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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6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 네이버 블로그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일본 불교

2018. 5. 17. 9:18
https://blog.naver.com/byunsdd/221277712924


比叡山 輩出 祖師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홍법대사 구법행 좇는 시코쿠 순례 유명

김춘호 일본불교연구소

원문출처

지난 강좌에서 살펴본 사이초와 더불어 헤이안신불교(平安新佛敎)를 탄생시킨 인물이 쿠우카이(空海: 774-835)이다.

사이초는 법화일승의 천태종, 그리고 쿠우카이는 진언밀교의 진언종을 개창하였는데, 남도육종으로 대표되는 나라시대의 불교가 교학중심의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한데 비해, 천태종과 진언종은 실천적 대승행을 강조한다는 점이 다르다.



화가산현금강봉사소장 홍법대사좌상(和歌山県金剛峯寺所蔵 弘法大坐像)

쿠우카이는 774년 시코쿠(四国)의 카가와켄(香川県) 서북부에 위치한 젠츠지시(善通寺市)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에키노아타이 타키미(佐伯直田公)와 어머니 아토씨(阿刀氏) 사이의 3남이었는데, 널리 알려진 이름(유명)은 마오(眞魚)였다. 친가인 사에키노아타이는 지역의 대호족이었고, 외가인 아토씨는 대대로 유명한 학자 집안이었던 까닭에 매우 윤택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칸무(桓武)천황의 3남 이오(伊予)친왕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외숙 아토노 오오타리(阿刀大足)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한적(漢籍)을 익힌다.

788년 외숙 아토노 오오타리를 따라 상경하여 중앙 사에키(佐伯)가문(쿠우카이는 사누키(讃岐) 사에키씨임)의 우지데라(氏寺)였던 사에키잉(佐伯院)에 머물며 《논어》, 《효경》 등을 비롯한 유가 경전을 배운다.

792년 18세에 당시 관료 후보생을 교육하던 대학료(大学寮)에 들어가는데, 여기서는《춘추좌씨전》, 《모시》(시경詩經의 별칭), 《상서》(尙書, 중국전통 산문) 등을 배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쿠우카이는 유력 호족의 자재로서 자라며 유가 경전 등 외전의 폭넓은 학습을 통해 교양을 넓히며 관료로서 장래가 유망한 소년기를 보낸다. 그러던 그가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불문에 귀의하게 된 것은 한 사문과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쿠우카이와 같은 사누키 사에키가문 출신으로서 화엄종의 승려였던 카이묘(戒明)에게서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 즉 정해진 작법에 따라 100일간 진언을 100만법 외우면 모든 경전을 외우고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실천을 위해 고향인 시코쿠 일대와 나라켄(奈良県) 긴푸센(金峰山)의 성지들을 전전하며 수행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출가수행을 결심한 쿠우카이가 24세 때 불교의 수승함을 논하며 저술한 《삼교지귀(三敎指歸)》의 서문에는 당시 그가 현재의 도쿠사마켄(徳島県) 남부의 다이류지야마(大竜寺山), 고치켄(高知県) 무로토자키(室戸岬) 등지에서 구문지법을 수행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특히 무로토자키의 미구로도(御厨人窟) 동굴에서 입안에 명성(明星)이 날아 들어오는 신비체험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당시 미구로도 동굴에서는 하늘(空)과 바다(海)만 보였다고 하여 자신을 쿠카이(空海)라고 부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쿠우카이의 정식 수계에 관해서는 20세·25세·31세 수계설 등이 있는데, 804년 견당사가 조난되어 다시 견당사를 파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쿠우카이가 입당수도를 위해 견당사파견 직전인 31세(804)에 토다이지(東大寺) 계단원에서 득도수계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삼교지귀》의 찬술로부터 입당까지의 수년간은 자세한 전기가 전하지 않아 쿠우카이의 일생 중에서도 가장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부분이다. 다만 이즈음 나라의 쿠메데라(久米寺) 동탑 아래에서《대일경》을 감득하였다는 전설을 통해, 쿠우카이가 입당을 결심한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대일경》의 오의를 알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견당사 파견 직전까지 일개 사도승(私度僧)에 불과하였던 그가 견당사로 선발된 경위에 대해서도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유력 호족 출신으로서 천황가와도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견당사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어떻든, 쿠우카이는 사이초와 함께 제 16차 견당사의 일행으로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총 4척의 견당사 사절 중 2척은 조난되고 2척만이 중국에 도착하는데, 쿠이카이가 탄 배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복주(福州) 장계현(長溪県) 적안진(赤岸鎮)에 표착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처음에는 해적으로 오인되어 50일간 구금되는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804년 12월 23일 수도 장안에 도착한다.

805년 2월 서명사(西明寺)로 들어가 체류하면서 쿠우카이의 장안 거주가 시작되는데, 우선 그는 예천사(醴泉寺)의 인도승 반야삼장(般若三蔵)으로부터 밀교를 배우기 위해 필수적인 범어를 배운다. 그리고 같은 5월, 밀교의 제7조인 장안 청룡사(靑龍寺) 혜과(惠果)를 찾아가는데, 이후 약 반 년간 사사한다. 동년 7월에 금강계 관정, 8월에는 전법아사리위(伝法阿闍梨位) 관정을 받는다. 그리고 혜과로부터 전법의 증표로서 불사리, 금강존상, 가사, 공양구 등을 전수받는다. 동년 12월 15일 혜과 화상이 60세로 입적하자 쿠우카이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비문을 기초한다.

806년 3월 장안을 떠나 4월 월주에 도착하여 4개월간 체류하는데, 여기서 토목기술, 한약 등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경전 등을 수집하여, 8월 일본으로의 귀국선에 오른다. 806년 10월 일본에 도착한 쿠우카이는 자신이 당에서부터 들여온 물품의《청래목록(請來目錄)》을 조정에 제출하는데, 그 내용은 막대한 양의 밀교전적과 불상, 경전, 만다라, 기타 문물 등이었다.

당초 쿠우카이는 20년 기한의 유학승으로 파견되었는데, 2년 만에 귀국한 것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수도로 입경하지 못하고 있다가 809년 비로서 교토의 다카오산지(高雄山寺, 후에 神護寺)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듬해인 810년 이곳에서 국가 진호를 위한 수법을 행하고, 812년에는 히에잔의 사이초와 제자들에게 관정을 행하고 밀교를 가리킨다. 당시 불교계 최고의 실력자였던 사이초가 쿠우카이를 밀교의 스승으로 받들었던 것인데, 이를 계기로 무명이었던 쿠우카이에게 조정과 불교계의 관심이 집중된다.

