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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0

04 유정길의 삶, 그리고 일이야기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유정길의 삶, 그리고 일이야기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2

유정길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유정길의 삶, 그리고 일 이야기 1

2004.04.29 / [불교정보센터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두 번째 주인공은 정토회의 유정길국장님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해외활동중이신 관계로, 국내에 왔었던 2월을 포함 서면인터뷰까지 포함해 여러차례의 인터뷰과정이 있었습니다. ‘개인 유정길에서 활동가 유정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말씀을 듣다 보니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편집자 입장에서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정길국장이“이렇게 속 시원하게 나와 정토회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한적이 없다”며 “가능하다면 원문을 그대로 살려달라”는 부탁말씀에 거듭 고민끝에 총 3회로 나누어 전문을 싣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소간 많은 분량입니다만 그 어디에서 다시 만나보기 어려운 흥미로움이 있을 듯 합니다. 사부대중 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불교정보센터]



한국에서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환경운동이나 불교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활동가의 이름을 한 번 들어 보았을지 모른다.



“유정길(본명 류길용)”, ‘한국불교환경교육원’의 사무국장이었던 사람. 그러던 어느날 사무국장직을 끝내더니만 불교환경교육원의 모단체인 ‘정토회’의 부엌살림을 책임지는 공양주가 되었던 사람. 그런데 그로부터 어느 순간 한국에서 사라져버렸던 사람. 노래 부르고, 놀기도 잘 놀았던 사람이고, 일도 무섭게 하던 사람. 그 사람은 한국에서 사라진 이후로 내내 미국의 침공과 탈레반의 붕괴 이후 재건의 길을 걷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갔었다.


지난 2월 그는 정토회 총회가 있어 잠시 한국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프간에서의 고생 때문인지 20Kg이나 빠져버린 날씬한 그를 만나 인터뷰를 부탁했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바쁜 일정 때문에 인터뷰를 한번에 완결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음의 서면 인터뷰를 해줌으로써 이번의 만남을 완성해주었다. 불교 활동가들과 만나는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두 번째 편. 유정길(법운 법사) 님을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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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작년 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본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들에게 근황을 알려주시는 것처럼 최근 살아오신 얘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지금 일하는 곳은 아프가니스탄의 JTS로, 과거 ‘탈레반’의 거점이었던 ‘칸다하르’(편주 :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중심도시)를 중심적인 지원대상으로 여러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지난 기간 이웃국가로 피난을 갔던 난민들이 파키스탄과 이란에서 다시돌아오고 있는데, 사실 이들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자국내 난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 IDP)’(편주 : 해외로 피난하지 못하고 국내를 떠도는 난민들, 대개 해외난민들보다 사정이 열악하다)들입니다. 칸다하르에서 더 내려가 ‘레기스탄’이라는 큰 사막이 나오는데, 그 위쪽에 이들의 난민캠프가 있습니다. 이곳의 난민들은 탈레반 집권 기간 4-5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사막에서 칸다하르로 올라왔던 사람들입니다. JTS는 이들이 모여 있는 난민촌에서 학교 교육지원사업과 과부, 고아, 여성들의 직업교육지원 그리고 식량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불’ 북쪽 ‘사카르다라’ 마을에 병원과 다리, 학교를 짓는 마을공동체 개발사업을 하고 있으며, 카불시내의 전쟁고아나 거리의 아이들에 대한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족인 ‘하자라’들이 살고 있는 ‘바미안’의 와라스 지역에 대한 긴급구호사업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JTS가 지원하는 여러 지역 중에서도 특히 칸다하르는 자주 폭탄테러사건이 발생해서 현재 UN기구와 250여개의 외국 NGO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어 더욱 상황이 열악한 곳입니다. 가난한 아프간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 이곳의 난민캠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카불 북쪽 사카르다라 마을의 다리, 병원, 학교 건설 사업의 복구(Rehabilitation)와 재건(Reconstruction)활동을 책임지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사로 돌아가 옛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법사님께서 불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본격적인 ‘운동으로써의 불교’를 하게 된 시발점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정토회 활동으로 오기까지의 신행사를 한 번 들려주시죠.



저는 79년부터 학생운동을 해왔고, 당시에는 교회에서 야학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에겐 ‘운동성’이 강하거나 종교내 진보적인 입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굳은 종교심이 없거나 종교를 그저 외피 정도로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랬지요. 종교가 단지 사회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서 운동의 보호막이 되어주는 일 외에 종교 그 자체는 운동에 별 도움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가 84년 학생운동 과정에서 수배생활을 한 7-8개월 하게 되었는데, 하도 힘들어서 이때 어느 지인에게 머무를 수 있을 만한 좋은 곳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절을 소개해 주어서 아주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 불교를 전혀 모르는 저에겐 산속 아늑한 곳에서 공부하면서 도인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지낼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었는데, 실제 데려간 곳이 서울시내 신림동에 있는 모선원이었습니다. 크게 실망했지요. 그러나 도피생활이 지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법륜스님(당시 최석호 법사)를 위시한 비슷한 또래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비슷한 경력의 사람들이 약 20여명 관계되어 활동하고 있더군요. 알고보니 다들 당시의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참 쟁쟁한 친구들이었어요. 당시에 법륜스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다들 함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륜스님에게는 그들을 묶는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졸지에 절에서 기도생활을 한 달간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자체에 대해서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고, 더구나 종교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시덥지 않게 생각하던 제가 약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는 천수경과, 능엄신주까지 하는 사분정근이며, 매회 한 500배 정도 절을 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함께 일하는 분들이 해인사로 청소년 수련대회를 간다고 해서 따라갔었습니다. 한 700명의 청소년이 참여했는데 거기서 어쩔수 없이 고3 담임을 맡게 되었고, 마지막날 3,000배를 한다길래 담임인 제가 안할 수 없어 따라 하게 되었었습니다. 처음엔 시늉만하다가 들어가 자려고 한 저에게 법륜스님은 순간순간 아주 이상한 이야기(당시에는)로 오기와 분심을 갖게하면서 포기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기도는 새벽 4시에 되어서야 다 끝났습니다. 그후 또 잠은 재우지 않고 어느 절에 올라간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같이 올라갔습니다. 웬 노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길래 알게 뭐냐고 구석 기둥에서 잠을 잤지요. 나중에야 알고보니 그분이 성철스님이셨더군요. 그래서 이후 법륜스님께서 그러시더군요. 그때 삼천배 기도 공덕으로 지금 이런 일을 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이후 다시 수배생활하면서 시위를 준비하고 일을 만들고 하다가 결국 구속되어 서대문, 안양, 전주교도소를 거쳐 1년만에 나왔습니다. 출소 후에 당시에 일상적이었던 공장에 들어가려고 용접을 6개월간 배웠습니다. 이후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로동 공단 근처에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당시에 법륜스님과 함께 일하던 동료인 박수일 법사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일하는 비원포교원에 갔다가 책 만드는 일과 대불련 수련교육을 도우면서 조금씩 불교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저에게 예상하지도 못한 인생의 전환이었습니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내게 불교공부는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전환이었다"



당시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정말 눈이 확뜨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거지요. 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 1학년때 아주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다니길 그만두었지만, 종교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 나에게 불교는 충격이자 운동적인 고뇌의 깊이를 심연 깊숙이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세계관의 지평을 새롭게 넓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일하지만 우리 도반들의 팀웍이 아주 좋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보았던 기라성같은 운동선배들이나 어느 사회운동조직보다 훨씬 수준과 질이 높았습니다. 그것도 큰 놀라움이었지요.

















그 이후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계속 활동을 함께 해왔습니다. 당시에 대불련 교육이나 청년회의 교육수련, 불교 내의 운동이나 ‘청년여래회’를 만들고 스님들에 대한 사회과학세미나 등을 지원하면서 ‘한국불교사회교육원’의 실무책임을 맞게 되었지요. 당시에 법륜스님을 비롯하여 우리 도반들의 팀웍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들 너무도 잘나서 주체못하는 젊은 열혈운동가들 속에서 치열하게 논쟁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도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바로 그 다양하고 다른 성격이 오히려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법륜스님은 이 애물단지들을 건사하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을 겁니다. 크고 작은 내부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법륜스님의 놀라운 통합력과 지도력, 위기관리능력은 우리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지금 내가 함께 하는 힘은 대부분 우리 도반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 도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90년 동구와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긴 고뇌의 시간을 갖었습니다. 당시 변화를 어느 규모로 인식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번의 변화가 세계의 대단한 지각변동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을 위해 우리 정도의 규모에서 대안적인 모색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약 3년간 활동을 중단하면서 정말 징그럽게 많이 토론하고 논의했습니다. 한달에 약 보름이상은 합숙하면서 토론하고, 과거에 보지 못했던 세계관이나 관점에 대한 검토와 학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색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지속하면서 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중단하고, 새롭게 출발한 관점으로 밑그림을 그릴 것인가로 오랫동안 논의하다가, 활동을 전면중단하고 집중적인 고민을 해야한다는 문제의식에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90년 초기에 정토회가 운동을 포기했느니, 변절했느니하는 하는 욕을 불교의 진보진영 내에서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다 법륜스님의 승적문제가 또 문제가 되어 업친데 덥친격으로 보수진영의 욕까지 덤으로 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내부 논의는 그정도에 흔들린 가벼운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각자 최소한 10여년이 넘게 전 삶을 운동에 집중해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나름대로 참으로 오랜 논의와 신중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비난과 오해에 일일이 우리의 과정을 해명을 할까 생각했지만, 운동가는 운동으로 보여주면 되지, 그걸 말로 설명하고 다니는 것은 운동가의 자세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삶을 믿는 것이지 말을 믿는 것은 아니며, 행동과 활동으로 확인시키면되지 짧은시간의 억울함을 해소하겠다고 여기저기 설득하면서 다니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무튼 이후 우리는 나름대로 큰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 근 90여년간 지속되어온 하나의 이념적 지형이 붕괴한다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당시 이 교훈을 심각하게 고민은 하면서 다소 나른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전 삶을 바쳤던 신념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인거지요.



실제 사회주의 붕괴를 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사회구성체가 변했다고 해도 그것을 이끌어가는 인간이 변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그 사회는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결국 자신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는 나뉠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명제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수행과 운동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불교의 종교적 용어가 아니고 보편적인 일반을 위한 용어이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 자신이 변한만큼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 만큼 일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변화는 그만큼 중요한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불교적으로 더 깊어지기 시작한거지요. 그러면서 훨씬 대안운동중심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번 한 생을 안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정진...1992년부터 결사시작"



그리고 비전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비전과 대안을 만드는 창조의 과제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고민과 논의에 대해 무한대로 열어놓고 경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사회론을 펼치는 사람, 통일에 대한 여지껏 듣도 보도 못한 견해를 갖고 있는 분들, 도인, 물리학자, 경제학, 인류학 등, 관련된 별아별 사람들은 만났고, 길게는 1-2년, 짧게는 1-2달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함께 토론했습니다. 나를 비롯한 도반들은 자신의 삶을 두고 하는 고민이어서 비전의 불투명성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과정에서 그 비전을 모색하고 창조해야 하는 주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 과거처럼 한가지의 담론으로 일사불란하게 정리되거나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대안창조의 상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외피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기도하고 수행하며 스스로 보살의 삶에 대한 깊은 자기결단이 있지 않으면 멀어져가는 이상과 구체화되는 현실의 어려움을 관통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도반들이 윤회를 거듭하는 생에서 이번 한 생을 안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정진해보자고 생각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10,000일 즉 30년 정도 원력을 갖고 힘을 모으면 큰일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발전적인 물꼬를 터놓는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1992년부터 결사를 시작하고 활동을 하게 된 겁니다.



/활동가로 일하시면서 개인적으로 일에 대한 의심이나 후회의 감정을 느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는 무디고 더딘 편입니다. 하나를 포기하고 선택할 때는 누구보다 늦는 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진아이지요. 아무튼 과정에서 고민을 오랫동안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일단 선택하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선택과 포기가 분명한 편이지요. 그러나 저는 돈을 못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고 싶은 일을 나만큼 많이 하고, 갖고 싶은 것을 나만큼 많이 누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일로 만듭니다. 집단의 원(願)과 개인의 원(願)을 일치시켜면 그건 일(Labour)이 아니게 됩니다. 재미있는 놀이(Recreation)이지요. 노는데 출퇴근이나 휴일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잖습니까? 그리고 조금 견해가 달라도 함께 결정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전화시킵니다. 즐기지 않으면 이런 일 오래할 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포기하면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모르시는 말씀이지요. 이 즐거움을 몰라서하는 소리지요.















저는 일단 경제적 이해관계의 세계를 떠나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일을 하면 제 주변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자신들의 일상생활은 돈에 찌들었을지라도 대부분 저에게 올때는 경제적 동기보다는 선(善)의지를 갖고 옵니다. 환경문제에 관심있거나 이웃을 돕는 일에 관심있어서 오지요. 그 분들이 자원활동을 하거나, 열성적으로 모금하시는 분, 집에서 지독스럽게 환경실천을 하거나, 근 10여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부가 새벽기도을 하면서 정토회에서 자원활동을 하시는 걸 보면 너무도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토록 열심히 북한동포나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직장 끝나고 모금하는 활동가 도반들이나 신도님들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이런 일하면 좋은 사람들만 만납니다. 감동적인 사람들만 만나요. 그리고 감동의 감각이 발달합니다. 그래서 나누기 할 때 사소한 것에도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그저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수많은 감동을 누리며 사는 일은 정말 행복한 일이지요. 정토회는 그 감동의 에너지가 만들어가는 조직입니다. 저는 사회운동은 항상 아트(Art)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모두 아트입니다. 감동을 생산하고 그 감동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니까요. 이제 저항 속에 너무 활동이 비장하면 고뇌에 찬 소수의 높은 결의 수준의 사람밖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의미와 감동, 내용과 재미가 에너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농담삼아 ‘조직의 쓴 맛’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떤 조직이든 유지되는 것은 ‘조직의 단맛’ 때문입니다. 단맛이 워낙 좋기 때문에 약간의 쓴맛은 단맛을 누리기 위한 투자이자 일종의 ‘기회비용’라고 생각하지요. 그 감동과 재미가 단맛입니다.



/교육원 활동을 마치시고 정토회의 공양주가 되셨었는데 전성기의 활동가가 일선에서 떠나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 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글쎄요 저는 항상 전성기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도 아프간의 맑은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생각해보면 지금이야 말로 나에게 최고의 시기, 최상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공양주는 그동안 제가 정토회에서는 선배축에 속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노고로 매일 밥을 얻어먹으면서 저는 드러나는 일만 했습니다. 표나고 드러나는 일은 공덕을 깍아 먹는 일인 것 같아요. 공덕을 쌓아야지요. 더 오래 일을 잘하려면 많은 사람을 대접하고 모시는 일을 많이 해야하는데 정토회에서 그동안 계속 부문에서 대장노릇만 해 온 것같아서 공양간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마음공부도 많이 된다고 해서...



"아이의 인생을 우리의 취향때문에 희생해선 안돼...2세 생각하지 않아...



정토회는 1,000일(약3년)마다 전체활동을 모두 내려놓고 처음상태(Zero Point)에 놓고 전면 검토합니다. 그리고 그때 모든 사람들의 보직이 해임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바른 방향인지를 전면 검토하면서 없앨 것은 과감히 없애고 새로 만들 것은 새로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그 일에 정말 맞는지를 검토해서 다시 배치됩니다. 설령 다시 같은 직책이 주어져도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속 2회 (2,000일)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조건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약 10년간 환경관련 활동을 해왔고 바꿔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공양간을 자청했고 도반들이 동의해주었습니다. 이런 방식도 오랜 토론을 통해 정착된 겁니다.



사람이 한분야에 활동을 오래하면 개인의 인맥과 활동의 노하우(Knowhow)가 생겨 훨씬 효율적이고 그 분야에 전문적이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의식이 생깁니다. 그리고 다른 분야로 옮기면 과거의 활동경험이 토대가 되어 훨씬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그 일과 분야가 새롭게 활성화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한사람이 너무오래 일을 하면 후배들의 지도력을 마음껏 발휘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책임지는 기회를 갖는 것이 지도력 훈련에 가장 좋은 방법이잖습니까?



