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성령.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성령. Show all posts

2021/07/21

'성경'의 성립ㅡ 김진호 박사 (신학자, 목사) 강연 : 네이버 블로그

'성경'의 성립ㅡ 김진호 박사 (신학자, 목사) 강연 : 네이버 블로그


한국종교발전포럼


'성경'의 성립ㅡ 김진호 박사 (신학자, 목사) 강연

이하 이만식

2019. 2. 22. 10:28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2월 종교발전포럼에 참석하였습니다. 서울대암연구동 이건희홀 로비, 새벽 6시 30분에 포럼을 이끄시는 #박재갑 박사님은 어김없이 맨 먼저 회원들을 맞이하십니다.








오늘 주제는 '성경'으로 신학자이자 목사님이신 김진호 박사님 강연입니다. 지난번 주제인 '불경'과 같이 알고 싶었던 종교 경서 성립에 대한 내용이라 찬바람 새벽길도 설렘으로 녹입니다.

https://youtu.be/xf4US4Ln5XQ





강연 에필로그, 가슴에 담고 귀교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ㅡ갈라디아서"














https://m.blog.naver.com/iha2006/221260181685






<한국종교발전포럼>

http://www.koref.org/sub/forum_catalog.php?CatNo=33박재갑 박사님(서울대 석좌교수, 초대 국립암센타...

m.blog.naver.com



상처로부터 출발하는 기억의 신앙사

성서는 역사의 기억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림1] king josiah hears law / 2kings22,10

성전 깊은 곳에서 오래된 법전이 발견되었다. 왕명에 따라 성전 정비 사업에 여념이 없던 대사제 힐기야 그는 유다 왕국 말기의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아버지다.

는 즉각 왕의 최측근인 서기관 사반에게 보고한다. 당연히 그것은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은 그 문건 내용에 접하자 옷을 찢는다. 왕이 자신의 어의를 찢는다는 것은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는 신호다. 왕실과 예루살렘, 그리고 전국 곳곳에 왕명이 전달된다.

바야흐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시작되었다. 불순한 것을 척결하여 야훼 앞에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지방 성소들을 훼파하였고, 제관들을 처형하거나 축출하였다. 이렇게 지방의 제의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왕실 이외의 세력에게 독자적인 정당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종교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몰수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 대중 공동번역은 이들을 ‘지방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는 ‘암하아레츠’ 곧 ‘땅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회적 실체에 대하여, 최근의 정교한 문헌학적 연구들은 ‘농민 대중’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는 견해를 도출해낸다.

은 신앙적으로 지방 성소보다는 예루살렘의 중앙 성소에 귀속되게 될 것이 기대되었다.

이 정풍운동의 다른 차원은 일련의 사회적인 조치들을 통해서 시행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법전을 확대하여 법률을 반포한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신명기〉의 원본으로 추정된다.

이 조치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한 가문의 재산이 보다 강한 다른 가문에게 복속되는 것을 억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몰락하거나 몰락 위기에 있는 가문을 보호하는 복지적 체계를 강화한 것이다. 농민 대중의 왕실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대지주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약화하려는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역사 편찬 작업이 활발히 전개된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이른바 ‘토라’ 묶음이 편찬되고, 또 〈판관기〉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등, 학자들이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사서 묶음의 최초 버전이 구성된다. 창조 때부터 왕조사에 이르는 일련의 파노라마적 선민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제1성서(=구약성서)의 역사틀은 이렇게 구축된다.

이 정풍운동은 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요시야 개혁’이라고 불리게 된다. 빈약하나마 고고학적 증거나 문헌적 증거에 의존해 본다면, 그것이 성서가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거나 성공적인 결과를 이룩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고, 몸속 뿌리 깊게 박힌 대중의 습속도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 요새에서 갑작스레 서거한 이후, 유다 왕국은 급속히 쇠락했고, 이후 30년이 못 돼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하지만 요시야 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운동은 유다 왕국 멸망 이후까지도 계속되어, 제1성서에 수록된 ‘토라’의 최종 형태에까지 이들의 시선은 깊이 새겨졌다. 또 ‘신명기적 역사서들’의 최종 형태는 거의 이들의 관점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제1성서에 포함된 위대한 예언자들의 담화집들이 묶인 것도 주로 이 운동의 소산이었다. 이들 신명기적 역사서와 예언집들은 훗날 정전(canon) 형성 과정에서 제1성서의 두 번째 요소인 ‘예언’으로 분류된다. 정경을 형성한 유대인들은 제1성서를 다음 세 요소로 분류하였다. ‘토라’(율법서), ‘예언’(예언서), ‘책들’(성문서).

토라도 그렇지만, 특히 ‘예언’ 파트는 야훼신앙의 역사관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제1성서 ‘예언’의 편찬 정신의 핵심에는 요시야 개혁이 자리잡고 있다.

요시야 개혁이 시작되던 당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성전 깊숙한 곳에서 법전이 발견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느 과자와 같이, 이 기억의 단자는 깊숙한 곳에 망각된 채 방치돼 있던 과거를 현재의 시공간 속으로 이끌어낸다. 왕은 옷을 찢는다. 아니 망각, 그 변조된 기억으로 직조되어 온 왕조 전통을 찢어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기억을 굴절시키고 변형되게 한 체계를 청산하는 일이다. 요시야 개혁의 주체들은 개혁의 이유를 이렇게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그릇된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기억을 처벌해야 한다. 지방 성소들을 불 지르고 그 사제들을 처벌한 것은, 그리하여 지방 성소를 완전히 폐쇄시킨 것은 바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 기억의 코드를 단절시키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위해서 다른 기억을 망각의 창고 속에 가둬야 한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청산될 역사의 처벌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 요시야의 조부였던 히스기야 왕 시절 만들어졌던 각종의 개혁적 제도들은 친아시리아적인 므낫세 정권 치하에서 불온한 기억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기억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이때 개혁 정책의 토대가 됐던 ‘법전’이 성전 깊은 곳에 처박혔다. 요시야 왕은 이 처벌된 기억을 다시 망각의 창고에서 꺼내어 개혁의 실마리 기억으로 삼은 것이다.

그때마다 역사를 주도하면서 기억을 관장했던 세력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처벌될 기억을 그릇되고 사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역사 청산은 사악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치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기억의 전쟁은 언제나 ‘과거의 진실’을 들이댐으로써 현재적 존재의 부당성 혹은 정당성을 판별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현재의 권력 투쟁과 맞물린다. 요컨대 과거의 진실이라는 것은, 그때 실제로 그랬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호출한 이들의 시각에서 편집된 기억이다. 다만 기억을 둘러싼 전쟁의 ‘게임의 법칙’은 그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이들이 그것이 편집된 것임을 알지 못해야 한다. 기억의 전쟁 당사자는 자신의 기억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가운데 싸움에 임한다.

왕을 포함한 요시야 개혁의 주체 세력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억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그것이 개혁 세력의 시각에서 무의식적으로 편집된 기억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야훼신앙의 역사관에 대해 질문하려는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시야 개혁이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 신앙적 기조에 있다.

요시야 개혁의 실마리 기억을 제공해 준 법전은, 앞서 말한 것처럼, 농민 대중의 재산 보호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런데 〈신명기〉 26장에는 의미심장하게도 ‘회복’된 땅(재산)에서 햇곡식을 드리는 제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햇곡식의 봉헌례는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시간’에 관한 제의를 함축한다. 물론 그것은 낡은 시간들에 속하는 제의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전제된다. 새로운 기억은 낡은 기억을 배제한다.

그런데 문맥에서 보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된 땅’에 돌아와 불하받은 토지에서 얻은 소출에 관한 것이지만, 요시야 개혁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대지주들에 의해 몰수당한 땅을 개혁 사업을 통해 회복하게 되는 상황을 암시한다. 아마도 개혁 주체 세력은 이 정풍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미래에는 땅을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농민 대중에게 선포하였을 것이다. 과거에 선조들에 관한 역사적 기억은 농민 대중에게 ‘미래의 꿈’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현재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 과거는 미래를 생산하며, 현재를 조직한다.

그런 점에서 햇곡식을 드리며 고백하라는 다음의 ‘역사적 신조’는 요시야 개혁이 추구하는 ‘기억의 정치’의 핵이 담겨 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주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 26장 5~9절

우리의 헌법 전문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이라고 시작하는 데 반해, 요시야 개혁은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역사적 신조를 시작한다. 곧 개혁 주체가 선사한 약속은 ‘강대국에의 꿈’이 아니라 ‘구원에의 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강력해지면 모든 백성의 구원 소망이 실현되리라는 비전보다는, 모든 백성이 꿈꾸는 구원의 세계가 실현됨으로써 국가는 존재 의의가 확인되고, 그럼으로써 야훼의 후견 아래 놓이게 된다는 주장이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도식화해본다면 전자가 위로부터의 시선에서 본 꿈이라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꿈이다. 요컨대 요시야 개혁의 종교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아래로부터의 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정치적 자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성서의 역사관은 바로 이러한 소망의 코드와 연계되어 있다. 곧 대중의 꿈에서 과거와 미래의 기억의 실마리가 추적된다. 위대한 영웅의 뿌리에서 혹은 신의 혈통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 아니라, 강자들에 의해 ‘괴롭힘당하고 사정없이 부림당하는 착취의 대상들’이 품는 구원의 소망에서 유래한 선민의식이다. 머물 곳도 연명할 것도 없는 약한 자들을 선조로 둔 이들, 그러한 조상에 관한 기억을 역사의식으로 간직한 이들, 그러한 기억 속에 구원에의 꿈을 품으며 사는 ‘우리’가 바로 야훼 백성의 자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민족주의에 흡수되어 버린다. 그래서 “야훼께서 오신다 / 사막에 길을 내어라 /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 벌판에 ‘큰 길’을 내어라.”(〈이사야서〉 40,3)는, 바벨론에 유배당한 이들의 귀향에의 꿈을 실은 신탁을 선포한 익명의 예언자의 목소리는, 실제로 귀향한 유대인들의 자폐적 종족주의(민족주의)의 ‘큰 길’ 신학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대로’(大路)를 통해 야만적 학대를 받으며 끌려갔던, 거할 곳도 연명할 것도 모두 상실하게 된 이들이, 귀향한 이후 새로 구축한 체제의 비전을 제국의 ‘대로’를 모방하여 설계한 것이다. 예언자가 제국의 ‘대로주의’를 빗대어 역설적으로 말한, 사막을 뚫고 개설된다는 길, 그 불임의 시공간에 던져진 대중의 고통을 가로지르는 절절한 소망의 길이 제국적 성공을 꿈꾸는 민족주의적 꿈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러한 변질된 꿈에 기반을 두고 그들은 순수 혈통주의를 추구했다. ‘오염된’ 타자를 가려내고, 그들을 마음껏 저주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물론 배제될 타자에 대한 폭력은 항상 보복할 힘이 없는 약한 자들을 향했다. 그러한 증오를 통한 자기 재생산의 장치로 발전한 것이 바로 ‘율법’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한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의 제도는 훌륭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많이 담고 있음에도 오염된 것과 정결한 것을 가르려는 혈통주의적이고 종족주의적인 강박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강박증은 과거의 기억을 편집한다.

약한 자들의 꿈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제1성서의 역사관은 수난당하는 민족의 꿈에 관한 이야기로 변질되고, 떠돌며 사는 조상들에 관한 기억은 영토에 대한 민족주의적 집착으로 해석되었다. 바로 이러한 야훼 신앙의 율법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훼손된 대중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역사의 집행관들에 의해 처벌당했다. 그와 함께 그런 이들에 관한 기억도 처벌됐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예수에 관한 기억은 살아남았다. 알다시피 제2성서(=신약성서)는 예수를 통한 야훼 신앙의 훼손된 기억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예수를 통한 기억에서 초점은 대중의 아픔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시야 개혁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예수의 특징은 더 철저하고 더 구체적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라고 들었으나”라는 〈마태복음〉의 율법 비판의 말은 예수에게서 진정한 말의 권위는 율법의 기억(전통)이 아니라 그 말과 관련된 상황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의 상처에 관한 기억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사역에 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예수에게서 대중의 아픔보다 더 중요한 기억은 없다. 모든 것은 대중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하느님의 구원의 품에 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율법도 민족도 심지어는 하느님 자신도, 모든 숭고한 기억의 단자들도 상처 입은 이들을 감싸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

in 김진호 / 가톨릭 월간지 《성서와 함께》(2005 01)에 실린 글



◇ ◇ ◇



맺음글_





가톨릭의 아우구스투스나 프로테스탄트의 마르틴 루터, 그리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그리스도교 신학의 제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세 사람의 신학은 바울 해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것은 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바울의 해석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주 일찍부터 나타났는데, 제2성서(신약성서) 27개 텍스트 가운데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라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울의 서신들이 1세기 말경에 이미 그리스도의 공동체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서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역사적 횡포에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도 바울을 특별히 주목하게 했다. 니체가 그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바울이 예수를 교회의 도그마로 왜곡, 전락시킨 장본인이라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심지어 비판적 신학자들에게도 나타났는데, 자유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바울이 기독교 신앙을 왜곡한 정통주의의 원흉이라고 생각했고, 여성신학자 루이제 쇼트로프(Luise Schottroff)는 그를 남성 쇼비니스트(male-Chauvinist)라고 비판했으며, 김창락의 바울 연구를 접하기 이전의 민중신학자 안병무도 바울이 왜곡시키기 이전의 신앙을 찾고자 역사의 예수에 주목했다.

