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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2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책소개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소개

책소개
이성적 관념의 철학에서 주체적 생명의 철학으로
인간에게 ‘나’는 무엇인가? 그것이 주도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억제해야 하는가? 유교는 극기와 수기를 말함으로써 나를 누르고 닦으려 했고, 도교는 무위자연을 내세우며 나를 자연의 법도와 질서에 순응하게 하려고 했으며, 불교는 무아와 멸아를 말하여 나를 부정하고 초월하려 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동양 종교 일반에서 가지는 태도에 반하는 면모를 함석헌과 유영모 연구에서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그들은 ‘나’를 중심과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은 안창호 연구에서 깨끗이 풀렸다고 술회한다. 저자에 따르면, 안창호는 시종일관 나를 중심에 놓고 전면에 내세웠다. “안창호는 나라를 잃고 종살이하는 한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나라의 독립과 통일 운동에 앞장서게 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고 행동한 안창호는 ‘나’의 철학자였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씨알철학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안창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이 동 · 서 정신문화의 만남과 민중의 주체적 자각으로 전개된 한국 근 · 현대가 낳은 생명철학이라고 규정한다. 국가권력과 지배이념에서 자유로웠던 안창호, 유영모, 함석헌은 동 · 서 정신문화를 깊이 받아들이고 인생과 역사,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자유롭게 생각하여 민주적인 생명철학을 닦아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 사상은 20세기에 한정되지 않는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철학이며, ‘나’의 삶을 저마다 저답게 살려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이 담지하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목차
머리말
들어가는 말
1. 나는 이 책을 어떤 동기에서 썼는가?
2. 어떤 관점에서 썼는가?
3. 어떤 내용을 썼는가?
4. 21세기와 도산 사상
제1부_ 도산 안창호의 철학
1장 이성의 철학에서 생명철학으로
1. 이성의 철학
2. 생명의 철학
3. 안창호는 철학자인가?
2장 도산철학의 배경
1. 역사의 깊은 어둠 속에서 진리의 빛을 밝힌 안창호의 생애
2. 시대 문화적 배경과 전환
3장 도산철학의 탄생과 형성
1. 낡은 철학에서 새로운 철학으로
2. 철학의 탄생
3. 철학의 형성과정
4장 도산철학의 위치와 특징
1. 인식론적 특권과 철학의 위치: 관념적 인식론과 물질적 존재론에서 생명철학으로
2. 철학의 성격과 특징
5장 나의 확립과 민주정신의 철학: 나는 어떻게 민주시민이 되는가?
1. 나의 발견과 확립: 나는 어떻게 나가 되는가?
2. 민주의 길: 어떻게 나는 민주시민이 되는가?
3. 민주정신과 철학
4. 민주시민의 자기 수양과 교육
6장 과학적 합리성과 무실역행의 철학: 나는 어떻게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가?
1. 과학적 사고와 주체적 실천의 철학
2. 인과율의 확장과 주체적 힘의 철학
3. 무실역행의 철학
4. 비신화화, 비종교화, 탈케리그마화: 개조와 진보의 철학
7장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길: 안창호는 어떻게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길로 갔는가?
1. 민주·통일·평화의 생명철학
2. 안창호는 어떻게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길로 갔는가?
제2부_ 한국 근현대철학의 계보: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8장 도산철학의 역사적 실천적 계보
1. 안창호·이승훈이 일으킨 교육독립운동
2.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의 역사철학적 계보
9장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연속성
1. 삶과 정신의 연속성: 한국 근현대 정신과 철학을 형성한 도산·남강·다석·씨알
2.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생명철학적 연속성
3.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상황적 연속성: 나라를 잃고 빈들에서 헤매며 독립의 철학을 형성하다
4.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세계 보편적 연속성: 동서 정신문화를 아우르는 세계철학
10장 주체의 깊이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나’의 철학
1. 안창호의 ‘나’ 철학: 자아혁신, 애기애타, 세계대공
2. ‘나’의 속에서 전체의 ‘하나’로 솟아올라 나아간 유영모의 ‘나’ 철학
3. 나의 속 생명의 바다에서 생각으로 나를 낚은 함석헌의 씨알철학
11장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의 실마리: 생명을 살리는 생각의 철학
1. 생명철학과 이성 철학
2. 생명철학적 생각 이해
3. 서양철학의 생각 이해에 대한 생명철학적 비판
4. 함석헌의 ‘나와 세상을 살리는 생각’
12장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1. 도산철학과 씨알철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2. 서구 철학의 비판과 극복
참고문헌
저자 소개 박재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신대 연구 교수를 지냈다. 한국씨알사상연구소 소장으로서 2008년 세계철학자 대회에서 ‘유영모, 함석헌 철학 발표회’를, 2009년 한일철학대회 ‘씨알학과 공공철학의 대화’를 주관하였다. 저서로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이 있으며, 논문으로 ‘도산 안창호의 마을공화국 철학’이 있다.
책 속으로
물질론과 관념론은 물질, 생명,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과 우주의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마르크스의 물질론적 변증법에 따르면 사회의 하부구조인 물질적 생산력이 발달하면 생산관계가 변화하고 생산관계가 변화하면 상부구조인 인간의 의식과 정신, 관계와 제도도 변화하고 발전해간다. 물질적 생산력의 발달은 기존의 생산관계 및 상부구조와 모순 대립하게 되고 결국 생산관계와 상부구조의 변화와 발달을 가져온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고 교묘하게 설명을 해도 물질론적 변증법에 의한 변화와 발전은 물질론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물질적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아무리 변화하고 발전해도 물질의 변화와 발전은 생명과 정신의 질적 초월적 변화를 위한 조건과 환경, 계기와 발판은 될 수 있어도 물질의 변화와 발전 자체가 생명과 정신의 질적 초월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도 관념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물질적인 관념과 정신의 변증법적 변화는 물질적 현실과 몸을 가진 생명의 구체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모든 관념론은 구체적이고 특별하고 다양한 생명의 주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드러내지도 못한다. 관념론은 물질에 이르지 못하고 물질론은 관념에 이르지 못한다. 물질론과 관념론은 인식주체인 이성과 인식대상인 물질의 대립적 관계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편향적이고 일방적인 설명체계일 뿐이다.
생명은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하여 의식과 정신에 이른 것이고, 인간의 생명은 의식과 정신을 넘어서 얼과 뜻, 영혼과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한 생명은 시공간적 제약과 구체성을 가지면서도 시공간적 제약과 속박을 초월하여 자신을 형성하고 심화 발전시켜가는 존재다. 생의 주체성, 전체성, 창조성은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하는 것이며, 시공간적 현실성과 구체성 속에서 시공간적 제약과 속박을 넘어서 스스로 자기를 실현하고 완성해간다. 생명체는 몸과 의식이 통일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다. 인간은 몸, 맘, 얼이 통일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주체적인 존재다. 인간과 우주의 세계는 물질과 생명과 영(정신, 얼)의 세 겹과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과 생명, 인간과 우주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관계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물질과 생명과 인간과 우주의 존재를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주체적 관계와 변화발전의 역사적 과정에 비추어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 물질론과 관념론은 물질과 생명, 인간과 우주의 통합적 존재와 관계, 주체적 변화과정과 지향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전혀 적합하지 않다.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하여 물질이 아닌 의식과 정신에 이른 생명은 물질과 의식을 통합한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주체이며 물질과 의식을 통합한 통일적 전체다. 생명은 주체와 전체의 통일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 발전해가는 것이다. 물질론과 관념론은 생명의 주체와 전체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것들은 물질과 생명과 정신과 신의 관계와 변화, 의미와 가치, 목적과 방향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1장_ 이성의 철학에서 생명철학으로」중에서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잃자 도산은 1906년 말에 미국에서 ‘대한신민회취지서’(大韓新民會趣旨書)를 쓰고 한국에 돌아와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민을 깨워 일으키는 교육독립운동을 벌이고 새로운 나라를 이루기 위한 혁신운동을 시작했다. ‘대한신민회취지서’를 보면 도산의 기본적인 사상과 철학이 이미 확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실천적인 구상과 방안이 마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은 신민회의 목적과 방법을 제시하였다. 신민회의 목적은 “대한의 부패한 사상과 관습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이다.
그 방법은 “… 신문 잡지 및 서적을 간행하여 인민의 지식을 계발케 할 일, 정미(精美)한 학교를 건설하여 인재를 양성할 일, … 합자로 실업장을 설립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만들 일…”이다. 한국의 부패한 사상과 관습을 혁신하여 국민을 새롭게 하고 새롭게 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새로운 자유문명국을 이루는 것이 도산의 사상과 실천을 관통하는 기본 내용이었다.
이 글에서 도산은 먼저 나라를 잃고 망하게 된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진단하였다. 한국 사회가 낡은 습관에 매어 있으며 거짓말과 허위로 가득 차 있고 공론공담과 당파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도산은 한국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한국 사회는 약자를 압제하고 강자에게 의뢰하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사회라고 보았다. 한국 사회는 약자에게는 거만하고 강자에게는 굽실거리는 노예성질과 사대주의로 오염된 사회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자유 문명국이 되려면 정치사회문화 교육도덕의 모든 분야를 쇄신해야 한다. 민의 새 정신을 일깨워 새 단체를 만들고 나아가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유신(維新)이다. 유신은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 실행할 일”이다. 하늘의 도가 새로워지고 인간의 일을 새롭게 하는 유신의 시작과 끝은 민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도산은 ‘나-민’(我 民)이라는 말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나 민’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 민이 새롭지 않으면 누가 나의 대한을 사랑하고 나 민이 새롭지 않으면 누가 나의 대한을 보호하겠는가.” 도산이 ‘나-민’(我 民)이라는 말을 쓴 것은 민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만 보지 않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적인 ‘나’의 관점과 자리에서 본 것을 의미한다. 그는 국민, 민중을 ‘나’(我)로 보았다. 그는 ‘나-민’을 새롭게 하고 민족사회의 온갖 낡은 습관과 버릇을 고치고 정신문화와 제도, 사상과 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가면서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가시밭길 험한 길에도 나아갈 뿐 물러섬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에게 민의 ‘나’는 나의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 새롭게 해야 할 나 자신이다.
---「3장_ 도산철학의 탄생과 형성」중에서
안창호가 말한 인격개조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의 덕력과 체력과 지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고정불변의 본성을 논하지 않았으며, 관념적 이성과 이념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을 말하지도 않았다. 안창호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 없는 인간이 능력 있는 인간으로 되는 것이었다. 능력 있는 인간이 되어 역사와 사회의 주인과 주체로서 할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안창호는 힘의 성격과 종류를 말했다. 기본적으로 힘은 인간 개인의 구체적이고 주체적 능력이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인격이 덕과 체와 지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덕력과 체력과 지력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다. 개인의 인격적 힘에서 시작했지만 고립된 개인의 힘은 약하므로 더 큰 힘에 이르기 위해서 조직되고 단결된 집단과 민족의 통일된 힘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에서 힘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는 개인의 건전한 인격을 기르기 위해서 삼대육(덕력, 체력,지력의 양성)과 사대정신(務實,力行,忠義,勇敢)을 강조했다. 그리고 개인의 건전한 인격을 넘어서 조직과 단체의 공고한 단결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성단결’을 말했다.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은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아직 주관적이고 주체적이다. 이 힘이 사회와 역사에서 큰일을 이루려면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힘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6장_ 과학적 합리성과 무실역행의 철학」중에서
생의 주체인 ‘나’가 곧 존재 이유와 목적이고 가치와 의미다. 생의 이유와 목적, 의미와 보람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다만 물질과 관념에 사로잡힌 ‘나’에서 참된 생명의 ‘나’로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 물질과 관념에 사로잡힌 나는 타성에 젖은 거짓 나, 게으른 나이며 물질과 관념을 초월한 참된 생의 나는 자유롭고 기쁘고 창조적인 나다. 존재와 활동의 원인과 결과를 밖에 가진 물질세계는 타자에 대하여 닫혀져 있다. 그러나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자기 안에 기쁨과 자유, 사랑과 희망을 가진 생의 주체는 타자에 대하여 무한히 열려 있으며 타자를 또 다른 나(주체)로서 그리워한다. 생의 주체는 타자와 서로 주체로서 기쁨과 사랑 속에서 새로워지고, 더 나아지려는 바람과 희망 속에서 사귐을 가지고 협동하려고 한다.
이런 생명의 본질과 특징에 비추어볼 때 통일과 평화의 첫째 철학원리는 ‘나’(주체)의 원리다. 생명의 중심과 주체는 ‘나’다. 생명이 생겨났다는 것은 ‘나’ 주체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밖의 타자에게서 오므로 물질적 존재와 활동의 조건은 외부의 타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서는 생명의 주체인 ‘나’ 안에 존재와 활동의 이유와 목적, 힘과 가치가 있다. 근본적으로 생명은 나에서 시작하여 나에게 돌아간다. 타자에 의존하거나 타자와의 만남과 관계에서 나를 찾거나 발견하고 확립하려는 것은 생명을 물질적 법칙과 환경적 조건에 가두고 그 법칙과 조건 속에서만 생의 주체를 보려는 것이다.
---「7장_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길」중에서
안창호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과 평화에 이르는 길을 열고 그 길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그가 개척하고 걸어갔던 민족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안창호가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사상과 실천의 원칙들에 비추어 보면 그가 걸어갔던 평화와 통일의 길이 보다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안창호가 제시한 사상과 실천의 원칙들은 앞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대로 공사병립, 활사개공, 대공정신, 애기애타, 무실역행, 충의용감이다.
앞의 공사병립, 활사개공, 대공정신은 국가의 양면을 이루는 공과 사의 구분과 통합과 실현에 대한 원칙과 방법이다. 이것은 생명의 주체와 전체를 통합 일치시키며 창조적 진화와 초월적 고양을 이루어가는 생명철학적 원칙들이다. 뒤의 애기애타, 무실역행, 충의용감은 공과 사를 통합하고 실현해가는 마음가짐과 지침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 애기애타, 무실역행, 충의용감은 공사병립, 활사개공, 대공정신을 실천하는 주체적인 원리다. 이 여섯 가지 원칙이 민족의 독립과 통일과 평화를 지향하는 도산의 사상과 실천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이다.
---「7장_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길」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 책은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두 큰 주제에 따라서 2부로 구성되었다. 저자는 본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서론에 대당하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의 집필 동기와 관점 그리고 담는 내용을 제시한다. 기독교 서구는 죄인된 인간을 강조하고 그와 더불어 무력한 자아를 구원할 타자로서 신을 강조했기 때문에 ‘나’를 내세울 수 없었고, 인간의 자아를 이성으로 본 서양의 이성 철학에서는 자아와 타자가 모두 이성의 지배와 독점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탈현대주의는 이성 철학이 유지해온 관념적 자아의 해체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라 잃은 한민족 구성원 하나 하나를 ‘나’라는 주인과 주체로 일깨워 독립과 통일 운동에 나서게 한 데서 그것을 극복할 실마리가 제시된다.
“제1부 도산 안창호의 철학”에서는 이렇게 ‘나’를 일깨운 도산철학을 7개 장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저자는 도산철학을 생명철학으로 규정하고, 생명철학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는 과정을 안창호 개인, 역사와 당대의 문화 그리고 철학 사상적 배경까지 상세하게 풀어나간다. 1부의 나머지 부분에서 저자는 도산철학의 핵심 주제들을 다루어간다. 나는 어떻게 민주시민이 되는가? 나는 어떻게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안창호는 어떻게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길로 갔는가? 저자는 이 질문들을 통해서 도산의 생각과 삶이 담지하고 있었던 생명철학을 정리해간다.
저자는 도산철학이 씨알철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늘 자신의 스승들로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을 내세우며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것은 함석헌 사상이 도산 그리고 남강과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임이 분명하고, 일련의 사승관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승훈은 안창호의 교육이념과 정신을 따라서 오산학교를 세웠다. 이승훈은 3.1운동에 앞장섰을 때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을 만나면서 스승과 제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씨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도산과 남강의 교육독립운동과 3.1운동의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제2부 한국 근현대철학의 계보: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에서는 5개 장에 걸쳐서 이 주제를 다룬다. 도산철학의 역사적 실천적 계보, 도산철학과 씨철학의 연속성, 또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나’ 철학의 문제 그리고 도산철학과 씨철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제2부에서 다루어진다.

