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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1

중국 유학의 변천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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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sungguk815/70094646599


중국 유학의 변천
1. 중국 유학의 변천
시대 학풍 특징 / 대표적 학자
한 훈고학
유교 경전의 자구 해석에 치중하는 학풍
정현, 마융
당 훈고학 공영달- 오경정의
송 주자학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학풍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주희
명 양명학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주장
왕수인
청 고증학
경전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치중하는 학풍. 정치 현실 외면
고염무, 황종희, 염약거, 호위, 혜동, 대진, 왕명성, 전대흔
청말 공양학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 역사에 대한 진보적 해석
유봉록, 공자진, 강유위, 양계초
2. 선진 시대의 유학
선진( 先 秦 ) 시대의 유학을 한대 이후의 유학과 비교하여 원시 유가 사상( 原 始 儒 家 思 想 )이라고도 한다. 춘추 전국 시대의
유가 사상가로는 공자, 맹자, 순자 등을 들 수 있다.
① 공자(孔子):덕치주의, 명분론, 중용 사상
② 맹자(孟子):왕도 정치 사상, 민본주의, 혁명 사상, 성선설
③ 순자(荀子):예치, 성악설
3. 훈고학(訓考學)
유교 경전의 자구 해석(字句解釋)에 치중하는 학풍. 진 시황제 때의 분서 갱유(奔書坑儒) 이후 한대에 와서 선진 시대와 글
자체가 달라져 경전의 해석에 치중하게 되면서 발달하였다. 한 무제 이후 유교의 국교화로 원시 유가 사상은 많이 변질되
었다. 원시 유가 사상은 당시의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덕치와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으나, 한대의 유학은 전제화
된 황제 권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송학(宋學)의 싹은 당 중기에 불교를 배척하면서 유교 윤리를 강조했던 한유(韓愈)와 불교 교리를 흡수하여 유학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모색했던 이고( 李翶)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송학의 우주론적 이론 체계는 북송의 주돈이( 朱敦頤, 자
는 염계 濂溪, 1017~1073)에 의해 기초가 잡히고, 장재( 張載, 자는 횡거 橫渠, 1020~1077)․정호( 鄭顥, 자는 명도 明道,
1032~1058)․정이( 鄭頤, 자는 이천 伊川, 1033~1107)에 계승 발전되어 남송 시대의 주희( 朱憙, 자는 회암 晦庵, 1130~
1200)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주돈이는 태극도설( 太極道說) 에서 우주의 본체를 태극( 太極) 또는 무극( 無極)이라 하고, 그 동( 動)․정( 靜)에 의하여
음( 陰)․양( 陽)의 2기( 氣)가 생기며, 여기에서 5행( 行)의 5기( 氣)와 만물이 생긴다고 설명하였다. 장재는 기체( 氣體)와 유
사한 기(氣)의 집산(集散)에 의하여 만물이 형성․소멸된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적 우주론을 전개하였다. 송대의 우주론은
정호․정이 형제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발전하였다. 그들은 우주의 현상을 이루고 질서와 조화를 가져다주는 근본 원리를
인식하여 이를 리(理)라 불렀다. 그리고 리와 기의 상관(相關)으로 우주를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송학宋學)에 있어 우주론(宇宙論)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인성론(人性論)과 이에 결부된 수양론(修養論)이다. 특
히 정이는 수양법으로 대학( 大學) 에 나오는 치지( 致知)를 강조하였다. 이는 송학의 합리주의적 정신을 표한한 것이라
고 하겠다.
주희는 송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송학을 대성하였다. 그는 태극․무극을 리( 理)에, 음양․오행을 기( 氣)
에 해당시키고, 리( 理)를 ‘형이상( 形而上)의 도( 道)’, 기를 ‘형이하( 形而下)의 기( 器)’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인성론( 人性論)에 있어 그는 인간의 본성은 리( 理)를 타고난 선한 것으로 보고,
리를 닦아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기에 유래하는 본능적인 불손한 기질( 氣 質 )의 성( 性 )을 억제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수양 방법으로는 특히 성찰( 省察)과 독서( 讀書)를 통한 덕성( 德性)의 함양[존양( 存養) ]과 궁리( 窮理)를 중요시하
였다.
주희는 경전 연구에 있어서는 문헌학적 연구를 하였으며 4서( 四書) [논어( 論語), 맹자( 孟子), 대학( 大學), 중용( 中庸) ]에
대한 치밀한 주석을 가하였다. 4서( 四書)는 송유( 宋儒)들에게 중요시 되어, 5경( 五經)과 더불어 유교의 기본 경전이 되었
다.
송학은 현세를 경시하는 불교 사상이나 도교의 반정치적 관념을 거부하고, 유학 본래의 실천 윤리를 본질적인 요소로 고수
해 나갔다. 그리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해 중국의 사상계에 있어 지도적인 위치를 다시 확립하게 되었다. 송학은 기본적으
로 송대 사대부 계층, 지주층의 유심주의( 唯心主義)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지주의( 主知主義)적 경향을 보이고 있
다. 송학은 삼강 오륜을 기본으로 하는 유교 윤리 사상을 고취하여 봉건적 사회 질서 유지와 군주 독재 체제 정당화에 공헌
하였다.
주자학은 남송 시대부터 중국 학문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청대까지 지속적으로 중국의 학문 사상계를 지배하
였다. 또 한국, 일본, 베트남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전 : 개관동양사 pp.176~177)
주자학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일관하는 철학으로 기초지워진 유학사상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그 핵심은 이기론( 理氣
論)에 있다고 한다. 주자학에서는 자연․인간계의 여러 존재의 근원이 되는것은 절대 불변의 초월적인 리(理, 天理)이고, 이
리가 개별적인 존재에 내재화한 것이 성(性, 天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 = 리에 기초지워진 인간은 본래 긍정적인 존재이지만, 구체적인 개인은 인욕( 人 欲 )과 정( 情 )의 기( 氣 , 氣 質 의

