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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4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 수련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 다석 유영모의 기도와 영성 김흡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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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08년 8월호)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 다석 유영모의 기도와 영성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새 길을 열며

다석 유영모(1890-1981)는 그의 제자 함석헌과 더불어 종교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된다. 이번 여름(7월 30일-8월 5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적 권위를 가진 제22차 세계철학대회(XXII World Congress of Philosophy)에서도 한국준비위원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사상가로서 유영모와 함석헌을 선정하고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 기독교계 내에서는 유영모가 과연 기독교인인가? 하는 등의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한국신학의 광맥”으로서 그의 중요성을 홀대하고 있다.1)

 그러나 유영모 사상의 기조는 확실히 성경에 있으며,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성 수련에 따른 통찰에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영어몰입교육 등 한글과 한국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고취보다는 언어와 경제적 실용이 서구화의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주장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유영모의 눈물겨울 정도로 끈질겼던 한글사랑이 한국 기독교인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많은 독자들은 이 글의 제목과 맨 앞에 인용된 키워드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순수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신기함과 의구심을 동시에 느꼈으리라. 제목에서 ‘여러 밤’이라 한 것은 ‘밤 셋’이란 뜻을 가진 유영모의 호 다석(多夕)을 필자가 한글로 풀어서 표현해 본 것이고, ‘그이’란 ‘선생’ 또는 ‘군자’를 다석이 자주 그렇게 호칭했다. 그래서 ‘여러 밤 그이’는 다석 선생을 지칭한다. ‘하늘놀이’라는 것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다석에 있어서는 최상의 기도법을 말한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는 다석이 순 한글로 표출한 기독교 영성 수련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한나신 아들’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몸’, ‘참맘’, ‘참바탈’을 성취하기 위한 다석의 수양법, 곧 전통신학적인 용어로 굳이 말하자면 성화론을 지칭한다.
다석의 수양법은 말로는 “성령! 성령!” 하지만, 구체적인 영성수련법이 빈곤한 한국 개신교에게 앞으로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며 큰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라는 구절을 화두로 놓고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자의 삶과 영성

다석에 있어서 영성과 일상(聖과 俗)은 서로 따로 있던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전부가 곧 영성이고 곧 기도이다. 그의 ‘기독자’라는 다음의 한시(1956. 12. 8)에서 이러한 생각이 분명하게 표출된다.2)

기독자(基督者)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
체성극명야귀탁(      誠克明夜歸託)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다석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이란 기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기도는 보통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숨을 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숨을 쉰다는 것은 단지 상징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호흡하는 것을 의미한다.(元氣息: 기도는 본래 숨을 쉬는 것이다) ‘배돈’이란 “조심조심 후하게 또한 정중히 두텁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다석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준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숨을 쉬면 두텁게 후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하는데 그 '원(元)'은 숨입니다. 그래서 기도드린다는 말은 안 됩니다. 호흡을 드린다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것, 곧 호흡하는 것을 바로 하느님에게서 받아서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즉, 기도는 우리의 ‘원기식’을 두텁게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기도배돈원기식’)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해석을 가할 여지가 있다. 즉 기도란 배돈하게 원기를 호흡한다(息)는 말이 된다. 기도란 원기(元氣), 즉 우주의 근원이 되는 기운, 곧 성령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숨 쉬는 것이다. 다석의 선도(仙道)와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석은 호흡하는 숨 하나하나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성 그리고 내가 기독교 신앙인이 된 의미를 음미하고 묵상하며 숨을 쉬었던 것이다. 숨을 흡(吸)하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숨을 호(呼)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과 공경을 바쳤던 것이다.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다석의 영성은 다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생물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 확인되고 체험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요 맥박이 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숨 쉬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도요, 맥박이 건강하게 뛰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찬미반주이다. 그는 말한다.
맥박은 건강해야 합니다. 맥박이 건강하게 뛰는 뚝딱뚝딱 하는 소리는 참찬미입니다. 다른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로 나가는 것이 ‘건맥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다석은 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맥박이 팔딱팔딱 찬미하며 반주합니다. 이렇게 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피입니다. 기도는 배돈하고 ‘원기식’을 드리며, 찬미에는 ‘건맥박’으로 반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 ‘건맥박’을 달성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인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했고. 이것을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정의했다.(롬 12:1) 그러나 많은 기독교 영성전통들은 희랍사유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아서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만을 숭배하고 몸과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몸 신학’ 또는 ‘몸의 영성’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석의 ‘찬미반주건맥박’과 ‘몸성히’라는 통찰은 이러한 상황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성신학적 자원인 것이다.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
물론 이러한 공경의 자세는 건강을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식사 때에도 적용된다. 모든 식사가 곧 성만찬이요, 곧 제사인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이 한마디만큼은 기억해주십시오. ‘상의극치일정식’은 제사이고 성찬입니다. 애식과 회식의 정신으로 먹는 것이 상의극치인데, 성찬은 제사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가짜가 들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예배당에서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일상을 사는 것이 ‘상의극치’가 됩니다.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정신을 매끼 식사 때마다 표시하여야 극치를 이룰 것입니다.(좬다석 강의좭: 329)

교회에서 예배할 때만이 아닌 모든 식사 때는 물론이고, 일상의 삶 전부가 바로 산제사요, 예배인 것이다.(롬 12:1)

체성극명야귀탁(    誠克明夜歸託)
다석은 하나님을 알기위해서는 ‘체성극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체(  )란 조상을 기리며 정성껏 봉양하듯 하나님을 추원하는 것이요. 성(誠)은 참을 존재론적으로 이룸을 말한다.

하느님에 대한 추원(追遠)을 옳게 하는 것이 체(    )요, 이에 바로 들어가면 성(誠)입니다. 체성(    誠)은 치성(致誠)입니다. 이 ‘체’를 밝혀야 ‘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극은 늘 하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체성'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늘 ‘체성’을 밝히면 밤, 곧 신탁(神託)에 들어갑니다. 말씀이 늘 참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래야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떳떳하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밤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체성극명야귀탁! 이 한 구절로 다석은 신학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신학은 바로 다름 아닌 체성, 극명, 신탁에 들어가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몸성히
기독자의 참 삶과 영성에 들어가려면 우선 “하나님의 성전”(고전 3:15)이요, “거룩한 산 제사”(롬 12:1)인 우리 몸을 성하게 ‘건맥박’하게 해야 한다. 다석은 이것을 ‘몸성히’라고 칭한다. 이 대목에서 다석이 “몸이 성하면 몸이 성하지 않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좬다석 강의좭:56) 왜냐하면 다석의 ‘몸성히’가 온전한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우생학적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맘놓이,  비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곧 마음을 비워야 한다. 다석은 이것을 ‘맘놓이’ 또는 ‘  비히’라고 칭한다. ‘  비히’는 ‘자기비움(kenosis)’의 영성(빌 2:7)을 다석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진공이 될 때까지 깨끗하게 비워야한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진공을 만들어 놓으면 한데 쏠려 몰려들어 옵니다.” 그 몰려들어 오는 참된 것들, 곧 ‘속’, ‘곧’, ‘믿’(忠信)을 말아서 채워야 한다(‘챔말기’). 이 ‘말기’는 결국 ‘맑기’에 이르게 된다고 다석은 설명한다.

‘말기’만 채우지 말고 몸 성히 비어 있으면 영원히 맑고 맑아집니다. 이승에서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 저승에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가는 길에 속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3)

바탈퇴히
‘몸성히’와 ‘맘놓이’의 두 단계는 ‘바탈퇴히’의 과정을 지향한다. ‘바탈’은 나의 바탕, 개성(個性)을 말한다. ‘퇴히’의 ‘퇴’는 본래 ‘ㅌ’ 밑에 ‘아래 아’자를 쓰는데, ‘태워버린다“(燃)라는 뜻과 ‘태워나간다’(乘)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좬다석 강의좭:174-6) 즉 나의 못된 버릇과 악한 바탕을 끊임없이 태워 변화시켜나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다석은 말한다.

‘나’밖에 없습니다. 단지 내 바탈을 태워서 자꾸 새 바탈의 나를 낳는 것밖에 없습니다. 종단에는 아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를 하느님 뜻대로 자꾸 낳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렇게 여러분께서도 바탈을 태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좬다석 강의좭:206)

‘바탈퇴히’는, 내 바탈(自)을 스스로 태우는(燃, 然)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옮기면 곧 자연(自然)인 것이다. 그리고 다석은 스스로 ‘자(自)’자는 ‘코 속’을 형상한다고 본다. 그래서 자연은 또한 코가 불탄다, 즉 코로 숨 쉰다는 것을 표상한다.

우리 동양 말로 ‘자연(自然)’은 불탄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숨쉬는 것은 불 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 속이 불탄다는 말입니다.(좬다석 강의좭 377)

이것 또한 다석과 선도의 연관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선도와 비교하자면, ‘참몸’을 만들어 가는 ‘몸성히’는 올바른 몸인 정체(正體)와 진체(眞體)를 체현하기 위해 몸을 고르는 ‘조신(調身)’에 해당하고, ‘참맘’을 향한 ‘맘놓이’는 올곧은 마음인 정심(正心)과 진심(眞心)을 구현하기 위해 맘을 고르는 ‘조심(調心)’과 유사하고, ‘참바탈’로 성화하려는 ‘바탈퇴히’는 ‘참숨’인 정식(正息)과 진식(眞息)을 이행하고자 호흡을 고르는 ‘조식(調息)’과 관련된다. 이와 같이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는 ‘조신(몸고르기), 조심(맘고르기), 조식(숨고르기)’과 대비된다. 그것을 도표로 하면 다음과 같다.

몸성히 (참몸) 몸고르기 調身 - 正體 = 眞體
맘놓이 (참맘) 맘고르기 調心 - 正心 = 眞心
바탈퇴히 (참바탈, 참숨) 숨고르기 調息 - 正息 = 眞息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다석의 기도

빈탕한데 맞혀 놀이(空與配享)
다석의 영성에 있어서 사람살이(살림 또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여배향(空與配享)’이다. 그는 그것을 “인간으로 나서 본 인간에 대한 결론”이라고 말한다.(좬다석 강의좭:458) 이 ‘공여배향’을 한글로 풀이한 것이 ‘빈탕 한데 맞혀 놀이’이다. ‘빈탕’은 크고 큰 허공, 즉 “공공허허대대실(空空虛虛大大實)”을 말한다. ‘안팎 한테’(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한데 + 하나 = 한테)에서 나온 ‘한데’는 ‘베풀’ 여(與)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좬다석 강의좭:466) ‘맞혀’는 맞추어 간다라는 뜻의 배(配)를, ‘놀이’는 제사(享)의 유희삼매에 빠져 노는 것을 말한다. 다석이 내린 “인생의 결론”을 한 마디로 하자면, 이와 같이 “빈탕 한데에 맞추어서 놀이하자!”이다.(좬다석 강의좭: 467) 그것은 곧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영적 예배”를 드리자는 것과 공명한다.(롬 12:1)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우주 산보

다석의 ‘빈탕한데 맞혀 놀이’, 곧 거룩한 산제사와 영적 예배는 “산보” 또는 “정신하이킹”이라고 부른 그의 기도문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 기도문을 살펴보자. 

산보

높고 높고 높고 산보다 높고 산들보다도 높고 흰 눈보다도 높고 삼만 오천육백만 리 해 보다도 높고 백억 천조 해들이 돌고 도는 우리 하늘 보다 높고 하늘을 휩싼 빈탕(虛空)보다도 높고 허공을 새겨낸 마음보다 높고 마음이 난 바탈(個性)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아버지 한나신 아들 참거룩하신 얼이 끝없이 밑없이 그득 차이시고 고루 잠기시며 두루 옮기시사 얼얼이 절절이 사무쳐 움직이시는 얼김 맞아 마음 오래 열려 예여오른 김 큰김 굴려 코뚤리니 안으로 그득 산김이 사백조 살알을 꿰뚫고 모여 나린 뱃심 잘몬의 바탕 힘 바다보다 깊이 땅 아래로 깊이 은하계 아래로 깊이 한 알 알을 꿰어 뚫다. 이 긴김 깊이 코김 뱃심으로 잇대는 동안 얕은 낯에 불똥이 튀고 좁은 속에 마음종 울리다 마니 싶으지 않은가, 우는 이는 좋음이 있나니 저희가 마음 싹임(消息)을 받을 것임이라. 우리 마음에 한 목숨은 목숨키기 깊이 느껴 높이 살음 잘몬의 피어 울리는 피도 이 때문 한 알 알의 부셔져 내리는 빛도 이 때문 우리 안에 밝은 속알이 밝아 굴러 커지는 대로 우리 속은 넓어지며 우리 꺼풀은 얇아지니 바탈 타고난 마음 그대로 왼통 속알 굴려 깨쳐 솟아나와 오르리로다.4)
 
다석은 이것을 노래처럼 외우면서 깊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정신하이킹”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우주를 관통하고 “높이 높이 올라 하나님의 보좌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얼김[성령]을 받아가지고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왔다가 다시 내 목숨을 키워 올려 결국은 마음의 꽃을 피우라는 것”이다. 다석의 기도는 그야말로 하늘을 무대로 우주 산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늘을 덧붙여 ‘빈탕한데 맞혀 하늘 놀이’라는 이름하고, 이것이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와 더불어 다석 영성신학의 요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 대한 다석의 해설을 직접 들어보자.

맨 처음에 산에서 부터 시작하여 해를 거쳐서 은하계 저편 우주를 싸고 있는 빈탕 한데 저편에 거기가 마음인데 그 마음 한복판에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고 그 보좌에서 생명의 강처럼 흘러 내려오는 얼김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슬이 내리듯 내 마음에 내려 그 얼김으로 입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눈이 뚫리고 귀가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지혜가 뚫려서 사백조 살알 세포를 다 뚫고 그 기운이 배 밑에 모여 자연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은하계를 뚫고 태양계를 뚫고 내리어 우리 얼굴에 불똥이 튀게 하고 우리 마음에 종을 울리게 하여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목숨 키우고 우리의 생명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이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다석의 기도, 하늘 산보는 빈탕한데 우주(大宇宙)와 맞혀 노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우주(小宇宙)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내 안팎에서 성령(얼김)을 통해 소통되고 있고 나는 그것에 맞혀 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대주천(大周天)과 소주천(小周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구체적으로 이 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영성의 단계와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땅 위: 지구-우주 (우주인) -> 빈탕한데(虛空): 노자(도교) -> 마음(心): 부처(불교) -> 바탈(性): 공자(유교) -> 아버지 하나님: 성부 -> 한나신 아들: 예수(성자) -> 참거룩하신 얼: 성령 -> 얼(숨)김(성령): 김(氣) -> 큰김 - 코 뚤리니 -> 산김 - 사백조 살알 뚫고 -> 뱃심 잘몬의 바탕 힘(단전) -> 바다 - 땅 아래 -은하계 -> 한 알 알 꿰어        다(玄牝一窺) -> 긴김 - 코김 - 뱃심 - 낮에 불똥 - 마음 종 - 마음 싹임(소식) - 목숨 - 올리는 피 - 내리는 빛 - 밝은 속알(덕) - 속은 넓어지고 - 거플 얇아지니(피부호흡) - 바탕 울려 속알 굴려 - 깨쳐, 솟아나와, 오르리로다.

여기에서 다석의 영성이 지닌 다섯 가지의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다석의 영성은 지구의 좁은 범위를 넘어 선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하는 우주적 영성(영적 우주인)이다.(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둘째, 다석의 영성은 동양의 모든 영성 전통들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전하여 더 높이 승화된 기독교 영성의 새로운 동양적 지평을 열고 있다. 빈탕한데(虛空)는 노자와 도가 사상의 단계를, 마음(心)은 부처와 불교의 차원을, 바탈(性)은 공자와 유교를 함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영성은 그 단계의 하늘들을 훌쩍 넘어 더 높은 차원의 하늘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 다석의 영성은 삼위일체적 영성이다. 다석에 있어서 영적 에너지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한나신 아들’(성자), ‘참 거룩하신 얼’(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넷째, 다석의 영성은 성령중심적이며, 그 얼김은 숨과 김(氣)을 통하여 역사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氣)는 성령의 강림을 통해 우리 몸에서 구체적으로 육화한다.
다섯째, 다석의 영성은 몸의 영성이다. 정신하이킹은 정신적 유희삼매로 끝나지 않고, 그 성화의 과정은 우리 몸의 변화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체화된다. 그야말로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가 몸의 실질적인 변화와 징조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영적 ‘하늘놀이’가 아니라, 성령과 기를 통해 소통과 연합에 이르는 ‘하늘몸놀이’인 것이다.