2021/09/28

도산 안창호로부터생명철학과 씨알철학의 연원을 읽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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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an4hsd  · 
도산 안창호로부터생명철학과 씨알철학의 연원을 읽어내다!
박재순 지음 /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동연 / 2021
                                         김대식 박사(씨알사상연구원 연구실장)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철학과 사상은 함석헌의 사유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간 저자의 연구 테제와관심사는 한마디로 ‘생명철학’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를 철학자로 규정하고 생명철학과 씨알철학, 그리고 민주주의에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구를 하게 되었을까요? 저자의 확신처럼 함석헌, 유영모, 이승훈, 조만식, 그리고 안창호는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근대적 자아인식의 주체인 ‘나’에 대한자각은 유영모와 함석헌의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 주체성은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삶과 철학, 생명과 정신은 ‘나’ 주체성, ‘나’-철학에서 나옵니다. 특히 자아 혁신과 애기애타(愛己愛他)는 주체성과전체성을 아우르는 도산의 독특한 사상적 개념입니다.
저자는 도산을 동서양의 시대정신을 잘 융합한 근·현대사적인 인물로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그리스도교 정신과 실천, 그에 기반한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을 간과하지 않은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생각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도산이 민중을 위한 민주주의적 정신을실현시킨 세계적인 사상가라는 점을부각시킵니다.도산은 고난당하는 민중의 역사를바라보면서 자신이 있는 삶의 자리에서 역사의 진리를 제대로 인식했습니다. 추론해보건대 비록 도산이 무학자였지만, 그가 조직한 흥사단을 통해서 유영모, 함석헌이 나왔다는 것, 임시정부수립이나 헌법전문정신형성에기여했다는 것도 ‘나’-철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구체적인 ‘나’-철학의 확립, 자아를 힘있게 하여 새 시대의 정신적 기초를 놓은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그는 관념철학을 넘어 실제적인 생활철학, 곧 애기애타(자아혁신과 협동)정신을 낳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격’과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를 확장하여 자연과 우주를 사랑하는 것은공공철학, 공립(共立)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제 삶을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야 하는것이고, 성현에 기댄 삶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나’-철학이자 자기답게 살아가는 민주시대의 젊은이 철학이라고 확신하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저자는 이성의 철학에서 생명의 철학으로의 전회를 역설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드러납니다.“생명과 정신의 철학은 스스로 하는주체와 전체의 일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생명과 정신의 입체적이고 통합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적 철학이 되고, 역동적이고 과정적인 변화와고양을 이루는 실천적인 철학으로 되어야 한다”(34쪽) 생명은 통합입니다.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의 통합입니다. 따라서 생명사건은 개방성, 수용성, 공존, 상생, 평화, 일치, 통합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서 얼과 신(神)을 향한 질적 초월로의 이행은 물질론적・관념론적 변증법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저자의 도산철학에 대한 생철학적 해석학의 지평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자신이 생의 주체이면서 생을 전체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씨알입니다. 씨알은 생명체요 역사를 압축한존재들입니다.
이쯤해서 도산과 생명철학, 생철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저자는 도산이 생과 역사 이해, 그리고 개혁적 창조를 통하여 생명과 정신의 실현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도산 자신의 생철학적삶은 몸, 맘, 얼, 감성, 이성, 영성을 폭넓게 담아내는 사상과 실천가로서의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나’-철학을 주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하는 철학, 스스로 되는 철학을 민중에게 계도하는 몸짓이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도산철학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 정신, 민주정신, 과학사상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나를 나되게 하는이, 곧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의 인격과 민족성 개혁, 창조하는 주체로서 몸, 맘, 얼의 존재론적 층위의 통합철학을 형성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 역사, 주체, 전체는 도산의 ‘수양철학’이요 함석헌과의 공통분모인 생명철학의 요체입니다. 도산의 생명철학은 독립과 통일, 이상촌(마을공화국) 건설, 인격형성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띠는데, 특히 마을공화국은 인격적 주체와 민족국가 사이의 다리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산의 철학적 실천의 근간은 애기애타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타자와연결・통합되는 사랑의 철학입니다.다산은 민중의 현실 속에서 생의 진리를 모색하고 하나님을 체험했다는점에서 함석헌에게도 영향을 주었을법합니다. 여기서 주체와 전체가 일치합니다. 도산의 철학은 지금 여기, 곧민중이 당면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전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주체와 상생, 협동, 공화의 원리를 내세운민중의 생명공동체를 말하지 않을 수없었을 것입니다.씨 한 사람 한 사람을 새롭게 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 ‘나’-철학,‘나’-주체성은 씨 사상의 기본입니다. ‘나’는 역사와 생명의 창조 주체이자 과정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나’-철학을 지닌 민중의 생명공동체 속에서 서로 다름과 서로 주체의 존재론적 인정은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한 필연입니다. 
여기서 도산의독특성이 나타납니다. 앞에서 언급한 무실역행입니다. 무실은 실제, 현실,진실에 충실하는 것이요, 역행은 알맹이에 충실하여 힘껏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곡 이이로부터 시작해서 다산 정약용에 이르는 실학사상에서 연원한 것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도산철학이 유영모와함석헌과 어떠한 유비점이 존재하는가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생각, 과학,‘나’ 주체 확립, 민주철학에서 찾습니다. 민중을 생명주체이자 실체로 본함석헌, 그리고 ‘나’선언(I am that Iam), ‘나’ 주체와 해방에 천착한 유영모는 자기 개조, 자아 혁신을 위한 몸,맘, 얼을 통합하는 사유를 가르쳤습니다. 도산에게 있어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안창호, 유영모, 함석헌은 생명주체인 나와 전체인 나를하나로 파악했다고 평가해도 무난할것입니다. ‘나’-철학과 ‘나’ 각성의 극대화입니다.
도산에게도 생각하는 씨알은 중요합니다.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생각위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유영모는생각의 끝에서 ‘나’를 발견한 인물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주체인 나와전체인 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생명인 ‘나’와 그 ‘나’를 ‘인격체’로 파악한 도산 안창호를 생명철학자로 수렴한 저자의 혜안은 한마디로‘생각 사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한국의 근・현대 철학자 혹은 종교철학자라 할 수 있는 유영모와 함석헌의 철학적 연원을 도산 안창호로부터 끄집어낸 것은 저자의 오랜 연구 성과의 결과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저자의 일관된 목소리가 있습니다. 도산은 보편적 세계철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그것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한국의 독특한 철학은 설령 서양철학의 궤적에서 발견되는 ‘나’-철학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전체인 나, 곧 인격과 통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영모와 함석헌을 연구한 저자가 도산에게서한국철학의 시원을 찾은 깊은 사유훈련에서 나온 정점이라고 봅니다.생각 위의 생각을 하도록 하는 참된 철학자가 없는 시대,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 세계가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저자가 우려낸 도산철학이 조용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종교와 평화’ 2021년 8월)
2 comments
민성식
선생님, 저 기억하시나요? 예전에 한국신학연구소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에 계실때 몇번 뵌 적이 있는 기독교신문 민성식기자입니다. 제가 지금은 종교와평화의 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동연의 김영호 선배님이 선생님 책을 내신다고 해서 서평을 실어야 하는데 필자를 누구로 해야할지 막막하더군요... 그래서 김영호 선배님께 섭외를 부탁드렸더니 김대식 박사님의 원고를 받아주셨어요... 저로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수가 없네요...
 · Reply · 2 h
Jaesoon Park
민성식 반갑습니다. 오래 전에 뵈었군요. 책 소개를 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1/09/08

