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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4

철학'이라는 이름 피자가 '부침개'는 아니잖아요 by 오수민

'철학'이라는 이름

피자가 '부침개'는 아니잖아요
by오수민Apr 04. 2019

초등학교 때였나, 교과서에서 여러 나라의 문화가 소개되는 자리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가 있었다. 바로 “피자는 이탈리아식 부침개”라는 비유. 나는 이 비유가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어쩌면 “이탈리아식 빈대떡”이었을지도. 이건 더 싫어!!!) 둥그런 모양 빼고는 재료도, 만드는 방법도 닮은 점이라곤 전혀 없는 두 음식을 마치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음식인 것 마냥 엮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개념적으로 거부반응이 든 것이다.


Ⓒ홈퀴진 이윤정 님 (bit.ly/2JDtyDP)

그런데 철학에서도 피자를 “이탈리아식 부침개”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철학'이라는 이름 자체와 관련해서 말이다.

철학의 세부분야를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지역’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으로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분류다.

고대 그리스에 전통을 둔, 논리학, 인식론, 윤리학 등으로 대표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부르는 건 별 문제가 없다. 피자를 '피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공자에 뿌리를 둔 동양의 학문을 ‘동양 철학’이라고 부르는 건, 엄밀히 말해 딱 맞는 표현이 아니다. 마치 피자를 '부침개'라고 부르는 격이랄까. 대체 ‘철학’이라는 이름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이를 알기 위해선 몇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격물궁리지학 vs 필로소피아

동양의 학문이라 하면 모름지기 ‘유학儒學’이다. 이것이 송명시대에 ‘성리학性理學’으로 발전했는데 그 뼈대를 세우는 데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 주자, 즉 주희朱熹인 까닭에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주자학이 동양의 학계를 주름잡고 있던 시기, 서양에서 새로운 학문이 들어왔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전파한 서양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다 건너온 신문물이라니, 일단 이름은 원어 그대로 ‘페이루쑤페이야費祿蘇非亞’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소리만 따서 부르다 보니 이름만 들어서는 당최 뭘 하는 학문인지 한방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이미 동양에 있던 학문 중 필로소피아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학문을 골라 그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격물궁리格物窮理'의 학, 즉 격물궁리지학이다.

격물궁리는 주희가 외부 세계를 탐구할 방법으로 내세운 이론으로, 그에 따르면 외부 사물의 원리인 ‘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리’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물궁리학은 외부 세계가 아닌 마음에 집중하며, 마음속 ‘리’를 깨닫는 방법으로 경전을 공부할 것이 중요시된다.

격물궁리지학과 필로소피아 모두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를 알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외에는 오히려 서로 다른 점이 더 많다. 단적인 예로 서양의 필로소피아가 전통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해왔던 것과는 달리, 동양의 유학은 현세를 잘 사는 방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필로소피아는 '격물궁리지학'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게 되었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며 변화가 일어났다. 서양의 자연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필로소피아로부터 '사이언스science'가 따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니시 아마네가 '철학哲學' 그리고 '과학科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필로소피아를 '철학'으로, 사이언스를 '과학'으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초기에는 '분명하게 밝힘을 바란다'는 뜻의 '희철학希哲學'이었으나 이후에 '희'자가 빠졌다) 이러한 신조어는 당시 동양에서도 객관적 지식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인기가 높아지던 경향과, 일본이 동양에서 학문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금세 널리 쓰이게 되었다.

니시 아마네

그리고 현재, 이 신조어들은 그것이 누군가가 번역어로서 발명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커졌다. 그리고 서양의 학문이 주류가 되면서 기존의 동양의 학문은 서양의 학문 체계로 편입되어 버렸다. 이제 격물궁리지학은 동양 ‘철학’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동양의 학파가 ‘철학’으로 분류되고, 그 ‘철학’의 기준이 서양 철학으로 세팅되어 있는 상황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 보면 오해를 하기 십상이다. 동양 철학이 학문적인 기준에 미달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동양의 전통 학문이 서양의 학문보다 열등한 건가” 하는 고민으로 괴로워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두 학문이 애초에 대등하게 치환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피자를 '부침개'라고 부르면서 한국의 부침개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건 의미가 없다. 왜 이 부침개는 반죽을 따로 빚냐고, 부추가 안 들어가지 않았냐고 따지며 피자를 열등한 부침개라고 평가한다면 우스운 일일 것이다. 서양 철학을 기준으로 동양 철학을 논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피자집에 가서 부침개를 찾을 수 없듯, 동양 철학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대답과 동양 철학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서양 철학을 대할 때와 달라야 한다. 부침개만이 줄 수 있는 맛이 있고, 피자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처럼, 그래야 각각의 학문이 가진 맛과 매력을 보다 잘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쌓는다는 고사성어 격물궁리(格物窮理)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쌓는다는 고사성어 격물궁리(格物窮理)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쌓는다는 고사성어 격물궁리(格物窮理)