새 하늘을 열며.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삼 천 년대의 새로운 기독교 영성

인간이 대기권을 뚫고 지구 밖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 이전에 다석 유영모는 이미 우주적 영성을 체득하고 스스로 “영적 우주인”이 되었다. 그가 자주 오른 북한산 등반은 단순한 하나의 등산이 아니라 우주를 단전 안에 품고, 굴리고, 더불어 숨 쉬었던 우주 산보, 영성 수련이었던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단지 물질적 축복을 요구하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우주적 호연지기를 숨쉬며, 체화시키며, 그것(율려)에 맞춰서 춤을 추는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였던 것이다. 값싼 표피적 기독교 영성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 다석의 영성은 마치 진흙탕 속에 숨겨져 있는 금광석과 같이 그 중요한 가치의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러한 다석의 영성은 비단 한국 기독교를 위해서만 아니고, 서양의 문턱을 벗어나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 세계 기독교에 큰 영성적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다석 영성신학의 중요성은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배타적 인식론적 관념론을 넘어서서 다원종교가 실재하는 동양적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의 통전적 정체성(또는 보편적 구체성)을 구현했다는 점에 있다. 다석의 기독교적 사유 속에는 글로벌 시대의 현대신학이 갈망하는 패러다임(다원종교, 다원문화, 학제간)을 위한 거의 모든 단초들이 내포되어 있다.(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을 “도의 신학”이라고 부른다.)5) 또한 다석은 첨단과학과 디지털 문명에 의해 인간이 사이보그로 기계화되어가는 트랜스휴먼(trans-human),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몸과 숨의 영성’의 한 지평을 선보이고 있다.(매트릭스 속의 분신과 기계 인간에게는 몸과 숨이 없다.)6) 그러므로 다석이 기독교인인가에 하는 등의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폄훼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한 소중한 영성적 유산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일이다. 다석 사상의 기조는 성경에 있으며,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성 수련에 따른 통찰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다석의 새벽 기도는 성경구절을 암송하며 나를 반성하고 알아가는 ‘나알’의 과정에서 시작하고, 성경말씀을 품고 알을 낳는 ‘알나’의 과정에서 종료된다.(이 ‘알나’의 과정을 통해 그의 주옥같은 한시들이 탄생했다)
더욱이 언어와 문화적 주체성보다는 경제적 실용성이 우선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다석의 눈물겨울 정도로 끈질겼던 한글사랑이 주는 의미를 지금까지 서구화 과정에서 오는 반사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던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 번 깊이 음미해야 하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운 미래에 대한 징조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곧 다석 선생의 기도는 우리에게 호방한 호연지기를 숨 쉬게 한다. ‘한나신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몸’, ‘참맘’, ‘참바탈’을 체득하고 구현하기 위한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의 다석 수련법은 지금은 비록 밤하늘 저쪽에서 빛나고 있는 듯하지만,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와 삼 천 년대에 높이 떠오를 세계 기독교 영성의 새 하늘을 준비하고 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

2021/05/29

알라딘: 씨알 생명 평화

알라딘: 씨알 생명 평화
씨알 생명 평화 -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이규성,이기상,유헌식 (지은이),씨알사상연구회 (엮은이)한길사200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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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절 확인일 : 2011-02-24

656쪽
책소개

씨알사상연구회 월례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된 글 가운데 19편의 논문을 가려 실은 책. 민주화, 평화를 위한 운동가, 종교인, 문필가등으로 널리 알려진 함석헌의 철학자적 사상가적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천착하고, 그것을 정갈한 순우리말 표현, 사회적 운동으로 실천한 함석헌의 삶과 그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지은이들은 다양한 글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왜 함석헌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가 -박재순

제1부 생명의 본질은 스스로 함이다
심정과 자유의 철학 - 이규성
생명의 진리 - 이기상
씨알의 생명사상 - 박재순
문명비판과 초월적 자연주의 - 유헌식
자연과 자유 - 양명수
씨알사상과 진정성의 윤리 - 박소정
비폭력 평화정신 - 김영호
개혁적 반전 평화주의 사상 - 정지석

제2부 씨알, 오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나타난 '민족' 개념의 신학적 성찰 - 이정배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신의 섭리 - 김기승
함석헌의 '뜻으로 본 세계역사' -김상봉
함석헌과 우치무라 간조의 '두 개의 J' - 양현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어떻게 쓰였을까 - 이치석

제3부 나는 빈들의 소리요 바람이라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 - 김경재
씨알사상에 대한 종교적 접근 - 김명수
함석헌의 성서적, 한국적 영성과 문화신학 - 최인식
함석헌과 샤르댕의 사상 - 이병창
무교회 정신이 이끈 삶 - 백소영
함석헌과 간디 - 허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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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함석헌의 사상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나'와 '전체'가 소통하고, '생각하는 생각'과 '생각나는 생각'이 소통하고, '본능'과 '바탈'이 소통하고, '인위'와 '무위'가 소통하고, '스스로 함'과 '저절로 함'이 소통한다. 그래서 자연과 자유는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종합된다.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함석헌이 말하는 자연에 저항적 자유의 성격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자연과 자유' p207 중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인의 민족적 반성과 회개의 책이지만, 함석헌이라는 지성 개인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개 부분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 일반에 대한 서술에서, 그 자신을 지식인에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 자신의 참회와 회개의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해방을 기존의 지식인, 엘리트의 것, 즉 자기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니라 민중의 것, 씨알의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신의 섭리' p346 중에서  접기
추천글
'고난의 역사'에 핀 '대자유'의 꽃 - 고명섭 (<한겨레> 문화부장《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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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규성 (지은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9년부터 201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2016),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2012),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2011), 『생성의 철학: 왕선산』(2002), 『내재의 철학: 황종희』(1994)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 더보기
최근작 : <중국현대철학사론>,<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마음과 철학 : 유학편> … 총 1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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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상 (지은이)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뒤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로 1984~2012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초대회장이었으며, 현재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이다. 1992년 열암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1994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철학노트』, 『콘텐츠와 문화철학』, 『... 더보기
최근작 : <소통과 공감의 문화콘텐츠학>,<동서양 철학 콘서트: 서양철학 편 (대활자본)>,<동서양 철학 콘서트: 서양철학 편> … 총 31종 (모두보기)
유헌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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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대학 철학부에서 「헤겔의 역사적 사유에 나타난 새로움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헤겔철학 논문집 『역사이성과 자기혁신』, 입문자를 위한 철학 안내서 『철학 한 스푼』, 소설 작품을 철학의 시선으로 해석한 『행복한 뫼르소』를 출간했으며, 공동 작업으로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시리즈 세 권(『호수에 비친 달은 외로울까: 고독』, 『흔들려야 날갯짓한다: 성장』, 『죽음아 날 살려라: 죽음』)을 펴냈다. 크로너의 『헤겔』과 앙게른의 『역사철학』을 번역했으며, 독일관념론, 문명론, 철학의 일상화, 문예비평이 관심 ... 더보기
최근작 : <나를 찾아가는 철학여행>,<행복한 뫼르소>,<동서의 문화와 창조> … 총 17종 (모두보기)
SNS : yoorius@dankook.ac.kr
씨알사상연구회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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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함석헌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2002년 5월에 '씨알사상을 연구,보급하여 자유로우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인류사회 형성과 생명 문화 창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박재순 박사가 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문영, 김경재, 문대골, 김영호, 곽분이, 김조년, 김성수, 최정윤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함석헌기념사업회의 지원과 협력으로 매달 연구 발표회를 가졌고 매년 함석헌 탄신을 기리는 학술대화마당을 열어왔다.
최근작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씨알 생명 평화> … 총 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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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님의 사상 새창으로 보기
 
한동안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분이 함석헌 선생님입니다. 1980년대까지 특히 197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면서 한국의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십니다. 이젠 세상도 많이 달라지고, 그분의 글에서 느껴지는 고어체도 약간 적응이 안되어, 잊혀져가는 옛 선각자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한번씩은 그분의 씨알의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요. 얼마전 서점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새로 출간된 것을 보고 무척 반가왔습니다. 그러다 함석헌 선생님에 관해 연구한 글들 중 중요한 글들을 모은 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분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두에 박재순님이 쓰신 왜 함석헌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근대한국이 가진 사상가로 부를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이 말씀하신 생명사상은 동양의 정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담고 있는 커다란 그릇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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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라 2007-04-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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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6

알라딘: [전자책] 불교를 철학하다 -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epub 이진경

알라딘: [전자책] 불교를 철학하다

[eBook] 불교를 철학하다 -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epub 
이진경 (지은이)휴(休)2016-12-19 

전자책정가
9,600원

종이책 페이지수 356쪽,

책소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이 그간 공부했던 과학, 철학, 예술 등이 불교적 사유의 흐름 속에서 섞이고 변성된 것들로, 자신도 모르게 밀려들어갔던 심연 속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촘촘하게 담아낸 책이다. 현대철학으로서의 불교, 즉 불교의 개념을 현대로 가져와 우리 삶 속에 투영해보고 융합해봄으로써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불교로의 재탄생을 이야기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25가지 개념을 다루는 방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은 무언가에 섞여 들어가며 스스로 바뀌어간 ‘불교의 초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연기, 무상, 인과, 무아, 보시, 중생, 분별, 중도, 공, 윤회, 자비, 마음, 식, 십이연기(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에 대한 이치와 지혜를 설명하면서 ‘21세기’라고 명명되는 이 시대의 연기적 조건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불교로,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의 방향을 조명한다.
목차
제1장 나의 본성은 내 이웃이 결정한다
연기: 외부에 의한 사유

1. 형이상학이여, 안녕
2. 당신의 본성은 당신의 이웃이 결정한다
3. ‘자업자득’의 업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제2장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하지만…
무상: 차이의 철학과 필연적 무지

1. 잎이 질 때 드러나는 본체
2. 환(幻), 필연적 무지
3. 집단적 환상과 무상의 정치학

제3장 나비의 날개를 타고 끼어드는 것
인과: 분석적 인과성과 연기적 인과성

1. 인과를 모르면 여우가 된다
2. 나비효과, 혹은 차이의 반복
3. 연기적 인과성, 연기적 합리성

제4장 내가 죽는 곳에서 만인이 태어나느니…
무아: 비인칭적 죽음과 부모 이전의 ‘나’

1. 카게무샤의 눈물
2.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3. 수정란도 되기 전의 나

제5장 존재 자체가 선물이 될 수 있다면
보시: 불가능한 선물과 절대적 선물

1. 소모적 장식과 선물
2. 무주상보시, 혹은 절대적 선물
3. 부처의 선물, 보살의 선물

제6장 모든 개체는 공동체다
중생: 공동체의 존재론과 중생

1. 모든 개체는 중생이다
2. 모든 중생은 공동체다
3. 중생은 부처인데, 왜 부처가 되어야 하는가

제7장 부처는 똥이고, 소음은 음악이다
분별: 척도의 권력과 타자성

1. 분별, 선택 이전의 선택
2. ‘옳은 것’의 힘
3. ‘초험적 경험’, 혹은 분별을 넘어선 분별

제8장 극단보다 더 먼 ‘한가운데’
중도: 중도의 존재론, 파격의 논리학

1. 있으면서 없는 것
2. 중도와 중용의 차이
3. 파격의 논리학

제9장 사물의 구원, 혹은 쓸모없는 것들의 존재론
공: 존재의 사유와 순수 잠재성

1. 연기적 조건 ‘이전’의 존재
2. 불생불멸의 잠재성
3. 존재는 왜 보이지 않는가

제10장 죽음의 불가능성이 왜 고통이 되는가
윤회: 영원회귀와 니힐리즘

1. 영생의 고통이라니
2. 고통의 피안에서 차안의 해탈로
3. 노바디(nobody)의 윤회

제11장 연민의 윤리에서 우주적 우정으로
자비: 타자의 윤리학과 존재론적 우정

1.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2. 연민 없이 사랑하라
3. 미움 없이 미워하라

제12장 자유의지 없는 세상에서의 자유
마음: 마음의 물리학과 능력의 윤리학

1. 내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니다
2. 어떤 마음이 내 마음을 만드는가
3. 행을 닦을 때, 우리는 무엇을 닦는 것일까

제13장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혼을 갖고 있다
식: 분자적 인식론과 식의 존재론

1. 눈 없이 보고, 코 없이 냄새 맡는 것들
2. 분자들의 지각, 세포들의 인식
3. 신체는 식을 만들고, 식은 신체를 만든다

제14장 무지 이전의 무명에서 생멸 이전의 ‘존재’로
십이연기: 무명의 카오스와 무지의 코스모스

1. 십이연기를 지금 다시 묻다
2. 무명(無明): 무한속도로 변하는 세계를 어찌할 것인가
3. 행(行): 태초에 행동이 있었으니라
4. 식(識): 동물 이전의 인식능력
5. 명색(名色): 안팎의 식별이 ‘나’를 만들고
6. 육처(六處): 이유 있는 허구의 여섯 시종들
7. 촉(觸): 있어도 만나지 못하면 없는 것이니
8. 수(受): 기쁨과 슬픔의 자연학
9. 애(愛): 분별심은 왜 지혜 아닌 무지로 인도하는가
10. 취(取): 가지려는 마음의 수동성
11. 유(有)/생(生): 생성보다 존재가 선행한다는 믿음이라니
12. 노사(老死): 고통과 두려움이 그려낸 생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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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방법은 많지만, 무엇보다 명확하고 뚜렷한 방법은 '연기'라는 말로 요약하는 것이다.
P. 18
‘연기적 사유’는 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무상함의 저편을 찾는 게 아니라, 무상함을 보는 것이 지혜임을 설하고,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음을 가르친다. 심지어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가변적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으라고 말한다. 아주 달라 보이는 것에서도 ‘동일한 것’을 찾는 ‘동일성의 사유’와 반대로, 아주 비슷한 것에서도 ‘차이’를 보는 ‘차이의 사유’라고 할 것이다. _p.18  접기
P. 43-44
불교의 가르침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무상이 바로 본체고, 그것 이외의 본체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도를 깨친다는 것은 바로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아는 것뿐 아니라, 무상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무상함 속에서 대하는 것이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아니, 상(常)이란 무엇인가? 항상 그대로인 것,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조건이 달라져도 그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상을, 불변의 실체를 추구한다 함은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걸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이란, 그런 동일성이 없음이고, 그런 동일성에 반하는 것만이 있음을 뜻한다. 동일성에 반하는 것은 ‘차이’다.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항상된 것을 찾음이 달라 보이는 것마저 ‘동일화’하려 함이라면,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차이화’하고 있음을 봄이다. 동일성이 없다 함은 오직 차이만이, ‘차이화하는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상의 통찰은 곧바로 ‘차이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_p.43-44  접기
P. 87-88
자아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이든 단단해지는 순간 나를 가두는 벽이 된다. 무아란 그런 벽을 반복하여 깨고 지금의 ‘나’를 반복하여 넘어설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끝없는 변이의 과정을 기꺼이 수긍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넘어서려고 선택하는 것 역시 ‘나’의 선택인 한,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나의 죽음이 아니라 확장에 불과한 거 아닌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게 다가오는 삶은 대부분의 경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온다. 나의 죽음을 동반하는 나의 선택이란 ‘외부’라고 불러 마땅한 그 뜻하지 않은 것과 내가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뜻하지 않은 것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옴을 수긍하는 것이다. _p.87-88  접기
P. 108
먼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의 존재는 시방삼세 존재자들의 연쇄가 준 선물이다. 준다는 생각 없이 준 선물이다. 그렇기에 무주상보시는 어딘가 특별히 따로 있기 이전에,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기대어 있는 것, ‘연기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내게 존재를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니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가, 매순간 자신의 삶이 이 우주적 연쇄의 존재자가 주는 선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이 부처라면, 부처란 매순간의 존재와 삶이 거대한 우주적 스케일의 선물임을 알고 받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_p.108  접기
P. 165
중도는 유무를 떠나는 것뿐 아니라, 진위를 떠나고, 선악을 떠나고, 남과 여, 적과 친구 같은 모든 이항대립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서나 이항적인 양극단을 떠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중도는 어떤 문제나 사태에 적용되고 관철되어야 할 ‘사유의 방법’에 가깝다. 즉 사태나 문장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하여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서구의 논리학적 사유방법과 반대로 양극단이 서로 섞이거나 중첩되기도 하고, 하나가 반대의 것으로 전변되는 아주 다른 종류의 ‘논리학’이다.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극단을 넘나들며 해체하는 횡단의 사고다. _p.165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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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진경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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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 한국사회의 토대를 분석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써서 24세에 이진경이라는 필명을 얻었다. 본명은 박태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논문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대한 공간 사회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지식 공동체 ‘수유너머104’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천착해 『철학과 굴뚝 청소부』를 썼고,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변혁을 모색한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이진경의 필로시네마』를 썼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과 함께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삶의 탈주를 꿈꾸며 『노마디즘』, 『철학의 외부』, 『역사의 공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 접기
최근작 : <철학의 모험>,<수학의 모험>,<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 총 90종 (모두보기)
SNS : //twitter.com/solaris00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 불교를 말하다!

현대의 과학, 철학, 예술은 물론 우리 사회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의해 침윤되고 혼합된 불교의 모습을 찾아서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방법은 많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명확하고 뚜렷한 방법은 ‘연기’라는 말로 요약하는 것이다. 즉 연기가 불교의 요체고, 석가모니가 자신의 깨달음을 펼치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개념이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연(緣)하여 일어남(起)이다. 연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기대어 있음이다. 따라서 연기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반대로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 《중아함경》에 있는 유명한 문구가 그것을 요약해준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처럼 불교의 오랜 역사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연기적 조건 속에서 과거의 자신과 대결하며 스스로를 갱신해온 것임을 안다면, 현대의 과학, 철학, 예술은 물론 우리 사회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의해 침윤되고 혼합된 불교의 모습을 ‘순수한 불교’를 준거로 비난하는 것처럼 거리가 먼 것은 없을 것이다.