한데 나는 이 책에서 바울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도록 전개되었던 기독교의 바울 수용사를 괄호치고, ‘기독교 이전’의 바울, 곧 기독교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실존했던 인물 바울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바울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소환하고자 했다. 이렇게 바울과 오늘의 기독교/교회를 연결하는 단단한 인습적 코드를 해체하고, 바울과 오늘의 사회를 연결짓는 질문 방식은 알랭 바디우, 그리고 어쩌면 조르쥬 아감벤의 문제제기와 비슷하다. 또한 북미의 급진주의적 성서연구자들인 닐 엘리엇이나 리처드 호슬리 등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책은 1세기의 제국 로마와 21세기의 제국 미국 사이에서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바울을 읽어내고자 했던 엘리엇이나 호슬리보다는, 유민과 난민들로 북적되는 1세기와 21세기의 세계에서 난민 혹은 유민들로 구체화된 두 사회의 민중과 함께 했던 바울을 해석하려 한 바디우와 아감벤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다.

내가 보기엔 바디우나 아감벤의 문제의식, 그 배후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유럽, 그 세계에서 발생하는 유랑하는 혹은 추방당하는 민중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활동했던 1세기 지중해 세계가 그랬다. 그와 비슷하게 나는 오늘 한국,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97년 이후의 한국을 떠올리며 바울을 물었다.

한데 나는 오늘의 한국을 ‘도시국가 서울’이라고 불렀다. 돌진적 근대화로 치닫던 한국의 도시와 농촌의 개념과는 달리, 농촌의 독자성이 거의 괴멸되어 가는, 서울에 귀속된 부속도시들과 촌락들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서울, 그것이 내가 바울을 묻는 나의 시공간이다. 그런 오늘 여기의 시공간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는 바울이 활동한 도시들, 특히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을 살폈다. 도시국가 서울이 ‘21세기적’으로 지구화하고 있는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라면, 바울의 도시들은 ‘1세기적’으로 지구화하던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었다.

이 두 세계는 많은 다른 점이 있지만, 또한 유사성을 갖는다. 그것을 나는 민중신학적 관점에 따라 ‘귀속성’(attribution)의 문제라고 보았다. 즉 시공간의 경계들을 무자비하게 뒤흔들며 무수한 이들의 귀속성을 심각하게 교란시켜버린 지구화되고 있는 세계의 문제가 두 다른 세계의 유사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압박 속에서 비자발적으로 귀속성을 상실한 채 유랑하는 이들이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으로 유입되고 있는데, 이곳은 중심부메트로폴리탄보다 더 폭력적으로 유랑자들의 생존의 기회들을 짓밟아버리는 공간이다.

한데 바디우나 아감벤은 바울의 현장 해석에서 너무 안이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바울의 세계를 읽어내려는 치밀함의 결핍 때문이다. 그들은 도처에서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비웃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 무지함과 무능함을 넘어서고 있는 새로운 연구 성과물들에 대한 독서의 게으름을 도처에서 들키고 있다. 심지어는 그들이 비판하고 있던 신학과 성서학의 낡은 패러다임의 감옥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구속시키기도 했다.



반면 그 점에서 민중신학자 김창락의 연구는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디우가 바울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 현장성의 문제를 중요시했지만, 정작 바울의 현장성을 스케치하는 데 가장 놀라운 성과를 이룩한 이는, 내가 보기엔, 김창락이었다. 그에 의하면 바울의 의인론은 자신의 현장에서 벌인 핵심적 논쟁의 무기로 개발된 것이다. 다시 그의 의인론의 결론을 얘기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차별이 없는 의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창락은 이것을 바울의 인권투쟁이라고 보았다. 즉 주권 없는 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신학적 담론이 의인론이라는 얘기다.

나는 김창락이 논한 의인론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하나의 가설을 제시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이 활동하던 기원후 1세기 중반은 해안 지역의 노동자의 거의 30%에 달하던 노예경제가 붕괴되고 무수한 노예들이 방출된 시기였다. 이들 방출 노예들은 대도시들로 유입되어 들어왔고 도시의 하층 노동시장을 크게 교란시켰다. 이것은 이들 방출 노예들에 대한 사회적 증오와 적대를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었고, 이에 방출 노예들은 어떻게 해서든 도시의 ‘콜레기아’들에 속하려는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 이민자 사회의 자치결사체들이 대다수인 콜레기아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스라엘 교포 사회가 주축이 되는 이스라엘 종교의 자치결사체였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 자치결사체로 유입해 들어왔다. 그중 다수는 방출노예였다. 해서 이 시기에 이스라엘 자치결사체에는 자연증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구의 커다란 증가가 있었다.

한데 이스라엘 자치 결사체에 편입된 비이스라엘계 사람들은 최소한 두 부류가 있다. 하나가 테오세비우스, 즉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가 개종자다. 여기서 전자에 대해서 이스라엘 교포사회는 별반 반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자치결사체를 위해 많은 기부금을 냈고 또한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는 굉장히 논란거리였다. 그들은 기부금을 낼 처지도 못됐고 품격 있는 면모라곤 최소한 만큼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스라엘 자치결사체 내에는 개종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가장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적 성향이 강한 유대주의자들의 말발이 들어 먹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알다시피 바울은 이들 유대주의자들과 정반대의 편에 섰다. 그는 개종자들의 편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싸웠고, 아무것도, 아무런 품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은혜를 선사하는 신을 설파했다. 바로 그런 주장의 절정에서 유대인도 헬라인도, 자유인도 노예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남자도 여자도 차이가 없다는 말이 덧붙여진 것은, 유대주의자들이 강변한 할례 주장이 가장 보수적인 여성 배제의 논리였기에, 개혁파인 바울이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의인론은 바울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 내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으로 헤게모니를 실현해 가고 있던 유대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방출노예의 편에서 활동한 결과였고 과정이었다. 하여 그는 이들 속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선사하였다.

나는 이러한 바울을 보면서 서울을 본다. 그리고 서울에서 벌어지는 시민의 반민중적, 혹은 민중 혐오적 양상들을 읽어낸다. 나아가 그렇게 사회를 만들어 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헤게모니적 체계들을 주목한다. 한편 이러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바울을 찾기 위해 나는 교회 안과 밖을 두루 살핀다. 아마도 그 바울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며, 교회 밖에서 배척된 이들을 이웃으로 삼는 일에 몸 사리지 않고 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바울을 찾아내고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다. □



in 김진호, 《리부팅 바울》(삼인, 2013) 맺음글



◇ ◇ ◇



영들로 세일즈하게 하라!





영성 마케팅

마케팅학계의 구루라고 불리는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의 책 《마켓3.0》은 산업사회의 ‘마켓1.0’과 소비사회의 ‘마켓2.0’에 이어 ‘마켓3.0’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보면서, 각 시대를 특징짓는 키워드를 각각 ‘이성’, ‘감성’, 그리고 ‘영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성’이라고 함은 기능성이나 욕망을 넘어서 가치를 상품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라고 코틀러는 해석한다. 역시 마케팅학계의 구루답게, 현상의 징후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가 그리는 미래의 자본주의는 참 매혹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코틀러의 해석은 차라리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영성 마케팅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최근에는 코틀러의 예측처럼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향후 거대한 시대의 대세가 될 것처럼 보인다. 한데 이때 영성 마케팅은 ‘종교적 신비체험의 상품화’라고 하는 게 더 객관적 지적이다. 즉 종교적 신비체험이 하나의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점술가가 복채를 받고 고객의 길흉화복에 대해 조언해주는 것이 가장 일상적인 영성 마케팅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한 스마트폰 회사 경영자는 아이폰의 등장을 스마트폰의 감성화라고 해석하면서 향후의 스마트폰에서 대중은 영성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스마트폰이 추구하는 미래 마케팅 전략은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고객이 종교적 신비체험과 같은 종류의 감성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코틀러의 ‘마켓3.0’론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상품화 능력의 탁월성, 아니 전능성일 것이다. 하여 인간의 체험 중 영성까지 상품화한다는 것은 상품이 되지 않고 남은 인간의 체험은 더 이상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하여 우리는 향후에 이런 자기계발의 명령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들로 세일즈하게 하라!”

〈사도행전〉 16장 읽기. 정신의학과 역사학적 비평을 중심으로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주목하게 된다. 이 텍스트는 ‘영성 마켓’에 관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것은 우리 시대의 ‘마켓3.0’의 논점을 비판적으로 읽는 데 훌륭한 전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에는 ‘프뉴마 퓌토나’ 들린 여성이 등장한다. 한글 새번역 성서는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이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그 헬라어 성서본에는 “프뉴마 퓌토나 들린 파이디스케”로 되어 있다. ‘파이디스케’(παιδισκη)는 인신이 타인에게 예속된 어린 여성을 뜻하니 ‘여종’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다만 고대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결혼가능 연령이 12세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는 아마도 12세를 넘지 않은 소녀였을 것이다.

문제는 ‘퓌토나’(πνευμα πυθωνα)인데, 인접어인 ‘퓌톤’(πυθον)이 ‘점쟁이’를 뜻하고 ‘퓌토네스’(πυθωνες)가 복화술사를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뉴마 퓌토나’는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는 점술사, 그 안에 들어가 점술을 하게 하는 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구절은 입을 열지 않고 소리를 내는 방식의 점술행위를 하는 노예소녀를 의미하는 것이겠다.

점술은 일종의 예지능력이다. 그것을 고대인들은 현상세계 이면의 세계와 대화하는 능력으로 보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 예지능력자가 현상세계 밖의 존재, 즉 영과 접신한 결과라고 이해했다. 하여 이 소녀는 접신자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녀 속에 프뉴마 퓌토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사도행전〉 16장의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그녀가 바울을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면서 그의 사역을 방해한 모양이다. 이제까지 바울은 아라비아와 시리아,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다. 특히 시리아 북부와 소아시아 동부는 바울의 활동 본거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서부 해안에도 활발히 활동한 결과 바울의 주요 거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서쪽, 이오니아 해를 건너, 생면부지의 땅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으로 길을 떠났다.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니 많이 설렜겠다. 그렇게 떠난 길의 첫 목적지가 바로 빌립보다. 과거 알렉산드로스가 난 곳, 어쩌면 바울은 이 도시가 한때 세계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게 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다. 한데 이곳엔 야훼의 회당(쉬나고그)이 없다. 단지 성밖으로 흐르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 한 곳에 기도처(프로슈케, προσευκη)가 있었을 뿐이다. 이스라엘 교포사회가 형성되지 않았고 소규모의 비공식적 예배 모임 정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잠잘 곳, 먹을 곳, 만날 사람 등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러다 프로슈케에서 루디아(소아시아 서부 지역) 출신의 한 여성 사업가를 만났고, 그녀로 인해 비로소 기식할 곳이 생겼으며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에게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거리에서 겨우겨우 뭔가를 말하려 하는데, 그때마다 한 소녀가 따라다니면서 그의 말을 방해한다. 그녀가 말한 ‘내용’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바울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녀의 말이 상황에 부적합한 것이라는 데 있다. 일종의 ‘경계선 장애’ 증상이 바울과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로막았던 것 같다. 바울은 부아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하여 그녀를 향해, 아니 일반적인 통념처럼 이 점술가의 몸속에 들어가서 그녀를 지배하는 영, 본문이 말하는 바로는 ‘프뉴마 퓌토나’를 향해 버럭 소리 지른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한데 이 축귀 발언 직전의 그의 심사를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귀찮게 여겨서”(디아포네떼이스. διαπονηθεὶς). 여러 영어 성서본들은 이 단어를 훨씬 더 강한 불쾌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단어인 annoy로 표현한다. 그녀에 대한 애틋함이 전혀 없이, 단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도로서의 소명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분노가 축귀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성서의 축귀 장면들에서 이처럼 인간애가 결여된 텍스트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텍스트에서 소녀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이 사건 이후에 소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텍스트는 무관심하다. 오히려 텍스트가 관심 갖고 있는 것은 그녀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이 복수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필경 그녀가 점술사 길드에 속한 노예였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길드(guild)란 동직조합을 의미하는데, 고대로마 사회에서 사용된 용어로는 콜레기아(collegia)다. 콜레기아(collegia)는 지중해 해안 지역 도시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데, 인구 혼합이 크게 진척되면서 스스로의 안전과 이해를 위해 형성된 일종의 자체결사체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종족적, 종교적 콜레기아다. 하지만 국제무역이 발달하면서 동직조합 성격의 콜레기아도 무수히 만들어졌고 그것이 일종의 길드인 셈이다. 그리고 빌립보에서는 점술사 콜레기아들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소녀는 그중 한 점술사 콜레기아에 속한 노예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점술 능력이 무력화된 소녀에게 일어난 일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무능력해진 많은 노예들의 운명처럼, 그녀는 죽임을 당했거나 매춘업자에게 팔려갔거나 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렇다면 바울의 축귀 행위는 소녀를 둘러싼 저간의 사정, 나아가 이 도시의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섣부른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

좀더 이 도시의 사정을 살펴보자. 바울이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텍스트가 주목하는 것은, 말했듯이, 소녀의 주인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당국에 고발한다. 그 이유는 그녀로 인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데 그 이후 사태의 전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그 소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행동은 고작 영업 방해일 텐데, 그들은 “우리 도시를 소란스럽게 했다.”고, 일종의 소요죄로 고발했다. 일단의 도시주민들이 그들의 주장에 따라 동조시위를 했다고 하니,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과장이 주민들에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국도 그 황당한 고발을 받아들여 바울 일행에게 체형을 가한 뒤에 구금해 버렸다. 체형이란 사람들에게 당국의 지엄함을 과시하기 위한 체벌이고, 고대로마 도시들에서 이는 죽을 만큼 혹독한 매질을 의미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거의 초죽음이 된 몸으로 감옥에 갇혔다.

