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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4

서양철학의 역설 | 김성수 - 교보문고

서양철학의 역설 | 김성수 - 교보문고:


김성수 저자(글)
도서출판 바람꽃 · 2023년 01월 18일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인문 > 철학 > 서양철학일반 > 서양철학의이해

김성수 박사는 전남 광주고등학교(3회), 연세대학교 철학과 학사 및 철학 석사로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요한 볼프강 괴테)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문과 더불어 사회운동의 실천활동가인 김성수 박사의 『서양철학의 역설』을 『도서출판 바람꽃』에서 펴냈다.

제1부에서는 서양철학의 기본성격을 3장으로 나눠 고찰했다.
1장에서는 이분법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철학이 서양철학의 뼈대로 정착되었으며, 이러한 이분법적 성격의 철학이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군림하게 된 시대적, 종교적, 사회적 배경을 살펴봤다.
2장에서는 서양철학의 기본성격인 이분법성(Dichotomie)의 근원, 이와 연관된 이원론적 테마 설정, 이에 기반한 이론 전개 방식을 세 가지 파라디그마(Paradigma)로 정립했다.
3장에서는 서양철학의 이분법적 성격으로 역설은 불가피하다는 근거를 고찰했다. 이와 더불어 역설의 의미와 종류에 대한 새로운 정리를 시도했다.

제2부에서는 서양철학에서 나타난 역설의 양상을 표본적으로 찾아 정리했다. 서양철학은 전통적으로 1장 존재론, 2장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의 3대 부분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3장 인간학에 윤리학을 포괄하면서 범위를 넓혔다.

제3부에서는 20세기에 유럽과 미국에서 전개된 중요한 철학 이론들을 고찰했다. 1장 사변론, 2장 학제 간 협동론, 3장 반이성주의로 구분했다.
새로운 이론들은 이전 이론들의 역설 현상을 극복해 보려는 내용으로 구성하였다. 이 이론들 스스로 역설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이 고찰을 통해 서양철학은 전반적으로 자신이 직면한 역설의 한계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며, 역설과 그 근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몰지각의 상태에 있다는 상황이 폭로될 것이다.

제4부에서는 18세기 철학적 역설 현상을 가장 활발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을 다루었다.
대표적인 문학작품은 한국에서도 많이 회자된 괴테의 『파우스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또는 근대 프로메테우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이다.
이 문학 작품들은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과의 이분법적 대립관계에서 스토리를 전개한다. 내용적으로는 가장 전형적인 역설적 상황을 실감 있게 형상한 것으로 해석할 때 그 문학적 사상도 돋보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전개도 역설의 근원이나 출로에 대해서는 서양철학의 한계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하나의 희망적인 길은 한반도의 전통적인 천지인(天地人) 사상과 불연기연(不然其然) 사상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제시한다.
『서양철학의 역설』은 이러한 관점에서 저술된 책이다.
“이성은 사유의 주체일 뿐 아니라 감정과 의지, 행동 등을 포괄하는 의식의 주체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이성이 언어를 수단으로 하지 않는 인지의 가능성을 찾을 때 독자들을 자주-주권-주체라는 인간 존엄의 최고봉으로 더욱 확고하게 인도하리라 생각한다.

작가정보

저자(글) 김성수
인물정보
철학자



Dr. Kim, Sung-Soo
1936년 전남 화순읍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고등학교(3회), 연세대학교 철학과 학사 및 철학 석사로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요한 볼프강 괴테)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와 관련된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3년 10월부터 2003년 9월까지 30여 년간 고국 방문을 고국 방문을 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 50여 년간 민주화 통일운동과 문화운동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초 기간에는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코리아코미티, 해외기독자통일위원회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까지 6·15공동선언실천 유럽위원회 자문위원이다. 현재 독한문화원(Deutsch-Koreanisches Kulturinstitut e.V.)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동학 동경대전 독일어 번역과 해설』 (Das Goße Buch des Tonghak von Choe.Che-U, IKO-Verlag, Frankfurt am Main, 199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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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ㆍ 5

제1부 서양철학의 기본성격
1장 이분법적 철학의 일반화 ㆍ 22
1절 이분법적 철학의 정착 ㆍ 23
1. 이분법적 철학의 대두
2. 헬레니즘 이후의 신플라톤주의
3. 그리스철학의 재활
2절 이분법적 학문의 절대화 ㆍ 35
1. 로마제국과 기독교
2. 스콜라철학의 군림
3. 이분법적 학문의 제도화
3절 이분법적 철학의 세계화 ㆍ 46
1. 유럽 사회의 근대 산업화
2. 세계의 식민지화
3. 유럽 중심주의화
2장 이분법적 서양철학의 특징 ㆍ 56
1절 사유 성격 ㆍ 57
1. 재래 사유론의 오류
2. 사유 구성의 입체성
3. 사유 성격의 이분법성
2절 이원론적 테마 설정 ㆍ 87
1. 철학
2. 사회과학
3. 자연과학
3절 이원론적 이론 전개 파라디그마 ㆍ 94
1. 일자택일/Entweder oder
2. 양자배합/Sowohl als auch
3. 양자부정/Weder noch. 일자택일
3장 역설에 대하여 ㆍ 110
1절 역설의 의미와 종류 ㆍ 111
1. 역설의 의미
2. 역설의 종류
2절 역설의 발생 근원 ㆍ 119
1. 물질과 의식
2. 부분과 전체
3. 현상과 본질
3절 비이분법적 담론 ㆍ 131
1. 도형이론
2. 불가의 여여(如如)
3. 도가의 무위(無爲)

제2부 서양철학의 역설 양상
1장 존재론 ㆍ 148
1절 존재의 시원론 ㆍ 149
1. 유존재론
2. 무존재론
3. 양립론의 역설
2절 존재의 성격론 ㆍ 157
1. 물질적 성격
2. 관념적 성격
3. 상호전환의 역설
3절 존재의 양상론 ㆍ 165
1. 실재론
2. 유명론
3. 보편논쟁의 역설
2장 인식론 ㆍ 176
1절 인식의 주체론 ㆍ 177
1. 이성론
2. 감정론
3. 옥시모론 역설
2절 인식의 성립론 ㆍ 187
1. 경험론
2. 합리론
3. 뮌하우젠 역설
3절 인식의 방법론 ㆍ 199
1. 반영론
2. 구성론
3. 악마의 순환
3장 인간학 ㆍ 210
1절 윤리학 ㆍ 211
1. 윤리규범 성립론의 역설
2. 윤리규범 원천론의 역설
3. 윤리규범 실천론의 역설
2절 심리학 ㆍ 230
1. 심리학의 근원적 역설
2. 심리치료의 역설
3절 인간학적 사회론 ㆍ 241
1. 사회 형성론의 역설
2. 사회 유지론의 역설
3. 사회 발전론의 역설

제3부 역설의 극복 시도 이론들
1장 사변론 ㆍ 258
1절 초월주의 ㆍ 259
2절 에소테릭 ㆍ 266
3절 알레테이아 ㆍ 273
2장 학제 간 협동론 ㆍ 278
1절 합동론 ㆍ 279
2절 통합론 ㆍ 286
3절 삼분법론 ㆍ 291
3장 반이성주의 ㆍ 298
1절 반합리주의 ㆍ 299
2절 비판이론 ㆍ 306
3절 해체주의 ㆍ 313

제4부 문학에서의 역설 형상
1장 파우스트 ㆍ 322
1절 시대적 배경과 작품 성립 ㆍ 323
1. 시대적 배경
2. 파우스트 작품 완성 과정
3. 새로운 안목

2절 파우스트의 비극 ㆍ 326
1.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메피스토)
2. 메피스토의 간단한 소개
3절 신에게로 도피 ㆍ 332

2장 프랑켄슈타인 또는 근대 프로메테우스 ㆍ 336
1절 시대적 배경과 작품 성립 ㆍ 337
1. 시대적 배경
2. 작가 메리 셸리
2절 작품의 전개 ㆍ 342
1. 주인공 프랑켄슈타인의 내력
2. 괴인, 프랑켄슈타인의 모습
3. 프랑켄슈타인의 행적
3절 이성의 부메랑 ㆍ 348
1. 프랑켄슈타인과 프로메테우스

3장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ㆍ 352
1절 시대적 배경과 작품 성립 ㆍ 353
1. 빅토리아 시대
2. 작품의 전개
3. 스티븐슨의 좌절

맺음글 ㆍ 366
추천사 ㆍ 368
참고문헌 ㆍ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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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정대현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나의 철학과는 다르지만 형님께서 일생 동안 추적해 오신 서양철학사에 대한 깊은 탐구가 지적 고통과 번민의 기록이 감동적이다. 모든 사람이 세계를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말할 때 철학자라면 또한 모든 사람은 형님처럼 자신의 일생을 이처럼 내보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상일 (클레어몬트대학교 코리아프로젝트 디렉터)

김성수 박사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와 역사 그리고 통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장에서 투쟁해 왔다. 제1부에서 서양철학의 역설 해의법이 이분법과 이원론을 초래하였다고 서양 문명사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분단 역시 서양 이분법의 결과라는 것이기 때문에 통일 역시 이분법과 이원론 극복에 있다고 이 책의 제1부는 말하고 있다.
최재영 (NK VISION 2020대표,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철학의 시대가 시작된 기원전 7~6세기처럼, 이제 이 책이 세상에 드러나는 2023년도는 바야흐로 서양철학 시대가 마무리되고 주체적 철학이 전 세계의 새로운 철학 사조로 자리매김하는 시발점이 되는데 김성수 박사님이 큰 역할을 해주시기를 고대한다.
이병창 (동아대학교 교수)

저자는 다양한 역설이 서양적 사유의 근본인 이원론적 사유에 뿌리를 둔 것이라 보면서 이원론적 사유의 극복을 위한 사유의 여정을 떠난다. 이것은 독일에서 오래 거주하면서 겪은 서양문화에 대한 저자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보겠다.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저자의 고투는 동학사상의 고투를 연상시킨다. 동학사상 역시 서학의 이원론적 사유를 불연기연(不然期然)이라는 개념을 통해 극복하려 한 바 있기 때문이다. 역설을 극복하기 위한 저자의 고투는 남북의 대결을 사상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고투이기도 할 것이다.
박준규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서양철학의 역설』은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특징과 한계인 역설 문제를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경계선에서 서서 연구한 김성수 박사님의 결과물이다.
제2부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철학의 3대 부분인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은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와 원주민적 비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윤리학, 심리학, 사회적 인간학을 같이 다루고 있는 3장 인간학에서는 이분법적 사유에 기반한 유럽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 역설 현상을 조목(條目)하고 있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와 원주민 연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원주민적 비판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관심 있는 분들께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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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사람은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또한 사람은 가장 창조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많은 문제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이성과 언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숙명을 가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새로운 철학은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이성은 사유의 주체일 뿐 아니라 감정과 의지, 행동 등을 포괄하는 의식의 주체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성이 언어를 수단으로 하지 않는 인지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이성은 언어적 사유가 아닌 돈오, 통찰 등으로 창조 활동의 근거가 되는 황금의 단추, 맥, 중심고리, 도축 등을 찾아내는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찾아낸 것을 확정하고 전달하는 수단임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제1부에서는 서양철학의 역사를 2500년에서 3000년으로 산정하고, 이 역사 기간 관통하고 있는 근원적 특징이 무엇이며, 이 근원적 특징인 이분법성의 성격을 고찰했다. 그리고 이 근원적 특징에 기반한 철학 이론 전개는 필연적으로 역설에 빠지게 된다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세계철학사의 효시라고 본다.

제2부에서는 20세기 이전 서양철학의 이론적 논의와 이론 전개에서 어떤 역설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가장 중추적이며, 대표적인 이론 전개를 선택해서 정리했다. 이를 통해 유럽철학 이론 전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지렛대를 제공했다.

제3부에서는 20세기에 재래철학의 오류, 한계 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론들이 대두했으나, 서양철학의 근원적인 한계(필연적인 역설 발생)를 파악할 수 없는 입지조건에서는 스스로 역설에 봉착한다는 숙명성을 밝히려 했다. 이를 통해 거대한 체계 또는 난삽한 이론 전개의 서양철학에 대한 외경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4부에서는 이성과 반이성의 갈등을 감동적으로 실감 있게 전개한 유럽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을 역설 양상이라는 지렛대로 고찰하게 되면 이 작품들의 진수를 이해할 것이다.

2022년 2월 24일에 시작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 유럽, 동아시아를 망라한 세계적 경제위기, 여기에 중국과 대만 간의 긴장과 한반도에서 남북 충돌의 고조까지 얽혀 지금 세계는 원자 대전을 예견하는 ‘아마겟돈 최후’를 회자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분법적 서양철학, 이에 기반한 세계의 학문, 정치, 경제와 문화의 역설 현상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이제 이 역설의 근거를 밝힌 데 근거해서 그 해결의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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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2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기고>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교수
기자명 김상일   입력 2020.06.02


머리말

‘코로나19’와 함께 인류의 임종이 가까워 오지 않나 하는 우려와 두려움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엘리자벹 큐버러스가 주도하는 인간의 ‘죽음학 thanatology’ 혹은 ‘임종학’을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란 죽음의 침상에서 환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관찰하는 것 정도라고 한다. 지금 지구촌 70억 인구가 거의 모두 지구의 종말과 함께 죽음의 침상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들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자. 죽음학이 그러하듯이 죽음의 침상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태도와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할일일 것이다.

46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지구의 암석층에는 그동안 수많은 생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멸종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고 이러한 층을 연구하고 거기에 이름을 매기는 학회를 ‘국제층서학회’(혹은 층서학회)라고 한다. 층서학회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과거 일만 년 동안의 살기 좋던 홀로세 holocene를 끝내고 다른 세로 접어들고 있는 데 크뤼천란 학자는 이를 ‘인류세 anthropoocene’라 불러야 한다고 한다. 이에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이상북스, 2018)에서 한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의 임종학을 다루고 있다. 

해밀턴은 인류의 임종을 막으려는 네 부류의 운동을 말하면서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시한다. 신인간중심주의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다른 세 가지 운동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데서 해밀턴의 주장이 분명해진다. 물론 해밀턴이 그렇게 연관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신인간중심주의가 그 내용면에 있어서 주체사상의 그것과 같다고 보아 인류세에 대한 ‘주체세 Juchecene’라는 층서명을 독자적으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인류세가 인류가 멸종한 다음 미래의 암반에 기록될 명칭이라면 주체세는 다가올 임종을 막아보자는 처방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해밀턴은 자기 책의 마지막 끝 단어를 ‘두 번 다시 아니어야 never again’로 끝내고 있다. 지구에 두 번 다시 이런 재앙이 오지 않게 하는 처방전은 과연 무엇인가? 

‘인류세’란 무엇인가?