/공양주가 된 것도 특별한 일이었지만 또 어느날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에 가신 것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프간으로 가시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습니까?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곳에 답사를 다녀온 도반들의 보고를 듣고는, 사람을 보내는데 일단 저도 고려는 해보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3년 공양주를 해야하는데, 왠만하면 안보내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일단 가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더욱 시급히 필요하다니 그냥 간거지요.



과거 7-80년대 수많은 사회운동가들이 현장으로 현장으로를 외쳤습니다. 아무튼 저도 그동안 20대의 사회운동의 에너지로 지금까지 해왔습니다. 이제 40대 중반, 앞으로 스스로 새로운 에너지로서의 현장활동 바닥경험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지요. 이제 어느새 시민사회단체 내에서 책임과 비중이 높아지고 사회적인 위치가 생긴 것 같아요. 더 있으면 아마도 많은 걸 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가 저에게 중요한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고 새로운 바닥에서 저의 능력을 점검해보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을 하셨지만 해외파견근무로 부인과 같이할 시간이 많지 않으시겠습니다. 부부 양쪽 다 현직 활동가인 경우인데 결혼생활과 불교운동이 긴장관계에 처하는 일은 없으신가요? (류정길씨의 부인은 현재 한국JTS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인 이지현(덕생법사)씨이다)



같이 일하고 경험세계가 같으니까 훨씬 편합니다. 내가 성격이 모난 편이어서 가끔 불평을 하지만, 덕생법사님은 별로 그렇지 않아요. 아니다. 요즘 내 건강문제 때문에 조금 잔소리는 많아지고 있어요. 사소한 것은 가끔 있지만 특별한 긴장은 없어요. 제 처는 저의 스승이자 도반입니다. 잘 모셔야 하는데... 그러진 못해요. 아무튼 항상 고맙게 생각하지요.



우리가 결혼한 지 15년되었습니다. 그동안 떨어져 산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이즈음에서 떨어져 살아보는 것도 서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상대에 대한 존재감, 고마움을 새삼 확인하는 좋은 기회인 것같아요.



아프간 사람들이 제 처에 대해서 물으면 제 처가 저의 보스(Boss)라고 합니다. JTS 실무책임자니까요. 아프간의 여성은 부루카를 쓰고 다기며 가족 이외의 남자들과 얼굴도 마주치면 안됩니다. 사회활동을 하기는 더더욱 어려운데, 제가 부인에게 지시(Order)를 받는다고 하면 아주 재미있어해요.



/장기간 해외파견근무를 하시는 것인데 이후의 출산의 문제나 자녀양육, 자녀교육의 문제 등에 대해 계획이 있으신지요. 어떤 정토회적인 해결방식이라도 있으신지?



저는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편입니다. 나의 삶은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에 고스란히 투입하고 싶어요. 그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제 처도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은 못하면서 참으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다보니, 아이들의 문제는 뒤로 처지더군요. 이런 성격의 사람이 아이를 잘 건사하겠습니까? 우리 두 사람이야 자기의 판단으로 삶을 선택했다지만, 아이의 경우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해서 삶이 규정되는데, 그 과보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아이의 인생을 우리의 취향 때문에 희생하게 만들어도 안되지만, 우리처럼 돈 안벌고 살려는 사람에게 그것은 아이에게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제 처도 능력이 있어서 계속 일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정토회에서 조건이 되면 아이문제나 부모문제도 공동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실제 구체적으로 고민을 하지요. 단지 개인의 욕망을 잘 들여다 보라고 서로 이야기는 할 뿐, 정토회에서 해결방식이라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지요.



인터뷰 : 김 동 훈 (사단법인 우리는 선우 기획과장)



다음편에는 '유정길 그리고 정토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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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 그리고 정토회 2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2

유정길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2004.05.03 / [불교정보센터]





/‘정토회는 이런곳이다’ 라고 쉽게 설명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단체든 '조직'이라는 틀을 만들게 되면 경계가 생기는 거지요. 조직의 안과 밖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조직적인 결속이 강할수록, 원력이나 의지가 강할수록 구심력의 에너지를 다지게 됩니다. 그것은 밖에서 보면 그 경계가 강해서 폐쇄적이라고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내적인 전혀 새로운 신행과 인간관계, 활동기풍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토회는 공동체입니다. 수행공동체이자, 사회운동공동체, 생활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현재 60여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활동이 결합되어 있는 단체입니다. 또한 사회운동과 개인의 수행을 아주 깊이 강조하는 단체입니다. 구태여 말한다면 일보다 수행을 강조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지요. 또 한편으로 활동보다 공동체 생활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냥 사회운동에만 관심있는 사람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수행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수행을 운동처럼 해야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존의 관행적인 신행을 기대하는 일반불교 신도들도 함께하기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운동을 수행으로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토회의 3,000여 신도들은 대부분 환경운동이나 평화통일관련 활동, 제3세계 지원활동에 모두 참여해야 합니다. 현재 서울정토회관에는 약 200여명을 포함하여 전국의 300여명의 활동가들이 일합니다. 이들 중 2/3가 학생, 직장인, 주부와 회사원들입니다. 때로는 풀타임, 파트타임, 무기한, 한정된 기한 동안의 활동을 합니다. 이들이 자신들이 직접 활동을 기획하고 시행하고 모금하고 평가하고 회의를 만들어나갑니다. 지금 우리는 활동가도 신도도 크게 구분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행과 깨달음의 내용을 강조하지만 불교임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식구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갖고 있지만 아무런 갈등 없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토회는 기본적으로 ‘나눔’의 문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나눔은 각자의 소유물을 나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보와 경험을 나누며 기분과 정서, 지혜와 지식까지 함께 나눕니다. 외부에서 개인에게 들어오는 어떤 선물이나 물건도 방침없이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누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음나누기’라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정토회에서 생활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입니다. ‘나누기’라는 형태로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함께 공유하기도 합니다. 이 ‘마음나누기’는 사업과 일에 대한 토론만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면서 사소하게 올라오는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대해 솔직하고 거침없이 나눕니다. 하루 시작하고 끝날 때, 일이 시작되거나 끝날 때마다 전체 혹은 부서별 나누기를 합니다. 작업시의 나누기는 한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끌고 지시하지 않고 나누기를 통해 각자의 방식을 제안하고 함께 공감대를 얻으면 그대로 채택됩니다. 모든 논의에서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직위가 있거나 없거나 스님이든 재가자이든 관계없이 하나의 대등한 의견으로 간주됩니다.

정토회에는 법륜스님과 유수스님 두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회의 때에는 모두가 똑같이 대등합니다. 차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많은 정보가 집중되어 있고 경험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 권위를 모두 존중하지요. 그리고 한가지 일을 할 때는 명확하게 책임선이 있고 스님이라 할지라도 그 책임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라줍니다.

우리는 10,000일 결사과정을 1,000일로 나눕니다. 매 1,000일마다 모든 일을 내려놓습니다. 사업의 방향과 보직까지 모두 내려놓는 거지요.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검토합니다. 그래서 방침이나 방향이 발전 변화되기도 하지만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지요. 그리고 다시 1,000일을 100일로 나누어 매 100일마다 전국의 결사자들이 전부 모입니다. 그래서 매일하는 아침기도와 수행을 점검하고 사회실천과제가 주어집니다. 그 실천 결과는 다음 100일에 보고하고 또 다음 실천과제가 주어집니다. 그 실천은 쓰레기 제로를 위한 환경실천, 통일관련 평화운동, 옷모으기, 모금하기, 자원봉사참여하기 등 신도대중들이 일상 속에 실천하도록 아주 다양하게 실시 되었습니다.



또한 매월 모든 실무자들은 ‘포살법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월 1회 ‘울력’이 있습니다. 또한 6개월에 1회 ‘자자법회’도 참여합니다. 모든 토론의 결정은 만장일치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전통인 삼의제(三議制)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방식이 정착되기까지 지난 15년간 100여명의 활동가들이 만들어놓은 토론 기록은 아마 한 사람이 평생 보아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분량일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논의 속에 지금의 모양을 갖춘 것은, 정토회의 자산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의 자산일 수 있고, 사회운동의 자산, 불교 내의 자산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회단체들에서 정토회의 수행과 운동방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직접 공동체에 살아보려고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동체로서의 정토회’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회운동단체로서의 정토회만 알 뿐, 공동체로서의 정토회, 수행단체로서의 정토회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오랜동안 많은 좌절과 실패, 성공과 성취, 작은 변화에서 급격한 변화까지를 내부에서 만들어오면서,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나가고 들어오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점검과 단련과정을 통해 다져진 부분에서 나온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지금 현재도 정토회는 완성태가 아닙니다. 현재도 많은 과제가 남아 있고 변화의 과정에 있으며 계속 변할 것입니다. 아무튼 정토회는 수행과 보시, 봉사를 실질적으로 벌이는 수행공동체이며 사회활동단체입니다.


/아는 분들은 ‘법운(法雲)’ 법사님으로 호칭하시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은 한국불교환경교육원(이후 교육원)의 ‘유정길 국장’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육원 시절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그리고 일찍부터 환경을 운동주제를 선택하게 되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처음에는 한국불교사회교육원 사무국장이었지요. 그때 주로 불교내의 대학생교육, 청년교육을 했고, 여성문제를 위한 여성운동관련교육, 민족불교학당, 그리고 스님에 대한 사회과학학습을 했습니다. 이후 민족불교학당출신들이 청년여래회를 만들어 불교내 사회단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활동했던 환상적인 단체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참 정이 많이 가는 아끼는 도반들이지요. 그러다가 90년 환경문제로 관심을 돌려 이름을 한국불교환경교육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처음에 90년 초, 법륜스님이 ‘환경문제가 네가 그동안 알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훨씬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문제니까 관심을 갖고 활동을 준비해보라’고 권하셨고 오랫동안 설득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운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저에게 환경운동은 그저 운동적 결의수준이 높지 못한 사람들의 변방의 활동정도로 인식했었기 때문에 쉽게 동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분의 깊은 조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같아서 다시 진중하게 받아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환경운동이 내가 알고 있는 환경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이고 새로운 의식화의 중심내용이었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이나 김민기씨나 김종철 선생님이나 생명운동을 주장하는 것이 단순히 환경운동하자고 강변하는게 아니거든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양쪽 모두 잘먹고 잘사는 것 그리고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가 좋은 것이고 그것이 곧 진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분배방식으로 서로 우열을 다투는 문제였다면,

환경운동처럼 드러나보이는 생명운동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그동안 너무도 당연시 해 온 근본전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되는 근본전제는 인간의 경제성장을 위해 자연(혹 자원)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중심이고, 인간을 위해 모든 자원이나 생명은 종속되거나 복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소위 ‘위기’라는 말을 쓰는 것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 앞에 다른 많은 문제는 2차화됩니다. 그 위기의 내용은 공멸의 메시지입니다. 그속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죽임의 관계와 문화가 보편화된 것지요. 그래서 생명운동 앞에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체제경쟁은 ‘그놈이 그놈인 싸움’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는 모든 활동이 생명운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환경운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환경운동이라는 외피(?)를 쓴 근본주의적 생명운동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타인을 죽이고 다른 생명과 자연을 죽이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만다는 것은 이제 깊은 통찰까지도 필요없는 일상적인 깨달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운동은 완전히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명운동 속에서 펄펄살아 가슴에 깊이 꽂히기 시작하더군요.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도 전혀 달라지고, 일을 펼치는 방법, 작은 계획을 수행하는 방법 모두 달라지는 겁니다. 당시 사회운동에는 과거의 맑시즘적 앙금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분노를 조직화하거나 저항을 동력화하는 것이 예전의 운동방식이라면 이제 그것은 낡은 것입니다. 분노와 저항은 단기간의 파괴의 에너지는 될지 모르지만, 전 삶을 던지면서 오랜기간동안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분노와 저항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파괴되고 피폐되기 때문입니다. 네거티브 에너지는 창조와 건설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게 기뻐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거 아닙니까, 내가 일하면서 힘들어하는데 누가 그런 일을 따라오려고 하겠어요.

제가 하는 일이 과거 불교환경교육원 시절에는 환경운동이었다가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구호활동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때도 생명운동을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과거에는 환경운동처럼 드러났고 지금은 구호활동처럼 보일 뿐입니다. 정토회도 마찬가집니다. 환경운동, 평화운동, 제3세계구호운동, 수행운동 모두 실은 하나의 다른 표현형일 뿐입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잘먹고 잘사는 것이 진보라고 바라보는 한 그것은 결국 죽임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신성은 피폐해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려는 것’이 과거의 가치라면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진보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깨달음의 가치는 풍요롭게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사회진화(진보가 아니고)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골고루 가난하게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너와 나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개인이 사는 거지요.





/불교계 일반에서 정토회에 대해서 얘기들을 많이 하면서도 정작 정토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정토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점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게 있습니까?

그거야 정토회는 폐쇄적이다. 스님이 승적이 없다. 그런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저도 처음엔 외부의 그런 오해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한편 그러한 비난도 우리가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실제 폐쇄적입니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의지가 강하다보니 그리 보이는 거지요. 우리는 아무나 쉽게와서 쉽게가는 조직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절차가 있고 공감대를 얻는 공동체적 경험을 해야만 그만큼 책임있게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폐쇄적이지만, 바로 그 점이 우리의 초발심의 순수성을 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 폐쇄적이라는 비판은 우리와 자주 접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견지동’적 시각이 아닌가 싶어요. 직접 한번 와 본 분들은 그런 이야기는 잘안합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원력을 갖고 일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일할 수 있게 열려있는 곳이 정토회입니다. 정토회는 전국적으로 한 3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경우에는 일하고 싶어도 소수의 사람들만 하지 다수의 일반적인 대중은 그저 돈내는 것이외에 접근하기 어렵잖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일하고 싶은 누구나 어느 조건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하게 합니다. 상근실무자들은 그 사람들의 일감을 만들어주고 조정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예요. 이런 단체를 폐쇄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예전엔 승적문제 때문에 답답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스님이 승적이 있으면 있는데로 좋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문제삼지는 않습니다.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이 있지만, 있으면 아마도 종단이나 불교공식기구의 수많은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을테고, 그려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을 만드는데 변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지요. 처처심심(處處心心), 처한 조건대로 살아야지요. 있으면 있는데로 없으면 없는데로 살아야지요. 오해하면 어쩔 수 없지요. 받으면서 살아야지요. 욕 안먹고 살 수 있나요. 그것도 큰 욕심이지...


/정토회의 활동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활발해지는 것에 비례해서 외부에서의 기대 또한 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반 대중이 쉽게 참여할 수는 없다고들 생각하는데 법사님이 하시는 일을 존경해도 법사님처럼 전일적으로 활동을 하기에는 현실적인 고려사항들이 많습니다. 특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크게 의미를 가지기 힘든건 아닐까요?

특수하지 않은게 있나요. 개개인 모두 특수한 존재입니다. 한 개인 개인을 각자 주의깊게 살펴보면 남이 따라할 수 없는 아주 특수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수한 사람들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특수 속에 일반이 있고 일반 속에 특수가 있습니다. 한 개인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면 누구에게나 관념적으로 가능합니다. 단지 선택하지 않을 뿐이지요. 우리가 특별하다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사회운동에 자신을 투신했던 사람들은 일반인이 볼 때 모두 특수한 별종의 사람들이었지요. 학교를 잘리거나 기득권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거나 했잖아요. 특수한 거지요. 그러나 정작 개인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는게 있기나 한건가요. 하나하나 모두가 특수하지요. 들판에 피어있는 풀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하나같이 모양이 다릅니다. 바로 그 점이 감동스러운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백인이나 흑인들을 볼 때 처음에는 누가누군지 구분 못하지만 조금 지나면 하나하나 아주 특별하고 영판 다르다는 것, 같은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겁니다. 다른 사람이 정토회를 볼 때도 불교신행단체, 혹은 운동단체와 별반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도 다른 단체가 다른 것만큼 다르고, 같은 것만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대중이 쉽게 참여하는 운동을 기조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 통일운동, 제3세계 지원운동 모두가 몇몇 특별한 전문적 활동가들 중심의 활동을 포기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한 예로 환경교육원의 경우, 그동안은 환경교육과 생명운동에 대한 지역네트워크 및 이념개발과 공동체운동 등에 초점을 맞춰 활동을 했지만, 지난 1,000일 입재부터 방향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래서 다수가 참여하는 대중참여 운동방식으로 생태적 생활양식과 가치관의 변화를 중요한 내용으로 쓰레기 제로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환경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실천해보고 안되면 주장하지 말자는 모토입니다. 그래서 실제 수많은 신도대중들이 참여하다보니 참으로 다양하고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나와서 실천되고 있으며 그속에서 사례와 모범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신도대중들은 모두 최소한 일주일 2시간 이상씩 자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전국적으로 300명 정도가 완전상근하거나, 최소 일주일에 3일 이상 전일로 활동하고 대부분은 자신의 직장이나 집에서 아니면 법당에서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 외에도 매 100일마다 기도회향과 입재를 합니다. 그때마다 모든 대중들에게 사회적 실천과제가 나갑니다. 그것이 다음 100일에 실천보고회를 갖고 또 다음 실천과제가 나가지요. 이 정도면 어느 단체보다 대중이 쉽게 많이 참여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요즘 들어서 정토회의 사회적 활동이 많아질수록 기대감을 갖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더군요. 우리가 사회운동 내에서 혹은 불교 내에서 요구되는 많은 일이 있지만 물론 많이 못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그 정도의 단체가 이것도 하지 안다니... ”라면서 욕도 많이 먹을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우리의 기조를 정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나 운동은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며 깊이 공감하고 마음으로 참여하고 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단지 우리만 할 수 있고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될 일을 되게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활동 기조입니다.