주자학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일관하는 철학으로 기초지워진 유학사상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그 핵심은 이기론( 理氣
論)에 있다고 한다. 주자학에서는 자연․인간계의 여러 존재의 근원이 되는것은 절대 불변의 초월적인 리(理, 天理)이고, 이
리가 개별적인 존재에 내재화한 것이 성(性, 天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 = 리에 기초지워진 인간은 본래 긍정적인 존재이지만, 구체적인 개인은 인욕( 人 欲 )과 정( 情 )의 기( 氣 , 氣 質 의
性 )에 의해 혼탁한 상태로 나타나는데, 이 기를 없애 천연의 성으로 돌아가는 것[격물궁리( 格 物 窮 理 ) ]이 인간의 길이다.
천연의 성이라는 것은 윤리적으로는 공자 이래의 유학에 의해 전해진 도통( 道統)이었는데, 군신․부자․부부․형제․붕우의 오
상( 五常), 전호․노비와 지주․주가( 主家)와의 관계를 포함한 상하 신분 질서가 천리( 天理)에 기초하는 절대 규범으로 되고,
개인의 지위에 따라 이 규범의 엄격한 준수가 요구되었다.
이 주자학은 당시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등장했던 형세호( 形 勢 戶 )층의 이념이었으며 송대 왕조 하에서 재편된 전제 왕조
국가의 지배 질서를 지탱하는 교학( 敎學)으로서 생겨났다. 남송기의 정쟁으로 한 때는 위학( 僞學)으로 탄압받았지만 이후
명․청 시대까지 체제 교학의 지위를 차지했다. 또 조선 시대의 한국, 에도 막부 시대의 일본에서도 공인된 국가 교학으로서
의 역할을 하였다.
(출전 : 松丸道雄외저, 조성을역, 중국사개설 , 한울, 1990, pp.248~249)


5. 양명학
양명학의 선구자 육구연
육구연( 陸九淵, 자는 상산象山, 1139~1192)은 주자학에 대립되는 학설을 내세워 남송 사상계에 한 조류를 이루었다. 그
는 우주의 본체는 성( 聖)이고 리( 理)는 심( 心)이라 하였다. 그는 리를 외계의 현상에서 찾을 것이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수양론(修養論)은 내성(內省)에 의한 직관(直觀)을 강조하였으며, 여기에서 불교 특히
선종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보인다. 그의 학설은 리일원론(理一元論)을 근본으로 하는 주관적 유심론(唯心論)에 입각한 것
으로, 명대의 왕수인에 이어져 더욱 성하게 되었으며, 주자학에 대립하는 주요 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출전 : 개관동양
사 , p.177)


명대의 유학
명대의 유학은 원대에 이어 주자학의 유행으로 전개되었다. 명대에 과거 제도가 실시되면서 주자학이 관학이 되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주자학의 관학화는 사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막게 되었고, 주자학의 관학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
었다.
주자학에서 중시하던 주지( 主知)적인 궁리( 窮理)보다는 실천적인 행동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났다. 이러한 풍
조는 먼저 설선( 薛瑄), 오여필( 吳與弼)에서 시작되어 호거인( 胡居仁), 누량( 婁諒), 진백사( 陳白沙)에 이르러 고조되었으
며, 그 뒤를 이은 왕수인(王守仁, 1472~1528 자는 양명 陽明)에 의해 주자학의 구투(舊套)를 벗어난 새로운 실천 철학 양
명학(陽明學)이 형성되었다.


왕수인의 양명학
왕수인의 교설은 그의 전습록( 傳習錄)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송대 육구연( 陸九淵)의 주장을 이어 심즉리( 心卽理)라
는 절대적 유심론( 唯心論)에 기본을 두고, 인간의 마음( 心)에 같추어진 양지( 良知)의 절대 지선( 絶對至善)과 자율성을 강
조함으로써, 학문의 목적을 실천에 의한 양지의 실현[치양지(致良知) ]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지(眞知)는 실천을 통하
여 완성된다고 하여 지행 합일[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을 역설하였다.


양명학의 변천
이리하여 양명학의 자율적인 실행 정신은 당시 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주자학을 대신하여 명대 후반기에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양명학은 한동안 침체되었던 중국 사상계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으며, 한국과 일본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후 왕수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각자 스승의 학설을 발전시켰으나, 그중 이른바 양명학 좌파라고 불리는 일
파에 오면 왕수인의 양지설( 良知說)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인심의 자유와 자율을 강조한 나머지, 수양을 위한 공부와 경
서의 학습을 경시하고 방자해지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특히 이지( 李贄, 1527~1602, 탁오卓吾)는 “양지만 갖추면 주색
광태를 부려도 성인 군자가 되는 데 무방하다”고 극언( 極言)하며, 전통적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명교 윤리( 名敎倫理)에 반
항하는 태도를 보이니, 이른바 명말 심학(心學)의 횡류(橫流)를 이루었다.
그러나 양명학 우파에서는 전덕홍( 錢德洪), 나홍선( 羅洪先) 등이 좌파의 과격한 태도를 비판하고 왕수인의 양지설을 바탕
으로 하면서도 수양과 학문의 필요를 역설하니, 오히려 주자학 쪽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출전 : 개관동양사 , p.236~237)

송대에 성립된 주자학은 원대에는 공인 관학이 되었고, 명대가 되면 국가 교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명대 후기에
송대 이래의 사회에 사회 체제가 전환기를 맞게 되자 지배 질서의 근거를 초월적, 절대적인 성리( 性理)에서 구하는 주자학
이 흔들리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주자학에 의해 구축되 유교적 명교주의(明敎主義)를 새롭게 보완하려 한 것이 왕수인
(王守仁, 1472~1528)에 의해 성립된 양명학이었다.

왕수인은 주자학에 의해 주창된 리(理)의 외재성(外在性)을 부정하고, 규범으로서의 리(里)와 성(性)의 가장 지순(至純)한
것, 즉 다름아닌 양지(良知)라 하여, 리의 내재화, 내면화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심즉리(心卽理)라 한다. 사회 질서
를 규제하는 윤리도 주자학에서와 같이 밖으로부터 주어진 규범의 준수가 아니라 인간 본래의 본성인 양지(良知)의 자연적
발로이며 그것은 정( 靜)적인 인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실천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하여, 지행
( 知行)의 합일[지행합일설( 知行合一說) ]과 주체적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주자학에서 초월적, 절대적 규범이었