‘에를레프니스 erlebnis’란 말은 ‘갑자기 우연히 생긴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말로 ‘별안간’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방식대로는 지구와 인간의 역사에 별안간 나타난 엄청난 균열의 규모를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20세기와 21세기 초의 특정한 사회현상을 뛰어 넘어 인간의 조건과 지구상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한다.”(해밀턴, 102쪽) 

이제 겨우 5000여 년도 안 되는 인간의 역사를 말하기엔 간에 풀칠 할 정도라고 봐야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가 아닌 층서학자들이 지구의 지질을 연구할 때 사용하던 절age, 세epoch, 기period, 대era, 누대eon 같은 용어들이 더욱 실감나게 되었다. 코로나가 인류 대멸종의 전조가 아닌지 지구촌이 함께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의 가장 큰 원인이 지구의 기후 변화에 있다면 질병의 원인을 지방, 인륜, 세회(사회), 세시(우주변화)의 네 가지로 분류한 이제마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인간의 질병이 오존층 파괴에 의한 기후변화와 코로나19가 무관하다 할 수 없게 되었다.

오존층 파괴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바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파울 크뤼천 박사는 2000년 "인류 전체가 지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현 지질시대를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지질시대의 가장 큰 단위가 신생대, 중생대 같은 대(代)이고, 중간이 페름기, 쥐라기 같은 기(紀)이고, 가장 작은 단위가 홀로세, 플라이스토세 같은 ‘세(世)’이다.

인류세가 다른 세와 다른 점은 세의 주인공인 인류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란 점이다. 충적세와 홍적세 그리고 홀로세 등이 있지만 공룡이 자기 살던 세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류세는 스스로 인류 자신이 ‘인류세’를 만들었고 이름마저 스스로 붙여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대로 임종의 침상에 지금 누워 있다.

크뤼천 박사가 ‘인류세’란 명칭을 붙인 다음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단행본으로 논하고 있다. 과학은 물론 철학과 신학을 망라한 시각에서 멸종 앞에 선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치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인류세’에 대하여 반론으로 ‘인간세’, ‘자본세’ 등 다른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인류세 대신에 ‘주체세’를 논해 본다. 그것도 해밀턴이 말한 신인간중심 사상이 주체사상의 ‘사람중심’과같이 들리기 때문에. 

1945년과 인류세의 시작

역사시대가 아닌 지질시대 구분법에 따라 인류문명사를 구분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생대 Cenozoic 제4기에 속하는 홀로세 Holocene이다. 신생대가 시작된 지는 6600만 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가운데 제4기가 시작된 지는 고작 258만 년 전이다. 그리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년 전부터 홀로세에 들어섰다. 그런데 바야흐로 그 홀로세가 우리 인간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끝나고 인류세도 인위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크뤼천이 1945년을 찍어서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원자폭탄이 투척된 이래로 지구촌 곳곳에서 핵실험의 결과로 10만 년이나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방사성 동위원소가 거의 영구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말름(Andreas Malm) 같은 사람은 인류세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본세 Capitalocene’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여성해방 운동가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자본주의란 궁극적으로 부유한 백인 남성중심 문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와 대척점에 있는 술루(Chthulu)를 따와 ‘술루세(Chthulucene)’라 하자고 한다. 

지금까지 인류세를 정의하는 제 관점에서 볼 때에 인류세는 우리 한반도의 운명과 어느 하나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어 보인다. 1945년과 자본주의, 그리고 백인 남성 문화가 인류세 정의의 중심에 등장하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북이 같이 인류세보다 더 적합한 용어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관점에서 홀로세 다음에 급격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와 이에 대처하는 방향은 무엇인가?

지구과학자들이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격한 증가와 그로 인한 지구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연쇄적 영향 때문이라 한다(해밀턴, 16쪽). 1945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지구 시스템에는 급격한 혼란이 조성되었다. 변화의 속도와 파급력이 인류 역사상 전체를 통해 볼 때에 전에 없던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를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부른다. 100만 년 이래의 암석 기록들을 보면 1945년 원자폭탄 피폭 이후 지표면에 퇴적된 방사능이 급작스럽게 쌓이게 되었고 이를 ‘밤 스파이크 Bomb spike’라 부른다.

이 ‘밤 스파이크’와 함께 일본은 패망하였고 우린 해방과 함께 분단이 되었다. 우리 한반도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에 인류세도 자본세도 술루세도 다 옳다. 1945년이 인류문명사에서 새로운 의의를 갖는 이유는 ‘자연’이란 개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이 어떻게 어거할 수 없는 것이라 정의되어 왔는데 1945년 이후부터는 인간이 자연을 만들고 있으며 그 만들어 놓은 자연에 인간 자신이 종속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세먼지 같은 경우는 인간이 만든 결과이지만 인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 곧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과거 1만년 홀로세 동안 인간은 따뜻한 기후, 그리고 맑은 공기와 물을 즐기며 잘 살아 왔다. 다시 말해서 홀로세가 주는 제1의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가자’고 구가하면서 잘 살아 왔는데 이제 인류세의 도래와 함께 제2의 자연, 즉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연을 향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을 수 있겠느냐 이다. 우리에겐 돌아 갈 자연은 없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공기도 공기이지만 앞으로 인류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물이다. 인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이 점점 부족해져 간다는 것이다. 미국 엘에이 근처 빅 베어란 산정에는 산정호수가 있다. 오랜만에 방문을 했을 때에 그 많던 물이 거의 다 사라지고 바닥만 드러나 있었다. 과연 물부족이란 사태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늘엔 마실 공기가 없고 땅엔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멸종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제2자연의 도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와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전도시키고 말았다. 1세기 전, 아니 30여 년 전만 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해밀턴은 경고하고 있다. “지구 경로의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변화가 우리의 미래이며, 역사적 균열이 존재하기 이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고방식들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이다”(해밀턴, 70쪽).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잘났다고 자랑하던 그러한 관념부터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GNP나 GDP를 자랑하고 매년 경제성장률이나 각국마다 비교하는 사고방식을 언제까지 더 유지할 것인가?

인류세 앞에 잘못 진단한 운동가들 

그럼 인류가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던 것인가? 당장 1989년 동구 공산권이 무너질 때에 자본주의의 만수무강을 외치고 공산주의의 영원한 패망을 선전하던 사람들이 지금 인류세에 대하여 무슨 언질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인류가 화석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지금도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부르짖고 있을 것인가? 

‘인류세’의 저자 해밀턴은 인류 멸종의 위기 앞에 임종의 병상에 처해 인간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족속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위기는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주장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② 이제 인간에게 해결할 능력이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환경운동가들과 생태학자들-‘포스트휴머니즘’, ③ 인간에게 위기 극복의 강한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에코모더니스트’, ④ 인간의 강함과 지구의 강함을 더욱 강화시켜 양자가 맞물리게 해야 한다는 ‘신인간중심주의’가 그것이다. 표로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인류의 임종의 침상에 나타나 너도 나도 자신들이 해결사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일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외하곤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④번째로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the new anthropocentrism)를 대안으로 들고 있다. 이 마지막 부류의 주장은 환경 파괴자들이든 보호론자들이든 자기들의 힘을 과신하고 남용해 무절제하게 사용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 더 힘을 절제 있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해밀턴은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라고 말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는다. 다만 반자본주의, 반백인남성주의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서양 철학과 신학 전반에 걸쳐 비판적이다. 서양 철학의 주류가 된 이원론적 사고 구조와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구조를 만들어 결국 환경 파괴 주범이 되었다.

인류세가 반자본주의 그리고 반백인남성주의를 겨냥한다면 미국에 대척점에 서 있는 곳과 나라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고, 그 곳은 ‘북부 조선’ 혹은 ‘북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어떤 희망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걸고. ‘인류세’란 말 자체가 인류의 멸종을 전제한 후의 지구과학에 부쳐진 이름이라면 이 시점에서 이 지구를 구제한다는 전제를 할 때에 그 곳은 당연히 자본주의와 백인남성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될 곳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북부 조선’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자본세와 인류세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제이슨 무어이다. 그는 크뤼천의 ‘인류세’란 말에 반기를 들고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내었다. 층서위원회는 되도록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려고 한다. 홀로세 다음으로 ‘자본세’가 집중조명 되는 이유는 제2의 자연이 자본주의를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산업혁명 이후 소비지상주의가 만연했고, 화석연료 생산업체들의 로비의 영향력으로 1945년 제2차 대전 이후부터 놀랄 만큼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되었다. 

1945년, 하필이면 한반도 분단과 때놓을 수 없는 이 기간에 국제층서위원회가 ‘인류세’라고 명명한다면 지구의 종말과 함께 한반도는 지구의 지층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백인남성 그리고 부자 자본주의에 대척점으로 혹자들은 정착토착민(settler colonialism) 즉, 미국 인디언을 손꼽는다. 인류세 담론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백인남성은 1492년 이래로 정착토착민들을 살던 곳에서 추방하고 살해한 후, 거기다 오늘날 자기들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여 드디어 인류세를 도래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세가 말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착민들이 살아 온 방식과 그들의 토착지식과 정신세계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정착토착민을 강화시켜 다른 백인 남성부류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에서 토착민들이 외래인들을 밧줄로 묶어 두면 힘을 못 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외래인들은 밧줄을 끊고 말았다.

토착민들이 백인 부유 남성들과 맞서 싸우기란 바위에 계란 던지기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자본주의-백인남성들에 맞서고 인류세를 대신할 수 있는 정체는 없다는 말인가? 

크뤼천은 책의 결론에서 ‘새로운 인간’ 즉, ④‘신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신인간상이란 인간의 ‘강해진 힘’과 ‘지구의 강해진 힘’이 결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신인간상은 인간의 강해짐이 자연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환경 재앙이 왔다는 ②포스트휴머니즘이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반대한다. 다른 한편 ③인간을 강하게 함으로 지구를 약하게 하려는 에코모더니즘도 부정한다.

크뤼천은 “일부의 철학자의 입장은 지구의 강해진 힘만을, 다른 입장은 인간의 강력한 힘만을 인정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두 힘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④“우리가 지구와 인간의 힘 모두를 인정할 때 우리는 인간이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란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욱 강해졌다”와 같다. 인류 문명사란 인간과 자연 간의 힘겨루기이었으며 인간과 지구가 모두 강해지는(win-win) 것이 새로운 인간상인데, 그것은 이율배반적 혹은 역설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를 ‘이중진리’라고 한다. 인간과 자연은 지금까지 대립 구도이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예속 내지 종속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낡은 인간상이다. 그래서 인간과 지구가 모두 동시에 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상이라고 한다. “신인간 중심적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91)

인간이 자연과 매듭같이 맞물린다는 것은 ‘국지적 local’이기도 하고  ‘보편적 global’이기도 한 ‘glocal’이다. 자연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연에 의해 제약받고 있으며, 힘과 자주성을 누리고 있지만 그 자주성이 방종에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중심적 자아이다.  

신인간중심주의와 다른 견해들의 비교 

해밀턴은 인간과 지구(자연)에 ‘약해진 힘’과 ‘강해진 짐’을 적용하여 위의 표와 같이 네 가지로 지금까지 나타난 이론 혹은 운동을 분류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의 임종을 앞두고 임종의 침상에서 보이는 네 가지 종류가 일목요연하게 표로서 제시되었다. 우측 하단의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힘도 지구의 힘도 모두 강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다른 세 가지 이론과 운동 차원에서 볼 때에 모두 비판의 대상일 수 있다. 

①은 종교적 근본주의적 입장으로 인간도 자연도 모두 무기력하여 오직 신의 섭리만이 답이라는 주장으로 신천지를 비롯한 기독교의 빛바랜 주장으로서 제일 처음으로 폐기처분 될 수밖에 없다. ③에코모더니즘 운동은 잘 알려진 대로 인간의 기술이 갖는 힘을 휘두르거나 강화시켜서 지구 자연을 더 제어해 나가야 한다는 모더니즘을 더 강화시키자는 운동이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중심주의와 인간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지구를 인간이 제압해 약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들은 마치 에덴동산을 거니는 아담과 하와가 신으로부터 자연을 잘 다스리라고 부탁 받은 청지기와 같이 지구상에서 행세하려 한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노예에 대한 착한 주인이 없듯이 착한 청지기는 없었다. 에코모더니즘은 이렇게 아직도 홀로세에 인간이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 중심주의 강한 지구 그리고 약한 인간을 대망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영향력을 가장 많이 끼치고 있는 조류이다. 오늘날 위기가 인간의 힘이 비대해지고 지구가 약해진데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지구(가이아)에 힘을 실어 주고 인간을 약화시키자는 주장이다. 신유물론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청지기 직분을 박탈해 자연에 돌리려 하나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은 오히려 인간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오늘날 주변의 페미니즘과 생태철학 그리고 포스트 식민주의 운동이 모두 포스트휴머니즘 운동에 해당한다. 

신인간중심주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자연을 약화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서로 맞물리자면 인간과 지구(자연) 간에는 서로 균형이 같거나 맞아야지 어느 하나가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최근에 와서야 자기 당착에 직면하여 인간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신인간중심주의가 주장하는 인간과 자연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페미니즘이나 생태환경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교모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자가당착적 모순에서 벗어나려하는 모습을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뉴턴-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들이 인간과 지구를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이에 ④신인간중심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하나 정신과 물질의 상호 맞물려 있음을 인지하고 인간도 지구도 상호 강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주체사상과 신인간중심사상 

지금까지 신인간중심주의를 기준으로 다른 세 가지 견해들을 각각 비교해 볼 때에 해밀턴이 말하고 있는 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에 많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맞물림 그리고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의 극복이란 관점에서 볼 때에 두 개의 사람중심 사상은 멀지 않고 가깝다.

주체사상이 해밀턴의 인류세의 새인간중심주의와 일치하는 면은 유물론과 관념론 이원론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이 갈망하는 대단원이 이원론의 극복에 있었지만 오히려 더 균열을 강화시킨 면이 있다면 주체사상은 이에 적절히 대처했다. 중국과 구소련이 낫과 망치(유물론)를 당 마크로 삼은 데 대하여 ‘북조선’은 거기에 붓을 넣었다. 이는 상징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지구의 힘을 모두 강화시켜야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의 논리에 의하면 세 가지 생명력인 물질적 생명력, 정신적 생명력, 사회협조적 생명력에 의하여 추동된다. 그래서 인간의 3대 생명력의 발전수준에 알맞게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의 수준이 결정된다. 이것은 주체사상이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그리고 의식성으로 정의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인간중심 세계관에서 보면 객관적 존재성의 측면만을 물질세계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유물론이나 주관적 측면만을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관념론은 모두 배격된다.

즉,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역사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세계관이 있었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힌 것은 없었습니다. 세계를 관념이나 정신의 세계로 보는 관념론자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세계관 1), 지난 시기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본 유물론자들도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히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세계관 2). 주체사상은 사람을 단순히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종래와는 달리 세계의 주인인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와 그 발전에 대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였습니다(세계관 3). (괄호 안은 필자의 것임)

그러면 유물론과 관념론을 조화시킬 존재는 무엇인가? 주체사상은 그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게 된다. 사람을 관념으로만 파악하려는 세계관1과 물질로만 파악하는 세계관2의 한계와 잘못을 극복하고 그것을 종합시켰을 때에 사람 그 자체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세계관3이다. 여기에 독특한 사람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주체사상에 대한 온갖 오해와 곡해가 발생하게 된다. 

