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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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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작성자 바보새 16-01-22 01:50 조회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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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은 펄럭거림이 없나니, 생각을 정복하고 자아의 통일을 닦고 있는 수도자를 비하여 말한다면 그와도 같으니라.
어떤 객관적 경험도 마음이 감각을 통하여 그대상과 연결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어떤 생각에 대해 명상을 할 때 그 생각에 대한 조잡 또는 오묘한 경험은 마음이 말의 감각과 접촉하는 데 달려있다.
명상하는 동안 경험의 대상은 점점 줄어드는 상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의 가장 오묘한 상태가 초월될 때, 그때 마음은 이때껏 그것을 통해서 경험하던 대상과 감각을 벗어나게 된다. 마음이 감각과대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때까지는 마치 바람에 펄럭이는 등불과 같다. 그러나 그 영향을 한번 벗어나게 될 때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같이 부동하는 것이 돼버린다.
마음이 대상과 연결되는 한은, 그것은 아직 경험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경험의 대상이 줄어들다가 나중 아주 없어지는 지경에 이를 때, 마음은 경험하는 마음이기를 그만둔다. 의식하는 마음이 의식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변화의 과정 동안에 그것은 우선 첫째로 개성의 가장순수한 상태를 얻게 된다. 이 절의 말이 마음의 부동을 말하지 않고, ‘생각’의 부동을 말하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다. 거기에 쓰인 산스크리트 말은 ‘칫타’ (chitta)다.
그것은 고요하고 잠잠한 인상의 집합이라 할까, 혹은 욕망의 씨라고 할까 마음의 그러한 상태를 나타내는 뜻이다. 칫타는 물결이 일지 않는 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물결이 되어 일 때 그것을 ‘마나스’ (manas) 곧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이 그러한 칫타의 상태, 즉, ‘생각’ 의 상태를 가졌을 때, 그때에 부동으로 선다.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과 같다는 것은 그 개성을 빔(그 주위에 가지는 추상적인 풍성) 속에 가진다. 그 이유는 그것을 경험해줄 아무것도 거기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방해도 받음이 없이 자신 속에 깨어 있다.
어느 순간에라도 곧 잠잠한 깊음 속으로 번져 빠져들어가려는 잠잠한 바다의 한 잠잠한 물결을 상상해보라. 이 절이 나타내는 마음의 순수한 개성의 상태, ‘나’의 순수한 개성의 상태는 곧 즉시로 초월적인 자아의식 속으로 빠져든다. 크리슈나가 ‘자아의 통일’ (자아와 하나됨)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 마음이 거룩한 본체와 연합한 것이다. 이 거룩한 하나됨, 곧 요가를 그 양상에 따라 각각 다르게 설명하는 것이 이어지는 네 절이요, 그 다음의 여섯 절에서는 초월적 의식에서 우주의식으로 변해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 세 절에서 우주의식에서 신의식으로 들어가는 길의 요점을 설명한다. 그 신의식이 곧 요가의 절정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0. 요가를 닦음으로써 다스림을 받아 생각이 안정에 이른 곳에, 또 자아만에 의하여 자아를 보아 자아에 만족하고 앉아 있는 곳에,
 
21. 또 감각을 초월하여야, 깨달은 마음에 의하여서만 알 수 있는 한없는 즐거움이 그 안에만 있는 줄을 알아, 진리에서 흔들림이 없이, 그 안에 굳건히 서있는 곳에,
 
22. 그것을 한번 얻고만 나면 그것을 다시 없는 이익으로 알아, 그 안에 굳게 서서, 어떤 큰 고난에도 흔들림이 없는 거기,
 
23. 그것을 가리켜 요가라고 하나니, 그것은 고통의 얽어맴을 벗어난 것이니라. 그 요가를 마땅히 결정 불변의 마음으로 닦을 것이니라.
위 19절까지에서 생각, 즉, 결정적인 지성이 확고부동한 자리에 이른 마음의 지경을 말했다. 그리고 20절 이하에서는 그러한 결정적인 지성이 계속 훈련에 의하여 자기 개성을 분명히 파악한 다음, 물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 물러남은 개성의 확대로 시작된다. 그렇게 될 때 지성은 제 개성을 잃고 보편성을 갖기 시작한다. 즉 무한한 본체(Being)의 지위를 얻게 된다. 본체 속에 빠져들 때 그것은 본체를 곧 자아로 인식하게 되고 마침내는 복된 의식에 이른다. 요가 수행자는 자기 자아 속에서 만족을 발견한다.
마음이 모든 경험을 초월하기 전까지는 자아를 깨닫지 못한다.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과정에서 마음은 다수의 경험에서 물러나 자기 개체의 바탈 속에서 통일(하나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 다음 자기 개성을 초월함에 의하여 우주적인 존재로 확대된다. 이러한 바탈의 상태, 즉 초월적인 의식의 상태를 말해서 자아에 의하여 자아를 본다고 했다. 그 ‘만’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초월적 자아 자체가 바탈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므로 어떠한 상대적 존재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 순수성은 영원하고 지극히 높은 것이기 때문에 개인생활의 최고의 모습, 결정적인 지성을 가지고도 거기서는 먼 것이요 그 속에 들어감을 거부당한다. 지성이 자아의 바탈 속에 자기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존재를 버리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이 자아의 성격의 영광이다. 집에 돌아오면 길손은 평화를 얻는다.
감각으로는 왜 무한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하여는 감각의 기원과 목적을 알아야 한다. 창조는 프라크리티(prakriti) 곧 자연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세 성으로 나타난다. 즉, 선성(善性, 사트바), 동성(動性, 라쟈스),암성(暗性, 타마스)이다. 창조가 진행됨에 따라 3성은 마하트 타트바(mahat tattva) 곧 지성의 원리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다시 아함 타트바(aham tattva) 곧 마음의 원리로 나타나고, 그것은 또 그담 다섯 가지 탄마트라(tanmatra)로 나타나는데, 거기서 다섯 감각이 나온다. 그 다음 나타냄이 계속됨에 따라 다섯 탄마트라에서 다섯 원소(地, 水, 火, 風, 空)가 나오고, 그것들이 결합하면 만물이 된다.
감성의 경험 범역은 이 다섯 원소에서 나오는 창조물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만 객관세계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영원한 생명의 복된 것은 감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고, 지성으로부터는 가까와 곧 바로 다음에 있다. 지성으로는 그것을 맛볼 수 있지만 감성으로는 불가능하다.
20 절에서 23절까지의 목적은 요가를 네 가지로 정의하여서, 그것을 가지고서 힌두 경전이 가르치는 인생의 네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을 ① 다르마, ② 아르다, ③ 카마, ④ 모크샤를 달성하는 데 있다고 한다.
① 다르마(dharma)는 사람의 자연적인 의무다. 그 안에는 선과, 올바른 행동, 자유, 정의, 법을 지킴 등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원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를 깨닫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은 단 번에 다 지켜진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아를 알고 체험하면 모든 도덕과 덕행과 올바른 행동의 기본이 되는 정도에 서기 때문에 거기서 자연의 모든 법을 준행하고 만물에 대해 정의를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② 아르다(artha)는 부(富), 사업, 유리, 유효, 보수, 이익의 뜻이다. 영원한 복의 체험으로 인하여 그런 모든 목적이 완전히 충족됨을 얻는다. 가지가지 행복의 수단을 모으고 또 모은다는 것은 결국 아르다를 얻자는 것이다.
③ 카마(kama)는 욕망으로 즐거움을 얻고 고통을 쫓아버리자는 것을 목적하게 된다. 이것은 자아의 영원한 복을 깨달을 때 이루어진다. 찾는 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없어질 때 카마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④ 모크샤(moksha)는 해방이다. 23절에 모든 슬픔, 고통에서 해방됨을 말했다. 요가, 즉 지극히 높으신 이와 하나됨으로 인하여 그것은 이루어진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타울레르(Johann Tauler)는 말하기를 이렇게 했다. “그의 영혼은, 말하자면 신성(神性)의 깊은 소속에 빠져 잃어지고 말아서, 모든 피조물적 차별의 의식도 따라서 잃어버렸다. 사람의 영혼이 거룩한 합일로 하여 하나님 안에 아주 완전히 잃어버려졌기 때문에 그는 모든 피조물적 차별감을 잃어버리고……구름도 빛도 없는 신비의 고적한 하나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24. 하고자 하는 뜻을 일으키는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내버리고 마음만으로 모든 감각의 무리를 샅샅이 정복하며,
‘뜻을 일으키는’을 간디나 라다크리슈난, 또 그 밖의 번역들은 다 “이기적인 뜻(혹은 목적)에서 일어나는 욕망을”이라고 하는데, 마하리쉬의 번역만이 “하고자 하는 뜻을 일으키는 욕망을”이라고 한다. 그 어느 편으로 하여도 근본에서 다를 것은 없으나, 마하리쉬의 번역이 더 나을 듯하다. 욕망은 자연적인 것이고, 그 욕망의 자극으로 행동의 동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욕망의 뒤에 있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감히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고, 문제되는 것은 그 욕망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식적으로 일으켜 행동하고자 하는 뜻이다. —함석헌
‘마음만으로’를 간디(with the mind itself)와 마하리쉬(by the mind alone)가 번역한 것을 보면, 그 뜻은 극기나 고행으로 감각을 억지로 눌러버리거나 없애버리려 해서는 안된다는 데 있다. 내 마음을 참으로 높은 데 두면 감각은 쉽게 이겨진다는 말이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악이 감각 그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헤매는 마음을 그대로 두고 선을 행하려고 감각을 억지로 구속하고 강제하여도 소용이 없고, 반대로 마음을 올바른 길(道)에 놓기만 하면 감각은 자동적으로 거기 따라 참(眞理)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곧 생명이다. 그러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이다. 브라만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 내 속에 근본적으로 선의 씨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신 이를 믿기를 결심할 때 마음속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인자가 천하에 대적이 없다는 것은, 인자는 아무리 악한 자라도 대적으로 알아 정복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 스스로 선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된 환경 속에 자라는 어린이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평등과 평화를 살고 있는 부모와 어른들 사이에서 사는 동안 그 어린이의 자아는 올바르게 자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어린이의 도덕적 활동능력은 자동적으로 높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불우한 환경에서 사랑, 평등, 평화를 맛볼 수 없이 삐뚤어진 자람을 한 아이는 벌써 그 마음이 스스로 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아무리 훈계를 하여도 벌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개인이 그렇다면 인간의 공동체 살림은 더욱 그렇다. 그러기 때문에 선한 목적을 위해 강제와 폭력의 방법을 써서는 아니된다. 종교는 고등한 종교활동에 의해서만 향상 되고, 악한 풍속은 선한 풍속을 길러줌에 의해서만 제거되며, 저속한 풍조는 고상한 예술에 의해서만 배제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규칙과 단속과 형무소 등으로, 정치적 조직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마음만으로’ 혹은 ‘마음 자체로’라는 건 깊이 생각할 만한 말이다. 정치가 종교나 교육이나 예술을 직접 간섭해서는 아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함석헌
‘감각의 무리’, 혹은 감각의 마음 즉 감각들이 들어 있는 장소 이것은 신경조직의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체 신경조직이 마을이라면 개개의 신경은 마을사람인 셈이고, 마음은 그것을 차지하는 영주(領主)이다. 크리슈나가 “마음만으로 감각의 마을을 샅샅이 정복하며” 했을 때는 무슨 이치를 밝히고자 한 것일까? 그것은 즉 영주를 감독하여서 그로 하여금 마을사람들을 시켜서 마을을 새로 나게 하여, 그 활동 즉 신경조직의 활동이 자연법칙에 따라 진행되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한편 참으로 깨닫고 새로 난 자아는 영원한 본체 안에서 그 깬 의식을 자연상태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절대의 본성과 상대적인 활동의 분야가 서로 따로따로 갈라져 있으면서도, 또 개인생활 속에서 우주의식의 상태 안에서 하나로 통전(統全)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수련은 완전히 정신적인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감각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전신경조직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우주의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는 그 첫머리에서 크리슈나가 신경조직, 즉 생활의 생리적 면을 먼저 말하여 그 개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신경조직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개조하는 것은 생리적 방법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어려움이 이 ‘마음만으로’라는 말의 강조에 의하여서 풀린다. 그는 수도자에게 감각을 직접 통제하려고 하든가 혹은 신경조직을 어떤 생리적 방법으로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엄중한 경고를 한다. 초월의식이 부동의 것이 되려면 신경조직이 개조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정신적인 방법으로 되어야만 한다. 만일 수도자가 감각을 그 정도대로 두고 개조해보려고 한다거나 혹은 그것을 통제하되 자기의 타고난 천성을 어기고서 해보려고 한다면 결과는 잘못될 것이다. 이 절에서 가르치는 방법에는 그런 것은 조금도 없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5. 꾸준한 인내로써 버티는 이성에 의하여 한걸음 한 걸음 안정에 들어갈지어다. 마음을 자아에 박아놓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25절은 20절에서 ‘물러간다’고 했던 것, 그리고 24절에서 ‘내버린다’ 고 했던 것을 더욱 자세히 밝혀준다. 그것은 물러가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나 갑자기 하려 하거나 또 그 나가는 길을 변경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인내로써 버틴다”는 말을 덧붙인다. 한번 시작한 다음에는 스스로 진행 되도록 내맡겨두어야 한다.
꾸준히라는 말과 점진적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조급해져가지고 그 초월 속에다가 내 마음을 몰아넣으려 하다가는 여러 가지 잘못이 일어남을 보게 된다. 마음이 생각함에서 빠져나와서 상대계의 경험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이 생각함의 오묘한 단계에 있어서는 생각의 강도(強度)가 굉장히 높은 법이다. 나가는 과정이 방해를 받음 없이 스스로 순순한 상태로 나가게 된다면 마음은 슬쩍 자아(self)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그 나가는 길을 이리저리 지시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거나 강요하거나 하게 되면 그만 마음이 자연스럽게 가던 길에서 떨어져나가서 동요되고 불쾌를 느끼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나가는 길은 조바심이나 서두름이 없이 조용히 참는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내로써 버티는 이성”이라는 말에는 겉으로 보아 알 수 있는 대로, 이성편에서 참음을 지켜간다는 것밖에 또 속뜻이 있다. 그것은 그 나가는 과정 동안에는 이성은 작용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 그 돼가는 일들을 지켜보거나, 분석하러 들거나 꼬치꼬치 캐려 하거나 해서는 아니된다. 그 과정을 비판적 태도로 캘 필요가 없다. 이성은 다만 받아들이고 음미할 뿐이어야지 어떤 방식으로라도 조사하거나 감시하거나 해서는 아니된다.
‘한 걸음 한 걸음 안정에 들어갈지어다’ 함은 그래야, 마음이 사색과정의 보다 깊은 지경을 헤아려보는 동안 또 동시에 스스로 정련(精煉)됨을 얻어 보다 더 오묘한 지경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앞으로 순순히 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이 밝은 데 있다가 갑자기 깜깜한 굴속에 들어갈 때는 그 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지만, 천천히 들어가면 그 눈이 엷은 광선에 맞추어지기 때문에 볼 수가 있다. 마음이 깊은 속으로 물러갈 때는 거친 경험에서부터 오묘한 경험의 지경으로 들어간다. 그러기 때문에 갑자기 달리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히 들어가는 것이 마음에 대해 절대로 필요하다.
그리고 또 이성의 개인적인 성격에서부터 바탈(本性)의 지경으로 옮겨 가기 시작할 때는 그 과정이 서서히 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만 복된 것을 체험하는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크리슈나가 마음을 자아에 박아놓은 다음에는 무엇을 생각하려고 해서는 아니된다고 한 것은, 초월적인 의식의 지경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경 저 쪽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지경을 생각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거기는 다만 거기 있음을 즐길 수 있을 뿐인 지경이다. 거기는 생각이 제 자리를 가질 수 있는 정도의 지경이 아니다. 거기 어떤 좋은 생각이 들어 올 수 있으려니 기대하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크리슈나는 수도자에게 이 말을 해준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생각하지 않는 지경은 마음이 자아 속에 확정됨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오는 결과다. 그러나 이것은 명상하는 동안에만 그런 것이다. 명상에서 나온 다음에도 그러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버릇이 되면 생활은 침체되고 무의미한 것이 돼버린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우주의식의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첫째로, 이 지경의 생활은 사색이나 감정의 기반 위에서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본성의 지경 위에서 자연스럽게 살게 되는 생활이다. 둘째로, 이 지경에서 자아는 행동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떠나 있는 것이므로, 마음이 생각을 하고 있는 때 비로소 자아는 그 사색과정에 머무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있을 수 있다. 이것이 3절에서 말한 “요가에 도달한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에게만, 고요히 함이 그 방법이다” 한 지경의 생활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6. 무엇이거나 가만 있지 못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헤매어 나가게 하는 것이 있거든, 즉시로 이끌어들여 자아의 지배 밑에만 있게 하라.
 
