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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김교신은 누구인가?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김교신은 누구인가?



김교신은 누구인가?


- 가톨릭 교우들의 카페 어둠속에 갇힌 불꽃 (http://cafe.daum.net/bulkot) 교회쇄신 게시판에서 재인용합니다. 金敎臣은 누구인가?



1938년 당시 37세때의 모습

金敎臣의 人生

선생의 인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선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젊은날 공자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십 년 단축하여 '육십이종심소욕불유구(六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달성해 보리라고 야심을 품었으나, 막상 '팔십이종심소욕불유구(八十而從心所欲不踰矩)'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덕적인 '낙망의 심연'에 떨어졌다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선생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로 만들 것을 목표로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일체의 '인공적인 부흥(復興)의 열(熱)'을 배제하고 '천품의 이성과 인간 공유의 양심'을 견지하면서 '냉수를 쳐가며' 냉정한 중에 성경을 연구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라고 말한 선생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접하게 된다.

선생은 진리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는 분이었으며, 선생이 추구한 진리는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의 진리였다. 그리고 선생이 제 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한 것은 '성서의 진리' 위에 '조선'을 세우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선생과 그 동지들이 옥고를 치를 때 취조에 나섰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에게 한 말은 역설적으로 선생이 일생 추구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결사(結社)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파뜩 뛰어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후일 선생은 일본 경찰의 힐난에 대해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하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선생이 일생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성서조선'의 간행이었다. 선생은 '성서조선'을 위해 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성서조선'은 전호에 걸쳐 적자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표현을 직접 빌자면 '의식(衣食)의 여분으로 잡지 출판을 한 것이 아니라 출판의 여분으로 생활을 해야'했다. '성서조선'은 그야말로 선생의 삶에서 최대의 것이요, 전부였던 것이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金敎臣의 信仰

김교신을 지도자로 출발하여 소수의 무리들에 의하여 이 땅에 맥맥하게 이어져 온 무교회운동의 핵심적 이념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공간을 점유한, 눈으로 보이는 회당을 진정한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모여 기도드리는 바로 그곳이 교회라고 부르짖는다. 또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그리고 기독자가 봉사하는 온 생활의 마당이 교회라고 믿는다.

둘째, 그들은 성직제도에서 비롯한 갖가지 교회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적 조직 못지 않게 관료화된 계층구조와 그에 따른 갖가지 비본질적인 구속.규제는 오늘날의 교회를 각 개인의 순수한 복음신앙생활의 질곡으로 화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성서해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천국의 열쇠는 교회를 대표하는 법황이 쥐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요, 하나님만이 끝까지 쥐고 계신다고 믿으며, 성서의 구절의 참뜻은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만이 풀이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신자 각자가 하나님에게 받은 믿음의 분수와 은총의 분수대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성서의 구절의 뜻풀이로 야기되는 교회의 분열과 중세기식의 '종교재판' 따위를 그들은 무의미한 일로 여긴다.

넷째, 그들은 섭리사관에 입각하여 신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고유하고 독특한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자각, 정립하는 것을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과제로 삼는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金敎臣의 業績

-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의 탐색 및 생활화

- 종교적 신앙과 교육적 실천의 이상적인 조화

- 교육에 있어서 인격적 감화력의 절대성을 나나내 보임

- 개인잡지를 통해서 소신을 밝힘으로써 온 민족사회를 교육의 대상으로 포섭

- 자신의 사상을 다음 세대에 계승,발전시킨 '코이노니아'의 육성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을 꾀한 독립운동에 몇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그것을 크게 나누면 서재필, 이승만으로 대표되듯이 국제여론 환기에 힘쓴 외교독립방식이요, 둘째는 안창호로 대표되듯이 자아혁명을 통해서 독립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려 했던 인격혁명방식이요, 셋째는 김성수로 대표되듯이 민족 독립의 경제.산업적인 기초를 다듬으려 했던 산업입국방식이요, 넷째는 김구로 대표되듯이 힘에는 힘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항쟁방식이요, 다섯째는 이 모든 유형에 공통적인 교육입국방식으로서 그 대표자는 이승훈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교신은 이런 세속사적인 독립방략보다 더욱 차원 높은 사상 및 독립방략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기여해야 할 교유.독특한 세계사적 사명을 자각.정립하고 이러한 민족의 섭리사적 '존재이유'에서 민족의 세속사적 독립을 꾀하려 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입국방식'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다.

민족을 통해서 신의 섭리를 자각하고, 민족을 통해서 세계사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 이것은 되풀이 되풀이 음미돼야할 귀중한 사상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민족정신사적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몇 천 년에 걸쳐 이 땅에 터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 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또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 줄 것인가? 그게 아니다고 외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이상적 한국인상

김교신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한국인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의 이상적 인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비상'일 것이다. 이 선비상은 영국의 신사상, 독일의 장인상, 중국의 군자상, 일본의 무사상에 필적하고도 남음이 있고,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터하면서 우리가 고이 가꾸어 온 이상적 인간상이다. 선비상으로 기대되는 인격적 특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이다.

그런데 '선비'라고 할 때 그것이 갖는 한계성을 긍정적인 면보다는 더욱 크게 부각시켜 '선비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흠집내기도 한다. 특히 일본관학의 식민사관의 입장에 서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크게 부각시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깎아 내리려 한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의 피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는 '선비' 상에 대하여도 심하게 헐뜯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선비'의 부정적인 측면은 첫째 그것이 계급적 지칭이라는 데 있다. 사농공상이란 봉건적 신분질서 안에서 선비는 지배계급이었고, 그러기에 봉건질서 계승을 위한 보수적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비생산성을 든다. 선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민중의 희생 위에서 여가를 즐기는 유한계급이며, 그러기에 그들의 논의가 또한 하나도 생산과 결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파당성이다. 선비는 지나치게 명분만을 내세워 파당을 형성하고, 그러기에 늘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으로 해서, 선비는 조선 500년의 역사에 주인공 노릇을 했으면서도, 그것이 신라기와 고구려기처럼 진취적이지 못했고 생산적이지 못했으며 건설적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사관적인 그릇되고 왜곡된 선비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든지 반론을 펼 수 있다. 선비상이 갖는 글정적인 특질, 즉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을 들고서 말이다. 학자적 기질이란 삶을 진리 자체를 묻는 데 바치는 생애를 이름이며, 예술적 기질이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생애, 그리고 지사적 기질이란 정의의 실현을 위해 살며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들에 묻히는 재야적 생애를 이름이다. 이러한 세 기질이 그의 인격 속에, 삶 속에 맥박칠 때 우리는 이것을 선비라고 일컫는다.

조선조 500년 중에서 우리는 이런 좋은 의미의 선비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학자적 기질이 가장 크게 나타난 선비로서는 이퇴계를 들 수 있고, 예술적인 기질이 크게 나타난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여성에 나타난 신사임당을 들 수 있으며, 지사적 기질의 대표적인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민중의 삶 속에 나타난 동학 농민군의 전봉준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선비상이 지니는 한계성 또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장점 또는 긍정적인 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우리 민족이 지금도 '선비'라는 말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장점과 긍정적인 면을 피부로 느끼고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정한 선비는 그러기에 한 계급적 지칭도 아니요, 비생산자도 아니며, 파쟁만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계급이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요, 건설적으로 작용하는 생산자며, 진취적으로 관여하는 창조자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 온 민족, 온 민중의 정신적 유산이요 소유이어야 한다.

김교신은 위에 든 선비가 지니는 세 가지 특징을 온몸에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전통적 선비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다른 두 가지 기질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 기질과 눈물 많은 다혈기적 기질이었다. 그의 이 다섯 기질은 선생에 있어 기독교의 최고 덕목인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선생의 온 활동, 온 생활에 응고되어 나타났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학자적 기질

선생은 학자적 기질의 소유자였고, 꼼꼼하게 사리를 밝히며 원리.원칙을 잘 책기는 일면이 있었다. 이러한 기질은 그로 하여금 직관적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 위에 터하는 문학의 세계보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에 터한 자연과학의 세계에 보다 친근감을 갖게 했다. 문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적성에는 자연과학적 학문이 맞다는 뜻에서다. 선생이 처음에 동경고사의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뒤에 자연과학에 보다 가까운 지리.박물과로 전학한 것도 이런 기질에서였다고 풀이된다.

무교회클럽이 학자들의 모임이라든가 또는 학자적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을 세인들은 곧잘 하는데, 이런 모임에서도 특히 김교신과 함석헌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석헌은 오산고보 학생들을 골방에 모아 놓고 과외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독창적인 관점에서 강의하였거니와 김교신은, 전 158호에 이르는 '성서조선'과 전 6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이 증명하듯이, 일개 중등학교 교사로서는 경이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물론 그의 신앙의 소치이겠으나 그 신앙을 학문적으로 다듬어 나가는 그의 학자적 기질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특히 그의 이런 기질은 그의 담당과목인 지리수업 방식에 잘 나타나 있다. 교과서의 내용은 50분 수업 중 20분 정도로 끝내 버리고, 처음 10분간은 시사적인 이야기, 나중의 20분간은 지리와 관련된 역사, 철학, 종교, 문학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한다. 40 전후의 나이로 이렇게 자유자재하게 수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의 덕택이며, 그의 학자적 기질의 교육적 발로라 할 것이다.

그의 지리수업 방식은 참으로 특이했다 한다. 당시의 지리 교과서에는 한국의 지리에 관한 내용은 극히 적은 양이었다. 그는 교과서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지리를 많이 다루었고, 지리시간은 가히 철학시간이자 세계사시간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의 관련에서 참고될 이야기를 많이 해서 학생들의 끝없는 흥미를 촉발하고 학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제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어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별로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이 아니었는데도 지리과에 학문적 관심을 퍽 많이 갖게 했을 뿐더러, 그의 시간에는 인생철학까지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한다. 제자들은 이런 수업방식을 최선의 방법이덨다고 지금도 회상하고 있다.

그의 저서 '조선지리 소고' 같은 내용을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듣는 젊은 영혼들의 가슴은 얼마나 흐뭇하며 자랑스러웠을까. 우리도 충분히 추측하고 남음이 있다. 이런 방식은 천성적으로 교사로 태어난 그의 인격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한편 의식적으로 짜낸 것 같은 -좋은 의미로- 면도 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여러 곳에 이런 방식을 저녁에 회상하고 메모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제 4학년 지리시간에 노량진 6충신묘와 양주 덕양산의 권율 도원수의 사적을 다루었고(1937.9.7), 하와이 몰로카이 섬과 신부 다미앙을 말하면서 우리 소록도 이야기를(1937.10.11), 북부 중국의 자원의 전부보다 곡부산 공자가 더 크다는 것(1939.2.13), 지리수업을 한 시간 쉬고 -저들이야 알 리가 만무하지만- 인생의 목적을(1940.1.31), 청년들과 함께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대통령 재취임 연설을(1940.6.29) 다루고 있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학문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학문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학문이 몸에 배인 교사에게서 표출되는 것이지, 결코 기교나 연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예술적 기질

중등교사로서 수업, '성서조선' 주필로서 원고집필과 발간사무, 그리고 경성성서연구회의 강사로서 성경강의, 이렇게 그는 일인 3역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과로의 탓인지 그의 눈은 늘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부르터 있을 때가 많았다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성서조선'의 발간사무는 육체적인 고통과 노력을 요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과 좌절감, 회의심이 늘 따르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달이 발간할 원고가 될 때마다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며, 조판이 된 후에도 몇 번식 교정을 봐야 하고, 또 책이 되면 독자들에게는 자기가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송해야 하며 시내의 독자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자전거로 배달해야만 했다. 시내의 독자들에게 왜 직접 배달했는지, 그 이유를 자신은 피력하지 않았지만 아마 한시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과 이왕이면 따뜻한 마음으로 전해 주자는 사랑에서 이리라고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가 갖은 고생 끝에 새 책을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시내 독자에게 전해 주며, 시국이야기, 신앙이야기를 자전거를 받쳐 놓은 채 문간에서 나누는 광경을 상상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가슴도 훈훈해진다.

이런 고된 생활에 그 자신도 짜증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러기에 그는 '제소와 패소'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둘째 제소: 한 사람 몫의 직분을 가진 자가 일주의 6일간을 근무하고서 주말 휴가를 가질 것은 생명 부지상 절대로 필요한 일인 것을 당신도 아시는 바일 뿐이오리까. 여호와 당신께서 제정하신 법칙이 아니오니까. 주간 6일을 벌써 힘에 넘치게 지치고서 또 주일을 쉬지 못한 지도 대략 십여 년. 그동안 우리의 외침을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못난 것을 이용하셔서 장터에 나가 피리 불라 하셨으나 어디 춤추는 인간 하나 있습디까? 일주일 내내 교단에 섰던 자가 일요일에까지 강의하는 것은 그 내용의 여하는 논할 것 없이 그 행위 자체가 피를 뽑아 주는 일이요, 살점을 분배하는 일이 아니오니까? 그런데 누가 들으러 왔댔습니까?

심문: 네가 나를 믿기 전보다 지금은 얼마나 약해졌느냐. 피로로 인하여 얼마나 감수된 듯하냐.