먼저 ‘사람 중심’이란 말이 무슨 새로운 맛과 의미를 갖느냐고 비판한다. 역대 철학으로서 사람을 다루어 그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철학이 어디 없었느냐고 비아냥거린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부하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르네상스로부터 인본주의 또는 인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8세기 계몽기에 이르러서는 존 로크, 루소로부터 대표되는 사회정치 철학이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권리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 등장한 인간 중심 사상은 거의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원시 고대의 자연 종교의 신관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면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세기 스콜라 철학은 인간을 다시 인격신의 예속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철학은 인간을 신의 복속 상태에서 해방시키려 했으며, 그 결과 빚은 과오는 인간을 너무 개별적이게 했으며 인간을 원시 동물적 형태로 끌고 가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서구의 인간주의는 신중심 아니면 개인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물질 아니면 정신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인간을 자연과 유리된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다윈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인간관인 것이다. 인간을 경제적 조건과 성적 본능으로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나 밀의 인간관은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만 파악함으로써 인간 소외를 초래했고 이 점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갖고 있는 인간상의 병폐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형성시킨 데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한몫 거들었다고 할 수 있다. 창 없는 단자 windowless monad 는 창살 없는 아파트적 공간 속에 인간을 밀폐시키고 말았다.

위에서 말한 ①종교 근본주의, ②포스트휴머니즘, ③에코모더니즘, ④신인간중심주의를 주체사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먼저 세 가지는 모두 서양 철학이 범한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해밀턴이 제시한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그래서 인류세를 ‘주체세’로 대치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밀턴이 아무리 새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서구 전통 속에서 그것을 구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류의 종말이란 임종의 침상에서 그 어느 의사도 환자를 바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색과 구호는 ‘신인간중심주의’라고 하지만 정치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구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이미 역사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있다. 이를 해밀턴은 ‘자연과정(natural process)’이라고 한다(책97). 필자는 이를 항일유격대원들이 춥고 굶주림 속에서도 왜 야생동물에 손을 대지 않은 데서 찾으려 한다.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전권에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전향하기는 했지만 김동하란 남부군이 쓴 ‘노고단은 알고 있다’를 읽던 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이현상을 만나러 갔을 때에 막사 앞으로 노루가 지나가는 데 총으로 쏘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 동료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우리 항일유격대와 야생 동물은 같은 운명이라네. 서로 돕지 않으면 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렵지”라고 말하는 데서 회고록에서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격대원들은 산속에서 굶어 죽어도 야생동물을 살상하지 않았다. 자연과정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실로 회고록은 많은 사실을 알게 하지만 야생동물과 유격대원들 간의 공동체 운명 정신은 인류세 앞에서 돋보이게 한다. ‘자연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주체사상이 죽어 멸종돼 가는 인류에 희망을 던져 인류세를 대신하는 주체세로 남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서 대동강변 주체탑 옆에 서 있는 당마크는 인류가 멸종된 다음에 이 지구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살았다는 한 표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과 자연지구의 조화, 궁극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 그것 이외에 인간이 다음 세에 남길 다른 것이 무엇일지 아직 모르겠다. 

 

2021/10/03

이호재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 - 에큐메니안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 - 에큐메니안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한국 토착화 신학의 성과와 한계(1)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2.04 

청년 변찬린은 어릴 적부터 받은 한문 교육으로 유가 경전에 익숙하였고, 중학교 때 캐나다 장로교 계통의 신앙에 입문하여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한다. 청년 시절에 칼 바르트의 『교의학』, 라인홀드 니버의 『비극의 피안』, 에밀 부르너의 신학, 알버트 슈바이처의 『문화철학』 등 서구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청년기를 보내면서 한국 교회에서 ‘살아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 서구 신학의 한계를 인식한다. 스스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으로 세계 종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종교적 목표를 세운다. 이때는 한국 그리스도교가 토착화 담론이 촉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토착화신학의 발전

한국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조성된 토착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4년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한국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가 개최되어 『사목』 발간과 1987년 설립된 한국사목연구소가 토착화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2007년 주교회의 결정으로 『사목』 폐간과 한국사목연구소가 해체를 맞이하였고 지금은 토착화에 대부분 냉담한 실정이다.(1)

개신교는 서구 교회전통에 근거를 둔 교파교회가 설립되고 서구에서 신학적 사유체계를 배운 신학자에 의해 교파 신학의 지형이 공고화된다. 이를 유동식은 태동시대(1885-1930), 정초시대(1930-1960), 그리고 전개시대(1960-1980)로 구별하면서, 길선주와 박형룡 등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윤치호와 김재준의 사회 역사 참여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 신학, 그리고 최병헌과 정경옥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한국 신학의 광맥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합동), 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기장)과 기독교대한감리교(감신-감리교)의 학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김흡영은 여기에 신정통주의의 이종성을 거론하며 한국 최대 교단인 예수교 장로회(통합)을 대변하는 장신(광나루)학맥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공로는 있지만, 한국의 독창적인 신학을 수립했다기 보다는 서구신학을 한국의 종교적 토양에 이식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신학적 환경에서 감신과 기장을 중심으로 한 토착화 신학자와 조직신학자는 상당한 신학적 성과물을 내었다. 유동식의 ‘풍류신학’,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 서남동·안병무·함석헌 등의 사상이 응축된 ‘민중신학’, 성(誠)을 실천적으로 해석한 김광식의 ‘언행일치신학’,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대화를 촉발한 변선환의 ‘대화신학(?)’, 김흡영의 ‘도의 신학,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 이정배의 ‘생명신학’ 등이다.



이 가운데 풍류신학은 토착화 신학의 큰 성과물이며, 민중신학은 세계신학계에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알려졌으며, 김흡영의 도의 신학과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도 세계 신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토착화 신학은 이미 낡은 신학적 주제이고, 주요 계승자들은 ‘문화신학’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신학적 사유를 확대하고 있다. 어찌 보면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와 ‘이해지평’에서 융합하지도 못한 채 ‘토착화의 개념’조차도 정립되지 못하고 방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토착화 신학은 개신교 내에서조차 토착화 신학의 성과물이 한국 교회에 주류담론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한국 종교지평에서 토착화 신학이 수용되지 못한 채로 어정쩡한 상태라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오히려 토착화 신학이 서구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하는 미완성의 신학이라고 말하면 과언일까?(2) 예를 들면 한민족의 고유한 ‘하늘님’(3)을 가톨릭은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하며 신의 이름조차 통일시키지 못하고 한국의 하늘님을 분열시키고 있다. 푸코가 말한 ‘언어와 권력’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굳이 상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종교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변찬린의 한국 토착화신학에 대한 비판

이런 토착화 신학에 대해 1982년 변찬린은 신약 사건과 인물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 (하)』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가 논의되어 메스콤의 파도를 타는 듯 하더니 판소리 찬송가 몇 편을 부르는 행사로 끝났다. 구미 신학자들이 부는 마적魔笛에 놀아난 우리들은 꼭두각시의 춤을 추었을 뿐 한국인의 심성, 그 깊은 곳에서 흥겹게 울려 나오는 가락과 신들린 춤사위를 우리는 이날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갓 쓰고 양복을 입은 몰골로 어릿광대의 춤을 춘 모습이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이었다.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녹아든 노래 가락은 판소리의 한맺힌 가락과 흥겨운 서도민요西道民謠, 구성진 남도창南道唱의 신들린 선율과 농악이지 바그너의 가극과 베토벤의 교향곡과 헨델의 할렐루야가 아니다. 마늘과 된장 냄새가 우리들의 체취이지 치-즈나 뻐터의 누린내가 아니다.(4)


풍류학자로서의 변찬린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한 서구신학의 한국화를 비판하며, 한민족의 종교적 근본어인 ‘풍류’를 사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1970년대 전후하여 ‘풍류’를 메타-언어로 하여 궁극적 인간을 ‘풍류체(風流體)’, 화쟁하고 회통하는 인식체계를 ‘풍류심(風流心)’, 자유자재하고 원융무애한 삶을 사는 인간을 ‘풍류객(風流客)’이라고 하며 그의 종교적 상표로 사용한다. 유동식이 풍류신학을 말하기 전인 10여 년 전의 일이다.

변찬린의 ‘풍류’해석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한국 기층종교 문화인 선맥과 무맥의 대척점에 있으며, 또한 풍류(도)라는 창조적 영성이 화랑도라는 제도조직과 팔관회 등의 국가의례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하는 핵심질문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성서의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가 ‘이해지평’에서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만난다면 어떻게 만나는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물음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풍류’를 가지고 성서와 한국 종교문화를 동시에 고찰한 두 종교인은 종교비평되어 한국 학계에 새로운 담론으로 토론되어야 한다.

풍류신학에 대한 이해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짧은 지면에 풍류신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풍류신학은 유동식의 신학적 상표로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무교로 보고 한국 종교문화에 그리스도교 신학을 토착화시키려 한 신학이다. 풍류신학의 풍류(風流)는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浪碑序」에 출전을 둔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일컬어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가르침이요, 무위하게 일을 대하고, 말함없이 가르침을 배푸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으뜸가는 가르침이요, 모든 악을 짓지않고 모든 선을 힘써 행하닌 이는 측건태자(석가)의 교화다.


풍류는 이두식 한자로 우리 말의 불(夫婁)이며, 광명, 태양과 관련되는 뜻을 가진다. 또한 풍류는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희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는 의미와 유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풍류신학은 「난랑비서」에 담긴 풍류의 개념을 세속을 초월한 종교적 자유와 삶에 뿌리내린 생동감과의 조화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멋’이라고 보며, 또한 유·불·선을 다 포함하는 포월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의미를 ‘한’이라고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되게 하는 풍류도의 효율성을 ‘삶’이라는 우리 말로 개념화한다. 풍류는 ‘멋진 한 삶’ 혹은 ‘한 멋진 삶’으로 현대화하여 신학의 골격을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풍류도의 원시 종교적 표출인 무교(고대)를 토대로 불교(신라, 고려)와 유교(조선)와 그리스도교(기독교)가 교체하며 전개되어 온 역사”라고 한국의 종교사상을 개괄한다. 또한 “멋진 한 삶”이라는 풍류도의 기본 구조로 “무교는 원시적 형태의 멋의 종교요, 불교는 철학적 한의 종교요, 유교는 윤리적 삶의 종교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종교문화사는 민족의 꿈인 ‘멋진 한 삶’의 실현 과정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 문화사적 위치로 보아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명은 분명해진다.”고 말하고 있다.(5) 이런 풍류적 사유를 통해 1983년부터 ‘풍류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정립하고 있다.

김경재는 풍류신학에 대해 「복음과 한국종교와의 만남」이란 부제가 붙은 『해석학과 종교신학』이란 책에서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에 토착화될 때 네 가지 모델을 언급하면서 풍류신학이 접목모델로서 바람직한 문화신학의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이정배도 유동식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신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예술신학으로까지 확장된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풍류신학에 대한 한국 종교학계의 평가

그럼 한국 종교사의 지평에서 풍류신학은 어떻게 자리매김이 가능할까? 최준식은 풍류신학은 한국 전통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완성된다는 성취설을 바탕에 둔다고 비판하며(6), 김상근은 유동식의 종교적 정체성을 종교학자 혹은 토착화 신학자로 보지 않고 선교신학자라고 본다.(7)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한국 종교문화가 성취되어야 한다는 선교신학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평가이다.

과연 한국 종교문화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풍류신학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2002년 8월 30일 유동식, 김경재, 이정배, 최인식이 연세대학교 알렌관에서 풍류신학을 주제로 한 좌담회에서 최인식은 “저는 유 선생님께서 어떤 조직신학을 쓰고 성서를 주해하고 체계화시키지는 않으셨지만, 일생을 한국 신학을 위한 틀 짜기, 그것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이룩해 주셨다.”고 한다.(8) 또 허호익도 풍류신학이 성경해석의 원리로 제시되지 못하고 수사적인 작업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9)

김광식은 근본적인 평가를 한다. “1960년대 토착화 논쟁을 거쳐서, 1970년대에의 무교문화론을 낳았고, 1980년대 이후로 풍류신학 즉 복음의 무교적 예증이 시도되어온 것이다”라고 말한다.(10) 이 말에는 그리스도교 복음이 한국의 종교원류인 무교에 의해 왜곡되며, 한국 종교문화의 본류를 무교로 보는 신학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에 이진구도 동일한 논지를 전개하며 유동식의 무교문화론이 보수적인 기독교가 지닌 무교에 대한 미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였지만 무교를 한국종교의 원형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하고 있다.(11)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이 가능한가

신학자는 기본적으로 풍류신학의 한국 종교문화에 대한 해석은 성과라고 평가하지만,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에 적용이 가능한 신학인지를 반문한다. 반면에 우리는 한국 종교지평에서 성서해석에 적용이 되지도 않는 풍류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 즉 선교신학으로 한국 종교문화를 재단하지 않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초는 아닐까?

이런 상반된 평가의 공통점은 ‘풍류’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이며, 한국의 기층 종교문화가 선맥(僊脈)이냐 혹은 무맥(巫脈)이냐를 둘러싼 한국종교의 중핵을 판단하는 핵심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한국종교와 한국신학』을 발간기념으로 유동식, 김경재, 김광식, 이정배가 참석한 좌담회에서 풍류신학의 풍성한 신학적 성과를 평가하면서 나온 말이다.
유동식 : [중략] 전에 누가 이런 말을 합디다. 성서에서 “道”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仙)”맥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이죠. 선맥이 흐르는 것 그것을 보지 못하면 성서를 제대로 못본다는 거예요.
김경재 : 선맥(仙脈)이 무슨 뜻입니까?
유동식 : [중략] 유·불·선에서도 말하는 … 하나의 새로운 존재, 그것을 요한이 제시해 준 것이거든요. 도성인신이라고 하는 그 표현 자체부터 … 결국은 우리가 “도”를 통해야 하늘나라에 가는데 …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는 말은 방법과 목적이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동양적 인식입니다.(12)


‘도’만이 아니라 ‘선맥’을 찾아라

유동식은 누구에게서 “성서에서 ‘도’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맥”을 찾아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까? 변찬린은 세계 신학계에서 최초로 선(僊)과 선맥 등의 도맥(道脈)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비조(鼻祖)이다. 1979년에 “성경 속에 뻗어내린 대도(大道)의 정맥(正脈)은 선맥[僊(仙)脈]이었다. 성경은 선僊을 은장한 문서이다. 에녹과 멜기세덱과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로 이어지는 도맥(道脈)은 이날까지 미개발의 황금광맥이었다”고 1979년 『성경의 원리 (상)』 머리말에서 말한다.