던 천리( 天理)는 양명학에서는 개인 마음( 心)의 본체로서의 양지( 良知)로 되었는데, 거기서 가치 규준( 規準)의 전환이 이
루어졌다. 다만 왕수인의 경우 양지(良知)와 주자학적 천리(天理)와의 정합성(整合性)은 끝까지 유지되었는데 여기에서 왕
수인의 명교(明敎) 획득의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왕수인에 의해 미묘한 균형으로 유지되었던 가치 규준은 명말에 사회 모순의 심화와 함께 그 평형을 잃게 되었다.
이미 왕수인 자신이 “마음에서 구하여 옳지 않을 때에는 공자의 말이라도 옳지 않다”라고 하여 자아( 自我, 양지良知)의 자
립과 그에 의해 기성의 권위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양명학 좌파( 左派)는 왕수인의 이러한 경향을 한층 발전시켜, 이탁오( 李卓吾, 1527-1602, 본명은 지贄)는 양지설을 더욱
철저히 하여 기성의 지식과 인습․도리에 물들기 이전의 지순한 마음을 동심( 童心)이라 부르고 이 동심 앞에서는 공자도 유
교의 경전도 절대적 권위일 수 없다고 하여, 인위적 명교에 속박되지 않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긍정하였다.
이로부터 주자학에 의해 강하게 부정된 인욕( 人欲)과 정( 情)을 인간 본래의 마음에서 나오는 요구로서 적극적으로 긍정하
고 공리( 功利)를 천히 여기는 것은 위선( 僞善)이라 하여 기성의 통념이나 명교에 맹종하는 도학자를 가인( 假人)이라 불러
통렬히 매도하였다. 또 고대 이래의 역사상 인물을 논하여 명분론적 해석을 비판하고 사대부적 교양에서는 정통적 가치가
주어지지 않았던 문학 작품에 오히려 인간지정(人間至情)의 발로를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도 모두 동심설(童心說)
로부터 도출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탁오를 정점으로 하는 양명학 좌파의 출현에 의해 주자학의 기초가 흔들렸지만, 청조의 지배가 확립되고 향신
사회가 안정되자 다시 주자학이 국가의 교학으로서 강조되어 학문의 주류는 고증학으로 전환되었다.
(출전 : 중국사개설 pp.315~316)


6. 실학과 고증학
청초의 학풍(경세적 학풍과 고증적 학풍)
청초의 학풍은 이른바 경세 치용( 經世致用)의 학으로 대표되다. 이는 명대에 싹튼 새로운 경향과 명의 멸망이 가져다준 반
성의 기운 속에서 출발하였다. 원래 명말 학문의 주류는 양명학이었지만, 양명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학문 경향이 싹
트기 시작했으니, 식물학․지리학․농학․군사학 등의 실용적 분야의 연구, 양명학에 대한 반성, 문헌 고증학의 태동이 바로
그것이다.

(王夫之, 1619~1692)․고염무(顧炎武, 1613~1682)․안원(顔元, 1635~1704) 등을 들 수 있다.
황종희의 주장은 그의 명이대방록( 明夷待訪錄) 에 보이는데, 전제 체제를 통렬히 비판하고, 삼대( 三代: 하, 은, 주 시
대)를 이상 사회로 설정하였으며 현실적인 정치 개혁론과 구체적인 제도론을 전개하였다. 특히 사대부의 여론을 학교를 통
해서 정치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견해는 전제 정치 비판과 표리가 되어, 사대부 계층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왕부지는 황종희처럼 본격적인 정치론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경세(經世)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만주족에 대항하여 싸운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비한족( 非漢族)적인 모든 것에 대해 경멸했으며 한족 문화의 우월성을 크게 강조했다. 또 그는 과거
를 이상화하는 경향에 반대했는데, 중국의 옛 선조들도 야만인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문화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제도는 변하는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바꿔져야 한다고 보았다.
고염무는 명대 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반대하여, 학문의 본래 목적은 구세( 救世)에 있다고 보고 학술 추구의 방법으로는 이
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제창했다. 그 자신은 이러한 원칙아래 추상적인 사색을 배격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회의 구
제라는 목적을 바탕에 깔고 경사(經史)의 연구에 몰두했다.
안원은 이들 세 학자보다는 다소 뒤의 인물이지만 청초의 학풍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체의 관념적인 학풍
을 배격하고, 실학( 實 學 )에 역점을 두었으며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유교의 경전을 실천의 반영이라고 보고, 옛 성인의 제
도를 따라 일상 생활 속에서 그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실학( 實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론( 理論)․강학( 講學)․사색( 思索)
등을 배격하여, 송명(宋明)의 이학(理學)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하고 오직 실학을 통해서만 요순(堯舜)의 황금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의 연구 경향에는 이러한 경세적 측면과 아울러 치밀한 연구를 중요시 하는 실증적인 태도가 공존하고
있었다. 황종희는 특히 역사학의 연구에 주력하여, 명유학안( 明儒學案) 등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제자인 만사동
( 萬斯同)과 전조망( 全祖望)을 거쳐 장학성( 章學誠)에 이르는 맥을 형성하였다. 왕부지는 경전 연구에 주력하여 자신의 독
자적인 주석을 가했으며, 춘추세론( 春秋世論) 등을 지어 춘추 의 의의를 독자적으로 구명해 갔다. 그밖에 노자연
(老子衍) 등을 통해 노장 사상 등에도 관심을 보였고, 독통감론(讀通鑑論) 송론(宋論) 과 같은 사론(史論)을 쓰
기도 했다. 이들 사론과 춘추 의 연구에서 보이는 철저한 화이관( 華 夷 觀 )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의 깊이 있고 다양한
학문 영역은 학문적인 후계자를 같지 못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청대 학문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고염무는 경학( 經學)
과 소학( 小學)의 연구에 힘써 일지록( 日知錄) 천하군국이병서( 天下郡國利病書) 음학오서( 音學五書) 등을
남겼다. 특히 음학오서 는 고증학( 考證學)의 중심적인 분야인 음운학( 音韻學)의 선구적 업적이라는 것 외에도, 16세기
매작(梅鷟)의 상서고이(尙書考異) , 진제(陳弟)의 상서소연( 尙書蔬衍) 에서 보였던 방법론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주
목할 만하다. ( 개관동양사 , pp.263~265)

