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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4

한국교회가 삼위일체신앙을 두목주의 세력에 양보하면 안되는 이유 -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체제, 경제질서, 그리고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 : 네이버 블로그

한국교회가 삼위일체신앙을 두목주의 세력에 양보하면 안되는 이유 -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체제, 경제질서, 그리고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 : 네이버 블로그

한국교회가 삼위일체신앙을 두목주의 세력에 양보하면 안되는 이유 -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체제, 경제질서, 그리고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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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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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삼위일체신앙을 두목주의 세력에 양보하면 안되는 이유

 

-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체제, 경제질서, 그리고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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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우상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쇠를 녹여 너희가 섬길 신상들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레 19: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신 5:8)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사 45:16)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사 44:9)

 

 

1. 바르트

⑴ 칭의

⑵ 행동

⑶ 성령

⑷ 화해의 主 예수 그리스도

 

2. 인간소외

⑴ 아시아 고대사상 전제의 인간 소외

⑵ 예수 신앙 전제 인간 소외

⑶ <민담~新종교~민중신학> 전제의 인간 소외

⑷ 현대인의 소외


3. 인간해방

⑴ 인간존엄성

⑵ 기독교

⑶ 한국 新종교(천도교 外)

⑷ 유학, 성리학, 실학

⑸ 분단체제와 민중운동

⑹ 시민 사회


4. 좌우합작

⑴ 新종교와 민족담론 연관

⑵ 김구·김규식

⑶ 통일전선

 

5. 칭의

⑴ 믿음과 행함

⑵ 이신칭의

 

6. 양명학

⑴ 양지

⑵ 지행합일

⑶ 공감적 영성

 

7. 화쟁

⑴ 一心에 도달

⑵ 소통

⑶ 통합

  

 

0. 한국교회가 삼위일체신앙을 두목주의 세력에 양보하면 안되는 이유

-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체제, 경제질서, 그리고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

 

 

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다원주의로 모든 형태의 권력집중을 반대한다. 다당제 정치구조로 드러나며 근간은 종교의 자유에 기반한다. 반면에, 유일당 운동은 한국현대사에서 민족운동으로 기록되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아니다.

 

한국현대사에서 민족운동의 중심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아니었다는 모순은 한국현대사를 부정적으로 지배했다.

 

20년대는 좌우합작운동으로 진보 정치의 기원에 해당된다. 20년대는 고종과 순종의 '운지'일에 맞춰진 연합정치가 지배했고, 이는 두목과 연관된 두레주의로 표현되는 아시아 종교정서와 연결됐다. 6.15선언 2항으로 형성되는 남북연합권력체도 그렇게 볼 때 사실상 '두목'으로서 한반도 유일당(헌법적으로 불법이 명백하다)으로 주변에 두레 공동체 문제로 존재한다. 두레 공동체 문제는 거버넌스/상생․화해/화해․협력/소통/시민참여/민족화해 등 복잡하게 표현되나, 본질은 같다. 이는 개인주의적이 아니란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관계를 말한다.

 

삼위일체 신앙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의 권력분립을 초래하는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시민정치를 가져왔다. 반면에, 두목주의 신앙은 군주와 民사이에서 눈치보며 재미보려는 관료의 이데올로기로 존재한다.

 

⑵ ‘중도파 마을’의 <마을주의 충성 위한 死六臣 전략>과 기복주의적 소망의식으로서 통일관은 정당한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다. 양심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형성기에 참여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현행 헌법과 다른 질서의 국가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엘리트끼리 짜고 문화를 다 바꾸어 버리겠다는 의도는 정당한가?

 

반공시대는 분단의 상처로 표현하며 중도마을의 소외를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의 중도파 갑질의 통일방안은, 다른 의미에서 반공마을의 소외를 가져오고 있다. 또다른 인간소외가 된다. 즉, 인간소외는 분단이 야기한 게 아니라 남북분단을 폭력적으로 초래하게 만든 한국 민족성에 각인된 씨족주의 본성이 초래한 것이며, 그것이 무게중심추로 오락가락 한 것이라 봐야 옳다.

 

마을주의는 해방감을 찾는 그곳이 바로 소외를 야기하는 곳이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서구적인 것을 수용하는 척 했지만, 사실은 천도교 민주주의였다고 보인다. 가감없이 지방유지를 배려한다고 선언하는 민주화관련인사의 글이 보이나, 아시아 종교에 의탁된 분권주의는 국가로도 지방으로도 어디로도 통제안되는 국가의 파벌주의적 분열을 초래케 했다.

 

가족주의는 기업에서 관리부서와 생산부서의 분열로도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생산부서는 너무한 이기주의라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책을 딴 마을 지적으로 치부하며 이기주의를 몰아간다. 정부와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위해 국회가 꼭 도와줬으면 하는 것은 국회는 정부 가족주의로 본다. 국민은 그 국회가 국회마피아 가족주의로 보인다.

 

⑶. 삼위일체 신앙과 두목주의 신앙은 구별돼야 한다. 삼위일체 신앙은 상품화폐관계가 소외다. 시민사회 관계 복원이 해방이다. 반면에 두목주의 신앙은 마을 좌절된 도시가 소외고, 마을이 구현된 씨족 공동체가 해방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점에서, 시작부터 자아의 몫이 인정되도 겸손의 여지를 담는다. 아시아 종교는 대부분 관료의 신비한 특성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와 연결된다.

 

⑷ ‘두목주의’의 종교정치적 드러나는 현상 (엘리트는 시민의식 보다도 무조건 官을 의존하려 하며, 官을 차지한 연후엔 독단의식을 갖고, 그 독단의식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엘리트는 관료(특수계층)로서 직관적 느낌을 신비화하며 군주와 民사이에서 입지를 강화한다.

 

기독교의 계시신앙이 망가진 채, 성경을 읽는 일차원적 직관적 느낌과 동일시된다면, 아시아종교와 다양한 옷 바꿔 입기가 가능하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그런 전제 위에 있다.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배교행위다!! 삼위일체 예수신앙이 없는 기독교가 어딨나?

 

⑸ 기독교 통일운동인가, 한국교회의 스스로 이단 배교행위로의 파멸인가?

 

기독교 신앙의 계시 신앙이 계피된 채, 유불선사상의 엘리트나 특수계층의 직관적 느낌과 겹쳐질 수 있다면, 엘리트가 주입한 가치관은 몇단계거쳐서 하나님 명령으로 둔갑할 수 있다.

 

북한과 친북좌파가 합의한 사안은 무속신앙 계열 新종교의 기복주의로 우리의 믿음인 것처럼 바뀌어지고, 불교의 화쟁교리로 덧입혀 공산마을의 억울감을 보편적인 억울감으로 바뀌어지고, 이런 현상을 하나님명령으로 생각하며 기독교인은 직관적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즉, 지하혁명당의 명령은 몇 단계만 거치면 민중계급에 하나님처럼 비춰질 수 있는 셈이 된다.

 

노자의 道가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고, 모든 매스미디어가 좌파 인맥에 의해서 통제가 된다면, 하나님 계시가 아닌 것이 하나님 계시인 것처럼 조작될 수 있다. 이는 한국 복음주의 교회가 사회참여신학에 둔감하여 직관적 느낌 수준으로 생각하고, 사회매스미디어의 좌파 학연 연고집단의 독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⑹ ‘두목주의’ 사회의 사물화와 인간 소외는 심각하다. 서구 시민사회는 상품 화페관계로서 지배받는 객체로서 소외의 아픔을 느끼지만, 두목주의 사회는 관직 지도자 위세가 물신화되고 주민은 배제되는 객체로서 아픔을 느낀다.

 

더불어, 두목주의 사회는 역사 사골 국물이 게속된다. 두목에 잘 도움되는 서포터였다는 지적은 자손 만대 누리는 궁물의 보장이기에, 역사 사골 국물의 유혹이 계속된다. (국가적으로는 비 생산적이나, 개인에겐 놓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⑺ 진짜 다원주의는 시민사회 기반이다. 가짜 다원주의는 두목을 중심으로 두레 관계로 서는 주체가 다양성이 있다 수준으로 표현된다. 국제사회를 속이고 국내로 수입하며, 두레 관계의 주체가 다양성이 있다는 게 다원주의인양 국민을 우롱한다. (두레 자체가 궁극적으로 한명을 보고 서는 관계다)

 

한국은 사상의 자유시장논리가 민망하다. 사상의 이중매매로 상황 따라 한 말을 다른 의미로 쓰는게 너무 빈발하다. 사상의 독과점도 남발한다. 대중을 순응적 주체로 생각한 프레임질이 난무한다.

 

⑻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이 폐기되고 직관적 느낌만 강조되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정치꾼들에 머리가 인질되고 낚인다. 또, 한반도 유일당 중심으로 한국종교를 두레관계로 줄세우는 적화전략에도 그대로 부역하게 된다. 국가와 국민을 향한 공적윤리를 말할 출구가 막힌다.

 

- 말씀이 주인인가, 기독교정치와 관련된 두목이 주인인가?

- 새로운 자료로 변화되지 않는 대졸자 장년층의 장기주도는 정당한가? 국민을 대변하지도 않으나, 6.25 세대보다는 대졸이란 면 때문에, 그리고 아랫세대보다는 장년이란 이름으로 무조건 지배할 수 있는가? 이들 세대의 직관적 느낌 중심의 대번대번함과 자기 중심적 (그 옛날 대졸자 자존심) 가치가 좌파 사회의 역이용 토대였다.

- 그 옛날 참여신학의 부정확성은 오늘에서 번역서가 많이 나온 입장에서도 따라갈 이유가 있는가?

- 반공마을의 갑질은 부당하고, 중도마을의 갑질은 정당한가?

- 두목주의가 아니라 헌법은 사회계약론으로 대한민국을 정당화한다. 성경도 사회계약론을 말한다. 단, 헌법은 '동의'로 말하고, 기독교 신앙은 '칭의'로 말한다. 그런 작업으로 한국현대사를 분석해야 북한인권을 논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북한인권 담론은 직관적 느낌이 우세하고 신학적 토대가 거의 없어 보인다.

 


 

0. 한국교회가 삼위일체신앙을 두목주의 세력에 양보하면 안되는 이유

 

- 기독교 신앙, 자유민주체제, 경제질서, 그리고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

 


 

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 다원주의 = 다당제 – 근간은 종교의 자유

 

유일당운동 = 민족운동 ≠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한국현대사에서 민족운동의 중심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아니었다는 모순은 한국현대사를 부정적으로 지배했다.

 


 

㈎ 20년대 좌우합작운동

 

 

 

일반 현대사

민족운동사

1919.3.1.운동 – 고종 운지

1926년 광주학생운동 – 순종 운지

1922년 대공주의

1920년대 민족유일당 운동

고종․순종 등 전제군주 → 신간회, 임시정부 : ‘정신적 군주’의 교체

 

 

 


 

권력 중심 + 두레적 공동체 관점 → 현대사는 민족운동(우파 역사), 혹은 민족해방통일전선(좌파 역사) 기재

 

 

 

20년대

좌우합작운동

건국준비위원회

~ 남북연석회의

민주화운동

~ 6․15

 

 

 


 

㈏ 6․15 선언 제2항으로 건설되는 남북연합 권력체 = 한반도 유일당 + 두레적 공동체 관계(거버넌스/상생․화해/화해․협력/소통/시민참여/민족화해 = 사회주의적 관계)

 


 

- 한반도 유일당(북한공산당 + 친북좌파)을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 – 무속 신앙 계열 新 종교의 종교정치(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 등의 연합) + 민중신학(기독교의 천도교화) → 정치적 군주를 받드는 종교감성체계로 국민 길들이기

 


 

㈐ 삼위일체 신앙의 ‘두목주의’ 세력에 양보 → 북한의 대남전략에 종교통일전선 차원으로 한국교회가 투항하는 것의 정당화(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 삼위일체 신앙 : 수직적 & 수평적인 시민정치 체계 믿음. 미국 연방 및 독일 연방 질서 및 기독교국가 시장경제질서의 사실상 기반.

 


 

- 두목주의 : 君主와 民 사이에서 눈치 보며 관료로 재미보려는 이데올로기. → 다수 문맹 국민들에 통일전선전술을 시도할 때 마을 유력 인사가 중심축이 됐다. (기존의 자료는 ‘영웅’‘엘리트’ 등의 표현으로 제시한 대상을, 이 글은 ‘두목’으로 표현하는 차이가 있다.)

 

 

 

- 임시정부나 신간회운동은 기존 대한민국 현대사에 끼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목주의로 해석할 때, 임시정부 공산파 및 신간회운동 공산파만이 두드러지고 나머지 세력이 전부 파묻혀지는 일이 빚어진다. (그렇다. 북한공산당은 왕조적 특성을 안은 레닌 스탈린주의 이입된 현실사회주의라니까)

 

- 분리주의로 좌우합작 영역을 전부 폐기하고 대한민국 현대사는 쓰여지지 않는다. 좌우합작 영역을 폐기하여 한국사의 중심을 좌익에 양여하고, 이승만을 표나게 내세워 두목주의로 서술하면, 그것은 200% ~ 300% 좌익이 원하는데로 해주는 자책골이다.

 

 

 

 

 

⑵ ‘중도파 마을’의 <마을주의 충성 위한 死六臣 전략>과 기복주의적 소망의식으로서 통일관은 정당한가?

 


 

- 신간회운동(민족유일당운동) ~ 건국준비위원회 ~ 남북연석회의 : 북한 정권 배제 + “이승만 체제에 배제” or “乙”→ 우리 마을 위주로 되도록 文化를 바꾸고 똘똘 뭉쳐야(死六臣전략) → 중도 마을 기복주의로서 ‘민주 통일운동’

 


 

㈎ “분단의 상처” → 중도마을의 좌절 / 다수 일반국민에겐 무질서의 정리일 수도

 

 

 

㈏ 분단 = 인간소외 → 중도마을 乙상태의 토로

 

→ 영구한 甲을 위한 통일운동. = 중도마을 아닌 지역 사람들에겐, 민주화 이후 통일운동사가 또다른 인간소외의 역사일 수도.

 


 

※. 해방의 ‘아수라백작’논리 (한국 사회에는 명분과 실제가 쪼개진 정치언어가 정말 많다.이는 거의 대부분 정치적 이익과 연관된다.)

 

 

 

명분

현실

인간해방으로서 서구 보편민주주의 구현

특정 마을 엘리트의 권세와, 그 연고 집단의 궁물과, 그로 인한 마을 주민의 만족

 

 

 

 

 

㈐ 마을주의에서 해방감을 찾는 그 의식에, 다른 마을에 인간소외를 야기하는 감정이 싹튼다. → 마을끼리는 결코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객관화된 입장을 내기 어렵다. (= 5.16으로 힘으로 외부에서 결론을 내리는 지점의 정당화)

 


 

㈀ 지방자치 – 동학 포접제 반영으로 추정됨. (김지하 전집 중 김영삼 신한국당 때 쓰여진 칼럼과, 김영삼 때 쓰여진 지방자치학 책자는 논리의 유사성이 상당함)

 

- 지역 유력인사의 주권차원으로 김지하씨는 ‘아무개 포’로 설정하는 것을 주장함.

 


 

ⓐ. 지역 유력인사는 충성자 확보로 ‘당근(고물)전략’을 취하고, 무리한 개발은 지방재정 압박으로 다가왔다.

 


 

ⓑ 지역 유력인사의 지배력을 위한 과시 행정의 댓가로 흔들리면, 정부의 지원 타령으로 이야기한다. (끝까지, 단 한차례도 사과나 회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 대기업 관리 현장과 생산부 노동조합의 서로 다른 시각

 


 

ⓐ 관리부서 : 아따 생산성이 회복될 때까지, 근로자가 안 참아주면 회사가 망한다.

 

ⓑ 생산부서 : 아따 그것을 왜 우덜에게 전가하나, 관리부서, 니네가 무능해서 그렇지.

 


 

㈂ 정부와 국회의 다른 시각

 


 

ⓐ 정부 : 국민행복을 위해선 국회는 이것을 꼭 처리해주셔야

 

ⓑ 국회 : 국회가 정부 卒이냐?

 

 

 

민주통일담론’의 중도마을 마을주의 위주의 기복주의 담론이 뜨면서, 온 사회가 마을주의로 각각 자기 이기적으로 분열적으로 놀아나는데, 조갑제기자는 도덕이 관념론이라고 못 박으며 ‘실리’위주의 실용주의 밖을 말하면 안되는 식으로 장기간 글을 써 왔다.

 

 

 


 


 

⑶. 삼위일체 신앙 vs 두목주의 신앙

 

 

 

삼위일체

두목주의

삼권분립 ․ 분산

제왕학

시민사회

마을 (엘리트 + 수동적․순응적 주민)

상품․화폐 관계 (소외)

자기 존중 상대 배려(해방)

도시 가족 밖 (소외)

농촌 가족 안 (해방)

 

 

 


 

사회적 삼위일체 –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인도. (=시민사회 속 교회의 사명 구현) 시민사회(교회) 공동체 속 자아 인식.

 

→ 지식은 협업. 공동체 공간에서 오류 수정.

 


 

두목주의의 사회참여 : 우주 ~나 ~ 천지에 동참과 천지의 화육 (= 군주제 강화) 자신의 직관적 느낌이 민중을 대변한다는 엘리트 자아인식(사실상 오류 불가)

 

→ 지식은 君子不器로서 사통팔달의 ‘이인, 진인, 도인, 성인’의 의식을 가진 자.

 


 

⑷ ‘두목주의’의 종교정치적 드러나는 현상 (엘리트는 시민의식 보다도 무조건 官을 의존하려 하며, 官을 차지한 연후엔 독단의식을 갖고, 그 독단의식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 중용 : 사람은 천지의 화육을 도와준다. 성인은 우주의 핵심.

 

 

 

이론의 의미

문자적 의미 : 중심, 균형, 중립

실질적 의미 : 실체적 근원, 공정성

실천의 측면

적합성, 적절성

관계의 측면

평범성, 일상성

성품의 측면

습관, 조율된 반응

 

 

 


 

ⓐ <한서> 곡영전 : 建大中以承天心. (大中 = 皇極)

 

中 - 우주 전체. 상하 관통 평형

 

大中以正. 무편부당 → 중국 최고의 공정한 도덕원리

 

ⓑ 仁과 禮의 균형

 

ⓒ 원시유가, 원시도가, 대승불학 : 초월 형이상학 ~ 내재 형이상학 겹침 → 씨족 神은 이토록 동북아 사람들 마음에 힘이 세다.

 


 

㈏ 중국 문화 = 인륜의 문화 = 관료들의 궁물지향적 탐욕의 정리 & 民의 행복

 

→ 관료들의 궁물지향적 탐욕을 막아내면서 체제를 지키거나, 못 막아서 무너진 역사

 


 

㈐ 성리학 : 관료의 직관 인식(格物致知 능력)의 신비화

 

 

 

形而上

추상적 보편적

未發

靜性(仁義禮智信) -本然之性/氣質之性

形而下

구체적 개별적

己發

動情(惻隱, 羞惡, 辭讓, 是非, 七情) -欲/情

 

 

 


 

- 직관적 느낌(心)을 원리 중심(주리론)으로 보느냐, 자연중심(주기론)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관료 직관 인식의 신비화가 종교심리의 실체다.

 


 

- 그 관료가 하는 일은 王부터 民까지의 서열을 배분하고 배치하는 것이다.

 


 

㈑ 불교 : 道= 인과론. 깨달음에 이르는 길. 고성제→집성제→멸성제→도성제

 

- 보살 : 부처의 지혜를 갖고 살아있는 것. 부처의 지혜를 구하면서 그것이 반드시 성취되게끔 살아있는 것.

 

※ 원효 대사의 회통 사상은 초월계(진여문)과 현상계(생멸문)의 상호교류를 주장.

 

 

 

왕권제 생활공동체 내 관료(혹은 특수계층)의 직관적 느낌의 신비화

- 유교 君子 仁 격물치지

- 도교 도사 양생술 物我一體

- 불교 보살 깨달음 一切唯心造

 

 

 


 

㈒ 기독교가 ‘직관적 느낌’ 수준으로 절하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엘리트에 의해 주입되는 종교적 가치관의 동어반복이란 셈. 사실상 순응적 대중이 많은 한국에서 보수 교회 및 진보교회 양축 모두에 있었던 것도 사실.

 


 

- 성공기복주의 : 도시생활의 경제적 곤란에서의 심리적 위로

 

- 정치기복주의 : 민주연합정부 결성으로 대박 궁물이 퍼부어진다는 기대감

 

 

 

기독교의 계시신앙이 망가진 채, 성경을 읽는 일차원적 직관적 느낌과 동일시된다면, 아시아종교와 다양한 옷 바꿔 입기가 가능하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그런 전제 위에 있다.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배교행위다!! 삼위일체 예수신앙이 없는 기독교가 어딨나?

 

 

 


 

⑸ 기독교 통일운동인가, 한국교회의 스스로 이단 배교행위로의 파멸인가?

 


 

㈎ 기독교 신앙의 계시신앙이 폐기된 채, 유불선 사상의 엘리트나 특수계층이 주입하는 직관적 느낌과 겹쳐질 수 있다면 ? 엘리트가 주입한 가치관은 몇 단계 거쳐서 하나님 명령으로 둔갑이 가능하다. (몇 단계만 건너면 인간이 하나님 명령인양 하는 망발 가능)

 


 

㈏ 북한공산당과 친북좌파가 합의한 사안은

 

- 천도교나 도교계열 新종교를 거쳐서 우리의 믿음인양, 기복주의를 입어 북한공산당 지시를 감추기 세탁하고,

 

- 불교의 화쟁교리로 공산마을 시점에서의 억울함만을 대변하며 보편적인 목소리화하여, 종북좌파의 분파주의적 비합리성을 감춰주며,

 

- 이런 과정을 거쳐 흘러온 실체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명령’으로 생각하며 직관적 느낌으로 동참할 수 있다.

 

 

 

지하혁명당의 명령은 몇 단계만 거치면 민중계급에 하나님처럼 비춰질 수 있다.

 

 

 


 

㈐ 노자의 道가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고, 모든 매스미디어가 좌파 인맥에 의해서 통제가 된다면, 하나님 계시가 아닌 것이 하나님 계시인 것처럼 조작될 수 있다.

 


 

→ 이는 기독교 목회자들이 사회적 참여 신앙을 주장하면서도, 사회적 삼위일체에 둔감하며 직관적 느낌으로 사회와 연대하는 유교의 仁 사상에 갇히고, 內聖外王수준의 조화인식에 갇히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 참여신학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대개 도교와 양명학 사이 수준이며 민중신학 과거 논리에서‘칭의’를 거의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칭의’를 설명할 수 없는 기독교 참여신학은 모두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한국교회 신학사상사에서 제2시대를 여는 신학자로 장공 김재준을 첫 손에 꼽아 존경을 표하지만, 실제로 그 분들은 거의 전부가 20세기 개혁파 신학을 대표하는 칼 바르트를 배우지는 못했고 잘 알지도 못했으며, 그 신학의 속알을 접촉하지 못한 분들입니다. (225쪽. 조향록님 글 중.)

박순경 외, 『팔순기념문집, 과거의 것을 되살려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계절, 2003.

 

 

 


 

⑹ ‘두목주의’ 사회의 사물화와 인간 소외

 


 

㈎ 사물화 : 시장사회는 돈에 낚이고, 두목사회는 관직에 낚인다.

 

 

 

시민사회

두목주의 사회

상품~화폐 관계

관직, 지도자 위세

지배 받는 객체

배제되는 객체

상호 배려 사회

대동사회(원시 씨족 사회)

 

 

 


 

㈏ 역사 사골 국물 (민주팔이들은 ‘역사청산’ 운운으로 치부한다)

 

- 조선조 공신 귀족 룰루랄라 풍습. 울과 내면 낼수록 國家에 뽑을 것을 뽑는다는 전제.

 

→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부작용만 넘치는데도, 대한민국 건국기의 문제로 역사 사골국물을 끓여야 되는 문제가 있다.

 


 

⑺ 진짜 다원주의와 가짜 다원주의

 


 

㈎ 군사정부와 다른 방식으로 다원주의는 이행되고 있지 않다.

 

- 중도 세력과 관련된 유력인사는 시시콜콜하게 과잉 기억되고,

 

- 반공주의와 관련된 주류 인사는 대부분 강제 망각되고 있다.

 

 

 

국가주의

두목주의

반공마을 중심

중도마을 중심

군사정부와 억압기구의 결합

파벌 정치 엘리트와 특정 언론의 연합

사람결합은 힘으로 분리

소비사회 욕망 매개로 분리

엘리트의 붕당성격을 제어하다가 국가가 붕당이 되는 문제 노출

국가의 권위주의성격 제어한다고, 국민이 그토록 싫어하던 50년대의 파벌주의의 완전 복원

 

 

 


 

㈏ 군주(씨족 神)안에서 두레식으로 수렴되는 多주체성은 무늬만의 다원주의고, 사실상 획일주의 → 시민사회의 다원주의인양 왜곡 홍보 (특히, 국제사회를 속이고, 그 속인 여파를 수입하는 것은 최고 악질!!)

 


 

㈐ 민주화 이후 ‘사상의 자유시장’논리가 민망하게, 두목주의에 권력집중된 엘리트는 오류를 범해도 논란에서 빠져 나간다.

 

- 사상의 이중매매 : 하나의 사상을 서로 다른 맥락에서 동시에 팔기

 

- 사상 시장의 독과점 : 갑질 그 이상의 갑질. 대중 세뇌는 모든 것의 첫단추라고??

 


 

⑻ 문제점과 대안

 


 

㈎ 문제점

 


 

- 기독교의 삼위일체 계시신앙이 주어진 상황에서의 직관적 느낌으로 바뀌어진다면, 정치 파벌과 연관된 언론 엘리트 마피아의 주입에 한국 교회성도들이 인질화된다.

 


 

- 한반도 유일당(북한공산당 +종북좌파)으로서 종북연합 권력중심으로, 애국심을 망각영역에 빠뜨리고 중도마을 엘리트만 구제하고 나머지 국민의 기본권을 팽개치는 데, 친일부역에 이은 또다른 反민족 부역의 싹을 내포한다. (가히, ‘하나님 팔아’ ‘나라 팔아’로 요약할 수 있다.)

 


 

- 견제와 균형을 주장할 사회의 계몽주의 어조가 토대할 바탕 믿음이 사라진다. = 대한민국은 두목주의 파벌 놀이의 惡무한 밖에 없고 다른 출구는 모두 막힌다.

 


 


 

㈏ 대안

 


 

- 유불선 종교와 분화가 미흡했던 1920년대나, 참여신학을 주장하나 공부가 미흡했던 1970년대에 조상숭배적으로 기독교신학적으로 잘못된 것도, 말씀이 주인이 아니라 두목주의 사회 두목들이 주인이라서 그런 두목 조상을 숭배해야 하는지 사회공론이 필요하다. (예수가 주인인가, 기독교 정치 파벌의 ‘두목’이 주인인가?)

 


 

- 1970년대~1980년대 대학가는 직관적 느낌 중심에 사실성 위주였다. 이 당시에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후대에 책이 엄청나게 나온 대학가를 전제로도 논리의 甲인지. 아니면 6.25 세대는 학력으로 떨구고 아랫세대에는 늙음으로 우기는 ‘곤혹덩이’인지 사회공론이 필요하다.

 


 

- 참여신학도 기독교인 한 예수 신앙이 중심이며 그것이 이끈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신학을 액면가로 지킬 때, 권력 없이 사회변화를 주장하며 검증 받길 주저하지 않으며 약자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수 신앙이 없는 행동주의로서 타 종교 도교계열 접신신앙에 기독교가 얹혀 사는 게 정당한가, 사회공론이 필요하다.

 


 

- <두목 + 두레 공동체. 그리고 그 매개로서의 ‘이익’ 문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고 있다. 5.16은 파벌간에 소통과 대화에 대한 절망으로 ‘힘’으로 통제하겠다는 좌절이고, 87년은 국민이 스스로 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권력이 바뀌고는 파벌간의 소통과 대화는 하지 않고 중도 마을의 갑질로 들어섰다. <두목+ 두레 공동체, 그리고 그 매개로서의 ‘이익’문제>를 담은 것은 박현채(김대중)의 대중참여경제학이다. ‘성장’과 ‘복지’등 모순적인 모든 내용은 김대중에 꽂혀 있으나, 사실상 김대중 이외에는 그 어떤 정부도 완전한 이행이 불가능한 설계다.

 


 

- 1919년 3.1운동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계약이 맺어지고, 그 차원으로서 48년 건국 계약이 확립됐으며, 그 배경으로 현행 헌법까지 쭉 이어지는 차원에 국민 기본권이 놓여 있으며, 엘리트는 전 국민과의 계약으로 일해야지 특정 연고 집단만의 문제로 그들만을 위한 서비스 정치를 하면 안된다는 공론이 필요하다. 두목주의가 아니라 헌법은 사회계약론으로 대한민국을 정당화한다. 성경도 사회계약론을 말한다. 단, 헌법은 '동의'로 말하고, 기독교 신앙은 '칭의'로 말한다. 그런 작업으로 한국현대사를 분석해야 북한인권을 논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북한인권 담론은 직관적 느낌이 우세하고 신학적 토대가 거의 없어 보인다.

 


 


 


 


 


 


 


 

1. 바르트

 


 

⑴ 칭의

 


 

 

 

‘칭의’에 대한 로마 가톨릭파와 루터파와 알미니안파와 개혁파의 견해를 고찰해 본다.

① 로마 가톨릭파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putation)’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부인한다.”(트랜트신조 규범 9). 그리고 ‘칭의’에서 내주하는 죄의 추방 하나님 , 은혜의 주입, 죄의 용서를 포함하여 부정하며,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 이들은 죄인은 자기편에서의 어떠한 공로 없이 선행적 은혜에 의해 ‘칭의’를 예비한다는 개념을 지닌다. 이러한 ‘선행적 은총’은 죄인을 지적 승인과 죄 의식, 회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고한 신뢰, 그리고 새로운 생활의 시작과 ‘세례’를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 아니라 사제의 ‘세례’에 의한 중생․칭의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 본질적으로 가장 유해한 교리이다. 웨인 그루뎀은 “로마 가톨릭의 견해로 의롭게 하는 은혜의 정도는 의인들 사이에 동일할 수 없고 은혜는 ‘선행’에 의해 증가 된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루이스 벌코프에 의하면 그들의 “‘칭의’는 죄의 부패가 ‘세례’로 제거되며, 내주하는 죄가 축출된 이후 죄의 용서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그 이후 기독교인은 덕에서 덕으로 나아가 공로적인 행위를 수행할 수 있고 그 보상으로 ‘주입은혜’와 완전한 ‘칭의’를 받는다. 그리고 ‘칭의’의 은혜는 상실될 수 있지만 ‘고해성사’에 의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성경」은 한번 ‘칭의’를 받은 자는 ‘영화’롭게 한다고 가르친다(로마서 8장 30절).

② 루터는 ‘성찬’에 의한 ‘믿음’으로 ‘칭의’ 된다는 ‘신인협동’교리를 깨달았으며, “소망은 오직 예수의 이름을 의지할 뿐이며, 반석 같은 그리스도 위에 선다.”는 고백을 남겼다. 그러나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시며, ‘칭의’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공적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임한다.”고 말한다(로마서 5장 17-19절; 로마서 3장 20절).

③ 알미니우스주의의 견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를 엄격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죄에 대한 실제적인 화목제물을 드렸으므로, 하나님은 죄인을 ‘칭의’하는데 있어서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 복음적 순종을 그의 의로 간주하며, 성도의 ‘신앙’은 ‘칭의’가 기초된 은혜이다. 이로 인한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칭의’의 영역을 협소화시켜 그리스도에 대한 수동적 복종을 기초로 받는 죄의 용서만을 포함시키며, 죄인이 그리스도의 ‘전가(轉嫁)된 의’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 된다는 요소를 제외시킨다. 알미니안파는 “죄인은 자신의 ‘신앙’, 즉 순종의 삶에 의해서만 의롭다고 하며, 인간을 복음적 순종의 법아래 두고 인간이 ‘신앙’과 순종으로써 하나님께 열납되고 영생에 합당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④ 벌코프의 진술에 의하면 쉴라이에르마허와 릿츨은 “‘칭의’는 죄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인식이 잘못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고 주장한다. 그리고 벌코프에 의하면 칼 바르트는 ‘칭의’를 한 번에 성취되어 ‘성화’가 수반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으며, ‘칭의’와 ‘성화’는 항상 동행한다는 견해를 지닌다. 그는 ‘칭의’는 윤리적인 발전이 아니며, ‘칭의’는 항상 인간이 자신의 삶을 건설했던 신념과 가치에 대해 전적으로 절망하는 시점에 이를 때마다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투르나이젠 역시 ‘칭의’의 단회성을 부인한다.

⑤ 개혁파들은 ‘칭의’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중생’된 자의 내재적 의와 선행에 근거한다는 로마 가톨릭파의 사상을 거부하고, ‘칭의’가 구속주의 의의 ‘전가’에 기인한다는 구원교리로 대치시켰다. 그리고 <벨지움 고백서>(1561년)에서 바울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됨.”을 천명하였다(로마서 3장 28절). 그러므로 개혁파는 ‘칭의’의 수단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여 받고 오직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신앙’에 의해 값없이 ‘칭의’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점진적인 “ ‘칭의’ 개념을 거부하고, ‘칭의’는 순간적이고 완전하며, 완성을 위해 죄에 대한 어떠한 추가적 보속 행위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지닌다.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과거의 죄 사함은 ‘칭의’의 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에게 전가(轉嫁)되는 것이 ‘칭의’의 두 번째 부분.”이라고 ‘칭의’를 서술한다.(황보 용, 207-210쪽)

 

 

 


 

바르트는 칭의의 객관적인 내용, 곧 하나님이 그의 심판에서 행사하는 구원의 행동에 관해 언급한 뒤에, 이제 주관적인 측면, 곧 하나님의 이 구원의 행동이 인식되고, 받아들여지고, 파악되는,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편에서 “실현된”인간의 행위에 관심한다. 이 행위는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로서 믿음은 결코 창조적인 특징을 갖지 않고, 단지 인식적인 특징만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어느 것을 바꾸지 못하고 단순히 이미 일어난 변화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협동이나 공적의 문제가 아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이 교리를 인간의 행위인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교리를 가장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보다 적절하게 이렇게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행동에서조차 자신을 의롭게 할 수없는 죄인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믿음을 다른 모든 자기 칭의들에 반대하는 칭의의 수단으로써 주장하는 것을“가장 악한 바리새주의”라고 비판한다.

 

믿음은 이렇게 그 자체로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고, 그것에 공헌하지도 못한다. 믿음은 단지 그것만이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칭의에 효과적으로 일치하고 알맞은 활동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칭의와 관계할 뿐이다. 그리고 만일 믿음이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의 내적인 가치나 혹은 특별한 효력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그런 것으로서 그것을 타당하게 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의로운 것으로서”, 곧 인간의 의로운 활동으로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본질은 정확히 겸손이다. 믿음 안에서 인간은 그 자신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자신의 교만을 긍정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도 역시 교만한 죄인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교만한, 자주적인 삶에 염증과 절망을 느끼게 된 자이다. 그는 겸손해진 교만한 자이다. 믿음의 겸손은 다른 모든 겸손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다. 그것은 결코 비관주의나 삶의 혐오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선택한 겸손도 아니고, 강요된 겸손도 아니며, 자유로운 순종 안에서 취한 자유롭고 즐거운 결정이다.(최영, 110-111쪽)

 


 

첫째, 칭의론이 현대의 업적지향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업적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압박감은 각종 정신질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칭의의 복음은 이러한 압박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가치 있는 자들로 살아가게 한다. 칭의론은 이렇게 우리의 존엄성과 가치와 권리와 책임성의 기초가 된다.

 

둘째,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과 교제하고 마침내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병들고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구원의 능력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단지 육체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억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가치 없고 버려졌다는 의식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과 연대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적 위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자들로 하여금 자연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한 고통이 가져다준 상처와 절망과 증오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셋째, 칭의론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발견 때문에 오늘날 칭의론이 새롭게 주목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권리 없는 사람들에게는 권리를 회복시켜 주며, 불의한 사람들은 회개하도록 한다. 기본적으로 윤리적 전망을 갖는 칭의론에 대한 재발견을 통하여 칭의의 복음은 우리 시대의 특별한 유혹과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메시지로 선포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업적지향 사회에서 시달리고 파괴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칭의의 복음을 말과 행위로써 선포하고 증언할 선교적 사명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여 미래의 창조적인 희망 속에서 살고 있다. 장차 이루어야 할 일과, 선포해야 할 메시지와,수행해야 할 봉사와, 극복해야 할 적의와, 바꾸어야 할 불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궁극적인 최후의 완성에 대한 확신과 희망 속에서 이러한 과업들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삶은 죄의 용서(칭의)를 받아들이는 것과 개인적인 변화(성화) 이상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소명) 이웃을 향해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활동의 완성이라는 미래를 향한 운동에 참여하는 선교적 과제를 감당하는 일로 이루어진다.(최영, 122-123쪽)

 


 

바르트의 칭의의 신학의 핵심은 화해론이다. 이는 그의 신학의 구조에서도 알 수 있는데 바르트는 화해론에 앞서서 죄론을 취급하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방법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다루는 『교회 교의학』의 ‘화해론’(Ⅳ/1-3권)가운데서 죄론을 다룬다. 바르트의 칭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벌(永罰)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갈 , 수 있는 인간의 통로이다. 이 변화에 쐐기를 박는 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판단이며, 바르트의 칭의의 신학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만든 것이다. ‘화해론’은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결론짓는 최종적인 창조적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9). 바르트에 의하면 이 화해의 사건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근원과 내용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신학의 중심이고, 그의 모든 신학을 결정한다.

 

바르트는 칭의를 다루는데 있어 의로움(justice)과 정의(righteousness)에 대하여 다룬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정의와, 인간에게 정의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주는 문제이다. 이와 연관하여 바르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극악무도한 죄라 할 수 있겠다.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가 집필되던 시기와 달리 화해론의 역사적 맥락은 세계 2차 대전 후 동서 유럽이 이데올로기로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한 동서 문제이다. 즉 바르트의 화해론은 냉전을 반대하고 평화를 세우려는 결연한 입장표명이다. 심광섭은 동서의 냉전문제는 세계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이 상황 속에서 바르트가 당한 시련은 그가 화해론을 구성하는 실존적인 맥락이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태동한 바르트의 칭의의 신학은 화해의 신학에 귀속된다. 이는 죄에 반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적이고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며 그것은 창조 사역을 선행하는 창조의 의지와 계약의 계획을 근거하는 하나님의 의도이고, 하나님이 바라지 않았던 죄에 대한 승리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화해의 근거를 설정하고 그로부터 모든 교리의 구조와 형식을 전개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과 구별하여 죄의 교리를 독자적으로 다룰 때, 죄의 교리는 추상화되고 만다. 죄의 최종적인 예리성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식된 다 그에게 있어서 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만 인식될 뿐이지 그리스도 이전이나 그 밖에서는 인식될 수 없고, 따라서 죄론도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죄인을 죄인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울을 우리 앞에 가지게 된다. 즉, 바르트는 죄론을 화해론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비추어 다루고 있다.(이경신, 37-39쪽)

 


 

제사장, 왕,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교만, 나태, 거짓의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 대하여 칭의, 성화, 소명의 삼중적인 화해 사건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칭의는 화해론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무와 관계가 있다. 제사장적인 역할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는 대제사장일뿐 아니라,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비하, 겸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자이다. 그러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심판받은 자가 되셨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스스로 낮아지심을 통해서 불의하고 죄 된 인간은 의롭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통해 드러나는 ‘객관적’(objective) 칭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신 은혜로서 가능하다. 칭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역과 선물에 근거한 인간의 사역이다. 인간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응답하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 그러한 신앙은 전적으로 순종하는 겸손이다. 교만한 인간은 겸손의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 이것은 ‘주관적’(subjective) 칭의이다.

 

바르트는 칭의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 성실하심에 대한 인간의 겸손한 믿음의 응답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의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by grace through faith)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없다. 의롭게 되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동들, 선행조차도 무익하고 헛되다.

 

바르트는 칭의가 인간의 ‘오직 믿음에 의해서’(by faith alone)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바르트는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바르트가 경계하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 인간의 행위로서, 자기 의, 공로로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by faith alone)에서 ‘by'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by'는 인간의 믿음의 방법에 의해서, 그의 감정과 사고와 믿음의 행동에 의해서 칭의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자기-칭의(self-justification)의 최고의, 성공적인 형식이 아니다.(CD Ⅳ/1, 617)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전제되지 않은 믿음은 인간의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황인태, 12-13쪽)

 


 

하나님의 영원한 화해 결정은 인류를 위한 칭의의 구원론적 행위도 포함시킨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인류에게 칭의를 부여하신 것이다. 나아가 이 칭의는 영원한 화해에 따라, 성화 이전에 단계별로 수여되는 것으로 간주되기보다는 성화와 함께 같이 주어진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가 객관적으로 주어진 만큼 바르트에게는 성화 역시 객관적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칭의와 더불어 성화되는 것이다.

 

객관적 화해에 따라 인류에게 칭의와 성화가 주어졌다면 바르트는 논리적으로 만인구원론을 제기하는 셈이 된다. 이로써 '객관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바르트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권문상, 12쪽)

 


 

⑵ 행동

 


 

바르트의 기독론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있다면 그것은 계시 자체이며 화해자가 되시는 신적 행동안에 편입되는 형식으로만 있을 뿐이다. 인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과 삶의 행동과 함께하는, 그래서 양성교류가 실재하는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수치의 삶에서도 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인성이 다른 인간적인 인격체와 같이 볼 수 있고 알려질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 자신이 인간 예수이기 때문에 예수라는 인성을 지닌 자는 "인간의 형식으로 행동하는 대리인"일 뿐이다. 인성을 입은 그리스도의 모든 삶과 사역은 결과적으로 그 효력이 인성에서 비롯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양성론은 루터의 그것과 같은 기독론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문상, 20쪽)

 


 

이런 점에서 볼 때 계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하나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신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계시할 수도 있겠지만, ‘신적인’ 어떤 것은 인간의 경험과 이해가 닿을 수 없는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인간적인 영역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인 영역은 다름 아닌 종교의 영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계시는 인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탁월한 행동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다. [……]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계시가 이해되어야 한다면, 인간이 간과되거나 배제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종교 또한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종교란 기독교이거나, 아니면 기독교가 속해 있는 종교 일반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계시와 종교의 관계를 내용과 형식의 관계로 보았다. 신적인 특수성은 종교적인 현상이라는 일반성을 통해서 인간에게 전해진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계시라는 특별한 내용은 종교라는 일반적인 형식을 통해서 전달된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종교는 자신을 넘어서 ‘신적인 것’을 가리키게 된다. 바르트는 이것을 가리켜 ‘도약’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가 계시의 형식과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종교의 내적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체성과, 계시를 계시되게 하는 인간적인 형식의 필수성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됨 뿐만 아니라, 종교의 필수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또 이런 점에서 바르트가 종교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상식은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김성열, 69-70쪽)

 


 

둘째, 화해론 안에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의 방향은 분리될 수 없다. 화해론 안에서 참 하나님, 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은 역동적인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에게로 와서, 사람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도상을 걸어가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뒤 다시 하나님 곁으로 승천하는 자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에 각각의 구분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통합적으로 다룬다. 이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대표자가 되고 인간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는 권위가 해명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부활 없이 십자가의 죽음만을 강조한다면 그 신학은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질 수밖에 없고, 십자가의 고통 없이 부활에서 죽은 예수만을 강조한다면 그 신학은 승리주의(triumphalism)에 고취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주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존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오류를 피하면서, 예수의 삶과 사역 속에 드러난 각 사건들을 연속적인 운동의 방향으로서 바라보고 있다.

 

셋째, 바르트가 말하는 화해의 역사는 그 내용으로서 '계약'(covenant) 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바르트는 앞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two natures)과, 비움의 상태(status exinanitionis)와 고양의 상태(status exaltationis)로 나타나는 두 상태를 통합해내는 주제로서 계약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바르트는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스스로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가 그 은총의 계약을 어겼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결정을 포기하지 않고 성취하신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트의 화해론 안에서 흐르고 있는 계약 사상을 인간의 죄에 대한 반응으로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죄가 결정적으로 계약 성취를 요청하는 조건으로서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임마누엘’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계약의 성취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그러한 신적의지와 사랑의 실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화해를 성취함으로서 깨어진 계약이 다시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화해론의 모든 주제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라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진술하는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로서 계약의 성취가 나타나는 것이다.(윤상필, 24-25쪽)

 


 

이 개념은 1952년 독일 빌링겐 (Willingen)에서 열렸던 IMC (세계선교대회)에서 바젤 선교부 원장이었던 칼 하르텐슈타인 (K. Hartenstein)이 사용한 용어로서 비체돔 (G. F. Vicedom)에 의해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개념이 성립되기에는 그 배후에 칼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르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성육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에 관한 신학이 하나님 선교에 대한 개념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개념의 등장으로 선교에 있어서 주체의 의미가 더욱 의미 깊게 논의되었다. 교회는 자체적으로 선교에 대한 기초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기초요 근거가 된다. 이 사실이 망각된다면 선교는 선교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선교가 아니라 선교를 가장한 기독교라는 종교의 자기 확장이 될 것이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힘은 영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으로 바뀌어졌을 때,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려고 했을 때 상실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 하고자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며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이 그것에 대하여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일을 감당할 때 자신의 뜻이나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영적인 것,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 있어서 사회에 대한 봉사보다도 세상에 등을 돌리고 오로지 영을 추구하는 이름만으로 행동하게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영적인 것이나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역사 속에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아간다는 것, 사람을 향해 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시키고 신자 수를 늘리는데 있지 않다. 타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들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특히 불상을 깨뜨리는 우상숭배에 대한 교회의 심판은 도리어 기독교의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낼 뿐이다. 선교, 전도,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데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것에 실패하고 있다.(신태성, 127-128쪽)

 


 

바르트에 의하면 화해는 사람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행동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을 교회인으로, 교회회원으로 만듦으로서 화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해는 인간에게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화해의 권한을 주지 않으시며 사람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인간이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만 하나님이 행하신 화해에 대한 증인일 뿐이다.

 

증인은 증거의 대상을 스스로 자처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증거의 대상을 가리킬 뿐이다. 말로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하여 증인이 된다. 오늘날 교회가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증인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가 화해의 주체가 되려고 하며 자신을 주장하려고 한다. 교회는 화해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악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증인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증인으로 행동해야 하며 말해야 한다. 증인의 행위는 다른 종교의 영역에 침범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목적을 가지는 증인의 삶도 아니고 전도도 아니며 선교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의 종교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증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사는 것이다. 증인의 삶은 믿음의 삶이며 사랑의 삶, 그리고 소망의 삶이다. 그것은 자신이 교회에 속한 회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깨어나는 사람이다. 만약 이러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닐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 모든 사람들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저 사람은 불교인, 저 사람은 이슬람교인 이라는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며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 중 하나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며 살 때 그리스도인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갈등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객관적 화해의 행동은 종교적 기준에 기초한 갈등만이 아니라 남북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이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북한문제에 다가서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증인의 삶을 살 때 공산주의의 허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의 소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소외는 단순한 경제적 소외나 현상이 아니라 죄의 문제이며 인간의 본래성의 문제이고 그것은 인간에 의해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을 단지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신태성, 113-114쪽)

 


 

또한 바르트의 삼위일체의 이해의 특징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신앙의 진리라고 보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통한 신앙을 통해서만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닫고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 없이는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까닭에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이외에 다른 계시나 어떠한 인간의 노력으로도 접근할 수도 없고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을 다른 말로 하면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인식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그 인식과정에 참여하시고 조명하셔야만 올바른 하나님을 인식할 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학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역사적 예수를 따라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요소와 일치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신앙 안에서 현존하고 신앙 안에서 간접적으로 알려지는 분이다. 실제로 교회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이해하는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신학방법론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따르는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뱅의 방법을 잇는 정통적 신학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신학은 성령에 의해서 시작되고 발전되고 완성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방법론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에 붕괴되었던 정통주의 신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특히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공헌한 바는 삼위일체론의 뿌리를 성서자체에 증거된 계시개념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처럼 바르트의 개시개념은 삼위일체론이 사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서자체에 근거한다는 것을 말했으며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개념은 성서의 증언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바르트는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사고의 개념을 성서자체에 종속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내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는 삼위일체론이 결코 사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성서자체에 근거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이와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자연능력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계시를 구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중심의 사변과 해석에서 다시금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간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가 있다.

 

또한 바르트의 신학의 공헌은 철저히 교회의 관점에 서게 함으로써 신학을 신학으로 독자적인 자리를 부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 신학의 사명은 말씀의 선교를 위탁받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며, 이러한 봉사는 교회의 선포(케리그마)의 내용을 성서를 표준으로 하고 교회의 전통을 안내로 하여 비판, 검토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으로 하여금 신학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하는 신학의 특수한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수행된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그것이 사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성서자체에 근거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리스도교 전통의 삼위일체론에 올바른 위치를 부여했고, 또한 당시 경시되었던 삼위일체론을 비판적으로 부흥시켰다고 할 수 있다.(나재천, 110-111쪽)

 


 


 

⑶ 성령

 


 

 

 

바르트는 계시가 객관적 현실이며 가능성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계씨를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기초한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계시를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은 오직 전적인 성령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우리들의 실존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하나님 말씀의 인식 가능성은 신앙 가운데 주어진 가능성이다. 신앙 가운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경험할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람은 신앙하는 자로서 자기를 자기 자신 속에 근거되어 있는 것이 아닌 그의 대상 속에 근거되어 있으며 오직 그의 대상을 통해 실존하는 것이다.

계시의 수용 가능성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이며,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와 닿음으로 인간을 자유케 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이 사건의 실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랑하며 찬양하는 자유를 누린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케됨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르게 된다. 즉,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은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성취하신 일에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일에 무슨 의미를 갖는가의 문제로 옮겨온다.(김신현, 22-23쪽)

 

 

 

바르트에 의하면 마음에 새겨지는 성령의 법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이다. “너는 … 해야 한다”라는 율법은 인간을 죄와 사슬 속에 가두고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너는 …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는 … 해야 한다”는 명령이 “너는 … 하도록 허락되어 있다”라는 놀라운 새로운 정황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이다. 자유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삶은 억압이나 강요가 없는 자유의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지 강요나 억압에 의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새겨진 성령의 법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희망하게 하고, 결단하게 인도하지만 그 모든 일은 우리의 자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법을 실천함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자가 된다는 점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함으로 참으로 인간이 되고 인간성이 갖고 있는 깊은 신비와 비밀을 경험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자유와 기쁨을 누린다. 바르트에 의하면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 세력이 말하는 거짓된 자유다. 그것은 인간을 저주와 곤경 속에 몰아넣는 부자유의 극치이다.

 

성령을 받으면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운 자가 된다. 인간은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되고 즐겁게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인간은 참된 자아를 찾고 하나님께 달려가는 사람이 된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묶던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운 주체로 하나님과 이웃 앞에 서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성령은 마음으로부터 인간을 설득하고, 인간의 이성과 마음에 성령의 빛을 비추어 자유로운 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 “성령보다 인간의 이성에 더 가까운 친구는 없다.” 성령은 인간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영이지 강요하는 영이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하는 영이지 억압하는 영이 아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은 인간도 참된 자유인이 된다.(김명용, 107-108쪽)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영이시고,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관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계시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라는 바르트의 주장은 매우 눈길을 끄는 주장인데, 그 이유는 몰트만이 1964년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 개념이 후기 바르트의 신학에 이미 앞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바르트의 신학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언급하고자 했던 것 중 많은 것들을 이미 몰트만 보다 앞서 언급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활동으로 세상 속에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고, 이 일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바르트에 있어서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동일한 일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은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을 말로만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면 성령과 교회의 과제가 전도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은 말(Sprechen)과 행위(Handeln)로 하는 일이다. 행위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화해의 현실을 세상 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말만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화해의 현실을 세상 속에 구현해야 한다. 이 화해의 현실을 구현한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과 무질서의 근원인 무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무의 세력은 궤멸되었다. 마귀는 더 이상 세상의 지배자가 아니다. 마귀, 악령 등으로 상징화 되는 무의 세력은 복음의 전도와 복음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쫓겨 나가야 한다. 그것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성령과 교회의 활동으로 쫓겨나가야 한다. 그것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성령과 교회의 활동으로 쫓겨나가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령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은 말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말과 실천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화해론의 윤리학인 <그리스도인의 삶>(Das christliche Leben)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움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고, 폭력과 무질서의 근원인 무의 세력과의 투쟁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으로 가르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목적은 세상을 지배하는 무의 세력을 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성령은 이 일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교회와 함께 일하고 계신 영이시다.(김명용, 112-113쪽)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영이시고,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관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계시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라는 바르트의 주장은 매우 눈길을 끄는 주장인데, 그 이유는 몰트만이 1964년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 개념이 후기 바르트의 신학에 이미 앞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바르트의 신학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언급하고자 했던 것 중 많은 것들을 이미 몰트만 보다 앞서 언급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활동으로 세상 속에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고, 이 일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바르트에 있어서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동일한 일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은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을 말로만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면 성령과 교회의 과제가 전도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은 말(Sprechen)과 행위(Handeln)로 하는 일이다. 행위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화해의 현실을 세상 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말만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화해의 현실을 세상 속에 구현해야 한다. 이 화해의 현실을 구현한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과 무질서의 근원인 무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무의 세력은 궤멸되었다. 마귀는 더 이상 세상의 지배자가 아니다. 마귀, 악령 등으로 상징화 되는 무의 세력은 복음의 전도와 복음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쫓겨 나가야 한다. 그것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성령과 교회의 활동으로 쫓겨나가야 한다. 그것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성령과 교회의 활동으로 쫓겨나가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령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은 말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말과 실천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화해론의 윤리학인 『그리스도인의 삶』(Das christliche Leben)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움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고, 폭력과 무질서의 근원인 무의 세력과의 투쟁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으로 가르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목적은 세상을 지배하는 무의 세력을 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성령은 이 일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교회와 함께 일하고 계신 영이시다.(김명용 1, 112-113쪽)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 사건에서부터 우리는 국가 속에 실천해야할 정치적 길을 발견할 수 있는데, 곧 약자를 보호하고 이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그리스도께 정초하고 있는 세상적, 정치적 실천이다. 또한 독재나 전체국가에 대한 저항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가 명하는 바른 저항이고,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에 대한 저항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형제자매공동체의 의미를 갖는 그리스도의 몸됨의 세상적 실천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자매 공동체의 정신은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의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정신이고,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에 대한 반대인데, 이를 정치적 영역에서 바라보면 삼권분립의 정신과도 연결될 수 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섬김에서 국가의 권력도 벌거벗은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되고 정의를 위해 섬기는 권력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고,) 만민의 교회 정신에서 특정지역이나 특정국가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반대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터 국가의 강압적 힘의 사용을 불가피한 경우로 제한했는데, 이 정신 역시 바르트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II/4에 나오는 불가피한 긴급 상황에서의 강압적 힘의 사용의 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사고가 1946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강압적 힘의 상용을 국가의 통상적 임무로 보던 과거의 신학적 시각을 떠난 것이다. 바르트는 국가가 강압적 힘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긴급 상황의 예외적 상태로 보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국가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자신의 본질적 임무를 찾아야 하고 또한 세상 속에 이 사랑의 세상적 유비가 되어야 한다. 바르트가 국가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비의 구현을 강조했다고 해서, 바르트가 1946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에서 교회와 국가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목적과 국가의 목적은 다르다. 국가의 목적은 정의와 평화의 구현에 있지만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다. 국가는 혼돈(Chaos)의 세력이 국가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국가는 질서와 평화를 유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가 전파하도록 도와야 한다. 국가는 복음을 선포하는 기관이 아니다. 국가는 세상적인 기관이다. 국가의 가장 심오한 목적은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세상적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르쳐지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김명용 2, 90-91쪽)

 


 

⑷ 화해의 主 예수 그리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은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선택 앞에 실존적 결단의 존재로만 존재 한다. 필자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응답의 존재로서 긴장 가운데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긴장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성을 나타낸다. 올바른 선택을 위한 긴장의 중요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결단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더욱 고조가 된다.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의 버림의 계시가 아니라, 오직 한 분 버림받으신 분에 대한 계시이다. 아니다. 필자는 오직 한 분 버림받으신 분으로 보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의 버림받음을 주장한다. 여기서 파괴라는 용어는 죄 때문에 발생한 인간관계의 파괴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인간에 사랑과 선택을 계시하기 위해 고통을 수용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아들을 버리는 자로서 철저하게 고통의 주체가 되셨다.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삼위일체적인 고통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 삼위하나님의 상호침투, 상호 관계성의 파괴를 가져왔다. 사랑의 하나님 사이의 관계적 훼손이다.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일어난 유기의 사건은 삼위의 전체적이 고통이다. 버리는 자로서의 고통과 버림받은 자로서의 고통, 버림받음으로서 고통이 바로 그것이다. 실존적 긴장 속에 있는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의 뒷면에 있는 고통과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예정론이 복음의 총화가 되는 이유이다. 긴장 가운데서 인간은 회개의 결단을 해야 한다. 인간의 신앙에 대한 보류나 거절은 하나님의 편에서 아픔이며 고통이기 때문이다.(김득열, 52-53쪽)

 


 

하느님과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가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복음” (good news)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다리가 된다. 『로마서 주석』 제2판(1922) 에서 보여준 바르트 신학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시대의 말” 로서는 가치가 있더라도 성서적 복음적 이해에는 못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복음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1922 년 “신학 의 과제로서 하느님의 말씀” 이라는 강연 속에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느님을 말해 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으로서 하느님을 말할 수 없다”는 두 축을 말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긴장올 해소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연구 에 몰두했다. 그는 칼뱅, 쯔빙글리 , 쉴라이엘마허,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동 개혁교회 전통의 신학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거기서 자유주의 신학보다는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보다 “성서로 가는 길 즉 “하느님 말씀의 신학" (The이 ogie vom Wort Gottes)의 토대를 발견하였다.