과거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강력한 파괴력이 필요했던 시기에는 ‘전노련, 전학련... 등 ’전‘자 돌림의 일사불란한 집단적 규합이 필요하고 그 범역에 포함되지 않으면 전선이 그어지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비전과 생태적인 창조의 시기에는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로 규합되는 에너지도 필요하지만, 낫낫히 쪼개지는 다양성의 에너지가 훨씬 비전의 풍성함을 갖게 합니다. 기대는 하시겠지만, 그 만큼 실망도 돌려드릴 것 같군요.



아무튼 불교 내에서 우리같은 단체가 없는 것보다 있는게 낫잖아요? 우리로 인해서 불교가 욕을 먹었다든가 불교에 해를 끼쳤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뭔가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는 단체가 많은 수록 좋은거지요. 단지 변방에서의 비난이 아니라 불교나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책임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불교 내, 사회운동내 에서 하는 좋은 일들은 모두가 의미있고 소중하지 않을까요?





/정토회는 조계종에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조계종에 포함되려하지 않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계 내부적으로 개혁해야 하고 고쳐져야 될 모습이 많은 시점에서 정토회는 왜 밖으로만 가고 겉에서만 바쁜 걸까요?



실제 정토회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분들의 기반은 대불련 출신의 비교적 선배그룹들이라서 조계종의 연줄이 많습니다. 저희 법당은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러나 사회활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구태여 조계종이라고 범역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할 필요도 없구요. 운동은 단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하는 거니까요. 그러다보니 그렇게 보였나보지요. 그러나 우리는 안이다 밖이다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안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분에게는 밖처럼 보였겠지요.



그리고 교계 내부개혁은 종단개혁을 말하는 것같군요. 불교는 정법안장하는 종교아닙니까? 정말 올바른 법을 수호하고 깨달음을 얻고 수행해 나가는 것,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자리를 찾아 살아가며, 그렇게 살려는 것이 개혁이 핵심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중 일부분도 80년대 초반에 내부개혁과정에 적극 참여한 적도 있습니다. 교계내부의 개혁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거 사회운동처럼 파괴와 타도를 중심으로 한다면 단체들이 집결해야 할겁니다. 그러나 개혁을 정치개혁처럼, 정치적인 논리로 바라보는 것은 정치혁명은 될지 모르지만, 종교개혁은 아니라고 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종교적 근본성에 올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도 중요하지만 누가 개혁하는가,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개혁하는가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혁하는 사람들이 정말 개혁적인가, 그리고 충분히 대안적인가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반복에 불과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개혁하면 뭔가 저항과 반대의 정서가 흐릅니다. 그리고 ‘종단과 제도’라는 한정된 공간의 변화만이 연상됩니다. 저는 종단과 제도의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보고 실제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개혁을 종단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겁니다. 사회에서 한 문제가 발생하면 실은 전체 모든 사람 속에 베어있는 문제입니다. 개혁은 종단도 있지만, 불교 내 곳곳에서 올바른 법을 따르고 실천하는 과정도 개혁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형식의 변화를 수반할 내용과 정신의 회복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구조의 변화와 개인의 변화, 제도의 변화와 정신의 올바로 섬, 이것이 함께 하는 것이 개혁이며 저희가 90년대 사회변혁과 관련해서 고민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개혁은 종단만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종단이 문제가 있다면 승재가 우리 모두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은 다양한 영역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개혁은 비판과 종단변화의 과정도 필요하지만, 올바른 방향에 대한 대안과 비전에 대한 모색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단체가 모든 걸 할 수는 없지요. 많은 단체들이 분담을 해야합니다. 종단을 건강하게 만드는 단체들은 참 소중합니다. 우리는 관심있지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그분들이 해야 할, 못하고 있는 한 부분을 하고 있는 거지요. 그것도 저는 큰 불교개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정토회의 사회변화의 전략은 일종의 ‘틈’전략입니다. 모든 변화는 실제 이 ‘틈’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변방에서 시작하지요. 모든 주류의 시작은 언제나 그 출발은 변방입니다. 한국사회는 자본주의로 전면 장악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은 반자본주의적 인간적, 공동체적 ‘틈’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걸 발견해서 확장시켜 나가면서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나가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이 안에 신경쓸 때 누군가 밖의 일하는 단체도 필요하잖아요.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단체는 그 자리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있는 겁니다. 중심과 주변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중심에 집착하고 강조하게 됩니다. 실제 뭐가 중심이고 어디가 주변인가요. 중심과 주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계적 사고에 빠져있는 것이며 다양성의 관점이 아닙니다.

/운동가로써의 활동경력도 있고, 지난 기간 많은 인맥과 경험을 쌓아오셨기에 정토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정토회말고 다른 곳으로의 유혹을 받거나 한 눈을 파신 적은 없으신지? 그리고 아직까지도 여전히 정토회를 고집하고 계신 이유가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우리는 모두가 정말 많은 과정을 거쳐 함께 만들어 온 단체입니다. 오랫동안 도반들이 함께 만들었지요. 그속에 저도 포함됩니다. 제가 만들었고, 제 스타일로 일이 진행되는데 달리 다른 곳을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단지 나른해지지 않기 위해서 정진하려고 할 뿐입니다. 함께 일한 도반들간의 애정, 그리고 부처님 법의 기쁨을 나누고, 사회적 열정을 갖는 이 곳이 저에게 참 과분한 곳이지요.


인터뷰 : 김 동 훈 (사단법인 우리는 선우 기획과장)

다음편에는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유정길편의 마지막, '유정길이 말하는 활동가의 삶'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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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이 말하는 활동가의 삶 3

불교의 미래를 말한다 2

아프가니스탄 JTS 상근활동가 - 유정길 (마지막 편)

2004.05.07 / [불교정보센터]



/오랜기간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불교운동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제가 워낙 성격이 괴팍하고 미련하다보니 20년간 활동하면서 주변사람들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나보고 인상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가 본데 실제 제 성격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몰아 부치고 혹독한 편입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실무자이자 도반들은 저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지요.

예전에 환경교육원에 있을 때 함께 일했던 간사들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6명이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보통 기가 ‘센’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회의는 언제나 전쟁이었지요. 한치도 자신의 의견을 접지 않았고 작은 일 조차도 세계관과 관점의 차이까지를 토론했어야 했으니까요. 그 과정에 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싸우면서 깊이 정이 들고 함께 계속 일을 해갈 수 있었습니다. 실무자 잘못 얻으면, 애물단지고 상전하나 모시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게 저에겐 큰 수행이 되었지요. 그럼에도 참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싸우는 것도 에너지가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제가 그 일의 주체라고 생각하면 실은 아무리 힘들게 한다고 해도 저의 일을 도와주러 온 고마운 사람입니다. 정말 고맙지요.




아무튼 그후 5-7년을 함께 일하다가, 그 중 한 여성간사분은 결혼해서 한 생협에서 출중한 환경활동가로 일하면서 정토회의 일을 돕고 있고, 또 그들 중 두 명은 박사학위를 받고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곳은 기독교 단체이지만 생명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내용적으로 함께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 곳에서 우리단체 출신들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지금 다른 형태로 관계를 맺고 정토회 일을 돕고 있지요. 지금 만나면 서로 어쩔줄 모르고 반가워하고 좋아하며 연락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옵니다. 그리고 부산의 한 교수님과 연구소 연구원은 이번 겨울방학에 아예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몇 달간 정토회의 전문적 일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들은 정토회가 고향입니다. 모두 친구이자, 형 동생이고 가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정토회에서 일하고 있고, 거쳐갔습니다.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정토회에 상근은 하지 않더라도 다른 단체에서 혹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관계맺는 방식이 변화되었을 뿐 다양한 형태로 정토회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활동가들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는 저같은 젊은 사람에게 매우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현장의 최일선에서만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과 운동에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계신지요.

정토회와는 달리 많은 불교활동가들은 일반사회인과 같은 생활환경 속에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잘 아시겠지만 경제적 여건이나 환경은 열악한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어떠한 이해나 극복의 지혜가 필요한 걸까요??

사람이 약해지는 것은 두가지 분별 때문입니다. 자꾸 비슷한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걱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살다가 먹고살기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지요.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원력이 약해집니다. 고민만큼 현재하고 있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에너지를 분산시키지요. 이 두 분별이 끊어지면 지금 하는 일을 미친 듯이 할 수 있습니다. 비전은 고민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정신없이 하다보면 만들어지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뭐 별건가요. 자꾸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고민하는건데, 까짓거 수많은 사람 중에 그저 별 볼일없는 한 인생이 이런 일하는거 뭐 별거 아니잖아요. 가볍게 던지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입니다. 아프간에 비하면 한 50배 넘게 잘살아요. 그곳에서는 정말 하루하루 생존의 문제가 턱에 찹니다. 저렇게도 사람이 사는데 한국과 같이 잘사는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한 인생이 못살겠습니까?

예전에는 개인에 대한 비전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이렇게 살뿐이지요. 과거에는 물질적인 진화로 급급한 것이 한국사회라면 이제 사회단체나 시민운동은 정신적인 사회진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예전에 운동하면 돈버는건 고사하고 감옥가고 고문당할거 두려워했지만, 이제 누가 그럽니까 오히려 좋은 일한다고 칭찬도 많이 듣잖아요. 그리고 사회활동한다고 웬만해서 굶어죽습니까? 너무 엄살들이 심한 것같아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인데도 말이지요.

과거 경제성장은 물건과 상품을 생산하는 상품시장의 확대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는 일종의 신념시장이자 도덕시장입니다. 상품시장이 포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신념과 도덕시장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무궁무진한 영역이 있습니다. 할 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돈벌 생각만 접어두면 훨씬 더 많은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어요.

"활동가의 삶 안정을 스님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불교의 주인은 스님이라 생각하는것..“

그리고 요즘 취업이 안된다고 난리들인데, 저는 아주 잘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돈벌려고 일하는 시대에서 자신을 구현하려고 일하는 시대로 변하는 하나의 징후이지요. 열심히 살다보면 돈은 저절로 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따라다니면 평생 인생이 돈으로 허덕댑니다. 대부분 돈을 굴리며 살아야 하는데 돈에 의해 굴려 다닌다니까요. 어떤 일이든 그길로 10년만 바닥을 기듯이 일하면 먹고 살길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걸 못해서 그렇지... 신념있게 살려면 처음에는 고생을 해야합니다. 그 정도도 안하려고 하면 도둑놈이지요. 그리고 10년 뒤, 20년 뒤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야기해 줄만한 자신의 전설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삶에 있어 자신의 신화도 있어야 하잖아요. 돈버는 일과 관련없는 곳에서 이름없이 생고생하면서 사는 것도 행복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요즘 사회는 벤처를 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나 개인은 벤처를 절대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밴처를 원하지 않는 부모 말 잘듣고 살면 인생은 망칩니다. 벤처(Venture)라는 것이 번역하면 ‘모험’이잖아요. 취업이 안된다고 하는데 대부분 직장의 일에 고생하거나 혼신을 다해 일을 하기 보다는 적당히 돈벌 생각을 하고, 더 많이 돈준다는 직장이 나오면 홀연히 떠날 생각하잖아요. 회사의 사장들은 그거 다압니다. 그런 사람 누가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취업하기 어려운거예요. 그런데 실제 직장이 없나요? 회사에선 사람이 없다고 난리잖아요. 하물며 돈벌이도 처음에는 오랜기간 돈도 투자하면서 고생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기간이 있잖습니까, 운동하는 사람이 구속되고 고문당하는 것도 개인의 삶 속에서는 투자입니다. 고생도 투자예요. 그런 과정을 많이 겪은 사람이 성공할 자격이 있고 성공해도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일확천금한 사람은 쌓은 공덕은 없이 복만 누리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나중엔 화가 됩니다.

사람이면 결혼도 해야하고 집도 장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혼도, 집도 당연히 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괴로운 거지요. 그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생각하면 편해집니다. 결혼도 그래요. 사람도 자기만큼 만나잖아요. 신념있게 살다보면 그 길에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길에 굳건하면 주변 사람이 나에게 맞추게 되어 있습니다. 변할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부인이나 가족이 흔들어대는 거지, 흔들어대도 안될 것같으면 오히려 그들이 변하고 배우자나 가족이 내쪽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그냥 나를 던져 버리세요. 그러면 됩니다. 해결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가난한 나라라면 모르겠는데 우리같이 잘사는 나라에서 뭘 걱정인가요? 자기 물질적 기대욕구가 많아서 문제지 그것만 내려놓으면 얼마나 하고 싶은 일하면서 풍요롭게 살수 있는데... 아프간에 있다보니 우리나라는 정말 괜찮은 나라입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돈에 찌들려 사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싶은 사람에겐 왠만한 강한 충격(Impact)이 아니면 어려운데 마침 사업이 실패해줘서 바로 그런 전환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 아닙니까.




불교 내에서 종단이나 스님들의 의식 속에서 재가사회활동가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엔 동의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해주면 좋지만 안해줘도 상관없지요. 스님들이 해줘야 하고, 종단에서 해줘야 한다고 실제로 (그냥 해보는 이야기가 아니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불교의 주인은 스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사부대중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정말 스님들을 잘 모시면 그런 자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스님과 재가가 대등하다고 말은 하면서 불교의 모든 책임은 스님에게 있다고 하면, 편익만을 요구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수행도 활동도 똑같이 해야지요.

/현재 불교계에 많은 활동가들이 있고 활동분야도 점차 넓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조언은 없으신지? 불교정보센터의 독자들이나 일반 대중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나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이제 한국사회에서 진보의 영역은 이제 넓어져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진보운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영역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자기나라의 이익에만 몰두한다면 전세계가 모두 맹렬히 비난할겁니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세계문제에 책임져야하는 정치적 경제적 지위에 올랐습니다. 국가나 정부의 인식보다 비정부기구(NGO)의 인식이 훨씬 폭넓고 유연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도 전지구적인 문제, 세계의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때 우리가 제3세계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느 누구도 가난한 나라, 그래서 잘사는 나라로부터 피해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아프간의 고통, 이라크에 문제, 버마나, 베트남 등 전쟁과 가난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는 연기적으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제 불교가 다른 사회운동보다 앞서가려면 세계의 문제로 적극 나가야 합니다. 저희 정토회 대학생회는 인도와 아프간 지원활동을 하다보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많이 옵니다. 참 좋은 학생들을 많이 만났고 그 분야에 많이 관심있어합니다.



요즘 대학생운동도 전망이 선명하지 못하고 활력도 떨어지잖아요. 그건 대학생 일반의 관심이 어학연수수다 배낭여행이다 국제화되고 있는데 진보적 대학생운동의 인식은 한국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용도 있지만 즐겁고 감동적인 곳에 사람이 모이는데, 비장하고 결의를 요구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오는 겁니다. 남을 돌아보고 걱정하다보면 자기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열심히 밖을 돕다보면, 그러한 분위기가 높아지면 불교내의 기운이 건강해집니다. 불교의 개혁에 일조하는 거지요.



