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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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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삼캬 요가 (1)
 
삼캬(samkhya 혹은 sankhya) 이론이란 뜻.
요가(yoga) 한자로는 유가(瑜伽).
요가는 통일의 뜻으로 쓰이는 말로서 가장 넓은 의미로는 마음과 몸의 통일 즉 의근(意根)과 작업근(作業根)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고, 보통은 마음의 통일을 말한다. 그래서 객관(客觀)에 중점을 두면 오감(五感)의 통일이어서 숨을 고르게 하고 의지를 집중시켜서 오감으로 하여금 외계에 붙어버리지 않도록 해서 마음 하나인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통일이라고 한다. 주관(主觀)에 중점을 둘 때는 나의 통일이 되는데 나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넓게 볼 때는 오감(五感), 오기(五氣), 의지(意志), 이성(理性), 즉 자아를 만들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리키게 된다. 그때의 나의 통일(atma-yaga)이란 자아의 통일이다. 그러나 좁게 볼 때의 나는 몸 마음을 차지하는 주되는 중심 나만을 가리잤고 한다. 그때의 나의 통일은 나에 의하여 내근(內根)을 통일한다는 뜻으로 나를 주로 한 통일이 된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것은 이성을 주로 하는 부디 요가(buddhi-yoga), 선정(禪定)에 의한 쟈나 요가(dhyana-yoga), 지식에 의한 즈나나 요가(jnana-yoga), 신념에 의한 박티 요가(bhakti-yoga), 이욕(離欲)을 주로 하는 산야사 요가(sannyasa-yoga), 실수(實修)를 주로 하는 아뱌사 요가(abjuasa-yoga), 이론을 주로 하는 삼캬 요가(samkhya-yoga), 실행을 주로 하는 카르마 요가(karma-yoga)가 된다. 안팎 어디로 보든지 다 마음의 통일 아닌 것 없기 때문에 일반으로 요가라면 마음의 통일로 번역함이 적당하다. 마음의 통일이라는 뜻을 주로 하게 될 때는 마음이 한 방면으로 집중되는 것이므로 경향(傾向), 주의(主義), 신앙(信仰), 교의(敎義) 하는 뜻이 된다.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요가는 대개 그런 뜻이다. ① 마음의 통일이 향하는 상태를 주로 할 때는 수행(修行), 수양(修養), 실수(實修), 상유가(常瑜伽) 하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다. 제 5장에서 말하는 요가는 그런 것이다. ② 마음 통일의 방법을 주로 하게 될 때는 행법(行法), 관법(觀法), 상응법(相應法), 유가법(瑜咖法) 하는 말로 할 수 있다. 이것은 ②,④와 서로 통하고 한다. 쓰인 예는 적지만 제 8장 12 같은 것은 여기 속한다. ③ 마음 통일의 결과 즉, 실지(悉地 곧. 成滿位)를 얻은 과상위(果上位)를 또 요가란 말로 표시할 수도 있다. ④제2장, 4장에 그 예가 많다. 마음의 통일로 얻은 힘 즉, 실지(悉地)를 얻은 사람의 현력(現力)을 자재력(自在力), 환력(幻力), 유가력(瑜伽力)이라고 하고도 한다. 제 11장, 18장에 그 예가 있다. ⑤ 그리고 마음 통일을 향하고 있는 사람, 혹은 그것을 이미 얻은 사람을 요기(yogi)라고 하는데 그것을 행자(行者) 혹은 유가행자(瑜伽行者)라고 번역한다. 제6장에 거기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⑥ 마음 통일이 된 사람을 특히 육타(yukta) 혹은 요가 육타(yoga-yukta)라 하고 그 현재 동사를 요감 유지(yogam yuj)라고 해서 ‘마음을 통일한다’ 혹은 ‘요가를 닦는다’ 하는 뜻으로 쓴다. 제 5장, 6장에 가장 많이 쓰인다. ⑦ 전체 18장 700절 중에 요가란 말이 쓰인 것이 157개나 되고 보면 이 책이 스스로를 요가 교전(yoga-sastra)이라고 한 것은 과연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 — 「세계성전전집」
그릇된 생각으로 인하여 사람은 비(非)를 시(是)로 알게 된다.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아르쥬나는 친족과 친족 아닌 사람을 차별하게 됐다. 이것이 쓸데없는 차별이란 것을 밝히기 위해 크리슈나는 몸(자아 아닌 것)과 아트만(자아)을 구별하고 몸은 항구하지 못하고 여럿인 데 대해 아트만은 항구하고 하나인 것을 알려준다. 힘씀은 사람이 다스려가는 속에 있지 거기서 나오는 결과에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것은 오직 그 결과에는 관심말고 제 행동의 방향 혹은 의무를 결정하는 데 있다. 집착 없는, 혹은 무사한 정신으로 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 간디
 
산자야 말하기를
 
1. 그와 같이 불쌍히 여김에 잡혀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낙망하는 그를 보고 마두 귀신을 죽여버리시는 이(크리슈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르쥬나의 ‘불쌍히 여김’은 거룩한 자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자기 아첨이다. 제 사람을 죽여야 하는 행동에 신경이 쭈그러들어서 하는 것뿐이다. 아르쥬나는 제가 해야 할 일에서 감상적인 자기 불쌍히 여김 때문에 꽁무니를 뺀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스승은 그를 책망한다. 아르쥬나는 카우라바스가 제 친족인 것을 전에도 벌써 알고 있었다. —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오, 아르쥬나야, 이 위급한 때에 네게 그러한 망령된 생각이 일어남은 웬일이냐? 이는 마음이 높으신 이들이 품지 않으셨던 바요, 하늘에 이르게 할 수도 없고, 더러운 이름을 가져올 뿐이니라.
마음이 높으신 이들 직역하면 아리안적이란 말이다. 인도 사람의 선조는 아리안 인종이라는데 그 아리안의 뜻은 용맹과 고상(高尙)과 강직(剛直)과 겸양(謙讓)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3. 푸리다 부인의 아들아, 사내답지 못함에 빠지지 말라. 이것은 네게 합당치 않다. 오, 대적을 억누르는 자야, 가엾은 비겁을 떨어버려라. 그리고 일어나라!
 
아르쥬나 말하기를
 
4. 오, 마두 귀신을 죽이시는 이여, 제가 어찌 싸움터에서 공경할 만한 비슈마와 드로나에게 화살을 겨눌 수 있사오리까?
 
5. 이들 존경할 스승들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빌어먹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네 이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제 스승입니다. 저는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 세상에서 피에 물든 복락을 누릴 뿐이옵니다.
피에 물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립 해방의 전쟁이란 것까지도 넣어서, 전쟁치고 피와 원망으로 물들지 않은 것이 있을까?
 
6. 또 우리가 그들을 정복하든 그들이 우리를 정복하든, 그 어느 것이 과연 나은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죽인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없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들이 저기 진을 벌이고 서 있습니다.
 
7. 제 목숨은 슬픈 심정에 오금이 저리고, 제 마음은 어지러워 제 할 의무를 가려낼 수 없습니다. 당신께 묻자옵니다. 확실한 말씀으로 일러주옵소서. 어느 것이 합당하옵니까? 저는 당신의 제자이옵니다. 당신께로 피하여 돌아왔사오니 가르쳐주옵소서.
확실한 아르쥬나는 절망하고 격정하고 의심할 뿐 아니라 또 확실한 것을 간절히 찾고 있다.
스스로 무리인 줄 아는 것은 이성으로 향해 나가는 발걸음이다. 불완전을 의식하는 것은 혼이 살아 있는 증거이다. 살아 있는 한 상하거나 병신 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산 몸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의 목숨은 위기를 통하여서 보다 높은 지경으로 나갈 수 있다. 구도자(求道者)가 다 같이 경험하는 것은 빛의 문턱에 가서도 의혹과 어려운 문제의 엄습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혼도 그 속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둠을 자극해서 맞서 일어나게 한다. 아르쥬나는 친척 친구의 반항이니, 의심이니, 두려움이니, 애욕이니, 욕망이니 하는 안팎의 난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을 다 제단 위에 바쳐 지혜의 불로 태워버려야 한다. 어둠과의 싸움은 빛이 그 사람의 전체를 채울 때까지 계속된다. 아르쥬나는 불행의 습격을 받고 정의와 사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제 스승, 자기와 같이 계시는 거룩한 이로부터 오는 빛과 인도를 자기의 자아 속에 찾는다. 사람은 제 하는 방법에만 내맡겨두어서는 아니된다. 제 세계가 온통 파멸된 담엔 사람은 다만 안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은혜 속에 밝혀주심을 찾는 수밖에 없다. 아르쥬나는 지식의 탐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찾는 것 아니다. 행동인으로 행동의 법칙, 자기의 다르마, 곤란 속에서 자기해야 할 것을 찾는다. “주여,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르쥬나와 같이 제 약함을 알고 제 무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열심으로 바라서 그것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8. 저는 제가 비록 이 땅 위에서 비길 수 없이 부요(富饒)한 왕국을 얻으며 천신(天神)들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얻는다 할지라도 제 오감을 다 말리어버리고야 말 이 고뇌를 무엇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산쟈야 말하기를
 
9. 구다케샤, 파란타파는 흐리쉬케샤, 고빈다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저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잠잠해버렸습니다.
파란타파(Parantapa) 대적을 억누르는 이, 아르쥬나,
고빈다(Govinda) 모든 것을 아시는 주(全知), 크리슈나.
아르쥬나는 스승의 말씀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기는 하면서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니 스승의 일은 더 어려워졌다. — 라다크리슈난
 
10. 오, 바라타시여, 흐리쉬케샤는 두 군대 사이에서 그와 같이 낙망하는 그를 보고 도리어 빙긋이 웃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웃으심 아르쥬나의 속을 뚫어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1.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말을 했다. 어진 이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는다.
‘지혜의 말’을, 라다크리슈난은 “카쉬미르(Kashimir) 번역에는 ‘너는 분별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했다’로 되어 있다”고 했으며 간디는 “그러면서 너는 지혜의 빈 말을 했다”로 번역했다.
이 아래 30절까지의 말이 곧 삼캬(samkhya)의 이론이다.
 
12. 나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때가 없으며, 너도 저 왕들도, 또 이 앞으로도 우리가 있지 않게 될 때는 없을 것이다.
주석가 샹카라(Shankara)는, 여기에 복수를 쓴 것은 그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른 우리 육신을 두고 하는 것이요 보편적이며 하나인 대아(大我, Self)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고, 라마누자(Ramanuja)가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와 왕들을 구별해 말한 것은 각 개인의 혼은 불가멸(不可滅)의 것이므로 전우주와 한가지로 영원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절대적인 영(靈)의 영원성이 아니고 경험적인 자아(ego)의 전생(pre-existence)과 후생(post-existence)에 대해서다. 자아가 복수인 것은 경험적 우주 안의 사실이다. 각 개인은 처음의 비존재에서 완전존재로 올라가는 운동 곧 비유(非有, asat)에서 유(有, sat)로 올라가는 운동이다. 삼캬론(samkhya論)에서는 혼(soul)의 복수를 가정하는 데 반해 「기타」에서는 그것을 절충해서 우리는 하나인 크세트라즈나(ksetrajna) 안에 살며, 움직이며, 존재를 가진다고 본다. 브라만은 만물의 근본이지만 그 자신 하나의 물건은 아니다. 브라만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시간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자아는 시(始)도 종(終)도 없다. 혼들은 브라만과 같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브라만이다” “네가 곧 그것이다(That art thou)” 하는 말들 그대로다. 수소(Suso)의 말대로 하면 “모든 피조물은 거룩한 본질 속에 그 모형으로 영원 전부터 있었다. 그것들이 거룩한 이상과 일치하는 한 그것들은 창조 전부터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이다.” “인격 신 곧 창조주는 경험적인 우주와 한가지로 영원히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는 경험적인 존재의 총체다. 생명의 주는 자궁(子宮)들 속을 다니신다. 그는 나시는 일이 없으시지만 가지가지 모양으로 나신다.”
샹카라는 말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유일의 전생자(轉生者)시다(transmigrant). 파스칼이 그리스도는 세계 마지막 날까지 고난을 겪으실 것이라고 했던 말과 비교해보라. 그는 인류가 주는 모든 상처를 다 받으신다. 그는 창조된 모든 존재의 상황을 다 견디어보신다. 해방된 혼들은 현재의 생활에서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고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가서야 평화에 들어간다. 다만 인격적 지존자(至尊者)는 자유로 제한을 당하시는데 우리는 처를 없이 제한을 당하는 것뿐둴 존재의가 만일 프라크리티(prakriti) 연극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그 연극에 속한 것들이 존재무지는 개인 영혼은 괴롭힐를 다있지만 저 보편적인 영은 어떻게 못한다. 우주의 끝이 올 때까지 개인 영혼들은 서로 다른 질의 내용을 가지고 복수로 계속질의나갈 것이다. 그 다수성(多數性)을 이 우주에서 뗄 수는 없다. 해방된 혼은 참을 알고 그 안에 살 수 있는데 해방되지 못한 것들은 업(業)의 끈에 붙들려매여 생(生)에서 생으로 굴러 간다.” — 라다크리슈난
 
13. 이 몸의 주인은 여기서 어린이와 청년과 어른의 시대를 지내듯이, 그렇듯이 또 다른 몸을 가지는 날이 온다. 어진 이는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다.
 