답신: 입신 이전에는 허약해서 약병만 차고 다니던 것이 근 20년내로 큰 병에 누워 본 일이 없고, 짐작컨대 어떤 사회에 가든지 저와 동년배 중에서는 가장 건강한 편일까 합니다.

심문: 그럼 또 무슨 말이냐.

답신: .... (1939년 10월)

이 '제소와 패소'라는 글은 하나님께 두 가지 따지자는 글이었다. 제 1소는 '그 비용을 저축했더라면 자녀교육에 염려 없을 뿐더러 노후의 안정을 이미 얻었으리라'고 믿어지는 돈과 노력으로 '성서조선'을 발간해 왔으나 진정한 독자가 없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 따진 것인데, '당신이 주신 것으로 출판하고 먹고 입과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 올시다'는 자답으로 패소하고 마는 내용이고, 제 2소는 위의 글에서 보듯이 일은 고되었지만 도리어 건강하게 되었다는 자답으로 역시 패소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렇게 바쁘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는 늘 자연의 즐거움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여유를 갖고 살았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는 것, 이것을 나는 예술적 기질의 단적인 표현으로 보고자 하는데, 그 의 일기의 거의 전부에 이런 마음의 여유가 보인다. 다음에 가장 대표적인 일기 하루분만 소개한다.

산기슭을 아침에 떠나 인쇄소 - 총독부 - 정릉리(원고) - 인쇄소 - 총독부 - 양정학교 - 인쇄소 - 북한산 기슭, 이렇게 뛰어 다녔다. 2월호의 정기일 발송이 이렇게 어그러지게 되었다. 잡지 발송용의 겉봉을 쓰려니 어깨가 매우 오그라지는 듯 아팠다. 피로가 축적된 까닭인가? 사람의 비열하고 추잡한 일면을 보고 심화를 일으키다. 그래서 밤 10시경부터 동네 움집에 나가 자정 넘도록 한담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다시 달빛에 눈을 밟으면서 오전 2시 넘도록 시냇가를 오르내리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내 손에 일장검 짚은 것이 없으나 내 영혼이 별들을 향해 긴파람, 큰 한소리 아니하지 못한다. 건달이 도리어 호유하듯이 분망한 오늘밤에 시간적으로 크게 호유한 셈이다. (1939년 1월 31일[화], 맑음)

이렇게 바쁘고 갖가지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늘 자연의 미를 찾고 창조의 섭리를 음미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과 예술적 문장을 듬뿍 남겨 주었다. 그가 당시에는 인적 드문 북한산 기슭 정릉리에 거처를 정한 것도 이런 예술적 기질에서였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지사적 기질

그는 지사적 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명문인 동경고사 출신이며 입신영달의 기회가 많았는데도 굳이 민족사학을 골라 교직에 투신한 것도, 또 수틀리면 그담둘 생각으로 언제나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것도, 또 그를 회유하기 위해 관립사범학교라는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꾄 총독부 학무국 관리에게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것도, 또 민족사학인 양정고보 재직시에도 감투 쓰기를 싫어하고 늘 '평교사'로 임하려 한 것도, 또 '성서조선' 독자 중세서도 소록도의 환자들을 가장 사랑하여 기회있을 때마다 원조의 손길을 뻗친 것도, 또 학생들을 한치 한오리의 어김도 없이 명분대로 다스려 두 날이 다 시퍼렇게 선 '양칼'이라는 별명을 받은 것도, 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한국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을 위해서 뛰어든 것도 다 이런 지사적 기질의 표현이다. 신앙적 지사 최태용(崔泰瑢)을 찬미한 다음의 일기 한 토막이 그의 이런 기질을 웅변하고 있다.

오후 2시에 다니엘서 공부를 필하고 동일 오후 6시부터 최태용씨의 환영회를 본사에서 열다. 최형은 지금부터 16,7년 전에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였으니 당시의 동창학우들과 같이 출세하였으면 현금은 상당한 지위나 재산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서 얻은 것이 없을 뿐더러 다소의 소유까지도 주 예수를 위해 없애버리고 지금은 '몸뚱이'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육탄이 되어 세상을 향하여 던짐이 되고자 한다.

예언자는 고향에 용납 안된다고 하지만, 조선에서도 전도사처럼 쓸쓸한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비행사가 고국을 방문할 때와 소녀가 공회당에 공연할 때와 마라톤 선수가 올림픽에서 귀국할 때에 민중들은 마치 구세주를 맞는 슷이 하였다마는 독립전도자 하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길바닥에서 아사한들 40만 경성부민에게 무슨 아픔이 되며 2천만 민족에게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1인보다 2천만이 가련하여 못 견딜 일이다. 반도에 기독교가 포교된 지 반세기에 처음으로 외국세력이나 조직, 기관 등에 의지함이 없이 조선 스스로가 비치는 전도자 하나가 섰다. 금후의 반도 영계에 처음으로 기골 있는 사람을 보리라. (1933년 6월 4일 [일])

김교신이 이렇게 찬양한 최태용은 뒤에 후꾸모도(福元唯信)로 창씨개명하고 앞장서 친일 훼절하여 그를 크게 실망시킨다. 당시의 관립고보 졸업생들이 총독부 식민지 관리나 되고, 판검사나 되고, 의사나 되어 세속적 행복을 구하며 개인적 입신영달을 꾀하는 모습에 언제나 분개하였다. 그의 일기의 도처에 이런 비판의 말이 나오고 있는데, 1934년 3월 15일자의 일기에는 그것이 아주 구체적,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강습소 선생을 구하는 데가 많지만 그 박봉을 감수할 사람이 없으며 농민학교 선생을 구하는데 농사의 경험과 신앙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며, 중등학교 교사를 초빙하려 하여도 70원보다 80원, 80원보다 90원, 이렇게 월급을 계산하며, 또 도시로만 가기를 원하여 의주보다 평양, 평양보다 경성으로 쏠려 교육적 사명은 찾을 길이 없고, 사람들은 타인을 이용하려고만 들지 타인을 위해 일할 줄을 모르고 있으며, 그러기에 '취직'이라 하면 '직무에 취임한다'는 뜻이 아니요, 먹을 것을 덮친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실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일자리는 많고 사람은 많이 필요한데 모두 자기 중심의 세속적 욕망만 채우고자 하고 있으니 어디 천거할 사람이 하나 있는가 하고 장탄식하기도 했다.

소위 일류명사 또는 저명인사들을 대하기를 그는 아주 싫어했다. 물론 이승훈 선생처럼 신앙의 투사이자 서민적인 냄새가 피부로 느껴지는 분은 존경해 마지않았지만, 일한답시고 돈이나 거둬 자기 배나 채우고 글 쓴답시고 환상적인 꿈이나 비도덕적인 야욕장면이나 그려내고, 전도한답시고 부흥집회나 전문적으로 쫓아 다니며 일시적으로 종교적 감정이나 충족시켜 주고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대전도사들을 아주 싫어했다.

이런 명사들을 비꼰 글이 1935년 3월 26일자 일기에 해학적인 필치로 담겨져 있다. 자기에게는 보약과 명사는 금물인데, 자기는 생래적으로 보약을 먹지 못할 팔자이고, 또 명사들을 대하면 흉금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사는 도리어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흉금이 열리는 사람들은 도리어 회개한 세리와 창기와 빈자와 병자들이라, 자신은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자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재야적 기질이 잘 담긴 말이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종교적 기질

선생은 종교적 기질이 풍부했다. 그가 종교가임이 이것을 증명하기에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다고도 여겨지나, 그의 종교적 기질은 직업적 종교가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그 특질을 역시 이 자리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종교적 기질이란 무엇인가? 우선 절대적 가치기준을 이 세상에서 구하지 않고 저 세상에다 두는 기질을 말하며, 또 모든 가치 및 활동을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는 삶의 ㄱ 기본적 자세를 말한다 할 수 있다.

독일의 뛰어난 철학자이고 심리학자이자 교육철학자였던 쉬프랑어는 '생의 형식'이란 명저에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여석 가지로 유별하고, 이 여섯가지 작용 중에서 어느 작용이 그 사람에게 가장 힘차게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적 특질 또는 인간 유형이 생긴다고 논하였는데, 우선 그 6가지 유형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기실현,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정치적 유형, 2. 실용성, 물질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유형, 3. 환상적 자기세계, 새로운 미의 형식을 추구하는 심미적 유형, 4. 진리탐구, 우주의 질서를 추구하는 이론적 유형, 5. 동포에의 봉사, 공동체에의 참여를 삶의 동기로 하는 사회적 유형, 6. 양심의 명령에의 순종, 신 또는 절대자에의 귀의를 기하는 종교적 유형이다.

그런데 쉬프랑어는 이 6가지 유형, 또는 6가지 유형의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종교적 가치라고 말했다. 이런 쉬프랑어의 분석에 덧붙여 종교적 기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요약, 정리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명령에 순종하며 창조주의 부름에 귀의하며, 모든 가치를 이에 따르게 하는 삶의 기본적 자세라 할 수 있다. 김교신은 이런 관점에서 참으로 종교적 기질로 삶을 일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마치 해바라기가 생명의 근원인 태양을 보듯이! 그가 얼마나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기도 속에 살았는가는 그가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이웃 약사사(현재에는 봉국사로 잘 알려지고 있는 정릉동 소재 사찰) 계곡에 가서 냉수로 목욕하고, 스님들의 목탁 소리에 맞추어 자신도 기도, 찬송한 나날의 경건한 사색과 생활이 잘 말해 주고 있으며, 다음 두 일기가 그것을 또한 잘 말해 주고 있다.

오후 짙은 안개에 흐림. 우리가 보는 은하보다 5만배나 더 큰 은하가 발견되었다고. 그 세로는 5천만 광년, 가로는 2천만 광년인데, 우리 지구에서 1억만 광년의 거리에 서로 있다고. 우주는 크고 넓다. 하나님의 능과 지와 애를 누가 능히 헤아려 내랴. (1937년 11월 12일 [금])

새벽 5시의 우리 마당은 오리온좌로 차일을 하고 천랑으로 등을 달고 북한 연산으로써 병풍을 두룬 것 같다. 인생이 무엇이관대 그 머리 위의 하늘이 저다지도 찬란하고 그 좌우의 산령이 이다지도 엄숙한고! (1938년 10월 17일 [월], 쾌청)

그는 창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격정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 무레사네 >(물에 산에)라는 등산 클럽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인 식물채집도 겸하여 학생들을 들로, 산으로, 바다로 인솔하고 다녔는데, 한번은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게 진 북한산 계곡에서 어찌나 감동했는지, 학생들을 보고 무의식중에, '이놈들아, 너희들도 느껴라, 울어라!'고 소리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창조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되어 울고픈 격정을 금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풀이된다. 그는 공부를 하다가도 중추의 달이 유혹적이라고 서재를 뛰쳐나가 공중에 솟은 달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물 속에 잠긴 달을 굽어 찾기도 했고, 또 가을벌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으면서, 이 은혜가 자기 혼자에게만 주어진 듯, 내 살림 오늘 하루도 이로써 족하도다 하면서 자정이 지나도록 하늘을 바라보며 환희에 젖기도 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눈물이 헤푼 기질

슬픔이나 기쁨이 극에 다다를 때 우리는 운다. 그러나 이렇게 감동이 극에 다다를 경우란 우리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다. 또 우리는 서러움이 북받칠 때 울기 쉽지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김교신은 유난히도 울음이 많았고, 더욱 그것은 슬픔이나 기쁨보다는 어떤 순수한 강렬한 감동을 억누르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여간 그는 눈물을 자주 흘렸다. 라디오에서 심청전을 듣다가도, 자녀의 전학수속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고도, 학업성적과 품행이 나쁜 학생을 타이르다가도,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읽다가도, 산에 가다가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그리고 시편을 공부하다가도 울었다. 1939년 5월 14일자 일기에는 새벽 4시 반에 깨어 시편 42, 43편을 주해하고자 정독하다가 감동되어 눈물로서 손수건 두 장을 다 적셔 버렸다고도 적고 있다. 다음에 눈물을 다룬 일기를 하나만 들어 본다.

등교 수업. 제 4,5학년 생도들은 오늘 저녁 8시 반 등교하여 밤 새면서 야외교련하게 되다. 귀도에 인쇄소에서 교정하고 또 시내에서 미국유학생 모씨를 만다 그곳 소식을 많이 듣다. 산기슭에 돌아와 묘포를 김매고 거름주다. 저녁에 새로 두 시까지 원고 쓰기. 이번 10월호의 권두문은 눈물의 점철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소외 패소'를 쓸 동안은 여러 차례 펜을 던지고 호곡하였다. 인간인 나로서는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고 형용할 것이나 신앙에 눈 뜬 때의 나는 은총이 내 잔에 넘쳐 소리쳤다.

