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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2

알라딘: 불교 파시즘

알라딘: 불교 파시즘

불교 파시즘 - 선(禪)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지은이),박광순 (옮긴이)교양인2013-04-19원제 : Zen War Stories (2003년)







불교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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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452쪽152*223mm (A5신)670gISBN : 9788991799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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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평화의 종교가 어떻게 전쟁 이데올로기로 변신했을까? 깨달음의 교리가 어떻게 윤리와 양심을 마비시켰을까? 미국인 승려이자 불교학자인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책으로, 일본 파시즘과 불교가 맺은 은밀한 유착을 파헤친다.



이 책은 베일에 가려져 온 일본 군국주의와 불교의 공모를 밝히는 충격적 보고서다. 불교학자이자 오랫동안 수행한 선불교 승려인 저자는 불교의 가르침이 교묘하게 일그러져 '오남용'된 역사를 날카롭게 고발한다. 전쟁에 가담한 승려들, 불교를 신봉한 군인들의 무섭도록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지울 수 없는 과오의 증거로서 제시한다.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자행되어 온 종교와 정치의 위험한 결탁에 매서운 경종을 울린다.

목차

머리말 / 감사의 말



1부



1장 병사가 된 스님

제국 군대에 자원하다

선불교의 도덕적 맹목성



2장 군대로 간 선불교

‘총력전’과 무사

절에서 배우다

선(禪)이 군대에서 사랑받은 이유



3장 선(禪)과 암살

나가타 데쓰잔 소장 암살 사건

암살을 지지한 선의 논리



4장 천황을 숭배하는 선사

‘착한’ 지킬 박사 오모리 선사

‘나쁜’ 하이드 씨 오모리 소겐

극우파 소겐 선사의 정치적 삶



5장 서양에 선을 전파한 반유대주의 선사

전쟁의 선전 도구가 된 불교 경전

선과 반유대주의

전후 이념 투쟁의 선봉

‘이데올로기적 경찰’이 된 선



6장 중국으로 간 일본 선

만주국의 일본 불교 대표단

만주국에 세워진 일본 사찰

선과 ‘악의 평범성’



7장 살생과 무아(無我)

장군의 선 수행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깨달음

군인 정신과 집단 자살

내 목숨이 가벼우면 적의 목숨도 가볍다



2부



8장 남편이 죽은 것은 업(業) 때문이다

전사자를 추모하는 불교

살육을 정당화해 온 불교 교리

선과 파시즘의 결합



9장 어느 종군 승려의 고백

전쟁터의 《묘법연화경》

불교의 숙명론과 무책임

불살생과 살육전



10장 전범들의 피난처, 불교

승려로 변장한 장교

사형수 독방에서 찾은 아미타불

승려가 될 뻔한 히로히토 천황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전범들



11장 ‘황도 불교’라는 괴물

일본 정부가 두려워한 좌우익 불교

천황을 모시는 ‘황도 불교’

광신으로 간 일본 불교의 비극



맺음말 / 후기 / 주석 / 참고 문헌

옮긴이 후기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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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Brian Daizen Victoria)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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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앤티오크 대학 교수.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서 불교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에서 불교에 귀의하여 일본 최대의 선불교 종파 조동종의 인가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 종교인으로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하여 40여 년 동안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연구했다. 특히 자비와 평화의 종교로 여겨져 온 불교가 일본 군국주의에 동원된 이유와 배경을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연구 성과를 본격적으로 정리해 출간한 첫 번째 책 《전쟁과 선(Zen at War)》(1997)으로... 더보기

최근작 : <불교 파시즘>,<전쟁과 선> … 총 6종 (모두보기)

박광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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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충북 청주에서 출생했고, 청주 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범우사·기린원 등에서 편집국장 및 편집주간을 역임하고, 현재는 저술가 및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헤로도토스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갈리아 전기》, 《서구의 몰락》, 《새로운 세계사》, 《역사의 연구》, 《트로이의 부활》,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 《콜럼버스 항해록》, 《아틀란티스의 유산》, 《사막의 반란》,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인간의 마지막 진화, 호모 노에티쿠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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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분야 : 여성학/젠더 4위 (브랜드 지수 91,702점), 심리학/정신분석학 12위 (브랜드 지수 75,190점), 역사 18위 (브랜드 지수 89,60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자비심으로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더 나은 보살행은 없다.”

- 승려 난텐보



선에는 특별한 교리도 철학도, 일련의 개념도 지적인 법칙도 없다. ……

선은 아나키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무신론이나 관념론,

혹은 어떤 정치적·경제적 독단론과도 결합할 수 있다.

- 승려 스즈키 다이세쓰 데이타로



평화의 종교가 어떻게 전쟁 이데올로기로 변신했을까?

깨달음의 교리가 어떻게 윤리와 양심을 마비시켰을까?

일본 파시즘과 불교가 맺은 은밀한 유착을 파헤친다!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에 힘입어 병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생(生)과 사(死)가 다르지 않기에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죽음은 그가 쌓은 업(業)에 의해 예정된 일이었고, 전사한 병사는 내세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었다.

제국주의 야망이 점령한 전시의 일본에서 불교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정신적 무기’가 되었다. 이름 높은 선사들이 자진해서 군대의 나팔수로 나섰고, 극우파와 손잡고 천황 숭배를 부르짖었다. 종교의 교리와 역사가 거침없이 왜곡되고 살생을 금하는 계율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불교의 무아관(無我觀)과 생사불이론(生死不二論)이 뒤틀리고 타락하면, 군국주의 파시즘의 광기와 유착해 대량 학살과 집단 자살의 아수라로 빠져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전쟁을 지휘한 군 수뇌부도 불교를 적극 받아들여 ‘활용’했다. 병사들은 스님이 쓰는 공양 그릇을 본뜬 밥그릇으로 식사했다. 돌격을 앞둔 자살 특공대는 절에 가서 선을 수행하며 두려움을 잊었다. 패전 뒤 사형수가 된 전범들은 과거를 반성하는 대신 정토 왕생을 꿈꾸며 구원을 기대했다.

《불교 파시즘》은 베일에 가려져 온 일본 군국주의와 불교의 공모를 밝히는 충격적 보고서다. 불교학자이자 오랫동안 수행한 선불교 승려인 저자는 불교의 가르침이 교묘하게 일그러져 ‘오남용’된 역사를 날카롭게 고발한다. 전쟁에 가담한 승려들, 불교를 신봉한 군인들의 무섭도록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지울 수 없는 과오의 증거로서 제시한다.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자행되어 온 종교와 정치의 위험한 결탁에 매서운 경종을 울린다.



일본 불교계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인 승려의 충격적 고발



불교는 비폭력과 평화의 종교로 널리 인정받아 왔다. 왔다. ‘불살생(不殺生)’을 가장 중요한 계율로 가르치며, 기독교나 이슬람교와는 달리 종교를 내세워 전쟁을 일으킨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불교 파시즘》이 밝히는 20세기 일본 불교의 부끄러운 역사는 ‘평화의 종교’라는 불교의 자부심을 무색하게 만든다. 전쟁과 살인을 지지하고 나라를 위해 죽기를 권장한 어두운 과거를 일본 승려들은 오랫동안 외면해 왔다.

한국 조계종의 전신이자 베트남 반전 운동을 벌인 틱낫한 스님이 속한 임제종은, 중국 선종 5가 중 하나로서 일본 불교계에서도 손꼽히는 유력 선불교 종파다. 임제종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제국에 협력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 5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2001년. 이들이 뒤늦게 지난날의 과오를 돌아보게 된 계기를 제공한 이가 바로 그 자신도 승려인 《불교 파시즘》의 저자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다. 40여 년 동안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연구한 학자이기도 한 그는 불교와 일본 군국주의의 공모를 고발하고 분석하여 서구와 일본 불교계에 큰 충격과 논쟁을 불러왔다. 임제종의 최대 분파인 묘신사파는 2001년 10월 9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이 파란 눈의 승려에게 전쟁 책임 문제를 환기해준 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불교 파시즘》 407쪽 ‘후기’ 참조)



난징 대학살도, 가미카제 특공대도 불교가 뒷받침했다>



《불교 파시즘》에는 일본 불교계마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전시 불교의 타락을 보여주는 증거가 가득하다. 지금도 널리 존경받는 일본의 선사들 중에는 병사로서 전쟁에 참전하고 나서도 희생자들에 대한 죄의식을 평생 느끼지 않은 승려가 있는가 하면(36쪽), 자신이 운영하는 사찰을 군대를 위해 아낌없이 제공하고(182쪽), 천황 중심 사회를 만들기 위한 쿠데타에 가담해 몸소 칼을 쥐는 등(99쪽) 국가 폭력에 저항하기는커녕 적극 협조했던 승려들이 무수히 많다. 이러한 사례들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당시 일본 불교계 대부분을 지배한 경향이었음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승려들이 저지른 만행의 배경에는 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용된 불교의 교리가 있었다. 자비, 깨달음, 무아(無我), 업(業), 열반, 정토 왕생, 생사일여(生死一如)와 같은 불교의 핵심 교리들이 전쟁과 살인을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둔갑했다. 이를테면 난징 대학살을 필두로 하여 일본군이 각지에서 자행한 중국인 학살은 “그들에게서 ‘번뇌’를 없애주는 불교의 자비심의 표현”(42쪽)이라고 설명되었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자살 공격은 “개인적인 자아를 부정하고 스스로 역사의 짐을 떠맡은 영혼의 재탄생”이며 곧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것”(250쪽)이라고 칭송받았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숱한 일본제국 군대 장교와 병사들이 적군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전쟁터에서도 불경을 놓지 않은 신실한 불교도였으면서도(294쪽),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의 정당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교리에 기대 죽고 죽이다



비록 몸은 죽더라도 생사일여를 통해 국가의 영원한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추구해야 한다.

- 일본제국 군대의 교육을 위한 지침서 《정신 교육 자료》(1941) 중에서



“나는 죽을 준비를 갖추고 여기 서 있다!”(244쪽)고 외치며 돌격하는 일본 병사들에 직면하여 당시 그들의 적수였던 미군은 물론이고 많은 서구 학자들이 당황했다.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 기꺼이 죽기를 원하는 일본 병사들의 태도는 지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저자는 이 ‘사무라이 정신’의 배경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생사관이었다고 지적한다.



군인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살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지우는 데는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일여, 즉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사일여의 가르침은 선종 불교의 역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당나라 때 승려 원규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나는 본래 태어나지 않았으니 당신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내 몸은 허공과 같으며, 나는 나 자신이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당신이 어떻게 허공을 없애거나 당신 자신을 파괴할 수 있겠는가?”(247쪽) 일본 국사(國師)였던 14세기 승려 간잔 에겐은 생사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내겐 처음부터 생사가 없었어!”라고 소리를 질렀고(227쪽), 17세기의 유명한 고승 하쿠인 에카쿠는 깨달음의 순간 “죽음은 좋은 것이고, 삶은 훨씬 더 좋은 것이다.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훨씬 더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210쪽)



조국을 위해 명예롭게 죽기를 권한 불교

일본제국에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던 육군 장교 스기모토 고로는 생사일여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일본 군인 중 한 명이다. 그는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10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을 절에서 수행한 선불교의 재가 제자였다. 스기모토가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뒤 나온 그의 글 모음 《대의(大義)》는 전쟁 동안 일본에서 1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는데, 제국 군인과 고위 관료들은 물론 승려들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대의》에서 스기모토는 거듭 선불교의 생사관을 강조한다.



“선 수행을 통해 나는 자기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 깨달음을 달성하는 일을 돕기 때문에 선은 제국 군대의 참된 정신이 된다. …… 선 수행으로 삶과 죽음이 명확해지고, 그럼으로써 삶과 죽음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선 수행으로 나는 완전히 순수해질 수 있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군인이 되고 싶은 소망을 이룰 수 있다.” ― 7장 살생과 무아(無我)·226쪽에서



“선은 제국 군대의 참된 정신이 된다.”는 스기모토의 말은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에 의해 실현되었다. 도조 히데키가 1941년에 공표하여 일본제국 군대의 모든 병사에게 배포한 야전 규정집 《전진훈(戰陣訓)》은 “전시의 다른 어떤 문서보다도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일본 군인 정신을 잘 요약”(195쪽)해놓은 책이었다. 《전진훈》은 장병들의 필독서였을 뿐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영향을 끼쳤다. 《전진훈》을 일반 독자 대상으로 해설한 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우후죽순 출간되었고(230쪽), 승려들은 불교의 생사관을 가르치는 교재로서 《전진훈》을 ‘역수입’했다.(234쪽)

선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가져온 《전진훈》을 읽고 “일본 군인(적어도 잘 세뇌된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을 결심을 확고하게 했다. 일본 군인에게 유일한 문제는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죽을 것인가, 즉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239쪽)

《전진훈》의 제2장 제8절은 다음과 같았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195쪽) 이 조항으로 인해 일본 군인과 민간인 수십만 명이 항복 대신 자살을 선택하고 무의미하게 죽어 갔다.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사이판에서 벌어진 참극이 대표적 예다.



항복을 거부한 일본인들은 실전으로 단련된 해병대 병사들조차 경악하게 만든 죽음의 축제를 벌였다. 전 가족이 함께 물에 빠져 죽으러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거나, 수류탄을 터뜨려 죽으려고 옹송그려 모이거나, 혹은 부모들이 자식들을 먼저 내던지고 나서 함께 죽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 살아남은 민간인들은 일본 수비대가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한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열었던, 《전진훈》의 정신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 7장 살생과 무아(無我)·254쪽에서



무아(無我)의 가치관, 자살 특공대의 등을 떠밀다



우리는 누구나 생명에 매우 강하게 집착한다.

그러나 바로 그 집착을 버려야만 비로소 우리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고귀한 정신을 획득할 수 있다. ……

불도 실천의 핵심은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소아(小我)의 생각을 없애버릴 때, 우리는 참된 일본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 승려 오모리 젠카이



“사랑하는 우리 조국에 미천한 나 자신을 바치는 공적을 세우며 영광을 누려야 한다.”(244쪽) 러일전쟁에 참전한 유명한 군인 사쿠라이 다다요시 대위의 회고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저자는 ‘미천한 나 자신을 바치는’ 것에서 불교의 핵심 교리인 무아를 발견한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인 무아는 무사(無私), 대아(大我), 몰아(沒我), 망아(忘我), 멸사(滅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불변하는 실체로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가치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일본 군인의 생사관에서 또 다른 뿌리를 구성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으면 태어남이 삶의 시작을 나타내지 않는 것과 같이 죽음이 삶의 끝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246쪽)



실제로 무아 개념은 일본제국 군인들이 직접 남긴 목소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해군 소위 요시다 미쓰루는 자살 사명을 띤 전함 야마토 호에 타고 출격하기 직전 일기에 “무아 상태에서 필살의 투지도 기를 것이다.”라고 썼다. 육군 장군 가와베 마사카즈는 《전진훈》을 평가하며 “《전진훈》은 일심동체인 육군과 해군 전체가 생사를 초월해 몰아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명확히 설명했다.”고 칭찬했다. ― 7장 살생과 무아(無我)·245쪽에서



내 목숨이 가벼우면 적의 목숨도 가볍다

생사일여와 무아의 가르침이 오남용된 탓에 희생된 것은 일본인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난징 대학살에 참가했던 병사 아즈마 시로는 자신이 저지른 강간과 약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생명이 중요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적의 생명은 훨씬 덜 중요해진다. …… 이런 철학으로 인해 우리는 적군을 경시했고, 이것은 결국 포로들의 대량 살해와 학대로 이어졌다.”(263쪽)

일본 군인에게 ‘명예롭게’ 죽는 것이 군인으로서 가장 큰 영광이라면, 살아서 포로로 잡히는 것은 가장 큰 치욕이었다. 일본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지 못한 포로들을 경멸했고, 따라서 그들을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군이 죽인 포로 숫자를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죽인 포로 숫자와 비교해보면 저자의 주장은 한층 설득력을 더한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 잡혔다고 보고된 254,473명의 미군과 영국군 포로 가운데서 단지 4퍼센트(9,348명)만이 그들을 잡은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이 숫자는 일본의 앵글로아메리카인 포로 중 살아남지 못한 27퍼센트(132,134명 중 35,756명)와 사뭇 비교된다. 이와 같은 숫자를 고려할 때, 체념하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일본 군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연합군 포로들의 생명을 존중하거나 그런 문제에 마음을 쓸 수 있었을지 여부도 생각해봐야 한다. ― 7장 살생과 무아(無我)·262쪽에서

남편이 죽은 것은 업(業)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전장에서 죽거나, 인생의 이른 시기에 과부가 되거나,

혹은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고아가 되는 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단 한 발의 탄환도 적으로부터 우연히 날아오는 일은 없다.

그것은 명백히 업의 작용이다.

- 승려 도모마쓰 엔타이



불교에서 나온 생사일여와 무아의 가르침을 무기 삼아 병사들이 기꺼이 죽음으로 달려갔다면, 또 다른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업의 교리는 혈육을 잃은 병사들의 유가족을 위로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25일, 승려 도모마쓰 엔타이는 《유족 독본(遺族讀本)》이라는 소책자를 출간했다. “그의 죽음은 누구의 탓도 아니고, 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일어난 일에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죽는 것이 그의 업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284쪽)라고 그는 썼다. 이러한 가르침은 일본의 사회 지도자들이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독일인과 달리 일본 국민 전체가 자신들의 전쟁 책임에 정면으로 대처하는 데 그토록 어려워하는 이유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적어도 그 이유의 일부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엔타이 스님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정식화된 업의 교리에서 찾아야 한다. …… 사회의 개인들이 치르는 대가는 자업자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관된 업의 작용’ 앞에서 일본 지도자들의 전쟁 책임을 어떻게 밝혀낼 수 있겠는가? ― 8장 남편이 죽은 것은 업(業) 때문이다·285쪽에서



가족의 죽음이 자업자득이라면 당연히 슬퍼할 필요도 없다. 승려 야마다 레이린은 여기에 더해 윤회 사상에서 힌트를 얻어 유가족에게 희망을 주려고 했다. “‘천황 폐하 만세!’ 하고 외치며 죽은 장교와 사병들의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고귀하고 영웅적인 정신은 바로 여기 이 나라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279쪽)



열반의 경지에 이르면 슬프지 않다

한편 종군 승려로 복무했던 나카가와 소엔은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저 슬퍼하기만 해서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애통함은 자기 중심주의의 산물이므로 모든 깨달은 정신과 마음은 그것을 멀리해야 한다.”(278쪽) 승려 도모마쓰 엔타이는 저서 《유족 독본》에서 슬픔을 초월하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 유가족을 소개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했으며, 천황의 인자한 자비심에 대한 존경심이 넘쳐흘렀다. 엔타이 스님은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며 전사자의 유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2, 3년 전에 잃고도 방금 여기에서 이야기한 전사자 유족들과 똑같은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 이 나라 곳곳에 존재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에게서 바로 최근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모범을 발견한다. 게다가 그들은 이 나라의 모든 국민에게 말없이 교훈을 보여주었다. 모든 유족이 가능한 한 빨리 이런 마지막 단계에 이르길 기원한다. ― 8장 남편이 죽은 것은 업(業) 때문이다·287쪽에서



극락 왕생을 꿈꾼 A급 전범들



이 손수건의 상표는 영어로 대포를 의미하는 ‘캐넌(Cannon)’입니다.

하지만 일본어로 발음하면 정확히 ‘간논(관음觀音)’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내가 관세음보살님이 친절하게도

손수건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도조 히데키, 사형을 앞두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제국과 불교의 친밀한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전범이 되어 사형으로 전쟁 책임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된 일본 군 수뇌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또다시 불교를 통해 씻어냈다.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와 관동군 사령관 도이하라 겐지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정토종으로 개종했다. 정토종에서는 누구든지 깊은 신앙심을 갖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서방 정토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 과거에 얼마나 ‘사악했든’ 간에 개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해주었다.”(353쪽)



처형되는 순간에는 어떤 경전도 필요 없다고 언급한 뒤에 도조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하는 것뿐입니다. 길 끝에 이르렀을 때는 ‘나무아미타불’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생사를 초월해야 합니다.” 처형의 순간이 다가오자 도조가 이렇게 소리쳤다고 신쇼 스님은 전한다. “천황 폐하 만세!” 그러고 나서 도조는 사형 집행실로 걸어갔다. 그는 1948년 12월 23일 자정 1분 후에 교수대 계단을 올라갔다. 사람들의 귀에 들린 그의 마지막 말은 ‘나무아미타불’이었다. ― 10장 전범들의 피난처, 불교·330쪽에서



승려가 될 뻔한 히로히토 천황

전범으로 기소된 적은 없지만 전쟁에 책임이 있음이 명확한 히로히토 천황 역시 패전 이후 불교에서 피난처를 찾는 처지에 놓였다. 1945년 1월, 패전이 몇 달 남지 않았을 때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는 천황을 승려로 만들자는 놀라운 계획을 내놓았다. 천황이 일본의 전통 신앙 신도에서 ‘살아 있는 신(現人神)’으로 모시는 존재임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이야기다. 고노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연합군도 승려가 되신 천황 폐하를 괴롭히진 않을 것입니다.”(347쪽) 히로히토가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리고 황실 제도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짜낸 기상천외한 계책이었다.

고노에의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히로히토는 불교를 진흥했던 9세기 우다 천황이 세운 닌나사의 주지 스님이 되었을 것이다. 연합국은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고 결국 고노에의 계획은 불발로 끝났지만, 이러한 계획은 실제로 실행 직전까지 갔으며 닌나사의 원래 주지 스님은 흔쾌히 주지 자리를 내놓았다. 불교가 정치에 동원된 또 하나의 사례다.



불교의 계율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죄를 범했다면 누구든지 승가에서 쫓아내라고 요구하는데도 닌나사 주지였던 오카모토 지코 스님은 이 계율을 신경 쓰지 않았다. 주지직에서 물러나기로 동의할 때 지코 스님은 단지 불교가 국가에 복종하는 전통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 전통은 닌나사의 경우에 이미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 10장 전범들의 피난처, 불교·348쪽에서



도덕적 판단을 포기한 승려들



선에는 특별한 교리도 철학도, 일련의 개념도 지적인 법칙도 없다. ……

그래서 선은 그 직관적인 가르침이 방해받지 않는 한 거의 모든 철학과 도덕론에 극히 유연하게 적응한다.

