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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4

알라딘: 함석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탐구

알라딘: 함석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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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탐구 - 한국 인문학의 선구   
김영태 (지은이)전남대학교출판부2018-02-23




함석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탐구

정가
20,000원
판매가
19,000원 (5%, 1,000원 할인)

책소개

신천옹(信天翁) 혹은 씨을로 불리우는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사상과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탐구서이다. 신천옹의 사상은 다분히 종교철학적이며 종교다원주의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유교ㆍ불교ㆍ도가사상ㆍ천도교ㆍ기독교(특히 프로테스탄트), 더 나아가서는 힌두교와 간디의 비폭력 사상ㆍ퀘이커교의 평화사상ㆍ한국사 및 세계사에 대한 성서적 역사관ㆍ실존철학 사상ㆍ현대적 과학정신ㆍ민주주의 이념 등으로 꽉 차있기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 5

제1장 서론 / 11
제2장 함석헌의 생애, 영적 순례 그리고 사상적 토대 / 20
제3장 이웃종교 섭렵과 원용 / 127
제4장 한국그리스도교 비판 / 178
제5장 새 종교론과 종교다원적 삶 / 268
제6장 평화사상 구현 노력 / 309
제7장 20세기 한국민주화의 창도자(唱導者) / 346
제8장 결론 / 376

사진출처 / 382
참고문헌 / 384
영문초록 / 397
찾아보기 / 402

책속에서
제1장 서 론

신천옹(信天翁, Albatross, 바보새) 함석헌은 1901년에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89년에 서울에서 서거하였다. 그는 한반도에서 온전히 20세기를 살다 간 사람이다. 민족사와 세계사를 통틀어 20세기만큼 크고 놀라운 변화의 시대는 없었다. 한국의 20세기는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로 치닫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민(民)의 주체적 자각이 이루어지고 세계화가 일어난 시대였다. 그러나 역사의 전환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바, 서양의 산업과 군사, 과학기술과 학문, 정치와 종교가 일방적으로 동양에까지 깊이 들어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 사회는 짧은 기간에 낡은 봉건사회로부터 산업 문명의 새 세상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해방 후 70여 년 동안에 이른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크게 흔들리고 무너졌으므로, 새로운 변화가 획기적으로 요구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함석헌은 낡은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 과학과 기술, 민주주의, 그리고 당시의 새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반도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개의 큰 강물이 만나서 하나로 합류하는 지점이었고, 함석헌은 이러한 지점에서 시대정신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한 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민족의 사상과 문화는 수천 년 동안 중국사상과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지배층과 학자들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 일제의 식민 통치 시기와 해방 후 군사독재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정신과 문화는 많이 위축되고 유린되었다. 군사정부가 한국적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한국정신과 문화를 내세우기는 했으나, 군과 정보기관을 앞세운 폭력적 지배 속에서 박제된 민족 문화와 새로운 한국을 어설프게 제시했을 뿐이다. 따라서 식민 사관과 서양의 문화가 지배한 지난 100여년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는, 겨레의 얼과 혼이 살아 있는 주체적인 한국 사상과 철학이 나오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철학자들은 동서 정신문화를 아우르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한국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을까? 이는 동서 문명을 그들의 정신 안에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함석헌은 주체성을 지키면서 기독교와 서양 문명을 깊이 받아들여 동서 문명을 아우르는 철학을 이룩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자유당 정권, 군사 독재, 민주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종교인으로서, 민주화 운동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는 일제하 식민지 시대에 서구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를 한국의 종교 문화적 감수성과 사회 역사적 경험 속에서 창조적이고도 주체적인 한국 기독교 사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나아가서 그는 고난과 위기로 점철되었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 실천가로서, 예언자적인 사회운동가로서도 대중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 근현대의 다른 어떤 인물보다 그를 돋보이게 만든 점은 그가 자신의 사회적ㆍ역사적 실천을 사상적ㆍ종교적ㆍ신학적 진술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ㆍ사회적 실천 속에서 깨달은 깊은 영적 통찰을 시적이고도 감수성 넘치는 글로 담아 낼 줄 알았고, 인격적이고도 역사적인 성서적 기독교 신앙과 마음을 중시하며 신인합일(神人合一)적인 동양 종교적 감수성을 결합해 창의적으로 기독교 사상을 펼쳤다. 그에게는 신앙적이고도 대중적인 실천과 창조적인 기독교 사상이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아마도 함석헌은 한국 종교사에서도 사회 변혁과 독창적 사상 형성이라는 양 측면 모두에서 발군의 업적을 쌓은 인물로서 한국 불교사의 원효와 근세의 다산 정약용 그리고 동학의 최제우에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함석헌이라는 인물의 깊이와 넓이에 비해 실제 그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정도는 아직 미진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운동가, 사회사상가로서의 그의 면모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과 활동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과 체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의 삶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동하는 그의 종교 체험의 떨림과 울림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고 그것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변용시켰는지, 더 나아가 그러한 변화의 동기와 동력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정통 신학자나 목회자는 아니었다. ‘이단자’라는 이름이 붙은 한낱 평신도 기독교인이었을 뿐이다. 그가 맞서 싸웠고 정화하려 했던 것은 부패하고 부도덕한 권력자들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구조였고, 그들이 발휘하는 영향력 아래서 폐습과 독단에 물든 한국 기독교였다. 그는 빗나간 한국 기독교를 각성시키는 ‘등에’(gadfly)나 다름없었다. 아울러 함석헌은 기독교 사상과 동양 사상의 융합, 보편주의적 종교관, 기독교에 대한 동아시아적 입장에서의 재해석 등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지평을 넓히고 그것을 심화하려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함석헌은 기독교 진리에 입각해서 비민주적인 근대한국의 정치 및 사회적 풍토를 쇄신하려고 혼신을 다해 싸웠다. 한국의 민주화, 즉 평화로운 한국을 만들기 위해 그의 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함석헌의 진의는 대승적 차원에서, 인류가 전쟁으로 공멸할지도 모르는 위험에서 벗어나 스스로 살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함석헌에게 평화는 하느님과 역사의 ‘절대적 명령’이었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될 문제가 아니라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평화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했던가? 함석헌은 무엇보다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의 사상적 안내가 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서양의 고전철학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동양의 고전 철학, 특히 노ㆍ장 사상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시대를 뒷받침하는 힘의 숭배, 폭력과 전쟁과 탐욕의 논리 반대편에서 노ㆍ장 사상이 제시하는 것은 ‘평화’의 논리였다고 본 것이다. 노자의 평화주의는 『도덕경』에서 명백히 드러난 바, ‘어린 아이’, ‘여성’, ‘물’로 대표될 수 있는 부드러움과 유약함, 겸손, 마음의 평정 같은 높은 가치들이 그것이다.
현대 한국은 놀랍게도 다종교(多宗敎)국가이다. 서구 선교사들의 열렬한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 신도(神道)같은 동양 전래의 종교들이 여전히 국가적 종교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구 나라들은 기독교를 압도적으로 국가적 종교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면에서 좀 특이한 경우이다.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 토속신앙, 그리고 신흥종교들이 두루 공존하는 가운데 어느 하나가 배타적으로 독점권을 누리고 있지 않은 가운데 한국은 동양종교와 서양종교가 혼재하는 나라이다. 한국은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과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정책이라는 종교 차별정책의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에서 불교와 천주교는 강력한 세력으로 살아남아있고 양자 간에는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함석헌은 동양의 고전 사상을 서구 기독교와의 관련 속에서 재조명하려 했고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들어맞도록 재해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개인 각자의 책임의식을 회피하는 기독교의 대속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 대신 그는 종교적 관용주의의 입장을 취한 기독교의 퀘이커교도로서 한국의 기독교 풍토를 유연한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힘썼다. 더 나아가 그는 서구 기독교에 상대적으로 우세한 사회 정의, 인권, 저항의식 등의 요소를 동양 사상이 강조하는 초월의식, 관용성, 포괄성과 결합시키려 했다. 구리와 아연으로 황동을 만들듯이, 함석헌은 동서의 장점을 융합한 사상이 문명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장차 인류가 보다 높은 영적 단계에 도달하도록 이끌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마치 인간의 두 다리나 남녀, 혹은 음양의 원리가 서로 협동하듯이 이 융합된 사상이 인류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근원적이고도 역동적인 힘이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함석헌의 원대한 포부와 추동력은 결국 무엇보다도 그의 폭넓은 종교적 신념에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본서에서는 그의 종교사상의 씨줄과 날줄이 과연 어떠한 구조와 특성을 가지고 짜여져 있으며 그 이상(理想)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하였다. 퇴계와 율곡은 유학에 기초해서 그들의 독특한 사상을 펼쳤고, 다산(정약용)은 유학과 천주교에 토대하여 그의 실학사상을 전개했다면, 현대 한국의 사상가 함석헌은 서양에서 전개된 기독교(개신교)에 기초하여 유ㆍ불ㆍ도, 인도사상까지 포괄해서 동ㆍ서양의 사상을 아우르는 다원적 사상의 토대 위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철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는 주로 과학ㆍ기술ㆍ자본ㆍ다원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이와 같은 역동적 현대 사회에서도 깊은 인문학적 성찰과 철학을 가지고 살아온 분들이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가운데, 함석헌은 마치 평지의 고봉처럼 돋보이는 현대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사상가(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대 사상가의 반열에 내어 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특출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가 세계 철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저작들이 오로지 한글로만 되어 있을 뿐 국제 언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또 한국 기독교 주류가 그를 이단시하여 그의 성장을 막았었고, 정치적으로는 북한의 공산주의 정부와 남한의 자유당 정권 및 군사정권이 그를 억눌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함석헌에 대한 평가가 적극적이고 다양하다 : 예언자, 인권운동가, 민주주의 신봉자, 평화주의자, 종교사상가, 다원주의자 등. 덴마크가 낳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진가는 그의 사후 100년 만에 인정받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덴마크의 국교인 루터교를 신랄히 비판함으로써 국교로부터 배척당한 점과 그의 저작들이 단지 덴마크어에 갇혀 있었다가 보다 폭넓게 사용되는 독일어로 그의 저작이 번역되고, 이어서 영어로 번역되면서 그의 사상의 진가가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선 함석헌에 대한 국내 보수 기독교인들의 인식전환이 있어야 하겠고 또 함석헌에 대한 연구의 붐이 일어나야 하겠으며 게다가 그의 저작들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그의 생동력있는 사상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져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된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함석헌을 논의했던 것은 아주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의 글과 외침은 그의 생존시에는 외로운 광야의 외침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보니 그의 주장과 외침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그대로 우리의 현실에 적중한, 앞을 내다 본 예언자적 외침이었다. 그는 강단 철학자가 아니라 실존과 현실 및 상황 철학자이기에 그의 주장은 결코 현학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삶의 철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삶 자체가 생동하는 철학이었다. 이렇듯 사ㆍ언ㆍ행(思ㆍ言ㆍ行)이 일치했던 함석헌 같은 철학자는 세계철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한국의 현대 실천적 사상가 함석헌을 탐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고 그 연구물들은 국내ㆍ외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특히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있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치유에 그의 사상은 크게 보탬이 되리라 확신한다.
이와 같은 탐구를 위해서는 주로 문헌적 연구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의 문헌은 《사상계》, 《씨알의 소리》, 《기독교 사상》 등에 산재되어 있으며, 함석헌에 관해서는 그의 주변 인물들의 글과 증언, 그리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통해서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는 『함석헌 전집』 20권과 그의 『저작집』 30권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씨알사상 연구원과 함석헌 기념사업회, 함석헌 학회, 함석헌 평화포럼 등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이 제법 제공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하여 그의 기독교 사상, 그의 역사관과 윤리관, 기독교 외에 그가 관심을 가졌던 여러 종교들에 대한 그의 이해와 관점, 더 나아가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꿈과 이상, 그리고 그의 공헌과 영향력이 무엇인지를 탐구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의 종교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역사적 접근, 전기(傳記)적 접근, 종교학적 접근, 신학적 접근, 실존철학적 접근, 신비주의적 접근, 종교신학적 접근, 정치-사회적 접근, 동양종교적 접근 등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신학과 관련하여 그의 공적(功績)으로 민중신학의 토대마련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사상 중 ‘씨알’사상은 한국 민주화와 한국 민중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민중신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안병무에게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고 본다. 아울러 송기득, 김경재, 박재순에게 미친 영향 또한 대단히 크다고 생각된다. 이 세 학자들은 탄탄한 철학적 지식의 기반 위에서 함석헌의 사상을 정리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정지석, 김성수 등은 해외에서 함석헌을 연구하여 외국어로 논문들을 발표하여 한국 현대철학자 함석헌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함석헌에 대한 깊은 연구는 결국 미약한 한국의 인문학을 부흥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영태 (지은이) 
1944년 전북 고창군에서 태어나 광주(光州)에서 성장하였다. 서울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한 뒤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영어교육전공(영어교육학석사), 전남대 일반대학원 철학과에서 서양철학(윤리학전공, 문학석사)을 공부하였다.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에서 칸트(Kant)의 종교철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퀘이커 공동체 신비주의로 종교학박사, 성공회(聖公會)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신학과에서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그의 영성적 삶에 대한 연구로 신학(神學)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안식년을 기하여 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Israel)에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비교 연구하였고(1년간), Bethany Theological Seminary 및 Earlham School of Religion(U.S.A)에서는 Brethren Church(형제교회)와 Quakerism(퀘이커교)을 연구(1년간) 하였다.