이 양극의 조화된 감정을 무엇이라 형용해 내랴? 자정 지난 후 때때로 멀리 군가 들려 오니 밤새면서 행군하는 경성중등학교 생도 연합교련대가 경성 동부를 공략함인 듯. (1939년 9월 22일 [금] 맑음)

김교신 선생에게 경기중학교에서 배움을 받은 심리학자 김성태(金聖泰)는 선생님의 눈물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눈물은 단순히 감격이 아니고,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몸소 느끼고 합일되어 그 참모습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안타까워하여 도맡아 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생각된다.

충무공도 좋은 경치, 밝은 달밤이면 이에 도취하여 슬퍼서 잠 못 이루는 대목이 그의 일기에 자주 나온다. 매슬로우(Maslow)는 황홀경이 그리고 외경의 감정이 합친 어떤 신비적 경험을 자주 하는 것이 성숙된 인격의 특징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자아몰각적이고 초월적이며 자아향상을 느끼는 사람됨이라 하겠다. 유교에서는 의로운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면 이루어지게 되는 성현의 인격의 특징을 호연지기가 충만하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볼 때ㅑ 선생의 울음이 헤푼 성향은 단순한 그의 기질적 특성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선생이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직감하여 이에 몰입하였던 그의 인격의 진지한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닉가 본다.(외솔회 '나라사랑' 제 17집, 김교신 선생 특집호, 1974년, 87쪽)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2019/03/09

큰빛교회-임현수목사-설교비평-성경에서 말하는 돈 버는 법 - 바보스쿨



큰빛교회-임현수목사-설교비평-성경에서 말하는 돈 버는 법 - 바보스쿨



2011-05-16 글쓴이 순두게
큰빛교회-임현수목사-설교비평-성경에서 말하는 돈 버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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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비평의 대상은 2011년 3월 6일에 토론토 큰빛 장로교회 담임인 임현수목사(이하 임목사)가 행한 주일 설교입니다. 필자는 이 게시판 처음 다섯편의 순서를 지키려 했지만, 중간에 변방의 최목사 설교가 끼어 들고 등등 해서 순서가 약간 뒤바뀌었군요. 만일 그일로 왜 우리교회 “목쌰-아-안님” 만 두번씩이나 바보스쿨 대문짝에 툭 튀어나오게 했느냐고 불평하시는 분께는 참으로 송구한 마음입니다.

필자가 읽으시는 분들께, 오늘 진실로 죄송스러운 마음은, 이번 설교비평은 완전히 “거저 먹는” 그런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부흥회 하면 그 주일의 주일 설교는 부흥 강사가 할 터이니 해당교회의 담임 목사는 그 주일은 설교준비 땡땡이치고 “그냥 거저” 먹습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교회로 부터 월급은 똑 같이 받습니다. 필자가 알기로는, 이 곳 북미 학교시스템은, 방학에는 선생에게 돈을 안줘요, 학교가 쉬는 데 무슨 돈?,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지요. 그래서 학교선생들이 방학에 ESL같은 부업합니다. 참내, 같은 맥락으로 제가 지금 그런 모양새로 별로 시간 안들이고 비평문 한편 쓰게 생겼다 이 말씀입니다.

자유게시판 어느글 댓글에 제가 한편의 설교 비평을 쓰는 과정에 대해 대강의 설명을 다음처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한편의 설교 비평을 쓰는 과정은 이러합니다. 먼저 서너번 동영상을 전체를 듣기만합니다. 그 후에 두어번 더 들으면서 전체 줄거리를 약술합니다. 즉 뼈대를 잡습니다. 그다음에 이야기의 한 문단을 쓰기 위해 동영상의 일정구간을 열번 이상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쓴 내용이 실제 설교자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함은 물론 비평적인 요소를 타이핑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적어도 20-40번 정도는 들은 후에 써놓고 이번에는 써 놓은 내용을 다시 읽고, 미심쩍으면 다시 들어 보고 하는 후에 포스팅합니다.”

그런데 오늘 필자는 임목사의 설교동영상을 딱 두번 들었습니다. 이유는, 임목사가 친절(?)하게도 설교 내용을 글로 써서 게시판에 올려 놓았고, 필자는 임목사가 글로 올린 내용과 동영상과 얼마나 일치하느냐 아니면 가깝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설교자가 올리지도 않을 뿐더러 올려도 실제 설교를 하면서 온갖 잡다한 이야기가 뒤섞여 들어가는 그리하여 동영상의 내용과 설교문과는 내용이 완전 딴판이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임목사의 이번 비평의 설교문과 동영상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먼젓번에는 차이가 많이 나서 동영상에 의존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이번 설교 동영상을 다시 글로서 옮겨 비교한다면 똑 같지는 않습니다. 필자는 이번 만큼은 설교문과 동영상이 아주 흡사하다고 지금 말합니다.

또한 글을 대하며 읽는 설교와 실제로 육성을 직접 듣는 경우도 받아 들이는 점에 있어서 많이 다르지요.

예를 들어 다음의 두 문장:

1. “믿-음-이 쭝요–합-니-다”

2.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에 쫒겨 숨어 들어간 동굴은 “피 – 나 – 안 – 처 – 어 – 어 ~~”


(참고 여기서 ‘-‘는 숨을 한 숨 고르기에 약간 길게 발음한다는 것을 의합니다. ‘~’는 약간의 바이브레이션이 들어가면서 느끼한 맛을 돋우는 표현입니다.)

위 두 문장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별로 감동(?)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박헌승 목사의 본한인교회 부흥회 마지막날 주일 설교 가운데 실제로 있었던 내용입니다. 육성으로 들어 보면, “내가 지금 주일 학교 교사 공과공부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일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납니다.

아뭏든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 설교비평은 임목사의 설교문에 의해 진행하겠습니다. 들어서 얻는 느낌은 읽어서 얻는 그것과 분명 다름에도, 오늘은 꽤나 괜챦을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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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임목사의 설교제목 “성경이 말하는 돈 버는 법” – 34번 삼화상운 시내버스 타고 미아리 고개 털털거리며 올라가다 보면 차창밖으로 지나치는 많은 점쟁이집 간판 중의 하나,, 글쎄 필자의 착각은 아닙니까?

그래요, 임목사도 이 사실을 알긴 알았는지 오늘은 작정하고 이렇게 시작했다고 하니 계속 가보십시다. 기독교도라고 해서 돈 벌면 안되는 그런 법도 없거니와 많이 벌면 않된다는 그런 법은 더더욱 없습니다.

임목사의 설교전문을 댓글란에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임목사는 오늘 설교의 대부분을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 켄터키 프라이치킨 할아버지, 맥도날드 창업자, 강철왕 카네기, 어떤 목사의 전도사 시절 이야기, 한국의 대리운전 업계를 평정한 김동진 사장이야기…… 로 때웠습니다.

필자가, 짖궂게도 임목사의 설교원문의 전체 글자의 수를 에디터로 확인 해봤습니다. 공백문자없이(스페이스) 8,526 글자입니다. 이번에는 위에서 말한 돈 많이 번 사람들의 이야기 부분만을 골라서 삭제한 후에 글자 수를 확인해봤습니다. 공백문자없이 3,655 글자 입니다.

8526 – 3655 = 4871, 그러니까 4871 글자가 영웅, 비즈니스맨 이야기에 할애되었군요. 설교문 전체 글자 수의 약 57퍼센트가 영웅, 비즈니스 맨에게 쓰여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43%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즉 성경을 읽고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즉 주의 의를 밝히 깨닫게 했느냐? 보시다시피, 어찌 되었든, 무슨 일을 하던 그건 별 상관이 없고, 돈 만 많이 벌어 세상의 유명 인사가 되면 그것이 곧 전부인 양 임목사는 자본주의에 찌든 자신의 천박한 정신세계를 그대로 노정하고 있음이 필자의 눈에 확연합니다.

그렇다면 제목대로 돈 버는 법을 확실하게 기르쳐 주셔서, 돈에 한 맺힌 사람들 한을 풀어 주신 것도 아니고 그냥 기도해라, 지혜로워라, 성실해라, 현장감을 가져라, 온유해라 등등 원론적인 뜬 구름만 잔뜩 잡으시면서, 줄창 돈 많이 번 사람들 이야기만 해대시니 누구 약올리시는 것도 아니고,,, 임목사 자신의 머리깍는 양반을 들어 은근히 띄워 뭘 어쩌자는 것인지,, (필자의 추측 : 그렇게 성공한 분이 헌금 많이 했으니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시라 고 들리기도 합니다. 이유는 그 교회가 요즘 현안문제인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는 풍문에의하면. 어디까지나 풍문이외다.)

(얼마전 이곳 자유게시판에 “앞으로 익명의 글은 다지운다” 는 큰빛교회 웹사이트 자유게시판에서의 임목사의 선언이 그대로 복사되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항상 자기가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만 눈에 넣으려 하는 임목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 이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설교입니까? 누가 설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영웅, 비즈니스맨입니까? 하나님, 예수입니까? 더구나, 이제 각론으로 들어 가면 임목사의 머리 속에 깊이 박혀버린 “영웅주의”가 빛을 발합니다.

돈을 벌려면 기도해야 된다고 첫번째 일성을 임목사는 날렸지만, 이야기는 갑자기 불평 불만을 하면 않된다 원하는 바는 기도와 간구로 다 해결된다,, 임목사의 횡설수설은 드디어 장황한 켄터키치킨 할아버지 성공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꿈에 본 닭, 계속 기도하던 중에 양념 닭튀김요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주었고, 어찌 어찌해서 크게 성공했다고 임목사는 말합니다.

KFC는 이제 국민의 보건을 심하게 해친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비만과 심장병의 보이지 않은 원인인 정크푸드의 대명사가 되어있음을 필자는 물론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맥도날드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들이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원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사육하는 “닭” 농장을 카메라에 담은 동영상은 유튜브에흔하게 널려있습니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로지 가장 빠른 시간에 많이 살을 찌우게 하려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공간에 닭을 가둬놓고 살 많이 찌는 사료를 줍니다. 닭이 움직이면, 즉 운동을 하면 살이 찌는 속도가 늦기때문입니다. 닭이 그 좁은 공간에서 나와 도살을 기다릴 때, 닭은 자신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하여 걷기는 커녕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먹는 치킨버거의 패티가, 비닐 봉지에 들어있는 닭 가슴살 – 바로 그런 슬픈 이야기를 담고있지요. 임목사께서 보고도 그런말을 하는지 아니면 몰라서 그러는지 필자는 알수가 없네요.

임목사는, 두번째로 지혜를 말하면서 카네기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앤드루 카네기에 관한 이야기는 노동 조합에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그의 부도덕한 면을 알고 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합니다. 공공복지에 돈을 쓰지마라, 그돈으로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을 지어야 한다는 카네기의 말을 들은 카네기 소유의 공장 근로자가 “하루 12시간 일하고 언제 그런데를 가겠는가” 라고 되물었다 합니다. 이렇게 구린 구석있는 카네기 이야기를 임목사는 장황하게 늘어 놓습니다.

어떤 목사의 전도사시절의 에피소드에 이어, 세번째로 성실해야 한다고 임목사는 화제를 옮깁니다. 여기서도 임목사는 잠언 한 절 읽어주고 곧바로 걸프전의 영웅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야기를 합니다. 연이어서 술꾼들의 안전한 귀가를 보장한 대리운전회사 창업자 김동진 사장이야기가 나옵니다.

대리운전 김동진 사장 이야기는 김사장의 사업이 더 잘되려면, 전국민이 술꾼, 그것도 그냥 술꾼이 아니라 알콜중독 주정뱅이가 되어 매일 밤 대리 운전 기사를 부르지 않으면 않될 정도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야 합니다. 임목사 말 대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사는 현장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라면, 무슨 일이던지 현장정신만 확실하면 돈 번다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목사가 하는 말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건 아니다”.

김동진 사장이 현장 정신이 강했는지 어땠는지, 고생은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설교 예화치고는 도저히 납득이 안갑니다. 술취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면, 즉 말씀대로 살면 김동진 사장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망한다는 것은 건강한 신앙생활의 한 표적이 될 터인데, 그가 잘된것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설교 마당에서 만큼은 자랑이 아닌것 같은데,,,,,, 필자는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임목사는, 맥도널드 햄버거 창업자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현장정신을 또 말합니다.

임목사는 마지막으로 온유를 설명하면서 시편 본문 한 절 읽고 바로, 연매상 30만 달러에서 130만 달러로 올린 어느 장로의 이야기를 하며 온유해서 그랬답니다.

계속해서, 임목사는 노드스트롬 백화점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임목사는 1970년대에 미국 시애틀의 노드스트롬 백화점에서 있었던 아주 유명한 실화를 들어, 한 점원이 베푼 작은 친절이 노드스트롬 백화점을 최고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고급백화점으로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 기업 경영자들은 무슨 대단한 성공비결을 발견한 것처럼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강조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이미 2천년전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갈파하신 대인관계의 황금법칙이라며 마가복음 7:12절을 들이 댑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어서 임목사는 “궤변”이 무엇인지 아주 좋은 공부재료를 다음처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방대한 구약성경의 정신이 바로 서비스 정신이라고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산상설교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마5:5절입니다.”

단 한마디로 구약성경의 정신이 서비스 정신이라고, 예수께서는 하지도 않은 말을 임목사가 지어냅니다. 아 – 필자는 이런 생각이 자꾸듭니다.