영원 철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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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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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철학 (永遠哲學)은 모든 민족과 문화에 공통의 진리가 되는 사상.

이 말은 16세기에 Agostino Steuco가 저서 'De perenni philosophia libri X (1540)로 처음으로 사용했다. 17세기에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모든 종교의 기초가 되는 사상을 나타내는데 이 말을 이용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1945년에 '영원 철학' (The Perennial Philosophy)을 출판해, 영원 철학을 유명하게 했다. 헉슬리는 영원 철학을 이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영원 철학의 주의에 의하면, 동서 고금에 여러가지로 다른 문화와 시대에 산 사람들은 현실자기세계존재의 본질에 관해서 공통되는 지각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각은 모든 종교의 공통의 기반을 형성한다.

물리적 세계는 유일한 현실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물질계는 감각을 넘은 현실의 그림자이다. 인간은 현실의 2개의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물질적 측면은 생성 소멸이라는 자연의 법칙의 지배 아래에 있지만, 인간의 또 한 편의 측면인 영혼, 예지는 그것을 넘은 궁극의 현실에 통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이 갖춰지고 있다.

종교는 인간을 이 궁극적 현실과 묶는다. 유태교기독교이슬람교 등에서는 신이 이 궁극적 현실이다. 불교 등의 무신론적 종교에서도 이나 가 궁극적 현실로 여겨진다.

참고 문헌[편집]

2021/08/05

야코프 뵈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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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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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뵈메

야코프 뵈메 (Jakob Bohme, 1575년 - 1624년 11월 17일)는 독일의 신비주의자이다. 독일어로 주로 저술한 최초의 사상가이기도 해, 신봉자로부터 붙여진 '피로소후스 테우트니크스' (독일의 철인)라는 이명으로도 알려진다. 루터파 교의를 배경으로, 파라켈수스들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독특한 자연 파악과 '신의 자기 산출'이라는 철학사상 드문 개념의 전개는 경건주의나 독일 관념론 등 근세의 독일 사상 뿐만이 아니라, 근대의 신비학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주요 저서는 '아우로라', '시그나트라 레이룸', '커다란 신비', '그리스도에게의 길'.


목차
1생애
2사상
2.1신의 현현
2.2영원의 자연
2.3타락과 구제
3참고 문헌
생애[편집]

1575년, 북쪽 독일·오버라우짓트나이세강 유역의 도시 게르릿트의 근교, 알토 자이덴베르크 (Alt Seidenberg)에서 태어난다. 여기는 현재, 폴란드스리크후 (Sulikow)의 일부가 되어 있다 (자이덴베르크 자체도 폴란드령이 되어 있어, 폴란드어명은 자비두후Zawidow).

구두 직공으로서의 수양을 끝낸 뵈메는 1599년 이후 게르릿트로 구두 직공으로서 일해, 가정을 마련한다. 자기의 신비 체험을 엮은 '아우로라'에 의해서 한 번은 이단으로서 비난 당해 휴필하지만, 그 후 저술을 재개한다.

뵈메가 저술을 시작했던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1612년 최초의 저작 '아우로라'가 완성된다. 뵈메는 후에 서간 중에서, 이 저술의 근저에 그 이전의 신비 체험이 있어, '12년의 사이 그것 (= 신비 체험)에 관련되었다' (아브라함 폰 존마페르트 충서간, 포이 켈트족판 팩시밀리 전집 제10권 수록)라고 말한다. 정규의 철학 교육 뿐만 아니라 고등 학교에서의 중등 교육도 받지 않은 구두 직공에게 이 작업이 곤란을 다한 것은 용이하게 상상된다. 뵈메 자신도 또, 이 최초의 저작이 문체와 내용의 양쪽 모두에 건너 난해한 것을 인정하고 있는 만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저작에는 뵈메의 근본적 사상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넓게 인정되고 있다. 뵈메는 상게의 서간에 대해 '아우로라'에 대해 '1권보다 많은 서적, 하나 이상의 철학이, 게다가 항상보다 깊게 할 수 있어 만들어진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하 같은 서간에 따르면서, '아우로라' 이후의 뵈메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

뵈메는 초 당신의 체험의 각서로서 '아우로라'를 저술해, 공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친구에게 청해져 그 손원고를 대출할 때에, 이것을 필경하는 것도 나오기 시작해 '아우로라'는 뵈메의 교우 범위를 넘고, 게르릿트 시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신비 체험이라는 개인적인 환시와 소박한 기독교 신앙의 합치로부터 태어난 자연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 저술은, 그러나 당시 게르릿트의 감독 목사인 그레고르 리히타에는 루터파 정통 교의를 띠어나 빌려주는 것으로서 인식되었다. 리히타는 설교단상으로부터 뵈메를 이단 사상의 소유자로서 비난해, 이에 호응하는 시민은 공공연하게 뵈메의 집에 공격을 하는 등, 뵈메의 평온인 생활은 위협해졌다. 이 결과, 뵈메가 저술을 이후 하지 않는 것, 리히타는 교회에서 뵈메를 비난하는 것을 그만둔다라는 타협이 시의 당국의 중재에 의해서 정해져, 뵈메는 저술을 가까이 두게 되었다.

한 편으로 뵈메의 '아우로라'를 호의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일정수 존재했다. 그 중에는 귀족계급의 독서인도 있어, 뵈메의 정신적 지원자가 될 뿐만 아니라, 뵈메에 연금술 등 당시의 신플라톤주의적 자연철학 사상을 매개하는 것과 동시에, 독서의 기회를 주었다. 뵈메의 저작에 산견하는 라틴어는 이러한 친구들로부터 뵈메가 배운 것이 대부분이지만, 파라케르스스의 저술에 대해서는, 이를 직접 읽었다고 뵈메는 증언하고 있어, 연금술 용어를 '시그나트라 레이룸'·'커다란 신비'를 시작으로 하는 후의 저작으로는 많이 이용하고 있다. 또 이 독서는 뵈메에 늦은 연령에 이르러이지만, 자기의 저술을 반성해 말을 가다듬는 도움이 되었다.

뵈메는 화해의 협약을 지켜 새로운 저술을 실시하지 않았지만, 그 후도 리히타는 교회에서의 공격을 그만두지 않고, 시민을 선동하고 뵈메를 괴롭혔다. 또 친구들도 뵈메에 '아우로라'에 계속 되는 저작을 소망했다. 뵈메는 스스로의 침묵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 일을 알 뿐만이 아니고, 이 기간에 숙성하며 간 자기의 사상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확신함에 도달한다. 1618년 뵈메는 저술을 재개해, 1624년의 죽음으로 도달할 때까지의 6년 간에 '시그나트라 레이룸'을 시작으로 하는 몇 개의 대저, 및 부수하는 소논문, 신봉자 앞의 서간 등에서, 정력적으로 그 사상을 이야기한다.

