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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9

19 조헌정 “없이 계신 하느님” 다석 유영모 (1-5) - 에큐메니안

“없이 계신 하느님” 다석 유영모 - 에큐메니안


“없이 계신 하느님” 다석 유영모(1)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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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선생은 1890년에 태어나 1981년 92세까지 우리 민족의 근대와 현대를 걸쳐 사신 분으로 흔히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석강의>라는 책 표지에 소개되어 있는 글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석은 천문, 지리, 서양철학, 동양철학, 불경, 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요 한글철학자이다.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


16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2세에 조만식선생의 뒤를 이어 평양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그곳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전하였다. 40대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따라 YMCA의 선생이 되어 30년이 넘도록 연경반 강의를 하였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평생동안 성서를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였다. 예수를 절대시하고 성서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성인을 모두 좋아하였으며, 노자를 알리는데 큰 공을 이루었다. 순수한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여 우리말이 들온말(외래어)에 밀려 없어지거나 푸대접받는 걸 몹시 언짢아하였다.


160cm미터가 못 되는 체구에 서민적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눌변도 달변도 아닌데 한 말씀 한 말씀이 예지가 번뜩이는 시문(詩文)이며 진언(眞言)이었다. 얇은 잣나무 판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하루에 한 끼씩 저녁에 식사를 하였는데, 세 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뜻으로 호를 다석이라고 했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맨손체조와 냉수마찰을 평생 동안 했다. 일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만든 손가방에 명상의 일기 공책을 들고 다녔다. 시계도 차지 않았지만,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사람이 제 먹거리는 제가 장만해야 한다면서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남에게 잔심부름을 시키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지켜 밥상을 손수 부엌 마루에 내놓았다. 걸어 다니기를 즐겨 북한산에 자주 올랐고 강의하러 갈 때도 꽤 먼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새벽마다 지구를 사타구니 밑에 깔고 우주를 한 바퀴씩 돌면서 우주 산책을 한다면서 세계의 명산, 깊은 바다의 이름과 높이 깊이를 모조리 기억하였으며, 지구와 별들과의 거리도 외웠다.


나이를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날수를 하루하루 세었는데, 32,200일을 살았다. 가까이 따르던 사람으로는 김교신, 함석헌, 현동완, 이현필, 김흥호, 유달영 등이 있다. 감탄할 만한 명문장가였는데도 평생 다석일지만 남겼다.


김교신 선생은 류영모 선생을 가리켜 “내가 만나 본 이 가운데 가장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을 믿되 이처럼 ‘믿어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류달영 선생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다석을 진인(眞人) 또는 성자(聖者)라고 추앙한다. 그의 인격이 참되고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그분이 펼치신 다석 사상은 우리 민족의 값진 정신적인 유산이요 인류의 유산이다.”


2011년 8월에 5차 세계 철학자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때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사상가로 두 명이 소개되었는데, 한분은 류영모 선생이고 다른 한분은 함석헌 선생이다. 함 선생께서는 당신 스스로 류영모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으니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철학자나 사상가가 있다면, 류영모 선생이 가장 두드러진 분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류영모 선생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만, 그때는 생각이 짧아 굳이 찾아뵐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한번이라도 찾아 뵈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진한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다. 말씀이 심오하고 사상의 깊이가 있어 선생의 어록이 담긴 책을 가까이 하긴 하였지만, 깊은 공부는 하지 아니하였다.


이번에 글을 준비하면서 책을 읽긴 하지만, 단기간에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 시험을 앞두고 밤샘 벼락공부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임을 고백한다. 물론 이는 단지 류영모 선생님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았던 훌륭하신 분들의 생애를 간추려 전한다고 하는 것이 실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다. 부족하기에 주저하면서도 이런 일을 시도하는 것은 남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 다석 유영모 선생 ⓒGetty Image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개신교회의 역사는 채 140년이 되지 않는다. 서양의 2,000년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서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서양의 여러 민족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왔다. 우리에게도 우리 문화와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뿌리가 깊지 아니한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 개신교는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의 흐름도 있고, SNS라는 새로운 소통방식에 의한 정신문화가 문명의 영향도 있고, 내부 자체의 여러 문제도 있다. 대형교회들의 물량화 선교 거기에 교회지도자들의 영적 신체적 타락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전통문화 뿌리 내리기이다. 불교는 외래종교이지만, 천년이 넘는 동안 우리 문화와 역사 안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가톨릭은 제사문제 등 개신교보다는 앞장서 있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미국의 보수 선교사들의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짧은 이해와 오해로 인해 우리 문화를 얕볼뿐더러 죄악시하기까지 하였다. 이제라도 뿌리 내리기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개신교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설교에 그런 노력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의 설교는 서구교회가 하는 대로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서구의 삼단논리에 매여 있고, 예화 또한 서양 것을 주로 한다. 그래 예수는 분명 검은 눈, 납작 둥글 코에 검은 곱슬머리, 짙은 갈색의 중동인이지만, 우리의 머릿속 에는 파란 눈, 우뚝 솟은 코에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백인으로 인식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성서의 인물만큼, 우리 역사에서 예수를 믿고 받아들였던 선배들의 믿음과 삶 또한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오늘 얘기되는 다석 류영모는 으뜸으로 중요한 분이다.


일좌식일언인(一坐食一言仁)


류영모 선생이 예수를 믿었던 16세가 되던 때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강제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뺏었던 해이다. 많은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 마냥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강연이 YMCA에서 있었는데, 청소년 다석이 이곳을 드나들다 총무 김정식 선생의 권유에 의해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교인이 되었고 이후 수년간을 오전에는 연동교회 오후에는 승동교회 저녁에는 새문안교회를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리고 경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정주의 오산학교에 과학교사로 초빙을 받아 가서 매 수업을 기도로 시작할 만큼 기독교정신에 열심이었는데, 그때 오산학교는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었고, 창립자 이승훈 선생 또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석의 영향으로 이승훈 선생이 예수를 믿어 후에 장로가 되었을 뿐더러 오산학교를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해 나간 것이다. 이 오산학교를 통해 함석헌 주기철목사와 같은 민족과 교회를 위한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왔는데, 그 근본을 보면 다석의 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석은 2년 후 이승훈 선생이 감옥에 갇히고 대신 평양신학교의 선교사 로버트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생들을 기독교신도로 만드는 일에 교육의 초점을 두자, 이때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고 그러면서 동시에 정통 교회신앙을 버린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전하는 교리 신앙, 서구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비주체적이고 탈역사적인 신앙 곧 죽은 신앙을 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과 톨스토이의 사상과 두 살 아래 동생인 영묵의 갑작스런 죽음들을 통해 얻어진 신앙의 결과였다.


다음 시간에 언급을 하겠지만, 특히 교회가 전하는 대속(代贖)사상 곧 우리의 구원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대신 지셨다고 하는 것을 입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이 온다고 하는 문자적 가르침에 의문을 품고 자속(自贖)사상, 우리 자신이 예수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희생적 결단 곧 자속을 통한 대속의 구원의 길을 얘기한 것이다. 예수가 가졌던 신앙을 본받아야지 예수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은 요즘 깨어있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가르침이지만, 당시에는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부정하는 일이 되기에 큰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는 예수의 십자가 신앙을 자속적인 동양의 수행으로 끌어내어 일좌식일언인(一坐食一言仁)을 실천하셨다. 일좌란 무릎을 꿇고 앉아 말씀을 골라 묵상하는 일이며 일식은 하루 한 끼를 먹는 일로서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일언은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끊는 일로서 선생이 50세에 부인과 해혼하여 남매처럼 지낸 것은 유명하며 일인은 언제든 걷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성서를 연구하고 우찌무라 간조나 톨스토이와 간디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불교, 유교 그리고 노장의 경전들을 두루 읽어 독특한 사상과 신앙을 세워나갔다. 특히 한글에 깊은 연구를 하시어 한자어를 비롯한 외래어들을 우리말로 바꾸는 노력을 하셨다. 예를 들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나는 ‘몸나’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나는 ‘얼나’로 그리고 나의 근원이 되는 하느님은 ‘참나’로 표현하고, 거듭난 나는 '솟나'로, 독생자는 ‘한나신 아들’로, 백성은 ‘씨알’로, 근본은 ‘바탈’로, 하느님은 ‘빔’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새롭게 해석하고 깨우치고 만든 단어가 워낙이 많아 다석 사전이 있을 정도이며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보통사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시중에 나온 책들은 모두 제자들이 해설을 한 것들이다. 다석은 한시 1천3백수, 우리말 시조 1천7백수를 지었다. 광주가 우리말로 ‘빛고을’이라고 하는 말은 많이 아는데, 이 말 또한 다석이 처음 한 말이다.


한글과 삼재론


다석이 한글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인 삼재론 곧 하늘과 땅과 인간을 중시하는 삼재론과 성서에 드러난 하느님 예수그리스도 성령이라고 하는 삼위일체가 사상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고 이 삼재론 사상이 한글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비교학자들에 의하면 중국과 한국은 그 기본적인 문화의 핵심 키워드가 다르다고 한다. 중국은 음양론이 중심이고 한국은 삼재론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음양론은 밟고 어둡고 태양이 있고 없는 농경문화권 속에서는 사상의 중심이 되지만,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시베리아 문명은 농경문화권이 아니라 수변문화권이며 여기에는 음양론보다는 삼재론이 더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함석헌 유영모 장일순 최홍종의 생애와 사상 강좌”, 이정배, 광주YMCA 오방 아카데미 편, 87쪽) 후에 한국과 중국의 문명권이 서로 교류하면서 중국은 ‘음양론 중심의 삼재론’을 펴고 우리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론’을 펴게 된다.