“예수와 임목사 그리고 나, 제발 3자대면 좀 해봤으면……”

필자의 너무 어이없는 기대인가요??? 예수께서 지금 이자리에 없으시다고(?) 임목사가 말을 너무 함부로 한다는 생각이 필자에게 강하게 듭니다. 서비스 정신 – 봉사 정신인데, 업계의 말로 하면 “섬김”인데 이것이 돈 받고 해도 계속 섬김인가, 장사인가? 필자도 이제 오락 가락합니다.

설교문 후반에 나오는 월마트,, 아마 임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 중에 편의점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상당 수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목사가 매일 아침 맛있게 먹는 아침 밥상에는 그들의 애환이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벌어서, 임목사가 그들을 세뇌한 대로, 온갖 헌금 다 하여, 임목사가 먹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트러블에 빠져있습니다. 그 이유중의 큰 이유는 월마트라고 이구동성입니다. 도매상에서 사오는 물건의 원가가 월마트 셸브에 놓인 그것의 소매가격보다 월등히 높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지금 월마트는, 캐나다 주류사회의 일정액의 캐쉬가 흘러 한인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캐쉬플로우를 비틀어 소형 자영업자들의 목을 죄고 있는 형국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월마트 때문에 장사가 안된답니다. 그런데 임목사는 월마트 회장을 본받으라네요. 모든 사람이 다 샘 월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임목사는 어떤 특정한 몇가지 사례를 들어 전체를 일반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확연하게 필자에게 보입니다.

설교문에는 없지만 동영상에는 있는 내용 한가지를 필자가 옮김니다. 큰빛교회의 어떤 장로께서 이발업으로 반세기를 종사했는데, 성실하게 했더니 터론토의 명사들이 많이 모여드는 이발관이 되었다, 여러분도 가 봐라 라고 말할 때는, 이걸 설교라고 들어야 하나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루 10시간 조그만 스토어에서 열심히 일하는 어떤 집사도 안되는 성도님은 “게을러서 그럽니까? 임목싸아-안-님!!” 전교인 열심히 릴레이 통성기도, 심방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임목사교회의 교우는 믿음이 없어서, 아니면 기도한 그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리 되었나요? 임목사는 답이 없음을 필자는 확신합니다.

비록 많이는 벌지 못했지만, 그 돈으로 주말에 아이들과 강가에서 소시지 몇개 굽는, 어린이 축구교실에서 씩씩하게 공을 차는 내 새끼의 모습을 보는 그 “소박함의 미학”을 임목사 당신이 어찌 알겠는가? 임목사야말로 현장정신을 배워야 할 사람 명단 제 0순위, 필자의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시편 37편은 다윗이 늙으막에 젊은이들을 향한 권면의 시라고 대부분 말하는데, 여기서 웬 돈 버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참 기괴합니다요.

이렇게 잡담에 가까운 함량미달의 말의 성찬만 예배당에 왜 가득한 것일까? 그것은 딱 한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밝히 깨달아 알게 하면 됩니다. 예수의 사랑과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 그만입니다. 허상뿐인 인간의 이야기, 겉으로는 다 좋아 보이지만 반드시 어둡고 구린 구석이 있는 법,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를 하면 구린내만 진동할 뿐임을 필자는 또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필자 역시 인간인지라, 카네기, 록펠러, 김동진, 샘월튼, 파월 처럼 돈도 많이 벌고 지혜롭고 온유하고 성실하고 현장감이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고, 또 그들은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필자가 아무리 돈에 한이 맺혀있다한들, 돈에 깔려 잘 보이지 않는 구린 곳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 설교의 중심에 있는 모습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카테고리설교비평태그설교비평, 성경이말하는돈버는법, 임현수목사, 큰빛교회

“큰빛교회-임현수목사-설교비평-성경에서 말하는 돈 버는 법”에 대한 9개의 댓글

순두게
2011-05-25 09:56

“큰빛교회-임현수목사-설교비평-성경에서 말하는 돈 버는 법”에 대한 9개의 댓글

  1. 임현수 목사 설교 전문 – 성경이 말하는 돈 버는 법 / 시37:1-11 / 2011-03-06
    성경에는 우리들이 찾고 구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는 보화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죄에서의 구원과 함께 통전적 구원 을 말합니다. 성경은 철학, 음악, 미술, 농업, 공업, 문학,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지혜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깨끗한 부자가 되는 원리도 분명히 나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업가들에게도, 직장인들에게도, 시골 농부에게도, 대학 교수에게도 성경은 지혜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이 특별히 직업이 없으신 분들이나 사업을 찾는 분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되고 안정된 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돈 버는 법칙 4가지를 본문에서 찾아 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 기도의 법입니다.
    돈을 버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은 기도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가장 실제적인 방법을 알려 드리는 것 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불평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첫 번째 함정은 언제나 인생을 불평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입니다. (시 37: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성경은 언제나 불평 대신 기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대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고 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 37: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 37: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크리스챤의 삶이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는 것 입니다. 맡겨드림으로 염려를 버리는 것 입니다. 참아 기다리므로 승리하는 것 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도로 가능합니다. 염려가 있거든 더 많이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미국과 카나다에 살았던 한 사업가가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 사람은 열다섯 살에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농장 인부, 자동차 페인트공, 보험 설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39세가 되던 1929년, 켄터키 주의 코빈이라는 작은 마을에 주유소를 차리고 조그만 식당도 차려서 꽤 번창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샌더스 카페에는 손님이 하나 둘씩 줄더니 급기야 가게 문을 닫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식당은 결국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에 그는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이미 그의 나이는 65세가 되었습니다. 제기가 불가능해 보였던 그는 마음의 병까지 얻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시름 시름 죽어가던 그는 어느 날 새벽에 밖에서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듣게 됩니다. 누가 이 새벽부터 찬송을 부르는가 싶어 밖을 쳐다봤더니 찬송을 부르고 있는 사람은 한쪽 다리가 없는 청소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소부는 계속 해서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이 찬송소리에 감동을 받고 청소부를 불렀습니다. “아니, 당신은 목발을 짚고 있으면서도 어쩜 그렇게 행복하게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까?”
    “아저씨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예요. 저의 영원한 집은 저 하늘나라에 있어요. 그래서 지금 내 환경이 어려워도 저는 항상 즐겁게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청소부와의 교제 속에서 그는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기를 시작 했습니다.
    퇴원한 후에 그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 저는 이제 나이도 많은데 이 나이에 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그랬더니 기도 하는 중에 수많은 닭들이 날아가는 그림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 그림이 자꾸 눈앞을 가려서 더 이상 기도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이게 도데체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기껏 말하기를 “그것은 닭 울기 전에 회개 하는 것이라네”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 기도 하던 중 사람들이 좋아하던 양념 닭튀김요리를 다시 해서 사람들에게 주었더니 모두들 맛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을 얻고 미국 캔터키 주에 있었던 자기 집에서 닭 튀김 장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 압력솥과 양념을 싣고 곳곳의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치킨 맛에 호의를 갖는 식당 주인들과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자동차에서 잠을 자고 주유소 화장실에서 면도를 하면서 수많은 레스토랑을 찾아다닌 지 2년이 지나자 다섯 개의 체인점을 모집할 수 있었고, 4년 뒤인 1960년엔 체인점 수가 2백 개를 넘어서 지금은 전세계 80여 개 국에 1만여 매장이 생길 만큼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65세에 사업을 시작해서 1980년 90세의 나이로 삶을 마칠 때까지 그는 각 나라 의 매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일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KFC) (korea for Christ?) 의 출입문 앞에 푸근한 웃음을 짓고 서 있는 할아버지 인형의 주인공으로서 바로 창업주인 커넬 할랜드 샌더스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 니까? 그는 남들이 연금을 받아 살 궁리를 할 65세의 나이에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 하므로 응답을 받아 그의 인생의 황혼 마지막 25년을 불태우면서 열심히 살다가 이 땅에 많은 수 많은 교회를 세워 놓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의 마지막 25년은 믿음의 생애였고, 그의 재기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환난 날에 우리가 할 것은 무엇입니까?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왜 구하지 않습니까? 왜 찾지 않습니까? 왜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 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사업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위해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구하라 찾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이든지 기도하시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광 돌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지혜의 법입니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지혜는 작은 아이들에게도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갑부중 한 사람인 강철왕 카네기의 어릴적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루는 어린 카네기가 어머님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갔습니다. 이것 저것 구경하다 가 딸기 파는 가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어린 카네기는 가만히 서서 딸기를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습니다. 하도 쳐다 보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안됐던지 한움큼 집어먹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카네기는 쳐다만 봅니다.
    집어 먹으래도 집어 먹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안됐는지 자기 손으로 딸기를 한움큼 집어서 카네기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카네기는 기다렸 다는 듯이 두 손으로 그것을 넙죽 받아 챙깁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카네기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얘야. 할아버지가 너한테 집어 먹으라고 할 때는 왜 안 집어 먹었니?”그랬더니 어린 카네기가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내 손은 작고 할아버지의 손은 크쟎아요?” ……… 지혜입니다.
    카네기가 10살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토끼를 길렀는데 토끼가 자꾸 번식합니다. 그래서 먹이가 부족합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친구들한테 이런 약속을 합니다. “얘들아, 토끼풀을 뜯어다가 먹여주면 토끼한테 너네 이름을 붙여줄게” 그랬더니 친구들이 앞을 다투어 토끼풀을 뜯어다가 먹여줍니다. 지혜는 두레박과 같아서 모든 좋은 것을 퍼 올리는 것 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피츠버그에 제철공장을 세웠을 때 그는 자기 이름으로 공장 이름을 짓지 않고 에드가 톰슨 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에드가 톰슨은 그당시 펜실바니아에 있었던 한 철도회사 사장의 이름 이었습니다. 왜 카네기가 자기공장 에다 그 사장의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는 자기 공장에서 생산되는 레일을 그 철도 회사에 팔아먹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결국은 그의 계획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후 기도응답의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장수를 구하지도 않았고, 잘 사는 부유함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 3: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16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결국은 지혜 안에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도 기도로 얻는 것 입니다. 솔로몬도 지혜로웠고, 다니엘도 지혜로웠고, 요셉도 지혜로웠습니다. 성실이 지혜를 만나면 거기서 탁월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전 10:10)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지혜가 우리의 성실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세상을 이기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가지를 긁어도 지혜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결혼을 했다. 신혼방에 들어서서 짐을 정리하다가 사모님의 가방에서 조그만 통을 발견했다. 궁금해서 사모님께 물었다. “이게 뭐요?” 그러자 사모님은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절대 열어보시면 안돼요, 알았죠” 전도사님은 궁금했지만 워낙 완강하게 말리는 통에 알았다고 약속했다. 그런 후 잊어버리고 세월이 20년이 흘렀다. 20년간 목회 하면서 어느 날 이사를 하게 되어 짐을 정리하다가, 20년 전의 그 통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목사님은 속으로 “이제는 20년이나 지났는데 설마 괜찮겠지” 하며 살짝 통을 열어봤다. 그런데 그 안에는 현금 200만원 과 계란 3개가 들어 있는게 아닌가, 너무 궁금해서 사모님께 사실을 말하고 물었다. “도대체 이게 뭐요?” 사모님은 절대 열어보지 말랬는데 열어보았다고 원망하면서 마지못해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이제는 말씀드리죠, 당신이 저와 결혼 후에 교회에서 설교 하실 때, 제가 졸음이 오면 그 때마다 계란을 하나씩 모았어요” 그러자 목사님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래? 20년 동안 내가 3번 밖에는 졸음이 오는 설교를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 돈은 뭐지?” 그러자 사모님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계란 판 돈요”
    셋째로, 성실의 법입니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내내 강조하시는 것은 성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처음에 명령하신 것도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고 도박과 투기로 버는 돈은 일하지 않고 번 불로소득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돈을 벌거나 뇌물을 받거나 하는 것입니다.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어느 지역의 개발 정보를 빼내서 거기에 땅을 샀다가 땅값이 열배로 올라서 돈을 번다든지 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모두 불로소득이기에 안 좋은 것 입니다.
    우리나라 농협의 기본 정신 가운데 하나도 현장정신입니다. 잠언 기자는 네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잠27:23) 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심방이 교회의 현장정신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 11: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잠 19:1)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한 흑인 고등학생이 코카콜라 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바닥에 흘러내린 콜라를 닥아내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50개의 콜라병이 든 상자가 터져버렸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닦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 흑인 학생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 그 콜라를 열심히 닦아냈습니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자마이카 출신의 미국이민자 였습니다. 그는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정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그의 학교 성적은 항상 하위권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했고 성실했고 어떤 시련 앞에서도 용감했습니다. 그는 그의 성실을 바탕으로 훗날 미국 합참의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걸프전쟁의 영웅 콜린 파월 입니다. 그는 백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콧대높은 미국인들로부터 크게 존경 받는 인물 입니다. 그에게는 항상 흑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닙니다. 그는 흑인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성공하게 만들었을까요? 그의 성실성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한다는 현장정신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 이십니까? I am Who I am 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사는 현장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현재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3무(학연,지연,혈연이 전무하다) 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김동진 사장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은 사업 가운데 <대리운전>이라는 사업이 있습니다. 술들을 워낙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계에 대부가 된 김동진 사장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1577-1577이라는 앞뒤가 같은 번호 하나 가지고 9년 만에 대리 운전 시장을 평정 시킨 사람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는 시골에서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서 꾸어서 준 돈 2,000 원 들고 서울로 상경하는 눈물겨운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중학교 졸업도 못하고, 서울 장안동 중고차 상점에서 광택 내는 일부터 시작해서 운전수, 밤중에는 파지 줏어서 파는 일까지 하루에 3가지 직업을 갖고 일 할 정도로 열심과 성실로 살았습니다. 조그만 교회에서 결혼하고 난 후 이 부부는 대리운전이라는 사업을 둘이서 시작 합니다. 하루종일 다니면서 전단지를 뿌리고, 새벽 3시경에 일어나 위험을 무릎쓰고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에 들어가 작은 현수막을 50개 씩 걸어 놓고.. 수없이 고생 했습니다. 
    한번에 12,000원 받고 술 취한 손님을 모셔다 드리고 자기는 버스 타고 돌아 오는데… 어느 겨울에는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버스 기다리다가 발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물차 하나 구입해서 길에다 세워 놓고 …
    그것이 사무실이 되고 부부가 둘이서 전화 받으면서 발로 뜁니다…. 그 직업은 술취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직업이기에 전화가 걸려 올 때부터 80%가 반말이고 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욕 먹으면서 시작한 사업이 어느 날 번창 하기 시작 하더니 지금은 운전 기사만 4,600명, 상담원 120명을 거느린 대한민국 1등 대리운전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600명의 직원들에게 대기업 수준의 복지 혜택을 베풀며 회사의 이미지 개선에도 1등 회사가 되었습니다. 
    세계최고의 햄버거 업체인 맥도날드사의 현장정신은 유명합니다. 창업주 레이 크록(Ray Kroc)은 52세에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현장에서 철저하게 햄버거 사업의 모든 것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햄버거를 직접 만들고 배달해본 사람만 회사의 요직에 앉혔습니다. 지금의 프레드 트너 회장도 창업주 밑에서 빵을 굽던 사람 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피 눈물 나는 현장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강철왕 카네기,석유왕 록펠러,발명왕 에디슨, 자동차왕 헨리 포드, 월마트의 샘 월튼, KFC의 카널 샌더스 현대 정주영, 이랜드의 박성수… 이들의 성공역사는 투철한 현장정신 이었습니다.
    기도와 지혜 그리고 성실함을 능가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성실하신 하나님을 닮아 범사에 성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기무라의 기적의 사과 유티브 동영상…)
    4. 온유의 법입니다.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시 37:11) 그러나 온유(溫柔)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란 말은 <따뜻할온(溫) 부드러울유(柔)>를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따뜻하고 부드러운친철 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즘은 서비스 정신 이라고도 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도 맥도날드가 서비스가 부족해서 1년에 몇 억불의 손해를 보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런던 한인 장로교회 장로님으로부터 점심 시간에 그의 사업 얘기를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하시던 분인데 은퇴하고 버라이어티를 시작 했다고 합니다. 그냥 보통 가게였답니다. 그런데 이분은 손님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을 경영의 우선으로 삼고 시작했는데 이 분이 이 가게를 인수한 후부터 가게 매상이 3배가 올랐다고 합니다. 1년에 30만불 되던 매상이 130만 불로 올라가더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이 온유와 친절의 법칙입니다. 
    한 노부인이 미국의 피츠버그 백화점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어느 한 사람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노부인이 가구 코너로 갔습니다. 그러자 젊은 점원이 공손하고 친절하게 인사하면서 뭐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노부인은 그냥 비를 피하려고 잠시 들어와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젊은 점원은 의자를 내어놓으면서 앉으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도 대접했습니다. 얼마 후 비가 그치자 젊은 점원은 노부인을 부축하고 밖으로 나가서 잘 가시라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노부인은 떠나면서 젊은 점원의 명함을 하나 받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몇 달이 지났는데 편지 한 장이 백화점 주인에게 날아들었습니다. 새 집을 단장해야 하겠으니 그 가구 코너의 젊은 점원을 스코틀랜드로 보내달라는 편지였습니다. 백화점 주인은 젊은 점원이 인테리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분야의 전문가를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답신이 왔는데 젊은 점원 외에는 아무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답신에는 놀랍게도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의 자필 서명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젊은 점원은 스코틀랜드로 파견됐고 수십만 달러 어치의 가구를 주문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 백화점의 동업자 자격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 백화점 수익의 50%를 차지하는 주인이 되었습니다. 작은 친절이 큰 복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한 중년 아주머니가 백화점 쇼핑을 하다가 옷 한 벌을 사고는 공항으로 달려갔습 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비행기표를 백화점 카운터에다 두고 나왔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 때 뜻밖에도 백화점 점원이 나타 나서 비행기표를 건네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점원은 뒤늦게 표를 발견하고는 곧장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그 아주머니는 그 백화점의 단골손님이 됐고 또 홍보요원이 됐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1970년대에 미국 시애틀의 노드스트롬 백화점에서 있었던 아주 유명한 실화입니다. 한 점원이 베푼 작은 친절이 노드스트롬 백화점을 최고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고급백화점으로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기업 경영자들은 무슨 대단한 성공비결을 발견한 것처럼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2천년 전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갈파하신 대인관계의 황금법칙이었습니다. 마7: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예수님은 방대한 구약성경의 정신이 바로 서비스 정신이라고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산상설교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마5:5절입니다.
    5 온유(친절)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성공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자리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행복에 이르고 성공에 이르는 바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바르게 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지식이 많고 아는 것이 많은 것과 바르게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그 지식이 바르지 못할 때에는 그 지식이 오히려 불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작은 가게를 하든지, 평범한 직장에 다니든지, 공부하는 학생이든지, 가정 주부 이든지 항상 이런 법칙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의 법, 지혜의 법, 성실의 법, 친절의 법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세상이 너무 불공평 하다고 합니다. 이민 생활이 너무 어렵다고들 합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계십니다. 광야에도 찾아 오셨고 더러운 마굿간에도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진심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십니다. 이런 특권을 약속 받고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불신앙이나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거나 시기하지 마십시오. 삶을 불평하지 마십시오. 분노하지 말고 조급하지도 마십시오. 행악에 치우칠 뿐입니다.
    두려워 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주안에서 승리할 수 있고, 주안에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로 이 한주간도 승리 하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마르다
1970-01-01 00:00