지금 사회운동 속에서 지금만큼 주도력과 영향력을 불교가 발휘했던 시기는 없었던 것같습니다. 어쩌면 불교가 운동 뿐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가장 잘나가는 전성기의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만큼 깊어져야 하고 넓어져야지요, 사회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즐거웠고 재미있었다면 그 보답은 이미 받고 있는 겁니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과정지향적이고 관계지향적인 활동이 되어야 합니다.



아둥바둥 돈벌고 싶은데 취직도 안되고 해서 할수 없이 불교운동이나 사회운동하면 안됩니다. 돈도 못버는 사람은 운동도 못합니다. 그리고 돈버는 것이 부러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 밀려서 들어와 일하면 열등의식이 있어 당당하지 못합니다. 불교내의 사람이 적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거 아닙니까, 한사람이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만큼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회사나 사람 많은 곳에서는 수많은 사람 중에 그저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지만, 불교 내에서 한사람이 갖는 파장과 영향력은 큽니다. 그만큼 가시적 생산성이 크다는 거지요. 가볍게 그냥 일하길 바랍니다. 대단한 일을 한다는 상도 갖지 마시고, 온갖 분별갖지 말고, 무식하고 미련하게...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 활동하실텐데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필요하거나 있으면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요. 도움이 안되더라도 말씀을 한 번 듣고 싶습니다.

얼마전에 ‘실미도’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도 봤구요. 그리고 아는 사람의 소개로 ‘한씨연대기’라는 연극을 봤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내용자체 보다는 아프간을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우리가 3년간의 동족상잔의 전쟁이 50여년이 지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뿌리는 아픔과 서러움으로 남아있고, 그것이 영화나 연극이 대대적인 성공을 이룰 정도로 정서적공감대를 만들고 있는 걸보고, 그보다 더한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의 속내는 어떨까를 생각했습니다.

소련과 10년간의 무자헤딘활동, 그리고 13년간의 내전, 종족간의 전쟁, 종교전쟁등 총 23년간 진행된 아프간의 전쟁속에서, 내가 아프간에서 알고 있는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은 식구 중에 최소한 1-2명 많게는 6-7명이 죽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황량한 카불시내 곳곳에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곳곳, 특히 사막의 평야 가운데 우뚝 수많은 푸른깃발의 무덤들이 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이들의 원혼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참 가슴 에이는 아픔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3년간 싸운 우리가 이 정돈데, 23년 싸운 이들은 오죽할까. 우리 함께 일하는 아프간 스텝인 ‘모하메드 하심’은 소련의 폭격으로 어머니와 3명의 여동생이 죽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현지 스텝입니다. 참 성실하고 재미있고 속깊고 귀엽기까지 한 그는, 다 좋은데 아버지와 관계가 나쁩니다. 아버지는 65세인데 그가 40 넘어서부터 일을 안하고 아들인 자기에게만 의지 하고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집이다 땅이나 자식에게 물려주는데 본인은 하나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도 없고, 오히려 아들인 자기에게 계속 투정만 하고 불평만 하고 며느리를 못살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소련폭격으로 자기 부인과 딸 셋을 여읜 그는 이후 ‘돈을 벌어야 할 의미가 없다’는 말을 했을 때는 모든게 너무도 확연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심의 아버지 마음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의 앙금은 더 이상 삶의 의욕도 희망도 없이 절망 속에 지금껏 살아온거지요. 이곳에 술이 없으니 망정이지 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원한을 잊기 위해 알코올중독 폐인이 되었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아프간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이라크는 아프간보다 그래로 잘사는 나라입니다. 현재 세계어디에도 아프간같은 나라는 없습니다. 물론 후원 많이 해주세요. 일단 오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활동을 하러 오셔도 좋습니다. 잘사는 나라만 가서 어학연수하지 말고 이런 곳에 와서 젊은 날 자신을 태우는 경험도 소중한 삶의 힘이 됩니다.

아하, 그러나 자원봉사하시려면 정토공동체에서 최소한 49일은 살면서 사전 교육을 받아야합니다. 그런 과정없으면 공연히 와서 분별만 내고 이곳에서 일하는 우리들의 힘만 들게 할수도 있습니다. 49일 살려면 3일간 1만배 기도해야 합니다. 절차가 복잡하지요? 그러나 한사람과 안한 사람과는 다릅니다. 이래서 정토회를 폐쇄적이라고 하나?


/오랜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몸조심 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불교정보센터에 가끔 소식도 전해주시고요...



인터뷰 : 김 동 훈 (사단법인 우리는 선우 기획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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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토회(淨土會)는 1988년 정토포교원을 개원으로 시작된 법륜 스님이 지도법사로 있는 불교수행공동체이다.

정토회는 대승 불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종교와 사회운동 두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라 하면 개인의 완성 즉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사회운동의 영역은 사회의 완성 즉, 사회 변화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정토회는 이 영역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활동을 한다.

정토회에 참여하는 개인은 불교 수행법에 의해 기도하며 종교생활을 한다. 그러나 종교를 불교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활동하고 있는 사회영역은 국제구호, 통일, 환경의 영역이다. 그래서 산하단체로 국제구호민간단체인 한국JTS, 좋은 벗들, 에코붓다를 설립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정토회
(한국어) 청년정토회 - 정토회 청년단체.

분류:
대한민국의 단체
불교 단체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 단체











2020/02/07

15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Interview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7-21 15:21:00



2015년 0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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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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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믿는 것보다 안 믿는 게 낫다
● 경탄하고 감격하라, awesome!
● ‘참나’ 찾아 ‘자유’ 얻는 게 심층종교
● 행복의 원천은 성찰이 주는 ‘아하!’의 삶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권위가 전만 못하다. 존경할 만한 종교 지도자도 찾기 어렵다. 오강남(74)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된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비교종교학자다. 그는 1971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줄곧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동아일보’ 2001년 10월 11일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오강남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교회 문턱을 넘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미션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종교학과에 진학해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의 믿음은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슬람이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게 사실인 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유학을 한 후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한문을 다시 공부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그는 자기 안에서 ‘기독교와 타 종교가 대화하는’ 핵융합의 과정을 겪게 된다. 예수님의 성령체험이 ‘성불(成佛)’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노장에서 말하는 ‘붕새처럼 변화와 초월의 체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아니겠냐는 인식이었다.”

오 교수가 2001년 한국에서 출간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은 파문을 일으켰다. 요지는 “역사적 예수는 있었으되 오늘날의 교회가 가르치는 그런 예수님은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저술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1947~2010)다. 가수 조영남(70)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억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강남 교수는 글로 먼저 만났다. 목사가 되겠다며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미주지역 순회공연을 하던 1980년으로 기억한다. 공연을 마치고 우연히 누군가가 소일거리로 읽으라며 던져준 교포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읽고는 섬뜩해졌다. 당장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나섰다. 그는 내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한국인의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특별한 사람이다.”

오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캐나다 맥매스터대 대학원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 변화를 경험했다. 서울대 규장각과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섰고,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14년 전보다 지금 한국 종교의 위상은 더 후퇴한 듯 보인다. 기독교 신자가 감소한다. 기독교와 불교 공히 사회적 소통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출간한 저서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는 때로 집단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국가 간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번영만을 위한 종교, 권력에 기생하거나 스스로 권력화한 종교, 양적 대형화에만 골몰하는 종교. 과연 종교란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7월 2일, 그에게 물었다.

▼ 종교란 무엇입니까.

“수없이 많은 답이 있겠으나, 간단히 대답하라고 한다면 ‘우리가 통속적 안목으로 볼 수 없는 실체의 더 깊은 차원을 발견해 더 큰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는 수단’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불교로 말하면 부처님이 4가지 진리(四聖諦)를 깨침으로써 고통에서 자유스러워지라고 한 것, 그리스도교로 말하면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욕심과 미망으로 가려진 눈을 떠 사물을 더욱 명확히 보면서 그만큼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종교기업’

▼ 한국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압도적 크기의 교회 간판이 보입니다. 어둠이 깔리면 십자가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교회도 이 시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흐름에 영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십자가 물결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고 봐요. ‘종교기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좀 다행인 것은 요즘에는 붉은 십자가 대신 흰색, 노란색 십자가가 이따금 눈에 띈다는 거.(웃음) 십자가를 보면 그것이 예수가 달려 죽은 로마의 형틀이라는 생각 대신, 다석 류영모(1890~1981·교육자 겸 종교인) 선생이 말씀한 것처럼 ‘인간이 대지를 뚫고 하늘과 하나 되고자 위로 솟남을 뜻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의미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요.”

다석이 설파한 ‘솟남’은 기독교의 부활, 불교의 해탈에 비견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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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기독교도입니까. 한국의 일부 개신교도는 교수님을 배교자(背敎者)로 여기기도 합니다. 박사학위 논문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는 불교 및 노장사상을 넘나들었고요.


“어머니가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에 다니셨는데, 덕분에 저도 그 교회에 다녔습니다.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할 때도 기독교 극보수주의 교수님의 강의를 많이 들었고요. 머리가 커지면서 어머니가 다닌 교회에서 가르친 것, 그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사상에 몰두했으니 캐나다에서는 동양 종교를 전공으로 택하기로 하고 불교, 힌두교, 노장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했어요. 그러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졌습니다. 불교를 전공 분야로 삼았고, 말씀한 대로 화엄의 법계연기를 학위논문 주제로 택했지요.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다닌 교회의 가르침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글로도 써야 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갖고 있던 교적(敎籍)을 철회해달라고 교회에 요청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배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특정 종교나 교파를 헐뜯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교적이 없어 어느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하지 않은 셈입니다.


현재는 캐나다 연합교회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합니다. 한국에 머무를 때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에서 주관하는 ‘일요 경 모임’에서 종교 경전을 읽습니다. 이곳저곳의 교회나 교역자 수양회, 사찰에서 초대받으면 가서 강연합니다. 개인적 이력을 물은 것 같아 사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겸연쩍습니다.”


▼ 한국 불교의 상황도 신자 수가 줄어드는 기독교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복(祈福)적 성향도 강하고요. 사업 잘되게 해달라,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며 시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찰(大刹)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요.








“그렇지요. 뜻있는 스님들이 직접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불교계가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지 않는 건 알지만, 정법대로 해서는 사찰을 운영하지 못 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속의 佛性, 神性


▼ 나와 내 가족의 복을 바라는 신앙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가족의 평안을 간구(懇求)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 종교는 나와 내 가족이 잘살고 싶다는 소망을 심리적으로 충족시켜줘야 하고요.


“물론 종교에 그런 면이 있어요. 종교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수단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진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종교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한국 교회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웃에 배타적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같은 어구(語句) 탓에 비(非)종교인이 기독교를 삐딱하게 바라봅니다.


“영적 눈을 떠서 사물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중 하나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속에 신성이나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의 근본은 우리가 이런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이라고 하겠지요. 불교에서는 우리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 속에 신성, 혹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고, 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고 해서 우리가 ‘한울님’을 모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내가 하늘과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나아가 천도교에서 말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처럼 남을 하늘 섬기듯 대하게 됩니다.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이런 기본 가르침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 진리를 가졌다, 자기들만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는 등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곤란합니다. 봉은사역 역명 논란, 탱화에 낙서하기, 땅 밟기 기도 등 일부 기독교도의 행동은 기독교와 기타 종교들의 기본 진리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땅 밟기 기도는 일부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의 성소에서 예배를 올리는 의식이다. 또한 기독교 목사가 대구 동화사 탱화에 낙서해 논란이 인 적이 있으며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명명을 두고 불교계와 기독교계가 갈등을 빚었다.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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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여하는 神’ 관념 수정돼야”

▼ 지난해 6월 문창극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 등으로 인해 낙마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할 만한 발언이라고 여겨지지만, 비(非)기독교인은 이러한 견해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비(非)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담스러운 발언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나 미국·소련의 분단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6·25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내지 미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다면 독립을 위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싸운 운동가나 남북분단 상태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이가 되는 셈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관은 함석헌 선생이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본 것과 판이합니다. 함 선생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함께해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니 이제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하면서 이 고난의 역사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역설한 반면, 문 후보자는 우리 민족은 나태하고 무기력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나 미국의 개입 등 외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도움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항과 자존의 역사냐, 숙명적 외세 의존의 역사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뭔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와 바울이 말씀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를 꼽고 싶습니다. 종교에서 중요한 대목은 할례나 기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변화(transformation)를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장자’ 첫머리에 물고기가 변해 붕(鵬)이라는 큰 새가 되어 구만장천을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가 줄 수 있는 초월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 ‘닫힌 종교’가 아닌 ‘열린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느 특정 시대, 어느 특정 사회를 배경으로 생겨난 종교관을 비롯해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등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롭게 이해돼야 합니다. 하나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특수 교리는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특별한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 혹은 절대자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해요.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해 신이 인간사 하나하나에 직접 관여한다는 ‘관여하는 신(Interventionist God)’ 같은 신관(神觀)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열어놓음’이 중요합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 종교에는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 병존하게 마련입니다.

“표층종교가 지금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힘쓰는 자기중심적 종교라면, 심층종교는 나의 ‘참나’를 찾아 지금의 나로부터 자유를 얻고 나아가 이웃을 위해 힘쓰는 타인 중심적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표층종교가 신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고 나와 나의 집단이 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것과 대조적으로 심층종교는 신과 나,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를 중요시합니다. 표층종교가 경전의 문자에 매달려 나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심층종교는 문자 너머의 속내를 발견하려 노력하고 나와 다른 해석에 열린 태도를 가집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표층종교로서 종교생활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거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표층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심화 과정을 거쳐 종교가 줄 수 있는 시원함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종교에나 존재하는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표층종교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종교적 근본주의는 폭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근본주의 그룹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조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라는 게 교황의 설명인데요. 한국 가톨릭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가톨릭 지도자들이 가진 의식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신학자 한스 큉처럼 근본주의에서 벗어난 진보적 가톨릭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처럼 비교적 보수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압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진보적인 신부들이 있지요.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는 보수 경향이 강한 분들이 이끈다고 들었습니다.”


3/6








교인 성장률 1600%의 배경


▼ 한국 기독교는 교수님이 비판하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가르치곤 합니다. 기독교는 20세기 초 한국이 개명(開明)에 나섰을 때 도움을 줬습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웠고, 독립운동과 기독교가 연결됐습니다. 1970~80년대에는 그리스도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70년대 10년 동안 교인 성장률이 1600%가 넘은 교회도 있습니다. 근본주의 신앙 덕분에 공격적 선교가 가능한 측면도 있었던 듯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러 면으로 공헌한 바가 컸습니다. 교육, 의료, 독립운동, 계몽…. 그러다 1970~8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하면서 전통적으로 친숙하던 농촌 공동체 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한 도시생활에서 소속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에서 새롭게 소속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어요. 더욱이 사람들 사이에 자본주의 가치관이 팽배하면서 부유해지려는 마음이 더 뜨거워졌는데, 교회에서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물질적 축복이 보장된다는 식으로 부채질을 한 셈이지요. 이것이 교회가 기복적으로 경도된 주원인이면서 교인 수 증가의 동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나 사회적, 심리적, 건강상의 소망을 교회가 아니더라도 채워줄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그런 필요에 의해 교회에 다니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자주의에 입각한 공격적 선교에도 한계가 오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 성경의 문자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보는 대로’가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전을 읽는 것은 그것을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가 아니라 ‘나는 성경을 이렇게 읽었다’고 해야 합니다. 경전이란 문자적으로 객관적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내 눈높이에서 읽고 이해하도록 구성됐어요. 이해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해야 하고요. 한국 교회의 큰 문제점이 성경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나요.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책 ‘신 없는 사회’를 보면 라디오, 텔레비전에 나온 목사들이 죄악에 물든 이교도를 저주합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하고요. 경찰서장이 범죄율 증가가 사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느 주지사는 자연재해에 기도로 대처하라고 호소하더군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시작을 알리면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신께서 미국을 변함없이 축복하시길”이라는 말로 연설을 마친 것도 떠오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회입니다. 유럽에서 근본주의가 거의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에는 아직도 기독교 근본주의가 살아 있지요. 주커먼 교수가 지적했듯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는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북유럽 사회가 범죄율, 문맹률, 행복지수, 복지수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을 앞섭니다. 교회 출석률이 높은 미국 남부 ‘바이블 벨트’ 지역 주들의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근본주의에서 말하는 신들을 앞세우면 결국 ‘신들의 전쟁’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사회제도를 개선하거나 복지제도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들만의 신’ ‘만들어진 신’

주커먼에 따르면, 북유럽에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거나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후 부활했다든지 하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게 그들이 말하는 종교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품위 있는 도덕과 가치관이 담긴 책이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는 소수의 북유럽 사람들도 대체로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은 생전에 “모든 이교(異敎)의 군대가 무함마드의 땅을 떠나기 전까지는 미국이 결코 평화로울 수 없을 것을 신께 맹세한다”고 다짐하면서 “신은 위대하다. 영광이 이슬람에 있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리아·이라크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슬람국가(IS)는 형제 격인 시아파마저 ‘불순한 이교도’라고 여깁니다. 불교나 힌두교와 다르게 유일신교인 크리스천과 무슬림은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내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여기는 건데요. 그렇다면 ‘오직 한 분’인 하나님, 다시 말해 ‘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요.