청대 고증학의 선구자들
이러한 경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본격적인 고증학(考證學)은 염약거(閻若璩, 1636~1704)와 호위(胡渭, 1633~1714)를
그 선구로 한다.
염약거는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蔬證) 을 지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위작(僞作)을 밝혀 내
었고, 호위는 역도명변(易圖明辨) 을 통해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본래 역경(易經) 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도
가( 道家)의 설임을 증명했다. 이들의 저작은 주자학의 근거를 완전히 뒤엎은 실증적인 저작으로서, 경전 자체에 대한 문헌
학적 연구의 문을 열었다.
고증학의 발전
이들의 뒤를 이어 18세기에 들어와 많은 학자들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특히 역경( 易 經 ) 의 연구에 정통했던 혜동( 惠
棟, 1697~1785)과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蔬證) 을 지은 대진(戴震, 1723~1777)이 주목된다.
혜동은 조부(祖父)인 혜주척(惠周惕)과 부(父)인 혜사기(惠士奇)의 뒤를 이어 이른바 한학(漢學)의 기틀을 완성했는데, 한
대( 漢代) 학자의 설을 기초로 한 주역술( 周易述) 은 왕필( 王弼) 이후의 현학적( 玄學的)인 해석을 전혀 채택치 않고 있
다. 그밖에 고문상서고( 古 文 尙 書 考 ) 를 지어 염약거의 설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의 문하( 門 下 )에서 강성( 江 聲 ), 왕창
( 王昶), 여소객( 余簫客) 등의 경학자( 經學子)가 배출되었는데, 주목되는 겄은 고증학의 방법론을 역사학에 도입한 십칠
사상각(十七史商榷) 을 지은 왕명성(王鳴盛, 1720~1797)과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를 낸 전대흔(錢大昕, 1728
~1804)이 나와서 고증학 연구의 폭을 넓혔다는 점이다.
대진( 戴震)은 경전 연구에 있어 문자와 언어의 분석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그가 중요시한 언어
학은 경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처럼 경전 연구에 있어 과학성을 중요시 하는 그의 방법론은 그의 제자
단옥재( 段玉裁, 1735~1815)와 왕념손( 王念孫, 1744~1832), 왕인지( 王引之, 1760~1834)로 이어져서 고증학은 그 전성
기에 이르게 된다.
단옥재는 육서음운표(六書音韻表)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등을 지어서 대진의 뒤를 이었는데, 특히 설문해자
주(說文解字注) 는 한자(漢字)의 어원 사전(語源辭典)이라 할 후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한 것으로, 고증학의 본령(本嶺)을 보여주는 성과로 지목된다.
왕념손( 王念孫)은 광아소증( 廣雅蔬證) 과 독서잡지( 讀書雜志) 를 남기고 있는데, 그는 고전의 연구에 있어서 귀납
적(歸納的)인 방법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그는 이전의 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제자(諸子)
에 대해 치밀한 고증을 하였다. 그의 독서잡지( 讀 書 雜 志 ) 가 바로 그 성과인데, 관자( 管 子 ) 와 묵자( 墨 子 ) 등
약 10종에 걸치는 제자서(諸子書)에 대한 고증을 하였다.
이렇게 본격화한 고증학 연구에 의하여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크게 주목되는 학자는 청말에 일어난 공양
학( 公羊學)의 선구자인 장존여( 莊存與, 1719~1788), 청정( 淸廷)의 사고전서( 四庫全書) 편찬을 주관했던 기물( 紀昒,
1724~1805), 독특한 역사 이론을 편 장학성( 章學誠, 1738~1801), 그리고 고전 비판의 전형인 최술( 崔述, 1740~1816)
등이 있다. 문사통의( 文史通義) 를 지은 장학성( 章學誠)은 이른바 「육경개사( 六經皆史) 」의 관점을 발전시킨 비판적인
사론( 史論)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거니와,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최술( 崔述)이다. 그는 경전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했
는데, 공자( 孔子)의 전기에 대한 연구인 수사고신록( 洙泗考信錄) 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여기에서 그는 과장된 전설적
요소를 제거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성인(聖人)이라는 공자의 상을 재구성했던 것이다.
청대의 고증학은 원래 명말 청초에 나타난 여러 가지 경향이 구체화된 것이지만, 그 발전에는 이민족 지배에서 오는 요소
의 영향도 있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한족을 통치함에 있어 항상 지식인들의 반항에 주의하게 되었고, 강희( 康 熙 )․옹정
(雍正)․건륭(乾隆) 연간에 많은 필화 사건, 이른바 문자의 옥(文字獄)이 있었던 것은 지식인 통제라는 면에서 설명된다. 이
런 분위기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헌 중심의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더구나 고금도
서집성(古今圖書集成) 사고전서(四庫全書) 황청경해(皇淸經解) 등 거대한 편찬 사업이 청정(淸廷)에 의해 주
도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한층 심화되었다. 특히 사고전서(四庫全書) 는 학문적인 목적 이외에 반만주적(反滿洲的)인 요
소를 문헌에서 제거하려는 의도로 편찬된 것으로서, 학문의 위축 내지 고증학의 발달에 미친 정치적 요인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 개관동양사 , pp.265~266)
7. 공양학
고증학의 전성기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장존여( 章存與, 1719~1788)를 선구로 하는 공양학파( 公羊
學派)이다.
장존여는 고증학자로서 춘추정사( 春秋正辭) 등 춘추( 春秋) 에 대한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춘추( 春秋) 를 해석
함에 있어서 공양전(公羊傳) 에 의거하여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이는 전성기의 고증학이 후한(後漢)의 경학(經學)
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나, 보다 오랜 전거( 典據)를 구하게 되어 자연히 전한( 前漢)의 금문학( 今文學)에 눈을 돌리게 됨
에 따라 나온 결과였다. 이는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나온 유봉록( 劉逢祿, 1776~1829)은 좌씨춘추고증( 左氏春秋考證) 을 지어서 좌전( 左傳) 이 경전과
는 관계가 없는 것임과 고문( 古文)의 좌씨전( 左氏傳) 이 한 유흠( 劉欽)의 위작( 僞作)임을 논증했다. 뿐만 아니라 논
어술하(論語述何) 를 통해 논어(論語) 의 해석에 하휴(何休)의 공양설(公羊說)을 적용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전개된 공양학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현실 사회의 문제에 적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서 오는
현실 타개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기도 한데, 대표적인 학자는 위원( 魏源, 1794~1857)과 공자진( 龔自珍, 1792~1841) 이
다.
위원은 모든 학문을 현실의 이해 내지 현실 개조의 도구로 보았고, 경전의 해석도 시대의 현실에 맞추어 자유롭게 이루어
져야 한다고 했다. 그가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을 편집하고 성무기(聖武記) 와 해국도지(海國圖志) 를 지
은 것은 모두 그러한 경세적(經世的) 관심에서였다.
공자진은 거란( 據亂)․승평( 升平)․태평( 太平)이라는 하휴( 何休)의 삼세설( 三世說)을 모든 경전 해석에 적용시켰고, 나아가
서 사회 문제의 이해에까지 하나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는 위원과 마찬가지로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두어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러한 자세의 밑바탕에는 공양전( 公羊傳)의 삼세설( 三世說)과 만물은 궁극에 달하면 변
한다는 주역( 周易) 의 이른바 변통설( 變通說)이 깔려 있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변법 사상( 變法思想)의 기초가 되어
실천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양학( 公羊學)의 전개 과정에서 보인 여러 가지 측면은 모두 강유위( 康有爲, 1858~1927)의 사상에서 종
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 에서 모든 고문 경전( 古文經典)이 위작( 僞作)이라고 주장하고,
공자개제고( 孔子改制考) 에서 정치 개혁의 근거를 찾아냈으며, 삼세설( 三世說)을 통해서 스스로 개혁의 구체상을 확립했
다. 그의 사상은 곧 무술 변법( 戊述變法, 변법 자강 운동, 1898)을 통해 구체화가 시도되지만, 현실의 개혁을 위한 사상으
로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 개관동양사 , pp.266~267)