선은 아나키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무신론이나 관념론,

혹은 어떤 정치적·경제적 독단론과도 결합할 수 있다.

- 승려 스즈키 다이세쓰 데이타로



선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깨달은 사람들은 삶과 죽음뿐 아니라 선과 악을 포함한 모든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한다. “깨달은 존재들은, 불교의 계율이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명하는 도덕적인 제약의 지배를 더는 받지 않는다.”(43쪽) 서구에 선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승려 스즈키 다이세쓰 데이타로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선불교의 이러한 특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선은 영혼의 불멸이나 정의, 신성한 길, 혹은 윤리적인 행동과 관련해 ……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으며, 단지 한 사람이 도달한 결론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그 결론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라고 촉구할 뿐이다. 철학은 지적인 정신을 지니고 안전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은 행동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일단 결심을 하면 가장 효과적인 행동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 ― 3장 선(禪)과 암살·80쪽에서



초국가주의 암살 조직 혈맹단을 지휘한 승려 이노우에 닛쇼는 이러한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에 옮겼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는 “선과 악의 특정한 개념에 집착하거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370쪽)는 진리에 다다랐다. 천황을 중심에 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혁명 수단으로 암살을 택하는 데 이노우에는 한 점 주저함이 없었다. 암살을 택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노우에는 불교의 자비심을 내세웠다. “우리의 목표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멸하는 것이었다. …… 자멸하는 과정에서 희생자들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 혁명의 근본적인 원리였다. 큰 자비심이 우리 혁명의 기본 정신이었다.”(377쪽)

체포되어 재판받을 때도 이노우에는 “나는 행동할 때 주로 불교 사상의 인도를 받았다.”(380쪽)고 당당히 선언했다. 일찍이 그의 스승이었던 승려 야마모토 겐포가 제자를 위해 법정으로 달려왔다. 이후 임제종의 최대 분파 묘신사파의 관장으로 선출된 고승인 그는 이노우에를 다음과 같이 적극 변호했다.



“불교의 모든 조각상은 부처의 정신을 나타내는데,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의 조각상 외에 칼을 쥐고 있지 않은 불교 조각상은 없다. 어린이들의 보호자인 지장보살조차 전쟁의 승리자로 나타날 때는 손에 창을 들고 있다. 따라서 참된 인간성의 완성에 기반을 둔 불교는, 사회의 화합을 해치려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량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밖에 없다.” ― 11장 ‘황도 불교’라는 괴물·383쪽에서



선도 악도 없는 절대적 영역

살인자 제자를 변호한 승려는 한 명이 아니다. 역시 천황 숭배자였던 군인 아이자와 사부로는 천황의 직접 통치를 신속하게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던 상관 나가타 데쓰잔 소장을 칼로 찔러 암살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아이자와가 암살을 실행에 옮길 때 자신의 심리 상태를 설명한 “나는 절대적인 영역에 있었다. 그래서 긍정도 부정도, 선도 악도 없었다.”(74쪽)는 증언에서 이원성의 초월에 대한 선불교의 가르침의 영향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다. 그는 유명한 사찰 린노사에서 수 년 동안 수행한 속가 제자였다.

제자를 변호하기 위해 린노사의 주지 스님인 후쿠사다 무가이가 법정에 나왔다. 저자는 “무가이 선사는 자기 제자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깊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80쪽)고 지적한다. 무가이는 “그의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에 앞서, 나는 그가 행동하기 전에 되풀이해서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며 “나만은 그가 어째서 그렇게 행동했는지 충분히 이해한다.”고 호소했다. 또 제자의 ‘확고부동한 불굴의 신념’과 더불어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꺼이 칭찬했다.(76쪽)



‘황도 불교’라는 괴물



우주의 창조와 진화의 자비로운 근원은 태양의 여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일본 정신이 일본 불교의 특질이라면

일본 불교도들이 절대적으로 헌신할 대상은 태양의 여신임에 틀림없다.

- 일본 사법성의 극비 문서 《불교와 사회운동》 중에서



전시 일본 정부가 배태한 기형아 ‘황도 불교’는 정치에 종속된 종교가 다다를 수 있는 나락의 끝을 보여준다. 1939년 일본 사법성은 ‘불교와 사회운동’이라는 제목의 극비 문서를 발행했다. 이 문서의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일본 불교 개혁의 필요성’이라는 장에는, “불교도들은 여러 부처와 보살의 본질로서 천황을 숭배해야 한다.”(392쪽)는 주장이 버젓이 실려 있다. 저자는 일본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은 문서에 수록된 이 글이 “현재 입수할 수 있는 어떤 자료보다도 일본 정부가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뿐만 아니라 불교에 무엇을 기대했는지까지 진실에 가깝게 설명해준다.”(385쪽)고 설명한다. 이 문서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불교의 이상은 종파 없이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에서 불교의 지도 원리는 우리 조국을 구원하는 것이다. 황도 불교의 미래는 일본 정신의 고양을 생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종파들은 다툼을 중단하고, 일본 정신이라는 진리이면서 동시에 우리 국민의 공통된 조상인 태양의 여신을 주요 숭배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 불교가 실제로 준수해야 할 사항이다. ― 11장 ‘황도 불교’라는 괴물·388쪽에서



이 광신적 글을 쓴 검사 오가타 히로시는 결코 불교 교리에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이 글의 가장 섬뜩한 측면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일본에 전래되기 이전의 대승불교뿐 아니라 인도에서 설파된 불교 초기의 가르침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가타가 지닌 불교 지식은 그가 당시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주의적이고 광적인 신앙을 받아들이고 장려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396쪽)

실제로 일본 불교가 숭배 대상을 태양의 여신으로 통일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천황 숭배를 독려한 승려는 적지 않았다. ‘전쟁의 신’ 스기모토 고로 중좌의 스승이기도 한 승려 야마모토 에키주는 “일본 국민의 신앙은 천황 폐하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전시 일본 제도권 불교의 모든 지도자들이 공유한 것이었다.(397쪽) 또한 제도권 불교는 실제로 ‘황도 불교’라는 문구를 서슴없이 채택하기도 했다. 정토진종의 니시혼간사파는 “정토진종에는 천황제 국체에 대한 복종을 지지하지 않는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398쪽)



학살을 정당화한 종교의 오래된 역사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부 당국의 합법적인 비호를 받는

살인에는 종교적인 용품과 의식(儀式)이 함께했다.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간 뒤 기도와 축복과 주문(呪文) 속에서 죽음에 이른다.

- 사회학자 피터 버거



전쟁과 살인을 지지한 불교의 어두운 역사는 과연 20세기 초 일본에 한정된 것일까? 불교도이자 승려로서 저자는 “전시 일본 불교 지도자들이 이런 시도를 처음 한 승려도 아니고, 또 마지막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287쪽)라고 말한다.



불교 교리가 정말 ‘왜곡되어 있다면’, 그러한 왜곡은 불교의 역사에서 수많은 유사한 사례 중 하나일 뿐이고, 또 1천 년도 더 된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불교가 다른 세계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대량 학살을 부추기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정당화해 왔다는 불편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 8장 남편이 죽은 것은 업(業) 때문이다·289쪽에서



1,500년 전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수나라 문제는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장소마다 사찰을 지음으로써 군사 작전을 전개하는 데서 불교 승려들의 정신적인 협력을 얻었다. 그는 이 사찰들에 거주하는 승려에게 죽은 병사들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라고 명함으로써 아직 살아 있는 병사들에게 장차 전쟁터에서 죽으면 그들의 영혼도 돌봄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288쪽)

오늘날에도 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교 지도자들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리랑카 신할리족의 불교 지도자들은 “승가와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불교의 기본 교리에 어긋날지언정 ‘타인’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함으로써”(289쪽) 비불교도인 소수의 타밀족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용인했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져 온 ‘성전(聖戰)’

불교의 범위를 넘어 생각해봐도 다르지 않다. “모든 종교가 한두 번쯤 ‘성전’이나 ‘지하드’, ‘정의로운 전쟁’ 등으로 불리는 것에 참여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399쪽) 기독교는 11~13세기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을 지켰다. 1980년대 이란과 이라크는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종교적 ‘성전’을 벌였다.

저자의 궁극적 관심사는 “전 세계 여러 종교의 사려 깊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국가가 시작한 전쟁과 자신들의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400쪽) 하는 데 있다. 《불교 파시즘》이 고발하는 일본제국 군대와 승려들의 유착은 바로 이러한 반성과 성찰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역사적 사례다. 앞으로 또 다시 벌어질지 모를 ‘성전’을 막기 위해, 저자는 불교를 포함한 전 세계의 모든 종교에 민족적 정체성이나 국가적 정체성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좀 더 보편적이거나 세계적인 윤리”(405쪽)를 구축할 것을 촉구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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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디 불교뿐이던가... 인류역사에서 종교들이 저지른 살인 등의 악행은 전쟁 등 다른 모든 범죄의 희생자들보다 많았고 그짓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세계화된 종교들은 오히려 갈등을 조장했고 뻔뻔해지게 죄의식을 사해주는 뽕이기도 하며 사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알라딘(최란)은 댓글농단을 멈춰라 2020-01-2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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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말하는 종교가 속세의 권력에 영합했을 때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

바스티안 2018-05-1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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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그러니 전쟁터에서 적을 죽인다고 죄가 되지 않는다. 마음껏 죽여라.˝ 2차 대전 당시, 중국으로 떠나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어느 일본의 유명한 승려가 한 말이라고 한다. 인명 경시와 허무주의가 일본 제국주의를 부추긴 셈이다.

가람 2013-08-2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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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어떻게 살인 무기가 되었나? 새창으로 보기

기원전 6세기에 태어난 석가모니 붓다의 말이 쓰여진《법구경》130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랑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그 외에 다른 경전을 봐도 불교에서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무아관과 생사불이론은 왜곡되어 전쟁 이데올로기로 변했습니다. 저자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불교 간의 유착관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불교가 다른 세계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대량 학살을 부추기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정당화해 왔다는 불편한 현실입니다.



일본의 불교는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태동하던 순간부터 함께였습니다. 일본 불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사실상 국가 종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일본 선불교는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 이데올로기적인 경찰 역할을 해 왔습니다. 국가의 모습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모습도 국가가 요구하는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일본의 선불교는, 깨달은 사람들은 선악뿐만 아니라 생사도 포함해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다는, 8세기 중국의 선불교에서 유행했던 도덕률 폐기론자들의 주장을 물려받았습니다. 선불교는 상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죽음도 불사하는 의무감이라는 미덕을 강조했고, 폭력을 성스러운 의미로 가득 채우면서 문화적 당위 명제로 만들었습니다. 선불교의 권위자 스즈키는 선 특유의 직관적인 이해 방식으로 인해 거의 모든 철학과 도덕론에 극히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선은 영혼의 불멸이나 정의, 신성한 길, 혹은 윤리적인 행동과 관련해 그들과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으며, 단지 한 사람이 도달한 결론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그 결론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라고 촉구할 뿐이다. 선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일단 결심을 하면 가장 효과적인 행동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은 진실로 사무라이 무사의 종교다. - 스즈키

스즈키 선사의 말처럼, 일본은 뒤돌아보지 않고 군국주의로 전진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메이지 시대 말기 이래 아나키즘이나 공산주의 등을 상대로 한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제도권 불교의 지도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군국주의로의 전환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내려는 반동적인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주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반공의 깃발 아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국가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군국주의처럼 일본의 군국주의의 성장도 군 내부의 반대를 포함한 국내의 반발을 억압하며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암살 사건들에 대해서 불교계는 지지를 보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의 교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목적과 동일시되어야 했고, 제도권 불교 지도자들은 대승불교의 계율을 왜곡해서 퍼뜨렸습니다.





조동선종의 총무원장이자 소지사의 주지였던 세키젠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평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상이다. 평화는 인간 최고의 이상이다. 일본은 평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평화와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국가를 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방식에 관계없이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언제나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전쟁이다." -《전쟁과 선》p.125

선불교 교리의 몇몇 주요 측면은 일본 군인 정신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그중 주요한 것은 바로 생사일여의 깨달음이였습니다. 생과 사는 동일하며, 생명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서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고귀한 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선의 생사관은 곧 군인들 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 전체의 생사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군인들의 목적이 살아남아서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죽는 것이라는 이 사고방식은 군 지휘관들에겐 매력적인 사상이였습니다. 군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적의 목숨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는 난징대학살 등 민간인 대규모 학살극으로 이어졌고, 일본군의 경우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인 비율로 적군 포로를 많이 죽였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비율이 2차대전 국가들 중에서 매우 낮았는데, 포로가 되기 전에 단체로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차 대전의 막바지에 패색이 짙어질 무렵의 일본은 국가 전체가 대량 자살을 통한 나라의 구원이라는 이미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불교가 제공하는 무아의 이데올로기는, 자살 특공대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했습니다. 이런 성향은 군인뿐 아니라 일본의 민간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은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을 전투에 소집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일본인들을 죽음으로 인도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정치적 엘리트의 자기 중심주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일본 국민의 압도적 다수를 희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도자들은 불교의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생사관을 국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연합군에 죽음으로서 맞서 싸우라고 지시했지만, 막상 천황과 그의 최측근, 대본영의 군 참모들은 약 6~7천명의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을 동원해 만든 거대한 방공 터널 속에서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대담하게 적을 죽이고 적의 것을 훔치고 약탈하는 것과 전법에 따라 정복할 때까지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행위고 사랑의 행위다. 이런 일들은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마르틴 루터

불교 지도자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군국주의에 뛰어들어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식민지에 대한 불교 전도 사업인데, 일본의 주요 불교도들은 중국과 아시아 나머지 지역의 불교는 후진적이고 수동적이며 사회적 요구에 무관심한 반면에, 일본 불교는 능동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과학적이기 때문에 일본 불교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참된 불교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일본의 참된 불교를 아시아의 민족들, 심지어 서양인에게까지 전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식민지 곳곳에 전파된 일본의 불교 사원은 그 지역의 일본군들에게 든든한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불교 지도자들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전후 일본에서 좌익 정당이 성장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들은 우익 단체의 기반이 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 일본이 전쟁당시 잔혹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고 암시하는 것을 모두 교과서에서 제거하려 했습니다.



일본의 불교계가 보여준 이 역사적인 사례들은 종교가 어떻게 군국주의 파시즘의 광기와 유착해 대량 학살과 집단 자살의 혼돈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행한 사례가 특별한 사례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 불교의 형태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먼저 있었습니다. 근대 일본불교의 구조적 특징은 사실 불교의 전래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는데, 신성 왕권에 강력히 집중된 국가를 건설하는 원인으로 기능했던 정치,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유용한 호국불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국가에 대한 복속은 한국 불교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군국주의에 휩쓸린 일본 불교의 지도자들은 동양과 서양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들도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의 가치관과 편견에 손쉽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너무 평범한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승려들의 그 평범한 악 이었습니다.



종교학자 마틴 마티는 종교 옹호자들은 대개 종교에 뒤따를 수 있거나, 종교가 만들어낼 수 있는 골칫거리를 축소하며, 진리 추구를 기본적인 주제로서 소중히 여기려 한다면,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에 계속 등장하는 종교의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의 많은 형태와 표현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목숨을 빼앗는다는 특징입니다. 안타깝게도 적어도 현대사에서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마티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성전이라는 형태의 살육을 이해하고, 줄이기 위해선 종교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역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심리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지원과 관심이 있어야 종교가 수 천년동안 외쳐왔지만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던 것,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윤리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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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선 2013-12-10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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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폭력을 부추길 때 새창으로 보기

신의 뜻을 따른다는 명분으로 종교가 폭력을 부추길 때가 있다.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이슬람교의 일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인 불교마저도 부처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을 부추긴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일본 군국주의에 영합해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부추겼던 일본 선불교의 어두운 역사를 폭로한다.







자비를 강조하고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와 살생을 할 수밖에 없는 군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저자는 중세시대에 일본의 무사와 병사들이 선불교의 금욕적이고 극기심을 키우는 수행 방법이 의지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선불교를 가까이 하면서 둘이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군국주의가 일본을 지배하기 이전인 17세기에 이미 선사 다쿠안 소호가 "치켜든 칼에도, 칼을 휘두르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의지는 없고 텅 비어 있다"며, 선불교의 교리를 교묘히 이용해 무사들의 살생을 정당화했었다.







저자는 이어서 일본 선불교가 세계대전 기간 동안 어떻게 일본 군국주의에 영합해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해 왔는지를 낱낱이 폭로한다. 자원입대해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적군들을 죽인 제자와, "부처님께서 사회의 화합을 깨뜨리는 자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며 제자의 입대를 말리기는커녕 격려한 스승 선사도 있었다. 세계대전 당시 선불교의 지도자들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불교의 교리를 천황과 국가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아를 버릴 수 있다는 방식으로 해석해, 일본의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전쟁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도록 몰아갔다. 교리를 교묘하게 해석하며 살생과 폭력을 정당화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선사들의 모습은 독자들의 치를 떨리게 한다.







후기에서 저자는 뒤늦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본 선불교 지도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것이 선불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첫 단계라고 말한다. 일본 선불교 승려로서 일본 선불교의 지도자들의 과오들을 폭로하고 고쳐나가길 바라는 저자의 용기와 객관성은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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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안 2018-05-1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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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초기불교 VS 선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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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VS 선불교 

방경일 (지은이)운주사201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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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쪽148*214mm381gISBN : 978895746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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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현존하는 니까야가 붓다의 원음이고, 남방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니까야에 쓰여 있는 내용은 모두 진리인까? 선불교는 붓다의 원음에서 벗어난 이단아인가? 바야흐로 선종의 시대는 끝나고 위빠사나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이 책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 때로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려, 때로는 치밀한 논증의 형식으로, 때로는 퍼즐을 맞추듯이 써내려 간다.



다소 만만치 않은 주제들이고, 어떤 것은 현실적으로 예민한 내용들도 있지만 저자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명쾌하게, 때로는 도발적으로 논지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을 통해 한국 불교의 올바른 미래를 위한 건강한 논쟁과 담론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목차

머리말



첫번째 미스터리 붓다는 가공의 인물인가?



두번째 미스터리 니까야는 과연 친설인가?



세번째 미스터리 니까야에 근거한 교리들은 오류가 없는가?

1. 삼법인의 진실

2. 사성제에서 팔정도는 멸로 이르는 기법일 뿐인가?

3. 오온에 대한 설명은 모순의 극치다

4. 심이처와 십팔계에 대한 실명의 모순들

5. 연기의 의미는 관계성뿐인가?

6. 교리들 사이의 충돌은 없는가?



네번째 미스터리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는가?

1. 들어가는 글

2. 무아윤회는 궤변이다

3. 윤회와 무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4. 무아와 진아의 관계

5. 종교체험의 필요성

6. 나오는 글



다섯번째 미스터리 대승은 비불설인가?

1. 반야심경, 사성제도 연기도 쳐버린다?

2. 공사상은 비불설인가?

3. 유식사상은 비불설인가?

4. 밀교는 불교가 아닌가?



여섯번째 미스터리 중국인은 왜 초기불교를 버렸나?

1. 황제가 꿈에서 붓다를 봤다고 불교를 공인했다?

2. 초기불교도 모두 알려졌다?

3. 중국인도 위빠사나 수행을 했다?

4. 복잡한 것은 싫어?

5. 우리에겐 노장이 있다?



일곱번째 미스터리 선종은 불교와는 다른 종교인가?

1. 달마와 혜능은 가공인물인가?

2. 선종은 문자를 싫어한다?

3. 견성이라면 성품이란 것이 있다는 말인가?

4. 선종이야말로 여실지견이 가능하다?

5. 선종과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같다?

6. 선종의 참선과 초기불교의 사선정 및 위빠사나와의 관계는?



여덟번째 미스터리 간화선만이 정통인가?

1. 능가경파ㆍ유심파와 금강경파ㆍ무심파의 대결

2. 조사선과 간화선의 차이

3. 간화만이 정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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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0년 5월 15일 지성 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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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경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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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참선을 시작, 1980년에 경봉 선사로부터 ‘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받고 화두로 삼았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서 고익진 교수로부터 초기불교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아함에서 선종까지 불교교리 전체를 관통하고, 독자적인 교상판석을 이루었다. 졸업 후 한동안 불교방송에서 조사기자를 하였으며, 현재는 저술 및 불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및 논문으로 <우리 곁에 계신 33관세음보살 이야기>, <초기불교 VS 선불교>, <마음을 밝혀주는 60가지 이야기>, <선사들의 삶과 깨달음>,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에 대한 비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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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만화로 보는 법화경과 새로운 해설>,<석가는 페르시아의 황제였다>,<우리가 모르고 쓰는 생활 속 불교용어>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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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한글세대 아미타경 관음경 반야심경>,<불교의 이해>,<성운대사가 들려주는 불법의 참된 의미>등 총 436종

대표분야 : 불교 7위 (브랜드 지수 88,10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불교 전반에 대한 탄탄한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한 편의 소설같은 책



1.

한국불교는 지금 교육, 포교, 수행 등 여러 측면에서 전환기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가름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오랫동안 정통으로, 주류로 받들어지던 간화선이 여러 도전에 직면한 점을 들 수 있다. 가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던 간화선이 여러 수행법 중의 하나로 취급되고, 심지어는 정통 불교수행법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온라인상에서는 더 극단적인 주장들이 횡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계종단을 비롯한 한국불교의 주류에서는 간화선의 체계화, 조직화, 대중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간화선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여, 표면적으로는 간화선이 여전히 한국불교(조계종)의 정통 수행법으로 인정되고, 여기에 근기에 따라 여타 수행법들도 인정하는 형식으로 봉합되고 있지만, 실상 현장에서의 움직임은 그렇게 안이하지 않다.

90년대 이후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간화선 수행에 한계를 느낀 다수의 출가자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위해 미얀마 등 남방으로 떠났고, 현재 그들 중 다수가 국내에 들어와 위빠사나 수행과 남방불교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그동안 한문경전의 번역을 통해서만 접했던 불경이 빨리어에서 그대로 번역되어 나오면서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들은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이미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면서 진행되고 있으며, 이제는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흐름의 단적인 예는 강원의 커리큘럼을 선종 관련 과목 대신 남방불교의 니까야를 중심으로 개정하자는 주장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흐름에는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초기불교, 남방불교, 위빠사나가 붓다의 원음이고 붓다의 실수행법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과연 그런가?



2.