816년 6월 쿠우카이는 고야산(高野山)을 국가와 수행자를 위한 도량으로 만들겠다고 사가(嵯峨)천황에게 상표(上表)하고, 같은 해 7월 그것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819년 봄에 고야산의 칠리사방(七里四方)을 결계하고 가람건립에 착수한다. 이 무렵《즉신성불의(即身成仏義)》,《성자실상의(声字実相義)》, 《우자의(吽字義)》,《문경비부론(文鏡秘府論)》,《전례만상명의(篆隷万象名義)》 등을 집필한다.




고야산 금강봉사(高野山 金剛峯寺)

821년 현재의 카가와켄(香川県)의 만노이케(満濃池, 일본최대 농업용저수지)의 개수를 지휘하는데, 아치형의 제방 등 당시 최신공법이 구사되었다고 한다. 822년 토다이지(東大寺)에 관정도량 진언원(灌頂道場眞言院)이 건립되고 헤이조(平城)천황이 관정을 받는다. 그리고 823년 교토의 동사(東寺)를 하사받아 진언밀교 도량으로서 개창하는데, 후에 천태종(사이초)의 밀교를 태밀(台密)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동사(東寺 : 쿠우카이)의 밀교를 동밀(東密)이라고 부르게 된다.

824년 소승도(少僧都)에 임명되어 승강(僧綱)의 일원이 되고, 828년에는 《종예종지원식병서(綜藝種智院式并序)》를 저술하고 동사에 서민들에게까지 문호가 개방된 사립 교육시설인 종예종지원(綜藝種智院)을 개설한다. 이곳은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다양한 사상과 학예를 망라한 종합 교육기관이었다고 한다. 현재 슈치잉대학(種智院大學)이 그 명맥을 잇고 있기도 하다.

830년 준나(淳和)천황을 위해 《비밀만다라십주심론(秘密曼荼羅十住心論)》10권을 저술하는데, 후에 이 책을 요약하여《밀장보약(秘蔵宝鑰)》 3권을 저술한다. 831년 5월 악창(惡瘡)에 걸리고, 6월 대승도(大僧都) 직을 사임하고 고야산에서 수행에 전념한다.

835년 1월 궁중의 진언원(眞言院)에서 고시치니치미슈호(後七日御修法, 매년 정월 8일부터 14일까지 천왕의 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진언밀교의 대법회)를 행하는데, 이 법회는 연중행사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전하다.

같은 해 3월 21일 고야산에서 입적한다. 921년 다이고(醍醐)천황으로부터 홍법대사(弘法大師)라는 익호가 내려진다.



시코쿠 88개소 순례

쿠우카이 이전의 진언밀교는 국가불교 체제하에서 비속한 대증적 주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도에서 전해진 정통밀교를 배우고 귀국하여 그것을 조직화, 통합화함은 물론 진언다라니 이면에 펼쳐진 장대한 밀교적 통일세계의 존재를 일본문화에 각인시킨다.

그리고 쿠우카이에 의해 형성된 밀교문화는 불교를 넘어 일본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사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밀교존상들은 일본불상을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입당 전에 쿠우카이가 수행했던 지역들은 성지로서 정착되어, 시코쿠 88개소(四国八十八っ個所), 긴푸센성지 등으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

일본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는 제도는 적절치 못합니다”


원문출처

“약속대로 진언(眞言)의 전수를 허락하신다니 한없이 기쁩니다. 변함없는 두터운 후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진언과 천태가 나란히 잘 전수되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념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의 배려까지 받게 되니 제 마음이 더 없이 굳건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인도하기 어렵고, 또한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제도는 너무나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진언과 천태의 양종은 서로 통할 뿐 아니라 궁극적인 가르침의 경지도 하나일 것입니다.”

일본 헤이안 불교 두 거목
편지 주고받으며 깊은 교유
함께 견당선 타고 당나라행
사이초는 천태사상 전수
구카이는 밀교사상 습득
귀국 후 서로 도왔지만
제자 등 문제로 결국 결별
종파와 성향 크게 달랐지만
헤이안불교 이끈 선각자



일본 천태종 개조 사이초 진영.

11세기 그려진 이 그림은 일본 국보로 지정됐으며, 현재 이치조지(一乘寺)에 보관돼 있다.

810년 8월, 일본 천태종 개조 사이초(最澄, 767∼822)는 감격스러웠다. 구카이(空海, 774∼835)로부터 진언의 전수를 허락받은 것이다. 사이초는 천태사상은 물론 계율과 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다만 새로운 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밀교에 대한 이해 부족이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사이초의 갈증을 채워줄 유일한 인물이 구카이였다. 천황과 가까웠던 사이초는 상소를 올려 구카이가 수도인 교토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누구보다 뛰어남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이초는 진리에 대한 고집스러움과 뜨거운 열정을 지녔다. 한 종파의 개조인 사이초가 세속의 나이도 어리고 법랍도 훨씬 적은 구카이를 진언의 스승으로 받든 것도 그의 열정에서 비롯됐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릴 각오가 돼 있던 그였다. 이런 사이초의 눈에도 구카이는 참으로 비범했다.

일본 진언종 개조인 구카이는 사누키국(讚岐國)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외가 쪽은 학문으로 유명했다. 그중 외숙부인 아토 노오타리(阿刀大足)는 간무(桓武, 737~806)천황의 아들인 이요친왕의 가정교사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구카이는 15살 때 외숙부를 따라 상경한 뒤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에 합격했다.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수재과정을 밟던 그는 천재적인 어학실력과 문장으로 늘 주목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카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한 사문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구카이는 그로부터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을 전해 들었다. 이 진언을 백만 번 독송하면 모든 불경의 경문을 암송하게 된다는 놀라운 밀교수행법이었다.

제가백가에 두루 밝았던 구카이가 처음부터 그 말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독송하면 할수록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암송 능력과 무관했다. 무상(無常)에 대한 절절한 체험이었다. 어린 시절 두 형을 잃어야했던 구카이. 그는‘귀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미인도 밀려오는 작은 파도보다 빨리 황천길로 떠나고, 고귀한 천자도 죽으면 한줌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지 않던가’라고 읊었다. 구카이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게 스러질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20살 구카이는 모든 젊은이들의 선망이었던 대학을 그만두었다. 대신 정식 득도와 수계를 거치지 않은 사도승(私度僧)의 길을 선택했다. 산중의 숲을 집으로 삼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했다. 오른손에는 108염주를 들고, 어깨에는 풀로 만든 돗자리를 둘러멨다. 자유로이 산천을 오가며 진언을 행하는 전형적인 방랑 수행자였다.