격물궁리지학, 격치지학, 격치학 그리고 과학 -서양 과학에 대한 동아시아의 지적 도전과 곤경

격물궁리지학, 격치지학, 격치학 그리고 과학 -서양 과학에 대한 동아시아의 지적 도전과 곤경- < 한림과학원 < KISS

격물궁리지학, 격치지학, 격치학 그리고 과학 -서양 과학에 대한 동아시아의 지적 도전과 곤경-
From gewu qiongli to kexue -The Predicament of East Asian Intellectuals in Understanding Science-

김선희 ( Seonhee Kim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17권0호
발행년월 : 2016년 06월
페이지 : 119-157(39pages)
개념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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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키워드 보기
격물궁리 격치 격치지학 격치학 과학 박물학 유서 명물도수 예수회 서학 
gewu qiongli gezhi gezhixue kexue bowuxue leishu mingwu dushu Jesuits Western Learning


초록 보기

동아시아에는 엄밀한 의미의 ‘과학(科學, science)’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외부 세계에 대한 지적 확장과 리(理)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의미하는 격물궁리(格物窮理)’의 전통이 서학 지식 유입에 따라 ‘격치(格致)’로 전환된 후에야 과도기를 거쳐 결과적으로 근대적 ‘과학(科學)’으로 재편성되었다는 것은 보편적 상식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일반적 평가를 넘어서 동아시아에서 격물궁리, 격치 등 과학이전의 개념과 범주들이 발화된 맥락과 지향을 검토함으로써 서양 과학에 대한 근대 초기 동아시아 지식인의 도전과 전환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래 성리학 에서 격물궁리는 외부 세계를 향한 지적 인식을 어떻게 마음에 내재된 근원적 원리[理]에 합치시킬 것인가를 묻는 환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성리학적 ‘격물 치지’, ‘격물궁리의 전통에 균열을 낸 것은 16세기 말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였다. 이들은 자신의 철학과 신학을 ‘격물궁리의 학’으로 번역 하여 기독교와 유럽의 지식체계를 중국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격치가 성리학의 맥락에서 이탈하는 경향은 예수회와 관계없이 이미 시작된 현상 이었다. 14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사이 중국 지식인은 박물학적 유서(類書)나 의서(醫書)의 표제로 ‘격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외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탐구과정을 ‘격치지학’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서학을 포함해 다양한 지식 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인 명말ㆍ청초의 지식인들은 격치지학을 박학(博學)과 박물(博物)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과의 온건한 접촉이 끝나고 본격적인 대결 단계에 접어든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서양인에 의해 최신 서양 과학 이론들이 한역되자 점차 ‘격치학’이 서양의 근대 분과 과학들을 총 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격치로 표현되는 한 동아시아 지식인이 지적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격치는 「대학(大學)」에서 연원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서양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으므로 동아시아 지식인은 전통적인 격물의 이념 위에 서서 외래 지식에 접근할 권리와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최소한의 권리와 여유는 박물과 격치를 대체하는 ‘과학’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지식장에서 서서히 소멸되었다. 

격치학에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 가 서구 문맥에서 전유한 신조어 ‘과학’으로의 전이는 현재의 우리에게 동아시아 에서 학문의 중심부가 변경되었음을 보여 준다. 

서양 과학은 일본이 직접 이룬 성취는 아니었지만 일본이 언어와 지적 정보를 선취하자, 지식의 중심부와 주변부가 바뀌게 된 것이다. 중국의 학문적 전통은 더 이상 동아시아 세계의 보편 과학 (universal)이 아니라 낙후된 지역 과학(local science)에 한정되었다. 지적 주체의 성격 역시 바뀌었다. 

격물을 통해 궁리를 체현하고자 했던 한 개인으로서의 동양 지식인은 문명의 선취자로서 독보적 권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던 서양뿐 아니라 지식의 형성과 체계화과정에서도 지식의 일방적 수용자ㆍ습득자로 격하되었으며, 특히 조선인은 제도화된 과학을 운용할 국가를 상실함으로써 삼중의 소외를 겪게 되었다.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East Asia did not have a well-defined concept of ‘science.’ After the introduction of Western Learning, however, there followed a transition period, during which the intellectual exploration of the external world through the Neo-Confucian tradition of gewu qiongli (the investigation of phenomena and the full comprehension of their underlying principles), together with the fundamental approach to understanding represented by li (the pattern principle), were transformed into modern science. This paper aims to discover the challenges facing early modern East Asian intellectuals by examining the traditional concepts and categories which were relevant to science, such as gewu qiongli. The transformation of such Neo-Confucian traditions was largely driven by Jesuit missionaries who entered China at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Thus, they tried to integrate the European Christian system of knowledge with the existing Chinese knowledge system by translating their philosophy and theology and framing it as gewu qiongli studies. In fact, some variation from the existing Neo-Confucian tradition of gezhi (格致) had already begun before the arrival of the Jesuits, particularly among the intellectuals of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periods who used the term ‘gezhizixue (格致之學)’ to refer to boxue (博學, learning); later,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term ‘gezhixue (格致學, natural studies)’ replaced gezhizixue. During this period, however, gezhixue always referred to specific scientific disciplines, allowing East Asian intellectuals to approach the Western knowledge system via the traditional concept of gewu, since gezhi originates from the Confucian classic Da Xue (Great Learning ). However, with the emergence of the term ‘kexue (science)’ coined by Nishi Amane in the Western context, East Asian intellectuals became passive consumers of Western knowledge and the Chinese intellectual tradition lapsed into a backward and localized science.

