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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9

알라딘: 백년의 급진

알라딘: 백년의 급진

백년의 급진 - 중국의 현대를 성찰하다  | 현대중국의 중국의 사상과 이론 1  
원톄쥔 (지은이),김진공 (옮긴이)돌베개2013-10-07



백년의 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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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아편전쟁 이후) 주간 31위, 역사 top100 9주|Sales Point :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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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쪽145*205mm395gISBN : 978897199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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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근현대사(아편전쟁 이후)
시리즈현대중국의 중국의 사상과 이론 (총 4권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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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향과 귀향 사이에서 - 농민공 문제와 중국 사회

탈정치 시대의 정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

백년의 급진 - 중국의 현대를 성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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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중국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혁신적 사상가 원톄쥔의 저작 최초 번역. 이 책은 총동원체제, 개혁개방 등 사회주의 중국이 지난 백년간 걸어온 과정을 반추해보고 “어떻게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현대화의 역사를 대할 것이며, 어떻게 적합한 발전의 경로를 선택할 것인지를 성찰”한다.

21세기 중국이 기획하고 있는 국가 정책과 향후 중국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원톄쥔의 사유를 알아야 한다. 원톄쥔은 현재 중국의 변화를 견인하는 사상가로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금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서구식 현대화와 도시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이론가로서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로 직면한 현대화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중국은 어떤 길을 가는가

1부 백년의 급진을 성찰하다

중국에게 ‘백년의 급진’은 무엇이었는가
‘백년의 급진’과 이별을 고하다 | 자본의 극단적 결핍에서 3대 자본의 과잉으로 | 청말, 민국 시기의 자본 결핍과 경제 붕괴 | 신중국의 위기는 민국 재정금융 위기의 연장 | 소련식 경제 건설의 부작용 | ‘계획’ 없는 계획경제, 1970년대의 산업구조 조정 | 1990년대 이후의 변화와 새로운 모순의 등장

중국이 겪은 여덟 차례의 위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험 위에서 분석하자 | 1950년의 위기: 신중국 자신의 위기가 아니라 민국 위기의 연속 | 위기에 대한 대응: 농민을 전통으로 회귀시키고, 현대 경제와의 연계를 차단한 토지개혁 | 1950년대는 ‘극좌’가 아니라, 공업화와 친자본을 추구한 시기 | 농민을 산업노동자로 만드는 일은 진보인가 퇴보인가? | 1960년대: 지식청년의 하향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대가 | 1970년대: 외자 도입이 초래한 재정 적자 위기 | 1980년대: 짐 보따리를 내던지는 것이 곧 개혁 | 1990년대: 화폐화의 가속은 구소련의 교훈 덕분 | 21세기: 생산 과잉의 위기 해결에 필요한 향촌사회

‘중국의 경험’과 ‘비교 우위’
현대 중국이 실제로 경험한 것 | 중국의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소련과 동유럽 해체의 이유 | 치열한 듯 보이지만 사이비似而非인 논쟁들 | 중국 향촌에 대한 실험적 연구 | 중국이 지닌 ‘비교 우위’의 실체

개혁 이래 대외개방 과정의 변화와 그 내재적 논리
1980년: 미완의 개방, 그리고 적자의 압력에 따른 개혁 | 1988년: 도시의 이익집단이 주도하는 ‘원재료도 국외에서, 판매도 국외에서’ 모델 | 1994년: 외환 적자 상황에서의 환율 조정 |21세기: 국제경제의 새로운 순환 속의 대외개방 | 중국이 직면한 새로운 과제


2부 중국의 길을 묻는다

삼농으로 돌아가자: ‘오바마-김정일 딜레마’를 풀기 위한 토론
제도의 비용 이론: ‘오바마-김정일 딜레마’ | 세기의 교체기에 중국이 직면한 중대한 도전 | 중국사회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

중국 농촌의 토지 사유화는 절대 안 된다
삼농 문제 해결과 거리가 먼 서구 이론 | 토지의 규모의 경제는 특정 사례에 국한된 서구 이론
일 뿐 | 서구의 교조적 가르침에 충실한 개발도상국 | 중국 신농촌 건설과 배치되는 토지 사유화

삼농 문제에 대한 세기적 성찰
중국의 문제는 무엇인가? | 두 가지 기본적인 문제 | 발전에 대한 제약 요인과 정책의 선택

발문 원톄쥔의 집요한 질문
해제 6억 중국 농민의 대변자, ‘三農’ 원톄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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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3년 10월 19일자 '300자 다이제스트'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3년 10월 13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원톄쥔 (溫鐵軍)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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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베이징 출생. 현재 중국인민대학 교수이자, ‘농업 및 농촌발전 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1983년 중국인민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연구실,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농업부 농촌경제연구센터,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회 등에서 근무했으며, 1999년에 중국농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10년 이상을 군대와 농촌 등 기층 현장에서 일했고, 현장의 정책 연구에 20년 이상 종사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른바 ‘삼농三農 문제’를 처음 제기하여, 중국의 최우선 어젠다로 확립했다. 그 덕... 더보기
최근작 : <삼농과 삼치>,<여덟 번의 위기>,<백년의 급진> … 총 6종 (모두보기)
김진공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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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문예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하대학교 국제어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 루쉰 (상, 하)』, 『백년의 급진』,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탈정치 시대의 정치』(공역), 『베이징 컨센서스』(공역)를 번역 출간하였다.
최근작 : <중국현대문학론 (워크북 포함)> … 총 9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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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꽃가루받이 경제학>,<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등 총 608종
대표분야 : 역사 4위 (브랜드 지수 666,959점), 음악이야기 4위 (브랜드 지수 22,574점), 한국사회비평/칼럼 9위 (브랜드 지수 50,725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국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혁신적 사상가 원톄쥔의 저작 최초 번역 출간
당대 중국의 사상 지형도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원톄쥔(溫鐵軍)의 저작 『백년의 급진―중국의 현대를 성찰하다』가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총동원체제, 개혁개방 등 사회주의 중국이 지난 백년간 걸어온 과정을 반추해보고 “어떻게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현대화의 역사를 대할 것이며, 어떻게 적합한 발전의 경로를 선택할 것인지를 성찰”한다.
21세기 중국이 기획하고 있는 국가 정책과 향후 중국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원톄쥔의 사유를 알아야 한다. 원톄쥔은 현재 중국의 변화를 견인하는 사상가로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금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서구식 현대화와 도시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이론가로서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로 직면한 현대화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중국의 현대’, 소농경제가 자본주의적 현대로 바뀌어가는 과정
원톄쥔은 중국의 현대는 관개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소농경제가 서구식의 자본주의적 현대화로 바뀌어가는 과정이었다고 분석한다. 자본의 결핍에서 자본의 과잉 상태로, 산업화 이전에서 산업화의 단계로 그리고 산업화의 단계에서 다시 금융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중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중국의 현대는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가 그대로 수용되는 과정이었다. ‘백년의 급진’이라 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삼농 문제, 지속가능한 발전과 중국사회 안정의 열쇠
서방세계의 자본주의적 현대화, 도시화가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이 될 수 없고 ‘중국적 특색’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원톄쥔은 ‘삼농’(三農) 문제에 주목한다. 삼농은 농촌, 농민, 농업을 가리키는데, 1996년에 원톄쥔이 처음 제기하여 2000년대 초반에 중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개념이다.
원톄쥔에게 삼농의 문제는 “농촌을 살려야 한다”라고 하는 듣기 좋은 당위적 주장이 아니다. 삼농은 중국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배후이다. 중국이 경제 위기를 겪을 때마다 농촌의 소농경제가 지니고 있는 저력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다수가 아닌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인구의 다수인 농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들은 산업화의 비용을 고스란히 치렀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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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급진을 읽어나가면서 중국의 현대 발전 과정을 전체적으로 훑어나가게 되었고 동시에 작금의 중국의 상황에 대한 진정한 토론을 진행하는 윈태쥔과 같은 학자가 있음에 부러웠다. 동시에 한국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좌우를 떠나서 진정으로 한국을 고민하는 학자가 있는가  구매
수잔 2019-02-2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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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11 빌려온 책마실 외 새창으로 보기
바다가 보이는 카페가 호젓하다옛그림을 보는 법 ㅡ 백년의 급진 을 본다. 톤이 높은 손님들 톤에도 책들은 입감이 좋다매화와 달빛 .ᆞ 그리고 은은한 눈풍경ㅡᆞᆞᆞ
여울 2014-03-1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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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삼농문제에서 우리의 농업을 생각하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20세기후반 중국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발전'이라면 농민은 발전의 예외지대에 놓인 존재이거나  이발전을 가능하게 하는데 소요되는 보이지 않는 소모품 이었으며 ,때로는 발전에 따른 각종위기를 떠넘기기에 적합하고 편리한 대상이었다.

원테쥔은 이러한 발전 지상주의 시대에 중국농민의 자리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양심의 목소리로 대표한다. 그는 오늘날 중국에서 처해있는 상황을 삼농문제로 나타난다고 진단한다.

사회계층 혹은 계급문제로서의 농민문제가 그 첫번째요, 인재와 자본의 유출에 의해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내부적 해체에 직면한 지역문제로서의 농촌문제가 두번째이며, 산업으로서의 농업이 직면한 경쟁력의 상실과 저소득 구조의 고착화라는 산업문제로서의 농업문제가 세번째이다.  ... 244P

 

원테진은 중국농촌이 처한 삼농문제의 역사적 근원이 토지 대비 과도한 인구라는 자연적 조건에 , 1949년 이후 국가가 농업부문에서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국가주도 공업화에 투자하면서 생겨난 구조적 모순,그리고 외자도입과 연관된 경제의 주기 변동에 따라 나타난 부담을 농촌에 전가함으로써 생겨난 부가적 모순이 종합된 결과라고 말한다. 이제 합당한 조치들이 농민을 위해 마련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테쥔의 주장과 노력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켜 2002년부터 정부 핵심과제 1호에 농촌관련정책 삼농문제가 핵심적 정책과제로 정착되었다. 농가소득증대,농업세와 각종잡부금폐지,농산물 가격안정,수리시설보수와 증축, 의료보험제 실시등 농민들의 삶의질 향상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중국의 농촌문제를 들여다보며 우리 농촌문제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오랜시간 서구식 발전모델을 그대로 따라온 결과 망가질대로 망가져 농촌인구 절벽시대를 맞이하고있다.  우리상황을 직시하고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하고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지만 복잡한 미로에서 새길을 찾는것은 쉽지가 않다. 

 농업문제에 관심있는분들은 한번쯤 읽어볼만하다고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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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2017-12-2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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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백년의 급진 새창으로 보기
인구팽창과 80%의 농민이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어떻게 근대화, 공업화를 이루었는가에 대한 내용.마오쩌둥만의 중국식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만, 저자의 강연내용을 묶어낸 책이라 그런지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hyss 2015-02-1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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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이 중국의 탈출구라는 학자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저자 원태쥔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무서운 속도로 경제성장을 해 온 중국 내에서, 이제는 대외개방과 글로벌화보다는 농촌 안으로 가야할 때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즉, 그는 중국 내 주류 계열에서 옆으로 한발 벗어난 비주류 경제학자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문제는 수십년 간 중국 중앙의 1호문건이었고, 저자는 직접 농촌으로 들어가 대안농업 등을 시도하였기에, 농촌이나 식량문제가 이슈로 거론될 때마다 언론의 관심을 받아온 스타 학자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Pros는 농촌, 중국적, 가족농, 자립, 계획 등이며

Cons는 개방, 친자본, 금융, 종속, 부채, 서구식, 글로벌화 와 같은 것이다.


저자의 비용전가론에 의하면, 모든 초기 발전에는 자본의 집중이 필요하고, 발전이 계속되면 자본의 과잉이 일어나는데, 서구의 경우에는 이 비용을 외부 식민지를 통해 해결했고,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 다른 거대 개발대상국들은 잉여 농민이 도시빈민화가 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으나, 중국의 발전은 거대한 농업과 농민의 희생이 이러한 비용을 흡수(모순의 내부화)함으로써 성공적인 개발이 가능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제는 자본의 과잉이 초래하고 있는 현재의 위기를 농촌의 개발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농촌의 개발은 토지의 사유화와 거대 농업화와 같은 규모의 경제를 통한 서구식 농업이 아니라, 가족이 중심이 된 향촌규모의 전통적 농업 개발과 생태 농업이 중국에 적합하다고 말한다(성진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의 21세기 농업방향에 대한 의견인데, 참 독특하다.


