는데….

“함 선생님이 1901년생이니 그때가 55세 때였죠. 남자 나이 55세면 한창 때죠. 시골 농장에 있는데 뒷바라지한다고 여자가 와서 교태를 부리고 그러니까 원효가 요석을 몇 번 안은 식으로 안은 게…. 함 선생님을 접해보면 알지, 어떻게 따라다니는 여자를 전부 건드려요.”

그는 여기서 함 선생의 부인 이야기도 했다.

“함 선생님 부인이 문맹(文盲)입니다. 함 선생님 부친이 아들 녀석은 도쿄(東京) 유학까지 했는데 며느리가 글을 몰라 큰일났단 말이죠. 그래서 부인, 딸, 며느리 세 명을 놓고 언문(諺文)을 가르치셨대요. 다른 사람들은 다 깨우치는데 사모님은 끝내 못 깨우치셨다는 겁니다.”

다석의 목요강좌

-함 선생 따라다닐 때 김동길 교수도 자주 만났겠군요.

“그럼요. 가깝게 지냈죠. 꽤 유명했던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양반이 어쩌다 정주영씨와 연결돼 정치계로 나가더니 조금 비난을 받고…. 그거 참 모르겠어요. 나는 자연과학을 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이 돼보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지요. 김동길 선생은 의외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죠.”

-함석헌 선생에 비해 다석은 덜 알려져 있어요. 최근에 다석 전집도 나왔더군요. ‘씨’이라는 말도 다석이 만들었다지요.

“선생님보다 11년 위예요. 유영모 선생이 오산학교에 두 번 부임하셨죠. 한번은 오산학교 선생으로, 한번은 교장으로. 함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촌놈이었는데 유영모 선생을 만나 정신이 크게 도약했다’고 하셨어요.

저도 함 선생님 따라서 유 선생님을 여러 번 뵈었죠. 기인(奇人)이죠. 간디처럼 하루에 한 끼만 드셨죠. 그 양반은 간디처럼 해혼식(解婚式)을 하셨어요. 결혼을 푸는 것이 해혼이죠. 52세에 부인과 해혼식을 갖고 성관계를 딱 끊으신 거예요. 간디가 말한 금욕(禁慾)생활이죠. 함 선생님은 훤칠한데 유 선생님은 키가 자그마하시죠. 짤막한 분이 마포 장사꾼이 쓰는 어투로 말씀하셨죠. ‘그렇습죠’라는 식으로.”

그는 1950년대 후반 종로2가 YMCA에서 다석이 하던 목요강좌 이야기를 했다. 다석은 오후 2시에 시작해 3시간 동안 강연을 했다. 삐그덕거리는 목조건물에 청강생은 10명 정도였다. 함 선생이 맨 앞에 앉고, 이화여대 김응호 교수를 비롯해 7, 8명이 안 빠지고 나오는 단골이었다.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으셨죠. 언젠가 선생님을 모시고 가다가 ‘선생님 한문에 이런 말이 있는데 노자, 장자 아니면 사서삼경 어디에 있는 말입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한참 후에 ‘그런 말 없는데’ 하셔요.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 거죠. 유 선생님은 나무판자 위에 담요 하나 깔고 주무십니다. 평생 이불을 안 덮고 주무셨다고 해요.

그분이 YMCA 목요강좌에서 인촌(仁村) 김성수에 대해 장장 2시간 동안 강의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기록했던 노트가 어디 남아 있을 거예요. 일제 강점기 당시 인촌의 여러 가지 행적에 대해 극구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독립자금 대준 이야기며 인물의 너그러움에 대한 얘기를 주로 하셨던 거 같아요.”

김 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온 후 모교인 서울대로 가지 않고 고려대로 가게 된 것도 다석의 그 강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때는 미국서 박사 따오면 제 가고 싶은 대학을 골라 갈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 다 오라고 할 때입니다. 서울대는 모교니까 오라고 하고, 연세대는 기독교 계통으로 해서 오라고 했죠.