경력으로는 국가공무원(법무부 산하) 2년 5개월, 중등학교 교사 9년, 전남대학교에서 29년간 윤리학과 종교학을 담당하였다. 정년퇴임 후 지금은 명예교수로서 자유롭게 연구와 강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의 종교』(2인 공저), 『신비주의와 퀘이커공동체』, 『도덕신학과 도덕신앙』 등이 있으며 수십 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교수직을 수행하는 동안 한국종교간 대화학회 창설 및 공동대표, 한국윤리학회 회장, 문화체육관광부 공직자 종교차별(문제)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접기
최근작 : <함석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탐구>,<도덕신학과 도덕신앙>,<신비주의와 퀘이커공동체> … 총 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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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신천옹(信天翁) 혹은 씨을로 불리우는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사상과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탐구서이다. 신천옹의 사상은 다분히 종교철학적이며 종교다원주의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유교ㆍ불교ㆍ도가사상ㆍ천도교ㆍ기독교(특히 프로테스탄트), 더 나아가서는 힌두교와 간디의 비폭력 사상ㆍ퀘이커교의 평화사상ㆍ한국사 및 세계사에 대한 성서적 역사관ㆍ실존철학 사상ㆍ현대적 과학정신ㆍ민주주의 이념 등으로 꽉 차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 역시 다차원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 바, 풍류도적ㆍ신비주의적ㆍ영성적 특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의(不義)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정의(正義)실현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상과 삶의 기반 위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암울했던 20세기 한반도의 민중(民衆)들이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첩경을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고향땅 북한에 있을 적(1947년 이전)에는 김일성 공산정권에 저항하고, 월남한 이후에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과 부당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듦으로써 고초(옥고 일곱번)를 당하면서까지 한반도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투쟁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민중신학의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향후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실현의 길까지 마련해 놓았다. 접기

2020/12/24

한국의 양심 '함석헌' 연구, 왜 필요한가? - 오마이뉴스

한국의 양심 '함석헌' 연구, 왜 필요한가? - 오마이뉴스


한국의 양심 '함석헌' 연구, 왜 필요한가?함석헌 사후 23주년에 스승을 생각하며...
12.02.11 15:42l최종 업데이트 12.02.11 15:43l
김성수(wad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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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생전의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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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은 '한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던 함석헌(1901~1989) 선생이 돌아가신지 2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나는 두문불출하고 집안에서 하루 종일 그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지냈다.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고 싶었지만 몸살로 건강이 안 좋았고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 어둠을 가르고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전화를 한 지인은 "함선생님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택시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택시안의 라디오뉴스에선 벌써 "함석헌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록 이른 새벽이었지만, 서울대병원 영안실엔 벌써 몇 사람의 조문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관을 보고, 그의 시신을 보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이 그 관속에 누워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신 앞에 예를 올린 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삶, 그의 죽음, 그리고 나의 인생…. 3시간 후, 나는 8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92년,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 에섹스대학교에서 학사논문으로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썼다. 5년 반 후인 1994년, 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으로 나는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를 제출했다. 9년 반 후인 1998년, 나는 영국 쉐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으로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연구>를 집필했다.

10년간의 영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0년 귀국 한 나는 2001년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함석헌평전>을 냈고, 지난해 원고를 보완, 수정하여 개정판을 냈다. 1980년 봄 그를 만난 이래 하루도 그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었고, 그는 나를 매순간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끄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다.

어려운 함석헌?



▲ 함석헌 함석헌과 필자. 1988년 1월 1일 함석헌 쌍문동 자택에서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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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 동안 함석헌과 관련한 세미나나 학회를 수도 없이 다녔고 많은 분들을 만났다. 때로는 내가 직접 발표할 기회도 있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의 발표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함석헌에 관한 강연을 들으며 말 못할 감동을 받은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떤 강연에서는 강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많았다. 마치 군대시절의 풀리지 않는 암호 같은 이야기와 이상한 이론을 동원해서 '열심히' 함석헌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그 강사의 얼굴을 보면서 "저이가 제정신인가? 정신병자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 적도 많았다. 강연을 들으러 온 것을 시간이 아까워서 후회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함석헌연구'는 물론 절대 필요한 일이다. 영국유학시절 간디에 대한 연구물이 수만 수십만 권이 있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해 함석헌에 대한 연구물은 국내외에 너무도 열악한 실정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나 함석헌에 대해서 몇십 년 연구한 연구자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이론과 표현을 통해서야만 함석헌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함석헌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발표하는 사람의 자기만족일 뿐이고 함석헌에 대한 추상화, 우상화작업일 뿐이다. 함석헌 말대로 "진리는 독점되어선 안 되고 독점 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혼자만 이해 할 수 있는 사상, 몇 사람만 아는 사상은, 적어도 내겐 아무의미가 없는 공허한 궤변과 소음에 불과하다.

'초월자' 함석헌?

함석헌에 대한 존경심이 지나쳐서 어떤 이들은 함석헌을 좌우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사상가로 또 심한 경우는 그를 좌우를 초월한 '초월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신도 아니다. '중립' 혹은 '초월'적인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두 편향되어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국가폭력이 만연했고(용산참사의 경우는 현재진행형이다), 정경유착과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양극화가 극심한 나라에서 '중립'을 내세우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이거나 현실에 안주하고픈 자기의 비겁함을 합리화하는 '겁쟁이 지식인'들이 라고 단언한다.

독재자 박정희-전두환과 함석헌 둘 다를 좋아하는 변태적 지식인들도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국가폭력으로 인해서 발생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화해, 박정희-전두환과 함석헌 사이의 화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상식은 가해자는 화해를 논할 자격이 없다. 이근안이 김근태에게 화해하자고 할 수 있는가? 화해는 피해자만이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피해자에게 가해를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화해는 신의영역이다. 나는 화해보다는 사회정의가,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불의와 부조리가 강물처럼 넘치는 나라에서는, 선행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함석헌에 대한 경애심이 도를 넘어서 그를 좌우논쟁을 넘어선 '초월자' 로 묘사하는 추종자들 있다. 나는 어느 한 인간을 '초월자'로 만들고 떠받드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그 '초월자'는 범인들이 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탈역사화'한 존재로 박제화 된다. 그런 우상화된 인간들을 우리는 많은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다. 결국 함석헌을 '초월자'로 대우하는 것은 그를 스탈린이나 김일성처럼 우상화하는 것이고 독재자로 만드는 것이다.

극좌파 함석헌

함석헌은 개신교의 한 부류인 퀘이커교도로 그 삶을 마감했다. 함석헌의 지인이기도 했던 미국의 퀘이커 역사가 하워드 브린톤(1884-1973)은 그의 저서 <퀘이커 300년>에서 "퀘이커 신앙은 영국 종교개혁의 극좌익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말은 퀘이커교도는 최소한 "파이 키우기"를 옹호하는 우파보다는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는 좌파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한 퀘이커교도는 천박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권이나 일방주의를 내세우던 미국의 부시 정권보다는 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힘쓰던 노무현 정부나 미국의 오바마 정부에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퀘이커 모임에 종종 나오는 사람들이나 함석헌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 중엔 함석헌은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고 중립적 인물이었거나 차라리 우파에 가까웠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함석헌에 대한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약자가 강자의 폭압에 의해 수탈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데 '중립'은 곧 강자에 기생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비겁한 기회주의적 변명에 불과하다.

예수도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고 목숨을 걸고 가르쳤고 결국 정치권력의 손에 생명을 잃었다. 이런 예수의 삶과 말도 좌파의 전형이었고 그런 예수와 퀘이커신앙을 따르던 함석헌도 당연히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일찍이 오산학교 시절인 1936년 함석헌은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우리가 정치가를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참말 위대한 정치가라 하겠나? 내 생각으로는 사회의 억눌린 계급의 민중을 살길로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상류사회를 위한 시설을 아무리 잘하고라도 하층에 짓밟히고 억눌린 민중이 있으면 국가는 위협을 느낀다. 국가의 운명은 하층민의 손에 달린 것이지 결코 상층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위정자의 재능의 척도는 하층사회에 대한 시설에 있다." 이런 함석헌의 글은 마치 내가 <자본론>을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연구는 행동이 아니다? '함석헌연구' 더 필요하다!



▲ 김성수 최근의 필자(왼쪽)
ⓒ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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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추종자 중엔 집필이나 연구는 행동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들 중엔 '함석헌연구'보다는 함석헌처럼 행동하며 살자고 강변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의 사마천은 궁형(거세형)을 당하면서도 <사기>를 썼다. 그의 <사기>가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과 공헌을 필설로 다 기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 사마천의 집필행위는 '행동'이 아닌가? 독일 종교개혁의 불씨를 담긴 마틴 루터는 <기독자의 자유>라는 짧은글을 써서 유럽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지폈다. 토마스 페인은 <상식>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대영제국에 대항한 미국독립전쟁의 이론적 정당성을 마련해 주었다.

사람은 다 자기 그릇이 있다. 안창호에게 안중근 같이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에게 셰익스피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쓰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말이다. 내가 함석헌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누구에게 '무엇을 하시오'라고 권유하거나 지시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 옳다고 믿으면, 그는 누구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변하기보다는,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혼자서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기꺼이 그로인해 오는 고난을 받아들였고 희생을 당했다. 그가 받은 고난과 희생의 결과로 오늘 한국인들이, 이나마 부족하지만,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자유를 쟁취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 자체는 함석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를 처음 만난 지가 어느덧 32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23년이 넘었다. 삶을 살아 갈수록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함석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의식하게 된다. 특별히 그의 영향으로 나는 철도공무원에서 역사가, 근본주의자에서 보편주의자, 복음주의자에서 인본주의자,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역사와 철학의 '맛'을 알게 해 준분도 함석헌이고, 무엇이 인생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준 분도 함석헌이다. 내게 함석헌은 진리, 도(道), 하느님을 보여준 마음의 창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살아서 그의 가르침과 영감(inspiration)이 내 인생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했나 보셨으면 하는 염원도 감히 해본다. 그가 남겨준 따스한 사랑과 들사람얼(野人精神)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

돌아가신지 23주년에 스승 함석헌을 생각하며......


덧붙이는 글 | * 김성수 기자는 <함석헌평전> 저자입니다.

2020/11/28

이상화 (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상화 (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상화
李相和


작가 정보
출생 1901년 5월 22일
대한제국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
사망 1943년 4월 25일 (41세)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대구에서 위암으로 사망
직업 시인
소설가
수필가
독립운동가
교사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국적 대한제국
일본 제국
학력 일본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학과 중퇴
종교 유교(성리학)
필명 호(號)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활동기간 1922년 ~ 1943년
장르 시, 소설, 수필, 평론, 번역
부모 이시우(부), 김신자(모)
배우자 서온순(아명은 서순애)
자녀 이용희(장남)
이성희(딸)
이충희(차남)
이태희(삼남)
친지 이일우(백부)
이상정(형)
한문이(형수)
권기옥(형수)
이상백(아우)
이상오(아우)
박창암(조카사위)
이열희(5촌 조카)
최남선(사돈)
박중양(사돈)
웹사이트 이상화 기념사업회


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22일 (1901년 음력 4월 5일)[1] - 1943년 4월 25일)는 일제 강점기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이며, 교육자, 권투 선수이기도 하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이다.


목차
1일생
2생애
2.1초기 활동
2.1.1출생과 가계
2.1.2학창 시절과 문단 등단
2.2작품 활동
2.2.1문학, 동인 활동
2.2.2〈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2.3귀국과 문학, 언론 활동
2.3생애 후반
2.4사후
3작품
4학력
5가족 및 친척 관계
6인간 관계
6.1같은 대구 출신의 동향 교우(同鄕 交友)
7평가
8기타
9이상화 시인의 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9.1뮤지컬
10관련 항목
11각주
12외부 링크
일생[편집]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피신하였으며, 1921년 잡지 백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시와 소설 등 작품 활동과 평론 활동,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에 동인 활동을 하였다.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서 교남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38년에는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 지도하였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이상화는 1901년 5월 22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아우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2]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2]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교남학교로 발전했다가 현재 대구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가 되었다.)에서 수학하였다.
학창 시절과 문단 등단[편집]

1915년 경성부중앙학교(지금의 서울 중앙고등학)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에 경성 중앙학교를 중퇴하였고, 자퇴 직후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백기만 등 친구들과 함께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밀정의 추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잡혀가자 경성부로 올라와 박태원(1897년 ~ 1921년. 음악가 박태준의 형)의 하숙으로 피신, 한동안 은신하였다.[3] 1921년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朴鍾和)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洪思容), 나도향, 나혜석, 박영희(朴英熙), 이광수, 최남선 등 문인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 중 육당 최남선은 그의 큰집과 사돈간이 되면서, 그에게도 사돈이 된다. 훗날 그의 사촌 이상악의 딸이 최남선의 며느리가 되었다.[2]

사촌 매형인 윤홍열은 후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위원과 대구시보사 사장을 역임했는데, 사촌 매부 윤홍열의 소개로 바로 충청남도 공주 규수인 서순애 여사를 상화와 중매시켰다.[2] 몇 차례 연락이 오고가다가 1919년 12월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 서온순(徐溫順)과 결혼하였다. 부인 서온순은 독립운동과 유학 등 경제적으로 불우한 환경에도 남편의 탓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하며, 남편 사후에도 서온순은 재혼하지 않고 홀로 자녀를 키웠으며 1980년대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922년 이상화는 《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갔다.
작품 활동[편집]
문학, 동인 활동[편집]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나머지 호,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등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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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상화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고,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편집]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 어학원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도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하거나 칼럼과 글을 국내의 잡지사로 송고하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으나 극적으로 어느 일본인의 배려로 은신해 있었다. 얼마 뒤 분장하고 집주인인 일본인이 준 여비를 받고 관동 대지진의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귀국과 문학, 언론 활동[편집]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1927년에는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이듬해 교남학교 교사직을 사직했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사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으나 이재와 상술에 눈이 어두워서 결국 1년 만에 실패하고 다시 교남학교의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또한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는데, 교남학교 권투부 출신들은, 졸업후 훗날 대구 권투 클럽을 결성하였다.

