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3
알라딘: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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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4)] 우리 만남은 바람꽃이었소 류영모의 탄식 | 아주경제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4)] "우리 만남은 바람꽃이었소" 류영모의 탄식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2020-12-07 10:30
류달영과 현동완, 류영모가 아낀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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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스승이라는 말 속엔 허허벌판이 있다. 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크고 굳센 어른 하나 서 있다. 스승은 말하지 않는다. 그 삶이 거울이 되어 내내 한 존재를 비춘다. 스승은 원래 앞날을 예언하는 여자무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죽음이 늘 가깝게 내려와 있던 맨발의 시절에 부락의 중심에 좌정하고 앉아 가야할 길을 읽어내던 지혜로운 자였다. 스승이 교육이라는 백년대계를 책임지게 된 것은 거기서 연유한 것일까. 그 뒤 부처의 가르침에 한 나라가 귀의하면서 왕을 길러내는 스님을 스승이라 불렀다. 한 사람의 덕망이 어린 왕자에게로 스며들어가 교화중생(敎化衆生)의 눈밝음과 향기가 되는 것. 그것이 스승의 옛뜻이다.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는 것. 거기엔 허허벌판에서 허허벌판으로 이어지는 진수(眞髓)의 이동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가슴에 평생 지지 않는 해를 달아 거는 일이다. 나를 스승으로 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나를 해 삼아 세상을 비춰보는 것이다. 눈 내리는 막막한 삶에 문득 홀로 서서 앞을 내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는 스승. 그 스승의 안광(眼光)을 빌려 세상을 읽고 다시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야 말로 인생공부의 간명한 요약이다. 류영모는 하느님의 말씀을 체현(體現)한 '예수'를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큰 길을 연, 스승이 되었다. 그가 말하고 행하는 '참(眞)'을 실감하고 인식한 제자들이 그를 모셨으며, 본받고 따르고자 했다. 그중에 류달영과 현동완의 길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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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달영 전 서울대교수. 박정희정부가 주도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다. 본부 해체 이후 1964년 민간 주도의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했다. 류달영은 서울 양정고보에서 김교신(1901~1945)을 담임교사로 만났고, 그를 깊이 존경했다. 김교신은 류영모 강좌를 열었고, 또 성서조선의 필진으로 모신 바 있다.]
박정희의 재건국민운동과 류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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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가운데'에 있다류영모는 세상에서 뭔가를 도모(圖謀)하는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의 정신적 기반이 된 두 제자를 두게 된다. 그의 씨알사상으로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함석헌이 그의 제자였고, 역시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이후 국가재건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이후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주춧돌을 놔줬던 류달영(1911~2004) 또한 그의 제자였다. 말하자면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중요한 국가발전의 축을 기초한 두 사람이 그를 사사(師事)한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였다.
류달영은 박정희가 설립한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권력 찬탈을 한 박정희에게 뜻을 굽혀 복무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사정권을 싫어한다. 국민운동의 첫째 목적은 군정(軍政)을 단축시키는 데 있다." 박정희는 5·16 이후 권력을 잡은 뒤 위축되고 이반된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재건국민운동을 구상했다. 박정희는 그 본부장에 함석헌을 생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유진오에게 맡겼는데, 그는 두 달을 맡고 물러났다. 이후 유달영에게 본부장직을 제안했다. 그 또한 바로 거절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끈질기게 그에게 요청을 했다. 그때의 상황을 류달영은 이렇게 회고한다.
"1961년 이 나라에는 불행하게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정신개혁과 생활혁신을 목표로 재건국민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을 폈다. 유진오가 초대 재건운동본부장을 두 달 맡고 내가 2대 본부장으로 위촉되었다. 직위는 총리와 동급이었다. 내가 그 직책을 맡기까지는 적지 않은 사연이 있다. 하루는 박정희 장군이 나를 불러 본부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대학에서 학구의 생활로 일생을 보내려는 것이 나의 소신이라고 했다. 두 번째 만나서는 거절하면서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며칠 뒤에 추천자 명단을 내놓았더니 웃으면서 모두 검토가 끝난 인물들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인편으로 서너 차례 교섭이 왔으나 번번이 거절했다. 여섯 번째의 면담에서 그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는 수락하지 못할 만한 조건 3가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3가지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정부는 일체 간섭을 안 한다는 조건이었다. 류달영은 박정희의 육고초려(六顧草廬) 끝에 철저한 자율을 약속받고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이 됐다. 이 제안을 수용한 까닭은 덴마크 그룬트비처럼 위기의 나라에 정신운동을 일으켜 후진적 정치와 경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애국적 열정 때문이었다. 류달영이 본부장이 되고난 다음, 그의 스승 류영모는 위촉장을 받았다. '중앙위원'으로 모시고자 하는 요청이었다. 중앙위원에는 함석헌, 이관구, 고재욱, 김팔봉, 김재준, 김활란이 포함되어 있었다. 류영모는 제자 류달영의 좋은 뜻을 도와주자는 생각에서 이를 응낙했다. 물론 류영모가 생각하는 '재건'의 의미는 훨씬 컸던 것 같다.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 위촉장을 받고난 뒤 류영모는 YMCA연경반에서 그 일을 공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재건(再建)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 같습니다. 새삼스레 재건이 뭡니까. 우주혁명이라고 하는데 우주재건이라고 해야 합니다. 석가와 예수는 우주재건을 가르쳤습니다. 우주 자체는 자연이라 내버려두고 나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우주혁명이란 인간혁명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뚜렷해야 합니다. 내 속에 하느님이 보낸 성령인 얼이 뚜렷하면 됩니다."
이후 류영모는 1년 8개월 뒤에 류달영이 본부장에서 물러났을 때 중앙위원을 그만두었다. 당시의 상황을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정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육사8기 출신 군인들의 행패도 적지 않았어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때 국민운동은 민간인이 주도한 민주적 향토건설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에 의한 관주도 운동이었습니다. 국민운동의 방법은 덴마크 부흥의 핵심이었던 연수원 교육의 실천이었어요. 서울에 중앙연수원을 비롯하여 각 시도에 시도연수원 그리고 시군에 시군연수원을 세운 뒤 향토건설을 위해 청년교육을 실시한 것입니다."
즉 재건국민운동은 민주적인 운동으로 시작했으며 류달영이 생각했던 덴마크 농촌 부흥의 '국가번영 시나리오'를 실천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일을 국민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나서서 진작하고 추동(推動)하여 이끌고 나가는 '새마을운동' 쪽으로 바꾼 것이다. 류영모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철학과 취지는 류달영의 민주적인 재건국민운동에서 나왔으나, 실행 방식은 독재정권의 강제적인 스타일로 진행된 변종이었다는 얘기다.
류영모와 류달영은,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국가번영 철학의 바탕을 제공하였으나, 그 권력의 전횡에는 동의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다. 박정희가 류달영에게서 얻은 민주적 방식의 농촌 부흥과 경제 발전을 꾀했더라면 이 땅에 산업화와 민주화가 함께 이뤄지면서, 박정희 정권이 독재의 말로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석헌 또한 민주화를 위한 치열한 투쟁 대신 정신적인 추구를 하는 데 평생의 열정을 쏟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역사에는 만약(萬若)이 없다. 긴 상처로 점철된 비극의 결말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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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 현동완.] '류영모 강좌'의 평생 집사였던 창주(滄柱) 현동완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YMCA로 파견된 그는 4년간 퀘이커교도와 교류하며 정신적인 눈을 새롭게 떴다. 1926년 귀국해, 당시 복음사회주의 경향에 반대하여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YMCA 소년 평화구락부가 그 활동의 중심이었다. 기도회와 체력 단련, 그리고 사회봉사가 수련 내용이었다. 이 운동은 전 연령을 망라한 '참운동'으로 전개된다.
현동완은 '류영모 금요강화(講話)'를 개설하여 참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 운동은 기독교 교계 내에서 반발에 부딪쳤고 보수세력과 사회복음주의의 저항에 흔들리게 된다. 현동완은 YMCA연합회 순회간사를 맡으면서 참운동을 확장하고자 하였으나 기독교 청년회의 반발로 1937년 사임을 하고 함북지방에 은둔한다.
