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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4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 시미즈 미츠루 지음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 녹색평론

2014.11.07.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이계삼


시미즈 미츠루 지음
녹색평론사, 2014년

늘 꿈꾸었던 것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달리 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혁명기 소비에트나 ‘김 주석’이 통치하는 북한을 동경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에는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소개되었지만, 의문이 남았다.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거느렸고 거대한 수탈과 살육의 바탕 위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가 대체 무얼까, 똘레랑스는 결국 ‘강자의 도덕’ 아닌가. 그리고 프랑스가 세계 2위의 원전대국임을 알고 나서부터 그 나라에 대한 동경은 싹 사라졌다. 근대세계 속에 우리의 푯대가 되어줄 다른 체제, 모델은 없는 것 같았다. 근대 이전의 풀뿌리 민중세계를 되살리는 것 말고 우리가 선택할 길은 없어 보이는데, 이미 후기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떻게 그런 세계를 되살릴 수 있을지는 막연했다.

그리고 덴마크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가슴이 뛰었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를 어떻게 맞았느냐는 것은 그 나라 민중의 현재적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사실을 덴마크를 보면서 깨달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강제로 근대세계로 편입당했고, 거의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수탈과 살육을 겪고, 그 반작용으로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를 강요당한 채 지난 100여 년의 시간을 지내야 했다. 우리의 근대 100년은 부국강병과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극심한 경제성장으로 내달려 오면서, 오직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에 마음의 자리를 다 빼앗겼다. 그런데 덴마크는 전혀 달랐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대만이 원전 중단을 결정해서 칭송을 받고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예 원전을 짓지 않는 것이다. 덴마크가 바로 그런 나라이다. 원전은 중앙집권주의, 지역차별, 민중 배제의 상징이며, 거대자본과 권력의 유착관계로써 유지된다. 그 어마어마한 위험과 미래세대에까지 전가되는 부담을 고려하면 그 자체로 반민주주의의 상징이다.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를 겪고, 세계가 너도나도 원전으로 몰려갈 때 덴마크는 전혀 다른 사회적 과정을 거쳤다. 덴마크에는 ‘시민합의회의’라는 전통이 있어서 수준 높은 토론들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에너지를 풍족하게 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주제로까지 이어진 심도 깊은 토론들을 거쳤고, 곳곳에서 반원전운동이 불붙었다. 그중 특기할 움직임으로 ‘트빈스쿨’이라는 폴케호이스콜레(‘국민고등학교’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그런 표현으로는 의미를 담아낼 수 없어 이 책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다 ― 필자 주)에서 추진한 에너지 자립운동의 일환인 풍차 제작 프로젝트가 있다. 몇몇 전문가들이 거들기는 했으나 거의 비전문가들이 함께 연구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술을 응용하고 중고 부품을 이용해서 제작했다. “정부가 60만kW 원전 1기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3만 대의 풍차를 만들어서 민중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정신으로 출발해, 연인원 10만 명이 참여한 대중운동이었다. 결국 덴마크정부는 1985년 원전 건설을 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덴마크의 공식 종교는 루터파 복음교회인데, 그 기원이 되는 종교개혁 지도자 마틴 루터는 유대인을 배신 민족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시너고그(유대인 회당)를 불질러 파괴하라”고 선동한 사람이다. 그런데 덴마크의 유대인은 다른 유럽에서와 달리 박해를 일절 받지 않았고, 19세기 초부터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5년간 덴마크를 점령했던 독일은 덴마크정부에 유대인(7,000명가량)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덴마크정부는 즉시 시너고그에서 신년예배를 드리던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서, 이들이 중립국 스웨덴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했다. 시너고그에 남겨진 유대교 성전은 코펜하겐의 복음교회에 감추어졌고, 이들의 집과 직장도 그대로 보존되었고, 심지어 뜰의 잔디도 이웃들이 깎아주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덴마크에는 이슬람계 이민자 학교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소수자 학교가 있다. 종교기관, 노동조합, NGO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신나치주의자들의 학교 설립도 제한하지 않는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똘레랑스’는 덴마크 민주주의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다른 근대, 높은 수준의 시민적 교양과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체제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그룬트비협회 간사로 주민운동가, 교육철학자인 시미즈 미츠루(清水滿)의 책 《삶을 위한 학교》는 한마디로 그룬트비의 사상과, 이를 구현한 폴케호이스콜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룬트비의 사상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1783―1872)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유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향 우드뷔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머니와 교회에서 부양하는 의지가지없는 노인들이었다. 어머니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대지의 언어’ 그리고 노인들이 들려주는 전설과 옛이야기의 세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또한 당시 관행에 따라 라틴어학교에서 수학했지만, ‘모든 사람을 쓸모없게 하고 나태하게 하고 썩게 만드는’ 라틴어학교의 권위주의와 지식 중심의 일방적 학교문화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젊은 시절 연상의 기혼 부인을 사랑하고 비련의 고통을 겪으며 그는 ‘인간’의 감정에 눈뜨게 되었고, 계몽주의의 차가운 이성보다 사랑으로 대변되는 인간적 감정의 우위를 설파하는 문예사조에 감화되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목사였지만 기성 교회에 순응하지 못했고, 형식과 강제에 의존하는 지식인 성직자를 혐오했다. 유년기의 영감을 좇아 북유럽 설화와 민중적 고전을 탐구하여 많은 책들을 번역·편찬했고, 그 깨달음의 기쁨을 시로 노래했다. 그는 급진적 인민주의의 길에 다가섰고, 끝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에서 최종의 답을 찾았다. “진리는 성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모여든 회중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었던 것은 사도들, 원시 기독교 교단,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성서는 종이 위의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그 말씀이 되살아나는 것은 교회에 모여든 경건한, 가난한 ‘신도들 사이에서’라는 것이다. ‘민중들의 살아있는 말’, 그것이 바로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죽음의 학교를 알고 있다. … 설령 (성스러운 문헌처럼) 천사의 손이나 별의 펜으로 쓰여졌다 하더라도 모든 문자는 죽어있다. 모든 책의 지식도 죽어있다. 그것은 독자의 삶과 결코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문법만큼 마음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없다.
― 그룬트비, 〈삶을 위한 학교〉(1838)

그러므로 그는 “가난하지만 신으로부터 받은 녹색의 대지를 보살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친구”를 참된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의 생각은 기존 교단으로부터 배격당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농민과 개혁파 목사들이 타락한 국교회와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은 뒤 가난한 노인들을 부양하는 구빈원 겸 병원에서 목사로 종신토록 근무했다.
그룬트비 사상의 핵심 개념은 폴케오프뤼스닝(folkeoplysning: 민중의 자기계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육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기피했다. 그룬트비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선거제와 의회는 부자와 엘리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허구의 기제라고 보았다. 그는 민중과 엘리트,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그 위에서 상호작용하며 포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폴케오프뤼스닝을 자신이 주창한 시민대학인 폴케호이스콜레의 목적으로 삼았다. 라틴어를 폐지하고, 배울 의지를 가진 누구라도 모여서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말’로 상호작용하며 삶의 신비를 깨닫고 ‘나 자신에게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학교를 제안했다. 관료, 상인, 수공업자, 농민의 자제들이 칸막이 없이 교류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폴케호이스콜레를 제안한 것이다. 그룬트비는 시험을 배격했다. 시험은 “젊은이가 자신의 경험의 범위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을 반복함으로써만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써 연장자가 젊은이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직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보았다.

그룬트비는 그 자신 시인이었고,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는 산문적인 세계의 거대함 앞에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차이를 통합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시의 정신임을 믿었다. 그는 이야기의 구체적인 풍토성과 너그러운 개방성을 사랑했다. 그는 시와 이야기가 ‘살아있는 말’을 되살려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이상은 폴케호이스콜레운동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었다.

크리스텐 콜

그룬트비는 영국 체류 당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보았던 모습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교사와 학생이 침식을 같이하고 친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칼리지 형식의 학교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제안은 크리스텐 콜(1816―1870)에게서 심화된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그룬트비는 국민대학을 꿈꾸었지만 콜 이후부터 실제로 창립된 폴케호이스콜레는 오히려 지방의 소규모 학교로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폴케호이스콜레의 농민적 성격을 강화시켰고, 학교마다 특색을 갖춘 다원성을 구현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은 농민에 의한 사회개혁과 사회의 재조직화를 가능케 했으며, 결과적으로 덴마크의 근대를 농본사회로 이끌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은 가난한 구둣방 집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 다니던 청년기부터 깊은 신앙적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럽을 도보로 횡단하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은 구도자였던 콜은 그룬트비의 사상을 접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무명의 민중의 교사였지만 그룬트비의 격려와 후원에 힘입어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고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헌신적으로 가르쳐 곳곳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는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지 국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국가로부터 되찾자”고 주장하며, 초등 대안학교인 프리스콜레의 기원이 되는 학교를 만들었다. 현재 프리스콜레는 덴마크 전역에 200여 개교가 존재하며, 공교육에 깊은 자극을 주어 덴마크의 초등교육을 사실상 견인하고 있다. 콜은 또한 오늘날 덴마크 교육제도에서 중요한 한 축이 되는 애프터스콜레의 간접적인 창설자이다. 14세부터 18세의 학생을 별도로 받아들여 나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애프터스콜레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동안 공교육 트랙에서 빠져나와 음악, 스포츠, 미술, 목공을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거의 전문가 수준까지 배우게 되는 학교이다. 기숙생활을 통해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법을 배우고, 풍부한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예민한 청소년기의 자아 형성에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콜이 첫 번째 전형을 만들어낸 이래 150년 동안 애프터스콜레는 덴마크 교육에서 독특한 역할을 해왔고, 현재는 전국에 226개 학교가 있으며, 덴마크 청소년 셋 중 한 명은 이 학교를 거쳐 간다고 한다.

농민과 협동조합

프로이센과 1, 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끝난 1864년, 덴마크는 유틀란트 반도의 3분의 1을 상실했다. 나라 전체가 열패감에 빠져 있었고, 국수적인 민족주의가 발호할 때였다. 그러나 그룬트비의 사상과 폴케호이스콜레의 민중적 교육의 저력은 전혀 다른 방식의 대안을 찾았다. 유럽 문화를 무시하여 전쟁에서 졌고, 산업혁명이 지체되어 기술력과 경제력이 떨어진 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항해서, 뜻있는 그룬트비의 사상적 제자들은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여 농민을 위한 민중교육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뛰어난 시인, 신학자, 과학자가 몰려들어 민중교육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달가스(1828―1894)의 “칼로써 잃어버린 것을 보습으로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힘을 키워 무력으로 적국에 대해서 복수를 계획하지 않고, 쟁기와 보습을 갖고 남은 영토와 싸워 그것을 전원으로 바꿈으로써 적이 뺏어간 것을 벌충하자는 것이다. 달가스는 히스 황야에 농민들과 함께 방풍림을 조성하고 용수로를 건설했으며, 토지개량, 도로망과 간이 철도를 정비하는 등 농업진흥사업을 도왔다. 끝내 덴마크 농민들은 100만ha의 황무지를 70만ha의 경지로 바꾸었고, 19만ha를 숲으로 만들었다.

1840년대부터 1900년경까지 오늘날 덴마크의 기틀을 닦은 세력은 농민이었다. 폴케호이스콜레와 그 자매학교에 해당하는 농업학교에 다니며 인간해방과 평등의식에 눈을 뜬 농민 그리고 그들의 교사들이 농민계몽 지도자가 되었고, 정부에 농촌위원회 구성과 자작농 창설, 소작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근대화를 겪은 국가들의 일반적인 경로와 달리 농민들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되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내린 농민들의 공동체인 협동조합 조직이 활발하게 형성되었다. 농민들은 낙농, 도축, 원예 협동조합들을 만들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스스로 관장했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이후에야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비자생협이 덴마크에서는 1866년에 만들어졌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주식회사로의 전환이 끊임없이 요구되었지만, 대자본가가 지배하게 될 것을 예견한 농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협동조합의 농민들은 높은 생산성과 협동력으로 세계 제일의 농민국가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정치개혁을 주도했다. 농민세력은 처음에는 도시의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였으나 연대는 깨지고 1870년 ‘좌익당’을 결성하여 ‘우익당’과 맞서게 되었다. 좌익당 지도자들은 모두 폴케호이스콜레 졸업생들이었다. 자작농과 소농이 중심이 된 농민정당은 늘 혁신세력이었다. 보수당은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1891년 세계 최초로 연금법을 만들었고, 이로써 덴마크 사회복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01년에는 좌익당이 집권당과 타협하자 다시 ‘좌익개혁당’이 만들어져 도시노동자 중심의 사민당과 함께 노농정권을 수립했다. 농민이 하원 총수의 114석 중 76석을 차지할 정도로 다수당이고, 사민당은 14석에 불과했다. 이 좌익 개혁당이 정권 장악 후 우경화하자 다시 ‘급진개혁당’이 분리되어 1913년 정권을 장악하고 여성 참정권, 8시간 노동제, 소작농을 위한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21년에 이미 건강보험제에 해당하는 ‘질병보험법’이 제정되었고, 이듬해에는 ‘노령연금법’이 제정되었다. 덴마크 현대 정치의 기본방향을 결정한 것은 폴케호이스콜레로 대표되는 농민 중심의 민중운동이었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와 오늘날 우리

덴마크도 2차대전 이후 서서히 산업사회로 재편되면서 농업국가를 고수할 수는 없게 되었다. 덴마크 경제 또한 글로벌 경제의 격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덴마크 농민의 비율은 5.8%로 급감하게 된다. 사회복지제도에서 여전히 이상적인 나라로 거론되지만, ‘노동의욕 감퇴 사회’로의 재편은 피할 수 없었다. 오늘날 폴케호이스콜레는 농촌 청년들이 아닌 도시의 젊은이들을 주로 받아들이게 되고, 문화센터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고, 사회변혁적 정체성은 흐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세계 제1의 도서관 장서 대출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덴마크의 높은 시민적 교양은 유지되고 있고, 복지‘국가’가 아닌 복지‘사회’의 기반은 건재하며,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적 전통은 굳건하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는 그룬트비와 폴케호이스콜레, 곧 사상과 교육의 힘으로 가능했다. 한편 프로이센과의 전쟁 이후 독일 침공(5년) 정도를 제외한 150여 년의 시간대에 별다른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유럽의 변방에다 매력적인 자원의 산지가 아니었던 지정학적 행운도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한 요인이리라 추측해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과거를 생각했다. 그룬트비의 자리에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크리스텐 콜의 자리에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과 《성서조선》의 김교신을, 그리고 폴케호이스콜레의 자리에 구한말과 식민지시대에 이 나라 곳곳에 존재했던 수많은 야학들을 대입시켜보았다. 이를테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대륙으로 건너가기 이전의 윤봉길, 열일곱 나이에 농민을 위한 야학을 열고 계모임과 독서회, 농민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농민들을 위한 교과서 《농민독본》을 저술했던 윤봉길 같은 이들이 또한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근대 이행기에서 최제우와 최시형과 안창호와 이승훈과 김교신 그리고 수많은 윤봉길들은 좌절했고, 수많은 이광수들이 우리의 근대를 이끌었다.

지금 우리는 또다른 이행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이미 ‘교육 불가능’이라는 언술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그것은 학교교육이 지금껏 그 어이없는 파행과 모순 속에서도 그나마 학생들에게 부여해왔던 교육을 통한 물질적 유익이 이제 그 시효를 다한 것에서 일차적으로 유래한다. 그것은, 석유가 생산 정점을 지나고 금융경제가 황혼기에 접어든 세계적 상황에, 부동산 거품이 언제 꺼질 줄 모르고 빈부격차가 갈수록 극심해지며, 비정규직 산업예비군이 창궐하는 국내적 상황에,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실체적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즉자적인 욕망의 해소에만 골몰하며 각기 인생의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정확히 조응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바라볼 한 푯대로서 덴마크를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언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땀 흘려 노동하는 삶,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생존방식, 인생의 의미를 궁구하는 대화와 공동체생활을 복원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주적인 농민으로, 시민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 출발은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와 같은 작은 교육기관이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우선, 나부터 그 길을 가고 싶다.

2020/01/09

16 한국퀘이커 -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고기교회 -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하늘기차 | 2016.11.29 18:48 | 조회 1068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하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평화교회 퀘이커로부터 평화목회에 대한 단상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필자가 퀘이커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중반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이행우 선생님(현재 자주평화통일미주연합 고문)을 통해서이다. 자주연합단체의 활동을 하면서 이 선생님을 통해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활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해외봉사사무실인 미친우봉사회(AFSC)에도 들려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관심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이들을 퀘이커 학교(Friends School)에 보내면서 거기서 폭력에 대응하는 철저한 교육, 아이들 인격존중과 평등에 대한 관점이 교사나 프로그램 속에 배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위가 끝나가는 마지막 해 2001년 나 자신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선생님을 통해 필라델피아 남쪽, Wallingford에 소재한 퀘이커 교육기관이자 수련공동체인 펜들힐(Pendlehill;www.pendlehill.org)에서 가을학기를 보내게 되면서 평화교육에 관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생활하면서 내게 남겨진 인상적인 몇 가지 체험과 신학적 관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본인이 펜들힐에 들어가고 나서 두 주 만에 9.11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 날은 논문 최종 본을 내는 날이어서 아침에 템플대 캠퍼스에 갔다가 학생들이 경악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TV를 지켜보고 계속 전화를 사방으로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각각 1시간에서 2시간 거리쯤의 위치에서 북으로는 뉴욕에, 서부 펜실베니아에 그리고 남쪽 워싱톤에 비행기가 각각 떨어지면서 가운데 위치한 필라델피아의 학생들에게도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펜들힐에서는 지역사회에 매우 유명하면서도 영향력이 강한 일련의 공개강연회를 매 학기마다 해 오고 있었다. 이미 2년 전에 기획되고 1년 전에 주제와 강사가 섭외되는 이 공개강연회의 당시 주제는 “퀘이커와 돈”이었었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맘모니즘에 대항한 대안적 삶에 대한 것이어서 꽤나 기대가 큰 주제였다.