이 삼재론 중심의 음양론 정신이 가장 잘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한글이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할 때 바로 이 삼재론과 음양론의 구조를 조화롭게 조절하여 만든 것이다. 한글의 기초가 되는 ‘아(아래아)·으·이’는 하늘 땅 인간이 우주의 근본이라는 삼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삼재론에 모음과 자음의 음양을 조합한 것이 한글이다.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의 핵심사상도 정기신(精氣神)이라는 삼재론이다. 몇 년 전 유네스코에서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세계의 소수민족에게 가장 적합한 언어는 한글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데, 몇 년전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했다고 하는 뉴스를 보았을 것이다. 사실 소리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언어는 한글이 최적이다. 한글은 매우 과학적인 글일뿐더러 거기에는 깊은 사상과 철학이 담겨 있다. 류영모선생은 바로 이러한 한글에 담겨 있는 철학과 사상에 깊은 연구를 하시어 가장 많은 한글 시조를 남기신 분이다.


그분이 남기신 우리 말 시조 하나를 살펴보자. 독자 여러분도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다.



우리 언니들은 싱싱히 댄겨가시압 아멘
힘차신 속알로 힝하니 돌아가시압 아멘
아버지 할렐루야 암 우리 읗님 가온뫼시리



여기서 언니는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을 말하고 읗님은 하느님을 말하고 가온이란 말은 영원절대를 말합니다. (풀이)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이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휭하니 다녀갔듯이, 우리도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어서 빨리 하느님께로 돌아가서 그분만을 영원토록 모시자.(『다석 유영모』, 박영호, 147쪽)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


류영모 선생의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다석은 자신의 생을 년으로 계산하지 않고 날로 계산하여 일기에 그 날수를 기록한 것이다. 그래 32200일을 사셨다. 8년 전에 다석을 따라 저도 한번 계산을 해본적인 있었는데,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 산 날이 2만1천3백9십8일이었다. 저는 그간 궁합이니 토정비결과 같은 신수를 전혀 해보지 않아 제가 태어난 시를 알지 못했는데, 어머님께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더니 정확한 시는 모르고 새벽녘이라는 것만 알았다. 무슨 태몽 같은 것은 없었냐고 하니까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간 기간을 햇수가 아닌 날로 계산하는 방식은 참으로 좋은 것 같다. 그건 하루하루를 보다 값지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에 화를 내는 경우는 없다. 덕담만을 한다. 그건 그 해를 보다 보람있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결심의 표시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나이를 날로 계산하는 습관을 갖는다면 매일매일이 새날이 되는 셈이고 태어난 시를 축하하는 습관을 갖는다면 매일매일이 생일이 되는 것이다. 나이를 굳이 햇수로 계산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습관에 불과하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나이를 물으면 40살쯤 먹은 사람이 150살이라고 답을 한다고 한다.


우리와는 다른 저들 나름대로의 계산법이 있는 것이다. 이를 갖고 미개인이다 문화인이다 말할 수는 없다. 굳이 미개인 문화인을 구분한다면 수십만 명을 한꺼번에 살상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수천 발씩 갖고 있는 놈이 미개인이고 야만인이지, 나이를 다른 방식으로 계산한다고 해서 미개인이 될 수는 없다.


필요하다면 우리 나이를 달의 주기에 맞춰 계산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계절로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고, 하루를 둘로 나누어 조석의 때로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세계적인 전위예술가 백남준 아트홀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작품이 있다.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의 날짜를 태어난 날로부터 거꾸로 계산해서 그날 있었던 어머니와의 대화를 ‘태내 자서전’이라는 명목으로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예를 들면 첫 작품은 자신이 태어난 날로부터 거꾸로 계산하여 120일째가 되는 날, 1930년 그날의 뉴욕타임스 신문을 구해서 그 위에다 큰 글씨로 -120 days 라고 매직으로 휘갈려 쓴 다음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Mom, what is tax?’ ‘엄마 세금이 뭐야?’ ‘응, 그건 정부가 국민에게 매긴 바가지란다.’ 태내 자서전이라는 발상 자체도 파격적이지만, 대화의 내용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석은 28세에 이 세상에서 산 날을 세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쓴 글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살이에 있다 하노라. 하루를 무심히 지내면 백년, 천 년을 살아도 시간을 다 잃어버린다. …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無常)한 인생도 비상(非常)한 생명이 된다. 언제나 오늘오늘,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런 얘기도 후에 하셨지요. ‘오! 늘--!’



태양을 꺼라!


류영모 선생님의 호 다석(多夕)은 한문으로 보면 저녁 석자 세 개가 모인 것이다. 여기에는 하루에 저녁 한끼만을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 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서양의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다석의 독특한 동양적 기독교 이해의 출발점이 담겨 있다.


철학자 이기상은 그래서 이 호를 ‘태양을 꺼라’로 해석한다. ‘많은 저녁’이 되려면 태양을 꺼야 한다는 것이다. 태양이라고 하는 것은 빛의 근원이자 밝음의 출발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세상이 있었다.’ 곧 빛은 세상의 출발이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분별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다석은 이 빛의 근원이 되는 태양을 끄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 저녁을 상징하는 어둠과 달을 끄집어 낸 것이다.


태양이 서양적 이성의 상징이라면 달은 동양적 감성의 상징이다. 서양인들은 태양을 좋아한다. 해변에 나아가 옷을 벗고 태양을 즐긴다. 반면 동양인들은 옷 벗음을 수치로 여기며 산에 올라 달을 즐긴다. 태양 빛 아래서 시원한 맥주잔을 기우리며 떠드는 것이 서양의 멋이라면 달빛 아래서 시 한수를 읊으며 차 한잔을 나누는 것이 동양의 멋이다. 따라서 어둠과 달을 뜻하는 다석의 호는 서양의 논리의 틀을 벗어나 동양적 감성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영원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석은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대낮에는 살림을 위해서 다니고, 일하고, 배우고, 놀고, 밤에는 그것을 위해 쉬고, 잠자고, 꿈꾸는 것으로 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밝은 것 뒤에는 크게 잊혀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은연중에 통신으로,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의 통신이다.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그저 잠이나 자고 있다. 한낮에만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없는 소리다. 빛을 가리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낮에 허영에 취해서 날뛰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밤에까지 연장하여 불야성을 만들려는 것은 점점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창세기에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고 했고,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없다 했으니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이 영원한 저녁이 그립도소이다. 파동이 아닌 빛 속에서 쉼이 없는 쉼에 살리로다.”(“저녁찬송”. 「성서조선」, 1940년 8월호)



고로 다석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밤에 잠만 자지 말고 세상을 향한 낮의 욕망을 다 내려놓고 영원하신 하느님 어버이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순우리말로 ‘하도 지낸 저녁’이라 옮겨 쓰기도 했던 영원한 저녁은 그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다석은 ‘있음’ 대신에 ‘없음’에서 참을 찾았다. 여기에서 다석이 자주 얘기하는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사상이 나온다.


없이 계신 하느님


없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믿는 그런 하느님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란 어떤 분인가? 절대자로서 우주의 공간 어느 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시는 그런 분을 말한다. 성서에서 하느님이란 말은 엘로힘이라는 히브리말을 번역한 말이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인데, 당시 고대 중동에서의 여러 부족들의 신들은 모두 ‘엘’이라고 불리었다.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며 부른 신은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하느님 ‘엘 엘룐의 하느님’이고,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신은 전능하신 하느님 곧 ‘엘 샤다이의 하느님’이다. 엘로힘은 그러니까 이런저런 신들을 모두 합친 이름이다.


그러면 성서에 나타난 또 다른 신의 이름 ‘야훼’는 무엇인가? 이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이에 응답하여 모세를 통해 나타나신 분이다. 모세가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는 어떤 대답을 기다렸는가 하면, 엘이 들어간 어떤 이름을 기대했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신은 자신을 많은 엘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훼’라고 발음하셨는데, 그 뜻은 그냥 ‘나는 나다.’


사실 우리는 이 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이해하지만,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신의 정체성을 설명한 하나의 문장이다.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유이다 그런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름을 부정한 것이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규정을 받는다는 말이고 규정을 받는다면 그건 더 이상 진정한 신이 아닌 것이다. 엘은 이름이 있다. 전능하신 엘, 뛰어나신 엘, 치료하시는 엘, 규정이 된다. 그런데 ‘야훼’는 실상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부정한 이름이다.


다석의 글에서 이런 설명은 보지 못했지만,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해를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고 신은 절대적 존재이다. 어떻게 상대적 존재가 절대적 존재를 파악(把握)-잡을 파에 집 악-하여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개미가 인간을 파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늘을 나는 손오공이 기껏 날아보았더니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역파악이 신 이해의 바름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신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독자 여러분은 언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부릅니까? 자기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을 부르지 않습니까?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 편리에 따라 신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면 그건 신이 아닌 신하 혹은 노예이다. 성서는 이를 우상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신앙을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정말 우리가 노예가 되고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그런 관계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사실 솔직히 말하면 무한 경쟁과 무한 소유를 부추기는 이 자본주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신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신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두 거짓이다.


존재에 대한 서양사상은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인간중심의 서양철학과 이성적 논리에 근간한 신학 그리고 그 바탕위에서 과학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반면 동양에서의 존재 파악은 인간 이성에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사람을 표현할 때,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인(人)이라는 하나의 낱말이 이미 인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이 간을 붙여서 인간을 표현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 거기에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인간을 개체로 보지 않고 관계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시간(時間) 마찬가지다. 시와 시 사이의 관계 그것이 시간이다. 공간(空間)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은 비어있다는 말이다. 빔과 빔 사이 그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은 인간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존재를 이해할 때,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인간을 주체적으로 놓고 그 존재성을 파악했고 이를 있음이라고 한 반면에 동양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없다. 그저 사이만을 이해할 따름이다라고 하여 빔 곧 무(無)를 더 큰 존재성으로 이해하였다. 서양에서의 무는 그냥 없는 것인 반면에 동양에서의 무는 마치 도(道)와 같이 그저 이해되지 않을 따름이지 부정의 의미로서의 비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그 근본을 무 곧 없음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현상을 다루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서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지만, 현상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세계에서는 동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다. 성서의 신 이해는 그래서 동양인들이 훨씬 더 정확한 이해를 한다. 하늘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하늘은 그냥 sky이다.


그러나 우리말의 하늘은 무한히 크고 넓다라는 뜻의 ‘한’이라는 단어와 항상 있다고 하는 ‘늘’이라고 하는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무한공간과 무한시간이 합쳐진 말이 하늘이다. 이 하늘에 사시는 분이 하늘님이다. 곧 하느님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를 유일신을 뜻하는 하나님이라고 고쳐 부르지만, 이는 서양적인 숫자 개념이 들어가 변형된 단어이다.