14. 쿤티의 아들아,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오, 바라타의 족속아.
감관(感官) 감각을 차지하는 기관, 관(官)은 차지한다는 뜻, 우리 몸에 그것이 다섯이 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그래서 보통 오감(五感) 혹 오관(五官)이라고 한다. 그것이 작용함으로써 감각이 생긴다. 빛, 소리, 냄새, 맛, 살갗에 닿는 느낌이다. 그러면 이에 따른 쾌, 불쾌의 감정이 생기고 그러면 마음이 갈라지고 평안이 깨진다.
이 서로 대립되는 것들은 모두 유한하고 일시적인 원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브라만에서 오는 즐거움은 보편적인 것이요, 자존(自存)하여서 모든 특수한 원인이나 대상에서 독립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분체(不可分體, 떼어놓을 수 없는 몸)가 있어서 복잡한 우주와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이기적인 존재의 기쁨, 슬픔의 변화를 가능할 수 있도록 붙들어준다. 그 쾌락, 고통의 태도는 습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공을 반드시 기뻐해야 하고 실패를 반드시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없다.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꼭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있다. 기쁨, 슬픔을 당하는 것은 사아(私我) 곧 의식 때문에, 그것이 생의 습관과 몸에 달려 있으면서 거기 붙어서 지식과 행동을 하고 있는 이상은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한번 자유를 얻어 거기 대한 관심을 내버리고 신비의 가라앉음 밑에 빠져들게 되면, 즉 그 의식이 밝아짐을 얻으면 그런 것들은 오고가는 것이지 그 자신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다음에 어떤 것이 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 라다크리슈난
 
15.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사람아, 그런 것들을 견디어내고 쾌락과 고통을 꼭같이 보는 사람, 그런 어진 이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이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음과는 다르다. 몸을 가진 자는 다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직도 슬픔(悲歎) 아픔(哀痛)의 지배를 받고, 물질적인 사건의 시달림을 받으며, 마땅히 뚫고 나가야 하는 의무의 길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가 아비쟈(avidya) 곧 무지에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 라다크리슈난
 
16. 비유(非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이 유(有) 아닐 수 없다. 이 둘의 궁극(窮極)은 참다움을 본 이에 의해서만 보일 수 있다.
원어(原語)를 모르고 다른 말로 옮겨진 것들만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번역할 수 없다. 영어로 하면 이그지스턴스(existence)와 빙(being)을 어떤 뜻으로 쓰느냐 하는 문제요 한문으로 하면 유(有)와 존재(存在)의 문제다.
참고로 간디 번역에 있는 마하데브 데자이의 보주(補註)를 여기 인용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불변의 기초가 되는 것(being)과 사라지기 쉬운 것(becoming)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H.P. Blavatsky)는 그 빙(being)이라는 말 자체부터 잊고 있었으며 장차 있을 그것을 표시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대신 ‘비니스’ (be-ness)라 하면 어떠냐고 하기까지 했다. 모든 비커밍, 모든 이그지스턴스(out-being)는 항구불변으로 있는 것에서부터 솟아나온다.
한문의 유(有)와 재 (在)는 비교하면 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유부형재(有父兄在)라 하면 부형이 있어서 있다. 첨의 유는 좀더 근본적이고 재는 좀더 현실적 구체적이다. 유부형이라 하면 때와 곳의 제한 없이 내게 부형 되는 이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재라 하면 여기 집에 지금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은 서로 바뀌어 쓰이기도 한다. 우리 말로는 다 ‘있음’이니 참이라는 말이나 붙여서 구별할까? 그때그때의 어감 문제다. 그런 때는 실재라 하면 그만이었는데 그것이 꼭 맞는 것 같지 않아 실존이라 해봤지만 존(存)과 재(在)에는 그 구별이 될 아무 근거도 없다. 이그지스트(exist)가 더 깊은 것 일까, 빙(being)이 더 깊은 것일까? 그러나 그 절 전체의 의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보면 짐작할 만하다. 참과 참 아닌 것에 대해서.
샹카라는 사실적(real, sat)인 것은 그것에 대해 우리 의식이 잘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고 비사실적(unreal, asat)인 것은 거기 대해 우리 의식이 잘못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물체에 대한 우리 의식은 다르지만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은 다를 수 없다. 비사실적인 것 즉 이 세계의 지나가는 모습들이 언제나 분명한 실재의 모습을 가리고 있다. 라마누쟈는 비사실적인 것은 몸이고 사실적인 것은 영혼이라고 했다. — 라다크리슈난
 
17. 너는 알라, 이 모든 것 속에 속속들이 들어 있는 것(遍滿)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물건이다. 그 변할 수 없는 것을 아무도 꺼버릴 수 없을 것이다.
편만(遍滿) 속속들이 들어 있다(pervade). 삼투(渗透)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속속들이라고 했다. 마하데브 데자이(stretched, spread out)는「이사야」 42장 5절의 “하늘을 창조하시며 펴시고” 하는 말로 자기 번역을 뒷받침했다.
 
18. 영원 불멸이요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이가 몸을 쓰고 와 계시는 이 몸들은 끝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족속아, 싸워라.
영원불멸 이 말을 쓴 것은 변경시킬 수도 멸망시킬 수도 없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요, 헤아릴 수 없다 한 것은 또 설명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도 좋다. 그 어떤 두 가지 뜻이 다 맞는다. 우리 참 자아는 자명한 것이어서 증거도 증명도 소용이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자아는 모든 증명과 측량의 기본이 된다.
 
19. 이것을 죽이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이것을 죽임을 당하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다 같이 참을 모르는 이다. 이는 죽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느니라.
이것 아트만, 자아, 현신자(現身者), 몸의 주인, 이것은 삼캬에서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를 구별해서 하는 말이다.
 
20. 그는 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으며, 일찌기 나타난 일이 없으므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불생(不生)이요 상주(常住)요 항구(恒久)요 태극(太極)이다. 몸이 죽임을 당하는 때에도 그는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다.
 
21. 프리다의 아들아, 사람이 만일 이것은 무너뜨릴 수도 없고, 영원이요 불생이요 불멸인 줄을 안다면, 누구를 능히 죽이며 누구를 능히 죽일 수 있게 하겠느냐?
이것을 안다면 어진 이는 천하에 적대하는 사람이 없다(仁者無敵於天下),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할 때의 인(仁)은 이것 아닐까?
 
22. 사람이 마치 낡은 옷을 버리고 새것을 입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이 몸으로 사시는 혼도 낡아버린 몸들을 버리고 다른 새것으로 옮겨가신다.
옮겨간다 영원한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일이 없지만 몸을 가지고 사는 혼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그럴 때마다 출생하고, 그 과거의 진화와 미래의 필요에 응하여서 자연 속의 물질로부터 마음과 숨과 몸을 꺼내어 자신에 모아가진다. 그 영적인 것(psychic)은 비즈나나(vijnana)요, 그것이 몸(anna),숨(prana), 마음(manas)의 세 겹으로 나타남(三重顯現)을 지지해준다. 이 거친 육신이 떨어져나간 때에도 생기적(生氣的, vital), 또는 심정적(心情的, mantal) 껍질은 아직도 영혼의 탈 물건으로 남아 있다. 다시 태어남은 자연의 한 법칙이다. 생의 가지가지의 형식 사이에는 한 객관적인 관련이 있다.「카다 우파니샤드」(Katha Up.)에는 “마치 곡식알같이 이 유한한 것 (mortal)은 익는 것이고, 또 곡식알과 한가지로 그것은 난다” 했다. 몸으로 삶은 영혼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몸을 죽이는 것이 어찌 옳을 수 있을까? 이 구체적인 존재의 세계는 한 의미를 가진다. — 라다크리슈난
 
23. 칼이 그것을 찍을 수 없고, 불이 그것을 태울 수 없고, 물도 그것을 적실 수 없으며,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24. 찍을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도 없으며 말릴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영원이요 두루 차 있음(遍滿)이요 불변이요 부동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이다.
 
25. 그는 나타나 뵈지 않는 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요 변함이 없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이인 줄 알진대 너는 근심하지 말라.
여기 말한 것은 온전히 삼캬에서 말하는 푸루샤지「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만은 아니다, 푸루샤는 모든 형상과 생각과 변화를 뛰어넘은 지경이다. 마음이나 숨이나 몸은 달라질 수 있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크리토(Creto)가 “소크라테스여,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을 장사하랍니까? 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대답하기를 ‘어떤 방식이거나 너희 하고 싶은 대로다. 그러나 너희는 우선 나를, 참 나를 붙잡아야지. 걱정 말라, 내 사랑하는 크리토야, 그리고 너희는 내 몸만을 장사한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거나 보통 하는 대로 너희 생각에 좋은 대로 하여라’” 했다. — 라다크리슈난
 
26. 네가 설혹 그것이 끊임없이 나고 끊임없이 죽는다 생각 하더라도 너는 걱정해서는 안된다, 이 억센 팔 가진 자야.
 
27. 난 자는 반드시 죽는 것이요, 죽은 자는 반드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는 근심하지 말라.
「리어 왕」안에서 에드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견딜 줄을 알아야 한다.
세상올 때에 그러했던 것같이, 갈 때에도 또한.
(Men must endure. Their going hence, even as their coming here.)
 
비구니 포타카라(Potacara)가 자식 잃은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말.
 
울지 마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요,
가고 싶어 가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라, 네 아들은 이 땅 위에 살려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이 짤막한 생을 살려고,
한길로 왔다가 또 다른 길로 가는 것을……
이 생이 그러하면 저 생도 그러하다. 울 것이 무엇이냐?
(Weep not, for such is here the life of man
Unasked he came, unbidden went he hence
Lo! ask thyself again whence came thy son
To bide on earth This little breathing space
By one way come and by another gone……
So hither and so hence-why should ye weep?)
 
나는 들으니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뭍으로 다녀도 호랑이나 물소를 만나는 일이 없고, 군(軍)에 들어도 칼날이나 갑옷을 피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 물소도 그 뿔을 내댈 곳이 없고 호랑이도 그 발톱을 박을 데가 없으며 칼도 그 날을 들이밀 데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 그러하냐, 그 죽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入軍不避兵甲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夫何故 以其無死地) ᅳ노자
지극한 속이 있는 이는 불로 뜨겁게 할 수가 없고 물에 빠지게 할 수 없으며 춥고 더운 것이 해할 수도 없고 날짐승 들짐승도 상처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弗能賊 弗謂其薄之也 言察乎安危寧於禍福 謹於去就 莫之能害也) ᅳ 장자
 
28. 모든 산 것의 모양이 그 처음에는 나타나 뵈지 않고, 그 중간에는 보이고, 그 끝에 가서는 다시 뵈지 않는다. 오, 바라타의 아들아, 거기 무엇이 한탄할 것이 있느냐?
 
29. 한 사람은 그것을 보고 놀라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놀랍다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듣고 놀라와한다. 그러나 듣고 나서도 아무도 그것을 참으로 안 자는 없다.
자아의 진리는 만인이 누구나 다 찾을 수 있지만 거기 도달하는 것은 극히 소수이다. 즐겨서 어떤 대가라도 내며 자기단련을 해서 흔들림과 애착이 없는 지경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이지만 대개는 그것을 찾으려는 열심이 없고, 그 열심은 가지면서도 의혹과 우유부단 때문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고, 또 의심치 않아도 난관에 부딪쳐 나가버린다.⎯라다크리슈난
 
30. 모든 몸 속에 들어 계시는 그이는 영원하고 상함을 입는 일이 없으신 이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아들아, 너는 산 물건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이 아니니라.
그와 같이 해서 크리슈나는 순전히 이성에 터잡는 강론으로 육신은 연약한 것이지만 자아 곧 아트만은 영원한 것으로, 설혹 어떤 사정으로 육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수가 있더라도 카우라바스들은 내 친척이기 때문에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망상이란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 다음은 아르쥬나의 크샤트리야(Kshatriya)족으로서 할 의무를 사명한다. ⎯간디
 
31. 또한 너의 마땅히 할 의무를 생각해서도 네가 겁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크샤트리야족으로서는 의무인 싸움을 하는 것에서 더한 선행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샤트리야 왕족이라 번역한다. 네 계급 중의 하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며, 필요에 의해서는 전쟁을 해서라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
 
32. 오, 파르다(아르쥬나)야, 그러한 싸움이 구함 없이 오는 것을 만난 크샤트리야는 행복하다. 하늘 가는 문이 열렸다.
하늘 가는 문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자야, 태양의 성좌를 뚫고 브라만의 지경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요가에 정통한 출가승이요 또 하나는 싸움을 하다 쓰러지는 무사다.”
 
33. 그러나 네가 만일 이 정당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너는 네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는 것이요 죄를 얻게 될 것이다.
 
34.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은 언제나 네 불명예를 말할 것인데, 지위 있는 사람에게 불명예는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다.
 
35. 큰 장수들은 네가 겁이 나서 싸움을 피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니 그러면 너는 전에 존경을 받던 모든 이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다.
 
36. 네 원수들은 가지가지의 더러운 말로 너를 평하며 너를 능력없는 자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아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37. 네가 죽으면 천당을 얻을 것이요 네가 이기면 이 땅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쿤티의 아들아, 싸우기를 결심하여라.
크리슈나는 먼저 가장 높은 진리, 곧 아트만은 영원한 불멸체라는 것과 육신은 지나가버리는 것임을 일러주고, 다음 아르쥬나에게 원하지 않고 닥쳐오는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크샤트리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는 그 가장 높은 진리와 의무의 실행은 또 저절로 좋은 것이 따라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제 그 다음 「기타」의 중심적인 교훈을 비치기 시작한다. —간디
형이상적 진리를 보거나 사회적 의무를 보거나 우리의 길은 분명하다. 보다 높은 지경은 우리의 의무를 바른 정신으로 다함으로써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다음 절에서 크리슈나는 그 정신을 말한다. — 라다크리슈난
 
38. 쾌락 고통을, 이득 손실을, 승리 패배를 하나로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어라. 그리하면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절들에서 크리슈나는 불명예와 하늘의 상과 땅의 통치를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세상적인 고려를 하라고 그와 같이 가르치고 나서는 평등관(平等觀)을 가지고 전쟁을 하라고 명령한다. 달라지기를 바라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지지 말고,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감정의 희생이 되지 말고, 우리의 놓인 상황에 의해서 우리게 지워진 일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우리가 영원한 것에 신앙을 얻고, 그 실재를 체험하게 될 때. 이 세상의 괴로움은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된다. 루터는 말했다. “저들이 내 생명과 재물과 명예와 자녀와 아내를 다 뺏아간들,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모든 것은 다 사라질 것이나됬다.뀠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제 참 목적이 무엇임을 알고 거기다가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사람, 그는 위대한 나됬다다. 비록 그가 다른 모든 것을 빼앗겨버리고 헐벗고 주린 몸으로 홀로 거리를 걸을지라도, 비록 .뀠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눈동자 속에서 이해해주는 빛을 찾아볼 수 있는 눈이 이려 없을지라도,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제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속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 라다크리슈난
맹자가 이르기를, “모든 몬(物)이 내게 갖추어져 있으니 스스로 돌이켜서 정성되면 즐거움이 이에서 더할 것이 없다”(萬物皆備於我 反身而誠 樂莫大焉)고했다.
 
