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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3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10 덴마아크 교육의 빛은 다시 국외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 -10.덴마아크 교육의 빛은 다시 국외에서

1)스웨덴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멘마아크의 오늘의 농업 문화 건설은 20세기의 일대 경이 (一大驚異)이다. 그 문화의 근저인 독특한 교육은 덴마아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싹터서 발전한 것인데 이같은 교육이 다른 나라에서도 적응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우리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를 조사 검토 하여 실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앞날의 개척도 교육으로 출발해야 할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덴마아크틀 구원한 그 교육이 우리 자신도 구원할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의문에 대하여 확증을 얻고자 함은 우리 겨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이 아닐 수 없다.

맨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 제도는 1864년에, 국가 사정 이 대단히 다른 노르웨이의 산악 지대에 이식되었고, 1868년에 는 다소 형태를 바꾸어 다시 스웨덴에 수입되어 농촌의 발전에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다시 핀란드로 옮겨지고, 1909년에 는 보수적이며 문화의 자존심이 강한 영국 에도,1874년에는 미국에도 수입되고, 그 밖에 독일과 일본에도 수입되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또 그 앞날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독일은 2차 대전 전에 이 교육 제도를 국가적으로 힘써 활용했었다.

약 백 년 전 18세 기 중엽까지의 스웨덴의 농촌 사회는 말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교육을 받을 길이 없었고 마라서 일반 민중은 우매(愚味)하였으며 빈곤과 단조한 생활올 영위하 였다. 또 당시의 농민들은 선거권조차 세금액에 의하여 결정 되는 것이었다.

어거스튼 소르만 박사는 스웨덴의 정부가 국민 대중을 교육하기에 힘쓰지 않고, 교육기관들이 모두 일부의 특권 계급에 전용되어 국민들은 암흑에서 헤어날 길이 없음을 통탄하여[학교는 국민 전체를 교육하기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편협하게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국가는 국민 전체를 모름지기 평등히 교육하라. 우리는 종래에 교육의 일대 혁명 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것이며, 이를 위하여서 필연적으로 새 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라고 부르짖고 덴마아크식의 국민 고등 학교의 설립을 주장하여 크게 여론을 일으켰다.

소르만 박사의 활동은 결실하여 1867년 11월 1일에 동방 코트란드의 헬례스타트와 스카네의 온네스타트에 최초의 국민 고등 학교가 일시에 개교되고, 또 하루 늦어서 서 남쪽 아카르브 근처에 유명한 피 일란(Hvilan)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스웨덴 사회의 깊은 잠을 깨우는 새벽종이었다. 스웨덴의 어두운 사회는 이 새 학교로 말미 암아 도덕의 앙양, 지식의 향상은 물론, 근린 상조(近隣相助)의 협동 정신이 급속히 높아갔다. 스웨덴의 교과서 만능의 형식 교육은 도덕과 실용적 지식 교육의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고 또 농촌의 모든 학교에는 설비를 완비한 농업과를 설치하기에 진력하였다 .

스웨덴에 있어서의 국민 고등 학교의 성과는 예기한 바 이상이었으므로 국가는 크게 각성(覺醒)하여 1882년에 비로소 국민 고등 학교의 일부의 혁신과 확충에 힘쓰고 또 자유 급비 제도를 만들어 급속히 많은 학생을 수학시키기 시작하였다.

스웨덴에 있어서 국민 고등 학교의 일부 혁신이라고 하는 것은 덴마아크의 링그비 농학교에서처럼 국민 고등 학교와 농학교률 한 구내에 두고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 한 관리자 아래 모든 시설율 서로 공동 이용하는 제도이다. 이 것은 여러 가지 점으로 경제적이요 또 능룰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에 정부가 인정한 국민 고등 학교는 44개교이었고 빈곤한 학생에게 주는 급비액은 80만 크로녀 에 달하였다.

그 후 스웨덴은 이 국민 고등 학교 교육을 기반으로 문화,정치, 경제,산업의 각 부면에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되어 오늘에는 덴마아크와 아울러 유럽의 이상 국가군의 하나로 손 꼽히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수단을 거치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부(富)의 균형과 자유 평등의 권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들의 정신 문화와 협동 조합의 운영 발달은 일대 장관(一大壯觀)으로 인류사에 특기할 만한 바가 있다.

국민 정신의 초석은 참된 정신 문화 위에 두어서 공포 없는 평화와와 참 자유 평등의 행복을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사실을 우리는 스웨덴에서 또 다시 찾아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스웨덴의 국민 고둥 학교는 86개 교로 불어 났다.

2)노르웨이 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세로 쪼개어 서반부에 자리잡은 나라로 첩첩한 산악의 나라이다. 이 산악들이 깊은 협강(狹江)들로 말미암아 쪼개져서 다시 다수한 산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지형에 의하여 자연히 많은 지방들이 생기고 또 각 지방들은 각기 독특한 방언과 풍속과 관습을 가지고 있어 문화 운동이 대단히 곤란한 나라이다. 이 자연의 장벽들을 돌파하고 여러 곳의 산악 지방의 민족적통일 이루어 문화를 향상시키지 않으면 이 나라의 진정한 번영과 발전을 가져올 길이 없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수많은 장벽들을 깨뜨리고 오늘 복지국가 노르웨이를 이룩한 것은 국민 고등 학교의 공적이 지대 한 구실을 한 것이다. 덴마아크의 그룬트비히의 사상을 그 처음으로 노르웨이에 수입한 것은 례오 핏히이다. 핏히는 교육자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이 나라에 명망이 높은 애국자였다. 그는 현명하게도 노르웨이를 구하기 위하여 덴마아크의 생명의 불씨를 조국으로 옮겨다 점화시킨 것이다. 크리스니아의 레디마의 묘지 에는 모든 노르웨이의 국민이 잠시도 잊지 못하여 하는 선각자 핏히의 묘비가 서 있다.

생명과 말씀의 광명이

동포를 깊은 잠에서 깨웠네

높고 귀한 보람있는 삶이어

핏히의 이름은 노르웨이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1850년으로부터 십년 동안 핏히의 감화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각 방면으로 동포와 조국을 위하여 큰 공적을 쌓았다.

종교 운동에 와그셀과, 국어 정리에 아젠, 국사 정리에 문호, 민족 전설 정리에 제르젠과 모에, 민요에 린데만 등은 국가적 인 교육 사업 에 그 공적이 뚜렷한 사람들이다.

핏히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선구자적 열정에 감격하여 직접으로 국민 고등 학교를 노르웨이에 이식한 것은 젊은 대학생이었던 헤르만 안카와 오라운 아르베젠의 두 청년이었다. 핏히의 지성과 그 현명에 움직인 그들은 대학 졸업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큰 포부를 안고 졸업 즉시로 덴마아크로 건너가 학교의 모든 실정을 상세히 연구하고 또 조합운영의 방법울 파악한다음 귀국하였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노르웨이를 구원할 교육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안카는 부호이었으므로 스스로 자금을 부담하면서 알페젠의 계획을 주로 하여 사업 을 촉진시켜 노르웨이의 통일과 번영의 기초를 만들었다. 첫 국민 고등 학교는 1864년 10월에 개교하여 역사적인 제 1회 8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해가 지날수록 발전하여 노르웨이의 국민 고등 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오늘날 노르뤠이의 무제에젠 호숫가의 유서깊은 사가룬 (Sagatun) 국민 고등 학교는 노르웨이의 자랑이 되었다. 이 학교는 우리 조국의 갈 길을 지시하는 한 개의 등대처럼 느껴진다.

1877년에 크리스토파 브룬은 판하임 국민 고등 학교를 설립하였고 십 년 간에 설조르드를 비롯한 20교의 국민 고등학교 개교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외 국민 고등 학교의 발전은 결코 처음부터 순조로이 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대부분이 경영난으로 허덕이었고 교사는 셋집을 얻어 이리 저리로 옮겨다녔으며 때로는 수많은 산악 지대를 찾아 이동하면서 가르치기도 하였다.또 어떤 때에는 큰 농원의 빈 방을 얻어 몇 달씩 교육받기도 하었다. 이 가시밭 길을 걸으면서 선각자들은 낙심 하지 않고 역사를 창조하여 갔다. 민중들은 차차로 그들의 정신을 찬양하고 그 수고에 감사하게 되었다.

노르웨이에서 국민 고등 학교의 사업은 그 초창기에 근시안적 편협 한 관리들이 이 사업 을 백안시 (白眼視)하였으며 정부도 전혀 협력하여 주지 않았었다. 그 당시의 교육기관은 특수계급들의 독점한 바 되었고 또 관료적이며 귀족적이며 학구적인 경향으로 치우쳐 있었다. 지방민의 교육 기관인 보습학교(補習學校)는 그 본래의 사명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고등 교육의 예비교로 되어 버렸고, 또 학교 출신들은 전원 생활(田園生活)을 꺼려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실로 노르웨이 교육도 그룬트비히의 평한바 그대로「사(死)의 학교」로서 생명이 없는 교육이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이웃 나라들이 새 교육으로 말미 암아 급진적으로 번영함과 국내의 애국 청년들이 분투한 가시밭에서 교육의 꽃이 피어남을 보고서야 뒤늦게 새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고 보조의 제도를 만들어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 노르웨이의 국민 고등 학교는 본 궤도에 올라 1955년 에는 기개교에 학생 수는 약 4천 명 으로 불어 났다.

