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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6

[커버스토리]‘이상한’ 3월 벚꽃이 우울했던 당신에게, ‘재연결’을 처방합니다 - 경향신문

[커버스토리]‘이상한’ 3월 벚꽃이 우울했던 당신에게, ‘재연결’을 처방합니다 - 경향신문

‘이상한’ 3월 벚꽃이 우울했던 당신에게, ‘재연결’을 처방합니다

기후위기를 마주하며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 ‘바로 지금, 이 길로 넘어가라’고 알려주는 신호등은 없다. 고통을 행동에너지로 옮기는 길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 과정을 도와주는 ‘재연결 작업’에 참여한 이다예, 조민지, 박시호씨(왼쪽부터)가 지난 9일 서울 중구 정동길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나란히 건너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기후위기를 마주하며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 ‘바로 지금, 이 길로 넘어가라’고 알려주는 신호등은 없다. 고통을 행동에너지로 옮기는 길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 과정을 도와주는 ‘재연결 작업’에 참여한 이다예, 조민지, 박시호씨(왼쪽부터)가 지난 9일 서울 중구 정동길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나란히 건너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꽃을 보는 게 슬픈 일이 될 줄 몰랐다. 4월에 피던 동네 벚꽃이 3월에 피었다. 서울에선 지난 100년 사이 가장 개화가 빨랐다고 했다. ‘봄의 전령’이 언젠가부터 ‘기후위기의 전령’이 됐다. “아름다운 장면인데 기쁘지가 않고, 우울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진 찍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더 힘들고요. 꽃을 보며 이런 마음을 느껴야 한다는 게 슬펐어요.”

하모씨는 지역에서 생태적 삶을 모색하는 활동가다. 포장재 없는 채소와 중고 물품을 사고, 친구들과 밭을 가꾼다. 무력감은 시시때때로 덮친다. 지난해 이상기후로 텃밭 토마토가 쩍쩍 갈라졌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변화는 더디다. 노년의 세상은 상상이 안 간다. ‘나는,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들은 무사할까.’ 미래를 내다보는 게 의미 없는 일 같다.

 

기후위기는 해롭다. 지구 생명체들의 물리적인 면을 무너뜨리는 것과 함께 인간의 정신을 마모시킨다. 일회용품 안 쓰기를 실천하다가 ‘이런다고 뭐가 바뀔까’ 회의감에 빠져본 사람부터, 환경단체 활동가와 학자까지 크고 작은 무력감과 불안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다.

해외에선 10여년 전부터 ‘생태불안(eco anxiety)’ ‘기후슬픔(climate grief)’ 등의 용어를 붙인 연구가 활발하다. 무력감, 슬픔, 분노, 불안, 절망 등 기후위기가 정신건강에 주는 부정적 영향에 주목한다. 한국에선 ‘기후우울’이라는 용어로 해석하는데, 관련 연구는 아직 드물다. ‘우울’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여겨선 안 된다고 환경운동가들은 말한다. 생존에 위협을 느낀 존재들의 당연한 반응으로 본다.

무력감과 고통을 넘어가는 데는 지렛대가 필요하다. 환경운동 시민단체인 녹색연합은 ‘알수록 답답하고, 차라리 눈을 감고 싶고, 지쳐버린’ 사람들을 위해 지난 6일부터 ‘재연결 작업’을 시작했다. 50여년 전 미국의 생태철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조애나 메이시가 만든 작업이다. “나와 세상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다시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고통을 ‘세상과 함께 괴로워하는 능력’으로 바라보는 게 특징이다. 기후우울을 넘어 ‘재연결’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지구를 위한 노력의 무력함…그 아픔을 오히려 에너지로 삼았죠”

그래픽 | 성덕환 기자

그래픽 | 성덕환 기자

이해·치유받고 싶은 마음에
자연과 인간의 끊어진 고리를 다시 잇는
‘재연결 작업’에 참여한 활동가들

지난 6일 저녁, 화상회의 플랫폼 ‘줌’에 접속한 ‘파도’(활동명)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녹색연합 ‘재연결 작업’의 첫날 참여를 위해 접속한 참이었다. 화면에선 재연결 작업 창안자인 조애나 메이시가 작업의 의미를 설명하는 짧은 영상이 나왔다.

“세상을 향한 고통을 존중하는 일을 통해 우리가 확실하게 지구와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내가 세상과 함께 아파할 수 있구나. 나에게 그런 힘이 있었어. 나는 정말 큰 존재이구나’. (그렇게 인식하고 나면) 무엇도 나를 멈추지 못합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울컥했다. 대학 때부터 환경운동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자주 절망해왔다. 큰 소리로 외쳐도, 세상은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을 바꿀 수 없겠구나. 이러다 내가 먼저 부러지고 말겠구나’ 싶어 활동을 중단했다. “내가 지구를 생각하며 느끼는 고통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 고통을 긍정하는 얘기를 들으니 눈물이 났어요. 마음앓이 해온 시간들을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날부터 시작된 재연결 작업에는 그를 포함한 15명이 참여한다. 조애나 메이시가 1970년대에 창안한 이후, 세계 곳곳에서 작업이 진행돼왔다. 메이시는 달라이 라마, 틱낫한 스님 등의 지지를 받아 온 미국의 생태철학자이자 환경운동가다.

재연결 작업이 한국에 소개된 지는 몇 년 안 됐다. 작업의 골자는 여러 존재와 연결된 자신을 확인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끊어진 고리를 다시 잇는 것이다. 메이시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생명으로 돌아가기>에 과정이 자세히 소개돼 있는데, 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추천사에 이렇게 적었다. “이 모든 것(환경문제)은 우리가 자신을 이웃과 세상 만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여기며 오랫동안 살아온 데서 연유한다. 궁극적인 활로는 ‘인간중심주의’라는 자폐적인 세계관에서 해방되는 데 있음이 틀림없다.”

통상은 오프라인에서 만나 2박3일 정도 진행한다. 코로나19를 고려해 이번엔 일주일에 한 번씩 5주 동안 화상회의 플랫폼에서 만난다. 기후활동가인 정혜선씨가 녹색연합 활동가인 이다예씨와 함께 안내자로 나섰다.

■나의 울음

‘결국 인간이 사라져야 지구가 깨끗해질까’
‘막지도 못할 것을 막겠다고 하고 있나’ 자책하다 우울

참가자들은 각자 다른 경로로 환경문제를 인식하고, 또 좌절을 경험했다. 환경 관련 시민단체나 교육활동을 하는 이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활동하는 방식도, 자신이 느낀 ‘기후우울’의 양상과 정도도 다르지만 여러 번 마음이 무너졌던 경험을 공유했다.

박시호(활동명)씨는 공연예술단체를 운영한다. 6년차 다이버이기도 하다. 물속에서 고래를 만나고 싶어 다이빙을 시작했다. 2019년, 죽은 고래 기사가 많았다. 3월 필리핀, 4월 이탈리아, 12월 스코틀랜드 해변에 떠밀려 온 죽은 고래들의 배 속에선 인간이 만든 쓰레기가 많게는 100㎏까지 쏟아졌다. 매번 짓고 부수는 무대, 공연의상과 분장 도구…. 창작활동 중 나오는 쓰레기에 죄책감이 들었다. “셰익스피어, 체호프 얘기를 잠깐 내려놓고 지금은 코 밑까지 닥친 미래,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고개를 끄덕인 예술가들을 모아 환경을 생각하는 창작자들의 모임 ‘지구숨숨’을 꾸렸다. 해양환경에 대한 고민을 두 어린이가 고래 배 속에 들어가 쓰레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라디오극 <요나 이야기>에 담아냈다.

때로는 힘이 빠진다. “인스타그램이 환경 관련 친구들로 채워지니까 ‘제2공항 짓는다’ ‘산 허물어 대규모 태양광 건설한다’ 같은 피드를 계속 보게 돼요. 아무리 반대해도 끝날 것 같지 않고, 무력감을 느끼죠.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까’ ‘결국 인간이 사라져야 지구가 깨끗해지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치닫게 될 때도 있고요.”