27. 그 마음이 깊은 화평 속에 있고, 모든 애욕이 잠잠히 가라앉았으며, 모든 죄와 허물을 벗어 브라만과 하나됨을 얻은 요기는 무상의 복락에 이르느니라.
브라만과 하나됨 브라마부탐(brahmabhutam), 하나님과 하나됨.
요기 요가를 닦는 사람, 행자.
 
28. 요가를 닦는 자는 그와 같이 언제나 자기를 통일하여 죄를 벗어버렸으므로 쉬이 브라만과 접촉하는 영원한 복을 얻을 수 있느니라.
그 닦음이 쉽고, 그 가르치는 생활방식이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 닦음이 쉬운 것은 마음의 움직여가는 것이 거의 자동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즉 복이 있는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 닦음은 바로 마음의 천성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브라만과 접촉하기도 쉽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길은 가까운 데 있다(道在邇).
인(仁)이 멀리 있는 줄 아느냐? 내가 인을 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그 인이 내게로 온다.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공자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 제자가 되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마태」(11: 28∼30)
무슨 짐이 가장 무거우냐? 내 양심이 가책으로 내게 지운 짐이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무겁다. —함석헌
‘브라만과 접촉’(brahmasamsparsam)함을 말함은 하나님은 하나의 풍설만이 아니요, 걷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바라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한 실재요 우리는 그것과 실지로 접촉할 수 있다. 종교는 입씨름이 아니요 체험되는 사실이다. 이성은 거기 입을 내밀어 사실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굳건한 기반 위에 서지 않는 이상 설명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뿐 아니라, 종교적 체험의 사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계의 각각 다른 곳과 역사의 각각 다른 시대에 발견된 것으로서 인간정신이 하나인 것과 시간을 꿰뚫고 존재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의 선견자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필론과 플로티노스, 기독교와 회교의 모든 신비가들이 밝혀준 것은, 그것을 설명하려고 한 그 신학적 시도에는 비록 민족과 시대의 특성의 차이는 있어도 다 한 근본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라다크리슈난
 
29. 요가로 자기를 통일한 사람은 모든 곳에 평등관을 가져 일체 산 것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산 것을 보느니라.
자아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는 외계에서 물러나와 자아와 세계를 구별하여야 하지만, 일단 깨닫고 난 다음에는 세계가 자아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도덕의 세계에서 말한다면, 처음에는 세계 속에서 떠나기를 힘쓰다가, 일단 거기 도달하면 다시 사랑과 수난과 희생으로써 속세로 돌아오게 된다.
희망과 공포와 좋아함과 싫어함을 갖는 서로 대립하는 유한한 자기가 완전히 정복된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명상하는 동안 본성(Being)의 지경이 마음의 천성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되면 그 스며듦이 마음을 거룩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스며듦이 흔들림이 없이 확고한 것이 될 때 마음이 이 잡다한 만상 속에서 통일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잡다한 만상의 세계가 속에 있는 거룩한 통일에 의해 해석된다. 마음이 거룩한 본성으로 충만될 때 그 뚫어봄은 자연 충만하고 평등한 것이 된다. 이 세계 생명의 복잡한속에 있으면서도 그 뚫어봄은 확고한 것이요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브라만과 접촉한 사람의 뚫어봄이다.
평등관은 브라만과의 접촉의 결과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을 브라만을 깨닫는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만일 평등관을 얻어보려고 한다면 그는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혼란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0. 사람이 만일 나를 모든 곳에서 보고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본다면 내가 그에게서 잃어짐도 없고 그가 내게서 잃어짐도 없을 것이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계는 우선은 본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감정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부터 사색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담에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에 들어간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사람의 삶 속에서 모든 분야를 정복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제단 안에 산다. 그의 생활은 사랑 안에, 복 안에, 지혜 안에, 신의식 안에 있다. 그는 보편적인 존재의 지경 안에 산다. 그는 땅 위에서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땅에서 살며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본체의 땅에서 산다.
이 복된 지경을 개척하는 일은 사색을 초월한다. 이것을 계속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값어치가 있다. 그것은 마음을 즐거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준다. 그러나 바라는 지경을 창조하게는 못한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생각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귀하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생각을 초월하여 절대 정결의 지경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 거기가 하나님의 계신 곳이다. 거기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삶의 표면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생각은 마음이 그 복된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을 뿐이다. 빵을 생각하는 것은 빵맛을 주지도 못하고 배를 부르게도 못한다. 빵이 먹고 싶거든 밖에 앉아 그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말고 부엌으로 들어가 그것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한은, 어떻게 이 현상적인 경험의 세계를 뚫고 초월적인 축복의 세계, 전능자의 순수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한은,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요, 혹은 그를 느껴보려고 애를 쓰고만 있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는 성인 성자들의 하나님과의 직접 연합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들의 생활은 복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의 그러한 생활의 성공의 비밀은 그들의 사상, 감정, 경험의 지경을 초월하는 데 있다. 하나님 실현의 비밀은 하나님 생각을 초월하는 데 있다. 사상대로 남는 사상은 하나님 의식을 가리고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로 복스러운 복을 가리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그것이 사라져 없어지는 데 가서야 그 이루어짐을 본다. 감정도 가슴속을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기 위해서는 사라져버려야 한다.
만유의 주의 영광을 아는 의식의 지경은 거룩한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계속 규칙적으로 하는 명상의 실천과 초월적인 본성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만 우주의식에 이르러 혼과 마음이 완전히 성숙될 수 있다. 이렇게 혼과 마음의 역량이 충분히 발달되어야 거룩한 본체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생활할 수 있다. 나타나 뵈지 않는 절대와 나타나 뵈는 바 본체(Being) 사이에 있는 관계가 그 자체를 드러내게 된다. 인격신을 감각적인 단계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일상생활의 산 실재가 된다. 창조의 개개 물체가 내 자아의 방식이므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낸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1. 요기가 만일 하나됨에 굳게 서서 만유 안에 들어 있는 나를 공경한다면, 그는 어떠한 방식의 살림을 살더라도 나를 사는 것이니라.
작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지극히 높은 대아는 없다. 작은 내가 없어질 때에 지극히 높은 대아는 간 데마다에서 보인다. —간디
 