세계 신학자 가운데 동방의 신선사상과 선맥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자가 없었다. 변찬린이 세계 최초이다.(13) 심지어 변찬린은 ‘풍류는 선(僊)’이라고 한다.

다음 호에서 “변찬린의 선맥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을 주제로 대화하기로 한다.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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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심상태, 「새 50주년을 위한 토착화 신학 진로 모색」, 『신학전망』177, 30-64,
(미주 2) 길희성, 「한국 개신교 토착신학의 전개와 문제점들」, 『종교·신학 연구』1, 347-35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 82, 1993, 113-124.
(미주 3) 필자가 하늘님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천주교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과 구별한 한국의 고유한 지고신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미주 4) 변찬린, 『聖經의 原理』下(서울: 도서출판 가나안, 1982), 1.
(미주 5) 유동식의 저술은 『素琴 柳東植 全集(10권)』(2009)에 간행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미주 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82, 1993, 115-116.
(미주 7) 김상근, 「1980년대의 풍류신학과 21세기 선교 신학」, 『신학사상』, 『한국문화신학회논문집』10, 2007, 164-183.
(미주 8) 소금 유동식 전집 간행위원회, 『素琴 柳東植 全集(10권)』, 한들출판사, 2009, 476-477.
(미주 9) 허호익,「단군신화의 기독교 신학적 이해」『단군신화와 그리스도교』, 대한기독교서회, 2003, 253.
(미주 10) 김광식, 「샤마니즘과 風流神學」, 『신학논단』 21, 1993, 59-81.
(미주 11) 이진구, 「샤마니즘을 보는 개신교의 시선」, 『기독교사상』, 2017, 59-61.
(미주 12) 소금 유동식 박사 고희 기념논문집 출판위원회, 『한국종교와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3, 126-127.
(미주 13) 김상일, 「한국의 풍류사상과 기독교를 선맥사상으로 융합한 사상가의 복원」, 《교수신문》 6면, 2017.12.18.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2021/08/03

알라딘: 한류와 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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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와 한사상 - 한류의 세계화를 위한 한사상의 이론과 실제   
김상일,이도흠,박성수,김용환,허호익,강은해,김주미,정현숙,조춘영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09-01-20
 미리보기
정가
25,000원
양장본464쪽

알라딘: 천지인신학 | 허호익 신학마당 1 허호익

알라딘: 천지인신학


천지인신학  | 허호익 신학마당 1  
허호익 (지은이)동연출판사2020-11-30

619쪽
책소개

허호익 신학마당 1권. 

한국신학을 새로이 모색하기 위해 한국문화의 구성원리인 천지인 조화론을 한국신학의 해석학적 원리로 삼아 천지인신학의 성서적 기초 제시하고, 아울러 신론, 기독론, 구원론, 영성신학 등 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들에 대한 천지인신학적 해석을 모색한다.

목차
머리말

제1장 한국신학 방법론과 천지인신학의 모색
I. 한국신학의 신학적 타당성
II. 동 ‧ 서 신학의 차이와 한국신학의 특이성
III. 한국신학의 방법론 유형
1. 자생적으로 전개한 한국신학
2. 주도적으로 도입한 한국신학
3. 해석학적으로 모색한 한국신학
IV. 한국신학의 해석학적 원리 및 방법의 재검토
1. 한국신학은 과연 한국적인가? 한국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2. 한국신학은 성서적인가?
3. 한국신학은 신학적인가?
4. 한국신학은 목회적인가?
5. 한국신학은 통전적인가?
6. 한국신학은 서양 신학에 대해 대안적인가?
V. 천지인신학의 과제

제2장 한국신학과 천지인신학의 사례
I. 길선주의 말세삼계설과 천지인 조화의 이상 세계
1. 길선주의 말세삼계설
2. 길선주의 천지인 조화의 이상 세계와 천지인신학
II. 최병헌의 삼륜론과 천지인신학
1. 최병헌의 비교종교학 방법론
2. 최병헌의 삼륜론
3. 최병헌의 유불선에 대한 삼륜론적 해석과 천지인신학
III. 서남동 신학의 삼태극적 구조와 천지인신학
1. 서남동 신학의 삼태극적 구조와 통전적 자연신학
2. 서남동의 역사와 자연의 통전적 역사관
3. 서남동의 유신론과 무신론의 통전적 신관
4. 서남동의 개인 ․ 사회 ․ 자연 윤리의 통전과 천지인신학
IV. 유동식의 ‘한 멋진 삶’의 풍류신학과 천지인신학
1.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2.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신학
3. 유동식의 풍류신학의 쟁점과 천지인신학

제3장 천지인신학의 성서적 기초
I. 성서의 주제: 하나님 ‧ 땅 ‧ 사람
II. 창조의 신관 ‧ 인간관 ‧ 자연관
III. 타락과 원죄에 관한 천지인신학적 해석
IV. 시내산 계약의 천지인신학적 해석
V. 초기 이스라엘 계약공동체의 세 가지 상징의 천지인신학적 해석
1. 법궤의 계약조문과 계약공동체의 종교제도
2. 아론의 지팡이와 계약공동체의 정치제도
3. 만나 항아리와 계약공동체의 경제제도
VI. 예언자들의 천지인 신앙
VII. 최초의 신자 마리아의 신앙고백과 천지인신학
VIII. 주기도문과 팔복의 천지인신학적 해석
1. 십계명에 관한 천지인신학적 해석
2. 복음과 팔복에 관한 천지인신학적 해석
IX. 예수의 3대 비유와 천지인신학
1.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하나님과 바른 관계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웃과 바른 관계
3. 포도원 품삯의 비유: 물질과 바른 관계

제4장 구약성서의 영 이해와 천지인 영성
I. 영성에 대한 일반적 이해
II. 구약성서의 루아흐의 다양한 용례
III. 구약성서의 루아흐 용례의 세 가지 의미
1. 하나님의 루아흐
2. 인간에게 작용하는 루아흐
3. 자연에 작용하는 루아흐
IV. 구약성서의 루아흐의 삼중적 적용과 천지인신학

제5장 하나님의 형상의 관계론적 해석과 천지인신학
I. 하나님의 형상론의 쟁점
II. 실체론적 해석
III. 외형론적 해석
IV. 인권론적 해석
V. 통치론적 해석
VI. 관계론적 해석과 천지인신학
1. 바르트와 몰트만의 이중 관계론적 해석
2. 본회퍼의 삼중관계론적 해석과 천지인신학
VII. 하나님의 형상의 삼중적 삼중관계와 천지인신학

제6장 샤르뎅의 삼성론과 천지인신학의 기독론
I. 현대 기독론의 새로운 과제
II. 우주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세 실존양식
III. 샤르뎅의 그리스도의 우주성과 그리스도의 삼성론
IV. 그리스도의 삼성론과 천지인신학의 통전적 기독론

제7장 영성신학의 세 차원과 천지인 영성
I. 영성신학의 등장
II. 성서의 영 이해, 성령론, 영성신학
III. 하나님과 교제의 영성: 개인적 수직적 영성
IV. 자유와 해방의 영성: 사회적 수평적 영성
V. 창조와 자연의 영성: 자연친화의 순환적 영성

제8장 구원론의 유형과 천지인신학의 통전적 구원론
I. 구원론의 여러 유형과 그 쟁점
II. 고전적 속전설
III. 전통적 객관적 충족설
IV. 전통적 주관적 사랑감화설
V. 종교개혁과 칭의론
VI. 현대신학의 화해론과 해방론
1. 바르트의 화해론
2. 몰트만의 해방론
3. 구티에레즈의 해방론
4.서남동의 한의 속량론
VII. 구원론의 통전적 이해
1. 개인 ․ 사회 ․ 생태구원의 통전성과 천지인신학
2. 칭의 ․ 성화 ․ 영화의 통전성과 천지인신학
VIII. 천지인신학의 통전적 구원론

제9장 파니카의 ‘우주신인론적 영성’과 천지인신학
I. 파니카의 생애와 다양한 종교체험
II. 종교의 공통체험으로서 우주신인론적 영성
III. 우주신인론의 배경으로서 불이론과 삼위일체론
1. 일원론 및 이원론의 극복과 힌두교의 불이론
2. 불이론과 삼위일체론
IV. 우주신인론적 영성의 세 차원
1. 신적 차원
2. 인간적 차원
3. 우주적 차원
V. 우주신인론적 영성의 세 차원의 삼중적 관계
VI. 파니카의 우주신인론과 천지인신학
1. 파니카의 불이론과 원효의 불이론 및 해월의 삼경론
2. 파니카의 우주신인론적 영성과 천지인신학

부록: 통일 이후의 통일신학의 과제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의 삼균제도와 이스라엘 계약공동체의 대안국가의 이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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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루터와 하르낙의 주장처럼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로 발견치 못한 하나님을 독일말로서 듣고 배우는 것’과 ‘독일인이 그들에게 전해 내려온 종교를 진정으로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는 노력’을 독일신학의 신학적 근거로 삼았다면, 우리 한국인들도 똑같은 의미에서 ‘한국신학’을 주장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자나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한국인들의 마음 밭에 전해진 기독교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한국신학의 신학적 근거라 할 수 있다.
유동식의 ‘풍류도’나 김상일의 ‘한 철학’은 한국 고유의 사상성에 기반한 방법론을 통해 고래古來의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는 구체적인 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시적 방법으로 한중일 동양 3국의 유불선 3교를 비교하여 한국적인 것을 찾거나, 통시적으로 유불선과 다른 한국 고래의 고유하고 시원적인 특성을 찾는 것 자체가 본격적인 신학적인 작업일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한국신학을 위한 정지整地 작업일 뿐이다. 또한 한국 유불선 3교와 기독교를 각각 비교 연구하여 개념이나 용어의 유사성을 찾는 것 자체도 본격적인 한국신학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비교종교학의 방법 역시 정지작업에 불과하므로 섣불리 신학이라 명명하기가 주저된다.
한국신학은 우선 ‘한국적인 것’ 즉 한국 종교나 문화나 사상이 고유하고 특수한 내용들의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러한 한국적 심성으로 성서를 읽고 서구적 심성으로는 볼 수도 없었고 보지도 못한 ‘성서 안의 놀랍고 새로운 가르침’을 찾아내고, 이를 한국적인 논리로 새롭게 풀어내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문화에 기초한 서양 신학 자체의 한계와 약점을 보완하는 한국신학적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선 이전에 시도된 몇 가지 한국신학의 여러 유형을 검토하면서 새로운 한국신학 모색의 방법과 과제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_ <제1장 _ 한국신학 방법론과 천지인신학의 모색> 중에서  접기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삼중적 삼중관계로 해석할 경우, 이는 천지인의 조화라는 한국문화의 구성원리와도 상응한다. 전통적인 서양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실체적 이원론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정신적, 영적인 것인지 아니면 외적, 육체적인 것인지 등의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적으로 해석하였으나, 대부분이 이중적 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배제시켰다. 이러한 서양 신학의 전통은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실체로 분열시켰고, 결과적으로 신성神聖의 포기와 자연의 파괴와 인격의 파탄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수직적 대신관계, 수평적 대인관계, 순환적 대물관계라는 천지인의 조화의 원리를 회복하는 것만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마음과 몸의 바른 관계와 나아가서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을 지향하는 영성신학,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정의와 평화의 상생신학이나, 남성과 여성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여성신학, 자연과 인간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창조의 보전과 생태학적 신학을 모두 아우르는 해석학적 원리가 바로 천지인의 조화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삼중적 삼중관계로 해석하는 것은 삼태극의 원리와 상응하는 것이므로 천지인 신학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신학적 주제라고 할 수 있다.

_ <제5장 _ 하나님의 형상의 관계론적 해석과 천지인신학> 중에서  접기

샤르뎅은 그리스도가 우주의 몸일 뿐 아니라 ‘우주의 머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 우주의 일부가 아니라 바로 우주의 지배 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육신은 우주의 모든 물리력과 정신력을 갱신하고 복구하는’ 능력이요, ‘부활은 우주의 중심적인 능력’이다.
샤르뎅은 우주적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두 가지를 긍정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만물은 그분(그리스도)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골 1:17)는 긍정과 “그분 안에서 만물은 완성된다”(골 2:10; 엡 4:9)는 긍정이다. 따라서 이 두 긍정은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위에 군림한다”(골 3:11)는 말로 줄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요, 머리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시작되고, 통일되고 마침내 완성된다.” 따라서 우주의 머리요, 우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샤르뎅 자신의 견해가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우주 통치권”(Christ's physical supremacy over the universe)에 관한 바울의 증언에 근거해 있음을 밝혔다.
우주는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창조된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갱신하고 복구하고, 활기차게 하며 성화하고, 통일하고 완성하신다. 만물의 근원인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만물의 통치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창조가 지속되고, 만물의 완성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샤르뎅의 우주적 그리스론은 창조의 세 측면 즉 태초의 원 창조(creatio originalis), 역사의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ua), 종말의 새 창조의 완성(creatio nova)을 포함하는 체계를 형성하였다.
샤르뎅의 창조론은 태초의 원창조라는 창조의 일면만을 강조해온 전통적인 창조론의 폐쇄적인 구조가 ‘계속적인 창조’의 개방적인 구조로 바뀌어 창조적 진화론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종말의 새 창조의 완성’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우주적 구원론의 확충과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를 향한 종말론적 지향점을 신학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_ <제6장 _ 샤르뎅의 삼성론과 천지인신학의 기독론> 중에서  접기

영성신학은 성령론과는 다르다. 성령론은 양성론이나 삼위일체론에 부수되는 교리로 등장하여 성령의 위격(person)과 출원(proceed)에 관한 본체론적 논의와 삼위의 내재적 관계와 경륜적 사역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세 분 하나님이 상호내재(pericoresis)하여 한 분이 되신다. ‘주변을 돌아 움직인다’, 즉 ‘회통’이라는 의미를 지닌 페리코레시스는 라틴어로는 ‘상호 순환’(circumincessio)이라고 번역된다. 말하자면 페리코레시스는 세 분 하나님이 서로 소통하면서도 각자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 있는 ‘공동 본유성’(co-inherence)의 관계 방식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있어서 세계의 창조 사역은 아버지에게, 세계의 화해 사역은 아들에게, 세계의 성화 사역은 성령에게 속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삼위의 사역은 서로 무관하게 순차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의 전 과정에서 상호관련성을 가진다. 구원의 경륜적 사역들의 순서에 있어서 삼위의 주체들이 교체되지만, 그 교체는 삼위일체 내에서의 교체이므로 삼위의 공동사역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순차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전유(Appropriation)하지만 다른 두 분이 배제되지 않고 각각 역동적으로 참여한다. 다시 말하면 성부의 창조 사역은 성자의 화해 사역을 지향하고, 성자의 화해 사역은 성령의 성화 사역을 지향한다. 또한 성령의 성화 사역은 성자의 화해의 사역을 전제하고, 두 사역은 성부의 창조의 사역을 전제한다.
따라서 세 분 하나님은 상호 내재하면서 각자의 고유한 사역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세 분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으로 사역하신다. 이로써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행위가 하나이듯이 오롯이 통전적 조화를 이룬다. 서양 신학의 본체론과 시원론으로 인해 복잡하게 논의된 삼위일체론을 동양의 비시원적이고 비본체론적인 논리인 ‘셋이 셋이면서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삼태극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_ <제7장 _ 영성신학의 세 차원과 천지인 영성>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허호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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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알리미 신청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졸업(신학박사: 조직신학 전공)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 Div.)
연세대학교 백낙준 명예총장 비서 역임
한국기독교학회 총무 역임
한국문화신학회 부회장 역임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역임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역임
현대종교 편집자문위원
대전신학대학교 교수 퇴임
『한국의 이단기독교』, 동연, 2016 -2017년 세종도서(우수학술도서) 선정
『이단은 왜 이단인가?』, 연세신학문고... 더보기
최근작 : <신천지부터 통일교까지>,<천지인신학>,<한국 문화와 천지인 조화론> … 총 2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하나님 ‧ 인간 ‧ 자연의 삼중관계에 대한 해석학적 천지인신학의 모색

