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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알라딘: 왕양명과 칼 바르트 -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김흡영

알라딘: 왕양명과 칼 바르트
왕양명과 칼 바르트 -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김흡영 (지은이)예문서원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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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3,000원

368쪽
책소개
저자의 영문서 Wang Yang-ming and Karl Barth: A Confucian-Christian Dialogue를 번역하여 출판한 것으로, 저자의 신학 연구의 시작이자 그동안 주장해 온 ‘도의 신학’의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왕양명과 칼 바르트를 통해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16세기 중국의 주요 유학자이자 장군이며 행정가였던 왕양명은 지행합일론을 주창하며 실천한 독창적인 사상가요, 유교사상사의 위대한 개혁자이다. 20세기 스위스의 신학 교수였던 칼 바르트는 종교개혁 이래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양명과 바르트가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조우에 있어 역사적 관계성과 구성적 중요성이 있으며, 그들은 각 전통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들로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위한 적절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들의 공통 관심인 인간화 또는 어떻게 참된 인간이 되는가에 대한 그들의 교의(신유교의 수신론과 그리스도교의 성화론)에 초점을 맞춘다.


목차


펴내는 말
서론
제1부 유교 패러다임: 왕양명 유학의 수신론
제1장 서설 / 제2장 근본-메타포: 성誠 / 제3장 인간성 패러다임 / 제4장 인간화: 치양지로서의 수신 / 요약
제2부 그리스도교 패러다임: 칼 바르트 신학의 성화론
제5장 서설 / 제6장 인간성 패러다임 / 제7장 인간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의 성화 / 제8장 근본-메타포: 사랑(Agape) / 요약
제3부 유교-그리스도교의 대화
제9장 대화 방법론 / 제10장 만남의 양상들 / 제11장 인간성 패러다임 / 제12장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결론: 새로운 우주적 인간성의 도를 추구하기 위한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
부록: 왕양명
후기: 새로운 우주적 인간성의 도道
참고문헌 / 김흡영 교수의 주요 출판 목록 / 찾아보기



책속에서


첫문장
서양 근대문명이 동아시아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이래, 유교는 멸시되고, 망각되고, 무시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저자 및 역자소개
김흡영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홈페이지: http://www.heupkim.com

▶ 학력
- 1987-1992, Graduate Theological Union, 철학 박사(Ph.D)
- 1986-1987,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신학 석사(Th.M)
- 1984-1986,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교역학 석사(M.Div)
- 1967-1971,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항공공학, 학사(BSE)
- 1964-1967, 경기고등학교

▶ 현... 더보기


최근작 : <왕양명과 칼 바르트>,<가온 찍기>,<도의 신학 2> … 총 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최근 세계 신학계는 동양종교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원만한 관계를 추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신학적 시도를 해 오고 있다. 그리스도교만이 최고의 종교라고 믿었던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동양종교전통의 가치와 깊이를 인식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부터의 일이다. 이러한 시도는 종교 간의 대화를 필두로 여러 이름을 가지며 진화되어 왔다. 토착화신학, 문화신학, 종교신학 등으로부터 출발해,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비교신학이 기세를 잡는가 하더니, 최근에는 종교 간의 담을 헐고 신학하자는 담 없는 신학 또는 초종교적 신학이라는 명칭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와 권위주의에 신물이 난 열린 서구인들에게도 신(God)을 언급하지 않고도 할 말을 하는 유교사상이 상당히 매력적인 듯하다.
이 책은 저자의 영문서 Wang Yang-ming and Karl Barth: A Confucian-Christian Dialogue를 번역하여 출판한 것으로, 저자의 신학 연구의 시작이자 그동안 주장해 온 ‘도道의 신학’(theo-dao)의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왕양명王陽明과 칼 바르트(Karl Barth)를 통해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16세기 중국의 주요 유학자이자 장군이며 행정가였던 왕양명은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을 주창하며 실천한 독창적인 사상가요, 유교사상사의 위대한 개혁자이다. 20세기 스위스의 신학 교수였던 칼 바르트는 종교개혁 이래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양명과 바르트가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조우에 있어 역사적 관계성과 구성적 중요성이 있으며, 그들은 각 전통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들로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위한 적절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들의 공통 관심인 인간화 또는 어떻게 참된 인간이 되는가에 대한 그들의 교의(신유교의 수신론과 그리스도교의 성화론)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다음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한다. 첫째, 유교와 그리스도교 교의의 해석: 유학의 수신론과 신학의 성화론을 구성한다. 둘째, 종교 간의 대화: 양명유학의 수신론과 바르트신학의 성화론에 기초하여 유교-그리스도교의 대화를 발전시킨다. 대화를 통해서 이 두 다른 종교문화 패러다임 사이에 서로 상응하는 개념들을 비교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한다. 셋째,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종교문화신학의 구성: 이러한 유교-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를 통하여 깨달은 통찰들을 기초해서 그리스도교 종교문화 구성신학을 위한 몇 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우리의 오랜 핵심적 전통인 유교와 이제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연결하는 가교가 되어, 두 전통들이 서로를 바로 알고, 대화하고, 소통하여 우리 신학과 유학 그리고 종교문화의 발전에 일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접기

알라딘: 다석 강의 다석학회 (엮은이),류영모

알라딘: 다석 강의

다석 강의   
다석학회 (엮은이),류영모 (강의)교양인2016-09-27
-
양장본1006쪽

책소개

<다석 강의> 개정판. 다석 류영모는 종로 YMCA에서 35년 동안 연경반 강의를 맡았다. 다석은 연경반 강의에서 <성경>과 <논어>를 비롯한 사서삼경, <법화경> 같은 동서양의 고전과 자신이 쓴 시조나 한시 등을 풀이하며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본질, 세계의 원리 같은 철학적인 주제부터 교육, 민주주의, 인권 같은 현실의 삶까지 두루 다루었다.

<다석 강의>가 출간되기 전까지 다석에 관한 책은 다석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이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였다. 다석의 제자들이 연경반 강의 기록을 간추려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속기록을 그대로 옮긴 책은 없었다. 그러다 2005년 2월 25일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졌고, 다석학회가 주도하여 연경반 강의 일 년 치 속기록 전문을 다듬어 2006년에 <다석 강의>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에 10년 만에 출간되는 <다석 강의> 개정판은 초판과 속기록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대조하고 확인하여 속기하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한자와 오.탈자를 비롯해 오류를 바로잡았다. 다석의 육성으로 펼쳐지는 43편의 강의를 통해,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능통한 석학이자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다석의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 책은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목차
머리말

제1강 _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
제2강 _ 날마다 세 가지로 제 몸을 살피다
제3강 _ 실없는 말은 무지(無知)다
제4강 _ 못된 짓을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다
제5강 _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제6강 _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제7강 _ 진리의 정신을 알면 끌려다니지 않는다
제8강 _ 방심(放心)이 안심(安心)이다
제9강 _ 인과율과 하늘의 법칙
제10강 _ 밝은 게 전부 빛은 아니다
제11강 _ 몽땅 놓아야 자유롭다
제12강 _ 주역의 가르침 : 팔괘(八卦)
제13강 _ 생각의 불꽃이 있어야 사람이다
제14강 _ 하늘의 섭리로 쥐덫이 마련되다
제15강 _ 얇기로는 시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제16강 _ 신비 아닌 것은 과학이 안 된다
제17강 _ 우리에게는 체(體)와 면(面)이 많다
제18강 _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주는 재미다
제19강 _ 하늘의 길을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제20강 _ 대학의 가르침 :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제21강 _ 간디의 가르침 : 진리파지(眞理把持)
제22강 _ 허공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제23강 _ ‘빈탕 한데’의 주인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제24강 _ 인생관이 다르면 시비(是非)도 다르다
제25강 _ 상대 세계가 있는 한 대속(代贖)은 계속된다
제26강 _ 혈육의 근본은 흙이고 정신의 근본은 하늘이다
제27강 _ 삶의 참목적은 하늘에 있다
제28강 _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제29강 _ 성령과 악령
제30강 _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그것이 원죄다
제31강 _ 늘 보아 좋은 상(像)
제32강 _ ‘하나’를 알기 전에는 전부가 까막눈이다
제33강 _ 산다는 것은 새롭게 되는 것이다
제34강 _ 물건에 걸리지 않으면 마음은 언제나 제대로 있다
제35강 _ 영원한 사상을 가지려면 강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제36강 _ 우리가 보는 것은 빛깔이지 빛이 아니다
제37강 _ 속알을 밝혀야(明德)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
제38강 _ 곧이(貞)여야 이웃에 이롭다
제39강 _ 우리는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이다
제40강 _ 정신이 만족하는 것은 상대 세계에 없다
제41강 _ 영(靈)을 알려면 먼저 못난 ‘나’를 깨달아야 한다
제42강 _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큰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43강 _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부록
● 나의 스승 류영모 _ 김흥호
● 다석 류영모의 YMCA 연경반 35년 _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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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레 신문 2016년 9월 30일자 '출판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다석학회 (多夕學會) (엮은이) 

다석 유영모 선생의 거룩한 삶과 뜻을 기리고 선생의 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하며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2005년 2월 25일 창립하였다. 앞으로 다석 사상 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달마다 '다석강의' 공부 모임과 강좌·특강을 개최하고, 다석낱말사전, 다석학회지, 영문판 다석사상선집 등을 펴내는 등 다석 선생의 업적을 정리하는 일을 할 계획이다.
최근작 : <다석 강의> … 총 2종 (모두보기)
류영모 (강의)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 더보기
최근작 : <죽는 날 받아 놓았다지?>,<제나에서 얼나로>,<태양이 그리워서> … 총 1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참말씀을 알고 참말씀을 많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가슴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사람입니다.
자꾸 일어나는 불꽃이 있습니다. 자꾸 이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참을 아는 사람은 말을 뱉고 싶어 합니다.”(류영모)

일평생 진리를 좇아 큰 깨달음에 이른 대석학 류영모,
동서회통, 일원다교의 사상을 생생한 육성으로 듣는다!

함석헌과 김흥호 등 20세기 한국 기독교 사상계를 이끈 거인들의 스승이자,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35년 동안 이어진 종로 YMCA 연경반(硏經班) 강의에서 다석은 스스로 지은 시조와 한시, 유교 경전, 성경, 불경의 경구를 직접 모조지에 써서 칠판에 붙여놓고 강의를 하였다. 다석의 강의는 예수와 붓다와 공자, 삶과 죽음, 절대 세계와 상대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을 넘나들었다. 방대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이 어우러지는 지혜의 향연이었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고, 때로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석 강의》는 제자들이 속기록으로 남긴 43편의 강의를 다듬어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다석의 철학과 사상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석 류영모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종로 YMCA에서 35년(1928년~1963년) 동안 연경반 강의를 맡았다. 다석은 연경반 강의에서 《성경》과 《논어》를 비롯한 사서삼경, 《법화경》 같은 동서양의 고전과 자신이 쓴 시조나 한시 등을 풀이하며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본질, 세계의 원리 같은 철학적인 주제부터 교육, 민주주의, 인권 같은 현실의 삶까지 두루 다루었다.
다석은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다석 강의》가 출간되기 전까지 다석에 관한 책은 다석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이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였다. 다석의 제자들이 연경반 강의 기록을 간추려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속기록을 그대로 옮긴 책은 없었다. 그러다 2005년 2월 25일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졌고, 다석학회가 주도하여 연경반 강의 일 년 치 속기록(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 전문을 다듬어 2006년에 《다석 강의》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에 10년 만에 출간되는 《다석 강의》 개정판은 초판과 속기록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대조하고 확인하여 속기하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한자와 오.탈자를 비롯해 오류를 바로잡았다. 다석의 육성으로 펼쳐지는 43편의 강의를 통해,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능통한 석학이자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다석의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 책은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류영모 선생의 말숨은 빛과 힘과 숨의 구현이다. 눈을 뜨고 일어서고 날아가는 통일ㆍ독립ㆍ자유의 세계이다. 또한 선생의 세계는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너무도 신비하고 오묘하여 하나로 같이 통하는 세계이지 분석하고 따지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고 실천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분석하는 세계가 아니라 같이 기뻐하고 같이 즐거워하는 생명의 세계이다. _ 김흥호, ‘나의 스승 류영모’ 중에서