1940년 대구부 계산 2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가 새로 마련한 집 바로 앞에는 김광제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던 서상돈 고택이 있다.[4] 1940년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부 계산2동 84번지의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해부터 춘향전영어로 번역하고, 이어 한국 국문학사불란서정석 등을 한글로 번역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만다.

1943년 초 갑자기 쓰러졌다가 그해 3월에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경상북도 대구 자택에서 위암폐결핵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인해 43세의 젊은 나이로 숨졌는데 이상화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현진건도 같은 날 경성부에서 폐결핵장결핵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후[편집]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

이상화의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에 있으며, 맞은편에 서상돈의 고택도 함께 위치해 있다. 1999년 도시개발로 한때 헐릴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졌고 2008년 8월 13일 결실을 맺어 이상화 고택 개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4]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2008년 8월 12일 새롭게 단장되어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었다. 도시개발로 헐릴 위기까지 맞았던 이상화 고택이 시민들의 모금활동과 100만 서명운동 등으로 보존, 공개되었다.[4][5]

2009년 초부터 대경대학교 뮤지컬학과 학생들은 이상화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제작하였다. 대본을 맡은 학생 허윤선은 이상화의 둘째 아들인 이충희를 수소문해 이상화 시인의 삶에 대해 묻고 극을 구성했다.[6] 이들은 지난 6개월간 시인의 삶을 기록한 책자를 참고하면서 대구시 중구 계산동 소재 이상화 고택을 수십차례 방문해 당시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대경대 뮤지컬과 1학년 학생 30여명은 1920년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저항시인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화 시인의 삶과 비극적 역사상황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만들었다.[6]

2009년 11월 30일12월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창작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공연되었다.[7]

작품[편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가상
나의 침실로
몽환병
구루마꾼
원시적 읍울
학력[편집]
경상북도 대구 우현보통학교 졸업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중퇴
일본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학과 중퇴
가족 및 친척 관계[편집]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은 그의 형이고, 사학자 겸 스포츠인 이상백과 수렵가 겸 문필가 이상오는 그의 동생이었다. 치과의사 겸 성형외과 의사이며 경북대학교 치대 학장을 지낸 이열희는 5촌 조카였다.
할아버지 : 이동진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2]
아버지: 이시우(李時雨, ? ~ 1907년)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김해 김씨(金海 金氏)
형: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중장)
형수: 한문이(韓文伊) 1897년 5월 7일 ~ ?,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여성 비행사, 대한독립군 대령)

아우: 이상백(李相佰, 1904년 8월 6일 ~ 1966년 4월 14일, 사학자 겸 체육행정가. 前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아호(雅號)는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아우: 이상오(李相旿, 1905년 ~ 1969년, 수렵가, 바둑인. 아호(雅號)는 모남(慕南). 경상북도 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졸업.)
조카딸: 이겸희(李謙熙)
조카사위: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李相旿)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 준장 전역.)
부인 : 서온순(徐溫順, 다른 이름은 서순애, ? ~ 1980년)
첫째 아들 : 이용희, 사망
딸 : 이성희, 사망
둘째 아들 : 이충희(1933년 ~ ), 전 흥국공업사 대표
셋째 아들 : 이태희, 미국으로 이민
사돈 :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사돈 :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사돈 : 허억(許億, 1889년 6월 1일 ~ 1957년) - 대구시장
인간 관계[편집]
같은 대구 출신의 동향 교우(同鄕 交友)[편집]
시인 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출생 ~ 1929년 11월 3일 사망. 아호는 고월(古月). 번역문학가로도 활동하였다.)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빙허(憑虛).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시인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출생 ~ 1967년 8월 7일 사망. 아호는 목우(牧牛).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평가[편집]

조연현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일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으나, 이상화의 중요한 특성으로 격렬한 미적 욕구와 그 강렬한 낭만적 의욕을 지적[8] 하여 그의 문단 초기 활동인 <백조> 동인 활동, 즉 낭만주의적 경향에 주목했다.

김현은 1920년대 한국시의 두 가지 과제를 식민지 현실 직시와 새로운 시 형식의 모색이라고 분석하면서,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시인으로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세 사람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상화의 현실 인식이 식민지 현실은 한국 궁핍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는 면에서 투철하며, 그 현실 인식이 현실 밖이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극단적인 탈출 욕구를 낳는다면서 이상화의 시를 식민지 초기의 낭만주의적 성격의 한 상징으로 보았다.[9]

반면, 감태준은 이상화의 카프 활동에 주목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조소〉, 〈선구자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상화가 낭만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에 대한 불신을 적극적 저항 내지 수용으로 변모시켰다고 보았다.[10]

이명재는 이상화 시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20년대 초엽의 감상적인 퇴폐성의 낭만주의 시, 중후엽의 항일 시, 30년대 이후의 민족적 비애를 담은 우국 시의 삼단계로 나누고, 이상화의 문학사적 위상을 항일 민족 문학의 구현자로 자리매김했다.[11]

조병춘도 이명재와 비슷하게 이상화 시의 세 단계를 감상적 낭만주의 시, 저항적 민족주의 시, 민족적 비애와 국토예찬의 시로 나눴으며, 특히 40년대에 문인들 거의가 친일문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그의 민족정기와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12]
기타[편집]
그는 생전에 파전정어리 음식, 그리고 생굴무침을 좋아했다.[7]
시인 고은의 부인으로 1947년생인 영문학자 이상화는 동명이인이다.
이상화 시인의 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편집]
뮤지컬[편집]
2009년 최춘식 -이상화 역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009년 서수빈 -김용조 역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관련 항목[편집]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파동맹
교남학교
백조
폐허
이상정
이상백
이장희
나혜석
박중양
박기만
성재기
이육사
현진건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
김성수
박종화
박창암
김일엽
이열희
최남선



각주[편집]

링크
이동:가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
기자, 인터넷뉴스팀 (2017년 11월 10일). “[김명환의 뮤직톡톡] 대구 음악의 선구자 박태원”. 2020년 10월 20일에 확인함.
이동:가 헐릴 위기에서 우뚝선 이상화 고택 오마이뉴스 2008.08.13
윤혜정 (2013년 11월 14일). “[동호동락] 시인 이상화 고택 근대골목 자전거 투어, 역사`문화예술 공부 기회”. 매일신문.
이동:가 [민족시인 이상화 일대기 창작뮤지컬로 그린다] 매일경제 2009.11.25
이동:가 민족시인 이상화 일대기 창작뮤지컬 공연 경북매일신문 2009.11.26
조연현 (1969년 9월 5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성문각. 451쪽.
김윤식·김현 (1973년 8월 30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민음사. 231~242쪽.
김윤식·김우종 외 34인 (1989년 8월 20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현대문학. 133쪽.
대구문인협회 (1998년 3월 30일). 《이상화 전집》. 대구: 그루. 285~293쪽.
조병춘, 〈한국 현대시의 전개양상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79) 174쪽
외부 링크[편집]
이상화 기념사업회
영대신문. 한평생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이상화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상화 시인 일대기 창작뮤지컬로 초연:대경대학교
58년전 ‘시인의 집’서 울다 한겨레 2008.08.14
헐릴 위기에서 우뚝선 이상화 고택 오마이뉴스 2008년 8월 12일자
이상화 시인,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 데일리안 2019년 11월 30일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

2020/10/20

마음 공부를 하면 마음이 좋아지는가

마음 공부를 하면 마음이 좋아지는가
마음 공부를 하면 마음이 좋아지는가

습관 덩어리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9-14 17:55:49

▲김성수 작가·마음과학연구소 대표
 소위 마음공부를 하면 갑자기 인생이 평화로워지고 선해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좋겠다. 하지만 일조일석에 그렇게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내 몸과 마음의 습관이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있어서이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거나 애쓰지 않아도 내 몸과 마음을 통해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학자들은 사람의 몸동작이나 태도, 생각, 감정 사용 등의 행위 중 구십 퍼센트가 그런 자동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고 본다. 말이 구십이지, 우리 몸의 두뇌 신경과 몸 신경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볼 때 ‘나’라는 존재는 사실상 습관 덩어리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습관 덩어리인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명상이다. 세계적 명상학자 존 카밧진은 이 객관성을 탈 자동화라고 표현한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자동화된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데 그것에서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마음의 내용물을 볼 수 있어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어느 책에선가 듣거나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거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머리를 이리저리 비틀어서 눈으로 내 몸을 본다면 나는 내 몸을 육십 퍼센트쯤 볼 수 있으려나. 생각으로 내 몸을 보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결국 내 몸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니, 사진 속 나를 보는 것보다 해상도는 낮잖아? 코로 내 몸이나 마음을 냄새 맡기도 어렵고, 혀로 내 몸을 핥아보면서, 이게 나야, 라고 할 만한 부위가 얼마나 될까.
 
명상, 자신의 삶을 입체적 차원으로 회복하는 일
 
며칠 전에는 지역 인터넷 커뮤니티 카페에서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건으로 단체장 주민소환 운운하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 시장을 주민소환해야 한다는 결기에 찬 글과 댓글들을 읽어가는 도중 내 안에서 문득 불쾌 감정이 고개를 디밀었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그래서 한마디 올렸다. ‘이런 행동은 객관적으로 분명한 문제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시장 또한 이 도시를 대표하는 사람이기 전에, 그저 우리와 다름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소유한 이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중하게 표현함으로써 되치기 당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내 마음은 깨진 병조각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댓글 창에 글을 올린 후 나는 즉시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30분도 되지 못해 다시 들어갔다. 내 댓글에 대한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런 궁금증에 끌려다니기 싫어서 커뮤니티에 글 올리지 않기로 했잖아? 나를 힐난하는 음성이 내면에서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댓글에는 내 글을 비판하거나 희롱하는 듯한 글들이 대여섯 개 달려 있었다. 그 중에는 나의 답변을 요구하는 글도 있었다.
 
익명의 숲속에서 총알처럼 나를 저격한 타인의 글에 대해 내 첫 반응은 신랄한 욕지기였다. 거친 욕지기와 불쾌한 감각이 폐포를 거칠게 쥐락펴락했다. 이게 뭐지? 음, 돌이켜보면 나는 반사적으로 내 생각에 불쾌 감정을 버무려서 댓글을 썼다. 그것도 이미 굳어져서 자동화된 내 생각이나 판단의 벨트 위에 말이다. 만약 내가 그러는 내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의 물건처럼 볼 수 있었다면?
 
≪몸은 기억한다≫를 쓴 데셀 반 베어 콜크는 몸 전체가 곧 두뇌임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사람 두뇌의 역할과 기능이 목 윗부분 둥근 뼈단지 속에 위치한 말랑말랑한 물체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100조 개의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의 모든 습관 또한 그 세포기억의 반응에 다름 아니다.
 
당신은 하루 종일 뭔가를 판단하고 해석한다. 기억이라는 생명의 기반이 작동한 탓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판단과 해석은 기억이라는 거울을 치고 올라오면서 꺾이거나 변형된 마음의 움직임이다. 이미 판이 이렇게 짜인 이 시스템을 이제 와서 전면 리모델링할 수도 없다. 유전자나 가계, 신념, 윤리의식과 같은 기초공사의 연륜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수시로 빠져나올 수는 있다. 말했다시피 나를 제3자처럼 대하면 된다. 나를 그렇게 객관화하는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 있다.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쉬운가? 아니다. 쉽지 않다.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보는 훈련이 돼 있어야 하는데, 마음공부 좀 하신 분들은 너무 쉽게 얘기한다. 생각 폭탄이 전쟁터처럼 횡행하고, 마음 어디에선가 폭발 굉음이 수시로 들려오는 우리들 속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발언 좀 그만 해달라.
 
물론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당신과 솥단지 속 누룽지처럼 동일시돼 있는 생각이나 신념, 감정 따위를 당장에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으니 펜과 종이를 꺼내보라. 휴대전화기의 노트 메모장도 좋다. 꺼냈다면 두 사람의 등장인물을 적으라. 한 사람에게는 나의 닉네임이나 ‘마음’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다른 등장인물에게는 지금의 이름을 쓴다. 그런 후 적어가는 것이다. 적어갈 때 첫 번째 요령은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이나 감정을 중심으로 적는다.
 
마음 : 머리가 딩딩거려 죽겠어.
철수 : 왜 딩딩거려?
마음 : 글쎄, 점심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 갑자기.
철수 : 점심? 누구랑 먹었는데?
마음 : 이과장님하고 김 팀장…. 이렇게 동태찌개 먹었지.
철수 : 점심하면서 얘기도 나눴겠네?
 
생각으로 나를 객관화시키는 작업은 말이 쉽지 실천은 어렵다. 하지만 이런 경험 시나리오를 적는 일은 생각이 어렵지 실천은 쉽다. 적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집중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생각은 그와 동급의 생각 에너지들이 허공 속의 공중전처럼 난무하기 십상이다. 뭔가를 적는다는 것은 그에 비하면,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일시에 동원하는, 차원이 다른 집중 행위다. 생각이 모기라면 글쓰기는 독수리 급이다. 그래서 글쓰기다.
 