 

그의 평생의 저작인 『교회 교의학』 (Die Kirchli che Dogmatik,1932- 1965)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쓰여진 복음주의 신학이다 『로마서주석』에서 보여준 “하느님과 인간의 무한한 거리” 대신에 『교회 교의학』에서는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그리스도”를 말힌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는 바르트신학의 주제였다.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는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계시는 우리 밖에서 (extra nos) 온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모든 현실과 구별된다. 계시란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이성과 합리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라고 성서는 증언한다. 그런 점에서 그 계시는 우리에게 낯설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자신의 뭇을 지시하고 있다. 그분은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던 것" (골 1: 26)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비밀”(막 4:1)이요, “복음의 비밀" (엠 6: 19)이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다(골 1:27 , 2:2, 엠 3:4) 이제 인생의 슬픔, 고뇌, 죄 등의 한계성은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기쁨, 감사, 찬양으로 바뀐다.

 

여기서 바르트의 화해론은 초기 ‘로마서 주석’ 때와는 달리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정초된다. 초기에 하느님의 주권과 심판을 강조했다면, 그의 주저 『교회 교의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강조된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에서 삼위일체 하느님 중심의 축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도 19세기 자유주의와 대결을 하고 있다 그가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은 인간 속에 하느님이 용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의 감정 속에(쉴라이에르마허), 역사 속에(하르낙), 가치속에(리출), 종교 속에(트휠취) 함몰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들과는 달리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느님 속에서 인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것은 신학적 교의학적 통찰이었다.(최종호, 198-199쪽)

 


 

이와 같은 실존주의와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의 긴장을 넘어서는 또 다른 휴머니즘은 앙드레 비엘레가 해석하는 바에 따라 칼빈의 “신학적․사회적 휴머니즘”(Un humanisme théologique et social)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신학과 인간학의 통전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비엘레는 칼빈에게서 “급진적 비관주의”를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 따르면, 인간에의 한 인간이해와 하나님에 의한 인간이해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인간의 이성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한계가 있고 하나님으로부터만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능력을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목적안에 있다는 것, 현재의 인간이 처음의 모습과 어떻게 다르게 본질을 잃고 있는지, 이렇게 변질된 인간성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할 것인지, 인간성을 회복한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인간성이 완전히 새롭게 완성되었을때, 인간의 존재모습과 종말에 관한 것들을 계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이 “하나님 밖에서의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엘레는 칼빈에게서 비관주의 이상의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 인간이 “인간들 속에 또 다른 사람”으로서 예수그리스도라는 “완전한 표상”, “진정한 인간, 온전히 자유로운 인간,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한 인간”을 만남으로써 역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의 신학적 휴머니즘은 사회적 휴머니즘의 첨가된 수식어를 획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이 “본래 다른 인간과 함께 벗하며 살아갈 때에만 진정으로 인간”일 수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를 형성하게 되지만, 사회적 관계가 왜곡되고 타락함으로써 회복해야만 하는데, 부부, 가족, 교회, 국가와 같은 사회의 각기 다양한 존재양식이 회복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휴머니즘은 칼 바르트의 글 “하나님의 인간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 바르트의 글 “하나님의 인간성”은 1956년 9월 25일 아라우(Aarau)에서 열린 스위스 개혁교회 목회자 연합회 모임에서 행한 강연의 제목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기독론적 관점에서 전개시킨다. 그는 이 글에서 일종의 신학적 방향전환(Wendung)을 꾀하는데, 이전에 하나님을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wholly other)” 분으로 분리시키고, 추상화했으며, 절대시하였고,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제 전적 타자(ganz Andere)로서의 하나님은 인간과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관계가 없는 형이상학적 하나님이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변화시키시며, 화해하시는 하나님으로 전환시킨다. 그래서 결국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적 모순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극복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참된 인간”이고, “인간의 참된 하나님”으로서 진정한 동반자요, 하나님의 인간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존재이다. 이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요, 화해자로서 양쪽의 계시자”이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르트는 융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만이 본질적인 실체이고, 인간을 신의 단순한 기능으로 파악하는 신중심주의도, 신을 단지 하나의 기능으로 이해하는 인간중심주의도 비판한다. 따라서 바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처럼 세상속에서 인간으로서 그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성을 드러내기 위해 파송 받은 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성안에는 인간의 인간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참된 하나님이기 위해서 인간성의 배척이나, 어떤 비인간성도, 비인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이후천, 125-127쪽)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인간성(humanitas Christi)에서 성취되는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가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내적 존재의 관계의 유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조우적 존재, 교제의 삶, 공동의 인간성, 협력 속의 역사라는 인간성의 패러다임을 드러내며, 나아가 타자와 동반하는 존재로서의 다원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인간의 삶은 다른 관계들을 방해하는 비인간성을 초월하여 기독교 내적 상호작용 및 종교간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관계 속에 있는 삶이다. 따라서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관계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야하며 인간의 삶 속에서 일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가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의 보편적 구원의 가능성에 대하여 열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바르트가 보편주의 또는 만인 구원설을 위한 신학적인 정당화를 보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견지에서 그를 다원주의자라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바르트는 후기에 “빛”(Light)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빛들”(other lights)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나, 이 다른 빛들조차 그리스도 없이는 보일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바르트의 보편주의적인 언급은 오히려 그의 신학적 방법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즉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긴장 속에 있는 문제들을 수정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입장들”을 도출한다. 바르트의 계시와 종교 간의 변증법적 신학에서는 교회교의학 내에서도 초반에 유난히 부정적인 부분을, 그리고 후반부에는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르트는 공동체가 종교들을 평가하고 종교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지만 그 종교들이 복음에 조금이라도 압력을 행사하거나 타협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학을 정립하면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성 또는 기독교 메시지의 독특성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고한다. 바르트의 종교신학은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중요한 선교신학적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송영석, 150-151쪽)

 


 

 

 

이 관점에서, 바르트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에서 의 역사적 현현(the lowliness of an historical existence in this world) 이 가시적이므로 그의 지체요 실체가 되는 교회 역시 “가시적인 기독교공동체 " (a visible Christian community)가 됨을 역설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기독교교회공동체들은 각 개인 구성원들과의 진실 되고 신뢰할 만한 관계성 안에서 영적인 친교를 확립하므로 하나님말씀진리의 행위자들(doers of the Word of God)로서의 그 가시적인 속성을 실행하고 입증할 수 있게 된다(약 1:22). 이 영적인 친교는 이 지상인간들의 현실적이며 확고한 삶의 형태로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모두 가시적인 기독교교회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인 친교모임에 참여하므로 이 지상에 역사적으로 현현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하심과 온유하심 그리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의 모욕과 수치 그리고 고통을 조건없이 수용하신 “그 무조건적이시며 아가페적인 사랑의 기적" (the miracle of the unconditional agape-love)을. 역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됨을 바르트는 주장한다.

바르트는 이런 지속적인 영적 친교모임의 실천은 교회목회 프로그램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지체요 실체인 기독교교회공동체가 견고히 “성장!' (upbuilding)할 수 있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요 또한 원통력 (driving force) 이 됨을 단언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장” 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들과 초대교회 사도들의 사역들 사이의 “통합!' (integration) 또는 “완성 … (completion)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다양한 기독교교회공통체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적인 사랑의 실천 . (the praxis of mutual love)을 토대로 실제적으로 발생-발전되는 그 “영적인 교류와 친교" (spiritual & interchangeable fellowship)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상호적인 사랑의 실천” 에 기초한 이 “영적인 교류와 친교”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일정한 시공간영역안에서 함께 정면으로 마주보며 (face to face) 다양한 인간 삶의 상황 속에서 발생되는 사건들을 주제로 진지한 뉘앙스와 심각한 표정들로 대화할 수 있는 동기 즉 "Christocratic brotherhood" 또는 “brotherly Christocracy" 의 접촉점 (point of contact)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이 “영적인 교류와 친교”로의 참여를 통해 비기독교인들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통해 이 지상에서 소외되고 억눌려 배척당해 처참한 빈곤으로 고통 받고 편견과 차별로 허덕였던 창녀들과 극단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진정한 친구이셨던 만민의 구원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됨(the true humanity of Jesus Christ)의 그 숭고성을 듣고 인식하므로 신실한 신지들로 거듭날 수 있게 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답게 친숙하고 두터운 우정의 관계로 발전될 수 있는 동등한 인간적 만남의 가능성이 지대함을 바르트는 역설한다(김영관, 124-125쪽).

1934년 바르트가 ‘바르멘 신학성언’을 기초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위에 굳게 서 있었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은 3가지 양태를 띠고 있다는 신학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와 교회의 교의(설교)가 이 하나님의 말씀의 3가지 양태라는 것이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라고 칭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는 하나님의 두 번째 양태이다. 그리고 교회의 교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 번째 양태이다. 바르트가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할 때, 교회 밖에 국가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양태가 있다고 선언하고 있던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Deutsche Christen)이 대결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히틀러(Adolf Hitler)를 추종하고 있었던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은 히틀러를 예수 그리스도에 상응하는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 히틀러가 내세운 국가 사회주의 이념을 민족과 세계를 구원할 성령의 길로 선포하고 있었다. 즉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에 의하면 국가가 내 세운 이데올로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또 하나의 양태이고 성령의 길이었고, 국가 사회주의 이념은 하나님 나라의 이념이었다.

바르트는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양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와 교회뿐임을 강조했다. 교회밖에 있는 어떤 것을 성령으로 옷 입히면 안 된다. 국가 안에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 나라의 양태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시기의 바르트의 주장이었다. 바르트의 이 주장은 독일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에 의해 채택되었고 ‘고백교회’는 이 신학정신으로 히틀러와 싸우는 위대한 역사를 감행했다.(김명용 2, 82-83쪽)

 

 

 


 


 

2. 인간소외

 


 

⑴ 아시아 고대사상 전제의 인간 소외

 


 

하늘사상은 공자에 이르러 도덕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전통이 마련되었다. 공자는 일찍이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아 주셨다. (天生德於余)”라고 하여 하늘에 대한 관념을 외재적인 지배자로부터 내재적인 도덕원리로 전환시켰다. 따라서 하늘과 인간은 도덕성을 매개로 서로 연계되어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자의 하늘관념은 내재적인 초월의 특징을 갖는다. 하늘과 인간의 성명적(性命的) 일관성의 자각을 통해서 하늘을 자아 인격성의 본원적 근거로 이해하는 도덕적 천명사상은 마침내 유가전통의 인본사상이 형성되는 근본 계기가 되었다.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도덕형이상학을 충실히 계승하여 인간의 본성은 하늘로부터 기인한다고 본다. 맹자는 “천지만물의 이치는 모두 나에게 갖추어졌다.”라고 하면서 “하늘의 도는 참된 것이고 인간의 도는 참됨을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맹자의 생각은 종래의 종교적인 하늘관념을 부정하고 하늘과 인간이 도덕적 본질을 매개로 한 도덕형이상학의 원초적인 관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하늘관념은 유심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사유 속에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묻어있다고 판단한 순자는 맹자의 하늘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부정하면서 소박한 자연사물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과학적 사유 속에서 하늘개념을 현상적 자연개념으로 돌려놓으려 하였다. 따라서 순자는 전통적인 유가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어 왔던 신비주의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순자는 하늘과 인간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면서(天人之分) 하늘에 대한 자연과학적 이해를 시도하였다. “하늘에는 영원불변한 도가 있고, 땅에는 영원불변한 원리가 있고, 군자에게는 영원불변한 몸가짐이 있다.” 자연인 하늘과 땅의 도와 사람의 도가 다른 것임을 강조한 내용이다. 하늘에 대한 관념을 소박한 경험대상인 자연현상으로 바꾸어 사유하였다. 순자철학에서는 하늘의 역할과 사람의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는 천인지분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늘을 현상화된 사물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은 서로 따르며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 비추며, 사계절은 순차적으로 찾아오고, 음과 양은 만물을 변화시키며, 바람과 비는 널리 고루 뿌려준다. 만물은 각기 조화를 얻어 생장하고 각각 살아가는 바를 얻어 성장한다. 그러나 생명이 이루어진 과정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이루는 결과는 알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신비하다고 하며,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이루어진 바를 알지만 그 형체 없는 작용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하늘이라고 한다.” 일월성신의 운행과 사계절의 순환, 음양의 변화, 바람 불고 비 내리는 것은 모두 자연현상이다. 그리고 자연현상이 이루어진 결과는 알 수 있지만 생성의 구체적인 과정은 알 수 없다. 이것을 신비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미 이루어진 사물현상은 알 수 있지만 형체 없는 작용은 알 수가 없다. 이것을 하늘이라고 한다. 있으나 알 수 없는 것은 신비의 대상이고, 있으면서 알 수 있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다. 순자는 자연과학적 대상에만 관심을 두었지 비실증적인 신비의 대상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했다. 그리고 순자는 구체적인 생성의 작용이나 과정마저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비과학적이라하여 자기철학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이 순자사상의 엄격성과 그에 따른 한계라고 할 수 있다.(최영찬, 349-350쪽)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철저하게 구분한 다음 그것에 기초하여 인간 속에서 자연적인 요소와 인위적인 요소를 구별한다. 기본적으로 순자는 인간 속의 자연적 요소를 본능과 마음에서 찾고, 마음의 기능에 의하여 판단・선택되어 이루어진 인의법정(仁義法正)을 인위적인 요소로 보았던 것 같다. 순자는 “하늘의 직무가 성립되고, 하늘의 공적이 이루어진 뒤에 사람의 형체가 갖추어지고 정신이 생겨나서 좋아함과 싫어함,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깃들게 된다. 이것을 자연적 감정(天情)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게 된 감정의 자연성을 밝히고 있다.

 

순자는 감정 이전의 감각 본성과 마음을 분석하고 있다. “이목구비와 육체는 각기 사물에 접하기 때문에 그 작용을 서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을 자연적 감각기관(天官)이라고 한다. 마음(心)은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오관을 다스린다. 이것을 자연적 주재자(天君)라고 한다.” 순자는 감각 기관의 독립성과 개별성을 밝히고, 동시에 마음의 주재성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선천적 자연성을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인간의 인간된 소이가 된 사회적 도덕질서의 인위적 요소를 강조하기에 이르게 된다. 본성과 마음을 나누어 논해보기로 한다.(최영찬, 360쪽)

 


 

유교사상에서는 인간이 도덕성을 상실하였을 때를 소외된 상태로 규정할 수 있다. 유교에서의 도덕성은 인간을 여타의 만물들과 구별 짓게 하며 , 삶의 주체자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특성이다. 이러한 도덕성의 상실은 비인간화된 삶의 결과를 초래하게 하여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비인간화된 삶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로 확산된다.

 

유교사상에서의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 , 즉 성 性에 대한 개념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유교의 성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 크게 봐서 타고난 그대로의 것(生而自然,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원인으로서의 성(사람이 지닌 보편적인 원인), 인생의 궁극적인 근거로서의 성으로 나눌 수 있다〈이영찬,2002) 유교에서 이러한 의미들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은 천리 天理가 마음에 구현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우주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소우주로서 내면적 성찰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본성을 실현하는 존재이다.

 

대우주의 원리에는 끊임없이 생명을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운동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 운동성은 생명 스스로가 자신을 쉽 없이 창조해 나가는 힘과 타 존재의 생명을 도와주고 살려주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대우주의 생명법칙은 우리 인간에게도 그대로 품부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본성은 우주적 원리가 전제가 되는 것이다. 우주적 원리인 성이 인간에게서는 인의예지로 표현되며 ,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사단四端이다 맹자는 인仁의 단서를 惻隱之心에서, 의義의 단서를 수오지심養惡之心에서, 예禮의 단서를 辭讓之心에서, 지의 단서를 시비지심是非之心에서 찾았다. 인간은 자신에게 품부되어 있는 이러한 성을 삶 속에서 실현할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본성이 왜곡되거나 억압된 상태는 존재론적 소외상태라 할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 많은 욕구들과 직면한다. 식욕, 수면욕, 배설욕, 성욕 등 육체적 욕구들은 인간을 소외된 마음 상태로 흘러가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이들 욕구는 도덕적 본성과 끊임없는 갈등 관계에 놓여있다. 『서경』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며, 정精히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는 말에서 인심과 도심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로 발전될 수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김보경, 165-167쪽)

 


 

天은 분명 초월적이지 않은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임에도 맹자는 그러한 하늘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천을 끌어들여 인간과 연계시킨다. 맹자는 “사람이 제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면 하늘을 알게 된다, 盡其心者, 知其性也,知其性則知自然天" 라고하며 인간의 마음이 하늘과 하나로 통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맹자도 순자처럼 自然天의 사실을 주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맹자에서 자율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인위의 도로 탄생된 인간이 만든 유가적 정신은 자연에 불과한 하늘에 대한 천도의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하늘은 우주적 위상을 넘어 그 속에서 위대함을 발견해내고자 한 인간의 마음으로 투사해 낸 인간 정신에 의해 재탄생된 道를 가진 하늘로 존재하게 된다. 즉 心郞天의 하늘로 만물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행하는 理의 하늘로 정의된다. 그렇기에 유가적 하늘은 사실적 진리의 하늘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연계성을 가지는 인위적 초월성이 가미된 도덕심성이 자리한 유가의 하늘이다.

 

이 인위적 초월은 학문의 철학적 탐구를 넘어서 미학적 과정으로 이행하는 범주로 확대된다. 맹자는 진심장하에서 인격을 善, 信, 美, 大, 聖, 神의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充實之謂美라 하였다. 이것은 人薦로 이루는 薦聖을 우주로까지 끌어올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에게 내재한 선을 확충되어 우주적 경지로 확대되는 것으로 하늘의 도를 따르는 길이다. 이러한 단계로 확충을 이룬 인간은 우주의 광휘로 빛나며 도덕의 인위적 실천이 인간의 심성 속에 내재된 善과 天이 하나로 융합된 경지를 이룬다. 따라서 聖과 神의 경지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하늘이 개입됨은 인간의 보편적 본성의 확충과 실현과정에 있어 필연으로 작용한다.

 

또한 맹자는 “義와 道가 짝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는” 도덕적 용기인 호연지기에 대해서도 “내 속에서 생기는 것으로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경지로 고양된 개체를 이루어낸 충만한 호연지기의 상태조차 맹자는 자신의 자율성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이 함께한 것이다. 스스로가 자연계 및 우주와 더불어 이루어낸 天人合은 인간과 하늘이 圓顧의 상태로 혼연일체에 이르는 모습으로 우주의 웅혼함에 합류하는 인간의지의 과정이다. 이 모두는 후대의 주휘의 말처럼 天理를 보존하고 人欲이 없는 至善에 이르는 길이고 성선을 바탕으로 확충된 도가 하늘의 아름다움에 도달한 모습이어서 至善에 이른 경지이다. 이것이 천도를 이루어낸 상태일 것이다.(김개천, 27-28쪽)

 


 


 

⑵ 예수 신앙 전제 인간 소외

 


 

그런데 인간의 공동체성은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존재론적 본성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하느님의 인간 창조의 모습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헌장 12항에서는 창세기 1, 27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언급하며 인간 본성의 사회적 성격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을 통한 남녀의 결합이 번식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사랑을 통한 긴밀한 관계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가정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세상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서로 인격적으로 교류하는 최초의 단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녀의 인격적 교류는 나아가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의 교류에 기반을 이룬다. 이러한 인간의 공동체적성격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이기도 하다. 「사목 헌장」은 32항에서 「교회 헌장」 9항을 인용하면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지 안에 나타난 공동체적인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가정을 통한 기본적인 남녀의 교류와 여기에서 더 나아간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의 인격적 교류는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헌장은 인간의 공동체적인 본성의 존재 이유가 삼위일체인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그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임을 함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헌장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 “인간에게 덧붙여진 우연한 그 무엇이 아니므로” 인간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공동체적인 소명에 응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조정환, 143-144쪽)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공동체적 소명의 모범이시다.「사목 헌장」은 인간의 공동체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음을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24항은 요한복음 17, 21-22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 기도를 통해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 즉,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의 결합이 지닌 유사성을 드러내 준다고 본다. 그리스도가 인간 공동체적 소명의 모범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강생은 인간에게 ‘완전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분이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적인 모습은 인간에게 자기 완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 때에야 자기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헌장(22, 41항)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완성을 위해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따름과 세상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원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22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이 세계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향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은 세상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와 세계 사이의 중재자, 또는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협조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불리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조정환, 145-146쪽)

 


 

첫째, 니버는 인간이 스스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성서적 인간 이해를 통해서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이는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인간 본성에 대한 진보적 낙관주의의 개념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과 대비되는 견해였다. 당시의 이상론자들의 눈에 니버의 인간 이해는 다소 비관적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현실주의적 개념은 계몽주의의 실패를 경험한 많은 사상가들에게 인간이해의 조망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정의론이 깊게 통찰하지 못한 인간 이해의 스펙트럼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의에 대한 철학적 담론은 인간의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근대주의 담론을 벗어날 수 없다. 푸코((Michel Foucault) 와 하버마스(Jtirgen Habermas) 의 담론이나 비트켄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과 포퍼(Karl Popper) 의 담론에서 드러난 것처럼 20세기에 이르러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신화는 무너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현상학적 측면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이런 사회적 정황 속에서 성서적 인간관에 기초해 인간의 타락한 이성을 강조한 니버의 신정통주의적 이해는 인간 현상에 대한 이해를 통한 정의실현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니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경제 정의를 실현시킬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인간의 타락한 이성을 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정의에 대한 희망의 이유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역설 속에서 발견했다. 물론 니버는 인간의 합리성 문제를 포퍼나 롤스(John Rawls)가 제기한 철학적 깊이로까지 끌고 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사랑이라는 이상의 근사치인 자유와 평동으로 실현되는 정의를 현실적으로 추구하였다.

 

바로 이 근사치 정의에서 니버의 또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니버는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 정의는 최선의 정의일 뿐 완전한 정의가 아니라고 보았다. 기독교 현실주의자로서 그에게 있어서 완전한 정의의 실현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그의 근사치 정의 개념은 바로 인간에 대한 성서적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윤리는 높은 차원의 아가페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데 그 사랑은 인간 사회에서는 성취될 가능성이 없는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인간은 그 사랑의 원리에 기초해 인류 간에 상대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그런 상대적인 사랑을 통해서 상대적인 정의를 성취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불가능한 가능성”이고 근사치 정의인 것이다. 니버의 근사치 정의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는 타당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모호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상대적 정의는 결과적으로 정의의 궁극적 목적을 이데아로 회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이국헌, 207-208쪽)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니버는 근대 계몽주의가 무너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그의 신학적 위치를 재구성해야만 하는 불행한 세대의 역할을 떠안았다. 인간이 합리적이 아닌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몽변증법의 시대에 신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재구성하여 당시 인류사회가 직면한 제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만 했다.

 

바로 그 시대의 중심 사상가 중 하나였던 니버는 스숭들에 의해 세속화된 진보적 인간학으로부터 성경적 인간학으로 회귀하였고, 그러한 기독교 정통신학이 추구하던 인간학에 기초해 현실주의적 인간 이해를 재구축하였다. 이러한 니버의 인간 이해는 1939년에 행한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을 기초로 정리한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1943) 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 책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당대의 진보주의 사상가들이 가졌던 인간 이해는 물론이고 신정통주의자들의 인간 이해와도 차별화된 니버만의 독특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니버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의 탐구를 배격하고, 사회 및 역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근대의 위기에서 꽤 직면한 인간의 현실은 사회적 진보주의자들이나 윤리적 자유주의신학자들의 이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도시화와 그에 따른 무질서의 증가, 도덕적 해이의 가속화와 그에 따른 사회 범죄의 증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제국주의적 논리에 따른 세계 전쟁과 살상 동을 경험한 20세기의 인류는 이전 세기의 낙관주의적 인간론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현실적 상황을 직시한 니버는 19세기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간의 상황에 대한 재인식을 토대로 사회 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인식한 인간의 상황은 기독교 정통주의 신학이 주목한 타락한 이성에 처한 상황이었다. 특별히 니버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한 사상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강조했던 낙관적 인간론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죄의 불가피성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렇게 하였다. 즉 인간은 지유의지를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믿음의 의를 구현하기보다는 죄를 짓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모순성 때문에 인간은 진보적 사회를 구현하거나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이런 이해는 그의 성서적 인간관에 기초한 것이다. 인본주의와 계몽주의가 발견한 근대 인간, 즉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환상과는 달리 성경은 인간의 모순성과 죄악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타락한 이성으로 표현되는 기독교 인간 이해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에 의해서 정립된 정통주의 (Orthodox) 적 견해로서, 니버는 이 기독교 정통주의 인간 이해를 토대로 당대의 비극적 사회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주체만이 아니라 유한성을 가진 모순적 주체이며, 나아가 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이다. (이국헌, 196-197쪽)

 


 

 

 

대략적으로 2세기 반의 르네상스 시대는 탄생지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으며 거의 인간 세계와 연관된 전 영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 시대가 지탱하고 있는 동안 그 시대를 굳건히 지탱해준 좌표축들 안에 많은 잘 정의된 개념들이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의 개념 혹은 특성이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인간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잘 정의된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인 활동 안에서 유사한 형태로 모든 것을 실현하는 일련의 모습을 갖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인간의 새로운 특성들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독창적인 예술 작품의 창시자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바꾸는 예술가는 도시의 삶 안에 개입하여 다른 이들, 즉 자신들의 저서를 통해서 정치 생명을 굳건히 하는 행정 직무를 수행하는 인본주의자, 공증인, 법률가 등과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다; 한편 도시를 ‘물리적으로’ 건설하기 위해서 군주를 만나고 군주와 관계를 형성하는 건축가도 인간의 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 같은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인간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가졌던 생각과 다른 발전과 진행 과정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르네상스 시대에 부각된 문제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당시의 특징들을 반영하는 문제들이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도 중세 스콜라 철학과는 달리 하나의 정해지고 유일한 특징적인 모습이 적용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곧 당시에 모든 부분에 있어서 대비되고 반대되고 상대적이기도 하고 동일시되기도 한 다양한 많은 모습들이 새로운 흐름과 경험의 차원에서, 왕성한 학문적 연구의 차원에서 그리고 환상적이고 마법적이고 점성술적인 배경을 가진 폭넓은 생산의 차원에서 공존할수 있었다는 것이다.(강윤희, 245-246쪽)

이처럼 마르크스의 소외의 개념은 자본주의 학교에서 목격되는 학생들의 소외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방식이다. 특히 학교에서 중심부에 위치하지 못한 채 주변부를 배회하는 학생들의 소외된 삶을 비판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소외의 개념은 또한 현대 학교 교육에 건설적인 제안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형태의 학교에서 목격되는 학생 소외의 문제는 학교 교육의 의미와 역할을 탈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재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학교는 나와 타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 공적 공간이다. 오늘날 학교는 어떻게 보면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곳이다. 하우저와 쿠즈믹 (Houser & Kuzmic, 2001: p.449)의 표현대로 현대 교육 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병리적이 자기중심성과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나보다 우리를 강조했다. 그의 ‘소외된 노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이 억압되고 있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교육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마르크스의 소외의 개념은 교육의 과정에서 개인적인 성취보다는 사회적인 관계를 강조하면서 학교를 공동체적 삶의 공간으로 인식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학교에서 교육은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한 유목적적 활동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상품 생산 논리에 따라 자신의 창의적이고 실천적인 본성으로부터 이탈, 즉 소외를 경험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노동 소외의 개념은 현대 학교 교육에서도 목격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교육은 더 이상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한 의식적인 활동이 아니라 인적자원의 육성을 위한 소외된 노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소외의 개념은 학교 교육의 목적으로서 인간의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과 이를 위한 학교의 탈도구주의화, 즉 학교를 인간의 창의적이고 실천적인 활동이 가능한 참된 노동의 공간으로 (재)개념화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학교는 사회적 다수의 목소리가 존중되는 민주적인 장소이다. Gill(1995: p.400)의 표현을 빌리면 교육의 시장적 재구조화는 “정의의 정치학”보다 “수월의 정치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교에서 소수의 지적 엘리트들이 교육적 의사소통의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다수의 보통 학생들은 주변인으로서의 삶에 만족할 것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소외의 개념은 이러한 자본주의 형태의 학교 교육에서 변두리화를 경험하는 사회적 다수의 삶에 현대 교육개혁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교 교육은 공공의 선으로서 사회적 다수의 삶에 봉사할 윤리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김성훈, 312-313쪽)

 

 

 


 

⑶ <민담~新종교~민중신학> 전제의 인간 소외

 


 

 

 

홍익인간의 이념과 두레공동체를 실현한 한민족의 정신적 원리는 서로 살림(상생)이다. 공동체적 삶의 오랜 전통 속에서 함께 살고 서로 살리는 지혜와 힘을 길러온 한민족의 정신과 문화 속에는 ‘서로 살림’의 원리가 배어 있다. 서세동점의 과정에서 한국민중은 서세동점의 과정에서 상생의 철학의 신앙을 펼쳤다. (중략)

증산교에서 두드러진 것은 해원상생의 사상이다. 옛 세상에는 서로 죽임의 원리가 지배하여 원한이 맺히고 쌓였으나 새로운 세상에는 만고의 원을 풀고 서로 살림의 도리로써 새 세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서로 살림은 삶의 원리일 뿐 아니라 삶의 사건과 과정이다. 서로 살리는 과정에서 생명은 생겨나고 자라나고 새로워진다. (박재순, 54-55쪽)

 

 

 


 

흥부는 변화하는 사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극빈층으로 전락하여 그 생존마저 위협당하는 인물이다. 경제력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한 시대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흥부는 하루하루를 품팔이로 연명하고 갱생의 가능성마저 철저히 박탈당한 임노동자 신세이다 흥부가 처한 이러한 비극적 현실은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호전되지 않는다. 매품팔이라는 극단적 방법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흥부는 한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흥부는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철저히 소외당한 인물이다.

 

흥부와는 달리 놀부는 재물을 숭상하여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공동체적 윤리와 가치는 아랑곳하지 않는 철저히 물신숭배적인 인물이다. 놀부의 부에 대한 욕망이 심해질수록 세계로부터의 고립은 더욱 심각해지고 이에 따라 놀부의 탐욕 또한 더욱 집요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급변하는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인 재물을 향한 놀부의 과도한 욕망은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의 질서를 뒤흔들 만큼 심각한 것이다.

 

흥부와 놀부의 소외에 대한 흥부전 의 서사적 해결 방식은 세계의 자정적 自淨的)인 질서 회복이 아닌 강남 제비라는 외부적 힘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흥부전 의 낭만적 해결 방식은 작품이 반영하고 있는 현실의 부조리 윤리와 도덕의 붕괴가 사회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작가적 인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즉 흥부와 같은 선량한 백성이 놀부 같은 악덕 지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왜곡된 현실은 전혀 개선의 가능성이 없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제비의 박씨와 같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외력의 개입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흥부에게는 더 이상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충분한 재산이 주어지고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한 놀부에게는 재산의 몰수와 육체적 징벌을 통해 그의 탐욕과 도덕적 과오를 징계한다.

 

결국 흥부와 놀부의 소외 문제는 두 인물이 한 형제에서 극빈층과 요호부민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회귀함으로써 해결된다. 놀부는 금전적 보상을 받고 놀부는 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두 인물의 부의 편중문제가 해결되고 양자가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다. 『흥부전』 은 몰락 양반 또는 유랑 농민의 형상을 하고 있는 흥부와 요호부민의 형상을 하고 있는 놀부의 대립을 통해 물질적 부가 전통적인 윤리관을 뒤흔드는 조선 후기 사회의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갱생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뿌리 뽑힌 빈민 흥부와 치부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배금주의적인 구두쇠 놀부는 경제력이 중시되는 물신숭배적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외받는 인간 군상의 양면을 보여주고 있다.

 

『흥부전』 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인간 소외의 양상을 극명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동화전설의 소설화 이상의 소설적 의의를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근대적 문학 장르로서 소설이 가진 현실 반영성을 고려할 때 『흥부전』 은 설화적 모티프를 서사적으로 단순 확장한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흥부와 놀부로 대변되는 사회적 가치와 갈등을 설화적 장치를 활용하여 봉합한 작품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재화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인간 소외의 양상을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부전’은 영웅소설과 같은 여타의 통속 소설에 비해 그 현실반영적 측면에 있어서 소설사적으로 발전된 형태의 작품이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상일, 255-257쪽)

 


 

그런데 이 기도는 이런 일이 이 땅, 이 역사 안에서 이루워지기를 간구한다. 이것은 구원이란 차안에서 피안에로의 도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역사, 내가 선 자리에서 이루워질 현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역시 성서에 일관된 신념이다. 구약은 차안, 피안의 구별을 모른다. 이스라엘 민족, 그 역사가 바로 구원의 현장이며 따라서 종교적 구원, 정치적 구원이 따로 없다. 예수의 선교적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다. 그 나라는 바로 이 역사에서 이루어질 현실인 것이다. 그 나라의 도래는 이 역사의 종말이다. 신약은 이 종말 신앙의 기조 위에 세워졌다.

 

그 다음에 세 가지의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이 따른다. 그 날 그 날의 먹을 것을 위해서, 인간이 서로 용서하듯 하나님의 용서를 빈다. 그리고 유혹에 매이지 말게 해달라는 것이다. 첫째는 생존권의 위협에서의 해방이며 둘째는 대립관계에서의 해방이며 영적 양식만을 구분하고 영적 영역만이 그리스도의 담당처럼 말해온 것은 근거가 없으며, 내적 평화만을 운위하고 사회적 존재성을 망각한 것도 비성서적이다. 끝으로 유혹을 물리치게 해달라는 것은 弱者의 해방을 뜻한다. 유혹은 권력으로나 지위 또는 소유에 있어서 弱者가 공포나 불안에서 절대 아닌 것이 절대화된 것 같이 강요당하는 상태다. 이것과 병행되는 유대교의 저녁기도에 ‘죄의 횡포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염오스러운 것의 횡포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로 된 것은 이 기도의 배경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혹은 감각적 유혹이 아니라 악의 비밀이 폭로되는 날을 향한 기원이다. 비밀을 쓴 악이 바로 우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상에서의 해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셋에서 공동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약자의 입장이라는 점이다.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희구하는 것은 富한 자의 기도일 수 있다. 대립관계를 만드는 것은 강자가 하는 일이다. 강자의 횡포에 대해서 약하기 때문에 증오와 적개심을 갖게 되며 그럴 때 인간관계는 파괴된다. 그런 상태에서 해방시켜달라는 것이다. 유혹은 강자만이 한다. 그러므로 유혹당하는 자는 약자다. (안병무, 72-73쪽)

 


 

그러면 오늘의 구원은 사회개혁 자체에 있다는 뜻인가? 균등한 경제분배, 균등한 권력 분배가 곧 구원인가? 그렇다면 사회개혁이 곧 오늘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관서에서 본 예수에게서 사회개혁에 대한 정열이나 프로그램을 찾을 수 없다. 예수의 관심이 사회냐 실존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후자에 초점이 모여지고 있다. 그에게는 사회구원보다 인간구원이 우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 구원은 결코 내적 정신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인간을 어디까지나 역사 또는 사회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인간 구원은 인간의 상황인 사회문제와 유리될 수는 없다. 이러한 입장은 다음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예수에게서는 이른바 사회개혁의 프로그램 제시나 그것을 위한 명령을 별로 볼 수 없다. 그 대신 기존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뚜렷한 행동 지시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극단적인 결단의 촉구를 많이 알고 있다. (안병무, 75쪽)

 


 

3. 오이코스를 위한 사랑의 운동은 조직화되어야 하고 저들이 체념에서 희망에로 옮겨질 만한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청사진은 그저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여야 한다. 조직화는 연대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으로서 네가 당하는 일이 곧 내가 당하는 일로 되는 것이어야 한다. 까닭은 저들을 억누르는 惡은 구조화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노의 단순한 폭발이나 파괴적인 비판을 위한 비판을 지양하는 길이며 정치, 경제의 횡포를 견제하는 길이다.

 

4. 그리스도교회의 어떠한 운동도 폭력을 저항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폭력을 저항하는 운동에 폭력을 쓰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폭력의 악순환에서 이 역사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동시에 최후의 역사적 결정은 하나님이 한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의 최선의 길을 택하고 판정은 하나님께 기대는 신앙을 최후 거점으로 해서 그러므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느니 예수의 십자가에 다소곳이 처형됐듯이, 3.1운동 선언을 끝내고 투옥될 것을 기다려 손을 내면 33인들처럼, 김찬국, 김동길이 투옥됐듯이 수난의 길을 선택하며 의의 증인이 된다. (안병무 1, 84쪽)

 


 

민중의 공통분모는 민중의식은 선의지와 재미본위와 신비력 숭상 3기반 요소를 이루고, 여기에서 복합요소인 조롱과 멋과 신념이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기반 3요소의 핵심인 슬기와 여유와 신통력이 조화되어 민중의 생명력이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생명력이야말로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민중의 삶을 가능케 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담, 수수께끼, 세시풍속, 탈춤놀이, 민요, 속담은 민중과 가장 밀착해 있는 민속으로서, 이들의 외형은 제각기 달라도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한 민중의식의 기반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민중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민중의 공통분모를 흔들기 위해서는 그 내재 가능성을 최대한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해야 하는데 이는, 민중의식이 형성된 과정을 참작하고, 구조적으로 편승하여, 민중의 생명력을 진작시킬 때 가능해진다.

 

그리고 민중의 ‘생명력’은 민중의 삶의 고뇌에서 해방한다는 점에서 복음과 관계되어질 가능성을 갖으며, 선교는 이 민중의 생명력을 승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정세, 123쪽)

 


 

개체의 구원과 전체(사회)의 구원이 상호의존적이고 상관관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성자연하는 고고한 자만에서가 아니라 인간 본질의 사회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 본질의 사회성에 대한 강조가 신과 인간 앞에 선 개인의 책임성과 인격성을 결단코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인격성은 개체화와 사회화가 동시에 고도로 이뤄지는 생명운동에서만 나타나는 생명현상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신학은 나 개인의 구원이나 내가 속한 종교단체, 교파, 교회의 구원에만 관심을 쏟을 수 없다. 그것만으로서는 구원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지난 시대까지는 개인주의적 기독교 신앙과 구원론으로 만족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인간이 성숙하였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아니고서야 동족과 동료인간이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데 나만은 안심이라고, 성공이라고 평안한 태평가를 부를 수 없다. 혹자는 그들 이외의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할 자들로 예정되었다고 예정론의 보검을 휘두를 수도 있을 것이고, 신앙이란 神앞에 선 단독자의 결단 문제라고 반론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현대인들은 그러한 교만한 결정론을 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와 전체는 유기체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략)

 

전체 구원의 완성 없이 개체구원의 완성은 없다. 그래서 앞서간 성도는 전체구원을 기다리며, 때가 찰 때까지, 새로운 영적인 몸을 덧입어 개체의 구원을 완성하지 못하고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중략)

 

민중의 신학은 인간 영혼의 구원만이 아닌 전인의 구원을 목표한다. 민중의 신학은 개체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체의 구원을 소망한다. 따라서 민중의 신학은 민중의 소외현상 곧 민중 삶의 구체적 장인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영역의 소외현상을 극복하는 것, 그것이 구체적이고 일차적인 구원을 향한 선교행위로 본다. 왜 민중의 신학은 순수한 종교영역 밖의 일까지 관심하느냐고 묻는다. 그 대답은 이렇다. 종교란 인간적 삶의 어느 일부 영역의 일거리가 아니고, 삶의 제반 영역의 깊이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경제적-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김경재, 82-83쪽)

 


 

본 연구를 통해 볼 때 증산사상에는 평등, 평화, 민족주체의식등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인존, 원시반본, 선민사상 등 특수한 종교사상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물론 증산사상에서 나타난 평등, 평화, 민족주체의식 등의 사회사상은 증산사상에서만 독특한 것은 아니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한국 신흥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증산사상에서는 당시의 조선사회가 노정한 사회적 현실과 당시의 민중의 욕구와 원망을 하나의 민중사상으로 체계화시키고 있으며 이것을 더 나아가 종교사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신흥종교란 일부 기성종교관계자들이나 기성권위자들이 보는 바와 같이 사회병리적인 현상으로만 다루어질 수는 없다. 오히려 신흥종교의 발생은 사회병리적 현상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신흥종교는 일반 대중운동의 발생 원인과 같이 가치규범의 붕괴, 경제적 실조, 문화갈등 현상과 같은 사회구조적 상황에서 발생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흥종교의 발생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기성체계, 기성종교가 얼마나 자신의 기능을 다하였느냐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고발하는 한편 사회의 관심에서 소외된 하류계층을 대상으로 그들의 욕구를 체계화하여 하나의 민중사상을 형성하면서 발생 성장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노길명, 117-118쪽)

 


 

 예수는 한번도 스스로가 메시아인 것, 곧 그리스도임을 주장하지 아니했고 현재의 로마체제를 넘어뜨리고 새로운 하느님의 지배체제를 세우려는 의도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당시의 차별 받던 ‘땅의 백성’ 혹은 죄인 곁에 섰고, 민중과 함께 있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사람이 他者로부터 사는 생활을 공유하는 것을 애타게 바랐을 뿐이다. (중략)

 

그러나 그는 목마르게 기도했다. 기도란 넘어갈 수 없는 현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보고 하느님께 부르짖는 알몸인 사람의 부르짖음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민중과 함께 있으면서도 간간히 한적한 곳으로 가서 땅위에서 부재한 하느님께 정말 ‘하느님’을 부르면서 처절하게 기도했다. 그것은 자기의 민중을 포함하여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차별의 뿌리를 캐어낼 수 없었기에! (전병호, 153쪽)

 


 

해방이란 무엇보다도 눌린자와 가난한 자 등 수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수난자라고 할 경우에는 상황적이며 개별적 개념이다. 그런데 사회학적으로 수난당하는 군상,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나 구속 등이 아니라 신분적으로 그 사회의 중심에서 소외된 결과로 고통하는 계층관념이다. 거기에는 <죄인의 친구 예수>라고 했는데 이 경우 벌써 기존 질서의 가치관이 전제하는 율법적 정의다. 그러나 민중의 친구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단순히 <버림받은 계층>이라는 뜻이고 어떤 선악의 가치기준에서 묻지 않는다.

 

서남동의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는 민중이란 용어 때문에 논쟁을 야기시킨 첫 글이다. 그는 그 논문에서 민중을 새삼 정의하지 않고 自明的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논박에 대한 답변 논문에서 그는 그 개념의 포착의 과정으로 3·15 조치 때에 낸 ‘민주회복 구속자 선언’이 ‘민중의 의지’를 내건 처음의 것이라고 하고 같은 해 3·1절 기념 기독자 교수 협의회 주체 강연회의 제목 <민족, 민중, 교회>과 내용에서, 그리고 같은 해 3월 10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의 ‘민주 민생을 위한 복음운동을 선포한다’에서 민중이란 용어는 없어도 민중을 강하게 의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민중개념은 뚜렷하다. 그는 예수의 세례, 시험등에서 고난받고 억압당하는 민중과의 동일성을 확인한 다음의 제 일성이 누가 4:18인데 주목, “예수의 출현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의 선포, 곧 투쟁이었다”고 하고 “경제적 빈곤, 사회적 문화적 편견, 사실이 은폐된 어두움 속에 사는 무리,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작업이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민중과 소외자를 직결시킨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민중의 우선권을 “예수의 하나님은 부자도 눌린 자와 함께 예배하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었다”고 단정하면서 주기도문은 가난한 자 눌린 자를 위한 것이라 하면서 ”부자의 권력자는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게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다“고 까지 단언한다.(안병무 2, 747쪽)

 


 

8.15 해방 후 민중 생활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국토분단에 의해 모든 것이 규제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민중의 희망은 정의와 자유를 실현하는 일이다. 일제하의 항일투쟁은 민족의 독립, 즉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고 사회정의, 즉 수탈과 착취를 반대하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한 투쟁이었다. 일제하에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벌인 것은 바로 이 정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8.15는 일반적으로 해방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국토분단이 정의와 자유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장애요건임이 명백해졌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할 것 없이 민중의 자유로운 생활이 이데올로기의 과잉 대립으로 정상적인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6.25는 민중생활이 결정적으로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당 12년의 통치에 있어 이러한 상황은 민중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를 탄압하는 데 절호의 구실을 주었다. 이런 뜻에서 8.15 해방은 민중에게 참된 해방이 될 수 없었다.

 

4.19는 억눌릴 대로 억눌린 민중이 민중 본래의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이요, 저항이었다.

 

5.16 후의 상황에도 본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도 성장이 구가되고 사실상 물량적인 성과를 올리고는 있으나 이 물량적인 성과는 두 가지 결정적인 희생을 대가로 지불하였다. 하나는 주로 저임금이 단적인 표시이듯이 민중의 희생하에 고도성장이 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정의 실현 문제가 제기케 되었고, 다음은 고도성장이 주로 외자에 의존해 추구된 결과 민족자주성의 취약성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민족의 주체성, 민족의 자유가 강조되어야 할 위기상황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저임금에 의한 고도성장은 필연적으로 근로자들의 노사분쟁을 고조시키고, 외자의존형 고도성장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에 대한 위기의식과 각성을 불러 일으켜 사회계층간의 갈등과 불안을 유발하고, 이러한 상황은 또한 자유의 유보, 민주주의의 위축을 초래해 인권문제가 클로즈업 됐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의 민중운동에 있어 그 형태와 질을 지난날의 기나긴 투쟁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하고 있다는 판단을 가져오게 하였다. 민중의 희망과 그 운동은 길고 긴 그 전통적인 길을 향해 계속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여론이다.(송건호, 49-50쪽)

 


 

가진 자의 희망은 최소한도 있는 것을 지키고, 나아가서 이미 있는 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더 증식시키는데 있다. 그를 위해 기업가는 권력자에게 권력자에게 줄을 대어서 면세에서부터 재정과 금융 특혜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수단을 다하여 자산을 늘이기에 바쁘다. 또 매스콤을 장악하여 기업의 상품의 광고에 열을 올리고, 기업의 신뢰도를 선전하기에 분주하고, 자기 기업의 특혜를 주는 정권에 박수를 치는 논조를 펴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물론이다. 권력은 또 이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부여하고 그를 통해서 권력기반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기업과 언론과 권력이 일체가 된다는 말이다.

 

명예를 누리고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그것의 확대 재생산을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 를림없다.

 

이런 상황이 극단적으로 될 때 한 사회는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극한적인 대립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생기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윤리의 힘은 너무나 무력하다. (김병식, 66쪽)

 


 

서남동 : 민중이 종살이만 할 것이 아니라 종당에 가서는 역사의 주인으로 서야된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킴에 있어서 한국의 해방의 신학이 소개되기 훨씬 전부터 創批를 중심한 문필가 그룹이 선구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온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창비를 중심한 문필가들이 미치는 영향의 범위나 방법과 종교적인 집단으로서의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나 범위는 상당히 대조가 되지만, 저는 상보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신학적 언어로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인 민중의 구원을 주장하고 고취하는 데서는 결국 같은 것인데,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분명한 것은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니까 확실히 더 유력하게 그것을 증거하고, 표본을 만들고, 추진하는데 역시 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좀 바뀌었지만, 우리가 민중신학이라고 할 때의 민중의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어요.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말은 안병직씨가 3.1운동 연구에서 부각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중이란 말은 5.60년대 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개념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그런 것 같아요. 독일의 folk도 아니고, 영어의 people도 아니고, 근래에 많이 쓰는 신약성서의 오클로스도 어밀하게 말하면 아닙니다. laos는 더욱 아니고요, 왜냐하면 오클로스는 문자 그대로 군중crowd입니다. 민중이라는 것은 분명히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 개념이고, 지배자들 때문에 자기의 모든 권리를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박탈당한 억압받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특유한 말입니다. 그러기에 <민중의 신학>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Theology of Minjung>이지 Theology of people이 아니거든요.

 

이런 전제하에 저는 <민중의 시인> 지하를 연구하고 그가 제시한 것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과 혁명의 통일>을 어떻게 하면 동학과 기독교를 통일시킬 수 있는가에서 추구하고 있어요. 그를 지배하고 있는 제일 큰 정신적인 조상은 전봉준입니다. 물론 만적도 있고 홍길동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종합하고 기독교와 통일시켜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자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미륵불 신앙에 담겨져 있는 이미지나 내용까지도 가지고 와야 하겠다는 겁니다. 천년 왕국 신앙이 아니더라도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민중신학을 위해 미륵불 신앙이라도 좋겠다는 것이죠. 한국적인 전통에서는 근본적인 속죄를 받아야 할 내면의 어떤 모순적인 것은 민중의 恨이거든요. 그러니까 교회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이렇게 미륵불 신앙이나 민중의 恨을 도입하는 고식으로 민중신학을 전개한다면 이것은 교회의 안이다 밖이다 하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훨씬 넓은, 참으로 보편적인 민중신앙의 기독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지금에 와서 불교와 기독교, 유교를 비교해서 각각의 장점을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민중이 주인이라는 차원에서 총동원하고 종합하면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죠. 또 사회경제사, 문학사회학 등을 신학이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것도 당면한 과제이며, 이것은 세계 양대 이데올로기를 종합 극복하고 제3의 것을 참조해야 할 오늘의 역사적 과제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복 외, 119-120쪽)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다. 예수의 메시지는 지금 여기서부터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이웃과 하느님에게 개방하여 인간답게 사는 길을 마련하자는 메시지였건만 사람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형이상학화․반사회화․비역사화시켰다. 이렇게 경직된 중세 서양문화 일색으로 채색된 배타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한국종교가 견지하던 조화와 관용의 모습은 일그러졌다. 그리하여 종교간 갈등과 쟁투의 모습이 지난 200년 이래 이 땅에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지닌 그러한 자세 때문에 처음에는 그리스도교가 국가이념이었던 유교에게 일방적으로 박해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를 모두 몰아붙이는 공세로 전환한 국면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중종교인 무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미신시하고 타파되어야 할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종교로 몰아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종교간 대립을 벗어나서, 오랜 전통 속에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리고 있던, 공존과 관용과 조화의 길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길을 실천하는 방도로는, 지금도 산발적으로 몇몇 뜻있는 개인들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간 협력 사업의 활성화라는 방향으로 오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동무이 되도록 이러한 협력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겠다.

 

이제까지의 논의에 근거하면, 무교적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교의 과제는 바로 한국 고유의 종교전통 속에서 하느님을 새삼 발견하는 일이다. 달리 말해 새로운 그리스도론의 개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람이 되어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러면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막, 8:29) 라는 성서의 질문을 오늘 여기에서 다시 묻고 대답하는 일이 된다. 불교적 관점에서 “예수 보살론”을 전개할 수 있다면, 선사시대 이래 이 땅의 기층종교로 기능해오고 있는 무교문화권에서 그것은 “예수 바리데기론”을 말하거나 “성주 그리스도론”내지는 “산신령 그리스도론”을 개발하는 일로 표상될 수도 있겠다. 그러한 작업들은 그리스도교와 무교에 대한 각각의 심층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여럿이서 꾸준히 전개해 나갈 과제인 것이다. (박일영, 88-89쪽)

 


 

이러한 풍조는 전지구적인 현상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참된 삶을 지향한다는 종교 공동체에 대한 숙고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사이의 친교를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민중들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이어져 온 무교 전통의 공동체관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팽배한 현대 사회속에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해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개인화, 사역화로 치닫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서로의 아픔을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친교의 대동잔치로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교와 무교의 공동체관은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환경 속에서 발전해 왔지만, 적극적으로 융섭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두 종교적 공동체 이해가 공히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일치와 화합을 최종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 넓고 큰 차원에서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고 해결하는 열린 공동체로서의 교류와 협력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상통하는 두 종교는 참된 종교적 자세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무교로부터 역동적이고 실제적인 삶아 있는 종교성을 보고 배울 수 있으며, 무교는 ‘굿정신’의 영성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이상적 공동체를 체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리스도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일영, 198-199쪽)

 


 

민중종교의 신앙 체계 안에서는 자연계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서로 교차하면서, 자연의 요소들과 인간이 우주적인 친교를 이룸으로써 사회안에서 조화가 확보된다고 한다. 무교의례인 굿이 진행되는 동안 구경꾼까지 포함한 모든 참석자들은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풍성한 대접을 받게 된다. 굿 중간의 식사시간이나 제의적인 대동음복의 경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루어지곤 한다. ‘굿당’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장소와 비교하여 그 크기나 모양에서 별 구별 없이 친근한 장소이다. 굿의 내용은 ‘재앙을 쫓고 복을 부름’으로써 한을 품고 원을 들어주는데 적합하다.