24살 때 일본 한문학사(漢文學史)의 백미로 평가받는‘삼교지귀(三敎指歸)’를 지었던 구카이. 자신의 출가선언서이기도 한 이 글에서 불교가 가장 수승한 가르침임을 천명했던 그는 31살 때 정식 출가자의 수순을 밟았다. 사도승으로서 배움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구카이는 출가한 그해 여러 어려운 관문을 거쳐 당나라로 떠나는 제16차 견당선에 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일본 진언종 개조 구카이 진영 일부.

1313년 조성된 것으로 교토 도지(東寺)에 보관돼 있다.

804년 7월6일, 사이초와 구카이의 첫 만남도 이 때였다. 38살의 사이초는 천태교학을 흥륭케 하려는 간무천황의 명을 받아 당에서 1년 동안의 체재를 허락받은 상태였다. 4대의 견당선 중 명성이 자자했던 사이초는 두 번째 배에 탔다. 무명의 구카이는 첫 번째 배에 올랐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뱃길. 생사를 넘나드는 두 달간의 항해 끝에 목적지인 명주(明州)에 도착한 배는 오직 두 번째 배뿐이었다. 첫 번째 배는 남쪽으로 표류해 복주(福州)에 닿았고, 세 번째 배는 규슈로 되돌아갔다. 네 번째 배는 폭풍에 휩쓸려 아예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 후한의 효헌황제 후예라는 사이초. 오미국(近江國) 출신으로 12살에 출가한 그는 19살 때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계를 받고는 돌연 히에이산(比叡山)으로 잠적했다. 사이초는 홀로 12년간 산에서 지내면 학문과 수행에 전념했다. 31살 때 천황을 가까이 모시는 관직을 맡은 그는‘법화경’은 물론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저술 강의에 탁월한 역량을 선보였다. 그런 과정에서 사이초는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보다 깊이 천태를 배우겠다는 뜻을 세웠다.

사이초는 어려서부터 당에서 건너온 율사 감진을 깊이 존경했다. 그가 천태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천태의 문헌을 처음 가져왔던 감진의 영향이 컸다. 당에 도착한 사이초는 꿈에도 그리던 천태산으로 향했다. 그는 천태 지의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그곳에서 보살계를 받았고, 좌주 행만(行萬)으로부터 천태의 법을 널리 펴라는 부촉을 받았다. 사이초가 당에 머무는 동안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불경의 수집이었다.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9개월 뒤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230부 46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적을 실을 수 있었다.

한편 첫 번째 배에 탔던 구카이는 5개월 험난한 여정 끝에 당의 수도 장안에 도착했다. 얼마 후 그는 청룡사(靑龍寺)에서 일생의 스승 혜과(慧果, 746~805)를 만났다. 불공삼장의 법을 이은 혜과는 구카이를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린 지 오래다. 오늘 서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으로 기쁘구나. 내 수명이 다하고 있는데도 법을 부촉할 사람이 없었다.”

혜과는 이국의 젊은 승려에게 마지막 생명의 심지를 불살라가며 정성껏 가르쳤다. 구카이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밀교의 정수를 온몸으로 습득해갔다. 그해 12월15일, 혜과는 구카이에게 불사리를 전수하며“세세생생 우리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밀교를 널리 전하자. 그대는 어서 귀국해 배운 가르침을 널리 전하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

구카이는 혜과의 장례식을 마치고 다음해 10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탄 배에는 경전·논소·진언 등 216부 461권, 혜과가 남긴 유물 13종을 비롯해 불상·만다라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장차 일본에 밀교의 새바람을 일으킬 중요한 전적들이었다.

구카이가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사이초는 이미 일본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그 배경에는 간무천황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 때 사이초는 무명에 가까운 구카이가 수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무진 애를 썼다. 천황에게 구카이의 뛰어남을 알리는가 하면 자신을 지원하던 귀족들이 구카이를 돕도록 주선했다. 시·글씨·문장에 두루 뛰어났던 구카이는 곧 궁중과 귀족사회에서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반면 사이초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806년 간무천황이 죽고 그를 이은 사가(嵯峨, 786~842)천황은 한시와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사이초보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구카이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시대는 천태사상이 아니라 밀교적 주술능력을 요구했다. 밀교수행의 목적은 현재의 신체 그대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에 있었다. 그러나 황실과 귀족들은 치병, 기우, 호국 등 밀교의 특정요소에 열광했다. 게다가 귀족들의 권한이 커지고 파벌이 나뉘면서 밀교의 기도법은 권력 다툼의 도구로 이용됐다.

사이초에게 당에서 불충분하게 배워온 밀교 지식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천태산에서 머물던 그는 장안에서 유행하던 밀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사이초는 구법순례의 도반인 구카이를 적극 돕는 동시에 밀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의존했다. 구카이도 사이초의 요청을 받아들여 밀교 서적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또 사이초의 애제자인 다이한(泰範) 등에게 직접 관정을 주고 밀교를 가르쳤다.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때다. 810년 8월19일, 사이초는 법화일승과 진언의 가르침은 어떤 차이도 없으니 서로 법을 전하자고 제안했다. 국가의 불교통제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당시 불교는 철저히 국가에 소속돼 있었다. 심지어 승려들이 백성을 위해 법을 설하지도 못할 정도로 통제가 심했다. 또 국가가 매년 득도할 수 있는 승려의 수를 종파별로 정하는‘넨분도샤(年分度者)’는 불교의 대중화를 막는 큰 걸림돌이었다.



구카이가 사이초에게 보낸 편지의 첫 부분.

일본 국보로 교토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에 소장돼 있다.

불교가 국가권력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설 수 있기를 꿈꾸었던 두 사람. 이들은 경전에 대해 논의했고, 아끼는 제자들을 교환해 정성껏 지도했다. 사이초와 구카이는 종파와 나이를 초월해 서로가 인정한 최고의 벗이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13년 11월, 구카이는‘이취석경(理趣釋經)’을 빌려달라는 사이초의 요청을 거절하는 서한을 보냈다. 구카이는 천태종 개조인 사이초가 밀교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듯싶다.

“비장(秘藏)의 오묘함은 글을 얻는 것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데 있습니다. 문자로 표현된 것은 찌꺼기이고 글은 깨진 기왓장입니다.”