두 사람의 등장인물과 그것을 시나리오로 작성하는 사람. 잘 보자. ‘등장인물 두 사람’과 ‘적는 이’의 위치는 같은가 다른가. ‘적는 이’는 그야말로 탈 동일시 돼 있지 않은가. 시쳇말로, 노는 물이 다른 곳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누구를? 나 자신을! 당신의 삶은 이런 순간에 입체적 차원을 회복한다. _()_

2020/09/10

북한 전문 취재기자 니시무라 히데키의 르포르타주

북한 전문 취재기자 니시무라 히데키의 르포르타주






북한 전문 취재기자 니시무라 히데키의 르포르타주
입력2020.09.10. 오후 12:07
김성수 기자

[프레시안books]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 재일조선인과 스이타 사건

[김성수 기자(=전북)(starwater2@daum.net)]
나는 시위대의 후미에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전쟁에 보내지던 군수 열차를 10분간 멈추면, 1000명의 동포를 살릴 수 있다고 해서 필사의 심정으로 참여했습니다. -김시종, 300쪽

두 사람은 한반도 중앙부의 잘록한 부분을 가로지르는 선에 시선을 멈췄다. 북위 38도선이다. 이렇게 해서 지도에 다트를 던지는 것보다 약간 복잡한 정도의 절차를 거쳐 분할안을 제출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133쪽

경찰과 대치할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시위대의 선두에는 175센티미터 정도의 유달리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한 남자가 있었다. 돌출된 광대와 먼 곳을 응시하는,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는 굳건한 의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부덕수(夫德秀). 재일조선인 2세다. 시위대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부덕수는 왜 선두에 서 있나. 그리고 누가 계획한 것인가. -니시무라 히데키, 32쪽
이 책의 저자 니시무라 히데키(西村秀樹)는 마이니치방송(毎日放送)에서 30년이 넘도록 북한취재 전문 기자로 활약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의 과거를 상기하면서 왜 전범국 일본이 아닌 식민지였던 조선이 분단되었는지 문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 시기에 일본이 소해정(掃海艇)과 LST(전차양륙함, landing ship tank)를 보내 사실상 '참전'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국헌법의 토대를 뒤흔들 정도로 중요하다. 일본이 한국전쟁 당시 무기를 수송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국헌법 제9조를 국가가 앞장서서 보란 듯이 위반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1946년에 공포되어 이듬해 시행된 일본국헌법 제9조 1항과 2항에는 '전쟁'과 '군대'를 포기한다는 사실이 명기돼 있다. 이는 일본국헌법이 줄곧 '평화헌법'이라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미국의 병참기지가 돼 여러 군사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이 사실은 일본국헌법의 중심축을 흔들 수 있는 것임에도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서 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미비하다.



원본보기ⓒ논형출판사

저자는 방대한 사료와 인터뷰를 통해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 '전후'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은폐돼 왔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이러한 취재의 여정에서 저자는 재일조선인들의 운동과 사상에 휘말려 들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스이타(吹田) 사건은 1952년 6월 24일 밤, 오사카 스이타시(市)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일본이 미군의 병참기지로써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등 전쟁에 협력하는 것에 항의하며 학생과 노동자, 조선인이 일으킨 반전(反戰) 투쟁이다. 김시종(金時鍾) 시인은 "한국전쟁에 보내지던 군수 열차를 10분간 멈추면, 1000명의 동포를 살릴 수 있다는 필사의 심정으로 참여했다"고 사건 당시의 경험을 전한다.

900여 명의 시위대가 1952년 6월 25일 오전 0시를 기해 행진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찰대와 충돌, 파출소와 미군 승용차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도주하고, 한큐 전철 측에 임시전철을 운행토록 해 이를 '인민전철'이라 부르며 승차했으며, 20분 동안 조차작업을 중단시킨 것을 이유로 111명이 소요죄 및 위력업무방해죄 등의 혐의로 체포·기소됐다.

소요죄 무죄판결을 받게 되는 1972년까지 재판에 걸린 기간만 해도 무려 19년에 이른다.

저자는 스이타 사건 그 자체를 쫓고 있기도 하지만, 관련자들이 살아간 사건 '이후'의 삶을 비춰낸다. 스이타 사건은 일본의 3대 소요 사건 중 하나로, 소요죄와 표현의 자유 사이를 왕복하며 갈등했던 헌법 판례로 다루어지면서 헌법 연구 분야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스이타 사건이 지닌 또 하나의 측면, 즉 제국 일본의 식민지배가 남긴 '얼룩'과도 같은 존재인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벌인 한국전쟁 반대운동이었다는 점은 충분히 공론화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스이타 사건은 일본의 전후 운동사만큼이나 낯선 이름이다. 한국전쟁 발발 70년에 관한 신문 기사와 보도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주류의 거대서사에서 생략된 존재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출몰하고 그 이야기 속에 살아있다. 저자가 사건 관련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함으로써 밝혀낸 것은 사건의 진상이나 전모뿐만 아니라, 사건 이후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굴곡과 주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펼쳐서 기록으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사건 당사자가 아닌 니시무라들이 '공감적 청자'를 자처하며 스이타 사건 연구모임을 만들어 함께-듣는 장(場)을 만든 덕분이다.

한국전쟁은 저자의 표현처럼 '국제적 내전'의 성격을 지녔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 재일조선인과 스이타 사건]인데, 여기서 '일본'은 영토로 구획된 국민국가로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과 국가 혹은 시민이라는 주어진 정체성의 토대가 '반전'이라는 공통의 지향으로 흔들림으로써 연결될 수 있었던 이들이 함께 싸워낸 시공간을 의미한다.

일례로 이 책에는 삐라를 뿌리고 경찰에 쫓기던 부덕수가 일면식도 없는 일본인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는데, 그는 일본어가 어설펐던 자기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도움을 준 일본인 노동자들을 상기하고 "한국전쟁에 반대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마음이 서로 통했던 것"이라며 그런 마음이 지금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이 현재에 일어난다면 어떨지를 독자들에게 묻는다.

"대기업 경비원이 낯선 남자에게 과연 문을 열어 줄까. 그리고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삐라 살포를 하다가 도망쳐 온 그를 도와줄 것인가"

이 책 곳곳에는 조선, 조선반도, 조선전쟁 등 생경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지금 '조선'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은 식민화되기 이전의 박제된 과거 모습 그대로 회귀해 만날 수 있는 조국도 아니며, 인민이라는 수식어를 무색케 하는 북의 '공화국'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제주에서 4·3의 피바람을 피해 소중한 이들을 남겨둔 채 작은 배로 밀항한 이들이 흘러들어와 살았던 동네 이카이노(猪飼野)에도 '조선'은 있었고, 한국전쟁에 사용될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열차를 저지하기 위해 서로의 몸을 묶고 누웠던 철로 위에도 '조선'은 있었으며, 한국전쟁 반대운동을 하며 인민전철에 올라탄 그 밤에도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청년들의 마음에는 함께 꿈꾸던 '조선'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국민국가라는 정치체제를 넘어선 의미, 즉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어떤 공통의 '심정'의 장소에 가깝다.

이 책은 김시종이 크로포트킨의 말을 빌려 부덕수(夫德秀)에게 보낸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그걸로 됐다, 거기에는 나의 지순한 시절이 있었으니" 일본의 헌법학자 마에다 아키라(前田朗)는 이 문구를 마음속으로 되뇌며 "너무 상냥하고,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도 격렬한 이 말의 의미를 대부분의 일본인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연 한국인이라고 다를까. 이 책을 통해 한국전쟁 시기에 일본에서 겪어낸 참전과 반전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독자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 즉 '조선'이라는 심정과 ‘일본’이라는 장소성이 생략된 한국전쟁의 일면적인 토대를 흔들며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성수 기자(=전북)(starwater2@daum.net)]

2020/06/01

김대중 노벨상 받은 지가 언젠데... 사법부 아직도 왜 이러나



김대중 노벨상 받은 지가 언젠데... 사법부 아직도 왜 이러나 - 오마이뉴스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김대중 노벨상 받은 지가 언젠데... 사법부 아직도 왜 이러나[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재일교포 김정사 간첩조작사건
20.05.31 11:57l최종 업데이트 20.05.31 11:57l
김성수(wad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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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출범 당시 모습
ⓒ 진실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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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 <대공30년사>에 따르면, 1977년 4월 15일 부산대생 재일교포 유영수는 같은 유학생 원영삼의 이모부인 박아무개 육군 준장에게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불온서신'(이적표현물)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 '불온서신'을 읽어본 박아무개 준장은 곧 보안사에 신고했고 유영수는 즉시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2011년 이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문을 보면 당시 '불온서신'의 "내용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적행위를 할 목적도 없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은 유영수 동생인 한양대생 재일교포 유성삼도 1977년 4월 17일 검거하고 가택수색을 한다. 이때 수사관들은 유성삼의 하숙집에서 이른바 '불온서적'인 김지하의 <법정투쟁기>, 김명식의 시 "10장의 역사연구",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장준하의 <사상계> 등을 발견한다.


보안사는 이 책자들을 유성삼에게 준 사람이 김정사라는 유성삼의 진술에 따라 1977년 4월 21일 서울대에 다니고 있던 재일교포 김정사를 체포한다. 또한 유성삼과 같은 과에 다니고 있던 재일교포 손정자도 1977년 5월 5일 검거한다.

당시 보안사에 따르면 김정사는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아래 한민통, 1989년부터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변경, 아래 한통련) 간부 '임계성'에게, 유영수는 재일공작지도원 '이시다'에게, 그리고 유성삼은 형 '유영수'에게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고문하다 죽으면 한강에 흘려보내' 위협

지난 2007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김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1977년 4월 1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집 현관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이 '네가 김정사야? 너 유성삼 알고 있지?'하고 물어 알고 있다고 하자 두 대의 승용차 중 한 대에 태웠는데 다른 승용차에는 유성삼이 타고 있었으며, 차에 타자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너 북괴에 몇 번 갔다 왔어?', '이 빨갱이 새끼야' 등의 욕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김정사는 강제로 보안사에 끌려갔고 보안사에서 겪은 고문조사 경험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서빙고분실 2층에서 수사관들에 의해 주먹과 몽둥이 등으로 뺨, 얼굴, 허벅지, 엉덩이 구타, 다리에 몽둥이 끼운 채 밟기, 수건을 덮은 채 얼굴에 물 붓기, 엄지손가락에 전화선 연결해 전기고문, 엘리베이터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해 왼쪽 고막이 파열되었고 지금까지 다리가 불편한 상태다."

김정사는 지난 2007년 국방부과거사위원회에서도 당시 보안사에 연행된 후 겪은 고초를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전화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손으로 돌리는 형태이고, 양쪽으로 선이 두 개 있는 것을 양손의 엄지손가락에 감아서 전기고문을 받았는데, 그 상처는 한 달가량이 지나면 사라져서 재판과정에서는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얼굴에 수건을 얹고 주전자로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도 받았으며, 고문을 매일 받은 것은 아니고 제가 쓴 진술서가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일 등이 있을 때에 가해졌다.

한번은 '너 엘리베이터 타볼래?'하면서 다른 방으로 끌고 갔는데 그 엘리베이터는 4개의 쇠로만 연결되어 받침만 있었고 위아래로 연결된 것으로 '이 엘리베이터는 북괴 간첩을 고문할 때 쓰는 것인데 고문하다가 죽으면 시체를 한강에 흘려보내 신원불명의 시체로 처리된다'고 위협했고, 하루는 수사관이 제 뺨을 때려 왼쪽 고막이 파열되었고, 의사가 보안사에 와서 치료를 했고, 60세 정도로 보이는 박모라는 일제 특고 경찰이었다는 사람한테 전기고문, 물고문 외에 다리 사이에 나무를 끼고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무릎을 발로 밟히는 고문도 당했다."

1977년 서울고등법원 첫 공판에서 김정사는 변호인 김옥봉이 수사기관에서 자백한 사유를 묻는 질문에 "수사기관에서 그렇게 진술한 사실이 없으며, 고문에 못 이겨 조서 말미에 무인을 찍었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당시 변호인 이병용이 김정사에게 "보안사에서 조사받을 때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조사받았나?"라고 묻자 "(조사관들이) 전기고문, 물 먹인 몽둥이로 때렸다"라고 진술했다.

당시 상고이유서에서도 김정사는 "(그때) 고문에 견디지 못해서 허위자백을 했고 검찰에서는 경찰조사관(보안사 조사관)이 입회하고 협박해서 허위자백을 했다"고 증언했다.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에서 김정사는 1977년 당시 재일지도원 임계성에 대해 "보안사에 연행되어 수사관들이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다 적으라고 해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적었는데 유학 오기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임계성이라는 이름을 적었고, 임계성과는 두 차례 정도 만난 것은 사실이나 강연회에 참석해 임계성의 강연을 들은 뒤 묻고 싶은 바가 있어 임계성을 찾아갔었고,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만나자고 해 나중에 만났지만 임계성으로부터 지령을 수수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다.

김정사는 또한 당시 항소이유서에서 "임계성으로부터 공산주의에 관한 교양을 받은 바도 없고 또 간첩 지령을 받은 바도 없으며 그에게 국가기밀을 제보한 사실이 없는데도 수사기관에서 조사 중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정신적 사정(고문)이 있어서 사실 아닌 허위자백을 했으므로 이를 토대로 한 공소사실은 너무 억울하다"고 적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비명"


▲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야당지도자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일본의 한민통 회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진실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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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수는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보안사 조사실에서 수사관들이 "옷을 모두 벗기더니 나무로 만든 침대 모양의 커다란 판 위에 누으라고 하고, 손발을 나무판에 묶은 다음에 물이 가득 찬 커다란 주전자를 가져와서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바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말하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얼굴에 물을 부었는데 몇 번이나 숨이 막혀 기절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라고 진술했다.