조민지씨는 일반 직장에 다니다가 4년 전 비영리단체인 아름다운가게 활동가로 방향을 틀었다. 환경 등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보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자책감이 찾아온다. 2019년 성공적인 기후위기 대응사례로 꼽히는 영국 토트네스 전환마을에 방문했을 즈음이다. “탄소를 엄청나게 쓰는 비행기를 타고 온 게 맞는 행동인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많은 것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도요.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을 누가 바라는가’ 생각해보다가도, 종종 자책하는 상태로 돌아가곤 합니다.”

이다예씨는 녹색연합에서 일한 지 1년6개월쯤 됐다. 지난해 재연결 작업을 경험한 뒤, 이번에 공동안내자로 나섰다. 활동가가 되기 전 스스로 ‘암흑기’라 할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며 동물권과 귀농에 관심이 많아졌다. 귀국 뒤엔 우울감이 덮쳤다. “주변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저만 혼자 변해서 많이 우울했어요.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보였고요.” 진로 고민에 기후위기로 인한 불확실성이 더해졌다. “세상이 10~20년 뒤에도 온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미래를 그리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녹색연합 면접을 봤어요. 면접 후 돌아가던 길에 지구가 티핑포인트(급변점)를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막지도 못할 것을 막겠다고 활동가가 되려 하는구나’ 싶어서 울면서 집에 갔어요. 암흑기였죠.”

활동가를 향한 정형화된 시선과 자각은 종종 죄책감을 불러온다. 조씨는 “환경단체 등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쏟을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너는 활동가이니까’라며 온갖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힘들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내가 이런 생각을 가져도 되나’라고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번 재연결 작업을 주로 이끄는 기후활동가 정혜선씨는 “이런 감정들에 ‘기후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면서도 “위협을 느끼는 생명체의 건강한 반응이기 때문에 병리작용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피하려는 ‘무감각’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환경운동 전면에 선 이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 스스로도 얼마 전까지 ‘기후위기’라는 단어가 꼴도 보기 싫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했어요. 많은 활동가들이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소리내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듣게 하려고 앞장서는 청소년·청년 활동가들의 속이 어떨지 걱정되고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연결되고 싶은 마음, 이해받고 싶은 마음, 치유받고 싶은 마음, 다른 이들에게 확장하고픈 마음 등이 재연결 작업의 문을 두드리게 했다. 하모씨는 “1~2년 전부터 주변에 재연결 작업을 경험한 친구들이 생겨서 관심이 있었다”며 “고통을 바라보는 법과 지구와 연결되는 경험을 통해 힘을 받고 싶어 신청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구의 울음

“울컥하고 답답한 감정,
내 울음 아닌 나와 연결된
지구의 울음이라 생각…
자연과 깊이 닿아 있는 사람이
아픔 안 느끼면 이상한 거죠”

정혜선씨는 앞서 영국과 호주 안내자를 통해 재연결 작업을 경험해봤다. 그는 기후우울을 다루는 강연을 할 때 틱낫한 스님의 “내 안에서 땅(지구)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 역시 기후위기를 알게 되면서 공포와 불안, 무력감 등을 느꼈다. 2016년 덴마크 성인 대안학교에서 기후위기를 처음 공부했다. 2018년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에서 발표한 ‘지구 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에 충격을 받았다. 인류 생존을 위해 1.5도 이내로 기온 상승을 억제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가다간 1.5도 상승까지 1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다. 몇 년에 걸쳐 수많은 전문가가 ‘합의’한 숫자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의 충격과 무관하게 사회는 대전환에 나서지 않았다. “소름끼치는 침묵”을 보며 마음이 자주 꺾였다. 그런 때면 ‘땅이 우는 소리’라는 말을 떠올렸다. “울컥하고 답답한 감정이 단순히 나의 울음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지구와 땅과 하늘의 울음일 거란 생각을 했어요. 자연과 깊이 닿아있는 사람이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재연결 작업의 핵심은 이런 ‘연결성’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다. 작업은 크게 4단계로 구성된다. ‘고마움으로 시작하기 → 세상에 대한 고통 존중하기 → 새로운 눈으로 보기 → 앞으로 나아가기’의 과정이다. 4단계에서 다시 1단계로 돌아가는 나선형 순환을 이룬다.

“반려동물, 숲밭의 생명…‘연결의 경험’ 떠올리면 헤쳐나갈 수 있어요”

그래픽  | 현재호 기자

그래픽 | 현재호 기자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은’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주변의 고마운 존재 돌아보며 굳은 마음 ‘밭갈이’

생태철학과 불교철학이 밑바탕에 깔렸지만, 교리나 이념을 내세운 작업은 아니다. 작업은 누구나 활용해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짜였다.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만병통치약이나 청사진, 지구 생명을 제때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그런 보장이 가능했다면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각자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각 단계는 일방적 강의가 아닌, 여러 참여 활동으로 구성된다. 첫 단계인 ‘고마움으로 시작하기’에선 주변의 고마운 존재를 돌아보게 하는 활동을 한다. 지난 6일 저녁 첫 시간에는 ‘고마움으로 시작하기’가 일부 진행됐다. 빈 칸이 있는 3개의 열린 문장을 각자 생각한 뒤, 3명씩 작은 그룹으로 쪼개져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은 __입니다’ ‘어렸을 때 즐거움을 느꼈던 장소는 __ 입니다’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__입니다’ 등의 문장이다.

하씨는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으로 얼마 전 치른 ‘시농제’를 말했다. ‘숲밭’(숲의 생태를 본뜬 밭)을 함께 일구는 친구들과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며 기원하는 자리였다. “땅 아래 미생물, 나무 위의 새, 밭의 작물과 나무 같은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하면서 ‘앞으로 자주 오가며 시끄럽게 할 거야. 잘 부탁한다’고 얘기하는 자리였어요.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밭을 한 바퀴 돌았어요. 생의 감각이 살아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박씨는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준 사람’을 ‘존재’로 바꿔 답했다고 전했다. “저에게 고마운 존재는 고양이였거든요. 단체 운영 외에도 환경책 읽기 북클럽 호스트, 지구를 걱정하는 이들을 연결하는 온라인 카페 ‘지구별숨숨마을’ 이장 등을 맡고 있어요. 스스로 ‘지치면 안 돼, 기대에 부응해야지’라는 책임감이 계속 생겨요. 같이 사는 고양이 두 마리는 저에게 아무 기대 없이 본능에 따른 행동들을 하는데, 그걸 바라만 보고 있어도 따뜻한 위로가 돼요.”

참가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고마운 존재들에 귀를 기울였다. 3시간가량의 첫 과정을 경험한 이들은 각자 작은 의미들을 발견해갔다. 실망과 좌절을 반복하며 굳어진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는 얘기를 여럿이 들려줬다.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간 무던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환기하게 됐어요.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 아무리 내리쳐도 바뀌지 않잖아요. 굳어진 마음에 ‘밭갈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정말 살아있게 하는 게 무엇인지, 감사한 게 무엇인지 꼽아본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조민지씨)

처음 안내자가 돼본 이씨 역시 ‘무뎌짐’과 ‘깨어남’을 말했다. “지난 1년간 활동을 하며 굉장히 무뎌졌어요. 일하면서 환경 관련 정책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계속 보거든요. 그러면 정말 세상은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말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특히 지난해 긴 장마 이후로 그랬어요. 재연결 작업을 진행하면서 계속 감각을 깨우는 중인 것 같아요. 둔감해진 세포를 다시 깨우는 느낌이 들었어요.”

