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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8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adorno2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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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는 바를 보고, 그의 의도를 살피고, 그의 습관을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 함석헌 전집 20권 등이 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2017/09/29

[요즘북한은] 드디어 국산화 성공!…北 어린이 가방 외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요즘북한은] 드디어 국산화 성공!…北 어린이 가방 외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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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북한은] 드디어 국산화 성공!…北 어린이 가방 외
입력 2017.02.11 (08:03) | 수정 2017.02.11 (09:00)남북의창| VIEW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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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의 최근 소식을 알아보는 ‘요즘 북한은’입니다.

북한 매체들이 올 들어 유난스레 평양의 한 가방공장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재료 조달을 제대로 못해 가방도 자력으로 만들지 못하다가 각종 생산 시설을 확충한 끝에 마침내 일궈낸 성과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이 직접 북한 국산화의 상징으로 띄우기에 나섰다는데요.

새 학기 북한 학생들이 메고 다닐 가방들, 함께 구경해 보실까요?

<리포트>

각양각색 다양한 가방들이 빽빽하게 전시돼 있습니다.

토끼와 나비 같은 동물 모양의 아동용 가방부터, 책을 넉넉히 넣을 수 있도록 크기를 키운 중‧고등학생용 가방도 있습니다.

실용성을 강조한 대학생용 가방도 보이는데요.

지난 달 문을 연 평양 가방공장입니다.

북한의 대표 만화영화인 ‘소년장수’와 ‘영리한 너구리’ 캐릭터를 도안에 적극 활용한 것도 눈에 띕니다.

<녹취> 리학철(평양가방공장 직원) : “청소년 학생들의 심리와 기호, 동심에 맞는 여러 가지 그림 장식 도안들을 더욱 생동하고 다양하게 창작하는데 중심을 두고 명제품, 명상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올해 첫 현장 시찰 대상으로 이곳의 가방을 둘러보며 ‘멋쟁이 가방’이라고 치켜세웠는데요.

지난해 방직공장에 가방천 생산 공정을 만들고 이어 지퍼 공장도 별도로 건설한 끝에 마침내 자력으로 가방을 만들 수 있는 공장이 문을 연 것입니다.

<녹취> 조선중앙TV : “(김정은이) 우리가 만든 멋쟁이 가방을 우리 아이들과 인민들에게 안겨주게 됐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시며...”

평양 가방공장은 한해 30만개 가량의 가방 생산 능력을 갖췄다는데요.

각종 절단기와 재봉틀 등 생산 설비 대부분을 국산화했다면서, 새 학기부터 학생들의 통학길 모습이 달라질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녹취> 안희순(평양가방공장 직원) : “제 손으로 만든 가방을 우리 자식들에게 맘껏 내어주게 되었으니 아무리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습니다.”

북한 매체들은 수입에 의존했던 재료들을 자체 생산하고 토종 만화 캐릭터까지 그려 넣은 국산 가방을 김정은식 국산화 정책의 대표 사례로 집중 홍보하고 있습니다.

‘적국 언어’ 배우기…북한의 영어교육

<앵커 멘트>

틈만 나면 미국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북한이지만, 김정은 정권 들어 ‘적국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영어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부터 영어를 배우고, 영어 사교육까지 있을 정도라는데요.

북한 TV도 공공연히 영어 실력을 뽐내는 모습을 방송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북한의 영어 교육 현장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리포트>

설 명절을 맞아 나들이에 나선 4살 어린이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합니다.

<녹취> 김권령 : "My name is 김권령. (권령이, 몇 살인가요?) I am 4 years old. 나는 네 살입니다."

지켜보던 외국어 학교 교사와도 영어로 대화를 합니다.

<녹취> "How many members are there in your family? (가족이 몇 명이니?)"

<녹취> "I live with grandmother, father, mother, sister and me. (나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삽니다.)"

미국을 원수라고까지 부르는 북한에서 공공연히 영어를 하고 이를 장려하는 듯한 모습을 TV로 방송하는 건 좀 의아할 수도 있는데요.

실제 북한은 김정은 집권 이후 학제를 개편하면서 일선 학교의 외국어 선택과목에서 러시아어를 폐지하고 영어만 남기는 등 영어 교육을 강화했습니다.

우리의 초등학교인 소학교 4학년부터 2년간 영어를 배우고 중고등학교에서도 영어는 필수과목입니다.

북한 유일의 사립 국제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학의 경우 상당수의 외국인 교수를 영입하고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하고 있는데요.

<녹취> 김미향(평양과학기술대학 학생) : “(평양과학기술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외국인 교수님들을 만났어요. 이렇게 많은 외국인 교수님들을 본 건 처음이에요.”

북한 주재 영국 대사관으로부터는 영어교사 양성 등 영어 교육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북한 고위층 자녀들은 한국에서 만든 영어교재를 USB 형태로 구해서 활용한다고 합니다.

<녹취> “미국 놈은 승냥이, 밉고 미운 승냥이”

틈만 나면 반미 감정을 고조시키는 북한.

다른 한편으론 국제공용어인 영어 교육에 공을 들이고 있는 건데요.

해외 기술 습득과 노동자 해외 송출 등을 위해 영어의 필요성이 늘고 있는 현실과 함께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경험도 이 같은 변화의 배경으로 분석됩니다.

지금까지 ‘요즘 북한은’이었습니다.

[클로즈업 북한] ‘유명무실’ 北 12년 무상 의무교육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클로즈업 북한] ‘유명무실’ 北 12년 무상 의무교육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클로즈업 북한] ‘유명무실’ 北 12년 무상 의무교육
입력 2016.10.15 (08:09) | 수정 2016.10.15 (08:33)남북의창| VIEW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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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 엘리트 양성을 위해 설립한 김일성 종합대가 최근 개교 70주년을 맞았는데요...

김일성대 출신들의 탈북도 부쩍 늘어서 서울에서 동문회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북한이 공들여 양성한 엘리트들마저 북한 정권에 등을 돌리는 이유는 뭔지, 또 북한이 선전하는 ‘12년 무상 의무교육’의 실태는 어떤지 <클로즈업 북한>에서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녹취> "아~ 조선아!"

북한 엘리트 교육의 산실인 김일성 종합대학이 얼마 전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녹취> 북한 노래 ‘조선아 너를 빛내리’ : "해 솟는 룡남산 마루에 서니~"

교직원과 재학생, 그리고 졸업생들이 함께 한 기념행사...

아흔 살을 바라보는 1기 졸업생을 포함해 김정일과 함께 대학을 다녔다는 동문들까지 모두 나섰다.

<녹취> 김기범(김정일 동창생) : "나는 오늘 위대한 장군님(김정일)께서 대학 전 기간 단벌 교복을 입으신 사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녹취> 리지향(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 "아버지 장군님(김정일)께서 창립 쉰 돌을 맞는 우리 대학에 오셨던 그날도 바로 12월이었습니다."

김정일에 얽힌 찬양성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가 다녀간 교정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순서.

김정일의 마지막 방문을 떠올리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참가자 전원이 돌연 숙연해진다.

<녹취> 고영해(김일성종합대학 교수) : "바로 이 날이 우리 장군님(김정일)께서 김일성 종합대학을 찾아주신 마지막 날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북한에서 신격화돼있는 김일성의 이름을 따오고 후계자 김정일이 다닌 학교.

그 시작은 분단 직후인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족 간부를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1946년 문을 연 김일성종합대학.

1948년, 일부 학부를 분리해 김책공업종합대학과 평양의학대학 등 여러 대학들을 신설했고, 현재는 철학부와 법학부 등 총 15개 학부로 운영되고 있다.

대남 정책을 이끈 김용순과 김양건, 그리고 김일성의 사위 장성택 등 북한의 파워엘리트 가운데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다.

또, 김정일과 여동생 김경희 외에도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경진과 김평일, 김영일 등 이른바 로열패밀리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갔다.

수령에 대한 충성만을 내세우며 동문회나 동향 모임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북한.

눈길을 끄는 것은 세계 유일의 김일성대 동문회가 서울에 있다는 점이다.

<인터뷰> 김광진(김일성대 동문회장(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 "서울에 우리 동문회가 있죠. 이제 세계적으로 아이러니하고 좀 웃음거리이기는 합니다만 북한의 현실이기 때문에... 서로 이제 가끔씩 얼굴 보고요. 맛있는 음식 찾아서 먹고, 다음에 서로 소식, 안부 이런 것들을 좀 나누고 그런 목적에서 활동하고 있고요."

김일성대 총장을 지낸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경제학과 출신인 조명철 전 의원 등 현재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은 3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세가 보장된 북한 최고 대학 출신들마저 탈북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인터뷰> 김광진(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 "엘리트 계층 탈북을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 현 체제에 대한 실망, 그것이 안받침 되지 않으면 떠나기가 힘들죠.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아 이건 안 되는, 잘못된 체제다 그런 바탕을 두고 왔다고 봅니다."

북한 최고의 대학이라지만 학문적 성취에 앞서 사실상 김일성 유일지도체제에 충직한 간부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이 같은 교육 목표는 북한의 교육 과정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

1950년, 5년제 의무교육을 시작한 북한.

이후 1975년부터 40년 가까이 유치원 1년,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 도합 11년의 의무교육을 시행했다.

그러다 김정은 집권 이후인 2012년 9월, 12년제 의무교육 개편을 단행한다.

4년이었던 소학교 교육 기간을 1년 연장해 5년으로 개편했고, 6년 과정이었던 중학교는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으로 나눴다.

<녹취> 김정은(7차 당대회 사업 총화 보고/지난 5월) : "국가적으로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 부문에 대한 투자를 체계적으로 늘리며 전사회적으로 교육 부문을 적극 도와주어야합니다."

달라진 교육 과정에 맞게 새 교과서를 배포하는 것으로 본격 시행된 12년제 의무교육.

김정은이 대대적인 교육제도 개편을 단행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해답은 북한이 새로 제작한 의무 교육 강령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에 이어 ‘김정은 혁명역사’가 정식 과목으로 신설된 게 눈에 띈다.

고급중학교 3년에 걸쳐 수업 시간은 81시간 정도지만, 혁명 역사 4과목을 모두 합치면 총 400시간이 훌쩍 넘는다.

북한 정규 교육 과정 가운데 무려 15% 비중을 차지하는 김 씨 일가의 혁명 역사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인터뷰> 조정아(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교육의 내용을 보면 김정은이 지도자로서 얼마나 뛰어난 어떤 성품과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예를 들어서 웃지 못 할 내용으로 세 살 때부터 총을 쐈고 몇 살 때는 아주 명사수가 되었다, 이런 내용부터 시작을 해서 최근에 미사일이라든지 핵 개발에 관한 업적들을 다루는 것까지 전부 포괄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타고난 천재다 3살부터 총쏘기를 했다, 3초 만에 총 10발을 명중시킨다...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이런 내용들을 북한 어린이들은 의무 교육의 첫 단계인 유치원 시절부터 배우게 된다.

<녹취> 북한 동요(김정은 원수님 명사수이지요) : "야~ 김정은 원수님 명사수야 명사수셔 목표마다 땅땅, 명중했다 땅땅"

37년 만에 단행된 학제 개편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본격적인 김정은 우상화인 것이다.

한 소녀의 일상을 통해 북한 사회의 민낯을 폭로한 다큐 영화 '태양아래'에도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녹취> 다큐 영화 ‘태양아래’ : "우리에게는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계십니다.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계시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네 승리합니다."

개편된 교육과정의 또 다른 특징은 토론식 수업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녹취> 정향순(소학교 교원) : "최근 연간에 12년제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새로운 교수 방법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5인조 수업 방법도 그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다."

토론식 수업을 강화해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겠다고 선전하고 있는 북한.

하지만 토론 주제를 살펴보면 토론식 수업 역시 사상 교육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인터뷰> 조정아(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특정한 사고방식을 그대로 주입하는 그런 교육이고, 그것이 사회 재생산, 사회를 유지시키고 재생산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는 그런 교육이기 때문에 그것 이외에 어떤 창의성을 발휘한다든지 좀 더 색다른 사고를 함으로서 그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는 그런 정치사상 교육이 굉장히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 북한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북한 사회가 처한 경제난, 그 자체다.

교과서와 학용품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건 물론이고 누구나 차별 없이 12년 의무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북한.

하지만 북한의 무상 공교육 체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탈북자들은 말한다.

<인터뷰> 강미진(데일리NK 기자(2010년 탈북) : "체제로만 보면 무상교육이지만 북한 내부 학생들 자체도 이제 12년제 의무 교육이 나왔을 때 불만이 그거였어요. 1년이라는 학년을 더 늘렸기 때문에 과제(부과금)를 더 받아내는 것 아니냐. 교구 비품이라든가 학교에다 내는 동원 비용, 그리고 교실 꾸리기 이런 것들도 다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면에서 보면 돈을 내고 공부하는 그런 자본주의 시스템보다 열악하지 않을까..."