 

(중략)

 

무교의례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 의례를 청한 단골이나 의례를 진행하는 무당이 겪은 실존적인 경험에 대한 집단전승이요,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종교사를 보더라도 지배자들은 사회 비판적인 기능이 다분한 피지배자들(민중)의 제의를 금지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장려하고 즐기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일영, 211쪽)

 


 

이러한 묘합의 원리로서 한 사상은 외래종교와 사상을 흡수동화하면서 한민족의 종교와 사상을 형성하는 원리가 되었다.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는 한민족의 현묘지도를 최치원은 풍류도라 했다. 이 심원하고 미묘한 풍류도는 ‘한’ 사상을 가리킨다. 한의 정신과 원리가 유불선 삼교를 포용하고 융합하여 현묘한 풍류도를 이루어냈다. ‘한’사상은 원효의 원융무애, 화쟁사상으로 표출되고, 고려의 의천과 지눌이 조계종의 기초를 닦은 교선일여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이을호에 의하면 송대 유학의 유입이후 고려말에서 조선조 말까지 ‘한’사상의 명맥은 끊겼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도 기고봉, 이율곡, 정다산 등이 한’사상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본다. ‘한’사상이 장구한 단절의 위기를 맞았지만 민속이나 민중의 피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한민족은 위대한 민중종교들을 통해서 다시 말해 ‘한아님’ 신앙, 동학의 인내천, 증산교의 신명과 해원상생, 원불교의 恩사상에서 ‘한’사상을 활짝 꽃피웠다. 19세기에 태동된 이러한 민중종교들은 하나같이 민족적 자주성을 확립하고 세계평화의 길을 제시했다. 서구세력의 침략을 당하면서 그리고 지배층의 압제와 수탈로 짓눌려 있던 민중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종교사상을 제시하고 외세에 맞섰던 것은 밝고 따뜻한 생명을 추구한 한민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생명사랑을 다시 확인해 준 것이다. (박재순, 19-20쪽)

 


 

최해월은 시천주 사상을 발전시켜 向我設位와 養天主와 事人如天을 말했다. 기존의 제사는 향벽설위였다. 제사지낼 때 과거의 죽은 혼령들에게 바치던 밥그릇을 지금 살아있는 ‘나’를 향해 옮겨 놓은 것이 향아설위이다. 제사의 중심은 오늘 살아있는 ‘나’이다.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이 관을 먹는 사람이 중요하다. 향아설위는 “밤의 저승과 죽음의 피안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대낮의 이승과 삶의 차안으로 인내천의 발걸음을 옮겨 놓은 혁명적 거보다.”

 

밥과 인간과 한울이 하나로 통한다. 밥이 곧 한울이고 밥을 먹는 인간이 곧 한울님이다. 밥을 먹음으로써 한울을 먹는다. 내 안에 한울님(천주)이 계시므로 한울님을 키워야 한다. 한울님을 키우는 것을 해월은 양천주라고 했다. 지금 밥을 먹고 사는 산 사람을 한울님처럼 공경하라고 했다. 해월은 경솔하게 아이를 때리지 말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날님을 대리는 것이니, 하날님께서 싫어하고 하날님의 기운을 상하는 것이다.” 해월은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을 지극히 신령하고 존귀한 존재로 본다. 생명을 포태한 여성은 한을님을 포태한 한울님이다.

 

동학의 시천주와 사인여천의 사상은 만민평등의 혁명사상이다. 동학은 조선왕조의 신분사회의 이념과 질서를 철저히 거부하고 만민평등의 생명사상을 표방했다. 이로써 외세에 맞설뿐 아니라 불의하고 부패한 봉건왕조체제에 맞서는 민중해방운동을 통해 한민족의 강력한 생명력을 분출시켰다.

 

증산 강일순은 맺힌 원한을 풀고 서로 살리는 길을 열었다. 신앙과 신령한 힘으로 질병을 고치고 한국 민중의 무의식과 집단적 혼을 지배하는 귀신들과 원혼들의 맺힌 한을 풀음으로써 서로 살림의 평화세상을 열고자 했다.

 

증산교에서 두드러진 것은 해원상생의 사상이다. 선천에는 상극지리가 지배하여 원한이 맺히고 쌓였으나 후천에는 만고의 원을 풀고 상생의 도리로써 새 세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선천에는 상극지리가 인간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침에 마침내 살기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천지도수를 뜯어고치고 신도를 바로 잡아 만고의 원을 풀고 상생의 도로서 선경을 열고 조화정부를 세우겠다”(『대순경전』 동도교 증산교회본부 5장 4절) 원한을 풀고 서로 살리는데 새 세상을 여는 일을 증산은 천지공사, 또는 개벽공사라고 한다. (『대순경전』 5장 1절)

 

(중략)

 

그러나 원한은 개인의 영혼에만 맺혀 있지 않다. 신명의 세계, 지방신, 종족신, 문명신들 사이에 원한이 얽혀 있음으로, 천지신명의 원한을 풀어야 새 세상이 온다. 세상의 모든 병페와 싸움은 종족신과 지방신들의 한이 맺힘에서 비롯되었다. 이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세계평화와 후천 선경의 조화정부를 여는 지름길이다. 개인의 혼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혼, 무의식과 의식을 지배하는 신명의 세계를 쇄신함으로써 상생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지방신과 지운을 통일케 함이 인류평화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대순경전』 6장, 129-132절)

 

증산은 계급없는 평등사회를 지향한다. “양반을 찾는 것은 그 조상의 뼈를 우려내는 것과 같아서 망하는 기운이 이르나니, 그러므로 양반의 기습을 속히 빼고 천인을 우대하여야 속히 좋은 시대가 오리라”(『대순경전』 6장 6절) (중략) 증산이 여는 후천상생의 시대는 “함께 성공하고 함께 사는 공화시대”(『대순경전』 5장 14절)이고 상생의 시대를 여는 길을 남을 살리는 길이다. (중략)

 

강증산의 천지개벽공사는 해원과 상생을 통해서 민족의 갱생과 인류의 평화를 폭력투쟁 없이 이룩하려는 차원 높은 사업이었다. 증산의 언행이 매우 신비주의적이고 환상적이지만 증산의 해원상새으이 이념과 실천에는 홍익인간과 한 사상으로 표출된 한민족의 생명사랑이 지극히 예민하게 나타나 있다.

 

19세기 민중종교의 사상 그 바닥에는 무교의 전통과 맥이 흐른다. 민족사의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민족사의 밑바닥에서 몸으로 겪어낸 민중을 위로하고 붙잡아 준 것은 무교였다. 무당은 민중과 함께 이름없이 천대 받는 고난의 사제이고 한을 풀어주는 영혼의 위로자였다. (박재순, 24-27쪽)

 


 

예수운동은 하나님과 민중의 만남의 사건이다. 하나님과 민중이 만남으로써 민중은 죄와 질병과 죽음에서 일어선다. 예수운동은 민중을 일으키는 운동이다. 부활한 예수는 민중현장인 갈릴리로 가서 민중을 일으킨다. 예수의 부활 생명은 민중의 일어섬에서 역사한다.

 

지배층은 민중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민중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메시아 예수는 민중을 섬긴다. 섬김으로써 서로를 살린다. 지배층이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서로 죽임에 이른다면 예수는 섬김과 나눔으로써 서로 살림에 이른다. (박재순, 70쪽)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아레오바고’로 자처하는 『신학사상』은 다음과 같은 것을 선언한다.

 

1. 신학운동은 결코 복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빛이 이 신학운동으로 더욱 빛나게 하고자 한다. (중략)

 

3. 우리의 신학운동의 관심은 한국적인 것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는 결코 ‘한국적 신학’이란 이름과 우리 신학적 노작을 결부시켜 국적이 있는 신학을 창조하려 함이 아니고, 한국적이라 일컫는 모든 역사와 전통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빛 아래 자각되고 심판받고 구원을 받아 “한국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한국을 위한다”는 소명의식에서, 우리 신학이 새 문화 창조의 기수락 되기를 바란다.

 

4. 우리의 신학운동은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라”(요 17:22)는 예수님의 기도의 정신에 따라 “오이쿠메네”의 정신을 최대한 발휘하기로 한다. (중략)

 

5. 우리의 신학운동은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만이 아니고, 인간이 그 삶의 소재로 하고 있는 모든 분야-과학의 세계, 철학의 세계, 예술의 세계-가 어떻게 신학의 소재로서 필요한가를 관심하며, 나아가서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는 권위의식에서가 아니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롬 11:36)는 말씀대로 만물의 의미와 가치를 밝혀주는 종의 입장에서 신학의 부분을 밝히고자 한다.

 

6. 이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우리는 과거와 현재, 세계 각국에서 이미 전개되었고 또 되고 있는 신학운동의 노작들은 번역하여 소개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와 같이 짧은 역사를 가진 신학소년은 남이 한 노작을 존경하고 부지런히 배우는 노력을 아끼지 아니한다. 그러나 모방의 신학을 하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것을 창조하는 밑거름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이다.(이하 略)(유동식, 252-253쪽)

 


 

물론 한국신학계는 이미 60년대에 소위 토착화 신학운동에 의해 민족적 종교 문화와 기독교의 접목을 부분적으로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대중문화운동으로까지 확산되지 못한 채 일부 신학적 엘리트의 신학적 주체성 수립을 위한 자구책으로 그친 감이 있다. 이에 반해서 80년대 이후 주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호가산 일로에 있는 민족 종교운동은 단순히 일시적 신흥 종교운동으로 보아 넘기기 어려운 철학적 윤리적 그리고 역사의식적 성숙성을 띠고 있다. 조선기 말엽에 창시되어 민족의 위기를 통과하고 최근에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대표적 민족종교운동 중에서 특히 증산교는 대종교와 천도교와 같은 여타의 집단과는 달리 80년대 이후 젊은 식자층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이들이 식자층을 중심으로 재빨리 부상하게 되었던 주요 요인 중의 하나는 중산층 교회가 좌우분열을 넘어서는 세계사적 안목의 구비와 한반도의 현실인식에 있어서 통일지향적 민족 열망에의 부응에 실패함으로써 사회적(특히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시뢰를 상실하였다는 데 잇다. 따라서 중산층의 교회가 한국적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는 민족 종교운동에 의한 좌우분열의 해결책을 받아들이기 보다 그것에 의한 문제제기를 심각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한국 민족종교의 ‘홍익인간’ 이상은 서구 근대 문화가 안고 있는 근원적 병폐인 이른바 유신론적 자본주의와 유물론적 사회주의의 좌우분열 도식을 하늘(神)과 땅(物)이 함께 어우러지는 ‘천지공사’의 이념에 의하여 파악하고 인간을 영육의 전인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홍익인간 이상은 좌우의 양극적 대립과 악순환을 넘어서 해원상생하려는 지상선경의 유토피아 의식에 의해 문화적 식민지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중산층 교회로 하여금 다시금 분열 이전의 근원에로 관심을 회복시키는데, 곧 원시반본하게 하는 데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논자는 중산층 교회가 민족종교의 이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이룩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通교회라고 명명하면서 기존의 제도교회와 구별하고자 한다. 원효가 십문화쟁을 구현하고자 통불교를 창안하였듯이, 좌우분열 속에서 사분오열하는 한국교회를 전일적으로 통일할 수는 없을지라도, 세계 평화와 민족통일의 과제를 하느님 나라의 빛에서 공동적으로 수용하기 이한 새로운 기독교운동을 通기독교라 칭할 수 있으리라. 통교회의 이상은 앞으로 논구할 민중교회론과의 비판적 연대와 대결 속에서 보다 구체화될 것이다. (박종천, 230-231쪽)

 


 

이상에서 약술된 십자가의 화해에 근거하면서 그것을 윤리적 당위로 실천하는 한 몸공동체를 우리가 구태여 ‘통교회’로 부르려는 까닭은 기존의 중산층 교회와 이에 대항하는 민중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내부의 또다른 좌우분열의 현상형태로 자리잡아 간다는 위기의식을 새로운 신학적 윤리적 지평 위에서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일찍이 원효는 십문화쟁을 주창하면서 소위 통불교의 이상을 제시한 바 있다. 원효의 화쟁론은 피아간의 대립모순 시비의 양극적 현실이 진망, 염정, 이사, 공유, 미오, 인과 등의 양극적 논리로 점철된 것을 일심동체라는 불이ㅡ이 원리에 따라 조화․회통․초극하려 한다. 즉 현상으로 보면 분명히 모순 대립되어 있으나 실상을 파고들면 그것은 근본이 둘이 아니며 하나이므로 양자는 상반되면서 상합하는 일심의 양면일 뿐이다. 이러한 원효의 통불교적 이상은 좌우분열의 시대 속에서 유물 유심의 대립, 개체-전체의 대립, 민주-공산의 대립, 자유-독재의 대립을 심물일여, 개전불이, 민공화쟁이라는 평화통일의 대원리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십자가의 화해의 빛에서 통교회의 윤리적 이상을 제시하는 것은 오늘날 긴급히 요청되는 한국의 기독교신학의 선교의 과제라 하겠다. (박종천, 236-237쪽)

 


 

사랑 없는 권력은 폭력화하고 권력 없는 사랑은 감상이므로, 좌우분열의 헤게모니론의 허상을 직시하여 사랑과 권력을 창조적으로 통저하려는 다양한 이념적 입장들이 상호연대․상호비판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점에서 통교회론은 앞으로 비판적 우익 노선과 합리적 좌익노선이 회통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요컨대 통교회는 중산층 교회로 하여금 비판적 우익 노선과 극우 선회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민중교회로 하여금 합리적 좌익 노선의 극좌 선회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함으로써 분열된 사회속에서 화해된 새로운 실재를 선도해 내야 할 것이다. (중략)

 

요컨대 좌우분열 속에서 치유신앙을 확립하려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삶 속의 십자가적 실천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 나라를 세상적 통치의 좌우 헤게모니로 착각하는 제자들을 꾸짖고 타이르시면서 예수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의 길을 제시하고자 십자가의 쓴잔을 마실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마태오 복음 20장이 오늘 우리의 분열 상황 속에서 치유책에 부심하나 상처를 아물게 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 말씀이다. 좌우분열의 근원적 치유는 헤게모니론을 이웃 사랑, 아니 심지어 원수사랑이 실천 속에서 극복하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공동체와 그 운동에 의해서 예시되리라 믿는다.(박종천, 238-240쪽)

 


 

이에 비하면 백낙청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명확한데, 이러한 태도는 여전히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에 대한 지정학적 인식의 산물로 볼 수 있다. 1960년대의 초기 비평에서 “서구의 20세기”와 “서구의 20세기보다 과거의 다른 어느 시기”가 서로 혼거하는 한국의 상황을 직시할 것을 요청했던 백낙청은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인간본성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서구적 탈근대 및 그것과는 다른 (과거의) 어느 시기가 혼거하는 한국적 상황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 후에 급격히 보수화․소시민화된 서구 시민계급이 성취하지 못했지만 제3세계 한국에 주어진 가능성이자 “복된 짐”으로서 “쟁취하고 창조하여야 할 미지․미완의 인간상”이 시민이라면, 그것은 또한 인간본성의 쟁취에 대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김우창은 백낙청을 가리켜 “사실상의 전향이 없는” 비평가라고 명한 바 있는데, 이런 점에서 백낙청 비평에서 보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일관된 입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그 일관성이, 김우창이 이해했던 것처럼 단지 자명성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불균등 발전에 의해 중첩되고 병치되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에 대한 지정학적 현실 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이수형, 364쪽)

 


 

⑷ 현대인의 소외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이렇게 소비에 집착하는가? 소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의 근원은 자기 존재의 무가치함이다. 현대인 일반은 현대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자기 존재의 무가치함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소비에 집착하며, 이를 통해 자기 존재 의미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통일체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그램 소비에 대한 추구와 집착은 현대인의 소외 양상의 하나이다. 만일 현대인에게 ‘하루의 많은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가정해본다면 아마도 노인의 경우에는 TV를 보면서 지낸다는 응답이 젊은이나 어린이의 경우는 컴퓨터를 켜놓고 보낸다는 응답이 가장 많을 것이다.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서 여가시간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사용하는 주도적인 방식은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의 소비이다. 프로그램의 소비란 인터넷 게임, TV 드라마, 신문, 프로 스포츠 중계방송, 인터넷 뉴스, 음란 사이트, 영화, TV 오락물, 비디오 뮤직, 대중가요, 연예가의 뒷이야기, 만화, 무협지, 상품광고, 코미디물 등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뜻한다.

 

프로그램의 소비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진정한 나’와의 만남을 회피하기 위한 시간 보내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심심풀이로서의 시간 보내기이며, 소중한 삶을 낭비하는 것으로서의 시간 보내기이다. 또한 프로그램의 소비는 강한 중독성을 갖고 있다. 삶에서 고통스런 경험을 겪을 때와 같이 우리가 자신의 존재에 깨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왔더라도 현대인은 고통을 대면하기보다는 쉽게 자신이 즐기는 프로그램으로 도피해서 고통을 잊으려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더라도 우리가 프로그램의 소비에 중독된 채로 살아간다면 ‘진정한 나’와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기회는 없다.

 

통일체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보면, 쾌락의 추구는 현대인의 소외 양상의 하나이다. 현대 인간관에서와 같이, 인간을 ‘욕망 주체’라고 간주했을 때, 인간다운 삶이란 ‘욕망 충족적인 삶’을 의미한다. 이 때 행복이란 욕망충족에서 비롯되는 쾌락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쾌락의 추구가 만연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현대인의 쾌락 추구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데 성적인 쾌락의 추구, 승리의 쾌감의 추구, 파괴의 쾌감의 추구 등이 그 대표적인 영역이다. 성적인 쾌락 추구는 현대인의 쾌락 추구의 대표적인 영역이다. 오늘날 현대사회에는 쾌락주의 문화가 지배하면서 성적인 쾌락에 대한 추구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승리의 쾌감 추구 역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현대인은 경쟁심이 강하기 때문에 현대인이 느끼는 쾌감의 주된 원천의 하나는 승리이다. 현대인은 쾌감을 얻기 위해서 승리를 추구한다. 월드컵경기에 대한 열광은 그 하나의 사례이다. 파괴의 쾌감 추구 역시 확산되고 있다. 영화 속의 폭력이나 격투기가 점점 더 잔인한 양상을 띠는 것이 그 예이다.(홍승표, 233-234쪽)

 


 

첫째, 본 연구의 목적은 사회적 배제 유형에 따라 지각된 정서가 과시적 소비에 차별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인지적․정서적 메커니즘을 동시에 확인하는데 있다. 특히 기존 선행연구에서는 사회적 배제와 소비행동과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인지적 측면만을 고려하거나 혹은 정서적 측면만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인지 정서 평가모형을 바탕으로 인지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동시에 고찰하는데 있어서 기존 연구와의 차이점을 갖는다. 둘째, 본 연구에서는 일차원적인 감정(긍정적vs 부정적)연구에서 벗어나 동일한 부정적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하위 차원별로(분노, 슬픔) 서로 다른 차별화된 동기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실무적 시사점으로는 첫째, 배제를 당했다고 지각하더라도 이유도 없이 무시를 당했다고 지각한다면 과시적 소비를 더 많이 할 것이며 반면 자신이 배제된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피드백 받게 되면 오히려 과시적 소비 경향이 줄어든다고 나타났다. 따라서 만약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광고를 하거나 홍보활동을 할 때 불가피하게 그들을 포함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무시보다는 거절이라고 지각될 수 있는 문구나 영상을 통해 반사회적 소비를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 부정적 정서 중에서도 과시적 소비는 분노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를 고려해 볼 때, 사회적 배제를 지각하더라도 분노의 감정보다는 자신이 사회구성원으로 참여 받지 못한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이나 혹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면 과시적 소비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본 연구의 한계점 및 향후 연구방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에서는 대학생들을 사회적 배제 상황으로 프라임시켜 사회적 배제의 관계성을 살펴보

 

고 있다. 하지만 결과의 일반화를 위해서는 대학생이 아닌 실제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속하는 노인, 장애인, 외국인이나 실험자극과 연관성이 높은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요구된다. 둘째, 과시적 소비행동으로 반사회적 소비 행동을 측정하고 있다. 하지만 과시적 소비를 구성하는 하위 차원 중 상징성 변수만을 사용하여 과시적 소비를 측정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갖는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자극-반응 관계의 일관성을 위하여 의류 자극물을 활용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시험효과가 발생할 수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추후 연구에서는 통제집단을 포함한 실험설계를 고려하거나 또는 결과변수로 활용한 과시적 소비척도를 다른 문항(예, Chauduri et al. 2011)들을 활용하여 사회적 배제에 따른 과시적 소비와의 관계성을 재검증할 필요가 있다.(오민정․황윤용, 161-162쪽)

 


 

통일체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다움’의 핵심적인 척도는 ‘우주적인 존재로서의 나와 세계를 자각 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우주적인 존재로서의 나와 세계를 자각’했을 경우, 나는 ‘분리된 자아로서의 나[에고8)]’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나는 더 이상 성공과 승리를 위해 내 모든 것을 쏟아 붓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인기나 외모, 젊음에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일어난 일에 저항하지 않는다. 나는 진정으로 겸손하며,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나는 따뜻한 미소를 띠고 나와 세계를 바라본다. 나는 상대편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준다. 나는 나와 너의 잘못을 용서하며,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이념을 갖고 있는 상대편에게 관용을 베푼다. 이런 통일체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가정이 현대 인간 소외 논의의 전제가 된다.(홍승표, 226-227쪽)

 


 


 

3. 인간해방

 


 

⑴ 인간존엄성

 


 

유럽인권협약(EMRK)은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명문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권법원은 유럽인권협약의 중요한 핵심적 내용은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럽인권협약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의 보장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보장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고문의 금지와 같이 유럽인권협약 상에 보장된 모든 개별적 권리들이 그 근원으로서 소급할 수 있는 기본적 규범(Basisnorm)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각각 고문 내지 비인간적인 대우, 강제노동 그리고 사생활의 제한으로부터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는 유럽인권협약 제3조, 제4조 제1항 그리고 제8조는 인간의 존엄 원칙의 구체화로 설명될 수 있다. 유럽인권법원(EGMR)의 판례들은 이러한 규범들로부터 유럽인권협약법적인 인간의 존엄원칙을 도출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유럽인권협약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의 보장의 역할은 미연방대법원(U.S. Supreme Court)의 판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기본적 개념(basic concept)으로서 인간의 존엄보장의 구성을 상기시키게 된다. 유럽인권법원은 비교적 최근에 논쟁의 대상이 된 영국여성인 Diane Pretty에 대한 그녀의 남편의 안락사 요청에 대한 결정에서 다시 한번 인간의 존엄 원칙을 구체화하였다. 이 결정에서 유럽인권법원은 유럽인권협약 제3조는 인간의 존엄의 존중이 결여된 행위를 금지한다고 보았다. 유럽공동체법원은 인간의 존엄을 유럽공동체법원의 구체적 사례에서의 법관의 법형성을 통하여 발전된 불문적인 기본권 목록으로 인정되었다. 유럽공동체법원이 자신의 판례와 관련된 법실무적 현실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한 견해들에 대하여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다면, 유럽연합의 영역에서의 인간의 존엄의 보장의 의미를 확정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실무적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개념의 구체적 의미를 확정하기는 매우 쉽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럽공동체법원은 지금까지 매우 드물게 그리고 단지 부수적으로만 인간의 존엄을 언급하였을 따름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격이 할인된 버터를 제공하는 경우에 있어서, 단지 이름이 기재된 교환권을 제시하는 것이 법위반적인 차별이 되는지 여부가 문제가 된 Stauder 결정(Stauder Urteil) 속에서 유럽공동체법원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존엄 개념을 유럽연합-법질서의의 부분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일의) 절차에서는 (청구인에 의해서 주장된) 인간의 존엄의 침해가 문제되었다. 결국 유럽공동체법원은 이 결정에서 공동체법의 일반적 법원칙들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보장될 수 없는) 개인의 기본권도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확인하였다.(박진완, 85-86쪽)

 


 

헌법 제10조는 존엄과 가치가 보장되는 주체로서 ‘인간’를 예정하고 있다. 이때의 인간은 육체, 정신 및 심령의 총체로서의 자연인을 말한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종에 속하면, 어떠한 자격여하를 불문하고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는 주체가 된다. 이처럼 헌법은 헌법을 지배하는 최고의 가치질서로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하여, ‘인간’을 헌법의 최고지배자로 예정하고 있다.

 

헌법의 최고가치로서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인간’은 여러 측면의 헌법질서에 작용하는 주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즉 헌법은 헌법의 최고가치로서의 인간을 단편적인 존재로서 예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는 행위형식의 다양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헌법속의 인간, 즉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서 인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다른 한편, 인간의 고립된 존재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신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행위를 하고자 하는 욕망을 기초로 한다. 그러한 욕망의 결과를 자신의 결단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통하여 전달하거나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 헌법은 결코 인간 그 자신의 정신세계를 도외시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나 행위형식 등에 속하는 한 보장한다. 이에 따라서 보면, 헌법은 인간의 고립된 모습 그 자체도 예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헌법은 인간 내면의 작용의 결과를 인간의 영역으로서 또한 보장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고립된 모습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인간과의 작용을 전제하는 것으로 사회에 대한 인간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서 보면,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정신세계에서 스스로 결단하는 자주적인 모습의 인간이며, 이에 더하여 자신의 정신세계에서의 작용의 결과를 사회에 대하여 영향을 주는, 즉 사회와 관련된 모습의 인간 또한 예정하고 있다. 나아가 헌법은 국가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인간의 능동적인 모습도 예정하고 있다. 즉 헌법은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및 국가 질서의 형성에 참여하는 능동적인 행위형식을 보장하고 있다.

 

이처럼 헌법은 자주적인 모습의 인간, 사회와 관련된 인간의 모습 나아가 사회 및 국가질서형성에 참여하는 모습의 인간을 예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헌법은 이러한 인간을 예정하면서 다른 한편, 이에 대하여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체를 통하여 그 행위형식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헌법은 다양한 형의 인간의 모습을 예정하면서 인간의 행위형식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를 창설하고 그로부터 인간의 행위형식을 보장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형식에 대한 국가의 침해금지 및 그 행위형식이 효과적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실현할 의무 그리고 또 다른 인간에 의하여 그 행위형식이 침해될 경우에 이를 보호하는 의무를 내용으로 한다.(표명환, 482-483쪽)

 


 

인간의 존엄이 침해되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인간존엄의 보호영역이 무엇인가가 확정되어야 하는데 인간존엄의 보호영역과 관련하여 무엇이 인간존엄인가를 적극적으로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대로 어떠한 경우에 인간의 존엄이 침해되는가를 소극적으로 인식하여 그 보장영역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즉, 기본권의 보호영역과 기본권의 제한이라는 심사구조를 지니지 않고, 어떠한 경우에 인간의 존엄이 침해될 수 있는가를 확인함에 의해 인간 존엄의 보호영역이 확정된다,

 

인간의 존엄성 조항은 객관적인 헌법원칙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거나 보호받지 못할 경우, 개인이 침해의 배제나 적극적인 보호를 요구할 구체적 기본권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조항을 단지 객관적인 헌법원칙으로만 이해한다면, 인간의 존엄권이라는 기본권을 주장하여 국가의 침해로부터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의 기본권성을 인정할 경우, 개인이 국가의 침해로부터 보호를 요청할 방어권의 성격을 지니며,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인간 존엄권에 대해 다른 사인의 가해가 있을 경우 국가의 기본권보호의무가 발생하게 된다.

 

인간의 존엄권을 보장하는 것이 헌법상 최고의 가치이자 기본권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의 존재이유이므로 인간의 존엄권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 국가권력에 의해 침해되어서는 안되는 ‘절대적 기본권’ 으로서 다른 법익과 비교형량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즉, 인간의 존엄권은 다른 헌법적 가치나 기본권과 형량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은 다른 기본권적 가치와 형량할 대상이 아니라, 외부의 절대적 한계로서 형량과정을 지도하고 교정하여야 한다)(이부하, 19-20쪽)

 


 

인간존엄의 근거에 관하여 ‘기독교적 관점’과 ‘철학적 관점’으로 나뉘어 설명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은 신(神)의 모상(imago Dei)을 닮은 형태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존엄성을 지닌다고 한다. 그 반면 ‘철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의 자율성’에서 찾는다. 이에는 관계이론(의사소통이론; Kommunikations theorie), 은사이론(지참금이론; Mitgift theorie), 성과이론(Leistungs theorie)으로 나뉜다.

 

“관계이론(의사소통이론)”에 의하면, 인간존엄은 인간 상호간의 사회적 평가와 존중에 의해 인정된다고 한다. 인간의 존엄을 ‘존재로서가 아니라, ‘관계’ 또는 ‘의사소통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존엄은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의 전제조건이자 결과물이다. 즉, 인간의 존엄은 사회적 존중의 긍정적 평가를 통한 사회적 인정에 의해 형성된다. 결국 인간의 존엄은 개인에 대한 인간성의 범주로서 정의된다.

 

“은사이론”은 기독교적 자연법사상 또는 칸트(I. Kant)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인간의 존엄은 창조자인 신에 의해 또는 자연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독일 기본법 제1조 제1항 제정시 인간의 존엄에 관한 기본입장이 되었다. 은사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은 인간의 창조자인 신 또는 자연이 인간을 세상에 보낼 때, 인간에게 지참금으로 소지하여 보낸 개인주의적 특성 또는 고유성으로 이해한다. 칸트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윤리적 자유의지에 기초한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인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성과이론”은 대표적으로 루만(N. Luhmann)이 주장하는 견해로, 개개인이 자신의 정체성 형성(Identitätsbildung)을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 낸 성과(Leistung)를 인간의 존엄의 근거로 본다. 성과이론은 독자적인 창조작으로서 인간의 주관성이라는 특수성을 강조한다. 즉, 개인은 자신의 독자적인 자기확정적인 행위에 의거하여 자신의 존엄을 가진다. 성과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존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또는 사회적 생존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이해하는 것이다. 루만(N. Luhmann)에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보장은 개별적인 인간에 의해 자신의 사회적 행위들을 인격적인 행위들의 총합(synthese)에 일치시키기 위해 필요한 형성여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이부하, 375-376쪽)

 


 

이러한 맥락에서 먼저 헌법 제10조에 등장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 사용된 “인간” 개념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장영수 교수가 유효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일반적으로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와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적인 문제에서 이에 대한 답이 간단하지는 않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는 종(種)에 속하는 모든 생명체를 인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들 가운데서도 - 적극적 또는 소극적 기준에 따라 - 일정한 인격을 갖춘 생명체만을 존엄의 주체인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생각건대 이 때의 인간 개념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귀속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적용범위상의 한정가능성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다시 말해서 무슨 사유가 존재하건 간에 특정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귀속주체임이 부정되어서는 안된다는 (헌법이념적) 요청과 함께, 규범적인 판단이 가능한 –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 용어들인 “존엄”과 “가치”가 그 개념에 귀속된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이때의 “인간” 그 자체는 사실적인 개념으로 즉,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속(屬)전체”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헌법 제34조 제1항에 등장하는 “인간다운 생활”에 사용된 “인간” 개념은 제10조의 그것과는 달리 명백히 규범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답다”라는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접미사’가 추가됨으로 인해 인간이라는 사실적 대상 그 자체보다는 “인간성”을 비롯한 인간에 관련한 규범적 판단의 대상으로서의 속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규범적인 개념을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는 보다 많은 논의를 요하는 것으로 기존의 논의들을 기반으로 할 때, 현재로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정도의 개념을 구체적인 것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으로 새로운 다방면의 연구성과들을 종합하여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김주영, 50-51쪽)

 


 

헌법은 제10조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천부인권으로서 전국가적인 자연권으로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 및 법질서의 성립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법질서에 의한 별도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규범화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국가권력에 의하여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규범력을 가지고 국가권력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헌법적으로 확인하고 규범화하여야 한다.

 

인간존엄성이 헌법에 실정법적으로 규정됨으로써 헌법의 구성부분이 되었고, 이로써 ‘인간존엄성을 모든 국가행위의 최고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요청이 헌법적 가치로서 보장되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 전문 전단은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단순히 선언한 조항이 아니라, 최고의 헌법적 가치이자 모든 국가기관을 구속하는 최고의 객관적 헌법규범으로서 국가행위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침이다.) 인간존엄성 조항은 모든 국가기관을 구속하는 행위지침으로서 인간존엄성을 실현해야 할 국가의 의무와 과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존엄성 조항은 국가의 기본원리나 다른 목표규범과 그 성격을 같이 하는 국가목표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존엄성 조항은 입법자에게는 입법지침으로서 입법을 통하여 인간존엄성을 실현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며, 법적용기관에게는 해석의 지침으로서 모든 법규범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또는 재량을 행사함에 있어서 인간존엄성의 정신을 고려하고 실현해야 할 의무를 의미한다.

 

이로써 헌법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는 가치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란 그 자체로서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로서, 인간에 대하여 우위를 주장하는 어떠한 가치나 목적도 인정할 수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이 다른 가치나 목적, 법익을 위하여 수단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수웅, 241-242쪽)

 


 

인간은 ‘법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할 뿐만 아니라, 자유행사의 ‘실질적’ 조건을 갖춘 경우에만 사실상 자유롭다. 헌법은 자유권의 보장을 통하여 개인이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내에서의 불평등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국가원리와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을 통하여 국민 누구나가 자력으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조건을 형성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사회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자유행사 및 인격발현의 ‘실질적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을 국가의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사회국가란 정의로운 사회질서의 형성을 위하여 사회현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간섭하고 분배하고 조정하는 국가이며, 단지 형식적인 법적자유와 평등의 보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국가이다. 이로써 사회국가원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적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국가원리이다. 사회국가원리와 이의 구체화된 헌법적 표현인 사회적 기본권은 인간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평등에 대한 예외인 차별대우’를 정당화하는 헌법규범이다.

 

오늘날 인간존엄성과 자유의 보장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영역을 보호하는 ‘국가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자유행사의 실질적인 조건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국가의 적극적인 활동, 즉 ‘국가에 의한 자유’도 또한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의 생존과 복지를 배려하는 적극적인 국가활동을 요청하는 사회국가원리 또는 사회적 기본권은 인간존엄성 실현을 위한 불가결한 요소이다.(한수웅, 251-252쪽)

 


 

다만 법에 있어서의 인간이 법규범이 상정하고 있는 인간상(법의 전제로서의 인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법의 주체로서의 인간)및 법의 객체로서의 인간의 측면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기존의 논의가 좀 더 엄밀하게, 보다 명확하게는 논의의 맥락(context)에 맞게 진행될 필요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있어서의 ‘인간상’에 관한 언급은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의 – 예들 들자면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개입의 한계설정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혹은 자기책임원리의 근거지움을 위한 논거로서의 – 비교적 한정적인 의미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으므로, 헌법재판소의 인간상에 대한 언급을 헌법이론적인 차원에서 무제한적으로 원용하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고립된 주관적인 개인이 아니고, 공동체구속성과 공동체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인격” 등으로 대표되는 헌법학계의 인간상에 대한 견해와 “자기결정권을 지닌 창의적이고 성숙한 개체” 등으로 대표되는 헌법재판소 판례의 입장은 현행의 실정 헌법상의 ‘인간’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확정하는 데에는 별 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헌법 제10조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귀속)주체로서의 인간의 범위를 확정함에 있어서 특정한 인간상을 전제한다는 것은, 그러한 인간상에 못 미치는 부류의 인간을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헌법 제34조 제1항과 관련한 논의에 있어서 헌법 제34조 제1항과 헌법 제10조와의 조문상의 차이점을 인식․강조하는 입장에서의 논의들이 적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헌법 제 34조 제1항에 있어서의 ‘인간’의 의미와 헌법 제 10조에서의 ‘인간’의 의미상의 차이점에 대한 논의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이하의 논의의 기본적인 출발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김주영, 37쪽)

 


 

⑵ 기독교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실천은 몸(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실제적인 해방과 구원을 추구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욕망에서 벗어난 자로 존재론적으로 이미 정의되고 선언된다. 그러나 실존적 차원에서는 아직도 욕망의 사슬에서 신음하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우리는 솔직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로써 본 연구의 목적은 욕망의 세력과 구조에서 탈피를 위한 신앙영성 훈련의 단서와 방법의 논리적 체계를, 신학과 신앙의 근간이 되는 성서로부터 밝혀내어 제공하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본 연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통용되는 구원의 약속과 성취의 구원론의 도식에 따라서(1코린 15,4) 구약성서로부터 욕망의 메커니즘을 신약성서로부터 구원의 신앙영성 훈련을 위한 원리를 규명하게 될 것이다. 즉 연구 방법론에 있어서 인간의 인격적 주체는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득적으로 부여된 절대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신구약성서를 토대로 최근 인문학이나 혹은 정신활동을 단지 물질의 작용으로 이해하는 유물론적 사고의 뇌(신경) 과학의 욕망이론에서 대두된 주체 형성론에 반대하여 신학적 논리만을 차용하여 본 연구는 진행될 것이다. 이 방법론에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의 주체의 인식론적 변화와 발전은 존재론적으로 소유하지 않았던 새롭고 낯선 형질을 습득하거나 형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었지만 망각하였고 상실했던 절대적인 “나” 자신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재발견과 회복이라는 성서적 전제가 깔려있다(창세 1,26ff).(서동수, 227-228쪽)

 


 

이와 같이 인간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궁극적으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 사실 삼위(三位)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한분이신 하느님은, 삼위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로써 실현되는 공동체이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에 바탕을 둔 친교적인 단일성 또는 관계의 단일성의 성격을 가진 공동체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의 성격은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한 인간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로서 작용하게 된다. 삼위이신 하느님의 공동체적인 성격과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가정 교서」를 통해 잘 언급하고 있다. 교황은 여기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가정 안에서 남녀의 관계를 기본으로 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 인류를 향한 계획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전 인류의 생활이 남녀의 창조와 같이 실제로 원초적인 이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이원성은 서로간의 분리가 아니라, 상호관계의 공동체를 이룸으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견해 안에서도 전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인류의 참다운 발전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참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교황은 인류의 진정한 발전이란 “모든 개인과 민족들이 정의와 평화라는 근본 가치를 바탕으로 연대하며 이루어진 인류 가족이라는 한 공동체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일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느님의 한 본체 안에 계신 삼위의 관계로 뚜렷하게 설명됩니다.” 라는 언급을 통하여 하느님의 공동체적인 계획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에서는 구원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신자들의 세계공동체 안에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일치 안에 우리가 다시 모이는 일치의 재건” 이라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조정환, 70-71쪽)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사회성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Trinitatis)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일치를 이루며, 영원히 자신을 내어주는 상태로 존재하는 완전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느님 공동체와 인간들의 공동체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하며, 인간의 존재론적인 본성은 공동체를 통하여 사회적인 관계를 지향하게 되어있다. 이제 현실 안에서 인간들의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욕구, 본질적으로 사랑을 주고받으려는 욕구에 부응하는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공동체적인 관계성은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공동체적인 구원 계획의 성취자일 뿐 아니라, 인간의 측면에서는 공동체적인 관계의 모범이시기도 하다.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의 결합이 지닌 유사성을 밝혀 주셨으며, 공생활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공동체적인 구원의지는 삼위일체의 사랑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구체적으로 요약되어지고 있다. 이제 인간은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 때에야 자기완성에 이를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그의 전체 모습을 통하여 인간에게 완전한 모범을 보여 주셨고,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더 인간답게 된다”는 언급처럼 인간이 그 자신을 충만하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고 「사목 헌장」은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당신을 닮을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주셨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간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성령이 증여 될 수 있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모범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는 이미 존재론적으로도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모상(Imago Christi)이기 때문이다. 신약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유보되어 있는 개념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일 수 있는 이유는 진정한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된 존재(ad imaginem Dei)이기 때문이다.(조정환, 82-83쪽)

 


 

풍요사회에서도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소유에 대한 불만족과 불안 속에서 산다. 그리고 자신의 소외된 관계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욕구와 어긋난 타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살아간다. 몰트만은 인간이 서로를 점점 소외 시킨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공동체 안에서 결합되어 있으나 현대가 이익 사회이기 때문에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와 소유를 위한 측면에서 인지하기 때문에 타자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무관심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무감정은 우리 시대의 병이요, 개인들과 조직체들의 병이며 죽음에 이르는, 개인적이며 우주적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몰트만은 현대 인간이 현실에 있어서는 같은 곳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을 제외한 타자들의 고통과 현실에 대하여는 무정하다고 비판한다.

 

몰트만은 현실에 대하여 모든 고통을 초래하는 인간의 죄 자체는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타자인 인간들이 경험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만 초래된 것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그는 기독교 신학이 그동안에 죄를 일방적으로 행위자들에게 제한시키고, 죄의 영향에 대해서도 주로 개인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구조적인 죄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 현실의 모습과 희생자들이 받는 현실적인 고난은 소홀히 해왔다고 비판한다.

 

부정적인 인간의 현실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죄에 대한 논의는 몰트만에게 불가피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들과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죄”는 언제나 사회적인 삶의 파괴로 나타난다. 죄로 인한 고통에는 피할 수 없는 구조적인 파괴의 과정들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김봉한, 26쪽)

 


 

몰트만은 성령의 근원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귐으로 이해한다. 성령의 본질은 ‘사귐’이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사귐으로부터 스스로 나오는 성령이 스스로 인간과 자신과의 사귐의 관계를 회복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성령과의 사귐의 관계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의 관계에 상응하게 된다고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의 구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의 관계에 상응하는 인간의 사귐의 관계의 근거가 발견된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내적으로 일치된 삼위의 개방된 관계 안에서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포괄하는 관계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됨(Einigkeit) 속에서 열려 있고 초대하는, 모든 창조가 그 속에서 자기의 공간을 발견하는 사귐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관계로 풍부한 사귐의 관계 안에 현존한다고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령에 의해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의 관계 속으로 받아 들여진다. 그러므로 어긋난 현실의 관계 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인간은 성령에 의해 성자와 성부의 친교로 해방된다. 인간은 성령을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기쁨과 감사로 성자와 성부를 영화롭게 한다.

 

성령의 자기 비움의 초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의 관계 안으로 받아 들여지는 인간은 더 나아가, 성령과의 사귐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성령의 경험을 함께 하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자신과의 사귐 속에서 그의 창조적 에너지를 통하여 사귐의 관계들의 그물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인간이 성령과의 이 사귐의 관계에 있어서 성령에 의한 일방적인 관계 안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성령의 사귐 속에서 성령 하나님은 해당하는 사람들과 상관성(Wechselseitkeit)과 상호성(Gegenseitigkeit)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며, 그가 이 관계들에 대하여 작용하는 동시에 이에 상응하여 이 관계들이 자기에 작용하도록 한다.” 인간과 성령의 관계는 상호적인 상응관계에 있다. 성령의 관계 행동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관계와 행동도 성령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며 모든 피조물과 사귐의 관계 안에 있는 성령에 의하여 성령과의 사귐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도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삶에 참여하게 되고 서로의 삶을 교환하게 된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으로 결합시키는 성령의 연대성에 의해 다른 피조물과 결합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유 또한 경험하게 된다.

 

몰트만은 성령과의 사귐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들의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이해한다. 그는 “성령의 사귐은 자기 자신도 파괴하는 인간의 공동체들을 고치기 위하여 그들을 유지하는 ‘신적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성령과의 사귐 속에서 인간들은 서로의 고유한 가치와 권리를 인정하며 서로를 용납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과의 사귐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 공동체야 말로 공동체 안의 약자들도 행복 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그는 더 나아가 성령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과 자연의 공동체를 논의한다. 인간과 창조세계가 성령과의 사귐의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사귐의 관계와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 사귐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 고유의 방법으로 서로, 그리고 하느님과 교통하는 ‘창조의 사귐’을 향하여 모든 피조물들과 하느님의 사귐, 그리고 그들 상호간의 사귐을 창조한다.”(김봉한, 37-38쪽)

 


 

이 세 명의 신학자들의 영성은 공통적인 해방신학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사회적․역사적 차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의 초기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천이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드러남을 증거 한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 즉 가난한 이들이 억압받고 소외 받는 상황을 직관함으로써 해방으로 향하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잘 설명하였다. 그는 인간들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착취 받는 불의한 상황에서 해방으로 향하게 하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지평을 펼쳐 놓았다. 구티에레즈의 관점은 해방신학의 영성에서 기본이 된다. 이후 해방신학자들은 이를 기초로 하여 영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소브리노 역시 그렇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역사에 부응하는 영성을 제기하였고 역사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 실천은 역사의 변혁으로 이어진다. 현실에 관계하는 영을 파악하고 현실에서 영에 충실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역사 변혁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성은 필히 역사 변혁을 이루면서 해방을 향해간다. 이렇게 해방신학자들은 그 논의를 점차로 발전시켜 나갔다.

 

보프 역시 그의 영성에서 이러한 해방신학적 관점을 유지한다. 그에게 있어서도 인간들의 삶의 체험과 해방의 논리는 충분히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들이 처한 상황에 더하여 인간 실존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근원적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이 해방으로 나아감을 보인다. 그리고 이 해방은 사회적 ․역사적 차원을 획득하여 인간을 역사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도록 투신하게 한다. 현실을 변혁하고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되는 삶을 걷도록 그 자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인간 전존재의 해방, 총체적 해방을 위해 생태적 차원으로까지 영성을 확장시킨다. 그의 해방하는 영성은 인간 개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해방, 생태계의 해방으로 생명을 새롭게 창조하는 총체적인 해방인 것이다.(신강헙, 9-10쪽)

 


 

보프는 인간을 관계 속의 존재 (being-in-relationship)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홀로 이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현실 속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실존의 상실이다. 인간은 나와 너 라는 상호관계성을 통해서 인격체가 된다. 즉 인간은 타자의 계시 안에서 인격체로서 자신이 실제로 발견되는 것이다. 자기를 개방하고 타자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관계 속의 존재가 인간 실존이라고 보프는 주장하는 것이다. 자기의 개방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인식하게 되고 상호관계를 통해서 인간다운 인격체로서 행위를 하게 된다. 상호관계가 없다면 인격적인 관계는 형성되지 않고 그 자신도 결코 인격적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 안에서만 인간다운 인격체로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이렇게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개방성과 범관계성(panrelationality) 의 맥락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관계의 망에서 더불어 삶 (live- together-with)이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적 인간으로서 상호 친교를 이루게 되고 이것은 상호간에 서로 인간화하는 행위가 된다고 본다.

 

또한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실존을 긍정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보프는 하느님은 타인들 속에서 섬김을 받고자 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이웃 사랑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 하며 이웃 사랑이이말로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일치하는 삶이 하느님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드러나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신강헙, 18-19쪽)

 


 

인간들은 공동체의 문화․사회․전통을 통해서 상호간에 깊은 친교를 나눈다. 이 상호친교는 공동체에서 우리들 이라는 고유한 공통의 집단의식을 발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함께 해왔고 현재 함께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할 운명적인 공동체로서 연대성을 갖게 된다. 공동체의 각 구성원은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사회적 역할을 받아들이고 나누며 공동책임을 지게 된다. 이로부터 인간의 내면적 측면이 거부되는 인간의 파편화와 타인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극복하는 공동체로서의 삶이 형성된다. 공동체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상호친교와 연대의식은 구체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따라서 공동체적 삶은 영성의 외면적 측면이 된다. 공동체는 상호 친교로 서로 인간화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이웃 사랑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보프는 공동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단지 인간들 간의 상호친교와 연대의식으로 구성되는 인간공동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공동체 안에서 각 구성원들이 상호 친교와 연대의식을 갖듯이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인간과 자연은 상호친교와 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은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상호 개방되어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존재에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공동체에서의 상호 친교와 연대의식이 사회정의를 향해 나아가듯이 인간과 자연의 상호친교와 연대의식은 전지구적․우주적 공동체로서 생태정의로 나아가게 한다. 정의는 억압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랑의 관계로서 하느님의 질서이다.

 

한편 보프는 공동체가 해방하는 영성의 외면적 측면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면적 측면으로서의 인간 실존이라고 파악한다. 공동체는 인간 각자의 실존이 실현되는, 그리스도교 영성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현실이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하나의 인간 개체로서 그 정체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동체 안의 각 개인들이 상호 친교로써 하나의 집단의식을 공유하게 되고 연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공동체를 자기 정체와 무차별(identity-indistinction) 이 동시에 발생하는 실존이라고 표현한다. 그에게 있어 공동체는 하나의 집단, 하나의 몸, 하나의 연대의식으로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거룩한 실존이다. 이것은 영성의 내면적 측면으로서 공동체 자체가 그 내면의 거룩함으로 존재하게 될 때 그 자체로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신강헙, 29-30쪽)

 


 

보프의 그리스도 이해의 출발점이자 핵심인 예수의 인성은 하느님을 알게 하는 열쇠 역할을 수행하며 형제 자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관한 메시지가 되기도 하다.

 

이러한 예수 추종은 우리를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로 이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꿈꾸던 유토피아의 실현이며 세계의 총체적 변모이고 인간 존재들을 소외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으며, 그는 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이미 실현시켰다. 이것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과정에 있으며 이러한 선포는 예수를 따름, 즉 예수 추종의 실천(프락시스)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예수가 자신을 하느님께 철저히 내어줌으로써 하느님 안에 존재하였고 타인들을 섬기는 삶의 방식으로써 타인들 안에 존재하였듯이 우리도 예수의 존재 방식인 ‘타자를 위한 존재, 즉 섬기는 사람’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보프는 그리스도 이해를 통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삶과 인간 존재들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허락하는 한, 그분이 의미하는 그것에로 계속해서 이끌려 들어가는 일련의 지속적인 과정이다.”

 

보프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답하기 위해 진력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그리스도와 대면시키는 것을 뜻하고 예수의 인격, 메시지, 예수의 처신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 의미로부터 도전받게 하는 것을 뜻한다.

 

보프의 그리스도 이해의 최종점은 바로 Ecce homo이다. 즉 너무나 탁월한 인간이기에 하느님일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이다. 그분은 그분과 대면한 모든 인간에게서 지속되는 결정적 기억이다. 그분을 정의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그를 정의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정의하게 한다. 참으로 그분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보프에 따르면 인간이 오늘 그리스도와 접촉하고 그를 대했다고 느끼는 것은 곧 자신이 신앙의 길에서 걷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새로운 칭호들이나 다른 이름들을 붙여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분이 살았던 삶을 살고자 진력함으로써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보프는 “이것은 언제나 자아 안에서가 아니라 타자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 존재의 중심을 찾고, 다른 사람 대신 불법이 자행되는 현장으로 뛰어들 용기를 가지는 가운데 실현된다.”고 주장한다.(김학선, 80-81쪽)

 


 

⑶ 한국 新종교(천도교 外)

 


 

해월에게 있어 인간의 노동은 육체와 이성과 관련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종교적 자기초월, 즉 인간의 자기실현과도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노동 안에서 노동을 통해 신성을 증가시키고, 그것을 모든 만물과 나누면서 스스로 신성과 합일된다.

 

해월이 당시에 말한 노동은 고도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소외 현상을 심각하게 경험하지 못한 19세기 말 한국의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나타난 인간활동에 대한 우주론적인 성찰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해월과 같이 영성적 의미의 차원에서도 노동을 살피는 것이 노동의 본질적 의미를 규명하고, 노동의 존엄성을 근거 짓는 데 중요하다. 해월이 지적한 관계적 사실들은 인간에게 있어 노동의 소외 현상보다 더 본질적이고 본래적이다. 해월은 모든 만물과 생명의 변화와 운동이 모두 신의 활동, 기화로 보기 때문에 그것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비이성적 동물의 활동이든 이성적 인간의 활동이든 천지조화의 연속이요, 창조의 과정으로 본다. 여기서는 정신과 육체의 우열, 이성과 비이성의 구별, 나와 너의 차별성, 그리고 개체적 본질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전체적 조화와 통일성이 중요하다. 인간이 존엄한 까닭은 자신 안에 신을 모실 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 동물, 그리고 전 우주와 하나가 되고 더 존귀하게 자신을 계발하는 기화를 통해서 우주 안에 신을 증가시키며, 더군다나 다른 생물과 달리 이 모든 조화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중심적인 동양의 직관인식과는 달리, 사물을 대상화하여 본질을 파악하는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는 노동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로 인간의 노동은 자연에 작용을 미쳐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동물의 활동과 구별된다. 물론 이 목적이 자연자체의 성질을 넘어설 수는 없다. 둘째로 인간만이 생산수단(도구)을 이용할 뿐 아니라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노동을 영위한다. 남태평양의 섬주민이 생활습관으로 생존을 위해 활동하는 것보다는 더 차원이 높은, 사고와 언어를 이용하여 생산수단을 사용하거나 생산하는 활동을 우리는 엄밀한 의미의 인간의 노동이라 부른다. 셋째로 인간의 노동은 가치를 지향하는 능동적 행위이다. 가치에는 사회경제적 가치, 예술적 가치, 진리적 가치, 윤리적 가치를 포함한다. 여기서 특별히 사회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 즉 상품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활동만을 좁은 의미로서 노동이라 부르기도 한다.(김용해, 52-53쪽)

 


 

인간의 노동은 인간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신성을 증대시키는 행위요, 동시에 신 자신의 창조행위로 보았던 최시형의 스승인 최제우는 19세기 말 당시의 사람들이 “각자위심各自爲心”하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동학을 창시하여 “동귀일체同歸一體”를 부르짖었다. 즉 인간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근원에서 왔으니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보았다. 앞에서 인간의 노동이 어떤 측면에서 신의 지속적인 창조행위와 창조의 목적에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노동의 결과가 개별적 인간 스스로 애써 활동하여 얻어낸 직접적인 결과로만 체험되지 않고, 자연과 세계, 동료 인간들과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체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위를 넘어서서 어떤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과 같은 계기가 함께 작용하는 창조적 노동은 한편으로 자신을 생존시키고 자신을 실현시켜가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자연과 세계의 신비를 파악하면서 완성시켜가는, 창조신과의 소통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노동의 인격성과 존엄성은 바로 여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김용해, 67쪽)

 


 

우선적으로 언급할 사항은 매우 실제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유형의 인간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 이러한 점은 전래의 인간상으로서 진여불교로의 전환을 통해 드러난 ‘보살’이라거나, 군자(君子)인 ‘선비’ 등이 추구한 이상과 매우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원효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은 일심(一心)을 통한 이문(二門)의 상통구조를 주된 논의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는 중관(中觀)의 진속이제(眞俗二諦)에서 부정되었던 속(俗)의 재긍정을 위한 것으로, 체성(體性)을 드러냄으로써 그간 부정되었던 현실성을 실제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이는 이후 불교적 인간관으로서의 ‘상구보리’와 ‘하화중행’의 상즉(相卽)의 논리로 묶는 보살행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적 토대가 된다. 선비의 경우 또한 학자 관료조직이라는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계층으로, 지와 행의 영역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지행관(知行觀)을 드러내고 있다. 유학(儒學)의 지행합일은 언행일치와 상통한다. 군자가 덕성을 갖추었다고 해서 침묵을 지키고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지성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것이다. 현대의 인간상은 이러한 전통적 인간상의 연장선에서 관조적 영역에서의 지식에 대한 고민은 다분히 배제하되, 현재적 가치를 고려할 수 있는 실제적․실천적 유형의 인간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특성은 공동체적 덕성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공동체적 덕성에 대한 부분은 어느 사회에서나 드러나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환웅, 단군, 박혁거세 등의 건국시조에게서 전쟁영웅의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전통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폭력은 되도록 피해야 하며 폭력에 의존하는 지도자는 마땅치 않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유추할 만하다. 즉, 한국의 전통에서 드러나는 차별적인 공동체적 덕성이란 타민족이나 외부에 대한 배타성을 배제한 자기 조직에 대한 헌신성이라 볼 수 있다. 한편, 군자의 공동체적 덕성은 정치의식을 통한 정치참여로 나타난다. 정치의 본질은 분화(分化)와 대립(對立)을 통합하고 일체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화와 대립을 통합하고 일체화한다는 것은 사회와 국가를 단위로 하는 것이며, 아울러 공동체적 덕성을 중시하는 공공성은 가장 뚜렷한 현상이며 기능이며 기준일 것이다. 군자의 인격은 자신의 수양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안인(安人)으로 나아가고 다시 안백성(安百姓)으로 나아가 확대되며, 서로간의 이해와 소통을 통하여 보다 넓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나 전근대사회에서나 약육강식의 방임상태에서 질서를 확립하여 약자를 돕고 사회와 국가를 안정케 한다는 정치적 이상은 거의 다르지 않다. 군자는 가장 객관적이고 정치적 권력의 실효성을 구현하는 법률제도를 존중하고 준수함으로로써 공동체적 덕성을 중시하는 인격의 공공성을 나타낸다.