이런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보기엔, 이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가능성은 이 도시 주민들이 그 천한 소녀에 덧씌워 있는 ‘퓌토나 프뉴마’에 대한 공격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하는 ‘무의식적 과민증상’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그 직전까지의 이 도시의 역사적 체험 때문에 그러하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도시가 겪은 역사적 체험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이 도시에 나타난 때로부터 90년쯤 전 이곳에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인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카시우스(Caius Longinus Cassius)가 이끄는 10만 명의 대군과 이들을 궤멸하려고 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만 명의 대군 사이의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 정규군 전사자만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치열한 전투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하나하나가 살인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로마제국의 정예병사 20여만 명이 맞붙었다. 《풀루타르쿠스 영웅전》의 묘사를 분석하면 이 전투는 전략이 부재한 대군이 단순 충돌한 전투였다. 그만큼 치열했고 피해는 막심했다.

1세기 중반 빌립보 시의 인구는 15,000~2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전투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전투의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자 못지않은 혹독함이 뒤따랐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 이 도시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절대1인이 되기 위한 정치적 격변이 세 번이나 벌어졌다. 그때마다 지배층의 급격한 변동이 있었고, 그들과 얽힌 서민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자신들의 의지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닥쳐온 재앙, 그것에 대항할만한 아무런 수단도 가질 수 없었던 철저한 무력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체험, 이러한 상황에 놓였던 이들 가운데 나타나는 신체와 정신의 장애 현상으로 대표적인 것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이하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다. 아마도 기원전 42년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경험했던 빌립보의 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한 PTSD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PTSD의 전형적 증상의 하나는 과거의 특정한 기억이 때로는 언어적 이미지(가령 특정 진술이나 상황)로 또 대로는 비언어적 이미지(가령 특정 색깔, 냄새 등)로 끊임없이 현재의 삶 속에 침입해 들어와(침습기억, intrusive memory) 안정된 생각과 행동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증세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이(transference)되곤 하는데, 전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의식적 동일화’(unconsciousness identification)다. 예컨대 1980년 광주사건을 겪지 못한 광주의 후예들이 부모나 이웃 어른의 트라우마적 불안 증상을 접하면서 그것에 무의식적 동일화를 체험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때로는 간접체험자 가운데 병증적으로 감정이 전이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는 그러한 병증적 전이로 인해 90여 년 전의 트라우마, 그것의 기억에 끊임없이 침습되는 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속인들의 자기 진술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나 가족, 혹은 타인의 트라우마적 기억에 대한 무의식적 동일화 체험이 영계의 언어를 읽어내는 ‘무(巫)의 감수성’을 갖게 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의 ‘무의 감수성’에 의해 접신한 이가 발설하는 언어는 그 사회의 대중, 그들의 집단적 기억이 투사된 영적 언어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그 접신자를 매개로 사회와 프뉴마 사이의 무의식적인 감정적 공감대가 형성된다. 트라우마적 집단기억은 침습기억처럼 그때의 기억조각을 불쑥불쑥 드러내곤 하지만 그것은 파편적(fragmented)이어서 서사성(narrativity)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PTSD를 겪고 있는 이들의 일반적 증상의 하나는 서사화(narratization)의 붕괴 현상이다. 이것은 특정 사건을 이야기로 풀지 못하는 데서부터 그런 상태가 점점 확대되어 모든 말을 횡설수설하는 식의 언어 장애를 나타내는 데까지 다양하다. 전자에서 후자로 증상은 점점 악화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한데 ‘무’의 감수성을 가진 접신자의 영적 언어를 사람들은 자신들의 단절된 기억과 동일시되는 다른 언어, 즉 환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의 말이 도시주민들의 억제된 기억의 환유로 여겨졌다면, 그녀의 영적 언어 능력을 무력화시킨 바울의 호령에서 사람들은 과거 그들의 부모와 이웃어른들에게 덮쳐와 언어 능력을 무력화시킨 사건들과 무의식적인 동일화를 체감했을 수 있다. 하여 바울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은 그의 언행이 그들의 무의식적 상처를 도지게 했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이 도시 주민들에게 점술에 대한 친근감과 의존성은 크게 확대되었다. 이는 점술산업의 비약적 확대를 가져왔다. 점술자 길드가 속속 만들어졌고, 노예든 자유인이든 점술자들이 고용되었다. 요컨대 영성 마켓이 활성화된 것이다.

그것은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가 점술능력이 무력화되는 순간 점술조합의 주인들에게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사회의 고통을 품은 소녀의 몸은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 사회의 영성 마켓에서 창출하는 이윤만이 그녀의 가치를 대변할 뿐이다.

하여 점술조합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동기는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도시 주민들과 당국을 설득한 언어는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했듯이 그 도시 주민들의 파괴된 기억, 그럼에도 그들로 하여금 존재가 붕괴되지 않고 살아낼 수 있게 한 하나의 비결이 그들의 봉쇄된 기억을 환유적으로 나타내는 그녀 같은 접신자들의 영적 언어 때문이라고 한다면, 도시 대중은 바울의 소행을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고, 하여 당국도 그를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겠다.

빌립보의 바울과 오늘의 교회, 실패의 내력

이런 관점에서 〈사도행전〉 16장을 읽는다면, 우리는 오늘 시대를 보다 깊게 보는 성찰에 이를 수 있다. 필립 코틀러가 말했듯이 우리 시대는 점점 영성 마켓이 활발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영적 체험들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세일즈에 동원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 근대사에서 점술업 단지가 만들어진 것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온 맹인 역술가들이 영도다리 밑 노상에서 점술 거리를 만든 데서 유래한다. 이후 우리사회는 거듭된 격변을 거쳤고, 특히 최근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점술산업은 엄청나게 확산되었다. 2012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점술가 50만 명, 그 매출액이 4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 만화 등에서 좀비나 빙의 소재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도 영성 마켓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증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신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들에서 영성운동 혹은 성령운동이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코칭 프로그램, 힐링 프로그램 등이 종교계 안팎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요컨대 영성은 한국사회에서 이미 거대한 마켓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데 이러한 영들로 세일즈해야 하는 사회, 특히 영성 마켓을 거대하게 창출하는 오늘의 사회는 깊고 구조적인, 개개인으로서는 도무지 대처할 수 없이 다가오는 사회적 고통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영성 마켓의 부름을 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영적 체험까지도 마켓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 우리의 체험들, 결국은 우리의 영적 체험들까지도 그것이 발생시키는 부가가치로만 존재 의의가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처럼 영적 능력이 시장에서 무력화되는 순간 우리의 고용주는 우리를 용도폐기할 것이고, 사회나 국가는 그것을 묵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해 버릴 때 그런 자신을 불러일으키고 자존적 주체가 되도록 일으켜 세울 내적 동력인 영마저도 그렇게 시장적 가치로 환원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소녀의 개인사, 그리고 그 소녀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은 채 섣불리 그녀의 삶에, 나아가 그녀에게 투사된 그 도시사회에 끼어들었다. 선교사라는 그의 소명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방식은 타자의 삶에 끼어들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그 타자가 되었다. 한데 바울은 그녀의 고통과 그 도시의 비극적 역사를 묻지 않은 채 자신의 능력을 과시적으로 드러냈다. 하여 그는 뼈저린 자기 성찰이 필요했고, 〈빌립보서〉 2장의 저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는 바로 그 자신의 처절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그 성찰을 간략히 말하면,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도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사회와 개인이 겪고 있는 아픔들과 절망, 그것이 환유적으로 표출된 종교성을 단순히 귀찮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는 너무 큰 소리로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을 부르짖는다. 그러는 사이 자본주의는 영성 마켓을 확대하고 사람들의 삶 곳곳에 끼어든다. 그리고 나아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영적 자원을 판매하는 자가 되라고, 영들로 세일즈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다. 하여 피로사회에서 존재가 고갈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내적 동력이 되어야하는 영조차도 자본주의적 가치의 평가 아래 귀속시키고 있다. 하여 그리스도교 복음의 실패는 결국 사람들의 고통에 다가가지 못하는 종교, 곧 그리스도교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

in 김진호 / 가톨릭 격월간지 《공동선》(2015 09+10)에 실린 글

2021/07/18

알라딘: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차정식

알라딘: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차정식 (지은이)포이에마2015-04-01

책소개

우리 신학계의 괴물, 근면한 성서학자 차정식의 신약 독법. 신약의 난해 구절, 십중팔구 오해되거나 외면받아온 구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그간 왕성한 에너지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며 묵직한 저작들을 산출해온 차정식 교수가 성서 해석의 길잡이로 나섰다.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저자는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검토한 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을 찾아간다. “학계의 동의를 거쳐 웬만한 결론이 나와 있는 부분은 좀 더 담대히 주장했고, 무엇이 바른 해석이고 온전한 의미인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보다 설득력 있게 대안을 내놓을 만한 꼭지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암시하기도” 했다.
--------------
목차
머리말

1부 복음서 뒤집어 읽기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 _막 14:36; 롬 8:15; 갈 4:6
가난한 자가 복된 이유 _마 5:3
‘예, 예’와 ‘아니오, 아니오’의 역설 _마 5:37
신중한 판단과 공정한 반면교사 _마 7:1-5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내력 _마 7:7-8
‘좋아요’와 황금률 생각 _마 7:12
화평이 아닌 검을 던진 까닭 _마 10:34-39
침노당하는 천국의 실체 _마 11:12
제 논에 물대기하는 ‘이 세대’의 변덕 _마 11:16-17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한 까닭 _마 13:24-30
나무가 된 겨자나물의 비밀 _마 13:31-32
공정한 희생의 샛길 _마 23:29-31
좁은 선교, 넓은 선교 _마 10:5-6, 28:18-20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논쟁 _막 12:13-17
계산하는 믿음, 포기하는 믿음 _눅 14:28-30
‘거듭남’의 본래적 의미 _요 3:1-21

2부 서신서 거꾸로 보기

어떤 믿음이 성서적 믿음인가 _막 10:52; 요 3:16; 롬 10:9; 갈 2:16; 약 2:19 외
초대교회의 빛과 그림자 _행 2:43-47, 4:32-35
변덕의 창의성, 위선의 진보성 _행 10장; 갈 2:11-14
영적인 예배? 합리적 종교! _롬 12:1-2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신 까닭 _롬 13:1-7
하나님의 미련한 것과 인간의 지혜 _고전 1:18-31
미혼의 불안, 비혼의 자유 _고전 7:36-38
바울의 저주, 그 빛과 그림자 _고전 16:22; 갈 1:8-9
연보의 유래, 헌금의 미래 _고후 8-9장
인사말에 담긴 속뜻 _빌 1:1-2
무엇이 덕스러운 것인가 _빌 4:8; 벧전 2:9; 벧후 1:3, 5; 고전 8:1, 10:23 외
상처는 어떻게 권위로 승화되는가 _갈 6:17
해산함으로 얻는 구원? _딤전 2:15
털외투와 가죽책의 사연 _딤후 4:13
그 ‘영’과 ‘옥’은 어떤 영과 옥인가 _벧전 3:18-20

3부 상상하며 바로 읽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_마 7:13-14
하나님의 깊은 속내와 인간의 얕은 심산 _마 13:14-15; 막 4:11-12
천진한 어린이와 몽매한 우민의 역설 _막 10:13-16; 고전 13:11
그 간청함으로 인하여 _눅 11:5-13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_요 8:1-11
더디오 생각 _롬 16:22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 _고전 4:6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 _고전 9:19-23
자족과 형통 사이 _빌 4:10-13

접기
책속에서
P. 5~6 아무리 성서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녹이 슬고 이끼가 덮인 텍스트로 다양한 해석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어느 선에서 옳은 해석과 그른 해석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민을 향해 만 가지의 의미를 토해내는 성서 해석의 춘추전국 시대를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해석학적 지식의 공변성公辨性을 높이고 그릇된 관행과 인습의 시장에서 번성하는 온갖 꼼수의 메시지들과 싸워야 하는 윤리적 사명의 당위성도 높아진다. 더구나 무지가 무지인 줄 모르고 오류를 오류로 인지하지 못하는 세태 속에 독버섯처럼 음습한 권위주의가 번성하는 현장을 나 몰라라 방치하는 것은 성서 연구를 업으로 삼는 자의 온당한 도리가 아닐 터이다.  접기
P. 94 요점은 이렇다. 혼인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의 주연을 맡아 왜 따라하지 않느냐고 겁박하고 우기는 아이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를 아전인수의 기준으로 비방하며 욕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나아가 그들로 표상되는 변덕스런 ‘이 세대’ 전체에 해당한다. 반면 제멋대로 겁박하는 자칭 주연들의 공세에 춤추지도 않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도 않는 묵묵부답한 아이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분신이다. 대꾸할 가치가 없으니 침묵으로 응대하는 것이다.  접기
P. 140 이렇듯 동전이라는 가시적 물질의 등장은 경직된 수사학적 상황을 산만하게 흩어버리는 착란 효과를 동반했다. 이와 더불어 예수는 그들이 던진 질문을 또 다른 질문으로 되받아치는 재치로 그들이 그 동전의 주인공을 응시하게 했다. 이렇게 물러진 수사학적 상황에서 나온 게 바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답변이다.  접기
P. 219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약소민족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지 선조들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로, 주어진 여건에서 일단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현실주의적 선택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 바울의 선택은 주어진 거대 권력체제를 일단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이었다.
P. 284~285 언제부터인지 한국 교회에 ‘은혜’라는 말과 함께 ‘덕’이라는 어휘가 기묘한 의미의 자장을 형성하면서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 파생된 ‘은혜스럽다’라는 형용사는 ‘덕스럽다’라는 또 다른 형용사와 짝을 이루면서 교회 안팎의 모든 세상사를 주물러대고 모든 문제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처럼 그 언어의 권위적 후광을 발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이 언어의 이면에 스민 무의식적 기계장치가 짐짓 수상하다. 어떤 사안에 대한 세밀한 논의와 검증, 비판과 성찰이라는, 피곤하지만 절박한 과정을 생략한 채,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그 이해 당사자들이 제 편한 대로 대강 눙치며 무마하고 봉합하며 흐지부지하는 걸 ‘은혜’와 ‘덕’이란 말을 앞세워 정당화하는 현상이 너무도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심각한 기만이고 우민화의 덫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차정식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신학과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글쓰기로 성서신학을 일상과 사회, 문학의 영역과 연계시켜 크로스오버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신학자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B.A.)와 미국 맥코믹 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하고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향연』『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시인들이 만난 하나님』『바울 신학 탐구』 등 50여 권 (공저 포함)의 저술을 내놓고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상·하)를 번역한 것 외에도 1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꾸준한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신학성서의 환생 모티프와 그 신학적 변용』으로 제1회 한국기독교학회 소망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가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화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성서문예학 연구>,<신약성서와 창의적 설교>,<예수 인문학> … 총 4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포이에마 
도서 모두보기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큰글자책]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2 >,<[큰글자책] 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큰글자책] 탕자의 귀향 >등 총 154종
대표분야 : 기독교(개신교) 18위 (브랜드 지수 263,81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약의 난해 구절, 오해되고 외면받아온 본문에 대한 창의적이고, 설득력 있고, 올바른 해석!
인습과 관행에 매인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우리 신학계의 괴물, 차정식의 신약 독법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는 전투적일 만큼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무리를 놀라게 했던 세금 논쟁의 진실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께서 옥에 갇힌 영들을 찾아가셨다고 하는 베드로전서 3장의 구절은 대체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는 구절은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해괴한 구원론을 설파하는 것인가?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성서학자 차정식 교수가 40편의 글에서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세밀하게 검토한 뒤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간다.

