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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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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작성자 바보새 16-01-29 01:37 조회1,1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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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일체상(一切相)
 
 
 
 
앞장에서 거룩하신 주께서 자기의 나타나 뵘을 말씀하시자, 아르쥬나는 그 일체상(一切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장에는 아르쥬나의 요구에 따라 크리슈나가 자기의 우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황홀한 지경이어서 이것을「기타」의 절정이라고 하고, 다른「기타」를 쓴 사람들이 다 이것을 베껴 썼다. ―틸라크
일체상 비슈바루파(vishvarupa), 비슈바(vishva)는 모든 방향으로, 루파(rupa)는 모습, 상(相).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저에 대한 특별하신 은총으로 가장 높은 신비의 영적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미혹은 벗겨졌습니다.
미혹 모호(moho).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저 스스로 존재한다는 생각,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고 움직인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라다크리슈난
 
2. 연꽃 같은 눈을 가지신이여, 모든 것의 나고 사라짐을 당신께로부터 자세히 풀었습니다. 또한 당신의 다함이 없으신 대아(大我)의 영광도 들었습니다.
 
3. 오, 지극히 높으신 주여, 당신은 스스로 그렇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이십니다. (그러나) 오, 지극히 존귀하신 이여, 저는 당신의 거룩하신 그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4. 오, 주시여, 만일 저로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거든, 오, 요게슈바라시여, 당신의 불멸의 몸을 제게 보여주시옵소서.
요게슈바라(Yogeshvara) 요가의 주.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한복음」
삶 있음은 삶 없음에서, 달라짐 있음은 달라짐 없음에서, 나지 않는 것이 나게 할 수 있고, 달라지지 않는 것이 달라짐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나는 것은 나지 않을 수 없고 달라지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늘 나고 늘 달라진다. 늘 나고 늘 달라지는 것은 나지 않는 때가 없고 달라지지 않는 때 없다.(有生不生 有化不化 不生者能生生 不化者能化化生 者不能不生 化者不能不化 故常生常化 常生常化者 無時不生 無時不化) ―열자
이름 없어 하늘 땅의 비롯, 이름 있어 모든 것의 어미, 그러므로 늘 하고자 함 없어서 그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늘 하고자 함 있어서 그 끄트머리를 본다. 이 둘은 한가지로 나와서 이름이 다르니, 한가지로 일러 깜, 깜 중 또 깜이 모든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의 문이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맨첨에 없음이 있어, 있음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하나가 일어나는 데여서, 하나가 있을 뿐, 꼴이 없다. 모든 것이 그것을 얻어 사니 일러서 큼이라 한다. (泰初有無 無有無名 一之所起 有一而未形 物得而生 謂之德) ―장자
‘연꽃잎 같은 눈을 가진 이’ (kamala-patraksha) 연꽃 이파리 같은 까맣고, 보드랍고, 큰 눈을 가진 크리슈나를 가리킨다. ᅳ마하데브 데자이
모든 것 속에 영원의 영이 들어 계시는 줄을 아는 것과 그 모습을 보는 것과는 같은 일이 아니다. 아르쥬나는 그 뵈지 않는 영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꼴, 그 일체상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이는 모든 산 것의 근본이요 또 무너짐이다. 추상적인 형이상의 진리가 볼 수 있는 실체로 되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는 1절에서 영적 지식(ashyatma)이라는 말로 나타나는 최고 주재자(Parameshvara)의 불멸, 불가사의한 모습을 알게 됐다. 그것은 크리슈나가 7장, 8장에서 말한 것이다. 또 그외에 7장에서 즈나나, 비즈나나를 말한 다음 9장, 10장에서 말한 가지가지의 인식할 수 있는 모습에 관해서도 알게 됐다. 2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근원과 종말”이라는 말은 인식할 수 있는 허다한 것들이 어떻게 홀로 하나인, 인식할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주석자들은 3절의 아래 위 두 부분을 서로 딴 문장으로 보고 아래와 같이 읽는다. “오, 지극히 높으신 주시여, 당신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오, 지극히 존귀하신 이시여, 저는 당신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두 부분은 한 문장으로 합해 보는 것이 옳다.「파라마르 다프라파」(Paramarthaprapa) 주석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4절에 나오는 ‘요게슈바라’란 말은 요가의 주라는 말이지, 요기(요가 닦는 사람)의 주란 말이 아니다. ‘요가’라는 말을 인식할 수 없는 것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해내는 힘 혹은 방법의 뜻으로 해석하는 예는 전에도 있었다(7:25, 9:5). 크리슈나는 지금 자기의 우주적인 모습을 그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보여주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요게슈바라’라는 명칭은 고의로 사용한 것이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프리다의 아들아, 볼지어다. 내 모습은 백 가지 천 가지 종류요 거룩하고, 여러 빛깔이요 모양이니라.
하나님의 경악케 하는 자기 나타냄의 능력이 우주의 변화와 궁극의 참 의미를 이해한 아르쥬나의 앞에 나타났다.「마하바라타」6장 131에는 크리슈나가 두료다나에게 다가갔을 때 두료다나가 그를 포로로 잡으려 하자 크리슈나는 자기의 세계적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 환상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고 영적 체험이다. 종교적 체험의 기록 안에는 그러한 환상이 수두룩하다. 예수의 변모, 사울의 다마스커스 도상의 환상, 콘스탄틴의 “이 표적을 가지고 정복하라”는 표어가 붙은 십자가, 잔다르크의 환상 같은 것은 다 아르쥬나의 것과 비슷한 것들이다.
성 힐데가드(Saint Hildegard)는 환상 속에 뚜렷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가 자기를 누구라고 했다는 것이 흡사히「기타」에 있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다. “나는 모든 생명의 불꽃을 불어 보내는 그 지극히 높고도 두려운 힘이다. 죽음은 내 안에 그림자도 없지만, 나는 그것을 여기 저기 보낸다. 그러므로 나는 지혜를 날개처럼 몸에 두르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들 속에 빛나는 그 거룩한 본체의 살아 있는 무서운 본질이다. 나는 물 속에서 반짝이고, 해와 달과 별 속에서 불탄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의 신비로운 힘도 내 것이다. 나는 모든 산것들의 숨을 붙들어주며, 숲 속에도 불고 꽃 속에도 불며, 물들이 산것처럼 흘러갈 때 그것도 나다. 온 땅을 버티는 기둥을 내가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사는 것은 나 때문이요, 나는 그 속에 있고 그 생명이다. 나는 지혜요, 우뢰같이 몰아치는 말씀의 바람으로 내가 만물을 지었다. 나는 모든 것을 꿰뚫어 그들을 죽지 않게 한다. 나는 생명이다.” ―라다크리슈난
 
6. 볼지어다, 바라타족의 아들아, 아디차들을, 바수들을, 루드라들을, 저 두 아슈빈들을, 그리고 마루트들을, 일찍이 보지 못한 여러 기이한 것들을.
아디챠들(Adityas) 열 두 태양신들.
바수들(Vasus) 여덟 세천(世天)들.
루드라들(Rudras) 열 한 황신(荒神)들.
아슈빈들(Ashvins) 두 구생신(俱生神).
마루트들(Maruts) 마흔 여넓의 풍신(風神)들.
 
7. 볼지어다, 구다케샤야, 오늘 이 내 몸 안에 움직이는 또 움직이지 않는 온 우주가 온전히 하나 되어 있느니라. 또 네가 보기 원하는 그 밖의 어떤 것도.
 
8. 그러나 너는 네 그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느니라. 내 네게 하늘눈을 주리니 그것으로 내 신비의 능력을 보라.
어떤 육신의 눈도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인간의 눈은 그런 빛을 뛰어넘은 것을 보게는 되어 있지 않다. 디뱌차크수스(divya-caksus)는 하늘눈(天眼)이고 맘사차크수스(mamsa-caksus)는 육안이다.
인간의 눈은 외양을 볼 뿐이고, 속의 혼은 영적 눈에 의하여서만 알 수 있다. 지식에는 우리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즉 감각의 전달과 지능의 활동에 의하여 되는 지식과, 우리가 은총의 영향을 받아서 되는, 즉 영적 실재의 한 직접적인 지식이 있다. 신의 환상은 신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전체가 하나님의 신성 속에 있는 우주적인 다양성의 통일을 말하기 위해서 하는 시적인 이야기로 된다.
환상이란 하나의 정신적 구성이 아니라 유일한 마음의 저쪽에서 하는 진리의 열어 밝힘이다. 체험의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것이 여기서 드러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산자야 말하기를
 
9. 임금이시여, 이렇듯 말씀하시면서 위대하신 요가의 주, 하리께서는 프리다의 아들에게 지극히 높으신 이슈바라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산자야 1장에 나오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에게 전장의 모양을 설명하는 마부.
하리(Hari) 지극히 높으신 신, 크리슈나를 가리키는 칭호.
이슈바라 자재주(自在主).
 