과연 현존하는 니까야가 붓다의 원음이고, 남방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니까야에 쓰여 있는 내용은 모두 진리인까? 선불교는 붓다의 원음에서 벗어난 이단아인가? 바야흐로 선종의 시대는 끝나고 위빠사나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이 책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 때로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려, 때로는 치밀한 논증의 형식으로, 때로는 퍼즐을 맞추듯이 써내려 간다. 실제로는 그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주제들이고, 어떤 것은 현실적으로 예민한 내용들도 있지만 저자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명쾌하게, 때로는 도발적으로 논지를 이끌어 나간다.

이 책은 전체 8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간략하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주제 ‘붓다는 가공의 인물인가?’ 편은 붓다가 신화적 가공의 인물이라는 일부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이 책의 맛보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주제는 ‘니까야는 과연 친설인가?’로, 저자는 현존 니까야가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현존 니까야는 A.D. 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붓다의 재세와 약 1,300년의 차이가 나며, 이 사이 편집자들에 의한 실수 혹은 고의에 의해 수정되거나 보완, 누락, 삭제 등의 일들이 일어났다고 본다. 즉 현존 니까야의 내용을 붓다의 원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현재 한국의 초기불교주의자’(이하 초기불교주의자)들의 믿음(believe)이지 결코 사실(fact)은 아니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은 초기불교주의자들의 믿음의 근거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의 ‘니까야에 근거한 교리들은 오류가 없는가?’에서 저자는 니까야의 교리들이 서로 상충되거나 상호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앞의 두 번째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즉 네 차례에 걸친 결집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나 수정 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이다. 저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처와 18계, 연기 등 불교의 주요 교리들에 대한 니까야에서의 주장을 정리하고 그 모순점들을 지적한다.

불교교리 중 난해하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로 무아와 윤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둘 다 불교교리의 핵심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를 긍정하면 어느 하나를 부정해야 하는 모순 논리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네 번째 주제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는가?’에서 이 문제를 단순 명료하게 정리해 낸다. 이 양자를 서로 별개의 범주로 보아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지?’라고 고민할 게 아니라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섯 번째 주제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논쟁이다. 저자는 공(중관)사상, 유식사상, 밀교 등의 예를 통해, 이들이 비불설로 비판받는 내용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이들이 붓다의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혀낸다.

여섯 번째, ‘중국인들은 왜 초기불교를 버렸을까?’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에는 대부분 소승불교(초기불교)의 경전들이 번역 유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이 전래되자마자 중국은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대승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중국에서 소승은 역사적 유물이 되어 버렸다. 저자는 그 원인을 노장사상의 존재와 현학의 유행, 중국인의 특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규명하고 있다.

일곱 번째, ‘선종은 불교와는 다른 종교인가?’ 흔히 학자들도 제기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중국에서 발생한 선종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와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선종에서 말하는 성품을 아트만의 일종이라고 보아, 불교의 기본개념인 무아의 사상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달마나 혜능이 가공의 인물이라고까지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참선과 위빠사나가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가는 다른 길이라고 주장한다.

여덟 번째, ‘간화선만이 정통인가?’ 초기불교주의자들에 따르면 불교의 정통 수행법은 위빠사나이고 간화선은 선종의 수행법일 따름이다. 잘 봐주어서 여기까지이고, 선종이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에까지 나아가면 간화선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간화선은 중국과 한국의 풍토에서 역사적으로 검증받은 수행법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이것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므로, 간화선 수행자들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3.

도그마에 빠지면 더 이상 불교일 수 없다.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불교는 고정되거나 교조적이지 않다. 불교는 그 시작부터 시대적, 지리적, 민족적 특색에 맞게 다른 사상이나 종교, 철학들을 포용, 융합하면서 자신을 풍부하게 변화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상이한 형태의 불교가 공존하고 있다. 선종도 그러한 역사적 실례의 하나이다.

따라서 초기불교도 대승불교도,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절대적일 수는 없다. 이미 붓다 스스로도 ‘당신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대가, 환경이, 근기가, 개인의 업 또는 공업이, 정서나 감성 등등이 변하면 그에 따른 수행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 전환의 시기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의심의 눈으로, 그리고 실천을 통한 검증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 책은 몇 가지 주제를 통해 현재 한국의 초기불교주의자들의 주장을 정면 반박한 것으로, 때론 도발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현시점의 한국불교가 짚고 넘어가야 할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 한국 불교의 올바른 미래를 위한 건강한 논쟁과 담론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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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이 한국불교의 미래와 대안을 찾기위한 지적 탐색의 인연으로 수용될 수 있다면..  구매

현정 2010-06-04 공감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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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 새창으로 보기

초기불교형태를 띈 상좌부불교(소승불교)가 더 우세하다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적은 책. 불교학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말 중간 중간 keyboard warrior다운 표현이 있어서 그렇지초기불교와 선불교차이를 나름대로 잘 정리.. 불교 역사책보다 battle형식으로 초기불교와 한국의 선불교의 논란 포인트를 잘 집어낸 책.. 

팔루스의 기표 2016-06-19 공감(1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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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언론-한국불교종단협 “일련정종은 무허가 일본불교 종파” - 법보신문

불교언론-한국불교종단협 “일련정종은 무허가 일본불교 종파” - 법보신문



한국불교종단협 “일련정종은 무허가 일본불교 종파”

 윤태훈 인턴기자 승인 2020.09.09



9월8일 “서울시 등 등록 안됐다” 표명

한국불교, 국민건강 위해 최선 다할 것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한 일련정종은 한국불교 종단이 아니며, 법인 허가를 받지 않은 임의단체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최근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일련정종’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종단협은 9월8일 “이번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일련정종은 일본불교 종파로 한국불교 종단이 아니다”며 “서울시의 법인 허가를 받지 않은 임의단체로 활동해오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특히 일련정종이 한국불교와 정서상 맞지 않는 단체임을 강조했다. 일련정종은 일본 가마쿠라시대 인물인 일련조사(日蓮祖師)를 개조로 하는 일본불교 종파로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국수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종단협도 “일련정종은 한국불교계 정서에 맞지 않는 임의단체다.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찬양과 신사참배를 합리화했다”고 지적했다.



종단협은 “한국불교계는 코로나19 재확산 방지를 위해 중앙질병관리본부에서 제시한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 전국 2단계와 수도권 2.5단계를 준수해 전국 사찰에서 모든 법회를 비롯해 집단행사를 자제해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영등포구 서울포교소에서 많은 인원이 모이는 법회를 진행해 확진자가 발생했다”며 “한국불교계의 노력을 훼손하고 국민의 안전을 위협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종단협은 “일련정종이 한국불교가 아님을 적극 고려해 국민과 불자들이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며 “한국불교계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기도하고 정부 지침을 준수해 국민과 함께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는 조계종, 천태종, 진각종, 관음종, 태고종, 총지종, 대각종, 삼론종, 보문종, 원효종, 일붕선교종, 총화종, 대승종, 용화종, 미륵종, 본원종, 원융종, 여래종, 염불종, 조동종, 법상종, 법륜종, 정토종, 진언종, 화엄종, 법연종, 미타종, 일승종, 법화종, 불이종의 30개 종단이 회원종단으로 가입돼 있다.



윤태훈 인턴기자 yth92@beopbo.com



다음은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입장문 전문.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입장문



코로나19의 집단감염 발생 일본불교 일련정종은 한국불교가 아닙니다.



(사)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는 이번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일련정종은 일본불교 종파로 한국불교 종단이 아님을 밝힙니다.



일련정종은 서울시의 법인 허가를 받지 않은 임의단체로 활동해오고 있으며, 본회에 가입하지 않은 종교단체로 군국주의 찬양과 신사참배 합리화 등 한국불교계 및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하지 않은 단체입니다.



한국불교계는 코로나19 재확산 방지를 위해, 중앙질병관리본부에서 제시한 전국 2단계와 수도권 2.5단계를 준수하여 전국의 사찰에서 모든 법회와 집단행사를 자제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련정종의 서울포교당에서는 많은 인원이 모이는 법회를 진행하였고 확진자가 발행함으로써 한국불교계의 노력을 훼손하고 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관련한 보도에 있어 일련정종이 한국불교가 아님을 적극 고려하여 국민과 불자들에게 오해 없도록 당부드립니다.



한국불교계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기도하며, 국민과 함께할 것입니다.



불기 2564(2020)년 9월 8일



[1553호 / 2020년 9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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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를 위한 불교 입문서   

정엄 (감수)리즈앤북2019-12-26
18,000원
전자책 12,000원 

404쪽
책소개

안온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안내서다. 불교는 마음의 깨달음을 이루는 종교로서, 우리 욕망의 뿌리와 고통의 근원을 깨달아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해탈의 삶을 살라고 다독인다. 인간의 주체적 인격 완성을 종교적 목표로 삼기에, 그 어떠한 독단이나 특수한 교리로 우리들을 속박하지도 않는다. 『초심자를 위한 불교 입문서』는 어려워만 보이는 경전과 교리들을 누구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보다 알기 쉽게 풀어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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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삼귀의三歸依 10

제1장 불·보살
1. 석가모니 부처님과 대웅전 14
2. 비로자나 부처님과 대적광전 16
3. 아미타 부처님과 극락전 18
4. 약사여래 부처님과 약사전 20
5. 미륵 부처님과 미륵전 21
6. 관세음보살 22
7. 보현보살 24
8. 문수보살 25
9. 지장보살과 명부전 26
10. 500나한과 나한전 28
11. 나반 존자와 독성각 29
12. 신중(화엄성중) 30
13. 치성광여래불 31
14. 사천왕과 사천왕문 32



제2장 불공·독송

1. 천수경千手經 36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42

2. 화엄경 약찬게華嚴經略纂偈 52

3. 의상조사 법성게義湘祖師法性偈 56

4. 관음기도 정근 59

5. 석가모니불 정근 60

6. 예불문禮佛文 61

7. 지장단地藏壇 64

8. 네 가지 진언 66

9.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 67

10. 칠성단七星壇 70

11. 신중단神衆壇 72

12. 반야심경(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74

13. 회향의 노래 77

14. 아미타경阿彌陀經 78

15. 무상無常법문집 86

16. 극락왕생 발원문 89

17. 금강경金剛經 91

18. 108참회·감사·발원문 115

19. 불설대부모은중경佛說大父母恩重經 122

20. 관세음보살보문품 노래 130

제3장 불교 교리
1. 부처님 일생 : 팔상성도 144
2. 불교의 4대 명절 145
3. 불교란 어떤 종교인가 171
4. 경전經典 176
5. 경전 보시와 불상 조성 공덕 178
6. 공空사상 180
7. 네 가지 성스런 진리 182
8. 발원發願의 의미 184
9. 방생放生 188
10. 사무량심四無量心 189
11. 삼법인三法印·사법인四法印 191
12. 삼보三寶 193
13. 삼보사찰三寶寺刹 194
14. 수계授戒 - 불자가 되는 길 197
15. 십이연기 199
16. 업業 202
17. 오계와 십계 206
18. 오온五蘊 210
19. 육바라밀六波羅蜜 211
20. 윤회輪廻와 해탈解脫 217
21. 중도中道사상 219
22. 참회懺悔 222
23. 팔정도八正道 223

제4장 마음 공부
1. 좌선의 의미 228
2. 좌선 방법 - 좌선의坐禪儀 232
3. 화두話頭 235
4. 화두 참구하는 법 238
5. 조사祖師 어록 249
6. 불자의 수행 자세 275


제5장 진리의 말씀
1. 보왕삼매론 288
2. 삶의 지혜 291
3. 마음을 다스리는 글 292
4. 진리의 말씀 293


제6장 기도하는 마음
1. 기도 326
2. 천수경과 다라니 기도 336
3. 여러 가지 기도 348
4. 기도하는 마음 363
생일 축하 기도문 365
소원 성취 기도문(혼자 기도할 때) 366
수능 고득점 기도문 368
대학 합격 기도문 370
학업 성취 기도문 372
시험 합격 기도문 374
축하 기도문(입학·취직·승진·합격) 376
건강 쾌유 기도문 378
행복한 가정을 위한 기도문 380
자녀를 위한 기도문 382


부록
불자 예절 386
불교 용어 해설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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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엄 (감수) 

해인사로 출가하여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해인사 승가대학,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경대 연구원, 승가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조계종 정각사 주지·화엄불교대학장
동국대·승가대 강사


석사논문
澄觀の華嚴思想の硏究
-『華嚴經』の位置づけと「理」の 思想を巡って

박사논문
澄觀硏究-法界觀·唯心觀の位相

연구논문

「화엄학연구자료집」

「현대중국불교현황 -교학체계 및 수행체계」

「징관의 선종관」

「사법계설의 성립과 『법계관문』」

「징관의 화엄법계관 -법계 이해의 세 가지 유형」

「법계의 어원과 의미 -대승경론과 화엄교학을 중심으로」

「법계에 대한 탐구사 -지론종·화엄종 학자를 중심으로」외 다수 접기

최근작 : <나를 찾는 화엄경>,<행복한 화엄경> … 총 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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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안온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안내서

불교는 마음의 깨달음을 이루는 종교로서, 우리 욕망의 뿌리와 고통의 근원을 깨달아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해탈의 삶을 살라고 다독인다. 인간의 주체적 인격 완성을 종교적 목표로 삼기에, 그 어떠한 독단이나 특수한 교리로 우리들을 속박하지도 않는다.

『초심자를 위한 불교 입문서』는 어려워만 보이는 경전과 교리들을 누구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보다 알기 쉽게 풀어내 보인다.

1장에서는 우리가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불보살과 전각의 종류를 알려주고,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전각의 이름들이 훨씬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2장에서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포함하고 있는 《천수경》을 비롯하여, 《반야심경》, 《아미타경》, 《금강경》 등 가장 많이 암송되고 있는 불경들과 불보살에 따른 정근의 시작과 끝의 기도법 등 생활 속 실천법을 자세히 담았다.

3장에서는 불교란 어떤 종교이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공사상, 중도사상, 연기설, 팔정도 등 불교의 기본 교리들을 알아본다.

4장에서는 좌선과 화두 등 불교의 대표적 수행법과 큰스님들의 어록을 담아 불자로서의 수행 자세에 대해 알아본다.

5장에서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들을 모아놓았다. 힘들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작은 안식이 될 것이다.


6장에서는 기도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기도의 기원과 필요성, 그리고 필요에 따른 기도법으로 초심자들이 쉽게 기도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불자의 예절과 익숙하지 않은 불교 용어를 풀이하여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초심자를 위한 불교 입문서』는 꼭 첫 장부터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독자가 당장 궁금한 것, 가장 필요한 것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조금씩 읽어나가는 것이 좋다. 불경 또한 4천 년도 훨씬 전에 깨달음을 얻으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그 제자들이 기억하여 적은 기록이다. 그 말씀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바로 와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간직한 진정한 속뜻은 우리가 거듭 새겨 기억하는 사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듣다. 접기

2020/09/14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서현욱 기자
승인 2016.10.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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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테너스’ 토크콘서트.ⓒ불교닷컴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는 ‘참나’와 ‘윤회’를 크게 비판했다. 강 교수는 불교계 큰 스님들이 말하는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이라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통해 “참나불교와 윤회불교는 환망공상(幻妄空想)이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즈’ 토크콘서트에서 “스님들이 자주 언급해 온 ‘참나’와 ‘윤회’는 없다”고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하지만 다수의 청중들은 강 교수가 힌두교의 윤회를 마치 불교의 윤회처럼 말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전통적인 불교 교리를 배운 청중들은 강병균 교수의 과학적 불교교리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부 청중은 ‘참나’ ‘윤회’ 등 교리 논쟁 보다 현실문제에 불자들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에서 벌어진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 우리나라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 토론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를 범한다. 첫째 인신 공격의 오류다. 논점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다. 그 사람의 주장이 있는데 다른 허수아비가 있는 것처럼 세워놓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토론해 달라.

고명선(문예출판사) : 여래장불교와 대승기신론 자체를 비판 바람이 불고 있다. 대승기신론 안에 참나 찾는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선불교가 그런 식으로 간 것 아니냐 문제 제기하는 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원효를 위대한 성인으로 대접한다. 원효는 여래장불교로 전체 불교 통합한 분이다. 대승기신론과 여래장불교 자체를 비판하면 원효까지 비판하는 셈이다. 일반 불교신자 입장에서는 너무 큰 문제다. 세 교수님이 여래장 그 자체, 원효까지도 비판해야 한국불교가 훌륭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인지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대승기신론은 이원구조가 문제”

강병균(포항공대 교수) : 대승기신론을 비판한 칼럼을 <불교닷컴>에 썼다. 보기 바란다. 과거 사람을 밟지 않으면 진보가 없다. 과거 사람을 밟는 것은 밟히는 사람도 굉장히 즐거워 할 것이다. 선불교 전통에서 ‘봉불살불(逢佛殺佛)’했는데 어찌 ‘봉조살조(逢祖殺祖)’가 안 되겠는가. ‘봉원효살원효(逢元曉殺元曉)’다.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

대승기신론은 진여라는 것과 생멸심이라는 이원구조가 문제다. 진여가 오염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이론으로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이원 구조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이원구조면 부처님 무아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은 진화론이 이야기하는 의식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렁이에게도 진여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승기신론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런 점만 제외하면 아주 훌륭한 논서다. 당시 열악한 과학이나 인문사회 수준으로 볼 때 놀라운 서적이다.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는 위대한 이론이지만 현재 와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당시는 아주 훌륭했지만 지금은 조금 부족하다.




우희종(서울대 교수) : 여러 층위에서 대답할 수 있다. 그 질문이 왜 중요한가 묻고 싶다. 원효 부정이 가슴 아플 정도라면 사실 여래장사상 이런 거 있나 없나, 참나니 이런 거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가 불교를 이야기할 때 여래장 사상이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불교학자들에게만 중요할 수 있다. 여래장이나 원효의 일심이나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 손가락이 좋은 손가락이냐, 나쁜 손가락이냐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여래장이라든지 초기 연기설을 볼 때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본다. 맞나 틀리나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드러내는가가 중요하다. 옳다 그르다 이전에, 원효를 부정하느냐 아니냐 이전에 여래장, 일심이 가리키는 게 무엇인가 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 실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처님 말씀 실천하는데 어떻게 중요한 것인가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만수(동국대 교수) : 힘든 시기 나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했다. 명상 기간은 평화로웠는데, 명상이 끝나거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큰 변화가 없다. 명상하는 나와 일상 속의 나는 분리되는 존재인가? 강 교수 말씀에 명상 단계가 높아지면 일상 명상의 나가 통일되는 어떤 것을 말씀했다고 생각한다. 생활하는 삶과 명상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일상 속에서 벗어난 나와 둘이 어떻게 만나 통합되는지 말씀해 달라.

“불교는 지혜의 종교, 지혜로 관조해야”

강병균 : 우리 속담에 ‘선정만 닦다가는 멍청한 중 늙은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앉아서 묵조선을 한다든지 해서 마음의 고요함만 닦으면 완전히 고요하다. 그러다 경계를 만나면 당장 흐트러진다. 그래서 그걸 굉장히 경계를 하는 거다. 그런데 진리는 항상 드러나 있고 간단하다. 그래서 계(戒)·정(定)·혜(慧)를 얘기한다. 계·정·혜 순서로 얘기한다. 혜가 마지막 순서다. 불교를 인도종교에서 분류할 때 지혜의 종교라 해서 즈나나 요가라고 분류한다. 지혜가 선정을 닦은 거 외에 지혜가 개입되면 절대 그런 일 없다. 비근한 예를 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고민이 있고 괴로운 순간 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에 내가 마음을 두면서 걱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상당히 경감이 되고 사라지고 그런다. 지혜로서 자기 마음을 관조하면, 단지 지로서가 아니라 관으로서 관조를 하면 그런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 진각종 호당 정사가 수행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불교닷컴

호당 정사(진각종) : 논제가 ‘한국불교가 바르게 가고 있는가’ 이다. 과학 전공 교수들인데 불교를 종교적 차원에서 보는 것인가, 과학적 차원에서 보는가? 또 하나 아까 유전자와 환경적인 요인도 말씀했지만 사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한 인연론이다. 인이 있다고 해도 이를 도울 연이 없다면 세상 모든 만물이 성장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이, 지식이 한쪽에 치우친 특수한 시대에서는 스님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지금은 지식이 보편화되고 지식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승단이 아니라 재가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속인들이 출가인들을 보면서 진정한 우리들의 인연을 깨쳐야 하지 않겠는가. 일반 정치나 종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시대적 인연이 악인 많으면 악인이 지도자 된다. 선인이 많으면 선인이 지도자 된다. 그것이 시절의 인연이다. 그런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우리가 속가에서 출가를 바라보는 관점도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강 교수 말씀 중에도 일체유심조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보살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잘못된 것도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도덕적인 걸 보충할 수 있는 스승인 게 아닌가 한다. 잘못된 승려를 보면서우리들이 도덕적으로 갖추어야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병기 : 명상하는 나와 일상생활의 나가 분리되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듣고 싶었다.

“대중을 통해 내가 끼우치는 것”

호당 정사 : 부처님 가르침이 현실을 떠나 이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세간 떠나 출세간 말씀한 것도 아니다. 산을 보려면 들로 나가야 한다. 들을 보려면 산으로 가야 하다. 중생세계를 바르게 보기 위해 출가라는 방편을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생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바르게 아는 것, 그것이 깨침 아닌가. 그것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그릇, 내 크기만큼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바르게 아는 게 깨침이라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명상을 할 때 나의 삶을 바로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되지 않으면 관념 이상의 가르침 속에 빠져서 가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진각종은 정사 전수가 마주보고 불사를 본다. 왜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깨침은 내가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보기 위해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보는 것이 자기를 깨치는데 가장 좋다. 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인연이 부부다. 그러면 흔히 내 반쪽이라고 하는 아내를 쳐다보고 남편이 깨치고, 아내는 남편을 보고 깨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결국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우리는 교수님을 통해 나를 깨치는 것이고, 교수님은 대중을 통해 깨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생활 속 명상, 깨침을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정모경 : 강병균 교수님 책(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잘 읽었다. 책 중에 자아가 없다는 증거로 사람을 두 쪽으로 자른다는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설명해 달라.