몇 개의 소론을 모으고 출판을 권하는 것이 있어 1623년에 '그리스도에게의 길'을 출판한다. 이 저작은 '아우로라' 같이, 격렬한 논의와 적의의 목표가 되어, 뵈메는 그 대응에 쫓겨 본격적인 저술을 할 틈을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게르릿트에 가족을 남겨 혼자 퇴거해, 드레스덴에 일시 체재하게 된다. 당분간 드레스덴에 체재한 후, 게르릿트로 돌아온 뵈메는 병을 얻어 죽었다.
사상[편집]

뵈메는 생애, 자신의 자각으로서는 루터파의 신앙에 충실했다. 뵈메의 사상의 제일의 배경으로서는 뵈메가 교회를 통해 받은 종교 교육을 들 수 있다. 자주 자연철학으로서 해석되는 그 사상도, 뵈메의 의도로서는 만년의 저작의 제목이 나타내 보이듯이 '그리스도에게의 길'로서 이야기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상은 뵈메가 정규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기독교형이상학의 신개념을 매우 내고 있다.

뵈메 연구자인 굴른 스키는 저술 재개 후 1618년부터 1624년까지의 뵈메의 사상의 전개를 4기로 나누어 각각을 물결의 내습에 비유하고 있다. 그 중 제4의 물결, 뵈메의 최만년은 '아우로라' 발표 시와 닮은 것 같은 소동의 와중에 있어, 그 때문에 뵈메는 서간이나 자신에게의 논란을 반박하는 소론의 저술에 쫓겨 자기의 사상의 전모를 말할 수 있는 양의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뵈메의 사상의 전개는 그 이전의 3개의 물결, 한 층 더 최초의 제술 '아우로라'를 중심으로 말해진다.

굴른 스키에 의하면, 제1파는 저술 재개로부터 1622년까지의 시기로, 이 시기의 가장 갖추어진 책은 '세 개의 제원리에 대해' (Von den drei Prinzipien)이다. 계속 되는 제2파는 1621년 일찍부터 1622년 여름까지이며, '시그나트라 레이룸' 집필의 시기에 해당된다. 덧붙여 제3파는 1622년 가을부터 1623년 가을까지 맞아, 여기에는 뵈메 최대의 저작 '커다란 신비'를 포함한 제저작이 포함된다.

뵈메는 자기의 사상의 연속성에 강한 확신을 안고 있었다. 먼저 접한 서간에서도, '아우로라'의 저술의 난해 마을 미성숙을 반성하는 한편으로, 거기에 기술된 내용은 '아우로라'이전의 신비 체험의 몇 초 가운데 기다린 나무 방법으로 주어지고 있어 그것을 개진하기 위해서 필요한 언어가 부족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의 사이에서는, 이 일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아우로라'·'시그나트라 레이룸'·'커다란 신비'를 각각 정점이 이루는 사상의 영동을 뵈메 가운데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의 현현[편집]

뵈메가 본 비전은 만물의 신적인 실상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었다. 뵈메는 모든 존재 안에 신의 드라마를 보고, 우리 인간 모든 것은 신의 기쁨의 조사를 연주하는 악기의 현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해 버리면 그것은 단순한 범신론이 된다. 그러나 뵈메의 범신론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상태를 말로 표현함에 있어서 비전을 어떻게든 파악하려고 특수한 용어를 구사해, 신의 현상을 다이나믹하게 묘사하려는 그의 사상은 복잡 난해한 것이다. 그 기술은 신의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의 안쪽의 안쪽, 삼위일체의 신의 근원을 뵈메는 무저라고 부른다. 무저는 바닥없는 것, 다른 무언가에 따라서 근거가 되는 것이 없고, 또 바닥이 없어 무엇인가를 근거 지을 것도 없다.

이 어디까지 가도 아무것도 없는 무안에는 다른 '어느 것'을 요구하는 동경이 있다고 한다. 다만, 동경은 무한하게 퍼지고 있어 중심도 없으면 형태도 없다. 동경의 바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눈이 아닌 눈, 거울이 아닌 거울이다. 동경으로부터 밖을 향하고 있어 후도 하는 운동을 의지라고 하지만, 이 의지가 무저 중으로 향해 수렴해, 자기 자신인 무를 잡을 때, 무저 가운데 희미한 바닥이 생겨 여기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의지는 본질의 구동력이며, 어떠한 본질도 의지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의지는 바닥에 서는 것으로 밖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바닥이 생기는 것에 의해서 무저가 무저가 되어, 눈이 눈이 되어, 거울이 거울이 된다. 어느 것이 어느 것으로서 인식되기 위해서는 구별이 필요하다. 뵈메에 의하면 신으로조차 자기를 인식하려면 신 이외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중심과 원주가 명확이 되는 것에 의해서 지혜의 거울로 불리는 것이 생긴다. 거울은 정신 (게스트)을 받아들여 모든 것을 비추지만, 그 자체는 무엇인가를 낳을리가 없는 수동적인 것이다. 지혜의 거울은 별명 소피아라고 한다. 소피아는 '받아 들이지만 낳지 않는다'라는 처녀의 성질을 가지는 무이다. 무라는 것은 소피아가 존재로부터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소피아를 보려고 의지는 거울을 들여다 봐 넣어, 거울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 의지는 욕망을 부흥, 이마기나치오 (상상)한다. 이마기나치오에 의해서 의지는 품어, 정신으로서의 신과 피조물의 원형이 거울에 대해 직관되는 것이다.
영원의 자연[편집]

지금부터 신의 욕구가 밖으로 향하는 것으로 세계가 형성되지만, 이후 직접 우리가 보는 자연이 창조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에 뵈메가 말하는 것은 가시적 자연의 근원인 영원의 자연이다. 그는 일곱 살(7개의 성질)의 영혼 혹은 성질에 의해서 만물이 형성된다고 한다. 성질 (Qual)은 근심 (Qual)이며 원천 (Quelle)이다. 이는 단순한 말 조합이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지금부터 말하듯이 뵈메에게 말이나 울림은 존재의 본질과 깊게 관련된 것이다. 내용으로부터 하면, 존재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누어지고 성질을 가지는 것은 시원의 융합으로부터의 괴리로서 근심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선 제1의 성질, 그것은 욕망이며, 안쪽에 틀어박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차분함, 딱딱함이라고도 표현되는 욕망은 자기 자신을 질질 끌어 들여, 농축해 어둠이 된다. 이미 무저 중에서 일하고 있던 이 원리는 자연의 제1의 원리이다.

제2의 성질은 제1의 것과 반대로 밖으로 향하는 운동, 유동성. 이것은 찔러 날뛰어 틀어박히는 힘에 저항해 상승, 도주하려고 한다. 이 성질은 '아우로라'에서는 달콤함으로 불려 외로는 씁쓸함으로 불린다.

제3은 위의 두 개의 힘의 경쟁인 불안. 안으로 향하는 힘과 밖으로 향하는 힘은 서로 반발 시합, 한 편이 강해지면 한 편도 강해지므로 안정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상반되는 면이 서로 운동하는 차바퀴의 회전같기도 하다. 불안의 고리의 회전은 한없이 에센치아 (존재물, 본성)를 낳는다. 이상의 세 개의 원리는 제1원리, 만물의 질료의 근원이다.

그런데, 제4성질은 열이나 불꽃으로 불리고 어둠을 다 굽고 빛을 일으키게 한다. 이 원리에 의해서 전의 제일 원리의 3성질, 어두운 불이 밝은 불로 바꾸어 죽음의 집으로부터 생명이 나타난다. 불안의 고리의 잔혹한 회전이 결과적으로 불의 날카로움, 그리고 훌륭한 생명을 낳는다.

제5의 성질은 빛이며, 열로부터 나온 것이면서도 다 굽는 파괴적인 열과는 반대로 부드럽고, 상냥하다. 이 성질은 기쁨과 은혜의 원리이며, 여기로부터 오감 (시각, 촉각, 청각, 미각, 후각)이 탄생한다. 사랑에 안겨 여기서 통일된 다양한 힘은 다시 밖으로 향해 퍼져 간다.

이 퍼져, 즉 제6의 성질은 울림, 소리, 그리고 말이다. 안에 있던 것이 이 성질에 의해서 밖에 현악어든지, 말해지는 것이다. 울림은 인식을 가능하게 해, 자연의 리를 분명히 해 앎과 관계한다. 정신은 여기까지 세분화하면서 전개해 온 것이지만, 리에 이르러 스스로의 전개를 충분히 인식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7성질에 대해 지금까지 전개해 온 것에 형태가 주어진다. 이와 같이 뵈메에게의 세계의 창조란, 신이 단번에 제작하는 것은 아니고, 신의 상상의 기능이 자기를 전개해 가는 것이다. 그 때 부정적인 요소가 큰 역할을 이루어 있는데 주목해야 한다. 세계가 생생하게 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장해가 불가결하다.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 헤겔은 뵈메를 '독일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렀다. 대립하는 힘의 기능 중에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해 간다는 그의 철학은 뵈메 중에 그 원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헤겔은 뵈메의 '혼란한 독일어'에는 벽역하고 있었다. 이 항으로는 개략을 봐 왔지만 실제로는 뵈메의 사상은 한층 더 복잡하고, 연금술의 특수한 용어나 기호와의 대응이 있어, 말의 사용법은 통상의 것과는 크게 떨어져 있다. 세계 중에 달콤함이나 씁쓸함이 일하고 있다고 말해져도, 보통 인간은 기묘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가 신비학에 물든 '무학인 구두 직공'이라고 비난해진다고 해도, 그 난해한 문장을 생각하면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타락과 구제[편집]

그런데 현실의 세계를 바라볼 때, 거기에는 악이 넘치고 있다. 뵈메는 이 악의 기원에 대해서도 말한다. 전통적인 신학 상의 문제로서 완전한 선인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왜 세계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있다. 뵈메의 신관으로는, 신은 순수한 선인 것은 아니고,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직접 이 세상의 악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시적 자연의 창조 이전에 창조된 천사의 세계에 악의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는 분노의 어두운 불과 사랑의 밝은 불을 정신의 원리로 하는 것으로서 창조되었다. 분노를 사랑에 따르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지만, 자유로운 의지에서는 역도 가능하다. 그리고 천사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천사의 하나, 루시퍼는 자유를 마이너스 방향을 향해서 이용했다.