10. 가지가지의 입과 눈을 가지고, 가지가지의 놀라운 다르샨을 가지고, 여러 가지 거룩한 장식을 하고, 여러 가지 거룩한 무기를 높이 들고,
다르샨(darshan) 바라봄, 목격(sight).
 
11.하늘 꽃줄 하늘 옷을 늘이시고, 하늘 향을 바르시며, 모든 기묘한 것을 갖추시고 눈이 부시며, 한이 없으시고, 모든 방향으로 보시는 낯을 가지신 하늘 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2. 만일 천 개의 해가 하늘에 나타나 그 빛을 단번에 쏟는다면, 혹 그 높으신 이의 광채에 비슷하올까.
 
13. 판두족의 왕자는 거기서 가지가지로 갈라져 있는 온 세계가 신 중의 신이신 그 한 몸 속에 하나인 것을 보았습니다.
 
14. 그때에 그 가멸음의 정복자는 놀람에 맞아 머리터럭이 곤두서고 머리를 조아려 주 앞에 절하며 합장하고 사퇴기를,
 
아르쥬나 말하기를
 
15. 오, 주시여, 저는 당신의 몸 안에 모든 천신들과 또 여러 이상한 생물의 무리와, 연꽃 위에 앉으신 모든 신들의 주이신 브라마와, 모든 성인들과 또 모든 하늘 용들을 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환상을 보면 시야가 넓어져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기 쉬운 시끄러운 근심 걱정의 속세의 저쪽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 조그만 지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우주의 하잘것없는 한 부분일 뿐이다. 아르쥬나는 이제 우주에 가득 차는 무한 무수의 영의 무리를 본다. ―라다크리슈난
 
16. 저는 허다한 팔과 배와, 허다한 입과 허다한 눈을 가지시고 사방에 무한한 모습을 나타내시는 당신을 봅니다. 그러나 당신의 끝과 중간과 맨첨을 저는 보지 못합니다. 오, 일체의 주시요 일체의 모습이신 주시여!
 
17. 제가 보니 당신은 왕관을 쓰시고, 권세의 지팡이를 드시고, 윤보(輪寶)를 가지시고 사방으로 광채를 발하시는 빛의 덩어리시요, 타오르는 불꽃같이 태양같이 헤아릴 수 없어 눈부시어 볼 수 없습니다.
 
18. 당신은 불멸이시요, 깨달아 이르는 지극히 높으심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궁극의 근본이시오, 당신은 무너짐 없는 영원한 진리를 지켜주시는 이이십니다. 당신은 으뜸 사람이시라 저는 믿습니다.
 
19.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없으시고 힘이 한이 없으시며, 한없는 팔을 가지시고, 해 달로 눈을 삼으시는 당신이 입에서 나오는 불꽃으로 이 우주를 불사르고 계신 것을 제가 봅니다.
 
20. 이 궁창과 땅 사이의 공간과 또 모든 방향이 오직 당신 하나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오, 마하트마시여, 당신의 이 놀랍고 무서운 모습을 보고 삼계가 부르르 떱니다.
 
21. 저 모든 천신의 무리가 당신께로 들어가고, 더러는 두려워 합장하고 찬송하며, 대성인과 성만위(成滿位)에 이른 성자들의 떼가 “복이 있도다”를 외며 울려퍼지는 찬미로 당신을 노래하옵니다.
 
22. 루드라들, 아디차들, 바수들, 사드야들, 비슈바데바들,. 아슈빈들, 마루트들, 우슈마파들, 간다르바들, 야크샤들, 아수라들, 싯다들의 모든 무리가 놀람으로 당신을 바라보옵니다.
사드야들(Sadhyas) 성취신(成就神).
비슈바데바들(Vishvadevas) 일체신(ᅳ切神).
우슈마파들(Ushmapas) 조신(祖神).
야크샤들(Yakshas) 야차신(夜叉神).
아수라들(Asuras) 수라, 아수라(阿修羅).
 
23. 오, 억센 팔을 가지신이여, 많은 입과 많은 눈과 많은 팔, 다리, 발과 많은 배와 많은 끔찍스런 이빨을 가진 당신의 엄청난 몸을 보고 온 세계도 저도 놀랍니다.
 
24. 당신의 하늘 닿는, 갖가지 빛의 불길이, 입을 쩍 벌리고 이글거리는 눈을 하신 모습을 보고, 오, 비슈누이신 이여, 제 속의 혼은 무서워 떨고, 가만 있을 수도, 맘이 평안할 수도 없습니다.
 
25. 저는 당신 입의 그 무서운 이빨을 볼 때, 타오르는 멸망의 불길을 보는 것 같아, 어디가 어딘지를 잊어버리고 평안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오, 신들의 신이시여, 세계의 피난처시여!
열망의 불길 칼랄라나(kalalana), 겁화(劫火).
 
26. 저기 있는 모든 드리타라슈트라의 왕자들, 모든 나라 왕의 무리들, 비슈마와 드로나와 또 카르나와, 그리고 한가지로 우리 편의 우두머리 되는 용사들,
 
27. 휩쓸려 당신의 무섭게 벌린 입의 이빨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것은 이빨 사이에 끼여 그 대가리가 부서지고 가루가 된 것이 보입니다.
 
28. 마치 많은 시냇물의 사나운 물결이 한데 밀려 바다로 들이닫듯이, 그들 세상의 날쌘 영웅들이 불타는 당신 입 속으로 달려들어 갑니다.
 
29. 마치 부나비들이 타는 불 속으로 몰아쳐 들어가 타 죽듯이, 모든 사람이 죽기 위해 당신 입 속으로 몰아쳐 들어갑니다.
 
30. 오, 비슈누 신이시여, 당신은 사면에 있어서 불타는 당신의 입으로 삼켜 씹어 온 세계를 먹어치우십니다. 당신의 무서운 불빛이 온 세계에 충만하여 그 불꽃으로 그것을 살라버립니다.
 
31. 그렇게 끔찍한 모습을 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씀해 주시옵소서! 당신께로 나갑니다. 모든 신 중에 가장 크신 주시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저는 맨첨이신 당신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하자는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무지로 인하여 눈이 어두운 인생들은 자기 멸망으로 달음질치는데, 거룩하신 주재자는 그것을 그대로 두신다. 그들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원할 때는 그 결과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행동은 우리를 결과에다 붙들어 맨다. 이 원인 결과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의 한 발현이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실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을 통하여서, 이 온 우주가 그 크기와, 아름다움과, 두려움과, 신들, 축복받은 영혼들, 동물들, 식물들, 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속에 가지고 계시므로 자기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런 생각에 잡히고, 어떤 때는 저런 생각에 잡힌다. 우리는 연속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하신다. 거기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2. 나는 시간이다. 세계를 멸망시키는 자다. 다 자랐다. 이제 나는 모든 세계를 삼켜버리려 나타났다. 네가 아니더라도, 저기 마주서 진을 벌이고 있는 모든 무사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라.
시간 칼라(kala)
시간은 우주의 원동자(原動者)다. 하나님을 만일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끝없이 창조하는 이요 끝없이 파괴하는 이다. 시간은 끝없는 유전(流轉)이다.
최고의 주재자는 창조와 파괴를 다 주장한다.「기타」는 누구나 보통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선을 주장하고 사탄은 악을 주장한다는 사상에 찬성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유한한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것, 생명도, 창조도, 고통도, 죽음도 그에 게서 나온다 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시간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시간 밖에 서기 때문이요, 또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시간 위에 올라서게 된다면 그것을 주장할 수 있다. 시간 뒤에 서시는 힘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보다 멀리 내다보시고, 모든 사건을 어떻게 주관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르쥬나에게 일의 원인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작용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막아낼 수 없는 자연적인 결과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대적들의 멸망은 벌써 오래 전에 저지른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정이 되어 있다. 비인격적인 운명이란 것이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섭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하나의 일반적인 우주적 필연이다. 즉 모이라(moira)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 면의 나타남이므로 그의 만유의 주재자로서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사람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거기에 대하여는 제 뜻으로 하는 모든 항의가 다 소용이 없다. —라다크리슈난
 
33.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라. 그리하여 네 영광을 얻을지어다. 네 대적을 정복하고 풍성한 왕국을 누릴지어다. 그들은 이미 나에 의하여 부서졌느니라. 오, 왼손잡이야, 너는 다만 그 잡은 것이 되라.
왼손잡이 사뱌사친(Savyasacin), 좌우 양손을 다 잘 쓰는 사람, 아르쥬나.
다만 그 잡은 것 니미타마트람(nimittamatram, merely the occasion, just the cause, no more than an instrument), 외인(外因)뿐.
 