너무 독특해 이해 안되는 부분도 여럿 있다. 가령 1950-60년대 수천만명의 죽음이 발생한 대약진 운동은 비판받는 정책으로 생각해 왔으나, 저자에 따르면 이는 소련의 지원 중단으로 불가피하게 시행된 상부구조로 이것의 성공여부는 따로 판단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p46). 심지어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시대를,

"비록 수천수만의 농민들이 국가 공업화를 위한 자본 축적의 단계에서 희생되었지만, 중국은 결국 최단시간 내에 이 단계를 뛰어넘었고,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공업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 특수한 역사적 단계가 바로 '마오쩌둥의 시대'이다. 또는 모든 사람들이 헌신해서 천하를 공평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영웅시대'하고 일컫기도 한다" (p230)라고까지 말한다


앞으로 중국에서 농업의 발전을 통해 생태영농 등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정도의 주장이라면 저자의 논지에 어찌 이의가 있을까마는,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개방, 금융, 글로벌화 대신 향촌 경제 중심의 개발로 가야한다는 하나의 주장이 너무 강해서, 책을 읽으며 여러 부분에서 선뜻 와닿지 않은 내용들이 많았다. 중국은 전체 유럽을 다 합친 것만큼 큰 나라이니, 유럽에서 공업국가 독일과 농업국가 덴마크가 공존하듯이, 글로벌화와 개방을 통해 성장한 동쪽 도시의 개발과, 동쪽의 잉여를 이용한 서쪽의 향촌 개발이 양방향으로 지속공존할 수 있는게 중국일 것이라고 믿어보는 나였기에 더욱 더 그러했다. 농민 비중이 80%가 넘는 시기에 농민을 중심으로 중국은 공산혁명을 일으켰고 지금은 40%를 밑돈다. 따라서 생산에서 10%를 차지하는 농업과 40%의 인구를 구성하는 농민의 비중을 이제부터 어떻게 프로답게 다루어 나갈지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아직도 농민 비중이 50% 이상인 인도나 베트남도 마찬가지로 살펴볼 주제이고. 참고로 40년 전 우리나라의 농민은 1,400만명으로 인구의 절반에 육박했는데, 지금은 250만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5% 정도이다.


지난 번에 읽은 덩샤오핑 평전과 비교해볼 때

덩샤오핑의 사회주의는 글로벌 개방을 통한 시장개발에 방점을 찍은 '중국적 개방경제론자'였다면

원톄쥔의 사회주의는 자족경제식 향촌개발을 주장하는 '중국적 농촌경제론자'로 보인다.


흥미로운 관점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등 세계경제에 급격히 편입된 이후의 일들을 바라보는 두 시선이다. 중국 내 농촌론자인 저자는 이를 기생적인 세계금융의 폐혜, 도농격차 등으로 중국에는 부정적인 위기로 보는 반면, 네오콘 등 미국의 반중 정서를 지닌 정치그룹들은 미국 내 온건파들이 중국을 세계경제에 편입시키는 실수를 함으로써 중국이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이 되도록 방치했다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같은 일을 두고 내외부에서 자국 중심으로 바라보는, 아이러니한 두 개의 질투어린 우려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종종 자기 울타리 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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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무 2020-11-0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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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8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참세상 기사게시판 :: 낡은책 :: “멍한 상태로 세상에 걸어나온 한국” -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멍한 상태로 세상에 걸어나온 한국”
[낡은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비숍, 이인화 역, 살림, 1994, 603쪽)
이정호(민주노총 미비실장) 2010.10.1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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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은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

1895년 청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을 본적이 있는가. 1895년 1월 패배한 동학혁명의 주인공 김개남의 목을 끌고 다니며 시체의 입에 흙을 집어넣는 서울 시민들의 꼴을 본적이 있는가. 지독한 근시에 병약했던 순종의 세자 때 얼굴을 본적이 있는가.

이 책은 115년이나 된 낡은 책이다. 영국 여성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 이 방대한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두 권으로 냈다. 정확히 90년 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도 이 책의 1898년도 판이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31년 영국 요크샤 주 보르브릿지 홀에서 태어나 이 책을 쓸 때 이미 60대 중반의 할머니였다. 왕립 지리학회에 들어간 최초의 여성이던 비숍은 1894년 2월말 한국에 도착해 이후 4년 동안 4번이나 한국을 드나들면서 고종과 명성왕후, 왕세자 등을 4번이나 알현하고 1897년 1월 서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뗏목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 고담삼봉이 화려한 단양까지 갔고, 다시 여주에서 동북으로 말을 타고 금강산을 둘러봤다. 다시 일산을 넘어 평양을 넘어 북쪽으로 여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북으로 연해주까지 조선인들을 만나러 다녔고, 다시 두만강 국경을 넘어 원산까지 내려왔다. 중국과 만주의 조선인도 봤다.

잘 생기고 똑똑한 한국인

이 책은 지리학 지식을 활용한 전문여행기다. 비숍 스스로의 표현대로 “미약한 독립 왕국(조선)이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구한말의 우리의 모습이 생생하다. “공격적인데다가 서로 담합한 서구 열강들은 이 유서 깊은 왕국의 전통에 조종을 울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서론)는 비숍의 표현은 너무도 적절하다.

비숍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비숍은 나름 객관적으로 한국을 보려고 했지만 결국엔 서구 제국주의의 눈으로 한국을 볼 수밖에 없었다. 비숍은 동학혁명군을 반란군이 아니라 ‘무장한 개혁자’로 봤다. 조선 백성은 일본, 중국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기까지 한데다가 활기차고 영민하다고 봤다. 군사정권 시절 내내 자원빈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게도 비숍은 금광이 많고 석탄의 품질은 최상급이라고 소개했다. 비숍의 눈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갖고 있고 문자해독률도 상당히 높았다. 도덕적 우월성과 치안 등 사회제도도 높이 평가했다. 반면 금강산에서 본 한국의 불교를 우상숭배로 여기는가 하면, 원산에서 본 천일염을 아주 지저분하고 순도가 떨어진다고 기록한 부분에선 우습기까지 하다. 한국의 감옥제도를 일본식으로 민주개혁했다고 기록한 부분도 코미디 수준이다.

이 책을 번역한 이인화는 80-90년대 운동권 뒷이야기를 그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와 정조와 정약용을 다룬 <영원한 제국>, ‘박정희 평전’으로 시작해 미처 끝내지 못한 <인간의 길>을 쓴 소설가다. 지금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다. 대학원 때 제 스승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써 유명세를 치렀다. <인간의 길> 서문엔 “내가 죽어 저승사자가 ‘당신은 뭐하던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소설 인간의 길을 쓴 소설가’라고 답하겠노라”라고 박정희 숭배론 수준의 기염을 토했다.

소설가 이인화가 100년만에 첫 번역

이인화는 이 책을 1994년에 처음으로 번역했다. 이인화는 이 명저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이유를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을 몰라서 번역하지 못했다”고 토로하면서 7장에 나오는 ‘벽절’이란 절이 신륵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전에 내가 죽산 조봉암을 [낡은책]에 소개하면서 자유시참변을 조봉암의 표현대로 조선의 공산주의 세력간의 파벌싸움으로 기록하자 독자 한명이 덧글로 “내 다른 건 몰라도 자유시참변을 공산당 파벌간의 책임으로 말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소! 그건 소련공산당이 이르쿠츠파를 앞세워 독립군을 살상한 사건이오. 님 말씀대로라면 명성황후도 일본이 아니라 대원군이 죽인게 맞소!!!”라고 항변했다. 자유시참변은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중고등학교 반공교과서인 도덕과 국민윤리 시간에 같은 이름으로 등장한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다. 덧글의 독자에겐 죄송하지만 비숍의 눈엔 명성황후를 죽인 게 일본이기도 하고 대원군이기도 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 명성왕후를 시해하러 들어온 일본인들은 용산의 대원군 집에서 대원군과 함께 대궐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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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흥미로운 나라 한국

나는 1894년 겨울(2월)과 1897년 봄 사이 4번 한국을 답사했다. 처음 한국은 가장 재미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곧 청일전쟁 동안 불안 속에 알 수 없는 한국의 운명을 깨달으면서 강렬한 흥미를 가졌다. 내가 믿을 만한 한국 관련 자료는 미션스쿨을 운영하는 외국인 교사들의 것이었다.

한국의 영국 총영사 힐리어, 한국정부의 재정고문 브라운, 러시아 공사 베베르, 존스 목사와 게일 목사에게 관대한 도움을 받았다. 제물포 영국 영사 윌킨슨이 쓴 <한국 정부>가 있다. 이 책에 나온 동판화들은 셋만 빼고는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토대로 직접 그렸다.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 1897년 11월 이사벨라 버드 비숍

멍한 상태로 세상으로 걸어나온 한국

1894년 겨울 내가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유럽 사람들은 한국이 그리스 연안 어디쯤 있다고 했다. 서구에 한국을 처음 소개한 문헌은 리쇼펜 남작의 중국에 관한 책의 575면에서다.(9세기경 아라비아 지리학자 코르다베의 책 <제국지>)

한국인들은 중국인, 일본인과 매우 다르다.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활기차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cm다. 이는 A. B. 스트리플링이 1897년 1월 서울지역에서 1060명의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재어본 값이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지극히 건전하다. 인구는 1천2백만~1천3백만명이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다. 여자들은 격리돼 열등한 지위다. 한국은 남북으로 965.6km 동서로 217.2km다. 면적은 영국보다 조금 작다.

한강은 273.5km 이상이 상업상의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된다. 모든 항구가 겨울에 얼지 않는다. 좋은 항구는 부산과 원산이다. 실용적인 식물은 거의 없다. 인삼은 예외다. 한국 세관에 따르면 1896년 총 1,360,279달러 어치의 사금을 수출했다. 밀수출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석탄의 품질은 최상급이다.

한국 왕의 권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한국은 13개 지방구역과 360개의 단위 행정구역이 있다. 1897년 1월 현재 부산 원산 제물포의 항구엔 11,318명의 외국인 거주자와 266개의 외국 사업체가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인이 10,711명(230개 회사)이다. 영국인은 65명이다. 중국인은 2500여명이다. 도로의 불편함은 악명 높다. 한국 민족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알파벳, ‘언문’을 갖고 있다. 한국인의 문자해독률은 상당히 높다. 한국에는 국민 종교가 존해하지 않는다. 이 미약한 독립 왕국은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다. 공격적인데다가 서로 담합한 서구 열강들은 이 유서 깊은 왕국의 전통에 조종을 울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

왜색 도시 부산

나가사키항에서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1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동강난 그림자 섬이라는 뜻의 절영도(사슴섬)는 부산항을 보위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영도에 석탄 공급지와 검역병원을 세웠다. 1883년 부산항 개방 때 거주 외국인 수는 1500명에서 1897년엔 5564명으로 늘었다.

낙동강은 80.5km를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고 정크선으론 사문까지 160km를 더 간다. 가벼운 보트로는 연안에서 274km 상류의 상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부산의 거주지는 일본풍이다. 한국인은 중국인 일본인과 닮지 않았고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나는 부산 구 시가지를 조사하려고 영국 여인 우나(Una)와 동행했다. 우나는 한국어를 거의 토착인처럼 구사했다.

제물포에서 마포 가는 길

제물포의 현직 영국 부영사 윌킨슨이 나를 마중나와 지극한 호의로 환대해 주었다. 무역은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제물포 주민들은 6천7백명이다. 나는 제물포에서 마포까지 6명의 가마꾼이 드는 교자에 앉아 7시간을 갔다.