안내자인 정씨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감사하는 법을 아는 게 기본이기 때문”이라고 첫 단계의 의미를 설명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생명이라는 이유로 거저 받은 것이 많습니다. 삶을 살아볼 기회, 꽃과 새를 보는 시간 등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았죠. 자본주의는 대가 없이 받은 것을 계속 잊게 합니다. 생명으로서 거저 받은 고마운 존재들을 자각하면, 많은 게 다시 보일 수 있어요. 감사는 내가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면서 실은 매우 ‘혁명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 바라보기

5-2 ‘재연결 작업’에 참여한 조민지, 박시호, 이다예씨(왼쪽부터)가 ‘열린 문장’을 채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강윤중 기자

5-2 ‘재연결 작업’에 참여한 조민지, 박시호, 이다예씨(왼쪽부터)가 ‘열린 문장’을 채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강윤중 기자

‘지금 가장 가슴 아픈 얘기는’…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을 표현하며
서로 연결돼 있다는 증거 인식

고마움을 돌아본 뒤에는 두 번째 단계로 고통을 바라본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고통을 존중하면서, 이를 ‘세상과 함께 괴로워하는 능력’으로 인식하게 하는 단계라고 했다. 기후위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을 서로가 연결돼 있다는 증거, 그럼으로써 행동하게 하는 힘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때문에 14가지 참여 활동 중에는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게 하는 활동이 많다. 가령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소식은 무엇인지, 지금의 세상을 살며 가장 가슴 아픈 얘기는 무엇인지, 그런 때 느끼는 고통을 어떻게 피하려 하는지 등의 질문을 던지고 표현하도록 한다.

사라지는 존재들을 돌아보는 활동도 포함된다. ‘애도의 돌무덤’이라는 프로그램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 장소나 존재를 상징하는 물건을 모아놓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며 고별하는 활동이다. ‘사라져가는 벗에게’는 멸종위기에 놓인 생물 종을 하나씩 호명하도록 한다. 죄책감보다는 유일무이한 종의 아름다움을 기리면서 슬픔을 해소하는 데 방점을 둔다. 여기엔 메이시가 쓴 동명의 시도 활용된다.

“섬개개비, 코르시카산 호랑나비, 큰뿔야생양, 인도비단뱀, 짖는원숭이, 향유고래, 흰긴수염고래/ 고래 형제여, 우리에게 남은 이 시간 동안 나를 저 깊이 데려가다오. 우리 어머니 대양의 깊은 곳에서 나는 한때 아가미로 숨 쉬고 지느러미로 헤엄쳤으니. 아주 먼 옛날 바다의 소금이 아직도 내 눈물에 흐르는구나. 이제 눈물로는 부족하니 노래가 좋겠다. 내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 벅찬 슬픔에, 내 목이 버텨낼 수 없을 만큼 이 격한 분노에 맞는 노래가 좋겠다.”(‘사라져가는 벗에게’ 중에서)

다음으로는 3단계인 ‘새로운 눈으로 보기’로 나아간다. 여러 존재와 연결돼 있음을 이해한 뒤에, 새로운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하는 ‘전환 단계’라고 했다. 자신뿐 아니라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 우리의 선택으로 영향을 받는 비인간 존재들과 미래 세대 등의 입장을 고루 생각하게 하는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다. 이어 마지막 단계인 ‘앞으로 나아가기’에서 일상에서 자신이 해나갈 역할을 찾는다. 앞으로 지켜나갈 다섯 가지 정도의 약속을 스스로 만들고, 작은 서약식을 하는 활동 등이다. 안내자들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단기적이고 구체적인 약속들을 담을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연결돼 있다

비인간 존재·미래 세대 등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일상서 해나갈 역할 찾아 서약…
기후우울을 넘는 ‘재연결’ 4단계

기후우울을 넘어서는 데 ‘재연결 작업’이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참가자들은 이미 주기적으로 덮쳐온 기후우울을 여러 방식으로 건너왔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 때로는 주변의 생명들이 무너진 마음들을 보듬었다. ‘연결된 세상’은 이미 곁에 있었다.

‘연극을 하지 않는 게 지구에 도움되는 것 아닐까, 모두가 활동가가 돼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박씨는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창작자들의 역할”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 비행기를 타고 전환마을을 찾은 데 죄책감을 느낀 조씨는 “네가 하는 활동의 근본 목적을 돌아봐라.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더 큰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이씨는 주말마다 시간을 보내는 숲밭, 거리의 나무 등 여전히 아름다운 존재들을 보며 힘을 얻곤 한다.

오는 6월 재연결 작업 과정이 끝나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이들도 확신하지 못한다. 정책과 기업, 사회를 굴리는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언제고 슬픔과 무력감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도 안다. 다만 이들은 그런 마음이 찾아왔을 때 헤쳐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좀 더 단단한 연결의 경험을 얻어가고 싶다고 했다.

기후위기 앞 ‘역시 할 수 있는 게 없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나아가는 힘 얻게 돼

“무력감을 덜 느끼기 위해 재연결 작업에 참여하게 됐어요. 다 마치고 난 뒤에는 ‘역시 할 수 있는 게 없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나아가고 싶어요.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은 아직 있고, 이런 사람들이 있고, 아직 감사할 것들이 있으니 해볼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박시호씨)

조직에서 활동가 ‘공육’(함께 배워나가기)을 맡고 있는 조씨는 “마음이 지쳤을 때 시도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도구, 또 다른 무기로서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며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 보면서 확장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후위기를 맞닥뜨린 존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하씨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모든 존재가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해보세요>

 환경운동 시민단체 녹색연합이 진행 중인 ‘재연결 작업’은 기후위기에 무력감을 느껴 본 사람들이 시도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미국의 생태철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조애나 메이시가 50여년 전 만든 작업입니다.
 작업의 골자는 ‘나와 다른 존재’, ‘인간과 지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크게 ‘고마움으로 시작하기 → 세상에 대한 고통 존중하기 → 새로운 눈으로 보기 → 앞으로 나아가기’의 4단계를 거칩니다.
 4단계의 핵심을 정혜선 기후활동가의 감수를 받아 정리했습니다. 메이시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생명으로 돌아가기>를 참고했습니다. 통상 2박3일 걸리는 재연결 작업을 1~2시간 일정으로 압축한 안입니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공간에서 따로, 또 같이 해보세요.

■1단계 - 고마움으로 시작하기
 파괴와 비극을 마주해 두렵고 지칠 때, 마음의 중심을 잡는 첫 단계입니다.

 -아래 문장을 채워보세요.
 “최근에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낀 순간은 ____이다.”
 “어렸을 때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장소는 ____이다.”
 “나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은 ___이다.”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살아볼 수 있어서 감사한 점은 ___이다”

■2단계 - 세상에 대한 고통 존중하기
 고통을 인정하면서 우리에게 세상과 함께 괴로워하는 능력이 있음을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아래 문장을 채워보세요.
 “자연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특히나 마음이 아픈 것은 ___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느끼는 감정은 ___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듣고/생각하고 싶지 않다. ___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___이다.”

 -‘사라져가는 벗’들을 불러주세요.
 멸종위기에 놓인 생물종의 목록을 하나씩 읽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을 호명할 때마다, 이를 기리는 소리를 냅니다. 종이나 북, 손뼉을 쳐도 좋습니다. 죄책감의 시간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종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기리는 시간이 되도록 합니다.

■3단계 - 새로운 눈으로 보기
 우리가 모든 존재와 연결돼 있음을 이해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전환 단계입니다.

 -네 가지 목소리로 ‘넓어지는 원’을 경험해보세요.
 세상의 고통을 야기하는 사안 중 관심있는 것을 택해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석탄화력발전소가 없어져야 하는가’ 같은 데 대한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반대자가 되어 말해 봅니다. 다음으로, 이 상황에 영향을 받는 ‘인간 외의 생명체’로서 말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안으로 영향을 받게 될 미래 인간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네 가지 목소리를 낼 때 모두 ‘나’라는 주어를 사용합니다. 다른 존재의 견해를 상상하면서 자신과 사람들 내면의 관용을 느껴봅니다.