34. 드로나 장군, 비슈마 장군, 쟈야드라다 장군, 카르나 장군, 그밖의 용사들도 이미 나에 의하여 죽여졌느니라. 너는 그들을 죽여라! 겁내지 말라! 싸워라! 너는 싸움에서 대적을 정복할 것이다.
쟈야드라다(Jayadratha) 위대한 전사.
운명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했으므로 아르쥬나는 그 잡은 것이 되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전능자의 손에 쥐인 한 개의 피리다. 그러면 그는 자기 목적대로 행하여 위대한 진화를 성취하신다. 아르쥬나가 만일 자기의 불완전한 판단에 따라 행하려 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한테 속게 된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특권에 침입할 수는 없다. 무기를 들지 못하겠다 했을 때 아르쥬나는 건방짐을 범했다.
‘다만 그 잡은 것’이 되라고 했을 때 저자는 하나님의 예정설을 지지하고 있고, 개인은 완전히 무력하고 무의미하다는 것, 그의 의지와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정은 이미 되어 있는 것이므로 아르쥬나는 그것을 변경할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 개의 힘없는 잡힌 거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거나 되는 대로 하는 이가 아니다. 이 두 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흔히 있는,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모든 것을 홀로 주장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 속에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지하자는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 하나님은 (완전히 타자)로서 우리와 절대적 대립 속에서 있는 이라는 뜻이 여기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직관이 여기 나와 있다. 그것은 욥기나 바울의 서간에도 나와 있다. “지음을 받은 자가 어찌 지으신 이를 향하여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할 수 있느냐?”
우리가 우주의 과정을 다 예정의 전개로만, 즉 미리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를 열어 보여주는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행동은 미리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의 영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의 어느 순간 속에도 영원이 다 현존해 있다는 뜻을 긍정하려 하고 있다. 시간내에서 되는 진화의 각 순간의 이 극단적인 특이성이 하나님의 영원과 양립 안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은 다 인간의 기구적인 성격을 통해서 된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리는 하나님 손 안에 잡힌 것답게 행한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온전히 내놓아 하나님으로 하여금 온전히 흡수해버리게 하여 자아의 형적을 남겨두지 않게 한다. 우리는, “당신의 뜻 속에 우리 평화는 있습니다”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그의 명령을 받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23:46) 아르쥬나는 ‘당신의 뜻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만이 오직 하시는 것이고 저는 다만 잡힌 것일 뿐입니다’ 하고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의 끔찍한 참상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인간의 표준으로 본다면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막이 올라가고, 그리하여 전능하신 이의 목적이 드러났을 때 그는 거기 가만히 순종할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원하던 것, 그가 이 세상에서 또는 오는 세상에서 이렇게 됐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이제는 다시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뒤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그것을 꿰뚫고 있다. 우리는 그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거기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모든 행동이 다 그것을 뛰어넘는 저 먼 어떤 것의 상징인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아미 나에 의하여 죽여졌다’(maya hatan) 함은 하나님에 의하여 운명이 결장되었음 뜻한다.
하나님은 그들 생애의 가는 방향, 그 종착점을 다 알고 있다. 아무리 미미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아르쥬나는 섭리의 사무를 집행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외적으로는 자연의 주요, 내적으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거기서 초연하고 있을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여호와의 칙령을 들으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시편」(2:7∼9)
 
산자야 말하기를
 
35. 이렇듯 케샤바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관을 쓴 이는 떨며 합장하고 절한 후, 다시금 두려움으로 크리슈나 앞에 업디어 더듬는 말로 했습니다.
케샤바(Keshava) 피발천(被髮天),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보관을 쓴 이 아르쥬나를 가리킴.
 
아르쥬나 말하기를
 
36. 오, 흐리쉬케샤시여, 온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여 즐거워하고 알뜰히 사모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옵니다. 나찰들은 두려워 사방으로 도망갔고, 모든 싯다상가들은 당신 앞에 업디어 절 하옵니다.
흐리쉬케샤(Hrishikesha) 머리터럭 거슬린 이,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나찰(rakshasa) 악한 귀신.
싯다 상가(siddha-sangha) 깨달아서 완전한 지경에 이른 성자들.
아르쥬나는 한편 경탄하고 한편 고뇌하는 영적 황홀 속에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양한다. 그는 시간의 파괴력을 보는 동시에 또 우주를 다스리고 있는 법칙이 임해 계신 것을 보았다. 그 첫번 것은 두려움을 주었고, 그 둘째번 것은 황홀한 기쁨을 주었다. —라다크리슈난
 
37. 오, 마하트마시여, 또 그들이 어찌 당신을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맨첨의 창조주시요, 브라만보다도 더 크시고, 무한의 신이시며 만신의 신이시요, 우주의 피난처이십니다. 당신은 불멸이시요, 있음이요, 안 있음이시며, 또 그것을 뛰어넘으신 이십니다.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 위대하신 이, 대성(大聖).
맨첨의 창조주 아디카르트레(Adikartre).
우주의 피난처 쟈간니바사(jagannevassa), 그 안에 온 우주가 거하는 하나님.
있음, 안 있음(sat-asat) 유와 비유(有, 非有), 원인 결과.
맨 처음의 창조주, 혹은 당신은 브라마의 창조주이시기까지 하옵니다. —라다크리슈난
「기타」(7: 24, 8:20, 15:16)를 보면 사트(sat)와 아사트(asat)란 말은, 여기서는 인식할 수 있는, 인식할 수 없는(vyakta and avyakta)의 뜻으로, 혹은 변하는 또는 안 변하는(kshara and akshara)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사트아사트를 뛰어넘는 원리를「기타」에선 불멸의 브라만(akshara-brahman) 이라고 한다. 13장 12절에 나온 말대로 한다면 “나는 사트도 아니요, 아사트도 아니다.” 아크샤라라는 말을「기타」에서는 프라크리티에 대해 쓰고, 어떤 때는 파라브라만에 대해서 쓴다. —틸라크
 
38. 당신은 맨 처음의 신이시요, 한 옛적의 으뜸 사람이시며 이 온 우주의 궁극의 쉴 곳이십니다. 당신은 아시는 이요, 또 알려질 것이며, 그 모든 것의 돌아갈 곳이십니다. 끝이 없는 형상을 가지신이여, 당신으로 이 우주는 꿰뚫려 있습니다.
 
39. 당신은 바유시요, 야마시오, 아그니시요, 바투나시요, 또 샤샹카시요, 프라쟈파티시요, 프라피타마하십니다. 당신 앞에 절하고 다시 절합니다. 다시금, 다시금, 천번도 더 다시금 당신께 절 드리옵니다.
바유어(Vayu) 바람.
야마(Yama) 죽음의 임금.
아그니(Agni) 불의 신.
바루나(Varuna) 물의 신.
샤샹카(Shashanka) 달.
프라챠파티(Prajapati) 창조주 브라마.
프라피타마하(Prapitamaha) 조상의 조상.
브라마데바(Brahmadeva)의 마음으로 낳은 일곱 아들들이 있다. 그중 첫째 가마리치(Marici)인데 그에게서 카샤파(Kasyapa)가 나왔고, 카샤파에게서 그밖의 모든 자손이 나왔으므로 이 마리치와 그밖의 것들을 합해서 프라쟈파티들(자존들의 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프라쟈파티란 말을 어떤 이는 카샤파란 뜻으로, 또 어떤 이는 프라쟈파티의 뜻으로 해석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프라쟈파티의 단수를 썼으므로, 브라마데바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브라마데바는 마리치와 그밖의 아들들의 아버지기 때문에, 즉 모든 자손의 할아버지기 때문에 아래 있는 조상의 조상(프라피타마하)이라는 말에 맞는다. —틸라크
 
40. 당신 앞에서 절합니다. 당신 뒤에서 절합니다. 일체의 신이시여, 일체의 방향에서 당신께 절합니다. 당신은 능력이 한없으시고, 힘이 한없으십니다. 당신은 일체를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체이십니다.
 
41. 당신을 친구로 알아, “오 크리슈나, 오 야다바, 오 친구여” 하면서 당신의 이 위대를 모르고, 혹은 경솔함으로, 혹은 친애하는 마음에서 당신을 향해 전에 했던 모든 말,
야다바(Yadava) 크리슈나의 다른 호칭.
 