오늘 노르웨이의 국어의 통일과 음악, 무용, 의상 등의 민족적 정화와 재흥(再與)이며,정치,경제,산업 둥의 비약적 발전은 참으로 볼만한 바가 있다.

3)핀란드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핀란드는 스웨덴 동쪽에 있는 인구 4백만 남짓한 작은 나라로 동양 민족이 유럽에 건설한 유일한 독립국가이다,그 들은 올림픽에서 그들의 체육의 실력을 발휘하여 널리 알려 졌다. 그리고 1939에서 1944년의 6년 동안을 강대한 소련에 항거 하여 싸웠을 때에 그 용감한 국민성은 전 세계의 동정과 찬사를 받은 나라이다.

핀란드의 최초의 국민 고등 학교는 1889년에 소피아 하그만이라는 여성의 손으로 란메르폴스 근처의 캉가살라에 설립 되었다. 그 당시에는 수공과에 상당히 주력하고 종교, 역사,음악,체육 등이 중요시되었다.

민요집 카례바라 편찬으로 이름난 시인 린로트와 수공 교육을 시작한 시그네우스 등은 모두 이 새 교육 사업을 개척한 공로자들이다. 이어서 시인 루네베르그의 감화와 활동으 로 각지에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고 1901년에는 벌써 41개교로 늘고, 근래에는 83개교로 증가하게 되었다.

패전 후 소련에 빼앗긴 동부 지방 카렐리아로부터 서부로 여섯 개의 국민 고등 학교가 이전되었고 1894년에 창설된 핀란드의 아스코브라고 불리워지던 칸델야르비 국민 고등 학교 는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핀란드에서도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이 겨울 동안은 남녀 공학으로 하고 여름에도 여 성들만의 학교를 운영한다. 주요 과목은 국어, 역사, 음악이다. 사회 문제, 지방의 역사, 목공 특히 체육을 열심으로 하고 있다. 큰 학교에서는 일층 높은 정도로 교육하기도 한다. 학생은 여자가 약 70% 를 차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도 초기에는 정부가 상당히 소극적이 었으나 1905년부터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날로 융성의 일로를 걷게 되었다. 6백 년 동안 식민지가 되었던 핀란드는 독립 후에 참으로 눈부신 발전올 거 듭하고 있다.

4)영, 미, 독, 일 세계 각국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영국 시찰단 일행이 1905년에 덴마아크를 방문하였다. 그들이 발킬메 국민고등학교에 들렸을 때에 이 학교의 팔메말벤니카 교수는 국민거등하교의 목적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그는 덴마아크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아스칼의 초상을 감개 깊이 응시하면서 국민 고등학교의 목적에 대하여 정열적인 강연을 하였다.

[ 이학교의 목적은 각종의 필요한 지식을 많이 전달해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정신적인 시야를 넓혀서 그 들에게 올바른 생활 의욕을 북돋아 주는데 있는 것이다.]

시찰단의 한 사람인 돈톤(J.I. Thornton)은 영국에 돌아가서 덴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를 열심히 신문과 잡지에 소개 하였다. 그는 무려 20여 차례나 북해를 건너서 스칸디나비 아의 국민 고등 학교를 시찰 연구하고 여러차례 교육 연구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여러 동지들을 격려하여 덴마아크 의 교육을 시찰시켰다.

1909년에 꿰이커 교도 죠지 캐드버리 (George Cadbury)에 의해 영국 최초의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는 버어밍감 근처 실리오크에 설립된 퍼어크로프트(Fircroft) 학교이 다. 돈톤은 이 학교의 간행지를 통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 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사람에게 도의적인 생존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교육은 단지 소극적 사실의 추구도 아니요, 이에 유사한 산만한 지식의 전달도 아니다. 실로 전 생애의 확충적 사업이다. 퍼어크로프트의 성공은 이런면의 발전을 가지고서만 측정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각지로부터 노동자, 사업가,교사,농부, 광부, 직공,점원들이 모여서 다투어 수학했다. 주요 학과는 성경 연구,정치 사회사, 경제학, 산업사, 영국 문학, 자연 과학, 사회 문제, 시사 문제,원예학이고 매주일 한 번씩 각계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청하여 특별 야간 강의를 듣는 것이 관례다.

영국의 대표적 신문 런던 타임스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퍼어크로프트 학교에 입학하여 더 넓은 사랑파 지식의 세 계로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다시 자기의 직업 으로 들아왔을 때에, 전보다 한층 예리한 관찰의 눈과 한층 높은 능력을 가지고 세계에까지 공헌할 추 있는 것튼 확실하다. 이 학생들은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치는 학구와 반성의 분위기 속에 유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 퍼어크로프트 학교의 교장 톰 부라이 안은 락월한 교육 자로서 크리스텐 콜의 예찬자인데 꿰이커 교도와 그룬트비히 계통의 사람들과의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을 인식하였다. 꿰이 커 교도?로은 인간의 정신적 교육에 있어서 덴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에 많은 기대를 가졌었고 반면에 덴마아크 사람들 은 또한 퀘이커 교도들의 그 실천적 인도주의(人道主義)에 대하여 많은 예찬을 보내게 되었었다.

우리는 옛날에 그룬트비히가 런던에 가서 덴마아크롤 구원 할 국민 고등 학교 교육의 기본 이념을 착상한 것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야말로 이 교육과 인연이 깊은 나라라 할 것이다. 많은 덴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 출신들이 퍼어 크로프트는 물론 죠지 캐드버리에 의해서 우드부르크에 세워 진 퀘이커 학교와 또 북부 웰스에 세워진 콜렉할레크(Coleg Harlech) 학교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덴마아크의 아스코브 국민 고등 학교를 방문한 영국인의 다음과 같은 술회는 우리들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다.

『우리 영국 사람들은 무엇인가롤 덴마아크의 당신들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크나큰 역사를 소유했으나 우리 국민의 대부분이 이와 관계가 없다. 우리는 또한 풍부한 문학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도 대부분의 일반 국민에 게는 사장(死藏)된 보옥(寶玉)이다. 우리는 이 민중과 그들의외 역사 및 문학과의 사이에 있는 큰 간격을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기 위하여 국민 고등 학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 다.』

미국에는 19세기 중엽부터 덴마아크 사람들의 이민이 많았다. 또 그들 이민 가운데는 국민 고등 학교의 출신들도 상당히 있었다. 그들은 자연의 광막한 토지를 따라 미시간, 아이오와 지방의 서쪽으로 태평양 쪽을 향하여 가며 개척하였다. 1870에서 1890년의 20년간에 그수는 십만을 돌파하였다. 그들은 새로 개척한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자기들이 국민고등학교 시절에 존경하던 교사를 초빙하여 교회와 함께 학교를 세우고 자신들과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1878년에 아이오와주의 일크 혼(Elk Horn)에 주재하고 있던 덴마아크 사람 오라프키르케베르히에 의하여 미국 최초의 국민고등 학교가 창설되었다. 이 사람은 노르웨이의 국민고등학교의 유명한 지도자 크리스토파 브론의 제자이다.

1844년에는 위스콘신의 웨스트 덴마아크에 또 그 다음에는 네브라스카의 부레이아에, 다시 아이오와의 데스모이네스에 설립되었고 1911년에는 멀리 서부의 캘리포니아주에 솔뱅 국민 고둥 학교가 세워졌다.

미국에서 잘 알려진 국민 고등 학교는 아이오와의 엘크 혼 과, 네브래스카의 니스넷드와, 미네소타의 덴보트 국민 고등 학교 들이다. 이 학교들은 모두 덴마아크의 국민 고둥 학교 의 졸업생들이 덴마아크인의 이민 지역에 세운 것들이다.

독일에 있어서도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큰바 있었다. 1890년에 베를린 에서 사회정책(社會政策)에 관한 회의가 진행 중에 덴마아크의 유명한 실업가인 타이트겐(C. F. Tiettgen)이 독일 황제의 초청을 받아서 국민 고등 학교 에 관하여 상주(上奏)한 일이 있었다. 1891년 코펜하겐에 독일 공사관 관원으로 가있던 홀만(A.H.Hollmann)박사가 이 교육의 중요성에 크게 주목하고 국민 고등 학교에 관한 책을 쓰게 되었는데 그 책이 1909년에 출판되었다.