저는 인촌을 직접 뵙지는 못했어요. 고려대 선배 교수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합니다.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하루는 인촌이 소집을 하더래요. 인촌이 보자기를 들고 와서 교수들에게 월급봉투를 나눠주시더래요. 나라가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그게 쉬운 일입니까. 그때의 감격을 고대 교수들이 잊지 못하더라고요.”

민청학련 사건과 지식인 선언

-왜 두 번씩이나 해직됐습니까.

“1975년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았다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죠.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은 당연직으로 기독학생운동총연맹(KSCF) 이사장이 됩니다. 이철(철도공사 사장), 유인태(국회의원), 나병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황인성(대통령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KSCF에서 일했죠.

1975년엔 주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해직됐어요. 백낙청(서울대), 김윤환(고려대) 교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1980년에 복직했더니 변형윤 교수가 주도하는 지식인 선언에 참여하라고 야단인데 안 나가고 있었죠. 무대가 바뀌면 배우도 갈려야죠. 왜 밤낮 똑같은 배우가 나가서 하는 거냐고요.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에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 명단에 과학자가 없다는 거예요. 변형윤씨가 ‘김용준이 데려오라’고 했다고 해요. 하루는 부르길래 세실레스토랑에서 모였는데 신군부에 반대하는 열기가 대단하더라고요. 결국 과학자를 대표해 서명했다가 또 해직당했죠.”

-KSCF 학생들이 몽땅 이 정부의 실세가 됐군요.

“이사장이 돼서 KSCF를 들여다보니까 1년 예산의 90%가 외국에서 오는 돈이더군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유일한 학생단체가 한국 교회의 지원을 못 받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 간사 4명을 지역별로 할당해 교회에서 돈을 얻어오게 했죠. 그런데 그 돈이 모두 민청학련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도 중앙정보부가 김 교수님을 민청학련으로 엮어 넣지 않은 것은 이상하네요.

“실질적으로 엮이지가 않았죠.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서경석 목사가 찾아와 100만인 구국서명에 참여해달라고 했죠. 내가 서 목사 보고 ‘이거 봐, 내가 마땅히 여기 서명해야지. 그런데 내가 지금 KSCF 이사장이야. 학생들이 매일 붙들려 들어가면 용서해달라고 빌면서 끄집어내야 할 판인데 내가 거기다 서명하면 나부터 들어갈 판인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했어요. 내 서명을 조금 미루자고 하고 안 했어요.”
-민청학련과 관련해 조사 받으며 맞지는 않았습니까.

“맞지 않았어요. 그럴 이유가 있죠. 한국화약 기술고문이었거든요. 한국화약 오너 집안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하고 사돈간 아닙니까. 거기서 어떤 시그널이 갔는지 때리지 않더라고요.”

-유신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평가해보시죠.

“4년씩이나 해직당했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죠. 그러나 그건 그거죠. 경제 부흥시켜놓은 건 인정해야죠. 사적 감정과 공적 평가는 분리해야죠.

1975년 박정희 정권하에서 해직당했을 때도 이목을 피하려고 반체제 인사들이 천주교 수녀원 같은 데로 돌면서 대화를 나눴어요. 그때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는 강경파가 있고, 온건파가 있었죠. 강경파는 덮어놓고 이쪽을 때려죽일 놈이라고 하면서도 저쪽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했죠. 나는 그 자리에서 ‘남북을 같은 자로 재라’고 했죠. 박정희를 재는 자로 김일성이도 재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독재로 치자면 김일성 독재가 박정희 독재보다 더 지독하다’는 말을 하면 H목사 같은 분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죠.

김정일이 적어도 남한하고 어떤 걸 하려면 공식 사과부터 해야지요. 그 사람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입니까. 아웅산 사건이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며, 그건 다 괜찮은 겁니까.”