 

애국심은 위와 같은 공동체적 덕성의 가치지향을 내적으로 계승했다 볼 수 있다. 물론 본 연구에서 구분한 시기에 따라 이 점은 다소 다른 경향을 보인다. 전환기의 경우, 초기에는 전통적 지배구조의 붕괴와 지도자의 부재로 인하여 국가와 민족이 대상이었다면, 지도자의 선출과 국가의 건립 이후에는 새로운 지배구조가 형성되어 국가보다는 지도자나 상급자에 대한 충성으로 변모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산업화 시기 애국심은 국가경제정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반공정신으로 무장하여 북한을 압도하는 통일의지를 가지는 것 등으로 비교적 다른 시기에 비하여 목적성이 매우 뚜렷한 경향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민주화 시기에는 기존에 강조되었던 내부기준에 의한 목표성취보다는 다른 나라와의 비교 우위를 통하여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해당 시기에 드러나는 대상과 실천방법의 차별일 뿐, 공동체적 가치 지향에 대한 공통분모는 여전하다. 우리는 전통적 가치관의 계승이라는 측면과 함께 변화된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람직한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중요한 사회적 잇슈인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가치관의 혼란에 따르는 도덕성 회복의 문제는 ‘실제적․실천적 인간상’과 ‘공동체적 덕성을 함양한 인간’을 지향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자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교육적 인간상 구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사회와 국가의 구성원은 사람이며 사람은 자기를 수련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에 참여하고 기여하고 봉사하고 공헌한다. 따라서 공동체적 덕성과 이에 따르는 인간상을 조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류형선․지준호, 197-199쪽)

 


 

이 시대 신종교 내지 민족종교로는 水雲 崔濟愚(1824-1864)이 창도한 東學을 비롯하여, 一夫 金恒(1826-1898)이 『正易』을 경전으로 일으킨 詠歌 舞蹈敎와, 甑山 姜一淳(1871-1909)이 天地公事를 내세운 甑山敎가 있으며, 少太山 朴重彬(1891-1943)이 자신의 깨달음을 불교의 진리와 부합한다 하여 圓佛敎를 개창하였던 것이 그 대표적인 유형들이다.

 

(1) 먼저 ‘東學’은 우선 그 명칭에서부터 天主敎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西學’에 대응하는 의식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敎條인 水雲 崔濟愚(1824-1864)는 東學을 天道에 근거한 것이라 하고, 당시 압박해 오는 西學(天主敎)은 東學과 “道는 같으나 理는 다르다” 라 하여 天(天主)의 道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실천원리의 理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그가 상당한 기간 공부하였던 동양의 중심사상인 유․불․도의 3교와 동학은 그 진리(道)가 같고 그 이치(理)가 같으나 先天의 낡은 시대와 後天의 새 시대 사이에 그 운수(運)가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른 동학의 세계인식은 이 세계로는 運數가 진하여 새로운 세계를 요청하게 되는 後天開闢사상을 제시하고, 그 구체적 도수로서 下元甲․上元甲의 질서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동학은 동양문화와 정신의 토대 위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서양(西學)으로 부터 자극을 받고 그 시대현실에 적용되는 개혁적인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입장임을 엿 볼 수 있다. 동학은 바로 이 개혁적 성격으로 한울님(天主)을 내세운 점에서 서학과 유사한데,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 것은 우리 민족이 믿어오던 한울님의 뜻[天命]을 따르지 않은 까닭이라 인식하고, 그 뜻을 아는 길로서 至誠으로 感天하는 방법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처럼 한울님에 대한 인식과 한울님에 대한 실천방법을 통해 한울님을 진정으로 공경하게 되는 단계에서, 水雲이 언급하였듯이 “나의 道에는 誠․敬․神의 세 가지가 있으면 그만이다” 라는 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誠․敬’의 도학적 수양론의 기본개념을 계승하면서도 ‘神’의 존재 곧 한울님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요청함으로써 사대부 문화의 학문적 태도로 부터 대중문화의 신앙적 성격을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울님을 분명히 믿는다는 것이 마음[心]으로 그친다면 불충분하다. 역시 어떤 신체적인 것을 아울러 요구하는데 이것이 기운[氣]의 문제이다. ‘氣’는 생명을 가지고 운동하는 것이요, 신령한 기운[靈氣]이며 무궁하고 자존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동학에서는 우주를 하나의 발전, 진화하는 것으로 보고 그 본체 생명을 氣로 파악하여 이 氣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어 현실세계의 모든 만물의 번성하고 쇠퇴하는 교체를 필연적인 변화로서 造化라고 해명하고 있다. 이것이 海月 崔時亨에 와서 사람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이 모두 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汎神的 세계관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나아가 “사람이 한울이요 한울이 사람이나,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다” 라 하여, 사람과 한울을 일치시켜 인간에게 한울의 존엄성을 부여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 라는 실천적 기본교리를 주창함으로써, 嫡․庶의 차별이나 班․常의 차별을 비롯하여 온갖 차별이 天意를 어기는 것이라 역설한다. 따라서 인간이면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신분적 차별로 부터 해방시키고, 더욱 나아가 하늘처럼 존중함으로써 인간존엄성을 최고의 단계로 높이고 있다. 海月에서 ‘인간이 바로 하늘이다’[人是天] 라 선언하였던 것이 義菴 孫秉熙에와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라는 선언으로 계승되면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며, 인간과 하늘을 일치시킴으로써 인간존재를 우주적 주체요 중심축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동학의 이러한 사상은 유교전통의 봉건군주 체제하에서 매몰된 개인의 인격적 가치를 해방시켜주는 근원적 통찰이며, 그 대중적 각성운동을 통해 한국적 인간존중사상의 중요한 결실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모순에 대해 적극적 해방의 논리에 입각하여 세상을 제도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도리는 면면히 東學敎徒들 사이에 흘러들어 갑오농민운동의 중심이념이 되었다. (2) 다음으로 유교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正易’ 에서 제시되는 後天開闢사상은 새로운 새계의 우주질서적 필연성을 제시한다. 正易이론을 확립한 一夫 金恒은 스승 李雲圭에게서 『주역』을 공부하고 易의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그는 易의 변천과정을 先天․後天의 변혁에 따라 伏犧易→文王易(周易)→正易의 단계로 해석한다. 그는 『주역』에서 제시된 先天․後天의 개념을 원리적 의미로부터 역사적 의미로 설정하고 중국의 원시 경전으로서 『주역』에서 사상의 실마리를 끌어오면서 우주의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규명하였다.

 

一夫에 의하면 기존의 유교전통 사회는 先天의 ‘舊’질서로서 ‘陽을 높이고 陰을 억압하는’(抑陰尊陽) 陰陽의 상하적 차별질서라 규정하고, 앞으로 닥아올 새로운 세계는 後天의 ‘新’질서로서 ‘陽과 陰의 조화를 이루는’(調陽律陰) 陰陽의 수평적 평등질서라 제시한다. 이러한 후천적 세계는 治者에 대한 人民이나 男子에 대한 女子가 모든 지배와 억압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사회적 평등과 화합을 실현한 새로운 세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후천의 세계는 인간의 본성에서 神明性을 계발하여 神과 인간이 합치할 수 있는 경지를 제시한 것이다.

 

正易에서는 선천-후천이라는 역학적 세계변혁의 대전환을 자연적 도수의 질서와 연관시켜 해석함으로써 후천을 통해 실현되는 인간사회의 평등과 화합을 자연적 질서의 조화와 균형으로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선천의 ‘365와 4분의 1’ 이라는 일년의 도수가 후천에 와서는 ‘360’의 완전한 균형의 도수로 바뀌게 되어 천문과 지리가 불균형․부조화를 균형․조화로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천의 일그러진 度數나 卦象이 후천에 와서 바르고 완전하게 된다는 인식은 새로운 세계에서 지금까지 속박과 고통을 받는 모순이 해결되고 모든 인간의 평등하고 화합하는 해방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내포하고 있다.

 

(3) 甑山敎는 甑山 姜一淳(1871-1909)이 창립한 교단으로서 ‘東學’과 ‘正易’의 後天開闢사상을 수용하여 ‘天地公事’의 교리체계를 세웠다. 즉 말세의 운수를 뜯어 고치기 위해 이념이나 규범과 질서 등을 개혁하여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地方神, 文明神, 萬古逆神 등 각 神의 부조화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통일된 신명의 세계로서 ‘造化政府’를 결성하고, 이들의 원한을 해소 곧 ‘解怨’하기 위해 모든 神明을 報恩줄로 이어주어 화목협동[相生]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先天시대의 오류를 수정하여 後天의 새로운 세계를 이룩한다는 조화의 이념을 전개시키고 있다.

 

따라서 선천-후천의 재난과 액운을 없애서 신명의 원을 푼다는 厄運公事와 세계의 분쟁과 반목을 공동체의 이념으로 교화한다는 世運公事와 유교, 불교, 기독교, 민간신앙의 정수를 통일 결집하여 종교적 합일을 도모한다는 敎運公事의 개혁이론을 내세웠다. 그만큼 先天의 갈등은 종교적 분렬․대립에 큰 원인이 있다는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甑山의 이러한 後天開闢사상은 그 동안 先天의 현실사회는 고통받는 대중의 怨恨으로 사회가 병든 ‘天下皆病’의 末世라 규정하고, 이에 따라 後天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요청이 제기된다. 따라서 甑山의 구원론은 天地公事를 통해 신분적 차별과 탐관오리의 虐政, 사회적 騷擾, 疫疾 등 온갖 고통으로 부터 대중을 해방하여 後天세계를 개벽하여 仙境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곧 그는 “兩班의 氣習을 속히 빼고 賤人에게 우대해야 속히 좋은 시대가 이르리라” 하여 신분적 해방을 역설하고, “여자의 怨을 풀어 正陰正陽으로 乾坤을 짓게 하려니와, 이 뒤로는 禮法을 다시 꾸며 여자의 말을 듣지 않고는 함부로 남자의 권리를 행하지 못하리라” 하여 여성을 남성의 억압으로 부터 해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4) 원불교

 

1916년 少太山 朴重彬이 개창한 圓佛敎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라는 開敎 標語를 내걸고 서양의 근대문물로 과학이 발달하는 물질문명의 현상을 ‘물질의 개벽’이라 파악하고, 그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는 종교신앙과 도덕훈련으로 현실의 무질서와 고통에서 벗어나 물질과 정신이 조화롭게 발전된 낙원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염원하였다. 이 개벽사상은 동학․정역․증산교의 후천개벽사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少太山은 여러 종교에서 인류구원과 평화세계를 건설하려던 성현들의 깨달음이 모두 하나의 진리로 파악하고 다양한 종교의 진리들을 통합하여, ‘法身佛一圓相’의 진리를 원불교 신앙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으며, 四恩. 四要. 三學. 八條로써 강령을 삼았다. 소태산은 당시 日帝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우리 민족에게 ‘强者와 弱者가 화합하는 進化’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弱者로 부터 해방된 强者로의 진화를 추구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그는 이 사회를 ‘병든 사회’로 규정하고, 그 병든 현상으로 부정당한 의뢰생활에 젖어 있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주로 조선사회 말기적 폐단에 따른 무기력하고 의존적이며 자립정신이 결핍된 우리의 사회적 질병으로 부터 대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소태산이 제시한 치료법은 心田개발과 自力양성의 원리 아래서 저축조합운동을 벌이거나 간척사업을 벌여는 등 물질적 생활기반의 향상과 자주적 향상의지를 배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적․정신적 계발과 진보를 위한 과정에서 이미 낡은 시대의 신분적 차별, 성적차별, 빈부의 차별로 부터 해방된 새로운 세상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금장태, 6-7쪽)

 


 

 

 

주지하듯 서구유럽철학이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부터 그리스에서 출발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서구유럽인은 없다. 단지 그들은, 데리다가 제기한 하이데거와의 논쟁에서 보듯, 그리스에서 출발한 ‘철학의 정신’이 현대 독일어에 살아 있는지 아니면 현대 프랑스어에 살아 있는지를 가지고 말질하며 그 유산의 보유권을 둘러싼 시비를 벌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한국철학과 한국철학의 정신이 중국이나 한자에 기원하고 있다고 말문을 떼지 못한다. 그 결과 한국철학은 서장(序場)이 생략된 ‘불구의 역사’를 옹호하지도 부인하지도 못한 채 그저 붙들고 있는 수준이다. 이런 비정상적 상황에 한국철학이 처해있기에, 그 ‘전개과정’이 설사 역사적으로 오랜들, 당당할 수도 없고 자부심을 외부세계에 내비칠 개재도 못된다. 특히 해방 이후부터는 서구유럽철학 일변도의 담론이 지배력을 행사한 관계로 한국철학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탐문하는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동서비교철학은 명의만 존재할 뿐이며 관련 교육과정도 관련학회도 유명무실한 형편이다. 감히, “한국에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소될 수 있다. ‘역사’를 살피고 중시하는 청안(靑眼)을 갖지 못한 탓에 한국철학의 현주소가 이러한 상황에 다다른 것 아닌가!. 철학은 기본적으로 ‘글로벌 하늘’에서 단비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로컬 토양’에서 가뭄을 견디며 고통의 결실로 탄생하며, 바로 그 로컬에서 로컬민들이 대를 이어 가꾸어가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경우라야 그것을 일러 우리는 마침내 ‘한국철학’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 탄생한 철학과의 본격적 비교도 가능할 것이고, 어떤 교류의 과정을 거쳤는지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곧 다양한 장소”라 했다. 하늘이 둘이 아닌 한 이는 지고의 진리이다. 인문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에도 소위 “땅의 정령(genius loci)”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때문에 이제는 발신지가 불투명한 글로벌 공공철학,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보편지의 망령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되기 이전에, 대서양을 태평양이나 인도양과 지리적으로 나누기 이전부터 인류는 각기 주어진 해당 장소에서 잘 살았고, 현재에도 아주 잘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라. 서구유럽인들을 비롯해 우리 모두는 이렇게 각기 땅의 정령이 꿈틀대는 장소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군상들이다. 그리고 장소는 ‘사유하는 인간(l’homme pensant)’과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철학의 고향이요, 그렇게 뿌리내린 철학이 꽃을 피우고 향을 발산하는 ‘조국’이다.

이렇게 철학의 장소성과 문화적 특수성 및 상대성을 용인하고 나면 인류가 지식이나 철학에 거는 희망 또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형제애, 인류애를 발휘해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는 것, 이러한 인도적 이념의 공유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변모할 수 있다. 솔직히 이런 범상한 요구라면 지식을 로컬과 글로벌 간에 공유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문화들 간에 갈등을 야기하는 불씨가 되거나 담론의 폭력으로 지탄받는 일도 물론 없을 것이다.(박치완, 178-179쪽)

 

 

 


 

마을에서 전승되는 공동체놀이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만큼 생산적이고 건강했으나, 오늘의 놀이는 크게 달라졌다. 산업사회의 놀이는 일과 분리된 채 사람을 정서적으로 들뜨게 만들고 소비적으로 메마르게 한다. 더 이상 일과 놀이, 생산과 소비의 변증법적 통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일을 멈추어야 놀이가 가능하다. 소비를 해야 놀이를 즐길 수 있다. 민속놀이처럼 공동체 성원들이 무상으로 공유하며 더불어 즐기는 대동놀이가 아니라, 놀이가 상품화되고 산업화되어 이윤추구의 수단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저마다 거래를 통해 즐기는 개별놀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놀이가 교류와 소통으로 더불어 공유하는 문화가 아니라, 거래와 유통으로 제각기 독점하는 상품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시장체제에 따라 놀이산업은 점점 비대해지는 동시에 오락산업이 환락산업으로 퇴폐화되거나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놀이상품이나 놀이시설을 이용하려면 상당한 경비 지출이 요구되므로, 경제력에 따라 놀이 수준이 결정되게 마련이다. 놀이가 빈부 차이 못지않게 불평등하여 오히려 일보다 차별이 더 극심하다.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사치스러운 놀이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반면에,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사람은 놀이 기회조차 확보할 수 없다. 놀이가 소비적인 유흥상품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차별없이 더불어 즐기며 인간해방을 만끽하던 공동체놀이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놀이가 일이나 굿, 잔치와 무관하게 하나의 상품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철저하게 유흥만을 별도로 즐기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상의 생활세계에서 벗어나 오직 유흥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상품화된 놀이의 전략이다. 따라서 놀이상품을 구입해서 소비하는 과정에 예술적 창조력이 발휘될 여지가 없다. 그러한 일은 상품화의 경쟁력을 갖춘 전문가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다수 국민들은 놀이상품의 소비자구실을 하는 데서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진 자들의 놀이 향유는 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반면에, 여기서 소외된 민중들은 일터보다 오히려 놀이판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더 심각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놀이의 본질인 인간해방의 기능은 상품화의 굴레에 갇혀 버린 상태이다.

 

놀이연구자들은 비일상성과 일탈성을 놀이의 본질인 것처럼 강조한다. 일과 놀이는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일이 놀이를 공유하고 놀이가 일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기 일쑤이다. 놀이와 굿, 놀이와 잔치의 상호공유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마을공동체 단위로 전승되는 민속놀이를 주목하지 않은 채 산업사회의 대중적인 놀이나 상품화된 놀이를 놀이의 본디 양식인 것처럼 주목하면, 비일상성과 일탈성을 놀이의 본질이라 할 수밖에 없다. 상품화된 놀이는 생활세계의 다른 영역과 분리되어 있으며, 일과 놀이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서 대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임재해, 253-254쪽)

 


 

민주화 이후 시대 변화의 흐름을 타고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현대적 신종교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과거와 같은 인간과 사회의 완성을 지향하는 종교가 아니다. 근대적 개념의 종교가 아닌 개인의 영성개발에 초점을 두는 영성종교들이다.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개인적인 것 그리고 자율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공동체 지향적인 전통적인 종교와는 상당히 다르다.

 

전통종교의 시각에서 보면, 종교현상이기는 하지만 조직적 실체를 가지지 않아 종교라고 말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문화와 종교가 융합된 혹은 과학과 종교가 결합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극단적으로는 문화자체가 종교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는 세속적인 시민종교나 대체종교를 말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이런 영성중심의 종교는 이성적인 산물로 나타난 기성종교의 조직이나 제도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의 초능력을 획득하려 한다는 점에서 강한 종교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종교를 넘어선 ‘종교 이후의 종교’들이 우리 사회에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대 신종교와 대비해서 이들은 살펴보면 이들의 종교적 실상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기존의 신종교는 민족운동, 계급운동, 민중운동과 같은 이념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비해 새로운 신종교는 이런 이념들과는 관계없는 개별적인 취향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둘째, 기존의 신종교는 해원, 상생, 조화, 평등 등과 같은 보편적 집단적 가치와 연결된 구원관을 제시하며, 종종 구세주신앙이나 천년왕국사상적 색채를 띠고 있는 반면, 새로운 신종교는 개인의 건강과 부 혹은 심리적 평안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구원관에 경도되고 있다.

 

셋째, 구원 수단의 변화가 확연하다. 새로운 신종교는 교리 학습이나 전통적인 의례보다는 현실에 대한 예측과 통제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 테크닉, 인간의 건강과 잠재력 개발을 위한 각종 수련방법, 주술적 수련방법등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기존의 신종교는 도덕적 사회구현이 이 땅에 가능하다는 낙관주의에 입각하여 기존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새로운 신종교는 도덕적 사회의 구현이라든가 윤리적 문제와는 무관하지만 기존 사회구조와 기성종교에 대해 저항문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윤승용, 119-120쪽)

 


 


 

⑷ 유학, 성리학, 실학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동양의 다양한 사상을 모두 하나의 철학으로 보고 서양의 담론과 대비하여 대안적 철학으로 우월 시 한다면 이 또한 동양과 서양철학을 양자 분리해버리는 이분법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우려를 자아낼 수 있기에 매우 조심스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이소영, 2012: 304). 그러나 이소영의 “동양사상의 일부만을 인용하여 자연을 신비화하고 인간의 존재가치를 폄훼하는 식의 생태담론은 극복하고 동양 혹은 한국 내에서 우리 안에서 스스로 생태문제에 대한 반성과 토론을 종합하여 서구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극복해 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사고체계를 주창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처럼, 본 연구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인식론적 기초로서 탈근대적 세계관을 정립하고자 특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본의 식민주의에 의해 사라진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인 ‘천지인 사상’에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노동의 개념을 근대의 탈주술화에 의해 잠재화된 인간의 영성을 다시 부활하는데 기여하고,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자립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 되며, 인간소외가 아닌 인간의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생태적 활동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독일의 사회학자 루만에 따르면 사회는 ‘자기준거적인 갇힌 체계안에서 자기생산적 부분체계’로 구성된다(Luhmann, 1987). 그런 의미에서 노동 역시 경제체계의 부분체계로서 ‘자기준거적’(selbstreferentiell)인 갖힌 체계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행위하는 주체로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체계 내 관찰자로서 존재할 뿐이기에 사회변화는 행위주체로서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생산적’(autopoietisch) 의사소통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에 개별노동자의 심리체계, 즉 개인의 생각이나 의지는 체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회학자 루만의 통찰은 그동안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적 지식인’의 비판이 근대적 자본주의의 체제의 ‘철통’같은 벽을 허물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본 논의 역시 루만이 우려했듯, 그동안의 윤리적 잣대에 근거한 도덕적 지침과 같은 탁상공론이 되지 않기 위해서 생태복지를 위한 체계구성에 필요한 의사소통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하겠다.(김미경, 180-181쪽)

 

 

 

주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 삶의 원리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원천, 즉 생명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간의 참찬화육이란 모든 존재들이 각자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각자의 생명 의지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저마다 최적의 상태를 획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자는 모든 존재들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고(窮極其理) 그 리를 완전히 실현시켜주어야 한다(盡其理)고 말한다. 『중용』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盡性(盡人之性과 盡物之性)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誠의 의미이며 참찬화육을 위해 인간에게 요구되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실현시킨다’(盡)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존재자에 내재하는 속성을 모두 드러냄으로써 그 존재를 온전하고 순일하게 완성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盡己는 주체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경주하여 자기중심성(私)을 모두 탈각하고 온전하고 순정한 주체의 본래 상태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홍성민, 33-34쪽)

 


 

참찬화육은 만물 하나하나가 살아가는 이치를 철저히 탐구하고 그 이치에 맞게 만물을 저마다의 삶을 최적 상태로 이끌어주는 것(各得其所)이다. 자연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상상하거나 초월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는 참찬화육을 실천할 수 없다. 우리가 자연 사물의 생존 방식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그 삶의 방식에 따라 친절히 보살펴줄 때라야 참찬화육은 가능하다고 주자는 주장하고 있다.

 

주자의 격물설은 생태계 존재들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깔려 있다.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상대에 대해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 해도 상대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상대를 해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주자의 격물은 생태계의 존재들을 배려하기 위해 우선 그들의 생태 원리와 생존 방식을 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연민과 공감이 중요한 동력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늘 적합한 배려를 할수가 없다. 생태계 존재들의 생존 방식을 귀 기울여 듣고 그것에 맞게 적절히 대우하는 것이 그들을 제대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홍성민, 38-39쪽)

 


 

다산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① 이기(理氣), 체용(體用) 및 본성(性)의 문제를 지나치게 세분화하고 각 자의 주장을 수천수만 가지로 나누다 보니 지리멸렬해지고 있다는 점, ② 효제충신과 예악형정의 본령을 따르기보다 지엽적인 견해를 고묘(高妙)한 이치로 생각하고 있는 점, ③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반대 의견에 대한 극단적인 천시와 공격을 일삼는 편협한 학문 태도, 그리고 ④ 경세(經世)와 관련되는 현실 문제를 팽개치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는 현실 도피적 태도를 성리학의 학문적 본령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둘째, 훈고학 비판에서 다산은 경전(經典)의 글자 뜻을 밝혀 도학(道學)과 명교(名敎)의 근본정신을 규명하는 것이 훈고학인데, 조선의 훈고학풍은 학문의 참된 정신을 간과하고 오히려 한(漢)나라 학풍만 숭상함으로써 주자의 비판정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훈고학은 ① 오직 널리 듣고 많이 기억하는 것과 단편적으로 시문(詩文) 을 잘 짓고 변론을 잘하는 것만을 숭상하고 있으며, ② 글자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집착하여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고 꼬집고 있다.

 

셋째, 다산은 유학의 도를 크게 해치는 공부가 문장학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문장은 유가 경전의 가르침과 기본 정신이 사람의 내면에 응축되어 이것이 바닷물이 넘치듯, 태양이 빛을 발하는 듯이 인간 내면의 정신과 덕성이 축적되어 자연스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문장을 공부하는 자들이 사마천의 글이나 당대(唐代) 한유와 유종원의 문장, 나관중(羅貫中), 시내암(施耐庵), 김성탄(金聖嘆) 같은 소설가들의 글을 주로 떠받들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문장학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① 인륜의 수양이나 실천, 제가 치국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② 지나치게 외형에만 치중하고, 부박(浮薄)하게 됨으로써 유학의 학문정신을 좀먹는 벌레[蟊蠈]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넷째, 과거학 비판에서 다산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더 격렬하게 이 공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과거학은 본래 요순의 정치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공부의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다산은 이 공부가 단지 실용성 없는 말들을 남발하고 허황한 내용의 글을 지어 스스로 자신의 식견을 자랑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과거학을 하는 사람들이 성리학을 ‘엉터리[詭]’라고 꾸짖고, 훈고학을 ‘괴벽하다[僻]’고 질타하며, 문장학을 비루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들이 하는 모든 공부가 문장학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과거학에 대해 ① 유학의 본령을 깨닫지 못하고 문장학의 폐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② 실제 실무 능력과 무관하며, 그러다 보니 ③ 명문거족의 자제들은 이 공부를 하지 않고 지방의 헐벗고 굶주린 자들만이 이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유독 권세가의 자제들이 과거 합격을 위해 갖가지 부정 행하고 있으며, ④ 무엇보다도 과거학이 세상을 경륜할 능력과 덕성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시험 형식에 사람을 획일적으로 맞추게 하여 오히려 총명한 사람의 능력을 망치게 한다고 비판한다. 다른 글에서도 다산은 과거학을 하나의 학문적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다.(고대혁, 8-10쪽)

 


 

다산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교제하고 교류하면서 그 사람들이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는 방식에 따라 사덕이나 사단과 같은 유학의 주요 도덕 개념이 성립되며, 이 세상의 온갖 선과 악이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 그는 문산(文山, 汝弘) 이재의(李載毅; 1772〜1839)와의 서신 왕래에서 성리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사람들은 사덕을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어 성(性)이니 심(心)이니 체(體)니 용(用)이니 하고 있으며, 이른바 인의예지를 체용, 본말, 두미(頭尾)로 설명하는 방식에 익숙해있다. 그러면서도 본원을 끝까지 궁구한 것이라고 하니 그 폐단이 끝내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질까 염려된다고 하면서 지금 산림에서 덕을 기른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병통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이 하는 공부의 기상이 주공, 공자, 안연, 계로와 조금도 같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요약한다면 다산은 주자의 경학 해석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원시 유학의 실천 정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유학의 주요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그는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과 유학의 교육이념, 더 나아가 주요 도덕 개념을 해석하면서 이기론의 틀 안에 정위(定位)된 도덕의 형이상학적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다산의 논의는 인간 존재를 자신이 직접 대면하는 삶의 현장, 특히 사람과 사람이 교제하고 교류하는 일상 속에서 효․제․자의 인륜을 실천하는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인간, 책임 있는 도덕행위자로 규정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고대혁, 20쪽)

 


 

⑸ 분단체제와 민중운동

 


 

이후 다른 글에서 그는 1970년대의 민족문학론을 통해 “민족문학론과 민중문학론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는 것이 해명된 셈”(백낙청, 1985: 342)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1980년대의 활발한 민중문학 논의는 ‘1970년대 민족문학론의 심화과정’이라고 본다(같은 글: 343). 이 글에서 백낙청은 민중문학의 주체의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지식인과 민중 간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문학의 생산은 집필행위라는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협동작업”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집필자의 전문성은 한편으로는 그 집필자를 민중으로부터 유리시키는 속성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생산에 반드시 있게 마련인 민중과의 의식적/무의식적 협동을 극대화하는 집필자의 기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말할 때, 사실은 민중이 역사의 올바른 주인노릇을 못하는 시대에도 엄연히 역사의 주체로서 활약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중이 직접 쓰지 않은 글에도 민중의 주체적인 개입이 있다고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역사의 대목에서 직접 간접으로 민중의 참여를 극대화시키는 작품이, 실제로 그것이 누구의 손에서 씌어졌든 간에, 당대의 민중문학이요 가장 우수한 문학이라는 것이 좀 더 타당한 논리가 아닐까 생각”(같은 글: 347)한다는 것이다.

 

그는 몇 년 후 또 다른 글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서 민중문학과 민족문학개념의 합일을 논하게 된다. “어느 민족이든 그 대다수 성원은 민중이며, 특정시기 특정 민족의 민중에게는 민족문제가 남달리 절실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일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민중문학과 민족문학의 개념이 실질적으로 거의 합치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본의 식민통치에 이어 국토의 분단과 외세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의 민중에게는 민족자주와 통일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바로 민중 자신의 문제”(백낙청, 1990[1988]:89)가 된다. “1970년대 민족문학에 대한 비판과 자기비판을 통해 획득된 좀 더 과학적이고 민중적인 인식은 이제 분단극복의 의지와 새롭게 결합함으로써 민중적 민족문학의 질적 비약을 이룩할 때”(같은 글: 93)라는 주장에 이르면, 1980년대에 이루어진 민중의 성격에 대한 과학적 논의에 기초하여 민족문학과 민중문학은 ‘민중적 민족문학의 개념 속에서 통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중문학의 개념을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결국 문학성과 사회성의 관계, 문학이 사회적 현실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한 이들은 이른바 ‘순수주의’에 빠지지 않고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문학을 한다고 했을 때 당대 한국문학이 민중문학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김지하와 신경림은 이를 위해 작가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하며, 백낙청은 1980년대의 사회과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문학에 있어서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와 민중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고 있다. 김지하와 신경림의 글에서 민중의 개념을 정립하거나 민중과 문학인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저 막연하게 민중은 역사의 주체라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한국 문학의 역사와 문학인의 사회적 사명을 다루는 가운데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와 민중사이의 관계에 관한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해방 이후 ‘반공’이 민족주의와 동일시되는 풍토에서 문학의 민중배제적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후 한국문학은 민중의 정서를 돌아보지 않은 채 순수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은 본래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작가 내면의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시대에 있어서 민족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중의 삶에 기반을 둔 민중지향의 문학은 너무도 당연하게 시대적 요청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또한 민중의 감성에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백낙청은 ‘민중적 민족문학’의 개념을 통해 문학이 민중성을 갖추어야함을 주장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인정한다면, 당대의 우수한 문학작품은 민중의 삶을 표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그 자신의 전문성을 통해 민중의 삶을 그려 낼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장상철, 122-123쪽)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민중개념을 둘러싼 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목적의식과 관련된다. 민중 개념을 둘러싼 논의는 지식인들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그 내용은 민중의 실체를 확인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이자 부당한 지배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 지식인에 의한 이러한 시도는 한국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배자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탈피하여 민중의 삶과 부당한 지배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민중문학 영역의 문필가들은 작가가 우리의 현실과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의 삶을 지향하는 문학활동은 당연한 것이라 역설한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 자신이 민중임을 강조하며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민중의 삶에 기반을 두어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민중 지향의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은 민중개념을 과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각각의 영역에서 수행된 이러한 민중관련 논의들은 민중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민중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함으로써 저항적 사회운동을 위한 개념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1970년대에 각 영역에서 민중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킨 지식인들은 잠들어 있는 민중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고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부각시키고자 했으며, 또한 민중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들은 저항운동의 조직적 중심으로서의 현대의 군주―정당―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중집단의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을 자임한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장상철, 136쪽)

 


 

1960년대 들어 한국 사회는 근대화의 기치아래 고도성장과 공업화를 이루면서 전통적인 농업국가로부터 신흥 산업국가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농촌의 피폐와 이농, 도시빈민의 증가, 노동조건의 열악화에 따른 계층간의 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엄청난 외채의 누적과 이에 따른 해외의존도의 심화 등” 고도성장의 엄청난 모순이 도사리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정치권력의 집중화, 절대화 및 그에 따른 권력과 유착된 부정부패의 구조화”가 더욱 현저해졌다. 이를 가능하게 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경제성장우선과 반공(안보)’ 논리였다. 이 논리로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면서 절대권력화를 강행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9, 23-24). 이런 상황에서 서구의 새로운 신학사조는 전통적 한국기독교에 회의와 비판적 자각을 하고 현실참여를 실천하고 있던 한국기독교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대화모임 참가자들은 한국 사회의 모순을 비인간화로 규정했다. 인간이란 자율적인 존재로서 사고력을 가지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물어 볼 수 있는 주체자이며, “어느 누구도 기계화되지 않고, 남을 위한 수단이 되지도 않으면서 그가 속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자기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도덕적인 존재(소흥렬, 1975: 24-28)다. 그러나 권위주의 국가의 정치적 양극화가 권력의 집중, 힘의 불균형, 의사소통의 단절 등을 지속시키고 고착시키면서 민주주의를 말살(이항녕, 1975:140)하여 비인간화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에 인간화를 위해서는 개인들의 최소한의 자율성과 정치적 자유가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인간화란 인간다움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다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더욱 바람직한 인간상을 향하여 향상해나가는 인격형성의 과정, 더욱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비인간화란 인간의 자율적인 성숙을 방해하는 현상들을 일컫는 것(소흥렬: 20-31)이었다. 또한 근대사회의 진정한 가치는 비인간화에 대한 반항을 통해서만 창조되며 반항은 행동이고 행동은 개인적 판단에 의하였을 때만 인간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이홍구,1975: 278). 다시 말해 인간화란 “인간이란 자신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책임지는 존재라는 역사이해”를 바탕으로 “사회체제의 적당한 개혁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의 수립을 꾀하는” 인간해방운동인 것이다(고재식, 1987:38-39).(박인혜, 148-149쪽)

 


 

둘째, ‘여성의 인간화’ 담론을 확산․전달하여 운동 주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체계화된 기제로서 ‘여성사회교육’이라는 시스템이 있었다. ‘여성사회교육’은 당시 부르주아 여성 교육이라는 비판과 억압적인 정치·사회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농민 여성들을 비롯하여, 문화예술인, 교회여성, 젊은 여성과 주부, 서울과 지방의 여성들 등 다양한 계층과 계급, 그리고 지역을 포괄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10년 이상 장기간 지속적으로, 여성학과 ‘여성의 인간화’ 담론을 교육했다. 이를 위하여 중간집단이라는 교육대상, 교육의 이념과 목표, 교육방법 등을 체계화하여 중간집단교육론을 확립했다. 이 교육론에 입각하여 교육 강사를 훈련하였고, 5개 분야의 중간집단마다 전담간사를 배치했다. 아카데미는 직접 여성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을 먼저 교육하여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사회개혁을 하게 하거나 운동현장의 여성들을 불러내어 재충전시킨 뒤 현장에 다시 투입하되 운동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아카데미는 운동외곽에서 교육으로 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사명으로 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엄혹한 정치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아카데미가 여성들을 교육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그 때문에 1980년대에 여성폭력추방운동, 여성문화운동, 여성노동운동, 여성농민운동, 주부운동 등 다양한 여성운동이 발화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카데미가 물적 토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적 토대는 크게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인적 자원을 보면 기독교지식인공동체와 서구의 페미니즘을 수용한 여성지식인들이 있었다. 아카데미는 대화모임을 기획하고 당시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모아 한국 사회의 모순점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논의하게 하고, ‘여성사회교육’의 강사들을 제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인적 자원은 엄혹한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참여했던 여성들이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참가자가 없다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이미 의식화된 여성들도 있었으나 막연하게 성차별을 느끼며 변화를 꿈꾸던 여성들도 있었다. ‘여성의 인간화’ 담론 형성은 이런 인적 자원들의 융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적 토대로는 대화모임 장소였던 수유리의 『아카데미 하우스』와 전문 교육 공간인 수원의 『내일을 여는 집』과 저렴한 참가비로도 고급숙박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공간과 재원으로 인적 자원들이 안정적으로 대화하고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와 동일한 조건의 물적 토대가 되어 줄 운동의 외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박인혜, 164-165쪽)

 


 

이러한 분단구조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특성을 통해 분단을 유지․강화시켜 왔다. 분단구조의 첫 번째 특성은 대립성으로서 소쉬르(F. Saussure)나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원적 대립의 체계를 사회․문화적 제도의 보편적 구조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모든 현상과 사회적 사실을 바라보고 있다. 두 번째는 왜곡성으로서 거짓된 의식이나 허위의식을 사실인 것처럼 확대포장하여 재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통제성으로서 이러한 분단구조의 유지는 개인의 자유의사가 아니라, 개개인이 수동적으로 동화된 분단체제적 특성의 언어를 통해 구성되며, 균열 혹은 분리된, 왜곡된 자아를 통해 분단은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남북한의 분단구조적 특성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러한 분단구조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대립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구조가 이원적 대립체계, 배후에서 결정하는 상위구조로서의 특성을 지닌다고 할 때 분단구조는 가장 극단적인 이분법적 대립체계와 무의식적 지배구조를 지니는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단구조는 남북한에서 각각 대립적 체제와 구조를 형성하여 분단체제를 지속시키고 있다. 먼저 제도적․법적인 측면에서 남북한은 각기 분단구조의 대립성을 지속시켜 오고 있다. 남한은 주적개념을 통해 북한을 대립의 상대로 설정하고 있으며 북한도 주체 사회주의노선을 통해 반미․반자본주의의 대립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대립성은 적대적 상호주의 혹은 적대적 공생관계를 통해 더욱더 심화형성되어 왔다. 적대적 상호주의란 두 가지 특징 즉 상대방은 본질적으로 악하다라는 확신과 상대방은 초전박살의 대상이지 결코 타협과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이러한 적대적 상호주의는 분단 이데올로기가 국시로 승격된 남한이나 북한의 반미주의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한국사회학회, 1999: 187-188). 적대적 공생관계란 양 체제의 권력 주체들이 명시적․의도적으로 적대관계와 불신관계를 유지․강화시키면서도, 묵시적으로는 또는 예기치 않게 자신들의 기득권 혹은 지배력을 체제 안에서 강화시켜온 것을 말한다.

 

둘째, 이러한 지배권력의 대립성 강화는 이데올로기적인 왜곡성을 통해 국민들에게 분단구조를 수용하게 하고 의식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왜곡된 상을 구성하게 한다. 남북의 상호 대칭적인 반작용을 반영하는 거울영상은 남북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서 진실과 거리가 먼 가공된 사실에 기초한 수사학적 논쟁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주관적 편견, 인식의 왜곡을 강화해 나가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안승대, 72쪽)

 


 

남한 교육이념의 홍익인간이념은 ‘양옥집 위의 이엉, 양복위의 갓’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승리한 사상인 자유민주주의를 역사적 정통성으로 포장하여 제시하려는 역사적 사실의 왜곡에 다름아니며, 자유민주주의라는 근대적, 서구적 합리주의를 홍익인간이념의 신화성․추상성․모호성을 활용하여 제시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아도르노가 제시한 것처럼 그 어떤 역사적 사실도 그 어떤 하나의 진실을 추구하는 동일성의 역사로 제시될 수 업다. 항일무장투쟁의 신화와 홍익인간의 신화는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위해 복무하는 역사의 왜곡성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도구화된 역사, 지배도구화의 역사는 해체되어 끝없는 와해, 해체의 과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남북한 교육이념의 대립성은 사회통합의 역할 대신, 대립과 대결의 체제이념을 조장해 온 분단구조적 특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남한 교육이념의 대립성은 반공주의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반공주의=민주주의, 북한=독재의 지옥으로 묘사하면서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교육을 통해 생성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주체사회주의 또한 이중의 극명한 대립성을 보여준다. 주체의 강조는 미국증오교육․반미주의 문화를 형성하며, 사회주의의 강조는 반자본주의․반자본가, 반남한문화를 형성․강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립성의 근거는 데리다의 해체론에 의해 철저히 해체된 후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남북한의 교육에서 제시하는 텍스트는 영원한, 고정불변의 의미로 제시될 수 없으며 그 어떤 체제이념도 절대진리․절대중심으로 주장되어서는 안된다. 상호대립․적대의 논리는 차이가 영원히 연기되는 차연속에서 그 근거를 상실하며, 남북한 교육이념의 대립성은 파르마콘과 파레르곤 속에서 무화되어 융합된다. 반공과 반미․반자본주의가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주체사회주의는 상호대립․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독이지만 동시에 약이 되기도 하는 파르마콘의 이념이며 그 어떤 것도 중심임을 주장할 수 없는 파레르곤과도 같은 상호보완의 이념인 것이다.

 

분단구조에 의해 조작된 주체, 길들여진 인간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대체되어야 한다. 남북한교육이념이 추구해온 반공인과 공산주의적 인간은 권력에 의해 형성된 주체, 규정되는 존재에 불과하며 이는 철저히 해체되어야 할 통제성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특수화된 근대성으로서의 분단구조는 남북한 권력이 통제사회, 감시사회를 형성하여 이 속에서 길들여진 인간을 형성하고 조종하는 토대를 제공하여 왔다. 이러한 통제사회, 감시사회 속의 인간은 권력과 지식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으로 새로이 제시되어야 하며, 만들어진․주어진․형성된 주체가 아니라 분단구조의 낡은 틀에서 벗어난 탈분단구조적․탈감시사회의 인간으로 새로이 제시되어야 한다. 남한사회는 이러한 탈분단구조․탈감시사회의 인간의 모습, 권력과 낡은 체제의 억압으로 부터 벗어난 새로운 통일시대, 민주화시대, 개인주의 시대의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분단구조적 특성의 통제성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안승대, 83-84쪽)

 


 

 

 

솔직히 이러한 지식의 식민성이 어디 대한민국에서만 지배적 경향이겠는가! 경제․문화강국들의 글로벌 스탠더드형 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로컬 학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강설해 놓은 진리(vérités établies)에 많은 로컬의 학자들이 주박(呪縛)되어 심지어는 본인이 소속된 로컬 인문학문의 정체성 찾기마저 백안시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인문학적 진리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당위로 주어진 것이라면 이미 강설된 진리의 역할을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적 진리가 문화적 에토스, 로컬의 역사와 현실을 반영해서 생성․창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문학문의 정체성이 탈영토화된 경우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재삼 강조하건대 인문학문의 연구결과물은 철저히 문화적 에토스, 로컬의 역사와 현실의 재현체다. 따라서 문화적 에토스, 로컬의 역사와 현실에 천착하지 못한 인문학문, 인문지식은 당연 정체성이 없는 것이라 할 수밖에 있다. 보편성이라는 학문의 인도(引導) 원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문의 탄생 조건 및 문화․역사적 배경과 문맥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서구유럽적 보편성만이 우리의 인문학문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원인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100~200여 년 전에는 중국의 유교적 보편성이 조선의 지성계를 통제․감독해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실용적 보편성이 서구 유럽적 보편성보다 더 기세(氣勢)를 떨치고 있다. 이렇듯 ‘그들의 보편성(Their universality)’과 ‘우리의 보편성(Korean and Asian universality)’ 간의 간발적 교류가 전개되지 못했던 탓에 우리는 서구유럽의 보편성(중국이나 미국의 보편성)의 일방적인 발신과 그것의 단순 수용이라는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외래 학문의 수입 역사만을 수치스럽게 소지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더더욱 이와 같은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생활세계적 경험, 세대 간에 문화유전자적으로 물려받은 역사와 전통은 백안시한 채 오직 ‘그들’의 정당성만을 용인하면서 비주체적인 연구 환경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인문학문계는 그렇게 서양인문학을 수용하며 100여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양 콤플렉스에 갇혀 독자적인 연구 패러다임 구축은 요원하기만 한 상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연 ’그들의 보편성’과 ‘우리의 보편성’ 간의 간통(間通)을 상상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쌍방향적 간통이 진행된 바 없기에 상호비교는 어차피 불가능하다. 상호비교가 불가능하기에 서로 과연 어떤 학문적 공통 경험(expérience interhumaine)을 했는지를 확인할 방도도 없다.(박치완, 162-163쪽)

 

 

 


 

⑹ 시민 사회

 


 

이성 도덕과 이성법이라는 현대적 이론들은 개개인의 자율성이란 기본 개념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중에 근거를 둔다. 이성 도덕과 이성법의 이 공동의 토대는 종종 결정적인 (차이를 속여서) 실제적 차이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도덕은 의무를 모든 행위 영역에 흠결 없이 스며들게 하는 반면에, 현대적 법은 사적인 자의와 개인적인 생활 형성을 위한 자유여지를 창설한다. 명백히 금지되지 않은 모든 것은 법적으로 허용된다는 혁명적 전제는 의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법시스템의 구성을 위한 시작점인 주관적 권리를 형성한다. Hobbes에게는 그리고 현대적 법을 위해서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하고 자의적인 것이 허용 될 수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동등한 권한부여가 중요하다.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에 그 권리를 행사하기를 원한다면, 행위자는 다른 관점을 수용하기만 하면 된다. 도덕적인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갚을 의무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사회적 관계에 있는지 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낮선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무엇을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음을 설정하면 된다. 이와는 반대로 상호간에 법적 관계에 서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사람이 그를 상대로 주장하는 청구에 반응하여야 한다. 법 공동체에서는 첫 번째 사람을 위해서는 두 번째 사람이 그에게 행할 수 있는 청구의 결과로서 비로소 의무가 발생하게 된다.(위르겐 하버마스, 516-517쪽)

 


 

인권들은 - 그것들이 더 이상 사회 유토피아적으로 그려진 집단적 행운의 그림들을 요술을 부려 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의 이상적인 목표가 헌법의 제도에 자체적으로 정초된 것인 한에 있어서는 -실제적인 유토피아를 형성한다. 이런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정의의 이념을 수단으로 물론 또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문제성 있는 긴장을 끌어드린다. 여러 형태의 민주주의적인 남아메리카와 다른 곳의 기본권들의 단순한 상징적인 힘을 완전히 제외한다면, UN의 인권정책에서는 한편으로 인권수사학의 유포와 다른 한편으로 통상적인 권력정책을 위한 정당성의 보조 장치로서의 남용사이의 모순을 보여준다. UN총회는 예를 들어 인권협정을 통과시킴으로서 국제법적인 법전화와 인권들의 내용적인 분화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또한 인권들의 제도화를 발전시켰다. -개인적인 소원절차를 수단으로, 개별 국가의 인권상황에 대한 주기적인 보고를 통해, 특히 유럽인권재판소, 국제적인 법원, 여러 상이한 전쟁범죄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와 같은 법원의 설치를 통해 그러하다. 특히 사변적인 것은 UN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적인 공동체의 이름으로 비상시에 또한 주권적 정부의 의지에 반하여 결정하는 인도주의적인 간섭이다.

 

바로 이런 경우에는 그러나 잠정적(일시적)인 단지 미완성의 문서에 제도화된 가치질서를 가속화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정당한 시도의 무성과성보다 더욱 별로인 것은 그 도덕적인 척도 자체의 불투명한 이중적인 의미 때문이다(키잡이적인 인권정책의 인권과 민주주의 상호연관의 파괴).(위르겐 하버마스, 526-527쪽)

 


 

지젝은 맑스의 ‘물신숭배’를 단순히 “사물의 이면에서, 사물들 간의 관계 이면에서 사회적인 관계, 인간 주체들 간의 관계를 탐색해야 한다”는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이런 식으로 맑스의 공식을 읽는다면, 냉소적인 이데올로기 주체들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즉, 그 주체들은 “사회 활동 속에서, 자신의 어떤 행위 속에서 마치 돈이 물질적인 현실 속에서 부(富) 그 자체의 직접적인 구현물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들은 “사물들 간의 관계 이면에 인간관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 혹은 간극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들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행한다. 그들의 냉소적 거리두기는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그들의 행위와 사고 사이에 끼워 넣으면서 그 간극을 해소한다.

 

하지만 그 간극의 해소는 진정한 해소가 아니라 은폐이며, 그들이 은폐하는 것은 자신들이 “물신주의적인 환영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기능이자 역할이다. 그것은 물신적 과정에서 “실천을 통해, 자신의 현실 활동을 통해 마치 특정한 사물들 (상품들)이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는” 현실적으로 추상화된 믿음을 믿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이 모르는 것’은 “현실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현실을, 그들의 현실 사회활동을 구조화하는 환영이다.” 이제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행하고 있다.(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est.)”는 맑스의 정식은 ‘그들은 그들이 물신주의적 환영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물신숭배적 실천을 행하고 있다’와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김종곤, 245-246쪽)

 


 

저자들은, 특히 마르크스는 바우어가 「특징」에서 던진 키워드 ‘역사’를 일 년 전에 「유대인문제」를 둘러싸고 바우어와 논쟁할 때 쟁점이었던 ‘인간해방’ 문제와 결합시켰다. ‘인간해방’이 필요한 것은 이미 인간이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저자들은 소외를 ‘경제적 소외’로 생각했다. 이 소외 개념의 창안자는 『독일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저자로 추가될 헤쓰이고 저자들도 넘겨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안 초두에 헤쓰의 행동철학의 개념, ‘역사적 행동’, ‘협동’, ‘교류’도 사용된다. 저자들은 소외의 원인이 정신적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종교적․정신적 소외’가 아니라 ‘경제적․물질적 소외’를 인간소외의 핵심 본질로 본 것이다. 따라서 바우어 등의 철학자들은 인간들이 실체인 신(神), 이념 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인간해방’이라고 보았던 반면에, 저자들은 인간들이 ‘적절한 의식주’를 충족하는 것, 즉 물질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해방이라고 보았다. 저자들이 보기에 인간이 정신적 존재에 속박당한 적도 없거니와 설사 속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해방을 ‘정신적 행위’, 즉 ‘순수비판’, ‘종교’등으로 실현할 수 없다. 저자들에 의하면 인간해방은 ‘역사적 행위’, 즉 ‘물질적 생산활동’으로 실현된다. 이 생산활동으로 “공업, 상업, 농업, 교류”가 발전하면 의식주문제가 해결되고 인간소외도 극복된다(DI 6). 그런데도 저자들은 바우어 등이 왜 인간의 정신적 활동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 그 방법이 그들의 철학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 분석 결과, 바우어는 역사를 ‘인간의 자기소외과정’으로 보고 있었고 포이어바흐는 몰(沒)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인간까지도 사회․역사적 존재로 보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한 정신적 존재, 즉 (바우어의) ‘자기의식’, (포이어바흐의) 추상적 ‘인간’으로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인간해방 방식도 정신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바우어는 ‘실체’와의 단절, 포이어바흐는 ‘유적본질’의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바우어는 관념론적 역사철학자, 포이어바흐는 몰역사적 철학자였다. 그러나 저자들에 의하면 정신․의식은 ‘처음부터 물질에 묶인 존재’이다. 인간은 물질적 생산활동, 즉 노동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역사적․현실적’ 존재이다. 동시에 인간들은 노동할 때 항상 협업하는 관계이고 협업은 분업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하에 이 노동분업은 본격화되어 ‘사회적 분업’으로 정착되었다. 이 분업체제하에서 인간들은 배타적 영역 안에서만 활동할 수밖에 없으니 전인적(全人的) 발전은 불가능하고 서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분업을 통한 협업은 자발적이지도 않으니까 협업의 결과인 ‘생산력’도 인간에게는 ‘소외된 힘’으로 느껴지고 오히려 이 생산력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이런 “소외”를 공산주의혁명을 통해 지양해야 한다고 당위적 주장을 한다. 이 결론적 주장은 ‘과학적 사실판단’이 아니라 ‘철학적 가치판단’이다. 또 이 결론은 ‘인간은 해방되어야 한다라는 가치판단과 ‘자본주의하에서 인간은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판단을 전제들로 하고 있다. 이로써 초안1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면하는 전형적인 철학적 논증구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이데올로기』를 처음부터 철학을 폐기할 의도로 작성했다고 볼 수는 없다.(조항구, 341-343쪽)

 


 

“헤겔 이래 공격적 철학은 주관성 반영이 아니라 상호주관성 반영이다”(Merleau-Ponty, 1964b,133~134쪽). 이는 ‘관찰 대상’을 두고 주체와 생활세계의 변증법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두고 퐁티가 한 말로써, 휴먼커뮤니케이션은 토대로서 관찰 대상 그 자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메타커뮤니케이션(metacommunication)은 인간 상호행동의 상황이라는 점을 말한다. 그 상황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비판 자체로 유용화된 방법론인데, 그 이유는 의식에 대한 기술 및 설명이 사회와 연결됨으로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비주의 및 설득이 보다 유사한 개념이다. 휴먼커뮤니케이터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언어행태(소비 대상 : 실증주의 방법)로서 물상화 커뮤니케이션으로 소멸될 수 있고, 인식(설득 대상: 일상 언어철학 방법)으로서 개인 물상화로도 소멸 가능하다(Lanigan, 1988, 89쪽). 하버마스는 목적합리적 행위(purposive-rationalaction, 도구적이라고 하는)와 커뮤니케이션 행위 간의 적정한 사회 특징을 끌어냄으로서 물상화 위험에 주목했다(Habermas, 1971b). 이런 맥락에서는 목적합리적 행위는 설득의 조건인데, 즉 커뮤니케이션 본질을 구성하는 전인지 메타커뮤니케이션(preconceived metacommunication)이 있는 사상(state of affairs)이 사회 내 개인 행위 위기에 대한 부정적 가치를 부과한다. 이러한 부정적 가치(소비주의)는 대부분의 경우 사회(메타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처되어 사회 내 개인의 역할로 나타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행위는 해방(설득의 지배로부터)의 조건이고, 메타커뮤니케이션의 본질 ― 개별 행위(parole)내 개인 참여에 대한 긍정적 가치 부여 ― 을 규제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사안이다. 긍정적 가치는 사회적 그룹의 대인 영역(langue)내의 진짜 실존(parole parlante)발생이다(Habermas, 1979b, 6쪽).