힘든 겨을지나고 희망의 봄맞아 열씸히 돈벌어볼끼라고,
이민현장 일터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면서, 바보 핵교 짬짬이 눈도장만 찍고 갔는데
더디어,
오매불망
아 !!! 꿈에도 그리던 돈벼락맞는 비법을 전수해주시는군요.
그런데, 하늘의 뜻을 밝히아는 임목싸안님 !!
가장 실제적인 방법을 갈켜준다했는데, 도데체 얼마만큼 기도해야하고,
무슨 지혜를 가져야하며, 어느만큼 성실, 온유해야 하나요?
보통의 예배당 열심파들 KFC 할배만큼 기도할낀데요.,
하루 몇시간 혹은 일주에 몇시간인지를 갈켜줘야 내 할일(기도)하고나서
돼지든 소든 그림을 안보여주면, 목사님이 믿는 하나님한테 따질수 있을것 아님니까?
글카고, 카네긴가하는 어린놈- 아니,- 분이 하는짖이 지혜입니까, 영악한겁니까?
보통의 우리같은 시장터의 민중 할아배가 애를 불쌍히여겨, 베풀고 나누는 이웃사랑을
잔머리 굴려 이용하는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지혠게요 ? 그런것이었나요 ???
만약에 내 자식놈이 고롷케 잔마리 굴렸으면 쟉신패고 시장할아배께 무릅꿇고 빌게했을 겁니다. 고딴것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라고 !!! @#$%$#@
전도사 이야기 – 헐 !!!!!!!!!!!!!1
200백만원 나누기 약 요즘시세 삼천원($2.99계란 12개 값 ?)이라치고 = 666. 다즌
666 다즌 곱하기 계란 12 개 = 7992 , 그리고 더하기 남은계란 3개 = 7995
한번더,
개란 7995개 나누기 20년하면 일년(365일 맞제? )에 싸모님모시고 한 설교만 해도
약 399.75번을 햤구만요 !!
뻥을 쳐도 정도껏 쳐야지, 사전조사는 사기당하는 병신도에대한 최소한의 예절 !
글카고 이런 멍청한 예편내가 지혜로운 바가지란다. 캬 !!

“그가 바로 걸프전쟁의 영웅 콜린 파월 입니다.” –
그럼 그보다 더높은 父子 대통령 부시는 얼마나 성실했을까? 또 명박이는 ???
더 이상 헐말 어읍씀. 쫑 !!
漸入佳境(점입가경) – 소위 말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짓이 더욱 꼴불견일때 쓰는말.
결정 타타타 !! 퇬 퇬 퇬 !!!
예수님은 방대한 구약성경의 정신이 바로 서비스 정신이라고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 밑줄 쫙
끝으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진심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ㅡ 설교에 은혜받은 나의간구. ㅡ
나는 진짜로 임목싸님이 믿는 하나님을 밌싸옵꼬,
임목싸님의 주님은 구하는자에게 응답하여 주씬다 해앴싸오니,
다가오는 복권 $50 밀리온(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요구) 벼락 맞게하여주시옵쏘써,
Amen !!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순두게
1970-01-01 00:00


계란 계산까지 하셨네요. 대단하십니다. 제목은 돈버는 법, 그것도 성경에서, 그런데 보셨다시피 완전 뜬 구름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뜬 구름은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지요. 차라리, 금융주를 사라, 제조주는 빨리 팔아라, 등등 차라리 이런 뜬 구름이라도 잡았으면 훨 나을뻔했지요. 마르다님은 더 학씰하시네,,, 복권 번호좀 갈쳐달라고 하셨으니….
큰빛교회 참 대단한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회학자가 아니라 사회학도가 기말 레포트 정도의 목적으로 그 집단의 정신상태를 연구해 보면 담당 교수가 점수 잘 줄것 같은데. 교회를 가는 것인지, 교회당 건물에 아무생각없이 그냥 본능적으로 들랑날랑하는 건지, 동네 문화회관 에서 정기적으로 개설한 재무설계 혹은 장사잘하기 강좌들으러 다니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알수가.
댓글 감사.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마르다
1970-01-01 00:00


하나더.
상대지망생 아들에게 주는 조언
야, 핵교 때리치우고 성경 “이나” 봐라 . 벼락부자 될끼다.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Bill
2013-04-10 02:34


제가 볼쩍에 임현수 목사님 설교 참 성경적이고 올바른 말씀이고 믿는 자에게 유익한 말씀인데, 너무 삐딱하게 보는것 같네요. 목사의 잘못된 점, 비리, 비성경적인 내용들은 통렬히 비탄하는 것에는 동감하나, 설교 말을 비틀어 야유하는것 같은 댓글같아 보이네요. 정말 기도 하면 응답아여 주시는 하나님이고, 자녀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우리 하나님이고,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라는 것을 설교 하셨는데, 왜 비판 받아야 할까 라는 의문입니다. 어디서 이렇게 하면 벼락부자 로또당첨되듯이 되다라고 설교에 써있는지 알수가 없네요.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마르다
2013-04-16 00:54


Bill님의 지적대로 비꼬고 야유하는둣한 표현으로 비춰졌다면 필력이 약한 저를 스스로 탓하고 조심스럽게 여러분들께 이해와 용서를 바랍니다.