UCI(KEPA)
I410-ECN-0102-2017-300-00030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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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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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 성리학 그리고 다른 학통들 -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

정주 성리학 그리고 다른 학통들 - 대학지성 In&Out

정주 성리학 그리고 다른 학통들
고현석 기자
승인 2020.06.21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3강>_ 이승환 고려대학교 교수의 「정주 성리학 그리고 다른 학통들」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3강 이승환 교수(고려대 철학과)의 강연 중 정주 성리학의 핵심 내용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이승환 교수는 “동아시아 문명에서 근대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이른바 ‘문화의 정전’이라고 불릴 만한 사유 체계”로서 정주(程朱) 성리학(性理學), 즉 12세기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신유학(Neo-Confucianism)’을 전반적으로 살펴본다. 먼저 그 정주 성리학의 핵심 내용들, 목적과 지향을 확인한 다음 그러한 “성리학이 추구하는 양대 공부로서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을 소개하고 그렇게 해서 성취되는 “최후의 인격, 이상적 관망자로서 성인(聖人), 그리고 성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왕도 정치의 이상”까지 다룬다. 그에 이어 “정주 성리학과 상산학(象山學), 심학(心學)이 어떻게 해서 갈라졌는가”, “성리학의 도학적(道學的)인 학풍이 사공학(事功學)의 공리주의적인 학풍과 왜 갈라설 수밖에 없었는가”를 고찰하면서 이들이 남긴 문제가 오늘날에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 지난 5월 23일, 이승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동아시아 문명의 정전, 정주 성리학

동아시아 문명에서 근대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이른바 ‘문화의 정전’이라고 불릴 만한 사유 체계를 꼽으라면 단연코 정주 성리학이 될 것이다. ‘정주 성리학’이란 12세기에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신유학’을 가리키는 말로, 성리학 사유 체계의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명도ㆍ정이천과 주자의 성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은 공ㆍ맹의 원시유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불교ㆍ도교의 형이상학과 수양론을 유학 안으로 받아들여 송대에 새롭게 확립된 사상 체계를 말한다. 이 사상 체계는 인간의 본성(性)과 세계의 이치(理)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성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송대에 정립된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송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상산ㆍ왕양명의 심학(心學)과 대비하여 리학(理學)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 두 학통은 단지 공부 방법론상의 차이일 뿐 궁극적으로는 ‘신유학’이라는 커다란 지적 흐름에 함께 속해 있다.

‘정주 성리학’이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문화의 정전으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ㆍ도교와 구별되는 유학 고유의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불교와 도교가 개인적 차원에서 해탈과 초월을 추구하는 출세간적(出世間的) 사유 체계라면, 유학은 자기 도야와 자아 완성을 추구하는 개인적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규범적 방향을 제시하는 입세간적(入世間的) 사유 체계였던 탓에 장구한 시기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사유 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리학이라는 사유 체계는 우주ㆍ자연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과 바람직한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에 기반한 이상 국가와 이상 사회에 대한 청사진까지 제공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법ㆍ제도와 정치 이념, 사회 구성 원리와 윤리적 규범, 그리고 개인의 수양과 자기 완성에 이르는 폭넓은 지적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성리학적 사유 체계의 궁극 지향

신유학은 공ㆍ맹의 원시유학을 계승하여 수기(修己)에서 치인(治人)에 이르는 일 또는 내성(內聖)에서 외왕(外王)으로 나아가는 일을 학문의 궁극 목표로 삼았다. 즉 안으로는 성인의 인격에 이르고(inner sage-hood) 밖으로는 왕도 정치의 이상을 펼치는 일(outer kingship)이 송대에 들어 새롭게 흥기하던 사(士) 계급이 자신을 포함한 지배 계층 모두에게 부과한 문화적 사명 의식이었다.

수기치인과 내성외왕이라는 사명 의식은 신유학이 원시유학과 더불어 공유하는 핵심 가치이지만, 신유학자들은 특히 ‘수기’ 또는 ‘내성’의 영역에 절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타인을 평안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 계급 자신이 성인에 가까운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성사 연구가들은 원시유학과 구별되는 신유학 고유의 특징을 “내면으로의 전환(Turning Inward)”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독서인 계층의 자각 운동으로 시작된 성리학은 장차 과거 시험을 통하여, 또는 재야에 남아서라도 백성들을 평안한 길로 이끌어야 할 책임을 지닌 예비 지도자들을 성인과 같은 지고의 인격으로 주조해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성인이라는 지고의 위격(位格)에 이르기 위해서는 크게 두 측면의 공부와 노력이 요청된다. 하나는 객관 세계에 내재한 다양한 원리와 법칙 그리고 이유와 이치를 파악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무사(無思)ㆍ무위(無爲)한 천ㆍ지의 운행 방식을 본받아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심적 상태를 확보하는 일이다. 전자와 연관된 공부를 격물궁리(格物窮理)라 한다면 후자와 관련된 공부는 거경함양(居敬涵養)이다. 성리학에서 이 두 가지 공부는 새의 두 날개 또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어느 하나도 결해서는 안 되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간주되었다.


격물ㆍ궁리의 궁극 목표: 심여리일(心與理一)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性)과 세계의 이치(理)를 궁구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천지ㆍ자연에는 불변하는 항상된 원리가 내재해 있다고 믿었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이 원리를 그대로 품부(稟賦)받아 자기의 본성(性)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성즉리(性卽理)”라는 명제다.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에 도달함)은 궁리(窮理: 이치를 궁구함)와 마찬가지 뜻으로, 객관 세계에 내재한 존재의 원리를 파악하는 일(所以然之故) 그리고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당위의 원칙(所當然之則)을 이해하는 일을 포괄한다.

격물ㆍ궁리의 궁극적 목표는 인격 주체가 객관 세계에 내재한 중다한 원리들을 파악하여 마침내 총체적 원리인 ‘천리’와 합치하려는 데 있다. 주자는 격물 공부의 목적이 ‘리’와 합치하는 데(合於理) 있다고 보고, 주체의 사고와 언행이 순연하게 ‘리’와 합치하게 된 상태를 심여리일(心與理一) 즉 “마음과 ‘리’가 하나가 된 상태”라고 표현한다.

심즉리(心卽理)는 주자의 경우, 격물 공부를 통하여 수많은 이치에 통달하게 될 때 주체의 마음은 ‘리’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의미이다.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사물마다 일정한 이치가 없는 것이 없다. 하루하루 공부하여 쌓임이 많다면 마음속에 저절로 [이치가] 관통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곧 ‘리’이고, ‘리’가 곧 마음이어서(心卽理, 理卽心)”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모두 ‘리’에 들어맞게 된다.

유학에서 인(仁)은 인간다움의 총칭으로, 성인에 해당하는 인격이 가지고 있는 지고의 덕성(supreme virtue)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은 아무에게나 허여(許與)할 수 있는 소소한 중덕(衆德) 중의 하나가 아니다. 성리학에서 인자(仁者)는 인간 세계에서 표준이 될 만한 모든 이치를 한몸에 갖추고 있는 ‘리’의 담지자다.