저는 우리가 하느님이 아닌 하나님을 고집한다면 유일신이라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요한이 말한 바, 하느님과 예수가 하나이시고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를 따름으로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한이 없다는 절대무한의 의미에서는 정당하지만, 개신교의 신만이 절대 유일하신 신이고 다른 종교들의 신은 모두 우상이다라고 하는 배타적인 의미에서 쓴다면 이는 잘못이다. 이는 무한히 크신 님 ‘야훼’를 자신만의 작은 신 ‘엘’로 축소해버리는 곧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다.


다석은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오늘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란 인간 중심의 서양의 사고 체계에 대한 동양적 답변이면서 동시에 이는 서양의 신학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다. 신을 믿고 엄청난 규모의 성당과 교회 건물을 짓고,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방대한 신학체계를 만들어 왔지만, 정작 그것이 하느님을 절대의 신으로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야훼님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었냐는 질문이다. 서구 기독교가 세계 역사에서 한 일을 보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여러 약소나라들을 예수 이름으로 정복하여 식민지화하여 단물은 다 빼내어 선진국 행세를 하며 지금도 군사와 경제의 힘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 과연 성서 하느님의 뜻이었는가?


수천만의 죽음을 불러온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지금도 핵무기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를 무분별하게 개발하여 수익을 얻는 반면 후진국은 이 무기로 서로 간에 죽이는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이 현실이 과연 야훼님이 원하는 일인가? 서양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와 혜택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환경오염과 이로 인한 자연재해를 불러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과연 하느님이 시켜서 한 일인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남한 또한 이러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고자 안달이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다. 용산참사나 평택의 노사대결은 선진국이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다석 류영모 선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서구 기독교가 저지른 인간 중심의 성공신화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갖도록 하고 있으며 동시에 섬김과 나눔의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바로 실천하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세상에 빠진 내가 미혹에서 벗어나서 뚜렷하게 나서야 한다. 예수는 뚜렷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도 이에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얼/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 아들과 딸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말씀 한마디를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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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기독교가 파악하지 못한 하느님 - 다석 류영모(2)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3.16



없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믿는 그런 하느님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란 어떤 분인가?


없이 계신 하느님


절대자로서 우주의 공간 어느 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시는 그런 분을 말한다. 성서에서 하느님이란 말은 엘로힘이라는 히브리말을 번역한 말이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인데, 당시 고대 중동에서의 여러 부족들의 신들은 모두 ‘엘’이라고 불렸다.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며 부른 신은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하느님 ‘엘 엘룐의 하느님’이고,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신은 전능하신 하느님 곧 ‘엘 샤다이의 하느님’이다. 엘로힘은 그러니까 이런저런 신들을 모두 합친 이름이다. 그러면 성서에 나타난 또 다른 신의 이름 ‘야훼’는 무엇인가?






▲ 다석 유영모(사진 왼쪽) 선생님과 그의 제자 함석헌(사진 오른쪽) 선생님 ⓒ한국 위키피디아



이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이에 응답하여 모세를 통해 나타나신 분이다. 모세가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는 어떤 대답을 기다렸는가 하면, 엘이 들어간 어떤 이름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신은 자신을 많은 엘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훼’라고 발음하는데, 그 뜻은 그냥 ‘나는 나다.’ 사실 우리는 이 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이해하지만,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신의 정체성을 설명한 하나의 문장이다.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유이다 그런 뜻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름을 부정한 것이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규정을 받는다는 말이고 규정을 받는다면 그건 더 이상 진정한 신이 아닌 것이다.


엘은 이름이 있다. 전능하신 엘, 뛰어나신 엘, 치료하시는 엘, 규정이 된다. 그런데 ‘야훼’는 실상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부정하는 단어이다.


다석의 글에서 이런 설명은 보지 못했지만,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해를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고 신은 절대적 존재이다. 어떻게 상대적 존재가 절대적 존재를 파악(把握)-잡을 파에 집 악-하여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개미가 인간을 파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늘을 나는 손오공이 기껏 날아보았더니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역파악이 신 이해의 바름이 아니겠는가?


서구가 잘못 걸어온 길


오늘날 신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언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부릅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을 부르지 않습니까?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 편리에 따라 신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면 그건 신이 아닌 자신의 종일 것이다. 성서는 이를 우상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신앙을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정말 우리가 종이 되고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그런 관계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사실 솔직히 말하면 무한 경쟁과 무한 소유를 부추기는 이 자본주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신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신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두 거짓이다.


존재에 대한 서양 사상은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인간중심의 서양철학과 이성적 논리에 근간한 신학 그리고 그 바탕위에서 과학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반면 동양에서의 존재 파악은 인간 이성에 있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람을 표현할 때,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인(人)이라는 하나의 낱말이 이미 인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이 간을 붙여서 인간을 표현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 거기에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인간을 개체로 보지 않고 관계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시간(時間) 마찬가지다. 시와 시 사이의 관계 그것이 시간이다. 공간(空間)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은 비어있다는 말이다. 빔과 빔 사이 그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은 인간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존재를 이해할 때,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인간을 주체적으로 놓고 그 존재성을 파악했고 이를 있음이라고 한 반면에 동양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없다. 그저 사이만을 이해할 따름이다라고 하여 빔 곧 무(無)를 더 큰 존재성으로 이해했다. 서양에서의 무는 그냥 없는 것인 반면에 동양에서의 무는 마치 도(道)와 같이 그저 이해되지 않을 따름이지 부정의 의미로서의 비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그 근본을 무 곧 없음이라고 파악했다.


서구 기독교가 파악하지 못한 하느님


현상을 다루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서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지만, 현상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세계에서는 동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다. 성서의 신 이해는 그래서 동양인들이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한다.


하늘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하늘은 그냥 sky다. 그러나 우리말의 하늘은 무한히 크고 넓다라는 뜻의 ‘한’이라는 단어와 항상 있다고 하는 ‘늘’이라고 하는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무한공간과 무한시간이 합쳐진 말이 하늘이다.


이 하늘에 사시는 분이 하늘님이다. 곧 하느님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를 유일신을 뜻하는 하나님이라고 고쳐 부릅니다만, 이는 서양적인 숫자 개념이 들어가 변형된 단어이다.


필자는 하느님이 아닌 하나님을 고집한다면 유일신이라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요한이 말한 바, ‘하늘님’과 예수가 하나이시고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를 따름으로 ‘하늘님’과 하나가 된다는 이런 의미에서, 곧 하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끝이 없다는 절대무한의 의미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신교의 신만이 절대 유일하신 신이고 다른 종교들의 신은 모두 우상이다라고 하는 배타적인 의미에서 쓴다면 이는 잘못이라고 본다. 이는 무한히 크신 님 ‘야훼’를 자신만의 작은 신 ‘엘’로 축소해버리는 잘못이요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늘님’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다석은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은 인간 중심의 서양의 사고 체계에 대한 동양적 답변이면서 동시에 서양 신학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다. 신을 믿고 엄청난 규모의 성당과 교회 건물을 짓고,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방대한 신학체계를 만들어 왔지만, 정작 그것이 하느님을 절대의 신으로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야훼님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었냐는 질문이다.


다석의 없이 계시는 하느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세계 역사에서 한 일을 보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또한 수많은 약소국가들을 예수 이름으로 정복하며 식민지화하여 단물은 다 빼먹은 결과 지금은 선진국 행세를 하며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과연 야훼 하느님의 뜻이었는가? 수천만의 죽음을 불러온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지금도 핵무기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를 무분별하게 개발하여 수익을 얻는 반면 후진국은 이 무기로 서로 간에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는 이 현실이 과연 야훼님이 원하는 일인가?


서양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와 혜택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환경오염과 이로 인한 자연재해를 불러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남한 또한 이러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고자 안달을 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다른 민족의 피를 대가로 했다면 오늘은 우리의 이웃이 피를 흘리고 있다. 용산참사를 비롯한 개발의 희생자들, 김용균 님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농어촌 곳곳에서 저임금에 혹사당하는 이주민 노동자들, 알바를 세 개씩 뛰는 흙수저의 젊은이들이 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서구 기독교가 저지른 인간 중심의 성공신화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갖도록 하고 있으며 동시에 섬김과 나눔의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바로 실천하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세상에 빠진 내가 미혹에서 벗어나서 뚜렷하게 나서야 한다. 예수는 뚜렷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도 이에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얼/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 아들과 딸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말씀 한마디를 하고 싶은 것이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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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에 하느님의 씨를 키워라 - 다석 유영모(3)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3.23

마가복음이 예수의 수난사를 중심으로 낮아지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을 주제로 삼은 반면에 요한복음은 높아진 그리스도,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주제로 삼는다. 다석은 이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요한복음의 하느님은 역사 안에 말씀의 형태로 자신을 내보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또한 이 세상에 “진리의 실을 뽑아 말씀의 집(思想)을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대를 품는 주체적인 신앙인


곧 생각하는 사람 주체적 인간을 강조한 것이다. 서구교회가 말한다고 무조건 믿지 말고,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신뢰하지 말고, 자신 안에 절대를 품고 말씀을 되씹고 되씹는 과정을 통해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할 때,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절대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지상의 것은 거의 전부 훨훨 벗어버리고 ‘하나’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의 ‘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절대 진리를 위해서는 내버릴 것은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다 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생(生)을 가진 자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여 나갑니다. 이 세상이 되고 안 되고는 영원한 님을 찾는 사랑의 힘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과 달리 류영모 선생은 정통기독교신앙을 버렸다. 정통기독교신앙이란 4세기 말에 바울의 편지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교의신학의 핵심을 요약한 사도신경을 따르는 신앙을 말한다. 사도신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의 육신부활과 동정녀 탄생에 이어,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간의 원죄가 속죄된다는 대속의 속죄교리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다석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속죄교리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요한복음에 따라 진정한 기독신앙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영원한 생명(얼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에게서는 예수의 신앙을 배워야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예수 믿기를 넘어 예수 따르기를 넘어 예수살기를 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대속신앙만이 주를 이루는 오늘 교회의 현실은 분명 예수께서 바라셨던 일은 아니다. 다석은 교회가 가르치는 대속 신앙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주체적인 신앙을 갖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그렇게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와 함께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보다 큰일을 하여야 한다.