류영모 선생이 연경반 강의실로 쓴 건물은 넓이가 서른 평 남짓하였는데, 일자로 된 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맨바닥에 앉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앞에는 교탁이 있었고 중형 칠판도 걸려 있었다. 물론 마이크 장치는 없었다. 그러나 공간이 작고 선생의 음성이 힘차서 강의를 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강의 교재는 류영모 선생이 일기장에 적어놓은 자작 시조나 한시가 주를 이루었다. 아니면 동양 고전의 원문을 다루었다. 강의 방식은 가르칠 내용을 모조지에 손수 붓글씨로 써 와서 칠판에 붙여놓고 읽으며 설명하는 식이었다. 강의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 그리고 오랫동안 쌓은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다. 때로는 맹자(孟子)의 말처럼 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하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 어떤 어려움에 놓여도 하느님 생각만 하면 기쁨이 샘솟아야 참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보여준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다. 삶은 기쁨이라고 한 선생의 말은 고달픈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_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YMCA 연경반 35년’ 중에서

주요 내용

“말씀을 알자는 것이 인생이고,
말씀을 듣고 끝내자는 것이 인생입니다.”
- 동서 사상의 대통합을 이룬 큰 사상가

다석 류영모는 일생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었으며, 예수를 스승이자 삶의 모범으로 삼아 본받으며 좇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다석은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유교가 길은 죄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공자는 덕(德)이라 하고 석가는 법(法)이라 하고 예수는 얼(靈)이라고 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름만 다를 뿐 실체는 같다는 것이다.

류영모가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를 얘기한다고 해서 공자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이 사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간디나 톨스토이처럼 하느님 말씀의 국물을 먹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들과 비슷하게 하려는 것이 공자, 석가, 예수, 간디, 톨스토이를 추앙하는 것입니다. 간디가 누구인지,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지내야 합니다. 현대 사람은 간디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나 부처를 말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제21강 간디의 가르침 : 진리파지 · 458쪽)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입니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은, 종단은 절대인 ‘하나’에서 비롯하여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긴박한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신경쇠약에 걸려서 강박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람일수록 이 강박감을 먼저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은 절대인 ‘하나’에서 나와서, 마침내 ‘하나’를 찾아 하나로 돌아갑니다. 대사상가나 대종교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 를 구한다는 말이요, 믿는다는 것입니다. 신선(神仙), 부처, 도의(道義)를 얻는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제32강 ‘하나’를 알기 전에는 전부가 까막눈이다 · 763, 764쪽)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름이 ‘대한나라’입니다.”
- 다석 류영모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조건

이 책에는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의 실정과 동서 냉전 같은 국내외 혼란한 상황에 대한 다석의 생각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연경반 강의에서 다석은 사회 병폐를 비판하곤 했으며, 특히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조건에 관해 여러 차례 강의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참 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대중이 옳은 의(義)를 분별하는 데 민주의 무게가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참으로 무게 있는 민주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중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가의 지도자와 관련해서는 “(지도자가) 밑을 밝혀줄 능력이 없으면 올라가 있을 필요가 없”으며, 거짓된 지도자 밑에서는 민주주의가 되더라도 잘살게 해줄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원칙이 틀어지면 허명민주(虛名民主)가 됩니다. 이름만 민주주의가 됩니다. 그러면 마귀가 참여하여 세상을 더럽힙니다. …… 이렇게 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만이 심해집니다. 자기 생각을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고, 남의 것은 보잘것없으며, 이 정도면 되었지 부끄러울 게 뭔가 하게 됩니다.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게 됩니다. 자만하고 시위(尸位)합니다. 혼자 잔뜩 부풀어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기말(世紀末)의 마귀들입니다. 이것을 가로되 세기말 현상, 곧 말세(末世)라고 합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좋은 세상에 그따위 마귀 때문에 귀하고 중한 것을 놓치다니 말입니다. 그냥 장난(作亂)으로 망(亡)하다니 말이 됩니까? (제29강 성령과 악령 · 707쪽)

인류의 역사는 밤낮 서로 싸움질하고 내려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놈을 물리치면 저놈이 들어옵니다. 소론(少論)이 승하면 노론(老論)은 기회만 보는 형국입니다. 악(惡)의 본(本)으로 서로 다투니 그 중간에서 백성만 부대끼고 못 살게 됩니다. 소위 혁명이 일어나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떠들어댑니다만, 혁명이 오면 무엇합니까?
희생자는 오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중에는 개죽음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지도자 밑에서 희생하는 것은 개죽음입니다. 앞문의 호랑이를 쫓으니 뒷문에서 이리가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장 보는 현실입니다. 봉건제도가 없어지고 민주주의가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습니까? 품앗이입니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흘러가는 그 짓이 전부 서로 하는 품앗이입니다. (제24강 인생관이 다르면 시비도 다르다 · 547쪽)

“우리말에는 하늘의 계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우리말과 우리글로 생각을 펼친 철학자

한학(漢學)의 대가였던 다석은 한자 한 글자에 철학 개론 한 권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자(破字)’를 하여 한자의 생성 원리를 밝히고 거기서 철학을 캐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말과 우리글을 아끼게 되었다. 다석은 자신이 궁구한 이 세계와 존재의 의미를 서양에서 만들어진 철학 용어나 중국의 한자가 아닌 순 우리말, 우리 글자에 담아내고자 했다. 다석은 훈민정음 28자에 만족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소리글자인 한글이 마치 뜻글자인 양 글자 하나 하나의 뜻을 곰곰이 새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오!늘’이라고 풀이했다. 오늘 하루가 늘상, 곧 영원이라는 뜻이다. ‘글(文)’은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여기서 이렇게 말하지만 후에 우리나라 철학이 있게 되면 이 말 역시 죄다 쓰일 것입니다. 이 말 그대로 쓰인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이 나오면 그 말을 쓰고, 그러지 못하면 이 말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민족에게 철학이 필요하면, 누가 되었건 우리말로 철학용어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있어서 우리 몸이 있는 것같이, 우리가 쓰는 말도 꼭 필요한 자식처럼 필요한 말이 마침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제29강 성령과 악령 · 687쪽)

‘이이ㅣ수ㅣ’ … …, 예수의 ‘예’는 ㅣㅓㅣ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수’, 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가 말하는 구원의 힘입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는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한글과 뜻이 우연히도 같습니다. 우리말이 웬일인지 하느님의 계시를 필름처럼 나타내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진리가 ‘예’에,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 퍼졌는데, 우리가 사는 ‘수’가 정신에 있다는 그림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이런 글을 궤변이니 불경(不敬)이니 하겠지만,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말로 이보다 더 적절하게 나타낸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41강 영靈을 알려면 먼저 못난 ‘나’를 깨달아야 한다 · 943쪽)

“죽음 공부는 공부 중에서
마지막 공부인 동시에 참공부입니다.”
- 다석의 죽음 철학

다석은 종교의 핵심을 죽음이라고 보았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였다. 또 다석은 ‘오늘 하루살이(일일일생, 一日一生)’의 철학으로 잠자는 것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영원을 하루 속에서 살고, 하루를 평생으로 여기며 매일 죽는 연습을 했다. 다석에게 목숨이란 “영혼이 잠깐 동안 이 흙덩어리(몸)에 들어와서 피게 하여주는 것”이었다.

사랑은 믿음이고, 생명을 내버리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 내가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한다는 뜻입니다. 인(仁)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몸을 내던진다는 뜻입니다. 자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은 이 살신성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면 죽음의 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누구에게 배워서만이 아니라 절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이고 생명은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뚜렷해지는 것은 영혼인 생명입니다. (제39강 우리는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이다 · 911쪽)

생명은 영원한 것을 하늘의 명령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어 온 생명을 무한 중에서 잠깐 누리는 것입니다. 잠깐 꿈을 꾸는 것입니다. 내일 꿈이 깨면 다 그만입니다. 꿈 깨면 다 시원합니다. 부천(富賤)의 차(差)가 없이 난(難)은 다 같습니다. 부잣집 자식이나 대통령의 양자(養子)나 난(難)은 다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해야 하고, 알았으면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제29강 성령과 악령 · 700쪽)

“교육은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 그 근본을 두어야 합니다.”
- 실천적인 배움을 추구한 교육자

다석 류영모는 일평생 배움의 길을 걷고자 했으며, 정신은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다석은 훗날 연경반 강의에서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교육열은 대단한데 좋은 재목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그냥 몸뚱이를 키우는 일”만 한다고 지적했다. 공부란 본(本, 근본)을 캐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과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결국에는 “하느님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글자 ‘몸’에서 가로로 그어 있는 것은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죄다 모아 몸이 잔뜩 붓게 되면 앉아 있으려 해도 편히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을 전제로 공부를 할 바에는, 아예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을 배워 가지고 나온 학생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학교를 나와서 매이려고만 하고 모으려고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하느님과는 융합이 되지 않습니다. 꿈꾸는 이 세상에서 꿈꾸고 지나가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이처럼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집어치워야 마땅합니다. (제11강 몽땅 놓아야 자유롭다 · 252쪽)

종국엔 그저 껍데기(몸)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려면 마땅히 하늘을 알아야 합니다. 다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 뜻의 뜻,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을 정하려면 그칠(止) 줄을 알아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알고 어려서부터 외곬으로 운동 선수가 되겠다거나 전문 기술에만 능해보겠다는 것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육은 그 근본을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 두어야 합니다. 운동이나 전문 기술만 가르치는 것을 교육으로 알면 그것은 도둑놈의 교육입니다. (제19강 하늘의 길을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 412, 413쪽) 접기

2021/06/23

알라딘: 빈탕한데 맞혀놀이

알라딘: 빈탕한데 맞혀놀이

빈탕한데 맞혀놀이 - 다석으로 세상을 읽다   
이정배 (지은이)동연출판사2011-11-02


책소개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다석학회 회원으로 다년간 다석사상을 연구해온 이정배 교수가 다석과 관련하여 연구한 두 번째 책이다. ‘빈탕한데’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허공’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석 선생은 평생의 소원을 그 ‘빈탕한데’ 맞혀(맞춰) 노는 것이라고 했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실체는 ‘빈탕’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토착화’는 WCC의 JPIC(정의·평화·창조의 보존) 한국 대회에서 기독교의 10대 과제로 뽑힐 만큼 중요한 과제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이듯이 신토불이(神土不二)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옷을 입혀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착화 신학의 과제이고 저자는 토착화 신학의 원류, 토착화 신학의 절정을 다석에게서 찾는다. 토착화된 신학이기에 세계적인 신학일 수 있다. 다석을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서슴없이 올릴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서론_ 미정고(未定稿)로서의 예수 - 多夕 유영모를 만나기까지
1. 신학적 영향사(影響史)의 개관
2. 오늘의 시각에서 본 가족사와 학창시절
3. 一雅 변선환 선생
4. 프릿츠 부리와의 만남
5. 스승 없이 스승되어 살기
6. 초현실주의 신학자 이신(李信)의 재발견
7. 토착화 신학의 절정으로서 多夕학파의 기독교 이해
8. 신학함의 동반자가 있어 행복했던 25년

제1부 한국 신학의 두 과제, 토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른 多夕의 기독론

1장. 多夕신학에서 본 ‘역사적 예수’의 기독론
들어가는 글
1.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기독론 비판의 근거 - 부활 이전/이후 예수상(像)의 구별
2. 초자연적 유신론 및 인습화된 ‘케리그마’ - 바울 신학과의 연계를 중심하여
3. 역사적(부활 이전) 예수의 신성(神性)과 영(靈)기독론 - ‘참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 이해
4. 역사적 예수의 한국적 재(再)케리그마화 - 영(靈)기독론에서 多夕의 ‘얼’기독론으로