39. 이것은 삼캬에 의해서 너에게 주어진 깨달음이다. 이제 요가에 의한 그것을 들어보라. 오, 파르다야. 네가 만일 이것으로 네 마음을 닦는다면 너는 카르마의 얽맴을 벗어버릴 것이다.
삼캬(samkhya) 한문으로는 승법(僧法), 혹은 수론(數論), 이론. 간디는 여기서는 지식(knowledge)이라 번역했다.
요가(yoga) 에브리맨스 문고판에는 규칙(rule)이라 번역했고 세계성전전집에는 실수(實修)라 했다.
깨달음 지혜(wisdom), 이해(understand).
마음을 닦는다면 간디는 ‘마음가짐에 의지함’(resorting to this sttitde)으로, 라다크리슈난은 ‘지성으로 받아들임’(intelligence accepts it)으로, 일본어역에는 ‘이 각오로 마음을 통일하면’으로 돼 있다.
카르마 업(業, work, action)「노자」「장자」에서 하는 말로 한다면 유위 (有爲)에 해당할 것이다.
바네트(L. D. Barnett)는 말하기를「바가바드기타」는 개인을 초인간적인 능력의 외로운 나라 속에 두어 고립시키자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사뭇 거룩한 사랑의 가슴속으로 이끌어 들이자는 것이다. 대체로 말해서, 그리 잘됐다고는 할 수 없으나, 두 가지의 요가 혹은 규칙(rule)을 구별해 말한다. 즉 지식의 요가(jnana yoga)와 실수의 요가(Karma yoga)다.
아트만이 불멸체임을 아는 지식은 한탄이 쓸데없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행동은 지식이 그것을 풀지 못하는 한 얽어매고 있다. 아르쥬나는 취하라고 가르침을 받은 그 무서운 행동의 달림 길에서 어떻게 하면 해방이 될 수 있을까? 이제 행동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과 자유하게 하는 지식에 이르는 두 가지를 다 하게 하는 열쇠를 아르쥬나 앞에 보여준다. 그 것이 요가다. 무집착(無執着) 혹은 무사(無私)의 태도(attitude)다. 요가는 태도라는 뜻으로도 행동이라는 뜻으로도 씌어있다. — 마하데브 데자이
「기타」에서 삼캬는 보통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철학의 체계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요가도 파탄잘리 요가(patanzali-yoga)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삼캬의 설명은 분명한 푸루샤(自我)와 프라크리티 (非我)의 이 원론인데「기타」에서는 만유의 주인 ‘지극히 높으신 자아’의 실재를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고 있다. 삼캬는 불변하는 ‘하나이신 이’ 에 대한 직관을 지적으로 설명해준다. 그것은 지식의 요가이다. 행동의 요가는 카르마 요가이다. 지금까지 말해온 지식은 말로 하거나 학문적으로 토론 할 것이 아니다. 내적인 체험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기타」에서는 삼캬는 지식과 욕망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고, 요가는 실행을 강조하고 있다. 자아와 몸과는 서로 다른 것이고, 자아는 이 세계에서 되는 일로는 불가 멸이요 부동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 스승은 부디 요가(buddhi- yoga) 혹은 부디의 통일, 즉 이해의 통일을 설명해준다. 부디(buddhi)는 단순히 개념을 만들어내는 능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 인지와 분별의 작용도 한다. 이해 혹은 부디는 달관, 불역(不易), 지관(止觀, samata)에까지 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manas)은 감관에 연결될 것이 아니라 마음보다는 높은 부디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부디와 연합돼야 한다(buddhi- yuka).「기타」의 시대에 형성되고 있었던 삼캬론의 영향이 여기 있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 의한다면 푸루샤는 비활동적이요 그러므로 얽매임이나 해방됨이 실지로 거기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24우주 원리의 하나인 부디에서 오는 것이다. 프라크리티에서는 물질의 5요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공(空)과 물질의 5 근(根)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과 부디 혹은 지(知)와 의(意)의 분별 원리인 마하트와 아함카라 혹은 자기 감각, 마음과 그 열 개의 감각 능력, 다섯 지식, 다섯 행동이 차례차례로 나온다. 해방 은 부디가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를 분별하게 될 때에 이루어진다.
이 견해가「기타」유신론 속에 받아들여져 있다. 부디는 차부고, 몸이 차고, 감관이 그것을 이끄는 말인데, 그 말을 어거하는 것이 마음(manas)이다. 자아(self)는 부디 위에 있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중인이다.「카다 우파니샤드」에는 부디가 차부로서 마음을 통해 감관을 통제하여서 자아를 알 수 있게 한다. 부디가 만일 자아의 의식에 의하여 비쳐줌을 입어서 그것을 제 일생의 빛과 주가 되게 하면 그 인도가 우주 목적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만일 아트만(atman)의 빛이 부디 위에 적당하게 반사된다면, 다시 말해서, 부디가 만일 모두 어둡게 하는 경향을 깨끗이 벗어버린다면, 그 빛이 일그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부디는 영과 연합이 될 것이다. 사아(私我)의 생각과 분리가 조화의 비전에 의해 사라져버리고 개개가 전체요, 전체가 개개이게 될 것이다. 삼캬와 요가는「기타」안에서는 서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같은 목적을 가지면서 서로 다른 방법을 가질 뿐이다. — 라다크리슈난
 
40. 여기는 힘써서 헛된 법이 없고 잘못에 빠짐도 없다. 이 법(다르마)을 조금 지킴으로써만도 너를 큰 두려움에서 건져줄 것이다.
 
41. 쿠루의 아들아, 여기서는 결정적인 태도가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결정적이 되지 못하는 생각이란 가지가 많고 끝이 없는 법이다.
여기서 이 요가에서는, 혹은 이 일에서는. 참고로, 세계성전전집에서는 ‘현세에서는’이라고 했다.
인생의 실현은 거룩한 계명이 지시해주는 목적에 대해 자기를 온전히 받침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무한한 가능성들을 무턱대고 추구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점에만 집중하는 것은 수양해서만 가능하다. 이리저리 헤매는 것은 자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지만, 거기서 벗어나서 자유로와지려면 그것은 자연 혹은 성, 인종 혹은 민족적 신비주의로 될 것이 아니라, 참(reality)에 대한 순수한 체험에 의해서만 될 수 있다. 그런 체험을 기초로 하는 전심(專心)이야말로 최고의 덕이요, 그것은 결코 광신으로 빗나가는 일이 없다. — 라다크리슈난
중용(中庸)의 중(中)이 곧 이것일 것이요, 공자의 오도(吾道) 일이관지(一以貫之)도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저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요, 하나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라, 그 중(中)이 어디냐, 그 일(一)이 뭐냐 가 문제다. 그것은 어디도 아니요 무엇도 아닌 데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 장자는 허무, 적막, 염담(恬淡), 무위를 강조했고, 불교에서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을 말한다. 유대교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만을 섬기라고 하면서 자기는 이름이 없다 했고,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42,43. 프리다의 아들아, 아지 못하는 것들은「베다」만을 좋아하면서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했고, 애욕을 자기로 삼고 천당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그들이 가지가지의 꽃다운 말을 하며, 향락과 권력을 위해 가지가지의 특별한 의식을 보여 주었으나, 그 말은 결국 행동의 결과에는 전생(轉生)에 이를 뿐이요,
 
44. 향락과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말에 미혹되어 시비 판단의 지혜를 잃어버리고 확고한 결정이 없기 때문에, 최고의 통일지경에 이를 수가 없느니라.
스승은 여기서 진정한 행동과 의식적인 경건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다. 「베다」의 제사의 목적은 물질적인 갚아주심을 얻는데 있지만「기타」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행동을 다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생활 전체를 제물로 삼아서 진정으로 바치라고 한다. ᅳ라다크리슈난
「베다」의식과「기타」가 가리키는 요가를 대립시켜서 하는 말이다.「베다」의식은 천당과 거기 이르는 공덕을 얻기 위해 수많은 예식, 의식을 명한다. 그런 것은「베다」의 짬(眞髓)에서는 먼 것이요 그 공덕은 오래 가지도 못하는 것이므로 쓸데없다. 一간디
「문다카 우파니샤드」(Mundaka Up.)에는 이런 말이 있다. “희생을 바치는 의식만이 효력이 있고 그밖의 것은 아무것도 효력이 없다는 이들 어리석은 자들은 천당에서 행복을 다 누리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베다」시대의 아리안들은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같이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인류의 청년시대를 나타낸다. 그들의 생활은 아직도 가지가지의 미혹시키는 꿈으로 더러워지지 않은, 청신하고 매력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성년(成年)의 균형 잡힌 지혜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기타」의 저자는 그 주의를「베다」의 카르마칸다(karmakanda)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베다」의 교훈의 전부는 아니다.「베다」는 갚아주심 (그것이 일시적인 천당의 것이었거나 또는 새 몸을 타가지고 나는 생활의 것이었거나간에)을 바라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는데 부디 요가 는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어준다. — 라다크리슈난
 
45.「베다」는 삼성을 그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아르쥬나야, 너는 삼성을 초월하라. (대립하는 두 반대의) 쌍에서 빠져 나오라. 영원한 참에 굳게 서라. 얻음 지킴을 생각지 말라. 자 아를 가져 라.
삼성(三性) 선성(善性, sattva) 동성(動性, rajas), 암성 (暗性, tammas).
성(性) 구나(gunas).
자아 보통 우리들의 의식이 나다 하는 것은 소아(小我) 혹은 거짓 나(self)로 쓰고, 거기 대해 참 깨달음에 의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 나 혹은 대아(大我, Self)로 쓴다.
자아 가짐 아트마반(atmavan).
자아를 가짐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 아파스탐바
출생도 사멸도 없는 영, 곧 불멸의 영을 깨닫는 일, 우리가 알 수 없는 ‘그이’ 를 알게 되는 일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다. — 「우파니샤드」
46. 홍수가 났을 때에 우물이 사람에게 소용이 되는이만큼, 깨달은 브라만에게 모든「베다」가 소용되는 것은 바로 그만큼 하다.
브라만(braman)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브라만은 깨달은 사람, 혹은 자아의 실현을 한 사람.
이 절에 대해서는 주석자 사이에 논쟁이 많다. 어떤 이는 깨달은 사람 에개는「베다」는 조금도 소용이 없다 하고, 어떤 이는 홍수가 났다 하더라노 우물이 어떤 한정된 소용이 있을 수 있듯이「베다」도 깨달은 자에게 소용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베다의 의식을「베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존재의 필요는 없어진다. — 마하데브 데자이
강에서 물을 길어 쓰는 사람은 우물을 그리 가깝게 알지 않듯이 어진 이는 의식 행함에 아무런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의식을 지킴이 아무 가치가 없다. — 「마하바라타」
 
47.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말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 유명한 절 안에는 무사(無私) 원리의 짬이 들어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일을 할 때, 가령 밭을 갈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를 때에, 명예나 이득이나 그런 딴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무사에서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그 선한 뜻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성공실패는 그 개인만이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요소에도 달려 있다. 기요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말했다. “나는 싸웠다. 그거면 다다. 승리는 운명의 손에 달렸다.”(I have fought, that is much, victory is in the hands of fate)―라다크리슈난
제갈양(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제 몸을 굽혀 다 지치고 부스러질 때까지 하다가 죽은 담에 말 뿐이지, 지고 이기고, 날카롭고 무디고(利害) 하는 데 이르러서는 제 지혜를 가지고 능히 미리 알 바가 아닙니다.” (臣 糊躬盡疼 死而後己 至於成敗利純 非臣之明 所能逆親也)
이것을 목적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또 해서도 아니된다. 기독 신자라면 곧 그런 반대를 할 것이다. 최고의 목적은 인간 앞에 벌써 놓여 있다. 자아의 실현, 또는 자유다. 모든 행동의 결과를 생각지 말라는 것도 이 목적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뜻이 톨스토이의 신앙 고백 속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본다. “결과 포기의 신앙은……우리는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럴 권리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해서는 아니된다. 그는 자기가 누리고 있는 평안 때문에 언제나 빚을 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가 없다. 이 봉사나 자기 생활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도 다 같이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결과를 바라서는 아니되기 때문에 결과를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결과를 포기하기 때문의 궁극의 결과는 더욱더 확실해진다.”
코란은 같은 생각을 다시금 다시금 강조한다. — 마하데브 데자이
우리 행동 뒤에 사욕적(私欲的)인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행동의 결과 생각을 떠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내버린다는 말도 아니다. 떠난다는 것은 미리 생각한 결과가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미리 생각한 결과가 적당한시기에 가면 틀림없이 온다는 신앙이 확실하다는 증거다. ᅳ간디
 
48. 부의 정복자야, 너는 집착을 내버리고, 요가에 굳게 머물러 서서 되고 안되고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요가라 하느니라.
부(富)의 정복자 아르쥬나를 가리킴.
요가에 굳게 머물러(yogasthah) 굳게 속이 가라앉은 마음.
평등으로 보는 마음(samatvam) 속에 균형잡힌 마음.
평등으로 보는 마음, 이것은 자기극복이다. 노여움, 고민, 자랑, 야심 을 극복한 것이다. 속의 법칙의 힘에 의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선다. — 라다크리슈난
 
49. 부의 정복자야, 단순한 행동은 이성의 요가보다는 훨씬 떨어진 지경이다. 이성 속으로 피하라. 가엾은 것은 결과를 동기로 삼는 자들이니라.
단순한 행동 자기를 위한 행동, 결과만 보는 행동.
이성(理性)의 요가 부디 요가.
이성 속으로 부디 요가를 닦음으로써.
 
50. 이성의 요가를 닦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능히 선행과 악행을 다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어나 요가에 힘을 쓰라. 요가는 행동의 훈련이다.
 
51. 어진 이는 이성에 의한 요가를 닦음으로써 행동에서 오는 결과를 버리고 생의 얽맴에서 벗어나 모든 고통이 없는 지경고 쟝른다.
모든 고통이 없는 지경 해탈, 혹은 모크샤.
 
52. 네 이성이 미망에서 오는 혼란을 넘어설 때 너는 이미 들은 것과 장차들을 것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관계하지 않게 될 것이다.
 
53. 네 이성이, 비록 많은 들음으로 인해 미혹되면서도, 부동 불변으로 사마디에 머무른다면, 그때 너는 요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들음 「베다」로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도 있다.
사마디(samadhi) 한문으로는 삼매(三昧),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장 높은 종류의 의식을 갖는 지경이다.
정신이 통일되는 그 대상은 거룩한 자아(Dvine Self)다. 부디 요가는「베 다」의식을 뛰어넘어서 우리 의무를 행동의 결과에 대한 아무런 집착도 없이 할 수 있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방법이다. 행동 아니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등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행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 어떤 정신으로 행동 하느냐가 문제다. — 라다크리슈난
노자의 “함 없는 행위이며, 말씀 아닌 가르침”(無爲之行不言之敎)이라든가 예수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도, 행동 아니 하고 말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하되 ‘나’라는 의식을 초월해서, 도(道) 자체, 성령 자체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54. 케샤바시여, 이 튼튼한 지혜의 사람, 삼매에 머무는 사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생각이 결정된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며, 어떻게 앉으며 어떻게 걷습니까?
케샤바(Keshava) 크리슈나를 가리킴.
 