자속의 예수, 대속의 그리스도


흔히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불교는 자력종교, 기독교는 타력종교라고 말한다. 불교는 극기의 훈련과 명상 깨달음을 통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곧 스스로가 부처가 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친다고 한다. 반면 기독교는 구원은 오로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의 아들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곧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 다석 유영모 선생님과 그의 부인 김효정 선생님 ⓒGetty Image

남한교회가 구원 교리에 있어 가장 강조하는 성서 구절은 로마서 3장 28절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라는 사도 바울의 얘기이다. 마르틴 루터 신부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대항하여 개혁운동을 펼칠 때에도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다고 하는 sola gratia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바울과 루터 공히 구원에 있어 자속의 노력은 부정하고 대속의 교리만을 외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주장과 사상이 그러하듯이 기독교에서 어떤 특정 교리가 외쳐질 때에는 그 교리를 외쳐야만 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는 것이다. 바울이 오직 믿음에 의한 의인됨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의 율법 곧 할례법이나 안식일법 정결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폐쇄적인 유대혈통 민족주의’와 ‘예루살렘성전 제사절대주의’라는 부당한 교권 교리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 구원을 가로막는 이러한 법을 타개해야만 했던 상황이 있었다.


루터 또한 중세 가톨릭의 로마 교황청이 베드로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민중을 오도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횡포에 가까운 교권에 대항해야 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나 루터가 신앙의 실천과 행위에 소홀하였던가? 전연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앙 행위에 있어서는 철저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이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그 역사적 상황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매우 잘못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남한교회의 타락과 그 원인


지금 남한의 교회들이 비판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기적이고 사회 참여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배나 기도에는 열심이지만, 윤리·도덕성이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비난받지 않는 대형교회들이 없다.


성스캔달, 재정비리, 세습, 교권횡포 등으로 인해 세상은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주일성수나 십일조헌금과 같은 종교적 실천만을 강조하고 교회 밖의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아픔은 외면하고 있다. 사회구조 악의 문제에는 눈을 감고 있다.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되이 지키라는 주일 성수 명령은 본래 쉴 수 없었던 노예와 가축 곧,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계명이었다. 열에 하나를 바치라는 십일조의 계명 또한 과부와 고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계명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계명의 말씀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계명으로 잘못 이용되고 있다.


지금 대형교회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 무엇인가? 만세! 삼창을 본떠 주여! 삼창을 외치고 나서 집단 통성기도를 시작한다. 두 손을 들고 주여! 주여!를 외치거나 방언기도를 하는 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집단적인 열광 속에서 개인의 스트레스나 울분을 토해내는 일에 너무 익숙해 있다.


예수께서 가르친 기도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하고’ ‘하루치의 양식을 위해’ 그리고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하라’ 등등이 주 내용이다. 공중석상에서 손을 들고 크게 외치는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라고 비판하셨다. 차라리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 TV 방송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댄 래더라는 앵커맨이 ‘당신은 하느님께 기도할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라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수녀님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듣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한 앵커는 다시 질문을 하였다. “당신이 듣고 있을 때에 하느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수녀님은 답변하기를 “그분도 듣지요.” 남한교회가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할 예화이다.


작금의 개신교의 성장이 멈추고 감소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10년 전만 해도 젊은이들이 개신교를 가리켜 ‘개독교,’ 목사를 ‘먹사,’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조롱하였다. SNS상에 끊임없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비난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판을 할 때는 그래도 관심이 있었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젊은이들의 관심과 참여가 사라진 교회는 미래가 없다. 교회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분명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신앙 훈련이나 사회 실천과 같은 자속 신앙이 없이 통성기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에 의지하여 구원받으려는 대속 신앙은 한 때 많은 사람들이 마치 밀물이 밀려들어오듯 쉽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동기가 되었지만, 지금은 교회 타락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었고 교인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떠나가는 주된 이유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피에 대한 설교도 많이 하고 보혈의 찬송을 많이 부르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도 지적이 되었지만, 정작 피해자는 아직 용서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가해자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좁은 길 신앙은 없어지고, 고난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다 지고 갔으니 넓은 길을 편안하게 걸어가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대속신앙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신앙의 추를 자속신앙으로 옮겨 신앙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때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류영모


대속신앙의 대표적인 성서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함을 얻을 것이다.” 100년 전 조선교회는 이 말씀 하나에 근거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어렸을 때, 교회에 가면 자주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말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유명했던 류영모 선생과 김교신 선생은 신앙의 길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김교신 선생은 정통신앙을 유지했고, 류영모 선생은 매우 폭넓은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류영모 선생은 김교신 선생이 주관하는 성서연구회 모임에 참여하면서도 어느 한계를 넘는 말은 일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교신의 간청에 못 이겨 성서연구회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풀이하였는데, 아니다 다를까 류영모가 예상한 대로 모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웅성거렸다. 이 장면을 김교신은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류영모 선생의 독특한 요한복음관을 듣고 일동의 논의가 분분했다. 류 선생은 특이한 해석을 갖고 계시다. 남의 신앙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자기의 성서관을 쉽게 공표하지 않는 터인데 수년 동안의 간청에 의해 금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설명하시니 처음 듣는 이들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67-68쪽)

그날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류달영 선생이 그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다.

“1937년 1월 정초 경인선 오류역 근처 송두용 선생 집에서 겨울철 성서연구 모임을 가졌다. 다석은 북한산록 구기리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왔다. 다석은 그 모임에서 김교신의 간청에 의해 성서말씀을 하게 되었다. 말씀의 내용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해설이었다. 다석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정통을 자처하는 교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느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다석의 생각은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했다. 다석은 말하기를 하느님이 사람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생명(성령)을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 주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씨)를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는 요한1서 3장 9절의 말씀과 상통하는 해석을 하셨다. 사람은 제 마음 속에 하느님의 본성(씨)를 키워서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의견이 분분하여 여러 사람들이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김교신 선생이 이를 막으면서 “다석 선생의 성서풀이는 아주 높은 차원에서 하는 말씀이므로 알아들을 만한 귀를 따로 갖고 듣지 않으면 그 참뜻을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닫기 어려우니 각자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가서 오랫동안 새겨보라고 타일렀다.” 여기서 우리는 류영모 선생이 주장하는 바를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는 모두 요한복음의 핵심 주장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인 것 같이 우리들도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고(17장 22절), 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14장 12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속신앙이 아닌 이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속신앙을 강조한 말씀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당시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조선교회의 지나친 대속신앙적인 성서해석이 가져올 조선교회의 미래를 그때 이미 예감했다고 본다.


따라서 대속신앙의 대표적 성서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해석할 때, 그 한 구절에만 매여 좁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리고 3장 16절 이하 말씀인 19절과 20절 말씀을 보더라도 이는 명확하다. 19절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행실이 악하여’라고 말함으로 ‘행실’을 강조하고 있고, 20절에서는 “악한 일을 일삼는 자가 빛을 미워하고 멀리 한다”고 말함으로 또한 “악한 일”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처음 선교와 전도를 시작할 때, 신앙행위가 강조된 무거운 신앙을 요구하기는 힘들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단순하고 명료한 대속신앙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을 때에는 그 교리나 신학은 이제 맞추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는 자속신앙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를 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 남한교회는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적이고 세계사적인 과제 앞에 서 있다. 개인영혼 구원이라는 전통교리와 대속신앙에 매여 있어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남한교회의 미래를 위해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믿기’를 넘어 ‘예수따르기’와 ‘예수살기’의 신앙에 이르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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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얼 사상 - 다석 류영모(4)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4.06


이번 글이 다석 류영모 선생에 관련한 네번째이다. 워낙 방대한 사상이라 1년을 계속한다 해도 끝이 나질 않겠지만, 중요한 얘기들이 많아 다섯 번까지 할 예정이다.


우리 말과 ‘얼’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나는 소용이 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인 얼나가 참나다. 하느님 아들 예수는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이 짧은 글 속에 다석 류영모 선생이 즐겨 쓰던 ‘얼’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얼생명 얼숨 얼나. ‘성령’이라는 한자어를 순수 우리말로 옮긴 단어가 ‘얼’이다.





▲ 구기동 집 주변을 산책하는 다석의 모습(1970년도, 80세) ⓒ다석사상 연구회



요한복음 4장 24절의 ‘하느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을 다석은 ‘하느님은 얼이시다’로 바꿔 말한다. 하늘나라 또한 ‘얼나라’라고 말한다. 얼은 썩어 없어질 몸의 반대어이며 영원함을 상징한다.


요한 1서 3장 9절의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sperma, 그리스)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씨,’ 곧 하느님을 알게 하고 자라서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도 얼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얼이 빠지다, 얼얼하다는 말이 있다. 얼이 빠지다라는 말은 갑작스런 충격으로 멍청해져서 생각의 알맹이가 없이 정신없이 이소리 저소리 횡설수설하는 경우를 말한다.


반면 얼얼하다는 말은 문자의 뜻으로 보면 얼이 가득 찬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쓰임새를 보면 얼이 빠진 경우와 비슷하여 넘어져 몸의 어딘가가 부딪혀 부어올라 신경이 둔하게 될 때, 얼얼하다고 말한다. 생각이 분명하지 못할 때, 머리가 얼얼하다고 말한다.


본래는 좋은 말인데, 실제는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얼이 하나만 들어와도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거늘 두 개나 들어왔으니 감당치 못할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우리가락을 들을 때에 흥이 나서 외치는 추임새 중의 하나인 ‘얼쑤,’ ‘얼씨구 좋다’도 얼이 넘치는 상태 곧 너무 흥겨워 ‘신’이 춤추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좀 거친 표현을 쓴다면 너무 좋아 자신의 똥집이 들썩들썩 거릴 때를 말한다.