천지인 삼재는 통시적으로 한국문화의 원형이고, 공시적으로 한국문화의 전승 모체이며, 기층문화와 표층문화를 모두를 통전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한국문화의 요체라 할 수 있다. 한국문화의 이러한 면모는 통전적 조화성, 순환적 역동성, 자연친화성을 핵심으로 하는 천지인의 조화론이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각종 한류의 문화적 기초 역시 한국인의 고유하고 특이한 역동적인 천지인 삼재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성서와 신학의 중심 주제 역시 하늘 ‧ 땅 ‧ 사람이라는 사실을 파지한다. 하나님 ‧ 땅 ‧ 사람 이 셋 중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둘인 인간과 자연 또는 물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신학을 새로이 모색하기 위해 한국문화의 구성원리인 천지인 조화론을 한국신학의 해석학적 원리로 삼아 천지인신학의 성서적 기초 제시하고, 아울러 신론, 기독론, 구원론, 영성신학 등 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들에 대한 천지인신학적 해석을 모색한다.

천지인신학은 하나님과의 영성적 수직 관계, 자연(또는 물질)과의 친화적(공유적) 순환 관계, 이웃과의 연대적 수평 관계의 조화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러한 ‘천지인의 삼중적 삼중관계’를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도 실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의 수직적 영성적 관계를 통해 마음과 몸,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을 지향하는 영성신학,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연대적 관계를 통해 정의와 평화를 이루려는 상생신학이나, 남성과 여성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여성신학, 자연과 인간의 순환적 친화적 관계를 지향하는 창조의 보전과 생태학적 신학을 모두 하나로 아우르는 해석학적 신학을 모색하려는 것이 천지인신학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학의 주제가 한국문화의 구성원리인 천지인 조화론과 상응한다는 데 착안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 왔는데, 천지인 조화론을 해석학적 원리로 삼아 성서와 신학의 주요 주제를 새롭게 풀어 본 것이 이 책 󰡔천지인신학 ― 한국신학의 새로운 모색󰡕(2020)이고, 5천 년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온 천지인 조화론의 골자를 정리한 것이 󰡔한국문화와 천지인 조화론󰡕(2020)이다. 따라서 이 두 책은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신학자’로서 평생 동안 추구해온 학문적 작업의 결실로 자리매김 된다. 접기

2021/03/13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기고>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교수
기자명 김상일   입력 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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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코로나19’와 함께 인류의 임종이 가까워 오지 않나 하는 우려와 두려움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엘리자벹 큐버러스가 주도하는 인간의 ‘죽음학 thanatology’ 혹은 ‘임종학’을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란 죽음의 침상에서 환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관찰하는 것 정도라고 한다. 지금 지구촌 70억 인구가 거의 모두 지구의 종말과 함께 죽음의 침상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들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자. 죽음학이 그러하듯이 죽음의 침상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태도와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할일일 것이다.

46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지구의 암석층에는 그동안 수많은 생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멸종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고 이러한 층을 연구하고 거기에 이름을 매기는 학회를 ‘국제층서학회’(혹은 층서학회)라고 한다. 층서학회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과거 일만 년 동안의 살기 좋던 홀로세 holocene를 끝내고 다른 세로 접어들고 있는 데 크뤼천란 학자는 이를 ‘인류세 anthropoocene’라 불러야 한다고 한다. 이에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이상북스, 2018)에서 한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의 임종학을 다루고 있다. 

해밀턴은 인류의 임종을 막으려는 네 부류의 운동을 말하면서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시한다. 신인간중심주의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다른 세 가지 운동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데서 해밀턴의 주장이 분명해진다. 물론 해밀턴이 그렇게 연관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신인간중심주의가 그 내용면에 있어서 주체사상의 그것과 같다고 보아 인류세에 대한 ‘주체세 Juchecene’라는 층서명을 독자적으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인류세가 인류가 멸종한 다음 미래의 암반에 기록될 명칭이라면 주체세는 다가올 임종을 막아보자는 처방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해밀턴은 자기 책의 마지막 끝 단어를 ‘두 번 다시 아니어야 never again’로 끝내고 있다. 지구에 두 번 다시 이런 재앙이 오지 않게 하는 처방전은 과연 무엇인가? 

‘인류세’란 무엇인가?

‘에를레프니스 erlebnis’란 말은 ‘갑자기 우연히 생긴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말로 ‘별안간’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방식대로는 지구와 인간의 역사에 별안간 나타난 엄청난 균열의 규모를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20세기와 21세기 초의 특정한 사회현상을 뛰어 넘어 인간의 조건과 지구상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한다.”(해밀턴, 102쪽) 

이제 겨우 5000여 년도 안 되는 인간의 역사를 말하기엔 간에 풀칠 할 정도라고 봐야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가 아닌 층서학자들이 지구의 지질을 연구할 때 사용하던 절age, 세epoch, 기period, 대era, 누대eon 같은 용어들이 더욱 실감나게 되었다. 코로나가 인류 대멸종의 전조가 아닌지 지구촌이 함께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의 가장 큰 원인이 지구의 기후 변화에 있다면 질병의 원인을 지방, 인륜, 세회(사회), 세시(우주변화)의 네 가지로 분류한 이제마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인간의 질병이 오존층 파괴에 의한 기후변화와 코로나19가 무관하다 할 수 없게 되었다.

오존층 파괴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바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파울 크뤼천 박사는 2000년 "인류 전체가 지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현 지질시대를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지질시대의 가장 큰 단위가 신생대, 중생대 같은 대(代)이고, 중간이 페름기, 쥐라기 같은 기(紀)이고, 가장 작은 단위가 홀로세, 플라이스토세 같은 ‘세(世)’이다.

인류세가 다른 세와 다른 점은 세의 주인공인 인류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란 점이다. 충적세와 홍적세 그리고 홀로세 등이 있지만 공룡이 자기 살던 세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류세는 스스로 인류 자신이 ‘인류세’를 만들었고 이름마저 스스로 붙여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대로 임종의 침상에 지금 누워 있다.

크뤼천 박사가 ‘인류세’란 명칭을 붙인 다음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단행본으로 논하고 있다. 과학은 물론 철학과 신학을 망라한 시각에서 멸종 앞에 선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치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인류세’에 대하여 반론으로 ‘인간세’, ‘자본세’ 등 다른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인류세 대신에 ‘주체세’를 논해 본다. 그것도 해밀턴이 말한 신인간중심 사상이 주체사상의 ‘사람중심’과같이 들리기 때문에. 

1945년과 인류세의 시작

역사시대가 아닌 지질시대 구분법에 따라 인류문명사를 구분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생대 Cenozoic 제4기에 속하는 홀로세 Holocene이다. 신생대가 시작된 지는 6600만 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가운데 제4기가 시작된 지는 고작 258만 년 전이다. 그리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년 전부터 홀로세에 들어섰다. 그런데 바야흐로 그 홀로세가 우리 인간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끝나고 인류세도 인위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크뤼천이 1945년을 찍어서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원자폭탄이 투척된 이래로 지구촌 곳곳에서 핵실험의 결과로 10만 년이나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방사성 동위원소가 거의 영구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말름(Andreas Malm) 같은 사람은 인류세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본세 Capitalocene’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여성해방 운동가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자본주의란 궁극적으로 부유한 백인 남성중심 문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와 대척점에 있는 술루(Chthulu)를 따와 ‘술루세(Chthulucene)’라 하자고 한다. 

지금까지 인류세를 정의하는 제 관점에서 볼 때에 인류세는 우리 한반도의 운명과 어느 하나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어 보인다. 1945년과 자본주의, 그리고 백인 남성 문화가 인류세 정의의 중심에 등장하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북이 같이 인류세보다 더 적합한 용어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관점에서 홀로세 다음에 급격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와 이에 대처하는 방향은 무엇인가?

지구과학자들이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격한 증가와 그로 인한 지구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연쇄적 영향 때문이라 한다(해밀턴, 16쪽). 1945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지구 시스템에는 급격한 혼란이 조성되었다. 변화의 속도와 파급력이 인류 역사상 전체를 통해 볼 때에 전에 없던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를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부른다. 100만 년 이래의 암석 기록들을 보면 1945년 원자폭탄 피폭 이후 지표면에 퇴적된 방사능이 급작스럽게 쌓이게 되었고 이를 ‘밤 스파이크 Bomb spike’라 부른다.

이 ‘밤 스파이크’와 함께 일본은 패망하였고 우린 해방과 함께 분단이 되었다. 우리 한반도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에 인류세도 자본세도 술루세도 다 옳다. 1945년이 인류문명사에서 새로운 의의를 갖는 이유는 ‘자연’이란 개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이 어떻게 어거할 수 없는 것이라 정의되어 왔는데 1945년 이후부터는 인간이 자연을 만들고 있으며 그 만들어 놓은 자연에 인간 자신이 종속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세먼지 같은 경우는 인간이 만든 결과이지만 인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 곧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과거 1만년 홀로세 동안 인간은 따뜻한 기후, 그리고 맑은 공기와 물을 즐기며 잘 살아 왔다. 다시 말해서 홀로세가 주는 제1의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가자’고 구가하면서 잘 살아 왔는데 이제 인류세의 도래와 함께 제2의 자연, 즉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연을 향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을 수 있겠느냐 이다. 우리에겐 돌아 갈 자연은 없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공기도 공기이지만 앞으로 인류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물이다. 인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이 점점 부족해져 간다는 것이다. 미국 엘에이 근처 빅 베어란 산정에는 산정호수가 있다. 오랜만에 방문을 했을 때에 그 많던 물이 거의 다 사라지고 바닥만 드러나 있었다. 과연 물부족이란 사태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늘엔 마실 공기가 없고 땅엔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멸종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제2자연의 도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와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전도시키고 말았다. 1세기 전, 아니 30여 년 전만 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해밀턴은 경고하고 있다. “지구 경로의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변화가 우리의 미래이며, 역사적 균열이 존재하기 이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고방식들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이다”(해밀턴, 70쪽).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잘났다고 자랑하던 그러한 관념부터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GNP나 GDP를 자랑하고 매년 경제성장률이나 각국마다 비교하는 사고방식을 언제까지 더 유지할 것인가?

인류세 앞에 잘못 진단한 운동가들 

그럼 인류가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던 것인가? 당장 1989년 동구 공산권이 무너질 때에 자본주의의 만수무강을 외치고 공산주의의 영원한 패망을 선전하던 사람들이 지금 인류세에 대하여 무슨 언질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인류가 화석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지금도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부르짖고 있을 것인가? 

‘인류세’의 저자 해밀턴은 인류 멸종의 위기 앞에 임종의 병상에 처해 인간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족속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위기는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주장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② 이제 인간에게 해결할 능력이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환경운동가들과 생태학자들-‘포스트휴머니즘’, ③ 인간에게 위기 극복의 강한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에코모더니스트’, ④ 인간의 강함과 지구의 강함을 더욱 강화시켜 양자가 맞물리게 해야 한다는 ‘신인간중심주의’가 그것이다. 표로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인류의 임종의 침상에 나타나 너도 나도 자신들이 해결사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일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외하곤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④번째로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the new anthropocentrism)를 대안으로 들고 있다. 이 마지막 부류의 주장은 환경 파괴자들이든 보호론자들이든 자기들의 힘을 과신하고 남용해 무절제하게 사용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 더 힘을 절제 있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해밀턴은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라고 말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는다. 다만 반자본주의, 반백인남성주의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서양 철학과 신학 전반에 걸쳐 비판적이다. 서양 철학의 주류가 된 이원론적 사고 구조와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구조를 만들어 결국 환경 파괴 주범이 되었다.

인류세가 반자본주의 그리고 반백인남성주의를 겨냥한다면 미국에 대척점에 서 있는 곳과 나라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고, 그 곳은 ‘북부 조선’ 혹은 ‘북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어떤 희망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걸고. ‘인류세’란 말 자체가 인류의 멸종을 전제한 후의 지구과학에 부쳐진 이름이라면 이 시점에서 이 지구를 구제한다는 전제를 할 때에 그 곳은 당연히 자본주의와 백인남성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될 곳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북부 조선’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자본세와 인류세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제이슨 무어이다. 그는 크뤼천의 ‘인류세’란 말에 반기를 들고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내었다. 층서위원회는 되도록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려고 한다. 홀로세 다음으로 ‘자본세’가 집중조명 되는 이유는 제2의 자연이 자본주의를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산업혁명 이후 소비지상주의가 만연했고, 화석연료 생산업체들의 로비의 영향력으로 1945년 제2차 대전 이후부터 놀랄 만큼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되었다. 

1945년, 하필이면 한반도 분단과 때놓을 수 없는 이 기간에 국제층서위원회가 ‘인류세’라고 명명한다면 지구의 종말과 함께 한반도는 지구의 지층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백인남성 그리고 부자 자본주의에 대척점으로 혹자들은 정착토착민(settler colonialism) 즉, 미국 인디언을 손꼽는다. 인류세 담론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백인남성은 1492년 이래로 정착토착민들을 살던 곳에서 추방하고 살해한 후, 거기다 오늘날 자기들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여 드디어 인류세를 도래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세가 말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착민들이 살아 온 방식과 그들의 토착지식과 정신세계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정착토착민을 강화시켜 다른 백인 남성부류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에서 토착민들이 외래인들을 밧줄로 묶어 두면 힘을 못 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외래인들은 밧줄을 끊고 말았다.

토착민들이 백인 부유 남성들과 맞서 싸우기란 바위에 계란 던지기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자본주의-백인남성들에 맞서고 인류세를 대신할 수 있는 정체는 없다는 말인가? 