제 1차 대전 후에 수많은 국민 고등 학교가 각지에 설립되었다가 그 대다수는 직공들을 위한 야간 학교로 변모되어 도시에 설립되었다. 시골에도 합숙하면서 배우는 많은 단기 학교가 설립되었다. 독일의 수많은 신문들이 이 교육을 찬양하고 격려해 주었다. 이 교육 사업은 일시는 나찌에 의해서 저지 당하기도 했으나 막대한 경비를 국가가 보조하여 청년교육의 수단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그릇된 지도자들에 의해서 극단적 국수주의(國幹主義)교육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 후에 국민 고등 학교 교육의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 순수화하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는 바르덴바일러 (Dr. Frtiz Warten Weiler)가 교육외 창시자이다. 그는 1910년에 젊은 학생으로서 덴마아크를 방문했다가 리슬링게 국민 고등 학교의 교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이 방면에 천품올 타고난 우수한 교사로서 대단히 정열적 인물이었다. 스위스로 돌아가서 그룬트비히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스위스 국민고등학교를 창설하였다.

초기에 푸라우엔필드에서 귀중한 경험으르 쌓은 그는 농촌 사람들을 이끝어 주(週)를 단위로 하는 국민고등학교 과정을 실시하여 큰 교육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큰 지침이 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1925년에는 국민거ㅗ등학교 협회가 창립되었고 카소야(Casoja)와 하임(Heim)에는 여자만을 위한 국민 고등 학교가 창성ㄱ되었다.스위스는 지금도 이 교육을 위하여 덴마아크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폴란드에는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십 여개의 국민 고등학교가 설치되었다.수많은 덴마아크 유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종종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정치 밖에서 서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최초의 학교는 달키 (Dalki)에 천주교 신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러나 순수하게 폴란드 사람에 의해서 착상되고 창설된 것은 1930년 경에 이그나시 (Ignacy), 조피 아솔라쓰(z?fia Solarz) 둥에 의해서 가씨 (Gaci)에 세워진 학교이다. 폴란드는 그 복잡한 정치적 복선 속에 온갖 설움과 천대를 받고 있으면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르헨티나(Argentina)에는 덴마아크 사람들이 이민해 가 서 산지 오래 되었다. 1908년에 덴마아크인 학교 협회가 생겼으나 정식의 국민 고등 학교는 1917년에 부에노스아이례스 주에 있는 카스칼레스에 설립되었다. 이 고장에 가장 성과를 거 둔 것은 주단위(週單位)의 코오스였다고 한다. 이 곳에 덴마아크에서 강사들이 비행기로 출장하여 그 곳 덴마아크 청년들을 위해서 강의도 했었다.

오스트리아, 험가리, 불가리아, 에스토니아에도 흉미롤 가진 교육자들에 의해서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다.

네델란드(和蘭)에는 많은 훌륭한 국민 고등 학교들이 있으 나 2주일 과정을 단위로 하는 단기 강습형의 것이 대부분이다.

프랑스에서도 이 교육 제도에 큰 자극올 받았다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와 실험시기에 있다. 일본 사람들은 홋카이도를 덴마아크식으로 개척하고자 꾀하기도 하였고또 이바라기현(安城蘇)의 카토오(加藤寬治)씨의 교육의 ’개척자적 기개 (氣槪)로 설립한 국민 고등 학교를 비롯하여 롯토리현(鳥取蘇)의 야마게(山陰) 국민 고등 학교,시즈오카현(靜言縣)의 흥농(興農)학원,토오료오의 농사 학교들은 모두 주목 할만한 학교들이 며, 또 이에 자극을 받아 설립 된 보습학교 상당한 수에 달한다.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9 구국의 원동력인 교육

 새 역사를 위하여 - 9.구국의 원동력인 교육

유달영

9.구국(救國)의 원동력인 교육

1.위대(偉大)한 교육(敎育)의 개혁자(改革者) 그룬트비히

나는 위에서 덴마아크의 경이적 부흥의 업적을 말할 때마다 그 원동력과 그 근저(根低)가 교육과 종교임을 누누히 암시하여 왔다. 세기적 불행의 대표국이던 덴마아크가 오늘 인류 최고 농업 문화 건설에 성공하였고 20 세기 복지 국가의 대표가 되었는데 그 원동력인 교육을 우리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검토해 불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해방 후에 현명함이 있었던들 덴마아크의 교육을 연구함에 있에서 이처럼 등한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까지 모든 정신을 큰 나라에만 빼앗기고 있었다.

"참 진리는 언제나 착은 것 가운데서 찾아낼 수가 있다." 라고 하였는례 그 말은 우리에게 성실한 반성올 촉구한다.

덴마아크의 교육의 생명은 국민 고등 학교이다. 이 국민고등 학교의 학제는 이 나라의 특유한 것으로서 덴마아크 농민의 용광로이며 국민 문화의 모태(母胎)인 것이다. 우리는 국민 고둥 학교를 떠나서 인류 최고 농업 문화국 덴마아크의 오늘을 생각할 수가 없고, 또 그 혁혁한 부흥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도 없다. 황무지를 옥토화한 것도,전례가 없는 협동사업의 성공도,고도의 국민 교양도 모두다 이 교육의 뿌리에서 움터서 자라난 줄기와 꽃과 열매인 것이다.

그련데,이 위대한 교육의 횃불을 높이 든 이는 누구인가? 그는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캄캄한 밤에 덴마아크의 갈바롤 인도해 준 그룬트비히 그 사람이다. 덴마아크의 교육을 혁신하고 세계 교육사에 이채인 국민 고등 학교롤 창도한 선각자가 곧 이 사람이다.

이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교육과 종교의 혁신의 면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그룬트비히는 1783 년 10월 6 일에 슐란드섬에서 신교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성이 정직한 사람으로 심히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어머니는 가다리네 방이라는 분으로 남편을 도와서 살림살이의 안팎을 잘 다스리고 심지어 밭일까지 모두 맡아서 혼자서 처리해 갔었다.

그룬트비히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깊은 신앙의 품 안에서 자랐고 그의 아름다운 심정은 어머니의 노래로 북돋아진 것이다. 덴마아크의 위대한 조상들의 위업을 진심으로 사모함과 신을 경외하는 신앙이 얼마나 인생으로서 값있는 것인가를 부모에게서 배웠다.

어머니는 늘 어린 그룬트비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목적이 없이 우유부단한 일생을 보내려면 차라리 죽옴올 택할 것이다."

그가 아홉 살 때에 라틴어 학교의 입학 준비를 위하여 남부 유틀란드의 츄레고라는 곳에 펠드 목사의 집에 가셔 6년동안이나 있게 되었다. 이 고장은 황무지와 소택이 많은 을씨년스러운 지대였다. 그러므로 막내동이로 자란 어린 그룬트비히는 낯설은 고장에서 농촌이란 곳이 얼마나 재미없고 쓸쓸한 곳인가를 깊이 느끼 었다. 이 쓸쓸한 농촌율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싹튼 것은 이 시절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룬트벼히는 15세 해 목적한 아르후스의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는 동안에 그 당시의 일반 풍조인 펀협한 학자형의 교사들에게 큰 고통을 받았다. 기계적이며,형식적인 교육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뭇하였을 뿐만 아니라 융화하기 어려운 적으로 생각하기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는 덴마아크의 교육이 얼마나 무용 무익 (無用無益)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었다. 그는 늘 이 시절율 회상하고 빵대신 돌을 머이는 학교 생활이라고 술회하였다. 무미건조한 아르후스 시대를 거쳐서 1800 년에 고펜하겐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여기서 괴테, 피히데, 쉘링과 같은 세기적인 인물들의 새 사상에 접촉할 수 있었고, 또 그들과 친교가 두터운 스테펜스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회가 되었었다.

영감이 넘쳐 흐르는 스테펜스 교수의 강의를 듣고 고동치는 가슴에 넓은 새 천지가 전개되는 감명을 받았다. 그는 철학,문학,역사 등에서 새 사상올 도입하였고 사랑하는 조국을 새로운 각도에서 옹시하게 되었다. 스테펜스 교수는 순결하고 정열척인 청년 그룬트비히로 하여금 후일 덴마아크 국민의 사상과 생활을 혁신하여 조국을 멸망에서 구원하고 오늘에 지상 낙원을 건설하게 한 도화선을 그의 가슴 속에 만들어 준 것이다.

산 인격에서 솟아나오는 생명의 말씀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 역사적 실례를 우리가 그룬트비히의 일생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마국의 시인 롱펠로우 읊은 「화살과 노래」라는 시는 그것이 진리임을 우리로 하여금 더욱 확신케 한다.

화살과 노래

내가 창궁(蒼穹)을 향하여 화살올 쏘았다

그 화살은 너무도 빨리 날라서

내 시력(視力)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정녕히 따위로 돌아왔으련만

화살의 간 곳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창궁을 바라고 노래를 불렀다

저 빠르고 예민히 흘러가는 노래를

뉘라서 따라가 잡을 수 있으랴

그 노래도 정녕히 따위로 돌아왔으련만

노래의 간 곳을 알 길이 없었다.

오랜오랜 훗날의 일이다.

싱싱한 상수리나무 큰 줄기에서

아직도 꺾이지 않은 그 화살을

아,나는 찾아낸 것이다

오랜오랜 훗날의 일이다

나는 친구들의 가슴에서

내가부른 노래 그대로를

아,아는 다시 찾아낸 것이다.

