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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

일본의 유교 - Wikipedia

일본의 유교 - Wikipedia


일본 유교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일본의 유교 (니혼노쥬쿄)에서는, 일본 에 있어서의 유교 에 대해 개설한다.

개요 편집 ]

유교 는,의 행위에 따라 문왕 무왕 의 법령을 신봉하고 공자  존중하며 그의 말을 중시하고 [ 1 ] 여름 ·  · 주삼 대의 예제를 답습하고 있는 사상체계로 기원전 중국  흥미.

일본에서는 유교는 학문(유학 ) 으로 받아들여지고 국가통치의 경세제 민사상이나 제왕 학적인 수용을 받았기 때문에 신도 , 불교 에 비해 종교 로 의식되는 것은 적다. 또한 중국에서는 유교는 '명교', '예교', '공교', '공자교'라는 호칭이 있어 종교로 인지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중세) 편집 ]

일본으로의 전래 편집 ]

일본 에 유교가 전해진 것은 불교 보다 빠르고, 계체천황 의 시대인 513년 , 백제 보다 오경박사가 도일한 이후이다. 게다가 이 이전에도, 왕인 이 『논어』를 가지고 도래했다는 전승이 『고사기』 등에 있어, 대체로 5세기 무렵에는 전래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유교의 사상은 다신교 를 봉사하는 신도 와 상담하기 쉬웠다고 생각되고 요출전 ] 유교보다 더 이전(4세기 무렵이라고 함)에 들어온 도교 , 유교와 동시기에 들어간 음양오행 사상을 아울러, 그때까지의 주술 적인 측면에 과학 적인 논거를 주어 후의 음양도 로 이어지는 소지가 태어났다. 요출전 ]

아스카 시대 - 헤이안 시대 편집 ]

아스카 시대 에는 불교의 보급에 열심이었던 소가씨의 대두 도 있어 아스카쿄를 중심으로 불교 유구가 많이 건조되었다. 하지만, 오토 미 의 변 이후의 황실 , 특히 사이메이 천황은 유교에 깊게 귀의했다고 생각되어 망부인 포메이 천황의 능을 팔각분으로 하거나 타부미네에 둔 양 쓰츠 미야 와  관련 유구 (  선석 ) 유적 , 아스카 수락 유적 , 광심의 渠등)에는 유교와 음양도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 후의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천무 천황 이 발포한 율령제 에도 유교의 영향을 볼 수 있고, 유교의 사상은 관양 양성에 응용되고, 또한 국가에서 연구를 실시하는 학문으로서 식부성의 피관  대학 기숙사 에서 명경도로 교수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과거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유교 본래의 가치가 정착하지 않고, 학문의 주체는, 실학적인 문장도와, 도경색이 강한 음양도로 옮겼다 . 이윽고 신불습합이 진행되어 구제에 더해 진수의 의미도 획득한 불교가 융성되어 공해의 '삼교지귀'에 의한 도교비판 등도 있어 쇠퇴 해 갔다 .

다만, 귀족 사회에 있어서 유교가 전혀 폐해진 것은 아니고, 「논어」에 대해서는, 전경 3년(879년) 8월에 양성 천황이 스스로 강의를 실시한 것이 「일본 3대 실록」으로 보이고 , 후지와라 요시히로 장의 일기 「대기」에 자주 기술이 등장하는 등, 교양으로서 널리 읽혀진 것을 알 수 있다 [2] .

가마쿠라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편집 ]

남송 의 주희 에 의해 시작된 주자학 은 일본에서는 송학이라 불리며, 일본에는 1199년 ( 정치 원년)에 입송한 슌슈가 유교의 전적 250권을 가져온 것이 시작된다. 이후, 도송한 엔센벤엔 이나 나카미엔 엔월들의 선승이나 원래 의 침공을 피해, 남송 으로부터 건너 온 지식인에 의해 전파되어 1299년 ( 정안 원년), 원래 보다 일본에 온 일산 일령이 가져온 주석에 의해 학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14세기 에 들어서 드러난 천대 종의 승현혜 는 주자학에 통하여, 후전추천황의 측근으로 봉사했다고도 한다.

