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형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사역자, 작가)
본 글의 배경(Background)
2010년에 영국의 신종 아나뱁티스트이자 신학자인 스튜어트 머레이가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본질을 여과없이 밝히겠다며 쓴 책이 <발가벗은 혹은 발가벗겨진(naked) 아나뱁티스트>이다. 한국어로는 점잖게 하지만 단정적으로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로 번역되어 2011년에 대장간에서 출간됐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말한다’는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머레이는 20세기 후반 하락을 면치 못하는 영국의 기독교계에서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관심의 폭이 증가되는 현상을 접하면서, 그리고는 메노나이트 초기 기독교 역사학자인 알렌 크라이더의 직접적인 영향과 영국 런던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에서 처치 플랜터(church planter)로 일한 경험을 발판 삼아 아나뱁티스트의 급진적인 믿음의 본질들을 여과없이 소개했다. ‘여과없다’라는 것은 이 책의 제목 ‘네이키드(naked)’가 말해주듯이, 16세기 아나뱁티스트의 신앙적 가치들을 현대로 가져와 알몸 그대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는 흔히 현대판 중산층 거주자(settler)/안정자가 되어버린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이 그러듯 과거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향수 어린 16세기 아나뱁티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영국의 특수한 정황 속에서 영국의 기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과거 스위스/독일/네덜란드의 아나뱁티즘을 다시 불러내 현재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공을 세웠다.
이 책은 나오면서부터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아나뱁티스트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토종/진골 아나뱁티스트 후손이 자신의 신앙 유산을 홍보하려고 쓴 게 아니라 영국인이며 자발적/후천적 아나뱁티스트가 그것도 또 현재 북미의 중산층 유럽계 백인 거주 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자신들이 대단한 아나뱁티즘의 상속자라 생각하고 있는 메노나이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자체가 센세이셔날하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고 그 내용으로 들어가보더라도, 전통적인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학자들이 쓴 책들과는 접근방법 자체가 달랐다. 대단히 객관적이려고 노력했다. 많은 이들의, 교단과 신앙의 부류에 상관없는 증언이 포함됐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머레이는 현대판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평가를 했다. 이 부분이 결국은 북미의 메노나이트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그는 “이들의 율법적인 성향과 선택적인 성경의 활용 그리고 지나치게 지성화된 문제(머리만 너무 발달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들의 침묵과 타성(제도화의 문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그래서인지 간단히 다뤘다. 하지만 이 일은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그는 더 유명해졌다. 여기저기 초청하는 곳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은 오늘 부로 5판까지 개정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왜 이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나?
2011년 머레이의 책을 미국 인디애나에 있는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에서 처음 접하고는 여러 번 ‘아하’를 했다. 특히 그가 본 21세기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의 문제점은 한결같이 옳았다. 지성화되고 제도화되고 타성에 젖고.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전통에 대해서는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니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면서 번쩍 드는 생각이, 머레이가 무엇이 아나뱁티스트인지에 대해서 썼다면 나는 이제는 ‘무엇이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인지(The Naked Anabaptist Spirituality)’에 대해서 쓰면 아나뱁티스트를 좀 더 폭 넓게 이해하는데 더 좋겠다라는 것. 바로 담당 지도교수이자 아나뱁티스트 신학자인 존 렘펠 선생에게 이 제안을 했다. 도와줄 수 있겠냐고. 그와 몇 번의 커뮤니케이션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수년이 더 흘러 나는 신학교를 졸업했고 목회보다는 선교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축축한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 관련 문헌 찾기를 그만두고, 존 렘펠 선생과의 약속조차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이게 지금으로부터 약 7-8년전의 이야기다.
그러는 사이 척박한 한국의 기독교 지형에 메노나이트 교회들의 연합이 생기고 여기저기 아나뱁티즘 혹은 아나뱁티스트에 관한 책들이 출간되고, 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드디어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센터(KAC)가 올해로 20주년을 맞는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다시 머레이가 그의 책 <’발가벗겨진’ 아나뱁티스트>, 아니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를 쓴 배경에 눈이 간다. 영국 기독교의 급속한 세속화와 퇴보 속에 하나의 희망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16세기 아나뱁티즘. 그 급진적인 믿음. 그 신앙의 본질. 어쩌면 머레이가 당시 20세기 말 이 책을 쓸 때의 배경과 지금 21세기 초 한국 땅의 기독교 상황은 많은 면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 기독교의 생명이 다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한국 기독교의 쇠락과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의 20주년 기념의 교차 시기에 ‘아나뱁티스트의 영성과 그 전망과 진단’에 대해서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받은 것은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은 글을 이처럼 쓰게 됐으니 우선은 존 렘펠 선생과의 약속을 지키는 셈이 되고, 이 글을 쓰도록 요청해 주신 김복기 형제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이런 주제로 글 청탁을 한단 말인가? 이렇게 모든 것이, 모든 자들의 협력을 통해 하나의 선을 이루게 되는가 보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한 말은, 그게 뭐라도, 반드시 책임질 날이 온다는 예정설인가?
본 글의 한계 고백(Disclaimer)
스튜어트 머레이는 영국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교단 또는 종파에 상관없이 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났고 그런 경험에 근거해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썼다. 우선 나는 그에 비해 경험이 적다. 나는 목사도 아니고 그처럼 신학 박사도 아니다. 캐나다 임마누엘 메노나이트 교회의 ‘평’신도이자 계절별 설교자이고(일년에 한 4번쯤), 교회와 교단의 여러 위원회를 전전하며 지식과 관점을 팔고 있는 한 명의 ‘지적’ 봉사자에 불과하다. 원래 화공과 전공자가 미국에서 대학원을 2군데 다녔다는 것 정도가 학력으로서는 전부다. 기업에서 ‘문화관계’를 가르쳤고 다양한 책들을 써왔으며 뒤늦게 미국 인디애나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성경대학원에 들어가 M.Div.를 했다.
머레이와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그와 나의 스승이 같다는 것이다. 알렌 크라이더. 초기 기독교역사학자인 그에게 첫 수업을 받게 되면서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을 했고, 2017년 그가 인디애나 고센에서 이생의 삶을 마칠 때까지 기도의 친구가 되었다. 머레이는 그가 속한 런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의 창립자 중의 한 명인 알렌 크라이더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그의 정신을 물려받았다. 그런 결과는 기독교의 역사를, 그 부흥과 쇠락의 경계를 4세기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세워진 크리스텐덤(기독교의 국가화)을 전후해 보게 된 것이고, 국가와 정치와 종교가 ‘짬뽕’이 되어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됐다는 것이다(교회의 대형화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이 점에서는 장로교 전통의 유진 피터슨도 맥락을 같이한다. 아, 그는 교회가 커지는 것을 얼마나 싫어했던가, 우리들의 목사!)
한 가지 앞으로 전개하는 나의 글이 머레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은, 이 글의 독자를 굳이 학자층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로 지루한 인용문이나 인명으로 초기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생경한 독자들의 기를 죽이지 않을 것이고(메노 사이몬즈와 필그람 말펙의 신학적 차이가 뭔지 굳이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아나뱁티즘을 안다는 자, 조롱하는 자들과 지적인 경쟁을 벌이지도 않을 것이다(누가 정통인지 싸울 맘이 없다—아, 나는 정녕 비폭력/비저항주의자인가?).
즉 이 글은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판단에 근거해 전개해 볼 것이다. 관점은 북미를 근거로 한 21세기 한국계 메노나이트가 보는 아나뱁티즘의 과거와 오늘과 미래다. 근본적으로 16세기 아나뱁티스트와 더 가까운 후터라이트와 브루더호프에 대해서는 단 하루도 그 공동체에 들어가 살아 보지 않았으니 뭐라 딱히 할말이 없고(있어도 참아야 하고), 나의 관점은 내가 지난 17년간 경험해 온 4개의 북미 도시 외곽형 메노나이트 교회(메노나이트 교회와 다운타운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의 물리적인 범위와 기억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본’의도를 밝히는 게 독자의 오해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겠다. 이 글은 아나뱁티즘을 홍보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 기독교의 처절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어떤 대안/대승적인 차원에서 아나뱁티즘, 그것의 영성의 고갱이에 대해서 소개하려는 게 아니다.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내가 경험한—공부만이 아니라—메노나이트 교회 그리고 그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알게 되고 배우고 깨닫고 실망도 한 아나뱁티즘의 실체에 대해 밝혀 보는 것이다.
이러는 것은, 앞으로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되고 한국 상황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이상적으로 아나뱁티즘을 보고 따라하다 실족하지 않게 함이다. 모르는 자에게는 진실, 그 빛과 어둠을 둘 다 알게 하는 것은 글 쓰는 자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글 쓰는 자는 선동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이 글을 읽고도 여전히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고 아나뱁티스트가 되기를 작정한다면, 본인이 처한 특수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맞는 제3의 아나뱁티즘, 제3의 아나뱁스트적인 믿음과 영성을, 하지만 반드시 공동체와 함께 창출해 내기를 바란다. 지독한 현실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신앙이 굳건 하듯이 아무리 16세기 아나뱁티즘이 이상적이고, 아무리 21세기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관이 공동체답다 하더라도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그대로 수입해 적용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에게 붙여진 거룩한 ‘레디칼(Radical)’ 즉 ‘급진주의자’라는 이름에 먹칠하는 행위다. 급진성이 창의성과 미래지향성과 맞물려 있듯이 21세기 한국의 상황에서 읽히고 적용되는 아나뱁티즘, 아나뱁티스트 영성 역시 철저한 제고와 비판과 의심과 성찰의 영성 위에서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게 전통 아나뱁티스즘에 대한 가장 고결한 보상이고 진보다. 자, 말이 길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과연 뭐가 진실인지 파 헤쳐보자!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시작: 그 급진성(Radicality)에 대해!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출현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운동(movement)’이라고 말 붙이는 것은 후세의 노력이다. 스위스에서 16세기초 기존 가톨릭 교리—유아세례—에 대항해 생긴 것이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말 그대로 성인이 되어 자기의 의지로 ‘다시 세례를 받는 자’이다. 한국에서는 ‘재’세례, 거기다가 ‘파’까지 갖다 붙여, 어느 동네의 마피아나 이단 부류같은 발음하기에도 불편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러기는 여전히 루터나 칼빈의 영향이 지배적인 한국 기독교의 낯설고 소수인 기독교 형제 종파에 대한 폄하나 조롱의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둘은 지긋지긋하게도 아나뱁티스트의 출현이나 그들의 발달과 확장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었던가?
아나뱁티스트들은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한 하나의 작은 그룹, ‘섹트(sect)’에 불과했다. 그후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들을 ‘섹테리안(sectarian)’이라고 부르니 그들의 소규모 그룹-마이너러티-지향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맞다. 이들의 동기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주 단순하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유아 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초창기 그들의 리더격이었던 쯔빙글리는 종교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굳이 가톨릭의 교리까지 건드려 미운 털 박히기는 싫었다. 스위스가 아닌 독일 동네의 루터도 이와 같은 지향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유아세례를 인정했다.
양쪽의 지향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나뱁티스트: “왜 성경에 쓰여있지도 않았는데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거야? 유아세례는 성경적이기보다는 통치적, 정치적 논리로 교회에 의해서 인용되고 활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더 깊게 들어가보면, 사회를 종교의 영향권 아래 놓기 위한 장치로,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이룩한 크리스텐덤의 연속성 아닌가? 사회나 국가의 기독교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본인의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기독교인이 되어버리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인가?”