제1성질과 제2성질에는 악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루시퍼는 이 두 개의 성질에 대해 스스로가 신타등응으로 하는 이마기나치오를 향했던 것이다. 루시퍼의 신에의 반역은 마이너스의 창조로서 자유의 에너지를 역류시켜, 어둠의 거울을 만들어 낸다. 어둠의 거울은 소피아의 거울과 달라 다양한 허상을 비춘다. 이것이 공상이다. 루시퍼는 어둠의 거울을 들여다 봐 넣고 공상에 놀아나 더욱 더 에고를 비대화 시킨다. 이렇게 해서 천사의 나라는 분노의 어두운 불이 불타는 지옥과 밝은 빛의 천국에 분열해 버린다.

그러나 신은 세계의 혼란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루시퍼의 어둠의 창조에 대해서 다시 빛의 창조가 발동한다. 창세기 제1장에서 신이 '빛이 있으라'라고 한 곳이 이 창조이다. 여기서 시간과 공간, 가시적 자연, 그리고 인간이 창조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신이 자기를 실현해 온 마지막 도달점이며, 그 중에는 모든 것이 찾아내지고 천사에도 우수한다는 확실히 지고의 존재이다. 당초의 아담은 남자와 여자의 양쪽 모두의 성질을 겸비하는 완전한 통일체였다. 하지만, 아담도 이윽고 타락한다. 신으로부터 사랑받아 스스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훌륭한 아담을 악마는 손에 넣고 싶었다. 악마는 아담을 유혹해, 불완전한 다의 세계에 아담의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 타락에 의해 아담 안의 여성의 부분인 아가씨 소피아는 하늘에 돌아가 버렸다. 그와 함께 아담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던 우주는 통일을 잃어 복잡한 다의 세계화한다. 아담은 고독이 되어, 신은 그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운 여성, 에바를 창조했다. 그러나 에바는 소피아의 완전한 대리는 될 수 없다. 아담은 에바 안에 소피아를 요구하고 남녀는 이렇게 끌리게 되지만, 성에 의해서 괴로움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은 루시퍼의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 루시퍼가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신에 반역한 것에 비해, 아담은 부추겨지고 함정에 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시간 안의 존재이다. 시간에는 대립하는 것을 조정하는 기능이 있으므로, 인간의 죄는 용서될 가능성이 있다. 그에 비해 루시퍼는 영원의 존재이기 때문에, 죄가 속죄해질 수 없다. 신은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낸다. 그리스도는 에바의 소피아화인 처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으므로, 아담이 상실한 남성-여성의 양극성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제2의 아담이다. 그리스도는 타락의 원래의 원인인 자유 의지를 방폐해, 완전한 수동성의 아래에서 십자가에 걸쳐진다. 이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에 모방하는 것으로 우리는 구해진다고 뵈메는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져, 나아가 박해나 조소를 만나 살해당하는 (장작이 되는) 일로, 불도 다 구울 수 없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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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뵈메
저서의 번역
'아우로라 동이 트기 시작하는 동천의 다홍색' 소노다탄 역, 소분사 (독일 신비주의 총서) 2000년 2월
'뵈메 소론집' 소노다탄, 오카무라 야스오, 마츠야마 야스시 국역, 소분사 (독일 신비주의 총서) 1994년 4월
'그리스도에게의 길' 후쿠시마 마사히코 역, 송뇌사 1991년 7월
'야곱 뵈메' 난바라 미노루 역 쿄우분관 (기독교 신비주의 저작집), 1989년전기 연구
난바라 미노루 '야곱 뵈메 열어 가는 차원' 목신사 1976년
신판 '야곱 뵈메 열어 가는 차원' 철학 서점 1991년
개정판 '극성과 초월 야곱 뵈메에 의한 연금술적 고찰' 신사색사 2007년
오카베 유조 '야곱 뵈메와 신지학의 전개' 이와나미 서점 2010년
노다또 남편 '르네상스의 사상가들' 이와나미 신서 초판 1963년

2021/06/05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epub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홍지수 (옮긴이),오강남 (해제)김영사2017-04-10 원제 :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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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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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424쪽, 약 34.1만자, 약 7.6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샤인
ISBN : 978893497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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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의 명저다.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목차
1장 종교의 진화 | 2장 초자연적 감시자 | 3장 위로부터의 압력 | 4장 우리는 거대한 신을 믿는다 | 5장 자유사상가는 무임승차자 | 6장 진정한 신도 | 7장 거대 집단에 필요한 거대한 신 | 8장 협력과 경쟁을 부추기는 신들 | 9장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 10장 신 없는 협력 | 해제_거대한 신, 그리고 그 너머 | 주석 | 참고문헌 | 색인

책속에서
P. 53 인간과 유사한 초자연적 존재들이 인간을 감시하고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고 인간의 행동을 보상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 훨씬 설득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이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청탁도 들어주는, 자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인격화된’ 신을 원한다. 추상적이고 인간사에 무심한 신보다 인격화된 신에게 훨씬 열렬한 추종자들이 몰리는 현상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접기
P. 137 친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세속적 경로가 또 하나 있다. 협력과 높은 수준의 신뢰를 촉진하는 효과적인 제도와 기관들이다. 이런 제도와 기관이 갖추어진 세속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이라면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종교에 의해 직접적으로 동기 유발되지 않는 무신론자도 친사회성을 보일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공적 영역을 관장하는 강력한 제도가 존재하면, 즉, 계약이 이행되고 경쟁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부정행위자는 처벌받는다는 믿음이 있으면,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공히 높은 수준의 신뢰와 협력의 태도를 보인다.  접기
P. 182~183 이런 터무니없이 과도한 행위들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주로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고, 이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예를 들어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남성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거세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로마제국 초기에는 키벨레 종교가 부활해 문화적으로 확산되었다. 신심을 공개적인 행동으로 과시해 보이면 키벨레를 숭배하는 다른 신도들에게 믿을 만하다는 신호를 보낼 뿐만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포교하는 수단도 된다는 뜻이다. 즉, 문화적으로 키벨레 종교를 비신도들에게 전파하는 수단이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행태가 나타났다. 그들은 기꺼이 순교를 택하여 문화적인 귀감이 되었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믿음이 문화적으로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접기
P. 296 종교적 관행과 의식을 통해 공고해지고 사회적 결속력은 공동체를 응집시키지만 동시에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부인인지 구분하게 만든다. 흔히 강한 사회적 결속력이 본질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결속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친사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도 많다. 하지만 강력한 사회적 결속력 이면에 존재하는 추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배타심이 생기고,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폭력적 반감을 표출한다. 이런 현상을 ‘집단 간 폭력에 대한 사회적 결속력 가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접기
P. 309 죽음을 상기시키면 사람들은 자기가 지닌 문화적 신념에 방어적으로 매달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비롯해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편협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실존적 위협이 팽배한 경우더라도 호전주의가 평화주의로 전환될 가능성은 있다. 이란의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죽음을 상기시키자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한다는 사례가 증가했다. 하지만 자비심을 강조하는 이슬람 가치들(“알라는 선행하는 자를 사랑하시니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라”)을 상기시키자, 죽음을 떠올려도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하는 수가 줄어들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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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아라 노렌자얀 (Ara Norenzay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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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성에 대해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연구에 CNN, BBC 등의 방송과 <뉴욕타임스 매거진> <이코노미스트> <슈피겔> <내셔널포스트> <뉴사이언티스트> 등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였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자랐으며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총 5종 (모두보기)
홍지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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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하버드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KBS 앵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정부의 정보통신부 차장, 리인터내셔널 무역투자연구원 이사로 일했다. 옮긴책으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미국의 봉쇄전략》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트럼프 위치 헌트》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가 있다.
최근작 :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 총 65종 (모두보기)
오강남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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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더보기
최근작 : <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 총 6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 뇌과학자 김대식, 종교학자 오강남,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 긍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추천! ★

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 명저.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흥미진진한 지적 탐구.

출판사 리뷰

인간과 사회 그리고 신의 관계에 대한
심오하고 독창적인 지적 탐구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생활을 하던 인류는 어떻게 거대한 집단을 만들고 오랜 기간 집단을 확장하거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친족이라는 친밀함의 경계를 넘어 낯모르는 사람들까지 거대 집단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어둘 수 있었던 구심점은 무엇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결속 아래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사회화의 기원을 묻는 이런 물음은 역사가 시작한 시점부터 있어왔고, 무수히 많은 종교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이 그 답을 찾아 수많은 시간을 바쳤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Big Gods》의 저자 아라 노렌자얀도 그중 한 사람이다. 레바논 출신으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그는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을 결속하는 힘이 무엇이며, 그 힘은 우리를 어떻게 협력하게 만들었는지 연구했고, 종교의 관점에서 그 답을 제시한다. 신앙의 대상이기만 했던 종교가 인간의 사회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거대한 집단에 거대한 종교가 필요했고, 거대 종교의 성장을 위해 거대한 사회가 필요했던 공생 관계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본다. 더불어 저자는 종교가 거대 사회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여덟 가지 믿음을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여덟 가지 믿음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급진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정연한 주장과 실험을 통한 탄탄한 연구가 뒷받침되었고, 영장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프란스 드 발도 “아라 노렌자얀은 방대한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절실하게 필요했던 논리정연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추천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과 종교의 미래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신에게 물을 것인가, 우리에게 물을 것인가”

젊은 석학 아라 노렌자얀의 학문이 집대성된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종교를 넘어 심리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종교의 탄생과 발달, 사회의 기원에 대해 밀도 있게 보여준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성격과 역할,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제도와 문화가 공정하고 선진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하는 한편, 21세기 미래의 종교 현실과 역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묻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사회제도의 발달과 공정한 세속적 권위의 강화로 변모하는 종교의 역할이다. 저자는 10장에서 2007년 코펜하겐에서 겪은 자전거 서비스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그리스도교가 전통을 이어온 서구 사회에서 점차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심지어 “정부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이 서로 상쇄하는 관계로 보인다는 점에서”(321쪽) 유럽의 무신론 확산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이런 세속적 제도는 종교를 대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제도가 잘 갖추어진 것에 비해 종교적 파급력이 강한 나라, 국민 대다수가 종교가 있다고 말하는 나라, 저자가 사회적인 긴장도(여러 가지 상황에 적용되는 엄격한 사회적 규범들을 갖추고 있는가?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은 어느 정도나 허용되고, 이런 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는가의 여부)가 상당히 높다고(259쪽) 연구를 통해 밝힌 한국의 독자들이 특히 눈여겨보며 우리 사회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거대한 신들,
그들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이 책을 관통하는 초자연적 감시에 대한 여덟 가지 믿음이 있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 여덟 가지 믿음은 종교가 거대한 사회를 만드는 데 되었다. 이제, 이 여덟 가지 주장을 찬찬히 짚어보자.