인자(仁者)에게 근심이 없는 까닭은 단지 인자(仁者)의 마음이 곧 하나의 도리(道理)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자는 어떤 일이 닥쳐와도 크거나 작거나에 관계없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기의 마음에 갖추어진 각각의 ‘도리’로서 대응할 뿐, 일이 닥치기를 기다려 비로소 여기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곧 ‘리’인 것이다(心便是理了)”.

주자가 ‘심즉리(心卽理)’라고 할 때 이 명제가 가리키는 내용은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학이지지(學而知之)의 자질을 지닌 범인들의 경우, 격물ㆍ궁리의 공부가 쌓이면 마음씀씀이와 행동거지가 모두 이치에 들어맞게 된다. 그리고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을 지닌 성인 또는 인자의 경우 그의 마음 씀씀이는 항시 도리에 부합한다.

독서인 계층인 ‘사’가 현자의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객관 세계에 내재한 수많은 ‘리’를 체득하는 일 즉 격물ㆍ궁리의 공부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러한 공부를 통하여 주체의 심적 상태가 객관 세계의 ‘리’와 합치하게 될 때 이를 “주체의 마음 상태가 객관 세계의 ‘리’와 하나가 되었다(心與理一)”라고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으로 자아를 주재하기: 거경ㆍ함양

성리학에서는 의식 활동에 깃든 경향성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아를 두 층위로 구분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기’와 ‘리’의 합으로 이루어진 만큼, ‘기’적인 특성과 ‘리’적인 특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다.

‘기’적 특성이란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본능적 경향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리’적인 특성이란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인격적 지향성을 의미한다. 현실 속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기’에서 연유하는 본능적 경향성을 충족시키며 살아가지만, 자아의 심층에는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인격적 지향성이 간직되어 있다.

주자는 자아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는 인격적 지향을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본연지성’은 ‘의리지성(義理之性)’이나 ‘천명지성(天命之性)’과 동일한 개념이지만, 특히 날 때부터 자아의 심층에 간직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본래성’에 주목해서 쓰는 말이다. 성리학적 수양론의 궁극적 목적은 자아의 심층에 잠재된 인격적 지향(본연지성)을 의식의 표층 위로 끌어올려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는 데 있다.

성리학에서는 신체에서 연유하는 본능적 경향성을 송두리째 부정하지는 않는다. 주자는 “외물의 유혹은 음식에 대한 욕구와 성적 욕구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그 근본을 추구해보면 이러한 욕구는 진실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서 없애려야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안 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성리학적 수양론의 관심은 신체(形氣)에서 연원하는 본능적 경향성을 자아의 심층에서 근원하는 인격적ㆍ문화적 지향에 의해 제어하려는 데 있다.

인격적 지향은 어떻게 본능적 지향을 제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경(敬) 공부에서 찾을 수 있다. ‘경’ 공부의 요체는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외물을 향하여 분산되는 의식 활동을 내면으로 수렴하여, 본연지성에서 연유하는 순일한 의식이 뻗어나가게 하는 데 있다. ‘경’ 공부에는 다양한 설명 방식이 있지만 주자는 특히 의식을 하나로 집중할 것(全一集中)을 강조하고, 의식을 하나로 집중하면 자신에게 간직된 ‘본연의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경’ 공부는 의식의 동(動)과 정(靜)의 두 국면에 모두 걸쳐 있다. 의식의 지향 활동이 아직 개시되기 이전인 미발(未發)의 국면과 의식의 지향 활동이 이미 개시되어 활발하게 흘러가는 이발(已發)의 국면 모두가 ‘경’ 공부의 대상이 된다. 주자는 “미발 시에는 함양(涵養)하고, 이발 시에는 성찰(省察)하라”라고 말한다. ‘함양’은 원래 농사일에서 파종하기 전에 씨앗에 물을 흠뻑 주어 발아시키는 일을 의미한다. 아직 의식이 지향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경외의 자세로 순일한 인격적 지향의 싹이 발아할 수 있도록 방한(防閑)하고 기르는 노력이 바로 ‘미발 함양’이다. 의식의 지향 활동이 개시된 후에는 사유와 감정이 바르게(正) 흘러가는지 행여 삿되게(邪) 전개되지는 않는지 점검하고, 공정하게(公) 흐르는지 행여 사사로운(私)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일이 ‘이발 성찰’이다.

‘경’ 공부의 목적은 주체의 의식을 항상 순일하고 안정되게 유지함으로써 유사시에 사태를 정명(精明)하게 판단하고, 의리(義理)에 맞게 처신하며,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분변할 수 있는 도덕적 성향을 도야하는 데 있다. 성리학에서 인간은 양극에 걸쳐 있는 존재이다. 신체적 층위의 자아와 인격적 층위의 자아가 그것이다. 수양의 목적은 자아를 더 높은 층위로, 더 고귀한 존재로 상승시키는 데 있다. 자아를 상승시키기 위한 노력의 여하에 따라, 인간은 그저 신체적 층위에 머물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높은 층위 즉 인격적 층위로 나아갈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층위에 속하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주체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 성리학에서 보는 인간은 생물학적 사물로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만들어져가는 존재’이다. 인간을 수양을 통하여 향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 또는 ‘과정적 존재’로 바라보는 성리학의 수양론은 인간에 대한 물신화의 경향이 팽배한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격물궁리와 거경함양
의 결과: 공정한 관망자로서 ‘성인’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인’이라는 이상 인격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격물ㆍ궁리와 거경ㆍ함양이라는 양대 공부가 요청된다. 격물ㆍ궁리를 통하여 객관 세계의 이치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확보하는 일은 ‘경’ 공부를 통해 공정하고 무사한 마음 상태에 도달하는 일과 더불어 윤리적 실천에 있어서 합리적 판단자가 갖추어야 할 필요ㆍ충분 조건을 구성한다.

합리적 판단자가 갖추어야 할 이러한 자격 요건은 이상적 관망자 이론(ideal observer theory / impartial spectator theory)에서 ‘이상적 관망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으로 요청되는 무사의(無私意: disinterestedness), 공정성(impartiality), 그리고 객관적 사실에 대한 충분한 인지(well-informedness) 등의 자격 요건에 해당한다. 이상적 관망자 이론은 한 행위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메타윤리학적 질문에서 비롯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한 행위는 오직(if and only if) 이상적 관망자에 의해 옳다고 판정될 때만 옳은 것이고, 만약 이상적 관망자가 그르다고 판정한다면 이 행위는 그른 것이다. 이때 이상적 관망자의 요건은 위에서 든 바와 같이 무사의, 공정성, 객관 사실에 대한 충분한 인지 등으로 요약된다. 성리학에서 격물궁리와 거경함양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성인의 인격은 행위 세계의 원리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확보하고 대공무사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공정하게 조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상적 관망자’에 다름 아니다.