인습과 관행을 넘어서는 치열한 성경 읽기
우리 신학계의 괴물, 근면한 성서학자 차정식의 신약 독법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이 구절은 전투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무리를 놀라게 했던 세금 논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께서 옥에 갇힌 영들을 찾아가셨다고 하는 베드로전서 3장의 구절은 대체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는 구절은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해괴한 구원론을 설파하는 것인가?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는 이 같은 신약의 난해 구절, 십중팔구 오해되거나 외면받아온 구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그간 왕성한 에너지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며 묵직한 저작들을 산출해온 차정식 교수가 성서 해석의 길잡이로 나섰다.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저자는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검토한 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을 찾아간다. “학계의 동의를 거쳐 웬만한 결론이 나와 있는 부분은 좀 더 담대히 주장했고, 무엇이 바른 해석이고 온전한 의미인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보다 설득력 있게 대안을 내놓을 만한 꼭지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암시하기도” 했다.
시발점은 지난 2012년 10월 저자의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이를 보완해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람어 ‘아바abba’가 우리말의 ‘아빠’에 해당한다는 통념이 서구의 한 유명 신학자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친밀하게 ‘아빠’로 부르고 싶은 감상주의를 부추겼고 미성숙한 자아를 감성 일변도의 신앙 취향으로 땜질하려는 경향을 낳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네티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의 말씀에 대한 갈증과 함께 그것을 바로 해석하고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허기”가 심하다는 점을 확인한 이 일 이후, 2년여에 걸쳐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현대종교〉에 글을 연재했고, 그 40편의 글을 엮어 책으로 펴냈다.

편의주의와 아전인수식 해석을 넘어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와 오늘의 독자 사이에는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과 문화적 차이라는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어 원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성서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예를 들어,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마 10:5-6,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과, 부활 사건 이후 주신 당부(마 28:18-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앞에서 독자들은 예수께서 이방인 선교를 명령한 것인지 금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성서 해석과 관련한 이러한 문제는, 특히 대체로 지성적 탐구보다는 화끈한 ‘믿음’을 강조해온 한국 교회에서 더 심각하다. 성서 해석상의 어려움을 치밀하고 끈질긴 정공법으로 돌파하기보다는, 편의적으로 혹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며 왜곡된 이해를 유통시키는 경우가 잦았다. 예를 들어, 로마서 13장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체제에 대한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구절로 흔히 사용되고 있고, 고린도전서 13장 등지에서 가져온 ‘덕스러울’ 것에 대한 강조는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일을 넘기고 마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제목의 ‘거꾸로 읽는’은 ‘전복적으로 읽기’에 앞서 일차적으로는 ‘바로 읽기’를 의미한다. 그간 잘못된 해석이 워낙 광범위하게 유통되어온 터라, 제대로 읽는 것은 기존의 해석의 문제를 바로잡으며 거꾸로 읽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성서의 독자들을 무지와 맹목에서 벗어나도록 계몽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일차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이단의 빈약한 성서 해석을 넘어서
이 일이 중요한 것은 이런 무지와 맹목이 이단 사이비의 모판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잘 알려진 천국 비유 중 가라지의 비유(마 13장)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주인의 말은 때로 기성 교회에서 “개혁이니 변화니 하는 구호로 교회의 내부 질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잘못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단 종파에서는 “이 세상의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는 현상 자체에 착안하여 자신들의 선택받은 위상을 ‘알곡’으로 치부하고 나머지 기성교단의 사람들은 타락한 가라지 세력이라며 공격을 일삼는”(97쪽)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들은 다양하고 풍성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비유조차 자기 종파의 교리적 틀에 때려 맞춘 모범답안을 강요하기 일쑤인데,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런 빈약한 모범답안에 쉽게 현혹된다.

“이단자들은 간단명료한 틀로써 교주가 제시하고 승인한 해답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해온 것만 늘 되풀이하고 그 되풀이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강박적 신앙의 포로로 산다. 그러나 강박과 신앙이 어찌 행복하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이단자들의 신앙 패턴과 삶을 대하는 기본 태도에 자주 황당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주체적인 질문과 모험적인 탐구의 의욕이 없기 때문이다”(62쪽).

최근 한국 교회는 내부의 타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편, 밖으로부터는 신천지 등 이단 사이비의 침투에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부심하다. 한국 교회의 타락과 이단의 창궐은, 결국 오도되고 빈곤한 성서 해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다시 꼼꼼하게 성서를 읽고 비판적으로 신앙을 점검하는 데서 안팎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 설교자들을 포함, 성서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나아가 성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접기

스포일러 포함 글 작성 유의사항 
구매자 (1)
전체 (2)
공감순 
     
마태복음을 다시 읽으면서 복음에 대한 새로움에 목말라 하는 이 때에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쁘고 반갑다. 이 책은 일상 속에서 습관적으로 읽혔던, 읽었던 신약성서를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성서 본래의 의미로 현장 속에서 읽게 하는 힘을 지녔다.  구매
antibaal 2015-06-02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구매자 (1)
전체 (1)
리뷰쓰기
공감순 
     
거꾸로 읽기 전에 성찰부터

동료 신학자 목회자들의 국어실력을 걱정하면서 정작 본인의 문장은 난잡하다.

표현력의 문제는 차치하고 유의미한 내용이라도 있으면 일독하는 의미가 있겠는데 챕터마다 시작의 문제제기는 거창하고 결론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맥아리가 없다.

양희송님의 페북을 팔로우 하다가 차교수의 덧글들이 눈에 띄어 설교도 찾아 들어보고 통찰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 책을 구입했는데 매우 실망스럽다.

책을 구매한 후 벌어진, 최근의 표절논란을 보면 다른 이들의 단점을 지적하는데는 단호하고 자기성찰에는 유연한 듯 보인다.

다른 이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저자에게서 통찰이나 영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 접기
Viewfinder 2016-07-02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차정식 견자(見者) 예수를 앞세운 도마와 도올의 선문답-도올 김용옥의『도마복음한글역주』를 평함

한일장신대학교 > 교수 연구광장 > 견자(見者) 예수를 앞세운 도마와 도올의 선문답-도올 김용옥의『도마복음한글역주』를 평함

2011.07.01 14:57
차정식
------
발행일 2010/06
학술지 신약논단
발행처 한국신약학회
구분 논문
교수명 차정식
------------------
I.

이 땅의 지식사회에서 도올 김용옥의 존재는 그를 둘러싼 복잡한 소문과 극명하게 엇갈리는 개인적인 호오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마력을 동반한다. 남들이 선호하는 한 사립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둔 이래 그가 보여준 행보는 격렬하리만큼 파격적이고 혼란스러웠다. 특히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그가 보여준 과감한 도전과 전복적 언행은 기성 교회에 불편한 원성을 드높였던 게 사실이다. 그는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두루 섭렵하면서 일찍이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에도 관심을 가지고 나름의 연구에 힘써왔던 바, 그 열정의 산물로 빛을 본 근래 몇 권의 책들이 비록 교회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지만 기독교 지식의 대중화에 불을 붙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 교회를 파괴하는 반(反)기독교 지식의 이단적 횡포라고 평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한국 지식사회의 전반적 지형에서 보면 그의 특유한 열정과 사상의 종횡을 가로지르는 모험적 결기, 나아가 그것을 대중에게 전하며 계몽주의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유희술사로서의 역할 모두 나름의 순기능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땅의 신학계를 포함한 우리 지식사회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의 균열이 심하고 배운 것과 사는 것이 겉도는 역리와 배리의 전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자들의 활동반경이 상아탑의 울타리와 교단의 폐쇄적 사육 사이에서 어설프게 휘둘리다보니 그들의 지식이 이 땅에 착근하여 신학의 자생적 근기를 기르기는커녕 서양에서 배운 것조차 활달하게 써먹지 못하는 처지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그러한 분위기를 가중시켜온 감이 짙다. 그 소심한 신학자들의 지적인 미션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도올 김용옥은 좌충우돌 자신의 깐깐한 탐구를 전략적으로 담론화하여 유불선의 동양 경전을 거쳐 이제 기독교 경전의 역주작업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II.
그가 이번에 출간한 『도마복음한글역주』는 도합 3권으로 이루어진 꽤 방대한 저서이다. 여타의 다른 역주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는 저자의 범람하는 지적인 열정이 넘실거린다. 이 책의 저작을 위해 그는 도마기독교의 원산지인 근동의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을 장기간 여행하면서 온 몸으로 자신의 지식을 검증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더했다. 이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동서사상의 합류와 교통의 시도로써 인류 지식의 통섭을 기획하려는 그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특히 서구의 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해온 기독교의 경전을 동양사상을 통해 재조명하려는 저자의 탐험은 마침내 도마복음이라는 문헌에 이르러 황홀경의 해석학적 진로를 개척한다. 그는 무엇보다 감탄하며 도발하는 열정적 지성이다. 일찍이 요한복음서와 Q복음서에 대한 역주를 낸 그는 이 책에서 빈번한 감탄과 감동을 토로하며 역사적 예수의 원류를 붙잡으려는 절박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저자 특유의 적나라한 구어체 문장을 곳곳에 뒤섞어 제조해낸 이 책은 그러한 열정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동양적 예수에 대한 그의 강렬한 신념이 투사된 결과물로 비친다.

도올의 관점에 의해 재구성된 도마복음의 예수는 다음의 몇 가지 간단한 논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가령, 도마복음은 영지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기존의 복음서의 내용을 짜깁기한 후대의 외경문헌이 아니라 그것들 본래의 원형(그의 표현에 의하면 “오리지날 아키타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도마복음이 다양한 전승의 예수 말씀들이 수집된 결과물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필사 시기나 복잡한 과정과 무관하게 “그 로기온의 전승은 최소한 큐복음서와 같은 시기의, 혹은 그보다 빠른 또 하나의 자료체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56-57)는 일각의 주장에 편승한다. 심지어 Q자료조차도 초기 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침윤된 데 비해 도마복음은 복음서의 드라마적 양식에 의거한 사상적 틀에 오염되지 않은 원형적 예수 운동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고 확신한다(2:332). 이에 따라 그는 도마복음을 ‘소승 기독교’의 출처로, Q복음서를 ‘대승 기독교’란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2:137). 이러한 전제로부터 용인되는 도마복음의 신학적 입장은 탈종말론적 지향과 지혜의 견자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 이에 따라 묵시주의적 종말론과 예수에게 부과된 온갖 기독론적 인식은 후대 교회에 의한 왜곡으로 치부된다. 그것은 고작해야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복음서 작가들의 변형 결과였을 뿐이다(2:326).

이러한 해석학적 틀에 비추어볼 때 도마복음의 예수는 견자이자 곧 갈릴리의 유대인 견유학자라는 크로산의 모델로 수렴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끊임없는 탐구와 모험의 여정으로서 말씀의 해석이 중요하며, 거기서 제 실존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 진리 추구의 궁극적 목표가 된다. 그 발견은 타인의 해석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개벽과 함께 자신의 해석을 발견하는 앙가주망이어야 한다(2:125). 도올이 앞세운 도마의 예수에게 천국은 시공간의 개념으로서의 천당이 아니요 곧 주체의 개벽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결국 도마복음의 예수가 보여준 구원의 길은 개인의 해탈이요 득도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고독한 단독자로서 제 실존의 심연을 살펴 자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깨치고 전관(全觀), 합일, 전복, 융합을 향해 나아가 “모든 분별이 사라진 웅혼한 원초성”(2:203)에 눈 뜨는 개안의 경험이어야 한다. 예수에게 종말의식이 있었다면 그것은 묵시주의적 시대 분위기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예수가 그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창출해내었다는 것이다”(2:94). 따라서 도마복음의 종말론은 우리의 종말이라는 실존적 사태에 관여하며 그것은 개체적 사태, 곧 개체의 죽음을 의미한다(2:322). “종말이란 시간의 종료가 아니라 나의 삶의 완성”(2:328)이라는 것이다.