42. 또 농담으로, 쉬는 동안,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밥을 먹는 동안, 혹은 혼자서, 혹은 여럿 앞에서 당신께 버릇없이 한 모든 행동을, 오 변함없으신 이시여, 용서하옵소서. 오, 불가사의하신 이시여, 이제 당신 앞에 비옵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본 사람은 자기가 아무 값어치 없는 물건이라는 것과 자기가 죄인이란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신 것을 보았을 때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의 내 왕을 눈으로 뵙다니?” 했다. —라다크리슈난
 
43. 당신은 이 흔들리는, 또 흔들리지 않는 세계의 아버지이십니다. 당신은 신들의 예배를 받으실 분이요, 존경을 받아야 하는 스승이십니다. 당신 같으신 이는 없습니다. 당신보다 더 큰이가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삼계에서 비할 자가 없는 능력이십니다.
 
44. 그러므로 당신께 절하고 업디어 빕니다. 찬양하올 주시여,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하듯, 친구가 그 친구에게 하듯,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에게 하듯, 저를 참아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것은 힌두교에는 흔히 있는 사상이다.「리그베다」에는 “우리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옵소서.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하듯, 스스로 빛을 발하시는 주시여, 우리와 함께 계시어서 복을 주시옵소서” 했고 또「야쥬르베다」에는 “오 주여, 당신은 우리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처럼 우리를 가르쳐주시옵소서” 했다. 구약에도 아버지의 상에 대해 씌어 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불쌍히 여기듯이 주께서는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사상이 그 가르침의 중심이다. —라다크리슈난
어떤 해석자들은 프리야(priyah), 프리야야르하시(priyayarhasi)를 “사랑 하는 자”, (여자들인 경우는) “내 사랑”이라 하지만, 내 해석으로는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프리야야르하시란 말을 문법적으로 볼 때 프리야야(priyayah)와 르하시(rhasi)를 끊어서 볼 수 없고, 비교를 표시하는 말인 이바(iva)가 이 절 안에서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프리야 프리야야르하시(priyah priyayarhasi)를 세째 비교로 보는 것보다는 그것을 그 비교의 주제목으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틸라크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법상의 토론은 약하기로 하고, 틸라크는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를 “부부의 비유로 보려 하지 않고(사실 원문에는 남편이란 말도, 아내란 말도 없다) 그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으로 보고 “그의 사랑”(받는 자)을 아르쥬나 자신으로 보아서,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사해주고, 친구가 친구의 잘못을 사해주듯, 그렇듯 사랑하시는 당신께서 당신의 사랑받는 제 잘못을 사해주옵소서 하는 뜻으로 해석하자는 것이다.”—함석헌
 
45.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저는 기쁨에 찼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두려움으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주시여, 당신의 모습을 제게 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만유의 주시요, 우주의 피난처이신 당신이시여!
초월적인 존재, 우주적인 존재의 무서운 모습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또 무서움에 질린 이 죽을 인생에게 다시 용기를 주는 인격신의 모습, 신성(神性)에 대한 명상의 상징이 되는 모습도 또 있다. 크리슈나의 옹근 모습의, 부숴버리는 광명의 불꽃 밑에서 견디어 설 수 없어하는 아르쥬나는 이제 보다 더 즐거운 모습을 원한다. 세계의 저쪽에 항상 빛나는 그 빛은 또 제 속에 있는 빛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제 속에 있는 스승과 친구다. —라다크리슈난
 
46. 전같이 왕관을 쓰시고 권세의 지팡이를 잡으시고, 윤보를 드신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오, 일천 팔의 하나님, 무한형상의 주님, 바라옵나니, 네 팔의 모습으로 보여주시옵소서!
윤보(輪寶) 우내(宇內)를 통일 지배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보기(寶器).
아르쥬나는 이제 비슈누의 화신으로서의 크리슈나의 모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47. 아르쥬나야, 내가 네게 만족했으므로 내 요가의 힘에 의하여 나의 최고의 모습을 네게 보여주었으니, 이것은 광명으로 이뤄진 것이요, 온 우주요, 무한이요, 맨 처음이니라. 너를 내 놓고는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느니라.
최고의 모습 일천 팔의 하나님, 무한형상의 주님을 가리킴.
환상이 사람이 찾는 것의 구경은 아니다. 그렇다면「기타」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한때 번쩍이고 지나가는 환상이 찾는 자의 늘 있는 체험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황홀 혹은 사마디(三昧)는 신앙생활의 목적도 또 본질적인 요소도 아니다. 눈을 캄캄케 하는 빛, 법열 속에 떠다님이 영구적인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아르쥬나는 그가 본 치떨리는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것을 자기 생활 속에 박아넣지 않으면 안됐다. 환상은 다만 열어줌일 뿐이다. 그것은 튼튼케 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본 것을 다른 감관의 증거로써 시험해보고 확인하고 하듯이 환상으로 얻어진 지식도 생명의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온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라다크리슈난
옹글참됨은 하늘길이요, 옹글 참되게 함은 사람의 길이다. 옹글참되게 한다는 것은 착함을 골라 굳게 잡음이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중용」
 
48. 오, 쿠루족의 가장 뛰어난 용장아, 베다나 희생이나 공부에 의해서도, 자선에 의해서도, 제사의식에 의해서도, 무서운 고행에 의해서도, 나의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너를 내놓고는 아무도 될 수 없느니라.
 
49. 나의 이러한 무서운 모습을 보고 너는 두려워도 말고 어쩔 줄 몰라 하지도 말라. 두려워 말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나의(전의) 모습을 보라.
 
 
산자야 말하기를
 
50. 그렇듯 아르쥬나에게 말씀하시면서 바수데바께서는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시었습니다. 마하트마는 다시금 자기의 인자하신 형상에 돌아가시어서 무서움에 질린 아르쥬나를 위로해주셨습니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51. 오, 쟈나르다나시여, 당신의 이 인자하신 모습을 뵈오니 제 마음이 가라앉고 제 본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2. 나의 이 지극히 보기 어려운 모습을 너는 이제 보았느니라. 모든 신들조차도 이 모습을 보기를 항상 원하느니라.
 
53. 베다에 의해서도, 고행에 의해서도, 자선에 의해서도, 희생에 의해서도, 네가 지금 본 나의 그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54. 아르쥬나야, 그러나 외곬으로 믿는 마음에 의해서만 나는 나대로 알 수 있고,참대로 볼 수 있고, 또 들어갈 수 있느니라. 오, 파란타파야!
 
55. 판두족의 아들아, 나를 위해 일을 하고, 나를 자기 목적으로 알고, 나를 진심으로 믿고, 아무것에도 집착이 없으며, 모든 물건에 대하여 악의를 품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내게로 오느니라.
이것이 박티 신심(信心)의 짬이다. 12장 13절을 보라. 이 절이「기타」전체의 교훈의 주지다. 우리는 우리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어떤 생명체에 대해서도 적대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직업이 무엇이었거나, 우리 성격이 어떠하였거나, 또 우리가 창조적인 사상가였건, 혹은 명상적인 시인이었건, 아무런 천부의 재능도 가진 것 없는 비천한 한 남자 한 여자였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구가 될 수 있고, 그의 사랑과 목적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산 영(靈)들의 넓은 세계가 하나님에게 가락을 맞추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면 인간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다.
「기타」는 그 놀라운 초월적인 환상의 체험이 있은 다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초월적인 아트만의 큰 비밀, 곧 있는 모든 것의 근본인 그 자체는 아직도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고자가 유한한 것의 끝없는 과정의 배경이 되고 있다. 아르쥬나는 이 진리를 보았지만 그 안에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기의 온 천성을 변화시켜야 했다. 한때 반짝 하고 지나가는 환상은 그것이 아무리 생생한 것이고 그 영향이 아무리 영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도달은 아니다. 영존(永存)하는 실재에 대한 탐구, 즉 궁극의 탐구는 감정적인 만족감이나 발작적인 체험으로 끝날 수 없다. —라다크리슈난
그때 갑자기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하였다. 그의 옷은 눈부시게 빛나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보였다…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초막 셋을 지으십시다. 그래서 하나는 선생님이 계시고,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도록 합시다” 했다……바로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했다……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게도 말하지 마시오”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그들이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보니, 큰 군중이 둘러서 있는……예수께서는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을까!” 하셨다. —「마가복음」(9:2∼29)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제 11장 일체상의 끝이니 브라만의 지식의 일부 요가에 대한 학문에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하는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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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작성자 바보새 16-01-28 09:32 조회1,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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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거룩하신 능력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억센 팔을 가진 자야, 다시금 나의 지극히 높은 교훈을 들으라. 네게 유익이 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너에게 내 그것을 말하리라.
 