1883년의 통상조약들 이후 외국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기들의 거주지를 마련하고 한국의 수도에서 한국적인 것들을 서서히 훼손시켜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변화는 건설중인 명동성당이다. 인구 25만명으로 추산되는 서울은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다. 이만큼 좋은 입지조건을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유럽에는 서울처럼 치안이 잘 유지돼 여자들이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지 않고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도시가 전혀 없다. 그러나 서울의 불결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남산 기슭엔 5천명에 육박하는 일본 조계가 있는데 대조적으로 매우 청결하다. 한국의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다.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서울과 한강의 나룻배 여행

1884년 개항되자 ‘미국 감리교회’와 ‘북 장로교회’가 서울에 왔다. 한국의 개신교 기독교인 수는 777명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는 28,802명이다. 젊은 선교사인 밀러씨가 나의 나룻배 여행을 도와 주었다. ‘왕’이란 이름의 중국인 하인을 통역 보조로 제공해 주었다. 1894년 4월 14일 밀러씨의 하인인 이체온 씨를 만났다. 우리의 배는 하루 16km 이상은 결코 가지 않았다.

남한강 상류로 가는 배 위에서 5주 동안을 보냈다. 사방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한강은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한다. 나는 한강에서 하루 평균 75개의 정크가 물길을 오르내리는 걸 봤다. 한강과 영원 사이 강변에만 176개의 마을이 있었다.

여주에서 본 한국의 기생충들

나는 배 안에서 버로즈나 웰컴즈 등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으며 마시는 오후 차시간은 결코 빠뜨리지 않았다. 여주에 도착한 건 4월19일이었다. 여주는 한국 군중이란 비록 적대적이지 않더라도 다루기 어렵고 몹시 불쾌하다는 걸 느끼게 한 첫번째 마을이었다.

주인집 부인은 매우 예쁘고 더할 나위 없이 고운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내 옷을 이리저리 조사하거나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거나 모자를 벗겨 써 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 펴 보기도 하며 내 머리핀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고, 비명 같은 웃음소리를 지르며 내 장갑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14개나 이어지는 방들을 보여 주었다. 번쩍이는 야한 금박 속의 큰 거울이나 프랑스식 시계가 있었다. 돈으로 처바른 저속함을 보여줬다.

집주인은 18살의 젊은이다. 프랑스식 시게, 독일식 거울, 미국산 담배, 벨벳 덮개를 깐 의자 등 값비싸고 번지르한 외제품에 대한 열광이 돈 있는 젊은 멋쟁이들에게 번져가고 있다. 이런 것은 한국인의 소박한 근면성을 저속하게 타락시키고 있다. 난 내 배의 검소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여주에 단양까지

한국 사람들은 과음하는 관습이 유난스럽다. 주정뱅이를 보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한국의 발효된 술은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강한 냄새와 토할 것 같은 맛을 내는 흰색 술까지 다양하다. 뀰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뀰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곶감 말리는 걸 보고, 잘못 이해한 듯하다.)

서울에서 떠난지 13일만에 단양에 도착했다. 원주라는 중요한 도시까지 약 60리 정도 되는 운항로가 있다. 남한강은 단양에서 북쪽으로 길고 거센 급류를 형성한다. 우리를 보러 먼 길을 걸어와 한번도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그 댓가로 달걀을 내 놓았다. 한강의 미는 가장 아름다운 강 마을인 도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의 악담 중에는 기득권 계급인 양반이나 귀족들에 대한 것이 아주 많다.

가평에서 다시 춘천으로

마재로 가는 분기점에 왔을 때 뱃사람들은 되돌아 가고 싶어했다. 한참 동안의 언쟁 끝에 결국 계약을 완료하기로 합의하고 서늘하고 화창한 오후에 북한강으로 들어섰다.

이틀을 혹독하게 작업한 후 우리는 아름답게 자리잡은 ‘가평’ 읍에 도착했다. 춘천은 요새였다. 약 3백명의 주둔군이 있었다. 인구는 3천명에 달했다. 춘천에 와서는 원산으로 가는 역참에서 멈춰 육상 여행을 하려고 말을 높은 값을 치르고 세내었으나 말과 마부가 모두 괜찮아 보였다. 정식으로 서명하고 우리는 배여행을 계속했다. 인구 4백명의 조그만 가평에 다시 도착했다. 낭촌에서부터 한강 아래로 내려가 뱃기미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거룻배에서 마지막 날인 일요일을 보내려고 멈추었다. 거룻배에서 5주 반 동안 보낸 뒤였다.

영국에 비해 한국의 결혼은 지극히 건전하고 도덕적이다.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부도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받지 않는다.

말을 타고 금강산으로

뱃기미에서 우리는 배를 버리고 북한강 상류를 따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한국의 조랑말은 체격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강인해 73~91km까지의 짐을 운반하는데 형편없는 사료를 먹고도 날마다 하루에 48km씩을 간다. 주인이 대충 먼지를 치우고 나면 왕씨가 기름을 먹인 두 장의 두꺼운 종이와 함께 아마인유를 입힌 커다란 양털 요를 바닥에 깔아주는데 이것은 여행 동안 나의 야전 침대로, 의자로, 보자기로, 아주 유용했다.

한국 여관의 숙박 요금은 터무니없이 싸다. 등잔과 따뜻한 구들이 있는 방에는 요금이 없다. 그러나 나는 하루 밤에 1냥씩 숙박요금을 치렀다. 한국 여관에 느낀 나쁜 기억은 버릇없고 어떻게 감당해 볼 도리가 없는 사람들의 호기심, 특히 여자들의 호기심이었다. 나의 마부들은 다시 이성을 잃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마부들은 그들의 굵은 몽둥이로 횃불 든 농부들을 때렸다. 나는 나의 마부들에게 욕을 퍼부어대며 말채찍으로 마을 사람들은 두들겨팼다.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로, 유점사로

금강산의 서쪽 경계선인 해발 402미터의 단발령을 넘었다. 그 뒤로 해발 1638미터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장안사의 첫 인상은 숲속에 자리한 규모의 엄청남이었다. 표훈사의 승려들은 친절했다. 엄격한 채식주의였다. 나는 주인들의 편견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차나 밥, 꿀물, 잣으로 식사를 때웠다.

불교는 중국 불교가 도교의 반신(半神)적 영웅들 밑에서 질식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숭배로 얼룩져 있었다. 문도와 같은 일본의 거대한 종교개혁을 특징지우는 현세의 정의실현에 대한 높은 포부와 열망 같은 것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한국의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다.

정중하고 후한 대접을 받았다. 장안사에서 유점사로 가는 17.7km 길에는 세 개의 큰 사찰인 표훈사와 마하연, 유점사가 나온다. 나의 하인은 두 개의 긴 막대기 사이에 가벼운 자리를 깔고 동아줄을 매듭지어 발 둘 데를 만들고 등나무 줄기로 등받이를 해서 남여를 만들었다. 삭발하지 않은 한 아이에게 우리 통역인 이체온씨가 닭고기 한 조각을 주었다. 그러나 먹지 않았다.

금강산을 넘어 원산 앞바다까지

장안사를 떠나 원산으로 가기 위해 마패령을 지났다. 나는 (강원도 통천군 벽양면) 중대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한국인들의 대단한 식탐을 목격했다. 한국인은 매일 1.8kg의 밥을 먹는 게 그다지 위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통천이라는 마을은 동해 바다에서 3.2km 정도 떨어졌다. 한국 어부들은 기업적 조직화가 긴급하게 요구된다. 오이센 씨는 1891년 원산의 과세 보고서에서 ‘해안을 따라 쳐 놓은 조잡하고 대충 만든 그물에서 고기들이 빠져나가 버리는 한국의 어업을 개탄했다. 계획적으로 만든 염전도 있는데 소금 만드는 공정은 완전히 원시적이다. 이렇게 만든 소금은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해서 순도가 매우 떨어진다.

여관 주인은 특히 외국인을 재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 친절한 마부를 성나세 했다. 그는 쥐어짜는 듯한 큰 목소리로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지불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오백나한상이 있는 대찰 석왕사는 이성계가 수련한 곳이다.

동학군 - 무장한 개혁자들

원산을 따라 동해안 오지를 오래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정치적 사건들을 전혀 몰랐다. 단지 반란을 일으킨 동학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의 소문을 약간 들었을 뿐이다. 동학군의 봉기는 과격한 충돌이나 쓸데없는 피흘림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6월17일 증기선으로 원산을 떠나 6월19일 부산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항구에 있는 일본 포함을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220명의 일본군이 그 날 아침 히고마루호에서 내려 언덕에 있는 절에 숙영중이란 사실과 동학군이 부산과 서울 사이의 전신을 끊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부산에서 장사하는 거류민들을 많이 가진 일본은 보호를 위해 상당한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일본이 취한 조치는 유럽인들 사이에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6월21일 아침 일찍 배로 제물포에 도착하자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일본 해군의 큰 함대 하나, 작은 군함 여섯 척, 미국 기함 한 척, 프랑스 배 두 척, 러시아 배 한 척, 중국배 두 척이 항구 밖에 있었다.

제물포 항구가 외국 군대의 캠프로

따분하기 그지없던 제물포 항구가 완전히 바뀌었다. 숱한 행진 대열 속에서 일본군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제물포의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서울을 향해 탄환과 포탄을 수송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캠프는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시내엔 일본군 초병들이 통행인을 검문했다.

얼떨떨한 한국 군중들은 흐느적거리며 그들의 제물포 항구가 외국 군대의 캠프로 변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길거리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언덕에 앉아 있었다. 일본은 그들이 성취하려는 목표를 위해 한국에 왔다. 그 목표는 동학군의 승리로 인해 위험에 봉착했다고 선전하는 한국 내의 일본인의 효과적 보호라는 미명 아래 잘 은폐돼 있었다. 이날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오시마 오시마사 소장의 혼성여단으로 보병 5800명, 하사관 584명, 위관 187명, 좌관 16명, 기병 300명이었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라기 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동학군이 한반도 군사개입의 빌미를 제공하자마자 일본은 가다렸다는 듯이 여심을 드러냈다.

일본군은 수도 서울의 강나루 마포를 점유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울의 남산에 눌러앉았다. 내가 제물포에 막 도착한 바로 그 날 오후 영국 부영사가 나를 방문해 그 날 밤 안으로 한국을 꼭 떠나주기를 당부했다. 그 날 밤 나는 두 명의 영국인 환자와 함께 항구에 매어 있던 일본의 기선 히고마루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청일전쟁을 피해 만주로 가다

일본 체푸에 도착한 나는 영국 공사관까지 경사가 급한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히고마루호를 타고 다시 만주의 잉쿠로 갔다. 라오허(요하) 하구 잉쿠에 도착했다. 만주 여인들은 보통 한족보다 더 키가 크고 더 건장하다. 만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중국 본토의 여성들보다 훨씬 높다. 열병에 걸려 홍수가 난 랴오허를 떠돌다가 나는 뉴창을 7월3일에 떠났다. 8일 뒤 펭티엔에 도착했다.

펭티엔은 만주의 오랜 수도로 1644년 중국의 황위에 올랐던 황가의 선조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특별한 혜택을 누린다. 기독교에 주어지는 우호적인 분위기는 펭티엔의 특징이다. 한국 국왕은 많은 망설임 끝에 중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의 장군 위여귀는 3천명을 이끌고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본의 장군 오시마 요시마사는 제물포와 서울을 강점했다.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이 선포된 뒤 정세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일본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만주를 통해 육로로 행군해야 했다. 중국군은 하루에 1천명 꼴로 펭티엔을 지나갔다. 이들은 남쪽으로 행진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얼마 뒤 평양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그들 중국군은 모두 우산이나 부채를 지니고 있었다. 막강한 화력의 무라다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이들 수 천의 병사를 맞닥뜨리게 한 건 자살행위였다.

번창하는 동방의 보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

나는 베이징에서 엔타이로 돌아가 사태를 지켜봤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증기선을 끈기있게 기다렸다. 나가사키는 따뜻한 가을 날씨였다. 그러나 내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니 항구로 둘러싸인 언덕은 겨울의 첫눈으로 덮여 있었다. 웃고 떠드는 한국 소년 4~5명이 나를 잡아당겼다. 부두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나는 마차에 타자 ‘골든 흘 호텔’이라고 말했다.