그 후 유영수는 광주보안대로 연행되었다가 2~3일 후 서울로 이동해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조사받았고 당시 상황을 진실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보안사에 연행된 후 상당 기간 동안 전혀 잠을 재우지 않았고 음식을 주지 않아 먹어본 기억이 없었고, 아주 밝은 불이 24시간 켜져 있는 조사실에서 거의 수십 일을 잠을 자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보안대 수사관들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거나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찬다거나 각목으로 온몸을 마구 때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늘상했으며 수건을 얼굴에 덮어씌운 채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해 자기들이 원하는 답을 말할 때까지 두드려 패거나 물고문, 전기고문을 해 허위자백 하도록 했는데,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당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옆방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비명소리가 너무 견딜 수 없었다."

유영수는 또 진실위에서 "(당시) 이시다는 일본에 있는 흔한 이름으로 TV에서 들은 이름을 말한 것으로, 보안사 조사관들은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인가', '언제 북한에 갔다 왔나'라는 두 가지로 계속 물고문과 구타를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해 '이시다'가 생각나서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지 누구의 지시에 의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허위의 사실이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이시다라는 이름을 말하자 원하는 답을 얻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이시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았고,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그런 서신을 작성해 (박아무개 준장에게) 전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이 원하는 답만을 강요해 그것을 인정할 때까지 두드려 패거나 물고문, 전기고문을 해 허위자백 하도록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유성삼은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조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가택수색에 동행했을 때 도망쳤다가 붙잡혔기 때문에 매우 많이 맞았으며, 오 계장은 '너에게 물어볼 것은 하나도 없다'며 권총을 빼 들고 총으로 때렸으며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집단으로 구타했고, 또 큰방으로 옮겨서 많이 때렸는데 건너편에 형인 유영수가 있었던 것 같고, 수사관들이 형 유영수가 자신의 소리를 듣도록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서빙고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비행기고문 등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고, 손정자를 구속하지 않고 살려줄 테니 시인하라고 회유, 협박을 했으며, 구치소에 간 후에도 서빙고로 출·퇴근하며 계속 조사를 받았는데, 구속 후에도 얼굴 상처 등 고문 흔적이 남아 있어 타인이 보지 못 하도록 아침 일찍 서빙고로 데려갔다가 밤늦게 구치소로 데려왔다."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신문 기사가 '국가기밀'


▲ 김정사 사건에 대한 국방부 과거사위 기자회견
ⓒ 진실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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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유학생 원영삼은 진실위에서 1977년 사건 당일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군인들 몇 명이 전부 군복을 입고 제가 자고 있던 방으로 와서 권총을 들이대면서 '너 일어나' 하면서 깨워 유영수와 같이 연행되었다. 이모부(박아무개 준장)에게 유영수를 소개했다고 해서 유영수와 공모한 것으로 의심한 수사관들에게 엄한 문초를 당해야 했고, 거의 1주일 이상 구금되어, 머리나 얼굴을 때리는 정도의 구타를 당했는데, 당시에 그런 곳에 끌려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들다, 병신 된다'라는 말을 평소에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절망감에 빠져 수사관들이 요구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심리상태였다."

임계성은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5년 7월경 김정사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 '재일한국청년동맹' 도쿄도본부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일한연대연락회의'(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일본 국회의원들과 교수 등 일본인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을 위해 결성한 단체)에서 한국 전반에 대한 강좌를 요청해 도쿄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일본신문에까지 광고가 나가서 일반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고, 그때 김정사가 참석을 했다. 강연 후 김정사가 '선생님 강의를 듣고 저도 재일한국인으로 한국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임계성은 당시 김정사의 첫인상에 대해서 진실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김정사는 도쿄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등 일본의 명문대학교를 진학할 정도로 똑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김정사가 나에게 한국의 민족의식에 대해 많이 알고 싶다면서 한국에 유학하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당시 한국의 김지하 시인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했고 한국말을 잘 몰라 한국말을 배우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했었다.

나는 김정사에게 북한 및 김일성 주체사상 등에 대해 선전하거나 교양한 사실이 없고, 설령 김정사가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라도 당시에는 내가 김일성 주체사상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는데 어떻게 김정사에게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이나 선전, 교양을 할 수 있었겠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으며, 김정사의 아버지는 민단 사이타마본부의 간부로 활동했기 때문에 김정사도 북한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순수 한국의 민족의식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여러 증언과 진술에도 1977년 보안사는 고문 조사 끝에 김정사, 유영수, 유성삼, 손정자를 국가보안법상 간첩, 고무·찬양, 회합·통신, 잠입·탈출 혐의와 긴급조치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리고 3심 재판을 거쳐 1978년 김정사는 징역 10년, 유영수는 무기징역, 유성삼은 징역 6년, 손정자는 징역 3년 및 집행유예 5년 형을 대법원으로부터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의 이른바 간첩 범죄사실 가운데 '경부고속도로에 활주로가 있다' 또는 '대한민국은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내용 등은 당시 일본 언론에서 이미 다 보도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사법부는 이들이 이런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 등을 적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검찰과 법원의 무리한 기소와 판결 때문이었는지 이들은 수감된 다음 해인 1979년 8월 15일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판결은 1980년 신군부 정권에서 일어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근거가 된다. 즉 이 사건에 대한 1978년 대법원판결은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죽이기'를 위해 '합법성'을 제공하는 큰 음모의 한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지난 1973년 미국에서 망명 중이던 김대중과 전 한신대학장 김재준 박사 등이 한민통을 발족했고 김대중이 초대 의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빨갱이'로 조작하기 위해 그가 초대 의장을 했던 한민통을 꼭 '반국가단체'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무죄판결 받았지만 여전히 입국 금지


▲ 2011년 9월 23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김정사(오른쪽)씨와 유성삼씨가 3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고등법원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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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한민통은 민단 내 인사들이 결성한 재일동포단체로, 결성목적이나 활동이 북한과 연계되어 남한사회의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것으로 볼만한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김정사 사건 판결에서 명백한 증거 없이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한 후 이를 내세워 김정사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고 중형을 선고함으로써 부당하게 김정사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다. 또한, 이후 다수의 재일동포와 관련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판결에서 김정사 사건의 대법원판결이 선결례가 되어 유사한 인권침해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위의 진실규명으로부터 2년 후인 2011년 9월 23일 서울고법은 이 사건으로 복역한 김정사와 유성삼 등에 대한 재심에서 다음과 같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현행법에 비춰 위헌이다. 이들의 공소사실도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 김씨 등이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신문조사나 진술서 등은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작성된 것이다. 영장 없는 구속과 고문 등으로 이뤄진 자백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

2013년 5월 22일, 대법원도 이 사건 재심 재판에서 모두 무죄 확정 판결을 선고했다.

당시 김정사는 "일단 무죄판결은 반갑다. 그러나 재판부가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이 반국가단체가 아니라는 언급이 없었던 점은 너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이 지난 1977년 김정사 사건을 조작했을 때 당시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결했다. 그런데 그때 대법원의 그런 판결은 그 후 한통련 회원들의 입국을 극도로 제한하는 큰 선례이자 족쇄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한통련 회원들이 아무 조건 없이 모국인 대한민국을 입국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그 후 집권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다시 위 대법원판결을 선례로 한통련 회원들의 입국을 제한시켰다.

결국 2013년 이 사건 피해자들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한통련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혀 있다. 그래서 지난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통련 모국방문단은 방한할 수 있었지만, 6·15 해외측위원회 위원장이자 한통련 의장인 손형근씨는 입국할 수 없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민통은 지난 1973년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과 김재준 박사 등이 발족한 단체이고 김대중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리고 김대중은 그 후 대통령을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법부는 지금도 여전히 한민통(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사법개혁이 시급히 필요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한홍구 교수와 전명혁 박사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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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9

14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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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해암신학연구소, <교회와 신학>2호, 201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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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암신학연구소20140930]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목차-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2. 한국 진보신학의 특징
3.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의 현황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주어진 논제는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이다. '진보신학' 이라는 표현대신에 '진보주의 신학' 혹은 '자유주의신학' 이라는 표현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진보신학'이라는 짧은 표현을 쓰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호칭은 한국 기독교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학의 경향성인 통칭 '보수신학'과 비교하는 일반적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불과하지만, 호칭이란 어휘의 개념이 지닌 상징성과 그 어휘가 사용되는 언어공동체 안에서의 '전이해'(前理解) 때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가령 한국 기독교계에서 보수주의 계열은 '보수신학'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만 '진보신학'과 차별화 하면서 기독교 정통신학을 지키는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어휘와 '보수신학'을 동일시하려 든다. 그리고, '진보신학'은 통칭 '자유주의신학' 혹은 심할 땐 '인본주의신학' 이라는 선입관을 갖기 쉽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신학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또렷이 하려는 의도로서 '복음주의신학'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경우에,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을 하는 신학운동과 신학자들은 '비복음주의적'이라는 신학적 가치판단을 암묵적으로 주입시키는 독선적 입장이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한 분파로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순복음교회'라고 교회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서,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등 여타의 다른 교단소속 교회들은 '순복음'을 신앙하는 교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어휘의 선택과 그 오남용은 보다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임이 한국기독교사에서 드러난 것이다.

일부 보수주의 교단의 목회자들이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을 '자유주의신학, 신신학, 인본주의신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세계 신학의 역사 혹은 기독교 사상사의 흐름에 입각한 공정한 사고가 아니다. "계시된 경전의 권위와 정통교의를 무시하고 신학을 신학적 규범에 제약을 받지않고 멋대로 자유롭게 하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 아닌가?"라는 판단은 소박한 생각이다. 세계 각국의 신학계에서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엄정한 역사적 기간동안 형성되었던 유럽에서의 신학운동에 대한 전문적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신학'이란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이 사상계 전반을 강타한 이후, 19세기의 유럽 종합대학교 신학부의 신학자들의 반응으로서 슈라이에르맛허, 리츌, 하르낙 등으로 대표하는 신학사상 흐름을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은 세계신학사에서 말하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이 비판하는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니버로 대표되는 20세기 초반의 신학운동은 18세기 '신교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신학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혼동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어떤 신학적 입장, 혹은 신학함의 경향성과 특징들을 공유하는 신학인가를 먼저 개념정리 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의 '진보신학'이라고 할 때 다음같은 5가지 특징, 입장, 혹은 경향성을 지닌 신학운동을 의미한다.

2. 한국 진보신학 흐름의 특징

첫째, 한국 개신교권 안에 앞으로 소개할 다양한 진보신학운동의 흐름이 있지만, 그들의 공통적 특징으로 '성경연구에서 비판적 연구방법 수용'이라는 특징을 제일 먼저 들수 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보수신학 진영'과 '진보신학 진영'의 장점을 아우르려는 소위 통전신학 , 중도신학, 중제신학에 해당하는 신학자들을 '보수신학 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인지 진보신학 진영에 속한 다고 분류할 것인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장로교신학대학 총작직을 수행했던 이종성교수나 현재 총작직을 수행하는 김명룡교수를 보수와 진보 어느진영 신학자라고 분류할 것인가 질문을 받는다면, 이 글에서 필자는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이다. 왜나하면 신학계나 정치계에서 흔히 '진영논리'에 입각한 패가름을 필자도 아주 싫어하지만, 그 두분의 조직신학은 현대20세기 성서학계의 '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을 열린 맘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느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무리 사회참여와 현실비판적 역사참여 활동을 펼치더라도, 그 분의 성서관이 20세기 성서학계가 이룬 '비평적 성서연구방법'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보수신학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 연구수용'이라 함은, 소위 학계에서 고등비평이라고 총칭하는 비판적 연구방법들 예들면, 문헌비판 〮역사비판 〮편집비판 〮 전승비판 〮수사비평 연구등 모든 비평적 성경연구태도를 "신구약 상경이 전하려는 복음의 참 본질을 밝혀내기 위하여" 연구방법으로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계의 소위 '보수신학' 일명 '복음주의신학'이란 성경무오설 교리를 가장 중요한 근본교리로 삼는 토대주의 신학인 것이다. '보수신학' 계열안에도 다양할 편차가 있겠지만 공통적 특징은 앞서 언급한 현대 20세기 세계신학계가 연구하는 '비평적 성경연구방법'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성경무오설' 이라는 근본교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진화론을 거부하고,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현대사회윤리의 상황적 응답을 반복음적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글에서 한국신학계의 진보주의 신학 특징으로서 현대문명의 위기적 ‘삶의 상황’에 복음적 입장에서 대답하고 복음을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변증법적 신학’ 입장을 취한다.

20세기 초, 소위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로서 촉발된 일명 ‘신정통주의 신학 운동’과 보다 더 자유로운 신학운동은 모두 강렬한 ‘변증적 신학과제’를 인정하고 그 책임을 수행하려는 학문적 운동이었다. 구미 신학자들을 예들면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루돌프 불트만, 에밀 부룬너, 본 훼퍼등 20세기 전반기에 크게 활동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 ‘변증접적 신학’ 을 수행했다.