강병균 : 사람에게 좌뇌 우뇌 둘이 있다. 둘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좌뇌와 우뇌가 관장하는 기능이 있다. 좌뇌는 언어를 관장한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라는 기관이 있다. 그걸 자르면 의식 분열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상태에서 좌뇌와 우뇌에 다른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면 그 의식이 둘로 갈라진다. 인간이라는 것은 최소 두 개 의식의 공화국이다. 인간 마음속에는 의식이 많다. 의식을 통합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수많은 마음을 관장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지혜를 수련하면 그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번뇌를 이길 수 있지 않나. 한만수 교수 질문에 대한 보충 설명이기도 하다.

임상실험 결과를 보면 어릴 적이든 선천적이든 한쪽 뇌 없는 사람은 잘 산다. 그러나 나이 들어 한쪽 뇌가 없어지면 힘들어한다. 그런 면에서 좌뇌와 우뇌가 독립적으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좌뇌와 우뇌를 딱 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생물학계 석학 교수에게 물어봤는데 그도 대답을 못했다. 내가 볼 때는 좌뇌와 우뇌를 가르면 독립된 두 개의 사람이 나타난다. 마치 지렁이를 둘로 나누면 두 마리의 지렁이가 되듯이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참나는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참나는 둘로 갈라졌나?’, ‘영혼이 둘로 갈라질 수 있나’라는 아주 심각한 질문을 할 수 있다. 내가 볼 때는 영혼이 둘로 갈라질 일도, 참나가 둘로 갈라질 일도 없다. 왜냐면 참나나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환망공상(幻妄空想)이기 때문이다. 그게 없다고 해야만 좌뇌 우뇌 분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중층구조 논의를 동일 층위에 두면 혼란”

우희종 : 좌뇌와 우뇌를 나눴을 때 두 개의 의식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감각기간에 의해 형성된 의식, 안이비설신의와 모든 현상의 근간인 형태, 사랑도 칼로 찌르는 사랑도 사랑이고 아카페적 사랑도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고 보고 듣거나 하는 의식이 참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만 어느 층위에서 그것을 얘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늘 토론처럼 다양한 중층구조 논의를 서로 동일 층위에 놓고 이야기하면 혼란스럽고 알아듣기 힘들다. 하나의 질문에도 담겨 있는 중층 논의구조를 이해하면 논의하기 쉬울 것이다.

송재형(용주사 신도비대위 사무총장) : 오늘 기적과 같은 자리가 마련됐다. 15일부터 간화선 대법회를 한다. 간화선이 불교를 새롭게 세계화시켜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참나불교로 나 혼자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종교라 할 수 있는가? 간화선 추구하는 것이 세계 고통 멸할 수 있는 대단한 것인가? 소승불교로 전락하고 있는 자본과 권력해서 권승이 판치고 조계종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가. 대들보 내려앉고 불타고 있다. 불교는 고통을 없애는 것인데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적 책임, 종교로서의 불교가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계율 살아야 변태불교서 본래불교로 돌아갈 것”

박병기 : 경전에 계·정·혜 삼학(三學)이 함께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출발은 계라고 전제하고 있다. 선불교 정착 발전 과정에서 계를 쉽게 무시할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계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는 과정도 포함해야 한다. 율장은 금서처럼 인식됐다. 한국불교가 본래 불교로, 변태불교에서 본래 불교로 돌아가는 출발점은 계율이 이 시대에게 맞게 살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승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역시 시대에 맞는 계율을 찾아야 하고, 불자들이라면 어떻게든 계를 지켜야 한다. 불자라면서 범계하는 풍토가 일반화돼 있다. 이번에 범계 스님을 대상으로 한 심판의 화살이 재가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자성으로 가야 의미가 될 것이다. 한 쪽을 일방적으로 비방 지적하는 것은 곤란하다. 현재 직면한 범계 상황은 심각하다. 그런 것 정리하지 못하는 승단의 자정능력은 문제다. 심각하게 해결해야 할 독화살 중 하나다.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에 대해 질문하는 김영국 연경불교전책연구소장.ⓒ불교닷컴

김영국(연경정책연구소 소장) : 참나란 없다. 윤회가 없다. 큰스님들이 참나나 윤회 이야기를 방편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부처님 경전에 숫하게 이야기하는 게 참나, 윤회 없다는 거다. 큰스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방편이 아닌가? 강병균 교수는 그런 부분을 문자에 집착해서 말하는 것은 아닌가. 큰스님들이 진짜 참나 있다, 윤회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윤회는 ‘종 쇼비니즘’…윤회 진설로 받아들여 문제”

강병균 : 향봉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찾아갔다. 향봉 스님이 “윤회는 방편이다” 하니 성철 스님은 “윤회는 진설이다.” 했다. 성철 스님에게 윤회는 방편설이 아니다. 성철 스님은 윤회가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윤회 사례, 학자들 주장을 수집해 책을 냈다. 진제 스님이나 연세 되는, 법랍이 되는 스님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몸뚱이 버리고 저 몸뚱이로 간다’, ‘주인공이 몸뚱이를 떠나면 며칠 지나지 않아 몸뚱이가 썩는다’는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확신이다. 이것은 소위 임사 체험과도 관계가 있다. 그분들이 명상을 통해 임사 체험 비슷한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의식의 장난에 속아 주인공이 자기 몸을 빠져나간다고 망상을 한다. 현대 의학에서 인위적으로 임사체험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미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임사체험 대가였던 사람, 이를테면 수잔 블랙모어라는 여자가 있다. 마음대로 유체이탈 하던 여자인데, 어느 날 자기 친구에게 물어본다.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이런 저런 일 하는 것을 봤는데 사실이냐” 하니 친구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거기서 충격을 받고 그 여자가 임사체험이라는 건 마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회는 큰 스님들에겐 방편이 아니고 진설이다.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chauvinism)’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모든 생명계의 생명체를 흉악한 존재로 만드는 쇼비니즘이다. 백인들이 흑인, 황인종을 열등종족이라 하고, 하나님이 실수로 흑인을 만들었다고 하는 종쇼비니즘에 해당한다. 동물들이 무슨 죄를 짓는가? 토끼가, 사슴, 노루, 참새가 무슨 죄를 짓는가. 죄 짓는 거 없다. 우리는 선업을 쌓지 못하면 토끼, 돼지, 말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실제 인간이 가장 흉악한 존재다. 다 잡아먹는다. 거꾸로 인거 같다. 흉악한 짓을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윤회론이라는 것이 경전에 나와 있다고 부처님의 진설이거니 하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불합리한 점을 간과한 점이 있다.

김영국 : 성철 스님이 윤회는 진설이라고 한 법문이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백일법문할 때가 1970년대다. 법문 하면서 “윤회가 있더라” 했다. 그 당시 서구에서 애드가 체이시 등의 임사체험이나 환생체험 책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고 이야기했다. 성철 스님이 1994년 돌아가실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셨는가. 알고 있다면 답변해 달라. 내가 볼 때는 티베트불교의 환생이나, 서구의 환생, 임사체험 이런 책을 보고 한 때 경도가 됐을지는 모르겠는데, 실제 내가 아는 성철 스님은 윤횐느 방편이라 생각하셨다. 교수님이 성철 스님의 1970년대 생각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강병균 : 성철 스님이 말년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 성철 스님이 아니더라도 티베트불교에서 윤회는 바뀔 수 없는 진리다. 달라이 라마는 환생신들에게 인가해 주고 그랬다. 스페인 가서 태어난 환생신이 있다. 그 젊은이가 스무 살에 “나를 이런 불교적인 틀에 가둬서 고문하느냐”하며 뛰쳐나와 지금 영화공부 중이다. 그렇듯 윤회라는 것은 환망공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달라이 라마를 너무 신격화해서 그렇다. <불교닷컴> 칼럼에 에드가 케이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것 있다. 읽어보셨으면 한다. 전부가 애드가 케이시의 망상이다.

우희종 : 층위가 다른 것을 지금 얘기한다. 또 하나는 깨달았다는 이에게 너무 완벽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완벽한 것은 없다. 우리 이대로 온전한 것이다. 다만 깨달았다고 할 때 불교적 지향성, 연기실상에 대한 깨달음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경전에는 헛된 망상이 윤회한다는 표현도 있다. 스님들이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각 종파마다 강조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티베트불교가 바라보는 것, 선종에서 바라보는 것 관점이 다르다. 이런 게 섞이게 되면 혼란스럽다. 사랑을 끈끈한 사랑이 사랑이냐, 아카페적인 사랑이 사랑이냐 논의 한다면 층위를 정해놓아야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박병기 : 윤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티베트불교이다. 티베트불교를 공부하는 분에게 얘기 들어보자.

“윤회 않는 중생에게 윤회 멈추라 했겠나”

김준영 : 티베트 명상을 하고 있지만 간화선도 하고 있다.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윤회 있다 없다 이 자리에서 증명 불가하다. 어찌 보면 희론에 가까울 수도 있다. 중요한 신념이 있을 것이고, 신념 속에 체험적으로 깨달음에서 본 것도 녹아 들어갈 것이고, 시대적으로 지금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벗기기 위해 방편으로도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를 멈추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부처님이 윤회를 멈추는 것 말씀하셨을 때는 분명히 윤회를 인정했기 때문에 말씀하셨지, 윤회하지 않는 중생에게 윤회를 멈추라고 한 것 아닐 것이다.
▲ 강병균 교수에게 질문하는 김준영 씨.ⓒ불교닷컴

조계종이 사랑의 매를 많이 맞는 거 같다. 대한민국 불교를 대표하는 게 조계종이라고 누가 얘기하고 있는가, 불교 지키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이들이 출가자라고 한정돼 있다는 건 어느 법인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세워 놓고 우리를 때리고 있는 것 같다. 참나, 무아의 반대 개념으로서 유아적 참나인가? 그러면 유아론이 몇 분 선지식, 진제, 송담 그분들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조사선, 간화선의 기본적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묻고 싶다.

강병균 : 중요한 질문을 했다. 간화선 조사어록을 보면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선불교가 혁명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에는, 특히 옛날 스님 법문에는 거의 윤회론이 나온다. 나는 선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근자에 들어와 유행하는 현재 한국불교의 참나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김준영 : 내 경험으로는 윤회는 사실이고, 윤회는 욕망이 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면 욕망을 쫓아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윤회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윤회의 조건이라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여쭙겠다. 달라이 라마 존자가 미국 의학자들과 이야기 하다가 기관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나왔을 때 “뇌라는 기관은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아닐까?” 이야기했다. 그때 “그런 가설을 한 번 세워볼 필요가 있다” 해서 그런 가설을 만든 분이 강 교수님이 발표할 때 명상의 효과에서 뇌의 변화를 말씀하실 때 잠깐 언급했던 존 카밧진 교수로 알고 있다.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뇌’라는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근이 안경 만날 때 안식 생긴다”

강병균 : 명제를 하나 이야기하겠다. ‘윤회는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명제다.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씩 드리겠다.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을 것이다. 내가 제안한다. 내가 빌게이츠인데 당신에게 100억 원을 당장 준다. 단 조건은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 기억은 다 잃고 갓난아기 같은 백지 상태로 돌아간다면 수락하겠는가? 여러분은 수락하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사림이 즉각 거부한다. 어떤 사람은 “죽는 것과 같다. 난 안한다.” 이런다. 윤회라는 것은, 다시 태어나도 지구상에 자기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달라이 라마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가 어렸을 때 기억한 거 같은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데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면 그 윤회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이런 근본적 질문을 하는데 어느 누구도 반박을 하거나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없다. 이게 첫 번째다.

두 번째, 마음이 수단으로 쓰는 것이 뇌이지 않은가 하는 것은 정확히 심신이원론이다. 마음이 따로 있다고 얘기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냐면 불교에서 안근(眼根)이 안경(眼境)을 만날 때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돼 있다. 안식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안근이 안경을 만날 때 안식이 생긴다 한다. 이건 현대과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물체에서 나온 빛이 우리 망막을 때릴 때 생체전기가 발생한다. 생체 전기가 열심히 달려 우리 시각중추로 가면 본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전기가 열심히 달리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전기를 넣어 작동하기 전까지 컴퓨터는 그냥 죽은 물건인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안식이라는 게 미리 우리 두뇌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마음이 뇌를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볼 때 ‘마설(魔說)’이다. 부처님 근본 사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티베트불교를 귀신불교라 부른다. 귀신불교인 티베트불교엔 국가 신탁이 아직도 있다. 티베트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무당 같은 이가 존재한다. 귀신불교 입장에서 영육 이원론을 이야기한다. 영, 마음이 육, 뇌를 움직인다. 불교의 가르침과는 십만 팔천 리는 어긋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방편설로 여래장 충분히 의미 있다”

김준영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가 존 카밧진 교수에게 ‘마음이 사용하는 기관으로서 뇌’의 가설을 세울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에 감사한다. 왜냐면 그래서 탄생된 MBSR이라는 의료명상에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여래장사상은 방편설이라 생각하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수행 측면, 실제 공부하는 데서도 그렇고 자기 상대적 대비적으로도 그렇고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데 여래장사상이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방편설로서 여래장사상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강 교수님에게 고맙다.

우희종 : 나는 윤회 유무에 대해 믿지만, 또 믿지 않는다. 개인이 죽어서 나쁜 짓하면 개가 되고 돼지가 된다는 그런 윤회는 믿지 않는다. 방편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한 것처럼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윤회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직선적 시간 속에서 윤회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한 육근 세계에서 내가 태어나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시작과 종(끝)으로 이어지는 직선적 시간 속이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현장에서 존재하는 순간 마음은 육도 윤회를 하고, 몸 또한 이 세계와 열린 상태에서 단 한 순간도 윤회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정리하면 좋겠다.

뇌가 마음이라고 하니까 다양한 개념이 들어와 혼란스럽지만, 예를 들어 손이 물건을 쥔다. 물건을 쥐고 글 쓰는 것이 손이 하는 것인가? 뇌가 시켜서 하는 것이다. 그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뇌가 뭐 생각하고 한다는 데 이것 역시 마음, 그 무엇의 표현력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굉장히 과학적 자세다. 지금의 과학 수단,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또 다른 논의이다. 저에게 그 질문은 매우 소중하다. 개인적으로도 손 자체가 쥐는 게 아니라 뇌가 지시해서 손이 그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물건을 쥐는 것은 아니다. 뇌도 그 무엇에 의해서 변하는 기관일 수 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열어놓고 있다.

“강 교수 윤회 비판은 힌두교 윤회 비판”


▲ 강 교수의 윤회불교 비판을 재비판하는 보성 정사(진각종).ⓒ불교닷컴

보성 정사(진각종) : 수행적 측면과 학문적 측면에서 무아(無我), 아(我)를 알아야 한다. 아를 모르고는 무아를 알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강병균 교수는 참나를 유아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진정한 참나는 무아라고 알고 있다. 참나는 무아적인 참나다. 나는 그런 이론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강 교수의 참나에 대한 해석은 유아적인 참나이다. 개념적 정의가 너무 과학적으로 치중돼 있고, 한편으로는 단순하지 않나 비판해 본다.

윤회는 불교 탄생 이전에 브라만에서 나온 단어이고 교리적 체계이다. 강 교수는 윤회라는 것을 불교가 받아들이면서 힌두교적인 윤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하는데, 불교적 윤회와 힌두교적 윤회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대승불교, 밀교로 넘어오면서 힌두교적 윤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대부분 말씀하신 것이 힌두적인 윤회다. 강 교수의 윤회에 대한 비판은 힌두교적 윤회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한다.

강병균 : 정사님 질문이 충격적이다. 첫째는 한국 선사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눈이 보느냐. 아니다. 마음이 본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반격을 한다. “눈이 본다면 어떻게 송장은 보지 못하는가?”, “마음이 보는가? 그러면 왜 송장이 보지 못하는가?”, “봉사는 마음이 있는데 왜 보지 못하는가?” 내게는 항상 원칙이 있다. ‘간단한 질문에 답을 못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원칙이다.

서암 전 종정 스님은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는 이 주인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존재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 영원히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한국 모든 선사들도 만장일치이다. 참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이상화해서 만든 용어가 아니다.

힌두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의식을 네 가지로 나눈다. 각성시 의식, 꿈꿀 때 의식, 숙면시 의식, 투리야 의식 네 가지 이야기하다. 투리야는 브라만의 의식이라고 얘기한다. 참선하면서 자기가 겪는 의식 상태를 참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한국에 힌두교 성자들이 인기 있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하나는 스님들은 청담 스님도 그렇고, 대부분 선사들은 생각은 참나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 참나는 실체다. 결코 방편설,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정확히 자기 몸 끌고 다니는 실체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윤회 말씀하지 않았다니…”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 비판에 혼란스럽다는 한 불자.ⓒ불교닷컴

방명숙(직장인) : 재가자로 혼란스러울 때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그때마다 무한한 생을 달려왔고 다시는 집을 짓지 않겠다고 했다. 힌두교적이든 대승불교적이든 윤회하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나라는 실체가 이어진다는 생각은 안하지만 연기법, 존재의 실상이라는 거 뭔가 연결된 연기식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득한 선정 명상의 단계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과 종류가 달랐다는 것인가. 그런 여러 가지를 꿰뚫어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윤회를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강병균 : 부처님이 보통 ‘견명성 오도’했다고 한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됐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고 밤새 사유하다 새벽이 온 것이다. 깨달음 얻었을 때 그때가 새벽이었다가 맞는 말이다. 초기경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라고 나온다. 내가 참나를 찾았다 이런 말은 절대 없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얘기한 것이 전부 거짓말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만약 참나를 깨달았다면 브라만교의 브라흐만을 깨달았다는 것과 같다.

선정 단계 이야기기했는데, 부처님이 처음에 색계 사선정을 버렸다. 그런데 색계 사선정의 특징은 일선에는 심이 있고, 이선에서 사가 있고 이런 식이다. 심사희락정으로 간다. 심사는 사유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나에게 사유력, 정진력, 인내력이 없었으면 나의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일주일 동안 버티시며 사유를 하신 결과 나온 게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법에 의한 종교이지 참나를 깨닫는 종교가 아니다. 어디서 이런 무지막지한 참나가 나왔는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분명히 연기법에 의한 깨달음이다. 연기법에 의한 측면으로 보면 소위 윤회라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꼭 자아 정체성이 다음 생으로 간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같으면 유전자가 있다. 사실은 부처님 생사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닌다. 부처님의 DNA만 복원하면 32상 80종호를 복원할 수 있다. 네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유전자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추적을 하면 언젠가는 32상 80종호를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DNA를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통도사 사리에는 DNA가 없다.

그리고 무형의 유전자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온 동양, 서양에 퍼져 있다. 그것이 부처님의 정신적 사리이다.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정신적인 사리이지 육체적인 사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유전자가, 정신적 유전자가 세상에 퍼진다, 그런 것을 윤회로 해석을 해야지, 좁은 의미의 윤회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좁은 의미의 윤회는 철저히 개인주의다. 내가 복을 지어서 다음에 좋은 몸을 받겠다는 것이지 내가 좋은 업을 지어서 일체중생이 해탈을 얻겠다가 아니다. 대승불교는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설한다. 아무 연 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그것은 내가 윤회를 못하더라도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연자비이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윤회라는 것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다. 갓난아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회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즉 자기가 하는 행동이 민족, 동양, 인류, 생명계에 얼마나 기여하고 무연자비를 베풀 수 있느냐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네가 다음에 윤회 한다 안 한다, 네가 고생 안하려면 복을 쌓아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처님을 크게 폄훼하는 거라 생각한다.

“무아, 윤회 논쟁 지금 무슨 쓸모가 있나”


▲ 이혜숙 금강대 교수는 교리 논쟁 보다 현실적으로 무엇을 실천할 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불교닷컴

이혜숙(금강대 객원교수) : 유아냐 무아냐, 윤회가 있냐 없냐 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윤회를 믿는 사람이면 다르게 사는가, 안 믿으면 또 다르게 사는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어느 법회에 가든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지금 물 맞아 죽은 노인이 있다. 그 일은 윤회를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안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대한민국이 정신 건강이 매우 나빠서 죽고 살기가 날마다 세계 1위인데, 여기 진지한 불자들은 그 아파서 혼자 죽는 그 수행에 대해서 무아며, 혹은 무아가 아니며, 어떻게 하시는 건가. 그거 생각해보자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박병기 : 박광서 교수에게 총평을 듣겠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 총평을 하는 박광서 종자연 상임대표.ⓒ불교닷컴

박광서(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임대표) : 우리가 불교라는 것을 인연으로 만났다면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고, 그것이 사는데 힘이 됐으면 좋겠고, 학술적으로도 불교에 대한 확신이 섰으면 좋겠다. 더 나가야 간다면 이혜숙 교수의 말처럼 우리들이 여기서 이런들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더 고민해야 한다. 오늘은 좁고 깊게 교리에 대한 논의가 되겠구나 그런 바람 가지고 왔다. 이혜숙 교수 말처럼 큰 바람은 없었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과격하고 때로는 끊으면서 자극을 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불교를 믿는가. 나는 왜 불교를 믿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봤으면 한다. 불교공부는 3개월만 하면 끝난다. 그 다음엔 연습하면 된다. 그 다음엔 불교 공부한 것으로 연습해야 한다. 평생 가정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일에서 연습해야 한다. 그걸 안하고 평생 배우다 내생까지 미루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박병기 : 불교는 신앙이 아닌 신행이 기본이다. 신행은 행, 삶, 실천이 중심이다. 과연 우리가 불교적 믿음에서 신행에 충실하고 있는지, 충실하기 위해 교리공부하고 있는지, 교리공부 자체가 독립된 목표가 된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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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9

한국 불교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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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역사 또는 한국 불교사는 한국에서 전개된 불교의 역사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에 전래된 것은 372년에 고구려에 전래된 것이다. 이 글은 이때부터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한국에서의 불교의 전개를 서술하고 있다.