이 도시의 발전은 괄목했다. 예전엔 삼림지역이었다. 1863년 많은 나무를 베었다. 1872년 60명의 해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1878년 블라디보스톡 인구는 1400명이었다. 1897년엔 2만5천명으로 늘었다. 짐마차꾼이나 짐꾼을 하면서 살아가는 3천명의 한국인과 2천명의 중국인이 있다.

시베리아의 한국인 정착민들

러시아령 만주엔 약 2만명의 한국인이 산다. 시베리아 통신청의 총책임자 아이드만 청장은 나와 동행하려고 휴가까지 냈다. 하이드만은 발칸 출신의 독일인으로 러시아 고위 관료가 됐다.

해가 뜨자마자 증기선을 타고 블리디보스톡을 떠났다. 7시간 뒤 포시만으로 97km를 달렸다. 포시만은 크고 멋진 막사와 창고가 있는 하나의 큰 군사 역사였다. 한국인 정착민도 있었다. 우리는 우편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2시간만에 노보키예프에 도착했다. 우리는 ‘쿤츠 앤 알레르스’ 상사의 지점장에게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노보키예프는 거대한 군사도시다. 한국인들은 수송을 맡았다. ‘쿤츠 앤 발에르스’ 상사의 직원 중에서 유럽 복장을 한 젊은 한국인 하나가 그의 신사다움과 바지런함 때문에 알아보기 쉬웠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중국령 만주로 가서 여윈 동물을 싼 값에 사서 살이 찌도록 키워 비싼 값에 되판다.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한국인들은 농산물 유통업에서 중국인들과 경쟁해 완승을 거두었다. 현재 하바로프스크의 야채 공급은 거의 한국인들의 손에 있다. 한국인 촌락은 주위에 산재했다. 마을 농장은 깨끗하고 잘 청소돼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아이들은 서로서로 섞여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얀칠레는 매우 부유한 마을이다. 깨끗한 경찰서에서 한국인 중사는 내 요구사항을 받아적고는 통역자의 역할을 하는 똑똑한 한국인 경찰관을 찾으러 밖에 나갔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4백여 한국인 경찰관들은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었다.

두만강 국경 경흥까지

한국의 국경으로 여행과 한국을 향한 경흥까지 여행. 경흥은 1888년의 무역 협정으로 키차의 모델에 따라 하나의 시장을 개척하려는 희망에서 러시아 국민의 거주지로 개방된 도시다. 한국인 마부와 한국인 길잡이가 있었다. 이 모든 멋진 지역은 한국인들이 개척한 것이다.

농장 경영자로, 노장의 소유자로 한국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최고의 것을 만든다. 나는 120여 세대가 사는 사레치예 마을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그 저택들은 아주 멋졌다. 그리고 그 곳의 한국인들은 다양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국경은 17.7km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요니의 부유한 한국인 마을을 지나갔다.

시베리아 정착민의 성공

1863년 이전 13가구가 함경도에서 국경을 건너 포시만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티젠호 주변에 정착했다. 1866년에 와선 1백여 가구가 정착했다. 한국인 이주민 전체는 1만6천~1만8천명이었다. 1884년 이전 시베리아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이제 러시아 국민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그들이 구매한 땅에서 정착해 왔음을 증명하는 사람도 역시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크라스노예와 노보키예프 사이의 촌민들은 러시아 이주 한국인들의 표본이다. 이 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은 없다. 이 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됐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했다. 나는 서 아시아 정복지에서 거둔 러시아 정부의 성공을 주목했는데 유랑적이고 공격적인 투르크 부족을 질시정연하고 평화롭고 정착된 농업민으로 정착시켰다.

며칠 뒤 나는 중국령 만주지역에 있는 훈춘에 갔다. 훈춘은 군사요충지다. 산악지역 한 가운데인 훈춘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인들이 개간해 기름지고 관개가 잘 된 계곡으로 넘쳐났다. 1500명의 코사크인으로 구성된 러시아 군대는 훈춘에서 흑룡강까지 30개 초소에 나뉘어 배치됐다. 한국인 마을을 약탈하려고 넘어오는 중국 마적들을 체포해 중국 관리에게 넘겨주지만 즉시 방면돼 다시 약탈을 반복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내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후 ‘쿤츠 앤 발에르스’ 상사가 젊은 덴마크인 통역자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동부 구간을 조사하며 한 주일을 보냈다. 철도는 우수리 강 위에 놓여진 우수리 대교 옆의 작은 마을까지 이르렀다. 평균 속도는 고작 시속 19.3km 정도였다. 현재의 짜르는 이 철도에 열광적 관심을 보인다. 현 짜르가 황태자 시절 1891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할 때 이 사업을 시작했다. 우수리 구간 철도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12km 구간의 철도다. 현재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일당 80센트를 받는 중국인 인부들이 건설중이다.

나는 니콜스코예에서 즐거운 이틀을 보냈다. 나는 이 정착촌 주변 32km를 마차로 드라이브하면서 어디에서나 번창한 농장과 초원 위에서 농사 짓는 마을, 러시아인, 한국인을 보았다. 네콜스코예는 거대한 군사도시이기도 했다. 9천명에 달하는 보병과 포병이 상주하고 있다.

청일전쟁 직후 고종 면담

겨울의 마지막에 나는 일본 증기여객선으로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원산에 도착했다. 원산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청일전쟁 중 일본 노무자들에게 과다한 임금이 나간 탓에 원산의 한국 사람들은 부유해져 있었다. 1만2천명 정도의 일본군이 평양으로 향해 가는 도중에 이곳 원산을 거쳐 갔다.

나는 원산에서 배로 부산을 거쳐 1895년 1월 5일 제물포에 닿았다. 일본 점령기의 중국 거리는 궤멸적 모습이었다. 일본 거리는 어디나 최상의 활기가 넘쳤다. 말에 올라타 서울로 가는 동안 내내 눈이 내렸다. 무척 치안이 안정된 나라여서 보호를 받을 필요도 없이 나는 마부도 없이 오리골까지 혼자 갔다. 서울서 나는 영국 총영사인 힐리어의 집에서 5주간 머물렀다. 나는 조랑말 한 필과 병사 한 명을 얻어 시내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 일본에 종속

일본은 해가 치솟는 기세로 일어섰다. 일본은 서울에 대단위 군대를 주둔시키고 내각의 지도급 인사 몇 명도 지명했으며 일본 장교가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명목상의 왕권만 남은 왕은 이런 상황을 참고 수긍했으나 명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왕비는 일본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백작이 일본 공사로 활약하면서 그의 강경하고 능란한 술책으로 인해 겉으로는 모든 것이 평탄했다.

1895년 1월 8일 일본은 왕에게 공식적으로 중국의 종주권을 폐기하는 동시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조공을 일소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국왕이 엄숙하게 종묘 사직 앞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개혁을 단행할 것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왕은 계속 미루고 있었다.

늙고 진중한 사람들은 이틀 전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탄식했다. 많은 군중들이 언덕 위에서 덕수궁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이충격적인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중들은 한 점 미소도, 한 마디 말도 없었다. 하늘은 어둡고 흐렸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었다. 마치 한국의 미래에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듯 불었다.

부마 박영효는 국왕보다 더 큰 권력

단정하고 깔끔한 푸른 울스터 외투를 차려 입은 일본 경찰들의 행렬 속에 있었다. 일본 경찰은 1884년 정변의 주역이었던 내부 대신 박영효의 특별 경호대였다. 일본 경찰대를 거느린 박영효의 위풍당당함은 국왕의 위엄을 능가했다. 박영효는 죽어 마땅한 반역자였다. 그러나 일본의 협박을 받은 왕은 그를 용서해 격하된 그의 조상들의 지위를 복권시키고 해외 추방된 그를 다시 불러 고위 공직에 임명해야만 했다.

도로에는 한국의 기마병이 어설프게 서 있었다. 양쪽에 유리창을 낸 평범한 목재 가마를 타고 단 네 명의 수행원의 보좌를 받으며 낙담한 통치자가 나타났다. 외제 안장과 외국인 경호원들로 돋보이는 내부 대신 박영효가 탄 검은 당나귀가 있었다. 이 모든 행보가 일본이 마련해 놓은 일이었다.

한국의 왕비 명성왕후

왕비가 나를 사적으로 초대했다. 미국인 의료 선교사이자 왕비의 주치의인 언더우드 여사를 따라서 갔다. 일본 경관 한 명이 큰 문 앞에 서 있었다. 여섯 명의 한국인 보초병들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중년의 상궁이 우리를 맞았다. 저녁 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차려졌다. 왕세자와 왕비는 세 개의 진홍빛 벨벳 의자 앞에 서 있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했다. 윤 나는 칠흑 같은 흑발에 피부는 너무도 투명해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을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은 작은 키에 병약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왕은 천성이 온화했다. 대화 동안 왕비는 왕을 몹시 채근했다. 왕세자는 통통했으나 병약해 보였다. 불행히 심각한 근시였다. 알현하는 동안 왕비와 왕세자는 줄곧 손을 꼭 잡고 앉아 있었다. 왕은 마흔 셋이고 왕비는 마흔 넷이었다. 나는 궁궐에서 딱 한 번 대원군을 본 적이 있는데 날카로운 눈빛과 위엄이 넘치고 원기왕성한 제스츄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영국의 관리 등용제도와 ‘귀족 이 아닌’ 사람이 정부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지 둗도 답했고 영국 귀족들은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는지, 귀족은 하층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물었다. 탁지부 대신(재무장관)이 왕비의 개인 경비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 수상의 위치를 점하는 내부 장관의 임무에 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졌다. 장관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왕비가 장관을 해임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알현실에 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문 틈으로 확실히 보았다. 뒤이어 통역관이 “오늘은 전하의 말씀을 통역해 내기가 퍽 어렵나이다”라고 말한 점은 재치있었다. 그 ‘그림자’는 바로 왕이 특별히 불신하는 6부 대신 중 한 사람의 측근이었다. 9개월 뒤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왕비는 이미 야만적으로 시해된 뒤였고 왕은 사실상 궁궐에 갇힌 죄수였다. 궁궐에서 가진 4번의 알현은 두번째 한국 방문의 대단한 수확이었다.

단발령 등 을미개혁의 파란과 이노우에

1895년 1월 서울은 이상 기류에 휩싸였다. ‘낡은 질서’는 변해가지만 새 것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왕은 1894년 6월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한 이래로 ‘봉급받는 자동인형’과 다름없이 되었다. 한때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던 민씨 일파는 더 이상 공무에 간섭할 수 없도록 축출됐다.

1894년 9월 17일 평양에서 중국군을 격파한 일본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일본 근대화의 기수인 이노우에 백작은 1894년 10월 20일 조선공사로 부임해와 실제 한국 정부를 통치했다. 일본인들은 과거에 영국이 이집트에서 그랬듯이 그들의 목적은 한국 정부를 개혁시켜 주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한국 상류층의 젊은이를 뽑아 2년간 일본에 보냈다. 한국의 일반 백성들은 임금이 당하는 수모에 치를 떨며 분노했다.

한국 관료제도라는 아우게아스왕의 외양간을 청소하는 일을 일본이 수행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수십 년간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아스왕의 외양간을 강물을 끌어들여 말끔히 치웠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

무력 도발은 일본이 행한 전략상의 실수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즉 1894년 6월 왕궁을 침입해 임금을 포획한 행위는 물론 이전의 모반자들에게 높은 관직을 준 것도 중대한 실수였다. 동학은 1895년 1월 초 전멸해 한국의 관리들이 교주 김개남과 성재식의 머리를 서울로 압송하고 있었다. 고장난 회중시계가 길에 떨어져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시계를 분해해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 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1주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1895년 2월 5일 나는 대단히 아쉬워하며 서울을 떠났다.

왕비의 최후 - 을미사변의 전말

1895년 5월 청일전쟁은 공식 종결됐다. 중국과 일본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과 타이완섬을 얻었다. 내가 여러 달 중국의 남부와 중부를 여행하고 난 뒤 일본에서 여름을 보내다가 나가사키에 간 것은 1895년 10월이었다. 왕비가 피살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을 들었다. 나는 즉시 제물포로 갔다가 바로 서울로 가 힐리어 공사와 함께 숨막히는 두 달을 보냈다.