32. 오, 아르쥬나야, 자아로써 봄으로 인하여 일체를 즐겁거나 괴롭거나, 평등으로 보는 이를 최고의 요기라 이르느니라.
자아로써 봄 아트마아우파마(atma-aupamya), 모든 것을 나와 같이 봄, 모든 것 속에서 나를 봄, 나로 여김.
아트마아우파마는 나와 다른 사람을 평등으로 본다는 뜻이다. 내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듯 모든 것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감싸고, 사람들을 거룩한 살림으로 인도하며, 세상 속에서 성령과 빛나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는 자기에게 즐거운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즐겁고, 자기에게 괴로운 것은 모든 산 것들에게 괴로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하지 않는다. 그는 쾌락이 오거나 고통이 오거나 이미 겁내는 일이 없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자아와 평등관을 가지고 감싸안는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은 요기가 지녀야 할 비전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샹카라가 설명했듯이, “세상 만물이 자기가 고락을 느끼듯이 마찬가지로 고락을 느낀다고 깨닫기 때문에 어떤 생명도 해하지 않는다”는 지경이다. 여기서 성경의 유명한 구절을 참조하라. “여러분이 남에게서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그대로 해주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의 정신입니다.” (「마태복음」7:12) —마하데브 데자이
‘자아로써 봄으로 인하여’, 즉 자기 자아의 심정으로써 보라는 것이다.
앞절에서 보면 헌신자가 하나님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본다고 했다. 이 절에서 말하는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운 상태다. 곧 자아로써 미루어봄으로 인한 평등관이라고 한다. 앞 절에서는 볼 수 있었던 헌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차이가 여기서는 없어진다.
이제 그의 하나님은 그와 하나다. 거룩한 하나됨이 그를 압도해 버렸다. 그의 개성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광이 비쳐나오고, 그것이 다시 없이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본성 정도에서뿐 아니라 그의 감정, 사색, 환상, 체험의 전분야에까지 나타나게 된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헌신의 색채를 면치 못하던 것이 이제는 영원하신 본체의 꿰뚫음을 입은 그의 자아의 심정으로 분명히 나타난다. 그 본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그것을 붙드시고, 헌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영원한 자유를 지지해주신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라는 말을 한 것은 상대되는 쌍이 되는 생각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개성이 가져다주는 피조물의 여러 가지 성격은 요기의 비전에서는 이미 없어졌다. 그것을 보통의식에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하려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가지가지의 장난감을 사다주는 아버지 눈에는 그것이 다 하나지만 받는 어린 아들의 발달되지 못한 의식으로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게 보인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장자의「제물론」(齊物論)은 바로 이 뜻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제물론이라, 물론(物論)을 가까이 한다, 하나로 한다는 말이다. 천차만별의 상대 세계에 붙잡히기 때문에 시비를 따지려 하지만 시비를 따짐으로써는 도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평등관이란 시비를 초월한자리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얻은 사람은 최고의 요기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상대계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시비를 초월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또 현실로 있는 시비를 인정한다. 그래서 “성인이 고르게 하기를 시비로써 하고 하늘의 고름에 쉬게 하니, 이를 일러 두길로 한다고 한다”(聖人和之以足非 而休乎天均 是之謂兩行)라고 했다. 정말 초월은 상대를 부정하면서도 실려두는 것이다. 그것이 참 초월이다.「기타」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절대에 서지만 또 상대를 인정한다. 그래서 일단 버리고는 또다시 속세로 돌아오려고 한다. —함석헌
 
 
아르쥬나 말하기를
 
33. 마두 귀신을 죽이시는 이여, 당신께서 말씀하여주신 그 평등관의 요가는 어떻게 하면 영구부동일 수 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34. 마음이야말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오 크리슈나시여, 걷잡을 수 없고 억세고 완고하여, 그것을 억제하기란 바람을 잡으려 함같이 어렵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있고 버리면 없어져서, 나고 듦이 때가 없어 그 일정하게 있는 곳을 알 수 없다 하셨으니, 그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惟心之謂歟) —맹자(吿子上)
산속의 도둑을 깨치기는 쉬우나 마음속의 도둑을 깨치기는 어렵다. (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 —왕양명
이것은 많은 선견자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이야기다. 순간적으로 거룩한 빛을 반짝하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늘 그렇지 못하고 곧 꺼져버리는 데 안타까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집중됐던 마음이 왜 풀어지느냐를 모르는 데서 온다. 그것을 마음의 집중 정도에서만 했기 때문인 것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흔들림 없는 거룩한 신의식을 마음의 집중으로만 되는 줄로 아는 것이 잘못이다. 흔들리는 것은 그것이 바탈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두절에서 하는 아르쥬나의 질문을 흔히들 신의식에 이르기 어려운 것은 마음의 흔들림 때문이라는 의미로 풀어 생각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그것은 신의식에 이르는 근본적인 원리를 모르는 테서 오는 잘못이다. 우리가 목적하는 신의식은 바탈의 지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색이니, 이해니, 혹은 마음의 집중을 계속하는 정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기독교에서 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다, 거듭 났다,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자리, 불교에서 말한다면 깨달았다는 자리, 유교에서 말한다면 불역(不易)의 자리다. —함석헌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5. 마하바후야, 물론 마음은 흔들리는 것이요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그러나 오, 쿤티의 아들아(아르쥬나),그것은 끊임없는 닦음과 집착 없이 함으로써 능히 붙잡을 수 있느니라.
마하바후(Mahabahu) 큰 팔을 가진 자, 곧 아르쥬나를 가리킴.
여기 나온 크리슈나의 대답은「요가수트라」(Yoga sutra)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끊임없는 닦음은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 힘들여 노력함이요, 집착없이 함’ 이란 자연적인 육신에 대한 모든 애탐을 영적인 것에 대한 뜨거운 불길로 변화시켜버림을 가르치는 것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사람의 마음은 그저 위태로운 것이요, 도의 마음은 그저 아득한 것이니, 오직 알뜰히 오직 하나로 그 가운데를 잘 잡을지어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ᅳ 允執厥中) —「중용」
요가를 닦고 집착이 없이 함으로써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 할 때에 크리슈나가 뜻한 것은 다시는 마음이 헤매임이 없이 가만히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래 가지고는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의 뜻은 다만 닦음과 집착 없이 함으로써 무소부재한 바탈의 지경으로 들어 갈 수 있게 해줌을 얻어 마음이 언제나 자체 근본의 복된 지경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이른바 선비란 것은 마음에 잡힌 데가 있고 일하는 데 지키는 것이 있어서, 비록 도를 완전히 다 닦았다 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 지켜가는 것이 있고, 비록 온가지 아름다운 선을 다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 자리잡고 있는 곳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알기를 많이 하려고 힘쓰기보다는 아는 것인 담에는 반드시 분명히 하려 하고, 말하기를 많이 하려고 힘쓰기보다는 그 말을 하는 바에는 반드시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을 자세히 하려고 하며, 행하기를 많이 하려고 힘쓰기보다는 행하는 바에 는 어떻게 하게 되는지 그 말미암는 바를 분명히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여서 알기를 이미 슬기 있게 하고 말하기를 이미 분명히 하고 행하기를 이미 똑똑히 하면 우리 바탈이 그렇고 우리 몸이 그렇듯이 흔들림 없는 자리에 가게 된다. 그러면 부하고 귀해진다 해도 더해지는 것이 없다. 가난하고 천해진다 해도 덜해질 것이 없다. 이것이 곧 선비라는 것이다. (所謂士人者 心有所定 計有所守 雖不能盡道術之本 必有率也 雖不能備百善之美 必有處也 是故知不務多 必審其所知 言不務多 必審其所謂 行不務多 必審其所由 智旣知之 言旣道之 行旣由之 則若性命之形 骸之下可易也 富貴不足以益 貧賤不能以損 此則士人也) —공자(家語)
 
36. 자기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요가를 성취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법에 따라 힘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라.
 
아르쥬나 말하기를
 
37. 믿음은 있으나 스스로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요가에서 멀어져, 완전한 요가의 성취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오, 크리슈나여, 그 사람은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되옵니까?
아르쥬나의 이 질문은, 죽을 때에 영원한 복락의 세계에 반대되는 길에 선 것은 아니다. 영원한 청정세계를 깨달아 알이만큼 완전한 수양을 하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묻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같이 영원한 천당 아니면 영원한 지옥중의 어느 하나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도 죽은 후에까지 더 자라서 완전에 이를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는가 하는 말이다. —라다크리슈난
그는 아마 신앙이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나 알고 싶어서 이 질문을 했을 것이다. 아르쥬나같이 실제적인 사람으로서는 신앙만으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쉬운 길이 혹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8. 오, 큰 팔을 가지신 이여, 브라만의 길에서 헤매어나와 발을 붙일 곳도 없는 자는 둘에서 다 떨어져나와 끊어진 구름 조각같이 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브라만의 길 브라만에 이르는 길, 끊임 없이 요가를 닦아나가는 길.
아르쥬나는 의식에 여러 층이 있고 거기 대응하는 여러 정도의 생활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의식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자라 올라가면 전단계의 생활은 그에게는 쓸데없어지는 것임도 알고 있다. 그가 묻는 것은, 사람이 어느 정도의 수양을 쌓아 보통 인간의식의 정도를 벗어나기는 하면서도, 해탈을 얻어 신의식에 이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주의식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인간의 정도에서는 자리를 잃어버렸고, 거룩한 지경에는 아직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는 ‘둘에서 다 떨어져나와’ 여기 있을 수도 저기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끊어진 구름조각같이 망해버린다”는 무서운 표현을 한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이 주는 기쁨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권세의 맛을 본 사람들이 배반하고 떨어져나간다면 그들을 회개시켜 다시 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히브리」(6: 4~6)
지극히 어려운 이 요가의 길을 그 끝까지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허다한 데, 그들의 말로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노력은 전연 쓸데없는가, 완성 할 수 없는 길을 시작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다크리슈난
 
39. 크리슈나여, 저의 이 의심을 온전히 몰아내주시옵소서. 이 의심을 끊어버리실 분은 참으로 당신밖에 없사옵니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40. 프리다의 아들아,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그에게는 멸망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벗이여, 선을 행하는 자에게 어찌 궂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사랑하는 벗 아르쥬나를 가리킴.
플라톤도 같은 말을 했다. “선한 사람에게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궂은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라.”「코란경」에도 있다. “누구나 선을 행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그 공로로 내침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보라, 그를 위하여 우리가 이를 기록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41. 요가를 하다가 떨어진 사람이면 선을 행한 사람들이 가 있는 세계에 가서 오랜 세월을 지내다가 청정하고 길상(吉祥)스러운 집에 다시 태어나느니라.
내가 비노바 바베이를 방문했을 때 그의 첫마디로 묻는 말이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소?”였다. 그래 나는 서슴지 않고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지만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나는 미리부터 해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라는 할아버지가 하늘 위에 앉았는 것을 믿는 것이 반드시 인격신을 믿는 것이 아닌 것같이, 반드시 소로 나고 버러지로 나는 것을 믿어서만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믿는 것 아니다. 궁극에 있어 생명은 한 생명이요 그 생명이 무한히 진화하는 생명임을 알면 그것 때문에 싸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곰곰이 오묘한 지경을 생각해보면 나는 결코 한번만 나고 한번만 죽는 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자기를 조금 들여다보는 사람이면 ‘나’ 라는 것은 연속이 아니고 불연속인 것을 알지 않나? 지금 일념(一念) 사이에, 믿으면 영으로 태어났다가, 금새 또 믿음을 잃고 구렁이로 여우로 승냥이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래서 “천하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속에 갖추어 있다”(萬物皆備於我)라 하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돌이켜보아 정성되면 즐거움이 이에서 더 한 것이 없다”(反身而誠樂莫大焉) 하는 것 아닌가? 성(誠)하는 데,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전부를 온전히 돌릴 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 것은 그때 내가 낮은 것을 벗어버리고 좀더 하나님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를 한번만 하는 줄 아는 사람은 그 궁극의 마지막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람은 보통의 거친 마음보다는 좀더 오묘한 현미경식의 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오묘는 갈수록 그 도가 깊어가고 높아가다 못해 말과 생각이 끊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내가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었다” 한 것은 그것을 체험해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예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 오묘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일부러 “사람의 아들이다” 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충성스런 분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금덩어리보다 더한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저울 판을 타고 스스로 땅에 내리지 않았더라면 쭉정이도 못되는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자녀’ 라는 말을 하며 하늘을 향해 곤두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억억만만 번 억억만만 가지 생으로 태어났던 우리요, 우리의 희망은 이제 이 순간에라도 은혜와 노력의 한 데 합함으로써 단번에 생사도(生死道)의 연옥을 탈출해 영원한 아버지 속으로 뛰어들 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나도 빠짐이 없이 이 만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또 몇 억억만만 번을 다시 여기로 내보내신다 해도 한마디 투정도 앙탈도 말고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며 고맙게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 어서 최후심판이 와서 하나님 우편에 가 앉자는 생각보다는 헤매이는 마음 하나를 건지기 위해서라면 보살의 지위를 내버리고라도 야차로 태어나기를 사양 않는다는 마음이 훨씬 더 하나님 뜻에 가까울 것이다. —함석헌
 
42. 혹은 어느 어진 요기의 집안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그러한 탄생은 이 현세에서는 아주 드문 것이기 때문이다.
 
