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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최현민 > 종교 대화 1-- 종교간_대화라는_표현의_위험성 여러 종교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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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_대화라는_표현의_위험성


WRITER: 관리자 (118.♡.103.201) DATE : 10-10-25 14:43 READ : 667

1. '종교 간의 대화' 라는 표현의 위험성


'종교 간의 대화'라는 말 자체는 하나의 추상적 표현이다. 그것은 종교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라고 할 때, 불교나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대화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의 종교에 대해 얘기 할 때 그것은 추상적으로만 가능하다. 하나의 동일한 그리스도교 신앙, 불교신앙, 힌두교 신앙, 유대교 신앙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고 나의 친구 그리스도인의 신앙, 나의 이웃인 유대인의 신앙이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 독립된 개인 인격체들이다. 우리들은 각자 한 개인 인격체이지 어떤 규격화 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다.

신앙은 개인 인격체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각자 직접적이며 개인적으로 진리를 만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축적된 전통은 나나 같은 종교를 지닌 사람이나 비교적 비슷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같은 의례에 참여하고 같은 설교나 설법을 들으면서 자라났고 우리가 돌아볼 수 있는 종교의 역사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신앙은 내 친구의 신앙과 다르다. 아니, 같은 사람도 어느 날 아침의 신앙과 그 전날의 신앙과도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이 한 개인에게도 신앙의 변화가 있음을 고려할 때 우리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이겠는가? 어떤 크리스찬도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는 그리스도교에 제한된 얘기가 아니라, 어느 종교이건 한 특정인이 대표할 수 있는 종교는 없다. 이를 감안할 때 종교 간의 대화라는 표현이 얼마나 추상적이며 위험성을 지닌 표현인지를 알 수 있다. 난쟌종교문화연구소는 “그리스도교는 불교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책을 편집 출간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표현은 “어느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도로서의 나는 어느 한 불자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종교간의 대화는 이를 무시한 체, 마치 자신의 사상이 그리스도 전체를 대표하는 양, 대화를 시도해 왔다. 설사 그가 아무리 자신이 지닌 사상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전통을 대표한다고 해도 그것은 틀에 갇힌 범주 내에서의 대표성이지 결코 그가 속한 종교 전통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2.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종교간의 대화

올해 25주년을 맞이한 난잔종교문화 연구소는 종교간의 대화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를 중심으로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이를 책으로 출간하면서 일본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종교간의 대화의 주축이 되어왔다. 내가 일본에 간 이유도 이 연구소에서의 종교 간의 대화를 배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에서의 양종교(불교와 그리스도교간)의 대화는 교또학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또학파는 니시따 기따로를 중심으로, 니시타니 게이치, 히사마쯔 신이찌, 아베 마사오 등을 들 수 있다. 교또학파는 불교의 기본개념을 갖고 신학의 여러 단편들과의 만남 즉 불교적 신학을 시도해왔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주로 다루어졌다.

1. 하느님과 공(절대무)

2. 즉의 논리(즉비의 논리)


- 相卽神學- 즉의 논리(本多正昭)
-교또학파- 공과 하느님(니시다 기따로, 니시타니 게이치)
-성령과 장소-성령신학(小野寺功)
-직접경험-야기세이찌(八木誠一)

이는 그들의 종교간 대화가 주로 교또학파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 역시 석사논문으로 히사마쯔 신이찌의 선사상를 썼고 이어 박사논문으로 그의 제자인 아베마사오를 중심으로 해서 논문을 준비해 보려 한 것도 기존에 행해져온 종교간 대화의 조류를 타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난잔연구소에 있으면서 아베마사오의 저작이 그리 많지 않음을 발견하고 니시타니 게이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서 약1년간 그의 저작집 26권을 중심으로 연구했다. 니시타니는 공사상을 중심으로 불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까지 설명해보려 했다.

즉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공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가 그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그가 의도한 바에 가장 근접할 가능성을 지닌 사상이다. 그래서 니시타니는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특히 마이스터 엑카르트 사상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했다. 니시타니는 여느 선불교학자와 달리 그리스도교를 상당히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교 이해 역시 ‘공의 입장’이라는 자신의 기본적 틀 속에서의 이해였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교 연구시 신비주의를 그 비교대상으로 삼은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과연 신비주의가 그리스도교 중심일수 있는가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교또학파의 종교간 대화가 지닌 한계는 바로 그들의 연구방법론이다. 그들은 종교철학적으로 각 종교를 이해하고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이 과연 실제 종교인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들이 하는 소위 종교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몇몇 학자들 이외에 과연 평범한 종교인들이 그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까? 이들의 종교간 대화의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까?