행위 이론(action theory)의 관점에서 볼 때,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행위자의 모델은 천지(天地)와 성인(聖人)이다. 천지는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지만 결코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으며, 성인은 만인을 보듬어주지만 결코 자의적이거나 사사롭지 않다. 비의도적이고 비작위적인 천지의 무심한 운행을 본받아 백성들을 이롭게 보살피는 이상적 행위자가 바로 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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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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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역사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신유학()은 송나라와 명나라 시절에 시작된 일련의 유학 학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성리학 및 양명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신유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서양의 유학 연구자들이 고안한 용어인 "Neo-Confucianism"의 번역어에 해당하며, 당대엔 전혀 쓰이지 않았던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나, 이는 송명대 유학에 영향을 받아 한국 및 일본에서 전개된 유학 전통은 배제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유학"의 용법과는 차이가 난다.

더불어 5.4운동 이후부터 진행된 현대의 유학적 전통인 이른바 "현대신유학(New Confucianism)"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2. 배경[편집]

신유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1] 최소한 신유학의 직접적인 토대가 된 인물은 《태극도설》로 유명한 주돈이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유교불교, 그리고 도교 등 간의 사상적 경합 가운데서 유교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띤 취약점 중 하나는 그 형이상학적인 토대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중국 고유의 신화적 우주관을 그대로 계승한 도교,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 힌두교 및 자이나교 철학 등과의 치열한 경합을 거치며 이론적으로 세련화를 거친데다가 중국 유입 이후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선불교까지 탄생시킨 불교에 비하여 
고대 유교는 세계와 우주의 근본적인 면모를 설명하는데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았다. 선진 유교는 현실주의적 토대에 기초하여 정치와 인성 수양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이런 형이상학적 주제를 도외시해도 큰 문제를 겪지 않았으나, 불교 유입을 기점으로 여러 사상들 간의 경합이 심해짐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유교 또한 이런 근본적인 이론적 토대를 강화시킬 필요성이 생겼다.

주돈이의 작업은 주역 등에서부터 전래된 도교의 이론적 틀을 차용하여 유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했던 본격적인 최초의 시도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는 이후 성리학의 직접적인 뿌리가 됨으로써 신유학이 탄생하는 기틀이 되었다.

3. 역사[편집]

저작 《정몽(正蒙)》으로 유명한 횡거 장재(張載)는 북송 당대의 유학자 소옹 등과 더불어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설명과 동시에 그에 근거한 유교적 수양론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기(氣)에 근거한 장재의 학설을 비판한 대표적인 당대의 학자로는 "이정(二程)"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명도 정호(程顥), 이천 정이(程頤) 형제가 있었으며, 이들의 학설은 양시(楊時), 사량좌(謝良佐), 호굉(胡宏) 등을 통해 전래됨과 동시에 나름의 변천을 이루기도 했다.

남송 시대에 태어난 주희는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접하며 스스로 이정, 특히 정이의 학설을 계승했다 여기고 후일 성리학으로 불리는 가르침을 제시했으며, 주희가 상세한 주석을 달기도 한 사서는 이후 중국 과거시험에서 중시하는 핵심 문헌이 되었다.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 혹은 이정과 주희의 성을 따서 "정주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던 성리학은 그에 따라 먼 미래인 청나라 시기까지도 과거시험의 핵심이 되는 관학(官學)으로 남는다.

한편 주희 당대에 《태극도설》의 해석 등을 두고 주희와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상산 육구연(陸九淵)의 가르침은 그보다 한참 뒤인 명나라 대의 왕수인에게 계승되었다. 당대 관학이었던 성리학과 격렬하게 대립했던 왕수인의 가르침은 육구연과 왕수인의 성씨를 따 "육왕학" 같은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엔 왕수인의 호를 따 "양명학"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됐다.

이러한 신유학의 흐름은 비단 중국 대륙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은 조선 시기에 이르러 한반도에서 확고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며 이후 500년간 이황이이 등으로 대표되는 자생적인 변천을 거쳐왔다. 다른 한편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일본에 조금씩 도입되기 시작한 신유학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후지와라 세이카 등의 에도 막부 시기 크게 번성하였으며, 어떤 학설에 따르면 이후 존황양이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이르렀다.

4. 관련 문서[편집]

[1] 당연하지만 신유학자들은 자신들의 학설이 공자맹자 등 선유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임을 자칭했기 때문에 과거 학설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명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이 "새로운(新)" 유학자라고 볼리가 없었다!

2022/05/19

격의불교 - 위키백과, 격의불교(格義佛敎)

격의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격의불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격의불교(格義佛敎) 또는 격의(格義)는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인 시대(魏晋時代: 220-420)에 나타났던 불교 교리 이해 방법 또는 불교 연구 방법이다.[1][2]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유교사상(儒敎思想)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다.[1][2]

예를 들어, 불교 경전인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공(空)"에 대해 

노장사상의 ""(無) 개념을 적용하여 그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1]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3] 하지만, 이러한 격의불교로는 불교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1]

동진(東晉: 317-420) 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안(道安: 312-385)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2] 하지만 그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는데,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에야 비로소 극복되었다.[2]

격의와 현학[편집]

위진시대(魏晋時代: 220-420)에는 노장사상에 관한 학문이 성행하여 청담(淸淡)이 유행하였고 특히 노장사상과 유사한 표현 형식을 갖는 《반야경》과 《유마경》이 애독되었다.[2] 그리고 이 경전들을 노장사상과 유교의 역(易)의 사상과 대비하여 연구 토론하는 일이 성행하였다.[2] 그 결과 불교의 (空)의 의의에 관하여는 본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여러 가지 중국적 해석이 다투어 생겨났다.[2] 이른바 이와 같은 철학적 격의를 특히 현학(玄學)이라 부른다.[2]

격의불교의 극복[편집]

동진(東晉: 317-420) 시대의 고승으로 초기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인 도안(道安: 312-385)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깨닫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2] 그는 불교는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도안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격의불교의 오류를 반성하고 《반야경》의 여러 다른 번역본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참다운 뜻에 이르도록 노력하였다.[4] 하지만 도안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2]

반야경》 등의 본의(本義)가 잘못됨이 없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에 들어와 공관불교(空觀佛敎)의 경전들을 올바르게 번역하고 그 교리를 소개한 이후부터였다.[2] 하지만 철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 이후로도 중국의 불교사상은 근본적으로 격의불교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