치기에 사로잡힌 386

-이 정부 사람들은 툭하면 ‘독재시대에 침묵한 당신은 말할 자격이 없다’는 태도로 나와요. 자기들이 감옥 가서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거죠. 그런데 김 교수님은 두 번씩이나 해직당했으니 그 사람들 기준으로 봐도 말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인류 역사가 모순의 덩어리입니다. 정말 죄도 안 졌는데 사형당하는 이도 있죠. 밤낮 정정당당하고 의롭게 산 놈만 있고, 나쁜 놈은 다 죽고 그러는 게 역사가 아닙니다. 박정희씨도 애국충정에서, 그야말로 제 딴에는 나라 세워보겠다고 애를 써서, 독재가 됐든 뭐가 됐든 경제를 이만큼 성장시켜놓은 건 인정해야죠.

386세대가 저러는 것은 치기(稚氣)로 봐요. 그들이 아직도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자꾸 선거에 지잖아요. 코드 안 맞는 사람을 갖다 써야 정치가 되지,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만 해서 정치가 됩니까. 내 편도 있고 네 편도 있고, 여당도 있고 야당도 있어야 정치가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교수님 글 중에 ‘자주니 외세 배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마치 한 맺힌 대원군을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경제규모가 세계 11위까지 올랐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다 때려치우고 6·25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닐 거고…. 조선 조정이 김대건 신부를 잡아 죽이기 1년 전에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는 학자 15명을 네덜란드로 유학 보내요. 우리나라에서는 쇄국정치하면서 김대건 신부 죽이고 남강 이승훈을 처형할 때라고요.”

여기서 화제를 종교와 과학의 관계로 돌렸다. 그는 최근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라는 저서를 펴냈다. 화제가 이쪽으로 돌아오자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과학-기독교 싸움은 과학의 승리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못 가르치게 하거든요. 성경의 창조론에 배치된다는 거죠. 요새는 지적 설계론(intelectual design)이라고 변형 창조론을 가르치는 교사도 있죠. 진화를 부정하기 어려우니까 하나님이 진화하도록 설계했다는 이론이죠.

“미국의 창조론자들은 정치와 연관돼 있습니다. 보수 성향의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자꾸 고개가 올라와요. 이제는 분자생물학까지 나왔으니까 진화에 이론의 여지가 없잖아요. 구더기를 구성하는 DNA와 사람을 구성하는 DNA는 같은 유전자입니다. 진화론을 무시하고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간에게서 신(神)의 개념은 영원히 안 없어지겠죠. 또 신의 개념을 부인하는 과학적 추구도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종교와 과학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인류 문화 속에 녹아든 하나의 요소입니다. 종교는 신의 관점에서 보고 과학은 물질의 관점에서 보니까 마치 나눠진 것 같지만. 그걸 나눠놓고 한쪽만 얘기하면 밤낮 싸움이 나는 거예요.”

김 교수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장로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보수 기독교계는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지 않습니까. 줄기세포 연구는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것인가요.

“과학과 기독교의 싸움에서 현재까지는 과학이 항상 이겼습니다. 과학이 매번 옳았고 종교가 늘 졌거든요.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봅니다. 나중에 복제인간도 나오겠죠. 나오면 어떻습니까. 김용준의 체세포에서 또 하나의 김용준이 나왔다고 해서 걔가 납니까. 내 부모님 밑에서 자라 내가 산 80세는 복제 김용준의 역사와는 다르잖아요. 나와 모양은 똑같지만 그건 다른 인격체지요.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될 것이며, 금방 뭐가 뒤집힐 것 같이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암만 반대해도 과학은 과학대로 갈 거예요. 복제인간도 나오겠지요. 그렇게 쉽게 나오지는 않겠지만. 자연과학의 발달 역사를 보면 옛날에 꿈도 못 꾸던 일들이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빅뱅(big bang)에 의해 우주가 생성됐다는 것과는 맞지 않지요.

“성경은 3000년 전에 씌어졌죠. 하나님이 엿새 만에 만드셨다는 말을 그대로 믿으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엿새 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묘사(inspirational description)죠. 그런 걸 신화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신화를 해석해야 내 것이 되는 거지요. 그걸 착각하니 답답해요.”