그러나 9.11사태가 터지자마자 펜들힐은 이 주제를 즉각적으로 취소하고 이슬람에 대한 주제로 바꾸면서 미국내 및 해외의 이슬람 학자와 활동가, 이슬람권과 관계된 평화운동가 등으로 전면 교체하였고 이슬람과 관련된 주제가 다음 학기까지 지속되었다. 대게 참석자들은 처음엔 퀘이커들이 많았으나 보통 100-200명이 모이던 숫자가 여러 지역사회의 관심 있는 사람들로 인해 넘치면서 그 장소를 옮겨 대대적인 모임과 더불어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인 이슬람권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더불어 미국의 헤게모니 정책에 대한 각종 반대운동의 결성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것이 대단한 충격인 이유는 당시 9.11충격으로 집집마다 성조기가 날리고, '적'에 대한 날카로운 국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성조기없는 집은 이웃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분위기였던 상황속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이념, 종교, 인종에 관계없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 것이다. 월남전중에 상선을 구입해서 구호물자를 베트남에 보내다가 미국함대가 이를 막고자 했던 사건이며, 20여 년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활동을 가장 먼저 종교기관으로서는 북과 접촉을 가진 곳도 퀘이커 단체였다. 17세기 중엽, 이미 미국의 퀘이커들은 흑인노예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위원회를 두어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노예를 풀어줄 것을 권고하고 이것이 시행이 안 되자 연회에서 강제로 흑인노예주들에 대한 멤버쉽을 박탈시켜 퀘이커 숫자가 반으로 주는 일까지 감수하였다. 비록 전 세계에 현재 30만 밖에 안 되는 숫자이면서도 갈등해결과 지역빈민구제활동, 비폭력저항운동, 인권을 위한 정책로비활동, 국제구호와 국제연대, 평화활동, 그린피스운동의 경우처럼 녹색활동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와 공헌을 하고 있는 데에는 이들이 가진 독특한 신앙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가 1656년 론세스톤(Launceston)의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의 몇 단어를 차용하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그것에 응답하기(Answering that of God in everyone)"- 퀘이커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진동을 하는 자란 뜻이다. 퀘이커는 모든 인간은-남/여, 노/소, 정상인/장애우, 백인/흑인/황인, 신앙인/비신앙인을 막론하고 - 누구나 “하느님의 그것”이라 부르는 “신적인 빛,” “그리스도의 빛” “내적인 빛”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존중되어야 하며, 특별한 엘리트나 권위자에 대한 경칭을 갖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직자가 없으며 모두가 친우(friends)로 불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타 종교에 대한 존중과 관심에 의한 종교 간의 대화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펜들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학습자와 강사(instructor)간에 구별이 없으며, 강사의 경력이나 질로 보면 수십 년간을 그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독보적인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함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사로움과 인격적인 친밀성이 두드러진 특성임을 느끼게 된다. 무슨 결정을 할 때도 소수자의 신적인 빛을 이해하여 다수결로 정하지 않고 동의과정이라는 독특한 방식에 의해 전원합의의 전통이 수백 년간 지속되고 있다. 결정을 전원동의를 통해 한다는 사실은 외부인에게는 매우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내부로 들어와 그 과정을 보면 전원동의가 얼마나 강력한 신뢰의 서클을 형성하고 또한 행동에 단호한 힘을 발휘하는지 놀라게 된다. 퀘이커학교(Friends School)의 교실에서는 아이가 장애우이어도 교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떠한 강제도 없으며, 어울림이 매우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어떤 갈등에 대해서도 아주 조심스럽고도 끈질기게 그러나 '나쁜 행동한 자'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집중하며 학부모와 학생들이 공동으로 대처하는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충격을 받곤 하였다.

우리의 예배처[교회]이자 모임장소로서 '모임집(Meeting House)'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평등의 원칙을 고려하여 가운데 빈 공간을 중심으로 한 팔각형내지 사각형의 의자 배치와 어떠한 성물-십자가, 촛대, 설교단, 성가대-도 없다. 이들 형식적인 것 모두가 신적인 빛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는 조용히 모여 침묵기도를 드리며 어느 누군가가 성령의 감흥을 받고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끼면 전체를 향해 말하게 된다.

펜들힐의 공동생활에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은 말, 기도 혹은 노래 어떤 형식이든 가슴에서 울려 터져 나오는 그 메시지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며 함께 모두의 가슴이 울리는 듯한 반향을 일으켜 매우 감동적이곤 한다. 혹은 감흥이 없을 때는 기다리다가 침묵으로 마치게 된다. 이런 형태를 통해 각자는 개인의 내적 수행(individual practice)을 통해 신께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의 내적 감흥에 자신도 울림을 받으면서 공동체적 수련 (communal practice)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선과 같으면서도 다른 것은 침묵이 있지만 깨달음/구원/계시의 통로는 관계적이고 공동적이라는 사실이 다르다.

침묵명상기도는 성령, 신적인 빛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역사를 위해 나의 활동, 나의 에고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침묵의 시간을 갖을 때 이는 또한 ‘나의 말함’을 멈추고 미세할지라도 ‘타자의 음성 voices of Others'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신적인 빛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빈 공간을 허락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퀘이커에게 있어서 영성은 말하기 보다는 들음이 영성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들음의 영성으로 인해 이들의 영혼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여리고 예민한지 느끼게 된다. 침묵이 단순히 내면의 고요만이 아니라 그동안 듣지 못한 타자의 음성이 나에게 말 걸게 오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적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역동적 개입(engagement)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진리를 위해 용감해지기(Be valiant for the Truth)" - 진리는 단순히 추상이나 이해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는 확신(convincement)과 관계된 것으로, 그렇게 도달하고 견고히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이다. 위의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것에 응답함”이 신적 빛의 경험(experience)과 존재에 관련된 것이라면 “진리를 위해 용감해짐”이란 "공개적으로 그 빛에 의해 걸어감(walking in the Light publicly)"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국가나 지배자에 대한 어떤 맹세니 징집문제에도 거부하고, 세상에 어떤 타협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퀘이커 신앙에는 신적 빛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social witness)이 분리되지 않는다. 펜들힐에는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치유기도, 성서연구, 신학...)등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을 위한 프로그램 (폭력과 갈등대응, 지역빈민구호, 파트너쉽과 능력부여...)이 동시에 존재한다. 평화의 증언은 퀘이커 역사에 오래된 것이다. 장소, 혀, 펜 그 무엇이든 주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옥이나 자기희생이 따를 지라도 진리일 경우에는 목숨을 거는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상업에 있어서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퀘이커라 할 때 그의 정직과 신용은 의심하지 않게 된다. 정찰제를 역사상 가장 먼저 도입한 무리가 퀘이커이며 퀘이커 상점에 대한 주변이웃의 신용은 확고하다.

* “모범이 되기(Be patterns, be examples)" - 진리에 대한 경험은 모범을 만드는 실험(experimental)을 강화한다. 이들은 선교(mission)이란 말을 안 쓰고 봉사(service)란 말을 선호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을 높이고 하느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누룩처럼 전위적인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 예가 감옥에서의 각종 자원 활동, 정신병동의 개선, 중재, 아동치유학교, 대안교육공동체운동, 평화활동이 그것이다. 모범이 되는 것에는 남들이 안한 가장 그늘진 곳을 먼저 찾아가서 삶의 예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일단 정신병동이든 인권활동이든 먼저 모범을 보이고 다른 단체, 다른 기관들이 그 중요성을 깨닫고 동참하여 그 분야에 운동이 일어나면 과감하게 다른 그늘진 곳을 찾아 간다. 지금까지 수년간 쌓아놓은 기득권, 먼저 차지했으니 우리를 존중해달라는 그 어떤 표시도 없이 자신들의 공로를 남기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들이 퀘이커라는 신분도 이야기 하지 않고 오직 인류와의 연대, 공공의 선에 기여한 것으로 만족한다. 북한에 외부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들어간 퀘이커의 봉사활동은 아직도 북의 파트너는 해외구호단체가 와서 봉사를 하는 것으로 알지 퀘이커(그들의 신앙, 종교)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이렇게 퀘이커는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없이 타자를 일에 함께 관여시키는 방식을 통해 소유권이나 멤버쉽의 배타성을 주장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펜들힐의 교육이 종교적 타자인 누구에게나 열어 놓고 있는 것이 그 예이며, 수많은 퀘이커관련 봉사기관에 타 신앙인이 직원으로 와 있고 네트워크 활동에 과감히 이들 타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봉사는 어느 특정한 공동체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지향한다. 즉 봉사는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인류를 생명으로 모으는 (“spreading the truth abroad...gathering up into the life") 것이며, 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함과 더불어 신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개신교들이 선교라고 부른 것에 대응하는 퀘이커의 봉사의 활동의 근본태도인 것이다.

모임집(우리의 교회에 해당)에서 상징화된 한 가지 생활방식은 또한 단순성(simplicity)에 대한 신앙실천-절제와 소박한 삶-에 대한 것이다. 과잉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옷, 소유물, 먹거리에서만 아니다. 퀘이커는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필자가 평화운동하면서 몇 가지 프로그램할 때 재정이 없어 쩔쩔매다가도-국가폭력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퀘이커는 정부돈을 받지 않는다- 어느 때 펀드가 들어왔다고 해서 그 출처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누군가 죽고서 기부가 들어왔다가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일처럼 말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수백년의 박해기간동안 국가로부터 재산박탈을 통한 생존과 그 박해받아 감옥에 들어가거나 남겨진 가족들 혹은 다른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같이 나눠야 했던 생활습관을 통해 이러한 소박한 삶과 자발성은 철저히 몸에 배여 있다. 그 예중의 하나는 평화 프로그램에 자원봉사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고, 퀘이커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어느 나라 어느 집에 몇 명이 어느 기간동안 무료로 숙박을 할 수 있는지-보통은 여행자가 최소한의 실비를 자진해서 사례하는 경우가 많다-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중독으로부터 단순성의 실천은 대안적인 삶과 서로 돌보는 삶을 목표로 한다.

10년 동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퀘이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마무리 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동안 따라온 허무주의와 내적인 고통이 정리되고 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됨으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실존적 교리로서 성육신 -let your life speak-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내 생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진리를 자기 삶으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은 평화교육운동을 하는 내게 있어서 근본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18 김조년 -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Backhouse Lecture 2018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

김 조 년(Cho-Nyon Kim)




* 왜 나는 이 강의를 맡았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서 항상 경험하는 것이 변화다. 관점도 달라지고, 세계도 달라진다.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철학도 그 내용이 달라지면서, 그것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달라짐은 때때로 있던 것들이 사라짐이지만 동시에 새로 운 모습으로 확장되는 것이요 풍부하여짐이다. 그래서 동시에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새 로운 것은 덧붙여진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과 정체성의 문제이 면서 새롭게 첨가되는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뒤부터 퀘이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어떤 것도 규정하거나 기준이나 신조를 만들려 하지 않는 퀘이커의 전통과는 아 주 먼 시도였다. 그러나 내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정식 등록 된 뒤에도 이에 대한 노력을 끝없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퀘이커 됨이란 무엇인가를 내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 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형성된 퀘이커됨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찾는 자(seeker)로서의 진지한 자세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노력할수록 퀘이커들이 주장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잡히기보다

는 모두 추상적이었다. 막연하였다.

예를 들면,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 안에 계신 그 님’. 퀘이커들이 말하는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불교와 유교와 도가와 한국 고유의 생활(민속)종교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 따위, 또는 기독교인이 된 뒤 수도 없이 많이 들어온 ‘하느님’, ‘성령’, ‘메시아’, ‘그리스도’, ‘구 원’, ‘해방’이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Tao), ‘진인’(眞人), ‘자연’ 또는 불가(佛家)에 서 말하는 ‘내 안의 부처’나 ‘성불(成佛; 부처가 됨)’, 해탈 등이 모두 추상적으로 다가왔

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러한 추상개념들은 일상생활과 매우 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런 개념들의 설명이나 이해보다는 좀 더 일상생활과 긴 한 관계가 있다는 퀘이커들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더 끊임없이 궁금하였다. 다시 말해서 퀘이커가 매우 좋 아하고, 모두가 실천하려고 하는 말들, 즉 평화(Peace), 단순함(Simplicity), 평등 (Equality), 컴뮤니티(Community), 진리(Truth),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진실 (Integrity) 등도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이것들 역시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매우 쉽지가 않다. 그 말들에 대해 매우 깊은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하여 실 천하려 할 때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것들은 상황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생활공동체는 깨지고, 평화보다는 다툼과 전쟁의 위험으로 가 득하고, 통합과 함께하는 삶보다는 분별, 분열이 가득하고, 점점 더 차등이 심화되며, 자 연파괴를 넘어 생명의 종말을 촉구하는 문명의 발달과 사건들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런 퀘이커의 전통처럼 내려온 삶을 실현할 길이 어디에 있는가? 특히 가장 단순하게 산다는 것이 곧 복잡하고 화려하게 살도록 규정된 현대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 삶의 전통을 지 키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세계는 전과 같이 민족과 나라와 지역을 넘어 인류를 생각하고 전 지구를 하나로 보며 문화의 융합과 공존을 꾀하는 지금, 어느 한 종교의 종파성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고 본다. 퀘이커는 어떤 종파성에 얽매는 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끊 임없이 하여 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함은 물론 중요하다. 이러한 때 동양의 고전 중에서 가장 평화롭고, 단순하며,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아 끼고 귀하게 보며, 형식과 규범을 넘어 자연(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주장한 도가의 이론과 삶을 찾아보는 것은 퀘이커 종교성 확장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들을 비교하 는 것이 아니라 퀘이커를 보충하거나 확장하기 위하여 도가의 영성, 또는 신비를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성과 신비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건들에서 들어나기 때 문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내가 낳고 자란 한국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생활, 종교성과 나의 성

장을 살펴보고, 한국사회를 오래도록 이끌어 온 유교, 불교, 민속종교들의 진화와 새로 들어온 기독교의 토착과정을 간단히 살핀 뒤, 퀘이커가 추구하는 것들과 도가에서 추구 하는 핵심점들의 만남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살아간 한국의 초기 퀘이커 중 한 사람인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퀘이커로서의 내 삶의 방향설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주로 질문 형태로 정리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주장이 아니라 내 궁금함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의 퀘이커 됨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요구이다. 이것은 동시에 미래의 퀘이커를 걱정할 만큼 젊 은 퀘이커들이 현격하게 줄고, 퀘이커들의 노화현상은 바로 직면한 문제다. 이것은 퀘이 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러한데도 많은 사람들은 바로 퀘이커 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서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 퀘이커를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화전통과 종교전통의 진수와 퀘이커의 진수를 접목시켜 확장된 종교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퀘이커의 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 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것을 매우 큰 기쁨이요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동시에 매우 큰 삶 의 부담으로 느낀다. 신앙과 그 믿음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는 문제에서 퀘이커들이 모 범이 되어 그 흐름에 몸을 싣고 싶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점 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형식화한 세계에서 실제를 살고 싶은 맘에서는 내 자신 이 퀘이커를 만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믿음에 성실하지 못하는 것에서는 내가 퀘이커라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을 매우 주저스럽게 한다. 특히 초기의 퀘이커 선배들, 조지 폭스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는 그런 감동과 떨림과 진리에 대한 헌신의 움직임 을 경험할 수 없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종교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흘 던 것같은 느낌이 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흐름과 기성종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 등에서 사회 전체 는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러한 때이지만 조지 폭스 등 초 기의 친우들의 삶은 매우 곤고하였으며 이상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 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곧 진리를 따르려는 그 삶은 매우 감동스럽다. 그것은 마치 신약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과 같다. 내 자신도 그런 삶 속에 있고 싶다. 그 러나 지금은 매우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종교없는 종교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사는 느 낌이다. 물론 종교라는 조직과 교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지만, 형식화한 종교에서 내용에 충실한 종교생활을 실천하는 수는 매우 적다. 동시에 종교, 정치, 경제, 문화, 학문, 일상생활의 친분과 교류에서 비종교적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이러 한 때 깊은 종교성을 띈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는 초기의 퀘이커 친우들이 가졌던 철저한 진리추구와 그 삶을 실 현하려다가 겪은 고난의 경험이 없다. 매우 평범하고 평이한 종교의 삶을 살아왔다. 그 러므로 내 말 속에서 종교성이 매우 희박하며, 일상생활에서 거룩함을 찾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몸에 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속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는 내 속에 있는 빛의 작동을 따라서 내 일상생활을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것은 일종의 철저하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퀘이커의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을 던져 주기가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 서도 이 강좌를 하겠다고 대답한 것은 단순히 이런 내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문화체계 속에서 어떻게 종교와 비종교가 구별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우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펼치겠다. 그러니까 이 말 은 나의 퀘이커 깨달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묻 는 것이다.