■4단계 - 앞으로 나아가기
 다시 시작될 일상을 바꿔 대전환에 참여하는 단계

 - 다섯 가지 서약
 마음을 다잡아도 수많은 이유로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자신이 지켜나갈 다섯 가지 정도를 정해 스스로에게 서약해보세요. 당장 내일, 일주일 안에, 혹은 한 달 안에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약속이 좋습니다. 간단한 ‘서약식’을 하며 거듭난 자신을 축하해 주세요.

■다시 1단계로
 4단계는 나선형 순환구조입니다. 재연결 작업 이후에도 언제든 고통과 무기력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더 넓고 깊어진 자신을 경험하며 고마움으로 돌아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니다.


2021/05/14

이병철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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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2 h  ·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한 이십여 년 가까이 육고기는 먹지않지만 생선과 달걀은 먹는다. 어떨 때는 간혹 우유와 치즈를 먹을 때도 있다.  
몇 해전 몽골에 가게 되었을 때, 초대형태로 따라갔던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육류라도 주는대로 먹으리라 다짐하고 갔는데, 한 20여 일 머무는 동안 도저히 육류를 먹을 수가 없었다. 먹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몸이 계속 거부하는 것이었다. 고맙게도 동행한 일행의 비상식으로 지냈던 경험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지구행성을 위한 식사법'을 접하고 완전한 채소의 식사법을 추구했던 적이 있었지만, 어릴 적 바다 근처에 살면서 익숙해졌던 입맛 탓에 멸치까지 포기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비건식을 전제로 하는 수행법도 포기했다. 그러나 갈수록 육류가 중심이 되는 식사법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와 같은 공장식 축사로 사육하는 축산은 온실가스 논쟁 여부를 떠나서라도 단호히 반대한다. 나는 도저히 그런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라는 생각에서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셍각에 젯사상에도 육류를 올리지 않고 있다. 
가능한 육식 위주의 식사법을 삼가했으면 좋겠다. 기후온난화 방지에도 기여하고 동료 생명들도 보로하고.


─ 채식이라는 정치적 올바름
타임라인에 이런 글이 돌아다닌다.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의 축산 기여는 1.3%, 그중 소의 기여는 0.9%로 추정된다. 기후변화 때문에 쇠고기를 덜 먹자, 소를 덜키우자 운동을 하려면, 인도나, 브라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게 진정한 환경운동가의 자세다."

일단 이 글을 쓴 축산 관련자의 '팩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축산과 기후위기의 커넥션을 지적할 때마다 등장하는 '1.3%의 함정'에 대해서. 
나라마다 온실가스 산정 기준이 다르다. 한국의 경우, 농업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 비중은 2016년 기준으로 총배출량의 3.1%다. 이 중 축산업은 1.3%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은 농축산물의 생산 단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생산면적, 생산량, 화학비료양, 가축사육두수 등 활동자료 값만 입력하고 온실가스를 산정한다. 
유럽의 경우는 다르다. 토지 이용 방식, 모든 먹거리의 생산 과정, 해외 수입 농축산물, 생산물의 운송 방식과 거리까지도 포함해 배출량을 측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산정해서 덴마크의 농업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 비중은 17%, 독일은 6%, 영국은 7%. 전세계 평균은 14%로 추정되며, 농림업과 토지 이용까지 포함할 경우 25%에 달한다는 연구도 있다.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은 어느 해의 IPCC와 GPG 가이드라인을 따르냐에 따라 이렇게 천차만별이다. 한국의 경우는 여전히 낡은 방식으로 산정하고 있고, 유럽 방식을 따를 경우, 축산업의 '1.3%'은 배 이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 
가령, 이렇게 질문해보자. 동물사료용 콩은 어디에서 오는가? 안타깝게도 수입국 중에 남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가까이 된다(한국콩산업지). 브라질(38.5%), 파라과이(11.6%). 
맞다. 남미의 원시림을 불태우고 재배된 그 대두 콩이다. 생태학적 비극을 먹고 자란 콩이 또 탄소를 배출하며 원거리 운송으로 한국에 도착한다. 아울러 소가 먹는 목초 중 일부도 남미에서 온다. 맞다. 문제의 그 목초다. 

또 이런 건 어떤가. 한국인들은 한우만 먹고 있는가? 국내 소고기 소비 중 한우 비중은 36.4%다(2019년 기준). 나머지는 미국과 호주산 등 수입된 것들이다. 
맞다. 우리가 먹는 소고기의 절반 이상은 해당 국가의 환경운동가들로부터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축산업계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것도 탄소를 배출하며 먼 거리로 운송된다. 
1.3%밖에 안 되니, 한국에선 소고기와 기후변화의 관계를 채근하지 말라는 저 축산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이미 충분히 탄소 뿜뿜 내뿜은 '진정한' 소고기를 드시고 계신다. 어디 소고기뿐이랴. 세계 최대 식량 수입국 중 하나인 한국은 농산어촌을 고사시킨 대신, 먹거리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른바 푸드 마일리지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수치로 현혹하지 마시라. 온실가스 측정 방식을 달리하면, 농업과 축산업 비중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3%? 4%? 고작 그것밖에 안 되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지들 마시라. 지금 6%를 줄인답시고 산림청에서 전 국토의 나무들을 싹쓰리로 베어내는 등 온갖 생난리를 피우며 생태적 범죄를 저지르고 계시는 중이다.  
소고기와 기후위기 문제만 나오면 쌍지심을 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최근 농민 운동의 일부에서는 저 낡은 산정 결과인 '3.1%'에 기댄 채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자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농민과 축산업자들에게 덤탱이를 씌우고 있다는 것이다.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말도 아니다. 
소고기는 고위험 비용을 안고 있는 먹거리 맞다. 수경재배로 인해 메탄을 뿜어내는 벼농사도 마찬가지고, 토지의 표토층을 기계로 갈아버리는 경운방식도 마찬가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다음이 보인다. 
오히려 내가 '소고기와 기후위기의 커넥션'을 주장하며 채식만이 답인 듯 외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떤 강박이다. 
우선 채식을 권장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육식을 탄소의 질량으로만 환원하는 방식. 예를 들어, 소가 메탄 방귀를 뀌지 않으면 소고기는 먹어도 되는 건가? 실제로 해초를 사료로 먹는 소의 방귀는 메탄을 거의 방출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와 호주 등에서 메탄 방귀를 뀌지 않는 소와 해초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메탄 방귀를 뀌지 않고, 남미처럼 원시림을 불태우지 않고, 친환경 배출물 처리 과정으로 전환하면 소고기를 먹어도 되는 건가? 기후위기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않아야 된다는 주장은 이처럼 쉽게 기각될 운명에 처한다. 동물의 생명을 탄소로 물신화하는 건 동물의 삶을 그저 맛있는 '식품'으로만 추상화하는 자본주의 논리의 거울상 버젼일 뿐이다. 채식을 강권하기 위해 만들어낸 자가당착의 함정. 
때로 이 강박은 정치적 올바름의 채식 버젼으로 전화되기도 하고, '채식인'이라는 정체성 정치로 굳어지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실재 세계의 복잡한 맥락과 모순들을 특정 요소로 모조리 환원하거나 대표 재현한다. 

"나는 채식을 한다, 고로 나는 옳다."
"당신은 육식을 한다, 고로 당신은 틀렸다."