2장. 多夕신학 속의 자속(自贖)과 대속(代贖), 그 상생(相生)적 의미
들어가는 글
1. 기독교 케리그마(Kerygma)는 불변의 상수(常數)인가?
2. 역사적 예수 삶의 탈(脫)현대적 조명
3. 多夕의 예수 이해, 상생적 구속론의 사상적 토대로서 <天符經>과 三才사상
4. 역사적 예수 삶의 재(再)케리그마화로서 多夕의 스승기독론 - 대속(代贖)과 자속(自贖)의 상생(相生)적 차원
나가는 글

3장. 민족과 탈(脫)민족 논쟁의 시각에서 본 多夕신학 - A.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의 비판적 독해
들어가는 글
1. 토착화 신학의 토대로서 ‘한국적 주(정)체성’, 그 실체는 있는가?
2. A. 네그리의 민족주의 비판의 새 차원 - ‘제국’의 도래와 세계적 가난의 실상
3. 다중(多衆)의 삶정치(Biopolitics)와 ‘유러피언 드림, 그 공감의 정치학’
4. 한국적 ‘통섭론’에서 본 새문명론과 多夕의 ‘다중(多衆)’기독론 - 3세대 토착화론에 대한 소견
나가는 글

제2부 두 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 -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

1장. 귀일(歸一)사상에 근거한 多夕의 유교 이해
들어가는 글
1. 多夕의 시각에서 본 유교와 기독교 만남의 역사 및 평가
2. 역사적 유교의 한계와 歸一사상에 근거한 유교 본래성 이해
3. 유교경전에 대한 多夕의 신학적 해석학
4. 성서 풀이 속에 나타난 후천(後天)시대의 多夕의 기독교상(像) - 귀일(歸一)사상에 근거하여
나가는 글

2장. 多夕신학 속의 불교
들어가는 글
1. 삼재론(三才論)의 틀에서 이해된 多夕의 신학적 회통 원리
2. 불교와 기독교 간의 소통 원리로서의 여래장(如來藏)사상 - 삼재론(三才論)에 대한 불교적 이해
3. ‘自他不二’적 구원(해탈)론으로서 십자가 사건 - 돈오돈수(頓悟頓修)적 점수(漸修)론과의 대화
4. ‘얼나’와 불교적 ‘無我’(成佛) - ‘덜 없는 인간’을 넘어서

3장. 기독교의 동양적, 생명적 이해 - ‘빈탕한데 맞혀 놀이’와 진물성(盡物性)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글
1. 없이 계신 하느님과 귀일(歸一)사상
2. 십자가와 참(얼)나
3. 바탈[本然之性]로서의 성령
4. 빈탕과 하나되는 삶 - 자속과 대속의 불이(不二)적 관계
나가는 글

제3부 多夕으로 오늘의 세상 읽기 - 多夕신학과 현대 사조와의 만남

1장. 생명담론의 한국적 실상 - 생명담론으로서 多夕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하여
들어가는 글
1. 생명의 형이상학적 이해, 그 새로운 시도들
2. 신과학의 전일적 생명론과 그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
3. 진화생물학의 생명담론 실상과 전개 및 비판 - ‘通涉’ 개념을 중심으로
4. 한국에서 전개된 자생적 생명철학 - 동학, 多夕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의 한국적 수용
나가는 글 - 현대적 생명담론과 多夕사상의 치열한 만남을 꿈꾸며

2장. 한국적 통섭론(通涉論)으로서의 多夕신학 - E. 윌슨의 ‘생명의 편지’에 대한 한 답신
들어가는 글
1.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편지』 풀어 읽기 - 생명을 위한 연대의 제안
2. 『생명의 편지』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 - 토마스 베리의 우주 진화적 신학과 샐리 맥페이그의 성육신적 생태신학을 중심하여
3. 기후 붕괴 및 종의 멸종 시대와 多夕의 생명사상 - ‘統攝’을 넘어 ‘通涉’으로
4. 한국적 통섭론(通涉論)의 시각에서 본 『에코지능』과 『생체모방』 - 多夕 생명사상의 구체적 실상
나가는 글

3장. 種의 기원과 種의 멸종 사이에서 본 多夕의 ‘없이 계신 하느님’
들어가는 글
1. 다윈 진화론의 핵심 내용과 기독교와의 갈등 배경
2. 진화론에 대한 현대적 논의들 - 유물론적 진화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3.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한 신학적 논의들 - 설계, 성사(聖事)를 넘어 ‘약속’으로?
4. 창조와 성육의 통합으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와 多夕의 ‘없이 계신 하느님’ - 약속을 넘어 ‘책임’으로!
나가는 글

접기
책속에서

서론 중에서

필자의 多夕연구는 크게 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多夕의 동양적 기독교를 서구 종교다원주의 틀에서 다루되 그와의 변별력을 강조했다. 소위 그의 ‘얼기독론’을 서구 다원주의 시각의 급진적 내재화로 본 것이다. 최근에는 그의 ‘얼기독론’을 ‘다중多衆기독론’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두 개의 ‘탈脫’ 탈현대와 탈식민성을 의식했던 까닭이다. 둘째는 多夕사상을 일본 교토학파와 견줄 만한 사상체계로 이해하는 일이었다. 해서 필자에겐 多夕한 사람만이 중요하지 않았고 함석헌 · 김흥호를 비롯하여 박영호 등 多夕을 스승으로 모신 이들의 사상과 多夕과의 관계를 묻는 일이 소중했다. 多夕학파란 이름하에 이들을 함께 묶을 수 있는 틀거지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에 초점을 맞춘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다른 점도 확연히 드러났다. 무게 중심이 기독교에 있었던 까닭에 이들에게 예수는 이론적 전거만이 아니라 고백적 토대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多夕의 기독교 사상을 민족문화 속에 스며든 <천부경>, 그 영향사의 정점으로 보았고 유불선(儒佛仙)은 물론 동학(東學)과도 회통할 수 있는 대승적 틀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십자가를 수행적, 자/타불이(自/他不二)적 대속론(代贖論)의 차원에서 설명한 것이 바로 그 핵심 증거이다. 성직만 있고 수도(修道)의 개념이 간과된 한국 기독교에게 그의 수행적 기독론은 상당히 유의미하다. 향후 필자는 多夕이 남긴 난해한 원전을 더욱 깊이 읽어갈 생각이다. 그러나 多夕을 과거적 시각에서가 아닌 현대 신학적 주제들과 맞부닥트릴 계획이다. 이미 다중(多衆), 생태신학, 진화신학, 역사적 예수 연구의 차원에서 多夕을 조명한 글들을 준비해놓았다. 물론 이런 글쓰기는 多夕한 개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多夕학파의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多夕연구는 순수 종교적 · 이론적 차원에서만 비롯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식치 못했으나 동양적으로 이해된 십자가 개념 속에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케리그마(kerygma)가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多夕에게는 십자가를 지신 스승 예수가 중요했고 그의 십자가를 ‘일좌식 일언인(一座食一言仁)’이란 말로서 동양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것은 그것을 믿는 차원을 넘어 그렇게 사는 길밖에 없을 터, ‘일좌식 일언인’이란 말 속엔 자본주의와 맞설 수 있는 삶의 에토스가 가득 차 있다. 소승적으로 자신 한 몸 수신(修身)하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 가득 찬 죽음의 세력(자본주의)과 맞서는 길이란 것이다.
필자 역시도 처음에는 多夕사상 속에서 개인적 차원만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전 재산이 오늘의 동광원의 기초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제 뜻 버려 하늘(아버지) 뜻’이룬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날 반(反)생태적 천민자본주의와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치열하게 공적(公的)인 삶으로 부르는 것, 사(私)와의 사투(死鬪)를 벌리는 일이 多夕에게 ‘일좌식 일언인’으로서의 십자가였던 것이다. 필자가 多夕사상 속에서 한국적 생명신학의 정수를 재인식하고 이에 몰두하게 된 것도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다. 多夕사상 속에 신학적 화두인 ‘생명’을 발견한 것은 필자에겐 은총 그 자체였다. 향후 한국적 생명신학의 차원에서, 아니 내 자신의 삶 속에서 多夕사상을 깨치고 체화시키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뿐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벨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했고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 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백 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상임 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정배의 생명과 종교 이야기』, 『이웃 종교인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 『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켄 윌버와 신학』,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토착화와 생명 문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종교개혁 500년 以 後신학』과 『3.1정신과 以後신학』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접기
최근작 : <유영모의 귀일신학>,<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 … 총 4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 다석일지 중

현대 담론을 다석 유영모의 사상으로 읽어내다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다석학회 회원으로 다년간 다석사상을 연구해온 이정배 교수가 다석과 관련하여 연구한 두 번째 책 『빈탕한데 맞혀 놀이 - 多夕으로 세상을 읽다』를 펴냈다. 첫 번째 책,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을 내며 다석 사상을 깊이 있게 내재화시킨 저자는 이 책에서 다석사상으로 현대의 신학 담론들, 현대 사조들과 만남을 시도한다.
‘빈탕한데’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허공’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석 선생은 평생의 소원을 그 ‘빈탕한데’ 맞혀(맞춰) 노는 것이라고 했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실체는 ‘빈탕’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토착화’는 WCC의 JPIC(정의·평화·창조의 보존) 한국 대회에서 기독교의 10대 과제로 뽑힐 만큼 중요한 과제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이듯이 신토불이(神土不二)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옷을 입혀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착화 신학의 과제이고 저자는 토착화 신학의 원류, 토착화 신학의 절정을 다석에게서 찾는다.(물론 다석 스스로는 토착화라는 단어를 쓴 적은 없다.) 토착화된 신학이기에 세계적인 신학일 수 있다. 다석을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서슴없이 올릴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론 “미정고(未定稿)로서의 예서 - 多夕을 만나기까지”에서는 저자 자신의 신학적 실존,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난 多夕의 의미를 정리한다. 숫한 신학 여정에서 씨름하며 만난 뭇 이론들과 만나 씨름했던 저자가 온전히 무릎 꿇을 사건을 多夕사상을 만난 것이라고 하는 저자의 삶으로 다석을 반추한다.

1부 “한국 신학의 두 과제, 토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른 多夕의 기독론”에 속한 세 논문은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들과 탈(脫)민족주의 이론들과의 대면을 통해 多夕이 이들 담론들 속에 내재된 서구적 갈등, 곧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민족과 탈민족주의 간의 대립을 동양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적시한다. 1부에서 제시한 자속과 대속의 불이(不二)적 성격 나아가 多夕의 ‘얼기독론’의 재해석으로서 다중(多衆)기독론을 통해 이들 서구 담론에 대한 동양적 응답을 접할 수 있다.

2부 “두 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 -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에서는 역으로 한국 고유한 종교들, 즉 유교와 불교와 만날 수 있는 신학의 적실한 가능성으로서 多夕사상을 언급한다. 축(軸)의 시대 종교들의 영향력이 실재하는 한국 땅에서 서구식의 어떤 종교다원주의 유형도 이런 실상을 온전히 밝힐 수 없다는 판단에서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多夕이 한국 고유한 <천부경(天符經)>의 귀일(歸一)사상의 빛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유교와 불교를 풀었기에 두 번째 차축(後天)시대(후천시대)에 합당한 회통적 기독교를 말했다고 확신하며 글을 풀어나간다.
마지막 3부 “多夕으로 오늘의 세상 읽기 - 多夕신학과 현대 사조와의 만남”에서는 우리 시대의 화두인 생명담론과 多夕사상의 상관성을 논한다. 진화생물학자로서 생태학에 관심 깊은 E. 윌슨의 통섭(統攝)적 생명론을 多夕의 눈으로 비판했고 다윈 진화론에 대한 서구적 논의구조 속에 뛰어들되 종(種)의 멸종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多夕신학의 얼과 구조가 얼마나 더 현실적 대안일 수 있는가를 역설한다. 동서양에서 논의되는 생명담론들의 빛에서 多夕의 생명사상을 자리매김한 것도 저자가 주안점을 둔 곳이다. 접기

文字를 넘어 신의 속나를 보라 ③-4 오강남 교수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文字를 넘어 신의 속나를 보라 - 아주경제


文字를 넘어 신의 속나를 보라
황호택 논설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입력 : 2021-01-27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③ 오강남 교수 <上>




아주경제와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이 공동 기획한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의 두 번째 인터뷰이는 비교종교학으로 명망이 높은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오강남 명예교수다. 코로나 19로 오 교수가 한국에 오지 못하고, 나를 비롯한 취재진이 캐나다로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줌(Zoom)을 이용해 인터뷰가 이뤄졌다.