우리가 지식을 이루고 싶다면 모든 사물에 나아가서 그것의 이치를 강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 한 가지 내일 또 한 가지 궁구하여 힘을 다해 연마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탁 트일 것이라는 말이 격물궁리(格物窮理)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난 학자가 있었다. 격물궁리(格物窮理)의 학문을 닦으려는 서양의 학자들은 모 는 어른으로 숭배하였다. 그런데 그는 사람의 참된 복(福)이 어디에 있는가를 논의하면서 먼저 그것이 세상의 지 않다고 결정하였다. 참된 복(福)은 반드시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것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富)를 참된 복(福 닭은 바로 재물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富)가 아름다운 복(福)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 에 있지 않고 도리어 베풀어 사용함에 있다는 것이다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이자 심학의 대성자로 꼽히는 명나라의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 과 서, 역, 춘추, 예기, 오경을 공부한다. 유학(儒學)의 경전이다. 격물궁리(格物窮理)를 깨우치기 위해 21살 젊은 明)은 대나무를 마주 보고 자리를 잡는다. 7일 동안을 꼼짝 않고 쳐다보며 궁리만 하다가 병들어 눕고 만다. 크게 실망한 그는 유학을 버리고 불교와 도교, 서학인 천주학까지 두루 연구에 몰두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감인데 모든 종교가 무리하게 인연을 끊고, 정신의 위안을 실로 허망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유학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목숨을 건 탐구에 들어간다. 

그렇게 깨우 (陽明學)의 핵심 논리로서 세 가지 종지이다. 
논리(論理)의 종지인 心卽理(심즉리), 
위학(爲學)의 종지인 致良
론학(論學)의 종지인 知行合一(지행합일)이다.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주희(朱熹 1130-1200)의 해석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격물궁리 다. 격물궁리(格物窮理)는 나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그 나름의 이치가 있다.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만물의 이치 의미이다.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쌓는 것을 말한다

2022/05/09

[동학][김지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을 읽다가 ... 아니 이것 동학아냐?

(2) Facebook (2019)

[동학][김지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을 읽다가
... <아니 이것 동학아냐?>
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2003) 「공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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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고 긴 시간, 나는 그저 책밖에 읽은 게 없는 듯싶다. 지금의 나의 지식은 거의 그 무렵의 수많은 독서의 결과다. 그러나 일반적인 독서 외에 내가 참으로 힘을 집중해 ‘공부(工夫)’한 것은 네 가지였으니 첫째가 생태학, 둘째가 선불교(仙佛敎), 셋째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 넷째가 동학(東學)이었다.