이 문장은 점심 시간에 재빨리 제육볶음 따위의 열량 높은 음식을 허겁지겁 채우고 다시 노동을 해야 하는 육체 노동자들의 삶을 배제한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쫓겨난 배고픈 기후난민 소년이 쥐고 있는 한 덩이의 소고기를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던져놓는다. 
세상엔 채식을 하는 '좋은 시민'과 육식을 하는 '나쁜 시민'의 가늠선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채식을 하는 인종주의자도 있고, 육식을 하는 반차별주의자도 존재한다. 해외에서 수입해온 값비싼 견과류와 비싼 국내산 두부를 먹으며 자신의 결정권을 선택하는 돈과 시간을 보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햄버거 하나로 한 끼를 때우고 부리나케 노동 현장으로 뛰어가는 가난한 사람도 존재한다. 
채식을 그저 자신의 선함을 강박적으로 전시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제로 여기거나, 채식의 문제를 그저 선택과 '자유의지'의 영역으로 축소 해석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말잔치. 나는 그게 불편하다.
딱히 그런 사람들이 농업의 구조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에코 페미니즘을 비롯해 채식과 재생농업의 관계를 사유하고 매개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두부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밀가루를 비롯한 곡류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해외 농민과 아동들의 피눈물을 먹고 자란 견과류들이 어떻게 수입되어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지 그런 문제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이들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요컨대,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채식의 정체성이 아니라 채식의 정치정치학이 아닐까. 
채식을 통해 당신 혼자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채식 인구가 늘어난다고? 육류 소비량은 더 늘고 있다. 잘 사는 북반부 국가에서는 채식 인구가 늘지만, 남반부와 개도국은 인구 증가와 함께 육류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몇 년 후에 피크를 치고 완만하게 육류 소비량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지만, 지구 전체적으로는 계속 증가하게 될 것이다. 
지금 지구는 '대두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더 많은 육류를 먹기 위해 콩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반목, 기후변화에 따른 소출 감소에 따라 대두 전쟁은 곡물 가격 상승과 함께 향후 중요한 국제 갈등의 한복판이 될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이유다. 
가급적 육식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고, 또 오래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동물들의 고통을 줄이고, 기후위기에도 대응하고, 생태적 균형을 위해 '가급적' 육식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개개인의 노력으로만 환원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채식의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소득계층의 삶의 질, 재생농업, 로컬 푸드, 채식 교육과 문화 양성, 공장식 축산화의 폐절, 육류세, 축산업의 정의로운 전환..... 등등.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적어도 저소득층들도 채식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 채식의 기쁨을 누리는 사회, 그게 기본이다.

2021/05/11

헨리 조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헨리 조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헨리 조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헨리 조지지공주의

헨리 조지
출생 1839년 9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사망 1897년 10월 29일, 향년 59세
미국 뉴욕
국적 미국
분야 고전주의 경제학, 정치경제학, 지공주의
영향받음 존 로크, 존 스튜어트 밀, 데이빗 리카도, 애덤 스미스, 프랑수아 케네
기여 지공주의의 토대를 놓음, 불공정한 토지제도를 경제적 불평등과 경기변동의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였으며 토지가치세를 주창함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년 9월 2일1897년 10월 29일)는 미국의 저술가, 정치가, 정치경제학자이다. 그는 단일세(Single tax)라고도 불리는 토지가치세의 주창자였으며, 조지주의(Georgism)라고 불리는 경제학파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조지주의는 지공주의라는 우리말로 순화되어 사용된다.) 헨리 조지는 19세기 후반에 카를 마르크스와의 논쟁에서 자본과 토지를 구분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다. 1891년 로마 교황청이 토지공개념에 대해 반대하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교황 레오 13세에게 공개서한 을 보내 교황청의 잘못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지공주의의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개인은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는 반면, 사람이 창조하지 아니한 것 즉,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대표적으로 토지, 넓게 볼 경우 환경 포함)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논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대표적 저서 "진보와 빈곤(1879)" 은 산업화된 경제에서 나타나는 경기변동의 본질과 빈부격차의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서 토지가치세를 제시하고 있다.


목차
1유년기와 결혼
2사상과 행적
3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등
4사망
5경제정책
5.1토지단일세
5.2자유무역
5.3중국인 이주 일부 제한 정책
5.4비밀투표
5.5경화사용 반대
6후대에 미친 영향
6.11909년 영국 국민예산(People's Budget)
6.2덴마크 정의당(Denmark Justice Party)
6.3토지가치세를 시행하는 국가들
6.4페어홉 시티(Fairhope City, Alabama)
6.5헨리 조지와 마르크스
6.6보드게임 모노폴리의 유래
6.7헨리 조지가 사상계에 미친 영향
7저서
7.1진보와 빈곤
7.1.1도입부-문제의 제기
7.1.21권 임금과 자본
8각주
유년기와 결혼[편집]

필라델피아 소재 헨리 조지의 출생지

헨리 조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의 중하위층 가정에서 리차드 S. H. 조지(부)와 캐서린 프랫 V. 조지(모)의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서적 출판업에 종사하는 헌신적인 미국 성공회신자였기 때문에 어린 헨리 조지를 필라델피아에 있는 성공회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헨리 조지는 그곳의 종교적인 훈육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 나머지, 졸업하지 않고 그 학교를 떠난다.[1][2] 그의 공식적인 학력은 14세 때까지이며, 그 후 15세가 되던 1855년 4월에 헨리 조지는 호주 멜번과 인도 콜카타로 항해하는 배, 힌두호(Hindoo號)의 선원이 된다. 14개월 후 그는 필라델피아로 돌아왔으며, 그곳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전까지 식자공 견습생으로 일했다. 19세기 중반 골드 러시가 일어났을 때, 서부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브리티시컬럼비아 등지에서 금광 채굴을 하였으나 생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후 1865년 헨리 조지는 인쇄공이 되어 처음으로 신문산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자, 편집인을 거쳐 발행인이 된다. 그는 수개의 신문사에서 근무하였으며, 후에 자기 소유의 신문사 San Francisco Daily Evening Post(1871-1875)도 갖게 된다.[3][4][5]

캘리포니아에서 헨리 조지는 당시 18세였던 호주계 미국인 애니 C. 팍스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고아였기 때문에 삼촌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부유한 그녀의 삼촌은 가난한 구혼자인 헨리 조지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부 삼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61년말에 결혼을 강행하였고, 4자녀를 낳았다. 헨리 조지의 부인은 모계의 영향으로 아일랜드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의 자녀들도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헨리 조지는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고 전해진다.

1862년 11월 3일 헨리 조지와 그의 부인 애니 C. 팍스는 장남 헨리 조지 주니어(1862-1916)를 낳는다. 헨리 조지 주니어는 후에 뉴욕주의 하원의원이 된다. 1865년에는 후에 조각가가 되는 둘째 리처드 F. 조지(1865-1912)를 낳는데, 이 즈음에 헨리 조지의 가정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계난을 겪는다.[6][7][8] 그러나 그 시기 이후 신문산업에서 헨리 조지의 명성이 올라감에 따라 그의 가족들은 서서히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헨리 조지의 다른 두 자녀는 모두 딸인데 장녀인 제니 조지 앳킨슨(1867-1897)은 단명하였고,[9] 차녀의 이름은 안나 A. 조지(1879년)였다. 차녀 안나 A. 조지는 무용수이자 안무가였던 아그네스 드밀(Agnes de Mille)[10]과 연기자였던 페기 조지(마가렛 조지 드밀)의 어머니이다.[11][12]
사상과 행적[편집]

Science of political economy, 1898

헨리 조지는 최초에 링컨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이었으나 후에 민주당원이 된다. 그는 철도산업과 광산업에 존재하는 이권(배타적 사업권)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부패한 정치인, 부동산투기자, 인력(人力)소개업자 등을 매우 싫어하였다. 헨리 조지는 1868년 "철도산업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란 기사에서 처음으로 그의 정치경제적 사상을 피력하였는데, 그 기사에서 헨리 조지는 주장하기를, 철도건설의 붐은 단지 이권(배타적 사업권)을 갖고 있는 소수 특권층 및 관련 기업들에게만 혜택을 줄 뿐, 건설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를 절망적인 빈곤에 빠뜨린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센트럴퍼시픽철도회사 의 경영진으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센트럴퍼시픽철도회사 경영진은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에 입후보 하려던 헨리 조지의 계획을 무산시키게 된다.[5][13][14]