여기 바보스쿨에서 비평한것은 임목사 개인을 향한것이 아닌, 이 시대를 깨우지 못하는 넓게는 이 세상의 목사들, 좁게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영향을 끼치는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이라고 이해하고 있읍니다. 더군다나 이십년 가까이 임목사를 곁에서 보고, 그의 성품을 쬐끔은 알고있는 저는 개인적으로 아무감정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분의 성품을 좋아하고 저보다도 인격이 몇십배는 훌륭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설교는 일전에 목사님 전상서 예언자편에서 밝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를 든 위의 설교에서와 같이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우리가 뭔가 (혹은 위의 설교처럼 기도,지혜,성실,온유의 법칙을 따라) 열심히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것처럼 가르치는데 위의 설교와 성경에서 절절히 경고하는 풍요의 신 우상 바알의 기도와 무엇이 다름니까?
님께서 성경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성경어디에 돈버는 법이라고 나오는지요.
돈 많이 벌어서 풍요롭게 살고 싶은것은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들(아니 모두)의 욕심일 뿐입니다. 그 우리들의 욕심을 번지르하게 성경이야기로 포장했을뿐이지 성경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럴싸 해 보이지만 성경은 경제학교제가 아님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도바울을 통해 “십자가의 도” 외에는 이땅의 모든것이 배설물이라고 했고, 부자청년이 예수께 영생을 물을때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이웃과 나눔을 통해 빈손이 되라 하셨읍니다. 욕심많은 대부분의 우리들의 죄의식을 성경구절을 이용해서 정당화시키는것이지 저의 생각은 절대 성경적이지 않읍니다. (제 생각이 잘못 됐다면 부디 가르침을 주소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은 물질,성공,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연약함, 죄인됨을 발견하는것- 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읍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지나가는것 많큼이나 어렵다고 하셨읍니다. 일전에 어떤 목사가 예수께서 과장법을 쓰셨다더군요. 정말로 예수께서 과장법으로 성경을 기록 했을까요? 아님, 우리 인간들의 욕심을 감추려고 목사께서 성도들에게 좋은 덕담으로 이야기 했을까요? 만약 내기를 걸수 있다면 부자가 천국가는게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지나가는것 만큼이나 어렵다에 올인하겠읍니다. 예수의 말씀을 우리가 믿는다면, 위에 설교에서 부자된 사람들 천국가기 힘들다는 이야기이고 오늘날 교회안에서 ” 부자되세요 ” 하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님 ! 혹시라도 님께서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달콤한 복말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받기 원하시면 마음 단단히 먹으시길 바렘니다. 성령받은 제자들의 복된길의 끝이 어떠했으며 그들의 바라는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안다면 말입니다. 목사가 아닌 예수께서 직접 경전(성경)에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말세에 참성도들이 많지 않을것이고 참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것이 라구요 !!

저는 누구를 비꼬는것이 아니라, 성경과 목사들의 설교(?) 사이에서 참담한 한 평신도의 절규이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탄식입니다. 몇십년을 거짓 축복의 설교에 속은 분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께 여전히 야유하는 듯이 보인다면 답답한 내가슴을 보일 수 없는 나는 거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웬지 예수가 불쌍타 !!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마르다
2013-04-18 16:41


설교본문중에서 –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피 눈물 나는 현장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강철왕 카네기,석유왕 록펠러,발명왕 에디슨, 자동차왕 헨리 포드, 월마트의 샘 월튼, KFC의 카널 샌더스 현대 정주영, 이랜드의 박성수… 이들의 성공역사는 투철한 현장정신 이었습니다.
.
과연 이런 성공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성경적 성공한 사람들의 본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기업의 성공신화는 하나님께 단물만 빨아먹는 타락한 인간의 욕심일 뿐입니다. 인간 중심의 우상숭배나 다를게 없읍니다. 차라리 저에게는 남들에게 피해주지않는 복권이 훨씬 더 깔끔하다고 사료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기업성공이나 복권이나 인간욕심을 나타내는 한 방편일 뿐입니다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마르다
2013-04-23 16:18


모두의 꿈 – 성공하는 삶, 축복받는 삶, 목적에 이끌리어 남들보다 보다 나은 질의 삶,
목회자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다는 번영신학, 목회성공, 건강한교회, 그리고 수많은 수식어들 !
그 거룩한 기초를 위하여 온 성도들의 헌신을 바란다는 대동소이한 호소의 성전건축

여기 어느 목사의 통곡이 들립니다. – 강추
http://www.youtube.com/watch?v=k6I6ROxchuk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geek
2013-05-13 17:12


김성수 목사,,, 다행히도 제도권 목사들 중에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뭄에 콩나듯,,,,,, 잘 보았습니다. 감사.이 댓글에 댓글달기 로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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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대한민국 보수의 멘탈리티를 말하다

대한민국 보수의 멘탈리티를 말하다

이 모든 생각들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국가주의 국가론이다 이를 따르는 사람과 정치세력을 기리키는 용어로는 이념형 보수가 적당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주의 국가론은 강령한 경쟁력을 지닌 이론이다 논리적으로 매우 단순명료해서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내부 혼란과 침략의 위험이 상존하는 국민국가의 시대 더욱이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대결을 동반한 한반도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한 대한민국에서 홉스의 국가론은 앞으로도 긴 세월 위력을 떨칠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돌배게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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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라이터 김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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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08. 2017
2017년 한국의 보수는 망했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하지만대통령 선거의 판을 열어보자 자
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가 2위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특히 젊은 층의 입장에서
시국의 책임을 져야할 보수당이 아직도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하지만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개인적인 문제와 도덕적 결함이
있는데도 2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한국의 보수당과 보수지지자들의 사고를 읽어 낼 수 있다
유시민 작가는 대한민국의 보수를 이념적 보수로 정의했다
이념적 보수는 국가주의적 보수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에서 보수 후보가 내거는 공략은 매우 간단하다
경제와 안보를 통한 사회 안정이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아무리 미친 짓을 해도 보수라는 타이틀
북한과 좌파 세력의 척결 그리고 경제만 잘 살게 해준다면 표를 던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된 것은 경제 대통령
의 이미지가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 때문이었다
젊은 세대는 보수를 이해 못하고 비합리적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보수의 멘탈리티와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정치는 특수한 상황에 놓였는데
보수가 먼저 형성되고 진보가 이에 대한
반격을 가하는 행태를 보인다
이런 행태는 대한민국의 특수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수의 형성 과정을 하나 하나 뜯어 보아야 한다
체제 선택의 정치 : 광복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세워질 때까지
한편 미군정은 일제하의 한국인 관료와 경찰을 상당 부분 유임시켰다 미군정은 이들을 행정과 치안 및 질서유지를 위한 기능적인력으로만 생각했지 그것을 둘러싼 한국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36)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태극기 집회에서 눈여겨 볼만한 장면은 태극기와 미국의 성조기를 동시에 들고 나타났다는 점이다
태극기 집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겠다는 어르신들의 마음은 이해는 간다
그렇지만 거기에 왜 성조기가 나타났을까
최초의 선거인 5.10 선거가 있기 이전대한민국에서 합법적인 무력을 사용할 수 있던 집단은 바로 미군정이었다
8.15 광복 이후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수많은 정치 세력
이 있었다
여운형을 필두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성수와 송진우를 필두로한 한국민주당
김구를 필두로한 임시정부 그리고 조선공산당 등이었다
하지만 혼란의 시기 속에서 이 정치세력
은 국가의 핵심인 합법적 폭력을 가지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광복을 맞은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군정의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좌파 세력은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미군정과 좌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군정은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 세
력을 대부분 유임시키며 국가를 돌렸다
미군정은 자신들과 일할 수 있는 보수를 선택했다
미군정의 지지를 얻었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자신의 친일 행적의 약점을 미군정의 지지로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민당 계열이 행정 일을 맞게 되었다
그러던 중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공표하자 많은사람들이 이에 대해 반응하기 시작했다
우파 세력은 신탁통치에 대해 반대했다
조선공산당과조선인민당과 같은 좌파도 처음에는 반탁을 했지만 신탁통치를 기능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생각해 찬탁이라 말하지 않고 3상회의
결의사항 전폭 지지라고입장을 바꾸었다
이에 대해 많은 민족이 분노를 했다
신탁은 마치 일제 강점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많은 민중이 미군정과 좌익 세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난처했다
그동안 손을 잡았던 우파 세력이 반탁을외치하고 좌파 세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한다
좌우합작운동이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미군정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유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통치 방식을 바꾸고 이 문제를 UN에 상정했다
UN은 남한에게만 단독정부 수립을 허가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을 지지했고 한민당 또한 반탁 진영에서
나와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5.10 선거가 치러줬다
510선거의 선거권은 23세 피선거권은 25세 이상의 성인 남녀에게 모두 주어지지만 민족 반역자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및 고위 친일 관리는 자격을 박탈했다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체택했으며 기표는 입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쓰는 자서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이북 출신의 월남자를 위한 특별 선거구를 두도록 했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68)

하지만 510선거도 지리적으로나 이념적으로는 한계가 있는 선거였다 좌파남노당는 선거에참여할 수 없었고 중간파민죽자주연맹와 우파의 일부한독당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선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가운데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독촉 그리고 무소속이 대거 참여하여 남한에서만 치러진 선거였기 때문이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69)
대한민국이 국가의 형태가 된 5.10 총선은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보수가먼저 형성된 것은 미군정의 통치 방식 때문이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한국에서 일을 해야하는데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보수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보수의 개념
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다만이념적 보수가 등장할 수 있는 땅은 마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치를 이해할 때
미국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국은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통
치자들과 관리들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정치를 한다
르포라이터김민성 2 46.25 전쟁과 한국인의 탄생

이 무렵 한국의 국민적 정체성 확립과 관련된 대표적인 계기는 농기개혁과 한국전쟁 그리고 반공이었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171)
이승만 정부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운 것은 분명 아니다 당시 정치는 권위주의적이였고 시장은 경제를 움직이는 부분적 메커니즘에 불과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위주의가 전체주의보다 나으며 부분적으로 작동할지라도 시장이 전면적인 통제와 계획보다는 효율
적이라는 점이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83)
수능 시험에서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시험 밭이다
그 만큼 농지개혁은 중요하다
6.25 전쟁
이 터지기 전 이승만 정부는 대대적으로 농지개혁을 펼친다
농지개혁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번째로 지주들의 지배 구조를 무너트려 버린 것이다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 소유의 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두번째가 중요한데 바로 자신이 지켜야 할 자신의 재산 즉 소유물이 생긴 것
이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땅을 받은 농민들은 이승만 정부에 대해 지지를 표하게 보수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 이전에 땅이 없는 농민들을 선동하던 좌익 세
력의 힘을 빼놓고지주들의 지지를 받던 한민당의 힘 또한 빼버린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이 남한으로 처들어 오고 6.25 전쟁이 시작된다
휴전이 있고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택한다
북한에게 가족을 잃었던 농민들에게 반공정책은 더욱 이승만 정부를 더욱 지지하게 만든다
외부에 적이 생기면 내부는 단결한다
6.25 전쟁 이후 조선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아이덴티티를 획득한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보수적인 국가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중도파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편 아니면 나쁜 놈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중간파가 설 자리는 없었다
이렇게 이승만 정부는 안정기를 맞이했지만 무리한 정권 연장과 비선 실세들이 등장 그리고 일본과 갈등을
조장하려는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는 미국의 태도가 합쳐져서 419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은 무너
지게 된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보수층의 멘탈리티의 기본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막과 경제 발전

발전국가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도 방어적 근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시장에 대한 장기적이면서 전략적인 개입을 하는 국가이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319)

이러한 반전국가적인 시장개입의 과정에서 관치 금융이 발생했고 정경유착이 싹텄으며 비효율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이렇게 한정된 자원을 특정분야에 몰아주는 방식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 것도 사실이다 이때 정북가 추구하는 것은 단기적인 효율성 보다는 중장기적인 효과성이였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320)
저자는 이승만 정부에서 산업화를 이룰 재료는 준비가 되었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하고 국면은 바뀌게 된다
박정희대통령은 5.16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획득한다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조직의 문제는 바로 지지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정은 처음에 인기 영합주의를 시도한다
반공 태세를 강화하고 3.15 부정선거자를 처단하고 화폐 개혁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더 큰 그림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박정희 군정은 정치와 경제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을 지지할 당을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거의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졍제 개발 우선 정책을 추진한다
그리하여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지하고
배트남 파병을 하며 저자가 말하는 발전국가의 완전한
틀을 만들었다경제 발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지며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국민에게 지지를 받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경쟁 특히 1967년 선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경쟁에서 이겼다 해도 이들 세력의 핵심인 박정희는 게임의 규칙에 따라 더 이상 출전의 기회를얻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데 이들의 고민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발전국가를 사회 내의 여러 계급뿐 아니라 의호 및 정당정치로부터 자율성을 지닌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정치가 실종되고 오로지 행정적 효율성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가 탄생하는 것을 의미했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P. 378-379)

이러한 의회 및 정당정치 위축 공화당의 자율성 상실 당내민주주의 소멸 등과 같은 현상들은 유신체제가 출범하면서 그 절정에 달했다 중략 이 모든 과정의 절정이 유신이었지만 , 그것의 시발은 삼선개인이었다 건국과 부국 생각의 나무 P.391)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갈린다
바로 경제를일으킨 훌륭한 대통령인가 아니면 독재자인가라는의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근본 문제를 과연 정치발전과 경제발
전이 함께 갈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지적해 주었다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선진국들이 발전할 때 민주주의가 먼저 발전하나 아니면 산업화가 먼저 이루어지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산업화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 후에 제도적
민주주의가 세워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아마 저자도 이에 착안을 했던 것 같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산업화와 민주주의는 동시에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지금 우리에게 많은문제를 안겨 주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발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여하튼 <건국과 부국>은 여기서 끝난다
-------------
<건국과 부국>은 두 가지 점에서 마음에 든다 비록 절판이 되었지만

첫번째로 저자가 자신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앞에다 설명한 것이다
사실 역사를 배울때 교과서나 선생님들이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자신의 역사관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비겁한짓이다

두번째로한국 보수의 이념적 멘탈리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저자의깊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신체제에서 책을 끝내는 것은 보수의 멘탈리티가 광복 이후 박정희 정권에 따라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마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다음에는 유시민 작가의 <나의한국 현대사>를 읽어 봐야겠다
한국의 보수에 따라 진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봐야 한국 정치
를 이해하는 큰 틀을 형성할 것이니까 말이다

2018/04/18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adorno2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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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는 바를 보고, 그의 의도를 살피고, 그의 습관을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 함석헌 전집 20권 등이 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2018/04/11

한국민주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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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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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韓國民主黨
이념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정치적 스펙트럼우익
당원약 90만 명(1947년)
역사
창당1945년 9월 16일(설립)
1949년 2월(해체)
선행조직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후계정당민주국민당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Korea Democratic Party, 영문약칭 KDP)은 미군정기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적,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정치 정당의 하나이다.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의 전신이기도 하다. 1945년 9월 16일에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등이 합당하여 조직된 정당이었다. 송진우김성수장덕수조병옥윤보선 등이 참여하였다. 초대 당수는 송진우였으나 1945년12월 30일에 암살되고 다음 당수 장덕수 역시 1947년 12월 2일에 암살당했다.
한국민주당에 참가한 정당으로는 8월 28일 김병로백관수 등이 발기한 조선민족당9월 2일 백남훈장덕수윤보선 등이 조직한 한국국민당 등이었다. 이들은 9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인 안동장에서 합당에 합의하였고, 9월 8일 윤보선의 집인 안동장에서 정식 창당하였다. 1945년 12월의 신탁통치 때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1946년 2월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에는 참석,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48년 1월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이 나뉠 때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 선거가 가능한 지역 만이라도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정부 수립을 준비할 것을 주장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내각 구성 때 김도연 등 일부 인사만이 반영되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다가 결국 야당화되었다. 1949년 2월 대한국민당의 일부와 합당하여 민국당으로 개편되었다.