크뤼천은 책의 결론에서 ‘새로운 인간’ 즉, ④‘신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신인간상이란 인간의 ‘강해진 힘’과 ‘지구의 강해진 힘’이 결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신인간상은 인간의 강해짐이 자연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환경 재앙이 왔다는 ②포스트휴머니즘이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반대한다. 다른 한편 ③인간을 강하게 함으로 지구를 약하게 하려는 에코모더니즘도 부정한다.

크뤼천은 “일부의 철학자의 입장은 지구의 강해진 힘만을, 다른 입장은 인간의 강력한 힘만을 인정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두 힘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④“우리가 지구와 인간의 힘 모두를 인정할 때 우리는 인간이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란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욱 강해졌다”와 같다. 인류 문명사란 인간과 자연 간의 힘겨루기이었으며 인간과 지구가 모두 강해지는(win-win) 것이 새로운 인간상인데, 그것은 이율배반적 혹은 역설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를 ‘이중진리’라고 한다. 인간과 자연은 지금까지 대립 구도이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예속 내지 종속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낡은 인간상이다. 그래서 인간과 지구가 모두 동시에 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상이라고 한다. “신인간 중심적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91)

인간이 자연과 매듭같이 맞물린다는 것은 ‘국지적 local’이기도 하고  ‘보편적 global’이기도 한 ‘glocal’이다. 자연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연에 의해 제약받고 있으며, 힘과 자주성을 누리고 있지만 그 자주성이 방종에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중심적 자아이다.  

신인간중심주의와 다른 견해들의 비교 

해밀턴은 인간과 지구(자연)에 ‘약해진 힘’과 ‘강해진 짐’을 적용하여 위의 표와 같이 네 가지로 지금까지 나타난 이론 혹은 운동을 분류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의 임종을 앞두고 임종의 침상에서 보이는 네 가지 종류가 일목요연하게 표로서 제시되었다. 우측 하단의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힘도 지구의 힘도 모두 강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다른 세 가지 이론과 운동 차원에서 볼 때에 모두 비판의 대상일 수 있다. 

①은 종교적 근본주의적 입장으로 인간도 자연도 모두 무기력하여 오직 신의 섭리만이 답이라는 주장으로 신천지를 비롯한 기독교의 빛바랜 주장으로서 제일 처음으로 폐기처분 될 수밖에 없다. ③에코모더니즘 운동은 잘 알려진 대로 인간의 기술이 갖는 힘을 휘두르거나 강화시켜서 지구 자연을 더 제어해 나가야 한다는 모더니즘을 더 강화시키자는 운동이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중심주의와 인간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지구를 인간이 제압해 약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들은 마치 에덴동산을 거니는 아담과 하와가 신으로부터 자연을 잘 다스리라고 부탁 받은 청지기와 같이 지구상에서 행세하려 한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노예에 대한 착한 주인이 없듯이 착한 청지기는 없었다. 에코모더니즘은 이렇게 아직도 홀로세에 인간이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 중심주의 강한 지구 그리고 약한 인간을 대망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영향력을 가장 많이 끼치고 있는 조류이다. 오늘날 위기가 인간의 힘이 비대해지고 지구가 약해진데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지구(가이아)에 힘을 실어 주고 인간을 약화시키자는 주장이다. 신유물론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청지기 직분을 박탈해 자연에 돌리려 하나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은 오히려 인간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오늘날 주변의 페미니즘과 생태철학 그리고 포스트 식민주의 운동이 모두 포스트휴머니즘 운동에 해당한다. 

신인간중심주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자연을 약화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서로 맞물리자면 인간과 지구(자연) 간에는 서로 균형이 같거나 맞아야지 어느 하나가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최근에 와서야 자기 당착에 직면하여 인간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신인간중심주의가 주장하는 인간과 자연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페미니즘이나 생태환경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교모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자가당착적 모순에서 벗어나려하는 모습을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뉴턴-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들이 인간과 지구를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이에 ④신인간중심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하나 정신과 물질의 상호 맞물려 있음을 인지하고 인간도 지구도 상호 강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주체사상과 신인간중심사상 

지금까지 신인간중심주의를 기준으로 다른 세 가지 견해들을 각각 비교해 볼 때에 해밀턴이 말하고 있는 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에 많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맞물림 그리고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의 극복이란 관점에서 볼 때에 두 개의 사람중심 사상은 멀지 않고 가깝다.

주체사상이 해밀턴의 인류세의 새인간중심주의와 일치하는 면은 유물론과 관념론 이원론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이 갈망하는 대단원이 이원론의 극복에 있었지만 오히려 더 균열을 강화시킨 면이 있다면 주체사상은 이에 적절히 대처했다. 중국과 구소련이 낫과 망치(유물론)를 당 마크로 삼은 데 대하여 ‘북조선’은 거기에 붓을 넣었다. 이는 상징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지구의 힘을 모두 강화시켜야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의 논리에 의하면 세 가지 생명력인 물질적 생명력, 정신적 생명력, 사회협조적 생명력에 의하여 추동된다. 그래서 인간의 3대 생명력의 발전수준에 알맞게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의 수준이 결정된다. 이것은 주체사상이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그리고 의식성으로 정의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인간중심 세계관에서 보면 객관적 존재성의 측면만을 물질세계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유물론이나 주관적 측면만을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관념론은 모두 배격된다.

즉,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역사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세계관이 있었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힌 것은 없었습니다. 세계를 관념이나 정신의 세계로 보는 관념론자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세계관 1), 지난 시기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본 유물론자들도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히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세계관 2). 주체사상은 사람을 단순히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종래와는 달리 세계의 주인인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와 그 발전에 대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였습니다(세계관 3). (괄호 안은 필자의 것임)

그러면 유물론과 관념론을 조화시킬 존재는 무엇인가? 주체사상은 그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게 된다. 사람을 관념으로만 파악하려는 세계관1과 물질로만 파악하는 세계관2의 한계와 잘못을 극복하고 그것을 종합시켰을 때에 사람 그 자체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세계관3이다. 여기에 독특한 사람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주체사상에 대한 온갖 오해와 곡해가 발생하게 된다. 

먼저 ‘사람 중심’이란 말이 무슨 새로운 맛과 의미를 갖느냐고 비판한다. 역대 철학으로서 사람을 다루어 그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철학이 어디 없었느냐고 비아냥거린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부하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르네상스로부터 인본주의 또는 인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8세기 계몽기에 이르러서는 존 로크, 루소로부터 대표되는 사회정치 철학이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권리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 등장한 인간 중심 사상은 거의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원시 고대의 자연 종교의 신관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면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세기 스콜라 철학은 인간을 다시 인격신의 예속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철학은 인간을 신의 복속 상태에서 해방시키려 했으며, 그 결과 빚은 과오는 인간을 너무 개별적이게 했으며 인간을 원시 동물적 형태로 끌고 가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서구의 인간주의는 신중심 아니면 개인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물질 아니면 정신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인간을 자연과 유리된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다윈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인간관인 것이다. 인간을 경제적 조건과 성적 본능으로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나 밀의 인간관은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만 파악함으로써 인간 소외를 초래했고 이 점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갖고 있는 인간상의 병폐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형성시킨 데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한몫 거들었다고 할 수 있다. 창 없는 단자 windowless monad 는 창살 없는 아파트적 공간 속에 인간을 밀폐시키고 말았다.

위에서 말한 ①종교 근본주의, ②포스트휴머니즘, ③에코모더니즘, ④신인간중심주의를 주체사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먼저 세 가지는 모두 서양 철학이 범한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해밀턴이 제시한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그래서 인류세를 ‘주체세’로 대치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밀턴이 아무리 새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서구 전통 속에서 그것을 구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류의 종말이란 임종의 침상에서 그 어느 의사도 환자를 바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색과 구호는 ‘신인간중심주의’라고 하지만 정치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구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이미 역사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있다. 이를 해밀턴은 ‘자연과정(natural process)’이라고 한다(책97). 필자는 이를 항일유격대원들이 춥고 굶주림 속에서도 왜 야생동물에 손을 대지 않은 데서 찾으려 한다.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전권에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전향하기는 했지만 김동하란 남부군이 쓴 ‘노고단은 알고 있다’를 읽던 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이현상을 만나러 갔을 때에 막사 앞으로 노루가 지나가는 데 총으로 쏘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 동료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우리 항일유격대와 야생 동물은 같은 운명이라네. 서로 돕지 않으면 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렵지”라고 말하는 데서 회고록에서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격대원들은 산속에서 굶어 죽어도 야생동물을 살상하지 않았다. 자연과정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실로 회고록은 많은 사실을 알게 하지만 야생동물과 유격대원들 간의 공동체 운명 정신은 인류세 앞에서 돋보이게 한다. ‘자연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주체사상이 죽어 멸종돼 가는 인류에 희망을 던져 인류세를 대신하는 주체세로 남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서 대동강변 주체탑 옆에 서 있는 당마크는 인류가 멸종된 다음에 이 지구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살았다는 한 표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과 자연지구의 조화, 궁극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 그것 이외에 인간이 다음 세에 남길 다른 것이 무엇일지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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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일 kimsykorea95@daum.net

2020/11/25

학술연구 > 불교와 심리학 > 유식론(唯識論)과 신경과학(神經科學) / 강병조

학술연구 > 불교와 심리학 > 유식론(唯識論)과 신경과학(神經科學) / 강병조

제 목 : 유식론(唯識論)과 신경과학(神經科學) / 강병조   
  글쓴이 : 미선이날 짜 : 09-06-11 10:14조회(10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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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론(唯識論)과 신경과학(神經科學) / 강병조 
 
 
  강병조  경북의대 정신과  
 

I. 서론
 
저자는 불교신도로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마음을 전공하는 정신의학도로서 근 40년간 학문의 길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스님들과 불교학자들로부터 설법도 듣고, 경전도 공부하고, 불교관계 서적들도 보면서, 저자가 전공하고 있는 의학적인 관점과 다른 점이 많이 있음을 느껴왔다. 특히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유식학의 견해가 최근에 발달한 신경과학적 견해와는 완전히 다름을 알고 있다.

보통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관점도 현대 정신의학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종교와 과학은 별개의 문제이며, 다른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과학적인 종교이건 비과학적인 종교이건 인간은 종교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종교는 과학적이고 지식층의 신자들이 믿을 것이고, 비과학적인 종교에는 그에 상응하는 계층들이 믿게 될 것이다.

불교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가장 과학적인 종교이다. 비과학적인 종교인 기독교는 과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전 교황 바오로 2세가 1996년 진화론을 인정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리도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그 교리해석을 달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승려교육에서 과학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 그러나 현 우리나라의 승려 교육이 그렇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과학을 전공하는 많은 불자교수들의 논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드려 불교교리를 재해석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다른 종교에 뒤 처지지 않고 신도들을 현명하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유식론이 틀렸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4-5세기에 유식학이 대두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오늘 날 까지 살아남은 것도 또한 그만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뇌과학 즉 신경과학은 최근 20-30년 사이에 많이 발달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뇌를 전공하지 않는 스님들, 불교 학자님들, 나아가 일반 신도들은 뇌과학의 최신 지식을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과 신경과학의 주장을 비교하며 고찰하는 것이 유식학의 재해석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 논문을 시도하였다.
    
 

 
II. 유식론

1. 유식사상의 출현 배경

불교 사상은 싣달타의 열반 후 수 백여 년 동안 수십 개의 부파 불교로 분열되어 각 부파별로 나름대로의 불교 사상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두 개의 큰 줄기가 있었다. 하나는 구전되어 암송되어 온 붓다의 전통적 가르침에 비교적 충실하려는 철학적․분석적 상좌부(上佐部) 불교 즉 소승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적이고 신앙적 색채를 띠는 대중부(大衆部) 불교 즉 대승불교가 그것이다.

유식학파는 대중부 계열에 속하는 학파로서 유가행파(瑜伽行波 : 요가행파)라고도 부른다. 이는 공(空) 사상을 핵심 사상으로 하는 공관(중관)학파와 함께 대중부 계열에 속하는 것이며, 이 두 학파의 사상은 후대에 대승 불교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고, 이들의 사상에 근거하여 상좌부에서 편찬한 팔리어로 된 초기 불교 경전과는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산스크리트어로 된 대승 불교 경전이 편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유식계열의 경전이 공관학파의 공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반야계 경전(금강경, 반야심경, 유마경)보다 나중에 편찬된다( 임원택 435쪽).

유식사상은 소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등의 사상을 배척하고, 또한 유식사상 보다 앞서 유행했던 반야경 계통의 공사상이 그 진의를 상실하고서 지나치게 공허한 사상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식사상이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만, 14쪽)

그러나 이와 같은 공사상이나 유식 사상은 붓다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임원택, 436쪽).

2. 유식사상의 사상가들 및 경론

이 사상은 미륵(彌勒, Maitreya, 270-350)과 무착(無着, Asanga, 310-390) 그리고 세친(世親, Vasubandhu, 320-420)등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중요한 경론(經論)으로는 해심밀경(解深密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Yogā cārabhūmi),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성유식론(成唯識論), 여래장경(如來藏經), 대반열반경(大槃涅槃經), 승만경, 불성론(佛性論), 능가경,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을 들 수 있다(이만 14쪽, 임원택 435-442쪽).
 
 
3. 유식사상의 주장에 대한 신경과학의 입장

1) 마음, 유식 즉 아뢰야식이 하나의 자기동일성(identity)을 갖는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주장.

유식학파에서는 물질로 된 모든 대상 즉 세상의 모든 물질적 존재가 비실재(無, 空)이기에 모두 텅 비었다는 데까지만 공관학파의 공사상에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즉 정신까지도 공하다는 것에는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만약 마음이 비실재인 공이라면 모든 이성적인 사유나 추론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생각, 즉 분별과 사고를 통한 모든 이론적 주장과 견해는 역시 거짓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공관학파에서 주장하는 공사상도 마찬가지로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까지도 비실재인 공이라고 한다면 공사상 자체가 부정되는 것인 만큼 인간의 생각인 사유와 사고, 그리고 그 논리와 주장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식(識: 마음․인식)의 실재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들은 마음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모든 물질적 대상은 그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즉 실재한다는 증거를 댈 수가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마음의 작용에서 나타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는 마음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비실재이고 거짓이며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심밀경>에서는 마음 중에서도 잠재의식이고 무의식인 제8식 아뢰야식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하게 되는 것이며 차츰 마음이라는 유일한 실재를 절대화시켜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절대 정신인 佛性이나 如來藏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세상에는 오직 마음(정신, 영혼)만이 유일한 실재다. 그리고 그 밖의 물질적 대상은 공이다’라는 유식학파의 사상은 관념론이고 唯心論이다. 이 사상은 붓다 탄생 수백 년 전부터 고대인도 사회를 지배해온 철학사상인 절대적 관념론인 우파니샤드의 사상에 현혹된 후대의 대승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임원택 435-465).