1871년 어느날 헨리 조지는 말을 타러 나갔고, 샌프란시스코 만(灣)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말을 세웠다. 후에 그는 이 때 받은 영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화소재를 찾던 나는 지나가는 트럭운전수에게 그곳의 토지가격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는 소가 쥐처럼 보일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떼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도 정확히 알진 못해요. 다만, 저쪽에 1에이커 당 1000달러에 땅을 조금 팔려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부(wealth)가 증가함에도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원인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토지가치가 상승하므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특권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15]


(헨리 조지는 인구의 증가에 따른 토지가치의 상승은 토지소유자의 노력의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자가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는 문제를 발견하였으며, 이것을 두고 특권이라고 지적하였다.)[16]

더욱이 헨리 조지는 뉴욕시를 방문할 때, 오랜 기간 발전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덜 개발된 캘리포니아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생활고에 시달리는 명백한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찰과 발견은 1879년에 발간된 그의 책 진보와 빈곤 의 주제와 제목이 된다. 진보와 빈곤 은 당대에 300만부 이상이 팔렸고, 이후에도 수백만부가 팔리는 등 큰 성공을 거둔다. 그 책에서 헨리 조지는 주장하기를, 시장경제 체제에서 사회와 기술의 발전에 의해 창출되는 부(wealth)의 상당부분이 경제적 지대(rent, economic rent)라는 명목으로 토지소유자와 독점사업자에게 옮겨지는데, 바로 이 불로소득(unearned income)의 집중이 가난의 주요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과 같은 생산활동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반면, 토지(넓은 의미로는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함으로써 사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허용하는 제도에 대하여 헨리 조지는 심각한 불의(不義, injustice)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경제 체제를 노예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임금노예의 개념에 상당히 근접하다. 진보와 빈곤(1879) 에서 그는 토지세를 주창했는데, 이는 정부가 토지의 가치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저 토지를 소유했다는 명분만으로 지주들이 불로소득을 사유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헨리 조지가 주창한 토지세는 순수하게 토지의 가치에만 부과하는 세금으로서, 토지에 가해진 개량(정지작업, 심겨진 수목, 건물, 각종 시설물 등)의 가치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즉, 토지에 가해진 개량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토지개량에 따른 이익은 그 투자자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17][18]

생애 후반부의 헨리 조지

헨리 조지가 위와 같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개인적 경험이 있었다. 즉, 그 자신이 심한 가난을 겪어 보았고, 여러 지역을 이주하면서 다양한 사회를 경험했으며, 급격히 팽창하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였던 경험이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이었다. 특별히 헨리 조지는 당시 캘리포니아의 철도건설이 토지의 가치와 지대(rents)를 상승시키는데, 그 상승의 폭과 속도가 임금(wage)상승의 그것을 훨씬 웃돌아 일반 대중들이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13][19]

1880년, 저명 작가와 연설가가 된 헨리 조지는[20] 그 자신이 영국계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뉴욕시로 이주한다. 그리고 뉴욕에서부터 시작하여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등 해외 각지에서 순회연설하였다.(당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토지문제가 주요 정치적 이슈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1886년에 헨리 조지는 연합노동당(the United Labor Party) 후보로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한다.(연합노동당은 중앙노동조합(Central Labor Union)이 만든 정당이었는데, 오랜 기간 지속되진 못했다.) 뉴욕시장 선거에는 그는 득표율 2위로 낙선했고, 대신 태머니홀(Tammany Hall, 19세기의 사조직에서 출발하여 20세기 초까지 뉴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패한 정치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의 에이브럼 S. 휴윗이 당선됐는데, 헨리 조지의 지지자들은 선거 결과가 조작되었다고 믿었다.(참고로 이 선거에서 득표율 3위를 차지한 후보는 후에 미국의 26대 대통령이 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이듬해인 1887년 헨리 조지는 뉴욕주 국무장관 선거에도 출마하여 득표율 3위로 낙선했는데,[5][21] 이 선거 이후 연합노동당(the United Labor Party)은 힘이 약해지게 된다. 당시 연합노동당의 관리조직은 대부분 조지주의자들이었으나, 이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가톨릭 노동운동가들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토지와 자본을 구분하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톨릭 노동운동가들은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의 파면사건으로 인해 낙담한 상태였다. 그리고 상당수 당원들이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헨리 조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측면도 있었다.

자본주의에 반대한 마르크스는 토지와 자본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모두 공유화할 것을 주장한 반면, 헨리 조지는 토지와 자본을 구분하여 그 중 토지만을 공유상태에 근접하게 만드는 제도(지대조세제)를 주장하였다. 즉, 마르크스와 달리 헨리 조지는 시장경제와 가격의 기능과 사유재산을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경쟁의 순기능이 강조된다. 마르크스(1818-1883)와 헨리 조지(1839-1897) 두 사람의 생애는 상당 기간 겹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던 논쟁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등[편집]

헨리 조지 사망 이듬해인 1898년, 헨리 조지 기념비 제막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

당시 유럽에서는 위축되어 있던 노동운동이 헨리 조지의 영향으로 다시 활발해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활발해지는 노동운동의 배경에 헨리 조지가 있음을 파악한 로마 교황청은 헨리 조지의 사상을 불순한 사상으로 경계하게 되었다. 특히 전세계에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교황청으로서 보유한 토지에 대해 세금을 메겨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실제 이상으로 급진적인 것이라고 인식하여 경계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황청은 헨리 조지의 지지자였던 가톨릭 노동운동 지도자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를 파면하게 된다.

후에 레오 13세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초석이라 평가받는 회칙《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발표하는데, 이 회칙에서도 헨리 조지의 사상은 부정적으로 언급된다. 이에 대하여 헨리 조지는 1891년에 매우 정중하고 수려한 문체로 토지의 공공성을 성서적으로 입증하는 편지,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을 교황청으로 보낸다. 그는 공개서한을 통해 교황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회칙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편지에서 "노동 의욕을 가진 인간이 가난이라는 저주에 빠지는 것은 인간이 불경스럽게도 창조주의 자비로운 의도를 거스르면서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만들고 관대한 아버지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토지에 배타적 소유권을 설정한 후 이를 극소수에게 부여하였기 때문입니다... 회칙을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교황님은 사회주의에 반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회칙에서 완화된 모습의 사회주의를 권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미국에서 토지단일세제라고 불리는 개혁에 반대하신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공개서한이 교황청에 도달한 이후 교황청은 공식대응을 하지 않았으나, 교황청이 앞서 파면한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를 복권시킨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레오 13세가 헨리 조지의 사상에 대해 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오해가 해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자유무역에 대한 정책을 두고, 헨리 조지는 노동운동의 주요지도자였던 테렌스 V. 파우덜리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헨리 조지와 파우덜리는 원래 가까운 사이였으나, 헨리 조지가 관세에 대한 반대입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파우덜리를 비롯한 일부 노동운동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당시 노동운동가들은 수입물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자국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2]
사망[편집]

헨리 조지가 처음으로 뇌졸중을 일으킨 것은 평등지권(平等地權) 및 지대(地代)와 가난의 상관관계에 대한 세계 순회연설을 마치고 돌아온 1890년이었다. 이 뇌졸중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훼손시켰고, 이후 사실 상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조지는 자신의 사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한 정치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의사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1897년 다시 한번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1897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헨리 조지는 무소속 후보였다.(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립적 민주주의자". Independent Democrat, 무소속이지만 그 정치적 입장이 민주당의 정강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정치인을 일컫는 용어) 선거의 중압감은 그에게 두 번째 뇌졸중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결국 헨리 조지는 선거일을 나흘 앞두고 숨을 거두게 된다.[23][24][25] 1897년 10월 30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약 10만명의 추모객이 운집했다고 전해지며, 노예제도 폐지와 사회개혁을 주장했던 라이먼 애버트(Lyman Abbott) 목사가 "헨리 조지를 추모하며"[26] 라는 조의문을 낭독했다.[27]
경제정책[편집]
토지단일세[편집]