 

2021/10/31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등록 :2021-08-10 
조현 기자 사진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의 서재에서 만난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종교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또한 종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살육하고, 전쟁을 일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사회와 남북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갈등과 적개심을 가장 부추기는 것도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이들이다. 따라서 종교는 가장 고귀한 인간을 지향하지만, 평균적인 인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중세적 억압을 넘어 인류 진보가 얻어낸 ‘휴머니즘’과 이상적 종교성인 ‘영성’이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길희성(78) 서강대 명예교수가 <영적 휴머니즘>(아카넷 펴냄)이란 책에서 제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그는 2011년부터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지어 영성적 고전공부를 이끌어왔다. 지난 6일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 교수는 평생을 씨름해온 종교적 여정을 마치고 정자에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려 900여쪽의 이 책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길 교수는 크리스천이다. 외조부를 비롯해 집안에 목사와 장로들이 많다. 한완상 교수 등과 힘을 모아 새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보조지눌의 선사상을 연구해 불교를 가르쳤고, <보살예수>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같은 다원주의적 저작과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을 썼다. 부드러운 성품과 달리 독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언자처럼 매섭게 비판해와 보수개신교계에선 그를 반기독교인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종교적인 책을 ‘최후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기독교와 종교적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오다 왜 말년에 ‘영적 휴머니즘’을 들고 나왔나?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릴 수는 없다.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는 외피고 본질은 영적 휴머니즘이다. 이제 종교적 인간보다는 영적 인간을 말할 때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휴머니즘이다. 이런 영적 인간관은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유교 등 세계 모든 주요 종교 전통의 공통적인 핵심이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세속적 휴머니즘’으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이유는?

“중세적 신본주의를 깨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 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예수를 근대적 의미의 휴머니스트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지향하는 자유가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맹목적인 자유를 위한 자유가 되는 순간 에리히 프롬의 예견대로 독재나 전체주의로 도피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힘차게 외치고 출발한 프랑스 혁명 뒤에 공포정치가 도래한 것을 보라. 도덕과 공정한 정의, 영성을 상실한 근현대 서구문명의 한계를 세속적 휴머니즘이 보여주고 있다.”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전통사회의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관습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켜준 계몽주의 이전이나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해 질서를 유지하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이성과 상식에 반해선 안 된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 고착되거나 매달리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며, 자연계를 감싸면서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가장 큰 고뇌는 무엇이었나?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적인 신앙과 정통 교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에 반하는 면이 너무 많고 크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지성에 부담을 주거나 상식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종교가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면 안 되나’ 하는 의문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철학자든 신학자든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내가 아는 서구 사상사를 장식한 위대한 사상가 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이 그 고뇌에 대한 답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앙을 유치하게 만드는, 신과 인간을 유사하게 생각하는 신인동형적 사고, 그리고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다.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묻지마 신앙’에 빠지거나, 아예 종교에 담을 쌓고 세속적 삶에 자신을 맡긴다. 이 불행한 양극단의 선택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에서 심도학사 학장인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가 거닐고 있다. 조현 기자―고뇌는 젊은 날 교회에서 시작됐나?

“그렇다. 영락교회 신자로서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러나 전혀 감동이 없었다. 한국 개신교 주류를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말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실제로는 죄의식이라는 게 없다. 차라리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 낫겠는데 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승리주의에 젖어 타종교를 무시하고, 미국을 할아버지쯤으로 여겨 역사의식이라는 게 없다. 기본적 이성과 상식을 무시해 세속적 휴머니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신학적 상식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상징이고 ‘아날로지’(유비)다. 그게 신학의 가장 기본이다. ‘저 친구는 곰이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고 진짜 곰’이라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목사와 신자들은 ‘진짜 곰’이라고 한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있다는 것이다.”

―이성 없는 신앙은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교회와 신학계는 이성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만, 이성 없는 신앙은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욕망과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가 너무 쉽다. 중세를 대표하는 토머스 아퀴나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어 신앙과 이성을 종합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철학적 이성보다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기술혁명시대다. 또 고대 그리스 철학보다 더 서양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을 매료시키는 불교나 노장사상 등이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상대성을 초월하지 못하는 다원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토머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한계도 분명하다.”

―대표적인 영적 휴머니스트로 예수와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 독일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제시한 이유는?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곧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준 참된 인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내가 아는 한,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대담하게 가르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임제는 불교 냄새도 풍기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이념과 관념조차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당당하게 사는 벌거벗은 참사람이었다. 최시형은 경천, 경인에서 나아가 경물까지 가르쳤다. 슈바이처보다 훨씬 먼저 인간중심주의까지 넘어선 것이다. 길을 잃은 문명의 앞길을 비춰주는 이들이 바로 이런 영적 선각자들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07175.html#csidx6d81bf98077c6628462c4a41b9aef68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영적 휴머니즘 -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길희성 (지은이)아카넷2021-07-01

924쪽

책소개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목차
머리글 7
I. 영적 휴머니즘
1. 두 가지 휴머니즘 29
2. 영적 인간관 95
II.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
1. 유일신신앙의 종교와 형이상학적 종교 144
2. 예언자 정신 151
3. 형이상학적 신관의 대두 159
4. 유일신신앙의 의의 167
5. 역사의 하느님 신앙과 신의 섭리 175
6. 토마스 아퀴나스: 신앙과 이성의 종합 223
7. 유명론과 종합체계의 붕괴 229
8. 오컴, 종교개혁, 그리고 서양 근대의 태동 239
9. 계시와 이성에서 신앙과 과학으로 243
10. 유명론, 도덕실재론, 목적과 의미가 사라진 세계 247
11. 위기에 처한 성서적 신앙 269
12. 스피노자와 칸트 이후의 신학 283
13. 세속주의의 종교비판 293
14. 다원화된 현대세계와 종교다원적 신학 299
III.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
1. 두 가지 창조론 335
2. 새로운 신관의 기본 구도 351
3.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 신의 양면적 본성 379
4. 창조 개념과 인과성의 문제 429
5.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창조와 구원 459
6. 무(無)로부터의 창조? 489
7. 악과 신의 섭리 문제 519
8. 특별섭리와 신의 행위 539
9. 부활신앙과 부활사건 563
10. 진화적 창조의 의미 591
11. 형이상학적 신관과 인격신관 607
12. 신론 후기 643
IV.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
1. 10가지 극한적 질문들: 세속화된 근대 이성을 넘어 675
2. 새로운 영성 745
3. 영적 휴머니즘의 길을 배우다: 4명의 영적 휴머니스트 837
부록: 심도학사 개원 강연문 857
참고문헌 869
찾아보기 887
-
종교와 휴머니즘은 같이 갈 수 있을까?
P. 30
영성이란 신을 향한 갈망이며 신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영성과 영적 삶은 종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영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서구 근대의 세속화된 인간관에 기초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여러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함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
다.  접기
P. 118
영적 휴머니즘은 성령을 받고 싶어 하고 성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 내재하는 선험적인 영적 본성이라고 본다. 이 영적 본성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험적(a priori)인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혹은 하늘이 부여한, 성령을 갈구하고 성령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인간 모두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람이면 모두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선험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고 천성이다. 간단히 말해, 성령은 인간학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접기
P. 161
성육신 사상과 사건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완벽한 일치(divine-human unity, 신인합일)가 이루어졌다는 진리다.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본성상의 합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교 한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졌다는 배타적 주장에 있다. 앞으로 우리는 성육신이 모든 사람의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시각,... 더보기
P. 214
나는 세계를 신의 유출 내지 현현으로 보는 진화적 창조 개념에 따라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신에서 출현한, 혹은 신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신의 육화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파격적인’ 보편적 성육신 사상임을 나 자신도 잘 안다. 천지만물이 하느님으로부터 출현하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적 창조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성육신이라는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유독 예수라는 한 사람에서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와 진리를 가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우주 138억 년의 진통 끝에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존재가 출현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접기
P. 319
인간의 무서운 편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로‘부터’ 오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에 ‘대한’ 세속주의의 편견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 편견 모두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제3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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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지은이)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사상』 등이 있다. 현재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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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탈종교 시대에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다. 영성이야말로 종교의 핵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탈종교 시대에서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며, 영성은 종교의 핵”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간 그리고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3의 길, ‘초종교적 영성’을 제안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넘어서는 ‘포월적 신관’을 제시한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인 영적 휴머니즘을 회복하고 심화할 필요성과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개인의 진정한 ‘참 나’를 찾을 수 있는 열린 종교로의 전환을 거듭 강조한다.

I부 ‘영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비교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휴머니즘이 지닌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손을 잡고 함께 현대문명을 주도해 나갈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II부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등장하여 근대 문명을 주도하게 된 과정을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신앙의 성격과 붕괴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상사적으로 고찰한다. 아울러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붕괴와 정신적 공백에서 오는 위기, 특히 목적론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와 세계관의 도전, 그리고 이로 인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삶의 무의미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고찰한다.

III부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적인 신관에 있다는 판단 아래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 혹은 ‘포월적 신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신관을 제시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에 따르면, 신에게는 양면적 본성(the bipolar nature of God)이 있어 신의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개념은 신의 양면적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새로운 신관의 두 축이다. 둘은 물질과 정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사고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IV부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서는 새로운 신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 첫째, 영적 휴머니즘의 길이 오늘의 세계를 주도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적 상식과 이성에 따른 가치들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 휴머니즘보다 더 성숙하고 힘이 있는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점을 논한다. 둘째, 영적 휴머니즘의 직접적인 사상적 토대가 되는 영적 인간관과 신관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영적 삶의 근본 성격을 논한 다음, 이러한 영적 휴머니즘의 영성을 가르침과 삶 속에서 실현한 영적 휴머니스트 네 명(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임제 의현 선사, 해월 최시형)을 소개하고 살펴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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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신학 심광섭 Philo Kalia, 신대식 『예술신학』을 읽고...

알라딘: 예술신학

심광섭 (지은이)
대한기독교서회2010-02-20



전자책
1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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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감사의 글

제 1장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제 2장 하나님을 보는 환희
제 3장 예수의 미의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제 4장 글로리아. 예술신학의 근본 개념
제 5장 창조의 아름다움
제 6장 멋. 인간학적 예술신학의 기초 개념
제 7장 아름답다 예수여! 십자가 책형의 미학-숭고
제 8장 미학적 구원론
제 9장 율법의 사용과 성도의 향기로움 삶
제 10장 성만찬의 미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제 11장 영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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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심광섭 (지은이)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1985)
독일 베텔신학대학(Kirchliche Hochschule Bethel) 신학박사(1991)
(사)한국영성예술협회_예술목회연구원 원장

지은책
기독교 미학의 향연(2018)
공감과 대화의 신학 F.Schleiermacher (2015,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예술신학 (2011, 2011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2003)
탈형이상학의 하느님. 하이데거, 바이셰델, 벨테의 신론 연구 (1998)
신학으로 가는 길 (1996)


최근작 :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기독교 미학의 향연>,<공감과 대화의 신학> … 총 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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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ristian fine arts / Christian Aesthetics

심광섭 저, 『예술신학』을 읽고...
아트가브리엘 2011. 11. 24. 18:37 
http://blog.daum.net/artangel/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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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출자: 신대식,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기독교미술학과,
 제출일: 20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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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본 연구자는 개혁교회 경건주의 역사와 경건주의 신학에서 추구하는 신앙과 학문적 경향이 기독교 지상대명령과 문화명령에 얼마나 중요하게 연관을 갖는지 의문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번 연구 중에 심광섭의 『예술신학』을 통하여서는 감성적 인식의 폭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과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분석해 보고, 개혁교회가 지금까지 추구하는 신학적 경향과 기독교인의 삶에서 인식을 새롭게 할 계기로 삼고저 한다.
    연구자료가 감리교 토양의『예술신학』이라는 점에서는, 칼빈주의 장로교 시각과 다르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본 연구자는 겸손한 자세로 개혁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과거 역사적 개혁교회 경건주의 신앙과 전통의 시각에서 장점을 수용하고 보완할 점을 찾으려고한다. 이를 위하여 학문적 자료로 삼고자, 제1장부터 제11장까지 요약정리하고, 개혁교회 경건주의와 개혁교회생명신학의 실천적 입장에서 문제점과 대안에 간결하게 본 연구자의 논지로 마치려 한다.

Ⅱ. 심광섭의 ‘예술신학’의 요점

제 1장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계몽주의시대 이후 이성과 계시를 대립시킨 개신교회와 카톨릭교회의 정통주의 모두 다 신앙을 이성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
하다. 즉, 계시의 가능성을 인간 이성의 지평 안으로 제한하는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는 이성적 개념으
로서 도달하고자 하는 논리적 진리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선과 미의 범주로 이해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진성미의 카테고리는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범주이다.
    오늘날 기독교신앙이 공감의 폭이 너무 좁고 감정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상상력을 질식시킨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말해 기독교 신앙에는 어
떤 심미적 철학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미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결국 어떤 신앙도 없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하나님도 있을 수 없음을 인
식해야만 한다.
    신학이 조형을 통해 나타난 아름다움을 경원시한 또 하나의 다른 원인은 감성적인 세계는 허위의 세계이며 초감각적인 세계만이 진리의 세계
라고 주장해 온 플라톤주의의 강한 영향권 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신앙은 공동체의 교리적 진술에 치우쳐 지나치게 논리적이 됨으로
써 공동체의 감성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시대에 펼쳐가야할 신앙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광적(廣的), 감성의 신앙이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미와 씨름한 기독교신학과 교회의 역사
    1) 고대교회와 아우구스 티누스
초대 기독교미술은 콘스탄티누스 이전(313) 미술과 이후 미술로 나뉜다. 초대교회는 결코 회화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교회의 가장 초기의 작품들
은 종교화가 허용되었다는 정황을 충분히 반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가장 선하시고 아름다운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며
아름다움 자체라고 고백하였다.
    2) 중세와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은 자연과 인간을 발견하고 종교적 지배로부터 인간과 자연을 해방하고자 했다. 가령 프랑드르의 예술가들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
연적인 것을 한 화면에 섞어 자연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3) 종교개혁과 근대
루터교회는 회화에 매우 개방적이다. 칼뱅은 회화에 대해 음악보다 더 단호하다. 원칙적으로 이미지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미신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지만 어떤 상을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기 때문에 그것을 순전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한다" 했다. 그러나 칼뱅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20: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유형적으로 표
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는 일은 더욱 더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며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고 하여, 예술의 기능을 인정하지만 예술
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예술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칼뱅은 "형상물 사용이 어떤 악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단언한다.
한국교회에서 이미지 사용에 대한 사정은 더 열악하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적 전통과 청교도적 영향으로 더욱 강화된 금욕주의적 미학의 전통이
한국교회에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4) 신앙의 아름다움을 찾는 현대신학의 고투
근대신학의 창시자 슐라이어 마허(E Schleiermacher)는 종교를 심미적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
과 감정"이며 "무한자에 대한 느낌과 취향"이다.