신경과학적 입장 : 정신이니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뇌의 기능(활동)일 뿐이지 하나의 실체(identity)를 가지고 있는 실재는 아니다.

이만은 유식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을 떠나서 모든 것이 그대로 의연하게 존재한다는 實在論에 관한 인식 그 자체도 사실은 마음이 만들어낸 表象에 불과하며, 외계의 실재가 마음에 影寫되어 표상이 형성된 것이 아니고, 마음 스스로가 표상을 만들어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존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의 주체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아뢰야식에 관한 내용이다. 이 아뢰야식은 인간존재의 근저에 항상 상존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으며, 그 흐름은 일생 동안 끊어지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생존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어떤 행위나 행동을 하는 한 그것은 대개 선업이거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에 아뢰야식이 업력의 귀의처로 사용되어 그 속에 心種子가 잠재하고 있다가 그에 알맞은 환경이나 조건 등의 緣을 만나면 모든 것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서 현상계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 - 업에 의하여 오염된 마음 -을 정화시켜 주는 종교적인 실천덕목인 수행이 필요한데 그것이 다름 아닌 yoga행이다(이만, 15-25쪽).

신경과학적 견해:

업력의 귀의처는 뇌의 기억과 관계되는 부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억은 의식적인 기억(어의적, 사실적 기억)과 무의식적인 기억(절차적, 기술적 기억)이 있다. 선업이건 악업이건 인간의 경험은 인간 뇌의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 사람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심리적인 업은 유전되지는 않는다. 경험과 학습은 DNA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나 DNA가 mRNA를 거쳐 단백질로 표현되는 과정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학습이나 경험은 유전은 되지 않으나 뇌에는 영향을 주어 뇌의 기능인 마음에는 영향을 준다고 본다.
 
참고로 기억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억 형성에는 특히 내측 측두엽, 간뇌핵(diencephalic nuclei), 기저, 전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측 측두엽은 해마와 연결되어 있고 그 앞쪽에 편도가 존재한다. 이들 부위가 모두 기억에 많이 관여하는 부위들이다.

기억의 종류에는 수초간 기억되는 즉시기억, 수분에서 수 일전의 기억인 최근 기억, 수개월에서 수 년 전까지 지속되는 장기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시기억과 최근기억에 관련된 개념으로 음운을 통한 기억과 시공간적 요소가 포함되는 작업기억이 있다. 이는 전화를 걸면서 들은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처럼 잠시 동안만 정보를 저장하며, 응고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곧 잊혀지게 된다. 단기기억은 응고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작업기억과 같은 단기 기억은 신경전달물질을 통하여 짧은 시냅스 회로의 흥분으로 급속한 신경 활동이 일어나며 특히 배측 전전두피질의 신경세포가 작업 기억의 정보를 기억하는데 중요하다. 한편 기억의 강화는 단백질의 조합과 신경원의 시냅스를 통한 연결이 변화되면서 생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4-25쪽).

다음으로 유식론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 두 가지만 들어서 저자의 견해를 밝혀 보겠다.

(가) 6조 해능의 마음관.

“바람이 부니까 깃대가 나부끼는 것도 아니고, 깃대가 나부끼니까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있어서 깃대가 나부끼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란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우주를 이루고 있는 근본 소립자(입자 또는 파장)를 마음이라고 본다면, 바람이나 깃대나 우리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뇌나 모두 ‘이러한 소립자’에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주의 근본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해석은 틀렸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우주를 이루고 있는 근본 소립자를 마음이라고 볼 수도 없다.

둘째, 바람이 부는 것도 깃대가 나부끼는 것도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역시 주관적인 해석이지, 나의 마음이 있어서 깃발이 나부끼는 것은 아니므로 틀렸다고 생각된다. 나의 마음이라는 존재가 그 곳에 없어도 바람이 불면 깃대는 나부끼기 마련이다.

셋째, 나의 마음이 존재해서 나의 마음이 깃발을 나부끼게 만들고, 바람도 불게 만든다고 해석하는 경우인데, 이는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 나의 마음의 존재가 깃발과 바람에 약간의 영향(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줄 수는 있겠으나, 나의 마음이 깃발을 나부끼게 만들고 바람을 불게 만들지는 못 한다.

(나) 一切唯心造

첫째, 이 의미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외계는 달리 보인다고 생각하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한 부인 환자가, 마음을 돌려 먹으니 남편이 자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며 자기를 진정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 이런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즉 마음의 기능 또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뜻이다.

둘째, 마음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이 마음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뜻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 과학적으로 볼 때 틀렸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실체는 없고 마음이란 단지 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셋째, 내가 죽고 없으면 이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니, 내게는 세상이 없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너무 주관적이며, 한 사람이 죽는다고 이 세상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의 문구를 첫 번째의 해석으로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2). 8식의 구조

5가지 감각기관(5根): 안, 이, 비, 설, 신.
감각기관의 대상(境) : 색(물질), 성, 향, 미, 촉
5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6식 : 의식. 의근에 의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킴 .
 
이 의식은 우리 신체외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분야로서,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는 볼 수가 없고 만져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앞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저 깊은 곳에서 항상 동반하여 일어나거나 아니면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정신적인 소산을 말한다. 그리고 이 의식의 대상을 法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법이란 일체제법(一切諸法)과 같은 존재로서 유형적인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무형적인 관념까지도 포함해서 말하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소승불교 시대에는 6식설만 가지고도 우리들의 인식활동의 원리를 대변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는 인간의 궁극적 실체로서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화하지 않고 상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상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제8식 아뢰야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은 우리들이 잠을 잘 때나 심지어 죽어서 혼백(魂魄)이 떠돌아다닐 적에도, 내지는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을 때에도 그 활동은 계속한다는 것으로 육도(六道) 윤회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제8식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일부러 어떤 의도적인 행위,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전인수격으로 끊임없이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 및 아애(我愛) 등 4종의 근본 번뇌와 항상 같이 하면서 업을 일으킬 때에, 이들에 의한 인상(印象)이나 여운 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정신은 제6 의식보다는 깊고 제8 아뢰야식 보다는 얕은 제7 말나식(末那識manasovijñāna)이라는 의식이 상정됨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7식 말나식을 일컬어서 ‘자아의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에 의하여 업을 지어서 우리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제8 아뢰야식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 같이 항상 제7 말나식의 집착력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럴 경우 제8 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유루법(有漏法)이 현행하는 사이, 곧 아집 등이 활동하는 위치까지 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聖人位)에 오르면 이 識의 이름은 자연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만. 18-22쪽).

“아뢰야식에는, 그 파악하는 각도에 따라서 <이숙식>, <종자식>이라고 부르는 방법도 있으며, 또 <집장>이라고 보는 방법도 있으나, 그것은 각각 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뢰야(ālaya)란 어느 곳에 ‘자리잡다’, ‘정착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a-li'로부터 나온 파생어로서 ’주거‘, ’용기‘, 藏을 의미한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경험이 뒤에 남긴 여력이, 잠재의식으로서 저장되는 장이 아뢰야이다 (고재욱, 257-264쪽. 太田久紀, 117-150쪽, 현남규 384쪽).

한편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아뢰야식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제8식 가운데는 모든 업의 세력들이 풍부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이것은 진여(眞如)나 법성(法性)과 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아뢰야식이 만일에 진여와 같이 변하지 않아서 무위법(無爲法)이 된다면, 여기에는 본래 작용이 없고, 또한 오고 감이 없으며, 변하지 않는 진리와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현상계의 제법이 생성될 수가 없다(無位無作用設 : 眞如의연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성의 것은 반드시 현상계를 낳을 수 있는 유위법의 것이어야 한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 전반에서는 이러한 아뢰야식에 眞如性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잡념법으로 취급하고 이보다 더 깊은 불멸의 어떤 것을 상정하여 제9 아마라식(阿摩羅識, amala-vijñāna)을 세우는데, 이는 오염되지 않아 깨끗하다는 의미에서 무구식(無垢識)이라고 하거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고 한다(이만. 22-24쪽).

신경과학적 견해 :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눈을 통해서 뇌로 보고, 귀를 통해서 뇌가 듣고 하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6식인 의식도 뇌의 기능이다. 7식인 마나식의 아집도, 8식인 알라이야식의 저장도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기능들일 뿐이다.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는 제9식인 무구식 또는 백정식은 신경과학적으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으며 단지 인간이 창조한 하나의 개념인 “하느님”처럼 하나의 개념 내지 관념일 뿐이다.

3)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는 주장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이 진짜로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여 죽은 후에 이것이 다음 세계로 윤회한다고 믿고 있다.

이 윤회(輪廻)사상은 불교 이전에 인도의 베다 종교 또는 우파니샤드의 사상이다. 베다 종교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4 계급이 있음)를 유지하기 위해서 윤회사상을 받아들였다. 즉 천민계급으로 태어나도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이 생에 천민으로 태어났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든 제도이다.

석가모니는 이 윤회사상을 거부하였다. 다음 간단히 붓다의 윤회관을 보겠다.

붓다 탄생 당시인 기원전 6세기에는 원시 이래로 내려온 영혼을 주체로 한 윤회 개념이 베다 종교와 우파니샤드 사상에 의하여 지적 엘리트들인 사상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사실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명상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이 기능하는 모습을 관찰하여 원리이자 사실인 자연법칙을 발견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붓다는 당시에 사실처럼 인정되는 미혹한 관점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바차고타라는 수행승은 ‘인간이 죽고 나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붓다에게 물었다. <아함경>에서 붓다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불타는 땔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즉 “사람이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꺼진 불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따라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이와 같으니, 죽은 자가 어디로 간다느니 가지 않는다느니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붓다의 말에서 우리는 또다시 이성적이고 실증적이며 과학적인 그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임원택, 372-375쪽).

저자의 견해:

현대의학은 정신과 신체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정신이란 뇌의 기능>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런데도 정신이니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여 죽으면 이것이 내세로 윤회한다고 생각하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많다. 죄를 짖지 말라고 유치원생에게 가르치는 권선징악적인 교리를 철석같이 믿고만 있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교리를 믿는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나 사회에는 유익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가? 하고 벽을 마주하고 참선을 아무리 많아 하여 보았자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서점에 가서 마음에 관한 과학 서적 한 권 사보면 빨리 깨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윤회 사상을 받아드려 불교의 없어서는 안 될 교리로 생각하고 있다. 각묵스님은 불교신문 교리문답에서 “자아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 윤회한다”고 말씀하셨다 (각묵스님, ibulgyo, 2005.5.7). 이 흐름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나는 이 흐름을 에너지의 흐름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가장 과학적이다. 내가 죽어 나의 시체를 개가 뜯어먹으면 나의 에너지는 개에게로 흘러간다. 그래서 내가 개가되는 것이다. 나의 시체를 사과나무의 거름으로 쓴다면 내가 사과가 되는 것이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도 맞고 과학적이다.

또한 이 윤회를 마음의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죄를 짖고 나면 죄의식으로 불안해하는 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냐. 몰라서 죄를 지었다면 그 몰랐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無明이 아니냐. 육도 윤회설도 모두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윤회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4) 선정 체험으로 유식을 확증한다는 생각.

유식을 선정 체험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 유식 즉 마음은 뇌의 기능이므로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선정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 다만 선정을 함으로서 생기는 새로운 경험과 뇌의 변화들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뇌의 영상연구로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5) 아뢰야식의 기능들은 뇌의 기능으로 설명된다.

<성유식론> 제3권에서는 아뢰야식의 별명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즉 i) 心(citta) ii) 아타나(阿陀那, ādāna-vijñāna ) iii) 소지의(所知依) iv) 종자식(種子識, bijakah-vijñāna) v) 아뢰야(阿賴耶, ālaya-vijñāna ) vi) 이숙(異熟, vipāke) vii) 무구식(無垢識, amala)이다 (고재욱. 257쪽).

心, 아뢰야, 무구식은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으므로 설명을 생략하고, 설명되지 않은 몇 가지만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가) 아타나

아뢰야식은 아타나식으로도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이다. 이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이란 전문적으로는 <집수(執受)>라고 한다. 상세히 말하면 아뢰야식은 육체의 감각기관, 五根(眼,耳,鼻,舌,身)을 집수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생리적 有機的인 측면에서 <안액동일(安厄同一)>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心身同一을 설명하기 위한 안액동일이란 한쪽이 양호한 상태라면 다른 쪽도 양호하며 한쪽이 나쁜 상태라면 다른 쪽도 나쁜 상태라는 의미이다 (고재욱. 259쪽)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의 역할을 하는 아타나식은 바로 뇌의 기능임을 말해준다. 오근의 기능을 하는 곳도 바로 뇌요,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도 뇌의 생명중추인 뇌간 (brain stem)이다. 안액동일도 뇌로 설명된다. 뇌의 상태가 나쁘면 정신상태도 나쁘고, 정신상태가 나쁘면 뇌의 상태도 나빠지기 마련이다.

(나) 소지의(所知依)

소지의란 지식, 사량식이 의지하는 곳. 의식의 주체인 7식 마나스식이 의지하는 곳이란 뜻이다. 지식이 저장되는 부위는 뇌의 피질이다. 7식인 자아의식을 담당하는 부위는 두정엽과 측두엽을 중심으로 하는 뇌의 부위이다 (Sadock BJ & Sadock VA, 566-574쪽).

(다) 종자식

불교의 근본사상의 하나는 業思想이다. 즉 현재의 상태는 과거의 업의 결과이며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종자란 아뢰야식 속에서 자기의 果를 산출하는 <功能差別>이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공능이란 力, 能力을 의미하며, 차별이란 <특수한>, <우세한> 것을 의미한다. 즉 <종자란 자기를 산출하는 특수한 힘>이다. 그것은 에네르기와 같이 하나의 힘인 것이다. 그것은 사물에 작용하고 있는 顯在的 에네르기가 아니라 원자핵과 같은 핵에네르기처럼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잠재적이며 정신적인 에네르기이다 (고재욱. 265-267쪽).

종자를 자기를 산출하는 특수한 힘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유전인자를 의미할 것이다. 유전인자는 계속 자기를 복제하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인간의 뇌도 이 유전인자의 영향을 받게 되며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라) 이숙(異熟)과 無記

불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記別할 수 없는 것(無記)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표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적 가치관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아뢰야식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무기인가? 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아뢰야식의 특성은 i)異熟되는 것 ii) 선도 악도 아닌 무기 iii) 훈습(熏習)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숙의 원래의 뜻은 <前의 원인과 다른 결과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전의 원인이란 과거의 카르마이며 <성숙된 결과>란 아뢰야식이다. 과거의 카르마가 선하든 악하든 그 결과를 낳지만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니다. 요컨대 무기라는 것이다. (고재욱. 259-260쪽)

확실히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카르마에 의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것에 속박되어 있다. 과거의 선악이 뇌 속의 기억중추에 저장되어 있지만, 마음을 돌이켜 먹으면 그 선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기이지, 선과 악이 기록되지 않는 실체가 뇌 아닌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 無始 이래의 훈습(熏習)

훈습이란 과거의 행위가 남긴 인상이다. 무시이래의 훈습은 바로 진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뇌는 진화의 산물이다. 훈습과 학습을 하면 인간의 뇌는 그쪽으로 발달한다. 이것은 뇌의 유연성(plasticity) 때문이다. 피아노를 열심히 치면 피아노 치는 손가락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신경뉴런이 가지를 많이 치고 발달하게 된다 (Gerald M. Edelman, 146쪽).
 