“그들이 말하는 신들이란 대부분 ‘만들어진 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 격으로 받드는 신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각자의 견해일 뿐이지요. 그들만의 신관(神觀)입니다. 궁극실재로서의 신,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고를 초월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밝힙니다. 말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신관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만진 것만을 절대화하는 대신 서로 둘러앉아 각자 만진 것을 이야기하면서 실물 코끼리에 근접한 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종교 간의 화해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세계 평화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4/6
‘awesome!’을 외치는 삶

▼ ‘그들만의 신관’은 ‘부족신관(部族神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성경의 구약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전투지휘관이 돼 다른 민족을 정벌합니다만….

“그렇지요.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 자기 집단만을 위한 신을 받드는 게 부족신관입니다. 지금도 가령 운동경기를 하면서 자기 팀이 이기기를 신께 비는 것, 자기 종교만을 사랑하는 신을 받드는 것은 부족신관의 잔재라고 할 수 있지요. ‘도덕경’에서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예수님도 하느님은 의인의 밭이나 악인의 밭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이 무조건 내 편,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은 망상인 셈이지요.”

▼ ‘신 없는 사회’가 오히려 평화롭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표층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봐요. 잘못 믿는 것은 안 믿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주커먼 교수가 지난해 ‘Living the Secular Life(종교 없는 삶을 살다)’를 썼습니다. 이 책은 경탄하고 감격하는 삶, ‘awesome(기막히게 좋은)!’을 외칠 수 있는 삶이 권위에 의존적인 종교적 삶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바꾸면 성찰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아하!’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2012년 출간한 ‘종교를 넘어’에서 종교적 계율에 따라 강제되는 삶보다 선한 일을 할 때 더 행복하다는 기본 원리에 입각한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한물간 패러다임에 입각한 옛 신관이나 세계관, 가치관에서 벗어나 생명, 평화를 기본으로 여기고 삶을 사는 세계시민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 앞서 ‘장자’의 붕(鵬)과 ‘도덕경’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언급했는데, 노장사상이 21세기 한국과 세계에 도움을 줄 것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노장뿐 아니라 여러 종교의 심층이 활성화해야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지만, 노장이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에 기여할 대목을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첫째, 도(道)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노장의 실재관은 오늘날의 세계관과 부합하는 점이 많습니다. 둘째, 도를 어머니나 여성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는 등 여성성을 강조합니다. 셋째, 자연은 신비스러운 기물이므로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하는 환경보호 내지 생태적 관심을 가졌습니다. 넷째,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면서 폭력, 전쟁을 반대합니다. 다섯째, 꾸미지 않은 통나무처럼 욕심을 줄이고 순리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여섯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면서 진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종교 같은, 종교 아닌 종교

▼ 한국 사회는 이념, 정치 성향에 따라 편갈림이 심합니다.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쟁은 요즘 말로 고치면 다원주의(pluralism) 혹은 시각주의(perspec tivalism)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동일한 사물이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자는 뜻이에요. 똑같은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모양이 다릅니다. 둘 중 하나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지만,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싸움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화쟁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사상이다. 대립과 모순·쟁론을 조화·극복해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 원효는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화쟁 이론을 전개했다.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도 한다.

▼ 스님이 중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중생이 중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 파문 탓에 시끄러웠습니다. 기독교 교단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는 금품 살포, 상호 비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종교가 ‘소금’ 구실, ‘목탁’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세태를 어떻게 봅니까.

“어느 스님이 그러시더군요. 지금 한국 종교는 기업만도 못하다고. 기업은 돈을 번다는 것을 떳떳이 밝히고 돈을 버는데, 종교는 거룩함이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오히려 기업보다 돈 벌기에 더 혈안이 된 상태라고. 종교가 물질만능주의로 변질되거나 권력화해 생기는 부작용이겠지요. ‘종교 같은 종교가 아닌 종교’를 보고 있다고나 할까요”.

▼ 우리는 종교를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통해 더 큰 자유를 누리는 특권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적,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상 너머에 있는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과 불의의 원인을 꿰뚫어 살펴보고 이런 현상을 타파하는 것도 종교가 할 일이라 봅니다.

인간의 근본적 사명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종교라면 존재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선불교에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침으로 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조상도 죽이라는 뜻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잘라버리라는 말이지요.”

▼ ‘종교는 궁극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변화하는 체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쉬운 말로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변화된 개구리,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개구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 항해하지 못하다가 바다의 실재, 곧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멀리까지 항해할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생각하는 백성’

▼ 한국 종교가 어떻게 나아가기를 바랍니까.

“지금까지 이렇게저렇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요약하면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돼야 하겠지요.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 같은 이는 그리스도교가 심층적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 남양주시의 어느 큰 스님도 기복 일변도 종교로서의 불교는 역할이 끝났다고 말씀하더군요. 생각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종교의 심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 개인은 종교와 관련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영성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과정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캅 교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물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동방정교에서 행하던 예수기도(Jesus prayer),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선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지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過程神學)은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사조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신도 변화해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헌금은 ‘욕심 줄이기’ 연습

▼ 헌금은 왜 하는 겁니까. 십일조는….

“히브리 성서(구약) 마지막 책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생각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1000만 원이 필요하면 미리 100만 원을 바치고 1000만 원이 들어올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헌금은 이처럼 내가 얼마를 내고 신의 축복으로 그 몇 배로 튀겨서 받는 투자나 투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욕심을 줄이는 연습이고,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겠다는 인류 공동체 의식의 함양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종교기관에 바치는 것이 그것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로 나뉘어 있을 때 각 지파가 수입의 10분의 1을 제사장 족인 레위지파에 바치는 제도에서 비롯했습니다. 레위족은 그것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습니다. 당대에는 일종의 세금이었던 셈이지요. 오늘날 십일조를 강제로 바치게 한다면 이중과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만, 수입 일부를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사용하도록 적절한 곳에 바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2020/02/04

오강남 - 함석헌 무교회에서 퀘이커교로



함석헌기념사업회



신천 함석헌 / 오강남
작성자 바보새 16-07-19 10:54 조회1,039회 댓글0건


신천 함석헌
민주화에 앞장섰던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법보신문 2011.03.26 11:42 입력 발행호수 : 1089 호 / 발행일 : 2011년 3월 23일


한국역사를 고난의 견지에서 재해석
종교개혁은 동양고전을 통해서 가능
‘씨알의 소리’창간 군부 독재에 맞서




▲함석헌은 1974년 윤보선(왼쪽에서 세번째), 김대중(왼쪽에서 네번째)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 고문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다.






다석 류영모가 가장 아꼈던 제자가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이고 함석헌이 가장 존경했던 스승 또한 류영모였다.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고 수염을 길렀다. 근본 사상도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스승 류영모에 비해 키도 크고 외모가 출중했다. 류영모는 삶이 은둔적이고 금욕적이라면 함석헌은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신비주의 전통의 용어를 빌리자면 함석헌은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평안북도 황해 바다가 용천에서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6세 때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댕기머리를 잘랐다. 그는 사립초등학교에서 ‘하느님과 민족’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16세에는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의사가 될 목적이었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1901년 평북에서 출생

함석헌은 평양고보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수리조합 사무원, 소학교 선생으로 일해야 했다. 21세가 되던 해 다시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어디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집안의 형님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나, 정주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 할 수 있었다. 그는 그해 늦여름 류영모가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평생의 스승을 만나게 됐다. 그는 이때 류영모를 통해 기독교뿐만 아니라 노자와 같은 동양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으로부터의 믿음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교조주의로 흘러가는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가지게 됐다.

그는 1924년 지금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스승 류영모에 의해 익히 들었던 인물이었다. 그 모임은 별도의 예배 없이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했다. 함석헌은 이곳에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번민에서 벗어나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1928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오산학교로 돌아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역사란 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일 뿐 아니라 한국 역사가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이어서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과 낙심만 심어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난의 메시아가 영광의 메시아라면,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다시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 역사의 기조(keynote)를 고난(suffering)으로 보고 이런 역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역사를 재해석해 낸 것이다. 후에 우치무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했던 유학생들이 귀국해 성서연구모임을 만들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함석헌은 고난의 견지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명작이다. 이 책은 나중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나왔고 영문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는 오산학교에 10년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무교회 신자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무교회도 하나의 교파로 굳어갔다. 또 우치무라에 대해서도 개인숭배 현상마저 일어나자 반감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강조하는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오산학교에 있으면서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농촌을 살려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1936~1937년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정점에 달하면서 오산학교 관계자들도 점차 총독부와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송산농사학교로 옮겨갔으나 설립자가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에 따라 덩달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해방 전에 4차례, 그 이후로도 3차례 옥고를 치렀다. 비록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사상적으로 심화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불교 경전을 읽었고 노장 사상을 숙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를 수도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에서 깨달은 바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 누가 받을까. 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風)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 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 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 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함석헌은 “기성 종교는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관련되었기에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나 예수 탄생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지금도 동방에서 새로운 정신적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한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무교회에서 퀘이커교로

함석헌은 해방 후 강권에 의해 임시자취위원회 회장이 되고, 이어서 평안북도 임시정부 교육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는 수난을 겪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는 월남 이후 무교회 친구들의 협력으로 일요 종교 강좌를 열어 1960년까지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의 생각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그의 무교회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주된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부정하고, 기도하지 않고, 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고, 기도도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공중기도를 삼갈 뿐이라고 했다. 또 동양 종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에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 결국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심층 종교로 들어가는 함석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구태여 무교회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무교회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중대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오산 시절부터 간디를 좋아해 간디 연구회를 만들 정도였는데, 동지들 사이에서 간디의 아슈람 비슷한 것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고 젊은 몇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이 때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형세는 돌변했다. 친구들이 모두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 그러면서 관념적으로 믿고 있고 감정적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스승 류영모마저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끝내 그를 내쳤다. 그러나 물론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석일지’에 보면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이별인가.”하며 탄식하는 등 7~8회에 걸쳐 제자 함석헌을 그리는 글이 나온다. 류영모는 “내게 두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겉으로는 스승으로부터도 버림받아 홀로 된 그에게 퀘이커교가 나타났다. 퀘이커교에 대해서는 오산 시절부터 들었지만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 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퀘이커교도들을 만나 처음으로 퀘이커교 신도가 된 이윤구를 통해 퀘이커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교 모임에 나갔다. 

1961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퀘이커교 훈련 센터인 펜들힐(Pendle Hill)에 가서 열 달 동안, 비슷한 성격의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브루크(Woodbrooke)에 가서 석 달 동안 지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퀘이커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에서 열렸던 퀘이커교 세계 대회에서 결국 퀘이커교 정회원이 되었다.

간디 존경…씨알농장 열어

함석헌은 류영모와 달리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961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단에 초빙되어 5·16 군사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잡지 ‘씨의 소리’를 창간했다. 그의 ‘씨 사상’을 널리 펼치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8년 만에 복간되었다. 군사 정권에서는 군사 독재에 맞서서 1974년 윤보선,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역을 맡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런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교 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는 1989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산학교장으로 치러진 그의 몸은 경기도 연천읍 간파리 마차산에 묻혔다. 그러다가 2002년 8월15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면서 대전 국립 현충원에 이장됐다.




함석헌은 동서고금의 정신적 전통에서 낚아낸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생명, 평화, 민주, 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였으며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 그는 류영모의 제자이지만, 어느 면에서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했다는 의미에서 ‘청출어남이청어남(靑出於藍而靑於藍)’의 경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불교포커스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불교포커스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이웃종교의 향기 신년기획 1] 퀘이커 서울모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승인 2014.01.1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www.catholicnews.co.kr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승인 2014.01.07 11:17:40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에 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2020/02/03

손원영 내가 꿈꾸는 교회(65): 동학과 신서학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

(8) 손원영


내가 꿈꾸는 교회(65): 동학과 신서학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

1860년 4월 5일, 최제우는 경주의 용담정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비한 음성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최제우는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세상 사람들이 ‘상제’라고 부르는 하느님이다.”

최제우가 다시 묻는다. “그럼 당신은 서학에서 말하는 ‘천주’와 같은 분입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또 소리가 들려오기를, “그렇다. 천도는 같다.” 그러자 최제우는 다시 묻는다. “그럼 제가 서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또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다. 너는 조선 땅에서 태어났으니, 서학이 아니라 동학을 하라. 서학의 이치와 동학의 이치는 다르다.”


그렇게 하여 동학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제우의 하느님 체험 이야기를 필자가 약간 풀어쓴 것이다. 최제우의 이 신비체험을 우리가 신뢰한다면, 동학이 섬기는 하느님과 기독교가 섬기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다. 다만 그 하느님을 설명하는 신학이 서학과 동학으로 서로 다를 뿐이다. 즉 동학과 서학은 서로 다른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부모에게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형제랄까?

흥미로운 것은, 동학을 심도 깊게 연구한 김상일 교수는 그의 책 『동학과 신서학』(2000)에서, 동학이 비판한 19세기 서학이 이제는 새로운 신학적 발전을 이뤄 ‘신서학’(新西學)이 되어 동학과 여러 면에서 비슷해졌다고 주장한 점이다. 특히 ‘과정신학’(process theology)과 같은 신서학은 신관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동학과 상당 부분 유사해졌으므로 형제애로 서로 연대하며 협력할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최제우의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시작된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통해 희망을 잃어버린 조선말 많은 민중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은 1894년 동학혁명을 통해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개입으로 30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고 동학혁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3·1독립운동이다. 특히 이때 동학은 기독교와 비로소 하나의 형제가 되어 대한독립을 외치는 위대한 ‘연대’(solidarity)를 이루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사상의 연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마중물이 된 것이다! 즉 대한민국은 동학과 기독교의 위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919년 4월 11일 3·1운동의 결과로 상해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동학과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얼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모판이 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동학의 인내천 정신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하였고,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 정신과 합류하여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재폭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4·19혁명과 5·18광주항쟁 그리고 6·10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하늘과 같은 고귀한 존재인 국민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동학과 기독교 정신은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워서 독재와 비민주적 정권의 타락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것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4·19, 5·18, 그리고 6·10사건의 깊은 심연 속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내천과 자유와 평등사상을 토대로 한 민본의 혁명은 거의 실패하였거나 미완의 혁명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의 혁명이었고, 3·1독립운동 역시 실패의 외침이었다. 4·19와 5·18, 그리고 6·10민주화운동 역시 절반의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혁명이 있은 후, 완전한 민주정부를 탄생시키지 못한 채 군부의 탄압과 기만으로 군부정권이 연장되는 비운을 겪었기 때문이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한’(恨)의 역사이다.

하지만 인내천과 자유와 평등사상의 위대한 승리가 얼마 전 쓰였다. 바로 2016년 촛불혁명이 그것이다. 특히 지난 2016년 촛불혁명은 필자가 보기에 첫 번째 온전한 동학 정신의 성공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1894년 동학혁명 이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인내천의 혁명이 2017년 대선을 통해 비로소 첫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탄생은 단순히 민주당 정부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승리요 또 인내천 사상을 설파한 동학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촛불혁명의 승리를 통해 불기 시작한 인내천의 기운은 이제 놀랍게도 한반도 전체로 번져 평화와 통일의 횃불이 되고 있다. 70년 이상 분단되고 또 적대관계였던 남북한이 드디어 인내천의 정신으로 비로소 화해와 평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하늘의 이 뜨거운 기운을 막을 수 있겠는가? 최제우가 1860년 설파한 인내천의 정신이 이제 비로소 한반도에서 온전한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너무나 가슴 설렌다.