북한 당국이 만성적인 재정난으로 학교 운영비와 교원 생계비를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일선 학교와 교사들이 학부모들에게 돈이나 물품을 걷기 시작하면서 무상교육이 사실상 사문화 된지 오래라는 것이다.

<인터뷰> 김OO(전 북한 중학교 교사/2008년 탈북) : "생활에 격차가 있잖아요. 학급 안에도 어려운 집 애들은 정말 힘들어요. 그러니까 학교를 안 보내는 부모들이 많아요. 학교에서 세(교육비) 부담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과외 지도 명목으로 돈이 오가면서 성적 조작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인터뷰> 김OO(전 북한 중학교 교사/2008년 탈북) : "월급 가지고는 절대 못 살아요. 그러면 교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학부모들 덕분에 살아가요. 그러면 나는 또 그만한 보상을 해주면 되거든요. 그 보상이 뭔가. 우리 기말고사라고 하죠. 기말고사 이런 데서 학생 성적이 떨어지면 내가 고쳐서 올려놔서 학생을 (대학에) 지원시킨다든가 이런 식으로. 북한 사회에서 그런 게 있어요, 성적 조작이."

교육 현장에 만연한 부정부패...

허울뿐인 무상 교육의 가장 큰 희생양은 학생들이다.

산나물 캐기와 고철 줍기, 토끼 기르기 등 학교 운영비 충당을 위한 갖가지 노동에 동원되는가하면, 당이 지시하는 노력 동원에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한다.

<인터뷰> 김OO(전 북한 중학교 교사/2008년 탈북) : "제일 많은 게 이번 함경북도 수해처럼 엄청난 수해가 발생했을 때 저희 지역 가면 이 철길 노반(철길 궤도를 지지하는 기반), 레일이 몽땅 흙에 덮여요. 학생들이 그 밑에서 그 다음부터 정확하게 침목과 침목 사이 흙을 파낸다든가 이렇게 하고 거기에 자갈을 채워 넣고 이렇게 그것들을 하는데 노력, 정확하게 노력 동원(이라고 하죠)."

지난 7월, 홍콩에서 열린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던 북한의 수학 영재가 망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앞길이 창창한 학생이 조국을 등지고 한국행을 택한 이유에 대해, 국가가 정해놓은 삶이 아닌 좀 더 자유로운 미래를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인터뷰> 김광진(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 "북한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고 재원도 제한돼있습니다. 하니까 국가를 이끌고 나가고 특히나 사이버테러라고 할지 핵물리학 개발이라고 할지 그런 쪽에 나라가 국가가 재원을 집중해서 선택해서 양성하고 키우는 거죠. 개인들 수요에 의한 교육이 아니고 그야말로 시장의 수요에 의한 교육이 아니고, 국가의 필요에 의한 교육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12년 의무교육은 물론이고 최고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조차 ‘수령에 충성하고 당에 복종하는 인민 양성‘에 방점이 찍혀 있는 북한의 교육 현실.

독재정권 유지라는 목적을 버리지 않는 한 자유롭고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통한 국가 발전이라는 목표는 요원해 보인다.

[클로즈업 북한] 어린이 지상 낙원?…북한 아동 인권 실태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클로즈업 북한] 어린이 지상 낙원?…북한 아동 인권 실태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클로즈업 북한] 어린이 지상 낙원?…북한 아동 인권 실태
입력 2016.06.04 (08:08) | 수정 2016.06.04 (23:03)남북의창| VIEW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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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세상에 부럼 없어라' 세상에서 어린이들을 가장 잘 돌본다며 북한이 내세우는 선전 구호입니다.

북한은 지난 1일에도 우리의 어린이날에 해당하는 국제 아동절을 맞아 다시 한번 북한이야말로 어린이들의 지상 낙원이라며 떠들썩하게 행사를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대다수 북한 어린이들의 삶이 그렇게 행복할까요?

<클로즈업 북한> 오늘은 겉으로 내세우는 선전과 달리, 강제 노역과 체제 선전에 내몰리는 북한 어린이들의 인권 실태를 짚어보겠습니다.

<리포트>

지난 1일, 우리의 서울대공원에 해당하는 평양 대성산 유원지.

수백 명의 북한 어린이들이 모여 곳곳에서 줄다리기와 씨름 등민속놀이를 하고 있다.

달리기, 자전거 경주 등 다양한 체육활동도 이어진다.

<녹취> 북한 어린이 : “나는 방금 공 안고 달리기를 했습니다. 공 안고 달리기는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북한의 어린이날인 ‘국제아동절’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날 행사에는 평양 주재 외국인 가족들과 해외 동포들도 초대됐다.

<녹취> 조선중앙TV(지난 1일) : "어머니당의 뜨거운 은정이 온 나라에 차 넘치는 속에 6.1 국제아동절 예순여섯돌 기념 친선련환모임이 1일 대성산 유원지에서 진행됐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어린이날인 ‘국제아동절’.

북한도 해마다 6월 1일, 국제아동절이 되면 이렇게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한다.

아동절 행사는 평양은 물론 북한 전역의 유치원과 탁아소 등에서도 열린다.

북한매체들 역시 각지에서 열린 다양한 행사 소식과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내며 아동절 분위기 띄우기에 나섰다.

특히, 북한TV는 외국인까지 내세우며 북한의 어린이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녹취> 아동절 특집물 ‘모성의 눈으로 본 조선’ : “이 세상 어머니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그 사랑의 세계를 현실로 펼친 조선은 명실공히 아이들의 왕국이다.“

집권 이후 김정은은 이른바 ‘후대 사랑’을 내세우며 할아버지 따라하기에도 어린이들을 활용했다.

<녹취> 북한 기록영화 ‘어머니당의 품’ : “우리 어린이들을 이 세상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시는 경애하는 원수님께...”

김정은을 보며 열광하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집중 부각시키고, 야영소와 스키장 등 새로 지은 위락시설 역시 모두 아동과 청소년을 우선하는 김정은의 치적이라며 치켜세웠다.

<녹취> 북한 기록영화 ‘어머니당의 품’ : “자라나는 새 세대를 위해서는 천만금도 아끼지 않는다고 우리가 후대들을 위해 바치는 노력은 먼 훗날 그들이 건설하게 될 조국의 면모를 좌우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녹취> 북한 노래 ‘세상에 부럼 없어라’ : “우리는 모두 다 친형제 세상에 부럼 없어라...”

‘걸작 사회주의 주제가’라며 북한 정권이 올해 상까지 준 노래다.

북한은 그동안 ‘세상에 부럼 없어라’라는 구호까지 만들어가며 북한이 어린이들의 천국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해왔다.

과연, 실상은 어떨까?

뙤약볕이 내리쬐는 철길 위에 아이들이 쭈그리고 앉아 쉴 새 없이 망치질을 해댄다.

돌을 깨서 철길에 깔 자갈을 만드는 ‘철길 보수 공사’에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된 것이다.

바로 옆 선로에 기차가 지나가는 아찔한 상황에도 선생님으로 보이는 남성은 감시에만 열을 올린다.

<녹취> 북한 남성 : “야, 여기 애들 다 어디 갔어?”

지난해 여름, 북중 접경 지역에서 촬영된 이 영상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북한 소학교 학생들이다.

산을 깎아 도로를 넓히는 작업이 한창인 또 다른 공사현장.

돌짐을 나르며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어린 아이의 모습도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앳돼 보이는 소년들이 고된 탄광 노동에 동원된 모습이 북한 매체의 화면에 포착되기도 했다.

세상에 부럼 없다는 북한 당국의 선전과 달리, 실상은 정반대로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북한 어린이들이 처한 현실인 것이다.

모내기나 가을걷이철에는 한 달 동안 학교 수업도 중단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된다고 한다.

<인터뷰> 이미연(교사 출신 탈북민) : "북한에서는 소학교 3학년 말하자면 한 11살 정도 그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부터 애들에게 노동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오전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는 일하러 가야 되죠. 그래서 북한 학생들이 보통 일을 하는 부분은 건설 현장이나, 그리고 농사하는 농업 현장에 많이 동원이 되거든요. 애들이 거의 보통 보게 되면 평균 10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는 거죠."

안전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사고 위험도 큰 상황.

그렇다보니, 북한의 부모들이 자식을 노동현장에 보내지 않기 위해 교사에게 뇌물을 받치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인터뷰> 이미연(교사 출신 탈북민) :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런 집안 같은 경우에는 해당 학교 교장 선생님이나 아니면 학교 내지는 교사 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내지는 공식적으로 뇌물을 줍니다. 우리 아이를 1년동안이면 1년동안 졸업할 때까지 이런 건설 현장에서 모두 빼주세요. 대신 빼준 것만큼의 경제적 이익을 학교에다가 드리겠습니다. 경제적인 여건이 센 부모님들은 이런 식으로 하고요."

지난 달 열린 북한의 7차 당대회.

김정은의 대관식이었던 이 행사의 마지막 날 소년단원들이 축하문 낭독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녹취> 조선소년단 축하단 : "원수님 주신 멋진 책을 펼치며 마음껏 배우며 뛰노는 우린 이 세상 가장 복 받은 세대 세상에 부럼 없어라!"

앳된 학생들이 김정은 앞에서 무려 4천자가 넘는 찬양 글을 한 목소리로 외워 읊는 모습은 전율마저 일으킨다.

이렇게 김정은 우상화와 체제 선전에 어린이를 내세우는 건 북한에선 흔한 일이다.

지난 2013년, 10만 여명이 동원된 대규모 집단체조 공연.

기계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체조 공연을 펼치는 어린이 공연단 뒤로 배경대를 가득채운 학생들이 펼치는 카드섹션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인다.

대규모 정치행사와 체제 선전에 수시로 어린이를 동원하는 북한.

어린이들이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을 습득하기 위해, 하루 열 시간 이상 진행되는 혹독한 연습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인터뷰> 이미연(교사 출신 탈북민) : “6살짜리를 줄을 곧게 맞추고 동작이 똑같고 이런 것을 연습하자고 하면요. 그만큼의 정신적인, 육체적인 강한 트레이닝이 들어가는 거죠. 애들이 그런 측면에서 정말 혹사가 많이 되는 거죠. 하루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이렇게 하게 되면 정말 짜증 지수가 사람 인간의 평정심을 잃을 정도의 짜증 지수가 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을 하다가 정신을 잃는 이런 학생들도 있고요.”

무엇보다, 북한 어린이 인권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역시 먹는 문제다.

지난 2014년 유니세프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5살 미만의 북한 어린이 28%가 영양실조로 인한 발육저하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어린이들 상당수가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북한 아동절을 경제 위기를 숨기고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행사라고 평가한다.

<인터뷰> 윤여상(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 : "어린이를 왕으로 생각하고 그런 식의 여러 가지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북한의 가정폭력도 굉장히 심각하고요. 아이들에 대한 강제노동도 심각하고 실제 교육에 대한 투자는 국가 단위에서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거든요. 실제는 작동되지 않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나 외부 세계에는 그런 것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공산주의 국가 특징이기도 하고 북한이 그런 측면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하나의 방법인거죠."

북한 당국 역시 국제사회의 따가운 비판을 의식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왔다.

지난 1990년에 이미 아동권리협약에 가입했던 북한은, 이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아동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북한 아동들의 진짜 실상은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형식적인 내용에 불과하단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인터뷰> 윤여상(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 : “아이들에게 하루 300g의 식량을 배급하게 되어 있고 아이들에게 학습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제공하도록 되어 있고 학교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국가가 제공하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로 국가가 모든 걸 제공하고 있느냐 전혀 다르거든요. 이런 실제적인 상황은 보고서 내용에 거의 포함시키지 않고 제도 중심에, 제도가 이렇게 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었다 이렇게 좀 더 강조해라 이런 식으로 지금 보고서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신뢰성은 국제사회에서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거죠.”

북한의 아이들이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열악한 현실이 계속된다면, 통일 이후 한반도 미래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인터뷰> 윤여상(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 : “통일이 되는 상황을 맞게 되면 지금의 아이들이 통일 세대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북한 아이들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제대로 발육되지 않으면 통일 다음에 우리 민족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가질수 있기 때문에 특히 북한의 아이든 남한의 아이든어린 아이로서의 제대로 된 지원과 제대로 된 보호가 함께 이뤄져야 하는거죠.”

지난 4월, 우리의 초등학교인 북한의 소학교 입학식 모습이다.