인간은 초자연적 감시자가 있다고 상정하고, 그 감시자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볼 줄 알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고 의인화한다. 감시자는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감시하고 있다. 이런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생각은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이런 신들을 두려워한 신앙인들은 전지적 능력이 없는 신들이나 인간의 도덕성에 무관심한 신들을 믿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구성원들과 서로 협력하고 신뢰하고 희생을 감수”(22쪽)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정신-육체 이원론’과 ‘목적론적 직관’을 가지고, 이것을 통해 막강하고 거대한 신이 인간을 감시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는 신격체-하늘의 감시자-가 있으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사람들”(48쪽)은 서로 협력하게 된다.
두 번째 믿음은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이다. 저자는 ‘일요일 효과’를 그 예로 든다.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는 자선이나 봉사 등 종교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일요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비신앙인들의 반응과 그리스도교도들의 반응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74쪽)는 것을 일요일 효과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24시간 내내 종교적일 수는 없으며, 종교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친사회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믿음은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이다. 저자는 신의 성정에 관한 평가실험을 통해 “신이 무자비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이 자비롭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부정행위를 할 가능성이 훨씬 낮”(86쪽)다는 것을 입증했다. 초자연적 존재에게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신의 자비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직접적이고 이는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신은 정반대 효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리를 저지르고 부추기는 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87쪽) 이는 천국보다 지옥을 믿는 비율이 높은 나라의 범죄율이 낮다는 아짐 샤리프와 마이크 렘툴라의 실험 결과에서도 입증되었다.
네 번째 믿음은 마 타리니Maa Tarini 여신을 믿는 인도 버스 운전기사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이다. 자신의 귀중품을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길 때 ‘신성한 유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니 무신론자보다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협력을 촉진하는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는 사람이라면 협력의 상대로 신뢰할 수 있”(123쪽)다. 9?11 이후에도 미국인들은 무슬림보다 무신론자에게 더 큰 반감을 가졌으며,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은 불신에서 비롯된 반면,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현오감에서 비롯”(149쪽)되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행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과도한 종교적 행위는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는 믿음으로 설명된다. 독실한 신자들이 이런 자학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거세나 장기간의 금식, 특정 음식 섭취 등 “거짓으로 꾸미기 어려운 행위를 함으로써 종교집단에게 신심을 증명해 보이는 효과가 있”(182쪽)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과도한 행위를 통해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종교적 믿음은 거짓으로 꾸미기 쉽기 때문에,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합리적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비용의 종교적 행위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진화”(188쪽)해온 것이다.
어린이에게 도덕적 심판을 하는 산타클로스는 왜 거대한 신이 될 수 없는가?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열렬한 추종자들이 독실하게 그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회적 증거가 없으면 그 신은 사람들을 개종하게 만들 힘을 발휘하지 못”(205쪽)하고 지리멸렬한다. 그래서 초자연적 감시자로 도덕성에 관심이 많은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의 신화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문화적 진화라는 막강한 힘이 작용하여 문화적 생존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종교집단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저자가 주장하는 초자연적 감시의 일곱 번째 믿음을 보자.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지구상 최후의 수렵채집 집단이라 불리는 ‘하드자Hadza'(탄자니아 북부에 거주)는 거대한 신을 섬기지 않는다. “교회도, 목사도, 지도자도, 종교적 수호자도 없고, 신의 형상이나 이미지, 조직화된 모임, 종교적 도덕성, 내세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도 없다.”(226쪽) 그들은 어느 정도 한계를 초월하는 영령이나 신을 섬겼지만, 오늘날의 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런 수렵채집인들이 거대한 신 없이도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사회는 도덕적 심판을 하는 전지전능한 초자연적 주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역사회의 결속력을 구축할 수 있었”(230쪽)기 때문이다.
마지막 종교적 믿음은 종교 간 경쟁에 관한 것이다. 거대한 집단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게 되었을 때 어떤 집단들이 더 우세하게 될까? “집단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거대한 신과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관행들로 무장한 친사회적 종교집단은 경쟁 집단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된다.”(262~263쪽) 바로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전적 진화의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문화적 진화로만 설명할 수 있다. 친사회적 종교집단의 생존을 위해 개종과 출산율의 증가를 통해 집단의 규모를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종교가 지닌 이점, 즉 출산율을 높인다는 이점은 협력을 촉진한다는 이점과 더불어 문화적 진화의 과정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280쪽)

우리가 잘 아는 이슬람교, 개신교뿐만 아니라 모르몬교나 오순절주의는 그 세력을 빠르게 확장한 반면 어떤 종파는 왜 그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동성애자보다, 왜 무신론자가 신앙인 사회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이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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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이다. 
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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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본문중에서 폐경을 완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자의적으로 만든 말이죠. 번역자의 태도로 옳지 않습니다. 공사구분을 해야죠. 
maitri 2017-09-12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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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용감한 책을 썼을까.. 레바논에서 20년동안 종교전쟁을 목격한 사람의 말이라면 이해가 될까.. 종교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썼다. 
삐약삐약 2019-01-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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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인류는 대부분의 세월을 가까운 혈연관계인 구성원들끼리 비교적 소규모 집단을 형성해 채집과 수렵 활동을 하며 서로 직접 대면하면서 관계를 유지했고, 이따금 낯선 이들과 제한적으로 교류를 했다." 대규모 공동체 생활, 낯선 타인과 협력과 거래를 시작한 시기는 불과 만이천 년 전으로, 농업 혁명이 시작된 시기다. (P.14) 그와 더불어 이른바 '거대한 신들'(big gods)에 대한 숭배가 퍼졌다.





거대한 신들은 '초자연적 감시자'다. 자연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지며, 상과 벌을 내리는 존재다.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믿음이 확산된 원인은 무엇일까. 거대한 신은 인류의 성장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가. 신앙의 토대는 무엇이고, 친사회적 성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가 다루는 질문들이다.





저자 아라 노렌자얀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특히 종교와 관련된 심리, 문화, 인류학적 연구로 CNN, BBC 등 유수의 언론에 연구 성과가 소개되었다. 저자의 주장은 여덟 가지로 요약된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다.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한 집단에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언뜻 당연하고 식상해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위의 주장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어떻게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대규모 집단생활에는 익명성이 따른다.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 다른 집단과 교역하기 위해선 중요한 거래비용이 있다. 바로 상호 신뢰다. 남을 믿을 수 있어야 생활할 수 있다. 신뢰는 중요한 무형의 사회적 자본으로, 경제적 거래 형성에도 필수 기반이 된다. 신뢰가 없는 사회는 탐색 등을 위해 막대한 거래비용이 소요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사회 체제가 고도화되지 못한 만이천 년 전 농업 혁명 당시에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바로 거대한 신들이다.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신앙으로 상대방의 도덕성을 담보했다. 사회 규모가 커질수록 신은 거대하고 전지전능해졌다.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도덕적 상벌을 내린다. 물론 소규모 채집 생활에도 신앙은 있었다. 자연 친화적이고 인간 생활에 덜 간섭했다. 무엇보다 권능을 부리는 범위도 한정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거대화될수록 신도 거대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 터키 동남부 괴베클리 테베는 돌 하나의 무게가 7에서 10톤에 이르는 장대한 종교 건축물이다. 그러나 신전 주변과 건축 당시에 농경 사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과연 수렵 채집인들은 왜 웅장한 신전을 세웠을까. 나아가 농업 혁명과 대규모 공동체 집단의 필요에 의해서 거대한 신들을 믿게 되었을까. 아니면 거대한 신들에 대한 믿음이 대규모 사회를 형성하게 하였을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다.





거대한 신은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하고 사회적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 '친사회적 종교'다. 현재도 다양한 심리 연구 결과, 종교 관련 상징을 제시할 경우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공정한 거래를 한다. 기독교 신자와 무신론자는 일상적으로 행동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기독교 신자는 종교적 상징물을 보거나 주일에 더욱 도덕적이고 관대해졌다.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가고, 종교의 효과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다. 무신론자 거부감이 절반을 넘는데, 이는 이슬람보다 높은 수치다.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불신이었다. 무신론자는 믿을 수 없어서 거부당했다. 순교, 엄격한 금기 준수, 심지어 힌두교의 카바디 등의 종교적 자학행위는 일종의 고비용 신호전달로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신앙은 인류의 대규모 집단화와 함께했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들은 종교적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신뢰가 높다. 이유는 고도화된 사회 체제와 제도 덕분이다. 제도와 법체계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공평한 사회일수록 비종교적이고 무신론자에게 관대하다. 구성원들이 신앙으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필요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대부분이 믿는 종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사회적 제도와 법체계가 고도화될수록 친사회적 종교에 대한 의존이 감소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일만여 개의 종교가 있고, 하루에도 두세 개의 신흥 종교가 발생한다는 추산이 집계된다. 저자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도 미래에 종교가 건재할 수 있는 이유로 높은 출산률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세계 독재 국가들의 사회적 신뢰도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전히 종교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인간의 직관적 사고 방식에는 친종교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종교를 설명한다. 어떻게 거대한 신들에 대한 신앙이 발전하였고, 초자연적 감시자가 사회적 신뢰 관계를 증진시켰던 사례와 연구 결과를 설명한다. 종교가 친사회성을 띄고 세계적으로 전파된 이유다. 반면에, 인류가 대규모 공동체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전쟁과 종교적 분쟁 또한 거대해졌다.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는 행위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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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10-25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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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감 새창으로 보기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 | 홍지수 (옮긴이) | 오강남 (해제) | 김영사

  2016-09-19

_원제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2013년)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1.