쯔빙글리와 루터와 칼빈: “성경에 유아세례 주지 말라고 쓰여 있어? 꼭 성경에 쓰여 있는 여부로만 기독교를 알면 안 돼! 사람이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에게 근본적으로 속해 있는 거야. 본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 세례도 마찬가지야. 세례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지 거듭난 자들만 들어가는 좁은 문이 아니야.” [사족: 이건 그럴듯한 신학적인 견지이고 더 깊게 이들은 교회와 국가론 역시 상호-보충-호환-협력의 기조 아래(‘국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속해 있다.’) 개혁은 필요하되 굳이 기존의 교회와 국가 체제까지 흔들 필요는 없고 개혁의 실효성을 고려해 기존 권력세력과의 연합을 도모하겠다고 작정하게 된다.]
결국 이 두 그룹, 순진하고 성경 문자적인 그래서 타협주의자들의 눈에는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비춰지는 아나뱁티스트들과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존 세력과 타협과 합의도 마다하지 않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개혁주의자들은 화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길을 각각 가기로 결정한다. 이 성경 한 구절의 차이로 인해 이 초기의 개혁 그룹들은 각자도생 혹은 연횡을 하게 되는데, 특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신학적인 배경이 (상대적으로) 일천하고, 그리고 기존의 교회 제도권과 국가정치세력으로부터의 분리까지 한꺼번에 도매급으로 선포해버린 이 소수의 개혁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그것도 조롱이 함께 어우러진 이름이 상대편들에 의해 붙여지는데 그게 바로 ‘레디칼들(the Radicals), 즉 급진주의자들’이다.
동시대 개혁자 리더 중의 한 명인 라인리히 불링거는 이들을 “악마와 같은 적들이고 하나님의 교회의 파괴자(destroyers of the church of God)”라고 했고, 루터는 창의적으로 “슈베르머(Schwaermer)” 즉 벌집 주위를 왕왕 소리 내며 몰려드는 벌이나 나방 떼와 같다고 했고, 칼빈은 더 과격하게 ‘광신자(fanatics) 혹은 미친 개들(mad dogs)’이라고 불렀다(미친 개는 때려잡아도 되니까). 이들의 눈에 아나뱁티스트들은 기존 교회를 파괴하는 악마 수준의 과격주의자, 급진주의자였다. (이 점은 가톨릭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 여기저기 나방 떼, 벌 떼처럼 불어나는 아나뱁티스트들을 잡아 쳐 죽이는 경쟁을 시작한다. 이런 교회가 주축이 되는 폭력의 허용에 대해서는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 컸다. ‘교회=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놈은 다 잡아 죽여도 돼!’가 이 자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법과 정의였다. 이런 폭력 정당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곧 세상 법도 의미가 없어진다. 아나뱁티스트와 같이 지독하게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폭력의 사용과 국가에 대한 복종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에게는, 법 제도에 호소할 필요없이 교회가 알아서 잡아서 맘대로 처형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기반이 만들어진다. 순진한 레디칼들을 잡아 죽이기 위한 ‘손에 칼을 든’ 강도 같은 레디칼들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레디칼이란 말이 도대체 뭐 길래? 이 말은 원래 라틴어의 ‘라딕스(radix)’, ‘뿌리’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결코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뿌리는 근본을 상징한다. 즉 온건하다고 평을 받는 쯔빙글리나 루터의 관점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은 (급하며 비타협적인)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에 천착하며 예수의 제자로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의 표현대로 이들은 급하게(急) 앞으로 나아가는(進), 마치 뭔 가에 홀린 급진주의자들이 된다.
급진주의자라는 한국어적 표현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 말이 정치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오역/오용되기 때문이다. 일전 어느 한국 신학자가 나의 선생인 알렌 크라이더를 ‘좌파’라고 불러 사과를 받아낸 일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크라이더 교수는 아마 무덤에서도 기분 나빠할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레디칼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급진성보다는 오히려 뒤로(성경과 초대교회적인 삶으로) 돌아간다는 환원적인 근본성의 의미가 더 크다. 아는가? 당시 루터는 아나뱁티스들을 ‘우익’에 올리고 가톨릭을 ‘좌익’에 할애했다는 것을. 맞는 말이다. 신앙 안에서 좌우의 차이는 오직 성경에 대한 수용의 범위로만 가늠할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서 이런 근본주의적인 레디칼의 의미가 사회주의적 혁명을 도모하는 급진주의의 의미로 탈바꿈되어 정치의 영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천착해온 한국의 기독교 역시 급진주의자나 급진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치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전투적이고 불온한 의미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즉 가장 성경적으로 ‘근본적인(radical)’ 아나뱁티즘을 사회주의적 가치지향으로 폄하해 버린 것이다. 이들의 판단대로라면, 누가복음이 말한 예수야 말로 가장 급진적인 사회주의자가 된다.
다시 레디칼, 급진으로!
이 말의 시작은 ‘응급성 혹은 긴박성(immediacy)’에 있다. 이건 두말할 나위 없이 변화, 혁명, 의식의 전환의 시작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변화를 환영하는 사람은 오줌 싼 아이 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위급하고 긴박해야 변화를 원하게 된다. 혁명에 단계가 필요한가? 온건하고 절차적인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난센스다. 혁명은 그야말로 기존의 것을 갈아엎는 전복적인 행위다. 이미 잘못되고 부패한 것으로부터의 결별하는 데는 오직 단순하고 즉각적인 결심과 돌아서서 왔던 곳이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하는(進) 용기만이 필요하다. 이게 ‘회심(conversion)’의 의미이고, 이게 16세기 아나뱁티즘의 시작이었다. 결과에 상관없고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나, 오직 말씀에 충성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아가는 것, 그 급진의 영성!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은 초기 개혁자인 쯔빙글리와의 한번의 만남과 한번의 성경적인 깨달음을 가볍게 치부하지 않았다. 이건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만큼이나 단순하지만 위대한 사건이 되었다. 자신들의 깨우친 신념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았다. 그렇게 죽어 나간 순교자들이 16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만 2천5백 명 가량 된다. (후에 틸레만 잔쯔와 브락트가 기록한 ‘순교자들의 거울’에는 803명의 초기 아나뱁티스트 순교자들의 증언이 포함된다.)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지극히 경건하다는 이유만으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재세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혀가 뽑히는 고문을 당했고(말하면 안 돼!) 수장을 당했고(이게 진짜 재세례야!) 화형(가장 극적으로 죽여야 돼!)에 처해졌다. 그 누구도 그들의 편은 없었다. 이들은 꼭 그래야만, 그렇게 급하게 혼자서 나아가야만 했을까? 예수님의 고난(Bitter Christ)을 본받아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이들의 신앙적 급진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과연 이들의 이런 급진적인 믿음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이제부터는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고갱이인 이런 급진성이 어떻게 지난 약 5백년 동안 아나뱁티스트 믿음을 형성해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525년 1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의 몇몇 제자들이 따로 모여 시의 명령에 대항해서 ‘재세례’를 베풀면서 시작된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적 혁명, 그 급진적인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전해졌고 현재까지 남아 있고 변해왔는지 한발 더 전진해 보자.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초기 흐름
초기 아나뱁티즘의 영성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지금이라고 다를까?). 지역이 다양했고(스위스와 남부 독일/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와 모라비아(지금의 체코 지역), 리더들의 성향/개성/신학적 수준도 다양했다. 대단히 성경적인 근거로 아나뱁티즘 즉 재세례의 관습이 생겨났으나 요즘 표현대로 초기 아나뱁티스들은 신앙의 모든 권위를 성경에만 두는 문자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성령에 대한 이해, 성령 의존도도 컸다. 성령으로 인해 그들은 누구나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추구한 공동체의 모델 역시 사도행전 2장에서 그 원형을 발견했다. 그래서 지난 천년 이상 가톨릭 교회에서 유지되어온 사제주의를 버리고 자발적이고 회중중심적인 모임과 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성령중심적인 그래서 위계 중심의 교회구성에서 자유로운 성격 때문에 초기 아나뱁티즘은 주로 평민과 장인 계층에서 더 성장하고 부흥할 수 있었다.
남부 독일이나 스위스를 배경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아나뱁티즘은 그들의 리더격인 한스 후트와 레온하르트 쉬머와 한스 슐라퍼와 한스 댕크의 영향으로 대단히 성령중심적이고 경건함을 지향하는 신비주의적인 신앙관을 갖게 되었다. 이중 가톨릭 프란치스코 사제였다가 아나뱁티스트로 개종한(1527년 재세례) 오스트리아의 레온하르트 쉬머의 ‘세번의 은혜(그는 은혜를 빛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예수)와 성령의 약속으로서의 기쁨을 설명한다.)’와 ‘세번의 침례(성령, 물, 피(순교))’는 성령주의에 바탕을 둔 영적 보고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 지역 출신(스위스 티롤)들의 일부, 존 후터와 피터 발포트 등이 독일 동부 현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주해가면서 더욱 더 오순절 사건에 입각한 성령의 공동체를 세우게 되는데 그게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후터라이트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체 안에서 다 함께 공유하는 이 공동체의 영성의 근간에는 대단히 영적인 ‘자기포기/순종(yield-ness)’의 정신이 담겨 있다. 상호신뢰/책임/포기 없이 공동체가 세워지고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향후 500년 동안 이런 영적인 근간을 손상하지 않고 계승발전하게 되고, 이런 정신에 감화된 독일의 에버하르트 아놀드에 의해 20세기 초 브루더호프(형제들의 집)’라는 이름의 새로운 공동체 운동이 시작된다.
이와는 정반대의 지역, 북서부의 네덜란드에서는 성령보다는 성경으로의 무게 중심이 활발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양한 영적 흐름을 보였던 초기 아나뱁티즘이 성경으로, 성경의 문자로 무게중심이 본격적으로 이동하게 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독일 서북부에서 일어난 뮌스터 사건(1534-35)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인 멜키오르 호프만은 초기 스위스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성령주의자 한스 댕크로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침례를 받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해 다른 사람들에게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가르치고 침례를 줬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2의 엘리야라고까지 불리게 됐다. 그의 카리스마적인 영성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자신의 종말론적 세계관이 당시 북서부 독일의 사회정치적인 맥락과 연결되면서 당초 그의 평화주의적인 아나뱁티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극단의 환상으로 발전한다. 드디어 폭력의 사용까지 허용되면서 교회와 도시를 약탈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하며 뮌스터라는 동네에 멜키오르의 천년왕국이 건설된다. 이 왕국은 그런데 얼마 못 가, 약 18개월의 환상 후 가톨릭 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몰살되고, 소위 지도자라 불리는 3인방의 시체는 성 람베르티 교회의 첨탑 철창에 전시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사건은 초기 아나뱁티즘의 형성에 대단한 기여(?)를 하게 된다. 물리적으로는 가톨릭과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들을 합법적으로 그것도 대량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지만 아나뱁티스트 안에서는 성령주의의 극단화와 폭력의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게 됐다. 한때 멜키오르의 신학에 감동받기도 했던 네덜란드의 가톨릭 수사 메노 시몬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중심무대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가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한 성경적인 삶이다. 앞으로 메노 시몬즈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철저히 성경 중심의 삶, 비폭력의 삶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 것은, 성경중심적인 것과 성경문자주의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든 오늘날의 메노나이트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어떻게 보면 같은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 가장 고리타분한 성경주의자라고 라벨이 붙는 메노 시몬즈의 성경관 역시 문자에 천착하는 교리 중심의 삶보다는 철저한 복음주의적이고 실질적인 삶에 그 방점을 둔다. 그가 말한 ‘진실한 복음적 믿음(True evangelical faith)’은 전통이건 신종이건 모든 아나뱁티스트에게 여전히 읽히는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고전으로 통한다.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진실한 복음주의적 믿음은 결코 잠잠한 것이 아니며 모든 종류의 의와 사랑의 열매 안에서 퍼져 나간다. 그것은 피와 육에 죽고, 그것은 모든 탐욕과 금지된 욕망을 파괴하며,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숙한 데에서 하나님을 찾고 봉사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은 벌거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배고픈 자의 배를 채우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고, 잘 곳이 없는 자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슬픔에 젖은 자를 위로하고 돕는다. 그것은 해악을 끼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도우며, 그것은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판단하고, 그것은 길을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그것은 상처 난 곳을 감싼다. 그것은 아픈 자를 낫게 하고, 그것은 강함을 보존하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다(it becomes all things to all people). 주님의 진실을 위해서 받는 핍박과 고난과 슬픔은 영광스러운 기쁨과 위로가 된다.”