 

하버마스가 목적합리적 행위와 커뮤니케이션 행위 사이에서 도출해낸 기술 비교(technical comparison)를 리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왜냐하면 비판이론의 ‘귀납적’방법으로 특성화했던 도식을 이 특성이 끌어내주기 때문이다(Lanigan, 1988, 90쪽).

 

도구적 행위는 경험적 지식에 근거한 기술 역할에 의해 관리된다. 대부분의 경우 그 역할들은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관찰 가능한 대상에 대한 조건적 예측을 함축한다. 이들 예측들은 정오(corrector in correct)로 증명될 수 있다. 합리적 선택 행위는 분석적 지식에 기반한 전략에 의해 관리된다. 그 전략들은 우선 규칙(가치 체계)과 결정 과정으로부터의 귀납법을 함축한다. 이러한 명제는 맞거나 틀리는 쪽으로 연역된다(Habermas,1971b, 91~93쪽).

 

하버마스는 이어서 이와 대조적인 언급을 한다. “한 쪽의 ‘상호행위’(interaction)에 따라 나는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상징적 상호행위로 이해한다. 커뮤니케이션 행위는 한데 묶여진 합의 규범에 의해 관리되는데, 그 규범은 행태에 대한 상호기대라고 정의되고 최소 둘 이상의 행위 주체에 의해 이해 및 인식되어야 한다. 사회 규범은 제재(sanctions)를 통해 강화된다. 그 규범의 의미는 규범적 언어 커뮤니케이션(ordinary language communication)내에서 객관화된다. 기술적 규칙 및 전략의 타당성은 경험적 진리 및 분석적으로 맞는 명제에 의존하는 반면, 사회 규범의 타당성은 지향성의 상호이해라는 상호주관성에 기초하며, 의무에 대한 일반 인지에 의해 보장된다.”(이범수, 353-354쪽)

 


 


 

4. 좌우합작

 


 

⑴ 新종교와 민족담론 연관

 


 

좌우합작을 강조하는 논자들은 ‘민족’이라는 기호에서 ‘화합’의 코드를 강조하였다. ‘조선인’을 ‘단일한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묶는 것은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서 기능하였다. ‘민족적’인 것은 애초에 ‘반민족적’인 것의 대타 기호로서 정립된 면이 강하다. ‘민족적’인 것이 먼저 정립되고 ‘반민족적’인 것이 정립된 것이 아니라, ‘반민족적’인 것이 먼저 정립되고 그 대타개념으로서 ‘민족적’인 것이 정립된 것이다. 이것은 ‘반민족적인 것’이라는 기호가 ‘일제적인 것’이라는 대단히 뚜렷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대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천지』 1947년 1월호에 실린 「단군론」은 일제 강점기에 일인 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단군의 의미를 바로잡는 데 목적을 둔 글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조선 고유의 특질, 혹은 상징을 다시 고유의 것으로 부활시킴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이렇듯 해방직후 ‘민족’ 개념의 수립은 일제 강점의 기억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김준현, 61쪽)

 


 

민족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민족 통일, 그리고 그것을 위한 좌우합작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기본적인 전제 및 근거가 된다. 이렇게 좌우합작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에 대해 객관적으로 개괄(오기영의 「5원칙과 8원칙」)한 다음, 함상훈의 「좌익 측 합작 5원칙에 대한 비판」과 권태섭의 「우익 8원칙의 분석과 그 비판」 을 실었다. 이렇게 좌우 양측의 입장을 공평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하고, 그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글을 포함하고 좌우합작의 역설로 수렴시키는 편집방향은 초기의 신천지 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패턴이었다. 민족의 단일성을 강조하며 좌우합작을 역설하는 문건은 초기 신천지 에 지속적으로 게재된다.

 

물론 『신천지』 에 좌우합작을 역설하는 근거로서 사용되는 ‘포용적․화합적’ 개념의 ‘민족’이라는 기호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실제로 『신천지』 는 좌익 담론과 우익 담론의 격전장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민족적인 것’, 그리고 ‘반민족적인 것’을 정의내리는 행위를 통해 첨예하게 드러났다. 그 결과 ‘민족’이라는 기호의 함의는 한층 더 복잡해졌으며, 단순히 ‘동질성’을 강조하는 원래의 ‘민족’ 기호로는 그것들을 수렴해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좌우합작을 시종일관 주창하던 『백민』과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서 공격받을 정도로 중립적인 논조를 유지하던 『신천지』의 매체이념은 ‘민족적’이라는 기호의 어의가 좁혀진 시점에서 뒤돌아 보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좌우의 대립이 파국으로 치달아버린 시점에서 돌아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좌우의 이분법적 대립이 먼저 완성되었고, 그러한 조건 하에서 『신천지』 가 창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아 모든 담론을 양분하여 버리게 된 시기 이후에 신천지 의 위치가 소급되어 정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민족’이라는 기호가 반봉건, 반제국주의적 의미에서 차원에서 반공, 혹은 국가적 당면 현실의 개선 등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바뀌어가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남한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데 필요한 제외개념이 ‘친일’에서 ‘친북’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김준현, 66-67쪽)

 


 

그리고 1905년 동학을 천도교를 재편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이후 천도교세력은 인내천(人乃天)을 교리로 공식화하고, 그 체계화에 노력하였다. 천도교세력이 주장한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는 천인일체(天人一體)와 자차일체(自他一體)의 원리를 가진 신앙인 동시에 사회사상으로서 그 이상은 보국안민포덕천하광제창생(輔國安民布德天下廣濟蒼生)을 통한 지상천국(地上天國)의 건설이었다.

 

여기에서 지상천국은 그 시대에서 더 좋은 새로운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내천주의와 지상천국에 대한 인식은 천도교세력이 현실사회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여건이 되었고, 이는 ‘성신쌍전(性身雙全)․교정일치(敎政一致)’론으로 정리되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교화는 물론 정치․경제 등 제반사회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도교는 정신생활(=性)과 물질생활(=身)을 모두 완전하게 하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정치였다. 따라서 천도교가 현실문제․정치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후 천도교세력의 현실 사회 문제에 대한 대응은 ‘성신쌍전(性身雙全)․교정일치(敎政一致’론 기반으로 전개되었으며, 종교 세력인 이들이 3ᆞ․1운동에 참여한 것 역시 물질적 제도개혁의 일환으로서 정치개혁을 바라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천도교세력은 3ᆞ1운동의 좌절과 교인들의 투옥으로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 이에 다양한 대책들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청년단체의 결성을 통한 천도 교리의 연구․선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단 조직과 운영에 대한 개혁이었다.

 

전자에 따라 천도교 청년회가 조직되어 천도 교리의 연구ᆞ선전과 ‘조선신문화(朝鮮新文化)’건설을 위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회의 결성과 활동에는 당시 한국사회의 사회개조(社會改造)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었던 문화운동을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천도교 지도자들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 결과 천도교 청년회의 활동 중심은 비록 성신쌍전(性身雙全)의 논리에 따라 회사를 설립하여 천도교인들의 경제문제에 관한 교양·훈련과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측면의 개조, 즉 일반민중의 각성과 근대적 의식함양에 두어졌다.

 

청년당은 천도교의 주의․목적을 사회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천도교의 전위조직으로 표방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당개벽(以黨開闢)의 단일정신으로써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당개벽(以黨開闢)이란 청년당을 통해 현실사회를 개벽한다는 의미는 물론, 모든 운동에 있어서 자신들 이외에는 어떠한 당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이후 청년당의 조직변화와 모든 활동을 규정 하였다.

 

이런 결과들은 손병희가 지닌 선천적인 현실 인식 능력과 갑오경장과 독립협회활동을 계승한 국내 독립협회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문명개화론을 끊임없이 수용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얻어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친일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지만 손병희가 문병개화론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서 동학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되었으며 이는 기존의 동학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사상적 폭이 넓어지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송영헌, 72-73쪽)

 


 

⑵ 김구·김규식

 


 

 

 

해방 직후의 중도파는 조직 면에서도 극히 허약했다. 우선 중도진영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결여한 ‘뿌리 없는 조직’들이었다. 중도진영의 정당단체들은 대체로 대중적 기반이 없이 소규모 정치인 써클이나 지식인 써클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것이었기 때문에 하부조직이 없었다. 중도파 정당 가운데 지방조직을 가진 정당은 거의 없었다. 중도파 정당단체들이 이와 같이 조직되었기 때문에 중도진영에서는 할거주의(당시에는 ‘두목주의’라 칭했다)가 성행했다. 할거주의 때문에 중도파의 정당단체들은 중도파 전체를 결속하는 하나의 정당이나 결속력 강한 연합체를 결성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결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단결을 위한 통합작업이 시작되면 곧 ‘두목’을 따라 이합집산하며 분열의 길로 갔다. 중도진영은 단 한 번도 중도진영 전체를 완전히 결속시키는 단체를 가져 본 일이 없었다.

해방 직후 중도파진영에는 개별적으로는 고상한 의식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념이 모호하고 조직력도 약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상황이나 민족의 진로에 강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구두로만 당위적 주장을 제시하는 것뿐이었다. 미군정의 지원 아래 전개한 좌우합작운동도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좌우가 합작해야 한다는 당위론을 주장한 것에 불과했고, 남북협상도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남북의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당면문제에 관한 협상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을 주장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의 당위론은 잘못이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당위론이 실천 가능하려면 남한의 좌우진영 정치인들과 남북의 정치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당위론에 따르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대중동원력이 있어야 했다. 해방 직후의 민족내부 정세나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중도파가 그러한 대중동원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정상적인 의미의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은 성사되기 어려웠다. 좌익진영은 완전히 소련의 통제하에 있어서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해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 없었고, 우익진영은 반탁투쟁 이후 공산당과의 타협가능성을 완전 배제하고 있었으므로 두 진영의 합작은 소련이 좌익에게 합작을 명령하지 않는 한 절대 불가능했다. 또한 미소 양군이 철수한 후 힘의 공백상태에서 남북한의 정치세력들이 협상을 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당시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것과 동일한 내란의 초래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도파는 옳기는 하지만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주장을 하면서 그것의 실현에 긴요한 대중동원력을 배양할 노력은 하지 않고 정치인들끼리의 모임이나 갖고 기자회견이나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당위론만 주장했다. 따라서 남북통일이 되건 남한의 단독정부가 되건 중도파로 하여 금 남한정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도록 하기 위해 미군정이 중도파를 적극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도파는 남한의 정치상황이나 민족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중도진영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자신들을 좌우익에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확대하기 위한 기초조건인 내부통합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중도파의 행동에는 순수성이 결여된 점이 있어서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좌우합작운동에는 중도파를 육성하려는 미군정의 사주와 지원이 작용하고 있었고, 남북협상추진에는 중도진영에 침투한 좌익프락치의 공작이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좌우합작운동은 당위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 두 진영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했으며, 남북협상 추진은 우익진영으로부터 의혹을 사게 된 것이다.(양동안, 251-252쪽)

 

 

 


 


 

중도진영내의 입장일치는 유엔소총회가 2월 26일 유엔위원단의 감시활동이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의 총선실시를 결의한 후 더욱 확실해졌다. 유엔소총회의 결의가 있자 마자 김규식은 입법의원 의장 사표를 제출해 유엔소총회의 결의에 대해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다. 김규식의 그러한 행동은 남한총선 저지에 대한 중도진영의 확고한 입장통일을 의미했다.

 

입장통일이 이루어진 중도진영은 남한총선저지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중도진영은 김구와 더불어 당시 남한정계에서 소외된 인사들을 총선반대투쟁에 끌어들여 3월 12일 소위 7거두 성명을 발표했다. 서재필도 남한총선반대․선거불참성명을 발표했다. 중도파는 유엔소총회결의 이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자유로운 선거분위기 조성이 불가능하다’, ‘단선단정하면 동족상잔전쟁 일어난다’, ‘선거 후 미국은 고등판무관을 두어 한국을 통치할 계획이다’, ‘선거는 미군주둔을 연장하기 위한 술책이다’는 선전을 하면서 민중의 선거불참을 유도했다.

 

중도파와 김구는 남한의 김구․김규식과 북한의 김일성․김두봉간의 남북협상관련 접촉이 이루어진 3월 중순 이후 남북협상 동조세력의 통일전선 결성을 추진하면서 남한총선반대투쟁을 더욱 강화했다. 민련과 한독당은 남북협상과 남한정부 수립반대·저지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이하 협의회)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협의회는 3월 26일 발기회를 조직하고 4월 3일 정식으로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협의회에는 민련과 정협에 참여한 중도진영 정당단체 및 한독당을 따르는 우익이탈단체 등 총 100여 개의 정당단체가 참여했다. 이 협의회결성에는 남북협상에 동조하는 정당단체는 무조건 받아들였다. 민련결성 과정에서 근민당, 민중동맹 등의 좌파를 배제한 것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중도파의 남한총선저지투쟁은 남북한 좌익의 남한총선저지·파탄투쟁과 공동보조를 취했다. 좌익은 폭력에 의한 투쟁에 주력하고 중도파는 선전활동과 정치공작에 주력한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중도파의 단선반대·남북협상관철 선전은 좌익의 선거파탄 폭력투쟁을 정당화하는 작용을 했고, 좌익의 격렬한 폭력투쟁은 중도파의 남북협상추진의 명분을 강화하는 작용을 했다.(양동안, 236-237쪽)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였다. 한민당은 민족주의대표와 더불어 좌파의 세력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 그리고 이승만의 반탁과 단정노선을 추진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남한에서는 우파계열의 정당활동을 통하여 그리고 북한에서는 좌파계열의 정당활동을 통하여 사회갈등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점점 남한과 북한은 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강인철은 한민당의 집단지도체제에 의해 운영된 한민당의 8인의 총무가운데 5인이 저명한 개신교 지도자들이었다고 분석하여 밝히고 있다. 더불어 미군정과의 교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해외유학부”라는 별명이 붙은 외교부원 9인 가운데 적어도 5명이 개신교신자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김구를 중심으로 임정세력인 ‘한국독립당(한독당)’은 또 다른 보수주의 우파계열로 정통 민족주의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한독당의 이대위와 오택관, 이남규등이 목사로서 정당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한독당은 이승만의 단일정부추진과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미군정과 관계를 맺기는 어려워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한독당과 이승만의 단일정부추진의 약화는, 한독당의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 때문이었다. 또한 미군정시기 정치적 주도계층의 형성에 미국지향적인 인사가 자행되었으며, 기독교와 친미 반공성향의 보수우파중심 그리고 반일에 소극적이었던 인사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정치지도자들을 반영할 수 없었다.

 

정리하면 해방 후 미군정 관료에 등용되었던 한국민주당(한민당) 발기인 및 당원들은 미군과 협력하고 보수적이며 일제시대시기 서북지역의 지주와 관료출신들이 많은 소극적 항일인사들이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는 대부분 개신교 지도자들이었으며 개신교인들은 정당활동과 사회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반공우익 단체를 지지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가재건운동에 참여하였다.(함신주, 25쪽)

 


 

그리고 김구도 한독당 주석의 명의로 따로 서한을 작성하여 보냈는데, 김규식이 남한정부 수립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유엔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열망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반해 김구는 5․10총선 이전의 통일방안을 그대로 주장하는 등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안이었다.

 

어쨌든 뒤늦은 서한은 유엔총회에서 관심을 끌지 못했고, 통촉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김규식・김구는 통촉을 통해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대한민국의 현실을 인정한 김규식과 여전히 임정의 법통성이 현 정부에 있지 않다고 하며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김구는 통일민족국가 수립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독당 내에서도 김구의 이러한 생각이 남한 단독정부를 인정하고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던 조소앙과 갈등을 일으켜 결국 조소앙은 신당 창당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정부 수립과 이승만 정부의 반공정책 강화는 통촉에 참여했던 정당들의 활동에도 제약이 되었다. 결국, 김구의 한독당은 通北분자가 염려되어 통촉에 소극적 활동을 가져왔고, 민련은 북한의 정부수립에 활동하는 맹원들을 정리함으로써 통촉의 활동은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방경원, 53-54쪽)

 


 

남북협상은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단절되는 순간에 남북분단과 분열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의 좌익세력과 남한의 중도파 세력들이 모여 합의점을 도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민련의 공식적 결정은 남북단독선거 불참으로 귀결되었지만, 남북협상은 협상대로 응하고, 이후 단독선거에 참여하여 국회에 진출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어차피 치러질 수 밖에 없었던 남한단독선거라면 민련과 같은 중도파가 불참할 것이 아니라 참가해야 했고, 제도권에 빨리 진입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통일민족국가 건설에 한층 노력하였다면 현실은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군정이 김규식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잘 이용한다면 국회 내에서 어느 정도의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5․10선거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수립되었다. 그러나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련은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민련은 김구측인 한독당과 더불어 통촉을 구성하여 통일문제를 제기하고 남한정부 수립 후현 정부를 인정하며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 하였지만, 국가 보안법으로 인해 합법적인 통일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민련의 맹원 중 일부가 북한 정권에 참여하여 민련의 입지가 축소된 상태였고, 특히, 남북정부 수립 후 민련은 함께 통일추진에 몸담았던 중도좌익 세력과도 완전히 결별하였다.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의 반공정책 속에서 즉, 남북한 정권과의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의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규식은 남북정부를 인정한 통일방안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1949년 6월의 국회 프락치 사건 및 김구의 죽음은 김규식과 민련의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이제 김규식과 민련은 한층 좁아진 공간 내에서의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단독정부 지지 세력과 남북협상세력과의 결합인 민강위가 결성되었지만, 실패는 예고된 것이었다.

 

이제 제도권 내에서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현실대응에 따라 민련은 1950년 5.30선거에 참가하였다. 이것은 민련의 통일민족국가 수립 정책의 변화가 표면화된 것이었다. 즉, 제도권 내로의 진입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달성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6․25전쟁으로 인해 김규식을 비롯한 민련 내 중도파 인사들이 납북되었고, 남한 정부는 전쟁 후 반공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통일민족국가 수립 추진 세력은 명맥을 잃게 되었다.(방경원, 68-69쪽)

 


 

좌우합작운동은 6월 30일 하지(John Reed Hodge)가 여운형과 김규식의 합작노력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한 후 급진전 되었다. 이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찬반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우익은 인물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였으나 미국의 지지로 인해 집단적으로 반대하고 나오지는 않았고, 좌익은 ‘친일파 제거, 테러중지와 민주주의자 석방, 모스크바3상회 결정지지’의 3원칙이 합의가 된다면 좌우합작에 응할 것이라는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좌우합작에 대한 지지와 반발이 엇갈리는 가운데 7월 17일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교살당할 뻔했으나, 좌우합작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22일, 25일 2차례에 걸쳐 예비회담 이루어져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7월 22일 북한에서 박헌영이 돌아오면서 조공계열이 합작 5원칙, 3당합당, 신전술이라는 3가지 전술변화를 주장하므로 인해 좌우합작운동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공은 여운형의 반대에도 좌우합작위원회의 의사결정을 위반하고 ‘합작 5원칙’을 민전의 이름으로 제출하였다. 이때 여운형은 와병 중으로 참석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합작문제를 두고 박헌영과 대립 중이었다. 우익은 좌익의 5원칙에 대처하여 합작 8원칙을 제시하였고, 이로 인해 좌우측의 의견대립은 심화되었다. 또한 조공의 ‘3당 합당’은 좌익의 분열과 여운형의 정치기반 약화를 시켰고, 신전술의 채택은 민중들의 불만과 함께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으로 이어져 좌우합작운동의 전개를 더디게 하였다.

 

좌익의 분열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에 과도입법기구안 제안하였고, 이때 60명으로 구성될 과도입법기구 수립을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안해준다면 1/2의 추천권을 줄 것임을 강조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9월 23일 회의에서 과도입법기구 문제를 토의해 위원총수는 90명, 1/3은 선거로, 2/3는 임명으로 선출한다는 데 합의하고, 10월 4일 과도입법의원 수립요구 조항을 포함한 7가지 기본원칙에 대해 합의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 7일 합작원칙에 서명하기로 했던 여운형이 박헌영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미군정과의 계획으로 인해 좌우합작 7원칙과 하지중장에서 보내는 새로운 입법기구 수립에 관한 건의사항을 발표하였다.(유연희, 20-21쪽)

 


 

우선 미소공위 재개로 인하여 우익 반탁 진영은 분열하였다. 곧 반탁진영은 재개되는 미소공위 참여를 둘러싸고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불참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장덕수 등 참여파의 주도 아래 한민당은 기존의 태도를 변경하여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하였다. 결국 한민당은 6월 10일 미소공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하는 74개 우익 정당사회단체가 6월 19일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이하 임협)을 구성하였다.

 

반면 중도 진영의 분위기는 미소공위 재개를 맞이하여 한층 고무되었다. 우선 이극로, 조봉암 등을 중심으로 중도우익의 군소정당들을 결집하여 제3전선 운동을 펼쳐왔던 ‘민주주의독립전선’의 주도로 중도노선 67개 정당사회단체들이 5월 28일 ‘미소공위각정당사회단체협의회’(약칭 공협)을 발족시켰다. 중도좌익 세력도 여운형을 중심으로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결성하여, 중도좌파세력에게 구심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근로인민당을 중심으로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사회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등 5개 정당은 6월 20일 ‘5당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여 소위 ‘5당캄파세력’을 형성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 1947년 6월 18일 종전 8명으로 구성된 위원에 각 단체를 대표하는 15명의 위원을 보강하여 그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7월 3일에는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을 비롯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0여명이 주로 임정수립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개인자격으로 ‘시국대책협의회’(이하 시협)를 결성하였다.

 

좌익세력은 1947년 초반에 그동안의 파업과 항쟁에 대한 경찰의 대량 검거, 우익세력의 테러 등으로 조직이 파괴되어 활동의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재개됨으로써 다시 한 번 고무된 그들은 주로 자신들의 통일전선체인 민전을 통해 미소공위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속에서 약 70여개에 달하는 좌파의 각종 정당 사회단체들은 물론 남로당의 주장이 주로 반영된 것이었지만 자신들의 주장을 민전을 통하여 동일한 강령으로 집약시키고 있었다. 민전 강령 마련에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미소공위 협의대상 단체에서 친일파 및 반모스크바결정 집단을 제외시킬 것과 공위협의에 응하는 남한 좌우단체의 비율을 5:5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가운데 남북한 각 정치세력들은 미소공위협의 신청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공동성명 제11호는 협의 참가 청원서는 6월 23일까지,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질문서에 대한 답신안은 7월 1일까지 공위에 제출토록 규정하는 한편 공위에 청원서를 제출한 단체들과의 합동회의를 서울에서는 25일, 평양에서는 30일에 개최토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일부 반탁진영은 미소공위 협의 자체를 무산시키고자 시위를 주동하고 나섰다. 이승만과 김구가 중심이 된 이들 불참파는 군중을 동원, 대대적인 반탁시위를 꾀하였다. 그러한 시도 결과 공위 청원서 제출 마지막 날인 1947년 6월 23일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서 반탁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반탁시위는 성공리에 전개되지 않았다. 결국 반탁시위를 통한 미소공위 협의를 저지하고자 했던 시도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이는 이후 공위 협상과정에서 소련 측이 반탁진영의 배제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만을 제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1947년 7월 5일 미소공위의 질문서에 대한 각 정당 사회단체들의 답신안 제출도 마감되었다.

 

한편 제2차 미소공위는 정당 사회단체의 공위 구두협의 신청결과, 명단 작성문제로 다시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들이 과대하게 부풀려진 상태로 답신안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미국 측은 자신을 지지하는 단체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할지라도 이들을 그대로 유지시키고자 하였다. 반면 소련 측은 이에 반발, 공위 구두협의 명단 작성에서 일정 단체들의 배제를 제기하고 나서게 되었다. 6월 말까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위 협상이 이로써 다시 7월초 이래 교착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소련 측의 반탁투쟁위원회 가입 단체 배제주장에 대해서는 완강히 반대태도를 취하였다. 반탁투쟁위원회 가입단체들을 협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공위 협상에서 미소 간 갈등의 최대 현안으로 등장하였다.

 

이 문제로 다시 제2차 미소공위의 교착상태에 다시 빠지자 국내정국은 다시 반전되었다. 우선 공위 재개로 분열되고 위축되던 우익세력은 다시 좌익 세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익 여성단체를 통일하여 결성된 여총에서도 우익 여성단체를 대표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탁치는 절대 배격하며, 찬탁을 주장하는 소수 공산주의자들은 전 국민의 의사에 배치되는 것이므로 반탁진영을 제외하는 것은 민족전체를 무시하는 행위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여타의 다른 우익단체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우익의 공세는 우익 테러의 증가로 나타났다.(양동숙, 144-146쪽)

 


 

1935년 6월에 남경(南京)에서 기존의 통일동맹 대신에 강력한 통일전선 정당을 표방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하고 김원봉(金元鳳), 김두봉(金枓奉), 이청천, 조소앙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혁명당의 실질적 지도자는 서기부 부장으로 당무를 총괄한 김원봉이었지만, 김규식은 통일전선운동 조직으로서의 민족혁명당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민족혁명당은 당강(黨綱)을 통해 ‘봉건 세력과 일체 반혁명 세력의 숙청,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의 소멸, 민중무장의 실시, 토지 국유제,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적 기업의 국영화, 국민 일체의 경제적 활동의 국가통제’ 등을 표방했다. 물론 이러한 방침에는 실제로 민족혁명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의열단(義烈團)의 견해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민족혁명당의 이상의 당강이 김규식의 정치 노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필 이력서」에서 “김원봉과 그의 의열단이 헤게모니를 휘두르는데” 대한 불만을 표했지만 민족혁명당의 노선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것을 보면 김규식은 민족통일전선이라는 대의 아래 자신의 개인적 견해와 입장을 자제하며 의열단 측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중일전쟁(1937)에 이어 태평양전쟁(1941)이 발발하면서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합운동은 활기를 띠며 한층 진전되었다. 우선 임정이 변했다. 즉 종전과 달리 1941년에 제정된 건국강령을 통해 토지의 국유화를 표방하는 등 임정은 좌익의 요구를 폭넓게 수용하는 변화를 보였다. 이로써 민족통일전선이 더욱 확대 발전할 소지가 마련되자 민족혁명당도 종래의 입장을 바꾸어 임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민족해방운동 세력 결집을 주장했던 터라 김규식은 다시 임정에 참여하였고 1942년 10월 임정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43년 1월 임정선전부장이 되었고, 1944년 2월에는 임정 약헌 개정에 따라 새로 마련된 부주석에 올랐다. 김규식은 임정의 부주석 자격으로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했고 그해 11월 23일 임정요원 제1진으로 환국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지 32년 만의 귀국이었다.(윤경로, 71-72쪽)

 


 

 

 

1차 미소공위가 1946 년 5월 6일부터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의 정책은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동위원회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계속된 토론을 통해 소련 당국자들은 한국이 4대국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의 모든 정치 단체들이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남한 정치가들의 반탁 의사 때문에 신탁통치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 온 미군정 사령부와 달리 소련 측은 신탁통치가 모스크바 결정이라 주장하고 이에 대한 변경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랭던은 1차 미소공위 휴회 이틀 후에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제안했다. 신탁통치의 중요성에 대한 소련 측의 주장 때문에 랭던은 이제는 미국정부가 유보기간전체 혹은 일부기간 동안에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확고한 결정을 내려서 공동위원회의 미국대표로 하여금 모스크바 결정에서 제항에 위임되어 있는 주제 신탁통치 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리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전했다. 그 이유는 소련 측의 주장 이외에 한국인들의 행정관리를 위해서는 2-3 년 간의 기간이 필요하며 또 북한 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는 절대주의적인 정권이 전한국의 임시정부의 권위에 도전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랭던은 한국민이 신탁통치하에서 임시정부가 누리고 있는 커다란 권위를 보게 될 때 그들은 대부분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랭던의 이 보고서에 첨부된 러치 장군의 비망록에서 러치 장군은 랭던 보고서에 대해 공식적으로 동의 했으며 한국인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만 회의를 표현했다. 러치는 만약에 미소공위는 한국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향후 2년간의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고 발표한다면 남한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따라서 러치는 큰 충격을 받게 될 한국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이 지금부터 상부에서 취해져야 할 것이며 그것은 신탁통치 란 단어를 일단 회피하고 신탁통치로 발전할 수 있는 자세한 시간계획표를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라는 말은 연합국한국위원회 란 표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인들이 신탁통치 로 발전할 이러한 계획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이러한 발언은 미국정부의 최상부로부터 나와야 된다고 거듭해서 강조했다

2주 후에 좀 더 구체화된 미군정의 정책 구상이 랭던의 전문을 통해 국무부로 전달되었다 이 정책을 요약하자면 남한에서는 온건한 애국인사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며 이들의 진정한 연합을 형성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먼저 남한에서의 정계의 통일 각 정당의 세력으로서의 행정관리에 참여하고 그 다음에 가능하다면 그들의 통일된 권위를 통해 북한과의 통일에 대한 압박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미군정에 따르면 이러한 정책으로 좌익 진영의 온건 좌익 단체와 좌익 민족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분리시켜 공산주의자들을 정계에서 소외시키려는 것이었다.(페테로바 아레나, 82-83쪽)

한편 미 국무부와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에 임하는 국내세력의 동기(이정식 2006, 327-335) 및 추진과정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 시발부터 개입하였다. 그 배경으로는 당시 미국의 극동정책, 즉 미국의 재정 및 인적 투자 없이 미국의 대외이익을 손상 받지 않고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정책을 들 수 있다. 특히 미국은 국부군과 공산군으로 나뉘어 내전을 치르고 있던 對중국정책에 있어 국공합작에 의한 정부수립을 기저로 삼고, 특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 원칙이 한반도문제의 해결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46년 5월 20일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미군정이 한국문제해결의 한 정책으로서 극우․극좌를 제외한 세력을 결집, 좌우합작정부를 구성하여 임시정부를 수립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미․소의 철수 뒤 한국(미국에 우호적인)을 독립시키기 위한 공작을 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미국에 있어 주변적 가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유럽에 집중시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1947년 국내정국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좌우합작에 의한 임정수립이란 당시의 정책이 쉽사리 달성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국내 상황 속에서 국제정세의 새로운 흐름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이 정책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즉 1947년 유럽 정세가 미․소의 이념대립이라는 냉전이 본격화되어 미국으로서는 유럽지역에서의 봉쇄정책에 전력을 기울이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유럽의 부흥과 봉쇄는 전략적 가치 면에서 어느 지역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 명명된 정책을 통해 인적․물적 자원을 이 지역에 총동원했다. 따라서 전략적 가치가 미미했던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한 지원은 특히 미 의회를 중심으로 적극 저지, 얼마 안 되는 원조계획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매트레이 1989, 145-146).

미국은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반도문제의 새로운 해결책으로 기존 정책을 포기하고, 이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미국은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또 적극 개입하기를 꺼려했던 한반도의 전후처리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 손을 뺐던 것이다. 여기에 중국 대륙에서 국부군이 공산군에 계속 몰리는 상황이 전개되어 국공합작 정책의 실효성이 없어짐에 따라 미국은 중국에서도 손을 떼었다. 국제정세의 이러한 전개가 이와 맞물려 진행되고 추진되었던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 중 하나였던 좌우합작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이후 이 정책은 어떤 양상을 보였을까는 충분히 추론 가능할 것이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이행에 있어 갈팡질팡했고, 표류를 거듭하다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손을 떼고 나감으로써, 1945년 8월 미․소 양군 점령지역의 경계선으로 38선을 제안하여 한반도를 1차 분단시킨 데 이어, 1948년 남북 분단정권 수립에 일조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황의서, 339-340쪽)

 

 

 


 

⑶ 통일전선

 


 

 

 

공산당이 우파를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당도 좌파는 물론 중간파와의 협력도 일체 배제했다.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 국내 정당간 통합운동이 본격화된 이후에도 한민당은 國民準備會이외의 좌우정당협력에 대해서는 냉담한 자세를 보였다. 10월 5일의 4대정당 당수간담회 개최 시에도 한민당은 처음에는 출석거부의 태도를 보였다. 이유는 “여운형이 인공성립을 잘못하였다고 서면으로 도장을 찍어 가져오지 않으면 절대로 공식회담에 참가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4당대표 모임 후에도 한민당은 4당간에는 아무런 합의가 없으며 4당간 의견접근은 없다고 못을 박아 좌파와의 협력에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나 한민당 내 중간파 인사들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인정했다. 10월 13일 김병로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견과 정당이 달라도 협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으며 공산당은 과거 일제를 상대로 투쟁한 업적이 현저하고 노동자 농민 및 근로대중의 이익을 잘 파악하고 있다”며 공산당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귀국은 한민당의 좌파 배제적 태도를 더 강화시켰다. 이승만의 귀국을 계기로 각 당 영수회담이 10월 18일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한민당은 인공이 정식 해산하기 전에는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는 이유로 1차 회합은 무산되었다. 대신에 한민당은 이승만 환영 등 해외 인사를 맞기 위한 국민대회준비활동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국민당과 장안공산당과의 협력을 추진하였다. 10월 24일에는 중경 임시정부를 전면 지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3당간 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주요 좌파세력을 배제한 연합전선을 노골화했다. 이에 공산당은 3당성명을 공산당을 고립시키기 위한 국민전선결성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했다.

친일파문제에 대한 한민당의 침묵과 좌파배제 일변도의 행태는 한민당 내에서도 일시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26일 열린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金武森은 중협결성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당내 정화가 필요함을 제기하고 나섰다.(남광규, 121쪽)

 

 

 

중간파의 실패는 구조적 차원과 행위적 차원에서 동시에 발생했다. 중간파가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國際的水準에서 중간파 노선에 충실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국가수립으로 나아가 국제세력과 충돌하여 국가수립을 위한 국제조건의 ‘허용 범위’를 이탈한 점이다. 국제세력들이 협조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고 국내정치세력들이 서로 참여할 수 있는 내외협력노선에서 벗어남으로 결국은 극좌와 극우로 중간파의 힘이 경도 당하고 중간파 자체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중간파는 결과적으로 國內政治의 兩極化에 기여하고 말았고 그럼으로써 美蘇冷戰體制가 강화되기 이전에 國內冷戰體制가 고착되었다.

 

중간파의 구체적인 실패는 建準의 人共으로의 변화가 1차 요인이었다면 臨政의 自主政府樹立이 2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인공수립은 여운형의 ‘정치적 실패’로 신탁정국기 정부 수립은 김구의 ‘정치적 실패’로 규정할 수 있다. 우선 국내외 조건이 미성숙 된 시점에서 중간파의 건준이 인공으로 좌편향 되어 이후 국내외 중간파세력 분열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국내적 분단의 씨가 뿌려 졌다. 여운형의 ‘인공’수립이 중간파의 실패원인 중 국내적 영역에 해당한다면 국제세력과의 적합성 여부로 본다면 임정의 자칭 ‘정부수립’이 중간파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국내외 조건이 국가건설에 유리했던 신탁정국의 시점에서 중간파 세력인 임정이 임정주체 과도정권을 고집함으로써 결국 국내정치세력이 좌․우파로 양극화 되고 국내세력과 국제세력의 분단적 대치를 초래하여 내외적 분단체제의 틀을 형성시켰다.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국가수립의 내적․외적 조건이 가장 접합될 수 있었던 신탁정국기의 실패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중간파책임 중 김구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간파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견제와 정치공작이 극심했지만 여운형은 건준을 일종의 준비위원회로 그 중도노선적 성격과 좌우협력적 요소를 유지 했어야 했다. 김구는 임정이 실질적 권위체보다 상징적 구심체가 되더라도 국제세력과 협력하고 좌우를 교통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결국 해방 초 중간파의 정치노선은 관념상의 외세협조․좌우협력적인 중간파 좌표와 실제 행동상의 반외세․좌우추동적 좌표를 오갔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중간파 범위의 이탈에서 중간파 정치세력의 실패 요인을 찾을 수 있다. 1장에서 구분한 중간파 범위의 정치세력에서 주요 시기에 여운형이 외세배격적 급진정치세력으로, 김구가 외세배격적 보수정치세력으로 이탈한 것이 실패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중간파의 정치이념은 결국 근본적으로는 ‘反外勢民族自主’라는 國內主義노선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외노선에서의 미소협조도 그것이 해방의 타율성이라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次善策’으로 택한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김구는 先외세배제의 입장을, 여운형은 後외세배제라는 방법상의 차이를 보였다. 중간파의 내심은 실제 韓國民族主義라는 政治的理想主義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해방의 현실적 상항에서 부득이 국제세력들의 협조를 인정하는 現實主義的選擇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민족주의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자기 주장인 국가수립의 문제에 부딪히면 ‘중간파적’ 현실주의는 냉정함을 상실하고 정치적 이상주의로 반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외노선에서의 중간파 인식과 실천의 불일치는 國內的水準에서는 협력대상과의 불일치로 나타났다. 중간파 정치세력이 약화된 가장 큰 내적 요인은 본질적으로 정치노선이 다른 극좌파와 극우파와의 협력을 도모한데 있다. 중간파의 좌우협력은 중요한 시기에 중간파의 좌파경도, 우파경도로 전이되면서 오히려 극좌파와 극우파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좌파, 우파와의 협력모색이 역설적으로 중간파 실패의 요인이 됨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중간파는 오히려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좌․우파와 구분하여 중간파간 통합을 이루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중간파 자체의 협력실패가 좌우에 대한 統合的中心을 상실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미군정 하의 國內的現實政治構造에서 중간파는 極右派를 견인하면서 極左派와의 차별성을 추구했어야 군정과도 호응하여 국내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할을 미국무성과 미군정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에게 기대했고 실제 그러한 구조로 국내정치를 재편하기 위해 中道左派인 여운형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이는 임정으로서도 가능한 정치적 영역이었다. 그런 점에서 역으로 극좌파를 견인하려 하면서 극우파와의 차별성을 추구한 여운형노선은 자체 역량이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한 미군정 하의 남한정치구조에서는 불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중간파 정치지도자인 김구와 여운형의 국내정치적 전략부재와 정치적 리더십의 결핍은 내외적으로 실현가능한 중간파 정치역량의 범위를 협소화 시켰고 좌파와 우파에 정치 기반을 잠식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중간파는 좌우협력을 도모하기 이전에 먼저 中間派間協力을 이루어야 했다. 중간파인 여운형과 김구가 人共과 臨政을 통해 左右對決構造로 편입된 데서 중간파의 실패는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즉, 여운형의 협력상대인 박헌영과 김구의 협력상대인 이승만은 본질적으로 중간파와 대비되는 外勢依存的分斷勢力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협력을 얻고자 한 것에서 중간파 실패의 요인이 있는 것이다. 김구와 여운형은 민족국가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동질적인 정치노선과 실천세력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한번도 접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각각 이승만, 박헌영에게 끌려간 것이 국내적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중간파의 통합적 결집체가 없이 시도한 좌우협력은 결국 중도 좌파는 극좌파에, 중도 우파는 극우파에 편입 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중간파는 국내정치세력들간 통합적 노력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협력 대상인 극좌․극우 정치세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들 세력이 중간파가 추구하는 국내적 통합과 국제적 협력을 통한 통일국가수립노선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깊은 분석과 전략이 부재하였다. 중간파가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구분되지 못하고 좌파와 우파에 뒤섞임으로 중간파 노선과 중간파에 대한 일반 민중의 지지가 마치 좌파와 우파에 대한 지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간파는 중간파 노선에 근접한 동질적인 정치세력을 결집하여 좌파, 우파와 구분되는 정치세력 및 노선을 분명하게 보여주어 일반으로 하여금 좌․우파와 구분하여 선택케 하는 정치운동을 실천했어야 했다. 반면에 좌파의 박헌영은 초기부터 사회주의혁명노선의 극단을 치달았는데 이는 이승만의 극우노선과 마찬가지로 통일전선이 분열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韓民黨과 共産黨은 민족연합전선의 성공을 타방으로의 주도권 포기로 인식하여 실제 가장 두려워한 것은 民族聯合戰線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과 박헌영의 해방 초 정치투쟁은 실제 좌우투쟁이 아니라 우파 내, 좌파 내 투쟁으로 초기 해방정국은 좌우대립의 외피를 두른 우파 내, 좌파 내 대결과정과 그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좌파와 우파간 세력투쟁의 양상은 중간파의 향배로 결과 되었다고 볼 수 있다.(남광규, 207-209쪽)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운형은 새로운 민주주의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좌우익의 연합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운형은 무조건적으로 연합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독선주의자와 반동분자를 철저히 배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연합은 현상유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이러한 그의 신념에 의해 민족반역자와 사대주의, 배외사상을 배격하고,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에 주력하였다.

 

여운형의 민족통합주의는 해방부터 그가 암살당할 때까지의 모든 정치활동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로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좌우합작운동인 것이다. 46년 1월 인민당을 포함한 좌익세력은 민전을 설립하였다. 여운형은 민전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우익의 민주의원과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좌우익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과도입법기구 수립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어 좌우익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중간좌익과 중간우익의 합작은 꾸준히 이어졌으나 여운형의 암살과 함께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유연희, 32-33쪽)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투쟁의 표준을 민족혁명에 둔다는 전반적 방침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나 이것을 활동에 세부적으로 적용함에 있어서는 우경적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활동의 중심이 신간회 활동을 통해 각계 각층의 대중운동과 결합하여 그 진지를 강화하고 이들간의 연대와 공동투쟁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전선 내의 동요를 극복하고 통일을 도모하기보다는 인사들 간의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전선전술을 적용함에 있어서도 대중획득이라는 본래의 의의를 상실하고 상층 연합이나 선진분자의 결합 정도에 그쳤던 것은 아니었을까?(정용욱, 95쪽)

 


 

단편적이지만 이상의 보도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해방정국의 최대과제로서 제기되고 있던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대한 임정의 입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첫째로 임정은 망명정부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워 남북한을 통합한 과도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둘째로 임정은 그들의 입국 이전 국내의 통일전선을 주도하던 박헌영의 공산당 및 이승만의 독촉중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특히 이승만과 박헌영의 통합노력이 12월 중순에 결렬되면서 임정은 섣불리 어느 한쪽과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다. 셋째로 임정은 좌익계열과의 통합에 있어서 인민당의 여운형과 연안에서 입국할 조선독립동맹의 金枓奉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넷째로 국내의 보수우익 세력을 대표하던 한민당이 임정 봉대에 가장 적극적이었지만, 환국 초기 임정은 한민당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이것은 한민당에 대한 국내혁명세력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합해 보면, 임정은 환국 후 좌우의 극단세력을 배격하고 중도적인 정당 및 단체의 지도자들을 망라하여 전국적 범위의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의 수립 여부인데, 시기적으로나 각 정파간의 입장 차이를 고려할 때 그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은 당시 다른 어떤 정치세력들보다도 통일전선형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임정 주도의 통일전선형성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고정휴, 59쪽)

 


 

이때부터 본격화된 반탁운동은 한편으로는 반소‧반공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임정추대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즉 12월 29일에 처음 열린 반탁위원회(임시의장 안재홍)에서는 임정에 대하여 ‘즉시 주권행사’를 하도록 간청한다는 건의안을 채택했다. 12월 30일에는 반탁위원회의 중앙위원회(위원장 權東鎭, 부위원장 안재홍‧金俊淵)가 구성되고, 다음날 이 위원회의 주관으로 반탁시위대회가 열렸다. 수만 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는, “3천만 국민이 절대 지지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로서 세계에 선포하는 동시에 세계 각국은 우리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반탁운동이 이처럼 임정추대운동으로 전개되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한민당과 국민당 등 보수세력들은 임정을 내세워 반탁운동을 전개할 때에만 이 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둘째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즉시독립을 요구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정권을 인수할 기구가 필요했다. 임정이 보수우익들과 손을 잡고 반탁운동에 적극 나섰던 것도 후자의 이유에서였다.(고정휴, 68쪽)

 


 

1920년대 후반 중공중앙은 동북지역에 중공만주성위를 설치하고 기층조직건설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립하고 ‘민족민주혁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혁명연장론’에 입각한 만주총국의 혁명운동은 동북지역 조선족의 실정, 특히 중국혁명의 실제와 연계시켜 효과적인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하지 못하는 한계를 나타냈다. 이 무렵, 코민테른 제6차 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1928년 12월 코민테른집행위원회정치서기처에서는 「조선문제에 관한 결의」와 「조선 혁명공인과 농민에게 보내는 글」(「12월테제」)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코민테른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반드시 당내에서의 파쟁을 극복하고 소자산계급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노농민중을 토대로 한 진정한 볼셰비키화한 당을 재건할 것을 촉구하였다. 사실상 조선공산당의 공산국제의 지부자격을 취소하였던 것이다. 그 후 상해와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각 파별로 당재건위원회를 건립하고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돌입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실정에서 동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국면을 타개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때 이들 앞에 제기된 문제가 바로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의한 중공 가입 문제였다.

 

중공만주성위는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을 집행하기 위해 1930년 1월 하얼빈에서 “재만중한공산당간부연석회의”를 개최하였으며, 동년 3월에는 길림에서 “동북성중한공산당연합집행위원회”회의를 개최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4월 만주성위는 「소수민족운동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지역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원들의 중공 가입과 혁명사업을 지도하였다. 결과 원 조선공산당만주총국산하의 ML파‧화요파‧서울-상해파는 선후로 해체선언을 발표하고 중공조직에 가입하였다. 중공만주성위는 조선공산당원들의 중공 가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된 이중사명의 중요성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공만주성위는 1931년 2월 조선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하고 「중공만주성위조선공작위원회의 조선국내공작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하였다. 그후에도 중공만주성위는 조선국내 공작에 관한 갖가지 「결의안」을 통과하여 조선혁명을 지원하는 것이 중국당 특히는 만주당의 제일 중심적인 실제임무의 하나임을 거듭 강조하였다.(김춘선, 69-70쪽)

 


 

변혁운동은 당면 정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그에 근거한 현실성 있는 목표수립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운동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을 수행할 조직이 있어야 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8월 테제」에서 정세분석과 혁명의 목표 설정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조직과 실천에 관한 것이다. 박헌영은 상기한 정세분석에 기초하여 대중운동 전개, 조직사업 실행,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획득, 인민정부 수립을 조선공산당의 당면 임무로 제시한다. 이 가운데 궁극적인 임무는 인민정부수립이며, 그것을 통한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이다. 그런데 당시 남한의 정치상황에서 인민정부의 수립은 인민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이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그러한 투쟁이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개되기 위해서는 각 방면에서 대중운동을 일으키고, 대중을 조직화하며, 조직화된 대중을 지도할 강고한 전위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면, 문제는 그러한 투쟁을 조직적, 통일적으로 지도할 강고한 전위세력의 구축에 있을 것이다. 그가 전국적으로 통일된 볼셰비키당의 건설을 공산주의자의 첫 번째 과업으로 설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확고한 전위당이 건설된다면, 다음 문제는 당이 대중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있다. 이 지점에서 대중운동과 조직사업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가 구상한 조직사업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야체이크로부터 중앙위원회로 이어지는 당의 기본조직을 건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기본조직과 연결된 다양한 보조적 대중단체를 조직하는 것이다. 두 층위의 조직을 매개로 한 대중운동의 전개는 당의 대중적 기반 확대, 즉 당의 대중화를 의미한다. 이처럼 박헌영은 당의 기본 및 보조 조직을 통한 통일적 대중운동의 전개를 조선공산당의 당면 임무로 제시했는데, 조직 건설과 대중운동 전개 문제는 이후 각 부문운동의 핵심과제로 인식, 실천되었다. 그러므로 「8월 테제」는 해방기 문화운동을 비롯한 여러 부문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나침반 역할을 했다.(박정선, 437-438쪽)

 


 

1928년 12월테제를 계기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농동맹을 통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즉 反부르주아적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으로 조선혁명을 정식화했다. 민족혁명에 내포된 사회혁명으로서의 성격을 극대화시킨 이 같은 정식화는 결국 민족혁명을 사회혁명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과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동맹을 만드는 활동 사이에 차이가 없어짐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의 전위조직인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이자 동시에 민족혁명의 유일한 지도기관으로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민족혁명이라는 목표에 포괄되어야 할 다양한 민족주의세력이 민족혁명의 과정에서 오히려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인식이 불러온 결과였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 자신은 이제야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 자신이 민족혁명가이자 동시에 사회혁명가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데, 이 두 성격의 조화가 쉽사리 보장되기 때문이다. 민족혁명은 노농동맹이라는 사회혁명의 동력으로 수행되어야만 하며 그럴 때에만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목표가 중도에 변질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는 테제는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적어도 그들의 생각 속에서는 통일시켜 주었다.

 

현실에서 민족혁명과 사회혁명 사이의 거리를 사회주의자들이 인식하게 된 계기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방향전환 그리고 중일전쟁이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반제민족통일전선이라는 방침이 제국주의에 대한 모든 민족적 불만을 조선혁명을 위한 힘으로 삼는다는 목표하에 현실성을 띠게 된 것이다. 8․15 해방은 반제민족통일전선이라는 방침이 제기하는 두 가지 질문, 민족혁명을 위해 공산당에 대립되거나 때론 적대적인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인정해야 하는가. 그리고 민족혁명을 위해 사회혁명의 과제는 적절히 유보되면서 조절되어야 하는가(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적절함’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현실정치의 문제로 만들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정치세력과 경쟁하는 법, 사회혁명의 힘을 민족혁명을 위해 적절히 동원하는 법, 이 두 가지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으며 때론 상당히 서투른 모습을 보였다.(류준범, 130-131쪽)

 


 

 

 

1935년 7월 중국관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연합 조직으로 (조선)민족혁명당(1935)이 출범했다. 민족혁명당에는 한국독립당(조소앙, 김두봉등), 의열단(김원봉, 윤세주 등), 조선혁명당(최동오, 김학규 등), 신한독립당(지청천, 신익희 등)이 참여했다. 중국관내 주요 세력이 거의 망라된 셈이었다. 김구 등 한국독립당 안의 임정 고수파가 참여를 거부했고, 창당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분열로 신한독립당 등이 이탈했지만 적어도 민족혁명당은 창당 초기에는 중국관내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전선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혁명당의 강령에는 좌우파가 모두 동의한 최소한의 합의가 반영되어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당의를 통해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평등을 확보 하겠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그리고 당강을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밝혔다.

1) 구적(仇敵)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한다.

2) 봉건세력과 일체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민주집권의 정권을 수립한다.

3)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하는 경제제도를 소멸하여 국민생활상 평등의 제도를 확립한다.(중략)

6) 국민은 일체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7) 국민은 언론, 집회, 출판, 결사,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8) 여자는 남자의 권리와 일체 동등하다.

9) 토지는 국유로 하여 농민에게 분급한다.

10)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적 기업을 국영으로 한다.

11) 국민 일체의 경제적 활동은 국가의 계획 하에 통제한다.

12) 노농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중략)

14)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은 국가의 경비로써 실시한다.(중략)

16) 국적의 일체 재산과 국내에 있는 적 일본의 공․사유 재산은 몰수한다.

민족혁명당에서 추진하고자 한 민주공화국의 핵심은 봉건세력과 반혁명세력을 몰아내고,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는 데 있었다. 또한 민족혁명당은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사람을 수탈하는 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농민에게 분배하고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기업을 국영화하려고 했다. 여기서 민족혁명당에의 참가를 거부한 김구 중심의 임정 고수파가 대안으로 만든 한국국민당도 당의에서 정치․경제 및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공화국을 건설 하고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해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한다 는 방침을 밝힌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의 방침에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1930년대 중반이면 중국관내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여러 세력이 이념적 지향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비슷한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이준식, 156-157쪽)

 

 

 

셋째, 6월항쟁에서 전국적 규모의 통일적 조직체를 처음으로 건설할 수 있었다. 국본의 결성이 그것이다. 국본은 6월항쟁과정에서 대중적 상징성을 가지고 통일전선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최초의 전국적 대중조직의 결성은 이후 사회 각 부문과 지역간 연대운동의 틀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국민연합 등 연합기구의 구성은 대중운동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 단초가 6월항쟁 시기의 국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6월항쟁을 통해 사회 각 부문운동, 그리고 계급운동이 분화되고 조직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운동은 각 대학간 느슨한 연대틀이 전대협, 한총련으로 조직되어 전국적이고 집중적인 조직화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6월항쟁의 부분적 승리로 인해 열린 공간에서 분출된 7, 8월 노동자대투쟁과 여의도 농민집회는 계급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임금인상과 작업장의 민주화을 이룩한 노동자대투쟁은 6월항쟁이라는 정치적 민주화의 영향을 받았다. 즉, 6월항쟁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경제적 민주화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윤모린, 66쪽)

 


 

다시 말해서 6월항쟁은 대중들의 집합행동을 통해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 대중의 중심에는 국본 이 있었다. 국본은 반(反)독재연합전선 의 구심체로서 전두환정권의 독재, 폭력성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대중들을 결집시켰다. 국본의 구성원들은 6월항쟁 이전부터 쌓아왔던 사회적, 개인적 관계망을 통해서 사회각계의 조직들을 연대의 틀속에 묶었다.

 

특히 민통련, 민청련의 재야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보수야당(통일민주당), 학생운동조직, 종교계 등이 국본을 구성하였고, 이들 운동조직의 연대활동은 국본이 실질적으로 반독재연합전선의 구심체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국본은 대규모 집회들을 결성하고, 직선제개헌․독재타도 라는 최소주의적 목표, 온건주의적 이데올로기, 투쟁전술의 개발 등을 통해 많은 대중들이 실질적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게 하였다.

 

이것이 국본이 대중을 동원, 참여시킨 동원기제 및 전략․전술이자 국본이 6월항쟁에서 행한 역할이었던 것이다.

 

물론 국본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국본은 명망가 중심의 구성원으로 조직되어 상층연합전선의 내부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통일된 정치이념을 가질 수 없게 하여 급속하게 변동하는 사안별 정세판단에 크나큰 오류들을 가져오게 했다.