교사의 인솔에 따라 김일성 동상을 참배하는 것으로 어린이들은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어린이 지상 낙원’이라는 선전 속에 실상은 강제노역과 체제 선전에 내몰리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

이들의 인권 보호와 생활 개선을 위한 북한 당국의 각성과 태도 변화 그리고 국제 사회의 관심이 절실하다.

[요즘 북한은] 잔혹한 ‘공포 정치’…군 2인자도 숙청 외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요즘 북한은] 잔혹한 ‘공포 정치’…군 2인자도 숙청 외 > 남북의창 > 정치 > 뉴스 | KBSNEWS



잔혹한 ‘공포 정치’…군 2인자도 숙청 외
입력 2015.05.16 (08:03) | 수정 2015.05.16 (13:23)남북의창| VIEW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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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의 최근 소식 알아보는 ‘요즘 북한은’ 입니다.

잔혹한 처형 방식이 동원된 김정은 제1위원장의 공포정치가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번엔 북한 군부의 2인자인 현영철 인민무력부장과 최측근 인사들이 대거 숙청됐는데요.

이유를 보면 더 잔인합니다.

<리포트>

지난 1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참관 아래 대규모로 진행된 북한군의 도하 훈련입니다.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함께 장갑차 위에 올라 최일선에서 작전을 지휘한 이 사람, 올해 66살의 군부 2인자,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입니다.

<녹취> 지난 1월 조선중앙TV : "인민무력부장인 현영철 육군 대장이 선두 장갑차와 자행포(자주포)에서 도하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현영철 부장은 지난달만 해도 북한 특사로 러시아를 찾는 등 건재를 과시해왔는데요.

<녹취> 현영철(지난달 17일/모스크바/북한 인민무력부장) :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의 두리에 철통같이 뭉쳐 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력을 백방으로 다져 나갈 것이며..."

갑자기 숙청된 이유, 지난달 24일 열렸다는 북한군 ‘훈련일꾼대회’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꼿꼿하게 앉아있는 다른 간부들과 달리 유독 현영철만 지그시 눈을 감고 졸고 있는 모습인데요.

며칠 뒤 모란봉악단 축하 공연에도 참석했던 현영철은 결국 지난달 말 ‘훈련일꾼대회’ 참가자들의 기념사진 촬영장에서는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녹취> 지난 1일 조선중앙TV : "황병서 동지, 리영길 동지, 박영식 동지, 렴철성 동지..."

평소 김정은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고, 김정은 바로 앞에서 조는 이른바 불경과 불충이 숙청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소식입니다.

장성택 때와 달리 재판과정도 생략하고, 군 고위간부 수백 명 앞에서 대공화기인 고사총으로 처형됐다는 첩보도 있는데요.

김정은의 금고지기로 평가받아온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변인선 작전국장, 마원춘 설계국장 등 최근 들어 부쩍 힘을 과시해온 최측근 3명도 숙청의 회오리를 피해가진 못했습니다.

북한의 처형에는 고사총 같은 대공화기는 물론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돼 갈수록 잔혹해지고 있는데요.

힘으로 충성을 강요하는 이런 공포 정치는 오히려 내부 반발을 불러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입니다.

외신에 비친 북한 교육 현장

<앵커 멘트>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 들어간 미국의 CNN 취재진이 이번엔 북한의 교육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외신의 눈에 비친 북한의 학교, 학생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리포트>

줄맞춰 등교하던 어린 학생들이 카메라를 보자 해맑게 인사를 합니다.

CNN 취재진이 찾은 곳은 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평양의 한 소학교.

<녹취> 윌 리플리(CNN 취재기자) : "북한의 모든 교실에는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숨진 두 지도자(김일성, 김정일)의 똑같은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한 여학생은 의미심장한 답변을 내놓는데요.

<녹취> 북한 초등학생 :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을 온 세상에 자랑하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야외에서조차 하나가 돼 움직이는 학생들의 모습도 외신의 눈길을 끕니다.

<녹취> 윌 리플리(CNN 취재기자) : "북한의 교육 체계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고, 무엇보다 최고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헌신적인 시민을 양성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어 취재진이 찾은 곳은 북한의 최고 수재들만 모인다는 김일성종합대학, 요즘 부쩍 강조되는 과학기술분야 교육 상황과 함께 북한 무상 교육 체계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녹취> 유예지(김일성종합대학 학생) : "(대학 등록금은 얼마인가요?) 등록금은 전혀 없습니다. (모두 공짜란 말이죠?) 예. 모두 공짜예요. 모든 학생은 무료로 공부해요. 우린 등록금이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이 여대생은 그러나 SNS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말문이 막힙니다.

<녹취> 유예지(김일성종합대학 학생) : "(페이스북 사용한 적 있어요?) 페이스북요? 그게 뭐죠? (페이스북에 대해 못 들어 봤어요?) 네."

학교 수업은 물론 승마나 수영, 축구 등 다양한 실기 수업 현장을 공개한 북한.

하지만 외신은, 이런 엘리트 교육이 실제론 일부 고위 관리 자녀 등에 국한돼있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요즘 북한은’이었습니다.

2017/01/14

퇴계 와 율곡 사상 비교

퇴계 와 율곡 사상 비교



퇴계 와 율곡 사상 비교 |

원두막 2012.12.09

http://blog.daum.net/wonduho/1178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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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퇴계의 사상



2.1 聖學十圖

퇴계가 어린선조가 임금에 등극하자 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을 10개의 그림으로 구성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성학십도는 소학과 대학을 중심으로 위로는 그 우주론적 근거와 기준을 탐구하고 아래로는 가치의 본원을 밝히고 체득하며 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주와 인간의 참모습,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추구해야할 바른 삶의 방향에 대한 최선의 지식을 자각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있고 특히 心統性情圖에 퇴계사상의 핵심이 들어있다



2.2 사단칠정론쟁

四端은 맹자의 측은지심은 인지단(仁之端), 수오지심은 의지단(義之端), 사양지심은 예지단(禮之端), 시비지심은 지지단(智之端)이라고 한 仁義禮智 端을 모아서 사단이라고 하며,



칠정이란 예기에 나오는 사람이 갖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 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이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주장을 사칠론이라고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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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것은 사람의 견해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며 조선시대의 성리학에 있어서 오랫동안

논쟁 대상이 되었다.(기대승과의 논쟁)



2.3 이기론

理氣論은 조선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자연의 존재법칙을 연구하는 우주론의 하나이다.

이기론은 사칠론과 얽히어 조선시대 유교계에 있어서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四端은 理에 發하므로 순선(純善)이요, 七情은 氣를 겸하였으므로 선악(善惡)이 있다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가 주가 되므로 사단은 이의 발이라 말하고, 칠정에도 이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기의 발이라 한다고 하여 理氣二元論을 취하고 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며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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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율곡의 사상



율곡은 한국 도학사상의 정맥을 계승하여 通儒로서 유교의 고전과 송대 선현들의 학술을 깊이 이해하고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다



4.1 理氣之妙

理와 氣는 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 무릇 리의 근원도 하나이며 기의 근원도 하나이다 (氣發理乘 : 운동하는 것은 氣요,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으면서 기의 운동 원인이 되는 것은 理다.) 율곡은 理氣一途說로써 理發을 부정하고 氣發理乘만을 관철하였으며,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 퇴계의 이른바 이발·기발이란 두 묘맥(苗脈)을 부정하고 기발의 한 묘맥만을 인정하였다. 율곡은 선배인 퇴계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율곡은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本然之理를 順한다면 기가 본시 本然之氣이다.”라고 하고 퇴계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二端)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4.2 人心道心說

인심은 본능적 욕구이고 도심은 도덕적인 순수의욕이다.

퇴계는 인심과 도심을 이기론으로 설명하면서 도심은 사단, 인심은 칠정으로 규정했으나 율곡은 인심과 도심은 사단이 칠정에 내포되므로 사.칠이 하나의 情인것과는 달리 서로 대립



적인 두 개의 마음으로 보고 인심과 도심은 다같이 理라고 하는 하나의 원천에서 흘러나와

두가지 마음이 된 것이다 (源一而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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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율곡은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氣質之性 은 理와 氣의 합이며 인심은 氣의 가린 바이나 도심은 氣가 가리지 않는 것이고 意는 마음이 발한 것을 헤아려 생각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또 정치사상에서는 민본 덕치주의를 강조하여 왕도정치가 실현되어 요순시대가

재실현되기를 바랐으며 정치에는 때를 아는 것이 귀하고,일에는 참을 힘쓰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국방력의 강화와 (10만 양병설을 주장) 정치의 주체는 국민이므로 民意에 의한 정치와 언로가 열리느냐, 닫히느냐에 국가의 흥망이 달려있다며 言路의 개방을 강조했다

경제사상 측면에서 애민정신으로 인간 생명 중시하였으며 養民 연후에 敎民으로 보았고

생산장려, 국부증대. 분배의 형평. 절약, 검소의 소비윤리를 강조하고 사창(社倉)제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오늘날 정치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경제에 있어서 의리와 실리가 조화 를 이루는 경제 윤리를 제시하여 이익에만 치우치는 경제를 경고하고 있다.

저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경연일기' '동호문답' 등이 있다.





5.맺음말



퇴계는 스스로 도산서원을 창설,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의 단암서원, 괴산의 화암서원,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은 내적으로 반드시 인륜에 바탕을 둔 덕성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에 밝고 경제에 밝은 부강을 겸비하여야 한다고 여기고 당시의 피폐한 현실은 역사적으로 경장기에 해당한다고 하여 국방력의 강화,경제 부강,사회정의의 확립등을 주장하면서 우리가 실리를 주장하다보면 의리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구하면 실리를 망각하기 쉽다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퇴계의 理發, 율곡의 氣發이란 상반되는 견해는 다음 主理派와 主氣派의 양대 진영으로 갈리어, 유교계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계속하였고 퇴계를 지지하는 주리파는 영남지방에서,

율곡을 지지하는 주기파는 경기·호남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므로 각기 영남학파·기호학파라고도 일컬어졌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퇴계,율곡을 정점으로 하는 전성기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空疎한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사회적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는 의리사상 및 실학사상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2016/11/09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 매김과 현대적 의미

 - 박 재 순 -(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다석 류영모의 깊고 맑은 삶과 정신과 사상은 오늘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며 빛나고 있다.  다석은 씨 함석헌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씨사상의 밑자리를 놓은 분이다. 함석헌의 씨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류영모의 정신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류영모 사상을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한국적 주체철학, 동서사상의 만남과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자리 매김을 하고 오늘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1.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그 동안 묻혀 있던 류영모의 삶과 사상이 지난 10 여 년 전부터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리 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기상 교수는 류영모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류영모의 사상이 이성, 존재, 인간 중심의 서구사상에 근본적인 도전과 대안이 됨을 밝혔다. “서양 사유의 잘못된 방향정립과 존재자에 대한 탐닉을 바로 잡기 위해서 다석 류영모 선생은 한 마디로 빛을 끄라고, ‘태양을 꺼라!’라고 외친다. 이것은 존재 중심의 철학, 빛의 형이상학에 대한 최대의 도전적 도발이며, 인간 중심의 철학, 의지의 해석학에 대한 방향전환 요구이며, 물질중심의 과학, 욕망의 주체학에 대한 강한 반성의 촉구이다.”1)

  다석은 물질(色界)과 이성의 빛보다 허공과 영의 어둠을 추구했다. 1922년에 이미 우주세계에는 빛보다 어둠이 더 크고 근원적임을 갈파했다. “우주는 호대한 암흑이다. 태양이 엄청나게 크다지만 이 우주의 어둠을 쫓아보았는가?”2) “광명은 허영이요, 이 허영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 우주의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3)

  어둠에 대한 다석의 통찰은 래리 라스무센이 1995년에 생명신학과 생명윤리의 새로운 상징으로 어둠을 제시한 것보다 70년 이상 앞선 통찰이었다. 또한 한=환(환하고 밝음), 백(白: 밝음), 배달(밝은 땅)에서 보듯이 밝음을 추구한 한국민족문화를 최남선이 ‘한밝문명론’으로 제시한 것4)을 뒤집고 삶과 존재의 깊이를 추구한 것이다.