해방 이후 그는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으로 일했고 1948년에 서울YMCA총무를 맡는다. 그는 복음운동의 대중화를 외치며, 매주 3대 신앙강좌(류영모, 한에녹,함석헌)를 열었다. 현동완은 식민지시대에 불굴의 의지로 지속했던 류영모 강좌를 다시 열어, 해방 공간으로 이어지는 정신운동을 전개한 셈이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꾸준히 류영모를 강단에 모셨던 그는 1957년 3월 총무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1959년 병을 얻어 난지도 삼동소년촌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3년 눈을 감는다. 그의 생은 YMCA와 함께했으며, '류영모 강좌'와 함께한 것이기도 하다.
문학가이자 목사였던 황광은은 현동완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세기 종로의 성자였습니다. 그는 분명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은 복이 있다고 외친 그 주님께 미쳤던 것입니다. 그가 커피를 안 마신 것은 나라를 위함이었고,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세계평화를 위함이었습니다. 하루 한끼씩 안 먹은 것은 불행한 고아를 위함이었고, 사과를 안 먹은 것은 병자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는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불우한 형제에게 다 나눠주고 남은 한 벌로만 살았습니다. 그는 머리 둘 집이 없었습니다. 난지도 소년촌 단칸방을 병실로 쓰다가 거기서 돌아갔습니다."
오직 이웃의 삶, 고통받는 불우한 이들의 벗으로 살고자 했던 현동완은, 그 실천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스승 류영모를 통해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것이다. 스승의 '참'이야 말로, 그리스도에 미친 삶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는 그 '참'을 필생의 신앙으로 삼아 죽음까지 나아갔을 것이다.
류영모는 난지도 소년촌으로 그를 문병한 뒤 '다석일지'에 이렇게 썼다.
언님 이제 아무 일도 못보심 만큼 싸흐심!
벽새에 앉은 이 아운 한우님 계로만 생각
한님계 이기신 님계 이길 싸움만 봅소사!
(형제여, 이제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만큼 홀로 싸우고 있구려.
벽 사이에 앉은 이 동생은 하느님이 거기 계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거기를 이기신 님의 거기, 이기는 싸움만 바라보시기를.)
류영모에게 현동완은, 그가 세상에 내놓을 복음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평생의 '복음집사(執事)'였다. 1963년 현동완이 돌아간 뒤 류영모의 YMCA연경반은 끝이 났다. 전택부가 총무를 이어받았으나, 그는 '류영모 강좌'를 만들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35년 강연역사가 급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류영모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겨놓았다. "창주도 이젠 우리 인생 만났다던 것이 바람꽃만이었던 것을."
류영모가 80세 때 문득 제자에 관해 남긴 말이 있다. 그의 제자들에게는 뼈아픈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무가 많으면 그 속에는 반드시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낢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 사람은 많으나 재목으로 쓸 만한 사낢은 없을까. 내가 여든을 살면서 아직껏 저 사람이면 사낢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류영모는 나무 중에서 쓸 만한 나무를 가리켜 '낢(材)'이라고 표현하면서, 뛰어난 제자를 '사낢'이라 표현했다. 낢은 '날(飛)'과 남(生)'이 함께 들어가, '뛰어오르는 후생'의 의미가 된다. 사람의 낢이니 인재(人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제자 중에서 '저 사람이면 뒤를 맡길 인재라 할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70년에 한 말이니, 이미 많은 제자들이 품을 거쳐 떠나간 다음이다. 그의 사상과 길을 온전히 믿고 맡길 이를 찾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했을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폄하나 불신이라기보다는, 류영모의 잣대와 기대하는 높이가 만들어내는 미흡이라고 봐야 하리라.
하지만 류영모의 아낌과 칭찬을 받은 제자는 적지 않았다. 함석헌이 구속되었을 때 류영모는 하느님께 하는 기도는 영원한 생명만 구해야지 세상 일을 어찌해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그가 구속되었다 하니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김흥호가 공부 모임에 다녀오느라 약혼녀에게 파혼당한 것을 두고도, 그의 열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류승국이 석가와 공자, 예수처럼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갈 수 있겠다고 말했을 때도 기뻐했다. 서완근이 천안 광덕에서 농촌운동을 했을 때도, 류달영이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을 썼을 때도 칭찬을 했다.
35년간의 강의에 찾아왔던 사람들 중에는, 한학자 범부 김정설, 논어를 영어로 번역한 변영태,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신도안의 정도령이라 불린 양도천, 시인 김관식, 도인 대오 석종섭 등도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간 모임은 광화문 문정길 사무실에 있었던 모임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김진홍 두레수도원장, 횡령혐의, 고발돼:올인코리아
김진홍 두레수도원장, 횡령혐의, 고발돼
네티즌 반응은 '모함'과 '위선'으로 갈라져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http://www.allinkorea.net/img/skin1/icon_mail.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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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두레수도원장이 교회돈을 횡령한 혐의로 고발됐다고 한다. “김 수도원장은 자신이 세운 경기 구리시 두레교회 담임목사를 2011년 그만 둔 뒤 동두천시에서 같은 이름의 교회와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동아닷컴은 “의정부지검 형사5부(신승희 부장검사)는 7일 구리 두레교회 장로 등 교인 13명이 김 수도원장을 횡령 혐의로 고발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인들은 지난해 교회 명의 계좌를 확인하다 김 수도원장이 담임목사로 재직할 때 만든 통장 3개를 발견했고, 2005년부터 약 3년간 총 22억여 원이 입금됐다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해 6월 검찰에 고발했다”며 “이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조사하고 있는 검찰은 고발내용이 확인되는 대로 김 수도원장을 불러 조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도 이날 “김 수도원장은 1997년 구리에 두레교회를 세워 2011년까지 운영했다. 2005∼2010년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았으며 2007년에는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취임준비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며 2007년 8월 뉴라이트전국연합 비상대책위가 “김진홍 상임의장이 금품을 받고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며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고발했다고 전했다. “제4회 지방선거가 치러진 2006년에는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가 김 수도원장이 담임목사로 있던 두레교회 관계자 14명의 이른바 ‘쪼개기 후원금’과 관련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며 연합뉴스는 “두 건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며, 검찰 관계자의 “아직 김 수도원장 소환 계획은 없다”는 입장도 전했다.
9월 6일 김진홍 목사는 경기신문에 기고문(새 역사를 위하여)을 통해 “내가 대학시절에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책이다. 나의 서재 한켠에 묻혀 있던 책을 찾아내어 오늘 다시 읽고 있는 중”이라며, 1952년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유달영 교수의 “1952년 공산군 침략 때에 대구에 피난하던 중 단칸방에 4·5인이 복작이면서 휴지조각에 초고를 쓴 것이 이 책이다. 처참한 전쟁 중에서 나는 이 민족을 구원하는 길을 찾아보고자 애태우는 심정으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내버리는 광고지 뒤에 이 원고를 썼다”며 “전선이 일진일퇴하는 중에 가족들은 갈라져 생사도 모르는데… 덴마크의 역사 속에서 우리도 살길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에 쓴 책”이라는 서문을 소개했다.
이어 “대학시절 이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나는 졸업할 즈음에 진로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의 길을 갈 것인가, 그룬트비 같은 개척자의 길을 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의 철학자였고, 그룬트비히는 목사이면서 개척자였다”며 김진홍 목사는 “나는 철학을 전공하였기에 키에르케고르 같은 순수철학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목사가 되어 그룬트비히 같은 개척자의 길을 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것”이라며 “결국은 목사가 되어 개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인격과 실력이 부족하여 그룬트비히의 흉내도 못내는 처지로 지내왔지만, 내가 바라고 추구하는 목표는 지금도 변함없이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다”고 고백했다.