〈홍펠로우 지옴〉

그훈트비히는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이 시절에 그는 영국의 넬슨이 거느린 대함대가 위세 당당히 쿄펜하겐에 쳐들어와서 덴마아크 해군과 격전하는 처절한 광경을 목도(目睹)하였다.그는 조국의 해군이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였다. 1803년에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 사정이 어려워 집에 돌아가 형의 교회를 도와 주고 있었다. 1805년에 해군 대위 레드씨의 초빙으로 그 집 가정 교사가 되어 란켈랜드에 가 있었다.

쾌활한 젊은 주인 레드 대위는 늘 분주하게 몰아다니는 성격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그 부인 콘스탄스는 언제나 우울하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룬트비히는 마음 속 깊이 동정함을 마지 않았다. 큰 저택에서 쓸쓸한 두 사람만이 지내가는 중에 그룬트비히는 콘스단스 부인의 그 청초하고 가련하고 아름다움에 점차로 정신을 빼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뜨거운 연모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 불의의 첫사랑으로 그는 주야로 번뇌의 생활을 계속하였다.그는 결국 양심의 가책에 견디다 못하여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그는 이 아픈 감정을 억제하기 위하여 괴테와 세익스피어를 연구하는 한편 그것을 번역하여 잡지에 싣기 시작하였다. 북유럽 신화(神話)의 대저가 간행되어 그의 이름이 온유럽에 덜치게 된 것도 이 해였다. 일부 인사들은 그를 덴마아크의 최대의 시인이라고까지 찬양하게 되었다.

그는 청년들이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연정(戀情)의 불 속에서 용감히 탈출했을 뿐더러 그 실패를 보람있게 잘 살린 사람이었다.

1810년 3월 그는 아버지로부터 얼마동안 고향에 돌아와 늙은 자기를 도와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받았다.

이제 사회에 널려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또 지명의 학자들과도 사귀게 되었으므로 적막한 고향에 돌아가 지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부모를 생각하는 효심이 강한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곧 귀향의 준비를 하였다. 그는 원래 목사가 되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당시 의식은 재같은 냉냉한 교회와 위선이 가득한 교직자들에게 실망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나,아버지의 소원에 따라서 목사시험에도 응하였다. 그 해의 시험관은 대학의 교관이었다.

그는 시험설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 안에셔 절멸(絶滅)하다." 라는 제목으로 생명이 없는 차다찬 교회와 거짓이 가득한 교권자들을 통렬하게 공박한 것이다. 교관은 그 담대하고 열정적이고 진리을 사랑하는 신념과 생명이 창일한 탁견(卓見)에 대하여 크게 칭찬하였다.

그룬트비히는 그 설교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는데 이것은 목사와 장로들의 큰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목사 면허를 주지 말라는 맹렬한 여론이 일어났다. 그룬트비히는 그 고루한 비난에 대하여 더욱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 당시에 덴마아크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에 본의 아니게 가담하게 되었으므로 영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807년에 영국의 대함대는 쿄펜하겐을 포격하여 덴마아크는 완전히 패배를 당하였고 함대를 송두리째 몰수당하는 형편이었다. 한펀 덴마아크 남부 홀스타인에 주둔하고 있던 2만 3천의 불군(佛軍)의 주둔비롤 전부 덴마아크에 부담시켰다.제정의 궁핍과 해외 무역의 두절과 노르웨이의 분리 등으로 1811년에 국립 은행은 파산하게 되고 지폐의 남발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어 올라서 마치 제 1차 대천 후의 독일의 마르크 폭락이냐 우리 나라의 6·25후의 인플레와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중류 계급의 봉급 생활자들은 실로 극도의 생활고에 빠지게 되었다. 실연으로 받은 정신적 상처와 조국의 비운 등으로 인해 인생과 조국에 대하여 심각한 번민을 하고 있었다. 그 대에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특히 십자군의 유래와 결과에 대하여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국민의 생활 속에 아름답게 숨어 있는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었다. 그는 또 스노레의 덴마아크사(史)에서 용감하고 고 아름다운 인생의 시와 조상들의 생활에 충만하였던 신앙의 빛을 발견하고 큰 용기롤 얻었다 그는 이 역사로부터 귀납하여 자기 자신의 건전한 신앙을 세우게 되었고 성서를 갈(渴)한자와 같이 읽었다고 술회하였다. 성서의 일언 일구는 모두 그의 신앙의 순수롤 위한 싸움의 무기가 되어 도전의 준비를 하였다. 그는 사색과 초려(焦慮)로 극도의 쇠약에 빠져 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당분간 휴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푼트비히는 목사 시험에 합격한 다음 해에야 겨우 목사의 면허를 받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향리의 교회에서 소박한 농민들과 친구가 되어서 그들의 신앙이 순수하고 바르게 자라도록 진력하였다.

1813년에 아벼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는 쿄펜하겐으로 다시 나가서 예언자적 경고를 거듭하여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멘마아크는 오래지 않아서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다. 이 강연은 젊은 청년들에게 많은 반향율 일으켰다. 그는 다시「조국의 위기」라는 글올 써서 널리 대중울 경고했다. 1816년으로부터 1819년에 걸쳐서 그는 「단네베야케(덴마아크의 보루(保壘) 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시와 평론과 역사로서 덴마아크 국민의 가슴 속에 잠든 정신을 깨우치고자 노력하였다.

덴마아크에서 수선(水山)은이른 봄 부활제 때에 피기 때문에 부활꽃이 라고 불리 운다. 그러 나 일반적으로는 「촌놈의 꽃」이라고 천시하였다. 그룬트비히는 수선화에 붙이어서 예언자적 시를 읊어 덴마아크의 장래를 상징하였다. 긴 겨울 동안 눈과 서리에 죽지 않고 견디었다가 이른 봄에 가장 일찍 피는 것처럼,천대받는 농민이야말로 덴마아크가 맞이할 봄날에 가장 먼저 필 부활 꽃이라고 비유로 노래 하였다

오, 그리워라 수선화

마율의 가난한 접 풀에

깨끗이 핀 수선화

천대받아온 수선화

장미 보다도 더 귀하여라

조상의 무덤가에 피어나는 부활꽃

온갖 꽃 모두 시들었는데

회망의 이른 봄을, 기쁨의 한 해를

알리는 사연 네 이름 부활초

그는 비참한 현실에서 북 유럽의 빛나는 장래롤 확신하였다. 그것을 우리는 다음 시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사나운 눈보라와 폭풍우

대지를 온통 휩쓸어도

우뚝히 셔리라 큰 바위로

북유럽 황금 시대롤 위하여

그는 북 유럽의 역사를 알려 주고자 노력하였다. 모든 학교들이 쓸데없이 정력을 라틴어와 그리이스어 등에 쏟아넣을 해에 그는 순수한 덴마아크어의 교수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이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 연구의 공로로 국왕으로 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므로 그는 약흔한지 7년만인 35세가 되어서 비로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로 마루어 보아도 그의 생활이 얼마나 빈곤 속에 악전 고투하였는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1822 년에 그는 코펜하겐의 구주 교회(救主敎會)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설교는 예언자처럼 높고 권위가 있었으며 사도와 같이 열렬하여서 점차로 사람들이 그의 설교롤 듣고자 모였다. 그는 교회를 널리 개방하여.누구나 자유로 설교를 듣게 하였다. 그 당시에는 목회도 일정한 구역이 정해져서 많은 구속을 받았다.

국민들도 자기 들의 소속된 교구이외의 목사의 설교는 들을 수 없었으며,더구나 자유 집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룬트비히는 그 규정을 깨뜨리고 교회를 개방하여 설교와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는 한갓 관습척인 교회의 의식 편중과 부당한 교권자의 횡포와 신앙의 자유 속박을 배격하고 오직 성서의 진리의 말씀만이 인생의 생활에 빚과 힘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825년 6월, 신학 교수안 크라우센이 「구교와 신교의 교회 정책 및 교지(敎冒)와 의례」라는 8백 면의 큰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 청년 교수는 상당한 인기롤 얻고 있는 중견이었므로 그의 그릇된 주장이 많은 후진들에게 적지 않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룬트비히는 이틀 동안에 반박 논문(反駁論文)을 탈고하여 「교회로부터의 답장」이라는 소책자률 출판하였다. 이것은 덴마아크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학자와 교직자들은 크라우센의 주장에 가담하였고 일반 대중들은 그푼트비히의 자유 사상에 찬성하였다. 크라우센은 성서의 합리적, 신학적 해석을 주장하였고, 그룬트비히는 자유로운 신앙적 해석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기회로 반항적이며,개혁적인 그룬트비히를 미워하던 무리들이 일어 나서 1827년에 그는 교회에서 추방당하였고,적지 않은 벌금을 물었으며,그의 저술은 일일이 치안국의 검열과 허가를 얻도록 하였다. 이것은 그룬트비히에 대하여 가장 가흑한 구속이요,형벌이었다.