43. 오, 쿠루족의 귀염둥아, 거기서 그는 전생의 몸에서 길렀던 정신의 결합을 다시 찾아, 거기서부터 다시 완전한 성취의 지경을 향해 힘써 나아갈 것이다.
정신 혹은 이성, 혹은 이상.
결합 전생에 얻었던 이성과 다시 연락이 된다는 의미로도 취하고, 그렇지 않고 그 결합을 브라만과 하나됨이라는 뜻으로 취하기도 한다.
거기서부터 그것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것으로 전생에 이루었던 공덕이 무효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 거기 있다.
완전을 향해 나가는 길은 천천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에 이르자면 아마 여러 날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노력도 헛되게 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맺었던 관계, 우리가 얻었던 힘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마 다음 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44. 전생에 닦았던 힘으로 그는 몰려나가게 된다. 요가를 알려고 찾았던 것만으로도 그는 베다를 뛰어넘는다.
몰려나간다 원하거나 아니하거나, 혹은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아니하거나 간에 전생에 닦았던 그 힘에 몰려 요가를 계속하게 된다는 말이다.
베다 「삽다브라마」(sabdabrahma)를 번역한 말이다(Veda 혹은 Vedic rule). 어떤 이는 프라크리티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문으로는 삽다브라마를 성범(聲梵)이라 번역한다. 즉 소리로 하는 베다, 글자로 하는 경전이란 말이다. 정신적 베다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넘어선다 상대계를 넘어 초월적인 의식에 들어감을 말한다. 크리슈나는 요가의 초심자조차도 이미 상대적인 생활의 지경은 넘어섰다고 했다.
이것은「베다」와 그 사이에 써넣은 글들을 의미한다. 베다의 교리를 실천함에 의하여 우리는 베다를 뛰어넘게 된다. 브라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삽다브라마와 그 지경을 넘어선 것과. 삽다브라마를 잘 외어 통하게 되면 그것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면 신앙은 체험이 되어버리고, 혀는 가만있게 되고, 교리는 퇴색되어버리고 만다. 신앙을 일깨우는 것은 보통 경전의 공부나 예배의식에 참여함으로써 되는데, 그 도움을 받아서 하다가 완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면 그때에 간접적인 도움은 필요가 없어진다. 보통으로는「베다」공부가 도움이 되지만, 한번 마음이 스스로 눈이 뜨여 그것으로 넉넉하게 되면 그런 외적 도움은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삽다브라마」나 그 밖의 어떤 제도적인 가르침이건 다 넘어서게 된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는 배가 필요하지만, “이미 피안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법이 다시 소용이 없다.” —라다크리슈난
 
45. 그러나 견디고 참음으로써 힘쓰는 요기는, 모든 죄의 소멸됨을 얻어, 많은 생을 거친 후 성취됨에 이르러 가장 높은 지경에 들어가느니라.
사람은 연약한 것이기 때문에 이 생에서는 비록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노력의 교훈은 그 죽은 후에도 영원히 남아 있으며 그를 도와 그로 하여금 전진케 하여 마침내 목적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용서와 회개와 고쳐줌과 회복으로 모든 인간이 다 속죄됨을 입어 최고의 지경에 하나됨을 이루기 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영혼이 다 자기를 그 자신의 모습대로 지은 하나님께로 도로 찾아옴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에 대해 지극히 반역적인 요소까지도 마침내 다 찾아 자기와 화(和)를 이루도록 하고야 말 것이다.「기타」는 우리에게 만유 구속의 희망을 준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용기를 잃는다. 완전에 가려면 여러 날이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이라는 말을 오해 하는 데서 나온다. 생이란 새 몸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만일 사람이 초월적인 의식 속에서 우주적인 신분을 가지게 될 때에 일어나는 일을 분석해본다면, 그때는 개인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 그는 순수한 ‘존재’ 그것이 되고 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초월에서 나오면 다시 개인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생이란 개인생활을 하는 것이다. 생이란 이 개인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요가 경전의 말을 오해하는 것은 요가 상태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과 요가를 닦는 데 대한 자세한 지식이 없는 데서 온다. 이 상태에서는 오해는 불가피한 것이다.
‘많은 생’이란 말을, 피상적인 견지에서 한다면, 여러 번 태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아직 요가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것이 분명하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46. 요기는 고행자보다도 위대하다. 그는 지식 있는 자보다도, 행동하는 자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아르쥬나야, 너는 요기가 될지어다.
여기서 크리슈나는 요기는 숲 사이에 물러가 있어서 극도의 단식과 고행을 하는 고행자 타파스빈(tapasvin)보다도, 해탈을 얻기 위해 행함을 내버리고 지식의 길을 취하는 즈나닌(jnanin)보다도, 복락을 얻기 위해 베다의 의식을 행하는 카르민(karmin)보다도 위대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타파스보다도, 즈나니보다도, 카르마보다도 더 귀하다는 이 요가는 그 셋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들 위에 또 헌신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를 요기는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 자리 잡고 계시는 신 앞에 자기를 부어 지극한 예배를 드리고, 그의 생활은 거룩한 빛의 인도에 따라서 하는 자기를 잊어버린 봉사로 된다.
요가, 다른 말로 해서, 박티(bhakti) 곧 실수(賞修)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하나됨이 최고의 목적이다. 다음 절에서는 모든 요기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이 박타(bhakta)의 신봉자라고 한다. 여기서 즈나나는 정신적인 실현이란 뜻이 아니고, 정신적 지식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고행자란 말은 결과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행하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지식의 사람이란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로서의 즈나니가 아니라 단순히 학식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간디
 
47. 그리고 모든 요기 중에서도 나를 믿음으로 예배하고, 그의 가장 깊은 속의 자아로 내 속에 빠져들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나는 가장 완전히 하나됨을 얻은 자라고 하느니라.
여기 진화의 최고 상태에 대한 설명이 있다. 크리슈나는 “모든 요기 중에서”라고 했다. 그것으로 가지가지의 요기가 있을 것을 알 수 있다. 하다(hatha) 요기, 쟈나(dhyana) 요기, 카르마(karma) 요기 등등이다. 이 모든 요기가 도달하는 네 가지의 단계가 있다. 그 첫째는 대아의식의 실현(10∼18절), 둘째는 우주의식의 실현(24∼29절), 셋째는 신의식의 실현(30∼32절), 넷째는 신의 식 안에서의 만유의 실현(32절), 크리슈나가 “모든 요기 중……그의 가장 깊은 속의 자아가 내 속에 빠져들어 있는” 했을 때 그는 자기 안에 만유의 주와 또 만유와 자연적 또는 항구적인 화합이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에 나타난다.
본체(Being)의 상태가 심성 속에 충만히 또 항구적으로 스며들어서 상대적인 경험이 아무리 들어와도 그것을 깨치지 못하는 것이 우주의식의 특징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 속에 자적(自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적이 아무리 적극적이고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그 본질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전혀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래도 초월적인 본체가 심성 속에 스며들어왔다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이 스며들어옴이 감각의 상태에서 본체를 경험하게는 못해준다. 눈이 본체를 볼 수는 없고, 혀가 그것을 맛볼 수 없으며. 귀가 그것을 듣거나 손이 그것을 만질 수 없다. 이것을 가져오는 것은 신앙 안에서 되는 신심의 과정이다. 신심은 언제나 개인적인 단계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슈나가 “모든 요기 중에서 나를 신앙으로 예배하는 그를” 하고 말했을 때 그는, 우주의식 속에 확호히 서서, 신심과 예배를 위해, 자기를 우주존재의 나타나 뵈는 표현에다, 하나님 안에서 개체로 화한 우주 존재에다 가져다 접착시키는 사람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럴 때 눈은 나타나 뵈는 추상적 영원의 본체를 보고 있고, 모든 감각기관이 그것을 경험의 대상으로 감각하고 있다. 이것이 신심이 어떻게 우주의식을 얻은 한 사람을 영광화하고 그로 하여금 어떻게 초월자, 곧 지극히 높은 자를 감각의 분야에서 맛볼 수 있게 하느냐 하는 방식이다. 종교의 역사는 슈카데바(Shukadeva)나 자나카(Janaka) 왕이나 또 그 밖의 개인들이 부동의 상태로 실재 속에서 주에게 진심으로 귀의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가지가지의 체험, 즉, 감각으로, 마음으로, 이성으로, 혼으로 맛보고 있는 것을 기록해주고 있다. 그러한 행복스러운 사람들을 가리켜 크리슈나는 “가장 완전히 하나됨을 얻은 자”라고 했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6장 진정한 요가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 속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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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작성자 바보새 16-01-22 01:48 조회1,6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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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진정한 요가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행위의 결과에 붙어 있음이 없이, 마땅히 하여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산야시요, 요기지, 한갓 제사의 불을 피우지 않고 제사의 의식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니라.
산야시 산야사(내버림)를 하는 사람, 출가승.
요기 요가를 닦는 사람.
이 장에서는 참으로 요가를 성취하는 방법, 다시 말한다면, 마음과 마음의 활동을 어떻게 훈련해갈 것이냐 하는 데 대하여 가르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여기서 불이라 한 것은 할 수 있는 행동의 모든 기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취하여야 할 것이다. 불은 희생을 바치려 할 때는 그것을 써가지고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물레질이 일반적으로 하는 봉사에 필요한 수단인 오늘에 있어서는 물레를 내버린다고 해서 산야시가 될 수는 없다. —간디
스승은 산야사, 즉, 내버림은 외적 행동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태도에 있다. 산야시가 되기 위해서 제사의 불과 매일의 예배의식을 내버릴 필요는 없다. 내버림의 정신없이 그런 것들을 버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샹카라는 ‘케발람’(kevalam)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서 이것을 “제사의 불을 켜지 않고 의식을 행하지 않는 사람만이 오직 산야시는 아니다” 하는 의미로 해석했으나, 그것은 문맥으로 보아 옳은 것 같지 않다. —라다크리슈난
앞장들에서 말할 때 크리슈나는 산야사와 요가의 두 길이 끝에 가서는 같은 경지에 간다 했고, 두 길의 목적도 같은 것이라 했다. 그리고는, 그렇지만 행동의 요가, 곧 카르마 요가가 산야사보다도 더 나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른 길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절에서는 크리슈나는 산야시와 요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둘을 하나로 만드는 공통 요소가 적어도 한 가지는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즉, 행동을 하는 동안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다. 크리슈나는 이것을 산야시에나 요기에나, 또는 내버림의 지경에서나 하나됨의 지경에 있어서나 표준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됨의 지경이 내버림의 지경과 같은 것이라 하면 모순인 듯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인 것이 우주적 의식 안에서 분명해진다. 이 지경에서는 마음이 신과 하나됨이, 즉 (대)자아의식이 부동의 지경에도 달한다. 그것이 곧 완전한 하나됨의 지경이다. 이 지경에서는 자아는 또 행동에서는 분리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이것이 곧 내버림의 지경이다. 하나됨과 내버림은 이렇듯이 해서 생명의 한 경지 속에 함께 있을 수 있다.
마음이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는 자아가 행동과는 떨어져 있음을 체험하는 결과로 오는 것이고, 그것은 또 2장 45절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가르쳐준 방법을 통하여 초월적인 복된 의식에 들어가는 것을 연습함으로 인해서 얻는 하나됨의 결과로 오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보고 ‘마땅히 하여야 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가 가르쳐준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행동하려고 한 것을 오해하고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 한 말이다. 만일 그러지 않다면 잘못 생각한 사람이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면서도 자기는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행동했노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르마 요가의 가르침은 사람이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고, 의식의 상태, 바탈의 상태에 기초를 둔다. 그 목적하는 것은 바탈이 마음 성질 속으로 스며들어서 거기 항구적인 상태로 설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 그러면 그것이 사상과 말과 행동의, 인간생활의 전역에 걸쳐서 항구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강요나 긴장이 없는 행동으로 초월적인 명상을 닦음에 의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성취할 수 있다.
카르마 요가도, 산야사도 그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통전(統全)된 생활 속에 서도록 하자는 데 있다. 여기서 산야시나 요기에게 독특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 집착이 없다는 것은 마음의 특별한 지경이지 바탈의 지경이지, 결코 생각의 지경이 아니다.
행동을 하는 동안 행동의 결과에 대해 집착을 아니하는 것을 기분적으로 하려 해서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한 느낌을 생각 정도에서, 혹은 기분 조성으로, 지식적으로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순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행동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 혹은 의무를 위해서 할 뿐이지, 그 결과에 대한 아무런 욕망도 없다. 내가 행동을 하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지만, 실지로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브라만이요, 행동도 브라만이요, 행동의 결과도 또한 브라만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라 해도 나 자신밖에 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아를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행동의 결과를 생각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이러한 식의 생각은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에서 말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한 무집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이요, 그가 어떤 사람이거나간에 그러한 생각 위에서 무집착의 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다만 자기를 속일 뿐이다. 그런데 몇 세기를 두고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는 바로 그런 오해 속에 내려왔다. ……바탈(性, Being)을 체험하는 것이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의 전제적 요건이다. 의식의 경지에서 말한다면 산야사와 카르마 요가는 마찬가지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그 마음을 다하는 이는 그 바탈을 알고, 그 바탈을 알면 하늘을 안다. (盡基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맹자(盡心)
 