뿐 아니라 도마복음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저자는 예수에 대한 일체의 신앙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깨달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탈로서의 구원을 가르친 예수는 그가 구약의 하나님과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니체보다도 더 본질적인 무신론자”(3:325)로 조명된다. 물론 여기서의 무신론은 신의 존재가 인간의 구원과 무관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조율된 개념이다. 이렇듯 도마복음이 보여주는 역사 속의 원형적 예수는 당시 바리새파와 달리 헬레니즘 문명이 번성한 갈릴리의 개방된 풍토에서 자라났으며 레바논 시리아 지역의 개방된 동양적 사유에 큰 영향을 받은 사상가이다(3:329). 그가 가르친 안식은 곧 구원으로서의 자기 해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식할 곳조차 없다고 그가 고백한 것은 “해탈을 거부하는 보살적인 대승 정신”(3:267)의 발로로 풀이되기도 한다. 도마복음의 사상적 정수를 발견하고 예수의 원형적 신학을 조명하면서 저자는 그 특유의 풍부한 동양사상적 지식을 맘껏 활용한다. 그리하여 동양적 풍모를 띤 도마의 예수는 노장과 공자의 사상에 수월하게 접속되고 고독한 초월자의 구원론에 이르러서는 숫타니파타경의 홀로 가는 ‘코뿔소’ 비유에 적절히 상응한다(3:105-106).

반면 도마복음에서 은밀한 말씀을 강조하는 특성은 브데레(Wrede)가 조형한 ‘메시야 비밀’ 이론의 문학적 편집과도 다르고, 밀의종교적인 비의의 속성과도 구별되는 다른 차원에서 ‘난해한 상징성’의 증거로 옹호된다(3:63). 특히, 특권적인 ‘지식’의 소유를 주장한 영지주의의 잡다한 신화론적 우주관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그는 도마복음의 영지주의적 연루 혐의를 제거해버린다. 한편 예수를 선지자와 의사로 인정하면서도(3:56) 그는 예수가 행한 기적을 초자연적인 ‘마술’이 아니라 “상식에 쩔어버린 역사를 변혁시키는 힘”의 상징적 표현으로 자리매김한다(3:58). 이와 같은 독법을 통해 도올의 도마복음 주해가 의도하는 실천적 메시지인즉 오늘날 신화화되고 교조적인 이 땅의 기독교가 해체되고 보다 자유롭고 포용적인 자기 수행의 기독교로 거듭나길 바라는 것인 듯싶다. 마치 “인도불교가 선불교로 변형되었듯이 서구기독교가 동방의 선기독교로 변형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을 “하나의 역사적 필연”(3:383)으로 보려는 시각도 마찬가지의 기대를 대변한다.

III.
이 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여러 방면에서 제기될 수 있다. 먼저 도올이 자신의 신념에 강하게 함몰한 나머지 도마복음에 대한 전문학계의 논의를 편취하여 그것이 보편적 대세인 양 선전하는 방식에 드러난 왜곡된 과잉 열정과 그로 인한 파행의 흐름을 비판할 수 있다. 특히 도마복음이 공관복음서의 본래적 원형이라는 주장이 가장 권위 있는 전문학자들 사이의 대세라는 투의 논조는 사실의 은폐와 왜곡을 조장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그는 “많은 주석가들이 공관복음서의 다양한 자료들을 놓고 도마가 간추려 구성한 것이라는 식으로 억지춘향의 논리를 편다”고 주장하면서 “세계 성서주석학의 수준이 어떤 이념적 편견에 묶이어 있”(3:62)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는 “억지춘향의 논리”와 “이념적 편견”의 실상이 그러한 일방적 재단 이면에 어떤 다양한 지형으로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기성 서구학계에서 다각도로 진행되어온 도마복음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도마복음이 부분적으로 히브리인의 복음서와 이집트인의 복음서 등과 같은 비정경복음서에서 파생된 어록의 수집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부 알렉산드리아 출신 클레멘트의 관련 증언과 도마복음 내의 쌍둥이 어록의 존재가 그 대표적 증거로 거론된다. 둘째는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서의 전승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특히 그 어법과 배열 순서를 기준으로 양자를 의존적 관계 또는 독립적 관계로 보려는 관점이 존재한다. 그 기준에 따르면 양자 간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도마복음이 공관복음에 의존한 편집물이라는 입장에서는 그 유사점을 강조하고 독립된 저작이라는 관점에서는 그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셋째는 도마복음과 정경복음 모두 그 이전의 공통된 자료에 의거하여 나름대로 문학적 창작을 했다는 입장이 있다. 전통적 자료들이 그 과정에서 호출되어 재활용되고 간텍스트적으로 재가공되면서 각기의 편집적 전승의 경로를 밟아갔으리라는 추론이다. 비록 도마복음이 정경복음에 의존하여 작성되었으리라는 주장이 다수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편이지만 이 논점은 아직 미해결의 난제로 남아 있다.

도마복음의 산출 연대의 비정 역시 Q문서와 같은 예수의 어록이 편찬되기 시작한 1세기 중반에서 파피루스 옥시린쿠스의 사본과 히폴리투스에 의한 언급을 증거로 2세기 중반까지 다양하게 산포된다. 영지주의의 산물로 보는 일부 관점에서는 이 자료를 훨씬 후대로 내려 잡아 3세기의 편집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주장들은 텍스트 안팎의 매우 빈약한 증거에 기댄 추론 이상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은 도올의 강변대로 “억지춘향의 논리”나 “이념적 편견”의 산물이 아니라 워낙 부족한 증거를 가지고 최선의 분석과 개연적 추리를 통해 산출한 나름의 학문적 결론인 것이다. 더구나 도마복음이 Q자료와 동시대이거나 더 선행하며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원형을 담아내고 있다는 주장은 도올의 주장대로 학계의 대세가 아니며 그가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크로산을 비롯한 예수 세미나 팀의 일부 주장일 뿐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옹호하는 세력을 추켜세워 “미국 주요 신학자들을 총망라한 지저스 세미나 운동”(3:191)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북미 성서학계의 지극히 적은 일부 신약성서학자들 및 고대기독교문헌학자들(‘신학자들’이 아니라)로 구성된 소수의 학자군일 뿐이다. 그들이 대중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매스컴의 적절한 활용과 꽤 선정적인 언론 플레이에 빚진바 적지 않고, 국내 독자들에게도 주로 이런 쪽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소개된 영향도 크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으로 재조명한 비묵시와 탈종말론의 예수와 현자 예수의 역사적 진정성 운운은 기실 19세기 이래 니체가 암시하였고 예수전 집필 붐과 함께 도래한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상을 재탕하면서 기존의 궤적을 큰 틀에서 선회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들 내부 진영에도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예수를 “캘리포니아 버전”의 예수, 북미중산층 백인 지식인들에 의한, 그들의 취향에 부응한 예수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다. 그들의 예수가 외려 이 시대에 낯선 부분을 도려낸 결과 이념적인 편향에 치우친 억지춘향의 산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분위기로 현재 북미에서조차 퇴조하고 있다(예컨대, 현재 북미 성서학계의 대표기관인 SBL 모임에서도 이들이 주도해온 ‘역사적 예수’ 분과 자체가 개설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 도올이 이 책에서 역사적 예수의 사회 참여적 성격과 실존주의적 수행자의 모습을 동시에 부각시키는 데서 탐지되는 균열을 지적할 수 있겠다. 전자는 공관복음의 예수 상을 부인하지 못하는 데 터한 관점이고, 후자는 도마복음과 Q자료의 견자 예수를 부각시키는 데서 도출되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도마복음의 예수가 추구한 ‘강렬한’ 사회참여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당대의 어떤 역사적 맥락을 걸치고 있는지 분명히 밝혀야 했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해법은 예수의 행적을 둘러싼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망과 그 실천적 내용이 아니라 앙가주망과 탈앙가주망의 역설적 혼재이다. 이를테면,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관심과 사회적 무관심은 궁극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는 가치”(3:78-9)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파행은 역사적 예수를 ‘역사’ 속에 위치시켜 그 구체적인 육체성을 부각시키면서 도마복음의 선문답적 어록에 비친 탈역사적인 예수로의 증발을 막으려는 고육지책에서 비롯된 듯하다. 

뿐 아니라 도올의 논법이 지닌 의도적 파격성과 그 대중적 어필의 의도를 감안하더라도 그의 진술은 과도한 자의식의 도취로 인해 더러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사실의 왜곡과 황당한 허세를 동반하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성취를 얼룩지게 하는 결함이다. 가령, “로마총독 빌라도의 재판 운운하는 거창한 장면들은 모두 마가의 드라마 구성에서 연유된 픽션으로 간주”되는 것이 “현재 성서학자들의 대세”(2:100)라거나 “도마복음의 단독자 전통이 기나긴 수행승의 전승을 거쳐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적 단독자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2:311)이라는 주장은 직관적 판단을 넘어 과도한 비약일 뿐이다. 나아가 “고린도전서 2:9에서 본문의 인용구가 이사야 64:3의 의미맥락과 다르기 때문에 도마복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로빈슨(M. Robinson)의 단견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2:315)이나 “중동세계의 종말론은 거개가 모두 조로아스터교에 근원하고 있다”(2:327)는 무모한 일반화 등은 동서고전을 섭렵하는 저자의 방대한 탐구 의욕이 섬세한 학문적 검증의 결여라는 패착으로 드러난 사례이다. 이러한 과잉 자의식은 한 술 더 떠 “나 도올을 모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 도올이 말하는 말씀에 내재하는 성령, 그 진실을 모독할 수는 없다”(3:118)는 식의 치기어린 독백으로 추락하기도 하는데, 이는 도마복음의 예수에 반향하는 결기 어린 선문답이라고 보기엔 너무 비성찰적인 진술이 아닌가 싶다.

나는 도마복음에 우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예수 전승의 또 다른 궤적이 담겨 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기독교란 종교를 떠나 인류 문명의 소중한 유산이고 이를 매개로 놓고 볼 때 “헬레니즘 문명권 속의 인도적 사유와 팔레스타인적 사유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확인”(3:108)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비록 콥트어 원문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과 이해가 담긴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주에 담긴 섭동적 도전 정신도 높게 평가한다. 전반적인 해석학적 틀과 세세한 주석의 내용과 관련하여 나로서는 이견이 깊지만 도마복음의 사상세계에서 “자각적 해탈론”(3:85)과 “선적 회향”(3:86)의 요소를 포착한 점도 사상적 교통 공간의 원활한 소통이란 견지에서 긍정적으로 볼 만한 여지가 있다. 물론 도마복음이나 예수 어록의 요체를 가짜 ‘나’의 모습을 떨치고 참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구도적 탐구로 보는 기본 패턴은 도올 이전에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으로 소급되고, 근래에는 역시 도마복음을 묵상적으로 풀어놓은 오강남 교수, 역시 도마복음과 Q자료 등의 문헌을 토대로 동양적 예수의 상(像)을 구상해온 김명수 교수의 학문적 시도와도 연계된다. 그러나 도올이 이로써 동서사상의 융합과 소통을 도모하고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을 기획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특히 그의 비판적 지적대로 자폐적이고 배타적인 체제의 논리를 고수하면서 사회적 반성과 검증을 거부하는 한국교계의 인습적 관행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려는 그의 예언자적 결기는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리라 본다. 따라서 기독교를 포함하여 “종교의 본질을 네가티브에서 포지티브로, 저주에서 격려로, 율법에서 사랑으로, 사망의 위협에서 생명의 환희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3:258)다는 저자의 열렬한 계몽적 웅변에도 명분상 무조건 반대하기 궁색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왕성하게 섭렵하고 원용하는 동양사상의 원융적 지혜와 이로써 촉발되는 계몽적 선기 역시 도마복음의 주해뿐 아니라 교조주의적 체계로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성찰적 자양분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학문적 방식은 보다 엄격하고 공정하며 포괄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신념을 부동의 진리로 확신하고 그 확신이 부단한 동어반복의 체계 속에 되먹임되는 방식으로 그 바깥의 보다 광범위한 사실을 외면하고 그 진실을 가린 채 과잉으로 범람할 때 그것은 숱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화자찬의 설익은 학문으로 표류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IV.
사족으로 나는 이 책의 거친 문장들 틈새로 자리한 매우 정제된 아름다운 사진들에 매우 감동한다. 그것은 저자가 두 발로 그 거친 근동의 대지를 밟으면서 제조해낸 작품들로서 지독한 ‘치통’과 ‘탈장수술’을 무릅쓴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비친다. 비록 책의 해당 내용이나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 사진들이 상당수이지만 도올의 이 치열한 탐구 정신의 진취성과 구도자적 모험의 개방성은 그를 싫어하는 기독교인들도 열과 성을 다해 배워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인류 문명의 기원과 역사의 원형을 찾아 온 몸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치열한 예수의 구경적(究竟的) 신학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뱀처럼 지혜로운 견자는 독조차 약으로 바꾸어 쓸 줄을 알지만 어리석은 자는 약까지 독으로 만들어 폐기해버리지 않는가.