헨리 조지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地代, rent)는 사유(私有)될 수 없고 사회전체에 의해 향유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진보와 빈곤(1879)" 에는 이런 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우리는 토지를 공공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28]


헨리 조지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공동체는 토지가치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공공의 유산(inheritance)을 되찾아 올 수 있고 동시에 생산활동에 부과되는 불합리한 세금을 철폐할 수 있게 된다. 헨리 조지는 토지가치세(또는 지대조세제)를 통하여 토지투기의 유인을 차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효과적인 사용을 촉진하게 됨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였다. 또한 토지 위의 건축물이나 어떤 산업에 대해서도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지 않음으로써 공정한 시장경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29]

오늘날의 환경보호론자들은 토지를 인류의 공공재산으로 보는 헨리 조지의 사상에 동의하며, 그 중 일부는 토지가치세의 이론적 도태 위에서 환경세(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자유무역[편집]
당시의 자유무역과 ISD(Investor-State Dispute, 투자자-국가 소송)[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등 논란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오늘날의 FTA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미연방 의회 의사록

헨리 조지는 무역관세(tarriff)에 반대하였다. 당시 관세는 보호무역의 핵심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재정의 중요한 세원이었다.(연방소득세가 도입되기 이전이었음) 그는 관세가 임금상승을 저해하고 물가를 상승시키므로 일반 대중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헨리 조지는 관세로 인해 독점적 기업이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헨리 조지 생애 후반부에 자유무역은 연방정치 무대에서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고, 그의 저서 보호무역인가 자유무역인가(1886, Protection or Free Trade)는 5명의 민주당 하원의원에 의해 연방의회에서 읽혀졌다.(출처: 미연방 의회 의사록(Congressional Record))[30][31]
중국인 이주 일부 제한 정책[편집]

헨리 조지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초기 글에서 그는 중국인들의 미국 이주를 일부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2] 비록 헨리 조지 자신도 미래 어느 시점에는 이주 일부 제한 정책이 불필요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생애 후반부에 이르러 외국인 이주에 대한 자신의 초기 분석이 조악한 수준이었다고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이슈에 대한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하였다.[33]

특별히 헨리 조지가 외국인 이주에 반대했던 이유는, 저임금도 감수하려는 이주 노동자들의 성향이 국가의 전반적인 임금 수준을 내려가도록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에 헨리 조지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자가노동에 의한 소득수준 밑으로 내려가는 갈 수는 없다고 인정하였는데, 이것은 이주 노동자들이 국가 전체의 임금 수준을 끌어내릴지도 모른다는 그의 초기 주장에 맹점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밀투표[편집]

헨리 조지는 미국에서 비밀투표에 대한 초창기의 강력하고도 유명한 옹호자였다.[34]
경화사용 반대[편집]

헨리 조지는 그린백과 같은 지폐의 발행 및 사용을 지지한 반면, 금화나 은화 같은 경화의 주조를 반대하였다. 지폐에 있어서도 은행의 신용에 의해 뒷받침되는 지폐보다 정부에 신용에 의해 보증되는 지폐가 우수하다고 주장하였다.[35]
후대에 미친 영향[편집]
1909년 영국 국민예산(People's Budget)[편집]

자유당 내각을 이끌었던 데이빗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

1909년 4월 영국에서는 자유당 내각 이 국민예산(People's Budget) 법안을 발의하면서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국민예산 법안은 부유층에 전례없는 세금을 부과함과 동시에 급진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당시 내각을 구성하고 있던 자유당과 상원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보수당 사이에 격렬한 대립을 야기했고, 그 결과 법안발의로부터 1년 후인 1910년 4월 국민예산안에서 토지가치세 조항이 삭제되고 나서야 비로소 상원에서 통과되었다. 국민예산과 토지가치세를 둘러싼 자유당과 보수당의 격렬한 대립은 법안 통과 이후에도 계속되어 1910년에만 총선거가 2번 치러지게 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에 상원권한축소법안(Parliament Act 1911)이 제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영국 자유당과 보수당의 대립을 통해 기득권층이 헨리 조지의 사상을 얼마나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국민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은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데이빗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와 상무부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질(Winston Churchill)이었는데, 데이빗 로이드 조지는 이 법안의 통과를 두고 "빈곤에 대한 전쟁선포"라고 표현하였다.[36]
덴마크 정의당(Denmark Justice Party)[편집]

덴마크는 국가적 차원에서 헨리 조지의 아이디어를 적용시켜 본 최초의 나라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인클로져 운동은 덴마크에도 영향을 미쳐, 19세기 말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였으며, 대토지 소유자들이 생겨났다.

때마침 미국에서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1879)" 이 발간되었고, 그의 사상은 덴마크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02년에는 덴마크 헨리조지협회(Danish Henry George Union) 가 설립되었으며, 그 협회의 일부 멤버들은 나중에 덴마크 정의당(Denmark Justice Party)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결성하였다.

정의당은 헨리 조지가 주창한 정책 대안을 주요 정강으로 채택했다. 그 기본 내용은 토지가치의 환수,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의 폐지, 무역자유화 등 세 가지였다. 1952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의회 진출에 성공한 정의당은 1957년 총선에서 9석을 획득하였다. 정의당은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70석)과 급진자유당(Radical Liberal Party, 14석)과 함께 연립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의당은 사회민주당과 급진자유당으로부터 토지가치세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

'토지세 정부'라고도 불리는 이 연립 정권이 수립된 직후부터 토지가치세의 눈부신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토지보유세 세율은 두 배 이상 상승하였고 토지투기가 중단되었다. 반면 건물에 대한 세금이나 노동과 자본에 대한 세금은 감면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실제로 1957-60년 사이 가구당 세금 부담은 10% 이상 감소하였다.

1957년 선거 이전 덴마크는 상당한 규모의 국제수지 적자, 대규모 외채, 높은 이자율, 높은 실업률을 나타내고 있었고, 인플레이션율이 연 5%에 달했으며 통화는 평가절하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토지세 정부' 집권 이후 국제수지는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으며, 16억 크로네 규모의 외채는 4억 크로네 규모로 크게 감소하였다. 인플레이션율은 1% 수준으로 떨어졌고, 실질임금은 사상 최고의 상승세를 보였다. 생산과 투자도 상당한 정도로 증가하였으며, 실업은 거의 해소되어 완전고용 상태가 실현되었다.[37]
토지가치세를 시행하는 국가들[편집]

헨리 조지의 사상은 이 외에도 뉴질랜드·호주·싱가폴·남아프리카 공화국·타이완 등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토지가치세의 부과방법이나 세율은 국가마다 상이하다. 특별히 뉴질랜드에서는 1890년대와 1900년대 자유주의 성향의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토지소유권 개혁에 헨리 조지의 사상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페어홉 시티(Fairhope City, Alabama)[편집]

페어홉 시티(Fairhope City, Alabama)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실험하기 위해 그의 지지단체 중 하나가 설립한 도시로서 미국 앨라배마주(洲)에 위치해 있다. 헨리 조지는 경제활동에서의 공정함·정의를 중시하였는데, 페어홉이란 명칭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페어홉 시티 내 대부분의 토지는 페어홉 단일세 주식회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그렇게 소유된 토지는 99년 동안 임대차가 이루어지고 있다. 임대차가 이루어지는 99년 동안 임차인은 그 토지의 사용권을 제3자에게 이전할 수 있으며, 사용권이 이전될 때에는 그 시점부터 다시 99년 동안의 새로운 임대차 계약이 성립된다.