2. 세상에서 이른바 산야사란 것이, 그것이 곧 요가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오, 판두족의 아들아, 어떤 사람도 (이기적인) 목적을 내버림이 없이 요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니라.
5장 6절에는 이와는 반대로 요기가 아니고는 산야사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을 참조하라. —마하데브 데자이
산야사, 곧 내버림은 필요한 행동을, 속으로 결과를 얻으려고 애씀이 없이, 성취하는 데 있다. 이것은 곧 참 의미의 요가다. 즉 자신을 확고하게 통제해나감이요. 완전한자지(自持)다.
이 절 말씀은 자기를 다스림(요가)은 내버림 (산야사)이나 마찬가지로 귀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라다크리슈난
‘욕망의 동기’ (본문의 ‘이기적인 목적’을 마하리쉬는 이렇게 번역한다)는 산스크리트말로 산칼파(sankalpa)를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욕망으로 싹터 나올 씨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요가를 공부하는 자에게 가장 요긴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가를 닦으려면 산칼파를 뿌리 뽑지 않으면 안된다.
크리슈나는 이미 산야사와 요가를, 그 결과에 있어서, 같은 지반 위에 세워놓았다. 내버림과 행동의 요가는 다 같이 지극한 선에 이른다. 그 어느 한쪽에 굳건히 선 사람은 양쪽의 결과를 다 얻는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 사람은 요기를 만들고 한 사람은 산야시를 만드는 한 가지 특성을 지적한다. 그는 말하기를 “아무도 욕망의 동기를 제거함이 없이 요기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요기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인데, 그러한 초월적 의식에 있어서는 욕망의 동기는 뿌리 뽑혀 있다.
그러면 문제가 일어난다. 만일 요기가 되기 전에 산칼파를 내버리지 않으면 아니되고, 또 산야시에게서도 그것이 특성이라면, 실지로 누가 능히 산야시나 요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인간생활은 가정에서 하거나 은둔처에서 하거나, 언제나 산칼파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대답은, 누구나 산칼파가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토론의 목적은 세속사람을 위해서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러한 마음 상태를 만드는 것은 뉘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면 아니된다.
마음이 산칼파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방법으로서 그 원리를 크리슈나는 2장 44절에서 아르쥬나에게 가르쳐주었고, 이제 이 장에서 더 설명한다. 명상을 하는 동안 마음이 점점 맑은 지경에 들어가는 것을 체험하여 나중에는 지극히 맑은 것도 초월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서 마음은 초월적 의식상태에 이르게 되어 완전히 산칼파의 영역 밖에 서게 된다. 이것이 요가의 지경이다. 이것이 또한 마음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자기 혼자만이 남는 산야사의 지경이다. 그와 같이 하여서, 마음을 도와서 산칼파를 초월하는 지경에 가게 하는, 초월적 명상의 방법이 곧 요기 혹은 산야시가 되는 방법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 요가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성자에게는 행함이 그 방법이니라. 요가의 경지에 이미 올라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고요히 함이 그 방법 이니라.
성자(muni) 침묵(mauna)을 지키는 성자. 혹은 은둔자. 고대 인도에서는 그런 무니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서 존경도 하고 두려워도 했다. 예를 든다면 불 속에서 혹은 단식을 하며 명상을 하고 고행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서 모든 부정(不淨)을 깨끗이 제해버리고 평등관에 도달한 사람은 자아의 실현을 용이하게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요가의 절정에 이른 사람이 세상을 지도하기 위해 일함을 업신여김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것 아니다. 그에게는 일함이 자기 콧구멍 속의 숨 같다기보다는 바로 숨쉼 그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그것을 순수한 자기 의지의 힘으로써 한다. 4절을 보라. —간디
우리가 해탈을 향해 정진할 때에는 올바른 정신과 내적 내버림으로 하는 행동이 도움이 된다. 일단 스스로 얻음의 지경에 이르면, 그때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식에 닻을 내림으로 인하여 하게 된다.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제함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자제에 도달하면 평화를 얻는다. 그렇다고 그 다음에는 모든 활동을 그친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4장 1절에는 진정한 요기는 일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성취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마(sama)는 카르마의 중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혜의 원인(karana)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해진 성자는 이미 지혜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12절에서는 말하기를 요기는 행위의 결과를 내버림에 의하여 완전한 고요에 도달한다고 했다. 그는 완전한 평등심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발적인 생기에 넘치고 있으므로 무슨 일을 하건 자기의 무진장의 역량에서 나오는 관대함을 가지고 일을 한다. —라다크리슈난
무니란 산스크리트 말을 번역하면 ‘생각하는 사람’ 이라할 수 있다. 무니는 그 성취의 길이 사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람이다. 그의 공부는 신체적 활동의 분야에 대립되는 마음의 분야에 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하여서는 마음이 어떤 경험을 보존해두려면 그에 상당한 신경계통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과 신경계통 사이의 관계로 인하여 어떤 경험이든보존이쪽에서도 자극시킬 수 있고 저쪽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다 요가(hath yoga)란 생리적 신경조직을 훈련 신경조직을을 제어함으로써 초월적인 의식의 을을 제어함자는, 그래서 결국은 우주신경조직에까보존이함자는 실현방법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 절있고에서 말하는 명상의 실습은 직을을 훈련함으로써 신경조직을 통제하고 련 신경조직을 일으켜서 종국에는 우주의식에까지 이르려는 실현의 길이다. 이 심리적인 방법이 무니의 길이다.
이 ‘무니’라는 말을 씀으로써 크리슈나는, 행동은 행동의 사람에게만 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서 가자는 사람에게도 역시 길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요가의 지경에 오르고자 한다’는 것은 그는 아직 산칼파를 빼버린 마음의 경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행함이 그 방법’이라는 것은 행동이 산칼파 없는 마음의 지경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4장 18절에 있는 것과 같은 역리적인 말이다. 거기서 크리슈나는 “행함에서 행함 없음을 본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행동을 통하여 고요를 지어내라고 하는 듯하다. 크리슈나의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크리슈나는 “행함이 그 방법이라고 한다” 했다. 이것은 요가의 길, 곧 산칼파 없는 마음의 지경을 지어내는 길에 대한 비밀의 전부를 드러내는 말이다.
행동이 요가의 지경에 오르는 길임을 말한 다음 크리슈나는, 요가의 지경에 든 후에는 고요히 함이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
‘요가의 지경에 올라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깨어 있을 때의 의식에서 초월적 의식 상태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마음이 거룩한 이와 완전히 하나된 상태다. 이러한 초월적 의식 속의 요가는 고요히 함이 늘어감에 따라 우주적 의식 속에 영구화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Being)이 마음의 성질 속에 스며들어오시게 된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요가의 지경에 든 후에는 고요히 함이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고요히 함은 우주적 의식의 요가에서 신의식의 요가로 올라가는 길이다. 우주적 의식에서 고요히 함은 자아가 행동에서 독립하는 체험을 주지만 신의식 속에서는 고요히 함이 하나님의 빛으로 변화해버린다. 그 안에서는 자아와 행동의 이원(二元)이 사라져버린다.
이 영원한 침묵의 신의식은 우주적 의식 속에서 체험했던 고요히 함이 한층 더 나아간 지경이다. 이것은 생명의 하나됨의 산 고요히 함이다. 그것이 우주적 활동의 바닥이 되는 동시에 또 하나님을 완전히 우주적 활동에서 따로 서시게 하는 기반이 된다. 우주적 의식 속에서 체험하는, 그리하여 자아를 행동에서 독립시키는 고요히 함은 무한히 작은 규모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주적 활동의 기반이 되고 하나는 개인 활동의 기반이 된다. 그 둘의 근본적 차이는 여기 있다. 즉, 우주적 의식에서는 고요히 함과 행동이 같은 수준으로 양립 되는데 신의식은 이원적 대립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와 같이 고요히 함에는 세 단계가 있다. 초월적 의식 속에서는 고요히 함 속에 어떤 행동의 흔적도 없다. 우주적 의식 속에는 자아의식이 행동과 병립하고 있다. 신의식 속에서는 그 행동과 고요히 함의 병립이 신의식의 하나됨으로 변화해버린다. 이 신의식의 고요히 함이 가장 높은 정도로 발전된 고요히 함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전능 정도에서의 존재다. 이것은 스러움(神性, godhead)의 무소부재, 무소불능, 무소부지의 고요히 함이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고요히 함’을 마하데브 데자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말은 산스크리트어 사마(sama)인데 14장 12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아사마(asama)에 대립하는 말이다. 아사마는 안식 없음(restlessness) 혹은 안정 없는 일(toil without tranquility)이다. 그러기 때문 사마는 아늘드(Mathew Arnold)의 말을 빈다면 ‘일은 하되 마음의 안정은 잃지 않는다’ (toil unsevered from tranquility)라 해야 할 것이다.” 아마 이 절 전체의 의미를 잘 표현하려면 노자의 말을 받아서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말 아닌 가르침과 함 없음의 더 함 있음”(不言之敎 無爲之有益)을 통해서 요가의 절정에 이른다고.
노자의 오천언(五千言)이나 장자의 십만언(十萬言)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도(道)는 허무, 적막, 염담(恬淡),무위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마하데브 데자이는 과연 옳게 봤다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너무 유위(有爲)에 치우친 하나님인 듯이 뵈는 때가 많으나, 또 그러기 때문에 적극주의(積極主義)의 길을 달리다가 이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에 대해 기독교가 책임의 한몫을 져야 할 것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성경을 옳게 보면 그렇지 않다고 나는 본다. 천지창조를 말하는「창세기」는 또 안식의 하나님을 말한다. 안식이 뭔가? 무위, 무언(無言) 아닌가? 창조를 상대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면 안식은 절대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안식 정신으로 하고 안식은 창조 정신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식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아는 유대인은 극성스러운 민족이 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한다” 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안절부절 못하는 동류상식(同類相食)의 최고 문명을 만들어냈다. 신약을 보면 평안, 평화란 말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가?
상대, 절대 두 차원을 하나로 사는 것이 생명이요 사람인데, 상대에서는 일함이 길이요, 절대에서는 잠잠함, 고요함, 쉼이 길이란 말 그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함으로써 쉬고 쉼으로써 일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떤 특별한 도를 닦는 심정으로가 아니라, 일상생활로 그것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천당엘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살기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한다. 요가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가 바로 요가 도장이다. 만물이 요기다. 이 병든 문명, 망할 인간에게 약이 있다면 단 한마디 “잠잠하라!”뿐이다. —함석헌
 