2. 천신의 무리도 대성자들도 내가 어디서 났음을 알지 못하나니, 나는 모든 점에서 천신, 대성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3. 나를 남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누리의 대창조주로 아는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모든 죽을 인생 속에서 미혹에 빠지지 않고, 일체의 죄악으로부터 해탈됨을 얻을 것이니라.
대창조주 마헤슈바라(Maheshvara)
죽을 인생 응사자(應死者).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Parabrahman), 혹은 거룩하신 주는 천신들이 있기 전부터 있었고, 천신들은 그후에 와서야 생겼다는 사상은 이미「리그 베다」의 나사디야 수크타(Nasadiya Sukta)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하자면 서론이고, 크리슈나는 이제 자기가 어떻게 모든 세계의 창조주 이슈바라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틸라크
우리가 모든 것을 홀로 하나인 초월적 실재에서 갈라져나온 것으로 볼 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모든 더듬고 헤맴을 면하게 된다.―라다크리슈난
 
4. 이성, 지식, 혹하지 않음, 참음, 참, 자제, 안정, 즐거움, 괴롬, 있음, 안 있음, 두려움, 안 두려움,
이성 부디 (buddhi)
지식 즈나나(jnana).
혹하지 않음 아삼모하이(asam-mohah),의심 없음.
참음 크샤마(kshama), 관대함(forgiveness)
참 사챠(satya), 진실.
자제 다마(damah) , 감정 조절(control of the senses).
안정 샤마(shamah), 기분 조절(control of the mind).
있음 바바(bhavah), 태어남(birth).
안 있음 아바바(abhavah), 죽음(death).
 
5. 불살생, 평등심, 만족, 고행, 자비, 명예, 불명예는 다 나에게서만 나가는 산 것들의 가지가지 특성이니라.
불살생 아힘사(ahimsa),비폭력.
평등 사마타(samata).
고행 타파(tapah).
자비 다나(dana).
특성 바바(bhavah),성질, 천성(nature),
바바(bhavah)란 말은 상태(condition), 상황(state), 또는 성격(temperament)을 뜻한다. 삼캬 철학에서는 이성(reason)의 바바들과 몸(body)의 바바들을 구별해서 말한다. 삼캬에 의하면 정신(spirit)은 활동하지 않는 것이고 이성은 프라크리티에서 변하여 나오는 것이므로 그들은 말하기를 속몸(subtle body) 속에 있는 이성의 가지가지 상태 혹은 바바들은 그 속몸들 이 탸가지고 나게 되는 새니 짐승이니 하는 가지가지의 출생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위의 두절에서 말하는 바바들은 아무래도 그런 의미에서 쓴 말일 것이다. 그러나「베단타」에서 말하는 대로, 있는 것은 파라마트만(paramatman)의 형체로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영구불변의 원리뿐이다,
그 파라마트만은 물질과 정신을 다 초월한 것이므로. 그리고 이 볼 수 있는 전우주는 나사디야 수크타에 있듯이 파라아트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창조욕의 결과로 나온 것이므로 베단티스트들이 말하듯이 마야 속에 나타나는 이 세계의 모든 창조물은 다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의 정신적 바바들이다. ―틸라크
 
6. 옛날의 일곱 대성인들과 또한 네 마누들도 나의 바탈로 됐으며 나의 마음에서 나간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창조물은 다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니라.
대성인들 마하르샤야(maharshayah).
마누(Manu) 인류의 조상이라는 사람, 마노왕(摩奴王).
세계 로카(loka).
이 절에 씌어있는 말들은 쉬운 것이나 이 속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많다. 특히 그 ‘옛날’ 이라는 단어 또 ‘네’ 라는 단어를 어디다가 붙여서 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일곱 대성인 즉 일곱 사람의 위대한 리쉬(Rishi)는 누구나 잘 아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브라마데바의 칼파(kalpa)는 14만반타라(manvantara)로 되어 있는데, 그 각 만반타라의 마누 신과 일곱 성인들은 각각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주석가들은 그 ‘옛날’이라는 말을 일곱 성인에 대한 형용사로 보고 이 절을 해석하기를 이 일곱 성인은 현재 우리가 사는 바이바수바타 만반타라(vaivasvata manvantara) 전에 있었던 차크슈샤(Cakshusha) 만반타라의 일곱 성인이라고 한다. 그 일곱 성인이란 곧 브리구(Bhrigu), 나바(Nabha), 비바수반(Vivasvan), 수다마(Sudhama), 비라쟈(Viraja), 아티나마(Atinama), 사히슈누(Sahishnu)인데,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문맥으로 보아서「기타」를 말해준 것이 우리가 사는 현재의 바이바수바타 만반타라 전의 만반타라 일곱 성인에게 한 것이라고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성인은 현재의 만반타라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름들은「마하바라타」에 있는 산티파르바(Santiparva) 속의 나라야니요파캬나(Narayaniyopakhyana)에 이렇게 씌어 있다. 마리치(Marici), 안기라사(Angirasa) 아트리(Atri), 풀라수챠(Pulastya), 풀라하(Pulaha), 크라투(Kratu), 바시슈타(Vasishtha)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이 절에서 말하는 일곱 리쉬들일 것이다. 왜냐하면,「기타」가 지지하고 있는 것은 나라야니야, 즉, 바가바타 신앙과 그 의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담은 ‘옛날의 네’ 라는 말을 ‘마누’ 에 붙여보려는 해석은 어느 정도로 옳으냐 하는 것을 보기로 한다. 만반타라는 전부 해서 열 넷인데, 거기 열 네 마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두 조로 갈려서 각각 일곱씩으로 되어 있다. 그 첫 일곱을 슈바얌부바(Svayambhuva), 슈바라치사(Svaracisa), 아우타미(Auttami), 타마사(Tamasa), 라이바타(Raivata), 차크슈샤(Cakshusha), 바이 바수바타(Baivasvata)라 하는데, 그중 여섯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 일곱째 바이바수바타 마누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끝나면, 그 다음 오는 마누들은 사바르니 마누들이라 하는데 그 이름은 이렇다. 사바르니(Savarni), 다크샤사바르니 (Daksha-Savarni), 브라마사바르니(Brahma-Savarni) 다르마사바르니(Dharma-Savarni), 루드라사바르니(Rudra-Savarni),데바사바르니(Deva-Savarni), 인드라사바르니(Indra-Savarni)다. 각 조마다 일곱 마누가 있다면「기타」가 각 조에서 처음 넷만을 든 이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브라만다 푸라나」의 기록에 따라 사바르니 마누 중 첫 마누 다음의 네 마누는 동시에 지어졌기 때문에 「기타」가 말하는 넷이라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거기 대하여는 또 이런 반대가 있다. 즉, 사바르니 마누들은 미래에 올 마누들인데 이 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들이 지어졌다고 과거사를 썼으니 그것을 거기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네’ 라는 말은 어느 다른 네 리쉬들이나 혹 다른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러면 그 넷이 누구냐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사나카(Sanaka), 사난다(Sananda), 사나타나(Sanatana), 사나트쿠마라(Sanatkumara)의 네 리쉬를 들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은 또 그들은 출가승으로 태어나서 후손을 두기를 거절했으므로 브라마데바의 분노를 샀으니, “모든 창조물이 그들에게서 나갔다는 말을 적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그 ‘옛날의 넷’은 누구냐? 내 의견으로는 그것은 바가바타 신앙의 전통에 의해서 풀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수데바(Vasudeva)와 삼캬르사나(Samkarsana)와 프라줌나(Pradyumna)와 아니룻다(Aniruddha)다. 이것을 합하여서 차투르뷰하(Caturvyuha)라고 한다……
이 넷은 언제나 독립해 있지 않다. 그 네 뷰하(Vyuha)는 독립한 최고 주재의 네 바바들, 네 상태다. 그 최고의 주재는 곧「기타」7장 19절에서 말하는 바수데바다. 이렇게 풀어보면 ‘옛날의 넷’이란 바가바타 신앙에서 말하는 일곱 대성인 전에 있었던 차투르뷰하 등 네 뷰하를 가리키는 것이다. ―틸라크
이것들은 세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천을 맡아가지고 있는 힘들이다. 마누는 전설에 의하면 새 우주가 시작될 때마다 있는 맨 처음의 사람이다. —라다크리슈난
크리슈나는 여기서 우주 인종의 보계의 개요를 말한다. 브라마가 히라냐가르바(Hiranyagarbha)라는 지극히 높으신 주의 능력에서 탄생된 맨첨의 조상이고, 그 브라마에서 일곱 대성인이 나왔고, 그들보다 전에 사나카, 사난다, 사나타나, 사나트쿠마라의 네 성자가 있었고, 그리고 마누들이 나타났다. 이들 25 명의 성자들을 전우주 생류의 족장들(Partriarchs)이라고 한다. 각개의 우주 안에는 무한수의 우주와 무한수의 천체들이 있으며 각 천체는 각종각색의 생류로 가득 차 있다. 그 생류들은 다 이 25족장에서 나왔다. 브라마는 천년 동안 천신들에게서 고행을 닦은 후 크리슈나의 은총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 창조의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런 다음 브라마에서 사나카, 사난다, 사나타나, 사나트쿠마라가 나오고, 그 다음 루드라가 나오고, 그 다음 일곱 성인이 나오고, 그렇게 하여 모든 브라만족, 크샤트리야족이 지극히 높으신 신성(神聖)에서 나왔다. 브라마를 피타마하(Pitamaha) 곧 할아버지라 부르고, 크리슈나를 파라피타마하(Parapitamaha) 곧 할아버지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7. 나의 이 영광과 능력을 참으로 아는 자는 누구나 흔들림 없는 요가로 (나와) 하나됨을 얻을 것이니, 이것은 다시 의심 할 여지가 없느니라.
영광은 원어로는 비부티(vibhuti)인데 이를 라다크리슈난(glory), 간디(immanence), 틸라크와 마하데브 데자이(manifestation)는 각각 다르게 번역 했다. 라다크리슈난의 경우는 무한히 나타내는 풍부의 영광을 뜻하는 것이고, 간디의 경우에는 그것이 무한히 내재하는 힘이라 해서 그 말을 택했으며, 틸라크와 마하데브 데자이는 그 나타난 것을 두고 그렇게 했다. 특히 마하데브 데자이는 비부티를 단수(power 혹은 immanence) 때와 복수(manifestation) 때를 각각 다르게 했다. 다까구스(高楠順次郞)는 능력이라 번역하고 그 다음의 요가(다른 이들이 power 라 번역하는 것)를 환력(幻力)이라 했다.
정신적 완성의 절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가지가지의 풍성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정성된 섬김은 불가능하다. 일반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어떻게 위대하시냐 하는 것을 사실로 안다면 자연히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 정성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어야만 능히 그 바탈을 다할 수가 있으며, 능히 그 바탈을 다할 수 있으면 능히 사람의 바탈을 다할 수가 있고, 능히 사람의 바탈을 다할 수 있다면 능히 몬의 바탈을 다할 수가 있고, 능히 몬의 바탈을 다할 수 있다면 능히 하늘 땅의 변화하고 나게 함을 도울 수 있고, 하늘 땅의 변화하고 나게 함을 도울 수 있으면 하늘 땅으로 더불어 셋이 될 수 있느니라. (唯天下至聖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賛天地之化育 可以賛天地之化育 則可以與 天地參矣) ―「중용」
 