이노우에 백작은 한 달 전에 이임했고 서울엔 후임으로 외교 경험이라고는 없지만 군인으로 유능한 미우라 자작이 와 있었다. 한국의 왕비가 저명한 일본 정치인 이노우에의 간곡한 약속에 기댔던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닐 성 싶다. 이노우에 백작은 이임 직전 왕비를 알현한 자리에서 1895년 6월 오토리가 왕궁에 침입한 이후 수립된 대원군 정권을 얘기했다. 왕비는 이노우에 백작에게 “내가 귀국에 건의한 여러 제안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유감이에요. 그런데 귀국에 별로 호의적이지도 않았던 대원군에게는 여러 도움을 주더군요”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왕비의 의혹을 누그러뜨린 뒤 한국의 독립을 확고한 기반위에 놓는 것과 한국의 왕가를 강화시키는 것이 우리 일본정부의 진정한 소망임을 힘주어 말씀드리고 왕족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면 우리 일본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왕가를 꼭 지킬 것이라고 확신을 드렸습니다. 근심이 해소된 듯이 보였습니다”라고 알현 내용을 본국에 급송했다.

미우라 자작과 대원군 사이에 잘 알려진 합의가 그 실행을 향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미우라는 먼저 일본군 사령관에게 왕국 문 바로 앞에 병영을 주둔케 하고 거기에 일본인이 훈련시킨 한국군대인 훈련대를 배치했다. 일본군을 동원해 대원군이 입궐하도록 도와 주었다. 미우라는 일본인 두 사람 산성신보 사장 아다치와 군부와 궁내부 고문인 오카모토에게 대원군이 사는 용산부터 대원군의 왕궁 행차에 경호를 맡겼다. 미우라는 암살 성공에 따라 20년간 일본을 괴롭히던 해악을 근절할 수 있음도 주지시켰다. 왕궁에 들어가자마자 왕비를 처치하라고 지시한 것도 미우라 공사였다. 미우라의 첩자 중 한 사람은 마침 비번이던 일본인 경찰관에게 민간인 복장을 하라고 명하고 그들에게 칼을 줘 대원군의 집으로 보냈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3시 일본인들은 대원군을 호위하고 용산을 출발했다. 도중에 10명은 한국인 경찰관을 붙잡아 정복을 벗겨 입었다. 대원군 일행은 서대문 밖 입구에서 훈련대를 만나 일본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궁을 향해 들어갔다. 왕궁 문 앞 호위병을 죽인 뒤 조금 더 들어가 왕과 왕비의 처소에 도착했다.

나는 이 내용을 히로시마 법정의 판결문에 따라 서술한다. 나는 그 재판을 시종일관 지켜보았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작은 내실로 안내하더니 잠시 뒤 나와 불시에 모든 피고인에게 ‘증거 불충분’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야만의 1895년 10월 8일 새벽

왕비 피살에 앞선 여러 사건을 살펴보자. 10월 경 훈련대와 서울 경찰국 사이에 말썽이 났는데 서울 경찰국이 완패했다. 1천 명 정도의 장병을 거느린 훈련대는 홍계훈 연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홍계훈(?~1895)은 1882년 왕비를 위험에서 구출한 훌륭한 군인으로 왕가의 신임을 받았다. 홍계훈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로로 중용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 출병해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전주화약을 맺고 유혈충돌 없이 철군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을 수비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왕국을 지키던 구식 군대의 ‘현’이라는 연대장도 1884년 왕비의 생명을 구했다.

10월 첫째 주 이 구식군대의 병력을 크게 줄였다. 1895년 10월 7일 밤 일본인 교관이 인솔하는 훈련대는 작은 소란을 일으키며 궁 안에서 전진과 후퇴를 계속했다. 벽 아래 2백명이 넘는 훈련대 병사가 잠복했다. 출입구 쪽에서 난타하는 소리와 사격소리가 뒤를 이었다. 훈련대 지휘관인 홍 연대장은 대문 앞에서 일본인 관리에 의해 단칼에 쓰러졌고 8발의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훈련대원들은 일본인들을 따라 궁내 모든 방향에서 떼지어 몰려 들었고 민간 복장으로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왕비의 소재를 미친 듯이 따져 물으며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2.1m의 베란다에서 대기하던 궁녀들을 내던지기도 했고 칼로 베고 발로 차고 심지어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버리기조차 했다. 일본인들이 초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불운한 임금은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켜 왕비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기 위해 그가 똑똑하게 보일 수 있는 방 앞에 섰다. 그러나 일본인 자객들은 대검을 휘두르며 임금을 밀어내고 그의 면전에서 궁녀들을 데려다가 머리채를 질질 끌고 다녔다. 내실에 있었던 왕세자도 끌려나와 그의 모자를 찢기고 머리채를 끌리웠다.

궁녀들과 함께 발견된 공주는 머리를 맞고 칼로 베어져 아래로 내던져졌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경보를 울렸다. 암살자들이 몰려 들어 왔을 때 그는 왕비 앞에 두 팔을 쳘쳐 그녀를 보호하고자 애썼다. 여기 저기 상처를 입었는데도 이경직(1841~1895)은 있는 힘을 다해 임금이 계신 베란다 앞까지 자기 몸을 끌고 가서 그 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자객들을 피해 도주한 왕비는 곧 그들에게 잡혀서 칼에 찔렸다. 왕비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을 때 약간 정신을 차려 왕세자는 안전하냐고 물었다. 그 순간 한 일본인이 그녀의 가슴 위로 덮쳐 대검으로 그녀를 베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그녀를 비단으로 된 누비이불로 꽁꽁 묶어 널판 위에 누인 뒤 사슴공원 부근의 작은 소나무 숲으로 운반해갔다. 그 곳에서 등유를 몸 위에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단지 몇 개의 뼈 조각 뿐.

민비를 암살한 을미사변의 정치적 동기는 암살에 참여했던 고바야가와 히데오의 회고록에 잘 요약됐다. 회고록은 “민비는 간섭을 싫어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을 혐오하고 러시아에는 그러지 않았다. 민비는 러시아에 더 의지하고 싶어했다. 오직 비상한 수단으로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왕실의 중심 인물인 민비를 제거해 러시아와 조선의 결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었다”.

왕비 시해 이후의 정국

미우라 자작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인 스기무라와 자객들을 이끌고 입궐했다. 임금의 개인적 수행원들까지도 침입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사흘 뒤 관보에 왕비에게 파렴치한 모욕을 주는 국왕의 칙령이 공표됐다. 칙령은 국왕의 것으로 둔갑돼 발표했다. 다른 여섯 대신의 서명도 있었다. 궁내 대신 이재면, 총리 김홍집, 외부 김윤식, 내부 박정양, 탁지 심상훈, 군부 조희연, 법부 서광범, 학부 서광범, 농상부 정병하.

열흘 뒤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즉각 증명했던 일본 정부는 미우라 자작과 스기무라, 군무아문의 고문관이었던 오카모토를 소환해 체포했다. 단 두 사람 미우라와 스기무라만 판결을 내렸다. “미우라의 선동으로 왕비 시해결정이 내려지고 공범자를 모으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른 10여 명은 위의 두 사람에 의하여 왕비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우라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인 노무라가 부임했다. 이노우에 백작이 내한해 일본 천황의 조의도 표했다. 일본은 아무리 범행사실을 부인해도 소용이 없었다. 왕은 독극물의 공포에 시달렸다. 미국인 군사 고문관인 다이 장군은 늙고 허약했던 인물로 궁중 도서관 가까이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북부 여행을 위해 11월 7일 서울을 떠났다. 훈련대는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임금은 갇힌 수인으로 계속 남았다. 임금은 암살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고양까지

통역자의 훌륭한 역할. 그는 영어를 상당히 잘했고 항상 밝고 예의바르고 영리하고 천성이 착했다. 힐리어 공사관 호위병인 임씨를 나의 하인으로 동반하게 해 주었다. 임은 유능하고 충실하고 민첩하고 원기 왕성했다. 1895년 11월 7일 서울을 출발했다. 정오에 우리는 고양에 도착했다. 20~30명의 일본군이 숙영하고 있었다.

파주를 거쳐 개성으로

개성의 여인숙은 형편없지만 이씨의 친구 한 사람이 친절했다. 나는 그 집에서 이틀 동안 기분좋게 묵었다. 생각해 보면 외국의 연약한 여인이 혼자 커다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골목에 붙어있는 거처에서 수행원도 없이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모르지만 내 돈이 어디에 있는지는 훤히 알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내 목을 찌르고 돈을 털어 갈 수도 있는 병사와 함께 대문도 잠기지 않고 자물쇠도 없는 방에서 아무런 불안감 없이 네 활개를 뻗고 누워 있었다. 나의 이런 저런 천역덕스런 설명들에는 한국의 민심을 알게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청일전쟁 직후의 평양

황해도 서흥군. 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경기지방과 황해지방의 경계인 예성강 줄기의 대부분 관리들은 안락과 사교를 위해서 서울에 살았고 거기에는 하급관리만 남겨 놓았다. 관청 건물에는 40명의 일본군인이 주둔했다. 깔끔한 상사 한 명이 내게 인사를 하더니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물을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엔화는 서서히 한국 경제의 내부로 침투하고 있었다. 평양을 처음 보고 나는 무척 기뻤다. 평양은 주위 경관이 훌륭했고 능숙한 솜씨로 가꾸어져 멀리서 봐도 아름다웠다.

일본군 철수를 무서워하는 평양 사람들

8만의 인구를 가진 번창하던 평양은 쇠락해 1만5천 주민만 남았다. 가옥의 4/5가 부서졌고 거리와 골목은 쓰레기로 꽉 차 있었고 언덕은 무너지고 한때 집들로 붐볐던 골짜기엔 기분 나쁜 잔해만 있었다. 초기에 여기선 실제 전투도, 약탈도 없었다.

일본군들은 기둥과 목조물을 부수고 지붕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마루 위에 불을 피우고 그대로 방치해 집이 타버리기도 했다. 일본군들은 전쟁 후 3주일 동안 피난민들이 남겨둔 재산을 약탈했다. 뒤 이은 점령기 동안 일본 군대는 정당하게 행동했고 마을과 이웃에서 거둬온 전리품을 꼼꼼하게 배상했다. 사람들은 일본군을 아무 미워했지만 일본군 때문에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는 걸 인정했다.

평양전투의 실상

청국 파견군의 총사령관이던 위여귀 장군은 1894년 9월 15일 평양 칠성문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은 세 개의 산꼭대기에 있는 세 개의 중국 진지를 점령했다. 전투라기보다 대량학살이었다. 2~4천명의 중국군인과 사람들이 학살됐다. 일본군은 고전한 끝에 오시마 장군의 용감한 돌격으로 그곳을 탈환했다. 아마도 평양 전투는 청일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평양 북쪽의 부촌(富村)들

우리는 먼저 안주대로를 따라 걸었다. 중국 기병대가 방어하는 참호를 향해 일본군이 소총돌격을 감했던 언덕이 보였다. 평양 북방의 마을들은 한국의 다른 시골마을보다 훨씬 더 반듯하고 청결했다. 우리는 자산과 은산 지역을 통과했다. 가창에서 덕천까지 여행길은 큰 산의 아무 재혹적인 경치를 감상했다. 유능한 통역자 이체온은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담배를 피며 앉았다. 평양을 지나 북쪽으로 알일령을 통과하는 험로를 걸었다. 알일령은 높이가 해발 1020m의 교역로였다.

평양의 무당과 기생

주민들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파렴치하게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중국 병사로부터 시달린 일을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평양은 오래전부터 기생과 고급 창녀, 요설가로 우글거렸고 부와 파렴치한 비행으로 악명 높았다. 전쟁 이후 그 곳에는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 140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임시교회는 너무 붐벼 많은 예배자들이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헌금도 풍족했다.

단발령과 아관파천

1896년 한국에서 구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화의 여명이 열렸다. 지방마다 분쟁이 잦았고 많은 관료들이 죽임을 당했고 일부 반란군들은 서울을 함락시키려고 위협했다. 일본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친일 정권은 전국에 걸쳐 붕괴되고 있었다.