※본 논문은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인 '신약논단(제17권 2호)'에 게재된 논문 전문임


Jesus Remembered: Christianity in the Making, V 1: Dunn, James

Jesus Remembered: Christianity in the Making, Volume 1: Dunn, James D. G.: 9780802839312: Amazon.com: Books



Jesus Remembered: Christianity in the Making, Volume 1 Hardcover – July 29, 2003
by James D. G. Dunn  (Author)
4.3 out of 5 stars    33 ratings
1037 pages

Editorial Reviews
Review
Homiletic
"This tome takes its place among the equally voluminous and deep contributions of scholars like Crossan, John Meier, N.T. Wright, and Walter Wink. . . Most important for preachers is the way Dunn interprets the words and deeds of Jesus and stories of his life as an unfolding, living tradition of interpretation. It helps us to understand our own work as part of that unfolding, living tradition. . . ."

Toronto Journal of Theology
"Dunn is to be commended for his challenging and insightful work. It must be read by all who are interested in the field, and it is destined to become a significant conversation partner in future discussions of the historical Jesus."

Christopher Tuckett
"A magnificent achievement. Jesus Remembered is massively thorough and wide-ranging, innovative in its stress on orality, at times provocative, yet also immensely readable and clear. James Dunn's book will undoubtedly shape Jesus study for the next generation and more. This is a 'must' for all those engaged in study of Jesus at whatever level."

Dale C. Allison Jr.
"This is not just one more book on Jesus but rather an esteemed scholar's wide-ranging presentation of conclusions arrived at over a lifetime of informed, critical reflection. It is full of good sense and much learning. As always, James Dunn's work is characterized not only by a genuine familiarity with Jesus' first-century Jewish world but also by an unsurpassed knowledge of the vast secondary literature. Especially suggestive is the consistent appeal to continuing oral tradition, which often appears justified."

Samuel Byrskog
"In this study one of the most prolific New Testament scholars of today presents an impressive new approach to the ol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James Dunn's central thesis that a hermeneutically informed dialogue with the ancient texts will legitimate an account of the impact of Jesus as it was remembered by his earliest followers convincingly places the oral character of the Jesus tradition at the very center of attention. The book should not only help scholarship to free itself from the prevailing literary paradigm, but also promote a healthy balance between positivistic optimism and postmodern relativism in the search for the so-called historical Jesus. "

John P. Meier
"For decades James D. G. Dunn has been a leader in serious and balanced study of both christology and history-of-Jesus research. I have profited greatly from his many books and articles, and I am delighted to read this massive distillation of his many years of reflection and publication on the historical Jesus. I highly recommend Jesus Remembered to all those interested in a thoughtful and methodologically sophisticated approach to the major questions that plague and stimulate historical-Jesus research today."

Mark Allan Powell
"Any serious student of the historical Jesus will want to become familiar with James Dunn's thorough and somewhat unique treatment of the subject. Dunn focuses his attention on characteristic features in the early traditions concerning Jesus in order to determine the impact that the latter had on his first followers. The portrait that emerges is both convincing and thought-provoking ? an indispensable contribution to an ongoing quest to comprehend the significance of Jesus for the history of Christianity and for modern civilization."

Jonathan L. Reed
"Jesus Remembered provides a fresh and thorough look at Christian origins that is provocative and at the same time judicious in its assessments. James Dunn is equally at home in the history of scholarship, in the details of the Gospels, in the array of nonbiblical sources, and in the archaeology of Jesus' world, and he weaves these into a coherent and credible account of the Jesus traditions.Jesus Remembered is absolutely essential reading for scholars and pastors, and Dunn's clarity and fluid style make complex issues accessible to undergraduate students and laypersons as well."

From the Back Cover
James Dunn is regarded worldwide as one of today's foremost biblical scholars. Having written groundbreaking studies of the New Testament and a standard work on Paul's theology, Dunn here turns his pen to the rise of Christianity itself. "Jesus Remembered" is the first installment in what will be a monumental three-volume history of the first 120 years of the faith.
Focusing on Jesus, this first volume has several distinct features. It garners the lessons to be learned from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and meets the hermeneutical challenges to a historical and theological assessment of the Jesus tradition. It provides a fresh perspective both on the impact made by Jesus and on the traditions about Jesus as "oral" tradition -- hence the title Jesus Remembered. And it offers a fresh analysis of the details of that tradition, emphasizing its "characteristic" (rather than dissimilar) features. Noteworthy too are Dunn's treatments of the source question (particularly Q and the noncanonical Gospels) and of Jesus the Jew in his Galilean context.

In his detailed analysis of the Baptist tradition, the kingdom motif, the call to and character of discipleship, what Jesus' audiences thought of him, what he thought of himself, why he was crucified, and how and why belief in Jesus' resurrection began, Dunn engages wholeheartedly in the contemporary debate, providing many important insights and offering a thoroughly convincing account of how Jesus was remembered from the first, and why.

Written with peerless scholarly acumen yet accessible to a wide range of readers, Dunn's "Jesus Remembered," together with its successor volumes, will be a sine qua non for all students of Christianity'sbeginnings.

About the Author
Widely regarded as one of the foremost scholars in the world today on the thought and writings of St. Paul, JamesD. G. Dunn is Lightfoot Professor Emeritus of Divinity at the University of Durham in England.

Read less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Wm. B. Eerdmans Publishing Co.; Edition Unstated (July 29, 2003)
Language ‏ : ‎ English
Hardcover ‏ : ‎ 1037 pages
Customer reviews
4.3 out of 5 stars
-------------------
Top reviews from the United States
Steven H Propp
TOP 100 REVIEWER
5.0 out of 5 stars A FAMED NEW TESTAMENT SCHOLAR LOOKS IN DETAIL AT JESUS' LIFE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ne 17, 2013
Verified Purchase
James D. G. Dunn (born 1939) is a British New Testament scholar who was Professor of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Durham prior to his retirement; he is also a minister of the Church of Scotland.

 He has written many other books, such as  The Evidence for Jesus , Jesus and the Spirit , New Perspective on Jesus: What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Missed , etc. He wrote in the Preface to this 2003 book, "It has long been a hope and intention of mine to provide a comprehensive overview of 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My primary concern has been rather to draw attention to the principal (mainly textual) data which have to be taken into account when considering whether a tradition can be traced back to Jesus, or... to the initial impact made by Jesus' teaching and activity." (Pg. xiii, xvi)

He states early in the book, "There are three great questions for students of Christianity's beginnings: (1) What was it about Jesus which explains both the impact he made on his disciples and why he was crucified? (2) How and why did it come about that the movement which took off from Jesus did not after his death remain within first-century Judaism ... (3) Was the Christianity which emerged ... as a predominantly Gentle religion essentially the same as its first-century version or significantly different in character and kind?" (Pg. 3)

He admits, "John's Gospel is determined much more by John's own theological than by historical concerns. Consequently it cannot be regarded as a good source for the life of Jesus." (Pg. 40) He adds, "the character of John's Gospel as a theological, rather than a historical document, became more and more axiomatic for NT scholarship. Like the miracles of Jesus, though not quite so decisively, the Fourth Gospel had been effectively knocked out of the quest." (Pg. 41)

He summarizes, "I wish to press the case: (a) that individual traditions and groups of traditions were almost certainly formulated and circulated in oral mode, (b) that most of them were given the shape which has endured into the Synoptic Gospels during that oral phase, and (c) that the Evangelists... would probably had known many of these oral traditions independently of their knowledge of written collections... I believe (d) that in the stabilities and diversities of the tradition we can trace the continuities and variations in the performances/retellings of the tradition... I do not pretend I can offer proof positive of my thesis. But in dealing with Synoptic traditions, who can realistically offer proof positive of any thesis?" (Pg. 336)

He comments about the birth stories: "the heavy typologizing ... (Herod as Pharoah, Jesus as Israel in Egypt) leaves it very uncertain whether we can discern any historical events underlying the present story... the whole Egyptian episode, including Joseph and Mary's return to settle in Nazareth, does seem somewhat contrived. More disturbing ... has been the probability that Luke got his facts wrong in the reason he gives for Jesus being born in Bethlehem of Judea. The census under Quirinius took place in 6 CE... That census would not have applied to Galilee, which was Antipas's territory. We know nothing of a universal census throughout the Roman Empire, then or earlier. And the idea of a census requiring individuals to move to the native town of long dead ancestors is hard to credit. It is difficult to avoid the conclusion that Luke was mistaken in dating the census so early... Most disturbing for Christian pilgrim is the outcome that Jesus' birth in Bethlehem has to be left in question. Was the story to that effect contrived simply because of the Micah prophecy..." (Pg. 344)

In his chapter, "How Did Jesus See His Own role?" he concludes, "In one sense our findings thus far are disappointing. We have to conclude as likely that Jesus made no attempt to lay claim to any title as such; also that he rejected at least one which others tried to fit him to." (Pg. 761) He concludes, "(1) The only realistic objective for any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is Jesus remembered. (2) The Jesus tradition of the gospels confirms THAT there was a concern within earliest Christianity to remember Jesus. (3) The Jesus tradition shows us HOW Jesus was remembered... (4) This suggests ... that that essential shape was first put into words by and among those involved as eyewitnesses of what Jesus said and did." (Pg. 882)

This is a challenging, essentially "orthodox" life of Jesus that should be studied by anyone interested in the "historical Jesus."
Read less
10 people found this helpful
-----------------------
Reader
4.0 out of 5 stars Impressive Undertaking - Speculative Field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November 17, 2010
Verified Purchase
`Jesus Remembered: Christianity in the Making' is the first volume in a planned three volume series on the origins and early years of Christianity by noted New Testament (NT) scholar James Dunn. The series is an ambitious undertaking and upon completion promises to be Dunn's Magnum Opus. In a broad sense the series, and especially this first volume, is situated in what is often referred to the `Thir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Dunn attempts to distinguish his approach by focusing on how Jesus impacted and was remembered those who encountered him, rather, than attempting to get to an objective Jesus behind these remembrances. While I appreciate Dunn's effort to nuance his case, it feels very much like the standard Jesus Quest approach, he makes assumptions, examines data and makes conjectures about the historic Jesus.

The book has much strength. With regard to more general issues Dunn does an excellent job of highlighting the difficulties and potential pitfalls associated with this type of scholarship, e.g. translations, cultural context, textual archaeology, theological presuppositions etc. All of which are handled with Dunn`s characteristic insight and clarity. It is a helpful reminder to experts and novices alike. In addition Dunn makes a good case for a move away from a rigid literary-textual approach to the gospels. He argues that even if one supposes that ancient Israel was a comparatively literate society many of the gospel stories were likely well known and frequently recounted in public oral performances prior to the being captured in their present form. An environment, Dunn argues, would have allowed for the core messages to have been preserved despite some variability in performances. With respect to specific issues the text also has much to offer, I particularly enjoyed Dunn's overview of the `son of man' debate, - the question as to how this expression is best understood, is it a broad generic term, as in `one', or a titular designator as in the Daniel's tradition.

With regards to drawbacks, I offer a couple of thoughts. 

First, the text is physically too large for a single volume at over a thousand pages (approx. 300-400 of notes and references!). This form of contemporary biblical scholarship is at once both impressive; engagement with such an enormous range of scholars, and frustrating, more concerned compilations of scholarly opinion with limited value-added analysis. 

Second, while a fascinating and interesting field it is important to remain mindful that NT scholarship is highly speculative. It is its own type of historic fiction, where scholar and layman alike see what they believe, giving credence to interpretations and information they support while dismissing that which they oppose. As with others in the field Dunn falls prey to the classic problem of Historic Jesus study - creating a Jesus in the scholar's image - It seems unavoidable. While I greatly admire Dunn, he seems to be trying to fashion a Christian story which is acceptable to modern Western intellectuals, affirming the feasibility of belief in an historic resurrection yet positing a deflated Jesus largely devoid of the miraculous - it is difficult to see how such a Jesus could attract followers or inspire a religion?

Ultimately, this is an impressive work by one of today's leading NT scholars. I enjoy Dunn and will likely read the subsequent two volumes in the series. I recommend the book to students of the NT and the historic Jesus.
Read less
8 people found this helpful


James H. Reynolds
5.0 out of 5 stars the best of everything that I have encountered
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December 13, 2014
Verified Purchase
This is a scholarly work of some length and significance. I am not a scholar but have read fairly widely in the area of "the search for the historical Jesus". This, by far, the best of everything that I have encountered. At first, I wondered about the lengths that Dr. Dunn has gone to in the details presented in background to his main points. It did not take long to realize that his detailed explanations were well worth the time. This is a wonderful work from a real scholar who pursues the truth and does not let his own preconceptions intrude on his reasoning or his explanations.
5 people found this helpful

Top reviews from other countries
Translate all reviews to English
Roy J Squires
5.0 out of 5 stars Five Stars
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on April 12, 2017
Verified Purchase
Excellent, comprehensive detailed summary of the historical and theological paradigms of Jesus Research

 
Dallas McQuarrie
5.0 out of 5 stars ANOTHER MASTERPIECE OF BIBLICAL SCHOLARSHIP
Reviewed in Canada on December 16, 2013
Verified Purchase
Dunn is one of the top biblical scholars in the world today. His work is comparable to that of great Raymond Brown and NT Wright. This book is an immensely enjoyable read, and it will be enjoyed by the average person and the scholar. Because it can be read at many levels, it's should be a standard book in the collection of any teacher or student seriously interested in the origins of Christianity.

What a great book to read at Christmas, or any other time of the year.
One person found this helpful
=====================================
 
doncecca
3.0 out of 5 stars patience conquers
Reviewed in Italy on January 25, 2013
Verified Purchase
---
If you have a lot of pacience to go through tens of useless pages and convoluted language you will collect fruits
but, the following passage as a conclusion about Jesus resurrection topic is surely out of place:

"Christians have continued to affirm the resurrection of Jesus, as I do, 
not because they know what it means. 