이어 구카이는 사이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줍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법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법은 당신도 따르지 않고 나도 구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도를 위해 도를 구하고, 지금의 사람은 명리를 위해 도를 구합니다. 명리를 위해 도를 구하는 것은 구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도에 뜻이 있다면 자기를 잊어버리고 법을 도로 삼아야 합니다.”

구카이는 사이초에게 추구하는 길이 다르다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껄끄러운 관계는 한 동안 지속됐다. 816년 사이초는 구카이 문하에서 공부하던 제자 다이한에게 편지를 보내“법화일승과 진언일승이 어떤 우열이 있겠느냐?”며 이제 히에이산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자가 돌아오는 대신 구카이로부터 다이한을 옹호하는 편지를 받으며 둘의 관계는 막을 내렸다.

최대의 후원자, 최고의 벗, 뛰어난 제자까지 잃은 사이초는 교토를 떠나 간토(關東)지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죽는 날까지 식지 않았다. 그는 법상종의 논객 도쿠이치(德一)와 격렬한 불성논쟁을 벌였으며, 국가를 향해 자체적으로 계를 줄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요청했다. 국가로부터 불교의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사이초의 오랜 노력은 사후에야 빛을 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일째 되던 822년 6월11일,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에 대승계단을 세워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사이초의 열정으로 일궈낸 일본 최초의 자주적 교단이었다. 56살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뒀던 사이초.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천태종은 자신의 제자이자‘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저자인 엔닌(圓仁, 794~864)대에 이르러 진언종을 능가하는 최고의 교단으로 거듭난다.

구카이는 천황과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밀교를 널리 홍포했다. 827년 전국에 가뭄이 들자 밀교의 수법(修法)을 펼쳐 비가 내리게 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 등을 비롯해 인도, 중국, 일본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종합적으로 비판한 방대한 스케일의 사상서‘비밀만다라십주심론(秘密曼茶羅十住心論)’등 200여종의 명저들을 잇달아 집필했다. 또 농민들을 위해 치수관리를 맡는가하면 만년에는 학문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슈게이슈치인(綜芸種智院)을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도 전개했다. 슈게이슈치인은 일본에서 처음 서민에게 개방된 무료 교육기관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라는 구카이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이안(平安) 불교의 양대 산맥이자 가마쿠라 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히에이산의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와 고야산의 홍법대사 구카이.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홍법대사진적집성(弘法大師眞蹟集成)’에 수록돼 있다.


[출처]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작성자 byunsdd

12. 일본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 이재형 기자의 편지로 읽는 스님이야기 < 2015 연재모음 < 지난연재 < 기사본문 - 법보신문

12. 일본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 이재형 기자의 편지로 읽는 스님이야기 < 2015 연재모음 < 지난연재 < 기사본문 - 법보신문




12. 일본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기자명 이재형 기자
수정 2015.01.05 11:53
댓글 3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는 제도는 적절치 못합니다”
“약속대로 진언(眞言)의 전수를 허락하신다니 한없이 기쁩니다. 변함없는 두터운 후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진언과 천태가 나란히 잘 전수되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념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의 배려까지 받게 되니 제 마음이 더 없이 굳건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인도하기 어렵고, 또한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제도는 너무나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진언과 천태의 양종은 서로 통할 뿐 아니라 궁극적인 가르침의 경지도 하나일 것입니다.”

일본 헤이안 불교 두 거목
편지 주고받으며 깊은 교유

함께 견당선 타고 당나라행
사이초는 천태사상 전수
구카이는 밀교사상 습득

귀국 후 서로 도왔지만
제자 등 문제로 결국 결별

종파와 성향 크게 달랐지만
헤이안불교 이끈 선각자

▲ 일본 천태종 개조 사이초 진영. 11세기 그려진 이 그림은 일본 국보로 지정됐으며, 현재 이치조지(一乘寺)에 보관돼 있다.
810년 8월, 일본 천태종 개조 사이초(最澄, 767∼822)는 감격스러웠다. 구카이(空海, 774∼835)로부터 진언의 전수를 허락받은 것이다. 사이초는 천태사상은 물론 계율과 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다만 새로운 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밀교에 대한 이해 부족이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사이초의 갈증을 채워줄 유일한 인물이 구카이였다. 천황과 가까웠던 사이초는 상소를 올려 구카이가 수도인 교토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누구보다 뛰어남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이초는 진리에 대한 고집스러움과 뜨거운 열정을 지녔다. 한 종파의 개조인 사이초가 세속의 나이도 어리고 법랍도 훨씬 적은 구카이를 진언의 스승으로 받든 것도 그의 열정에서 비롯됐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릴 각오가 돼 있던 그였다. 이런 사이초의 눈에도 구카이는 참으로 비범했다.

일본 진언종 개조인 구카이는 사누키국(讚岐國)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외가 쪽은 학문으로 유명했다. 그중 외숙부인 아토 노오타리(阿刀大足)는 간무(桓武, 737~806)천황의 아들인 이요친왕의 가정교사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구카이는 15살 때 외숙부를 따라 상경한 뒤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에 합격했다.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수재과정을 밟던 그는 천재적인 어학실력과 문장으로 늘 주목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카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한 사문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구카이는 그로부터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을 전해 들었다. 이 진언을 백만 번 독송하면 모든 불경의 경문을 암송하게 된다는 놀라운 밀교수행법이었다.

제가백가에 두루 밝았던 구카이가 처음부터 그 말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독송하면 할수록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암송 능력과 무관했다. 무상(無常)에 대한 절절한 체험이었다. 어린 시절 두 형을 잃어야했던 구카이. 그는 ‘귀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미인도 밀려오는 작은 파도보다 빨리 황천길로 떠나고, 고귀한 천자도 죽으면 한줌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지 않던가’라고 읊었다. 구카이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게 스러질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20살 구카이는 모든 젊은이들의 선망이었던 대학을 그만두었다. 대신 정식 득도와 수계를 거치지 않은 사도승(私度僧)의 길을 선택했다. 산중의 숲을 집으로 삼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했다. 오른손에는 108염주를 들고, 어깨에는 풀로 만든 돗자리를 둘러멨다. 자유로이 산천을 오가며 진언을 행하는 전형적인 방랑 수행자였다.

24살 때 일본 한문학사(漢文學史)의 백미로 평가받는 ‘삼교지귀(三敎指歸)’를 지었던 구카이. 자신의 출가선언서이기도 한 이 글에서 불교가 가장 수승한 가르침임을 천명했던 그는 31살 때 정식 출가자의 수순을 밟았다. 사도승으로서 배움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구카이는 출가한 그해 여러 어려운 관문을 거쳐 당나라로 떠나는 제16차 견당선에 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 일본 진언종 개조 구카이 진영 일부. 1313년 조성된 것으로 교토 도지(東寺)에 보관돼 있다.