‘신’의 존재감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양식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 이백년 동안 지구상에서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이 수없이 반복됐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을 유지해왔고 여전히 독실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 오히려 종교는 빠른 속도로 그 수가 늘어나고 성장하고 변해왔다. 하루 평균 두세 개의 신흥종교가 생겨난다는 추산도 있다.

 

2.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1만 여개의 종교가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지만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는 극소수 몇 개의 종교를 믿는다. 즉 몇몇 종교들이 전 세계 신앙인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문화시장에서 살아남은 극소수 종교운동들을 계승한 문화적 후손들이다.

 

3.

이 책의 저자 아라 노렌자얀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저자의 연구에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고 있다.

 

4.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이다. 신이 감시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다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신뢰의 수준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이다.저자는 신앙인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비신앙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견해를 펼쳐나간다. 아울러 지난 1만 2천 년에 걸쳐 친사회적 종교와 대규모 협력 공동체가 출현하도록 만든 역사적 동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5.

그렇다면 종교가 규정한 도덕 공동체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종교는 성스러운 가치들을 전파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고질적인 갈등을 일으키는가? 어떤 경우에 종교적 친사회성이 집단 간 적개심과 폭력으로 변질되는가? 갈등을 해소하는 데 종교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가?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들이다. 이와 같은 의문들은 종교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저자는 이 부분들에 대해 나름대로 그의 생각을 표출한다.

 

6.

시간을 거슬러 9세기와 13세기 사이 – 지금으로부터 20세대에서 30세대 전 -의 중세 유럽으로 되돌아간다면,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제도나 관행과 수없이 마주치게 된다. 저자는 그 중에서 신성재판(神聖裁判, trial by ordeal)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중세 유럽 당시는 물론 유전자검사 기술도, 전화 통화기록도, 보안카메라도, 심지어 믿을 만한 증인의 증언도 없던 시절이었다. 판사들이 증거를 조사하고 범행 동기나 범행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는지를 밝혀낼 방법들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난해한 사건들을 만나면 판사들은 신성재판을 명령했다. “끓는 물을 담은 솥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기나 돌을 던져 놓고 피고에게 그 솥 안에 팔을 집어넣어 그것을 건져내라고 명령했다. 피고가 화상을 입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했고, 그렇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렸다. 알몸인 피고를 결박하여 수심이 깊은 성수에 던져 넣어 피고의 몸이 가라앉으면 유죄를 선고하고, 몸이 물에 뜨면 무죄 방면하는 방식도 있었다.”

 

7.

저자는 장거리 교역과 종교인들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장거리 교역은 대규모 협력을 연구하기에 안성맞춤인 사례라는 것이다. 교역에 관여하는 상인 공동체들은 익명성, 책임 소재 규명이 어려운 집단적 행동이라는 문제를 극복하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과 서로 다른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빼앗기거나 사기를 당해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값진 물건들을 주고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런 교역망을 유지하고 번성하게 하려면 높은 수준의 사회적 결속력을 담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17세기 초, 아르메니아 비단 상인들이 운영했던 교역조직망을 살펴본다. 이 교역망의 최고 전성기에는 암스테르담과 런던 같은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멀리 인도, 티베트와 필리핀 같은 극동지역까지 뻗어 있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아르메니아 국가에서 정치적 군사적 혜택을 받지 않고도 자신들의 교역활동을 뒷받침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 비결은 뭘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 상인의 친족들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얽힌 정교한 통신망 및 사회적 감시망에 의존했다. 여기에 신뢰심이 추가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도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종교적 공동체들 내에서 상거래 계약이 자율적으로 이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일한 이유는 물론 아니지만)한 가지 강력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지 여부를 모두 알고 있고 늘 인간을 감시하며, 보상과 처벌을 내리는 신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8.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언급되는 (초자연적 감시에 대한) 여덟 가지 믿음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다.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한 집단에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9.

세속적 사회의 문화적 수명과 종교의 문화적 수명을 비교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일부 지역에서 세속화를 추진하는 막강한 힘들이 작용하면서 세속화가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경제적으로 더욱 풍요롭고, 실존적 안정이 확보되고, 세속적으로 막강한 제도들이 구축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과 과학과 분석적 사고에 노출되고 있다. “친사회적 종교는 세속적 제도들에 비해 한 가지 결정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다. 신앙인들의 높은 출산율이라는 횡재이다.” 종교가 지닌 이런 우위는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 약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가장 세속화된 사회들이 출산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친사회적 종교집단들이 세속화 세력에 맞서기에 불리한 여러 약점들을 출산율에서 만회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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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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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어떻게 생겨났고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나?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새창으로 보기

 알고 있는지? 종교에도 수명이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에 따르면 19세기에 종교적, 세속적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 공동체가 무려 200개나 만들어졌는데, 그 평균 수명이 겨우 25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보면 종교의 생명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길고 질길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가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한 번은 해 봤을지도 모를 그 질문에 본격적으로 천착하여 한 권의 책까지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인 아라 노렌자얀이다. 그리고 그 책이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는 종교의 생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종교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종교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해 진화론, 인지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 방법을 통해 종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밝혀낸다.



 터키 동남부에는 '괴베클리 테페'라는 유적지가 하나 있다. 원래는 중세의 공동묘지로 알려져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게 밝혀졌다. 무려 11,5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고대 유적지인 스톤헨지보다 두 배는 더 오래된 신전이다.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신전이라는 말은 이 때 종교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전이 있었던 시기는 놀랍게도 신석기 시대였다. 지금까지 종교는 농경 사회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베'의 존재는 먼저 거대한(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 때문에 농경 사회도 출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인류가 무리에서 사회로 전이해 가는데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과연 종교의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책의 전반부는 바로 그 의문을 푸는데 할애된다. 최근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육식 동물에 비해 부족한 체력적인 한계를 무엇보다 상호 협력을 통해 생존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의 언어도, 윤리 감각도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보호도 알고보면 그런 협력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런 협력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협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뢰다. 종교는 바로 그 신뢰를 구축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령 먼 이국의 이방인일지라도 신을 믿고 있다면 신뢰할만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넘어 국가가 만들어지고, 먼 이국의 땅까지 교역이 이뤄져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신뢰는 어떻게 보증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노렌자얀이 거대한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에게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신의 초자연적 감시자로써의 속성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종교의 신에겐 결코 빠지지 않는 공통된 특성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신의 명령과 믿음을 져버리면 형벌을 받는다'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산타클로스조차 1년 동안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 지켜본다는 관념이 남아있을까? 종교의 신은 이렇게 초자연적 감시자와 기독교의 십계명과도 같이 신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형벌을 내리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구축되었다. 왜나하면 바로 이것이 상호 협력을 위한 신뢰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회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무역을 할 때, 언제나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따졌다. 신을 믿으면, 그 역시 초자연적 감시자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며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도덕적으로 행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설령 같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뤄졌다. 실제로 당시엔 서로 다른 신을 많이 믿었지만 이방인 사이에 교역이 이뤄지는 것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을 믿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바로 이슬람교 최대 성지 순례 행사인 '하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로 성지 순례하는 하지는 이슬람교도라면 꼭 지켜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해서 매년 수백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이나라 저나라에서 찾아든다. 한 마디로 이슬람교에서 가장 대규모로 이뤄지는 국제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처럼 온갖 국적과 파들이 모이는 행사에 모이는 교도들이 그렇지 않은 교도들보다 더 타인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여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폭넓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종교적 체험이 도덕의 테두리를 확장시킨'(p. 304)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재밌는 예 하나를 들자면, 9. 11 이후 미국에서 무신론자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졌다는 게 조사로 입증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을 믿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자신의 아기들을 위한 보모를 고르기 위해 유타주에 주로 공고를 낸다고 한다. 거기는 몰몬교들이 많기에, 신을 믿는 그들이라면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신은 인류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호 협력을 위한 증진 방안 중의 하나로써 인위적으로 구축된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신이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신이 있어 인류가 좀 더 사회적이 되고 도덕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입증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빈도가 증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종교로 인한 많은 갈등을 보고 있다. IS는 코란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렌자얀은 그것이 전적으로 종교의 탓으로 볼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는 원래 이타주의적이 되도록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소속감이 필요했다. 그 소속감을 주기 위해선 종교 나름의 성스런 가치의 강조가 필수적이었는데, 현재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 대부분은 바로 이 성스런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여기게 되는 바람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렌자얀은 그런 종교들간의 타협불가능한 성스런 가치들 역시 마땅히 타협 가능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 본연의 의미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리하자면, 내게는 종교 본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 천 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참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필 주커면의 '신 없는 사회'를 읽은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이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가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신 없이도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아라 노렌자얀 역시 이 책에서 그런 나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민이 정부에 대해서 가지는 신뢰가 무척 크기 때문인데, 노렌자얀은 그것이 무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정부에 대한 믿음으로 전이된 것으로 설명한다. 필 주커면도 여기에 대해선 그다지 반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종교가 그냥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문화로 자리잡았기에(다시 말해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아비투스화 되어버렸기에) 가능해진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까. 이 책은 무신론의 유혹이 깊어지는 시대에 종교의 효용이 그렇게 없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종교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책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고 내부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도록 이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종교인으로 넘쳐나는 우리 나라가 이토록 살기가 어렵고 힘든 것은 우리가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지도 않고 서로 자신의 성스런 가치만 고집하고 때로는 그것을 탐욕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국정마저 한 이상한 종교인(과연 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때문에 파국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이제야말로 과연 종교라는 게 무엇인지 그 근본부터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렌자얀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종교의 본질은 상호 신뢰를 증진하여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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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로이 2016-10-2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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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탄생과 성장, 그 실체를 다양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잘 정리한 책 새창으로 보기
신과 종교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종교인들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면