8,나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느니라. 지혜 있는 자는 그것을 알아 마음을 온전히 해 정성으로 나를 예배한다.
 
9. 마음을 내게 모으고 목숨을 내게 바치며 서로 일깨워주고 서로 내게 대하여 이야기하면 언제나 만족하고 즐거움에 차 있게 되느니라.
 
10. 그 정신이 언제나 통일되어 사랑의 기쁨으로 나를 예배하는 그들에게 나는 이성의 요가를 줄 것이니 그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게로 와 이를 것이다.
이성(理性)의 요가 부디요가(buddhi-yoga), 지성적 요가(yoga of reason, yoga of intelligence)
여기서 부디요가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제2장(39절)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는 가운데 부디요가의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한 말이 있는데 이제 여기서 그것을 설명한다. 부디요가는 크리슈나 의식 속에서 하는 행동이다. 그것의 최고의 지성이다.
부디는 지성(intelligence)이란 뜻이고 요가란 신비적 행동, 혹은 신비적 올라감이다. 사람이 본향,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힘써 정성된 예배 가운데 온전히 크리슈나 의식에 이르면 그 하는 행동이 부디요가다. 말을 바꾸어 한다면, 부디요가란 이 물질세계의 얽매임에서 빠져나가는 길이다. 나가는 목적은 크리슈나에게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와 진정한 정신의 스승의 결합이 필요하다. 먼저 목적이 크리슈나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길은 서서히 그러나 점점 나아가는, 오르는 방향으로 열린다.
만일 인생의 목적은 알면서도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고 있으면, 그는 카르마요가(karma-yoga)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크리슈나인 것은 알면서도 크리슈나를 깨닫기 위해서 하는 명상에만 빠져 있다면, 그는 즈나나 요가(jnana-yoga)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알고 온전히 크리슈나 의식과 헌신하는 믿음에서 크리슈나를 찾는다면 그는 바로 박티요가(bhakti-yoga) 곧 부디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요가다.
만일 진정한 스승도 있고 정신적 단체에 속해 있기도 하면서도 진보할 만한 지식이 부족한 때는 크리슈나는 속에서 그에게 교훈을 주어 어려움 없이 궁극의 목적을 지향해 나아가게 한다. 자격은 다만 언제나 크리슈나 의식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또 사랑과 헌신으로 모든 봉사를 해야 한 다는 일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11. 나는 오직 그들에 대한 자비의 마음에서 그들의 바탈 속에 머물러 있어 빛나는 지혜의 등불로 무지에서 나오는 어두움을 깨쳐준다.
‘그들의 바탈 속에’(atma-bhavastho)라는 귀절을 라다크리슈난은 “나의 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라고 해서 “그들의 깊은 바탈 속에 머물러 있어” 하는 다른 사람들의 번역과 반대되는 듯이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참 바탈은 브라만이 지닌 마음의 참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서 보면 내 바탈이지만,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면 그가 자기의 참을 나타내시는 것이 곧 우리가 우리의 바탈을 보는 것이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12.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이요 지극히 높으신 거처시며, 지극히 높으신 정결자시고, 으뜸이요 초월적인 인격이요, 나시지도 않고 두루 뚫어 계시는 맨첨의 주이시라고,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 파라브라만(parabrahman)
지극히 높으신 거처 파라다마(paradhama).
지극히 높으신 정결자 파비트라 파라마바반(pavitra paramabhavan).
맨첨의 주 아디 데밤(adi-devam).
 
13. 모든 성자들이 당신에 대해 말했으며, 나라다, 아시타, 데발라, 브야사 같은 천신 성자들도 그렇게 했고, 또한 당신 몸소께서도 지금 그렇게 선포하셨사옵니다.
나라다(Narada), 아시타(Asita), 데발라(Cevala), 브야사(Vyasa)는 천신들.
 
14. 오, 크리슈나시여, 저는 당신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것을 모두 다 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하오나, 오, 바가반이시여, 당신의 나타나심은 신들도 귀신들도 모릅니다.
바가반(Bhagavan) 신성(神性)을 의미함.
 
15. 오, 으뜸이신 분이시여, 참으로 당신 몸소께서만이 당신을 당신에 의하여 아시옵니다. 만유의 근본이시요, 모든 산 것들의 주시요, 신 중의 신이시요, 우주의 주이신 이시여.
으뜸이신 분 푸루쇼타마(Purushottama).
우주의 주 자가트파테(Jagat-pate).
 
16. 당신의 참으로 검스러운 그 능력을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주시옵소서. 당신은 그 능력으로 이 모든 우주를 뒤덮으시고 그 속에 머무시오니.
 