‘변증법적 신학 방법’이란 두가지를 함의한다. 그 한가지는 계시적 성경진리를 인간 삶의 정황을 무시하고 변함없이 ‘계시적 진리’로서 선포만하지 않고, ‘상황’과의 상호대화 속에서 기독교진리를 새로운 인간상황 안에 증언한다는 점이다. 또다른 한가지는 변증법적(dialogical) 신학방법을 수행하면서 복음의 구원과 진리를 옹호하는 적극적 과제 즉 복음진리의 변증(apologetic)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신학 교육기관에서 혹은 신학자가 현대신학의 방법적 특징으로 ‘변증법적 신학’을 수행했던, 앞서말한 20세기 초 신학거성들을 비롯하여 진화론적 신학, 종교다원론적 신학, 생태여성신학, 아시아의 빈곤신학등 세계신학계 운동에 긍정적으로 경청한다. 예들면, 신학자 떼이야르 샤르뎅, 죤 캅과 죤 힉, 인도의 사마르타와 대만의 송천성, 영미 여성신학자들 로스마리 류터나 맥 페이그를 강의실에서 자유롭게 논의 할수 있는 신학이 아니라면 진보신학 기관이거나 진보신학자라고 할 수 없다.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이란 포스트모던니즘과 대화하고 포스트모던니즘 안에서 복음을 변증하려는 적극적 신학을 의미한다.

셋째, 오늘의 한국 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오늘의 구원’을 강조하는 선교신학 정신에 긍정적으로 참여하는 속칭 ‘에큐메니칼 신학’을 의미한다.

오늘의 한국신학계에서 그 신학교육기관 혹은 신학자가 ‘진보신학’인가 여부를 가늠하는 쉬운 기준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강조하는 교회의 일치연합 운동, 교회들의 사회적 책임강조, 타계적-미래적 구원만이 아니라 ‘오늘-여기’에서 구원을 강조하는 상황적 신학운동을 지지하는가의 입장으로서 구별된다.

넷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신학을 하나님 백성들의 순례자적 신앙고백으로 이해하여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에 긍정적으로 복무하는 공통특징을 지닌다.

보수신학의 대부였던 박형룡박사가 보수신학은 “선교사가 전해준 복음적 정통신학을 그대로 보수하는 것”을 신학자의 기본 입장으로 삼았다면, 진보신학은 ‘순례자의 신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해명하고 변증하는 ‘신학들’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상대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신학체계를 절대불변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학문적 시도로서의 ‘신학 ’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반복음적 피혜를 초래한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진보신학’은 우리들에게 많은 좋은 점들을 가져다준 구미신학들, 예들면 라틴적 스콜라신학,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영미신학, 독일신학,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등이 필요하고 귀중하듯이 동아시아의 신학과 한국신학이 필요하고 당연하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동아시아-한국적 삶의 자리와 토양 속에서 주체적으로 ‘한국신학’을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섯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21세기 지구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기존의 ‘십자군의 영성신학’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영성신학’의 재정립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신학의 ‘패러다임전환’을 공통적으로 지향한다.

‘십자군의 영성신학’이라 함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일환으로서 진행하는 신학함의 태도에 있어서, 타문화및 세상 정복적 태도와 교회의 무한성장 번영을 복음적 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말한다. ‘십자가의 영성신학’이란 정복이 아닌 섬김, 성장번영이 아닌 낮춤과 비움, 금관의 예수가 아니라 가시관의 예수를 더 주목하는 신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대로, 이 글에서 말하는 한국 신학운동 흐름에서 ‘진보적 신학들’이라고 분류하는 기준을 5가지로 삼았다. 다시 정리하면 ① 비판적 성경연구 방법수용 ②변증법적-변증적 신학입장 ③ 에큐메니칼 신학정신 ④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 ⑤ 십자가의 영성 강조, 이상 5가지 이다.

위에서 말한 진보신학 특징들을 감안하여 필자는 다음장에서 아래의 다섯그룹을 한국의 진보신학계 현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등이다.

이상의 5가지 그룹의 한국 신학계 ‘진보신학 운동들’의 현황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언급하는 신학자 이름들은 그 분야의 특징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선택한 신학자 이름들 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한국 신학계는 이 글에서 지면관계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수많은 귀중한 신학자 지성집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구약 성서신학자들의 활동은 『신학과 교회』창간호와 이번호 특집에서 각각 자세하게 다루는 전문적 연구논문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학자 명단 언급은 하지 않는다.

3.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현황

(1)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의 첫 번째 흐름의 특징을 명시하기 위하여 필자는 ‘통전적 조정신학’(integrating modulation Theology)이라는 어휘를 일부러 만들어 쓰려한다. 이 어색한 신조어 명칭에서는 ‘통전’(integration, 統全)이라는 단어와 ‘조정’(modulation,調整)이라는 두 개의 어휘가 이 진보적 신학지성 집단의 특징을 지시한다. 통전(統全)은 본래 교육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단어로서 한인격체가 원만한 성숙성을 가지고 정서적, 도덕적, 철학적 측면에서도 균형과 통합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조정(調整)은 본래 음율, 음색, 음조등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들리도록 조절하는 일과 많이 관련되는 단어이다.

신학의 특징을 ‘통전적 조정신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극단적인 진보나 보수적 사고를 통전하고 조정하려는 신학이며,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부분적 진리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적 견해들을 종합(synthesis)하여 보다 ‘건전하고 온전한 형태의 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을 말한다. 이러한 ‘통전적 조정신학’ 작업에 특별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한국 신학자로서 장로회신학대학장을 오랫동안 맡아 수고하셨던 이종성 박사의 신학작업을 예로들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신학 저작물들은 ‘독창적 새로움의 신학’ 이 아니지만, 길게는 그리스도교 신학사 전체를 섭렵하고 짧게는 20세기 세계신학운동의 다양한 흐름들을 이해 한후에, 그 나름대로 ‘통전적 조정신학 체계’를 저술물 속에서 서술하였다.

짧은 한국 개신교 역사 안에서 불행하게도 보수와 진보라는 두 신학진영이 갈라지고 서로 각각의 ‘진영논리’에 갇혀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향성을 노정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통적적-조정신학 운동’은 건전한 신학지식을 목회자들과 신도들에게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일부 급진적 진보신학자들 중에서는 이종성박사로 상징되는 중도적 신학을 통전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만,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2장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진보신학의 범주’에 어떤 신학운동을 포함할 것인가에 대항 5가지 조건중에서 적어도 4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성서비평학 수용, 변증법적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과학신학에도 긍정적 입장을 가지므로, 이종성교수의 신학을 ‘보수신학’이라고 부른다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지금 생존하신 한국 신학계 원로 신학자들 중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 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신학자로서 예들면 해암 이장식 박사를 비롯하여 조종남, 김성수, 민경배, 강근환, 박근원, 선한용, 황승룡, 이형기, 정장복, 서정운, 이원규, 송순재, 윤응진, 박종천, 최인식교수들을 예로 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신학계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의 대표적 신학자는 조직신학 영역에서 김균진교수, 김명룡교수, 오영석교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균진 교수는 『기독교조직신학』(1권-5권)을 완성함으로서 20세기 전세계 진보적 신학흐름을 총정리했으며, 특히 말년에 집필한 『죽음의 신학』이라는 명저를 집필했는데, 긍정적 의미에서의 ‘통전적-조정신학’의 면모를 유감없이 나타내고 신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김명룡교수는 선배 이종성박사의 뒤를 이어 학문적으로나 신학교육 행정면에서 한국 신학계의 ‘통전적-조정신학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그와 김균진 교수와의 공동 노력에 의하여, 20세기 후반기 유럽 조직신학계의 대표적 학자 율겐 몰트만의 중요한 저작들이 10여권 번역되어 신학계와 일선 목회자들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오영석교수도 그의 저술물을 통해서 바르트-몰트만 신학계보의 개혁파신학의 흐름을 건전하게 전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한국 진보신학 흐름중 첫 번째 운동으로서 ‘통전적-조정신학’은 칼빈의 개혁신학 전통, 루터의 종교개혁전통, 웨슬레 신학 전통의 본래성과 그 오늘의 의미를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신학운동이다. 성서비평학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사회의 도전들에 열린맘으로 응전하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적 신학’이 전승해주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굳게 지키려는 심정을 공유한다. ‘복음과 상황’이 만날 때 대등한 관계의 해석학이 아니라 복음 우선적이며, ‘기독교와 이웃종교’가 대화할 때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유일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통전적-조정신학’은 충분히 그리고 철저히 변증법적 해석학 공리를 준수하지 않으면 ‘정통보수적 신학’의 연장이 아닌가라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2)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필자는 한국 진보신학운동의 둘째번 흐름으로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을 언급하고자 한다. 복음운동은 주기도문의 핵심화두 처럼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는 신앙고백이요 삶이요 운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언은 래세적이고 역사초월적 측면 못지않게 현세적이고 역사 내재적 측면을 지닌다. 엄밀하게 말해서 “종말론적이 아닌 신학은 기독교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회정치적 증언을 소홀히하는 신학은 충분히 기독교적 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은 한국적 삶의 총체적 자리안에 하나님의 정의, 자유, 평등, 평화가 온누리에 실현되어 실질적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요10:10) 일에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힘쓰는 신학이다.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이 모두 민중신학회 회원도 아니고 민중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리 복음이 민중지향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먼저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힘을 쏟는 신학운동의 현황을 살피고 그 다음에 민중신학운동을 살피려고 한다. 두 그룹은 대체로 중복되지만 구별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의 래디칼한(radical) 한 신학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정치신학의 본격적 태동은 1961년 박정희 군사혁명 이후, 군부세력의 집권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군사정부가 추진하는 반민주주의적, 반인권주의적, 경제성장 제일주의적 정책의 강행이 성서가 증언하는 복음의 자유, 인간 존엄성, 정의로운 평화,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회의 비젼에 심각하게 위배되고 충돌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동참했던 선구자들은,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12:1)이 있다. 고인이 되신 분들로는 김재준, 김정준, 박대선, 서남동, 문익환, 안병무, 김관석, 현영학, 김찬국교수 얼굴이 떠오른다.

민중신학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도 뚜렷한 한국의 ‘진보신학’ 계열로서 한국적 사회정치신학(Korean socio-political Theology)운동에 힘쓴 신학자들로서 현존하는 인물을 예로 든다면 박순경, 손규태, 노정선, 김창락, 박명철, 황성규, 임태수, 김성재, 유석성, 채수일장윤재, 정재현등을 예로 들수 있다. 현존하는 민중신학자로서는 원로신학자로서 서광선, 김용복교수를 비롯하여 임태수, 권진관, 김은규, 강원돈, 김진호, 류장현, 최형묵, 김영철, 방인성, 김희헌등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눈에 뜬다. 한국 진보신학계열에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려는 신학적 관심을 아래에서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독교복음의 본질파악을 위해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리얼(Real)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서연구에서 정치사회적 조명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본다. 복음이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한 인간구원과 해방’이 정치사회적 차원에 머문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한 해석은 관념적이고 반복음적이 된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순복음교회가 강조해왔던 소위 ‘삼박자 축복의 구원론’과 ‘성장과 풍요의 교회론’을 복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두가지 속성은 ‘공의로우심’(정의)과 ‘긍휼하심’(사랑)인데, 특히 예언자적 성서전통에 의하면 “가난한 자와 눌린자와 포로된자들”(루가 4:18)에게 자유, 해방, 평등, 평화를 선물하는 ‘민중에 대한 우선적 배려’가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특히 민중신학의 강조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장소가 성경, 예배당, 수도원, 크리스챤 형제공동체 못지않게 ‘고난당하는 민중현실’에서 만나라고 강조한다. ‘오클로스 민중론’을 예수와 특별관계로서 세계에 제시함으로써 민중신학은 국내보다도 세계에서 훨씬 높은 관심과 평가를 받았다.

셋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죄성이 개인적인 것만 아니라 집단적 사회구조적 죄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구조적 정치경제 악의 실체에 맞서서 ‘선한 싸움’을 하자는 것이다. 현재 전체 지구촌을 덮고 있는 소위 ‘신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당연한 것이거나 피 할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프란체스코교황이 강조하듯이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고 한국사회 전반에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고 힘써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넷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오늘의 신학적 아젠다’로서 제시하는 것들은, 철저한 민주주의 실현, 남북의 무기경쟁중단과 외세의존 탈피, 남북 민족의 주체적 화해와 평화통일, 소외된 사회계층에 대한 배려,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 회복 강조등이다.

(3)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

한국 진보신학의 세 번째 그룹은 ‘한국적 종교문화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자 그룹이다. 흔히 줄여서 ‘한국문화신학’라고 부르는데 이 신학캠프는 ‘한국민중신학회’와 쌍벽을 이루면서,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한국의 진보신학을 견인해가는 신학운동이다.

일찍이 폴 틸리히는 1920년대초 그가 독일 학계에 데뷔하는 베르린학회에서 「문화신학의 이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 논문발표에서 그는 문화종교신학의 본질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다음같이 피력한바 있다: “종교는 문화의 알짬(substance)이요 문화는 종교의 표현형식(form) 이다”. 다시말해서 문화의 다양한 장르들 법률, 예술, 문학, 이념, 건축, 그리고 심지어 과학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인간의 의미있는 활동의 “깊이 차원”에 종교가 있기 때문에, 사람생명체에 비교한다면 ‘종교’는 정신과 영혼이며 ‘문화’는 신체와 활동이다.