페어홉 단일세 주식회사의 정관은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종류의 사적인 독점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그 구성원들에게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개인의 모든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지며, 공적인 일을 위한 협력의 혜택을 골고루 분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함 [38]


페어홉 단일세 주식회사는 토지임대차 계약을 통해 임차인으로부터 지대를 징수한 후, 임차인을 대신하여 임차인이 납부해야 하는 모든 종류의 정부 세금을 납부해 준다. 그리고 그렇게 대납을 해주고 남은 지대는 페어홉 시티 전체를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토지단일세 체제를 구현한다(simulation of a single tax). 이와 같이 토지단일세 체제를 구현하는 이유는 토지의 생산적인 사용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토지의 가치를 공동체 전체에 귀속시키기 위한 것이다.[출처 필요]
헨리 조지와 마르크스[편집]

비록 헨리 조지와 마르크스는 모두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했지만, 두 사상가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마르크스는 단일세 시스템을 두고 공산주의 사회에 한 단계 못 미치는 불완전한 체제라고 여겼으며,[39] 헨리 조지는 헨리 조지대로, 만약 마르크스의 아이디어를 실제로 적용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독재로 끝날 것이라고 예견했다.[40][41]
보드게임 모노폴리의 유래[편집]

미국의 게임 디자이너였던 엘리자벳 매기(Lizzie Magie)는 헨리 조지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1904년 "지주놀이"이라는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이 보드게임에서는 최종적으로 1명의 참가자만 생존하고, 나머지 모든 참가자는 파산하게 되는데, 이것은 토지사유제가 지속될 경우 결국 소수의 대지주만 남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파산 혹은 빈곤의 상태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이 보드게임은 보다 정교해져서 "모노폴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대한민국에는 "브루마블(Blue Marble)"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The Monopolization of Monopoly)
헨리 조지가 사상계에 미친 영향[편집]

헨리 조지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톨스토이. 그는 자신의 소설 '부활' 에서 헨리 조지의 실명을 언급한다.

헨리 조지의 대중적 인기는 20세기에 걸쳐 서서히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고전주의 경제학자나 마르크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조지스트(참고:지공주의) 단체와 기관이 활동하고 있으며,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가, 정치가들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톨스토이(Leo Tolstoy), 쑨원(孫文), 헐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 데이빗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등이 있다. 특히,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부활"에서 토지단일세 이론을 헨리 조지의 실명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만나는 헨리 조지와 윤동주)

기자 출신의 루이지애나주(州) 하원의원이자 후에 루이지애나주(州) 민든(Minden)시의 시장이 된 프랭크 콜버트(J. Frank Colbert)는 1927년 조지스트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932년 테네시주(州) 멤피스에서 열린 '국제 헨리 조지 회의'에서 연설을 하였다.


단일세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평등과 자유를 상징하며, 어떤 이도 압제를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너무도 단순하여, 그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인정하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단순명료함 때문에 단일세를 등질 수는 없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조지스트 매거진, "토지와 자유" 1930년 3-4월호, 프랭크 콜버트) [42]


한편, 실비오 게젤(Silvio Gesell) 의 저서, 자연스러운 경제질서(Die Natürliche Wirtschaftsordnung)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토지사유제 및 지대에 대한 헨리 조지의 사상에 자신의 이자율·화폐이론을 접목시켜 자유화폐학설(自由貨幣學說)을 발전시킨다. 이것은 후일 J. M. 케인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근대 경제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그의 마지막 저서 "혼돈 또는 공동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 guarantee) 개념을 옹호하며 헨리 조지를 언급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헨리 조지의 영향력은 폭넓게 나타나 진보적인 인물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인물들에 의해서도 헨리 조지의 사상은 자주 긍정적으로 언급된다.
저서[편집]
진보와 빈곤[편집]
도입부-문제의 제기[편집]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의 증대와 노동의 효율성이 높아졌고 이런 사실로 사람들은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예상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고 불황과 노동착취가 확산되었다.

이런현상속에서 공통적으로 발전된 지역일수록 빈부격차가 더 심화되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리고 전자 헨리 조지는 정치 경제학적인 방법으로 이런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1권 임금과 자본[편집]

1장-현재의 임금학설-그 불충분성

헨리 조지는 당대 노동자의 임금 문제를 "생산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왜 임금은 생존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가?"라고 제시한다.

이 문제를 두고 헨리 버클등 기존 정치경제학자들은 임금을 자본량와 노동자의 수에 따라 결정되며 (임금을 낮추는)노동자 수가 자본량보다. 유사 혹은 더 급격히 늘어나서 임금이 늘지 못하고 최저수준으로 낮게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그러 나 헨리 조지는 이자율을 기준으로 이를 반박하는데 이자율은 자본량과 반비례하며 따라서 기존 임금학설에 따르면 이자율에 따라 임금도 반비례해야하는데 현실에서는 정 반대로 이자율과 임금이 정비례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에 헨리 조지는 기존이론(임금은 자본량에서 나온다)을 반박하며 새롭게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게 아니며 실제로는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나온다"라는 학설을 제시한다.

2장-용어의 정의

임금-

3장

4장

5장

(작성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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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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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화, 괄호의 안의 문장은 옮긴이의 추가 설명임, 2012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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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ll Lepore' (2008년 10월 13일). “'Rock, Paper, Scissors: How we used to vote'”. 《New Yorker》. New Yorker.
To illustrate: It is not the business of government to interfere with the views which any one may hold of the Creator or with the worship he may choose to pay him, so long as the exercise of these individual rights does not conflict with the equal liberty of others; and the result of governmental interference in this domain has been hypocrisy, corruption, persecution and religious war. It is not the business of government to direct the employment of labor and capital, and to foster certain industries at the expense of other industries; and the attempt to do so leads to all the waste, loss and corruption due to protective tariffs. On the other hand it is the business of government to issue money. This is perceived as soon as the great labor saving invention of money supplants barter. To leave it to every one who chose to do so to issue money would be to entail general inconvenience and loss, to offer many temptations to roguery, and to put the poorer classes of society at a great disadvantage. These obvious considerations have everywhere, as society became well organized, led to the recognition of the coinage of money as an exclusive function of government. When in the progress of society, a further labor-saving improvement becomes possible by the substitution of paper for the precious metals as the material for money, the reasons why the issuance of this money should be made a government function become still stronger. The evils entailed by wildcat banking in the United States are too well remembered to need reference. The loss and inconvenience, the swindling and corruption that flowed from the assumption by each State of the Union of the power to license banks of issue ended with the war, and no -one would now go back to them. Yet instead of doing what every public consideration impels us to, and assuming wholly and fully as the exclusive function of the General Government the power to issue money, the private interests of bankers have, up to this, compelled us to the use of a hybrid currency, of which a large part, though guaranteed by the General Government, is issued and made profitable to corporations. The legitimate business of banking - the safekeeping and loaning of money, and the making and exchange of credits, is properly left to individuals and associations; but by leaving to them, even in part and under restrictions and guarantees, the issuance of money,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suffer an annual loss of millions of dollars, and sensibly increase the influences which exert a corrupting effect upon their government. The Complete Works of Henry George. Social Problems, page 178, Doubleday Page & Co, New York, 1904
“The National Archives Learning Curve | Britain 1906-18 | Achievements of Liberal Welfare Reforms: Gallery 2”. Learningcurve.gov.uk. 2008년 9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4일에 확인함.
전강수, 토지가치세와 덴마크 정의당, http://www.land.kimc.net/news/183/1.htm[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2년 8월 9일 확인
http://www.fairhopesingletax.com/
Karl Marx - Letter to Friedrich Adolph Sorge in Hoboken
Henry George's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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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rank Colbert, "Taxation and Prosperity"”. Cooperativeindividualism.org/colbert. 2009년 6월 7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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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839년 태어남
1897년 죽음
미국의 경제학자
미국의 정치철학자
좌파 자유지상주의자
19세기 경제학자
고전파 경제학자
지공주의
캘리포니아주의 공화당 당원
캘리포니아주의 민주당 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