 
17. 오, 요가의 주시여, 제가 어떻게 하면 당신을 알 수 있습니까? 또 제가 어떻게 가지가지의 당신 모습에서 항상 당신을 생각할 것이옵니까. 오, 거룩하신 주시여?
요가의 주 요긴(yogin).
창조주로서의 덕에서 볼 때 크리슈나는 지극하신 요긴이다. 아르쥬나는 자연의 어떤 모양 속에 크리슈나의 모습이 더 자세히 나타나 있는가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가 거룩하신 주의 가지가지의 나타남의 모양에 대하여 물은 것은 그 가지가지 나타남 그것에 대해 명상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 모든 가지가지 나타남을 모든 것을 뒤덮은 최고 주재로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크리슈나는 이미 다른 데서 정성된 신앙의 길에서 볼 때는 어떤 곳에서나 최고의 주재는 오직 한분이시라 믿는 것과 최고의 주재의 가지가지 나타남의 모습을 보아 서로 다른 신으로 보는 것과의 사이에는 참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틸라크
 
18. 오, 쟈나르다나시여, 당신의 능력과 나타나심을 다시 더 자세히 일러주시옵소서. 저는 참으로 넥타르 같은 당신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쟈나르다나(Janardana) 무신론자를 죽이시는 이,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넥타르 암리탐(amritam, 감로(甘露), 생명을 주는 말씀.
「기타」는 브라만과 세계 사이, 말로 할 수 없는 실재와 불완전한 그 표현 사이에 반대되는 대립을 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주 포괄적인 정신적 견해를 준다. 그것은 물론 결정지어 설명할 수 없는 것, 나타나 뵈지 않는 불변의 것,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절대적이어서 모든 경험적 결정을 뛰어넘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이를 예배하는 것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궁극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하는 것이 보다 더 쉬운 일이요, 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궁극자는 다방면적인 자연의 작용을 감찰하며 개개의 피조물의 혼속에 거해 계시는 인격적인 주시다. 최고의 브라만(Parabrahman)이 최고의 주재자(Paramesvara), 즉 사람의 속과 우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그의 바탈은 가지가지의 성장적(becomings)인 것으로 가리워 있다. 사람은 자기와 하나님이 하나인 것, 또 그의 만유와도 하나인 것을 발견 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9. 그렇다. 내 네게 참으로 나의 거룩한 나타나 뵘들을 말하리라. 그러나, 쿠루족의 으뜸가는 자야, 그것은 주요한 것뿐이니라. 나의 풍성함에는 한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 주재자 형상에 대한 묘사는「아누 샤사나파르바」(Anu shasanaparva, 14:311∼321)와「아누 기타」(아슈바 43~44)에도 나와 있다. 그것은 대체로 여기 나타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기타」의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것들과는 다른 어떤 것에서 옮겨 쓴 것일 것이다. 가령 예 든다면, 같은 묘사가「바가바타 푸라나」15장에 거룩하신 주가 우다바(Uddhava)에게 말해주는 데 나와 있고, 거기에 그것이 이 장에 묘사된 것과 같다는 말이 적혀 있다. ―틸라크
크리슈나의 위대와 그의 풍성을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의 감각이나 혼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크리슈나의 일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정성된 신앙 있는 사람들은 크리슈나를 그래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원리에 의하여서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생활 상태에서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크리슈나의 문제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그들에게는 감로(甘露, 넥타르)같이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맛을 본다. 크리슈나의 풍성한 성격과 그의 가지가지의 능력에 관해 토론을 하는 가운데 그들 정결한 헌신자들은 초월적인 희열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기 관해 듣고 토론하기를 원한다. 크리슈나는 목숨 가진 것들은 자기의 풍성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기 능력의 주요한 나타냄만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비인격신론자(非人格神論者)나 범신론자(汎神論者)는 지극히 높으신 주의 예외적인 풍부나 그의 거룩하신 능력의 나타남을 이해할 수 없다. 물질계에서나 영계에서나 그의 능력은 가지가지의 현상 속에 골고루 퍼져 있다. 이제 크리슈나는 이 아래 있어서 보통의 인간으로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해준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0. 구다케샤야, 나는 모든 산 물건들 피조물들의 속에 있는 자아요, 나는 또 모든 산 물건들의 맨첨이요 중간이며 또 나중이니라.
구다케샤(Gudakesha) 머리터럭 짙은 이, 아르쥬나의 칭호의 하나.
 
21. 나는 아디챠들 중의 비슈누요, 나는 광명 중의 이글거리는 태양이요, 나는 마루타스들 중의 마리치요, 나는 별들 중의 달이다.
아디차(adityas) 아디차는 해라는 말인데「베다경」에는 열두 해가 있다 했다.
마리치(Marici) 천계(天界)를 다스리는 신.
마루타스(Marutas) 바람 신들. 일곱, 혹은 마혼 아홉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22. 나는「베다」중의 사마요, 천신들 중의 인드라요, 감각 중의 마음이요, 산 물건 중에서 생각이다.
사마(Sama) 사마(沙磨) 유명한 4베다 중의 하나인데 이것을 주로 든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노래이기 때문인 듯.
감각 눈, 귀, 코, 혀, 살갗, 마음.
생각 체타나(cetana), 생물 속에 있는 생기의 움직임, 사상, 의식.
 
23. 나는 루드라들 중의 삼캬라요, 야크샤와 라크샤사들 중의 쿠베라요, 바수들 중의 아그니요, 산봉우리 중의 메루다.
루드라(Rudra) 황신(荒神).
삼캬라(Samkara) 시바(Shiva), 파괴신(破壞神).
야크샤(Yaksha) 야차(夜叉).
라크샤사(Rakshasa) 나찰.
쿠베라(Kubera) 보신(寶神).
바수(Vasu), 세천(世天).
아그니(Agni) 화신(火神).
메루(Meru) 그 속에 보물이 많이 묻혀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 수미산(須彌山).
 
24. 프리다의 아들아, 알아들어라. 나는 사제들 중의 머리인 브리하스파티요, 군대 장관 중의 스칸다요, 강과 바다 중의 대양이니라.
브리하스파티(Brihaspati) 기도주(祈禱主).
스칸다(Skanda) 위태천(韋駄天).
 
25. 나는 위대한 성인들 중의 브리구요, 소리 중의 외마디 낱말 ‘옴카라’요, 희생 중의 침묵 희생이요, 움직이지 않는 것 중의 히말라야며,
성인 마하리쉬(maharishi).
브리구(Bhrigu), 일곱 성인 중의 하나.
옴카라(om-kara), 암(掩).
침묵 쟈파(japa), 침묵명상.
히말라야(Himalayah) 히말라야 산, 거대함을 나타냄.
“나는 희생 중의 침묵 희생이요” 하는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아누 기타」(Anu-gita)에 이런 말이 있다. 모든 희생(yajna) 중에 ‘하비’(불 속에)로 하는 희생이 가장 귀중한 것이다. 베다의 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심의 길에서는 나마 야즈나(nama yajna), 즉 침묵희생(japa-yajna)이 하비르 야즈나(havir yajna)보다 더 귀중한 것이므로「기타」에 “모든 희생 중의 침묵 희생”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마누는 어떤 곳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어떤 일을 했거나 말았거나, 그는 자파(침묵명상)에 의하여서만 해탈에 이른다.
자파는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 외는 일이다. 헌신적인 신앙을 말하는 이 대목에서「기타」는 하나님의 이름을 외는 희생을(간단하게는 찬송의 희생이라 한다) 가장 좋은 길로 가르치고 있다. ―마하데브 데자이
 
26. 나는 모든 나무 중의 아슈바타요, 모든 성도 중의 나라다요, 간다르바 중의 치트라라타요, 싯다들 중의 카필라 무니니라.
아슈바타(ashvatta) 보리수(菩提樹).
나라다(Narada) 모든 리쉬들 중가장신심이 깊은 성자로 알려져 있는 이.
간다르바(Gandharva) 악신(樂神).
치트라라타(Citraratha) 가장 노래 잘하는 신.
싯다(Siddha) 완전한 지경(成滿位)에 간 사람.
칼리파 무니(Kalipa Muni)는 은둔해 있는 성자를 가리키는 칭호인데 일반으로 크리슈나의 화신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의 교리는「슈리마드바가바타」속에 나와 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또 다른 칼리파로서 유명해진 사람이 있으나 그의 교리는 무신론적이므로 이 칼리파와는 아주 반대 되는 입장에 서 있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7. 나를 말 중의 웃차이슈라바스로 알라. 그것은 바다를 흔들 때에 났느니라. 나는 왕코끼리 중의 아이라바타요, 사람 중의 왕인 것을 알라.
웃차이슈라바스(uccaihshravas, 天馬)는 인드라신의 말인데, 신들이 아므리타(amrita,죽지 않게 하는 효력을 가진 神酒 혹은 甘露)를 얻기 위해 바다를 흔들어 저었을 때에 나온 열 네 가지 물건 중 하나다. 아이라바타(airavata)도 그중의 하나다. ᅳ마하데브 데자이
신심 깊은 천신들과 아수라들이 한번 여행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여행 중 넥타르와 독약이 터져 나왔다. 독약은 시바신이 마셨고, 그 신주에서 여러 가지 산 물건들이 나왔는데 그중에 웃차이슈라바스라는 말이 있었고, 또 다른 동물이 하나 나온 것이 아이라바타라는 코끼리였다. 이 두 동물은 신주에서 나왔으므로 특별한 뜻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 크리슈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 중에서는 왕이 크리슈나를 나타내는 것이다……마하라자 유디슈트라, 마하라자 파리크시트, 주 라마 같은 이들은 언제나 백성들의 안녕만을 위해 걱정한 의로운 왕들이다.「베다경」에서는 왕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종교의 부패로 인하여 왕조는 타락하고 다 무너졌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8. 나는 무기 중의 벼락이요, 소 중의 여의우요, 생식케 하는 힘 중에서 사랑의 신이요, 뱀 중의 바수키다.
벼락 바즈라(vajra), 금강저(金剛杆)
여의우(如意牛)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주는 암소.
사랑의 신 칸다르파(Kandarpa), 카마(Kama), 애신(愛神).
바수키(Vasuki) 바수길룡(婆修吉龍).
 