얼굴이라는 단어 또한 다석은 이를 ‘얼+골’ 곧 얼의 ‘골자구니’에서 나온 말로 설명한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얼이 지나온 모습을 볼 수 있다. 깊게 파인 주름에서 인생의 험한 골짜기를 엿볼 수 있고, 눈가를 스치는 여유있는 미소에서 인생의 넉넉한 골짜기를 맛볼 수 있다. 예수님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얼굴을 얼의 골자구니로 풀이한 것은 참으로 깊은 통찰에서 나온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단어 또한 ‘얼이 온전한 사람’에서 나온 말로 해석한다. “사람이 나이 먹고 시집 장가간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얼과 얼이 얼려야 어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본래 우리말에 상대방을 높이는 말에 ‘언님’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또한 ‘얼님’ ‘얼을 가진 님’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은 식당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분을 향해 ‘언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근본을 알면 쉽게 사용해서는 안될 말이다.


얼은 알과도 그 뜻이 통한다. 알의 껍데기는 그 생명이 나오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와 같이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몸 혹은 맘은 모두 얼이 나올 때까지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얼은 곧 태초에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어주신 당신의 숨길, 숨바람, 곧 성령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 얼을 찾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 또한 같은 의미이다. 물은 과거의 죄를 씻어내는 역할을 하고 비어낸 몸을 새롭게 하는 역할은 성령이 담당한다.


남한교회의 일반 성령이해

성령은 우선 하느님 예수와 더불어 동등한 인격체이다. 이 세 분이 하시는 역할은 다르지만, 이 세분은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신학이 주창하는 삼위일체론의 핵심이자 남한교회가 매 예배 때마다 반복하는 사도신조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니케아신조가 있는데 그 내용이 사도신조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또 다시 사도신조를 새롭게 고백한 이유는 성령님을 하느님이나 예수님보다 하위에 두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를 가보면 강단에 선 목사들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면서 쉿! 쉿! 하는 목쉰 소리를 낸다. 때로는 손을 펴서 성령을 나눠주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마치 성령은 부흥목사의 주머니 속에 있다가 그 목사의 명령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

이는 참 성령의 모습이 아니다. 한 인간의 명령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영이라면 그건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 성령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의 영에 불과하다. 이 영이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품을 내며 넘어뜨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최면사들도 하고 무당들도 하는 일이다. 오히려 무녀나 무당들은 접신을 하면 날이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파 부흥사들이 날이 선 작두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에만 관련지어 성령의 역사를 말하면 기독교가 뛰어날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교회는 그 선교 역사가 짧아 성령하면 방언과 치유 기적만을 떠올리는 성령 은사주의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다. 사도 바울로가 쓴 여러 편지를 종합하면 성령의 은사는 방언과 치유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에 기록되어 있는 은사들을 보면, 거기에는 지도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지혜, 지식, 권면, 방언, 통역, 치유, 예언, 전도, 섬김, 자선, 영분별 등등 30가지가 넘는다.

오히려 바울로는 방언의 은사나 치유의 은사를 여러 은사 중 하위에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남한의 많은 교회들은 이 낮은 은사에만 매달려 있다. 바울로가 말하는 최고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의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바로 12장의 은사장 다음에 나온다. 여러 은사를 말하고 나서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 모두가 사도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것은 사랑의 은사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 선생이 이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을 감추는 사랑의 은사보다는 자신을 드러내주는 방언과 치유의 은사에 더 관심한다. 그래 남한교회에서 성령은 방언과 치유 기적이라는 신비주의와 광신주의의 산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교권과 광신주의에 갇혀 버린 성령님을 해방시키기를 원한다. 본래의 자유하는 영으로 되살아나 오늘 여러분의 현실의 삶 속에서 이 땅의 탐욕을 줄이는 영원에 대한 소망과 경쟁이 가져오는 죽음의 권세를 누르는 부활의 능력을 되찾기를 고대한다.

성령은 생명의 근원

성서가 말하는 성령님은 ‘생명을 낳게 하는 분’으로 말해진다. 제1성서에서는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라 말하고 제2성서에서는 그리스어로 프뉴마로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 야훼 하느님은 흙으로부터 인간을 빗은 후에 그 코에 당신의 입김 루아흐!를 불어넣으시어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드신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 프뉴마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 루아흐나 그리스어 프뉴마는 모두 성령으로 번역되지만 동시에 문맥에 따라 바람으로도 번역된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변화의 힘을 동반한다. 특히 요한은 단어의 이러한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용한 엇갈리는 대화를 좋아한다.

그리스어 ‘ana’라는 부사는 ‘다시’와 ‘위로부터’라는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나야 한다고 하는 질적 태어남을 말하고 있는데, 이를 니고데모는 두 번 태어나야 한다고 하는 그래서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양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어 대화가 엇갈리고 있다.

다석 류영모는 어머니 배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생명은 가짜 생명인 몸나입니다. 우리는 참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이 참나를 찾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참나가 들어갑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은 참나가 아니고 속알(德)의 나, 성령의 나가 참나입니다. 우주와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가 참나입니다. 죽으면 흙 한줌 재 한 줌이 되는 몸뚱이는 참나가 아닙니다.”



다석은 ‘나’라는 단어를 이용한 여러 가지의 우리 말을 만들었는데, 육신적인 인간을 말할 때는 ‘몸나’ 혹은 제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나’로,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은 ‘얼나’ 혹은 참된 모습의 인간이라는 ‘참나’로, 몸나 혹은 제나에서 얼나 혹은 참나를 체험하는 인간은 ‘솟나’로 말한다.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다석의 용어로 말하면 제나 혹은 몸나가 얼나 혹은 참나로 거듭나는 솟나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뛰어난 랍비인 것은 알았지만,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 둘 사이의 대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이후 니고데모는 이 예수의 말씀을 곱씹고 곱씹어서 숨은 제자로 남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예수를 변호하기도 하고 십자가 처형 후 예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니고데모만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가까이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몰랐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을 얻어먹자 예수를 저들의 세상 왕으로 받들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신다.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통해 영원의 떡을 주고자 했지만, 예수의 참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자꾸만 좇아오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여 온 살아있는 떡이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떡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6장 51절)


그러자 사람들은 그만 이 ‘살’이라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치 식인종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고는 말이 어렵다고 수군거리고는 다들 떠나간다.(6장 66절) 다만 베드로는 뭔가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고 답한다.(요한 6장 68-69)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란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어떤 저 하늘 저편에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주기도에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 임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바와 같이 육체를 따라 사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의 성령을 따라 사는 그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으로 얼룩진 이 땅의 오욕의 역사 속에서 움틀거리는 공의와 생명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 역사의 소리를 듣고 이에 응답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믿는다. 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솟나를 경험한 얼나의 사람은 작게는 사람을 바라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우릴 줄 아는 사람이요 크게는 하느님의 백성들인 씨알이 주인되는 민의 역사를 믿고 하루하루를 희망의 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주4.3 항쟁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전해들이고 오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제주4.3항쟁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30만 전체 도민 중 거의 십분지 일에 해당하는 3만명이 살해당한 사건이며 이중 3분지 1이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한마디로 골육상잔인 한국전쟁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초기에 합의에 의해 소수의 희생자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북에서 내려온 기독청년단과 미군정과 하수인 이승만정권이 손을 잡고 빨갱이 이념 논쟁을 벌려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인 대학살사건이다. 왜냐하면 당시 미군정이 파악한 남한 사람들의 이념은 70% 이상이 남의 자본주의보다는 북의 사회공산주의 제제를 더 원하고 있었기에 친북 빨갱이 이념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도 이러한 논쟁으로 정적들을 감옥에 가둔 맥카시논쟁이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당시 한 달 만에 무려 6천명을 체포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인 경비대장 박진경을 암살한 기독교인 문상길 중위의 법정에서의 마지막 증언입니다.


“22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이승만)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도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류영모 선생이 말하는 몸나와 제나라는 세상 생명을 넘어 하늘 얼나에서 부활 솟나로 살아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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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과 말을 되찾는 운동에 앞장 섰다 - 다석 류영모 (5)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5.25


다석은 일제강점기를 살며 독립자금을 전달한 적도 있었지만, 총을 들고 직접 싸우기보다는 바른 신앙과 민족의 얼과 말을 되찾는 사상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꾀한 분이다. 다석의 독창성은 순우리말로 생각을 풀어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오래된 뿌리를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오듯이 다석의 글도 곱씹어볼수록 깊은 뜻이 드러난다.


다석이 우리말로 옮겨 놓은 주기도문과 다석의 제자로서 이화여대 교목/교수로 봉직하시면서 선생의 뜻을 펼쳤던 김흥호 목사의 해설이다.


다석의 주기도

하늘 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길 참 말씀이니이다.
이에 숨쉬는 우리 박는 속알에 더욱 나라 찾음이여지이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옵고 진 짐에 짓눌림은 되지 말아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며 고루 사랑을 널리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님께서 하나가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되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해설) 영원무한하신 생명의 근원에 도달함만이 거룩한 길이요, 참 말씀이다. 아침에 해가 떠올라 온 세상을 밝히듯이, 생각하는 사람의 속알이 깨어나 밝아지는 대로 우리의 나라 찾음은 더욱 확실해진다. 사람이란 자기 속에 자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힘씀으로써 무한히 발전할수 있다.
사람은 서로 바꿔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하느님 앞에서 평등함을 느껴야 한다. 하느님과 주님이 하나가 되어 참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랑 속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땅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나무처럼 하늘을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산 사람이다. 아멘. (제소리 김흥호)



다석의 민중씨알론


그런데 당시 지식인들은 그가 학력이 없는 것을 갖고 얘기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력이 없거나 집안의 재정이 없어 일본 유학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마치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닫고 중국 유학을 포기하였듯이 다석 또한 깨달음 속에서 일본 유학을 포기했던 것이다.