목차


1삼국 시대 (372~676) 
1.1불교의 전래 
1.2고구려 (372~668) 
1.2.1불교의 고구려 전래 
1.2.2고구려 불교의 특징 
1.2.3고구려 불교의 일본 전래 
1.3백제 (384~676) 
1.3.1불교의 백제 전래 및 전개 
1.3.2백제 불교의 특징 
1.3.3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 
1.4신라 (263/479~661) 
1.4.1불교의 신라 전래 및 전개 
1.4.2진흥왕과 불교 정책 
1.4.3밀교의 전래 
1.4.4신라 불교의 특징 
1.5인도 구법순례승의 활동 
2남북국 시대의 신라 (661~935) 
2.1시기 구분 및 역사 
2.1.1전성기 (661~780) 
2.1.2침체기 (780~826) 
2.1.3선법전래기 (826~935) 
2.2전성기의 주요 승려 
2.2.1원효 
2.2.2의상 
2.2.3원측 
2.2.4기타 
2.3승관 제도 
2.4신라원과 적산 법화원 
2.5사원 경제 
2.6사원 노비 
3고려 시대 (918~1392) 
3.1고려 전기·중기 (918~1101) 
3.1.1고려 전기·중기 불교의 개요 
3.1.2고려 태조와 불교 
3.2고려 중기·후기 (1101~1392) 
3.2.1고려 중기·후기 불교의 개요 
3.2.2사원경제 
3.2.3교단의 문란 
3.2.4배불론의 대두 
3.3고려시대 불교의 종파 
3.3.1고려 불교의 종파 
3.3.2의천과 천태종의 성립 
3.3.3지눌과 조계종지의 성립 
3.3.4보우와 구산선문의 통합 
3.4대장경 조판 
3.4.1초조장경 
3.4.2재조장경 
3.5승과제도 
3.6승록사 
3.7법회 
4조선 시대 및 대한제국 (1392~1910) 
4.1조선 시대 불교의 개요 
4.2조선 전기 (1392~1506) 
4.2.1조선 전기 불교의 전개 
4.2.2조선 태조와 불교 
4.2.3배불정책 
4.2.4종파의 폐합 
4.2.5세조의 호불정책 
4.3조선 중기 (1506~1637) 
4.3.1조선 중기 불교의 전개 
4.3.2문정왕후와 보우 
4.3.3휴정과 유정 
4.3.4간폐석교소 
4.4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1637~1910) 
4.4.1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불교의 전개 
4.4.2선문수경과 선론 
4.4.3미타신앙 
4.4.4승려 입성의 해금 
4.4.5승단의 국가관리 
4.4.6불교연구회 
4.4.7원종의 성립 
4.4.8이판승과 사판승 
5일제 강점기 (1910~1945) 
5.1일제 강점기 불교의 전개 
5.2임제종 
5.3사찰령과 교단의 체제 
5.430본산연합회 
5.5총무원과 종무원 
5.6조계종의 성립 
5.7불교지의 간행 
6현대 (1945~현재) 
7같이 보기 
7.1관련 주제 
7.2주요 승려 
7.2.1삼국시대 
7.2.2고려시대 
7.2.3조선시대 
7.3주요 불교 서적 
7.4기관 
8참고 문헌 
9각주 
삼국 시대 (372~676)[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삼국 시대의 불교입니다.
불교의 전래[편집]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인 공식 기록일 뿐, 불교가 이 보다 먼저 전해졌으리라는 것을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양고승전(梁高僧傳)》(519) 등의 문헌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직접 들어오지 않고 중국[1]을 거쳐 들어왔으며 또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불교가 8~9세기라는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4세기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에서, 한국에 전래된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 불교와는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사항이다.


당시 전래된 불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전까지 한국의 민간에서 믿어 온 고유한 민간신앙인 무속신앙이나 도교와 별다른 마찰 없이 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이 초기 전래시 고구려와 백제 보다는 고유 신앙의 융합에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372~668)[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의 불교입니다.
불교의 고구려 전래[편집]


불교의 고구려(高句麗) 전래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2년 후인 374년에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혹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한국 사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고국양왕 8년(391)에 "불법을 믿고 받들어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다음 해인 광개토왕 2년(392)에는 평양에 9사(寺)를 세웠다. 이 밖에도 구법(求法)과 전교(傳敎)의 고승들이 나라 밖에까지 나가 많은 활동을 하였다
고구려 불교의 특징[편집]


고구려의 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 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 fl. 500년 전후)을 들 수 있다. 승랑은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新三論)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2] 승랑의 사상은 승전(勝詮) · 법랑(法朗: 507~581[3]) · 길장(吉藏: 549~623)으로 이어졌으며, 길장에 의해 새 종파인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승랑은 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4]


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 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관(惠灌)은 (隋)의 길장(吉藏: 549~623)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으로 가서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을 널리 펴서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2]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일이다. 또한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로 가 승통(僧統)이 되어 신라 불교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고구려 불교의 일본 전래[편집]


고구려 승려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한 최초의 인물은 혜편(惠便: fl. 584)이었다. 그는 일본 비다츠(敏達) 13년(584)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사마달(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그밖에 선장(禪藏) · 혜선(慧善)의 세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켰으며,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 불교사상 비구니 출가의 효시가 되었다.[5]


영양왕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간 혜자(惠慈)는 일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덕태자(聖德太子) 풍총(豊聰)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혜자는 일본 불교의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혜자는 삼론학(三論學)을 위시하여 《법화경》·《유마경(維摩經)》·《승만경》과 같은 난숙한 발달을 보인 대승경전을 가르쳤는데, 후일 성덕태자가 불교정신을 뒷받침으로 한 정치를 베풀 때 이러한 불교정신이 통치 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 발전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5]


같은 영양왕 때 일본으로 간 담징은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하였고 채색(彩色), 지묵(紙墨), 공예(工藝)에 능하여 일본 미술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의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류왕 8년(625)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은 일찍이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 밑에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 불교의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三論宗)을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5]


같은 왕대(王代)의 도등(道登)도 일찍이 (唐)나라 길장 밑에서 삼론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을 강술(講述)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도현(道顯)도 일본에 가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수(敎授)하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책자를 몇 권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승려들의 이름 이외에도 망각된 고승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되며, 고구려 불교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문화 전반에 걸친 광범한 것이라고 믿어진다.[5]
백제 (384~676)[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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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백제 전래 및 전개[편집]


백제(百濟)에는 불교가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들어왔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동진(東晋: 317~420)으로부터 왔는데 왕이 직접 환영하여 맞이하였고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며 예로써 공경하였다. 다음 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명을 양성했다. 왕이 외국의 승려를 직접 맞이하였고 궁중에 있게 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그 이전부터 불교가 전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6]


그 뒤 140년쯤 지나 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 때에 이르러 불교는 크게 번창했다. 왕은 겸익(謙益)을 인도에 보내어 계율을 연구하게 했는데, 526년 산스크리트어본의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오자 국내의 고승들을 불러 겸익을 도와 번역하게 하고 주석서를 짓게 했으며, 왕이 몸소 서문을 썼다고 한다. 성왕 23년(545)에 장륙(丈六) 불상을 조성,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해탈하기를 기원했다. 동 30년(552)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으며, 이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시초이다. 그때 백제는 여러 가지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불교를 전함으로써 백제의 승려와 예술가와 기능공들이 건너가 일본의 문화를 크게 일으켰다. 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다.[2]


법왕 1년(599)에는 나라 안에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널리 방생(放生)을 행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연장을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이듬해 수도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웠고, 무왕때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탑을 조성했는데,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寺塔)이 많았었다는 사실이 중국의 문헌에도 전해지고 있다.
백제 불교의 특징[편집]


백제의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 예술 불교, 외교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2][7]


인도로 유학하였던 겸익(謙益: fl. 526)은 백제 성왕 4년(526년)에 인도 상가나대률사(常伽那大律寺)에 이르러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율부(律部)를 깊이 공부하고, 백제 성왕 9년(531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 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했다.[7][8][9] 귀국 시에 겸익은 성왕의 환대를 받았으며, 그 후 흥륜사(興輪寺)에 있으면서 명승 28명을 소집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7] 당시에 중국에는 《오부율(五部律)》 중 음광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파의 율부들은 이미 번역되어 있었다.[10] 그러나 끝내 음광부의 율부는 중국으로 전해지지 못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백제에 《오부율》 전체가 전해지고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율부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11] 겸익의 이러한 활동에 의해 계율 중심의 백제 불교의 특징이 이루어졌다.[7] 중국에서 율종이 성립된 때는 당나라의 도선(道宣: 596-667)이 법장부의 《사분율(四分律)》을 강설하고 저술한 624년인데,[10] 백제에서 겸익에 의해 율종이 성립된 때(526년경)는 이보다 1세기 앞선 것이다.


백제는 성왕 30년(552)에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래시켰으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특히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는 고승들과 불공(佛工)들을 보냈고, 30년에는 일본왕이 고승 파견을 요청하여 일라(日羅)를 파견하였다. 그 후 무왕 3년(602)에 관륵(灌勒)이 각종 역서(譯書)를 가지고 가서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으며 아울러 탁월한 불교 예술을 진작시켰다.[2]
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편집]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한 때는 성왕(聖王) 30년(552)이었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달솔(達率)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파견하여 금동석가상(金銅釋迦像)과 미륵석불(彌勒石佛) 및 번개(幡蓋) · 경론(經論)을 보낸 것이 일본 불교의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일본 군신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소아마자(蘇我馬子)만이 이를 예경(禮敬)하였는데, 석천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만들고 이를 모셨으나 그 용도나 의미는 몰랐다. 그때 일본(日本)에 와서 있던 고구려 승려 혜편(惠便)을 발견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세 사람의 여자 승려(尼僧)를 배출하였고,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사마달과 함께 최초의 일본 불교신자가 되었다. 곧이어 2년 후 성왕은 담혜(曇惠) 등 9인의 승려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심(道深) 등 7인과 교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을 위시한 7인의 백제 승려가 집단적으로 이미 일본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2]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比丘尼) · 주금사(呪禁師) · 불공(佛工) · 사장(寺匠)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에서는 그들을 맞아 난파(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라(日羅)라는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크게 일으키고 또 동(同) 35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사공(寺工) · 화공(畵工) · 와장(瓦匠) 등을 보냈으며, 일본(日本)에서는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백제(百濟) 승려(僧侶)를 청하여 수계(受戒)하는 법을 묻는 등 백제와 일본 간의 교류는 빈번하였다. 이때 일본 최초의 비구니(比丘尼)인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로 건너와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으며, 같은 해(588)에 혜총(惠聰) · 영근(令斤) · 혜식(惠寔) 등의 사문(沙門)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일본에 보냈다. 이 일행 가운데 혜총은 계율에 정통하여 그곳 대신인 소아마자에게 수계를 행하였다. 이밖에도 당시 도일(渡日)한 승려로는 영조(聆照) · 영위(令威) · 혜중(惠衆) · 혜숙(惠宿) · 도엄(道嚴) · 영개(令開) 등을 들 수 있다.[12]


무왕(武王) 3년(602)에는 관륵(灌勒)이 천문(天文) · 지리 · 역서(曆書) · 둔갑(遁甲) · 방술(方術) 분야의 책을 일본에 전했지만 그는 본래 삼론(三論)의 학장(學匠)으로 그곳에서 일본 최초의 승정이 되어 승단의 기강을 정하는 등 불교계의 지주가 되었다. 그는 또 일본 의학의 시조로도 불린다. 그 후 혜미(惠彌) · 도흠(道欽) · 의각(義覺) · 도장(道藏) · 도녕(道寧) · 다상(多常) · 원각(願覺) · 원세(圓勢) · 방제(放濟) 등 많은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 문화 시대(飛鳥文化時代: 538~710)를 꽃피운 인물들이 되었다.[12]
신라 (263/479~661)[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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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신라 전래 및 전개[편집]


고구려와 백제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불교가 받아들여졌지만, 반도의 동남쪽에 자리잡아 대륙과의 소통도 없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신라에는 백제보다 수십 년 늦게 불교가 전해졌다.


최초의 전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 2년(263)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또 2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은 포교했다는 설,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부터 들어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善山)) 에 있는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다는 점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의 차이점인데 이런 점에서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6] 그러나 그 전래는 완고하고 배타적인 집권계층의 반대에 부닥쳐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법흥왕(재위 514~540)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오게 하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여 즉위 초부터 국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고심했다. 그러다가 불교 신자요 젊은 신하인 이차돈(503~527)의 순교로 인해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공포하고 연호를 세우고 문물을 개발하는 등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왕이었다. 그는 불교 신앙을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국가적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 발전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 불교가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때부터로, 이는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 5년(544)에 선왕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이 있는 자는 승려가 되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반에게 출가를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진흥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짓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진흥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거한 청소년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국민 정신의 함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 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여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 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진흥왕과 불교 정책[편집]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신라에 처음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때부터였으나 불교를 진흥, 발전시켜 국가종교로까지 이끈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에 의해서였다. 그의 치세중의 불교 진흥을 위한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자신도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말년에 사문(沙門)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고 부인 역시 영흥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재위 동안의 불교 업적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13] 
왕 5년(544)에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었고, 3월에 비로소 출가(僧尼)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황룡사(皇龍寺) · 지원사(祗園寺) · 실제사(實際寺) 등 여러 사원들을 계속 새로 세웠으며, 왕 27년(566)에 낙성된 황룡사는 13년 동안에 걸쳐 조성된 거찰(巨刹)이었다. 
왕 10년(549) 봄에 각덕(覺德)을 위시한 유학승(留學僧)들이 계속 귀국하였고, 이때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경전(經典)을 들여왔다. 
왕 11년(550)에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여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으로 삼았다. 왕 12년(551)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승 혜량(惠亮: fl. 551)을 승통(僧統)으로 임명, 교단을 지도 · 육성케 하고 이 승통 밑에 대도유나(大導唯那) · 도유나랑(都唯那娘) 등을 두고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였다. 
왕 12년(551)에 승통(僧統)인 혜량(惠亮: fl. 551)에 의해 인왕백고좌법회(仁王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시작되었다. 인왕백고좌법회는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의 내용에 따라 국가의 안태(安泰)를 기원하고 내란(內亂)과 외환(外患)을 소멸시키기를 비는 법회였으며, 팔관회는 본래 하루하나의 계(戒)를 닦는 법회였으나 신라에서는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였다는 점에서 인왕백고좌법회와 함께 팔관회는 국가의 현실적인 의도와 이익에서 베풀어진 법회들이었다. 
왕 26년(565)에 (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귀국할 때 1700여 권의 경전을 들여왔다. 
왕 35년(574)에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성(鑄成)하였다. 
왕 37년(576)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인도의 승려 비마라(毘摩羅) · 농가타(農伽陀) · 불타승가(佛陀僧伽) 등이 그를 따라 입국하였고 이때 《능가경》·《승만경》 등 발전된 대승경전을 왕에게 바쳤다. 


이 밖에도 진흥왕은 재위시 신라 국민사상의 총화를 이룬 화랑도(花郞道)를 제정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진흥책은 진흥왕으로 하여금 정교일치(政敎一致) 정책을 써서 불국토(佛國土)를 신라 사회에 현실화시키려 했고, 왕 자신도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에 심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라 사회에서의 불교 발전은 진흥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13]
밀교의 전래[편집]







밀교의 태장계 만다라







밀교의 금강계 만다라


신라에 밀교(密敎)가 처음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4년(635)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승려 자장(慈藏)의 외숙(外叔)으로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 신인비법(神印秘法) 혹은 문두루비법(文頭婁秘法: Mantra)이라는 방위신(方位神)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주술적인 신앙을 들여왔다. 밀교는 대승불교를 난숙하게 발달시켜 타력신앙(他力信仰)을 강조하다 파생된 신앙형태로서, 주술을 통해 병귀(病鬼)와 악귀를 쫓고 초자연적 힘을 구사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등 실리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교파이다.[14]


명랑은 이러한 밀교를 신라에 처음 전래하여 신인종(神印宗)의 종조가 되었고, 같은 시대의 밀본(密本)도 비밀법(秘密法)을 통해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유하여 밀교 전파에 공헌하였다.[14]


그 후 혜통(惠通)은 당나라에서 인도 밀교승 선무외(善無畏)에게 밀교 교의를 배운 다음 문무왕 5년(665)에 귀국하여 크게 교풍(敎風)을 일으켰다. 후대에 혜통을 진언종(眞言宗)의 조사로 삼을 정도로 그의 밀교 전파에 대한 공로는 큰 것이었다. 혜통 이전까지 전래된 밀교는 잡밀교(雜密敎)여서 주술적인 면이 강조된 반면, 혜통은 영묘사승(靈妙沙僧)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순밀교(純密敎)를 처음 신라에 전하여 태장법(胎藏法)과 금강법(金剛法)에 의해 불교의 오의(奧義)를 터득하는 길을 열었다.[14]


신라 후대의 불교신앙은 미신과 결부된 주술적 밀교신앙이 횡행하여 본래의 탄력을 잃고 타락적인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14]
신라 불교의 특징[편집]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경향이 강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국민을 단합시켰던바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황룡사 9층탑(九層塔) 건립, 사천왕사(四天王寺) 건립 등이 있으며, 특히 세속오계(世俗五戒) 등은 모두 불교정신에 의해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2]


팔관재회는 불교를 배우기 위한 범국민적 집회였으며, 백고강좌는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의 호국적인 사상을 익히는 법회였으며, 황룡사 9층탑 건립은 자장(慈藏: 590~658)이 중국에 가서 본국의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여성으로서의 연약한 면을 보좌하고 국가 권위를 세울 것을 암시받고 돌아와 인접 9개국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9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또한 불교를 보호하는 동서남북의 사천왕(四天王)이 신라를 호위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원광(圓光: 542~640)의 세속오계는 호국의 표준이념이 되었다. 또한 원승(圓勝), 혜숙(惠宿: fl. 600[15]), 혜공(惠空: fl. 7세기 후반) 등 많은 고승들이 나와 능히 삼국을 통일(676년, 문무왕 7년)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길러 왔다.[2]
인도 구법순례승의 활동[편집]


백제의 겸익(謙益)이 삼국시대에 구법(求法)순례를 위해 인도를 방문한 이래 많은 승려들이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로 떠났다. 삼국 통일기(676)를 전후하여 이들 유학승(留學僧)의 수는 급격히 증가되었으나 그들은 거의 대다수는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일부는 인도에서, 일부는 귀국 도중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16]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는 (唐) 정관년간(貞觀年間: 627~649)에 장안(長安)을 떠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에 들어갔다. 당시 불교학의 최고학부인 인도 나란타사(那爛陀寺 · Nalanda)에 머물면서 연구하다가 70여 세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혜업(慧業)도 같은 시기에 나란타사에 머물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60여 세로 일생을 마쳤다. 현각(玄恪)은 당나라 승려 현조(玄照)와 함께 인도로 들어가 대각사에서 공부하다가 40세를 겨우 넘어 병으로 죽었다.[16]


현태(玄太)는  영휘년간(永徽年間: 650~655)에 티베트 방면을 통해 중인도(中印度)에 들어가 고타마 붓다가 대각(大覺)을 얻은 부다가야(佛陀伽耶 · Buddhagaya)의 보리수를 참배하고 이어서 그곳 대각사(大覺寺)에서 연구를 한 다음 다시 당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그 후 무엇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혜륜(惠輪)은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던 승려로, (唐) 인덕(麟德) 3년(666)에 인도에 들어가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간 유학을 마친 다음 토카라 지방(Tokharistan: 현재의 발크(Balkh))의 사원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구법순례 도중 수마트라(Sumatra)섬 서해안 파로사국(婆魯師國 · Baros)에서 병사한 2인의 신라 유학승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16]


대범(大梵)은 신라 무열왕(재위 654∼661) 때 인도 대각사에서 연구를 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중국 불교계를 위해 공헌하였다. 원표(元表)는 경덕왕 때 입당(入唐)한 후  천보년(天寶年)에 다시 인도로 들어가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으로 돌아왔다. 귀국시 그는 《화엄경(華嚴經)》 80권을 가지고 왔으며 지제산(支提山) 석실(石室)에 들어가 고행(苦行)과 연구를 계속했다.[16]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로 유명한 혜초(慧超: 704~787)는 일찍 당나라에 들어가 당시 인도에서 나와 있던 고승 금강지(金剛智 · Vajrabodhi)에게서 사사(師事)하다가 인도로 들어갔다. 그는 벵골만(Bengal灣)에 있는 니코바르 군도(Nicobar群島)를 거쳐 인도에 들어갔고, 거기서 갠지스강(Ganges江) 유역 비하르(Bihar) 지방의 마가다국(Magadha國), 고타마 붓다의 열반지(涅槃地)인 쿠시나가라국(Kusinagara國)과 성도지(成道地)인 부다가야 등의 성지를 순방하고 중인도 · 남인도를 거쳐 서인도 · 북인도를 두루 순방하고 나서 토카라국을 거쳐 아무다리아강(Amudarya江)을 지나 사마르칸트(Samarkand) 지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파미르(Pamir) 고원을 넘어 동튀르케스탄(東Turkestan)을 거쳐 타슈켄트(Tashkent)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국(Kucha · 龜慈國)으로 돌아왔으니 이때가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이었고 신라 성덕왕(聖德王) 26년이었다. 으로 돌아온 후 혜초는 금강지(金剛智)와 그의 제자 불공(不空 · Amoghavajra)에게 밀교(密敎)를 배우며 밀교 경전을 번역하다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죽었다.[16]


혜초의 이 기록은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Paul Pelliot)에 의해 1910년 둔황(敦惶) 명사산(鳴沙山) 천불동(千佛洞) 석실(石室)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그의 《왕오천축국전》에 의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혜초의 이 기행기는 동서 문화교섭사의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의 인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종교 · 풍습 · 인종을 알려주는 희귀한 문헌 중 하나가 되었다.[16]
남북국 시대의 신라 (661~93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남북국 시대의 불교입니다.
시기 구분 및 역사[편집]


남북국 시대의 신라 불교를 크게 3분하면 다음과 같다.[17] 
전성기(全盛期): 문무왕(재위 661~681)에서 혜공왕(재위 765~780) 때까지 
침체기(沈滯期): 선덕왕(재위 780~785) 때부터 헌덕왕(재위 809~826) 때까지 
선법전래기(禪法傳來期): 흥덕왕 원년(826)에서 신라 멸망기(935)까지 
전성기 (661~780)[편집]


남북국 시대 신라 불교의 전성기(全盛期)는 문무왕(재위 661~681)에서 혜공왕(재위 765~780) 때까지로서 수많은 학승(學僧)을 배출하여 대승(大乘)의 종파와 교학이 크게 일어나게 된 학해불교(學解佛敎) 문화의 극치를 이룬 시기이다.[17]


신라는 제30대 문무왕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 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여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 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전성기에는 많은 고승들이 속출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원효(元曉) · 의상(義湘) · 원측(圓側) 등이 있다.[17]
침체기 (780~826)[편집]










가지





실상





희양





봉림





동리





성주





사자





사굴·도굴





수미


v • d • e • h선종 구산(9산선문) 



남북국 시대 신라 불교의 침체기(沈滯期)는 선덕왕(재위 780~785) 때부터 헌덕왕(재위 809~826) 때까지로, 불교(佛敎)가 국가사회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 시기이다.[17]