  다석에게 어둠은 욕망을 자극하는 물질의 빛, 존재와 관념을 분별하는 이성의 빛이 닿지 않는 세계이고 차원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고 없음(無)과 빔(空)의 세계이다. ‘하나’는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깜깜한 세계이고 우주의 허공이 그렇듯이 없음과 빔은 물질과 이성의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깜깜한 단일허공(單一虛空)이다. 허공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물건과 물건 사이, 집과 집 사이, 세포와 세포 사이...원자와 원자 사이...이 모든 것의 간격은 허공의 일부이다. 허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5)

  어두운 허공을 존재의 바탕으로 보았던 류영모는 “어둠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유일한 자신의 사명”6)으로 알았다. 물질과 이성의 빛을 넘어서 어둠, 한(하나), 공허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려 했던 다석은 이성과 기술의 빛,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사유의 틀과 논리, 물질적 존재의 힘과 현실에 집착한 서구사상에 큰 도전을 줄 뿐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 바탕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새로운 사유와 삶의 길을 제시했다. 다석은 세속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길을 갔고 가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수도의 길을 열었고, 나라와 겨레의 역사 속에서 한얼나라, 하늘나라를 이루려 했다. 또한 그는 생각과 말이 끊어진 어둠과 하나와 공허의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생각과 말과 한글로 진리체험을 표현하려 힘씀으로써 깊고 독창적인 많은 생각과 글을 남겼다. 이로써 다석은 불립문자의 세계에 매몰된 선승들과도 다르고, 논리와 개념에 집착한 서구철학자들과도 다른 사상의 경지를 열었다.



  2. 한국적 주체철학



  류영모는 서구의 언어와 개념을 번역한 말과 글이 아니라 우리말과 글로 사유한 사상가이며, 삶과 생각을 통전시킨 생활철학자이고, 민족의 얼과 정신을 세우는 민족주체철학자였다. 그가 우주와 공허를 말한 것도 매임 없이 곧게 서려는 것이었다. 매임 없이 곧게 서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하나님과 하나로 되어야 세상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매임 없이 자유롭고 곧게 서는 주체철학이다.



  1) 신선처럼 자유롭게



  함석헌은 한민족의 종교문화의 근본줄기를 신선사상으로 보았다.7) 세상의 이해관계와 다툼에서 벗어나 자연생명세계와 하나로 녹아드는 신선사상은 자연친화적이고 종교적이며 평화적인 사상이다.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인 신선사상이 한국인의 예술과 생활 속에 깊이 배어 있다. 물과 바람에 어울리며 삶과 생각을 키우고, 기교와 과장 없는 단순 소박한 도자기, 사람과 자연이 함께 녹아든 그림, 풍수지리에 어울리는 집과 정원에서 신선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류영모는 치열하게 생각하고 파고드는 진리탐구자이면서 초탈한 신선의 모습을 보였다. 민족사학자 문일평이 일제 때 류영모의 집을 다녀가서 지은 한시에 류영모의 집과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둘러싸인 골에 산장을 찾으니 푸른 뫼 속에 집 한 채 서 있고 물 구름 함께 어울려 한 고향이라 숲 속에 꽃은 다시 아름다워라 계곡에 시냇물은 오히려 서늘하고 약초 캐러 다니느라 어둑한 지름길을 뚫었다 씨 소나무는 외딴 집을 둘러 지키고 집 부엌에는 맛좋은 먹거리가 그득하니 상위에는 우유 토마토의 향기로다.”8)

  류영모는 자신의 사는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의식(衣食) 않은 것 우리 집 자랑이요 명리(名利)를 웃 보는 게 내 버릇인데 아직껏 바람 물 줄여 씀이 죄받는 듯 하여라.”9)검소하게 먹고 입으며 명예와 이익을 우습게 여기는 류영모는 바람과 물을 아껴 쓰면서도 바람과 물을 쓰는 것이 “죄받는 듯 하여라”고 했다. 자연 속에서 초탈한 삶을 살면서도 자연을 아끼는 다석의 겸허하고 정성스런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나는 1975년 무렵 류영모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80대 후반의 류영모는 신선처럼 보였다. 머리털과 눈썹은 눈처럼 희고 분을 바른 듯 하얀 얼굴에는 붉은 복숭아 빛이 가득했고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빨갰다. 하루 한끼 먹고 육욕을 버리고 온 종일 무릎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기 때문에 신선의 몸이 된 듯 했다.

  다석은 “脊柱는 律呂10),  거믄고”(다석일지. 1955, 4.27)라고 했다. 다석은 척주를 율려라고 함으로써 몸을 삶의 기본음(基本音)으로 보고 을 거문고라고 함으로써 맘을 악기로 보았다. 몸과 마음의 예술적 일치를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척주로 보고 척주가 곧고 바르게 조율이 될 때 마음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11)

  다석은 생명과 영을 예술로 보았다. 법과 도덕, 제도와 풍습만으로는 삶과 영이 완성될 수 없다. 예술의 차원과 경지가 있어야 삶은 완성되고 구원된다. “인생은 피리와 같다...피리를 부는 이는 신이다.”12)

  일상의 삶을 영과 예술로 높인 류영모의 삶은 신선의 삶이고 그것을 추구한 그의 사상은 ‘걸림 없는 옹근 삶’(圓融無碍)을 추구한 한국의 고유한 신선사상이다. 그는 신선처럼 욕심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2) 씨 사상: 민주사상



  15세에 기독교신앙에 입문하고 20세 때 오산학교 교사로서 류영모는 남강과 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오산을 기독교 학교로 만들었다. 20세에 노자와 불경을 읽고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에 심취했다. 톨스토이를 통해 19세기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으로서 농사꾼이 되려 했고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예수나 바울처럼 민중적 대중적 사유를 한 것 같지 않다. 예수는 엄격한 금욕이나 높은 도덕수준을 요구하지 않고 서민대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다. 바울도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복음적 가르침을 폄으로써 일반대중에게 기독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엘리트적 이성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의 흔적이 톨스토이에게 있다고 보고 이런 경향이 영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금욕적이고 엄격한 다석에게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씨로서 참되게 살려고 했던 다석의 삶과 생각을 움직이는 기본원리는 씨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 놓는 민주주의이다. 삶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구도자적 헌신이 그를 씨의 삶과 사상에로 이끌었다. 죽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 톨스토이, 동양사상은 정통신앙에서 벗어나게 했고 구도자적인 신앙의 길로 가게 했다. 동경에서 예과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귀국했다. 조선왕조는 남에게 일시키고 놀고먹으며 족보 자랑하는 양반도덕으로 망했다고 보았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 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 민비 사상입니다.” 그는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농부”13)를 이상으로 알았다. 일하며 섬기는 삶을 추구했다. 다석은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짐을 지는 어린양”14)이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貴人, 閑士들의 贖垢主”15)라고 했다. 다석은 풀뿌리 민주주의자다. 노동자 농민을 오늘의 예수로 보는 다석의 사상적 통찰이 씨사상과 민중신학의 기본바탕이 되었다.



  3) 민족 주체사상



  다석은 민족정신사의 중심에 서 있다.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을 스승으로 함석헌을 제자로 사귀었다.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가까이 했고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와 사귀었다. 최남선과는 경성학교 동기생으로 가까이 지냈다. 최남선은 일제말기에 변절했지만 민족문화사상에 대한 그의 연구는 빼어난 통찰과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모두 민족적 주체적 근대문화정신을 추구했다. 다석은 서구의 민주정신과 과학정신,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양적 한국적 사상과 영성을 추구했다. 기독교 신앙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과 철학사상에 회통하는 신앙과 사상의 세계를 열었다.

  다석은 생각한 대로 실천했기에 정인보는 그를 ‘조선에서 두려운 인물’이라 했다고 한다. 20세 때부터 냉수마찰을 했다. 추운 겨울에도 머리에 찬물을 붇고 냉수마찰을 했다. 32세때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실의 의자 등받이를 자르고 평상 위에서 무릎 꿇고 사무를 보았다. 몸과 마음을 곧게 가지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삶을 살았다. 중국과 일본에 굴복한 정치문화의 살림살이, 사대적 굴종을 거부하고 스스로 곧게 서는 삶을 살았다.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남을 나무라고 내몰아서 여기에 나라를 세우려 한다.“ 다석은 한국을 등걸(단군)이 하늘 열어 세운 나라로 여겼고 등걸을 ”머리 웋인 님 우리님금“(머리에 웋[하나님]을 인 님 우리 님금)18)이라고 했다.

  다석은 한글, 등걸의 정신과 사상을 기독교 신앙과 결합시켰다. 다석은 세종 임금이 내 놓은 바른 소리인 우리글의 모음의 기본인 ㅡ ㅣ 를 예수와 직결시킨다.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ㅡ ㅣ 를 나타낸 나무이다. 그리고 다석은 십자가를 나무뿌리, 나무등걸을 나타내는 등걸(檀君)님과 연결시킨다. ㅡ ㅣ 를 십자가와 연관시키고 십자가를 다시 한겨레의 뿌리인 단군과 연관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석의 상상력이다. 다석의 이런 풀이는 엉뚱한 말놀이가 아니라 한글의 기본모음에 대한 의미깊은 해석으로 여겨진다.19)

  한글의 기본모음은 ㅡ ㅣ 는 예수의 십자가 나무 막대기를 나타내고 (하늘)와 ㅡ(땅)을 잇는 나무 막대기 ㅣ(정신)는 겨레의 뿌리인 단군, 다시 말해 나무 등걸과 ‘둥글’ 나무(朴)를 나타낸다. 막대기는 세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십자가와 겨레의 얼과 뿌리를 나타낸다. 한글의 모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는 ‘아가야 어서 오너라, 위(하느님 아버지께로)’의 뜻이다. 이것을 줄여서 ‘오으이’로 나타낸다.20) 그는 한글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곧게 위로 올라간 이다. 하나의 세계, 절대불멸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고디’(直)뿐이다.21) 고디 독립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태양을 사모한다.22) 다석은 “몸은 활이고 고디 정신은 화살”이라고 했다. 몸이란 활에다 곧은 막대 같은 정신을 화살로 끼워 쏘아 하나님 나라에 똑바로 맞혀야 한다.23) 1956년 1월 21일에 쓴 ‘그리온’이란 글에서 다석은 “그리온 걸 그리우고 드디어 오른이 누구리? 무리여. 거룩할 우리 고디!”라고 했는데 김흥호는 “오른이...고디!”를 그리스도라 보았다. 김흥호에 따르면 다석은 기독교를 貞敎로 보았다.24) 성서는 엄한 죄의식과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성서는 다른 모든 종교를 앞지른다. 거룩과 의는 곧음을 뜻한다.

  단군은 우리의 나라님이시다. 단군은 우리 말 둥글(朴) 등걸(璞)을 사음한 것이다. 단군은 우리 겨레의 뿌리(등걸) 되시는 원만하신 둥근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도, ‘두루 이치가 통하는’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이념도 둥글고 원만한 정신을 나타낸다.25) 다석은 단군을 나무등걸 나무뿌리로 보고 나무의 둥글고(朴) 소박한 ‘자연’과 연결함으로써 한국정신의 자연친화적 성격을 밝혔다. 곧고 꼿꼿한 나무 막대기, 고디가 자연친화적인 원융합일, 묘합의 한국정신과 만나고 있다.

  다석은 하나님을 고디로 보기도 하고 동글암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속성은 고디다. 의롭고 바른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원만이다. 은 유와 무, 없음과 있음을 아우르는 동글암, 원만이다. 곧은 막대기인 사람은 “없시계신 동글암”에로 돌아간다.26)

한국의 종교예술문화에서도 자연친화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다석의 사상에서 곧고 진취적인 기독교서구정신과 둥글고 원만한 한국아시아정신이 아름답게 결합되었다. 깊은 죄의식, 믿음만! 은혜만!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을 말하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타협 없는 곧음을 지닌 종교이다.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 하늘, 나무 등걸의 동글암, 원만을 품고 있다. 다석의 삶과 정신 속에서 등걸과 그리스도가 만나고 있다. 둥근 등걸과 곧은 그리스도가 만남으로써 한국은 곧게 선 나라가 될 수 있다.





  3. 동서사상의 만남과 종합



  다석은 조선왕조가 몰락해가고 서구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인 1890년에 태어났다. 이 때는 가톨릭 전교 100년이 지나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특히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고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평생 하늘의 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옥상에 망원경을 만들어 놓고 별들을 관찰했다. 동경에서 예과인 물리학교를 마쳤다. 한학의 대가로서 서구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았다.

  믿음의 진리와 씨의 삶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던 류영모는 낡은 이념과 종교의 틀을 깨고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에 두루 통하는 삶과 생각에 이르렀다.