상투 폐지는 1895년 12월 30일 법령을 제정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훈련대의 3명의 사령관은 무기를 빼들고 궁성에 들어가 즉시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에 대해 단발 법률의 제정을 요구했다. 다음 날 관보에 왕이 머리를 잘랐다는 기사와 함께 왕명에 의한 법령이 공포됐다. - 1894년 음력 11월 15일 내부 대신 유길준

단발령은 일본에 의해 한국인이 일본인과 똑같이 보이게 하려는 수작으로 믿어졌고 일본식 관습에 맞추려는 것으로 생각됐다.

1896년 2월 2일 아침 국왕과 왕세자는 동이 틀 무렵 궁녀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보초들의 의심을 조금도 받지 않고 경복궁의 성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왕은 이후 1년 이상 그의 비밀수용소로 대여될 공사관의 커다란 방에 들어서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 1896년 2월 11일 내부 및 총리 대신 박정양

같은 날 수천 명의 백성들이 단발령을 취소하는 명령을 읽었고 체포가 가능했던 관료들, 관청의 집무실을 지키다 체포된 총리대신을 비롯해 농부 대신, 탁지부 대신은 붙잡혀 거리에서 참수 당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상투를 자르게 한 장본인이 총리 대신이라고 여겨 정말 잔인하게 시체를 모독하고 손발을 잘라내는 등 극도의 야만성을 보였다. 왕의 탈출을 도운 엄씨와 박씨라는 궁정의 상궁들이 항상 왕의 곁에 보였다. 영국와 미국 대사관과 인접했고, 정동에 죽은 왕비를 위한 비각을 속히 짓게 했다. 손가락 하나의 뼈, 왕비의 잔유물을 옮겼다.

근대교육의 도입

쓸모 있는 사람을 기르는 대학이란 뜻의 배재대학은 1887년 왕이 이름 지은 학교다. 미국 침례교 기독교회에 속하는 이 학교는 개교 후 11년간 목사인 아펜절러 교장이 봉사했다. 1897년 5월 유능하고 박식한 학자 헐버트 박사의 열정적 지도 하에 국립영어학교와 일반대학들이 세워졌다.

한국 시장에서 영국의 큰 경쟁자는 일본이다. 일본은 한국 해안에 20시간 내에 접근할 수 잇는 강력한 라이벌일 뿐 아니라 현재 한국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는 무서운 상대다.

1897년 다시 고종 접견

나는 1895년 12월 25일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6개월 보내며 중국의 서쪽을 여행했다. 석 달 동안 일본 난태산 주위에 체류했다. 내가 서울에 돌아온 것은 1896년 10월 중순으로 이 때부터 1897년 겨울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나는 1896년 10월 보름달을 보며 제물포에 도착했다. 나의 심복 임씨와 서울에 들어왔다. 성문을 열어주라는 명령은 똑똑한 우두머리인 예차윤이 했다. 그는 서울 서쪽 쓰레기 더미와 악취를 제거한 장본인이었다. 국왕은 일본의 왕자를 접견하기 위해서 경운궁에 갔다. 왕은 나를 정식 면담에 초청했다. 일본 군복을 입은 한국인 파수병들이 경운궁의 입구를 어슬렁거리며 지켰다.

나는 왕과 세자에게 세 번의 절을 올렸다. 왕의 처소에서 왕과 두 차례 비공식 접견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행한 정치는 야만적이고 잔인했지만 거시적으로는 한국의 진보와 정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은 현재 지나치게 많은 경찰력으로 무장했다. 3백명이면 충분함에도 서울의 경찰력은 4배인 1천200명이 넘었다. 군인들은 한 달에 5달러50센트를 받는데 이는 세계에서 급료를 제일 많이 받는 군대다.

지저분한 도시였던 서울이 이제는 극동의 제일 깨끗한 도시로 변했다. 넉 달 동안 일어난 일이다. 현 중앙관세청장이며 미구에 서울시장이 될 유능하고 지성적인 관리인 예차윤의 정열과 능력 때문이었다. 예차윤은 일찍 워싱턴을 시찰했다.

1897년 서울서 가장 놀랄 변화는 감옥제도의 개선이다. 이는 스트리플링 때문이다. 그는 상해 경찰이었는데 한국 경찰의 고문관이 된 이후 일본인이 주장한 감옥제도의 개혁을 인간적이고 계몽방식으로 수행했다.

한국에 부치는 마지막 말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미개발 자원은 많고 기후는 최상이다. 한국의 관청도 많이 나아졌다. 재정고문 맥레비 브라운의 재정 수행능력으로 한국의 재정 개혁은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다. 브라운이 부임한 몇 달 뒤 탁지부라는 아우게네스의 외양간이 청소되었다. 타락한 군대는 해산시켰다. 1896년 재정에서 150만달러가 남아 3백만달러의 일본 대부금 중 1백만달러를 상환했다.

1896년과 1897년 동안 일본의 근신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외교가 은밀하고 과묵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꾸준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 외교의 기틀은 지금까지 한국의 어떤 정치적 변동에도 영향 받지 않았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패권을 획득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동시에 일본의 영향력은 조용하고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영국이 한국에서 소유한 것은 이전에 여왕 폐하의 중국 영사였고 현재 관세청장인 맥레비 브라운의 수완, 관록, 외교적 재주 뿐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이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는 이제 거의 애정으로 바뀌었다.

겨울 아침의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해행 헨릭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역자해제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생애

이 책은 1898년 1월 런던 세인트 제임스 신문사가 두 권으로 출판했다. 같은 해 뉴욕에서 출판됐다. 88 서울 올림픽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도 이 책 한 권이었다. 여사가 죽은 직후에 안나 M. 스토우다트가 쓴 <이사벨라 버드의 생애>(1907)과 66년 뒤 간행된 패트 바아의 <이사벨라 버드 이야기>(1970)이 있다.

1831년 10월 15일 영국 요크샤 주 보르브릿지 홀에서 태어났다. 친정은 캔터베리 대주교인 섬너 경의 가문으로 유서 깊은 성직자 집안이었다. 병약했던 이사벨라는 신경통으로 몹시 고생했다. 키는 160cm로 크지 않았지만 얼굴과 몸매는 아름답고 우아했따. 1854년 23살 때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했다. 헬리팩스에서 보스턴, 신시내티, 시카고, 디트로이트, 캐나다 터론토, 퀘벡, 몬드리올을 7개월간 돌았다. 1856년 1월 런던의 유명 출판사 머레이에서 <미국의 영국 여인>이란 여행기를 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에서 이사벨라는 미국 남부의 노예제를 비판하고 흑인과 인디언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 1857년 이사벨라는 다시 미국으로 가 노예주인 버지니아, 사우스 케롤라이나, 조지아를 돌며 교회를 통한 흑인과 인디언의 인권운동에 헌신한다.

20대 이사벨라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29살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이사해 철학적 내용의 시를 발표했다. 빅토리아 시대가 여성에게 강요하던 사회적 문화적 차별이 우울증 원인이었다.

제국의 어둠 속에는 마르크스가 <자본론>(1867)에서 증언한 비참한 영국의 노동계급과 위선적인 가족 윤리에 옭죄인 여성들. 다윈이즘의 충격에 허우적거리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1866년 어머니가 죽자 우울증은 더 심했다. 이 때 의사 존 비숍을 만났다. 41살이던 1872년 이사벨라는 홀로 하와이로 여행가 건강 회복을 시도했다. 미국 록키산맥의 요양소에서 몇 달 보냈다. 거기서 그녀가 “내 깡패 같은 남자”로 부르며 평생 잊지 못한 연인 ‘짐 뉴젠트’를 만났다.

40이 넘어 대학 강의를 청강하며 지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는 일본>(1880)을 썼다. 이사베랄는 1881년 3월 8일 존 비숍과 51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비숍은 원래 죽은 동생 헨리에타의 연인이었다. 존은 빈혈에 시달리다가 1886년 3월 6일 죽었다.

1889년 58살에 중동 여행에 나서 이슬람 세계를 보고 인도까지 간다. 뉴욕의 프레임 H 레벨사에서 <티베트 미니중들>(1894)로 냈다. 1893년 비숍은 한국 여행을 계획한다. 류머티즘이 악화됐고 폐도 안좋았다. 1894년 2월말 한국에 도착해 이후 4년 동안 4번 한국을 드나들었다.

1901년 71살에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결행한다. 모로코를 출발해 1천마일 이상을 말로 달린 대장정 끝에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 아틀라스 산맥에 오른다. 6개월간의 강행군으로 모로코로 돌아온 여사는 패혈증으로 3주 동안 앓았다. 1904년 10월 10일 에딘버러 자택에서 74살에 죽었다.

마포에서 배로 한강 상류를 오르는 여행은 비숍 여사와 젊은 미국인 선교사 밀러, 밀러의 한국인 하인 이체온, 왕씨라는 중국인 통역자, 뱃사공 김씨와 그의 조수 등 모두 6명이었다. 먼저 남한강 상류를 보고, 북한강 상류를 답사한다.

이 책에 필적하는 한국의 구한말을 다룬 명저는 두 권 더 있다. 월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1882)과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의 <한국의 비극>(1908)이 그것이다. 그리피스의 책은 한국 고대 중세사까지 다뤄 구한말은 조금 밖에 없다. 한국의 정파를 다룬 25장은 당쟁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취재했다. 노론과 남인 사이에 초미의 쟁점을 설득력있게 묘사했다. 그러나 그리피스의 책 마지막의 서구중심주의적 한계는 저서의 곳곳에서 서구와 한국의 비교를 문명과 야만이라는 무지한 도식으로 몰고가 비숍 여사의 저서가 갖는 미덕과 여러모로 대조가 된다.

매켄지의 <한국의 비극>은 일본의 야심과 제국주의 본질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일본의 죄악을 고발한다. 의병종군기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인류의 양심을 증언한다. 그러나 저자가 데일리 메일지의 신문기자라는 한계 때문에 충격적 사건의 전달에 집중하는 아쉬움이 있다.

비숍의 책도 미덕만 있는 게 아니다. 일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영국이 일본을 도와 러시아 남진을 저지하려 했던 당시 영국 사회의 분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영국인의 심정적인 편향과 선입견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이 명저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이유.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을 몰라서 번역하지 못했다고 본다. 7장의 ‘벽절’이란 이름의 절이 신륵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이대 정재서 교수님에게 확인했다.

시간순서로 본 비숍의 한국여행

11개월 동안 한국을 현지답사. 지리학자로 명망과 친정인 영국 왕실의 지친이란 신분 때문에 여사는 남자옷을 입고 궁궐을 자유롭게 출입했다.