▲ 다석 유영모 선생 ⓒ다석학회



대학 대학 하면서 대학에 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생각하는데, 대학이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대학 때문에 사회악이 조장되지 않아요? 고등교육 받은 사람의 범죄가 더 심해지고, 그런 사회악이 더 눈에 띄지 않아요? 모르기는 해도 오늘날 교육하는 사람 가운데 공부 잘해야 잘먹고 잘살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옛날에도 좋은 음식, 좋은 집, 출세 같은 것이 권학(勸學)의 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박사논문은 빌어먹을 짓입니다. 나는 대학을 반대합니다. 출세하여 대학교수 된다고 하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하는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의 편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라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지식을 취하러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입니다.(『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39쪽)


저도 이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만, 오늘날 대학입학 박사학위 위주의 교육현실을 감안할 때, 여전히 살아있는 말씀이다.

일제 패망 직후 주위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잠시 은평면의 자치위원장직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를 돌아보며 “나라 장관 자리만 맡으려 할 것이 아니라, 동네일을 볼 마을 이장 통장감이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됩니다. 온 나라 이장들이 다 훌륭하면 나라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자꾸 나라 대들보감만 되라고 하는데 서까래도 있어야 합니다. 대들보감만 기르다가 서까래감이 없으면 무엇으로 지붕을 덮습니까? 대들보를 쪼개 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대들보가 되는 것만을 성공으로 보는 오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민중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으로 깨어나기를 원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왔다.’(마태 20장 28절)는 말씀을 실천하였다.


다석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성서 말씀을 따라 지금은 서울 시내에 속하지만 당시는 사대문 밖이었던 구기동 일대 임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오늘의 세상에서 지각 있는 사람은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살지를 않습니다. 농민, 노동자, 이들은 모두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 그들의 찔림은 우리 허물로 인함이요, 그들이 상함은 우리 죄악이라고 이사야 53장 5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대중의 고통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왜 고생합니까? 우리 대신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의 중심 생각이고 민중신학이 강조하는 바이다.


현존-하루살이, 오늘살이


류영모 선생은 자신의 산 날을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날수로 계산하였다. 영원한 시간에 비기면 사람의 일생이란 번갯불이 번쩍 빛나는 동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짧은 삶의 시간을 알뜰하게 살기 위하여 다석은 오늘살이 하루살이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루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하루살이의 삶이다. 아니 어쩌면 하루로 만족하는 삶이다. 어찌 하루에 만족하지 않고 백일 천일에 만족할 수 있을까? 하루살이, 그건 그날 하루가 자신의 최후의 날인 줄 알아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그 이룬 자리가 어떠하든지 만족할 줄 아는 인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


다석은 말한다.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마중을 나가 기다리는 동안 차를 기다리는 동안 같은 부스러기 시간에도 자기의 사상을 영글게 하는데 써야 합니다. 하루를 무심히 지내면 백 년, 천 년을 살아도 시간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 겨레가 5천 년 동안을 긴장해서 살아왔다면 지금 이 모양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조나 우리나 모두 하루를 무심코 편안히 지냈기에 지금 요 모양입니다.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한 인생도 비상한 생명이 됩니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내버리면 인생은 허무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쉬면서도 쉬지 않는 숨처럼 언제나 깨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일과를 꼭꼭하면 괴로우면서도 기쁩니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데서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느님이 시키신 사명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나의 뜻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제나는 죽고 얼나로 사는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허송세월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지나간 것은 찌꺼기라 돌볼 것이 못됩니다. 내일을 찾으면 안됩니다. 내일은 아직 도착되지 않은 손님입니다. 언제나 오늘오늘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오늘 오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 6장 34절)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순간순간에 집중하면 기뻐집니다. 살아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래 류영모선생은 강의를 하다가 둥실둥실 춤을 추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얼쑤, 얼이 쑤-욱- 올라갔다 내려오는’ 얼춤을 춘 것이지요. 선생은 말하기를 “목숨은 기쁨입니다. 사는 것은 기쁜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기쁜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좇아 하느님께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391쪽)


얼나 그리스도


다석은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을 새롭게 해석한다.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면 어머니 아버지에 의해 생겨난 짐승의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의 얼나로 거듭나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의 깊은 뜻이다. 사람이 삼독(탐貪, 진瞋, 치痴, 욕심과 성냄과 향락)의 죄악에서 구속되어 자유할 수 있는 것도 얼나로 솟나는 길뿐이다. 그러기 위해 내 속에 온 하느님의 씨가 독생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습니다. 얼로 거듭나는 것이 영생입니다. 얼이 참나인 것을 깨닫는 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417쪽)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닌 예수의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 참 구원의 길이다. 그래 예수님은 당신이 매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부탁하셨다. 곧 대속이 아닌 자속의 길에 참 구원의 길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다석은 매우 독특한 그리스도론을 얘기한다. 民의 그리스도론, 씨알의 그리스도론을 말한다. 메시아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이고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말한다. 제1 성서에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왕들이 다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그들은 모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불리었다. 심지어는 유대인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을 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마저 메시아라고 칭한다.


다석은 이 사상을 이어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이기에 이 성령에 의해 거듭난 모든 사람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류영모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껍질(몸)을 쓰기 전, 또 벗어 버린 뒤에 어찌 될 줄은 모릅니다. 이것을 안다면 나도 거만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영원한 생명이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하 206쪽)


다석은 일요일이면 세 개의 교회를 함께 다녔던 두 살 터울의 동생 영묵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그간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고 성공을 한다고 하는 교회의 주장에 회의를 갖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떠난다. 후에 그는 깨달음을 통해 죽음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한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죽음의 연습은 영원한 얼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에요.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몸으로 죽은 연습은 얼생명으로 사는 연습입니다.”(박영호 다석 류영모 37쪽) 그래 외치기를 “죽음이란 참으로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 없는 것인데 사람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다.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박영호, <다석 유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237쪽)

죽음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외쳐야 할 마지막 신앙고백이다. 다석 선생은 다시 한번 당부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밖에 개인적인 행복이니 성공이란 다 부질없는 생각이요, 허황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행유예의 처지에 놓인 사형수가 무슨 행복을 찾고 무슨 성공을 한단 말입니까? 개인적인 행복이나 성공이란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행복이 있고 성공이 있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뚜렷이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하, 207쪽)

땅에 속한 제나를 버리고 하늘에 속한 얼나를 통해 언제나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참고서적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다석 유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박영호, 두레, 2000.
『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2000.
『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2009.
『다석 유영모』, 박재순, 현암사, 2008.
『씨ᄋᆞᆯ 함석헌, 다석 유영모, 무위당 장일순,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사상을 돌아보다』, 김경재·이정배·이현주·김한중 공저, 광주 YMCA 오방기념사업회 편찬, 2009.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장회익 공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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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이야기
장회익 (지은이)현암사201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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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서는 <공부도둑 -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의 개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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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서는 <공부의 즐거움 - '공부도둑' 장회익의>의 개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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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반양장본
430쪽
140*220mm
700g
ISBN : 9788932317144

책소개
장회익 선생의 베스트셀러인 <공부도둑>의 개정신판인 <공부 이야기>가 새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끝없이 앎을 추구하며, 평생 앎과 숨바꼭질하며 살아온 생애의 자취를 더듬으며 선생은 자신을 때로는 공부꾼 때로는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고 말한다. 그저 앎을 즐기고 앎과 함께 뛰노는 것이 좋았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대학 시절, 유학 시절에 이어 장년을 지나 노년의 지금까지 여일한 ‘공부하는 삶’이 담백하고 아름답다.

이 책의 형식은 파격적이다. 전체를 열두 ‘마당’으로 나누고 마당마다 이야기를 몇 ‘토막’씩 담았는데, 그 안에서 사실에 바탕을 두되 상상과 추측 그리고 느낌 등을 자유롭게 삽입함으로써 형식에 매이지 않는 입체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노학자의 이야기는 살아 있는 도서관이 되어 많은 이들이 열람하는 우리 지성의 라이브러리가 되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이번 개정판에서 새로 쓴 열두째 마당에서 장회익은 한층 즐거워진 공부 생활을 피력하면서, 자신이 아인슈타인보다 더 뛰어난 점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목차


개정판을 내면서
초판 머리말

첫째 마당 본풀이
둘째 마당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
셋째 마당 인삼과 산삼
넷째 마당 교실 안과 밖
다섯째 마당 방황과 모색
여섯째 마당 배움의 되새김질
일곱째 마당 물질에서 생명으로
여덟째 마당 학문과 동산
아홉째 마당 우주설과 동양학문
열째 마당 온생명과 낱생명
열한째 마당 가르침과 깨달음
열두째 마당 낙엽과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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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장회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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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고체물리학 연구(논문 〈GsSb의 에너지밴드 구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대학교 연구원과 루이지애나대학교 방문교수를 거쳐 30여 년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겸임교수로 참여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초빙교수로서 경희대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물질, 생명, 인간: 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온생명과 ... 더보기


최근작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정보혁명>,<융합 인문학> … 총 5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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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예언자>,<들판은 매일 색을 바꾼다>,<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헌법재판소 결정 20>등 총 513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5위 (브랜드 지수 95,036점), 음악이야기 6위 (브랜드 지수 15,500점), 불교 10위 (브랜드 지수 39,57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의 ‘통합적 지성’ 장회익의 삶과 학문, 사유의 이정표!
현대의 고전 <삶과 온생명> 신판, 베스트셀러 <공부도둑> 개정판 출간

우리의 언어와 사유로 고유의 입론과 개념을 주창해온 당대의 지성 장회익 선생(서울대 명예교수)의 명저인 <삶과 온생명>의 신판, 베스트셀러인 <공부도둑>의 개정신판인 <공부 이야기>가 새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과학자들은 물론 인문학자들에게 오히려 더 추앙받는 ‘온생명’의 물리학자 장회익의 주저와, 공부하는 삶의 본보기로서 널리 읽힌 한국판 ‘학문의 즐거움’이 새로이 출간됨으로써 ‘사유하는 과학자’ 장회익의 사상과 학문 세계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우뚝 세워졌다.

■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공부 이야기> 장회익 3부작 완간!

장회익 선생의 평생의 탐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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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와 생명의 만남! 그리고 대하드라마


장회익 선생은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선 물리학자다. 생명과 물리는 별개의 영역 같지만 서로를 이해하는데 동반자 같은 관계다. 아니, 선생에 따르면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모든 만물이 종내는 하나의 원리로 수렴되듯이 생명 현상과 물리 법칙도 그러하다. 선생은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획득한 후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탐색하기 시작한다. 에르빈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찾아갔듯이.