따라서 과거 3·1운동에서 한 형제로 피를 나눈 동학과 기독교는 이제 다시 하느님의 한 형제로서 연대의 공동체가 되어 이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실현을 위해 씩씩하게 서로 협력하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교회는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듯이”(시 85:10), 이제 동학과 신서학이 한 형제임을 자각하며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함께 뜻을 모으는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3호』 (2018/06/12)




68Paul Dongwon Goh, Sunghwan Jo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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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Young Kim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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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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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듯이~
한울안 한이치....한형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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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넵!!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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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Dongwon Goh https://books.google.com.au/.../Su_un_and_His_World_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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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un and His World of SymbolsSu-un and His World of Symb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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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Dongwon Goh https://ytu.edu.au/.../prof.../paul-beirne-ma-mdiv-dmin-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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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Beirne, MA, MDiv, DMin, PhDPaul Beirne, MA, MDiv, DMin,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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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고박사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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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손 교수님, 적극 동감.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부 기독교 세력이 이런 인내천 평화 화해 정신에 역행하여 소란을 피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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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Kang-nam Oh 공감 감사합니다.ㅎ 그러게요 저도 한국교회의 미래가 많이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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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내가 Beirne의 동학 영부 해석을 비판하고 새 학설 제기했지요. 내 책 2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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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Kyoung Kim 인내천 사상과 요한복음 비슷하지유. 이런 비슷한 성서해석을 1998년에 써서 출판되었지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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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Park 아 너무 좋습니다 공유합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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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수운의 상제 체험에 대한 너무 기독교적인 해석^^. 천도교나 증산교나 원불교에서는 수운의 체험을 그렇게 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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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 February at 07:16 ·



내가 꿈꾸는 교회(64): 계시의 공동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해명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이 문제를 ‘계시’와 연결하여 설명하곤 하였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하나님과 유한한 우리 인간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먼저 자기를 제한시켜 우리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우선성 곧 하나님의 ‘주도권’(initiative)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실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베일을 벗는다(revelum; to unmask)’는 의미에서의 계시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이 ‘완전히’ 마치 벌거벗은 누드처럼 총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그러한 계시는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언급하였다.(요 1:18a)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초자연적인 직접적인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것을 일컬어 신학에서는 ‘계시의 간접성’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등만을 보여주신다.(출 33:20~23)

그리고 예수께서도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 14:9~11)라고 말씀하시며 의심하는 제자 빌립을 꾸짖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의 등(back)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의 삶과 그가 행한 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실천(praxis)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등’이 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성을 함축적으로 잘 설명해 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등을 뵙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분의 얼굴을 뵐 것이요”(마 5:8)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청결하게 닦은 뒤 우리의 영적인 눈을 활짝 떠서 그 분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시의 간접성은 어떻게 달리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계시의 다양성과 함께 하나님의 자유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계시의 다양성이다. 계시는 세상의 무언인가를 ‘매개’ 혹은 ‘매체’(media)로 한 간접적인 계시란 점에서 다양성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마치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고 주장하는 맥루한 같은 매체학자들의 언급처럼 미디어의 다양성은 신의 메시지의 다양성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매개를 통해 세상에 숨겨진 것을 폭로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래서 계시는 이 세계의 탈은폐 사건이다. 곧 하나님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와 서로 낯선 게토화된 타자들 사이의 열린 의사소통, 그리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해방되는 진정한 자유의 사건 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는 떼제의 노래는 계시의 간접성을 제시한 아주 좋은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들려오는 노랫말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다양한 매개를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전제되지 않은 매체들은 단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히 11:6)

하지만 우리가 신앙으로 모든 매체들을 바라볼 때, 산은 산이 아니고 또 물은 물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분의 현존을 중재하는 ‘성례전적 존재’(sacramental being)가 된다. 이와 같이 아주 작은 매개조차 신적 계시의 통로로 인식될 때 이 세상은 신성이 가득한 아름답고 거룩한 신의 정원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이 여러 매개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신다고 믿는 신앙의 공동체이자, 나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기꺼이 사용되기를 염원하는 계시의 공동체이다. 이런 점에서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노래한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바라는 신앙공동체의 자기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계시의 어원이 ‘베일을 벗음’ 혹은 ‘탈은폐’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와 다름 아니다. 진리를 의미하는 희랍어 ‘알레세이아(aletheia)’는 ‘탈은폐’ 곧 ‘망각을 벗어남(a-letheia)’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계시와 진리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즉 계시자로서 예수께서는 바로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리고 계시자에 의해 전해진 진리는 해방의 효과가 있다고 언급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이처럼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계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의 인식을 통해 자유를 얻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숨겨져 있는 거짓과 무지 그리고 망각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진리 추구의 과정은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한 형태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얻어진 진리의 빛에 우리의 영혼이 환하게 조명될 때 인간은 비로소 참 자유인이 된다. 아,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런 점에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바로 이런 계시의 공동체로서,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추구의 공동체요 동시에 참 자유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4호』 (2018/06/19)




53Paul Dongwon Goh, Kwon Sun Phil and 5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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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K. Joe 참으로 아름다운 진리의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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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1 January at 22:31 ·



<감사> 레페스심포지엄 및 아시아종교평화학회 출범

1. 한 개신교인에 의해 훼불된 김천 개운사 불당회복을 위한 모금운동이 있은 지 만4년이 지났다. 그 결실로 레페스심포지엄이 만들어졌고, 또 그 모임이 발전하여 이제는 아시아평화를 함께 논의하는 국제학회로 발전하였다. 감회가 새롭다. 하느님의 깊은 뜻이 분명 있는 것 같다!

2. 이번 행사는 3박4일 일정(1.30-2.2)으로 일본의 나고야에서 개최되고 있다. 일본측 종교인들과 교수님들의 융숭한 환대 속에 심도깊은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어 넘 기쁘다. 종교분야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아시아의 평화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는데,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일본 종교 지식인들이 보여준 평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과 한국인에 대한 사죄의 표현들은 새삼 마음에 크게 다가왔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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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7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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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gatzschev Muhschienn 와우~~ 세계로 뻗어가는 손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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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1 reply


민성식 돌아오시면 사진과 기사자료 보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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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혁 창립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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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on Paul Joo 사건이 발아하여 이제는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앞으로 귀하게 자라고 열매맺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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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1 January at 08:23 ·



내가 꿈꾸는 교회(63):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적 저항의 공동체

지난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 해 어느 때보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컸었다. 특히 2016년 말 한국사회에 강하게 불었던 촛불혁명과 그에 따른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적폐청산’(積弊淸算)의 주장들은 그대로 한국 교회에 전이되어 한국 교회의 적폐청산에 대한 요구는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으로서 한국 교회가 직면한 적폐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개신교회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청산하자며 등장하였기 때문에 그 적폐청산을 제대로 완수하였는지 검토하는 일이다. 따라서 먼저 한국 교회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얼마나 잘 청산했는지 그 성적표를 검토한 후,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한 적폐청산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로 표상되는 ‘면죄부’(혹은 면벌부)를 거부하면서 당시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다. 그리고 개신교의 3대 ‘오직’(sola) 교리로 불리는 “오직 믿음, 오직 은총, 그리고 오직 성경”을 주장하면서 개신교의 문을 열었다. 특히 1520년 종교개혁 관련 3부작으로 불리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구체적인 적폐가 무엇이고 그 대안적 방향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우선, 루터는 <독일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을 통해 교황권의 절대권력을 적폐로 간주하여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교황이나 사제에게만 독점적으로 있다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저항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모든 신자도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소위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였다.

둘째로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문을 통해서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성례전을 신비주의적으로 오용하였는지를 또 다른 적폐로 지적하면서 성례전의 바른 이해와 활용을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성례전을 성례전답게 만드는 것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신자 개개인의 믿음뿐”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성례전의 본 의미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끝으로 세 번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논문을 통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곧 신앙과 삶의 관계를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잘 강조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과 책임으로’ 다가가야 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적폐에 저항하면서 개신교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루터의 후예인 한국 개신교회는 루터의 적폐청산의 노력에 얼마나 부응하여 그 개혁을 잘 완수했을까? 특히 만인사제설과 성례전의 참 의미의 회복,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이란 기준에서 볼 때 한국 교회는 적폐청산에 얼마나 성공했을까?

필자의 주관적인 입장이기는 하나 한국 교회의 성적을 매긴다면, 그 성적은 낙제를 간신히 면한 수준인 약 70점 정도 곧 C학점 정도이다. 너무 인색한 점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국 교회에게 있어서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은 아직 ‘미완의 개혁’으로 파악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이 왜 아직 미완의 개혁일까? 루터의 세 논문을 중심으로 반성해 보면, 우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루터가 비판했던 ‘성직자 중심주의’ 안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성 중심적인 목회자의 절대권력이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 세습 논란이나 여성안수의 문제 등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제 명실공히 만인사제설이 실제적으로 한국 교회 안에 구현될 수 있도록 평신도의 차별을 철폐하고 교회를 더욱 개방적이면서도 평등한 공동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한국 교회는 성례전을 바르게 회복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찬을 너무나 극단적인 화체설을 통해 신비화한 것이 문제였다면, 한국 교회는 그 반대로 지나치게 상징적 의미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찬을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례전을 소홀히 여기고 있는지는 성찬예배가 일 년에 겨우 서너 번밖에 시행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잘 발견된다.

그리고 성찬의 의미도 오직 죄의 용서란 측면에서만 강조될 뿐, 리마예식에서 강조하는 ‘성부께 감사’,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대’, ‘성도의 교제’, ‘하나님 나라의 식사’ 등의 통합적 의미는 거의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제 매주 성찬예배로 예배의 구조를 바꿔야 하며, 성찬의 다양한 의미를 균형 있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한국 교회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역설한 영혼의 자유와 이웃사랑의 실천이 결코 둘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는 점을 많이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 교회는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지향하는 기복적 신앙에 집착한 나머지, ‘세월호 사건’이나 ‘생명-평화-민족분단 극복’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공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public faith)이란 사회적 영성의 측면에서 보다 깊이 성찰하면서 교회의 정신과 틀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운동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을 완수하는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루터 종교개혁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개신교적 저항(protestant)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5호』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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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young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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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0 January at 10:56 ·



내가 꿈꾸는 교회(62): 적폐청산에 앞장서는 공공의 공동체

필자는 몇 년 전 한국 개신교의 개혁과 한국적 교회의 형성을 염원하면서 『테오프락시스교회론』(동연, 2011/소망학술상 수상)이란 저서를 집필한 바 있다. 그 책에서 필자는 건강한 한국적 교회의 형성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한국 교회가 당면한 몇몇 대표적인 적폐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당면한 대표적인 적폐들은 무엇이 있을까?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를 숙고하고자 한다.

첫째는 교회가 교회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무비판적으로 추구해온 ‘교회사유화-재벌기업화’의 적폐이다. 교회의 사유화-재벌기업화란 철저하게 교회가 ‘공교회성’(public church)을 잃어버린 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사유화되거나 이익집단화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교회가 자본주의의 약육강식의 논리와 신자유주의의 무한한 이기심에 편승하여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이웃과의 연대성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을 뜻한다.


교회의 사유화-재벌기업화로 표현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교회세습’과 ‘재벌형’ 대형교회를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작금의 한국 교회 최대 적폐는 교회의 자본축적과 세습이다. 최근 급속히 늘어나는 신자들의 탈교회 현상, 곧 가나안신자의 증가현상은 대형교회의 문어발식 확대와 자본의 축적 그리고 세습이 낳은 결과물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상징적 사건은 ‘명성교회의 불법세습’과 ‘사랑의교회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사랑의교회는 수천억 원을 들여 매우 화려한 교회당을 지으면서, 수많은 스캔들로 논쟁의 한복판에 아직도 서 있다. 특히 담임목사의 학위부정 논쟁과 교회당 신축 중에 발생한 불법적 건축설계 변경, 그리고 그와 관련된 송사 등은 한국 교회의 재벌형기업화가 낳은 슬픈 자화상이다. 결국 한국 교회는 교회의 ‘사유화’와 ‘재벌기업화’의 적폐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작은 공적인 교회를 향해서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잡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제국주의적-문화폭력적 선교방식의 적폐이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이유인 ‘선교’(mission)를 진지하게 다시 성찰하게 하는 문제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요 또 예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맥락에서 교회는 늘 선교하는 교회였고, 또 앞으로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 선교방식에 있어서 여전히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 사용하던 폭력적이고 자문화 중심적인 형태를 고집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약 10여 년 전(2007) 이슬람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단기선교팀을 보낸 샘물교회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샘물교회는 단기선교팀을 선교현장에 보내는 과정에서 무자격 선교사를 불법적으로 보내고 또 이슬람국가의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선교방법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이슬람 단체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져 여러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 그 유사한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는 필자와도 관계가 있는 사건으로, 2016년 초에 있었던 개신교 신자에 의해 이루어진 김천 개운사 불당훼불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한 필자는 기독교 대학에서 불법적으로 파면 처리되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선교의 방식에 있어서 큰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타자와 이웃종교를 배제의 원리로 접근하는 대신 오히려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소위 ‘종교대화적 선교방식’에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래 전부터 WCC에서 강조해 온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나 최근 선교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고 있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그 나름 의미 있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교회 연합기관의 아노미와 남성-권위주의적 교회의 적폐이다. 이것은 1989년 설립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동안 한기총이 보수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보수적 정권과 깊은 유착관계를 맺으면서 불법선거와 금품살포 등 수 많은 권력형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교계에서는 ‘한기총 해체운동’ 등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특히 최근에는 한기총 해체의 수순 속에서 한기총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으로 분열되었고, 또 개신교의 주요 교단장들의 모임인 ‘한국교회교단장회의’를 발전시켜 또 다른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정확하게 어떤 조직이 현재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교회 연합기관의 수명이 기껏해야 수십 년도 채 못 가는 이데올로기화된 연합 기구가 한국 교회에 필요한가?” 이런 맥락에서 무의미한 교회 연합기관을 해체하는 일, 특히 남성중심적인 권력기관화된 교회를 갱신하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따라서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 기구화된 연합기관과 교회의 적폐를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평등적이고 유기적인 교회의 자기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와 같은 적폐들을 청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적폐의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공적 신앙(public faith)을 바탕으로 적폐청산에 앞장서는 공공(公共)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6호』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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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이 땅에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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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Cheul Oh 성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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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Cheul Oh 베스트셀러가 되셔서 월급되신 맘껏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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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0 January at 09:24 ·



<안내> 길위의가나안교회 및 아트가나안교회 모임

가나안 언님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제 본격적인 봄기운이 충만한 2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걱정이 많네요. 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이번주엔 두 개의 가나안교회 모임이 있습니다. 우선 길위의가나안교회는 씨알순례와 협력으로 진행됩니다. 팀을 이끌며 안내를 맡으신 김영덕 대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See more




51Myung-kwon Lee, Yeo Injo and 4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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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진 맛저 하시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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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9 January at 10:56 ·



내가 꿈꾸는 교회(61): 생명의 공동체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적지 않은 이들이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로서 한양대 교수를 지낸 리영희 교수를 꼽는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독재의 시대인 1970~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서전적 대담집인 『대화』(2005)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무신론자로서 종교에 큰 관심이 없지만, 유일하게 존경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꼽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 무신론자도 존경하는 한국 최고의 그리스도인, 그가 무위당 선생이다. 위의 인용된 시가 바로 무위당의 시이다. 그의 시에서도 묻어나듯이, 그는 모든 것들을 생명 있는 ‘나’로 볼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욕심을 부리는 이기적인 나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인내천)라는 의미에서의 나이다. 나는 곧 하늘이니까 너도 하늘을 품고 있는 나이고, 더 나아가 하찮은 미물도 하늘을 품고 있는 나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명이신 하늘을 품고 있는 하늘 같은 존재로서 나와 다름이 아닌 의미에서의 나이다. 그러니 장일순에게 있어서는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인 셈이다.

사실 장일순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동학 제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되었다. 특히 그는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안다.”는 최시형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무위당은 밥 한 숟가락을 뜨면서도 해와 달과 비와 구름과 땅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 피를 뽑고 물을 대고 추수를 했을 어느 농부님에게 감사했다. 밥상이 되어준 나무와 밥상을 만든 목수에게 감사했다. 숟가락이 되어준 물질들과 숟가락을 만든 이름 모를 이에게 감사했다. 찰진 밥을 지어준 아내에게 감사했다.