804년 7월6일, 사이초와 구카이의 첫 만남도 이 때였다. 38살의 사이초는 천태교학을 흥륭케 하려는 간무천황의 명을 받아 당에서 1년 동안의 체재를 허락받은 상태였다. 4대의 견당선 중 명성이 자자했던 사이초는 두 번째 배에 탔다. 무명의 구카이는 첫 번째 배에 올랐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뱃길. 생사를 넘나드는 두 달간의 항해 끝에 목적지인 명주(明州)에 도착한 배는 오직 두 번째 배뿐이었다. 첫 번째 배는 남쪽으로 표류해 복주(福州)에 닿았고, 세 번째 배는 규슈로 되돌아갔다. 네 번째 배는 폭풍에 휩쓸려 아예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 후한의 효헌황제 후예라는 사이초. 오미국(近江國) 출신으로 12살에 출가한 그는 19살 때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계를 받고는 돌연 히에이산(比叡山)으로 잠적했다. 사이초는 홀로 12년간 산에서 지내면 학문과 수행에 전념했다. 31살 때 천황을 가까이 모시는 관직을 맡은 그는 ‘법화경’은 물론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저술 강의에 탁월한 역량을 선보였다. 그런 과정에서 사이초는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보다 깊이 천태를 배우겠다는 뜻을 세웠다.

사이초는 어려서부터 당에서 건너온 율사 감진을 깊이 존경했다. 그가 천태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천태의 문헌을 처음 가져왔던 감진의 영향이 컸다. 어쩌면 사이초의 의식 깊은 곳에서는 자신에게 대륙인의 피가 흐른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에 도착한 사이초는 꿈에도 그리던 천태산으로 향했다. 그는 천태 지의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그곳에서 보살계를 받았고, 좌주 행만(行萬)으로부터 천태의 법을 널리 펴라는 부촉을 받았다. 사이초가 당에 머무는 동안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불경의 수집이었다.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9개월 뒤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230부 46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적을 실을 수 있었다.

한편 첫 번째 배에 탔던 구카이는 5개월 험난한 여정 끝에 당의 수도 장안에 도착했다. 얼마 후 그는 청룡사(靑龍寺)에서 일생의 스승 혜과(慧果, 746~805)를 만났다. 불공삼장의 법을 이은 혜과는 구카이를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린 지 오래다. 오늘 서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으로 기쁘구나. 내 수명이 다하고 있는데도 법을 부촉할 사람이 없었다.”

혜과는 이국의 젊은 승려에게 마지막 생명의 심지를 불살라가며 정성껏 가르쳤다. 구카이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밀교의 정수를 온몸으로 습득해갔다. 그해 12월15일, 혜과는 구카이에게 불사리를 전수하며 “세세생생 우리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밀교를 널리 전하자. 그대는 어서 귀국해 배운 가르침을 널리 전하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

구카이는 혜과의 장례식을 마치고 다음해 10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탄 배에는 경전·논소·진언 등 216부 461권, 혜과가 남긴 유물 13종을 비롯해 불상·만다라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장차 일본에 밀교의 새바람을 일으킬 중요한 전적들이었다.

구카이가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사이초는 이미 일본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그 배경에는 간무천황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 때 사이초는 무명에 가까운 구카이가 수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무진 애를 썼다. 천황에게 구카이의 뛰어남을 알리는가 하면 자신을 지원하던 귀족들이 구카이를 돕도록 주선했다. 시·글씨·문장에 두루 뛰어났던 구카이는 곧 궁중과 귀족사회에서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반면 사이초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806년 간무천황이 죽고 그를 이은 사가(嵯峨, 786~842)천황은 한시와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사이초보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구카이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시대는 천태사상이 아니라 밀교적 주술능력을 요구했다. 밀교수행의 목적은 현재의 신체 그대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에 있었다. 그러나 황실과 귀족들은 치병, 기우, 호국 등 밀교의 특정요소에 열광했다. 게다가 귀족들의 권한이 커지고 파벌이 나뉘면서 밀교의 기도법은 권력 다툼의 도구로 이용됐다.

사이초에게 당에서 불충분하게 배워온 밀교 지식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천태산에서 머물던 그는 장안에서 유행하던 밀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사이초는 구법순례의 도반인 구카이를 적극 돕는 동시에 밀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의존했다. 구카이도 사이초의 요청을 받아들여 밀교 서적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또 사이초의 애제자인 다이한(泰範) 등에게 직접 관정을 주고 밀교를 가르쳤다.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때다. 810년 8월19일, 사이초는 법화일승과 진언의 가르침은 어떤 차이도 없으니 서로 법을 전하자고 제안했다. 국가의 불교통제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당시 불교는 철저히 국가에 소속돼 있었다. 심지어 승려들이 백성을 위해 법을 설하지도 못할 정도로 통제가 심했다. 또 국가가 매년 득도할 수 있는 승려의 수를 종파별로 정하는 ‘넨분도샤(年分度者)’는 불교의 대중화를 막는 큰 걸림돌이었다.


▲ 구카이가 사이초에게 보낸 편지의 첫 부분. 일본 국보로 교토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에 소장돼 있다.



불교가 국가권력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설 수 있기를 꿈꾸었던 두 사람. 이들은 경전에 대해 논의했고, 아끼는 제자들을 교환해 정성껏 지도했다. 사이초와 구카이는 종파와 나이를 초월해 서로가 인정한 최고의 벗이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13년 11월, 구카이는 ‘이취석경(理趣釋經)’을 빌려달라는 사이초의 요청을 거절하는 서한을 보냈다. 구카이는 천태종 개조인 사이초가 밀교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듯싶다.

“비장(秘藏)의 오묘함은 글을 얻는 것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데 있습니다. 문자로 표현된 것은 찌꺼기이고 글은 깨진 기왓장입니다.”

이어 구카이는 사이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줍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법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법은 당신도 따르지 않고 나도 구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도를 위해 도를 구하고, 지금의 사람은 명리를 위해 도를 구합니다. 명리를 위해 도를 구하는 것은 구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도에 뜻이 있다면 자기를 잊어버리고 법을 도로 삼아야 합니다.”