대학을 갓 졸업한 유수민 인턴기자가 카카오톡 통화로 오 교수에게 줌 작동법을 코치하기 시작한 지 몇 분 만에 오 교수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음성 전달에서 캐나다와 서울 사이에 0.5초 정도의 시차가 있었으나 큰 불편은 없었다. 서울의 아주경제 스튜디오와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오 교수의 서재를 연결해 화상 인터뷰를 두 시간 동안 진행하면서 세상이 '코로나 이전(BC·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AC·After Corona)'로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캐나다로 두 사람이 출장 인터뷰를 갔더라면 5박6일 걸릴 일을 두 시간으로 단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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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릴레이 인터뷰'는 다석을 연구한 학자, 다석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 등 10 여명을 연속으로 만날 계획입니다. 인터뷰를 종이신문,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보도하고 나중에 책으로 펴내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4개 매체에 활용하는데요. 여기는 지금 아침 10시인데 캐나다 밴쿠버는 몇 시입니까?

“오후 다섯 시입니다.”

나는 2년 전 캐나다 밴쿠버를 방문해 부차트 가든 등을 주마간산으로 둘러본 적이 있다. 밴쿠버 섬(Vancouver Island)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태평양 연안에 있다. 남한 면적의 3분의 1 정도 되는 큰 섬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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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교수님의 최근 저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세계적인 종교인 57명을 다루었더군요. 한국인으로는 류영모 함석헌 두 분이 들어있던 데요.

“한국에도 원효 지눌 이퇴계 이율곡 최수운 등 사상가들이 많지만 내가 두 분을 선정한 이유는 한국 종교의 가장 큰 특색인 기복(祈福) 종교를 타파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석학회 회장 정양모 신부는 ‘인도가 석가를, 중국이 공자를, 그리스가 소크라테스를, 이탈리아가 단테를,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독일이 괴테를 각각 그 나라의 걸출한 인물로 내세울 수 있다면 한민족이 그에 버금가는 인물로 꼽을 수 있는 분이 바로 다석 류영모’라고 말했습니다. 좀 과한 것 같지만 다석 류영모의 위상을 잘 얘기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한테 직접 배우신 박영호 선생은 ‘다석은 인류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석을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분이 함석헌 선생입니다.”

-오 교수님은 표층(表層)종교와 심층(深層) 종교를 구분하는 말이나 글을 많이 쓰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합을 금지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복신앙으로 번성한 표층종교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늘상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살 정도까지는 산타가 정말로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와서 굴뚝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고, 착한 일을 한 아이들에게 벽난로 옆에 달린 양말에 선물을 넣어주고 간다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린아이의 정신 발달 과정에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한테는 그것이 1년을 기다리는 이유고, 착한 일을 하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 어머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눈치 채면서 산타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 대신 '산타 이야기는 식구들 사이에 서로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구나, 나도 선물을 받지만 말고 부모님이나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단계 올라가는 겁니다.
아이가 철이 들면 '산타 이야기는 가족 사이에 사랑을 베풀 뿐 아니라 온 동네에, 혹은 더 넓은 사회, 좀 더 넓게 세계의 불우한 이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성숙하면 '불우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만 사랑을 베푸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억울한 사람들이 없게 해야 한다, 환경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습니다. 산타 이야기는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화답하는 천지합일(天地合一), 신이 내려오고 인간이 화답하는 신인(神人)합일을 상징하는 이야기라는 깨달음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들의 산타클로스 믿음 수준에 머물러있다면 일종의 '종교적 발달장애'라고 할 수 있지요.
표층종교는 이기적인 나를 잘 되게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헌금이나 보시를 하더라도 나와 내 식구가 현세와 내세에서 잘 되기 위해서, 기도를 할 때도 내가 잘 되도록 비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심층종교는 이기적인 나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내 속에 있는 신성, 불성, 참 나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나 혼자와 가족만 잘 되기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함께 잘되기를 바라는 결의를 다지는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한 자 한 획도 가감 없이 믿어야 한다는 문자(文字)주의가 표층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을 하던데요. 문자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 거죠?

“류영모 선생은 이기적인 나를 '제나'라고 하고 내 속에 있는 참나를 '얼나'라고 했습니다. 제나에서 얼나로 바뀌는 것, 이를 제나에 죽고 얼나로 살아나는 죽음과 부활이라 할 수 있는데, 류영모 선생은 이를 '솟남'이라 하셨습니다. 류영모 선생님의 경우 어느 종교든지 이렇게 제나에서 얼나로 솟나게 해주는 종교는 모두 유익하다고 봅니다.

표층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합니다. 교회나 절에서 한 얘기를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 광신, 미신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무조건적 믿음은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독립적 사고 능력을 박탈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심층종교는 이와 달리 이해와 깨달음을 강조해요. '보고 깨달아라'는 것이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 해방돼 무엇이 바른지를 계속 추구하는 종교, 열린 종교입니다. 무엇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새로운 눈뜸입니다. 부처님도 '무조건 믿지 말고 실험해보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종교만 옳다'는 근본주의는 폭력

표층종교는 신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식으로 신과 인간, 신과 세상을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이른바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신의 초월(超越)만을 강조하지요. 심층종교는 신이 밖에도 있지만 내 안에도 있다고 봅니다. 어느 면에서는 신의 초월보다 신의 내재를 더 강조합니다. 신이 우리 속에 있는데, 우리 속에 있는 신이 바로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결국 '신과 나는 하나'라고 봅니다. 이런 사상을 강조하는 신관을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하는데, 동학(東學)이 이런 신관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한울님이 따로 계시지만 우리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시천주(侍天主)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한울님이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끝내 나와 한울님은 하나다' '인간이 바로 신이다' 하는 것이 인내천(人乃天)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동학에는 '나만 한울님이 아니다. 내 이웃도 한울님이다' 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도 있습니다.

표층종교는 문자주의를 고집합니다. 성경이나 여러 경전에 있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층종교는 이와 대조적으로 '문자 너머를 보라', 류영모 선생님 용어로 '속나를 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신을 경험하는 일은 너무나도 엄청나 도저히 문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종교 경전은 결국 상징이나 은유를 통해 그 경험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징적 은유적인 문자는 그 경험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경험 자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걸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 믿어라' 라는 것은 성경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합니다. 문자에 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한국 기독교의 다수는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나온 것이면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손가락만 보고 있으면 안 되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표층종교는 자기만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합니다. 독선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 프란체스코 교황은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못한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제일 큰 동창회가 교회 졸업동창회라는 말도 있다던데요. 교회 신자가 감소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지요? 교회보다 훨씬 재밌는 것이 많기 때문인가요?

“교회가 문자주의에 매달리면 그 문자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6일 만에 창조되었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태양 보고 '서라' 했더니 태양이 섰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성경의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하면 요즘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심청전을 보면 심청이가 물에 빠져서 용궁에 갔다가 연꽃에 실려 송나라 황후가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심청전의 메시지가 중요한 거지, 용궁이 정말 있느냐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성경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거지 이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들을 그대로 믿으라고 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소위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고 하는데, 가나안은 '안 나가'를 거꾸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인데…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가 쓴 책 제목이 입니다. 지금 기독교인이 죽고 나면 기독교인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회도 졸업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동창회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미국은 그래도 서방국가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은 셈입니다. 북유럽 쪽은 기독교인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북구의 제일 잘 산다는 세 나라에는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라는 겁니다. 기독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나 필요하지 그 외에는 별로 상관없는 사회가 된 거예요.”


다석 류영모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 왼쪽부터 방수원 현동완 류영모 김흥호 함석헌.

-이 인터뷰의 문패가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유영모'지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함석헌과 다석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해주시죠.

“함 선생이 오산학교에 다닐 때 다석이 교장으로 오셨어요. 그 전에 평교사로 가서 한 몇 년 가르치다가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나올 때 다석은 표층적(表層的)인 기독교를 버렸습니다. 두 살 아래인 동생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무리 기도를 해봐야 효험이 없어 기복신앙이 소용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톨스토이가 죽으면서 붐이 일었을 때 다석도 톨스토이에 관심을 갖고 그를 연구했습니다. 그 무렵 노자의 도덕경과 불경을 배웠습니다.

함석헌 학생이 교장으로 온 다석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석도 함 선생을 특별한 제자로 생각했습니다. 다석이 일제의 간섭으로 1년 만에 교장 노릇을 못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함 선생이 배웅하러 나가는데 다석이 '내가 오산에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보네'라고 특별한 관계임을 말했습니다. 그 후에 계속 사제 관계를 유지했는데 나이는 10살 차입니다. 생일이 똑같습니다.”
함석헌은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다석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당대에는 함석헌이 세속적으로 다석보다 유명했다. 그가 입만 열면 "다석이 나의 스승"이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석을 알게 됐다. 오 교수는 캐나다와 한국에서 여러 번 함석헌을 만나 깊게 교류하면서 다석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오 교수는 다석을 만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생각한다고 책에 썼다.

-말년에 두 분 관계에 묘한 갈등과 결별이 생깁니다. 다석 제자인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전기>에 보면 함 선생의 여자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옵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여자 문제는 흠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세계 종교인 57명의 반열에 함 선생님을 올린 뜻이 궁금합니다.

“조금 곤란한 질문인데 나름대로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에 거론된 사람 중에 여자 문제와 관계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겸 종교학자로 꼽히는 폴 틸리히도 여자 문제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실존철학의 대가 마르틴 하이데거, 인도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마하트마 간디도 여자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도 마찬가집니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이름 높아진 다석

함 선생님의 문제를 알지만 그런 문제보다는 함 선생님의 심오한 사상, 실천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과(功過)가 있는데 저는 공을 보고 그 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론토에 사는 목사님이 나 보고 '폴 틸리히가 여자 문제가 있는데 왜 자꾸 인용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폴 틸리히의 깊은 통찰은 내가 종교를 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다석이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바꿔놓고,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서 정작 본인은 나중에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함석헌 선생이 한때 따르던 무교회주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요? 다석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과 탈(脫)종교화 현상은 다른 건가요?

“다석은 미리 깨달은 거죠. 문자주의적 믿음이 현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거죠. 계몽주의 이전 시대에서는 목사나 신부,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거의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몽주의 시대가 지나가고, 현대 과학 생물학이나 심리학 같은 학문이 발달하고, 특히 인터넷 속에서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데, 2천, 3천년 전의 세계관과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교리를 강요하는 종교는 설득력이 있을 수 없죠. 지금 그런 걸 강조한다면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입니다.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죠.
그런데 류영모 선생은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었어요. 함석헌 선생이 처음에는 김교신 등 무교회 사람들과 같이 <성서조선> 운동을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도 무교회주의에 처음에는 호응했지만 나중에는 결별합니다.

일본인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신학은 소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류영모 선생님의 해석은 완전히 달라요. 류영모 선생은 사상을 풀어갈 때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를 가지고 풀이합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에서 세로로 선 것이 사람이고 가로로 누운 것은 땅, 위의 점은 하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이냐, 인간이 땅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하는 표시'라고 풀이합니다. 대속(代贖)신앙이 아니라 자속(自贖)신앙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인데 정통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서 예수가 죽음으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다석은 그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자기의 씨(신성)를 각 사람 속에 심어줬다고 해석합니다. 우리 속에는 전부 신성이 있고, 불교에서는 그걸 불성, 유교에서는 인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참나, 얼나 이런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하늘에서부터 주어진 씨라고 보는 것이죠.”