개요[편집]

민주당의 기원은 한국민주당에서 시작된다. 한민당은 1945년 9월 16일에 결성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존속하다가 1949년 2월 10일 발전적으로 해체, 민주국민당으로 개편되었고, 민국당은 그 이후부터 원내 야당으로 활동하다가 역시 발전적으로 해체, 1955년 9월 28일 민주당으로 개편되었다.[1]

광복 직후[편집]

광복 직후 보수적인 인사들과 지주, 미국과 유럽 유학생 출신들은 각자 정당을 조직했다. 1945년8월 18일 원세훈이순탁조병옥 등은 서울에서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는데 해방 직후 한국에서 조직된 초기 정당 중의 하나이다. 그 뒤 8월 28일 김병로백관수 등은 서울에서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을 조직했고, 9월 2일 백남훈장덕수윤보선장택상허정 등이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하나의 단결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8월말부터 협상에 들어갔으며 9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인 안동장에서 통합에 합의한다.
1945년 9월 4일 우익진영의 대표자 82명은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처음에는 송진우김성수 등의 명망가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우익 여당이 있을텐데 별도의 당을 창당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는 권고에 못이겨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창당 배경[편집]

초대 수석총무 송진우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성명을 내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9월 7일에는 김성수송진우서상일 등 동아일보사 계열의 인사들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환영을 계획하였다. 또한 같은 9월 7일 이인조병옥 등이 결성한 중경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곧 9월 8일 국민대회준비위원회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를 계획하는 한편 한민당의 측면지원조직으로 활동하였다.
9월 8일 한민당은 창당 발기인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 성명서를 동아일보와 중앙방송국 등에 발표했는데, 그것은 '기미(己未) 이래의 조선 독립운동의 결정체이며 국제적으로 승인된 재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반대, 부인하는 도배(徒輩)가 있다면 이는 3천만 민중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창당 이전부터 조선공산당과의 투쟁에 있어서 선봉적 역할을 한 세력의 모임이었던 한민당은 이후로도 한국독립당독립촉성회와 연대하여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 등 좌파에 대한 투쟁을 지향하였다.
1945년 9월 9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입성하여 군정을 선포하였고, 10일 한민당계열 인사인 오긍선이 미군 장교를 접선, 송진우의 한민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1일 군정사령관과 미정보참모부(G-2)는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윤보선윤치영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듣게되는데, 이들 한민당 세력들은 '건준을 비롯한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다.'라고 주장하였다.[2]
창당 멤버의 한사람인 조병옥에 의하면 한민당의 주 목적은 건준 타도라고 하였다.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는 활동과 그 다음 소위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 집단을 성토, 타도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지방 방방곡곡으로 뻗쳐 있었고, 조선민주청년동맹이라는 것도 결성되어 있었다.[3] 이들의 조직을 타도하는 것이 한민당의 첫 당면과제였다는 것이다.

창당 조직과 당 행동강령[편집]

한국민주당은 1945년 9월 8일 윤보선의 집인 안동장에서 정식 창당하였다. 이들 한민당에 입당한 구성원들은 미국, 일본 등 해외 유학파와 그밖에 4분의 2가량이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들이 핵심[4] 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친일파를 직접 대표자로 선출하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함께 친일파 세력을 상당수 포섭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매우 약했다.[5] 1945년 9월 16일,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1600여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하면서 당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많이받았던 건준을 맹렬히 비난, 공격하였다.[6] 창당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일본 제국주의 철쇄는 끊어졌다. 혈한의 투쟁! 참으로 36년,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만 년의 빛나던 역사를 도로 밝혀 완벽무결한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구원의 발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3천만 가슴에 뒤끓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혁명동지들에게 바치는 감사로 옮겨지고 더욱이 포한종천하신 순국제현에게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몰래몰래 슬플 쁜이다. 참으로 이 크나큰 광복의 공훈은 해내.해외의 들입고 감추인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한의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머지않아 해외의 개선동지들을 맞이하려 한다. 더욱이 인방중경에서 고전역투하던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혁명동지들을 생각건대 그들은 두 번 거듭나는 세계의 대풍운을 타서 안으로 국내의 혁명을 고동하며 밖으로 민족의 생맥을 국제간에 현양하면서 나중엔 군국주의 박멸의 일익으로 당당한 명분 아래 맹방 중,미,소,영 등 연합군에 끼어 빛나는 무훈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광복 성취가 이 어찌 우연한 바이랴.

우리는 맹서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는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약속한다. 군국주의의루(전쟁보루)를폭멸하고 세계평화를 확립시키는 세기적 건설기를 당하여 자주독립을 회복한 우리는 맹방 제국에 최고의 사의를 표하는 한편 국제평화의 대헌장을 끝까지 준수 확충하려 한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장래할 세계의 신문화 건설에 뚜렷한 공헌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완벽결한 자주독립국가로서 힘차게 발전해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 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국민의 자반석 위에 두고 세계 신문화 건설에 매진하려 한다.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강령
  •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정책
  •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 중공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 국방군의 창설
(하략)
경제 강령을 만들 당시 허정은 무상몰수를 하든 유상매수를 하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허정은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인 국유화는 곧 농민들을 소작농화 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따라서 한민당은 농지에 대해 일부 무상몰수를 포함한 유상매수와 유상매매 또는 분배를 당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어 한민당은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승만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한편 조병옥은 '김규식 박사도 당의 영수로 추대할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다른 한민당 당원들에 의해 번번히 묵살당했다. 조병옥은 '나는 그(김규식)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기대를 가졌다[7] 며 많이 아쉬워하였다.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은 정강과 정책을 발표하였다. 정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공주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경제조항은 사회주의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다.

당원 수[편집]

창당 19일 후인 1945년 9월 27일 미군정청 내무부에 신고된 한국민주당의 당원수는 전국적으로 5만 명이었다. 이후 서울의 당 본부와 경기도지구당을 조직하고 1945년 12월 5일 부산시지구당, 경상남도지구당을 결성한 뒤로는 지방 지구당 조직을 확대, 확장시켰으며, 지역의 유지, 해외 유학파,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자, 온건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이 참여하였다.
1946년말 당시 한국민주당은 남한 전역에 54개의 지구당을 조직하였고, 당원수도 1946년 12월기준 23만여 명이었다. 1947년 12월말 미군정청 내무부에 신고된 한민당의 당원수는 86만 6천여 명이었다.

역대 정당 당원[편집]

집단지도체제[편집]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였다. 형식적으로 수석총무와 정치부장을 선출하였지만 수석총무나 정치부장은 형식적인 대표였고, 외교분야는 당 외교부장, 경제분야는 당 경제부장, 산업분야는 당 산업부장, 농림분야는 농림부장이 주관하는 등의 형식이었다. 또한 각 부처의 총무와 부총무, 부원이 있었고 정치부원이 외교부원을 겸하기도 하고, 각 부장이 타 부의 부원이나 부총무, 또는 각 시도지구당 위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허정은 한민당은 총무 중심의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였다고 증언하였다.[8] 조병옥은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인 8총무제를 채택하고 수석총무에는 송진우를 피선하고 총무에는 김병로이인 등과 나도 그 8총무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3]'고 하였다. 이어 각 도의 시도지구당 위원장을 선출하였다.
한민당 발기위원이자 창당 멤버이기도 한 허정은 당수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지 않았던 것만 놓고 보더라도 한민당은 민주적인 정당이라고 봤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은 한국 최초의 민주적 정당이었다. 민주주의의 구현을 당이 노선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정당 운영도 민주적이었다 고 하였다. [9] 다수의 의견과 함께 소수의 의견도 존중되면서 그 의견이 민주적 방식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당원 자치의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1인 중심의 독선적 당 운영은 있을 수가 없었다.[9] 또한 허정은 한민당이 각 부서의 자치권, 각 시도지구당의 자치권을 인정한 것과 어설픈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 역시 한민당이 갖고 있었던 민주적인 시스템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출범 초기[편집]

한민당은 1945년 9월 21일 중앙부서를 확정하였는데, 당수제 또는 최고위원제를 채택하지 않고 총무제를 채택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북의 백관수, 경북의 서상일, 경기의 김도연, 경남의 허정, 충남의 조병옥, 황해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20일 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일명 환국지사후원회)라는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해외에서 귀국하는 독립지사들, 사실상 임정 요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1945년 10월 23일 개최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개최 대회에 대표를 참석시켜 이승만의 의견에 동조하였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신탁통치 반대 사태와 미소공위[편집]

탁치 찬반론 당내 갈등[편집]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암살을 보도
신탁통치 반대운동 집회.
1945년 12월 27일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계획에 한민당은 당차원에서 반대했다. 그러나 초대 수석총무였던 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일단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한민당은 당수인 송진우의 의견과 갈등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10][11] 브루스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10][11] 송진우는 5개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다.
한국민주당 일각에서는 신탁통치를 놓고 탁치에 반대하는 시각과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역설하는 입장이 나타났는데, 전자의 대표는 김성수였고, 후자는 송진우였다. 우선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미군정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충고했다. 이는 12월 29일 저녁 12시부터 열린 경교장의 회의에서도 표현되었다.
12월말 그는 한 미국계인사와의 인터뷰에서 주한 미군이 주둔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12]
미군정에 도전할 경우 우익 진영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고 제3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탁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지만 송진우는 자신을 적극적인 탁치론자나 신탁통치에 지지하는 것으로 몰고 가는 여론을 불쾌히 여겼다.

송진우 암살 사건[편집]

송진우와 임시정부 측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등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13][14] 범인은 한현우유근배 등 6명이었고 이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이들의 총은 준 사람은 전백으로 '영화(永和)기업사'라는 해운회사를 차려 사장을 지냈던 사람이다.[15] 전백은 배후는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16] 한현우는 진술하기를 배후는 없었으며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을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17][18][19]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브루스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16] 미군정청 하지 사령장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20] 송진우 암살 이후 한민당은 탁치 문제에서는 반탁을 주장하였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취소하고 김구한국독립당과 갈등하게 된다. 송진우의 암살 후 한민당은 혼란에 빠졌지만 곧 원세훈과 백관수를 임시 당수로 선정하였다가 장덕수를 두 번째 당수로 선출한다.
한편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1]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이는 김구나 임시정부에 대한 한민당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좌우합작위원회[편집]

한민당은 미군정 주도로 진행되는 좌우합작위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방관하였다. 이때 한국민주당 측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자를 파견했는데 원세훈이순탁서상일 등을 좌우합작위원회의 한민당 대표로 파견하였다.