흔히 그렇듯 성령주의의 영향이 크면 클수록 외부로 드러나는 의식적 행위/외식—세례나 교회출석이나 성만찬 등과 멀어지게 된다. 즉 반사회적, 반교회적인 성향이 강화되기 쉽다. 아나뱁티즘 역시 메노 시몬즈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네덜란드로부터 시작해 더욱 더 신학적, 교리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교회성(ecclesiology)을 세우고 유지하기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이런 성령주의적 신앙관에서 멀어지게 되고 이들의 자취도, 영향도 미미해지기 시작한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 안에서는 ‘성령(Spirit)과 말씀(Letter)’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 대단히 뜨거웠다. 당시 타 도시에 비해 종교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스트라스부르그를 배경으로 한 실용적 성경주의자 필그람 말펙과 경건주의자이며 성령주의자인 카스펜 슈뱅크펠트의 논쟁이 그중 특히 유명하다. 말펙은 성령주의를 가장 반대한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의 한 명으로 1528-32년까지 약 4년에 걸쳐 많은 성령주의자들을 만나 대단히 광범위한 논쟁을 펼쳤다. 이런 초기 아나뱁티즘 안에서 성령주의는 그 성격이 더욱 급진적으로 바뀌어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를 제외한 성경의 말씀조차도 잉여의 계시로 여기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안에서 성령과 성경의 분명한 분리 현상은 1540년쯤으로 보는게 일반적인 주장이다. 뮌스터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 약 5년 후다.
존 하워드 요더의 연구에 의하면 독일 남부/스위스에서는 이러한 성령과 성경의 분리 현상은 1530년보다 먼저 일어났다고 한다. 이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독일 남부/오스트리아 지역 아나뱁티스트 성령주의(‘교회는 성경보다 성령이 중심’)의 원조격인 토마스 뮌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민중을 위한 농민전쟁(1524-1525)를 이끌다 실패하고 본인마저 처형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당시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다른 아나뱁티스트 리더들(한스 댕크, 한스 후트 등) 역시 편향되고 종말론 중심의 성령주의 관점(선민적 천년왕국설)에서 한발 물러나 아나뱁티즘의 본연의 바운더리(교회와 사회/국가/정치의 분리와 비폭력 그리고 성경)안에서의 온건한 성령주의로 전향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외부적인 이유로는 이 농민전쟁의 실패로 루터가 이끌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탄압이 더 노골화됨으로 이런 외부 핍박에 대한 자기방어/자기조정의 기능으로서도 성령주의적인 관점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고 보는게 맞다.
21세기 들어 토마스 뮌처의 혁명적인 신앙관이 재조명되면서 한때 그가 추종했던 동시대의 종교개혁자 루터와 비교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다음은 최근 한국의 <가톨릭프레스(2016-5-27, 조영규)>에 기고된 글의 내용이다.
“500년 전 토마스 뮌처가 왜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고 실상은 같은 흐름이었던 소위 교회개혁자 루터에게 등을 돌렸는지 되새겨보아야 한다. 루터는 농민들의 피폐한 삶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로를 찾기 위해 세상과의 어설픈 타협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뮌처는 그의 사망 500주년을 기점으로 재평가 되어야 하며 21세기 ‘혁명의 신학자’로 복권되어야 한다.”
21세기의 루터교/루터 추종자 그룹에서는 뮌처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아마 여전히 그는, 종말론적 환상에 사로잡힌 예언자로, 사회적 불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환상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려고 시도한 이단적 좌파의 수장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루터에게) 죽어도 싸다, 정도? (‘신학적인 견지가 다르다고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역시 500년전의 루터주의자에 가깝다. 아나뱁티스트는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개종/선교의 문제라도, 강제나 폭력이 동원되는 것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반대해 왔다.)
21세기 오늘 시점에서 앞으로 전개될 아나뱁티즘의 영성의 본질 재고 및 전망 역시 위 메노 시몬즈의 영향을 받은 성경과 공동체 중심적이고 비폭력지향의 메노나이트 영성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힌다. 아마 여전히 세상과 분리해 공동체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는 후터라이트나 브루더호프 그리고 전자의 두 그룹에 비해 사유재산과 신자간 어느 정도의 사적 공간을 허락하고 있는 아미쉬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관점과 다른 질의 아나뱁티즘을 지향하고 아울러 내가 속한 세상 한 가운데 나와있는 메노나이트 교회를 평가할 것이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원천
한 교단이나 교회, 아니 개인이라고 쳐도, 그 영성을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것이다. 영성이 신학적인 사유의 결과인가 아니면 삶의 증거인가? 아나뱁티즘은 아우구스티누스부터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루터식 신학적 재정립의 결과가 아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은 물론 루터와 같이 기존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통치 논리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은 공감했으나 루터식 이신칭의나 이신득의의 신학적 관점을 다시 세우고 설파하는데 노력하지 않았고 이런 관점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다(현재도 그렇다).
초기 아나뱁티즘이 알려지고 확대되면서 기존 교회(국가교회)의 지도자들/신학자들과 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의 신학적인 설득력은 늘 기존 교회, 기존 신학자들의 논리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당장 (재)세례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루터나 칼빈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이것을 인정하고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 ‘하나님의 신학’을 크게 보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이라면 아나뱁티즘적인 재세례의 개념은 더 편협하고 인본주의적이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의 관점은, 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신학적인 완전성으로 호소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와 예수의 말씀 그리고 그 예수를 따르는 고난에의 동참, 즉 ‘예수 따름(Nachfolge)’에 더 비중이 많았다. 이들의 믿음은 십자가의 예수를 본받아(고난의 예수) 오직 삶으로만 증거(고난과 순교)되어야 하기에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루터의 추종자들과는 질적으로 대비됐다. 그들의 삶의 변화와 그 증거의 효력은 대단해 같은 편이든 반대 편이든 목격자들을 놀라게 했다.
“재세례신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가르침이 곧 이 나라를 뒤덮을 것 같다. 그들은 아주 빠르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가득 찬 수 천명의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다……비록 이런 두려움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고 있고, 온 세상은 그들에 의해 동요가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 말은 아나뱁티스트들의 자평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편에 섰던 취리히의 제바스티안 프랑크의 말이다. 당시 쯔빙글리 계승자 하인리히 불링거 역시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인과 같은 삶에 매혹되어 전도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물론 그것에 대한 그의 대응은 무자비한 폭력의 사용이었다.
반면 교리적 완전성(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예수 등 ‘오직’ 신학—여기에 ‘오직 삶’은 없다.)에 무게를 둔 쯔빙글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말은 거창했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데에는 큰 도움이 안되었다. 실제 루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랑의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어찌 보면 대단히 균형 잡힌 신학자였다. 문제는 그의 말대로 사람들의 행위가 안 바뀌었다는 게 문제다. 루터는 스스로 이런 고백까지 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름 하에 거의 불신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 모임을 조직하지 못했다.” (해럴드 벤더의 <재세례 신앙의 비전> 중)
결국 쯔빙글리와 루터는 제도 교회에서 신약중심적 교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기존의 체제를 인정함으로 다수 중심의 국가 교회를 지향하게 된다. 이후 500년이 지났지만 이들의 교리/전례 중심의 신앙이 예수 중심의 제자도로 그 포커스가 전향되었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들리지 않는다(과연 이들은 전통주의자들인가?). 루터 역시 자신의 말년에 의식장애까지 겪으며 낙담과 실망에 찬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의 개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따라서 아나뱁티즘의 영성에 대해서 알려면, 아나뱁티스트들의 이런 급진적인 삶의 다양한 면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고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이들에게 영성은 곧 ‘움직이는 관계’로만 해석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의 관계적 영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고민해 보자. 물론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것은, 실제 이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이야기와 삶의 증거들을 대비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기는 제한적이다. 내가 보고 겪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의 숫자와 연도가 상대적으로 일천하기 때문이다. 17년간 메노나이트 교회에 있었다는 것은, 이들의 (원조의) 관점으로는 여전히 ‘신입생’ 정도이고, 나에게 축적된 기억과 체험들도 제한적이고 국소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이 지난 500년 어떤 삶의 족적들을, 어떤 삶의 증거들을 보여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고백(Confession of Faith)’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아나뱁티스트의 관계적 영성
교인/교회의 삶은 고백으로 확증된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롬 10:10)”는 것은 진리다. 삶으로 보여지는 게 우선인지 말에 의한 고백이 우선인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아나뱁티스트들 역시 그들이 삶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바 또는 구현된 삶을 신앙 고백의 형태로 남기고 계승해 왔다. 따라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의 흐름을 알려면, 이들이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신앙적 고백을 만들고 나눠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미리 알아둘 것은, 아나뱁티스트들은 고백이나 신조나 신경의 의존도가 타 교단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이다. 분명히 하자면, 이들은 하나의 고백-사도신경-에 올인하는 ‘신조고백교회(Creedal Church)’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그룹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들의 고백을 문서화해서(신경神經의 형태로) 보편적으로 나누고 주입하는 행위 자체(교리화)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더 근본적으로 이들은 전통교회에서와 같이 신조나 고백을 성경의 권위와 동일하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이단으로 규정하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첫번째는, 신경의 효과성에 대한 의심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기존 가톨릭 교회나 주류 종교개혁자들이 이끄는 국가교회의 시스템에서 사도신경이 의무적으로 암송되었지만(그리고 지금까지 여전히), 이런 행위가 신자들의 행위, 삶을 바꾸는 데에는 큰 구실을 하지 못했다고 믿는다. 즉 이건 하나의 교리적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신경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자의 믿음의 강화에 목적이 있지 신자의 윤리적인 삶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경의 교회정치적인 목적이다. 4세기 크리스텐덤 이후의 국가교회들은 신경의 강화를 통해 교회내 위계를 세웠고 신자와 비신자의 자격을 엄격하게 구분하게 시작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비신자에 대한 폭력까지도 허용하게 되는 신학적 발판을 제공하기도 했다. 5세기 아나타시우스에 의해 만들어진 아타나시우스 신경에는 온전하고 오염되지 않는 믿음을 제외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믿음을 가진 자는 영원히 멸망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이런 의심자/불결자들에 대한 물리적인 처단도 가능하다는 신학적 근거를 간접적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실제로 신경/신조교회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기점으로 역사적으로 자신들과 신학적인 기조가 다를 경우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들을 처분해 왔다.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한 루터나 칼빈 교회의 폭력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로 말미암아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신조나 신경은 교회의 폭력을 일상화하고 다름에 대한 불관용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적이고 권위적이고 압제적인 수단으로 각인되어 왔다. 문제는 종교개혁이 50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루터/칼빈을 따르는 한국 교회는 이 사도신경을 절대화해 이 신경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믿음 여부로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예수따름’을 신앙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아나뱁스트들에게 신경은 불완전한 신학적 고백으로 평가된다. 즉 신경의 내용에는 예수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 외에 그의 공생애에 대한 강조가 일절 없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예수의 삶의 정수인 산상수훈 역시 추상적인/영적인 영역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은 오리지날 사도신경의 암송이 ‘굳이’ 필요하다고 여길 시 자체적으로 예수의 삶까지 포함한, 자체적으로 개정된 사도신경을 사용한다. 이게 과히 프로테스탄트적(도전적) 아닌가? 신성불가침의 신경조차 손을 댈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아나뱁티스트들이 기존의 신경이나 신조를 싸잡아 무시했다고 보면 안된다. 초기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사도신경을 많이 암송했고 이 내용을 근간으로 신학적 기초,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배우고 세워갔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추종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을 잡아 신문할 때 신경의 믿음 여부를 묻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이들 초기 순교자들은 신경의 내용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도리어 루터측 추종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을 잡아 죽일 목적으로 이런 명목을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경우들이 있었다. (죽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은 못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고문 시 아나뱁티스트들의 혀까지 뽑는 잔인함을 과시한 것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믿고 나누고 전승해 온 고백에는 한가지 분명한 차이(그걸 혁신이라고 하자!)가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기존의 신경(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외에 신자들의 삶에 대한 강조가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나뱁티스트 혹은 이들의 교회가 굳이 고백교회가 아니라고 해서 이들이 고백의 중요성조차 소홀히 한다고 보면 대단한 오해다. 이들만큼 시대와 장소와 경우에 따라 다양한 고백서를 나눠온 교회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라! 따라서 아나뱁티스트들은 화석화되고 고대의 신경을 더 포괄적이고 유연하게 그리고 더 현실에 맞게 발전시킨 자들로 보는게 합당한 평가일 것이다.