이처럼 해와 바람과 비와 눈과 나무와 돌의 도움 없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나로 대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취지를 확산하기 위해 <한살림>을 조직하여 생명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 그것은 장일순이 꿈꾸는 공동체와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주 작은 미물이라도 하늘처럼, 아니 나처럼 대하는 온전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장일순의 꿈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생명의 존재로, 즉 하늘로, 아니 바로 나 자신으로 볼 것을 추구해야 하지만, 현대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반생명적이다. 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고, 특히 최근에는 4대강 사업으로 강이란 강은 온통 다 파란 녹조로 변해 버렸다. 심지어 공기는 또 어떤가? 미세먼지로 해서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이 생명운동이 시급한 때가 아닌가 싶다.

진정한 신학자란 그 시대의 가장 고통스런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서 씨름하는 자란 말이 있다. 20세기 초 있었던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세계대전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서 인간의 죄성을 폭로했던 칼 바르트가 그랬고, 히틀러의 광기어린 파시즘에 저항하여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본회퍼가 그랬다.

그렇다면 21세기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런 질문 앞에서 서슴지 않고 ‘생명’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더 구체적으로는 생명을 구성하는 ‘물’의 문제요 또 ‘공기’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무위당식으로 더 엄격하게 말하면, 나인 물이 썩어가고 있고, 나인 공기가 숨조차 쉴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과거에 철학과 대화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물과 공기를 연구하는 ‘수문학’(hydrology)이나 ‘대기학’(aronomics)과 대화하면서, ‘생명학’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 6:51) 사실 교회는 지금까지 예수의 이 말씀에 따라 성찬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성찬신학에 근거하여 빵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 교회에 꼭 나오라든지, 혹은 빵이신 그리스도를 먹지 않으면, 즉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등 빵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차별하는 배제의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말하자면, 하늘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일상적인 먹거리인 빵으로 오셨다면, 물로는 못 오시며, 또 공기로는 못 오시겠는가?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신학의 논리로써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는 가장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으로도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시며, 또 장차 다시 오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 짓는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빵과 포도주 같은 가장 하찮은 먹거리 속에도 계시는 생명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는 생명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하찮은 미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마치 나로 대하는 생명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7호』 (2018/07/17)




62Paul Dongwon Goh, 이호재 and 6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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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생명공동체.. 를 꿈꾸는 멋진 목사님...글을 읽게 해주셔서
무한 감사 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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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uou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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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8 January at 07:54 ·



내가 꿈꾸는 교회(60): 예수밥상의 식탁공동체

필자는 교회에서 종종 농반진반으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내가 추구하는 교회는 절밥보다 맛있는 교회밥의 식탁공동체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한국인으로서 절에 한두 번쯤은 모두 다 가 봤을 것이다. 등산하거나 아니면 사월 초파일에, 혹은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를 통해 사찰의 문턱이 많이 낮아지면서 일반인들도 종종 절에 가서 어렵지 않게 절밥을 먹곤 한다.

오신채로 불리는 매운 맛을 내는 다섯 가지의 향신료(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를 안 쓰는 전통 때문에 싱거워 맛이 없거나 혹 배고프지 않을까 상상도 되지만, 실제로 절밥은 아주 맛있다. 그런데 교회밥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최근 들어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교회밥은 군대식 짬밥이 되어가고 있고, 밥도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한다. 심지어 주일날 교회에서 밥을 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깊이 반성되는 부분이다. 종교 간 경쟁의 시대에 교회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절밥보다 맛있는 식탁공동체’를 꿈꿔야 하지 않을까?

최근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밥상공동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필자는 이런 예수의 밥상공동체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혼자 종종 예수가 차린 밥상의 풍경을 상상해 보곤 한다. 예수의 밥상에도 누군가 배제된 차별이 있었을까? 아니면 누구나 참여 가능한 평등의 밥상이었을까?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혼술’이나 ‘혼밥’이 회자되고 있는데, 혹 예수는 혼밥에 익숙했을까 아니면 공동체 식사에 익숙했을까? 또 그 밥상의 메뉴는 무엇이었을까? 생선이나 고기뿐만 아니라 혹시 한국인들이 오래전부터 건강식으로 즐겨먹었던 잡초요리는 없었을까? 예수는 어떤 내용으로 식사기도를 하였을까? 등등에 대해 상상해 본다. 물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성서학자들의 몫이겠지만, 대안적 교회를 추구하는 우리도 종종 고민해 볼 만한 문제의식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예수밥상에 대한 풍경을 상상해 볼 때, 우리는 적어도 한두 가지 예수밥상의 특성을 그려보게 된다. 하나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던 것처럼, 예수밥상이란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실천한 ‘만나’ 공동체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만나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은총으로 내려주시는 그날에 꼭 필요한 먹거리 곧 일용할 양식을 뜻한다.

주지하듯이 만나란 말의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광야에서 먹어야 할 먹거리가 부족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다. 여기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음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을 보고 너무나 놀라서 “이것이 무엇이지?”(what’s this?, manhu)라고 물었던 것이다.(출 16:15)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놀라움이요 감사였다.

필자는 여기서 만나 곧 일용할 양식으로 권포근과 고진하 목사부부가 최근 『잡초치유밥상』(2017)이란 책을 통해 연구하며 알리고 있는 ‘잡초요리’를 언급하고 싶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낯선 음식! 하지만 가장 흔하기에 귀한 음식 ‘잡초요리’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잡초를 보고 약간 당황하며, “이게 뭐지? 이런 것도 먹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만나?”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잡초는 보관도 만나처럼 짧고 저장할 수도 없는 풀과 같은 음식이지만, 그 안에 보약 같은 생명이 가득한 음식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코셔(kosher)나 이슬람교의 할랄(halal)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만나 곧 ‘잡초요리’를 생각하면 어떨까?

또 하나는, 예수의 밥상은 자유식탁과 만인평등의 밥상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예수에게 붙여진 그의 별명 속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마 11:19a)

여기서 ‘마구 먹어대는 자’와 ‘포도주를 마시는 자’에 대한 옛 번역은 ‘먹보’요 ‘술꾼’이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번역으로, 예수께서 음식에 대해 ‘자유로운 음식’ 태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죄인들과 서슴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밥상이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초대되는 ‘죄인들의 식탁’이요, 또 어떤 음식도 허용되는, 심지어 술이든 고기이든 모두 허용되는 자유음식 식탁공동체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지하듯이 후에 베드로의 보자기 음식환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유대적 전통을 넘어 세계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발전하였다.(행 10:11~16)

결국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밥상이란 평등과 자유음식의 밥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어떤 동물이든 우리가 먹어도 되나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린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람도 청소년 시절에 죽으면 한(恨)이 된다는 말처럼 동물도 자신의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물건처럼 대량생산되고 또 일찍 희생되어 사람의 밥상에 올라온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따라서 필자가 꿈꾸는 교회는 만나인 잡초요리를 기본 베이스로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타자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는 생명밥상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든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식탁에 환대하는 완전 평등의 식탁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8호』 (2018/07/24)




112Myung-kwon Lee, Chee Youn Hwang and 11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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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최 [건강한 식탁]이 그리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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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3 replies


박순영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타자의 밥 상에.... 잡초가 아니라
생명초 ~ 냉이.쑥.달래.미나리.씀바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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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아멘!
글을 대하며 잠시라도 일용할 양식 범위내에서 섭생을 잊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우리의 식탁은 어류, 육류, 곡물, 엽채·근채로 채워지는되...…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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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k Lee 글이 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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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7 January at 08:37 ·



내가 꿈꾸는 교회(59):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

얼마 전 문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톨스토이의 언덕을 넘으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큰 산이 다가온다.” 이 말은 러시아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주지하듯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거장들이다. 톨스토이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인간 내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도덕성을 강조한 사상가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심연의 어두운 부분을 매우 적나라하게 잘 파헤침으로써 은폐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폭로시킨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인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첫 페이지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말하자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소설의 주인공인 카라마조프가의 막내아들인 알료샤는 수도사로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을 지도한 수도원의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해 수도생활의 참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도생활은 마치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과 단절된 채 수도원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수도생활은 무의미한 고립적 삶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삶이다.

그 좋은 예가 소설 속에서 진정한 수도자의 모범으로 등장한 조시마 장로의 모습이다. 그리고 수도자였다가 “속세에 머물라.”는 스승 조시마 장로의 권고에 의해 수도사를 그만두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일종의 재가수도자가 된 소설 속 주인공 알료사의 삶 또한 그렇다.

이처럼 수도원 안에서 수도하든 아니면 수도원 밖에서 재가수도자로 생활하든 중요한 것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 힘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권에 보면, “양파 한 뿌리”에 대한 우화가 나온다. 그 이야기 역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톨의 밀알 비유와 비슷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옛날에 참 못되고 못된 한 아줌마가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었다. 죽고 나서 보니 아줌마는 그동안 착한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악마들이 그녀를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아줌마의 수호천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녀를 변호할까 고민하던 중 다행히 양파 한 뿌리를 기억해 낸다. 아줌마는 과거 어느 날 딱 한 번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수호천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에게, “양파를 갖고 아줌마에게 가서 그 아줌마가 양파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양파를 들고 지옥에서 그것을 아줌마에게 내밀었고, 아줌마는 그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양파를 같이 잡고 오르려고 하였다. 그 때 아줌마는 그 양파는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밀치자, 그만 양파는 끊어져버리게 되었다.

결국 아줌마는 끊어진 양파와 함께 영원한 불바다 속으로 떨어졌고, 수호천사는 슬피 울면서 아줌마 곁을 떠났다는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양파 한 뿌리 같은 아주 작은 선행이라도 인간을 지옥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말하자면, 양파 한 뿌리는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알에 비견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선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주일학교에서 종종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믿음으로 가는 나라>라는 곡이 있다. 가사 중에, “어여뻐도 못 가요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가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야 간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과연 맘 착해도 가지 못하는 나라라는 말은 맞을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마 25:31-46) 양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롬 2:14-15) 말하자면, 그들은 양파 한 뿌리 같은 선행을 실천한 사람들이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선행의 삶을 산 자들이다.

선행과 믿음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과 양파 한 뿌리 같은 착한 일, 그것은 수도원에서 고독을 씹으며 인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수도사의 기도일 수도 있고, 혹은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떠 주는 아주 작은 선행일 수 있다. 그것은 비록 작지만 자신도 살리고 또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일일일선’(一日一善)이란 말처럼, 우리는 매일매일 착한 일을 도모함으로써 그것으로 존재양식을 삼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한 톨의 밀알이나 양파 한 뿌리 같은 작은 선행일지언정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9호』 (2018/07/31)




68Myung-kwon Lee, Hyun Kyung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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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행함은 존재의 변화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분리해버려 행함은 믿음이 없는줄로 착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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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잊어 버렸던 세계명작 그....
다시 봐야 겠네요
상황에 따라 달리 느껴질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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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6 January at 10:07 ·



내가 꿈꾸는 교회(58): 무궁화 기독교의 공동체

필자의 스승인 유동식 교수(1922~ )는 신학자이기 이전에 화가이다. 그는 화가로서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수채화로 그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소위 ‘관상화’(觀想畵)로 불리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관상화란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깊이 관상한 미적 이념을 화폭에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을 뜻한다.

예컨대 신학자인 화가가 한 폭의 관상화를 그렸다면, 그 그림은 단순히 외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재현하여 묘사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신학적인 이념을 화폭에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상화의 대표적인 경우는 불교미술의 ‘만다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유동식 교수의 관상화 중에 ‘무궁화 기독교’로 이름 붙여진 그림이 하나 있다.(아래의 그림) 이 그림은 좌우 대칭적 구도로 되어 있다. 왼편의 위쪽에는 기하학적 도형 하나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아름다운 빨간 장미가 여러 송이 피어난 모습이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편에는 한 보살이 물가에 한 발을 늘어놓고, 다른 발은 반가부좌 자세로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다. 그 아래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왼편 쪽의 장미와 오른편 쪽의 보살을 두 원이 이어주면서 그 접점에 무궁화가 한 송이 피어 있다.

필자는 언젠가 스승에게 위 그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왼편 상단의 그림은 성서의 세계를 함축하여 표현한 성서계 만다라입니다. 그리고 왼편 아래에 있는 장미는 아가서 2:1에 나오는 ‘샤론의 꽃’ 혹은 ‘샤론의 장미’를 그린 것입니다. 이것은 ‘샤론의 꽃 예수’라는 찬송가(89장)에도 나오듯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말하자면, 왼쪽의 그림은 서구의 기독교 문화를 뜻합니다.

한편, 오른쪽에 그린 보살은 13~14세기 고려시대에 많이 그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서 관음보살의 모습을 따온 것입니다. 관음보살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보살로서, 그 자비심은 마치 하늘의 달이 여러 맑은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여 ‘수월’(水月)로 표현됩니다. 관음보살 아래의 연꽃은 아름다운 불국토를 이상화한 것입니다. 수월관음도는 화엄경의 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써,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한국불교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오른편의 그림은 한국문화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나는 장미의 기독교문화와 연꽃의 한국문화가 이제 두 원이 서로 만나 교집합을 이루듯 새롭게 만나 새로운 꽃을 피우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궁화 기독교입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한반도에서 장미와 연꽃이 만나는 모습, 그리고 두 꽃이 만나는 지점에서 제3의 아름다운 꽃인 ‘무궁화’가 피어나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 무궁화 기독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서구에서 들여온 장미의 기독교만 풍성할 뿐이다. 그리고 연꽃의 한국문화를 우상시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장미와 연꽃의 문화를 넘어서, 제3의 새로운 꽃인 ‘무궁화’ 꽃을 피워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무궁화 기독교의 모습으로 무궁화의 특성을 상상하며 세 가지로 제안하고 싶다.

첫째, 무궁화 기독교란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는, 그래서 ‘늘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를 뜻한다. 무궁화의 의미는 말 그대로 끝없이 오래 지속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무궁화만큼 오래 피는 꽃은 거의 없다. 7월에 피기 시작하여 10월까지 거의 4개월 동안 계속해서 피니 말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무궁화는 매일 꽃이 떨어지고 다음 날 새로운 꽃으로 새로 핀다는 점이다. 마치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말한 것을 실증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무궁화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새로워진 한국인의 한 멋진 삶의 영성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진정한 한국적 교회를 의미한다.

둘째, 무궁화 기독교는 한국인을 ‘치료하는 기독교’를 뜻한다. 무궁화는 그냥 꽃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약재로 사용된 꽃이다. 한방에서는 4~6월에 무궁화 껍질을 벗겨서 햇빛에 말려 해열·해독제로 사용한다. 특히 동의보감에 따르면, 무궁화는 사혈을 멎게 하고, 설사 후의 갈증이 심할 때 달여 마시면 효험이 크다고 한다.

이처럼 무궁화는 치료의 꽃으로서 ‘여호와 라파’(출 15:26,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를 지닌 무궁화 기독교를 암시한다. 지금 우리 한국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가? 특히 한국병으로 불리는 불신과 분열, 그리고 노예의식과 평화를 깨는 분단의 질병은 매우 심각하다. 따라서 무궁화 기독교는 한국인의 병을 치료하여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돕는 치료의 공동체를 뜻한다.

끝으로 무궁화 기독교는 어떠한 고난도 굴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내의 기독교’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은 무궁화의 약점으로 진딧물이 많이 끼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무궁화는 절대로 진딧물로 죽는 법은 없다고 한다. 즉 무궁화는 진딧물을 비롯하여 그 어떠한 질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는 꽃이다.

더욱이 무궁화는 영하 20도 추위에도 끄떡하지 않고 잘 견디며 살아남는 인내의 꽃이다. 이것은 수 천 년의 역사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난을 슬기롭게 잘 이겨온 한국의 역사를 상징하며 동시에 한국인의 꿋꿋한 근성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서양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시켜 세계가 깜짝 놀랄 제3의 창조적인 문화의 꽃을 피우는 무궁화 기독교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0호』 (2018/08/07)




78Chee Youn Hwang, Myung-kwon Lee and 7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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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이야기도 홍천의 무궁화 동산, 찬송가 5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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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yn Jang 하근동백..다도용어입니다.