“김진홍 두레수도원장, 교회 돈 20억 원 횡령 혐의로 고발돼”라는 동아닷컴의 뉴스에 네티즌들의 반응은 교차됐다. 한 네티즌(g7571)은 “김진홍 목사의 글을 보고 참으로 너무나 감동했던 시절이 되살려진다. 그런데 어찌타, 백성들, 신도들의 신망을 받던 당신, 왜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질 일을 저질렀소?”라고 했고, 다른 네티즌(광솔잎)은 “종교계를 사회공익단체로 법제화하여 재정관리 투명성 차원에서 매년 회계감사 받도록 하고 개인이 횡령하거나 불법전용 되는 사례를 예방해야 하며 수익자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해야 합니다”라고 했고, 또 다른 네티즌(자유민주)은 “수사를 해봐야 죄의 유무를 알겠지만, 한국은 종교인들의 부패 단죄를 엄히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한 네티즌(Hyun Lee)은 “김 목사가 좋은 일 많이 했다하는데 왜 좀 조용히 겸손히 하지 못하고 책을 출판하여 자기 자랑이나 하고 돈이 없었을 때는 겸손한 척 하더니 돈 멋을 보고는 확 돌아버린 것 같다. 왼손이 한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을 목사들은 다 잊어버렸나?”라고 했고, 다른 네티즌(toot)은 “이 참에 하나님 사업 빙자하며 세금 한푼 안 내는 교회 목사들도 세금 소득세 부과하고 교회 엉터리 재정처리도 철저한 외부감사를 받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나라 교회 짝퉁목사들 거의 대다수가 교인 헌금을 자기 쌈지돈 쓰듯 마구 꺼내 쓰는 엉터리들 수두룩할 것이다!”라고 했고, 또 다른 네티즌(songgaxi)은 “진실성이 없이 설치는 자는 모두 나쁜 쪽으로 한몫하는군”이라고 했다.
중앙일보의 한 네티즌(kywoo22)은 “존경받는 인물을 못 만드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절차상의 하자는 있을 수 있으나 그럴 분이 아님은 모든 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기사 마지막에 예전에 피소된 건들도 혐의 없이 음해당한 것입니다. 기다려보십시오”라고 했지만, 다른 네티즌(Tae Hyung Lee)은 “대한민국에는 이런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드글드글 하다. 종교계 법조계 교육계 정계 재계는 물론이고 국가차원의 정화사업이 절실하다”고 했고, 또 다른 네티즌(Hyun Lee)은 “교회가 돈이 없을 때는 말썽이 없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가 부흥(?)하고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온통 잡음투성이 집단으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이라고 했다.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hursuaby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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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 정신은 어디서 왔는가?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룬트비
새마을 운동 정신은 어디서 왔는가? | 머리식히기
부산갈매기 2009. 5. 22. 07:24
http://blog.daum.net/oceanpro88/194
19세기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자.”는 이른바 ‘3애(三愛)정신'을 내세워 전쟁과 가난으로 깊은 좌절과 자탄에 빠진 덴마크 국민들에게 등불이 되어주었다. 오늘날의 덴마크는 북유럽의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지만 19세기 중엽만 해도 상황은 딴판이었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다.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다. 국가 경제는 당연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덴마크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1783년 9월8일 덴마크의 우드비에서 태어난 그룬트비는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룬트비는 그 파탄에 빠진 덴마크를 구하기 위해 ‘국민의식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국민성 개조운동’을 펼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 국민들 사이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믿음이 경제 재건의 활력소가 되면서 덴마크는 아름답고 부유한 낙농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부흥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고 류달영 선생은 참고할 만한 변변한 문헌도 없고 원고지조차 구하기 힘든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대구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시멘트 포대 속지에 조국을 다시 일으켜세우겠다는 의지와 다짐을 담은 부흥사를 써내려갔다. 그는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가진 ‘되는 일이 없다’는 식의 부정적 문화를 ‘열심히 해서 잘살아보자’는 긍정적 문화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1953년에 출간된 류달영의 <새 역사를 위하여>는 전후 한국재건운동의 바이블이 되었다. 특히 그가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자조’는 이후,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 운동 정신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처럼 150년 전만 해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던 자조가 그룬트비와 우치무라 간조, 류달영 선생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2>에서
덴마크의 그룬트비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 2002
2022/05/22
grundtvig_selected_educational_writings.pdf
N.F.S Grundtvig (1991): ”Selected Educational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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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WD Forewords —
57 pages
[An Introduction To Danish Culture |includes Spiritual father Grundtvig
N. F. S. Grundtvig - Wikipedia 니콜라스 그룬트비 한일위키
N. F. S. Grundtvig
N. F. S. Grundtvig | |
---|---|
![]() Grundtvig in pastoral garments | |
Born | 8 September 1783 |
Died | 2 September 1872 (aged 88) |
Occupation | Lutheran minister, teacher, author, poet, philosopher, historian |
Children | Svend Grundtvig |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Danish: [ˈne̝koˌlɑjˀ ˈfʁeðˀˌʁek ˈse̝vəˌʁiˀn ˈkʁɔntvi]; 8 September 1783 – 2 September 1872), most often referred to as N. F. S. Grundtvig, was a Danish pastor, author, poet, philosopher, historian, teacher and politician.
He w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people in Danish history, as his philosophy gave rise to a new form of nationalism in the last half of the 19th century. It was steeped in the national literature and supported by deep spirituality.[1][2]
Grundtvig holds a unique position in the cultural history of his country. Grundtvig and his followers are credited with being very influential in the formulation of modern Danish national consciousness. He was active during the Danish Golden Age, but his style of writing and fields of reference are not immediately accessible to a foreigner, thus his international importance does not match that of his contemporaries Hans Christian Andersen and Søren Kierkegaard.[3][4]
Contents
Early life and education[edit]
Called Frederik rather than Nikolaj by those close to him. N. F. S. Grundtvig was the son of a Lutheran pastor in Udby, Johan Ottosen Grundtvig (1734–1813) and was born there. He was brought up in a very religious atmosphere, although his mother also had great respect for old Norse legends and traditions. He was schooled in the tradition of the European Enlightenment, but his faith in reason was also influenced by German romanticism and the ancient history of the Nordic countries.[5]
In 1791 he was sent to Thyregod in Sydjylland to live and study with pastor Laurids Svindt Feld (1750–1803). He subsequently studied at the Aarhus Katedralskole, the cathedral school of Aarhus, from 1798 until graduation. He left for Copenhagen in 1800 to study theology and was accepted to the University of Copenhagen in 1801.[6][7] At the close of his university life, Grundtvig began to study Icelandic and the Icelandic Sagas.[8]
Career[edit]
In 1805 Grundtvig took a position as tutor in a house on the island of Langeland. The next three years he used his free time to study writers Shakespeare, Schiller, and Fichte.[9] In 1802 his cousin, the philosopher Henrich Steffens, returned to Copenhagen full of the teaching of 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His lectures and the early poetry of Adam Oehlenschläger opened Grundtvig's eyes to the new era in literature.[10] His first work, On the Songs in the Edda, attracted no attention.