바로 종교인들의 거센 공격이 빗발치기 십상인데 이 주제는 기본적으로 논쟁이 제대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신과 종교가 상당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종교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와

그 전파과정, 인간 사회에 있어 끼치는 영향까지 종교를 논리적으로 제대로 분석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통해서 신과 종교라는 허구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을 이미 경험했지만

이 책은 좀 더 사회학, 심리학적인 면에서 종교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먼저 신을 '인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존재, 존재의 근거 또는 만물의 총체로 신을 보는 일부 신학적인 교리들과는 달리,

신앙인들의 일상적인 생각 속에 존재하는 신은 마음을 지난 인간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사에 개입하는 막강하고 거대한 신이라는 개념이 인간 사회에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유형의 신들이 인간을 감시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믿음을 받아들인 사회들이

협력적인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적 감시는 낯선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어 초자연적 감시자가 출현하는 데 필요한 선행조건이 되었고 친사회적인 종교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도

협력이 가능하게 만들어 더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결국 거대한 신의 존재와 복잡한

사회집단의 형성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선 무신론자들에 대한 신앙인들의

편견에 대한 다양한 조사 결과와 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타 종교인들보다 무신론자에 대해

더 불신을 갖는 이유는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통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다는 말인데

현실에서 종교를 빌미로 이뤄지는 각종 범죄들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편견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한국 사회는 불신의 사회여서 무신론자에 대한 배타적인 편견이 적은 편이지만 종교 국가인

미국 등에선 무신론자가 동성애자보다도 더 불신의 대상이 된다니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해선 친사회적 규범을 창출하는 강력한 세속적 제도에 노출시키거나

그런 암시를 주는 방법, 무신론자가 많다는 사실을 노출시키거나 그런 암시를 주는 방법, 사회에서

종교적 성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아무래도 종교인들처럼 맹목적이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종교인들처럼 세력을 형성하거나 자기 표현을 강력하게 하지 않는 한 종교인들이 만들어내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긴 쉽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친사회적 종교집단은 집단생존율에서도 우위를 보이고 문화적 안정성도 가지고 있으며 종교인들은 출산율마저 높기 때문에 다른 집단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점이 많은데, 이런 종교의 위력은 결국 사회가 종교를 대체할 강력하고 세속적인 대안을

개발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정부와 사법기관 등 세속적 기관들이 충분히 신뢰를 받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면 결국 종교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종교가 어떻게 인류사회에 등장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지와

종교의 미래도 조심스럽게 엿볼 수 있었다. 종교가 분명 인간들의 결속을 이끌어내며 거대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이상적인 국가들로 생각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을

보면 더 이상 종교가 그리 필요한 것 같진 않다. 다만 종교가 무용한 세상이 되기 위해선 세속적인

사회가 충분히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면 종교가 여전히 기세를 떨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씁쓸한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종교가 없는 세상을 노래한 

존 레논의 'Imagine'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데 종교의 실체에 대해 다양한 연구결과를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서 이론적으로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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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6-10-23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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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은 제목만 얼핏 보면 "신의 존재 여부"를 과감히 논하거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유신론 vs 무신론"의 현황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런 추상적이고 어차피 똑떨어진 답이 나오기도 힘든 물음에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처럼 무익한 수고를 벌이는 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때로는 특징적 혹은 무작위로 뽑힌 집단을 두고 벌인 실험을 통해, 중립적이고 과학적 접근으로 "왜 신은 우리 인간의 관념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나"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않고는 차라리 부차적인 이슈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면(아주 어리석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 신은 속타서 죽을(?) 지경이겠지만 여튼 인간의 시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인간은 이런 번거롭고도 부자연스러운 개념을 만들어 내어 자신도 괴롭히고 안 믿겠다는 다른 동족까지 괴롭혔는지, 그 해답이 그런 이유에서라도 필요는 합니다.

일일이 인간사에 끼어들어 악당을 처단하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 냉정하고 초연하며 공감도 안 하면서 전지전능하기만 한 신, 따라서 그 가시적 흔적을 확인도 할 수 없는 저런 신을 왜 인간은 숭배하는지, 지극히 이기적이고 생존 본능에 충실하게 진화해 온 인간치고는 썩이나 안 어울리는 이런 선택("관념론적 신앙")을 왜 거창하게 해 온 건지,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하나 짚어 나갑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그저 과정의 기술에 그친다거나, 최종적인 해답은 독자가 스스로 내 보라며 무책임하게 발을 빼지도 않습니다. 그 나름 대담한 결론까지 낸다는 점에서 독자는 더욱 혹해서 읽어 갑니다. 그리고 제법 알찬 생각거리까지 건지거나, 더 나아가 저자들의 결론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논쟁적인 주제를 담았으면서도 흥미롭고, 논의의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하기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첫째 명제는 유신론/무신론 여부에 관계 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믿음 체계는, 일일이 마을의 원로나 실력자가 개개인의 뒤를 쫓아 다니며 도덕을 준수할 수고를 덜어 줍니다. 사회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1차 집단의 윤리가 다양한 개성과 선택을 규율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만, 일탈 분자의 질서 파괴 행위를 작건 크건 용인하면 공동체 전체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합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이 아니라 확신)시키고, 설령 현장에 감시하는 (사람의)눈길이 없다 해도 저 위에서 전지전능한 이가 지켜 보고 있다고 환기시키면, 그저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가 강력하다는 겁니다.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서는 우스운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역사 시대 초기 전체가 공존할 지혜가 필요한 단계에선 이게 꽤나 효율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효과를 크게 보았을 터입니다. 우리 종이 지금 이 정도로나 생존을 이어 왔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리는 것도 저런 어설픈 믿음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소수의 범죄자(어리석기까지 한)가 공동체 전체를 망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아닐까요?

종교의 효과가 개인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 쉽게 말해 이런 뜻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개인이 종교적(이라기보다 사회적) 의무를 잘 지킨다기보다, 그저그런 껄렁한 신자가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조성되었을 때 이런 의무를 더 확실히 지킨다는 겁니다. 즉 종교는 개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일일이 고쳐 먹게 한다기보다, 불특정 다수가 평균적으로 나쁜 마음을 덜 먹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건, 이런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이라기보다 차라리 친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 경우 다분히 실용적인 효용을 창출하며, 여기서 강조하는 도덕은, 결국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돕는 공리적 메커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시스템 한 구석에 고장이 났을 때 보수 없이도 자발적 봉사에 나서는 건 그게 동기가 종교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결국은 개인의 행동으로 사회가 건전한 질서로 복귀한다는 그 실용적 결과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바른 행동으로 사회의 질서가 잡히는 그 결과에 주목하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내내 구사하는 "친사회적"이란 용어는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천하고 가난하며 사악한 종자들에게 죽어서 지옥 간다는 협박도 못 하면 어떻게 교회가 유지되겠소?"라는 어느 성직자(...)의 말이 나옵니다. 여튼 이런 사후 세계에의 엄혹한, 혹은 한없이 희망적인 기제가 개념상으로 구축되면, 사람들의 행동은 아무 현세적 보상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친사회적(결과적으로는)"으로 재편됩니다. 처벌은 꼭 현세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며, 존재의 필멸성, 유한성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머리 속에 인식된 이들에게 "지옥의 위력"은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혹은, 현세의 처지에 큰 만족을 못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신(사실은 이를 빙자한 권력자의 야욕)의 미션을 수행하면 지복(至福)의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끼로 테러리스트의 길을 부추기는 집단(IS 등)도 있습니다. 샤리프와 렘툴라의 실험 보고서가 이를 직접 표명하지는 않아도, 어쩌면 이 역시 "친사회성 증대"의 범주로 판단하면 (테러리스트= 반인륜 이란 이유에서) 다시 타당성이 확인되는 셈입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경우에도(흑인이나 [미국에서는 소수파인] 가톨릭이나, 여성이나, 심지어는 모르몬, 동성애자보다 더) 나쁜 취급, 불신을 받는 게 흥미롭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어떤 기독교도는 "설사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파로 적대한다 해도, 그가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보다야 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같은 말을 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는 종교 관념이 희박한 동양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주장 같습니다. 한국이라면 오히려 무교라고 밝히는 이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인상도 주고, 기독교라 해도 자파에서 이단이라 점찍은 이들에게는 무교인(잠재적 고객)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 드는 예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코코넛을 운반하는 운전수들"입니다. 힌두의 신전까지 코코넛을 그 원산지로부터 옮겨 가야 하는데, 중간에 가로채거나 의무를 태만히하는 이도 없이, 일단 앞 "주자"로부터 바톤을 넘겨 받은 모든 운전수들이 착실히 이를 (아무 대가 없이) 운반핝다는 겁니다. 인도 사회가 정직하고 이들이 교육을 충분히 받아 명예를 지키는 까닭일까요? 전혀 아니겠죠. 그 비결은 오로지 "마 타리니 신이 무슨 응보를 내릴지 몰라서" 같은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신념은 경제 질서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핵심 팩터이기도 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예전에 사회를 선진 질서와 그렇지 못한 혼란으로 양분하는 원인으로 "트러스트"를 꼽은 적이 있죠. 이런 "신뢰"가 종교적(거의 미신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도, 이성적인 형량 과정을 거쳐 자발적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회 질서의 고도화 단게에 차별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등한 개인들의 예를 들며 "이런 문제도 하나 해결 못하는데 A의 효용이 대체 무엇이냐?"며 유치하고 미숙한 불평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자신의 예를 들며, 나 자신이 효과를 못 봤으니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며 일반화의 폭주 그 끝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가 있어도 이 모양인데 종교가 없으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관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신이 창조하여 완전무결한 인간이 오늘날 이지경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어디냐며 대견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훨씬 건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이 있고 없고, 어느 종교가 그르고 옳고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든 뭐든 어떤 제도와 신념의 도움을 빌려 인간이 얼마나 나은 삶(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을 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공리적 결과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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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6-10-25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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