이 책은 2008년 《공부도둑》으로 나왔던 것을 새롭게 다듬어 낸 것이다. 선생은 1938년생이니 초판이 나온 2008년이 꼭 칠순이 되던 해였다. 본래 책 제목이 ‘공부도둑’이듯 선생은 앎을 훔쳐내는 도둑이 되고자 했다. 이제는 생명의 정수(精髓)를 찾아 ‘삶 중심의 학문’에 심취해 있다.



어떻게 물리학을 통해 생명의 신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을까? 책에는 선생이 지적 호기심과 학자의 열정으로 우주 만물의 근원을 찾아 한 평생 달려온 대하드라마가 펼쳐진다. 초반은 조금 생뚱(?)맞고 지루하게 시작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버텨보자. 선생 만이 선보일 수 있는 독특한 경지의 세계가 펼쳐진다.



선생은 목차를 열두 마당으로 나누고 마당마다 이야기를 몇 토막 씩 담았다. 주요 내용은 그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30여년 재직하는 등 자신이 지나온 자취를 점검하고 생을 되돌아보는 형식이다. 선생에게 이 책은 자신의 회고록이자 자서전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이 만년에 쓴 『자서전적 노트Autobiographical Notes』(1949)와 같은.


내 삶이 끝없이 ‘앎’을 추구하며 지내온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 이것은 뭐 그리 대단한 탐험의 길도 아니었고 또 대단한 성취를 얻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즐기면서 함께해온 놀이로는 의미 없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앎과 숨바꼭질하며 살아온 생애라고도 할 수 있다. - 초판 서문

그는 물리학이 좋아 물리학을 더 공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청주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자유로운 야생(野生)의 분위기에서 꾸준히 공부한 결과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선생은 자신이 읽고 공부했던 책과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룬 학문의 성취에 대해 마치 지층을 쌓듯 하나 하나 들려 준다. 나는 이 책을 보는 독자에게 열두 마당을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



책을 보면 선생은 자신의 교육관도 자세히 피력한다. 가령 물리학과를 다니던 당시 처했던 어려운 상황(강의가 체계적이지 못함, 구하기 힘든 원서 등)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았을지 조언한다. 이는 곧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공부법이다.




“물리학 전체에 대해, 그리고 이와 연결해 개별 과목에 대해 그것이 담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잠정적 결론을 자기 언어로 서술하라. 그리고 학습이 진행되는 대로 이것에 대한 수정·보완을 수행해 나가되 그 핵심은 반드시 유지하라. 이렇게 할 경우 설혹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더라도 핵심은 항상 파악할 수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학점 관리를 해나갈 수 있다.” - 161쪽



통찰과 혜안으로 학문의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요, 먼저 전체를 파악해서 부분을 채우라는 것이다. 한국 대학의 교육 여건과 대학생의 역량 수준에서 이를 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주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송아지 사육론’을 제창한다. 이는 ‘자동차 조립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자동차 조립론’은 물리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수학을 비롯한 개별 과목과 항목들의 지식을 먼저 다 익혀야 비로소 쓸 만한 물리학자가 된다는 것.



이에 반해 ‘송아지 사육론’은 물리학은 아무리 미숙하더라도 살아 있는 송아지 같아서 이미 전체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단지 학습이라는 것은 여기에 영양을 공급해 키우는 일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부분을 마련하기 전에 전체를 의식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는 항상 살아 있는 것이기에 삶의 기쁨을 맛보며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 어느 것이 더 큰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학문마다 내용이 다르고, 과정에서도 수준에 따라 달리 적용되거나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서구 학문은 부분의 정확성을 중시하고, 동양 학문은 전체의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살펴보면 금세 이해가 된다.



여담으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보면 양자역학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가 어떻게 발산되고 수렴되었는지 파악하기에 좋다.



선생에 따르면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그렇게 하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



마치기 전에 선생이 제창한 생명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생명을 낱생명, 보생명과 온생명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생명체의 신비는 생명체(낱생명)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밖에 놓인 무엇(보생명) 사이의 관계에서 온다. 이 둘이 합쳐 완결된 실체로서의 온생명을 이루게 된다는 것. 이는 1940년대 슈뢰딩거가 설파한 생명의 원리보다 더 한층 진일보한 개념이다.



이제 선생이 생명에 관해 다룬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 나도 선생이 이끄는 뫼비우스의 띠로 나서 보련다.



* 사족 하나. 본문에는 “심괄의 《몽계필담》이 국내에 한 번도 출간된 적이 없는 듯하다”(313쪽)고 언급되어 있다. 실은 2002년에 범우사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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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지기 2015-01-03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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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깊이를 더하는 공부하는 삶 《공부이야기》




저자 장회익 선생님은 자신을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 지칭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공부가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는 것. 저 역시 소망하는 삶이기도 하고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그러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평생 앎을 추구하며 즐긴 놀이로서의 공부, 그 과정을 기록한 글 <공부 이야기>를 통해 앎의 유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독특한 스토리텔링 방식입니다. 공부 이야기라고 해서 여느 책처럼 학업과 관련한 이야기만 있지 않고, 조상 이야기부터 시작해요. 그런데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네요. 가풍의 부재는 곧 자녀 교육 문제와 직결된다며 집안 이야기를 쭉 합니다.


나름 성적을 잘 따는 아이였다는데 공부 냄새와는 거리가 먼 할아버지의 반대로 1년간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집안 일꾼들과 같이 들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죠. 그런데 이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강희맹의 <창고에 갇힌 도둑> 이야기처럼 공부의 길을 막아놓으니 더 공부하고 싶어 한 탓에 오히려 공부꾼의 길에 무사히 들어설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이겨내면 좋은 훈련이지만 그러지 못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며 알게 모르게 요즘 말로 자기주도학습이 되어버린 거죠. 책을 읽다 모르는 게 나와도 누구 하나 알려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생각하며 혼자 힘으로 공부하는 경험을 터득하게 된 겁니다. 모든 기회를 자기에게 도움이 되도록 최대한 활용하는 길을 마련한 셈입니다.


정규 교육에서 얻은 것보다 직접 삶의 현장에서 학문을 수행해보는 직접적 체험을 경험하는 것. 한마디로 야외생존훈련 덕분에 고등 물리학 전체를 혼자 힘으로 학습해낼 동기와 저력을 길렀다고 하네요. 선행학습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역경을 기회로 활용한 장회익 선생님의 생각이 참 대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 아버님의 영향이 아주 컸더라고요. 칭찬과 격려로 자부심을 높였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인터뷰에서도 봤었는데 아버님의 이런 좋은 영향이 진로는 물론 평생 공부꾼이 되게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부모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어려서부터 익힌 독자적 학습능력은 다시 독자적 학습경험을 낳으며 수동적 교육으로는 얻기 힘든 학습의욕과 학업 능력 향상에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학부모들은 궁금해할 듯하네요. 제도권 너머에서 머물던 독특한 공부방식이 제도권 내 시험에도 효력을 발휘할까요. 장회익 선생님은 자력으로 학습 습관을 익히면 놀라운 이해의 새 지평이 열리는 경험을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힘이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건 약간의 노력을 더 해 최대 효과를 얻는 힘이 된다는 거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 후 70세까지, 상아탑 공부꾼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에서의 공부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파트에서는 특히 학문의 본질을 강조하네요. 제대로 공부하라는 말입니다. 학문에서는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보다 타당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그러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비로소 구분된다 합니다. 학문의 목적은 내 삶을 온전히 하기 위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에게 납득되도록' 알아보자는 것이라고 하네요.

『 학문의 요체는 자유이다. 생각의 실마리가 그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져야 하고, 성취나 보상 따위의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한다. 』 - p193

물리학 공부 이후 DNA에 호기심이 생기면서 생명에 관해 관심이 확장되었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물리학 용어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수학, 물리학, 철학, 생물학 등 제법 손댄 분야가 많지만, 물리학이란 줄기를 바탕으로 다른 분야를 접목하며 일찌감치 융합이니 통합이니 요즘 유행하는 그런 개념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전통학문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과학 하면 서양과학만 염두에 둔 상황에서 전통학문의 과학적 논의를 소개하는데 신선한 것들이 많더라고요.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질문을 하는 방식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장회익 선생님의 생명의 새로운 개념 제시는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온생명, 낱생명, 보생명이라는 개념들로 생명을 파악하는데 다음에 기회 되면 관련 도서를 읽어봐야겠습니다.


진짜 학문의 정수는 이런 것이란 걸 알려준 <공부 이야기>. 초반엔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옛이야기 듣듯, 중후반부에는 멘토의 조언을 듣듯 읽어왔네요. 이 시대는 현재 정신적 기아 상태라고 합니다. 공부의 의미, 앎의 의미가 협소해져 진정한 공부꾼이 드뭅니다. 그래서 이 책이 갖는 의미가 더 와 닿더라고요.


인디캣 2015-01-1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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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배움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다

​⁠"낼 또 학교가야해" , 울 아이가 한숨소리와 함께 무겁게 내뱉는다. 방학전에는 호기롭게 어느정도 공부(?) 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과후를 신청했으면서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벌써 어깨가 무거운가보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퇴직했기에 이제는 내 맘대로의 공부를 할 수 있어 좋고, 이제껏 알아왔던 것들이 쌓이면서 점점 넓은 세상을 보고있는 자신의 오늘보다 더 나아질 내일을 기다린다는, 희망에 차 있는 노老교수의 "공부"는 어떤 것일까 새삼 궁금해지게 된다.

년 칠순이 되던 해, '공부 도둑'으로 나왔던 내용도 정리했지만 후에 달라진 생각 두 가지를 첨부하셨다고 한다. 하나는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라 한다. 아인슈타인의 일생과 비교해가며 남에게 배운걸 따라하기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깨닫는 기쁨을 중요시하는 장교수님은 사숙재 강희맹 선생의 도자설에 나오는 도둑 이야기를 꺼내신다.