여름에는 무궁화 겨울에는 동백이란 뜻입니다.무궁화는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떨어지고 동백은 예쁘고 고울때 떨어집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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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5 January at 11:52 ·



<안내> 길위의가나안교회+씨알순례 모임

●모임일시: 2020. 2. 1(토) 오전9시50분
●모임장소: 종로3가역(1,3,5선) 탑골공원 팔각정....See more




45Myung-kwon Lee, Duk Jin Hong and 4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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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5 January at 11:45 ·



<공지> 가나안교회 모임 안내

1. 경자년 설을 맞이하여 모든 가나안 언님들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가나안교회에 깊은 관심과 응원 감사드립니다.

2. 본래 내일은 <스팀가나안교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하지만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의 교회를 방문하거나 혹은 가족들과 함께 주일을 지키는 것도 좋을듯 싶어 이번주일은 쉽니다. 보람찬 설날 되시길 바랍니다. 대신에 스팀가나안교회는 월요일(1/27) 점심 때 친교모임을 갖을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바라며, 자세한 것은 최승언 언님께 문의바랍니다....See more




52Myung-kwon Lee, 이강인 and 5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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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국 새해
가나안 교회 모임
더욱…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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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Yoo 새해 공동체 모든 분들 가운데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은혜가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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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4 January at 09:36 ·



내가 꿈꾸는 교회(57): 깨달음 추구의 공동체

기독교는 지금까지 '믿음'의 종교로만 이해되었다. 여기서 믿음이란 소위 ‘적색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자칫 ‘값싼 은총’(cheap grace)으로 잘못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그래서 최근 많은 신학자들은 적색은총에 대비되는 소위 ‘녹색은총’의 중요성을 말한다. 여기서 녹색은총이란 좁은 의미에서 생태신학적 복음 이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수행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소위 ‘깨달음’의 측면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는 분은 다름 아닌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선생이다.


그렇다면 유영모가 깨달은 바는 무엇이고 또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여기서 모두 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없이 계신(빈탕) 분’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그 없이 계심을 본받아 ‘몸나’에서 ‘얼나’ 곧 ‘참나’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영모는 “빈탕 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유영모가 ‘빈탕 한데 맞혀 놀이’라고 말한 그 깨달음의 현장 내지 도량(道場)을 일컬어 ‘심우소’(尋牛所)라고 부른 점이다.

우리가 불교사찰에 가게 되면 대웅전의 외벽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여기서 심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길을 찾아 나서는 10가지 그림이다. 그것은 길들이지 않은 소를 찾아 나서서, 궁극적으로 소를 찾아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까지를 그린 10단계의 길인데, 그것을 일컬어 종종 ‘십우도’(十牛圖)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10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1. 소를 찾아 나섬(尋牛)--> 2. 소의 발자국을 찾음(見跡)--> 3. 소를 발견(見牛)--> 4. 소를 붙잡음(得牛)--> 5. 소를 길들임(牧牛)--> 6. 소를 타고 집으로(騎牛歸家)--> 7. 소는 없고 사람만 있음(忘牛存人) --> 8. 사람도 소도 없음(人牛具忘)--> 9. 본래의 자리로 돌아옴(返本還源)--> 10. 거리로 나섬(入廛垂手)이다.

이처럼 심우도는 마치 화엄경에 나오는 주인공 선재 동자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모습과 같다. 혹은 그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주인공이 지옥과 연옥을 구경하고 다시 궁극적인 이상향인 천국으로 순례하는 모습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

그런데 유영모는 앞서 언급한 얼나 곧 참나를 깨닫도록 수행하는 현장을 일컬어 심우도의 도량, 곧 ‘심우소’(尋牛所)라 불렀다. 말하자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나를 찾아 떠나는 심우소와 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교회는 과연 심우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교회는 심우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다. 빈탕 한데 맞추는 곳이 교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는 빈 곳이 아니라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채우려는 ‘욕망소’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눅 19:46)

여기서 기도하는 집이란 유영모식으로 말하면 다른 아닌 심우소이다. 그곳은 인간의 탐진치(貪瞋癡), 곧 탐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세상적인 것의 없이 계신 분(빈탕)인 하나님께 맞추어 그분과 하나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처이다.

그렇다면, 심우소인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줄이면서 빈탕 한데 맞히는 놀이를 계속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융심리학이나 자아초월심리학에서는 세상적인 자아(ego)를 초월하여 참자아(Self)를 찾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적절한 표현이다. 따라서 심우소인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자아를 찾도록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을 종종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고전 15:31,36).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그리고 그는 계속 외쳤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

이처럼 참자아를 찾는 작업, 그것은 마치 심우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소(진리)를 찾아 떠나는 길과 같고, 또 소를 찾은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여(如如)하게 그 소와 더불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같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심우도의 마지막 10단계의 그림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10단계에서 소를 찾은 자는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저잣거리로 다시 들어가서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산다. 그것은 성스러운 깨달음을 성취하고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도의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얼마나 즐거우랴! 교회는 마치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심우소와 같은 곳 말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이런 심우소 같은 신앙공동체로서, 얼나를 찾아 함께 기도하는 집이요, 또 새로운 참자아를 찾은 이들이 더불어 일상을 나누는 입전수수의 현장이다.

<주간기독교>, 『2161호』 (2018/08/21)




122Paul Dongwon Goh, songsoonhyun and 12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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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 역시 언제나 스승님의 품 따뜻합니다.
참 나의 자리는 품어줌의 자리겠죠.
그 품어줌을 떠나 나를 찾아가다보면 나는 온기를 잃습니다. 스승님이 열어 놓으신 그 가슴에 지친 마음 살며시 기대어 봅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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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손 교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침 제가 십우도 풀이 책 원고를 막 끝낸 터라 더욱 감명깊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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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3 replies


하중조 성육한 하느님이라 가르치는
근본주의교리에 아직도 목매단
Church of Christ 교단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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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포 이우원 손교수님,현장스님 함께 있으면 참 즐거워요!
차곡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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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4 January at 09:18 ·



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

PRESSIAN.COM

다주택 임대사업자 세금특혜 폐지 운동이 시작됐다
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




50박걸, 이은선 and 4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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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3 January at 09:33 ·



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


PATHEOS.COM

St. Maximos, The Purpose of Humanity and Universal Salvation
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



16Jong Gil Choe, Jong Wan Park and 1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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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3 January at 06:38 ·



내가 꿈꾸는 교회(56): 화해의 공동체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부흥회를 많이 하던 70~80년대에 생긴 속담으로 생각된다. 보통 부흥회에서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이 정작 부흥회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와서는 전혀 성령 충만한 사람답지 않게 이웃과 잘 싸우고, 게다가 화해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은 한번 싸우면 절대로 화해하는 법이 없다는 말도 여전히 들려온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종종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은 정작 어떤가? 그들은 오히려 문제가 생기면 소주 한 잔 따라 놓고 화해를 청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말할 때마다 심심치 않게 ‘성령’(하나님)이란 말을 종종 들먹이지만, 실제 일상 속에서 잘 화해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한 이야...Continue reading




96Chee Youn Hwang, Byeong Hee Kang and 9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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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K. Joe 역시 목사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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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2 January at 05:01 ·



내가 꿈꾸는 교회(55): 용서의 공동체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가장 비추(悲醜)한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용서’를 거부한 어느 무자비한 종의 이야기를 들고 싶다.(마 18:21~35) 왜냐하면 그 결과는 ‘은혜의 철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지우면 ‘일흔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거의 완전에 가까운 용서의 요구로, 용서야말로 예수 가르침의 핵심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은혜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용서’가 실천되지 않을 경우, 베풀어진 은혜가 철회될 수 있음을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용서의 사건을 실감나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경제적인 의미의 ‘빚’(debt)과 연결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뒤에서 언급할 주기도문에서도 그렇다. 지금처럼 예수 당시에도 돈이 매우 중요했던 모양이다.


우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는 한 종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한 달란트는 당시 노동자의 15년 치의 연봉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란 산술계산으로 할 때 그 ‘만 배’이므로 거의 15만 년 치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년 치 연봉이 3천만 원이라면, 한 달란트는 약 4억 5천만 원이다. 서울 강북의 집 한 채 값이다.

그런데 그것의 만 배이니, 계산하면 약 45조 원 정도가 된다. 그 부채의 규모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자산에 맞먹는 엄청난 돈이다. 그 큰 부채를 모두 갚으라는 왕의 요구에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에게 애원하는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모두 탕감시켜줬다. 일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틱한 반전이 벌어졌다. 엄청난 돈을 탕감받은 그 종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났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하루 품삯을 10만 원으로 할 경우, 약 1천만 원 정도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난 것이다. 종은 자신에게 빚진 자를 만나자 그의 멱살을 잡고 빚을 독촉하였고, 그가 갚지 못하자 그를 투옥시켰다.

이 소식을 전하여 들은 왕은 노하여, 종을 잡아 형무소에 넘기고 빚진 일만 달란트를 모두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는 예화이다. 이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잊고 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철회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5) 이처럼 용서의 존재론적 근거는 인간을 향하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용서는 하나님과 연관된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적 본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에 참여하는 지름길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철회시킬 수 있는 무서운 심판도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공자(孔子)도 ‘용서’가 모든 인륜의 근간임을 강조한 점에서 선행은총적인 용서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논어』에 따르면, 제자 자공은 공자에게 인간이 죽을 때까지 행해야 할 덕목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자공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기서호 기소불욕물시어인).

즉 “그것은 ‘서’(恕)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마라.” 여기서 ‘서’란 용서의 마음으로, 너와 나의 마음을 같게 하는 것이다.(如+心) 달리 말해 그것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이요, 내가 용서받았으면 나도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학의 황금률이다.

한편, 공자의 서(恕)의 황금률은 예수의 황금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2)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황금률이 왜 그렇게 중요한 말씀인지 생각보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황금률에 표현된 ‘대접’이란 말이 한국인들에게 ‘음식’과 연관된 단어로 축소 이해됨으로써, 황금률을 “내가 음식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먼저 음식을 대접하자”라는 정도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것이 맞다면, 그것은 자칫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예수의 황금률은 ‘기도’와 관련된 말씀에서 나온 가르침(마 7:7ff.)이다. 따라서 예수의 황금율은 ‘용서’와 관련된 말씀으로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주기도문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마 6:12) 여기서 죄란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처럼 다름 아닌 ‘빚’(debt)을 의미한다. 주기도문에서의 특이점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오히려 더 앞서서 누군가 우리에게 진 빚을 먼저 적극적으로 탕감시켜줌으로써 우리가 하늘에 지은 죄를 보다 확실하게 용서받으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처럼 용서는 예수의 사상에서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예수의 황금률을 실천하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3호』 (2018/09/04)

* 사진은 다천 언님의 매화 사진 작품(2020.1.20)




62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6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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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2 January at 04:13 ·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HANI.CO.KR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68Chee Youn Hwang, 주영준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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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yn Jang 경교에서 모신 예수상입니다.

관음의 형상에 이마와 가슴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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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0 January at 00:13 ·




김근수‎ to 행동하는 예수
19 January at 18:28


5년전 이런 강의 있었는데요...



19박걸, 한양국 and 1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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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9 January at 22:04 ·



가나안교회 템플스테이 중^^






Huyn Jang
19 January at 22:01


지혜의 불로. 번뇌를 태우고

장작의 불로 고구마를 굽는다.

가나안 성도들과 오대종교 모임이 아실암에서



28Byeong Hee Kang, Myun-joo Lee and 2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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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jin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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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궁금했어요.언제 소식이 올라오나.ㅎ
마치 마두금 소리 같은
우~~~ 웅웅...소라고둥 악기..^^…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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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8 January at 09:00 ·



내가 꿈꾸는 교회(54): 전통에 앞서는 양심의 공동체

오래전 필자가 섬겼던 교회에서는 특강 강사로 한 저명한 종교학 교수를 초대하여 신앙강좌를 가진 적이 있다. 강사는 특강 말미에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한국 교회가 ‘양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그가 소개한 경험담은 이렇다.

그 교수에게는 수십 년 동안 가깝게 지내온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하나 있었단다. 10여 명이 일 년에 서너 번 모이는데, 여느 동창 모임이 그렇듯이 그 모임도 친구들이 서로 허물없이 형제처럼 지내고 의리도 매우 돈독하였다. 1998년 IMF 때 일이다. 사업을 하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 친구는 부도를 내고 그만 망하게 되었다.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그 친구는 그만 소위 경제사범으로 구속되어 몇 년간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친구의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 어려운 상황을 지켜보던 동창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친구가 출소할 때까지 틈틈이 친구 가족들을 챙겨주었다.

감옥에 갔던 친구는 다행히 형기를 잘 마치고 출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동창 모임에도 다시 나왔다. 그런데 그 친구는 모임에 나와서 자기 가족들을 챙겨준 동창들에게 고마움을 전혀 표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 생활 잘 마치게 되었다. 기업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생하게 되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친구의 말을 들은 동창들은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왜냐면 자신이 힘들 때 동창들의 도움으로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전혀 그 고마움을 언급하지도 않은 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운운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가장 강조하는 ‘전통’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앞의 예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신앙적 언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통은 아닐까?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은 참 많이 사용하는데, 정작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위 교수의 친구는 동창 모임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말을 하기 전에 적어도 먼저 벗들에게 진실로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옳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요 양심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에게 비양심적인 존재로 비춰지면서 공분(公憤)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장로의 전통’으로 불리는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매우 엄격히 준수하는 소위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결 예법에 따라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지 않았고, 또 시장에 외출하였다가 귀가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정결하게 한 뒤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귀가 후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은 뒤 음식을 먹었다.(막 7:1-5) 그런데 어느 날 예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일이 발생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에게 항의하였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막 7:6)

바리새인들의 이 항의는 어쩌면 정당한 항의처럼 보인다. 왜냐면 정결 예법을 지키는 일은 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요, 또 현실적으로 정결 예법의 규정을 떠나서 귀가 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위생상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정결 예법을 어긴 제자들을 옹호하며, 대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는 정결 예법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정결 예법 자체가 아니라 ‘법 정신’이다. 즉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특정 법 조항을 구실삼아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무뎌진 양심을 깨우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중략)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마 7:9-23) 법 정신 곧 사람의 양심을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교회의 전통은 그 나름대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중요하다. 그래서 사막기후인 팔레스타인에서는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좋고, 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교회의 언어를 적절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늘이 주신 ‘양심’을 먼저 지키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계명’(막 7:8)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의 전통은 지키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계명인 양심은 저버렸다. 그리고 종교학 교수의 친구 역시 하나님의 은혜란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자기를 도와준 친구들의 은혜를 잊은 비양심적 신자였다.

하나님의 계명 곧 양심은 특정한 법 규정이나 전통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에 앞서서 늘 법 정신을 물으며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전통에 앞서는 양심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4호』 (2018/09/11)




63Myung-kwon Lee, 이호재 and 6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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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전통에 앞서는 양심공동체..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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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글의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되는데 친구가 동창모임에 나온 것 자체가 친구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 은혜가 고통의 현실에 뿌리 내리고 거기서 살아내는 하늘기운, 양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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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국 로너건은 종교적 회심만을 말해 온
전통적 회심이론을 비평하면서 지성적 회심,, 윤리적 회심,종교적 회심을 구분했습니다 젤피는 로너건의 회심 이론에 사회적 책임과 연대 의식을 강조하는 사회적 회심을 ...
저는 티핑 포인트가 얼마남지 않은 이 시대에 생태회심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데...…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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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 Lee replied · 2 replies


연창호 양심에 대한 성서구절이 드뭅니다
바울은 성령과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들은 대부분 양심보다 믿음을 강조하고 그 둘을 대립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루터조차 보름스에서 양심을 속일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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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7 January at 07:12 ·



내가 꿈꾸는 교회(53): 유무상자의 공동체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저 세상 곧 ‘내세’에 가는 문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혹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교회의 전도 구호는 일종의 ‘내세 비즈니스’ 쯤으로 이해된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의 이해는 사실 매우 왜곡된 이해이다. 오히려 기독교 복음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예수께서 전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중심에는 내세보다는 오히려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인간들이 고민하는 문제, 특히 먹고사는 ‘경제’의 문제가 그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사건과 초대 교회의 모습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는 그 증거로 세 가지 정도 성찰해 본다....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