신간 《불교를 철학하다》는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이 그간 공부했던 과학, 철학, 예술 등이 불교적 사유의 흐름 속에서 섞이고 변성된 것들로, 자신도 모르게 밀려들어갔던 심연 속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촘촘하게 담아낸 책이다. 현대철학으로서의 불교, 즉 불교의 개념을 현대로 가져와 우리 삶 속에 투영해보고 융합해봄으로써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불교로의 재탄생을 이야기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25가지 개념을 다루는 방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은 무언가에 섞여 들어가며 스스로 바뀌어간 ‘불교의 초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연기, 무상, 인과, 무아, 보시, 중생, 분별, 중도, 공, 윤회, 자비, 마음, 식, 십이연기(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에 대한 이치와 지혜를 설명하면서 ‘21세기’라고 명명되는 이 시대의 연기적 조건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불교로,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의 방향을 조명한다.
인터넷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곳이 연결되고, 기계와 인간이 섞이고 합체되며, 생명체가 복제되고 매매되는 시대에 어떤 현대철학보다 더 현대적인 철학으로, 어떤 윤리보다 더 현대적인 삶의 방법으로서 불교가 재탄생되어야 한다는 한 현대철학자의 경계를 허무는 관점과 폭넓은 사유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세속을 벗어난 수행과 고된 깨달음의 여정을 뛰어넘어 좀 더 행복하고 충만하게 우리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깨달음의 실천적 요체로서 다가온다.

‘무아’의 철학,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다

그런데 왜 현대철학자가 ‘불교’를 이야기할까? 또 그에게 불교란 어떤 의미일까? 철학자 이진경에게 ‘불교’는 아주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종교였고, 아득한 먼 곳에서 가끔씩 보내는 철학적 눈짓에 불과했다. 한 번도 절에 가본 적이 없었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철학적 향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찾아서 읽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성철 스님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접한 후 《벽암록》의 심오함과 유머러스함, 고준함에 ‘매혹’되었고, 가까운 이들과의 갈등에서 시작된 당혹스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아상’에 대해, 그 아상이 만드는 세계의 일방성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었다. 내 기준에 따라 세상사를 분별하며 내 맘에 들지 않는 얘기는 싫다고 쳐내고 맘에 드는 얘기만 기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점차 ‘무아’를 설하는 철학(4장 참고)에 빨려 들어갔고, 세상을 향해 분별하고 재단하던 시선을 비로소 내 자신을 보는 데 내 자신이 만든 세상의 협소함을 보는 데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전에 읽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것, 가령 ‘차이의 철학’이니 ‘공동체’니 하는 것들이 ‘무아’의 철학 없이는 공허한 것이 될 것임을 직감했고, 그 직관 속에서 그것들 또한 변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운명의 지침들이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 또 하나의 현대철학,
25가지 불교 개념으로 삶을 사유하다

이 책은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자 이진경이 ‘불교’에 매혹되고 예고 없이 맞닥뜨린 삶의 심연 속에서 보고 생각하게 된 것들, 불교가 신체와 영혼에 스며들어 만들어낸 사유의 단면을 섬세하면서도 통찰력 넘치는 문장으로 보여준다.

■ 연기: 외부에 의한 사유
‘연기적 사유’는 무상함을 보는 것이 지혜임을 설하고,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음을 가르친다. 저자는 이러한 ‘연기’를 이야기하며 세르반테스와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똑같은 글이지만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른 문체와 의미를 갖는다는 것, 바이올린 역시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악기가 된다는 것, 흑인이 노예가 되었던 것은 백인과의 끔직한 만남에 기인한다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좋은 본성을 가지려면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이란 밖에서 오는 것, 즉 바이올린이나 흑인의 본성은 그것의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연기적 사유는 어떤 것의 본성을 그 외부에 의해 포착하는 ‘외부성의 사유’다.

■ 무상: 차이의 철학과 필연적 무지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차이화’하고 있음을 봄이다. 우리는 동일한 신체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의 세포들은 생명하며 바뀌어가고 있다. 나뭇잎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스스로와도 끊임없이 달라지는 무상한 ‘차이화’ 과정 속에 있다. 가령 ‘남성’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남성’이라고 동일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차이가 숨어 있다. 힘 좋은 남성, 눈물이 많은 남성, 남성을 좋아하는 남성 등. 남성적 정체성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동일성의 사유는 이 모든 차이가 최소화되고 사라지도록 억누르는 반면, 무상과 차이를 본다는 것은 ‘남성’이란 동일성 안에서 수많은 차이가 숨어 있음을 보고, 그것들에 따라 동일한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그런 차이화에 대해 억지로 막지 않고 열어둘 것을 요구한다.

■ 인과: 분석적 인과성과 연기적 인과성
분석적 인과성은 수학적 공식으로 정확하게 표시되는 보편적 인과법칙을 찾는 것이라면, 연기적 인과성은 초기 조건의 차이에 따라 인과의 작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한다고 언제나 캘리포니아에 폭풍이 부는 건 아니고, 사회주의 사회라고 반드시 셀프서비스가 없어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 무아: 비인칭적 죽음과 부모 이전의 ‘나’
무아란 ‘본래의 자아’나 ‘불변의 자아’ 혹은 ‘참된 나’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음을 뜻한다. 자아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이든 단단해지는 순간 나를 가두는 벽이 된다. 무아란 그런 벽을 반복하여 깨고 지금의 ‘나’를 반복하여 넘어설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는 죽음을 불랑쇼는 ‘비인칭적 죽음(비인격적 죽음)’이라고 명명했고, 누군가 죽으며 비워진 자리에서 ‘누군가’ 다른 이가 탄생하는데 이를 ‘비인칭적 탄생’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그런 비인칭적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사건의 영원한 반복임을, 기쁜 긍정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아란 능력의 최대치를 뜻하는 잠재성을 향해 우리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자아 형성 이전의 아기가 가진 잠재적 능력을 통해 다른 ‘나’들로 바꾸어가는 것이다.

■ 보시: 불가능한 선물과 절대적 선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란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는 것, 그런 만큼 받으려는 마음도 동반하지 않고, 그렇기에 받은 이에게 어떤 채무감도 부과하지 않는 것, 따라서 교환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는 증여, 이것이 절대적인 증여고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절대적 선물’이다. 선물인 줄도 모르는 채 주고받는 선물, 있을 수 없는 선물이란 점에서 ‘불가능한 선물’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무외시(無畏施)’처럼 존재 그 자체로 선물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편안함이든 긴장감이든 자신에게 어떤 도움으로 다가왔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대적 선물이고 무주상보시일 것이라고 말한다.

■ 중생: 공동체의 존재론과 중생
중생이란 수많은 것이 하나의 ‘무리(衆)’를 이루어 살아가는(生) 개체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는 개체다. 무리지어-살아가는 중생은 모두 그 자체로 공동체다. 개개의 인간이나 동식물만 중생이요 공동체인 게 아니라, 내 몸도, 심장이나 허파, 세포도 모두 중생인 동시에 공동체고,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가족이나 마을도 중생이요 공동체다. 중생은 공동의 삶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입이나 호오 분별에서 벗어나 몸이나 지구의 고통에 눈을 돌리고, 그것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통찰해야 한다. 좋은 삶을 위해선 지혜(인연으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긍정하고 그것과 기쁘게 공생하는 법을 아는 것)가 필요하지만, 선악호오의 분별을 떠날 때에만 지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 분별: 척도의 권력과 타자성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과 같은 이차적 관념이 덧붙여진 구별이나 판단, 인식을 분별이라 한다. 분별은 모두 ‘나’의 기준을 척도로 행해진다.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남들도 행해야 한다는 암묵적 가정이 분별의 행위 속에 숨어서 작동한다. 그 척도를 내려놓지 않으면 남의 처지가 보이지 않고, 남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에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성’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20세기 현대예술의 역사는 분별심에 대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카소, 뒤샹, 장뒤페를 비롯하여 현대음악가 루이지 루솔로 역시 관념과 척도를 깨버리자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중도: 중도의 존재론, 파격의 논리학
중도란 진위와 선악 같은 양자의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떠나서 사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태나 문장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하여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서구의 논리학적 사유방법과 반대로 양극단이 서로 섞이거나 중첩되기도 하고 극단을 넘나들며 해체하는 횡단의 사고다. 눈 안에 들어선 격자, 사유를 직조하는 ‘이치’를 파괴하여 틀을 벗어나서 사유하게 하는 ‘파격의 논리학’이다.

■ 공: 존재의 사유와 순수 잠재성
공은 어떤 규정성이나 본성이 없기에 연기적 조건에 따라 그 조건이 규정하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알도 될 수 있고, 식재료도 될 수 있고, 남을 괴롭힐 무언가가 될 수도 있고, 실험재료도 될 수 있고…. 규정성은 없지만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갖는 상태가 바로 공이다. 공성을 본다는 것은 용도의 규정 속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규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 사물의 공성을 보는 것, 고기의 규정성에서 벗어나 소나 돼지의 잠재성을 보는 것, ‘흑인’이란 규정에서 벗어나 어떤 한 사람의 잠재성을 보는 것. 그러나 더 중요한 진실은 그런 ‘구원’의 행위를 통해 사물이나 사람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구원하는 자가 자신이란 사실이다.

■ 윤회: 영원회귀와 니힐리즘
윤회하는 수많은 생의 긍정은 수많은 생을 반복하여 사는 힘의 긍정이다. 이것은 그때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힘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사상과 매우 가깝다. 극락이든 구원이든 현세를 떠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현세적 삶 안에 있으며, 그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것임을 말한다. 윤회하는 삶은 ‘나’라는 실체가 없을 때만 가능하다. 어떤 누구도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 그것만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 ‘아무도 아닌 자’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어떤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이 능력을 ‘무아’라고 한다면, 윤회란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수많은 존재자가 될 수 있는 이 잠재적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다. 이 능력을 ‘생명’이라고 부른다면, 윤회란 니체의 말처럼 영원한 시간을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어떤 동일한 힘이 그때마다 다른 양상들로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다.

■ 자비: 타자의 윤리학과 존재론적 우정
자비란 우정과 공감이라는, 우리 중생들이 고통에 찬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버티게 해주는 두 가지 관계를 집약한 개념이다. 남에게 기쁨을 주려는 마음과 남에게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가까이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고통받는 불쌍한 ‘타자(과부, 고아, 빈민 등)’를 향한 연민에 대해 설한 반면, 달라이 라마는 인간이 아닌 것을 포함하는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는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다. 중생은 불쌍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부처’가 될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모든 중생은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지만, 현행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조건에 따라 다른 지위와 규정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현행화된 세간에서는 조건에 따라 많고 적음,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교차하며 자비행이 행해지게 마련이다.

■ 마음: 마음의 물리학과 능력의 윤리학
일체유심조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속한 마음이다. 마음은 모두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는다.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마음들의 연쇄에 의해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다른 산출능력을 갖는다. 흑인을 노예로 삼으려는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의 마음과 자유인으로 대하려는 마음에 상대하는 흑인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유전자조차 그러하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나의 마음, 너의 마음은 모두 35억 년간 생명의 역사라고 불리는 연기적 조건이 기억되고 집적된 것이며, 그런 외부적 조건이 내부화된 것이다. 나에게 작용하는 모든 마음이 응집되어 내부화된 것이다.

■ 식: 분자적 인식론과 식의 존재론
식의 개념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의식) 각각의 인식능력이나 그것이 얻은 식의 독자성을 사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인식의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해준다. 나아가 인간 아닌 생명체의 ‘인식능력’이나 그것으로 얻은 ‘식’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세포의 핵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아니 핵산들의 식의 작용은 세포별로 고유한 단백질을 만든다. 분자적 식의 작용으로 인해 생명체의 신체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체라는 존재방식은 물론 그 존재 자체가 유전자나 그 이하 수준에서 진행되는 식의 작용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식의 작용은 단지 인식론의 영역뿐 아니라 ‘존재론’의 영역에도 속한다.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이유나 존재양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시적 식의 작용은 생명체의 존재를 특정한 양상으로 구성하고, 그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가장 일차적인 성분인 것이다. 분자적 식의 개념을 통해 이제 우리는 미시적 식의 존재론에 도달하게 된다.

■ 십이연기: 무명의 카오스와 무지의 코스모스
십이연기(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는 생과 사, 늙음 등 열두 개 사태들의 연관을 연기법에 의해 포착하여 설명한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인 ‘늙고 죽음(老死)’은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며, 태어남은 ‘있음(有)’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한다. 있음은 ‘집착/취착(取)’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고, 집착은 ‘애착(愛)’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며, 애착은 쾌감이나 불쾌감 같은 ‘감각작용(感受, 受)’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한다. 감각작용은 감각기관과 외부의 만남 내지 ‘접촉(觸)’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접촉을 조건으로 하고, 그런 접촉은 눈과 귀, 코 등 여섯 개의 ‘감각기관(六入, 六處)’을 조건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다. 이런 육처는 사물(色)을 구별하고 그것을 파악하는(~라고 명명하는) 작용(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고, 명색은 분별능력이나 분별작용(識)을 조건으로 가능하게 된다. 분별작용은 필경 살기 위해 발동되는 충동이나 의지, 그에 따른 행동(行)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 행동이나 의지는 세상이 무언지 알지 못하는 조건 위에서, 즉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
이 개념들을 세심하게 따져보면 수많은 의문을 야기한다. 이는 ‘십이연기’의 가르침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명한 연쇄가 아니며, 사용된 개념들 또한 상식이나 통념과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십이연기를 우리가 처한 지적·존재적 조건에서 사유를 이끌어낸다. 상투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깊이 통찰하는 지혜의 단서로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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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요체는 연기(緣起)이다. 불변하는 영원한 존재는 없으니 무상함의 사유가 바로 지혜이다. 연기에 바탕하여 이시대 불교를 현대적인 철학과 윤리로 접근하고 재탄생시키려는 새로운 융합의 철학적 사유가 탁월하다. 현실의 굴뚝청소에서 내면의 청소로 이어지는 저자의 지적 편력이 돋보인다.  구매
현정 2017-03-12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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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교수는 불교전공자는 아니지만 어설픈 ‘불교주의자‘들에 비해 훨씬 더 불교의 본령에 육박하고 있다.전공이 아니고 기고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불교 자체가 그런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워온 지난한 자기 갱신의 역사이거늘.다만 이 책의 관점을 절대화하지 말자.그 또한 아상일 테니.  구매
흰바람벽 2017-10-25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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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입각한 책보다 불교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책.  구매
heru25 2019-10-0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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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혁명성을 한껏 드러낸 책.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통섭‘을 보여준다. 불교가 지니는 현대성과 창조성을 이렇게 매력적으로 드러내긴 어려울 듯.  구매
박하향 2017-01-1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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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들뢰즈에 대해 많이 공부해서 그런지 들뢰즈로 불교 철학하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뢰즈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보였지만 잘 읽히고 괜찮았다  구매
koziro 2016-12-0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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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흐리는 종교 새창으로 보기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제언에서 유발하라리가 말한 것처럼 종교는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낸 강력한 하나의 허구로써 인간의 적응도를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해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수 있게 해주었고,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그리고 삶의 목표를 제시하며 도덕적 인간공동체를 만들어주었고, 신에 대한 공동의 믿음으로 강한 결속력을 부여했다. 종교는 필요로써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와 우주를 설명해주기도 하였는데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재에 이르러선 이런 종교의 설명은 불합리한 측면이 많아졌고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부분도 사실이다. 때문에 몇몇 종교는 애써 현대과학의 성과에 대응하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나 그런 논란에서 비켜나있는 종교도 있다.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중 현대과학의 설명과 많은 부분에서 합치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불교다. 책은 그런 불교의 현대성과 미래성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처와 과학기계장치가 결합된 파격적 모습을 표지로 선정했다. 그리고 책의 저자역시 불교의 여러 철학을 설명하며 현대 과학과 이를 결부시키기도 한다.

 불교에서 시작은 공이다. 우주와 세계는 공이다. 텅비었다는 뜻인데 사실 그렇지가 않다. 양자역학에 의해 입자는 언제든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어 완벽한 진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공에서 말하는 무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 무언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갖는 무규정성이 된다.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모든 가변성의 바탕이고 근거가 된다.

 이런 공에서 연기가 시작된다. 무언가는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관련하여 생겨난다. 따라서 연기는 연하여 일어난단 뜻으로 어떤 조건에 의하여 일어나고 어떤 조건에 기대에 존재함을 말한다. 즉, 인간이든 사물이든 절대불변의 본성 같은 것은 없으며 특정한 관계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입자는 관찰자의 영향을 받으며 이로 인해 입자의 위치와 속도 두가지를 완벽하게 측정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또한 사람이나 사물간에는 상성이 있고, 서로 영향을 받는다. 즉, 연기적 존재인 것이다.