3. 도겐선사와의 만남

종교간 대화와 관련된 이러한 일련의 사유를 하던 중 나는 도겐선사를 만났다. 물론 그건 그분이 남긴 텍스트를 통한 만남이었지만 이는 단순히 언어의 세계, 학문의 세계에서의 만남이 아니었다. 나는 선사의 삶의 태도, 그의 지향과 신앙, 그의 깨침의 세계를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짐을 느꼈다. 그분과의 만남은 바로 나의 신앙, 나의 삶의 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 붓다를 철저히 모방하려는 그의 수행관
-佛道 때문에 佛道를 수행하는 只管打坐
2. 唯佛如佛; ‘佛로서 佛과 함께’라는 佛道를 사는 그의 역동적 신앙
3. 일상의 聖化영성-洗面, 洗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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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종교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들

2010-12-20


여러 종교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들

-R.Otto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중심으로




Ⅰ. 서 론


Ⅱ. 본 론

1. 거룩의 속성과 그 체험

2. 두려운 신비

3. 황홀한 신비

4. 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5. 타종교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Ⅲ. 결 론









Ⅰ. 서 론


모든 종교의 핵심은 사상이나 이념,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고, 종교의 내면적 체험이다. 이러한 종교체험의 본질에 대한 해명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통해서 본 ‘거룩’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다. 오토의 누미뇌제는 원시 종교로부터 고등종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지는 신 앞에서의 내면적 체험으로의 인간이 갖는 필연적이고 소박한 감정적 요소에 대한 현상학적 언어이다.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오토는 인간의 종교역사 전체를 통해 여러 다른 문화와 종교권에서 이루어진 누멘적인 체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오토의 여러 종교체험의 다양성 안에서 드러난 이 누미뇌제의 현상학적인 면과 기독교와 타종교의 누멘적인 현상들을 비교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거룩의 속성과 그 체험

오토의 의하면 종교는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오토에게 ‘합리적’혹은 ‘비합리적’이란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 대상이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사유가능하게 될 때 그것을 합리적이라 부를 수 있고, 반대로 그 대상이 우리의 개념적 사유론은 잡히지 않는 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부른다.” 오토가 강조한 것은 그것의 비합리적 요소이며, 이 요소를 종교의 핵을 이루는 요소로 보았다. 오토는 이 거룩의 비합리적 요소를 신성을 의미하는 라틴어 누멘으로부터 ‘누멘적인 것’이라는 말을 만들어 표현하고자 한다.

오토의 공헌은 모든 종교의 중심 내용을 이 ‘누멘적인 것’의 눈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 종교학의 틀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오토에 의하면 이 누멘적 체험은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으로 나뉜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누멘적인 대상을 대면함으로 자신을 무로 객관적 측면에서 그것은 두려운 신비와 매혹적인 신비로 나타난다. 이러한 누멘의 현상학적 체험을 노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종교언어의 한계성과 그 상징성이다. 따라서 족교언어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종교체험의 기술보다는 그것의 체험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겸손한 고백으로 그의 종교체험의 현상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

전적인 타자인 누멘은 양극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한없는 공포와 경외를 그 자신 안세서 경험하도록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황홀의 대상으로서 개인을 황홀하게 하고 그를 사로잡는다. 오토에 의하면 ‘두려움’에는 네 요소가 있다. 두려움(Awefulness), 압도성(Over poweringness), 활력성(Energy), 그리고 전적타자(Wholly other)의 요소가 그것이다.

(1) 두려움(전율)

오토는 모든 실존의 신비의 문제는 신앙과 정성어린 신뢰보다 더 원초적인 열정에 있다고 하며 이 열정 안에는 경이적이고 신비적인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의 생각이 있다고 한다. 오토에 의하면 이 ‘귀신에 대한 공포’는 ‘원시인들의 종교’가 지닌 본질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공포는 독특한 신체적인 반응을 자아낸다. 그리하여 사지가 싸늘해지거나 찬물을 끼얹듯 소름이 끼치게 되거나, 등골이 오싹하게 된다. 이 두려운 공포를 표현해 주는 다른 말로 ‘진노’ ‘하느님의 진노’라는 말이 있다. 오토에 의한 구약성서의 야웨의 진노는 유리적인 성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진노라고 말한다. 이 진노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없고 다만 느낄 수밖에 없는 공포에 찬 누멘적인 진노인 것이다.