첫째의 생태학은 맨 먼저 일반적인 환경생태학(環境生態學)으로 들어가 공공경제학(公共經濟學)을 거쳐 드볼과 세션의 심층생태학(深層生態學)의 소개서로, 거기서 다시 루돌프 바로와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학(社會生態學) 입문 서적으로 나아갔다. 생태사회주의니 생태마르크스주의니 기타 이것저것 독일 녹색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전망과 소개를 접하게 됐고 녹색당과 페트라 캘리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대충의 스케치들일 뿐이었으니 체계적이고 정확한 지식은 훗날 병사(病舍)로 옮긴 뒤던가 아니면 출옥 후 구해 읽은 것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 무렵의 사유와 상상력을 급전환시키는 데 그 스케치들은 결정적 촉매 노릇을 하였다. 생태학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경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낡아빠진 역학이나 사회구성체주의 따위 가지고는 살아 생동하는 생성적 공간과 시간 인식을 할 수 없게 됐다. 녹색운동은 새로운 변혁운동의 시발점이었고 생태학은 이 운동의 지침서였다.
그러나 생태학만으로 세계와 삶의 진화를 이해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 심오한 것이었으니, 나는 그 생태학 소개에 촉발되어 도리어 선(禪)과 불교에 관한 깊은 지식 및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다. 생태학, 특히 사회생태학이 새로운 사회변혁론의 근거라면 선불교야말로 인간의 영적(靈的) 깨달음과 영성적(靈性的) 소통(疏通)의 철학이었다. 나는 ‘금강경(金剛經)’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외우게 되었고, 고승들의 게송(偈頌)과 법어(法語) 200수(首) 가량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마음에 거침없는 푸른 하늘이, 가없는 우주의 바람이, 파도치는 드넓은 바다가 문득문득 나타나기 시작했고 거꾸로 뭇 생명의 생태학적 질병과 오염과 파괴, 죽임에 대한 연민과 자비가 어려운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것, 텅 빌 정도의 영적 깊이와 사회생태학적 파괴의 극복이나 생명평화의 새 사회 창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어떤 확실한 과학적 근거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나의 답답함이 있었으니 또한 진정으로 새로운 공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내가 기억해낸 것이 함석헌 선생의 옛 권유였다. 영성(靈性)과 생명(生命), 삶의 안팎을 과학적․신학적으로 함께 이해하자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을 읽는 것이 첩경이라는 권유였다.
나는 떼이야르의 이효상(李孝祥) 번역본 전집을 들여다 모조리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세 권 외에는 참으로 엉터리 번역이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主著)인 <인간현상>과 다른 책들의 영역본을 영한사전과 함께 들여다 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주저인 <인간현상>을 다 읽는 데 몇 달이 걸렸는지 알 수 없다. 참으로 어려운 과학서적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떼이야르는 참으로 나에게 이제까지의 모색과 앞으로의 나의 사상의 진로에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간단히 요약해서 그것은 ‘우주 진화의 3대 법칙(法則)’이다.
첫째, 우주 진화의 내면에는 의식의 증대가 있고
둘째, 우주 진화의 외면에는 복잡화의 증가가 있으며
셋째, 군집(群集)은 개별화한다는 3대 법칙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교호작용을 하는 것이니 우주 진화의 외면에서 물질이나 생명의 복잡화가 진행될수록 우주 진화의 내면에서 감각(感覺)이나 의식(意識)이나 정신(精神), 영성(靈性)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것이 진화의 실상이며 진화는 우선 종(種)적으로 군집화(群集化), 전체화(全體化)하지만 그것은 결국 개별화(個別化)하여 종내는 각각의 자유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생태학과 선불교 사이의 관계, 외면적 변혁과 내면적 명상의 관계 그리고 집단과 개체, 필연성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참다운 원리를 보았다.
그것을, 그것을 깨달은 날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아마도 발 셋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가 태양 속에서 날개를 푸드득 푸드득 활개치며 날아오르기 시작한다고나 할까. 눈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다고나 할까.
그 저명한 떼이야르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실현의 배후 촉매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톨릭의 공식 인정을 못 받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가톨릭의 우주관토마스 아퀴나스의 계층구조적 우주론, 즉 ‘토미즘’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준국가주의 위계질서는 바로 이 토미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아,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가 크게 놀란 것은 어느 날 대낮, 점심을 막 받고 앉은 바로 그 정오(正午)의 시간에 문득 깨달은 것!
“아니, 이것 동학(東學) 아냐?
그것이었다.
떼이야르 사상의 중핵(中核)은 바로 동학사상이었음을 크게 깨우친 것이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인가.
떼이야르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치밀하며 구체적이다. 고생물학(古生物學)의 고전이며 최고, 최대의 과학적 진화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간단한 우주 진화의 3대 법칙 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귀결된다.
그런데 바로 그 3대 법칙이 동학사상의 핵심이었다는 말이다.