 다음은 무상과 무아다. 고정 불변의 진리와 존재는 없기에 모든 것은 항상 빠르게 변화한다. 같은 사람만 하더라도 세포단위에서 무수한 교류와 변화가 있으며 1년여의 시간이지나면 사람에게서 이전의 세포는 남아 있지 않다. 또한 늙어가며 다른 것과 연기해 꾸준히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한다. 때문에 무상이나 무아는 본래의 자아나 불변의 자아는 없음을 의미한다. 지금의 나나 사물은 특정한 연기 조건에서 만들어진 잠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이나 무아는 이런 내가 죽고 다른 내가 계속해서 생성되는 것이며 이것을 우주와 함께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상과 무아속에서도 열역한 제2법칙을 무시하고 생겨난 생명은 본래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세계에 던져진 생명은 이런 의지로 인해 살고자 하나 세계는 무명이다. 무명이란 무상과 무아의 세계로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포착할수 없는 세계다. 하지만 생명은 살아남아야하기에 억지로 무명의 세계의 속도를 늦추고 멈추고 관찰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식이라고 한다.식은 환경과 개체의 만남이고, 반복되는 만남에 대한 지각과 포착이며 그럼으로써 발생하고 발전한 지각능력과 포착능력들이다. 인간과 다른 생명이 환경에 대해 유전자에 새긴 것들이나 지능, 그리고 사람과 생명이 만들어낸 모든 지식과 밈등은 모두 이 식으로 인한 것들이다. 이 식은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용한 것이기에 무지이나 반드시 필요한 무지다.

 우주의 모든 것은 연기적 존재로 서로 연결되었으며 불성을 갖는 평등한 것들이지만 식으로 인해 생명체는 경계를 만들어낸다. 이 경계는 생존을 위해 피아를 구분하는 것으로 그 경계는 사실 매우 모호하다. 숨을 내쉬며 외부가 금방 나의 내부가 되고 내부의 공기가 외부의 것이 된다. 먹이의 섭취는 다른 것을 내몸으로 만드는 것이고 배설은 나의 것을 외부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는 필요하고 생명체가 만들어낸 대표적 경계는 면역계다.

 하여튼 식은 호오나 미추처럼 선호를 나타내는 이차적 관념인 분별로 이어진다. 이는 이차적 관점으로 생득적인 것도 아니고 재인식이며 선별이다. 하지만 이 이차적 관념은 곧 일단 생명체에 정착되면 오히려 생각이전에 일어나고 감각보다 앞서 감지되며 이성보다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감정적인 것이어서 너무 단순하여 정확한 지각을 막고, 분별은 너무 빨라서 생각하기 전에 판단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분별은 다른 것들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이런 분별은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합적으로도 이루어진다. 분별의 척도라는 것이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분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해진다. 연기적 존재가 본성을 거부하고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별을 넘어서기 위해선 낯선 것과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분별하기 어려운 것과의 만남으로 분별이 정지되고 비로서 제대로된 생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만남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고, 여러 사람과 세계, 견해를 접하는게 중요하다. 이처럼 분별심을 내려놓는 다는 것은 타자성의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분별을 떠났을 때 비로서 어떤 조건에서 어떤게 더 나은지 제대로 분별할수 있다.

 불교는 상당히 평등한 종교인데 이런 점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점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중생은 모든 인간에서 사물, 생명체와 작은 것들도 의미한다. 불성은 연기적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존재자와 현행활 도리 수 있는 잠재력인데 이게 가능한 것이 부처다. 즉, 부처는 연기법의 작용을 통찰하여 그에 응하되 내부화된 성향에 머물지 않고 그 때마다 적적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내는 능력에 보여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부처를 대하는 것이 자비이며 자비를 부처가 아닌 자에게도 행하는 이유는 모두가 잠재적 부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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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9-10-14 공감(26)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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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진경의 놀라운 불교 철학 새창으로 보기 구매
불교의 의미를 어떤 전공자보다 래디컬하고 설득력 있게, 그러면서 자유롭게 풀어쓴 책이 이진경의 '불교를 철학하다'이다. 제목에 철학이란 말이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이진경은 '외부, 사유의 정치학', '필로 시네마;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등 철학 저서들을 쓴 저자이다.

 

문화의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처럼 우리사회에서 인문학이 소비되는 방식에 근본적 문제제기를 한 '불온한 인문학'(2011년 6월 출간)에 수록된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에서 저자는 하이데거의 개념들과 유식불교나 화엄학의 개념들간에 유사한 개념들을 찾아 대응시키는 것 등을 횡단으로 간주되는 유비적 대응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의 관심이 불교 철학으로 드러났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충격을 의도하고 쓰지 않았겠지만 이진경의 책은 래디컬한 만큼 충격적이다. 개인적으로 김영명의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를 가장 핵심적 불교 비판서이자 애정의 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인상적인 대목은 다음의 구절이다. "기존 불교계는 자동차는 엔진, 브레이크, 바퀴 등 즉 자동차 전체보다 작은 단위의 실체들이 일시적으로 만나 이루어진 것이기에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문제는 자동차의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그 부품들의 실체는 인정한다."는 것이다.(163 페이지)

 

각설하고 이진경의 책은 불교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의도한 빛나는 책이다. 연기(緣起), 무상(無常), 인과(因果), 무아(無我), 보시(普施), 중생(衆生), 분별(分別), 중도(中道), 공(空), 윤회(輪回), 자비(慈悲), 마음, 식(識), 십이연기(十二緣起) 등 열 네 개념에 대해 저자가 펼치는 사유는 놀랍다.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도 명쾌하고 논란이 분분한 부분에 대해서도 의연한 것이 저자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과장하면 카뮈가 그르니에에 대해 한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란 말을 해도 좋을 듯 하다.

 

저자는 철학에 익숙하기에 동서 사유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금강경 등의 불교 경전, 벽암록 같은 선불교 공안집, 유식(唯識) 불교 등은 물론 보르헤스, 마르크스, 생물학, 나비효과,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카게무샤(かげむしゃ)', 매트릭스(영화), 데카르트, 스피노자, 블랑쇼, 포틀래치 개념, 조르주 바타유, 프로이트, 양자역학, 현대음악, 진은영의 시, 니체 등을 여유롭게 횡단한다.

 

전체가 버릴 것이 없지만 특별히 몇 부분을 보자. 저자는 공(空)을 어떤 규정성도 없음으로 정의한다. 어떤 규정성이나 본성이 없기에 연기적 조건에 따라 그 조건이 규정하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공은 단지 없음을 뜻하는 무(無)가 아니라 차라리 가능한 규정성들이 너무 많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가령 달걀은 식재료도 될 수 있고 남을 괴롭힐 무엇인가(투척용)가 될 수 있고 실험재료도 될 수 있고... 무질서가 아닌 무한질서로서의 카오스가 생각난다. 인연을 의지해 생기는 연기는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는 없음을 가르친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본성이 달라진다.(18 페이지)

 

저자는 가변적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니체는 가변적 세계의 저편을 추구하는 행위를 니힐리즘으로 규정했다. 공성(空性)을 본다는 것은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음을 보는 것이고 최대치로 열린 잠재성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179 페이지)

 

저자는 어떤 누구도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 그것만이 윤회하는 것이라며 절대적 가변성을 갖는 이 능력을 무아라 한다면 윤회란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수많은 존재자가 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될 것이라 결론짓는다.(21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여러 생의 윤회든 한 생 안에서의 윤회든 그것은 나나 진아(眞我), 아트만보다는 무아나 생명이라고 불리는 게 더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다. 윤회를 긍정하는 것은 이 힘의 되돌아옴, 이 흐름의 가변성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218 페이지)

 

압권(壓卷)은 마음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한 해명이다. 저자는 마음을 논하며 스피노자의 자유의지 부정을 논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쓸 때도 그것은 그가 겪은 어떤 사건, 혹은 사람이 무언가 쓰도록 촉발했기 때문이고 그런 자극을 표현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247 페이지)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행위조차 신체의 어떤 상태가 요구한 것을 따른 것이다. 신장이나 방광이 앞장서는 그런 촉발이 없다면 소변기 앞에 서려는 마음이 생겼을 리 없다. 소변을 보는 것도 내가 마음 먹기 이전에 신체가 마음먹은 것이고 그 신체에 흡수된 수분이 마음 먹은 것이다.

 

내가 내 뜻대로 행위한다고 즉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믿는 것은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을 하게 만든 원인을 모르고 있음을 뜻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라 할 때 그 마음은 저렇게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하는, 내게 다가온 것들에 속한 마음들이다.(247 페이지)

 

그렇기에 일체유심조는 연기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연기법의 다른 표현이고 내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관념론과 반대되는 방향의 사고이다.(248 페이지) 저자는 이 부분에서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활용한다.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뜻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산출하는 역할'을 능산적 마음, 나의 마음이나 개미의 마음 등 각각의 마음은 그것에 의해 산출된 능력이란 점에서 소산적 마음이라 설명한다.(251 페이지)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들었지만 전편이 이런 논리와 흐름으로 진행된다.

 

화려하면서 꼼꼼하고 치밀하면서 자유로운 책이 ‘불교를 철학하다’이다. 자주 들여다 보아야 할 책이다. 놀라운 책이기 때문이고 더 배우고 적응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비판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다른 생각이기에 비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유식무경(唯識無境)은 다르게 볼 여지가 충분하다 하겠다.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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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8-11-09 공감(1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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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제대로 철학했습니다. 평이하지만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심길 2017-02-0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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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철학하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통해 ‘익숙해진다’는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부모님이 특별한 종교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무신론자로 살아갈 수 있다. 어린 시절 이웃집 어른을 따라 교회에 다니다 부흥회의 분위기에 질겁하고, 소풍 길에 다녔던 절은 볼 거리이거나 쉼터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책을 통해 이슬람을 만나고 왜곡된 프로파간다에서 참모습을 찾으려 읽는다. 부모님과 함께한 어린 시절의 익숙함이 종교보다 자신을 믿고 살아간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시대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 온 이진경님이 불교를 종교보다 철학으로 이해하고 안내하는 불교철학 기본서 라고 판단한다. 바람 쐬러 다녔던 절, 스님들,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체유심조’와 ‘가는 걸 잡지 말고, 오는 걸 막지마라’ 정도였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보왕삼매경’을 보고 좋다고 느낀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불교 철학을 온통 이해했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몇 가지 불교 철학 개념을 알고 이해한 것만으로도 기쁘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1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 ‘나의 본성은 내 이웃이 결정한다’에서 막혔던 가슴이 터지고, 답답함이 사라지며 ‘아 ! 그래, 그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연기적 사유’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책이란 독자가 읽었을 때 책이다. 가지고만 있으면 책이 아니라 짐이거나 스트레스일 뿐이다. 좋아했던 남자의 변심을 원망하고 안타까워하고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연기’를 받아들이지 못함이다. 연기緣起가 무엇인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사라짐이다.

“‘연기적 사유’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주역의 모든 것은 변한다와 같은 변화를 긍정함을 토대로 한다. 그러니 불변한 것을 찾으려는 서양의 형이상학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다.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혼 초기에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10년, 20년 후에 같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것조차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업’이란 하던 것을 계속 하게 하는 성향으로 관성적인 잠재력이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업은 본성이 아닌 것조차 반복되면서 본성처럼 몸과 입, 의지에 달라붙어 관성적인 언행을 만들어낸다.” 연기적 조건의 차이에 업의 힘이 끼어들어 변화를 만들어간다.

 

불교의 가르침중 하나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상이란 조건이 달라져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무상이란 동일성이 없음, 동일성에 반하는 ‘차이’가 있음이다. “무상을 본다는 것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무상을 보지 못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 할 때 애착과 집착이 일어나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다.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하는 ‘동일성의 사유’도 배운다. 차이에서 출발하는 불교 철학은 차이화에서 생긴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일성에 가두려는 힘에 대항하며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한다.

 

근대 과학의 분석적 인과성과 불교 철학의 연기적 인과성을 비교한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이라는 단서로 독립변수와 종속 변수로 분석하는 인과는 서양의 분석법이다. 분석적 인과성에서 변수간 인과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하지만, ‘연기적 인과성’이란 필연성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필연성을 가진 법칙마저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빚어내는 우연성도 무시하지 않는다. ‘카게무샤의 눈물’에서 우리는 조건, 관계에 따라 다른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를 풀어낸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이라 본다. 행동패턴은 익숙해진 일상생활을 쉽고 편하게 해 주는데, 이는 새로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패턴 안에 제약된다. “삶의 가능성이 ‘나’라고 불리는 성격이나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오십 정도가 되어야 자아가 안정된다는 말은 자아에 갇혀가는 시기라는 말이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나와 남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다 남에게 폐가되고, 나에게 안타까운 어떤 상태를 표시할 뿐이란다. 그렇기도 하다.

 

지구는 가장 큰 공동체다. “일정하게 유지되는 대기비율처럼, 지구의 온도 역시 그런 항상성을 갖는다. 이런 이유에서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일 뿐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하나의 생명체다.”

 

끌어당겨 내 것으로 가지려는 마음(탐심 貪心), 밀쳐 내거나 제거하려는 마음(진심 嗔心) : “오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치달리고, 갖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집착하며, 가버린 것을 붙잡으려 애쓰고, 바로 옆에 있는 것을 피하려 하며, 피할 수 없이 다가온 것을 밀쳐내려 버둥거린다.”

 

‘도’라는 지혜는 선악호오, 미추정사 美醜正邪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 요체다. 분멸은 모두 ‘나’의 기준을 척도로 행해진다.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분별하지 말라는 뜻은 호오미추의 판단을 떠나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空’이란 연기적 조건을 모두 지워 남는 것이 아무런 본성도 규정성도 없음이다. “공성을 본다는 것은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을 보는 것이고, 최대치로 열린 잠재성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

 

‘윤회’는 영생불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삶이란 모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에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그런 고통 속에 영원히 머문다는 것이다. 윤회의 중단은 고통스런 삶의 중단이요, 그로부터 벗어남이다. 열반, 해탈은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연기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당대에는 혁명적 발상이다. “고통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차분하게 직시하고 그 안에서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다시 찾아 나선 이유였다.” 고통이나 번뇌 없는 깨달음은 없다. 윤회하는 현세적 삶과 별개의 해탈이나 극락 같은 것은 따로 없다. 윤회하는 삶을 떠나야 할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이다. 고통에서 배우려고만 한다면 깨달음을 향한 길을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집착이다. “연민 없이 사랑하라.”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성과 거리가 멀다. 동정이나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전제되어 있다.

 

一切唯心造 :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 조건 속에 스며들어 있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든다.”

 

十二緣起 : 無明/行/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生/老死

앞에 것이 뒤 것의 조건이다. 뒤는 앞이 있어서 일어난다.

 

“미움 없이 미워하라.”와 “눈 업이 보고, 코 없이 냄새 맡는 것들”, “十二緣起”의 어느 부분들은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불교를 철학하다>는 휴에서 2016년 11월 초판을 내놓았고, 2017년 9월 초판 6쇄, 본문 356쪽 분량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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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hill 2018-07-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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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쉽.
hiphop99dan 2018-01-0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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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이 쌓여서, 이번 주는 도서관 꾹 참고 있는 ... 새창으로 보기
읽을 책이 쌓여서, 이번 주는 도서관 꾹 참고 있는 책 읽자 했건만... 마음이 들썩들썩~ 평일엔 도서관 가기 힘들텐데 하는 초조한 마음이 오후가 지나면서 심해져.. 에라 모르겠다. 또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도서관엔 이미 빌린 책이 많으니, 두 번째로 가까운 도서관으로~ 훗~ 나 좀 천재같아.)

<초조한 마음>이 생각보다 두꺼워서 깜놀. <감정의 혼란> 분량 즈음으로 내 멋대로 생각해놓고, 빨리 못 읽을 거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든다. 책 제목과 싱크로율 1000%
다시 데려가겠다던 <불교>와의 약속도 지키고,
수연님과 함께 읽을 줌파 라히리 책도 챙기고,
팟케스트에서 듣다가 추천 받아 읽고 싶은 책도 빌리고... 하.. 또 5권 꽉 채웠엉.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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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11 공감 (30)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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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반 이상 이해가 안되는데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 새창으로 보기
와~ 반 이상 이해가 안되는데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다니..
정말 나의 배경지식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던 부분을 읽을 때는 이해가 쏙쏙, 흐름이 줄줄~ 모르는 부분을 읽을 때는 하얀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혹은 한 장씩 읽고 함께 토론해 보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하다.
강연을 다시 책으로 낸 거라 말씀하시는 톤으로 적어놔서 그런지 읽히긴 정말 잘 읽힌다.(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흐름을 꿰고 있다니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

정말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왜 막시무스님이 주기적으로 굴뚝청소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는지 진짜 완전 알겠음.(막시무스님 감사해용!)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싶은 책장에 넣었는데, 그때 북다이제스터님이 <불교를 철학하다> 구절을 올리셨는데 그게 또 너무 좋아서 담았다. 댓글로 북다님이 두 작품의 작가가 같다는 걸 알려주셔서 완전 운명적인 책이 되었음.(옷깃만 스쳐도 운명 남발하는 거 아시죠?)(북다님, 감사해요!! 저자 따윈 신경 안 쓰는 저에게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장 집에서 세번째로 가까운 도서관에서 두 권 다 빌렸으나, 이건 다 읽고 <불교>는 뚜껑도 못 열어보고 반납..ㅜㅠ 괜찮다. 또 빌릴 거니까! 다시 데려와 주겠노라고 사진도 찍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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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11 공감 (30)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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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4

알라딘: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알라딘: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장일순 (지은이),이현주 (대담)삼인2003-11-25초판출간 2003년
양장본730쪽
책소개

이 책은 장일순 선생이 삶의 말년에 노자의 <도덕경>을 가운데 두고 이아무개(이현주) 목사와 나눈 대화를 풀어쓴 것으로, <노자 이야기>의 개정판이다.