미소공위 사태[편집]

장덕수는 한민당의 정치부장으로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 공이 컸다.[22]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22] 한국의 독립에 미국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장덕수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암살된 제2대 당수 장덕수
1947년 5월부터 장덕수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자신의 서울 제기동 자택을 방문한 배희범박광옥 등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이때 붙잡힌 배희범, 박광옥 등과 그들의 배후로 지목된 김석황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고,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회의 동원부장, 임시정부 등에도 관여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 시도에 김성수는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반대하였다.[23] 장덕수는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23][24]
1946년부터 한민당은 미소공위에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했다. 이어 그는 국제연합(UN)에 호소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그러나 장덕수의 암살로 김구와 이승만·한민당의 단결은 무산되고 말았다.[25]

단정참여 후 야당화[편집]

1946년 6월 3일에 이승만이 정읍발언하였는데, 여기서 처음 언급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한민당은 신속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한민당은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승만을 옹호하고 나섰다.
1947년 2월 5일,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중도파 인사 안재홍이 임명되고,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한국인으로 바꾸고 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미군정 기구에 중도파가 파고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한민당은 민정장관 안재홍을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한민당의 공격은 너무 거셌으며, '1개월을 넘지 않는 동안 저 자를 쫓아내고야 말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또한 각종 연설과 삐라 등으로 터무니없는 억지식 논리로 안재홍을 몰아붙여서 비방하였다. 심지어 미군정내에 한민당계 고위 관리들은 5월 하순 민정장관 안재홍이 내린 인사 발령까지 거부하였다.[26]
3대 당수 인촌 김성수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자, '참여하되,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소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27]
한민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찬성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가하였지만, 1948년 7월 이승만은 정부 조각 후 한민당계열 인사에 재무장관직 1석만을 부여하였다. 이에 한민당은 이승만에 반발하였고, 한민당은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한민당에는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허정이기붕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1948년 8월, 한민당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즉시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 보다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윤치영은 이승만과의 개인적 인연 외에도 자신의 신념 때문에 한민당을 탈당하게 된다.
윤치영은 한민당을 탈당하면서 당리당략이나 일삼는 정상배, 정치 모리배, 양아치들이라고 극언을 퍼부었고, 이는 한민당 계열이 윤치영을 두고두고 미워하는 원인이 된다. 훗날 1963년 12월과 1966년 윤치영은 총리 내정자로 지명되었지만 한민당 출신 국회의원과 지식인들의 맹렬한 반대로 총리지명 자체가 철회되고 만다. 또한 한민당 계열 인사들은 윤치영이 박정희를 단군 이래의 최고의 지도자라 예찬한 것을 두고도 윤치영은 단군 이래의 최대의 간신이라고 응수한다. 한민당 출신들은 윤치영이 한민당에 극언을 퍼붓고 탈당한 점과 이승만의 절대 지지, 그의 일민주의 노선 지지, 나중에는 박정희를 적극 지지한 것, 3선 개헌과 유신을 적극 지지한 것을 두고 극도로 미워하게 된다.

민주국민당과 통합[편집]

단정수립론에 적극 지지하던 한민당은 UN 소총회의 결의 결과 발표와 미군정법령 제175호 및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90명의 입후보자 중 29명의 당선으로 총유효투표의 13%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 개원 이후 한민당은 국무총리 지명과 조각과정에서 당수인 김성수를 총리로 생각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외면하였고, 윤치영 등 10여 명의 의원이 탈당함으로써 원내세력도 위축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초대 총리 인사에서 번번히 반대를 하기도 했다.
1949년 1월 26일 대한국민회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흡수해체되었다. 민주국민당은 민주당의 모태가 되었다.

정책 비전[편집]

자본의 국영, 국유화[편집]

한민당은 경제관에 대하여 산업자본의 국유화, 국영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지주들이 주를 이룬 만큼 영구 국영화는 아니고 어느정도 민족 자본이 형성된 뒤에 민영화를 서서히 추진하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당 강령 6조에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라는 항목이 있었다.
허정에 의하면 하민당이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한민다이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28] 고 해명했다. 허정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 한민당의 지상과제인 만큼 경제정책도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자유경쟁 체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많은 산업시설을 인수할 만한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한 때에 자유경쟁의 원칙만을 고집하면 경제적 혼란이 오고, 이에 따라 기업 윤리가 혼미에 빠지고 급조 재벌이 횡행하여 민생이 위협받을 것이므로, 건전한 민족자본과 기업윤리가 형성될 때까지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잠정적으로 실시하려고 한 것이다.[28]
토지 문제에서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공산당과 그 계열은 경자유전을 말하면서도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토지의 국유화를 w전제로 해서 가능한 만큼, 토지의 소유권이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28]
농민은 단지 경작권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농민은 남의 땅 경작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는 땅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땅에 자기가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기쁨을 희구했으며, 남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슬픔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주가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바뀌는 차이밖에 없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경자유전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다.[29] 허정과 한민당은 공산당이 말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완전한 국유화 국영화는 농민을 소작농으로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민당은 유상 매수 또는 유상 분배를 주장했다. 저렴한 대가 내지는 국가에 토지세를 상환해서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은 모든 농민에게 자기 땅에 씨앗을 뿌리는 기쁨을 주기 위해 농민이 땅을 사서 사유화하는 유상분배의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29] 가난한 농민을 위해 국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농민은 땅값을 국가에 장기 분할로 갚아나가고, 지주는 토지를 매각한 자금으로 산업 자본가로 전환하는 토지의 합리적 재편성을 의도했던 것이다.[29]

미군정 협력 문제[편집]

미군 주둔 후 한민당은 미군정에 협력하느냐 여부를 놓고 고민하였다 한다. 한민당은 창당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고, 임정 요인들을 잠재적 영수로 추대했다. 조병옥에 의하면 미군정에 협력하느냐를 놓고 한민당에서는 처음에 쉽게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졌다고 한다.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에서 의하여 한국은 곧 독립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한국민주당은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우리 한국민주당이 미군정에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아 한국은 군정 단계의 훈정기(訓政期)를 거치지 않고서는 치안유지를 할 수가 없고, 또 한반도의 적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한국민주당 수뇌부에서는 와신상담의 격으로 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3] 이라는 것이다. 이후 한민당은 미군정의 사실상의 여당의 기능을 하였다.

논란과 의혹[편집]

공산당 습격설[편집]

한민당이 창당될 때 조선공산당원 일부가 창당대회장을 습격하여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한때 유포되었다. 그러나 한민당 창당 발기인의 한사람인 허정은 이를 두고 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 창당과 관련하여 덧붙여서 말해두어야 할 것은 창당대회 때 공산당의 습격을 받았다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대해서이다. 내 기억으로는 공산당의 습격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30] 그 이유로 허정은 '그 때만 해도 해방 직후여서 좌우의 대결은 물리적인 힘의 대결로 번지지는 않았을 때이다. 다만 이념상의 문제, 정책상의 문제로 대결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실력 행사까지 벌이게 된 것은 시일이 좀더 지난 다음이었다[30]'고 하였다.
허정은 한민당 창당대회 때 박헌영이 내빈으로 참석하여 창당을 축하한다는 축사를 한 것을 증언하였다. 한국민주당 창당대회 때만 하더라도 박헌영이 참석하여 내빈 축사를 했다. 우두머리는 축사를 하고 졸개는 습격을 하는 일은 없었다[30] 는 것이다.

지역정당 논란[편집]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라고 비난받아 왔다.
이를 두고 창당 멤버인 허정은 한민당을 가리켜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니 친일파의 소굴이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산당의 악의의 찬 비난에 지나지 않았다[29] 고 해명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인사는 전북 고창(또는 부안) 출신의 김성수, 김병로, 금산의 임영신, 유진산, 전남 담양 출신 송진우, 백관수, 백남훈, 전남 영암 출신의 김준연, 전북 고창 출신의 이철승 외에도 황해남도 해주 출신의 장덕수, 경북 영천 출신의 이활, 충청남도 출신의 윤보선, 윤치영, 충남 천안 출신의 조병옥, 서울 출신의 원세훈, 이기붕, 김도연, 대구 출신 서상일, 경북 출신 장택상, 이인, 부산 출신의 허정, 김약수 등이 있었다.
조병옥은 고하 송진우나 인촌 김성수는 정당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나 또는 당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지방적인 차별을 두지 않고 인재 본위 실력 본위로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특히 정당 및 사회단체 조직에 있어서는 그런 점에 d가장 유의하고 세심한 검토로서 전력을 다하여 주력하였던 것이다 [31] 라며 지역 정당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한편 허정은 한민당이 전라도 당, 호남 갑부 정당이라는 비난은 공산당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일파 정당 논란[편집]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친일파들을 일부 받아들인 것을 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창당멤버의 한 사람인 허정은 일부 친일파의 수용을 인정하였지만 나름대로 엄선 기준이 있었다 한다. 그에 의하면 '일제 하에서 고급 관리를 지냈거나 친일파로 지목받던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극악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아니었다.[32] 고 주장했다.
허정은 또 정당 당원들의 총 수가 많다는 것이 정당의 우수성의 증명은 아닌 것 쯤은 알고 있었다.[32] 며 당시 우리로서는 아무리 문호 개방을 원칙으로 하기는 했더라도 무원칙, 무분별하게 입당시켰던 것은 아니다. 단지 좀더 문을 넓게 열어 민족 진영의 대집결체가 되자는 뜻에서 인선의 원칙을 크게 완화시켰을 뿐이다.[33]
한편 한민당에 몸담았다가 탈당한 윤치영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하였다. 윤치영의 이같은 비난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설득력을 얻는 원인이 되었다. 한민당은 미국, 영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한국 사회에 도입, 확산시키는 것을 당의 중점 사업의 하나로 선정했다. 당 강령으로 넣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회에 미국, 영국식 민주주의를 소개, 확산, 정착시킨다는 것을 공공연한 당원들의 목적으로 설정,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광수, 이범석, 안호상, 박정희 등의 인사들은 이를 노골적으로 불쾌히 여겼다.

기타[편집]

한편 2004년 조선일보의 기자 이한우는 당시 친일파 논쟁이 격화되자, 한나라당을 친일파로 공격하는 일부 좌파 진영의 주장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는 늘상 이승만대통령이 친일파를 감싸안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승만이 감싸안았다는 친일파의 실체가 묘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했습니다. 한민당이었죠. 이승만이 건국과정에서 한민당과 함께 했고 건국이후에는 한민당을 내팽겨친 것은 알고계시겠죠. 그 한민당이 민주당됐고 박정희때 신민당됐다고 거기서 쪼개져 김영삼김대중이 나왔다는거 아시죠.[34]"라면서 역으로 반박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작가 장정일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결실"이라는 주장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44년 만의 진보정당의 국회 등원을 '50년 만의 결실'이라고 부정확하게 반올림하는 것 만큼이나 진보정당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을 놓고 '50년 전통의 야당'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수사가 분분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35]'이라는 것이다.
장정일은 또, 2004년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쇠멸하는 진로를 놓고 '50년 역사의 전통 야당'을 지켜 달라고 읍소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꽤 있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의 50년 전통 운운은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진보정당 의회 진출이라는 환희에 찬 구호와 달리 사기성이 짙은 것이다.[34]'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새천년민주당의 기원을 1990년 1월 22일에 행해진 김영삼의 3당합당에서부터 찾지 않고 한민당, 민국당, 신한당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고자 한다면 안티조선 논객을 자청했던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 등의 비아냥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34]'고 지적한다.

역대 총선 결과[편집]

실시년도선거지역구비례대표정원
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득표율당선자 수당선비율
1948년1대23/200
11.5%
23/200
11.5%

함께 읽기[편집]

각주[편집]

  1. 이동 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오름, 2000) 337페이지
  2. 이동 G-2 Periodic 1945. 9. 12 보고서
  3. ↑ 이동: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2페이지
  4. 이동 김약수나 유진희등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일부 진보적 정치인사들이 한민당에 입당했는데, 이들은 주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노선에 반발하여 한민당에 입당한 경우다. 이들은 한민당의 정치노선에 반발하여 이듬해 1946년 탈당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거나 김규식계열 정치노선과 같이하게 된다. 한민당 핵심인사들은 송진우,김성수,윤치영,조병옥,장덕수,유억겸등이었다.
  5. 이동 1945년 10월, 우파 단체이자 잡지사인 <선구>회라는 단체에서 해방정국 주요정치인들 여론조사를 실시한적이 있었는데, 1위가 여운형, 2위가 이승만, 3위가 김구, 4위가 박헌영, 5위가 이관술 순이었다. 한민당계열 인사들은 단 한명도 뽑히지 않았었다.
  6.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80~83쪽
  7. 이동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8페이지
  8.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5페이지
  9.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10페이지
  10. ↑ 이동: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6
  11. ↑ 이동:  고하 송진우 선생전 69, 대한민국사 I 713~714
  12. 이동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310쪽
  13.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152페이지
  14. 이동 브루스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287~288페이지
  15. 이동 법조 50년 야사 - 해방공간의 요인암살사건
  16. ↑ 이동: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7
  17.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152~153페이지
  18. 이동 브루스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287페이지
  19. 이동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동아일보사, 1990) 357페이지
  20. 이동 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
  21. 이동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
  22. ↑ 이동:  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224페이지
  23. ↑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
  24. 이동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
  25. 이동 서중석,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
  26.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3~44쪽
  27.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1~32쪽.
  28.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8페이지
  29.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9페이지
  30.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7페이지
  31. 이동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81페이지
  32.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2페이지
  33.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3페이지
  34. ↑ 이동:   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83페이지
  35. 이동 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74페이지

참고 자료[편집]

  • 한국민주당 선전부, 《한국민주당소사》 (한국민주당, 1948)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 55, 56쪽.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 편 1, 2》(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 편 2》(인물과사상사, 2006)
  •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도서출판 에디터, 2000)
  • 이기택, 《한국야당사》 (백산서당, 1987)
  •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1》(도서출판 풀빛, 1982)
  •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치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1994)
  • 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오름, 2000)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