  2. 아름다움을 찾는 신학
    1) 감성으로 신학하기
최근 교육가들은 감성적 경험이 지적작용을 고무한다는데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은 교육과정에서의 오감의 작용( 맛, 접촉, 듣기, 냄새 맡기, 보
기)을 고무한다. 네델란드 신학자 종교가 반더 레우는 예술( 춤, 연극, 문학, 회화, 건축, 음악)을 신학적으로 읽는 신학적 미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신학적 주제를 미학으로 읽는 미학적 신학을 훌륭하게 결합하고 있다. 이제 예술신학, 예술목회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제 2장 하나님을 보는 환희

  1. 신학의 감각
기독교 신학의 주류 전통은 자신을 감각과 느낌 등 감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하기 보다는 개념과 논리 등 이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해 왔다. 아무리
위대한 지식의 체계라도 그것이 신앙의 경험에 근거하고 그 경험을 해명해 주지 못한다면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시인 엘리엇은 현대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 "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느
낄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사람의 오감 중에서 단연 뛰어난 것은 '보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 예수로 육화함으로써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기독교를 청각중심의 종교, "들음의 종교"로만 알고 있으나 기독교는 시각, 곧 "봄의 종교"이기도 하다. 동방교회는 봄을 강조한 반면, 서
방교회는 들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방교회가 말씀의 계시를 배제해 왔다면, 서방교회는 특히 개신교는 미학을 배제해 왔다. 양자는 서로 보완되
어야 한다.

  2. 신학 그리고 하나님을 그리는 예술
기독교신앙의 학문인 신학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의 신비이고 생의 최고의 가치인 진, 선, 미, 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기리고 사랑하고 그리
워하고 즐거워하며 생각과 언어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술적 활동으로서 그분을 그리는 학문이다. 나는 신학을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그리워 그분을 그리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3. 창조주 하나님의 예술적 행위
칼뱅도『기독교강요』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술가로 언급한다. "하늘의 무수한 성군을 놀라운 질서에 따라 배치, 배열하시고 서로 어
울리게 하신 그 예술가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외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 최
초의 예술가이시다. 요한일서 서문은 미학적 그리스도를 위한 대헌장이다.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

  4.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즐거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뉘인 아기예수의 형상(눅 2:7). 그는 보이지 아나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1:15).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오 그 본체의 형상(히1:3).

  5. 성령 안에서 신학하기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사막 빈들로 가신다. 사막은 인간의 업적, 성취가 없고 인간의 자랑이 끝나는 곳이다. 사막은 인간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
지 못하고 자기 힘만으로 실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의 체험 장이다. 텅 빈 속에 하나님만
오시니 하나님과 예수는 하나가 되었다.

제 3장 예수의 미의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1. 예수의 미의식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아름다움과 선을 향한 에로스는 타자의 아름다움에 먼저 주목하고 그 아름다움에 때문에 사랑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아
가페적 사랑은 단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타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타자의 곤
경을 먼저 주목하는 아가페의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누더기와 넝마 같은 인간성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미적 감각이고 미의
식이다.

  2.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1) 미적판단
논리적 판단이 개념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려고 하는 반면, 미적판단은 대상이 나의 표상 속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쾌감 혹은 불쾌감에 관
심한다는 것이다. 미적판단은 증명될 수 없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구속력을 갖는다.
    2) 미적자유
미적자유는 예술 외적인 목적에서 해방되어 전적으로 그 목적을 자기 자신 속에 갖는 자신의 형식의 완성에만 과제를 두는 무관심적인 활동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만족은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와 결부된 유쾌한 것, 선한 것과는 달리 대상이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자유로운 만
족 무관심한 만족이다.
    3) 미적 충일함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눅9;33)라는 고백과,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나
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처럼 자기의 이해 밖에서 일어난다. 아름다움은 대상이 의미하는 가치
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만족을 창출하지만 그 만족이 아직 기호로써 중개되기 때문에 기호가 현실을 담보하지 못하는 한 충분하지 못하다.
    형상 또는 외형의 세계, 곧 현실을 떠난 것은 주관의 환상일 뿐 예술에서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논의가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적 실천에서 세계를 잇는 그대로 재현하려 했으며 모더니즘은 세계를 의식의 흐름으로 재구성하려했다.


제 4장 글로리아, 예술신학의 근본개념

    루터는 영광의 신학에 대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내세운다. 십자가의 신학은 수난의 서술에서 그려진다. 성육신이 미의 미학을 논의한다면, 수
난과 십자가는 추의 미학을 서술한다. 영광은 교의학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고 드러내는 계시와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성서와 신학에
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낼 때 나타난 현상과 경험을 제시하기 위한 개념이기 때문에 예술신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1. 성서의 영광이해

아름다움이란 관념은 신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 33장 17정 "네 눈은 왕을 그 아름다운 가운데서 보며...,"에 사용한 외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다. 히브리 사상이나 신약성서에서는 주요한 역할 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답다(καλος)는 70인역(LXX)에서 창세기, 지혜서, 아가서,
전도서, 잠언, 등 여러 번 등장하는데, 창시기 1장의 '좋았다'(פוב(는 단어도 미학적인 아름다움이나 내적인 효용성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
의 기대에 부합하는 피조물의 직무상의 능력을 표현한 무질서 안에서의 질서를 의미한다. καλος(美)의 의미는 외적 특질을 의미하는 폭넓은 개
념(용기, 유용성, 선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창조가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며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승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은
καλος를 Pulchrum(美)이 아닌 bonum(善)으로 번역했다. 세계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그리스적이다. 성서미학에 나오는 것은 그리스어
로 번역함으로써 그리스영향을 통해 성서로 가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영광의 구약 개념 כבוד)카보드)나 신약δόξα(독사)는 빛, 광휘(光輝), 광
채(光彩)를 의미한다.
10/31/21, 1:22 PM 신대식의 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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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영광의 신학

칼뱅이 창조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극장) theatrum gloriae Dei"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세계 안에서 감지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현대신학에 두 가지를 기여했다. 하나는 신학의 진리 담론이 논쟁적, 논리적, 사변적, 객관적 성격에서 벗어나 성찰적, 구체적, 경험적, 참여
적 진리담론이 되는데 기여했고, 다른 하나는 신학과 미학, 논리와 감성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통합 된 것이다.
  1)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형식(form)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내용이다. 그래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
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2)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는 개신교 신학은 변증법적 사유를 적용하여 신앙으로부터  미완성의 봄(incohtio
visionis)을 제외시키고,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을 보는 것과 그 메시지를 들음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보았다. 
    ① 발타자르의 신학적 구성과 핵심개념으로서 계시와 아름다움
발타자르는 계시신학에 아름다움(美)을 도입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현재화하고 전달하는 일은 예전과 케리그마와 교리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
이 아니라 기독교예술을 통해서 일어난다.
    ② 발타자르의 신적형태들의 지각에 대하여 발타자르 신학적 착상은 ‘하나님의 형상’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인간은 몸을 수단으로 자신이 세
계의 부분이라는 사살을 인식하는 한 자기 자신을 현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현상들 중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그러므로 발타
자르는 인간이 존재하는 혹은 영의 일차적 이미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적 ,영적 현상은 항상 반응, 곧 응답적 현상이다. 인간은
현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치 거울처럼 응답적이고 반영적인 이미지로 반응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다라 창조
되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거울이며 인간의 영적이며 신체적인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형태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유사하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피조된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원초적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피조된 형상은 소외
된 형상이 아니라 형상을 닮아 형상과 일치하게 될 때 가치 있게 되는 형상인 것이다. 이 일치는 지각을 통해 일어난다. 미의 지각이란 삶의 형태
의 지각이며 그것은 인간의 형태 안에서 발견된다. 동시에 이 삶의 형태는 자기 창조적 형태가 아니라 주어진 선사받은 형태이며 자유와 신체성
과 영성을 부여받았다.
    발타자르는 왜 이 형태를 아름다운 형태라고 칭하는가? 삶의 형태의 지각은 지각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한
실재의 진리와 선(善)안에서 발견되며 이 실재는 무한하고 무진장한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형태 속에 나타난 이 실재의 현상은 이 형태를 넘
어 실재를 지시하며 동시에 이 형태의 실재 안에 현재한다. 발타자르의 신학적 미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계시가 꼴을 취한 형식(form)과 형태
(gostalt)이다.

==발타자르의 핵심적 개념의 형태와 영광==
  형태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나타나 꼴을 취한 형태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는 예수가 기호나 상징이 아니라 형태로 불려져야하는 이유이다. 예
수는 형태로서 하나님의 가리킴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곧 신현(神 顯)이다. 괴테는 형태가 자연에 도취되었을 때 경
험된다고 한다. 여기서 자연은 신적 상상력의 표현이다. 괴테는 후기 저작에서 형태개념을 수정하여 형태는 존재자의 본질의 표현이 된다. 괴테
의 경우와 동일하게 발타자르는 형태의 개념의 이해에서 모든 유형의 이원론을 배제한다. 근원적인 감각의 지각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형이상
학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존재 전체가 분리되고 파편화된 존재자들 속에 나타날 뿐이다. 존재자를 전체성 혹은 절재성의 파편 혹은 모순으
로 지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자는 존재의 형태로 간주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과 영광
발타자르는 교회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이 미에 초월적 범주의 자리를 부여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한다. 만일 신학이 미를 초월적 범주로
버려두어야 한다면 세계를 성령이 역사하는 공간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며 세계는 창조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에서 시
작한 발타자르의 형태의 개념과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론의 출발점이 된다

  3)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
칼바르트가 영광을 하나님의 본성에 국한하여 변증법적으로 다루었고 폰 발타자르가 은총과 자연, 계시와 아름다움을 유비적으로 해결할 때, 몰
트만은 은총과 자연을 종말론적으로 접근하면서 아름다움은 역사와 자연을 통해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의 형태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미적 범주는 믿음 안에 있는 새로운 생에 속하는 것이며 이 범주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과 새로운 순종은 샘솟는 기쁨이 없는 율법적 노력
이 되고 만다. 영광은 예술의 부활에서 놀이와 축제의 특징을 입는다. 창조의 놀이는 새창조의 시작인 부활에서 모든 피조물이 당하는 억압에 저
항하고 고난을 극복하여 기쁨의 축제에 참여하는 진정한 놀이의 신학이 된다. 몰트만에게 영광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영원한 기쁨의 잔치이다.

  3. 아름다움의 신학, 신학의 아름다움
바르트는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받을 만한 형태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 자체인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
은 모든 학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학문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다. 성육신의 아름다움은 예술신학의 미가 철
학적 미학에서 취한 방법론이나 철학적 미의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고유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발타자르
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아름다움, 즉 객관적 계시에 대한 성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미학적 범주로 말할 수 있고 사상적 착상을 제공한다고 평
가한다.

제 5장 창조의 아름다움: 생태 미학적 창조론

    창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구분되지만 아름다움자체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에 나타난 아름다움을 말한다. 창조의
아름다움은 철학적 미학에서 다루는 자연미와 구분된다. 자연미에는 근대철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예술미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
으며 존재론적으로 제 2의 현상을 지칭하였다. 중세에는 자연미와 예술미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르네상스에 이르러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
다는 인식이 싹트게 되어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자 칸트가 르네상스의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월성을 말함
으로써 그 순서를 역전시켰다. 근대이후 개신교신학은 자연친화적인 경건주의나 자연신비주의를 반대함으로써 자연을 성례전적으로 보거나 혹
은 미적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력을 아예 상실하고 말았다.
    장 칼뱅에 의하면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으나 타락 후에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
여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식을 회복하여 피조물과 갱신된 새로운 관계, 자연을 창조자로서 지각하며 창조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관계를 획득해야 한다. 칼뱅이 창조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란 점을 말한 것이다. 자연 탐
미주의는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보지 못하고  종교와 윤리로부터 미학의 독립이며, 미학의 자율성에서 본다.
    생태학적 창조론은 생태계의 위기가 직면하여 창조를 생태학적으로만 아니라 미학적으로 봄으로서 생태학적 태도가 제공하지 못하는 창조에
대한 인식을 보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 6장 멋, 한국의 인간학적 예술신학의 기초개념

    신석초는 한국의 독특한 미의식을 멋으로 규정한다. 멋이란 사치성 유기성의 산물이며 한가한 여유의 상태에서 혹은 잉여 된 정력의 소비작용으로 나타내는 것이지만 직접 사치의 상태는 아닌 것으로 거기에는 상당히 해박한 상식과 고매한 사상과 또는 예절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된 인간 삶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한다.

10/31/21, 1:22 PM 신대식의 예술세계
https://blog.daum.net/artangel/1182 4/5

    해천 윤성범은 바르트에게서 직접사사하여 바르트 신학의 화해론이 중요한 위치이듯이 한국에서 솜씨를 화해의 예술로 보고 한국미의 특징을 조화미로 특징짓는다.
    소석 유동식의 풍륭도의 전거는 신라말의 석학 최치원이 쓴 화랑의 미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한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7장 아름답다 예수여! 십자가의 책형의 미학- 숭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은 고대그리스의 형태미로는 표현할 수 없다. 십자가는 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추(醜더럽다)라고 해
야 옳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수남과 죽음의 순교를 추의역사로 분류한다
    한완상은 현실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경계하여 십자에서 “예수 따르미”의 아름다운 패배의 미학을 그려냈지만 더욱 근원적인 것은 패배의 미
학이 아니라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숭고한 사랑일 것이다.                                 
    어떤 형상이든지 그것을 보면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이 잇다. 그 형상이 사람일 경우 우리는 그것을 멋 혹은 기품이라고 한다. 멋이
인생의 밝음과 어두움이 개입되어 새겨지고 형상화된 아름다움이라면 십자가는 예수의 멋이며, 부활은 온 천하에 드러낸 환상적 놀이, 곧 신명이
요 흥이 될 것이다. 십자가 책형의 예수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이 형상화 되어 멋과 기품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ikon)이다.

제 8장 미학적 구원론

    어떻게 하나님을 세계 안에서 경험할 수 잇는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경험되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도 종
교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면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로서 표상하는 것, 그것이 종교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경험을 신
학의 구원론에 연결시켜 전개한 탁월한 신학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1703-1791이다. 성경은 영적 실재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너
희 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니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5-16)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요일1:1)하고, 바울은 자신
을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한다.
    영적 감각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영적 감각론을 수립한 최초의 학자
로서 그는 그리스도를 오감을 통해서 지각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보았다 해서 다 영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시각(inner sight)에 관하여 그리스도가 참된 빛이신 이유는 빌라도와 십자가
에 못 박은 자들이 예수를 육안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 다면 아무도 예수를
보았다 할 수 없다. 청각(hearing)에 관하여, 미각(taste), 후각(smell)에 관하여는 옥합이 깨뜨려질 때는 향기로 하나님의 자기비움(kenosis)과
그리스도의 향기다. 촉각(touch reception)에 관하여 오리게네스는 최고의 완전은 오감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을 통해 실현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감각의 집합체인 몸을 통해 말씀이 형상화 되었다는 것이다. 감각이 동물적인 사람은 동물이고 감각이 신적인 사람은 신인 것이
다. 나는 여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그 몸은 생각이나 의지정도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기 몸이 자기를 아끼고 사랑
하듯 자기의 영원한 생명으로 다른 생명조차도 그 안에서 살려 영원히 사는 생명이 되도록 하고 싶은 사랑이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과학적 경험과 종교경험에 대하여는 루터, 웨슬리, 슐라이어마허 세 사람 모두 신앙의 경험관련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에게 신학은 사
변신학이 아니라 실천신학이다. 근대의 데카르트와 칸트의 합리주의 전통과는 달리 후설이후의 현대 철학에서도 인식의 조건으로서 경험은 강조
된다. 메를로퐁티(Merleau Ponty)는 몸의 지각을 강조한다. 메를로퐁티는 모든 반성의 근거로서 몸의 전인격적 지각을 말한다. 인간은 몸을 통
하여 경험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을 미리 제공받으며 몸의 지각이 모든 사유를 앞서간다. 전통적인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 의식과 몸, 개인과
사회성 등의 이원론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을 제공하고 있다.