책은 <도덕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꼼꼼히 읽고 해석하는 형식으로 짜여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노자에 대한 해설서나 주석서가 아니라, 노자 사상을 화두 삼아 우리 시대에 바람직한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에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노자의 사상뿐 아니라 기독교, 불교, 유교, 동학, 마르크스주의 등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지혜와 통찰을 구하고 있다.


목차
개정판 머리말
초판 머리말
일러두기

1장 일컬어 道라 하느니라
2장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3장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4장 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로 되고
5장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6장 아무리 써도 힘겹지 않다
7장 천지가 영원한 까닭은
8장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9장 차라리 그만두어라
10장 하늘 문을 드나들되
11장 비어 있어서 쓸모가 있다
12장 배를 위하되 그 눈을 위하지 않는다
13장 큰 병통을 제 몸처럼 귀하게 여기니
14장 모양 없는 모양
15장 낡지도 않고 새것을 이루지도 않고
16장 저마다 제 뿌리로 돌아오는구나
17장 백성이 말하기를 저절로 그리 되었다고 한다
18장 큰 道가 무너져 인과 의가 생겨나고
19장 분별을 끊고 지식을 버리면
20장 나 홀로 세상 사람과 달라서
21장 큰 德의 모습은 오직 道를 좇는다
22장 굽으면 온전하다
23장 잃은 자하고는 잃은 것으로 어울린다
24장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25장 사람은 땅을 본받고
26장 무거움은 가벼움의 근원
27장 잘 행하는 것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28장 영화로움을 알면서 욕됨을 지키면
29장 억지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30장 군사를 일을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31장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어서
32장 道의 실재는 이름이 없으니
33장 죽어도 죽지 않는 자
34장 큰 道는 크고 넓어서
35장 큰 형상을 잡고 세상에 나아가니
36장 거두어들이고자 하면 베풀어야 하고
37장 고요하여 의도하는 바가 없으면
38장 높은 德을 지닌 사람은
39장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40장 돌아감이 道의 움직임이요
41장 뛰어난 재질을 지닌 사람은
42장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43장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부리고
44장 이름과 몸, 어느 것이 나에게 가까운가
45장 크게 이룸은 모자라는 것과 같으나
46장 만족을 모르는 것만큼 큰 화가 없다
47장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천하를 안다
48장 道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지거니와
49장 착하지 않은 사람을 또한 착하게 대하니
50장 나오면 살고 들어가면 죽거니와
51장 道가 낳고 德이 기르고
52장 아들을 알고 다시 그 어머니를 지키면
53장 사람들은 지름길을 좋아한다
54장 몸으로 몸을 보고 천하로 천하를 보고
55장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56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57장 법이 밝아지면 도적이 많아진다
58장 어수룩하게 다스리면 백성이 순하고
59장 하늘 섬기는 데 아낌만한 것이 없으니
60장 작은 물고기 조리듯이
61장 큰 나라가 마땅히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62장 道는 만물의 아랫목
63장 어려운 일을 그 쉬운 데서 꾀하고
64장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라
65장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림은 나라의 적이다
66장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임금인 것은
67장 세 가지 보물
68장 잘 이기는 자는 적과 맞붙지 아니하고
69장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으니
70장 내 말은 매우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우나
71장 병을 병으로 알면 병을 앓지 않는다
72장 사람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73장 하늘 그물은 성기어도 빠뜨리는 게 없다
74장 백성이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데
75장 백성이 굶는 것은 세금을 많이 걷기 때문이다
76장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77장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
78장 바른 말은 거꾸로 하는 말처럼 들린다
79장 큰 원망을 풀어준다 해도
80장 작은 나라 적은 백성
81장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장일순 선생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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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미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40여년 간 원주를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 운동가로 살아왔다. 원주대성학원을 설립하고, 밝음신용협동조합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한살림운동을 주창하였다.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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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도 쉽게 읽을수있는 노자이야기. 판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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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ley 2014-01-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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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독서모임 책으로 선정했다가회원들께 엄청 혼났어요. 일단 너무 두껍고, 진도가 너무 안나간다고. 그래도 내용은 굿!!  구매
솜다리 2014-03-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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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름다운 책 새창으로 보기 구매
   어느 날 하릴없이 노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 도덕경을 읽기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 산 책은 해석이 없이 도덕경 원전만 있는 작은 책이었는데, 책을 읽고 난 뒤에 내게 남은 것은 당혹감뿐이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국어는 한국어이되 이게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무식함을 탓하며 이번에는 해석서를 사 보게 되었다. 해석서를 사 본 뒤에도 당혹감은 여전했다. 해석본마다 해석이 틀린 데다 원문의 번역마저 완전히 다른 경우도 허다했다. 노자의 도덕경이 워낙에 애매한데다 워낙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 사람마다 그 해석이 다르다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여러 권을 사서 비교하며 보게 되었는데, 무엇하나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내가 이 책 바로 이전에 읽은 책은 외국에 사시는 분이 해석한 것으로, 꽤 유명한 출판사의 꽤 유명한 분이 쓰신 책인데도 불구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동양사상을 서양사상에 입각하여 해석하고 있으니, 그나마 동양인인 내 입장에서도 이게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그분은 은연중에 ‘노자의 사상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뻔한 사실을 알고 싶어 도덕경을 읽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는, 도덕경을 제대로 보려면 노자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산 사람의 해석본을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말 그대로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어하며 거의 기대 없이 서점을 돌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장일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강원도로 이사 와서 살게 된 뒤에야 들은 이름이다. TV에서도 뉴스에서도 신문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름이건만 원주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일을 하면 그게 부처의 삶이다’라는 신념으로 일생 원주를 떠나지 않은 분이라는 말을 들었다. 원주 사람들이 원주의 예수님이라고 불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처음에는 웃었다. 어디 살아있는 사람에게 감히 예수님이라는 낯부끄러운 이름을 붙인단 말인가. 그런 가당찮은 경우가 있나.

 하지만 그 뒤로 듣게 된 그 분의 일화들은 모두 평범하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원주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든가, 천주교와 개신교의 교류가 이분에게서 비롯되었다든가, 하지만 한번도 이름을 내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든가. 무슨 일이든 이분에게 가면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해결이 되더라든가. 한번은 역에서 돈을 잃은 아주머니가 이분을 찾아와 울며 돈을 찾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어이없는 일인데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장일순씨는 역에 나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역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근방의 소매치기들의 행동반경을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사람을 찾아내어 돈을 돌려주게 했다고 한다. 그 뒤에도 가끔 그를 찾아가 ‘내가 자네 밥벌이를 방해해서 미안하네.’하고  술을 사곤 했다고 한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화다. 

 장일순이라는 이름에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이 아무개’라는 저자 이름에는 또 의아해했다. 대체 누가 필명을 이따구로 짓는단 말인가. 이 아무개라는 필명을 누가 기억할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몇 장 넘기다가 ‘이 아무개’가 이현주씨라는 것을 또 놀라고 말았다. 왜 이 유명하신 분이 이런 필명을 쓰시나 싶었다. 이런 이름이면 사람들이 책을 들었다가도 ‘뭐야, 이름도 없는 사람 꺼잖아.’하고 도로 내려놓아버리지 않겠는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이것이 참으로 도덕경에 어울리는 필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장일순씨다. 이렇게 도덕경을 아무 어려움 없이 앉은 자리에서 문장 하나하나를 해석해주실 줄 아는 분이, 이 책이 세상에 나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상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은 하나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처럼.

 이 책은 장일순씨과 이현주 목사님, 두 분이 노자의 도덕경을 두고 나눈 대담을 이현주씨가 기록한 책이다. 두 분이 노자를 두고 몇 달인지 몇 년인지 알 수 없는 시간동안 나누는 이야기들의 기록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술적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한 분은 개신교인이고 한 분은 천주교인이라 간간히 성서 해석도 등장하는데, 그 역시 놀랍기 그지없다. 만약 모든 크리스챤이 이런 종교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종교분쟁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일순씨가 책이 완성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후반부는 이현주 목사님이 ‘자신의 안에 있는 장일순씨와’ 대담하여 썼다. 장일순씨는 ‘네가 쓰는 것이 내가 쓰는 것이다’라며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러라고 하셨다고 한다. 피아의 구분이 없으신 분들, 참으로 노자스러운 두 분이 아닌가.

 노자를 공부하려는 분들이 있다면 공연히 저 멀리 중국 분이나 저 옛날에 살던 분들의 해석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한국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셨던, 그리고 살고 계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읽어보기를. 진심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아름다운 책이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내가 감히 뭐라 토를 달기도 부끄러운 책이다.

잊혀지지 않는 장일순씨의 말씀 한 토막 올려놓겠다.
"한 사람의 깨달음이라는 건 말야, 뭐냐 하면, 그게 전 우주적인 사건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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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da 2006-01-16 공감(78)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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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과 이아무개의 대화로 푼 노자... 새창으로 보기
(평점:)


글샘(mail) 2005-08-09 01:30


무위당 장일순. 무위당이 뭔가. 이름에. 이름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현주 목사님. 필명이 이아무개다. 그야말로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이다. 이름은 그가 아님을 역설하기 위해 이름을 아무렇게나 아무개로 지었다.

이 아무것도 아닌 두 사람이 만났다. 그래서 노자를 풀이한다.

원래 무위당 선생님과 이아무개님이 노자를 읽고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것을 녹음이라도 해서 나중에 이아무개가 정리를 한 것이 이 책일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세 권이던 책을 한 권으로 합본하여 만들었다.

고등학생들이 보는 정석만큼 묵직한 책이다. 그러나 읽다 보면 술술 읽힌다.

내가 얼마 전에 이경숙씨의 노자를 웃긴 남자와 그의 도덕경을 읽었기 때문에 더 쉽게 읽히는지도 모르지만, 노자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이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특히나 목사였던 이아무개님의 탁월한 해석은 성경과 노자의 공통점을, 도와 하느님의 무위의 길을 멋지게 빗대어 놓는다. 가히 이십세기 최고의 절창이라 할 만하다.

우리 나라 인문학의 황폐함을 이런 책들을 보면서 깨닫는다. 아, 우리 나라에도 인문학이 아직 살아 있구나. 그러나 그 맥이 점점 끊어져 가는구나... 왜냐면 이런 책들은 대개가 도서관에서 봐도 깨끗하고, 알라딘 같은 데 보면 절판이라 나와있으니...

이 책은 노자의 풀이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다.

무위당 선생님이 푼 것을 이아무개님이 정리하는 것으로 노자에서 벗어나 버린다. 그리고는 도와 관련된 대화들을 자유스럽게 풀어 나간다. 마치 장자가 갖가지 고사와 비유로 노자를 풀었듯이...

이 책이 뛰어난 점은 노자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두 분이 끈질기게 늘어 놓는 데 있다. 그래서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인데도, 마치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스릴러물을 읽듯이 단숨에 읽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읽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역시 더운 여름을 나는 데는, 화끈하지만 금세 꺼져버리는 모닥불같은 추리소설 종류보다는, 뭉근하지만 오래오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생각하는 책들이 어울린다.

잡스런 세상의 번사를 잊는데는 역시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큼직한 활자에 갇혀있으면서도 결코 갇히지 않는 노자의 수염을 스치는 맛도 일품이다.

몇 권 만나지 않은 노자지만, 이 책에 와서 그 의미의 확장을 맛볼 수 있었다.

내 부족한 능력을 늘 잊지 않으시고, 다음 책에로 이끄시는 그분, 바로 하느님이시고, 내안의 부처님이시고, 모든 아상을 잊게 하시는 그 도道에 늘 감사를 드린다.(평소에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인상人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라 하는 이들을 비웃었는데, 무어라 부르든 그 하나는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이젠 상관 않는다.)

다음 번 도서관에 가면 나를 어떤 책에로 이끄실지 늘 가슴 설레며 책을 접는 내 마음이 이렇게 뿌듯한 적도 드물다. 지난 번 금강경 이야기 읽은 후로, 정말 오랜만에 오래 남을 책을 만났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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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8-09 공감(39)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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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노자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구매
20살의 봄이었다.<노자 도덕경>을 처음 만났다.어제 밤에 퍼부어 댔던 최루탄의 잔향을 맡으며 빈 강의실을 찾았다.햇살이 반쯤 드는 빈 강의실에서는 언제나 '학교냄새'가 났다.노자를 읽었던 건 고전에 대한 애정이자 약간의 의무감같은 것이었다.한자는 대략 운만 따라 가고고 한글로 풀이된 내용만 읽었다.알 듯 말 듯 했다.

당시 선배들과 주로 하던 사회과학 세미나에서 노자는 비판의 대상이었다.세미나는 유물론에 대한 이해를 주목적으로 했던 것들이었다.그 곳에서 노자나 석가의 가르침은 주관적 관념론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허무주의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어 왜곡된 현실을 변혁하기 보단 순응하는 반동적 철학으로 읽히곤 했다.고전이 주는 아우라에 대해 비판해보지 않았던 대학 신입생이었던 내게 신선한 시각이었다.하지만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꼇을 뿐 고전 자체에 대해 내가 두고 있던 무게감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도 종교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생각한다.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을 보면 나는 대개 그 내용에 동의한다.하지만 종교가 가진 심리적,문화적 기능 역시 인정한다. 혐오감이 가고 미신 같아 보이던 무속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애정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결과적으로 나는 ' 종교로서의 종교를 부정'하고 사회,문화 현상으로서 종교를 바라보는 입장에 서 있다.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 역시 <노자 이야기> 에서 인류의 큰 가르침으로써 노자,석가,예수를 이야기한다.책은 기본적으로 <노자 도덕경>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대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노자의 해석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노자를 이해하기 위해 아니 절대적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도 기독교도 전부 인용된다.특히 이현주 목사는 전공을 살려 도덕경의 내용과 성경의 내용 중 동일한 말씀을 잘 찾아 내어 들려준다.책 전체에 수시로 등장하는 예들이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이런 비유가 있다.

도덕경 4장에 보면 유명한 '화기광하여 동기진하라'는 말씀이 있다.풀이하면 '그 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가 된다' 는 것이다.먼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물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만물이 같은 뿌리를 두고 있으니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예수가 가난한 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그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 라고 한 말 역시 이와 같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여기서 예수가 말한 나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먼지이며 하늘이고 땅이며 우주이다.석가모니가 태어나면서 '천상천아 유아독존'이라고 했을 때 그 '아'에 해당하는 존재이다.물론 이 '아'라는 것 역시 우리가 말하는 self 와 다른 것이다.'아상'을 없앤 '나'이다. '자기를 넘어선 자기,천지와 하나 되어 있는 자기'인 것이다.

도덕경 16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모든 것을 품음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왕이요 왕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도요 도가 곧 영원함이니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도의 불생불멸을 이야기하고 있다.이현주 목사는 여기서 '부활'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즉 부활이라는 것이 죽었던 사람이 다시 멀쩡하게 살아서 밥먹고 여행다니고 대소변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는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부활이라는 것은 썩을 육신의 옷을 벗고 영원히 썩지 않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범신론적 관점을 가지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노자의 이야기로 수렴한다.여기에서 하나님이나 부처님은 다 하나다.모두 공이요 무다.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는 존재이다.인간의 가치로 재단할 수 없는 자연의 영역이며 도 자체이다.이러한 범신론적 유연함은 종교적 편벽함이 주를 이루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 신선함과 깊이로 큰 울림을 갖는다.

노자의 철학을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그럴 능력도 못되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이해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몇가지 키워드로 노자의 철학을 정리하는 것 정도로 머물러야 겠다. 

無爲 ...無常...反...樸... 根 ...德 ....道

시각을 조금 현재로 끌어 올려 노자를 보게 된다.노자의 말씀은 여전히 지금 사회에도 유의미한 구석이 많다.특히 '강함'에 대한 이야기는 지구촌 유일의 패권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적절하다.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라는 말이 도덕경 76장에 나온다.단단하고 강한 것을 무력에 기대 힘의 외교를 추구하는 강대국에 빗댈 수 있다.노자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죽음의 무리다.노자는 정치에서도 무위를 강조했으며 큰 나라의 역할을 요구했다.61장에 보면 '큰 나라는 하류라 천하가 모이는 자리요 천하의 암컷이다....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큰 나라를 얻는다.' 하지만 현존하는 패권국가에게 이런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하기란 무리다.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한다는 말을 듣고 부여잡은 무기나 좀 내려놨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그나마 도덕경에서도 '도가 아니면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말로 패권국가의 몰락에 대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있어서 더운 여름에 위안이된다.