(2) 압도성

이 요소는 절대적인 위엄 가운데 압도해 오는 신의 면전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자기 겸비의 반응이다. 오토의 표현대로 하면 객체적으로 의식된 압도적인 것에 대한 대조로서 자신의 함몰성 내지 무화 그리고 먼지와 잿더미 같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분명히 느끼는 감정으로 오토는 이것을 ‘종교적 겸손의 누멘적 원리’라고 한다.

(3) 활력성

이 요소는 특히 신의 진노 가운데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로 이 요소가 경험되는 순간 인간의 마음은 열성으로 치달으며 엄청난 긴장과 역동성으로 채워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종교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의 실재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런 갈망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이 활력적인 누멘체험은 일어날 것이다.

(4) 전혀 다른 것

오토의 이 ‘전혀 다른 것’은 느낄 수는 있으나, 개념적으로는 분명히 표현하기 어려운 초세상적이며 초자연적인 세계를 대상으로 한 종교의 본질이기도 하다. 오토의 이 요소는 신관념에서 비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신비신학’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보고, 신비주의 신학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다.


3. 황홀한 신비 (Mysterium fascinosum)

누멘적인 것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요소로 체험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혹하는 어떤 것으로서 두려움의 요소와 묘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Fascinosum을 이루는 요소로서 오토가 말하는 것은 매혹성, 어마어마함, 그리고 장엄함이다.

(1) 매혹성 (fascination)

지극한 비천함 속에서 용기를 잃고 그 앞에 떨고 있는 피조물은 동시에 언제나 그 앞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을 느낀다. 이것이 오토가 말하는 누멘의 매혹적 요소이다.

(2) 어마어마함

누멘의 황홀한 신비 안에는 ‘어마어마’한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이는 누멘적 대상이 인간에게 너무 크고 엄청나서 경악을 자아내는 캥기는 것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아연실색’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것이다.

(3) 장엄성

매혹성이 황홀한 신비의 주관적 측면이라면, 장엄함은 그것의 객관적인 측면이다. 이 장엄성의 체험에서 인간이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성과 현존자체의 확실한 평가절하이다. 이 누멘체험은 초월자의 장엄함과 자기 속됨의 감정이요, 죄인 됨의 발견이다. 이 통렬한 자기 비하 속에서 속죄의 필요성은 인식되고, 거기에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다. 오토가 전 종교사의 과정을 결정하고 그의 신앙 고백적 종교학을 튼튼히 세울 수 있었단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종교체험 요소의 발견 때문이었다.

4. 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비합리적이고 누멘적인 것에 대한 감정은 비록 모든 종교에 일반적으로 살아있지만, 그것은 셈족의 종교 특히 성서적 종교에 더욱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기이성의 요소와 장엄성의 요소가 결합된 누멘적 체험의 순수하고 희귀한 예를 욥기 38장에서 만나게 된다.

이 장은 아마도 모든 종교사에 있어서 가장 주의할 만한 것에 속할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하느님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서 실패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 자신이 자기의 변호를 위해서 나타나신다. 이 변호는 욥으로 하여금 자기가 패배했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하며 이 패배는 실로 정당하게 수행될 진정한 패배이지 단순한 위압으로 그의 입을 다물도록 강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느님의 정당화와 욥의 화해를 동시에 가져다 준 이 이상한 요소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합리적 관념들로는 측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 기초하고 있다. 곧 모든 개념을 초월하는 목적의 개념까지도 초월하는 절대적인 놀라움 그 자체이며, 순수히 비합리적 형태로서의 그리고 기이성과 역설로서의 신비인 것이다. 욥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경탄과 경배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매혹하는 어떤 것이나 이 가치는 결코 인간의 지성적인 목적이나 의미를 추구하는 사상과는 비교 될 수도 없고, 동화될 수도 없는 가치이다. 이 가치는 신비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의 체험과 더불어 하느님은 동시에 정당화되고, 욥의 영혼은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누멘적인 것 중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오토는 예수를 그로부터 받은 인상과 체험을 통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누멘적 존재로 인정된 메시아로 보았다. 곧 예수는 교리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내면적인 여’ 즉 직감에 의하여 체험되어야 할 누멘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영을 충만히 소요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인격과 업적 속에서 성스러움의 현현을 느낄 수 있는 직감의 대상이 되는 점에서 예언자 이상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는 단순한 종교학자, 종교 현상학자가 아님을 말해준다.