그는 다시 서재에 틀어박혀 역사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게 되었다. 역경에 처할수록 그의 지조와 주장은 더욱 굳어지고 확실하게 되었다. 뎀마아크의 살아날 길이 분명하건만 교육자들은 이 주장에 냉담하였고,성서의 가르침이 분명하건만 석상(石像)같은 교직자들의 심금은 울리지 않았다. 명예와 권력과 지위에 판계없는 소박한 민중만이 그에게 공명하였나 그들은 너무도 무지하였고 또 투쟁에 무력하였다.

직업종교가들이 교리와 신학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국민의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역경올 비관하는 심정만을 불붙일 뿐이었다.

그룬트비히가 제도와 의식에 포로가 되어 화석같이 된 그 때의 교회가 신앙의 중심에서 멀리 이탈하였옴을 경고하고,한갓 형체를 지키는 형식주의롤 반대하며 열렬히 성서 중심의 자유 신앙을 부르짖은 것은 얼마냐 자유스려운 주장이며 당연한 주장이었던가. 그는 1827년부터 7년 동안이나 설교를 금지당하였다. 그의 위대한 넋이 낡은 오랜 껍질올 깨뜨리고 하늘을 자유로이 날으는 까닭에 교직자들은 그를 정통이 아닌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이 당돌한 위험 분자를 봉쇄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자유의 혼은 그렇게 쉽게 감금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거리낌없이 국민에게 또 다시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다량의 시문을 발표하는 한편,교육의 개혁 운동,농민의 민권 확장 운동 기타 각 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정당한 구국 정열은 붓과 혀롤 통하여 요원의 불처럼 퍼져나가 날로 수많은 공명자를 얻게 되었다. 교권자들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농민,직공,노동자들의 자유 신앙 운동이 일어나서 곳곳에서 자유 집회가 빈번히 개최되었다. 자유 신앙의 운동은 평신도들이 탄압을 무릅쓰고 맹렬히 싸우는고로 이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푼트비히는 사람의 생활을 무시하는 종교와 교리를 반대하였다. 그는 사람이 내세를 중히 여기는 동시에 또한 현세를 소훌히 보지 않아서 현재와 내세를 모두 건실히 여길 것이며 사랍의 영 (靈)과 육(肉)이 잘 조화되는 생활만이 정상의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교리 해석에만 열중하고 실생활을 참되고 올바르게 발전시키고자 하지 않는 점을 강력하게 배격한 것이었다.

1839년에 국왕의 특지로 그룬트비히는 왈도 병원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여기는 정부의 관할 구역 이외였으므로 자유신앙단을 만들어서 자유 신앙의 부활과 덴마아크 정신 고취(鼓吹)에 힘쓸 수가 있었다. 왕비 가타린 아마린은 그루트비히를 몹시 존경하는 분으로 항상 이 교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음으로 양으로글르 돕기에 노력하였다. 이 후로 부터 자유 신앙단은 농촌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진리는 페닉스(不死鳥)의 넋과 같아서 그의 주장은 점점 끌 수 없는 불이 되어 전 국민의 지지를 얻게까지 되었다. 그리하여,결국 신앙의 자유가 국가적으로 법에 의하여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1921년의 통계를 보연 루우터파의 자유신교인의 수는 322만 이상으로 98% 의 다수에 달하였다. 이신교는 결국 덴마아크의 국교가 되었고 후일에 중국과 인도에도 선교사롤 파견하여 복옴을 전파하기까지에 이르렀었다.

그룬트비히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시의 교육계의 상황이었다. 그의 현명한 눈에는 교육계의 전반이 생명을 잃어 버린 "산 송장"으로 보였다. 덴마아크롤 구원할 유일의 희망인 모든 학원 안에는 약동하는 생명과 불타는 정열이 없었다.그의 가슴에는 교육의 본격적 요소인 인격의 불이 꺼져 있었다. 교사들은 월급을 위하여,학생들은 간판올 위하여 학교에 드나드는 것이었다. 이 공전 절후(空前絡後)의 난국을 어떻게 이러한 생명들이 개척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인가. 생명의 묘판(苗床)인 학원과 교회가 이렇게 무기력하여 낡은 껍질 속에 갇히어 잠자고만 있다면 결코 이 혈로(血路)를 열어갈 수는 없다고 그룬트비히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룬트비히는 주야로 쉬지 않고 막대한 양의 글을 써서 국민을 깨우치고 격려하였다. 그는 정력을 기울여서 덴마아크의 예로부터의 위대한 민족성과 찬연한 과거를 국민에게 알리어 온갖 고난을 돌파할 용기와 신념을 기르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는 실로 3만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쓴 것이다. 그는 문학 자체롤 목적으로 하여 글을 쓰기보다는 문학으로서 국민의 심금을 울려 정신적 각성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시만도 l천 4백여 종이며,현재 덴마아크에서 부르는 찬송가도 백여펀에 달한다. 그러므로,오늘날에 있어서도 그의 시와 노래는 덴마아크 국민의 가슴에 감격을 일으켜 애국심을 북돋아주고 있다. 그러나, 그룬트비히는 아무리 훌륭한 저술이라도 그것은 결국 「산 말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 었다.

그러므로, 문필만으로는 덴마아크 국민의 가슴 속에 뜨거운 애국 정신을 불붙여 자라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고펜하겐에 덴에마아크 협회롤 조직하여 때때로 모여 강연회롤 개최하고 또 노래를 지어 민중과 함께 불렀다."산 말씀"의 운동은 점점 퍼져서 농민 계몽에 큰 효과롤 내기 시작하였다. 1년 동안에 천여 곳에 강연회가 열려 역사,과학,정치,경제,종교,문학 등올 연제로 「산 말씀」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수많은 연사들은 모두 그룬트벼히의 주의(主義)아래 교육 받은 사람들이다. 이 강연회의 반향은 심히 커서 전 국민들의 여론을 좌우하게까지 이르렀다.

그는 참된 교육만이 덴마아크의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덴마아크의 청년들이 복지 사회롤 바라보고 이상의 날개롤 퍼덕 일 수 있게, 그들의 가슴에 「산생명」의 말씀을 붙어 넣어서 직접 인격적 상응(相應)이 될 수 있는 정신 교육만이 정의와 사랑으로 민족과 국가를 건져낼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교육이야말로 덴마아크의 전 국민을 힘 있게 결합시켜서 새로운 건설의 튼튼한 초석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굳을수록 당시의 썩은 교육계를 바라보고 건딜수가 없었다. 그는 교육의 근본적 혁신의 시급함을 통철히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룬트비히는 당시의 학교를 평하여 "죽은 학교" ,"암흑의 학교"라고 통렬히 공격하였다. 반가족적이며,반민족척인 당시의 유행하던 사조(思潮)는 북 유럽의 정신적 보옥(寶玉)을 파괴하고 있으며 학원도 또한 완전히 이 사조에 지배되고 있었던 까닭이다. 고상한 윤리(倫理)와 애국 애족의 정신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으로 비웃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덴마아크의 그 찬란하던 역사는 여지없이 정복되고 짓밟히어 최후의 기름진 영토인 흘스타인과 슬레스버히를 상실한 비운의 날에 자포 자기의 국민은 고귀한 인생의 목표도 민족과 가정에 대한 진정한 사랑도 거의 잃어 버리고 있었다.

국민에게 생의 가치와 역사적인 자기를 각성시키는 것이 국가 부흥의 열쇠이며 그 밖의 모든 문제는 이 근본 문제의 확립이 된 후라야 바로소 풀리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이 확고한 목적을 위하여 우선 종래의 교육을 근본저으로 혁신하고자 결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혁신의 열쇠는 진리와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교사의 양성과 그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는 참으로 그룬트비히의 탁월한 착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식있는 이기주의를 만드는 교육은 나라와 민족과 자신까지도 파멸의 심연(深淵으로 집어 넣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식있는 이기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롤 강하게 배격한다. 우리는 민족 자신 뿐만 아니라 실로 인류의 자유를 등에 지고 이 전대 미문(前代末聞)의 난국을 걸어가고 있는 현금에 처하여 우리의 교육계를 철저하게 검토하고 나아갈 진로롤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룬트비히는 부르짖었다.

"먼저 참된 덴마아크 사람이 되라. 그 다음에 크리스챤이 되라. 조국 덴마아크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인간에게는 신의 축복은 있올 수 없다 ."

그는 애국적인 청년 교육올 위하여 자유 학교를 설립하고자 분투하였다. 그룬트비히가 직접 국왕에게 상주(上奏)한 말을 보연 그 뜻이 얼마나 간절하였던가를 우리는 쉽사리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폐하께서 국민을 위하여 자유 학교를 세우신다면 확실히 도탄에 빠진 백성을 널리 건져낼 수가 있옵니다. 국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 샘물이 청순하기만 하다면 민중은 팔방으로부터 모여 와서 이 샘물을 마시고자 할 것이며, 그 가치와 명성은 세기를 통하여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이 샘물을 마시면 소경들은 불 것이요, 귀머거리들은 들을 것이요, 앉은뱅이는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숲속으로 뛰어다닐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룬트비히는 자기의 지향하는 바 자유 학교는 능히 덴마아크를 구원하여 빈곤, 공포,죄악에서 벗어나 참 자유와 행복을 얻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의 국왕인 크리스찬 8세와 왕후 아마련은 요두 진심으로 그의 선각적인 사상에 공명하여 목적하는 자유학교를 구체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완고한 정부 관리들과 편협한 일부 교육자들이 맹렬히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룬트비히를 비방하여 치자(癡者)의 꿈이 라고 욕하였다.