35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에까지 활발했던 신라불교는 그 후 점점 침체되어 갔다. 이 무렵에 직절 간명한 선(禪)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새로운 선풍(禪風)은 중국에서 달마 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독특한 선종(禪宗)으로 성립 · 발전된 것이다. 중국의 선종이 6조(六祖)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러 북선(北禪)과 남선(南禪)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가 극성할 무렵 신라 학승들이 선법을 배워 온 것이다. 신수(神秀: ?~706)의 북선(北禪)은 흔적만 남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6조 혜능의 남선(南禪)은 크게 일어나 신라의 선종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선법전래기 (826~935)[편집]


남북국 시대 신라 불교의 선법전래기(禪法傳來期)는 흥덕왕 원년(826)에서 신라 멸망기(935)까지로서 실천활동으로서의 선불교(禪佛敎), 특히 중국의 달마선(達摩禪)이 전래, 성행하게 된 시기이다.[17]


한국에 전해진 선법은 6조 혜능의 남선(南禪)의 후손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전법자가 도의(道義: d. 825)이다. 그는 선덕왕(宣德王) 5년(784)에 으로 가서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고제자 서당(西堂) 지장(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현덕왕 23년(831)에 귀국,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설(魔說)이라고 거부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니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 804~880/890)에게 법을 전했다. 설악산에서 도의(道義)의 법을 배운 체징(體澄)은 837년에 에 건너갔으나 실망하고 840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쳤다.[18] 이로써 선종 9산의 일파로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되었다.[18] 이렇게 해서 9산선문(九山禪門)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전성기의 주요 승려[편집]







신라 불교 전성기의 대표적인 인물 의상


신라 불교의 전성기(661~780)는 또한 한국 불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황금기이기도 하다. 이 때의 주요한 승려로는 원효 · 의상 · 원측이 있으며, 이들의 사상과 활동은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원효는 신라 불교는 물론이요 한국 불교의 가장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19][20]
원효[편집]


원효(元曉: 617~686)는 45세때(문무왕 원년, 661의상(義湘)과 함께 에 가던 도중 참된 법을 체험하고 도중에 돌아와 저술과 교화에 힘쓰다가 신문왕 6년(686)에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은 240여 권이라는 방대한 규모이며 오늘날 20부 22권의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중심사상은 일심사상에 의한 원융회통(圓融會通)으로, 모든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서로 상통하는 원리를 구현시키고 있다.[17]
의상[편집]


의상(義湘: 625~702)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의 문하에서 학명을 떨치고, 문무왕 11년(671)에 돌아와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여 화엄교학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3000여 제자가 운집했으며 그 중에 뛰어난 제자 10인을 상문10덕(湘門十德)이라고 했다. 원효는 교화 · 연구 · 저술에 힘쓴 반면 의상은 후진교육 · 교단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17]
원측[편집]


원측(圓測: 613~696)은 왕손으로서 15세때 에 유학하여 고승들에게 유식론(唯識論)을 배우고 산스크리트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당 태종에게서 도첩(圖牒)을 받고 유가론(瑜伽論) · 유식론(唯識論)을 강의했다. 그는 규기(窺基)의 전통적 유식사상보다 앞선 대가였다.[17]
기타[편집]


이 밖에도 성덕왕(재위 702~764) 때의 혜초(惠超), 경덕왕(재위 742~764)때의 대현(大賢) · 진표(眞表), 고구려 출신의 승려 보덕(普德) · 혜량(惠亮) 등의 고승들이 있었다.[17]
승관 제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승관 제도입니다.


승관 제도(僧官制度)는 신라 시대 사원(寺院) 및 교단(敎團)을 통솔하기 위한 승직제도(僧職制度)이다. 이 제도가 언제 누구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그 직무가 무엇인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직계(職制)가 존립했었음을 알 수 있다.[21] 
국통(國統) 또는 승통(僧統) 
대서성(大書省) 
소서성(小書省) 
대도유나(大都維那) 
도유나랑(都維那娘) 
주통(州統) 
군통(郡統) 


이 밖에 국통 밑에 군승정(軍僧正)이 있었고, 9명의 주통과는 달리 절주통(節州統)이 있었다.[21]


원성왕 원년(785)에 정관(政官, 혹은 政法典)이 설치되었고 그 장(長)을 정법사(政法事)라 하였는데, 이들 승관(僧官)은 행정사무를 관장하는 한편 국민교화의 지도자로서의 직분도 부여받았으며, 또 군사적인 기능까지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비롯한 7개 사원에는 그 사찰의 운영과 영선(營繕)을 맡아보는 사성전(寺成典)을 두었다.[21]
신라원과 적산 법화원[편집]


남북국 시대 신라와 (唐)의 교역이 성하던 산둥반도(山東半島)와 장쑤성(江蘇省) 등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설치되었던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 하며 이곳에 세운 사찰을 신라원(新羅院)이라 한다. 신라원은 재당(在唐) 신라인의 신앙 의지처이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예배처였다.[22]


흥덕왕(재위 826~836) 때 장보고가 산둥반도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華院)은 특히 유명했던 신라원이다. 이 적산 법화원은 해외 포교원(布敎院)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내지(內地)와의 연락기관 구실도 하여 신라의 도당승(渡唐僧)은 물론 일본 승려들이 이곳을 거치며 많은 도움을 입었다. 일본 천태종의 승려 엔닌(圓仁)은 그 좋은 예다. 적산 법화원은 많은 재력(財力)을 갖고 있었으며 담표(曇表), 법청(法廳), 양현(諒賢), 성림(聖琳) 등 30여 명의 승려들이 상주하였고, 그 중에는 궤범(軌範), 혜각(惠覺), 법행(法行), 충신(忠信) 등의 선사(禪師)들도 있었다. 연중행사로서 신라의 예를 따라 8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간의 축제를 열고 또 정기적인 강경회(講經會)를 여는 등 활발한 불교행사를 행하였다.[22]
사원 경제[편집]


사원 운영을 위한 재원(財源)은 신도들의 재물(財物) 시납(施納)에 의존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사원경제가 형성되었다. 사원의 재산 형태는 토지와 노예가 있고, 토지는 국가에서 주는 사전과 일반 신도들이 기진(寄進)하는 장전(莊田)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외에도 사찰은 이식(利殖)을 도모하여 대곡(貸穀)의 형식으로 재원을 증대시켰고, 한편 사원에서 시주된 토지는 국가에서 면세조처를 받을 수 있어 수많은 전답이 사원에 기진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사원경제를 비대하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재원을 고갈시켰다. 또 이식(利殖)의 증대를 위한 대곡제(貸穀制)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어 가난에 허덕이게 하였다.[23]


이러한 폐단은 이미 문무왕 4년(664)에 재화(財貨)와 전지(田地)를 불사(佛寺)에 시주하는 일을 금하는 영(令)까지 내리게 하였으나 전지(田地)의 시납(施納)은 계속되어 효소왕(孝昭王) 2년(693)에 백률사(柏栗寺)에 1만(頃)의 전지가 시주되었고, 혜공왕(惠恭王) 15년(779)에 취선사(鷲仙寺)에 30(結),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는 봉암사(鳳巖寺)에 500의 전지가 시납되었다. 한편 사원측에서 다량의 전답을 매입한 사실도 있어 그 매입문서가 남아 전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불교 사원은 유력한 토지소유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사원경제는 국가경제와 직결되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군신들로 하여금 수차에 걸친 전답 시주 금지의 상소를 올리게 하였으며, 불교측으로는 내부적인 부패를 초래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23]
사원 노비[편집]


사원 노비(寺院奴婢)는 신라 시대의 사원에 거주하던 비승려(非僧侶)로서, 사승(寺僧)을 도와 사원의 경영 및 제반 업무에 종사하던 신분이다. 이들은 후대에 와서 그 신분이 비천해졌지만 처음에는 농노제(農奴制) 사회에 있어서의 노비와는 따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성별에 따라 남자는 사노(寺奴), 여자는 사비(寺婢)라 불리었는데 그 성분은 다음 세 종류로 구분되었다.[24] 
왕족궁척(王族宮戚): 법흥왕(재위 514~540)이 사문(沙門)이 되어 흥륜사에 들어갈 때 궁척들을 사예(寺隸)로 사찰에 시주하였다. 그 후 한동안 사예는 왕손(王孫)이라 호칭되었다. 
귀족: 귀족의 자녀가 스스로 불사(佛寺)에 몸을 바쳐 사원 노비가 되었다.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때 재상 김량도(金良圖)는 자기의 두 딸 화개(花開), 연보(蓮寶)를 사비(寺婢)가 되게 하였다. 
죄인: 역적이나 죄인의 일족을 노비로 삼았으니 태종 무열왕 때 역신(逆臣) 모척(毛斥)의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고려 시대 (918~1392)[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의 불교입니다.
고려 전기·중기 (918~1101)[편집]
고려 전기·중기 불교의 개요[편집]







고려 태조







대각국사 의천







경천사 십층석탑고려 충목왕 4년 (1348), 대한민국 국보 제 86호


고려 태조(재위 918~943)는 신라 말기에 출현한 도선(道詵: 826~898)의 도참설, 즉 불교의 선근공덕(善根功德) 사상에 도교의 음양오행과 풍수지리를 가미한 과도기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도선의 사후에도 그를 숭배했다. 태조는 불교 신앙에 의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운의 가호를 얻으려고 했다. 그래서 불교 외호(外護)에 힘쓰고 을 짓고 법회를 열었다. 송도(松都)에 호국도량(護國道場)으로 10개의 을 짓고 서경(西京)에 9층석탑을 세우며, 몸소 불교를 널리 펼 것을 발원하는 글을 썼다. 특히 계계승승 왕가에서 불교를 믿도록 하기 위해 〈훈요10조(訓要十條)〉를 만들고,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燃燈會)를 열 것을 당부했다. 불교의 의식과 법회에 의해서 나라를 보호하려는 태조의 염원은 고려불교의 성격과 방향을 개국 초부터 굳혀버린 것이다. 고려조 전체를 통하여 이와 같이 고정화되어 버린 속신적(俗信的) 기복(祈福)의 저속성은 국민사상을 구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시대정신을 선도할 역량을 교단에서도 잃어버렸다.


태조는 불교를 외호하는 데 있어서 종파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무인적인 성격에서 자연 선종을 좋아하여 선승(禪僧)에게 귀의하였고,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958년 관리등용을 위해 과거제도를 쓴 데에 견주어, 승려의 위계질서를 가리려고 승과(僧科)를 설치했다. 이것은 승려를 존경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 그들을 통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신라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9산선문은 고려에 와서 이엄(利嚴: 866~932)의 수미산파의 성립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선법의 영향으로 여러 종파의 교학이 빛을 잃은 듯했으나 화엄교학만은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 남북국 시대에 의상(義湘: 625~702)이 화엄을 널리 펼친 이래 끊임없이 연구되어 고려에 계승된 것이다. 화엄교학은 고려조 전체를 통해 선종이나 교종을 막론하고 널리 연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승보살의 실천적 행동을 강조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균여(均如: 923~973)의 《보현십원가》도 이 화엄교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자들의 출가가 많았는데, 의천(義天: 1055~1101대각국사(大覺國師))은 문종의 제4왕자로 11세에 출가하여, 영통사의 왕사 난원(爛圓)에게서 화엄을 배웠다. 그는 (宋)에도 유학하였으며, 그때 천태학(天台學)을 전수받고 귀국 후에는 천태교관(敎觀)을 널리 강설했다. 그는 또 교장도감을 설치, 국내외의 논저(論著)를 널리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을 출판했다. 대각국사가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한 뒤부터 천태종이 성립(1097)되었다.[25]
고려 태조와 불교[편집]


왕건(877~943)은 고려의 태조(재위 918~943)가 되어 왕위에 오르자 고려국의 건설은 불법(佛法)의 가호(加護)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운의 번영을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우고 불사를 크게 일으키며 불교 옹호에 힘썼다.[26]


태조는 즉위 원년(918)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었고, 이것을 연례행사로 삼았다. 동 2년에는 송악(松嶽: 개성)에 천도하고 성내에 법왕사(法王寺), 자운사(慈雲寺), 내제석원(內帝釋院) 등의 10대사(十大寺)를 세웠으며, 많은 사탑을 새로 개수하였다. 고승을 맞아들여 사사(師事)하였고, 또 자기의 옛집을 광명사(廣明寺)라는 절로 만들었으며, 사문(沙門) 홍경(洪慶)이 에서 대장경 1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왕은 친히 이를 맞이하여 제석원(帝釋院)에 안치하였다. 그 후 태조 23년(940)에 개태사(開泰寺)를 세우고 낙성화엄법회(落成華嚴法會)에 왕이 소문(疏文)을 짓기도 했다. 또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연례행사로 베풀었고, 그의 제5대 왕자 증통국사(證通國師)는 출가까지 시켰다. 그 외에도 왕은 경유(慶猷)와 충담(忠湛)을 왕사로 삼고 현휘(玄暉)를 국사로 삼았으며, 신라가 9층탑을 세워 3국을 통일한 고사를 본떠서 통일의 대업을 이룩고자 개성에 7층탑평양에 9층탑을 세웠다. 개국사(開國寺)를 지을 때는 병사들을 동원하였으며 병기를 건축자재에 충당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심(信心)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500곳의 사원을 세웠으며 불상과 탑을 모두 합하면 3,500여개나 된다고 한다.[26]
고려 중기·후기 (1101~1392)[편집]
고려 중기·후기 불교의 개요[편집]


고려는 초기부터 (禪)이 성하였으나 천태교학이 들어온 뒤부터 중기에는 재래의 선종(6조 혜능의 영향을 받은 조계종)은 심히 부진하게 되었다. 이때 고승 지눌(知訥: 1158~1210)이 나와 조계선종의 중흥을 이루었다. 많은 선승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어 고려불교의 후기는 선종 일색이 되었는데, 지눌은 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에 특기할 것은 역시 《고려대장경》의 판각이다. 태조(재위 918~943) 때부터 강조된 국가를 위한 신불(信佛) 사상은 《고려대장경》이란 거대하고 찬연한 민족문화 사업을 이루어 놓았다. 이 《고려대장경》은 양과 질에 있어서 세계 모든 대장경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문화유산을 남긴 불교이지만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국권의 쇠퇴와 함께 불교도 함께 기울어졌다. 그런 중에도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 ?~1363)과 태고(太古: 1301~1382) · 백운(白雲: 1299~1375) · 나옹(懶翁: 1320~1376) 등 4선승은 고려말을 장식한 찬란한 별들이었다.
사원경제[편집]


사원경제의 구성요소는 인적자원(人的資源)으로서의 각종 노비(奴婢)의 증대 및 그들 노비에 의한 다양한 노역(勞役)과 물적자원(物的資源)으로서의 왕실귀족(王室貴族) 등에 의한 사여전(賜與田) · 시납전(施納田), 양민(良民)에 의한 투탁전(投託田), 기타 점탈(占奪)에 의한 전지(田地)의 증대 등이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재원(財源)을 토대로 사원 내의 승려들은 각종 수공업(手工業)과 상업을 진흥시켜 사재(寺財)의 충실을 기하였다.[27]


사원의 특권적 지위는 사령내(寺領內)의 전토(田土)에 대한 면세권(免稅權) 행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귀족 및 양민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사원 명의로 하여 과세(課稅)를 면하려 하였으며, 또 정부의 주구(誅求)를 피하기 위하여 전지를 투탁(投託)함으로써 사원의 소작인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원은 곡물(穀物)과 주류(酒類)를 양조하고 또는 염전을 경영하여 그것을 판매함으로써 사재(寺財)를 확충시켰다.[27]


이와 같은 경향은 한편으로 승려의 사생활을 호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극단의 사치생활을 영위하게 하였으며,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승려들의 수가 늘어나자, 세인(世人)의 반감과 원성이 높아지고 유신(儒臣)들의 배불론(排佛論)이 대두하기에까지 이르러 국가 발전에 장해를 주기도 하였다.[27]
교단의 문란[편집]


지나치게 번잡한 불교행사는 고려(918~1392) 사회에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사탑(寺塔)의 남설(濫設)과 행사(行事)의 번다로 국가경제와 국민생활은 극도로 궁핍하였으며, 또한 병역(兵役)의 의무를 피하여 출가를 가탁(假託)하는 자가 많아 승려의 질이 저하되었다.[28]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에 와서는 권신(權臣) 최우(崔瑀: 1166~1249)의 서자 승(僧) 만종(萬宗) · 만전(萬全)이 악승(惡僧)을 모아 재화를 늘리는 일로 업(業)을 삼아 금은곡백(穀帛)을 쌓았으며, 그 문도(門徒)들은 각 사원에 분산되어 심한 횡포를 부렸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는 원조(元朝)의 위압(威壓)이 컸으며 토번승(吐蕃僧: 西藏僧)들이 인심을 무혹(誣惑)하였고, 또 라마의 미신은 신앙계를 흐려 놓았다. 특히 요술(妖術)로 사녀(士女)들을 유혹하고 사설(邪說)로 인심(人心)을 어지럽히는 사례가 많았다.[28]
배불론의 대두[편집]


불교의 지나친 부패와 타락은 필연적으로 유생들 사이에 배불론(排佛論)이 대두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종(成宗: 재위 981~997) 때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상서(上書)를 비롯하여 갖가지 불교의 폐단과 부패를 지탄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상소가 있었으며,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10년에는 왕이 조칙을 내려 "계율(戒律)을 어기고 영리와 음주, 노래와 춤으로 법도를 어기니 기강을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때의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 이색(李穡: 1328~1396)과 이조판서(吏曹判書) 강회백(姜淮伯)은 조불조탑(造佛造塔)으로 국가재정이 탕진되는 폐단을 시정하도록 촉구하기도 하였다. 창왕(昌王: 재위: 1388~1389) 때의 조인옥(趙仁沃: ?~1396),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때의 김자수(金子粹) · 김초(金貂)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 박초(朴礎) 등의 상소는 불교의 폐해를 극간(極諫)한 것이었다.[29]
고려시대 불교의 종파[편집]
고려 불교의 종파[편집]


5교종(五敎宗)과 9산선문(九山禪門)이 이미 신라 시대에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에서처럼 뚜렷한 종지(宗旨)를 갖고 종파를 이루지는 못했다. 뚜렷한 종파를 가진 종파가 형성된 때는 고려 시대에 들어서이다.[30]


불교 종파의 기록을 보여주는 가장 오랜 자료는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 일 것이다. 숙종 6년(1101)에 찬(撰)한 개성 흥왕사(興王寺)의 대각화상 묘지(墓誌)에는 계율종(戒律宗) · 법상종(法相宗) · 열반종(涅槃宗) · 법성종(法性宗) · 원융종(圓融宗) · 선적종(禪寂宗) 등 6종(宗)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대각국사 당시의 학불자(學佛者)종(宗)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고려 초기에 6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신라 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근거는 없다.[30] 이 중 선적종을 선종(禪宗)이라 하여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였다.[31]


선종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면 신라 후기에 20여 개 선파(禪派)가 개창되었던 것을 나말 여초(羅末麗初)에 정리하여 9산(九山)이라고 불렀다. 9산(九山)은 가지산(迦智山)의 도의(道義: 804~880)선사, 실상산(實相山)의 홍척(洪陟: 828~888)선사, 사굴산의 범일(梵日: 810~889)선사, 사자산(獅子山)의 철갑선사, 희양산(曦陽山)의 진감(眞鑑: 774~850)선사, 봉림산(鳳林山)의 현욱(玄昱: 787~868)선사, 수미산(須彌山)의 이엄(利嚴: 866~932)선사 등을 말한다. 이리하여 6종(六宗) 혹은 5교9산(五敎九山)으로 통칭하였던 것이다.[31]


그러나 대각국사(大覺國師) 이후에는 5교9산이 5교양종(五敎兩宗)으로 바뀌었다. 5교양종이란 고려 원종 때(1206)부터 조선 태종(1418) 때까지의 각 종파를 총칭한 것으로 사실상 7종이 성립된 시대이다. 대각국사가 (宋)나라에 다녀온 후 중국에는 교종(敎宗)의 한 종파였던 천태종(天台宗)이 한국에서는 선종(禪宗)에 가까운 불교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5교(五敎)도 개명되었으니 다음과 같다.[31]

계율종(戒律宗) → 남산종(南山宗)

법상종(法相宗) → 자은종(慈恩宗)

원융종(圓融宗) → 화엄종(華嚴宗)

법성종(法性宗) → 중도종(中道宗)

열반종(涅槃宗) → 시흥종(始興宗)


6종 시대에는 5교 9산으로 통칭했으나 7종 시대에는 5교양종(五敎兩宗)이라고 통칭했다. 5교양종이란 5교종과 양선종(兩禪宗)이란 뜻으로서, 양선종이란 조계종과 천태종을 가리킨다. 천태종은 중국에서 창종된 것으로 교종의 하나였으나 고려에서는 선종의 하나로 취급되었다.[30]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융통하되 교종의 입장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禪)의 입장에서 (禪) · (敎)의 일치(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이 두 사상이 양종(兩宗)의 대조적 선풍을 이루게 되었다.[31]


고려 불교의 특기할 만한 사상가는 보조국사 지눌인바 한국의 독자적 선(禪) 사상을 개발하여 조계종을 중흥하고 새로운 면목을 세웠으며, 그 후 혜심(慧諶) · 진각(眞覺) 등 16국사(國師)가 사자상승(師資相承)하였다.[31]


고려 말(高麗末)에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1382)가 9산선종(九山禪宗)을 통합(統合)하였으니 이 점에서 선계의 모든 스님들은 태고(太古)에 맥(脈)을 댔었다. 이후의 사계(嗣系) 문제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31]
의천과 천태종의 성립[편집]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의 주요 인물인 관세음보살










가지





실상





희양





봉림





동리





성주





사자





사굴·도굴





수미


v • d • e • h선종 구산(9산선문) 



신라에도 현광(玄光)이나 연광(緣光) 같은 천태교학에 밝은 학승(學僧)은 있었으나 천태종이 성립된 것은 대각국사가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한 뒤부터이다(1097). 숙종 4년(1099)의 식년(式年)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였다. 이로부터 천태종은 공인(公認)된 한 종이 된 것이다.[25]


국청사를 천태종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하고 천태학을 강의하여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9산선문이나 화엄종의 승려도 많았다. 이리하여 근본도량인 국청사 외에도 전국에 6대본산(六大本山)을 두어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25]


당시 불교는 (禪)과 (敎)가 서로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폐단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폐단을 타파하고 전(全)불교가 대동단결하는 종합적이고 이론적인 체계를 수립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의 통일적 사상을 전개한 것이 천태종이었다.[25]
지눌과 조계종지의 성립[편집]


조계종(曹溪宗)이란 말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계종지(曹溪宗旨)가 성립된 것은 지눌(1158~1210)에서부터였다. 지눌은 일찍이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에서 체용(體用)이 곧 정혜(定慧)라는 것과 화엄원돈지(華嚴圓頓旨)와 선지(禪旨)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고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힘을 얻은 바가 있었다.[32]


이와 같이 그는 화엄 · 천태 · 선학 등을 정혜겸수(定慧兼修)로써 포괄하고, 그 위에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제창하였다. 당시 9산선문은 모두 이 종지(宗旨)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종사(禪宗史)에 획기적인 비약을 가져왔다.[32]


지눌은 또 (禪)의 입장에서 염불문(念佛門)을 흡수하여 자심미타(自心彌陀)의 도리를 밝혔다. 과 가 저마다의 주장에 치우친 편견을 시정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 사상을 주장하고, 정혜겸수를 제창하여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종풍(宗風)을 수립했다.[32]
보우와 구산선문의 통합[편집]


고려 말에 이르러 승려가 타락하고 사원의 규범이 무너져 승단(僧團)은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타서 유신(儒臣)들은 배불(排佛)하기 시작하였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에 의해 조계종지로의 내면적 통일은 되었다 하지만, 9산의 문파(門派)가 열립(列立)하여 각각 자기의 산문(山門)을 자부(自負)하고 피차의 우열을 논하기를 능사(能事)로 삼았다. 그때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9산선문(九山禪門)의 병폐를 우려하고 서로간의 우열을 없애기 위하여 조계종이란 이름으로 9산을 통합하고자 그 취지를 공민왕(재위 1351~1374)에게 헌언(獻言)하였다. 공민왕은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9산을 통합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보조국사 지눌에 의하여 한국 특유의 종지가 확립되어 내면적인 통일이 되었고, 공민왕 5년 태고 보우에 의하여 외면적으로 통일된 조계종이 이루어졌다.[33]
대장경 조판[편집]







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으로 만든 경전의 한 페이지 (1371)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대장경 및 팔만대장경입니다.