-미국에는 교회 신자들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며 예배를 드리면 스트레스가 줄고, 가깝게 지내는 교우도 생기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생각하며 나쁜 유혹에 덜 빠지고… 그런 착한 신앙도 기복신앙, 표층 종교라고 비판할 수 있는 겁니까?

가나안 교인과 안나가 교인


“저는 교회의 공동체적 요소를 좋게 생각합니다. 서로 가깝게 지내면서 돕고, 우의를 다짐하는 것은 좋습니다. 제 형님도 미국 LA에 사는데 교우들이 모여서 매일 아침 골프 치러 가고…. 세상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은 교회 말고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형제나 일가친척도 그렇게 자주 만나지 않지요.

그러나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갈등과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목사 편과 장로 편, 오래된 신도와 새 신도 편 등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고 호소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교인들, 거꾸로 '안나가' 교인들이 많아지는 것이지요.

교인들이 오래 산다는 말이 정확한 통계에서 나온 말일까요. 교회에 안 나가는 북유럽 나라들의 평균 수명이 더 길 것 같은데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제가 LA 어느 목사님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목사 사모들의 경우 생명보험비가 더 높다고 하더군요. 스트레스가 아주 높기 때문이죠. 목사 사모라는 특수 위치 때문에 자기의 전공을 살리지도 못한 체 교회에 묶여 있어야 하고, 남편 목사가 여신도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불평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교회가 사교적이고 즐겁기 만한 모임이 아니고, 자기들의 이기적 '제나'를 추구하는 투쟁의 장소가 되기 쉽습니다. 이상적인 '얼나'를 찾는 장소로 적합한지 다시 생각해봐야죠.”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박하늘 인턴기자)

<오강남 교수 약력>
- 1941년 출생
- 1965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학사
- 196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석사
- 197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76년 캐나다 맥마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Ph.D)
- 1980~2006년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비교종교학 교수
- 1986, 2011년 서울대학교 객원교수
- 1990~98년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
- 1991~96년 북미한국인종교학회 회장
- 저서 "도덕경"(1995, 개정판 2010), "장자"(1999년), "예수는 없다"(2001, 개정판 2017년)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2011, 개정판 2019) 등 다수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④ 오강남 교수 <下>






내가 오 교수와 처음 만난 것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하던 2001년경이다. 오 교수는 그때 현암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펴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개안(開眼)을 하는 느낌을 받고 동아닷컴에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을 읽은 오 교수가 서울에 왔을 때 신문사로 찾아와 처음 만나게 됐다. 그 뒤로 나는 종교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그에게 전화나 메일로 자문(諮問)을 했다. <예수는 없다>는 2001년 5월 초판이 나온 이래 개정판까지 42쇄를 찍은 장기 베스트셀러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보면 정통 기독교인 중에는 오 교수의 안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기독교 계통의 어느 목사가 ‘하느님 보호해주심으로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고, 설사 감염되더라도 성령의 불로 깨끗이 낫게 되리라’고 장담했는데 그 사람도 코로나에 걸렸어요. 트럼프처럼요. 오 교수가 최근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교회’라는 글에서 ‘교회에 모여서 코로나를 낫게 해달라고 합심 기도를 하는 그 집회 때문에 코로나가 더 확산된다’고 지적했던데요. 하느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건가요?

“전광훈 목사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기도나 종교 행사와는 관계가 없고, 방역이 중요합니다. 마스크를 쓰느냐, 손을 잘 씻느냐, 혹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막을 수 있는 거지, 기도한다고 안 걸리는 게 아닙니다. 코로나가 ‘저주냐, 축복이냐’ 하는데 저주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저주도 되고 축복도 된다고 봅니다. 코로나를 기도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모이면 점점 퍼지고 이건 저주가 돼요,

예수님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고, 한두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함께 모여 예배를 할 수 없다고 야단인데, 비대면으로 조용히 예배 드리고, 이런 기회에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 속의 얼나를 찾는다면 축복이겠지요. 내 속에서 우러나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 혹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 얼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글에서 코로나 이후 소위 기복(祈福)신앙,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내려온 인과응보 사상이 힘을 잃을 것 같다고 했는데요.

“하느님이 착한 사람에게 상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 준다면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죄를 지어 그렇게 됐고, 걸리지 않은 사람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게 되죠. 코로나 걸린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것입니다. 세월호에서 죽은 순수한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인간이 겪는 행복과 불운을 신의 상벌(賞罰)로 가르는 것은 오늘날 먹히지 않는 사상입니다. 그걸로 사람을 협박하면 안됩니다. 달라이 라마가 <종교를 넘어>라는 책에서 “인간이 잘해서 나중에 극락 간다, 못해서 지옥에 떨어진다, 이런 식의 협박이나 회유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면 속에서 좋은 일을 하면 즐겁고 나쁜 일을 하면 스스로 고통이 되는 것을 감지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성지 포탈라궁 앞에서. [사진=오강남 제공]

-오 교수가 한국에서 신흥종교가 번성한 데는 정감록 비결의 영향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데요. 이제는 국립공원이 된 계룡산에 옛날엔 불교, 기독교 계통 신흥종교가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도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풍수설이 전해지고 비결서에 새 왕조의 터전으로 지목되면서 신흥종교들이 모여들었다는 거지요. 왜 기독교계 신흥종교들까지 십승지지를 찾아갔을까요.

“한국의 신흥종교는 대체적으로 혼합종교적(syncretic) 특색을 가집니다. 이것저것 필요하다면 다 받아들이지요. 예를 들어 절에 삼신각이 들어와 있다든가, 기독교에서 새벽 예배를 드린다든가 하는 것은 한국 샤머니즘적 요소가 들어온 것이라 봅니다. 정화수 떠놓고 장독대 앞에서 빌던 치성의 연장이죠.”

-한국 교회가 일제시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급성장했고, 서울에는 궁전같이 크고 화려한 교회들도 많은데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한국 교회는 복 받고 부자 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머리 둘 곳이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으리으리한 건물을 짓고 거기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모순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한국 기독교 상당수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황금을 섬기는 맘모니즘(mammonism)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 하면 대형교회를 떠올리기가 쉬운데, 내가 아는 몇몇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은 참 존경스러워요. 교회를 나오는 사람이든 안 나오는 사람이든 아이들을 통학시켜주고, 어려움을 도와주지요. 상당수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제왕과 같죠. 천국에 가도 그보다 좋은 대접을 받긴 힘들 겁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대체로 배타적이죠. 왕왕 불상 훼손 행위를 저질러 사회적 물의를 빚는데요. 다석 사상은 기독교 유교 불교에다 노장 사상까지 들어가 있으니 정통 기독교 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통 기독교인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사실이죠. 종교학을 창시했던 독일인 막스 뮐러가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한 말을 들려주고 싶군요. 여러 종교를 뒤섞고 혼합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내 종교라도 어떤 위치에 있는 건지, 어떤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지, 서로 비교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스 큉은 '종교 간 대화가 없으면 종교 간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 평화가 없으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대화를 해서 네 종교가 어떤 것인가, 내 종교가 어떤 것인가 알아야 합니다. 요즘은 타종교라는 말도 안 쓰고 이웃 종교라고 합니다. 이웃 종교가 서로 상생하고 도와주는 길벗으로서 살아가면 서로 좋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힘쓰게 됩니다.”

동서양 종합한 독창적 종교 사상

‘종교 없는 삶’의 저자 필립 주커먼(Phil Zuckerman)은 '오이즘(Aweism·경외주의)'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종교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는 삶의 태도다. 캐나다와 미국의 알래스카 주에서는 태평양에서 자란 연어들이 자신이 태어난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어 사냥꾼인 물개나 곰이 목을 지키는 위험한 여로다. 밴쿠버에 있는 오 교수의 집 옆으로도 태평양으로 통하는 개울이 있는데 10월이면 알을 낳기 위해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을 만날 수 있다.

암컷들은 목숨을 걸고 수천km 떨어진 고향을 찾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 그러면 수컷들이 알을 부화시키고 따라 죽는다. 오 교수는 이것을 아하이즘(Ahaism)이라고 바꾸어 부른다. 봄에 파란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온다든가, 겨울에 앙상한 가지에서 꽃이 핀다든가 그런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대우주의 움직임이나 신비스러움을 발견할 때 ‘아하’하고 감탄하는 것을 ‘아하이즘’이라고 한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아하’ 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아우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기적인 것은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어느 쪽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오 교수는 종교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산 밑에서는 약간의 나무와 꽃들이 보이지만 올라갈수록 멀리 호수와 넓은 들판이 보인다. 그 때 ‘아하!’ 하게 된다. 새로운 발견이다. 종교는 어느 면에서 ‘아하! 경험의 연속’이다.
“옛날에는 깨달음을 얻었다든가 심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 했어요. 왜냐면 그때는 98% 이상이 문맹이었어요. 심층종교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앉아서도 미국, 유럽 유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하이즘’ 혹은 심층에 접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 겁니다. 그러니까 ‘심층종교의 민주화’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항아리에 담겨 있다 1600년만에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이집트의 고대어인 콥트어로 기록돼 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농부가 밭에서 발견한 항아리 속에서 도마복음이 출현했습니다. 오 교수님은 도마복음 해설서도 썼는데요. ‘오강남 복음’이라고 혹평하는 목사들도 있더라고요. 도마복음은 기독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4세기경 니케아 공의회에서 승자가 된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승리의 여세를 몰아 4복음서 외에는 모두 폐기처분 하라고 명령했는데, 나그함마디에 있던 사원에서는 나중에 다시 찾아보려고 그랬는지 항아리에 넣어서 땅에 묻었어요. 그러다가 1600여년이 지나 1945년에 발견되었는데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어록 114개만 기록되어 있어요. 행적에 관한 것은 없어요. 예수의 수난이라든가,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에 관해서도 없습니다.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치라’고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은 ‘믿으라 믿으라 믿으라’ 그러잖아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도마는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대비되는 도마복음은 믿음(pistis)이 아니라 깨달음(gnosis)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깨달아야만 거기에서 종교가 줄 수 있는 참된 청복((淸福)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도마복음의 특징입니다.

나의 ‘도마복음’ 풀이에 다석을 몇 번 인용했습니다. 도마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땅 주인이 와서 땅을 되돌려 달라고 하니 그 아이들은 땅 주인이 보는 데서 자기들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다석도 삶을 ‘놀이’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묶고 묶이는 큰 짐을 크고 넓은 ‘한데’에다 다 싣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 버려야 한다. 다 벗어 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 한데로 날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도마복음은 ‘홀로’를 강조하는데, 다석도 해혼하고 홀로 되심을 실행했다고 봅니다.