굳이 고백(confession)을 신조(creed)와 간략히 비교해 보자면, 고백은 더 포괄적이고(내용도 더 길다는 말이다), 지역적이고, 적용에 있어 유연하다. 즉 이 고백을 믿고 믿지 않는다는 여부로 성도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이단의 죄명을 씌워 처단까지 하는 폭력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폭력에 정당성을 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1527년 스위스 슐라이트하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해서 1995년 <메노나이트 관점에서의 신앙의 고백>이 나오기까지 아나뱁티스트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목적을 위해, 다양한 아나뱁티스트 그룹들에 의해서 고백서를 만들고 나눠왔다.
아나뱁티스트 신앙 고백의 역사는 1527년 스위스 슐라이트하임이라는 동네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 초기 스위스 아나뱁티스 그룹들이 모여 가톨릭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마이클 새틀러의 손을 빌려 고백서를 작성한다(그는 곧 처참하게 처형된다). 이 고백서에는 7개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1) (재)세례/자발적 세례, 2) 출교(ban: 상호책임성), 3) 주의 만찬(재세례된 자만의 나눔), 4)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순결주의), 5) 교회의 목자(목사의 권위), 6) 칼(비폭력성과 직업의 제한), 7) 맹세(세상 권력에 대한 불복종과 진리 수호)에 대한 선포. 내용은 대부분 신자의 윤리적인 삶을 다룬다. 후에 추론하기는, 당시 기존 교회와 시의 숨가쁜 압박과 처형의 위험 가운데 이 고백서가 쓰여졌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내용에서와 같이 보편적인 신학의 근간 부분은 의도적으로 누락했다고 보았다. 이 슐라이트하임 고백서가 등장한 이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각각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한 다양하고 더욱 더 정교해진 고백서들이 등장한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 가운데 가장 신학적인 배경이 탁월한 자는 발트하저 후브마이어이다. 그는 스위스/오스트리아를 거쳐 특히 모라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활동했는데 그는 신자의 삶과 초신자의 교리문답에 관한 많은 소고와 사도신경의 전통에 의거한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죽고(1528) 약 15년이 지난 뒤 본래 제화공이었다가 모라비아의 후터라이트 지도가가 된 피터 리더만이 감옥에서 쓴 후터라이트 신앙 고백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에 걸쳐 후터라이트 공동체(그리고 후에 만들어진 부르더호프 포함)의 신앙적 유산으로 자리매김을 된다.
기독교 신앙의 12개 신조부터 시작하는 이 고백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하다못해 신자의 옷차림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 안에서의 신자의 행동과 삶의 자세까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 모든 고백의 내용들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총 2부로 되어있는 이 고백서 중 1부에만 최소한 1432번의 성서적 언급과 암시가 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적용을 경계한다. 피터 리더만은 다른 아나뱁티스트 리더, 한스 뎅크나 필그람 말펙과 같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경직되고 기계적인 방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이 고백서는 기존의 신경과 같이, 개인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믿음의 확인과 강화에 목적을 둔 게 아니라 성령 중심의 공동체적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침의 역할을 한다. 이중 ‘성도의 공동체’ 항목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교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각 사람이 다른 사람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눕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갖지 않으시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들과 함께 나누십니다. 그리고 아들 또한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갖지 않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버지와 그리고 그와 함께 교제하는 모든 자들과 나누십니다.” (피터 리더만의 후터라이트 신앙고백서 가운데서)
리더만에게 공동체의 삶이란, 세상의 어느 그럴싸한 집단의 삶을 본받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모형을 발견하는 통로로 인식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공동체의 삶은 동일체가 된다.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의 신앙 고백서의 역사
현대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영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역사적인 고백서로는 1625년 네덜란드 메노나이트 리더인 아드리안 코넬리우스에 의해 쓰여지고 1632년에 채택된 네덜란드 메노나이트들을 위한 도르트레히트 고백서가 있다. 스위스에서 최초 슐라이트하임 고백서가 나오고 약 백 년 후에 네덜란드에서 등장한 이 고백서에는 위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를 근간으로 새로운 교리와 실질적인 지침들이 더 보강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고백서에 비해 눈에 띄는 변화는 후터라이트 고백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적으로 더욱 더 정교해졌고 고백서의 권위도 한층 강화됐다는 점이다. 신학적인 골자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간의 타락, 회복과 화해의 예수, 신약의 법, 회개의 중요성, 세족식, 세속 권위의 인정, 죄 지은 자와의 분리, 죽은 자의 부활 등이 포함된다.
이 도르트레히트 고백서의 정신을 계승해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후 1766년 또 다른 고백서가 나오는데 이는 네덜란드 메노나이트 교회의 목사인 코넬리우스 리스가 썼다고 해서 리스(Ris) 고백서라고 불린다. 이 고백서는 앞선 도르트레히트 고백서(길이 총 5000자)보다 더욱 길고 정교해져 약 17,000자가 사용된다. 내용 중 더욱 더 본래의 아나뱁티스트 정신으로의 복귀 경향이 돋보이는데 그것은 그동안 말도 많았던 (국가에 대한) 맹세나 서약에 관해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의 맹세나 서약 그리고 군 복부를 금한다.” 그런데 과연 정부가 이런 일개 소수의 교단의 과격한 주장을 받아들일까?
18세기 초 들어 유럽의 아나뱁티스트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고백을 실행하기 용이한, 소속된 정부의 관용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와 종교적 분리/자유성을 인정해주는 미국의 펜실베니아와 버지니아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고백서의 중심 무대도 자연적으로 북미로 옮겨진다. 그리고는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전통적인 메노나이트들(Old Mennonites) 그룹에서 과거 보수적인 도르트레히트 고백을 다시 재현해낸 ‘크리스찬의 기초들’이란 고백서가 나온다(1921). 재미있는 것은, 이 안에 신자들의 비밀서약이라든지 아니면 생명보험 같은 것도 들면 안된다고 나온다는 것이다. 세속과의 분리 성향은 여전히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1963년 지난 과거의 고백서들을 모두 아우르는 신학적으로도 구성이 아주 단단한 고백서가 등장한다. 이 고백서의 작성자는 이보다 약 20년 전에 나온 메노나이트 신학자 해롤드 S. 벤더가 쓴 아나뱁티즘에 관한 한 근세의 고전이 된 <재세례신앙의 비전>에 영향받은 그의 동료 J.C.웽어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메노나이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백서의 내용 중에는 세족식, 거룩한 입맞춤(벧전 5:14), 안수, 술 담배의 금지, 결혼과 여성의 베일 착용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다 전통적이지만은 않았다. 신자의 정부나 사회 참여의 면은 많이 진보되어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직업이라면 허용된다고도 밝힌다. 하지만 고백서 안의 여성의 베일 착용의 문제는 곧 메노나이트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 고백서의 활용도 역시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이후 1995년에 미국과 캐나다의 메노나이트 교회 총회에서 채택된 ‘메노나이트 관점에서의 신앙의 고백’이 가장 최근의 고백서이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백서와 가장 다른 점은, 고백서의 제목에 ‘메노나이트의 관점에서’라는 표현을 삽입한 것인데 이는 앞으로 메노나이트 교회는 하나의 교단으로서 타 교회와 일치를 지지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메노나이트 외의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수용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인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큰 진보다. 드디어 교단간/종교간 대화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21년 오늘 메노나이트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신자/목사들은 이 고백서를 근간으로 신입 교리문답을 하도록 권장되고 있다. 이 안에 있는 총 24개의 조항들은 교회와 삶의 유익한 가르침과 양육을 위한 실질적인 지침으로 쓰이고 있다.
지역과 시대에 따른 이런 고백서들의 등장은 각 그룹의 신앙적인 고백이 주 목적이나 각 그룹 안에서의 분리와 분파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으로도 쓰여졌다. 그러면서 최초 슐라이트하임의 고백서의 내용에서 일부가 첨부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했다. 특히 출교에 관한 부분은 강제성이 동반되기 때문에 많은 논란의 핵심이 되기도 했으며, 교인/교회의 순결성을 위해 세상과 분리해야 한다, 폭력이 수반되는 혹은 폭력에 노출되는 직업(경찰관 등)은 피한다 등의 보수적인 생각 역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달해온 메노나이트들이 사회문화경제적으로 수직적으로 계층 이동을 하게 됨에 따라 적용의 유무에 대한 찬반 논란이 많았다.
그리고 약 4백년이 지나 21세기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관점에서 ‘출교/치리/훈육/폭력과 유관한 직업 제한’등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지침들은 더이상 아나뱁티스트들의 입에서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즉 이런 내용은 사문서화 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존 하워드 요더의 말대로, 21세기의 메노나이트는 16세기 아나뱁티스트가 아닌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핍박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망하는, 알렌 크라이더의 말대로, 이 세상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외계인 같은 거주민의 신분이 아니다. 많은 메노나이트 교인들은 백인 유럽계 영어권 정착자로서의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있다.
21세기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영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고백서/선언은?
(공동의) 고백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그리고 오늘날까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영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선언으로는 1944년 21세기의 메노나이트 신학자 해롤드 S. 벤더가 ‘메노나이트 계간지’에 기고한 <재세례신앙의 비전>이다. 급진적인 종교개혁 이후 약 4백년 동안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조상을 닮아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가는데 신학적인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그렇다, 이들은 오직 삶이다.). 그렇다는 것은 20세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알려진 아나뱁티스트 신학자들이 거의 전무했다고 보는 게 맞다. 여전히 이들은 지역적이고 분파적인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드디어 스타 학자가 탄생했는데 그가 바로 해롤드 S. 벤더이다. 그는 미국 메노나이트들의 작은 동네 미국 인디애나 엘크하르트 출신으로 고센이라는 메노나이트 성경대학을 나온 뒤 동부의 장로교파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독일의 튀빙엔과 하이델베르그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분파적인 아나뱁티스트의 경계를 넘어 소위 정통 신학의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그의 유산을 따라 존 하워드 요더와 알렌 크라이더가 나온다.).