Rather, they do so because, like the affirmation of Jesus as God’s Son,
‘the resurrection of Jesus’ has proved the most satisfactory and enduring of a variety of options, all of them inadequate in one degree or other as human speech, 
to sum up the impact made by Jesus, the Christian perception of his significance. 

They do so because as a metaphor, ‘resurrection’ is perceived as referring to something otherwise inexpressible, as expressing the otherwise inchoate insight that this life, including Jesus’ life, is not a complete story in itself but can be grasped only as part of a larger story in which God is the principal actor and in which Jesus is somehow still involved. 

In short, ‘the resurrection of Jesus’ is not so much a criterion of faith as a paradigm for hope" (page 879)

Report abuse
Translate review to English
Sam Erlandson
5.0 out of 5 stars Substantial
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on November 23, 2013
Verified Purchase
Jimmy Dunn's work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cornerstone's of any biblical scholar's library. Other cornerstones include Wright and Bauckham.
One person found this helpful
Report abuse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상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1  
제임스 D. G. 던 (지은이),차정식 (옮긴이)새물결플러스2010-06-21원제 : Jesus Remembered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상권












































 미리보기
정가
36,000원
판매가
32,400원 (10%, 3,600원 할인)
마일리지
1,800원(5%) + 멤버십(3~1%)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원
배송료
무료 
11
8
양탄자배송
지금 주문하면 7월 19일 (월) 오후 8시 퇴근후 배송
(중구 중림동 기준) 지역변경
Sales Point : 365 
 9.0 100자평(0)리뷰(2)
이 책 어때요?
카드/간편결제 할인무이자 할부소득공제 1,460원 
수량
1
 
장바구니 담기
바로구매
선물하기
보관함 +
전자책 출간알림 신청중고 등록알림 신청중고로 팔기 


기본정보
양장본718쪽160*230mm1077gISBN : 9788996376132
주제 분류 
신간알리미 신청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역사
시리즈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총 3권 모두보기)
신간알리미 신청
 
전체선택
 
보관함 담기
 
장바구니 담기


[품절]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세트 - 전2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하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상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이벤트

7월 특별 선물! 여름 변색 텀블러, 빨대 세트, 키링 시계(이벤트 도서 포함, 국내서.외서 5만원 이상)

알라딘 22주년, 모든 몰 동시 이벤트!

이 달의 문장 투표

이 달의 적립금 혜택

이 시간, 알라딘 굿즈 총집합!
책소개복음서와 초기 문헌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전 생애와 그 메시지를 밝혀낸 역작이다. 소기천, 윤철원, 최갑종, 존 P. 마이어, 크리스토퍼 터킷, 페터 슈툴마허 등이 추천했다. 이 책에서 제임스 던은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기억을 통해 보존된 예수 전승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 강력한 연결 고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권에서는 역사적 예수 탐구의 과거와 현주소를 점검하고 나서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자료들 및 전통과 역사적 맥락을 살핌으로써 복음서를 통해 예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를 놓고 있다. 그런 후 요한의 세례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공관복음서가 기억해 증언하고 있는 메시지를 풀어나간다.

하권에서는 예수의 메시지가 겨냥한 대상, 제자직의 성격을 살핀 뒤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했는지, 예수는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 다음 기억된 예수에 대한 내용으로 전체 내용을 총괄하며 예수의 선교에 대한 내용으로 끝맺는다.
목차
l약어표l10
l저자서문 l23

제1장생성기의 그리스도교 33


제1부신앙과 역사적 예수

제2장서론 47

제3장역사인식의 각성 또는 재각성 55
3.1르네상스55
3.2종교개혁60
3.3예수에대한 인식 63

제4장도그마로부터의 탈주 65
4.1계몽주의와근대성 66
4.2계시와기적 벗어나기 70
4.3자유주의의예수 77
4.4예수생애의 비평적 재구성을 위한 자료들 84
4.5자유주의탐구의 붕괴 91
4.6사회학적관점에서 본 예수 100
4.7신자유주의의예수 다시 들어오다 107
4.8결론115

제5장역사로부터의 탈주 117
5.1역사비평적방법 118
5.2신앙을위한 불가침의 영역 탐색 122
5.3루돌프불트만 (1884?1976)125
5.4제2의탐구 132
5.5제3탐구?141
5.6포스트모더니즘149

제6장역사,해석학,신앙157
6.1계속되는대화 157
6.2역사적탐구의 필요성 159
6.3역사가무엇을 전달할 수 있는가?160
6.4해석학적원리들 173
6.5언제신앙의 관점이 처음으로 예수 전통에 영향을 끼쳤는가?191
6.6두가지 추론결과 203


제2부복음서에서 예수로

제7장자료들 211
7.1외부자료들 213
7.2예수에대한 최초의 언급들 216
7.3마가217
7.4Q221
7.5마태와누가 235
7.6도마복음237
7.7요한복음242
7.8다른복음서들 245
7.9예수의가르침과 알려지지 않은 어록에 대한 지식 250

제8장전통 251
8.1그리스도교의창립자 예수 252
8.2예언의영향 268
8.3구어전통 275
8.4구어전통으로서의 공관복음 전통:서사들297
8.5구어전통으로서의 공관복음 전통:가르침들317
8.6구어전승 336
8.7요약353

제9장역사적 맥락 357
9.1‘유대교’에대한 잘못된 전제들 358
9.2‘유대교’를정의하기 364
9.3유대교의다양성 ― 외부에서 본 유대교 370
9.4.유대적분파주의 ― 내부에서 본 유대교 391
9.51세기유대교의 통일성 398
9.6갈릴리유대교 406
9.7갈릴리의회당들과 바리새인들?418
9.8정치적맥락 424
9.9예수의생애와 선교 개요 428

제10장복음서를 통해 예수로 447
10.1추가탐구는 성공할 가망이 있는가?447
10.2어떻게진행하는가?452
10.3핵심논지와 방법 458

제3부예수의 선교

제11장요한의 세례에서 시작하여 465
11.1왜‘베들레헴’부터 시작하지 않는가?466
11.2세례자요한 476
11.3요한의세례 486
11.4요한의메시지 494
11.5요단에서예수의 기름부음 506
11.6요한의죽음 514
11.7유혹받은예수 516

제12장하나님의 나라 521
12.1하나님나라의 중추성 521
12.2‘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526
12.3세가지 핵심 질문들 537
12.4임하게될 그 나라 551
12.5그나라가 왔다 588
12.6수수께끼풀기 623

l참고문헌 l652
l역자후기 l715

접기
책속에서
“이 책의 기본 주장은 다음의 몇 가지 명제들로 압축될 수 있다. (1) ‘역사적 예수 탐구’의 유일한 현실적 객관성은 기억된 예수이다. (2) 복음서의 예수 전통은 맨 처음 그리스도교 내에서 예수를 기억하려는 관심이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3) 예수 전통은 우리에게 어떻게 예수가 기억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성격은 구전 양식으로 그 전통을 정기적으로 활용하고 또다시 반복하여 활용함으로써 그것이 본질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음을 거듭 강하게 암시한다. (4) 이는 나아가 예수가 끼친 최초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그 본질적인 형태가 갖추어졌음을 암시한다. 즉 그 영향이 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나 연관된 자들 가운데, 또 그들에 의해 처음 말로 옮겨짐에 따라 그러한 결과가 생겼으리라는 것이다. 바로 그 핵심적인 의미에서 예수 전통은 기억된 예수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예수는 정말 예수거나 우리가 그에게 당도할 수 있는 최대치로 그에 근접한 예수다.”
_상권 458쪽에서  접기
추천글
영국 더럼 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던은 바울 및 복음서 연구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정상급 신약학자다. 정년을 앞두고 출판한 그의 책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이 차정식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타이센(G. Theissen), 마이어(J. P. Meier), 라이트(N. T. Wright)의 예수 연구서와 함께 금세기에 출판된 가장 뛰어난 역사적 예수 연구서로 꼽힐 만하다. 이 책에서 던은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기억을 통해 보존된 예수 전승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 강력한 연결 고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최갑종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철저한 선행연구와 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제공하여 거장의 학문적 철저성을 단박에 확인시켜준다. 또한 복음서와 예수의 정체성에 역사적 탐구라는 이름으로 덤터기 씌운 허망한 혐의가 말끔하게 처리되어, 역사적 예수의 진실을 찾아 헤매던 현대 성서학계가 제임스 던에 의해 구명된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이 책은 결국 복음서에 보도된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이 결코 진리를 호도하는 연출이 아님을 역설하여, 기독교의 핵심가치들을 기꺼이 긍정하도록 이끈다. 우리 시대의 명저로 손꼽힐 만하며, 목회자와 신학도의 필독서임에 틀림없다.
-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1982년부터 더럼 대학교에서 라이트푸트 석좌교수로 재직한 신약학자 제임스 던 교수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하나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된 2003년에 세계성서문헌학회(SBL)에서 즉시 구입하여, 몇 년 동안 신학교 강의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여왔다. 이번에 이 방대한 책이 차정식 박사의 번역을 통해 우리말로 출간된 것을 계기로, 신학생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들과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의 기원에 가장 기본적이며 중심적인 인물이신 역사적 예수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란다. 이 책은 예수의 삶과 말씀 및 교훈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 소기천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위대한 업적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은 방대하면서도 깊이 있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며, 구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면서 때로는 도발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술술 읽힐 뿐만 아니라 명료하다. 제임스 던의 이 책이 다음 세대를 넘어 계속해서 예수 연구의 틀을 잡아줄 책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수준에서건, 예수를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이다.
- 크리스토퍼 터킷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 
이 책은 단지 예수에 관한 또 한 권의 책에 불과한 게 아니다. 이 책은 지적으로 성숙하고 학문적으로 철저한 평생의 숙고 끝에 도달하게 된 결론을 광범하게 제시할 뿐만 아니라 좋은 균형 감각과 깊이 있는 학식으로 가득 차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던의 이 작품은 예수가 거닐었던 1세기 유대적 세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뿐만 아니라 폭넓은 2차 문헌에 대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지식이 두드러지는 책이다. 특별히 구전 전승의 계승에 대해 일관되게 호소하는 점이 주목할 만한데, 이 점은 많은 부분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 데일 C. 앨리슨 (피츠버그 신학대학원) 
역사적 예수에 대한 현대적인 초상은 주위에 넘쳐난다. 하지만 제임스 던은 여기서 예수가 자신의 최초 추종자들에게 남긴 수많은 영향들을 통해 고대에 예수가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두루 살핀다. 이러한 묘사는 그저 바라는 바를 말하거나 자기를 투영하는 학문적 속임수가 결코 아니다. 던이 밝혀내는 이미지들은 놀랍고도 도전적인 동시에 심지어 모순되기도 하는데, 이 이미지들은 고대 진술의 신빙성에 확신을 더욱 보태주고 있다. 이러한 모험 자체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그 성과도 의미심장하다.…『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은 기독교의 역사와 현대 문명에 끼친 예수의 의의를 파악하려는 앞으로의 탐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여가 될 것이다.
- 마크 앨런 포웰 (트리니티 루터란 신학대학원) 
가장 풍부한 연구 성과를 내는 현대 신약학자 중 한 명인 제임스 던은 이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의 옛 탐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인상적으로 제시한다. 해석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고대 텍스트들과 대화하게 되면 예수가 끼친 영향에 대한 진술이 바로 예수의 최초 추종자들이 기억했던 것이라는 점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던의 중심 논지는 예수 전승의 구어적 성격을 관련된 논의의 한가운데에 확신을 가지고서 자리매김한다. 이 책은 널리 퍼져 있는 문서 중심적 사고로부터 학자들을 자유케 할 뿐 아니라, 소위 역사적 예수 탐구라 불리는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실증주의적 낙관론과 포스트모던 상대주의 사이에서 건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새뮤얼 뷔르스콕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교) 
수십 년 동안 제임스 던은 그리스도론과 예수의 역사(history-of-Jesus) 연구에 있어서 진지하고도 균형 잡힌 연구를 이끈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나는 던의 많은 책과 논문들로부터 큰 유익을 얻었다. 이제 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수년간의 숙고와 출판 끝에 나온 정수와도 같은 이 방대한 작품을 읽게 되어 기쁘다.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에 널리 퍼져 있으면서 또한 그 연구를 자극하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사려 깊으면서도 방법론적으로 치밀하게 접근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을 적극 추천한다.
- 존 P. 마이어 (노트르담 대학교) 
‘생성기 기독교’ 연구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인 제임스 던의 이 책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은 예수에 대한 비평적 연구의 역사와 경향에 대해 정말 읽을 가치가 충분하고 신뢰할 만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이 책의 제목(Jesus Remembered)은 일련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공관복음서들은 수백 년 동안 대부분 문학비평과 자료비평적 접근을 통해 연구되었지만 예수 전통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그려주지는 못했다. 이제 던은 그러한 전통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던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에 대한 기억을 잘못 간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을 보존하고 제시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와 조우할 수 있게끔 이끈다고 강조한다.
- 페터 슈툴마허 (튀빙겐 대학교) 
저자 및 역자소개
제임스 D. G. 던 (James D. G. Dunn)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영국의 저명한 신약 신학자. 1939년에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나, 1968년에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2년에 더럼 대학교에 부임하여 2003년에 은퇴할 때까지 라이트푸트 교수로 있으면서 신약 신학과 주해를 가르쳤고, 존 바클레이, 스캇 맥나이트 같은 훌륭한 후학들을 길러 냈다. 영국의 같은 또래 신약 신학자인 앤터니 티슬턴이나 리처드 보컴, 톰 라이트가 성공회 전통에 선 학자인 반면, 던은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따르고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존중하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성령을 신학의 연구 대상으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에드 패리쉬 샌더스, 톰 라이트와 더불어 바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 ‘새 관점’ 학파를 이끌기도 했다. 많은 연구 결과를 단행본과 주석 등으로 남겼는데, 대표작으로 형성기 기독교를 다룬 Christianity in the Making 3부작《예수와 기독교의 기원Jesus Remembered》·《초기 교회의 기원Beginning from Jerusalem》(이상 새물결플러스)·Neither Jew nor Greek: A Contested Identity, 《바울 신학》(CH북스), WBC 성경주석 《로마서》(솔로몬) 등 다수가 있다. 그의 많은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나, 제임스 던 자신이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은 Jesus and the Spirit 같은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2020년 6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접기
최근작 : <IVP 성경비평주석 신약>,<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수>,<초기 교회의 기원 - 하> … 총 103종 (모두보기)
차정식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신학과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글쓰기로 성서신학을 일상과 사회, 문학의 영역과 연계시켜 크로스오버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신학자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B.A.)와 미국 맥코믹 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하고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향연』『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시인들이 만난 하나님』『바울 신학 탐구』 등 50여 권 (공저 포함)의 저술을 내놓고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상·하)를 번역한 것 외에도 1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꾸준한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신학성서의 환생 모티프와 그 신학적 변용』으로 제1회 한국기독교학회 소망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가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화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성서문예학 연구>,<신약성서와 창의적 설교>,<예수 인문학> … 총 4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페이지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교회를 위한 구약성서 신학>,<신학과 과학의 만남>,<시네마 에피파니>등 총 353종
대표분야 : 기독교(개신교) 12위 (브랜드 지수 330,880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위대한 업적이다!
제임스 던의 이 책이 다음 세대를 넘어 계속해서 예수 연구의 틀을 잡아줄 책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기천, 윤철원, 최갑종, 존 P. 마이어, 크리스토퍼 터킷, 페터 슈툴마허 등 추천