21 나는 용족 중의 아난타요, 물 속에 사는 것 중의 바루나요, 조상들 중의 아리야만이요, 제어자(制御者) 중의 야마다.
용족(龍族) 나가(nagas), 하늘에 있는 뱀들, 용(龍).
아난타(Ananta) 무종용왕(無終龍王), 나가들 중 가장 크고 위력 있는 것.
바루나(Varuna) 수천(水天), 모든 해신(海神, 바다에 있는 뱀) 중 가장 크고 무서운 것.
야마(Yana) 야마천(夜摩天).
바수키를 뱀의 왕이라 하고 아난타를 용 중의 왕이라고 하는 말은「아마 라코샤」(Amarako놈)나「마하바라타」속에 나와 있다. 그러나 뱀과 용의 분명한 구별은 없다.「마하바라타」의 아스티코파캬나(Astikopakhyana)에는 둘을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슈리다라」(Sridhara) 주석서에는 뱀은 독이 있고 용은 독이 없다고 했다.「라마누쟈바샤」(Ramanujabhashya) 속에는 뱀은 머리가 하나지만 용은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별들은 내게는 다 옳지 않아 보인다.
어떤 데 보면 용들 중에 큰 것을 들 때 아난타도 바수키도 다 나와 있고, 또 둘 다 머리도 여러 개고 독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아난타는 붉은 빛깔이라 했고 바수키는 누런 빛깔이라고 했다. ―틸라크
 
30. 나는 귀신들 중의 프랄라다요, 헤아리는 자 중의 시간이요, 짐승 중의 수왕이요, 새 중의 금시조다.
귀신 다이챠(daitya) 악마(demon)
프랄라다(Prahlada) 신심 깊은 신자로 크리슈나를 대표함.
수왕(獸王) 므리겐드라(mrigendrah) 사자.
금시조(金翅鳥) 바인나테야(vainateyah), 힌두교 전설에서는 이 금시조가 그 날개 위에 비슈누신을 태우고 있다고 한다.
디티(Diti)와 아디티(Aditi)는 두 자매였는데, 아디티의 아들들을 아디타야라 불렀고 디티의 아들들은 다이타야라 불렀다.
아디타야들은 모두 신앙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이타야들은 모두 믿지 않았다. 프랄라다는 다이타야 가정에 났으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열심있는 신자였다. 그러한 신앙으로 인해 그를 크리슈나의 대표자라 한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프랄라다는 신앙의 모범으로 온 인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는 아버지가 노(怒)를 발하는 데도 불구하고 신앙을 버리지 않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이겨냈다. ―마하데브 데자이
 
31. 나는 정결케 하는 자 중의 바람이요, 무사(武士) 중의 라마요, 물고기 중의 마카라요, 흐르는 강물 중의 쟈나비다.
마카라(makarah) 마갈어(摩竭魚), 상어, 악어(alligator).
쟈나비(jahnavi) 갠지즈 강.
 
32. 아르쥬나야, 나는 창조에 있어서, 그 맨첨이요 나중이며 또 그 중간이요, 밝힘 중에서 자아에 대한 밝힘이요, 변론자들에 있어서 올바른 대화이며,
밝힘 비쟈(vidya), 명(明), 과학(science), 학문.
자아에 대한 밝힘 아쟈트마비쟈(adhyatma-vidya), 내명(內明).
올바른 대화 바다(vadah).
학문 중에서 나는 자아에 대한 학문이다. 자아에 대한 학문은 최고선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적 활동이나 사회적 모험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깊은 종교적 확신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자아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뚫어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무지를 극복하게 한다. 그것은 플라톤의 말로 하면 보편적인 학문이다. 그것 없이 단순히 부분적으로 하는 학문은 미혹케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말했다. “일반적으로 학문은, 그 속에 만일 최고의 것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이익이 되는 일은 별로 없고, 도리어 자기를 해치는 일이 많다.” ―라다크리슈난
 
33. 나는 글자 중의 ‘아’자요, 합성에 있어서 드반드바요, 불멸의 시간이요, 그리고 나는 두루 사방에 얼굴을 향하고 있는 창조주니라.
아자(字) 산스크리트 글자 중 첫 자.
합성(合成) 두 말, 혹은 두 물건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일.
드반드바(dvandva) 둘이 합하되 어느 하나가 우세하고 다른 것이 열세한 것 아니라 꼭 같은 자격으로 합함.
 
34. 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죽음이요, 또 모든 것을 나게 하는 근원이다. 나는 여성에 있어서 이름남이요, 아름다움이요, 말이요, 기억이요, 지성(知性)이요, 정절이요, 참고 견딤이니라.
 
35. 마찬가지로 나는 노래 중에서 브리하트사마요, 찬미 중에서 가야트리요, 달 중에서 마르가슈르쇼, 계절 중에서 꽃피는 봄이다.
규격을 맞춘 시 중에서 가야트리 만트라(Gayatri mantra)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상당히 숙련된 브라만이어야만 부른다. 가야트리 만트라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주를 나타낸다. 그 만트라는 영적으로 깊은 지경에 이른 사람이어야만 부를 수 있고, 그것을 불렀을 때 그는 초월적인 경지에 들 수 있다. 그 만트라를 부르려면 우선 물질세계의 법칙에 의하여 완전한 지경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베다 문명에서 가야트리 만트라는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그것을 브라만의 소리로서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인도에서는 동짓달 섣달(marga-shrsho)에 모든 곡식을 거둬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때를 가장 즐거운 시기로 알았다. 봄은 덥지도 춥지도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꽃이 만발하고, 봄에는 크리슈나를 기념하는 의식이 많다. 그러므로 가장 즐거운 때요, 지극히 높으신 크리슈나를 드러내는 때라 믿었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36.나는 부랑자의 도박이요, 번쩍 하는 자의 광명이다. 나는 승리요, 결정이요, 선한 자의 선이다.
 
37. 나는 브리슈니족의 바수데바요, 판두족의 아르쥬나며, 성자 중의 브야사요, 시인 중의 우샤나다.
크리슈나는 지극히 높으신 신의 본체시고, 바수데바(Vasudeva)는 크리슈나의 직접적인 발현이다.
판두족 중에서는 아르쥬나가 가장 잘났고 용맹이 있었으며 인간 중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를 대표한다.
「베다」경전을 통하는 무니 중에서는 브야사가 가장 훌륭하다. 그는 이 칼리 시대에「베다경」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여 보통 사람이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크리슈나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카비(kavis)는 무엇이나 통달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 카비들 중에 우샤나(Ushana)는 귀신들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성이 지극히 높고 통찰력이 있고, 정치적이요 또 영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크리슈나의 대표자다.
 
38. 나는 다스리는 자의 징벌이요, 승리자의 좋은 계책이요, 비밀의 침묵이요, 지혜자의 지혜니라.
 
39. 아르쥬나야, 모든 창조물에 씨가 있다면 그것은 나요, 움직이는 또 움직이지 않는 모든 물건 중에 나 아니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
 
40. 위대한 적을 정복하는 자야, 나의 거룩한 능력의 나타남에는 끝이 없느니라. 내가 지금 여러 가지로 설명한 것은 다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니라.
 
41.어떤 것이거나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능력있는 것이 있거든, 그것은 내 광명의 단편으로 된 것이다.
 
42.그러나 아르쥬나야, 이 많은 것을 네가 다 알아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이 온 누리를 내 한 조각으로 뒤덮어 지지 하고 있느니라.
한 조각 에캄쉐나(ekamshena), 한 부스러기, 단편.
하나이신 하나님이 산산조각이 난단 말 아니다. 이 우주는 무한의 부분적 계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요, 그의 영광의 한 가닥 광채로 비쳐진다는 말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초월적인 빛은 이 우주를 뛰어넘어, 시간 공간을 뛰어넘어서 충만하고 있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에 이르는「우파니샤드」의 제10장 거룩하신 능력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 있어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