제 9장 율법의 사용과 신자의 향기로운 삶

    루터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성은 하나님의 법을 다르기 위한 도덕적 투쟁의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삶이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루터에 비해 종교개혁 이후 특히 루터의 제자 멜란히톤과 칼빈은 율법의 제3용법에 훨씬 더 많이 전념하였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신앙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희망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삶의 형태화에 관한 규칙이다.

제 10장 성찬의 미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성찬에 대한 이해는 급기야 종교개혁교회가 루터, 재세레파, 개혁파, 영국교회, 등으로 분열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예수께서 초대하신 만찬 앞에서 형제들이 싸우고 결국 갈라진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떡과 몸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피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매우 실천적으로 생각한다. 개신교회는 성찬의 관계를 향유의 행위와 무관하게 보려는 자들에게 대해서만 반대한다, 다른 한편 이 성찬의 관계에 덕과 포도주, 살과 피의 영적 향유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자들을 반대하여, 그는 경험을 강하게 강조하고 성천행위의 영향과 결과를 강하게 강조함으로써 처음부터 교의학적 입장을 약화시키고 있다. 성찬의 제정의 말씀을 듣고 떡과 포도주를 향유함으로써 영적 삶을 강화하는데 있다.
    심광섭은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인 삶의 새로운 형성은 하나님께 감사, 그리스도를 기억, 성령의 새창조, 사귐(타자의 초대와 사귐, 자연과 우주와의 사귐), 희생제사, 사회적 사랑과 정의 그리고 해방, 하나님 나라의 잔치, 성례전을 위한 거점으로 정리한다.

제 11장 영성의 미학

    핀바르 코놀리(Finbarr B. Connolly)는 영성이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닌 하나님과의 친분 관계를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개신교 교회와 신학에서 영성에 해당하는 단어는 "경건(敬虔)"일 것이다. 경건은 원래 신앙에 근거하여 활동적인 사랑가운데서 모든 삶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경건주의와 19세기의 각성운동과 부흥운동에서는 점점 개인의 내면성에만 관련된 단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영성에 그 자리를 내주는 듯싶다.
    신적 미의 세계는 인간이 통상 아주 사랑하는 사물에 관심을 보이고, 추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에 대하여 이사야나 아모스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추한 현실을 치유하는 사랑의 힘은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넘어선 신의 아름다움의 세계에 진입함이다. 오늘의 영성은 신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체현하고 표현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신적 미의 세계는 형식적 아름다움이 사랑의 내용을 담아내는 세계이다.
 "...하늘은 우리 마음 안에 있소"(프란체스코).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봄으로써 거룩해진다. 하나님은 모든 이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그런데 그분의 현존은 인간이 알아 볼 때만 드러나신다. 아 그때! 우리에게는 세상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심광섭)


Ⅲ. 결론 

현대사회에서 시각예술의 이미지(Image)는 정지된 채로 머물지 않고 생명의 유기체성처럼 창의적으로 새롭게 예술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개혁파 기독교 안에서는 이러한 보편적 현상이 어느 때 부터인가 제약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초기 칼빈주의 개혁자들의 시각예술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경원시한 것으로 보인다. 개혁파 입장에서 바르게 인식하려면 지성이나 감성은 인간 본성의 두 측면으로 함께 타락했든지 함께 중생된다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며, 성경은 두 본성 중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 연구자는 자연과 예술에서의 심미적 경험을, 세속적 영역 내지는 위험스런 인식으로 여기는 것은 영적경험에 있어서 감성적 경험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주의(ism)을 만들어 칼빈주의로 신봉한 것으로 인하여 개신교 신앙생활은 사소한 오류가 아니라,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목표에 중대한 오류가 발생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에서는 교리와 변증을 듣고, 일상적 삶의 원천은 교회 밖에서 얻게 되는 격으로 예술에 있어서 형상(Image)을 교리적으로는 우상(idol)시하면서도, 삶속에서는 시각예술에 있어 조형적 형상이 신앙생활에서는 은혜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신앙과 삶의 이원론적 현상에 대하여, 예술적 감성을 신학적 인식의 방법론으로 보완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4세기 말경에는 성경의 문맹자에게 종교화로 신앙교육을 하였고, 1522년에 성상파괴가 한창일 때 종교개혁자 루터는 삽화를 게재한 신약성경에서 교육적 순기능으로 활용하였던 것과 개혁교회 경건주의자들의 신앙과 윤리적 삶 속에서는 시각예술을 통하여 교육적 기능만이 아니라 선포적 기능까지도 하였던 것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자는 하나님이 주신 예술적 재능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할 목적으로 우상(idol)을 만드는데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런 목적과 기능으로 시각예술을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창조한 동산에서 우리가 “휘황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되거나, 하나님의 창조적 재능주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교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미술은 거짓 신을 숭배하는 악마의 짓"이라 부정했던 이유가 창세기 3장의 금단의 열매를 해석하는 차이에서 생긴 것으로 본다. 하와가 보기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는데,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고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유혹의 제공자라고 생각한 이유에서 조형예술이나 시각예술을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칼빈의 경우에도 시각예술의 조형(造形)을 통하여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경원시한 원인은 그가 어거스틴 이래로 플라톤철학의 계승자가 되었던 이유로 보이며, 감성적인 세계는 허위이며 초 감성적인 세계만이 진리의 세계라고 주장하는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21세기부터는 헬레니즘적 스콜라 학문이 아니라 생명신학운동에서 기독교문화의 변혁적 주체가 될 감성(感性, sensibility)의 기능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회자와 신학자는 예술신학과 문화명령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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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E 문화 예술과 목회
[예술신학] ①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하나님을 보는 신앙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28
심광섭 목사
승인 2019.09.1

나는 약 20여 년 전부터 기독교 신앙이 형상화하는 아름다운 진리의 생명적 형태를 찾는 구도자이며, 그것을 말하고 전하는 전도자임을 자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책의 제목을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이라 달기도 했다. 나는 <예술과 기독교 신앙>, <예술신학> 등을 신설하여 가르치기도 했고, 2013년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 이래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 일은 마치 바울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받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

여기서 바울이 말한 복음이란 나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는”(엡 4:13) 기독교 신앙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아름다움이다.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얼굴의 하나님은 아름답고 감미로운 분(dulcedo Dei)이다. 복음의 진리(道)와 복음의 실천(德과 仁)은 복음의 아름다움(藝)에 놀라고, 그것에 끌려 노닐고 즐거워함으로부터 나오며(脫) 다시 거기로 향(向)한다. 요컨대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생각(思)하며 행(實行)하기에 앞서 느끼고 반응(感應)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중세기의 신학자 안셀무스가 남긴 유명한 명제에서처럼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여겨져 왔다. 논리적 진리에 더하여 신앙에서 선을 찾고 행하는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바울은 믿음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 갈 5:6)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예술신학의 새로운 명제로서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을 제시하였다.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대주교 성당의 '승리자 그리스도' 6c.

교회사가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승리자 그리스도>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해 주는 개념은 진•선•미임을 역설한다. 그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대주교 예배당에 새겨진 인상적인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상에 새겨진 “에고 숨 비아 베리타스 에트 비타”(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에 주목한다.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펠리칸은 그리스의 고전적 삼중주인 미, 진리, 선에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주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길’은 아름다운 것(미)을 지칭하며, ‘진리’는 빛을, ‘생명’은 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라벤나의 그리스도 상은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사실에서 신앙의 ‘진리’와 ‘선’만큼 궁리(窮理)하지 못했던 신앙의 ‘아름다움’(美)이 새롭게 화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眞) 선(善)한 아름다움(美)을 보는 것(觀)이다. 참된 삶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유한한 표층에서 발하는 은닉된 신적 근원을 보는 것이다. 논리를 다투는 사실들의 세계보다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가 더 크고,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보다 존재의 감각과 감응하는 세계가 더 깊고 높다. 신앙의 진리와 신앙의 실천은 신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즐거움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그곳을 지향한다.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치열한 것이고 얼마나 비장하고 간절한 것인가? 욥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 하나님 자신이다. 욥이 씨름하는 것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며,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기 위한 신학적 쟁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욥 19:26-27)

하나님 자신을 보려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마침내 욥은 직접 하나님을 두 눈으로 뵙는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 42:5)


수도자는 시편을 노래하며 부재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맛본다. 하나님이 몸과 마음에 꾹꾹 차게 현존하신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요일 1:1). ‘말씀을 들음’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봄’은 신앙이 도달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할 안방인 것이다.

 

      






Philo Kalia 심광섭 폴 틸리히 산산조각이 나고 바스러져서 그 심층에 흐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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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2 h ·




Philo Kalia  심광섭
18 h ·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기독교 사상사의 ‘근대’ 편에서 교회 내부의 신학적 운동보다 교회 밖에서 일어난 사상적 변화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교회 내부의 신학자로서 크게 다룬 인물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복고신앙 조금, 슐라이어마허와 키르케고르, 틸리히의 스승 마르틴 켈러와 하르낙 정도이고, 
그 외에는 모두 교회 밖의 사상적 운동이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스피노자와 헤겔, 셸링,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쇼펜하우어와 니체. 이들은 전통 교회와 신학의 비판자로서 근대의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오늘의 인간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오히려 신학자들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그는 복음적인 대답만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상황의 분석과 이해를 신학에 포함시킨다.

이는 틸리히가 신앙의 내용을 서술하는 조직신학을 구성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계시-하느님-그리스도-성령-하느님 나라’로서의 조직신학이 아니라 
‘이성과 계시, 존재와 하느님, 생명과 영, 역사와 하느님 나라’, 
이처럼 ‘와’(and)를 중심으로 상황과 복음을 동시에 결합한다. 

신학은 상황 혹은 복음의 양자택일 아니라 
상황과 복음을 비평적으로 묶어 창조적으로 엮는 ‘와’에서 사건화되고 발생한다.

틸리히의 신학적 태도는 인간의 상황, 인간의 곤경에서 절대로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칼 바르트의 입장과 다르다. 
  • 바르트 같으면 신이 밖으로부터 인간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인간에게 말해야 한다. 바르트 신학은 인간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상황으로부터, 인간의 곤경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인간 안에는 신과 만날 수 있는 아무런 접촉점이 없다. 
  • 바르트는 동료 에밀 브룬너의 『자연과 은총』이란 저서에 대해 한마디 큰 소리로 『아니요』(Nein!)라고 잘라 말했다. 단호한 Nein!에서 신앙의 절대성을 지키려는 20세기 파수꾼의 숭고한 사명을 느낀다. 
  • 그래서 바르트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18세기의 계몽주의, 루소, 레싱, 칸트, 헤르더와 노발리스를 신학의 전사(Vorgeschichte)로 다룬다. 이것은 연대기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내용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사자후(獅子吼)도 역사적 울림일 뿐이다.

 틸리히는 “이제 나는 이 사상이 지탱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은 후견인이 불필요한 성인(成人)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세속 세계 속에서 종교영역과 문화영역의 분리는 이 이상 존속될 수 없다. 
교회는 역사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의 유일한 대표가 아니다. 세속문화도 이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본회퍼의 사상에 따르면 현재에 있어서 아마도 세속문화가 더 참된 권리를 가질지 모른다. 성과 속의 분리는 성서에는 없는 생각이다.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이 구별되어 따로 있으며 그 안에, 그 시간에 입장해야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성서에 없다. 
하느님이 임하는 장소, 하느님이 현존하는 시간이 성소(聖所)이고 성시(聖時)이다. 성소와 성시가 교회나 성당, 예배와 미사 시간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성전과 교회, 안식일과 주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장소와 시간이 거룩함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배타적인 시공간은 아니다
‘아버지가 피우시던 꽁초’(레오나르도 보프)와 ‘강아지똥’(권정생)이 성사가 될 수 있듯이 뒷간도 성소가 될 수 있다  (손원영, “기독교의 생태신학적 ‘뒷간신학’”).

교회는 문화의 자율적 발전에서 떠나 있어야 하는가? 
교회는 문화 전체에 대해서 최후의 진리 보루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적응성을 잃고 구석으로 밀려나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일반 세속문화 안에 있는 종교적 요소와 종교 안에 있는 문화적 요소를 이해하고, 지난 시대와 문화에 존재했던 통합과 같은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는 시도를 꾀할 것인가? 
지상에서 문화와 종교의 통합은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종교 없는 문화, 문화 없는 종교로 영역을 분할 축소하여 자신들만을 위한 닫힌 성안에서 자신들만의 잔치를 고집할 것인가?

지난 2년 코로나19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달라져야할까? 
보이는 ‘내’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 이완되어 교회와 세계, 신앙과 문화 및 예술을 갈랐던 경계의 문들이 열리고 담들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유불선 이웃 종교 등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그들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는 주체이며, 그들 안에 깃든 종교적 옥동자녀(玉童子女)를 산파(産婆)해야 한다. 
적용이나 해석이 아니라 산파술이 필요하다. 
문화 없는 종교로 축소될 수 없듯이 종교 없는 문화로 축소될 수 없다. 이런 방향은 인간의 풍요로운 자기실현을 위해 해로울 뿐이다. 
유구한 종교적 가치는 세속적 무신론의 사회 속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고 바스러져서 그 심층에 흐르고 있음을 다 안다.

2021/10/30

[도올김용옥] 동경대전 71 "종교는 인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특수한 매커니즘이다" - 하나님의 임의적 간섭은 있을 수 없다...