도둑질을 업으로 삼은 아비와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밤 도둑질하는 중에 아비가 아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건 다음 주인이 깨도록 소리를 낸 것이다. 이 위기를 재치로 가까스로 피하고 밖으로 나와 당연히 아비를 원망하는 아들에게 아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지 않았던들 어떻게 쥐가 긁는 시늉을 내고 못에 돌을 던지는 꾀를 냈겠느냐. 이제 지혜의 샘이 트였으니 다시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후에 과연 그는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86

여러번 공부와 멀어질뻔한 일들을 공부의 창고에 자물쇠를 건 일에 비유하기도 하고, 자신은 아직도 학문의 창고에 들어가 앎을 훔쳐내는 '공부꾼'일뿐이라는 이야기에서 그의 일생 주요 흐름이 되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공부를 즐기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를 알게된다. 초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채로 시골 농사일을 도울 수 밖에 없었기에 반강제로 시작된 혼자 공부는 돌아보니 스스로 앎을 찾아가도록 할 수 있는 힘이 쌓이는 시절이였다는 걸, 미적분 이해하게 됐다며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어했다는 이야기에서는 공부의 다른 이름이 경쟁이 아니라 알다 이해하다 가 주는 순순한 기쁨이라는 것을, 낯선 외국땅에서의 '아는 것은 알겠는데 모르는 것은 모르겠더라"로 아는 것을 다시 음미하여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모르는 것을 보고 알려고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이야기에서는 모르는 걸 무조건 머릿속에 많이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게 공부라 여겼기에 우리가 공부를 싫어하고 어려워하는 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국 몸마저도 공부에 신명을 내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94

좋아하고 즐겨라, 즐기는 것보다 그 일을 계속하게 할 스스로 만든 강제요인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공부만큼은 누가 좋아하랴' 하던 우리에게 신명을 내는 경지라는 것이, 그의 인생을 열 두마당으로 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회고록이라 부를만큼 한 사람의 일생이 들어있는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일생의 큰 부분이 된 공부를 '앎 중심'이 아니라 '삶 중심'으로 만들어갔기에 자연스레 넓어지고 깊어진 학문을 여전히 즐기는 분의 모습을 어느 순간에서건 볼 수 있기때문이다.


공부 잘하던 아이가, 앎을 야금 야금 한 부분씩 꺼내가던 공부 도둑이 이제는 지식의 순환고리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게 된 기쁨과 깨달음의 재미를 알려주고 싶어하는 커다란 지혜의 보고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분은 알고 계실련지, 어느 페이지를 들춰보아도 자신의 이런 일들이 깨달음과 또 다른 깊이를 얻게했다는 걸 말씀하시는 분의 이야기에서 아직도 고달픈 게 공부라면서도 여전히 하고있다는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끼게 되니 나 또한 나를 돌아보게 되지않을수 없다.


하나와 둘, 명확히 다른 부분이라 여긴 지식의 부분들이 이제사보니 서로 연결된다는데, 난 어디까지 왔으며 누구에게 어떤 기쁨을 말해줄수 있는 자신이 있는지 말이다. 꼭 물리처럼 어려운 과목이 아니더래도, 생명처럼 중요한 과목은 아니더래도 살아가면서 얻은 진짜 안다는 것의 기쁨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게 된다.


"당신이나 나같은 사람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죽을 테지만,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늙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안에 태어난 이 거대한 신비Mystery 앞에서 호기심 많은 아이들처럼 이것과 대면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424(아인슈타인의 친구가 그의 80세 생일에 보낸 편지 구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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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하루 2015-01-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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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 공부 이야기

공부이야기 -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가 재미있다. 더하여 그가 했다는 공부도 재미있다. 그러니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면서 공부도 재미있게 하는 셈이다.


어떤 공부?

그가 전공했다는 물리학에 대한 매력을 담뿍 느끼며 또한 깨달음에 대한 과정을 마치 공부하듯 차근차근 해 나가는 재미, 이게 바로 책을 읽는 기쁨이 아닌가 싶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책의 줄기가 잡힌다.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또 하나는 창고에 갇힌 도둑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저자의 생애와 오버랩되며 저자가 자기 생의 고비고비마다 비교하며 따라간 멘토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생애는 많이 알려져 있기에 여기에서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이야기는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앎을 훔쳐내는 학문 도둑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姜希孟)이 쓴 도자설(盜子說)에 나오는 것으로, 저자가 공부 도둑이라 자칭하며 자기 생에서 공부를 마치 부잣집 곳간에 들어간 도둑처럼 금은보화 같은 공부를 빼내어 온 것을 비유하는 아주 적합한 비유이자,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여기 등장하는 도둑 이야기는 강희맹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쓴 '훈자오설(訓子五說)'중 하나로, 아들에게 스스로 터득하는 '자득(自得)'이 학문 연구에서도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지극히 천하고 몹쓸 짓을 하는 도둑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도둑 이야기 http://blog.yes24.com/document/7903939)







아버지 도둑이 아들 도둑에게 스스로 지혜를 깨우치도록 하기위해 일부러 아들을 창고에 가두는 이야기를 '발단- 전개- 위기- 결말'의 서사적 구성 방식을 취하여 아들에게 훈계하고자 하는 내용을 뒤에 제시하고 있다. 강희맹은 도둑의 도(道)에도 '자득(自得)'이 있듯이 학문의 도(道) 역시 자득(自得)이 있어야 천하에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래서 도둑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자득의 원리’는 장회익 교수의 학문 방법을 그대로 말해주는 아주 적절한 비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자득’의 이치를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이 기간 동안 혼자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득했고, 이후 이 것이 내 일생의 공부방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내가 수시로 미지의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대학 교육을 통한 수동적 학업에 지치고 질린 나머지 학업을 거의 포기할 상황에서 나 홀로 몇 년간 공부에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이 평생의 학문적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412쪽)







<공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 이미 초판을 낼 때도 내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그간 칠팔 년이 경과하면서 공부가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다른 하나는 공부에는 오로지 앎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더 아름다운 삶, 더 즐거운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내 최근의 생각이다.>(5-6쪽)


<나는 나 자신을 공부꾼이라고도 했고 때로는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고도 했다. 그저 앎을 즐기고 앎과 함께 뛰노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이 과정 자체를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기로 했다. 혹시 이러한 앎의 유희에 흥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공감하는 바를 넓혀보자는 것이 취지라고 할 수 있다.>(9쪽)


깨달음 이란 무엇인가?


이해의 새 지평이 열리는 것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공부에 관한 이야기만큼 더 의미있는 것이 바로 그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그는 어떤 스님을 방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201쪽) 그런데 그 스님 방에 들어가니 탁자 위에 ‘지구의’가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이 지구의는 나중에 커다란 깨달음의 소재가 된다. (‘지구인의 눈’과 ‘우주인의 눈’ - 343쪽) 그러나 그 때는 그 지구의에 대하여 묻지 못하고 그저 깨달음을 얻는 방법만을 물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돈오와 점오에 관한 경험을 하고 - 그저 듣고 오는 경험?- 돌아 온다.

돈오(頓悟)란 그 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 즉석에서 깨닫는 것’이고, 점오(漸悟)는 ‘조금씩 학습해 가면서 깨닫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해의 틀’과 그 틀 안에 넣어야 할 ‘이해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으며, ‘관념의 틀’과 ‘관심의 폭’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깨달음의 정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작은 돈오로 구성되는 하나의 큰 점오>가 바로 깨달음이다. (207쪽)

그러기 위해서는 물음이 필요한데, 그 물음은 꼭 명시적으로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 구석 그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찜찜함을 느끼는 형태로 오기도 한다. (207쪽)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어떤 현상을 대할 때에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되었으니, 그것도 하나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종교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







공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의외로 종교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색 중 하나이다. 각 마당마다 거의 한 꼭지씩 담아 놓았다.



셋째 마당의 ‘교회에서는 왜 질문을 안받나’, 넷째 마당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 다섯째 마당 ‘성경이 과연 하느님 말씀인가’, 여섯째 마당 ‘스님 방에서 받은 깨달음 수업’, 아홉째 마당의 ‘인간의 도’ 등이다







이중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게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내가 이 시험 -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 과 관련하여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를 드릴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합격하면 누구 하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나를 붙여 달라는 것은 누구 하나를 떨어뜨려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닌가?> (147쪽)







여기서 잠깐! 독자들 중에 위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고민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 결국 나는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길밖에 없었다.>(147쪽)







어떤가? 그런 기도가 적절한가?



이런 기도를 드린 후에 결국 그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다른 경우에서 발생한 일인데,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가지 않고 그가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경우도 그렇게 - 공정하게 해달라고 - 기도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떻게?







공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내가 적합한 사람이라면 시험과정에서 실수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283쪽)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게 더 인간적인 기도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끝으로 읽어야 할 대목은 410쪽 이하의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이다.



“뉴턴은 자기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는 그자신보다 한 세대 앞섰던 데카르트의 선구적 방법론에 힘입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414쪽) 고 말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익힌 사람이 뉴턴만은 아니었을진대, 오직 그만이 멀리 보게 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스스로의 공백기간을 통해 마련된 자기만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기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414쪽)







그래서 그렇게 할 때에 시야가 하루 하루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요체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하여 그는 평생을 걸려 공부했고, 공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 두고 싶은 말들







<아침에 도를 깨닫고 낮에 이를 적어 놓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403쪽)







<학문의 본령을 터득한 학자가 학문 전체의 내용을 재음미 해가면서 그 안에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추려내고 이것을 다시 일반 지식인들이 함께 깨우쳐내게 하는 매우 적절한 방식을 강구해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학문이라는 것이 오직 이를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몇몇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407쪽)







<‘앎 중심’ 학문이 식품의 생산에 해당한다면 ‘삶 중심’ 학문은 음식의 마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상황은 엄청나게 많은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이를 적절히 선택하고 배합하여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줄 요리사가 부족한 실정이라 할 수 있다.> (408쪽)







저자의 선조인 '장현광'의 우주설(宇宙說) - 303쪽 이하







'동굴의 비유'(367쪽)



이 비유는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가 아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생각이 녹아 있는 신선한 비유인데, 이 부분 독자들이 읽어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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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yoh 2015-01-2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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