* 1894년
2월23일 부산에 도착 하루 체류
2월27일 부산을 출발 3일 항해 제물포 도착
3월 1일 서울 도착해 50일간 체류
4월14일 한강을 거슬러 나룻배 여행 시작
5월21일 나룻배 버리고 육로로 금강산 향해 떠남
6월14일 금강산을 떠나 육로로 북상해 원산 도착
6월19일 원산을 떠나 증기선으로 부산 도착
6월21일 새벽 부산을 떠나 증기선으로 제물포 도착
6월21일 밤 제물포 탈출, 만주로 감
6월23일 중국 체푸 도착, 청일전쟁 발발
6월26일 잉쿠 도착
7월 3일 잉쿠 출발. 나룻배러 랴오허강 거슬러 올라감
7월13일 펭티엔 도착.
8월25일 펭티엔 출방, 잉쿠로 귀한
8월 말 베이찡 거쳐 엔타이 도착
9월 초 엔타이 출발. 배로 5일만에 나가사키 도착
9월 중순 나가사키 출발, 블라디보스톡 도착
9월 말 프리모르스크, 노보키에프, 포시만 거쳐 두만강까지 여행. 러시아령의 한국인 취재
10월 초 시베리아 횡단 철도 따라 니콜스코예, 스파스코예 거쳐 우수리강까지 답사
10월 말 블라디보스톡에서 원산, 부산 거처 나가사키로 감

* 1895년
1월 5일 나가사키에서 제물포 도착 혼자 말 타고 서울 입경
2월 5일 서울을 떠나 4개월 동안 중국 중부와 남부 답사
6~10월 일본 답사
10월15일 민비시해 소식 듣고 제물포로 돌아옴. 고종 알련
11월 7일 서울 떠남 고양 파주 개성 서흥 봉산 황주 평양, 자산, 가창, 덕천, 안주, 알일령, 무진대, 순천 거쳐 다시 평양옴
12월 중순 포산에서 증기선으로 제물포 귀환
12월25일 한국 떠나 6개월간 중국 서부 답사
12월30일 단발령 발표

* 1896년
2월 2일 아관파천
6월 말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감
10월20일 제물포에 도착. 서울에서 고종 알현

* 1897년
1월25일경 서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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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 이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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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8