남북조 시대 부터 무로마치 시대 에 걸쳐서는 ​​교토 고산 이나 가마쿠라 고산 등 주로 임제종 의 선종 사원 에서 유학이 연구되었다. 또, 15세기 전반, 우에스기 헌실 에 의해 재흥된 시모노국 의 아시카가 학교 에서도 유학의 강의가 행해졌다.

15세기 후반의 응인·문명의 난에 의해 교토 가 황폐했기 때문에, 공 가나 승려 등의 문화인은 지방으로 내려, 각지의 다이묘나 유력 무사 를 따게 되었기 때문에, 유학자도 지방에 확산했다. 계암현수 는 주방 의 오우치씨 와 히고 의 기쿠치씨 , 사쓰마 의 시마즈씨 등에 유학을 강구해, 사츠나미학파 의 기초를 방해했다. 토사의 미나미무라 우메켄 은 주자학을 강구해 남학 (海南学派)을 열었다. 남학은 근세 이후 교토를 중심으로 한 경학과 함께 유학의 일학파를 형성했다.

역사(근세) 편집 ]

에도시대 편집 ]

대성전(공자묘)(2010년 2월 3일 촬영)
오츠카 선교묘소 (도쿄도 분쿄구). 유장 전용 묘지.
무로하토소의 유식묘(오츠카 선유묘소 내)

에도시대가 되면, 그때까지의 불교 의 스님들이 배우는 흔들림으로서의 유교로부터 독립시켜, 하나의 학문으로서 형성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유불 분리 ) . 중국과 조선에서 주자학과 양명학 이 정좌( 좌선  의 행법을 없앤 순수한 학문으로 전래했으며, 특히 주자학은 막부에 의해 봉건 지배를 위한 사상으로 채용되었다. 조선 강간 의 영향을 받은 후지와라 히와와 의 제자인 임라산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섬기고 이후 임가가 대학 머리 에 맡겨 막부 문교정책을 통제했다.

제5대 장군 도쿠가와 츠나요시 는 막부의 문치 정치로 의 전환에 있어서 유학을 중요시하고, 하야시호오카를 종종 부르고는 경서의 토론을 실시해, 또 4서나 이경을 막신에게 강의한 것 외에 , 1690  ( 원록 3년), 공자묘를 유 시마 에 건립해( 유시마성당 ), 거기서, 임가의 사학원으로서 「학문소」가 개강되어 주자학이 교수되게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 는 개념적인 주자학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임가 당주가 연속적으로 젊어 죽는 등 한때 주자학은 침체하지만 마츠다이라 정신이 노중이 되면 저하된 막부  지도력 를 되찾기 위해 유학 가운데 농업과 상하의 질서를 중시한 주자학을 정학 으로 부흥 시켜 것”으로서 임가의 문인이 배우는 것을 금지하는 등 규제를 도모했다( 관정이학의 금 ). 1797년 (관정 9년)까지는 '학문소'를 임가에서 분리하여 '성당 학규'나 직제 제정 등 제도상의 정비를 진행시켜 막부의 직할 기관으로 삼았다. 이것이 막부교학기관으로서 창평사카학문소의 성립이다. 하야시 술사는 입양자로 하야시가에 들어가 시바노 구리야마 · 고가 정리 · 오토 니스 관정의 세 박사 ) 등과 함께 유학의 교학의 쇄신에도 힘을 다해 하야시가 중흥의 조라고 불렸다.

다음은 임가 학파의 주요 사제 관계를 보여준다(굵은 글씨는 임가 당주, 첨자는 대수).