  1) 동서의 융합



  서구문명과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에 나서 살았던 류영모는 서구의 정신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은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창조적 결합이다. 첫째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 한국적 정신으로 풀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한국사상, 한국적 기독교사상이다. 예수와 민족혼의 만남이고 성경과 동양사상의 결합이다. 하나님을 향한 솟아오르고,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성서의 사상이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공(空)의 세계를 추구한 동양사상과 결합되었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프로이트는 인간이성이 주도하는 의식보다 욕구가 주도하는 무의식이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의식에서 리비도(육욕)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봄으로써 인간내면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내고 성의 해방을 가져왔다. 류영모도 의식보다 무의식, 밝음보다 어두움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규정한다고 보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내면의 심층세계를 탐구하고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통한다. 다석도 식욕과 육욕이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식색(食色)을 끊고 육욕에서 자유로워져서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성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 정면 도전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심리학자와 내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육욕을 끊고 자유로운 영적 세계, 초자아의 자유와 해방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을 성욕(性慾)으로 번역한 것을 어이없는 짓으로 못 마땅해 했다. 性은 인간의 본성, 바탈로서 하늘, 하나님과 통하는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을 육욕에다 붙이냐는 것이다. 또 ‘미성년자 불가’라 해 놓고 어른들이 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라 했다. 미성년자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면 어른들은 더욱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서구의 이성적 도덕적 사유와 기독교 인생관에 맞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선과 악의 피안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긍정하며 원초적 생명의지에 따라 아무 속박이나 매임 없이 살 것을 추구했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밖에서 ‘나’를 규제하고 지배할 존재가 없어졌다는 뜻이고 이성과 도덕의 규정과 질서를 거부한 것은 하늘과 땅, 동서남북의 좌표와 규정을 폐지하고 ‘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있다. ‘나’를 규제할 것은 없다. 지금 여기의 나가 중심이고 주체이다. 원초적 생명의 힘을 추구했다.

  류영모도 근원적 생명기운(元氣)에로 돌아가려 하고 살고 죽고 선하고 악하고 높고 낮고의 규정과 차이를 넘어서서 있는 것은 ‘이제, 여기’의 ‘나’뿐이라고 한 것은 니체의 생각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하고 空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존재를 보고, ‘나’를 중심에 놓은 것도 니체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본능적 생명력을 넘어서 육욕의 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하려 하고 타자와의 근원적 일치, 타자를 섬기는 사랑을 강조한 것은 니체와 다르다. 타자와의 화해와 일치, 서로 살리고 돌보는 생태학적 원리를 추구한 류영모는 원초적 본능적 생명력, 신화적 힘을 추구한 니체와는 다르다. 니체는 서구의 비윤리적 생명력, 정복자적이고 전투적인 생명력 사상과 통한다. 자아와 타자(자연과 타인)의 갈등과 대립을 전제한 서구철학에서는 생명력에 대한 열광과 허무주의와 불안이 공존한다. 자연친화적이고 타자와의 공생을 추구한 동양사상에서는 허무와 불안이 나타나지 않는다.



  2) 다석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성격



  (1) 타자와의 공생과 상생을 이루는 생태학적 사고이다. 서구철학에서 ‘나’, ‘너’는 개체적 실재이다. 타자, 만물과 구별된 실체이다. 실존적 자아도 만물과 구별되는 독립된 실체다. ‘나’는 바깥세계, 타자와 긴장과 갈등 속에 있다. 다석은 ‘나’에 집중하지만 ‘나’는 자연과 타인과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히 열리고 뚫린 것이다. 말씀을 깨달은 인간은 섬기는 존재다.

  (2) 깊은 영성의 사상이다. 서구의 생명사상은 해와 빛에 기초한 생명력사상이다. 류영모는 몸과 숨을 강조하지만 낮보다 저녁, 빛보다 어둠을 존중한다. 이성과 물질에 기초한 태양숭배를 거부한다. 어둠이 빛보다 크다. 해와 달은 없는 것이다. 物은 空이다. 생각으로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 어둠의 신령한 세계, 영원한 생명, 초월과 하나됨에로의 돌아가는 귀일(歸一),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한다.

  (3) 속세의 기독교 선승이다. 해혼(解婚)하고 하루 한끼 먹고 온종일 널빤지에 무릎꿇고 앉아 생각에 몰두한 류영모는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기독교 선승이다. 불립문자를 강조하고 생각은 끊고 절대의 사유 세계에 접어든 산 속의 선승들과 다르다. 가정에서 민족사회 안에서 사유하고 명상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성적 과학적 사유에 힘썼고 말과 개념을 닦아냈다는 점이 다르다.

  (4) 한국전통사상과 현대사상의 결합이다. 19세기 한민족의 독창적인 민중종교사상인 동학과 다석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말하는데서 일치한다. 다석이나 함석헌이 동학을 연구한 흔적이 없는데 기본사상이 일치한다는 것은 이런 기본사상이 매우 한국적인 사상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38)

  동학과 다석은 많은 점에서 상통하지만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동학은 부적과 주문을 사용함으로써 신비주의적 비합리적 경향을 보이는데 다석은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개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이다.

  다석의 사상은 민족사학인 오산의 정신과 사상의 맥을 잇는 사상으로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의 기독교적 민족정신운동의 흐름 속에서 함석헌의 씨사상으로 이어진다. 일제 아래서 민족정신과 독립을 추구한 대종교 교주 윤세복,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와 함께 주체적인 민족사상과 정신을 추구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면서 닦아낸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족사상과 단절됨으로써 해방 후 한국사상계는 사상의 뿌리를 잃고 말았다. 다석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뿌리를 밝혀준다.

  (5) 결정론을 거부하고 미정론(未定論)을 내세웠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미정이다. 따라서 무슨 종교, 신조, 사상으로 평안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1, 809-12) “마음을 마음대로”는 말 그대로 모든 매임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고 마음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하는 경지를 뜻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든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내 삶이 달려 있다. 몸을 강조하고 결정론을 거부하고 지금 이 순간에서의 삶에 집중한 것은 몸의 느낌을 존중하고 삶의 우발성을 강조한 서구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통한다. 그러나 다석이 의지적인 면을 강조하고 초월적 영성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다르다.

  (6)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종교원주의다. 70여년 전에 존 힉보다 먼저 종교다원적 신앙을 펼쳤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의 고갱이는 성서, 예수에게서 왔다. 그의 사상과 영성의 내용과 특징은 유교, 불교, 도교에서 왔다. 그의 종교다원주의는 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제시된 게 아니라 삶과 정신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온 것이다. 깨닫고 체험하고서 종교다원의 생각이 나왔다. 머리 속에서 개념적으로 논리적 이론 정리되고 전개된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혼으로 체득한 종교다원사상이므로 살아있고 구체적이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의 삶이 숨겨 있고 담겨 있다.

  (7) 다석은 종합적인 사상가이다. 한겨레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크고 하나임, 밝고 환함)이다. 한국인의 사상적 천재성은 하나로 꿰뚫는데 있다. 최치원, 원효, 지눌, 율곡, 수운, 해월, 다석, 함석헌은 모두 대종합의 사상가이다.

  다석은 주관과 객관, 상대와 절대, 유와 무, 인간과 신에 대한 서구의 이원론적 경향과 동양의 일원론적 경향을 통합했다. 안과 밖을 꿰뚫었다. 초월자 하나님이 내 바탈 본성 속에 있다고 보았다. 영원한 생명의 줄이 내 숨 속에 내 생명의 본성 속에 있다.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야 하나님을 만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절대자를 말하고 동양에서는 마음, 본성이 곧 하늘이고 도라고 보았다. 내면 속에 영원한 궁극의 실재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 바탈을 닦으면 궁극적인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나’의 밖의 하나님,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있다. 거기에 영원이 있고 구원의 나라가 있다. 류영모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내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솟아올라야 한다고 보았다. 내 속을 파고들면서 끊임없이 위로 하나님을 향해 솟구쳐 오르려 했다는 것은 동양적 영성과 기독교적 영성이 결합된 것이다.

  몸과 정신,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꿰뚫은 사상이다. 류영모의 사상은 동서를 아우르고 함석헌의 씨사상,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한국신학의 선구이고 깊은 샘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하는 사상이다. 우주적 폭과 실존적 깊이를 지녔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 영원과 절대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 했다.



  다시 류영모 사상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기독교 신앙과 동양종교의 창조적 만남을 이루고 하나로 꿰뚫었다는 데 있다. 동서 사상과 종교와 정신의 회통과 통전은 지구화시대에 인류의 평화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2) 앞으로는 풀뿌리 민주시대와 서비스 중심의 사회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섬김의 철학으로 다석과 함석헌의 사상이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다석은 삶의 사상가이고 생각과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한 사상가이다.

  3) 류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적 연속성과 발전을 논구해야 한다. 다석에게 배우고 다석을 깊이 안 이는 함석헌이다. 다석사상이 뿌리와 싹이라면 함석헌 사상은 줄기와 꽃과 열매이다.

다석의 비상한 삶은 범인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혼돈과 어둠에 빠진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비추는 등불처럼 빛나고 있다. 다석사상을 연구함으로써 함석헌의 씨사상도 더 밝아지고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에게서 실천적으로 힘차고 활달하게 펼쳐진 씨사상의 깊은 뿌리와 높이가 드러나기 위해서도 다석의 사상이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1)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I. 솔, 2001. 669쪽.



2) 류영모. 다석어록. 153-4쪽.



3) 같은 책. 156쪽.



4) 최남선, 불함문화론, 신동아. 1972. 1. 다석도 최남선이 한민족의 본질을 ‘밝기’로, 인간의 본질을 광명으로 본 것을 알았다. 다석일지공부 2. 616-617쪽.



5) 다석어록. 161쪽.



6) 이기상, 같은 글. 683쪽.



7) 함석헌, “우리 민족의 理想”, 함석헌전집 1.365쪽.



8) 박영호 지음,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두레, 2001.  359쪽.



9) 같은 쪽. 360쪽.



10) 율려(律呂)는 풍류, 음악을 뜻한다. 율은 음의 조율(tuning)을 뜻하고 려는 풍류를 뜻한다. 옛날에는 새 나라를 세우면 법과 제도, 도덕과 풍습을 바로 잡을 뿐 아니라 음악의 기본음을 정하고 기본음에 맞추어 악기들을 조율하고 가락을 정했다. 옛날에는 음을 측정하는 기계장치가 없으므로 기본음을 정하고 이 음에 따라 악기들을 조율하는 일이 중요했다. 강증산은 죽기 전에 “율려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최근에 김지하가 율려를 내세워 새로운 미학과 사상운동을 펼치고 있다.



11) 다석은 呂와 은 등뼈를 그린 것이라고 보았다.(진2, 40)



12) 류영모,  “밀알(1)”,  柳永模 先生 말씀上. 817쪽.



13)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204쪽.



14) 류영모, “짐짐”. 柳永模 先生 말씀 上, 789-92쪽.


2016/11/04

신동아 김용준 교수 인터뷰 (함석헌 선생 회고 포함) | 우리 말과 글이 있다는 것, 언제나 내 마음의 기쁨 !

신동아 김용준 교수 인터뷰 (함석헌 선생 회고 포함) | 우리 말과 글이 있다는 것, 언제나 내 마음의 기쁨 !



신동아 김용준 교수 인터뷰 (함석헌 선생 회고 포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김용준(金容駿·78) 고려대 명예교수는 독재정권 시절에 두 차례나 해직된 경력이 있다.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유신정권의 눈 밖에 나 1975년 해직돼 4년 동안 백수로 지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와 복직했으나 격동의 세월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신군부 집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에 과학계 대표로 참여해달라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명했다가 다시 4년 동안 강단에 설 수 없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동안 민주화운동에 한 발을 걸쳤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 자리씩 했다. 결코 그들의 용기와 공헌을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민주화운동 인사 중에는 세 정권에서 대통령 총리 국회의원 장관 총재 총장 사장 등으로 보상을 넉넉히 받은 사람이 많다. 김 교수의 우산 밑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정부의 실세가 됐다. 그러나 그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김 교수가 계간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 ‘나도 황국신민선서를 읽었고 창씨개명을 했으며 춘원(春園) 이광수를 욕할 수 없노라’는 글을 실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출범해 친일파의 행적을 단죄하겠다는 마당에 그는 ‘이광수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일본식 이름을 가진 충실한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친일진상 규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를 교과서로 배운 세대다. 그 시절에 태어나 간난(艱難)과 격동의 세월을 산 사람들의 체험 속에는 교과서에선 배울 수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서울 힐튼호텔 옆 대우재단빌딩 18층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지만 대우재단은 살아남았다. 김 교수는 1976년 해직됐을 때 대우재단의 과학부문 자문위원을 지낸 인연으로 대우재단 산하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리에 앉자 팔순을 바라보는 김 교수가 직원을 시키지 않고 손수 차를 내왔다. 속기사는 “공무원은 계장만 돼도 여직원을 시키는데…”라며 황송한 눈빛이었다.

동생 도올과 장남은 동갑내기

-대우그룹이 사라져 학술협의회 꾸려나가기가 어렵지 않은가요.