4. 감각의 대상과 일에 매달림이 없는 사람, 일체의 욕망의 씨를 제해버린 사람, 오직 그 사람을 가리켜 요가의 경지에 올라갔다고 하느니라.
욕망의 씨를 제해버린 사람 사르바산칼파산야시(sarva-sankalpa-sannyasi)
우리는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을 내버리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목적을 내던짐에 의하여, 이기적인 나(ego)를 극복함에 의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뜻에 온전히 항복함에 의하여 요가에 정진하는 자는 여기 영원에 방불한 지경을 성취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터득하고자 하는 그것의 분열되지 않은, 시간 없는 의식에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해방된 영혼은 욕망도 없이, 집착도 없이, 욕망이 나오는 이기적인 의지도 없이 일할 수 있다. 마누(Manu)는 말하기를 모든 욕망은 산칼파에서 나온다고 했고,「마하바라타」(Mahabharata)에서는 “오 욕망아, 나는 네 뿌리를 안다. 너는 산칼파 혹은 생각에서 나왔지. 내 너를 생각지 않으리라. 그럼 너는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다” 했다. —라다크리슈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마태복음」(16:24)
네 몸을 올바르게 하고 네 봄을 하나로 하면 하늘 고름이 장차 이를 것이요, 네 앎을 걷어잡고 네 헤아림을 하나로 하면 이 네 속에 와 계시므로 속이 장차 네 아름다움이 되고 길(道)이 네 있을 곳이 되어, 갓난 송아지처럼 네 눈이 멀뚱하여 그 까닭을 찾음이 없으리라. (若正汝形 一汝視 天和將至 攝汝知 一汝度 神將來舍 德將爲汝美 道將爲汝居 汝瞳焉如新生之犢 而無求其故) —장자(知北遊)
 
5. 자아로 자기를 높이 들게 하라. 자기로 자아를 떨어뜨리게 말지어다. 자아만이 자기의 벗이요 자아만이 자기의 대적이기 때문이니라.
 
6. 자기의 자아로 자기를 정복한 사람만은 제 자신이 자아의 벗이 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므로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는 사람은 그 자아조차도 원수가 되느니라.
자아 아트만(atman), 대아(大我).
자아가 자아의 주님이시니라. 다른 누가 주님이 될 수 있겠느냐? 자아를 잘 정복하면, 만날 수 없는 주님을 만나느니라. —「법구경」(160)
제 죄가 저를 더럽히나니 죄를 멀리하면 자신을 깨끗이 지킬 수 있느니라.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거나 제 자신에 의하여 되는 것이요,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느니라. —「법구경」(165)
비구는 모름지기 자아로 자아를 높일 것이요, 스스로 자기의 이웃이 되어야 하느니라. 그렇듯이 스스로 보호하고 스스로 가지는 자는 행복하니라. 「법구경」(379)
자아는 자아의 주요, 자아는 자아의 목적이니라. —「법구경」(380)
나는 나의 번역에서 대아인 아트만과 소아를 구별해서 썼지만 간디가 그렇게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참대로 말한다면, 아트만은 친구도 아니요 원수도 아니다. 그러나 낮은 자아가 자기를 아트만에까지 끌어올리려 하느냐, 그에게서 끌어내리려 하느냐에 따라 그를 친구로도 만들고 원수로도 만든다. 자기를 도덕적으로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소아는 대아를 “목적으로, 증인으로, 피난처로, 친구로” 바라보아야 한다. (9:18) 그러나 이 연약한 인생들에게서는 그에게 진력을 내서 오히려 원수처럼 아는 일이 많다. —마하데브 데자이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지을 뿐이다. —「코란」
성령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네 자신처럼 네게 성가시고 사나운 대적은 없다. —그리스도 모방 중의 말
 
7. 자아를 정복하고 완전한 고요함에 이른 사람은 그의 최고의 자아가 춥거나 덥거나, 즐겁거나 괴롭거나, 명예에서나 불명예에서나 변함없이 안정하니라.
 
8. 요가를 닦는 자가 만일 지혜와 지식으로 혼의 만족을 얻고, 감각을 제어함으로써 부동의 자리에 서서, 흙이나 돌이나 금을 평등으로 보면, 그를 가리켜 요가의 통일을 얻은 자라 하느니라.
 