구카이는 사이초에게 추구하는 길이 다르다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껄끄러운 관계는 한 동안 지속됐다. 816년 사이초는 구카이 문하에서 공부하던 제자 다이한에게 편지를 보내 “법화일승과 진언일승이 어떤 우열이 있겠느냐?”며 이제 히에이산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자가 돌아오는 대신 구카이로부터 다이한을 옹호하는 편지를 받으며 둘의 관계는 막을 내렸다.

최대의 후원자, 최고의 벗, 뛰어난 제자까지 잃은 사이초는 교토를 떠나 간토(關東)지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죽는 날까지 식지 않았다. 그는 법상종의 논객 도쿠이치(德一)와 격렬한 불성논쟁을 벌였으며, 국가를 향해 자체적으로 계를 줄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요청했다. 국가로부터 불교의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사이초의 오랜 노력은 사후에야 빛을 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일째 되던 822년 6월11일,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에 대승계단을 세워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사이초의 열정으로 일궈낸 일본 최초의 자주적 교단이었다. 56살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뒀던 사이초.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천태종은 자신의 제자이자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저자인 엔닌(圓仁, 794~864)대에 이르러 진언종을 능가하는 최고의 교단으로 거듭난다.

구카이는 천황과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밀교를 널리 홍포했다. 827년 전국에 가뭄이 들자 밀교의 수법(修法)을 펼쳐 비가 내리게 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 등을 비롯해 인도, 중국, 일본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종합적으로 비판한 방대한 스케일의 사상서 ‘비밀만다라십주심론(秘密曼茶羅十住心論)’ 등 200여종의 명저들을 잇달아 집필했다. 또 농민들을 위해 치수관리를 맡는가하면 만년에는 학문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슈게이슈치인(綜芸種智院)을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도 전개했다. 슈게이슈치인은 일본에서 처음 서민에게 개방된 무료 교육기관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라는 구카이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이안(平安) 불교의 양대 산맥이자 가마쿠라 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히에이산의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와 고야산의 홍법대사 구카이.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홍법대사진적집성(弘法大師眞蹟集成)’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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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경 - 위키백과, 『大毘盧遮那経』(だいびるしゃなきょう)、あるいは『大日経』(だいにちきょう)Vajrayana

대일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일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태장계 만다라: 가운데에 여덟 개의 연꽃 잎이 있는 원이 있는데 이 원의 중심부에 대일여래가 있으며 각 연꽃 잎에도 한 명의 부처 또는 보살이 있다

대일경(大日經)》은 불교의 밀교의 경전이다.[1] 정확한 명칭은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이다.[1] 경명의 뜻은 "대일여래(大日如來: 비로자나불)가 성불(成佛)하여 신묘한 변화를 나타내고 가지(加持: 부처의 대자대비한 힘의 가호를 통해 중생을 부처와 일체가 되는 경지로 이끄는 것)를 행하는 경"이다.[1]

《대일경》은 7세기 중엽 서부 인도에서 성립되었다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선무외(善無畏: 637~735)의 한역과 9세기 초엽에 인도의 승려 시렌드라 보디와 티베트의 번역관 페르체크의 공역에 의한 티베트어 역본이 있다.[1]

진언 밀교(眞言密敎)의 근본성전 가운데 하나로서 《금강정경(金剛頂經)》과 함께 양부(兩部)의 대경(大經)으로서 숭상되고 태장계 만다라(胎藏界曼茶羅: 부처의 자비심을 어머니의 모태에 비유한 그림)가 성립하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1]

한역본은 7권 36품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앞의 6권 31품이 《대일경》의 원본으로, 당나라의 학승(學僧) 무행(無行)이 인도에 가서 입수한 것이고, 32품 이하의 제7권은 선무외(善無畏)가 가져와서 번역하여 합본(合本)했다고 한다.[1]

내용은 제1품은 교상(敎相: 밀교의 교의)을, 제2품에서 31품까지는 사상(事相: 밀교 의례의 실천)을, 마지막 32품에서 36품까지는 공양(供養)에 관한 규정을 서술하고 있다.[1]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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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毘盧遮那成仏神変加持経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大毘盧遮那成仏神変加持経』(だいびるしゃなじょうぶつじんべんかじきょう)、略して大毘盧遮那経』(だいびるしゃなきょう)、あるいは『大日経』(だいにちきょう)は、大乗仏教における密教経典である。成立時期には諸説あるが、7世紀の中頃が穏当な説である[1]。7世紀半の前後約30年間という栂尾祥雲1933年発表の説が一般に承認されている[2]

概要[編集]

インドからにやってきた善無畏Śubhakarasiṃha、637-735)と唐の学僧たちによって724年に漢訳された。また、812年にはシーレーンドラボーディ(Śīlendrabodhi)とペルツェク(dPal brTsegs)によってチベット語に翻訳された。しかし、サンスクリット原本は未だ発見されていない。チベット訳に記されているサンスクリット名は、Mahāvairocana-abhisaṃbodhi-vikurvita-adhiṣṭhāna-vaipulyasūtra-indrarāja nāma dharmaparyāya(『大毘盧遮那成仏神変加持という方等経の大王と名付くる法門』)である。

内容[編集]

胎蔵曼荼羅

漢訳『大日経』は、全7巻36品であるが、この内最初の第6巻31品が中核で、第7巻5品は供養儀軌で善無畏が別に入手した梵本を訳して付加したものと見られている[3]

内容は、真言宗のいわゆる事相と教相に相当する2つの部分から成り立つが、前者である胎蔵曼荼羅(の原形)の作法や真言、密教の儀式を説く事相の部分が非常に多い。また、この部分の記述は具体的であるが、師匠からの直接の伝法がなければ、真実は理解できないとされている[4]

教相に相当するのは「入真言門住心品」だけといってよく、ここで密教の理論的根拠が説かれている[5]。構成は、毘盧遮那如来金剛手(秘密派の主たるもの)の対話によって真言門を説き明かしていくという、初期大乗経典のスタイルを踏襲している。

要諦は、金剛手の問いに対し、毘盧遮那如来が一切智智[6]を解き明かすことにあり、菩提心とは何かを説くところにある。

仏の言(のたま)わく、菩提心を因と為し、大悲を根本と為し、方便を究竟と為す
秘密主、云何(いかん)が菩提とならば、謂(いわ)く実の如く自心を知るなり
秘密主、是の阿耨多羅三藐三菩提は、乃至(ないし)、彼の法として少分も得可(うべ)きこと有ること無し。
何を以ての故に、虚空の相は是れ菩提なり、知解の者も無く、亦た開暁(のもの)[注 1]も無し。
何を以ての故に、菩提は無相なるが故に。秘密主、諸法は無相なり、謂く虚空の相なり。[7]
佛言菩提心爲因。大悲爲根本[注 2][注 3]。方便爲究竟。
祕密主云何菩提。謂如實知自心。
祕密主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乃至彼法。少分無有可得。
何以故。虚空相是菩提。無知解者。亦無開曉。
何以故。菩提無相故。祕密主。諸法無相。謂虚空相。[注 4]