Returning to Copenhagen in 1808, Grundtvig achieved greater success with his Northern Mythology, and again in 1809 with a long drama, The Fall of the Heroic Life in the North. Grundtvig boldly denounced the clergy of the city in his first sermon in 1810.[11] When Grundtvig published the sermon three weeks later it offended the ecclesiastical authorities, and they demanded him punished.[11][12]
In 1810 Grundtvig underwent a religious crisis and converted to a strongly held Lutheranism. He retired to his father's country parish in Udby as his chaplain.[13] His new-found conviction was expressed in his The First World Chronicle (Kort Begreb af Verdens Krønike i Sammenhæng) of 1812, a presentation of European history in which he attempted to explain how belief in God has been viewed throughout human history and in which he criticized the ideology of many prominent Danes.[14][15] It won him notoriety among his peers and cost him several friends, notably the historian Christian Molbech.[15] Upon his father's death in 1813, Grundtvig applied to be his successor in the parish but was rejected.[16]
In the following years his rate of publication was staggering: aside from a continuing stream of articles and poems, he wrote a number of books, including two more histories of the world (1814 and 1817); the long historical poem Roskilde-Riim (Rhyme of Roskilde; 1813); and a book-sized commentary, Roskilde Saga.[17] From 1816 to 1819 he was editor of and almost sole contributor to a philosophical and polemical journal entitled Danne-Virke, which also published poetry.[14]
From 1813 to 1815, he attempted to form a movement to support the Norwegians against the Swedish government. Later he preached on how the weakness of the Danish faith was the cause of the loss of Norway in 1814. His sermon was met by an enthusiastic congregation in Copenhagen. Grundtvig withdrew from the pulpit because of lacking his own parish, and being barred by other churches.[18] In 1821 he resumed preaching briefly when granted the country living of Præstø, and returned to the capital the year after.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6/GrundtvigByHansen.jpg/170px-GrundtvigByHansen.jpg)
In 1825 Grundtvig published a pamphlet, The Church's Rejoinder (Kirkens Gienmæle), a response to Henrik Nicolai Clausen's work on the doctrines, rites and constitutions of Protestantism and Roman Catholicism. A professor of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Copenhagen, Clausen argued that although the Bible was the principal foundation of Christianity, it was in itself an inadequate expression of its full meaning. He described the church as a "community for the purpose of advancing general religiousness."[19] In his reply, Grundtvig denounced Clausen as an anti-Christian teacher and argued that Christianity was not a theory to be derived from the Holy Bible and elaborated by scholars. He questioned the right of theologians to interpret the Bible.[20][21] Grundtvig was publicly prosecuted for libel and fined. The Church of Denmark forbade him to preach for seven years. During this time he published a collection of theological works, visited England three times (1829–31), and studied Anglo-Saxon.[16]
In 1832 Grundtvig obtained permission to again enter active ministry. In 1839 he was called as pastor of the workhouse church of Vartov hospital in Copenhagen, a post he held until his death. Between 1837 and 1841 he published Sang-Værk til den Danske Kirke (Song Work for the Danish Church), a rich collection of sacred poetry; in 1838 he brought out a selection of early Scandinavian verse; in 1840 he edited the Anglo-Saxon poem "The Phoenix", with a Danish translation. In 1843 he visited England for a fourth time.[22] [23]
From 1844 until after the First Schleswig War, Grundtvig took a prominent part in politics, developing from a conservative into an absolute liberal. In 1848 he was part of the Danish Constituent Assembly which wrote the first constitution of Denmark. In 1861 he received the titular rank of Bishop in the Church of Denmark, but without a see. He continued to write and publish until his death. He spoke from the pulpit at Vartov Church every Sunday until a few days before his death. His preaching attracted large congregations, and he soon had a following. His hymn book effected a great change in Danish church services, substituting the hymns of the national poets for the slow measures of the orthodox Lutherans. In all Grundtvig wrote or translated about 1500 hymns, including "God's Word Is Our Great Heritage" and "Det kimer nu til julefest".
Christian thinking[edit]
Grundtvig's theological development continued over his lifetime, and took a number of important turns. He moved from his "Christian awakening" of 1810 to believing in a congregational and sacramental Christianity in later years. He was most notable for the latter thinking. He always called himself a pastor, not a theologian, reflecting the distance between his ideas and academic theology. The chief characteristic of his theology was the substitution of the authority of the "living word" for the apostolic commentaries. He desired to see each congregation act as a practically independent community.
Thought on education[edit]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d/Grundtvig_Vartov_Copenhagen_1.jpg/170px-Grundtvig_Vartov_Copenhagen_1.jpg)
Grundtvig is the ideological father of the folk high school, though his own ideas on education had another focus. He advocated reforming the ailing Sorø Academy into a popular school aiming at another form of higher education than what was common at the university.
Rather than educating learned scholars, he believed the university should educate its students for active participation in society and popular life. Thus practical skills as well as national poetry and history should form an essential part of the instruction. This idea came very close to implement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Christian VIII, whose wife Caroline Amalie was an ardent supporter of Grundtvig. The death of the monarch in 1848 and the dramatic political development in Denmark during this and the following years put an end to these plans. However, by that time, one of Grundtvig's supporters, Kristen Kold, had already established the first folk high school.
Grundtvig's ambitions for school reform were not limited to the popular folk high school. He also dreamed of forming a Great Nordic University (the School for Passion) to be situated at the symbolic point of intersection between the three Scandinavian countries in Gothenburg, Sweden. The two pillars of his school program, the School for Life (folk high school) and the School for Passion (university) were aimed at quite different horizons of life. The popular education should mainly be taught within a national and patriotic horizon of understanding, yet always keeping an open mind towards a broader cultural and intercultural outlook, while the university should work from a strictly universal, i.e. humane and scientific, outlook. [24]
The common denominator of all Grundtvig's pedagogical efforts was to promote a spirit of freedom, poetry and disciplined creativity, within all branches of educational life. He promoted values such as wisdom, compassion, identification and equality. He opposed all compulsion, including exams, as deadening to the human soul. Instead Grundtvig advocated unleashing human creativity according to the universally creative order of life. Only willing hands make light work. Therefore, a spirit of freedom, cooperation and discovery was to be kindled in individuals, in science, and in the civil society as a whole. [25]
Beowulf and Anglo-Saxon literature[edit]
In 1815 Grímur Jónsson Thorkelin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Epic of Beowulf titled De Danorum rebus gestis secul. III & IV : Poëma Danicum dialecto Anglosaxonica in a Latin translation. Despite his lack of knowledge of Anglo-Saxon literature, Grundtvig quickly discovered a number of flaws in Thorkelin's rendering of the poems. After his heated debate with Thorkelin, Johan Bülow (1751–1828), who had sponsored Thorkelin's work, offered to support a new translation by Grundtvig — this time into Danish. The result, Bjovulfs Drape (1820), was the first full translation of Beowulf into a modern language (previously, only selections of the poem had been translated into modern English by Sharon Turner in 1805). [26]
Grundtvig went on to explore the extensive literature of the Anglo-Saxons which survived in Old English and Latin. In both poetry and prose, it revealed the spirituality of the early Church in Northern Europe. Grundtvig was very influenced by these ancient models of Christian and historical thought (notably the 8th-century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written in Latin). Using the resources of the Royal Library in Copenhagen and of the libraries at the universities of Exeter, Oxford and Cambridge in three successive summer visits to England (1829–31), he went on to make transcriptions of two of the four great codices of Anglo-Saxon poetry: the Exeter Book and the codex designated Junius 11 in the Bodleian Library at Oxford. Although he thought to publish them, this project was never realized. Beowulf and Anglo-Saxon literature continued to be a major source of inspiration to Grundtvig. It had a wide-ranging influence upon his work.[27][28][29]
Marriage and family[edit]
Grundtvig was married three times, the last time in his seventy-sixth year. His first wife, Elisabeth Blicher (1787–1851), was a clergyman's daughter. They were married in 1818 and had three children. His second wife, Marie Toft (1813–54) was the daughter of a landowner. She died a few months after giving birth to a son. In 1858, he married Asta Reedtz (1826–1890) of an old aristocratic Danish family. His son Svend Grundtvig (1824–83) collected and edited Danish ballads.[30]
Legacy[edit]
- Grundtvig's Church in the Copenhagen district of Bispebjerg was designed by Danish architect Peder Vilhelm Jensen-Klint as a memorial to Grundtvig. Built of yellow brick in a Neo-Gothic expressionist style, it was completed in 1940.
- Grundtvig International Secondary School in Nigeria is also named after him, It is an independent co-educational secondary School.
- His hymn De Levendes Land was chosen in 2006 as an item in the Lyrikantologi which forms part of the Literature section of the Danish Culture Canon.[31]
- Grundtvigian Forum is located at Vartov in central Copenhagen. Founded during 1898, it is a religious movement with a background in Grundtvigianism.
Veneration[edit]
- Grundtvig is commemorated on 2 September as a renewer of the church in the Calendar of Saints of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32]
- Grundtvig is honored with a feast day on the liturgical calendar of the Episcopal Church (USA) on 8 September.
Bibliography[edit]
Editions[edit]
No comprehensive foreign language edition of his work exists. A three-volume edition in German, however, is under preparation and projects for an English edition are in progress as well. Grundtvig's secular poetical works were published in a nine-volume edition, the first seven volumes by his second son, the philologist Svend Grundtvig. The philological practice of this work, however, is not up to the standards of modern philology. His hymns have been collected in the philologically more stable five-volume edition Grundtvigs Sang-Værk.
The best overall collection of his writings is the 10 volume edition Grundtvigs udvalgte Skrifter edited by Holger Begtrup (1859–1937). His enormous oeuvre is presented in Steen Johansen: Bibliografi over N.F.S. Grundtvigs Skrifter (I-IV, 1948–54).[33]
The most important editions are:
- Grundtvigs Sang-Værk 1–6. Magnus Stevns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Det danske Forlag. 1948–64.
- Poetiske Skrifter 1–9. Udgivet af Svend Grundtvig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Karl Schönberg og Hyldendal. 1880–1930.
- Udvalgte Skrifter 1–10. Holger Begtrup (editor). Copenhagen: Gyldendal. 1904–09.