“대우재단의 주 수익원은 대우재단빌딩(18층)의 임대료입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50억원을 희사해 대우재단을 발족시켰죠. 힐튼호텔과는 지금도 가교(架橋)로 연결돼 있어요. 학술협의회는 대우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동생인 도올(김용옥·57)은 자주 만나십니까.

“요새는 못 만나요. 걔가 어떻든 고려대 철학과를 나와 일본 미국 대만에서 석사, 미국 하버드에서 박사를 했지 않습니까. 동생이 보스턴에 있을 때 만났더니 ‘한국 가면 한의학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되겠나 생각했죠. 그런데 원광대에서 6년 만에 한의사가 됐죠. 내 동생이지만 공부도 할 만큼 했고 머리도 있고 정력이 대단하죠. 신통하게 생각하는데 좀 불안합니다. 그놈이 럭비공 같아서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형만 아니라면 저 럭비공이 이리저리 튀는 모습을 보며 구경을 하겠는데….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니까 이놈이 안 와요.”

4남2녀 중에서 김 교수는 맏형이고 도올은 막내다. 김 교수의 장남과 도올은 동갑내기다. 부모 같은 형이라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자타칭 대가(大家)가 된 도올을 ‘걔’ ‘얘’ ‘이놈’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밌다. 장형은 도올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 걸까.

“너무 그렇게 튀지 말라고 하죠. 학교(고려대)를 그만두는 게 아닌데…. 그만두려고 할 때 주저앉히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죠. 걔 성격이 괴짜 같은 구석이 있어요. 말도 악센트를 줘서 하다보니 때때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도 있어요. 걱정이죠. 그냥 보시는 대로예요. 가라앉아 자기의 길에 천착했으면 좋겠는데. 칭찬하는 사람은 또 칭찬하고… 저도 칭찬합니다. 내 동생이라고 나무랄 생각은 없는데 너무 그러니까 걱정이 돼서.”

-도올이 만든 EBS 다큐멘터리 10부작 ‘한국독립운동사’는 봤습니까.

“좌익 계통의 독립운동사라고 하더군요. 나는 보지 않았어요. 걔 책도 별로 읽은 게 없습니다. 이때까지 가려졌던 부분을 파헤쳤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 안창호보다 더 독립투사라고 했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직접 안 봐서. 걔 거는 일단 안 봐요.”

-도올이 쓴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글에 경기중학교를 나온 형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을 토로한 대목이 있더군요.

“용옥이가 내 큰아이와 6개월 차이죠. 내 아들 셋이 경기를 나왔단 말이에요. 나까지 합하면 넷이 경기를 나왔죠. 경기 나온 셋 중 둘이 서울대를 나오고 한 아이는 외국어대를 나왔죠. 그런데 용옥이는 어떻게 하다 보성에 들어갔거든.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죠. 어려서부터 걸작 같은 면이 있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면 없어져요. 산속에 들어가 거의 거지 중 꼴이 돼서 돌아와요. 걔 태권도가 몇 단인지 아세요? 걔한테 얻어맞으면 죽어요. 그런 얘예요.”

-기인(奇人)이군요.

“네. 동양학을 하버드에서 했지 않습니까. 나는 국학이나 동양학 한 사람들이 메서돌러지(methodology·방법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냥 공자왈 맹자왈 암기식으로 나가고, 학문적 방법론이 부족하죠. 용옥이는 어떻든 양쪽을 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영미의 현대 학문 조류와 동양학이 합류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죠. 자기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러겠죠. 그런데 인기가 너무 올라가니까 거기서 오는 병폐도 있잖아요. 내가 어디 가면 도올의 형으로 소개될 때가 많죠.”

-동생 김숙희 교수는 김영삼 정부 때 어떤 인연으로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습니까.

“걔가 지금도 독신이죠. 집은 앞뒷집이지만 같이 밥 먹고 함께 살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내가 큰오빠니까. 걔가 YWCA에서 일할 때 어느 지방에 가서 ‘이제는 그래도 대학 나온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게 좋겠다’고 몇 번 얘기했더래요. 그 말이 지방 사람들에게 꽤 먹히더래요. YS가 대통령 취임하기 전에 만나자고 해서 입각 교섭을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내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정무장관이나 여성부 장관은 하지 말라고 했죠. 이회창씨가 국무총리 된 후에 YS가 또 만나자고 하더니 교육부 장관 하라고 하더래요. 이회창씨는 어떻게 여자가 교육부 장관을 하냐고 반대했대요. 장관 하면서 월남 파병을 용병(傭兵)이라고 했다가 재향군인회에서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쫓겨났죠.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지요. 월남 파병이 용병이 아니면 뭐예요.”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라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글에서 ‘소학교 다닐 때 자정 무렵 역에 나가 지나(支那·중국)로 가는 출정군인(出征軍人)들을 전송하면서 일장기를 손에 들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었던 추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썼더군요. 중학교 5학년을 마칠 무렵엔 가네미쓰 요슝(金光容俊)으로 창씨개명을 했다지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안 하고 버틸 수는 없었던 겁니까.

“우리 집은 광산(光山) 김가라 가네미쓰(金光)라고 지은 거죠.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분들도 있죠. 그러나 창씨개명 여부로 친일(親日) 반일(反日)을 가릴 수는 없어요. 항일운동가도 창씨개명을 안 했지만 친일파 중에도 창씨개명을 안 한 사람이 있어요. 한상용(韓相龍)씨 같은 친일 거두도 창씨개명을 안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죠. 압박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학교에서도 계속 창씨개명하라고 독촉하고, 사회에서도 불이익이 그대로 쏟아지니까 안 하고 배길 수 있나요. 어떻게 보면 그때 창씨개명을 안 한 것이 애브노멀(abnormal·비정상)이고 창씨개명한 것이 정상적인 거죠. 못 견뎠으니까….”

한상용은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로 중추원칙임참의(中樞院勅任參議)를 15년간 중임하고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됐다. 각종 친일단체에 참가해 1916년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평의장을 지냈다.

-‘친일 문인’ 이광수를 옹호한 대목이 흥미롭더군요.

“경기중학교가 종로구 화동 꼭대기에 있었어요. 학교에서 안국동을 거쳐 종로로 나가면 화신상회(현재 삼성증권 자리) 4층에 서적부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돈이 올라와 서적부를 어슬렁거리다 춘원이 쓴 ‘그의 자서전’이란 소설책을 샀습니다. 친구 부인과 간도(間島)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스토리죠. 간도의 한국사회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의 본거지였죠. 춘원이 나 같은 놈을 생각해 쓴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그 책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한 겁니다.

학교 가면 황국신민(皇國臣民) 선서를 낭송하고 천황이 계신 곳을 향해 동방요배(東方遙拜)했습니다. 일본말로 쓴 일기장을 제출해야 했죠. 그야말로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랐죠. ‘덴노 헤이까(천황 폐하)’라는 말이 나오면 벌떡 일어서서 차려 자세를 취했습니다. 천황 폐하의 적자(嫡子)로서 생명을 새털같이 버리는 게 남아(男兒)의 영광스러운 일생이라고 교육받았으니까요.

‘그의 자서전’ 이후 춘원의 역사소설을 모조리 읽었어요. 그때는 일본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정식 학교에서 한국 역사를 못 배운 세대거든요. 춘원의 소설을 읽은 후로 우리글로 일기를 썼죠. 광복이 되고 나서 춘원을 친일파다 뭐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춘원이라는 사람을 욕할 수 없죠.”

교수도 광복 직후에는 쏟아져 나오는 좌익서적에 심취해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정심상소학교(지금의 천안초등학교) 다닐 때 박성의(朴成義)라는 친구가 급장을 하고 내가 부급장을 했어요. 그 친구는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했어요. 성의의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로 집안이 무척 빈한했죠. 우리 집은 꽤 잘살았어요. 아버지가 개업 의사였으니까. 성의는 경성사범학교에, 나는 경기중학교에 갔어요. 둘 다 좋은 학교였어요. 경성사범은 수업료가 일절 없어 가난한 수재들이 모여들었죠. 성의는 연수과에 진학했다가 광복 후에는 사범대학생이 됐죠. 사범대학은 좌익의 소굴이었고 성의는 거기서 보스였어요.

성의가 갖다준 야마카와 히도시(山川均)의 ‘자본주의의 계략(資本主義の からくり)’과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또 하나의 가난한 이야기(第二貧乏物話)’라는 책에 사로잡혔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 쓴 책이에요. 성의에게 이끌려 좌경화된 거죠. 마분지 같은 종이에 인쇄된 모택동·스탈린·레닌 선집이 쏟아져 나올 때였죠.

성의가 함께 좌익운동을 하자고 해서 사범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죠. 사범대학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사범대학이 교원 양성소지, 그게 어디 대학이냐’며 할아버지 산소 앞으로 끌고 가서 우시는 거예요. 그래서 경성공업대학(서울 공대의 전신)에 진학했죠. 거기서 국대안(國大案) 반대투쟁을 격렬하게 했어요.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과 약학전문학교·의학전문학교·고등공업학교·고등농업학교 같은 고등교육기관을 합쳐 국립서울대를 만든 거죠. 광복이 되고 고등교육기관이 모자라 야단인데 그걸 다 합해서 하나로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잘못된 정책이죠.

신입생 투쟁위원이 돼서 국대안 반대 삐라를 붙이고 다니다 경찰관에게 붙잡혔어요. 성의는 내가 붙잡히는 걸 보고 달아났어요. 그게 마지막이죠. 그 친구는 전쟁 통에 월북하다 폭격을 맞고 죽었다고 해요.”

-언제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게 됐습니까.

“삐라 붙이다가 붙잡혀 형무소살이를 하고 있는데 천안에서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빼내주셨죠. 만 스무 살이 안 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소년감호원으로 이감됐다가 나온 거죠. 나는 소년감호원에서 사식(私食)을 먹고 살이 뽀얗게 쪘는데 집에 내려가보니 어머니는 자식이 형무소에 있는데 편하게 잘 수 없다고 가마니를 깔고 자며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 무릎에 부황이 나셨더군요.

천안에 있을 때 김구 선생님이 쉰 듯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어요. 국대안 반대투쟁을 거론하며 ‘너희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나라 걱정은 우리한테 맡기고 너희는 공부해라’고 말씀하셨어요. 남로당은 김구 선생을 반동의 괴수요, 백색 테러의 두목이라고 헐뜯었죠. 그러나 김구 선생의 호소는 내 심금을 울렸습니다.

서울대 동맹휴교가 많이 허물어지고, 한쪽에서는 이철승씨가 이끄는 우익 전학련이 침투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투쟁본부로 가서 제네스트(general strike·총파업)를 일단 중단하고 등교했다가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했죠. 남로당의 명령이라서 중단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남로당은 그때 전국노동자평의회의 철도 제네스트와 서울대 국대안 반대 제네스트를 연대한 투쟁을 지시해놓고 있었거든요.

나는 형무소에서 넉 달 동안 위대한 투쟁을 하고 있을 때 국대안 반대 투쟁본부에서 면회 한번 안 오고, 고생하고 나온 뒤에도 위로를 안 해줘 뿔따구가 나 있는 상태였죠. 학생운동은 순수해야 한다며 탈퇴했어요. 적색 테러가 굉장했을 때라 정말 혼났어요. 사범대 교수 두 명이 노상에서 맞아죽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국대안 반대 투쟁위원들이 몰려왔죠. ‘저 악질 반동놈의 새끼, 한민당 놈들 쏘기 전에 너부터 쏘겠다’고 협박했죠. 배신자라는 거죠. 한 달 이상 집 밖으로 못 나갔어요. 어쨌든 그쪽에서 볼 때는 배신자 아닙니까.”

국보법 폐지엔 찬성

-강정구 교수가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지 77%, 자본주의 지지 14% 로 나왔으니까 당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선택했어야 맞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세분하면 공산주의 지지 7%, 사회주의 지지 70%였죠. 과연 그 여론조사가 정확했던 걸까요.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요즘도 통계숫자를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질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6·25전쟁 터지고 나서 피난민이 몰려와서 이북 사람들이 여기에 자리잡은 거 아닙니까. 잘살았으면 여기서 그리로 올라갔지, 젠장.

강 교수는 도대체 정체가 뭔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돼요. 왜 야단스럽게 꼭 그런 발언을 지금 이 단계에서 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소리를 해야 클로즈업되는 건가요.”


-김종빈 검찰총장이 강정구 교수에 대해 구속수사를 하려니까 법무부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하는 바람에 결국 사퇴하는 사태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누가 얼마 전에도 묻길래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할 법’이라고 했어요. 법률지식은 없지만 형법으로 다스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국가보안법은 이북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법이죠. 이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거기까지도 잘못됐다고 생각 안 했습니다. 없애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국가보안법은 애브노멀하고 예외적인 법이죠.