동학의 핵심은 21자 주문, 그 중에서도 13자의 본주문(本呪文)에 있다. 본주문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万事知)’의 중핵은 또 맨 앞에 있는 ‘모실 시(侍)’ 한 자에 집중되어 있다.
최수운 자신이 해설해주고 있는 이 ‘시’ 한 글자의 뜻을 알아보자. 우선 한자로 쓰면, ‘시자(侍者)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이다.
뜻은 이렇다.
‘시’, 즉 ‘모심’이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옮겨 떨어질 수 없음을 각각 깨달아 자기 나름대로 실현한다(各知不移)이다.
첫째, 안으로 신령이 있으며(최수운), 우주 진화의 내면에 의식의 증대가 있다(떼이야르).
둘째,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최수운), 우주 진화의 외면에 복잡화의 증가가 있다(떼이야르).
셋째, 한 세상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옮겨 떨어질 수 없음을 각각 깨달아 자기 나름대로 실현하며(최수운), 군집(群集)은 반드시 개별화(個別化)한다(떼이야르).
도리어 세번째인 진화 법칙은 동학이 떼이야르보다 더 첨단적이고 최근의 진화론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종(種)이나 군집(群集)을 개체(個體)보다 먼저 세우는 떼이야르식 발생학을 비판하고 오히려 개체가 먼저 발생하되 그 개체마다의 내부에 있는 자율적인 전체성에 따라 개체들 나름대로 각각, 자기 나름의 전체, 자기 나름의 군집, 자기 나름의 종을 실현한다는 자유의 진화론, 자기 선택과 자기 조직화의 진화론이 훨씬 더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까닭이다.
내 안에서 내 생각의 파도가 내 생각의 주체에게로 한없이 하얗게 하얗게 밀려오고 있었다.
떼이야르는 지금으로부터 꼭 5만 년 전에 직립 사유인(直立 思惟人, 호모 사피엔스 에렉투스), 즉 똑바로 서서 걷고 의식하고 감각하며 사유하는 인간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인간, 사유를 사유하는 반성적 인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 출현하여 언어가 생기고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고생물학적․고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런데 최수운은 현생인류가 나타난 것, 즉 최초의 개벽이 5만 년 전이라고 못 박고, 다시 5만 년이 된 지금에 와서 신인 합일적(神人合一的) 신인간(新人間), 즉 ‘신인(神人)’이 개벽, 즉 후천개벽한다고 했다. 떼이야르와 최수운 둘 다 똑같이 현금과 같은 인류의 탄생이 5만 년 전이라고 본 것이다.
파도는 또 왔다.
떼이야르는 바로 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호모 사피엔스 에렉투스의 한복판에서 태어나는 사건, 즉 가시적인 외모는 전부 호모 사피언스 에렉투스인데 비가시적인 내면의 뇌세포 속에서 자의식이 그 극히 일부의 뇌세포 속에서 반자의식(反自意識)이 마치 별 뜨듯, 꽃봉오리 열리듯 반짝하고 열리는 그 순간을 내면과 외면의 양측에서 동시 파악하는 논리가 바로 ‘아니다, 그렇다’, ‘NO, YES’의 생명논리임을 주장하고 또 그렇게 적용하여 그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생명철학의 절정인 베르그송과 현대 생물학의 고전인 그레고리 베이트슨, 그리고 가시적 차원과 비가시적 차원 사이의 인식에 사용되는 ‘그렇다’와 ‘아니다’의 동시어법에 귀결되는 데이비드 보옴의 물리학에 두루 공통되는 생명논리인 바, 최수운의 글 ‘불연기연(不然其然, 아니다, 그렇다)’의 진화론법 안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미셸 세르에까지 이어질 듯하다.
파도는 또 다시 밀려온다.