1. 나의 성장과 내 주변의 종교성 나는 무종교적이지만, 유교적 가정생활의 전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 가정은 유 교전통의 교육과 생활윤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불교나 무속 또는 한국 적 샤마니즘의 생활풍속이 우리 가정에는 없었다. 우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무 속신앙의 전통을 우리 가정에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점을 치거나 절을 찾아 부처에게 기도하고 시주하는 일이 없었다. 그분들의 언어생활에서 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

다. 그 대신 사람이 죽고 나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때 사람이 살아 있 때는 하나였던 것이 어떻게 죽 은 다음에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각각 자기들이 갈 곳으로 가는 것인지가 매우 궁금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그에 대 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주신 적도 없다. 그러나 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할 때, 그 하늘 이라는 곳이 어디일까가 몹시 궁금했고 그것을 알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채 그 냥 자랐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집안에 차려놓은 빈소에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혼백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른이 돌아가시면 집에는 빈소를 차렸다. 빈소에는 종 이상자로 만든 혼백함이 있었다. 그 안에는 청색실과 홍색실을 꼬아서 혼백을 상징하는 실무더기를 넣어두었다. 그러니까 빈소를 차리는 동안은 그 혼백상자가 죽은 사람을 상 징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그 빈소에 아침과 점심과 저녁 세 번의 상식(밥상)을 올렸다. 그 때는 언제나 혼백함을 열어서 죽은 혼령이 식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완전히 상 징을 통한 의식행위(儀式行爲)지만 아주 진지하게 그 일을 하였다. 그리고 삼년이나 일 년이 되어 탈상할 때는 그 혼백함 속에 있는 청실과 홍실을 꺼내어 땅에 묻거나 불에 태 웠다. 백을 상징하는 청실은 무덤 앞에 묻고, 혼을 상징하는 홍실은 불에 태워 날렸다. 이렇게 하여 죽은 사람은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예식을 치 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집에서 하는 유일한 종교행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 은 엄 히 따지면 종교행위라기보다는 단순히 조상신을 섬기는 효도행위에 속하는 것이 었다. 그러니까 조선사회를 이끌어 왔던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계통의 신유교를 생활 윤리로 믿었던 가정 전통은 다른 종교행위에 대하여 배타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신 유교와 성리학 전통과 위배되거나 배치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매우 크게 배척을 받았 던 조선시대의 전통이 우리 가정에는 일상생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이변이 생겼다. 내 증조할머니의 큰아들의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며

느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큰 손자가 죽었다. 이에 그녀는 매우 크게 상심하였다. 이 때 예수교전도사를 만나서 기독교의 복음을 듣게 된다. 그 뒤 그녀는 매우 열심히 교회 에 나갔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기도 방식은 한국 전통가정의 기도방 식과 같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두 손을 모으거나 비비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젊어서 죽은 영혼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살아 남은 큰 아들의 안녕된 삶을 비는 기도였다.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몸을 단장하 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생활신앙전통과 일치하는 행위였다. 가정 에 무슨 일이 있거나 어떤 사람이 아프거나 멀리 떠난 가족을 위하여 빌 때는 언제나 그 와 비슷한 기도를 하는 것이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일상문화였다. 그렇게 빌고 난 뒤 일 상에서 일을 하면서 찬송가를 입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많이 부른 것이 ‘예 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네’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통은 그녀의 며느리에게 내려 졌고, 나중에는 손주며느리에게 전해졌다. 물론 그녀가 직접 그들에게 전도한 것은 아니 지만, 그런 가정의 영향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 할아버지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큰 갈등은 아니었지만, 유교전통의 가정분위 기와 기독교 신앙이란 새로운 흐름 사이에 묘한 갈등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물 론 내 증조할머니나 할머니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에, 유교식의 가정윤리나 조상에 대한 제사행위를 진행하는 데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중국에 가톨릭이 전달되었을 때, 그리고 조선왕조 때 한반도 에 전달된 가톨릭과 유교 사이에 매우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제사갈등 같은 것이 우리 가 정에서는 없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미래의 삶이 나 일상생활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 고향 마을에는 불교사원도 없었고, 유교식 사당도 없었다. 향교나 서원이 있는 마 을이 아니었다. 내 고향마을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양반들이 사는 곳 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의 철저한 유교식 예식이나 예법으로 마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한 해를 시작하는 날 동네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이 있었고, 성황당이 있었으며, 마을 입구에는 마을수호신으 로 장승이 세워졌었다. 많은 사람들은 절기에 따라서, 각자 자기집의 전통에 따라서 자 기들이 믿는 신에게 빌었다. 때로는 부엌신에게, 때로는 장독대신에게, 때로는 우물신에 게, 때로는 나무신에게 빌었다. 묘하고 큰 바위나 몇 백년 묵은 큰 나무나 깊은 골짜기 나 우물은 또한 기도터가 되었고, 그것들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애니미즘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에게 신은 일상생활 속에 있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을 지키는 지킴이, 즉 업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에는 기독교에서 말하 는 것같은 유일신 개념이 없었다. 신은 매우 다양하였고, 많았으며, 각각 기능을 담당하 는 것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신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념상의 신이었을 뿐,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조상에 대한 숭배심은 매우 강했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 런 모든 제사와 비는 행사에는 언제나 음식이 마련돼 있었고, 그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마련하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그에 맞는 의식행위가 있었다. 그러할 때는 언제나 전통으 로 내려오는 신의 이름들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개별적이지 체 계를 갖춘 조직이 아니었다. 아플 때나 깊은 병에 걸렸을 때, 가정이나 한 사람에게 어 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 것들은 조직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종교적 예식행위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에 나갔다. 매우 낯설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았다. 열심히 다녔지 만 의심스러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 중에 왜 기도할 때 꼭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하 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가 빌고 기도하는 것이지, 꼭 누구를 대신 불 러서 그의 이름으로 내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비는 것이라 고 하였다. 내 죄를 그가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점 이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렇게 나를 대신 해서 죽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요 그는 그인데 그가 어떻게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교나 기도 또는 찬송가를 부를 때 피, 죄, 원죄, 죽음, 구원, 부활, 영생, 멸망, 지옥, 천당, 천사, 마귀, 싸움, 승리, 사랑, 평화 따위의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 피와 죄라는 말이 들어간 찬송가를 부를 때는 매우 거북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찬송가의 내용들이 매우 전투적인 것이 많아서 함께 부르기가 많이 불편하였다. 사랑과 저주나 멸망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으며, 평화와 싸움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알 수가 없었다. 유교나 도가에서, 또는 일반 민속신앙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 았기 때문에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원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더욱이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받은 교육은 유

교식 윤리교육이었다. 그것은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하는 끊임없이 자기를 갈고 닦아 가는 생활윤리를 매우 귀중한 것으로 알고 지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흠결이 없이 사는 것을 매우 훌륭한 덕목으로 알고 지내기를 바랐

다. 인(仁)한 삶, 즉 자비와 사랑의 삶과 의(義)의 삶, 즉 정의로운 삶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과 모순을 어떻게 조화하면서 살 것인가를 배웠다. 오랜 논쟁의 유교전통인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이냐 아니면 악한 것이냐 라는 결론 없는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 었지만,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무조건 모든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수히 많이 설교하였지만, 그것을 들으면서도 시원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대신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 이었다. 그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없이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믿으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듣기 전에 살았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모두가 다 멸망의 구 텅이 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인가? 아직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 은 없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매우 심한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을 발견하 였다. 그것을 내가 따라 믿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천당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의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전혀 심각하게 다가오지가 않았다. 불교에서 말하 는 서방정토, 또는 극락이라는 것과 같은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물론 끊없는 윤 회를 말하는 불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같이 느껴졌다.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인간은 인격존재다.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결

정하는 아주 고유한 분야다. 그러니까 인격이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어느 인간이든 남의 삶을 대신하여 살 수 없는 것처럼, 죽음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지 않던 가?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으 면 크리스천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믿겨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 러나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맴도는 논리였다. 여러 신학적인 글들 을 읽을 때도 이 부분에 대한 논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서 계속하여 교회에 나갔고, 기독교라는 틀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인격을 가진 나라는 존재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과정이 곧 나의 기독교교회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중에 하워드 브린턴(Howard H. Brinton)의 책 『퀘이커 300년』이 함석헌의 번

역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다.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한 공감을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함석헌의 다른 글을 읽으면서 퀘이 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의 퀘이커 모임에 가끔 참석하고, 독일에 서 머무는 동안 퀘이커모임에 참석하면서 차차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면서 퀘이커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 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함께 독 일 북서부 4계회에서 회원이 되었다. 물론 이 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서 왜 내가 퀘이커가 되는 형식절차를 밟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하였다. 독일에 계 속하여 있겠다면 회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면 회원이 아닌 데 퀘이커모임을 주관하는 것은 이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백을 하였고 인 터뷰를 통하여 정식 독일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전에서 몇 친구들과 함께 퀘이커리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 하였다. 처음에는 매일요일마다 짧은 고요예배에 긴 공부를 하였다. 차차 고요예배 시간 을 늘려 한 시간의 고요예배를 마친 뒤에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여러 참여자들이 정식으로 퀘이커 월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공부를 시작한 지 6년만에 대전 월회로 출발하고 FWCC에 등록하였다. 나는 종교경전을 다양하게 읽는다. 기독교의 성 경 신약과 구약을, 불교경전과 도가경전을 읽으며, 때때로 유교의 경전을 읽는다. 이러할 때 나의 기독교에 바탕을 둔 퀘이커 신앙에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폭넓은 종교성을 얻게 된다. 이미 내 성장배경을 말하면서 밝혔듯이 내 삶 속에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 가와 민속신앙의 전통이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체계있는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삶과 사회공기로서 내 속에 그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낀 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기독교와 퀘이커리즘의 삶이 나를 이끈다.



2. 한국의 종교다원성; 유교, 불교, 도교, 생활(민속)신앙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다원성을 가진다. 국가지배이데올로기와 생 활윤리로 유교, 불교가 오래도록 지배하였고, 도교와 민간신앙은 바로 이러한 외래 종교 들과 조화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끌어 왔다. 다시 말하면 학자들의 주장들이 서 로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재래종교로 도가 또는 도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중국에 서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이 어떠한 것과 상관 없이 도가사상과 도교신앙은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넓고 깊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중국과는 달리 도가 사상이나 도교신앙이 한국 역사상의 어떤 왕조의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한 적은 없

다. 그렇지만 근 1천년 가까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불교나 그 뒤를 이어 유교가 역할하던 시대에도 이것들은 일반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체계를 잡거나 거대한 세력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민간신앙 위 에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불교가 지배한 뒤,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가 유입되었 다. 이 두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문화계에서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였다. 때로는 박해 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된 적은 없다. 그러 니까 왕조가 바뀌거나 사회 질서가 기존 이데올로기로 지탱할 수 없이 되었을 때는 언제 나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들어와 새로운 기운을 사회에 불어 넣었다. 고대국가들 이 기틀을 잡기 시작할 때 민간신앙으로는 국가제도를 이끌거나 새로운 국민정신을 집합 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의 힘이었다. 한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고대국가 형성과 틀을 같이 한다. 한반도에 있었던 왕조들을 이끈 종교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불교였다. 그러나 달라진 사회와 국제간의 교류는 새로운 종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들어온 것이 신유교였다. 신유교는 조선 왕조의 굳 건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협한 유교유일체제는 정신세계뿐 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경제, 정치생활에 매우 좁은 한계를 가지게 했다. 이 때 중국을 거쳐서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도입되었다. 그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에 들어온 가톨릭이 었다. 아주 철저한 신분체계와 현실중심의 유교윤리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던 이들 은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소식은 신분사회에 살던 그들에게 복음 이었다. 그러한 사상과 믿음은 지배계층에게는 기존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 개혁성향을 가지거나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엘리트집단들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곧 일반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킴 에 새로운 종교이데올로기를 도입하기에 이르 다.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지배계층은 아 주 강력하게 새로 유입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논란이 된 제식논쟁과 직결된다.

그 뒤 백년이 지나서 개신교가 새로 유입되었다. 가톨릭은 당시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하여 매우 큰 저항에 부딪혀 상당히 많은 희생자를 낸 반면, 그 뒤 들어온 개신교는 전교의 어려움은 없었다. 의료와 교육과 자연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개신교는 많은 일반 사람들과 왕조와 지배엘리트들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 이 됐다. 특히 왕조가 힘을 잃고 일본에 의한 강제 통합과 통치가 시작되면서 한국민의 민족의식과 개신교는 일치하는 활동을 하였다. 국권을 상실하여 발생한 민족의식과 새로 들어온 개신교는 공통의 관심사항을 가지게 됐다.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한국은 미국과 유럽에 문을 열게 되었고, 그들의 과학과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러한 것들은 민족주의와 함께 성장하였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때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상은 이제까지 한 국을 지배했던 유교나 불교의 생활관습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 때에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역사상에 있었던 종교체계들을 다시 정리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크게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중 동학(東學)은 려오는 서양의 문물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민간에 깊이 파고들었으나 양반지배계층을 중심으 로 정치를 이끌던 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의 핵심 은 기존의 유교나 불교에서 주장하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래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 간신앙으로 깊게 자리를 잡았고 널리 퍼졌다. 이 동학은 일본의 통치에 항거할 때 개신 교와 함께 민족 독립의 입장에서 공동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정부의 강력한 박해로 공개활동을 금지당했으며,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상호 경쟁과 공존의 과정을 겪는다. 동학, 천도교 등으로 이름이 바뀐 이 신흥종교는 한 국의 전통사상과 기독교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통합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

결국 한국사회에는 역사적으로 불교, 유교, 재래종교와 기독교가 차례로 유입되어 사 회에 매우 중요한 정신활동과 일상생활에 큰 역할을 한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체계가 들 어왔을 때는 언제나 기존의 종교나 사상체계와 갈등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 나면서 새로운 사상체계는 과거로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존의 정신세계와 사상체계, 그리고 생활습관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신유교는 불교의 것을 흡수하 였고, 불교는 새로 들어온 유교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맨 뒤에 들어온 기독교 역시 이미 이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불교와 유교 그리고 민간 신앙의 이데올로기와 생활습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리와 교리 상으로는 서로 배치되는 점이 많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혼용하고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사상체계는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를 부분적으로 받 아들여 자신의 것을 개선하였고,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는 기존의 사상과 생활습관을 받 아들여 토착화하거나 정착하는 데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갈등과 공존을 가능 하게 한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혼용, 또는 혼합은 곧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체계 들 속에서 자기 종교나 사상체계의 핵심사상의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완전 히 배제할 수밖에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수용할 가능성이 큰 유사성이나 같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갈등과 공존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가져오게 한다. 자신의 종교나 사상체계를 확정하고 유지하기 위하여는 다른 종교나 사상체계와 다르다 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들 속에 있는 핵심요소들을 활용하거나 차용할 수밖 에 없다. 그것은 곧 현실 종교의 모순과 딜레마를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과 같은 다원종 교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교섭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 여 진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극단적 진보론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 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다원성은 곧 종교일원성에서 만난다. 즉 개별 종교들의 다양한 차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갔을 때 궁극에서 만나는 것은 한 점이라 는 것이다. 바로 궁극의 그 한 점을 찾기 위하여 모든 종교는 각각 자기의 자리에서 자 기의 방식으로 출발하지만 궁극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하고 인정하게 되는 데, 그것의 이면에는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일 원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확신이 뒷받침한다. 바로 이 점이 종교의 진화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나 사상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한국의 것들은 중국의 것들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

다. 중국으로부터 왔거나 중국을 통하여 왔기 때문이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왔지만, 불교와 가톨릭은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다. 그것들은 이미 중국에서 많이 진화된 모습이 거나 토착화와 전교의 갈등을 경험한 뒤에 들어왔다. 그 대신 개신교는 부분적으로 중국 을 통하여 왔고, 큰흐름은 미국과 서양의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다. 일찍 들어온 것들 은 민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고, 뒤에 들어온 것들은 앞에 들어온 외래종교와 민 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큰 종교들,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는 고유한 민속종교와 다른 외래종교들과 부딪치면서 융합된 복합성을 띈다. 그렇 게 하여 한국화한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 개인 자신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옛날이 야기나 선조들의 이야기 또는 생활이야기를 통하여 유교, 도교, 불교와 민속신앙이 혼합 된 삶의 지혜, 체험, 학문, 도덕과 종교의 체험담을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자랐다. 체계 있는 교육이나 종교행위로서가 아니라, 비공식 일반 삶의 이야기와 생활을 통하여 여러 종교들이 녹은 생활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내가 기독교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내 속에는 한국사회의 오랜 종교전통들이 녹아서 흘러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국가형성을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민속종교와 유, 불, 도 교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 영향은 그 뒤 국가가 형성되고, 견고하게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을 때에도 다른 사상들과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었지만, 대개의 흐름은 서로 용납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3. 한국의 종교들과 기독교의 만남 어떤 종교가 되었든 새로운 지역에 전파 되어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순수하게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것을 주장하고 유지할 수가 없다. 종교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은 그곳의 긴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문화 속에 정착되는 것을 말한다. 한 종교가 새로운 사 회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한 사회가 새로운 종교를 유입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 지역에서 살아왔던 삶의 자세들, 생각들, 의 식(儀式)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였던 언어(개념) 속으로 들어가지 않 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전래되는 종교들의 변이가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는 굉장히 심한 갈등에 부딪치게 된다. 때로는 대화라는 상황으로, 때로는 박해라는 양 상으로, 때로는 무관심이란 자세로 나타난다.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이 미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새로운 종교의 전파다. 이런 과정에서 종교들은 새롭게 진화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종교들이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됐고, 생활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종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에도 과거에 있었던 종교와 생활문화는 주류의 자리에서 곁 가지로 려 났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삶과 생각과 제도와 의식 속 이나 밑바닥에 남아서 기능한다. 새로운 체제에서 살아남는 것과 새로운 지역에서 널리 퍼지는 것은 바로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접촉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접촉점이 바로 공 존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종교들의 대화가능성과 토착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인류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보편성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인류라 는 존재가 어떤 상황, 어디에 있든지 꼭 가지게 되는 공통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

다. 이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는 근거가 되며, 모든 종교들이 다른 종교에 의하여 진화하는 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에 있었던 많은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해 볼 이유가 생긴다. 한국에 고유하게 오래도록 전통으로 내려오는 종교들과 기독교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 가능하고 의미가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과 개념들이나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변화 되었으며, 같은 존재를 두고 각각 다르게 이름을 붙이고 있기도 하지만, 같은 이름을 쓰 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지기 때문이 다. 때로는 신, 하늘, 도, 절대자 따위로 각각 불리지만 그것들은 궁극존재 즉, 최초, 최 후, 지고하고 심오하며, 개인 안에 실재하는 존재라는 데서는 일치한다. 신앙의 대상으로 서 그것들은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동시에 인간 삶의 실천에서도 역시 용어와 이미지가 각각 달랐다. 죄로부터 벗어나며, 고통을 넘어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같은 노력이었

다. 그러니까 믿음과 실천의 부분에서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가를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점과 비슷한 점 또는 같은 점을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 미가 있을 것이다.