9. 친지나 벗이나 대적 사이에서도, 무관심한 사람이나 치우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도, 미워하는 사람이나 친척 사이에서도, 또 성자나 죄인 사이에서도 평등한 이성을 갖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니라.
‘평등한 이성’, 이렇게 속으로 영원히 스스로 만족해하는 태도 때문에 그 요기의 마음은 잠잠한 가운데 머물러(安住) 있다. 이 잠잠함 위에 놓여 있으므로 그의 이성은 반드시 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하는 말의 뜻은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같은 모양으로 대한다는 말이 아니다. 요기는 각양 각색의 인륜관계의 차이가 있는 것을 몰라서 그것을 혼동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복잡한 인륜관계 속에서도 그의 이해는 생명의 평등 관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결코 흔들리는 일이 없다. 그는 변함없이 머무른(止)다.
앞절에서는 밖의 대상을 평정한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을, 그가 그 자리에 오는 것을 삼캬로 했거나 카르마로 했거나간에 요가를 통한 사람이라 했다. 지금 이 절에서는 ‘뛰어난’ 요기의 표준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지가지의 명상을 말한 다음크리슈나는 이어서 다음 절에서 그 자세한 방법을 설명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0. 요가를 닦는 사람은 은밀한 곳에 홀로 남아있어, 몸과 마음을 억제하고, 모든 욕망과 가진 것을 버리고, 늘 정신 모으기를 힘써야 하느니라.
10절에서 16절까지의 문맥 안에서 ‘요기’라 할 때는 대개 요가 정진자 즉 요가를 닦기 시작한 사람을 뜻한다. 요가라 할 때는 마음과 이성과 기(氣)를 모아서 신체의 모든 기관을 ‘아트만’에다 통일하려고, 즉, 자아를 자아(大我)에 통일하려고 함을 말하는 것이다. 10절에서 14절에 이르는 부분에 관하여는「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Svetashvatara Upanisad)를 참조하라. 거기 자세와 처소와 그 밖에 여러 가지 조건에 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한 것이 있다. 그외의 부분은「기타」그 자체가 요가에 대하여서 하는 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여기서 스승은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Patanjai's yoga sutra)의 계통에 따라 정신통일 하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그 목적은 우리 의식을 평상시의 깨어 있는 상태의 것에서 보다 높은 의식으로 이끌어서 지극히 높으신 이와 하나됨에 이르게 하자는 데 있다. 인간의 마음은 보통 외계를 향하는 법이다. 생활의 기계적 물질적 면에만 몰두하면 의식의 균형을 잃은 상태에 빠진다. 요가는 의식 속의 경계를 개발하여서 의식과 잠재의식을 통전(統全)하려 하는 노력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감성적인 욕망을 제거해버리고, 주의를 바깥 것에서 끌어들여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18장 72절을 보라. 거기서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보고 마음을 한 점에다 모으고(ekagrenacetasa) 자기 가르침을 듣고 있느냐고 묻는다. 목적이 맑은 속봄(vision)에 이르는 데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마음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밀하게 확고부동하게 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현시의 차원이 우리 존재의 구경의 지경은 아니다. 마음의 전력을 모아 그것을 한 점에 집중시킴에 의하여 우리 교섭을 경험적인 것에서 참된 것으로, 겉봄에서 속봄으로 올려서, 정신이 우리의 전존재를 차지하게 한다. 구약「잠언」에는 “사람의 영혼은 주의 촛불”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생명의 가장 깊은 속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불이 켜질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늘’ (satatam)에 대해서 살펴보면, 훈련은 ‘늘’ 하지 않으면 안된다. 명상을 했다가 말았다가 해서는 소용이 없다. 보다 높고 보다 강한 의식을 발달시키려면 계속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은밀한 곳’ (rahasi)이란 한적한 곳, 고요한 곳으로서 정진자는 이런 곳을 골라야 한다. 강가 언덕, 혹은 산꼭대기 같은, 심신을 상쾌히 하고 안정시켜주는 자연 환경 속이다. 날마다 소란을 더해가는 이 세상에서 문명한 사람이 할 의무는 생각하는 고요한 시간을 가지는 일이다.「마태복음」6장 6절의 “너는, 기도하려 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라. 우리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서 외계의 혼란을 피해야 한다. 오리겐(Origen)이 첫째 은둔자들에 관해 기록한 말을 참고하라. “그들은 거친 들에 산다. 거기는 공기가 더 맑고, 하늘이 더 활짝 열리고, 하나님이 더 친숙혜지는 곳”이라고 했다.
‘홀로’(ekati)란 구도자에게 스승이 강조하는 점이다. 부드러운 압력을 느끼기 위해서, 고요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
‘자기를 억제’ (yatacittatma)한다는 것은 흥분이 되어도 긴장해도 걱정을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고요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제자숙하는 생활함을 의미한다. 아트마는 데하(deha) 곧 몸의 뜻으로 썼다. (샹카라에 의하면) 골방에 들어가는데 신문과 사무 문서를 가지고 들어가서는 의미가 없다. 비록 그것들을 방 밖에 놓고 문과 창을 닫았다 하더라도, 걱정이나 열심 때문에 고요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안절부절못하거나 떠들썩해서는 못쓴다. 생각을 통해 지성에 호소하고, 침묵을 통해서 생명의 심층부에 접촉해본다. 마음이 정결한 자만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비치게 하려면 심정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저 깊은 고요에까지 정신을 집중해 가라앉혀 빛을 우러러야 한다.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너희 아버지와 교통하라.” 하나님이 와 계심은 받는 사람의 역량과 필요에 따라 침묵 속에 나타나신다. (워즈워즈는 “시는 정적 속에 괴는 정서에서 솟아난다” 했고, 릴케는「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이것밖에는 다른 어떤 조언도 할 것이 없다. 너 자신 속에서 물러가, 그리하여 네 생명이 솟아오르는 그 바닥을 샅샅이 뒤져보아라.”)
플라톤의「메논」(Menon)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묻노니, 소크라테스여, 덕(德)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답하기를 “덕은 가르쳐줄 수 없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게 할 수는 있다. 돌이켜 생각함은 제 자신을 다시 한데 모으는 일이다”고 했다. 즉, 제 혼 속으로 물러감이다. 이 돌이켜 생각함의 교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 자신 속에 물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그 자신의 중심이요 그 자신 속에 진리를 가진다.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하자는 의지와 인내를, 끝까지 추궁하는 인내를 가지는 일이다. 선생의 할 일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배우는 자가 자기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이다. 묻는 자는 참 대답을 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진리를 제 속에 가지게 되는데, 객관세계에 얽매이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린다. 우리 자신을 객관세계와 하나로 봄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천성에서 쫓겨남 혹은 소외를 당하게 된다. 외계에 정신이 빠져서 우리는 깊음을 내 버린다. 물질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객관을 초월함에 의하여 우리는 자유의 영역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욕망을 버리고’ (nirasi)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필요, 즉 돈을 벌고 쓰는 것으로 걱정하는 것은 명상을 방해하여 정신생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욕망이나 걱정, 탐욕과 두려움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구도자는 자신을 이러한 심리적 속박에서 떼어 모든 미혹, 편견을 떠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모든, 마음으로 무엇을 좋아하는 것, 생존적인 목적, 가족과 벗에 대한 애착으로 연연한 생각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을 기대해서도 아니되고 무엇을 고집해서도 아니된다.
‘가진 것을 버리고’ (aparigrahah), 이것은 정신의 지경이지 물질적 조건이 아니다. 소유물에 대한 탐욕을 억제해야 하고, 붙어 있는 것들의 포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자랑이나 고집이나 소유의 감정의 지배를 면하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기타」는 진정한 행복은 내적인 데 있음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생활양식, 인간적인 의식상태에 주의하라고 일러준다. 그런 것은 다 생활의 외적 구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죽고 세계는 지나갈 수 있지만, 정신적인 생명은 영원히 있다. 있다가 없어질 세상 재물이 보배가 아니요, 영원히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보배다.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여기서 요가를 닦는 사람이라 한 것은 요가를 성취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미 성취한 사람은 훈련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훈련을 계속할 필요를 말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아직 정진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요기란 말은 이미 하나됨의 지경을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요기란 말을 바로 해석하려면 그것은 이미 대아(大我)의식에 들어간 사람, 즉 사마디(samadhi)에 도달한 사람, 그러면서도 아직 우주적 의식, 즉 니챠사 마디(nity samadhi) 혹은 지반묵티(jivan-mukti)에는 도달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그러한 요기는 더 열심으로 훈련을 계속하여 그 대아의식이 영속적이고도 확고부동한 자리에 가서, 마음이 상대적인 경험 자경역에 나아가 있는 때에도 본체의 지경에서 떠남이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의식의 지경이다. 즉 성취된 요기의 상태다. 우주적 의식에 이르려면 요기는 고요한 곳에서 명상을 한 후에는 활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절에서 크리슈나는 요기가 명상할 때에는 아래와 같은 조건 아래 할 것을 강조한다.
① 조용한 곳에 머물러 있을 것.
② 홀로 있을 것.
③ 몸과 마음을 억제할 것.
④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 것.
⑤ 아무것도 가지지 말 것.
‘조용한 것’이 절대 필요하다. 마음이 직접 초월적인 복된 의식에 들어가는 길인 초월적 명상이란 것은 아주 오묘한 것이다. 그것은 방해를 받음이 없이 저 하는 대로 두어야하는 것이다. 만일 명상의 장소가 조용치 못하면 방해를 받기가 쉽다. 명상하는 동안은 마음이 사색과정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있는데, 그때에 방해를 받아 갑자기 감각적 인식의 조잡한 세계에 돌아오게 되면, 인식의 오묘와 조잡의 심한 대조를 경험하게 된다. 그 갑작스런 대조는 마음의 안정을 해하여서 신경조직을 망가뜨릴 우려가 있다.
만일 명상을 홀로 하지 않는다면, 누가 옆에 있다, 혹은 지켜보고 있다 하는 감정이 초월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그러면 복스러운 의식에 들어가는 길이 더디게 되고, 마음에 지나친 긴장을 주어 거기 따라 신경계통에 긴장이 온다.
‘몸과 마음의 억제’에서 억제라는 말에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마음은 행복의 체험으로 억제가 되는 것이다. 명상 동안 마음은 계속 사색의 오묘한 지경을 경험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점입가경식으로 올라간다. 이러한 점점 더해가는 행복감이 명상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 주는 것이다. 마음이 이런 모양으로 정복되면 마음의 상태에 따라 신경조직도 흔들림이 없이 가만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이 어떻게 가장 자연스럽게 억제되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련자가 자기 몸과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 부단히 힘을 써야 하는 것으로 알아서는 오해다.
정진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 자신을 모으고 고요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을 때 크리슈나는 또 동시에 무엇을 기대해서는 아니된다고 경고했다. 이 자기를 모으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장차 올 단계 혹은, 어떤 특정한 체험을 기대해서는 아니된다. 조금이라도 목적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어서도 아니된다. 이 말은 2장 47절에서 “너는 네 행동만을 통제할 것이지, 그 결과를 통제하려 하지 말라” 한 말의 뜻을 잘 밝혀준다.
기대를 해서는 아니된다는 경고는 매우 긴요한 말이다. 명상에서 마음이 사색과정의 가장 오묘한 지경을 경험하고 있을 때 그것은 계속 높아 가는 황홀의 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거나 하려는 경향이 생기면 그만 그 길에서 떠나게 된다. 마음은 그 본성이 그러한 점점 높아가는 행복감의 과정에서 떠나 긴장상태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기대’는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몸까지도 따라서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기대하지 말라는 규칙을 여기 내세운 것이다.
‘가진 것을 버리라’고 함은, 명상은 마음을 소유의식에서 본체의식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소유편에서 본다면 무소유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자아가 저 혼자만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환경과 몸을 잊어버림에 따라 수도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가졌다는 의식, 곧 소유의식까지 잊게 한다. 크리슈나가 무소유가 되라고 한 것은, 명상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는 물건이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보다 더 큰 행복의 경지로 가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또 동시에 그 과정은 사람을 모든 것이 저절로 떨어져나가는 자리에 가져다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 가르침에는 명상을 할 때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라는 뜻도 있다. 외계에 대한의식을 잃음에 따라, 명상자는 그 없어지는 것을 슬퍼할 것이 없게 된다. 명상을 시작할 때 요기는 무엇에나 매달리려 해서는 아니된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는 본체로 가서 자신을 깨고 세상으로부터는 잃어져야 한다. 그 결과 그는 세계의 소유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가짐 없이 하라”는 말은 본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크리슈나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했을 때 그 말은 아르쥬나에게 명상을 하는 동안 실지로 어떤 것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이다. 명상을 하려고 왔을 때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욕망하지도 않으려 하며 아무것도 가지기를 바라지 않으려 한다면 잘못이다. 그러려고 하는 동안 마음은 그것을 잊기 위해 다른 것을 또 가질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잊으려고 하는 일이 잊고자 하는 물건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명상의 과정은 조잡한 물체를 잊어버림을 기초로 하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오묘한 체험의 세계에 대해 힘쓰는 것을 기초로 하여 되기 때문이다. 잊자는 노력은 미워함과 저주함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명상 동안 사색의 오묘한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되는 체험은 보다 큰 행복의 길로 가려는, 즉 하나님 실현의 길로 가려는 마음의 천성인, 즐거이 하는 받아들임의 기초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인생 일생의 생활양식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아니된다. 요기가 되기 위해 실제 인생에서 물러나 있는 승려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요기를 언제나 사회에서 떠나, 혼자서, 무엇을 위해 향상하려 하는 노력을 쏟는 일도 없고 소유하는 일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만일 명상할 때의 시간과 명상에서 나와서 쓰는 시간의 구별을 할 줄 모른다면 이 절과 이 다음에 오는 절은 오해되고 말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1. 깨끗한 곳에 자기를 위하여 자리를 꽉 잡으라. 너무 높지도 않게, 너무 낮지도 않게. 그 위에 거룩한 풀, 사슴가죽, 그리고 옷을 겹쳐 깔라.
거룩한 풀 쿠샤 풀(kusha grass)
 