13자 주문의 제2단계인 ‘조화에 일치하여 마음을 정한다(造化定)’는 노장학(老莊學)과 선불교(禪佛敎)를 통합한 논리이며 마지막 단계의 ‘만 가지 사실을 안다(万事知)’의 만사(万事)는 ‘수의 많음(多)’을 뜻하는 것으로 복희(伏羲)와 문왕(文王)의 역리(易理)의 비밀을 깨닫는 주역(周易)의 간역(簡易)을 말하고 정역(正易)을 예언한다. 나아가 20년 뒤에 나오는 연산(連山) 김일부(金一夫)의 마지막의 ‘앎(知)’은 ‘스스로 노력해 앎(知其道)’과 동시에 ‘그 앎을 계시받음(受其知)’이라 하여 동양(東洋)의 풍류선도(風流仙道)나 그리스도교적 깨달음의 핵심인 신비주의에 그대로 적합한 것이었다.
본디 우리의 풍류선도는 유․불․선(儒彿禪) 3교(三敎)를 아울러 가지면서(包含三敎) 동시에 뭇 생명을 사랑하여 진화시키는(接化群生) 생명의 철학이요, 생명의 사상이다. 이것이 다만 고색창연한 최치원의 주장인 줄로만 알았던 내게 그 가장 구체적이고 현대적인 과학적 논법과 증명을 통해 나타났으니, 오호라! 나는 이미 그 파도에 풍덩실 뛰어들고 하늘의 헤엄을 치고 논 것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며칠 동안 반은 정신이 나가 살았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머리 속은 온통 ‘시’ 한 자로 꽉 차버렸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시는 사랑이다. 그러나 시는 그 말 자체로 이미 사랑보다 훨씬 더 풍요하고 올바른 범주이니 높이는 사랑이요, 섬기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경건한 사랑 ‘모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심이야말로 삶, 사람, 살림, 생존, 동양식 생생화화(生生化化)와 서양식 진화의 핵심인 것이다.
나는 머지않아 가톨릭 교회가 떼이야르를 공식 인정하고 동양사상과의 역동적인 통합을 통해 ‘동학화(東學化)’하리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우선 내 민족의 지혜의 보석인 동학부터 내 자신의 모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빛 밝은 아침, 뻘겋게 녹슨 창살 사이로 흰 햇빛이 오묘한 느낌으로 비끼는 것을 바라보며 내 넋은 이미 서학(西學)과 동학(東學)을 탁월한 과학적 새 차원에서 통전하되 동학 쪽에 시중적(時中的, 균형을 잡되 때에 따라 좌우로 중심을 둔다)인 중심이 더 가 있는 ‘기우뚱한 균형’을 실현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그날 이후 나는 천도교(天道敎)가 아닌 원동학(原東學), 내 증조부의 그 동학에 돌아가 있음을, 아니 떼이야르의 고생물학(古生物學)과 최신 진화론의 과학 그리고 사회생태학과 선불교를 아우른 신동학(新東學)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놀라서, 놀라서 바라보면서 몇 날 몇 밤이 흥분 속에 지나갔는지 모른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이미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심의 철학’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톨릭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그대로 가톨릭에 머물렀으면 아마도 지금쯤 유명짜한 원로가 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백면(白面)이 그대로 더 좋다. 나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나그네인 까닭이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는 거북한 호칭보다 ‘형님’이라는 정겨운 호칭이 훨씬 마음에 든다.
어느 날 나는 지 주교님에게 솔직히 말씀드렸다.
“저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어디? 목포 말이야?”
“아니오. 동학입니다.”
“천도교 말이야?”
“아니오. 내 마음의 원동학(原東學)입니다.”
“좋아서?”
“네.”
“그럼 그러지 뭐! 자네가 헛소리할 사람이 아니지. 오죽 생각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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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학고재, 2003)에서 「공부」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http://www.gforest.or.kr/xe/board_chg/12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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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나도 떼이야르 드 샤르뎅을 읽어야지.

2022/05/04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알게 된 개념 마히야 후위야 : 네이버 블로그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알게 된 개념 마히야 후위야 : 네이버 블로그

신학과 철학 과학 사이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알게 된 개념 마히야 후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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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6. 23:11

 이웃추가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존재론에 대한 이슬람 철학의 개념이 있어서 검색을 하던 중에 이것을 일목요연히 정리한 아주 좋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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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 멤버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발제문을 2페이지 이내로 줄이라"고.
그 열화와 같은 성원에 부응하기 위해 줄이고 또 줄이고
그래도 3페이지가 나오는 발제문을 싹둑싹둑 가위질했었지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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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질 3장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첫번째는 본질과 존재의 관계.
 
 본질이란 존재와 대립하여 상관하는 개념이다.
본질은 항상 존재에 대해 본질이고,
또한 역으로 존재는 항상 본질의 존재다. 
 
 X가 지금 여기에 현전하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 스콜라 철학에서는 X에 대한 지각이 성립하기 이전에 그것의 전단계로서 더욱 원초적인아직 분석적 이성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X의 의식을 생각해요그렇다면 X는 아직 꽃이 아닌 거죠.  다만 막연하게아니 혼연스럽게’, 무분별적으로 무엇인가가 우리의 의식을 향해 자기를 드러내고 있을 뿐. 지난 번엔 이 상태가 구토를 불러 일으킨다고 했었지요. ㅎ~~이 상태에서의 X는 아직 어디에도 갈라진 틈이 없는 하나의 존재론적 덩어리예요. 갈라진 틈도 접붙인 틈도 없는 덩어리에 인식의 제2단계에서 이성이 갈라진 틈을 만들어 본질과 존재로 나누면 그것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X가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인식된다고 보는 게 스콜라 철학의 입장이예요. 이제야 존재하는 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죠. 본질과 존재의 이 분할을 이성의 가장 본원적인 작용이라 하더군요. 
 