한국 신학계에서 종교문화신학의 발아지역은 장로교보다 감리교 였다. 일찍이 탁사 최병헌목사가 기독교에 접한 이후 한국 전통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성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주체적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부터, 소위 ‘복음의 토착화론’에 선구적 역할을 감리교신학교수단 에서 했고,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교수등 용기있는 개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대체로 한국의 장로교회 교단은 칼빈주의의 강력한 영향으로 ‘복음의 토착화론’에 소극적이거나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3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복음의 빛에 비추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들을 조명하면서 ‘복음’과 ‘한국전통문화’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려는 과제를 갖는다.특히 이웃종교들과의 바른 관계정립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둘째, 한국인 크리스챤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의 문화, 예술, 삶의 표현형식으로 조형(造型)하고 증언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의미한다. 예배 전례상의 상징적 표현들, 건축과 미술과 음악의 한국토착적 표현들, 기독교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소설, 연극, 시 작품창작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셋째, 2,000년 그리스도교신학과 동아시아 영성전통과 만남으로서 제3천년 시기의 ‘제3의 눈’의 신학 형성을 지향한다. 헬라적 교부신학, 라틴신학, 게르만 독일신학, 영미신학이 있었듯이,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정신토양 속에서 형성된 ‘제3의 눈’의 신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종교문화라는 폭넓은 관심영역 때문에, 문화신학학회 정회원만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전문 분과 학자들이 참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서신학자, 여성신학자, 기독교 사회윤리학자, 정치신학자들이 고루 고루 참여하고 있다. 한국 종교문화신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술물도 남긴 학자들중 그 일부만 열거하면 유동식, 유재신, 심일섭, 이계준, 김광식, 김경재, 박재순, 이정배, 김영일, 서창원, 김흡영, 이정구, 송성진, 허호익, 이찬수, 손호현, 박일준 교수와 여성신학자로서 특히 차옥숭교수의 무교연구와 이은선교수의 유학연구, 오정숙박사의 다석연구가 돋보인다. 여성신학자들 활동은 ‘여성신학’운동의 항목에서 별도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문화종교신학계를 지난 30년간 이끌어온 대표적 학자는 유동식 교수이다. 그의 학술적 공헌은 매우 독창적인데 대표적 저술물로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풍류신학』, 『신학과 예술의 만남』이 대표적인 저작물이다. 유동식교수가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끼친 독보적 공헌의 의미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민족의 종교심성 바탕에 깔려있는 무교 혹은 무속연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종교사에서의 ‘무교’를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바알신앙’과 동일시해왔던 오해와 갈등을 상당부분 해소 시켰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민의 종교심성의 영성적 원형바탕을 ‘풍류도’로서 밝힘으로서 기독교신앙의 한민족에 수용과정에서 선교과제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셋째, 특히 말년엔 ‘예술신학’을 제창하면서 신학의 최고경지가 예술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묵상에서 꽃핀다는 것을 밝혀준다.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사에서 변선환목사에 대한 감리교단의 ‘파문’은 감리교단의 역사내 부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신학사에서 큰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변교수가 “이웃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발언한 것이 파문죄목의 중요한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변교수가 의미하는 내용과 교단의 보수적 정통 교권주의자들의 의미하는 내용사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본다. 변선환 교수에게서 ‘구원’은 구체적으로 구원받은 종교인들의 생명현상학에서 세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자기중심적이던 이기적 실존이 실재(Reality)중심의 해방된 존재로 자유인이 된다. 둘째, 자유인이 된 종교인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함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다. 셋째,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내용에 다양성이 있으나, 공통점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고 죽음을 넘어선 승리적 삶을 산다.

유동식, 변선환교수의 선도적 문화신학의 과업을 이어받아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을 젊은 세대들과 호흡을 맞추며 크게 활동한 학자는 이정배교수와 감신대를 중심으로한 그 선후배 동료신학자들이다. 『문화와 신학』 정기 학술지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으며 『한국신학, 이것이다.』(한들출판사, 2006)와 『한류로 신학하기』(동연,2013)를 간행하여 한국문화종교신학회의 과거정리와 미래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는 시범을 보였다. 이정배, 김흡영, 박재순 박사를 비롯한 문화신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종교유산의 토양에 뿌리 박은 한국신학을 정립하려는 역저를 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특히 불교와의 대화가 학자들간에는 열매를 조금씩 거두어간다. 우선 한국교수불자연합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공동주관으로서 붓다와 예수를 상대편 종교인으로서 어떻게 보는가를 시민공개강좌로서 갖고 『인류의 스승으로서 붓다와 예수』(동연, 2006)라는 표제의 단행본으로서 출판된 것은 특기 할만한 일이다. 기독교 학자로서 불교와 기독교 상호관계연구 결실로서 종교학자이면서도 제1급의 신학자인 길희성교수의 연구서는 신학계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 불교계의 전문 학술지 『불교평론』에서 기독교신학자들의 글을 싣는등 학문적 대화는 종요히 계속되어 가고 있다.

천도교, 원불교, 유교, 전통민족종교들과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기독교와 불교와의 관계는 그동안 타종교의 가치와 존재를 부정하는 보수적 교회들의 배타적 태도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선교전선의 약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진보적 기독교 목회자들이 ‘종교간 대화모임’에 열린자세로 임하며, 특히 생태환경운동이나 사회정의 구현에서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성탄절과 석탄봉축일에 서로 경축하는 따뜻한 마음은 조금씩 증가되어가는 추세여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우주적 보편종교이다. 양대 종교사이의 대화와 협력은 상대방을 정복하려는 것도 아니고 흡수통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양대종교의 특징과 진리증언의 길에 서로 경청하면서 보다 성숙해지려는 것이다. 개신교의 종교신학은 결코 종교혼합론이 아니며 도리혀 종교혼합론은 이웃종교 종교배타론 만큼 위험하고 성숙하지 못한 독선과 독단론이라고 본다.

(4) 여성신학 운동

한국신학계의 진보적 신학 운동의 현황소개에서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 만큼 눈부신 활동과 엄청난 학문적 기여및 사회실천적 공헌을 한 지성집단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보다 자세한 여성신학의 역사와 현황소개는 여성신학협의회에서 간행한 훌륭한 단행본 및 논문들이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들은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교계와 신학계를 막론하고 소위 ‘보수, 진보’를 구별하는 확실한 판단도 그 교회,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에서 일어난 ‘여성신학 운동’과 1980년대 초기에 그 반응으로 태동한 ‘한국 여성신학’의 소리들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받아드리는가의 태도로서 여부로서 구별이 가능하다. 그만큼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은 전통적 한국보수교회 안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전통 비판적 주장과 래디칼한 문명비판적 주장들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한국신학계에서 여신학자 협의회가 정식 결성된 해는 1984년이어서 어느듯 30년이 되었지만, 한국 여성신학자들의 활동현황을 살펴보기 전에 ‘여성신학’ 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징을 아래의 몇가지로서 먼저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여성신학은 기독교문명사회와 교회공동체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억압이 가부장적 성서해석에 있음을 주장하고 새로운 성서해석을 시도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 주제는 인간으로서 존엄한 여성의 ‘해방’이다.

경전으로서 성경의 문자무오설과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보수적 신학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겠지만, 여성신학자들은 경전으로서의 성경자체의 형성과 편집과 전승이 ‘가부장적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성서를 ‘억압과 차별’의 경전으로서가 아니라‘해방과 평등과 자유’의 원천으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신구약 성경의 완성자이신‘예수의 마음자리’에서 성서를 읽고, 성서문자에 메이지 말고 성서가 말하려는‘살리는 영’으로 읽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가 엮은 『새롭게 읽는 성서의 여성들』(1994), 구약신학자 이경숙의 『구약성서의 여성들』(1994), 신약학자 최영실의 『신약성서의 여성들』(1995) , 그리고 최만자의 『성서와 여성신학』(1995)등이 여성신학자들의 새로운 성서해석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둘째, 여성신학은 교회안에서와 사회에 편만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부당한 억압구조와 사회와 문명의 성차별적 가부장적 문화구조 해체를 통한 양성평등의 새로운 인간공동체 구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주제는 여성의 평등권을 담보하는 ‘정의’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제반 활동영역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무능한 존재, 지배받고 남성에 의해 계도(啓導) 받아야할 존재로 생각하는 일체의 허위의식 지배이데올로기를 철폐하고, 양성 평등 문명사회를 요청하고 투쟁한다. 한국의 여성신학계는 서구사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국사회에서의 여성폄하적인 노동의 임금차별, 직장의 진급제약, 여성에게 가하는 성의 상품화, 가사노동의 집중과부하등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비인간화 현실을 극복하려는 ‘실천적 여성신학 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여성의 ‘해방과 평등’의 아젠다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여성신학은 민중신학과 파트너쉽을 가지고 발전해가고 있다.

셋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생태계의 위기상황에 주목하고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과제를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중심 주제는 ‘생명의 평화’ 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해방’모티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계, 여성의 ‘평등’ 주장을 하는 정치사회 인간문명의 맥락을 넘어서, 기독교 여성신학은 오늘날 인류문명이 직면한 자연파괴,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기가 성경을 포함한 가부장적 인류종교경전의 잘못해석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 지성계는 인류문명이 당면한 자연환경 오염,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험문제가, 다른 어떠한 주제들 예들면 경제발전이나 우주과학실험이나, 신무기 개발경쟁보다도 우선순위에 놓여야한다는 점에 한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여성의 비하와 억압은 자연(대지)에 대한 무한 공격적 개발과 관련되고, 생태계의 조화와 순환원리를 무시하는 남성적 문화의 ‘바벨탑 건설 본능’과 관련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여선신학계의 원로이셨던 고 이우정선생의 고희기념논문집 책이름이 『여성,평화,생명』(경세원,1993)이었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여성신학의 지향성을 잘 나타낸다.

넷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외국의 여성신학과 다른 독특한 한민족의 분단상황, 동족간 상잔, 전쟁위협과 무기경쟁을 극복하고 모성의 심정으로 민족의 화해, 협력, 평화통일의 과제를 신학적 의제로 진지하게 삼는다. 중심주제는 ‘한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이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모성’이다.

특히 여성신학의 제1세대들 박순경, 이우정은 여성신학운동의 본질적 과제가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임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자들이 여선신학의 긴급한 주제로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의제로 삼는것은 단순히 한국의 일반학계 정치학, 외교학, 군사학등에서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여신학자 선언」(1988)에서 천명한바와 같이, 한민족의 분단을 강요하고, 지속하고,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모든 어리석은 국제정치적 행위자체가 따지고 들어가면 인류문명의 가부장적 죄악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8-19세기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쟁탈, 1,2차 세계대전의 국가주의 발호, 2차대전 후의 세계 냉전체제, 근래 한반도를 둘러싼 6자회담의 정체가 모두 가부장주의 정치문화의 열매이다. 힘의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패권주의, 국가주의 경쟁과 보복의 악순환, 군사문화의 창궐,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구입등등은 그 어리석음을 뿌리에서 비판하여 극복하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에 여성신학의 중요 아젠다가 된다.

하나님의 모성적 심성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인간살상과 긴장갈등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신학의 중요한 신학적 의제로서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민족평화 통일 신학’은 마침네 신학의 아킬레스건이랄 수 있는 전통적 신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주장한다. 그동안 서구신학이 설명한 ‘하나님론’이 다분히 가부장적, 남성적, 지배적 힘숭배의 관념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반성이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운동은 성서가 증언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온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들’ 예들면 ‘산고의 진통’, ‘기다림과 설득’, ‘차마못하는 마음’, ‘내어줌으로서 만족’, ‘비움으로서 충만’ 등의 속성을 기독교 신관이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 신관은 율법제정자, 질서의 보존자, 인과응보적 심판주, 선악의 재판관, 세계정상의 지배자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관의 혁명은 역동적인 기독교 ‘영성운동’에 창조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인 여성신학자들의 ‘지성집단’의 힘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더욱 놀라운 결실을 맺을 것이다. 필자의 이글은 여성 신학자들의 활동과 논저를 소개할 목적에 있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다만 ‘구름같이 많은 한국의 에스더들’의 면모를 독자들이 감지하도록 하기 위해 필자의 서재에서 발견되는 여성신학자들의 면모를 소개하는데 그친다. 물론 미처 소개못하는 인재들이 더 많다. 이우정, 박순경, 손승희, 안상님, 정숙자, 최만자, 선순화, 장상, 김윤옥, 최영실, 이경숙, 박경미, 김애영, 임희숙, 정미현, 이영미, 강남순, 유춘자, 이현숙, 이문숙, 윤수경,한국염, 김순영, 이숙진, 김정수, 권미경, 명노선(무순) 제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5)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다섯번째 캠프는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이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를 본질로 하지만, 일반적인 현대 물리학이나 천문학등 과학일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신학적 응답보다는 그 핵심이 지구촌이 당면한 ‘생태학적 위기’(ecological crisis)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자연신학적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한 갈래로서 ‘신자연신학’( new theology of nature)은 다음같은 차이가 있다. 전통적 ‘자연신학’은 계시론과 신 인식론에 관련된 개념으로서, 자연질서와 리성을 포함한 일반자연을 매개로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이론이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한 초자연적 ‘말씀계시’(성서) 만이 아니라, 자연도 하나님의 또다른 말씀이라는 긍정적 생각이 그 단초를 이룬다. 특히 중세 스콜라신학 체계에서 ‘우주론적 신존재증명’(cosmological arguments)은 전형적인 전통적 ‘자연신학’의 한 사례이다.

20세기 초,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자연신학 논쟁’도 인간성의 ‘전적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응답능력이 인간성안에 존재하느냐 않느냐의 논쟁이므로 전통적 ‘자연신학’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신자연신학’은 계시론이나 신인식론의 가능성 여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뉴톤-데카르트적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 진화적 자연, 새로움을 생성하고 창발시키는 자연, 자기조직능력과 자기조절능력을 자신 안에 갖춘 유기체적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지와 씨름하는 신학적 통찰이 관련되어 있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한 갈래로서 ‘생태학적 신자연신학’의 의제와 특성들을 3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적 ‘신자연신학’ 운동은 종교(신학)와 자연과학과의 관계정립에서 상호 배타적 관계모델이나 평행적 독립모델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대화모델과 상호 통합모델까지를 추구한다.