Joo Han-gyu | Facebook 북한 검색 - 북한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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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Aug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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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을 속속들이 아니 한국과 북한 양측 다 침묵을 지켰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황장엽서기는 김교수를 불러 자기는 이제 노쇄하니 김교수가 미국으로 재망명해서 북한의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미국입장에서도 정보의 보고가 오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역시 비밀리에 김현식 교수의 미국정착을 도왔다. 처음에는 예일대로. 내가 김현식 교수를 만난것은 2000년대 초반 D.C.에서 였다. 한국교수가 북한사정을 잘알고 러시아어로 얘기가 되니 무척 신기해하면서 밤새 속마음과 비밀을 털어 놓으셨다. 그때도 이미 거동이 불편해서 목발을 짚고 다녔다. LINK라는 예일대 중심의 한국교포학생들의 북한인권단체가 생겼다. 애드리언 홍이란 키가 큰 멕시코 출신 교포학생이 리더고 김교수님이 지도교수였다. 한국link지부의 지도교수는 나였다. 홍군은 키가 꽤 큰 미남이었다. 배우가 돼도 될만큼.. 시간이 흘러흘러 20년후에 갑자기 애드리언 홍은 세계뉴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정체를 알수없는 청년들의 주스페인 북한대사관 습격사건이 터졌고 그 리더가 홍군인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유유히 대사관을 털고 스페인 경찰을 속이고 리스본 공항으로 달려 미국으로 무사귀환했다 사진에 나온 홍군은 그동안 살이 찌고 머리가 벗겨졌음을 알수 있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스페인 경찰에게 김정은 뺏지를 단 북한대사관 직원이 유창한 스페인어로 아무일 없었다고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이 북한대사관 직원을 연기한 사람은 애드리언 홍이었다. 멕시코출신이니 스페인어가 유창한건 당연지사. 스페인 경찰은 돌아가면서 그 북한직원 스페인어 정말 잘하네 하고 감탄했을것이다. 여기에 얽힌 얘기는 많지만 통일이 된 차후에 얘기할 수밖에.. 김현식 교수님이 나에게 해준 북한 최고지도자 집안의 속살은 너무나 흥미로웠다. 내가 던지는 의외의 질문에 김교수님은 놀라면서도 충실히 답해주셨다. 자기 제자인 김정일이 죽기전 날 김현식 교수는 느닷없이 김정일에게 주는 편지를 썼는데.. 그 다음날 그 편지를 받을 인물인 김정일이 사망했다. 당시 동아일보 워싱튼 특파원이 재빨리 이 편지를 입수하고 인터뷰를 해서 특종을 터트렸다. 아래에 링크 건 기사에 있는 내용은 약 20년전 나에게 해준 얘기의 거의 70%에 해당되는 얘기이다. 재밌는 것은 역시 자기 제자였던 김평일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 더 깊숙한 내용도 차후로 미룰수 밖에.. 류근일 선생과 김현식 교수의 만남. 비밀리에 서울에 온 김교수는 제일 먼저 류근일 주필을 만날것을 요청했다. 김일성대 교수였다가 반골기질을 참지못해 함경도수용소로 숙청된 류주필님의 가친은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류주필님 서울대정치학과 동기중 월북해서 어느 위치에 올라간 인물이 김일성에게 요청을 했다. 유모교수의 아들인 류근일이가 남반부에서 투옥 등 빛나는 투쟁을 하고 있으니 유교수를 유배에서 풀어주는게 어떻겠냐고... 김일성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수를 유배에서 풀어주되 김일성대가 아닌 김형직 사범대로 보내고 거기 교수 두사람이 매일 유교수에 대한 동향보고서를 써내야한다는 조건으로. 김형직은 김일성의 친부 이름. 그때 지명받은 교수가 김일성가의 과외교사였던 김현식 교수였다. 류주필님은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유교수님은 밥도 따로 먹어야했는데 김현식 교수가 재치를 발휘해 김일성에게 같이 교수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동향보고가 더 쉽다라는 권유를 해서 유교수는 이후에 교수식당에서 마음 편히 동료들과 밥을 먹을수있었다. 세월이 흘러흘러 김현식교수는 서울로 오게됐다. 어려서 교회를 다녔던게 망명의 주원인이 됐다. 오자마자 류주필님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얘기하니 몰랐던 사실을 알게됐다. 류주필님은 후에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버지께 효도를 하게됐었다고 회고하셨다. 이제 류교수님이나 김현식 교수님이나 전부 저 세상에 가셨다. 아래 글을 읽으면 김현식 교수의 북한 최고지도자 집안에 대한 평가를 잘 알수있다. 김정일의 前 개인교사 김현식 교수 ‘제자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 뉴스 : 동아일보 -
donga.com
[北 김정은 시대]김정일의 前 개인교사 김현식 교수 ‘제자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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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Ju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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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익 측면 뿐만 아니라 북한 비핵화도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으므로 원자력 생태계의 붕괴를 막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탈원전 정책 전환이 필요합니다. 먼저 단기적으로는 원전수출을 성사시키도록 범정부적으로 전력을 다하고 수출이 성사되더라고 향후 5년 정도 이후에나 기자재 제작 착수가 가능할 것이므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신한울 3,4 호기를 APR1400+로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필요할 경우 One-In-One-Stop 방침 즉 신규를 하나 가동하게 되면 고령원전 하나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방안도 제안했습니다. 이 길이 우리 원전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인 것 같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원자력의 안전과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관한 국민의 불안을 불식시킬 수 있는 원자력 제대로 알리기를 제안했습니다. IT 매체, SNS를 적극 활용하여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원자력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인식을 전환하여 탈원전에 대한 여론이 바뀔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체계적으로 해야합니다. 이과정에서 미세먼지와 이산화탄소 저감에 있어 매우 원자력이 매우 효과적임을 널리 잘 알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북한 비핵화 과정에 우리나라 원자력 인력과 기술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함을 제안했습니다. 핵물질의 생산 이력 검증, 핵시설과 물질의 폐기, 북한 핵개발 인력의 전환, 경수로 사업 재개 등에 원자력계 인력과 기술이 활용될 수 있는데 이는 미리 잘 준비함을 전제로 합니다.
viva100.com
[집중분석] 신규원전 종결은 “비가역적 탈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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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v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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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접으면 한전과 기업과 국민이 환호한다 (문화일보 기고) 원 제목을 위와 같이 하여 기고한 글이 문화일보에 실렸습니다. 오죽하면 한전 사장이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기요금 할인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겠습니까? 한전 주가가 탈원전 이전 6만원에서 근래 2만 6천원대로 떨어졌습니다. 적자로 배당도 줄어드는데 주가 마저 떨어지니 소액 주주들이 열받아서 대통령과 전현직 장관을 검찰에 고발했답니다. 비용상승 요인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탈원전으로 전기요금 인상이 없을 거라는 공언을 지키기 위해 한전이 적자를 감내하는 게 부당하다는 겁니다. 알아보니 한전의 외국인 주식비율이 25%도 넘습니다. 외국인들이 이 부당성에 대해 제소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면 한전은 지금의 최하의 투자적격 등급에서 부적격으로 바뀔 지도 모릅니다. 결국 정부는 전기요금을 인상할텐데 표를 의식해 산업용 전기요금을 인상할 겁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나라 산업용 전기요금은 주택용과 실질적으로 같을 정도로 올랐기 때문에 산업용 전기 요금의 인상은 가뜩이나 떨어진 제조업의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킬 겁니다. 모순 투성이의 탈원전의 문제점을 아는 국민은 이제 7할이상이 원자력의 지속적 이용을 지지합니다. 탈원전 접으면 한전, 기업, 그리고 대다수 국민이 환호할 것입니다. 수출 경쟁력에도 악영향 끼칠 탈원전 출처 : 문화일보 | 네이버 http://naver.me/GcbHXZg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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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Oc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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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탈원전 로드맵 정부가 어제 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하며 원자력계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신고리 건설재개 기쁨은 사흘밖에 못갔습니다. 에너지 전환 로드맵이라는 이 로드맵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1. 탈원전이 국민의 뜻이라는 자의적 해석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 중 2만명을 대상으로 한 1차 여론 조사에서는 원전 축소 의견은 39.2% 로서 유지 및 확대 의견보다 4.8%p 적었습니다. 시민참여단 471명만 대상으로 한 3차 조사에서도 4.6%p 적었습니다. 다만 숙의토론 후 진행된 4차 조사에서 축소 의견이 8.0%p 우세하게 나온 것은 건설재개를 선택해 준 일부 시민참여단원이 정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합니다. 시민참여단 471명의 8%는 34명입니다. 공론화위원회는 소수인 이들의 온정을 견강부회하여 중차대한 국가 대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전 비중 축소 권고안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임무에 없는 월권적인 권고이며 불합리한 권고입니다. 정부가 탈원전 대선공약을 공론화위원회의 이 부당한 권고로 정당화하여 탈원전이 국민의 뜻이라고 한 것은 자의적입니다. 탈원전에 대한 국민의 뜻을 한 번 제대로 물어야 합니다. 2. 탈원전과 원전 수출지원의 이율배반 어떤 나라가 원전이 위험하므로 탈원전을 하겠다고 선언한 우리나라의 원전을 수입하겠습니까? 이는 이율배반이며 도덕적이지 못한 방침입니다. 탈원전을 포기하면 세계 정상급 수준인 우리나라 원전 기술로 블루오션 원전 수출시장에서 대박을 낼 수 있습니다. 지금 원전 수출을 할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 러시아, 한국, 중국, 일본 정도입니다. 원전기술은 고도의 기술이므로 아무 나라나 할 수 없으므로 그렇습니다. 3. 원전 해체시장에 진출하자는 모순 원전해체 시장은 향후 50년간 약 300조 즉 연평균 6조 정도밖에 안 되는 데다 이미 해체 기술과 경험을 확보한 해외 기업들이 여럿 있습니다. 원전해체는 약 15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제 해체 기술개발을 시작해서 경험을 쌓아 수출을 해보려면 2030년 이후에나 됩니다. 그 이후도 우리나라가 기존의 기업들에 비해 경쟁력이 있을 거라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한 기의 해체 비용 약 6500억원을 15년에 집행하면 연 430억원 밖에 안되고 그나마 40% 정도는 폐기물 처리에 들어가는 소모성 비용이라 수익이 별로 없습니다. 이미 세계 수준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원전건설 산업에 비해 해체산업은 기대수익도 턱없이 작은 레드오션입니다. 4. 원전 연장 가동 백안시 미국에는 88기의 원전이 가동기간 20년 연장 허가를 받아 60년을 목표로 가동 중입니다. 이중 44기는 이미 40년을 넘겨 가동 중입니다. 오래된 원전이라고 위험하고 고장이 많이 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최근 3년간 미국의 원전 평균 가동율이 92% (아래 인터뷰에서 93%라 한 것은 수치 착각) 였다는 점에서 입증됩니다. 5. 석탄과 가스발전 대책 누락 진정한 에너지 전환 로드맵이라면 석탄과 가스발전에 대한 계획도 응당 포함되어야 하는데 누락됐습니다. 탈원전과 탈석탄을 동시에 가져가면 가스 발전 비중이 늘 수 밖에 없어 전기료 인상이 불가피 합니다. 월 3만원 내던 가정에서 인상 후 15,000원 더 내는 것과 월 100만원 내던 중소기업에서 50만원 더내는 것은 영향이 다릅니다. 최근 셰일가스의 생산성이 정점에 도달했다는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도 있었습니다. 유가가 향후 급격하게 오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적정 에너지 믹스를 먼저 정하는 것이 순리인데 미운 털 박힌 원자력은 무조건 줄이고 예쁜 자식 신재생만 잘 키우자는 단순한 논리의 탈원전 로드맵입니다. 6.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 후속조치의 왜곡 건설재개 후속조치로 권고된 3개항은 객관식으로 제시된 4개 선택지에서 시민참여단이 선택한 것들 중 비율이 높은 대로 우선 순위를 정한 것입니다. 정부는 원래부터 안전기준 강화, 신재생에너지 비중 확대, 탈원전 정책 유지를 원해서 이들을 선택지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시민참여단은 의외로 탈원전 정책 유지를 13.3 % 제일 적게 선택하고 대신 사용후핵연료 해결방안 마련을 25.4% 로 선택하였습니다. 현명한 시민참여단은 탈원전 필요성을 높게 보지 않고 대신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중시한 것입니다. 여하간 정부에서 원한 후속 조치를 시민참여단의 입을 빌려 정당화한 것입니다. 다만 탈원전 정책유지 의견이 저조함은 숨긴 채로 말입니다. 7. 원자력 전문가 의견 일절 미반영 탈원전 공약은 수립 때부터 원자력 전문가의 의견은 완전히 배제된 채 편견을 갖고 있는 탈핵인사들의 주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원자력을 백안시하는 청와대의 편견은 공약 수립 당시와 지금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청와대는 탈원전을 지지하던 20, 30 대 사람들 다수가 숙의과정 중 원전 전문가들의 설명에 의해 원전에 대한 여러 오해가 벗겨지고 사실이 드러나면서 건설 재개로 선회된 것을 유념해봐야 합니다. 청와대가 원자력 전문가와도 한 번이라도 소통하여 그들의 말을 듣고 탈원전 기조를 재고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아래는 9시간 이상 네이버 대문에 보이던 보도입니다. 탈원전 로드맵을 질책하는 댓글들이 옹호보다 훨씬 많습니다. 국민여론이 반영되는 듯합니다. 계속되는 '원전 싸움'…매몰비용 등 '탈원전' 공방 출처 : MBC 뉴스 | 네이버 뉴스 http://naver.me/FdBILml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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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Aug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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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분별 이런 거 분별하세요? 저는 잘 못하는데 아래 노정태 작가의 글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자베르 경감을 용서한 장발장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인문학에 결핍한 사람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본문 중에 아래와 같은 말이 있습니다. 노정태 작가는 경향신문 고정 칼럼니스트하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죄로 짤리고 지금은 조선일보 고정 칼럼니스트로서 토요일 마다 맛깔나는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주말 저녁에 시무시무 하시면 한 번 보실만 합니다. --- 그런데 오직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소극적 자유만을 유일한 선으로 여기는 목소리가 대세를 이룬다. 작년 광복절 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과 화해하고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그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는 올해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몇몇 사례만 꼽아보자. 네이버의 자회사인 한국계 기업 라인주식회사의 메신저 라인은 일본에서 카카오톡과 같은 위상을 차지한 국민 메신저다. 옛날에는 대중가요의 상당수가 일본 노래의 표절이거나 번안이었지만 지금은 트와이스의 뒤를 이어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한 '니쥬'가 일본의 국민 아이돌 자리를 넘본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온갖 경제 지표 역시 한일 간의 격차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상태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은 소극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 아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과 경제의 문호를 개방하고, 1998년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대중문화의 창을 열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와 식민 지배를 겪었던 나라가 대등한 위치에 섰다. 미국과 영국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에 머물지 않고, 일본'에 대한' 자유를 국민들이 누리게 한 덕분이다. 적극적 자유의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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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아침… 박정희·김대중 그리고 일본에 대한 자유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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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Dec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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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한겨레 신문에 탈원전 대총리질의 자비 광고 낸 신광조 (Kwango Shin) 생명의 사과 대표의 글입니다. 바쁘시더라도 한 번 보시길 강추합니다. ----- ‘썩은 사과’와 ‘생명의 사과’ - 신광조 (생명의 사과 대표) -신한울 3·4호기 재개 서명 국민운동 출범에 부쳐- 이 자리를 준비해주신 최 연혜 의원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자리에 떨리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우리국민이 다시는 과학기술을 박대하고 홀대하지 말고 배우고 사랑하여 우리나라가 희망의 나라로 부강한 나라로 가는 마지막 남은 배를 기다리며 타는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저는 광주에서 왔습니다. 공무원 출신이지만 늘 세상을 개혁하고 싶어 학생운동을 최 일선에서 열렬히 한 전형적 좌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저 같은 출신, 성분, 성향을 가진 분이 좀 드문 것 같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왜 ‘탈원전’정책 찬성 반대에 이념이 좌지우지하며 정파가 중요하냐고? ‘탈원전’이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꼼꼼히 따져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느냐고? 왜 영남은 찬성 호남은 반대, 왜 한국당은 찬성 민주당은 반대, 왜 민주당은 슈나이더만 쫓아다니고 한국당은 쉘렌버그 만 쫓아다니냐고? ‘탈원전’이 정강이 될 수는 있지만, 종교적 독단 도그마가 되어버린 세상은 슬픕니다. 정책방향 결정의 족쇄가 되어서는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을 가로막는 덫이 되고 맙니다. 제 어머니 님은 겨울이 오면 난방을 하지 못하고 오돌 오돌 떨며 지내셨습니다. 난방비를 아껴 자식의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서. 화순에서 파프리카를 키우는 제 후배는 요즘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전기료가 오른다는 데 우리는 어떻게 온실 농업을 하느냐고? 국민은 ‘탈원전’에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탈원전’ 바람이 불자 대체 수입 선수로 등장한 LNG 사용은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를 양산해 국민 감기환자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국민이야 등골이 휘든 말든 뼈골이 빠지든 말든, 전기요금 마음대로 올려, “한국 전력공사는 수지 잘 맞추고 한국전력 주가 오르고 사장 경영 잘 한다 칭찬받고”, 마음대로 멋대로 폼나게 멋지게 ‘탈원전’하면 그만입니까? 과학기술의 숭상과 진흥은 국민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급소’입니다. 문화예술이 국민들 밥상의 반찬이라면 과학기술은 밥입니다. 이순신의 거북선이 그랬고, 세종의 농사직설과 한글이 그랬습니다. 가장 최근의 업적은 반도체와 휴대폰, 그리고 원자력이 그랬습니다. 과학기술이 우리나라 국민을 먹여 살리는 밥인 것입니다. 뼈 빠지게 우리들을 위해 45년간 사고 한 번 안내고 헌신해온 원자력이라는 머슴! 지난 60여 년간 선배들의 피와 눈물이 어린 역사의 금자탑! 그런 원자력을 하루아침에 버려버리겠다는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효자산업 수출산업 버리고 무얼 먹고 살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지금 우리 힘으로 우리가 키운 자식! 원자력을 버리겠다하니 국민을 늘 어여삐 여기던 세종대왕이 울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수루에 홀로 앉아 울고 있습니다.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쳤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울고 있습니다. 오곡백과 풍성하고 삼림이 울창한 나라를 꿈꾸었던 백범 김구선생이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당 대를 책임지고 사는 우리는 국민을 위해 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날이 갈수록 삶에 지쳐 우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같이 울어 줄 분이 누가 있습니까? 국민의 눈물을 닦아 줄 손수건을 장만한 분들이 누가 계십니까? 지금 이 나라에는 썩은 사과만 널려 있고 생명의 사과는 귀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처럼 나라를 풍요롭게 하고 국민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생명의 사과가 너무나 귀합니다. 사과는 원자력의 씨앗인 태양의 빛을 받고 자랍니다. 그러다 가을이 오면 빠알간 홍조를 띠며 자신을 키워준 주인에게 수줍게 다가섭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 달콤새콤하고 아삭아삭한 순정을 바칩니다. 지금 이 나라는 팩트는 없고 주장만 있습니다. 증명은 없고 목소리만 있습니다. 합리성과 건전한 상식은 없고 모순과 독선만 있습니다. 우리는 없고 진영만 있습니다. 국민은 없고 정치인만 있습니다. 과학자는 없고 무당의 주술만 있습니다. 윗사람의 비위나 맞추고 눈치만 보는 행정기술자만 있고 자기 목을 내놓고 바른 말을 하는 영혼을 가진 공무원은 없습니다. 이런 사이비 종합예술의 총체적 결과가 ‘탈원전’입니다. 썩은 사과 무당들의 춤이 ‘탈원전’입니다. 우리는 모두 과학자가 될 수는 없지만 과학자를 존중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안전하게 날아가는 비행기의 양 날개 이듯, 좌뇌의 논리와 우뇌의 감성은 좌뇌의 과학기술과 우뇌의 문화예술은,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먹여 살리는 밥과 반찬입니다. 일요일 하루 종일 노래만 부르는 TV 프로그램 편성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기분과 정서에 의해서만 좌우 되어서는 안 됩니다. ‘탈원전’과 같은 외침이 과학기술을 다루는 인간에게 “위험성을 한 시도 잊지 마라”고 주의를 당부하는 간절한 경고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과학기술을 송두리째 뿌리뽑아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재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사고부터 과학적 마인드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하여 우리들은 ‘생명의 사과’ 국민 운동본부라는 조그만 배를 띄우고자 합니다. [생생하고 명쾌하고 의미있는 사실과 과학]의 정보를 국민 여러분에게 손쉽고도 재미있게 전하고자 합니다.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고 국민이 행복해지는 데 조그마한 기여라도 하고자 합니다. 과학의 아침편지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과학교육은 입시제도와 치맛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과학적 사고가 없는 나라는 늘 ‘탈원전’과 같은 무당의 주술만이 판을 치기 십상 입니다. <생생하고 명쾌한 사실과 과학>에 입각한 과학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 질 때만이, 지금 이 나라에 혼란과 불안 갈등의 원흉이자 주범인 ‘탈 원전’과 같은 일이 다시는 국가정책화 되지 않고 시급하고도 중요하며 절실하고도 너무나 당연한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의 횃불을 태울 불쏘시개가 되어 마침내 국가를 부강하게 할 활화산이 되어 지금 이 땅에 만연한 ‘썩은 사과’를 떨어뜨리고 ‘생명의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는 금수강산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을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8. 12.13. <생명의 사과 국민운동본부> 대표 신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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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a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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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피겔 지 독일 탈원전 실패 기사가 한경에 상세히 한국경제가 슈피겔 지 기사를 자세히 소개해서 썼네요. 제가 아침에 소개한 것 보다 훨씬 낫습니다. "독일 정부는 당초 내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대의 60%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감축량 목표치 달성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결국 지난해 1월 해당 목표 달성을 포기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슈피겔은 독일이 계획대로 완전한 탈원전·탈화석연료화를 달성하려면 현재보다 다섯 배 많은 대체에너지 발전 설비를 확충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위해 향후 2조유로(약 2620조원)에서 3조4000억유로(약 4455조원)가량의 비용이 들 것으로 내다봤다. 슈피겔은 “독일의 에너지원 전환 사업은 독일 통일만큼이나 값비싼 프로젝트가 돼가고 있다”고 했다." 아래는 제 원 포스팅... 독일 에너지 전환이 실패라는 기사가 슈피겔지에 독일 통일후 최대 정치적 사업이었던 에너지 전환 사업이 매년 40조원 정도 (최근 5년간 1600억 유로)의 비용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은 줄이지 못하고 전기요금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 실패한 사업 (murks = a botched job)이라는 정밀 분석 기사가 슈피겔지에 실렸습니다. 독일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원전을 확고한 정책으로 하여 원전을 줄이며 재생에너지를 늘여 왔지만 그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갈탄 발전 증가로 이산화탄소 배출이 줄지 않아 202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달성 못할것이라는 것을 지난해에 이미 공표했습니다. 이제는 풍력발전기와 송전선 건설에 대한 주민 반발이 거세지고 있고, 가난한 국민들의 전기료 부담때문에 독일 연방 감사원장 정치에 대한 지지도가 하락하는 것을 우려해야 될 정도라는 언급도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된 기사 링크 참고하세요. A Botched Job in Germany - Der Spiegel - https://docs.google.com/…/148Lym3a487S8lha50QXG…/mobileba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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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은 값비싼 실패"…독일서도 비판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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