 지금까지 하나의 전체인 무엇인가로서 어디에도 갈라진 틈을 보이지 않고 막연하게 규정도 분절도 없는 양태로서 현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던 X이성의 존재론적 분석의 빛에 쬐어 존재와 본질의 조합이 된다는 거죠. X가 존재하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로서예컨대 꽃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존재란 현실성 혹은 현전성의 원리여서 그것이 X를 현실화시켜 현전하게 하는 측면을 말해요
X는 존재함으로 인해 가장 절실하게 현실이고 실재인 거죠
그러나 존재는 X를 실재하게는 하지만 결코 X로 하여금 꽃답게 하지는 못합니다.

 X를 꽃답게 만드는 것은 X의 존재성이 아닌거죠. 거기에는 뭔가 다른 원리가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을 본질이라고 불러요. 꽃은 그 본질즉 꽃의 성질 때문에 꽃인 겁니다. 
그러나 또한 반대로 X의 본질은 X를 ……로서 규정은 하고 있지만 X의 존재를 보증하지는 않아요꽃의 성질은 다만 꽃의 성질일 뿐이고 현실에서 한 송이의 꽃도 피어나게 하지 못해요. 본질과 존재가 조합해야  비로소 X는 존재하는 꽃 이 되는 것이죠. 
 
 꽃이라는 말은 X의 존재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만 꽃이다라는 X의 본질을 정하고 고정시킨다그것에 의해 끊임없이 유동하는 존재의 혼동 가운데에서 꽃이라는 하나의 응고점이 나온다. 의식의 대상에는 반드시 본질이 있어요그 대상이 구체적인 사물이건 추상적인 내용이든 (그 본질이 꽃이나 사람 같은 구체적인 규정성일 필요는 없어요순자의 대공명 같은 일반적인 규정성이라도 상관없다는 거.) 어쨌든 무엇인가의 형태로 안에서 본질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의 초점을 X에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존재와 본질은 서로 모순적인 상태로 뒤엉켜 있어요. 
 
 X의 의식을 성립시키는 본질은 일반자이다. 결국 꽃의 성질이란 어떤 꽃에게도 공통되는 일반적인 성질이다. 이렇게 본질이 일반성을 갖는데 반해 실재하는 존재는 개별적이다.   
이 꽃을 진짜 이 꽃으로 체험하는 경우, 이 꽃에는 그냥 꽃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있다는 존재감각이 활동하고 있다. 이 꽃을 일반적인 꽃이 아니라 이 꽃답게 만드는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가 있고 그것은 일반자, 즉 보편적 본질과는 다른 또 다른 하나의 본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이 근원적 존재감각으로부터 나온다.
  
 이슬람의 스콜라 철학은 이런 시점을 가지고 본질을 둘로 나누었어요. 일반자, 즉 보편적 본질 마히야와 개체적 본질 후위야로. 요컨대 실재하는 꽃을 앞에 두고 '이 꽃'의 '이'에 절대적인 역점을 둘 것인가(후위야), '꽃'에 역점을 둘 것인가(마히야)에 의해 본질론은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심지어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독특한 개별 사물의 독자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리얼리티를 개별 사물의 존재론적 구조 자체의 내부에서 찾아 본질로 삼는 것이 후위야입니다. 이런 입장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려고 한다면 '보편적 본질'은 이성의 추상작용에 의해 만들어낸 개념적 일반자의 위치로 폄하되어 그 실재성을 박탈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요. 그러나 이런 개체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마히야의 실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상가들이 동서양에 적지 않게 존재했고 그들은 보편적 본질이 실재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어요. 이들에게 보편적 본질은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농밀한  존재감을 지닌 리얼리티를 말하구요.
 