5. 타 종교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오토는 성서에 있어서 발견된 누멘적인 요소들이 타 종교 안에서도 발견됨을 여러나라의 여행과 여러 종교의 연구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오토는 1895년 이집트, 팔레스티나, 그리스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슬람과 만나게 되는데 이는 타 종교에 대한 그의 이해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의 이야기들도 성서에서처럼 피조물의 활동이 제아무리 강하고 자유롭다 할지라도 영원한 선태과 활동이 그것을 절대로 능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느님의 전능과 인간의 선택적 헛됨을 체험한 누멘에 대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토는 알라에 대한 복종을 통한 이슬람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라에 대한 복종은 단지 의지의 헌신만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바라고 추구하는 알라에 의한 충만함이며, 그러기에 일종의 취한 상태와 같이 사람을 사로잡거나 황홀하게 할 수 있으며 그 상태가 깊어지면 곧바로 신비적인 행복의 도취도 될 수 있는 ‘구원’이다.”

오토는 일본의 선불교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불교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공(空)은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무(nihil)처럼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누멘적 지시어이다. ‘공’이란 ‘기이한 것 그 자체’로서 ‘무’가 지닌 의미- 즉 단지 어떤 것으로는 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혹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이질적임-와 상통한다. 또 홀리고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누멘의 요소도 ‘불타의 열반체험’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차갑고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감정상으로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적극적인 실재이며, 그것을 신봉 하는 자를 열광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매혹적인 것이다.

타 종교 중에서 오토에게 가장 큰 매력을 준 것은 힌두교였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브라흐마 경성소’를 번역하였으며 ‘카타 우파니샤드’도 독일어로 번역 출판하였다. 그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체계와 대표적인 학자들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인도인의 신앙까지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Ⅲ. 결 론

오토는 성서 안에서의 누멘적인 것들과 타 종교 안에서의 누멘적인 것들의 발견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종교 체험의 핵심을 정리했다.

(1) 모든 종교의 종교 체험은 다양하지만 그 다양성에는 보편적인 통일성이 있다. 오토는 종교 체험의 다양성이 종교가 가진 본질의 이질성을 의미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종교들 속에서 본래적으로 가장 내적인 핵심, 곧 누멘적 본질이 있으며, 만일 이것이 없다면 어떤 종교도 감히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2) 모든 종교의 종교 체험 자체는 본질적으로 차이는 없으나 그것의 윤리화 여부가 질적 차이를 결정한다. 그리스도교와 힌두교의 차이는 오토에 의하면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그리스도교와 힌두교가 갖는 비합리적 본질이나 누멘적 종교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윤리적인 발전의 정도에 있어서의 차이인 것이다.

결국 오토가 하려고 한 것은 도덕적 인간과 구별되는 종교적 인간의 독특한 면을 직시하도록 하였다는 것, 모든 인간 안에 누멘적 인식, 곧 종교적 깨달음의 능력이 선험적으로 있어서 전적타자인 신비 앞에 자신을 무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확실히 오토는 종교의 외면적 형식과 구별되는 종교의 내면적 체험에서 종교의 핵심을 보앗으며, 모든 인간에 누멘적 깨달음의 능력이 선험적으로 있는 것을 직시하였다. 오토를 통해 듣는 것은 메말라가는 소리, 오늘의 종교인들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내면 소리, 누멘적 거룩 체험으로부터 들려오는 그 영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참고문헌

1. Otto, R., '성스러움의 의미‘ 길희성 역, 왜관:분도출판사, 1987

2. 이윤재., Otto, R의 Nemonose 연구, 한신대 신학대학원 1989

3. 김승혜 외 종교학의 이해, 왜관:분도출판사, 1986

4. 에릭샤프, 종교학, 윤원철 역, 서울: 한울, 1986

5. 한국 종교학회, 종교 연구, 제 3집 1987

최현민 연구실 > 그리스도교 연구 1 - 영성생활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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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의 함정
2015-06-21
최현민

영성생활은 거창한데 있지 않다. 신학적 철학적으로 아리송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건 영성생활과는 그리 관계있어 보이지 않는다. 초월이니 내재니 하는 말들은 실제로 영성생활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의미있게 다가오는가?  현실에 발딛지 않은 말들은 그저 空華 곧 ‘허공의 꽃’일 뿐이다.