日本語訳・注釈書[編集]

脚注[編集]

[脚注の使い方]

注釈[編集]

  1. ^ 「さとる者」の意。
  2. ^ 磧砂蔵[8]・嘉興蔵(径山蔵・万暦蔵[9])・清蔵(中国語版)[10]および大正蔵では「悲」と作る箇所を、『大日本校訂縮刷大蔵経』(縮蔵)[11]等の流布本では「大悲」に作る。また注釈書に引用された当該箇所では、仁和寺本を底本にしたとする大正蔵の『大日経疏』[12]では「悲為根」となっているが、安達泰盛(1231-1285年)による高野山刊本(1277-1279年に刊行)では「大悲為根」となっている[13]。卍続蔵経に収録された台密系の『大日経義釈』も引用箇所を「大悲為根」とする[14]
  3. ^ 蔵訳はリタン版、デルゲ版、北京版、プタク写本いずれも「rtsa ba ni snying rje chen po'o」とあり、漢訳流布本における「大悲」(snying rje chen po)と同じである。ブッダグヒヤの『大日経広釈 (Bhāṣya)』(デルゲ版)に於ける当該箇所の引用では「snying rje ni rtsa ba'o」とあり、大正蔵と同じく「悲」(snying rje)である。
  4. ^ 原文は『大日本校訂縮刷大蔵経』(縮蔵)に依った[11]

出典[編集]

  1. ^ 金岡秀友「大日経」 -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小学館。
  2. ^ 山本匠一郎「『大日経』の資料と研究史概観」2012年 『現代密教』23号, p.73-102 pdf p.88
  3. ^ 山本匠一郎「『大日経』の資料と研究史概観」p.78
  4. ^ 小林靖典「『大日経』の講伝について」2015年現代密教26号, p.15-31pdfp.15-16
  5. ^ 宮坂宥勝『空海曼荼羅』1992年 法藏館 ISBN 4-8318-8058-2。 p.67
  6. ^ 一切智者の智。 渡辺章悟『般若経の意図するもの』東洋思想文化 = Eastern philosophy and culture 5 122(1)-99(24), 2018-03 pdfp.116
  7. ^ 訓読は權田雷斧譯『國譯大毗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8. ^ 磧砂藏分冊目錄 - 【觀世心編輯】
  9. ^ 東京大学総合図書館所蔵 万暦版大蔵経(嘉興蔵)アーカイブ・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巻1 p.5 。
  10. ^ 乾隆大藏經:1738年完成、清蔵、龍蔵とも。第48冊 第526部 大乘單譯經 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七卷 影印pdf、p.162 上段。
  11. a b 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昭和再訂 大日本校訂大蔵経』・秘密部・閏1 (縮刷大蔵経刊行会による復刻版)1937年・14コマ右・10行目 。
  12. ^ 『大正新脩大蔵経勘同目録』p.466、505コマ中314コマ目。
  13. ^ 『大毘盧遮那成佛經疏』(建治3-弘安2 [1277-1279])第一巻 54-55コマに「菩提心為因大悲為根方便為究竟」とあ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4. ^ X23n0438_001 大日經義釋 第1卷 (CBETA 漢文大藏經)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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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로 노 차나 성 불신 변가지경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오오비노 차나 세이 불신 변가지경』(다이비루샤나조부츠진벤카지쿄), 약어 『오오 비노 차나케이 』(다이비루샤나쿄), 혹은 『대일경  (다이 니치쿄)는 대승 불교 의 밀교 경전이다. 성립시기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7세기 중반이 온건한 설이다 [1] . 7세기 반의 전후 약 30년간이라는栂尾祥雲1933년 발표의 설이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다 [2] .

개요 편집 ]

인도 에서 당나라 로 온 선무반 ( Śubhakarasiṃha , 637-735)과 당나라 학승들에 의해 724년에 한역되었다. 또한 812년에는 씨레인 드라보디( Śīlendrabodhi )와 페르체크( dPal brTsegs )에 의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티베트 번역에 기재되어 있는 산스크리트명은, Mahāvairocana-abhisaṃbodhi-vikurvita-adhiṣṭhāna-vaipulyasūtra-indrarāja nāma dharmaparyāya (『대장노 차나성 불신 변가지』라고 하는  등경 .

내용 편집 ]

태장 만다라

한역 『대일경』은 전 7권 36품이지만, 이 중 최초의 제6권 31품이 핵심이며, 제7권 5품은 공양 의궤 로 선무반이 따로 입수한 가모모토를 번역해 추가 된 것으로 보인다 [3] .

내용은 진언종 의 이른바 사상과 교상 에 상당하는 2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지지만, 전자인 태장 만다라 (원형)의 작법과 진언, 밀교의 의식을 전하는 사상의 부분이 매우 많다. 또, 이 부분의 기술은 구체적이지만, 스승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전법이 없으면, 진실은 이해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4] .

교상에 상당하는 것은 「입진언문 주심품」만이라고 해도 되고, 여기서 밀교의 이론적 근거가 설설되어 있다 [5] . 구성은毘盧遮那如来金剛手(비밀파의 주된 것)의 대화에 의해 진언문을 설명해 나간다는 초기 대승 경전의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다.

요망은 금강수의 물음에 대해 毘盧遮那如来가 전혀 지치 [6] 를 밝히는 데에 있으며, 보리심 이란 무엇인가를 설득하는 곳에 있다.