예수 당대의 역사적 배경과 복음서의 증언을 통해
복음서의 신뢰 가능성을 입증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

복음서와 초기 문헌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전 생애와 그 메시지를 밝혀내다!
그동안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연구된 역사적 예수 탐구는 예수에 대한 문헌 자료의 체계적 층위를 전제하는 다양한 가설들에 깊이 몰입돼 있었다. 그러한 연구들은 도그마로부터의 탈주와 역사로부터 탈주를 주장했으며, 이제는 예수가 실재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회의까지 등장할 정도로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학문적 연구라는 이름 아래 오리무중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기독교회가 믿는 공관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알기 위해 지금까지 감춰졌던 비밀스런 다른 문서들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발견해야 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기독교회가 알고 믿었던 예수는 거짓인 것인가?
지금도 계속되는 이러한 질문에 직면하여 저자 제임스 던은 이 책을 통해 문서 가설과 역사실증주의에 기초한 기존 예수 연구의 역사와 문제점 및 새로운 예수 탐구의 동향을 집중적으로 다룬 뒤,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구전된 예수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여 전달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우리가 충분히 신뢰할 만한 예수를 만날 수 있음을 방대한 문헌 검토와 연구를 통해 역설하면서 예수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별히 상권에서는 제1부(‘신앙과 역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 탐구의 과거와 현주소를 점검하고 나서 제2부(‘복음서에서 예수로’)에서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자료들 및 전통과 역사적 맥락을 살핌으로써 복음서를 통해 예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를 놓고 있다. 그런 후 제3부(‘예수의 선교’)를 요한의 세례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공관복음서가 기억해 증언하고 있는 메시지를 풀어나간다.
하권에서는 예수의 메시지가 겨냥한 대상(제13장), 제자직의 성격(제14장)을 살핀 뒤 제4부 예수의 자기 이해에 대한 물음들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했는지(제15장), 예수는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보았는지(제16장)를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제5부 예수 선교의 절정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 다음 기억된 예수(제19장)에 대한 내용으로 전체 내용을 총괄하며 예수의 선교에 대한 내용을 끝맺는다.
접기
북플 bookple
이 책의 마니아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
내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이 아직 없습니다.
마니아 읽고 싶어요 (3) 읽고 있어요 (2) 읽었어요 (6) 
이 책 어때요?
구매자
분포
0% 10대 0%
2.9% 20대 7.4%
6.9% 30대 18.3%
4.6% 40대 33.1%
4.0% 50대 16.6%
0% 60대 6.3%
여성 남성
100자평
    
 
등록
카테고리
스포일러 포함 글 작성 유의사항 
구매자 (0)
전체 (0)
공감순 
등록된 100자평이 없습니다.
마이리뷰
구매자 (2)
전체 (2)
리뷰쓰기
공감순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1 / 제임스 던 새창으로 보기 구매
※ 3~6장 중심 요약



그리스 고전들을 재발견한 르네상스인들은 당시의 세계가 중세 후기의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 고전들을 원어로 읽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줄 방안을 모색했다. 역사 인식의 각성과도 같은 이러한 관심과 전개는 그리스도교 기원사에 대한 근대 학문 연구의 주요 원리와 방법을 낳았는데, "그 첫째가 역사언어학으로, 이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저술 당시 그 단어와 문장이 사용된 방식을 참조하여 문헌의 원어에 비추어 면밀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문비평으로, 상이한 사본에서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전승과 편집에 의해 변개된 것을 포착하고 바로잡아 최선을 다해 원래의 문헌을 재구성하는 기술이다."(57-8)



종교개혁가들은 "서구 교회가 예수의 사도들과 교부들 당시의 교회에서 변해왔다고 믿었는데, 그 변화는 단순히 역사의 전개 과정 차원에서 비롯된 변화가 아니라 신약성서, 사도들, 교부들이 제시한 정당성을 한참 벗어난 변화"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16세기 서구 교회의 내부 논쟁에서 공유된 두 가지 인식은 "첫째, 교회의 전통이나 가시적인 형식과 실천은 때로 교정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과거는 남용되는 현재에 대한 적절한 비평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60) 종교개혁가들은 "성서에는 스스로 해석하는(sui ipsius interpres) 힘이 있다"고 강조했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62)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비판하는 르네상스의 관심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점은, 교회와 관련하여 예수가 진정 무엇을 의도하였는가라는 결론을 제기하는 부분이다."(64) 이는 도그마로부터의 탈주를 낳았고, 예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를 다시 확신하려는 노력이 배가되었다. "계몽주의(대략 1650-1780년)와 함께, 신앙과 역사의 긴장도 점점 양극화되었다."(65) 이때는 '역사적 예수 탐구'가 시작된 시기이며, "새로 등장한 자연과학이 제공한 패러다임을 따라 과거를 탐구"하는 '과학적 탐구 모델'이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과학적 탐구 모델은 "이후 150년간 '역사적 예수 탐구'를 지배한 도구가 된 역사비평 방법으로 조율되었다."(67-8)



※ 과학적 역사비평 방법

1. 실증주의 : 역사(과거)에는 그 역사학(학문 분야)이 자연과학과 유사하게 취급되도록 할 만한 객관성이 있다.

2. 역사주의 : 역사가는 스스로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이며, 따라서 편견이 담긴 가치 판단을 피할 수 있다.

3. 계몽주의 : (하느님이 주신) 인간 이성은 참된 사실과 거짓 사실을 분별하는 과학적인 척도이다.

4. 뉴턴의 가설 : 세계는 인과관계의 '닫힌 체계'로서 불변의 법칙을 따르는 복잡한 기계와 유사하며, 따라서 모든 사건은 예측 가능하고 원인의 결과는 관찰 가능하며, 신의 개입 여지는 없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 안에서 시도된 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반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슐라이어마허를 통해 신학에 들어온 낭만주의의 영향은 "경건주의의 대체물로 찾아왔다."(78) 그는 예수를 ‘종교적 인격체’로 보았고, 이후 헤르만은 "예수에 대한 종교에서 돌이켜 예수의 종교로!", 곧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교제를 위한 기초로서 ‘예수의 내면적 삶’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갔다.(80) 하르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하나님의 아버지 됨,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사랑의 중요성"으로 요약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진정한 신앙은 교리적 정통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행한 대로 행하는 차원의 문제'였다."(82)



19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적 정서는 '역사적 예수' 탐구에 종말론을 다시 도입했다. 바이스가 보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적 수단으로 실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월적 개입의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라였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순수한 사회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질서를 끝장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제자들의 사회에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였다."(91-2) 그리고 이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결국 신앙을 설명해야 한다는 정신 번쩍 나게 하는 깨달음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에 관한 모든 탐구와 해석은 '막다른 골목'에 불과했다.(96-7)



1차 세계대전이 펼쳐낸 파괴적인 현실은 '역사적 예수' 탐구의 주요 방법론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선포된 말씀을 강조한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엄격한 '결단주의'에 입각한 불트만의 실존주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추가 탐구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99-100) 자유주의 개신교에 조종弔鐘을 울린 칼 바르트는 "우리 눈이 분별할 수 있는 한, 역사 안에는 신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언명하였다.(125) 불트만은 초기 공동체의 메시지인 예수의 가르침 전통이 지속적으로 보존되어 왔으며, 현재의 삶에 양식을 부여한다는 '삶의 자리'(Sitz-im-Leben) 개념을 천명하였다.



20세기 초 종교사학파는 "그리스도교를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 등장한 많은 종교 운동 가운데 하나로 이해"(101)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타이센은 예수 전통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견유학파의 유랑 철학자에 빗대어 조명"하였고, 호슬리는 예수의 탈정치화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끝으로서 ‘우주적 파국’을 뜻하는 옛적의 묵시적 종말론보다 사회의 회복과 사회적 삶의 갱신을 표상하는 '정치적 은유와 상징'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4-5) 크로산은 "급진적 평등주의를 요청하고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소작농이자 유대적 견유철인'으로서의 예수를 결론으로 제시한다."(112-3) 



'역사적 예수' 탐구에 엄격한 역사적 방법론을 적용하지 않고 "신앙의 영역('이성이라는 필연적 진리')을 따로 상정"(122)해야 한다는 줄기찬 의문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재개되어야 할 것인지의 질문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시 제기한 사람들은 불트만의 학생들이었다."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를 너무 날카롭게 분리시켜 비연속성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역사적 예수를 "신화 속으로 해체해버릴 위험, 곧 가현설(docetism)의 위험"이 있다고 말했고, "공관복음서의 체제와 형태 자체가 (이미) 예수의 생애사를 신앙의 구성 요건"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132-4)



"20세기 후반기의 예수 생애 연구에서 가장 희망적인 진척은 예수를 무엇보다 유대인으로 봐야 한다는 인식과 그 결과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공고한 파악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역사적 예수의 제3의 탐구’로 구분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초상을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도 예수가 1세기 환경에서 살았던 1세기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141) 여기에 더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저자에서 독자로, 텍스트 배후의 독서에서 그 전면의 독서로, 창문으로서의 텍스트에서 거울로서의 텍스트 이해"로 복음서 연구의 축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의미는 "단순히 텍스트 ‘안에’ 존재하지 않고 독서의 행위 가운데 독자에 의해 창조된다."(152)



우리는 "자료에서 사실이 발견되기까지 해석과 해석자가 연루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사실, 역사를 앞으로 움직이는 사실은 결코 의미가 제거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단순히 일시적인 것 이상의 사실은 늘 의미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그것의 의미/의의 내에서의 사실이다."(169) 가다머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 개념에 따르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외려 '이해를 가능케 하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조건'이며, 그 사이에 끼어드는 전통은 우리의 일부이다." 해석자의 의식은 "어느 정도 텍스트의 산물이다." 텍스트는 해석자의 의식을 '만들어내서'(effected), '효과적'(effectual)으로 올바른 질문을 찾도록 이끌어준다.(187-8)



"역사적 객관성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역사적 예수 탐구에 가짜 목표를 투사했다. 왜냐하면 그 초창기부터 탐구자들은 복음서 텍스트 배후에, 또 그것이 담아낸 전통들의 배후에 어떤 ‘역사적 예수’가 있다고 가정해왔기 때문이다." 되돌아 보면, ‘역사적 예수’는 "공관복음의 자료를 사용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 구성해놓은 결과이지, 그때 당시로 되돌아간 예수와 우리가 복음서 전통 속의 예수상을 비판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역사 속의 인물은 아니다."(191-2) 공관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일과 기억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그 "과거를 다시 현존하게 함으로써(Vergegenwartigung),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기억함’의 과정인 것이다."(198)

- 접기
nana35 2017-08-28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상권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전문성(내용난이도) ⭐️⭐️⭐️⭐️⭐️
가독성(자간, 글씨체, 총량) ⭐️⭐️⭐️⭐️
디자인(표지, 속디자인) ⭐️⭐️⭐️⭐️

내용 난이도 자체는 별 다섯개인데, 언급하는 주요 구절들을 모두 친절하게 나열해줘서 난이도를 줄여주고 싶지만, 그래도 어렵다. 두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라 별점을 좀 깎았다.

주요 공략 대상은 “역사적 예수 세미나 학파”들의 주제인 “역사적 예수”를 다룬다. 그래서 상당히 낯선 주제와 낯선 학문적 틀로 접근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뭐든지 잘 알지 못한다, 라는 애매한 학자의 전형적인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다루는 주제에서만큼은 저명한 학자의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문자주의자에게 중간중간 짜증나는 부분이 있는건 애교로 봐주자.

상권이지만 사실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찾기의 서론부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또한 가치가 있고 후반부에 “하나님나라”라는 주제를 다루니 어쩔 수 없이 보게 될 것.
- 접기
책갈피하고덮음 2019-10-04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