 일반자로서의 본질은 말즉 사물의 이름과 매우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어요본질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입장이건 부정하는 입장이건 이 점에 관해서는 똑같죠본질의 실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말이 본질 환기적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고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말이 본질 지시적으로 작용한다고 봐요. 쉽게 말하자면 꽃이라는 이름이 본래는 실재하지 않는 꽃의 본질을 망상적으로 불러일으킨다고 보는 입장(본질 환기)과 실재하는 꽃의 실재하는 본질을 지시한다고 보는 입장 차이가 있을 뿐인 거죠. 이렇게 말이 의미하는 일반자즉 '마히야가 실재인가 비실재인가' 하는 문제는 불교철학의 입장과 힌두철학의 입장의 존재론적 대립의 주축으로 인도사상의 오랜 역사를 통해 왕성하게 논의되어 왔구요.
 
불교처럼 마히야를 부정하여 떨쳐 버리려는 입장과 달리 일반자인 본질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마히야가 어떤 형태로 실재하는지, 의식 차원에서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를 규명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거죠.
 
보편적 본질의 실재성에 관한 주장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보여주는 것이 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기준은 '실재하는 본질'을 사람이 의식의 어떤 층에서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이는지예요. 이 작업을 위해 의식을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으로 나눴어요. 물론 의식에 표면이나 심층이 있을 리 없지만 일상적인 조건아래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의식들(대승불교의 무의식, 릴케의 의식의 피라미드 밑바닥 같은)을 심층의식이라고 하기로 한 거죠. 

 
1
보편적 본질은 존재한다그것은 실재한다 해도 존재의 심층부에 실재하는 것이어서 존재의 표면에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식의 주체의 측면에서도 의식차원의 근본적인 전환이 당연히 요청된다.
신유학의 격물궁리
말라르메
2
보편적 본질이 체험적으로 인식되는 장소가 의식 심층 중에서도 샤머니즘과 어떤 종류의 신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가 성립하는 의식영역이다모든 존재자의 보편적 본질이 농후한 상징성을 갖는 아키타이프(원형)로 나타난다.
유무중도의 실재빛의 천사, 64만다라유대교 신비주의 세피로트 등
3
1형이 심층의식적 체험에 의해 포착하는 보편적 본질을 의식의 심층에서가 아니라 표층에서 이지적으로 인지한다형이상학적 일반자의 실재를 형이상학적 체험을 통해 직접 매개 없이 포착하려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표층의식적으로) 본질의 실재를 확인하는 것에 그친다.
공자의 정명론고대 인도의 니야바바이세시카 학파의 존재범주론
 
특히 제3형의 본질론에서 그 일반자를 마음 밖의 실재성을 무시하여 단지 순수하게 일반자로서 취급하면 순식간에 개념적 일반자결국은 보편적 개념이 되어 버리게 되는데요공손룡의 유명한 궤변(흰 말은 말이 아니다)은 보편적 본질을 경험적 실재성의 차원으로부터 일단 완전히 잘라내어 추상적 사유로 옮겨 본질론을 철저하게 개념구조이론으로서 전개시킨 예이고공자의 정명론에도 본질 개념화의 경향이 다분히 인정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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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장부터 하나 하나 공부해 나가기로 했어요. 다음 번 발제자는 효진. 
 
침뜸공부에서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 우리 몸이 자연 그 자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 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선입견과 관념을 털어내고 투명하게 사람을 만나는 게 진단과 치료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침뜸은 신경 및 체액의 조절을 거쳐 유기체 내의 병에 대한 저항력을 움직여서 통증을 멎게 하고, 열을 끄고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임을. 경혈과 내부 장기가 현저히 떨어져 있지만 그 경혈에 내부 장기의 반응이 나타나고, 
그 경혈에 침을 놓아서 해당장기의 이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동양의학의 정체관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었어요. 
 
후기가 늦어져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진땀 좀 흘렸네요. ㅋㅋ 
다음 번엔 깜박하지 않아야겠어요.   


출처: http://gamidang.com/bbs/board.php?bo_table=0401&wr_id=1132&sca=&sfl=wr_subject&stx=%EC%9D%98%EC%8B%9D%EA%B3%BC+%EB%B3%B8%EC%A7%88&sop=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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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서당 세미나]2014.02.19 후기 /의식과 본질 3장 본질과 존재, 일반화와 개체성/
 글쓴이 : 얼음마녀 | 작성일 : 14-02-27 00:56
조회 : 3,646  
혈자리 멤버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발제문을 2페이지 이내로 줄이라"고.
그 열화와 같은 성원에 부응하기 위해 줄이고 또 줄이고
그래도 3페이지가 나오는 발제문을 싹둑싹둑 가위질했었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