  영성생활을 살려는 이들의 일상 속에는 많은 함정들이 숨겨져 있다. 오늘 아침 일이다. 

주방장 수녀님께서는 어머님께서 병환이셔서 토요일 저녁식사 당번을 내게 부탁하셨다. 아니 일요일 식사당번인 내가 하루 댕겨 당번을 하는 것뿐이다. 오늘 큰 문제가 없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문제는 공교롭게도 오늘 토요일이 내 기도당번날인 것이다. 그래서 깍둑이-기도당번이 없을 때 대신 해주는 역할로 공동체에서 결정된- 수녀님께 기도주도를 부탁 드렸다. 사실 그 수녀님도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 안 되어 기도를 주도하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 짐작대로 수녀님은 어려워 하셨고 그래서 다른 수녀님께 부탁했다. 그러나 그 수녀님도 이유를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부탁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얼마 전에 어느 수녀님이 찾아와 속상해 하며 했던 말도 오늘 내가  느낀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기 것만을 챙기려 한다면 같이 사는 게 팍팍해지고 그래서 힘도 빠지게 된다. 일상 안에서 부닥치는 상황들에 우린 늘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는 이유를 갖고 있다. 사실 우리는 쉽게 자기 합리화를 해가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자기합리화가 자신의 영성생활을 좀먹고 결국 구멍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일상 안에서 내게 다가오는 작은 도전들 앞에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사실 그것은 자기포기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포기는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부닥치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온다.

 가면 갈수록 우린 점점 더 시간에 인색해져간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시간을 내주기가 점점 어려워져간다. 그러나 그러한 인색함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힘 빠지게 만들고 결국 자신의 영성생활에도 구멍을 숭숭 만들고 만다.
토마스 머튼이 말했던가. “우리는 포기하는 것만을 얻는다”고. 이기심은 자신 안에 분열을 가져오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분열을 조장한다. 그 분열은 자기포기를 통한 사랑에 의해서만 다시 봉합가능하다. 

어제 모처럼의 기회가 주어져 대학로 내여페 극장에서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를 보았다.  평범했던 조선 여인 정난주는 천주쟁이 황사영의 아내라는 이유로 사대부부인에서 노비로 전락해서 5대독자 젖먹이 아들과도 떨어져 제주도에서 참혹한 일생을 살았다. 천주 위해 목숨을 바친 남편, 몰락한 집안, 죄인으로 제주도 땅을 밟은 자신, 어디 사는지 조차 알길 없는아들을 그리워하며 가혹한 현실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가야만 했던 정난주. 그녀는 결코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 안고 일생을 견디어낸 이 시대의 또 다른 형태의 순교자가 아닐까.

뮤지컬 중 그 여인이 품어내는 깊은 신음소리는 그 공간에 함께 있던 나에게도 그대로 그 절절한 쓰라림이 전해졌다. 제주도 바람만큼이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낸, 한 평범한 여인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순교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순교는 어떤 식으로 다가오나, 신앙 때문에 남편이나 아이를 잃을 위험이 우리에겐 주어지지는 않지만 대신 우리에겐 일상 안에서 자기를 포기해야 할 순간들과 직면하며 살아간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이 도전 앞에 과감히(?) 자기포기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린 영성생활 그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2015.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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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모상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5강 ‘하느님의 모상과 불성‘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최  현  민


1) 그리스도교 전통신학에서의 하느님의 모상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성인 ‘자성은 청정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절대 긍정적 인간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전통 그리스도교 교의신학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래성을 단순히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볼 때, 하느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신학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된 존재”로 이해해 왔는데, 이는 P문서에 나오는 창조 기사인 창세기 1장 26-27절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두 가지 개념을 도출했습니다. 