기독교는 비판받아야

-‘우리나라 기독교는 종파의 생존을 위한 폭력집단 같다’고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던데요.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 거둬들이는 헌금이 얼마이겠습니까. 그 많은 돈을 거둬들여 지금 기독교인들 뭘 하는 거냐고요. 그래도 미국 기독교인들은 예일·프린스턴·하버드를 세웠잖아요.

교회당 지어놓고, 수양원이라고 해서 땅 사놓고, 해외에 선교사 파송하죠. 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요전에 숭실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나는 이 학교만 오면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어요. 숭실대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교파인 예수교 장로회 통합이 세운 학교입니다.

기독교가 무슨 짓들이에요. 교회당을 크게 짓고 수만명을 모아놓고 목사가 하루에 일곱 번 똑같은 설교를 한다고 해요.”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한데요. 요즘 의대 한의대 약대 못 간 학생들이 공대를 갑니다. 서울대 공대 들어가서 사법시험 공부하는 학생도 있고. 의학전문대학원이 생기면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지겠지요.

“일제 강점기 때 내가 왜 화학을 했느냐 하면 군대 안 가려고 한 겁니다. 일본 사람들이 선견지명이 있는 겁니다. 전쟁 말기에도 이공계 학생들은 징병 안 데려갔어요. 문과는 다 데려가면서도.

단적으로 얘기한다면 소위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고 나서 이공계는 더 망했어요. 그래도 박 정권 때는 탄압을 했지만 학교 자체를 흔들지는 않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언제쯤 과학분야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또 노벨상 타령이야. 글쎄요. 단적으로 얘기해서 50년 내로 한두 명 나오겠죠. 그런데 지금 국가 차원에서 전체적인 플랜이 없습니다. 과학은 놔둬야 됩니다. 놔둬야 거기서 씨도 나고 뿌리도 내리고 그러는 거지. 극단적인 얘기지만 아인슈타인이 지금 한국에 오면 취직 안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쓴 논문 17편밖에 안 돼요. 그 사람이 대한민국에 오면 아마 전임강사도 될 수 없을 거예요. 대학을 시장경제의 원리로만 몰아세우면 나라의 장래가 없어요.”

김 교수의 집안은 명문거족(名門巨族)에 만석꾼 살림이었다. 증조부는 전라병사(全羅兵使)를 지냈다. 지금으로 치면 군사령관쯤 되는 벼슬이다. 조부는 구한말 문과에 급제해 충청도 부여와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군)의 원(員·수령)을 지냈다. 필자가 조상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웃으며 “탐관오리셨죠”라고 말했다. 부친은 세브란스 의전과 일본 교토(京都)대 의학부를 졸업했다.

평생 사람다운 삶 살려 노력

뛰어난 학자와 문화인은 명문거족에서 많이 나온다. 괴테도 그렇고 찰스 다윈도 그렇다. 집에 있는 책과 분위기, 그리고 부(富)가 학문과 문화예술의 거장을 길러내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몇 대에 걸친 부가 인류문화의 진보에 기여하는 학문과 문화를 길러내는 것이라면 ‘학벌의 세습’ 운운하며 흥분할 일만도 아니다.

-혹시 과학부 장관 제의를 받아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 거 없었어요. 장관을 했으면 DJ정권 때 했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DJ를 싫어했고, 김영삼 정권 때는 동생이 장관됐으니 내가 장관 될 리도 없었죠.”

-일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을 몇 권 꼽아 보시죠.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제이콥 브르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정도예요.”

두 살 아래인 부인과 사이에 4남1녀를 뒀다.

-혹 안 여쭤봐서 못한 말씀이 없는가요.

“함석헌과 같은 인격체를 만나서 평생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쟁 직후 함 선생을 모시고 천안 봉원사에서 여름 수양회를 했어요. 거기서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篇)을 배웠어요. ‘온 세계가 너를 칭찬해도 조금도 더할 것도 없고, 온 세상이 너를 비난해도 조금도 주저할 것도 없도다.’ 거기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사는 거죠.”

(끝)

신동아 2005.12.01 통권 555 호 (p82 ~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