- Værker i Udvalg 1–10. Hal Koch and Georg Christensen (editors). Copenhagen: Gyldendal. 1940–46.
English translations[edit]
- N.F.S. Grundtvig - A Life Recalled. An Anthology of Biographical Source-Texts.Edited and translated by S.A.J. Bradley.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08.
- The School for Life. N.F.S. Grundtvig on Education for the People.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1.
- Living Wellsprings. The Hymns, songs and Poems of N.F.S. Grundtvig.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5.
- Human Comes First. The Christian Theology of N.F.S. Grundtvig. Translated by.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8.
- The Common Good. N.F.S. Grundtvig as Politician and Contemporary Historian.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9
Bibliography[edit]
- Abrahamowitz, Finn (2000), Grundtvig Danmark til lykke (in Danish), Copenhagen: Høst & Søns Forlag, ISBN 87-14-29612-8.
- Allchin, Arthur Macdonald (1997), NFS Grundtvig, Århus: Århus University Press, ISBN 87-7288-656-0.
- Reich, Ebbe Kløvedal (2000), Solskin og Lyn — Grundtvig og hans sang til livet (in Danish), Copenhagen: Forlaget Vartov, ISBN 87-87389-00-2.
- Johansen, Steen (1948–54), Bibliografi over NFS Grundtvigs Skrifter 1–4, Copenhagen: Gyldendal.
References[edit]
- ^ Mogens Brøndsted.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Store norske leksikon.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John A. Hall, Ove Korsgaard, Ove K. Pedersen (2014) Building the Nation: N.F.S. Grundtvig and Danish National Identity (McGill-Queen’s Press) ISBN 9780773596320
- ^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Denmark.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Grundtvig Sought a Transformed Denmark". Christianity.com.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Allchin 1997, pp. 30–31.
- ^ Abrahamowitz 2000, pp. 20–25.
- ^ Reich 2000, p. 33.
- ^ Pia Andersen (2005). "N.F.S.Grundtvig". Forfatterweb.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Allchin 1997, pp. 31–32.
- ^ Reich 2000, p. 35.
- ^ Jump up to:a b Allchin 1997, p. 33.
- ^ Reich 2000, p. 48.
- ^ Allchin 1997, pp. 33–36.
- ^ Jump up to:a b Allchin 1997, p. 39.
- ^ Jump up to:a b Abrahamowitz 2000, pp. 115–117.
- ^ Jump up to:a b Lundgreen-Nielsen, Flemming, NFS Grundtvig (Biografi) (in Danish), DK: Arkiv for Dansk Litteratu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 July 2007, retrieved 8 August 2007
- ^ Abrahamowitz 2000, pp. 125–133.
- ^ Reich 2000, pp. 55–57.
- ^ Allchin 1997, p. 105.
- ^ Allchin 1997, pp. 105–106.
- ^ Grundtvig, Nikolaj Frederik Severin (1825), Kirkens Gienmæle (in Danish), DK: Arkiv for Dansk Litteratu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6 July 2011, retrieved 9 August 2007
- ^ "Vartovs historie". Grundtvig. dk.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Vartov kirkes bygningshistorie" (PDF). Grundtvig. dk.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S.A.J.Bradley. "N.F.S.Grundtvig – A Life Recalled" (PDF). University of Aarhus.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N. F. S. Grundtvig, folk high schools and popular education". YMCA George Williams College.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Hofembedsmand – Bülow, Johan, 1751–1828". Dansk biografisk Lexikon.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Bradley, SAJ (2006), "Grundtvig, Bede and the Testimony of Antiquity", Grundtvig Studier, 57: 110–131, doi:10.7146/grs.v57i1.16495
- ^ Bradley, SAJ (2004), "Before Irenaeus. The Making of Grundtvig the Medievalist", Grundtvig Studier, 55: 234–254, doi:10.7146/grs.v55i1.16461
- ^ Bradley, SAJ (1999), "The Recovery of England's 'skrinlagt fortid' — a Progress Report", Grundtvig Studier, 50: 138–161, doi:10.7146/grs.v50i1.16337 and various other related articles by this author in the same journal.
- ^ "Biografi – Nik. Fred. Sev. Grundtvig". Arkiv for Dansk Litteratur.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Litteratur: Lyrikantologi" (PDF). Kulturkanon (in Danish). DK: Ministry of Culture. 2006. p. 47.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29 October 2013. Retrieved 30 January 2013.
- ^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Renewer of the Church". Field Guide To Lutheran Saints. 2 September 2010. Retrieved 15 December 2015.
- ^ "Grundtvig Tekstoplysninger Tekstbeskrivelse". danske litterære tekster efter 1800. Retrieved 15 December 2015.
Further reading[edit]
In English[edit]
- Allchin, AM (1998), NFS Grundtvig. An Introduction to his Life and Work, Lossky, NO, afterword, London: Darton, Longman & Todd, ISBN 87-7288-656-0. The single most important work on Grundtvig in English.
- A.M. Allchin. (2015.) N.F.S. Grundtvig: An Introduction to his Life and Work. Aarhus University Press.
- A.M. Allchin, ed. Heritage and Prophecy: Grundtvig and the English-Speaking World. ISBN 1-85311-085-X. Essays by leading international Grundtvig scholars.
- E.L. Allen (ca. 1940). Bishop Grundtvig, a Prophet of the North. In series, Modern Christian Revolutionaries. London: J. Clarke & Co. N.B.: Brief biography and study (of 94 p.).
- M. Eliade, Encycklopedia of Religion, Second Edition (editor in chief Lindsay Jones),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s 3704-3706 (Synnøve Sakura Heggem 2005)
- S.A.J. Bradley, tr., ed. (2008). N. F. S. Grundtvig: A Life Recalled. An Anthology of Biographical Source-Texts. Aarhus University Press. ISBN 978-87-7288-969-6. Very extensive Index documents the broad context of Grundtvig's life and work. Complementary to Allchin (1998).
Holm, Anders (2019). The Essential N.F.S. Grundtvig.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Filo.
Important, too, are the numerous articles in English published in the yearbook Grundtvig-Studier (Grundtvig Studies) from 1948 and onwards. Danish is the main language of the journal, but the English articles are prominent and increasing in recent years.
In other languages[edit]
The most important works on Grundtvig are a series of dissertations published since the founding of Grundtvig-selskabet (The Grundtvig Society). All of them contain summaries in major languages, most of them in English. This series includes:
- Aarnes, Sigurd Aa. (1960). Historieskrivning og livssyn hos Grundtvig. Oslo: Universitetforlaget.
- Auken, Sune (2005). Sagas spejl. Mytologi, historie og kristendom hos N.F.S. Grundtvig.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2-03757-2
- Bugge, Knud Eyvin (1965). Skolen for livet. Copenhagen: GAD.
- Christensen, Bent (1998). Omkring Grundtvigs Vidskab. Copenhagen: GAD. ISBN 87-12-03246-8
- Grell, Helge (1980). Skaberånd og folkeånd. Copenhagen: Grundtvig-Selskabet. ISBN 87-7457-072-2
- Grell, Helge (1987). Skaberordet og billedordet. Aarhus: Anis. ISBN 87-981073-0-5
- Heggem, Synnøve Sakura (2005): Kjærlighetens makt, maskerade og mosaikk. En lesning av N. F. S. Grundtvigs "Sang-Værk til den Danske Kirke". Oslo.
- Høirup, Henning (1949). Grundtvigs Syn på Tro og Erkendelse. Copenhagen: Gyldendal.
- Lundgreen-Nielsen, Flemming (1980). Det handlende ord. Copenhagen: GAD. ISBN 87-503-3464-6
- Michelsen, William (1954). Tilblivelsen af Grundtvigs Historiesyn. Copenhagen: Gyldendal.
- Thaning, Kaj (1963). Menneske først — Grundtvigs opgør med sig selv. Copenhagen: Gyldendal.
- Toldberg, Helge (1950). Grundtvigs symbolverden. Copenhagen: Gyldendal.