그룬트비히는 자유 학교 설립에 실패했으나 왕과 왕후의 호의에 감격하였다.그는 다시 왕에게,

"종래의 획일적 교육은 학생을 학문으로 중독시키고 용기와 정신을 위축시켜 활동을 상실하게 합니다. 자유 학교는 생명으로 청년과 접촉함으로써 흥미롭고, 유쾌하고,그리고 순직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농민으로서,또 국민으로서 조국에 대한 관념이 명확하고 환희와 감사로써 국민적 공동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다. "

라고 아뢰어 감사를 표시하였다.

오늘에 이 자유 학교의 실패를 바라보면 오히려 "새옹의 마 (塞翁之馬)" 가 된 것 같다. 그룬트비히의 이상은 권력을 중심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민중 운동으로서 국민 가운데서 움터 나와 어느 것이나 사립 국민 고등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에 있어 멀리 그 시대를 바라보면 오히려 자유 학교의 실패가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룬트비히는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분기할 줄 모르는 무위 안일(無爲安逸)한 청년들에게 이렇게 노래를 읊어 각성하라고 격려하였다.

아침 해는 숲 위에 떠올라서

만물은 황금의 지붕처럼 빛난다

닭들은 홰를 치며

아름다운 말을 고하지 않는가

깨어라 어서 깨어나라

덴마아크의 젊은 용사들아

쾌활하게 일어나 혁대롤 조여애라

역사는 찬연하게 고대시(古代詩)에서 빛난다

왕은 자유 민권 요구의 여론을 존중하여 국민의 참정권 실시롤 약속하었다. 그룬트비히는 몹시 감격하여 기뻐서 뛰기도 하였으나 농민들은 여전히 무지 몽매 하였고 교육도 여전히 생명 없는 죽은 교육이었다. 그는 농민 계몽과 교육 개혁을 더 한층 통감하게 되었다. 당시의 덴마아크의 교육은 청년들이 실생활에 있어서 아주 무능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또 교육은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 못되었으며 농민의 대다수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학생들은 손에 괭이와 망치를 쥐고 실지로 일하기를 부끄러워했다. 결국 그 교육은 몇 사람의 학자와 관리를 양성하는데 지나지 뭇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가정에도,농촌에도,국가에도 쓸모없는 고등 유인(高等遊民)의 양성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 비현실적 교육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이었다. 국가가 막대한 재정을 들여 이러한 죽은 교육만을 하는 것을 생각하여 보연 한심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830년에 정치 개혁이 얼어나 정치의 실권이 왕으로부터 국민의 손으로 들어와 의회 정치가 되면서부터 그룬트비히는 국민 고등 학교의 새 안(案)을구체적으로 선전하여 급속한 국민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역설하였다. 민중이 우매(愚昧)하면 민주 정치는 오히려 일부 야심가들에게 이용되어 덴마아크는 더욱 도탄에 빠지기 쉬움을 경고했다.

그룬트비히는 노년에 이르러 자신이 스스로 학교롤 세우는 것을 단념하고 열심히 교육의 모순을 지적하고 새 교육의 이상을 널리 고취하여 많은 청년들의 공명 (共鳴)을 얻기에 힘썼다. 그는 교육은 인생에 대한 열과 흥미를 일으켜서 보람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 높은 교육과 문화의 향상을 목표로 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인생의 공통된 갈망이어야 한다. 학원이 결코 자격증올 판매하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간판을 얻기 위한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교육의 방법에 있어서도 교과서에 기계적으로 얽매어서 생명올 자유로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졸렬한 짓은 시급히 버려야 할 것이다. 교사들의 산 말씀이 교사 자신들의 높은 인격을 통하여 학생들의 인격을 소생시켜야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인생의 고원한 목표를 갖게 하는 동시에 실생활에 유능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재의 내용과 전달의 방법도 오두 혁신하여야 한다.

서로 도와 뭉치는 협동의 정신과,인격 평등의 사상과,뜨거운 애향,애족,애국의 정신을 올바르게 북돋아 길려야 한다. 청년들의 마음에 마덕과 여유가 있는 건실한 애국심을 길러 주려면 교육을 필연적으로 「역사와 시의 기초」위에 수립하여야 한다. 그룬트비히는 당시의 교육에 대하여 이러한 구상을 하였었다.

그룬트비히의 이같은 교육 이념은 날이 갈수록 많은 공명자를얻게 되어 그가 바라던대로 젊은 교육자들의 활동으로 세계에 유례없는 성과롤 거두어 국가롤 위기에서 구해내고 오늘의 번영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다.

1848 년에 국왕은 보수당 내각을 총 사직시키고 재야(在野)의 정객들로 자유당 내각을 조직하게 하여 보통 선거를 단행케 하였다. 이것도 그룬트비히의 헌책(獻策)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65세 해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선각자들의 상례와 같이 의회 안에서도 많은 정적(政敵)이 있어서 그의 정당한 주장이 여러번 부결되었으나,항상시간 문제이었을 뿐으로 조만간 그의 주장은 결국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는 84세가 되는 1866 년까지 국회에서 활동하여 교육,종교,산업,토지 정잭의 개선에 진력하였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덴마아크의 소농법도 결국 그룬트비히의 이상의 일부롤 실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는 국회에서 토지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사람을 물론하고 자기가 태어난 조국 안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법률이라도 이 권리를 빼앗거나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룬트비히는 언제나 l 인 l 당으로 자유,평등 사상에 배치하는 모든 악제도롤 분쇄하는 데 있어서 그 불굴의 의기는 이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진리를 위할뿐 한몸의 영욕을 돌봄이 없었고 정부 부패의 권세와 싸워 사회 정의를 수호(守護)하기 위하여는 생명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국회 의원들은 이에 배울 바가 없을 것인가?

보신 (保身)과 차기 선거의 방편으로 잇 따른 무상한 변절(變節)은 어떻다 할 것인가? 현명하고 용기있는 국회 의원들이 있는 나라에 부패한 정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룬트비히의 국회의원 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이름다운 일화를 여기에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거에 있어서 전국적인 투표를 한다면 그룬트비히가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얻을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소선거구에 있어서는 언제나 평탄하게 당선될 수는 없었다. 그룬트비히가 66세 해에 코펜하겐 11구에서 첫번 출마를 하였을 때의 일이다. 연설과 수단이 능수능란한 세무 관리출신자와 대결하였는데 불과 56표의 차로 낙선되어 전국의 큰 화제가 되었다.

그 때에 2천여 명의 애국자들이 연서하여 그를 칙선의원(勅選議員)으로 임명하도록 국왕께 호소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표레스죠 선거구에서 당선된 한센은 스스로 사퇴하고 그푼트비히를 보선(補選)시키기에 열성을 다하였다. 이것은 덴마아크 정치사에 영원히 빛나는 아름다운 유산이 될 것이다. 또 어느 선거구에서는 모든 경쟁자들이 스스로 사퇴하고 그룬트버히를 무투표로 당선시킨 일도 있었다.

1866년 개원식 해에 83세의 최고령자안 그룬트비히는 임시 의장으로 등단하여, 다음과 같은 개회사를 하였다.

"나는 우리 나라의 첫번 의회가 개회되었을 때에 연장자로 여러분께 인사롤 드린 이래 이미 1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국내의 모든 문제는 많이 개선되어 국민이 언론을 비롯한 모든 자유를향유하게 된데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오늘의 나의 인사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오른다. 그러나,상하 양원의 의원 여러분과 함께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크게 위로되는 바는 자유가 죽었던 덴마아크는 물러가고 산 자유의 새 덴마아크가 이렇게 건설된 것을 크게 기뻐하여 마지 않는다."

그룬트비히는 1872년 10월 3일 89 세로 코펜하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지 나갈수록 더 많은 덴마아크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 위대한 애국의 지성이 살아 움직이어 정치도, 산업도,교육도 원활히 발전되어 그의 이상이 꽃피어 갔다.

고펜하겐 북쪽에 거대한 그룬트비히 기념 교회가 서 있다. 1921년에서부터 1940 년까지 20년의 장기에 걸쳐서 건축된 특유한 덴마아크식 건물이 다. 이 교회 에 사용된 벽돌은 전국에서 그룬트비히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한 장씩 모아다 지었다고 한다. 가정마다,학교마다,관청마다 이 위대한 구국 선각의 초상이 걸려 있음은 덴마아크 사람들이 얼마냐 그를 사모하고 기리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참으로 위대한 덴마아크의 애국자는 어찌 덴마아크만의 자랑이겠는가. 실로 인류의 자랑이라 하겠다.

새 역사를 위하여- 9.구국의 원동력인 교육-2.