그가 쓴 <재세례신앙의 비전>은 그가 미국 종교사 학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작성된 것이라 그 효과가 더 컸다. 즉 이 선언문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 미국의 교회에 도전하는 대범한 시도였다. 무비판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정신을 받아들여왔던 많은 미국의 신자들에게 그는 주류 신학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된 종교개혁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편협하게 인식되어 왔던 아나뱁티스트 신앙이 얼마나 복음의 본질에 가까운지 설파한다. 그의 말이다.
“믿음에 강조점을 둔 종교개혁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생명에 대한 새로움없이 그들이 붙들고 있는 믿음은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재세례신자들의 이러한 비판은 신랄했지만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와 쯔빙글리가 추구했던 원래의 목표가 만인을 위한 ‘진정한 기독교’를 되찾고자 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는 너무 달랐다. 이는 개신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의 수준이 그전의 가톨릭 시대보다 못했기 때문이다.” —<재세례신앙의 비전> 중에서.
그가 말한 신앙의 본질은 간단히 세가지로 설명된다. 예수의 삶을 따르는 제자도와 자발적인 교회공동체와 무저항과 성경적 평화주의다.
그의 마지막 말이다.
“이 재세례신앙의 비전이 인간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의도하셨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이 땅 위에서 건설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아나뱁티스트 형제들이 믿고 시행하고자 의도하던 것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이나 여러 곳에서 제시하신 예수의 비전을 두고 하늘에서나 실현될 비전이라고 말하지만 재세례신자들로서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믿지 않는다. 이 비전은 마지막 끝날 때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긴장 속에서 지켜야 할 비전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가 친히 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를 실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벤더의 비전은 지금으로부터 약 5백년전 독일 뮌스터에서 멜키오르 호프만이 꾸었던 극단적이고 비평화적이고 종말론적인 환상하고는 다르다. 계시록적인 종말론을 현실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둘은 같지만(here and now), 그 실행의 방법은 정반대다. 멜키오르는 당시의 불안정한 환경을 폭력으로 극복하려 했지만 벤더는 오히려 긴장을 안고서라도 예수의 길—비폭력과 비저항—-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하나의 추상적인 가르침으로 그치지 않고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하고 구체적인 지침이 된다. 이런 벤더의 비전은 현실이 되어 수많은 메노나이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 선언이 나오고 64년만인 2008년 벤더의 제자인 미국의 파머 베커는 벤더의 ‘<세례신앙의 비전>을 21세기적으로 표현한 <아나뱁티스트 크리스천>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한다. 그는 제목에서 메노나이트란 말을 크리스천으로 대체함으로 메노나이트 신앙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된다. 벤더의 세가지 신앙의 본질을 베커는 ‘중심(center)’이라는 말로 부연해 다시 설명한다. 첫째, 예수는 우리 신앙의 중심이시다. 둘째, 공동체는 우리 생활의 중심이다. 셋째, 화해는 우리 사역의 중심이다.
가장 최근 2017년에 그는 <아나뱁티스트의 본질들: 유일한 크리스천의 믿음의 열 가지 증거들>이란 책으로 이전의 세가지 본질에서 좀 더 부연된 차원에서의 메노나이트 신앙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열 가지 신앙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크리스천은 제자도다. 2. 말씀은 예수를 통해서 해석된다. 3. 예수는 주님이시다 4. 용서는 공동체의 핵심이다. 5. 하나님의 뜻은 공동체 안에서 분별된다. 6. 공동체의 일원(신자)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7. 신자들은 하나님과 화해한다. 8. 신자들은 서로서로 화해한다. 9. 세상의 갈등들은 화해되어야 한다. 10. 성령의 사역은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 근본적이다.
현재 베커는 동시대 아나뱁티스트 제자도/영성에 관한 한 가장 존경받는 학자이자 목회자이자 선교사이자 처치 플랜터이자 저자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및 남아메리카의 15개 이상의 국가에서 미국의 메노나이트 미션 에이전시인 미국의 미션네트워크와 캐나다의 위트니스와 함께 아나뱁티스트의 정체성에 관한 강의를 해 왔다.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는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Begin Anew)’는 총 16 세션으로 이루어진 제자도 훈련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메노나이트 선교사인 김복기 형제의 멘토가 이분이라는 것이 새삼 새롭고 희망적이다. 역사는 흐르고 있으니….
지금까지는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의 개략적인 역사와 그들의 영성에 영향을 주었던 고백/선언의 긴 역사를 간략히 살펴봤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온 독자의 인상이, 아마 여느 열정적인 아나뱁티스트의 자기네 믿음에 대한 프로파겐다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까봐 우려가 된다. 이제부터는 나의 주관적인, 유색인종이자 유전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메노나이트가 된 한국인의 관점으로 다시 한번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을 간추려 보려한다. 아마 보수적인 벤더나 좀더 전향적인 하지만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와 그 결을 같이 하는(그러기를 바라는) 베커와는(유럽계 백인) 좀 더 다른 관점을 나눌 수 있지 않나 기대해본다.
비전통 자발적 소수 한국인 메노나이트가 본 21세기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의 영성의 본질
21세기전만해도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인종간의 차이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저 전통적인 메노나이트와 나와 같은 후천적인 메노나이트 정도의 차이만 부각될 정도였다. 그리고 나와 같은 별종의 신종 메노나이트들 숫자가 워낙 미미해 늘 주류 백인 메노나이트들에 의해 환대받고 보호받는 수준이라, 인종간의 문제가 불거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주인과 손님의 관계). 이 말은, 메노나이트들의 다인종/다문화에 관한 인식도 그다지 예민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9월 시점에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이고 백인 주류의 북미 메노나이트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백인 일색의 교회가 대단히 문화적으로 다양한 복합문화적인 교회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도 북미의 유럽백인계 메노나이트들의 숫자는 지구의 남쪽 신종 메노나이트들에 의해 추월 당한지 오래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한나라 메노나이트 숫자가 북미 전체의 메노나이트들 숫자(60만 수준)와 맞먹거나 이미 추월한 것으로 예상한다. 이디오피아에는 2017년 기준으로 세례자만 31만명이 넘고 전체 메노나이트 교회수가 천개가 넘었다. 교회성장율이 매년 4.5% 이상이다. 이디오피아는 20세기말 약 17년의 공산정권의 체제 안에서 기독교는 지독하게 탄압되었다. 이런 핍박 가운데 메노나이트 교회들이 살아남음으로서(지하교회) 오늘날과 같은 신자의 폭발적인 증가 현상을 가져오게 됐다. 이런 세계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세상의 지형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이 장자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파워의 문제는 늘 돈의 문제와 연관되지 않던가?)
이러한 상황에서 나와 같은 한국계 메노나이트의 등장과 도전의 목소리는 때로 기존의 메노나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 우리 전통적인 메노나이트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유색인종이 생기네?’ 현재 미국과 캐나다에는 “이문화/다문화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조정 위원회”까지 만들어지고 나는 그 중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기존의 주류라 생각하고 있는 메노나이트들의 관점에 대해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너희의 백인주의, 순수혈통주의(메노나이트는 성만 보면 누가 누군지 안다.)가 문제야!”
이런 포스트모던적인 논쟁의 과정에서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역사나 영성을 불러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존 하워드 요더의 말로 돌아가서, 21세기의 메노나이트는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붙들고 있는 아나뱁티스트적인 영성의 고갱이는 뭘까? 이들은 과거 500년 아나뱁티스트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속성장이 가능한 교회일까?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쇠퇴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교회 쇠락의 과정조차 너무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이게 그들의 비저항적 신앙과도 연결이 되는가?)
다시 한번 동시대의 아나뱁티스트 작가가 인정하는 스튜어트 머레이의 <이것이 아나뱁티스트이다>와 파머 베커의 <아나뱁티스트의 본질들> 가운데 공통분모만 간추려 오늘의 관점으로 비평해 보고자 한다. 21세기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을 가장 쉽게 설명해 줄 수 공통분모 세가지는, 예수 중심성과 회중성과 평화지향성이다.
예수 중심성부터 시작해보자.
2004년 한국의 교회를 떠나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로 적을 옮긴 이후로 성경을 읽고, 세상 일을 판단하고, 나의 삶을 살아가는 관점이 바뀐 게 있다면 그것은 예수와 그의 말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아나뱁티스트의 후손이고 그게 메노나이트라면 최소한 예수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것에는 그 어떤 이의도 달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예수 중심성은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생각과 여전히 동일하다. 16세기 메노 시몬스의 말을 다시 불러내 보자.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가 자신의 피와 진리로 우리를 사셨다는데 기초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성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이며 그의 회중이다. 이에 대해 아나뱁티스트는 이렇게 답변한다. 만약 당신의 믿음이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면 왜 예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지 않는가? 당신이 예수가 바라고 명령하시는 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결국 그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드러내는 셈이다.” (월터 클라센의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아나뱁티즘> 중에서)
그렇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예수는 삶의 중심이고 삶의 방향이다. 16세기 남부 독일/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활동한 한스 후트의 말은 간명하고 힘이 좋다.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르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연결되어야만 했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소개한 21세기 영국의 신종 아나뱁티스트이자 작가인 스튜어트 역시 런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의 첫번째 신념으로 예수따름으로 선언하고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범이요, 선생이요, 친구이자 구원자이며, 그리고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과 참다운 교회 모습과 사회 참여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다.” (스튜어트의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중에서)
이들이 묘사하는 예수는 믿음의 대상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스튜어트의 말대로라면, 예수는 우리의 사회참여에 대한 기준까지 제시하시는 구체적인 분이시다. 이런 예수 중심의 삶 즉 제자도는 다음의 세 단어로 축약되어 현재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우선 (공동체에) 속하고(Belonging), 그 다음 (예수님을) 믿고(Believing), 마지막에 (예수님을 따라) 행동하라(Behaving)!
아나뱁티스트들의 이처럼 급진적인 예수 중심성은 단지 신자들의 삶에만 강조되고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파머 베커가 <아나뱁티스트 크리스천>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것은, 예수 중심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권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단히 동시대적으로도 중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해석의 문제로 싸우고 있다. 시대가 다양해지고 다원화해지면서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는 다뤄지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이 부각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리더십의 문제가 뜨거웠고, 최근에는 동성애 문제가 온 세상의 교회를 들었다 놓았다.
아나뱁티스트 전통이 우리에게 알려준 성경해석의 본질은, 예수 중심으로 해석하라는 것이고 반드시 교회공동체와 함께 해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이런 태도는 대단히 문자적이다. 성경에 쓰여있고 않고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성경은 그렇다면 만병통치, 백과사전인가?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런 문제—성경이 답을 안해 줄 때—한결같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 “여지space를 남기세요.” 물론 여지, 공간이 있어야 우리의 사고가 더 유연하고 느긋해 질것이고 그래야 성령이 활동하시기에 수월할 것이다. 잔은 비워야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하지만 21세기 메노나이트들 역시 문화의 영향인지 이런 여유와 인내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예수 중심으로 해석하라는 데 구약의 레위기가 등장하고 바울의 서신서가 등장해 말씀 겨루기를 시작한다. 지난 5백년 훈련된 불복종의 피가 거꾸로 솟아 목소리를 높이고 급기야 교회까지 뛰쳐나가는 신도들이 있다. 나중에 메노나이트 교회에 합류한 유색인종들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교단을 나가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단지 하나의 이슈로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많이 갈라졌다. 이제는 문제만 터지면 쉬쉬하는 분위기다. 이게 올바른 (예수를 따르는) 태도인가?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가 많지만 그럼에도 메노나이트들의 예수 중심적 삶은 이들의 표준이 된다. 교회가 갈라졌다고 교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를 떠나라면 글쎄, 거의 사형선고와 같은 정도의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이들에게 교회공동체는 삶 그 자체다. 나의 과거 한국 교회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이 보여주는 불일치와 불협화음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그래도 부패와 폭력은 없으니 말이다.