유교와 도가 또는 도교는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

왔다. 물론 중국에서도 많은 변화를 거치고, 새로 들어온 종교들과 공존하고 다투면서 변화된 것이었지만, 한반도에 들어온 각 종교들은 또 한 번 굴절 내지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쓰지만 내용은 매우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나 도가에서는 직접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인격존재로서의 신개념이 그들에게는 없지만, 신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는 궁극존재는 있다. 그것이 바로 그것들의 종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비인격적이고, 비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또 인격적이 다. 그러니까 신이 어떠하다는 것은 어떤 논리나 교리가 아니라 만남의 체험이라고 보아 야 한다. 비록 개념 설명에서는 인격과 비인격이라는 것이 구별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만남은 모든 곳에서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런 인격적 만남이 아니고는 결코 삶의 변화 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궁극존재와 직접 만남을 통하여 자신과 그가 하나 가 되는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각종 신들에게 빌고 기도 를 하지만, 그것은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인간집단인 국가와 민족(종족) 의 안녕을 위한 것이며, 현세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간과 집단이 할 일의 핵심은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었

다.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수양, 곧 성인에 이르는 자기 닦음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일이었다. 그 중 하나가 인 (仁)을 행하는 것이면서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와 큰 갈등을 일 으켰다. 조상에 대한 숭배는 종교행위는 아니지만 가족전통의 예식행위였다. 그 문제는 온갖 가족행사에서 항상 부딪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중국에서도 크게 부각된 것이었 고, 한국에서도 꼭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과의 갈등은 지금은 해소 되었으나 개신교와는 아직까지도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았다. 기독교인도 물론 조상에 대 한 생각을 깊이 하지만, 예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한 유연성 을 가진다. 즉 상당한 부분 타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윤리문제에 서는 크게 부딪칠 문제가 아니다.

민속종교와 기독교의 관계: 샤마니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교와 민속종교는 한국사 회에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은 서양식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신앙이 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 신이 있었지만 그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 종 족, 가족, 시대에 따라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신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변하였다. 이 경우 모든 신들은 일종의 기능상의 신이었다. 다신인데 어떤 우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능상의 문제로만 일상생활에 대두되었다. 이 민속신앙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예식과 생 활에도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민속종교 즉 무교는 지금도 살 아서 계속하여 생성되는 현대종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유교는 생활윤리로 작용할 뿐, 어떤 종교적 교육이나 체계있는 조직으로 존재하

지는 않는다. 사원이나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위 있는 유교교사나 학파의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이 유교사회라고 서양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화된 문화들이 있기 때문만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정당 한 것인지는 매우 궁금하다. 유교는 인간과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윤리를 강조하였기에, 그것이 곧 일상생활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숭상하는 입장 에서가 아니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유교사회라고 할 때는 의미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맹자와 순자로 나뉘는 인간의 본 성이 선하냐 악하냐는 논쟁을 통하여 인간은 온전함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 정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수양을 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받아들임에도 계속된 자기성장과 성찰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자 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많은 사원이 있고 승려를 양성하는 학교가 많았다. 여러 해 전부터 학생수가 줄고 승려지망생들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신도들에게서 불교신앙은 크게 줄어들지는 않고 있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대학, 고등학교가 있고, 장례식을 치르는 기 관이 많다.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극락에 이르는 길을 찾고,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힘든 이들이 고요함을 찾고 평안을 누리기 위한 프로그램 을 절에서 많이 진행한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한 희망을 일반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돈오(頓悟)나 점수(漸修)를 주 장하는 파가 있지만, 어느 것을 주장하든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상대 안에 절대가 있고, 삼라 안에 열반이 있으며, 속된 것 안에 성스러움이 있음을 인정하는 대승 불교의 입장이 한국불교에서는 강하다. 불교 내 종파들끼리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지 만, 불교와 민속종교인 무교와의 결합은 특이하다. 이것은 불교가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전파하는 전술의 결과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의 예식이 불교식으로 정착되기 도 하였다. 열반과 해탈의 전통과 서방정토나 극락을 그리워하는 정서는 구원과 천당을 말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도교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당도 없고, 교사도 없다. 다만

일을 마친 사람들, 사회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도 교나 도가적 삶을 흠모하여 추구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힘있게 삶을 영 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삶은 자연에 순응하는 도가스러운 삶을 사는 것임을 천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바닥의 정서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특히 문명비판적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도가철학은 현대인들의 쉼없는 삶, 끊임없이 급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무의미성을 체험할 때 도가에서 강조하는 관조와 놓음 의 삶은 새로운 숨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반 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를 운영하며 특히 기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병원과 각종 사회서비스기관을 운영하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사회전반에 서 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현실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운동을 벌여 정치와 경제계에 깊이 관 여한다. 진보경향이 있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가지지만, 보수경향 의 기독교는 개종과 선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진다. 종교간 갈등은 이러한 분파에서 많이 심화돼 있다. 각 종교를 신봉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토착화를 생각하는 이들은 서로 교류가 많다. 에큐메니칼 차원의 기독인들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나 신도들과 교류를 많이 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개종을 전제로 하는 논쟁은 지금은 별로 없다. 다만 자기 종교 속에 타종교 의 교리나 윤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인정하고 생활방법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한다. 진보 경향이나 보수 경향의 종교인들은 각각 자기들이 관심을 가지 는 부분들에 대한 공동대응을 많이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문제에 대한 공동대응에서 공통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안에서 진 보와 보수 경향의 흐름들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와 보수 끼리, 진보와 진보끼리는 풀어야 할 문제들을 놓고 다른 종교들과 함께 할 때가 많다.





4. 기독교 또는 퀘이커에서 주의할 도가사상의 핵심

도가에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할 수 있는 도(道, Dao)는 유한한 우리 인 간의 생각, 연구, 언어, 느낌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 터 나왔다는 도는 무한히 신비롭고 오묘하다. 모양이 없고 이미지가 없다. 이름도 없고 성질도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적 사유나 추 리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다만 상징으로만 이야기 될 뿐이다. 이미 도라고 말한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이라고 이름한 순간 그것이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결국 부정을 통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존재다. 다 시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함으로 도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그램이 없는 퀘이커에서 예배나 일상생활에서 하는 고요히 함은 불교에서 하 는 참선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은 혼탁해진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방법 이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다. 맘을 깨끗이 하는 것이 첫째 길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상태로 접어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 여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초월한 궁극의 실재로서의 무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한다. 내면의 세계를 직관하므로 그 속에 있는 불성을 만나는 일이다. 이것 은 기독교 수행자들이 드린 기도, 즉 마음을 비워 생각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오로지 내맡기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요한 중에 찾고 말씀 을 기다리는 퀘이커의 예배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부정을 통한 새로운 만남을 의미한다.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에 도달하려는 도가의 사상체계는 퀘이커 리즘을 확장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도가의 사상체계를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정리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가 있다고 본다. 관계 또는 사회윤리의 실천으로서의 무위, 박(樸; 소박, 단순), 도 그리 고 근본으로 돌아감을 간단히 살펴본다.

도덕경을 읽을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 위로감은 무엇일까? 거기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 지극한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진실되게 하면 다 이룬 것이 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다 시 말하면 사람이 도달해야 할 고정된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능력 상황 처지에 따른 진실된 과정을 중요하게 본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와 청장년과 노인이 도달 할 기준을 일정하게 설정할 수가 없다. 각자 그들에게는 각각 다른 기준이 제시된다. 다 양한 기준은 곧 다양한 사람들의 그들 나름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도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도가의 신비체험은 황홀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중립적이며 불확실하다. 그래서 믿음 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직접 체험에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체험 이란 단순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삶의 신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 히 도가철학을 원칙과 역동적 힘과 행위 또는 삶의 실천자세를 나누어 생각하여 본다. 우선 도(道, Dao)에 대한 이해다. 도는 궁극적 절대실재로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다. 자애롭고 생산하는 실재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이미지를 그릴 수 없는 무의 존재다. 부정으로서만 설명이 되는 없음의 존재다.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보아도 볼 수 없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그냥 작용만 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원천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까 맣고 까만 카오스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주 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꼭 설명이 필요하다면 텅 비어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깊은 골짜기, 가장 낮은 넓고 깊은 바다, 어머니 또는 낮은 곳으로만 흘러드는 물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계시성과 구원성을 가진다. 그래서 영생의 개념을 가진다. 구원과 영생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도는 어떤 특정한 상층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도의 나타남과 실현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 지만 언제나 일상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로고스이면서 길이다. 길은 곧 길을 가는 것이

다. 원칙과 삶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 원칙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것은 상대성과 평등성이다. 균형을 잡기 위한 작용은 언제나 상대세계를 이용하면서 그것을 넘는 절대 적 평등성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귀함이나 천함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빠르 고 느림이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도(道)가 작용하거나 인간들이 그 도를 따라 올바르게 활동하고 생활하는 자세

는 바로 무위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앞뒤의 문맥이나 흐름을 보면 ‘하지 않음으로 함’이란 모순스런 해석이 된다. 도는 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그릇이나 연못에 물이 차면 넘쳐흐르듯 이, 길이 기울면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하면 새싹이 돋아나 듯이, 더위가 극에 달하면 차차 기온이 내려가고, 추위가 극에 달하면 기온이 올라가듯 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억지로 인간의 힘을 더하여 작용하지 않게 하 는 일이다. 이것은 때를 기다리는 일이요, 기다릴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지나치 게 문명과 제도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규제하거나 이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위는 도덕과 예법과 형식을 떠나는 삶을 추구한다. 아나키스트적 삶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드럽고, 자비롭고, 겸손하며, 약하고 비우는 삶의 자세는 무위의 한 가 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다툼과 폭력의 사회양상이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모순스런 용어, 즉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러한 삶은 원초적 상태, 즉 박(樸, natural disposition)으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박의 상태는 쉽게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소박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물이 들여지지 않은 상태, 타고난 그 모습 그대로의 상태, 영아와 같은 상태, 뿌리로 돌아간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다 섯 가지 소리는 귀를 어둡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을 더럽힌다. 이러한 꾸밈들은 사 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여 탐심에 가득한 삶으로 이끈다. 그것이 잘못된 문명과 삶을 유 발하는 시작이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언제나 투박하지만 갈고 닦이지 않은 원시상태를 희구한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생명본질인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이미지로 표시하고 설명해보자. 도가의 신비주의와 궤이커 신비주

의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에 대한 설명을 위의 이미지

를 통하여 할 수 있다. 퀘이커를 상징하는 Q자는 퀘이커의 믿음과 실천을 의미한다. Q글 자의 O부분은 믿음, 원칙을 의미한다면 ~는 생활실천을 의미한다. Q자 중 O에 해당하 는 것은 신, 퀘이커식 표현으로는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면의 스승을 의미한다. 그 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 Tao)와 같다. 이것이 어떻게 생활에 작용하는가? 퀘이커들 은 기다리고 찾는다. 그 행위는 일상이나 예배시간이나 깊은 침묵으로 연결된다. 고요히 함으로 말씀을 기다리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어떤 행동이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을 도가식으로 말하면 무위(Wuwei; 無爲)다. 하지않음의 함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로 하면 성령이 내려질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신, 내면의 빛, 또는 도에 다다르는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때 활동이 일어난다. 이 활 동이 작동하는 방법은 단순성, 단순함이다. 그것을 도가에서는 박(樸; Po´)이라고 한다. 박은 전혀 작업을 하지 않은, 깎지 않은 그냥 통나무다. 그것을 의역한다면 단순함이다. 순수함이다. 있는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 이다. 그러니까 도가 일상생활에서 실현되고 실천되려면 무위, 즉 하지않음의 함으로서 도를 체득해야 한다. 그것을 체득한 다음에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어 떤 문화나 교양이나 기교를 섞지 않은, 받은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다. 퀘이커의 삶의 증 언이란 바로 단순함,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퀘이커의 증언이 되는 Peace, Equality, Integrity, Community는 바로 Simplicity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 곧 퀘이커와 도가의 만남의 핵심이면서, 두 체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사상체계와 삶의 체 계는 만난다. 이렇게 볼 때 퀘이커가 동양사상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가 있다. 이렇게 하여 퀘이커가 확장되고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는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되고 자란다. 완성된 교리가 없다. 그것이 살아있는 종교의 핵심이다. 이러 한 종합된 삶을 살고자 한 사람이 함석헌이다. 함석헌이 주장하는 씨의 자세와 삶이 바 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이러한 도가적 사상체계를 어떻게 기독교적 체계와 합 하여 자기의 삶으로 이끌었는가?



5. 함석헌(Ham Sok Hon)의 삶과 사상; 종교적 신비와 일상생활 한국의 초기 퀘이커요 현대사상가인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삶에 대한 간단한 고찰이 필 요하겠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접촉하고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길 은 다양하게 바뀌었다. 처음 장로교인으로 시작하고 성장하였고, 일본에서 유학할 때 우 찌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신앙’을 배우고 상당한 기간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원숙 기에 퀘이커가 되었다. 한국의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향이 크고, 나 자신도 그에게서 받 은 영향이 크다고 믿는다.

“나는 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처 음에는 『기탄잘리』를 읽은 것이 시초가 되어 타고르의 책을 계속해 읽었다. 범신적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신앙하여 가는 데 아무 지장이 되는 것을 느끼지 않고 좋았다. 타고르를 읽다가 간디를 읽게 되었다. (…)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으로 칼라일을 읽었다. 『옷의 철학』은 몇 번 읽었다. 그도 교회에 갇힌 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에서 알게 되어 러스킨을 읽었다. 그도 교회주의는 아니지. 톨스토이는 전부터 읽는데 그는 물론 교회에서 파문을 맞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찌무라 선생도 십자가 신앙을 고조하느니만큼 톨스토이는 참 신앙이 아니라 했지만, 나는 우찌무라 선생을 전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점만은 불복이다. 또 선생의 소개로 쉬바이쩌를 알고 읽게 됐는데 쉬바 이쩌는 결코 정통 신자는 아니다. 오산에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에 동경서 받은 영향으 로 무교회적인 독립 신앙의 입장에서 성경을 원문에 따라 연구해 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줄곧 웰즈(H. G. Wels)의 문화적인 자리에서 보아왔고 과학에 충실하면서 옛 신앙을 건질 수 있는 데까지 건져보자는 고등비평학자의 정신을 따랐다. 그렇게 성경 을 보았다. 역사에서는, 그 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는 없어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 그 결과 근본에서 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 실적인 면에서 어느 부분의 진리를 가진 것으로 단정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울 감 옥에 있는 동안 불교 경전을 조금 읽었다. (…)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 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 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 피난 중에 해를 두고 이름만 듣고 보지 못한 『바가밧 기타』를 우연히 헌책집에서 발견했을 때 기쁘던 생각,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 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점점 껍질 이 좀 떨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 이렇게 오는 동안 역사적 예수를 믿느냐 하는 것, 속죄는 어떻게 해서 되느냐 하는 것, 하나님은 정말 인격신이냐 하는 것,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는 무어냐 하는 의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 각이다. (…)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생각은 켸켸묵은 생각이다. 허공에 길이 어디 따로 있을까? 끝없이 나아감, 한없이 올라감이 곧 길이지. 상대적인 존재인 이상 어차피 어느 한 길을 갈 터이요, 그것은 무한한 길의 한 길밖에 아니 될 것이다. 나는 내 가는 길을 갈 뿐이지, 그 자체를 규정할 자격은 없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람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1] 이런 선언 뒤에 그는 자기의 독자적 신앙노선을 걷는다.