도마복음과 4복음서는 상당 부분 겹치지만 겹치는 부분도 의미를 달리합니다. 예를 들어 4복음서에서 양이 우리를 빠져나와 길 잃은 양이 되지 않습니까? 불쌍한 양이 되어서 예수님이 양을 안고 다시 우리로 들어온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도마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길 잃은 양이 아니라, 99마리의 양들과 달리 너무 특출하기 때문에 거기에 그대로 섞일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스스로 그 무리를 탈출해서 자기 나름의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용감한 양입니다. 그래서 양을 찾았을 때 예수님이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더 귀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은 용기를 가지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를 강조합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엘레인 페이젤스(Elaine Pagels) 교수는 도마복음 전문가인데, ‘도마복음이 만약 폐기 처분되지 않고 기독교 전통의 일부로 남아있었다면 지금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훨씬 쉬워졌을 것’이라는 얘기까지 합니다.
도마복음에서 하는 예수님 말씀이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제 책 제목을 ‘또 다른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문 마지막에 ‘도마복음이 기독교와 불교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99마리 이탈한 한 마리 양은 자유로운 영혼

-오 교수가 ‘교회를 지배하는 신학은 암흑시대라고도 하는 중세와 근대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면서 ‘교회를 개혁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신학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아까 말한 대로 무엇보다 신관(神觀)이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하늘 위에 계셔서 낮고 천한 인간을 보시면서 잘한 사람은 칭찬하고 못한 사람은 벌주고 나중에 죽어서 잘한 사람은 천당 보내고, 못한 사람은 지옥 보내고, 이런 식의 신관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걸 가지고 교회를 유지하는 방식은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유럽 같은 데서는 안 되잖아요.
지금 젊은이들은 ‘나는 종교적이 아니다. 나는 영성적이다’하는 말을 씁니다. ‘전통적인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내 속 깊이의 영적인 영성에 주목하고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고 나를 찾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신관과 성경관 역사관이 통째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맞는 패러다임에 입각한 그런 기독교가 탄생해야지요. 그것이 제가 말한 심층종교적 요소를 받아들인 기독교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이 류영모 함석헌 선생이 지향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종교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

-다석 류영모의 기독교관을 보면 톨스토이가 상당히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요.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다석은 독창적이라서 어느 한 사람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명상해서 발견한 것을 독창적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 괴테, 이런 사람들보다 어느 면에서 더 위대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사람들은 서양에서 태어나 서양 사상만 가지고 생각했어요. 공자나 노자는 동양 사상만 가지고 생각했고요. 다석은 동양 서양 한국까지 다 알아서 종합적인 사유를 했고, 특별히 한국말을 가지고 자신의 독특한 신학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빈탕 한데’라든가, ‘가온 찍기’라든가.
특히 하느님을 말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하느님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해요.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신이 절대적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없어요. 그렇다고 없다고 말하려니 그것도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노자의 경우는 ‘무’라고 하지만 류영모 선생은 둘을 합해서 ‘없이 계신 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는 불교의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과 비슷한데요. 한문보다는 얼마나 우리한테 착 들어맞는 말입니까.”

-다석 류영모의 종교 철학과 사상이 표층종교적인 신학을 개혁하는 데 빛이 될 수 있다고 보는지요?

“그럼요. 류영모 사상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자극 받아서 새로운 설명 방법이 나와야죠. 새로운 세대에 의미 있는 방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해주는 겁니다. 함석헌 선생은 ‘껍데기를 붙들고 있는 정통 기독교는 역사의 골목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한국에서 지금은 근본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얼마 안 가서 근본주의는 지탱할 수 없을 겁니다. 2015년 통계에 의하면 그 전 10년 사이에 종교인구가 300만명이 줄어들었어요. 어느 목사가 한국에서 코로나 사태 이후 교회 1만개 정도는 없어질 거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넷 예배를 본다지만 교회에서 떨어져 있으면 헌금을 덜 하게 되니 종교는 앞으로 더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는데 어쩌다 세계 각국의 종교를 비교연구하면서 때로는 개신교를 비판하는 길로 나가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0리를 걸어서 경북 안동읍 교회에 갔습니다. 바로 위의 형님이 서울에 있는 교회학교를 다니다 방학 때 내려와 종교와 성경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관심이 커졌어요. 그래서 중학교를 교회학교로 갔습니다. 중학교 1학년, 2학년까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흥미로웠는데 3학년 때 터는 의문 투성이였습니다. 종교에 대해서 뭔가 새롭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와중에 고등학교 때 루돌프 볼트만의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조그마한 책을 읽었습니다. 유동식 교수가 번역한 그 책을 읽으면서 종교를 좀 더 객관적으로 알아보겠다는 마음에서 종교학과를 택했습니다. 그 당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분위기는 주로 서양 종교사상이나 종교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거기서 대학원을 마치고 캐나다 유학을 가서 보니 그 학교는 서양종교와 동양종교를 반반씩 가르치고,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서양종교를 부전공으로, 서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동양종교를 부전공으로 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으로 나갈 때 세계종교를 가르칠 수 있는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그때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150년경~250연경)의 중관론(中觀論)을 연구한 세계적인 학자 T. R. V. Murti 교수의 강의를 1년 들으면서 종교 이해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노장사상과 선불교를 공부하고 화엄 철학에 관한 학위논문을 쓰게 됐습니다. 기독교 교적을 자진해서 정리하고 나니 종교에 대해 홀가분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독자가 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죠.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새로운 시각을 발견했다는 사람들도 생기죠.”

종교 높이 오를수록 멀리 보인다

밴쿠버는 여름에는 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 않은 동네다. 겨울이 되면 낮에는 7도, 여름에는 낮에 더울 때가 25도고 30도를 넘어가는 일이 없다.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온다.
“화상 인터뷰를 하는 지금도 밖에 비가 오고 있습니다. 그 대신 4월부터 10월 초까지는 한국의 초가을 같은 청명한 날씨입니다. 단점을 찾자면 여기는 일자리가 별로 없고 집값이 비싸지요. 그런데 밴쿠버 교민들 중에 여기가 999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천(1000)당에서 한 끗 모자란다고….”
오 교수는 서재의 블라인드를 걷으며 마운드 베이커의 산자락을 보여주었지만 서재 밖의 원경(遠景)은 줌 화면에 잡히지 않아서 아쉬웠다. 아들 셋에 손자는 네 명. 자손에 모두 ♂만 있다. 며느리 둘이 모두 한국계인데 북미에서 태어나 오래 살다 보니 평소에도 영어 이름으로 부른다. 셋째 아들은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여자 친구가 중국계 싱가포르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외할아버지가 한국계다. 두 남녀가 아마 한국계 DNA에 끌려서 가까워졌을 수도 있다.

내가 “50대 중반 무렵의 오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 같은데 지금 팔순에 접어들었죠”라고 묻자 “내년이면 80”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생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말해주시죠. 이 답변을 끝으로 국제 화상 인터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쓴 책의 대부분은 제가 먼저 쓰겠다고 한 것은 거의 없어요. 어디서 부탁을 해서 쓰거나 연재를 한 것을 모아서 쓰거나 한 거죠. 지금도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요청이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책 쓰는데 바쳐야 할까요. 제가 쓴 책 중에 영어로 번역하고 싶은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여력이 있으면 그걸 번역하려고 생각 중이죠. 여기저기 강연 요청이 있는데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못 갔습니다. 올 10월에는 한국 종교 발전 포럼이라고 하는 모임에서 강연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때까지는 상황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골프도 열심히 치려고 합니다. 코로나 끝나면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물 흐르듯이 사는 게 제 라이프 스타일입니다.”(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박하늘 인턴기자)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⑦ -8 김흡영 교수-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 아주경제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입력 : 2021-03-0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⑦ 김흡영 교수<上>

경북 영주는 중국에서 들여온 한국 유학의 본향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享)을 배향하는 소수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감싸고 흘러가는 전형적인 물도리 마을이다. 다양한 형태의 구조를 지닌 40여 채 고택이 옛 그대로 남아 있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다. 이 건물은 선성 김씨 입향조인 김대(金臺)의 손자가 1830년에 건립했고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1879년에 중수(重修)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해우당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시원(始源) 김흡영 전 강남대 신학과 교수(72)는 해우당의 5대손이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자란 그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집안에 파란을 몰고 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무섬마을은 아직도 유교적인 관습과 사고방식이 철저히 뿌리박혀 있다. 한국의 큰 마을에는 으레 교회가 들어서 있지만 무섬마을에는 교회가 없다. 국가에서 유교 문화 존속 마을로 공인했다. 김 교수는 해외에 오래 있었고 신학과 교수를 지내다 보니 고향 마을에 가면 가끔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 연구하고 묵상하고 글 쓰는 곳은 소수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소백산 자락에 있습니다. 영주에 살다 보면 ‘아직도 기독교는 우리 종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의 글방에서 산 너머로는 부석사, 왼쪽으로 소백산 비로봉이고, 오른쪽으로는 소수서원입니다. 유불선의 고적을 가까이 두고 ‘나의 신앙 기독교는 무엇인가’를 20년간 명상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 다석이 좋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GTU 신학대학원 전 총장 다니엘 레만 랍비(가운데)와 현 총장 유리아 김 박사(왼쪽)가 해우당을 찾았다.[사진=김흡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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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원래 공학도였다.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나와 전공을 살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그 후 미국 뉴욕에서 무역상사 주재원 생활을 하다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집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아내는 유교 풍습이 배인 집안에 시집와서 처음엔 나와 종교 문제로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나는 이방 종교인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다투다 보면 저희 집사람이 항상 마지막에 꺼내는 말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이더라고요. 내가 논쟁에서는 밀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이라는 소리는 머리에서 뱅글뱅글 돌았죠. 하나님이 뭔지 알아야겠다 싶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가 쓴 ‘도의 신학 Ⅱ’라는 책의 부록에 나오는 간증처럼 하나님께서 밤 중에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연히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유가로 똘똘 뭉친 집안에서 자란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가 기독교에 귀의한 후 1982년 어머니 장례식 때 사달이 났다. 아버지는 종교에 관해 관용적이었다. 그는 장남으로서 맏상주의 유교적 권한을 행사해 어머니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렀다.
“그때 나는 아주 적극적인 기독교도였습니다. 종파는 장로교였죠. 1970년대 뉴욕의 한국 교회들이 엄청난 전도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었어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하늘나라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게 최고고 절대였죠. 그 누구도 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덕을 베풀어 일가친척과 동네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요. 장례식에 400~500명이 모였는데 기독교로 장례를 치르니 어른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는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이 옛 식으로 따로 하시더라고요. 나를 지극히 아껴주던 큰어른은 매우 슬픈 표정으로 ‘네놈이 어떤 신앙과 종교를 가져도 좋지만, 천 년 이상 지켜온 전통을 깨버릴 줄은 몰랐다’ 하고 돌아서서 가버리셨습니다. 그때 내가 깜짝 놀랐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결과는 친척에 큰 아픔을 주고 우리 전통을 깨버리는 배신이었습니다. 이게 과연 옳은가. 거기서 나의 신학이 시작된 것이죠.”

"이웃 종교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지금 다시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다면 기독교 식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죠. 지금껏 내가 30년간 한 일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외국의 신학자들이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한국 기독교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한국 종교의 막내라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우리의 과거인 전통 종교를 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장례식과 유교 장례식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는 장례식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죠. 기독교 장례식의 주체는 하나님이죠. 진행은 목사가 하지만. 유교는 주체는 조상이고, 진행은 가족이 합니다. 신의 권위보다 조상에 대한 효(孝)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에선 철저히 신의 권위 아래서 하지요. 유교적인 장례는 효를 가장 중시하는 거죠. 기독교는 조상과 관련된 제사를 미신적 요소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죠. 귀신하곤 사실 관계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이제 가장 강력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천년이 넘는 유교 불교의 전통 앞에서 기독교의 독특성 차별성이 중요했지만 우주를 섭리하는 하나님을 진정 믿는다면 이웃 종교를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김 교수는 다작(多作)이다. 공저를 포함해 저서가 39권 (영문 25권, 한글 14권)이고 논문도 58편이 넘는다. 다석 류영모에 관한 저서인 <가온찍기>(2013)에는 ‘다석 류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고 학술서로는 드물게 3판이나 찍었다.