다시 이들의 예수중심적인 삶으로 돌아가보자. 이런 삶에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이런 예수 중심의, 예수 따름의 급진적인 삶에는 원치 않는 피해가 따른다. 예수를 따르는 것과 세상을 따르는 것은 동시에 가능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오직 선택의 문제가 매일 하루에도 아마 수백 번씩 우리의 머리를 괴롭히게 된다. 이거야, 저거야? 예수를 따를 것인가 세상에 순종할 것인가?
아나뱁티스트들의 이런 이상적이고 단순한 예수 따름의 삶, 제자도는 때론 대항문화적이고 반순종적이고 불복종의 자세를 견지하게 된다. 세상에 속하고 세상의 문화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여전히 분리하려 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반대로 가려고 한다. 미국 인디애나 엘크하르트에 있는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의 채플의 모습 역시 이런 비순종적인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어느 관점으로 봐도 다 다른 건축양식을 구사했다.
16세기부터 유전되어온 이런 예수를 따름으로 생기는 세상과의 분리 현상 즉 대항문화적 삶은 이들이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고(누가 이런 자들을 쉽게 환영하겠는가?), 더욱 더 이주의 횟수를 늘려가게 했고(나라에서 나라로, 지역에서 지역으로) 그러다 보니 결국 교인 숫자가 늘어나질 않게 되고(누가 이런 삶을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따라서 소수의 종교집단으로 남게 되고, 윤리적으로는 더욱 까다로워져 하다못해 여느 복음주의자하고도 말을 섞지 못할 정도로 까탈스러운 평화와 정의의 사도들이 되었다. 이건 축복인가 저주인가?
물론 이건 일반론이다. 가끔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을 놀라게 하는 사건들이 터지곤 하는데 가장 최근의 일로는 미국의 메노나이트 중에서 트럼프 지지자가 꽤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진보적인 크리스천 미디어 소저너스(Sojourners)는 공공연히 밝혔다. “트럼프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를 따르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병행될 수 없다!” 그렇다. 예수를 죽기까지 따른다면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국 메노나이트 중에서 박근혜의 태극기 부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예수 중심의 삶과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는 일들이 메노나이트 교회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밴쿠버의 어느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성인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진행한 적이 있다. 교재로는 카일 아이들만의 <팬인가 제자인가>를 골랐다. 아이들만 역시 대표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목사이자 작가로 아나뱁티스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책의 내용은 간결하나 그 본질은 아나뱁티즘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요한복음 3:16은 누가복음 14:27과 같이 가야 완전해진다고. 그렇다. 예수를 믿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결국 예수를 따름으로 완전해진다. 아멘!그러면서 그는 결국 우리가 예수의 팬이 아니라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조차 버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하자 그 교회의 핵심멤버라고 말할 수 있는 전통 메노나이트 백인이 이렇게 대꾸를 했다. “자기 같으면 죽어도 그렇게 못한다고! 다 내려놓지는 못하겠다고!” 이걸 솔직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메노나이트 교회도 타락했다고 해야할지 막연해 했던 기억이 난다.
예수의 영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건너편’ 영성이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그는 자주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21세기 북미의 아나뱁티스트이자 평화운동가이자 신학자인 체드 마이어는 이 ‘건너편’ 영성을 그의 전문분야인 ‘마가복음’을 가르치면서 많이 강조한다. 그를 닮아 우리도 낯선 곳으로, 주변부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건너가야 한다고. 그렇다. 이게 예수 복음의 본질이다. 더 낮고 더 춥고 더 피곤하고 더 필요로 하고 덜 익숙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 이게 급진적인 믿음 아닌가?
물론 이러려면, 체드 마이어의 말대로 거주자, 정착자적 삶/영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나마 가진 것조차 다 내려놓고, 급진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자기포기와 무모한 용기만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런가? 21세기 백인 영어권 중산층 혹은 기득권 메노나이트들이 과연 그런가? 이들의 삶이, 여행하기 가벼울 정도(Travel light)로 단순하고 가난한가? 16세기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처럼 뭐를 해야만 할 것 같은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내가 오늘 마주하는 있는 21세기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이런 급진성의 정신, 급진적인 믿음을 보기는 많이 어려워졌다는 안타깝지만 솔직한 의견이다. 이들은 이미 너무 정착되었고 그 편안함을 맛보았고 그래서 도전과 고난보다는 안정과 유지가 우선이고 그러다 보니 다른 제도권의 교회와 다를 바 없이 관료화 되었고 여전히 백인남성중심의 리더십과 점잖은 척하는 인종주의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더 큰 정신심리학적 문제점은 이들은 여전히 16세기 순교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의식.
두번째는 이들의 회중성이다. ‘공동체는 우리 삶의 중심이다”가 이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다.
아나뱁스트들의 예수따름 즉 제자도는 개인의 영역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회중과 함께 세워진다. 기존의 제도 교회와 가장 대비되는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차별성은 사제/목회자 중심이고 권위적이고 엘리트/전문가 중심이 아닌 자발적이고 회중 중심적이고 평등한 교회 질서/구조에 있다.
기독교 저자로 한국에서 책을 낼 때 내가 속한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늘 사용해오던 회중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면 늘 편집자의 수정요구를 받는다. 한국 교회 교인들에게 회중이란 말은 낯설다는 것이다.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을 통칭할 때 회중이라는 말 외에 어떤 말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풀어 써야 할지. 한국 교회에서는 왜 회중이라는 말이 생경할까? 교회의 주인은 회중이고 교회의 운영의 주체 역시 회중이라는 게 그렇게 급진적인 표현인가?
사실 그렇다.
신앙의 자발적 선택권과 시민의 자유/자율성이 보장된 21세기에는 가장 평범해 보일 것 같은 이 말은, 4세기 이후 국가교회, 기독교의 국가화가 마치 마태복음 28장의 실현인 것처럼 광고해온 기존의 위계 중심의 교회, 즉 사제중심/신학전문가 중심의 교회에게는 그들의 질서에 반하는 하나의 위협으로 들릴 수 있다. 교회의 운영 주체, 아니 교회의 소유권 자체가 사제/전문가집단에서 일반 회중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마치 교회 자체가 사회주의 체제로 전복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 회중 교회, 회중성의 내용을 보더라도 기존 교회의 시스템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뭐가 다른가?
내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경험한 회중 교회의 특징들은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목사직의 제한적 기능, 아마추어리즘, 공동체적 성경해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동체적 분별 정도.
먼저 회중 교회에서 목사를, 목사의 기능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자.
회중교회에서의 목사란, 성경에 충실하게 해석해서, 다른 여러 직분과 같이(그 위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구성요소이고 기능이다. 즉 가르치는 기능이 그들의 주 임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해 보겠다.
십 수년도 훨씬 전에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 입학(제임스 휴스톤과 유진 피터슨과 J.I.패커와 폴 스티븐스와 고든 피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이미 그곳에 재학중인 여러 한국인 학생들을 만나 문의를 한 적이 있다. 왜 M.Div.를 하는가? 왜 크리스천 스터디를 하는가? 한국에서 기자였고 회사원이기도 했던, 사회 경력이 출중했던 그들은 꿈이 컸다. 전공이 뭐든 그들은 비전 있는 목사가 되기를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사가 되어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바라고 있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해!
영향력이라는 말은 쉽지만 어렵고도 무서운 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파워’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파워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위계(hierarchy)와 부과성(imposition)과 일방성(unilaterality)과 교차되어 때론 ‘폭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하지만 목사가 목회를 하는데 회중을 이끄는데 ‘영향력이 없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런 목사는 그렇다면 어떻게 보여질까? 아마 무능력하게 보이지 않을까? 특히 한국 교회 정서에서는. (이들은 늘 카리스마적인 리더, 갑갑한 가슴을 빵하고 뚫어줄 정도의 과감하고 대범한 리더를 바라지 않던가? 즉 파워’풀’한 리더!)
만약 영향력을 지향하고 본인 스스로도 영향력 있는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속한 메노나이트 교회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고 싶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목사는 영향력을 함부로 구사할 수 없고 그러도록 회중이 허락하지도 않는다. 교회에 정책(policy/polity) 입안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목사는 뭘 하는가?
그는 한 명의 회중으로서 주어진 일’만’ 하도록 위임된다. 그 일이란 회중을 돌보고 설교하는 것이다(주일 설교는 통상 한 달에 2번 한다-이것도 목사의 영향력을 줄이는 일환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의 정책이나 방향에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주입하는 행위 즉 ‘영향’을 미치면 안된다. 목사의 영향력이 함부로 행사되지 않게 하는 일은 회중의 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Council)’에서 담당한다. 그러다 보니 운영위원회와 목사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존재한다. 이건 좋은 것이다. (편하면 늘 문제가 터지지 않던가?)
메노나이트 교회 목사는 그러니 본인의 영향력을 시험하거나 본인의 비전을 펼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어진 일에만 ‘입 닥치고’ 순종하는 인내만을 배운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교인이라도 누구에게도 누설할 수 없다(입이 무지무지하게 무거워야 한다). 아무리 본인과 친하고 본인에게 잘 하려고 하는 교인이라도 어느 직분에 추천하거나 동의하거나 하는 ‘인사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만약 이러다간 사달이 난다. 목사가 회중의 자율적인 판단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영향을 미치다는 말은 영어로 (인플루엔싱(influencing)’이라고 한다. 아주 좋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어진 범위를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때 이 말은, 하지 말아야 할 ‘부정의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 메노나이트 교회는 목사는 ‘보상받기’ 어려운 직업이다. 회중의 감시와 평가가 사뭇 엄중하다. 그리고는 2년에 한 번씩 회중의 재신임 절차를 겪는다. 70% 이상의 찬성. 하지만 본인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영향력을 미치면 안된다. 오직 본인의 진정성으로만 평가된다.
이런 교회에 과연 ‘선한’ 영향력을 꿈꿔왔던 한국 목사가 들어올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오직 철저히 ‘종의 신분’만을 담당하기 위해? 그러다가 회중이 가라면 가야만 하는. 이게 목사를 바라보는 회중의 시각이다. 단지 한 명의 형제로,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 범위 안에서(분별의 시각)’ 헌신하는 것.
두번째는 회중성이 가진 아마추어리즘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마 많은 한국 교회의 독자들은 아마추어리즘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나 의아해 할 것이다. 스포츠 세계에서만 쓰일 것 같은 이 말은 어찌 보면 아나뱁티스트의 정신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뱁티즘은 루터나 쯔빙글리 같은 신학 전문가들의 향연이 아니었다. 초기 쯔빙글리의 제자였던 콘라드 그라벨이나 펠릭스 만츠 정도를 제외하고(이들은 단명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중심에는 신학 전문가들이 많이 포진해 있지 않았다. 이전에 간략히 언급했던 후브마이어 외에 대부분은 신학적인 배경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도리어 대부분의 리더들은 성령의존도가 컸고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인 전문성은 리더의 첫째 자격이 못되었다.