- Vind, Ole (1999). Grundtvigs historiefilosofi.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0-37308-7
External links[edit]
![]() | Wikimedia Commons has media related to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
- Grundtvigsk Forum
- Grundtvig-Akademiet
-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National-Louis University
- Center for Grundtvigforskning
- Grundtvig EU programme for adult education
- Bishop Grundtvig and the people's high school in Denmark (1912)
니콜라스 그룬트비
![]()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 |
---|---|
![]() | |
작가 정보 | |
출생 | 1783년 9월 8일 덴마크 셸란 지역 우드뷔 |
사망 | 1872년 9월 2일(88세) 덴마크 코펜하겐 |
직업 | 루터교 신학자 개신교 루터 교회 목사 시인 민족운동가 역사가 민속학자 정치가 저술가 교육자 교육학자 철학자 |
언어 | 덴마크어 |
국적 | ![]() |
학력 |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과 학사 |
종교 | 개신교(루터회) |
필명 | 독일어식 이름은 니콜라스 그룬트비히(Nikolas Grundtvig) 스웨덴어식 이름은 니콜라스 그룬트비그(Nikolas Grundtvig) |
활동기간 | 1808년 ~ 1872년 |
장르 | 시문학, 신학교육학 저술 |
배우자 | 아스타 레츠 그룬트비(3번째 부인) |
자녀 | 스벤 그룬트비(아들) |
니콜라이 프레데리크 세베린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년 9월 8일 ~ 1872년 9월 2일)는 덴마크의 신학자, 루터교 목회자, 시인, 민족운동가, 역사가, 민속학자, 정치가, 저술가, 교육자, 교육학자, 철학자이다.
일생[편집]
생애 초기[편집]
그는 덴마크 셸란 지역 우드뷔의 작은 섬마을에 있던 독실한 개신교 루터 교회 신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 그는 3세 때부터 5세 때까지 부모를 따라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2년간 어린 시절을 보내었으며 이어 5세 때부터 6세 때까지도 부모를 따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1년간 어린 시절을 보내었고 6세 때 덴마크에 귀국하여 고국 덴마크의 향리에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졸업을 거쳐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과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였으며 루터교 목사 자격을 얻은 이후에는 향리 교회에서 소박한 농민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1808년에는 《북유럽 신화(Nordens mythologi)》라는 시집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첫 입문하였다.
저술 활약을 비롯한 덴마크 민족 운동[편집]
1825년 《교회의 대답》이란 저서를 발표하여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다가 7년간 설교 금지 조치 처분되었다.
1848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방의 의무, 신앙, 언론, 출판, 집회 등의 자유를 위하여 지도적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각자 자기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권리가 있음을 역설하면서, 국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민중고등학교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같은 덴마크인 철학자이기도 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의 실존주의 철학 이론을 극찬하였으며 아울러 같은 덴마크인 작가이기도 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심 사랑을 극찬하기도 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땅을 사랑하자..."라고 호소하며 박토인 조국 덴마크를 개척하였고 덴마크를 세계적인 아름다운 나라로 개혁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여 "덴마크 중흥의 국부(國父)"라 일컬어진다.
주요 경력[편집]
가족 관계[편집]
그의 아들 스벤 그룬트비(Svend Grundtvig)도 시인이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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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년 9월 8일 - 1872년 9월 2 일 )는 덴마크 목사 , 작가 , 시인 , 철학자 , 교육자 , 정치인 . 보통, 이름은 N·F·S·그룬트비 로 약칭된다.
덴마크 역사 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으로, 그 철학은 19세기 후반, 덴마크의 새로운 내셔널리즘을 형성할 때 큰 자극을 주었다. 그는 첫번째 이름을 3번 바꾸고 3번째는 그의 76년의 삶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룬트비와 그의 후계자들은 현대 덴마크의 국민 의식에 현재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국민문학 속에 널리 스며들어 있으며, 그것은 깊은 신앙의 힘에 의해서도 지지되고 있다.
목차
평생 [ 편집 ]
어린 시절과 교육 [ 편집 ]
루터파 목사인 요한 오토센 그룬트비의 아들로 셰란 섬 의 우즈뷔(Udby)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다. 친밀한 사람들에게서는 니콜라이가 아니라 프레데릭으로 불려 자랐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지만 북유럽 의 옛 전설과 전통에도 경의를 표했다. 그는 유럽의 계몽주의 전통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지적인 신앙심은 독일의 로망주의 와 북유럽 국가의 역사에서 흔들렸다. 1791년에 유틀랜드 반도 의 목사인 라우리드 펠드에게 보내져 거기서 생활하게 되었고, 1798년부터 오르후스 의 대성당 학교에서 배우고, 동교를 졸업했다. 1800년에 신학을 배우기 위해 코펜하겐 에 가서 1801년에 코펜하겐 대학 에 입학을 허락했다. [1] [2] 학생 생활과 병행하여, 글룬트비는 아이슬란드어와 아이슬란드 사가 (이야기) 공부를 시작했다.
경력 [ 편집 ]
1805년, 그룬트비는 로랑섬 의 한 집에서 가정교사의 직업을 얻었다. 그 후 3년간 그는 자신의 자유가 되는 시간의 대부분을 윌리엄 셰익스피어 , 프리드리히 실러 , 그리고 피히테 의 공부에 맞춘다. [3] 1802년 그의 종형제로 철학자인 헨릭 슈테펜스 (1773년 - 1845년)가 독일 유학으로부터 셸링의 가르침을 탭리로 받아 코펜하겐 으로 돌아왔다. 그의 강의와 아담 고트 로프 에일렌스 레이어(Adam Oehlenschläger)의 초기 시작이 그룬트비에게 문학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게 한다. [4] 그의 최초의 저작 『에다의 노래에 대해서』는 세상의 주목을 끌기에는 이르지 않았다. 1808년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그룬트비는 '북유럽의 신화'라는 저작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1809년에는 장편의 희곡 '북방 영웅 전설의 몰락'으로 새로운 성공을 거둔다. 그룬트비는 1810년 첫 설교에서 마을 성직자를 몰래 비난했다. [5] 몇 주 후, 그룬트비가 교회의 권위자들을 공격한 설교를 출판하자 그들은 그룬트비에게 징벌을 요구했다. [5] [6] 1810년, 그룬트비는 종교적인 위기에 빠져 지금까지 짙게 안고 있던 루터파로 개종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작은 교구에 예배당이 있는 목사로서 끌려 버린다. [7] 그가 새롭게 믿음은 그의 1812년의 '첫 번째 세계 연대기'에 자주 나타나고, ( Kort Begreb af Verdens Krønike i Sammenhæng ) 모습을 드러냈는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유럽사 속에서 재현하려고 한 것으로, 그 중 그는 또 많은 유명한 덴마크인들의 사상을 비평하고 있다. [8] [9] 이 책은 그의 동세대 동료들 중에서도 특히 그에게 인율력을 주고 수많은 친구를 주었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역사가인 크리스티안 몰벡(Christian) Molbech). [9] 1813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룬트비는 교구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그것은 스스로 고사했다. [10]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간행 템포는 압도적인 것이 있었다. 기사나 시작에서 넘쳐나는 일과 병행하여 수많은 책을 집필했다. 그 중에는 세계의 역사에 관련된 2권의 책(1814년과 1817년)이 있었다. 즉 장편의 역사적인 이야기시 '로스킬레 찬가'( Rhyme of Roskilde ; 1813)와 서적 사이즈의 주석책 '로스킬레 사가'이다. [11] 1816년부터 1819년까지 그는 Danne-Virke라는 제목의 시의 잡지의 편집자로, 거의 유일한 기고자였다. [8]
1813년부터 1815년까지 그는 스웨덴에 저항하는 노르웨이를 돕는 운동을 시작하려고 시도했다. 나중에 그는 1814년 노르웨이가 패한 원인이 덴마크의 믿음의 약점에 기인하는 설교를 하기도 한다.