[도올김용옥] 동경대전 71 "종교는 인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특수한 매커니즘이다" 
- 하나님의 임의적 간섭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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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힐링이 됐다
아 <물약자요>라는 말씀,  부정을 좋고 우리가 너무 과도하게 큰 의료 라고 한 것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 자신의 삶의 지혜를 잊어버린, 그런 것을 다시 일깨워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얘기들이 있었어요.
이런 깨달음 대로 인생을 좀 주체적 산다고 하는 것, 의사를 안 믿고 사는 것도 주체적으로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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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
칸트가 말하는 주 관계관 으 으
객관이 다 내 주관이 구성하고 있다
이로 이런 것만 주관주의 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몸을 인식한 몸을 인식하는
태도와 *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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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6
사람들한테 아닐 쳤던 용담유사는 헐씬 더 중층 적인
그 여러 복선이 깔려 있는데 그걸 다 표면에 드러내서 펼쳐 줘야 돼요
근데 이제까지 그런 식의 번역자가 없었던 거죠
중층적인 숨은 원리를 다 일일이 드러내서 그 맥락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나아가야
봐 알고 4제 용담유사의 번역은 제 인생의 희열이었어요.
아직도 지금 안심가가 아까 경우 끝나는 형태인 되면서 서문이 상당히 길고 
2개의 노래가 끝나는 데,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인 동시에 가창 희열을 많이 느낀
작업이었고, 정말 그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런 시간이 었고,  
저는 이 책이 나오게 되면, 여러분들이 아주 사랑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우리 지금 이 강의를 듣는 사람이 뭐한 2만명 규모라고 하면은
용담유사는 그야말로 그 몇 십만이나, 몇 백만명이 앞으로 볼 수 있는, 
동경대전과는 다른 포풀라리티가 있는, BTS도 이걸 가지고 랩을 해야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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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 동영대전을, 그리고 용담유사를 같이 읽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에 성지우성 이라고 하는 것은, 이 것은 다 중용에서 왔죠.
545 페이지 하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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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 우성 곤경에서 하늘님 만 생각하소, 
 찾아 블로 효 유하고 영세 불망 하여 쏘아라
부인과 자식을 불러서 효유하고 타이르고,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이 진리를
동학의 진리를 잊지 않도록 하게 하였다

아동 방연 년 괴질 요새
최근에 2대 그 선교사들이 쓴 그 많은 기록들을 보니까 한국학 중앙 년 뭔
의 이 일상 교수의 그 조사 의 하는 거의 이 시대의 40만명 까지도 5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영이 만한 3년이 시절이 굉장히 고래 라가 시내서
거의 40만명이 에 주었다 이런 얘기까지 하는데 그 여러분들이 그저
희극 오래라 그 퍼지고 그런 것이
문학작품에 나오는 거는 거
누구야 그 토지에 나오지.토지 사건은 하신 후 재조

05:04
이거보다 더
19세기말 2인데 영이는
1860 년 전후해서
상당한 괴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05:16
요대 선생 주는 집에도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건들이
공부한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유사 해요 
지금 우리 상황이가 우리가 지금 사실 그 2 코로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만
이 코로나 와 같은 사태가 우리 역사의 인류역사의 계속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번질 조금 그 음 재고를 해야 됩니다 
아 우리가 반성을 해야 되고 어 그러한 괴질 들의 바로 에 의해서 그나마
이 문명이 벨라 이슬을 지켜오고 줘,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런 거대한
 카오스 이론 이라든가 이런걸 보면은
이 세계의 재난 이라든가 이런 보존 상황이 
이 우주가 자기 여 우리가 이런 데 있으며 고름이 있으면 고름을 짜내야 되잖아요, 
이 지구라고 하는 생명체도 골무 원칙이 있어야 하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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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지구가 자기 댄스 를 유지한다는 거지 이게
생명체라고 우리가 본다는
태풍이 난다 든가,  있는 모든
천재지변 도 사실은 그런 자연의 빨라 안수
언발란스 달리 시 이런 인거 람 같은
문제를 알 거야 
이거는 이 우주 생명체 라고 하는 것을 우리 인간의 능력을 사실 벗어난 건데
우리가 잠시 과학적 능력의 미쳐가지고
모든 자연현상을 위해 다가 콘트롤 할 수 있다는 그런 착각에 빠져가지고
이런 죄를 저지르게 되고 있는 거죠
이거 이거 지금 반성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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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1
아동방년년괴질 인물 상해 아닐는가 
나도 또한 이 세상의 편답주류 하다 가서
어디 사람 만날 때 마다
여기서 어진사람 이라는 것은 상당히 훌륭한, 그 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쉬운 십이언을 의논하고
100년 신세 말하거든,
 그 여기서 꼭 그 수운 얘기가 아니라
여기 나도 또한이라는 것이, 
 각자, 이 글을 읽는 모든 자기,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거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편답지기하다가다, 사람 만나서 쉬운 실
07:51
집에 의온해가지고 100년 신세 마라 것 은 100년
기계를 얘기할 만한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거든
이런 것이 아니겠어요? 이걸 주고 결이 해서
두유 시 라 하여 우새
08:10
여기 의 그 후에 친구 잡아서
친구에게 이음 이어 중요한 님의 아까
성경이 있을지 계신 일하게 나오자
욕조 신이라 의 같이 나온단 말이야
08:19
====================
붕유유신 이라는 게 신이 있다고 했으니까
08:25
부모간에 신이라, 그러니까 이런것도 나와요 
신 이라는 게 이게 내가 시 넘 그러지만 동우가 4
08:33
이 신이라는 이해도가 생각해요 트러스트
08:35
시대 해야지 가장 않죠
08:39
뭐 신용문고 이럴 때 신이잔아요
 그저
08:42
교회 나와서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야요
Trust, 증언한다던가,  서로 신뢰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거 안 붕우유신하여,  친구들 끼리
어떠한 믿음으로 trust 결속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붕우유신의 신 이란 말이야

붕우유신 - 위키낱말사전https://ko.wiktionary.org › wiki › 붕...· Translate this page
1.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같이 보기편집 · 삼강 · 부자유친 · 군신유의 · 부부유별 · 장유유서.

붕우유신朋友有信- 사람에게는 도리가 있다 - 의약뉴스http://www.newsmp.com › articleView· Translate this page
5 Feb 2021 — 朋 벗 붕-友 벗 우-有 있을 유-信 믿을 신직역을 하면 친구 사이의 도리에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이는 중국의 사상가 맹자가 한 말이다.

09:09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동학이 퍼져나가는 것은 붕우유신 같은 거죠 
붕우유신 같은 그런 어떤 트러스트,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이 세상을 해처가자
우리 100년 신세를 같이 해보자.
아 이런 사람들의 믿음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퍼져 와야
09:35
뭐 강요하면서, 너 이거 주 예수 그리스도 까 뭐 뭐 뭐
십자가에서 목밖혀서 사흘만에  살아나난 것을 믿느냐? 네 믿습니다.  
이게 아니란 말이야 이건
09:49
이 삶에 있어서 모든 컴믄 센스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해서 
어떤 트라스팅이 생기면서 이렇게 퍼져나간다
참 이상적인,  이 수은이라는 정말 고매한 이상을 제시했기 때문에
수운 사상은 절대 어디로 갈 수가 없는거예요
우리 민족의 사상이고 우리 민족의 아주 탁월한 정신을 나타내는,
 그러한 동학이죠. 
===
 우매한 이 내 말이,  항상 겸손하기 이제
10:24
내 많이 우비 안듯이 보이더라도 이
우매한 이 내 말을 잊지 말고 생각하자
우주철려
나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죠.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의 첫 마디 생각하면서 한 말을 가운데,
 필요일득, 그 중에 한 마디는 쓸모 있는 말이 있지 않겠소 

필요 1등 이라야 
얼마나 편의 뭐 식
내가 천 가지를 생각하여, 한가지라도 여러분들이 얻을 것이 있다고 하면은
그게요 얼마나 큰 덕이냐
여러분들이 인생의 덕이 아닐까요

11:07
운수관계
인해 운수 에 관계되는 이런
그러니깐
나의 이러한 사상은 고금에 없었던 것이다
아 이런 사상은 없습니다
===
이 천박한 기독교가
믿음을 강요하고 천당을 내세워 가지고
신도 없다 이루어 하고, 제사 유치한
짐 오류의 벗어나서 유원 족사 에서 다 옥경대에 올라오고 있다 
이런 황당한 픽션,  오늘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어떤 공동체의 삶을 거부하는, 이러한 팩션
이러한 픽션에서 전혀 다른 나의 사상이
 고금에 없섰던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졸필 졸문으로 지어 내어
모벌염치(?) 전해준다 
------
여기서 5
12:14
이거 참,  번역 때를 이 전체가 잘못돼 있어요
모멸염치를 다 잘 못 번역했다니까, 못 보냐 안되니까
염치가 없음을 무릅쓰고

몰염치하게 전해준다 이렇게 번역들을 하거든
몰 염치를 무릅쓰고, 불구하고 이런 얘기

몰 염치 뭐라는 건 물었어
몰 염치를 무릅쓰고, 
 그 우리말로 하면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되지요
----
13:19
졸필이고 졸문이지만, 
내가 뭐 유기하는 문장을 쓰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고, 
솔직한 얘기
졸필졸문을 지어내는 내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이거를 후세에 전하려고 이렇게 썼으니
이걸 보고 비웃지 말고, 
13:47
흠 제 공경하게 이훈사를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나라 한국인이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에요 
이렇게 정직한 문학이 또 어디 있느냐
14:07
전 세계에 이게 뭐 워드워스 엘리어트 시에 비교하니까 예
14:14
여러분들이 이거를 좀, 
우리가 우리 삶의 언어를 과감하게 쓰고
그것을 시로 만들잖아요
이 사람의 이 이 한글 가사를 보면
거의 그 한 문장 한 문장 사이에 엄청난 비약이 있어요
근데 여러분은 그걸 보통 못 느껴요
그냥 엉성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14:42
근데 그 비약을 매꿀려면 엄청난 고생을 해야 되요 

그야말로 나는 한글 가사 용담가사야 말로 용비어천가 이제
아 정말 이거는 우리 민중의 노래 써 고용되어 
용비어천가 만은 조선왕조를 세운 사람들의, 그 겁주기, 
자기들에게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이것이지만,  그 용비어천가에서 지금 여기까지,
이 변화을 한번 생각해 보세오
얼마나 한글 문학이 진보했고 이 한글을 통해 담는 내용이 얼마나
다르잖아요. 
용기어천가라고 하는 것은 민중을 제압하면서, 권위주의로 누르기 위해서 
우리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때에 이렇게 용을 타고 다닌다는 거에요
15:40
어천, 하늘을 제압하는 노래다 이러지만, 난 하늘을 공경하는 민중들이 하늘을 구멍을 내어 용을 다 없애버려요,  
아, 한글 문학이 여기까지 왔다는 거, 
우리가 수운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한국사람일 수가 있는가? 
이게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는거죠. 
기독교인들도 정말 정신 차려서 배워야 되요
---
16:18
그래서 내가 한국신학대학에서 한번
대학원생들한테 한번 강의할 생각이 있어요
---
16:27
이거는 동학정신을 제대로 알아야 훌륭한 목사가 될 수가 있다
어차피 기독교를 나는 배척한 게 아닙니다
바르게 바른 종교의 모습으로 써
기독교의 원 모습을 찾아가자는거죠
그래서 내가 역사적 예수를 추구했고, 
그 역사적 예수의 죽음 끝에 수운을 다시 만나면서
내가 사상이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다듬어진 거죠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결실이
용담유사의 번역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들어나게 될겁니다 
=====
자 지금부터 동학론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동학론은 동경대전 책 102 페지