노자를 읽다가 보면 편협한 기독교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 종종 나온다.그와 함께 노자나 도에 대한 과소비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든다.노자의 철학은 근본적인 인간과 세상의 변화를 겨누고 있다.절대적 진리를 말하는 논점에서 지극히 당연하다.하지만 노자의 철학 역시 현실의 모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도덕경 후반부에 이상주의적이긴 하지만 노자의 정치철학이 상당부분 담겨있다.하지만 노자나 도,선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노자의 현실 적합성은 뒤로 두는 경우가 많다.그들은 성인들의 말씀을 지극히 소아적으로 해석하여 마음의 평화만을 쫓는데 쓰고 만다.사회적 비겁함이나 무관심을 내적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가려는 듯 보인다.이 책의 저자인 장일순 선생은 그 대척점에 있다.실제로 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활에서의 실천이 있었다.또 내면의 수양만큼이나 현실의 불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대응했다.장일순 선생은 그러한 현실적 정의가 무용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중요한 것은 옳바른 일을 하고 거기에 머문다거나 어떤 사심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그런데 선이나 도를 마음깊이 믿는 다는 사람들 중에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는 경우가 많다.노자가 말하는 '무위'라는 것을 철저하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서 선시를 즐기고 화두를 나눈다.도에 대해 말하고 여운을 즐긴다....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행위들은 '도'를 소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서구가 zen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선문화를 상품화해낸 것 처럼 ...이현주 목사도 지적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기만'이다.한산의 시나 고승들의 게를 소비하면서 마치 '도'에 이르는 도정에 있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그냥 그런 여백을 좋아하고 즐긴다고 하는게 솔직한 일일지도 모른다.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앎을 실천하는지 빈방에서 홀로 벽을 마주보고 이야기 나누어 볼 일이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힘든 날이 이어진고 있다.중동에서는  무지비한 폭격으로 무고한 아이들이 쓰러지고 있다.지난 폭우로 인한 수재민들은 제대로 정비도 못한 상태에서 폭염을 맞아 복구가 더욱 힘들다.추운 겨울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힘들지만 더운 여름도 마찬가지이다.. 노자는 말한다.

'하늘의 도는 마치 활에 시위를 얹는 것과 같구나.높은 데는 누르고 낮은 데는 들어올리고 남은 것은 덜고 모자라는 것은 채운다.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채우나 사람의 도는 그와 같지 않아서 모자라는 것을 덜어 남는 것을 떠받든다.누가 능히 남는 것으로써 천하를 받들 것인가? '

모든게 같은 뿌리라면 가난하고 힘없는 자도 한 뿌리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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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8-08 공감(21)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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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처음 만나게 되는 아이의 태교삼아 이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

아침, 통유리 거실 문 앞에 앉아서 소리내어 조금씩 읽었다. 소리내어 읽을 때 책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오는구나, 하고 느꼈다. 구어체의 문장들이라서, 소리내어 읽기에 더욱 좋았다. 두 분이 대화하는 걸 나 혼자 읽는 것이지만,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노자의 이야기는 토막토막 익숙하지만, 울림이 깊다.

태교를 잘 했나봐, 아기가 참 착하네, 라는 말을 들으면, 그건 아마 이 책 때문인 거라고 으쓱, 한다.

노자가 전 인생을 털어 들려주는 이야기에, 두 분의 어른들이 더하여 붙인 이야기가 참 좋다. 두 어른의 배경이 기독교 천주교라서 조금은 아쉽지만, 그런 종교적인 부분에 집중하시거나 하지는 않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사상가, 철학가로서의 노자를 우리 시대의 고민에 비추어 만나게 된다. 조금은 시대가 어긋나더라도, 그런 가르침은 다시 그 시대에 또 새로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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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07-03-23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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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살 한알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구매
망설이다가 추천합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이아무개 대담 정리  출판사 삼인

장일순은 서울대 미학과 중태 그 부인은 서울사대 출신 -- 지식의 허영은 어느 정도 충족
학교 재단이사장, 진보당 국회의원 출마, 약간은 좌파 -- 조봉암과 김삼용에 대한 호의
김지하의 스승
지학순 주교와 원주의 대부이자 원주 천주교 평신도 회장

필명 이아무개는 개신교 목사 이현주님

유신시절에 한문과 붓글씨를 친구삼아 살다 보니 그 후 대통령된 사람들이 그의 붓글씨와 서화를 구매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호를 여러 개 갖고자 했는데
죽기 전에 좁쌀 한알  일속자가 그가 좋아한 호이었는데
그래도 사치 스러운 인간들은 노자라면 무위당 정도 되어야 한다고 크게 써 붙였다고 저는 짐작합니다.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이 다음 입니다. 

256쪽
성경에는 탕자는 처음엔ㄴ 아버지한테서 멀리 간단 말씀입니다. 원(遠)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反)  행위의 한 부분이 아니겠나 싶은데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친구가 만일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제 정신'을 차렸을 리도 없고 따라서 돌아올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맏아들이 바로 그랬지요.

257쪽
그래.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떠나 있었던 거지.

예, 맞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경우에는 멀리 갔기 때문에 돌아오거든요. 그러니까 멀리 가는 것이 곧 돌아오는 것이지. 가는 것 따로 있고 돌아오는 것 따로 있고 그렇게는 볼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요?

그런 거지. 그런 거야. 그런데 이제 결국은 여기서 말하려는 게 道 아닌가? 道란 이런 것이다 하고 여기서 말하려는 게 道 아닌가? 道란 이런 것이다 하고 여기서 설명을 하는 건데, 大니 逝니 遠이니 反이니 하고 말이야. 그런데 이런 모든 말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뭔고 하니 道라는 게 상대적인 무엇으로 나눠질 수 없다는 그런 애기라고 봐야겠지.

지난 번에 道者는 同於道하고 德者는 同於德하고 失者는 同於失한다고 했을 때, 그게 다 도덕이 있느니 없느니 得이니 失이니 그런 분별이 道의 세계에는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바로 그런 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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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30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
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마리산인
2006. 12. 18. 14:26댓글수0공감수0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사상연구회 월례발표회(2004년 9월)
<씨알의 소리> 2004년 11,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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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
박 재 순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함석헌은 20세기가 시작되는 해에 태어나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일찍이 기독교 신앙과 근대적 교육을 하는 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평양고보 3학년 때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민족과 민중의 하나 되는 감격을 경험한 후 오산학교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배웠다.1) 40세까지 서구적인 학문과 문화, 기독교 신앙에 심취했다. 유영모의 영향으로 그리고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불경을 비롯한 동양경전에 깊이 몰두하면서 기독교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었다.2)

함석헌은 남강 이승훈의 독립정신과 민족애를 물려받고,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신앙에서 순수하고 자립적인 깊은 신앙을 배웠으며, 유영모로부터 동양·한국적인 정신과 기독교사상을 결합하는 깊은 정신과 사상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은 치열한 삶과 투쟁 속에서 인간과 역사, 신앙과 우주에 대한 독창적이고 활달한 사상을 형성했다.




1. 함석헌 사상의 핵심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 함석헌이 닦아낸 사상의 핵심은󰡐스스로 함󰡑이다. 그는 특권을 누리지 않는 보통 사람을 씨로 표현했다. 그의 사상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씨사상은 풀뿌리 민주 철학이다. 씨은 나라와 역사의 주체이다. 씨 하나 속에 수억 년의 과거가 담겨 있고, 앞으로 펼쳐질 수억 년의 미래가 들어 있듯이, 한 인간 속에는 과거 역사와 미래 역사가 담겨 있다. “너는 씨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지나 간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3)




씨 속에 하늘의 생명기운이 맺혀 있듯이,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수천 년 동안 온갖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민족의 삶을 지탱해온 민중 속에는 큰 힘과 지혜가 숨어 있다. 함석헌은 “민중의 본바탕을 밝혀내기만 하면 큰 기적을 행할 수 있다.”4)고 했다. 모든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는 민중을 가르치기 전에 민중에게 겸허히 배워야 한다. 민중과 유리된 정치는 반드시 타락하고 민중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둘째, 생명 평화의 철학이다. 씨의 생명활동은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이 함께 어우러져 벌이는 생명의 춤이고 잔치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울리고 서로 느끼는 생명 축제이다. 한 알의 씨처럼 한 인간이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 서서 자신을 비우면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늘나라의 생명잔치가 시작된다. 씨(民)의 삶 속에서 자연생명과 역사와 신앙이 서로 어우러지고 서로 통한다. 생명의 자발성과 사랑에 근거하여 비폭력 평화의 사상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셋째, 믿음(종교)과 생각(과학)이 통일된 철학이다. 함석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줄기차게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마음의 일차적 기능이다. 생각에는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靈感)이 있다. 생각하면 생각(영감)이 난다. 󰡐하는 생각󰡑으로 󰡐나는 생각󰡑을 얻고, 󰡐나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5) 생각은 믿음(영감)에 이르고 믿음은 생각을 깊게 한다. 신앙과 과학이 충돌하거나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이 발달하면 신앙은 과학 위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앙의 세계가 요청된다. 현대문명의 근본 문제는 신화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떠난 데서 생겨났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스스로 하는󰡑자율성의 영역이 급속히 확대된다. 유전자 조작과 생명 복제와 같은 문제는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주체적이고 성숙한 책임성은 깊은 믿음과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함으로써 운명적인 삶에서 󰡐스스로 하는󰡑주체적인 삶으로 바뀐다.







넷째, 동서문명의 종합을 추구한 통일 철학이다. 함석헌은 서구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태어나 개인의 인격과 영혼을 쇄신하는 기독교 복음과 신앙에 깊이 들어갔고 서구의 현대학문으로부터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정신을 익혔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서 지구화가 이루어지고 동서문명과 정신의 융합 및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 서구의 기독교 신앙과 비판 정신이 배어 있으며, 그 속에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정신과 문화가 살아났다. “우리 역사, 우리 문화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사회의 문화가 󰡐한󰡑(크고 하나임)에서 나왔고 󰡐한󰡑을 목표로 하고 나아간다.”6)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을 세계통일의 근거와 목표로 제시했다.




함석헌의 사상은 씨(民)을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놓고 씨을 하늘처럼 섬기는 풀뿌리 민주 철학, 모든 문제와 일의 중심에서 󰡐나󰡑를 문제 삼는 주체 철학, 겨레의 얼과 혼을 추구한 민족 철학, 한국․동양의 정신문화와 서양의 정신문화를 융합하려는 세계 철학이다.7) 그의 사상은 생각(과학)과 믿음(종교), 몸(육체)과 영혼(정신), 삶(실천)과 이론(학문), 남한(자본주의)과 북한(공산주의)의 통일을 추구하고 국가와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세계정부를 꿈꾸는 통일 철학, 기독교에 바탕을 두면서도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서 유교․불교․도교․힌두교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진리의 자유로운 세계를 열었던 종교다원주의 철학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명예교수인 유동식 박사는 <대표적 한국인>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와 율곡과 함석헌을 꼽았다. 이 세 사람은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기 종교의 울타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서도 󰡐큰 하나됨󰡑(한)을 추구한 종합적인 사상가들이고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고 행동한 사상가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동식은 세 사람 가운데서도 동서문명이 만나는 세계적인 지평에서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사상을 펼쳤다는 점에서 함석헌이 가장 위대하다고 보았다.







2. 시대적 성격과 내용적 독창성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은 매우 역동적이고 종합적이며, 날카롭고 깊다. 그의 이런 사상은 다석 유영모의 깊은 사유와 체험적 깨달음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심오함은 역사와 민중에 충실했던 자신의 치열한 삶과 경험에서 그리고 삶과 역사의 한 가운데서 초월과 절대(하나님)를 만나는 깊은 체험과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1) 시대의 성격과 동서정신의 창조적 융합




지난 500년의 역사는 서세동점의 역사이면서 동서문명이 충돌하고 결합되는 세계화의 과정이었다. 동서문명이 충돌하고 결합되는 세계사의 과정에서 두 문명이 가장 깊고 창조적으로 만난 자리가 한국 근현대의 역사와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서구문명의 진출과 침략, 팽창과 확대로 이루어진 동서문명의 만남과 충돌의 자리는 동양과 제3세계였다. 미국과 유럽의 서구에서는 동서의 만남이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인과 미국인은 동양정신과 문화를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지하게 경험하지 못 했다. 이슬람 문명권은 서구문명과 배타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사회적 근대화가 충실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통문화와 서구근대문화의 결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도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주변적인 종교이며 엄격한 신분제도에 매인 전통사회와 종교문화가 온존하고 있다. 남미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전통문화가 압살되고 정복자의 문화가 지배했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적 만남과 융합은 동북아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구문화의 도전과 충격으로 동양정신과 문화가 깨어났고 사회적 근대화와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은 사회경제적 근대화와 민주화를 달성했으면서 동양적 전통과 정신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공산화되면서 전통문화는 억압되고 서구정신(기독교)문화는 배제되었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에 의해 천황제와 전통종교 신도를 바탕으로 서구기술문화와 결합하여 군사제국주의로 치달음으로써 일본민족과 서구정신문화의 깊은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조선왕조가 붕괴되면서 민중이 민족사의 전면에 나섰고, 한국민족(민중)과 서구정신문화의 깊은 만남이 창조적으로 활달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정신과 기독교의 깊은 만남이 이루어졌고, 기독교 정신과 서구 근대정신의 도전과 충격으로 민족정신이 깨어나고 민중의 각성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동서정신문화가 가장 창조적으로 만났고 융합되었다. 기독교 신앙과 근대민주정신의 수용으로 한국근현대사는 동학혁명과 3.1운동, 4.19혁명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함석헌(1901-1989)은 개신교와 서구근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시기에 살았던 사상가였다. 한국의 근현대사 자체가 한국적 동양적 정신문화와 서구 기독교 정신 및 서구 근대문화의 창조적 만남과 융합의 과정이다. 동학, 증산교와 한국기독교, 3.1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자체가 동서정신문화의 종합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인물들,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이용도, 안병무, 문익환 등은 동서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창조적 인물들이다. 한국근현대사는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의 공존과 상생의 가능성, 융합(fusion)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함석헌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민중의 자리에서 동서정신문화의 깊은 만남과 창조적 융합을 경험하고 그것을 창조적 사상으로 형성하고 삶으로 피어낸 이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동서정신문화를 종합한 민주사상을 폈다. 그는 기독교신앙정신을 등뼈로 해서 이성적인 과학정신과 민주정신을 바탕으로 동양정신과 한국정신문화, 유교, 불교, 도교의 정신세계와 두루 통하는, 물질과 정신, 자연과 역사, 신앙과 이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사상을 펼쳤다.




2) 함석헌 사상의 독창성




1930년대 근대 인류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비관적일 때, 파씨즘적 전체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전쟁, 세계대전과 집단학살이 준비되고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달했을 때인 1933년부터 조선역사를 썼다.



그는 고난의 민족사를 십자가 고난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민족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민족에게 적용시키고 고난 받은 한민족이 세계평화와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적 구실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세상의 죄 짐을 진 어린양, 세상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양으로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함으로써 인류의 죄를 씻고 화해와 구원을 가져오듯이, 고난 받는 한민족이 고난의 짐을 짐으로써 세상을 화해와 평화의 세계로 이끈다고 보았다.



믿음의 주체(나, 민중, 민족)와 대상(그리스도, 하나님)을 일치시키며, 오늘 ‘나’, 또는 ‘민족’이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구원을 스스로 성취한다는 주장은 오늘의 삶을 강조하는 주체적이고 일원론적인 동양적·한국적 사고를 반영할 뿐 아니라 씨·민중을 민족 또는 그리스도(하나님)와 일치시키는 민중적 사고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고난받는 사람을 통해 치유되고 죄의 속량이 이루어지고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고난의 종의 노래’(이사야 53장)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삶에 직접 적용한 것이며 성경의 역사적 진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밝혀진 성경의 진리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이다. 인간의 고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는 온전히 드러나며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나’와 ‘너’의 경계와 벽, 적대와 갈등의 깊은 골을 넘어 ‘하나’로 되어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에 이를 수 있다. 함석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체의 자리에서 보는 것이며 “너를 나로 본 것”이다. 전체의 자리에서 본다는 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역사상에 일인칭을 똑바로 쓴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고 했다.8) 이처럼 전체의 자리에서 ‘나’와 ‘너’를 볼 때 비로소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여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함석헌은 제3세계의 식민지적 고난을 패배주의나 전투적 투쟁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고난을 승화시켜 고난 받는 민중과 민족을 생명과 평화를 실현하는 주체로 제시했다. 함석헌의 민족사 이해는 1960년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사적 이해를 추구했으나 십자가 고난의 관점에서 민족사를 본 것은 변화가 없다.



민족사에 대한 그의 해석에는 민중적 관점, 민족적 관점, 세계적 관점이 결합되었고, 기독교의 신앙과 동양의 영성이 결합되었다. 그는 풀뿌리 민주주의자이면서 겨레 얼을 추구한 민족주의자이고 세계평화를 추구한 세계주의자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민족사에 적용함으로써 이미 함석헌은 민족과 성서, 민중과 예수를 긴밀히 결합시켰고 오늘 우리의 주체적 삶과 책임적 실천을 강조했다. 이로써 함석헌의 민족 주체적 신앙과 사상의 틀과 방향은 정해졌다. 그의 신앙과 삶은 역사와 사회에 책임지고 행동하는 신앙이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데 머물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삶을 살려고 했다.



기독교의 십자가 신앙을 민족사에 적용하여 일관성 있게 해석한 것 자체가 기독교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새롭고 독창적이다. 또한 함석헌이 실존, 민족, 민중, 세계평화를 아우르는 깊고 열린 사관(史觀)을 제시한 것도 독창적이다. 동양, 한국적 정신과 기독교 정신, 개인과 전체, 영적 깊이와 과학적 이성, 헌신적 신앙과 주체적 책임성을 역동적으로 결합한 것은 그의 사상의 크기와 창조성을 드러낸다.