그러나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걸 보고 ‘아, 이 나라는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법률을 없애기 전에는 그 법에 의해 움직이는 게 검사의 본분입니다. 검찰이 제멋대로 법률을 만들어서 집행합니까.”

그는 이 대목에서 질문하지 않았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이 정권을 나무라기 전에 이 정권을 들어서게 만들어준 전(前) 정권을 나무라고 싶어요. 이 정권이 이렇게까지 아마추어인 줄은 몰랐잖아요. 386세대가 휴대전화를 동원해 감성적으로 당선시켜놓았지만 지금 뽑아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후회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대통령이 대학을 안 다녔다고 하지만 고등학교를 나와서 판사 된 것 보면 머리는 꽤 좋은 편이죠. 어떻든 전 정권에서 장관도 했죠. 그런 사람이 이 정도밖에 못하니까 안타까워요. 글쎄, 대통령 아닙니까. 대통령이 보통 자리입니까. 대통령 한 지가 벌써 2년 반이 넘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대통령인 걸 몰라요, 내가 볼 때는 대통령이라는 자각(自覺)이 없어. 대통령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다 끌어안고 가야지요. 미운 놈한테 떡 하나 더 주라는 게 뭐예요. 나라 다스리고 장(長) 노릇 하려면 보기 싫은 놈 궁둥이도 두들겨주고, 승진도 시켜주면서 부려먹어야 해요. 그게 장이지요. 그렇게 제 코드에 맞는 것만 찾고 앉았으면 정치가 됩니까.”

친일 진상규명은 학자의 몫

-광복 60년이 지났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활동한 사람들은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됐죠. 광복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해산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친일파의 아들이나 손자 증손자가 조상의 과오에 대해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지금 국가기구를 만들어 친일을 규명하는 것은 연좌제밖에 안 된다고 보는데요.

“둘째아이(김인중·53)가 숭실대 사학과 교수입니다. 인중이만 해도 책을 읽고 6·25전쟁이 이랬구나 하고 알죠. 인중이한테는 임진왜란이나 6·25전쟁이나 다 옛날 이야기지요.

정확한 역사를 쓰기 위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것에는 절대 찬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의 친일 진상규명은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해서 뭘 하자는 거냐고 이 정부에 물어보고 싶어요. 그건 역사학회 혹은 국사학회에 맡겨서 객관적 관점에서 정리해보라고 해야죠. 그런데 자기편에 서 있는 친일파는 안 넣었다는 얘기도 나오더군요.”

미군 통역 생활

그가 6·25전쟁을 맞아 천안 산골짜기에 숨어 있을 때 미군 부대가 올라와 가까운 곳에 주둔했다. 거기 구경나갔다가 짧은 영어로 미군들과 대화를 나눴다. 매코이라는 미군 대위가 낙동강 전투에서 부대가 박살나는 바람에 통역이 모두 전사했다며 그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한 달 동안 으스대며 대대 부관 통역을 했다. 이 부대가 북으로 진격할 때 미군복을 입고 카빈총을 메고 38선을 넘었다.

철원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인민군 패잔병이 밀려 내려왔다. 미군들은 그에게 인민군과 의용군을 가려내라고 했다. 수많은 패잔병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몇 마디 물어보고 이북 말을 쓰면 ‘코뮤니스트’, 남쪽 말을 쓰는 사람은 ‘볼런티어’로 분류했다. 모두가 그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속에서 인민군 중좌, 정치보위부원 등 3명이 당당하게 신분을 밝혔다. 미군은 이 3명을 특별호송했다. 그가 통역으로 종군한 미군 부대는 내일이면 압록강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할 것이라는 지역까지 갔다가 중공군에 밀려 남하하기 시작했다.

“강정구 교수가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느니,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느니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볼 때는 말도 안 되죠. 내가 돈암동에서 큰길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살고 있었어요. 19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죠.

헌병들이 권총을 양손에 들고 지나가는 차를 모조리 징발해 외출 나온 군인들을 붙잡아 전방으로 보냈어요. 무심코 하룻밤이 지났는데 군인들이 우리 집 대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창덕궁 근처 이모 집으로 피신했죠. 다음날(6월27일) 새벽에 인민군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창경원 앞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죠. 그걸 다 겪은 사람 아닙니까. 나중에 서울을 빠져나가 천안 처가 근처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습니다. 미군이 일단 올라왔다가 후퇴할 때 남겨두고 간 발전기를 고쳐 라디오에 연결했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국의 소리를 들었죠. 9·28 서울 수복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그때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어요.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는 그런 걸 겪은 사람들이니까 강 교수가 암만 그래봐야 코웃음밖에 안 나오죠.”

그는 함석헌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화학 빼놓고는 모든 걸 함 선생한테 배웠다고 술회한다. 그의 집 책상 앞에는 함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여동생(김숙희)은 “우리 오빠는 아버지가 두 분”이라고 말한다.
“함석헌 선생에게 모든 걸 배웠다”

“함 선생님이 일요성서 강좌를 오후 2시에 시작하면 해가 질 때까지 해요. 모든 게 다 나오는 겁니다. 박식하시죠. 내가 쓴 ‘내가 본 함석헌’이란 책이 내년에 나옵니다.”

도올 김용옥이 쓴 ‘나의 큰형 김용준’이란 글에는 ‘아버지가 함 선생에 빠져 있는 큰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아버지는)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를 마땅치 않게 여겼고 퀘이커 운운 하는 것도 시원찮게 여겼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큰형 얘기만 나오면 “쟤는 함석헌 따라다녀서 저 모양 됐어”하고 아주 못마땅하게 쯧쯧 혀를 찼다. 해직당했을 때도, ‘씨의 소리’를 복간한다고 돈을 구하러 다닐 때도, 아버지는 큰형의 함석헌 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중략) 함석헌은 내가 생각하기에 좀 헛폼이 쎈 사람이다.’

김 교수는 ‘함석헌은 헛폼이 쎈 사람’이라는 도올의 글을 읽어주자 “허” 하며 웃었다. 지하의 함 선생이 도올의 글을 읽었더라면 아마 “도올 이 사람아, 자네도 헛폼이 세기는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함 선생님이 이화여대에 초청 강의를 가셨던 모양이에요. 강의를 하면서 이대생들에게 ‘공부 안 하고 멋만 부린다’고 야단치셨대요. 강연 끝내고 나오는데 여학생들이 뒤따라오면서 ‘자기는 멋 안 부리나. 자기도 흰 두루마기 입고 수염 기르고 고무신 신고…. 자기는 저게 멋이지’라고 쑤군거리더래요. 선생님은 그런 말을 들으시면서 속으로 ‘너희들 말이 옳다’고 생각하셨대요. 나는 함 선생님 생각할 때마다 원효대사를 떠올려요. 함 선생님이 아마 신라시대에 사셨으면 원효처럼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화학과 교수가 민주화 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도 함 선생의 영향인가요.

“함 선생이 가끔 하신 말씀이 있죠. 젊은 놈들 교육한다면서 ‘저 놈 때문에 내 아들 버렸다’는 소리 한번 못 들으면 교육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함 선생을 만나 내 일생이 순조롭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화학에서 할 일도 많았는데….”

-거룩한 인물한테도 사사로운 흠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1980년대에 함 선생의 여성 관계를 다룬 ‘거짓 예언자’라는 책이 나왔죠. 국가안전기획부 공작이란 설(說)이 파다했죠. 먼 친척이 썼다고 하는데 그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나 사실인가요.

“글쎄, 나는 그 책을 안 읽었습니다. 읽을 가치가 없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렇습니다. 함 선생님을 따라다니던 여대생이 꽤 있어요. O씨 같은 분도 그 중에 포함되죠.

함 선생님이 천안 씨농장에 혼자 계시는데 O씨가 뒷바라지한다고 가 있었죠. 그 여성은 함 선생님을 몹시 흠모했죠. 선생님으로 보지 않고 남자로 본 거죠. 함 선생님 혼자 주무시는 방에 옷을 벗은 채로 들어간 일도 있다고 해요. 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던 거 같아요. 함 선생님의 여자관계를 조금도 숨길 마음이 없습니다. 함 선생님이 성자(聖者)는 아니죠. 나는 그분을 철저한 인간으로 보니까요.

그 양반만큼 자기의 일에 대해 표리(表裏)가 같으신 분은 정말 없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여자 문제가 좀 있었다고 해서, So what?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그런 상황에서 부득이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안전기획부가 함 선생님의 먼 조카뻘 되는 아이를 꼬여서 ‘거짓 예언자’를 쓰게 하고 5만부를 찍었죠. 항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책방에서 진열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함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 감격했어요. 큰 테두리에서 봤을 때 그 일이 함석헌이란 거목에 그렇게 큰 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내가 돈암동 집에 있을 때 함 선생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시더군요. 거의 정신이 나가신 모습이었어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1890∼1981) 선생이 나무라시더랍니다. 유영모 선생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함 선생님의 그 일에 대해서. 함 선생님은 오산학교 스승인 다석 선생을 아버님처럼 모셨죠. 선생님한테 애걸하면서 ‘제가 잘못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빌어도 돌아가실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셨죠. 주변의 무교회주의자들한테 지탄받고,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용서를 안 해주시니까 무척 괴로워하셨습니다. 칼릴 지브란 번역 전집 서문에 그 심정이 나죠. 서문을 읽어보면 눈물이 나와요. 당신의 후회하는 모습이 들어 있죠. 함 선생님이 그 사건 가지고 그 정도 반성했으면 됐지.”

원효가 요석 몇 번 안은 셈

-한 여자와의 일이었습니까. 그 책에는, 따라다니는 여자는 모두 건드리는 것으로 묘사돼 있는데….

“함 선생님이 1901년생이니 그때가 55세 때였죠. 남자 나이 55세면 한창 때죠. 시골 농장에 있는데 뒷바라지한다고 여자가 와서 교태를 부리고 그러니까 원효가 요석을 몇 번 안은 식으로 안은 게…. 함 선생님을 접해보면 알지, 어떻게 따라다니는 여자를 전부 건드려요.”

그는 여기서 함 선생의 부인 이야기도 했다.

“함 선생님 부인이 문맹(文盲)입니다. 함 선생님 부친이 아들 녀석은 도쿄(東京) 유학까지 했는데 며느리가 글을 몰라 큰일났단 말이죠. 그래서 부인, 딸, 며느리 세 명을 놓고 언문(諺文)을 가르치셨대요. 다른 사람들은 다 깨우치는데 사모님은 끝내 못 깨우치셨다는 겁니다.”

다석의 목요강좌

-함 선생 따라다닐 때 김동길 교수도 자주 만났겠군요.

“그럼요. 가깝게 지냈죠. 꽤 유명했던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양반이 어쩌다 정주영씨와 연결돼 정치계로 나가더니 조금 비난을 받고…. 그거 참 모르겠어요. 나는 자연과학을 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이 돼보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지요. 김동길 선생은 의외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죠.”

-함석헌 선생에 비해 다석은 덜 알려져 있어요. 최근에 다석 전집도 나왔더군요. ‘씨’이라는 말도 다석이 만들었다지요.

“선생님보다 11년 위예요. 유영모 선생이 오산학교에 두 번 부임하셨죠. 한번은 오산학교 선생으로, 한번은 교장으로. 함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촌놈이었는데 유영모 선생을 만나 정신이 크게 도약했다’고 하셨어요.

저도 함 선생님 따라서 유 선생님을 여러 번 뵈었죠. 기인(奇人)이죠. 간디처럼 하루에 한 끼만 드셨죠. 그 양반은 간디처럼 해혼식(解婚式)을 하셨어요. 결혼을 푸는 것이 해혼이죠. 52세에 부인과 해혼식을 갖고 성관계를 딱 끊으신 거예요. 간디가 말한 금욕(禁慾)생활이죠. 함 선생님은 훤칠한데 유 선생님은 키가 자그마하시죠. 짤막한 분이 마포 장사꾼이 쓰는 어투로 말씀하셨죠. ‘그렇습죠’라는 식으로.”

그는 1950년대 후반 종로2가 YMCA에서 다석이 하던 목요강좌 이야기를 했다. 다석은 오후 2시에 시작해 3시간 동안 강연을 했다. 삐그덕거리는 목조건물에 청강생은 10명 정도였다. 함 선생이 맨 앞에 앉고, 이화여대 김응호 교수를 비롯해 7, 8명이 안 빠지고 나오는 단골이었다.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으셨죠. 언젠가 선생님을 모시고 가다가 ‘선생님 한문에 이런 말이 있는데 노자, 장자 아니면 사서삼경 어디에 있는 말입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한참 후에 ‘그런 말 없는데’ 하셔요.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 거죠. 유 선생님은 나무판자 위에 담요 하나 깔고 주무십니다. 평생 이불을 안 덮고 주무셨다고 해요.