 

국본의 성공과 실패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곧 국본의 성공요인이 나아가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국본의 실패요인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먼저 국본 구성원의 문제를 보면 국본은 상층연합전선으로서 출발하였다. 국본 구성원들은 그간 사회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민주화운동을 해 오던 명망가들로 대중들의 믿음과 정당성을 얻고 있었다. 명망가들의 집합체였던 국본은 구성원들의 신뢰와 권위가 그대로 운동조직에 이어져 대중들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았고, 또한 합법적인 보수야당과의 연대를 통해서 무리없이 정치적 구심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국본은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꾸려진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대중의 정치적 의사를 올곧게 수렴할 수 없었다. 또한 국본의 구성원들인 명망가들은 명망가일 뿐이지 실질적 조직력은 미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은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는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도덕적 관념주의자 들이었기에 현실적 측면에서 보수야당에게 이용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직선제 개헌의 쟁취, 절차적 민주주의의 획득은 궁극적 목표가 대권(大勸)인 보수야당의 목적을 획득시켜준 셈이었다. 그리하여 보수야당은 곧 국본과 결별하였고, 이후 국본은 진정한 정치적 구심체, 반독재연합전선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정치적 대표부로서 어려움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국본의 이러한 인적 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통일전선운동에서 지나친 계급환원론적 사고 의 팽배는 대중조직화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본은 하층통일전선의 강화를 통해서 상층통일전선의 계급성을 극복하고 대중을 보수야당으로부터 민족민주운동전선으로 이끌어야 했다고 보아진다.

 

둘째, 6월항쟁의 정치적 목표인 슬로건의 문제이다. 국본은 최소강령주의로서 호헌철폐․직선제 개헌 을 내세웠다. 군부독재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겠다는 온건노선이었다. 물론 이러한 최소강령주의, 온건 노선은 대중성을 확보하고 6월항쟁에 많은 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군부의 입장에서도 국본이 내건 투쟁목표가 정권의 퇴진 이 아니라 정권교체의 방식에 관한 것이었기에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본이 행한 낮은 차원의 요구는 대중의식의 발전과 민족민주운동이 가진 운동역량의 상승을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직선제 개헌 에 직접적인 이익이 맞물려 있던 제도야당과 연합함으로써 대중들에 대한 제도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 주었다. 그리하여 국본은 직선제 개헌 이후 모든 실질적 대중장악력과 성과물을 보수야당에게 빼앗겼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그들의 영향력을 지속시켜 제도야당을 보다 민주적인 개혁으로 나아가도록 견인하지 못하고 스스로 와해되어버리거나 제도야당에 흡수되었다.(윤모린, 81-82쪽)

 


 

제2기 문화대중화운동의 실천론으로 제기된 것이 문화서클운동론이다. 사실 문화서클은 해방 직후 문건협에 의해 ‘문화집단’으로, 문학가동맹에 의해 ‘맹우회’로 지칭되면서 문화대중화운동의 구체적 실천방침의 하나로 제시된 바 있다. 문화서클과 같은 소모임이야말로 “예술가 양성의 온상인 동시에 우리의 정치노선을 삼투시키는 한 개의 말단기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전문적 문화운동과 대중의 자주적 문화활동이 결합하는 ‘고리’, 문화운동과 정치운동이 결합하는 ‘고리’, 대중으로부터의 문화적 일꾼과 정치적 일꾼이 무한히 쏟아져 나올 저수지로서의 ‘고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인식이 일찍부터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서클운동은 해방 후 일 년 동안 당위적 차원에서 논의만 되었을 뿐 실제적인 성과는 별로 없었다. 이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모색의 촉구가 제2기 문화대중화운동의 출발점에서 김영석에 의해 제기된다. 김영석의 「문화서클의 성격」은 해방 후 일 년간의 문화대중화운동을 자기비판하고, 대중화의 구체적 실천으로서 문화서클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것을 제안한 글이다. 김영석은 이 글에서 문화 내지 문학서클이 전문가 집단인 것처럼 해석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전문가의 ‘소그룹’과 일반대중의 ‘서클’은 분명이 다른 것인데, 이것이 혼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서클은 어떠한 모임인가? 그에 의하면 문화 내지 문학서클은 “대중의 문화,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대중의 문화, 문학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대중 자신의 조직체”이며, 그 목적은 “대중의 계몽과 문화와 대중과의 조직적 연락”에 있다. 김영석의 말처럼 문학자들만의 그룹으로는 대중과 결합할 효과적인 방안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김영석은 우선 창조해야 할 서클은 ‘문화서클’이고 이 문화서클에 문학자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문화서클은 전문가집단이 아니므로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제하는 것은 피해야 하며, 회원도 전문가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된다면 서클은 와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필요는 있다. 따라서 “신축성 있고 탄력성 있는 참으로 대중적, 자주적인 서클”이 될 수 있도록 문학자는 문화운동의 목표와 방향은 견지하되 그것을 일방적이고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독선적, 독재적 태도가 아니라 유연하게 관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화서클의 지도 및 운영에서 서클의 오락적, 위안적 기능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자생적 문화소집단을 문화서클로 전환하는 문제, 반동서클의 자주화 방법 등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문제는 문화서클운동에 참가하는 문학자들의 실천적 경험과 창의적 노력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김태준도 문화대중화운동이 문화서클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고 서클 조직화에 대해 논의한다. 김태준이 말하는 서클운동 전개 방법은 간단히 말해 “대중 속에 들어가서 대중을 가르치며, 대중에게 배워야 할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대중계몽의 내용은 문맹퇴치,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며, 대중에게 배우는 것은 그들의 삶과 의식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가 소부르주아적 근성을 극복하고 진실로 인민적인 작가로 자기를 개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남천 역시 문화서클을 “대중단체의 조직적 저수지”로 규정하고, 이 사업에 문화단체뿐만 아니라 대중단체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단체의 조직적 과제가 “다수자 획득”인 만큼 문화서클은 다수자 획득의 한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박정선, 455-456쪽)

 


 

조공은 인민공화국을 완결된 권력체로 보지 않았다. 박헌영은 미주둔군 사령관 하지와의 대담에서 조공과 인민공화국은 아무런 특별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은 인민공화국이 장차 수립될 정부를 준비하기 위한 학교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민공화국은 미군정청에 대립하는 기관이아니며 인민공화국은 한국에서 동맹국들의 군정기간이 종료될 때 수립될 미래의 정부를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조공의 권력구상은 민족통일전선의 이론으로 제기한 ‘인민정부론’에 집약되어 있다. 이것은 조공이 정권수립을 가장 긴급한 과제로 제기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전국적 범위에서 정권수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하며 해방 후 새 조선은 ‘혁명적 민주주의의 조선’의 조선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민주당과 같은 반민주주의적 경향의 반동단체는 반동성을 폭로해 반대투쟁을 일으키고 “정권을 인민대표회의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투쟁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주아지와 싸워야 하며 민족 및 사회개량주의자의 영향 밑에 있는 인민대중을 공산당으로 획득하기 위해 그들의 개량주의적 본질을 비판하고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정부’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고 도시소시민과 인텔리겐차의 대표와 진보적 요소는 모두 참가하는 민족통일전선으로 결성되어야 한다. 이런 정부라야 근로인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고, 이것이 점차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으로 발전해 혁명의 높은 정도로의 발전을 보장하는 전제조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조공은 인민정부 건설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인사들의 범주를 네 부류로 제시했다. 첫째는 절대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의 잔존세력과 친일파의 근절을 철저히 주장하는 사람, 둘째는 조선 인민을 위해 민족을 위해 실천적으로 일하는 사람, 진정한 인민을 위한 일꾼으로 대중이 인정하는 사람, 셋째로 국제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 넷째 일본제국주의자와 가장 격렬한 싸움을 싸운 조공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 등이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지주이건 자본가이건 상관하지 않고 뭉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침 없는 통일, 무조건 통일에 반대하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전민족의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민정부의 대중적 기반을 조공 지지세력으로 한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요소를 충족시키는 여러 혁명세력을 민주주의적 토의 위에 정당히 평가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약법에 따라 1년 이내에 국민총선거를 통해 ‘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조공의 마스터플랜이었다.(이현주, 89-90쪽)

 


 

공산당 재건과정의 조급성은 인민공화국의 선포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재건파는 조공이 재건되기도 전에 건준과 협력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공산주의에서 통일전선이란 조직‧사상적인 자기세력화가 선행된 뒤에 제기되는 것이 순서임을 감안할 때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조공은 인민공화국을 ‘인민정부론’에 기초하여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구성원 전체가 망라되는 민족통일전선으로 구상했다. 그러나 인민정부에의 참여요건의 하나로 조공에 대한 지지를 제시함으로써 인민정부의 대중적‧계급적 기반의 범위를 좁히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남한 내 배타적 유일정부임을 자처하는 미군정의 부인과 각료의 태반이 취임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인민공화국이 인민정부의 완결체일 수는 없었다. 권력의 완결체로 간주하지 않는 한 인공을 광범위한 민중적 기초 위에 민족통일전선으로 확대 강화하는 것은 조공이 당면한 급선무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조공은 미군정의 후원 하에 이승만이 주도하는 독촉중협 참가를 시도했다. 독촉중협 속에서 인민공화국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여의 조건으로 인민공화국의 해산을 요구한 미군정과 이승만의 요구로 조공은 독촉중협 참여를 포기했고 인민공화국을 광범한 대중적 기초위에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강화하려던 조공의 계획은 위기를 맞았다.

 

중경임정과 인민공화국은 다른 정치사상과 상이한 계급적 기반에 더하여, 양자 모두 정부권력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둘 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추구하고, 대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등 핵심적인 경제정책이 동일한 점에서 보면 협력의 가능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협력의 가능성이 배제된 데에는 이념과 정책, 완고하게 법통만을 내세우는 임정의 고집, 인적 구성의 이질성 등 못지않게, 임정이 8‧15 해방 직후 민족 구성원 사이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조공의 박약한 역사의식에도 있었다.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도 혁명의 헤게모니는 노동자계급이 갖는 다는 것은 공산주의 이론의 상식에 속하는 것인데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외치다 느닷없이 임정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안파공산당의 행태는 이러한 혼란상이 극에 달한 사례였다.

 

8‧15 해방에서 같은 해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는 조공이 민족통일전선운동 등의 정책과 노선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선택과 결정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과거 공산주의운동의 파벌의식과 자파 우월주의, 편협한 교조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의 폭을 크게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이현주, 108-109쪽)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순수형 연립단계 시기의 김일성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보면 김일성이 입북하기 전 하바로크스크의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이미 면접하였고 9월 초순 스탈린도 면접하여 김을 낙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입북한 이후에는 소련은 북한의 독자적인 정당으로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을 10월 13일 설치하여 그의 위상을 강화시킨 후 다음날인 14일에는 그를 대중 앞에 공개시키는 것도 연출하게 된다. 더 나아가 12월 중순에는 김일성을 분국의 책임비서로 임명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의 북한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소련은 이 시기에 토착민족주의자인 조만식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9월 20일자 지령대로 철저하게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하여 협조 관계를 유지하다가 12월에 모스크바3상회의 지지에 반대하자 용도 폐기하였다. 이제 김일성이 사실상의 지도자가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조만식과 연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대로 조선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우익은 불리한 세력이었기에 협조하지 않으면 사전에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소련은 이 시기에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는 연안파의 무장을 철저하게 해제함으로써 김일성의 잠재적인 경쟁상대를 미리 제압하였다.

 

두 번째 사이비형 연립단계로부터 공산당 단독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소련과 김일성의 관계를 보면 먼저 1945년 9월 초순에 이어 1946년 7월에 스탈린이 김일성에 대한 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소련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소련군에서 복무하면서 소련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또 소련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박헌영은 그의 과거 전력과 대중성 부족이 문제가 되었다.

 

김일성을 다시 한 번 지원하기로 방침을 정한 소련은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의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을 만들어 김일성을 지원하였다. 또한 1948년 4월에 열렸던 남북협상회담에도 깊이 개입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크게 관여하였다. 한편 스티코프는 이 시기에 북한 정치의 총 연출자였다. 그는 각급 선거에 시시콜콜히 개입하고 중요 회의와 관련된 모든 문서까지 일일이 승인했다.

 

이런 모든 면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은 소련의 완전한 ‘괴뢰정권’은 아니더라도 소련의 강력한 후견 하에 있었던 국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련은 북한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시종일관 김일성을 충실히 지원하였고 이런 점에서 소련에 대한 김일성의 자율성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이철순, 139-140쪽)

 


 

해방 직후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공식 채택하여 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했다. 그러나 1946년 4월 20일 박헌영은 부르주아민주주의에서 인민민주주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946년 7월 이후 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이 신전술을 채택하는 것을 계기로 부르주아와의 연립을 포기함과 동시에 미국(과 그와 결탁한 자본가)에 대항하면서 대중정당인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는 합법․비합법의 ‘배합투쟁’에 나섰다. 이후 박헌영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인민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에 비하여 북의 김일성은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결성으로 인해 조직적으로는 남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1946년 9월 개진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 민족자본가와 지주들은 이미 1946년 상반기 토지개혁 추진과정에서 스스로 북을 떠나 연립에 참여할 수 없었고 동질적 계급적 기반 위에서 소련의 후원을 받아 편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북의 공산주의자들도 1947년 이후 인민적 민주주의론으로 변형되는 조짐을 보였으므로 김일성은 적어도 이론적로는 박헌영의 노선을 추수했다고 할수 있다. 한편 남의 남로당은 조직을 미국에 노출시켜 1948년 4․3사건과 10월 여순사건, 유격대 활동 등으로 인해 단계적으로 무장해제당하는 고난의 행군을 자초했다. 남로당이 남조선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무장봉기 혁명론에 대해 친김일성파인 강건․최용건과 연안파 등은 미군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혁명역량을 낭비하지 말고 북의 혁명기지가 주동이 되고 남조선 혁명 역량이 배합되는 남북배합작전에 의해 이룩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 후 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북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압도당했다. 1948년 8월 3일 슈티코프는 김일성을 만나 남북노동당 연합 중앙위원회 구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박헌영을 위원장으로 할 것을 권고했으나 1949년 6월 남북로동당이 합당했을 때는 김일성이 위원장에 박헌영과 허가이가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는 종파주의자로 낙인찍혀 6․25전쟁의 와중에서 제거당하는 운명을 감내해야 했다. 결국 헤게모니를 틀어 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해방 직후 시기를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시기로 포장하여 박헌영 계열이 주장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의 흔적을 1950년대 중반 이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막강했지만 남의 좌파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독자적인 논쟁을 벌였다. 또한 남의 이론가들이 북의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결국 남한 출신 좌파는 남과 북에서 몰락했으므로 이론적으로도 소련의 영향력아래서 혁명을 했던 동구의 혁명론인 인민민주주의혁명론에 의한 정식화를 남북의 혁명론에 적용시키려는 의존적 ‘수입’을 1950년대 중반 이래 감내해야 했다. 1970년대 이래 현재는 김일성 유일사상과 주체사상에 의해 윤색되어 김일성식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으로 정식화되었다. 따라서 현재 북의 역사서나 이론서에서 소련의 영향이나 동구 이론의 적용 등에 대한 서술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북한 혁명은 오로지 김일성이 이론적으로 기획하고 성취했던 것으로 과장․왜곡되어 있다.(이완범, 35-36쪽)

 


 

 

 

둘째로, 남남갈등의 제1-2전선에 해당되는 6. 15공동선언 자체의 해석 및 고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된 논쟁점과 관련된 남남갈등의 제1-2전선의 경우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의 영향권 내에서 발생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이견을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선, 6. 15공동선언의 제1항과 제2항의 통일조항에 김정일이 끈질기게 집착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북한정권 창립 이래 한반도의 정통성 있는 정권의 주체로 북한이 스스로 자임할 수 있게끔 하는 반미자주화통일테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북한이 정권 창립 이후 일관되게 추진해왔던 대남통일전선전술의 목표였던 셈이다. 다른 하나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그의 핵심 수행원들이 정상회담기간 남북간의 주요 쟁점사항들에 대해서 김정일이 발언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있으나, 우리가 유념해야될 것은 김정일의 발언들이 남한 내 여론분열을 획책하는 고도로 계산된 통일전선전술 차원의 발언들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의 결여측면인 것이다. 주지하듯이, 북한체제에서 남북대화를 포함한 이른바 대남사업은 수령의 고유권한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 김정일이 대남통일전선전술의 수장인 셈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김정일의 정상회담 동안의 그의 행동과 남북관계관련 발언들은 철저하게 계획되고 의도된 계산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가 그러한 연출에 능한 통치스타일을 보여 왔다는 점에 대해서도 더욱 그러한 것이다.(김연수, 238-239쪽)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의 관점에서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사업이 대남전략상 어떤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북한은 통일문제를 남조선 혁명을 전제로 하는 전국적 범위에서의 반제민족해방 인민주의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적극적 사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말해 남조선에 대한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 하는 것을 통일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북한의 통일정책은 남한의 통일정책과 근본적으로 대립되고 사실상 남조선 혁명전략과 등치된다. 따라서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사업은 북한의 남조선 혁명전략 차원에서 검토되고 논의될 수 밖에 없다. 북한의 통일전선사업은 남한체제의 전반적 와해를 목표로 하는 대남통일정책의 연장선 위에 있는 셈이다.

주지하듯이 북한의 통일정책의 기조는 소위 3대 혁명역량 강화 전략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의 파괴력을 경험한 북한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 남조선 혁명역량 강화를 대남 통일정책의 핵심적 목표로 설정했다. 김일성은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조선혁명역량이 구비되어야함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북반부에서 혁명력량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지금 미제국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압박과 착취를 받는 것은 남조선인민들입니다. 그러므로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하여서는 먼저 남조선인민들이 주동이 되어 일떠서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통치제도에 직접 타격을 줄수 있으며 남조선혁명이 인민대중의 힘에 의하여 더 빨리 추진될 수 있습니다. 남조선에서 혁명력량이 준비되지 않고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체험했습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남조선 사람들이 적 후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인민군대의 진격에 호응하여 싸웠더라면 우리는 적을 철저히 때려부수고 조국 통일문제를 벌써 풀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남조선혁명력량이 강화되였더라면 남조선혁명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는 기회가 적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중심은 남조선인민자체가 혁명을 하기 위하여 투쟁을 불길을 높이는데 있습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과 4․19혁명의 경험에 비추어 남조선혁명 역량강화가 북한이 통일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필수 과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지적했던 셈이다.(김연수, 225-226쪽)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일제타도와 민족해방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예외 없이 다른 세력과의 연대와 통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각 세력의 국가건설론이 서로 수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임정의 건국강령을 비롯해 각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밝힌 새로운 국가건설 구상은 거의 비슷했다. 민주공화제 국가를 만들어 국민(또는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데 대해서는 모든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흔히 우파(민족주의)와 좌파(사회주의)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고 생각하기 쉬운 경제체제 구상에서도 중요 산업의 국유화, 중소자본 활동의 보장, 토지개혁 등의 공통요소가 발견된다. 제헌헌법이 전문에 서 균등을 새로 세워질 국가의 핵심 가치로 제시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건설론의 수렴현상은 해방 이후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러한 흐름이 해방정국기 여러 정치세력의 헌법구상을 거쳐 제헌헌법에도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해방정국기에 출현한 여러 정치구상을 보면 토지개혁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외하고는 각 정치세력 사이에 뚜렷한 입장 차이가 없었다. 민주주의의 도입, 중요 산업의 국유화나 통제경제체제를 통한 균등경제의 실현 등 비슷한 점이 더 많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헌헌법이 평등지향적이고 진보적인 내용을 갖춘 데는 이러한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흔히 제헌헌법의 아버지 라고 알려진 유진오는 제헌헌법을 구상하면서 대한민국건국강령,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차 준비되었던 민주주주의민족전선의 시안), 1947년 제2회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된 자문 5호․6호에 대한 각 정당․사회단체의 답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 각 정당의 강령과 정책도 참조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제헌헌법에는 좌우의 헌정구상이 종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의 국가건설론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유진오가 제헌헌법을 만드는 기본원칙으로 개인주적 자본주의 국가와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인 균등의 원리를 채택하되,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의 장점인 각인의 자유와 평등 및 창의의 가치를 조화되고 융합되고 새로운 국가형태를 실현함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이라고 밝힌 것도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이준식, 167-168쪽)

건국절 제정론자들의 건국에 대한 견해는 대한민국 건국이 1945년부터 48년 사이에 반탁운동, 반공운동,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 반대 노선의 흐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국가보훈기본법’에 의거해 각각의 국가유공자 범주를 규정한 하위 법은 민족독립, 국가수호, 민주발전이라는 세 가지 가치 중의 하나를 반영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일제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들은 ‘민족독립의 가치에 공헌한 국가유공자들이다. 전몰․전상․순직․공상 군경, 재일학도의용군, 6․25및 월남전 참전 유공자, 고엽제후유(의)증 환자들은 개별법에 의거한 국가유공자 규정을 갖고 있지만 모두 ‘국가수호’의 가치와 연관된 국가유공자들이다. 4․19 혁명유공자들이나 5․18민주화유공자들은 공히 ‘민주발전이라는 가치에 공헌한 국가유공자들이다. 보훈이념의 가치는 단순한 것이 좋고 복수의 가치들보다는 하나의 가치만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근․현대사에서 한국이 처했던 여건상 하나의 가치만을 보훈이념의 가치로 설정하기 힘들었고 복수의 가치들이 보훈이념에 포괄되었던 것이다. 그들 간에 경중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보훈이념의 복수가치들 중 ‘건국유공자’들은 어느 가치에 공헌한 것으로 규정되어야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건국절 제정 시 해방 후의 ‘건국운동은 보훈이념의 기본축인 세 개의 가치들 중 어느 것에도 정확하게 부합되지 않으므로 새로운 가치를 보훈이념에 추가해야 한다. ‘민족독립과 ‘건국운동’ 모두를 ‘건국이라는 단일 가치에 포함시키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양자는 상호 배치되는 측면이 있고 기존 독립유공자들이 원치 않으므로 반발이 예상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서는 양자 간 가치 통합이 힘들다는 것이다.

해방 3년 시기 ‘건국운동’으로 규정되는 활동의 주된 내용은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국제협력노선인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과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대내적으로는 공산주의 및 좌우합작노선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건국운동’관련자들은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고 공산당의 배후에 있는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국제협력노선 저지는 반미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고 당시 미국과 소련은 우리민족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대일전선 연합국으로 인식되었는데 연합국 반대 활동이 애국적인 활동이었는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요구된다. 또한 1946년 초 격렬한 신탁통치 논쟁 후 온건한 정치세력의 연합체인 좌우합작으로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의도했던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비협조와 반대가 애국적인 활동이었는가에 대한 판단도 요구된다. 국가유공자란 어려운 상황하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인데 한편으로 미군정과 갈등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군정과 미군정의 지휘를 받는 한국경찰의 도움을 받으며 행한 정치활동이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지도 모호하다. 물론 ‘건국운동’에 큰 어려움이 있었고 때로는 제주도에서의 유혈사태처럼 신체의 손상을 무릅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어쨋든 건국절 제정을 위해서는 건국을 위해 공헌하고 희생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민족을 해방을 시켜준 것도 아니므로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은 큰 의미가 없고 1948년 정부수립이 ‘건국’이며 8․15를 ‘광복절’보다는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은 해방 3년의 반탁, 반소, 반공, 좌우합작 반대, 남북협상 반대의 정치활동을 ‘건국유공’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것은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연합국들의 국제협조노선에 협력하여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보훈이념에 내재된 기존의 가치는 단수는 아니지만 3가지 가치들 각각은 피아의 전선이 명확하고 단순하다. 민족독립을 위한 반일 항거와 투쟁, 국가수호를 위한 참전과 희생, 민주발전을 위한 반독재투쟁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단순, 명료하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정치활동을 ‘건국유공’이라는 것으로 규정해 새로운 보훈이념의 가치로 격상시키면 기존의 3가지 보훈이념 가치들 가운데 ‘민족독립’의 가치는 ‘건국활동’의 가치보다 격하된다. 왜냐하면 건국절 제정론은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과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원동력이었던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의,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건국운동이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원동력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김주환, 116-117쪽)

 

 

 


 


 

5. 칭의

 


 

⑴ 믿음과 행함

 


 

전통적으로 대다수의 학자들은 율법 준수를 통해 얻어진 도덕적인 공로의 행위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통한 칭의를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학자들은 율법 준수를 칭의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죄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러한 견해는 “율법의 행위들”이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한 선한 공적들, 즉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기의 행위를 지지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16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로주의의 입장에 비추어서 1세기 유대주의를 율법주의로(Legalism) 이해한 루터의 해석에 기초하여 대다수의 학자들은 1세기 유대교를 개인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율법주의적 유대교”(Legalistic Judaism)로 생각했다. 이 입장에 근거하여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함이 칭의의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공로주의적 유대교를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와 바울에 관한 연구로 인해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등장하게 되면서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샌더스는 그의 저서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에서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묘사했다. 그는 먼저 바울의 진술들 중 상당 부분의 불일치를 지적하며 “율법에 관한 바울의 조직적 사고의 결여” 또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사상의 비 조직적 성격” 을 강조한다. 즉 바울이 율법에 관한 모든 진술에 대해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통일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그 언약공동체 속에 머물기 위해 사람은 율법에 복종해야 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은 복종을 보상하고 범죄를 벌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율법은 보상의 수단을 제공하는데, 곧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유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율법적 요구 사항들을 성취한다 해서 궁극적으로 곧바로 구원이 허락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곧 율법을 통한 의가 필요하긴 하나, 그것은 구원을 위한 충분한 근거는 될 수가 없었다. 샌더스는 이러한 사상을 “법률주의”와 구분한다. 이 “언약적 율법주의”가 바울에게 알려진 종교의 일반적인 패턴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바울은 참여주의적 종말론을 각각 주장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바울의 기독교는 두 추상적인 종교의 패턴들이고, 적어도 이 점에서 그 둘은 서로 나란히 병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은 결국 구원론에 있는데, 샌더스가 보기에 바울의 출발점은 구원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일관성 있는 “중심”이라는 것이다. 즉 바울이 율법주의적 유대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샌더스는,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으로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성경적 견해가 후기 유대교에 와서 편협한 율법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한다. 그는 처음부터 바울의 당대의 유대인들을 가리켜 율법에 대한 외적인 준수에만 관심을 쓰고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공적이나 쌓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로 이해했던 기독교 해석자들에 대해 반대의견을 선언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간의 위치는 언약이라는 기초위에 수립되어지며, 언약은 인간의 마땅한 반응으로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동시에 범죄에 대해서는 속죄의 수단이 주어진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바울에게서 율법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는데, 구원은 모두에게 믿음이라는 똑같은 근거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곧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 올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 진술의 근거라는 것이다.(남기훈, 51-53쪽)

 


 

믿음의 우선성, 그리고 믿음과 행위의 바꿀 수 없는 순서는 예수님의 급진적인 명령들, 그리고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의 관련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틀을 제공한다.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근거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에서 언급되는 믿음 그리고 이 믿음이 갖는 천국과의 연관성은 윤리적인 삶의 요소 없이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반대로 행위는 ‘예수를 믿음과의 관계’에서 혹은 한 편으로는 기독론적인 주제인 예수와 그의 가르침이란 것과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론적인 그를 믿음과 그의 교훈을 지킴의 관계 속에서 만이 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즉 님의 교훈에 대한 순종은 하나로 결합되어 전체로 기독교인의 삶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믿음의 가치와 행위의 역할을 우리는 우월성이나 차등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마태복음에서 윤리, 행위의 문제는 대부분 독자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제자들 혹은 믿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선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행위의 필연적인 첨가를 강조한다. 믿음은 행함보다 우선한다는 도식보다는 믿음과 행함은 시간적으로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원리적으로 믿음은 행함보다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예시로서 산상설교의 결론인 7:21~27을 들어보자.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라도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고 선언하셨다. 다만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말씀은 아니다. 단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이라는 호칭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기필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믿음과 행위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는 그 역할이 상호보완적이다. 행위의 첨가는 믿음을 배척하거나 믿음의 역할을 제한, 축소하지도 않는다. 또한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생하게 체험하기 때문에 한 시라도 그 하나님의 간절한 요구를 외면하지 못한다.

 

‘믿음’이란 단어를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이런 기독론적 지식 위에 살아계신 그를 의존 하고, 그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을 믿음’과 ‘그의 말씀에 순종함’의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자격요건임을 알 수 있다. 믿음이란, 그 주님에게 굴복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요, 또 의존하는 것이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이경민, 53-55쪽)

 


 

그러나 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순전한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뿐이다. 우리는 내세울 것도 없고,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천국행 티켓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음에도, 그 자격 없음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 뿐이다. 바울의 복음은 이제 이 자리에서 구원의 기쁨을 선포하고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바울이 이야기한 “오직 믿음”을 올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직 믿음은 구속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 그 복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까지 받아 들여 종교적 혼합 주의가 된 것처럼 지금이 한국 교회의 종교적 혼합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다시 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교회 건물이나 형식적, 감정적 예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우리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이다. 그저 우리는 이전의 삶을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었던 종의 모습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본받고, 그 믿음에 참예하여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어떤 형식적 행위가 아닌 우리 마음의 중심에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바울의 복음이 다시 조명 되어야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들이여!” 라는 그 한탄의 목소리가 이제 교회를 향한 소리로 들려야 한다. 다시금 새롭게 갱신하고 지금의 새로운 율법주의를 타파하고 믿음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복음이다.(남기훈, 59-60쪽)

 


 

이제 지금까지 서술해온 내용들의 결론을 내리자면, 가장 이슈가 된 주제는 “이신칭의(以信稱義)냐” 아니면 “신행일치(信行一致)냐”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본문 석의에서 여러 차례 정의를 내렸다. 야고보와 바울은 둘 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요, 그 시대의 신실한 사도요, 신학자들이다. 또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다. 이들의 진정한 교훈의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나타나심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사람들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인간은 잠시의 어두움도 견뎌내지 못하고 일시적 유혹도 참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들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빛으로 왔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 것과 같다. 이제 인간은 이러한 어두운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의 말씀을 믿고 다시 거듭나야만 한다. 성령은 예수를 알게 하고 예수를 변호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인간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에 대하여 영혼에 조명하시며 생각나게 하여 세상의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을 지배할 수 없게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세상을 지배하는 삶을 “종말을 준비하는 삶”이라 한다. 교회는 모든 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을 알게 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명을 받았다. 교회는 늘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고,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고, 고난을 무릅쓰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을 때, 교회 구성원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것이다.(배태영, 106쪽)

 


 

바울은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을 예로 들어 믿음과 순종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한다. 로마서 1:16-17; 3:21-3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설명한다. 특히 크랜필드가 로마서의 중심이자 심장이라고 부르는 로마서 3:25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된다. 아담의 불순종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사단의 우주적 통치의 기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종식한 그리스도의 순종적 죽음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우주적 통치를 그리스도의 통치로 회복하였다. 죄의 통치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로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는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바울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에서 찾고 있다.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의하여 하나님의 통치로 우리를 옮겨 놓은 사건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인 자의 믿음의 삶, 곧 순종의 삶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은 신자들에게 믿음을 제공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순종은 신자의 순종을 이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의의 구체적 실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유대인과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죽기 까지 순종하여 율법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와 행함은 순종의 길을 열어 놓은 그리스도 안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본 논문은 제4장에서 “율법과 믿음의 순종의 관계를 다루었다. 바울은 율법을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정의한다. 이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언약백성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율법의 부정적인 입장과 긍정적인 입장을 함께 언급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배경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의 율법 이해 배경은 구약성경이다. 특히 70인경(LXX)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구약의 토라는 시내산 계약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원역사 뿐만 아니라 축복과 저주의 규정까지도 포괄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절대적으로 준수해야 할 신적 규범이었다. 둘째, 바울의 율법 이해는 초대 교회에서 전승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섬김의 삶을 통하여 율법은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의 새 가르침으로서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다메섹의 그리스도 사건에서 깨닫는 십자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다. 즉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였다고 본다. 그리하여 바울은 다메섹 사건에서 유대교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주장한 율법관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세운 새 계명으로서 율법 정신을 긍정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율법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내어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복음의 빛 아래서 유대주의적 율법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을 충족시킬 만큼 순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을 이루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믿음’, 하나님의 ‘의’, 율법을 통해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고 정의한다.(김천수, 214-215쪽)

 


 

결국 선행은 거룩하게 된 영혼의 결과인 것이다. 선행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앞에 영혼이 성화가 되므로 그것이 몸의 언행을 통제해서 나오는 선행이므로 이 선행은 열매, 결과일 뿐이다.

 

성화에서의 선행은 믿음의 열매로서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충심으로 느낄 만큼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됨을 말하고 있다.이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으로, 하나님을 인지한 영혼은 동시에 모든 허탄한 생각을 피하기에 이것이 곧 자기부정의 삶이며 성화의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듯이 곧 이웃을 돕는 것에도 자기의 일보다 남의 일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웨슬리는 인간이 선행을 크게 두 가지의 항목으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그것이다. 선행으로서 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화가 영혼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성화되었다면 마땅히 선행이 나와야 하는 것이며,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영혼의 내적원리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의와 거룩으로 되어야만 성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가 잘 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려면 선행이 잘 되어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선행이 없다면 그 앞에 영혼의 성화의 상태가 뭔가 부패된 것이고, 그 이유는 그 앞에 믿음으로 된 것인데, 믿음이 뭔가 부패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망가짐으로 영혼이 의와 거룩의 상태가 아니고, 그래서 그 영혼을 통제하는 몸의 상태가 선행이 안 나오고 악행이 나온다는 것이다. 영혼의 기능은 믿음에 의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에, 칭의를 받으면 동시에 중생하며 중생이 성화의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가 성화의 근거인 이유다.(이종철, 42-43쪽)

 


 

바울과 야고보에 의해 동일하게 사용된 “행함”이란 단어는 헬라어 에르곤(ἒργον)이다. 에르곤은 사전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행위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야고보가 사용하는 행함은 전자의 의미에 가깝게 자비와 친절한 행동을 베푸는 사랑을 의미한다. 즉 야고보의 행함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온전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온전한 율법은 이미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법이다. 따라서 야고보에게 있어 행함은 구원하는 믿음의 열매 혹은 표현이다.

 

야고보서 1장 25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행동하는 자이어야 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는 듣기만 하거나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 행동은 지혜로운 자의 삶속에서, 그리고 그의 선한 생활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실제적인 이웃사랑으로서 야고보의 행함은 유대교적 율법과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야고보의 행함에 대한 강조가 유대교적 율법의 실천에 대한 강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오해일 뿐이다. 믿음과 행함에 대한 본격적인 권면을 주고 있는 야고보서 2장 14-26절에서 야고보는 믿음의 행위, 사랑의 행위를 강조하면서도 율법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야고보의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가르침은 유대교적 율법과는 무관한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이라는 단어 에르곤을 무려 15회 사용하고 있다. 야고보서 안에서 “행함”은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이웃사랑으로서의 “사랑의 행위”이며, “자비의 행위”, “믿음의 행위”로 드러난다. 야고보서 1장 4절에서 에르곤은 완전에 도달하기 위한 인내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에 따르면 “온전히 행해짐”으로 이루어야 할 인내는 종말론적인 “완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도달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온전해야 할 행위는 믿음과 행위가 살아 움직이는 통일성을 이루어 나가는 데서 성취된다.

 

야고보는 분명히 믿음보다 행위를 더 강조하고 있으며(1:27; 2:1-7, 8-13, 14-26; 4:17), 믿음에 의해 나타나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즉 구원 이후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 곧 헛된 고백을 하는 무가치한 믿음이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미 신앙고백을 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메시지는 믿음보다 행위에 더 강조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야고보의 행함은 전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행동과 연결된다. 행함은 무조건적으로 믿음과 함께 속한다. 따라서 행함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지만, 그 반대로는 될 수 없다(2:18). 그러므로 믿음만으로는 귀신들도 그렇게 하듯이(2:19) 하나님을 인정할 뿐이다. 반면에 참된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어야 한다(2:14-16, 17, 20). 이를 위해서 야고보는 유대교 전통에서 창세기 15장 6절을 창세기 22장과 연결하는 것으로 사용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도입한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드린 사실을 말하면서, 아브라함은 이 일을 통하여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한다(2:21). 창세기 22장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한 곳은 없다.(김달홍, 16-17쪽)

 


 

마지막으로 칭의에 관한 부분에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논증한다. 그의 관심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선 후에 어떤 종류의 믿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2:12). 이러한 맥락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칭의를 그는 마지막 심판에서 선한 행위를 토대로 하나님의 긍정적인 판결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반면 바울의 칭의 논증은 안디옥 교회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안디옥 사건은 게바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로부터 온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게바가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허물었던 담을 다시 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안디옥 사건을 사용하여 자신의 칭의 사상을 전개한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고 확언한다. 칭의는 율법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칭의 구원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의 칭의는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죄인들에게 선언되는 하나님의 최초의 칭의를 가리킨다.(김달홍, 43쪽)

 


 

갈 2:19에서 기술한 “하나님을 향한 삶”은 20절에서 믿음 안에서 사는 삶으로 설명되고 있다. 물론 칭의는 소망의 대상이므로 이 삶이 칭의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삶은 “믿음 안에서의 삶”(갈 2:20)으로서, 로마서에서 말씀한 것 같이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롬 6:10-11)에 관한 의미와 같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이것은 사실상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어(갈 4:6)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갈 2:16). 믿음에 근거한 삶은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삶에 주체가 되어지는 삶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은 십자가를 통한 죽음은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또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율법의 행위로는 가능하지 못한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이 믿음의 삶을 통해 ‘의의 소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칭의’의 수단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을 향한 삶’ 곧 ‘믿음 안에서의 삶’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이 하나님을 향한 삶을 가능하게 하지 못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삶만이 하나님을 향한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 ‘의의 소망’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논증은 ‘의’의 도구로 살아가는 삶의 결과가 영생으로 주어진다는 로마서 진술과 사실상 동일하다(롬 6: 13, 22).(김명성, 9-10쪽)

 


 

(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율법에 대해 제기하는 세 번째 율법의 한계는 율법이 믿음과 조화될 수 없는 독자적 언약 원칙으로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으니라” (갈3:12). 율법은 “그 안에서” 살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율법’과 ‘믿음’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설명한다. 즉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은 서로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그 이유를 레위기 18:5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곧 성경이 “이(율법)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 것이다”라고 했다.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배타적인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믿음으로 사는 삶과 결합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율법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의 성숙이 아니라 믿음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임을 각인시킨다.

 

그러므로 위에서 논의된 갈 3:10-12까지를 통해 나타난 바울의 의도는 율법은 ‘칭의’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율법은 저주의 계기가 됨을 밝힌다. 또한 이 율법은 ‘칭의’의 참된 수단인 ‘믿음’과 함께 섞일 수 없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사이에서 방황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돌아오도록 하려는 바울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김명성, 13-14쪽)

 


 

루터의 성화 사상이 지닌 한계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명확한 체계화가 없거나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초기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칭의와 성화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기의 루터도 칭의와 성화의 관계와 한계에 관한 체계적인 진술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반면. 이러한 발전은 멜랑통 이후의 신학자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 특별히웨슬리는 칭의와 성화가 혼용되는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칭의이지만 실제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성화이다. 양자는 모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 독생자를 통해서 행해 주신 것이며, 성화는 하나님이 그 영으로서 우리 속에 해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성화는 성령의 역사이다. 칭의는 인간을 악마의 고발에서 자유롭게 하거나, 율법의 고발에서 자유롭게 하는 의미는 아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칭의는 하나님이 자기가 의롭다고 칭하신 그 사름들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마치 그런 것처럼 여기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칭의의 성서적인 견해는 사명이요 죄의 용서이다.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더 이상 기억되거나 지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마치 죄를 범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주시는 것이다. 칭의는 신앙의 경주, 달려갈 길의 출발점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분명한 개념을 자리매김한다.

 

따라서 웨슬리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강조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이 의로워지는 순간에 성화가 시작된다. 의로워지는 것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위로부터 태어남, 성령으로 다시 남을 통하여 성화가 시작된다. 그것은 성화의 문이다. 영의 새로운 탄생이란, 영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면적인 변화인 동시에 거룩해지는 역사의 시작이다. 새롭게 탄생한 영혼은 점차로 성장해 나간다. 웨슬리는 자신이 칭의나 성화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음을 말한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똑같이 강조하면서 각자의 위치를 유지시켰다. 양자에 하나님께서 모두 함께 하시며 따라서 인간은 이 둘을 떼어놓을 수 없다.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를 똑같은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거듭난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성화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 결과적으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앙으로 구원받고 성화되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을 신앙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실제로 거룩해져야 하면 훈련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김시편, 82-84쪽)

 


 

웨슬리는 루터와 달리 의인과 성화 사이의 연결에 더 관심하였다. 루터가 일찍부터 의 문제에 모든 자아를 몰두 시켰다면, 웨슬리는 성화문제를 가지고 오래 투쟁하였다. 물론 웨슬리도 루터처럼 자기의의 추구로서 성화가 좌절된 후 외적 행위 즉 공로에 의해 의인화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으나, 회심이후 도리어 성화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루터와 갈라진다.

 

웨슬리의 의인 이해에 있어서 루터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물론 웨슬리 역시 의인을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 있어서는 인간편에서의 믿음이 강조되고, 또한 ‘pro me’ 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주관적 확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아마도 모라비아교를 통해 흘러들어 온 경건주의의 요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리에게는, 루터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실재적인 예리한 의인이해가 결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반면 웨슬리의 성화 개념이 주목될 수 있다 . 그는 믿음이 깊이 인격적으로 되기 전에는 참된 믿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그와 같은 것은 ‘의인’이라는 한 순간의 사건만으로 불충분하고 오히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인간은 현실적인 의를 촉진하기 위해 실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주권의 예정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움직여지는 수동적 기계가 아니라,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윤리적 행위주의로서 자신을 이해라는 존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웨슬리는 의인을 구원의 terminus a quo 로, 성화를 terminus ad quem 으로 보고, 성화의 최종목표를 기독교인의 완전에 두었다. 여기에서 웨슬리는 ‘사랑’을 이 모든 성화일반을 포괄하는 원리로서 내세웠다. 그래서 완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의 수직적인 고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묘사되었으며, 하나의 목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루터가 이와 같은 완전에 대하여 들었다면 아마 그것을 로마 카톨릭교의 반복이라고 하며 꺼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에게 있어서 점점 완전하여져서 죽는 순간 바로 이전에 완전에 도달하게 된다는 웨슬리의 생각은 매일 매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투쟁적이고도 역설적인 실존을 영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자신의 생각과는 매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김시편, 90-91쪽)

 


 

위에서 살펴본 ‘그리스도의 믿음’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① 그리스도의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근거한 의’와 ‘예수의 구원 사역에 근거한 의’를 구분한다. 예수의 믿음이란 인간의 행위에 선행하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구원사건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의와 은혜를 강조한다. ② 그리스도의 믿음은 신자가 본받을 ‘믿음의 전형’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충성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으로 이어진다. ③ 그리스도의 믿음은 신자의 주체성과 책임성을 강화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하느님의 주도적 구원행위를 보여주고, 신자의 주체적 참여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와 신자는 상호 주도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2:20). ④ 그리스도의 믿음은 ‘믿음’과 ‘행위’를 통합한다. 종교개혁의 신학에서 복음과 율법이 대립하고, 믿음과 행위가 분열되어 있다. 우리의 신앙이 하느님의 현존을 증언하고,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앙과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몸과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며(약 2:26), 우리와 하느님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믿음과 행위가 통일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율법의 행위’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법”(6:2)을 성취하는 것을 목적한다.(김종길, 34쪽)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대상과 행위의 고유성이 무엇에 또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둘 사이의 연결의 고유성이 무엇인지 여기서 알 수 있다. 또 그리스도교적인 믿음과 유일신교들을 포함한 다른 종교들의 믿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혹은 그리스도교적 믿음이 갖는 ‛그 이상의 것’(“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는 논리 안에서 주장하고 보호하고 삶으로 살아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fides quae)과 신앙의 행위(fides qua)의 연결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하느님은 계신다”라는 외침 안에서또는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상응하는 실현 안에서는 모두 표현될 수 없다. 그것은 예수 인격의 관계적 정체성, 즉 삼위일체적 정체성인 동시에 신인적 정체성에 기준점을 두면서 믿어지고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정체성이 지닌 무한한 풍요로움과 복합성이 예수가 제안하고 증언한 믿음의 행위라는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짊어지도록 우리를 초대하면서 그 당시처럼 오늘날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라고 말하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fides quae)과 신앙의 행위(fides qua)간의 연결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특성을 최대한 종합적으로 표현하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인격 안에서 당신을 삼위일체로서 믿도록 자신을 내어 주신다면, 하느님은 이제 삼위일체적으로 믿어져야 하며, 혹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삼위일체적 진리에 따라 ‘평가된’ 관계적 역동성에 따라 고무된 행동이어야 한다. 나아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아가페(Agápe)로서 믿도록 당신을 내어주신다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아가페적으로 사는 행위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바오로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초대받았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고린13,1).(루보미르 차크, 311-312쪽)

 


 

실제, 그리스도교 신경(Credo)이 전달됨에 있어 그것을 이해하는 열쇠도 처음부터 풍부한 신앙의 유산으로서 전해졌다. 그것의 존재는 삼위일체적 및 그리스도론적 교의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들 교의들은 그 형식적 측면에서 계속해서 발전되었고 또 교부들에 의해 교회의 신앙이 ‘올바른지 오류에 떨어졌는지를 결정하는 준거들(articula stantis vel cadentis)’로서 보호되어 왔다. 많은 교부들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항목들에 대한 굳건하고 용감한 방어는 그것들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인간들 가운데 이루신 그분의 계시에 대한 중요한 진리들을 파악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러한 계시의 가장 심오한 의미에 대한, 따라서 믿는다는 것과 신앙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진리를 간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의미는 죄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지 안에 있다. 물론 이 의지는 하느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진리로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진리요 모든 인간들이 성령 안에서 성부와 아들의 친교(Koinonia)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초대되었다는 진리이다.(루보미르 차크, 316-317쪽)

 


 

 

 

이상에서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칭의교리에 대한 루터나 칼뱅의 표준적인 해석은 분명해졌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불완전하여 율법에 따른 행위의 심판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의 의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행위의 의로 불가능한 죄인들에게 그들이 비록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부정하고 믿음에 의한 칭의를 주장한 것은 인간의 행위가 불완전하여 그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믿음으로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행위의 의와 믿음의 의의 대조는 인간 스스로 행한 바 불완전한 의와 은혜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대조이다.(서충원, 40-41쪽)

그는 이 주장에 대한 논거로 바울이 최종적인 구원이 행위에 의존한다고 하는 많은 언명을 든다.대표적인 예는 로마서 2:6-16, 고린도후서 5:8-10, 고린도전서 6:9, 갈라디아서 5:21등이다. 샌더스는 이 점에서 바울이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본다. 즉 언약의 백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마지막 심판에 관해 말할 때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유대교의 사상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즉 율법의 행위가 언약 안으로 ‘들어감’의 문제에서는 배제되고, 최후의 심판을 다룰 때는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바울의 행위에 따른 심판에 대한 언급들을 유대교의 행위에 따른 심판에 관한 사상과 동일한 범주에서 생각하고 있다. 샌더스의 주장에 따른다면, 바울은 유대교의 행위구원사상을 비판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최후심판은 율법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의 논의에서 샌더스의 새로운 바울 이해에 따르면, 바울의 주장은 믿음으로 미래 구원의 선조건 즉 칭의에 이르고, 율법의 행위로 최종적인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신학과 아주 유사한 특성으로 나타난다. 샌더스는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에 의한 칭의는 단지 미래 구원의 선조건에 들어감을 논하고 있고, 미래 구원을 논할 때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보는 점에서, 믿음에 의해서 중생과 칭의에 이르고 이 중생의 은혜에 바탕을 둔 선행의 공로에 근거하여 미래 구원에 이른다고 본 중세 신학의 입장에 가깝다.

던 역시 바울이 정체성 표지를 통해서 이방인에 대해 특권의식을 갖는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바울은 유대교와 동일하게 은혜에 따른 언약적 의무를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바울은 할례는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함을 주목하면서 유대교와 바울의 신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마서 2:6-11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구원에 이르는 심판은 삶의 질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던은 바울이 유대교와 동일하게 영생이 어느 정도 순종에 달려 있다는 견해를 가졌다고 본다. 따라서 던은 바울이 율법에 대한 순종이 영생을 결정한다는 유대교의 신인협력설을 비판했다면, 그 자신의 권고도 동일한 비판 아래 종속되었을 것이라고 보면서, 행위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는 유대교를 신인협력설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최초의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죄로부터의 자유로, 최종적인 칭의는 이것에 근거한 성령 안에서의 삶에 대한 평가로 이해한다. 이 점에서 라이트는 가톨릭의 이해와 거의 비슷한 입장에 선다: “현재의 선고는 미래의 선고가 그것에 합치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 성령은 능력을 주는데, 그 능력을 통해서 미래의 법정적인 선고가 주어질 때 신자들이 산 삶에 조화된다고 보이게 될 것이다.”(서충원, 75-77쪽)

루터가 율법의 행위가 전체 율법을 지시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기 보다는 인간의 행위를 신뢰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칼뱅은 율법은 완전한 행위를 요구하는데, 인간은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관점에서 율법의 행위를 전체 율법의 행위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루터는 십계명이든 의식법이든 시민법이든 율법의 행위들은 인간의 자랑과 신뢰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어떤 율법의 행위든 관계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자랑이 된다는 견지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바울의 진술을 이해하고 있다면, 칼뱅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말할 때 율법 자체가 완벽한 행위를 요구하기에 단지 의식법만을 의의 길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을 어길 경우에도 그것으로 인해서 칭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의 행위란 단지 갈라디아서에서 주로 쟁점이 되고 있는 의식법에만 한정되지 않고 도덕법을 포괄하고 있다고 본다는 사실이다. 또 율법의 행위를 이렇게 보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이 단지 유대주의자들이 의식법을 지켜 행한다는 사실 때문이기보다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의로 칭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가 도덕법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는 공적주의라고 보는 것에 근거한다면, 샌더스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대해 두 가지로 비판하는데, 유대교는 공적주의가 아니라는 점과 바울은 유대교를 공적주의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하듯이 유대교는 행위-의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하는 로마서 3:27-4:25에 대한 주해에서, 이는 “유대인의 특권적인 지위를 반대하는 것이지, 공로를 쌓은 업적에 대한 자랑을 반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27절 이하에서 바울이 주장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동일한 기초 즉 믿음 위에서 무할례자와 할례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고,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일한 지위를 옹호하고 특권적 지위에 대한 자랑을 반대한다.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 즉 유대인 (3:29), 할례 (3:30,4:9,12); 율법에 속한 자들 (4:14,16)이란 표현들은“지위에 초점을 두며 종교적 태도나 행동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바울의 비판은 그들의 특수주의에 대한 자랑이지, 은혜를 부정하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영적 교만으로서의 공적주의적 자랑에 대한 것이 아니다.

던은 공적주의로서의 유대교 이해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비판하는 샌더스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특별히 갈라디아서 2:16을 그 앞선 문맥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석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을 개진한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유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말할 때, 이것은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의 민족주의적 배타성에 따라 언약적 표지 행위들을 이방인에게 강요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던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2:16에서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말할 때, 당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는 ‘율법의 행위’는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들이나 행동들”, 혹은 샌더스가 언약적 율법주의로 표현한 바대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부과된 의무들”로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던은 실제적으로는 보다 특별하게 한정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보는데, “마카비 위기 이후에는” “이방인으로부터 유대인의 구별이 걸려 있는 경계선 이슈들”, 곧 할례나 음식법 등이 문제되었고,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논쟁할 때 ‘율법의 행위’는 바로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던은 할례나 음식법이나 안식일 준수 행위들은 바울 당대에 유대교를 특징짓는 정체성 표지 행위였고 또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해했고 또 이로 인해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장벽이 형성되었다고 보면서, 바울 당대의 역사적인 상황의 배경에서 바울의 이신칭의론을 이해고자 한다.

그리고 던은 로마서 3:20의 “모든 육체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리라”는 진술에서 율법의 행위도 전통적으로 이해하듯이 율법의 행위가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아니라, 갈라디아서에서와 동일하게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면서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정체성 표지 행위들임을 강조한다.(서충원, 85-87쪽)

루터는 결코 믿음은 행위와 동일 선상에 위치할 수 없다고 본다. 만약 행위를 통해서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다. 그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믿음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한 것 같이, 오직 내적 인간 안에서만 다스리는 것이고, 또한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의 사실을 주장한다. 내적 인간은 어떤 외적 행위나 어떤 외적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칭의를 받으며 해방되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행위는 여기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오직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의 불신앙적인 의심 때문에 죄책을 지게 되며 저주받아 마땅히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 먼저 어떤 외적 행위를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안성원, 11-12쪽)

위에서 필자는 루터의 글 중에 “믿음이 모든 것을 다하고, 믿음 하나만으로 경건에 이르는데 충분하다면, 왜 선행을 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게으르게 앉아서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빈둥거리며 믿음만으로 만족하자는 말인가?”라고 질문을 살펴보았다. 즉 루터가 믿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려 루터가 공격당할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 대해 루터는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선행을 하지 않기는 정말힘들다고 답변을 한다. 즉 믿음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사람이 선한 일을 하지 않기란 불가능 한일이라고 말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 자체를 자신의 힘으로 유지할 때보다 선행은 믿음을 원인으로 할 때 강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성화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원인을 믿음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루터는 믿음이 있는 경우에는 행위들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기 위하여 행해질 수 있지만, 행위들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 그 자체는)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길 수 없다고 논박한다. 루터는 행위에는 생명이 없다고 주장하며,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지식을 더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즉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므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과 성화의 관계는 어떠한가? 본 연구자는 위에서 칼빈의 성화 개념에 대하여 지속적인 회개, 성경에 의한 삶, 자기 부인, 내세에 대한 소망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했다. 성화에 있어서 그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성화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반대를 한다. 왜냐하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회개에 전력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는 사람이 성화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칼빈도 믿음을 원인으로 하여서 진정한 성화의 길을 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 역시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구원을 무너뜨린다고 말을 한다. 즉 그는 행위를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루터의 생각과 동일한 것이다.(안성원, 45-46쪽)

웨슬리는 로마서 5장 10절을 근거로 해서 율법적 의를 행하는 사람은 율법에 의하여 산다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율법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준행하면 그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행위 계약의 개념이다. 이러한 행위계약에 의하면 모든 무익한 말과 모든 악한 행위를 회피하고, 모든 애정과 모든 욕망,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 웨슬리는 누구도 외적인 계명(the outward comandments)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행위 계약으로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을 아무도 없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계명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지켜야할 계명들이었음을 언급하며, 이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다른 언약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의 계약이다. 바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신다는 칭의의 약속인 것이다. 하지만 이 칭의는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가 배제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pardon), 즉 죄들의 간과하심(the for giveness of sins)이며, 또한 성부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피로 인하여 이루어진 바 인간의 죄에 대한 성부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신 일(propiation) 때문에,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remission)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시는 성부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다.