무교회와 헤어지는 데는 우선 자신보다는 인생 전체를 보자는 것, 앞에 올 것을 보자

는 것, 무엇에 들어붙지 말고 자유하자는 것,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되어 보자는 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니 나만이 아버지 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진리의 산에 오르는 길은 매우 많은 것이 눈에 보였다. 걷는 그 자신에겐 이 길 외엔 딴 길이 없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그 길만이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많은 사람 이 얼마든지 기어오르는 길이 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이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이다.(9, 예: 314) 상대의 세계에 있는 ‘종교’, 기독교는 이제 그에게 여러 종교 중의 한 종교일 뿐이다. 그러니깐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라는 것은 상대계의 좁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겸손해야 한다. 개별종교는 하느님을 담을 만큼 크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를 삼고, 사도를 뽑은 것은 최소 한의 껍질을 가지는 상징행위였다. 그래서 함석헌도 가능한 한 상징으로 시작된 ‘엉터리’ 를 붙잡지 말고 자유의 영으로 살자는 것이었다.(9, 예: 315)

그래서 그에게 참 길은 너도 나도 기독교도도 이교도도 다 같이 더듬어가는 길이다. 나만이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은 동물희생을 했지만, 이제 네 신조희생을 해야 할 것”(9, 예; 317)이라는 것이다. 정통이냐 미신이냐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만 알 뿐이다. 획일이 아니라 내 소리를 내자는 것이 참찾아 나가는 길이다.(9, 예;318) 나만을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믿고 세계가 구원되어야 한다.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해 믿는 믿음이 정말 구원하는 믿음이다. 나(진리)는 지나간 모든 인류 속에 있고, 장차 올 인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멸망할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9, 예; 318-9) 만인 구원론이다.

함석헌은 새시대에 맞는 종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지금의 종교들은 새 시대에 맞 지 않는 낡은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로: 1) 기독교 교리의 완성, 2) 점점 제도적으로 되 어 가는 점, 3) 공세적이 되지 못하고 수세적이라는 점, 4) 점점 더 피안적이 되어가는 점, 5) 내분이 심하다는 것이 바로 새 종교를 필요로 하는 징표라는 것이다.(3, 새종: 221-222) 낡은 것은 새 것을 예견하고 주문한다. 썩음이 지극하거나 충격이 강력할 때 새로운 흐름은 솟아오른다.

이 시대가 새로운 종교를 낳을 ‘그때’가 멀지 않다는 표시의 두서너 가지 징표가 있다.

1) 현대의 전쟁의 성질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2) 원자학의 발달이다. 3) 세계관 문제다. 4) 생명공학의 발달이요, 5) 전 세계가 하나의 연결망 속에 있다는 점이다.(3, 새 종: 223-228)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게 될 새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그 새 종교의 모습을 그려보면 대강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 한다. 모습을 그러보는 것

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맘에서 새 종교는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얼굴의 테두리를 말한다면 둥글 것이다. 하나란 말이다. (....) 모든 종교는 하나다 하는 것을 거 부하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할 것이다. (....) 세계를 온통 한 집안으로 만드는 말씀을 주실 것이다. (....) 앞으로 세계는 하나 될 터이요, 그것을 위해서 한 종교가 있을 것이다.” 2) “그 담 그 얼굴의 빛깔을 말하면 무색일 것이다. 더 합리적이 되어간단 말이다. (....) 이 이성의 문제는 과학에 대한 문제다. (....) 과학도 종교도 다 생명의 자라가는 일면인데 이 날까지 반대방향에서 서로 욕을 하며 파 들어간 셈이다. (....) 이기고 지고의 감정에 붙잡 혀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간다. 과학이 이긴 것도 종교가 진 것도 아니다. 영원무 한의 세계에 들어갈 때까지의 종교요 과학이지, 들어가면 이도 아니요, 저도 아니다.” 3) “이것은 인간관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다. (....)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자연세계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제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데 가서 맺힌다. (....) 미래의 종교는 이 지친 인생을 다시 일으키는 종교여야 할 터인데, 그렇기 위하여서는 그 분열된 인격을 재통일 하는 새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뚫려 비친다고 하였다. 육이 영의 거침이 되는 것도 아니요, 영이 육을 배척하는 것도 아닌 인간이다.”(3, 새종: 229-235) “미래의 종교는 인격의 종교, 논리의 종교기 때문에 맘의 종교요, 맘의 종교기 때문에 깨달음의 종교다.”(3, 새종: 239) 그것은 언제나 ‘시재(時在, now-here)’, 이 지금-여기에 산다.(3, 말 씀: 143) 지금-여기가 바로 현실이다. “종교는 현실을 잊어버림이 아니다. 현실을 건지는 것이다. 현실을 건지기 위해 가장 작은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5) 거대조직 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직과 형식이 필요할 뿐이다. 미래의 종교는 시재의 종교이기에 지금-여기를 놓고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없고, 회개가 될 수도 없다. 잠 꼬대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6) 물론 목적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오르잠이 종교의 길이다. 그러나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없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이다’ 한 것은 바로 시재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3, 말씀: 146)

그래서 현실의 종교라면 현실을 사는 민중, 밑을 중하게 여긴다.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오,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악과 싸우 지 않고 선한 영이 될 수 없는 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죄악은 곧 현실적 사실, 현실은 곧 죄악적 존재, 죄악은 사회적 현상인 것이므로,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 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 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우리 종교는 현실적 과학적이어야 한다.”(3, 말씀:

146-7)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과 싸울 것인가?

싸울 목표는 둘이다.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

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민중이 하나님의 발이라 하는 말 은 민중은 보이는 전체란 말이다. (....) 발을 씻음은 민중을 씻음이다. 절대 거룩한 하나 님, 그에게는 문제가 있을 것 없고, 더러워진 발인 민중을 깨끗이 하면 된다. 그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민중이다. 작지만 크다. 작다는 것은 낮단 말이다. 하늘에 비하면 말할 수 없 이 낮지만 땅에서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교회요, 나라요, 문화요, 세계요, 그것은 다 이 밑바닥 위에 세운 건축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7-8) 이 민중, 이 씨을 일으키는 하나되는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9) 그래서 그는 이미 퀘이커 를 만나기 이전에 퀘이커가 돼 있었고, 그래서 만나서 서로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뿐 이다.



6. 항상 자라는 종교와 인생; 절대구원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뜻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기독교국가나 기독 교사회를 만드는 것이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민족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 수하는데 그 책임을 맡겨 준 것이라고 판단한다. 불교가 못한 것 유교에게, 그것이 못한 것 기독교에게 책임을 맡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기독교가 다하지 못할 때는 다 른 것에게 그 자리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목적이 아 니라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수단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단순히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선택한 것과는 다르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 앞 에 평등하다. 다만 그가 노는 역할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는 선생에게서 해방되고, 남의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고, 자기 종교를 가지고 싶었다. 즉 ‘내 생각, 내 믿음’을 가지기에 맘을 모았다. 이렇게 되어 그는 서대문감옥에 있는 동안 크게 달라졌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 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 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여기에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 까지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 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

야 한다는 것이다.”(1, 뜻: 17-18) “성한 혼에 모든 종교는 다 하나님 말씀”(죽, 열: 280)인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의 입’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다.

오직 제 종교만을 가지자는 한 사람의 노력에서 세상의 구원을 본다. ‘제 종교’란 하

느님과 맞대결하는 종교, 그래서 신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 즉 중간자 없이 하느님과 마주 서는 한 신자만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대신 시키지 않는 다. 누구를 대신 내세우지도 않고 누구의 대신 노릇을 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 는 인격, 그것이 그리스도다.”(죽, 열: 285) 하느님 앞에 직접 서고자 하는 그는 기독교인 으로서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고(끝: 56),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진리가 있다면 그 것은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는 간디를 좋아하였다.(끝: 62) 동 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궁극적 긍정인 영원한 긍정에 도달한다는 칼라일 을 통하여 절대긍정주의자가 된다.(끝: 58)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네가 이제 알아서 살다 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해 봐’ 하고 하느님이 준 자유를 사랑한다.(끝: 68) 이 렇게 그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 자유하는 개인은 독 불장군이 아니라, 전체를 나타내는 개인이다. 그래서 그러한 개인과 전체의 융합이 중요 하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바로 개인의 삶 속에서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나 타낸다.(끝: 역, 150)

하나라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 음 것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람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걸 받 아가지고 베드로와 바울이 ‘머리는 예수요, 우리는 다 몸이다’ 라고 말한다. 머리는 제일 높고 몸은 낮다는 것이 아니고, ‘우린 다 하나다’ 하는 걸 말하는 거다.”(끝: 고, 192-3) 개인과 전체는 함석헌에게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 개인 속에 다른 개인이 들어 있고, 다른 개인 속에 들어있는 내가 전체를 이룬다. 개인은 전체의 표현이면서 전체는 개개인 을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역동성이다. 개인이면서 전체, 전체를 중심에 두면서 개인을 자 유롭게 하는 영성공동체를 함석헌은 새로운 종교의 모습으로 본다. 그것을 그는 퀘이커 에서 느낀다.

가능하다면 평화주의자 예수의 삶을 따르자는 것이다.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퀘이커의 성경읽기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 투신한다.”(3, 퀘: 154) 그런 퀘이 커는 동양사상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언제나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특히 노장사상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수밖에 없다. 양심을 때리는

데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내 몸으로 폭탄이 되는 거다. 특히 평화주의자의 구령은 ‘자 기희생’이다. 죽자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정성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이 역

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3, 퀘: 165-6)

타종교와 대화를 좋게 보고, 노장사상이나 불교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기를 계시한다 고 본다. 함석헌은 타골과 간디를 읽으면서 보편주의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꼭 기독교 에만 진리가 있다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 종교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 다. 적어도 도덕적인 종교라면 진리는 하나이고 같은 거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즉 종

교의 본질은 하나라는 입장이다.(3, 퀘: 155)

그는 언제부터 노장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리스도교와 같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 두 사이에 충돌은 없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가까 워 오면서부터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간의 사회 살림이 근본 에서부터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계가 달라지 는 정도가 아니라 생활방식과 사회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달 라지면 어떻게 달라질까?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 종교는 새로운 문명이 나오려고 할 때 앞장을 서서 지도하려고 할까? 문명에 앞장서서 인류를 건진다고 하는 성현들이 말한 것처럼, 과연 기존 종교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40세 때 그 대답을 부정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종교는 못할 거라고 보았다. 종교 들이 정치에 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대전이란 것이, 지금까지 있던 대국주의, 대 국가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정부주의, 지배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관 이 새로워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민중을 위해 있는 국가라야지 민중이 국가를 위해 서 존재해야 된다는 그따위 국가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뜻이라면 이를 위해서 동양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3, 퀘: 156-7)

그렇게 하여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불교의 해탈도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 으로 본다. 기독교에서는 죄,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무지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으로서 하 는 자리는 한 자리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그들 사이에는 충돌될 요소가 아무 것도 없

다. 아마 기독교에서 찾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자리를 노자 장자가 말한다면 도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지 말고, 실제로 믿는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느냐고 본다.(3, 퀘: 158)

함석헌은 내세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부정한다거나 긍정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궁극 목적은 사람이 영원 무한에 도달하는 거라고 본다. 죽어가지고 부 활한다는 것보다 ‘예수는 부활해 가지고 죽었다’고 함석헌은 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생 명을 찾는 것이다. 즉 부활이란 나긴 물질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으로 났지만 생명이 인 간에게 와서는 소위 정신적이라고 하는 데까지 갔다. 아직도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 나지 못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죽은 후에 무슨 형식으로 되겠는지 그 때 가봐야 알 것이 니까 모르지만, 믿음으로 인해서 그 어느 세계에 올라갈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수 와 소크라테스 같은 이가 나왔다는 것은 정신계가 있다는 증거다.(3, 퀘: 159-160) 그러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세라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시간적으로 연장해서 죽은 후에도 영원히 호화로운 생활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높은 데 올라가는 것, 그것이 하늘나 라 가는 것이다.(3, 퀘: 160) 그래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는 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채우는 것을 통하여 진리의 자리에 선다.(3, 퀘: 169) 이것에서 기독교와 선이 만 나게 된다.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갔더니 노장사상을 모르고서는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 더군. (…) 하나님이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는 그것 얼마나 높은 사상이야요? (…) 이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원의 세계입니다. 이 우주의 본의가 무엇인고 하니, 온 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이나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이지요. 왜 이처럼 다원적 이냐는 샤르뎅이 다 지적했지만, 우주의 근본원리가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여럿 입니다. (....) 이 단계에서 인류가 생각할 것은 다원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거요. 생명의 목표가 그런 거니까.”(3, 퀘: 172) 다원, 전체, 하나, 동양과 서양, 기독교, 불교, 선, 노장 따위를 구별하는 것을 그 는 싫어한다. 관념으로는 나눔이 될는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 속에 포섭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종교는 완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종교는 완성된 것이 없다. 계속하여 변하고 흐르며 새롭게 달라진다. 그래서 과정의 종교, 길 위에 있는 믿음이요 자라나는 것만이 있다. 그것은 생 활종교라야 그 길을 따를 수 있다. 신도 미완성이요 자라는 것으로 보는 그에게 현실종 교와 믿음이 완성되어 나타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되어갈 뿐이다.



7. 함석헌의 기독교이해와 다른 사상체계 함석헌의 기독교이해는 동양사상과 긴 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예수 이해 와 동양철학의 관계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정 리하고 주장한 씨이란 것은 ‘맨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맨사람의 좋은 예가 예수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 예수에게서 맨사람은 ‘어린아이’ 였다. 어린아이가 되는 그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태어남은 어머 니 탯집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다시남이 아니다. 꼭같이 육으로 낳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남은 영으 로 낳는 것이다. 다시남은 곧 그렇게 낳는 것을 통하여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으로도 다시 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다시 나고, 모 든 것에서 다시 낳는 것이 곧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도 함께 말하였다. 특히 노장사상에서는 동심론(童心Q)에서 이것에 깊이 관여하였다.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그는 현덕(玄德)한 사람이다. 노자 28장을 보자.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知其雄 受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上德不離 復歸於嬰兒). 수컷(하늘, 양)을 알고 암컷(땅, 음)을 수호하면 천하의 생명수 인 골짜기의 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덕인 자연을 잃지 않고, 영아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함덕지후 비어적자(含德之厚 比於赤子). 덕을 돈후하게 품게 되면 마치 영아와 같이 된다. 벌이나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나 새들도 덤비거나 쪼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맨사람이다. 혹시 함석헌은 씨을 이 지경의 사람들로 본 것일까?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어린아이의 손아귀와 같이 단단하게 잡고, 부드럽기 한이 없어서 물컹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함유하는 영아. 부드럽고 약함으로 주변을 다 정리하는 어린아이. 동심(童心)은 진심(眞心)이요, 진심은 최초부터 있었던 맘, 곧 흠이 없는 동심 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그 진심을 잃으면 참 사람, 즉 맨사람으로서의 씨을 잃는 것이 다. 이것이 씨의 맘이지 않을까? 함석헌은 기독교에서나 노자가 추구하는 진실된 사람 을 그것으로 본 듯하다. 조금 더 노장사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살펴보자. 함석헌은 노장이해, 아니 노장의 삶의 자세를 이렇게 이해했다.