“미국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와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GTU에서 10년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종교의 광석을 찾는 게 나의 큰 고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 한국의 사상가 퇴계와 왕양명을 비롯해 신유학을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들어왔더니 강남대 동료 교수가 날 보고 이화여대 교회에 가서 김흥호 목사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고 해서 따라나섰죠. 김 목사가 우리의 경전과 성경을 비교해서 강의하더라고요. 김 목사가 그동안 강의한 카세트를 몇 백 개 주더라고요. 출퇴근할 때마다 차 속에서 들었습니다. ‘아차, 이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다석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서 <가온찍기> 표지

다석을 세계에 어떻게 소개시킬 것인가? 다석의 기독론을 영문으로 제일 먼저 썼는데요. 20세기 말 정평 있는 세계적인 수준의 종교 분야 단행본에 다석에 관한 글을 올린 건 내가 처음일 겁니다. 그 다음부턴 내가 개발한 ‘도의 신학’에 관련된 글들에서 조목조목 다석의 통찰을 집어넣고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석을 이해하는 해외 학자들이 늘어나는 데 도움을 줬다 할까요. 강남대학의 대학원 코스에도 최초로 다석 강좌를 넣었습니다.

다석은 정말 자유스럽게 동서를 회통(會通)해 풀어냈습니다. 과연 이것을 서양 기독교 신학 체계 속에서 기독교를 배운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고민했죠. 다석 사상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광맥입니다. ‘아이고 다석 멋지다’ 라는 찬탄으로 그칠 게 아니라 교육의 소재로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후학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저서 <가온 찍기>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반문화적으로 이식되고 기계적으로 전수된 서구적인 신학을 추종하기를 원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보수적인 풍토에서 다석의 독창적인 생각을 다른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했다.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본다면….

“지금은 정통 보수 기독교인들이 다석의 사상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울 겁니다. 그러자면 껍데기를 여섯 번은 벗어야 하니까요. 알을 까는 것처럼. 특히 한국 기독교는 너무 굳어지고 단단해져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어느 정도 열려있는 기독교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서삼경을 구약 대접하라’는 다석의 말은 동양문화라는 바탕 위에서 기독교를 바라본 인식을 잘 드러낸 말 같은데요. 동양의 전통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바라보던 ‘선교사 신학’이 한국 교회를 주도하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 아닌가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종교의 흐름 속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분입니다. 한국 기독교계보다는 세계 기독교계가 더 빨리 다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다석은 학자들에게 정말 힘든 숙제입니다.
영어로 논문을 몇 편 쓰고 있는데 정말 어려워요. 기독교의 지평을 넘어서 동양의 모든 경전을 회통하는 개념을 외국인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힘이 들어요. 그 다음 문제는 한글이에요. 한문은 세계적 수준에서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한글은 다석이 또 새로운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어 놓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다석이 ‘산보’ 또는 ‘정신 하이킹’이라고 이름을 붙인 기도문이 있습니다. 내가 ‘산보’를 stroll(sanbo), 정신 하이킹을 spiritual hiking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서구 신학자의 제자들에 의해 이끌려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전략도 외국 신학의 제자가 된 사람을 개혁하는 것은 어렵고, 오히려 외국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목표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으로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다석은 ‘최후까지 진실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사람은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시지 않았습니다’라고 여러 군데서 강조하더군요. 그렇지만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김흡영 교수는 다석을 기독교라는 신앙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고 싶었던 김흥호 이화여대 전 교수의 신학과 맥이 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일단 다원주의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신학을 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놓고 외국 신학자와 논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서구에는 기독교밖에 없었잖아요. 그들은 선교를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오니까 엄청난 종교들이 있던 거예요. 그래도 서구보다 열등하니까 계몽시켜야 하겠다고 선교를 했지요. 그러나 아시아의 종교들은 기독교보다 오래된 종교들이라 파면 팔수록 뭔가 나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기독교밖에 없고 기독교가 최상이라는 종교적 생각을 가진 서구 사상에서 나온 인식론적 개념이죠. 선교 전략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우린 기독교 이전에 유교 불교 도교 등 여러 종교가 있었는데 여기에 기독교가 끼어든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종교의 다원성이 우리의 맥락입니다. 전혀 모르다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서구의 종교다원주의를 그대로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기본이 안 된 거죠. 한국의 종교는 상생적이고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지만, 서구적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못 살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종교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은 종교 전쟁이 없어요.
다석은 기독교를 넘어선 사람이죠. 한국 종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한국적 신학을 할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라서 그렇게 한 게 아니죠.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주장하면 얘기를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제도권 테두리 벗어났지만 예수의 제자"

-다석은 기독교 테두리의 안에 있었습니까? 밖으로 나갔습니까?

“기독교의 제도권 테두리는 벗어났으나 예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도를 따라간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김흥호 목사의 계보냐는 질문을 한 것이라면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 직접 불러주신 나는 어떠한 계보도 없습니다.”

-해방 후 신학은 ‘신학 오퍼상’들이 들여온 ‘수입신학’ ‘번역신학’의 천국이었다고 서술했더군요.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보다 앞섰던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그건 학자로서, 제 범위를 벗어나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학교육에서 교재와 같은 책이 한 권 있었어요. 유동식 교수가 한국 신학의 광맥으로 감신대의 정경옥(자유주의), 총신대의 박형룡(보수주의), 한신대의 김재준(진보주의) 교수를 꼽았습니다. 셋 다 모두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박형룡과 김재준 두 분은 장로교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정경옥은 시카고에 있는 개럿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분들이 미국에서 잠깐(2~5년) 배운 걸 한국에 수입해서 가르친 거죠. 그러니까 한국 신학의 광맥은 서구 신학, 특히 미국 신학이 뿌리라는 건데 그게 말이 됩니까. 

서구 신학은 서구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의 신앙 고백이죠.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에 신학의 광맥은 그게 다일 수 없지요. 신학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하면서 자기가 느낀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자기의 이해와 통찰을 체계화한 것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한국신학의 광맥은 오히려 다석 같은 분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신학 공부를 40년 했는데,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총체적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남의 것을 베끼고 남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지 않더라도 제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한국의 자생적 신학을 한 대표적인 분으로 단연 류영모를 꼽겠습니다.”


김흡영 교수(왼쪽)와 대담하는 황호택 논설고문.[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의 좌우명인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 중에서 일인(一仁)의 해석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인이 늘상 걷는 것이라는 해석은 누구한테 나온 것인지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김 교수의 저서 ‘가온찍기’에서는 십자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에서의 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적 행위를 통해 인을 실현한 것에서 다석은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는데요. 이것이 일인의 해석에 더 적합해 보이는데요. 다석은 동광원 강의에서는 ‘성언 인’이라고 했어요.

“다석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한문처럼 여러 의미를 가지는 문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독특한 천재성 때문에 끊임없는 논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요. 한 신학자가 하버드에서 내 논문을 가지고 발표를 했는데 한국어를 전공한 한 참석자가 한글은 표음문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석하냐고 질문해서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석은 표음(表音)문자를 표의(表意)문자로 바꾸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동광원 강의에서 ‘성’은 몸이 성하다는 의미입니다. 몸을 비하하는 건 다석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석의 사유에 있어선 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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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석의 숨신학과 몸신학은 선불교의 실천수행법인 참선 같은 인상을 줍니다. 다석의 숨신학 몸신학은 선도(仙道)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그리고 몸신학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A: “우선 ‘몸신학’ ‘숨신학’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독자들도 가끔 혼란스러워 하는데, 이 용어는 다석이 아니라 제가 창안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다석을 선도 수행자로 보는 입장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김흥호 목사는 스스로 호흡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선도 수행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다석의 글을 읽으면 머리에 잘 들어와요. 그렇지만 수행을 안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도의 맥을 잇고 있는 국선도에서는 3가지 기본적인 수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조신(調身), 둘째는 조심(調心), 셋째는 조식(調息)입니다. 조신은 몸을 성히, 조심은 마음을, 조식은 숨을 고르는 것입니다. 
다석이 바탈을 닦는다고 말씀하실 때 단전호흡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선도 수련에 중요한 성명쌍수(性命雙修)라는 말은 성(후천의 바탈)과 명(선천의 몸과 숨)을 동시에 수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선도는 성명쌍수 중 성의 수련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석 사상을 말할 때 보통 성 수련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몸 수련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석의 핵심 사상인 ‘빈탕한데 맞혀놀이’하늘의 움직임과 내 숨과 몸의 움직임이 공명(율려)해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을 이해하려면 선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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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정리=이주영 인턴기자>

<김흡영 교수 약력>
-1949년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1년 서울대 항공공학과 졸업
-1972년~73년 대한항공 근무
-1973년~83년 대우, 삼화 등 종합상사 해외주재원 근무
-1986년~87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신학, 교역학 석사
-1992년 GTU 철학 박사(신학 및 종교철학)
-1993년~2014년 강남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 교수
-1997년 하버드 대학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2002년~ 세계종교과학학술원(ISSR) 창립정회원
-2005년~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
-2006년~2012년 아시아신학자협의회(CATS) 총회 공동의장
-2007년~2008년 일본 도시샤 대학 ‘유일신 종교 학제간연구소’ 등 선임연구원
-2012년~2013년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2020년~ 예일대학 종교와 생태포럼 자문위원
-저서로는 <道의 신학>(2000)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2006) <道의 신학Ⅱ)(2012) <가온찍기>(2013) <왕양명과 칼 바르트>(2020) 등 영문 25권, 국문 14권이 있고 논문은 58편 이상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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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짜기 정신에서 세계 사상 나온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3-10 16:28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⑧ 김흡영 교수<下>

조선 사회는 유교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본산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인 사회가 됐다. 유학의 지나친 보수성과 배타성으로 결국 조선 유교사회를 멸망시켰다고 김흡영 교수는 <가온찍기>에서 지적한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1,000년 동안 꽃을 피웠다. 조선에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왕실의 여인들까지도 불교 신앙에 의지했다. 조선은 국방의 중요 부문을 사찰과 승려에 의존할 정도였다. 개신교는 유교 불교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세계 최대의 교회가 한국에서 나왔다. 북한의 김일성교를 종교로 분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세계에서 공산주의가 멸종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이 과잉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본 주제입니다. 저는 이걸 골짜기 멘탈리티(mentality·사고방식)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골짜기 사람들이라 처음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대신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오랫동안 원형을 간직합니다. 세계에서 불교나 유교나 한국처럼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중국도 불경 원전이 없어져서 한국에 와서 원전을 받아간 적이 있고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중국엔 유교적 제사 같은 것이 사라져서 한국에서 배워갔죠. 한국의 이데올로기도 공산주의 자본주의 둘 다 원형에 가깝죠. 그런데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올 때부터 근본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도 골짜기 멘탈리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경을 읽어보면 6장에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현빈지문 시위천지근(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골짜기의 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이것을 현빈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Mysterious Female(신비로운 여신)로 번역을 하지요. 이 현빈의 문이 천지만물의 근본이지요. 사실 모든 게 골짜기에서 시작하거든요. 사람도 현빈의 골짜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골짜기가 모든 것의 시작, 시원(始源)이에요(김 교수는 始源을 字로 쓰고 있다). 그런 의미로 바라보면 한반도가 세계의 골짜기라고 볼 수 있죠. 다석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살리는 사상과 영성은 한반도 골짜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흡영 교수가 소수서원 취한대를 찾았다. 그의 고향인 무섬마을은 여기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다. [사진=경향신문 제공]
 
-류영모 신학은 지나치게 금욕주의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요. 다석사상의 대중화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요?

“(웃음) 지금 이 질문이 다석의 제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참 치열하게 다석을 따라서 일일일식(一日一食)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석의 윤리와 일상은 몸서리치도록 치열합니다. 나도 몇 년 일식을 해봤는데, 나는 좋지만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해요. 내가 밥 먹었는지 여부를 아내와 자식이 신경 쓰기 시작해요. 밥 먹을 때와 배고플 때는 표정부터 다르니까…. 나는 도를 닦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주는 거예요. 학교에서도 배가 고플 땐 강의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고요. 물론 제가 도가 모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석은 귀한 도인이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율배반적이에요. 그분이 ‘빈탕한데’ 즉 텅빈 데를 주장하신 분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도 꽉 차 있거든요. 누가 들어설 틈이 없어요. 말은 ‘비워 두라’고 하지만 꽉 찬, 그래서 사실 몸과 이웃이 품어지는 공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는 그런 의문도 가질 수 있죠.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몸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생각을 갖게 됐을지도 모르죠.”