은혜 계약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고 칭의 하시는 것이며, 이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안성원, 35-36쪽)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첫째로, 갈라디아서 5:4의 표현은 선행하는 3절의 ‘의무’라는 술어를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 “율법 전체”를 행하는 것은 유대주의자들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본연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언약적 의무를 행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고 말할 수 없다. 둘째로, 생명과 칭의가 갈라디아서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것은 사실이다 (cf. 3:11,21). 아마도 실바 교수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으로 살려고 노력한”(try to live by the law) 행위는 결국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노력한”(try to be justified by the law) 행위이다. 그가 ‘산다’는 술어와 ‘의롭다 함을 얻다’는 술어를 동의어적으로 해석한 것은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미 언약 “안에” 있는 자들로 의식했다는 것을 그가 인정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이 염두에 둔 “칭의”는 언약 안에 “들어가는”(getting in)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삶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처음 구원 경험을 묘사하는 바울의 칭의 술어는 언약 안에 머무는 삶의 방식을 지칭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칭의 술어와는 서로 다른 실재(實在)를 가리킨다. 그리고 유대주의자들 편에서 ‘산다는 술어를 이렇게 칭의 술어로 변환시키려고 한다면, 그들과의 논쟁적 상황을 반영하는 갈라디아서에서 동일한 언어 함축을 “믿음으로 산다”(live by faith)는 표현에도 삽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뉴앙스를 적용하면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도출된다: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주의자들처럼 순종의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유대인들의 ‘행위’는 율법에 의해 규정되는 행위이고, 기독교인들의 ‘행위는 믿음에 의해서 규정되는 행위이다. 이것은 오히려 유대인들과 바울 사이에 사고패턴에 있어서 공유된 면이 있다는 것을 역으로 반증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력했다는 함축만으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에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이한수, 124-125쪽)

3. 최근에 중도파 학자들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강한 거부 배후에 “행위의”(行爲義)를 추구하는 유대교 칭의론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그들의 이러한 해석은 “언약적 신율주의” 해석 모델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져 있다. 유대교는 새 관점 학파들이 주장하듯이 획일적인 집단이 아니고 ‘은혜’(gift)와 ‘요구(demand) 사이의 균형성을 깨뜨리고 후자 쪽으로 편향되어 언약백성 된 신분을 계명 준수에 묶어두려는 개인주의적이고 조건주의적인 유대교 집단들도 포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언약백성의 구성원으로 의식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신분이 계명 준수에 의존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결국 ‘행위 의’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학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유대교의 정신이 갈라디아의 논쟁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고,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 논적들은 할례와 그것에 뒤따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그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따라 살도록(=의롭다 함을 얻도록) 선동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해석 모델이 갈라디아 위기를 재구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 한다:

첫째로, 칭의 술어는 바울과 유대주의 논적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것을 지시 한다: 바울의 경우에 그것은 언약 안에 “들어가는”(getting in) 처음 구원 경험을 지칭하는 반면, 유대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언약안에 “머무는”(staying in) 삶의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믿음”과 “율법의 행위”의 대조도 이런 차이점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믿음이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 경험과 연관될 때 처음 단계의 신뢰 행위를 가리키는 반면, 율법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에게 언약 안에서 머무는 유대인들의 삶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왜 바울은 믿음과 더불어 율법의 행위조차도 처음 구원경험을 묘사하는 칭의 술어와 연결시키려고 하는지 불분명해진다.

둘째로, 불분명한 이런 요소를 해소하는 길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생겨난 그의 변화된 전망을 고려할 때이다. 갈라디아서 3:6 이후에 전개되는 바울의 논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그는 “믿음에 속한 자들”과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을 대조하면서 전자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역으로 후자가 “믿음에 속한 자”, 즉 아브라함의 참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후에 갈라디아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참 가족의 정체성은 “성령을 따라 난 자”(4:29)로 보충 설명된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론이 성령의 창조적 능력의 차원에서 보완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참 가족은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이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다. 바울은 이런 존재가 십자가 구원 사건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판단 한다(1:4; 3:13; 6:14-15). 이와는 반대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은 율법을 따라 삶으로써 스스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간단하게 말해서, “믿음의 사람들” 또는 “성령으로 난 자들”로 특징화되는 아브라함의 참 자녀가 아닌 자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들”에 종사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들은 육의 영역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의도에 못 미치는 인간적 행위들에 불과하다. “율법의 행위”는 그들이 언약 “안에”(in) 있는 존재들임을 표시하는 유대교인 된 신분표지의 행위들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실행하는데 실패한 자들이었다.(이한수, 129-131쪽)

우선 칼빈은 야고보와 바울은 비교하면서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때 ‘행함’은 칭의의 결과로 보면서, 야고보는 여기서 어떤 방식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가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행으로 열매를 맺는 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바울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의 판정을 확보했다는 뜻이고 야고보의 의도는 전혀 다른데, 곧 신실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행위로 입증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4:3절과 야고보서 2:21절에서 말할 때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살펴 볼 때에 그 조화를 찾을 수 있는데, 즉 아브라함의 예와 라합의 예, 둘 다 야고보가 말하는 선행들을 동반한 믿음들이었으며 또한 의롭게 하며 구원하는 믿음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곳에 언제나 행함이 따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이 잘 조화가 된다. 렌스키는 그의 주석에서 야고보서와 바울의 상호 대조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신앙의 행위를 구별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정종수, 36-37쪽)

바울이 십자가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수사적 질문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 체험의 정황에로 관심을 돌린다. 갈라디아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성령을 받았는가? “율법의 행위들”을통해서 인가? 아니면 “믿음”을 통해서인가? 물론 물음의 답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들”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해 “듣고” 이를 “믿음으로써”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2, 5절).

“율법의 행위들”과 “믿음” 간의 계속적인 대립에서 확인되듯, 전략적으로 이 논증은 2장 16절에서 시작된 칭의 논증의 한 부분에 속한다. 하지만 논증의 진술은 다소 달라진다. 칭의를 둘러싼 율법의 행위와 믿음 간의 대립(2:16)이 3장 1-5절에 오면 성령을 둘러싼 대립으로 바뀐다. 곧 칭의가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주장은 실제로 성령의 선물이 믿음을 통해 주어졌다는 체험적 진술로 구체화되고 있다.

일관된 율법의 행위-믿음의 반제 속에서 바울의 칭의론이 성령에 관한 논의를 통해 개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양자가 서로 긴밀한 관련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물론 칭의가 현재적 체험이라면 성령 체험은 당연히 칭의와 동일시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믿음으로 받은 성령을 상기시킴으로써 칭의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하지만 바울은 한 번도 성령과 칭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성령(체험)과 칭의(원리)의 관계는 후에 더욱 분명히 규명될 것이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칭의의 유일한 근거인 십자가(1절)와 믿음(2-5절)이 성령 체험의 원천 혹은 근거로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칭의의 논증 속에서 바울이 믿음에 관해 강조하는 바는 이것이다. 곧 성령은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배격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율법의 행위”에서는 성령이 나오지 않는다.(권연경, 57-58쪽)

 

 

 


 


 

⑵ 이신칭의

 


 

칼빈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을 가르친다. 동시에 그 자유함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진지한 삶의 모습도 보게 한다. 칼빈은 율법을 믿음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의미를 분명히 가르치고 깨달을 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율법을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 칼빈의 구원체계 속에서 오늘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강력한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반면에 언약적 신율주의 구원체계에서의 칭의는 진정한 자유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들의 체계는 갱신이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이 전통적인 칼빈의 칭의관을 비판하는 것은, 칼빈의 칭의론이 구원론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기 보다는, 칼빈의 칭의관을 단지 학문적 체계로만 끌고 갔기 때문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실제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내적 증거가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에게도 존재하는 지 궁금하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는 믿음에 대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믿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필자가 연 구한 믿음 안에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의가 존재한다. 이 믿음을 통해서 인간은 본질적인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 그 어떤 행위나 보상의 개념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자유이다. 이 믿음의 확신, 자유함을 가지고 신자는, 인격체 안에서, 율법의 목적인 거룩함의 삶을 이루어 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인격체 안에 소유하는 믿음이 참되고 바르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그 믿음의 내용이 참되고 실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행위의 시작은, 바로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이 믿음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믿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칭의의 가리키는 실제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바로 ‘믿음’이다. 행위가 목표가 아니다.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의 무의미성을 말할 때 믿음은 그 행위의 반대 개념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고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격과 연결된 믿음은 아무런 의미도 내용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것 자체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격안의 믿음을 판정 내릴 때, 곧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따라서 이 믿음이 참되면 그 인격도 참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믿음이 옳다라고 법이 판정을 내리는 것이 칭의이다. 그 믿음이 옳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옳다, 마치 법정에서 판정을 내리는 것과 동일하다. 법의 기능은 그 법을 적용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보이지 않는 믿음이나 보이는 행위에 대해서 판정을 내린다. 그런데 이 법은 믿음을 판정한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라는 것은 그 믿음이 참된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다.(신근수, 67-68쪽)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할 때, 그는 전체로서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아무도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순종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온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배상을 드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희들에게 요구하셨을 수도 있는 그 배상을 한 보증인으로부터 받으시되,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이 보증인으로 내세우시고, 그의 의를 저희들에게 전가시켜 주셨다. 뿐만 아니라 저희의 칭의를 위해서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저희에게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 믿음 또한 그의 선물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칭의는 값없는 은혜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71.)

 

요약하자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은택(恩澤)이 무엇과 관계되는가의 포괄적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된 몇 가지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칭의의 개념은 우리에게 정죄의 제거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및 신분의 확립에 관하여 말해 준다(롬 3:22-27, 4:5, 5:1-5). 양자됨의 사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가리킨다. 화해와 용서의 개념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지적해준다(고후 5:18-21, 엡 2:13-18). 구속과 해방의 개념은 속박과 노예상태로부터의 구출을 가리키는 것이요, 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지불된 값임을 가리킨다(막 10:45, 엡 1:7). 여기서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에 대한 중요하기는 하나, 철저하지 못한 기술이다. 즉 죄가 없이는 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은혜 없이는 칭의의 가능성도 없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적, 변화적 임재가 믿는 자들속에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칭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이 문제에의 신약성경의 진술들을 초월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 교리의 중요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통찰을 확증 시켜주는 하나의 다리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배태영, 29-30쪽)

 


 

결론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갖는 특징들에 대한 몇 가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 요소들은 어떤 면에서 인과적이요, 어떤 면에서 동시적 발생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1)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제3의 요소/전제된 조건)이 있음. (2)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임. (3) 하나님의 뜻을 행함. (4)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고, 예수님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 됨. 이라는 최종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1)의 전제 위에 (2), (3), (4)의 반응이 시간적 동시성을 띄고, 또 논리적 순서에 따라 발생된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자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안에 있는 자신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로서의 ‘믿음’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과 산 중에서 설교라는 매개를 통해서 관계를 맺기 시작한 청중들에게 ‘믿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요소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갖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아직 불완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시기상 예수님의 사역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안에는 ‘예수님이라면, 해결하실 수 있다.’하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그들안에 있었다. 바로 눈 앞에 계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고, 그 신뢰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계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인격적인 신뢰의 지속이야말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선생님→그리스도)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이경민, 57쪽)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편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사건에 관심을 둔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의”는 그 언약에 충성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에서의 의미를 보편화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던 하나님의 의를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사단의 통치를 종식 시키고 하나님의 통치로 회복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의를 통한 통치의 회복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로 회복과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김천수, 116쪽)

 


 

성경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께 향한다는 주장이다. 말씀으로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말씀의 구성은 말씀을 율법과 복음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의 원죄의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그 율법을 인간이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율법 다음으로 우리에게 다른 말씀 즉 복음을 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또 다른 약속으로 인해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인류구원의 역사이다. 즉 새로운 약속 예수 그리스도 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진 성경은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즉, 믿음과 말씀의 기능은 마치 태양과 빛의 관계로 볼 수 있다. 태양이 빛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말씀은 근원이고 믿음이 빛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태양을 바로 보면 혼동이 되지만 그 빛으로 인하여 사물을 정확하게 본다면 즉, 말씀과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 할 수 있다.(이종철, 7-8쪽)

 


 

바로 위에 언급된 5장 5절의 진술은 당연히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를 제공한다. 현재 우리는 의의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는 입장에 서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성령”은 우리가 그 소망을 기다리는 방식(수단의 여격)을 결정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자들과는 달리, 바울이 제시하는 길은 믿음에서 주어진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향한 기다림, 혹은 달음질을 완수하는 것이다(3:3). 이처럼 성령은 장래에 얻어야 할 의로움을 향해가는 방식이지 그 의로움의 증거가 아니다. 물론 성령은 신자들의 “아들됨”을 증거하고 유지한다(4:7; cf. 롬 8:14-15). 하지만 바울 논증의 지평은 현재의 아들됨이 아니라 장래 “의의 소망”이다. 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연결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으며, 바로 그 점에서 현재 상황의 절박함이 있다. 바울의 염려는 성령이 증명하는 현재적 칭의를 망각하고 있다거나 빼앗긴다는 것이 아니라, 의의 소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성령을 떠남으로써 이 소망에 이르지 못하게 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논증은 바로 이런 종말론적 위기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권연경, 64쪽)

 


 

바울은 “의의 소망”이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삶의 결과라는 사실 분명히 한다. 이에 비해 바울의 적대자들의 입장은 오히려 율법 준수에는 무관심한 채 할례나 절기준수 등으로 구체화되는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5:3; 6:12-13)소위 부정적 의미의 “은혜구원론”에 가깝다. 따라서 유대적 신앙을 “행위구원론”으로, 기독교적 신앙을 “은혜구원론으로 생각하는 생각은 바울의 논점을 뒤집은 것이다. 바울이 그리는 유대 신앙의 문제는 율법의 성취 혹은 순종의 부재였다. 그가 선포했던 기독교 복음은 율법의 이런 생명의 부재를 극복하고 성령을 통해 참된 율법의 성취를 일구어 내는, 그럼으로써 우리를 의의 소망에 이르게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바울의 답답함은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히 (행위 없는?) 믿음의 충분함을 부인한다는 식의 교리적 불만이 아니라,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의의 소망에 이르게 해 주는 참된 복음에서 벗어나 구원의 능력이 없는 헛된 가르침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었다.(권연경, 80쪽)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본래 그 믿을 내용(fides quae)이 자체로 명료하고 중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그 내용에 대한 지적 동의와 의미(Sinn)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신앙은 그렇게 지성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인식 작용만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믿는다는 행위는 내가 믿음의 대상을 향해 ‘실제적인 동의’를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내적확실성에 입각한 신뢰에 찬 고백(fides qua)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실성은 그 자체로 명료하고 초월적인 하느님께 근원을 두지만, 신앙의 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체험은 하느님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고 다루시는 지에 대한 직접적으로 체험과 이에 대한 신뢰의 행위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신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하느님 인식(Gotteserkenntnis)의 완성인가, 아니면 하느님 체험(Gotteserfahrung) 자체인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일상적인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고, 내가 믿는 신앙 교리들을 하느님의 진리라고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내 안에서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느끼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문제는 신앙이 하나의 인식행위라고 말할 때, 그 인식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명백히 종교적 의미 질문(Sinnfrage)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의미(Sinn)’가 감각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해석학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원초적으로 의미 질문은 인간의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의미 근거인 하느님을 향한 내적 충만을 목표로 한다. 신앙은 인간이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의미 질문을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던진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스스로를 의미의 근거인 하느님께 맡기고, 온전히 다루시도록 내어주는 결단 없이는 결국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의 정당성은 믿을 내용의 신빙성을 철학적 사유의 방식을 통해 궁극적으로 정초하려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진리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수용하고, 자신을 얽매이는 것들로부터 풀어놓고, 온전히 내어 주고 맡기는” 인간의 신뢰능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이라는 실존적 태도가 결국 “인간이 자신의 본성상 하느님의 실재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적인 신뢰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하느님의 표징을 읽어내는 감각적 지각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의 수많은 표징들은 하느님의 흔적과 그 분의 손길을 담고 있는 신앙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표징들을 세상 안에서 읽어내야 하는 인간의 감각이 유한하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감각은 보다 영적으로 변용되고 승화될 필요가 있다.(송용민, 158-159쪽)

 


 

 

 

둘째는 신앙 감각이란 개별 신앙인들에게 선사된 진리의 영의 은사가 결코 개인의 은사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은사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신앙 감각은 본래 신앙의 인식 원리이기 때문에 자체로 파악되지 않고, 그것이 삶으로 표현될 때, 즉 일상의 언어를 통해 선포되고, 신앙적 삶으로 증거될 때 비로소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 감각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교회적 신앙 고백의 원리이자, 공동체적 신앙 표현과 증거의 기초적 원리이기도 하다. 바이너르트(W. Beinert)는 “신앙 감각이란 신앙의 대상과 내적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모든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은사이며, 이른바 신앙적 합의를 이루는 보편교회는 바로 이 은사 덕분에 신앙의 대상을 인식하고 삶의 실천 속에서 교회의 교도권과 지속적인 공감을 표현하는 가운데 고백하게 된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공통감각’에 대한 논의는 신앙 행위가 감각의 지각능력에 기반을 두었을 때 어떻게 보편적인 합의(consensus)에 이를 수 있는 지를 밝혀주는 원리였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친교(koinonia)를 맺고 있는 통교적 공동체(Communio)라고 한다면, 신앙 행위에는 다분히 상호 주체간의 통교를 가능하게 해주는 통교적 감각도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플러(R. Schaffler)는 인간의 감각이 추구하는 ‘의미의 충만’이란 “생존하는 모든 것들의 질서를 의미하며, 이는 특정한 형태의 개별자들의 상호간의 행위와 다양한 경우에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 작업이 동일한 출발점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라고 말한다. 공동의 신앙 증언이 가능하려면 신앙 행위가 서로 다양한 삶의 배경과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를 이끌어주는 동일한 인식론적 출발점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현실을 벗어나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영지주의(gnonis)'에 빠지지 않고, 세상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표징들을 발견하고, 해석하며, 이를 간직하는 교회의 통교적 실존에 뿌리를 둔 것도 바로 신앙 감각이 지닌 공동체적 원리인 것이다.(송용민, 162-163쪽)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한 대조적 논증을 설명하였다. 대적자들과 바울 사이의 논쟁은 의를 제공하는 믿음을 율법의 행위와 일치시킬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상호 주장하고 있는 믿음의 성격에 관한 기존 논의에서 목적격의 소유격과 주격의 소유격에 관한 해석은 의로부터 행위를 배제하고 있는 바울의 논지를 불리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바울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음의 역사적 범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의의 계시이자 근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동격의 소유격을 사용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개념화하여 대적자들의 이해와 거리를 둔다. 이러한 수사학적 계산은 바울이 논증에서 주체를 강조하기 사용하는 개념적 논제들을 적극 활용하여 논쟁하는 것에서 현저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이 지향하는 사랑이라는 본질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 이미 완성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규정하는 행위들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속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대적자들이 제시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아브라함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의인화를 사용하기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된 믿음으로 강조하기 위해 개념화한다. 바울의 논지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통해 대적자들과 화해를 시도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율법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이방인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오신 믿음이신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자유를 변호하고 있다. 믿음을 그리스도와 동격화하고 개념화하는 것은 수사학적 측면에서 독자인 갈라디아교회를 설득하고 기독론적 의를 확립하기 위한 효과적인 논제였다.(조대훈, 153-154쪽)

 


 

이제 칭의론의 기능을 살펴보겠다. 갈라디아서에서 칭의론은 사회적 기능으로써 작용하였다. 옛 관점에서 칭의론의 중심 의제는 사람이 의롭게 되려면 ‘율법을 지킬 것인가,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 관점에서 보면, 바울의 관심은 ‘이방인이 어떻게 이스라엘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는가?’하는 데 있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특권을 고수하려는 유대계 신자들의 반복음적인 입장을 교정하기 위하여 칭의론을 개진하였다. 그것은 개인적인 속성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론의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설치된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사회적 조정 기능을 지닌 변론, 곧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부당한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이론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김종길, 21쪽)

 


 

갈라디아서 3장에서 제기 된 중요한 질문은 누가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인가이다.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인가? 아니면 바울이 전한 복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가? 사도 바울은 갈 3:10-12 문단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의 잘못을 입증하고, 그 대신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확립한다. 이를 위해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율법의 행위 및 율법의 저주와 결부시키고, 반면에 자신이 전한 복음을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리는 믿음 혹은 성령과 결부시켜 양자 사이의 반위관계를 극대화한다.

 

바울이 볼 때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르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축복은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곧 율법을 통해 의와 생명을 추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는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율법의 기능이 아닌 것을 율법에 두는 잘못, 곧 믿음의 기능인 의와 영생을 율법에 잘못두기 때문이다. 율법이 율법의 저주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율법의 저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시고, 율법의 저주인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기 때문이다(3:13; 롬 8:3-4).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율법의 저주가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과 율법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저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죽음을 가져오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할례와 율법과 관계없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고, 이를 보증하는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바울의 반대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하며, 바울의 복음만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최갑종, 1175-1176쪽)

 


 

6. 양명학

 


 

⑴ 양지

 


 

먼저 이상세계에 이르는 길로서 지눌이 심즉불을 주장한다면 양명은 심즉리를 주장하고 있다. ‘불(佛)과 ‘리(理)란 목표는 인간과 우주의 질서에 대한 표현의 차이가 나지만 이는 불교와 성리학의 목표에 대한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에 이르는 길로서 제시하고 있는 점은 ‘마음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지눌은 ‘마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 표현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이다. 공적이란 마음의 본체를 말하며, 영지란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본체와 작용, 성(性)과 상(相)의 두 모습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공적영지심이다. 이에 대하여 양명은 ‘양지(良知)’라 표현하고 있다. 지(知)는 마음의 본체를 말한다. 지눌의 공적영지의 ‘지(知)’역시 양명의 양지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다음으로 깨달음과 닦음의 수증론(修證論)에 관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지눌이 제시하는 수증론은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돈오가 깨달음에 대한 것이라면 점수는 닦음에 관한 것이다. 지눌은 깨달음은 점차적인 순서나 단계가 없이 한 순간에 몰록 깨닫는 돈오를 주장한다. 이에 해당하는 양명의 사상은 치양지(致良知)라 할 수 있다. 닦음에 관한 지눌의 견해는 오후점수(悟後漸修) 즉 깨침에 바탕한 닦음을 말한다. 그는 혜능의 자성정혜와 더불어 신수가 주장한 수상정혜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양명은 지행합일과 사상마련을 주장하고 있다.(김방룡, 21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치양지학의 최종적 완성에 도교(도가 포함)는 물론 유교, 불교적 요인들이 융합, 회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불도가 ‘양지(良知)’의 태허(太虛) 속에 모두 포섭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렇게 양지를 중핵으로 해서 다른 사상을 융합했던 양명학은 중국사상사의 심학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그것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심학의 길을 열고 주자학의 교조적, 배타적 성향과 전혀 다른 포용적 성향의 사상의 틀을 형성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만물일체론(萬物一體論)으로 드러나며, 그 근저에는 이원론적 도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생명(生命)’의 혼일성, 일체성에 대한 왕양명의 깊은 통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것은 ‘병약(病弱)’했던 자신의 ‘몸-신체(身體)’의 한계성에서 열린 지혜였다.

 

왕양명이, 도교의 개념인 원신(元神), 원기(元氣), 원정(元精)을 ‘양지는 하나(良知一)’이라는 관념 속에 넣어서 이해하던 방식은 바로 생명의 근저에는 늘 소통와 융합, 회통의 메시지가 들어있음을, 도교적 수행을 통해 얻어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최재목, 47쪽)

 


 

결국 양명에게 있어서, 󰡐격물(格物)󰡑은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양명에 따르면 격(格)은 바르게 한다는 정(正)이고 물(物)은 사(事)일 뿐이다. 또한 양명은 격물치지의 치(致)는 이른다는 의미의 지(至)이고 앎의 지(知)는 양지(良知)라고 하였다. 이때의 양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며 사물에는 의(意)가 들어 있기 때문에 격물과 치지는 두 가지 일이 아니라고 양명은 말한다. 즉, 자신의 양지를 완성하는 일과 실천으로서의 사를 바로잡는 일은 하나인 것이다. 이에 양명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게 되었고, 격물치지란 내 안의 양지를 잘 기르면 될 뿐 내 마음 밖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양명은 격물을 일련의 자기조절의 파편적인 행위로부터 내적인 자기쇄신의 지속적 과정으로 변형시켰다. 즉, 그는 격물의 의미에 있어서 󰡐의지의 성실함[성의(誠意)]󰡑이나 󰡐마음을 바로잡음[정심(正心)]󰡑과 같은 개념으로 동일시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학』의 수신(修身)에 관한 가르침을 도덕적 발전의 점진적인 과정에 따른 별개의 단계로서가 아니라, 인간적 완벽함을 향한 심신(心身) 상관적인 방법론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양명에 의하면, 격물이 더 이상 주체가 객체와 만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으로 해석되지 않을 시, 그것은 자기실현을 향한 주체의 탐색의 변형원리가 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앎[知]은 반드시 바로 잡는[正] 행위이며 함[行]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기인식을 증폭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앎과 함의 통일로서의 지행합일이 이루어짐을 양명은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명은 󰡐치지(致知)󰡑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취하였을까? 양명에 의하면, 󰡐치(致)󰡑는 『논어(論語)』에서 󰡐장례에서는 슬픔을 지극히 한다󰡑고할 때의 󰡐치(致)󰡑이며, 󰡐양지(良知)󰡑일 따름이며 결코 외연적인 지식의 의미는 아니다. 양명에게 있어 󰡐격물치지󰡑는 사물, 즉 의미의 발현을 바르게 함으로써󰡐양지를 실현하는 것󰡑 곧 󰡐치양지(致良知)󰡑라 할 수 있다.(김미령, 11-12쪽)

 


 

사림 세력의 집권에 따른 정치 질서의 재편이 요구되고 시도되었던 명종 말 선조 초의 시기에 양명학을 이해․수용하는 여러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 양란에 따른 피해의 복구와 동요하는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한 방안이 시급히 요구되었던 인조대에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개혁방안이 제출되었던 것, 사림 세력이 수립한 주자학적 정치질서가 파탄을 맞이하는 한편, 양란 후 국가 재건을 위한 사회경제적 토대의 복구가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치질서․국가구상이 요구되었던 숙종-영조대에 주자학적 붕당론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탕평론이 제안되고,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국가재조 방안이 형성되고 있는 것 등은 양명학이 주자학의 대안으로 인식되고 검토되었음을 말해 준다.

 

양명학을 이해․수용하고 그 영향을 받았던 학자․관인들이 양명학을 주목한 것은, 그것이 주자학과는 다른 관점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양명학을 수용했던 사례들을 통해 양명학에 대한 주된 관심이 簡易直截한 공부 방법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퇴계 이황과 그 문하가 주도한 양명학 변척에 따라 양명학을 異端으로 규정하는 것이 양명학에 대한 주류 학계의 일반적 인식으로 자리 잡아 갔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관인들은 주자학을 고수하는 학자․관인들과 다른 관점에서 현실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주자학의 명분론을 극복하는 현실타개 방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양명학이 이단으로 규정되고 배척되는 학계의 풍토는 여전하였지만, 양명학은 국가적 위기, 사회변동에 대응하는 변통론의 흐름에 수렴되고 있었던 것이다.

 

양명학은 혼맥․학맥을 통해 주로 서인 내부의 成渾계열 내에서 전승되었고, 주자학과 다른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변통론의 흐름 또한 같은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두 흐름은 정제두에 이르러 양명학의 체계화와 그에 바탕한 양명학 정치론․사회개혁방안으로 종합되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대변통을 지향하는 국가재조론의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었으며, 서인-소론계 학풍의 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정두영, 127-128쪽)

 


 

鄭寅普는 良知를 感通으로 표현하면서 이것을 통해 ‘天地萬物이 一體’임을 강조하고 있다. 感通이란 용어는 『周易』「繫辭傳」의 “寂然不動하다가 感應하여 천하의 모든 일에 마침내 疏通한다”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는 宋代性理學者들이 특히 중시해 왔다. 그런데『周易』에서는 感通의 주어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鄭寅普는 이를 良知라고 한다. 즉, 良知가 세상의 모든 일에 感應하여 疏通한다는 것이다. 그의 독창성이 보이는 부분으로 선천적 ‘良知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동일하게 파악하는 입장에서 이 말은 도덕적 판단능력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시되는 것으로 누구에게나 주어진 天理이기에 누구에게나 동일한 도덕인식과 도덕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선천성이라는 의미가 가지는 공동체적 의미에서 파악된 것으로, 이를 통해 鄭寅普는 陽明철학의 사회적 적용점을 찾고 있다. 특히 어떤 것이 선천적으로 모든 객체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모든 동일한 객체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성이 담보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선천적 알음’인 ‘良知’가 주어져 있다면, 良知는 곧 서로가 가진 공통성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서로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이해의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조은덕, 30쪽)

 


 

鄭寅普는 참된 앎은 행위화 되는 앎이라고 보았다. 그는 行없는 知는 實知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知行合一論은 사실상 致良知와 心卽理의 이론 속에 이미 담겨있는 논리이다. 陽明學의 이론적 특색은 원래 心의 수양에 맞추어져 있다. 朱子學이론이 理를 통한 心으로의 접근이었다면, 陽明學은 心에서부터 우주의 이치에 관한 이해로 나아가고 있다. 心이 바르게 된다면, 이를 통해 모든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心을 바르게 하기 위한 수양론은 陽明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良知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바로 ‘행위를 수반하기 위한 도덕 인식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行하지 못한 것은 애초에 알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정인보의 知行合一論은 王陽明의 知行合一에 근거한다.(조은덕, 52쪽)

 


 

인용문을 보면, 왕양명은 사람이 천지만물과 한몸인 이유로서 양지가 천지만물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음을 그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천지만물의 고통과 아픔을 내 몸의 고통과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는 양지는 저절로 남의 곤궁함과 아픔을 나의 고통처럼 여기고,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말이다. 왕양명은 양지의 이러한 뛰어난 ‘공감적 감수성’은 선천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양지에는 천지만물의 고통과 아픔을 내 몸처럼 느낄 수 있는 감응원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응의 실현을 통해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마음,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양지가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서 남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실은 배제할 수 없다. 왕양명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양지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은 모두 양지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지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에 막히지 않지만, 후천적인 경험이나 학습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양지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에서 필요한 정보를 흡수하고 있음을 왕양명은 인정하고 있다. 또한 양지가 그러한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을 멀리할 수 없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지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경험과 지평이 다른 선천적으로 민감하게 남의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양지의 진성측달, 즉 ‘공감적 영성’인 것이다.(김영건, 64-65쪽)

 


 

여기서 양명은 병의 뿌리를 제거하듯이 사욕의 근원을 제거하여 순수하게 천리와 하나가 된 마음이어야 ‘미발지중’이고 ‘천하지대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징과의 이 대화에서는 정좌가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비록 아직 집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미색이나 이익,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은 원래 없었던 적이 없다’는 구절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마음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마음, 곧 미발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 주며, ‘반드시 평소에 미색을 좋아하고 이익을 좋아하며 명예를 좋아하는 일체의 사심(私心)을 말끔히 쓸어내고 씻어내어 터럭만큼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논의되는 내용이 미발의 마음에 대한 명상임을 알려준다. 결국 여기서 양명은 미발의 마음에 대한명상으로서의 정좌가 양지를 온전하게 하여 마음이 확 트여 천리에 순수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셈이다. ‘마음이 확 트여 천리에 순수하게 됨’(廓然純是天理)은 주자가 격물치지의 정점으로 말한 일이관지(一以貫之)와 활연관통(豁然貫通)을 연상시킨다. 주자가 격물 궁리를 통한 ‘활연관통’을 주장하는 반면에 양명은 치양지의 명상을 통한 ‘확연순시천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정은해, 22쪽)

 


 

박은식이 양지와 만물일체지인을 기반으로 생성한 한국근대주체는 중화사상의 복원이나 유학적 보편도덕을 이용한 친일논리의 계발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박은식의 진아는 도덕적 자율성을 본유한 주체로서 모든 존재와 관계맺음하고 있는 열린 존재로서, 한국의 독립과 세계평화를 구현할 근대주체였다. 박은식의 근대 양명학은 단순히 유학문명의 재건이라기보다는, 유학이 늘 시대와 함께 호흡하면서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는 시대정신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力說을 담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 시대 유학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지금 여기 서있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박정심, 114쪽)

 


 

하지만, 양명이 즐거움을 마음의 본체로 간주하고, 또한 이를 바탕으로 도덕성의 실현 문제를 논의한 배경에는 보다 심층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곧 그것은 어떻게 하면 일신(一身)을 단위로 하는 개체성의 간극을 넘어서 모든 타자와 소통을 통해 진정으로 합일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양명은 인(仁)을 이상적인 만물일체(萬物一體)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공부 방법으로 본체의 생의(生意)와 유행(流行)을 전제로 한 치양지를 제시하는 한편,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타자와 시비(是非)와 호오(好惡)를 공유할 것을 제시하고 이것이 곧 가장 크고 참된 즐거움이라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볼 때, 양명이 즐거움의 개념에 근거하여 새로운 본체 개념을 제시하고, 또한 그것이 칠정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기쁨과 편안함, 그리고 안정을 중시한 까닭은, 한 주체의 도덕적 동기와 행위는 오직 긍정적인 심리적 상태를 매개로 해서만 일신을 존재의 근거로 삼을 때 발생하는 타자와의 간극을 넘어서 점차 기타 모든 존재들과 자연스럽게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박길수, 45쪽)

 


 

양명은 가르침과 양육이란 두 의미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親民이 올바른 용어라고 주장한다. 독서․강학․수양을 통해 올바른 이상적 인격에 도달한 이후에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자의 新民은, ‘지식인 엘리트가 민중의 위에 자리하여 그들을 계도해야 한다는 요청’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親民은 백성들에게 ‘억지로 善의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지도자 혼자만 이 진리를 독점한 것도 아니다.’ 민중은 그들 스스로 善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다만 민중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진작시킬 뿐[作]’이다. 이것이 親民의 교육이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진리를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교사가 학습자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있다고 할지라도 교사는 학습자보다 절대적 우위에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교사는 다만 학습자 스스로가 그 진리를 끌어낼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줄 뿐이다. 이 모두는 어떠한 제도나 정치의 혁신을 통해 이상적 사회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양명의 믿음이 표현된 것이다. 그는 모든 이들이 ‘자기 수양적인 심학 공부를 해 나갈 때, 이상적 사회가 동시에 실현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양명이 생각하고 있던 교육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한교육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외적 환경만 제대로 갖추어진다면 그 스스로 도덕적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실천’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에서 그의 교육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인간의 양지를 가리고 있는 사욕을 제거하는 자기 수양의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곧 외적강요가 아닌 학습자 스스로의 자발성을 강조한다. 더불어 양명에게 교사는 진리의 독점적 소유자가 아니며, 학습자 역시 무지몽매한 자가 아니다. 교사와 학습자 모두는 진리를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교사는 다만 학습자 스스로가 그 진리[양지]를 끌어낼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그리고 학습자는 그 환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욕을 제거하는 공부를 진행해 간다. 곧교육은 교사와 학습자는 협동하여 학습자 자신에게 담긴 진리[양지]를 스스로 끌어낼 수 있도록 장치인 것이다.(이우진, 70-71쪽)

 


 

궁극적으로 ‘知’와 ‘不知’의 구분도 ‘仁’과 ‘不仁’에 달려 있다. ‘仁’ 곧 천지만물, 남과 나를 한 몸으로 소통할 때만이 ‘知’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적 합리성을 의미하는 지(이성), 지혜와 달리 인식의 문제가 상생을 의미하는 ‘仁에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지’란 결코 ‘지’일 수 없는 것이 된다. 대상 간 상생을 위한 ‘지’가 아니라면, 결코 지혜라고 언급할 것이 못 되는 것이 된다.

 

“유독 에테르와 같은 無形의 뇌신경이 천지만물과 남과 나를 통하게 하여 한 몸이 되게 하는 데도, 망령되이 상대방과 나를 구분하고 망령되게 경계를 보이고, 단지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여 다른 사람의 아프거나 죽고 사는 일 따위는 거들 떠 보지도 않고 홀연히 마음에 기뻐하거나 측은해 하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도리어 제멋대로 꺼리거나 잘라먹거나 깨물거나 죽이면서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더 이상 괴이할 게 없다. 이런 사실들을 돌이켜 볼 줄 알면, 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는 『인학』 전반을 관통하고에 있다. 뇌란 지적 작용을 맡는 것이고, 뇌신경은 지적작용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양명의 양지는 기타 사물의 ’, 곧 공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념적으로 경계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담사동은 이 같은 의미에서 서로 간 상생을 모색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세태를 비판한 것으로 필자는 판단하고 싶다.(이명수, 312쪽)

 


 

王陽明은 “心外無理”을 주장하고 이로 하여 “대 도리는 사람마음에 있다”고 인식하여 정치적 사무와 사회적 사무는 결국에는 인간의 “心”에 있기에 인간의 도덕은 本心이라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매개인의 “心”은 한줌의 피와 살뿐이 아니라 儒家의 도덕과 정치적 원칙이 내포되어 道德之心, 政治之心이다. 心이 정치생활 중에 근원적 의의가 있기에 양호한 정치생활을 실현하려면 儒家의 理想정치를 널리 시행하고 개인의 心에 공을 들일 것을 강조하였다. 오로지 心으로부터 공을 들여서 연마하여야만 내재적인 정치관념과 정치감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현실중의 정치사무가 적절히 배치될 수 있다. 만약 정치의 외재적 형식에만 발을 붙여 형식으로만 표현하면 정치의 지향점을 잃게 되여 허위적인 정치로 된다. 그렇다면 “治心을 위하여 “治世”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治世을 위하여 “治心”을 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 王陽明은 “治心이 바로 “治世” 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자신이 창립한 “致良知”의 心學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람마다 모두 良知가 있으며 良知는 옳고 그름 및 선과 악을 판단하는 표준일 뿐만 아니라 개인행위의 준칙으로써 개인의 양호한 생활을 실현하는 행동준칙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良知는 개인의 도덕신념으로부터 개인의 행동준칙으로 변화되고 진일보 전반 사회의 공통적으로 준수하는 내재적 규칙으로 변화되었다. 만약 사람마다 良知를 믿고 따르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致良知를 의무로 하고 도덕적 자각성을 발양하면 인간사회의 정의와 공평, 타인을 자기처럼 아끼는 것, 나라를 집처럼 여기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러면 천하가 大同되고 萬物一體의 理想적 인간질서의 실현과 양호하고 선량한 사회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도덕건설과 정치건설은 통일되어야 하고 정치건설의 기초는 도덕건설에 있다.(방호범, 299쪽)

 


 

지금까지 주체적 능력을 통해 연대로서의 ‘公共’을 이루는 ‘個人’의 모습을 왕양명의 ‘良知’개념 및 전통 유가적 사유로부터 이어진 ‘感應’의 인지적 특성을 통해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양명의 사유에서 ‘致良知’를 통해 달성하는 ‘公共’에서의 ‘個人’은 ‘感應’하는 ‘주체’, 즉 관계적 힘[氣]으로 존재한다. 이때 사람은 신체영역적인 단위로 분절되지 않는다. 관계를 관통하는 생명 에너지[氣, 仁]는 구체적 몸[身]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본래적 존재 방식인 ‘生意’의 힘으로 체화되어 다양하게 전개된다. 즉, 한사람의 존재 에너지[靈明]는 그 사람 내부에서 구체적인 몸의 느낌과 비가시적 정신에너지를 이원화 하지 않고 모든 존재 상황을 관통한다. 그리고 이 존재 에너지에 대한 직감을 통해 인간 세계에서 관계를 이루며 고유한 가치의 세계를 형성한다. 양명은 인간에 고유한 이러한 존재의 힘과 의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眞誠惻怛’이라는 몸의 느낌으로 설명하는데, 인간은 상대 존재의 ‘生意’로서의 ‘自由’가 파괴된 상태를 보고 이와 같은 고통의 느낌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이를 통해 자기 몸의 경계적 제약을 넘어서 다른 존재와 그 존재 방식의 힘을 교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내감[內感]되는 모든 존재의 결을 직감하고, 그 ‘生意를 회복시켜주고자 하는 노력이 ‘良知다.(이지영, 80쪽)

 


 

우리가 흔히 무도에서의 앎과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도를 통해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얻은 후 행위로 옮기는 것인가, 아니면 무도를 통해 내적인 사사로움을 제거하여 원래 알고 있던 앎을 행위로 옮기는 것인가. 이 질문을 王陽明의 수양론을 통해서 보면 ‘무도에서의 앎과 행위는 원래 가지고 있는 良知를 발현하는 致良知의 수양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王陽明의 이러한 의식은 그 동안 고민했던 여러 문제들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주었다. 연구자가 시종일관 무도의 목적을 ‘자아성찰을 통한 인간완성’이라고 강조한 것은 王陽明心學과의 접목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王陽明의 생각은 마치 佛家에서 말하는 암벽에 부조형태의 부처상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개념은 암벽에 부처님을 부조형태로 새겼다라고 하지만 불가에서는 입장이 다르다. 불가에서는 원래 암벽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私心의 시선으로는 부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아닌 부분을 제거하고 나면 부처님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한다. 이는 王陽明의 생래적 良知와 良知의 발현을 위한 사욕의 제거와 비슷한 이치이다.

 

무도 또한 이와 같다. 무도를 통한 도덕적 깨달음은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상존에 있는 도덕적 자아를 일깨우는 것이다. 무도의 도덕성은 무도라는 발현기제가 우주자연의 이치를 체현하는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내적 자아를 채근함으로써 사욕을 제거하고 도덕적 행위로 이어져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무도에서의 앎과 행위는 과학적으로 구분하는 이론과 실제의 구체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이원화된 개념이 아니라, 앎과 행위는 살아있는 생명체내에서 끊임없이 활성화되는 일원화된 천리의 발현임을 말한다.(김시연, 123-124쪽)

 


 

王陽明의 修養論의 가장 핵심 개념은 良知이며, 이 良知는 陽明學을 心學이라 부르는 이유가 되고 또한 陽明學이 ‘主體唯心主義’또는 ‘主觀唯心主義’라 불리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良知를 가진 인간은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이른바 ‘아비와 자식에게 친함이 있고, 임금과 신하에게 의로움이 있고, 知아비와 知어미에게 구별이 있고, 어른과 아이에게 차례가 있고, 벗들 사이에 믿음이 있다.’는 다섯 가지의 명제를 즉각적이고 알 수 있다고 王陽明은 주장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 이치에 따라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心, 즉 良知만 잘 발현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王陽明의 心學에 입각한 修養論은 모든 사람들이 聖人이 될 수 있는 근본적 토대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평등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송영배(1994)는 “王陽明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良知를 천리라고 규정함으로서 士大夫계층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계층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다분히 朱子學에 의하여 주로 전문적지식인 계층에만 한정되었던 송명시대의 신유학을 전 사회계층으로 확산하고 대중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객관적 천리의 엄격성이 허물어짐에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각기 자기 나름으로의 良知에 따라서 도덕 실천을 매우 용이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王陽明 철학은 이와 같이 主靜적이고 명상적인 고상한 세계로부터 세속의 시정배에까지 두루 확산되는 동적 특성을 띄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王陽明의 修養論은 인간의 主體性확립에 있어서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王陽明은 心本體를 우주의 理와 동등한 입장에 둠으로서 인간의 마음(心)이 하늘의 이치, 즉 吾心을 우주의 理와 등등하게 보았다. 이는 삼라만상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정신, 즉 良知가 만물을 주재하는 것으로 인간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은 개체를 주체성의 존재로본 것이지, 도구적 대상으로 본 것은 아니다. 때문에 王陽明은 시종일관 정신수양의 과정 중에서 자아가 그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王陽明의 주체성은 자기를 위하는(爲己)마음이 있다면 바로 자기를 이길 수 있고(克己), 자기를 이길 수 있으면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成己)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김시연, 34-35쪽)

 


 

 

 

‘天理를 보존 할 수 있도록 배운다.’라는 말은 인용문에서 보듯이 天理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수양을 통해 天理를 보존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뜻이다. 天理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실제로 없다. 객관적인 지식이라면 누구한테 배울 수 있겠지만 天理를 보존하는 일은 누구한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배워 나가는 것일 뿐이다. 聖人은 학문의 목표로 제시된 것일 뿐 학문의 구체적인 방법은 모두 개인들이 각자자신들의 良知에서 찾아야 한다. 성인이란 그 마음이 언제나 天理에 맞고 인욕이 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성인의 경지에도 달하려면 마음이 언제나 天理에 맞을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하는 과정을 거치면 된다. 여기서 ‘天理를 보존한다.’라는 말은 마음을‘ 天理에 맞게 실천할 수 있는 상태로 계속 지속시킨다.’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좋을 듯하다. 이러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각 상황에 맞는 윤리적인 실천을 온전히 수행해 내어야한다. 그러한 윤리적 실천들이 바로 ‘存天理’에 이를 수 있는 배움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윤리실천이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수양의 한 과정이라는 이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명이 주관성 속에서 보편 규범을 세운 온전한 의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전병욱, 103쪽)

 

 

 

⑵ 지행합일

 


 

 

 

致知가 실제 일 속에서 爲善去惡하여 그 일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格物이다. 이런 의미에서 致知는 곧 格物(正物)이며, 誠意工夫가 실제로 착수하는 곳 또한 格物이다. 그런 의미에서 致知는 일상에서 바로 잡는 工夫이며 바로잡는 工夫는 誠意工夫의 착수처이므로 결국 하나의 工夫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王守仁에게 있어서『大學』에 제시된 제반 工夫는, 致良知의 과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致良知속에는 行의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王守仁은 知를 먼저하고 行을 나중에 하면, 知와 行이 분리되어 格物窮理를 통한 致知만 추구하여 본말이 전도되는 경계에 빠지게 된다고 보고 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 그는 “(知와 行이 둘인 것)은 이미 사욕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지,知行의 本體가 아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단지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知行의 本體는 본래 “如好好色, 如惡惡臭”하듯이 보고 아는 순간 바로 저절로 좋아함이나 싫어함을 일으키는 行이 일어나는 하나인 것이다. 실제로 善에 대해 좋아함을 표현하고 惡에 대해 싫어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善惡에 대한 내 앎이 참된 앎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내가 판별한 善惡이 이미 실제적인 행위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王守仁은 “앎이란 행위의 시작이며 행위는 앎의 완성이다”라고 하였다.(김윤경, 76-7&쪽)

양명이 자신의 심즉리의 체험에 입각해서 당시 넘볼 수 없는 권위였던 주자의 격물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심지어는 공자조차도 그에게 절대적인 권위가 될 수 없음을 밝히면서 당시의 지적,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부패의 근본을 치유하려고 한 것처럼 함석헌은 1923년 관동대지진과 거기서의 일련의 체험이후 자신의 진로를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하고, 특히 그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큰 전환이 마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선택한 것도 이즈음의 경험들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그의 또 다른 삶의 내러티브인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에 보면 그는 이 사건 속에서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았고, 종교도 도덕도 어떤 것인지 눈앞에 똑바로 나타났습니다.” 고 한다. 고향에서 기독교를 접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것,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던 그가 전쟁에 끌려가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와서 그러한 참상을 겪고, 또한 거기서의 특별한 섭리를 체험한 후 신학이나 철학 등의 이론적 탐색을 선택하지 않았고, 또한 소질도 있었고 무척 하고도 싶어 했다던 미술도 마다하고 ‘사범학교’를 선택한 것은 그저 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양명이 심즉리를 경험하고서 ‘지행합일’의 행과 실천에 몰두한 것과 같이 그렇게 그가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 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정했습니다.”라고 한 대로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현장’이고 ‘현실’이며, 평범한 사람들(씨알)의 ‘교육’이라는 깨달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나중에 1928년 졸업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10년을 재직할 때 쓴 글에서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입니다. 절대입니다.”라고 쓰고 있다.(이은선, 22-23쪽)

 

 

 


 

양명은 용장에서 心卽理를 자각한 뒤, 그 다음해에 곧바로 知行合一說을 논하기 시작한다. 양명이 용장에서 心卽理를 자각한 1년 뒤에 곧바로 知行合一說을 논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가 깊다. 양명의 心卽理는 ‘마음의 발동’을 ‘이치에 즉한 것, 이치 그 자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 心卽理를 알맹이로 하여 그는 ‘知와 行이 하나’로 되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心卽理를 주장한 양명에 있어서 주희와 같이 마음 밖의 理를 따로 인식하는 窮理의 과정은 불필요하게 된다.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창출된 실천조리가 개체욕망의 장애를 받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실천행위를 통해 완전히 실현 되도록 하는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理를 궁구하는 과정은 외재적인 理에 대한 인식과정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창출된 실천조리를 실현하는 실천행위로 전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感應力과 창출성의 주체가 바로 良知를 가르킨다.

 

心卽理說이 주희의 格物說과 性卽理說에 대한 반론이라면 知行合一說은 주희의 先知後行說에 대한 반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心卽理, 知行合一, 致良知 3대 학설은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주자학에서는 마음이 외재적인 정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인식능력으로 국한되기 때문에 先知後行의 차서를 지닌다. 반면 양명학에서는 마음이 실천條理를 창출하는 역동적 창조성과 자각적 판단력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행위로 이행하는 능동적 실천성을 동시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따라서 知行은 마음 안에서 이미 合一의 계기를 지니게 된다.(조지선, 39쪽)

 


 

첫 번째 양명의 취지는 知行의 本體는 良知 하나이므로 知와 行은 원래부터 合一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함에 있으며 두 번째는 사유․성찰 과 착실․궁행의 合一로 불선한 의념을 방지하여 行과 知를 바로 잡아 참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면서 부실한 말만 앞세우는 시대 풍조를 바로잡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知行合一에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知行合一의 내용은 知行의 本體인 良知에 대한 이해를 먼저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악해야한다. 知行의 本體인 良知는 스스로 알고 행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갖가지 사물과의 感應 속에서 是非와 好惡을 알고, 동시에 是非하고 好惡 하는 意念과 그 전개로서의 외적 행위를 수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知行의 불가분성과 합일성이 성립하게 되며 그것은 知와 行의 本體는 하나이며, 知 속에 行이 있고 行 속에 知가 있다는 것으로 파악되며, 知는 行의 주체적 意念이고, 行은 知의 공부이다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知가 진절하고 독실하게 되면 行으로 나타나며, 行의 明覺하고 精察함이 知로 본다. 즉 知行合一의 내용은 ‘배우면서 행하지 않음은 없고, 행하지 않으면 배움이 아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희의 知行合一은 누구나 지식을 내면화하면서 그 경지에 이르는 가정을 밝아갈 수 있다고 보고 그리하여 각자 지식을 추구한 결과로서 심성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추구란 주희의 용어로 格物공부를 가리키며 이때의 格物은 형이상학적인 원리로서 理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며 왕양명의 格物과 차이를 갖는다. 주희의 性卽理는 氣와 정감이 배제된 순수 理의 세계이므로 양명학에서 도덕의념이 드러나는 心卽理의 세계와는 명백히 다르다. 心卽理의 세계는 理氣와 性情을 일체로 하는 세계이므로 知行은 물론 一體가 合一을 이룬다. 순수 도덕의념이 구현하는 세계 속에서 心卽理와 知行合一은 사실 원칙이 되면서 현실지도 원칙이 된다. 양명학의 세계에서는 心卽理의 도덕의념의 세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명의 눈에 비친 당시의 세계는 心과 理, 知와 行이 각기 두개로 나누어진 모순된 세계였다. 이 상호모순의 대립의 세계에서는 『大學』의 學․問․思․辨․行 도 知와 行으로 나누어지고, 따라서 평생알지도 행하지도 못하는 학풍이 조성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도덕교육에서 같은 문제 상황을 야기한다. 知行의 관계를 知를 중시한 주희의 견해는 결국 ‘교과공부를 통한 심성함양’에 기초를 두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知를 좁게 도덕규범에 관한 지식이나 윤리학 이론에 관한 지식으로 한정하는 것이 되며 이는 도덕교육의 문제인 知行의 乖離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조지선, 50-51쪽)

 


 

왕양명과 송대 유학자들이 이해했던 ‘지(知)와 ‘행(行)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송대 유학자들이 생각했던 ‘지’와 ‘행’은 지식과 실천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것과 스스로 실행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나 양명학에서 ‘지란 단지 주관적인 형태의 ‘지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송대 유학자들이 사용하는 ‘지의 범주에 비해 범위가 좁다. 하지만 ‘행의 범주는 송대 유학자들이 사용하는 범주보다 넓다.‘행은 사람의 실천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심리적인 행위까지도 포괄할 수 있다.