부처님의 말  듣고 , 보리심을 원인으로 하고, 대비 를 근본으로 하고, 방편 을 궁수로 한다 .
비밀주,云何(이칸)  보제 라면, 우와 열매처럼 자심을 알게 된다 .
비밀주, 시의 아소 다라 삼개 미보제 는, 아니 , 그의 법으로서 소분도 얻을 수 있다는 것 없음.
무엇을 이후로 허공의 상은 꼭 보살펴져, 지해의 사람도 없고, 향한 개창(의 것) [주 1] 도 없음.
무엇을 이후로, 보제는 무상이 되기 때문에. 비밀주, 제법은 무상이 되고, 우울한 허공의 상이. [7]
불언 보제심심인. 대비 근본 [주 2] [주 3] . 방편 爲究竟.
祕密主云何菩提. 근려 實知 자심.
祕密主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 그 법. 소량 무유 가득.
무엇 이후. 허공상 시보제. 무지해자. 亦無開曉.
무엇 이후. 보리 무상고. 祕密主. 제법 무상. 우상 공상. [주 4]

일본어 번역·주석서 편집 ]

각주 편집 ]

각주 사용법 ]

주석 편집 ]

  1.  「사토루자」의 뜻.
  2. ^ 아키사조 [8] ·가흥장(경산장·만력장 [9] )·청장 (중국어판) [10] 및 다이쇼쿠라 에서는 「슬」이라고 만드는 개소를, 「대일본교정축쇄 대장경」 (축장) [11] 등의 유포책에서는 「대비」로 만든다. 또 주석서에 인용된 해당 개소에서는, 니와지본을 저본으로 했다고 하는 다이쇼쿠라의 『대일경소』[12] 에서는 「비위근」이 되고 있지만, 아다치 야스모리 (1231-1285년) 에 의한 고야산 간본(1277-1279년에 간행)에서는 「대비위근」이 되고 있다 [13] . 비속장경 에 수록된 대 밀계 의 「대일경의석」도 인용 개소를 「대비위근」으로 한다 [14] .
  3. ^ 장역은 리탄판, 델게판, 베이징판, 푸타크 사본 모두 「rtsa ba ni snying rje chen po'o」라고 하며, 한역 유포본에 있어서의 「대비」( snying rje chen po )와 같다. 부다구히야의 『대일경광석(Bhāṣya)』(델게판)에 있어서 해당 개소의 인용에서는 「snying rje ni rtsa ba'o」라고 하며, 대정장과 마찬가지로 「슬」( snying rje )이다.
  4. ^ 원문은 『대일본교정 축쇄 대장경』(축장)에 의했다 [11] .

출처 편집 ]

  1.  가네오카 히데토모 , ' 대일경 ' - 일본 대백과 전서(닛포니카) , 쇼가쿠칸.
  2.  야마모토 타카이치로 「『대일경』의 자료와 연구사 개관」2012년 「현대 밀교」23호, p.73-102 pdf p.88
  3.  야마모토 타카이치로 「『대일경』의 자료와 연구사 개관」p.78
  4.  고바야시 야스노리 「『대일경』의 강전에 대해」2015년 현대 밀교 26호, p.15-31 pdf p.15-16
  5. 미야자카 凥勝『空海曼荼羅』1992년 호랑 관 ISBN 4-8318-8058-2 . p.67
  6. ^ 전혀 지자의 지. 와타나베 쇼오 '반청경의 의도하는 것' 동양 사상 문화 = Eastern philosophy and culture 5 122(1)-99(24), 2018-03 pdf p.116
  7. ^ 훈독은權田雷斧譯『國譯大毗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8. ↑ 아키사라 분분 눈금 - 【모세세심편배】
  9.  도쿄대학 종합 도서관 소장
  10.  건류대藏經:1738년 완성, 청장, 용장 모두. 제48권 제 526 부
  11. ↑ b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쇼와 재정 대일본 교정 대장경」・비밀부・윤1(축쇄 대장 경간행회에 의한 복각판) 1937년・14컷 오른쪽・10행째.
  12. 『다이쇼 신겨대장경 감동목록』 p.466, 505컷 중 314컷째.
  13. ^ 『대장노 차나성 불경기』(건치3-홍안2 [1277-1279]) 제1권 54-55컷에 “보제심위인 대비위근방편위 궁수”라고 있다.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14. ↑ X23n0438_001 다이 니치 츠요시 제 1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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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jray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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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jra and bell (ghanta), which are classic ritual symbols of Vajrayāna

Vajrayāna (Sanskritवज्रयान, "thunderbolt vehicle", "diamond vehicle", or "indestructible vehicle" ) along with MantrayānaGuhyamantrayānaTantrayānaSecret MantraTantric Buddhism, and Esoteric Buddhism are names referring to Buddhist traditions associated with Tantra and "Secret Mantra", which developed in the medieval Indian subcontinent and spread to TibetNepalEast AsiaMongolia and other Himalayan states.

Vajrayāna practices are connected to specific lineages in Buddhism, through the teachings of lineage holders. Others might generally refer to texts as the Buddhist Tantras.[1] It includes practices that make use of mantrasdharanismudrasmandalas and the visualization of deities and Buddhas.

Traditional Vajrayāna sources claim that the tantras and the lineage of Vajrayāna was taught by the Buddha Shakyamuni and other figures such as the bodhisattva Vajrapani and Padmasambhava. Contemporary historians of Buddhist studies meanwhile argue that this movement dates to the tantric era of medieval India (c. 5th century CE onwards).[2]

According to Vajrayāna scriptures, the term Vajrayāna refers to one of three vehicles or routes to enlightenment, the other two being the Śrāvakayāna (also known pejoratively as the Hīnayāna) and Mahāyāna (a.k.a Pāramitāyāna).

There are several Buddhist tantric traditions that are currently practiced, including Indo-Tibetan BuddhismChinese Esoteric BuddhismShingon Buddhism and Newar Buddhism.

Terminology[edit]

In Tibetan Buddhism practiced in the Himalayan regions of IndiaNepal, and Bhutan, Buddhist Tantra is most often termed Vajrayāna (Tib. རྡོ་རྗེ་ཐེག་པ་, dorje tekpa, Wyl. rdo rje theg pa) and Secret mantra (Skt. Guhyamantra, Tib. གསང་སྔགས་, sang ngak, Wyl. gsang sngags). The vajra is a mythical weapon associated with Indra which was said to be indestructible and unbreakable (like a diamond) and extremely powerful (like thunder). Thus, the term is variously translated as Diamond Vehicle, Thunderbolt Vehicle, Indestructible Vehicle and so on.

Chinese Esoteric Buddhism it is generally known by various terms such as Zhēnyán (Chinese: 真言, literally "true word", referring to mantra), Tángmì or Hanmì (唐密 - 漢密, "Tang Esotericism" or "Han Esotericism"), Mìzōng (密宗, "Esoteric Sect") or Mìjiao (Chinese: 密教; Esoteric Teaching). The Chinese term  密 ("secret, esoteric") is a translation of the Sanskrit term Guhya ("secret, hidden, profound, abstruse").[3]

In Japan, Buddhist esotericism is known as Mikkyō (密教, "secret teachings") or by the term Shingon (a Japanese rendering of Zhēnyán), which also refers to a specific school of Shingon-shū (真言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