하나는 “형상(imago)”이고, 다른 하나는 모양(similitudo)이라는 겁니다.
이 두 개념의 대한 논쟁은 초대교회의 교부 시대부터 있어 왔습니다. 클레멘스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는 하느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 반면, 이레네우스Irenaeus와 테르툴리안Tertullian은 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와도 결합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형상과 모양’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의 ‘모양’은 상실되었으나 하느님의 ‘형상’은 상실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세 스콜라 신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이성, 의지의 자유로 보았고 ‘모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본래적인 의’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후에 에밀 브룬너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형식적 하느님의 형상(formale imago Dei)과 실질적 하느님의 형상(materiale image Dei)을 구분했습니다. 형식적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의 언어 능력과 책임성, 자유, 양심, 이성으로 남아 있는데 반해, 실질적 하느님의 형상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종교 개혁자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첫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적인 의’의 근거로 보지 않고 실제적인 하느님과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 현실적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서도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현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루터(M. Luther)는 원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모양뿐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까지도 완전히 상실했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까지 완전히 상실했다는 겁니다. 그는 형상과 모양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성서 어디에도 없으며, 인간은 타락한 후에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칼빈(J. Calvin)은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느님의 형상의 파편이 남아 있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칼빈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는 이론을 수용했던 겁니다.

19세기 변증법적 신학자인 칼 바르트K. Barth는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아 하느님의 모상성이 인간의 고유한 성품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모든 견해를 반박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했기에 하느님께서 지으신 하느님의 형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은 인간 편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sola gratia)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하느님의 모상성은 인간이 소유했다가 상실할 수 있는 것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고 보는 견해(M. Luther-K. Barth)이고, 
다른 하나는 모양과 형상으로 구분하여 모양은 상실했으나 (완전하지는 않지만) 형상은 남아 있다고 보는 흐름입니다(초대교부, J. Calvin, E. Brunner 등). 

이렇게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달랐지만, 하느님께서 창조한 최초에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성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뭔가 상실되었다는 건 상실 이전에 있었던 상태를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죄로 인해 그 상태를 잃어버렸다는 건 그 시초가 완전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은 최초에 한 번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원죄로 인한 타락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전통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태초에 완전한 상태가 죄로 인해 상실되었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잃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교파 간에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교부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형상에 대한 견해는 현대신학에 와서 어떻게 자리매김해 왔는지 판넨베르크의 사상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2)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견해

전통신학에서는 신을 전제하여 인간을 이해해 왔기에, 다른 학문(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는 차별화되어 왔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에 문제의식을 느껴 타 학문의 인간 이해를 수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시도했습니다. 현대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려 듦으로써 세계를 넘어선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종래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우주 질서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막스 쉘러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대상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벗어나기도 하고 그 세계로부터 자신을 돌본다는 점에서 인간의 특성을 ‘세계 개방성’으로 보았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막스 쉘러의 영향을 받아 ‘신개방성’을 인간의 본성적 특징으로 언급했습니다. 즉 인간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실현코자 하는 세계 개방성을 지녔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신을 향한 개방성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판넨베르크에게 신개방성은 ‘하느님의 모상’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모상을 신개방성으로 이해하게 된 데에는 쉘러와 함께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헤르더는 전통신학자들이 가르쳐 왔듯이 ‘원래 인간은 완전한 하느님의 형상 속에서 창조되었으나 타락에 의해 완전성을 상실했다’는 주장을 부정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은 원래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인간성을 지녔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간은 점점 하느님을 닮아간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 실현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헤르더의 이러한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하느님의 형상을 완성되어 가야 할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이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특성을 쉘러의 ‘세계 개방성’과 헤르더의 하느님의 형상을 향한 목표를 지닌 존재로 본 것입니다.
한편 그는 인간은 신개방성이라는 자기 본성에 모순되게, 자기중심에 갇혀 살아가는 경향을 띤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와 같이 세계와 신을 향해 자기를 폐쇄하는 것을 판넨베르크는 ‘죄’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판넨베르크는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인 신개방성과 함께 자기 폐쇄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러한 양면의 긴장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전통 신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쉘러가 말한 세계 개방성과 헤르더의 하느님 형상을 결합시켜 ‘신개방성’으로 하느님의 형상을 해석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신학적인 인간 이해를 넘어 종교의 보편적 관점에서 인간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