그분이 YMCA 목요강좌에서 인촌(仁村) 김성수에 대해 장장 2시간 동안 강의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기록했던 노트가 어디 남아 있을 거예요. 일제 강점기 당시 인촌의 여러 가지 행적에 대해 극구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독립자금 대준 이야기며 인물의 너그러움에 대한 얘기를 주로 하셨던 거 같아요.”

김 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온 후 모교인 서울대로 가지 않고 고려대로 가게 된 것도 다석의 그 강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때는 미국서 박사 따오면 제 가고 싶은 대학을 골라 갈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 다 오라고 할 때입니다. 서울대는 모교니까 오라고 하고, 연세대는 기독교 계통으로 해서 오라고 했죠.

저는 인촌을 직접 뵙지는 못했어요. 고려대 선배 교수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합니다.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하루는 인촌이 소집을 하더래요. 인촌이 보자기를 들고 와서 교수들에게 월급봉투를 나눠주시더래요. 나라가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그게 쉬운 일입니까. 그때의 감격을 고대 교수들이 잊지 못하더라고요.”

민청학련 사건과 지식인 선언

-왜 두 번씩이나 해직됐습니까.

“1975년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았다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죠.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은 당연직으로 기독학생운동총연맹(KSCF) 이사장이 됩니다. 이철(철도공사 사장), 유인태(국회의원), 나병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황인성(대통령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KSCF에서 일했죠.

1975년엔 주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해직됐어요. 백낙청(서울대), 김윤환(고려대) 교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1980년에 복직했더니 변형윤 교수가 주도하는 지식인 선언에 참여하라고 야단인데 안 나가고 있었죠. 무대가 바뀌면 배우도 갈려야죠. 왜 밤낮 똑같은 배우가 나가서 하는 거냐고요.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에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 명단에 과학자가 없다는 거예요. 변형윤씨가 ‘김용준이 데려오라’고 했다고 해요. 하루는 부르길래 세실레스토랑에서 모였는데 신군부에 반대하는 열기가 대단하더라고요. 결국 과학자를 대표해 서명했다가 또 해직당했죠.”

-KSCF 학생들이 몽땅 이 정부의 실세가 됐군요.

“이사장이 돼서 KSCF를 들여다보니까 1년 예산의 90%가 외국에서 오는 돈이더군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유일한 학생단체가 한국 교회의 지원을 못 받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 간사 4명을 지역별로 할당해 교회에서 돈을 얻어오게 했죠. 그런데 그 돈이 모두 민청학련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도 중앙정보부가 김 교수님을 민청학련으로 엮어 넣지 않은 것은 이상하네요.

“실질적으로 엮이지가 않았죠.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서경석 목사가 찾아와 100만인 구국서명에 참여해달라고 했죠. 내가 서 목사 보고 ‘이거 봐, 내가 마땅히 여기 서명해야지. 그런데 내가 지금 KSCF 이사장이야. 학생들이 매일 붙들려 들어가면 용서해달라고 빌면서 끄집어내야 할 판인데 내가 거기다 서명하면 나부터 들어갈 판인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했어요. 내 서명을 조금 미루자고 하고 안 했어요.”
-민청학련과 관련해 조사 받으며 맞지는 않았습니까.

“맞지 않았어요. 그럴 이유가 있죠. 한국화약 기술고문이었거든요. 한국화약 오너 집안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하고 사돈간 아닙니까. 거기서 어떤 시그널이 갔는지 때리지 않더라고요.”

-유신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평가해보시죠.

“4년씩이나 해직당했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죠. 그러나 그건 그거죠. 경제 부흥시켜놓은 건 인정해야죠. 사적 감정과 공적 평가는 분리해야죠.

1975년 박정희 정권하에서 해직당했을 때도 이목을 피하려고 반체제 인사들이 천주교 수녀원 같은 데로 돌면서 대화를 나눴어요. 그때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는 강경파가 있고, 온건파가 있었죠. 강경파는 덮어놓고 이쪽을 때려죽일 놈이라고 하면서도 저쪽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했죠. 나는 그 자리에서 ‘남북을 같은 자로 재라’고 했죠. 박정희를 재는 자로 김일성이도 재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독재로 치자면 김일성 독재가 박정희 독재보다 더 지독하다’는 말을 하면 H목사 같은 분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죠.

김정일이 적어도 남한하고 어떤 걸 하려면 공식 사과부터 해야지요. 그 사람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입니까. 아웅산 사건이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며, 그건 다 괜찮은 겁니까.”

치기에 사로잡힌 386

-이 정부 사람들은 툭하면 ‘독재시대에 침묵한 당신은 말할 자격이 없다’는 태도로 나와요. 자기들이 감옥 가서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거죠. 그런데 김 교수님은 두 번씩이나 해직당했으니 그 사람들 기준으로 봐도 말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인류 역사가 모순의 덩어리입니다. 정말 죄도 안 졌는데 사형당하는 이도 있죠. 밤낮 정정당당하고 의롭게 산 놈만 있고, 나쁜 놈은 다 죽고 그러는 게 역사가 아닙니다. 박정희씨도 애국충정에서, 그야말로 제 딴에는 나라 세워보겠다고 애를 써서, 독재가 됐든 뭐가 됐든 경제를 이만큼 성장시켜놓은 건 인정해야죠.

386세대가 저러는 것은 치기(稚氣)로 봐요. 그들이 아직도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자꾸 선거에 지잖아요. 코드 안 맞는 사람을 갖다 써야 정치가 되지,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만 해서 정치가 됩니까. 내 편도 있고 네 편도 있고, 여당도 있고 야당도 있어야 정치가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교수님 글 중에 ‘자주니 외세 배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마치 한 맺힌 대원군을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경제규모가 세계 11위까지 올랐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다 때려치우고 6·25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닐 거고…. 조선 조정이 김대건 신부를 잡아 죽이기 1년 전에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는 학자 15명을 네덜란드로 유학 보내요. 우리나라에서는 쇄국정치하면서 김대건 신부 죽이고 남강 이승훈을 처형할 때라고요.”

여기서 화제를 종교와 과학의 관계로 돌렸다. 그는 최근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라는 저서를 펴냈다. 화제가 이쪽으로 돌아오자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과학-기독교 싸움은 과학의 승리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못 가르치게 하거든요. 성경의 창조론에 배치된다는 거죠. 요새는 지적 설계론(intelectual design)이라고 변형 창조론을 가르치는 교사도 있죠. 진화를 부정하기 어려우니까 하나님이 진화하도록 설계했다는 이론이죠.

“미국의 창조론자들은 정치와 연관돼 있습니다. 보수 성향의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자꾸 고개가 올라와요. 이제는 분자생물학까지 나왔으니까 진화에 이론의 여지가 없잖아요. 구더기를 구성하는 DNA와 사람을 구성하는 DNA는 같은 유전자입니다. 진화론을 무시하고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간에게서 신(神)의 개념은 영원히 안 없어지겠죠. 또 신의 개념을 부인하는 과학적 추구도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종교와 과학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인류 문화 속에 녹아든 하나의 요소입니다. 종교는 신의 관점에서 보고 과학은 물질의 관점에서 보니까 마치 나눠진 것 같지만. 그걸 나눠놓고 한쪽만 얘기하면 밤낮 싸움이 나는 거예요.”

김 교수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장로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보수 기독교계는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지 않습니까. 줄기세포 연구는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것인가요.

“과학과 기독교의 싸움에서 현재까지는 과학이 항상 이겼습니다. 과학이 매번 옳았고 종교가 늘 졌거든요.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봅니다. 나중에 복제인간도 나오겠죠. 나오면 어떻습니까. 김용준의 체세포에서 또 하나의 김용준이 나왔다고 해서 걔가 납니까. 내 부모님 밑에서 자라 내가 산 80세는 복제 김용준의 역사와는 다르잖아요. 나와 모양은 똑같지만 그건 다른 인격체지요.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될 것이며, 금방 뭐가 뒤집힐 것 같이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암만 반대해도 과학은 과학대로 갈 거예요. 복제인간도 나오겠지요. 그렇게 쉽게 나오지는 않겠지만. 자연과학의 발달 역사를 보면 옛날에 꿈도 못 꾸던 일들이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빅뱅(big bang)에 의해 우주가 생성됐다는 것과는 맞지 않지요.

“성경은 3000년 전에 씌어졌죠. 하나님이 엿새 만에 만드셨다는 말을 그대로 믿으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엿새 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묘사(inspirational description)죠. 그런 걸 신화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신화를 해석해야 내 것이 되는 거지요. 그걸 착각하니 답답해요.”

기독교는 비판받아야

-‘우리나라 기독교는 종파의 생존을 위한 폭력집단 같다’고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던데요.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 거둬들이는 헌금이 얼마이겠습니까. 그 많은 돈을 거둬들여 지금 기독교인들 뭘 하는 거냐고요. 그래도 미국 기독교인들은 예일·프린스턴·하버드를 세웠잖아요.

교회당 지어놓고, 수양원이라고 해서 땅 사놓고, 해외에 선교사 파송하죠. 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요전에 숭실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나는 이 학교만 오면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어요. 숭실대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교파인 예수교 장로회 통합이 세운 학교입니다.

기독교가 무슨 짓들이에요. 교회당을 크게 짓고 수만명을 모아놓고 목사가 하루에 일곱 번 똑같은 설교를 한다고 해요.”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한데요. 요즘 의대 한의대 약대 못 간 학생들이 공대를 갑니다. 서울대 공대 들어가서 사법시험 공부하는 학생도 있고. 의학전문대학원이 생기면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지겠지요.

“일제 강점기 때 내가 왜 화학을 했느냐 하면 군대 안 가려고 한 겁니다. 일본 사람들이 선견지명이 있는 겁니다. 전쟁 말기에도 이공계 학생들은 징병 안 데려갔어요. 문과는 다 데려가면서도.

단적으로 얘기한다면 소위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고 나서 이공계는 더 망했어요. 그래도 박 정권 때는 탄압을 했지만 학교 자체를 흔들지는 않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언제쯤 과학분야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또 노벨상 타령이야. 글쎄요. 단적으로 얘기해서 50년 내로 한두 명 나오겠죠. 그런데 지금 국가 차원에서 전체적인 플랜이 없습니다. 과학은 놔둬야 됩니다. 놔둬야 거기서 씨도 나고 뿌리도 내리고 그러는 거지. 극단적인 얘기지만 아인슈타인이 지금 한국에 오면 취직 안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쓴 논문 17편밖에 안 돼요. 그 사람이 대한민국에 오면 아마 전임강사도 될 수 없을 거예요. 대학을 시장경제의 원리로만 몰아세우면 나라의 장래가 없어요.”

김 교수의 집안은 명문거족(名門巨族)에 만석꾼 살림이었다. 증조부는 전라병사(全羅兵使)를 지냈다. 지금으로 치면 군사령관쯤 되는 벼슬이다. 조부는 구한말 문과에 급제해 충청도 부여와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군)의 원(員·수령)을 지냈다. 필자가 조상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웃으며 “탐관오리셨죠”라고 말했다. 부친은 세브란스 의전과 일본 교토(京都)대 의학부를 졸업했다.

평생 사람다운 삶 살려 노력

뛰어난 학자와 문화인은 명문거족에서 많이 나온다. 괴테도 그렇고 찰스 다윈도 그렇다. 집에 있는 책과 분위기, 그리고 부(富)가 학문과 문화예술의 거장을 길러내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몇 대에 걸친 부가 인류문화의 진보에 기여하는 학문과 문화를 길러내는 것이라면 ‘학벌의 세습’ 운운하며 흥분할 일만도 아니다.

-혹시 과학부 장관 제의를 받아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 거 없었어요. 장관을 했으면 DJ정권 때 했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DJ를 싫어했고, 김영삼 정권 때는 동생이 장관됐으니 내가 장관 될 리도 없었죠.”

-일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을 몇 권 꼽아 보시죠.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제이콥 브르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정도예요.”

두 살 아래인 부인과 사이에 4남1녀를 뒀다.

-혹 안 여쭤봐서 못한 말씀이 없는가요.

“함석헌과 같은 인격체를 만나서 평생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쟁 직후 함 선생을 모시고 천안 봉원사에서 여름 수양회를 했어요. 거기서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篇)을 배웠어요. ‘온 세계가 너를 칭찬해도 조금도 더할 것도 없고, 온 세상이 너를 비난해도 조금도 주저할 것도 없도다.’ 거기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사는 거죠.”

(끝)

신동아 2005.12.01 통권 555 호 (p82 ~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