유달영

2.새 교육(敎育)의 선봉(先鋒) 크리스텐 콜

우리가 덴마아크의 교육을 연구하자면 필연적으로 크리스덴 콜(Kristen Kold) 이란 인물을 알아야 한다. 그 까닭은 크리스텐 콜이 야말로 그룬트비히의 이상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서 비상한 열성과 탁월한 역량으로 전 생애를 바쳐서 국민고등학교의 교육을 실천에 옮겨 발전시킨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국민고둥학교를 스스로 설립하고 또, 이 사업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허다하건만 크리스덴 콜이 국민에게 특별한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그 명망이 가장 높은 것은 그가 경영한 사업의 규모가 커서가 아니라 콜이 국민고등학교의 옳은 방향을 잡아 현명하게 실천한 까닭이다.

콜은 1816년에 유틀란드의 서부의 시골에서 구두장사(製靴商)의 아들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듵고 자란 교훈은「하찮은 물건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아껴서 써라.」「듣는 사람들 의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선의로 말하기에 힘써라.」하는 말씀이었다.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도 별로 다니지 못하였고 고생스럽게 국민학교를 졸업한 다음 양친을 열심히 설복하여 스네트스테트에서 2년제의 초등 교원 양성소롤 겨우 수료하였을 뿐이다.

이 양성소를 수료한 다음에 그는 가정교사가 되기도 하고 보조교사 노릇도 해보았다. 그가 독일과 인접한 슬레스비히에서 농민의 자제를 가르치고 있을 때에 덴마아크의 민 족적 각성을 위하여 맹활동을 하였다. 독창적이고 열렬한 성격의 콜에게는 그 관료적이며 형식적인 죽은 교육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이동안 그는 학교의 교수법이 몹시 혹독하고 너무 기계적으로 많은 폐해(弊害)가 있음을 느꼈다. 어느날 한 소녀가 교리(敎理)의 문답(門答)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도 없고 의울 수도 없다고 흐느껴 우는 것을 보았다.

[저렇게 무리하게 암송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이겠는가? ]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콜은 학생들에게 교리의 내용읍 알기 쉽게 먼저 설명하여 이해시키고 그 다음에 그들과 문답을 시작하여 보니 그들은 묻는 까닭을 아는대로 틀림없이 대답을 쉽게하고 또 기억도 잘 하였다. 그 후부터 콜은 교과서를 집어 던지고 독창적인 교안을 만든 다음에 학과의 내용을 될수 있는대로 쉽고 흥미있게 문답식으로 유도해서 싫증이 없도록 하여 목적한 바를 깨달아 알수있게 가르쳤다. 콜은 재래의 전통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실력 없는 교사들이 자신을 은폐하는 연막으로 불필요한 어려운 용어와 의국어를 무수히 나열하여 목적하는 내용을 깨닫기 어렵게 하며, 한편 이런 것을 오히려 박학한 교사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진리를 평이한 표현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경모(敬慕) 하는 유명 한 어느 학자는 자기 의 쓴 글을 반드시 국민 학교 상급반 학생인 자기 딸에게 읽혀서 그가 모른다면 다시 고쳐서 쓴다고 한다.

콜의 이 파격적인 교수법 에 대 하여 문교부의 관리와 교수들을 비롯하여 교회의 목사 감독들은 반감을 갖게 되었다.이 관료적인 행정 관리들과 직업적인 편협(偏狹)한 종교가들은 콜을 교육의 이단자로 몰아서 추방해 버렸다. 교육에 비상한 흥미와 열성을 가지고 큰 사명감을 느껴 침식을 잊고 활동하던 콜은 마침내 어느 학원에서도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콜은 이 수난시절에 인생의 자유에 대하여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정당한 자유가 억압받는 사회에는 아무리 큰 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태양 없는 골짜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인생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보석은 자유이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찾아 헤메인 나그네의 역사이다, 인류는 자유를 찾기 위하여 무수한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여 온 것이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패트릭 헨리의 부르짖음은 결코 헨리 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인류 전체의 시대를 초월한 절규라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유의 상실은 곧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콜은 자유를 사랑하는 청교도의 넋들이 죽음을 택하는 각오로 개척한 북미 신천지를 한없이 동경하여 마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가진 바 천분을 자유로이 발휘할 수 있어야 함 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정당한 권리인가를 생각한 것이다. 콜은 마침내 북미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노력하였으나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거의 실망에 빠져 있을 때에 소아시아의 스머나로 떠나는 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그 조수로 동행하게 되었다.터어키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섞여서 사는 이 지방에서 2년동안 노력해 보았으나 흥미를 얻지 못하였다. 다시 5년의 세월을 이역(異域)에서 무의미하게 보냈다. 이것은 혈기가 넘치는 젊은 콜에게 큰 정신적 시련기가 된 것이다.

때마침 덴마아크와 독일 사이에 풍운이 급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애국심이 강한 콜은 의용병으로 곧 지원하였으나 귀국의 여비가 없어 배를 타지 못하였다.그는 초조해 견디다 못해서 작은 손수레 하나를구하여 약간의 짐을 싣고 2개월여에 걸쳐 도보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곤란한 여행 중에서 그는 인생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이것이 그의 22세 때 일이었다.

1848년에 네덜란드와의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벌어져 콜은 사병으로 지원하여 출전하였다. 이 전쟁은 덴마아크의 승리로 끝났으므로 콜은 무한한 승리의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 그는 이 전쟁에서 국민들의 애국심이 자연스럽게 불붙음을 보았고,또 스스로 이것을 체험하였다. 콜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 이해를 초월하여 국민으로서 의의 있는 생활을 영위하는 정신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콜이 명망이 높은 목사 월리 베르게달의 초빙 을 받아 그의 집의 가정 교사로 있을 때에 근처의 농민의 아들 네 명을 모아서 함께 가르쳐 보았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생각하던 바가 확실히 좋은 교육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49년에 덴마아크의 헌법은 정치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였고,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도 과거에 콜을 괴롭히던 모든 제약이 제거되었다.

콜은 마침내 학교 설립의 결심을 하고 오랫동안 저축한 전 재산을 던져서 학교 건축에 필요한 토지를 샀다. 그러나 콜이 가진 자금으로는 너무도 부족하였다. 그는 마침내 그룬트 비히를 방문하고 자기의 계획을 밝히고 지도를 받기로 하였 다. 그룬트비히는 즉석에서 그 훌륭한 특지(特志)를 칭찬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스스로 기부방명록(寄附芳名錄)을 만들어서 그 초두(初頭)에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고 국민교육을 위한 새 학교의 창설을 바라는 친구들에게 콜을 소개하였다.

정성어린 찬조금이 상당히 모였으므로 콜은 1851년에 낡은 농가 한채를 사서 퓨넨주 리슬링계에 자유학교를 개교하였다. 콜이 처음으로 학교를 개교할 때에 있었던 이야기는 여원히 인류의 가슴에 큰 감명을 남길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콜이 천신만고하여 온갖 개교 준비를 마치고 나서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학생모집 광고를 붙여 놓고 초조하게 입학지원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집이 학교이며 기숙사인데 최대한 20명을 수용할 수가 있어서 20명 정원의 학생모집 광고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기다려 보아도 지원자는 없었다. 개교 예정일 전날에야 겨우 한 명이 입학을 지원했던 것이다.

콜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밖에 나가 밤을 새워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하나님 제가 희망하는 학생모집 인원이 너무 많다면 세 사람만으로 만족하겠으니 두 사람만 더 보내 주십시오. 덴마아크의 이 고난의 역사를 타개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 가르쳐 보겠읍니다.」

그가 이렇게 호소를 하면서 밤을 새웠다. 개학날의 아침을 맞이했을 때에 뜻밖에도 열 다섯 명의 학생들이 마차에 짐을 심고 자기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콜은 어린 아이처럼 뛰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콜의 국민고등학교의 개교날이야말로 덴마아크 역사에 새로운 기원을 긋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외형적으로 빈약한 콜의 교육사업이 오늘에 이렇게 이렇게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을 안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 16세 이 상 33세까지의 학생 15명을 모집하여 수업을 시작하였다. 가르쳐 가는 중에 그는 그룬트비히의 충고가 옳음을 발견하고 18세 미만의 학생을 제외하였다. 국민적 정신교육을 하기에는 청년기에 달한 사람이 아니면 효과가 적은 까닭이다.

당시에 치충(置重)한 학과는 국사, 북유럽사, 성경사(聖經史), 북구 신화(北歌神話) 등의 역사와 덴마아크어, 스칸디나비아 문학, 음악(특히 국민가와 영웅 찬미의 노래) 등이었다. 그는 그룬트비히의 이상에 전적으로 찬동하여서 그의 뜻을 받아 건전한 국민정신 배양과 인격교육에 힘쓰고 또 배운 바가 그대로 생활에 살아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 교수법은 가장 평이(쭈易)한 방법 으로 학생들이 교육의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하였다.