원래 그 옛날 기록에는 전부 동학론으로 나옵니다.
17:34
동학의 모든 초기 문헌을 보면 논=학문이라는 건 없어요
논=학문이라는표현은 없고,  다 동학 론으로 나옵니다.
諭 에 도 나오는데
17:50
우리 1권 에 실려있는 대 선생 유민
17:53
집에도 동향 놈이 돼 있습니다 자
17:56
그렇게 되니까 논 학문 이라고 하는
17:59
것이
18:01
아 전 발 * 80 년
18:05
경제인 판에 도 없었고 이게 죄책
18:09
나타나면
18:11
목 전 에서 발행한 전 1883년반
18:14
연서
18:15
나옵니다 처음
18:17
1883 년 복전 판에서
이것이 최초로 나오기 때문에 그
이전에
어떻게 된거 아 우리가 몰랐거든요
근데
경진 바에 나오면서 보니까 이것이
동안 되어 있는 거야 어
그래서 이 거에요 원체 모근이 그런
주 은 전쟁 님은 이걸 동암 논으로
만 쓰시고 돌아 가셨다 그런데 왜
18:43
이것이 논 학문으로 밖엔 냐 이거는
18:46
결국 뭐냐면
18:48
포 이게 고 동문회 돼 있었고 그
18:53
다음이
18:54
수 동문 아니에요
18:58
그러니까 는 여기 사이에 있는 곳
19:01
오면 다음에 이
19:02
동안구 오늘
19:05
6월을
19:07
이제
19:09
동악 을
19:11
논한
19:13
그래 이다
19:14
쌀 자기 같은 거예요 도박 논하고
19:17
같은건데
19:19
잃기 않 게 좋겠다
19:23
왜냐하면 그 당시 목 전략 가능할
19:25
때만 해도
19:26
목차의 동학 이란 말이 바로 나오면
은 그 입 일제의 이제사 사건이 루
동학 이라는 이름이 탄압에 대상이었고
때까지는 그러니까 이것을 가능하면서
2 우리가 좀 조심스럽다 싶다 이어
19:41
있는 영이 이렇게 8일 무엇을 논하는
19:45
그걸 뭐 질문하는 걸 무엇을 논하는
19:48
그걸 어 이렇게 됐으니까 이런 구조에
19:53
따라서 이걸 고칩시다 해서
19:57
1883년
19:59
목천 에서 편집해 일을 할 정에
20:02
고친 것 같아요
20:04
그 편지 배를 것 고치지 않고 누가
20:06
임의적으로 했다면 그 다음 반 경주
20:09
판에서 다시 동항 눈으로
20:13
회복을 했을 텐데 안 한 것을 보면은
20:16
해월 선생의 님과 모든 의논해서 고친
20:20
것 같아요 이건
20:21
여러분들이 논 학문이라는 것도
20:24
이것도 정통성이 있습니다 이게
20:26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20:28
서운 성령께서는 이거를
20:31
동 학문으로 알고 가셨으니 까
20:35
도항 돈으로 쓰셨습니다 요 저는
20:38
내내 이 을 얘기할 때 전체를 동힉론으로만 얘기합니다 
예 경진 판에 의 뭐해서
이동 항로 니라는 것은 그
남원의 은정 안에서 쓰신 거거든요 아
얹어 안 해서 쓰셨으면 때 고전의
권 아까 권 학과를 은 적 안 해서
쓰셨고 그 연이어 선이 이걸 쓰시게
되는데 결국 뭐냐면은 포 더 문
이라는 것은 그 전해에 1,008 회
61 년 그 1860 년 4월에 이제
득도를 해가지고 그 일 년여 검증을
받아서
어유 월에 포동 을 시작 했어요
4 토도우 을 시작해 가지 여러가지
문제가 맛만 간 거기서 생기는 문제를
가지고 이제 안심과 대표적인 것이
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데
안심하십시오
아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맞습니다
그래서 아닌가를 썼단 말이야 그
그러고 나서 이제 결국은 그 아닌가
에서 이미 그 얘기하고 있는 않은
문제가 표면으로 너무 극대화 돼
가지고 뭐냐면 영남 유생들이 까고
이러니깐 도저히 용담 을 시킬 수가
없어 아내가 떠는 것이 상책이 있다
그러고서 전라도로 가신 거란 말이야
22:02
그 가지고
22:03
구례를 거쳐 가지고 이제 남원으로
22:06
가서 은 저와 내다가 것 저를 종하고
22:10
거기서 매일 산에 올라가서
22:13
웅장한 지리산 산재를 보면서 이제
22:15
이걸 쓰시고요 아마 그때 검경 이라고
22:18
22:19
그건가 도 그때 검정 일하고 또 그
22:21
전에
22:22
에 지은 것일 텐데 이제 그러나 *
22:27
현상 삼성 꼭대기에서 질량을
22:29
바라보면서
22:31
웅장 이 밤에 참
22:34
쓰신 왔단 말이야 그러니까
22:36
그러면서 영이 포동 물을 쓸 쪽에는
22:40
벅 을 펼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
22:45
자람이 여기서
22:47
어는
22:49
덕 이라는 말만 안 되게 보편적인
22:51
언어란 말이야 근데 포도 오븐 할
22:54
적만 해도 그 사업으로 우해 봐줘야
22:57
어쩌다 만큼 뭐예요 2 2분은 이날
23:01
의회 마디는 꿈에도 안고 얻는데 영남
23:05
유생들이
23:07
이거를 무국 되도록 그대로 받아들여
23:09
와 주고 한국인의 어리지 난 특별한
23:13
이건 만고에 없는데 계속 해 왔잖아
23:16
씨가 이거 여기 보시면 그러면 나는
23:18
나로써 유니 큰 나의 무극 때도 지가
23:22
어디가 없는거 다 맨날 이거 강조하는
23:24
것 그러나 그 항상 영남 유생들이 면
23:27
양은
23:28
이순을 때려잡는 것이 서 와우로
23:31
때려야 합니다
23:34
그래서
23:35
잇어 하게 대해서 내가 서 학장이
23:38
아니고 내가 가르친 것은 정말 서학과는 관계 없는 겁니다 해가 지고
23:45
서 하기 아니라는 것은 계속 강조한
23:49
에 다 보니까 는
23:52
여기에 대해서
23:56
통하기 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24:00
거죠 서로 멀리 쉽게 되니까 오해를
24:03
받아 가지고
24:05
그래서 무국 때도 집안은 먹 되더라는
24:09
간판을 애매해서 게 그 워낙 거대한
24:12
개념이기 때문에 그게 잘 전달이 안
24:15
되니까
24:16
우리가 이제 이것을
24:19
동아고 바꿉시다 4
24:21
이게 마음속에서 결심을 하신 거지요
24:23
그래서 원래 면도 화기 아니었는데
24:28
서하 우로 몰리게 되는 상황에서
24:31
이거는 서학과 대비되는 동학이다
---
근데 이때 동학이라는 것은 
소외 에 대해서 도움이 아니라
이거는 살릴 해동의 동의해야
해도 에 동의 이 때문에 자신은 동학이라는 건 우리 조선의 고유한 하기 다 한거죠 어 그 양이
하기 라는 표현도 유 서 항에서 나왔겠지만 은 희 하기 란 표현도
교우 하는 거를
내 자국이 안 없다는데 특징인 느
2교 가 아니라 나는 종교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건
배움이 고
여러분들이 배워서 깨우쳐야 될 스스로
깨우쳐야 할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동항 이라고 했고
그러면 내가 말하는 동안은 뭐냐
그걸 내가 체계적으로 논술 하겠다
그래서
하셔도 동안 인데 너나 한다는걸 뒤로
놓쳐 우리는 그래서 동학 논의되고
그래서
동악 논 이라는 것이 쓰여 졌는데
외롭게 은정 하면서 쓰신 글인데 이
글만 해도
레퍼런스가 없었다는 거죠 또 도서관이
없었던 거죠
그 양은 부탄 자로 가지고
집필 부분 그 거기 좋은 그 약동
산거 아니다 그리 많이 도와 주었기
때문에
지필 무기 제공이 됐고
그러고 굉장히 넉넉한 뉴 족한 그
환경이 마련돼 있기 때문에
순정은 해태 있죠 아주 했어요 그래서
그러나 해피 한 만큼 3 위치 멋있는
사실 고도 기업
화이트 되는 종류라는 것은 결국 알고 보면
26:28
인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특수한
26:32
메카니즘이 라 이런 얘기를 했거든
26:35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죠 으
26:37
결국 교회 나가는 사람들
26:40
다 고독한 야
26:43
고독한 야
26:46
나체로 고독하지 않고 충분한 사람들은
26:50
휴 할 일이 없어요 예
26:53
나는 그래서 바쁘니까
26:56
바쁜 사랑의 몸으로 밖에 안양
26:58
대가리가 바쁘니까 용이한 아님 된거
27:01
언제해요
27:02
천당 생각하고 언제 하고 나와 하지마
27:05
뿌리가 싫어 산이를 마치
27:08
세종이 듣고 물소리 드리려고
27:10
그게 나의 유일한 얘 됩니다 아 이런
27:14
일이에요
27:15
그러나 그 아이 테드가 그 원래 주인
27:19
더 메이지 모든 종교는 우릴 내 이제
27:22
있는게 2기 하나의 그
27:24
생성 중에 좀 종교라는 것이 완성된
27:27
조밀한 게 있으시오
27:30
하나님도 생성 중의 하는것
27:33
그렇게 된 거야
27:35
인간 이 모든 정결한 상상 중에 있는
27:38
거야
27:39
지금 기독교에 대한 여러분들의 이
모습도
생성 중에 어떤거 과정에서 한국에선
시정 보고 있는 거지에
어디에 기독교 라는 게 우리 20세기
초반만 해도 기독교가 그렇게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생각났어요
텔 여러분들이 월 기독교 회한 문 썰
기본적으로 볼수 에 의하면
사실은 6 민중 항쟁 이후에 기독교가 오는 기독교 된거
운영은 빨갱이가 안 버리려면
교회로 하면 된다
그런것이 이승만 정권의 반공 정책이나
기독교가 맞물려 하죠 그 때 대형
교회 라는 문화가 막 생겨나고 거야
그것과
그러냐 이게 뭐냐는

우리는 이런 대형 교회라면 전생 게
없는 현상인데
이게 방공 그 국시와 결합돼 가지고 생애는 잠깐 이죠 5
그 내신 이렇게나 아무리 지금 그 얘
러시아 관성 있으니까 조금은 강했지만
28:59
은 잠깐 입니까
29:02
여름엔 모든 위대한 성장 들이 자신
29:05
통통 돼 있는데 한국의 뭐라 움직
29:09
이게 되겠어요
29:11
미가는
==================
여러분들이 동화 항은 종교 시작한
것이 아니고
도가 이란 말도
애초 로부터
무극 때도 였지
그니까 동악 이란 말은 이 잠 처음에
안 썼던 것은 뭐냐 이런 동서의 분
* 개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무겁게 덜한 말이야 나의 도 라 함은
그럼 무급 때 되는 말이 이 무급
때도 란 말이지 하는건 보겠어요
결국은 까 아 시라는 건 너무 야한
것은 이 할고
이건 극이 없는거니까 이게 뭐냐면
실체를 거부 하는 거 실 청와대 수가
없다 누 국대 돌을 이제 그 동아
그로써 다시 클레임 하는
그럴 라면은
29:58
동악 논을 지표라고
30:01
그러다 전이 수온이 득도를 한 힘
30:05
의미의 최초로 동화 기라고 하는
30:08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는 아주
30:11
결정적인 문장이 동안 의미죠 깐
30:15
우리가 지금 2년 동안 논 이라는
30:17
것은 가장 긴 문장 9
30:19
그리고 내용도 가장 풍요롭고 이동 앙
30:23
논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30:25
동아 게 정체를 알 수 있게 되는
30:28
겁니다
30:29
책의 108 패지 108 태즈 대정
30:33
후 천도 자는 요 무영이 유저 카고
30:37
지휘자는 여 광대 의 유방 자야
30:42
요 한 마디만 해도 같이 병 문인데
30:46
2
30:47
천도 라는거 하고
30:50
cd 가 아 여기 에 대기 됐잖아요
30:54
그런거는 천도 우와 7이 에
30:58
보통은 전문 지리라 그러죠 인데
31:02
e 번역 2000도 라고 하는 개념을
31:06
맨들 할꺼예요 이 역시 그 그랜드 안
31:09
커 쓰니깐
31:10
하늘의 기는 자 무영 헝 채 거
31:15
없으니 이상 없다 라는 것만으로
31:19
만족을 못하는 거야 하늘에도 라고
31:22
하는 것은
31:23
형체가 구체적인 형체가 없어요 전
31:27
아니라 보편적인 거니까 하늘이란 거
31:30
여러분들이 하늘의 특징 2 왜 지금
31:33
형 해독 보나 부산이 너무나 또
31:36
같아요
31:37
하늘의 특징을 보편성이란
31:40
어디서나 폰 아 그 물론 난방 거야
31:42
서보 며느님 다르겠지만 은 그러나
31:45
땅이라고 하는 건 뭐야 구체성이 라면
31:48
구성 이라면 눈으로 부여는 다르잖아요
31:52
부산에서 보는 광경이라 지금 서운
31:54
바다가 없잖아요 으 그러니까 는 0이
31:57
천도 라고 하는 기본 용어로 하늘의
32:00
긴 형체가
32:03
없지만은
32:06
투 유 청 3
32:11
그 2 2
32:12
정일 거죠
32:14
요새는 얘기야
32:16
밤에 갈등은
32:18
달해 돌아가는 기획 관심이 있것
32:21
이 달 질 붉혀 편 에 의해 난도 8
32:25
요자 변란이 그 이보름 달인데 상당히
32:29
또 부캐 떠요
32:30
그런 시간이 변해 일 년 계속 딴
32:33
했는데 이 다리 그 기회를 보면은
32:37
해오며 합니다
32:39
그 그걸 이렇게 보면은 이건 안
32:42
하느라 보면 편 저희가 있거든 한
32:45
적이 다 있어
32:46
그래야
32:48
천도 라는 것은 하늘의 길 10 권
32:50
형체는 없으나 헌정 있어 언정 2
32:54
어젯 다리 간이라고 오늘 간질이 단락
32:57
헌정 이 달라요 그러나 그 있단
32:59
말이야
33:00
지휘자는 여 광대 땅은 광대 하지만은
33:05
33:05
방향이 있단 말이야 이게 방이랑 은
33:08
이제 사각형을 가기 있다 이렇게 그야
33:11
어떤 방이 있다는게 얘기 로 가라 가
33:14
u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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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하지만 로 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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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을 이렇게 데뷔 시켜서 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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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족하고 광대의 유방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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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하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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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에는 없 구성이란 게임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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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 별이라는 게 아니라 그 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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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 인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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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9개 영역이 있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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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이제 대표적인 별들을 9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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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건데 이제 땅에는 그 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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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구주가 있다 이게 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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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말한 것이죠
33:50
그러고 가고 땅에는 8 방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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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에 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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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1 배터리 여기에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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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들이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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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못하는 그 사람들이 누
영어 7 수
부동 저항 변혁 우리가 술이야 말듯이
만수 라리 응급 별로 같은 말이고
근데 역 여기 거라는
점과 지를 얘기 했잖아요
1,000 천도와
어 지를 얘기했는데 이
천지간에
그래야 뭐 보 구성이 꼭 우주와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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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으로 8 갖고 다이 그런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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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차고 b 곡 차고 비고 또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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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렇게 번갈아 아 아아 하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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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변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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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이 있잖아 이러한 어떤 법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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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스 카오 티 카 미 들어가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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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란 말이야 으 항성 일은 뭐 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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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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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계속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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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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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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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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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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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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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를 아주 정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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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것으 마쓰다 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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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기서 변형 이란 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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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있는데 따라서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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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다자 해석을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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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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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 2억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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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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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변화는 영어 질 때에 변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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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있는데 반해서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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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없는 이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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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런 식으로 이 문화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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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을 대비 시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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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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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말 잘못된 해석이 줘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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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의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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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여 따 이건 동아고 정황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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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고 정화 하니 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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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정 이라는 말도 이게 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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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더라도 말을 아니라 말이 챙길
36:40
햇수가 아니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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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어깨는 야 이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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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다는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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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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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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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과 정의라 와 언 정리 변함 없는
37:01
게 아니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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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완 이동이 쉬는 상태 란 말이야
37:05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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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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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천지 자연히 잊힌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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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근본적으로 변혁 동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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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의 법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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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뎌 그는 뒤바뀌는 위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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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같은 얘기해 같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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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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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워 질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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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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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나 그것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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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이 그것이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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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기는 이치를 있지 않냐
38:01
그리고 여기서 뭐냐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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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의 지금 보내는 이의 동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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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 소개하고자 하는 그 이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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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거의 천지 대자연 이라고 하는
것을 본 더 내놓은 게 마테오 리치는
천주 12에서 까 이러한 계산은 것
같애 전주시 리에서 이 편지 대자연은
전혀 자체 법칙이 없다

 
그건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물질이라는 게다 이게
영문이 아닌데 어떻게 지가
의식도 없는 물질들이 다 그렇게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느냐 하늘을 봐라
다시 출세도 의도와 안되고 물질
아니야 그 그저 의식도 없는 없는데
어떻게 자랑거리를 다 두고 재개
되도록 하고 있냐 이거는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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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글 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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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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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목수가 없는데 지가 나무가 일하던
9 의자가 되냐 이 거야
마태오 리치 얘기하는 거예요 그건
목수가
디자인 감각을 가지고
망치질을 해 가게도 맺는 거 아니야
이 우주는 그러한 것이 다 아는걸
얘기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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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를 통한 눈에 최초의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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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난동 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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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 주는 셋으로 질서를 지금 정연한
영험 있는 0 물질의 세계라
생명의 무 주자 그 이거는 엉뚱 악의
바뀌는 법은 없다 엉뚱한 변 혈압도
이거 뭐야
하나님의 임의적 간섭이 있을 수 없다
이거예요
이 우주의 법칙 에는 하나님이 이 그
임의적인 간섭이 있을 수 없다
촘 마디에서 이렇게
때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야 정말 이거 인터넷 철자 int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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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은 이런 식으로 간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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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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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의 언어를 이런식으로 분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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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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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그건 이따가 이런 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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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 제 살랑 것처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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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가 이걸 국회를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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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실은 수운 내가 열며 천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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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태오 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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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청주시 라고 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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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라고 하는 그 논리가 전제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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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면 이 사람의 말을 이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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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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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동향 논의 전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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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동학이 다 그랬는데
천도와 지리를 다 깨지고 들어가는
아무것도 없어 이상직
찰 도구 아무도 없네 부탄 자라
가지고 이렇게 썩어들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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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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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언 하면 흔적 암에 타지에서 외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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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은 진짜 혁명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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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키피탈을 쓴 것 보다는 더 위대한 문장 하셨습니다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써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