3. 기본 사상의 내용




1) 정신적 우주관;




함석헌은 상대성원리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4차원적으로 이해하며, 현대 원자물리학에 따라서 물질을 과정과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는 물질을 “입자와 파동의 생성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우주, 세계는 생성하는 과정과 사건이다. 물질은 운동의 굳어진 것이고, 시간은 정신이 폭발하고 나가는 뒷 파동이다.”9) 그는 또한 고생물학자이며 카톨릭신학자인 샤르댕을 따라서 “뜻, 생각, 정신에서 물질도 나왔다.”고 본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주 물질의 힘은 믿음, 뜻에서 나오며 통전하는 힘이다. 생명, 물질, 하나님, 인간, 역사는 스스로 함의 원리를 따른다. 스스로 함의 주체는 정신과 의식이다. 물질은 운동의 굳어진 것이며, 시간은 정신의 폭발한 결과이다.



물질, 힘, 시간의 근원을 정신으로 보았고 정신을 자유로운 주체, “스스로 하는 나”로 보았다. 스스로 함, 나, 주체, 정신은 모순의 통일이며 까닭 없음이다. “물질에 까닭 있지 정신, 생명에는 까닭 없다. 그 자신이 까닭이다. 정신, 신은 까닭 없이 있는 이다. 인격의 본질, 생명의 근본은 스스로 하는 자기초월이며 까닭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10)



함석헌의 이런 주장은 관념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서처럼 물질과 정신, 현실과 관념을 이원론적으로 갈라놓고 물질과 현실을 정신화, 관념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질과 정신, 현실과 관념(생각, 뜻)을 통전적으로 본다. 다만 정신과 뜻에 비추어, 정신과 뜻을 통해서 물질과 현실을 본다. 정신과 뜻은 물질의 주체이며 의미이다. 함석헌에게는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몸과 마음에는 떼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인격은 몸·마음이 하나된 것이다...우주가 무한하다 하여도 그 중심은 나요, 만물이 수없이 버려져 있다 하여도 그것을 알고 쓰는 것은 나다. 내가 스스로 내 몸의 귀함을 알아야 한다. 욕심의 하자는 대로 끌려 내 몸을 허투루 다루는 것은 내 몸을 천대함이다.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는 이 몸, 이 마음을 허투루 하면 우주와 만물은 차례와 뜻을 잃고 어지러워지고 맞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조심이란 몸 공경이다.”11)



함석헌은 정신을 전체, 하나님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 전체, 아가페의 관점에서 우주와 역사, 생명을 보았다.12) 하나님을 부르면 ‘나’와 우주가 하나로 통전된다. 믿음은 전체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인간의 본 바탈을 창조적 지성, 이성으로 보았다. 생각하는 내 속에 우주가 열린다. 내 속에 열린 우주와 세계가 하나로 되며, 몸과 우주의 일치에 이른다. 하나님, 전체, 우주를 모신 '나', 몸, 맘이 우주의 중심이다. '나'는 코로 우주의 숨을 쉰다. “내가 하나님의 콧구멍이요, 우주의 숨통이다.”13)







2) 주체사상




함석헌사상의 중심은 나를 찾고 세우는데 있다. “ ‘나’-주체성 상실이 모든 고난과 간난의 근본원인이고 죄이다. ‘나’를 잃은 죄가 역사와 인생의 고난을 가져왔다.”14) 생명과 정신의 근본원리가 󰡐스스로 함󰡑인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생각과 힘에 눌려 살면 생명과 정신은 파괴되고 쇠퇴한다. 스스로 힘 있게 살려면 나를 찾아야 하고, 나를 찾으려면 나를 깊이 파야 한다. 나를 깊이 파는 길은 생각하는 길밖에 없다. 생각함으로써 나를 찾고 세운다. 살림의 뿌리는 생각함에 있다. 살림의 주체는 나이고 나를 찾고 세우는 일은 생각에 있다. 그는 명상이나 감흥, 감정보다 생각함을 철학과 종교의 근본행위로 보았다.15)




스스로 함의 주체로서 “나”는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나”는 자기부정과 죽임에서 참된 나, 전체로서의 나로 드러난다. 함석헌의 나의 주체성은 무한한 깊이, 초월, 절대, 순수를 지향하며, 구도자적 자유와 평화, 사랑을 추구한 공동체적 개방성을 지닌다. 이처럼 함석헌의 󰡐나󰡑는 타자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다. 함석헌에게서󰡐나󰡑는 초월적 타자와 인격적 관계 속에 있으며, 사회적 타자와의 일치와 상생을 지향한다. 함석헌의 주체성은 타자와 맞서고 타자를 정복하고 희생시키면서 자아의 실현과 확장을 추구한 서구의 근대적 주체성과는 다르다.16)




얼과 정신은 주체이고 󰡐나󰡑이다. 󰡐나󰡑는 물질의 주체이며, 스스로 하는 자유로운 인격이다. 물질과 현상에는 원인, 까닭, 인과관계가 있으나 정신에는 까닭이 없다. 저 자신이 까닭이다.17) 인간은 물질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물질과 자연 현상은 인과관계의 사슬과 법칙에 매여 있으나 마음, 정신, 신은 원인, 까닭 없이 스스로 자유롭게 있다. 마음과 정신은 까닭을 밖에 갖지 않고 자기 안에 갖는다. 제가 삶의 이유이고 동인이다. 제가 곧 까닭이다.. 그러므로 자유다. 결정론은 없다. 전통과 권위도 없다. 모든 우상은 부서진다.




스스로 하는 존재가 되려면 스스로 하는 힘과 의지, 스스로 하는 삶의 궁극적 근거와 동인, 신적 씨앗, 불빛, 인(仁)이 있어야 한다. 제 안에 스스로 함의 근거가 있다. 스스로 함의 원리와 근거가 고장 난 것이 죄다.18) 죄는 전체, 신과 하나인 '저'에 대한 불신앙이다. 죄는 스스로 함의 부정이며 불가능이다. 스스로 함은 '저'와 신이 하나임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스스로 함은 신, 우주와의 합일, 일치이다. 전체의 자리에 섬이다. 나를 버리고 나에게서 자유로워져서 참 나, 전체의 나, 신과 하나로 된 나에 이를 때 비로소 중단 없는 스스로 함의 삶이 나온다.



예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는데, 함석헌에 따르면, “사람을 낚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낚는 것이다.19) 나의 본성, 어짐, 혼을 낚는 것이 내가 사람 되는 것이며, 나를 일깨우고 붙잡음이 나를 사람으로 세움이고 스스로 하게 함이다. 사람이 되어 스스로 일어섬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스스로 일어나야 하며, 내가 나를 붙잡아 일으켜야 한다. 나를 붙잡는 것, 내 삶의 본성을 살리는 것이 기도이고 예배이며 믿음이고 명상이다.



스스로 함은 자유의 원리, 신앙의 원리, 사랑의 원리이다. 이것은 저항의 원리, 비폭력 평화의 원리이다. 이것이 반국가주의와 세계평화주의의 원리이며 기초이다.




(1) 얼 힘을 기름




함석헌은 인간을 인격, 정신, 얼로 보았다. 얼은 개성적이고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인생과 역사와 문화와 교육과 종교의 목적은 얼 힘을 기르는데 있다. 지식과 기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직접 주고, 받을 수 없고 얼과 정신을 통해서만 깨달음과 이해를 통해서만 전해진다.20) 얼 힘 없으면 인생과 문명은 무너진다.



󰡐스스로 하는 나󰡑는 통일성을 지닌 존재이다. 분열, 갈등, 혼란, 분규, 얼크러짐에서는 힘찬 스스로 함의 삶이 나올 수 없다. 얼은 생명의 꼭대기 한 점이다. “교육의 목표는 위대한 얼의 사람을 길러낸다는 한 점에 집중되어야 한다.”21) 원기는 회개, 자기부정을 통해서 전체생명에로 돌아갈 때 나온다. 원기, 생명력, 생기에 가득 찰 때 자유롭고 힘 있는 행위가 나온다. 회개는 하나님, 전체 생명이 하나 되는 자리로 돌아감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자리에 설 때 스스로 하는 얼 힘이 솟는다.22)




(2) 유기체적 전체 생명; 진화의 절정이며 우주의 중심




우주 자연의 물질과 생명 세계에서 인간이 가장 존귀하고 위대하다. 인간을 대자연 생명세계의 일부로 보면서도 새로운 영적 존재로 상승하고 비약할 존재로 보았다. 인간이 생명진화의 절정과 목적이라고 보면서도 인간의 얼을 유기체적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보았다. 얼은 개체를 지탱하는 정신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정신이다. “오늘 내가 있고 내 머리에 생각이 솟는 것은 전에 억만 생명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요, 억만 마음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무한 바다의 한 물결이다. 내가 일어선 것은 내가 일어선 것이 아니요, 이 바다가 일으켜 세운 것이다.”23) 내 몸과 마음은 생명진화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다.

인간의 몸과 정신이 우주의 중심이다.24)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과 닿아있으며 통해 있다. “이 나는 작고 형편없는듯하지만 저 영원 무한에서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이다.”25) 함석헌은 인간의 깊은 죄를 말하고 피조물로서 작고 유한한 존재임을 강조하지만 인간을 신과 일치된 존재, 신과 통하는 존재로 본다. 내가 우주의 주인이고 왕이다. 모든 것은 인간 안에 “나” 안에 있다. 나를 존중하는 데서 생각과 삶이 시작한다. “거울에 비치는 네 얼굴을 보라...그것은 백만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그 얼굴이다.”26)



인간영혼의 정점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한 점에서 인간의 얼과 정신에서 하나님과 일치하고 통하면 무한한 얼 힘, 영적 힘이 나온다. (하나님과 일치된) 나를, 기운을 펴야 한다. 하나님과 일치된 나를 펴기만 하면 우주와 역사를 돌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3) 섬기는 삶




우주와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면서도 그 중심의 높이와 깊이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보았다. 전체의 자리에 선 나는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있는 존재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존재이다. 거룩한 창조자, 무한한 절대자 앞에서 자기를 회개하고 비워야 한다. 스스로 서는 것이 민주의 시작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이 나라사랑의 기본이다. “나라 사랑하거든 네 옆의 사람부터 존경하라. 네가 만물의 왕이라면 그도 만물의 왕이다. 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식모는 네 식모가 아니요, 영원한 님의 아내다. 너를 섬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이’를 모시러 왔다.”27)



제 할 일을 남에게 시키는 버릇은 계급사회의 못된 습관이다. 섬기는 삶은 제 몸을 제 손으로 섬기는데서 시작된다. “네 몸 대접 네가 해라...제 신발도 닦지 않는 청년이 이 다음 사회봉사, 인류공헌이라니 곧이들리지 않는 말이다...네 몸 거둠 네가 하는 것이 데모크라시의 첫 걸음이요, 하늘나라 준비다.”28)




3) 세계평화사상과 비폭력저항




70년대에 대표적인 진보적인 지식인들(송건호, 박현채, 백락청 등)은 민족주의자였다. 생활방식과 사고는 서구적으로 하면서도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던 사람,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함석헌은 세계평주의를 내세웠다. 오산학교 학생 시절에 웰즈(H.G. Wells)의 「세계사대계」에서 세계국가주의에 대한 이상을 접하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리고 일제의 혹독한 식민통치를 겪으면서 함석헌은 한민족의 평화정신과 기독교의 평화주의에 근거하여 함석헌은 50년대 중반 이후 비폭력 평화주의와 세계평화사상을 내세웠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으나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세계평화를 열망하고 추구했다. 그는 민족을 사랑했으나 국가는 비판했다. 민족들의 독특한 정신과 문화가 피어나는 세계공동체를 지향했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제 인류역사는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민족국가들을 넘어서 세계가 하나로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29) 동(복종, 통일, 되풀이 지킴)의 역사와 서(저항, 자유, 진보)의 역사가 만나고 있다.30) 역사는 중도(中道)를 지키고, 한(韓; 큰 하나)을 붙잡고 밝히면서, “비폭력평화주의, 세계국가주의, 우주통일주의”로 가야 한다.31)




그의 평화주의는 한국인의 평화정신과 기독교의 평화주의에 근거한다. 한국인의 심성이 인정 많고 착하다는 점에서 평화적이라고 보았다. 6.25 전쟁 때 피난 가는 기차에서 음식이 부족한 형편인데도 반드시 옆 사람에게 음식을 권하고 함께 먹는 것을 보고 함석헌은 “한국인의 저 착한 마음으로 세계에 크게 공한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인의 종교문화의 맨 꼭지가 신선사상이라면서 자연과 하나 되기를 열망하는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평화적이라고 보았다. 한국의 신화도 평화적이고 한국인의 이름에도 평화의 열망이 담겨 있고, 역사적으로도 다른 민족을 침략한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평화민족임을 내세운다.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을 이루는 “한”사상이 하나(一)와 크다(大)를 함께 나타내는, 크게 하나 됨을 추구하는 평화사상임을 강조했다.32)



그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비폭력 저항정신을 추구했다. 그는 치열하게 저항하고 투쟁했으나 비폭력과 사랑의 포용주의를 추구했다, 원수와 싸우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기고 짐을 떠나서 싸우라고 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원수는 없다. 그의 평화주의는 전체를 끌어안는 사랑의 포용주의이다. “가룟 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독독 갈고 있는 한 천국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가룟 유다와 화해하기 전에는 천국은 완성될 수 없다.”33)



그는 섬김과 살림의 사람이었다. 그는 후배가 “디디고 설 흙”이 되고자 했다. 지배, 권위의식을 철저히 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라 할 수 있는 안병무와 김용준을 형이라 불렀다. 누가 의견이나 조언을 구할 때마다, 자기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늘 “글쎄”라고 해서 “글쎄”가 그의 별명이 되었다.




4) 과학적 사상; 생각과 믿음과 행동의 일치




함석헌은 호기심, 탐구심을 평생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역사적 새로움, 삶의 새로움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영원한 어린이였고, 과학적 탐구심을 지닌 영원한 학생이었다. 80대에도 예쁜 조가비 모으고, 예쁜 그림 오려 붙였고, 늘 새 책을 읽었다. “과학의 시대는 씨의 시대, 씨의 아구를 트이어 눈을 트고 입을 열게 한 것은 참의 과학이었다. 씨은 과학으로 말한다.”34) 감정의 종교는 낮은 것이고, 이성으로 닦여진 신앙이 깊고 높다. 함석헌의 믿음은 생각하는 믿음이다.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의 통전된다. 생각으로 역사의 뜻을 알고 주체, 나가 된다. 생각은 믿음에 이른다.



생각하면 믿음이 깊어지고 자유로운 실천에 이른다. 생각은 물질적 사건적 현상의 깊이를 파헤쳐 없음과 빔의 까닭 없는 자유에 이르고 물질과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부정과 죽음에 이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고 없음과 빔의 자유에서 자기를 버리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35) 자아도 물질도 없고 하나님만 있으면 단순하게 믿고 자유롭게 행동하게 된다.







5) 역사철학; 씨사상




함석헌은 자신의 역사관과 인생관을 씨사상으로 나타냈다. 씨은 자연과 인간과 초월의 차원을 통전시키는 개념이고 역사의 중심이며 주체이다.




(1) 자연과 역사와 초월적 영성의 통전




역사는 기후 토질 지리 조건, 민족의 특질, 신의 뜻, 의미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나사바퀴, 수레바퀴처럼 발전한다. 역사는 미완성이며, 되풀이하면서 자란다.36) 함석헌은 우주생명진화의 맥락에서 역사를 보았다. 뇌신경과 뇌세포 속에, RNA, DNA 속에 생명진화와 인류사, 민족사가 통조림 되어 있다.37) 생명진화를 거쳐 인류로 진화했듯이, 인류역사의 진화를 거쳐 초정신, 초인류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 한, 우주, 전체와 하나 된 인간, 새 인간, 새 종교를 기다렸다.38) 하나님을 찾음이 사람의 바탈이며 역사를 낳는 것은 아가페다. 사랑의 임(하나님)을 찾는 것이 역사이다.39)



씨은 인간과 자연생명의 일치를 뜻한다. 씨은 자연생명의 본질이면서 인간생명의 본성을 나타낸다. 인간과 우주생명은 일치하고 통한다. 또한 씨의 속에는 신적 생명의 씨앗, 본질이 담겨 있다. 씨은 초월적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이다. 씨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날 길도 없고 구원받을 길도 없고 진리를 찾을 길도 없다.

씨은 전체(나무)의 하나(일부)이면서 자신 안에 전체를 품고 있다. 씨은 자기를 버리고 깨뜨리고 내맡기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죽음으로써 사는 생명의 길을 보여준다. 씨은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과 함께 어우러져 생명을 창조하는 상생과 공생의 평화세계를 보여 준다.