그는 여기서 다석의 큰아들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석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버클리대학 도서관에서 사서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다석 자료를 찾고 있으니까 그분이 관심을 표시하더라고요. 자기가 다석은 직접 못 만났지만 다석의 아들과 교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석의 아들이 워싱턴에 살 때 은퇴하고 세상을 뜰 때까지 거의 매일 워싱턴 대학 도서관에 나오셨대요. 그분은 언어에 천재적이었답니다. 대학을 안 나왔는데도 박사과정의 한국인 학생들을 많이 도와줬대요. 다석 어른의 고집 때문에 대학도 못 가고, 대학자가 될 만한 소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대학의 도서관에 앉아서 소일 삼아 후학들을 도와준 거죠.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다석이 우수한 아들에게 기회를 안 준 거죠. 과연 그런 교육이 옳은 것인가. 그러한 태도가 다석 사상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후학들은 그걸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다석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첫째아들 의상은 해방 후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다 6·25 전쟁이 나자 일본 맥아더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공문을 번역하고 미군방송에서 우리말 방송을 했다. 의상은 휴전 회담을 할 때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했을 만큼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 그는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김흡영 교수의 글에 나오는 다석의 아들은 의상이다. 둘째 자상은 평창에서 농사를 지으며 벌을 치고 젖양을 길렀다. 다석은 여름 8월 한달 동안 YMCA 강의가 쉬는 때면 매년 둘째 아들네 평창 농장에 갔다. 다석 부부와 자상의 묘소가 평창에 있다. 셋째 각상은 무선통신사를 하다 일본 여인과 결혼해 일본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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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수행 중시한 다석 사상, 몸과 얼 이원론으로 나눠선 안돼

-그리스도교 신학이 종교개혁 이후 말과 글 중심으로 환원되어 몸을 망각했다고 ‘가온 찍기’ 책에 썼는데요. 서양 기독교사에서 종교개혁 이전 중세에는 실천수행이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중세까지는 수도원에서 몸을 쓰는 그런 수행 전통이 있었죠. 제도권과 수도원은 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제도권은 항상 부패하게 되고 그러면 기도원 운동이 일어나서 기독교가 새로워지는 식이죠. 루터가 위대한 종교개혁 사상을 펼쳤는데, 내가 보기에 큰 역할을 했지만 독이 되기도 했어요.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구원이 개인보다는 교회와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졌거든요.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Coram Deo)을 신학의 핵심으로 본 점은 엄청나지만, 개인주의적이고 영혼 중심주의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의 몸이 날아가 버렸죠. 나라는 것은 영혼일 뿐만 아니라 천지인 중에 몸과 함께 연결된 ‘점’입니다. 천지인이라는 큰 맥락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온찍기입니다. 그걸 분명히 해준 이가 다석이죠. 과거의 기독교에선 그러한 몸 수행이 있었지만, 근대에 와서는 상당히 약화했고 그것을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다석의 통찰이 굉장히 유의미합니다.”

실제로 다석은 요가 체조 등을 통해 몸을 단련했다. 그 때문인지 하루 한 끼만 먹고서도 91세까지 장수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워가 다석의 인간론, 몸신학의 핵심이라고 했는데요, 모든 경전이 이 세 가지의 가르침에 수렴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다석 몸신학을 요점만 쉽게 설명해보세요.

“몸을 성하게 한다는 것은 ‘참몸’을 만드는 거죠. 체조를 통해서. 다석이 체조(體操)라고 했어요. ‘맘놓이’는 정조(情操)라고 하세요. 참마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죠. ‘바탈태워’는 지조(志操)라고 하셨어요. 의지, 바탈을 닦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몸 고르기(調身), 마음 고르기(調心), 숨고르기(調息)와 연관이 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이분의 ‘성명쌍수(性命雙修)'에서 성을 고르는 것(바탈태워)만 볼 게 아니라 몸과 숨을 연마해서 명을 고르는 게(몸성히, 맘놓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에서 바울이 예배의 최고의 경지는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거라고 했어요(로마서 12장 1절). 다석이 그것을 기독자(基督者)라는 한시로 기막히게 표현했습니다.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내 몸이 숨을 쉬는 게 기도다. 기도란 생명의 원기인 하나님을 들이마시고 쉬는 것이라 했죠. 찬미반주건맥박은 성가대가 악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뿐 아니라 내 맥박이 뚝딱 뛰는 게 찬미반주라는 것입니다. 이게 몸신학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몸에 대한 통찰을 통해 얼나로 나아가는 것이 다석의 핵심이라고 하면 틀리진 않았지만, 몸의 중요성이 희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몸나가 곧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이기적인 나’라는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몸을 비하하고, 정신에 비해 육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서구 이원론에 맞닿게 될까 우려됩니다. 주역을 공부해보면 지천태(地天泰)라는 괘가 나옵니다.
  지천태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은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삽니다. 하늘은 빛을 아래로 비추고 땅은 물을 올려주어야 합니다(水昇火降). 그래야 나무와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은 땅이고 얼은 하늘이죠. 성명(性命) 수행은 얼이 내려가고 몸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죠. 혼(얼)은 올라가고 몸이 내려가면 혼비백산이란 말 그대로 되는 파멸의 길입니다. 몸은 필요 없고 정신만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성적 문제는 어떻게 몸인 지구를 회복시키는가에 있어요. 우리의 몸을 살리자면 어떻게 독을 빼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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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공지능이 나오고 코로나도 뛰쳐나왔습니다. 이 골치 아픈 몸을 없애고 수퍼 머신 바디(body)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개선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첨단 기술에 의해 완전히 성능이 증강된 인간 이후의 존재자인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등장을 예고하는 시대입니다. ‘영생을 꿈꾸는 초지성이 되어야 한다’ ‘몸을 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종교와 인류가 처한 최대 난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몸나’ ‘얼나’로 구분해 따지고 있으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거죠.

생태계 파괴한 근거 제공한 기독교 자성 나와야

-다석의 한글 놀이는 재밌지만 어렵습니다. 그의 한글신학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한글창제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요? 다석의 한글 사랑에 대한 김흥호의 해설을 읽다보면 구약에 나오는 유태인의 선민(選民)사상을 닮은 것 같습니다. ‘한글은 우리 민족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한글은 하나님의 글이요. 정음은 복음이다. 한글만으로도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저도 다석 선생님의 한글놀이를 ‘참 재밌다’ ‘오묘하다’ ‘어떻게 이분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무릎을 칩니다. 기가 막힌 용어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한글을 다시 창제한 거죠. 다석의 한글 사용을 훈민정음 시대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서양어의 단어도 시대에 따라 바뀌지요. 다석이 한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묘하게도 한글은 철저하게 천(天) 지(地) 인(人)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이버 시대에 가장 잘 통용할 수 있는 글자라고 볼 수 있죠. 한글엔 틀림없이 그런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신 글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석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결국 철학 신학 특히 인문학은 언어의 싸움입니다. 현대의 대표적 철학자 하이데거는 모든 철학을 독일어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깊은 통찰, 철학, 사상을 알려면 먼저 우리의 언어의 지평으로 들어와라, 그러고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를 배우려면 독일어를 열심히 하고, 독일어 안에 들어가서 그 어원을 찾아내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하는 정도까지 갑니다. 다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생태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성경에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자연파괴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를 비롯한 어려운 위기를 가져온 종교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20세기 중반부터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생태신학은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서구와 세계를 지배한 로고스 신학은 철저하게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몸과 자연을 비하하고 억압하는 데 별 문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도(道)의 신학을 주장해왔습니다. 정신 중심의 로고스 신학에서 몸과 자연 친화적인 도의 신학으로 모형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여성의 소중함을 복구하고 생태계를 복구해야 한다는 것을 에코 페미니즘(eco feminism)이라고 합니다. 생태의 위기를 맞아 서양에서 내놓은 가장 유력한 신학이고 사상인데, 아직도 서양의 이원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 사상이나 태극 사상은 상극을 넘어 상생을 주장해왔습니다. 생태신학에 다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몸나 얼나로, 몸과 얼을 갈라놓으면 다석의 중요성이 희석될 수 있습니다.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서구의 영혼 중심적인 사유체계에서 몸과 숨의 영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것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다석 사상에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꾸로 몸과 얼을 자꾸 구분하려 드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염통 노래' '밥통 노래'는 왜 했겠습니까? 염통을 바라보면서, 염통이 몸에서 하는 무언가를 보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몸으로 수행하며 하는 얘기거든요. 몸통 노래, 밥통 노래를 이야기하는 분을 두고 몸과 얼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면 핀트가 어긋난 것이죠. 숨도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목숨, 말숨, 우숨으로 나뉘거든요. 그의 사상은 결국 몸과 숨으로 말과 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말과 글의 신앙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본래 신앙은 말을 넘어서 몸으로, 글을 넘어서 숨으로 하는 차원의 신앙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구 생태신학의 경우 몸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숨이라는 걸 모릅니다. 숨이 사실 가장 중요한데, 숨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기계 인간이 되고 인간이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 사이버 세계와 기계인간이 인간과 다른 점은 몸과 숨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 아시죠? 게임을 할 때 자기 아바타 속에 들어가버려요. 아바타와 자기를 분리하지 못해요. 그건 고치기 힘든 병이 되어버립니다. 아바타는 몸과 숨이 없거든요. 그러한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성의 비밀이 몸과 숨에 있는데, 그걸 몸과 얼로 나누기 시작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의 책에서 다석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시기적으로 언제쯤입니까. 다석도 기독교에 대한 사상이 변화를 겪지 않습니까. 부활은 로마의 국교가 된 뒤 예수가 신격화하면서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던데요.

”동광원 마지막 강의 같은 것을 들으면, 분명히 그분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성육신 신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평신도들 앞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느라 그런지 모르지만 그 자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미국의 동양계 신학교육자들이 유교예절 교육을 받았다. [사진=김흡영 교수 제공]

-다석은 “예수의 재림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고 정말 해야 할 일은 예수를 따라 자기의 생명완성에 정진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다석은 예수의 재림에 부정적이었나요?

“기독교 신앙과 예수를 얘기하면서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석도 예수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의 문제는 어느 신학자도 다 고민하는 거예요. 재림이 있다고 하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값싼 은총을 믿는 사람들에겐 굿 뉴스지요. 그러나 이미 천당 가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삶의 현장 속에서 윤리와 도덕을 간과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이 큰 것이죠. 우리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과 사회적 도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재림의 문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현재 이 시점에서 예수의 도를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데 방점을 찍어야지, 재림을 기다리면 된다는 식의 싸구려 신앙은 곤란하다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제목인 가온찍기를 쉽게 설명하면….

"‘가온찍기’라는 건, 기역은 하늘, 니은은 땅이고. 그 사이 ‘아래 아’는 천지인의 자리 속에서 자기의 참 자리를 찾아서 찍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천지인이라는 연결망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내는 거죠.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하늘(하나님)과 땅(자연), 그리고 나의 관계성 속에서 통합적이고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나’라는, 즉 ‘참나’를 찾는 것부터 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죠.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웃음)”

“어려운 얘기지만 쉽게 얘기하겠다”고 해놓고 더 어려워진 것 같다.

-학자로서 앞으로 구상을 말해주기 바랍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서울에 있습니다만 봄이 되면 다시 서울과 영주를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신학자로서 한국 기독교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과거와 단절되었거든요. 우리의 과거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과학기술의 시대입니다. 코로나와 기후변화 같은 것도 과학기술을 통해 또 해결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 시대에 우리의 신앙, 종교, 영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다석의 통찰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국내에서 도의 신학을 대중화하고 또 세계로 나아가 도의 신학 및 몸과 숨의 영성을 가지고 죽어가는 지구촌을 살리는 영성의 자료로써 이바지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는 “다석이라는 선지자는 내가 지금 발전시키고 있는 ‘도(道)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광맥의 하나”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 정리=이주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