“노자ㆍ장자는 한마디로 이 현상세계를 초월해 살자는 것이다. 초월한다는 말은 결코 내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현상계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양으로 꿈도 아니요, 허망한 것도 아니요, 내버려야 하는 악한 것도 아니다. 노자ㆍ장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지도 않았다. 이 현상의 세계는, 그 안에 태어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피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런 것,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이므로 필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2]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 태도가 문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생각하므로 알게 되고(知), 좋고 나쁘고가 판가름되며(情), 그에 따라서 선택하고 버리고가 나타난다(意). “그럴 때 이 생각하는 나와 나를 둘러싸는 세계 또는 그 안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생 각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상대에서 절대를 보아 절대에서 상대가 나왔음을 안다. 그렇게 함이 현실을 초월함이 다. 절대도 영원 무한, 상대도 영원 무한, 상대에 살면서 절대에 하나 되기 때문에 ‘현지 우현’(玄之又玄)이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 속에서 그대로 절대와 하나 되기 때문 에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다. 노자ㆍ장자의 삶은 도에서 시작되고 도에서 끝난다.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이다.”[3]

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것은 원인 없는 원인이다. 스스로 그런 것, 곧 자 연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음, 곧 무라고 하기도 한다.”[4] 그 도를 깨달으려면 어 떻게 하면 될까? 노자는 지적으로는 허무(虛無), 적막(寂寞), 염담(염淡)을 강조했고, 실 행으로는 무위(無爲), 유약(柔弱), 부쟁(不爭), 복귀(復歸)를 말했다.[5]

이렇게 주장한 노자를 평화주의자로 이해한다. “노자처럼 시종일관 순수한 평화주의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6] 노자는 무위 로 하자는 것, 정치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현한 이가 장자다. 무치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삶의 원리에 적용된다. 즉 모든 생 명존중과 생명의 자기통치능력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장자는 가난했지만, 벼슬을 싫어했고, 제삿집 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구

는 돼지가 좋다고 했다. 높은 관직을 주어 모시려는 왕이 보낸 사자에게 그것을 강조해 말한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포악한 지배자의 착취 아래 사는 씨을 건져주기 위하여 불같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임금, 학자, 호걸, 영웅이라는 존재들이 그의 붓끝에서는 한갓 지푸라기도 되지 못해 한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의 삶과도 통한다. 함 석헌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그의 유명한 논설 ‘들사람 얼’(야인정신)에서 잘 표현한다. 이러한 정신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아와 아모스 같은 선지자의 삶에서 그 모 범을 본다. 함석헌의 국가주의비판은 이러한 노ㆍ장의 무치의 정치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에서 따온 것임이 분명하다. 현실세계에 살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서 새로운 참의 세계와 나라를 꿈꾸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들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8 퀘이커로서의 나의 삶 나는 퀘이커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믿음과 실천을 꼭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아니 하나로 보는 퀘이커로서 그러한 전통을 내 자신이 지킬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가 온다. 특히 옛날에 비하여 사치스럽게 살 수밖 에 없는 오늘과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과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 무엇 일까? 태어남 자체가 환경파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과연 자연 생태계를 파괴 하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일까? 처음부터 끝까지가 오로지 경쟁과 다툼을 부추기는 삶의 패턴에서 함께 살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사회에서 과연 자연스럽고 바람과 같은 영의 인도를 받아서 살 수 있을까? 점점 국가주 의가 굳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류는 하나의 생명체계 속에 있다는 믿음과 철학을 어 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맹세를 하지 않고, 서약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아왔던 퀘이 커의 삶을 모든 것이 서류와 사인으로 이루어지는 디지털화한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양 심을 주장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는 내 숨이 막히는 듯하다. 그 러나 그러한 답답하고 꽉 막힌 듯한 현실에서 작은 활로를 찾아 나가는 것이 또 퀘이커 가 찾아나갈 길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느낌으로 잡는 실천 가능한 좁 은 길을 찾는 것이 계시를 기다리는 삶이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이 되지 않 을까? 그러니까 신비함이 없는 듯한 삶에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날카로운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자세로 내 삶을 이끌고 싶다.

한반도는 한 민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와 두 나라로 갈 라져서 다투는 현실 속에 있다. 나는 전 인류는 민족과 개별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철 학과 믿음 속에서 현상태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에 깊 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내 개인이 먼저 평화가 되고, 화평한 맘으로 살아갈 것을 노력할 일이다. 그것과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한 삶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하여 일단 나는 내 얼굴과 맘 속에서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함을 실천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용하는 훈련을 쌓아야 함과 동시에 획일화하려는 전통과 사회흐름과 대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캠페인을 벌이려 한다. 그것은 좌우의 이 념이나 노선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전쟁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진 늙은이들과 함께 전 국토를 순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던 지역을 찾아서 평화의 기운 을 불어 넣는 일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동시에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들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순례의 길을 걷고자 한다.

평화의 기운은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창의적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상태로

바꾸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자신이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활동 가로 참여하면서 직접 경험한 결과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돌보고, 모든 문제를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과 빠르게 반응하고 행동하기 전에 깊게 생각하여야 하고, 최선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 생활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훈련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것은 내 자 신이 AVP훈련가로 여러 번에 걸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확신하게 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워크숍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중요한 생의 과제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일반 시민과 비폭력 평화사상에 대한 연구와 강좌와 포럼을 통한 평화분위기 의 확산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적대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신뢰가 없는 자도 그것이 있 는 자처럼 신뢰하는 부드럽고 유연한 삶을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드러움 이 강력함을 포섭하고, 유연함이 경직된 것을 녹인다는 도가철학의 일상화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특수한 사람만이 그러한 훈련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반 사람이 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내면의 빛이 있다는 것, 내면의 스승이 있다는 것, 불성을 가지며 도와 접촉 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신비체 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는 곧 지극한 정상생활이다.

그러나 현대생활, 특히 문명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일상의 쉼이 부족하고 깊은 숨쉼이 부족하다. 그래서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분위기에 끌려가면서 힘 들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느 철학자가 분석했듯이 현대사회는 피로사회다. 나 에게는 피로를 느끼는 그들을 이끌고 평안한 곳으로 안내할 능력과 비전이 없지만, 그분 들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물론 나는 특별 상담사도 아니고, 갈등해결사도 아니며, 그와 같은 훈련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방황하는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은 맘이 참으로 많다. 그것이 내 나름으로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고 느낀다. 그런 접촉, 만 남은 일대일의 개별만남도 가능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통한 소그룹으로 만날 수도 있 다고 확신한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 즉 모든 것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옷도 다르며, 생활하는 모습도 다르다. 그 다름은 하나의 큰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서 종국 에는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고 있 는 지역의 시냇물은 가까운 산골짝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그것은 곧 내 농토와 내 집의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제공한다. 나는 그 물 때문에 산다. 그러나 그 물은 흐르고 흘러 서 거대한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한없이 넓지만 하나의 바다다. 거기에서 하나가 된다. 결국 모든 실개천과 강을 거쳐서 바다로 흘러든 물은 한 물로 친하게 지낸다. 모든 물은 곧 친구들이다. 이런 비유를 우리의 논의인 종교와 생활, 신앙과 실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핵심들은 각각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출발하고 다르게 실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궁극은 하나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결 국 친구다.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민속종교가 곧 한 물에서 친한 친구로 살되 자기의 고유한 전통과 삶의 길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것이 내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리의 종류는 각종 분야별로 다양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3 가지의 참여를 통하여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다.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Quaker 그리고 Amnesty International의 적극활동가로서 국경 없는 삶으로 다리를 놓은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다른 문화 종교, 사람(인종), 문명, 관습 따위를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 고, 그 속에서 알짬을 찾아서 새롭게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열린 자세에서 항 상 찾아가는 자의 삶을 이끄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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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in: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1983, 한길사. 195-7

[2] 함석헌: 함석헌 저작집 24, 『씨의 옛글 풀이』, 한길사 2009, 34쪽)

[3] 위의 책, 36쪽

[4] 위의 책, 37쪽

[5] 위의 책, 37쪽

[6] 위의 책, 39쪽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 1303 나장수 제안,철학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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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장수   제안,철학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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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지난주(2월24일) 모임이후 마음이 무척 불편하였습니다.
사안표명에 무례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때문 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심정은 안 좋은 방향으로의 속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으로는 안 되게끔 빠르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사안에 차근히 의견개진을 하였어야 하였고, 000 선생님의 열정적인 참여와, 이끌어 주시는 점에 경의와 감사함은, 그 이전에 이미 제 마음속에 간직되어있음을 밝혀드리며, 이 자리를 빌어서 사죄드립니다.

저는 모임 집에 당도하여 예배하기 전에는 본 모임 집을 퀘이커 성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소통의 시간공간이, 시작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담소/대화/인사를 생략하는 면을, 무례나 무관심으로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여 제가 염려스러워서 드리는 말씀인데 내면에 외국 특히 유럽 문화 등이 가슴속 은연중에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면 재고해 주시기 희망합니다.

그들 앞이거나 그들을 향함에는 성의나 존중에 의미를 가짐은 좋으나 주변인을 무시하고 있으면서 아무런 깨달음을 가져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점은 없는지 성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준이 안 서신다면 혹 함 선생님을 생각함과 그 이외인 에게는 현격한 차이를 가지는 점이, 주변인에게는 기본적인 예의범절 이하로 함부로 대함의 자연스러움은 없는지 생각하시길 부탁드립니다.

함 선생님은 본인을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셔서 본인 가슴에 자리하고 계신지 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생각하시는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넓으시어, 어떠한 고난에도 진리를 탐하시고 투쟁하신 귀착점이, 님이 함부로 여기는 보잘것없고 무시하고 간과함의 무지를 깨치고자 하시는 점은 없는지 고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이 현실을 보는 느낌은 박정희 대통령당시보다 지금의 소위 나라의 머슴선봉에서 머슴역할을 맡기고, 맡으려 하는 인물을 보면, 도대체가 이렇게 타락의 속도가 빠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나라가 제 나라인데 나라에다 저축 할 생각은 안하고 개인 사리사욕을 저렇게 챙길 수 있을까? 저렇게 에덴동산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해야하나? 저 스스로 오물로 만들어져서 에덴동산에 투척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모임 등 이라도 저 오물로 타락하는 이들이 존재함 속에서 얼마나 값이 있는 보석인지 자각을 넘어, 진 죽탕인 것처럼 인 우리역사 안에 아름다운 순항의 선봉인 우리가 “인류구원방안 철학토론회”를 하자는 제안을 다시 합니다.

수,당에도 밀리지 않던 웅혼한 기상이 있었습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알고 궁극의 순수한 가치관을 믿던 민족이 있었습니다.
대륙을 누비며 온정을 베푼 인류가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아끼던 민족이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가족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아침을 깨우는 민족 동방이라 불렀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희망의 활짝 핀 꽃을 보면서....”

2013. 03. 03. 나장수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퀘이커 서울모임, 그 자리매김의 진통> 김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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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입니다.

권술용
“속에 계신 그리스도”, 침묵 통한 발견과 실천(펌)



한국교회의 아웃사이더 2

“속에 계신 그리스도”, 침묵 통한 발견과 실천

퀘이커(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선생님, 세례는 받으셨습니까?”
영국의 볼테르가 퀘이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영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퀘이커 교도 한 사람을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 교도는 “아니오. 나의 친우들도 모두 받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했고, 볼테르는 “저런,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군요!”라고 은근히 말했다. 그러나 그 교도는 부드럽게, “우리들은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좋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만 기독교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소금을 약간 뿌리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괘씸할 수가! 불경스런 말에 화가 난 볼테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자 그는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았어요. 우리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라고.
요한의 제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의 직제나 교리에 대한 추종자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고자 하는 무리들. 이들이 바로 퀘이커 교도이며 이것이 퀘이커의 핵심 원리다. 종교의 궁극적인 도(道)를 더욱 가리곤 하는 제도나 형식주의를 버리고 성령과의 내밀한 교류 속에서 평화와 공존의 삶을 실현하겠다는 것.
17세기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한 흐름으로 태동하게 된 이 공동체는 현재 미국과 영국 등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종교기구로 자리매김해 있으며, 특히 전쟁반대, 전시 또는 전후 구제사업, 사형제도 폐지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는 평화운동단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사회뿐 아니라 기독교계 내에서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퀘이커는 이미 반세기 전인 한국전쟁 직후에 구제활동을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땅에 뿌리를 내려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퀘이커(종교친우회) 서울모임. 회원 약 10명, 일반 참석자 약 10명으로 구성된 이 공동체는 현재 신촌에 있는 ‘퀘이커의 집’에서 매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 곳은 십자가 종탑도, 강대상이나 피아노 한 대도 없는 단촐한 곳이었다.


침묵으로 드리는 예배
지난 18일(日) 오전 11시경. 10평 남짓한 공간에 일인용 의자만이 빙 둘러져 있다. 예배시간이 가까워오자 한두 사람씩 오는 순서대로 빈자리를 채우고 앉는다.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오는 사람 사이에 어수선한 인사도 없고, 각자 자리에 앉아 차분히 눈을 감는다. 11시가 넘었지만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사회자도 목사도 없다. 더러는 바닥에 허리를 펴고 앉고 더러는 의자에 앉아 손을 모은 채, 느긋이 침묵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누군가 말을 할 법도 한데, 좀이 쑤시는 침묵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뒷산에 눈 녹는 소리와 여린 새의 소리가 크게 들린다. 새소리가 들리자 옆 사람 들숨날숨 소리도 들리고, 마음이 누그러진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무렵, 예배가 끝났다. 꼬박 한 시간 동안, 찬송가 자락이나 성경 봉독도 없이 예배가 진행된 것이다. 이 시간 동안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말문을 연 사람들 사이에, 해비타트 집짓기 운동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얘기, 창밖의 흰 눈과 예배당 화분에 피어 있는 흰 꽃의 색이 어쩌면 저렇게 다르냐는 얘기 등 사사로운 삶의 단상들이 나눠졌다. 그리고 이 날의 모임은 <멈추지 않는 대량학살―대인지뢰>라는 다큐멘터리 자료 시청으로 이어졌고, 전쟁과 맞닿아 있는 한반도의 아픔, 평화실천에 대한 경각심을 공감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성경 한 줄 읽지 않았지만, 예수가 어느 때보다도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모든 개인의 내면에 ‘진리’가 있다
침묵예배. 이것이 이들의 일관된 예배 방식이다. 단순히 명상으로서의 침묵이 아니라, 모든 겉치레를 버리고 전심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기 위한 침묵. 그러나 예배 도중 누구라도 자신이 받은 감동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말하기도 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기도 한다. 말을 나누든 나누지 않든 이들의 예배는 늘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전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침묵을 한다고 해서 과연 성령의 임재가 가능한 것일까.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배에 길들여진 사람은 이런 의구심을 품어볼 만 하다. 평신도로서, 성경 한 줄 읽고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야 그나마 ‘감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러나 모든 개인의 내면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 퀘이커의 신학은 제도나 교리적인 의식에 구도(求道)방법을 얽어맬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것은 퀘이커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로부터 비롯된 신학으로, ‘속의 빛’이라고 함축할 수 있다. 속의 빛이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빛의 원천인데, 곧 ‘하나님’과 동일한 의미다. 폭스는 “이 빛만이 어떤 사람이나 책이나 문서 따위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앎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고 말한다. 즉 각자의 속에 빛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외부에 우주적으로 존재하는 더 큰 하나님과 만나게 될 때 진리에 이르게 되고, 각 사람이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성경 또한 하나의 보조자료일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대한 위대한 기록’인 성경은 이미 ‘속의 빛’을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수단일 뿐인 것이다. 서울모임의 회원인 장영호 씨는 “일반 개신교단이 성서중심이라면 퀘이커는 성령중심”이라고 이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빛이 있어서 공동체적인 깊은 침묵을 통해 그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 이것이 퀘이커의 모임에 설교도 없고 성찬도 없고 목사도 없고 리더도 없이, 오직 동등한 공동체로서 함께 성령의 임재를 추구해 나가는 근거다. 그러나 ‘속의 빛’으로부터 시작된 퀘이커의 신학은 단지 신비적인 체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체험’은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의 시작일 뿐이다. 예배를 통한 성령의 체험,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실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 과정인 것이다. 이들의 ‘삶의 실현’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종교에 있어서 이들은 ‘모든 종교의 궁극에는 진리가 있다’는 보편주의적인 입장이다. 종교전쟁이나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배타성을 버리고, 다양함을 인정하는 ‘공존’의 방식 말이다. 이러한 보편주의적인 태도는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시비를 받기도 했지만, 17세기 퀘이커 신학자인 로버트 바클레이(R. Barclay)가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했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퀘이커의 신앙은 보편주의적인 태도 아래 확고하게 서 있다.
또한 이들이 삶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의 형태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사회참여다. 이들은 전적으로 평화를 옹호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1,2차 세계대전 참전 거부로부터 시작해서 노예제도 폐지, 감옥개선, 핵무기 반대운동 등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평화운동을 벌여왔다. 이것은 전쟁반대와 인권운동, 정치적 개혁에까지 걸쳐 있는 폭넓은 사회참여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나서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 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퀘이커 교도였던 함석헌 선생이 처음으로 퀘이커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됐던 경위를 설명하는 글이다.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들의 평화에 대한 엄격한 실천, 그것에 감동받아 퀘이커가 됐던 것이다.


퀘이커 서울모임, 그 자리매김의 진통

미국의 퀘이커 봉사단이 한국전쟁 직후 군산도립병원을 중심으로 구제활동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된 퀘이커는 1960년도 이후 함석헌 선생의 본격적인 퀘이커 가담으로 활기를 띄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스승’이었던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고, 성서와 퀘이커리즘 공부 등 신앙활동을 했다. 또한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참여에 대한 의식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나 1989년 함석헌 선생이 타계하고, 퀘이커 서울모임은 결코 작지 않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글쎄, 스승의 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리더 없는 동등한 공동체를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부딪힘과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큰 스승이 떠난 자리에서 중심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란과 방황으로 침체되기를 10년. 10년 동안 그래도 퀘이커 정신을 붙들고 명맥을 유지해 오던 이들이 다시금 새롭게 모임을 활성화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2000?)

“누군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지만 이제 내부 갈등도 거의 해결되었고, 이제부터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퀘이커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려고 해요. 그리고 ‘평화’와 직결되는 우리나라 통일 문제도 자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겠죠.”