고려 시대에 있어서 《대장경》의 조판은 전후 두 번에 걸쳐 있었다. 처음은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때이고, 다음은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이다. 이것을 《초조장경(初雕藏經)》·《재조장경(再雕藏經)》이라 한다.[34]
초조장경[편집]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2년(1010)에 거란(契丹)의 성종(聖宗)이 쳐들어와서 의주(義州) · 선천(宣川)을 빼앗고 평양을 포위하였다. 이때 법언(法言) 등 승려들도 적병을 물리치고자 싸웠으나 적군은 수도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왕은 나주(羅州)로 피란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고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 판목의 조조(雕造)에 착수하였다. 왕이 《대장경》 조판을 시작한 것은 적을 물리쳐 국난을 극복하고자 불법(佛法)에 기원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모의 명복까지도 빌기 위함이었다고 한다.[35]


그 뒤 적은 물러가고 이어서 덕종(德宗: 재위 1031~1034)과 정종(靖宗: 재위 1035~1046)을 거쳐서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에 이르기까지 전후 약 40년에 걸쳐 《대장경》 조판을 완성하였다. 이 《대장경》은 1,106부 5,048권으로 《고려 구장경(舊藏經)》 또는 《초조장경》(初雕藏經)이라 한다.[35]


이 대장경판을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하여 국가를 진호(鎭護)하게 하고 국민의 신앙이 집중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19년(1231)에 몽고병이 쳐들어와서 부인사의 장경판과 황룡사(皇龍寺)의 9층탑을 태워버렸다.[35]
재조장경[편집]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19년(1231)에 몽고병이 침입하여 이듬해 왕은 강화도로 천도(遷都)하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 24년(1236)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대장경》 재조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앞서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 《대장경》을 조조(雕造)하여 외적을 퇴치시키고자 한 것처럼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부처의 가호(加護)를 빌기 위한 것으로《재조장경(再雕藏經)》이라고 한다.[36]


고종은 전국의 학자와 기술자를 동원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강화(江華)에 대장도감 본사(本司)를 두고 진주(晋州)에 분사(分司)를 두어 국력을 기울여 16년간이나 걸려 왕 39년(1251)에 완성을 보았다. 총 81,258판을 양면에 새겼으므로 162,516면이나 된다. 여기에 수록된 경이 1,512부 6,791권이다. 당시 각종 이판(異板)들과 대교(對校)하여 정밀히 교정했기 때문에 각국에서 개판(開板)된 어떤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한역대장경》이며 한국 문화의 지보이다.[36]


현재 해인사(海印寺)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판(板)을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 하며 속칭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36]
승과제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승과제도입니다.


승과제도(僧科制度)는 승려의 선발을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제도로서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승려의 선발제도로서는 국가적인 승과제도에 앞서 해회(海會)라는 것이 태조(太祖: 재위 918~943) 4년(921)에 있었으나, 국가적인 제도로서 승과가 실시된 것은 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 이후이다. 확실한 명문은 없으나 광종 10년(958) 이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광종 10년에 국가에서 관리의 등용문(登用門)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때 일반 과거법을 따라서 승려도 선발 · 등용하고자 승과(僧科)를 실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37]


승과에는 종선(宗選)과 대선(大選)의 구별이 있었다. 종선은 총림선(叢林選)이라고도 하였으며, 각 종파 내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여기에 합격하면 대선에 응시하게 된다. 대선은 국가에서 행하는 것으로 선종대선(禪宗大選)과 교종대선(敎宗大選)의 구별이 있다. 선종대선은 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선종(禪宗)의 승려에게 실시하였고, 교종대선은 왕륜사(王輪寺)에서 교종(敎宗)의 승려에게 시행하였다.[37]


이나 나 다 같이 대선(大選)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이라는 초급법계(初給法階)를 주어 차례로 승진하게 하였다. 선종법계는 대선(大選)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의 차등이 있었고, 교종법계는 대선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수좌(首座) · 승통(僧統)의 차례였다. 이와 같은 법계를 밟아 올라가서 각종(各宗) 모두 삼중대사 이상, 즉 선종은 선사 · 대선사교종은 수좌 · 승통의 법계에 이르면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받들어지게 되었다.[37]


이러한 승과제도는 고려조에는 물론 조선시대 중엽까지 계속되었다.[37]
승록사[편집]


승록사(僧錄司)란 불교의 제반 사무를 맡아보기 위해 중앙에 둔 관청이다.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듯하나 자세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고려에 와서는 초기부터 관련의 기록이 보이고 있다. 양가(兩街)라든가 좌가승록(左街僧錄) · 우가승록(右街僧錄) 또는 좌우양가도승록(左右兩街都僧錄)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모두 승록사 또는 그 일부의 직제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기능과 역할, 구성조직 같은 것을 알기는 힘들다.[38]


다만 표면상의 기록과 명칭에 의하면 승록사에는 좌우 양가(兩街)가 있어서 그 양가에 각각의 승록이 있었다. 승록은 그 가(街)의 승려와 교단의 제반사를 관리하고 모든 불교행사를 주관하였던 것 같다. 양가의 승록 위에 도승록(都僧錄)이 있어 전(全)승록사를 대표하고 양가를 총괄하여 관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38]
법회[편집]


고려시대의 법회는 종류와 명칭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법회들은 법회(法會) · 법석(法席) · 대회(大會) · 도장(道場) · (齋) 등으로 나눌 수 있다.[39]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 · 팔관회(八關會) · 연등회(燃燈會) 등은 모두 신라에서부터 전해 온 것으로서 백고좌법회와 팔관회는 호국적(護國的)인 불교행사였다.[39]


태조 때 화엄법회(華嚴法會) ·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창설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비로자나참회법회(毘盧遮那懺悔法會) ·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 · 장경도장(藏經道場) · 소재도장(消災道場) · 기상영복도장(祈祥迎福道場) · 금광명경도장(金光明經道場) · 오백나한도장(五百羅漢道場) · 금강경도장(金剛經道場) · 인왕도장(仁王道場) · 우란분재(盂蘭盆齋) · 금광법석(金光法席) · 오교법석(五敎法席) 등이 있었다.[39]


이들 법회의식이 지닌 성격과 내용을 분류하면 기복(祈福) · 양재(穰災) · 진병(鎭兵) · 치역(治疫) · 시식(施食) · 기우(祈雨) · 기청(祈晴) 등으로 나눌 수 있다.[39]
조선 시대 및 대한제국 (1392~1910)[편집]
조선 시대 불교의 개요[편집]


조선은 고려 후기의 사원경제의 폐해 등의 불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억불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한창 번성하고 있던 불교의 모든 종단이 위축 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에 5교양종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바뀌게 되었다.[40] 특히, 조선은 억불책의 일환으로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위해 처음에는 도첩제를 시행하였고,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에는 이마저 폐지해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렸다.


세종 7년(1424)에 7종을 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왕명에 의한 것으로 조계종 · 천태종 · 총남종(摠南宗)을 선종으로,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시흥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폐합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40] 또한 조선의 불교가 쇠퇴를 거듭했다 견해가 존재하지만(대표적으로 다카하시 도오루의 이조불교) 최근에는 김용태 교수 등이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손성필 또한 조선시대를 단순한 불교의 쇠퇴기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였다.가령 불국사의 경우 사찰 재건에 유림이 기여하기도 하였다.


조선에도 유명한 승려들이 있었는데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를 비롯하여, 호불론(護佛論)의 하나인 《현정론(顯正論)》을 제시한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 등이 있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때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비호로 허응당 보우(虛應堂普雨: 1515~1565)는 불교 부흥을 시도하였다. 그는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어 도승법(度僧法)과 승과(僧科)를 시행한 결과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등용되어 각각  ·  양종판사(禪 · 敎兩宗判事)가 되어 인재를 발굴, 억불정책 속에서도 계속 법맥(法脈)을 유지시키며 발전시켜 왔다.[40]


이러한 소수의 유명한 승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전체적으로는, 조선의 불교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해 신라나 고려에서 보여주던 왕성한 교학적 성격을 띄진 않는다.
조선 전기 (1392~1506)[편집]
조선 전기 불교의 전개[편집]







세종어제 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


조선(1392~1897) 건국을 주도하였던 관학파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말 불교의 많은 폐단을 봄에 따라, 도첩제를 시행하는 등 국가적인 억불책을 펼쳤다. 고려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유생(儒生)들의 배불(排佛)운동은 불교를 사교(邪敎)로 이단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정도전(鄭道傳)은 《불씨잡변》을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억압책 속에서 불교계에서는 태조의 창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무학(無學: 1327~1405)을 비롯한 고승들이 나오기는 했으나, 교학상 혹은 선리(禪理)상 독창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태조(재위 1392~1398) 자신은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조준 등의 진언으로 억불정책을 쓰면서도, 역성(易姓)혁명으로 인한 많은 인명을 살상한 죄업을 두려워하고 개국 초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전시대의 신앙을 존중하려 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에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고 《대장경》을 인출하여 탑 속에 안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하였다. 태조 6년(1397)에는 왕후 강씨를 위해 흥천사를 세우고, 수륙재를 베풀어 고려 왕씨들의 원혼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재위 1400~1418)은 국가의 재정과 국방을 위해, 즉위하자 곧 불교 탄압에 착수, 종파를 병합하고 사원의 수를 줄이고 승려를 강제로 환속시켰으며, 사찰 토지를 몰수하고 왕사와 국사의 제도를 철폐하였다.


세종(재위 1418~1450)도 태종의 억불정책을 계승, 더욱 강행하였다. 이러한 억불책 때문에 세종 1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로 가서 국내의 심한 박해를 호소한 일도 있었다. 세종 때에는 여러 종파들을 (禪) · (敎)의 양종으로 폐합하고 성 밖의 승려에게 성안 출입을 금하게 하였다.


한편 세조(재위 1455~1468)는 일찍부터 신미(信眉) · 학조(學祖) 등의 당시 고승들을 가까이 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호불정책(護佛政策)을 썼다. 승려들에게는 다시 도성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출가도 제한을 받지 않았으며, 관속들이 함부로 사찰에 침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 중에도 세조의 업적으로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의 번역과 간행에 힘쓴 일을 들 수 있다. 《월인석보》 등을 간행하고 《대장경》을 인출했다.
조선 태조와 불교[편집]


태조는 창업(創業)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으며 불교 신자였다. 그는 즉위하기 전에 이미 태고(太古) · 나옹(懶翁) 등의 고승들에 사사(師事)하였으며, 특히 무학대사(無學大師)와는 관계가 깊었다. 그리고 그의 창업에 전기(轉機)를 가져다 준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때에는 승장(僧將) 신조(神照)의 도움이 컸으며 등극(登極) 후에는 곧 무학을 왕사(王師)로 삼고 어려운 건국사업(建國事業)을 완성코자 하였다.[26]


태조는 즉위 초에 연복사(演福寺塔)을 중창(重創)하고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으며, 해인사(海印寺) 고탑(古塔)을 중수(重修)하고 《대장경》을 탑 속에 안치하여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번영을 빌었다. 태조 3년(1394)에는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國師)로 삼고 승(僧) 100명을 내전(內殿)에서 반사(飯食)하였다. 6년(1397)에는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조계선종(曹溪禪宗)의 본사(本寺)가 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강화(江華)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 이 밖에도 건국경찬사업(建國慶讚事業)으로 《대장경》 인경(印經)과 금은자 사경(金銀子寫經)을 하게 하였다.[26]


실록(實錄)》에 전하는 불교행사만 해도 인경(印經) 12회, 소재회(消災會) 14회, 불사법석(佛事法席) 35회, 반승(飯僧) 9회 등을 들 수 있다. 주위 여론이 (僧尼)를 도태시키고 사원(寺院)을 혁파(革罷)해야 한다고 했으나 태조는 개국(開國) 초기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여 척불(斥佛)에 휩쓸리지 않았다.[26] 정도전(鄭道傳) · 조준(趙浚) 등도 척불을 주장했으나 태조의 신불(信佛)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자호(自號)를 송헌거사(松軒居士)라 하였고, 왕위를 떠난 뒤에도 염불삼매(念佛三昧)로 만년을 보냈다.[26]
배불정책[편집]


불교 자체의 부패와 유생들의 척불(斥佛)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 즉위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다음과 같은 배불정책(排佛政策)을 단행하게 하였다.[41]

① 종파(宗派)를 병합하고 사원(寺院)수를 줄이며 승려를 환속(還俗)시켰다.

② 사찰 토지를 국유(國有)로 몰수하고 사원에 딸린 노비(奴婢)를 군정(軍丁)에 충당하였다.

③ 도첩제(度牒制)를 엄하게 하고 왕사 · 국사를 폐지하였다.

④ 능사(陵寺)의 제도(制度)를 금하였다.


태종 2년(1402)에 왕은 서운관(書雲觀)의 상언(上言)에 좇아 경외(京外)의 70사(寺)를 제외한 모든 사원의 토전(土田) · 조세(租稅)를 군자(軍資)에 영속케 하고 노비를 제사(諸司)에 분속(分屬)시켰다.[41]


태종 5년(1405) 11월에는 의정부(議政府) 상서에 좇아 개성(開城)과 신경(新京: 지금의 서울)에 각종(各宗)의 사원 1사(寺)씩, (牧)과 (府)에는 선종 사찰 하나와 교종 사찰 하나, 각 (郡縣)에는 선종 · 교종 가운데서 1사(寺)씩만 두고 다른 사원은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노비의 수도 대폭 줄이고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그러나 연경사(衍慶寺) · 화장사(華藏寺) · 신광사(神光寺) · 석왕사(釋王寺) · 낙산사(洛山寺) · 성등사(聖燈寺) · 진관사(津寬寺) · 상원사(上元寺) · 견암사(見岩寺) · 관음굴(觀音窟) · 회암사(檜巖寺) · 반야사(般若寺) · 만의사(萬義寺) · 감로사(甘露寺) 등만은 노비(奴婢)와 토지를 감(減)하지 않았다.[41]


이듬해 태종 6년(1406) 3월에는 의정부(議政府)의 계청(啓請)에 좇아 전국에 남겨둘 사찰의 수를 다음과 같이 정하여 이밖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도록 하였다.[41]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을 합해서 70사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을 합해서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을 합해서 43사 
자은종(慈恩宗) 36사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을 합해서 30사 
남산종(南山宗) 10사 
시흥종(始興宗) 10사 


그리고  ·  양경(兩京)에는 선종 · 교종의 각 1사(寺)에 200(結)의 속전(屬田)과 100명의 노비로써 100명의 승려를 상양(常養)하게 하고 그외 경내(京內) 각사는 속전 100결에 노비 50인으로 50명의 승려를 상양케 했으며, 각도 수관지(首官地)에는  ·  중에서 1사에 100결의 속전과 50명의 노비로써 50명의 승려를, 각 관읍내(官邑內)의 자복사(資福寺)에는 급전(給田) 20결에 노비 10명으로써 승려 10명을, 읍외(邑外)의 각사에는 급전 60결에 노비 30명으로써 승려 20명을 상양케 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가혹한 정부의 처사에 석성민(釋省敏) 등이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복구를 호소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였다.[41]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역시 억불정책(抑佛政策)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세종 원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에 가서 명제(明帝) 성조(成祖)에 호소한 사실에 의해서 세종의 배불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세종 6년에는 종단을 폐합하여 (禪) · (敎) 양종(兩宗)으로 하고 태종에 의하여 전국 242개 사찰로 축소되었던 것을 다시 36개사로 줄였으며, 성외(城外) 승려에게 성내(城內) 출입을 금하였다.[41]


다음 문종(文宗: 재위 1450~1452)도 역시 승려의 왕성(王城) 출입을 금하고 민간인의 출가(出家)를 막았다.[41]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일반이 상(喪)을 당했을 때 불승(佛僧)에게 공재(供齋)하는 풍습을 엄금하고 국왕의 탄신일에 신하가 사원에 가서 설재(設齋)하는 일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도승법(道僧法)의 폐지와 승려의 환속으로 승려의 수가 줄어들었다.[41]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은 선종(禪宗)의 본사(本寺)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본사인 흥덕사(興德寺) · 대원각사(大圓覺寺)를 폐하고 관가의 건물로 삼았다. 삼각산 각 사찰의 승려를 쫓아내어 빈 절로 만들고, 성내(城內)의 니사(尼寺)를 헐고 니승(尼僧)은 궁방(宮房)의 비(婢)로 삼았다. 또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거나 취처(娶妻)하게 하였으며, 사사(寺社)의 토지를 모두 관부(官府)에 몰수하였다. 이때 승과(僧科)도 중지되고 양종(兩宗) 본사(本寺)도 없애버렸다.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은 승과를 완전히 폐지시키고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부수어 군기(軍器)를 만드는 한편 원각사(圓覺寺)를 헐어 그 목재를 연산군 때 헐린 민가(民家)의 재축(再築) 자재로 나누어 주었다.[41]


이러한 국가적 배불정책의 결과로 조선 시대 전체를 걸쳐 불교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게 되었다.[41]
종파의 폐합[편집]


태종 6년(1406) 3월의 의정부(議政府) 상계(上啓)에는 조계종(曹溪宗) · 총지종(摠持宗) ·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 · 천태법사종(千台法事宗) · 화엄종(華嚴宗) · 도문종(道門宗) · 자은종(慈恩宗) · 중도종(中道宗) · 신인종(神印宗) · 남산종(南山宗) · 시흥종(始興宗) 등 11종(宗)의 명칭이 보이는데, 다음 해 의정부 계서(啓書)에는 조계종 ·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총남종 · 시흥종의 6종의 명칭만 보인다. 이에 의하면 태종 6년(1406) 3월까지는 11종이 있었으나 곧 총지종과 남산종을 합쳐서 총남종으로 만들고,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으로,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을 합쳐 천태종으로 만들어 7종으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42]


그러나 세종 6년(1423예조(禮曺)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7종이던 종단을 폐합하여 2종으로 하였으니, 즉 조계종 · 천태종 · 총남종을 선종(禪宗)으로 하고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시흥종을 합하여 교종(敎宗)으로 하여  ·  양종(兩宗)으로 만든 것이다. 이리하여 양종 각각 18개사, 합하여 36개사만 남기고 모든 사원을 폐지하였다.[42]


이와 같이 불교 종파의 폐합은 사찰의 수와 종파를 축소시킴으로써 많은 사재(寺財)와 노비를 몰수하고 재정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배불(排佛)의 의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42]
세조의 호불정책[편집]


세조는 본래 신심(信心)이 돈독하였다. 평소에 신미(信眉) · 수미(首尾) · 설준(雪峻) · 홍준(弘濬) · 효운(曉雲) · 지해(智海) · 해초(海超) · 하지(斯智) · 학열(學悅) · 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가까이 하며 그들에게 사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를 좋아했고 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호불정책(護佛政策)을 썼다.[43]


세조의 호불정책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43] 
승려의 권익 옹호 
사원 중흥 · 삼보(三寶) 숭봉 등에 의한 불사 진흥 
불경의 역간(譯刊) 


세조의 호불정책에 따라 승려의 성내(城內) 출입이 자유롭게 되고 출가의 제한도 받지 않았다. 범죄의 혐의를 받은 승려라도 먼저 국왕에 계청(啓請)해서 허가를 받고 신문(訊問)하며, 관속(官屬)이 함부로 사찰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였고, 도승선시(度僧禪試)의 법을 정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기(明記)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준거(準據)하게 하였다.[43]


왕은 지금의 파고다공원 터인 흥복사(興福寺) 자리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불상과 과 을 세웠다. 그 외에도 해인사(海印寺) · 상원사(上院寺) · 월정사(月精寺) 복천암(福泉庵)과 금강산 · 오대산의 명찰(名刹)을 찾아 공양하고 불사(佛事)를 일으켰다.[43]


왕은 또 불전(佛典)의 국역(國譯)과 인경(印經) 사업을 장려했다.[43]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印出)하였으며,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월인석보》는, 앞서 세종 때 왕명에 의하여 자신이 편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세종이 보고 부처의 공덕을 찬양한 것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 하여, 각각 별책으로 간행되었던 이 두 가지를 세조 5년(1459)에 합하여 하나의 체제로 간행한 것이다. 또 세조 6년(1460)에는 불교음악 영산회상곡(靈山會相曲)을 작곡하였으며, 세종 4년에 폐지한 바 있는 도성경행(都城經行)을 부활시켰다. 이듬해 6월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불경을 국역 · 간행하였다.[43]
조선 중기 (1506~1637)[편집]
조선 중기 불교의 전개[편집]


세조(재위 1455~1468)의 호불(護佛)이 있은 뒤 성종 · 연산군 · 중종을 거치는 동안 불교는 다시 박해를 받게 되는데, 13대 명종(재위 1545~1567)이 즉위하자 문정왕후 윤씨(1501~1565)가 섭정을 하면서 불교는 잠시 부흥의 기운을 보았다. 왕후는 유생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폐지되었던  ·  양종제(兩宗制)를 부활시켜 허응 보우(虛應普雨: 1515~1565)를 선종판사수진(守眞)을 교종판사로 삼아 승과(僧科)를 다시 시행케 했다. 조선 불교의 거승(巨僧)인 휴정(休靜: 1520~1640)과 사명(泗溟: 1544~1610) 등이 모두 이 때의 승과 출신들이었다.