이후 17세기 들어 아나뱁티스트들이 정착하고 교회의 형태를 이뤄감에 따라 오늘날과 같은 전문적인 목사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학 지식의 유무가 첫번째 자격조건은 못되었다. 회중 안에서 삶으로 증명된 자를 선출하는 게 관례였다. 그리고 목사직 자체도 봉사직으로 했다. 즉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부르심, 공동체로의 부르심의 차원에서 목사직을 병행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목사가 오래 교회 일을 하기 어려워 어느 정도하면 또 다른 회중에서 선출하게 되는 절차를 밟았다. 현재와 같은 직업으로서의 목사직은 근대의 산물, 산업화에 따른 적응이라고 봐야 한다.
21세기가 되어 모든 게 전문화되고, 목회자의 학력 수준이 청빙의 우선 기준이 된 오늘날에도 메노나이트 교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신학 수준만 요구한다. 굳이 신학대학원에서 M.Div.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 대학 정도의 학력이면 오케이다. 이러기는, 앞에서 말했지만, 목사의 신학이, 목사의 비전이 교회를 좌지우지 못하도록 한 회중의 질서가 이미 견고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기능은 자원자로 이뤄진 회중의 각종 위원회에 의해서 유지된다. 내가 속한 예배위원회에서는 예배의 기획과 진행과 평가를 다 주관한다. 이 위원회의 일원이 목사이기는 하나 그의 기능은 설교에 대한 기획을 할 뿐이다. 이 위원회 위원에 자격이 있을까? 없다. 어리든 늙든 배웠든 성소수자든 손들면 환영한다. 이런 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교회의 예배를 정의하고(define) 집행한다(perform). 나와 같이 신학 배경이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대단히 (신학적으로) 엉성하고 즉흥적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예배는 굴러가고 회중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예배 시 내가 늘 앉는 교회 2층 발코니에는 주로 ‘교회에 갓 들어와 주목되기를 회피하는 유색인종이나 불만이 가득한 20대나 성소수자나 아이들이 많아 시끄러운 젊은 부부들이 앉는다. 어느 20대 백인 여성이 새로 참가하기 시작해 인사를 나눴다. 그는 늘 혼자 와 이곳에 앉아 예배를 드렸고 예배가 끝나면 조용히 교회를 떠났다. 그가 교회를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예배가 기성교회 같지 않아서요.” 뭔 말인가? “다른 교회처럼 인위적이지 않아서 좋아요.”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아마추어들이 기획하고 실행해 나가는 이런 회중 교회의 예배의 엉성함(다른 말로는 자연스러움이라고 하자)이 좋아서 오는 자매도 있구나!
회중교회의 아마추어리즘은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의 운영 전반이 그렇다. 모든 위원회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더 적극적으로 교회의 운영에 참여하고 싶고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은 사람은 ‘운영위원회’에 손들고 들어가면 된다. 이런 위원회적/회중적 사고와 집행 그리고 이들의 해 나가는 의사결정의 모든 순간과 기억(이 가운데에는 아픔도 물론 있다)들이 합해져 이들의 공동체적 분별의 전통이 세워졌다. 그러니 이들이 분별의 전통 역시 학문적으로 공부해 배운 것이 아니다. 순전히 초짜들이 몸으로 때워가며 배운 것이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북미의 모든 교회가 아마추어들의 경합장은 아니다는 것이다. 교회에 따라, 지역에 따라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교인들의 신학적인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난다.)
나의 멘토이셨던 103세까지 장수하며 살다 작년에 돌아가신 어빈 코넬슨 역시 독일 목수 출신이었다가 회중에 의해 선택된 목사다. 죽을 때까지 눈에 시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책을 읽으셨지만 그분은 정식으로 신학대학교를 나오지 않으셨다. 도리어 신학한 자들의 이중적인 삶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셨다.
이런 아마추어리즘은 그 자체로 위험할 수도 있다. 배가 산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 교회가 제정신일 때가 언제 있었던가? 하지만 이런 아마추어리즘의 부족한 면을 잘 알고 있는 메노나이트들은 그래서 성경에 대한 공부나 해석도 공동체 즉 회중과 같이 하기를 권고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공동체적 성경 해석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고래로 성경은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함과 동시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와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이런 활동은 교회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많은 소그룹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다. 세대별, 관심사별로 구분해 소그룹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한번 만들어진 이런 소그룹들은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타지로 이주하지 않는 한, 나이 들어 죽지 않는 한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본 모습은 겉으로 드러나는 엉성한 예배에 있지 않고 이런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소그룹 활동에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에 처음 출석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점이 여기 있다. 그들의 첫 인상은 대동소이하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사람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보기만 할 뿐 잘 달려와 인사하지 않아요. 말수도 적구요….” 맞다. 이들은 여전히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수줍음과 특유의 과묵함이 있다(과연 순교자들의 자녀답다!). 아마 최소한 수개월은 참고 다녀야 인사하거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환대와 너그러움 그리고 우애를 알려면 이들이 교회 뒷면에서 만들어가는 소그룹 활동에 참여해 봐야 한다. 여기에 그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마추어적이고, 그러한 만큼 순수하고 단순한.
이런 소그룹안에서 그들은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 사안에 따라 전 교회적으로 이런 성경 읽기/해석의 과정이 이뤄지기도 하고 전 교단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알아둘 것은 이런 공동체적 성경읽기/해석이란 하나의 정답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누가 신학적으로 더 완전한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럴 바에는 아마추어 회중이 모여 다같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 이 세상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완전한 자, 권위 있는 자를 초빙해 그의 말을 들으면 될 터이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이 공동체적 성경읽기/해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앞에서 언뜻 이야기한 바 있는 ‘해석에 있어 공간이나 여지(space)’를 남기는 것이다. 네 말이 맞니 내 말이 맞니 하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상대방의 해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만남을 계속하고 성경에 대한 공부와 해석을 지속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게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질적인 집단이 예수를 중심으로 만나 사귐과 나눔의 행위를 계속해 가는 것(Diversity in Unity).
이런 가치가 지난 세월 회중 가운데 나눠지고 전승되어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동체적 분별의 문화를 세웠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분별은 퀘이커의 ‘분별(Clearness Committee)’과 더불어 공동체적 분별의 가장 좋은 본보기로 알려져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동체적 분별
미국의 퀘이커와 <가르칠 수 있는 용기>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교육사상가인 파커 파머의 인연은 유명하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잘 나가는 사회학과 교수였던 파머가 안식년을 퀘이커들이 운영하는 학습 공동체 펜들 힐이라는 곳으로 가면서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런 분별의 과정에 퀘이커들의 독특한 분별 방법인 ‘명료화위원회’의 도움이 컸다. 이 분별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성찰하게 되고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게 된다.
파머에게는 퀘이커의 분별이 도움이 되었다면, 장애 신학의 리더였던 루터교 전통의 마르바 던에게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동체적 분별이 있다. 그녀는, “내게 평등 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가장 많이 체험하게 해 주고 분별의 문화에 가장 숙련되었다는 느낌을 준 교파는 메노나이트 교회였다” 고 고백한다. 그녀는 미국 인디애나 노트르담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던 시절 그 옛날 자신의 영적 조상 마틴 루터에 의해 핍박 받았던 메노나이트 교회를 알게 되고, 메노나이트의 공동체적 분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분별하는 목적은 본인이 장애자로서 이런 장애를 경험하면서 학업을 지속할지 말지에 대해서 결정해야하는 것이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이런 분별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그녀는 학위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노트르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장애신학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배운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분별의 두 가지 요소는, 첫째 “성령께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이 말을 주신다고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만 말하는 것이고, 둘째 개인적인 문제일 경우에는 “성령께서 개인의 유익을 위해 이 말을 주신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가 경험한 메노나이트 교회의 분별의 기초는 오직 ‘성령’에 의존한 것이었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신앙고백서 제16조 <교회의 질서와 일치>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교인들(회중)이 교회의 지도자를 선택하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항상 성경을 지침으로 삼고―이 부분이 퀘이커의 명료화 위원회식의 분별의 방법과 근본적인 차이가 된다. 퀘이커들은 전적으로 성령중심적인 분별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에 대한 강조가 없거나 덜하다―상대방의 의견을 기도하는 열린 심령으로 듣고 또 말해야 한다.” 즉 교회의 어떤 문제도 소위 특정한 일부가 (밀실에 모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교인들은 칭찬받기를 기대해서만은 안되고 교정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공동체는 분별하는 과정에서 성급해서는 안되며 의견 일치를 위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밝힌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이처럼 전체 성도들과 함께 결정하는 것이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고 있고, 이 가치의 보존을 위해 지난 500년 죽기까지 수고를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교회의 규모에 대해서 민감해 보통 20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게 되면 분리를 고민한다(교회는 크면 안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공동체적인 교회를 추구하면서 성도들의 가정 환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교회의 모든 회중이 서로 알 수 있는 교회. 그래서 서로의 사정에 대해서 묻고 돕고 보완할 수 있는 교회.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는 교회. 그러려면 교회의 사이즈는 제한 받아야 하고 이럴 때만이 허울좋은 가족 같은 교회가 아닌 진정한 나눔의 공동체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메노나이트 교인들은 믿는다.
그렇다면 메노나이트 교회는 늘 분별을 잘 해 왔고 성도들은 이런 성령 중심의 삶을 구현하고 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과거의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이 (대부분) 그래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나 21세기 현대판 메노나이트 교회에서의 분별은 교회마다 중구난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 이게 아마추어리즘의 폐해일 수도 있다. ‘표준화’되기 힘들고 한결 같은 전통이 유지되지 힘들다는 것. 그 누구의 권위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교단의 권위는 없다). 회중이 누구고, 그 회중의 수준이 어떠냐에 따라 모든 게 다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앞의 예수 중심성과 회중성에 이어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지향성’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 말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비저항, 비폭력, 불순응, 불복종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고, 여기에 파머 베커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평화의 제스처인 ‘화해’라는 의미를 추가했다. 아나뱁티스트의 시작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비폭력의 삶의 추구였다면(순교자 영성), 이런 관점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 더 적극적인 저항적 비폭력으로, ‘평화 지키기(Peace-keeping)’에서 ‘평화를 만들기(Peace-making)’로 진화되었다. 16세기 평화의 아나뱁티스트 신학이 점점 윤리적인 사회정의로 그 무게중심이 바뀌는 것이다.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그룹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평화만들기’에 주력하는 창구가 생겼는데, <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으로 한국 기독교에 잘 알려진 로날드 사이더의 1984년 메노나이트 세계총회의 연설(“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메고 예수를 따라 골고다로 가야 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에 대한 가시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기독교 평화사역팀(Christian Peacemaker Team)’이다. 1986년에 세워진 이 기관은 세계의 특정한 분쟁지역에 팀원을 직접 파견해 그 지역의 사람들과 같이 (비폭력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살게 한다. 이런 사역의 결과는 극단적인 경우를 불러일으키기도 해 2006년에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4명의 팀원들이 납치되었다가 톰 폭스 한 명을 제외하곤 풀려난 적이 있다.