임라산 1
 
 
 
 
 
 
 
 
 
 
林鵞峰2야마가 소행
 
 
 
 
하야시 봉오카 3
 
고학 (성학)
 
 
 
 
 
 
 
 
 
 
 
 
 
 
 
 
 
 
 
 
 
 
 
 
 
 
 
 
 
 
 
 
 
 
 
 
 
 
 
 
 
 
 
 
 
 
하야시 사카오카 4이노우에 란다이아키야마 타마야마오카시마 관산쿠로사와 카즈오카마쓰다이라
 
 
 
 
 
 
 
 
 
 
 
 
 
 
하야시 봉곡 5이노우에 카네시부이 타이무로
 
 
 
 
절충학하야시 술사 8
 
 
 
 
 
 
 
 
 
 
 
 
 
 
 
 
 
 
 
 
 
 
 
 
 
 
 
 
 
 
 
 
 
 
 
 
 
 
 
 
 
 
 
 
 
 
 
 
임단우 9토리이 요조하야시 복사 11사토 이치사키安積苮斎마쓰자키 케이도
 
 
 
 
 
 
 
 
 
 
 
 
 
 
 
 
 
 
 
 
 
 
 
 
 
 
임학사이 12사쿠마 상산야마다 카타야시오야 히로네야스이 숨결

주자학은 막정 및 거기에 속하는 여러 번에서 입신출세가 되었고, 임가의 다른 학파도 성장했다. 특히 키노시타 준 안문 아래에는 아라이 시라이시 , 무로하토 스미 , 아마모리 요시오 , 기온 난카이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장군 사무라이 강의 오쿠 유자 의 지위는 에도 후기까지 거의 하야시가가 독점했지만,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통치에서는 예외적으로 무로하토소가 1725년부터 1734 년 까지 오쿠 유자를 맡아, 오기 소우의 문인인 나리시마 노부 미遍역시 오 유자가 되고 있다. 그 후, 나리시마가의 사직이 막부의 정사 『고실기』(『도쿠가와 실기』) 편찬 등의 공적으로부터 문정 연간(1818-1831  )에 오우자에게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동가계로부터 양자 나리 시마 쓰쿠야마 와 요우손 나리시마 야나 기타 도 오쿠야가 되었다.

막부나 여러 번에서는 관학으로서 주자학이 중심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중국 본토나 조선과 달리 과거가 채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본토나 조선에서는 순차적으로 쇠퇴해간 양명학이 명맥 을 유지할 것 되었다. 대표적 학파로서 나카에토키가 일가를 짓고 그 제자인 구 마자와 소야마가 오카야마  에 집정하는 등 각지에 영향을 남겼다. 이른바 오미 상법 에 그 영향을 보는 사람도 있다. 또, 1724년 ( 우호 9년)에는, 오사카의 호상들은 공동으로 학문소  카이토 쿠도」를 설립해, 초대의 학주로서 미야케 석암이 맞이해, 주자학에 혼교한 양명학을 가르쳐 했다. 나중에 이 계열에서 나카이 타케야마 , 나카이 이겐 , 토미나가 나카기 야마가타부모모 , 사토 카즈사키 등이 배출된다. 이와 같이 주자학에 더해 양명학이 지보를 굳히는 가운데, 「전습록」등을 통해, 막부 말기에서의 유신 사상을 비롯한 각종의 운동(오오시오 헤이하치로, 요시다 마츠 다카스기 신사쿠 , 사이고 타카모리 , 카와이 가즈유스케 , 사쿠마 상산 , 야마다 카타야 등)에 영향을 미쳤다. 양명학 연구는 에도기를 통해 진행되어 중국 본토에서의 청말에 있어서의 양명학 재평가시에는 거의 잊혀진 양명학 좌파 이탁고의 '焚書'나 '장서'가 역수출될 정도였다 .

그 밖에 유교와 불교가 분리되는 한편, 야마자키 암사 이에 의해 신유 일치가 주창되고, 수가신도 등의 유교신도가 태어났다.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섭취하는 패원익처 등도 나타났다. 일본 유교의 큰 특색으로서 주자학이나 양명학 등의 후세의 해석에 관계없이 논어 등의 경전을 직접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성학(고학), 고 의학 , 고문 사학  의 고학 이 , 각각 야마가 소행 , 이토 히사사키 , 오기 소우 에 의해 시작되었다.