휴정과 그의 동문 부휴(浮休: 1543~1615)는 조선 일대의 고승이었으며, 그들의 문하는 번창하여 (禪) · (敎)의 명승들이 다수 배출되어 한때 장관을 보였다. 휴정의 제자 사명은 1604년 일본에 강화사(講和使)로 건너가 임무를 완수,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목숨을 바쳐 구국의 길에 앞장을 서기도 했던 것이다. 서산과 사명이 없었던들 조선 불교는 적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수난으로 조선의 승려들은 깊숙한 산사에 묻혀 개인의 수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의 대(對)사회적인 기능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의 규탄자가 있었으니 그는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때의 백곡 처능(百谷處能: 1617~1680)이었다. 너무나 가혹한 국가의 배불정책에 분개한 그는 8만여 언(言)의 상소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로써 척불(斥佛)정책을 규탄했다. 그러나 억불책(抑佛策)은 늦추어지지 않았고 승려들은 산중으로 들어가 도성(都城) 안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편집]


세조의 호불정책이 있은 후 성종(成宗) · 연산군(燕山君) · 중종(中宗)을 거치는 동안 불교는 다시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한 뒤 그의 모후(母后) 문정왕후의 섭정이 시작되었다.[44]


문정왕후는 중종의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명종 6년(1551설악산 백담사(百潭寺)의 허응당 보우(普雨)를 맞이하여 불교를 일으키고자 노력했다. 당시 유생들의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봉은사(奉恩寺)에 선종을, 봉선사(奉先寺)에 교종을 두어 양종제(兩宗制)를 부활시켰다. 보우를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住持)로 삼고 수진(守眞)을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奉先寺) 주지로 삼았으며, 도승제(度僧制)와 승과(僧科)를 다시 시행하였다.[44]


명종 6년(1551)에 승과 예비시험을, 7년(1552)에 본(本) 시험인 승과를 행하여 교단은 활기를 띠고 유능한 인물이 모여들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도 이때의 승과 출신이었으며, 교종판사 · 선종판사를 역임한 바 있다. 사명당 유정(惟政) 역시 그 후에 승과에 등용되었다. 이때 사방에서 보우 타도의 상소가 빗발치듯 하였고, 성균관 유생(儒生)들은 관(館)까지 비우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44]


그 후 명종 20년(1565)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흥불 사업은 중도에서 꺾어지고,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몰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끝내 목사(牧使) 변협(邊協)으로 하여금 장살(杖殺: 형벌로 매를 쳐서 죽임)하게 하였다.[44]


또다시 배불이 시작되어 명종 21년에 양종과 승과가 폐지되고 도승법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15년간의 흥불사업은 교계에 유능한 인물을 배출시켜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국난(國難)을 구하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44]
휴정과 유정[편집]







서산대사 휴정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은 승과에 급제하여 선 · 교 양종판사(禪 · 敎兩宗判事)의 승직을 가지고 교강(敎綱)을 바로 잡고 문도(門徒)를 양성하였다. 왜병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국란을 당하게 되자 70노구로 전국 사찰에 격문(檄文)을 띄워 승군(僧軍)을 모집하고 참전하여 공을 이루었고 이에 선조(宣祖)가 선교도총섭부종수교(禪敎都摠攝扶宗樹敎)의 사호(賜號)를 내렸다. 특히 그의 저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시불심(禪是佛心) · 교시불어(敎是佛語)를 제창하여 의 동체 2면(同體二面)을 주장하고, 불교 총화에 노력하였다.[45]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1610)은 휴정의 문하로서 임진왜란 시에 승병(僧兵)을 통솔하여 공을 이루었고, 전후에는 강화사(講和使)로 일본에 가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나라를 구하고 국민을 살렸다는 공적으로 보제생령 홍제존자(普濟生靈弘濟尊者)라는 법호(法號)를 받았고, 조선 시대 불교 중흥의 기초를 마련했다.[46]
간폐석교소[편집]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는 조선 시대의 척불책(斥佛策)과 배불사상을 논파(論破)한 유일한 소문(疏文)이다.> 당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이 즉위하여 억불책(抑佛策)을 강행하였다. 현종 4년에는 서울 장안의 니승(尼僧)을 성밖으로 축출하고 문정왕후의 내원당(內願堂)으로서 5,000의 니승을 수용했던 자수(慈壽) · 인수(仁壽) 두 니원(尼院)을 폐하였으며, 모든 사찰 소속의 노비와 위전(位田)을 본사(本司)에 돌리게 하고 를 엄중히 단속하였다. 이때 백곡 처능(百谷處能: 1617~1680)이 불교의 탄압에 항의하는 (疏)를 올린 것이다. 이 소문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긴 상소문(上疏文)이기도 하며,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척불의 부당함과 불교의 정당성을 간쟁(諫諍)한 오직 한 번뿐인 소문이다. 그러므로 처능의 《간폐석교소》는 불교사의 중요한 자료이다.[47]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1637~1910)[편집]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불교의 전개[편집]


명종 20년(1565)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흥불 사업이 중도에서 꺾어지고 억불책이 다시 시행되었다.[44] 그 후 승려들은 도성 출입이 다시 금지되었고 깊숙한 산사에 묻혀 개인의 수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 32년(1895) 4월 입성(入城)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그것도 일본 승려들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그때 일본의 승려들은 마음대로 성안 출입을 하는데 정작 자국의 승려들은 출입을 금지당한 모순을 보고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승려 사노(佐野)가 총리대신 김홍집에서 상서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게 된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성(城) 안에 자유로이 전교할 수 있게 되자 암담했던 불교는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일제(日帝)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는 일본의 각 종파의 승려들이 드나들면서 전도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뒤늦게서야 배불정책을 지양하고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게 되고,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국내 수사찰(首寺刹)을 삼고, 13도에 각각 1개의 수사(首寺)를 두어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불교계 자체에서도 전국 사찰의 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8년 3월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인이 원흥사에 모여 그동안 종명(宗名)마저 없어져 버린 한국불교를 개탄하고 원종(圓宗)이라고 종명을 의정(議定)했다. 그때 해인사 주지이던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으로 추대했다.
선문수경과 선론[편집]


선문수경(禪文手鏡)》은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 저술로서 선학(禪學) 연구의 한 지침서가 되었으며, 새로운 선론(禪論)이 일어나게도 하였다. 백파는 《선문수경》에서 (禪)에 3종(三種)을 세워 조사선(祖師禪) · 여래선(如來禪) · 의리선(義理禪)이 있다고 하였다.[48]


그러나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반론을 폈다. 의순은 그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에서 의리선(義理禪) · 격외선(格外禪) · 여래선(如來禪) · 조사선(祖師禪)의 4변(四辯) 또는 살인검(殺人劍) · 활인검(活人劍) · 진공(眞空) · 묘유(妙有)의 4변(四辯)으로 백파의 선론을 반박하였다.[48]


또 우담 홍기(優曇洪基: 1822~1881)도 백파의 《선문수경》이 고석(古釋)에 어긋나서 그것을 고쳐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지어 백파의 선론에 반대했다.[48]


이에 대하여 백파의 문인(門人)이며 법손(法孫)인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89)은 《선원소류(禪源溯流)》를 지어 의순의 《선문사변만어》와 홍기의 《선문증정록》을 번박(飜駁)하였다.[48]


그 후 서진하(徐震河: 1861~1926)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지어 백파의 《선문수경》과 의순 · 홍기 · 유형의 모든 선론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백파의 설에 대해 찬 · 반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나 선론을 집대성(集大成)하고 총정리하지는 못하였다.[48]


이와 같이 백파의 선론을 중심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에 기석(記釋)과 이론의 쟁변(諍辯)이 있었던 것은 조선 말기 불교의 특징이다.[48]
미타신앙[편집]


신라 후기에도 미타신앙(彌陀信仰)이 성하였으나 정토종(淨土宗)의 성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와서 사찰은 염불당(念佛堂)을 두어 만일회(萬日會)를 베풀고 정토왕생(淨土往生)을 염원하였다.[49]


건봉사(乾鳳寺)의 만일회는 전후 3회에 걸쳐 대법회를 가졌었다. 처음은 순조(純祖: 재위 1801~1834) 때 용허(聳虛)가 시작하여 마쳤고, 두 번째는 철종(哲宗: 재위 1850~1863) 때 벽오(碧梧)가, 세 번째는 만화(萬化)가 고종(高宗) 18년(1881)에 시작하여 융희(隆熙) 2년(1908)에 마쳤다.[49]
승려 입성의 해금[편집]


고종 32년(1895) 4월에 승려의 입성(入城) 금지령(禁止令)이 해제되었다. 그때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사노(佐野)는 한국의 승려가 성내에 들어오지 못함을 보자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에 상서하고 다시 김홍집이 고종(高宗)에 상주(上奏)하여 비로소 승려의 입성이 허가되었다.[50]


그 뒤 3년이 지나서 광무(光武) 2년(1898)에 또다시 성 안의 승려를 축출하는 영(令)이 내려져 의 입성을 금하였으나 이것은 실행되지 않고 해제되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승려의 성내 출입이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었고 또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50]
승단의 국가관리[편집]


광무(光武) 3년(1899년)에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국내 수사찰(首寺刹), 즉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로 삼고 13도(道)에 각각 하나씩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사찰 통일의 뜻을 관철하고 나아가 국가 관리로 하기 위하여 광무 6년(1902)에는 궁내부(宮內府)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였다.[51]


이에 관리서에서는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 즉 사찰령(寺刹令) 36조를 발포하고 전국 사찰 및 승려에 관한 일체 사무를 맡아 보았다. 이리하여 관리서에서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中法山)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을 관리했다. 원흥사가 국내 수사찰로서 대법산이 되고, 중법산은 각 도내 수사찰로 16개 사찰이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국내의 사찰 및 승려는 이제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 들게 되었다.[51]


그러나 그 후 관리서와 대법산도 오래 가지 못하고 광무 8년(1904) 1월에 폐지되어, 관리서의 소관사무는 내부관방(內部官房)에 옮겨졌다가 동년 2월에 칙령 제15호로써 사사(寺社)에 관한 사무는 내부지방국(內部地方局)의 주관으로 되었다.[51]
불교연구회[편집]


관리서가 폐지된 뒤 광무 10년(1906) 2월에 홍월초(洪月初) · 이보담(李寶潭) 등이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창립하여 원흥사에 본부를 두고 지방 각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서 정토종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그리고 불교 교육기관으로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였다. 초대 회장은 홍월초, 그 뒤를 이어 이보담이 회장이 되고 명진학교 교장(校長)을 겸직하였다.[52]
원종의 성립[편집]


융희(隆熙) 2년(1908) 3월 전국 승려 대표자 52인이 원흥사에 모여 회의하고, 원종 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세웠다. 배불정책으로 말미암아 종명(宗名)마저 없었던 일부 불교계에서는 일본 불교의 각 종파(宗派)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종명(宗名)을 밝힐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승려대표자회의를 열어 원종(圓宗)이라 결의하고 대종정(大宗正)으로 이회광(李晦光)이 추대되었다.[53]


융희 4년(1910)에는 각황사(覺皇寺)를 창건하여 조선불교중앙회의소 겸 중앙포교소(中央布敎所)로 하였다. 이해 가을 종정 이회광은 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관장(管長) 이시가와(石川素童)를 만나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체맹(聯合締盟)에 합의를 보고 7조의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내 교계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 조약이 조선불교를 일본에 팔아먹는 매교행위(賣敎行爲)라는 반대운동이 일어났다.[53]
이판승과 사판승[편집]


조선의 억불정책에 의하여 승려는 사회에서 가장 천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유역(油役) · 지역(紙役) · 혜역(鞋役) · 잡역(雜役) 등의 천대가 극심했다. 이에 견디기 어려워 황폐한 사원이 많이 생겼으며, 이때 이판승과 사판승의 두 유별(類別)이 생기게 되었다.[54]


당시 수행에 전념하는 유능한 승려들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공부와는 거리가 멀고 다소 무식한 승려들이 사원을 맡아 그 실무를 보며 지켜왔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 말기 교단의 혜명(慧明)을 유지하고 심한 관가(官家)의 주구(誅求)와 잡역을 감당하며 사원을 지켜온 공은 컸다. 이때부터 참선(參禪) · 간경(看經) · 염불(念佛)을 비롯한 수도(修道)에 종사하는 승려를 이판승(理判僧)이라 하고, 사원의 운영 실무를 맡아 보는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 했다.[54]
일제 강점기 (1910~1945)[편집]
일제 강점기 불교의 전개[편집]


1910년에 각황사(覺皇寺)를 창건, 중앙회 사무실 겸 중앙포교소로 삼았다. 이회광이 그해 가을 일본 조동종과 임의로 연합조약에 합의하자, 국내 교계에서는 크게 반발, 개종역조(改宗易祖)의 매교행위라고 규탄하였다.


박한영 · 진진홍 · 한용운 등이 궐기하여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를 모아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도 1911년 6월 조선총독부가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자, 불교도 국운의 쇠퇴와 함께 식민지 통치 아래 들고 말았다. 이때 전국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유기적인 관계를 단절해 놓았다.


이 무렵 불교청년회 및 불교유신회가 생겨 사찰령의 폐지와 정교(政敎) 분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다.
임제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임제종입니다.


1910년에 원종(圓宗)이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한 데 반대하여, 박한영(朴漢永) · 진진응(陳震應) · 한용운(韓龍雲) 등이 궐기하여 이듬해 1911년 1월  · 호남 승려를 모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55]


임제종 임시종무소를 송광사에 두고, 관장으로 선암사(仙巖寺) 김경운(金擎雲)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연로하여 한용운이 대리로 종무(宗務)를 맡게 되었으니 광주 등지에 포교당을 설치하고 원종과 대치하여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견지하려 하였다.[55]


그러나 1911년 6월 조선총독부는 사찰령 7조를 발포하고, 7월에 사찰령 시행규칙 8조를 발포하여 모든 사원과 승려의 문제를 규제하였다. 이리하여 원종과 임제종은 모두 저절로 없어지게 되었다.[55]
사찰령과 교단의 체제[편집]


1911년 6월 3일 사찰령(寺刹令)이 제정 · 발포되고, 동년 7월 8일에 사찰령시행규칙이 발포(發布)됨으로써 교단은 조선불교 30본산(本山)(1924년에 화엄사가 승격되어 31본산으로 됨)으로 형성되어 30개 교구역(敎區域)으로 나뉘었다. 이 사찰령에 의하여 동년 11월부터 30본산의 제1대 주지(住持)를 차례로 인가하였으며 이듬해(1912)부터는 사찰령에 의한 체제가 갖추어져 갔다.[56]


또한 조선 불교를 선교 양종(敎禪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5월에 각황사(覺皇寺)를 중앙포교당으로 하여 30본산 회의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30본사(本寺)는 각각 사법(寺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고 각 사찰에 시행함으로써 사찰령의 취지를 실현하게 되었다. 사법(寺法)은 각 사찰에서 각각 제정하였으며 모두 총칙(總則) · 사격(寺格) · 주지(住持) · 직사(職司) · 회계(會計) · 재산(財産) · 법식(法式) · 승규(僧規) · 포교(布敎) · 포상(褒賞) · 징계(懲戒) · 섭중(攝衆) · 잡칙(雜則)의 13장(章)으로 하였고 그 내용도 거의 같았다.[56]
30본산연합회[편집]


1915년 30본산에서는 포교 및 교육의 일원화를 위해 본사 주지들이 회의를 하여 30본산연합제규(聯合制規)를 제정하고, 각황사(覺皇寺)에 30본산연합사무소를 두었다. 위원장은 30본산의 주지 가운데서 선정하여 연합사무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30본산이 교구로 성립되고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유기적인 관계가 결여됨으로 인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국 사찰을 총괄하고 전 승려를 통제하지는 못하였다.[57]
총무원과 종무원[편집]


조선 불교계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점점 심해지자, 신진 소장 승려들이 주동하여 신성한 종교가 행정관청의 지시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전국승려대회를 열었다.[58] 이러한 움직임에 의하여 1921년 각황사에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총무원)을 설치하고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58] 그러나 30본사 주지 중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생겨, 이듬해(1922)에 별도의 기구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종무원(종무원)이 역시 각황사에 설치되었다.[58] 이리하여 같은 건물에 두 개의 간판을 걸고 총무원(總務院)과 종무원(宗務院)이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였다.[58]


1925년 마침내 총무원과 종무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양원(兩院)은 하나로 뭉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교무원)으로 되었으며, 교단은 통일적인 중앙종무기구를 갖게 되었다.[58]
조계종의 성립[편집]


일제 치하의 한국 불교 교단은 그 종명(宗名)을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 하였다. 그러나 보다 선명한 종명이 필요하였고 유기적인 중앙통제적 체제가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태고사(太古寺)를 세워 총본산을 삼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결정하여 1941년 4월 23일부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사법(寺法) 전16장 130조의 인가를 얻었다. 제1대 종정에 한암 중원(漢岩重遠)을 추대하고 종회법 · 승규법을 차례로 제정 · 발포하였다.
불교지의 간행[편집]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불교계가 최초로 잡지를 발간한 것으로는 1910년 12월의 《원종(圓宗)》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원종》지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機關誌)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終刊)되었다.[59]


불교문화의 종합지이며 문화기구로서의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1912년 2월에 발간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것이다. 《조선불교월보》(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이며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동년 11월에 《해동불보(海東佛報)》(편집인 및 발행자: 박한영(朴漢永))가 발간되었다가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다가 동년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다.[59]


1916년 4월에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으나 겨우 3호를 내고 동년 6월에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행되어 1920년 5월에 21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1924년 7월에는 《불교(佛敎)》(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가 발행되어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정간되었으며,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불교신(佛敎新)》이라 하였는데 해방 전까지 계속되었다.[59]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金剛杵)》와 1920년에 통도사(通度寺)에서 발간한 《취산보림(鷲山寶林)》, 또 동년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支會)의 《조음(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 발행인 《불일(佛日)》, 동년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荒野)》, 1935년 발간된 《불교시보(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했던 《일광지(一光誌)》 등이 있었다.[59]
현대 (1945~현재)[편집]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 불교의 고유성을 되찾는 운동이 전개되어 1954년에서 1962년까지 승단정화(僧團淨化)의 기치를 내세워 1962년 4월 12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이 발족되고 25교구(敎區) 본산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처승(帶妻僧) 측은 끝내 불응하여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을 별립(別立)해 나갔고, 조계종단은 교세를 단합하여 한국불교가 직면한 3대불사(도제양성 · 포교사업 · 역경간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관련 주제[편집
한국의 불교 
한국 불교의 사상 
삼국 시대의 불교 
고구려의 불교 
백제의 불교 
신라의 불교 
남북국 시대의 불교 
고려의 불교 
조선의 불교 
현대 한국의 불교 
주요 승려[편집]
삼국시대[편집
승랑(僧朗) 
겸익(謙益) 
원광(圓光) 
자장(慈藏) 
원측(圓測) 
원효(元曉) 
의상(義湘) 
고려시대[편집
의천(義天) 
지눌(知訥) 
보우(普愚) 
조선시대[편집
보우(普雨) 
의승(義僧) 
휴정(休靜) 
유정(惟政) 
주요 불교 서적[편집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교장총록(敎藏總錄) 
선가귀감(禪家龜鑑) 
선문수경(禪文手鏡) 
기관[편집
간경도감(刊經都監)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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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진 (1989).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각주[편집]

 중국에는 기원전 2년경에 전래되었다.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 삼국시대의 불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운허 & 동국역경원, "法朗(법랑)"[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불교 사전》. 2011년 6월 4일에 확인.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승랑,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고구려불교의 일본 전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 불교의 전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겸익,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삼국시대의 사상 > 삼국시대의 불교사상 > 겸익,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고익진, p. 123. 
↑ 이동:가  고익진, p. 124. 
 고익진, pp. 123-124.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백제불교의 일본 전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진흥왕과 불교정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밀교의 전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운허 & 동국역경원, "惠宿(혜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불교 사전》. 2011년 6월 5일에 확인.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인도 구법순례승의 활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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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원효,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Keel, Hee-Sung (2004). "Korea"; cited in Buswell, Robert E. (2004). 《Encyclopedia of Buddhism》. Volume 1. New York, USA: Macmillan Reference USA. ISBN 0-02-865719-5 (Volume 1): pp.431-432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승관제도,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신라원과 적산 법화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신라시대의 사원경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사원 노비,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고려시대의 불교 > 천태종의 성립,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고려시대의 불교 > 태조와 불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글로벌-태조와 불교"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고려시대의 불교 > 고려시대 사원경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고려시대의 불교 > 교단의 문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고려시대의 불교 > 배불론의 대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고려시대의 불교 >고려시대 불교의 종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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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종단의 변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세조의 흥불정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문정왕후와 보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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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유정,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간폐석교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선문수경과 선론,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미타신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조선후기의 사상 > 조선후기의 종교사상 > 조선시대의 불교 > 승려 입성의 해금,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승단의 국가관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불교연구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원종의 성립,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이판승과 사판승,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임제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사찰령과 교단의 체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30본산연합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총무원과 종무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이동:가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불교지의 간행,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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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불교의 경우 각 종파는 해당 문서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포함되어 있다. (참고: 틀:대한민국의 불교 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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