 
 

III. 마음이란 무엇인가?

1. 마음이란 뇌의 기능(활동)이다.

마음이란 실체는 없다. 영혼이란 실체도 없다.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뇌의 기능일 뿐이며, 하나의 작용이나 개념(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DNA 구조의 공동 발견자인 프랜시스 크릭은, 최근 자신의 저서 <놀라운 가설>에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뇌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경 세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들끼리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이해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Gary Marcus, 7쪽).

마음이 뇌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크릭은 정확했다. 그러나 마음을 전공하고 있는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며 상식에 속하는 말이다. MIT의 인지과학자 스티븐 핀커의 말을 빌리자면 “뇌가 하는 일이 바로 마음이다”.

오늘날 뇌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다. 항우울제인 프로작이 뇌를 자극하여 기분을 바꾼다거나, 발작을 하면 뇌 손상이 일어나 행동방식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뇌의 각 부분이 각기 서로 다른 인지 기능에 참여한다는 것- 음악을 들을 때는 우측 뇌, 연설을 할 때는 좌측 뇌, 공포를 느낄 때는 편도채, 오르가즘을 느낄 때는 우측 전두엽 피질- 등을 과학이 보여 주었다.

그런데, 마음의 기원이 뇌라는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어도, 또 다른 사실, 즉 뇌의 기원은 유전자라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은 훨씬 적다. 50년 전에 크릭이 해독해낸 분자는 그간 과학, 의학, 심지어 법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마음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만큼은 유전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Gary Marcus, 7-8쪽).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음이란 실체가 존재하며 이 실체가 뇌 안에 존재해서 뇌를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sum, ergo cogito)“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나 융이 말한 것처럼, 겉으로 보면 일원론 같이 보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원론인 ‘속성 이원론’도 틀렸다. 프로이트가 말한 ‘개인 무의식’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기능은 뇌의 피질하 부위에서 담당한다. 융이 이야기 하는 ‘집단 무의식’ 역시 뇌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과 같은 뇌의 기능이 있을 뿐이다. 이 역시 뇌의 피질하 조직의 기능에 불과 하다.

2. 뇌라는 물질이 어떻게 작용해서 ‘마음’이라는 현상(기능)을 나타내게 되는가?

이는 뇌의 구조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뇌는 침팬지의 뇌와 98.7%가 유전적으로 같다. 다만 1.3%가 다른데 이 1.3%에 해당하는 언어유전자, 생각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진화의 산물이며,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인간의 뇌는 국소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뇌는 그룹으로 작용한다. 즉 스위스 군인들의 칼처럼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 신경원들의 집단이 회로를 형성해서 작용한다. 예를 들면, 보는 신경회로, 듣는 신경회로, 말하는 신경회로, 생각하는 신경회로, 감정을 느끼고 감정을 발산하는 신경회로, 사랑하는 신경회로, 두려움을 느끼는 신경회로, 피아노를 치는 신경회로,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회로, 꿈을 꾸는 신경회로, 판단하는 신경회로, 자유의지 와 동기를 담당하는 신경회로, 종교적 사고와 행위를 담당하는 신경회로 등등.

뇌가 죽으면 마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이 있어서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하는 것도 과학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인간의 뇌는 1000억개의 뉴론과 100조개의 신경결합으로 되어있다.

신경다윈주의자 Gerald M. Ede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유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입자들은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은 진화적으로 유효하다. 세계는 마음에서 독립해 존재하고 존속되며, 마음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뇌는 선택계이며, 튜링 기계 (turing machine)가 아니다. 감각 자료는 마음의 토대가 아니다. 지난 300년에 걸쳐 과학은 지구중심설, 생기론, 그리고 단순한 기계론과 같은 편협한 사상들을 이미 붕괴시켜 왔다.

마음은 물질의 특별한 형태가 아니라, 물질의 특별한 배열에 따른, 특별한 종류의 과정이다. 특별한 종류의 생물학적 구성이 정신적 과정을 낳는다.

의식이 자연선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은 그 존재와 기능에 있어 의식에 의존한다. 지각과 개념 형성, 기억 사이의 특수한 관계 집합에서 의식이 생겨난다.

애댈만 생각의 핵심은 뉴런 집단선택설(Theory of Neuronal Group Selection)이다. 이는 유전자와 유전형질에 의해서 신경망이 형성되며 신경조직이 집단화된다.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 시냅스의 선택과정이 생기게 된다. 즉 뇌는 신경 유연성 (neural plasticity),이란 것이 있어서, 경험과 훈련에 의해서 그 쪽 신경들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진화의 결과이지 神에 의한 논리적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음을 낳는 뇌는 그 형성 방식에 있어 컴퓨터보다는 정글과 유사한 원형적인 복합계이다.

뇌는 자연선택과 체성선택 등의 두 가지 선택과정을 겪는다. 결과는 회로와 층들로 가득 찬 오묘하고 다층적인 것이다.

이러한 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학자들이, 분자적인, 장 이론적인 또는 생리학적인 용어만 가지고 사람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 없다. 개인의 행동에 대한 이론을 분자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는 영혼 불멸을 바라는 사람들이 영원한 정신을 계속 상정하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 (Gerald M. Edelman, 19-308쪽).

IV. 결론

불교 교리에서 비과학적 교리는 버리고 새로운 현대 과학에 맞는 교리로 재해석하여야 한다. 그 중 유식사상이 가장 비과학적이다. 유식사상의 주된 기능은 뇌의 기능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식 즉 8식인 아뢰야식이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로서도 활동한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현대 신경과학은 동의할 수 없다. 여기서 그것을 논하여 이 교리를 현대 신경과학에 맞게 재해석을 시도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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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뇌과학과 마음’주제 격론 / 이학종 

2009년 4월26일 미디어붓다 보도
 

 [0호] 2009년 04월 26일 (일)  이학종  미디어붓다 대표 
 
 
    
 
'마음은 뇌의 기능' 주장에 自由意志는 어떻게 설명하나?

뇌과학 결과에 대한 선불교의 응답 ‘주목’
 
 
강병조 교수.
 
 
종교가 과학의 우의에 있던 시대가 지난 지는 오래다. 이의 상징적 사건이 기독교가 천동설을 포기하고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나아가 지난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진화론을 수용했다. 과학에 종교가 굴복한 좋은 예이다.

과학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입장을 정리해야 하는 것은 불교라고 예외일 수 없다. 아직까지 불교는 가장 과학적 교리를 가진 종교의 자리를 굳건히 해왔다. 과학의 발전이 곧 불교의 과학성을 입증한다는 믿음을 불자들은 가지고 있다.

한국불교의 특징은 선불교(禪佛敎)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뇌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 전통적인 선불교가 과학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도전의 핵심은 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마음을 뇌의 기능’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그들의 말대로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면 산중에서 불철주야 ‘이 육체를 움직이는 주인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들고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 헛고생일 수도 있다. 뇌의 기능이 마음이라는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사실로 입증된다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이런 민감한 주제를 놓고 발제자 강병조 의대 교수를 포함, 교수 등 불교학자, 불교계 지식인들 20여 명이 24일 저녁 강남 신사동 열린논단에 모여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강 교수는 이전에도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는 주장을 뇌과학 연구 결과를 통해 주장한 바 있다. 그의 발제는 이날도 예상대로 부처님이 그토록 경계했던 단멸론이나 유물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강 교수는 이날 발제에서 “마음은 뇌와 몸의 통합적 활동을 통해 발현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의식, 정서, 욕구, 기억 등의 영향하에 바깥 환경의 외적 자극과 신체 내부의 내적 자극을 받아들인 다음, 뇌의 인지활동을 거쳐 행동으로 표출하는 일종의 ‘정보처리 과정이 마음’이라는 것이다. 유물론적 입장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마음은 실체를 가진 물질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거침이 없었다. 현대과학에 대한 확신, 현대과학과 불교의 전통적 교리해석이 차이가 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해온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소신으로, 그는 얼굴을 붉힐 정도의 거친 논박에도 초지일관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가 주장 몇 부분을 더 살펴보자.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영혼을 아뢰야식(제8식)이라고도 한다. 《해심밀경》에서는 마음 중에서도 잠재의식이고 무의식인 제8식 아뢰야식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며 마음이라는 유일한 실재를 차츰 절대화시켜 나간다.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절대정신인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상에는 오직 마음(정신, 영혼)만이 유일한 실재다. 그리고 그 밖의 물질적 대상은 공(空)’이라는 유식학파의 사상은 관념론이고 유심론(唯心論)이다. 이 사상은 붓다 탄생 수백 년 전부터 고대 인도 사회를 지배해 온 철학이며 절대적 관념론인 《우파니샤드》의 사상에 현혹된 후대의 대승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강 교수는 영혼의 문제는 수천 년 전부터 철학의 주제가 되어 왔으나, 뇌의 기능을 간접적이나마 볼 수 있게 된 최근 20~30년 사이에 사실상 결론이 내려졌다고 단언한다. 현대의학(특히 정신의학) 뿐만 아니라 현대철학에서도 마음이니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뇌의 기능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현대의학의 연구결과가 2,600년 전 석가모니에 의해 파악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통찰”이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강 교수의 주장을 조금 더 들어보자.

“무아와 윤회는 모순이 아닌가? 이 윤회를 현대 과학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윤회는 실체로서 파악해서는 안 되고 기능으로 파악해야 한다. 윤회는 심리적 윤회로 파악해야 한다.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서도 마음이 괴롭다. 그것이 지옥이고 그 삶이 짐승 같은 삶이다. 이것이 심리적 육도윤회이다. 실체로서 윤회를 파악하려면 에너지의 흐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던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로 변한다. 인간의 시체를 개가 먹으면 개의 에너지로 변하여 개가 된다. 사과 밭에 거름으로 주면 사과 에너지로 변하여 사과가 된다. 우주 전체로 보면 에너지의 증감은 없다.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다만 에너지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제임스 오스틴의 논문(1998년 MIT출판사가 《선(禪)과 뇌(Zen and the Brain)》라는 책으로 출간) 등, 서구 현대의학의 성과들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 그는 독특한 불교관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우리 불자들이 다시 깨달아야 한다. 즉 욕심 때문에 생기는 고통을 없애려면, 자연이 기능하는 원리(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원리)를 깨달아 욕심을 적게 부리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진리를 미리 알고 바르게 살아서, 편안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과학이며, 심리학이고 정신수양의 도(道)다.”

강 교수는 “인간 싯다르타는 생존 당시 연기(緣起), 무아(無我),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팔정도(八正道), 공(空)사상, 중도(中道) 등 아주 과학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며 “원래의 석가모니의 과학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국불교 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한국불교는 이제 비불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석가모니의 깨침과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참석자들의 격한 반론이 터져 나왔고, 강 교수는 간단하게 답했다. “부처님을 인정하지 않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발제”라는 감정적인 비판(전종식 대승기신론연구회장)으로부터, 강 교수의 주장이 부처님이 경계했던 유물론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등의 교리적 지적(참석자 다수)이 잇따랐다.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면 각자(覺者)든 불각자(不覺者)든 죽으면 끝이므로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방경일)

“마음이 시냅스의 과학적인 작용에 불가하다면, 붓다가 굳이 출가교단을 만들면서까지 교단을 유지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방경일)

“사람이 죽으면 에너지가 흐른다니, 도대체 무엇이 흐른다는 말인가?”(이제열)

“유체 이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동국대 대학원생)

“불교를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그렇다면 마음 중에서 ‘자유 의지’와 ‘동기’는 보통의 마음과 신경회로에서 어떻게 다른가?”(허우성)

“뇌과학과 불교의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뇌가 마음의 산실이라면 ‘자유의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지 않나?”(허우성)

“발제자는 윤회를 부정하고 있는데, 의식의 흐름이 세포와 세포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바로 윤회가 가능하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윤회는 가능하지 않은가?”(김성철)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강 교수는 의학자답게 간단하게 답변했다.

“각자든 불각자든 죽으면 같다. 왜? 물질이 죽으면 정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뇌의 기능이 마음이라는 현대의학의 결과를 유물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해다. 뇌는 자주 바뀐다. 살아있는 뇌는 물질만이 아니고 새로운 것이 생기는 창발적 존재다. 부분의 합이 전체는 아니다. 뇌세포를 다 모았다고 뇌가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뇌과학은 유심론도 유물론도 아니다.”

“사후에 흐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에너지의 흐름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유체이탈은 거짓말이라고 본다.”

“자유의지를 담당하고 있는 신경회로가 따로 있다. 대뇌피질 밑에 있는 신경회로가 그것이다. 이 신경회로를 차단하면 자유의지는 생길 수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를 뇌과학에서 어떻게 설명하는냐는 참 어려운 문제다.”

한편,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평가하는 의견도 있었다. 윤창화 민족사 사장은 “강 교수의 뇌과학을 통해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자체가 불교학계에 대단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불교학계가 언제까지 옛 문헌에만 따지고 있을 것인가? 옛 불교문헌들 가운데 오류가 얼마나 많은가. 또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다’라는 것이 어떻게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윤회는 불교이다, 아니다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윤회는 불교 이전 힌두에서 다 나온 것이 아닌가?”라며 강 교수의 시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열린논단’을 주관하고 있는 월간 <불교평론>의 홍사성 편집인은 “현대과학에서 혹시라도 불교의 기존 교학적 해석과 다른 부분이 제기된다면,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호교적(護敎的) 입장에 서고자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그러나 ‘열린논단’은 모든 것을 열어놓고 고정관념 없이 토론을 벌이는 장이며, 어떤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자리도 아니”라고 말했다. 홍 편집인은 “호교적 입장이 지나치면 비불교적인 것이 된다”며 “광대무변한 불교의 특성답게 모든 것을 열어놓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문화를 열린논단이 선도해 정착시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강병조 교수는?

1968년 경북대 의과대학 졸업. 1973년 신경정신과 전문의. 1975년 의학박사(경북의대). 1976년부터 경북대학교 의학대학원 정신과 교수(현). 1983~1984년 미국 뉴욕 앨버트 아인슈타인의대 정신과 방문교수. 1995~1997년 대한정신약물학회장, 1998~2000년, 대한생물치료정신의학회장, 2007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학회장 등 역임. 의대 재학 시절 불교학생회를 창립하고 1998년 경북대학교병원 불자회와 종교 간화합을 위한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연구논문으로 Can the expression of histocompatibility antigen be changed by lithium? 외 130여 편과 《뇌 과학과 마음의 정체》등의 저서가 있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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