특히 야마가 소행은 주자학 을 비판하고 막부에서 처벌됐다. 그는 고학 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확립하고 관문 5년(1665년) 천지로 이루어진 자연은 인간의 의식과는 독립적인 존재이며 일정한 법칙성으로 자기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이 생각은, 문인에 의해 정리되어 야마가류 로서 계승된다. 다만, 소행이 주창한 '사도'는 '말하더라도 개조할 수 없는 주군이라면 신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3] 등 '두 군을 섬기지 않고'라는 종래의 무사도의 대극  있어 주석 1 이것이 중조 中華) 이다 .

에도시대 중기에 쓰여진 하가키 에서는 당시 주류가 되고 있던 유학적 무사도를 '상 방풍 이 붙은 무사도'라고 비판하고 있어 번내에서도 금서 취급을 받았다. 이 시대에는 일정한 비판도 있었지만, 안정기가 오랫동안 계속되면 봉건사회를 지지하는 유교적 사상이 정착했고, 막말 말에는 병학이나 무사도의 실용성이 상실되었다.

에도시대를 통해 무가층을 중심으로 유교는 일본에 정착해 미토학 등에도 영향을 받았고, 이윽고 존왕 추이 사상에 연결되어 메이지 유신에 대한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일반 민중에서는 이시다 우메이와 의 석문심학 등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학문으로서의 유교사상은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

유학의 체계화와 입신출세라는 실익에 의해 무가층에 침투한 결과, 유사하게 대비해 기술을 계승할 필요성으로부터 마찬가지로 체계화되어 갔던 병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 그때까지의 병학은 실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전 부대의 운용이나 편제 등 현실적인 내용이 중심이었지만, 에도 시대 이후는 유학의 영향을 받아 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게 되었다 했다. 또 생존술과 처세술적인 의미였던 무사도도 주군에 대한 충의 등 막번체제를 지지하는 사상과 윤리를 전수하는 학문으로 변화했다.

역사(근대) 편집 ]

메이지 시대가 되면, 유교적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에도시대부터 일부 행해져 온 신불 분리 운동이 격화되어, 폐불 훼석이 행해졌다 [ 5 ] .

1885년 에 유럽주의자 당시 문 부경모리 유례에 의해 유교적인 도덕교육을 규제하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1889년에 암살되었기 때문에 다시 교육의 유교성이 강해졌다[6 ] . 모토다 에이즈카 등 궁중의 보수적인 한학자의 영향에 의해, 1890년 제정의 교육 칙어 등에 유교의 충효 사상이 도입되어 장려되었다. 이노우에 테츠지 로는 에도시대의 유학을 다룬 3부작 '일본 양명학파[고학파, 주자학파]노철학'을 저술해, 이 분야에 있어서의 연구를 개척했다.

『논어』의 한절이나 주자학의 가르침이 인용되는 것은 많아 도덕과 윤리의 고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논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어 번역이나 해설서가 다수 간행되고 있다.

시부자와 에이이치 는 『논어와 산반』을 저술하고 『논어』를 거처에 윤리와 이익의 양립을 내건 ‘도덕경제합일설’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근대경제와 유교사상의 융합을 도모했지만 널리 보급 하지 않았다. 또, 전전 전후의 일본의 정재계에 은연한 영향을 준 야스오카 마사아츠는, 정통한 유교 사상의 후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공적으로는 양명 학자라고 칭했다.

한편 ' 실학' 의 중시를 주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 는 유교를 망설로 삼아 엄격히 비판했다. 또 쓰다 좌우길은 '시나 사상과 일본', '문학에 나타난 우리 국민사상의 연구' 등으로 유교 등 중국의 영향을 배제한 문화사를 그리려 했다.

역사(현대) 편집 ]

패전 후, 교육 칙어 , 군인 칙사 , 전진훈 등은 철폐되었다 [7] . 웨버 나 마르크스 의 연구가 활발해지면 「아시아적 정체성」을 낳은 존재로서의 평가가 되게 되어, 역사 교과서 등에서도 이러한 평가가 정착하고 있다[8][ ] . 와쓰지 테츠로 는 패전에 이른 일본의 정체의 원인을 임라산 의 유교 정책과 쇄국 정책에 요구했다 [10] [11] .