 

왕양명은 “알면서도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이란 없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또한 “앎은 실행의 시작이고 실행은 앎의 완성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앎에 대해서만 말하더라도 실행은 저절로 그 안에 있게 되고, 실행에 대해서만 말하더라도 앎은 저절로 그 안에 있게 된다.”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왕수인이 동태적인 과정에서 지와 행이 서로 연계되고 포함된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식은 앎에 속한다. 의식 활동이 행의 시작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의식은 전체적인 행위 과정의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은 행위 과정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의식을 실행이라 말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위는 실행에 속한다. 그러나 행위가 사상의 실현이라거나 실천이 관념의 완성이라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실행은 전체적인 지식 과정의 종결, 즉 지식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실행을 앎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앎에는 실행의 요소가 있고 ’실행‘에는 앎의 요소가 있다. 두 범주의 규정은 서로를 포함한다. 결국 지와 행은 합일되는 것이다.(이상룡, 34-35쪽)

 


 

이상의 양명의 知行合一적 致良知의 공부법은 궁극적으로 ‘萬物一體’의 대동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교육법이다. 양명은 죽기 2년 전인 1527년 앞에서 우리가 소개한 拔本塞源의 글과 함께 그의 사상의 정수가 들어 있다고 이야기되는 大學問을 지었고, 거기서 그는 이러한 정신의 소유자를 ‘大人(the great man)으로 표현했다. 大人이란 그에 의하면 “하늘과 땅과 우주의 만물을 한 몸으로, 이 세상 모두를 한 가족으로, 이 땅 전체를 한 나라로 파악하는 사람”(大人者以天地萬物爲一體者也)이다. 그는 만물일체의 실현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참되게 실현하도록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만약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충분히 ‘仁’을 실천하였다고 하여도 남과의 관계에서 아직 그것이 충분치 않다고 보면 자신의 인이 아직 충분히 확충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 또한 자신의 가족은 배부르고 따뜻하지만 옆에서 삶의 필수품과 즐거움을 박탈당한 채 궁핍한 사람들을 본다면 결코 그들에게는 인과 의를 요구하고, 예의를 지키며 인간관계에서 성실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법과 정부를 세우고, 예와 음악과 교육을 정비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자신과 남을 온전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그 일들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이은선, 31쪽)

 


 

주희가 그의 학문 체계를 확립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시한 것과 달리, 양명은 성의(誠意) 개념에 주목하고 이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그는 최종적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이 곧 의(意)이다.와 “의(意)가 있는 것이 곧 물(物)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실천적 관심이 전통적인 심물(心物) 관계에 새롭게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의향 활동을 심의 가장 심층적인 특성으로 간주한 것으로 마음과 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통일하고 있다. 그런데 사물의 의미와 의의를 심의 지향 활동 안에서 새롭게 규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사물(事物)이 언제나 의(意)의 지향활동과 구조를 매개로 해서 심신에 그 존재의 의의를 현전한다는 것이므로 이때 모든 사물은 필연적으로 사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성의(誠意) 공부 안에서 주체의 심(心)과 신(身), 그리고 지(知)와 행(行)은 서로 결합하고 통일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모종의 의념이나 의도가 발생했다는 것은 곧 심이 지향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미 마음이 어떤 사태로서 사물과 필연적인 ‘상관관계(correlative relation)’를 맺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심(心)과 물(物)의 상관관계는 심신이 곧 외부 사태와 관련된 특정한 정향 활동을 전개한 것을 의미하므로 이때 주체의 지(知)와 행(行)은 그 자체로 통일되어 있으므로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이 양명이 곧 의(意)를 ‘행위의 시작[行之始]’으로 규정한 본의이다. 실제로 양명의 전체 사상을 일별하면, 그가 용장오도(龍場悟道) 이후 제일 먼저 제창한 사상은 심즉리(心卽理)가 아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며, 이후 그의 사상이 여러 차례 전변하였는데도 이 사상을 끝내 만년까지 시종일관 견지했던 주요 원인도 다름 아닌 신심지학에 근거한 성학 이념 때문이다.(박길수, 10-11쪽)

 


 

한사상은 천·지·인 ‘합일(合一)’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나와 남이 구별이 없는 자타일여(自他一如)사상, 조상과 후손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생사일여(生死一如)사상 등의 ‘일여’(一如)처럼 ‘하나’라는 사유구조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신토불이(身土不二) 즉 생활의 터전인 땅과 사람이 둘이 아니라는 삶의 철학을 낳는다. ‘일(一)’, ‘불이(不二)’는 한국어의 ‘우리’라는 표현에서처럼 모두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체의식과 평등의식으로 정립된다. 이 부분이 한사상 논의의 쟁점을 이루기도 한다. 신토불이는 자연의 질서와 인간 삶의 원리는 근원적으로 합치되어 있다는 사상으로 한사상에 내포된 점이며, 이 점은 단군신화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그리고 인내천(人乃天)사상에서도 확인된다.

 

아울러,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郞碑序) 에서 ‘국유현묘지도왈풍류(國有玄妙之道曰風流)’라 하여,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인 풍류가 있다고 천명한다. 이는 ‘풍류’가 신라에서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우리의 고유의 사상=한사상임을 언급한 대목이기도 하다. 최치원이 말한 선사(先史)의 기록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전해져 오고 있는 문헌들을 살펴보면 최치원이 말한 부분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불교와 유교, 도교의 유입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는 유, 불, 선을 아우르는 사상 즉 포함삼교(包含三敎)의 사상이 있었다.(최재목, 216쪽)

 


 

⑶ 공감적 영성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기적인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지행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 지행이 분리되었다는 것은 효제충신과 같은 사회적 행동을 창출하는 마음의 본래성이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기적인 생각에 막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관계에서 시와 때에 맞는 사회적인 행동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행동은 이기적인 욕심이나 사사로운 생각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내가 알고 있는 이치[앎]는 이기적이며 사사로운 욕심과 생각에 막히게 되고,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사회적 행동[행동]과 괴리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기적인 생각이 제거되면, 진정한 앎에 이르게 되고 앎과 행동은 자연히 일치가 된다. 이러한 상태는 마음의 본래성을 회복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름이 걷히자마자 햇빛이 온 대지를 두루 비추는 것과 같다. “이미 악한 생각을 제거하였으면, 그것은 곧 선한 생각이 되고, 바로 마음의 본래성을 회복한 것이다. 비유하면 햇빛[마음의 본래성]이 구름[私欲]에 가려져 있다가 구름이 사라지면 바로 햇빛이 회복된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햇빛처럼 마음의 본래성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단지 구름과 같은 사욕이 막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마음에서 사욕을 제거하게 되면, 마음의 본래성이 바로 다시 제 기능을 찾게 되고 제소리를 내게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마음의 본래성은 이기적인 생각이나 사사로운 행동을 초월하여 시와 때에 맞는 이타적인 사회적 행동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인간관계는 마음의 본래성이 지향하는 이타적이고 타자 중심적인 관계로 발전해나갈 수 있게 된다. 결국 이타적이고 타자 중심적인 사회적 행동의 관건은 마음에서 생기는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기적인 생각을 초월하여 마음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겠다. 이것이 왕양명이 말하는 지행합일의 궁극적인 취지라고 할 수 있다.(김영건, 61-62쪽)

결국 공자의 앎은 견문을 넓히고 박학(博學)하여 많은 것을 기억(識)하는 경험적 지식 체계와 우리의 덕성에 대한 강한 실천 의지를 반영하는 실천적 도덕체계를 모두 함축하는 속에서만 그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게 된다. 바로 그의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이치로써 관통하였다.”가 그것이다. 여기서의 ‘일이관지’(一以貫之)야말로 ‘앎’을 구하는 하나의 중심 관념이자 근본 원칙으로서 모든 지식 체계와 도덕 체계를 ‘하나’로 융합하여 체계화시키는 것인데, 그 ‘하나’(一)가 바로 ‘인도(人道)의 근본’, 즉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근거’이자 표준인 인(仁)이다. 따라서 그가 제출한 앎을 구하는 궁극 목적은 ‘인’의 실현이고, ‘인’의 실현이야 말로 우리 삶의 최종 귀착지인 것이다.(김철운, 235쪽)

 

 

 


 

왕양명은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을 나와 하나로 보는 인함[萬物一體之仁]’의 자타(自他)와 물아(物我)의 간격이 없는 상태를 한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여,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손은 쥐고, 발은 걸어서 全身의 작용을 돕는 것과 같다. 눈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귀가 미치는 데 따라서 반드시 거기서 살피며, 발은 물건을 쥐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손이 찾는 데 따라서 반드시 그리로 나아간다. 생간건대 元氣가 두루 충만하고 혈맥이 뻗어나가 통하니, 그 때문에 가렵든지 아프든지 내쉬든지 들이쉬든지 감촉하는 것마다 귀신같이 응하여 말하지 않아도 깨닫는 신묘함이 있게 된다.”고 하는데, 특히 천지간의 만물이 형체나 그것으로 인한 사욕에 막히거나 가리지 않고 다른 것들과 감응하고 소통하는 활동이 어떠한 단절이나 조금의 왜곡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를 ‘앞과 뒤, 안과 밖이 없이 혼연히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渾然一體’라고 한다. 혼연일체의 상태는 현재에 완전히 몰입된 상태인데, 왕양명은 자연적인 세계의 본래 모습은 개체로 나뉘어져 있지 않는 혼연일체로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주객미분의 일체적 감응 속에서 느끼는 자와 느껴진 것 간의 구분이 명료하지 않은 채로 함께 어우러져 일체성을 자연스럽게 실현하고 있는 상태라고 본다. 이 상황은 행동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간의 감응과 소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孺子入井’의 예에서처럼 우물로 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 깜짝 놀라 곧바로 위험에 처한 어린아이를 구하러 가는 즉각적인 행동이 있을 뿐이지,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교를 맺기 위해서라거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거나, 어린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악평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통한 목적의식적인 행동은 없다. 혼연일체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상황과 나를 나누어 판단하는 분별적인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자기(內)와 바깥 세계(外)를 구별하여 主客이나 自他의 관계로 정립하지 않았으므로, 나와 천지만물 사이에 감응과 소통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측면에서는 확실성이지만 인식의 측면에서는 주객미분의 애매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는 생각 이전이므로 인식을 통해서 형성된 객관적이고 명증적인 확실성과는 다른 본능적 느낌이라는 의식하기 이전의 확실성이 중시되며, 마음은 자연의 생의로서의 仁이라는 본래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걸림 없이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집착함이 없어야 가능하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조금의 私心이 없을 때라야 가능하다. 집착하지 않아야 변화의 흐름을 타고 상황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왕양명은 이 상태에서야 말로 天理에 온전하게 합일되는 상태라고 한다. 그는 사심이 없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天然의 理로써 자신에 대한 집착이 없는 無我의 상태라고 말한다.(정갑임 1, 80-81쪽)

 


 

왕양명의 철학에서도 당대의 심각한 병적 징후였던 불안과 고통은 바로 안과 밖을 나누고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분할의 방식, 즉 세계를 보는 방식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특정한 자리도 흔적도 없는 바로 그 곳이 우리들 깊은 병증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왕양명의 心學은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내밀한 관계방식을 성찰하여 자기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과 힘을 회복하는 공부이다. 그에게 치유는 나와 단절되어지고 잃어버린 가능성과 힘, 세계, 관계와 감각의 복원이고 회복이다. 왕양명에게 ‘분산된 현재’는 바로 분열된 자신이며 잃어버린 내적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거울의 비유를 통해 ‘현재에의 집중’이라는 치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정갑임 1, 100쪽)

 


 

양명에게 이처럼 주체의 ‘感應’ 능력은 열린[明] ‘公共’으로 직접 연결 된다. 양명은 ‘公’을 “무릇 도란 천하의 공적인 도[公道]이고, 학문이란 천하의 공적인 학문[公學]이다. 주자라고 그것을 사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자도 그것을 사적으로 행할 수 없다. 천하의 공적인 것은 공적으로 말해질 뿐이다.”와 같이 ‘비폐쇄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전통 유가 사상에서의 ‘公共’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양명에게 있어서도 바람직한 ‘公共’은 ‘私가 아닌 상태’로서, 누구나 접근 가능한 개방성[明]을 특징으로 하며, 이 개방성은 스스로도 개방되어 있는 주체들의 感應으로 이루어진다.

 

즉, 양명에게 ‘明’으로서의 바람직한 ‘公共’의 상태는 그 구성원들의 능동적 노력이 있을 때에야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 심체(心體)를 곧 도심(道心)이라 하는 데, 본체[體]가 밝아지면[明] 곧 道가 밝아진다.”고 하면서, 관계를 이루는 주체로서의 ‘心’이 ‘公共’의 ‘道’를 그 ‘본체(體)’로 삼고 이를 그 고유성에 맞게 발현하면서 역시 그 ‘道’에서 벗어나지 않은 ‘公共’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양명에 있어서 이러한 주체의 능력은 ‘도심(道心)’으로 표현되며, ‘道心’은 어떤 실체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속성’을 ‘소유’한다는 폐쇄성인 ‘私’ 혹은 ‘인심(人心)’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개방[明]했을 때 이룰 수 있는 상태적인 것이다. ‘道心’은 나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도 공유하고 있는 ‘道’를 알아보고, 이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내외(內外)의 경계 없는 개방성이다. 따라서 ‘道’로 이루어진 자신의 ‘心體’를 그 자체로 직관할 수 있으면, ‘道’는 그 ‘心’의 차원에서도, 다른 주체들과의 병존 관계에서도 막히지 않고 밝게[明] 드러날 수 있다.(이지영, 22-23쪽)

 


 

이와 같은 ‘正名’의 윤리는 종법적 위계질서의 바탕에서 설명되었다는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각 ‘個人’들이 각종 사회적 관계 가운데 자기의 자질을 발휘하며 참여하고 있다는 ‘사회적 만족도’ 및 이를 통해 이루는 자발적 ‘연대’로 읽힐 수 있다. 이에 따라 ‘正名’은 각 ‘個人’이 자발성에 따라 사회적 기회를 추구할 권리를 지닌다는 측면에서 유가적 세계에서 보장되어야할 개인의 권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전체적 생산 관계를 해치지 않는 일정 수준의 도덕적 제어심[仁]을 지녀야 한다는 책임론 및 공정한 제재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공정한 교환조건 확립의 요구로도 볼 수 있다.

 

이를 확장해보면, 感應’의 관계적 세계관에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기본적 삶의 여건을 누리면서도,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참여를 통해 그 본연의 관계성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합리적 선택 능력’으로서의 ‘이성’간의 ‘계약’으로만 ‘公共’의 영역이 보장된다는 사고관에서는 사람의 관계를 생산 교환 관계만으로 축소해버림으로써 그 본연의 관계적 참여 만족도를 충족시킬 수 없다. 유가적 ‘感應’세계관에서 구체적 ‘個人’의 고유성을 살리면서도 자연스럽게 연대로서의 ‘公共’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正名論’을 해석하고, 사회적 역할 관계로서의 ‘個人’을 이와 같이 능동적으로 해석한다면 ‘합리적 이성’으로 축소된 ‘個人’관념에서 탈각되었던 구체적, 실질적 만족도를 ‘公共’에 포함시킬 수 있는 여지가 구성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전통 유가 사상에서 ‘君子’는 사회의 무질서를 민감하게 느끼고 걱정하는 마음[仁]으로 백성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마땅한 행위[義]로 자기 존재 의의를 실현하는 인간상으로 제시된다. 孔孟의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계층이 극소수에 불과 했다. 따라서 공자와 맹자는 백성의 실정을 정치적 의사결정에 포함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역량을 중시했는데, 백성들의 요구가 公論의 장에서 논의 될 수 있도록 사회를 진단하는 것을 군자의 역할로 여겼다. 이에 따라 공자에게는 우선,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군대와 병기를 풍족하게 하는[足食, 足兵]”것이 정치의 근본으로 여겨졌다. 공자는 “君子는 義에서 깨닫고, 小人은 利에서 깨닫는다.” 고 하면서, “利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기” 때문에 원망의 감정이 없는 공평한 기준을 세울 것을 강조했다.(이지영, 44-45쪽)

 


 

이러한 ‘공감적 영성’을 실현하게 되면, 첫째 개인은 사람의 본질적 가치를 찾게 되고 초월적 세계를 경험하게 되며 질적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천리(天理)와 행동을 일치시킴으로써, 사람다운(성인) 삶의 지평에 이르게 되고, 천지만물과 일체가 되어 그들을 내 몸처럼 여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의 학문은 일상성에서의 성자(聖者)의 상(像)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적 종교적 상황에서 새로운 종교문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사람사이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으며, 타자 중심적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사회는 공감하고 배려하며 공존의 물결이 흘러넘쳐, 모든 인간이 삶의 의미를 가지게 되고, 뿐만 아니라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를 중시하고 경쟁과 다툼을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본다. 셋째,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을 내 몸처럼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며, 자연의 아픔과 고통을 나의 아픔과 고통처럼 여길 수 있게 된다. ‘생태적 위기’,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현상 등 우주 자연의 상처에 대하여 불감증에 걸린 인간과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상처에 대해서 가엾어 하는 동정심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그에 따른 도덕실천을 유도할 수 있다고 본다.(김영건, 69-70쪽)

 


 

 

 

앞서 살펴봤듯이 의례를 통해 종법적 위계질서를 재확인하면서 결속을 다지고, 또 신분적 차등질서를 수립한다는 궁극적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 적합성을 확보해야 한다. 즉,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들 가치규범을 사회구성원들이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의례적 정당성을 담보 받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를 도덕적 의미로만 합리화시키거나 강조하게 되면 긍정적 수용은 물론 이거니와 지속적 전승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이 초래된다. 이렇듯 의례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함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의례의 신성화(celestialization)라고 할 수 있다. 즉, 의례가 신적 존재와의 만남을 재현하는 경건한 신앙적 기능의 행위로 인식될 수 있도록 의례 내용과 절차에 나름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예서 등에 명시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행례현장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곧 의례에 내재된 신분적 차등질서는 왕실(국가)뿐만 아니라 향촌사회 및 가문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했음을 뜻한다. 아울러 그 중심에는 당대의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사대부 계층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상제례 가운데 제물은 조상이 드실 음식이라는 인식 아래 신성화의 가장 주된 대상이 되고 있다. 이때 제물의 사용범주 및 구입과 조리과정 등에 엄격한 금기원칙을 세워둠으로써 제물의 신성화를 담보 받는 경향이 인정된다. 성聖의 어원인 라틴어 ‘sacer'는 그 자체가 신神에 속함으로써 금제(prohibition)를 의미하고 있듯이, 성스러움과 금제禁制는 동일시되었다. 나아가 성스러운 것을 속된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금제가 있는가 하면, 속된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금제가 존재한다. 전자는 성스러움을 격리하는 형태를 취하고 후자는 부정不淨의 위험을 차단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제물은 통칭 제수祭羞라고 한다. 동일한 발음을 가진 제수祭需는 제례에 소요되는 물품을 일컬으며, 제례상에 차리는 음식은 ‘제수祭羞’라고 한다. 제물의 신성화 행위는 구입단계에서부터 드러난다. 일상의 장보기와 달리 제물을 구입하러 갈 때에는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가는 도중 상스럽고 흉한 것을 접하거나 타인과 잡담을 나누고 시비 붙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울러 품질이 가장 좋고 신선한 것을 고르고, 또 가격을 흥정하는 것도 금기되어 있다. 그리고 햇곡을 수확하면 그 해 제물로 쓸 것을 미리 갈무리해두기도 한다. 이처럼 제물의 외형적 측면에서는 일상의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재료의 마련에서부터 차별화를 꾀하면서 신성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김미영, 235-236쪽)

의례는 오랜 역사적 기간을 거치면서 축적되어온 집단적 산물이다. 그리고 집단은 당대의 사회구성원들이 구성한다. 이는 곧 종교적 상징성을 부여받아 신성화의 영역에 자리매김 된 의례라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사회문화적 조작과정을 거쳐 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 유교의례 역시 이들 가능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유교의례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사회적 가치규범의 범주가 확장될수록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는 그동안 조상숭배의 차원에서만 주목받아온 조상제례의 또 다른 측면을 조명하는 것으로서, 향후 이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국을 본원지로 삼고 있는 유교는 한국과 일본 등지에 전래된 이후 그야말로 동아시아 거대유교문화권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상과 문화가 그러하듯이 유교 역시 각국의 사회문화적 토양에 근거하여 변화‧전개되었는가 하면,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초래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여타 종교의례와 달리 유교의례는 복잡하고 세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에 행례현장에서 수많은 변수가 발생하곤 하는데, 이런 연유로 의례방식의 규범적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예서와는 상이한 양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유교의례연구는 원론적‧규범적 틀을 벗어나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된다.(김미영, 241쪽)

 

 

 


 

우선 ‘소통’과 ‘합의’를 통한 공공성의 구현이라는 적극적인 차원의 경우, 신라 건국 (혁거세) 신화나 가야국 건국 (수로) 신화에서 이미 6부 촌장과 9간의 연맹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다. 그들에 의해서, 혁거세와 수로는 왕으로 추대되었다. 종래의 부족장들을 중심으로 한 합의제, 그리고 합의제를 통한 ‘선거’(선출)과 ‘교체’라는 제도적인 패턴이 갖추어져 있었다. 부족장들 사이의 소통과 합의에 의해 나름대로 공공성이 구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합의제를 구성했던 종래의 부족장들은 그 성격이 점점 중앙 ‘귀족’으로 바뀌어갔다. 강력한 왕권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런 합의제, 다시 말해 ‘귀족회의’를 통해서 국사(國事)를 처리해갔던 듯하다. 고구려의 귀족회의와 대대로 선출, 백제의 재상 선출과 정사암, 그리고 신라의 남당, 화백제도, 사령지 등이 그 같은 소통과 합의의 형식을 전해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한편 ‘독점’과 ‘배제’의 지양(止揚)을 통한 소극적인 차원의 경우, 폭군 및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이라는 특성을 갖는 것이었다. 독점과 배제에 기초한 폭정은 일종의 ‘공공의 적’ 내지 ‘공공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 같은 측면은 우선 왕의 교체와 살해, 그리고 민회(民會) 내지 민의 참여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공공성에 적대적일 경우, 왕을 폐위(廢位)시켜 버리기도 했으며[交替] 더 심할 때는 죽여 버리기도 했다. 고구려에서 대신(大臣) 명림답부와 창조리가 주동이 되어 봉상왕을 폐위시켜버린 사례가 있다. 정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색에만 빠져 있다가 폐위된 신라 제 25대 사륜왕(舍輪王, 眞智王)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한다. 또한 “장마와 가뭄이 연이어 오곡이 익지 않을 때, 그 때마다 왕에게 허물을 돌려서 혹은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혹은 ‘왕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한 부여의 옛 풍속에서 그 일단이나마 읽어낼 수 있다.

 

이어 다수의 민(民)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민이 모인다는 의미에서의 ‘민회’(民會)라 해도 되겠다. ‘수많은 사람들의 원초적인 모임(집합)’ 내지 원초적인 형태의 ‘민회’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표현되었으며, 이미 단군신화에서부터 그 싹이 보인다. 직접 민주주의 형식이라 해도 좋겠다. 이같은 원초적인 형태로서의 민회는 특정한 사안에서 확인되기도 하며, 더러 직접적인 봉기나 민란 형태를 띠기도 했던 듯 하다. 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라 해도 좋겠다. 전통시대에 그 같은 민의 정치참여가 왕조 교체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그 유제(遺制)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김석근, 393-394쪽)

 


 

왕양명은 진정한 인간다움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人間) 관계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가족’으로 시작되는 인간관계를 떠나 개인의 자유나 해탈을 추구한다는 것은 왕양명에게는 도피인 동시에 비인간성을 의미했다. 그래서 왕양명은 오히려 가족에 대한 원초적인 집착을 끊어내기 위해 出家의 방식을 택한 불교에 대해 오히려 가족관계라는 상(相)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굴레로 여겨 그로부터 도피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가족 간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굴레로 여겨 아예 가족 관계 자체를 끊어 내는 불교의 방식으로는 결코 자기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가족 간의 관계란 끊어내야 할 집착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참된 인간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떠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인간 삶의 근본조건이라고 보는 유가의 한 입각점을 볼 수 있다.

 

이후 왕양명은 그의 만년에 이르러 천지만물로 표현되는 자연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이자 생명을 창출하고 양육하며 쉼 없는 생명활동을 전개하는 생명의 의지[生意]를 가진 생명체라는 것에 기반하는 ‘만물과 한 몸이 되는 인[萬物一體之仁]’을 강조한다. 그는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사이에 자연의 생명력이 막히지 않고 소통되는 자연의 덕성을 ‘仁’이라고 하는데, 仁은 천지자연의 쉼 없고 역동적인 생명창출의 근거인 생명의 의지[生意]로 자연과 인간에 다 함께 충만한 생명의 힘이자 생명의 원리[生理]이다. 왕양명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천지자연을 낳고 살리는 생명의 이치인 仁이 본성[性]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원리가 아닌 천지자연의 실질적인 생명의 힘이자 원리인 仁은 가족 관계에서 孝悌의 방식으로 그 구체적인 실질성을 담보한다. 왕양명의 철학에서 孝悌는 ‘萬物一體之仁’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첫 싹으로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친구 사이의 관계로 발전하고 산천․귀신․조수․초목과의 친함으로 확장되어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는 실질적인 기초가 된다.(정갑임, 59-60쪽)

 


 


 


 

7. 화쟁

 


 

⑴ 一心에 도달

 


 

원효는 그의 저서 십문화쟁론 에서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하여 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현실은 이념적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사고와 가치관의 갈등, 지역적 갈등으로 심각한 內憂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서로 다른 주장들을 화해 혹은 소통시킨다는 의미이다.

 

원효의 말처럼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여 마음을 깊이 통찰하고, 일체의 차별상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쳐 차별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얻어, 누구나 걸림이 없는 無碍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다툼도 화도 없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화쟁의 목적은 一心에의 도달이다. 이는 歸一心源과 饒益衆生의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화쟁은 평등의 관점에서만 취하거나 버리지 않고, 또 차별의 관점에서 어느 하나를 전적으로 고수하지도 않는 不二不一의 논리이다. 화쟁사상은 또한 三乘을 一佛乘으로 귀일시키고 眞如와 生滅의 二門을 일심으로 통합하여,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통합이념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원효는 인간이 다투게 되는 것은 일심에서 벗어난 번뇌와 집착 때문이며, 반대로 일심을 찾아 정진함으로써 화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일심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여와 생멸의 이문으로 나누어져 있어 서로 교섭하고 융통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일심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융섭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심을 근거로 하고 또 일심을 지향하여 화쟁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집착을 벗어난 무애자재한 마음을 통해서이다. 일심과 무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일심의 모습은 본래 무애하며, 무애행을 통하여 일심을 회복할 수 있다.무애는 원효에게 있어서 일심과 함께 화쟁의 가능 근거이며, 또한 목표이다. 원효는 민중과 함께 고락을 함께하는 同事攝을 통해서 이론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를 구현했던 것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당시 세계의 선진 사상이었던 불교가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오랜 동안 다투어 온 교리상의 쟁론들을, 그는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안목을 바탕으로 화쟁사상을 펼쳐 나갔다. 그의 화쟁의 방법은 양 극단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선 자기중심주의나 집단 이기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화해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화쟁에 있어서나 분쟁의 해결에 있어서 다 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김영석, 70-71쪽)

 


 

원효의 ‘일심(一心)’은 우주의 이치나 원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마음으로 그의 사유의 이론적 바탕이 되며, ‘화쟁’은 일심의 사유를 토대로 수행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일심과 화쟁 사상은 ‘화(和)’를 근본으로 하여 주객의 조화와 융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장자의 주객합일의 원리와 유사하고 볼 수 있다. 일심에서 시작된 화쟁은 본 논문과 작업의 주된 관심사인 이중성의 공존, 양면적 속성들의 조화, 주객도식의 긴장과 차별의 해소 , 문제의 해결과 존재의 부정을 통한 궁극적 존재 긍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는 본인 개인의 내면적 고민의 해결과 함께 주객의 구별을 넘어서는 작업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투명하게 열어 주는 방법론인 것이다.

 

본인이 추구하는 ‘쉼’이라는 것은 주객이 동화되어 상대성을 의식하지 않는 마음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글로 서술된 이론과 그림으로 표현된 작품으로는 형상화될 수 없다. 그것은 글과 작품 너머에서 가슴 속에 뜨겁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이와 같이 원효도 ‘일심’에 대해 “언설을 떠나고 사려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지목할 도리가 없어 억지로 일심이라고 불러 본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렇듯 그도 일심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언어의 지시성과 한계성을 경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일심을 통해 도달되는 ‘쉼’이라는 것은 어떠한 객관적인 실재로서의 절대적인 존재나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일심은 모든 우주 자연의 존재들을 포괄하는 마음이며, 세상은 그러한 마음이 바깥으로 투사된 그림이기에 주관과 대립된 객관적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로 보면 모든 주객의 구분은 사라지게 된다. 세계가 나의 마음의 반영이고 내가 세계의 마음의 반영이라면, 세계 내의 모든 성질과 존재들이 그 시작부터 이중적 동시성을 이루고 있으므로 나의 존재의 양면성과 세계와의 양의성 또한 동시적으로 공존함이 당위적인 하나의 결과가 된다. 이렇듯 자타의 대립과 차별을 초월하는 주객합일의 상태인 ‘진여(眞如)’의 세계에 눈 뜨게 되면, 모든 존재가 하나의 원리로 귀결되는 드넓은 일심의 세계 속에서 쉼을 느낄 수 있다.

 

일심에서 발전하여 실천성이 강조되는 화쟁 사상을 거론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중성의 공존, 즉 철저한 부정을 통한 양극의 공존, 더 나아가 양극을 여의고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공(空)’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는 공(空)에 집착하고 유(有)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융합하는 것이라 한다.(이화영, 17-18쪽)

 


 

원효가 설정한 화쟁의 목적은 ‘歸一心源’과 ‘饒益衆生’이다. 그런데 화쟁의 목적에 귀일심원의 다른 측면인 요익중생을 命題化시킨 것은 원효사상의 특징이자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익중생 그 자체가 바로 화쟁의 참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즉 화쟁의 목적은 화쟁 그 자체에 있는 것으로, 중생을 요익하는 일이 중생과 화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

 

약 心의 본래적 자기작용인 一心에 돌아간다면(귀일심원) 그 필연적 자기 확대작용은 중생과 하나 되는 자연스런 움직임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 움직임은 곧 중생을 이롭게 하고(요익중생) 중생과 화해하는 것(화쟁)이라는 말이다.

 

좀 더 살펴보면 요익중생은 一心의 동적 자기확대이면서 동시에 귀일심원하는 수행이며, 귀일심원은 본래의 자기로 회복하는 수행이면서 동시에 요익중생의 실천적 행위가 된다.전자는 ‘不守一而無二’이고 후자는 ‘無二而不守一’이 된다. 여기서 不守一이란 ‘一心에 머물러 있지 않음’이니 요익중생할 수밖에 없고, 無二란 ‘一心에 들어감’이니 곧 귀일심원이다. 요익중생을 실천하면서도 그 안에 귀일심원의 수행을 하고, 귀일심원하는 수행을 하면서도 그 안에 요익중생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화쟁’의 목적이요, 그 실천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중생구제라는 의미에서 정토발원과 화쟁의 두 사상은 분절되어 있지 않으며, 원효는 통합과 실천을 추구했다.

 

원효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대승심 혹은 보리심의 유무에 근거해 극락왕생 여부를 해명하고자 했다.이는 자기 구원에만 얽매이어 중생구제를 등한시하는 무리들을 경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효는 아미타 신앙의 힘으로 극락왕생하는 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효는 근기가 낮은 이에게는 극락정토가 西方이라는 방향과 지역을 지니지만, 근기가 높은 이에게는 一心 극락정토와 같이 한 마음 안에서의 세계가 극락이라고 말했다.(박준호, 74-75쪽)

 


 

초월적이며 포괄적인 「大乘起信論」의 언어나 은유적이고 함축된 글로 그 뜻을 풀이한 원효의 글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일상어로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생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염두해야 할 개념적 원리가 필요하다. 그 원리를 네 가지로 분석해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중부정(二重否定)과 이중긍정(二重肯定)이라는 텍스트(text)의 교차 배어법 원리이다. 김형효에 의하면 원효는 이중부정적 글쓰기를 통해 초월적 세계에 대해 논하고 이중긍정적 텍스트에서 포괄적 지평에 접근하려 한다. 환원하면 원효가 이중부정과 이중긍정의 글쓰기로 논리를 전개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진리의 근원을 표현하기에 언어가 가진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화쟁하기 위한 수행적 차원으로 진리의 근원에 대해 말하기는 위해서는 모든 ‘교의적 틀’과 ‘인식의 틀’에 집착하고 있는 언어 표현들을 부수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걸림이 없고 얽매임 없는 존재의 근원을 직시하기 위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음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집착’과 ‘아상’(我相)의 틀에서 자유로울수록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음을 주지하고자 함이다.

 

두 번째로 원효에게 一心은 ‘존재의 근원’을 가리키는 ‘근원어’이다. 특히 ‘空’으로 표현되는 이 이름은 연기(緣起)와 ‘차연’(此緣: 相依性)의 존재방식과 연관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어찌할 수 없이 붙여진 이름으로 ‘근원어’임을 알아야 한다. 존재의 생멸의 원인과 결과 그 해석학적 지평(역사성과 초역사성)에서 피조물(諸法: 만물)과 끊임없이 친교 하고자 하는 초월적 실체의 속성에 대한 이름부름이 ‘空’이다. 환언하여 ‘지연’과 ‘뒤틀림’, ‘얽힘’과 ‘설킴’의 차연적 존재방식에서 체험되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의 신비와 대승불교의 일심지원에 대한 정의가 유비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원효에게 진리와 ‘절대 실체’를 이름하는 다른 이름 ‘空’에 대한 언어적 정의는 사실상 불합리한 이유이다.

 

세 번째로 원효가 주지하는 대승(一心)의 논리란 “중생심과 여래심이 하나로 통합된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즉, 초월적 실체성(空性)의 본질이 초월적 실체로서 ‘있는-그대로’의 진리인 ‘진여문’(理門: 초월적 실재)과 체성의 현상적이고 감각적 존재양상인 경험계의 문인 ‘생멸문’(事門: 현상적 실재)이 통합되는 것이다. 이는 화합하나 혼합되지 않는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둘’이 아닌 ‘구원의 문’인 일심지원의 문(門)이다. 여기서 구원의 문이란 초월적으로 ‘언설’(言說)을 넘어선 경계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신비체험의 장(場)인 세속, 즉 ‘생멸문’ 밖에서 이야기 될 수 없다는 것이다.(진동길, 45-46쪽)

 


 

화쟁이 원효의 방법론적인 특색이라면 화쟁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는 일심이다. 다시 말해서 원효는 제법의 근거(體)이자 연기에 입각한 상대적 차별을 떠나서 전망되는 일심에 기초하여 그만의 독특한 화쟁사상을 전개하였다. 즉 그의 화쟁사상은 다양한 교설로 인해 아쟁(我爭)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놓여 있던 불교의 모든 이설들을 화해시켜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도달시키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바탕이 된 일심을 통해 중생의 마음속에 선험적으로 내재된 불성(佛性)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원효의 화쟁론은 모든 원리(一體法)를 오직 一心으로 삼는 「대승기신론」과 「금강삼매경론」을 바탕으로 전개되는데, 이 두 논서는 또 여래장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은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을 지양하고 화합시켜 진(절대)과 속(상대)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라는 점에서 원효에게 대승적 일심은 그가 지향하던 화쟁의 가능성을 더욱 확고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원효에게 일심은 최유진이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만유의 궁극에 있는 근본적인 것이며 중생의 궁극적인 목적지이기도 하였다.

 

문제는 일심이 백가의 이쟁을 화회(和會)할 수 있는 가능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전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김명희가 주지하고 있듯이 인식론적 문제인 ‘차별상’(差別相)과 ‘분별상’(分別相)을 극복하고 존재론적으로 ‘상대 실재’와 ‘절대 실재’를 원융할 수 있는 ‘진리표준’ 역할을 일심법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진리표준’의 속성에 대한 문제인데, 즉 ‘절대 실재’로서 그 체(體)와 존재됨의 양상(相), 그리고 현현(顯現)의 방식(用)이 화쟁함에 있어서 무애한가라는 전제들이다.

 

그 첫째 전제에 대한 답으로 원효는 “바른 뜻 가운데 말하기를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모든 법을 총괄한다.’ 이것이 여래가 설한 일체 법문의 근본 뜻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일심이문(一心二門) 안에는 하나의 법이나 한 뜻이라도 포섭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진동길, 56-57쪽)

 


 

⑵ 소통

 


 

 

 

원효는 언제나 어느 한 가지 입장을 절대화하거나 독단시하면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여러 입장을 상대적으로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문제의 실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효는 사람들이 논쟁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번뇌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번뇌에 빠져 있기 때문에 단정을 하고 자기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주장하며 서로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툼을 없애려면 번뇌를 없애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 근본적인 방법이 된다고 주장한다.

원효는 『열반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길, 제불 세존은 번뇌가 없는 만큼 단정하는 바도 없다. 이런 까닭에 부처를 무상사(無上士)라고 부른다. 상사(上士)라 함은 쟁송(諍訟)을 하는 것이요, 무상사는 쟁송함이 없다. 여래는 다툼이 없으며 그러므로 부처를 무상사라 부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인간이 번뇌와 집착을 버리고서 이해와 분별이 따로 없는 마음의 자세로 문제를 바라본다면, 논쟁의 대립을 떠나 참된 진리와 부처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효는 논쟁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화쟁 방법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첫 번째는 극단(極端)을 떠나는 방법이다. 원효는 어떤 표현이든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효는 개념들이 상대적으로 성립함을 지적하면서 한 쪽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다른 반대편의 극단 또한 버릴 것을 요구한다. 한 극단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의 상대로서 성립하는 다른 극단도 버려야 하는 것이며, 이런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개념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화쟁의 한 방법임을 강조하며 집착을 떠나 말하면 합당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원효는 유(有), 무(無)와 중도(中道)의 개념을 대입하여 극단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극단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고자 하였다.(박민현, 27-28쪽)

 

 

 


 

열반경이 자기의 견해에만 집착을 하여 제기된 모든 주장들을 소통시키고 있기에 원효도 이 경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 예로 표원(表員)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에 인용된 그의 말에는 “안이 없으므로 밖도 또한 없는 것이니 안과 밖은 반드시 상대(相對)하기 때문이다.(無內故亦無外外與內必相待 故, 「華嚴經文義要決問答」, 韓佛2. 367中.)”라고 하고 있으며, 「열반종요涅槃宗要)」에서는 “극과(極果)의 큰 깨달음은 실성(實性)을 체득해 마음을 잊고, 실성(實性)의 둘이 없음은 진망(眞妄)을 섞어 하나로 만든다. 이미 둘이 없으니 어찌 하나가 있고, 진망이 섞이었으니 어느 것이 진실이겠는가?”(極果之大覺也體實性而忘心實性之無二混眞妄而爲一旣無二也何得有一眞妄混也孰爲其實. 「涅槃宗要」, 韓佛 1. 524上.) 라고 하며 집착을 버리고 소통하도록 한다(최유진, 1988, 64쪽).

 

원효는 경전에 근거한 주장에 대하여는 이들이 모두 절대적으로 옳은 붓다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모두 긍정하였다. 그러나 경전에 의거하여 제시하는 여러 이론들에 대하여는 합당한 부분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합당하더라도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집착하면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한쪽 입장만을 고집한다면 두 설이 모두 옳지 못하고, 하나만을 집착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주장이 모두 인정될 수 있다’거나 ‘한편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면 모두 틀린 것이지만 서로 모순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면 모두 도리에 맞는 것이다’(問如是二說何得何失答若如言取二說皆失互相異諍失佛意故若非定執二說俱得法門無碍不相妨故「涅槃宗要」, 韓佛1. 529上)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대혜도경종요」에서는 반야바라밀에 대한 여러 견해 중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견해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견해들을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第四義者唯顯地上無分別智證會實相絶諸戲論超過四句遠離五相故言末後答者爲實是就最勝作如是說而非盡攝一切智慧, 「대혜도경종요」, 韓佛1, 482上-中).

 

원효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견해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로서 인정하고 있다. 원효는 다툼이 있는 것은 이처럼 여러 가지 학설들이 진리의 일부분에만 집착하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 견해들이 모두 집착에 의한 편견임이 드러나게 되면 비로소 다툼이 사라지게 된다고 보아 그 견해들을 모두 소통시키기 위하여 화쟁을 제시하였다. 이런 점에서 원효의 화쟁론은 붓다의 가르침 곧 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한 의사소통의 방법이었다.

 

원효는 화쟁을 위하여 이론들의 대립을 지양하고 상대되는 이론 모두를 긍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론들을 모두 동등하게 평가하였던 것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이론만을 옳은 것이라고 하였다.(이경렬, 119-120쪽)

 


 

원효가 전개하고 있는 화쟁의 논의들에서는 ‘저마다 일리가 있다’는 식의 화쟁 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저마다의 일리를 변별하여 인정하려는 원효의 태도는, 진리를 향한 인간의 향상적 노력들을 ‘본각에 의거한 시각의 과정’으로 간주하는 인간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진리관에 의거해 볼 때 존재의 진실을 밝히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과 언어는 ‘깨달아감’의 과정이다. 불교 이외의 언어(외도) 역시 진리 구현의 노력이자 산물이라면 시각의 흔적이요 표현이다. 따라서 ‘부분적 타당성을 변별하여 인정한다’는 화쟁의 원리는 존재 향상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쟁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견해에 내재한 생산적 일리(一理)들을 변별해 내려면 각 견해의 의미맥락을 잘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원효의 화쟁 논리에는 이러한 의미 맥락의 식별 노력이 돋보이고 있다. 특정 일리에 안주하여 그것으로써 완결시키려는 태도는 다른 일리들과 다른 의미 맥락들을 놓치거나 외면, 혹은 배척하게 되어 상생적, 상호 포섭적 담론을 통한 진리에로의 접근을 장애한다. 그러므로 각 견해들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지하고 포섭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부분적 진리에 국집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원효는 ‘일변(一邊)을 고집하기 않기’로 강조하고 있다. 쟁론의 주체들이 자기 견해에 집착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자기 주장의 부분적 타당성과 의미 맥락을 온전히 직시할 수 있는 동시에 타 견해의 일리들과 의미 맥락을 사실대로 인지하고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모든 상호 부정적 쟁론들의 인식적 토대를 방치한 채 시도되는 화쟁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각 주장들의 일리를 변별하여 포섭할 수 있는 근원적 능력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배타적 쟁론의 인식적 토대 자체를 해체한 후 새롭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이룩된 온전한 존재 인식의 지평이 원효 화쟁의 근원적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마음의 경지를 원효는 일심(一心)․일각(一覺)․일심진여(一心眞如)․일심본각(一心本覺) 등의 용어로 지칭하는 동시에, 그 경지에서 이설(異說)과 쟁론들을 회통, 화쟁하는 국면을 일미(一味)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일미로 화쟁, 회통하는 일심의 경지, 그 새로운 존재 이해의 핵심은 다름아닌 ‘둘 아님(無二)’의 통찰에 있다. 이 마음 자리(一心之源)에 서면 있음/없음, 옳음/그름, 진실/허망, 청정/오염의 이항(二項)들을 배제적 긴장 관계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 상생 관계로 포섭시킨다. 모든 실체적 자가(自家)의 울타리를 해체시키고 일체의 배제적 개념의 성벽도 허물어 버린 탁 트인 자리에서면, 동시에 그 모든 분별의 언어들을 분별없이 포용한다. 이 진실의 고향에서는 선호와 부정, 선택과 배제의 격리의 벽이 없기에 모든 언어의 주소지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머물러야 할 그 어느 주소지도 없기에 그 어떤 주소지로도 다 응해 갈 수 있다. 이 초탈적 포용을 드러내려는 언표가 ‘둘 아님(不二)’이요 ‘한 맛(一味)’이다.

 

쟁론은 ‘언어에 의한 다툼’이이므로 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화쟁의 보편원리 구성에 필수적이다. 원효가 화쟁을 위해 제시하는 언어관의 원리로는 크게 두 가지가 부각되고 있는데, ‘실체적 언어관을 극복할 것’이 그 하나이고, ‘언어의 방편적 의미를 이해할 것‘이 다른 하나이다.

 

진리 구현을 장애하는 형태의 쟁론들은 희론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실재하지 않는 자아 관념을 증폭시켜 ‘나의 견해’에 집착하게 하여 배타적 쟁론 태도를 초래하게 하는 것이 희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론의 극복은 화쟁의 핵심 과제가 된다. ‘나의 견해’를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태도에 의해 초래되는 쟁론의 이면에는 실체적 언어관에 포획된 희론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실체적 언어관을 극복하여 그 어떤 견해의 진영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모든 일리들을 상생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의 성취는 화쟁의 보편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원효는 불교의 전통적 언어관을 계승하여 희론적 쟁론의 화쟁 원리를 수립하는 동시에, ‘걸림 없이 쟁론들을 화해․소통시킬 수 있는 언어 능력’을 제시한다. 이 무애회통의 언어 능력은 원효가 말하는 일심․본각의 자리에 설 때 발휘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 희론에서 해방된 사람은 ‘한 몸으로 여기는 열린 우호감(同體大悲)’으로 오직 진리다운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언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지혜롭게 긍정과 부정을 자유롭게 한다.(박태원, 49-50쪽)

 


 

‘화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해보면 이견들의 화해, 화합을 위한 평화사상, 조화, 불법의 근원적 독법이며 올바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 또는 일심으로 원융을 이루는 사상체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재현(2001)은 화쟁은 대립과 갈등의 해소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소통로를 막은 채 고착되어 있는 당대의 상황을 소통하게 하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는 매우 독특한 견해이며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의 견해에 집착만 하고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면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하였다고 해서 화해나 화합 또는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며 차이를 좁혀나갈 뿐이다.

 

원효가 그토록 화쟁을 주장하게 된 배경은 격의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경전들이 한꺼번에 소개되어 혼란을 가져왔으며 당시 우리나라의 불교계는 이를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점을 의식한 원효는 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당시 불교계는 자신이 속한 종파의 교설만을 지지하는 태도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화쟁’이다. 이렇게 볼 때, 화쟁의 목적은 이견들 간의 차이를 좁혀나가기 위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견해의 차이를 좁혀나가는 방법이다. 견해를 달리하는 양측이 받아들이도록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고 일관된 것이어야 하는데 원효는 이를 ‘화쟁’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그의 저술들을 통해 화쟁을 위한 사유체계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보여준다. 원효는 화쟁을 위하여 견해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견해들의 차이를 경전을 근거로 밝히고 있다. 이는 공정성과 일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그는 경전을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모두 인정하는 절대긍정,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닌 것임을 알 것과 동의도 않고 반대도 하지 않아서 도리와 정에 어긋나지 않을 것 등이다. 원효는 경전의 내용이 다른 이유는 근기가 다른 중생들을 위한 설법의 방편임을 밝히고,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경전간의 절대적 가치 서열을 두지 않고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였다. 경전에 근거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집착에서 벗어난 이론만을 옳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 진리는 씨와 열매, 흙과 질그릇의 관계처럼 이항대립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로 의미를 고정화 시킬 수 없다. 그는 모든 고정적 기준을 소통시켜 비고정화 시켰는데 이것은 바로 탈 형이상학자들의 ‘해체’이자 ‘차연’이며 ‘보충과 대리’인 것이다. 그는 모든 중생은 여래의 근기를 갖고 있으므로 인간 본연의 상태인 일심으로 돌아가면 화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원효는 어느 종파에도 치우침이 없이 누구보다도 일관되게 그의 전 저서를 통해 종횡무진하며 견해의 차이를 좁혀나가기 위한 의사소통의 실천적 대안이라는 점이 ‘화쟁’의 특징이다. 불교는 실천을 중시하며 공허한 논쟁을 경계한다. 공허한 논쟁은 궁극적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원효 또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서양의 전통형이상학적 언어관에 대하여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는 문제만 제시하였지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원효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원효가 이렇게 일관되게 화쟁을 주장하며 복잡다단하게 화쟁을 엮어 나가고 있는 이유는 불교가 실천을 중시하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 진리가 무엇이며 도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일방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리고 궁극적 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원효의 개인적 깨달음의 과정 또한 다양하다. 그는 경전을 공부하여 이론적으로 깨닫기도 하였지만 해골 물을 마시고 실천적으로 깨닫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러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파계와 대중교화, 저술을 통해 실천하였다.(이경렬, 134-135쪽)

 


 

원효에 있어 화쟁의 원리는 한마디로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걸림이 없음이란 원래 서로 논쟁을 시작하기 전의 무쟁(無諍)의 모습이며 또한 논쟁이 그치어 유기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로 되돌아 왔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로의 착각 속에서 다툼과 논쟁이 시작됨으로써 장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번뇌 즉 어리석음이다. 화쟁(和諍)이란 이러한 착각과 망각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다. 논쟁을 종식시키고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참된 이해와 부분과 전체를 같이 볼 줄 아는 폭넓은 시야가 필요하며 이러한 화쟁을 위해 원효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원효는 『미륵상생경종요』에서 미륵사상에 대한 어려운 주제들을 화회, 회통시키고자 고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경전이 쓰여 지거나 번역되던 당시 상황으로 되돌아가 보지 않으면 결론을 내리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원효는 한 가지 경전의 내용에만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경론의 비교와 대비를 통해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쟁의 방법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원효는 다양한 경전과 올바른 불교 교리에 입각한 자신만의 관점에서 미륵보살과 미륵사상을 새로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쉬운 수행의 방법들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미륵보살에게 다가가고 도솔천 상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고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원효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신앙적인 측면에서만 받아들여지고 유행하던 신라의 미륵사상을 학문적, 사상적 영역에서 이를 체계화시키고 발전시켜나가는 초석을 제공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미륵사상을 다시 불교의 사상체계 속으로 끌어들였다.(박민현, 49-50쪽)

 


 

이처럼 생멸문과 진여문은 상호 화합함으로써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또 진여문에서 생멸문으로 아무 걸림 없이 융통하게 되는 모습은 바로 모든 대립을 극복하는 길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서로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이치를 이해한다면 백가지 쟁론도 화합하지 못할 게 없다”고 말했다. 두문이 서로 같지도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서로 같게 동화되지도 않고, 다르게 이질화되지도 않으면서 서로 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효는 대립되는 견해를 오로지 평등의 관점에서 보아 함께 취하기만 하거나 모두 버리기만 하지 않는다[無二而不守一]. 또한 오로지 차별의 관점에서 보아 어느 하나를 전적으로 취하지도 않는다[融二而不一]. 함께 취하거나 모두 버리는 것은 현실적 대립의 문제를 관념적으로 무화시켜 회피하는 것 일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원효가 취하는 해결방식은 양자를 다 같이 인정하면서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각자의 견해가 제기한 맥락과 입장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미들에 대하여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한다.(김영석, 39쪽)

 


 

⑶ 통합

 


 

한편 ‘和’에는 화해라는 의미 이전에 ‘會’, 즉 ‘모이다’혹은 ‘함께 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모이다(會)는 것은 단순히 자리이동이 아니라 서로 간에 여러 가지 重層的 인과관계가 얽혀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원효는 먼저 이들 모두에게 시비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편벽됨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장과 입장이 대립되는 경우에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정작 대립과 다툼이라기보다는 ‘소통의 단절’인 것이다. 쌍방 간에 대립과 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경우이다. 왜냐하면, 부정적이나마 최소한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언젠가는 화해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소통의 형식이 반드시 긍정적이고 친화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주장과 입장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외면’하거나 ‘배제’하고 마침내 서로 간의 소통이 ‘단절’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단절이란 모든 존재자(法)는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불교의 진리론인 연기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이다.

 

이와 같이 원효의 화쟁은 서로 다른 주장들을 화해 혹은 소통시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本稿에서는 화쟁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고, 화쟁의 대상인 다툼, 대립, 경쟁, 집착, 이론적 논쟁 등이 무엇이든 화쟁을 ‘공생’혹은 ‘상생과 통합(혹은 조화)의 소통’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자 한다.(김영석, 17쪽)

 


 

화쟁에서 ‘和’는 ‘會通’, ‘和合’, ‘和解’, ‘和會’, ‘和通’의 뜻이다. ‘諍’은 ‘주장’이며 ‘異諍’은 상이한 혹은 다양한 주장을 가리킨다. 화쟁은 ‘상이한 주장’을 해명(이해)하고 ‘경문을 모아’ 조화(융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주장들은 그 나름대로 道理를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모든 주장들[百家之諍]은 모두 화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無所不和也]. 그런데 몇몇 불학자들은 논사들이 보여주는 주제나 쟁점이 경전들의 내용과 서로 충돌된다고 지적해 왔다. 하지만 원효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경론들이 의도하는 뜻이나 관점이 다를 뿐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화쟁과 회통은 시작된다. 원효의 저술 속에서 만나는 화쟁과 회통의 표현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由是(此)道理’, ‘由是義故(皆/理)不相違(背)’, ‘不違道理, 故無過失, 故無取捨’, ‘皆(具)道理’ 등으로 정형화해서 나타난다. 여기서 道理는 인식방법[量] 상 추리[比量]와 경전 즉 깨친 성인의 증언[聖言量] 속에 내재되어 있다. 원효의 일관된 주장과 논리는 그 자신의 진리와 실상에 대한 직접지각[現量]이 뒷받침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도리에 상응하는 말은 “무량한 경문과 법문은 오직 한 가지 맛을 가지고 있으며, “마치 수많은 냇물이 큰 바다로 들어가서 한 가지 맛이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화쟁의 대상은 ‘두 가지’[二說, 二義, 二師所說], ‘세 가지’[三義] 혹은 여러 가지[諸難, 諸師所說] 또는 무량한 법문들의 주장 혹은 개념 또는 義趣(義, 意)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그의 저술에서 ‘문’과 ‘논’을 시설하여 다양한 주장들을 화쟁 회통하고 있다. 여기서 ‘문’은 ‘교문’ 혹은 ‘법문’ 또는 ‘양상’을 가리킨다. ‘측면’ 또는 ‘계통’ 혹은 ‘계열’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는 『대승기신론』의 二門 一心의 구조에 의해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을 생멸연기적 전개[開]와 환멸연기적 수렴[合]으로 갈라서 설명한다. 『이장의』에서는 顯了門과 隱密門으로, 『열반경종요』에서는 ‘和諍門과 ‘會通門으로, 그 하위에서는 就心論과 約緣論 등으로 나누어 해명하고 있다.

 

원효가 두 문으로 범주화한 것은 화회 즉 화쟁하고 회통하기 위해서이다. 원효의 『십문화쟁론』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 ‘문’의 용례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저술을 인용하고 있는 후대 불학자들의 ‘문’의 사용례에서도 그가 사용한 교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원효는 『열반경종요』의 열반문에서는 和諍門 항목을 시설하여 涅槃의 四德에 대한 서로 다른 쟁론을 화쟁하고, 불성문에서는 會通門 항목을 시설하여 佛性의 文意가 다른 것을 회통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화쟁 회통 논리에서 和諍은 會通을 성립시키는 근본 원리가 된다. 화쟁의 논법에는 ‘解(異諍)의 과정’과 ‘和(會文)의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회통의 논법에도 ‘通(文異)의 과정과 ‘會(義同)의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고영섭, 101-102쪽)

 


 

오늘날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각기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다 보니 다양한 대립과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경우 각각 자신의 관점과 주장은 옳고 타자의 관점과 주장은 틀렸다고 말한다. 때로는 상대에 대하여 부분적인 긍정을 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입장을내세우곤 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앞서 살펴 본 원효의 화쟁사상, 특히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를 재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나의 소재로 등장하는 코끼리는 그것을 만지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있어서 이해와 설명의 대상이다. 만약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이 각기 자신의 이해와 설명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다면 타인들의 얘기는 당연히 틀렸다고 하고 상대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완전 부정의 입장에 서 있는 경우로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님들이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해와 설명이 완전하지는 못하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서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적어도 상대에 대하여 부분적인 긍정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므로 상호 소통과 이해의 지평을 열어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 코끼리 전체를 인지하는 ‘눈뜬 이’의 단계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서로 갑론을박할 여지가 있다. 이 때 눈뜬 제3자가 등장을 하여 판정관의 입장에서 각각 어떤 면에서 옳고 어떤 면에서 틀렸는지 일깨워 준다면 그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장님들 스스로 눈뜬 이가 되는 것만은 못하다. 사실 눈을 뜬 이로 거듭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기존의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편견을 모두 버리고 자기의 현실적 이익을 완전히 배제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자기 결단이며 돌파의 노력이 전제될 때 성취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모두가 눈뜬 이가 되면 과거의 알력과 다툼, 불신과 반목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요, 자기(自己)와 타자(他者)의 차이와 차별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나됨의 세계가 열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통찰의 지혜를 담고 있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당시 신라가 통일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것을 오늘날 개인과 사회, 국가와 민족의 차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숙원인 한반도의 통일(統一)이라는 과제를 풀 수 있는 통일인문학적 이론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정상봉, 219-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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