모임의 서기를 맡고 있는 김형렬 씨의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현재 퀘이커리즘에 대한 공부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갖고 있고, 평화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함 선생이 떠난 자리에서, 퀘이커로서의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는 것이다.
50년 역사의 퀘이커 서울모임. 이들은 어쩌면, ‘신앙과 실천의 합일’이라는 퀘이커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 자체가, 영적인 갈구와 끊임없는 자기성찰 속에서 ‘길’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는 어제도 그랬듯이, 지금도 종교로서의 제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예배와 삶의 실현, 그 두 수레바퀴를 공동체 안에서 찾고자 끊임없이 진통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곽성혜 기자 rullu@c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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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6 01:35:24


2020/01/07

알라딘: 15 성소은. 경전 7첩 반상 - 인류 최고 스승 7명이 말하는 삶의 맛

알라딘: [전자책] 경전 7첩 반상
경전 7첩 반상 - 인류 최고 스승 7명이 말하는 삶의 맛
성소은 (지은이)판미동2015-06-09
































8.8
100자평(1)리뷰(16)

제공 파일 : ePub(22.15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248쪽


책소개

다산정약용, 정조이산, 간디, 괴테, 링컨 등 시대를 넘나드는 위대한 인물들이 평생 경전을 옆에 두고 읽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문고전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데 필요하다. 경전은 그러한 인문고전 중 최고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혜를 담아 놓은 책이다. 그곳에는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이 골몰해온 생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답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만큼 ‘경전’은 난해하고 복잡해 섣불리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책으로, 혹은 자신과는 동떨어져 있는 종교 서적으로 여겨져 오기도 했다.

이번에 판미동에서 나온 『경전 7첩 반상』은 인문 고전 중의 고전으로써 독자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경전의 벽을 낮추고,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핵심적인 지혜를 맛깔스럽고 쉽게 정리하였다. 특히 우리가 이 험난한 시대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헤쳐갈 수 있도록 삶의 뿌리가 되어줄 깊고 단단한 명구들을 선별하여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생의 좌표를 재점검하고 안착하게 만드는 ‘지점’을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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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감추어졌던 것이 여러분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묻혀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P. 6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사람이 도를 실천한다 하면서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도를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P. 79~80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헤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눈을 아래로 두고, 두리번거리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각을 억제하여 마음을 기켜라. 번뇌에 휩쓸리지 말고, 번뇌에 불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집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접기
P. 116 “순환은 원점으로의 회귀가 아니에요. 이중 나선의 형상을 떠올려 보세요. 융 심리학은 그런 나선형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는 상승이 아닌 하강을 중요시하죠. ‘성장’보다는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땅 위의 나무는 아름다워요. 잎도 있고, 꽃도 피고, 새가 둥지도 틀고요. 하지만 땅 속은 캄캄합니다. 벌레도 많고, 바위투성이에 공기도 희박하죠. 그래도 뿌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해요. 뿌리가 내려간 만큼 몸통도 자라는 거니까. 그래야 나무는 건강해집니다.” 접기
P. 116~117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귀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탐날 만한 것 보이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다스리게 되면 사람들로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튼튼하게 합니다.
사람들로 지식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영리하다는 자들 함부로 하겠다는 짓도 못하게 합니다.
억지로 하는 함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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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성소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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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일본 릿쿄 대학교 법학과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세계처럼 얽혀 있는 국제관계를 공부했으며, 이후 한일 양국 정부와 국제기구 등에서 공공선을 추구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찾아 순복음교회를 나왔고, 성공회를 지나,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칼끝 같은 가르침에 이끌려 3년간 출가수행을 했다. 이후 ‘나는 누구인가’를 참구하면서 선물처럼 “아하!”를 체험하고 기쁨으로 환속했다. 현재는 인문, 사회, 종교, 과학, 문학, 신화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로 배우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공회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인간사회와 종교 관계를 관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의미 있는 만남을 담은 구도적 고백서 『선방에서 만난 하나님』과 경계 너머의 무한한 가능성을 담아 엮은 『종교 너머, 아하!』(공저)가 있다.
『경전 7첩 반상』은 지금까지 접근하기 어려웠던 두꺼운 세계 경전들을 지혜의 근원으로써 가볍게 맛볼 수 있도록 풀어냈다. 특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이 시대에 꼭 읽어 봐야 할 7가지 경전들을 중심으로 감동적인 경구와 그곳에 함의된 의미를 맛깔스럽게 정리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과거 현인들이 지녔던 소중한 삶의 지혜를 상기시키고 우리에게 인생의 바른 방향과 공부법을 다시금 되짚어 보게 만든다.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www.njn.kr 접기


최근작 : <인문학 특강>,<경전 7첩 반상>,<종교 너머, 아하!> … 총 5종 (모두보기)





흔히 경전이 주는 막연함과 이 책의 의도인 여러 경전을 한 데 보는데서 느끼는 경전간間의 분석이 매우 어려운 문제로 여길 수 있는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경전을 대하는 자세라는 `읽는 틀`을 제공해주며 코칭해 준다.
바람흙별 2016-07-0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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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도마복음


쪽수가 많지 않음에도 내게 읽어나가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었고, 또한 책이 도착하도 전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도마복음과 동경대전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도마복음과 동경대전, 두 경전은 내게 낮선 것들이었다. 성경은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고, 동경대전은 부끄럽게도 관련 도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여 이번 기회에 관련 도서를 구입해 함께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으로 내게 두 가지의 선택이 가능했다. 하나는 본 책을 먼저 읽은 후 초면의 도마복음과 동경대전을 따로이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접하기 전에 이 두 내용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하기로 하고, 먼저 「도마복음」을 읽었다. 이어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신복룡, 선인」을 구입해 「경전 7첩 반상」과 함께 읽었고 아직 끝내지 못했다.



책을 받아 펼치니 추천사가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기독교에서 시작하여 불교에 다가갔고, 나아가 또다른 경전들을 접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서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을 통한 것이라 한다. 따듯한 안방의 아랫목에서 글을 썼다 한들 독자인 내가 알게 무엇이고, 설사 안다 한들 어떠하리.., 그러나 저자는 머리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접했다고 한다.



추천사를 지나면 프롤로그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이런 프롤로그는 처음 읽어보았다. 내 독서의 바닥을 훤히 드러나 보이게 하는,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 담겨있었다. 예리한 날이 가슴을 파고들듯 아프게, 그리고 다시 아름답게 다가온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인문은 고통과 위기에서 피어난 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창조의 원동력이 아닌가. 지금 나의 삶이 위태롭고 아프다면 여태껏 잊고 살았던 ‘나’ 라고 하는 꽃망울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1쪽



나는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 프롤로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더불어 나의 독서가 그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단 말인가... 경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만 저자의 정신에 경도되고 말았다.



7가지의 경전은 하나로 통한다, 바로 깨달음이다. 마치 자신을 낮춘 물이 흘러 큰 바다, 한 곳에 이르듯 말이다. 다만 그 표현이 다를 뿐이다. 깨달음이야말로 경전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하여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 이 자유는 방종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자유이다. 기독교에서의 깨들음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요, 불교에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요가와 도덕경 역시 그러하다. 나를 아는 것이다. 탐욕과 욕망을 버리는 것, 나의 집착과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자유로움이다. 하여 우주에 닿는 것이다. 다만 각각의 경전들은 깨달음으로 가는 안내를 위해 각기 다른 방편을 사용했을 뿐이다.



인간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은 깨달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깨달음이 있어야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만이 필요이상으로 욕망하고 탐욕 한다. 필요이상의 욕망과 탐욕은 나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존재에게 유해하다. 그 다른 존재가, 다른 사람 다른 사회 그리고 다른 동물이든 식물이든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든 환경이든 말이다. 우리 사회가 늘 불균형으로 인해 아프고 병들어가는 이유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준다. ‘스스로 그러함’은 본디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그러함’을 깨닫지 못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탐진치’는 그칠 줄 모르는 탐욕, 끝없이 욕망하는 그 어리석음, 그 탐욕을 이루지 못할 때 오는 노여움이다. 한마디로 탐(貪)은 ‘스스로 그러함’의 대척점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다.



깨달음은 나 자신에게는 물론 나 이외의, 우리 환경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도움이 된다. 중용(中庸)의 표현을 빌자면, 만물을 생육하는(萬物育焉-만물육언) 존재가 되는 상태가 아닐까.



경전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도마복음이었다. 기독교의 경전으로 평소 알고 있던 기독교의 내용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러한 편견은 기독교의 정신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나로 인한 것이었다. 하긴, 성경이 집에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도마복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31쪽, 도마복음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24쪽, 도마복음



내게 도마복음의 가난이란, 탐을 버린 가난으로 이해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을 굶는 것’이다. 저자의 이 말은 인간의 탐욕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의미로 파악된다. 저자의 말대로 하늘나라는 공(空), 비어있는 곳이니 말이다. 탐을 버린 가난은 정신의 풍요를 뜻하며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임을 예수께서는 알려주시지 않았던가... 번뇌를 끊어내는 금강경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목이다. 또한 우파니샤드는, “매일 덜어내며 가는 매 순간의 완성”이라고 가르치고, 도덕경은 “하루하루 없애간다”고 말한다. 도마복음의 가난이란 물질적 빈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의 가르침과 정신의 풍요로움, 깨달음으로 가는 상통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매우 인상적인 또다른 부분은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고 말하는 도마복음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이다 싶은데, 그 말은 ‘네가 곧 부처니라’ 였다. 기독교의 경전이나 불교의 경전은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성이 우리 안에 있으니 깨달으면 곧 우리는 부처가 된다. 도마복음은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다’ 라고. 도마복음은 그 씨앗의 싹이 트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싹이 트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신성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되다니... 내게는 충격적인 도마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기독교와 불교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영원한 상극의 그 어떤 것으로 인식해왔던 것은 크나큰 나의 편견이었음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신에게 닿는 것 178쪽

인간의 본성인 아트만과 우주의 브라만은 하나 179쪽



동경대전은 말한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인여천(思人如天), 사람을 하늘님처럼 섬기라 209쪽



경전들은 인간이 도달 불가능한 그 무엇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두툼한 껍질을 벗어내고 맨 발로 걸어야 할 그 길을 안내하고 있다. 바로 깨달음이다. 당신은 나보다 더 행복하겠지만 나도 작지만 행복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길이 이곳에 있다. 행복은 권리하고 말한다던지 추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마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행복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행복은 본디 나의 것, 스스로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것인데 말이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었던 것을 잃어버린 후 오래도록 그것을 되찾지 못했다. 스스로의 깨달음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경전들은 한입처럼 말한다. 인간 안에 신성이 있고, 네가 곧 부처이고,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고. 이 모두는 우리에게 한결같은 목소리로 깨달음을 전언하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무지개를 보면 닿아보고 싶어 하고. 지평선을 보면 가보고 싶어진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맨 손을 쥐고 있어도 펴보고 싶어 한다고. 이는 인간의 본능이며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탐욕의 원천이기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은 경전의 의미를 전하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산산이 깨트려준다. 그동안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자와 사유(철학)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틀렸다. 문자가 있고 사유가 있다 한들 동물보다 못한 짖을 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은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경전이 있고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인간은 경전을 존중해왔지만 동시에 늘 경전을 배반해왔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은 모두 같은 말이다. 원수마저 사랑하라 했지만 우리는 그 원수를 지독하게도 미워했다. 인지상정이라지만 이것은 깨달음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믿음을 종교라 말한다면 모든 믿음은 종교랄 수 있다. 유일신과 그 교리만을 종교라 한다면 유불도는 종교라 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유대와 기독교는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자 본질은 종교에 관해서가 아니다. 종교를 초월하는, 스스로 그러한 인간의 자아로의 회귀이다. 흔히 말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 경전들을 옭아매기에는 그 말씀이 너무나도 크고 위대하다. 그동안 갇혀있던 경전의 울타리를 걷어낼 때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자주 듣던 말, ‘진리’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그 진리로 가는 방편을 안내하는, 일종의 작은 깨달음을 주는 더없이 귀한 진리의 책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한 발 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경전의 세계로 뛰어들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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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판에서 새로이 살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40쪽, 아래 5줄, “더 큰 나라를 일구는 일깨움의...”에서 ‘나라를’은 ‘나를’의 오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문맥상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2. 저자는 본 책에서 다석 류영모를 6회 이상 언급하고 있다. 29쪽과 115쪽에서는 유영모, 104, 114, 115, 125 쪽에서는 류영모라고 쓰고 있다 (115쪽 상단에 류영모, 하단에 유영모 두 번 등장함). 누군가가 다석께서는 자신의 성을 ‘유’가 아닌 ‘류’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어째 거나 독자로서는 ‘유’이든 ‘류’이든 하나로 통일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출판사가 서평 희망자에게 제공해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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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5-03-27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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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다시 읽고', 경전은 '매일 보고'...


'경전'이라고 하면 흔히 종교를 떠올리기 쉬운데,

'4서3경'을 생각해 보면 굳이 종교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이 책에는 양반가 7첩반상에 빗대어 일곱 가지 경전을 해설하고 있다.



그 해설은 깊이가 적당하여 초심자도 핵심에 쉽사리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여져 있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선생과 함께한 경전읽기 모임의 결과라 하니
경전 읽기에 낯설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지침이 될 것 같다.



강유원이 '고전'을 일컬어 '나 요즘 일리아드를 다시 읽고 있어.' 이렇게 말하면 뽀대가 난다고 했던가.

그렇게 치자면 '경전'은 매일 읽고 또 읽어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글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책상 위에 임제 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든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같은 것들을

몇 자 끄적여 붙여두곤 하는데,

가끔 '반야심경'을 사경하는 것 등으로 마음의 번잡함을 다스리려 이용한다.



이 책의 경전들 역시 부담없이,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들로 접하면 좋겠다.

로마의 치하에서 벗어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인 '성경'이나,

봉건의 계급사회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의 이야기 '동경대전' 같은 것들은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자의 도덕경도 전쟁터의 지도자가 가져야할 정치 언설일 게고,

중용 역시 혼란통 안에서 군자가 가져야할 삶의 자세를 다루는 것이다.



경전들은 결국 전쟁터와 같은 삶의 공간에서,

인간의 고뇌를 해소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공통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經을 鏡삼아 輕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전을 거울삼아 삶을 가볍게 해보자는 의도다.

주제는 무겁지만 책은 의외로 가볍다.



성경에서 왜 하필이면 '도마복음'인지는, 오강남의 '또다른 예수'를 읽어봐야 알 것이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24)



불교 경전을 읽는 듯 하다.



'나그네가 되십시오.'

나그나게 되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는 떠돌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사고에 빠져있지 말고

새로운 차원의 열림과 깨달음을 향해 길을 떠나라는 말씀이다.(29)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43)



여느 성경과는 다르게 스스로 깨어남을 가르치고,

예수를 따라 살지 말고, 니 스스로 예수임을 알아라~! 마치 불교의 한마디와 상통하는 글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싫어할 수도 있겠다.



삶의 마디마디에서 천명인 性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현실은 중용으로 발현할 것이다.

큰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 홀로 먼저 조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신독이다.(57)



돌~ 선생의 중용도 읽었지만, 또 기억에서 가물가물한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천명인 성을 '도'라 하고 그 길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지속되는 사랑이 있을 뿐.(58)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이며,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한다는 것.(72)



그렇다. 세상 만물은 변하는 것이 진리다.

그래서 인간의 자세, 태도가 문제시 되는 것이다. 신독만이 중용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은 늘 경전을 읽으며 지속시키기 위하여 수시로 자신의 변화율을 측정해 내야 한다.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줄광대는 줄에서 떨어진다.



힘 중에서 가장 센 힘이 '홀로 있을 수 있는 힘'이다.

홀로 있는 시간이 자유롭고 풍성한 이는 남도 자유롭게 하고 풍성하게 한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헛헛해져 술친구를 찾고, 성급하게 결혼해 결국 삐걱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사이버 세상에서 존재아닌존재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외로움을 면하고자 하는 일들이 오히려 나를 잃고, 시간을 잃고 덩달아 삶의 생명력까지 고갈시켜

낭패가 된다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다.(82)



그래서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그토록 많이 나온다.



집에 불이 난 것을 물로 꺼 버리듯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걱정이 생기면 이내 지워버린다.

마치 바람에 솜털을 날려 버리듯이.(95)



인간에게 '걱정'은 날마다 생기지 않는가?

걱정 인형에게 맡기고 편안하게 살 수는 없다.

솜털을 바람에 날려버리듯, 살려면, 경전을 읽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104)



경전을 이해하기는 참 쉽다.

허나, 마음에 끄달려 사는 중생에게 그것을 실천하고 마음을 툭, 털어버리는 일은 참 어렵다.



기타에서 '요가'라는 말의 풀이가 읽을만 하다.



'요가'라는 말은

신에게 닿는 것, 우주를 주관하는 힘에 자신을 잡아 매는 것, 절대자와 인간의 접촉을 의미한다.

요가란 더욱 심원한 본체와 하나가 되려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다.(172)



보통 요가를 기묘한 동작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모두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실천이라는 것이다.



요가의 힘으로 모든 행위를 놓아버린 이,

지혜로써 의심을 끊어버린 이,

참나에 머무르는 이, 그는 어떤 행위도 속박될 수가 없다.