이 자유 학교는 후일에 덴마아크 갱생의 큰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이다. 자유 학교의 실적은 날로 뚜렷하여 마침내 퓨넨주의 여러 학교들이 교수법을 혁신하기에 이르게 끔 되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콜을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이 콜의 교육 방법을 음(陰)으로 양(陽)으로 비방하여 일시는 자유 학교를 존폐의 위기에까지 몰아넣었다. 오직 자유 학교의 학생들만이 모교의 은사 콜을 극진히 사랑하고 두둔하였다.

자유 학교는 결국 사회적으로 문제화 되어 문교부의 장학관이 직접 출장하여 신중히 학교의 내용과 운영을 조사하였다. 또 장학관은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문답을 시험해 보았다. 모든 학생들은 장학관이 놀랠만큼 우수하였다. 콜에 대한 중상과 혐의가 이것으로 일소(一掃)되 었을 뿐더러 자유 학교가 위대한 사업을 덴마아크에서 하고 있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이 장학관의 보고로 인하여 문교 위원회는 자유 학교에 국고금을 보조하도록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리슬링게 시대의、콜의 생활은 극도의 빈곤(貧困)과 싸웠다. 부식물이 거의 없는 빵만으로 생활하였고 별로 차를 마셔보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육 생활에서 그는 큰 만족을 느꼈고 더없이 즐거웠다.

콜의 자유 학교는 리슬링게에서 딸비로 이전되었고 여기서 9년만에 다시 다람으로 옮겨 갔다. 다람의 학교는 교사도 훌륭하고 또 상당한 면적의 농장이 부설(附設)되어 있었다. 다람 국민고등 학교는 참으로 공적이 혁혁 하고 또 많은 인물을 배양하였다. 1천 3백여 명의 학생들이 콜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공부하였던 것이다. 교문을 나가는 청년들은 모두 가슴에 포부를 가지고 보람 있게 살아 보려는 개조된 인물이다. 그들은 벌써 이기적 생활을 청산한 사람들이다. 으젓이 살아 개인보다 더 큰 것을 위하여 작은 나(小我)를 바친 애국 청년들이다.

콜의 교육 생활은 그대 로 발분망식(發憤忘食)의 지성스러운 생활이었다. 콜은 다람에서 8년 동안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교를 경영하였다. 콜은 지식을 뇌신경에서 뇌신경으로 전달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생활과 인격을 통하여 영 (靈)에서 영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뜨거운 이상을 불붙여 주고 일깨워 주는 스승이었다.

흐르만씨는 콜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콜은 위대한 그리이스의 대철인(大哲人),곧 세계 진리를 가져 오게 한 진리의 산파(産婆) 소크라테스의 교수법을 상기 하게 한다. 콜은 그 시절의 덴마아크의 소크라테스이었다. 그의 교수법도 생활도 다 소크라테스를 방불(彷佛) 하게 한다』

콜은 모든 학생들의 가슴 속에 숨어있는 고귀한 것을 깨워 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순결하고 고상한 인생의 생활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학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 능력이야 말로 콜의 인격에서 솟아나오 는 힘이었다. 그는 교사임에 그치지 않고 실로 학생들의 다시없는 좋은 친구였다. 콜은 교육 생활의 대부분을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자고, 함께 담화하고, 노래 부르고, 함께 일하고 살았다. 오늘의 국민고등학교가 특히 가정적인 특색을 띠우게 된 전통적 특색은 콜에게서 시작한 것이다. 여름에 젊은 여자들을 교육하게 된 것도 콜이 시작 한 것이다.

콜은 그룬트비히의 교육 이상을 그대로 실천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한 권의 저서도 후세에 남기지 않았으나 그 교육의 성과는 시냇가에 자라는 무성한 나무처럼 자라나고 있다. 콜은 겨우 2년제의 초등 교원 양성소를 수료한 사람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학벌을 코에 걸고 부당한 지위와 권세를 잡아서 일세 (一世)를 횡행해 보려는 무리들은 콜의 숭고한 인격 앞에 참괴(慙愧)함이 있어야 할것이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독(毒)하고 자기를 해하여 마침내는 불 나비의 최후를 면치 못하게 된다. 우리가 세계사를 읽을 때에 실로 대다수의 위대한 인물들의 이력이 호화로운 학벌을 배경으로 함이 없음은 참으로 흥미있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국민고등학교 중에는 콜에 비해서 심원(深遠)하고 진보 된 학문적 수양을 쌓은 인물들에 의해서 창설된 학교들이 많지마는 콜처럼 그렇게 큰 감화를 준이는 없었다. 콜은 1870년 다람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콜이 남기고 간 말을 더듬어서 그의 위대한 교육의 근저를 살펴 볼 필요를 느낀다. 콜이 재학 시절에 인생 문제로 몹시 번민하고 있을 때,우연히 한 농부의 소박한 신앙의 체험담을 듣고 그는 비로소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신앙이 그 전 생애를 한결같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서 그의 공적을 인류 교육사에 빛나게 한 것이다.

콜이 다람에서 교육 사업 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의 교육 방침을 물어보면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I8세 때에 신(神)과 이웃을 사랑하는 도리를 배워서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참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나와 같은 마음의 행복감을 가질 수 있는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있는 힘과 시간을 바칠 결심을 하였다. 이 국민 고등 학교의 목적도 결국 신을 공경하고 나를 사랑하고 또 사람들을 형제처럼 사랑하는 길로 청년들을 인도할 따름이다]

콜의 이 말로 미루어 보면 청년 콜을 감격하게 한 예수의 정신이 그의 일생을 지배하였으며, 한결같이 교육 사업에 진력하게된 까닭도 알 수 있다. 경신 애린(敬神愛隣)의 정신이 없는 곳에 참 평화와 참 행복의 광명이 없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우리는 어느 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동정하기보다는 학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분노가 강렬한 사람이 다, 그의 사회 학설은이 분노 위에 세워진 것이다. 또 격하기 쉬운 성격의 주인들이 그 밑에 모여든 것이다. 이 분노의 사상과 행동에 는 자연히 위협, 감시, 살륙(殺鐵), 밀정(密懷), 함정 등등 의 검은 그림자가 어디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따라 다닌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들로 쌓아올린 사회는 아무리 강한 힘을 자랑할 수 있더라도 또 공명 평등을 자랑할 수 있더라도 참평민적 평화와는 인연이 먼 것이다.]

참 평화는 전당같은 큰 집보다도 오히려 3간에 잘 깃드린다. 항상 분노로 가득찬 가슴 속에 따스한 태양이 비치는 평화의 동산이 있을리 없다.평화와 행복이 분노에서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는 형제애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콜의 증언으로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가 있다.

콜이 자유학교의 교장으로 있었을 때에 그가 한 다음 말을 살펴보면 그 교육의 이념을 우리는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나의 자유 학교는 어느 학교보다도 가장 훌륭한 학교라고 나는 믿는다. 레딩에 세워진 학교는 독일에 대항하여 가장 강렬한 민족심을 기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학교는 독일과의 마찰이 가장 신한 국경지대 쉴레스비히에 설립된 것으로 그룬트비히도 덴마아크의 정신의 보루(保壘)라고 가지 칭찬한 학교이다. 이 학교는 아스코브 국민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달성한 날에는 그 학교으 사명은 다 한 것이다.힌흐름에 세워진 학교는 농민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 것도 그 목적을 이룬 날에는 벌써 그 학교의 존재의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이 학교는 후에 사실로 폐교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 자유학교는 주검에 대한 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존속하는 날 까지는 이 학교도 필연적으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콜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무엇이 보람 있는 인생인가에 대하여 가르쳤다. 어느날 한 학생이

[생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귀중한 말씀을 다 기억할 수가 없어서 큰 걱정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콜은 그 학생에게 곧 이렇게 대답하였다 『염려 말게,보통 지식이라면 모르거니와 내 말은 그것과는 다른 것일세. 땅속에 토관(土管)을 묻었다면 그위에 표지가 있어야 곧 찾아 낼 수 있겠지마는 씨를 심는 곳에는 표지가 없는 것일세. 씨를 심은 자리에서는 반드시 싹이 나오게 마련이니까, 깊이 느낀 것은 필요한 때에 틀림없이 다시 살아 나오는 것일세.]

얼마나 확고한 신념인가, 참으로 인생의 교사라고 할 것이다.

콜의 교육 방침은 결코 목전의 것을 위한 것이 아니며, 조국 번영의 영원한 동력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콜의 말 그 대로 국민 고등 학교의 생명은 역사와 함께 길 뿐만 아니라 오늘에는 국경을 넘어서 여러 나라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콜의 견실한 신앙과 뛰어난 지능과 지성스러운 봉사의 협동 정신이 덴마아크의 교육사에는 물론 인류 문화사에 불멸의 공 적을 남겼다.

국민 고등 학교와 콜을 찬양한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인적인 자기를 뛰어 넘어서 더 큰 것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진정한 애국심, 조국을 영원의 동력에 연결시키는 교육은 인류로서 참으로 자랑할 만한 것으로 덴마아크롤 부흥시키 공적의 반분(半分)은 콜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식의 소매상을 교육으로 오인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