유교를 종교로 파악하는 연구자는 소수파이지만, 학술 연구에서 유교의 본질을 종교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것은 야마시타 류지·가지 신행 이다 [ 12 ] . 야마시타는 천지귀신이나 조상에게의 제사를 유교의 중심에 두고, 카지는 종교를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해 조상숭배를 유교의 본질로 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유교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이케다 히데조 등으로부터 비판이 전해지고 있다.

전후의 유교운동으로서는 신좌익 에서 보수파로 전향하여「봉건주의자」를 칭한 오지영이 있지만 , 보수파 사이에서도 「일본이 유교국가가 아니다」라며 그 점을 평가하는 논객도 감금소( 켄트 길버트 등), 평가는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

현대 문화인류 학자 호프스테드 (헤르트호프스테드, 네덜란드인) 등에 의한 실증적 연구 등에서는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이 국제 비교상 동종 문화권 으로 인식 된다 .

일본 유학자 목록 편집 ]

고대·중세
근세
주자학
사나미학교 (주자학의 일파)
도사 주자학( 남학 )
미토학 (주자학의 일파)
양명학
고학 (성학)
고의학
고문사학
고주학
절충학
고증학
근현대

유교를 종교로 믿지 않고 유교를 연구하는 학자는, 「유학자  라고 말하지 않고, 「유교 연구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요출전 ] . 다만 교토대학 교수의 요시카와 코지로 와 평론가 오지에 이는 스스로를 유자라고 주장하고 유교의 입장에서 다양한 입론을 하고 있다.

관련 항목 편집 ]

공자묘는 각국에 존재하지만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에 막부가 유교(유교 중에서도 특히 주자학)를 학문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유교(주자학)를 강의한 막부나 각번의 학교 에서는 공자 을 모시는 묘가 지어져 숭경되었다.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 야마가 소행은 “자신이 소속하는 공동체에 대한 윤리(주가에 대한 충의 등)와 하늘에서 받은 윤리(천륜)가 충돌할 경우 무사는 천륜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
  2. ^ 시라시마 연고 저택(뒤의 「수도관」)을 옹호하는 히로시마 번 아사노야는 소행이 비판한 주자학을 번학으로 했다. (주자학 이외의 소행의 고학등의 교수는 학문소에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3.  소행의 후손은 히로사키 번 과 히라도 번을 섬겼다. 쓰가루가와 마쓰우라가는 근현대에 천황가 의 친족이 된다(정인친왕비화자와 나카야마 1위국 경자).

출처 편집 ]

  1. ^ 반고, 전한, 『한서·예문지』
  2.  고카츠 타카이치 '중국 중고 학술과 사회'호리칸, 2021, P152-153.
  3.  『야마가 어록』권 21일 「사도」
  4.  『중조사실』 관문 9년(1669년)
  5. 가시와라와 메이지 유신 7 | 오사카 부 가시와라시
  6. 히로시마 류타로 「모리 유례의 도덕관 : 문상기의 덕육 정책면 에서 1346-664X , NAID 120006771926 . 
  7. 아라카와 紘 「교육 기본법과 유교 교육」 「동방 학지」 제39권 제1호, 아이치 동방 대학, 2010년 6월, 37-52페이지, ISSN 0287-4067 , NAID 110007603043 .  
  8. 주자학의 전통은 현대 사회의 위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 허프 포스트 LIFE
  9. ^ 나가이 카즈「전후 마르크스주의의 아시아 인식
  10. ^ 와츠지 테츠로 「쇄국 일본의 비극
  11. ^ 와즈지 테츠로 묻힌 일본 ――키리시탄 도래 문화 전후에 있어서의 일본의 사상적 정황――
  12. ^ 야마시타는 「유교의 종교적 성격」(1968년, 「주자학과 반주자학」연문사, 1991년 소수)・「공자를 말한다」(「NHK 마음을 요한다」텍스트, 1993년)로, 카지는 『공자-시를 넘어 새롭게』(1984년, ISBN 4081850011 )・『유교란 무엇인가』(중공신서, 1990년, ISBN 4121009894 )・『침묵의 종교-유교 』 그 지론을 전개하고 있다.

참고 문헌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