그의 설교는 코펜하겐에서 열광적인 신도들에 의해 환영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스스로의 교구를 가지지 않고, 또 다른 교회로부터의 방해도 있어 설교단으로부터 발이 멀어져 가게 되었다. [12] 1821년, 그는 프레스트에서 시골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이 설교를 짧게 정리하고 있다. 그가 수도로 돌아오는 것은 그 1년 후이다. 1825년 그룬트비는 '교회의 항변'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한다. ( Kirkens Gienmæle ), 이것은 개신교와 가톨릭 교리, 의식, 제도에 대한 헨릭 니콜라이 클라우센의 저작에 대한 대답이다.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클라우센은 성경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기초이지만, 성경 자체는 기독교가 완전히 의미하는 것의 부적절한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야말로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보편적인 종교성을 위한 공동체"라고 썼다. [13] 그룬트비는 이에 반론하고, 클라우센은 반 그리스도의 교사라고 선언했고, 그리스도교는 성경에서 파생되었고 학자들이 마무리한 이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들의 권리를 문제시했다. [14] [15] 그룬트비는 중상비방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루터교 교회는 그에게 몇 년 동안 교회에서 설교를 금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련의 신학 저작을 출판하고 영국을 세 번 방문하여 (1829-31) 고대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10] 1832년, 그룬트비는 다시 설교할 허가를 회복했다. 1839년, 그는 코펜하겐의 바토프 병원의 구빈원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1837년부터 1841년까지 그는 '덴마크 교회를 위한 찬가집'을 간행했다. 이것은 방대한 찬송가의 수집이 되고 있다. 1838 년 그는 스칸디나비아의 옛 시대 시가의 선집을 간행. 1840년에는 앵글로 색슨의 시집 '불사조'를 덴마크어 번역으로 편찬, 1843년에는 영국 4번째 방문을 했다. 1844년부터 제1차 슈레이스비히 전쟁 이후에 이르기까지, 글룬트비는 보수파로부터 절대적인 리버럴파에 이르기까지의 정계에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861년, 그는 주교의 지위에 맡겨졌지만, 감독하는 교회가 없는 명목만의 것이었다. 그는 계속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죽을 때까지 출판 활동을 계속하고, 바토프 교회에서는 사망하기 2, 3일 전까지 매주 일요일에는 설교를 실시했다.
그의 설교는 청중을 매료시키고 곧 추종자들도 나타나게 된다. 그의 찬가책은 덴마크 교회 예배에서 정통 루터파의 느긋한 운율을 국민적 시인의 찬가로 변경하는 등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룬트비가 집필, 혹은 번역한 찬가는 1,500편에 오르고, 그 중에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큰 유산」도 포함되어 있다.
결혼과 가족 [ 편집 ]
세 번 결혼하고 마지막 결혼은 76세 때이다. 아들 스벤 그룬트비 ( 1824년 -1983 년 )는 덴마크의 이야기시 (발라드)를 수집하고 편집했다.
기독교 사상 [ 편집 ]
그룬트비의 신학 사상의 발전은 그의 생애에 건너고 있으며, 게다가 여러 번 중요한 방향 전환(개심)이 일어나고 있다. 그는 1810년 '기독교 신앙의 각성'에서 조합 교회를 믿는 분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비밀주의 기독교로 바뀌었다. 그는 그 밤새의 사상에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항상 목사라고 부르며, 결코 신학자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자신의 종교관과 대학 등 세계의 신학 사이의 거리를 반영한 표현이다. 그의 신학의 주인이었던 특징은 사도의 주석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대체한다는 것에 있다. 그는 실제로 독립된 마을에서 신도들의 집회를 만나는 것이 항상 열망했다.
교육관 [ 편집 ]
그룬트비 는 포르케 호이스 콜레 의 이념적인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그룬트비의 교육관은, 그것과는 약간의 시점의 차이는 있지만. 그는 쉐란섬의 솔레에 있던 청식 한숨의 아카데미가 대학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같은 교육과는 다른 형태의 것을 목표로 하는 인기 있는 학교가 되어 가도록 촉구했다. 그는 학생을 교육하는 것보다 대학이 사회와 평범한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학생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용적인 스킬이야말로 국민적인 문학이나 국민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수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독교 8세 의 통치 시대에 뿌리를 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왕의 여주인 칼로리네 아마리 에는 그룬트비의 열렬한 지원자이기도 했다. 1848년 왕제가 끝을 알리고 그 해와 그 뒤를 이은 몇 년 동안 덴마크 정치의 격변기가 왔을 때, 이러한 계획은 반고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룬트비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콜 은 이미 최초의 포르케 호이스 콜레를 창립했다. 학교 개혁에 대한 그룬트비의 야망은 인기의 포르케 호이스 코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북유럽 참가국이 국경을 접하는 스웨덴 예테보리에 대북방 대학(열정 학교)을 설치하는 것을 계속 꿈꾸고 있었다. 그의 학교 계획의 두 개의 기둥, 생활을 위해, 혹은 살기 위한 학교(포르케 호이스 코레)와 열정을 위한 학교(대학)는, 생활의 별개의 지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교육은 물론, 폭넓은 문화적이고 지적인 옷차림을 향해 눈을 뜨고 들어가지만, 결국은 국민적이고 애국주의적인 것의 사고방식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만 , 이것에 대해 대학은, 엄밀하게 보편적인, 즉 인간적이고 과학적인 의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룬트비의 교육적 노력의 공통된 분모는 교육적인 삶의 모든 지엽에서 자유, 시가, 그리고 창조성의 정신을 밀어내려는 것이었다. 그는 지혜, 슬픔, 자기 확인, 평등 등의 가치를 추진했다. 그는 시험처럼 사람의 영혼을 망치는 모든 강제에 저항했다. 대신 그룬트비는 생명의 보편적인 창조적 질서에 따라 사람의 창조성을 풀어내는 것을 옹호한 것이다. 다만 「의지가 있는 손이 빛의 업을 하는 것이다.」 는 안 되는 것이다.
베오울프와 앵글로 색슨 문학 [ 편집 ]
1815년, 그리몰 용슨 토르켈 린이 '베오울프 ' Epic of Beowulf titled De Danorum rebus gestis secul. III & IV : Poëma Danicum dialecto Anglosaxonica 라틴어 번역으로 출판했다. 앵글로 색슨 문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글룬트비는 즉시 톨케린의 시가 번역에서 일련의 오역을 발견했다. 톨 케린과의 격렬한 논쟁 후, 톨 켈린의 일의 경제적인 뒤 방패였던 요한 뷰로가 그룬트비의 새로운 번역, 이번에는 덴마크 Ⅴ로의 번역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제기했다. 그 결과, Bjovulfs Drape (1820년)가, 「베오울프」의 최초의 근대어로의 번역으로서 출판되었다.
그룬트비는 더 오래된 영어와 라틴어로 남아있는 다른 앵글로 색슨 문학 조사에 나섰다. 그 양자의 시가와 산문 중에는 북방의 초기 교회의 정신성이 계시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그룬트비는 고대 기독교인과 역사적인 사고의 모델에 (특히 8 세기 베다에 의해 라틴어로 쓰여진 " 구제사 ") 매우 영향을 받았다. 코펜하겐의 왕립 도서관과 엑서터 대학,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의 각 도서관의 장서를 연속 3기 여름방학의 영국 방문(1829년-31년)에서 이용하면서 그는 앵글로 색슨 문학의 4가지 중요한 사본 안에 2개의 사본을 만들었다. 옥스포드 대학 보돌리안 도서관에 있는 '엑서터 책'과 '유니우스 11'이다.
그는 이들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베오울프'와 앵글로 색슨 문학은 그룬트비에게는 그 발상의 영감의 근원으로 계속 존재했다.
그것은 그의 저작에 광대하고 중요한 충격을 가하고 있다. [16] [17] [18]
일화 [ 편집 ]
그룬트비는 그의 모국의 문화사 속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덴마크의 칼라일 로 비유되거나 에머슨 과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작문 스타일과 관련된 분야는 직접 누군가 또는 선인의 표본이 있는 것 같지 않고, 그의 중요성은 그의 동시대인 한스 기독교 안델센 과 세일렌 키에르케골 에서도 굵게 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찬송가인 'De Levendes Land'는 2006년 덴마크의 문화적 지보의 집대성의 문학적 부문이 되는 '문학목록'(Lyrikantologi) 안에 담겼다. [19] 코펜하겐의 유명한 그룬트비 교회 는 그룬트비를 기념하여 덴마크 건축가 옌센 클린트가 설계한 것이다. 네오고딕의 표현주의 양식으로 노란 벽돌을 쌓아 세워 1940년에 완성했다. 나이지리아의 그룬트비 국제 세컨더리 스쿨은 그의 어쨌든 명명된 것이다. 이것은 독립적인 남녀 공학의 중등 교육 학교이다.
현창 [ 편집 ]
그룬트비는, 미국 복음 루터파 교회 의 성 인력 으로, 교회의 주교로 해 쇄신자로서 9월 2일의 성인으로서 축하되게 되었다. 그는 성회 의 교회 달력 에서 9월 8일에 저 공휴일이 있다.