이언 바버(Ian Barbour)는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책안에서 인류문명사속에서 자연과학과 종교간의 만남의 관계유형을 4가지로 이론으로서 대별하여 설명하였다: 갈등이론, 독립이론, 대화이론, 통합이론이 그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성서무오설에 입각하여 진화론을 부정하고 생명 종들의 독립적 창조론을 주장할 때,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는 갈등모델에 해당한다.

창세기 창조설화를 자연과학 지식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창조의 목적과 근원과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설화로서 이해하고, 객관적 사실세계(fact) 탐구를 주업무로 하는 자연과학과 창조의 궁극적 의미와 뜻을 탐구하는 주관적 가치세계(meaning)를 탐구하는 정신과학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독립이론에 해당한다. 칸트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의 거성들(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부룬너, 라인홀드 니버)은 사싱 독립모델의 캠프에 속한 신학자들이다.

그러나 세계 자연과학계와 신학계는 1960년 이후, 이전의 독립이론에 안주 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과 종교(신학)의 관계성 정립에서 대화이론과 통합이론이 활발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 지성계의 흐름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신진 신학자들은 테드 피터스(Ted Peters)가 엮은 책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을 우리말로 공동번역한 5명의 신학자들이다. 김흡영, 배국원, 윤원철,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수고했는데, 특히 이분야에서 김흡영교수의 선도적 노력이 컸다. 문화신학자 이정배교수는『기독교 자연신학』을 저술하고 죤 폴킹혼(John Polkinghorne)의 『과학시대의 신론』을 번역하였으며,김흡영교수는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를 저슬했다. 강성열교수는 『기독교 신앙과 카오스 이론』을 저술했고, 심광섭교수는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 이라는 책을 통해서 현대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대화 곧 신자연시학을 연구발표 하였다.

둘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중 ‘신자연신학’ 운동의 뚜렷한 목표는 기독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어떤 형태이든 진화론을 부정하는 기독교계의 ‘창조론’을 극복해야할 21세기 신학적 과제라고 본다.

위 주제를 가지고 특별히 노력을 경주한 진보신학자 신재식 교수는 최근 『예수와 다원의 동행』을 출판하여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기독교신앙이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될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신재식은 이 책에서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쟁점들과 이론들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신자연신학을 이끌어가는 한국 진보신학계 중진 신학자로서 면모를 보인다.

신자연신학의 주제중 특히 진화론과 전통적 창조신앙과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돕는 존 F. 호트(John F. Haught)교수의 명저 『다윈 이후의 하느님: 진화의 신학』을 박만교수가 번역하였는데, 그 주제에 관하여 신선한 통찰을 우리들에게 선물한다. 이 책에 관하여 서평자 그리핀이 말하는대로 “ 이 책을 통하여, 우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며, 창조주는 진화로 인해 제약을 받는 전능하신 설계자가 아니라 가능성과 가치, 새로움, 정보,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우주적 원천으로 이해된다”.

셋째, 신자연신학 운동은 실천적 시급한 지구촌 문제의식과 더불어 생태학적 영성과 신학의 새로운 재구성을 힘주어 주장한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구가 환경파괴문제및 기후붕괴, 그리고 생태계 교란 등으로 위기상태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에서는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응책에 관혀 진보신학이 보수신학과 다른점은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 극복은 단순히 ‘개인적 경건윤리 의식’을 고취함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데 있다. 다시말하면, 정통적 신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특히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통적 기독교 패러다임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개인윤리적 생활에서, 근검절약, 자원의 재활용, 자연환경보호운동등의 실천으로서만은 않된다는 인식을 갖는다.

생태학적 윤리, 혹은 생태학적 영성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무엇이 선하고 옳은 일인가의 윤리적 판단기준은 인간과 하나님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정의, 진실, 정직, 평등, 사랑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및 생태계와의 관계가 고려되지 않는 바른 도덕적 삶, 영적 삶이란 지극히 부분적이거나 심지어 반윤리적, 비영성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생태신학에 대한 비상한 관심은 한국교회환경연구소가엮은 책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에서 15명의 신학자들이 세계 생테신학의 동향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책안에서 세계적 생태신학자들 예들면 제이 맥다니엘, 디터 헷셀, 다글라스 할, 샐리 매페이그, 버나드 앤더슨, 로즈마리 류터, 매튜 폭스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생태학적 신학에 관한 한국 기독교계의 각성과 응답을 촉구하면서 여러신학자와 출판사가 노력하지만,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박사의 열정에 힘입어 이 분야의 좋은 논저가 한국 교계에 소개되었는데 그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진보신학의 여성신학운동과 생태신학 운동의 배경에는 현대 기독교 신관에 대한 새로운 재성찰이 요청되는데, 과정신학의 신관은 다양한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과정신학을 한국 진보신학계에 소개한 학자들로서 류기종, 김상일, 장왕식,김희헌, 전철, 정강길 등의 공헌이 있었다.

생태학적 신학운동캠프에 속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한국사회에서 이끌어가는 평신도 크리스챤 과학자인 장회익 교수의 명저 『삶과 온생명』은 특기할만한 저술물로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안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 윤리학을 극복하고 동시에 동양사상이 흔히 빠지는 범신론적 만물동체주의(萬物同體主義)에도 빠지 아니하고, 전체지구를 '유기체적 한 몸'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자리매김은 '중추신경계'에 해당한다는 은유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진보신학의 운동현황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진보신학 캠프안에 흐르는 5가지 색깔을 그 신학적 지향성과 특징들이 무엇인지 대략살펴 보았다.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라는 것은 앞으로 10년 혹은 30년 을 내어다 보면서 미래의 과제를 살피자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언제나 현제 속에 이미 다가오고 있는 것이며, 내일의 과제는 곧 오늘의 과제이다. 특히 힘써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미쳐 수행하지 못한 신학적 책임을 각성하자는 의미에서 내일의 과제라고 말한 것 뿐이다. 진보신학의 개념규정과 그 현황 흐름을 각각 5가지 언급했으므로, 내일의 전망과 과제도 5가지를 간추려 살피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첫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은 아직 교회론을 충분하게 담론화 하지 못했으며, 21세기 세속화 물결과 포스트모던사회 속에서 새로운 교회론의 치열한 담론화가 요청된다.

기독교 신학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믿는 바를 서술하고 세상에 증언하며 새로운 세상 상황 속에서 변증하는 과제를 지닌다. 줄여말하면, 신학이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봉사하는 책임을 갖는다.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교회공동체의 공동작업인 것이지 개인 신학자의 기독교에 관한 소견이거나 특정 지식인 집단의 기독교철학 작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들은 1960년대 이후, 급진적으로 변화된 시대상황과 한국적 ‘삶의 자리’에서 보다 복음적이고 책임적 신앙고백과 실천적 참여를 하는 과제앞에서 일차적으로 기존 전통신학의 굳어지고 시대착오적 신학틀과 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과제에 복무하지 않으면 않되게 되었다. 그리고. 진보적 신학운동을 펼처갔던 신학자들은 ‘굳건한 정통신학’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충분하게 설득하지 못하고, 기존교회 울타리 밖에서 그리고 진보적 신학집단들 학회활동 안에서 주로 신학운동을 펼쳐간 것이다.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교회’, ‘선교의 아방가르로서 교회’, ‘민중운동으로서의 교회’, ‘전위적 제자직을 수행하는 교회’, ‘평신도중심의 만인 사제직 교회’, ‘자연과 세속사회를 제단으로 삼는 범성례전적 교회’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제도적 전통교회의 형태변화를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감성과 윤리성과 지성이 아울러 충만한 <21세기에 걸맞는 영성적 제3교회> 시대를 아직 열지 못했다. 이것이 제일 첫 번째 과제이다.

둘째, 진보신학의 다음과제는 신학을 진보적 신학자들 집단의 전유물로서 생각하거나 전문적 신학써클 안에서만 논하는 학문적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진보신학 운동의 대중화, 소통강화’라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대중화는 학문성의 하향조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교회의 적지않는 지성인 신도들은 기존교회의 설교와 신학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진보적 신학서적 독서를 통하여 신학적-영적 갈증을 메꾸어오고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열린강좌’가 시대의 흐름이듯이 ‘감성과 지성이 함께 숨쉬는 열린 신학강좌’를 기획하여 귀중한 한국진보신학 써클이 지닌 집단지성을 ‘생명의 떡과 포도주의 잔치’로 펼쳐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통은 세상의 다른 학문들과 학제간 소통, 기독교 안에서 보수신학과 진보신학과의 소통을 과제로 갖는다. 평화통일 신학은 남북한의 역사적 경험이 융합된 소통의 신학을 요청한다.

셋째, 한국의 진보신학만이 아니라 세계신학의 최대화두는 계몽주의 시대 인간 역사의 경험, 아우슈비치 홀로코스트, 그리고 지구촌의 생태계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 이해’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신학은 학문이름 그대로 결국은 ‘신론’이 중심을 이룬다. 기독교의 위기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위기이거나 ‘예언자와 사도들이 증언한 성서적 진리’의 위기가 아니라, 그 해석과 이해의 틀을 새롭게 재해석하지 못하고 기존교리에 안주하는데서 오는 위기이다. 적어도 “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안에 계시는 한 하나님”(엡4:6) 고백에 걸맞는 새로워진 하나님론을 말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다시말하면,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 신관은 만유를 초월하시는 주 하나님, 들꽃과 고난당하는 피조물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내재적 하나님, 그러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창발하면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과정적 하나님 체험이 동시에 살아나는 신관을 요청한다.

넷째, 한국의 진보신학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종교개혁신학 원리의 총체적 메타크리틱’ 과제를 숙제로 갖는다.

흔히 종교개혁의 3대모토로서 ‘오직 믿음만, 오직 성서만, 오직 은총만’의 신학원리를 강조한다. 본래적인 의미에서라면 언급한 종교개혁 정신의 3대원리는 항구적 진리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나, 지난 500년을 지나오는 동안, 종교개혁이 3대원리는 많은 신학적 문제를 제기해왔다는 것을 개신교 교회사에서 증명한다. 특히 개신교 교회안에 영성수행의 약화, 성례전 신학의 약화, 성서해석상의 분파주의,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공공성의 약화를 초래했다.

다섯째, 세계신학사 지평에서 볼 때, 한국 진보신학은 동아시아 정신적 영성토양에 뿌리내린 ‘동아시신학’(East-Asian Theology)을 형성하여 세계 그리스독교 신학사에 공헌한 과제와 사명을 갖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역사는 짧고 각각의 관심영역으로 분화되어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구미신학의 역사가 각각 위대한 복음진리를 그들 시대와 문화역사적 토양 속에 육화시켜 독특한 신학전통을 창출해 냈다면, 동아시아 문화역사 토양에서 그 가능성은 훨씬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문화권 안에는 불교, 유교, 노장철학, 한국의 종교등과 더불어 아시안인들의 고난경험과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등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실패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진보신학은 그 과제를 피할수 없는 세계신학사적 과제로서 인식하고 있다. (탈고 2014.9.23)


[논문 한글 요약]

이 논문은 한국의 진보신학의 동향과 그 과제를 개론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진보신학’이라는 명칭은 한국의 교계나 신학계에서 ‘보수신학’이라는 표현에 대비하여 사용하는 호칭을 일컫는데 다음같은 신학함의 경향성을 공통으로 한다: (i)세계 신학계의 비평적 성경연구 방법의 수용 (ii) 복음과 상황과의 변증법적 관계 (iii)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신학운동 참여 (iv) 토착적 한국신학 형성추구 (v) 십자군의 영성을 지양한 십자가의 영성을 추구함이 공유하는 정신이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운동으로서는 다음같은 다섯가지 신학써클을 통하여 진보신학의 현황과 미래과제를 살펴보았다: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자연신학 운동이 그것이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이 안고 있는 내일의 과제들은 진보신학에 걸맞는 교회론의 강화, 진보신학운동의 대중화, 21세기 지식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론의 새로운 정립, 그리고 종교개혁 정신의 근본적 재성찰, 그리고 세계신학계에 공헌해야 할 동아시아 영성신학 정립으로 보았다.
(중요 어휘) : 성서비평학, 오늘의 구원, 생태학적 여성학, 우주신인론적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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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영문요약]

This essay is a bird's eye view of Korean Progressive Theology, which is a common title in contrast to Korean Conservative Theology. In a broad sense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shows some marked trends toward doing theoloy : acceptance of biblical criticism , dialectical method between gospel and situation, commitment to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through investigation into indigenous theology, and pursuit for spirituality of crucifixion.
For making a general survey of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this essay classifies Progressive Theology of Korea into five large groups: (i) theology of modulation (ii) minjung oriented socio-political theology (iii) indigeneous religio-cultural theology (iv) feminist theoloy (v) eco-theology of nature. And some specific chracters and tendencies of each theological movements are described comprehensively.
At the end of this treaties, the urgent tasks of Progressive Theology for today as well as future are suggested to theologians of five groups above mentioned: formation for update ecclesiology corresponding to post-modern world, driving of progressive theology to win a public support, proposal of new doctrine of God overcoming a supernatural God of orthodoxy protestants, and shaping of new christian spirituality deep rooted in east-Asian fertile soil.

(key words) Biblical criticism, liberation, salvation of Today, eco-feminism, cosmotheandric spiritu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