(2) 씨; 역사의 주체




씨사상은 민주사상이다. 씨 속에 생명의 본 바탕이 비교적 옹글게 남아있고, 삶의 지혜와 힘이 있으므로, 씨에게 배우고 씨이 앞장 서게 해야 한다. 씨을 가르치려들지 말고, 이끌려고 하지 말라고 함석헌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경고했다. 씨이 혁명의 주인공이 되고, 정치의 주역이 되게 하라고 역설했다. 이미 50년대에 함석헌은 국민이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원리와 지침을 제시했다.40)

민이 역사와 사회의 주인이며, 하나님과 직통하는 존재이다. 역사의 씨인 민 속에 민족정신과 생명이 온전히 담겨 있고 5천년 민족사가 담겨 있다. 더 나아가서 우주 생명진화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41) 현재와 미래의 역사와 생명진화의 운명이 씨의 손에 맡겨져 있다.




6) 대종합의 통일사상




함석헌의 사상은 아주 쉬우면서 매우 어렵다. 그의 생각과 통찰이 삶의 체험에서 우러났고, 일상의 삶, 구체적인 현실, 몸과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맘으로 함께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사상은 현실의 상대세계를 뛰어넘어 모든 잡다함과 다양함을 하나로 꿰뚫는 절대, 초월, 궁극의 자리에서, 죽고 다시 사는 깊은 신앙체험의 자리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깊고 높은 깨달음의 미묘함과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글은 깊은 감동과 충격을 주면서도 높은 하늘을 보는 듯, 깊은 바다를 보는 듯, 어지럼을 일으키고 너무 높고 깊어서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함석헌은 구체적인 삶의 철학자이면서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는 대종합의 사상가이다. 그는 몸과 영혼, 물질과 정신을 통전적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의 자리에서 전체의 자리에서 믿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에게는 민중, 민족, 세계평화, 신앙적 실존의 차원이 긴밀히 결합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더 민중주의자였고, 누구보다 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누구보다 더 개방적인 세계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진지하게 신앙적 실존의 진실을 추구하는 철저한 구도자였다. 민중, 민족, 세계평화, 종교적 실존을 추구한 초월적 자유인이고 저항적 행동인이었고 비판적 지성인이었다.

그의 삶과 사상 자체가 대종합을 이루었다. 겨레얼과 기독교신앙, 동양정신과 서양정신, 몸과 정신, 자유와 평등, 물질과 정신, 이성과 신앙, 이론과 실천, 인간과 신, 역사와 자연, 민족과 민족을 크게 하나로 통일하려 했다.




그는 한겨레가 언어와 문화 속에서 정신적으로 닦아낸 “한 사상”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업적이라고 했다. “한”은 한님, 하나님과 한겨레를 함께 나타내고, 개체와 전체, 큰 하나 됨을 뜻한다. “한”은 세계화되는 인류의 하나 됨을 지향하는 정신적 바탕이 된다. 함석헌은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에서 우주적 일치와 종합의 근거를 발견한다. 민족의 원형질인 “한 사상”과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대종합의 근거가 되었다.

함석헌의 글과 사상에는 유교의 선비정신, 기독교의 죄의식과 역사적 책임의식,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불교의 없음과 빔, 한국의 한 사상, 서구의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이 녹아있다. 함석헌이 깊은 믿음으로 없음과 비움 속에 자기를 잊고 자기를 버림에서 행동의 자유가 나온다고 할 때, 기독교 신앙과 동양적인 정신이 결합되어 있다.









1) 함석헌의 생애에 대해서는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함석헌전집4. 201쪽 이하 참조.


2) 함석헌의 신앙이 변화되고 발전된 것에 대해서는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함석헌전집4. 177쪽 이하. 특히 196-197쪽 참조.


3)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4) 함석헌, “새 나라 꿈틀거림”, 함석헌전집2. 294쪽.


5) 함석헌,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함석헌전집 8. 56쪽 이하.


6) 함석헌, “새 윤리”, 함석헌전집2. 348쪽.


7) 함석헌, “우리 민족의 理想”, 함석헌전집1. 361-3쪽.


8) 함석헌, “인간을 묻는다”(송기득과의 대담), 함석헌전집 4. 344쪽.


9) 함석헌, “레지스땅스”, 함석헌전집2. 187쪽.


10)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5쪽.


11)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13쪽. “새 나라 꿈틀거림”, 같은 책. 262쪽.


12)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함석헌전집9. 14-5쪽.


13)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7쪽.


14)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185쪽.


15) 함석헌, “새 시대의 종교”, 함석헌전집3. 213-4쪽.


16) 서구의 대표적인 신과학적 생태주의 사상가 에리히 얀치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아라”는 자기 개념, 그리고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헤겔의 “자기의식” 철학적 전통에 서 있다. 얀치의 우주는 헤겔에 의해 대표되는 모놀로그의 신령(神靈)이다. 그러나 한국적 사유인 동학사상에서는 한울‘님’과의 대화의 길이 열려 있다. 이준모, 밀알의 노동과 共進化의 敎育. 한국신학연구소, 1994. 274쪽.


17)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5-6쪽.


18)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6-100쪽.


19) 함석헌, “새 나라 꿈틀거림”, 함석헌전집2. 295-6쪽.


20)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3쪽.


21)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6쪽.


22) 같은 글. 310-311쪽.


23) 같은 글. 304쪽.


24) 함석헌, “살림살이”, 전집2. 307쪽.


25) 같은 글. 306쪽.


26) 같은 글. 313쪽.


27) 같은 글. 314쪽.


28) 같은 글. 314쪽.


29)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31쪽.


30) 같은 책. 61-2쪽.


31) 같은 책. 297쪽.


32) 함석헌, “새윤리”, 함석헌전집2. 347-348쪽.


33) 함석헌, “펜들힐의 명상”, 함석헌전집3. 317-8쪽.


34) 함석헌, “씨의 설움”, 씨의 소리. 1970. 4.


35) 함석헌, “열 두 바구니”, 함석헌전집4. 393-4쪽.


36)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56쪽 이하.


37)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38)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26쪽.


39) 같은 책. 52-3쪽.


40) 이에 대해서는 박재순 “함석헌의 민주정신”, 씨의 소리. 2003년 3-4월호 참조.


41)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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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4

홍진표의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 AI 시대에 돌아보는 서양 근대철학,

Namgok Lee
43 m ·



홍진표의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 AI 시대에 돌아보는 서양 근대철학,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를 일독(一讀)했다.

요즘 집중력이 떨어져 1주일 정도에 읽을 생각이었는데, 3일 만에 읽었다.
교양 수준에서 철학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기 때문에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말이 ‘철학 공부 굳이 하지 말라’ 였다.

서양 근대철학의 중심 과제들이었던 경험론과 합리론, 관념론과 실재론,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과 복잡한 뒤섞임 등에 대해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는 식으로 여러 사상 이론 등을 소개하고 있다.
과학과 철학이 함께 다룬 영역들에서 이 책은 제목처럼 ‘철학의 물음을 과학이 답하는’ 방식으로, 지금 시대의 사람이라면 그 이름도 유명한 철학자들(데카르트,로크, 흄, 칸트,스피노자, 헤겔, 마르크스 등)의 이론이나 사상을 머리 아프게 ‘굳이 공부하지 말라’라는 말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하지 않아도 좋으려면 이 책을 한번 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교양 수준이라고 말은 했지만, 부록에 그가 참조한 책만 해도 65권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집중한 노고에 편승하여 쉽게 ‘굳이 어렵게 철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기회를 만난 것은 나에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과학(자연과학에서 점차 심리과학까지 확장)과 철학과 종교가 함께 섞인 테마들에 대해서, 많은 신비(神祕)들이 과학의 발전으로 베일을 벗었다.
그러나 과학이 벗긴 베일은 광대한 우주에서 보면 아직 아주 작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해진 것은 이제 과학이라는 창구(窓口)를 거쳐야 우주 자연 인간의 신비에 옳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머릿글에서 이야기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철학은 ‘주로 서양 철학을 말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을 제외한 철학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철학을 하고 과학을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운동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의 삶이 물질적 결핍, 사회 제도의 억압, 인간의 특징인 관념 안에 존재하는 부자유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가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런 취지와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 철학에 대해 내 의견을 말한다면, 도덕이라는 말이 갖는 규범적 강제성이나 의무성을 넘어서는 것이 과제라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축의 시대에 출현한 인간 정신의 위대한 선각자들이 열어간 세계는 근대 철학이 부딪친 함정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전히 또 앞으로도 AI 시대에도 우리들이 석가나 공자 예수에게 배워야 하는 이유다.
미래의 종교는 아마도 우주 진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관념계에 내재하는 부자유로부터 해방을 돕는 역할이 그 존재 의의가 될 것이다.
요즘은 인류 생존 자체가 위협 받는 사태가 눈앞에 다가왔지만, 궁극적으로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 되어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문명전환은 현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특히 한국의 현재의 정치 사회 경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과도기적 혼돈을 넘어서야 하는 것은 살아남아 번영하기 위한 절박한 과제로 되고 있다.

586세대에 속하고 특히 정치 분야에서 활동해온 저자가 철학 공부를 집중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자신을 위해서나 사회정치운동을 위해서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평소부터 우리 정치 운동이 인문운동과 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자의 이런 노력이 그런 방향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아무쪼록 퇴영적이고 비생산적인 편가름의 정치, 낡아서 쓸모없게된 관념이나 정서가 발목을 잡는 정치에서 벗어나 문명전환의 새로운 정치, 상생과 연합의 정치로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의 맨 끝에 쓴 내용이다.
“AI 시대를 전망하면서 인류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만큼,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탐구하는 철학을 기대한다. 인류의 진로와 시대정신에 관한 논의는 개별과학의 범위를 벗어난 마지막 남은 철학의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AI와 관련해서 바둑을 예로 들었다.
사람은 AI에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둑에 대한 흥미를 감소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둑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AI와 인간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어쩌면 바둑이 실생활에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바둑을 즐겨 보는 편이다.
언제 홍 선생과 수담(手談)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 AI시대에 돌아보는 서양근대철학,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

책소개

철학비전공자인 저자가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개괄한 책이다. 책은 철학계의 성역에 과감히 도전한다. 과학의 발전 속에서 철학이 어떤 도전을 받고 어떻게 허물어졌는지? 가감 없이 논하며 일부 철학의 무용론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전문가들은 기존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거장들의 철학에 대해 ‘가치가 없다’는 비평을 하게 되면 계속 철학계에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 철학자들 다수는 과거 철학자들의 죽은 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게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할 수 없다.

목차
프롤로그

1. 기원을 찾아서-철학과 근대문명
1.1. 철학이란 무엇인가?
1.2. 철학의 시작
1.3. 철학의 가치와 난해함
1.4. 근대문명과 근대사상

2. 한 발은 중세, 한 발은 근대-데카르트
2.1. 고대의 유산에서 과학의 근대로
2.2. 데카르트 자연관의 한계
2.3. 영혼, 신, 코키토
2.4. 데카르트는 근대인이었나

3. ‘마음’은 없다-정신, 감각, 뇌
3.1. 마음은 어디에?
3.2. 보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3.3.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 정신과 감각

4. 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나-경험론 대 합리론
4.1. 근대이전의 인식론
4.2. 근대적 인식론의 전개
4.3. 합리론과 경험론의 쟁점

5.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칸트
5.1. 인식론의 종합 시도
5.2. 칸트의 도덕철학

6. 세계는 실재하는가-물질과 정신
6.1. 관념론 대 실재론
6.2. 유물론의 등장

7. 관념론의 극단-스피노자, 헤겔
7.1. 두 얼굴의 스피노자
7.2. 관념론의 완성자 헤겔

8. 유물론의 반격-마르크스주의

에필로그

======================
책속에서

이 책에서는 근대철학의 쟁점들에 대해 현재 시점의 지식수준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평가들을 제시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과거에 철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다면 철학이 아니라 역사공부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때 그 철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이 오늘날 어떤 ‘지식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데 중점을 둘 것이다. 한편 검증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모호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분명히 말할 것이다.


우선 오히려 철학전문가들은 이런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철학 거장들의 이론이 가치가 없다는 수준의 비평을 하게 되면 계속 철학계에 남아 있기 어려울 것이다. 유튜브의 <플라톤 아카데미>채널에서 한국의 칸트 권위자인 두 명의 철학교수가 놀랍게도 일반인들에게 <순수이성비판> 읽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천체 물리학자가 일반인에게 오래전 폐기된 천동설의 경전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읽어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강단의 철학자들 다수는 과거 철학자들의 죽은 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게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과학적 기준에 따른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하는 것은 자기부정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유튜브에는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이라는 채널이 있다. 여기에 김상환 철학교수의 ‘왜 칸트인가’의 철학 강의와, 최영기 수학교수의 ‘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의 수학강의가 있는데 뚜렷하고 흥미로운 대비가 된다. 
김교수는 칸트의 철학을 소개하는데 주력하는데 개념어의 난무와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과연 이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대부분의 철학 강의가 그렇듯이 이 강의도 칸트 철학이 지금 우리의 지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반면 최교수는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가 유클리드기하학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칸트 추종자들의 공격을 의식하여 그 발표를 유보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가 보편적 진리라고 전제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으니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은 칸트철학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례는 우리가 칸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데 어떤 방법이 더 좋은지 잘 알려주고 있다.

-서문중에서  접기

근대철학의 내용 대부분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의 기준에서 보면 조잡하거나 심지어 터무니없다. 근대철학을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논의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때’를 기준으로 그 생각이 과거보다 진일보한 면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 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비전문가들에게는 현재 학문의 기준으로 ‘여전히 유효한’ 내용이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의 근대철학의 가치 평가는 오늘의 기준에서 그들의 생각의 ‘가치’를 알려는 실용적 요구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정 철학자를 숭배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그들의 이론 가운데 여전히 믿을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현대의 우리가 가져야 할 합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당시 그들이 왜 알지 못했는지 비웃거나 질책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가졌던 의문에 대해 과학이 어떤 답을 내렸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접기

데카르트는 인류가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지적 자산을 축적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길을 잘못 들었다. 특히 신에 의존한 인식론의 전개를 보면, 데카르트는 아직까지 중세에 머물러 있거나 잘 봐줘야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에 위치했다고 보인다. 데카르트의 과오는 다행히 뉴턴과 로크 등에 의해 빨리 교정될 수 있었다.

인간의 감각기관에 대한 불신이 관념론의 시초로 보인다. 착시와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면서 인간에게 보이는 것들은 허상이고 우리의 관념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발상에 빠지는 사람들이 나온 것이다. 외부에 실재하는 것 같은 세계가 실은 우리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현실의 공포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효과를 주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우리 눈앞의 모습이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진 것이다. 이때 꿈이 이런 사고에 빠지는데 큰 영향을 미친것 같다. 과학시대 이전에 꿈은 모든 문명권에서 예외 없이 사람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 나오는 꿈은 영생하는 영혼에 대한 믿음을 주었고 미래를 알려주는 신비한 기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지금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 혹시 꿈일지 모른다는 회의를 했고, 장자는 유명한 ‘나비의 꿈’에서 유사한 의심을 했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관념이듯이 현실세계도 관념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망상을 하게 된 것이다. 버클리 또한 ‘대화’에서 필로누스의 입을 빌려 꿈에서는 외부대상이 없이도 지각이 가능하다는 것을 관념론의 근거로 들고 있다.  접기

헤겔의 이성은 더 이상 세계를 관찰하고 인식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창조자가 된다. 정신자체가 운동을 하고 세계를 창조한다는 망상의 단계로 나가버린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사실이나 논리의 영역을 모두 벗어나 종교와 유사한 믿음의 영역에 놓여있다. 포퍼는 진리탐구에서 단순성과 명백함의 추구는 지성인의 의무이며 명증성의 결여는 죄악이며 과장은 범죄라고 규정했다. 헤겔은 그 반과학적 성격을 볼 때 근대에 속하지 않는다. 헤겔은 정신의 운동으로 세계의 원리를 설명해내겠다는 과욕을 부렸고 결국 실패하였다. 플라톤 이래로 근본원리를 발견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욕망에 빠진 철학자들 중 헤겔은 관념론의 계보로는 최후의 사람으로 보인다.

AI가 등장하면서 정신은 물질 중에서도 유기체에서만 파생될 수 있다는 논리도 수정되어야 한다. 유기체가 아닌 컴퓨터도 물질을 잘 결합시키고 전기라는 에너지를 공급하면 유기체의 뇌에서만 가능했던 정보의 수집과 전달, 연산이라는 지적활동을 할 수 있다. 특히 AI는 학습과 판단이라는 창조활동의 단계로 나가고 있다. 지능은 정신활동의 핵심이라서 무생물도 정신활동이 가능하다는 예상은 이제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AI시대에는 정신을 신비화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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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홍진표 (지은이) 

1963년생으로 광주 인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정치학과를 중퇴했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부장,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사상이론지 <시대정신> 편집인을 지냈다. 현재 사)시대정신 상임이사로 있다.
최근작 : <철학이 묻고 과학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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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철학비전공자인 저자가 데카르트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개괄한 책이다. 책은 철학계의 성역에 과감히 도전한다. 과학의 발전 속에서 철학이 어떤 도전을 받고 어떻게 허물어졌는지? 가감 없이 논하며 일부 철학의 무용론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전문가들은 기존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거장들의 철학에 대해 ‘가치가 없다’는 비평을 하게 되면 계속 철학계에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 철학자들 다수는 과거 철학자들의 죽은 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게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할 수 없다.
책은 고대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 등 주요한 문제의식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일단락된다고 보고,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서양철학사의 핵심을 간추려서 제공하는데 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