문헌 [ 편집 ]
제판 [ 편집 ]
그룬트비 세속의 문학 작품은 9권본의 저작집에서 간행되고 있다. 첫 번째 7권은 그의 둘째자로 문학학자인 스벤 그룬트비의 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의 문헌학적 검증은 현대의 문학학 수준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의 찬가는 문헌학적으로는 보다 확고한 5권본의 '그룬트비 찬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저작의 최상의 전집은, 홀거 베그트랩(Holger Begtrup)의 10권본의 전집 「Udvalgte Skrifter」이다. 그의 편이 되는 유명한 전집은 스텐 요한슨(Steen Johansen)의 'NFS 글룬트비 문헌목록'에도 게재되고 있다. 그의 저작 전집의 잘 생긴 외국어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어판에서는 3권본의 선집이, 간행 준비중이며, 영어판에서도 저작권의 계획이 있다.
중요한 전집, 선집은 다음과 같다.
- Grundtvigs Sang-Værk 1–6. Magnus Stevns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Det danske Forlag. 1948–64.
- Poetiske Skrifter 1–9. Udgivet af Svend Grundtvig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Karl Schönberg og Hyldendal. 1880–1930.
- Udvalgte Skrifter 1–10. Holger Begtrup (editor). Copenhagen: Gyldendal. 1904–09.
- Værker i Udvalg 1–10. Hal Koch and Georg Christensen (editors). Copenhagen: Gyldendal. 1940–46.
전기 [ 편집 ]
- Abrahamowitz, Finn (2000) (Danish), Grundtvig Danmark til lykke , Copenhagen: Høst & Søns Forlag, ISBN 87-14-29612-8 .
- Allchin, Arthur Macdonald (1997), NFS Grundtvig , Århus: Århus University Press, ISBN 87-7288-656-0 .
- Reich, Ebbe Kløvedal (2000) (Danish), Solskin og Lyn — Grundtvig og hans sang til livet , Copenhagen: Forlaget Vartov, ISBN 87-87389-00-2 .
- Johansen, Steen (1948–54), Bibliografi over NFS Grundtvigs Skrifter 1–4 , Copenhagen: Gyldendal .
독서 안내 [ 편집 ]
영어에 의한 것 [ 편집 ]
- Allchin, AM (1998), NFS Grundtvig. An Introduction to his Life and Work , Lossky, NO , afterword, London: Darton, Longman & Todd, ISBN 87-7288-656-0 . The single most important work on Grundtvig in English .
- AM Allchin, ed. Heritage and Prophecy: Grundtvig and the English-Speaking World . ISBN 1-85311-085-X . Essays by leading international Grundtvig scholars.
- EL Allen (ca. 1940). Bishop Grundtvig, a Prophet of the North . In series, Modern Christian Revolutionaries . London: J. Clarke & Co. NB: Brief biography and study (of 94 p.).
- SAJ Bradley, tr., ed. (2008). NFS Grundtvig: A Life Recalled. An Anthology of Biographical Source-Texts . Aarhus University Press. ISBN 978-87-7288-969-6 . Very extensive Index documents the broad context of Grundtvig's life and work. Complementary to Allchin (1998).
이들과 나란히 중요한 것은 1948년부터 매년 간행되고 있는 「그룬트비 연구」(Grundtvig-Studier)에 영어로 발표되고 있는 수많은 논문이다. 이 잡지의 주된 언어는 덴마크어이지만, 최근의 뛰어난 연구는 영어의 것이 많아, 또 그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다른 외국어 문헌 [ 편집 ]
The most important works on Grundtvig are a series of dissertations published since the founding of Grundtvig-selskabet (The Grundtvig Society). All of them contain summaries in major languages, most of them in English. This series includes:
- Aarnes, Sigurd Aa. (1960). Historieskrivning og livssyn hos Grundtvig . Oslo: Universitetforlaget.
- Auken, Sune (2005). Sagas spejl. Mytologi, historie og kristendom hos NFS Grundtvig .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2-03757-2
- Bugge, Knud Eyvin (1965). Skolen for livet . Copenhagen: GAD.
- Christensen, Bent (1998). Omkring Grundtvigs Vidskab . Copenhagen: GAD. ISBN 87-12-03246-8
- Grell, Helge (1980). Skaberånd og folkeånd . Copenhagen: Grundtvig-Selskabet. ISBN 87-7457-072-2
- Grell, Helge (1987). Skaberordet og billedordet . Aarhus: Anis. ISBN 87-981073-0-5
- Heggem, Synnøve Sakura (2005): Kjærlighetens makt, maskerade og mosaikk. En lesning av NFS Grundtvigs "Sang-Værk til den Danske Kirke" . Oslo.
- Høirup, Henning (1949). Grundtvigs Syn på Tro og Erkendelse . Copenhagen: Gyldendal.
- Lundgreen-Nielsen, Flemming (1980). Det handlende ord . Copenhagen: GAD. ISBN 87-503-3464-6
- Michelsen, William (1954). Tilblivelsen af Grundtvigs Historiesyn . Copenhagen: Gyldendal.
- Thaning, Kaj (1963). Menneske først — Grundtvigs opgør med sig selv . Copenhagen: Gyldendal.
- Toldberg, Helge (1950). Grundtvigs symbolverden . Copenhagen: Gyldendal.
- Vind, Ole (1999). Grundtvigs historiefilosofi .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0-37308-7
- 할콕
외부 링크 [ 편집 ]
![]() | 위키미디어 커먼즈에는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 와 관련된 미디어가 있습니다. |
-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page at National-Louis University
- Center for Grundtvigstudier
- GRUNDTVIG, EU programme for adult education
- Bishop grundtvig and the people's high school in Denmark (1912)
각주 [ 편집 ]
- ↑ Abrahamowitz 2000 , pp. 20–5.
- ↑ Reich 2000 , p. 33.
- ↑ Allchin 1997 , pp. 31-2.
- ↑ Reich 2000 , p. 35.
- ^ a b Allchin 1997 , p. 33.
- ↑ Reich 2000 , p. 48.
- ↑ Allchin 1997 , pp. 33-6.
- ^ a b Allchin 1997 , p. 39.
- ↑ a b Abrahamowitz 2000 , pp. 115–7.
- ↑ a b Lundgreen-Nielsen, Flemming (Danish), NFS Grundtvig (Biografi), DK : Arkiv for Dansk Litteratur 2007년 8월 8일에 확인함. .
- ↑ Abrahamowitz 2000 , pp. 125–33.
- ↑ Reich 2000 , pp. 55-7.
- ↑ Allchin 1997 , p. 105.
- ↑ Allchin 1997 , pp. 105-6.
- ↑ Grundtvig, Nikolaj Frederik Severin (1825) (Danish), Kirkens Gienmæle , DK: Arkiv for Dansk Litteratur 2007년 8월 9일에 확인함. .
- ↑ Bradley, SAJ (2006), “Grundtvig, Bede and the Testimony of Antiquity”, Grundtvig Studier : 110–31 .
- ↑ Bradley, SAJ (2004), “Before Irenaeus. The Making of Grundtvig the Medievalist”, Grundtvig Studier : 234–54 .
- ↑ Bradley, SAJ (1999), “The Recovery of England's 'skrinlagt fortid' — a Progress Report”, Grundtvig Studier : 138–61 and various other related articles by this author in the same journal.
- ^ “ Litteratur: Lyrikantologi ( PDF ) ” ( Danish). Kulturkanon . Ministry of Culture. p. 47 (2006년) . 2013년 1월 30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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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sh Folk Tales ; From the Danish of Svend Grundtvig, E. T. Kristensen, Ingvor Bondesen and L. Budde ; Translated by J. Christian Bay
by Bay and J. Christian (Jens Christian) | Aug 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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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dtvig: Webster's Timeline History, 1774 - 2007
by Philip M. Parker | Jun 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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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dtvig et ses doctrines (French Edition)
French Edition | by George Cogordan | Dec 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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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dtvig og Ingemann: Brevvexling 1821-1859 1882 [Leather Bound]
by Bernhard Severin Grundtvig, N. F. S. (Nicolai Frederik Severin),Grundtvig, Svend,Ingemann | Jan 1, 2019
Leather B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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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dtv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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