아무튼, 평화를 지키든 만들든,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지향성은 지난 500년간 변함없이 유지되어온 정신적 유산이고, 오늘날 메노나이트 교회 전반에 걸쳐 이유불문하고 통용되는 태도다. 그렇다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전쟁 당시 독일 메노나이트 교회는 히틀러의 독주와 독재에 반대의 소리를 구체적으로 내지 않았고, 실재로 많은 독일의 메노나이트 젊은이들이 히틀러의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안에서 폭력이 인정되거나 묵인된 경우는 공식적으로 1542년 독일 뮌스터 사건과 (2차 대전 당시 독일 메노나이트 교회의 나찌 동조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진보적인 메노나이트 그룹 안에서 나찌 시대의 메노나이트의 참여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고 비판의 목소리도 크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메노나이트 교회의 총회에 의해서 2차 대전 당시 나찌 참여에 대한 공식적인 회개나 사과는 없는 듯하다(이런 행동을 개인차원으로 돌린 것이다.). 나찌의 군대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의무병이나 여타의 비전투병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과연 비폭력적이고 평화지향의 아나뱁티스트적인 태도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외에, 최신 들어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지향성이 더욱 구체화되고 적극화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행동만이 가장 정의롭다는 마인드셋이 작용하게 되고 이런 생각은 결국 자신들의 사역의 우월성을 조장하게 된다. 즉 이런 평화지향성이 신학적, 태도적 교만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즉 다른 교인, 다른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과 협력하기 힘든 독불장군식의 사역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대단히 행동주의적인 신앙의 자세를 견지하게 됨으로 영적인 경건의 삶이나 영적인 지도받기에는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가운데 가장 예상하기 쉬운 결과는, 개인의 신앙의 삶의 균형이 깨지고 분쟁지역이 주는 긴장과 폭력성에 노출되면서 정신적 장애를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죽음까지 희생하는데 진즉 자신의, 가족과의 영적 균형과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경우다. 이건 또 무슨 종류의 평화주의인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아나뱁티스트들의 비폭력적이고 평화지향적인 삶의 태도와 그들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와 화해에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들이 순교자의 후손인 것은 맞는 사실이고 이들의 DNA에 이런 태도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CC)의 세상을 향한 정의와 평화의 활동들은 온 세상의 기독교가 다 인정하고 있는 바다. 한국에 메노나이트 교회가 소개된 것은 한국 전쟁 후 북미의 메노나이트 활동가들이 한국에 정착해 학교를 세우면서 부터이다.
스위스 아나뱁티스트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콘라드 그레벨의 고백을 보자(헤롤드 벤더의 <재세례신앙의 비전>에서 인용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언약 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검을 사용하지 않으며,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검에 위해 보호를 받지도, 또 그렇게 검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도 않는다.”
네덜란드의 메노 시몬즈는 거듭남의 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새로이 개심한 사람들은…….자신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셔 낫을 만들 것이며, 더 이상 전쟁을 알지 못하는 평화의 자녀들이다……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의 피나 돼지의 피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굳이 문제를 지적하라면 21세기에 이런 순종 아나뱁티스트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세상의 글로벌화로 인해 수많은 인종과 배경을 가진, 나와 같은 후천적인 메노나이트들이 이미 메노나이트 교회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들이 이런 전통의 회중교회안에서 많은 긴장과 갈등을 생산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교회의 목사들 역시,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B.C.주의 경우는 비 메노나이트 전통에서 넘어온 경우들이 많다. 기독교 교단 중에서 메노나이트 교회는 타 교단의 목사가 이적하기 가장 손쉬운 교단이다. 이적의 조건이 ‘거의’ 없다. 회중이 원하기만 하면 어느 교단의 목사이건 환영한다. 이런 다원화, 다중화, 다문화된 오늘날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평화주의는 일치된 관점을 유지하기는 사실상 힘들다. 보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나와 같은 유색인종들의 메노나이트 교회가 과연 얼마나 세상의 정의와 평화에 대해서 간절히 사모해왔는가? (나는 전방 15사 출신이다. “김일성의 대가리를 갈아서 마시자”란 군가를 많이 불렀다.) 남북한 대치라는 지정학적 상황이 주는 불안감을 안고 있는 특수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안에서 과연 이런 아나뱁티스트들의, 자기 목숨까지 포기하는 비폭력적이고 비저항적인, 예수 중심적인 평화주의가 시작될 수 있을까? 또한 이런 암묵적 폭력지향성이 마치 애국의 표현이고 교회의 의무인 것처럼 교육되어온, 그리고 후에 그 어떤 인연으로 아나뱁티스트가 되겠다고, 메노나이트가 되겠다고 작정한 한국의 교인들에게, 이런 급진적인 사상과 행동의 전환이 가능할까? 칼이 보습이 되고 양과 사자가 함께 뛰노는 일이, 우리 살아생전에 한국 지형에서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이상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을 그들의 고백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의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이들의 급진적인 신앙의 본질 세가지에 대해 나의 경험과 관찰과 비평적인 생각을 곁들여 살펴봤다. 자, 어떤가? 내가 전술한 내용들이 여러분이 생각해온 아나뱁티스트들의 진정한 모습인가? 아니면 여러분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가? 실망인가? 희망인가?
마지막으로 이런 아나뱁티스트의 영성과 고백의 과거와 현재가 21세기 한국 교회와 한국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아나뱁티즘과 메노나이트 교회에게 주는 당부는 뭔지 생각해 보자.
21세기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이 나아갈 방향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의 골격인 이들의 급진성, 급진적인 믿음을 오늘의 21세기에서 구현해 내기는 쉽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내가 지금 북미에서 마주하는 메노나이트 교회/교인들의 급진성은 소멸됐다고 보는게 맞는 평가이다. 급진성은 ‘갈급함’을 먹고 자라는데 이들에게 갈급함을 찾기는 힘들다. 이들은 대단히 느긋하고 만족적이다. 21세기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은, 일부 스튜어트도 지적했지만, 이미 충분히 제도화됐고(교회질서와 교단성의 면에서), 백인중심적이고(인종주의의 면에서), 역사적인 반지성주의의 벽(배우면 도리어 신앙에 반대가 된다는 생각)을 넘어 충분히 지성적이고 지식적이고 스마트한 교인들이 되어 있다. 교인들 중에서 백만장자도 나오고 변호사도 나오고 의사도 나오고 경찰도 나온다. 학자들은 너무 많아 세기가 어려울 정도다. 물론 여전히 이들의 삶의 모습에는 가장과 사치가 없고, 단순하고 너그럽다.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조심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 신앙적으로 충실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이들의 교회가 쇠락하고 있다. 이 말은, 새로 들어오는 신자는 없고, 죽어가는 신자가 늘어난다는 말이다. 젊은이들은 메노나이트 교회의 전통적인 노아의 방주같이 생긴 독일식 교회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떠나고, 과거의 향수에 젖은 머리가 은색으로 바뀐 전통 메노나이트 노인들이 자리를 채운다. 옆 동네의 메노나이트 형제(Brethren) 교회는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예배당을 현대화하고 교회 이름조차 커뮤니티 교회로 바꾸고, 누구든 막론하고 교회로 다 들어오도록 문턱을 낮춘다. “예수”만 빼고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채비다. 그렇다. 설교자가 설교 시 커피를 마시든 앞에 나와 춤을 추든 말리지 않는다. ‘거의’ 자유가 허락되는 곳이 그들의 예배당이다. 이런 외부 사람들이 찾기 쉬운 좋은 위치에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지나 지역적으로도 한산하고 도시 외곽이고 한 50년동안은 외벽 색칠조차 안한 것 같은 교회가 나오면 이게 바로 메노나이트 교회다. 교회 간판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라면 국물도 남기면 보관해 뒀다 먹을 정도로 지독하게 검소하다. 이런 극도의 절약의 정신으로 예배당도 본인들이 직접 짓고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도 최대한 아낀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사용하기를 가장 싫어하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처치 플랜팅(교회개척)이고, 복음주의란 말이다. 이들은 인위적이고 급하고 목적 중심인 것을 아주 싫어한다(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가 쓴 책에도 관심이 없다!). 교회에는 그러니 거의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다(오, 아마추어리즘!). 교회가 비니 사람을 더 받기 위해서 교회 인테리어를 고쳐야 한다면 난리날 것이다, 이런데 돈을 쓰냐고!. 더 많은 유색인종을 받아 이문화, 다문화 교회로 가자고 하면 이것 역시 인간의 인위적인 프로그램 취급을 한다. 모든 게 자연스러워야 좋다는 게 이들의 주된 생각이다. 이들은 이런 면에서 교회의 쇠락과 멸망도,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의 과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교회가 죽어가고 있어요, 하고 외쳐도 누구 하나 소란 피우는 일이 없다.
과연 이들이 5백년전 아나뱁티스트 조상들을 닮아 오직 하나의 정신, ‘나흐폴게(Nachfolge)’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쫓아갈 수 있을까? 초기 스위스 아나뱁티스트의 역사에서, 스위스 형제단이 세례를 받기 위한 후보자에게 던졌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섬기는데 자신들이 잠시 맡고 있는 모든 재산들을 바칠 수 있는가?” 초기의 아나뱁티스트들은 두말하지 않고 이 질문에 ‘예’했다는 게 아닌가? 내가 만약 지금 메노나이트 교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다급하지도 않고 더 이상 예전의 그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제도와 교회와 가정의 유지. 이게 이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적인 듯하다.
이제는 한국 교회,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한국의 메노나이트들이 답할 차례다.
당신은 아나뱁티스트가 될 자발적인 의지가 있는가? 다시 세례를 받음으로 물과 더 나아가 성령과 피(고난)의 세례까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있는 것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만 따라갈 용기가 있는가? 평화와 화해와 정의의 사도가 될 수 있는가? 이런 길을 혼자 가기 두렵다면 같이 갈 운명의 공동체가 있는가? 공동체에 순종하고 공동체를 위해 살기를 작정하는가? 마지막으로 역사적 아나뱁티스트의 전통과 영성을 배우고 북미 메노나이트 교회의 복잡한 상황을 성찰해 한국의 상황에 맞는 한국적 아나뱁티스트의 정신을 새롭게 창조해낼 수 있는가? 유진 피터슨이 <메시지>를 통해서 보여줬고, 존 쉘비 스퐁 주교가 강조한 것처럼, 구대의 신경이나 고백이나 나아가 급진적 종교개혁의 정신을 21세기의 ‘살아있는’ 믿음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은 더 이상 북미의 소위 전통 아나뱁티스트 후손인 메노나이트들만의 숙제가 아니다. 시대와 문화가 바뀌었고 영성은 흐른다. 누가 16세기의 아나뱁티스트 정신을 계승복원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재창조낼 수 있는가는 더 이상 어느 특정 유럽계/백인/남성중심의 북미 메노나이트들의 고유한 역할이 아니다. 이제는 새롭게 아나뱁티스를 발견하고, 새롭게 아나뱁티스를 발전시킬 덜 타성에 젖고, 비주류에 속하며, 인종에 구별 받지 않고, 더 개방적이고, 더 신선한 시각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이 필요하다. 그건 어찌 보면 나와 당신 같은,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은 죽어도 상상할 수 없는, 아직은 먼 나라의 이웃 같은 하지만 오직 예수를 찾아 갈급한 심령으로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고 강을 건너는 그 옛날의 동방 박사와 같은 그 누군가일 수 있다. 급하다, 목이 탄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자,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자!
참고문헌
-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대장간, 2011
-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편찬위원회,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2007
- 파머 베커, 아나뱁티스트 크리스천, 2008
- 피터 리더만, 후터라이트 신앙고백서, 2018
- 해롤드 벤더, 재세례신앙의 비전, 2009
- Denny Weaver, Anabaptists & Postmodernity, Pandora Press, 2000
- Thomas N. Finger, A Contemporary Anabaptist Theology, IVP, 1989
- Daniel Liechty, Early Anabaptist Spirituality, Paulist Press, 1994
- Jill Raitt, Christian Spirituality, Crossroad, 1988
- C. Arnold Snyder, Anabaptist History and Theology, Pandora Press, 1995