12. 그 자리에 올라 앉아,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고, 사념과 감각을 제어하여, 자기 혼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요가를 닦을 지어다.
장소나 자리에 대해 주의할 요점은 장시간 동안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방해를 받음이 없이, 그리고 사람의 몸이 피로해짐이 없이 견디어갈 수 있도록 하며, 마음의 활동이 깊은 정신적 체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순조롭게 되어가도록 하자는 데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淸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런 지경에 가려면 많은 훈련을 쌓은 후에야 되는 것이고, 처음에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육신 속에 있는 것이므로, 생리적인 법칙을 무시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침착한 마음으로 지킬 것을 지켜가며, 불급불완(不急不緩)의 겸손한 태도로, 단계적으로, 제 분에 맞는 대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특히 기독교 개신교 사람들이 주의할 것은 개신교에서는 신앙을 강조하는 나머지 개인 자질에 생리적 심리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생각 않고, 아직도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제멋대로 열심을 내어 구하기만 하면 된다 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많다. 초심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체험 있는 이의 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을 보면 주의 깊게 그 사람과 경우를 생각하여서 지도하신 것을 알 수 있고, 바울도 처음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나 일단 폐단이 생긴 후는 그것을 바로 지도하기 위해 애쓴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에라고 결코 법칙도, 원리도, 순서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아직 샤머니즘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데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이 점도 확실히 그 하나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함석헌
12절에서 요가라 한 것은 자나 요가(dhyana yoga) 즉, 명상을 말한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실제적인 이해관계에서 놓여나지 않고는 아니된다. 그런데 실제적 이해란 우리 사는 외계의 물질적인 세계와 서로 얽혀 있다. 그 주된 조건은 잘 수양된 가라앉은 마음이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될수록 자유롭게 비틀리지 않은 지성으로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을 국외에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왜 자기 자신을 철학자라 부르느냐 하는 질문을 당했을 째,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다. 그는 인생을 올림피아 같은 큰 축제에 모인 가지각색의 군중에다 비했다. 어떤 사람들은 저자에서 장사를 하러 가 재미를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경기에 나가 상을 타려고 가고,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단지 그런 것을 보려고 가는데, 이 나중사람이 철학자라고 했다. 그들은 직접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필요에 버물려들지 않는다. 샹카라는 지혜를 탐구하는 자의 가장 근본적인 자격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못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과, 현세적 내세적 행동의 결과를 누리자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음과, 자제와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모든 지식의 목적은 선(善), 즉, 삶과 앎에 다 같이 근원이 되는 선의 관념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를 높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상적인 철학자란, 인생을 힘껏 다 살고 난 끝에 가서, 그의 목적이 언제나 고요하고, 안으로 향해 잠잠하고 고적하며 떠나 있는 살림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살림 속에서는, 세상이 그를 잊음으로 인해, 그는 세상을 잊고 자기의 하늘을 선에 대한 외로운 명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그것만이 참 살림이다. “마음이 정결한 이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 혼의 정화는 훈련에 의해서야만 얻어진다. 플로티노스는 “지혜는 안정 속에 있는 심성의 한 상태라” 했다. —라다크리슈난
크리슈나가 밝히고자 하는 것의 첫째는 명상은 반드시 앉은 자세로 할 것이지, 눕거나 서서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누우면 정신이 둔해지고, 서면 마음이 자아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을 때 쓰러질 염려가 있다. 명상을 시작하려면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마음이 둔해져도 못쓰고 너무 활발해도 못쓴다. 둔하면 잠이 와서 체험할 능력이 없어지고, 너무 활발하면 이 조잡한 의식 속에 남아 있어서, 말하자면 오묘한 체험 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셈이 된다. 마치 수면에서 활발하게 동작하면 물속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다. 명상한다는 것은 마음이 자아의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일인데, 만일 섰을 때와 같이 마음이 너무 활발히 작용하면 그 빠져드는 과정이 시작되지 못한다. 그래서 명상은 앉아서 하라고 한 것이다.
‘한 점에 집중하고’에서 한 점에 집중하려면 마음이 점점 더 오묘한지경에 들어가는 대로 두어두어야만 잘 된다.
‘사념과 감각을 제어’해야 함은 모든 경험은 마음과 대상이 감각을 통하여 접촉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명상을 할 때는 마음이 감각의 오묘한 지경과 접촉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가장 오묘한 지경에 이르고 마침내는 대상을 초월하는 지경에 들어 본성(本性, Being)의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마음과 감각의 활동이 점차적으로 정복된다.
‘혼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절대의식의 지경에서 마음이 온가지 상대적 규제에서 벗어나 가장 맑은 지경에 이름을 말한다. 그것이 요가의 경지다. 크리슈나가 “네 혼의 정화를 위하여 요가를 닦으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의미는 이 경지에 이름으로 인하여서 몸과 마음과 혼이 다 정결해짐을 얻는다는 뜻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3. 몸과 머리와 목을 꼿꼿이 일직선으로 가져 움직이지 말고 눈으로 코끝만을 들여다보며, 사방으로 눈을 팔지 말라.
몸과 머리와 목을 곳곳이 일직선으로 하여 등뼈를 바로 하면 호흡의 길이 빨라져서, 들숨 날숨이 다 편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 듬을 가만히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몸을 가만히 가지고 있기를 가르친 다음, 감각을 가만히 가지고 있기를 가르친다. 감관 중에 가장 심히 활동하는 것이 눈이다. 그러므로 눈이 가만있으면 다른 것도 자연 가만있게 된다. 눈은, 모든 감관이 다 그렇듯 마음으로 인해 움직인다. 마음의 활동은 숨과 관계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과 감관과 숨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코끝에 주의를 모으라고 한다. 그 코끝은 시선과 숨이 만나는 곳이다. 그렇게 하는 결과로 마음과 감관과 호흡의 활동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고, 그러므로 모든 비정상적인 작용이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한 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감각을 조용하게 만들고 숨을 고르게 한다.
‘들여다보라’는 것은 거기를 향했다가 쉬었다가 하라는 말이지 줄곧 거기만 주시하란 말은 아니다.
‘사방으로 눈을 괄지 말라’는 것은 첫째는 여기 봤다 저기 봤다 하지 말라는 뜻, 둘째는 꼭 코끝만을 뚫어지게 보지 말라는 뜻, 셋째는 눈을 감으라는 뜻이다.
이 가르침에서 가장 오해되는 점이 코끝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샴카라 는 말하기를 만일 코끝만을 보라는 말이 거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마음은 거기에 가 있고 하나님께는 가 있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몸의 자세에 관해 말하는 것은 몸, 마음, 숨, 어디거나 긴장시키라는 뜻이 아니다. 이 절의 말들은 마음이 바탈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 방법들을 통해 주의를 잡다한 외계에서 돌려, 외계를 경험하는 이 범역에 있으면서도 고요하고 잠잠한 지경에 돌리라는 말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4. 바탈의 고요 속에 두려움을 버리고, 브라마차랴의 맹세에 굳게 서서, 마음을 정복하고, 생각을 내게 맡기고, 정신을 통일하고 앉아 나만을 지상으로 전념하라.
‘바탈의 고요’란 마음이 감각적인 경험의 분야에서 아트만의 지경으로 옮겨졌으므로 외계의 장애가 없어져 한없는 평화의 지경에 들어간 상태를 말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브라마차랴의 맹세’란 요가를 닦는 자는 성욕을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힌두교는 처음부터 브라마차랴를 주장해왔다.「챤도가 우파니샤드」에는 브라마가 인드라신에게 101년 동안의 브라마차랴를 지키게 한 이후에야 실재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브라마차랴는 성교를 어떤 조건이나 어떤 곳이나 어떤 때에도 생각으로도 말로도 행동으로도 아니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들은 브라마차랴와 참회로써 죽음을 극복 했다고 한다.
자기 사랑하는 여자 하나를 얻기 위하여 이상도, 최고의 비전도,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어떤 것도 다 내버리지 않을 사람이 천에 하나인들 있을까? 현대인 중에는 동정(童貞) 생활은 우둔한 동시에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는 힌두교가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하나의 기괴하고 과장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브라마차랴라 할 때는 금욕적으로 독신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절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힌두 전통으로는 가정을 가진 사람이 성 생활을 조절해가면 그것도 성 생활을 전연 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브라마차랴로 알아준다. ᅳ라다크리슈난
동정의 맹세를 세운 사람의 모든 정력은 위를 향하고 있어서 몸, 마음, 감각의 모든 흐름이 진화의 보다 높은 층을 향해 흐르고 있으므로 그 정력이 아래로 흐를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맹세를 하는 그 행동이 아니고, 정력을 위로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로만 튼튼한 마음을 가지고 쓰는 그 일에 있다.
‘생각을 내게 맡기고’란 나를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라 생각하는 권(權)을 내(만유의 주)게 넘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생각하기를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생각하기를 무집착의 태도로써 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명상을 하는 동안 명상자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 넘겨드린다는 기분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다 넘겨드린 것으로 알고, 벌써 내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온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5. 그처럼 자기 마음을 정복하여 요가를 닦는 자는 언제나 자아를 통일하여 내 안에 항상 있는 지상 니르바나의 평화에 도달하느니라.
니르바나(nirvana) 해탈, 열반.
 
16. 그러나 아르쥬나야, 요가는 지나치게 먹는 자도 이것을 얻지 못하고 지나치게 먹지 않는 자도 얻지 못하며, 지나치게 자는 자도 이것을 얻지 못하고 지나치게 깨어 있는 자도 얻지 못하느니라.
먹는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대상으로 감각을 먹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때 감각에다 그 대상을 너무 많이 주어 길러주어도 아니되고, 또 전연 주지 않아도 아니된다.
‘잔다’는 것은 감각이 활발치 않은 것을 말하고 ‘깨어있다’는 것은 반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감각이 너무 자고 있어도, 너무 깨어 있어 도, 자고 깸보다 높은 지경에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요가에서는 자고 깨는 지경을 초월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도의 행해지지 않음을 내 알겠도다. 아는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믿지 못하는구나. 도의 밝아지지 못함을 내 알겠도다. 어진 이는 지나치고 불초한 자는 믿지 못하는구나. —「중용」
 
17. 그 음식 섭취와 쉼을 알맞추 하고, 그 활동에서 힘쓰기를 알맞추 하며, 그 자고 깸을 알맞추 하는 사람에게는 요가는 고통을 꺼버리는 힘이 되느니라.
 
18.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아에만 안주하며, 쾌락을 바라는 일체의 욕망에서 벗어나면, 그때에 비로소 정신통일을 이룬 자라 하느니라.
진리를 보는 데는 작은 나를 완전히 말살해버리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진리를 알려면 개성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모든 편견과 성벽을 다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절들에서 스승은 구도자가 어떠한 과정을 밟아서 궁극의 자아를 체험하는 데 이를 수 있는지 그것을 보여준다. 외적 또 내적 세계의 평상시의 경험에 있어서는 우리의 참 자아는 몸과 연합하여 있기 때문에 언제나 현상계의 복잡한 모습에 가리워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혼속에서 모든 특수한 작용을 내쫓아버리고, 마음의 모든 상(相), 모든 특수한 표현, 모든 서로 다른 작용을 제해버려야만 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절차다. 의식 속에서 모든 상을 내쫓아버려서 나중에는 정결, 단순한 텅 빔만 남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승은 그 부정적인 절차를 취하는 목적인 순수한 자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 복스러운 전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임을 설명해준다. 그러한 외양 보기에는 부정뿐인, 그러나 그러면서도 아주 발랄한 신비로운 명상을 통해서, 침묵은 완전한 지경에 이르고 빔은 극점에 달하여 마침내 혼의 능력의 긴장상태를 가져온다. 이것은 모든 지식을 초월한 체험이다. 왜냐하면 참 자아는 관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또는 마음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주관적인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것은 초월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때 마음은 물결 하나 일지 않는 무한하고 잠잠하고 순수한 의식의 바다가 된다. 그것은 또 우주의식이라 할 수도 있다. 거기서는 사상과 체험의 물결이 아무리 일어도 그 때문에 바다의 고요가 어지러워지는 일이 없다. 그러면 이런 반대를 할 수 있다. 마음이란 그 본성이 어떤 경험의 대상 속에서나 완전히 안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증거로는 2장 67절에서 이러지 않았는가? 사람의 이성이 감각으로 움직여지는 것은 마치 배가 바다 위를 부는 바람으로 움직여지는 것과 같다고. 그러고 보면, 감각의 힘으로 끌려가는 마음은 감각이 대상과 접촉할 때에 완전히 안정함을 얻어, 거기서 오는 쾌락을 누릴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런 반대로 인한 오해의 여지를 없이하기 위해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아에만 안주하며라고.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초월적인 의식의 단계에서와 우주의식의 단계에서다. 초월적 단계에서는 자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아의 성질은 순수한 의식이다. 우주적인 지식, 우주적인 존재, 우주적인 생활, 영원한 실재, 절대의 복이다. 그것은 초월적이요, 언제나 불변이요, 불멸이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보다도 더 작은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다. 자아란 말은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생명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 지경에 들면 개성을 잃어버리고 순수한 실재로서의 참된 본성을 가지게 된다.
우주적인 의식단계에서 ‘자아에만 안주’한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행 동 속에서나 즉, 상시, 꿈 속, 잠 속에서 활동을 하거나 쉬거나, 자아는 행동과는 완전히 독립한 것임을 깨달아, 자아 속에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을 가진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9.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은 펄럭거림이 없나니, 생각을 정복하고 자아의 통일을 닦고 있는 수도자를 비하여 말한다면 그와도 같으니라.
어떤 객관적 경험도 마음이 감각을 통하여 그대상과 연결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어떤 생각에 대해 명상을 할 때 그 생각에 대한 조잡 또는 오묘한 경험은 마음이 말의 감각과 접촉하는 데 달려있다.
명상하는 동안 경험의 대상은 점점 줄어드는 상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의 가장 오묘한 상태가 초월될 때, 그때 마음은 이때껏 그것을 통해서 경험하던 대상과 감각을 벗어나게 된다. 마음이 감각과대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때까지는 마치 바람에 펄럭이는 등불과 같다. 그러나 그 영향을 한번 벗어나게 될 때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같이 부동하는 것이 돼버린다.
마음이 대상과 연결되는 한은, 그것은 아직 경험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경험의 대상이 줄어들다가 나중 아주 없어지는 지경에 이를 때, 마음은 경험하는 마음이기를 그만둔다. 의식하는 마음이 의식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변화의 과정 동안에 그것은 우선 첫째로 개성의 가장순수한 상태를 얻게 된다. 이 절의 말이 마음의 부동을 말하지 않고, ‘생각’의 부동을 말하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다. 거기에 쓰인 산스크리트 말은 ‘칫타’ (chitta)다.
그것은 고요하고 잠잠한 인상의 집합이라 할까, 혹은 욕망의 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