오 부를 차지하는 이여.(178)



명상은 특별한 날에 먹는 외식이 아니다.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살찌우기 위해 매일 먹어야 하는 정신의 밥이다.(189)



경전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가끔 기분전환으로 먹는 외식처럼 섭취할 것이 아니라,

매일 먹는 정신의 밥.



형체도 모양도 없는 그 마음을 닦아야만

한울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을 알 수 있는 것이요,

한울님 덕을 밝히는 것이 바로 도이다.(222)



동경대전은 동학의 경전이다.

조선의 천민, 여성들에게 동학은 그대로 예수였다.

마음을 닦으면 스스로가 한울님이 되는 지경을 한번 경험한 자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절두산에서 머리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릎 꿇고 비루하게 천민으로 사느니 한울님의 자녀가 되어,

스스로 한울님이 되어 사는 것이 꿈이었을지니...



차를 마실 때는,

천천히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치 차가 온 지구가 될고 있는 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한결같은 속도로 미래를 향해 서두름 없이 마시기를 바랍니다.

실제적인 순간을 사십시오.

그런 실제적인 순간만이 생명입니다.(225, 틱 낫한)



살아 숨쉰다고 모두 생명이 숨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두렵다.

실제적인 순간만이 생명이라는 말에서,

터무니없이 불필요한 속도를 내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이 책은 제목이 참 맛깔스럽게 잘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한번 읽은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어차피 잘 차린 칠첩 반상이랬자,

그 하나하나는 반찬이고, 한끼 먹으면 후딱 치워버릴 밥상이다.

여기 소개하는 경전들은 칠첩 반상 류가 아니다.

매일 꼭꼭 씹어 먹으며 음미해야할 영혼의 밥상이라 해야 더 비근한 예가 아닐까 싶다.





19. 오심즉여심의 한자를 '나 오'가 아닌 '나라 오 吳'로 쓰는 곳이 여러 군데다. 204, 205쪽에서도 틀려있다. 205쪽의 제목에서는 또 맞게 적고 있고... 편집자여, 한자 공부 쫌 하시라... 125쪽의 오상아 에서도 마찬가지 실수를...



145.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즉'자는 '卽 곧 즉'이다. '則'이 아니다. '則'은 접속사로 쓰일 때 then, thus 이런 이어짐의 시간 관계를 나타내는 글자이고, 卽은 곧바로, 즉시...를 나타내는 한자다.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만난다...는 의미지, 이리하여... 여래를 만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한자는 중요한 한자이므로 '경전'이란 책에서 틀리면 안 된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의 '아상'과 '인상'에서 '인상'을 '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풀고 있는데, '아상'과 상반된 '타인'을 의미하는 '남'이라는 의미가 더 큰 것이다. 나는 소중하고 남은 가벼이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글샘 2015-03-30 공감(6) 댓글(0)


일곱 경전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 <경전 7첩 반상>


직장 생활은 분주함을 넘어선 '바쁨'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 더 이상 미망(迷妄)의 더께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자문하게 되더라. 이어 내 자신을 위한 이런저런 투자(공부를 더 한다거나 마라톤 등등)의 시기마저 지나니 그 다음은 보다 자유로운, 걸림이 없는 나만의 삶을 지향하게 되더만.(물론 뜻대로 다 되는 건 아니고...) 당연히 인간 본연의 존재 의미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찾아오고, 자연스레 고전(古典) 사상서나 종교의 경전(經典) 속에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으려고 뒤적거리게 되더라. 묘하게도 젊은 시절엔 별다른 감흥이나 느낌이 없던 문장이나 가르침이 세상사 경험의 깊이만큼 선명하게 각성되는 이건 또 뭐람. 대략 서양의 정신 속엔 건조한 묵시적 신비주의가 보였고, 동양의 정신 속엔 정해진 틀이 없는 '마음'이란 게 있더만. 종교라는 것도 그 이름을 들어내고 보니 뿌리와 줄기는 거의 비슷하고 크고 작은 가지만 달라보였다. 그 무엇이든 결국은 인간의 삶, 그 중에서도 고(苦)로 귀결되더라는 거지. 이 고(苦)란 것이 어디 단순한 괴로움이겠는가. 시대의 결함과 불만족에 맞닿아 있는 아픔이 아니겠는가. 그 아픔을 보담는게 종교 아니겠는가. 에고~ 개똥철학 집어치우라 해도 뭐~ 할 말 없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경전 7첩 반상>. 처음 이 책의 표지를 봤을 때 '경전'이란 큰 제목보다 '7첩 반상'이란 글의 의미가 더 빨리 와 닿더라. 그래서 요리 관련 책인가 싶었다.(아마도 최근 들어 요리에 조금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요리 책이 아니더만. 인류가 낳은 정신적 유산 중에서도 그 최고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가히 지혜와 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일곱 권의 경전을 통해 우리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이더라. 책에 뒷면에 요약되어있는 일곱 가지 경전의 카피를 보니, 불교의 수많은 경전 가운데서 가장 초기에 모아진 <숫타니파타>, 동양 문헌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되고 있는 <도덕경>, 양 극단으로 치달은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간절한 정신이기도 한 <중용>, 나뿐 아닌 너와 우리 모두의 대 자유를 추구하는 대승의 중추 <금강경>, 인도를 넘어 세계의 고전이 된 <바가바드기타>, 그리스도교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선두 마차 <도마복음>, 우리 정신과 우리 철학을 담고 있는 <동경대전>이 소개되어 있었다. 물질만으론 해소할 수 없는 풍요 속의 허기와 깊은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지혜가 경전 속에 있다는데, 이 일곱 중 다섯의 원전을 어쨌든 나름의 느낌으로 읽은 적이 있는지라 나는 저자가 어떻게 그 오의(奧義)를 풀어내는지, 그 깨달음의 경지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저자는 다양한 종교의 경전을 만나고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의 바탕을 다지는 일이요, 나아가 '참된 나'를 체득하는 뛰어난 방편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이 나온 것이고... 사실 '내 경전'만 챙기는 종교적 편협성이나 극단주의는 갈등의 심화 또는 전쟁 등의 고통으로 이어져 온 것이 역사 아닌가. 독선은 편견과 무지를 낳고 이는 '너의 것만 아니라 나의 것'조차 올바르게 알 수 없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눈 감은 신앙으로는 경전에 숨은 속뜻을 알아차릴 수 없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개념이 곧 내 마음이다. 저자는 그래서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도록 여러 종교의 경전을 읽고 묵상해 보자는 의도에서 2013년 늦가을 '종교 너머, 아하! 경계 너머, 아하!'를 지향하는 '일요경모임'이란 지식협동조합을 설립하였는가 본데, 이 책은 그 결과물인 듯하다. 경을 소리 내어 읽고, 가다듬고, 잠시 명상을 통해 이들이 얻은 '황홀한 기쁨, 은혜와 가피'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었단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한번 들어보시라', '냄새라도 맡아보시라'고 권하는 생각 밥상이요 마음 밥상이라는 의미에서 책의 제목을 <경전 7첩 반상>이라고 했다한다.(그런데 난 경전을 음식에 빗대는 타이틀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구먼)



처음에 소개되는 경전이 <도마복음>이다. 1945년에 발견된 이 도마 복음서는 4복음서의 형식과 달리 예수의 일생에 대한 전기적 내용 보다는 예수의 어록을 주로 담고 있다. 신성을 중시하는 기독인들은 이단서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나, 정신과 영혼을 탐구하는 이에겐 참으로 경이롭고 놀라운 경서다.(나는 오강남 교수 책과 도올 선생 책을 읽었다.)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는 여러 기적이나 부활, 재림, 최후 심판 등등 유일신을 향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진면목 즉, 자아를 찾는 '깨달음'을 강조하니 어찌 놀랍다 하지 않겠는가.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는 말은 정말 지금의 성경과는 많이 다르다. 도마복음은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비밀의 문을 연다. 달마의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결국 마음속에 있는 신성(神性, 하느님)을 깨닫고 그것이 인성(人性) 그 자체가 될 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로 이해하고 만다. 한마디로 불이(不二)다.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완전히 다른 것 같으나 그 사이에 도마복음을 놓으면 서로가 통하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느낌을 들더라.



저자가 일곱 경전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홀로 있음'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자는 거다. 그래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행복으로 나아가자는 거지. 도마 복음의 67절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를 보면 어째 섬뜩하다. 이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인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과 통할 뿐 아니라, 도덕경의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自知者明)과 통하고 중용의 신독(愼獨)과도 통하며, 법구경의 무소의 뿔과도 연결되고 바가바드기타의 지혜의 요가와도 그 깨달음이 하나가 된다. 한마디로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하는 너 자신을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일곱 경전의 전반을 관통한다. 행복은 자신의 깨달음 즉, 자아를 찾아 다시 시작점으로 회귀하였을 때 시작되는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끝이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시작을 찾았는가?"라고 되묻는다. 나는 여기서 본성을 찾는 단계를 소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가 떠오르더라. 도마복음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시작에 서 있는 사람이며, 있기 전에 있는 사람이며, 가난한 사람이고, 홀로 있는 사람이고, 박해받는 사람, 길 잃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어째 고(苦)의 향기가 나지 않는가! 결국 '삶의 답'은 자신을 어떻게 알고 구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언급한 일곱 경전 중 내가 정식으로 읽은 적이 없는 경전은 <바가바드기타>와 <동경대전>이었다.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는 어찌어찌 요가 아사나를 배우면서 읽었는데 바가바드기타는 처음으로 간략 내용을 알게 되었다. <동경대전>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끄러움(?)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더라. 동학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고, 인내천이나 21자의 주문(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만세불망만사지) 염송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그 근본을 알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동경대전이나 한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경전이 오늘날에는 그저 '열린 보물창고'처럼 언제든지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시대이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다. 마음 한 자락만 열면 편협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의 진수를 수용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종교적 경계의 걸림에서 벗어나 그 종교가 가진 '황금 지혜'를 슬기롭게 받아들인다면, ‘참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즈음에서 생각의 흐름이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로 이어지더라. ‘참된 나’로 맞이하는 삶은 그저 행복이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걸까? 진리로 통하는 비밀의 문은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않나싶다. 내가 어리석어 이 책에서 특별한 견성(見性)의 경지를 엿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읽을 만 했다는 건 알겠다. 나름 괜찮은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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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03-27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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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7첩 반상]생각 밥상, 새콤 달콤 매콤한 양념은 없지만 단백하고 정갈한 맛이야!

차려진 밥상이지만 낯익은 밥상은 아니다. 7첩의 경전 밥상이다. 분명 먹기만 하면 되는, 잘 차려진 밥상이지만 경전이 주는 무게 때문일까. 덥석 집어먹기엔 격식이 필요한 밥상 같아서 자꾸 멈칫하게 된다. 그럴 땐 일단 손이 가는대로 한 입 두 입 먹어보는 수밖에.

경전은 문자가 없던 시절, 종교 창시자의 계시나 그 행실을 기록한 책이다. 종교 서적이기도 하고 고전 중의 고전이기도 하다.



『도마복음』은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 가운데 하나다.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내용과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고 한다. 예수의 행적이나 죽음, 부활에 대한 언급 없이 오직 예수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하는 점이 4복음서와 차이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25쪽)

구하는 사람은 찾을 것입니다. 열릴 것입니다.(26쪽)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마음속에서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행복합니다. 원하는 사람마다 그 때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51쪽)



행복을 찾는 과정이 더 행복하고, 약간의 결핍이 있는 삶이 감사와 행복을 누리게 한다. 파키스탄 같은 빈국이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도 그런 결핍이 주는 감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설렘과 기대감, 호기심으로 가득한 1%가 부족한 상태에서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겠지. 행복은 다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숫타니파타』는 초기 불교 경전으로 팔리어로 ‘경의 모음’이라는 뜻이다.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3대 아소카왕 이전에 지어진 인간 붓다의 행적과 육성이 담긴 경전이다.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략)

집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8~80쪽)



무소의 코 위에 우뚝 솟은 뿔은 출가수행자의 獨覺을 상징한다고 한다. 수행자의 흔들림 없이 정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흔들림 없이 용맹정진하기가 쉽지 않지만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인생살이기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싶다. 오늘도 흔들림 없이 씩씩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인도 고전인 『바가바드기타』는 『베다』,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 3대 경전의 하나다. 산스크리트어로 ‘지극히 높은 사람’, ‘거룩한 자의 노래’라는 뜻이다.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에 대한 가르침이자 요가(신에게 닿는 것)를 설하는 경전이다. 『베다』와 『우파니샤드』와 달리 모든 계층의 해탈 가능성을 인정하는 경전으로 마하트마 간디의 영적 지침서‘이었다.



그대에게 부여된 의무의 행위를 행하라.

행동은 행동이 없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행동이 없이는 그대 자신의 육신조차 부지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집착함 없이 있으면서 언제나 행해야 될 행위를 하라.

집착 없이 행동을 함으로써 그는 가장 높은 것에 이르느니라. (170쪽)



집착 없는 행동, 오늘 부여된 의무를 다하는 행동, 거침없이 당당하게 행동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이 책은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초기의 『숫타니파타』, 노자의 『도덕경』, 새로운 기독교 경전 『도마복음』, 『중용』, 한국불교의 소의 경전인 『금강경』, 인도 고전인 『바가바드기타』, 동학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 등 모두 7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진 경전 밥상이요, 생각밥상이다.



익숙한 경구도 있고 낯선 경구도 있는 잘 차려진 밥상이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게 꼭 씹어 소화시켜야 할 밥상이다. 새콤 달콤 매콤한 양념은 없지만 단백하고 정갈하다. 그렇게 경전의 맛을 음미하라는 마음밥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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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덕 2015-03-30 공감(5)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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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으로 맛보는 인생의 참맛




경전으로 맛보는 인생의 참맛



책의 서문에 적힌 추천사의 말처럼 정갈한 경전 한 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 상에는 다양한 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경전들이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그 경전들은 <도마복음>, <중용>, <수타니파타>, <도덕경>, <금강경>, <바가바드 기타>, <동경대전>이다. 이러한 경전들은 기독교, 도교, 힌두교, 불교, 천도교 등 종교의 핵심 사상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었다.



특히, 작가의 이력이 특이했다. 일본 릿쿄 대학교 법학과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세계처럼 얽혀 있는 국제관계를 공부했단다. 이것보다 더 특이한 것은 저자 성소은의 다양한 종교 이력이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찾아 순복음교회를 나왔고, 성공회를 지나,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칼끝 같은 가르침에 이끌려 3년간 출가수행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성공회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인간사회와 종교 관계를 관찰하고 있단다.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것과 더 다양한 종교를 공부하면서 이제는 인간세계와 종교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니, 저자의 지식에 대한 무한한 욕구가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이 책의 목차에는 각각의 경전들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들을 멋진 글자로 적어 놓고 있어서 그 경전들을 이해하는 걸 돕고 있었다.



<도마복음>은 "나그네가 되십시오",

<중용>은 "간절함으로 스스로를 이루다",

<숫타니파타>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도덕경>은 "머물지 말고 흘러라",

<금강경>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바가바드 기타>는 "나는 누구인가",

<동경대전>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목차만 훑어봐도 마음이 충실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특히, 캘리그래피 글씨체로 적힌 말들이 너무나 멋져서 더 좋게 느껴졌다. 이러한 캘리그래피도 저자가 직접 적었다고 하니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책 중간 중간에 적힌 경전의 좋은 말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저 많은 경전을 하나 하나 찾아서 읽는다는 것은 경전 공부를 따로 하는 게 아니라면 바쁜 현대인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경전을 멀리하고 있기에는 최근 복잡해진 사회 구조 때문에 정신적으로 척박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경전 구절로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경전 구절들은 하나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말 우리 삶의 정수를 모아 놓았기 때문에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남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구절들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우주의 신비를 이루는 진리요, 지혜라고 할 수 있었다.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득도하여 해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경전 구절을 계속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바뀔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이루어진 <도마복음>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말이 아니던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단다. 불교에서 누구나 도를 닦으면 도를 깨달아 해탈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표현하는 말만 다를 뿐이지 결국은 하나의 진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교관이 다르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종교 전쟁이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짓이며 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때문에 일어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몇 명의 지도자, 부를 가진 권력자에 의해 얼마나 많은 민중들은 힘없이 죽어 나가게 되는 건지,,, 전쟁은 이 세상에서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는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스러운 것,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라고 한다.



책 속에서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댔지만 그런 분류 방식을 묻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다시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 난 누구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어머니이다고 말하지만 그걸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업이나 소속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멍한 눈으로 묻는다. 내가 누구인지... 나 또한 저런 질문을 받으면 위에 열거한 내용들을 말하며 나를 표현할 것 같다. 그것 외에 내가 누구냐고 물어 본다면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 알라딘 판미동의 서평단으로서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불교에서는 `문자를 세워 말하지 말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라`고 한다. 경전은 도구일 따름이다. 손가락을 달로 집착해, 읽는 정성스러움을 헛된 노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부디 경전의 보고에서 한 층, 두 층 깊어지고 넓어지는 삶을 체험하기를. 그맇여 오랫동안 내 속에 갇혀 있던 `위대한 사람`과 조우할 수 있기를.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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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향 2015-03-31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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